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랑 11코스

 

여행일 : ‘18. 12. 1()

소재지 : 경북 경주시 양북면, 감포읍 일원

산행코스 : 나아해변(6.3, 생략)봉길해변(대왕암, 2.4)감은사지(1.2)이견대(6.9)전촌항(2.0)감포항(소요시간 : 18.813.68를 걷는데 3시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문무왕의 호국정신이 살아 숨쉬는 11코스는 문화재와 함께하는 역사탐방길이자 경주 최대의 어항과 미항이 여행객을 맞이하는 생동감 넘치는 코스이다. 11코스는 문무대왕과 함께 시작된다. 해중릉(海中陵)과 감은사지(感恩寺址), 이견대(利見臺) 등 문무왕과 관련된 문화재들이 출발지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 있기 때문이다. 이후부터는 아름다운 바닷가 풍경이 길손을 맞는다. 경주의 미항으로 손꼽히는 전촌항과 참가자미로 유명한 경주 최대의 어항인 감포항까지 이어지는 바닷가에는 다양한 볼거리와 체험거리가 가득하다. 봉길해수욕장을 비롯한 코스 전역에서 해산물을 건조시키는 광경을 만날 수 있다.


 

트레킹의 시작은 한국원자력환경공단 코라디움(홍보관,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해파랑길 11코스는 나아해변에서 시작하는 게 원칙이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봉길리해안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방사성폐기물처리장이 들어서면서 탐방로를 막아놓았기 때문이다. 개중에는 대중교통을 타고 이곳 봉길리까지 오는 것을 고집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이런 번거로움을 애초부터 생략해 버리는 것이다. 동해고속도로(포항-부산) 동경주 IC에서 내려와 929번 지방도를 이용해 문무대왕릉 방향으로 달리다가 대본삼거리(경주시 감포읍 대본리)에서 31번 국도를 갈아타고 1가량 내려가면 대왕암(문무대왕릉) 앞 해안이다. 해변의 뒤편 언덕 위에는 청정누리라는 명품공원이 들어앉았다. 잘 가꾸어진 산책로는 물론이고 유명작가들이 만든 예쁜 조형물들도 여럿 들어있으니 잠깐 들러보는 것도 괜찮겠다. 특히 공원 안에 위치한 코라디움(홍보관, 아래사진)에 들어가 우리나라에서 발생하는 방사성폐기물들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아볼 것을 권해본다. 세상은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는가. 참고로 한국원자력환경공단(Korea Radioactive Waste Agency, KORAD)은 방사성 폐기물 관리사업을 효율적으로 추진함으로써 방사성폐기물로 인한 위해를 방지하고 공공의 안전과 환경보전에 이바지하기 위해 설립된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기금관리형 준정부기관이다. 본사는 경주 시내에 두고 있으며 이곳 봉길리에는 방사성폐기물 처리시설(월성지역본부)이 위치하고 있다. 아래 사진은 청정누리공원에 만들어진 홍보관인 코라디움(공단의 영어 약자인 ’KORAD‘와 전시관을 뜻하는 'rium’의 합성어)으로 설계에서 공사에 이르기까지 내가 심혈을 기울였던 사업 가운데 하나이다. 아니 공단은 설립단계부터 주도적으로 참여했기에 이번 방문은 의미가 깊다 하겠다.




원자력환경공단을 나서면 봉길리 해변이 바로 코앞이다. 대종천(大鍾川) 하구에 위치한 해변을 중심으로 감은사지와 이견대, 기림사, 선무도의 본산인 골굴사, 장항사지 등 많은 명소들이 인근에 위치하고 있어 물놀이와 함께 문화유적 관광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자갈과 모래가 섞인 해변은 해수욕장(백사장 길이 500m, 40m)으로 조성되어 있지만 그보다는 모래사장 건너편에 있는 문무대왕릉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바다 가운데에 커다란 바위무더기가 들어앉았다. 문무대왕릉(文武大王陵, 사적 제158)으로 삼국통일을 완성한 문무왕(文武王)의 시신이 수장(水葬)되었다고 해서 대왕암(大王岩)’ 또는 대왕바위로도 불린다. 지난번 8코스에서 만났던 울산의 대왕암과는 동명이처(同名異處)인 셈인데 생김새만 놓고 볼 때는 울산의 대왕암보다 한참이나 뒤진다. 참고로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자신이 죽으면 불교식으로 화장한 뒤 유골을 동해에 묻으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적고 있다. ()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는 것이다. 681년 문무왕이 죽자 그의 아들 신문왕이 유언에 따라 화장한 유골을 동해의 큰 바위에 장사지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바위를 대왕암이라 했단다. 바위는 둘레가 200m쯤 되는 천연 암초인데 사방으로 물길을 터놓았다. 이 물길은 인공을 가한 흔적이 있고, 안쪽 가운데에 길이 3.7m, 높이 1.45m, 너비 2.6m의 큰 돌이 남북으로 길게 놓여 있어 이 돌 밑에 문무왕의 유골을 묻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해변에는 유난히도 물새가 많다. 해변이 온통 흰색으로 덮여 있다가 사람이라도 지나갈라치면 그 흰색이 이번에는 하늘을 뒤덮어버린다. 또 다른 구경거리도 있다. 곳곳에 들어선 무당집들인데 개중에는 아래 사진과 같이 간판까지 버젓이 내걸고 있다. 정월 대보름에는 전국에서 모여든 무당들이 떼 굿판을 벌이기도 한단다. 문무대왕의 영험한 기운을 받으려는지, 아니면 이미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여행자들에겐 저런 풍경이 불쾌한 기억이 되기도 한다. 굿판에 사용되는 징소리가 소음을 넘어 소름으로 치닫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해변이 끝나는 곳에서 대종천(大鍾川)’을 만난다. 경주시 양북면의 재궁마을에서 발원하여 양북면과 감포읍의 경계에서 동해로 흘러드는 하천으로 용당천이라 불리기도 한다. 건너편에 만파식적을 받았다는 이견대(利見亭)가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수면 위를 하얗게 뒤덮고 있는 새때를 카메라에 담을 수 있는 뷰포인트(viewpoint)이니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도록 하자. 이왕에 시작했으니 대종천의 유래도 함께 알아보자. '''쇠북 '''을 쓴 대종천의 이름은 이곳이 큰 종과 관련이 있는 강임을 말해준다. 1238년 몽고군의 침략 때 일이다. 몽고군은 경주 황룡사의 9층탑을 불태운 것으로도 모자라 에밀레종, 즉 성덕대왕신종의 네 배가 넘는 황룡사종을 가져가려고 했다. 에밀레종의 네 배 이상 크기라면 무게가 100톤을 헤아린다. 몽고군들은 대종천을 이용하여 황룡사종을 실어 나르려 했다. 당시의 대종천은 대형선박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 있는 문무왕이 이를 보고도 가만 놔두었을 리가 없다. 몽고군이 종을 싣고 배를 띄워 동해로 들어서려는 찰나, 갑자기 폭풍이 휘몰아치면서 배는 뒤집혔고, 종도 물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단다. 그 이후 대종천에는 바람이 심하고 파도가 무서운 날이면 은은하게 종소리가 울려 나왔다고 한다.



대종천의 뚝방길을 따라 냇가를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는 대종교(大鍾橋)를 건넌다. 이때 약간의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감은사가 있는 방향만 헤아리며 올라가다 보면 다리를 지나쳐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감은사는 저쪽 대종천 너머에 있는데 자신은 강을 사이에 두고 이쪽에서 길을 찾고 있는 것이다. 하긴 설사 그런다고 해도 무슨 문제이겠는가. 길을 잃고 헤매보는 것도 낯선 여행에서의 재미가 아니겠는가. 아무튼 우린 마을이 끝나는 지점에서 눈짐작으로 도로로 올라섰다. 탐방로는 다리를 건넌 다음 끄트머리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꺾도록 되어있다. 교통량이 많은 곳이니 방심은 금물이다. 교통신호를 잘 준수해가며 건너도록 하자.



다리 아래로 흐르는 대종천의 물이 유난히 푸르다. 저 물은 잠시 후 동해 바다와 하나가 된다. 그래선지 옛 문헌들은 이 부근을 동해구(東海口)’라 적고 있다. ‘동해의 입이라는 뜻이니 다분히 상징적인 지명이라 하겠다. 경주의 진산인 토함산에서 흘러나온 물이 큰 내를 이루다가 동해로 흘러들어 가는 입구라는 얘기이다.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929번 지방도를 탄다. 잠시 후 길이 둘로 나뉜다. 오른편에 보이는 샛길의 끄트머리에 감은사가 보이나 우린 계속해서 동해안자전거길을 따른다. ‘감은사주차장을 경유하는 정규의 탐방로를 따르기 위해서이다.



길을 나선지 25분 만에 감은사지(感恩寺址, 사적 제31)에 이른다. 신라 31대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의 업적과 은혜를 기리고자 지은 감은사(感恩寺)가 있던 절터다.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왜병을 진압하기 위해 역사를 시작한 문무왕(文武王)이 중도에 죽자 그의 아들 신문왕(神文王)이 즉위해 682(신문왕 2) 완성했으며, 금당의 기단 아래에 동향한 구멍을 두어 이곳으로 해룡이 된 문무왕이 들어와 서리도록 했고, 또 유서에 따라 골()을 매장한 곳이 절의 앞바다에 있는 대왕암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절의 이름 또한 본래는 나라를 지킨다는 의미에서 진국사(鎭國寺)였으나 신문왕이 부왕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으로 감은사(感恩寺)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널따란 부지에는 국보 제112감은사지 삼층석탑두 기()가 세워져 있다. 동탑(東塔)과 서탑을 양옆으로 두고 몇 걸음 들어서니 절은 흔적도 없고 초석만 남은 금당(金堂)만이 외롭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라며 읊던 길재(吉再) 선생의 마음이 이랬을까?



동서로 마주 서 있는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 (慶州感恩寺址東·西三層石塔, 국보 제112)’은 신라 신문왕(神文王) 2(682)에 세워진 높이 13.4m의 석탑이다. 화강암 이중기단 위에 방형(方形)의 중층(中層) 탑을 쌓았다. 동서로 건립된 두 탑의 규모와 형식은 동일하며, 현존하는 석탑 중 거탑(巨塔)에 속한다. ‘고선사지 3층석탑과 함께 통일신라 초기 삼층석탑을 대표한다. 이 탑을 해체·보수하는 과정에서 창건 당시 설치했던 사리장치(舍利裝置)가 발견되기도 했다. 이 유물은 현재 감은사지 서삼층석탑 사리장엄구(感恩寺址 西三層石塔 舍利莊嚴具, 보물 제366)’라는 이름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전시 중이다.



탐방로는 감은사의 오른편 뒤쪽으로 나있다. 사적지의 울타리를 넘자마자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잠시 후 민가가 나타나자 탐방로는 용당산(감은사 뒷산)의 오른쪽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들머리에 해파랑길 이정표(이견대 1.1)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제법 가파르게 올라선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두어 번 반복한다. 가슴에 담을 만한 볼거리가 없는 그저 그렇고 그런 구간이라고 보면 되겠다.



능선에 올라서자 소리에 끌려 걷는 길, 7구간이라고 적힌 낯선 팻말 하나가 눈에 띈다. 그러고 보니 이곳이 감포 깍지길7구간인 소리에 끌려 걷는 길인가 보다. ’감포 깍지길이란 경주시가 해파랑길이 지나는 해안선을 활용해 조성한 걷기 코스다. 경주의 남쪽인 양북면의 문무대왕릉에서 시작해 북쪽 해파랑길 경주 구간의 끝인 감포읍 연동까지 이어지는데, 해안뿐만 아니라 내륙의 주요 지점을 연결해 모두 7개 코스가 조성돼 있다. 깍지길의 깍지는 손가락을 서로 엇갈리게 바짝 맞추어 잡은 상태로 사람과 바다가 깍지를 낀 길이라는 의미이다. 또한 혼자가 아닌 함께 손을 잡고 걸어야 제 맛이라는 뜻도 담겨있단다.



능선을 따라 걷다가 숲을 벗어나면 두어 기의 무덤이 들어서있는 묘역이 나타난다. 무덤 앞에 서면 문무대왕릉과 동해가 시원스레 펼쳐진다. 이런 멋진 경관이 있기에 버겁다싶을 정도로 가파른 오르막으로 탐방로를 내놓았던 모양이다. ! 묘역의 뒤편에 오석(烏石)으로 만든 표지석이 하나 세워져 있다. 이곳이 듬북재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나 보다.



산을 내려가는 길은 많이 가파르다. 통나무로 계단을 만들어 놓았지만 층고(層高)가 높은 탓에 관절이 좋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자칫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다. 그런 내리막길이 짧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이어서 산자락 아래로 난 해안도로(31번 국도)를 따라 500m쯤 더 걸으면 오른편 바닷가에 자리 잡은 이견대(利見臺)‘가 눈에 들어온다.



해안가 벼랑에 걸터앉은 이견대(利見臺, 사적 제159)‘도 역시 문무대왕과 관련이 깊다. 이견대는 삼국유사(三國遺事)‘의 만파식적조(萬波息笛條)에 처음 등장한다. 그대로 옮길 경우 헷갈릴 수도 있으니 조금 쉽게 풀어보자. 문무왕이 죽어가면서 유언을 내렸다. 자기의 시신을 동해바다에 수장(水葬)시키면 용()이 되어 왜구의 노략질을 막는 등 나라를 수호하겠다는 것이다. 신문왕이 그대로 따른 뒤 그곳에 대()를 쌓고 나서 바라보니, 과연 큰 용이 바다 가운데서 나타나더란다. 그래서 이견대라 했다는 것이다. 이견대의 이견(利見)주역(周易)‘의 건괘에 나오는 나는 용이 하늘에 있으니 대인을 봄이 즐겁다(飛龍在天利見大人)‘라는 괘에서 따온 것으로 여겨진다. 참고로 신문왕은 이곳 이견대에서 용으로부터 만파식적(萬波息笛)을 만들 대나무를 얻었다고 전해진다. 이름만으로도 스토리텔링이 되는 기이한 피리 만파식적을 '삼국유사'는 이렇게 적고 있다. '신라 제31대 신문왕은 아버지 문무왕을 위해 동해변에 감은사를 지어 추모했다. 죽어서 해룡(海龍)이 된 문무왕과 하늘 수호신이 된 김유신은 용을 시켜 동해의 한 섬에 대나무를 보냈다. 왕이 이 대나무를 베어서 피리를 만들어 부니, 나라의 모든 근심걱정이 해결되었다.' 그래 만파식적은 보이지 않는 음률이다. 그 음률은 마음의 파도다. 마음으로 들어야만 들린다고 하니 신문왕의 마음으로 들어보자.



지금 이곳엔 이견정(利見亭)‘이란 정자가 들어서 있다. 신발까지 벗어야하는 번거로움이 싫어 정자에는 오르지 않은 채로 그냥 조망만 즐기기로 한다. 눈을 들자 바다 한가운데에 웅크리고 있는 대왕암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아니 이왕이면 신문왕의 시선으로 따라가 보자. 그러자 대왕암이 한 마리의 용으로 변하면서 바다건너 일본을 향해 포효(咆哮)하고 있다.



다시 길을 나선다. 탐방로는 31번 국도의 가장자리를 따라 나있다. ’국토종주 동해안 자전거길과 같이 사용한다고 보면 되겠다. 하지만 길을 걷는 내내 안전에 주의가 요구된다. 오가는 자전거를 피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어떤 곳에서는 스칠 듯이 지나가는 승용차들까지 조심해야 한다. 탐방로와 도로가 구분되지도 않은 곳들이 심심찮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대신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고운 편이다. 바닷가에 널려있는 크고 작은 갯바위들이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그 모양새를 바뀌어 선보이면서 훌륭한 눈요깃감으로 변하는 것이다.



! 이게 웬일이란 말인가. 느닷없이 대본2(회곡마을)‘의 표지석이 나타나버린 것이다. 이곳으로 오는 도중 어디선가 대본3의 바닷가로 내려가는 해파랑길이 나뉘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도 우린 이를 모른 채로 그냥 지나치고 말았던 것이다. 덕분에 우린 경주구간의 또 다른 볼거리라는 촛대바위를 보지 못하는 우()를 저지르고야 말았다. 흙 한줌 없는 바위에 자라나 나 홀로 바다와 맞서는 소나무의 모습이 일품이라는 그 촛대바위를 말이다.



회곡마을 버스정류장을 지나 바닷가로 나가면 제법 긴 백사장이 나온다. 이후부터 탐방로는 바닷가와 31번 국도를 번갈아가며 이어진다.




그렇게 얼마간을 더 걷다보면 대본1(가곡마을)‘이다. 마을 앞에는 지방어항인 가곡항이 들어서있다. ·북방파제 400m와 선양장, 물양장 등을 갖추고 있는데 방파제의 벽에 그려진 피리를 형상화한 그림이 눈길을 끈다. 그 옆에는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고 적어놓았다. 만파식적을 건네받았다는 이견대가 자기 마을에 위치하고 있다는 걸 자랑이라고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마을에는 제당(祭堂)‘이 지어져 있다.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빌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 옆에는 할배·할매소나무로 불리는 두 그루의 늙은 소나무가 웅크리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에 심은 것으로 전해지는데 보통의 소나무와는 달리 용틀임을 하고 있는 형상이라서 마을 주민들이 숭배의 대상으로 삼고 있단다. 매년 61일에 지내는 마을 동제(洞祭)의 당목(堂木)이며, 어선들이 출항할 때 안전과 풍어를 비는 나무이기도 하단다. 참고로 이 나무에는 옛 얘기가 하나 전해져 내려온단다. 옛날 가곡마을에 금슬 좋은 부부가 살았는데 슬하에 자식이 없었지만 이에 개의치 않고 정답게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할머니에 이어 할아버지까지 세상을 떠나면서 집은 폐허로 남게 되었는데, 그들이 살던 집의 뒤편 바위에 소나무 두 그루가 자라나더란다. 그 소나무들이 서로 손을 맞잡고 있는 형상인지라 후세 사람들이 할배소나무와 할매소나무로 불렀다는 것이다. 그럴싸한 얘기이지만 귀에 익숙한 것을 보면 요즘 유행인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이 만들어낸 얘기가 아닐까 싶다.



잠시 후 현대식으로 지어진 절간이 나타난다. 옥상에 해룡일출 관음사라는 이름표를 달았는가 하면 그 아래에 매단 현수막에는 한국불교대학 관음사라고 적혀있다. 이로보아 무문관(無門關)‘으로 유명한 대관음사의 바닷가 포교장이 아닐까 싶다. 무문관이란 중국선종 5대가 중 하나인 임제종파(臨濟宗派)의 남송 무문혜개(無門慧開)1228년에 펴낸 책이다. 이 책에서 무문관은 자의 진실한 탐구만이 선문의 종지로 들어서는 제1의 관문으로 해석된다. 아무튼 이곳 대관음사의 무문관은 스님들의 수행처이다. 승려가 선방에 들어가 짧게는 3개월, 길게는 수년간 밖으로 나오지 않은 채로 화두를 참구한단다. 문고리는 밖에서 걸어놓고 하루에 한 번, 오전 11시에 유일한 통로인 작은 문을 통해 음식을 넣어주는 일이 전부란다. 2년 전엔가는 지방 방송사에서 무문관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해 방영하기도 했었다.



대관음사를 지나면서 탐방로는 몽돌밭으로 이어진다. 새알처럼 반질반질한 몽돌들이 해안가에 즐비하다. 까만 자갈밭을 파도가 만드는 포말이 쉼 없이 휘감는다. 모가 나지 않고 새알같이 둥근 것이 마치 '자갈자갈~' 소리를 내지를 것만 같다. 이런 곳에서는 맨발로 걷는 게 제격인데 시간이 허락하기 않는 게 아쉽다. 몽돌을 따라 둥글어지는 자연지압이 잠시나마 피로를 풀어줄 텐데 말이다.



몽돌해변이 끝나면 탐방로는 소나무 숲속으로 파고든다. 숲은 쓰레기장을 방불케 하고 있다. 못쓰게 된 어구(漁具)들은 물론이고, 페트병과 스티로폼(styrofoam)들이 사람이 피해가야만 할 정도로 널브러져 있는데, 주민들이 버린 것 같지는 않고 파도에 밀려온 해양쓰레기들로 보인다.



다시 31번 국도로 올라섰던 탐방로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해안으로 되돌아간다. 지중해라는 이국적인 외모의 펜션 앞에서인데 이때부터 진행방향 저 멀리에 있는 감포항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근거리에 있는 나정항이 코앞으로 성큼 다가와 있음은 물론이다.



이 구간은 바닷가에 널려있는 크고 작은 갯바위들을 눈요기삼아 걷는 재미가 제법 쏠쏠한 구간이다. 그렇다고 바닷가로 내려가는 것은 금물이다. 이곳 주민들이 전복 치패(稚貝)를 방류해 놓았기 때문에 자칫 무단 채취를 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견대를 출발한지 50분 만에 나정항에 이른다. 355m의 방파제와 110m의 이안제(離岸堤, 해안 보호를 위해 해안선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위치에 해안선과 평행하게 설치하는 방파제), 그리고 선양장과 물양장을 갖춘 지방어항이다. 이곳도 역시 특별한 볼거리는 없다. 그저 방파제에 그려놓은 해양스포츠 그림들이 시선을 끌 따름이다. 옆에는 해양레저도시 경주라고 적혀있다. 10년쯤 전인가 이곳 나정항과 전촌항 일대에서 해양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고 하더니 그 사업의 일환으로 그려 넣었나 보다. 당시 기사(記事)는 레프팅을 비롯한 스킨스쿠버와 보팅, 제트스키 등 시원한 바다물살을 가르며 쾌감을 느낄 수 있는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운영한다고도 했었다.




조금 더 걷자 나정해변이다. 이 해변은 모래가 아주 작은 세모(細沙)로 이루어져 있다는 게 특징이다. 그런 특징이 길이 0.5에 폭이 4090인 해수욕장의 이름까지 나정고운모래 해변으로 바꾸어 놓았다. 고운 모래사장의 뒤편은 소나무 숲으로 이루어져 있다.



솔밭에는 바다가 육지라면의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배 형상으로 만들어졌는데 앞면에는 노래 가사가 그리고 뒷면에는 창작 유래에 관한 설명을 적어 놓았다. ‘바다가 육지라면1970년대에 가수 조미미가 불러 히트시킨 노래이다. 노랫말은 이 지역(경주시 현곡면) 출신인 정귀문(鄭貴文) 씨가 지었단다.



해수욕장 뒤편의 널따란 주차장에는 캠핑카들이 늘어서있다. 체육시설(멀티 코트장)도 갖추고 있어 피서와 체육활동을 겸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인근에는 동해의 바닷물을 이용한 해수탕도 문을 열었단다. 조금 전 나정항에서 얘기했듯이 모터보트와 바나나보트 등 수상 레저를 즐길 수 있음은 물론이다.



조금 더 걷자 또 다른 볼거리가 나타난다. 나정해변과 전촌의 솔밭해변을 잇는 보행자 전용의 인도교(人道橋)가 그 주인공이다. 이 다리는 교각(橋脚)이 없는 사장교(斜張橋) 형태로 지어졌는데 축을 이루는 주탑(主塔)은 옛 신라시대부터 경주 바다를 지켜온 만파식적 설화를 모티브로 제작했다고 한다. 20개의 로프는 감포 지역의 20개 행정리(行政里)를 의미한단다. 이곳 감포의 랜드마크(landmark)로 자리 잡기에 충분하다 하겠다.




다리를 건너면 전촌해변이다. 이곳도 역시 전촌솔밭해변으로 이름을 바꾸어 놓았다. 모래사장의 뒤편에서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는 솔밭을 자신을 어필(appeal)할 특징으로 삼은 모양이다. 밋밋해서 특색이 없는 것보다는 이미지가 분명한 게 기억하기 좋은 법이니 발상의 전환이 만들어 낸 좋은 본보기라 하겠다.



전촌해변의 솔숲은 100여 년 전 경주최씨 문중에서 조성했다고 한다. 숲속에 써놓은 최씨 선대의 오래된 묘()가 증거란다. 나무들은 해마다 조금씩 키를 늘렸겠지만 솔밭은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으로 거기에 있다. 숲의 앞은 해수욕장이다. 백사장의 길이는 800m, 추령터널이 뚫렸던 1998년에 개장했단다.



모래사장이 끝나면 전촌(典村) 마을이다.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허공을 달리고 있는 날렵한 거마상(巨馬像)이 눈에 들어온다. 생뚱맞게 웬 말()일까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단다. 커다란 말이 누워 있는 것처럼 생긴 마을 뒷산에서 모티브를 따왔다는 것이다. 신라시대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병마를 훈련시키고 말을 주둔시킨 곳이라는 설화도 함께 전해진단다. 나정항에서 이곳 전촌항까지는 25분이 걸렸다.




고요하고 아담한 포구에는 작은 어선 몇 척이 밧줄에 묶인 채로 물결에 장단을 맞추고 있다. 건너편 방파제에는 길이 146에 폭이 3.3인 타일벽화가 만들어져 있다. 동쪽방파제의 내측 부분에다 용()과 말() , 여러 종류의 문화제들을 이형모자이크 타일로 그려 넣었단다. 소재로 이용된 용은 해룡이 된 문무왕과 천신이 된 김유신이 대나무 하나를 신문왕에게 주어 만파식적이라는 피리를 만들어 불게 하여 나라의 안녕과 평화를 이루어 냈다고 하는 문헌에서 모티브를 따왔단다.



전촌항은 어촌관광단지로 조성되어 있다. 널따란 광장과 주차장을 조성하는 한편 야외공연장과 전망대, 파고라, 정자, 화장실 등의 편의시설들을 새로 지었다. 관광객 유치를 위한 노력이 돋보인다고 하겠다. 그러니 횟집이 안보일 리가 없다. 곳곳에서 나그네들을 유혹하고 있다.



길가에 쳐놓은 긴 줄에는 생선이 매달려있다. 인근에서 많이 잡힌다는 참가자미인가 했더니 작업을 하고 있던 아주머니께서 아귀라고 알려주신다. 겨울철의 별미 손꼽히는 아구탕의 재료이자, 나처럼 술 좋아하는 술꾼들에게는 최고의 안주로 각광을 받는 고기이다. ’아귀라는 생선이 식탁으로 올라가는 도중에 아구로 변하는 것은 자산어보(玆山魚譜)‘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저자인 정약전(丁若銓) 선생께서 본명을 조사어(釣絲魚)’로 적으면서, ‘아구어(餓口魚)’를 속명으로 첨언해 놓았기 때문이다.



감포항으로 향한다. ‘감포깍지길’ 1구간에 속하는 탐방로로서 항구의 끝에 세워진 해파랑길안내도의 뒤편으로 나있다. 이 구간은 크고 작은 갯바위들이 널려있는 해안을 끼고 나있다. 그 갯바위에는 파도소리를 벗 삼아 세월을 낚는 듯한 강태공들 몇이 파도가 이는 바다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입질이 좋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이곳은 3년 전까지만 해도 군()의 경비지역이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1970년대에 간첩 6명이 숨어들어 용굴 속에서 지내며 주변을 정찰했다고 한다. 그로인해 민간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다는 것이다. 아직도 일몰 이후에는 출입이 통제된단다. 군사시설을 촬영하는 것도 금지다. 2015년에 개방되었지만 부대가 완전히 철수한 것은 아니며 민간인 출입은 잠정적으로만 허용돼 있다는 증거이다.



탐방로는 이제 산속으로 파고든다. 아니 해안가 산자락으로 길이 나있다는 게 옳은 표현이겠다. 비탈에 가까운 산자락에다 길은 내다보니 데크로 바닥을 깔았다. 길게 내려섰다가 다시 위로 향하는 데크계단이 만들어내는 곡선이 아름답게 펼쳐지는 구간이다.



그렇게 얼마를 진행하자 오른편으로 내려가는 길이 하나 나뉜다. 데크계단을 따라 바닷가로 내려서자 용굴이 나온다. ()이 승천할 때 뚫었다는 구멍이 있어 용굴, 구멍이 4개라 사굴 또는 사룡굴이라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것은 2개뿐이다. 이 굴에는 뱀이 변해서 용이 되었다는 사룡(巳龍)과 맑은 물에 사는 담룡(淡龍)이 함께 살았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태생이 다른 두 마리의 용은 자주 옥신각신 싸웠다고 한다. 용들이 파놓았다는 동굴은 이제 호기심 많은 파도가 동굴 속을 들락날락거리며 하얀 이야기를 한 보따리씩 풀어내고 있다. 아니 용들의 싸움처럼 용굴과 바다가 서로 으르렁댄다.



왼편으로 고개를 돌리자 해식애(海蝕崖)가 나타난다. 물이 차있어 내려왔던 길로 되돌아가야 하지만 물이 빠졌을 때는 바닷가를 따라 이동해도 좋을 것 같다. 되돌아간 길은 잠시 후 저곳 어디쯤으로 다시 내려오기 때문이다.



되돌아 나와 걷는 길, 탐방로는 좌우에 산과 바다를 끼고 이어진다. ‘깍지길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산과 바다를 깍지 끼고 걷는 셈이다. 그렇게 이어지던 탐방로는 잠시 후 해안으로 뚝 떨어진다. 그러자 시야가 탁 트이면서 진행방향 저만큼에 감포항이 나타난다. 마지막 모퉁이를 돌아서니 이제 감포해안이다. 잘그락 잘그락 몽돌을 밟으며 걷다가 잠시 그 위에 앉아 본다. 크기와 모양과 색깔은 다르지만 대부분 둥글다.



트레킹의 날머리는 감포항(甘浦港)

골목길을 지나서 해안 도로를 끝까지 따라가면 감포항이 나온다. 그리고 해파랑길 11코스도 끝을 맺는다. 전촌항을 출발한지 50분만이다. 감포항은 드나드는 어선이 많은 동해남부의 중심 어항이다. 그래선지 정박되어 있는 배들도 먼 바다까지 조업을 나갈 수 있을 만큼 커다랗다. 해파랑길을 답사하면서 보아오던 배들과는 크기부터 다르다는 얘기이다. 오늘 트레킹은 총 3시간이 걸렸다. 핸드폰의 앱(application)에 찍힌 거리(문무대왕릉에서 감포까지)13.68이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은 셈이다. 참고로 1920년 개장한 감포항은 1937년 인천 제물포항과 함께 읍으로 승격되었을 만큼 우리나라 근대 어업사에 있어 대표적인 어항으로 꼽힌다. 특히 일제강점기의 번성했던 어항유적과 당시 생활상을 엿볼 수 가옥들이 많이 남아 있어 우리나라 근대 생활사를 확인해 볼 수 있는 곳으로 알려진다.



남방파제를 지키고 있는 등대가 눈길을 끈다. 2016년에 설치된 16m 높이의 등대인데 국보 제112호인 감은사지 삼층석탑에서 모티브를 따왔다고 한다.


해파랑 6코스

 

여행일 : ‘18. 10. 20()

소재지 : 울산시 남구 일원

산행코스 : 덕하역(3.9km)선암호수공원(6.3km)울산대공원(3.6km)고래전망대(1.8km)태화강전망대(소요시간 : 15.6중 선암호수공원에서 출발 11.7를 걷는데 3시간 30)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덕하역(동해남부선)에서 시작되는 6코스는 내륙으로만 이어진다. 구간을 걷는 내내 바다를 한 번도 구경할 수 없는 유일한 구간이 아닐까 싶다. 해안길이 없다보니 가슴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은 만날 수가 없다. 그렇다고 좋은 점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탐방로의 대부분이 도심공원(都心公園)으로 가꾸어놓은 산줄기들을 오르내리도록 나있기 때문이다. 특히 폭신폭신한 황톳길과 울창한 송림(松林)으로 이루어진 널찍한 등산로, 그리고 곳곳에 배치되어있는 각종 편의시설들은 6코스만의 장점이라 할 수도 있겠다. 신선정과 솔마루정, 고래전망대, 태화강전망대 등도 빼놓을 수 없다. 울산시가지와 십리대숲으로 유명한 태화강변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조망이 일품이기 때문이다.


 

트레킹의 들머리는 선암호수공원(울산시 남구 선암동 480-1)

동해고속도로(울산-부산) 청량 IC에서 내려와 TG 앞 교차로에서 좌회전, 14번 국도를 타고 공업탑로터리(남구 신정동) 방향으로 달리다가 활고개교차로(남구 신암동)에서 오른편으로 빠져나온다. 이어서 아파트지구 사이길(두왕로 190번길)을 통과하면 잠시 후 신암호수공원(무궁화동산 옆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참고로 해파랑길 6코스의 들머리는 덕하역(울주군 청량읍 상남리 522-7)‘이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무릎이 시원찮은 집사람의 체력을 감안해서 선암호수공원을 들머리로 삼았다. 15.6에서 4km 정도를 단축했다고 보면 되겠다.




선암호수공원은 과거 일제강점기 때 농사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선암제라는 연못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울산이 공업화 되어가면서 공업용수 또한 늘어나기 시작했고, 이의 해소를 위해 1964년에는 연못이었던 선암제를 확장하여 댐(dam)을 만들게 된다. 수질보전과 안전을 이유로 1.2의 유역면적 전역에 철조망이 설치되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지금은 야생화단지 등 사계절 내내 아름다움을 간직한 선암호수공원으로 거듭났다. 자연과 인간을 경계지어온 철조망을 철거하고 저수지 주변의 수려한 자연경관을 활용하여 산책로 및 다양한 테마를 가진 시설물들을 조성해놓은 것이다.



호숫가로 들어서자 종합안내도가 눈에 띈다. 시간이 허락된다면 한번쯤 살펴보고 길을 나설 일이다. 특히 나같이 사전준비를 못하고 트레킹을 나선 사람들이라면 이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 할 수도 있겠다. 그래야 나처럼 테마쉼터를 둘러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사전준비를 못해왔으니 안내도라도 꼼꼼히 살펴봤어야 하건만 난 그러지를 못했다. 그러니 호수공원의 볼거리가 무엇인지를 알았을 리가 만무하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다. 이 모든 것이 사전준비를 못한 내 탓이니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아무튼 테마쉼터에는 한국기록원(韓國記錄院, Korea Record Institute, KRI)’에 전국에서 가장 작은 교회와 사찰, 성당으로 등재되어 있는 초미니 종교시설이 있다고 한다. 길이 2.9m에 폭이 1.4m, 그리고 높이가 1.8m에 불과한 호수교회(湖水敎會)는 한두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이고, 안민사(安民寺)는 길이 3m, 1.2m, 높이 1.8m로 뜰에는 돌로 만든 거북이와 기도하는 손 모양의 의자가 있단다. 바티칸의 성베드로 성당을 본떠 만든 성베드로 기도방은 길이 3.5m, 1.4m, 높이 1.5m이다. 글자 그대로 종교를 테마로 평안과 안식을 기원하는 특색 있는 장소라 하겠다.



연꽃방죽 옆에는 생태학습장이 만들어져 있다. 지난해에 조성했다는데 면적이 1라니 규모가 크다고는 할 수 없겠다. 하지만 이곳에는 호수공원에서 자생하는 물고기를 관찰할 수 있는 어류연못을 비롯해 야생초화원, 관람 데크, 디딜방아 등 다양한 볼거리가 들어서 있다. 엄마 아빠를 따라 나온 꼬맹이들에게 딱 좋은 곳이라 하겠다.



연꽃방죽등 호숫가에 만들어놓은 시설들을 둘러보다가 호숫가를 따라 나있는 탐방로로 들어선다. 언덕처럼 작디작은 발음산을 가운데에 두고 한 바퀴를 빙 돌도록 길이 나있는데 쉼터를 겸한 포토전망대와 장미터널 등 눈에 담을만한 시설들로 치장되어 있는 멋진 구간이다. 참고로 선암호수공원에 만들어진 탐방로는 모두 세 구간으로 나누어져 있다. 1구간에는 댐체부터 보현사 입구에 이르는 곳으로 벚꽃터널과 꽃단지, 야생화단지 등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보현사 입구부터 대나리 진입로에 이르는 2구간은 장미터널, 연꽃지, 생태습지원 등으로 구성되었다. 마지막 대나리 입구부터 댐체에 이르는 곳에는 테마가 있는 쉼터, 물레방아, 인공암벽장 등으로 구성하여 그 운치를 더하고 있다. 우리가 트레킹을 시작한 곳이 대나리 진입로였다면 이해가 빠를지도 모르겠다.



조금 더 걷자 넝쿨장미로 띠를 두른 장미터널이 나타난다. 철이 지난 장미넝쿨이 멋스럽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풍취가 있는 길이다. 그래선지 만나는 사람들마다 하나같이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는 경쾌한 걸음들이다. 가끔은 오른편으로 시야가 열리기고 한다. 댐이 보이는가 하면 그 뒤에 버티고 선 아파트는 느긋한 모습으로 호수를 들여다 보고 있다. 멀리 공장들도 보인다.



발음산을 한바퀴 돌았다 싶을 즈음 도로(선암호수길)를 만난다. 길가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이곳을 끝바우고개라 적고 있다. 아까 트레킹을 시작하면서 곁눈질로 살펴본 호수공원 종합안내도에 나와 있던 지명이다. 신선산 남쪽에 있는 뾰쪽한 바위를 화암(花岩)이라고 하며, 그 아래에 있는 마을을 끝바우마을이라 부른다고 적혀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꽃바우가 어떻게 해서 끝바우로 변했는지는 설명하고 있지 않았었다. 이곳의 안내판도 역시 지명과는 동떨어진 설명을 늘어놓고 있을 따름이다. 옛날 이곳에 탱자나무 울타리가 조성되어 있었고 여우 울음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단다.



탐방로는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 또 다른 인공터널 속으로 탐방객들을 인도한다.



그렇게 조금 더 걷자 단을 나누어 조성된 주차장이 나온다. 4년쯤 전인가 새로운 주차장을 추가로 조성한다더니 이를 두고 하는 말이었던가 보다. 당시 기사에서는 주차장이 350면이나 되지만 주말이면 몰려드는 차들로 인해 몸살을 치른다고 했었다. 이곳 선암호수공원이 울산 시민들로부터 그만큼 사랑받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아무튼 주차장으로 들어서기 바로 직전에서 탐방로는 왼편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솔마루길의 입구임을 알려주는 이정표(신선정·신선산 0.5)가 데크계단의 앞에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기둥에는 해파랑길의 표식도 붙어있다. 들머리에서 이곳까지는 22분이 걸렸다.



신선산으로 오르는 길은 가파르면서도 긴 데크계단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이마에 땀방울이 흐를 즈음이면 길은 평평해진다. 하지만 이는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잠시 후면 또 다시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그렇다고 미리부터 겁먹을 필요는 없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상에 올라서기 때문이다. ! 중간에 전망데크가 만들어져 있다는 것을 빼먹을 뻔했다. 아니 주변의 나무들로 인해 시야가 트이지 않으니 쉼터라고 하는 게 더 옳을 수도 있겠다.



그렇게 잠깐 오르면 시야가 툭 트이는 바위가 나타난다. 울산(남구) 시가지가 한눈에 쏙 들어오는 멋진 조망처이다. 산자락으로 들어선지 10분만이다.



몇 걸음 더 올라서자 덩어리로 이루어진 또 다른 바위가 나타난다. 이번 것은 아예 명찰까지 달고 있다. 옛날 신선들이 구름을 타고 내려와 이곳에서 놀다갔다고 해서 신선암(神仙岩)’이란 이름이 붙었단다. 그렇다면 신선산이란 이름을 낳게 한 모태(母胎)인 셈이다.



신선바위 옆에는 신선정(神仙亭)’이라는 이름의 예쁘장한 팔각정이 지어져 있다. 정자에서의 조망은 일품이다. 울산시가지는 물론이고 이번에는 선암호수공원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선암호수는 지형적으로 산과 산의 틈 사이 계곡에 위치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론 도시 주거지와 공장지대 사이이기도 하다. 산에 대한 조망도 압권이다. 산에 대한 조망은 다른 이의 글로서 대신해본다. 울산 시내를 가로지르는 남암지맥이 눈앞을 달리고, 울산을 대표하는 문수산과 무룡산이 우뚝 서 있다. 저 멀리 부산의 금정산과 울주군의 가지산도 눈에 들어온다.




조망을 즐겼다면 이젠 울산대공원으로 향할 차례이다. 갖가지 운동기구들은 물론이고 약수터까지 갖춘 쉼터에서 첫 번째 갈림길을 만난다. 이정표에 표시된 유화원(遊花園)‘ 쪽으로 내려간다. 잘 닦여진 이 길은 울산해양경찰서방향으로 연결된다. ! 중간에 두어 번의 갈림길을 만나게 되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야음동수암길(롯데케슬)과 울산대공원(입구) 등 이정표의 방향표시판에 해파랑길표식이 붙여져 있으니 이를 따르면 된다.



길을 가다보면 숲속 작은 도서관도 만나게 된다. 꽤 많은 도서들이 진열되어 있는가 하면 그 옆에는 벤치도 두어 개 놓아두었다. 힐링만 할 게 아니라 마음의 양식까지 살찌워가라는 배려일 것이다. 알뜰살뜰하게 시민을 챙기는 울산시청 관계자들의 열정을 보는 것 같아 마냥 즐겁다.



그렇게 15분 정도를 진행하면 탐방로는 울산해양경찰서앞의 차도로 내려선다. 횡단보도를 건넌 해파랑길은 경찰서 담장을 왼편에 끼고 대략 5분 정도 이어진다. 그러다가 왕복 8차로를 건너는 솔마루다리를 만난다. 여기까지가 솔마루길 1구간이다.




해파랑길은 이제부터 솔마루길 2구간을 따른다. ’울산대공원안의 산길을 걷는 여정이다. 아니 울산대공원이 조성되어있는 산줄기, 즉 마룻금을 따른다고 보면 되겠다. 탐방로는 일단 곱다. 보드라운 흙길은 폭신폭신하다는 느낌까지 들 정도이고, 경사 또한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작은 오르내림만 반복된다는 얘기이다. 길가 양 옆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등()까지 설치해 놓았다. 웰빙시대를 맞아 늘어난 야간 이용객들을 위한 시설물이란다. 다만 동·식물의 생태계 교란을 방지하기 위하여 낮은 등을 설치했다고 한다. 또한 늦은 시간에는 소등(消燈)을 함으로써 '인간''자연'이 공존하는 방안까지 모색했단다.



숲에는 도토리저금통도 만들어놓았다. 사람만 배려하는 줄 알았는데 동물들까지도 챙기는 모양이다. 보기 좋은 풍경이 아닐 수 없다.



건강안내판도 보인다. 시점과 종점사이의 거리와 소요시간, 그리고 소모되는 칼로리()의 양을 적었다. 그 가운데서도 적혀있는 칼로리에 해당되는 밥의 양을 적어 놓은 게 돋보인다.



숲속을 헤집으며 나있는 탐방로는 바닥이 반질반질할 정도이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녔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숲은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다. 사람들이 들어갈 수 없도록 지정된 탐방로 외의 모든 곳을 일일이 막아놓은 덕분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17분 정도를 걷자 이층으로 지어진 정자가 나타난다. 길 건너 맞은편에는 쉼터를 겸한 전망데크를 만들어 놓았다. 이층까지 올라가는 걸 귀찮아하는 사람들까지도 배려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주변의 소나무들로 인해 아랫도리가 다 잘려 나가버린 동쪽방향에 비해 서쪽은 제대로 된 조망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울산을 감싸고 있는 산군들이 일목요연하게 눈에 들어오는데 대운산과 천성산, 정족산 등이 아닐까 싶다.




드문 일이지만 계단을 놓아야만 할 정도로 가파른 오르막길을 만나기도 한다. 그런데 계단을 만들고 난 뒤에도 맨땅이 드러난 탐방로를 그냥 내버려 두었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겠지만 이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이왕에 계단을 만들어놓았으면 탐방객들이 이를 이용하도록 해서 기존의 맨땅은 자연으로 되돌려 주는 것이 산을 보호하는 하나의 방법일 테니까 말이다.



그렇게 20분 정도를 걸으면 현충탑 입구사거리가 나온다. 물론 정자에서부터 계산한 시간이다. 이곳도 역시 진행방향이 헷갈리는 지점이다. 이정표(문수국제양궁장/ 현충탑/ 갈연마을/ 전망대)가 세워져 있지만 해파랑길이나 솔마루길 등에 대한 표식이 일절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주변을 살펴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마침 해파랑길과 솔마루길, 그리고 울산어울길을 설명해놓은 안내판 옆에 솔마루길 종합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지도를 살펴보니 진행방향에 문수국제양궁장이 보인다. 이정표에 붙어있는 문수국제양궁장 방향으로 가면 된다는 얘기이다.



이후로도 탐방로는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갈림길인 풍요삼거리도 지난다. 이번에는 이정표(솔마루길/ 울산대공원 정문/ 전망대)솔마루길이라는 지명이 공공연하게 나타난다. 이후부터는 이정표마다 같은 지명이 계속해서 등장한다. 해파랑길이 아니라 솔마루길을 걷고 있다고 보는 게 더 옳겠다. 그렇다. 해파랑길 6코스는 솔마루길 1코스인 선암공원에서부터 3코스가 끝나는 지점까지를 그대로 사용한다고 보면 되겠다. ‘솔마루길이란 남구 선암공원에서 시작해 신선산과 울산대공원, 삼호산, 남산을 지나 태화강 십리대숲까지 24를 잇는 도심(都心)순환산책로'이다. 소나무가 울창한 산등성이(마루)들을 연결하는 등산로란 의미에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산과 산, 산과 호수가 공존하는 것이 특징으로 작년(3)에는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에서 공동으로 선정하는 '이달의 걷기 좋은 여행길에 뽑히기도 했다. 그만큼 걷기에 좋다는 증거일 것이다. 참고로 솔마루길은 4개 구간으로 나누어져 있다. 2.1길이의 1구간은 솔마루길 진입광장에서 신선정을 거쳐 울산대공원산으로 연결되고, 2구간(5.4)은 울산대공원 입구에서 하리삼거리와 용미등을 거쳐 솔마루하늘길까지다. 그리고 3구간(3.6)은 솔마루하늘길에서 솔마루정와 태화강전망대를 거쳐 맨발등산로까지, 4구간(1.3)은 맨발등산로에서 남산전망대와 남산루를 거쳐 솔마루길의 종점인 크로바아파트까지 이어진다.



풍요삼거리를 지났다싶으면 곧이어 공원사거리가 나온다. 좌우로 정문과 남문으로 연결되는 차도(車道)가 지나가는 지점이다. ’울산대공원의 중간쯤이라고 보면 되겠다. 그래선지 이곳에는 솔마루길 종합안내판외에 흙먼지털이기까지 설치해 놓았다. 잘 생긴 돌탑도 보인다. 생김새로 보아 지자체에서 돈을 들여 아랫도리를 만든 후, 윗부분은 탐방객들에게 맡겨놓았던 모양이다. 오가는 사람들이 하나하나 올려놓았을 돌맹이들이 그들이 염원하는 작은 소원들만큼이나 켜켜이 쌓여있다. 참고로 울산대공원(蔚山大公園)은 남구 옥동과 신정동에 걸쳐 있는 도심공원이다. SK()1,000억 원을 투자하여 공원을 조성한 후 울산광역시에 무상으로 기부했다고 한다. 산과 호수를 포함하는 100만평의 넓은 부지는 자연(Natural)! 깨끗함(Clean)! 편안함(Comfortable)!‘을 테마로 생활 속에서 자연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상쾌한 휴식공간으로 꾸며졌다.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고 있는데 난데없는 삼각점(三角点, triangulation point)이 길 한가운데에 박혀있다. 삼각점이란 삼각 측량을 할 때 기준으로 선정된 지상의 세 꼭짓점을 말한다. 지구 표면상의 원거리에 있는 점의 상호 위치와 이들의 각 점을 연결하는 선의 길이 및 그 방향을 정밀하게 측정하는 삼각측량에 의해 지구상의 수평위치가 결정되니 매우 중요한 시설물이라 하겠다. 하지만 이에 대한 안내가 없어 사람들은 무심코 지나칠 따름이다.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불당골 사거리를 지나자 옥동농소 간 도로 공사현장이 나타난다. 공원사거리에서 출발한지 17분만이다. 탐방로는 공사현장을 피해 왼편으로 나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너나없이 그냥 공사현장으로 향한다. 길 또한 반질반질하게 나있다. 우회시키는 임시탐방로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아예 없다는 증거일 것이다. 아무튼 두 길은 공사현장을 벗어나자마자 하나로 다시 합쳐진다.



공사현장 다음은 용미등이다. 이정표까지 세워져 있으나 큰 의미가 없어 그냥 지나친다. 얼마간 더 걸으면 이번에는 솔마루 하늘길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삼거리를 만난다. 직진하면 문수체육공원, 우리가 가려는 해파랑길(솔마루길)은 물론 오른편 방향이다.



잠시 후 울산의 동맥이라는 문수로가 나타난다. 공사현장에서 12분 거리이다. 왕복 8차선인 이 도로는 솔마루 하늘길이라는 공중다리를 놓아 보행이 가능하도록 했다. 만일 이 다리가 없었더라면 솔마루길은 이곳에서 뭉텅 잘려나갔을 게 뻔했으니 가히 솔마루길의 백미(白眉)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을 것 같다. 그래선지 다리의 양쪽 끄트머리에다 조형물까지 배치했다. 울산대공원 방향은 소의 등에 올라앉아 퉁소를 불고 있는 소년이, 그리고 반대편에는 삿갓을 쓴 방랑객이 다리를 지키고 있다.




솔마루 하늘길은 솔마루길의 2구간과 3구간이 나뉘는 경계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3구간이 시작되는 지점에다 누각까지 갖춘 성문(城門)을 만들어 놓았다. ’솔마루 성문이라고 적힌 현판까지 달았다.



능선(마루)을 따라 이어지기는 2구간과 매한가지이다. 길이 넓고 경사까지 없다는 점도 같다. 물론 주변의 숲도 소나무들 일색이다. 아무튼 가는 길에 삼호산 삼거리차폐형등산로 2지점등의 갈림길을 만나게 되나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솔마루정방향으로 진행하면 된다. 그거도 아니라면 고래 모양으로 생긴 가로등(街路燈燈)을 따라 진행하면 된다. 남구에서 등산로를 정비하면서 고래 도시인 울산을 홍보하기 위해 허리춤에도 못 미치는 높이의 가로등을 고래 모양으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들국화가 꽃망울을 활짝 열었다. 그래 다음 주에는 첫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霜降)이 들어있다. 가을은 이미 문턱을 넘어 그 절정으로 달려가고 있는 중이다.



걷는 속도를 조금 떨어뜨리기로 한다. 서둘러 걷다보니 주어진 시간보다 훨씬 빨리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들꽃에 눈을 맞추기도 하고, 범장골과 성지골 등 지명의 유래를 적어놓은 안내판들을 읽어가면서 느긋하게 걸어본다. 그렇게 30분 정도를 걷자 솔모루정이라는 팔각정이 나타난다. 물론 솔마루 하늘길에서부터 계산한 시간이다. 정자는 신발을 벗어야만 오를 수가 있다. 그렇다고 조망을 즐길 수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태화강 방향에다 난간을 둘러 시야가 트이도록 해놓았다. 박취문(1617~1690)이 낙향 대비용으로 지었다는 만회정(晩悔亭) 태화강대공원의 북단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솔마루정에서 10분 정도를 더 진행하면 이번에는 고래전망대가 나온다. 태화강의 하구에는 장생포(長生浦)라는 항구가 있다. 인근 수역에서 고래가 잘 잡혀 예로부터 포경업(捕鯨業)의 근거지였던 곳이다. 장생포항을 품고 있는 태화강이 잘 조망된다고 해서 고래전망대라는 이름을 붙여놓았나 보다. 아무튼 울산의 또 다른 명물인 십리대숲 등 태화강대공원의 전경이 일목요연하게 펼쳐지는 빼어난 조망처이다. 참고로 태화강은 한때 수질 나쁜 강의 대명사로 불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되살아난 하천의 대명사로 바뀌었다. 민관(民官)이 힘을 합쳐 환경보호에 심혈을 기울인 결과이다.




또 다시 길을 나선다. 이번엔 대부분이 내리막길이다. 그렇게 잠시 내려서자 삼호산 삼거리‘(이정표 : 옥동마을/ 신성중학교)가 나타난다. 해파랑길은 이곳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신성중학교 방향에 해파랑길 표식이 붙어있으니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길가에 등산로 내 화장실 이용에 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이 등산로에는 화장실이 설치되어 있지 않으니 가까운 화장실을 이용한 후에 길을 나서란다. 그러고 보니 이곳까지 오는 동안 화장실을 한 번도 만나지 못했었다. 도심공원으로 꾸며져 있는데도 말이다. 해파랑길을 걷는 사람들이 꼭 알아두어야 할 내용이 아닌가 싶다.



삼호산삼거리 갈림길에서 좌측 남산루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급하게 아래로 떨어졌다가 신성중학교의 축대를 오른편에 끼고 언덕으로 올라서면 농구대가 두어 개 설치되어 있는 운동시설을 만난다.



태화강 전망대는 운동시설의 옆에 만들어져있다. 태화강이 잘 조망된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는지도 모르겠다. 이곳에서 울산의 랜드마크(landmark)라 할 수 있는 태화강대공원을 속속들이 들여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곳과 같은 이름을 쓰고 있는 또 다른 전망대가 발아래에 보이는가 하면, 강 건너에는 그 유명한 십리대숲과 샛노란 꽃밭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울창한 저 대밭이 지금처럼 보존된 데에는 전설처럼 떠도는 얘기가 뒤따른다. 1987태화강 하천정비 기본계획이 수립되면서 죽림(竹林)은 사라질 위기에 처한다. 이때 환경단체와 시민들이 온몸을 던져 막았다고 한다. 그렇게 살아난 대숲이지만 1994년 태화들녘이 주거지역으로 변경되면서 또다시 개발과 보전이란 기로에 선다. 이때도 울산 시민들이 발을 벗고 나섰다. 이들은 '태화들 한 평 사기 운동'을 통해 태화강 자연을 지켰다고 한다. 한국 환경운동사에서 기념비적인 사건이라고 보면 되겠다.




이제는 태화강변으로 내려설 일만 남았다. 가파른 침목계단을 잠시 내려서자 태화강 가는 길이라는 이름표를 단 사거리(이정표 : 태화강 둔치/ 남산루/ 태화강전망대)가 나온다. 해파랑길은 이곳에서 왼편(태화강 둔치)으로 방향을 틀면서 솔마루길과 헤어진다. 산행을 하느라 고생한 발을 씻을 있도록 만들어 놓은 우물을 잠시 후에 만났다면 길을 제대로 잡은 셈이다. ! 알아두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제대로 된 솔마루길은 조금 전에 지나왔던 태화강 전망대에서 오른편으로 갈려나간 다는 것을 말이다. 농구대가 있는 운동시설을 나서자마자 오른쪽 자연 부락으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자연 마을을 지나면 아파트 앞 차도를 만나게 되고, 산쪽으로 올라붙으면 4구간이 시작된다.



트레킹의 날머리는 태화강전망대 앞 주차장

우물을 지났다싶으면 남산사 옆에 만들어놓은 주차장이다. 개의치 말고 차도를 건너도록 한다. 이어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잠시 올라가면 태화강전망대 앞에 만들어놓은 주차장이 나오면서 해파랑길 6코스는 끝을 맺는다. 오늘 트레킹은 3시간 30분이 걸렸다. 6구간이 시작되는 덕하역에서 시작되는 전체 구간은 4시간 30분 정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시간이 조금 남아 주차장 아래에 조성되어 있는 코스모스 꽃밭으로 내려가 봤다. 가을의 전령이라는 코스모스를 만났는데 어떻게 바라보기만 할 수 있겠는가. 코스모스의 꽃말은 소녀의 순정이다. 코스모스가 가을바람에 한들거리는 모습이 소녀가 가을바람에 수줍음을 타는 것처럼 보인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꽃밭으로 들어간 집사람에게 수줍은 표정을 지어보라고 했으나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 모양이다. 하긴 60대 중반의 나이에 수줍음을 탄다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아무튼 코스모스는 신이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제일 처음 만든 꽃이라는 전설도 갖고 있다. 처음 만들다보니 모양과 색을 요리조리 다르게 만들어보다가 지금의 하늘하늘하고 여러 가지 색을 가진 코스모스가 만들어졌단다.


해파랑 10코스

 

여행일 : ‘18. 11. 17()

소재지 : 울산시 북구와 경주시 양남면 일원

산행코스 : 정자항(2.8km)강동 화암주상절리(3.9km)관성해변(6.3km)음천항(1.1km)나아해변(소요시간 : 13.9, 3시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울산의 정자항을 출발하여 강동해변과 신명해변, 경주 관성해수욕장 그리고 수렴리해변을 거쳐 나아해변까지 이르는 10코스는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몽돌해변과 강동화암, 읍천해안 주상절리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해안 경관이 절정을 이루는 코스이다. 특히 양남면 하서항부터 읍천항 벽화마을까지 1.7km가량 조성된 양남 주상절리 파도소리길은 일반 주상절리와는 확연히 다른 누워있는 주상절리, 부채꼴 주상절리 등 독특한 자연자원을 만날 수 있어 그 가치가 뚜렷하며 자연이 수놓은 장관을 감상할 수 있는 최고의 여정으로 손색이 없다. 또한 파도소리길을 벗어나자마자 등장하는 읍천항은 값싸고 싱싱한 생선회를 먹기에 딱 좋다. 활어직판장에서 참가자미회를 떠 바닷가에서 먹는 맛은 일품이라 하겠다.


 

트레킹 들머리는 정자항(울산시 북구 정자동)

동해고속도로(포항-부산) 동경주 IC에서 내려와 929번 지방도를 이용해 문무대왕릉 방향으로 달리다가 대본삼거리(경주시 감포읍 대본리)에서 31번 국도를 타고 울산방면으로 내려오면 산하교차로(울산 북구 산하동)가 나온다. 이곳에서 동해안 방향으로 빠져나와 바닷가까지 온 다음 우회전하여 내려오면 정자교()‘가 나온다. 다리를 건너기 바로 직전에 정자항으로 들어가는 진입로가 왼편으로 열린다. 대문을 겸한 조형물이 커다랗게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조형물 바로 뒤에 해파랑길 안내도스탬프 보관함이 설치되어 있다.




정자항과의 첫 만남은 고래로부터 시작된다. 방파제의 양 끝에 세워진 흰색과 빨강색의 두 등대가 모두 귀신고래형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곳 정자항이 고래와 인연이 깊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포석이 아닐까 싶다. ! 그러고 보니 이곳 정자항에서 동쪽으로 1020떨어진 바다가 고래 구경의 포인트라고 했다. 날씨가 궂은 날에는 10003000마리의 참돌고래 떼가 수면 위로 튀어 올라 군무를 펼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억세게 운이 좋은 날에는 동해안을 따라 회유하는 향고래, 흑범고래, 밍크고래, 큰머리돌고래, 큰돌고래, 범고래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 덕분인지 가끔가다 그물에 걸려 죽은 돌고래가 항구로 실려 오는 경우도 있단다. 이왕에 거론했으니 한걸음 더 나가 보자. 지금부터 100년 전인 1912. 미국의 탐험가이자 고고학자인 로이 채프먼 앤드루스(18841960)’악마 물고기(Devil's Fish)’를 찾아 일본의 포경선을 타고 물 반 고래 반의 고장인 울산 장생포를 찾았다고 한다. 그리고 한국인들이 귀신고래라고 부르던 회색의 거대한 고래를 운명적으로 만난다. 장생포에서 1년 동안 머물며 귀신고래를 연구한 앤드루스는 귀신이 곡할 정도로 신출귀몰한 이 악마 물고기에게 한국계 귀신고래(Korean Gray Whale)’라는 학명을 부여했다. 훗날 미국 뉴욕박물관장을 역임한 이 고래박사해리슨 포드가 주연한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실제 모델이기도 했다.



정자항으로 들어서니 활어직판장이 길손을 맞는다. 시작부터 횟집을 찾을 수는 없는 일이라서 그냥 지나치는데 건어물을 파는 노점(露店)들이 길게 늘어서있다. 좌판에는 인근에서 많이 잡힌다는 가자미와 오징어가 따스한 가을 햇볕과 바람에 꾸덕꾸덕 마르고 있다. 하지만 이 또한 그냥 지나치기로 한다. 아무튼 정자항은 생각했던 것보다는 큰 규모이다. 하긴 1971년에 이미 '국가 어항'으로 지정되었다니 그럴 만도 하겠다. 이곳 정자항은 원래 참가자미와 문어로 유명했다. 하지만 최근 동해의 수온 변화로 울진과 영덕에서 주로 잡히던 대게가 정자 인근의 바다에서도 대량으로 잡히기 시작했단다. 그래선지 바닷가에 대게 조형물을 커다랗게 만들어 놓았다. 참고로 정자라는 마을 이름은 우리가 흔히 보는 정자(亭子)’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옛날 옛적 이곳에 수십 그루의 느티나무가 있었는데 그 사이에 정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탐방로는 해안도로의 가장자리에다 내놓은 자전거길을 따른다. ‘국토종주 동해안 자전거길이라고 적힌 노면 표시를 따라 조금 걷다 보면 수많은 갈매기가 쉬고 있는 정자해변에 이른다. 정자해변은 바둑알 크기의 자갈돌이 널려 있어 몽돌해변이라 부르는데 일반 백사장과는 또 다른 맛을 선사한다. 거기다 갯바위까지 함께 어우러지며 사시사철 맑은 바다풍경을 선사해준다. ! 깜빡 잊을 뻔했다. 정자항을 빠져나오면 시야가 툭 터지면서 10코스의 대부분 구간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는 것을 말이다. 너무 서두르지 말고 한번쯤 눈에 담고 길을 나서는 게 어떨까 싶다.




산하천()을 건넌 탐방로는 이제 산하동의 해안을 따른다. 오른편은 여전히 몽돌해변이지만 왼편은 신시가지로 개발해가는 도중이어선지 조금은 어수선한 모습이다. 그렇다고 기존의 아름다운 풍광이 어디로 가겠는가. 해양수산부에서 '아름다운 어촌 100'에 아무 이유도 없이 이곳 정자마을을 뽑지는 않았을 것이다. 거기에다 2011년에는 한국관광공사에서 ‘3월의 가볼만한 곳에 이곳을 선정했으니 이들이 증인인 셈이다.



길을 나선지 25분쯤 지나는 곳에서 화암마을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이정표 하나를 만난다. 300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강동화암 주상절리로 가고 싶으면 오른편 길로 들어서란다. 참고로 이정표에 나와 있는 화암(花岩)’이란 마을 이름은 주상절리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주상체의 횡단면이 꽃무늬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탐방로는 아직도 몽돌해변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 바둑알 크기에서 손가락 굵기 만한 다양한 자갈들로 뒤덮인 해안이 계속해서 이어진다는 얘기이다. 몽돌은 자갈이 오랜 세월 파도에 휩쓸려 깎이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저런 몽돌들은 모래와 달리 몸에 달라붙지 않아 쾌적함을 준다고 한다. 피서객이 많이 찾는 이유일 것이다. 참고로 정자해변은 깊은 수심과 높은 파도 때문에 해수욕은 금지된다고 한다. 하지만 몽돌을 밟으며 해변을 거닐거나 물에 발을 담그는 것까지 막지는 않는단다. 아무튼 파도가 치면 밀려왔다가 다시 가라앉는 돌들이 내는 소리로 귀가 즐겁다. 그리고 청량함이 심신으로 전해지면서 새로운 활력이 되살아난다.



그렇게 5분쯤 더 걷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자그만 동산 하나가 나타난다. 그 앞에 정자(亭子)를 세우고 강동화암 주상절리(江東花岩 柱狀節理 :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42)’에 대해 적어놓은 안내판을 설치했다. 동해안에 나타난 주상절리 가운데 용암 주상절리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학술적 가치가 높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각도로 형성되어 있어 눈요깃감으로도 훌륭하다는 내용을 적어 놓았다.



정자의 뒤로 넘어가자 주상절리(柱狀節理)가 눈앞에 펼쳐진다. 주상절리는 단면이 육각형 내지 삼각형으로 된 긴 기둥 모양의 바위가 겹쳐져 있는 특이 지질 가운데 하나이다. 이 곳 화암마을 해변 일대에 있는 주상절리는 신생대 제3(2,000만 년 전)에 분출한 현무암 용암(Lava)이 냉각하면서 열수축 작용으로 생성된 냉각절리라고 한다. 그 생김새는 수평 또는 수직 방향으로 세워진 다량의 목재더미 모양을 하고 있다.



도로로 되돌아와 50m쯤 더 걷자 또 다른 안내판이 나타난다. 아까와 같은 내용이 적혀있는데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만은 아까와 사뭇 다르다. 기둥 모양의 절리(節理: 암석의 물리적 연속성을 단절하는 분할선이나 균열)가 아까와는 달리 또렷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육각형 또는 삼각형 돌기둥이 수평으로 쌓여 있는데, 그 형상이 나무를 쌓은 듯 가지런히 누워있는 모습과 흡사해서 신기함마저 든다. 대부분의 주상절리가 수직 주상절리인데, 이곳의 주상절리는 누워 있는 형태인 와상 주상절리라고 보면 되겠다. 저 돌기둥의 지름은 대개 50cm, 길이는 7m에서 수십m에 이른다고 한다.




또 다시 길을 나선다. 신명교()를 건너자 이번에는 신명해안이다. 이곳도 역시 모래 대신에 조그마한 몽돌들로 이루어져 있다. 조금 전에 지나온 정자해안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얘기이다. 아니 확실하게 달라진 점도 있다. 동해안 특유의 코발트빛이 더욱 강해진 것이다. 거기다 그런 멋진 풍광에 매력을 느끼기라도 했는지 엄청나게 많은 갈매기떼가 해변을 온통 뒤덮어버렸다. 겨울 한낮의 따사로운 햇볕을 쬐는 갈매기들로 인해 휑한 겨울 해변이 조금은 덜 쓸쓸해 보인다. 갈매기 떼의 비상에 파도가 몽돌을 휩쓸고 내려갈 때 들려주는 짜르륵 짜르륵소리가 더해지면 겨울 바다를 찾는 사람들의 마음이 한결 따뜻해진다.



몽돌해안이 끝나자 한적하기 짝이 없는 작은 포구가 나온다. 어촌정주어항인 신명항일 것이다. 포구의 옆에는 이 마을의 일주문격인 선돌(立石)이 우뚝 솟아올랐다. 아니 그냥 바위가 아니라 왜소하긴 하지만 바위봉이라고 하는 게 옳을 수도 있겠다. 아무튼 기묘하게 생긴 바위꼭대기에는 소나무 몇 그루가 자라고 있다. 바위를 뚫고 뿌리를 내린 해송(海松)의 끈질긴 생명력이 참으로 경이롭다. 주상절리에서 25, 트레킹을 시작한지는 55분이 지났다.



신명항을 지나자 바다에 들어앉은 바위들의 숫자가 부쩍 늘어난다. 그 생김새 하나하나가 범상치 않은 게 하나도 없는 바위들이다. 덕분에 바다는 한 굽이를 돌 때마다 품고 있는 또 다른 속살들을 아낌없이 보여준다. 그리고 그 끄트머리에서 땅이 경계를 이룬다는 지경마을(地境里)‘을 만난다. 행정구역이 울산시(북구)와 경상북도(경주시)가 경계를 이룬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단다. 마을 앞에는 작은 배들이 드나들 수 있도록 항구가 만들어져 있다. 아무튼 경주 지역에 들어서자 길 찾기가 한결 수월해진다. 종합안내판과 이정표는 물론이고 간이안내체계(나무패널, 고리형패널, 리본, 바닥페인팅)까지 잘 구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편의점과 화장실 등 편의시설들도 심심찮게 만난다.




바위가 널린 천혜의 바닷가를 그냥 내버려둘 리가 없다. 바닷가에 전복양식이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가 싶더니 물질을 준비하고 있는 해녀들도 보인다.



한참을 앞서가던 집사람이 되돌아오는 게 보인다. 항구의 끄트머리에서 길이 막혀있다는 것이다. 맞다. 해파랑길은 항구가 끝나기 전에 왼편으로 열린다. 갑자기 길이 나뉘어 당황스러울 수도 있겠으나 들머리에 이정표(관성해수욕장1.4/ 강동화암 주상절리2.6)를 세워놓았을 뿐만 아니라 전신주 등에 해파랑길의 진행방향 표식이 너절하다 싶을 정도로 잘 붙여져 있으니 조금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계속해서 함께하고 있는 자전거길을 따른다고 생각하면 더 쉬울 수도 있겠다. 길바닥에 자전거표시가 확실하게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골목으로 들어서자 계단이 나온다. 오른편에는 자전거를 끌고 올라갈 수 있도록 좁은 통로도 만들어 두었다. 조금 전에 보았던 이정표의 상단에 적혀있던 매우 급한 오르막이니 걸어가라는 안내문구가 이제야 이해가 간다. 20%의 경사로가 60m 정도 이어진단다.



계단을 올라서면 국도 31호선을 만난다. 도로변에 5전방에 주상절리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안내판이 우리가 길을 제대로 들어왔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 국도로 올라왔으니 해파랑길 찾기에 대해 거론해 보자. 길을 찾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전신주 등 주변의 시설물들에 해파랑길의 방향표시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면 이것 하나만 기억해 두면 될 일이다. 국도를 따라 걷다가도 해변으로 길이 연결될 경우에는 서슴없이 내려가라는 얘기이다. 틀림없이 해파랑길 표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잠시 후 탐방로는 다시 국도와 헤어져 오른편 수렴리로 들어가는 이차선 도로를 따른다. 이곳에 경상북도 경주시 양남면이라고 적힌 커다란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그 앞에 조성된 작은 공원에는 배짱이 조형물을 배치했다. 암수 한 쌍인 모양인데 한 마리는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다른 한 마리는 피리를 불고 있다.



도로의 가장자리를 따라 내놓은 자전거길을 걸으며 바라보는 바닷가 풍경이 참 아름답다.



그렇게 조금 더 걷자 이정표(양남 주상절리 파도소리길4.7/ 정자항6.4) 하나가 나타난다. 이정표가 지시하는 대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트니 바닷가로 이어진다. 이곳에서 잠시 해파랑길 표식을 놓치고 허둥대다가 바닷가를 따라 잠시 걸으니 관성해변이다. 솔숲과 모래밭, 자갈이 함께 공존하는 해변으로 갯바위가 어우러진 바다 풍경이 아름다워 사람들의 발걸음을 더디게 만드는 곳이란다. 지경리에서 이곳까지 오는 데는 20분이 걸렸다.



카메라에 잡히지는 않았지만 관리센터 옆에는 첨성대(瞻星臺) 모양의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관성(觀星)이라는 마을 이름에 얽힌 사연을 전해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신라 시대에 별을 관측해 시간을 측정하는 첨성대 같은 시설이 있었던 마을이라는 것이다. 거기다 해변에 솔밭이 있다고 해서 솔밭이라는 낱말을 하나 더 붙여 관성솔밭해변이 되었다.



관성솔밭해변은 경주시 관내 해변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다고 한다. 거기다 울창한 솔밭까지 끼고 있으니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을 법도 하지만 위치가 울산과 경주 경계에 놓여있는 탓에 접근성과 주목도가 모두 떨어진단다. 휴가철에도 사람이 덜 찾는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겨울철에는 그 반대인 모양이다.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강태공들이 그 넓은 모래사장을 꽉 매워버렸다. 텐트까지 쳐져 있는 걸로 보아 몇몇은 날까지 새웠던 모양이다.



원래의 해파랑길은 다시 31번 국도로 올라서야 했지만 우린 그냥 해안가를 거닐어 보기로 했다. 강태공들의 낚시 솜씨도 엿볼 겸해서다. 그러다가 다시 해안가로 오르니 솔밭 사이로 난 탐방로가 나타난다. 하나같이 오래 묵어 보이지 않는 소나무들이다. 그러고 보니 금년 초(5)엔가 이곳에 산책로를 조성한다는 기사를 본 것도 같다. 당시 기사는 이 해송(海松)들이 10년 전에 심은 것이라고 했다.



솔밭길이 끝나자 수렴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에는 마을 사람들을 지켜준다는 수호천사 수렴할매바우로 유명하다. 할매바우에 소원을 빌면 다 이루어진다는 전설까지 있는데 우리 부부는 그냥 지나쳐버리고 말았다. 소문난 맛()집을 찾느라 정신이 없는 친구와 보조를 맞추려다보니 할매바우가 있다는 것조차 깜빡해버린 것이다.



수렴리를 지났다싶으면 전적비(戰蹟碑)’가 길손을 맞는다. 1983년 이곳으로 침투한 무장공비 5명을 사살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세운 것이란다.



또 다시 해안도로를 따른다. 이곳도 역시 모래 대신 크고 작은 몽돌이 해변을 이루고 있다. 아기 손처럼 작은 몽돌부터 어른 몸보다 큰 바위에 이르기까지 크기가 다양한데, 특히 겨울철 파도가 밀려왔다 내려갈 때 몽돌들을 스치며 내는 소리가 매력인 해변이다.



그렇게 잠시 걷자 하서해안에 이른다. 몽돌해변으로 여름에 해수욕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일 뿐만 아니라, 해수욕장 뒤쪽으로 소나무 숲이 우거져 있어 시원한 그늘 아래에서 바닷바람을 만끽할 수도 있다. 과연 아는 사람만 아는 숨겨진 고즈넉한 바닷가라는 입소문에 어울리는 곳이라 할 수 있겠다. 아무튼 2005년에 조성되었다는 해안공원에는 ‘6·25참전 유공자 명예 선양비가 세워져 있다. 이 지역 출신으로 6·25전쟁에 참전한 유공자를 기리기 위해 2005년에 세웠는데, 가운데 자연석으로 된 비석을 세우고 양쪽에 설치한 까만 비석에는 500여명의 참전용사와 월남전에 참가한 파월장병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그밖에도 전망대와 파고라. 캠핑장, 평상, 식수대 등 각종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어 여름철 피서지로는 이만한 곳도 드물겠다.



청동 인어상도 보인다. 월성원자력발전소의 후원으로 양남초등학교 김진석 선생 외 2명이 제작했단다.



해수욕장이 끝나는 곳에 하서(下西) 마을이 있다. 탐방로는 마을 앞 도로의 가장자리에 만들어놓은 자전거도로를 따른다. 자전거와 사람이 함께 쓰니 주의가 필요한데,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자동차라 하겠다. 자전거도로를 온통 점령해버렸기 때문이다. 자동차를 피해 차도로 들어설 수밖에 없는데 꽤나 많은 차량들이 왕복 2차선 도로를 씽씽 달리고 있어서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참고로 하서마을은 서촌(瑞村) 가운데 아래쪽에 위치한 마을이라고 해서 원래는 하서(下瑞)로 불렸다고 한다. 신라6부시대 금산가리촌에 속했던 양남일대를 서촌(瑞村)으로 불렀는데, 지금도 서동리(瑞洞里)’로 불리는 마을이 있고 이 일대(상계, 수렴 등)를 상서(上瑞)라고도 한다. 그리고 지금의 환서리(環西里)’ 일대(석읍, 석촌)를 중서(中瑞)라고 하며, 하서는 그 아래에 위치했으므로 하서(下瑞)’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금은 (西)’를 쓰고 있다. 이것은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마을 이름을 새로 지으면서 변한 것이란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다는 설도 있으니 하루빨리 바로잡아야할 일이다.



하서마을을 관통하는 하서천()’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하서교()’이다. 해파랑길 지도에는 이 다리를 건너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 '물빛사랑교'라는 보행자 전용의 다리를 새로 놓았기 때문이다. 생김새만 놓고 보아도 예쁜데 거리까지 400m를 단축시켰으니 고마운 일이라 하겠다. 다리의 중간에 만들어 놓은 돔 모양의 쉼터에는 물빛 사랑교라는 이름이 붙게 된 연유가 적혀있다. 예로부터 인근 마을 처녀 총각들이 달빛 어린 하서천 물빛을 바라보며 물속에 잠겨 있는 수많은 별을 헤아리며 사랑을 속삭였다는 데서 착안했다고 한다.



탐방로는 다리를 건너서도 해안가를 따른다. 아직까지도 지주목(支柱木)에 의지해서 서있을 정도로 이식한지 얼마 되지 않은 소나들이 가로수 삼아 길게 늘어서있어 조금은 삭막한 풍경이다. 아무튼 아직도 우린 하서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1에서 ‘4로 단위부락만 바뀌었을 따름이다. 오른편에 펼쳐지는 해안의 이름 또한 하서일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하서4리에는 주상절리란 이름의 대형 주차장이 조성되어 있다. ‘파도소리 주상절리길안내도까지 세워놓을 걸 보면 이곳에 차를 세워놓고 주상절리를 구경하라는 모양이다. 그러나 탐방로는 하서리를 아직까지 벗어나지 못하고 있나 보다. 하서항(율로진리항)의 오른편으로 길게 늘어선 방파제 끝에 만들어놓은 사랑의 열쇠가 눈에 들어오는 걸 보면 말이다. 방파제에는 사랑이 이루어지는 바다라는 뜻의 사랑를 테마(Thema)로 젊은 연인들의 프로포즈 장소와 포토존까지 만들어 놓았다. 참고로 이곳 하서항(율포항)은 신라시대 때의 재상인 박재상이 내물왕의 왕자인 미사흔을 구하기 위해 왜국으로 출발했던 장소이다. 사랑의 자물쇠는 부부의 애틋한 사랑과 재회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세웠다고 한다. 억겁의 세월이 지나서도 변하지 않고 있는 박재상과 그의 아내를 모티브로 삼은 모양이다. 하서해안공원에서 이곳 하서항까지는 15분이 걸렸다.



방파제를 지나자마자 바다에 널려있는 먹빛의 바위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그 하나하나가 주상절리가 아니겠는가. 아까 주차장에서 보았던 주상절리 파도소리길에 들어선 것이다. 해파랑길의 공식 구간에 포함된 양남면 하서항에서 읍천항까지의 1.7해안길이다. 이 구간은 2009년까지만 해도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해안작전경계지역이었다고 한다. 무모한 낚시꾼들이 몰래몰래 숨어들어 낚시를 하다 발각돼 가끔 혼쭐이나던 장소였다는 것이다. 군부대가 철수한 후 눈 밝은 사진가들이 담은 사진과 입소문을 통해 주상절리 실체가 일반인들에게까지도 알려졌고, 2012년에는 경주시에서 '파도소리길'을 정식 개통했단다. 기울어진 주상절리와 누워 있는 주상절리, 위로 솟은 주상절리, 부채꼴 주상절리 등 다양한 주상절리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으니 나라에어서도 가만히 있었을 리가 없다. 2012년에는 천연기념물(536)로 지정해 놓았다.



주상절리 옆으로 나있는 탐방로는 데크(deck) 길로 조성해 걷기에 좋도록 했다. 흙길과 데크 길을 번갈아 걸으면서 갖가지 형태의 자연 예술 조각품들을 감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벤치가 곳곳에 놓여있어 사색의 공간으로도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아무튼 파도소리가 온몸에 가득 차오를 즈음이면 첫 번째 전망데크를 만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누워있는 주상절리(臥狀 柱狀節理, columnar joint)’와의 첫 대면이 시작된다. 길쭉한 나무들을 차곡차곡 쌓아둔 형상인데, 누워 있는 주상절리의 경우 땅이 벌어진 사이로 용암이 올라오면서 차가운 부분에서 갈라져 식어 들어가 옆으로 누운 것이란다.



운치 있는 흙길을 따라 조금 더 걷자 이번에는 위로 솟는 주상절리가 나타난다. 조그마한 네모난 나무기둥을 전부 세워둔 모양을 하고 있다. 아니 거대한 숯을 한 묶음씩 엮은 모양으로 보이기도 한다.



위로 솟는 주상절리를 지나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주상절리 전망대가 나타난다. 타워로 가는 길에는 왜소한 소나무들을 머리 위에 얹고 있는 기암(奇岩)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해안가 커다란 바위와 그 위에 뿌리를 내린 오래 묵은 소나무.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관계지만 밀어내지 않고 서로의 몸을 잘 안아주고 있다. 이 부근은 KBS 1TV 대하드라마 대왕의 꿈의 촬영지이기도 하단다. 그만큼 경관이 빼어나다는 증거일 것이다.



경주 해양관광의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주상절리 전망대201710월에 문을 열었다. 높이 35m4층 전망타워를 비롯해 관람객 편의시설을 갖춘 조망공원으로 꾸며졌다. 연중 무휴로 운영하고 있는 타워에 오르면 자연이 연출한 조각품이라 일컬어지는 천혜의 비경을 자랑하는 주상절리를 한눈에 굽어 볼 수 있다. 특히 이곳 양남주상절리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부채꼴 주상절리가 발아래에 펼쳐지는데 가히 장관이라 하겠다. 하지만 사진을 찍고 싶다면 타워를 내려갈 것을 권하고 싶다. 타워는 유리로 막혀있기 때문이다.



전망대에는 작품사진들이 전시되고 있다. 지난 달엔가 경주바다 100리길의 아름다운 해양 자연환경과 해안에 숨어있는 다양한 이야기를 주제로 한 경주해요!, 전국 사진공모전이 열렸다고 하더니 입상작들을 전시하고 있나 보다.



부채꼴 주상절리는 이곳 양남 주상절리의 꽃이라 할 수 있다. 길이 10가 넘는 주상절리가 부채꼴 모양으로 펼쳐져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바다 위에 곱게 핀 해국 같다고 하여 동해의 꽃이라고도 부른다. 국내에서는 최초로 발견되었고, 세계적으로도 희귀하단다. 참고로 경사진 주상절리는 경사면을 따라 내려가다 굳어진 것이지만 부채꼴 주상절리는 어떻게 형성됐는지 아직 규명되지 않고 있단다. 두 가지 설이 있는데 첫 번째는 마그마가 올라오던 분화구였을 것이라는 설이다. 지하에서 용암이 올라오다 식으면서 방사성 모양으로 굳어졌다는 것이다. 두 번째 가설은 둥근 연못으로 용암이 흘러들어 식으면서 방사성 모양이 됐을 것이라는 설이다.



부채꼴 주상절리를 지나니 다른 모양의 주상절리가 또 다시 나타난다. 정사각형 나무토막이 서로 엉켜 있는 모습의 주상절리도 보인다. 그런 풍광들을 눈에 담으라는 배려인지 전망대를 하나 더 만들어 놓았다.



잠시 후 출렁다리가 나온다. 지난 2012년에 만든 폭 1.5m, 길이 32m의 현수식 출렁다리인데 이 다리를 빠져나오면 주상절리 관광은 끝난다. 그렇다고 주위 경관까지 끝났다는 얘기는 아니다. 진행방향 저만큼에 읍천항이 나타나면서 새로운 경관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읍천항은 조그마한 어촌마을 포구이다. 동해 근해에서 가장 높은 해수온을 보이는 읍천항은 사시사철 감성돔과 돌돔, 벵에돔 낚시가 가능하다고 한다. 파도소리길이 있기 전부터 이미 낚시꾼에게 인기를 끌던 곳이란다. 2010년부터는 인근 월성원자력본부가 국립현대미술관과 공동으로 '아름다운 지역 만들기' 사업을 벌였다. 회색빛 콘크리트 담장이 갤러리로 바뀌었으니 '읍천항 갤러리 프로젝트이다. 하지만 우린 그런 풍광을 눈에 담지 못했다. 방파제에 쭈그리고 앉아 어촌계 활어직판장에서 구입한 참가자미회를 먹느라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릴만한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노동을 내려놓고 물결에 잠시 몸을 맡긴 채 햇빛 바라기를 하고 있는 작은 어선 옆에서 생선회를 안주삼아 마시는 술은 그야말로 행복 그 자체였다. 오랜 친구가 있고 술이 있는데 이보다 더한 행복이 또 어디 있겠는가. 참고로 하서항에서 이곳 읍천항까지는 35분이 걸렸다. 1.7쯤 되는 거리임을 감안할 때 꽤 더디게 걸은 셈이다. 다른 한편으론 그만큼 볼거리가 많았다는 얘기도 될 것이고 말이다.



다시 길을 나선다. 바닷가를 끼고 나있는 탐방로는 아예 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100m 남짓한 해수트레킹로드가 만들어져 있는가 하면 산책로와 광장, 파고라가 곳곳에 만들어져 있다. 지역농산물 야외 특판장도 보인다. 작년엔가 테마가 있는 특성화거리를 조성한다는 기사를 본 것 같은데 사업이 마무리 되었나보다. 당시 기사에서는 이 길을 탈해왕 길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신라의 철기문화를 이끈 석탈해왕을 테마로 한다는 것이다. 그래선지 트레킹 종료지점 근처의 소공원에는 석탈해와 관련된 조형물들을 설치해 놓았다. 참고로 나아리(羅兒里)는 삼국유사에 신라 석탈해왕의 탄생설화가 얽힌 아진포(阿珍浦)’로 기록된 유서 깊은 마을이다. 1975년부터 시작된 월성원자력발전소 건설 사업으로 인해 삶의 터전을 대부분 원전부지에 내어주고 지금은 월성원전 남쪽 수아(수남)마을만이 남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아직도 석탈해왕의 유허비가 이 마을에 서 있고, 석탈해왕의 탄생설화와 관련한 수아(水兒, 아기 석탈해를 거두어들인 곳)’, ‘장아(長兒, 석탈해가 자랐다는 곳)’, ‘내아(乃兒)’, ‘나아(羅兒)’, ‘아진포(阿珍浦)’ 등의 지명들이 남아 옛이야기들을 전해준다. 신라 6부시대 금산가리촌에 속했던 양남일대를 서촌(瑞村)으로 불렀고 이 마을이 속한 아진포는 아서(阿瑞, 兒瑞)’라고 불렀다는 것도 석탈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트레킹의 날머리는 나아해변(경주시 양남면 羅兒里)

그렇게 조금 더 걸으면 몽돌과 파도의 합주가 매력이라는 나아해변이 나오면서 해파랑길 10코스가 끝을 맺는다. 조금씩 가까워지던 월성원자력발전의 건물들이 이젠 코앞으로 다가와 있다. 저 발전소로 인해 이후의 해파랑길은 뚝 끊겨버린다. 해파랑길이 다시 시작되는 봉길리 해안까지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된다니 기억해 두자. 아무튼 10코스를 걷는 데는 4시간이 걸렸다. 지금이 제철이라는 참가지미회를 먹느라 1시간 조금 못되게 쉬었으니 실제로 걸은 시간은 3시간 10분인 셈이다. 핸드폰에 깔아놓은 앱(application)에 찍힌 거리가 13.9이니 꽤나 부지런히 걸었다고 봐야하겠다.


해파랑길 8코스

 

여행일 : ‘18. 9. 15()

소재지 : 울산시 동구 및 북구 일원

산행코스 : 염포삼거리(4.0km)울산대교전망대(3.5km)방어진항(2.9km)대왕암공원(2.1km)일산해변(거리 및 소요시간 : 12.5(실제는 15.5)4시간 10)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1962년 울산이 특정 공업지구로 지정이 되자 이 일대는 그야말로 상전벽해로 변한다. ()에서 시()로 승격이 되고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S-OIL, LG화학 등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이 들어서면서 조그만 마을이 국내 대표 중화학 도시로 변한 것이다. 하지만 막상 울산에 들어서면 그런 공업도시의 풍광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 산업단지가 동해바다 쪽에 숨어있기 때문이다. 오늘 걷게 되는 해파랑길 8코스는 이런 산업도시 울산의 진면목을 여과 없이 볼 수 있는 구간이다. 솔마루길과 더불어 울산 시민이 가장 사랑하는 염포산 숲길을 지나 일산해변까지 이어지는데, 염포산 숲길을 걷는 도중에 위에서 말한 울산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는가 하면, 예로부터 피난항구 역할을 했던 방어진항과 해식 절벽의 전형적인 모습을 간직한 대왕암공원 등 뛰어난 경관들도 여럿 만나게 된다. 특히 걷기가 마무리되는 일산해변은 다양한 먹거리와 숙소가 있다. 8코스의 종점을 일산해변으로 잡은 이유일 것이다.


 

들머리는 염포삼거리 근처 SK주유소(울산시 북구 염포동 990-5)

울산고속도로 울산 IC에서 내려와 북부순환도로를 타고 삼호교를 건넌 다음, 다운사거리(중구 다운동)에서 우회전 태화로를 따른다. 이 길은 태화강변을 따라 내려가면서 강북로아산로로 연이어 이름이 바뀐다. 현대자동차 선적장(船積場)을 지나자마자 성내삼거리(북구 염포동)에서 좌회전하여 방어진순환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잠시 후 염포삼거리(북구 염포동)가 나온다. 해파랑길 8코스의 들머리인 SK주유소는 이곳 염포삼거리에서 100m쯤 더 들어가야 나온다.




주유소 옆 골목길로 들어서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들머리부터 1km 정도는 염포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다. 옛날 신작로가 뚫리기 전 방어진에 살던 주민들이 고단한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읍내를 오가던 고갯길이라고 보면 되겠다. 15분쯤 걸었을까 약수터(이정표 : 염포산 정상 0.3/ 거북이주유소 0,7)가 나온다. 삼거리라서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정상은 왼편으로 나있으나 해파랑길은 오른편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린 서슴없이 정상으로 향한다. 모처럼 나선 길이니 염포산 정상을 빼먹을 수야 없지 않겠는가. 거기다 염포산을 지나자마자 두 길은 또 다시 합쳐진다는 것을 미리부터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조금 더 가팔라진 오르막길을 따라 8분쯤 더 걷자 염포산 정상이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23분만이다. 정상은 아예 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운동기구와 벤치를 놓았는가 하면 조망 좋은 곳에는 오승정(五勝亭)이라는 정자도 지어놓았다. 산과 바다, , 고을, 산업단지가 한눈에 쏙 들어오는 조망과 동구의 발전과 번영을 기원한다는 뜻을 담은 이름이라고 한다. 아무튼 정상은 운동과 조망, 그리고 휴식까지 겸할 수 있는 복합공간이라 하겠다. 염포산은 신작로가 뚫리면서 방어진 사람들의 삶에서 멀어지게 된다. 그러다가 90년대 이후 사람들이 다시 찾게 되면서 각종 시설물들이 하나 둘씩 늘어난다. 그렇게 염포산은 삶의 무게를 덜어내기 위한 휴식의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계속해서 트레킹을 이어간다. 이정표(화정삼거리2.8/ 한마음 체육공원1.1/ 남목3.1)가 가리키고 있는 화정삼거리 방향이다. 정상을 지나면서 탐방로는 넓어진다. 포장도로와 비포장도로가 번갈아 나오는데 차량 두 대가 서슴없이 비켜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넓다. 이런 이점을 지자체에서 놓쳤을 리가 없다. ’산악자전거 코스로 조성했음은 물론이고 매년 전국 산악자전거대회까지 열고 있단다.



탐방로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갈림길을 만든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한 곳도 빠짐없이 이정표를 세워놓았기 때문이다. 해파랑길의 방향표시를 그려 넣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이 표시를 따라 진행한다면 길을 잃는 등의 불상사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염포산 일대의 지도를 그려 넣은 안내판도 보인다. 탐방로는 주황색의 길을 따라 문현삼거리까지 이어진다. 가는 길에 천내봉수를 보고 싶다면 잠시 해파랑길을 벗어나면 된다.



염포산 정상에서 15분쯤 내려왔을까 오른편으로 제법 또렷하게 나있는 오솔길 하나가 보인다. 이정표(염포산 정상 1)에는 방향표시가 보이지 않지만 일단은 들어서고 본다. 눈에 담을만한 뭔가가 있을 것 같아서이다. 그 결과는 훌륭했다. 50m 남짓 들어가는 곳에 전망데크가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울산공단과 울산대교가 한눈에 들어오는 멋진 전망대이다. 잠시 후 그런 갈림길이 또 다시 나타나니 이 또한 놓치지 말 일이다. 거의 같은 풍경이 나타나지만 아까보다 훨씬 더 시야가 넓어진다.






잠시 후 탐방객들은 '울산대교 전망대'를 마주한다. 20155, 울산대교의 개통에 맞추어 문을 연 울산대교 전망대는 울산대교와 울산 산업단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곳이다. 특히 여기서 바라보는 울산대교와 산업 단지 야경은 백미(白眉)로 세간의 입소문을 탔다. 하지만 전망대 개장 후 무려 1년 동안을 야간 개장 없이 오후 6시까지만 운영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20166월부터 야간 개장을 하면서 조금씩 자리를 잡기 시작, 지금은 울산을 찾은 사람라면 한 번쯤은 꼭 들르는 장소가 되었다고 한다.



해발 140m의 언덕에 지어진 4(63m) 높이의 타워(tower), 옥외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야경(夜景)울산 12가운데서도 으뜸이라고 한다. 이를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이 벽에다 울산 12의 사진들을 그려 넣었다. 전망대에서 오르면 '골리앗 크레인'으로 상징되는 조선소 풍경과 함께 2015년에 개통된 울산대교(蔚山大橋)‘가 한눈에 들어온다. 염포산을 울산 시민들에게 제대로 알려준 계기가 된 시설물이다. 울산대교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전망대가 바로 염포산에 있기 때문이다. 전망대에 올라온 시민들은 모두 '염포산'에 오른 셈이 되니, 염포산 안 가본 울산 시민이 어디 있겠는가. 참고로 울산 남구와 동구를 잇는 울산대교는 물류 수송비용 경감이라는 경제적 측면이 강하다. 다른 한편으론 울산의 새로운 '랜드마크'라고 할 수도 있겠다. 국내의 단경간 현수교 가운데 가장 긴 다리이기 때문이다.



계단을 이용해 3층으로 내려오니 이곳도 역시 전망대로 꾸며놓았다. 4층은 옥외인데 반해 이곳은 옥내인 것만 다를 뿐이다. 벽에는 사진으로 담은 울산시와 동구의 발전사를 그려 넣었다. 창가에는 조망도까지 세워두었다. 실경과 비교해가면서 그 경관이 품고 있는 역사까지 되새겨 보라는 모양이다.



전망대에서 내려와 또 다시 트레킹을 이어간다. 여기서부터 방어진까지는 내리막길의 연속이다. 하긴 염포산 정상에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에도 오르막길은 없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17~8분 정도를 걷자 방어진체육공원이 보이고, 곧이어 천내봉수대(川內烽燧臺)‘의 들머리임을 알리는 대문이 탐방로의 오른편에 만들어져 있다. 울산만의 관문을 지키던 여러 봉수대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니 잠시 짬을 내어 들러보는 것도 괜찮겠다. 하지만 봉수대에 흥미가 없는 사람이라면 계속해서 기존의 탐방로를 따라가면 된다. 참고로 봉수는 성격에 따라 경봉수(京烽燧)와 내지봉수(內地烽燧) 그리고 연변봉수(沿邊烽燧)로 구분되는데 이곳 천내봉수는 연변봉수에 속한다. 경봉수는 전국의 모든 봉수가 집결하던 중앙봉수로서 서울 목멱산(木覓山)에 위치하여 목멱산봉수 또는 남산봉수라고 불렀다. 연변봉수는 해륙 변경(海陸邊境)의 제1선에 설치하여 연대라 하였으며, 내지봉수는 연변봉수와 경봉수를 연결하는 중간봉수로서 수적으로 다수(多數)였다.



봉수대로 들어가는 길은 판석(板石)을 깔아놓는 등 정비가 잘 되어있다. 길가에 벤치를 놓아두었는가 하면 봉수대에서 사용하던 신호전달 비품과 거화(炬火:횃불) 재료, 거주시설과 비품, 주전(남목)봉수대 관련 고문서 등을 설명해놓은 안내판을 줄줄이 세워놓았다. 작년엔가 이곳에 역사로드를 조성한다는 기사를 보았던 것 같은데 당시에 설치한 시설들인가 보다. 이왕에 거론했으니 봉수제도에 대해서도 조금 더 알아보자. 봉수(烽燧)는 과거 통신수단이 발달하지 못하였던 시대의 군사통신제도이다. 조망이 양호한 산정에서 밤에는 횃불로, 낮에는 연기로 국경과 해안의 안위를 중앙에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봉수제가 성립된 것은 1149(고려 의종 3)으로, 1급에서 4급의 봉수 거화수(炬火數)를 규정하고, 봉수군의 생활대책을 마련해 주었다. 조선 세종대에 이르러 그 체제가 정비되었다. 5거 거화수 등 관계 규식 마련, 각 도 연변의 연대(烟臺) 축조, 봉수선로 획정 등을 통해 그 면모를 새롭게 하였다. 각 봉수에는 오장(伍長)과 봉수군(烽燧軍)이 교대로 근무하면서, 평상시에는 한 홰(), 적이 나타나면 두 홰, 적이 국경에 접근하면 세 홰, 적이 국경을 넘어오면 네 홰, 적과 접전하면 다섯 홰의 봉수를 올리도록 하였다. 그러다가 1894(고종 31)에 전보통신이 보급되면서 폐지가 결정되었고, 다음해에는 각처 봉대와 봉수군을 폐지함으로써 모든 봉수제가 완전 폐지되었다.



잠시 후 해발 120m의 봉화산 정상에 위치한 화정 천내봉수대(華亭 川內烽燧臺 : 울산광역시기념물 제14)‘에 이른다. 하지만 복원공사가 진행 중이어서 본래의 모습은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저 공사현장의 앞에 세워진 안내판에서 천내봉수대의 노선을 확인해 볼 수 있었을 따름이다. 천내봉수는 부산해운대에 위치한 간비오봉수에서 출발하는 직봉노선의 7번째 봉수로, 남서쪽에 위치한 가리산(加里山)에서 신호를 받아 동북쪽의 남목(南木 : 현재 주전봉수)으로 전해주는 연변봉수(沿邊烽燧)였다.




봉수대로 들어왔던 반대방향으로 빠져나오면 기존의 탐방로(염포산 정상에서 5지점)와 또 다시 만난다. 이후는 포장도로의 연속이다. 눈에 담을만한 풍경이 없어진다는 얘기이다. 아니 틀렸다. 가로수 역할을 하고 있는 나무들이 모두 무궁화나무라는 것만큼은 누가 뭐래도 신선한 충격이라 하겠다. 지난번 태화강변(7코스)의 무궁화동산에 이어 이곳에서도 무궁화 꽃무리를 만난 것이다. 울산시민들의 지극한 무궁화사랑을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본 계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맨날 벚꽃잔치만 보아오며 식상해진 내 가슴에까지 잔잔한 감동이 밀려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염포산 정상에서 내려선지 1시간 20분쯤이면 방어진체육공원 입구 교차로(동구 화정동)‘가 나오면서 시내를 통과하는 구간이 시작된다. 근처의 버스정류장에는 이곳의 지명을 송정타워라고 적고 있으니 참조한다.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100m쯤 걷다가 문현삼거리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잠시 후 문재삼거리(동구 방어동)에서 오른편 문재로로 들어서면 방어진항으로 연결된다. 하지만 우린 이를 놓치고 말았다. 해파랑길 표식을 놓쳐버렸기 때문이다.



길을 놓쳤다고 해서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잘못 들어섰다 싶으면 하시라도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 되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꽃나루 공원을 지날 즈음에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을 알아차렸고, 공원이 끝나는 곳에 있는 사거리(꽃나루공원 앞 교차로)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북진5을 따랐다. 가는 길에 방어진우체국방어진제일교회라는 엄청나게 큰 교회를 만나게 되니 참조한다.



그렇게 잠시 걸으니 방어진항(方魚津港)‘이 나온다. 항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활어회센터이다. 회를 좋아하는 벗이 이를 지나칠 리가 없다. 이왕에 바닷가에 왔으니 열 일을 제쳐두더라도 생선회 한 접시쯤은 먹어야겠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난 도착지인 일산해안에서 먹자고 꼬드겨서 길을 재촉하고야 만다. 이 약속은 결국 공수표로 변해버렸지만 말이다.



잠시 후 보수공사로 분주한 부둣가에서 선두대장이 깔아놓은 진행방향 표시지가 지시하는 대로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우린 이곳에서 길을 놓쳐버리는 우()를 또 다시 범하고 말았다. 몇 걸음만 더 걸으면 만나게 되는 오른편 골목으로 들어서야 하는데도 그냥 지나쳐버린 것이다. 선두대장의 방향표시지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20분 이상이나 도심(都心)을 헤매고 다니는 고생을 치러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결국에는 대왕암공원 입구(버스정류장)에 이르러버렸다. 대왕암공원으로 곧장 가버리느냐를 놓고 고민하다가 우린 방어진항으로 되돌아가기로 한다. ’슬도등 아름답기로 소문난 방어진항 주변의 풍광을 놓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방향을 튼 곳이 세계비전교회‘, 교회 옆에 있는 동뫼산공원을 통과하고 나서도 한참을 더 걸은 후에야 방어진항에 돌아올 수 있었다. ! 세계비전교회에서부터 항구까지는 이 지역 주민의 도움을 받았다. 만일 그들의 도움을 받지 않았더라면 항구로 되돌아오는 시도조차 못했을 지도 모르겠다. 글을 빌어서나마 그 부부에게 감사를 드려본다.



기껏해야 2~3분이면 올 수 있는 거리를 우린 25분을 소모하고 난 후에야 돌아올 수 있었다. 속상한 일이지만 어쩌겠는가. 그나마 돌아올 수 있었던 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다. 널따랗게 펼쳐지는 방어진 포구를 눈에 담다가 항구의 왼편 끝자락에 위치한 슬도로 향한다. 수협위판장 앞을 지나는데 생각보다 깨끗하다는 느낌이다. 근처 바닷가도 마찬가지이다. 여느 항구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 즉 어망(魚網) 등 주민들이 사용하는 어구(漁具)들이 널려있지 않은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곳은 깨끗한 바다 만들기 프로젝트의 일환인 ’Clean Zone’으로 지정되어 있단다. 일명 깨끗Zone’이다.



슬도(瑟島)는 방어진 항으로 들어오는 거센 파도를 막아주는 면적이 3,083에 불과한 작은 바위섬이다. 예쁜 그림들로 덧입혀진 방파제와 다리로 연결되어 있으니 이젠 섬이 아니고 육지이라고 보면 되겠다. 슬도는 갯바람과 파도가 바위에 부딪칠 때 거문고 소리가 난다고 하여 부쳐진 지명이다. 다른 한편으론 '바다에서 바라볼 때 섬의 생김새가 시루를 엎어 놓은 것 같다'고 해서 시루섬으로 불리기고 한다. 또 다른 사람의 눈에는 거북이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그들은 '구룡도' 라고 불렀다니 이 또한 참조해 두자. 참고로 이곳 슬도는 MBC-TV에서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주말드라마 '욕망의 불꽃'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주인공인 유승호와 서우의 아역이 어린 시절을 보내던 곳으로 나온다.



고래를 형상화한 조형물을 지나자 자그마한 섬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슬도등대(瑟島燈臺)’가 눈길을 끈다. 그리고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는지 절로 등대에 가까워진다. 등대의 주변은 음수대와 벤치 등 편의시설을 갖춘 작은 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이 등대는 근처에 있는 대왕암공원과 송림이 조화를 이루면서 아름다운 풍광을 빚어내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이국적인 풍광을 사진촬영 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아무튼 조명시설을 갖추고 있어 저녁이면 그 아름다움이 한층 더 돋보인다니 한가한 시간에 다시 한 번 찾아봤으면 좋겠다.



주변의 바위들이 하나같이 구멍이 숭숭 뚫려있다. 슬도가 곰보섬이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는 이유일 것이다. 또한 갯바람과 파도가 바위에 부딪칠 때마다 거문고 소리가 난다는 슬도명파(瑟島鳴波)’를 낳게 한 근원이었을 게고 말이다. 바닷가로 내려가서 바위구멍 가까이에 귀를 기울여본다. 행여 울산 동구의 소리 9가운데 하나이자 방어진 12중 하나라는 구슬픈 거문고 소리라도 훔쳐들을 수 있을까 해서이다. 하지만 내 귀에는 그저 단조로운 파도소리일 따름이다. 무학대사가 시안견유시 불안견유불(豕眼見唯豕, 佛眼見唯佛)’이라는 말했다는데, 아무래도 내 수준으로는 그런 현학적인 표현이 어울리지 않는 모양이다. 참고로 슬도는 섬 전체에 촘촘한 구멍이 난 이색 지질을 갖고 있다. 이는 모래로 굳어진 바위에 조개류 등이 파고 들어가 살면서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는데, 이처럼 구멍이 섬 전체에 분포하는 사례는 국내에 거의 없다고 한다.



슬도는 방어진항(方魚津港)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뛰어난 전망대이다. 조선시대 슬도는 울산도호부(蔚山都護府) 관할의 동면(東面)에 속해 부근 일대가 국가 경영의 목장(魴魚津牧場)으로 이용되었던 곳이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30여 호에 불과하던 조그만 어촌마을 방어진은 1920년대가 되면서 우리나라 굴지의 항구로 급성장한다.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방어, 삼치, 고등어가 풍부하고 일본, 부산과 가까워 개항 직후부터 일본인들이 주목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방어진(方魚津)이란 이름은 방어(魴魚)가 많이 잡히는 나루터라는 의미에서 왔다고 한다. 그 방어(魴魚)가 방어(方魚)로 변했다는 견해가 유력하니 참조한다. 하지만 고려 시대에는 방어진(防禦陣)이라 불렸다고 한다. 왜구를 방어하기 위한 수로진(水路陣)’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란다.



슬도로 들어가는 방파제의 들머리에는 '여음(餘音, 소리의 잔향)의 풍경'을 콘셉트(concept)로 삼았다는 소리체험관이 지어져 있다. 울산 '동구의 소리 9'을 체험해볼 수 있는 체험전시관이란다. 시간이 없어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대신 야외에 설치된 에코튜브등의 조형물들을 통해 34m나 떨어진 곳에서도 마치 옆에서 대화를 하는 것처럼 선명하게 들을 수 있는 체험을 해볼 수는 있었다. 참고로 동구의 소리 9이란 제1경인 동축사 새벽 종소리(축암효종)를 시작으로 마골산 숲사이로 흐르는 바람소리’. ‘옥류천 계곡 물소리(옥동청류)’, ‘현대중공업 엔진소리’, ‘신조선 출항 뱃고동소리’, ‘울기등대 무산소리’, ‘대왕암공원 몽돌 물 흐르는 소리’, ‘슬도 파도소리(슬도명파)’, ‘주전해변 몽돌 파도소리등이다.



해파랑길은 이제부터 해안길을 따른다. 그리고 대왕암공원을 두루두루 돌아가며 8코스의 종점인 일산해수욕장으로 나아간다. 그 길이가 4쯤 되는데 한마디로 경관이 빼어난 구간이라 하겠다. 아름다운 해식(海蝕) 해안이 연이어 나타나면서 탐방객들의 눈을 황홀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여가'라는 개념이 일반화된 울산시민들에게 최고의 나들이 장소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겠다. 아니 울산을 찾는 외지인들에게는 이미 울산여행의 1번지로 자리매김했다고 한다.



첫 번째 만남은 배미돌이다. 고동섬이 있는 남쪽 해안에 있는 커다란 바위로, ‘동쪽의 바위를 뜻하는 샛돌()’로 전이되면서 배미() 이 된 것이라고 한다. 뱀이라는 바위의 이름처럼 영험까지 갖춘 모양이다. 바위 앞 해안에 기장의 해동용궁사와 글자 한 자 틀리지 않은 절간이 자리 잡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하지만 여염집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건물의 외관 등으로 보아 절간이라기보다는 무속인(巫俗人)들의 기도장소에 가깝게 느껴진다.



이어서 가운데 고개또는 경계점의 한자어로 여겨지는 중점과 그 아래에 늘어진 노애개안을 지나자 이번에는 고동섬이라는 작은 바위섬이 나온다. 전망대에 세워진 안내판에 의하면 원래의 이름은 수리바위였는데 소라바위로 음()이 전이되었다가 이후 방언화(方言化)되면서 고동섬으로 변했단다. 그건 그렇고 갯바위에 걸터앉아 낚시를 드리우고 있는 강태공이 보이는 걸로 보아 고동섬 부근은 입질이 좋은 낚시 포인트인가 보다.



탐방로는 동그란 자갈이 깔려있는 해안가로 내려서기도 한다. 과개안(너븐개)이라 부르는 몽돌해변인데 1960년대까지만 해도 동해의 포경선들이 고래를 이곳으로 몰아 포획했다고 전해진다. 그건 그렇고 자갈 위를 걸으려면 발걸음이 피곤해진다. 발이 빠지는 모래사장처럼 발을 붙잡는 곳이 있는가하면 삐끗해지지 않으려고 발목에 힘을 주는 통에 발에 피로를 주는 곳도 있기 때문이다. 탐방로가 자갈길을 버리고 해안으로 올라서있는 이유일 것이다. 길은 잠시 후 소나무 숲속으로 파고든다. 그리고 송림사이로 바다와 해변을 내다보며 걷는다. 여전히 매력적인 해변이다.



잠시 후 탐방로는 대왕암공원(大王巖公園)’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해맞이광장에 이른다. 슬도에서 길을 나선지 30분만이다. 울산 시민들은 물론이고 울산을 찾는 외지인들이 가장 즐겨 찾는 곳 가운데 하나가 바로 대왕암공원(옛 울기공원)이다. 그 대왕암공원에서도 백미(白眉)는 단연 대왕암이라 하겠다. 대왕암은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 문무왕의 릉()은 아니다. 문무왕은 자신이 죽으면 호국대룡(護國大龍)이 되어 나라를 수호하겠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왕이 죽자 그의 유언에 따라 동해에 장사를 지내니 용이 되어 동해를 지켰다. 이것이 대왕바위 또는 댕바위이며, 현재 경주군 양북면에 있다. 그렇다면 이곳 대왕암에는 어떤 사연이 숨어 있을까. 설화는 문무왕의 왕비가 묻혔다고 전해준다. 문무왕의 뒤를 이어 세상을 떠난 왕비가 남편처럼 동해의 호국룡이 되고자 울산 앞바다에 있는 이 바위 아래에 잠겼다는 것이다. 그 후 사람들은 이곳 또한 대왕바위 또는 대왕암이라 불렀다고 한다.



현대중공업에서 기증했다는 다리를 건너 대왕암에 발을 딛고 서 본다. 용이 승천하다 떨어졌다 해서 용추암(龍墜岩)으로도 불리는 바위다. 불그스레한 바위색이 짙푸른 동해와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데, 그 모습이 한눈에 봐도 상서로운 기운으로 가득하다. 아니 문무대왕에 얽힌 옛 얘기의 영향일지도 모르겠다. 귓가만 스쳐도 가슴이 훈훈해지는 나라사랑이 아니겠는가.



대왕암을 세차게 흔드는 파도가 일렁이며 하얀 포말로 사라지는 광경을 보고 있자니 또 다시 옛 얘기가 떠오른다. 그리고 물속에서 포효하고 있는 용의 모습이 함께 그려진다.



바다건너에 있는 일산해안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와 있다. 해파랑길 8코스도 이젠 끝나가나 보다. 그건 그렇고 물이 차서인지 동구의 소리 9가운데 제7경을 만들어냈다는 몽돌은 눈에 띄지 않았다. 몽돌 사이로 물이 들어왔다 빠져나가는 파도소리가 흡사 천상의 소리 인 듯 더없이 감미롭고 몽환적이라는데 말이다. 아니 어쩌면 해맞이광장의 좌우 아래 비치파라솔로 뒤덮인 해안을 이르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대왕암을 둘러봤으면 이젠 일산해안으로 갈 차례이다. 이 또한 해안산책로를 따라가면 된다. 하지만 주의해야 할 게 하나 있다. 대왕암공원의 또 다른 명물인 울기등대(蔚埼燈臺)’를 보고 싶다면 내륙방향으로 진행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를 간과해버린 우린 결국 대한민국 등록문화재 제106로까지 지정되어 있는 구 등탑(舊 燈塔)’을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해버렸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다.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사전 준비가 부족했던 나 자신을 탓할 수밖에. 울기등대에 대한 자료를 뒤적여보며 그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래본다. 울기등대는 1906년 동해와 대한해협의 해상을 장악하기 위한 일제(日帝)에 의해 처음 지어졌다. 처음 지었을 당시에는 6m 높이의 등탑(燈塔)이었으나 주위 소나무의 성장으로 등대의 기능이 제한을 받게 되자 1987년 구 등탑을 증축하는 대신촛대모양의 아름다운 등대를 새로 세우고 옛 등탑은 현재 기능이 정지된 상태로 남아 있다.



탐방로 주변에는 유난히도 많은 벤치가 놓여있다. 하나같이 푸른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경관 좋은 곳들이다. 그런데 앉은 이들마다 모두 먼 바다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다. 뭔가 가슴 저리는 추억 한 토막이라도 찾아내려는 것일까? 아니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영원한 노스텔지어의 손수건'을 노래했던 '시인'처럼 가슴이 촉촉한 사람들일지도 모르겠다.



해식애 위로 난 탐방로는 수많은 갈래 길을 만든다. 그리고 그 끝에는 어김없이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다. 탁 트인 해안절벽으로 나아가면 흡사 선사시대의 공룡화석들이 푸른 바닷물에 엎드려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거대한 바위덩어리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불그스레한 바위색이 짙푸른 동해 바다색과 대비되어 아주 선명하다. 그러니 어찌 들어가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들락거린 거리가 무려 1나 되었다면 믿을런지 모르겠다.




야외공연장도 만들어져 있다. 보는 즐거움()에 듣는 즐거움()까지 더했으니 가히 울산을 대표하는 공원답다 하겠다.



이밖에도 옛 얘기 하나 정도는 갖고 있는 수많은 기암괴석들을 만나게 된다. 괴이하게 생겼다 하여 쓰러뜨리려다 변을 당할 뻔 했다는 남근바위, 그리고 탕건바위와 자살바위, 해변 가까이 떠 있는 바위섬들이 시야를 꽉 채운다. ! ‘용굴이라는 곳은 놓쳐버렸다. 안내판까지 봐가며 찾아봤지만 발견할 수 없었으니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파도가 치면 덩덕궁 하는 소리가 들린다 하여 덩덕구디로도 불리는 용굴은 옛날 청룡 한 마리가 여기에 살면서 오가는 뱃길을 어지럽히자 동해 용왕이 노해 청룡이 굴속에서 다시는 나오지 못하도록 신통력을 부려 큰 돌로 입구를 틀어막아 버렸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 천연동굴이다. ‘수루방(수리바위)’이라는 바위절벽도 눈에 담을 수 없었다. 망루를 설치해 놓고 숭어잡이 망을 보았다는 수루방은 철망을 쳐 출입을 금하고 있었다.





이제 대왕암길의 마지막이라 할 수 있는 소나무 숲(松林) 사이를 걷는다. 100년을 훌쩍 넘길 정도로 아름드리 자란 15천여 송림 사이로 이어지는 산책로는 송림만으로도 완성된 풍경이라 하겠다. 나무 사이로 다양한 꽃들이 풍경을 더했는데, 가을이면 송림 아래에서 피어나는 꽃무릇이 일품이라고 세간에 입소문을 탔다. ! 늦었지만 이제라도 대왕암길에 대해 알아나 보자. ‘대왕암길은 커다란 바위들이 해안의 절경을 이루고 있어 제2의 해금강이라 불리는 울산의 끝자락(蔚崎)에 자리하는 둘레길이다. 이 길은 아름다운 해안의 운치와 각양각색 바위의 이야기를 한껏 느낄 수 있는 노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왕암공원 입구에서 바깥마구지기를 시작으로 안마구지기, 해맞이전망대, 용추암, 고동섬 그리고 노애개안을 거쳐 슬도 소공원 등대에 이르는 4km의 해안 산책로가 잘 정비돼 있다. 특히 처음부터 끝까지 해안길과 길게 뻗은 해송사이를 누빌 수 있어 힐링이 가능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공원의 막바지에서 긴 나무계단을 내려서면 일산해수욕장이다. 1930년대 개장한 일산해수욕장은 반달형의 백사장이 850m 길이로 펼쳐지는 가운데 수질이 깨끗하고 차가와 도심 속의 피서지로서 최적지라 할 수 있다. 여름철에는 축제, 공연, 해양스포츠 등이 다양하게 개최되어 볼거리와 즐길거리를 함께 제공한단다. 하지만 요즘은 ''가 주관하는 행사보다 '' 행사가 자주 열린다고 한다. 최근 휴가기간이 길어지면서 근거리보단 원거리 휴양지로 시민들이 빠져나갔기 때문이란다. 그 덕분에 휴양지의 정취가 많이 사라지고 대신 주민들의 휴식공간으로 그 성격이 변했다는 것이다.



트레킹 날머리는 일산해수욕장 행정봉사실 근처의 광장

백사장으로 내려서면 울산시(동구)에서 세간의 추세에 맞추어 새로운 체험공간으로 조성했다는 드론(drone) 체험장이 나오고, 이어서 상설무대를 갖춘 행정봉사실과 동구(동구)를 상징한다는 소리나무조형물을 지났다 싶으면 곧이어 너른 광장이 나타나면서 해파랑길 8코스가 종료된다. 오늘 트레킹은 총 4시간 10분이 걸렸다. 12.5밖에 되지 않는 거리를 뭐 그리 오래 걸렸느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핸드폰에 깔아놓은 앱(app)에는 15.5가 찍혀있었다. 방어진 항에서 길을 잃고 헤맨 거리에다 슬도를 다녀온 거리, 그리고 대왕암공원에 만들어진 전망대마다 들락거리다보니 3나 거리가 늘어나버린 것이다.


해파랑 7코스

 

여행일 : ‘18. 9. 1()

소재지 : 울산광역시 남구와 북구, 중구 일원

산행코스 : 태화강전망대(4.8km)십리대밭(5.9km)내황교(6.4km)염포삼거리(거리 및 소요시간 : 16.87, 4시간 10)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울산을 상징하는 태화강을 오른편에 끼고 흐르듯 걷게 되는 구간이다. 즉 시작부터 강줄기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다 구 삼호교를 통해 강을 건넌 후부터는 다시 강줄기를 따라 내려오게 된다는 얘기이다. 이 구간의 백미는 누가 뭐래도 십리대숲이라 하겠다. 굵은 대나무들로 가득한 숲이 2정도 이어지는데 그 규모가 국내 제일일 뿐만 아니라 죽림욕장(竹林浴場)‘뱃살빼기 체험시설‘, ’포토죤등의 시설까지 곳곳에 배치해 놓았다. 보는 것에 더해 즐기는 재미까지 갖춘 것이다. 또한 이 구간에서는 울산 최초의 현대식 교량인 구 삼호교와 만회정, 태화루 등 역사적 사실을 품은 공간들도 만난다. 선현들의 발자취를 엿볼 수 있는 기회가 아닐까 싶다. 이후로도 눈요깃거리가 풍부한 강 둔치가 계속 이어지지만 후반부는 썩 좋지가 않다. 후반부의 5정도는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외곽 등 둑길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길의 변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자전거 길과 함께 사용하고 있어 방심하다간 자칫 부상까지 입을 수 있는 구간이다.


 

트레킹 들머리는 태화강전망대 앞 주차장(울산 남구 신정동 1549-6)

울산고속도로 울산 IC에서 내려와 북부순환도로를 잠깐 타다가 삼호교남교차로(남구 무거동)에서 오른편 남산로로 옮겨 들어가면 잠시 후 태화강전망대 근처의 주차장에 이른다. 아니 남산근린공원에 속하는 주차장일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주차장의 끝에 남산사라는 나름대로 구색을 갖춘 절간이 있으니 참조한다. 그렇다고 찾아볼 필요까지는 없다. 야박하게도 문을 굳게 닫아놓았기 때문이다.




주차장 건너편에 SK주유소가 있다. 이 주유소의 끄트머리에서 오른편 골목으로 들어서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들머리에 이정표(태화강 동굴피아 950m) 외에도 해파랑길 방향표시목과 남산나루의 입구임을 알려주는 이정표가 따로 설치되어 있으니 들머리를 못 찾아 헤매는 일은 없을 것이다.



50m쯤 걸었을까 태화강가에 세워진 태화강전망대가 길손을 맞는다. 서울의 남산타워나 롯데타워 같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전망대는 아니다. 하지만 전망만은 빼어나다고 한다. 태화강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경관 좋은 곳에 지상 4(수면에서 30m) 높이로 들어앉았기 때문이다. 50년 이상 된 수자원공사의 취수탑을 생태환경에 맞도록 리모델링해 지난 20092월에 문을 열었단다. 1층은 엘리베이터 홀과 안내실이 2층은 기계실이다. 3층은 회전 카페로 차와 간단한 식사를 할 수 있는데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 동안 한 바퀴를 돌며 태화강 전역을 감상할 수 있게끔 해준단다. 4층은 야외 전망데크로 되어 있어 망원경으로 태화강의 곳곳을 볼 수 있다고 한다. ! 전망대 아래에 해파랑길 7코스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눈요깃거리나 먹거리에 대한 정보까지 소개되어 있으니 트레킹을 나서기 전에 한번쯤 살펴보고 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전망대의 옆 강가에는 남산나루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나룻배를 이용할 때 주의해야할 일들을 적어놓기도 했다. 2015년부턴가 남산호라는 이름의 나룻배가 운항을 시작했다고 하더니 그게 요 아래에 있었나 보다. 이 나룻배는 길이 6m에 폭 2,2m, 승선인원은 12(뱃사공 2명 포함)이라고 한다. 전통의상을 입은 뱃사공이 130m 길이의 줄을 당겨 건너편으로 이동시켜 준다니 시간이 있다면 한번쯤 이용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우리 같이 해파랑길을 따라 걸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는 화중지병(畵中之餠)이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남산나루는 태화강에 교량이 없던 시절 태화나루와 내황나루, 삼산나루 등 여러 나루와 함께 시민들의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다고 한다. 농민들과 아낙들의 만남의 장소였으며 학생들에게는 정겨운 통학로였다. 가축과 농기구, 곡식 등을 운반하는 화물선의 역할까지 겸했음은 물론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트레킹을 나설 차례이다. 탐방로는 태화강을 오른편에 끼고 나있다. 태화강은 울산 가지산과 백운산 물줄기가 57개의 지류를 품고 도심을 가로질러 동해로 흐르는 길이 47.54의 강이다. 이 강은 한때 죽음의 강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울산은 공업도시로 유명하다. 그러니 환경오염으로 이어졌을 게 뻔하다. 오폐수(汚廢水)가 흘러들고 온갖 쓰레기가 쌓여가면서 급격히 생명력을 잃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물고기가 죽어가고 철새가 떠나가는 죽음의 강이 되고 말았다. 이런 태화강을 살린 것은 울산시민들이었다고 한다. 시민과 환경단체, 기업, 그리고 행정이 모두 팔을 걷고 태화강 살리기에 나섰다는 것이다. 하수처리장을 건설하고 하수관거 정비사업, 퇴적오니(하천이나 호수 바닥의 퇴적된 오염된 흙)를 제거한 후에 14만 톤의 하천 유지수를 확보해서 맑은 물을 흐르게 했단다. 특히 지난 2004년에는 전국에서 가장 먼저 강둑과 호안의 콘크리트 덩어리를 걷어내고 자연형 호안으로 새롭게 정비했다고 한다. 그 결과 지금은 생명의 강으로 바뀌어 울산시민들과 함께하는 울산의 젖줄과 같은 소중한 강으로 변했단다.



길을 가다보면 건너편 강기슭에 있는 만회정(晩悔亭)’이 눈에 들어온다. 만회정이 있는 저 일대는 태화강 대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오랫동안 무관심으로 방치되어 오던 태화강 하류의 들녘을 공원으로 가꾸어 시민들의 품에 되돌려 준 것이다. 서울 여의도 공원 면적의 2.3배에 달한다는 태화강대공원은 전국 최대 규모의 도심 친수공간(都心 親水空間)’이다. 홍수 조절을 위해 사라질 위기에까지 이르렀던 십리대숲은 시민의 단결된 힘으로 보전하게 되었고, 도시계획상 주거지역으로 결정되어 개발이 예정되어 있던 186의 토지를 다시 환원시켜 오늘의 태화강 대공원을 조성했다고 한다.



얼마쯤 걸었을까. 옛 삼호교에 이르기 조금 전에 태화강 철새공원이라고 쓰인 말뚝형의 팻말이 보인다. 그 옆에는 대한민국 20대 생태관광지라고 쓰인 표지목도 꽂혀있다. ’생태관광지(生態觀光地)‘란 환경에 대한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자연을 관찰하고 이해하며 즐길 수 있는 곳이란 의미이다. 그렇다면 이 부근에 수많은 철새들이 모여든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리고 피해를 최소화하는 선에서 그들의 생태계를 보고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조성되어 있다는 얘기도 된다. 하지만 지금은 제철이 아닌지 팻말의 뒤편에는 비둘기로 보이는 새들이 여럿 보일 따름이다. 이왕에 시작했으니 태화강의 생태계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자. 현재 태화강에는 조류 146, 어류 73, 식물 632종 등 총 900여종의 동식물이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전국 최대 규모의 생물자원도 3종이나 있는데 여름철새인 백로, 겨울철새인 떼까마귀, 바지락이 그것이다. 여름에는 7종으로 늘어난단다. 아무튼 백로 8000여 마리가 둥지를 틀고, 겨울이면 떼까마귀 53000여 마리가 화려한 군무(群舞)를 펼친단다. 또한 강 하구는 종패(種貝) 때부터 자연 서식된 바지락의 전국 최대 생산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몇 걸음 더 걷자 이번에는 여러 종류의 운동기구를 갖춘 작은 체육공원이 나온다. 노거수(老巨樹) 아래에는 벤치 몇 개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음수대(飮水臺)‘도 보인다. 오늘 트레킹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싶다. 이런 음수대를 곳곳에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냉수와 온수를 골라서 공급 받을 수 있는 정수기(淨水器)까지도 여려 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30분쯤 지났을까 삼호교(三湖橋)‘가 나온다. 아니 저 앞에 6차선의 다리를 삼호교라는 이름으로 새로 놓았으니 이 다리는 () 삼호교로 부르는 게 옳을 것 같다. 이 다리는 일제 강점기인 1924년에 군수산업을 효과적으로 관리할 목적으로 건설된 울산 지역 최초의 근대식 철근콘크리트조 교량이다. 이런 점을 인정받아 2004년에는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제104호로 지정된바 있다. 현재는 교각과 상판의 노후화를 이유로 차량통행은 금지시키고 보행자 전용의 교량으로만 활용되고 있다. 해파랑길의 탐방로는 이 다리를 건너도록 되어 있다.




다리를 건너는 도중에 바라본 태화강 상류의 전경, 카메라에 잡힌 다리가 바로 새로 놓인 삼호교이다. 강변을 따라난 길은 태화강 100리길이라는 둘레길이다. 태화강의 발원지인 울주군 백운산의 탑골샘에서 시작해 강 하구의 명선교에 이르기까지 총 길이 48의 강줄기를 따라 탐방로를 내놓은 것이다. 울산을 대표하는 걷기 코스라니 한번쯤 시간을 내어 시도해볼 만도 하겠다.



다리를 건너자 천변(이정표 : 십리대밭 1.6/ 태화강전망대 1.9)에 자전거연습장이 만들어져 있다. 오늘 걷고 있는 코스의 또 다른 특징은 사람 전용과 자전거 전용 길이 나란히 나있다는 점이다. 어떤 곳에서는 두 길이 합쳐지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또렷이 구분되어 있다. 그만큼 자전거 길을 잘 조성해놓았다는 얘기이다. 그러다보니 안전사고가 걱정이라도 되었나보다. 저렇게 반듯한 안전교육 시설까지 만들어놓은 걸 보면 말이다.



다리를 건넌 후에도 태화강은 여전히 오른편에 있다. 다만 아까는 강줄기를 따라 거슬러 올라갔던 반면에 이번에는 강물을 따라 내려가고 있을 따름이다. ! 삼호교를 건너면 무궁화동산을 만나게 된다는 것을 깜빡 잊을 뻔했다. 기껏해야 못생긴 무궁화 몇 그루가 심어져 있을 따름이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다. ’무궁화는 이따가 다시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곱고 화려한 무궁화 꽃들이 지천으로 널려있다.



강변에는 커다란 주차장이 곳곳에 만들어져 있다. 시민들을 위한 시설이 빠졌을 리가 없다. 축구장이나 풋살장, 테니스장 같은 체육시설은 물론이고 야외공연장도 갖췄다. 강변을 아예 도심공원(都心公園)으로 가꾸어 놓은 것이다.



잠시 후 수령(樹齡)300년이다 되었다는 팽나무가 나온다. 나이뿐만이 아니라 생김새까지 제법 그럴싸하게 갖춰 주변 풍경과 잘 어우러지고 있다. 보호수(保護樹)로 지정되어 있는 이유일 것이다. 그 옆에는 다운동 물레방아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이 근처에 보()를 막아 높이 3.5m의 물레방아를 돌렸는데 1959년의 사라호 태풍 때 유실되고 지금은 팽나무만이 외롭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요즘은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이 관광산업의 요술방망이처럼 여겨지는 시대다. 근거도 없는 설화를 끌어들여 축제를 만드는 자치단체도 없지 않은데, 이런 역사적 사실을 챙겨놓아 찾는 이들에게 사실에 근거한 상상력을 북돋워주는 배려가 돋보이는 것 같다.



새로 짓는 중인 오산대교의 아래(이정표 : 십리대밭교 1.6/ 삼호교 1.49)를 통과한 후 강안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모퉁이를 돌아서자 만회정(晩悔亭)’이 얼굴을 내민다. 삼호교를 지난 지 20분 만이다. 자라()의 형상을 닮았다는 오산(鰲山)은 예로부터 숲과 강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명소로 알려져 있다. 그런 명당자리를 가만 놓아두었을 리가 없다. 조선 중기에 부사(副使)를 지낸 박취문(1617~1690)이 낙향 대비용으로 만회정(晩悔亭)이란 정자를 지어놓았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 말기에 소실되었던 것을 2011년에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건물은 전면툇마루에 중당협실형, 그리고 팔작지붕 구조로 되어 있다. 원래의 건물은 정면 3칸에 측면 2칸이었으나 관리와 편의를 위해 복원과정에서 통칸으로 변경했단다. 현판은 박계숙(朴繼叔박취문(朴就文) 부자가 작성한 부북일기(赴北日記·울산시 유형문화재 제14)에서 집자(集子)해 작성했다고 한다. 이왕에 거론했으니 울산의 읍지인 학성지(鶴城誌, 1749)’에 나오는 글귀도 한번 옮겨보자. <내오산은 태화진의 서쪽 수리(數里)쯤에 있다. 작은 언덕이 강에 닿아 있고 경치가 그윽하며 묘하다. 만회정이 있는데 부사 박취문(朴就文)이 지은 것이다. 정자의 앞에는 가늘고 긴 대숲이 몇 무()가 있고 아래에는 낚시터가 있으며 관어대(觀魚臺)라는 3글자를 새겨 놓았다>




만회정을 지나자마자 십리대밭이 시작된다. 아니 만회정이 십리대밭의 안에 들어있다고 하는 게 옳을 수도 있겠다. 십리대밭은 길이 약 10(4.3)에 면적은 142,060에 이른다고 한다. 70여만 그루의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십리대밭의 대나무는 고려 중기 문장가인 김극기의 태화루 시에도 그 모습이 묘사돼 있다. 1749년 울산 최초 읍지(邑誌)인 학성지에도 기록된 것으로 보아 오래전부터 이곳에 대나무가 자생하고 있었다고 추정된다. 그 뒤 일제강점기 때 큰 홍수로 인해 태화강변 전답이 유실됐고, 일본인이 헐값에 이 부지를 사들여 대숲을 조성했다고 전해진다. 한때 주택지로 개발될 뻔했으나 범시민 반대 운동이 벌어져 이를 보존할 수 있었단다. 다른 한편으로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한국관광 100에 선정된 십리대숲은 지난해 정부가 주관하는 ‘2017 열린 관광지로도 선정되기도 했다. 열린 관광지는 장애인과 노인 등 모든 관광객이 불편함 없이 관광 활동을 할 수 있는 무장애 관광지다. 그만큼 누구나 쉽게 걸을 수 있다는 얘기이다. 그렇게 트레킹을 할 수 있는 산책로의 길이는 약 1.8이다.



하늘을 찌를 듯이 쭉쭉 뻗은 대나무가 무성한 숲을 이뤘다. 숲에 들어서니 대낮인데도 사위가 어둡다. 가을이 시작된다는 처서(處暑)가 지난지도 벌써 일주일이 되었지만 더위는 아직도 기세가 등등하기만 하다. 그런데도 대숲에 들어서니 금세 서늘한 기운이 온몸을 감싼다. 거기다 초록 장대와 그 잎새가 서로 몸을 비비며 내는 초록 소리가 숨구멍을 통해 온 몸으로 파고든다. 좋다. 그저 좋다. 이런 맛에 '죽림칠현(竹林七賢)'이 대숲에서 청담(淸談)으로 세월을 보냈을 것이다.




대밭에는 여러 곳에다 포토존을 만들어 놓았다. 대나무 숲을 전체적인 배경으로 넣을 수 있음은 물론이고, 예쁘장한 조형물과 함께 할 수도 있다. 친구와 함께 사진을 찍으면서 걷거나 혹은 홀로 사색을 즐기기 딱 좋은 공간이라 하겠다.



대밭의 가운데로 난 산책로의 곳곳에는 평상이나 벤치를 놓아 잠시 쉬어갈 수 있도록 했다. 자신의 뱃살을 재어볼 수 있는 시설도 보인다. 그 가운데서도 백미(白眉)는 죽림욕장(竹林浴場)이 아닐까 싶다. 대나무 숲에서는 공기속의 비타민이라 불리는 음이온이 다량 발생하여 신경안정과 피로회복 등 병에 대한 저항성을 키우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울산시에서 이런 점을 놓치지 않고 욕장(浴場)을 만들어 둔 것이다.



십리대밭을 벗어나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십리대밭교가 나타난다. 길이 120m에 폭이 5~8m인 태화강 유일의 인도교(人道敎)2009에 완공됐는데, 태화강전망대와 함께 태화강의 랜드마크(landmark)라고 하니 꼭 기억해 두자. 참고로 이 다리는 고래와 백로를 형상화한 비대칭형의 아름다운 아치교로 울산의 미래와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함축적으로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다리 아래를 지나면 음료수는 물론이고 간식거리까지 팔고 있는 매점이 길손을 반긴다. 출출해진지 오래일 테니 요기나 하고 가라는 모양이다. 맞다. 해파랑길 7코스는 절반, 아니 아직 1/3도 못 왔다. 갈 길이 아직 머니 체력을 비축해두라는 얘기이다. 다른 편의점을 이용하려면 코스를 벗어나 5~10분 이상을 걸어야하기 때문이다. 16이상을 걸어야 하는 장거리 트레킹에서 그나마 체력을 아낄 수 있는 방법이니 어쩌겠는가.



물가의 잡초 사이에 작은 조형물들이 들어앉았다. 울산대학교 서양학과 학생들이 만든 금의환향(錦衣還鄕)이라는 작품이란다. 회귀(回歸) 어종인 연어(鰱魚)에서 우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순환관계를 생각했다는데 예술에 문외한이 내 눈엔 글쎄올시다.’가 아닐까 싶다. 그저 힘찬 에너지로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의 역동적인 형상을 작품에서 찾아볼 따름이다.



잠시 후 여울다리를 건너자 넓이가 1에 이른다는 무궁화 정원이 나온다. 작년(2017)에 울산 출신의 세계적인 무궁화 육종가인 심경구 박사가 육성한 울산지명 품종 11종과 특허 품종 11, 기타 품종 2종 등 총 242400여 그루를 심었단다. 그런데 1년도 채 되지 않아 꽃망울을 활짝 열고 있는 것이다. 무궁화도 무리를 지으면 저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는 모양이다. 거기다 근처에는 태극기가 그려진 바람개비 수백 개를 꽂아 놓아 꽃밭의 아름다움을 한층 더 고조(高潮)시키고 있다.




무궁화정원을 지나자 이번에는 태화루(太和樓)’가 길손을 맞는다. 당나라에서 불법을 구하고 돌아온 자장대사가 울산에 도착하여 태화사를 세울 때 함께 건립했다는 누각(樓閣)이다. 밀양 영남루, 진주 촉석루와 함께 '영남 3'로 불렸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지난 2014년 복원했단다. 십리대밭에서 이곳까지는 20분 정도가 걸렸다.





태화루는 뛰어난 조망을 자랑한다. 태화강변의 황룡연 절벽 위에 위치하고 있는 탓에 태화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기 때문이다. 바람이 솔솔 부는 누각에 앉아 유유히 흐르는 강물과 멀리 십리대밭교를 바라보며 쉬어 가기 딱 좋다.



태화루 옆에는 남구 신정1동과 중구 태화동을 잇는 태화교가 지나간다. 탐방로는 이 교량의 아래로 나있다. 다리의 아래는 어르신들의 놀이터이자 쉼터이다. 장기나 바둑을 두는 분들이 계시는가 하면 서넛이 둘러앉아 약주 잔을 돌리고 있는 분들도 보인다. 한쪽 귀퉁이에는 아이스박스와 함께 의자 두엇이 놓여있다. 역시 수요는 공급을 창출하는가 보다.



둔치에 수많은 몽골텐트들이 쳐져 있다. ‘태화강 치맥 페스티벌행사가 열리고 있는 중이란다. 그러고 보니 이곳 태화루에서는 해마다 전통문화예술 공연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올해는 이달부터 열린다는 기사가 있었는데, 이 페스티벌도 그 일환일지 모르겠다.



행사장 바로 옆에 마두희(馬頭戱)의 곳나무라는 안내판이 걸려 있다. 그 뒤에는 커다란 나무기둥, 곳나무여섯 개가 꽂혀있다. ‘마두희(馬頭戱)’란 여러 사람이 양편으로 갈려서 굵은 밧줄을 마주 잡아당겨 승부를 겨루는 놀이를 말한다. 울산의 마두희는 전·근대 시기부터 매년 경상좌병영과 울산부 부민들이 동서로 편을 갈라 당기던 큰줄당기기라고 한다. 이때 당기던 줄은 암줄과 수줄이 따로 있는 쌍줄로서, ‘곳나무를 이용해 두 줄을 결합한 뒤 당겼다. 당기기 놀이가 끝나면 곳나무는 태화나루로 옮겨져 배를 매어두는 말뚝으로 사용되었다고 전해진다. 곳나무가 단순한 놀이기구가 아닌 풍요·다산을 상징하는 의미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2012년에 마두희 행사가 최초로 재현되었다고 하니 이 조형물 역시 당시에 만들어 놓았지 않나 싶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해파랑길 7코스의 좋은 점 가운데 하나가 물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곳곳에 음수대가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음수대 가운데는 아래 사진과 같은 정수기를 비치해놓은 곳도 여럿 보인다. 냉수와 온수를 원하는 대로 공급받을 수 있으니 운동을 나온 울산시민들은 물론이고, 특히 우리 같은 장거리 여행자들에게는 그야말로 구세주인 셈이다.



이후 내항교까지는 특별히 눈에 담을 만한 게 없는 풍경이 펼쳐진다. 그렇다고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아름답지 않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태화강은 강이라고 믿기 힘들 만큼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 길을 가다보면 낚시를 하고 있는 강태공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아니 한두 사람이 아니고 군데군데 무리를 지어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그만큼 강물이 맑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청정상태의 1급수를 계속해서 유지할 정도로 강이 되살아났다고 하더니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그 덕분에 사라졌던 연어와 은어, 황어들이 돌아오고 수달이 서식하기 시작했다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태화루를 출발한지 50분 만에 내황교에 이른다.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해파랑길의 공식 지도에는 내황교의 아래를 통과한 후 동천강을 거슬러 올라가다 동천교에서 강을 건넌 후 되돌아 나오게끔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내황교의 상부에 보행로를 내놓았다. 다리 아래를 지나자마자 왼편으로 오르면 내황교의 상부로 연결된다.




다리를 건너다보면 동천강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강변을 따라 난 산책로도 눈에 들어옴은 물론이다. 저 길을 따랐더라면 3정도를 더 걸어야 했을 테니 얼마나 잘 된 일인지 모르겠다. 강안 풍경을 눈에 담고 있는데 물고기를 잡느라 여념이 없는 오리떼가 눈에 들어온다. 동천강도 이미 수질이 좋아진 모양이다.



내황교를 지나면서 억새밭이 시작된다. 태화강의 생태복원을 위해 강의 하구에 조성된 억새군락지이다. 이 일대는 백로와 떼까마귀, 고니, 흰죽지, 물닭 등 약 506만여 마리의 철새가 서식하는 도심 철새도래지로 알려져 있다. 2008년에는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아무튼 때를 맞춰 찾아오면 은빛물결이 장관을 이루고 있는 풍경에 듬뿍 빠져볼 수도 있겠다.



길을 걷다가 아장거리고 있는 작은 생명체를 만났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태화강 주변에는 900여 종의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트레킹 도중에 이런 게를 위시해서 여러 동식물들을 만나게 된다. 가끔은 바닥을 살펴가면서 걸어야 하는 이유이다.



억새군락지가 끝나갈 무렵, 그러니까 내황교에서 25분쯤 떨어진 곳에 그늘막이 쳐져있다. 장거리 트레킹에 지쳐갈 즈음인지라 잠시 쉬었다 가기 딱 좋은 곳이라 하겠다. 아니 앞으로는 쉴만한 곳이 없으니 꼭 쉬면서 컨디션을 조절해보자. 날머리인 성내삼거리까지는 앞으로도 5정도가 더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자전거와 함께 쓰는 위험스럽기 짝이 없는 길이다.



사람과 자전거가 함께 사용하고 있는 탐방로는 위험하기 짝이 없다. 지나다니는 자전거들의 속도가 하도 빨라 뒷머리가 쭈뼛거리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들을 탓할 일만은 아니다. 탐방로에는 보행자에 대한 배려가 애초부터 없었기 때문이다. 자전거 그림은 그려져 있지만 보행자 표시는 눈에 띄지 않는 것이다. 원래부터 자전거 도로이니 보행자가 알아서 피해가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내가 알기론 울산은 산업으로 인해 발달한 도시이다. 그렇다고 인간보다 기계가 우선시되는 그런 도시는 아니기를 바래본다. 다른 각도에서도 한번 살펴보자. 현대는 물을 만나면 돌아가고 산을 만나면 넘어가는 시대가 아니다. 다리와 터널로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세상인 것이다. 그렇다면 데크를 이용해서라도 둑을 조금 더 넓혔으면 어떨까 싶다. 그게 어렵다면 인본주의(人本主義), 즉 인간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된다는 생각에서 시설들을 보완해 주었으면 좋겠다.



현대자동차로 들어가는 것으로 보이는 갈림길이 나뉘면서 자전거의 행렬은 뚝 끊긴다. 그렇다고 자전거 길과 헤어진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자전거에 들이받힐 확률이 현저히 떨어졌으니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는가.



가는 길에는 현대자동차의 선적장도 만나게 된다. 줄지어 거대한 선박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자동차 행렬이 장관이었지만 사진 촬영은 하지 못했다. 이를 금지한다는 팻말이 붙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시간 조금 넘게 걸으면 성내삼거리가 나온다. 고가도로(高架道路) 아래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면 오른편은 방어진으로 가는 길, 해파랑길은 왼편 주전동 방향으로 이어진다. 삼거리에 세워진 이정표를 참조하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70번 지방도를 왼편에 끼고 걷다보면 또 다른 삼거리가 나온다. ‘염포(鹽浦), 3포 개항지라고 적힌 커다란 빗돌을 세워놓을 걸 보니 염포삼거리쯤 되나 보다. 염포는 경상좌도병마도절제사영이 설치되어 있던 곳으로 태종 때인 1418년 왜()에 대한 문호 개방 차원에서 부산포, 제포와 함께 개항이 된 역사를 갖고 있다. 왜관의 설치와 함께 왜인들이 상주했었는데, 1510(중종 5) 3포의 왜인들이 대마도주와 연합해 일으킨 삼포왜란으로 인해 염포에 있던 왜관은 폐쇄되었다. 이후 제포만 다시 개항했다가 다시 부산포로 개항이 옮겨지게 되었다.



트레킹 날머리는 염포삼거리 근처 SK주유소(울산시 북구 염포동 990-5)

삼거리에서도 역시 오른편의 주전동 방향으로 향한다. 이곳에도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니 참조하면 될 일이다. 삼거리에서 100m쯤 더 걷자 트레킹이 종료되는 SK주유소가 나온다. 주유소의 북쪽 귀퉁이로 난 골목 입구에 해파랑길 안내도와 함께 이정표(염포산 정상 1)를 세워 다음 구간인 8코스가 이곳에서 시작됨을 알려주고 있다. 아무튼 오늘 트레킹은 총 4시간 40분이 걸렸다. 식사를 하느라 멈추었던 시간을 감안하면 4시간 10분쯤 걸은 셈이다.


해파랑 4코스

 

여행일 : ‘18. 7. 21()

소재지 : 울산시 울주군 서생면 일원

산행코스 : 신리항(4.3)나사해변(2.5)간절곶(4.4)진하해변(거리 및 소요시간 : 12, 3시간 30)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임랑해변에서 진하해변까지 이어지는 4코스는 부산과 울산의 경계를 넘는 코스이다. 내륙을 통과하는 초반은 볼거리가 거의 없으나 신리항부터 시작되는 해안길을 만나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나사리와 송정리 등 바닷가 마을들을 지나는 해안풍경이 자연 그대로의 맛을 느끼게 만들기 때문이다. 누가 뭐래도 이 구간에서의 백미(白眉)는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일출을 볼 수 있다는 간절곶이 아닐까 싶다. 등대를 중심으로 공원처럼 조성되어 있는데 간절곶의 의미를 되새기려는 듯 여러 가지 조형물들을 세워놓아 이를 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해파랑길 4코스는 원래 임랑해변에서 진하해변까지의 19.9구간이다. 하지만 난 임랑해변에서 신리항까지의 구간은 생략하기로 했다. 눈요깃거리가 그나마 있는 월내항까지의 구간은 지난번 3코스 때 이미 끝냈었고, 그 나머지 구간은 삭막하기만 할뿐 별다른 볼거리가 없다는 걸 미리 알았기 때문이다. 수은주가 34를 오르내리는 무더운 날씨도 그런 결정을 내리는 원인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겠다.


 

트레킹 들머리는 신리항(울주군 서생면 신암리)

동해고속도로(울산-부산) 장안 IC에서 내려와 부산방면 14번 국도를 탄다. 잠시 후 좌천고가도(기장군 장안읍 좌천리)에서 59번 지방도를 이용해서 31번 국도의 임랑삼거리(장안읍 임랑리)로 옮긴 후 울산방면으로 달리면 얼마 지나지 않아 신리삼거리(울주군 서생면 신암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접어들면 잠시 후 트레킹을 시작하려고 하는 신리항에 이른다. 1970년대 초 고리원자력발전소가 세워지면서 고리에 살던 주민 27세대가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생겨난 마을이라는데 한적한 어촌마을 풍경이다. 그러나 수협이 들어섰을 정도로 호황을 이루던 때도 있었다고 한다. 2004년 어촌정주어항으로 지정될 즈음에는 태풍이라도 불어올라치면 이 일대의 어선들이 모두 이곳으로 모여들었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탐방로는 항구의 끄트머리에 이르기 조금 전, 그러니까 신리 회센터건물을 왼편에 낀 골목으로 들어선다. 이어서 작은 텃밭 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 언덕을 넘자 또 다른 바닷가가 나타난다. 동글동글한 모양새를 하고 있는 바위들이 널린 독특한 풍경의 바다이다. 계란처럼 껍질이 벗겨지는 형상이라고 해서 공돌 또는 알돌이라고 부른단다. 생김새는 몽돌과 비슷하지만 훨씬 더 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아무튼 이 근처는 바위 사이로 모여드는 물고기 덕분에 낚시가 잘 되는 것으로 알려져 강태공들 사이에는 명소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잠시 후, 그러니까 길을 나선지 10분 만에 신암마을에 이른다. 신암포구를 끼고 있는 신암마을의 역사는 1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윤씨(尹氏)를 시작으로 안씨(安氏)와 이씨(李氏)가 차례로 들어와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세 성씨의 시조들이 모여 마을의 이름을 짓기 위해 의논하고 있는데 그들 앞에 구름처럼 크고 흰 바위가 나타났다 사라졌던 모양이다. 그래서 구름 운()’ 자와 바위 암()’ 자를 따서 운암동(雲岩洞)이라 정했다는 것이다. 현재의 이름인 신암(新岩)은 운암동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이는데 정확한 근거는 모르겠다. 아무튼 이 마을은 광복 이후에 그 규모가 비대해졌다고 한다. 그래서 신암회관을 중심으로 서남쪽을 중리, 동북쪽은 송리로 나누려고 했으나 주민들의 반대로 실패했단다. 현재 신암리에는 신리와 신암, 비학의 행정마을이 있다.



포구의 한가운데에 마을의 안녕을 빌기 위한 사당(祠堂)이 지어져 있다. 마당에는 운암동(雲岩洞)이라고 적힌 빗돌이 보인다. 이곳 신암리(新岩里)의 옛 이름이니 마을의 공동 수호신(守護神), 별신(別神)’을 모시는 신당(神堂)이 아닐까 싶다. 이곳 신암리에서 지내는 별신굿 풍어제가 제법 유명한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별신굿이란 마을의 무속적 축제 가운데 하나로 그 역사는 유구하다. 부산지방에는 요즘 별신굿을 일반적으로 풍어제라 하고 있으나, 예전에는 별신굿 또는 뱃선굿이라 호칭했다고 한다. 별신굿이 고대로 부터 전래한 부족국가의 제천 의식이었던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의 무천(舞天) 등의 국중대회(國中大會)’가 하회(河回)와 같은 마을행사로 축소되고, 한편으로는 해변 어촌의 행사로 변천해 간 듯하다. 따라서 별신의 개념을 사적 가신(私的 家神)’에 대비해서 초가정적·공적인 마을의 공동 수호신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마을의 신은 온 마을이 공동으로 모시는 신격이므로 신역(神域)에 있는 신당에다 별도로 모신 별신(別神)이라고 볼 수 있다는 얘기이다.



포구의 끄트머리에서 툭 튀어나온 모퉁이를 돌아서자 또 다른 항구가 나타난다. 파도를 막아주는 방파제의 이름이 신암이니 또 다른 신암항인 셈이다. 마을에 포구가 두 개나 들어섰다는 얘기이다. 아무튼 방파제의 벽면에는 바다풍경이 그려져 있다. 해녀가 많은 이곳의 특징을 살린 것이 아닐까 싶다.




방파제에는 독특한 모양새의 등대가 바다를 향해 서있다. 둥근 원통형의 획일적인 모양을 하고 있는 보통의 등대가 아니라 맥주잔처럼 생긴 것이다. 이곳을 답사했던 어느 기자는 왕관처럼 생겼다고도 했다. 하지만 본래의 모티브(motive)우산이 접혀진 형상이란다. 역시 난 예술에 문외한이 분명하다. 아니 너무 술을 좋아하다보니 그리 보였을 수도 있겠다.



해안의 끄트머리에는 작은 해수욕장이 자리 잡았다. 화장실 등의 편의시설은 보이지 않고, 열 개 남짓한 비치파라솔이 모래사장에 꽂혀있을 따름이다. 그래도 이름만은 반듯하게 지어놓았다. ‘신암 해피비치라니 이름만 듣고는 이렇게 작은 해수욕장인줄 누가 알겠는가.



신암항에서부터는 국토종주 동해안자전거길과 겹친다. 자전거가 지나다니는 길을 함께 써야 한다는 얘기이다. 거기다 2차선의 자동차도로와도 함께 쓰는데 경계선이 애매하다. 안전에 각별한 주의가 요구되는 구간이라 하겠다. 아무튼 해파랑길은 이제부터 간절곶 소망길을 따른다. 덕분에 길이 잘 정비되어 있다. 걷기 좋은 길이 생겼으니 외롭게 홀로 걷던 도보 여행자에게는 신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나 같은 여행자들이 부쩍 늘어났을 것이고, 지역경제 또한 이전보다 많이 좋아졌을 게 분명하다. 이런 게 바로 일석이조(一石二鳥)가 아니겠는가. 참고로 간절곶 소망길은 한반도에서 제일 먼저 새해를 여는 간절곶의 명칭과 해맞이를 통해 한 해의 소망을 기원하는 바람의 의미를 담아 만들어진 해안 길이다. 명선교에서 시작하여 남쪽 해안을 따라 신암항까지 10km 구간에 나있으며, 사랑, 낭만, 행복 등 다섯 가지 테마의 코스로 이루어져 있다.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구간은 이 다섯 개의 코스 가운데 마지막 구간인 행복의 길(신암항에서 나사항까지의 1.3구간)’이다.



오가는 차들을 살펴가며 잠시 걸으니 길가에 신암리유적(新巖里遺蹟)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안내판에는 발굴현장과 출토유물 등의 사진과 함께 이에 대한 설명을 적어 놓았다. 1935년 일본인 사이토 마코토(齋藤忠)에 의해 즐문토기 유적으로 처음 알려졌으며, 본격적인 발굴조사는 1966년과 1974, 1989년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에 형성된 남해안의 대표적인 신석기시대 유적의 하나로, 토기·석기뿐 아니라 토제 여신상(土製 女神像)’ 등 신석기 시대의 정신세계를 알 수 있는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일본 승문(繩文) 시대 유물도 출토됨으로써 일본과의 교류양상도 알 수 있게 해준 중요한 유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지역 주민들에게는 별다른 의미를 주지 못했던 모양이다. 안내판 주변이 온통 쓰레기들로 뒤덮여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탐방로는 계속해서 자전거길을 따른다. 아예 자동차길과 자전거길이 구분조차 없어져버린 길을 잠시 걷자 서생중학교가 나오고 이후부터는 국도 31선을 따른다. 자동차가 지나다니면서 일으키는 바람소리가 간을 졸이게 만드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구간이다. 비록 폭은 좁지만 가장자리에 보행자 전용 길을 만들어 놓은 게 그나마 다행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20분 정도를 걷자 나사(羅士) 마을이 나온다. 물론 신암항에서부터 걸린 시간이다. 참고로 나사(羅士)라는 마을 이름은 모래가 뻗어나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후에 선비가 많이 배출되기를 원해서 선비 사()’ 자로 바뀌었단다. 마을은 지금으로부터 약 360년 전 인조(16241649) 후기에 달성 서씨가 먼저 들어왔다 하며 이후 광주 이씨경주 최씨등이 들어와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도로에서 내려오면 나사포구가 광활하게 펼쳐진다. 포구와 함께 백사장도 길게 이어지고 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후련해진다. 동으로 대구장끝과 남쪽의 신선암이 활처럼 감싸 안은 길고도 넓은 해안이다. 해변의 길이가 1쯤 되는 모래사장은 정식 해수욕장은 아니란다. 그런데도 바닷가는 피서객들로 넘치고 있다. 하긴 이렇게 넓은 백사장을 그냥 내버려둘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바다에 물막이처럼 생긴 둑이 쌓여있는 게 보인다(아래 두 번째 사진 참조). 작년엔가 이곳 나사해안에 이안제 설치공사를 한다는 기사를 본 것 같은데 저걸 두고 하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이안제(離岸堤)’란 해안선과 떨어진 해면측에 해안선과 평행으로 설치하는 것으로, 해변에 작용하는 파력(波力)을 감세(減勢)하여 해변을 안정화하는 것이 주목적이다. 당시 기사에서는 이안제 설치를 통해 백사장 확장을 추진하는 한편 양빈(養濱 : 해안 침식을 막기 위하여 침식 해안에 모래를 보급하여 인위적으로 해변을 조성하는 일), 데크 설치, 해빈광장 조성 등을 통해 나사해수욕장 활성화를 추진할 계획이라고도 했다.



바다에는 패들보드(Stand Up Paddle board, SUP)를 즐기는 사람들도 여럿 보인다. 왠지 낯설어 보이는 풍경이다. 우리나라와 패들보드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왔던 내 선입견 때문일 것이다. 나도 이젠 바닷가로 나가볼 때가 되었나 보다. 서핑보드(Surf boards)를 해보고 싶었지만 두려움 때문에 그만두었었는데 대신 할 수 있는 걸 발견했으니 말이다.



나사해수욕장의 또 다른 특징은 해변 바로 옆에 방파제와 등대가 있다는 것이다. 파란색 문이 인상적인 등대는 이국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겨 사진촬영 때 배경으로 삼기에 딱 좋겠다. 또한 이 방파제는 강태공들이 좋아하는 낚시터로 알려져 있다. 가족끼리 왔을 경우 아빠는 이곳에서 낚시를 하고 엄마와 아이들은 백사장에서 물놀이를 하면 되겠다.



방파제에 안내판 몇 개가 세워져 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에도 두어 곳에서 이런 안내판들을 볼 수 있었다. 지명의 유래나 구전(口傳) 이야기 등 적혀있는 내용들이 다양하다. 하지만 하나같이 하단에다 간절곶소망길 스토리텔링 중에서라는 문구를 적어 넣었다. 2년쯤 전엔가 간절곶 소망길의 전설과 유래 등을 담은 스토리텔링 책이 발간되었다는 기사를 본 것 같은데 이를 옮겨놓은 것이지 싶다. 전체 5개 구간 82개의 스토리로 구성된 스토리텔링은 주인석 작가가 서생면지, 울주문화원 문헌과 현지주민과의 현지 인터뷰 등을 기초로 집필했다고 한다.



이젠 평동항으로 가야할 차례이다. 이곳에서 2.4거리인데 간절곳 소망길4구간인 사랑의 길이기도 하다. 나사항의 끄트머리에 있는 모퉁이에서 해안가로 내려서지를 않고 그냥 해안도로(간절곶해안길)을 따른다. 비록 도로를 따르기는 하지만 기괴한 바위들이 널려있는 아름다운 바다를 바라보며 걷는 재미가 쏠쏠한 구간이다.



쉼 없이 부서지고 깨지는 파도 너머로 코발트 빛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짙푸른 동해가 끝없이 펼쳐진다. 시선을 아무리 멀리 두어도 그 끝은 수평선에 막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지만 그걸로 이미 위안을 얻기엔 충분하다. 걷기도 전에 시선과 마음을 모두 앗아가는 이런 풍경을 배경으로 국내 최장거리 걷기 길인 '해파랑길'이 이어진다.



아래사진과 같이 탐방로가 자전거길은 물론이고 차도와도 겹치는 구간이 있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길은 잘 닦여 있는 편이다. 폭이 넓은데다 조금이라도 위험하다 싶으면 데크계단이나 데크로드를 놓아 안전을 도모했다. 곳곳에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므로 길을 잃을 염려도 없다. 특히 조금이라도 볼거리가 있는 곳에는 스토리텔링 이야기판을 세워놓아 읽는 재미까지 더했다. 이만하면 나무랄 데가 없는 둘레길이라 할 수 있겠다. 하긴 해양수산부에서 선정한 전국의 52개 걷기 좋은 해안길, 즉 해안누리길에 선정되었을 정도이니 오죽하겠는가.



그렇게 30분 조금 못되게 진행하자 평동항에 이른다. 서생면 대송리(大松里)에 속한 자연마을로 마을 앞 바다에 포구가 조성되어있다. 평동이란 마을 이름은 들이 넓고 평평하다는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선착장이 이층으로 지어진 것 말고는 특별한 볼거리는 없는 평범한 포구라 하겠다.



간절곶 소망길은 이제 3구간인 소망의 길로 접어든다. 평동마을에서 간절곶공원까지 2.6구간이다. 이 구간도 역시 기괴한 바위들이 널려있는 바닷가를 오른편에 끼고 이어진다. 눈요깃거리가 제법 많다는 얘기이다. 그렇게 15분 조금 못되게 걷자 원형의 조형물이 세워진 대여섯 평이나 됨직한 데크 마당이 나온다. ‘응응광장이라는데 두 겹으로 이루어진 조형물의 안으로 들어가 사진을 찍는 것 외에는 특별한 게 없는 공간이다. 그런데도 스토리텔링의 이야기판까지 세워져있어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강양호와 진하랑의 사랑이야기인데 토대가 되는 장소가 이곳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 있는 회야강일뿐만 아니라 내용 또한 이곳과는 무관해보이기 때문이다.




응용광장을 지나자마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우뚝 솟아있는 하얀색 등대와 넓게 펼쳐진 잔디밭이 눈에 들어온다. 이 일대가 간절곶 공원이다. 간절곶(艮絶串)이라는 이름은 고기잡이를 나간 어부들이 먼 바다에서 이곳을 바라보니 마치 긴 간짓대(대나무 장대)처럼 생겼다고 한 것에서 유래됐다고 전해진다. 곶은 육지가 바다로 돌출해 있는 부분을 의미하므로 간절곶으로 부르게 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넓고 길다는 의미를 가진 이길곶으로 불리기도 하였고,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는 간절포로 기록되어 있다. 간절곶은 한반도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뜨는 곳으로 매년 11일이면 새해 첫 일출을 보려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는 것으로 유명하다. 트레킹을 시작한 신리항에서 이곳까지는 1시간30분이 걸렸다.



간절곶은 정동진, 호미곶과 함께 동해안의 대표적인 일출 명소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가장 먼저 해를 볼 수 있는 곳은 이곳 간절곶이라고 한다. 이는 국립천문대와 새천년준비위원회에서 증명해준바 있다. 새천년(2000)의 첫날(11) 오전 73126초에 해가 떴다며 그 장소가 바로 이곳 간절곳이었다는 것이다. 하긴 간절곶에 해가 떠야 한반도에 새벽에 온다(艮絶旭肇早半島)’는 말이 괜히 나왔겠는가. 2000년에 세워졌다는 간절곶 표지석의 뒷면에는 이곳을 찾은 분과 그 후손은 새천년에 영원히 번성할 것입니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같은 내용이 한자와 일어, 그리고 영어로도 표시되어 있으니 국제용인 셈이다. 아무튼 이곳에서는 매년 1231일부터 그 다음날인 11일까지 간절곶 해맞이축제가 개최된다고 한다.



표지석 옆에는 굴뚝을 닮은 조형물이 하나 세워져 있다. 작년엔가 포르투갈의 해넘이 마을 '카보 다 로카(Cabo da Roca)'에서 보았던 조형물을 쏙 빼다 닮았다. 높이 8m에 폭이 1.5~2m라고 하는데 꼭대기에 십자가가 없다는 게 다를 뿐이다. 하단에는 포르투갈의 국민시인 '루이스 바스 드 카몽이스(Luis Vaz de Camoes; 1524 ~ 1580)'가 쓴 시 구절까지 적어 놓았다. ‘여기서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도다(Aqui,.. onde a terra se acaba e o mar comeca)’. 얼마나 멋진 표현인가.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 마을에서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해를 바라보는 심정으로 이곳 간절곶에서 해가 떠오르는 것을 바라보라는 의미인가 보다. 육지의 끝이 아니라 바다를 향한 새로운 출발이라는 이미지를 품고서 말이다.



한켠에는 높이가 5m에 이른다는 엄청나게 큰 우체통도 만들어 놓았다. 1970년대에 사용된 옛 우체통을 본떠 만든 것으로 본래의 기능을 수행하는 진짜 우체통이라고 한다. 소망하는 바를 엽서에 적어 넣을 경우 실제로 배달이 된다는 것이다. ‘소망 우체통이란 이름이 붙게 된 이유이다.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가 없어 주변을 두리번거려 보지만 엽서를 구입할만한 판매점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만들 내가 아니다. 내가 전하고 싶은 상대가 옆에 있고, 전하고 싶은 소망은 단 하나 사랑이니 말이다. 집사람에게 다가가 허그(hug)’를 시도해보지만 집사람은 손사래를 친다. 그래 오늘은 사랑도 귀찮을 정도로 찜통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철이다.



우체통에서 대각선 언덕으로는 간절곶 등대가 있다. 이곳에 처음 등대가 생긴 것은 1920, 지금의 등대는 새천년이 시작되는 2001년에 새로 만든 것이다. 그래서 이름도 '해맞이 등대'가 되었다. 이곳은 국립천문대와 새천년준비위원회가 새천년의 해가 가장 먼저 떠오른 장소로 공포함에 따라 더욱 유명해졌다. 주변 경관도 빼어난 편이다. 이른 봄, 꽃이 피는 시기가 되면 이곳 등대에서 바라다보는 유채꽃밭이 특히나 아름답다고 한다. 그렇다고 다른 계절이라고 해서 하등에 뒤질 것은 없다. 푸른 바다가 거문고 소리가 되어 흐르는 바닷가이니 어느 계절인들 절경이 아니겠는가.



등대는 백색 8각형의 기둥에 지붕은 10각형으로 동기와를 얹어 한옥의 멋을 냈고 전망대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한마디로 멋진 자태다. 하긴 울산 동구의 울기등대와 함께 아름다운 등대 16경에까지 선정되었다니 어련하겠는가. 아무튼 오랜 세월 동안 뱃길을 인도하며 한 자리를 고집하고 있는 희고 정갈한 모습에 경건함마저 든다. 참고로 이 등대는 누구나 자유롭게 올라가볼 수 있다고 한다. 원통형의 등대 안으로 들어가 나선형의 계단을 오르면 전망대에 이를 수 있단다. 하지만 오늘은 문이 굳게 닫혀있다. 일품이라는 전망대에서의 조망을 보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마당의 한쪽 귀퉁이에는 조형등탑을 복원해 놓았다. 1979년부터 2001년까지 20여 년 동안 동해안을 밝혀오던 등대의 등탑(燈塔)이란다. 신등탑을 건립하면서 철거된 기존 등대의 등롱(燈籠)과 등명기(燈明機)를 설치하여 상반부를 복원했다는 것이다. 그 옆에는 연인체험 용으로 (Something의 파생어)’ 코너를 만들어 놓았다. 요즘 따라 내꺼인 듯 내꺼 아닌 내꺼 같은 너, 연애와는 알게 모르게 다르면서 어떻게 다른지는 모르겠다는 ’, 그런 썸을 직접 체험해보라는 것이다. 이용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하트모양의 포토죤 주위에 세워진 네 개의 부스에서 이름, , 혈액형 등으로 커플궁합을 맞추어보면서 상대방의 애정도(愛情度)까지 확인하면 된다. 궁합을 맞춰보지 않았던 우리 부부이기에 이제라도 맞춰볼까 했지만 이왕에 늦었으니 그냥 살아가라는 모양이다. 난데없이 금()줄이 쳐져 있는 걸 보면 말이다.



대충 둘러봤으면 이젠 또 길을 나설 차례이다. 큰 날개를 편 풍차가 운치를 더해 주는 아름다운 해안길이다. 높이 15m짜리로 포토죤(photo zone)‘으로는 이만한 곳도 없을 듯 싶다. 저런 풍차를 사진의 배경으로 넣었을 경우 비행기를 타지 않고도 낯선 이방의 세계를 연출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멋진 '인생 샷'을 건질 수도 있을 것 같은 분위기라 하겠다.



몇 걸음 더 걷자 대송항이다. 이곳의 명물은 시계탑광장인데 지금은 경관 정비공사가 한창이다. 해안을 매립해 만든 너른 광장의 한가운데에는 시계를 넣은 철제 조형물이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시계탑광장이란 이름이 붙었나 보다. 파고라(pergola의 일본식 발음)’의 외관이 특이하게 생겼다는 것 말고는 별다른 볼거리가 없으나 여름철이면 음악회나 가요제 등이 자주 열리는 울주군의 문화 명소라 여기면 되겠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혜은이, 진시몬, 이재성 등이 출연하는 울주군 간절곶 오딧세이84일에 이곳에서 열린다는 것을 알리는 현수막이 난간에 매달려 있다. 아무튼 이곳에서 난 방파제 끄트머리에 있는 붉은색 등대에 들러본다는 것을 깜빡 잊고 말았다. 연인들을 위한 프러포즈 등대가 있다는 데도 말이다. 등대에 서면 음악과 팡파르가 흘러나오면서 낭만적인 분위기가 연출된다는 것이다. 덕분에 난 집사람에게 재도전 해볼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아직까지도 날 받아줄 만한 사랑과 열정을 간직하고 있을지가 궁금해지는 건 나만의 인지상정(人之常情)이 아니겠지?



시계탑의 뒤로 가자 간절곶 드라마세트장의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MBC 드라마인 메이퀸욕망의 불꽃그리고 TV조선에 방영했던 한반도의 포스터가 붙어있는 걸로 보아 이 드라마들의 촬영세트장이 이곳에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언덕 위로 오르니 중세 서양의 궁전(宮殿)을 쏙 빼다 닮은 이층 건물이 나타난다. (dome) 모양의 작고 예쁜 건축물도 보인다. 지난 2010MBC 주말드라마 욕망의 불꽃촬영을 위해 지은 드라마세트장이라고 한다. 해주의 아버지를 죽이고 조선소를 집어삼킨 장도현의 저택이란다. 이후 메이퀸한반도등 각종 드라마와 영화 촬영지로 전국적인 명성을 날렸다. 그러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걸로 보아 지금은 비어있는지도 모르겠다. 촬영이 끝난 후 활용문제로 골머리를 썩이다가 지난 2015년엔가 갤러리(gallery)와 카페로 새 단장을 했다고 하더니 그것마저도 여의치 않았던가 보다.



MBC-TV에서 방영했던 메이 퀸출연 배우들의 실물 모습을 재현한 포토존도 만들어져 있다. 김재원, 재희, 한지혜 등 선박을 둘러싼 등장인물들의 성공 스토리를 그린 이 드라마는 2012년 방영 당시 26.4%의 시청률을 보일 정도로 높은 시청률을 보이기도 했다. 집사람이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리가 없다. 그리고 두 남자의 사이로 쏙 파고든다. 젊고 예쁜 남자를 좋아하는 그녀는 아직도 소녀가 분명하다.



간절곶회센터를 지나자 탐방로는 숲속으로 파고든다. 비록 잠깐이지만 빽빽하게 들어찬 해송(海松)들이 하늘을 가려주는 멋진 숲길이다. 잠시 후 탐방로는 바닷가로 내려선다. 그리곤 나무계단을 이용해 해안가 바위절벽을 오르내리며 이어진다. 바위벼랑과 해송, 그리고 푸른 바다가 함께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풍경이 끊임없이 펼쳐진다.



잠시 후 어촌관광단지로 조성된 송정항에 이른다. 간절곶에서 출발한지 35분만이다. 이곳도 역시 해안을 끼고 있으나 모래사장으로 이루어진 다른 해안들과는 달리 동글동글한 자갈들이 깔려있는 몽돌해안이다. 그래선지 가족나들이 나온 피서객 몇 명만 보일뿐 한적한 풍경이다. 이곳의 볼거리는 바다 한가운데에 만들어놓은 시설이 아닐까 싶다. 얼핏 양식시설로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는 유료 낚시터라고 한다. 낚시를 좋아하는 관광객들을 위해 만들었다는데 배를 타고 들어가야만 낚시를 할 수 있다니 보기 드문 풍경이라 할 수 있겠다.



송정항을 지나자 바다거북이가 그려진 너른 광장을 만나고 이어서 바위벼랑에 걸터앉은 전망대에 올라선다. ‘송정공원으로 추정되는데 바로 이웃에 있는 송정항은 물론이고 바다 저 너머에 있는 울산시가지까지 한눈에 쏙 들어오는 멋진 전망대이다. 벼랑 아래에는 크고 작은 바위들이 널려있다. 그래선지 전망대에다 스토리텔링 안내판을 두 개나 설치해 놓았다. 원님의 욕심을 날려버릴 정도로 맛있는 미역이 채취된다는 미역바위, 상납돌과 왜가리들이 떼를 지어 논다는 왜갈돌이다.




이후부터 탐방로는 바닷가를 따른다. 걷는 게 다소 불편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웬만한 태풍에도 개의치 않을만한 데크로드를 만들어 놓았으니까 말이다. 이 구간에서의 특징은 양식장이 아닐까 싶다. 규모가 엄청나게 클 뿐만 아니라 기괴하게 생긴 건물까지 들어서있어 자못 이색적인 풍경을 연출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잠시 걸으면 솔개공원에 이른다. ‘처럼 툭 튀어나온 모퉁이에 돌의자 등을 놓아 탐방객들이 쉬어갈 수 있도록 했다. 이곳에서의 조망 또한 좋다. 진하해수욕장은 물론이고 울산공단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이어서 반석이 깔려있는 해안가를 조금 더 걸으면 이번에는 아예 데크전망대까지 만들어 놓았다. 아름다운 주변 경관을 실컷 즐겨보라는 모양이다.



이 부근도 역시 수많은 돌섬들이 바다에 널려있다. 밀물 때는 어김없이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 암초와 같은 섬들이다. 그중에 유난히도 큰 바위집단이 눈길을 끈다. 스토리텔링 이야기판에 두꺼비 처녀바위에 대한 설명이 적혀있었는데 저 바위를 이르는지는 모르겠다. 아니 이곳 주민으로 보이는 분이 가마우지섬이라고 알려주는 것을 보면 내가 생각을 잘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공원산책로가 끝나면 널따란 솔개해수욕장에 내려선다. 푸른 하늘과 파란 바다가 어우러진 솔개해수욕장은 바위지대를 끼고 있어 멋스러운 자연 풍광을 연출한다. 하지만 텐트들이 많이 비어있는 걸 보면 찾는 사람들은 많지 않은가 보다. 그렇다면 조용히 힐링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장소이겠다. 맑고 푸른 바다에다 모래까지 고우니 말이다. 이런 곳에서는 걷기 수월한 데크로드만을 고집할 게 아니라 모래사장을 걸으며 발 도장을 남겨보는 것도 재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송정해안에서 이곳까지는 25분이 걸렸다. 맥주를 마시느라 잠깐 쉬었던 시간을 포함해서이다.



모래사장이 끝나면 또 다른 비경인 바위지대가 나온다. 어느 것 하나 모양새가 같은 게 없는 기암괴석들이 바닷가에 널려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신랑각시바위가 아닐까 싶다. 두 개의 바위가 마주보고 있는데, 서있는 게 신랑바위는 각시바위는 앉아서 절을 하는 모양새란다. 이곳에도 스토리텔링 이야기판이 세워져 있지만 정교한 맛이 없는 것 같아 옮기는 것은 생략했다.



바위지대를 지났다싶으면 대바위공원이다. 옛날 울릉도를 지키던 할랑할미가 간절곶 몽돌을 주워갖고 돌아가는 길에 초동들의 노랫소리에 홀려 뛰어놀다 흘린 돌들이란다. 그 돌들을 통틀어서 대바위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그 바위들이 몰려있는 해안가 산자락에다 널따란 공간을 만들고 대바위공원이라고 적힌 커다란 빗돌까지 세워두었다. 이 공원의 주요 시설로는 산책로와 달바라기언덕, 명선전망대 등이 있다고 한다. 간절곶에서 이곳까지는 간절곶 소망길2구간인 낭만의 길(2.1)’이다.



일대의 바위 가운데 가장 큰 바위가 있는 언덕에는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전망대에 서면 진하해수욕장 주변을 한눈에 관망할 수 있다.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화 속의 명선도가 크게 그려진 것을 보면 얼마안가 트레킹이 마감될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길을 잘 닦아놓았는데 출렁다리라고 빠졌을 리가 없다. 탐방객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출렁다리가 아니겠는가. 멋으로 만들었으니 다리 아래에 물이 없음은 물론이다.



출렁다리를 건너면 울주 해양레포츠센터이다. 울산 지역 최초의 해양레포츠센터인 이곳은 고무보트와 패들보드, 윈드서핑, 카약 등 각종 해양 장비들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3층 규모의 본관 1동과 편의시설 및 관리시설 2동으로 이루어졌는데, 해양레저교육을 위한 강의실, 세미나실 등에서 각종 자격 연수는 물론 취미 및 여가생활을 위한 체험활동이 이루어진단다. 건물의 옆 해송 숲속에는 캠핑장과 카페테리아 등의 부대 편의시설, 어린이 놀이터와 바닷길 산책로까지 조성돼 있다. 남녀노소 함께 어울려 즐기기 딱 좋겠다.



캠핑장이 끝나는 지점에서 왼편으로 틀면 주차장이다. 산악회의 버스는 이곳에 주차되어 있지만 난 계속해서 백사장을 따른다. 진하해수욕장의 또 다른 명물인 명선도를 탐방해보고 싶어서이다. 진하해수욕장은 해양레포츠센터에서 시작해 명선교에 이르는 2길이의 해수욕장으로 완만하게 휘어지는 넓은 백사장과 송림(松林), 그리고 점점이 흩어져 있는 작은 섬들이 함께 어우러지며 한 폭의 그림을 그려내는 곳으로 유명하다. 방풍림 아래로 난 데크로드를 따른다. 1남짓한 길의 왼쪽으로 죽 늘어선 모텔촌과 수조 가득 해산물을 채운 횟집들이 진하해수욕장의 규모를 말해준다. 딱히 피서철이 아니더라도 많은 관광객들이 찾을 게 분명하다는 얘기이다.



백사장의 끄트머리 즈음에서 신선이 하늘에서 내려와 놀던 섬이라는 명선도의 입구가 나온다. 해송(海松)과 일출로 유명한 명선도는 면적 1900, 둘레 500m의 무인도이다. 예전에는 말 그대로 섬이었다지만 지금은 뭍과 연결돼 있다. 해당화나 갯메꽃이 많이 피는 곳이라 해서 사진이라도 찍어볼까 하고 모래톱을 따르다가 걸음을 멈추고 만다. 중간쯤에 출입금지 경고판이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진하어촌계의 공동양식장이니 주민 외에는 출입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연이 열어준 길을 사람들이 막아버린 셈이다. 이곳뿐만이 아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이런 경고판을 수도 없이 만날 수 있었다. 참고로 간절곶 소망길1구간인 연인의 길(1.6)은 이곳에서 조금 더 진행해야만 끝난다. 저 앞에 보이는 명선교가 시점(始點), 나로 봐서는 종점이기 때문이다.



에필로그(epilogue) : 오늘 트레킹은 총 3시간 30분이 걸렸다. 핸드폰에 깔아놓은 앱(application)12를 걸었다고 알려준다. 오늘 걸었던 코스가 평지였던 점을 감안할 때 시간 당 3.5는 꽤 더디게 걸었다고 볼 수 있다. 주변 경관을 카메라에 담느라 더딜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감안해도 말이다. 이는 무더위 때문이 아닐까 싶다. 수은주가 34를 오르내리는 무더위에, 그것도 햇빛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될 수밖에 없는 해안길을 걷는 게 어디 그리 쉬웠겠는가. 걷는데 이골이 날 정도의 전문 산꾼들은 오늘도 4코스(19)를 완주했다. 그리고 하나같이 죽는 줄 알았다는 말로 트레킹을 마쳤다. 이는 오늘의 제반 여건이 그들에게도 악조건으로 작용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로보아 오늘 같이 무더운 여름철, 특히 햇빛이 날 경우에는 해파랑길걷기가 적합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난 8월 달의 일정에서 해파랑길 트레킹을 빼놓기로 했다. 같은 달 하순에 있는 터키여행의 일정과 겹쳐서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해파랑 3코스

 

여행일 : ‘18. 7. 7()

소재지 : 부산시 기장군 일원

산행코스 : 대변항죽성리 해안택시 탑승일광해변동백항신평소공원칠암항임랑해변월내항(이동거리 : 택시 탑승구간 포함 21.84)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기장은 예로부터 아홉 개의 포구가 있다고 해서 기장구포(機張九浦)로 불리었다고 한다. 화사을포(火士乙浦. 고리), 월내포(月來浦, 월네·임랑), 독이포(禿伊浦, 문오동·칠암·신평), 동백포(冬柏浦), 동백), 기포(碁浦, 이동), 이을포(伊乙浦, 일광·이천), 무지포(대변), 공수포(公須浦, 공수), 가을포(加乙浦, 송정)를 말한다. 오늘 걷게 되는 해파랑길 3코스는 이 가운데 대변에서 임랑까지 6개 포구를 잇는 해안선을 따라 이어진다고 보면 되겠다. 부산판 올레길인 갈멧길1-1코스와 1-2코스의 일부분과도 겹친다. 아무튼 이 코스도 바다를 끼고 이어지기 때문에 아름다운 경관들이 끊임없이 나타난다. 오영수의 소설 '갯마을'의 무대를 지나는가 하면 옻을 칠한 것처럼 검은 빛으로 일렁이는 칠암 바다 등 눈요깃거리가 쏠쏠하게 나타난다는 얘기이다. 또한 포구마다 갖고 있는 각양각색의 등대들도 빼놓을 수 없는 구경거리라 하겠다. 그중에서도 백미(白眉)는 단연 죽성리 해안이 아닐까 싶다. 갯바위 위에 드라마세트장으로 지어진 교회는 지나는 사람들이 누구나 기념촬영을 하고 갈 만큼 예쁘고, 해파랑길을 걸으며 만나는 수많은 신목(神木)들 중에 당당하기로 세 손가락 안에 든다는 해송(海松)‘이 그 뒤를 이어 나타난다. 그밖에도 임진왜란의 아픈 흔적이랄 수 있는 왜성(倭城)‘도 죽성리에 있다. 이야깃거리야 볼거리가 몰려있다는 얘기이다.


 

트레킹의 들머리는 대변항 멸치광장‘(기장군 기장읍 대변리 444-80)

대변항의 옛 이름은 대변포(大邊浦), 이는 '대동고(대동미 창고) 부근의 포구'라는 뜻인 대동고변포(大同庫邊浦)‘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대변항의 특징은 단연 멸치라고 할 수 있겠다. 전국 멸치 생산량의 60%를 차지하며 싱싱한 멸치회를 맛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니 말이다. 그래선지 바닷가에다 멸치를 주제로 한 널따란 광장을 조성해 놓았다. 이름 또한 멸치광장이란다. 그러니 멸치를 모티브(motive)로 한 조형물 하나 세워놓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런데 그 조형물의 크기가 보통이 아니다. 멸치는 크기가 매우 작은 어류인데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크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멸치가 이 지역에 미치는 영향이 그만큼 크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하긴 매년 4월 말에서 5월 초 사이의 멸치 성어기에는 대변항을 중심으로 멸치 축제까지 열린다니 두 말하면 뭐하겠는가.




트레킹을 나서기 전에 흥선대원군이 세웠다는 척화비(斥和碑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292)‘부터 둘러보기로 한다. 이 비석이 자리 잡은 '대변초등학교'10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변초등학교는 독특한 이름 때문에 전국에 알려진 곳이나 지금은 용암초등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학교 이름이 놀림거리가 되었기 때문이란다. 부학생회장에 출마한 학생이 개명(改名)을 선거공약으로 내걸었고, 이 공약이 실현되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높이가 150쯤 되는 방형(方形)의 척화비는 초등학교의 담벼락 안에 세워져있다. 하지만 담장을 허리 높이로 낮게 쌓고 그 위를 개방시켜 놓아 학교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도 비석을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척화비란 1871년 흥선대원군이 서양 제국주의의 침략을 경계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세운 비석이다. 그는 국내적으로 국정쇄신을 통한 왕권강화정책에 초점을 맞추었고, 대외적으로는 서방 제국주의에 대해 쇄국정책으로 치달았다. 그리고 자신의 쇄국 의지를 모든 국민에게 알리고 경각심을 강화할 목적으로 전국의 중요 통로와 지점에 척화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당초 이 비석은 대변항 방파제 안쪽에 세워져 있었는데, 일제 때 축항(築港)을 하면서 바다에 버려졌던 것을 해방 후 1947년경 부락 청년들이 인양하여 현 위치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대변마을회관이 있는 동쪽 방향으로 진행하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길가에는 이 지역 특산품인 멸치와 미역 등을 파는 건어물 가게들이 즐비하다. 대변항은 전국 멸치 생산량의 60%를 차지하는 국내 최대의 멸치 산지로 유명하다. 또한 죽도 주변에서 채취된 미역은 질이 좋다고 세간에 알려진지 이미 오래이다. 이왕에 특산지에 왔으니 두어 개 챙겨가라는 건어물 가게 아주머니의 호객행위에 확신이 들어가 있는 이유일 것이다. 또 하나, 멸치회와 장어구이를 전문으로 하는 음식점들이 항구에 즐비하다는 것도 잊지 말자.



바닷가 포구를 빠져나온 탐방로는 한적한 시골길을 잠시 걷는 가 싶더니 이내 산자락으로 접어든다. 월전마을까지의 구간이 해안도로로 연결되기 전에 걸어 다녔던 옛길이란다. 이 부근의 특징은 아무래도 건조망(乾燥網)이 아닐까 싶다. 조그만 공터라도 나올라치면 어김없이 건조망을 깔아놓았기 때문이다. 지역의 특산품인 멸치나 미역을 말리기 위해서일 것이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5분쯤 되자 고갯마루에 올라선다.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봉대산((峰台山·229.4m)으로 올라가는 길(왼편)과 죽성마을로 내려가는 길(오른편)이 나뉘는 지점인데도 불구하고 이정표가 세워있지 않기 때문이다. 죽성리로 내려가는 길이 사유지라고 해서 막혀있기 때문이란다. 그로인해 죽성리로 연결되던 원래의 탐방를 봉대산으로 돌려놓았다는 것이다.



선두대장의 방향표시지를 무시하고 죽성리 방향으로 진행하기로 한다. 그를 따라 진행할 경우에는 죽성리 해안을 구경할 수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국수당과 왜성(倭城), 황학대 등 이야깃거리가 많을 뿐만 아니라 드림세트와 갯바위가 널린 바닷가, 해송(海松) 등 볼거리까지 널려있는데도 말이다. 그렇다고 마음까지 편한 것은 아니다. 혹시 길이라도 막혀있을지도 누가 알겠는가. 허나 이 또한 기우(杞憂)에 불과했다. 200m쯤 내려가는 지점에서 잠깐 길이 희미해지는 것을 제외하면 임도에 가까울 정도로 길이 고왔기 때문이다.



그렇게 15분쯤 진행하자 월전마을(이정표 : 기장군청4.1/ 오랑대6.8/ 대변항2.5)에 이른다. 월전(月田) 마을의 옛 이름은 달밭이고, 마을 앞 포구를 달밭개라고 불렀다. ‘은 높다, 또는 산이라는 뜻으로, 마을이 남산 기슭의 언덕을 개간하며 형성되어 경작지가 높은 곳에 있는 밭, 또는 산에 있는 밭이라는 뜻에서 달밭이라 하였다고 한다. 달밭을 한자명으로 하면 고산(高山) 또는 산전(山田)이 되어야 하는데, ()’을 차훈해 월전이 되었단다. 마을에 들어서니 바닷가에 지어진 활어판매장이 눈길을 끈다. 40여 가구의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 17년 간 공동으로 운영해오는 곳이라는데, 자리가 지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매달 주민들이 번갈아가면서 다른 상호로 이곳에서 영업을 한단다. 오늘 하루 일했다면 다음날은 쉬고, 그 자리는 다른 사람이 다른 상호로 영업하는 격이다. 주민 모두가 골고루 먹고 살자는 철학이 담겨있는 활어장이라 할 수 있겠다. 그 푸근한 마음이 나에게까지 전이(轉移)되었던가 보다. 뜬금없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도는 것을 보면 말이다. 밭을 널따란 마음으로 펼쳐보니 마을 이름은 곧 달뜬 마음으로 변한다. 파도소리 스며드는 언덕에서 달빛에 몸을 맡긴다고 상상해보자. 앞에는 이곳의 명물인 장어구이와 와인(wine) 한 병이 놓여있다. 아니 꼭 와인일 필요는 없겠다. 이런 분위기라면 소주라고 해서 분위기가 달라질 리가 없기 때문이다. 꼭 연인이 아니더라도 사랑이 쏠쏠 돋아날 게 분명하다는 얘기이다.



마을 앞 방파제에는 독특한 모양새의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전망대를 겸하고 있는 월전등대장어등대라고도 불리는데 장어에서 모티브(motive)를 땄다는 데서 연유된 이름이란다. 콘크리트 재질의 네모난 외관에 넣은 문양(紋樣)이 몸을 배배 꼰 장어가 수면을 박차고 치솟는 형상이라는 것이다. 안전 운항을 돕는 등대의 고유 기능에다가 관광과 지역특성을 감안한 디자인이라 하겠다. 참고로 이 등대는 200999일 첫 점등했다고 한다. 9가 두 번만 겹쳐도 행운이라고들 하는데, 세 번이나 겹쳤으니 행복에 겨운 날이라고 해도 좋겠다. 그러나 등()4초에 한 번씩 깜박인단다. 언뜻 불길한 숫자 같기도 하지만 야구 등의 스포츠에서는 서로가 탐내는 숫자이기도 하다.



월전리에서 낮은 고갯마루 하나를 넘자 또 다시 바닷가이다. 누군가는 이곳을 놀래미섬 해안이라고 적고 있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놀래미처럼 생겼다는 놀래미섬의 앞에 있는 해안이라는 것이다. 아무튼 해안가에는 예쁘장한 산책로가 만들어져 있다. 양쪽에 난간까지 둘렀는가 하면 아름다운 주변 경관을 구경이라도 하라는 듯이 바닷가에다 관람석까지 만들어두었다. 이제부터는 두호(豆湖)‘ 마을이다. 조선시대에는 두모포라 불리었는데 연안방어를 위한 수군이 주둔하던 군사요충지였다. 두모포진성의 일부가 지금까지 남아있으나 이 두모포진은 임진왜란 이후 부산 수정동으로 옮겨졌다.




조금 더 걷자 바닷가에 세워진 커다란 빗돌 하나가 눈에 띈다. 이곳이 두모포 풍어제가 열리는 장소임 알리는 빗돌이다. ’두모포 풍어제란 기장의 6개 어촌마을(두호, 대변, 학리, 칠암, 이천, 공수)에서 매년 정월 대보름을 전후해 한 개 마을씩 지내오는 풍어제 가운데 하나이다. 쉽게 말해 두호마을이 제주(祭主)가 되어 지내는 풍어제라고 보면 되겠다. 풍어제는 동해안 별신굿(중요무형문화재 제82-가호)의 또 다른 말로 바다가 중요한 삶의 터전이 되어온 기장에서 고기잡이를 나간 사람들의 무사 안녕과 만선을 기원하는 제()이다. 개인의 건강과 장수(長壽), 사업의 번창, 마을 사람들의 화합 등 마을 전체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소규모 지역축제라고도 볼 수 있다. 굿거리는 천왕굿, 용왕굿, 문굿, 제석굿 등 무려 50석이나 되지만 지역 실정에 따라 굿거리가 조정돼 행해진다고 한다.



빗돌 옆에는 포장마차들이 줄지어 들어서있다. 그런데 어느 집이나 할 것 없이 주요 메뉴를 장어구이로 내걸고 있다. 장어 굽는 냄새가 길을 막는 이유일 것이다. 맞다. 이곳 기장 앞바다는 붕장어가 대량으로 잡히는 곳 가운데 하나가 아니겠는가. 한류(寒流)와 난류(暖流)가 만나는 곳으로 물살이 세서 옛날부터 붕장어의 주요 생산지였다고 했다. 부산의 붕장어 어선들 대부분이 이곳에서 출항했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지금도 60여 척의 붕장어 배들이 어획작업을 하고 있는데, 가을 생산량만 해도 200~300톤에 이른단다. 붕장어는 큰놈은 통발어업으로, 작은놈은 주낙어업으로 어획하는데, 기장은 이 모두를 활용할 정도로 붕장어 어업이 성한 곳이란다. 그 가운데 작은 놈은 횟감으로 사용된다니 이곳 포장마차촌에서는 큰놈을 사용하고 있는가 보다.



잠시 후 바닷가에 솟아오른 갯바위를 올라탄 교회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회색 벽돌과 흰 벽체, 주황색 지붕이 푸른 바다와 어우러져 아름답다. 그 오른편에는 등대도 하나 들어앉았다. 이곳 죽성리의 명물이라고 할 수 있는 죽성리 성당이다. 하지만 진짜 성당은 아니다. 2009SBS-TV에서 방영했던 인기드라마 드림(Dream)’의 촬영세트장이라고 한다. 주진모, 김범, 손담비 주연의 드림은 소년원 출신 격투기 선수와 스포츠에이전트가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공에 이르는 과정을 담은 드라마이다. 당시 이곳에서 주인공들의 지옥 훈련 씬(scene)과 최종회의 피날레 씬(finale scene) 등을 촬영했단다.



아무튼 눈앞에 펼쳐지는 풍광이 장난이 아니다. 이런 풍광을 보고도 그냥 지나칠 사람들이 어디 있겠는가. 주변에 있는 사람들 누구나 할 것 없이 교회건물을 배경 삼아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양새들이다. 앨범에 끼워놓고 싶을 만큼 경관이 아름답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주변 풍광도 사뭇 빼어나다. 이를 감안했는지 건물 앞에다 전망데크를 만들고 포토죤(photo zone)‘도 설치해 두었다. 바닷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보라는 배려일 것이다.



안으로 들어서니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옥선 수채화전이란다. 최근에 리모델링했다고 하더니 내부를 전시공간으로 바꾸었나 보다.



해안가를 따라 만들어놓은 산책로를 따라 트레킹을 이어간다. 잠시 후 나지막한 바위 언덕에 지어진 정자 하나가 나타난다. 그 아래에는 사당으로 보이는 단칸집도 지어져 있다. 기장오대(機張五臺) 중의 하나인 황학대(黃鶴臺)‘일 것이다. 정자는 물론 황학정일 것이고 말이다. 죽성리 일대의 해안은 예로부터 알려지지 않은 명소였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풍류를 아는 선비들이 자주 찾았다고 한다. 그래선지 시조문학의 대가였던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 1587-1671)도 이곳에다 그의 흔적을 남겼다. 기장에서 7년간 유배생활을 한 그는 죽성 해안의 작은 섬 송도(황학대가 있는 이곳은 원래가 섬이었다)의 아름다움에 푹 빠졌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바다와 시원한 바닷바람, 코끝을 스쳐가는 해송 향기, 그리고 갈매기의 날갯짓이 그의 시름을 달래주었던 모양이다. 그래선지 그는 이곳을 양쯔강 하류에 있다는 황학대의 빼어난 절경에 비유했고, ‘황학대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 , 제문 등 29수도 남겼음은 물론이다.




황학대의 뒤편에는 두호해녀복지회관이 이층으로 지어져 있다. 황학대의 벼랑 아래에는 해녀상도 세워놓았다. 마을에서 차지하는 그녀들의 비중이 그만큼 높다는 증거일 것이다. 복지센터 앞에서 기장군청 방향으로 진행한다. 바닷가를 따라 200m 조금 못되게 더 걷자 죽성초등학교가 길손을 맞는다. 해송과 왜성을 찾아가는 길이 나뉘는 곳이니 유념해 두자. 하긴 들머리에 이정표(죽성 해송200m/ 황학대200m, 드림세트장 300m)와 갈멧길 안내판이 세워져 있어 헷갈릴 일도 없겠지만 말이다.



초등학교 조금 못미처에서 왼쪽으로 들어선다. 죽성리의 또 다른 명물인 해송(海松, 부산시 지정기념물 제 25)’을 만나보기 위해서이다. 해파랑길을 걸으며 만나게 되는 수많은 신목(神木)들 중에 당당하기로 세 손가락 안에 든다는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가 있겠는가. 커다란 소나무 몇 그루가 웅크리고 있는 언덕을 바라보며 진행하다 길이 둘로 나뉘는 곳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잡는다. 오른편은 왜성(倭城)으로 가는 길이니 참조한다. 이어서 100m 조금 못되는 곳에서 오른편으로 난 오솔길로 들어서니 수령이 400년이나 되었다는 노거수(老巨樹) 무리가 길손을 맞는다. 얼핏 보면 하나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섯 그루라고 하는데, 그 나무들 가운데에 국사당이라 불리는 성황당이 자리를 틀고 앉았다. 원래 이 사당은 나라의 안녕을 비는 제사를 지내는 국수대로 지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해방 후 마을의 안녕을 비는 제사로 바뀌면서 이름 또한 국수당으로 바뀌었단다.



올라왔던 반대방향으로 내려가다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 널따란 주차장이 나온다. 이어서 주차장 뒤편으로 몇 걸음 옮지가 성곽으로 오르는 데크계단이 나타난다. ! 주차장 한켠에 왜성 본성의 배치도와 왜성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는 걸 깜빡 잊을 뻔 했다. 한번쯤 읽어보고 난 후에 성곽을 만나야 하지 않겠는가. 성은 해발 50m의 산봉우리를 평평하게 고르고 한 변이 약 50m인 정사각형의 아성(牙城)을 쌓고, 그 둘레에 한층 낮게 한 변이 약 80m인 사각형 외곽을 둘러싼 전형적인 일본식 성곽이다.



100m 남짓 오르니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48죽성리 왜성의 성벽이 나타난다. 둘레 960m 규모로 쌓아올린 일본식 성곽인데 현재는 성문과 해자(垓字) 등의 시설만이 남아 있을 따름이다. 이 성은 1593(선조 26) 서울에서 후퇴한 왜군이 장기전 태세를 갖추기 위해 서생포(西生浦)에서 동래·김해·웅천(熊川거제(巨濟)에 이르는 해안선에다 쌓은 성 가운데 하나로, 왜장 구로다(黑田長政)가 축성했고, 정유재란 때는 왜장 가토(加藤淸正)의 군대가 주둔하기도 했다. 일본문헌에는 기장성(機張城)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조선왕조실록이나 증보문헌비고등에는 모두 두모포왜성(豆毛浦倭城)으로 기록하고 있다.



죽성초등학교로 되돌아와 콜택시를 부른다. 시내구간을 지나야 하는데다가, 일부 구간에서는 지나다니는 차량들에 생명의 위협까지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7천원 조금 못되는 돈을 물고 10분 남짓 달리자 일광해안(日光海岸)에 도착한다. 강송정에서 학리 어구까지 원을 이루며 펼쳐져는 일광해안은 현재 해수욕장으로 개발되어 있다. 백사장의 길이 1.8에 너비 25m, 평균 수심은 1.2m라고 한다. 해안선은 수평선의 양끝이 시야에 잡히지 않는 보통의 해수욕장들과는 달리 오목한 어항 모양의 전형적인 포켓 비치(pocket beach)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덕분에 장엄하거나 광활하기보다는 아늑한 느낌을 준다. 대변항에서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30분 만에 이곳에 도착했다.



너울성 파도가 밀려온다는 일기예보 탓인지는 몰라도 백사장에는 사람들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아니 평소에도 이런 풍경이었는지 모르겠다. 지난 6월에 해양수산부에서 선정한 올해의 으뜸 해수욕장에 이곳이 선정된 것을 보면 말이다. 부산지역의 다른 해수욕장들처럼 방문객이 많지 않은 탓에 여유롭게 해수욕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을 선정 이유로 들지 않았던가. 여유로운 일광(日光)은 물론 붕장어 구이나 멸치회 등 식도락까지도 겸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해수욕장의 중앙에는 배() 모양의 조형물을 만들어놓았다. 뱃머리 부분에서 바라보는 조망이 뛰어난 것을 보면 전망대용으로 만들었지 않나 싶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싶었는지 바닥에는 분수(噴水)를 배치해 물놀이까지 겸할 수 있도록 했다.



일광해수욕장에서 다리 하나만 넘으면 이천항’, 행정 지명으로는 일광면 이천리이다. 전형적인 어촌마을인데 1965년 오영수의 소설을 영화화한 김수용 감독의 갯마을을 촬영하면서 유명해졌다. 토속적 정서와 삶의 애환이 담긴 영화였는데, 이를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길가에다 빗돌까지 세워두었다. 그런데 빗돌이 자리 잡은 장소가 자못 범상치가 않다. 엄청나게 굵은 노거수와 그 아래에 지어진 사당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옛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한 감흥을 불러일으키게 만든다. ! 해마다 8월이면 이곳에서 갯마을 축제도 열린다고 한다.



해안선을 따라 걷다보면 마을 끄트머리에서 이천 해녀복지관을 만난다. 이 마을 역시 해녀들이 벌어들이는 소득이 짭짤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탐방로는 복지관 앞에서 골목길로 들어선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오솔길로 변한다. 맞은편에서 오는 사람과 마주치기라도 할라치면 고생깨나 하면서 비켜가야 할 것 같이 비좁은 오솔길이다. 한국유리공업이 바닷가에 잇대어 쌓은 담벼락을 피해 길을 만들다보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유리공장 뒷길을 아슬아슬하게 걷는 게 싫다면 바닷가로 내려설 수도 있다. 자갈밭이어서 걷는데 부담이 없기 때문이다. 파도라도 높을라치면 이용이 불가능하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 구간에서 바라보는 이동항의 풍경이 제법 낭만적이다.




유리공장 뒷길이 끝나면 비록 잠시지만 탐방로가 바닷가를 벗어난다. 한국수산자원관리공단이 해안가를 턱하니 차지해버렸기 때문이다.



오른편에 끼고 걷던 공단을 벗어나자 기장미역다시마특구라고 적힌 입간판이 길손을 맞는다. 미역만이 지역특산품인 걸로 알았었는데, 다시마도 유명했던 모양이다. 아무튼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동래현조를 보면 미역을 진공(土貢)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15세기 이전에도 기장 지역의 미역이 유명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대부분이 양식인 지금과는 달리 바위에 붙어 있는 것을 채취한 미역(돌미역)이었지만 말이다. 이런 이점을 살리기 위해 2007년에는 이 일대 157필지(168755)기장 미역·다시마 특구로 지정했다고 한다. 미역을 기장군의 특산품으로 특화시켜 육성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란다.



입간판을 지나자마자 탐방로는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들머리에 이정표(신평소공원4.2/ 일광해수욕장2.0)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꽤 많은 소형 동력선들이 정박해있는 이동항(伊東港)에 이른다. 이천리의 동쪽에 있다고 해서 이동이라는 이곳까지 도착하는 데는 2시간이 걸렸다. 이곳 이동항은 미역다시마특구’, 나온 김에 다시마에 대해 한걸음 더 나아가 보자. 다시마는 다시마과에 속하는 해조류(海藻類)로 몸은 넓은 띠 모양이며, 바탕은 두껍고 표면이 미끄럽다. 옛날부터 사람들이 먹어왔으나 최근 혈압을 낮추는 라미닌이라는 아미노산이 들어 있음이 밝혀져 약용식물로도 널리 쓰인다. 특히 일본 후쿠시마(福島) 원전사고 이후 다시마의 요오드 성분이 방사능 물질 해독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물량이 없어서 못 팔 정도란다. 참고로 이동 마을의 옛 이름은 바둑개라고 한다. 바둑돌이 갯가에 널려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한자로는 기포(碁浦)라 표기한다.



바닷가를 따르다가 삼기물산건물 앞에서 골목길로 들어선다. 이어서 탐방로는 자동차도로(일광로)를 따라 이어진다. 길가에 늘어선 멋진 외관의 음식점과 카페들을 눈요기 삼는 재미가 제법 쏠쏠한 구간이다. 대신 나쁜 점도 있다. 도로와 탐방로 사이에 경계선을 그어놓았지만 혼자서 겨우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비좁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어떤 곳에서는 카페나 음식점을 찾아온 승용차들이 그런 공간들마저 점령해버렸기 때문이다. 이를 피하다보면 도로를 침범할 수밖에 없는데, 지나다니는 차량들의 속도가 만만찮아 소름이 끼칠 정도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10분 남짓만 걸으면 그런 위험구간이 끝난다는 것이다. 바닷가 비탈진 곳에다 데크로드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데크로드를 따르다보면 곳곳에 바닷가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인다. 기암괴석들이 들어찬 바닷가 풍경이 만만찮게 빼어나다는 증거일 것이다. 하지만 이곳도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풍경들 일색이다. 조그만 공간이라도 보일라치면 장사치들의 평상들이 어김없이 들어앉았다. 그들이 만드는 뭔가를 팔아주어야만 이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변해버렸다는 얘기이다.



그렇게 20분 남짓 걷자 해동성취사(海東成就寺)가 나온다. 이 사찰은 대한불교 법화종 소속의 사찰로 2000년 범종이 창건했다고 한다. 역사가 일천하다보니 기억해 둘만한 문화재가 있을 일가 없다. 그저 팔작지붕 형태의 대웅전은 1층에다 지장전을 두었고, 산신각과 요사채 등이 더 있을 따름이다. 그 외에 경내에는 범종과 포대 화상(布袋和尙,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을 나누어주는 미륵보살의 화신), 그리고 특이한 북 형태의 해우소가 있다. 도로 건너편에 있으므로 사찰에 대해 특별한 관심이 있지 않다면 구태여 들어가 볼 필요가 없을 듯 싶다.



이 근처에서 우린 길을 잃어버렸다. 온정마을회관을 지나자마자 오른편으로 빠져나가야 하는데도 무심코 직진해버린 것이다. 잠시 후 한국생산기술연구원을 만나고 나서야 길을 잘못 들어선 걸 눈치 챘지만 되돌아가는 것은 포기하기로 했다. 덕분에 온정항을 구경하진 못했지만 모두들 다리가 피곤하다니 어쩌겠는가. 아무튼 연구원이 끝나는 지점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 얼마 지나지 않아 동백항(冬栢港)에 이르게 된다. 동백항은 지방어항으로 지정된 항구이다. 잔잔한 동백항의 바다에서 겨울이면 싱싱하게 잘 자란 제철의 미역을 딴다고 한다. 바다가 깨끗한 걸로 보아 이곳에서 딴 미역은 분명 귀하디귀할 것이 분명하다.



해안가를 따라 조금 더 걷자 소담한 매력이 있는 신평소공원이 나타난다. 신평마을에 있는 작은 공원쯤으로 보면 되겠다. 이곳 신평마을은 1970년대 이곳을 무대로 한 오영수 소설의 '갯마을'이 영화화되고, TV연속극으로 방영되면서 유명해진 갯마을이다. 극중 주인공인 청상과부 해순이가 물질을 하면서 상수와 밀회를 즐기던 장면을 여기서 촬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갯마을의 주요촬영지는 아까 지나왔던 이천리였다는 것은 잊지 말자. 참고로 신평리의 옛 이름은 독이방(禿伊坊)이라고 한다. 신평리 뒷산이 민둥산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고 전해진다. ‘신평리라는 이름은 새로 생긴 마을이란 뜻에서 새들, 새버들이라 불리던 것이 한자로 고치면서 신평(新坪)으로 변한 것이란다.



공원의 바닷가 벼랑 위에는 배를 빼다 닮은 조형물 하나가 걸터앉았다. 마치 배 한 척이 항해를 시작하는 것 같은 모양새이다. 길이 18.86m에 폭은 12m, 그리고 높이가 15.5m인데 기장바다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상징물이란다. 또한 기장의 바다풍경과 아침 해가 잘 조망되는 곳으로 소공원의 랜드마크(landmark)라는 안내판도 세워져 있다. 기장군의 그런 의도를 읽기라도 한 듯이 사람들이 뱃머리에 올라가 바다를 향해 양팔을 벌리면서 영화 타이타닉의 한 장면을 재현하기도 한다.



신평공원 아래는 마치 옻칠을 한 것처럼 검게 빛나는 갯바위들이 곳곳에 잘 발달되어 있다. 바다가 만들어 낸 바위의 결이 얼핏 주상절리를 닮은 것 같기도 하지만 아니란다. 하지만 그 생김새만큼은 사뭇 범상치가 않다. 바닷가로 내려가는 길이 보여서 내려가 볼까 하다가 파도가 높아 그만두기로 한다. 갯바위에 들어붙은 고동이나 담치, 거북손 등을 잡는 재미보다는 당장의 안전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카페가 올라앉은 바닷가 모퉁이를 넘어서자 이번에는 칠암항(七岩港)이 길손을 맞는다. 칠암(七岩)이란 지명은 마을 앞 해안가에 있는 바위와 관련이 있다고 전해진다. 마을 앞에 옻바위(색깔이 옻을 칠한 것처럼 검어 붙여진 이름)가 있었는데 이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 칠암(漆岩)이라는 것이다. 칠암의 칠() 자가 쓰기 어려워 일곱 칠() 자로 바뀌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마을 앞 검은 바위가 7개라서 일곱 칠()’ 자를 썼다고도 하니 참조한다. 다른 한편으로 칠암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칠암 붕장어라는 지역음식 브랜드 발상지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잡히는 붕장어는 60~70, 육질이 적당히 단단하면서도 부드럽다고 한다. 그래서 씹을수록 고소하고 단맛이 돌아 오래전부터 횟감이나 구이용으로 큰 인기를 누려왔단다.



칠암항의 구경거리는 뭐니 뭐니 해도 등대가 아닐까 싶다. 야구등대와 붕장어등대, 갈매기등대 등 색깔과 외모가 완연히 다른 등대가 셋이나 된다. 셋이지만 칠암에서 보이는 등대는 이보다 더 많다. 왼편 끄트머리에 문중등대가 보이고 오른편에는 신평등대가 보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칠암의 등대들은 조형등대(造形燈臺)이다. 등대 고유의 기능에다 지역 특성을 살린 디자인 개념이 들어갔다. 이런 조형등대는 전국적으로 스물 두 개가 있다고 한다. 그 가운데 셋이나 칠암에 있으니 이곳 칠암이 등대의 포구로 불림은 어쩌면 당연하다 하겠다. 이 가운데 야구등대는 흰색이다. 조형등대답게 외양에 개성이 철철 넘친다. 야구글러브와 공과 배트를 한데 모은 형상이다. 거꾸로 세워진 배트의 뭉툭한 윗부분에서 등불이 들어온단다. 녹등이 4초에 한 번씩 깜박인다. 야구등대의 왼편, 그러니까 문중등대 방향의 일자방파제에 등대 둘이 더 있다. 붉은색은 갈매기등대로 갈매기와 떠오르는 해를 조형한 등대다. 홍등을 4초에 한 번씩 깜박인단다. 같은 방파제의 노란색 등대는 일본말로 아나고인 붕장어가 칠암에서 판을 친다고 해서 붕장어등대로도 불린다. 노란색 등불을 4초에 한 번씩 깜박인단다.



야구등대는 가까이 다가가 볼 수도 있다. 등대 내부에는 이곳 부산이 낳은 불세출의 투수 최동원의 사진과 그가 세운 기록이 전시돼 있다.



등대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칠암마을과 항구, 반대편에는 동해의 푸른 바다가 끝간데 없이 펼쳐진다. 문중항 방향도 빼놓을 수 없다. 대한민국 최초의 상업용 원자로인 고리원자력발전소(古里原子力發電所, Kori Nuclear Power Plant)가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다. 197111월에 착공되어 1977년에 완공되었고 19784월에는 상업운전을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21번째로 원전보유국이 된바 있다. 지금은 비록 탈원전 정책(脫原電 政策)’에 시달리고 있지만 말이다.



칠암의 바닷가를 걷다보는 모든 시야에서 등대는 사라지지 않는다. 바닷가에 세워놓은 조형물이라고 이를 벗어날 수는 없다. 그런 불가항력적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았나 보다. 등대들을 양옆에 끼고 있는 조형물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조형물은 아예 품에다 안아버렸다. 이런 풍경을 카메라에 담고 싶어 찾아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온다니 조형등대들은 이곳 칠암의 홍보대사인 셈이다. 아니 일류의 홍보대사라 하겠다. 사람이 모이면서 지역경제에 윤기를 불어넣는다니 말이다.



아직 칠암항이려니 했는데 어느새 문중항(文中港)’이다. 행정구역으로만 나뉠 뿐 실제로는 무경계라고 보는 게 옳겠다. 조형등대가 흔하디흔한 보통의 등대로 바뀐 것을 제외하고는 마을 풍경도 별반 달라진 게 없다. 아니 마을이 조금은 아기자기 해졌고, 방파제 안에 어선 주차장이랄 수 있는 정박시설이 별도로 만들어져있으니 어느 정도는 달라졌다고 보는 게 옳겠다. 옛날 이곳에는 공납미를 보관하던 해창(海倉)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기록으로만 남아있을 뿐 흔적을 찾을 수는 없단다. 그저 바닷가에 세워진 안내판 하나가 이를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참고로 문중(文中)이란 지명은 문오동의 중간에 위치한 마을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문오동은 기장현 시기에 중북면의 문동, 문상(해창 마을), 문중, 문하(칠암 마을)와 문서(동면 동백 마을)를 합쳐 부르던 지명이다.



문중항을 지나면서 탐방로는 또 다시 도로(31번 국도)로 올라선다. 이동에서 온정으로 넘어오는 구간에서 만났던 도로와 마찬가지로 비좁은 탐방로를 걸으며 지나다니는 차량에까지 신경을 써야만 하는 소름끼치는 구간이다. 거기다 이번에는 볼거리까지도 별로 없다. 3코스에서 가장 삭막한 구간이라고 봐도 될 것 같다.



그렇게 잠시 걸으면 좌광천을 가로지르는 임랑교를 만나게 되고, 다리를 건너자마자 탐방로는 천변으로 내려선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임랑해수욕장(林浪海水浴場)에 이른다. 임랑(林浪)이란 지명은 아름다운 송림(松林)과 달빛에 반짝이는 은빛 파랑(波浪)에서 두 글자를 따왔다고 전해진다. 또한 백설 같은 백사장이 넓게 깔려있고, 백사장 주변에는 노송(老松)이 즐비하다고도 했다. 옛사람들이 이곳 임랑천의 맑은 물에서 고기잡이하면서 놀다가 밤이 되어 송림 위에 달이 떠오르면 사랑하는 님과 함께 조각배를 타고 달구경을 하면서 뱃놀이를 즐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완연히 다른 풍경이다. 모래사장은 폭이 좁을 뿐만 아니라 그 모래마저도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 같다는 느낌이다. 달빛 아래서 빛을 발했다는 송림(松林)도 보이지 않는다. 아니 늙은 소나무 숲은커녕 작디작은 소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다. 대신 벽화로 장식된 민가와 민박집, 그리고 횟집들이 바닷가를 따라 줄줄이 늘어서 있을 따름이다. 하긴 강산도 십년이면 변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해수욕장이 끝나면 곧이어 임랑항(林浪港)에 이른다. 임랑(林浪)의 옛 이름은 임을랑(林乙浪)’이다. 임을랑이 임랑으로 바뀐 것에 대해서는 전하는 바가 없으나 마을에 숲이 우거지고 바다 물결이 아름다워, ‘수풀 림()’ 자와 물결 랑()’ 자를 따서 불렀다는 설에 무게가 실리는 편이다. 이곳 임랑항의 명물도 역시 낚시등대라는 조형등대가 아닐까 싶다. 부산출신의 조각가인 박종만씨의 작품으로 모티브는 황금 낚시대로 대어(大漁)를 낚는 기쁨에서 따왔다고 한다. 풍어를 바라는 어민들의 소망이 깃들어있다고 보면 되겠다.


트레킹의 종료는 월내항(기장군 장안읍 월내리 494-36)

해파랑길 3코스는 원래 임랑항에서 끝을 맺는다. 하지만 우린 임랑항과 함께 임을랑포(林乙浪浦)를 구성하고 있는 월내항(月內港)’까지 연장하기로 했다. 대형버스가 주차할만한 공간을 찾다보니 그리 되었단다. 아무튼 골목길을 짧게 통과하니 탐방로는 멋진 카페(음식점)들이 늘어선 도로로 연결되고, 또 다시 나타나는 바닷가를 따라 조금 더 걷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월내항의 널따란 주차장이 나타나면서 오늘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 트레킹은 총 4시간 30분이 걸렸다. 하지만 중간에 택시를 이용하기도 했고, 또한 경관 좋은 곳에서는 사진을 찍느라 더디 걸었으니 소요시간에 큰 의미는 부여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하긴 아름다운 만큼 더디 걸리는 것이 트레킹의 특징이 아니겠는가.


해파랑 2코스

 

여행일 : ‘18. 6. 16()

소재지 : 부산시 해운대구와 기장군 일원

산행코스 : 미포(2.4km)달맞이공원 어울마당(4.5km)송정해변(4.3km)해동용궁사(5.1km)대변항(16.3)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해운대의 삼포라 불리는 미포·청사포·구덕포를 거쳐 대변항에 이르는 코스다. 이번 코스도 역시 길맷길과 겹친다고 보면 되겠다. 특히 미포~청사포 구간은 해운대의 명품 산책로인 문텐로드를 따른다. 달맞이공원 어울마당으로 올라가는 오솔길 갈림길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 청사포로 이어진다. 성철스님이 주석했다는 해월정사를 지나 또 하나의 스카이워크인 다릿돌전망대를 구경하고 나면 오솔길을 통해 송정해변으로 연결된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문탠로드와 삼포길을 들락거렸다고 보면 되겠다. 송정해변에서부터는 대부분 바닷가를 따른다. 시랑대와 오랑대 등 해식애(海蝕崖)가 잘 발달된 암벽해안이 펼쳐지는가 하면 동해용궁사라는 명품 절간을 만나기도 한다. 훌륭한 눈요깃감을 제공한다는 얘기이다. 그러나 공수마을로 넘어가는 구간 등에서는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기도 한다. 아무튼 부산을 대표하는 길 중에 하나로 꼽혀있을 정도로 경관이 뛰어난 구간이다


 

트레킹 들머리는 미포 로터리(rotary, 해운대구 중1)

승용차나 대중교통 등 문텐로드로 오는 방법은 다양하다. 하지만 이곳도 역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게 좋겠다. 지하철 해운대역에서 내려 100·141·200번 버스를 이용 미포 문텐로드 입구까지 오면 된다. 정류장 근처에 있는 미포교차로에서 바닷가로 잠시 내려가면 해운대해수욕장의 끝자락인 미포이다. 지난번 1코스를 마치면서 보았던 커다란 표지석이 반갑게 맞을 것이다. '중동역'에서 하차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10~15분 정도를 걸어야하므로 버스로 오는 것을 추천한다.




로터리에서 달맞이고개가는 쪽으로 오르막을 잠시 오르면 옛 철길이 나온다. 2013년 해운대 도심을 지나는 우동~기장구간의 복선화가 완료되면서 동해남부선 해안철길이었던 이곳은 역사의 뒤안길로 묻혔다. 지역으로 봐서는 그게 더 득이 되었던 모양이다. 자연 풍광을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입소문을 타면서 최근 이 길을 걷는 인구가 부쩍 늘었기 때문이다. 특히 부산의 젊은 연인들 사이에는 데이트 코스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한다. ! 들머리에 위의 내용을 적은 동해남부선 옛길 안내판을 세워놓았으니 그냥 지나치지 말고 한번쯤 읽어보고 갈 일이다.




조금 더 올라가면 이번에는 미포교차로(해운대구 중동)이다. 이곳에서는 오른편 달맞이 길을 따른다. 들머리에 달맞이길이라고 적은 커다란 표지판을 세워놓았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인근에 있는 아트센터와 갤러리들의 위치를 표시해놓은 달맞이 미술의 거리 현황도도 보인다. 그러고 보니 이곳 달맞이 언덕을 한국의 몽마르트(Montmartre)‘라고 표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많은 예술인들이 모여 살았던 몽마르트 언덕처럼 이곳에도 다양한 갤러리들이 모여 있다는 것이다. ! ’들머리에 문텐로드주차장이 만들어져 있다는 걸 깜박 잊을 뻔 했다. 해운대구청에서 도보꾼들을 위해 만든 주차장이란다.



입구에는 갈맷길안내판도 보인다. 2코스(문텐로드~오륙도 유람선선착장)까지란다. 그렇다면 오늘도 갈맷길을 걷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그걸 더 세분화시키면 문텐로드를 걷게 되는 것일 게고 말이다. 아무튼 가로수로는 벚꽃나무들을 심어놓았다. 나이가 족히 수십 년은 넘어 보이는 큰 나무들이 대부분이다. 중간 곳곳에는 벤치도 배치했다. 문텐로드의 장점 중 하나라 하겠다. 걷는 도중에 쉴 수도 있고 바다를 보며 소중한 사람과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으니 말이다.



문탠 로드(Moontan Road)‘달맞이 고개를 향해 500m 정도 오르다가 오 해피데이 레스토랑을 지나자마자 오른편으로 열린다. 들머리에 문탠로드를 형상화한 조형물과 문탠로드 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문탠 로드(Moontan Road)‘란 달빛을 받으며 자신을 되돌아보고 정서적 안정을 찾아보자는 취지로 만든 해운대 특유의 둘레길로 총 길이는 2.5라고 한다. 코스는 달맞이길 입구~바다 전망대~달맞이 어울 마당~해월정~달빛 나들목으로 이어진다. 또한 달빛 꽃잠 길(0.4, 설레는 마음으로 달빛 맞으러 가는 길), 달빛 가온 길(0.4, 은은한 달빛 속에 마음을 정리하는 길), 달빛 바투 길(0.7, 달빛에 몸을 맡겨 새로운 나를 만나는 길), 달빛 함께 길(0.5, 나와 달빛이 하나 되는 길), 달빛 만남 길(0.5, 아쉬움에 다시 오길 약속하는 길)로 구성되어 있다. 참고로 계속해서 도로를 따를 경우에는 해월정이라는 정자(亭子)가 나온다. 해월정의 앞바다는 2013년에 우리나라 동해와 남해의 경계로 정해진바 있다.



들머리 오른편에는 전망대도 만들어져 있다. 해운대와 광안리 해변은 물론이고 저 멀리 오륙도까지 한눈에 쏙 들어오니 자리를 제대로 잡은 셈이다.



오솔길로 내려선다. ’문탠로드‘(Moontan Road)’의 다섯 개 구간 가운데 달빛 가온길일 것이다. ‘은은한 달빛 속에 마음을 정리하는 길이라는 구간 말이다. 이 구간의 특징은 짙은 소나무 숲속을 걷는 다는 것이다. 어느 기사에선가 문탠로드를 솔숲으로 이루어져 눈은 물론이고 몸까지 즐겁게 해주는 멋진 산책로라고 소개한 걸 봤는데, 내 생각에도 그런 것 같다. 이 길의 또 다른 특징은 어지럽다 싶을 정도로 많은 안내판들이 아닐까 싶다. ’삼포해안길 안내도문탠포드 안내도‘, ’달맞이길 안내도등의 여러 안내도(案內圖)와 지명을 설면해 놓은 안내판(案內板)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시판(詩板)까지 세워놓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건 문텐로드를 소개하는 안내판이지 싶다. 황옥공주, 대마도에 대한 조망, 청사포의 망부송에 대한 전설 등이 적혀있으니 잠깐의 소일거리 삼아 읽어보고 갈 일이다.




오솔길을 따라 잠시 걷자 데크 전망대가 나타난다. ’달빛마당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바다전망대로 보이는데, 벼랑에 가까운 비탈진 산자락에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았다. 하지만 동해바다가 끝도 없이 펼쳐지는 등 조망만은 나무랄 데가 없다. 날씨 좋은 날에는 바다 건너 대마도까지 시야에 들어온다고는 하지만 믿거나 말거나이다. 아무튼 누군가는 문탠로드‘(Moontan Road)’에서의 문탠(Moontan)‘선텐(suntan)‘과 비슷한 개념이라고 했다. ’달을 선텐하는 것처럼 만난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전망대가 문탠로드‘(Moontan Road)’라는 이름에 가장 걸맞는 장소가 아닐까 싶다. 휘영청 밝은 달빛을 받아들이기에 이보다 더 나은 장소가 어디 있겠는가.



이 일대 44000달맞이 공원이라는 이름으로 조성되어 있다. 공원은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청사포로 넘어가는 와우산 중턱 달맞이 고개 일대에 넓게 분포되어 있다. 그러니 체육시설을 갖추지 않았을 리가 없다. 산비탈에 조그만 터를 닦은 뒤 운동기구 몇 점을 설치했는데 주민으로 보이는 몇 사람이 기구에 매달려 유유자적 하고 있는 게 보인다.



길은 한마디로 잘 닦여 있다. 조금만 위험하다 싶으면 난간을 만들었고, 가파른 곳에는 어김없이 계단을 놓았다. 길가 곳곳에 벤치를 배치했음은 물론이다. 또 하나 눈에 띄는 게 있다. 길가 곳곳에다 나무토막 모양의 키 작은 조형물을 꽂아놓은 것이다. 반달, 초승달 등 각종 달의 모양이 그려진 유리로 윗면을 덮어놓은 걸로 보아 조명시설이 아닐까 싶다. ! 밤이 되면 달빛 모양의 조명이 숲을 밝혀준다는 기사를 본 것 같은데 이를 두고 했던 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당시 기사는 비록 인위적인 맛이 가미되긴 했지만 운치를 더해주는 시설이라는 부언까지 했었다. 소나무 가지 사이로 보이는 망망대해도 빼놓을 수 없다. 탁 트인 에메랄드빛 바다를 보고도 환성을 지르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길가에 달빛 바투길이라고 적힌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항상 달빛과 내가 함께 하는 길... 달빛 바투길에서 달빛을 바다처럼 느껴보세요라는 부언(附言)까지 늘어놓았다. ‘바투의 뜻이 두 대상이 아주 썩 가깝게라는 순수한 우리말이니 달빛 바투란 길의 이름을 제대로 풀어놓았다고 보면 되겠다. 참고로 문텐로드를 구성하는 나머지 넷은 달빛 꽃잠길과 달빛 가온길, 달빛 함께길, 달빛 만남길 등이다.



그렇게 한참을 걷자 삼거리(이정표 : 어울마당/ 청사포/ 미포)가 나온다. 오른편이 다음 행선지인 청사포로 가는 길인데 선두대장의 방향표시지는 왼편으로 향하고 있다. 아마 어울마당에 들렀다가려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것도 아니었나보다. 어울마당 쪽으로 한참을 오르다 만나게 되는 삼거리에서는 어울마당의 반대편으로 인도 해버렸기 때문이다. 잠시 후 만나게 되는 이정표(구덕포 3/ 해수욕장 2.8)에는 이 길이 구덕포로 연결된다고 표기되어 있다. 아무튼 이 구간을 지나는데 길가에 십오구비 달맞이길 관광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그래 문텐로드의 옛날 이름이 달맞이길이었다. 해운대구청에서 새로운 이름 공모전을 실시하였고 그 결과 문텐로드기 선정되었던 것이다. 선텐(suntan)과 비슷한 개념으로 달을 선텐하는 것처럼 만난다고 해서 문텐로드라는 이름이 붙여졌단다. 다른 한편으로 미포에서 시작되는 이 길은 송정해수욕장까지 가는 동안 15번 이상 굽어진다고 해서 ‘15곡도(曲道)’라고도 불린다. 저 안내판이 십오구비 달맞이길이라는 이름표를 달게 된 이유일 것이다.



들머리에 들어선지 40분이 조금 지났을까 도로(이정표 : 구덕표 2.5/ 신시가지/ 해수욕장 2.3)에 내려선다.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조금 더 내려가니 묘하게 생긴 조형물 하나가 나타난다. 귓전에 맴도는 청사포의 파도소리를 해와 달의 원형인 소라모양으로 디자인한 것이라고 한다. 그 앞에는 청사포마을의 유래를 적은 안내판을 세웠다. 이 마을에서 박편과 원판형 석기 등 구석기시대의 유적지가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후로의 마을 역사도 적혀있지만 가슴에 기억해볼 만한 내용은 아니다.



청사포(靑砂浦)의 본래 이름은 청사포(靑蛇浦)로 전해진다. 남편을 간절히 기다리던 여인을 용왕이 보낸 푸른뱀(靑蛇)이 찾아와 여인을 용궁으로 안내하여 남편을 만나게 했다는 전설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후세 사람들에게는 그런 이름이 영 탐탁지 않았나 보다. 푸른 뱀의 청사에서, 맑은 모래라는 뜻의 청사가 되었고, 현재는 푸른 모래라는 뜻의 청사(靑砂)가 되어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청사포에는 모래가 거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옛 이름을 다시 되찾자는 의미에서 원래의 푸른 뱀으로 돌리려는 움직임도 엿보인다고 한다.



조형물을 지나자마자 도로를 건넌다. 탐방로가 해월정사(海月精舍)’ 앞을 지나도록 나있기 때문이다. 청사포는 횟집으로만 유명한 게 아니다. 사진작가들의 출사지(出寫地)로 유명한 쌍둥이등대를 끼고 있는가 하면 아름다운 벽화(壁畫)가 담벼락을 온통 장식하는 문화마을도 있다. 거기다 구덕포도 들러보지를 못했다. 해운대의 삼포(三浦), 즉 미포와 청사포, 구덕포 가운데 둘을 통째로 빼먹어버린 셈이다. 아쉽지만 주어진 시간이 빠듯하니 어쩌겠는가. 아무튼 해월정사는 성철스님이 말년에 머물며 수행하던 절이다. 해월정사라는 이름도 그가 지었다고 한다. 넓은 바다와 밝은 달빛(月光)이 부처님 지혜를 뜻하는 것이라며 그렇게 지었단다. 하지만 청정(淸淨)을 모토로 삼았던 스님으로 봐서는 절집이 너무 크지 않나 싶다. 4층으로 이루어진 봉훈관의 생김새도 눈에 영 거슬린다. 전통사찰에서는 보기 드문 외형이기 때문일 것이다. 초 단위로 바뀌어 가는 요즘 세상에 나 혼자만의 아집일지도 모르겠다.



해월정사를 지났다싶으면 탐방로는 또 다시 숲속을 파고든다. 경사가 거의 없는데다 일행끼리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걸어도 될 정도로 길의 폭 또한 넓다. 그렇게 잠시 걷다보면 서슬 시퍼런 암벽 위에 걸터앉은 전망대 하나가 나타난다. 해월정사에서 0.77, 구덕포까지는 1.55를 남겨놓은 지점이다. 전망대에 오르면 널디 너른 동해바다가 끝도 없이 펼쳐진다. 하지만 시선을 집중시켜야 할 것은 그게 아니다. 이 전망대는 바로 아래에 만들어 놓은 다릿돌전망대의 조망용으로 제격이기 때문이다. '다릿돌'이란 청사포 전망대 바로 앞에서 해상 등대까지 가지런히 늘어선 다섯 개의 암초를 말하며 돌(징검)다리를 뜻한다고 한다. 예로부터 청사포 주민들은 다섯 암초가 마치 징검다리 같다고 해서 '다릿돌'이라 불렀단다.



2017년 말 완성된 다릿돌전망대는 부산의 3번째 해상 스카이워크전망대다. 청사포와 구덕포 사이 돌출된 돌무덤을 들어내고 바다로 쭉 뻗은 해안 절벽 위에 우뚝 선 폭 3~11m, 길이 72.5m의 상판이 바다 쪽으로 돌출돼 있다. 전체가 푸른 바다를 형상화한 것 같은 특이한 생김새를 가지고 있는데, 특히 끝자락에서 송정 쪽과 중심 쪽을 강화유리로 만들어 아름다우면서 아찔한 바다풍경을 볼 수 있도록 했단다. 오륙도의 스카이워크와 마찬가지로 입장 가능 시간이 정해져 있으며, 입장을 위해서는 상자에 담겨있는 덧신을 신어야 한다. 가장 끝에는 망원경도 설치되어 있다. 대마도라도 찾아보라는 모양이다.



구덕포 방향으로 향한다.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되는 비좁은 오솔길이다. 길을 가다보면 참호(塹壕) 등의 군() 시설들도 눈에 띈다. 한때는 민간에 개방되지 않던 지역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그렇게 5분쯤 진행하자 해마루 갈림길(이정표 : 구덕포 1.2/ 해마루 0.3/ 청사포)’이 나타난다. 문텐로드에 해월정이 있다면 송정고개에는 해마루가 있다. ‘일출을 처음으로 맞이하는 산둥성이의 꼭대기라는 뜻을 가진 해마루는 지어진지 오래 되지 않았다. 2005년에 지어졌기에 부산 사람들도 이곳을 모르는 사람들이 꽤 된다고 한다. 들러보지 않고 그냥 지나치는 이유이다.



삼거리를 지나면서 탐방로는 오르내림이 거의 없어진다. 수렛길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폭도 제법 넓어졌다. 그렇게 한참을 걷자 마을 뒤편에 내려선다. 거리표시가 없는 이정표(송정해수욕장/ 청사표)에는 현재 위치를 구덕포로 표기하고 있다. 해운대의 삼포(三浦) 가운데 하나라는 얘기이다. 그러나 포구는 보이지 않았다. 오른편 방향으로 조금 더 들어가야 만날 수 있는 모양이다. 시간에 쫒긴 우리 곧장 송정해수욕장으로 향한다. 이어서 고층빌딩이 즐비한 도심을 통과하자 송정해수욕장을 만난다. ‘다릿돌전망대를 조망했던 전망대에서 40, 트레킹을 시작한지는 1시간30분 만이다. 길이 1.2에 폭 57m의 길고 넓은 백사장을 가지고 있는 이곳 송정해수욕장(松亭海水浴場)은 수심이 얕고 파도도 잔잔할 뿐만 아니라 수질 또한 맑고 깨끗해서 아이를 동반한 가족 피서지로 적합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널디 너른 해수욕장은 텅 비어있다시피 하다. 개장한지 이미 15일이나 지났는데도 말이다. 어느 글에선가 해운대해수욕장이나 광안리해수욕장 등에서 느껴지는 번잡하고 화려한 분위기와는 전혀 다르게 조용하고 아늑하다고 하더니 그 말이 맞는가 보다. 그는 또 도시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자연의 아름다움과 순수를 함께 느낄 수 있는 공간이라고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닌 것 같다. 백사장 뒤편에 횟집과 카페들이 즐비한 걸 보면 말이다. 바다로 눈을 돌리자 특이한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바다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보드(board)를 챙겨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서툴게나마 파도에 몸을 실어보려고 용트림을 하고 있다. 이곳 송정해수욕장이 또 하나의 파도타기(surfing) 명소로 자리 잡아가나 보다.



모래사장이 끝나면 죽도공원(竹島公園)이 길손을 맞는다. 옛날에는 육지에서 떨어진 섬이었으나 송정천에서 흘러내린 모래가 쌓임으로 해서 지금은 그저 바다를 향해 뽈록하니 불거져 나간 육지의 모양새로 변해있다. 흠사 호리병처럼 말이다. 섬은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이루어져 있어 죽도(竹島)라는 이름이 어색할 정도이다. 하지만 옛날에는 대나무가 많이 자생했다고 전해진다. 여기서 나는 대나무를 좌수영으로 보내 화살로 만들었을 정도란다.



섬은 전체가 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전망대와 벤치 등 편의시설들을 곳곳에 놓아 도심공원으로서 손색이 없도록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곳은 섬의 뒤편에 지어놓은 송일정(松日亭)이다. 정자에 올라 바라보는 해수욕장의 풍경은 일품이다. 특히 이곳에서 바라보는 일출과 월출은 장관으로 알려져 있다.




공원을 빠져나오면 곧이어 송정항(松亭港)을 만난다. 양쪽 방파제 끝에 흰색과 붉은색의 마주 보는 쌍둥이 등대가 특징인 송정항은 조선시대 기장 구포의 하나인 가을포에 속했다고 한다. 1975년 연안어업 지원의 근거지로 삼기 위해 지방어항으로 지정된바 있다.



이후부턴 해안도로를 따른다. 그렇다고 해서 계속해서 따르지는 않는다. 진행방향에 아래 사진과 같은 돌출부분이 나타나지만 탐방로는 그쪽 해안을 피해 나있기 때문이다.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구간이니 걷는 도중에 만나게 되는 대한민국 대표라는 명품 물회, 숫불 장어구이간판을 놓치지 말자. 그 다음에 만나는 삼거리에서 오른편 골목으로 들어서야하기 때문이다. 아니 들머리에 대변항, 해동용궁사의 진행방향을 표시한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니 주의만 한다면 길이 헷갈리는 일은 없을 것 같다.



골목길을 지나면 곧이어 공수마을이 나온다. 해운대구에서 기장군으로 넘어가면 만나게 되는 첫 번째 마을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기장읍 시랑리에 위치하지만 고려시대에 관청의 경비나 출장 나온 관리의 숙박이나 접대비를 충당하기 위한 밭을 뜻하는 공수전(公須田)이 있던 곳이라 하여 공수란 마을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에 들어서니 배를 형상화한 어촌체험마을안내소가 지어져있다. 길가에는 어촌체험마을 관광안내도도 세워놓았다. ‘공수항보다 공수체험마을로 더 널리 알려진 이유인 모양이다. 500명 정도가 살고 있는 공수마을은 주민의 대부분이 미역과 다시마양식, 어로 등의 수산업에 종사하는데, 2001년도에는 어촌체험시범마을로 지정된바 있다. 해조류 말리기 체험장, 지압산책로, 물고기체험장, 나무다리 산책로 등이 설치되어 있고 바닷가에서 양쪽으로 그물을 끌어당겨 물고기를 잡는 후릿그물이라는 전통어법체험, 해녀체험, 조간대 체험 등 다양한 체험프로그램들이 준비되어 있다고 한다.




다시 길을 나선다. 이제부터는 기장군 소관의 갈맷길이 시작된다고 보면 되겠다. 공수마을을 지나면서 탐방로는 해안을 따른다. 시랑산을 가운데에 놓고 오른편으로 빙 돈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웃자란 갈대들이 뒤덮인 분지를 지나면서 탐방로는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산자락을 잘라가며 내놓은 좁다란 오솔길이다. 비탈길 아래로는 갯바위들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강태공들이 노닐기 딱 좋은 장소일 것 같다.




시랑산의 모퉁이를 돌아 제법 규모가 큰 군부대옆길을 빠져나오자 갑자기 탐방로가 넓어진다. 바위벼랑을 깎아 만든 비포장 길인데도 말이다. 군부대의 진입로로 사용하기 위해 만든 도로이지 싶다.



도로를 따라 잠시 걷자 오른편으로 목제계단이 만들어져 있다. 바위벼랑에 기대어가며 만들어놓은 탓에 선뜻 들어서기가 망설여지나 그렇다고 들어가 보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다. 들머리에 시랑대(侍郞臺)’에 대한 안내판을 세워놓았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기장 제일의 명승지로 알려졌다는 글귀가 특히 호기심을 끈다. 계단을 내려가니 목제 대()가 만들어져 있다. 안전을 위한 조치로 보이나, 바위 가운데가 넓고 평평하다는 시랑대의 본 모습은 엿볼 수 없게 된 것은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참고로 시랑대의 원래 이름은 원앙대였다고 한다. 부근에 비오리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이 바위에는 용이 잡아놓은 고기를 빼앗아 먹고 살던 젊은 장사와 그로 인해 목숨을 잃은 그의 처()와 갓난아이에 대한 슬픈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자기가 잡아온 고기를 빼앗기던 용이 그의 처와 갓난아이를 삼켜버렸다는 것이다. 그 결과 용과 장사의 싸움이 일어났고 끝내 둘 모두 죽게 되었단다. 이후 시랑대의 동굴에 파도가 몰아칠 때면 부인의 절규가 들려온다고 한다. 부산시의 스토리텔링 사이트에는 또 다른 전설인 해동용궁사의 스님과 용왕의 딸이 사랑을 나눈 이야기가 등재되어 있으나 옮기지는 않겠다.



시랑대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는 뒤편의 기암괴석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바위를 살펴보던 중 바위에 음각(陰刻)되어 있는 시랑대(侍郞臺)’라는 글자가 눈에 띈다. 1733(영조 9)에 시랑직(이조 참의)을 지낸 권적(權樀)이 기장 현감으로 부임하여, 이곳 바위에서 놀다가 바위 위에 새겼다고 전해지는 글귀이다. 이후 홍문관 교리였던 손경현(孫庚鉉)이 학사암(學士嵓)으로 불렀다고도 하나, 지금은 시랑대라는 이름으로만 전해지고 있다. 되돌아 나오는 길에 또 다른 볼거리가 있을까 해서 바위의 위로 올라가봤지만 가슴에 담아둘만한 특별한 볼거리는 눈에 띄지 않았다. 시랑대에 대해 설명해 놓은 안내판 하나만 덩그러니 세워져 있을 따름이었다.



해동용궁사로 향한다. 절간의 담장을 끼고 100m 남짓 걷다가 도로를 벗어나 왼편 산자락으로 올라선다. ‘갈맷길 가는 길이라고 적힌 이정표가 들머리의 조금 안쪽에 위치하고 있어 주의 깊게 살펴봐야만 들머리를 찾을 수 있겠다. 이어서 비좁은 오솔길을 2~3분쯤 더 진행하자 커다란 교통안전기원탑이 문지기처럼 버티고 있는 해동용궁사(海東龍宮寺)’에 이르게 된다. 해가 가장 먼저 뜨는 절이라는 해동용궁사는 진심으로 기도하면 누구나 한 가지 소원은 꼭 이룬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사찰이다. 지금으로부터 600여 년 전인 1376년에 고려 공민왕의 왕사였던 나옹 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나옹이 경주 분황사에서 주석하며 수도할 때 나라에 큰 가뭄이 들었는데, 어느 날 꿈에 용왕이 나타나 말하기를 봉래산 끝자락에 절을 짓고 기도하면 비가 내리고 국태민안(國泰民安)할 것이다.’고 하더란다. 이에 나옹이 이곳에 와서 지세를 살펴보니 뒤는 산이고 앞은 푸른 바다가 있어 아침에 불공을 드리면 저녁 때 복을 받을 곳이라 하여 절을 짓고 산 이름을 봉래산, 절 이름을 보문사(普門寺)라 했다는 것이다. 이후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30년대 초에 중창되었다고 한다. 1974년에는 관음도량으로 복원할 것을 발원하고 절의 이름 또한 해동용궁사(海東龍宮寺)로 바꾸었다. 현존하는 건물은 대웅전을 비롯하여 굴법당·용왕당(용궁단범종각·요사채 등이 있다. 대웅전 앞에는 스리랑카에서 가져온 불사리 7과를 봉안했다는 사사자 3층 석탑이 있다. 이밖에도 단일 석재로는 한국 최대의 석상이라는 약 10m 높이의 해수관음대불, 동해 갓바위 부처라고도 하는 약사여래불이 있다. 절 입구에는 교통안전기원탑과 108계단이 있고, 계단 초입에 달마상이 있는데 코와 배를 만지면 득남한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이 절의 특징은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자연 경관이라 하겠다. 특이하게도 산속이 아닌 바닷가에 지어져 있어 바다와 절이 함께 어우러지며 멋진 풍광을 연출하기 때문이다. 어찌나 바다에 가까운지 얼핏 절이 바다 위에 떠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이런 이색적인 풍광을 사람들이 놓칠 리가 없다. 절간 전체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오늘뿐만 아니라 늘 그렇단다. 소원을 이루어 준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는 외국인들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절로 들어가는 돌다리(용문교) 위에서 동자가 들고 있는 항아리에다 동전을 던지고 있는 중국인들도 상당수 됐다. 도박을 좋아하는 나라 사람들답게 자신이 던진 동전의 위치에 따라 일희일비(一喜一悲)하고 있는 게 재미있어 보인다. 감로약수(甘露藥水)도 빼놓을 수 없다. 서출동류(西出東流)의 암반수(巖盤水)로 이 물을 마시면 좋은 일이 생긴다고 하니 꼭 한 모금 마셔 볼 일이다. TV에도 소개가 되었을 정도라니 그 효과는 이미 보증된 셈이 아니겠는가. 약수터 입구 반대편에는 관욕불(灌浴佛)이란 자그만 전각을 짓고 수반(水盤) 안에다 동자상(童子像)을 모셔놓았다. 길게 줄지어선 사람들이 차례로 바가지로 뜬 물을 동자상의 머리 위에다 붓고 있는 게 보인다. 뭔가 간절한 소망이라도 갖고 있는 모양이다.



절간을 다 돌아봤다면 이젠 또 길을 나설 차례이다. 아까 들어왔던 길로 되돌아갈 필요는 없다. 용문교를 건너자마자 오른편으로 빠져나가면 해가 가장 먼저 뜬다는 일출암 위로 지장보살이 모셔져 있다. 진심으로 기도를 하면 한 가지 소원은 꼭 이루어진다고 알려진 곳이다. 지장보살상 앞을 지나면 국립수산과학관 앞길로 연결시키는 돌다리가 나타날 것이다. 국립수산과학관은 19215월에 조선총독부 수산시험장으로 창설되었다가 1991년 해양수산공무원교육원에 편입, 현재에 이른다. 1997년 수산과학관을 개관하여 해양 보존 방법과 지식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며 미래 해양 대국을 지향하고 있다. 또한 과학관에는 해양자원과 어업기술, 수족관 등 15개 주제별 전시영역을 갖추고 참고래 실물골격과 국내 최대크기의 산갈치박제 등 7,300여 점의 전시물을 전시하고 있단다.



수산과학관 앞 해안은 해식바위(海蝕巖)가 잘 발달되어 있다. 바닥도 갯벌이 아니라 자갈과 암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린이들의 체험학습장으로 손색이 없겠다. 아니 꽤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는 걸로 보아 이미 입소문을 탔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사람들을 구경하며 잠시 걷다보면 어느덧 동암(東岩) 마을에 이르게 된다. 해동용궁사에서 1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바닷가 마을이다. ‘동암(東岩)’이란 동쪽 바다에 바위가 많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이곳으로 오는 동안 보아왔던 바위를 이르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옛날에는 시랑대와 오랑대라는 두 대의 안에 있다고 해서 대내(臺內)’로 불리었다니 참조한다.



산악회에서 준비한 점심으로 요기를 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점심 먹기 딱 좋은 정자 앞에 이정표(오랑대 1.5, 대변항 4.2/ 동해용궁사 1.0. 공수항 4.0)가 세워져 있으니 진행방향을 찾느라 걱정할 일은 없다. 잠시 후 바닷가에 너른 꽃밭이 조성되었는가 싶더니 오시리아 해안산책로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오시리아는 기장읍 남부에 조성되는 면적 3662725.4의 대규모 관광단지를 이르는 말이다. 관광단지 내에 위치한 오랑대와 용녀(龍女)와 미랑 스님의 사랑이야기를 간직한 시랑대의 머리글자에다 장소를 나타내는 접미사인 이아(~ia)를 합성시켜 오시리아라는 새로운 지명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아무튼 귀에 익은 발음도 아닌데다 길가에 늘어선 이국적인 건물들까지 겹치다보니 마치 외국에라도 나온 기분이 든다. 그만큼 주변 풍광이 뛰어나다는 얘기이다.



탐방로는 해안선을 따라 나있다. 해식애까지는 아니어도 파도와 바람에 닳고 닳은 기암괴석들이 널려있다시피 한 아름다운 해안이다. 길가 경관 좋은 곳에는 벤치도 놓아두었다. 빼어난 주변경관을 실컷 즐기다 가라는 모양이다.



해안가 벼랑에는 군부대도 들어앉았다. 아까 시랑대 근처에서 보았던 부대보다 그 규모가 훨씬 더 커졌다. ‘남북 또는 북미대화가 한창인 요즘은 금방이라도 통일이 이루어질 것 같은 추세이다. 하지만 이념이 다른 두 체제가 공존하고 있는 것 또한 무시 못 할 현실이라 하겠다. 화해무드라는 분위기에 너무 휩쓸리지 말고 국가 안보에 충실해야 되겠다는 얘기이다.



잠시 후 탐방로는 오랑대공원(五郞臺公園)’에 이른다. 오랑대의 자연 경관을 보존함과 동시에 시민들에게는 휴식처를 제공하기 위해 조성된 공원이다. 총면적이 17334인 공원은 첩첩의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진 해안과 해안가에 툭 튀어나온 넓고 편편한 잔디밭으로 이루어져 있다. 공원 내에는 산책로가 잘 나있는데, 바닷가에는 카메라의 삼각대를 펼쳐놓기에 안성맞춤인 장소도 여럿 보인다. 일출 명소를 찾아온 사진 동호인들이 자리 잡기에 딱 좋을 것 같다.



동쪽 바닷가에는 자그만 바위봉우리가 솟아올랐다. 그 위에는 자그만 암자가 지어져 있다. ‘용왕단이라는데 지붕에 탑을 쌓아올렸는가 하면 지붕 모서리에는 용의 머리를 조각해 놓았다. 안에는 용왕(龍王)으로 보이는 상()을 모셨는데 그 앞의 제단(祭壇)에는 물 말고도 소주가 두 병이나 올려져있다. 술깨나 좋아하는 용왕님인 모양이다. ‘미랑대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는 오랑대(五郞臺)는 지명과 관련해 정확히 알려진 설화(說話)는 없다고 한다. 다만 옛날 기장으로 유배 온 친구를 만나러 시랑 벼슬을 한 다섯 명의 선비들이 이곳에 왔다가 술을 마시고 즐겼다는 데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그 밖에 이곳에 오랑캐가 쳐들어와서 오랑대라고 불렀다는 주장도 있으니 참조한다.



대변항으로 향한다. 탐방로는 차량이 지나다녀도 충분할 정도로 넓어졌다. 비포장 길이지만 바닥에다 야자매트를 깔아놓아 질퍽거리지도 않는다. 오히려 폭신폭신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걷기에 무척 좋다는 얘기이다. 거기다 주변의 자잘한 바위들로 이루어진 바닷가 풍경도 괜찮은 편이다. 하긴 부산을 대표하는 길 중에 하나로 꼽힌다니 두말하면 뭐하겠는가.



주변 풍광에 도취되어 느긋하게 걷다보니 어느덧 서암(西岩) 마을이다. 서암마을의 옛 이름은 여리개(여리포, 餘里浦)’였다고 한다. ‘남을 ()’는 남어(넘어)의 뜻을 가지므로 한글로 표기할 경우에는 남이개가 된다. 즉 남(넘어)+(동네)+(포구)로 구성된 합성어인 것이다. 신암 마을에서 보면 언덕 너머에 있는 포구 마을이라고 해서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서암(西岩)이라는 지명도 신암의 서쪽이라서 붙여진 지명이란다.



대변항의 특징 중 하나는 등대들이 아닐까 싶다. 서암마을 앞의 젓병등대와 닭볏등대(일명 차전놀이 등대)는 물론이고 외곽의 방파제에도 여러 개의 등대를 만들어 놓았다. ‘마이징가Z 등대태권V 등대’, ‘월드컵기념 등대등 하나같이 특이한 이름을 가졌다. 이 등대들은 붙여진 이름에서 모티브(motive)를 딴 외관(外觀)이 보는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서암항의 남방파제에 있는 젓병등대가 아닐까 싶다. 한눈에 보아도 아기 젖병 모양을 본떠 만든 등대는 여행자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할 만큼 독특하고 귀엽다. 계속해서 감소하는 대한민국의 출산율을 장려하기 위해 만들었다는데 부산 지역 144명 영유아의 손과 발을 찍은 타일이 등대의 벽면에 붙어있단다.



이곳은 바닷가, 그 가운데서도 제법 큰 마을이 자리 잡았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가장 먼저 찾아봐야 할 곳은 횟집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곳은 횟집을 찾는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비록 가건물 형태이긴 하지만 신암(新岩) 마을앞에다 집단 회촌을 조성해놓았기 때문이다. 다만 횟감보다는 조개종류가 많아 보인다는 게 단점이라면 단점일 수도 있겠다. 아무튼 포구 근처에서 회를 사먹을 때의 재미 중 하나가 상인과의 실랑이다. 실랑이를 재미로 여기는 내가 좀 이상할지도 모르겠지만, 깎고 깎이는 관계에서 생기는 기싸움은 곧 삶의 현장이 된다. 당사자로서는 썩 재밌는 일이 못될 수도 있으나, 곁에서 살짝 구경만 해봐도 흥미진진한 볼거리다. 아무튼 이곳 상점 대부분은 가격대를 맞추어 손님을 끌고 있지만, 덤으로 주는 것은 제각각이라고 한다. 하긴 사람들도 그게 무엇이든 무엇 하나 더 주는 재미에 찾아드는 법이니 부창부수(夫唱婦隨)인 셈이다.



횟집이 즐비한 신암마을 물양장에서 오른편으로 놓인 다리(蓮竹橋)를 건너면 죽도(竹島)’가 나온다. 대나무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지금은 대나무보다 동백나무가 더 많다고 한다. 아무튼 이 섬은 기장군의 유일한 섬으로 기장팔경의 하나이다. 하지만 개인 소유가 되어 철조망이 쳐진 지 이미 오래다. 그렇다면 이미 다리를 건너버린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 내가 본 그들은 섬의 옆구리에 붙어있는 널디 너른 갯바위에서 노닐고 있었다. 참고로 회촌이 있는 신암(新岩) 마을의 옛 이름은 무재이다. 무재에서 의 고어이고, ‘이라고도 부르는데 ()’의 고어로 수성(水城)으로 해석된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포구에 수군영이 있어 새바오, 동영(東營)’이라고 하였는데, 이를 잘못 발음해 새바우가 되며 한자명으로 신암(新岩)이 되었다고 한다. 신암의 은 새롭다는 뜻으로 해 뜨는 곳’, 동쪽을 의미하며, ‘()’의 옛말인 바오를 오기해 쓰인 지명으로 본다.



트레킹 마무리는 대변항 조형물 앞

죽도에서 빠져나와 다시 대변항으로 향한다. 아름다운 어촌 100곳 중 하나로 해양수산부가 선정한바 있는 항구이다. 기장의 자랑인 멸치축제가 열리기도 한다. ‘신암마을 회촌을 벗어나도 음식점들은 줄어들지 않는다. 다만 집단으로 모여 있지 않고, 파는 종류도 회와 곰장어구이로 바뀌어 있을 따름이다. 그렇게 잠시 걷다보면 널따란 주차장에 이른다. 멸치광장이란다. 광장에는 거대한 은빛 조형물 하나가 햇빛에 반짝거리고 있다. 은빛 멸치의 역동적인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낸 조형물이라는데 예술에 문외한인 내 눈에는 멸치의 형상이 잡히지 않는다. 그나저나 오늘 트레킹은 총 4시간50분이 걸렸다. 물론 산악회에서 제공한 점심을 먹는데 소요된 시간까지 들어있으니 엄청나게 빨리 걸은 셈이다. 아무튼 버스가 풀발하려면 50분 정도가 남았다. 넉넉하지는 않지만 지역 특산물을 안주삼아 소주 두어 병 정도는 너끈히 마실 시간이다. 이 지역의 먹거리는 멸치회와 곰장어구이라 할 수 있겠다. 일단은 크고 깨끗한 집으로 들어서고 본다. 장어구이를 시켰는데 별로 맛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같이 간 친구는 맛있다고 하는데도 말이다. 생선을 좋아하지 않는 내 식습관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해파랑길’ 1코스-2(솔밭공원주차장해운대 미포마을)

 

여행일 : ‘18. 6. 2()

소재지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여행코스 : 솔밭공원 주차장동백섬 APEC하우스해운대해수욕장미포마을(거리 : 4)

 

함께한 산악회 : 청마산악회

 

특징 : ’해파랑길‘ 770의 첫 번째 코스는 오륙도 해맞이공원에서 해운대 미포마을까의 17.8구간으로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첫 번째로 만나게 되는 이기대길구간부터 경탄과 감탄을 자아내는 해식절벽의 비경으로 아름답다. 해운대는 신라 최치원이 속세를 버리고 가야산으로 들던 길에 빼어난 경치에 반해 자신의 자()인 해운(海雲)을 바위에 새겨 넣은 것이 이름으로 굳어진 곳이다. 지금도 동백섬 바위에 최치원이 새겼다는 해운대 글씨가 또렷하다. 아무튼 1코스가 들어있는 부산구간은 총 4개 코스로 이루어져있는데, 이 부산구간은 부산의 올래길이라 할 수 있는 갈맷길(Galmaetgil Road)‘과 겹친다. 해파랑길 1코스에서 3코스 구간이 갈맷길 1,2코스의 역순으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갈맷길이란 부산의 시조(市鳥)'갈매기'''의 합성어다. ‘갈매는 순수 우리말로 깊은 바다를 뜻하기도 한다니 참조한다. 부산의 산과 바다, , 온천을 걸어서 체험할 수 있도록 총 9개 코스 21개 구간, 278.8길이로 2012년에 만들어졌다.



잔여구간의 시작은 동백섬의 들머리에 있는 솔밭공원 주차장(해운대구 우동 701-3)‘에서 시작된다. 해운대해수욕장의 뒤로 나있는 해운대 해변로의 도로변에 조성되어 있는데, 솔밭공원과 경계를 맞대고 있다.




주차장과 맞닿아 있는 송림공원으로 올라선다. 넓이 5만여의 솔밭인데 부산시에서 해운대해수욕장 및 동백섬과 연계된 공원으로 조성해놓았다. 울창한 소나무 숲이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잔디와 꽃나무들, 잘 다듬어진 산책로가 눈길을 끈다. 특히 소금기를 듬뿍 머금은 모래바람 속에서도 잘 자란 소나무는 품위까지 있어 보인다. 도심공원으로서 시민들의 휴식처 노릇을 톡톡히 수행할 것 같다.



공원의 끄트머리에 있는 웨스턴조선호텔앞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자 동백공원 순환산책로가 나온다. 입구에는 동백섬에 대한 안내판을 세워 놓았다. 해운대12경 가운데 하나인 동백섬은 해운대해수욕장의 오른쪽 끝에 붙어있는 육계도(陸繫島, land-tied island), 즉 사주(砂洲, sandbar)가 발달해 육지로 변한 섬이라고 한다. 원래는 섬이었는데 바로 옆으로 흐르는 춘천(春川)이 퇴적작용을 일으켜 육지와 연결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옛날 명칭 그대로 불리고 있단다. 섬 전체를 붉게 물들이는 동백나무가 만들어낸 그 이름말이다. 참고로 섬의 모양이 다리미와 비슷하다고 하여 다리미산또는 다리미 섬으로 불리기도 한다니 참조한다.




동백섬에는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다. 2006년 부산에서 APEC이 개최되면서 해운대 환경이 새롭게 조성되고 산책길도 더 좋아졌다. 섬을 한 바퀴 도는 순환산책로 외에도 가로와 세로로 산책로가 잘 뚫려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길은 순환산책로일 것이다. 그 길을 따르다보면 바다와 숲이 만드는 절경과 함께 멀리 광안대교, 오륙도, 달맞이 고개 등이 잘 조망된다. 또한 섬 곳곳에서 최치원의 해운대석각, 황옥공주 전설이 깃든 인어상, 누리마루 APEC하우스 등도 만날 수 있다.



산책로 주변에는 여가가지 조형물들을 세웠다. 벤치를 놓아두었음은 물론이다. 산책로가 아니라 이건 숫제 공원으로 꾸며놓았다. 하긴 섬 전체를 동백공원이라는 이름으로 관리하고 있다는데 오죽하겠는가.



산으로 올라가는 길도 보인다. 들머리에는 최치원 동상 가는 길이라고 적힌 입간판도 세워놓았다. 하단에는 최치원(崔致遠) 선생이 이곳을 지나가다가 아름다운 주변경관에 반해 대를 쌓고 바다와 구름, 달과 산을 음미하면서 소요하다가 남쪽 바위에다 해운대(海雲臺)‘라 적었는데, 그게 이곳의 지명이 되었다는 유래도 적어놓았다. 아무래도 해발고도 57m인 동백섬 중앙에 만들어 놓았다는 최치원 선생의 동상(銅像)과 시비(詩碑)로 올라갈 수 있는 산책로인 모양이다. 하지만 직접 올라가보는 것은 사양키로 한다. 트레킹 시간을 조금 단축해서 남은 시간에 소주라도 마셔볼 요량이기 때문이다. 모처럼 고우(故友)와 함께하는 여행인데 그 아까운 시간을 어찌 그냥 흘려보낼 수 있겠는가.



산책로 주변에는 소나무가 더 많아 보인다. 하지만 곳곳에는 아직도 동백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섬의 이름부터가 동백섬인데 오죽하겠는가. 섬 전체를 붉게 물들이는 동백나무가 많이 자라는 곳이라는 데서 이름이 유래됐다니 말이다. 겨울에서 봄 사이에 동백나무에서 떨어진 꽃이 땅에 쌓이면 지나가는 사람과 말발굽에 밟히는 것이 34(1치는 약 3)나 되었다고 전해질 정도이다. 동백섬이란 명칭을 가진 섬은 우리나라에 여럿 있었으나, 지금까지 동백섬으로 불리는 섬은 해운대 동백섬이 유일하다고 한다.



얼마간 들어가자 예쁘장하게 지어진 원형의 건물이 나타난다. ‘누리마루 APEC하우스인데 20051118~19일에 열렸던 13APEC 정상회담때 회의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새로 지은 건축물이다. ‘누리마루 APEC하우스란 명칭은 순수 우리말인 누리(세상, 세계)’, ‘마루(정상, 꼭대기)’APEC회의장을 상징하는 ‘APEC하우스를 조합한 것으로 세계정상들이 모여 APEC회의를 하는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단다. 건물 자체가 예쁠 뿐만 아니라 울창한 동백나무와 송림으로 둘러싸인 주변 경관과 잘 어우러진 탓에 해마다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온다고 한다. 특히 일본인 여행객들에게는 자갈치시장 다음으로 방문 빈도가 높은 명소로 알려져 있다.



산책로 난간에는 여러 시인들의 시()를 프린팅(printing)해 걸어놓았다. 그저 그러려니 하고 걷다가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이 멈추어진다. 꼭 나를 지칭하는 것 같은 시가 하나 걸려있었기 때문이다. 시의 제목인 예순 일곱에는 지금 내 나이와 정확히 일치한다. 시의 내용 또한 요즘의 내 처지와 어쩌면 그렇게 똑 같은지 모르겠다. 쓸쓸함, 허망함... 하지만 인생은 육십부터라는 말도 있지 않는가. 아니 요즘 경로당에서는 칠십도 받아주지 않는다는 소문도 있다. 아직도 꿈이 있는 나이라는 얘기이다 .그래서 난 오늘도 이렇게 길을 걸으며 새로운 것을 보고, 듣고, 느끼며 또 다른 내일을 위해 그것을 정리해 간다.




조금 더 걷자 이번에는 등대(燈臺)가 나타난다. 하얀색으로 지어진 앙증스럽고 예쁜 등대를 한쪽 귀퉁이에다 놓고 그 주변은 전망대로 꾸며 놓았다. 실경과 비교해가면서 조망을 즐길 수 있도록 조망도를 세워놓았는가 하면, 멀리 떨어진 경관까지 속속들이 보라는 듯이 망원경까지 설치해 두었다.





전망대에 서면 누리마루 APEC하우스의 옆모습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누리마루는 지상 3층의 건축물로 건물 전체의 조형은 한국전통의 건축인 정자(亭子)‘를 현대적으로 표현했으며, 지붕의 형태는 동백섬의 능선을 형상화하였고, 내부 장식은 한국의 창조적 전통문화를 시각적으로 표현했다고 한다. 12개의 외부 기둥은 부산의 역동적인 모습을, 내부 장식은 한국의 전통문화를 시각적으로 표현했고, 그 밖에도 대들보 꼴로 만들어 전통 단청을 입힌 로비 천장과 대청마루 느낌을 받도록 한 로비 바닥, 석굴암 천장을 모티브로 설계한 정상회의장, 구름 모양을 형상화한 오찬장 등 건물 구석구석마다 한국 전통 양식이 짙게 배어 있다는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대청마루를 콘셉트(concept)로 한 테라스에서는 오륙도와 광안대교, 달맞이 언덕 등이 잘 조망된다고 알려져 있다.



전망대에서 보는 부산의 전경은 인상적이다. 건너편 미포 쪽 해안끝선과 달맞이 언덕, 바다와 하늘을 가로지르는 광안대교, 부산바다의 상징 오륙도 등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몇 걸음 더 걸으면 다른 전망대가 나온다.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되는 곳이니 유념해두어야 할 일이다. 이곳에서 해운대라는 이름을 낳게 한 석각(石刻,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45)‘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전망대 난간에 서자 철제 울타리 안에서 보호를 받고 있는 작은 바위가 눈에 들어온다. ’해운대(海雲臺)‘라는 이곳의 지명을 낳게 한 석각(石刻)‘이다. 이 석각은 신라 말기의 학자인 최치원(崔致遠 ,857~?)이 쓴 것으로 전해진다. 선생이 가야산으로 향하던 도중 이 주변의 자연경관이 너무도 아름다워 돌을 쌓아 대를 만든 후, 바다와 구름, 달과 산을 음미하면서 바위에다 해운대(海雲臺)’라는 글씨를 새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치원 선생의 글씨라는 사실이 확인된 바는 없다고 한다. 고려시대 문신 정포(鄭誧, 1309~1345)가 읊은 대는 황폐하여 흔적이 없고 오직 해운의 이름만 남아 있구나라는 싯귀에서 그 근거를 찾고 있을 따름이다. 그런 좋은 인연을 후세 사람들이 놓칠 리가 있겠는가. ‘해운대라는 지명이 생겨난 이유일 것이다.




조금 더 걷자 또 다른 전망대가 나타난다. 이곳도 역시 그냥 지나칠 일은 아니다. 등대가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서슬 시퍼런 해벽 위에 걸터앉은 등대가 푸른 바다와 어우러지며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낸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으로 말이다.



이쯤해서 미포 쪽 해안끝선과 달맞이 언덕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하늘을 향해 치솟은 건물은 현재 공사가 한창인 해운대 엘시티더샵일 것이다.



이후부터는 데크로드를 따른다. 바닷가 해안절벽(海岸絶壁)을 따라 난 탐방로에는 곳곳에 전망대까지 들어앉혔다. 서두르지 말고 조망을 즐기면서 걸어보라는 얘기일 것이다. 아무튼 해운대해수욕장에 가까워질수록 미포 쪽 해안끝선과 달맞이언덕이 점점 더 또렷해진다.





갯바위 사이를 작은 도보 현수교로 연결해 놓기도 했다. 긴장감을 부추기려는 노력도 보인다. 출렁다리의 중간에 강화유리를 깔아놓은 것이다. 하지만 다리의 높이 워낙 낮은 탓에 무서워하는 사람들은 눈에 띄지 않는다.







해안산책로가 끝나갈 즈음이면 파란색 인어상(人漁像)을 만난다. ’황옥공주(黃玉公主)‘의 동상(銅像)이라는데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늘 북새통을 이루는 곳이다. 이 동상은 1989년에 복원된 것이라고 한다. 1974년에 만든 원래의 동상은 1987년에 몰아친 태풍 셀마로 인해 유실되었단다. 이후 작품 공모과정을 거쳐 높이 2.5m에 무게가 4톤인 청동(Bronze) 좌상(坐像)이 새롭게 제작되었다. 제작은 동아대학교 임동락교수가 맡았다. 아무튼 원래의 동상보다 크기가 더 커졌을 뿐만 아니라 위치 또한 원래 있던 곳보다 해운대 백사장 쪽으로 더 가까워졌다고 한다.



인어상에는 애틋한 전설이 깃들어 있다고 한다. 나란다국의 황옥 공주는 무궁국의 은혜왕에게 시집을 왔는데, 세월이 흐르자 고국이 매우 그리워졌던 모양이다. 이때 옆에서 호위하던 거북이 이를 안타깝게 여겨 왕비에게 황옥(黃玉)을 주면서, 보름달이 뜨는 날 황옥을 꺼내어 달에 비추어 보라고 일러 주었다. 보름날 왕비가 황옥을 달에 비추어 보니 어느덧 눈앞에는 꿈에도 그리던 고국의 아름다운 달밤이 나타났고, 또한 황옥 왕비는 인어 공주로 변신되어 바닷속을 마음대로 헤엄칠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전설에 나오는 황옥 공주를 인도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로, 금관가야 김수로왕(金首露王)의 왕비 허황옥(許皇玉)이라고 보는 향토사학자들도 있으니 참조한다.





바닷가에 갯바위까지 갖추었으니 어찌 낚시꾼이 없겠는가. 그런데 아무리 봐도 입질은 없을 것 같다. 이렇게 시끌벅적한 곳까지 찾아와 노닐 정도로 한가한 고기가 어디 있겠는가. 그렇다면 저 사람은 진정한 강태공의 후예일지도 모르겠다. 고기보다는 세월을 낚고 있는 셈이니 말이다.



동백섬 해안산책로가 끝나는 곳에서 해운대해수욕장이 시작된다. 부산, 아니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해수욕장이라 하겠다. 해운대구 우1동과 중1동에 걸쳐 있는데, 고운 모래로 이루어진 해변의 총 면적은 58,400m2이며 길이 1.5km에 폭은 30m~50m라고 한다. 유명 관광지답게 조선비치호텔 등 300여개의 편의·숙박시설들 인접거리에 있다. 아무튼 널따란 백사장이 너무도 바다와 잘 어울리는데 해마다 줄어든 모래를 채워 넣는 등 공들여 가꾸어가고 있단다.




모래사장의 뒤에는 소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다. 숲이 크고 울창하진 않지만 벤치 등의 편의시설 들은 물론이고 각종 조형물까지 배치해 멋진 공원으로 꾸며놓았다. 바닷물에 들어가지 않는 사람들이 쉬었다가기에 딱 좋겠다.




초여름 날씨가 시작되었다고 시끌벅적하더니 바닷가에는 많은 인파로 붐비고 있다. 그러고 보니 엊그젠가 뉴스에 해수욕장을 61일에 조기 개장한다고 했던 것 같다. 그 기사는 백사장에 '파라솔 없는 구간'을 조성해 버스킹, 해변라디오, 북카페, 비치시네마 등을 운영한다는 내용도 전했었다. 야외부대 등 백사장에 설치된 시설들을 보니 예정대로 개장이 이루어졌던 모양이다. 하지만 아직은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지 않은 모양이다. 그 유명한 해운대의 파라솔이 눈에 띄지 않는 걸 보면 말이다.참고로 2008년 이곳에 설치된 7937개의 파라솔은 세계 최고의 기록으로 인정받아 기네스북에도 등재된바 있다.



3곳이나 되는 야외무대에서는 출연자들의 연습이 한창이다. 해떨어지고 난 뒤에 공연이라도 있는 모양이다. 참고로 이곳 해운대에서는 부산바다축제와 해운대Beach Festival 등과 같은 각종 국내·외 문화·예술행사가 사계절 개최된다고 한다.




사람들이 몰려드니 포토죤(photo zone)’이 없을 리가 있겠는가. 명색이 대한민국 최고의 해수욕장으로 소문났는데 말이다.




백사장에는 모래 더미가 여러 곳에 쌓여있다. 바다 모래 축제를 위해 예술가들이 조각한 작품들이란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건 10일 밖에 남지 않은 ‘6·13 지방선거의 투표 참여를 독려하기 위한 작품이 아닐까 싶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투표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디 있을까 싶다. 근대 민주주의 정치의 절차적 핵심은 선거이다. 그리고 투표 행위는 선거의 요체로 투표자의 구실을 구체화시키는 기능을 담당한다. 그러니 우리에게 주어진 신성한 권리를 놓쳐서는 안 될 일이다. 정치를 잘하느니 아니면 못하느니 하는 것보다는 후보자들을 제대로 보고 올바른 선택을 해서 후회하는 일이 결코 없도록 해야겠다.





해운대 해수욕장을 지나는 걷기는 그다지 유쾌하진 못했다. 주말이어서 많은 인파가 몰리다보니 해파랑길 걷기의 참맛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해파랑길 걷기의 진면목은 뭐니 뭐니 해도 호젓한 걷기가 아니겠는가.



해수욕장이 끝나고 이어서 해안길을 따라 조금 더 걷자 북쪽 끝에서 미포(尾浦)가 반긴다. 소가 누워있는 모양인 와우산(臥牛山)의 말미(末尾)에 해당되는 곳이라는 뜻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아름다운 경관에 푹 빠져 걸었던 4시간여의 1코스 트레킹이 종료되었다. 눈이 즐거우면 마음은 그 즐거움에다 행복까지 더해진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보다 더한 보약이 따로 있을까 싶다. 하지만 뭔가 빠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건 무슨 이유일까? 그래 누군가 웰빙(well-being) 여행의 마지막 퍼즐조각은 단연 먹거리라고 했다. 마침 주어진 시간까지도 넉넉하지 않겠는가. 미포 근처의 음식점을 기웃거리다 마음에 드는 집을 골라 안으로 들어선다. 닭요리에 소주와 맥주로 반주를 삼았는데 맛이 괜찮았다.


해파랑길’ 1코스-1(오륙도용호동 LG메트로시티)

 

여행일 : ‘18. 6. 2()

소재지 : 부산광역시 남구

여행코스 : 오륙도해맞이공원이기대 해안동생말LG메트로시티(거리 : 6)

 

함께한 산악회 : 청마산악회

 

특징 : 해파랑길은 동해의 떠오르는 해와 푸른 바다를 길동무 삼아 함께 걷는다는 뜻으로 부산광역시 오륙도 해맞이공원을 시작으로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에 이르는 초광역 걷기 길이다. 2010년부터 문화체육관광부 주관으로 ’()한국의길문화와 각 지자체 및 지역 민간단체가 뜻을 모아 조성했는데, 770에 이르는 동해안을 총 10(부산·울산·경주·포항·영덕·울진·삼척동해·강릉·양양속초·고성) 구간 50개 코스로 나누었다. 참고로 해파랑길의 심벌마크(Symbol Mark)는 노랑 파랑 하양의 세 가지 색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동해안의 역사적 의미와 함께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요소로서의 가치를 이미지화했다고 한다. 다른 한편으로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나라 지도와 독도 그리고 동해와 울릉도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트레킹의 시작은 오륙도 해파랑길 관광안내소

해파랑길의 시작점은 동해의 최남단이므로 동해와 남해의 분기점인 오륙도 해맞이공원이다. 부산지하철 2호선 경성대부경대역에서 내려 일반버스 27번이나 131번을 이용하면 된다. 해파랑길은 총 770의 거리를 50개 코스로 나누었는데 부산구간은 4개 코스로 구성되어 있다. 대부분 갈맷길과 겹치는데 이기대 공원으로 향하는 해안 절벽과 광안리 해수욕장 그리고 해운대 해수욕장과 송정 해수욕장은 부산을 대표하는 여름 휴양지이다. 특히 미포와 대변항 그리고 임광 해변과 진하 해변에 이르는 동해안 첫 번째 노정은 바다와 절벽 그리고 해안선과 해수욕장이 함께 있어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명품 걷기 코스이다. 오늘은 이 중에서 들머리에 해당되는 1코스 구간 17.6를 걷게 된다. 부산의 오륙도 해맞이공원을 출발해 해운대 미포에 이르는 코스로, 해안절벽 산책로와 해변길, 해송(海松)숲길 등을 품은 비경이 펼쳐진다. 또한 길 중간에 빠져나갈 곳이 많아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다.





먼저 오른편에 위치한 스카이워크로 향한다. 들머리에 커다란 표지석이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있을 것이다. 이곳은 오륙도이기대를 결합시킨 관광 상품이다. 아름다운 해안 경관과 끝없이 펼쳐지는 조망을 하나로 결합시킨 명품 관광지인 것이다. 2012년 조성계획을 수립하고 공사에 들어가 201310월에 개장했다고 한다.



안으로 들어가는데 진입로 난간에 사진들이 줄줄이 매달려있는 게 눈에 띈다. 하나같이 아름다운 풍경들이다. ’갈맷길 축제의 부대행사로 열렸던 사진공모전에 뽑혔던 수상작들이란다. 갈맷길의 사계를 담은 사진들이라고 보면 되겠다.



잠시 후 널따란 광장에 이른다. 오륙도의 맞은편, 그러니까 옛 한센인 정착 농원 자리에 조성된 생태광장이라고 한다. 넓이 1,594의 광장은 가장자리를 따라 난간을 두르고, 곳곳에 벤치도 놓았다. 쉼터를 겸하도록 해놓은 것이다. 망원경도 보인다. 조망이 좋은 곳이니 곳곳을 살펴보라는 배려일 것이다. 특히 바다건너 영도에 있는 국립해양박물관에 대한 안내판이 눈길을 끈다. 물방울을 형상하한 디자인에 선박의 모양을 담은 외관에 대한 설명과 함께 그곳에서 하고 있는 일들을 설명해 놓았다. 근처에 있는 것도 아니고, 특히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도 않은 시설의 안내판을 유일하게 세웠다. 이는 이곳 부산에서 바다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얼마만큼 큰가를 엿볼 수 있지 않나 싶다.



광장의 끄트머리에 스카이워크가 만들어져 있다. 35m 해안절벽 위에 철제빔을 설치하고 그 위에 유리판 24개를 말발굽형으로 이어놓은 15m 길이의 유리다리로 한 바퀴 돌아 나오도록 되어있는 형태이다. 바닥유리는 12유리판 4장에 방탄필름을 붙여 특수 제작한 두께 55.49mm고하중 방탄유리라고 한다. 발아래 투명유리를 통해 파도가 절벽을 때리는 모습은 바라볼 수 있게 해놓은 것이다. 엉금엉금 기어가다시피 하고 있는 여성들이 보인다. 그럴 만도 할 것이다. 발아래에 펼쳐지는 풍경이 현기증이 날 정도로 아찔한데 별 수 있겠는가. ! 깜빡 잊을 뻔했다. 스카이워크로 올라가는 데는 무료이지만 반드시 헝겊으로 된 덧신을 신어야만 한다. 바닥에 깔린 유리에 흠집이 나는 걸 막기 위해서일 것이다. 또 하나,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만 이용이 가능하며, 안전사고의 위험이 있는 강풍··비가 올 때는 개방이 제한되고, 입장 인원은 바닥 유리 1면당 5인까지란다.



스카이워크 앞에 펼쳐진 바다는 시시때때로 아름답고 다채로운 색상을 연출한다. 오륙도가 코앞으로 다가와 있음은 물론이다. 고개를 돌리기라도 할라치면 저 멀리 해운대가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대마도까지 바라볼 수 있다고 한다. 너나 할 것 없이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는 게 보인다. 그래 이곳은 사진촬영의 명소로 자리 잡은 지 이미 오래였다. 참고로 오륙도는 부산의 상징이다. 남구 용호동 앞바다의 거센 물결 속에 솟아 있는 여섯 개의 작은 바위섬으로 밀물 때는 방패섬과 솔섬이 합쳐져 다섯 개의 섬이 된다고 해서 오륙도라 불린다. 저 가운데 유일하게 사람이 산다는 등대섬의 본래 이름은 평탄하다해서 밭섬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등대가 세워진 후로 등대섬으로 바뀌었단다.




이젠 해파랑길트레킹에 나설 차례이다. 탐방로는 저 아래에 보이는 해파랑길 관광안내소뒤편으로 열린다. 해파랑길의 처음 5구간은 부산 바다 중에서도 자연미를 가장 잘 간직하고 있다는 이기대(二妓臺)해안을 따라간다. 오래전 군인들의 해안순찰로로 이용돼 군홧발로 다져졌고, 지금은 여행객들의 순한 발길로 넓혀진 아름다운 탐방로다.



널따란 산책로를 따라 100m 조금 못되게 오르자 잘 가꾸어진 꽃밭들이 보인다. 전망대와 정자도 지어져 있다. 최근에 조성된 오륙도 해맞이공원이란다.




공원에는 두세 개의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하나 같이 오륙도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 배치했다. 각각의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섬들의 아름다움은 실로 대단한 절경이다. ’오륙도란 보는 위치와 조수의 차이에 따라 섬의 숫자가 달라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방패섬을 비롯해서 솔섬과 등대섬, 굴섬, 송곳섬, 수리섬 등이 있는데, 등대섬을 제외하면 모두가 무인도라고 한다.




어느 전망대에서건 오륙도는 코앞이다. 아니 오륙도에 거리가 멀어질수록 시야가 더 넓어진다고 하는 게 옳은 표현이겠다. 오륙도의 크기가 작아지는 대신 스카이워크 일대가 더 일목요연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오륙도 스카이워크의 옛 지명은 승두말이라고 한다. 말안장처럼 생겼다고 해서 승두마라고 부르는 것이 승두말로 되었는데, 해녀들과 지역주민들은 잘록개라고도 불렀단다. 바다를 연모하는 승두말이 오륙도의 여섯 섬을 차례대로 순산하고 나서 승두말의 불룩했던 부분이 잘록하게 들어가 선창나루와 어귀의 언덕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잘록한 것이 말안장을 쏙 빼다 닮은 것 같기도 하다.




해맞이공원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탐방로는 산길로 변한다. 들머리에 3.42짜리 이기대해안길이 시작됨을 알리는 이정표와 함께 남구 트레킹 노선안내도를 세우고 산책로를 그려 넣었다. 이 산책로가 원래 4.7이니 이미 1.1를 걸어온 셈이다. ! 부근에 생태습지와 생태관찰로, 유전자원증식장 등의 자연마당이 조성되어 있다는 안내도로 세워져 있다.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해안을 따라 걷는다고 생각하고 가면 길 찾기에 별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갈림길이라도 나올라치면 어김없이 이정표를 세웠고, 간이 이정표로 설치해 둔 해파랑길 리본과 표찰, 바닥페인팅 표시도 길안내를 도와준다.



잠시 후 모퉁이를 돌아서자마자 가파른 산비탈의 중턱을 헤집으며 나있는 탐방로가 눈에 들어온다. 이기대(二妓臺) 해안길의 특징 중 하나로 탐방로 주변은 온통 경탄과 감탄을 자아내는 해식절벽의 비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기대 해안은 장산봉이 바다로 면한 동쪽 바닷가에 위치한다. 기기묘묘한 바위절벽들로 이루어져 있어 경관이 뛰어나지만 직각으로 된 절벽이 아니라 바다에 접한 암반이 비스듬한 경사로 기울어져 바다로 빠져든다는 특징이 있다. 오랫동안 군사작전지역으로 되어 민간인 출입이 금지되어오다가 1993년부터 민간에 개방되었다.



이기대 해안의 절벽길은 기존 해안순찰로를 정비해서 재사용했다고 한다. 조금이라도 위험하다 싶은 곳은 나무데크와 울타리를 만들어 안전한 명품길로 재 탄생시켰다. 남녀노소 누구라도 쉽게 찾을 수 있는 산책로 수준으로 만들어놓은 것이다.



아름답기로 소문난 이기대 해안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기대란 이름은 임진왜란 때 기생 두 명(二妓)‘이 술에 취한 왜장을 끌어안고 벼랑에서 바다로 떨어졌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한단다. 그녀들이 떨어진 곳의 정학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어디서 떨어졌든 실제로 그랬다면 도저히 살아 돌아오기를 바랄 수 없을 만큼 절벽은 풍화와 침식을 거쳐 높고 날카롭게 솟았다.




벼랑의 주름진 허리춤으로 그림같이 이어지는 길을 걷다 보면 바람과 파도, 그리고 억겁의 시간이 조각한 해식(海蝕) 절벽의 기이한 작품들이 곳곳에 널려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50분 만에 만나게 되는 농바위이다. ’()‘이란 버들채나 싸리 따위로 함처럼 만들어 종이를 바른 궤를 포개어 놓은 가구를 말한다. 저 바위가 농처럼 생겼다는 얘기일 것이다. 아무튼 조망을 위한 전용 전망대에다 설명판까지 갖춘 걸 보면 아름다운 이기대의 진수들 중에서도 가장 빼어난 절경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전망대에 오르면 농바위가 확실하게 그 자태를 드러낸다. 쓰러질 듯 위태롭게 바위 세 개가 겹쌓여 있다. 할머니가 보따리를 이고 선 것 같기도 하고, 고기잡이 나간 서방님을 기다리는 아낙네가 바다를 바라보다 망부석이 돼버린 것 같기도 하다. 바람과 파도, 그리고 억겁의 시간이 조각한 기이한 작품들이 해식(海蝕) 절벽의 곳곳에 널려 있다.




갯바위가 있고, 그 앞에 푸른 바다가 펼쳐지는데 강태공인들 없겠는가. 가끔가다 낚싯대를 거두어들이는 걸로 보아 세월을 낚고 있는 것은 아니리라. 저런 곳이라면 고기가 잡히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 요즘에는 느림보의 미학이 대세라고 하지 않는가.





가끔은 무인 방송시설도 만난다. 태풍 등의 기상특보를 탐방객들에게 미리 알려주려는 목적일 것이다.



이 부근이 치마바위가 아닐까 싶다. 치마바위는 부산의 대표적인 관광명소인 태종대와 마찬가지로 까마득한 높이의 바위절벽과 바위들이 절경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아니 바위의 생김새 때문이었다고 하는 것이 더 옳은 고백일 수도 있겠다. 바위의 이름이 치마를 펼쳐놓은 것처럼 생겼다는 데서 유래된 것을 알고 있는데, 저 바위가 문득 그런 모양새로 보이기에 하는 말이다. 따로 안내판을 세워놓지 않아 나처럼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을 듯도 싶다.



문득 코끝을 스쳐가는 바람결에서 짙은 솔향을 느낀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턴가 탐방로 주변이 소나무 숲으로 변해있다. 그것도 어둡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울창하다. 지자체에서 그런 장점을 놓쳤을 리가 없다. 나무그늘 아래에다 벤치를 놓고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근처에 세워놓은 이정표(어울마당 0.1/ 치마바위 1)에 걸린 이름표는 이곳의 지명을 솔밭쉼터로 적고 있다.



잠시 후 시야가 아득하게 넓어지는 어울마당에 닿는다. 어울마당은 계단 형식의 스탠드가 길게 만들어진 걸로 보아 음악회 등의 행사를 위한 야외공연장으로 조성되었지 않나 싶다. 아니 누군가는 이곳을 해돋이의 명소로 소개하기도 했다. 아무튼 이 공간의 뒤편에는 간이매점과 편의시설이 들어서 있다. 쉼터의 기능까지 수행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어울마당의 또 다른 특징은 조망(眺望)이라 하겠다. 멀리 열린 광안리해변 풍광이 이국적이다. 바다 위를 가로지르는 광안대교의 수평선과 거대한 돛을 펼친 듯 우뚝 솟은 마린시티 초고층 빌딩들의 수직선이 교차하며 광안리 바다와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조망터를 만난다. 바다 쪽으로 조금 튀어나오게끔 공간을 만들고 무인 방송시설을 세워놓았다. 또한 김규태 시인의 시비(詩碑)와 함께 이곳이 부산 국가지질공원이라는 안내판도 세웠다. 1999년엔가 이 부근에서 공룡발자국이 발견되었다는 기사를 본 것 같은데, 그래서 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난간의 앞에는 조망안내도를 세우고 광안대교와 마린시티, 해운대, 달맞이공원 등을 그려 넣었다. 눈앞에 펼쳐지는 실경과 비교해가면서 가슴에 담아가라는 배려일 것이다.




북경과 도쿄, 로스엔젤리스 등 세계 주요도시들이 있는 방향과 그곳까지의 거리를 나타내는 이정표도 보인다. 하지만 내 눈길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 나를 향한 방향에 ‘You I’라고 표기가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그 거리는 바라보는 사람의 몫이라는 듯이 ‘?’라고 적었다. 그렇다면 나와 내 집사람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나에게 집사람은 ‘0가 확실한데, 집사람이 느끼는 거리는 과연 얼마나 될까?



얼핏얼핏 보이던 광안대교가 이젠 제법 또렷해졌다. 광안대교는 수영구 남천동에서 해운대구 센텀시티 부근을 잇는 총연장 7.42km의 바다를 가로지르는 국내 최대의 해상 복층 교량이다. 예술적 조형미를 갖춘 첨단 조명 시스템이 구축되어 10만 가지 이상의 색상으로 경관 조명을 연출하며 매년 불꽃 축제에는 100만 명의 관람객이 모인다고 한다.



길가에는 이곳에 있었다는 구리광산에 대한 안내판도 세워져 있다. 이기대의 구리광산은 일제 때부터 채굴을 해오던 역사가 오랜 광산이다. 당시의 이름은 대한광업. 한때는 질 좋은 황동과 구리를 생산하던 갱도가 여럿이었다는데,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있을 따름이다.



해안에는 너럭바위들이 자주 눈에 띈다. 잠시 쉬었다가기 딱 좋은 장소들이다. 아름다운 경관을 향해 카메라의 셔터도 눌러보고, 준비해온 간식도 먹으며 오랜만에 모든 것을 잊은 채, 평화로운 휴식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으로 보인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내 발길은 그러지를 못한다. 하긴 바쁜 일상에 쫒기며 종종걸음을 치며 살아온 인생인데 어찌 쉽게 떨쳐버릴 수 있겠는가. 여행을 왔으니 게으름 좀 피운다고 해서 나무랄 이도 없을 텐데 말이다.



이기대해안산책로가 끝나갈 즈음이면 출렁다리가 길손을 맞는다. 출렁다리가 대미(大尾)를 장식하는 셈이다. 높지도 그렇다고 길지도 않지만 약간의 출렁거림이 감지되는 여러 개의 다리가 놓여있다. 벼랑과 벼랑을 연결시키고 있는데, 이 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해안절벽을 오르내리느라 다리품깨나 팔아야 했겠다.




현수교를 지나면 이기대길과는 아쉬운 작별이다. 그 아쉬움이 짙었던지 건너편 언덕 위에 멋진 볼거리를 올려놓았다. ‘더 뷰(the VIEW)‘라는 부산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웨딩홀이란다. 아름답기로 소문난 부산의 명물 광안대교와 이기대해안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는 것이다. ’(view)‘라는 이름에 걸맞는 웨딩홀이지 싶다.



저만큼에 동생말 전망대가 나타나면서 1시간40분의 이기대 산책로는 끝을 맺는다. 눈이 호사를 누렸을 정도로 아름다운 경관들의 연속이었다. 덕분에 내 안의 잡념(雜念)은 시원한 바닷바람에 씻겨 나가고 몸은 흘린 땀만큼이나 가벼워졌다.



동생말에도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다. 전망대에 서면 부산의 명물들이 완전체로 나타난다. 그 유명한 광안대교와 마린시티, 그리고 해운대 동백섬과 달맞이고개가 파노라마로 눈앞에 펼쳐지면서 감탄사가 신음처럼 흘러나온다. 자연경관과 도시의 장관이 절묘하게 뒤섞인 절경이라 하겠다. 참고로 마린시티(Marine City)는 해운대구 우동에 위치한 과거 수영만 매립지였던 곳에 조성된 주거지 중심의 신도시이다. 부산의 부촌 가운데 한곳인 지역이며, 고층 아파트들이 많다보니 가장 화려한 외관을 자랑한다. 마린시티의 야경 또한 빼놓을 수 없다고 한다. 뉴욕이나 홍콩, 도쿄, 상하이에 준하는 한국 최고의 마천루 뷰로 자리 잡았단다.



동생말 전망대에서 내려가는 길, 바다 건너의 광안리대교가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과연 우리나라 최대의 현수교(懸垂橋)답다. 9년 동안 만들어졌는데 총 길이가 7.4에 이른단다. 저 다리는 광안리해변에서 바라보는 게 제격이라고 한다. 다리의 전모(全貌)가 한눈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난 여기서 바라보는 선으로 만족하기로 한다. 선택과 집중을 위해서 1구간 가운데 일부분을 생략할 계획이기 때문이다.



이기대길이 끝나면 탐방로는 도심을 꿰뚫는다. 그렇다고 해서 바다를 완전히 떠나는 것은 아니고, 길은 바다 곁을 멀리 떠나지는 않는다. 그렇게 잠시 걸으면 ’LG메트로시티 아파트가 나온다. 아파트 곁에 만들어진 소공원에서 산악회에서 준비한 식사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에서 난 1코스의 중간부분을 생략하기로 했다. 산악회버스를 이용해 동백섬까지 이동하려는 것이다. 까짓 도심을 걷는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렇다고 아쉽지 않다는 얘기는 아니다. 부산의 명물인 마린시티(Marine City)를 둘러보지 못하게 됐으니 말이다. 그곳은 스카이라인이 장관이라고 알려져 있다. 동백섬과 광안대교에서를 바라볼 때 형성되는 스카이라인이 일품이라는 것이다. 사진 애호가들이 즐겨 찾는 촬영의 명소란다. 또한 그곳에는 영화의 거리가 조성되어 있다고도 했다. ’영화와 놀고 즐기기란 주제로 산토리니광장, 천만 영화 존, 애니메이션 죤 등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고 하니 한 번쯤 들러볼 만도 하지 않겠는가. 누군가 연인과 함께라면 더 좋다고 했는데, 마침 내 곁에는 집사람이 껌 딱지처럼 딱 붙어있지 않는가. 그러나 어쩌겠는가. 선택과 집중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