해파랑길 33코스
여행일 : ‘19. 12. 7(토)
소재지 : 강원도 동해시 추암동·북평동·송정동·전곡동·부곡동·발한동 일원
여행코스 : 추암해변→전천→동해역→감추사→한섬해변→하평해변→묵호역→묵호항(소요시간 : 16.11㎞/ 4시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추암해변’에서부터 ‘묵호역’까지 동해 시내를 지난 후 해안을 따라 걷는 코스로, 거리는 총 13.3km 정도가 된다. 하지만 우린 묵호항까지 연장해서 걸었다. 거기다 마음에 드는 해안까지 오르내리다보니 총 거리는 16.11㎞로 늘어나 버렸다. 그건 그렇고 해파랑길 33코스는 동해 시가지를 통과해야 하는 등 삭막한 풍경이 펼쳐지는 구간도 있으나 대부분은 바닷가를 따른다. 덕분에 크고 작은 해안절벽과 갯바위들이 푸른 동해바다와 함께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경관을 눈에 담으며 트레킹을 즐길 수 있다. 한마디로 보는 재미가 쏠쏠한 코스라 하겠다. 그래선지 조망이 좋은 곳에는 어김없이 벤치나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었다. 툭 트인 바닷가 오픈스페이스에서 바다를 조망하는 여유를 가져보라는 배려였을 것이다. 참! 해파랑길 스탬프보관함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묵호항의 번화가로 들어서기 전, 그러니까 묵호역에 이르기 바로 전에 만들어져 있다는데 이게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똑 같은 전철을 밟았다. 33코스의 종점으로 지정되어 있는 묵호역이 보이지도 않는 곳으로 길이 나있으니 미리 알아두지 않은 이상 어떻게 찾아낼 수 있겠는가.
▼ 33코스의 시작점은 추암조각공원 주차장(동해시 추암동 474-4)
동해(속초-삼척)고속도로 삼척 IC에서 내려와 38번 국도를 타고 강릉방면으로 올라오다 단봉삼거리(동해시 단봉동 265-2)에서 우회전한 후 7번 국로를 따라 삼척방면으로 내려온다. 이어서 공단삼거리(동해시 대구동)에서 빠져나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추암조각공원이 나온다. 공원에 마련된 주차장은 해파랑길 33코스의 시작점이자 동해시로 들어가는 입구가 된다. 해파랑길 안내도와 스탬프보관함은 주차장에서 ‘추암역’으로 올라가는 육교의 하단 근처에 설치되어 있다.
▼ 삼척선 철로의 아래를 통과하는 굴다리로 들어서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굴다리 위로 지나가는 삼척선(동해역↔삼척역)은 시멘트 수송을 목적으로 1944년에 개통된 철도이다. 1991년 여객열차 운행이 중단되었으나 2007년부터 관광열차인 강릉-삼척간 바다열차가 하루 3~4번씩 왕복 운행 중이다. 참! ‘추암 철도 가도교’라고도 불리는 이 굴다리가 단차선이라는 것을 깜빡 잊을 뻔했다. 그런데도 오가는 차량이 많으니 안전에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는 얘기이다.
▼ 굴다리를 빠져나온 해파랑길은 이제 ‘공단1로’라는 왕복 6차선의 대로를 따른다. 지금 걷고 있는 33코스는 동해시의 둘레길인 ‘해물금길’이기도 하다. 동해시 북단 망상동 기곡마을에서 시작해 최남단 추암동을 잇는 길이 24.4km의 둘레길인데 ‘해물금길’이란 ‘해 뜨는 수평선’을 의미한단다. 탐방로를 걷는 내내 수평선을 바라볼 수 있다는 자신감일 것이다.
▼ 그렇게 잠시 걷자 ‘동해자유무역지역관리원(東海自由貿易地域管理院)‘ 건물이 나온다. 자유무역지역이란 관세법과 대외무역법 등 관계 법률에 대한 특례와 지원을 통해 자유로운 제조와 물류・유통 및 무역활동 등을 보장하기 위하여 지정한 지역을 말한다. 이 자유무역지역에 입주해 있는 기업의 발전에 시너지효과를 극대화하고, 관세유보와 조세감면, 물류비 제공 등의 인센티브를 통해 맞춤형 One-Stop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하여 설립된 기관이 곧 자유무역지역관리원이다. 그리고 저곳에서는 현재 나의 옛 동료들이 근무하고 있다. 90년대 초반 이리수출자유지역관리원에서 근무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것은 수출입국(輸出立國)에 일조했다는 자부심의 발로가 아닐까 싶다.
▼ 석탄 수송을 위한 컨베이어 벨트(conveyor belt)가 도로를 가로지르는가 싶더니 이내 동해화력발전소(東海火力發電所)가 웅장한 그 자태를 드러낸다. 하지만 굴뚝에는 응당 피어올라야 할 연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가동을 하지 않고 있는 모양이다.
▼ 대로(공단1로)를 따르던 해파랑길은 동해화력발전소 앞에 이르자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23분이 지난 지점인데 들머리에 이정표(동해역→/ 추암해변↓)는 물론이고 해파랑길 표식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으니 길이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산행대장 얘기로는 도로를 따라 곧장 진행해도 된다고 했다. ‘동해팔경’ 가운데 하나인 ‘할미바위’를 보여주기 위해서 길을 에둘러 내놓았다는 것이다. 그의 말을 들은 이상 해파랑길을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다. 아름다운 풍광을 하나라도 더 보고 싶은 게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 이제 탐방로는 하수·폐수종말처리장을 오른편에 끼고 걷게 된다. 코끝을 움켜쥐고 걸어야 할 만큼 악취가 심하니 해파랑길 33코스 가운데 가장 힘든 구간이라 하겠다. 자신도 모르게 빨라지는 발걸음으로 5분쯤 더 걸으니 탐방로가 ‘조양산’ 자락으로 파고든다. 그리곤 오른편에 해안경계용 철조망을 낀 오솔길을 따른다.
▼ 철조망을 따라 13분쯤 진행하자 동해바다를 마주하고 있는 커다란 바위 하나가 길손을 맞는다. ‘동해팔경(東海八景)’ 가운데 하나라는 ‘할미바위’다. 이 바위는 어떤 심술궂은 사람이 힘자랑을 하느라 건들건들 노는 바위를 떠밀어 바다 속에 떨어뜨리자 마귀할미가 앞치마에다 바위를 싸가지고 다시 그 자리에 얹어 놓았다고 한다. 그래서 ‘할미바위’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그래선지 바위의 생김새가 우리네 할머니의 질박하고 자애로운 얼굴 모양으로 생긴 것 같기도 하다. 참고로 ‘동해팔경’은 저 할미바위 외에도 능파대(촛대바위)와 용추폭포, 무릉반석, 망상 명사십리, 천곡천연동굴, 만경대, 호해정. 초록봉 등이 있다.
▼ 할미바위 앞에는 포토죤으로 안성맞춤인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벤치도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 비스듬하게 놓인 나무계단을 100m쯤 내려서자 ‘호해정(湖海亭)’이란 정자가 나온다. 이 또한 동해팔경 가운데 하나이다. 이 정자는 해방의 기쁨과 조국광복을 기념하기 위하여 1947년 봄에 지역 주민들이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호해정’을 동해팔경의 제 일경으로 꼽고 있는 옛 문헌이 있는 걸로 보아 옛날에도 ‘호해정’이 존재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도 더할 나위 없는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채로 말이다.
▼ 전천 강변으로 내려서서 조금 더 걷자 ‘만경대(萬景臺)’의 들머리임을 알리는 푯말이 세워져 있다. 하지만 왕복 1㎞나 되는 거리여서 선뜻 들어설 수가 없다. 함께 걷고 있는 지우(知友) 형우군과 묵호항에서 반주 삼아 회를 먹기로 약속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1시간 정도의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서 술자리를 가져야 하는데 그 소중한 시간에서 어찌 30분이나 떼어낼 수 있겠는가. 아쉬운 마음에 관광공사에서 사진을 찾아 올려본다. 만경대는 1613년(광해군 5)에 첨정(僉正)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한 김훈(金勳)이라는 이가 건립한 정자로, 김훈은 이 정자에서 소요하며 말년을 보냈다 한다. 정자 서쪽으로는 두타산, 동쪽으로는 동해항, 아래로는 동해시의 젖줄인 전천(箭川)이 굽이쳐 흘러 삼척의 죽서루와 쌍벽을 이루는 경관을 자랑해 예로부터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한다. 1660년(현종 원년) 문신이자 학자인 미수 허목(許穆)이 주변 경관에 감탄하여 ‘만경(萬景)’이라 하였는데 그 후부터 만경대라 불렀단다.
▼ 이제 해파랑길은 오른편에 전천(箭川)을 끼고 걷게 된다. 신흥골짜기에서부터 내려오는 신흥천과 두타산에서 발원한 냇물이 삼화동에서 합류하여 동해바다로 흘러들어가는 강으로 산업이 발전하기 전까지는 취병산 앞으로 흐르는 냇가에서 천렵도 가능했다고 한다. 수량이 점차 줄어들면서 흉물스럽게 변해있던 것을 시(市)에서 환경 개선사업을 펼친 덕분에 이젠 시민들의 안락한 휴식공간으로 탈바꿈되었단다. 참고로 ‘전천’은 임진왜란 당시 피아가 쏜 화살이 강물을 타고 흘러내렸다고 하여 화살 전(箭)자를 붙였다고 전해진다.
▼ 전천 강물과 동해의 바닷물이 만나는 ‘갯목’으로 고개를 돌리자 쌍용시멘트 공장이 그 장대한 시설을 눈앞에 펼쳐놓는다. 저 공장은 변변한 일자리가 없던 60~70년대 동해시민에겐 최고의 일자리였고 지금도 변함없이 좋은 직장임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일생을 한곳에서 열심히 일을 하며 자식들을 가르치고 행복을 추구했던 사람들이라면 끊임없이 돌아가는 저 공장설비가 마냥 미더울 것이다.
▼ 강변길을 따라 30분쯤 걷자 전천을 가로지르는 징검다리가 놓여있다. 아니 상판을 나무로 연결시켰으니 목교(木橋)라고 부르는 게 더 옳겠다. 징검다리 근처 강기슭엔 갈대가 무성하다. 저런 곳이 있으니 물고기가 돌아왔을 게고 그 물고기를 쫓아 철새들이 찾아들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오리 몇 마리가 고개를 내민다. 전천강 생태계 복원사업이 성과를 거두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 반대편 강변에 이르니 예쁜 나무담장이 눈길을 끈다. 아니 그 위에 꽂혀있는 바람개비가 더 눈길을 끈다. 아까 반대편 강변에서는 공공기관이 만들어 놓은 바람개비들이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화를 한층 더 돋보이게 만들더니 이곳에서는 개인의 노력으로 그 아름다움에 정점을 찍고 있다. 주인장의 고상한 취미는 그것으로도 모자랐나보다. 담장 위에 동글납작한 조약돌들을 올려놓아 바람개비와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 반대편 강변을 따라 두타산을 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던 탐방로가 3분쯤 되는 지점에서 교각(橋脚) 아래로 파고든다. 그리곤 몇 번을 구불대더니 이내 왼편 옆구리에다 철로(鐵路)를 끼고 동해역으로 달려 나간다. 길이 넓고 또렷한데다 이정표와 리본 등 해파랑길 표식들이 곳곳에서 손짓하니 길을 잃을 염려도 없다. 행여 다리라도 아플라치면 길가에 만들어놓은 쉼터에서 쉬어가면 될 일이다. 느긋하게 걸어도 좋겠다는 얘기이다. 다만 눈에 담을만한 멋진 풍광이 눈에 띄지 않는 것은 흠이라 하겠다.
▼ 그렇게 20분 남짓 걷자 시가지가 나오는가 싶더니 발길은 이내 동해역(옛 이름은 북평역)에 이른다. 영동선이라는 간선에 묵호항선과 삼척선, 북평선 등 지선이 세 개나 뻗어나가는 철도교통의 중심이 되는 역이다. 하지만 이층으로 지어진 붉은 색 벽돌집은 한 시(市)의 이름이 붙은 역이라기엔 참 작고 소박하다. 쉼터가 만들어져 있는 역사 앞도 한적하기는 매한가지다. 한적한 역과 역 앞의 거리는 세월이 그렇게 천천히 쌓이고 있었다.
▼ 해파랑길은 이제 왕복 4차선 도로를 왼편에 끼고 이어진다. 이 부근은 러시아어로 적힌 간판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러시아 음식을 파는 식당도 보인다. 인근에 있는 동해항에 러시아 선박들이 자주 들어온다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8년쯤 전 톰스크공대의 ‘신기술 관련 세미나’에 참석하러 갔다가 맛있게 먹었던 양고기 구이 생각이 나 한번 들러볼까도 생각했지만 이것 역시 그만두기로 했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묵호항에서 갖게 될 회 잔치가 더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 동해시 구간의 해파랑길도 정비가 잘 되어 있는 편이다. 탐방로 대부분이 도로와 확실하게 구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함께 걷는 이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어도 될 만큼 널찍하기까지 하다. 길을 만들기 여의치 않은 곳은 데크로드나 계단을 놓아 보행하는데 지장이 없도록 했다. 특히 다른 지역들과는 다르게 제작된 이정표가 돋보였다. 지금 걷고 있는 지점이 해파랑길 50개 코스 가운데 몇 번째인지를 알 수 있도록 그 숫자를 적어 놓았는가 하면, 동해시 자체에서 조성한 둘레길의 이름까지 함께 적어 넣는 등 탐방객들을 위한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를 건넌다. 오가는 차량이 제법 되기에 눈치를 보지만 멈추어주는 차량은 눈에 띄지 않는다. ‘이런 곳에서는 사람이 먼저인데..’ 유럽 쪽 여행에 이력이 붙어가는 집사람의 입에서 한숨 섞인 넋두리가 튀어나온다. 나도 공감이다. 잠시 후 동해체력장이란 표지석이 세워져있는 작은 공원이 진행방향을 가로막고 있다. 용정 해안마을 사람들의 이주(移住) 역사를 담은 유허비(遺墟碑) 외에도 ‘88올림픽 기념비’ 등 의미가 없어 보이는 빗돌들이 여럿 세워져 있다. 이곳에 들어선 해군체력장으로 인해 삶의 터전을 내준 용정마을을 잊지 않기 위해 마련된 소공원이라고 보면 되겠다.
▼ 공원 앞에서 방향을 틀면 ‘명사십리 망상오토갬핑장’으로 가는 길임을 알리는 굴다리가 나오고 이어서 탐방로는 도로변을 떠나 오솔길로 들어선다. 도로와 철로 사이의 좁은 틈새를 비집고 들어선 탐방로는 정비가 잘 되어 있다. 길가에 벤치는 물론이고 정자까지 지어놓아 나그네들의 쉼터로 만들어놓았는가 하면 자작나무나 수양벚나무 등 관상용의 나무들을 식재해 보는 이들의 눈을 즐겁게 했다.
▼ 지금은 한겨울로 들어가는 길목, 붉게 물든 산수유와 피라칸타(firethorn)의 열매가 보는 즐거움을 한층 업그레이드시키고 있다.
▼ 코끝을 스쳐가는 솔향에 취해 걷는데 ‘나이스 샷!’이라는 골프장에서나 쓸 법한 환호성이 들려온다. 아니나 다를까 고개를 돌려보니 골프장 하나가 아름다운 동해 바닷가를 독차지하고 있다. 해군의 ‘동해 체력단련장’이란다. 이제야 고개가 끄덕여 진다. 아까 굴다리를 지나기 직전에 만났던 유허비의 ‘체력단련장’이란 골프장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골프장을 ‘체력단련장’이란 용어로 고쳐 부름으로써 곱지 않게 볼지도 모르는 시선을 잠시 피해보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 조금 더 걷자 ‘감추사(甘湫寺)’라는 표지석이 눈에 들어온다.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절이라는 귀띔이 있었기에 주저 없이 가보기로 한다. 특히 ‘해수관세음보살 봉불’ 및 ‘용왕각 개축’이라는 현수막까지 내걸려 있는데 어찌 들어가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운이라도 좋으면 맛있는 음식이라도 대접 받을지 누가 알겠는가. 아무튼 한국불교 태고종 소속인 ‘감추사’는 신라 선화공주(善花公主)가 창건했다는 ‘석실암(石室庵)’에서 유래한다. 현재의 사찰은 폐허로 방치되어 오던 것을 1960년대에 새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선화공주는 신라 진성여왕의 셋째 딸로 ‘서동요’의 주인공인 선화공주와는 다른 인물이라니 참조해 두자. 이왕에 시작했으니 옛 설화로 들어가 보자. 당시 선화공주는 큰 병을 앓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한 스님이 ‘동주 감추에서 치성 드리면 병이 나을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고 한다. 동주는 지금의 동해 지역. 감추의 석굴에서 3년을 간절히 기도한 선화공주는 병이 깨끗하게 나았고 공주가 그 자리에 만든 절이 ‘감추사’라는 것이다.
▼ 오른편 언덕을 내려가 철로를 건넌 다음 솔숲 길을 잠시 걷자 ‘감추사(甘湫寺)’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감추사는 관음전과 삼성각, 용왕각, 요사채가 전부인데 저마다 바위 틈새에 교묘하게 들어앉았다. 바람 센 날, 사찰 벽에 파도가 부딪힐 정도로 바다와 가깝다는 특징도 있다. 참고로 바닷가에 들어선 절들은 관음도량이 대부분이다. 바닷가에 관음보살이 상주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이곳도 역시 관음전(觀音殿)이 본당 노릇을 하고 있다. 봉불(奉佛) 의식을 행하고 있는 ‘해수관세음보살’도 여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참! 이 경내 전각들 가운데 ‘용왕각’의 ‘기도 발’이 엄청 좋다니 간직하고 있는 바람이라도 있다면 한번쯤 빌어볼 일이다.
▼ 관음전 앞에서는 산사음악회가 열리고 있었다. 앞에서 얘기했던 ‘용왕각 낙성식’을 기념하기 위해서란다. 그냥 지나치려는데 보살님들이 차라도 한 잔 들고 가라며 소맷자락을 붙잡는다. 비빔밥도 맛있다며 요사채로 들어가길 권한다. 시간이 없다고 사양했더니 가시는 길에 드시라며 떡을 한 봉지 싸 주시는 게 아닌가. 진정한 ‘보시(布施)’를 보는 것 같아 즐거웠다. 이렇게 따뜻한 일상을 매일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 해안가로 내려가니 100m 남짓 되는 작은 규모의 해변이 나온다. ‘감추사’ 아래에 있다고 해서 ‘감추해변’이라 불리는데 바위가 많아 물놀이보단 풍경 감상에 더 적합한 곳이다. 하지만 맹위를 떨치고 있는 한파 탓인지 바닷가에는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강태공들이 전부였다.
▼ 15분 만에 해파랑길로 되돌아와 탐방을 이어간다. 탐방로는 이제 완전한 솔숲으로 변한다. 그것도 20~30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노송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것이다. 코끝으로 파고드는 솔향에 반해 발걸음을 잠시 멈춘다. 그리곤 복식호흡(腹式呼吸)을 해본다. 이내 피로가 가시면서 심신은 한없이 맑아져 온다. 피톤치드(phytoncide)의 영향일 것이다. 그렇게나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 중의 하나가 소나무가 아니겠는가.
▼ 10분쯤 더 걷자 탐방로가 도로와 해어지잔다. 그리곤 굴다리를 지나자마자 오른편으로 한섬해변이 길게 펼쳐진다. 하지만 공사 ‘가림막’으로 가려져있어 화장실을 찾지 않았더라면 그냥 지나칠 뻔했다. 그렇게 들어간 한섬해변은 규모는 작지만 고운 모래사장이 길게 뻗어 있어 물놀이를 즐기기에 딱 좋은 해안이었다. 그렇다고 정식으로 개장한 해수욕장이 아니라는 점까지 잊어서는 안 된다. 해양구조대 등 관리자가 상주하지 않으니 안전에 신경을 써야 한다는 얘기이다. 또한 일몰 이후에는 해변으로 들어가는 문을 걸어 잠근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 망상해수욕장이나 추암해수욕장 등 큰 규모의 해수욕장이 인근에 있어 비교적 눈길을 덜 받는 한섬해변은 이른바 ‘아는 사람만 아는’ 동해의 숨은 명소라고 한다. 해변은 오른편으로는 감추산이, 왼편으로는 한섬방파제가 감싸고 있는 모양새다. 해변 양끝에 추암해변에서 보았던 촛대바위와 비슷한 원통 모양의 바위가 하나씩 서 있어 신비한 느낌도 든다.
▼ 해파랑길로 되돌아오니 탐방로는 이제 해안가 솔숲 사이를 헤집으며 나있다. 오른편에 끼고 있는 동해바다는 철조망으로 가로막혀 있다. 그것도 개미 한 마리 들어올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튼튼하다. 남한혁명기지 구축을 목적으로 울진과 삼척지구에 침투했던 1968년의 무장공비 침투사건의 영향이 아닐까 싶다. 아픈 상처이지만 해송이 우거진 솔숲은 쾌적하기만 하다. 함께 걷는 이와 담소를 나무며 걷기에 딱 좋다는 얘기이다.
▼ 철조망으로 닫아놓은 해안선을 아쉬워해 보지만 손대지 않은 바다 경관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것에 오히려 감사해본다. 그러다가 왼편 산자락에 들어앉은 정자 하나를 찾아낸다. ‘관해정(觀海亭)’이라는데 울창한 솔숲에 둘아싸인 탓에 바다는 보이지도 않는다. 본디 시내 송정동에 있던 정자(옛 이름은 호정 또는 영호정)를 1975년에 현 위치로 옮겼다는데 이왕이면 이름에 걸맞은 곳에 터를 잡았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
▼ 군부대 초소 입구를 지나 ‘동해기도원’ 표지판을 따라 내려가면 고불개 해안에 이른다. 곁에 세워진 이정표(하평해변/ 한섬해변)에는 하평해변으로 표기되어 있으니 참조한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잠시 내려가야만 만나게 되는 ‘고불개해안’은 해안에 널린 기암괴석들이 일품인 곳이다. 갯바위에 해초와 이끼류가 자라면서 더욱 환상적인 모습을 만들어내는데, 그 바위들을 파도가 때리며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는 풍경이 가히 장관이다. 산 밑에 홀로 우뚝 선 바위 옆으로 펼쳐진 널찍한 바위자락은 낚시꾼들 사이에선 명소로 소문나 있다. ‘평바위’로 불리는데 감성돔 포인트란다. 그래선지 강태공 몇 명이 이미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참! 오는 도중에 천곡항의 위를 지나기도 했으나 포구까지 내려가 보는 것은 그만두기로 했었다. 솔숲 사이로 내다보이는 풍경이 보잘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섬해안에서 고불개해안까지는 15분이 조금 못 걸렸다.
▼ 고개 하나를 더 넘자 이번에는 ‘가세해변’이 나온다. 고불개해안에서 5분쯤 되는 지점인데, 묵호방향의 갯바위 지대가 특히 아름다운 이곳은 높다랗게 쌓아올린 시멘트 축대가 고운 모래사장을 둘로 나누어 놓았다. 탐방로는 물론 축대의 왼편으로 나있다. 백사장에서 낚시 삼매경에 빠져있는 낚시꾼들의 숫자가 꽤 되는 것을 보면 이곳도 역시 바다낚시의 명소인가 보다.
▼ 가세해변을 지나자 탐방로는 서슬 시퍼런 절벽의 가장자리를 따라 나있다. 왼편 바로 옆으로 철로가 지나다보니 제비집처럼 아슬아슬한 잔도(棧道)를 낼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물론 데크로 길을 만들어 안전에는 문제가 없다. 그저 바닷가에 널린 절경들을 눈에 담으며 걸으면 될 일이다.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시시각각으로 달리 나타나는 기암절벽들이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해파랑길 33코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간이라 하겠다.
▼ 서두르지 말라는 듯 전망대로 만들어 놓았다. 이 아름다운 경관을 가슴 속 깊은 곳에 차곡차곡 쌓아두라는 모양이다. 저런 배려를 그냥 무시해서는 아니 될 일, 일단은 오르고 본다. 저 멀리 묵호항을 낀 해안선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 묵호항으로 향하는 탐방로가 바닷가를 떠나기 싫었던 모양이다. 가는 도중에 모래사장이 고운 ‘하평해변’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이곳도 역시 묵호항 방향의 끄트머리에 기괴한 생김새의 갯바위들이 널려있어 충분한 눈요깃거리로 작용한다. 또한 물빛이 맑은데다 수심까지 얕아 가족단위의 피서객들로부터 사랑을 받는단다. 가세해안에서 하평해안까지는 10분이 걸렸다.
▼ 해파랑길 33코스는 전체적으로 영동선 철도를 따라간다. 그래서 운이 좋을 경우 테마열차인 ‘바다열차’가 철로 위를 달리는 풍경을 볼 수도 있다고 한다. 바다열차란 정동진역에서 삼척역까지 왕복 운행하는 관광열차이다. 중간에 묵호와 동해, 추암, 삼척해변역을 거치게 되는데, 이때 원하는 역에서 내려 관광을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다른 특징도 있다. 바다열차라는 이름답게 바다의 풍경을 감상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일반 열차에 비해 창이 넓고 크게 나 있고 좌석은 창가를 향해 앉도록 2열로 만들어져 있다. 앞열과 뒷열에 단차가 있기 때문에 뒷열에 앉더라도 창에 가득 차는 동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바다열차를 보는 행운은 나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 길을 걷다보면 ‘부곡동 돌담마을 해안숲 공원’도 만날 수 있다. 일제 식민지 시대부터 진행된 항만과 철도 등의 개발로 인해 사라졌던 숲을 복권기금으로 조성된 녹색자금을 지원 받아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공원에는 두 기의 돌탑 외에도 노천공연장이 만들어져 있었다. 매년 초여름에 열리는 ‘묵호등대 논골담길 축제’ 때 이곳에서 음악회가 열리기도 한다더니 저런 무대가 있었기에 가능했었을 것이다.
▼ 하평해안을 떠난 지 15분 만에 묵호항역(墨湖港驛)에 도착했다. 원래 이름은 ‘묵호역’이었으나 영동선이 강릉역까지 연장되면서 묵호역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고 기존의 역은 ‘묵호항역’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기능도 화물전용 역으로 전환되었단다. 묵호항은 이곳보다 묵호역에서 훨씬 더 가깝다는 점도 기억해두자.
▼ 길은 이제 ‘묵호(墨湖)’로 들어선다. 지금은 동 이름이 된 ‘묵호’는 유독 물새들이 많이 몰려들어 ‘새도 검고, 바다도 검다’고 해서 ‘먹 묵(墨)’ 자를 써서 만든 지명이라고 한다. 하지만 탐방로는 새와 바다 대신 쇠락하고 누추한 마을 풍경만 보여준다. 어느 곳에서는 영화에서나 볼 법한 풍경을 보여주기도 한다. 작은 평수의 집들이 월세방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 예전엔 선원들과 항만에서 일을 하는 인부들로 가득했을 것이다. 그런 골목에 술 마실 장소가 없을 리 없다. 이제는 과거의 영화를 찾아볼 수 없지만 그래도 아직 남아있는 술집 몇이 골목의 한켠을 차지하고 있었다.
▼ 잠시 후 탐방로는 시내 중심가로 들어선다. 해파랑길 33코스는 동해시 관내를 걷도록 나있다. 동해시는 1980년 삼척군 북평읍과 명주군 묵호읍이 합해지며 만들어진 항구도시다. 옛 북평항은 동해항으로 이름을 바꾸며, 한때 금강산 유람선 출항지로 명성을 떨친 항구다. 묵호항은 삼척 지역의 무연탄을 수송하는 무역항으로 번성했던 항구다. 무연탄 생산도 멈추고 금강산 유람선도 끊긴 항구엔 이제 싱싱한 해산물을 찾아 모여드는 관광객들이 대부분이다.
▼ 망상해변으로 가는 길이 나뉘는 삼거리에서는 묵호항 방향이다. 이어서 ‘묵호여객선터미널’을 지났다싶으면 묵호항 회센터가 탐방객들의 식욕을 북돋운다. 모처럼 만나는 포구인데 그냥 지나칠 수야 없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그것도 값싸고 싱싱한 횟감이 즐비하다니 말이다. 이곳은 횟감을 사는 곳과 회를 뜨는 곳, 그리고 먹는 곳이 각기 다르다는 특징이 갖고 있다. 그런 번거로운 절차를 거쳐 가자미와 오징어회를 챙긴 다음 소주까지도 넉넉하게 준비했다. 그리곤 마땅한 곳에 주저앉아 형우군과 술잔을 나누었다. 미주가효(美酒佳肴)에 오래 묵은 벗까지 더하니 술은 술술 잘도 넘어간다.
▼ 트레킹 날머리는 묵호수변공원 주차장
날머리인 묵호수변공원이 바로 옆이다 보니 마음까지도 여유로워졌나 보다. 만취 해버렸으니 말이다. 아무튼 불콰해진 얼굴로 또 다시 길을 나선다. 그리곤 몇 걸음 걷지 않아 묵호수변공원 주차장에 이르면서 오늘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기존의 33코스 보다 2㎞ 정도를 더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걷는 데는 4시간이 걸렸다. 핸드폰의 앱에 찍힌 거리는 16.11㎞, 더딘 속도로 걸었던 모양이다. 아니 그만큼 구경거리가 많았다는 얘기도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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