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랑 11코스
여행일 : ‘18. 12. 1(토)
소재지 : 경북 경주시 양북면, 감포읍 일원
산행코스 : 나아해변(6.3㎞, 생략)→봉길해변(대왕암, 2.4㎞)→감은사지(1.2㎞)→이견대(6.9㎞)→전촌항(2.0㎞)→감포항(소요시간 : 18.8㎞ 중 13.68㎞를 걷는데 3시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문무왕의 호국정신이 살아 숨쉬는 11코스는 문화재와 함께하는 ’역사탐방‘ 길이자 경주 최대의 어항과 미항이 여행객을 맞이하는 생동감 넘치는 코스이다. 11코스는 문무대왕과 함께 시작된다. 해중릉(海中陵)과 감은사지(感恩寺址), 이견대(利見臺) 등 문무왕과 관련된 문화재들이 출발지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 있기 때문이다. 이후부터는 아름다운 바닷가 풍경이 길손을 맞는다. 경주의 미항으로 손꼽히는 전촌항과 참가자미로 유명한 경주 최대의 어항인 감포항까지 이어지는 바닷가에는 다양한 볼거리와 체험거리가 가득하다. 봉길해수욕장을 비롯한 코스 전역에서 해산물을 건조시키는 광경을 만날 수 있다.
▼ 트레킹의 시작은 한국원자력환경공단 코라디움(홍보관,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해파랑길 11코스는 나아해변에서 시작하는 게 원칙이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봉길리해안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방사성폐기물처리장’이 들어서면서 탐방로를 막아놓았기 때문이다. 개중에는 대중교통을 타고 이곳 봉길리까지 오는 것을 고집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이런 번거로움을 애초부터 생략해 버리는 것이다. 동해고속도로(포항-부산) 동경주 IC에서 내려와 929번 지방도를 이용해 문무대왕릉 방향으로 달리다가 대본삼거리(경주시 감포읍 대본리)에서 31번 국도를 갈아타고 1㎞가량 내려가면 대왕암(문무대왕릉) 앞 해안이다. 해변의 뒤편 언덕 위에는 ‘청정누리’라는 명품공원이 들어앉았다. 잘 가꾸어진 산책로는 물론이고 유명작가들이 만든 예쁜 조형물들도 여럿 들어있으니 잠깐 들러보는 것도 괜찮겠다. 특히 공원 안에 위치한 코라디움(홍보관, 아래사진)에 들어가 우리나라에서 발생하는 방사성폐기물들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아볼 것을 권해본다. 세상은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는가. 참고로 한국원자력환경공단(Korea Radioactive Waste Agency, KORAD)은 방사성 폐기물 관리사업을 효율적으로 추진함으로써 방사성폐기물로 인한 위해를 방지하고 공공의 안전과 환경보전에 이바지하기 위해 설립된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기금관리형 준정부기관이다. 본사는 경주 시내에 두고 있으며 이곳 봉길리에는 방사성폐기물 처리시설(월성지역본부)이 위치하고 있다. 아래 사진은 청정누리공원에 만들어진 홍보관인 ‘코라디움(공단의 영어 약자인 ’KORAD‘와 전시관을 뜻하는 'rium’의 합성어)으로 설계에서 공사에 이르기까지 내가 심혈을 기울였던 사업 가운데 하나이다. 아니 공단은 설립단계부터 주도적으로 참여했기에 이번 방문은 의미가 깊다 하겠다.
▼ 원자력환경공단을 나서면 봉길리 해변이 바로 코앞이다. 대종천(大鍾川) 하구에 위치한 해변을 중심으로 감은사지와 이견대, 기림사, 선무도의 본산인 골굴사, 장항사지 등 많은 명소들이 인근에 위치하고 있어 물놀이와 함께 문화유적 관광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자갈과 모래가 섞인 해변은 해수욕장(백사장 길이 500m, 폭 40m)으로 조성되어 있지만 그보다는 모래사장 건너편에 있는 문무대왕릉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 바다 가운데에 커다란 바위무더기가 들어앉았다. 문무대왕릉(文武大王陵, 사적 제158호)으로 삼국통일을 완성한 문무왕(文武王)의 시신이 수장(水葬)되었다고 해서 ‘대왕암(大王岩)’ 또는 ‘대왕바위’로도 불린다. 지난번 8코스에서 만났던 울산의 대왕암과는 동명이처(同名異處)인 셈인데 생김새만 놓고 볼 때는 울산의 대왕암보다 한참이나 뒤진다. 참고로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자신이 죽으면 불교식으로 화장한 뒤 유골을 동해에 묻으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적고 있다. 용(龍)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는 것이다. 681년 문무왕이 죽자 그의 아들 신문왕이 유언에 따라 화장한 유골을 동해의 큰 바위에 장사지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바위를 대왕암이라 했단다. 바위는 둘레가 200m쯤 되는 천연 암초인데 사방으로 물길을 터놓았다. 이 물길은 인공을 가한 흔적이 있고, 안쪽 가운데에 길이 3.7m, 높이 1.45m, 너비 2.6m의 큰 돌이 남북으로 길게 놓여 있어 이 돌 밑에 문무왕의 유골을 묻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해변에는 유난히도 물새가 많다. 해변이 온통 흰색으로 덮여 있다가 사람이라도 지나갈라치면 그 흰색이 이번에는 하늘을 뒤덮어버린다. 또 다른 구경거리도 있다. 곳곳에 들어선 무당집들인데 개중에는 아래 사진과 같이 간판까지 버젓이 내걸고 있다. 정월 대보름에는 전국에서 모여든 무당들이 ‘떼 굿판’을 벌이기도 한단다. 문무대왕의 영험한 기운을 받으려는지, 아니면 이미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여행자들에겐 저런 풍경이 불쾌한 기억이 되기도 한다. 굿판에 사용되는 징소리가 소음을 넘어 소름으로 치닫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 해변이 끝나는 곳에서 ‘대종천(大鍾川)’을 만난다. 경주시 양북면의 재궁마을에서 발원하여 양북면과 감포읍의 경계에서 동해로 흘러드는 하천으로 ‘용당천’이라 불리기도 한다. 건너편에 만파식적을 받았다는 이견대(利見亭)가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수면 위를 하얗게 뒤덮고 있는 새때를 카메라에 담을 수 있는 뷰포인트(viewpoint)이니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도록 하자. 이왕에 시작했으니 대종천의 유래도 함께 알아보자. '큰大'에 '쇠북 鐘'과 '내 川'을 쓴 대종천의 이름은 이곳이 큰 종과 관련이 있는 강임을 말해준다. 1238년 몽고군의 침략 때 일이다. 몽고군은 경주 황룡사의 9층탑을 불태운 것으로도 모자라 에밀레종, 즉 성덕대왕신종의 네 배가 넘는 황룡사종을 가져가려고 했다. 에밀레종의 네 배 이상 크기라면 무게가 100톤을 헤아린다. 몽고군들은 대종천을 이용하여 황룡사종을 실어 나르려 했다. 당시의 대종천은 대형선박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 있는 문무왕이 이를 보고도 가만 놔두었을 리가 없다. 몽고군이 종을 싣고 배를 띄워 동해로 들어서려는 찰나, 갑자기 폭풍이 휘몰아치면서 배는 뒤집혔고, 종도 물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단다. 그 이후 대종천에는 바람이 심하고 파도가 무서운 날이면 은은하게 종소리가 울려 나왔다고 한다.
▼ 대종천의 뚝방길을 따라 냇가를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는 대종교(大鍾橋)를 건넌다. 이때 약간의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감은사가 있는 방향만 헤아리며 올라가다 보면 다리를 지나쳐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감은사는 저쪽 대종천 너머에 있는데 자신은 강을 사이에 두고 이쪽에서 길을 찾고 있는 것이다. 하긴 설사 그런다고 해도 무슨 문제이겠는가. 길을 잃고 헤매보는 것도 낯선 여행에서의 재미가 아니겠는가. 아무튼 우린 마을이 끝나는 지점에서 눈짐작으로 도로로 올라섰다. 탐방로는 다리를 건넌 다음 끄트머리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꺾도록 되어있다. 교통량이 많은 곳이니 방심은 금물이다. 교통신호를 잘 준수해가며 건너도록 하자.
▼ 다리 아래로 흐르는 대종천의 물이 유난히 푸르다. 저 물은 잠시 후 동해 바다와 하나가 된다. 그래선지 옛 문헌들은 이 부근을 ‘동해구(東海口)’라 적고 있다. ‘동해의 입’이라는 뜻이니 다분히 상징적인 지명이라 하겠다. 경주의 진산인 토함산에서 흘러나온 물이 큰 내를 이루다가 동해로 흘러들어 가는 ‘입구’라는 얘기이다.
▼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929번 지방도를 탄다. 잠시 후 길이 둘로 나뉜다. 오른편에 보이는 샛길의 끄트머리에 감은사가 보이나 우린 계속해서 ‘동해안자전거길’을 따른다. ‘감은사주차장’을 경유하는 정규의 탐방로를 따르기 위해서이다.
▼ 길을 나선지 25분 만에 감은사지(感恩寺址, 사적 제31호)에 이른다. 신라 31대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의 업적과 은혜를 기리고자 지은 감은사(感恩寺)가 있던 절터다.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왜병을 진압하기 위해 역사를 시작한 문무왕(文武王)이 중도에 죽자 그의 아들 신문왕(神文王)이 즉위해 682년(신문왕 2) 완성했으며, 금당의 기단 아래에 동향한 구멍을 두어 이곳으로 해룡이 된 문무왕이 들어와 서리도록 했고, 또 유서에 따라 골(骨)을 매장한 곳이 절의 앞바다에 있는 대왕암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절의 이름 또한 본래는 나라를 지킨다는 의미에서 진국사(鎭國寺)였으나 신문왕이 부왕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으로 감은사(感恩寺)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널따란 부지에는 국보 제112호 ‘감은사지 삼층석탑’ 두 기(基)가 세워져 있다. 동탑(東塔)과 서탑을 양옆으로 두고 몇 걸음 들어서니 절은 흔적도 없고 초석만 남은 금당(金堂)만이 외롭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라며 읊던 길재(吉再) 선생의 마음이 이랬을까?
▼ 동서로 마주 서 있는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 (慶州感恩寺址東·西三層石塔, 국보 제112호)’은 신라 신문왕(神文王) 2년(682년)에 세워진 높이 13.4m의 석탑이다. 화강암 이중기단 위에 방형(方形)의 중층(中層) 탑을 쌓았다. 동서로 건립된 두 탑의 규모와 형식은 동일하며, 현존하는 석탑 중 거탑(巨塔)에 속한다. ‘고선사지 3층석탑’과 함께 통일신라 초기 삼층석탑을 대표한다. 이 탑을 해체·보수하는 과정에서 창건 당시 설치했던 사리장치(舍利裝置)가 발견되기도 했다. 이 유물은 현재 ‘감은사지 서삼층석탑 사리장엄구(感恩寺址 西三層石塔 舍利莊嚴具, 보물 제366호)’라는 이름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전시 중이다.
▼ 탐방로는 감은사의 오른편 뒤쪽으로 나있다. 사적지의 울타리를 넘자마자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잠시 후 민가가 나타나자 탐방로는 용당산(감은사 뒷산)의 오른쪽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들머리에 해파랑길 이정표(이견대 1.1㎞)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제법 가파르게 올라선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두어 번 반복한다. 가슴에 담을 만한 볼거리가 없는 그저 그렇고 그런 구간이라고 보면 되겠다.
▼ 능선에 올라서자 ‘소리에 끌려 걷는 길, ←7구간’이라고 적힌 낯선 팻말 하나가 눈에 띈다. 그러고 보니 이곳이 ‘감포 깍지길‘의 7구간인 ’소리에 끌려 걷는 길‘인가 보다. ’감포 깍지길‘이란 경주시가 해파랑길이 지나는 해안선을 활용해 조성한 걷기 코스다. 경주의 남쪽인 양북면의 문무대왕릉에서 시작해 북쪽 해파랑길 경주 구간의 끝인 감포읍 연동까지 이어지는데, 해안뿐만 아니라 내륙의 주요 지점을 연결해 모두 7개 코스가 조성돼 있다. 깍지길의 ‘깍지’는 손가락을 서로 엇갈리게 바짝 맞추어 잡은 상태로 사람과 바다가 깍지를 낀 길이라는 의미이다. 또한 혼자가 아닌 함께 손을 잡고 걸어야 제 맛이라는 뜻도 담겨있단다.
▼ 능선을 따라 걷다가 숲을 벗어나면 두어 기의 무덤이 들어서있는 묘역이 나타난다. 무덤 앞에 서면 문무대왕릉과 동해가 시원스레 펼쳐진다. 이런 멋진 경관이 있기에 버겁다싶을 정도로 가파른 오르막으로 탐방로를 내놓았던 모양이다. 참! 묘역의 뒤편에 오석(烏石)으로 만든 표지석이 하나 세워져 있다. 이곳이 ’듬북재‘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나 보다.
▼ 산을 내려가는 길은 많이 가파르다. 통나무로 계단을 만들어 놓았지만 층고(層高)가 높은 탓에 관절이 좋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자칫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다. 그런 내리막길이 짧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이어서 산자락 아래로 난 해안도로(31번 국도)를 따라 500m쯤 더 걸으면 오른편 바닷가에 자리 잡은 ’이견대(利見臺)‘가 눈에 들어온다.
▼ 해안가 벼랑에 걸터앉은 ’이견대(利見臺, 사적 제159호)‘도 역시 문무대왕과 관련이 깊다. 이견대는 ’삼국유사(三國遺事)‘의 만파식적조(萬波息笛條)에 처음 등장한다. 그대로 옮길 경우 헷갈릴 수도 있으니 조금 쉽게 풀어보자. 문무왕이 죽어가면서 유언을 내렸다. 자기의 시신을 동해바다에 수장(水葬)시키면 용(龍)이 되어 왜구의 노략질을 막는 등 나라를 수호하겠다는 것이다. 신문왕이 그대로 따른 뒤 그곳에 대(臺)를 쌓고 나서 바라보니, 과연 큰 용이 바다 가운데서 나타나더란다. 그래서 ’이견대‘라 했다는 것이다. 이견대의 이견(利見)은 ’주역(周易)‘의 건괘에 나오는 ’나는 용이 하늘에 있으니 대인을 봄이 즐겁다(飛龍在天利見大人)‘라는 괘에서 따온 것으로 여겨진다. 참고로 신문왕은 이곳 이견대에서 용으로부터 만파식적(萬波息笛)을 만들 대나무를 얻었다고 전해진다. 이름만으로도 스토리텔링이 되는 기이한 피리 만파식적을 '삼국유사'는 이렇게 적고 있다. '신라 제31대 신문왕은 아버지 문무왕을 위해 동해변에 감은사를 지어 추모했다. 죽어서 해룡(海龍)이 된 문무왕과 하늘 수호신이 된 김유신은 용을 시켜 동해의 한 섬에 대나무를 보냈다. …왕이 이 대나무를 베어서 피리를 만들어 부니, 나라의 모든 근심걱정이 해결되었다.' 그래 만파식적은 보이지 않는 음률이다. 그 음률은 마음의 파도다. 마음으로 들어야만 들린다고 하니 신문왕의 마음으로 들어보자.
▼ 지금 이곳엔 ’이견정(利見亭)‘이란 정자가 들어서 있다. 신발까지 벗어야하는 번거로움이 싫어 정자에는 오르지 않은 채로 그냥 조망만 즐기기로 한다. 눈을 들자 바다 한가운데에 웅크리고 있는 대왕암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아니 이왕이면 신문왕의 시선으로 따라가 보자. 그러자 대왕암이 한 마리의 용으로 변하면서 바다건너 일본을 향해 포효(咆哮)하고 있다.
▼ 다시 길을 나선다. 탐방로는 31번 국도의 가장자리를 따라 나있다. ’국토종주 동해안 자전거길‘과 같이 사용한다고 보면 되겠다. 하지만 길을 걷는 내내 안전에 주의가 요구된다. 오가는 자전거를 피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어떤 곳에서는 스칠 듯이 지나가는 승용차들까지 조심해야 한다. 탐방로와 도로가 구분되지도 않은 곳들이 심심찮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 대신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고운 편이다. 바닷가에 널려있는 크고 작은 갯바위들이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그 모양새를 바뀌어 선보이면서 훌륭한 눈요깃감으로 변하는 것이다.
▼ 앗! 이게 웬일이란 말인가. 느닷없이 ’대본2리(회곡마을)‘의 표지석이 나타나버린 것이다. 이곳으로 오는 도중 어디선가 ’대본3리‘의 바닷가로 내려가는 해파랑길이 나뉘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도 우린 이를 모른 채로 그냥 지나치고 말았던 것이다. 덕분에 우린 경주구간의 또 다른 볼거리라는 ’촛대바위‘를 보지 못하는 우(愚)를 저지르고야 말았다. 흙 한줌 없는 바위에 자라나 나 홀로 바다와 맞서는 소나무의 모습이 일품이라는 그 ’촛대바위‘를 말이다.
▼ 회곡마을 버스정류장을 지나 바닷가로 나가면 제법 긴 백사장이 나온다. 이후부터 탐방로는 바닷가와 31번 국도를 번갈아가며 이어진다.
▼ 그렇게 얼마간을 더 걷다보면 ’대본1리(가곡마을)‘이다. 마을 앞에는 지방어항인 가곡항이 들어서있다. 남·북방파제 400m와 선양장, 물양장 등을 갖추고 있는데 방파제의 벽에 그려진 피리를 형상화한 그림이 눈길을 끈다. 그 옆에는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고 적어놓았다. 만파식적을 건네받았다는 이견대가 자기 마을에 위치하고 있다는 걸 자랑이라고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 마을에는 ’제당(祭堂)‘이 지어져 있다.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빌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 옆에는 ’할배·할매소나무‘로 불리는 두 그루의 늙은 소나무가 웅크리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에 심은 것으로 전해지는데 보통의 소나무와는 달리 용틀임을 하고 있는 형상이라서 마을 주민들이 숭배의 대상으로 삼고 있단다. 매년 6월1일에 지내는 마을 동제(洞祭)의 당목(堂木)이며, 어선들이 출항할 때 안전과 풍어를 비는 나무이기도 하단다. 참고로 이 나무에는 옛 얘기가 하나 전해져 내려온단다. 옛날 가곡마을에 금슬 좋은 부부가 살았는데 슬하에 자식이 없었지만 이에 개의치 않고 정답게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할머니에 이어 할아버지까지 세상을 떠나면서 집은 폐허로 남게 되었는데, 그들이 살던 집의 뒤편 바위에 소나무 두 그루가 자라나더란다. 그 소나무들이 서로 손을 맞잡고 있는 형상인지라 후세 사람들이 할배소나무와 할매소나무로 불렀다는 것이다. 그럴싸한 얘기이지만 귀에 익숙한 것을 보면 요즘 유행인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이 만들어낸 얘기가 아닐까 싶다.
▼ 잠시 후 현대식으로 지어진 절간이 나타난다. 옥상에 ’해룡일출 大관음사‘라는 이름표를 달았는가 하면 그 아래에 매단 현수막에는 ’한국불교대학 大관음사‘라고 적혀있다. 이로보아 ’무문관(無門關)‘으로 유명한 대관음사의 바닷가 포교장이 아닐까 싶다. 무문관이란 중국선종 5대가 중 하나인 임제종파(臨濟宗派)의 남송 무문혜개(無門慧開)가 1228년에 펴낸 책이다. 이 책에서 무문관은 ’무‘자의 진실한 탐구만이 선문의 종지로 들어서는 제1의 관문으로 해석된다. 아무튼 이곳 대관음사의 무문관은 스님들의 ’수행처‘이다. 승려가 선방에 들어가 짧게는 3개월, 길게는 수년간 밖으로 나오지 않은 채로 화두를 참구한단다. 문고리는 밖에서 걸어놓고 하루에 한 번, 오전 11시에 유일한 통로인 작은 문을 통해 음식을 넣어주는 일이 전부란다. 2년 전엔가는 지방 방송사에서 ’무문관‘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해 방영하기도 했었다.
▼ 대관음사를 지나면서 탐방로는 몽돌밭으로 이어진다. 새알처럼 반질반질한 몽돌들이 해안가에 즐비하다. 까만 자갈밭을 파도가 만드는 포말이 쉼 없이 휘감는다. 모가 나지 않고 새알같이 둥근 것이 마치 '자갈자갈~' 소리를 내지를 것만 같다. 이런 곳에서는 맨발로 걷는 게 제격인데 시간이 허락하기 않는 게 아쉽다. 몽돌을 따라 둥글어지는 자연지압이 잠시나마 피로를 풀어줄 텐데 말이다.
▼ 몽돌해변이 끝나면 탐방로는 소나무 숲속으로 파고든다. 숲은 쓰레기장을 방불케 하고 있다. 못쓰게 된 어구(漁具)들은 물론이고, 페트병과 스티로폼(styrofoam)들이 사람이 피해가야만 할 정도로 널브러져 있는데, 주민들이 버린 것 같지는 않고 파도에 밀려온 해양쓰레기들로 보인다.
▼ 다시 31번 국도로 올라섰던 탐방로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해안으로 되돌아간다. 지중해라는 이국적인 외모의 펜션 앞에서인데 이때부터 진행방향 저 멀리에 있는 감포항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근거리에 있는 나정항이 코앞으로 성큼 다가와 있음은 물론이다.
▼ 이 구간은 바닷가에 널려있는 크고 작은 갯바위들을 눈요기삼아 걷는 재미가 제법 쏠쏠한 구간이다. 그렇다고 바닷가로 내려가는 것은 금물이다. 이곳 주민들이 전복 치패(稚貝)를 방류해 놓았기 때문에 자칫 무단 채취를 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 이견대를 출발한지 50분 만에 ’나정항‘에 이른다. 355m의 방파제와 110m의 이안제(離岸堤, 해안 보호를 위해 해안선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위치에 해안선과 평행하게 설치하는 방파제), 그리고 선양장과 물양장을 갖춘 지방어항이다. 이곳도 역시 특별한 볼거리는 없다. 그저 방파제에 그려놓은 해양스포츠 그림들이 시선을 끌 따름이다. 옆에는 해양레저도시 경주’라고 적혀있다. 10년쯤 전인가 이곳 나정항과 전촌항 일대에서 해양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고 하더니 그 사업의 일환으로 그려 넣었나 보다. 당시 기사(記事)는 레프팅을 비롯한 스킨스쿠버와 보팅, 제트스키 등 시원한 바다물살을 가르며 쾌감을 느낄 수 있는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운영한다고도 했었다.
▼ 조금 더 걷자 ‘나정해변’이다. 이 해변은 모래가 아주 작은 세모(細沙)로 이루어져 있다는 게 특징이다. 그런 특징이 길이 0.5㎞에 폭이 40∼90m인 해수욕장의 이름까지 ‘나정고운모래 해변’으로 바꾸어 놓았다. 고운 모래사장의 뒤편은 소나무 숲으로 이루어져 있다.
▼ 솔밭에는 ‘바다가 육지라면’의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배 형상으로 만들어졌는데 앞면에는 노래 가사가 그리고 뒷면에는 창작 유래에 관한 설명을 적어 놓았다. ‘바다가 육지라면’은 1970년대에 가수 조미미가 불러 히트시킨 노래이다. 노랫말은 이 지역(경주시 현곡면) 출신인 정귀문(鄭貴文) 씨가 지었단다.
▼ 해수욕장 뒤편의 널따란 주차장에는 캠핑카들이 늘어서있다. 체육시설(멀티 코트장)도 갖추고 있어 피서와 체육활동을 겸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인근에는 동해의 바닷물을 이용한 해수탕도 문을 열었단다. 조금 전 나정항에서 얘기했듯이 모터보트와 바나나보트 등 수상 레저를 즐길 수 있음은 물론이다.
▼ 조금 더 걷자 또 다른 볼거리가 나타난다. 나정해변과 전촌의 솔밭해변을 잇는 보행자 전용의 인도교(人道橋)가 그 주인공이다. 이 다리는 교각(橋脚)이 없는 사장교(斜張橋) 형태로 지어졌는데 축을 이루는 주탑(主塔)은 옛 신라시대부터 경주 바다를 지켜온 만파식적 설화를 모티브로 제작했다고 한다. 20개의 로프는 감포 지역의 20개 행정리(行政里)를 의미한단다. 이곳 감포의 랜드마크(landmark)로 자리 잡기에 충분하다 하겠다.
▼ 다리를 건너면 ‘전촌해변’이다. 이곳도 역시 ‘전촌솔밭해변’으로 이름을 바꾸어 놓았다. 모래사장의 뒤편에서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는 솔밭을 자신을 어필(appeal)할 특징으로 삼은 모양이다. 밋밋해서 특색이 없는 것보다는 이미지가 분명한 게 기억하기 좋은 법이니 ‘발상의 전환’이 만들어 낸 좋은 본보기라 하겠다.
▼ 전촌해변의 솔숲은 100여 년 전 경주최씨 문중에서 조성했다고 한다. 숲속에 써놓은 최씨 선대의 오래된 묘(墓)가 증거란다. 나무들은 해마다 조금씩 키를 늘렸겠지만 솔밭은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으로 거기에 있다. 숲의 앞은 해수욕장이다. 백사장의 길이는 800m, 추령터널이 뚫렸던 1998년에 개장했단다.
▼ 모래사장이 끝나면 전촌(典村) 마을이다.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허공을 달리고 있는 날렵한 거마상(巨馬像)이 눈에 들어온다. 생뚱맞게 웬 말(馬)일까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단다. 커다란 말이 누워 있는 것처럼 생긴 마을 뒷산에서 모티브를 따왔다는 것이다. 신라시대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병마를 훈련시키고 말을 주둔시킨 곳이라는 설화도 함께 전해진단다. 나정항에서 이곳 전촌항까지는 25분이 걸렸다.
▼ 고요하고 아담한 포구에는 작은 어선 몇 척이 밧줄에 묶인 채로 물결에 장단을 맞추고 있다. 건너편 방파제에는 길이 146m에 폭이 3.3m인 타일벽화가 만들어져 있다. 동쪽방파제의 내측 부분에다 용(龍)과 말(馬) 등, 여러 종류의 문화제들을 이형모자이크 타일로 그려 넣었단다. 소재로 이용된 용은 ‘해룡이 된 문무왕과 천신이 된 김유신이 대나무 하나를 신문왕에게 주어 만파식적이라는 피리를 만들어 불게 하여 나라의 안녕과 평화를 이루어 냈다’고 하는 문헌에서 모티브를 따왔단다.
▼ 전촌항은 어촌관광단지로 조성되어 있다. 널따란 광장과 주차장을 조성하는 한편 야외공연장과 전망대, 파고라, 정자, 화장실 등의 편의시설들을 새로 지었다. 관광객 유치를 위한 노력이 돋보인다고 하겠다. 그러니 횟집이 안보일 리가 없다. 곳곳에서 나그네들을 유혹하고 있다.
▼ 길가에 쳐놓은 긴 줄에는 생선이 매달려있다. 인근에서 많이 잡힌다는 ’참가자미‘인가 했더니 작업을 하고 있던 아주머니께서 ’아귀‘라고 알려주신다. 겨울철의 별미 손꼽히는 ’아구탕‘의 재료이자, 나처럼 술 좋아하는 술꾼들에게는 최고의 안주로 각광을 받는 고기이다. ’아귀‘라는 생선이 식탁으로 올라가는 도중에 ’아구‘로 변하는 것은 ’자산어보(玆山魚譜)‘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저자인 정약전(丁若銓) 선생께서 본명을 ‘조사어(釣絲魚)’로 적으면서, ‘아구어(餓口魚)’를 속명으로 첨언해 놓았기 때문이다.
▼ 감포항으로 향한다. ‘감포깍지길’ 1구간에 속하는 탐방로로서 항구의 끝에 세워진 해파랑길안내도의 뒤편으로 나있다. 이 구간은 크고 작은 갯바위들이 널려있는 해안을 끼고 나있다. 그 갯바위에는 파도소리를 벗 삼아 세월을 낚는 듯한 강태공들 몇이 파도가 이는 바다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입질이 좋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이곳은 3년 전까지만 해도 군(軍)의 경비지역이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1970년대에 간첩 6명이 숨어들어 용굴 속에서 지내며 주변을 정찰했다고 한다. 그로인해 민간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다는 것이다. 아직도 일몰 이후에는 출입이 통제된단다. 군사시설을 촬영하는 것도 금지다. 2015년에 개방되었지만 부대가 완전히 철수한 것은 아니며 민간인 출입은 잠정적으로만 허용돼 있다는 증거이다.
▼ 탐방로는 이제 산속으로 파고든다. 아니 해안가 산자락으로 길이 나있다는 게 옳은 표현이겠다. 비탈에 가까운 산자락에다 길은 내다보니 데크로 바닥을 깔았다. 길게 내려섰다가 다시 위로 향하는 데크계단이 만들어내는 곡선이 아름답게 펼쳐지는 구간이다.
▼ 그렇게 얼마를 진행하자 오른편으로 내려가는 길이 하나 나뉜다. 데크계단을 따라 바닷가로 내려서자 ‘용굴’이 나온다. 용(龍)이 승천할 때 뚫었다는 구멍이 있어 용굴, 구멍이 4개라 사굴 또는 사룡굴이라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것은 2개뿐이다. 이 굴에는 뱀이 변해서 용이 되었다는 사룡(巳龍)과 맑은 물에 사는 담룡(淡龍)이 함께 살았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태생이 다른 두 마리의 용은 자주 옥신각신 싸웠다고 한다. 용들이 파놓았다는 동굴은 이제 호기심 많은 파도가 동굴 속을 들락날락거리며 하얀 이야기를 한 보따리씩 풀어내고 있다. 아니 용들의 싸움처럼 용굴과 바다가 서로 으르렁댄다.
▼ 왼편으로 고개를 돌리자 해식애(海蝕崖)가 나타난다. 물이 차있어 내려왔던 길로 되돌아가야 하지만 물이 빠졌을 때는 바닷가를 따라 이동해도 좋을 것 같다. 되돌아간 길은 잠시 후 저곳 어디쯤으로 다시 내려오기 때문이다.
▼ 되돌아 나와 걷는 길, 탐방로는 좌우에 산과 바다를 끼고 이어진다. ‘깍지길’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산과 바다를 깍지 끼고 걷는 셈이다. 그렇게 이어지던 탐방로는 잠시 후 해안으로 뚝 떨어진다. 그러자 시야가 탁 트이면서 진행방향 저만큼에 감포항이 나타난다. 마지막 모퉁이를 돌아서니 이제 ‘감포해안’이다. 잘그락 잘그락 몽돌을 밟으며 걷다가 잠시 그 위에 앉아 본다. 크기와 모양과 색깔은 다르지만 대부분 둥글다.
▼ 트레킹의 날머리는 감포항(甘浦港)
골목길을 지나서 해안 도로를 끝까지 따라가면 ‘감포항’이 나온다. 그리고 해파랑길 11코스도 끝을 맺는다. 전촌항을 출발한지 50분만이다. 감포항은 드나드는 어선이 많은 동해남부의 중심 어항이다. 그래선지 정박되어 있는 배들도 먼 바다까지 조업을 나갈 수 있을 만큼 커다랗다. 해파랑길을 답사하면서 보아오던 배들과는 크기부터 다르다는 얘기이다. 오늘 트레킹은 총 3시간이 걸렸다. 핸드폰의 앱(application)에 찍힌 거리(문무대왕릉에서 감포까지)가 13.68㎞이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은 셈이다. 참고로 1920년 개장한 감포항은 1937년 인천 제물포항과 함께 읍으로 승격되었을 만큼 우리나라 근대 어업사에 있어 대표적인 어항으로 꼽힌다. 특히 일제강점기의 번성했던 어항유적과 당시 생활상을 엿볼 수 가옥들이 많이 남아 있어 우리나라 근대 생활사를 확인해 볼 수 있는 곳으로 알려진다.
▼ 남방파제를 지키고 있는 등대가 눈길을 끈다. 2016년에 설치된 16m 높이의 등대인데 국보 제112호인 ‘감은사지 삼층석탑’에서 모티브를 따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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