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랑길 14코스
여행일 : ‘19. 12. 22(일)
소재지 : 경북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과 호미곶면 일원
산행코스 : 구룡포항→구룡포해수욕장→관풍대→석병항→다무포→동쪽 땅끝 조형물→강사2리→호미곶(거리/ 소요시간 : 15.82㎞/ 3시간 30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총 50개 코스(770km)로 이루어진 해파랑길 중 포항은 ‘6개 코스(13~18)’가 지나가는데 그중에서 백미는 14구간으로 알려져 있다. 이 구간은 대게와 과메기의 본고장 구룡포항에서 시작해 ‘호랑이 꼬리’를 따라 호미곶까지 올라가는 한적한 바닷가길이다. 그러다보니 걷는 내내 바다 냄새에 흠뻑 빠져볼 수 있다. 푸른 바다와 바닷가 갯바위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풍경 또한 빼어나다. 그렇게 만들어진 풍경화에 해라도 떠오른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아닐까 싶다. 매년 초 일출을 보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이유일 것이다. 그래선지 사람들은 이 구간을 1월에 가장 걷기 좋은 길이라고 말한다. 새해가 1주일 정도 밖에 남지 않았으니 나 역시 제 때에 찾아왔다고 할 수 있겠다.
▼ 들머리는 구룡포항 ’아라광장‘ 주차장(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구룡포리)
새만금포항고속도로(대구-포항)의 포항 IC에서 내려와 우측 구룡포・감포 방면으로 방향을 잡는다. 31번 국도를 타고 계속 직진하다가 병포교차로(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병포리 359-2)에서 왼편 929번 지방도로 옮겨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구룡포항‘에 이르게 된다. 해파랑길의 스탬프보관함은 안내도와 함께 북방파제로 들어가는 길이 나뉘는 아라광장의 주차장 코너에 만들어져 있다. 참고로 ‘구룡포(九龍浦)’라는 지명은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신라 진흥왕 때 장기현령이 늦봄에 각 마을을 순시하다가 지금의 용주리를 지날 때 갑자기 폭풍우가 휘몰아치면서 바다에서 용 10마리가 승천하다가 그중 1마리가 떨어져 죽자 바닷물이 붉게 물들면서 폭풍우가 그쳤다는 전설이다. 용두산 아래의 깊은 소(沼)에서 살던 용 아홉 마리가 동해바다로 빠져나가면서 승천했다는 데서 연유되었다는 또 다른 전설도 있다.
▼ 트레킹을 나서기 전에 ‘일본인 가옥거리’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아니 언덕배기에 조성되어 있는 ‘구룡포 공원’부터 오르는 게 순서이다. 꽤나 긴 돌계단으로 연결되는데 양 옆에 세워놓은 120개(왼쪽 61, 오른쪽 59)의 돌기둥이 눈길을 끈다. 1944년에 일본인들이 세운 것으로 원래는 구룡포항을 조성하는데 기여한 일본인들의 이름이 적혀있었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떠난 뒤 주민들이 시멘트로 발라 기록을 덮어버렸다가 1960년에 충혼각을 조성하면서 그 과정에 도움을 준 후원자들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고 한다.
▼ 맨 꼭대기에는 포항지역 출신 전몰군경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충혼탑’과 ‘충혼각’이 자리하고 있다. 그 아래 단에는 구룡포를 형상화한 아홉 마리의 용(龍)이 커다란 조형물로 다시 태어났다. 일제 때 공원을 만들면서 신사와 함께 세웠다는 ‘도가와 야스브로 송덕비(十河彌三郞 頌德碑)’도 보인다. 구룡포 방파제 축조와 도로개설에 관여한 사람이라는데 주민들이 시멘트로 덧칠을 해버려 비문의 내용은 알 수가 없었다.
▼ 공원에서 내려와 이번에는 ‘일본인 가옥거리’로 향한다. 구룡포 공원을 중심으로 오른쪽과 왼쪽으로 길이 나 있는데 난 오른쪽 골목만 둘러보기로 했다. 구룡포는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조용한 어촌마을이었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일본인들이 구룡포 앞바다에 항구를 열었다. 큰 배가 정박할 곳이 생기자 일본인 어부들이 대거 몰려들었고 항구 주변에는 일본인들의 집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일본인 거리의 시작이다. 거리에는 쭉 늘어선 일본식 목조건물과 함께 과거의 사진이 붙어 있어 현재와 과거의 모습을 비교해 볼 수 있다. 거리가 끝나갈 즈음에는 ‘구룡포 근대역사관’도 만날 수 있었다. 일본인 유지였던 ‘하시모토 젠기치(橋本善吉)’의 2층짜리 목조건물을 개조한 것이라는데 시간이 없어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아니 부부와 딸들이 기거하던 침실과 녹슨 재봉틀, 부엌 등 당시 생활상을 재현해 놓았다는 정보가 흥미를 잃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 거리를 빠져나와 왼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그리곤 해파랑길의 시그널을 따라 트레킹을 이어간다. 이 길은 얼마 전 KBS-2TV에서 방영했던 ‘동백꽃 필 무렵’의 촬영지라고 한다. ‘사랑하면 다 돼!’로 대변되는 이 드라마는 공효진과 강하늘의 생활밀착형 치정 로맨스를 그렸는데 23.8%의 최고시청률을 기록했을 정도로 인기를 탔었다. 그래선지 이곳 구룡포가 ‘동백꽃 필 무렵’의 촬영지임을 알리는 현수막을 곳곳에 설치해 놓았다. 참! 그러고 보니 아까 구룡포공원의 계단에서 보았던 ‘인생 샷’을 찍던 커플들도 이 드라마의 영향을 받았던 모양이다.
▼ 얼마 지나지 않아 탐방로는 해안(이정표 : 구룡표 주상절리 1.85㎞, 관풍대 2.65㎞/ 근대 문화역사 거리 0.35㎞)에 이른다. 바다와의 첫 만남인데 탐방로 오른쪽으로 파란 동해바다가 넘실거린다. 왼쪽으로는 그 바다를 마당삼은 소박한 집들이 일 나간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탐방로는 이후부터 해안도로를 따른다. 전체 구간의 90% 정도를 바다를 끼고 걷는데 해파랑길 표식(이정표 및 고유의 리본)과 함께 ‘호미반도 해안둘레길’ 표식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어 길 찾기가 수월하다.
▼ 탐방로는 ‘포항과기고’ 맞은편 구룡포리 어촌계 공동작업장 오른쪽 길을 따라 내려간다. 이어서 대현수산(KBS-2TV의 생생정보에 소개된 ‘대게 맛집’이란다)을 옆구리에 끼고 모퉁이를 돌아서자 왼편 언덕에 걸터앉은 하얀 등대가 눈에 들어온다. ‘사라말 항로표지관리소’이다. 이곳 사라말 주변은 구룡포항으로 입출항하는 선박의 위치를 바꾸는 중요한 지점이다. 그런데 위의 사진에서 보았듯이 노출 및 간출암, 천소(淺小 : 얕은 곳) 등이 산재하고 있어 크고 작은 해난사고가 잦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외형일지라도 등대가 들어서야만 했던 이유일 것이다. 참! 맞은편 바다의 수중암초 위에도 똑 같은 목적의 등표(燈標) 하가가 들어서 있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 조금 더 걷자 자그마한 모래사장(이정표 : 주상절리 1.15㎞/ 근대역사문화거리 1.05㎞)이 나온다. 고운 모래사장이 깔려있는가 하면 공중화장실 말고도 안전사고 예방을 위한 조망대까지 지어진 걸로 보아 ‘해수욕장’이 분명한 것 같은데 이름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조금 전에 만났던 등대의 이름이 ‘사라말(沙羅末)’이었던 걸로 보아 ‘사라끝’이라는 마을일지도 모르겠다. 모래사장이 있다는데서 유래된 마을이 곧 ‘사라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마을은 ‘용주리’로도 불릴 것이다. 마을 지형이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국이라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 모래해변이 끝나갈 즈음 다소 헷갈리는 상황과 맞닥뜨린다. 도로는 왼편으로 나있는데 해파랑길 표식은 바닷가로 내려서라는 것이다. 길은 물론 흔적도 없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자갈밭으로 내려서서 잠시 걸으니 여느 바닷가와는 확실히 다른 특이한 지형이 눈앞에 펼쳐진다. 온통 울퉁불퉁한 ‘바위 밭’인 것이다. 용암이 흘러내리고 오랜 세월 파도와 바람이 깎고 다진 때문이라는데 태고의 모습을 연상케 하기에 충분한 모양새이다. 참! 이곳 바위지대를 걸을 때는 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깜빡 잊을 뻔했다. 바위가 평평해서 파도가 거칠어도 사람이 걸어 다니는 데 문제가 없지만 간혹 미끄러운 바위가 섞여 있기 때문이다.
▼ 너른 바위지대에는 흡사 밭의 고랑이라도 되는 양 군데군데 물길을 만들어 놓았다. 어떤 것은 폭까지 제법 넓다. 이곳 구룡포는 용(龍)의 전설이 곳곳에 배어있는 곳이다. 조금만 시선을 돌리면 흥미진진한 스토리텔링 두어 개쯤은 너끈히 찾아낼 수도 있을 것도 같다.
▼ ‘바위 밭’을 지나면 400m 길이의 백사장을 갖고 있다는 구룡포해수욕장(이정표 : 관풍대 1.1㎞/ 근대문화역사거리 1.90㎞)’이다. 여름이면 발 디딜 틈 없이 붐빈다는 반달 모양의 해수욕장이지만 겨울철이어선지 텅 비어있다. 아니 사람 대신 갈매기들이 떼를 지어 놀고 있다. 참! 아까 지나왔던 ‘사라말해변’의 끄트머리에서 바닷가 대신 도로를 따랐을 경우 ‘새골’이라고 적힌 표지석을 만날 수 있다고 했다. 구룡포해수욕장이 위치한 마을의 이름일 것이다. 200년 전 이 마을이 생겨나면서 새로 생긴 마을이라고 해서 붙여놓은 이름이 ‘새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대신리(大新里)’이다. 1942년 읍으로 승격되면서 마을을 크게 번창시킨다는 의미로 고쳐 부르게 되었단다.
▼ 구룡포해수욕장을 지나자 바닷가 언덕 위에 만들어진 작은 공원이 길손을 기다린다. 방금 지나온 구룡포해수욕장은 물론이고 북쪽으로 ‘삼정리 주상절리’까지 한눈에 내다볼 수 있는 멋진 전망대다. 공원에는 그늘막(겨울철이어선지 막은 걷혀있었다)과 벤치도 놓아두었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아름다운 경관을 여유롭게 살펴보라는 배려일 것이다.
▼ 수직으로 떨어지는 단애(斷崖) 아래로 ‘주상절리(柱狀節理, columnar joint)’가 그 자태를 드러낸다. 하지만 내 눈에는 주상절리의 모양새가 그려지지 않는다. 그동안 보아오던 주상절리들과 많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느낌을 옮겨본다. <이곳에서는 방사형, 부채꼴 등 다양한 방향의 절리가 관찰되지만 가장 우세한 것은 역동적인 사선의 주상절리다. 그것은 화산이 폭발해 용암이 분출되던 바로 그 순간을 보여주는 듯하다.>
▼ 주상절리를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 말고도 바닷가로 연결되는 데크계단도 설치했다. 제주도나 경주의 양남리에 있는 주상절리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규모이지만 직접 내려가 주상절리를 만져볼 수 있다는 게 무척 매력적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이제 흘러내린 용암이 비스듬하게 기울어지면서 굳었다는 사각형의 바위를 만나볼 일만 남았다.
▼ 주상절리를 지났다싶으면 곧이어 ‘삼정리(三政里)’가 나온다. 1리에 해당하는 범진과 2·3리에 해당하는 삼정 등 2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졌는데 그중 범진(凡津) 마을을 먼저 만나게 된다. 원래 지대가 낮았던 이곳은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과 바닷물이 자주 범람했다고 한다. 그런 곳에 위치한 나루터라고 해서 ‘범진’ 또는 ‘범늘’이란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나루터가 넓다는데서 유래됐다는 설도 있으니 참고해 두자.
▼ 마을에는 포구가 들어서 있다. 삼정리에는 이곳 말고도 두 개의 항구가 더 있다. 삼정리가 세 개의 행정마을로 나뉘어 있으니 마을마다 독자적인 포구를 거느리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그러나 지도에 표기된 ‘삼정항’은 2리에 있는 항구라는 것도 기억해 두자.
▼ 포구를 지나자 너른 백사장이 펼쳐진다. 삼정해수욕장으로 트레킹을 시작한지 50분이 지난 지점이다. 이 해수욕장은 깨끗한 바닷물과 완만한 경사가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마을의 고깃배들이 잡아오는 싱싱한 수산물의 맛이 일품이란다. 이어서 탐방로는 ‘삼정2리’에 있는 ‘삼정항’을 지난다. 삼정리에 위치한 세 개의 항구 가운데 가장 크다고는 하지만 자그만 어선 몇 척이 정박해있는 한적한 항구이기는 매한가지다.
▼ 삼정항을 지나자마자 동쪽 바다에 들어선 바위섬 하나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관풍대(觀風臺)라고 하는데 지금은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삼정섬’으로도 불리는 이 섬은 소나무가 울창하고 경치가 아름다워 바람 맑고 달 밝은 밤이면 신선(神仙)이 놀았다는 옛 얘기를 품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섬 입구에 들어선 ‘카페(’Point‘라는 이름으로 포항의 hot place로 자리 잡았단다)’를 찾은 손님들과 갯바위에 터를 잡은 강태공들이 옛날의 신선들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 밖의 경관은 보잘 것이 없으니 일부러 들어가 볼 필요는 없겠다는 얘기이다.
▼ 잠시 후 탐방로는 ‘삼정(三政)’ 마을을 지난다. 옛날에 3정승이 살았던 곳이라 하여, 혹은 삼정승을 지낸 분이 살았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하나의 자연부락인 이 마을은 2리와 3리로 나뉘어져 있다. 그만큼 크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래선지 2리에 이어 3리에도 항구가 만들어져 있었다.
▼ 전망 좋은 바닷가에 자리한 지중해풍의 건물(포스코 패밀리수련원)을 지나면 석병리 땅이다. 마을 입구에 다다르자 ‘두일포’라는 마을 표지석의 뒤를 받쳐주고 있는 작은 바위봉우리가 시선을 붙잡는다. 늙은 소나무 한 그루가 뿌리를 드러낸 채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기 때문이다. 굵거나 가는 뿌리가 서로의 몸을 휘감은 채 흙 밖으로 코를 내민 채, 안간힘을 다해 수액을 빨고 있는 게 하도 집요해서 처연함마저 들게 만든다.
▼ 석병리(石屛里)는 두일포(斗日浦)와 석병(石屛)이라는 두 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탐방로는 그 가운데 1리인 두일포(이정표 : 다무포 고래마을 4.95㎞/ 관풍대 1.1㎞)부터 지난다. 조선 숙종 때의 문신인 송시열이 장기현에 유배되어 있을 때 이곳을 자주 왕래하게 되었는데 이 마을 뒷산의 모양이 마치 말(斗)을 엎어놓은 것 같고, 마을 앞의 나루터가 일(日)자형을 이루고 있다 해서 두일포(斗日浦)라 부르게 했단다. 흔히 ‘들포’라고도 하는데 이는 ‘두일포’를 빨리 부를 때 나오는 음(音)이라니 참고해 두자.
▼ 두일포 포구를 지난 탐방로는 ‘들포회가든’을 왼쪽에 낀 오르막길로 변한다. 이어서 개설된 지 얼마 되어 보이지 않는 비포장길을 따른다. 오른편에 들어서 있는 양식장을 피해 길을 새로 내놓은 모양이다.
▼ 길가에 세워진 이정표(한반도 동쪽 땅끝마을 0.30㎞/ 관풍대 1.65㎞)를 발견하고 앞서가던 일행까지 불러들여 주변을 살피기 시작한다.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한반도의 동쪽 땅 끝에 ‘기념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는 기사(記事)를 읽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온통 양식장뿐이다. 그 뒤의 갯바위에도 조형물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 언덕배기를 넘은 탐방로는 다시 포장도로로 내려선다. 그리고 200m 남짓 더 걷자 또 다른 양식장을 만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이 양식장을 통과해야 ‘한반도 동쪽 땅 끝’ 표지석을 만날 수 있는데 금(禁)줄이 쳐져있는 게 아닌가. 사유지라는 것이다. 앞에서 거론했던 기사에서 주인장의 양해를 얻어 안으로 들어가 봤다고 했기에 찾아봤지만 주인장은커녕 종업원도 눈에 띄지 않는다. 궁리 끝에 일단 금줄을 넘고 본다. 나중에라도 만나면 양해를 구할 요량으로 말이다. 낚시꾼들 몇과 가족으로 보이는 관광객들 몇이 안에 보이는 것을 보면 나 말고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 양식장의 둑을 통과하자 갯바위 지대가 나온다. 한반도의 ‘동쪽 땅 끝’이다. 끝이라는 단어가 가진 묘한 울림 때문인지 바라보이는 하늘이 더없이 푸르고 바다는 한없이 고요하다. 동해가 열려 내가 마치 망망대해로 나온 것 같다. 그리고 그곳에 지구본 모양으로 생긴 ‘한반도 동쪽 땅 끝’ 표지석이 세워져 있었다.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석병리에 위치하며 동경(경도)이 129.35.10에 북위(위도)는 36.02.51이란다. 호랑이 꼬리 가운데서도 가장 동쪽에 있다고 보면 되겠다.
▼ 땅끝을 지나면 이번에는 2리인 ‘석병(石屛)’ 마을이다. 마을을 끼고 있는 긴 해안선이 깎아 세운 듯한 암벽으로 되어 있는 곳이 많아 마치 병풍을 세워 놓은 것 같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단다. 그래선지 바다에는 크고 작은 갯바위들이 널려있다시피 했다. 두일포에서 이곳 석병마을까지는 30분이 걸렸다.
▼ 석병 마을을 지나면 솔숲 사이로 난 오솔길(이정표 : 다무포 고래마을 1.85㎞/ 땅끝마을 2.25㎞)을 걷기도 한다. 솔가리가 수북이 쌓여 여간 폭신폭신한 게 아니다. 거기다 주변에 널린 기기묘묘한 갯바위들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참! 석병리에 있다는 ‘성혈바위’는 구경하지 못했다. 탐방로에서 비켜나 있었던 때문이 아닐까 싶다. 참고로 성혈(性穴)이란 선사시대 신앙의식의 하나로 돌의 표면에 파여져 있는 구멍을 말한다. 원형은 태양, 여성의 성기, 알, 구멍 등으로 상징되며, 당시 인구 증가에 따른 생산량 증대의 필요성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 갯바위에선 강태공들이 낚시에 한창이다. 지금은 학꽁치가 많이 잡히는 철이라고 한다. 물결이 잔잔해선지 그 숫자가 꽤 많다. 하긴 거센 파도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게 강태공들의 특징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용기에 비해 수확은 별로인 모양이다. 입질이 좋으냐는 내 질문에 손사래를 치는 걸 보면 말이다. 챔질을 해대는 알찬 풍경도 찾아볼 수 없었다.
▼ 오솔길이 끝나면 또 다시 아스팔트도로를 만나게 되고, 곧이어 나타나는 구룡포읍과 호미곶면의 경계인 ‘강사1교’를 건너면 탐방로는 다시 해안가로 향한다. 호미곶면 관내인 강사리(江沙里)로 들어선 것이다. 다무포와 강금리, 새기, 송림촌 등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탐방로는 그중 ‘다무포(多無浦)’를 먼저 만나게 된다. 석병마을을 지난 지 20분 만이다.
▼ 마을 앞을 지난 탐방로는 몽돌이 깔린 바닷가로 내려선다. 이어서 해안선을 따라 내놓은 데크로드(이정표 : 다무포 고래마을 0,80㎞/ 땅끝마을 3.30㎞)를 따른다.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해안선을 따라 나있어 눈이 호사를 누리는 구간이다.
▼ 중간에 만들어놓은 전망데크는 그런 아름다운 경관을 가슴속 깊이 담아가라는 배려일 것이다.
▼ 데크로드가 끝나면 지중해풍으로 지어진 ‘라메르(La Mer) 팬션’의 예쁘장한 건물들이 나타나고 곧이어 탐방로는 시골 마을치고는 규모가 큰 다무포(多無浦)로 들어선다. 조선 말엽, 회산 감(甘) 씨가 정착하면서 외진 곳에 숲만 무성하고 없는 것이 너무 많다고 해서 ‘다무포’라는 이름으로 풍자했다는 마을이다. 계곡어귀에 나무가 많다고 해서 ‘다목포’(多木浦), ‘다목계’(多木溪)라 부르기고 했단다.
▼ 포구에 지어진 2층짜리 회관에는 ‘다무포 고래마을’이라는 이름표와 함께 고래의 로고(logo)를 붙여놓았다. 이곳 ‘다무포’ 앞바다가 고래의 서식지라는 얘기일 것이다. 그나저나 없는 것이 너무 많다는 마을 이름(多無)과는 달리 고래잡이가 성행할 때는 다 들고 오지 못할 만큼 고래가 많이 잡혔다니 아이러니라 하겠다.
▼ 길을 걷다보면 과메기를 손질하고 말리는 공장이 심심찮게 보인다. 과메기의 본고장인 포항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 아닐까 싶다. 요즘은 과메기의 배를 따고 내장을 정리하고 씻는 것까지 기계가 다 알아서 한단다. 사람들은 그저 과메기를 다듬는 기계 입구에서 칸마다 과메기를 정돈해 놓아두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손질된 과메기를 바람과 햇볕이 잘 드는 바닷가에서 3일 동안 말린다. 온도가 올라가거나 바람이 없으면 과메기의 제 맛이 나지 않으므로 한겨울에 찬 바닷바람을 맞으며 말려야 제 맛이 난다고 한다. 요즘은 보통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과메기를 만드는데 1년 중 가장 추운 12월 말부터 2월초 사이에 먹는 맛이 최고란다. 제철에 찾은 덕분에 비록 양은 적었지만 과메기 맛을 볼 수 있었다. 트레킹 도중 사갖고 온 일행들이 안주삼아 먹으라며 몇 점 넘겨주었기 때문이다.
▼ 완만한 곡선의 해안도로다. 화산 폭발의 여파가 여기까지 미친 것일까. 바닷가에는 주상절리의 흔적처럼 보이는 바위들이 심심찮게 나타난다.
▼ 고래마을 회관을 출발한지 20분 만에 ‘2리’인 ‘새기(沙基)’ 마을에 도착했다. 1590년 경, 충주 지(池)씨와 달성 서(徐)씨가 처음 만들었을 때만해도 마을 이름은 ‘사지리’(沙只里)였다고 한다. 마을 앞에 큰 모래더미가 있다는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그러다가 사지(沙只)가 와전되면서 ‘새기’라 부르게 되었단다. 참고로 이 마을에서는 1981년부터 3년 주기로 호환(虎患)을 없애는 범굿을 행해오고 있으며 약 370여년 수령의 곰솔(보호수 11-18-14호)이 있는 제당은 포항시 민속신앙 유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 마을에는 이 지역 출신인 ’박광훈‘의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었다. ’내 고향(故鄕) 강산(江山)아‘라는 시인데 고향을 뼈에 사무치도록 그리워하는 시인의 마음이 그대로 담겨있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는 말도 있듯이 인간에게 고향은 어쩌지 못하는 그리움의 대상일 것이다.
▼ 새기마을을 벗어나자 또 다른 데크로드(이정표 : 호미곶관광지 3.1㎞/ 고래마을 2.15㎞)가 길손을 맞는다. 도로가 끊긴 절벽을 이은 데크길은 바다와 거의 맞닿아 있다. 발아래로 파도가 세차게 와서 부딪히는 모습이 가히 달력 그림이다. 숲을 이루고 있는 주변 기암괴석들을 구경하는 재미 또한 쏠쏠한 구간이다.
▼ 데크길이 끝나는 곳에 안내판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관을 쓴 선비 같은 관암, 매 같은 매바위, 까만 흑암, 노란 황암으로 수놓인 이 근처의 바다를 소개하고 있었는데 어떤 바위를 이르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 데크길을 내려서자 해국(海菊) 길이 이어진다. 하지만 지금은 맹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겨울철, 사위는 온통 누렇게 말라비틀어진 풀들 일색이다. 길가에 세워놓은 ‘해국 자생지’ 안내판을 보고 나서야 그중에 해국의 시체가 섞여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 탐방로는 또 다시 해안도로를 따른다. 호미곶이 가까워지고 도로 이름도 ‘해맞이로’로 바뀐다. 그리고 해맞이로가 호미곶길로 바뀌면 걷기 길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되겠다.
▼ ‘해맞이로’를 따른 지 30분 만에 ‘대보1리(大甫一里)’에 도착했다. 호미곶면의 소재지인 ‘대보리’로 들어선 것이다.
▼ 트레킹날머리는 호미곶광장(포항시 남구 호미곶면 대보리)
대보1리에서 10분 조금 못되게 더 걷자 하얀색 등대와 바다에 솟은 ‘상생의 손’이 보이기 시작한다. 새해가 되면 어느 곳보다 분주한 곳으로 해파랑길 14코스는 이곳에서 끝을 맺는다. 호미곶(虎尾串)은 소위 말하는 ‘호랑이의 꼬리’다. 조선 명종 때의 풍수지리학자 격암 남사고는 호랑이 꼬리에 해당하는 천하제일의 명당이라 칭송했고, 육당 최남선은 일출이 가장 멋진 조선10경으로 꼽았다. 호미곶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는 ‘상생의 손’이다. 인생 샷을 남기기 위해 몰려드는 사람들로 항상 붐비는 곳이다. 이밖에도 해맞이광장에는 ‘영일만 호미곶 일출 불 씨’와 또 다른 ‘상생의 손’, 삼국유사에 나오는 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연오랑 세오녀상’ 등이 있다. 또한 새천년기념관에서는 포항의 역사를 비롯해 포항바다의 화석들을 둘러볼 수 있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총 3시간 30분을 걸었다. 핸드폰의 앱에 찍힌 거리는 15.82㎞, 구룡포공원을 둘러보느라 0.5㎞ 정도를 더 걸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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