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북부 유럽 여행

 

여행일 : ‘17. 6. 19() - 7.1()

여행지 : 러시아(모스크바, 페테르부르크), 에스토니아(탈린). 핀란드(헬싱키), 스웨덴(스톡홀름), 노르웨이(오슬로, 발드레스플라야, 요정의 길, 게이랑에르 피오르드, 뵈이야 빙하, 베르겐, 하당에르 피오르드, 하당에르비다국립공원, 덴마크(코펜하겐)

 

일 정 : 28() : 오슬로시 청사, 칼 요한슨 거리, 비겔란조각공원

 

여행 아홉째 날 :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Oslo)

 

특징 : 노르웨이와 유틀란드 반도(덴마크)’의 사이에 있는 스카게라크 해협 (Skagerrak)’에서 내륙의 안으로 움푹 들어온 만()의 안쪽에 위치하는 노르웨이의 수도이다. ‘노르세 이야기(The Norse sagas)’라는 북유럽 전설에도 등장하는데, 바이킹의 후예가 사는 곳으로 알려진 것처럼 1049년 바이킹의 왕인 '하랄(Harald Hardråde)'이 건설했다고 전해진다. 중세인 1300년경 호콘 5(Haakon V)’에 의해 수도로 지정된 이후 노르웨이의 요충지로 거듭났으며 수많은 발전을 거쳐 무역도시로 번성하며 오늘에 이른다. 목재 건물이 많았던 1600년대에는 잦은 화재로 인한 피해를 입다 결국 1624년에는 3일에 걸친 대화재 끝에 도시의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이에 크리스티안 4세는 폐허가 된 오슬로를 복구함과 동시에 근교에 대체 도시 크리스티아니아(Christiania)를 지어 그곳에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1840년대엔 크리스티아니아의 산업적 번성이 이루어지는데 이러한 팽창은 많은 건축적 유산을 남겼으나 1800년대 말 그 추세가 꺾이게 된다. 크리스티아니아가 다시 오슬로라는 이름을 찾게 된 것은 1925년도이다. 이처럼 오랜 역사를 품은 오슬로는 세월을 견뎌낸 수많은 건축물이 즐비하다. 여유롭고 단정한 도심 속에 자리한 중세풍 건물들이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오슬로 여행의 시작은 시청사(Oslo City Hall)의 뒤에 있는 광장으로부터 시작된다. 오늘 둘러보게 될 시청사는 물론이고 도심(都心)이라 할 수 있는 칼 요한슨 거리(Karl Johans gate)’도 이곳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오슬로가 시작된 아케르스후스 요새(Akershus Fortress)’5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시청광장의 서쪽에는 노벨평화센터가 자리하고 있다.2005년 개관해 노르웨이 노벨위원회가 선정·시상하는 노벨 평화상의 역사와 역대 수상자 자료를 보관 전시하는 일종의 박물관이다. 건물이 매우 고전적으로 보이는 건 130년 된 옛 오슬로 서부역사를 개조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설계는 아프리카 가나(Ghana)계의 영국 건축가인 데이비드 아디아예(David Adjaye 1966~)’가 맡았다. 가나 외교관의 아들로 태어나 영국에 정착한 뒤 왕실 작위를 받았을 만큼 유명한 인사이다. 아무튼 이곳에는 초대 평화상 수상자인 앙리 뒤낭을 비롯해 테레사 수녀, 넬슨 만델라, 달아이 라마, 우리 김대중 대통령, 버락 오바마까지 역대 수상자들의 자료가 전시되고 있다.

 

 

시의 900주년에 맞춰 준공된 시청사(Radhuset)는 오슬로를 상징하는 건축물로, 공사 계획과 착공은 1920년이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완공된 것은 1950년의 일이다. 낭만주의와 고전주의가 적절히 결합된 아름다운 외관을 지녔다. 두 개의 탑을 가진 시청사의 내부는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작가들의 예술품들로 가득 장식되어있다. 매년 12월이면 노벨상 시상식이 열리는데, 2000년에는 우리나라의 김대중 대통령이 이곳에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시청 앞 광장은 시청사를 타원형으로 생긴 두 개의 건축물이 둘러싸고 있는 형태이다. 청사를 가운데에 두고 전면의 양쪽에서 둥글게 뻗어 나온 날개 건물이 에워싼 모양새라고 보면 되겠다. 쌍둥이 건물은 아니지만 두 건물이 대칭을 이루고 있음에는 틀림이 없다.

 

 

정면 중앙의 한복판에 오슬로의 상징인 백조 두 마리로 분수(噴水)를 만들어놓았다. 조각가인 ‘Dyre Vaa(1903~1980)’가 만들었다. 노르웨이 소설가 한스 에른스트 칭크(Hans Ernst Kinck 1865~1926)’백조를 '오슬로의 영혼'으로 묘사한 이래 백조는 오슬로의 여러 조형물에 즐겨 쓰는 소재가 되었다. 청사의 정면 상단에 매달린 조각상(彫刻像)‘Joseph Grimeland(1916~2002)’라는 조각가의 '오슬로 소녀(Oslopike)'라는 작품이라고 한다. 오른편 벽면에는 지름 5미터짜리 천문시계가 붙어 있다. 태양이 운행하는 궤도를 12 성좌로 나눈 황도 12, 서양식 12간지라고 할 수 있는 조디악(12궁도)들이 빙 둘러 있는데, 조각가 ‘Nils Flakstad(1907~1979)’의 부조 작품이란다. 시청사 안팎을 장식하고 있는 이러한 조각과 벽화들은 화가 8명과 조각가 17명이 만든 작품들이다.

 

 

청사 안으로 들어서면 천장까지 툭 트인 메인홀(main hall)이 나온다. 가로 31m, 세로 39m에 높이가 21m인 이 공간은 노벨상의 만찬이 열리는 스톡홀름 시청의 블루홀을 벤치마킹했다고 한다. 한쪽에 계단을 놓아 2층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한 구조도 같다. 다만 스톡홀름의 블루홀은 벽돌 벽을 그대로 노출시킨 데 반해, 이곳은 빙 둘러 벽화로 장식한 점이 다르다. 메인홀과 이층 연회실, 그리고 이층 복도의 벽화들은 '벽화 형제들'로 불리던 세 명의 화가( Axel Revold, Alf Rolfsen, Per Krohg)헨릭 쇠렌센(Henrik Sørensen)’이 맡았다고 한다. 벽화에는 노르웨이 사람들의 일상생활, 바이킹 신화, 문화와 역사 등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점령으로 인한 어두운 역사도 잘 표현되어 있다. 독일군이 노르웨이를 점령하고 있던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시청 건축이 잠시 중단되기도 했는데, 그런 아픈 역사를 잊지 않으려는 의도가 아닐까 싶다.

 

 

이곳에서는 다른 나라의 귀빈 영접을 비롯한 다양한 국내외 행사가 열리는데, 특히 1990년부터 노벨 기일인 1210일마다 노벨 평화상을 주는 시상식장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우리네 귓가엔 김대중이라는 이름 석 자만 맴돌 따름이다. 김대중전대통령이 이곳에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노벨은 스웨덴 사람이다. 하지만 노르웨이에서 오래 살았다고 한다. 그의 이름으로 수여되는 노벨상 가운데 평화상을 이곳에서 수여하게 된 이유이다. 평화상만은 노르웨이에서 수여하라는 그의 유언에 따라 매년 1210일에 시청사에서 상을 수여해오고 있다.

 

 

 

관람 동선(動線)은 스톡홀름 시청 블루홀처럼 메인홀 한쪽에 놓은 계단을 올라가도록 되어 있다. 이층으로 오르면 메인홀의 베란다로 연결된다. 스톡홀름 시청처럼 이층 복도를 따라 가면서 방들을 구경하는 구조이다. 이곳에서 눈여겨봐야 할 곳은 남서쪽 모퉁이에 있는 작은 방이다. 시민들의 결혼식 장소로 쓰이는 공간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보다는 뭉크(Munch)의 대형 작품이 걸려 있어 더 유명해졌다. 이 방에 걸려있는 '(Life)'이란 작품은 ‘2차 세계대전때 노르웨이를 점령했던 나치가 약탈해 갔던 것을 전쟁 후에 돌려받은 것이라고 한다.

 

 

연회장으로 가는 길에 만나게 되는 남쪽 '축제의 회랑(Festival Gallery)'이다. 천장은 전통 바이킹 문양으로 장식했고 왼쪽 벽엔 화가이자 직물염색가 코레 미켈센 욘스보르그(Kåre Mikkelsen Jonsborg 1912~1977)’8세기 오슬로 시장 풍경을 묘사한 벽걸이 직물, 태피스트리(tapestry)들이 걸려 있다. 연회장 쪽으로 통하는 문의 벽면에 가득한 그림은 악셀 레볼(Axel Revold 1887~1962)’의 작품으로 노르웨이의 울창한 삼림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입체파 기법으로 그린 것이라고 한다.

 

 

잠시 후 오슬로시의 의사당으로 들어선다. 북유럽의 특징대로 기능적이면서도 생산성이 있어 보이는 구조이다. 다른 한편으론 소박함 속에서도 품위가 있어 보인다고 평하고 싶다. 이 나라는 청사나 의사당을 누구에게나 공개하고 있단다. 그만큼 떳떳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복도의 곳곳에는 유명 인사들의 흉상(胸像)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벽면에는 도자기로 만든 부조들이 결려 있다. 제작한 사람의 약력을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는데 생각은 나지 않는다.

 

 

시청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연회장이다. 왼쪽 벽엔 1905년 스웨덴으로부터 독립한 이후의 왕인 호쿤 7울라브 5’, 그리고 현재의 왕인 하랄 5세와 소냐 왕비의 전신 초상화가 걸려 있다.

 

 

전면에는 윌리 미델파르트(Willi Midelfart 1904~1975)’가 그린 '성장(Growth)'이라는 작품이 그려져 있다. 누드 비치에서 벌거벗고 노는 남녀노소들을 그렸는데, 계급 없는 세상과 사회주의 이상향을 상징한단다. 벽화의 아래에는 연회장의 음식을 나르는 두 개의 문()이 나있다. 이 문과 벽화에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벽화는 원래 일층 중앙홀에 쓰려다가 너무 분방한 소재여서 이리로 옮겨졌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옮기려고 하니 문이 벽화를 잘라 먹어 버리더라는 것이다. 그림을 보면 문을 가리키며 메롱 하는 꼬마가 그려져 있다. 짜증이 난 화가가 일부러 그려 넣은 것이란다.

 

 

주방기구들을 진열해놓은 공간도 보인다. 노벨상 행사 때 사용되는 집기들인 모양인데 은()으로 만든 제품들 일색이다. 그리고 그 하나하나는 섬세하면서 아름답기 짝이 없다.

 

 

기념품을 전시하는 공간을 살펴보다가 화들짝 놀라고 만다. 우리나라의 거북선도 진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전통의상을 입은 인형과 중국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방패, 회교사원인 모스크(mosque)의 모형들 사이에서 의젓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청사의 바깥쪽 벽에는 노르웨이의 국민적 영웅이자 북극 탐험가이자 난민의 아버지인 민중 운동가 프리드쇼프 난센(Fridtjof Nansen 1861~1930)’을 기리는 기념물이 붙어 있다. 그는 1888년 세계 처음으로 그린란드를 횡단했고 1890년엔 북극 탐험에 나서 그때까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북단이었던 북위 8359분까지 북상했다. 난센은 대학 교수, 주영 대사를 거쳐 국제연맹 노르웨이 대표를 지냈고 1차 세계대전 후에는 시베리아에 갇혀 있던 포로의 본국 송환과 난민 구제에 앞장선 공로로 1922년 노벨 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그는 나라도 없이 세계를 떠도는 유랑 난민들의 정착을 위해 제3의 피난처로 '난센 여권'을 주창해 실현시키기도 했는데, 그의 부조상 오른쪽 아래에 보이는 게 '난센 여권'이다.

 

 

시청을 둘러본 다음에는 칼 요한슨 거리(Karl Johans Gate)’로 향한다. 중앙역에서 시작해 왕궁까지 오슬로의 중심부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약 1.3쯤 되는 구간으로 오슬로 최대의 번화가이다. 이 거리의 끝 언덕 위에다 왕궁을 건립한 칼 요한왕의 이름에서 이름을 따왔다. 시청 앞에서도 곧바로 연결되는 이 거리는 상점과 레스토랑이 즐비하며 거리의 중심에는 국회의사당이 있다. 이번 투어는 칼 요한슨 거리를 따라 걷다가 만나게 되는 사연이 있는 건물들의 외관(外觀)을 둘러보는 것만으로 짜여있을 따름이다. 타이트하게 짜인 일정에 쫓겨야만 하는 패키지여행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거리로 들어서서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건물은 국립극장(Oslo Nationaltheatret)이다. 19세기 말 노르웨이가 스웨덴으로부터 분리·독립하면서 노르웨이 극작가들과 예술가들의 염원을 담아 1899년 문을 열었다. 노르웨이에서 가장 극적인 예술 공연을 펼치는 곳으로 유명하다. 극장 앞 좌측에는 헨리크 입센(Ibsen, Henrik Johan, 1828-1906)’의 동상(銅像)이 세워져 있고, 오른쪽은 노르웨이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초대 극장장인 비에 른손(BjØrnson, BjØrnstjerne, 1832-1910)’의 동상이 지키고 있다. 또한 건물 정면에는 대표적인 노르웨이 출신 극작가인 루드비 홀베르(Ludvig Holberg, 1684-1754)의 조각이 새겨져 있다.

 

 

광장 한쪽에 노르웨이 출신의 작곡가인 할보르센(Johan Halvorsen, 1864-1935)의 동상도 보인다. 베르겐 필하모닉의 수석연주자를 거쳐 1893년부터 지휘자로 활동했다. 1899년 개장한 국립극장의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임명되었고 1929년 은퇴할 때까지 30여 년 동안 지휘자로 활동했다. 이 기간 동안 30여 개의 오페라를 지휘했고 또한 30여 개의 무대음악을 작곡하였다. 은퇴 후에는 마지막 음악적 정열을 집중시켜 세 개의 교향곡과 두 개의 노르웨이 광시곡을 작곡하였다. 할보르센은 그리그가 수립한 노르웨이 민족음악을 발전시켰으나, 그리그와는 확실하게 구분되는 스타일로 작곡하였다. 그리그의 여러 개의 피아노곡을 오케스트라용으로 편곡하였는데, 그 중 하나를 그리그의 장례식에서 연주하였다. 또한 헨델의 바이올린과 첼로 2중주곡을 편곡하여 파사칼리아를 작곡하였다.

 

 

거리의 동쪽 끄트머리쯤에 있는 오슬로 대성당(Oslo domkirke)이다. 노르웨이의 국교인 루터파 교회의 총본산일 뿐만 아니라 3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 깊은 건축물이다. 1624년 대화재로 불타 버린 도시를 다시 재건하면서 대성당도 함께 건립되었다. 하지만 1686년 화재로 소실되었고, 1694년 다시 짓기 시작해서 1699년에 청록색 탑이 있는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이후 150여 년 동안 시 안에 있는 유일한 성당으로 종교 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고, 현재는 3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시의 상징물이 되었다. 1936년부터 1950년 사이에 제작된 천장의 화려한 벽화와 노르웨이의 대표적인 조각가 비겔란(Vigeland)의 작품인 창문의 스테인드글라스는 놓치지 많아야 할 볼거리이다.

 

 

오슬로 국립미술관(Oslo National Gallery)이다. 노르웨이 최대의 미술관으로 1836년에 개관하였다. 피카소, 르누아르, 세잔, 마네, 모딜리아니, 드가, 뭉크 등 거장들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또한 노르웨이 작가의 작품과 19~20세기 덴마크·핀란드 화가의 작품도 소장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기가 있는 전시관은 사춘기‘, ’절규58점의 뭉크(Edvard Munch,1863-1944) 작품을 전시하고 있는 뭉크관이다. 만일 뭉크의 더 많은 작품을 감상하고 싶다면 국립미술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뭉크 미술관을 함께 둘러볼 것을 권한다.

 

 

칼 요한슨 거리는 서울의 명동만큼이나 하루 종일 인파로 북적이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카페나 상가가 밀집해 있음은 물론이다. 명색이 유명한 관광지인데 노점상이 보이지 않을 리가 없다. 길바닥에다 좌판을 벌여놓고 기념품이나 민속공예품 같은 것을 파는 사람들도 보인다. 생김새로 보아 남미계 이민자들이 아닐까 싶다. 모금함을 앞에 놓고 각종 악기들로 연주를 하는 사람들도 보인다.

 

 

바닥에 뭔가가 적혀있다. 뭔 소린지는 몰라도 특이하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거리 곳곳에 옷가게와 노천카페, 식당들이 늘어서 있다. 마치 서울의 명동을 걷고 있는 듯 활기찬 모습이다.

 

 

잔디밭으로 된 정원의 너머에는 국회 의사당이 있다. 반원형 의사당을 가운데에 두고 양쪽으로 날개를 펼친 모양새이다. 스웨덴의 건축가 에밀 빅토르 랑글레트(1824~1898)가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신고전 양식을 섞어 설계했다고 한다.노르웨이에서 주관하고 있는 노벨 평화상의 초기(1901-1904) 시상식(施賞式) 장소로 이용되던 곳이다. 이 행사장은 노르웨이 노벨협회(1905-1946)’로 옮겨졌다가 오슬로대 법학부(1947-1989)’를 거쳐 1990년부터는 오슬로 시청에서 거행되고 있다.

 

 

노벨상 수상자들이 묵는다는 그랜드호텔이다. 우리나라의 김대중 대통령도 이곳에서 묵었음은 물론이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한국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평화란,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훨씬 더 절실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피상적인 개념보다 노벨평화상의 현장에서 진정한 평화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거리 끝의 언덕에 있는 왕궁(The Royal Palace of Norway)은 현재 노르웨이 국왕이 기거하고 있는 공식 저택이다. ’카를 14가 지었는데 화려하기보단 소박한 모습이다. 왕궁 내부는 출입할 수 없지만 왕궁 외부와 주변 정원은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있어, 봄과 여름철에는 녹음 속에서 일광욕을 즐기려는 오슬로 시민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왕궁을 지키는 근위병들의 교대식도 볼거리로 알려져 있다. 참고로 나폴레옹의 전사이자, 원래 이름이 장바티스트 베르나도트(Jean Baptiste Bernadotte)‘인 칼 요한은 1818년 당시 스웨덴 왕인 동시에 노르웨이를 지배했던 왕이었다.

 

 

비겔란 조각공원(Vigeland Sculpture Park)‘으로 향한다. 창밖으로 보이는 도심의 모습은 우리나라와는 다른 한가로운 여유가 느껴진다. 새삼 부러움을 느끼며 푸르른 자연에 감탄하고 있을 즈음 비겔란 조각 공원에 도착한다. 비겔란 조각 공원은 원래 개인의 정원으로 시작해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모해오다가, 20세기 초반 조각가 구스타브 비겔란(Vigeland, Adolf Gustav, 1869-1943)이 직접 제작한 분수대와 조각들이 전시되면서 비겔란 조각공원으로 명명됐다. 아름다운 자연과 예술 작품이 훌륭한 조화를 이루며, 매해 200만 명 이상이 방문하는 오슬로가 자랑하는 대표적인 문화 공간이다. 참고로 비겔란은 오슬로와 코펜하겐에서 공부했고, 파리에서 몇 달간 머물면서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 1840-1917)’의 작품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비겔란의 조각 작품에는 자연주의적인 정서가 담겨 있으며, 죽음과 남녀 사이의 관계를 주제로 한 인물의 흉상과 부조가 주를 이룬다. 그는 감정과 표현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여 고독과 황홀함이 대조되는 분위기로 인물상을 묘사했다.

 

 

20세기 초, 비겔란은 자신이 일생 동안 영혼을 바쳐 조각한 작품들을 오슬로시에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힌다. 이에 오슬로시는 공원 설계와 작품을 의뢰했고 비겔란은 13년에 걸쳐 청동, 화강암, 주철 등을 사용한 다양한 작품을 준비했다고 한다. 작품을 관통하는 테마(thema)는 인간의 삶과 죽음을 아우르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이다. 1943, 비겔란은 자신이 온 힘을 기울인 공원이 완성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 후 비겔란의 제자와 오슬로 시민들이 합심해 지금의 공원을 완성했다고 한다. 아무튼 프로그네르 공원(Frognerparken)’이라고도 불리는 이 공원에는 212점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그 가운데 하이라이트는 세계에서 가장 큰 화강암 조각품으로 알려진 '모놀리트(Monolith)'이다. 멀리서 보면 기둥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121명의 실제 크기 남녀가 얽혀 있는 모습이다.

 

 

'모놀리트(Monolith)'는 높이가 17m나 되는 하나의 화강암에다 수많은 인간 군상(群像)들이 위로 올라가려는 모습을 표현한 작품으로 20년에 걸쳐 완성한 걸작이다. 121명의 남녀가 서로 엉켜 괴로움으로 몸부림치는 모습이 생동감 있게 묘사되고 있는데, 조각 속의 사람들은 실제 사람 크기로 만들어졌다. 태어나 성장하고 늙어 가는 인생을 표현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아무튼 세계에서 가장 큰 화강암 조각품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공원에서 가장 명물로 꼽히고 있다.

 

 

 

36개의 다양한 포즈를 한 인간상들이 모놀리트(Monolith)'를 호위하듯 둘러싸고 있다. 인간의 욕망과 투쟁, 희망과 슬픔을 농축시켜 놓은 것들이란다. 즉 갓난아이로 부터 죽음에 이르는 노인까지의 과정을 표현했다는 것이다. 아이들에게는 무한한 사랑을 소년들에게는 드높은 이상을 불어 넣는 반면 성인에게는 사랑과 증오, 고독과 죽음 등을 다루고 있단다. 그런데 모든 조각품들이 하나 같이 발가벗고 있다. 혹자는 이를 두고 공원의 테마(thema)가 인간의 삶과 죽음을 아우르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다른 어떤 이들은 시대에 관계없이 똑 같은 이미지를 전달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하는데 어떤 게 맞는지는 모르겠다.

 

 

건너편 언덕에도 조각상이 세워져 있으나 멀리서 눈요기만 즐기기로 한다. 여러 사람이 띠를 이루며 큰 원형을 만들고 있는 작품인데,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삶의 수레바퀴를 나타내려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모놀리트(Monolith)'에서 바라본 정문 방향, 분수공원을 거쳐 입구의 다리까지 거의 대칭으로 이루어져 있다.

 

 

계단을 내려서면 분수대(噴水臺)가 기다린다. 여섯 거인이 받쳐 든 수반에서 물이 흘러넘치는 구조로 만들어져 있다. 분수대를 에워싸고 있는 낮은 담 위로는 20점에 이르는 '나무 인간(Tree People 1906~1914)'이 늘어서 있다. 왕관 모양 나무 안에 다양한 몸짓으로 들어가 있는 군상들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인간의 일생을 순차적으로 표현한 것이란다, 그리고 수반을 들고 있는 여섯 명의 거인들은 젊은이부터 노인까지 조금씩 연령대가 다르다고 한다,

 

 

분수대를 지나면 장미정원이다. 정원의 규모도 작을뿐더러 장미의 종류도 많지 않으나 정성스럽게 꾸며놓은 흔적이 역력하다.

 

 

조각공원을 빠져나오다 보면 널따란 다리를 만나게 된다. 이 다리 또한 조각공원의 명물이다. 길이 100m에 폭이 15m나 되는 다리의 양쪽 난간에는 58점이나 되는 수많은 청동 조각상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인간의 실제 크기에 맞춰 제작된 이 청동상들은 다양한 연령대의 남녀노소가 혼자이거나 둘 또는 여럿이서 어울리고 있는 작품들이다. 남자와 여자, 또는 어른과 아이의 관계를 묘사하고 있단다.

 

 

 

 

아래 사진은 '네 천재를 쫓아다니는 남자(Man chasing four geniuses, 1930)라는 작품이다. 말썽꾸러기 아이들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는 아버지를 표현하는 작품으로 보인다. 그런데 아빠의 발끝에 매달린 아이의 팔이 반들반들하게 윤기가 나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만졌다는 증거인데, 그런데는 다 이유가 있단다. 비겔란이 작품을 기증하면서 두 가지의 조건을 붙였다는 것이다. ‘누구나 맘껏 만질 수 있을 것입장료를 받지 말 것이다. 일생동안 예술만을 추구해온 그 다운 발상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 다리의 명물은 화가 난 아이(Angry boy/ Sinnataggen 1928)‘라는 작품이다. 화가 난 아이를 조각해 놓은 작품인데, 그 인기를 반영하듯 손과 발이 반질반질하게 윤기가 돌고 있다. 조각상의 왼손을 만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속설(俗說) 때문인데,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발까지 만졌던 모양이다.(사진이 별로여서 따로 붙이지는 않았다)

 

 

다리의 귀퉁이 네 곳에는 높다란 좌대(座臺)를 세우고 그 위에다 화강암으로 제작된 입상(立像)을 올려놓았다. 남자가 도마뱀에 맞서 싸우는 형상이 둘이고, 나머지 둘은 도마뱀이 각기 여자와 남자를 제압해 껴안고 있는 모양이다. 인생의 고통, 즉 악으로 상징되는 이무기에 굴복하고 밀치고 수긍하는 인생사를 표현했다고 한다.

 

 

공원의 안에도 호수가 있다. 호수가 참 많은 나라라는 게 실감이 나는 순간이다. 누군가 이곳 오슬로를 ‘300개가 넘는 호수와 200여 개의 공원으로 이루어진 도시라고 했다. 그는 오슬로에서 자연과 인공의 경계를 찾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는 말까지 덧붙였었다. 그래서 이곳 오슬로가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도시로 유럽 전역에 알려져 왔다는 것이다. 한데 최근에는 그런 자연 위에다 뮤지엄(museum)’ 등의 예술적 색채까지 덧입히고 있단다. 이들이 어디에다 중점을 두고 있는지 능히 짐작할 만하다.

 

 

잔디밭에는 남녀노소 다양한 사람들이 한낮의 망중한(忙中閑)을 즐기고 있다. 유모차를 끌고 나와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는 부모들이 있는가 하면, 잔디밭에 누워 책을 읽는 젊은이들도 있고, 또 다른 곳에서는 서로 팔베개를 해주며 사랑노름을 하고 있는 다정한 연인들도 보인다. 맨날 쫒기 듯 살아온 우리에게는 낯선 풍경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도 어색하지도 않아 보이는 건 무슨 이유일까. 한 박자 느리게 살아가는 그네들의 여유로운 삶에 나 또한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조각공원을 둘러본 다음에는 오슬로항으로 이동한다. 다음 행선지인 덴마크의 코펜하겐으로 가는 크루즈(DFDS SEAWAYS)’를 타기 위해서이다. 배의 승선까지는 1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다. 30분 정도의 자투리시간을 이용해 아케르스후스 요새(Akershus Fortress)’ 쪽으로 가보기로 한다. 오슬로 항구 동쪽 언덕에 세워져 있는 중세의 성채(城砦)이다. ‘호콘 5(King Håkon V)’가 도시 방어를 위해 1299년에 건립하기 시작한 것으로, 노르웨이 왕이 머물던 성이다. 17세기 초 크리스티안 4(King Christian IV) , 성을 개조하면서 현재와 같은 르네상스 양식의 외관을 갖추게 되었다. 바다에 면해 있는 이 성채는 수도뿐만 아니라 노르웨이 전체에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사실상 아케르스후스 성을 지배하는 자가 노르웨이를 지배해왔다. 현재까지 군사 요새로 이용되고 있으나 낮에는 일반인에게 공개된다. 요새 내에는 하콘 7세와 올라브 5세의 무덤을 비롯해, 군사박물관과 아케르스후스 성이 있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바닷가 선착장에 ‘Oslo sightseeing Fjord cruise’라고 적힌 현수막이 걸려있다. 오슬로를 둘러볼 수 있는 크루즈가 운행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선착장에는 유람선 몇 척이 정박해있고, 매표소에는 오슬로를 보여주겠다는 문구도 적혀있다. 이곳 오슬로가 오슬로 피오르드(Oslo fjord)’의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더니 눈에 담을만한 구경거리가 제법 있는 모양이다.

 

 

아쉽게도 요새까지는 가보지 못했다. 30분 가지고는 구경은커녕 성채까지 다녀오기에도 벅찰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별 수 없이 성곽의 옆에 만들어진 전망대까지만 다녀오기로 한다.

 

 

언덕에 오르면 성벽으로 여겨지는 높다란 담이 나타난다. 그 아래는 공터로 그냥 남겨 두었다. 조금 더 걸으면 요새의 안으로 들어갈 수 있지만 이쯤에서 발길을 돌리기로 한다. 아쉽지만 시간이 부족하니 어쩌겠는가.

 

 

전망대에 서면 바이킹의 수도라는 별명을 얻은 오슬로 항의 전경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아담한 규모인 항구는 유람선과 요트, 어선 몇 척 말고는 비교적 한산한 편이다. 노르웨이가 해상국가임을 감안할 때 의외가 아닐 수 없다. 9백여 년 전 북유럽을 주름잡던 바이킹들이 가장 사랑했던 오슬로는 젊은 분위기를 발산하는 도시다. 유럽국가들 수도와는 달리 시골과 같은 한적함을 느낄 수 있는데, 특히 면적의 3/4이 삼림과 전원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되돌아 내려오는 길에 뜻밖의 인물을 만난다. 뜬금없이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1882-1945’의 동상(銅像)이 세워져 있는 것이다. 세운 이유도 적어놓지 않았다. 어쩌면 독일군에게 점령당했던 자신들의 흑역사(黑歷史)를 끝낼 수 있게 해준데 대한 감사의 표시인지도 모르겠다. 당시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주역 중의 한사람이 바로 루스벨트일 테니까 말이다. 그게 아니면 국왕인 하랄 5(Harald V. 1937~, 재위기간 1991~)’와의 인연 때문일 것이다. 독일군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 온 하랄 5세를 전쟁이 끝날 때까지 백악관에서 머물 수 있게 해준 이가 바로 미국 대통령이었던 루스벨트(재임기간, 1933-1945)였기 때문이다.

 

 

승선시간이 되어 배에 오른다. ‘DFDS SEAWAYS’는 스칸디나비아(Scandinavia)의 도시와 도시를 운항하는 덴마크 국적의 크루즈회사로 140년 넘게 북해를 운항하고 있다. 오늘 저녁은 오슬로와 코펜하겐을 잇는 배편을 이용하게 된다. 헬싱키에서 스톡홀름으로 올 때 타고 왔던 실자라인(Silja Line)과 마찬가지로 이 배도 역시 숙식(宿食)을 겸하도록 되어 있다. 430분 오슬로를 출발해서 다음날 아침 945분에 코펜하겐에 도착하는데, 배의 크기(10층의 데크)도 실자라인과 거의 비슷하다. 길이 212m에 폭이 29m이며, 차량탑승 라인도 1,300m에 이른다. 승객도 물론 28백 명이나 태운다. 속도는 22노트이다. 선내에는 다양한 카페와 바(bar), 레스토랑과 엔터테인먼트 등 다양한 부대시설이 준비되어 있다. 특히 가격이 싼 것으로 알려진 선내면세점은 여행자들에게 인기가 좋다. 술 좋아하는 난 현지인의 도움을 받아 품질이 좋다는 보드카 2병을 챙겼고, 집사람은 세일행사중인 초콜릿을 한 바구니나 샀다.

 

 

 

이번 코스도 역시 저녁식사는 뷔페이다. 그리고 훈제연어역시 무제한으로 제공된다. 하지만 술은 생맥주나 와인 가운에 딱 한 잔만 마실 수가 있다.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식사 후 선실에서 휴식을 취하다 9시쯤에 갑판으로 올라가본다. 지난번에 실패했던 일몰(日沒)을 기다려보기 위해서이다. 면세점에 들러 축배용 캔맥주까지 사들고 올라왔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오늘도 그런 행운은 주어지지 않았다. 저녁노을이라도 볼 수 있었던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그럼 일출은 어땠을까? 3시쯤 일어나 밖에 나가봤지만 오늘은 아예 비까지 내리고 있다. 아무래도 이번 여행은 눈물을 흘릴 정도로 아름다웠던 비경(祕境)들을 보았던 것으로 만족하라는 모양이다.

 

 

 

에필로그(epilogue), 노르웨이 여행을 하다보면 국기를 게양해 놓은 집들이 자주 눈에 띈다. 국기가 게양되어있지 않은 집들도 빠짐없이 게양대는 만들어져 있다. 노르웨이에서는 국경일은 물론이고 특별히 자기 집안에 경사스러운 일이 있거나 마을에 경사가 있을 때에는 국기를 게양해서 자축하는 게 일상이라고 한다. 국기게양대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일 것이다. 또한 국가와 국기에 대한 노르웨이 국민들의 깊은 애정이 밖으로 드러나는 한 장면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론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복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 이들은 무거운 대가를 지불하고 있다. 모든 국민들이 자기 소득액의 50%를 세금으로 부담하고 있지만 불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한다. 세금을 덜 내려고 속이는 사람도 없단다. 자신들이 내는 세금이 자신과 이웃들에게 틀림없이 혜택이 되어 돌아온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란다. 그런 믿음을 바탕에 깔고 있기에 이네들의 국기에 대해 느끼는 소중함과 애정은 더욱 남다르지 않나 싶다. 국기는 그 나라의 표상이다. 한 때 우리나라에는 국기 게양식과 하기식의 의식이 있었다. 이때는 그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은 물론, 지나가던 사람도 걸음을 멈추고 국기에 대해 경의를 표해야만 했다. 그러던 것이 언제부턴가 사라져 버렸고 태극기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도 줄어들어 버렸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무튼 우리도 노르웨이의 국민들처럼 국기와 친하게 살아갔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시위할 때까지 들고 나오자는 얘기는 물론 아니다.

여행지 : 북부 유럽 여행

 

여행일 : ‘17. 6. 19() - 7.1()

여행지 : 러시아(모스크바, 페테르부르크), 에스토니아(탈린). 핀란드(헬싱키), 스웨덴(스톡홀름), 노르웨이(오슬로, 발드레스플라야, 요정의 길, 게이랑에르 피오르드, 뵈이야 빙하, 베르겐, 하당에르 피오르드, 하당에르비다국립공원), 덴마크(코펜하겐)

 

일 정 : 27() : 하당에르 피오르드, 하당에르비다 국립공원

 

여행 여덟째 날 : 하당에르 피오르드, 하당에르비다 국립공원

 

특징 : 하당에르피오르드(Hardanger fjord)’는 노르웨이 남서부의 호르달란(Hordaland) ()에 있는 길이가 170km쯤 되는 협만(峽灣, fjord)으로 베르겐 남쪽의 해안에서 시작해서 하당에르비다국립공원까지 뻗어있다. 노르웨이에서 두 번째, 즉 송내피오르드(Sogne fjord) 다음으로 길다. 거대하고 거친 느낌으로 다소 남성스러움이 강한 다른 피오르드에 비해 하당에르는 그 속에 부드러운 여성스러움을 지녔다. 봄이 되면 피오르드 이곳저곳에서 만발하는 꽃의 향기가 바닷속으로 스며들고, 사과나무와 살구나무 밭이 펼쳐지는 구릉이 목가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고 한다. 하이킹 코스가 발달한 곳으로 유명한데, 도중에 에이드피오르(Eidfjord)와 욘달(Jondal), 울렌스방(Ullensvang), 오다(Odda), 울빅(Ulvik) 등의 아기자기한 마을을 만날 수 있다. 하당에르 피오르드는 그 끄트머리(아이드피오르드)에서 고원지대(高原地帶)를 만나게 된다. 이 일대가 노르웨이에서 가장 큰 국립공원인 하르당에르비다 국립공원(Hardangervidda)’이다. 고원지역의 평균 해발고도는 1,100m이며, 최고점은 하당에르외쿨렌 빙하(Hardangerjøkulen glacier)’의 상단으로 해발이 1,863m에 이른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황량한 평원에는 빙하의 침식작용이 만들어 낸 수많은 호수와 강들이 형성되어 있다. 주변의 유명관광지로는 뵈링폭포(Vøringfossen)와 하르당에르 민속박물관(Hardanger Folkemuseum), 트롤통가(Trolltunga)바위 등이 있다.

 

 

  

점심식사 후에는 베르겐의 남쪽에 있는 하당에르피오르드(Hardanger fjord)’로 향한다. 다음 목적지인 오슬로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당에르피오르드와 아이드피오르드, 그리고 하당에르비다국립공원(Hardangervidda National Park)을 거쳐 숙소가 위치하고 있는 누레피엘(Norefjell)’까지 가는 긴 여정이다. 누레피엘은 오슬로에서 북쪽으로 130Km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산악지대로 차량을 이용할 경우 2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첨부된 지도를 살펴보면 오늘 달리게 될 길은 베르겐에서 오슬로까지 ‘7번 국도로 연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두 시간 정도를 달렸을까 차창 밖으로 하당에르피오르드(Hardangerfjord)’가 얼굴을 내민다.

 

 

 

 

 

 

하당에르를 만나자마자 현수교(懸垂橋)가 나타난다. 2016년에 개통되었다는 이 다리는 협곡의 양안(兩岸)에다 200m 높이의 주탑(主塔)을 세우고 길이 1,380m, 폭이 20m인 상판을 놓았다. 왕복 2차선이다. 이 다리의 특징은 교량으로 연결되는 터널이 아닐까 싶다. 교차로까지 나있어 터널에서의 차량이동을 용이하게 해준다.

 

 

다리의 남쪽 끝에는 간이 쉼터가 만들어져 있다. 관광객들을 위한 쉼터로 보이는데 벤치와 식탁, 화장실(문이 잠겨 있었다) 같은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카페나 매점 등이 보이지 않는 걸로 보아 휴게소는 분명 아니다. 이 쉼터의 특징은 지나온 다리의 전경사진을 찍기에 안성맞춤이라 할 수 있겠다.

 

 

쉼터에는 관광안내판이 세워져 놓았다. 하당에르(Hardanger)지역과 하당에르비다(Hardangervidda)의 경관들을 사진과 함께 설명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세계최고의 아찔한 전망대로 알려진 트롤퉁가(Troolltunga)’가 아닐까 싶다.

 

 

노르웨이 3대 트레킹 중 가장 도전적이라는 트롤퉁가(Trolltunga)’'트롤(Troll)의 혀(tunga)'라는 의미이다. 트롤은 북유럽의 신화에 등장하는 괴물인데, 마치 괴물이 혓바닥을 내놓고 있는 것처럼 절벽이 툭 튀어 나와 있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이 절벽에 서서 바라보는 노르웨이의 산하는 지상 최고라는 평가를 받는다.

 

 

편의시설은 부족하지만 쉼터로서의 입지요건은 썩 좋은 편이다. 저 멀리 만년설을 뒤집어 쓴 고봉(高峰)들이 시야에 들어오는가 하면, 근처 산자락에 자리 잡은 농가(農家)들은 하나같이 목가적(牧歌的)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다. 이곳 하당에르피오르드(Hardanger fjord)’는 멋진 피오르드와 함께 목가적 분위기의 마을을 한꺼번에 구경할 수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 지역은 과일 정원으로 유명한데 여름이면 사과와 체리, , 자두와 같은 과일나무들의 꽃을 구경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방문한단다.

 

 

 

 

쉼터에 놓인 식탁에는 여행객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먹거리를 펼쳐놓고 있다. ‘21라서 균형을 맞추진 못했지만 그네들은 표정은 여유로우면서도 행복해 보인다. 사진 찍어도 되겠냐는 질문에 주저 없이 ‘O.K’, 아니 포즈까지 취해준다. 역시 서구의 젊은이들답다.

 

 

 

이후로는 피오르드의 해안선을 따른다. ‘하당에르게이랑에르와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바위벼랑이나 폭포 등 여행자들의 눈을 현혹시킬만한 아름다운 풍경들은 만날 수 없으나, 대신 이곳 나름의 색다른 풍경화를 내보여 준다. 구릉(丘陵)처럼 밋밋한 산릉들이 하나 같이 하얀 만년설(萬年雪)을 뒤집어쓰고 있다. 눈앞에 나타나는 풍경 하나하나가 새로운 아름다움으로 성큼 다가온다.

 

 

하당에르피오르드(Hardanger fjord)’는 노르웨이 남서부의 호르달란(Hordaland) ()에 있는 협만(峽灣, fjord)으로 노르웨이에서 두 번째, 즉 송내피오르드(Sogne fjord) 다음으로 길다. 길이는 170km쯤 되는데 베르겐 남쪽의 해안에서 시작해서 하당에르비다국립공원까지 뻗어있다.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하면 하당에르비다국립공원과 얼굴을 맞대고 있는 것은 이이드피오르드(Eid Fjord)’이다. 하당에르피오르드의 지류(支流)라 할 수 있는 피오르드이다.

 

 

 

 

 

피오르드는 잔잔하고 조용하고 끝이 없다. 흡사 어머니의 품이라도 되는 양 포근하면서도 평화로운 느낌이다. 아름답다. 아니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느낌, 그게 뭔지 모르겠다. 인간이 가진 표현력의 한계가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를 여실하게 보여주는 그런 느낌이다. 천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 듯한 웅숭깊은 산맥과 협곡 사이로 태고의 바닷길이 열린다. 노르웨이의 자연은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잠시 후 버스는 또 다른 쉼터에 내려놓는다. 개방된 화장실을 찾다보니 급했던 모양이다. 아무튼 쉼터에서의 조망은 끝내준다. 피오르드 너머로 나타나는 설산(雪山)이 그 아름다운 자태를 맘껏 자랑하고 있다.

 

 

건너편 저 멀리 만년설을 뒤집어쓰고 있는 산들이 끝없이 펼쳐진다. 그 아래 해안가에는 싱그러운 초록으로 물든 그림 같은 마을이 자리 잡았다. 누구나 한번쯤은 머물러보고 싶은 마을이지 싶다. 누군가는 노르웨이에서는 자연이 스스로 말을 한다.’고 했다. 북유럽 여행, 그중에서도 특히 노르웨이 여행을 하면서 느낀 거지만, 눈에 들어오는 풍경마다 하나같이 그림이나 엽서처럼 예쁘기 짝이 없다.

 

 

 

 

 

내륙 깊숙이 파고든 피오르드는 빙곡(氷谷)이 침수되며 생긴 좁고 깊은 바닷길이다. 피오르드는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절정의 풍광을 보여준다. 차장에 스쳐가는 풍경을 쫓다보면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을 법 한데 눈이 너무 호사해서 인지 피곤한 줄도 모른다. 아무튼 여행사가 약속했던 세 개의 피오르드는 모두 둘러본 셈이다. 하지만 제대로 본 것은 게이랑에르하나뿐이라 할 수 있다. 이곳 하당에르는 차창을 통해서나마 경관을 구경할 수가 있었다. 가끔가다 전망대도 만났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송내 피오르드(Sogne fjord)’는 완전히 수박 겉핥기에 불과했다.

 

 

바위언덕 위에도 농가가 자리 잡았다. 이 지방의 특징답게 주위에는 많은 과일나무들이 심어져 있다. 이렇게 산자락을 파고든 집들은 심심찮게 눈에 띈다. 약간의 불편을 감수하고서라도 자연 속에서의 삶을 만끽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 거의 종교수준인 노르웨이 사람들다운 풍경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당에르피오르드의 가장 안쪽 협만(峽灣, fjord)은 아이드피오르드(Eid Fjord)라고 했다 .하지만 그게 어디쯤에서부터 시작되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해수면(海水面)이 보이지 않는다 싶으면 도로는 협곡의 안으로 들어서게 된다. 그리고 고도(高度)를 높여간다. 험상궂은 암벽이 볼만하지만 그 거리가 가까워 협곡의 전체적인 모양새를 카메라에 담을 수는 없었다. 때문에 다른 분의 사진을 빌려다 썼다. 포슬리(Fossli)호텔 앞 전망대에서 찍은 사진이다.

 

 

얼마쯤 달렸을까 카페와 화장실을 갖춘 휴게소가 나온다. 노르웨이 최대의 국립공원인 하당에르비다(Hardangervidda)’로 들어가는 입구에 위치하는데, 7번 국도를 이용하는 관광객들이 빼놓지 않고 꼭 들르는 휴게소이다. 아니 저 위에 있는 포슬리(Fossli)호텔로 올라가지 않는 사람들이 들른다고 하는 게 더 옳은 표현이겠다. ‘아이드피오르드(EidFjord)’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는 뵐링폭포(The Vøringfoss Waterfall)’를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휴게소에는 ‘Velkomen Til EidFjord Kommune’라고 적힌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에이드는 피오르드의 이름일 뿐만 아니라 지자체(地方自治團體)의 이름이기도 한 모양이다. ‘Velkomen Til’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에이드피오르드의 범위를 표시해 놓을 걸로 보아 관광안내도쯤 되지 않을까 싶다. 그게 아니라면 환영합니다.’쯤 되는 인사말일 것이고 말이다. 참고로 덴마크어로 벨코멘(Velgommen)’은 위의 둘 가운데 후자(後者)환영합니다.’이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숲속으로 들어서고 본다. 그리고 입이 떡 벌어지는 풍경을 만난다. 건너편의 거대한 바위절벽에 뵈링폭포(The Vøringfoss Waterfall)’가 걸쳐져 있는 것이다. 2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위쪽에선 돌과 돌 틈바구니를 구르다가 아래쪽에선 그대로 내리뛰는 모양새이다. 높이는 182m이고, 막힘없이 낙하하는 최대 높이는 163m나 된다고 한다.

 

 

만년설(萬年雪)이 녹으면서 만들어 놓은 폭포에서 무지개가 피어올랐다. 가이드는 노르웨이의 자연이 만들어내는 장관 가운데 하나가 무지개라고 했다. 또한 그녀는 무지개는 비가 그친 직후에 만날 수 있다고 했다. 이번 여행 중에 비, 그것도 제법 강한 빗줄기를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무지개는 꼭꼭 숨어있었다. 그런데 그 귀한 무지개를 이곳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2%가 부족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폭포가 전모(全貌_를 보여주지 않고 자신의 일부를 감추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잠시 후 안내판을 만나면서 알아차리게 된다. 지도에다 전망이 좋은 포인트를 표시해 놓았는데, 조망사진까지 올려놔 보는 사람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지금 내가 서있는 위치는 애초부터 전체적인 조망이 불가능한 곳이었던 것이다.

 

 

안내판이 알려준 곳으로 이동한다. 아까 버스를 타고 왔던 도로이다. 도로는 서는 곳마다 일류의 전망대로 변한다. 그리고 서는 곳마다 각기 다른 그림들을 내보여 준다. 이래서 이곳 뵐링폭포를 일러 하당에르비다 국립공원(Hardangervidda National Park)’의 가장 빼어난 절경 가운데 하나로 꼽는가 보다.

 

 

폭포의 꼭대기에 건물 몇 동이 보인다. 백 년의 역사를 자랑한다는 포슬리(Fossli)호텔이다. 여름 한 철에만 문을 여는데, 비싼 숙박비에도 불구하고 수개월 전부터 예약이 마감되는 인기 있는 호텔로 알려져 있다. 저 호텔은 노르웨이가 낳은 세계적인 음악가 그리그가 악상이 떠오르지 않을 때 가끔씩 찾아와 묵어갔다는 곳이다. 그는 뵈링포센(Vøringsfossen, The Vøringfoss Waterfall)과 고원의 아름다운 전경을 바라보며 솔베이지의 노래를 작곡했을지도 모르겠다. 페르귄트는 기쁨과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솔베이지의 품에 안겨 죽어간다. 그렇다면 그때 그녀가 불러주던 노래는 뵈링포센의 물 떨어지는 소리가 아니었을까? 참고 로 호텔 벽 한쪽에 그리그의 젊은 시절의 사진과 악보 및 그의 생활용품들이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가장 먼 곳에 있는 조망처에 이르자 폭포는 둘로 변한다. 하지만 그 경관은 아까만 못하다. 거대한 물줄기의 폭포 하나가 새로 나타난 대신에 아까 보았던 멋진 폭포는 절반 정도가 가려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곳 뵈링폭포(The Vøringfoss Waterfall)’는 협만(峽灣, 피오르드)과 고원(高原)의 경계선이다. 폭포로 올라서기 전에는 하당에르 피오르드(Hardanger fjord)’였고, 이제부터는 하당에르비다(Hardangervidda)’로 들어서게 된다. 노르웨이어인 비다(vidda)’는 고원을 뜻한다. 그러니 하당에르(Hardanger) 지역에 있는 피오르드(fjord)와 비다(vidda)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뵈링폭포를 지났으니 이미 고원(高原)에 들어선 셈이다. 노르웨이 최대의 국립공원이자 유럽에서 가장 넓은 고원이란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양 주위는 엄청나게 널따란 분지(盆地)로 이루어져 있다. 산이라기보다 구릉(丘陵)에 더 가까운 능선에는 울창한 숲이 들어서 있다. 고원이라고는 하나 아직은 해발이 낮다는 증거일 것이다.

 

 

나지막한 산자락에 들어앉은 집들 중에는 잔디로 지붕을 덮은 집들도 보인다. 저렇게 잔디로 지붕을 덮음으로써 보온(保溫)과 보냉(保冷)’ 효과를 얻는단다. 눈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지붕은 높은 삼각형에다 색깔은 벽돌색이다. 설마 국가에서 지정해 놓지는 않았겠지만 건물마다 거의가 진한 브라운 색깔을 칠해 놓았다.

 

 

점차 고도를 높여가던 대지는 어느덧 1m를 넘긴다. 언제부턴가 주변의 풍경은 확연히 변해있다. 푸름을 자랑하던 초원은 오간데 없이 사라져버렸고, 그 빈자리를 아직 덜 녹은 눈이 차지하고 있다. 동토(凍土)의 나라에 들어선 모양이다.

 

 

눈과 물이 반반인 대지가 끝도 없이 펼쳐진다. 이때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 한줄기가 이마를 스쳐간다. 포근하기 짝이 없는 바람이다. 눈앞의 풍경은 겨울이건만 기후는 이미 여름의 문턱을 넘어섰는가 보다. 그래 맞다. 우린 엊그제 하지를 떠나보냈었다.

 

 

 

드넓고 황량한 평원에는 빙하의 침식작용이 만들어놓은 수많은 호수와 강들이 널려있다. 개울도 보인다. 물줄기가 제법 그럴싸하다. 이 부근에 수력발전용 댐이 있다더니 저런 물줄기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었을 게다.

 

 

 

 

나지막한 언덕 사이에는 호수가 있고, 그 너머에는 일 년 내내 녹지 않을 것 같은 설원(雪原)이 펼쳐진다. 생전 처음 대해보는 낯선 풍경이다. 마치 여기가 천상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면 믿을지 모르겠다. 어떤 글이나 사진으로 이런 느낌을 전달할 수 있겠는가. 그저 오감(五感)으로 느끼며 받아들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일 것 같다. 혹시라도 잊혀 질까 두렵다면 카메라를 끄집어 내보자.

 

 

길 양옆에는 어른의 키를 훌쩍 넘기는 긴 장대들이 쭉 꽂혀 있다. 겨울철 제설작업(除雪作業)을 할 때, 이곳이 길임을 알려주는 표시라는데 장대 끝까지 눈에 묻히기도 한단다. 눈이 얼마나 많이 내리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9월이 되면 이 길은 막힌다. 아마 다음 해 4월 이후나 되어야 다시 열리게 될 것이다. 그때는 아무도 없는 고원은 적막강산, 오롯이 하늘만 향하게 되는 얼음 나라, 그야말로 겨울왕국이 된다.

 

 

호수주변에 자그만 집들이 옹기종기 들어서 있는 게 보인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히테(Hytter)라고 부르는 통나무집인데, 텐트가 없는 사람들이 묵어갈 수 있도록 시설을 대여해 준다. 북유럽에서는 이런 시설(Hytter)이 캠핑장마다 활성화되어 있는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물가가 비싼 북유럽에서 주머니가 가벼운 여행자들에게는 이보다 더 반가운 시설은 없을 듯 싶다.

 

 

꽤 오랜 시간을 버스가 달려도 여전히 같은 그림이다. 햇살에 반짝이는 호수와 그 주변을 포위하고 있는 눈들... 이따금 검게 젖은 바위와 몸을 웅크린 키 작은 나무들이 한 폭의 진경산수화 같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아름답고 위대한 순수자연에 압도당해서인지 소름이 오소소 돋는다. 갑자기 눈물 한 방울 또로록 흘러내린다. 어제에 이어 두 번째이다. 자연이든 사람이든 순수한 진실 앞에서는 눈물이 나는 모양이다.

 

 

 

굴곡이 거의 없는 고원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아니 높은 산이 없다보니 그렇게 보이는 것일 게다. 하긴 유럽에서 가장 너른 고원이라니 두말 하면 뭐하겠는가. 이 고원은 평균 고도가 1,100m이고, 가장 높은 곳은 1,863m이며, 면적은 서울의 10배 정도 크기라고 한다. 여행의 필수는 여유로움이다. 그 외의 것은 필수조건이 아닌 선택사항에 불과할 따름이다. 발길을 옮길 때마다 쉼 없이 이어지는 풍경을 담을 맑은 두 눈과, 마주치는 사람들과 교감할 수 있는 미소만 챙기면 된다. 일상을 놓아보자. 어렵지 않은 일이다. 동화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여행지라면 누구라도 그럴 수 있을 것이다.

 

 

흑백(黑白)으로만 덧칠되어 있던 풍경화에 초록의 색깔이 추가되어 있다. 아니 대부분이 초록빛으로 바뀌어 있다. 동토의 세계를 빠져나왔다는 증거일 것이다. 아무튼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경관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그것도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한 러브스토리다. 그래선지 흡사 영화세트장을 연상시키는 듯한 풍경들도 자주 눈에 띈다. 아니 그림엽서에나 나올 법한 아름다운 풍경들이다.

 

 

하룻밤을 머물렀던 누레피엘 스키 & 스파 호텔(Norefjell Ski & Spa Hotel)’, 7번 국도에서도 한참을 더 들어가야 만날 수 있다. 하긴 해발이 1,400m를 훌쩍 넘기는 곳에 위치한 스키장의 리조트(resort)이니 산꼭대기까지 올라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호텔은 뾰족지붕에 나무 외장(外裝)을 한 전형적인 노르웨이식 건물로, 꽤 모던(modern)한 느낌을 보여준다. 하긴 노르웨이의 리얼리티 TV 프로그램에까지 나왔을 정도라니 두말하면 잔소리일 것이다. 부대시설로는 한 잔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바(bar)와 레스토랑이 있으며 실내 수영장 및 -서비스 스파(full-service spa)’까지 갖추고 있다. 식사는 아침과 저녁이 제공되는데 질과 양도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호텔들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괜찮은 편이었다.

 

 

 

해발이 1,400m를 훌쩍 넘기는 스키장의 리조트를 겸하다 보니 호텔 또한 산꼭대기와 마찬가지인 곳에 자리 잡았다. 덕분에 공기가 맑을 뿐만 아니라 주변 경관 또한 빼어나다. 아침 일찍 숲속을 산책하며 자연과 동화되어 보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 아닐까 싶다. 마침 이정표까지 세워놓아 큰 어려움 없이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조금 남을 경우에는 취사가 가능한 시설(노르웨이에서는 그냥 아파트라고 하는데 우리나라로 치면 콘도)들의 앞에 조성해놓은 인공호수까지 다녀올 것을 권한다. 별로 크지는 않지만 잠시 쉬어가게끔 편의시설들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에필로그(epilogue), 캔맥주라도 하나 살까 해서 슈퍼마켓에 들어가니 우리네 컵라면을 닮은 미스터 리가 눈에 띈다. 노르웨이에 귀화한 이철호씨가 창업한 브랜드라고 한다. 언젠가 책에서 그를 본적이 있었던 것 같다. 아마 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 마라라는 그의 일대기였을 것이다. 6.25전쟁 직후인 1954년에 이곳 노르웨이로 이민을 온 그는 구두닦이와 조리사 등의 일을 하다 라면사업으로 대박을 터뜨렸다. 그로 인해 노르웨이 이민자 가운데 최초로 국민장과 기사작위까지 받았으며 노르웨이 초등학교와 고등학교의 교과서에 그의 이야기가 실렸을 정도란다. ‘위대한 한국인이라 할 수 있겠다. 그와 같은 동포인 내 어깨 또한 으쓱해진다. 아무튼 한글로 된 브로셔(brochure)나 한글 안내방송과 함께 이번 여행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풍경이 아니었을까 싶다.

여행지 : 북부 유럽 여행

 

여행일 : ‘17. 6. 19() - 7.1()

여행지 : 러시아(모스크바, 페테르부르크), 에스토니아(탈린). 핀란드(헬싱키), 스웨덴(스톡홀름), 노르웨이(오슬로, 발드레스플라야, 요정의 길, 게이랑에르 피오르드, 뵈이야 빙하, 베르겐, 하당에르 피오르드, 하당에르비다국립공원), 덴마크(코펜하겐)

 

일 정 : 26() : 베르겐(그리그 생가, 구시가지 브리겐, 어시장)

 

여행 여덟째 날 : 4대 피오르드의 관문인 한자동맹의 옛 도시, 베르겐

 

특징 : 베르겐(Bergen)은 오슬로 서쪽 492km, 대서양 연안의 작은 만() 깊숙한 곳에 위치한 항만도시이다. 이 나라 제2의 도시로서 가장 중요한 어항(漁港)이기도 하다. 베르겐은 '포도주의 보급 기지'라는 뜻이다. 예전에는 비외르그빈(산간 목장이라는 뜻)이라고도 불렸다. 1070올라프 3(Olav III)’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1350한자(Hansa) 동맹(同盟)’에 가맹한 이래 200년 이상 서해안의 모든 무역을 지배하여 무역항의 기반을 구축했다. 조선·섬유·식품 등의 공업이 발달했으며, 종합대학도 있어 서해안의 교육·문화의 중심지를 이룬다. 작곡가 E.H.그리그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1213세기에 이 나라의 수도이기도 했던 이 도시는 여러 번의 화재를 겪었다. 19세기 대화재(大火災)를 계기로 목재건축의 신축이 금지되었으나, 한자동맹 시절의 중심가에는 독특한 목재 건물들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런 점을 인정받아 역사지구가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기도 했다. 참고로 베르겐은 노르웨이를 여행하는 관광객들이 한번쯤은 꼭 들러보는 곳이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구시가지를 둘러보기 위해서 이기도 하지만, 노르웨이 관광의 꽃이라 할 수 있는 피오르드(fjord)’로 연결되는 관문(關門)이기 때문이다. ‘송네(Sognefjord)’하당에르(Hardangerfjord)’, ‘게이랑에르(Geirangerfjord)’, ‘뤼세(Lysefjord)’ 등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네 개의 피오르드가 모두 이곳 베르겐에서 연결되므로 이들을 둘러보려면 어떻게 해서라도 한번쯤이 이곳 베르겐에 들를 수밖에 없다.

 

 

 

오늘도 힘든 여정이 계속된다. 아니 어제보다 더 힘든 일정이라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푀르데(Forge)을 출발해 베르겐을 거친 후 오슬로 근처에 위치한 ’Morejell’까지 가야하기 때문이다. 어제보다 훨씬 먼 거리이다. 아침 일찍 호텔을 나서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푀르데를 출발한지 1시간30분쯤 지나면 라빅(Lavik)이라는 곳에서 송내 피오르드(Sogne fjord)’를 만난다. 스웨덴의 5대 피오르드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피오르드이다. 부드러운 육산(肉山)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물결 하나 일지 않을 정도로 잔잔한 것이 흡사 내륙의 호수를 닮았다.

 

 

 

 

 

 

건너편에 보이는 오페달(Oppedal)까지는 페리(Ferry)를 타고 건넌다. 이곳도 역시 버스에서 내릴 필요는 없다. 송네피오르드의 경관은 보잘 것이 없다. 하긴 게이랑에르의 절경을 만났던 게 아직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다른 경관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을 게다. 이때 가이드의 보충설명이 뒤따른다. 송내 피오르드는 규모는 가장 크지만 경관은 다섯 개 가운데 가장 뒤떨어진단다. 그러나 이게 송내 피오르드의 다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기껏 15분 정도를 투자해 피오르드를 가로지르는 것이니 맛보기쯤으로 여겨도 될 일이다. 기껏 이 정도를 보고 송내 피오르드의 모두라고 평가하지는 말자는 얘기이다.

 

 

2005년에 세계 자연유산에 등록된 송네 피오르드(Sogne fjord)’100만 년 전인 빙하시대에 빙하의 압력으로 깎여진 ‘U자형 계곡(피오르드)’으로, 노르웨이에서 가장 길고(204km) 가장 깊은(1,309m) 피오르드이다. 노르웨이의 피오르드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이 피오르드는, 좁은 협만(峽灣) 주변으로 장엄하고 숨막히는 대자연의 아름다운 경관이 펼쳐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산꼭대기에는 하얀 눈이 덮여있고 절벽에서는 폭포수가 가느다란 은색의 리본처럼 피오르드의 잔잔한 해수면으로 떨어져내린다고 한다.

 

 

다시 1시간 30분쯤 더 달렸을까 거대한 다리 하나가 나타난다. 2.6Km정도 떨어진 양쪽 해안을 연결시켜 놓은 다리인데, 이름은 알아내지 못했으나 예술에 가까울 정도로 예쁘게 만들어진 다리임에는 분명하다. 이 다리를 지나서 길이가 3Km쯤 된다는 터널을 통과하고 나면 드디어 베르겐 시가지이다. 아래 사진은 다른 곳에서 빌려다 썼다.

 

 

베르겐의 투어는 그리그의 생가에서부터 시작된다. 주차장에서 내려 큰 상수리나무가 가로수로 심어져있는 길을 따라 잠시 들어가면 삼거리에서 나무로 만들어진 조형물 하나를 만난다. 그냥 지나치지 말고 그 생김새를 꼭 기억해 두자. 잠시 후에 만나게 되는 그리그의 초상화와 똑 같은 모양의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하지만 추상적으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마음먹고 살펴보지 않을 경우 그 모양새를 찾아낼 수 없음에 유의한다. 예술가의 생가라서 조형물 하나까지도 예술적으로 만들었나 보다.

 

 

 

 

왼쪽으로 접어들어 몇 걸음 더 걸으면 사무동이 나온다. 생가로 들어가려면 입구의 데스크(desk)에서 입장료를 지불해야 한다. 이때 입장권 대신에 작고 동그란 스티커(sticker)를 나누어 주는 게 특이하다. 각자 옷자락 등에 붙일 수 있도록 한쪽 면에 접합제가 발라져 있다.

 

 

데스크 옆 벽면에는 그리그의 약력(略歷)을 연대별로 적어 놓았다. 그냥 지나치지 말고 한번쯤 살펴볼 일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미리 알아두면 잠시 후에 돌아보게 될 생가에서 더 많은 것을 눈에 담을 수 있지 않겠는가. 보는 것만으로도 부족하다면 약력 아래에 진열해놓은 블로셔(brochure)라도 하나 챙겨볼 일이다. 에드바드 그리그(Edvard Grieg)는 베르겐이 낳은 세계적인 음악가이다. 오슬로에 에드바드 뭉크(Edvard Munch, 1863-1944)‘가 있다면 베르겐에는 에드바드 그리그가 있다고 할 정도로 베르겐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인물이다. 물론 이런 이분법적인 구분은 바람직하지 않다. 뭉크 역시 이곳 베르겐에서 상당 부분 영감을 받은 것으로 전해지며, 그리그가 베르겐을 떠나 있었던 시간도 제법 길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르겐에서 그리그의 존재는 절대적이다. 그는 누구보다 노르웨이적 색채가 짙은 음악가로 명성이 높은데, 우리에게도 익숙한 페르귄트 모음곡(Peer Gynt, 1867)’ 솔베이지의 노래(Solveigs Lied)’를 들어 보면 당시 식민 상황이던 조국에 대한 그의 마음이 느껴질 것이다.

 

 

사무동에는 카페와 기념품 숍이 함께 들어서 있다. 카페로 들어서는 사람들이 몇 보인다. 별 흥미도 없는 생가를 둘러보느니 차라리 향긋한 커피향에나 빠져볼 요량인가 보다.

 

 

 

생가로 가다보면 다리를 건너게 되는데 그 아래에 200석 규모의 콘서트홀이 마련되어 있다. 아담한 목조주택으로 지어진 공연장은 소리울림이 아름다운 것으로 유명하다. 계단식 지붕은 잔디로 덮여서 얼핏 보면 사람이 다닐 수 있는 정원인가 싶을 정도이다.

 

 

공연장 앞에는 그리그의 동상(銅像)을 세워놓았다. 152인 그의 키에 맞게 실물 크기로 제작했다는데 서양인 치고는 무척 작다고 할 수 있다. 아니 동양인이라 해도 작은 키에 포함될 것이다. 동상은 엄청나게 인기가 좋다. 인증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기 때문이다. 하긴 그리그의 생가(生家)에 왔다는 것을 증명하는데 이만한 게 또 어디 있겠는가.

 

 

공연장에서 바다 쪽으로 스무 걸음쯤 내려가자 한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만한 작은 오두막이 나온다. 복원한 그리그의 작곡실(作曲室)이란다. 그리그는 바다로 향한 창문을 중심으로 피아노와 책상, 그리고 오선지와 펜 등 최소한의 물건을 비치해 놓고 곡을 썼다고 한다. 그가 죽은 뒤 이 오두막을 복원할 때 발생했던 에피소드(episode)가 하나 전해진다. 아내 니나(Nina)에게 최종 점검을 받는 중에 그녀가 갑자기 집으로 뛰어가더니 두꺼운 악보집을 가져다 피아노 의자에 놓더란다. 이것 없이 그리그의 작곡실은 완성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말이다. 153cm의 단신이었던 그리그는 피아노를 칠 때 두꺼운 악보집을 깔고 앉아야 편하게 건반을 두드릴 수 있었던 것이다.

 

 

 

 

 

 

오두막에서의 조망(眺望)은 좋다. 발아래로 펼쳐지는 노르도스만()은 물론이고 건너편에 있는 산자락까지 한눈에 잘 들어온다. 산기슭에 기대어 옹기종기 지어진 작은 집들이 시선을 끈다. 푸른 숲속에 하얀 점들로 들어앉은 모양새이다. 만일 노을이라도 비낀다면 저 바다 풍경은 흡사 동화 속에서 금방 튀어나온 것처럼 비현실적으로 보일수도 있겠다. 아니 그럴 게 확실하다. 설마 아무 이유도 없이 그리그의 작업공간을 이곳에다 마련했겠는가.

 

 

다음은 트롤하우겐(Troldhaugen)’, 즉 그리그 부부가 30대 중반부터 여름철에 지내던 생가(生家)이다. 북유럽에서 요정을 가리키는 트롤하우겐은 노르웨이 사람으로는 눈에 띄게 단신이었던 그리그의 별명이기도 했는데, 그의 집이 지금도 요정의 정원으로 불리고 있다는 사실이 재미있다.

 

 

 

 

생가의 안은 식당과 베란다. 그리그가 사용하던 슈타인웨이 피아노가 있는 응접실 외에도 그의 생애에서 가장 주요했던 순간들을 담은 사진과 유품들이 전시된 공간도 있다. 그리그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원하는 만큼 음악을 공부하고 작업하면서 오페라 가수였던 아내 니나(Nina)와 평생을 해로했다. 6세 때부터 어머니에게서 피아노를 배웠으며, 1858년 바이올린의 거장 올레 불(Ole Bornemann Bull, 1810-1880)’의 추천으로 라이프치히 음악원에 입학했다. 거기서 그는 멘델스존과 슈만 풍의 음악 전통에 영향을 받았다. 1863년에는 코펜하겐으로 가서 노르웨이의 젊은 민족주의 음악 작곡가 리카르트 노르로크(Rikard Nordraak)와 사귀면서 음악적으로 성장했다. 1864~65년 스칸디나비아의 젊은 작곡가들의 작품을 소개하기 위해 설립한 코펜하겐 음악협회 외테르프의 창립회원이 되었다. 1867~1901년에 10집으로 된 피아노곡 서정 소곡집을 작곡했다. 가장 사랑받는 곡은 솔베이지의 노래로 더 잘 알려진 페르 귄트 모음곡 작품 23(Peer Gynt Suite Op.23)’홀베르그 모음곡 작품 40(Holberg Suite Op.40) 등이 있다.

 

 

 

 

 

 

생가의 뜨락에서 다시 한 번 시야가 열린다. 아까와 비슷한 풍경인데 이번에는 자그만 섬들 몇 개를 추가시켜 아름다움을 배가시켰다. 있는 그대로를 떼어다 액자(額子)에 넣고 싶은 풍경이다. 거기에 조금만 덧칠을 한다면 유명미술관에 내걸어도 될 만한 그림으로 변할 수도 있겠다.

 

 

 

 

다리에서 콘서트홀의 반대방향으로 향한다. 이 오솔길은 노르도스만()이 보이는 바위언덕 아래로 연결된다. 오솔길이 바닷가에 이를 즈음 그리그의 무덤을 만나게 된다. 죽어서도 이곳에 머물길 바랐던 키 153의 거인은 양지바른 바위절벽에 구멍을 뚫고 아내와 함께 나란히 묻혀 있다. 앞에 보이는 바닷가에서 낚시를 즐기다가 낙조(落照)가 던지는 햇빛 줄기가 바위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나는 영원히 저곳에서 쉬고 싶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1907년 그는 영국의 리즈음악회로부터 초대를 받고 베르겐의 노르게 호텔에서 배를 기다리던 중 심장발작으로 쓰러지고 만다. 생전에 그가 원했던 대로 그의 시신은 이 바위에 안치된다. 그의 부인 니나는 코펜하겐으로 돌아가 1935년까지 살았는데, 그녀가 숨을 거둔 다음에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남편의 옆에 함께 안치되었다.

 

 

 

 

무덤의 앞에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시야가 열린다. 작은 바위들이 노르도스만()을 향해 자연의 징검다리를 놓았다. 이 징검다리가 바다 건너 산자락과 어우러지며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의 눈에는 이 정도로는 눈에 차지 않았나 보다. 바위 몇 개를 시멘트로 연결시켜버렸다. 배를 댈 수 있을지는 몰라도 본래의 아름다운 경관을 완전히 망쳐버렸다.

 

 

 

투어를 마치고 빠져나오는 길에 색다른 풍경 하나가 시선을 끈다. 가로등 기둥과 그 옆에 있는 배전함에 뭔가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것이다. 다가가 보니 아까 생가에 입장할 때 나누어주던 스티커이다. 본연의 임무를 다 마쳤으니 일종의 무덤인 셈이다.

 

 

두 번째 방문지는 베르겐의 구() 시가지이다. 버스는 우릴 어시장 앞에다 내려놓는다. 이어서 한 시간 정도의 자유시간이 뒤따른다. 각자 알아서 구() 시가지를 돌아보라는 얘기일 것이다. 일단은 브리겐(Bryggen) 지역으로 향한다. 베르겐 시의 옛 부두이다. 14세기~16세기 중기에 브리겐은 한자동맹이 이룩한 해상무역 제국을 이루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곳에는 매우 독특한 목조 가옥들이 모여 있는데, 당시의 번영과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현재 이곳에는 과거의 목조 건축물들이 62채 가량 남아 있다고 한다.

 

 

베르겐(Bryggen)14~16세기 런던, 브뤼헤 등과 함께 유럽을 대표하는 한자 동맹의 주요 거점이자 북유럽 최대의 물류 무역항이었다. 특히 대구와 소금 거래로 유명세를 떨쳤는데, 당시 이곳에서 거래되는 물량이 북유럽 최고였다니 베르게너의 자부심이 근거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삼각형의 뾰족한 지붕들이 열을 이루고 있다. 옛날 저곳은 선원과 상인들로 넘쳐나는 왁자지껄한 부둣가였을 것이다. 사실 저 건물들은 처음으로 지어질 당시의 건물은 아니다. 본래의 목조 건축들은 수차례의 화재로 소실과 복원을 반복했기 때문이다. 특히 1702년 대화제로 일대는 완전히 잿더미가 되었는데, 20세기 들어 사료를 바탕으로 세심하게 복원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복원사업이 완벽하게 이루진 사실이 인정되어 1979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바 있다.

 

 

베르겐이 북유럽 최대의 상업항으로 발달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입지 조건이 좋다는 점이다. 하지만 결코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이유도 있다. 바로 독일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한자동맹의 중심항구가 되었다는 점이다. 독일 북부지역의 상인들은 여러 나라와 교역을 하면서 독일의 도시는 물론이고 외국에 있는 도시와도 상업적인 동맹을 맺기 시작했다. 13~15세기에 독일 상인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이러한 상인 집단을 한자동맹이라고 한다. ‘한자(Hansa)’가 독일어로 집단이라는 뜻이니 독일 상인들이 자신들이 사는 도시와 다른 지역을 연계하여 공동의 이익을 얻기 위하여 결성한 것일 게다. 유럽 남부에서 성행했던 길드(guild)와 같다고 보면 되겠다.

 

 

중세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간직한 브리겐은 베르겐의 얼굴이자 심장이다. 원색의 목조건물들이 시가지를 생동감 넘치고 정감 있는 매력적인 도시로 각인시키고 있다. 파격의 색감과 매혹의 디자인으로 지어진 건물들로 이루어진 동화 마을인 것이다. 이러한 특징들은 독일인들로부터 시작되었다 한다. 독일인 무역상들이 브리겐에 집단으로 거주하면서 가옥을 알록달록하게 칠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는 것이다. 참고로 현재 남아 있는 목조건물들 중 일부만 14~16세기 것이고 나머지는 18세기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순차적으로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건물을 자세히 살펴보면 숫자가 적혀있는데 새로 지어질 때마다 표기를 해둔 것이란다.

 

 

거리에는 안내판을 세워 관광객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한자박물관 등 근처의 찾아볼만한 곳들을 그림과 함께 소개하고 있는가 하면, 건물의 벽에는 브리겐 복원사업에 대한 설명판도 붙여 놓았다.

 

 

 

브리겐 지역에 남아 있는 목조 건축물은 대부분 3~4층으로 되어 있다. 주로 사무실과 창고로 사용되었으며 주거용으로 사용되었던 곳도 있다. 이 건물들은 용도에 상관없이 하나같이 지붕이 뾰족하고, 좁은 골목을 따라 다닥다닥 붙어 있다. 조금만 멀리서 보면 지붕과 처마가 맞닿은 것처럼 보이는데, 우리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연립 주택을 떠올리게 한다. 이 목조 건물들은 겉은 비슷해 보이지만 내부의 모습은 신분과 재산 정도에 따라 조금씩 달랐다고 한다. 부유한 상인들이 살았던 방에는 고급스러운 가구가 갖추어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침실은 밀폐된 곳에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와 반면에 일꾼들이 살았던 곳에는 나무로 만든 간이침대와 벽난로, 여러 명이 동시에 요리를 할 수 있는 화덕과 작은 요리대 정도가 전부였다고 한다.

 

 

이곳도 역시 유럽의 도시들의 특징을 벗어나지 못했다. 음식점이나 카페의 앞에다 테이블을 세팅(setting)해 놓은 것이다. 점포의 안보다 오히려 더 넓은 공간을 확보하고 있다. 하긴 유럽같이 햇빛이 귀한 나라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햇빛을 쏘이고 싶다는 손님들이 찾아오니 어쩌겠는가.

 

 

여행자들이 옛 도시에 갈 때마다 빼놓지 않고 꼭 들러보는 곳이 있다. 바로 뒷골목인데, 해당 도시의 은밀한 속살을 엿볼 볼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이곳 베르겐은 예외였던 것 같다. 현지인들의 거주공간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옛 건물들 몇을 둘러볼 수 있을 따름이었다.

 

 

 

 

대구 모양으로 생긴 조형물이 보인다. 대구가 이 지역의 특산품이었음을 나타내기 위해 만들어 놓았을 것이다. 베르겐에서는 소금, 대구, 모피, 벌꿀, 의류, 포도주, 곡물, 목재, 양모 등 무척 많은 물품들이 거래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은 소금과 대구였다. 일찍이 베르겐에서는 북해와 아이슬란드 연안에서 잡아 온 생선을 모아 독일을 비롯한 전 유럽에 판매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것이 말린 대구였다. 이는 대구가 많이 잡히기도 했지만 종교가 큰 몫을 했다고 한다. 당시 유럽인들은 금육재(부활절 전 40일인 사순절 기간에 육식을 하지 않는 것) 기간에는 육류를 먹을 수 없었기에 생선으로 영양을 보충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때 말린 대구가 많이 선택되었다는 것이다.

 

 

브리겐(Bryggen) 지역의 오른편은 신시가지이다. 삼각으로 된 지붕 등 외형은 구()시가지를 흉내 냈지만 본질까지 속이지는 못했다. 멀리서 봐도 시멘트로 지어졌다는 걸 금방 눈치 챌 수 있기 때문이다.

 

 

길가에 포탄으로 여겨지는 조형물 하나가 세워져 있다. 하단에는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이, 그 반대편에는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남자가 부조(浮彫)로 새겨져 있다. ‘1차 세계대전(World War I)’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지는 ‘1014-1918’이란 숫자도 적혀있다. 아무래도 1차 세계대전 당시의 참상을 되새기고 싶었던 모양이다.

 

 

바다에는 각종 배들이 정박해 있다. 유람선이나 요트는 물론이고 어선과 화물선도 보인다. 선조들의 영광을 잇고자하는 정중동(靜中動)’의 자세나 아닌지 모르겠다. 베르겐은 중세 시대의 대표적인 무역과 상업항이었다. 북유럽 최대 항구로 엄청난 양의 소금이 거래되었으며, 북해와 아이슬란드에서 잡아 온 생선을 모아 유럽 각지로 공급하는 식량 창고의 기능을 담당하기도 했다.

 

 

 

 

 

아까 그냥 지나쳐버렸던 어시장(Bergen Fish Market)으로 다시 되돌아간다. 유람선과 요트가 즐비한 베르겐 항구 앞 광장에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중세시대의 거리 브리겐(Bryggen) 역사지구의 여행이 시작되는 곳이다. ‘토르게 어시장(Fiske torget)’라고도 불리는데 매일 열리는 노천시장이다. 11세기 초 항구도시 베르겐이 형성되면서 자연발생적으로 시작된 어시장으로, 40여개의 상점과 노점들로 이루어져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지만 북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시장 중 하나이다. 대구, 연어, 새우, 고래 고기 등 신선한 해산물들이 거래되고, 관광객을 위한 기념품, 수공예품, , 과일 등도 판매하고 있다.

 

 

어시장은 생각했던 것보다는 그 규모가 작다. 하지만 팔고 있는 생선들은 다양한 편이다. 연어, 대구, 바다가재 등 오만가지 생선들이 판매되고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건 킹크랩(King crab)이 아닐까 싶다. 속살만 빼놓았는데도 어른의 팔뚝만큼이나 굵다. 그런 좌판들 속에서 주민과 관광객들이 함께 북적이고 있다. 물건을 파는 사람들과 물건을 사는 사람들, 그리고 양자 간의 흥정으로 소란하다. 혹자는 이런 풍경을 보고 베르겐의 살아 있는 허파와 같다.’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어시장이라고 해서 반찬거리만 파는 게 아니다. 생선회는 물론이고 익혀놓은 킹크랩과 새우꼬지, 홍합 등 조리과정을 끝낸 해물들도 다양하게 진열해 놓고 있다. 많은 여행객들이 선채로 음식을 먹고 있는 게 보인다. 그게 싫은 사람들은 포장마차 안에다 만들어 놓은 간이 식탁에서 먹으면 된다. 우리나라의 포장마차 촌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풍경이다.

 

 

 

 

 

 

 

반듯한 외모의 식당도 보인다.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손님들로 붐비고 있다. 조금 전 포장마차에서 보았던 사람들보다 행색이 나아보이는 건 나만의 선입견일까? 어시장이 배낭족이었다면 이곳은 관광객들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밖에다 내놓은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할 경우 만만찮은 가격이 따라붙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행지 : 북부 유럽 여행

 

여행일 : ‘17. 6. 19() - 7.1()

여행지 : 러시아(모스크바, 페테르부르크), 에스토니아(탈린). 핀란드(헬싱키), 스웨덴(스톡홀름), 노르웨이(오슬로, 발드레스플라야, 요정의 길, 게이랑에르 피오르드, 뵈이야 빙하, 베르겐, 하당에르 피오르드, 하당에르비다국립공원), 덴마크(코펜하겐)

 

일 정 : 26() : 뵈이야 빙하, 빙하박물관

 

여행 일곱째 날 : 동토의 왕국에서 만난 얼음의 모든 것, 뵈이야빙하(Boyabreen)와 빙하박물관(Norsk Bremuseum)

 

특징 : 노르웨이는 6개월 이상이 얼어붙는 동토(凍土)의 나라이다. 그러니 만년설(萬年雪)과 빙하(氷河)는 노르웨이 사람들에게는 일상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는 노르웨이 관광에서 이 둘을 빼놓을 경우 남는 것이 거의 없을 거라는 얘기이다. 현재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고 있는 피오르드 또한 이 빙하가 만들어 놓은 결과물일 따름이다 오늘은 빙하를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는 코스로 짜여있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빙원(氷原)을 자랑하는 푸른 빙하’, 즉 요스테달 빙원의 한 자락인 뵈이야 빙하(Boyabreen)’를 둘러보는 한편, 빙하의 총체적인 모습을 한군데에 모아놓은 피얼란드 빙하박물관에도 들른다. 공식 명칭이 노르웨이 빙하 박물관 겸 울티베이 모에 기후센터(Norsk Bremuseum & Ulltveit-Moes senter for klimaforståing)‘인 박물관에서는 피오르드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배울 수 있으며 요스테달빙원에 대한 20분짜리 멀티스크린 동영상 감상도 할 수 있다. 또한 천 년된 얼음 만져보기, 가짜 얼음을 뚫어 만든 터널 지나보기 등의 체험도 가능하다. 특히 1919년에 발견되었다는 얼음인간 '외치(Oetzi)'는 압권이라 할 수 있다.

 

 

 

빙하박물관으로 향한다. 피오르드의 해안선을 따르기도 하고 또 어떤 곳에서는 산악지대를 통과하기도 한다. 특히 사진은 첨부되지 않았지만 길이가 24.5Km나 되는 피얼란드 터널을 지나기도 한다. 2005년에 개통되었는데 북유럽 최대의 빙원(氷原)이 있는 '요스태달산'을 관통하는 세계에서 가장 긴 터널이라고 한다. 버스로 통과하는데도 25분이나 걸렸으니 얼마나 긴지 대충 짐작이 갈 것이다. 아무튼 이 터널에서 어느 유명인사가 결혼식까지 올렸을 정도라니 꽤 유명한 터널임에는 분명하다.

 

 

 

 

 

 

한참을 달리던 버스가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느 언덕위에 멈춰 선다. 눈요기를 겸한 잠깐의 휴식을 위해서이다. 산자락을 따라 리프트가 설치되어 있는 걸로 보아 스키장이 이 부근에 있지 않나 싶다. 고갯마루에는 반듯하게 지어진 집 한 채가 있다. 이곳 노르웨이 특유의 지붕, 즉 기와 대신에 잔디를 덮어놓은 독특한 지붕을 갖고 있는 집이다. 저런 지붕으로 꾸며진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한다. 보온(保溫보냉(保冷)의 기능뿐만 아니라 습도(濕度) 조절에도 큰 효과가 있기 때문이란다. 이는 길고도 추운 겨울철과 일 년의 반 이상이 강우일(降雨日)인 노르웨이의 기후에 적합하다는 얘기가 된다.

 

 

안내판에 ‘kommune’이라는 단어가 보인다. 프랑스의 최하위 행정구역인 코뮌(commune)’과 같은 뜻이 아닐까 싶다. ‘공동생활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의 작은 모임이라는 중세 라틴어 ‘communia’에 어원(語源)을 둔다는 그 단어 말이다. 그 앞에는 스트린(Stryn)’이란 단어도 적혀있다. ! 이건 아까 점심을 먹었던 마을의 이름이 아닌가. 또 다른 안내판에는 글로펜(Gloppen)’이란 지명이 적혀있다. 그리고 가운데 안내판에는 ‘Sogn og Fjordane’라고 적혀있다. 노르웨이의 송노 피오라네 (Sogn og Fjordane county, Norway)’를 나타내는 단어일 것이다. 이로보아 노드 피오르드(Nord Fjord)’를 끼고 있는 송노피오라네 주에 대한 관광안내를 기본으로 깔고, 양 옆에다 이 근처에 위치하고 있는 소규모 지방자치단체인 스트린과 글로펜에 소재하고 있는 관광명소들을 표시해 놓은 안내판들인 모양이다.

 

 

얼마간 더 달린 버스는 빙하의 광대한 생성 과정과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빙하 박물관(Glacier Museum)’ 앞에다 우릴 내려놓는다. 북유럽의 가장 큰 빙하인 요스테달 빙하 아래의 계곡에 위치하고 있는데, 빙하를 연상시키는 독특한 형태로 설계된 박물관의 외관은 주변 환경과 자연스럽게 동화되고 있는 모양새이다. 노르웨이의 건축가이자 프리츠커상(Pritzker Prize, 건축가의 노벨상으로 불린다)의 수상자(1997)로 유명한 스베레 펜(Sverre Fehn, 1924~)이 설계한 이 박물관은 주 재료로 콘크리트와 유리·목재를 이용하였으며, 기울어진 외벽과 다양한 형태의 창문으로 장식되어 있다. 박물관은 노르웨이의 유명 영화감독 이보 카프리노가 제작한 빙하와 관련된 20분 분량의 영화를 보여주며, 긴 사각형 모양의 직선으로 된 전시관에는 4가지 카테고리(category)24개의 테마(Thema)를 가진 다양한 전시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박물관의 뜰에는 크기가 각각 다른 매머드(mammoth) 세 마리가 밖으로 걸어 나가고 있다. ’맘모스로도 발음되는 이 동물은 포유류 장비목에 속하는 멸종한 동물로, 크게 휜 엄니와 긴 털이 특징이다. 플라이스토세인 480만 년 전부터 4천 년 전까지 존재했다. 영구적인 동토(凍土)에서 보존 상태가 좋은 화석으로 발견되는 게 보통이므로 빙하박물관과 연관시켜 놓은 모양이다.

 

 

 

 

1991년 개관한 박물관의 건물은 죽기 전에 꼭 봐야할 건축물로 꼽히기도 한단다. 박물관 내부는 전시공간과 영상관으로 나뉘어 있다. 먼저 영상관에 들어간다. 전문가 몇 명이서 요스테달빙원(Jostedalsbreen)‘을 탐사(探査)하는 멀티스크린(multiscreen) 동영상(動映像)이 입체적으로 상영된다. 노르웨이의 유명 영화감독 이보 카프리노(Ivo Caprino)‘의 작품이란다. 아무튼 아름다운 설경이 환상적으로 펼쳐지는 멋진 장면들이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관객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그 분위기에 몰입이 되어버린 게 분명하다. 상영이 끝날 때까지 잔기침 한 번 들려오지 않는다.

 

 

 

 

설마 기념품 숍(shop)이 없을 리는 없다. 아니 가장 목이 좋은 입구에다 모셔놓았다. 각종 엽서나 화보, 메달, 조각품, CD 등 빙하를 연상시키는 각종 소품들을 판매하고 있는데 의외로 인기가 좋아 보인다.

 

 

숍의 앞에는 1,000년 된 빙하가 샘플로 놓여있다. 진품이다 보니 얼음 녹은 물이 둥그런 돌바닥을 따라 흘러내린다. 빙하가 녹으면서 계곡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설명하려는 의도인 모양이다. 거기다 빙하를 손으로 직접 만져보라는 배려를 추가했을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녹아 없어진 후에는 새로운 것으로 갈아 놓아야 할 테니 꽤나 번거로운 일일 게 분명하다.

 

 

이젠 빙하와 관련된 자료들이 전시되고 있는 공간으로 들어가 보자. 입구는 포효(咆哮)하고 있는 커다란 백곰이 지키고 있다. 그래, 현존하는 동물 가운데서는 빙하와 가장 밀접한 동물일 것이다. 그래선지 유독 이 박제품 앞에서 포즈를 잡는 사람들이 많다.

 

 

 

이 박물관은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조금씩 사라져가는 빙하를 안타까워한 노르웨이의 공주님이 약 20억 원을 출자함으로써 만들어진 박물관이라고 한다. 이 박물관은 단순히 보여주는데 그치지 않고 4D체험관에서는 잘 편집된 영상을 통해 빙하가 어떻게 해서 생성되는지를 오감을 자극하며 설명해준다. 각국의 언어로 된 브로셔(brochure)가 비치되어 있는 걸 보면 많은 나라의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는 모양이다.

 

 

매머드(mammoth)의 상아(象牙)도 전시되어 있다. 그들의 현대 후손인 코끼리처럼 매우 컸다고만 알고 있었는데, 상아의 크기로 보아 그보다는 훨씬 더 컸었나 보다. 아무튼 영어로 ’mammoth‘이나 거대한이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지금까지 알려진 매머드 중 가장 큰 것은 송화강 매머드, 어깨까지의 높이가 무려 5m에 이른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매머드 종들은 현대 아시아 코끼리와 크기가 유사하단다.

 

 

 

 

 

 

가짜 얼음을 뚫어 만든 굴도 보인다. 옛 사람들이 살던 공간을 재현한 모양인데 안으로 들어가 볼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다. 볼거리가 일절 없는 데다 허접한 것이 어둡기까지 해서 괜히 들어왔다는 후회감만 들 것이기 때문이다.

 

 

1991년 알프스의 빙하에서 발견되었다는 얼음인간 외치(Oetzi The Ice Man)‘도 살아 있을 때의 모습으로 복원해 놓았다. 피나일봉 등반을 마치고 하산하던 독일인 등반가 헬무트 지몬과 그의 아내 에리카는 해발 3,200m 부근의 외치계곡 빙하지대에서 얼음 위로 상반신이 드러난 사체를 발견하게 된다. 산행 중 조난당한 사체로 오해했을 정도로 사체의 상태는 그리 오래되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냉동 미이라 곁에서 현대인의 것이라고는 볼 수 없는 유물들이 함께 발견되면서 뼈와 피부로 연대를 측정한 결과 5300년 전의 석기시대 인간으로 밝혀졌다. 또 미라의 뼈와 근육에서 DNA를 뽑아내 분석한 결과 유럽인의 조상으로 판명 되었다. ’아이스맨 외치(Oetzi The Ice Man)‘란 이름은 그가 발견되었던 지역의 이름(Oetzi)을 딴 것이다. 이와 관련된 기록들을 따로 적어 뒤에다 걸어 놓았다.

 

 

밀랍인형의 앞으로 바짝 다가가던 집사람이 실소를 흘리고 만다. 앞에 놓인 깡통이 어디선가 본 듯하다는 것이다. 맞다. 내가 보기에도 옛날 거지들이 각설이 타령을 부르며 두들겨 대던 깡통을 쏙 빼다 닮았다.

 

 

그 외에도 다양하게 꾸며져 있다. 1000년 전 만들어진 빙하와 빙하 속을 재현해 놓았는가 하면, 빙하지대에 건설된 수력 발전소 모형도 만들어져 있다. 아까 보았던 원주민 외에 탐험가들의 모형도 만들어 보다 생생한 관람이 가능하다. 하긴 1994년 유럽 박물관 포럼에서 수여하는 '올해의 유럽 박물관상을 수상했을 정도이니 두말 하면 뭣하겠는가. 거기다 교육프로그램과 세미나가 개최되기도 한단다.

 

 

 

 

기후변화에 관한 자료도 꽤 많이 전시되고 있다. 2007년 기후변화와 빙하 모니터링을 위한 기후 전시관이 새롭게 개관했다더니 당시에 추가했던 모양이다. 공식 명칭도 노르웨이 빙하 박물관 겸 울티베이 모에 기후센터(Norsk Bremuseum & Ulltveit-Moes senter for klimaforståing)‘로 바뀌었다고 한다.

 

 

 

 

 

 

 

 

 

 

왜 빙하가 푸른빛을 띠는 가를 알려주는 공간도 눈길을 끄는 곳 가운데 하나이다. 얼음과 색소를 비치해 관광객 스스로 체험해 볼 수 있도록 했다.

 

 

밖으로 빠져나오면 그저 탄성만 자아내게 만드는 아름다운 풍경이 기다리고 있다. 박물관의 정원을 겸하고 있는 잔디밭 너머로 설산이 나타나는 것이다. 잔디밭을 노랗게 뒤덮은 야생화와 새하얀 만년설을 뒤집어쓰고 있는 산이 함께 어우러지며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런 걸 보고 자연의 위대함이라 하지 않을까 싶다. 아무리 유명한 화가라 해도 저 정도의 풍경화는 그려내지 못할 게 분명하다.

 

 

 

 

 

아름답다. 아니 너무나 아름답다.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리고 눈물 한 방울 또로록 떨어뜨리고 만다. 누군가 기쁨이나 슬픔이 극에 달할 경우에는 똑 같은 양상을 보인다고 했다. ‘겹다라는 형용사가 있다. ‘정도나 양이 지나쳐 배겨 내기 어렵다는 뜻이다. 기쁨도 지나치게 겨우면 눈물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는 나를 두고 하는 말이었나 보다. 그나마 나는 남자, 대성통곡만은 참기로 한다. ‘화장실문화시민연대에서 남자가 떨어뜨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닙니다.’라고까지 주장하지 않았던가. 남자들의 감성을 누르는 사악한 주장이라는 일부 문학인들의 주장도 있지만 뭐 어떻겠는가. 감성과 이성을 적절하게 섞어가며 살아가는 게 요즘의 현대인들인 것을.

 

 

 

 

박물관을 모두 둘러봤다면 이젠 뵈이야빙하(Boyabreen)‘를 직접 만나볼 차례이다. 옛말에 백문이 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 했다. 이는 한서(漢書) 조충국전(趙充國傳)’에 나오는 고사(古事)인데, ‘한나라()’로 쳐들어온 북방 이민족의 군세를 묻는 선제宣帝)에게 현장을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 제대로 된 책략을 세우겠다.’는 거기장군(車騎將軍) 조충국(趙充國)의 답변에서 유래한다. 지금의 상황과 딱 맞아 떨어지는 고사(古事)가 아닐까 싶다. 명색이 통토의 나라에 왔을 뿐만 아니라 박물관에서 빙하에 대한 모든 지식을 배웠으니 이제는 직접 빙하를 만나봐야 하지 않겠는가.

 

 

주차장에 내리면 암벽으로 이루어진 언덕이 나타난다. 두꺼운 얼음으로 덮여있는 암벽이다. ‘뵈이야빙하(Boyabreen)’라고 하는데 의외이다. 그동안 빙하는 북극 같은 바다에 둥둥 떠 있는 얼음덩어리로만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빙하는 크게 대륙빙하와 산악빙하, 그리고 산록빙하로 분류된단다. 그렇다면 뵈이야 빙하는 폭이 좁은 리본 형태로 산 계곡을 흘러내리는 빙류(氷流)’를 뜻하는 산악빙하로 보면 되겠다.

 

 

 

 

빙하는 생각했던 것 보다는 그 규모가 훨씬 작다. 근원이 되는 요스테달 빙원(Jostedalsbreen)’은 산 너머에 있는데, 직접 올라가보는 것은 불가하단다. 그렇다면 뵈이야빙하는 맛보기인 셈이다. 잠깐! 우리나라 말에 뵈여야라는 표현이 있다. 누구누구에게 보여준다는 뜻인데, 저 빙하의 이름인 뵈이야와 발음이 비슷하지 않는가? 원 빙하는 꼭꼭 숨겨놓고 맛보기만 보여준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을 지도 모르겠다. 요즘 애들은 이런 걸 보고 아재 개그(gag)’라고 한다지?

 

 

뵈이야 빙하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빙원을 자랑하는 요스테달 빙원(Jostedalsbreen)’의 한 자락이다. 그런데 요스테달 빙원푸른 빙하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그 이름은 자연스레 뵈이야 빙하에게로 이어진다. 빙하는 만년설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눈이 내리고 내리어 견고하게 쌓여 오랜 시간이 흐르면 단단한 얼음덩어리로 변한다. 이 얼음덩어리에서는 푸르스름한 빛이 감돈다. 불순물 가운데 파장이 짧은 파란색이 반사되어 파랗게 보인다고 한다. 햇살속의 다른 색들은 빙하가 모두 흡수하나 푸른색은 흡수하지 못해 파랗게 보인다는 설도 있으니 참조한다.

 

 

오묘한 푸른빛이 은은한 거대한 얼음덩어리(길이 400m)가 계곡 아래로 흘러내릴 듯 꽉 붙어 있다. 위태위태한 모양새이다. 아니나 다를까 지구의 온난화 현상때문에 빙하가 점점 녹아들고 있단다. 아래로 굴러 떨어질 날이 머지않아 올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이왕에 온 걸음이니 빙하의 본질을 속속들이 느껴보자. 한여름에도 녹지 않고 시원한 냉기를 발산하는 빙하를 어느 광고 문구처럼 눈으로 마셔보자

 

 

가까이 다가갈수록 빙하는 그 속살을 더 많이 내보여 준다. 드디어 세계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빙원(면적 487, 빙원 뚜 깨 30m~600m)이라는 푸른 빙하, 즉 푸른 눈이라 불리는 요스테달빙원의 끝자락인 뵈이야빙하 앞에 선다. 여름철이어선지 빙하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제법 거세다. 숫제 폭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빙하는 그렇게 그 크기를 점점 줄여가고 있다. 지구 온난화가 그 원인이겠지만 그 원인을 제공하고 있는 현대인의 한사람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착잡해진다. 우리의 잘못으로 인해 후손들에게 위대한 자연유산을 물려주지 못하게 되는 것 같아서이다.

 

 

빙하는 암벽의 아래에다 제법 큰 호수를 만들어 놓았다. 얼음이 녹아 흐르는 물의 양이 제법 된다는 증거일 것이다. 녹아드는 과정이 아주 조금씩 미세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일 따름이다.

 

 

 

 

 

 

버스를 타고 왔던 길을 따라 삼거리까지 되돌아간다. 피올랜드터널을 지나 한참을 더 가면 ‘Skri 마을삼거리가 나오고. 거기서 푀르데(Forge)’로 간다. 오늘 저녁은 거기서 묵게 된다. 아래 사진은 하룻밤을 머물렀던 ‘Thon Hotel Forge’인데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는다. 특별히 나쁜 기억이 없는 걸로 보아 그동안 머물렀던 호텔들과 별반 다르지 않는 서비스가 제공되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아무튼 이날의 여정은 너무 힘들었다. 이른 새벽에 오따(Otta)를 출발했는데 저녁 늦게야 푀르데(Forge)에 도착했으니 하루의 2/3 정도를 강행군 한 셈이다. 참고로 푀르데(Forde)는 주민이 1만 명쯤 되는 작은 도시이지만 통신의 분기점으로 무역과 공공서비스센터가 자리 잡고 있다. 송네와 피오르드 지역을 서비스하는 지방병원, 예술센터, 지역예술 갤러리, 극장 등의 편의시설들을 두루 갖추고 있는데, 1인당 소비증가율이 노르웨이에서 가장 높은 도시 가운데 하나란다. 또한 노르웨이에서 가장 큰 축제인 민속음악 페스티벌(Forde Folk Music Festival)’이 매해 이곳에서 열린다고 한다.

 

 

 

에필로그(epilogue), 전편에서 게이랑에르피오르드를 안내할 때 집사람의 체력 얘기를 했었다. 그런데 집사람을 괴롭히는 건 백야현상 말고도 또 다른 것이 있다. 변덕이 심한 날씨가 그 범인이다. 노르웨이는 한반도의 1.7, 국토가 남북으로 길게 뻗어있어 지리적 위치에 따라 자연환경이 다른 모습을 뿜어낸다. 특히 날씨는 예측이 불가능하다. 해가 나면서 비가 내리기도 하고, 금세 눈이 내리기도 한다. 그러니 24~2515라는 여름철 최고, 최저 기온은 아무 의미도 없다. 방수기능을 탑재한 바람막이는 물론 두툼한 방한복(防寒服) 하나 정도는 꼭 챙겨가야 하는 이유이다. 그런 준비를 못했던 우리부부는 여행 내내 고생을 감수해야만 했다. 짐을 줄인답시고 집사람이 챙겨놓은 방한복까지 빼버린 난 집에 돌아오고 난 후에까지 고개를 들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여행지 : 북부 유럽 여행

 

여행일 : ‘17. 6. 19() - 7.1()

여행지 : 러시아(모스크바, 페테르부르크), 에스토니아(탈린). 핀란드(헬싱키), 스웨덴(스톡홀름), 노르웨이(오슬로, 발드레스플라야, 요정의 길, 게이랑에르 피오르드, 뵈이야 빙하, 베르겐, 하당에르 피오르드, 하당에르비다국립공원), 덴마크(코펜하겐)

 

일 정 : 26() : 노르웨이의 게이랑에르 피오르드

 

여행 일곱째 날 : 협곡 속의 비경 그리고 폭포박물관, 게이랑에르 피오르드(Geiranger fjord)

 

특징 : 피오르드(fjord)’는 빙하의 침식으로 만들어진 골짜기에 바닷물이 들어와서 생긴 좁고 긴 만()이란 뜻의 노르웨이어다. 쉽게 말해 빙하가 만들어 낸 ‘U’자 모양의 대협곡이라고 할 수 있다. 노르웨이 서쪽 해안에는 송네, 하당, 뤼세 등 5대 피오르드가 자리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게이랑에르 피오르드(Geiranger fjord)’는 가장 아름다운 경치로 손꼽히는 곳으로 2005년에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됐을 정도이다. 1500m대의 높은 산들 사이에 16의 협곡이 펼쳐져 있고, 빙하의 눈이 녹아 폭포를 만들며 쏟아지는 풍경은 진정한 산수유람(山水遊覽)의 진수를 보여준다. 게이랑에르를 감상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첫째는 피오르드 사이를 왕복하는 유람선을 탑승해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차량을 이용해 전망대에 도착한 뒤 게이랑에르의 파노라마 전경을 발아래에 놓고서 감상하는 것이다. 같은 게이랑에르이지만 그 느낌은 전혀 다르니 이 둘 중 어느 하나도 놓쳐서는 안 된다. 아무튼 게이랑에르에서 헬레쉴트까지 운행하는 유람선을 타고가다 보면 도중에 칠자매 폭포(Seven Sisters waterfall)’프라이아렌 폭포(Friaren Waterfall)’, ‘스카게플로폭포(Skageflåfossen)’ 등의 이름난 폭포들을 만나게 된다. 이 구간에는 이들 외에도 엄청난 규모의 폭포들이 수없이 많다. ‘헬레쉴트에 도착하는 1시간여 동안 게이랑에르는 자신의 속살을 아낌없이 내보여 준다.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아름다운 풍경들이다.

 

 

 

아이스달(Eidsdal)을 지나면서 다시 산길이 시작된다. 이어서 30분쯤 지났을까 갑자기 눈앞이 훤해진다. 허공에 액자(額子) 하나가 떡하니 걸려있는 것이다. ‘게이랑에르 피오르드의 환상적인 절경을 그린 풍경화가 들어 있는 액자이다. 그 앞에 외르네베겐 전망대(Ornesvingen)’가 만들어져 있다. 얼른 차에서 내리고 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주룩주룩 내리던 비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쳐있다. 아니 구름 사이로 햇살이 빠져 나오기까지 한다. 이래서 북유럽 날씨가 변덕스럽다고 하는 가 보다. 참고로 외르네베겐 전망대(Ornesvingen)에다 플리달슈베트(Flydalsjuvet)와 달스니바 전망대(Dalsnibba)를 합쳐 게이랑에르 피오르드의 3대 전망대라 일컫는다고 한다.

 

 

 

 

게이랑에르 피오르드를 감상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그 첫째는 피오르드를 왕복하는 유람선에 탑승해서 거침없이 다가오는 자연들을 직접 줏어 담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차량을 이용해 전망대에 도착한 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이다. 같은 게이랑에르이지만 그 느낌은 전혀 다르다니 이 둘 중 어느 하나도 놓쳐서는 안 될 일이다. 오늘의 일정은 이 가운데 전망대를 먼저 들르도록 짜여 있다.

 

 

안내판에 ‘Geiranger-Trollstigen’라고 적혀있다. 하단에는 지도를 그리고 그 위에다 선을 그어놓았다. 트레킹코스를 나타내고 있지 않나 싶다. 상단에는 사진 몇 장을 올려놓았다. 지도에 표기된 지점의 풍경화들일 것이다. 그런데 막상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 이곳에 대한 설명은 보이지 않는다. 덕분에 다른 인터넷 서핑(web surfing)을 꽤 오래 한 후에야 이곳이 외르네베겐 전망대(Ornesvingen)’라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허공에 걸쳐져 있는 전망대에 오른다. 그러자 아름답기 짝이 없는 호수, 아니 바다가 눈앞에 펼쳐진다. 노르웨이관광청은 얼마전(‘177) CNN이 선정한 세계 50대 대자연의 신비가운데 노르웨이의 명소인 프레이케스톨렌(Preikestolen)‘, ’게이랑에르피오르드(Geirangerfjord)와 내뢰이피오르드(Nærøyfjord)‘가 각각 1(No.1)10(No.10)로 선정됐다고 밝힌바 있다. 그 가운데 10위에 선정된 게이랑에르피오르드가 지금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도 등재된바 있는 노르웨이의 대표적인 피오르드다. 참고로 1위에 뽑힌 프레이케스톨렌은 노르웨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트레킹 장소로 모양이 마치 설교단같이 보인다고 해서 일명 펄핏 록(Pulpit Rock)’으로 불리기도 한다. 정상에서는 뤼세 피오르드(Lysefjord)’의 풍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다고 알려진다. 또한 게이랑에르피오르와 함께 지난 2005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내뢰이 피오르드는 가장 폭이 좁은 지점이 250m에 불과해 유럽에서 가장 극적인 피오르드 여행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도로 쪽으로 몇 걸음 옮기니 피오르드가 또 다른 모습으로 여행자의 눈을 현혹시킨다. ‘게이랑에르마을이 조금 전 전망대에서 보았을 때보다 한층 더 또렷해졌다. 이 모든 것은 한마디로 아름답다. 마치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하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이다. 노르웨이는 자연환경 보호를 국가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삼는다고 한다. 그만큼 보존할만한 가치가 있는 경관들이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 결과는 또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화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게 되고 말이다. 인간과 자연이 서로 주고받으며 공생(共生)해가고 있는 셈이다.

 

 

피오르드 연안의 높은 산들은 하지(夏至)가 지난 지금까지도 하얀 만년설을 뒤집어쓰고 있다. 이 만년설이 여름철을 맞아 녹아 피오르드가 있는 협곡으로 흘러든다. 이때 만들어지는 것이 폭포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수많은 폭포들이 한여름의 울창한 숲, 그리고 파아란 물빛의 수면과 어우러지며 아름다운 경관을 만들어 낸다. 노르웨이의 여름이 그려놓은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이다.

 

 

바다에는 아름다운 경관을 즐기려는 선박들로 분주하다. 유람선은 물론이고 크루즈까지 수면에다 아름다운 문양을 수놓으면 오간다. 게이랑에르 피오르드 관광의 핵심이라는 게이랑에르(Geiranger)에서 헬레쉴트(Hellesylt) 사이를 오가는 유람선일 게다. 크루즈야 물론 북유럽의 관광명소를 찾아다니는 중일 게고 말이다.

 

 

 

조망을 즐긴 뒤, 갈지()자로 나있는 도로를 따라 잠시 내려오면 게이랑에르(Geiranger)’라는 마을에 이른다. 피오르드로 들어가는 관문(關門), 즉 유람선이 출발하는 선착장으로 보면 되겠다. 게이랑에르는 노르웨이 서부의 뫼레오그롬스달 주, 순뫼레(Sunnmøre) 지역에 속해있는 작은 관광 마을로, 2005년부터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선정되어 있는 게이랑에르피오르드(Geirangerfjord)’의 끝 부분에 위치한다. 마을은 호텔, 리조트 말고도 구석구석 예쁜 찻집들이 많이 들어서있다. 카페들, 예쁘게 꾸며놓은 집들과 갤러리들, 기념품상점들이 그득한 골목은 걸어 다니는 것만 해도 큰 즐거움이 된다.

 

 

게이랑에르에서도 30분 정도의 자유시간이 주어진다. ‘헬레쉴트(Hellesylt)’로 가는 유람선이 출발할 때까지의 자투리시간이다. 아까 요정의 길의 고원전망대(高原展望臺)에서 비 때문에 상부(上部) 전망대에 다녀오지 않음으로 인해 절약된 시간으로 보면 되겠다. 아무튼 이 자투리시간이 모처럼의 여유를 가져다주었다. 선착장을 따라 늘어선 기념품상가에서의 쇼핑은 물론, 피오르드를 배경삼아 사진촬영을 하는 등 느긋하게 눈요기를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슈퍼마켓에 들러 캔 맥주 하나 사 들고는 투어에 나선다. 원래 이곳은 길이 열리지 않은 숨겨진 땅이었다고 한다. 1869년 영국의 조난선이 이곳을 발견한 후 태초의 신비를 간직한 자연이 알려지면서 늦은 봄부터 가을까지 수많은 유람선과 관광객들이 몰려온다고 한다.

 

 

마을 입구에는 피오르드를 감상할 수 있는 전망 포인트를 표시해 놓은 지도가 걸려있다. 200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음을 알리는 안내판도 보인다.

 

 

그 옆에는 '트롤(troll)' 조형물을 만들어 놓았다. 전에도 얘기했듯이 트롤은 노르웨이 전설 속에 등장하는 요정으로 작고 귀엽다기보다는 긴 코에 꼬리가 있으며 산발한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모습을 가지고 있는데 장난이 짖궂어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악을 물리치고 나쁜 기운을 쫓는다고 해서 노르웨이 사람들에는 매우 친숙한 존재이다. 우리나라의 도깨비쯤으로 여기면 되지 않을까 싶다.

 

 

아까 전망대에서 감상했던 산자락이 이번에는 아래에서 올려다 보인다. 거대한 암릉을 짙은 숲이 포위하고 있는 모양새이다. 포위가 덜 된 부분에는 실 같이 가는 폭포들이 흐르고 있다. 산꼭대기에 쌓여있는 만년설 녹은 물이 흐르면서 만들어 놓은 폭포들일 것이다.

 

 

마을 앞바다에는 엄청나게 큰 크루즈 한 척이 떠있다. 맞다. 누군가 이곳에 노르웨이 3대 크루즈선박 항구가 있다고 했었다. 그는 여행 성수기인 4개월 동안 많은 선박과 크루즈 여행객이 이 마을을 방문한다고도 했다. 매년 6월에는 '게이랑에르-피오르에서 정상까지(Geiranger From Fjord to Summit)‘라는 행사까지 이곳에서 개최된단다.

 

 

 

 

게이랑에르 피오르드(Geiranger fjord)’의 투어는 유람선을 타면서 시작된다. 독일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빌헬름 2(재위 1888~1918)가 일곱 차례나 찾았을 정도로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이 피오르드(Geiranger fjord)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제대로 구경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유람선을 타고 둘러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유람선은 게이랑에르(Geiranger)마을에서 헬레쉴트(Hellesylt)까지 16쯤 되는 거리를 오간다. 게이랑에르에서 헬레쉴트까지 가는데 1시간 20분 정도가 걸리는데, 유람선은 5월부터 10월 사이에 매일 4~8회 운항한다.

 

 

유람선은 두 개의 관람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다. 선실(船室)에 앉아 선창 밖으로 펼쳐지는 경관을 감상할 수도 있고, 더 꼼꼼히 살펴보고 싶다면 갑판으로 올라가면 된다. 대부분의 승객들은 후자의 방법을 선택하고 있었다.

 

 

 

 

 

 

 

뒤돌아본 게이랑에르마을, 언제 도착했는지 크루즈가 둘로 늘어났다. 아무튼 흠잡을 데 없는 아름다운 풍경이다. ‘땅과 바다가 아름답게 만난 곳영국 시인 바이런이 피오르드(fjord)를 표현한 말이다. 오죽 아름다웠으면 그런 표현까지 썼을까 싶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버킷리스트(Bucket list)에 올라가 있는 모양이다.

 

 

피오르드는 웅장한데다, 벼랑은 대부분 깎아지른 직벽(直壁)으로 이루어져 있다. 바다도 깊다. 눈앞에 펼쳐지는 저 산자락의 높이만큼이나 바다도 깊다고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 지역이 원래 빙하였기 때문이다. 100만 년 동안이나 눈과 얼음으로 뒤덮였던 빙하(氷河)1만 년 전에 녹았다. 백두산보다도 더 높았던 얼음덩어리가 녹아내리면서 산을 깎고, 흙을 쓸어내렸다. 그곳이 빙하수로 차올라 바다 수위(水位)도 올라갔다. 그러다보니 산과 산 사이가 물길이 됐다. 이게 바로 피오르드 해안이다. 그래서 수심(水深)600m가 넘는 곳도 있다고 한다.

 

 

배가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절벽들이 성큼 눈앞에 다가온다. 멀리서 본 산줄기와 가까이서 본 산은 달라도 한참이나 다르다. 풀과 나무가 빼곡하게 자란 절벽 밑둥은 푸릇푸릇했고, 산봉우리는 한겨울처럼 눈이 덮였다. 눈이 녹아내린 실폭포가 벼랑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다. 폭포수를 하나 둘 세다가 나중엔 셈을 포기했다. 폭포가 열댓 개가 넘었다. 산꼭대기에 내린 눈들이 녹아내리면서 골이 파인 틈새로 흘러내리니 여기저기가 모두 폭포다.

 

 

 

 

 

 

입소문을 탄 폭포 가운데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건 칠자매폭포(Seven Sisters waterfall)’이다. 300m 높이에서 눈 내린 물이 일곱 가닥의 폭포수가 돼 흘러내리는데, 폭포의 수량은 지난 겨울에 내린 눈의 양()에 비례한단다. 이 독특한 이름은 멀리서 폭포를 바라봤을 때 물줄기가 일곱 여인의 머리카락을 닮았다는 데서 유래되었다는데 이 구간의 하이라이트다. 다른 주장도 있다. 마을에 미혼의 일곱 자매가 살고 있었는데 한 청년이 그녀들에게 각각 청혼했지만 일곱 자매는 술에 빠져 있어 모두 거절해 버렸다고 한다. 이에 상심한 청년은 일곱 자매에게 바칠 술병의 모습으로 변해 폭포가 되었다고 한다.

 

 

일곱 개의 물줄기를 모두 볼 수 있는 건 여름시즌 뿐이라고 한다. 평상시에는 4~5개의 물줄기만 흐를 뿐이란다. 다행이도 지금은 일곱 줄기 모두가 다 나타나고 있다. 제대로 철을 맞춰왔다는 증거일 것이다. 누군가는 이 폭포를 일러 신부가 머리에 면사포를 쓰고 있는 형상이라고 했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리 비쳐지지 않는다. 물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이상한 일이다. 아무래도 내 감성이 많이 무뎌진 모양이다.

 

 

폭포의 상부에 집이 보인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해발 1000m 높이의 절벽 위에 농장(農場)들이 존재했다고 하더니 그 흔적일지도 모르겠다. 내 추측이 옳다면 저곳은 사다리를 놓고서야 올라갈 수 있었다. 그래서 사다리만 치우면 세무관원(稅務官員)들을 피할 수가 있어 그렇게 험한 곳에다 농장을 두었다는 재미있는 얘기도 전해진다. 지금은 농부들이 모두 떠났고 산책로로 인기를 끌고 있단다. 그 길의 이름은 독수리의 길이란다.

 

 

 

 

마주보고 있는 반대편 절벽의 폭포는 구혼자라는 뜻을 지닌 프라이아렌 폭포(Friaren Waterfall)’이다. 남쪽 해안의 가파른 절벽위에서 하나의 물줄기로 125m를 떨어지다가 중간에서 바위에 부딪히며 부채꼴 모양으로 퍼져 쏟아진다. 일곱 자매에게 청혼을 했다가 거절당하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는 전설을 품고 있는 폭포로. 술병모양을 하고 있어 그런 얘기가 나왔다는데 폭포가 시작되는 위쪽은 물줄기가 병목처럼 가늘다가 아래쪽이 병의 몸통처럼 퍼지는 것을 보고 병모양이라고 하는 듯하다. 아무튼 칠자매폭포(Seven Sisters waterfall)와 함께 예이랑에르피오르드 유람선 관광의 주요 명소로 꼽힌다.

 

 

 

 

 

페리는 좁고 기다란 바닷길을 따라 나아간다. 주변에 나타나는 웅장한 산과 아찔할 만큼 가파른 절벽은 보는 사람들을 압도한다. ‘~’하는 감탄사와 함께 카메라를 들이대느라 정신들이 없다. 하긴 달력에나 나올 법한 풍경들이 펼쳐지고 있으니, 다들 정신 줄을 놓을 수밖에 없었을 게다. 그러나 그마저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하찮은 인간의 능력을 갖고 어찌 저런 경관을 온전히 담아낼 수가 있겠는가.

 

 

 

 

 

 

 

 

얼마 후 엄청나게 높은 폭포 하나가 나타난다. 높이로 보아 스카게플로폭포(Skageflåfossen)’일지도 모르겠다. ‘스카에플라새스트라(Skageflåsæstra)’라는 호수에 의해 흘러내리는 물이 일 년 내내 흐른다는 폭포이다. 이 밖에도 브리달베일 폭포(Bridalveilfossen)와 스토르세테르폭포(Storseterfossen) 등 크고 작은 폭포들이 계속해서 나타났다 사라지곤 한다.

 

 

 

 

벼랑이 한 발자국 물러선 구릉(丘陵)에는 초원이 펼쳐진다. 언덕 위엔 자그마한 나무집 몇 채와 목장이 보이기도 한다. 들은 푸르고, 그 너머는 빙벽으로 하얗다. 아무튼 햇살 아래 드러난 산들은 하나같이 싱싱하다. 푸른 초지에 푸른 물이 더해지니 세상은 온통 푸른색으로 덧칠이 되어 버렸다.

 

 

 

 

게이랑에르 피오르드는 사진이나 포스터보다 실제 풍광이 더 나은 것 같다. 그 반대가 더 일반적이기에 예외가 아닐 수 없다. 수백 미터 높이에 달하는 절벽 틈새로 난 물길을 따르다보면 하늘과 바다, 깎아지른 절벽, 눈 쌓인 산봉우리, 실개울처럼 흐르는 폭포들이 끊임없이 나타난다. 어느 것 하나 광활하고 오묘하지 않은 게 없다 .그러니 사진이나 그림이라는 한정된 공간에다 한꺼번에 담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 리가 없다. ‘게이랑에르 피오르드가 다른 어느 곳보다도 더 사람들이 몰려드는 관광지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피오르드는 내륙 깊이 들어온 만()이라는 노르웨이어이다. 빙하가 깎아 만든 U자형 골짜기에 바닷물이 유입되어 형성된 좁고 기다란 만을 뜻하며 특징은 바닷물 30%와 빙하가 녹은 물 70%로 염도가 적어 물이 짜지 않다는 것이다. 해안에서 내륙으로 이동하는 피오르드 여행은 이곳 노르웨이에 온 관광객들이 빼놓지 않고 들르는 필수 코스로 자리매김 된지 이미 오래이다. 그중에서도 게이랑에르피오르드는 가장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노르웨이의 보석이다. 풍광으로는 으뜸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2005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됐다. 아무튼 잠시 후에는 유람선의 종착지인 '헬레쉴트'에 이르게 된다. 노르웨이가 낳은 세계적인 문호 '입센'이 지은 희곡 '페르귄트(Peer Gynt)'를 조각품으로 표현한 미술관이 소재하고 있다고 해서 '페르귄트 마을'이라고도 불리는 작은 마을이다.

 

 

종착지인 헬레쉴트(Hellesylt)에서 유람선을 내려와, 한 시간 정도를 달리던 버스가 작은 마을에 멈춰 선다. 점심식사를 위해서이다. 이곳 역시 피오르드의 해변, ‘노르드 피오르드(Nordfjord)’로 보이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곳은 스트린(stryn)마을일 것이고 말이다. 그나저나 분명한 것은 아까 눈요기를 즐겼던 게이랑에르 피오르드에는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한 경관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해수면 또한 흡사 내륙의 호수처럼 잔잔하다.

 

 

 

 

점심식사를 마친 후에는 빙하박물관으로 향한다. 피오르드의 해변을 따르는 예쁜 길이다. 차창 너머로 해안마을이 나타난다. 노르웨이의 자연은 아무런 수식어가 필요하지 않는 순수한 자연이다. 푸른 하늘, 꽃보다 아름다운 연녹색 산하, 청결한 대기, 깨끗한 시냇물 등 모든 것을 갖추고도 지나침이 없고, 인공의 흔적이 보이지 않아 그 위에 세워진 가옥도 그 안에 살고 있는 인간도 순수한 자연의 일부인 것 같다. 그래서 이 땅의 사람들은 아름다운 조국 강산을 그냥 자연, 자연, 자연이라고 한단다.

 

 

 

에필로그(epilogue), 집사람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인다. 여행을 시작한지 며칠 되지 않았기에 걱정에 앞서 그 이유가 궁금해진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끄떡거리게 된다. 노르웨이가 백야(White Night)의 땅이었던 것이다. 거기다 위도가 60° 이상이나 되다보니 그 현상(白夜)은 더 심해진다. 자정이 넘었는데도 책을 읽어도 될 만큼 밖이 훤하다. 아직 시차적응도 덜 되었는데 백야까지 괴롭히다보니 체력소모가 많았던 모양이다. 누군가 여행자들에게 백야는 기쁨이라고 했다. ‘밤낮 할 것 없이 하루 종일 해가 있으니 맘껏 돌아 다녀야지라고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면 족하다. 체력안배 없는 여행은 오래가지 못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또한 돌아다닐만한 곳도 없다. 노르웨이 상점들은 대부분 오후 4~5시면 문을 닫는다. 그러니 밖에 나가봐야 쇼핑은커녕 거리를 마냥 배회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여행지 : 북부 유럽 여행

 

여행일 : ‘17. 6. 19() - 7.1()

여행지 : 러시아(모스크바, 페테르부르크), 에스토니아(탈린). 핀란드(헬싱키), 스웨덴(스톡홀름), 노르웨이(오슬로, 발드레스플라야, 요정의 길, 게이랑에르 피오르드, 뵈이야 빙하, 베르겐, 하당에르 피오르드, 하당에르비다국립공원), 덴마크(코펜하겐)

 

일 정 : 6.25()-26() : 노르웨이의 오슬로, 발드레스플라야, 오따, 요정의 길

 

여행 여섯째 날 : 노르웨이 최고의 트레킹코스, 발드레스플라야 & 요정의 길

 

특징 : 노르웨이(Kingdom of Norway, 노르웨이어 Kongeriket Norge) : 내륙으로는 스웨덴과 핀란드, 러시아와 접경하고, 해안부는 북해와 노르웨이해, 북극해 및 스카게라크 해협에 면한다. 국토의 70%가 호소(湖沼, 호수와 늪)와 빙하, 암석산으로 이루어져 인구의 70%가 도시에 몰려 산다. 인종은 대부분이 게르만족인 노르웨이인이며, 그밖에도 사미족이 있다. 언어는 노르웨이어이고, 전인구의 94가 국교인 복음루터교를 신봉한다. 내각책임제 하의 입헌군주국으로 국왕은 하랄 5(Harald V)’이다. 8세기 말까지 남부에서 여러 개의 작은 나라를 이루고 있던 노르드인은 9세기 들어 해외 진출, 즉 바이킹 활동을 11세기까지 활발하게 해온다. 872년 하랄왕(Harald)에 의하여 통일왕국이 세워졌고, 11세기 중엽에는 노르웨이왕이 덴마크왕을 겸하는 세력을 지니기도 했다. 14세기 말부터 1814년까지는 덴마크의 지배를, 1814년부터 1905년까지는 스웨덴의 지배를 받았다. 1905년 스웨덴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오늘의 왕가가 시작되었다. 대외적으로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으로, 국제연합(UN)에는 1945년에 가입했다. 하지만 EU에는 가입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와는 1959년에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발드레스플라야(Valdresflya)와 트롤스티겐(Trollstigen) : 청정자연을 자랑하는 노르웨이에서 첫 번째로 만나게 되는 순수(純粹)한 자연이 발드레스플라야(Valdresflya)이다. 북유럽 최고의 트래킹코스로 알려진 이곳은 요툰하임의 광활한 풍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노르웨이의 다른 고지대(高地帶)와 마찬가지로 12월에 닫혔다가 이듬해 4월에야 열리지만, 열린 후에도 지나다니는 차량들은 그다지 많지가 않다. 덕분에 마음이 동하는 곳이라면 어떤 장소에서건 쉴 수가 있고, 마음껏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다. 난생 처음 보는 이질적인 풍경에 흠뻑 빠져볼 수 있음은 물론이다. ‘트롤스티겐(Trollstigen)’ 또한 결코 뒤지지 않는다. ‘거인의 사다리라는 뜻의 이 길은 금방이라도 숨어 있던 요정이 나타날 수 있다고 해서 요정의길이라고도 부른다. 11개의 U자형 급커브와 가파른 경사로(傾斜路)가 있는 아주 스릴 넘치는 고갯길로, 특히 길의 폭이 좁은데다 한쪽 면이 천 길 낭떠러지로 이루어져 있어 고갯마루까지 올라서는 내내 오금저리는 두려움에 떨어야만 한다. 반면에 주변의 경관은 끝내준다. 산자락에 만들어진 수많은 폭포들이 바라보는 이의 눈을 현혹시키는가 하면, 낭떠러지 아래에서 꿈틀대고 있는 구곡간장(九曲肝腸)의 도로는 두려움을 넘어 환희로 다가온다. 한마디로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만한 멋진 경관이다.

 

 

 

국경도시 아르장(Arjang)을 출발한 버스는 1시간 반 정도를 달린 끝에 노르웨이의 수도인 오슬로에 이른다. 오슬로 시청사(市廳舍) 앞의 부둣가이다. 가이드가 점심때까지 시간이 조금 남았다며 자유 시간을 준다. 가는 길에 점심을 먹을 만한 곳이 없기 때문에 이곳 오슬로에서 한 끼를 때우고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1시간이 채 되지 않는 이 자유시간이 참으로 어중간하다. 무언가 하나를 톡 찍어 구경할 수가 없는 것이다. 별 수 없이 오슬로 시청(Oslo City Hall)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다가 동쪽 바위산에 자리한 아케루스후스 요새(Akershus Fortress)’까지 다녀오기로 한다. 그 곳도 역시 외곽만 눈에 담을 수 있을 따름이다. 내부관람을 할 만한 시간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르웨이 투어의 마지막 날에도 이 부근에서 30분 정도의 자유시간이 주어지게 된다. 애초에 일정을 잘 조정해서 이 둘을 합쳐놓았더라면 요새의 내부관람까지 가능했을 텐데 아쉬운 일이다.

 

 

아케루스호스 요새(Akershus Fortress)는 오슬로의 역사를 배우며 걷기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13세기 호콘 5(King Haakon V)’가 오슬로 동쪽 바위산 위에 세운 성채인데, 17세기 초 오슬로 대화재로 잿더미가 된 것을 크리스티안 4(Christian IV)’가 르네상스풍으로 재건했다. 현재 국외 주요 인사의 노르웨이 방문시 영빈관 겸 연회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역사적인 내용을 전시한 박물관도 열어 놓았으며, 성 아래 해안도로는 19세기 말엽 뭉크가 친구들과 산책을 나왔다가 '절규'의 모티브를 얻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매일 오후 130분에 행해지는 위병 교대식이 볼만한 것으로 알려진다. 아래 사진은 못 가본 것이 하도 억울해 노르웨이의 관광 사이트에서 빌려왔다.

 

 

 

1950년 오슬로(Oslo) ()의 창립 9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지어진 청사(廳舍)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는 장소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김대중 전 대통령도 20001210일 이곳에서 수상증서 및 금메달을 받고 수상 연설을 한바 있다. 자세한 얘기는 뒤로 미루겠다. 노르웨이에서의 마지막 날 일정에 시청사의 내부관람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점심 식사를 마친 후에는 산간마을인 오따(Otta)로 향한다. 가는 길에 1m가 넘는 고원지대를 지나야 하는 험난한 여정이다. 오슬로를 떠난 길은 시간이 지나갈수록 고도(高度)를 높여간다. 그렇다고 서둘러서 변화를 주지는 않는다. 거리가 멀다보니 1m 정도의 높이는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모양이다. 언제부턴가 차창 밖으로 내다뵈는 풍경이 많이 달라졌다. 끝없이 펼쳐지던 허허벌판은 언제부턴가 사라져버리고 모나지 않는 산릉(山稜)이 좌우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이 길은 우리나라와는 다른 특징을 보여준다. 어쩌다 만나게 되는 호수에서 그런 특징이 여실히 나타나는데 우리가 가야할 반대편이 뻔히 건너다보이는데도 빙 에둘러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나라 같으면 다리 하나 뚝딱 놓아버렸을 텐데도 말이다. 여유로움이 몸에 배어있는 이 나라 사람들의 심성을 보는 것 같아 내 마음 또한 포근해진다.

 

 

겨울철 세계 각국의 스키어들이 몰려드는 핫플레이스(hot place)인 바이토스톨렌(Beitostolen)을 지나면서 차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풍경들이 바뀌어져 간다. 고도(高度)를 높여가는 속도가 서서히 빨라져가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나무 한 그루 눈에 띄지 않는 삭막한 풍경으로 바뀌어 버린다. 북유럽 최고의 트래킹코스로 알려진 발드레스플리야(Valdresflya)’에 들어선 모양이다. 아니 요툰하이멘국립공원(Jotunheimen National Park)’일지도 모르겠다. 얄팍하기 짝이 없는 내 앎을 갖고 두 지역의 경계를 나눈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아무튼 발드레스플라야를 가로지르는 도로(51)는 요툰하임국립공원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어, 이 길을 가다보면 요툰하임의 광활한 풍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고 한다. 노르웨이의 다른 고지대들이 다 그러하듯이 이 길 역시 겨울철이 시작되는 12월에 닫히고, 이듬해 4월이 되어야만 다시 열린다. 가장 높은 지점은 해발이 1,389m나 된다.

 

 

숨도 고를 겸해서 잠시 쉬어가기로 한다. 안내판은 보이지 않지만 작은 공터로 이루어진 걸로 보아 전망대(展望臺) 용도로 만들어놓은 것 같다. 노르웨이 여행의 장점 중 하나가 바로 이런 자유로움이 아닐까 싶다. 마음이 동하는 곳이라면 어떤 장소에서건 쉴 수가 있고, 마음껏 여유를 부릴 수 있다는 점이다.

 

 

엊그제 하지(夏至)가 지났는데도 아직도 산은 새하얀 눈을 머리 위에 이고 있다. 그래 이곳은 1200미터를 훌쩍 넘기는 고원지대(高原地帶)이다. 거기다 북극권인데 오죽하겠는가. 가이드의 말로는 일 년 내내 눈을 구경할 수 있는 곳이란다. 아니 조금 옹색하기는 해도 스키까지 탈 수가 있다니 할 말 다했다. 아무튼 이렇게 척박한 곳에서도 오래된 경작지와 목장 등 사람들이 살고 있는 흔적들이 눈에 띄기도 한다. ‘여름 농장즉 여름에만 거주하는 가옥(家屋)들이다. 이곳 발드레스플라야(Valdresflya)에 걸쳐있는 지역인 Heidal, Sjodalen, Valdres 등에서는 생활 전통이나 자연경관이 잘 보존되고 있단다.

 

 

전망대에 서면 건너편 저 멀리에 멋진 산 하나가 나타난다.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 민둥산의 꼭대기 위로 하얀 뭉게구름이 지나간다. 그 아래에는 크지도 그렇다고 작지도 않은 호수가 놓여있다. 난생 처음 보는 이질적인 풍경이다. 가슴이 뭉클해지는 걸로 보아 그 풍경이 사뭇 고왔던 모양이다.

 

 

 

 

반대편 방향에도 호수가 보인다. 비록 작지만 호수임에는 틀림이 없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저런 호수들을 수없이 만났었다. 이곳 발드레스플라야(Valdresflya)’가 물길이 따로 없는 평원(平原)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고산(高山)에 쌓여있던 만년설(萬年雪)이 녹아 흐르다가 움푹 파인 곳을 만나 고이게 되면 자연스레 호수를 만들 거라는 얘기이다.

 

 

 

버스는 또 다른 공터에서도 멈추어 선다. 이번에는 ‘Rjupa전망대라는 공식적인 이름까지 갖고 있는 곳이다. 하지만 주차장이 비어있기는 아까와 매한가지이다. 성수기인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비어있다면 일 년 내내 붐빌 일은 없겠다. 그런 분위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모든 것이 여유롭다. 바쁜 사람도 없고 재촉하는 일도 없고, 급한 마음 또한 생기지 않는다. 마음에 들면 서고 싫어지면 떠난다. 적당히 숨고르기를 하며 여정을 이어가기에 딱 좋은 분위기이다.

 

 

안내판에 ‘Jotunheimvegen’라는 단어가 보인다. 영어는 아니지만 요툰하이멘 국립공원(Jotunheimen National Park)’에 대한 안내판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그 아래에는 세계의 경이로운 자연경관 100(100 Natural Wonders Of The World)’ 가운데 하나로 뽑힌바 있는 요툰하이멘(Jotunheimen)의 아름다운 경관을 소개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또 다른 안내판에는 지도가 그려져 있다. ‘Rjupa’라는 지명 옆에 붉은 점을 찍어 놓았다. 이곳이 ‘Rjupa 전망대라는 증거이다.

 

 

 

전망대에 서면 커다란 호수 하나가 눈앞에 펼쳐진다. ‘Vinstre 호수라고 한다. 해발이 1,302m나 되는 높은 곳에 저렇게 커다란 호수가 있다는 것이 경이롭기까지 하다.

 

 

 

 

호숫가를 따라 난 좁다란 길가에 작은 오두막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게 보인다. 북유럽의 명물 가운데 하나인 통나무집 히테(hytte)’일 것이다. 호텔이나 모텔보다 가격이 저렴할 뿐만 아니라 주방시설까지 갖추고 있어 배낭여행자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시설이다. 참고로 히테(Hytee)란 별장을 의미한다. 이곳 사람들은 주말이면 이 시골집에 내려가 채소 등을 직접 가꾸며 소일하는 것이 또 다른 일상이자 휴식이다. 그러다보니 산간오지(山間奧地)에 위치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요즘의 히테는 해변이나 호숫가, 스키장 근처 등의 경치가 좋은 곳에다 마련하는 게 보통이라고 한다. 그중에는 민박(民泊)으로 이용하는 곳도 많단다.

 

 

 

 

 

 

요툰하이멘 국립공원(Jotunheimen National Park)은 스칸디나비아에서 가장 높은 산악지대(山岳地帶)로 노르웨이의 남부지역에 위치한다. 빙하기(氷河期, glacial stage) 때 얼음으로 덮여있던 융기평원이 빙상(氷床, 빙하)의 침식(侵蝕) 작용을 거치면서 해발 1,000~2,000m의 산지 및 호수, 계곡, 피요르드 등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환상적인 자연경관으로 형성되었다. 산지의 서쪽에는 유럽 최대의 빙하인 요스테달스브레 빙하가 아직까지 잔존하고 있단다. 요툰하이멘(Jotunheimen)은 이러한 높은 산들이 자아내는 웅장하고도 신비한 자연 경관 때문에 '거인의 나라'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으며 북유럽 신화나 전설에 자주 등장한다. 주인공이 애인 솔베이지를 버리고 산속 마왕의 딸에게 혼을 판다는 입센(Henrik Ibsen,1828-1906)의 희곡(戲曲) '페르귄트(Peer Gynt, 1867)'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개울을 발견한 집사람이 쪼르르 달려 내려간다. 졸졸졸 흐르는 물에 손을 담그는 모습이 아직도 동심(童心)을 벗어나지 못했나 보다. 하긴 이렇게 아름다운 경관 속에서 어른 티를 낼 필요는 구태여 없겠다. 그녀가 화들짝 놀란다. 명색이 얼음이 녹으면서 만들어 놓은 개울인데 얼마나 차겠는가. 엄청나게 손이 시렸을 것이다.

 

 

요툰하이멘 국립공원(Jotunheimen National Park)을 지나면 이젠 내리막길이다. 주변 풍광도 확연히 달라진다. 울창한 숲은 물론이고 계곡에도 물이 넘쳐흐른다. 한마디로 아름답다는 얘기이다. 여기에 감미로운 음악까지 곁들여진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아닐까 싶다. 눈치 빠른 가이드가 이런 분위기를 놓쳤을 리가 없다. 준비해온 CD를 틀어준다. 위에서 얘기했던 '페르귄트(Peer Gynt, 1867)'인데, 우리의 귀에도 익숙해진 솔베이지의 노래(Solveigs Lied)’가 여기서 나온다. ‘에드바르드 그리그(Edvard Grieg, 1843-1907)’가 작곡(作曲)한 노래들이다. 반쯤 눈을 감은 채로 노래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어느덧 산간마을이 오따(Otta)에 이르게 된다. 아래의 사진 두 장은 다른 분의 것을 빌려다 썼다. 비가 너무 많이 내려 버스의 안에서는 사진촬영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오따(Otta)는 오플란주의 지방 자치 지역 가운데 하나인 셀(Sel)의 행정 관청이 있는 타운이다. 오플란주의 주도인 릴레함메르(Lillehammer)로 부터 북쪽으로 약 110km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데, 우리나라의 읍() 규모에 조금 못 미치는 크기라고 보면 되겠다. 오따(Otta)는 슬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산간마을이다. 14세기 무렵 흑사병으로 주민 3000명이 모조리 죽음을 당하고 8명만이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오따라는 지명은 당시 살아남은 사람들의 숫자인 ‘8’을 나타내는 라틴어(Latin language) ‘옥토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인근에는 1962년에 노르웨이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된바 있는 론다네 국립공원(Rondane National Park)’이 있다. 아무튼 오늘 하루의 일정은 이곳에서 종료된다. 숙소로 정해진 ‘Rondeslottet Hotel’은 시내에서 벗어난 산꼭대기에 자리하고 있는 산장형의 호텔이다. 왔다갔다 갈지()자를 그려야만 호텔까지 올라갈 수 있는데다. 엘리베이터까지 없어 이층으로 올라갈 때에는 무거운 가방을 끙끙거리며 들고 올라가야만 한다. 하지만 시설을 깨끗했다. 제공되는 식사 또한 괜찮은 편이었다. 다만 캔 맥주 하나에 10유로나 받는 살인적인 가격은 나 같은 애주가들을 주눅들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아침식사를 마친 후 요정의 길로 향한다. 새벽부터 내리기 시작한 빗줄기가 많이 굵어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햇빛이 쨍쨍 내려쬈는데 참 변덕스러운 날씨이다. 누군가 종잡을 수 없는 게 북유럽 날씨라더니 그 말이 맞는 모양이다. 덕분에 아름답기로 유명한 주변의 경관이 엉망으로 변해버린다. 차창에 부딪치는 빗줄기가 시야를 가려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조망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또렷하지 않다고 해서 그마저도 놓칠 수야 없지 않겠는가. 다들 좌우를 오가며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대기에 여념이 없다.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탄성을 감출 생각도 못하면서 말이다.

 

 

 

길의 양쪽은 바위벼랑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까 우릴 태운 버스가 협곡(峽谷)을 따라 달리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양쪽 산자락에 수많은 폭포(瀑布)들이 만들어져 있다. 수량(水量)이 풍부한데다 높기까지 해 다른 어느 유명 폭포들에 비해 조금도 뒤질 것이 없어 보인다. 한마디로 장관이 아닐 수 없다. 거침없이 쏟아대는 빗줄기가 거추장스럽지만 대신에 저런 멋진 풍경을 만들어 내다니 자연이 아니고서는 생각해볼 수도 없는 일이다. 새옹지마(塞翁之馬)란 인간들에게만 해당되는 고사성어(故事成語)가 아닌 모양이다.

 

 

 

그렇게 한참을 달릴 즈음 가이드가 마이크를 잡는다. ‘요정의 길에 들어섰다는 것이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길은 고도(高度)를 높여간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갈지()를 그리면서 겨우겨우 위로 향한다. 도로 폭도 엄청나게 좁다. 오가는 차량이 서로 만났을 때를 생각하니 소름이 끼칠 지경이다. 바로 옆이 천 길 낭떠러지인 것이다. 참고로 요정의 길(trollstigen)8년간의 공사 끝에 1936년 완성되었다. 꼭대기에 오르기 위해서는 가파르면서도 비좁은 산모퉁이를 11번이나 돌아 올라가야하는 모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한다. 대신,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경관은 환상적이다. 트롤스티겐은 대개 6월부터 8월까지 관광이 가능하며, 날씨에 따라서 폐쇄되기도 한다.

 

 

 

이곳도 역시 폭포로 넘쳐난다. 바위벼랑으로 이루어진 산자락이 마치 주름치마라도 입은 양 수십 개의 주름을 만들고 있다. 그 주름 사이로 물이 흐르며 폭포가 만들어진다. 하지만 이런 풍광은 오늘 같이 비가 오는 날에나 구경할 수 있는 별미(別味)일 것이다. 날이 맑을 경우에는 흘러내릴 물이 없을 테니까 말이다. 아니다. 이곳 노르웨이는 1년간의 강우일(降雨日)200일 정도나 된다니 이틀 건너 하루는 구경할 수도 있겠다.

 

 

아래 사진은 가슴을 졸이면서 찍어본 사진이다. 까마득한 벼랑 아래로 방금 지나왔던 길이 아슬아슬하게 이어지고 있다. ‘트롤스티겐(Trollstigen)’‘Troll’은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괴물로 스칸다나비아 국가에 사는 거인족 요툰의 후예라고 한다. ‘stigen’은 사다리의 노르웨이식 표현이다. 트롤스티겐(Trollstigen)은 이 둘을 합했으니 괴물이 사용하는 사다리쯤으로 생각하면 되겠다. 결과적으로 거인 트롤이 이 꼬불꼬불한 길을 사다리 삼아 산을 오르내렸다는 얘기가 되는 셈이다. 그 길을 거인이 아니라 우리가 오르고 있다. 경사는 생각보다 훨씬 더 가파른 편, 코너에 반사경은 보이지 않는다. 거기다 경사가 가팔라서인지 1/4 정도는 1차선이다. 앞을 잘 살피면서 달리다 맞은편에서 차라도 나타날 경우에는 폭이 넓은 곳에서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그럼 가운데에서 만날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별 수 없다. 신경을 곤두세우며 비좁은 길을 후진하다가 다소나마 길이 넓어지는 곳에서 서로 비켜가야 한다. 다른 곳이라고 해도 별 수 없다. 2차선이라고 해도 노선의 폭이 좁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큰 차량과 마주칠 경우 차를 바깥쪽으로 붙여야하는데, 그쪽이 절벽인데다 가드레일까지 어설퍼서 간이 콩알만 해진다.

 

 

이 여성분은 겁도 없는 모양이다. 절벽 아래를 촬영하겠다고 차창 쪽으로 몸을 기대기까지 한다. 그러니 겁이 많은 난 중심 잡기에 바쁠 수밖에 없다. 절벽 아래를 보려고 사람들이 몰려올 때 나라도 반대방향으로 무게중심을 옮겨 주어야 될 것 같아서이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자. 이곳 요정의 길은 해외 인터넷에서 화재가 되었던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길에서 11번째로 꼽혔을 만큼 위험천만인 도로다. 그러니 겁을 좀 먹었다고 부끄러울 것까지야 뭐 있겠는가.

 

 

간을 졸여가며 오르다보면 어느덧 널따란 주차장이 나타난다. 수십 대, 아니 수백 대를 주차해도 되겠다. 주차장 한켠에는 예쁘장한 휴게소도 지어져 있다. 카페와 기념품가게가 들어있다지만 시간이 이른 탓인지 아직까지도 문을 열어놓지 않았다. 휴게소 앞에는 깔끔한 화장실도 준비되어 있다.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는 증거일 것이다.

 

 

정상은 아직까지도 눈이 수북하게 쌓여있다. 하긴 만년설(萬年雪)이라니 일 년 내내 녹을 일은 없겠다.

 

 

 

 

전망대로 향한다. 물살이 제법 센 개울에는 현대식으로 디자인된 다리가 걸려있다. 이어서 냇가를 따라 길을 내놓았다. 하나같이 예쁘장한 외관(外觀)을 지녔다.

 

 

 

 

잠시 후 절벽 끄트머리에 걸쳐져 있는 전망대(展望臺)를 만난다. 일단은 전망대에 오르고 본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다. 빗줄기 따라 몰려온 안개가 짙게 끼어버린 것이다. 대신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만약 시야(視野)가 트일 경우에는 유리로 된 발아래가 허전할 수도 있겠다. 여기서 구불구불 구곡간장(九曲肝腸)을 흉내 내고 있는 도로를 내려다보는 게 장관이라 했는데 아쉽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전망대 앞에서 오른편으로 길이 하나 나있다. 또 다른 전망대로 올라가는 길일 것이다. 하지만 올라가 보는 것은 사양하기로 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게 분명한데 일부러 올라갈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이다.

 

 

 

 

 

 

 

게이랑에르로 향한다. 올라왔던 반대방향이다. 고도(高度)를 떨어뜨리는 속도가 더뎌선지 아까와 같은 절벽은 보이지 않는다. 긴장이 풀리는 순간이다. 그렇게 얼마간 진행하다 링에(Linge)에 이르면 페리(Ferry)를 이용해서 호수를 건넌다. 버스를 통째로 실기 때문에 버스에 앉은 채로 반대편에 있는 아이스달(Eidsdal)에 이를 수가 있다.

 

 

 

에필로그(epilogue), 북유럽의 물가는 영국의 2, 우리나라의 4배 정도로 높다. 특히 노르웨이는 북유럽 중에서도 물가가 높은 편이다. 20171월에 발표된 빅맥 지수(Big Mac index, 각국의 맥도널드 빅맥 햄버거의 현지 통화가격을 달러로 환산하여 각국의 물가 수준을 보여주는 지수)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3.68달러로 세계 25위에 올랐지만 노르웨이는 5.67달러로 세계 2위를 기록했을 정도다. 교통비, 생필품 등의 가격대가 높고 음식 값도 비싸다. 특히 술을 좋아하는 나에게 노르웨이는 지옥이나 마찬가지였다. 노르웨이는 주류 구입에 대한 규정이 엄격한 국가 중 하나다. 'Vinmonopolet(주류 전문점)'에서만 술을 구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구입할 수 있는 시간도 제한되어 있다. 특히 슈퍼마켓에서는 도수가 낮은 맥주 등의 주류만 구입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이러한 상황이다 보니 노르웨이 여행 중에는 식당에서 주문해서 마실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맥주 값이 내 한계점, 그러니까 500용량의 캔 맥주 하나에 10유로까지 올라버렸다. 노르웨이에서의 첫날 저녁, 오따에서 생겼던 일이다. 앞으론 그 좋아하는 맥주까지도 마음 놓고 마실 수가 없어져 버렸다. 죽을 맛이다. 참고로 독일이나 발칸에서는 2유로면 충분했다. 비록 슈퍼마켓이긴 했지만,, 혹자는 노르웨이 출신의 화가 뭉크의 절규’(The Scream)가 비싼 물가에서 비롯됐다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그러나 나 또한 그 주장에 고개가 끄덕여지니 어쩌란 말인가. 나 같은 애주가들에게는 즐거워야할 여행이 고역으로 변할 수도 있겠다.

여행지 : 북부 유럽 여행

 

여행일 : ‘17. 6. 19() - 7.1()

여행지 : 러시아(모스크바, 페테르부르크), 에스토니아(탈린). 핀란드(헬싱키), 스웨덴(스톡홀름), 노르웨이(오슬로, 베이토스톨렌, 요정의 길, 게이랑에르 피오르드, 뵈이야 빙하, 베르겐, 하당에르 피오르드, 하당에르비다국립공원), 덴마크(코펜하겐)

 

일 정 : 6.24() : 스톡홀름(구시가지인 감라스탄, 왕궁, 시청사, 바사박물관)

 

여행 다섯째 날 : 스웨덴의 스톡홀름(Stockholm)

 

특징 : 스웨덴(Sweden, Kingdom of Sweden) : 스칸디나비아반도 동남부에 위치한 입헌군주제 국가로, 게르만족인 스웨덴인이 95를 차지하며, 핀란드인이 4% 정도이다. 스웨덴어가 공용어이며, 전국민의 87가 기독교의 한 분파인 복음루터교를 믿으며, 가톨릭교가 1.5% 이다. 이 나라의 역사는 500년경에 게르만족의 일파인 고트인이 쇼넨지방에 정착하였고, 600년경 스비아인이 웁살라부근에 정착하였는데, 이 두 민족이 융합하여 스웨덴인이 형성되었다. 911세기의 바이킹시대를 거쳐 13세기 초에 신왕조를 창시한 비르에르얄(Birger Jarl)이 통일국가의 기초를 닦았다. 14세기 말 인접한 덴마크·노르웨이와 함께 칼마르동맹을 결성하였고, 1523년 구스타브 에릭슨(Gustav Eriksson)의 지휘 아래 독립할 때까지 사실상 덴마크왕조의 지배를 받아왔다. 18096월 헌법을 제정하였고, 17세기 후반에는 한때 유럽의 강대국으로 국세를 떨치기도 했다. 현재의 영토는 1905년 노르웨이가 독립함에 따라 만들어졌다. 1946년 유엔에 가입하였으며, 외교정책의 기조는 한마디로 전시의 중립을 목표로 한 평화시의 비동맹이다. 따라서 완벽한 방위능력을 보유하고, 유사시에는 입체적으로 격퇴한다는 총력방위개념으로서, 주요 물자 비축, 생산대체 태세 및 전시 대비 병력 동원체제를 갖추고 있다. 우리나라와는 1959년에야 정식으로 외교관계가 수립되었다. 하지만 6·25전쟁 당시 야전병원선을 파견했고, 휴전 후에는 중립국감시위원단으로 활약했으나 그 이전부터 관계를 맺었다고 봐야하겠다. 1960년에는 양국관계가 대사급으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스톡홀름(Stockholm) : 스웨덴의 수도이며 발트해로부터 약 30km 정도를 거슬러 올라온 멜라렌호() 동쪽에 위치한다. 많은 반도와 작은 섬들의 위에 시가지가 자리한 탓에 넓은 수면과 운하가 많다고 해서 흔히 북구의 베네치아로도 불린다. 스톡홀름은 1250년에 스타덴섬에서부터 건설되기 시작했으며, 지금도 그 무렵의 교회와 시장의 광장, 불규칙한 도로 등이 남아 있다. 1255년경부터는 한자동맹(Hansa League)에 속하는 항만도시로서 번영하였는데, 당시에는 독일계 시민의 세력이 컸다. 1520년에는 스웨덴 국왕을 겸하고 있던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2세가 반대세력을 탄압하여 스웨덴계 귀족을 학살했다. 이를 계기로 구스타브 바사(후일의 구스타브 1) 아래 결속한 세력은 1523년에 한자동맹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17세기에는 크리스티나 여왕 치하에서 시의 정비가 진행되었으며, 그동안의 수도였던 웁살라 대신 수도가 되어 북유럽의 문화적 중심지로서 급속히 발전해 나갔다. 그런 특징은 바로크풍의 건물에 잘 나타나 있다. 1850년부터는 제3의 발전기에 들어갔으며, 낭만적인 전원도시에서 현대적인 도시로 발전하였다. 1950년부터는 대규모의 도시계획으로 도심지를 헐어 새로운 비즈니스가()와 공원을 건설하였다. 특히 빈민가가 전혀 없는 것이 스톡홀름의 자랑이다. 참고로 스톡홀름(Stockholm)‘stock’은 목재, ‘holm’은 섬을 의미하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이곳이 과거에는 목재의 집결지로서 경제 중심지였다는 사실을 추측해 볼 수 있다.

 

 

 

배에서 내리니 버스가 기다리고 있다. 현지가이드가 동승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첫 번째 방문지는 감라스탄(Gamla stan)’ 지역이다. 한참을 달리던 버스가 내려준 곳 역시 물가이다. 바닷가를 벗어나 호숫가에 다다랐다고 보면 되겠다. 이곳 스톡홀름은 발트해와 멜라렌호()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 항구인 것이다. 우리가 내린 곳은 감라스탄(Gamla stan)’, 감라스탄이란 스웨덴어로 옛 도시를 뜻한다. 따라서 스웨덴의 수도인 스톡홀름의 구 시가지라고 보면 되겠다. 감라스탄은 스타스홀멘 섬(Stadsholmen)’에 위치하며 다리 사이에 위치한 거리를 뜻하는 스타덴 멜란 브로아르나(Staden mellan broarna)’라고 부르기도 한다. 감라스탄 주변에 있는 작은 섬들로는 리다르홀멘 섬(Riddarholmen), 헬게안스홀멘 섬(Helgeandsholmen), 스트룀스보리 섬(Strömsborg) 등이 있다.

 

 

 

 

 

 

널따란 광장을 따라 들어가면서 투어가 시작된다. 아마 스톡홀름궁 남쪽 길이자 광장인 슬로츠바켄(Slottsbacken)일 것이다. 오른편에 스톡홀름 궁전(Stockholms slott)’을 끼고 들어가다 보면 정면으로 성 니콜라스교회(Storkyrkan, The Great Church)’라고도 불리는 스톡홀름 대성당(Stockholms domkyrka)‘이 나타난다. ’감라트탄지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건축물이지만 일단은 제켜두고 왕궁에만 집중하기로 한다. 18세기에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놓은 왕궁 또한 두 번째 가라하면 서러워할 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건축물이기 때문이다. 아니 입헌군주제인 이 나라에서는 왕실의 거주지인 이곳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 게 옳을 수도 있겠다. 그 외에도 이곳 감라스탄에는 노벨 박물관과 스웨덴 왕실의 묘소로 사용되고 있는 리다르홀름 교회(Riddarholm)‘ 등이 있다. 감라스탄 북서쪽에는 기사의 관저(Riddarhuset)가 들어서 있다.

 

 

 

광장 쪽으로 나있는 왕궁의 문 앞에는 근위병 두 명이 보초를 서고 있다. 운이 좋았던지 마침 근무교대 의식을 치르고 있다. 절도 있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기 좋아 한참을 구경해본다. 그런데 교대를 하고 있는 4명 가운데 1명이 여성이다. 남자들 일색이었던 다른 나라의 근위병들만 보아왔기에 낯선 풍경으로 비쳐진다.

 

 

성당의 앞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 스톡홀름 궁전(Stockholms slott)’의 정문이 나있는 광장으로 들어설 수 있다. 아니 왕궁을 오른편에 끼고 걷다가 끝나는 곳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할 수도 있겠다. 참고로 이 왕궁의 주인인 스웨덴 왕실(Swedish Monarchy)970-1060년의 웁살라(Uppsala)왕가로부터 시작되어 스텐킬(Stenkil)왕가’, ‘스베르커(Sverker), 에릭크(Erik)왕가‘, ’벨보(Bjelbo)왕가등을 거쳐 1818년부터는 나도테(Bernadotte)왕가로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실권은 없다. 국왕은 국가원수의 지위를 갖지만 1975년의 헌법 개정으로 실권이 없는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 국왕은 정치에 참여하지 않으며 국회의 개원, 외교사절의 임명 및 접수 등 의례적인 직무만 행한다. 현재의 국왕은 1973년에 즉위한 구스타브 16이다. 1976년에 결혼한 실비아 소머래스(Silvia Sommerlath)왕비와의 사이에 왕세녀 빅토리아(Victoria:1977년생)와 칼 필립(Carl Philip:1979년생), 마델라이네(Madeleine:1982년생) 12녀를 두었다.

 

 

안으로 들면 둥근 반원형 날개 건물 둘이 에워싼 널따란 광장이 나온다. 아니 한쪽 귀퉁이에 적혀있는 지도를 보니 ‘yttre borggården’이라고 적혀 있다. ‘yttre borggården’‘yttre’는 스웨덴어로 바깥의또는 외부의’, 그리고 ‘borggård’성내의 마당을 뜻하는 각각의 단어이니 바깥쪽에 있는 왕실 정원쯤으로 여기면 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말이 정원이지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 허허벌판이다. 이럴 때는 바깥마당이라고 표현하면 될 듯도 싶다. 아무튼 안에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왕궁 건물이 자 모양으로 에워싸고 있는 안마당(위에 첨부된 사진에는 Inre borggården로 나와 있다)과 대비시킨 이름이지 싶다.

 

 

왕궁의 정문(正門)은 이곳 외부 정원으로 나있다. 정문 또한 근위병들이 굳게 지키고 있다. ‘스톡홀름 궁전(Stockholms slott)’은 이탈리아의 바로크 양식과 프랑스의 로코코 양식이 결합된 건물이다. 13세기에 요새로 처음 지어진 후 왕궁으로 발전했으나, 1697년 대화재로 피해를 입어 오랜 복원 공사 끝에 1754년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1982년까지 왕과 왕비가 실제로 거주하던 곳이었지만 스톡홀름 외곽의 드로트닝홀름 궁전(Drottningholm Palace)’으로 이사하면서 지금은 외교 사절단의 숙소나 스웨덴 왕족이 집무를 보는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3층 높이의 건물 안에는 유명한 장인과 예술가들의 손길로 아름답게 장식된 방 1430개가 있는데 일부는 관람객들에게 공개된다. 그중 압권은 보물의 방(Royal Treasury)’이라고 한다. 에릭 14세의 왕관을 비롯한 역대 왕실의 보물들을 볼 수 있단다. 하지만 223일부터 1230일까지 시기에 따라 정해진 시간에만 왕궁 내부를 일반에게 공개하기 때문에 운영 시간을 미리 확인하고 가야 한다. 이를 대비 못한 우리는 내부 관람을 할 수 없었다. 하긴 패키지여행의 특성상 여행사에서 일정을 잡는 게 먼저이겠지만 말이다.

 

 

동서 89m에 남북이 77m'바깥마당'은 궁전 본 건물을 타원형으로 생긴 두 개의 건축물이 둘러싸고 있는 형태이다. 본 건물을 가운데에 두고 전면의 양쪽에서 둥글게 뻗어 나온 날개 회랑(回廊)이 에워싼 모양새라고 보면 되겠다. 오른편 날개 회랑 앞에는 몇 문의 대포가 진열되어 있다. 자세히 보려고 다가가니 정문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근위병이 고함을 지른다. 깜짝 놀라 살펴보니 들어가지 말라는 표시가 되어있다. 넘어가지 말아야할 요소가 눈에 띄지 않는 걸 보면 무슨 행사 준비라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왼편 날개 회랑 뒤로는 스톡홀름 대성당의 첨탑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아무튼 날개화랑의 프리즈(frieze, 고전건축에서 주두에 의해 지지되는 부분인 엔타블레이처3부분 중 가운데 것)를 따라 띠처럼 옛 투구와 갑옷, 무기들이 부조로 새겨져 있다.

 

 

왼쪽 날개화랑의 한가운데에는 여인의 동상 하나가 세워져 있다. 주인공은 종교의 개종(改宗)을 위해 여왕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난 크리스티나 여왕(Drottning Kristina, 재위 1632-1654)이다. 본명이 마리아 크리스티나 알렉산드라(Maria Christina Alexandra, 1626-1689)‘인 그녀는 부왕인 구스타브 2(Gustav II Adolf of Sweden)‘가 가톨릭국가와 개신교(루터교회) 사이의 종교전쟁인 ’30년 전쟁(Thirty years’ War, 1618~1648) 뤼첸전투(1632)’에서 죽자 불과 6세의 나이로 추정상속인으로서 스웨덴의 왕좌를 물려받는다. 어린 크리스티나는 부친 재임 시절 재상을 역임했던 청렴한 성품의 악셀 옥센셰르나(Axel Oxenstierna)’5명의 섭정 대신의 헌신적 도움을 받아가며 정치, 행정, 군사, 외교를 위한 다양한 외국어 교육을 이수 받는다. 이때 그녀를 가르치던 유럽의 1급 석학(碩學)들 가운데 한 명이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하다는 명언으로 유명한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이다. 164418세가 된 크리스티나는 섭정에서 벗어나 정식 여왕으로 등극한다. 그리고 재임 중에 ‘30년 전쟁을 종식 시키면서 독일과 베스트팔렌 조약(1648)’을 체결해 막대한 토지와 전쟁 배상금을 받아낸다. 또한 신문 발간, 웁살라 종합대학 설립, 미술품 구입 등 문화와 교육, 예술에 대한 지속적 투자를 시도해 스웨덴을 서유럽 국가와 버금가는 부국강병으로 만드는 초석을 제공하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엉뚱한데서 발생한다. 개신교가 국교인 나라의 여왕이 가톨릭으로 개종을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스웨덴에는 가톨릭으로 개종한다면 왕위를 포기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결국 그녀는 재임 10년째인 1654년에 전격적으로 퇴위를 선언한다.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위해 서슴없이 왕위를 버린 것이다. 당시 그녀는 왕권을 행사하는데 절정의 나이인 28세였으니 스웨덴으로서는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퇴위한 뒤에도 그녀는 도나 여백작(Countess Dohna)’으로 활동한다.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크리스티나는 모국 스웨덴을 떠나 프랑스와 이탈리아 로마에서 말년을 보냈으며, 로마 체류 중이던 1689년 향년 63세에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한다. 그리고 성 베드로 대성당에 묻힌다.

 

 

왕궁을 다 둘러봤으면 이젠 감라스탄의 옛 골목을 거닐어볼 차례이다. ‘스톡홀름 대성당의 옆으로 난 골목길로 들어서면 된다. 감라스탄은 13세기부터 형성되었으며 중세 시대에 건설된 도로와 거리, 오랜 역사를 가진 건축물들이 들어서 있다. 17세기부터 18세기 이전에 지어진 수많은 건축물들이 주류를 이룬다.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이곳 감라스탄은 슬럼으로 간주되었고 역사적 건축물들 가운데 대부분은 방치되었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수많은 벽돌들과 5개의 골목길이 스웨덴 의회의 확장 공사로 인해 파괴되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중세 시대의 거리와 르네상스의 건축물들이 세간의 주목을 끌게 되면서 수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들고 있다.

 

 

감라스탄의 구시가지는 옛 모습 그대로이다. 혹자는 이곳의 분위기를 커피 집 광고에 나오면 딱 어울릴 것 같다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맞는 말이다. ‘밀레니엄 버그(millennium bug)’로 온 세상이 떠들썩하던 1999년에 이곳 스톡홀름을 다녀간 일이 있었다. 당시 동행을 했던 국내 일간지의 중견기자와 이 부근의 뒷골목을 거닐었는데 그가 감탄사 끝에 내뱉던 넋두리도 이와 비슷했었다. 그런데 당시보다 훨씬 더 복잡해진 도시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눈에는 오죽 이질적인 풍경으로 다가오겠는가. 아무튼 이런 길은 걷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길바닥은 돌을 깔아놓았다. 오래 묵은 건물들과 함께 묶어지니 중세의 느낌은 한층 더 짙어진다. 어쩌다 자동차 한 대가 겨우 들어올 만한 길도 보이지만 대부분은 좁디좁아 자동차는커녕 자전거도 못 다닐 형편이다. 오롯이 사람들 차지가 되었다는 얘기이다. 아무튼 구불구불 이어진 골목길은 여유롭게 산책을 즐기기에 그만이다. 중세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거리를 걷다 보면 16세기 유럽의 어느 마을 속에 와 있는 듯하다. 실제로 감라스탄은 13세기에 형성되어 지금까지 명성을 이어 온 곳으로, 건물 외벽에서 묻어나는 세월의 흔적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역사다. 지금은 스톡홀름의 부자들이 모여 사는 고급 주택가로 거듭났지만 그리 부담스러운 분위기는 아니다. 오히려 저렴하게 스웨덴 전통 요리를 즐길 수 있는 레스토랑이 많아 주머니 가벼운 여행자들이 선호한다.

 

 

 

스톡홀름을 다녀온 많은 사람들이 가장 인상 깊은 곳으로 꼽는 곳이 바로 감라스탄 지구이다. 스웨덴의 옛 모습과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흡사 하나의 거대한 옥외 박물관(屋外 博物館) 같기 때문이란다. 고딕, 바로크, 로코코 등 다양한 양식으로 건축된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수많은 골목들을 따라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골목길은 좌우를 가리지 않고 가지를 친다. 그렇게 이리저리 뻗어나간 오래된 골목을 걸어보는 게 감라스탄의 묘미가 아닐까 싶다. ! 깜빡 잊을 뻔 했다. 옛 건물을 개조한 레스토랑과 카페들까지도 이색적이다.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보아 넘길 게 없다는 얘기이다.

 

 

골목길을 대충 돌았다 싶으면 옛 건물들이 에워싼 장방형의 광장이 나타난다. 그다지 커 보이지 않는데도 '큰 광장'이라는 뜻의 스투르토리에트(Stortorget)’란 이름을 얻었다. 감라스탄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14세기부터 18세기까지만 해도 시청이 들어서 있던 중심 광장이자 스톡홀름에서 가장 유서 깊은 광장이었다. 이 광장은 152011월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2세 국왕이 이끄는 덴마크 군대가 스웨덴의 귀족들을 학살한 스톡홀름 피바다 사건이 일어났던 곳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폭동과 내전이 일어나면서 칼마르 동맹이 해체되었고 구스타프 1바사가 스웨덴의 국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그런 유명세 덕분에 이 광장은 감라스탄에 온 여행자라면 빼놓지 않고 꼭 들러보는 명소가 되었다.

 

 

광장의 복판에는 꼭대기에 화병 모양의 장식을 얹은 오래된 우물이 하나 있다. 고풍스러우면서도 괴상하게 생긴 모양새처럼 '해골의 샘'이란 섬뜩한 별명을 갖고 있는 우물이다. 3국 연합시대 말기인 1520년 스웨덴을 지배하던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2세가 말을 듣지 않는 이유로 스웨덴 귀족 90명의 목을 쳐 묻은 곳에 세운 우물이어서 그런 별명을 얻게 되었단다. 그 귀족 중엔 독립 스웨덴 왕국을 세운 바사왕, 구스타브1세의 아버지도 있었다고 한다. 이 사건은 스웨덴 독립의 기폭제가 된다. 3년 뒤 바사가 이끈 농민과 귀족들이 덴마크를 몰아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우물의 설계는 노벨박물관을 설계했던 엘름 팔름스테트(Elm Palmstedt)가 맡았다. 참고로 이 우물은 더 이상은 샘물이 아니라고 한다. 1859년 샘물이 마르면서 다른 곳으로 옮겼다가 1950년대에 옛 모습으로 복원하면서 상수도로 연결을 시켜 놓았단다.

 

 

광장의 랜드 마크(landmark)노벨 박물관(Nobel Museum)’이라 할 수 있다. 2001년 노벨상 제정 100주년을 기념해 문을 열었는데 역대 노벨상 수상자 자료를 모두 전시하고 있으며 수상자들과 관련된 짧은 영상을 개관 시간 내내 상영한다. 또한 700여 점이 넘는 오리지널 발명품과 초기 컴퓨터가 전시되어 있으며, 세계를 바꾼 발명품인 다이너마이트, 다양한 발명 모형, 책 등도 함께 볼 수 있다. 박물관 자료가 그리 풍부하지 않아서 약간 실망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역대 노벨상 수상자들의 모습을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다는 점에서 뜻깊은 공간이다. 1층 카페의 의자 뒤에는 노벨상 수상자들의 친필 사인도 있다고 한다. 원래 이 건물은 '주식시장 건물(Börshuset)'이었다. 시청이 인근 본데(Bonde)궁으로 옮겨 가고 난 1778년에 시청이 있던 그 자리에다 프랑스 고전주의 양식으로 새로 지었다. 설계는 스웨덴의 건축가인 엘름 팔름스테트(Elm Palmstedt)’가 맡았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왕궁이나 귀족의 저택과 같은 외형이나 옥상에 랜턴형 돔(dome)을 올려 공공건물이라는 걸 강조했단다. 그러다가 일층에 있던 증권거래소가 1998년 다른 곳으로 옮겨가자 2001년 노벨상 백년을 기념해 노벨박물관이 새로 들어섰다. 이층에는 스웨덴 한림원(Svenska Akademien/ Swedish Academy)’이 입주해 있다고 한다. 스웨덴 문학의 정통성을 지키는 왕립 학술기관으로 해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선정 발표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참고로 물리학상과 화학상, 경제학상은 스웨덴 왕립 과학아카데미가, 생리-의학상은 스톡홀름에 있는 카롤린스카 의학연구소가, 평화상은 노르웨이 의회가 선출한 5인 위원회가 심사하여 선정한단다.

 

 

고색창연한 중세의 건물들이 광장을 빙 둘러싸고 있다. 16-18세기에 지어진 건물들이란다. 그런데 노벨박물관을 제외한 나머지 건물들의 일층에는 분위기 좋은 카페와 레스토랑들이 어김없이 들어서 있다. 광장은 관광 성수기인 여름철임에도 불구하고 텅 비어있다. 그러니 카페나 레스토랑이라고 문을 열었을 리가 없다. 이른 시간이기도 하지만 비까지 내리는 게 원인이지 싶다. 겨울철이면 이 광장의 주변에 크리스마스 마켓이 들어선다니 참조한다.

 

 

그때 가이드의 손가락이 뭔가를 가리킨다. 아래 사진의 방향, 그러니까 광장의 서남쪽 모퉁이에 있는 미색(米色) 건물이다. 건물의 2층 코너에 뭔가가 박혀있다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검고 둥글게 생긴 뭔가가 보인다. 가이드의 말로는 덴마크와 다툼이 있던 시절 날아온 탄환(彈丸)이 박힌 것이라지만 글쎄다.

 

 

주어진 시간에 여유가 있어 반대편 골목으로 나가본다. 감라스탄에서도 가장 오래된 가게들이 들어서있다는 상인의 길’, ‘쾨프만가탄(Köpmangatan)’이 아닐까 싶다. 이곳 역시 옛 건물들 일색이다. 그런데 같은 외양을 가진 건물들이 거의 없고 하나하나가 각기 다른 모양새를 하고 있다. 그런 건물들을 카메라에 담으며 걷는 재미가 나름대로 쏠쏠하다.

 

 

얼마쯤 걸었을까 쾨프만가탄거리가 끝나는 곳에 작은 광장이 만들어져 있다. 그런데 이곳에도 기마상(騎馬像)이 하나 세워져 있다. '성 외란(Sankt Göran)과 용'이라는 이름의 조각상이다. 이와 똑 같은 조각상은 스톡홀름대성당의 안에도 있다고 한다. 대성당의 목각 걸작을 1912년 복제해서 이곳에다 세웠다는 것이다. 그러니 같을 외형을 가질 수밖에 없겠다. 다만 진품이 나무로 만들어진 반면, 복제품은 청동으로 만들어졌다는 게 다를 뿐이다.

 

 

 

옛 골목들을 대충 둘러보고 난 뒤, 아까 투어를 시작했던 광장으로 빠져나오면 스톡홀름 대성당(Stockholms domkyrka)‘이 나온다. 성 니콜라스교회(Storkyrkan, The Great Church)’로도 불리는 이 건축물은 1279년에 벽돌 고딕양식으로 지어진 스웨덴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다. 원래는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지만 여러 번 증·개축을 반복하면서 이탈리아 바로크 양식이 섞인 독특한 모습을 지녔다. 예로부터 스웨덴의 중요한 행사는 대부분 이곳에서 열려왔으며, 특히 역대 국왕의 대관식과 결혼식 등이 거행된 장소로 유명하다. 이곳 역시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없었다. 문이 열려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왕가와 귀족들의 문장으로 장식된 성당의 내부는 볼 것이 많은 것으로 알려진다. 특히 덴마크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1489년에 성당에 기증되었다는 높이 4m의 나무조각상 성 예란(St. GÖRAN)의 기사상(騎士像)‘이 유명하다. ()과 싸우는 용감한 기사의 형상을 조각한 이 목조상은 섭정(攝政, 기간 1470-1497))이었던 스텐 스투레 1(Sten Sture )’와 그의 부인이 부룬케베리 전투(덴마크의 크리스티안 1를 크게 무찌른 전투)’의 승전에 대한 사의를 표시하기 위하여 만들게 한 작품이라고 한다. 하지만 성당의 문이 열려있지 않아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아쉬운 마음에 다른 분의 사진을 빌려와 봤다.

 

 

문 앞에 마르틴 루터의 제자 울라우스 페트리(Olaus Petri/ 1493~1552)’의 동상이 서있다. 바사왕으로 불리는 구스타브 1를 도와 루터의 종교개혁을 스웨덴에 전파한 종교지도자로 스웨덴의 국교인 루터교의 기반을 닦았다. 신약을 번역했을 뿐만 아니라 설교집과 스웨덴연대기, 스웨덴 최초의 희곡을 쓴 스웨덴 문학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그의 동생 라우렌티우스 페트리(Laurentius Petri, 1499~1573)’는 스웨덴 최초의 신교(新敎) 대주교가 됐다고 한다.

 

 

성당 앞에는 오벨리스크(obelisk)’가 세워져 있다. 스타브 3세가 18세기 말 러시아 전쟁에 나간 사이 스톡홀름을 지켜준 시민들에게 감사하다는 뜻으로 프랑스 출신 건축가 루이 장 데스프레즈에게 세우도록 했다. 5미터 기단까지 합쳐 높이가 22미터에 이르는데, 한 덩어리가 아니라 여러 조각의 돌을 이어 붙여 만든 것이란다.​​ 다른 한편으로 이 구조물은 스톡홀름의 모든 도로의 기준점이 되는 원표 구실까지 겸하고 있다니 참조한다. 아쉽게도 오벨리스크의 외관은 구경할 수 없었다. 보수공사가 한창이었기 때문이다.

 

 

슬로츠바켄(Slottsbacken) 광장의 한쪽 귀퉁이에 14의 청동 기마상이 보인다. 그런데 임시로 보관하고 있는 모양새이다. 아마 원래 있던 자리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보다. 아무튼 17세기 중반에서 18세기 초의 스웨덴은 오스트리아 계승전쟁’7년 전쟁에 무의미하게 참전했을 뿐만 아니라, 그 결과 많은 영토까지 잃었다. 또 나폴레옹 전쟁 때에도 처음의 반() 나폴레옹의 입장에서 전환하여 러시아와 싸워 핀란드를 잃었으며, 그 후에는 나폴레옹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프랑스 장군 베르나도테를 황태자로 맞아들였다. 1809년 베르나도테는 칼 요한이라 칭하며 국가의 실권을 장악하고 반 나폴레옹의 태도를 취했으며, 1814년에는 덴마크로부터 노르웨이를 얻어내기까지 했다. 그리고 1818년 왕위에 올랐으니 그가 14이자 현 스웨덴 왕조의 시초이다

 

 

다음 행선지는 스톡홀름 시청사(Stockholm City Hall)’이다. 차에서 내리자 붉은 벽돌로 지어진 커다란 건물이 나타난다. 언뜻 보아서는 교회처럼 보이지만 1923년에 건축된 스톡홀름 시청 건물이다. 무엇보다 매년 12, 노벨상 시상식 후 축하 연회가 열리는 곳으로 더 유명하다. 건물은 저명한 건축가 라구날 오스트베리(Ragnar Östberg, 1866-1945)’의 설계로 1911년에 시작해서 12년의 공사 끝에 1923년 완공되었다. 동서 너비 120m에 남북 폭이 60m쯤 되는 장방형의 벽돌 건물로 동쪽에 안마당 중정(中庭), 서쪽엔 시청사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인 블루홀과 황금의방을 두고, 남동쪽 모퉁이에다 106m 높이의 주탑(柱塔)을 세운 구조이다. ‘시청타워라고 불리는 메인타워의 맨 위는 종루(鍾樓)와 금도금(金鍍金)된 첨탑(尖塔)을 올렸다. 전망대를 겸한 종루까지는 나선형(螺旋形)으로 된 365계단으로 연결된다고 한다. 스톡홀름 시내가 한눈에 쏙 들어오는 멋진 조망대라는데도 우린 올라가 볼 수가 없었다. 여행사의 프로그램에도 빠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다녀올만한 시간도 내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쉬워하는 나에게 가이드의 위로가 뒤따른다. 5월부터 9월까지 개방하니 올라가 볼 수는 있지만 통로와 계단이 좁아서 40분마다 유료 입장객 서른 명까지만 받는 다는 것이다. 그럴만한 시간이 없다는 얘기를 에둘러서 말해주는 가이드가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청사는 적벽돌을 즐겨 쓰는 북유럽 낭만주의 건축을 기조로 하고, 북구 고딕과 이탈리아 르네상스식, 비잔틴과 이슬람, 동양풍 장식, 아름다운 발코니와 조각상까지 다양한 문화 요소를 아름답게 섞어낸 절충식 건물이다. 영국 시인 예이츠가 이탈리아 도시들의 르네상스적 흥분 이래 거기에 견줄만한 건축물은 없었다.’고 찬미했을 정도이니 가히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청'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설계자 외스트베리는 베네치아 두칼레궁산마르코광장 종탑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했다는데 작년에 보았던 두칼레궁이나 종탑과는 하나도 닮은 것 같지가 않다. 건축에 문외한인 내가 뭘 알겠는가마는 말이다.

 

 

안으로 들어서서 조금만 더 걸으면 시청의 메인 홀(mein hall)블루 홀(Blå hallenm, Blue Hall)이 나온다. 그곳에 청사를 안내해주는 가이드가 기다리고 있다. 이곳은 가이드가 안내하는 투어만 가능하다고 한다. 혼자 들어갈 수가 없다는 얘기이다. 예약은 기본이고 인원도 열 명 이상의 단체가 필수인데, 개인적으로 오면 다른 팀에 끼어 움직여야 하는 불편쯤은 감수해만 한다. 가이드의 설명은 영어로 이루어진다. 우리 같은 패키지여행자들에게는 자체 가이드의 통역이 뒤따른다. 아무튼 홀은 엄청나게 넓다 아예 실내 광장이라고 부르는 게 더 알맞은 표현일 수도 있겠다. 남북 길이 50m에 동서 너비 30m, 그리고 천장의 높이는 22m에 달한단다. 바닥 넓이가 무려 15(3백 평)에 달한다니 대체 얼마나 넓은지 미루어 짐작이 갈 것이다. 이름은 블루홀이지만 색깔은 푸른빛이 아니다. 원래는 벽돌 벽에 석회를 바르고 그 위에다 파란 칠을 해서 스톡홀름의 푸른 호수를 상징하려고 했었는데, 설계자인 외스트베리가 벽돌 벽을 보고 나서는 그대로 두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고 판단해 마음을 바꿨다고 한다.

 

 

 

홀의 남서쪽에 나있는 계단을 이용해 2층으로 오른다. 블루홀에서 만찬을 즐긴 참석자들도 이렇게 올라와 발코니 북쪽으로 난 통로를 따라 황금의 방으로 자리를 옮긴다고 한다. 다음 행사인 무도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이다. 처음으로 도착한 방은 시 의회가 열리는 의사당(議事堂)이다. 그런데 상상 외로 규모가 작다. 크고 으리으리하던 국내의 지자체 의사당을 몇 군데 돌아본 나로서는 의외의 풍경이 아닐 수 없다. 검소함을 기본으로 삼는 루터교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의사당은 좁고 긴 공간에 배치했다. 방문객들은 왼쪽 통로를 따라 이동하며 자연스럽게 구경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 의사당의 필수품인 방청석을 깜빡 잊을 뻔 했다. 입구 맞은편 위쪽에 200명쯤 앉을 수 있는 방청석이 마련되어 있다. 또 하나. 의장석 위에 달린 닫집이 눈길을 끈다. 권위의 상징일 것이다. 동양적 느낌이 물씬 풍기는 격자형 벽을 비롯한 가구들은 당대의 유명 디자이너였던 카를 말름스텐(Malmsten 1888~1972)이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의사당의 천장이 예술이다. 높이가 19m나 되는 천장의 구조물인 트러스(truss)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네 전통가옥으로 치면 들보와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셈이다. 아무튼 천정은 바이킹 배를 뒤집어놓은 모양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이런 모든 결정 역시 설계자인 외스트베리의 발상이란다. 천장에는 그림을 그려놓았다. 바이킹 전통 문양이란다. 옆방으로 이동하기 전에 하나 더 알고 넘어가자. 스톡홀름 시의회의 정원은 101명이다. 원래는 100명 이었으나 투표 때 가부(可否) 동수가 자주 생겨 이를 막기 위해 1명을 추가했단다. 또 하나, 회의는 3주에 한 번씩 월요일 오후에 열리는데, 의원들의 보수(報酬)는 없고 그저 교통비 같은 실비(實費)만 제공될 따름이란다. 다들 생업에 종사하면서 시민들을 위한 일에 자원봉사 한다고 보면 되겠다. 하긴 이런 무보수 봉사는 선진국들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우리나라도 이미 선진국의 문턱에 다다랐으니 이런 좋은 점들은 스스로 따랐으면 좋겠다.

 

 

다음은 정면 남쪽 복도를 따라 만들어진 왕자갤러리이다. ’오스카르 2(Oscar II, 1829-1907)‘의 막내아들이자 구스타프 5(Gustav V, 1858-1950)‘의 동생으로 화가였던 유셴(Eugen, 1865-1947) 왕자의 프레스코(fresco) 벽화가 동쪽 벽을 따라 길게 붙어 있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시청을 짓던 1917년부터 왕자가 이곳에 와서 호수 건너의 소데르말름섬과 남동쪽 리다르홀멘섬의 풍경을 벽에 그려 넣었다고 전해진다. 아무튼 벽화가 걸린 공간과 나무 바닥이 깔린 복도의 경계를 따라 줄지어선 열다섯 쌍의 열주(列柱)가 멋진 홀이다. 햇빛 드는 창가 벽면도 그냥 두지 않았다. 예술성이 있어 보이는 작품들을 부조(浮彫)로 새겨 넣었다.

 

 

시청사 투어의 하이라이트는 누가 뭐래도 황금의 방(Golden Hall)‘이다. 길이 44m의 장방형 홀인데 7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란다. 그래서 처음에는 만찬장으로 사용되다가 연회의 참석자가 1천명을 넘기면서 만찬은 블루홀로 옮겼고, 이곳에서는 만찬 후의 무도회장으로만 사용된단다. 정면의 벽에 그려진 여신은 멜라렌호와 스톡홀름의 수호 여신인 멜라렌호의 여왕(Mälardrottning)‘이다. 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 디자이너였던 에이나르 포르세트(Einar Forseth 1892-1988)‘가 그렸는데, 여신의 큰 눈과 입은 세상을 살피고 바르게 말하는 의미이고, 뱀 모양의 머리카락은 멜라렌호의 파도를 나타낸다고 한다. 왼손에 든 왕관은 여신이 내준 스톡홀름을, 그리고 오른손의 홀()은 권위를 상징한단다.

 

 

벽은 물론이고 창문 주변까지 빈틈없이 금빛 모자이크가 들어차 있다. 아니 금빛이 아닌 곳이 없다고 하는 게 더 옳은 표현이겠다. 일일이 금박을 입힌 유리조각 1900만개로 만들었는데, 순금이라 할 수 있는 23.5K 금박이 11kg이나 들어갔다고 한다. 아무튼 가이드의 설명은 꽤나 길게 이어진다. 그만큼 자랑할 게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녀가 가장 장황하게 늘어놓은 부분은 그림 안에 들어있는 상징물들 이었다. 여신이 옷으로 감싸 무릎 위에 얹은 건물은 스톡홀름 시청이라고 했고, 여신의 왼쪽 아래에 그려져 있는 자유의 여신상과 에펠탑, 마천루 등은 서양을, 그리고 오른편에 보이는 코끼리나 낙타, 터키 국기 등은 동양을 각각 상징한단다. 따라서 스웨덴이 동서양의 중심에서 화합을 이끌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대단한 자부심이 아닐 수 없다.

 

 

이동 중에는 만찬장의 테이블 차림을 엿볼 수 있는 기회도 있다. 그릇과 접시는 하얀 본차이나를 기본으로 하고 포크와 나이프는 순은(純銀)인데, 생선나이프만 금도금(金鍍金)을 했다. 식탁에는 노벨 기념주화로 보이는 금화도 놓여있다. 아무튼 세 시간 정도 이어지는 만찬에는 식기와 컵, 커틀러리(cutlery)를 차리는 데만 160만 달러, 우리나라 화폐로는 18억 원 정도가 들어간다고 한다. 감이 안 잡히는 숫자이지만 믿을 수밖에 없다. 여기서 웃고 넘어가는 얘기 하나. 만찬 한 번 치를 때마다 커피스푼이 100개 가깝게 없어진다고 한다. 참석자들이 왔다갔다는 기념품으로 몰래 챙겨가기 때문이란다. 혹시 내가 연회에 참석했었다면 나 또한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어 있었을 게 뻔하다.

 

 

각종 메달들도 전시되어 있다. 새겨진 얼굴들이 거의 비슷한 걸 보면 노벨상 시상과 관련된 메달들이 아닐까 싶다.

 

 

청사 밖으로 나오면 바로 멜라렌 호반에 접해있는 잔디밭이다. 시원한 그늘 쪽에 벤치가 놓여있으니 잠깐의 짬을 내어 쉬었다 가면 어떨까 싶다. 호수 너머로 보이는 풍경이 장난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남쪽(아래 사진의 스웨덴 국기 뒤쪽)으로 보이는 리다르홀멘(Riddarholmen)'기사(귀족)의 섬'이라는 뜻이다. 구스타프 왕가와 왕족을 비롯한 스톡홀름 귀족들이 살던 곳이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이 작은 섬엔 왕족, 귀족들의 옛 궁과 저택이 있었으나 1697년 대화재 때 트레 크로노르(세 왕관)성이 타버린 뒤로는 관공서, 법원, 국립도서관, 상인들의 사무실이 들어섰다고 한다.

 

 

코너를 돌자 황금빛의 관이 하나 모셔져 있다. ’비르예르 알 왕(Birger Jarl, 재위 1250~1266)‘의 황금관이란다. 그는 멜라렌(Maelaren)호와 발트 해가 만나는 지점에 떠있는 작은 섬(Gamla stan)에 성채(城砦)를 쌓아올렸다. 그리고 섬 주위에는 통나무(Stock)로 목책을 친 다음 섬 양쪽으로 흐르는 물길을 수문으로 막아 선박의 입출항을 감시 통제했다. 스톡홀름의 시작이며, 그가 스톡홀름의 창시자로 인정받고 있는 이유이다. 또한 그는 법률을 정비함으로써 최초의 중앙집권형 왕국도 탄생시켰다. 그런 그가 왜 저런 곳에 누워있는지 모르겠다.

 

 

 

스톡홀름에서의 마지막 방문지는 바사박물관(The Vasa Museum)‘이다. ’구스타브 2(Gustav II)‘가 재위하던 1625년에 건조되어 1628810일 처녀항해 때 침몰한 전함 바사(Vasa) ()‘가 전시된 곳으로, 스톡홀름의 스칸센 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 침몰된 이후 1956년에 해양 고고학자인 안데스 프란첸(Anders Franzen)‘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침몰한 지 333년만인 1961년에 인양되었다. 1962년 임시 박물관이 문을 열어 이곳에서 1979년까지 보호액을 뿌리는 작업이 계속되다가, 1988년 반 정도 완성된 새로운 박물관으로 옮겨졌으며, 1990년 정식으로 바사박물관이 개관되었다. 박물관은 누드 콘크리트로 골조와 벽을 세우고 지붕엔 구리판을 씌웠다. 윗부분 측면은 어두운 색으로 칠한 나무 패널(panel)을 붙였다. 전체적으로는 바사호를 추상화한 형상에다 돛을 세움으로써 배의 모양을 더 확실히 나타내려 했다.

 

 

안으로 들면 바사호의 위용(威容)에 주눅부터 든다. 7층 정도의 높이라는 어마어마하게 큰 공간을 바사호 한 척이 온통 독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닥에서 돛대까지의 높이가 52.5m이며 함체 높이만 해도 19.3m5층 건물의 높이에 해당된단다. 선체 길이는 47.5m, 뱃머리의 사자상이 내민 보우스피리트까지 합칠 경우엔 무려 69m에 이른단다. 전시된 바사호는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게 했다. 또한 바사호 발견 당시 해저탐색에 사용된 잠수복, 배 안에서 발견된 보석상자 등도 전시돼 있다. 4층으로 이루어진 박물관의 각 층에서는 바사의 준공과 취항, 침몰, 인양의 각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현존하는 세계 유일의 17세기 선박인 바사(Vasa) 는 원형의 95% 이상이 보존되었다고 한다. 이 배는 구스타브 2(Gustav II)‘가 재위하던 1625년에 건조된 호화 전함이다. 총길이 69m, 최대 폭 11.7m, 높이 52.2m, 배수량 1210t, 적재 대포 64, 탑승 가능인원은 450명이었다. 1628810일 스웨덴의 해군력을 과시하기 위해 스톡홀름 항에서 폴란드로 첫 항해에 나섰지만 불과 30분 만에 침몰해버리고 만다. 애초 계획보다 많은 대포와 포탄을 배에 싣는 바람에 균형을 유지하지 못한 채 돌풍에 가라앉고만 것이다. 1956년 해양 고고학자인 안데스 프란첸(Anders Franzen)에 의해 발견된 바사 호는 침몰 이후 333년 만인 1961년에 인양됐다. 전함에서는 14000개 이상의 목조품과 700여 개의 조각상, 선원들의 유골과 유품들이 함께 발견됐다. 이 선박의 유물은 17세기 조선술 연구에 유익한 자료를 제공해준다.

 

 

 

 

박물관 내부는 배를 가운데다 놓고 지하까지 포함해 총 여섯 개 층에 빙 둘러 복도를 내어 관람 공간으로 만들었다. 다양한 각도에서 배를 구경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리라. 만일 아래층에서부터 빙빙 돌면서 위로 올라갈 경우에는 배의 전모(全貌)를 빠짐없이 눈에 담을 수 있다. 배의 가장 높은 부분까지 가까이서 볼 수 있음은 물론이다. 그래도 미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실물을 10분의 1로 축소했다는 모형을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 실물에는 없는 돛을 더했을 뿐만 아니라 화려한 뱃머리, 꼬리, 뱃전의 조각상과 장식들을 원래 색깔대로 복원해 바사호의 당시 모습이 어땠는지도 알아차릴 수 있게 했다.

 

 

일반의 범선(帆船)도 전시하고 있다. 가이드는 뭔가를 열심히 설명해 주었지만 다른 것에 신경을 쏟다보니 하나도 듣지 못했다. 아무튼 박물관은 거대한 선박의 본체와 아름다운 선미의 조각, 선원들의 옷가지와 물품 등과 더불어 당시 선박의 구조와 선원들의 활동을 볼 수 있는 미니어처까지 세심하게 진열해 놓았다. '30년 전쟁' 때 발틱 해를 지배하기 위해 만들어진 전함 바사 호는 당시에는 적들을 하나도 죽이지 못했지만, 수백 년 뒤에는 세계의 여행객들을 사로잡고 있다.

 

 

배의 선실을 실물크기로 복원해 선원들의 당시 생활상은 물론이고, 대포 등 무기들의 사용 방법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게 했다. 그런가하면 배의 단면도(斷面圖)를 만들어 구조가 어떻게 생겼는지 굳이 설명을 듣지 않고도 직관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당시의 유골을 복원하고 그 유골의 흉상을 제작해 전시해 놓은 것도 인상적이다. 당시 사람들의 외모와 의상과 심지어는 그들의 소지품까지 전시해 놓았고 배를 만드는 과정과 당시의 채색이나 장식들에 대한 자료들도 전시를 해 놓았는데 배를 칠했던 도료들과 조각들과 카펫까지 모두 전시했다. 화려한 색채와 조형성이 강조된 부조들은 아름답기 짝이 없다.

 

 

박물관을 빠져나오면 중세의 궁전을 닮은 거대한 건축물이 나타난다. 바사박물관과 마주보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노르디스카(Nordiska)박물관이라는데 여행사의 일정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아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다. 대신 그 내력이나 소개해 볼까 한다. ’노르디스카를 굳이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북방민족이라는 뜻이니 북방민족 박물관이라 부르면 되겠다. 가이드의 설명으로는 민속박물관이란다. 박물관은 건축가 이삭 구스타프 클라손(Isak Gustaf Clason)‘이 디자인했다고 한다. 1907년에 개관했는데 전시분야는 인형의 집(Doll’s House), 테이블 세팅(Table Settings), 스웨덴 민속예술(Swedish Folk Art), 장남감(Toys), 인테리어(Interiors), 패션의 힘(Power of Fashion), 전통(Traditions), 섬유갤러리(Textile Gallery), 스웨덴 가정(Swedish Homes) 등이란다.

 

 

바사박물관을 빠져나오면서 스톡홀름 관광도 끝을 맺는다. 이어서 길고 긴 버스여행이 시작된다. 노르웨이와의 접경지역 근처에 있는 아르장(Arjang)’까지 가야하기 때문이다. 400Km 정도 떨어진 아르장까지는 고속도로가 뚫려있다. 스웨덴 고속도로는 우리나라와 같은 110Km이다. 하지만 그건 말 뿐이다. 편도 2차선과 4차선이 번갈아 나타나기 때문에 지나다니는 차량이 드문데도 불구하고 제 속도를 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칫 지루해지기 쉬울 수도 있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끝없이 펼쳐지는 푸른 초원이 지겨워지기라도 할라치면 어김없이 아름다운 호수들이 나타난다. 하나같이 아름다운 호수들이다. 스웨덴 전 국토에 21,500여 개의 호수가 있다고 하더니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하룻밤을 머무른 베스트 웨스턴 호텔 아르장(Best Western Hotel Arjang), 아르장(Arjang)은 노르웨이와의 접경지역 부근에 위치한 소도시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읍() 정도의 크기인데 생각보다 호텔은 괜찮았다. 4층이라 규모도 제법 컸을 뿐만 아니라 내부시설도 깔끔했다. 제공되는 식사 또한 다른 호텔들에 비해 뒤지지 않았다. 특히 호텔 내에 볼링장까지 갖추고 있다. 마침 호텔 근처에 엄청나게 큰 슈퍼마켓까지 있으니 캔 맥주 두어 개 사다 놓고 게임을 즐기기에 딱 좋다.

 

 

 

호텔 앞에는 낯선 조형물이 하나 세워져 있다. ’Arjang trollet‘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다. ’trollet‘을 영어로 바꾸면 트롤(troll), 즉 북구(北歐)의 민담이나 동화에 등장하는 요물(妖物)로 사람처럼 생겼으나 그 모습이 흉측하고 행동이 굼뜨며 주로 깊은 숲속이나 산에 산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저 괴물은 이곳 아르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요물이란 얘기일 것이다. 북유럽 사람들과 트롤은 떼려야 뗄 수가 없다고 하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던 가 보다. 호텔의 앞에다 이런 무서운 조형물까지 스스럼없이 세워 놓은 것을 보면 말이다.

 

여행지 : 북부 유럽 여행

 

여행일 : ‘17. 6. 19() - 7.1()

여행지 : 러시아(모스크바, 페테르부르크), 에스토니아(탈린). 핀란드(헬싱키), 스웨덴(스톡홀름), 노르웨이(오슬로, 베이토스톨렌, 요정의 길, 게이랑에르 피오르드, 뵈이야 빙하, 베르겐, 하당에르 피오르드, 하당에르비다국립공원), 덴마크(코펜하겐)

 

일 정 : 6.23() : 헬싱키(원로원광장, 우스펜스키 사원, 암석교회, 시벨리우스 공원)

 

여행 넷째 날 : 북유럽의 흰 수도, 헬싱키(Helsinki)

 

특징 : 핀란드(Republic of Finland) : 헬싱키(Helsinki)에 수도를 두고 있으며, 서남쪽의 발트 해와 남쪽의 핀란드만() 그리고 서쪽 보트니아만() 등의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가 하면, 스웨덴과 노르웨이, 러시아와는 국경을 맞대고 있다. 핀란드인(국민은 2016년 통계로 5,498,211명이며, 이 가운데 93가 핀란드인이고 스웨덴인이 6%)들은 스칸디나비아족과 발트 인종에 속한다. 2개의 공식 언어가 사용되는데, 대부분의 국민은 핀란드어를 쓰고 소수만이 스웨덴어를 사용한다. 국민 대부분은 복음주의 루터교(89)에 속한다. 기원전 1500년경 현재의 핀란드 지역에 처음 정착한 핀족(우랄어족)12세기 초 스웨덴(에리크 9)에 정복되어 스웨덴의 일부로 병합된 뒤 19세기 초까지 스웨덴의 지배를 받았다. 나폴레옹전쟁 후에는 러시아에 할양되어 러시아의 대공국으로 자치령이 되었으나, 그 뒤 핀란드인의 핀란드라는 민족적 자각운동이 싹트기 시작하여 러시아의 끈질긴 러시아화 정책에도 불구하고 1917126일 의회 결의로 독립을 선언하였고, 1919년에는 헌법을 제정하였다. 독립 이후 두 차례에 걸친 러시아와의 전쟁(19391944)에서 패하여 영토의 일부가 러시아에 할양되고 많은 액수의 배상금을 지불하였다. 1948년 소련의 제의로 체결된 핀·소우호협력상호원조조약에 따라 핀란드의 중립외교정책이 확인되었고, 양국의 기본관계가 정립되어 오늘에 이른다. 소련 붕괴 후 서방 진영에 접근하여, 1994년에는 EU 가입에 합의하고, 2000년에는 유로를 도입했다. 남북한 동시 수교국으로 우리나라와는 19738월에 외교관계가 수립되었다. 남북한 동시수교국으로 1973년 주핀란드 한국 상주공관, 19779월 주한 핀란드 상무관실 개설에 이어 197811월에는 대사관으로 승격되었다. 한국과 핀란드 사이에는 사증면제협정(1974. 3)과 이중과세방지협정(1979. 2), 경제기술협력협정(1979. 9) 등이 체결되어 있다.

 

 

 

헬싱키(Helsinki) : 핀란드의 수도이며 육지의 남쪽 끝에 위치한 해항(海港)이자 핀란드의 산업 중심지이다.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유럽 각국의 수도 가운데 가장 북쪽에 있다. 헬싱키는 1550년 스웨덴의 구스타프 바사 왕이 세웠다. 핀란드 만 반대편에 있는 레발(지금의 에스토니아 공화국에 있는 탈린)과 경쟁하기 위해서이다. 이후 잡다한 사건들을 겪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헬싱키는 발트 해 연안의 번영하는 무역 도시들과 경쟁 상대가 되지 못한 소규모의 해안 도시에 불과했다. 1748년 헬싱키 항구 외곽에 요새(要塞)가 건설되어 위상이 조금 높아지기는 했지만 1809년 스웨덴이 핀란드 전쟁에서 러시아에 패해 핀란드가 러시아령 자치 대공국이 된 후에야 헬싱키의 본격적인 발전이 시작되었다. 1812년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스웨덴의 영향을 줄이기 위해 핀란드의 수도를 투르쿠에서 헬싱키로 옮겼다. 1827년에는 핀란드 내 유일한 대학이었던 투르쿠의 오보 왕립 아카데미(Åbo Kungliga Akademi, 헬싱키대학의 전신)도 헬싱키로 이전되었다. 새로이 핀란드의 수도가 된 헬싱키는 그 후 수십 년간 놀라운 성장과 개발을 거듭하여 20세기에 독립국의 수도가 되는 기반을 갖추었다. 헬싱키의 변화는 도심의 건축을 통해 잘 살필 수 있는데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흉내 낸 신고전주의 건축 양식은 이때로부터 유래되었다. 또한 철도의 건설과 산업화는 헬싱키의 성장에 큰 기여를 하였다.

 

항구에 기다리고 있는 버스는 우릴 태우더니 헬싱키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원로원광장(핀란드어: Senaatintori 세나틴토리)’에다 옮겨 놓는다. 19세기 초 투르쿠(Turku)에서 헬싱키로 수도를 이전하면서 조성되었는데, 헬싱키를 내려다보는 상징적인 존재로 자리 잡았다. 다른 한편으론 헬싱키 관광의 시작점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정사각형으로 만들어진 광장은 일단 엄청나게 넓다. 광장의 바닥에는 무려 40만 개나 되는 화강암 포석(鋪石)을 깔아 놓았다. 그리고 한가운데에다 알렉산드로 2의 동상(銅像)을 배치하고 그 주위를 헬싱키 대성당과 정부 청사 등이 둘러싸게끔 만들었다. 남쪽의 길 건너에는 상가가 들어앉았다. 아무튼 이 건물들은 대부분 19세기에 지어졌다. 고풍스러운 멋이 넘치는 이유일 것이다.

 

 

 

 

 

 

광장의 정면에는 눈이 부실정도 새하얀 헬싱키 성당(Tuomiokirkko)’이 자리 잡고 있다. ‘루터란 대성당(Lutheran Cathedral)’으로도 불리니 기억해 두자. 설계는 건축가 카를 루빙 엥겔(Carl Ludvig Engel)’가 맡았다. 1830년에 착공해 1852년에 완공되었는데, 예전에는 성니콜라스(St. Nicholas)교회또는 단순히 '큰 교회'라고 불렸다. 네오클래식((neoclassic, 신고전주의) 양식의 웅장한 건물과 푸른색 돔이 눈에 띄고, 햇빛이 밝은 날에는 눈부실 정도로 빛나는 상아색 외벽이 인상적이다. 중앙 돔은 네 측면 어디에서도 보이며, 아연으로 만들어진 지붕 위에는 예수의 12제자의 동상이 있다. 처음에는 중앙의 돔만 있었으나, 후에 네 귀퉁이의 돔이 보완되었는데, 이 건물은 바다에서 바라볼 때가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오늘날 핀란드 인구의 85%440만 명이 루터파(Lutheranism) 교회의 신자로 등록되어 있는 만큼, 이곳에서는 각종 국가적인 종교행사가 거행되며 전시회, 파이프오르간 연주회 등 대학과 시민들의 문화공간으로서의 역할도 겸한다. 아무튼 성당의 새하얀 벽면이 푸른 하늘과 어우러져 유난히 도드라져 보인다. 지을 때부터 밝은 녹색 돔과 흰색의 주랑이 청명한 하늘과 완벽한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설계되었고 전해진다.

 

 

안으로 들면 회중석과 제단(祭壇)이 눈에 들어온다. 가톨릭 성당과 비슷한 것 같지만 꾸밈이 거의 없는 정갈한 모습이다. 이따가 암석교회를 설명하면서 거론이 되겠지만 소박함을 중요시하는 루터교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제단의 뒤편에는 성화가 걸려있다. 러시아 출신의 화가인 폰 베프가 그린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라고 하는데,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가 선물했다고 전해진다.

 

 

광장의 한가운데에 있는 동상(銅像)의 주인공은 러시아 황제이자 핀란드 대공이었던 알렉산드르 2(1855~1881)’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투어를 안내할 때 그리스도 부활 교회(Church of the Savior on Spilled Blood)‘와 인연이 있다고 설명한바 있는, 급진 혁명조직인 아나키스트(anarchist)의 폭탄 테러에 의해 살해(1881) 당한 그 개혁주의 황제 말이다. 그가 피 흘린 자리에 세웠다고 해서 피의 사원이라는 별칭이 붙게 되었음도 다시 한 번 기억해 두자. 하나 더, 그가 행한 가장 큰 치적이 농노(農奴)의 해방이라는 점도 함께 기억해 보자.

 

 

알렉산드르 2세가 죽고 3년이 지난 1894년에 핀란드 최고 조각가 타나켄루넨베르그를 동원해 그의 동상을 세운 것은 핀란드 의회의 자발적인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왜 하필이면 지배자의 동상을 세웠을까가 궁금할 것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광화문 앞 서울광장에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동상이 서있는 거나 마찬가지이니 말이다.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다. 알렉산드르 2세가 핀란드 의회를 재건시키고 핀란드에 더 많은 자치권을 줬기 때문이란다. 핀란드 사람들이 그를 얼마나 좋아했는지는 그의 생일에 맞춰 동상을 제막하면서 그 날을 공휴일로 삼았던 데서도 잘 드러난다. 하지만 러시아의 굴레를 벗어나면서 한때 철거문제가 대두되기도 했다. 러시아와의 전쟁 및 2차 세계대전 때의 구국 영웅이었던 만네르하임(Friherre Carl Gustaf Emil Mannerheim, 1867-1951)‘으로 바꾸자는 구체적 제안까지 나왔었다고 한다. 하지만 알렉산드르 2는 아직까지도 제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다. 표면적으로 내세운 이유는 교육목적이라지만 내 생각에는 러시아라는 강대국의 옆에 위치한 지정학적(地政學的) 요인이 작용했지 않나 싶다. 명목보다는 실리를 취한 것이다. 이런 눈치작전은 소련과 조약(1948)을 맺고 소련의 적대국인 서방에 군사기지로 자국의 영토를 빌려주지 않는다는 약속까지 하게 된다. 그 대가로 정치적 자율성을 얻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런 약소국의 생존법을 일러, ’핀란드화(Finlandization)’라고도 하니 참조해두자. 아래 사진은 다른 분의 사진을 빌려다 썼다. 바로 위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내가 촬영한 사진들이 엉망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새로 산지 얼마 되지 않은 카메라를 들고 여행을 떠나온 탓에 노출 조정을 잘못했던 모양이다.

 

 

광장의 동쪽, 그러니까 오른편에는 원로원(元老院)이 있다. 위에서 헬싱키를 설명하면서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드르 1가 투르크에 있던 수도를 이곳으로 옮겼다고 했었다. 계몽정책을 펴던 그는 핀란드공국에 자치권을 후하게 주면서 독자적으로 의회와 행정부를 구성 운영할 수 있는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를 허용한다. 여기서 '군주(君主)'핀란드 대공(大公)’, 즉 러시아의 황제가 됨은 물론이다. 최종 결정은 자기가 하겠다는 심산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대공국 초기까지 서부 투르크에 있던 수도는 1812년에 헬싱키로 옮겨졌다. 당시에 광장을 조성하면서 함께 들여놓은 것이 바로 국가 평의회(원로원)’이다. 이 건물의 이름이 자연스럽게 광장의 이름으로 굳어졌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현재 이 건물은 총리실을 비롯한 정부 청사로 쓰고 있다. 아래사진도 빌려온 사진이다. 이분의 것은 다른 곳에서도 여러 장 사용되었다. 거기다 이분의 글은 내가 글을 쓰는데 많은 도움까지 줬다. 이 자리를 빌어 미안하면서도 고맙다는 인사를 드려본다.

 

 

 

 

원로원의 맞은편, 그러니까 광장의 서쪽(왼편)엔 핀란드 최고 명문대인 국립 헬싱키대의 본관이 자리 잡았다. 국립대 역시 옛 수도 투르크에 있었다가 화재로 불탄 뒤 1832년 이곳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원로원광장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면 나면 한 시간 정도의 자유시간이 주어진다. 헬싱키 성당의 안을 기웃거리거나, 그렇지 않으면 광장의 근처를 거닐어도 좋다고 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5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마켓광장(Market Square)을 빼먹으면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것이라는 가이드이 설명이다. 그러니 안 가볼 수도 없다. 항구로 이어지는 길은 고풍스런 옛 건물들이 줄줄이 늘어선 멋진 길이다. 거기다 깨끗하기까지 하다. 배에서 내려 원로원광장으로 오는 길에 느꼈던 헬싱키의 첫 인상과 같다고 보면 되겠다. '정갈하고 깨끗하다'란 느낌말이다. 잘 닦여 있는 자전거 도로, 쓰레기가 안 보이는 길가, 규격에 맞춰서 반듯하게 올려져있는 집들이 어느 것 하나 허술함이 없어 보인다. 헬싱키 중심부의 많은 건물들이 카를 루빙 엥겔(Carl Ludvig Engel)’의 영향을 받았다고 들었는데, 지금 보고 있는 건물들도 그중 일부분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다면 이 도시의 대표적인 자랑거리인 디자인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고 말이다. 이곳 헬싱키는 2012'세계디자인의 수도'로 선정된바 있기에 연관시켜 보았다. 아무튼 국내에서도 사랑받는 디자인 브랜드인 아르텍과 마리메꼬, 이딸라 등이 모두 여기에 자리 잡고 있다.

 

 

두어 블록 정도를 걷자 항구의 선착장이 나타난다. 싱싱하고 값싼 생선이 많다고 해서 피쉬마켓(FishMarket)’으로 불리기도 하는 마켓광장(Market Square, 핀란드어로는 Kauppatori)’이다.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너른 광장에는 싱싱한 해산물은 물론이고 꽃가게와 과일가게, 그리고 기념품으로 선물하기 좋은 수공예품 등 다양한 물건들을 팔고 있다. 하지만 손님들은 그다지 많아 보이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이제 겨우 10시를 조금 더 넘겼을 따름이다. 630분에 장이 열렸으나 점심시간까지는 시간이 조금 더 남았다. 아직은 손님들이 몰려올 시간이 아닌 것이다.

 

 

헬싱키는 발트해를 품고 있는 항구도시다. 그래선지 주택으로 치면 앞마당이라 할 수 있는 바다에 집채만 한 크루즈로부터 유람선과 바지선, 그리고 돛단배까지 다양한 크기와 종류의 배가 구불구불한 해안선을 따라 정박해 있다.

 

 

헬싱키 시민의 부엌이라는 마켓광장은 헬싱키 서민들의 일상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항구에 위치한 이곳은 현지인들이 많이 이용하는 곳이다. 발트해에서 갓 잡은 신선하고 값싼 해산물은 물론이고, 싱싱한 채소와 과일 등 서민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품목들이 매일 거래되기 때문이다. 특히 레스토랑과 노천카페가 많아 간단하게 배를 채우려는 사람들로 항상 북적이면서 만들어내는 왁자지껄한 소란스러움이 시장 특유의 생동감을 더해 준다.

 

 

광장마켓의 주요 품목은 뭐니 뭐니 해도 신선하고 값싼 해산물과 채소, 과일 등 서민들의 먹거리이다. 다음으로는 꽃집이 많아 보인다. 헬싱키 시민들이 꽃을 좋아한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 외에도 수공예 모직물이나 각종 액세서리, 핀란드 토산품 등도 눈에 띈다. 아무튼 구경하는 재미가 꽤 쏠쏠하다. 여기서 가이드가 귀띔해주는 정보 하나.. 해질 무렵이면 아름다운 석양을 감상하며 식사를 할 수 있는데, 그 분위기를 못 잊어 많은 시민들이 자주 이용한단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한국에서 자주 보던 포장마차를 닮은 노천식당이다. ‘유럽식 포장마차촌이라고 보면 되겠다. 아무튼 국내외를 막론하고 먹거리촌의 풍경은 비슷한가 보다. 하긴 먹고사는 게 어디 다를 필요가 있겠는가. 언젠가 국내의 모 축제장에서 만났던 노신사의 넋두리가 생각난다. 뭔가 볼만한 게 있을까 해서 물어물어 찾아왔는데 구경거리는 하나도 없고 맨 포장마차만 늘어서 있더라는 불만 섞인 목소리였다. 이곳도 역시 꽤 많은 포장마차들이 널찍하게 포진하고 있다. 가장 시끌벅적한 곳 역시 포장마차이다. 그 이유는 가이드의 귀띔으로 알 수가 있었다. 물가 비싸기로 유명한 북유럽에서 부담 없는 가격에 즉석요리를 맛볼 수 있는 곳이라서 여행객들뿐만 아니라 현지 주민들도 자주 찾는다는 것이다.

 

 

이곳 핀란드 사람들이 가장 즐겨먹는 음식 중 하나는 연어구이이다. 그리고 이곳 마켓광장은 그 연어구이를 가장 싸게 먹을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물가 비싼 헬싱키에서 10유로만 내면 풍요로운 만찬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포장마차를 이용해야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내가 들여다본 포장마차의 안에는 늘씬하면서도 아름다운 금발의 처녀들이 줄무늬 상의에 분홍색 앞치마를 둘러 멘 채로 손님을 맞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민이 시작된다. 아침식사를 배불리 한 탓에 아직까지도 배가 꺼지지 않았으니 어쩌란 말인가. 인기 메뉴 중의 하나인 연어구이와 볶은 감자, 야채(FRIED SALMON WITH POTATOES & VEGETABLES)’ 등이 푸짐하게 함께 나오는 플레이트(plate)를 고르더라고 10유로면 충분할 텐데 말이다.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어제 저녁에 맛봤던 훈제연어로 만족하기로 하며 발길을 돌린다.

 

 

광장의 한가운데에 이집트의 오벨리스크(obelisk)처럼 생긴 조형물이 하나 세워져 있다. ‘황후의 오벨리스크또는 황후의 돌이라 불리는 기념탑인데, 아까 원로원광장에서 보았던 알렉산드르 2의 동상과 같은 맥락으로 보면 되겠다. 그 증거는 꼭대기에 올라앉은 쌍독리상이다.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문장이기 때문이다. 독립이 되고 나서도 허물지 않은 이유는 아까 원로원광장에서 거론했었기에 여기서는 생략하겠다. 아무튼 이 조형물은 러시아의 지배하에 있던 핀란드 공국시절(1833) ‘니콜라이 1황제 부부가 이곳 헬싱키를 방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그들이 배에서 내려섰던 곳에다 세웠다고 전해진다. 헬싱키대성당을 설계했던 카를 루드비히 엥겔의 작품이란다.

 

 

광장을 돌아다니다 보면 원로원광장이 있는 방향을 북()으로 높고 볼 때, 북동쪽 방향에 멋지게 지어진 건물 하나가 또렷이 나타난다. ‘우스펜스키사원(Uspenski Cathedra)’이다. 마켓광장과 거의 맞닿을 정도로 가깝지만 가보는 것을 사양하고 원로원광장으로 되돌아나간다. 가이드의 인솔 하에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다음 방문지는 우스펜스키사원이다.

 

 

예정대로 아까 마켓광장에서 건너다보였던 우스펜스키 교회(Uspenski Cathedral)로 간다. 이 건축물은 암반(巖盤)으로 이루어진 작은 언덕 위에 지어졌다. 항구에서 쉽게 눈에 띄었던 이유일 것이다. 하늘로 솟아오른 13개의 첨탑은 그리스도와 12제자를 의미하는 조형물이란다. 핀란드 국민의 대부분(85%)은 루터교 신자이다. 반면에 러시아정교회의 신자는 극히 소수이다. 그런데도 성당 건물은 거대하면서도 화려하기 짝이 없다. 러시아의 오랜 지배가 만들어낸 흔적들이 어디 그렇게 만만하겠는가.

 

 

 

 

핀란드가 러시아의 지배 아래 있던 1868, 성모승천을 기념하여 비잔틴 슬라브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정교회 성당이라고 한다. 러시아의 건축가 알렉세이 고르노스타예프(Aleksei Gornostaev)’가 동방 정교회의 전통에 따라 설계했는데, 빨간 벽돌이 외벽을 이루고 있고 핀란드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독특한 양식의 돔 지붕이 인상적이다. 성당을 지을 때 건축 자재는 물론 실내장식까지 러시아에서 실어 날랐다고 전해진다.

 

 

 

 

성당 내부도 화려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천정이 높아 탁 트이다보니 전면 또한 넓을 수밖에 없다. 그 넓은 공간은 다양한 아이콘으로 장식되어 있다. 그리스도와 열두 사도들을 나타내고 있다는데 이 역시 화려하면서도 웅장하다.

 

 

성당에서의 조망(眺望)은 뛰어나다.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지리적 요건 덕분이다. 북동쪽으로는 크고 작은 배들이 정박해 있는 항구의 너머로 높고 낮은 굴뚝들이 솟아올랐다. 공업지역이 위치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참고로 헬싱키의 주요산업은 식품과 금속가공, 인쇄, 섬유, 의류 등이다. 베르트실레 조선소와 유럽에서 규모가 가장 큰 아라비아 도자기류 공장은 국제적으로 유명하다.

 

 

대통령궁도 시야(視野)에 잡힌다. 대통령이 사는 관저는 세우라사리섬(Seurasaari Island) 근처에 있고, 저곳은 대통령이 국정을 보는 집무실이다. 5km쯤 떨어진 관저에서 출퇴근한다고 보면 되겠다. 애초(1814)에는 부유한 상인의 집으로 지어졌다가 1837년 러시아 황제가 겸하는 핀란드 대공의 궁()으로 삼았고 1917년 독립 후 대통령궁이 되었다. 아무튼 멀리서 보기에는 소박한 외형을 지녔다. 핀란드 사람들의 국민성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이곳 핀란드는 세계에서 가장 정치적 부패가 적은 나라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기 때문이다. 2008년 민간 활동 단체인 국제 투명성 기구에서 시행한 정치부패 인식지수 조사에서 2004년까지 1위를 지키다가 2009년에는 6위로 떨어졌지만 누가 뭐라 해도 부패가 적은 나라임에는 틀림이 없다.

 

 

 

북유럽의 흰 수도또는 발트해의 아가씨라는 애칭으로도 불리는 시가지도 한눈에 잘 들어온다. 내가 느낀 핀란드는 파란 나라이다. 파랑은 하늘과 바다를 떠올리게 해 평화롭고 여유롭다. 이 나라의 국기처럼 하얗고 파란 나라. 그래서인지 이 나라 사람들의 표정은 밝아 보였다. 삶에 여유가 있는 나라. 잔잔하고 여유로운 삶이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영화 카모메 식당(Kamome Diner, 일본 제작)’의 배경지가 되기에 충분한 나라이다. 인상 좋은 이 도시와 한국의 첫 인연은 스포츠가 아니었을까 싶다. 1952, 당시 한국전쟁이 한창인 데도 불구하고 이곳 헬싱키에서 개최된 하계올림픽에 한국선수단(6개 종목에 21)이 출전했었기 때문이다. 결과는 비록 동메달 2(복싱의 강준호와 역도의 김성집)를 얻는데 그쳤지만 한국선수단은 핀란드 대통령으로부터 최고 체육문화상을 받는 등 각국의 선수단들로부터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지난 대회에 이어 또 다시 메달을 딴 김성집의 일화(逸話)는 빼앗긴 나라에서 태어난 스포츠맨의 애환이 절절이 묻어난다. 그는 1937년에 이미 세계 신기록을 기록했었기 때문이다. 일본 역도연맹이 조선 선수들의 전력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자 올림픽에 역도를 출전시키지 않는 바람에 김성집은 올림픽에 나갈 수조차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해방 후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나가 한국인 최초의 메달리스트가 되었으니 영광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이미 전성기를 훌쩍 넘겨버린 탓에 동메달에 그쳤지만 말이다. 은퇴 후 김성집은 체육계에 몸담아 태릉선수촌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2016220일 타계하였다.

 

 

세 번째 방문지는 핀란드를 찾아온 관광객들이 빼놓지 않고 찾아본다는 암석교회이다. 기존의 교회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암석 교회인데 교회 내부는 천연 암석의 특성을 살린 독특한 디자인으로 구성돼 있다. 암석 사이로 물이 흐르고 파이프 오르간이 이색적이다. 자연의 음향효과를 충분히 고려해 디자인 돼 음악회장으로도 자주 이용된다고 한다. 기독교 신자가 꼭 아니더라도 그 자체로 교회가 참 예쁘기 때문에 들릴 만한 곳이다. 교회는 마치 땅속에서 솟은 듯 보이기도 하며, 아주 오래전부터 그곳에 서 있었던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팸플릿(pamphlet)에 의하면 외형(外形)을 이루는 암석 벽은 극한의 기후와 화염포로 인한 타격으로부터 교회를 보존하기 위해 고안된 것으로, 오래된 핀란드의 숲을 연상시킨다고 한다.

 

 

이곳은 암석(巖石)을 쪼아서 만든 공간에 유리로 자연광이 비출 수 있게 설계되었다. 원래의 이름이 템펠리아우키오 교회(Temppeliaukio Church)’인데도 암석교회로 더 잘 알려진 이유이다. 건축가 겸 가구 디자이너인 티모(Timo)’투오모 수오말라이넨 (Tuomo Suomalainen)’ 형제가 맡아서 1960년대에 완성했다고 한다. 원형으로 된 유리지붕을 통해 교회당 안으로 빛이 스며든다. 주변의 자연물과 빛이 음악과 마찬가지로 예배당 안에 들어온 이들이 종교적 의식에 더욱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유리로 된 돔(dome) 너머로 파란 하늘이 나타난다. 하얀 구름 한 조각이 흡사 돛단배라도 되는 양 그 위를 돛단배처럼 유유히 떠다니고 있다. 갑자기 한줄기 빛 조각이 교회 안으로 스며든다. 암석으로 둘러진 공간을 비추는 태양빛이 자못 경건함을 자아낸다. 건물 내부는 천연 암석의 느낌을 그대로 살린 것이 특징이다. 깎아낸 바위들을 다시 쌓아 놓아 방음과 외부 충격을 줄이는 차단 효과도 뛰어나다고 한다. 천장과 외벽 사이 원형으로 창을 만들어 최대한 자연광이 들어오도록 설계됐으며, 천장 중앙 부분은 음향효과를 높이기 위해 약 3m의 구리선을 돔 모양으로 둥글게 엮어서 만들었다. 조명효과와 음향효과가 뛰어나 많은 건축가의 모델이 되고 있단다.

 

 

 

 

위에서도 얘기했듯이 교회는 소박함 그 자체이다. 루터교(Lutheranism)의 우상(偶像)에 대한 거부와 검소한 절제가 건축에까지 이어졌음이리라. 그동안 보아오던 교회들은 하나같이 크고 화려함을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높고 웅장한 천장과 색색의 스테인드글라스, 그리고 화려한 조각상 등 다른 교회에서 흔히 보아오던 장식물들은 일절 찾아볼 수 없다. 소박한 나무의자와 작은 오르간, 단상이 전부인데, 난쟁이들이 파낸 것 같은 거친 바위벽은 마치 태초부터 존재하던 장소인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헬싱키 최고의 명소로 꼽히는 이유일 것이다. 참고로 개신교가 주류인 국가들의 교회는 가톨릭의 성당에 비해서 규모나 장식적인 면에서 검소한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점은 훗날 현대건축의 시발점이 된 모더니즘 건축에서 장식이 사라지는데 영향을 끼친 요소 중 하나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시벨리우스공원(Sibelius Park)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핀란드가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 장 시벨리우스(Jean Sibelius, 1865-1957)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원이다. 시벨리우스는 조국 핀란드에 대한 사랑과 민족의식 고취를 주제로 한 곡들을 작곡해 핀란드인들에게는 더욱 의미가 깊은 작곡가이다. 특히 1899년에 작곡한 핀란디아는 러시아 지배를 받던 핀란드인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한 작품으로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참고로 시벨리우스는 핀란드인들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사람들 가운데 한명이다. 그가 사랑받는 이유는 핀란드에 대한 사랑과 민족의식에 관한 주제가 담긴 음악(핀란디아, 칼레발라, 투오넬라의 백조 등)을 작곡하여 핀란드인들의 가슴 깊은 곳까지 울려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러시아는 그들이 지배할 당시 시벨리우스의 음악을 연주하지 못하도록 하였단다.

 

 

공원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24톤의 강철로 만든 파이프 오르간모양의 시벨리우스 기념비와 그 옆의 시벨리우스 두상이다. 핀란드의 대표적인 여류 조각가 엘라 힐투넨(Eila Hiltunen)’1967년 시벨리우스 사후 10주년을 기념해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이 가운데 은빛으로 빛나는 600개의 강철 파이프는 물결 모양으로 세움으로써, 마치 시벨리우스의 음악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은 효과를 내고 있다. 파이프오르간이 시벨리우스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몰라도 높이 8.5m에 전면 너비 10.5m, 그리고 측면 너비가 6.5m인 이 기념비와 시벨리우스 두상은 공원의 상징물이자 헬싱키를 대표하는 명물이 되었다.

 

 

 

이 공원의 특징은 자유분방함이라고 해도 좋겠다. 다른 곳들과는 달리 조형물들을 자유롭게 만질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 좌대인 암반 위에 올라가 사진을 찍는 것은 기본, 만져보거나 심지어 어떤 사람은 두들겨 보기도 한다. 핀란드 사람들에게는 듯 깊은 조형물이 분명할진데 두들기는 짓까지는 그만두었으면 좋겠다. 참고로 이 조형물은 파이프의 중앙이 포토죤(photo zone)이다. 한가운데에 앉아 하늘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댈 경우 예쁜 사진이 나오기 때문이다. 카메라의 노출 조정을 제대로 하지 못한 난 쓸만한 사진을 한 장도 건지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 오른편 자연암반을 축대처럼 깎아놓은 위에 시벨리우스의 두상이 있다. 스웨덴계 핀란드인 가정에서 태어난 시벨리우스는 러시아 통치하에서 핀란드어로 가르치는 최초의 학교였던 핀란드 교원양성학교에서 공부했다. 이때 핀란드의 문학, 특히 그에게 있어 지속적인 영감의 근원이 되었던 핀란드의 신화적인 서사시 칼레발라(Kaleval‎a)’를 접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포횰라의 딸(Pohjola's Daughter)’루온노타르(Luonnotar)’ 등을 포함한 그의 많은 교향시들이 이 서사시에서 비롯되었단다. 법률가가 되려 했던 원래의 목표를 바꾼 그는 음악에만 전념하게 된다. 20대 중반에 핀란드를 떠나 베를린과 빈에서 계속 공부했으며, 그곳에서 작곡가인 로베르트 푹스카를 골트마르크로부터 사사(師事)받았다. 핀란드로 돌아오자마자 발표한 그의 최초의 대규모 관현악 작품 쿨레르보 교향곡 Kullervo Symphony(1892)’은 큰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이 작품과 그 뒤를 잇는 작품들인 엔 사가(En Saga)’카렐리아(Karelia) 등으로 그는 핀란드의 대표적인 작곡가로 부상한다. 핀란드 의회는 이런 시벨리우스의 재능을 인정하여 그에게 연금을 지급하도록 의결(1897)했다. 이후 그는 창작에만 전념하다 92세에 생을 마쳤다고 한다.

 

 

공원은 바닷가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바다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내륙으로 들어앉은 데다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 바다가라기 보다는 오히려 내륙 깊숙한 곳에 위치한 호수 같다는 느낌이 더 강하다. 그 덕분인지 기념 조형물들과 자연경관이 함께 잘 어우러지며 멋진 경관을 만들어내고 있다. 좋은 공기를 마시며 산책하기에 딱 좋은 곳이라는 얘기이다. 마침 바닷가에 오두막집처럼 생긴 카페까지 들어서 있다. 120년이나 묵었다는 레가타라는 카페인데, 실내 식탁이 넷밖에 안 되는 작은 카페에 불과하지만 골동품 식기와 악기, 그림들을 가득 채워 분위기를 한껏 돋아놓았다. 2014헬싱키 최고의 커피숍으로 선정되기까지 했다니 한번쯤 꼭 들러볼 일이다. 향이 가득한 커피와 함께 금방 구워낸 계피빵 한 조각 입에 문다면 분위기는 한껏 고조될 게 분명하다. ! 카페의 화장실은 공짜이니 그냥 지나치지 말자, 대신 커피 한 잔 쯤은 팔아주는 매너도 잊지 말고 기억해 두자.

 

 

조형물의 바로 앞에는 아이스크림 가게도 보인다. 아이스크림 마니아에 가까운 집사람이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리가 없다. 냉큼 하나 주워들고 본다. 계산은 물론 그녀의 뒤만 졸졸 따라다니는 내 몫이다. 그렇다고 귀찮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즐겁다. 거스름돈을 내주는 금발의 미녀에게 홀딱 반한 게 원인일 수도 있겠다.

 

 

헬싱키의 투어가 끝나면 또 다시 2시간 넘게 걸리는 긴 여정이 시작된다. 우리를 코펜하겐으로 실어다줄 크루즈선박이 헬싱키에서 북서쪽으로 160정도 떨어진 해안도시 투르쿠항에 정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1812년까지 핀란드의 수도였던 이곳은 한때는 스웨덴의 통치를 받았던 탓에 스웨덴어를 모국어로 쓰는 인구도 많으며 스웨덴식 이름인 오보로도 불린다. 중세의 성()과 대성당 등이 도시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아우라 강과 함께 어우러지는 전형적인 유럽의 모습을 마주할 수 있다지만 이를 둘러볼 시간은 없었다. 배의 출항시간에 맞춰 항구에 도착하게끔 일정이 짜져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북유럽은 육로로 여행하는 것도 좋지만 각 나라 사이를 크루즈(cruise)’를 이용해 다니는 것이 더욱 편하고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 특히 크루즈는 자면서 이동하므로 숙박과 이동 두 가지를 하나로 해결 할 수 있는 장점이 있어 여기저기 부지런히 다녀야 하는 북유럽 여행에는 더할 나위 없는 수단이 된다. 여행의 간결함이 생명인 패키지여행에서 이를 놓쳤을 리가 없다. 이곳 투르크(핀란드)’에서 스웨덴의 스톡홀름까지 구간에 탈링크 실자 라인 크루즈(Tallink Silja Line)’를 포함시켰다. 오늘 저녁에 이 배에 오르면 내일 아침이나 되어야 스톡홀름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투르쿠에서 스톡홀름으로 가는 크루즈는 바이킹라인(Viking Line)’실자라인(Silja Line)이 있다. 이중 실자라인을 탈 경우, 20:55분에 출발하여 다음날 아침 6:30분에 스톡홀름에 도착한다. 참고로 헬싱키에서 출발할 수도 있다. 다만 17:30분에 출발해서 다음날 10시에 스톡홀름에 도착하게 되므로 일정관리에 약간의 차질이 발생할 수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우리를 태우고 갈 배는 발틱 프린세스(Baltic Princess)‘, 배의 길이 212m에 넓이는29m, 10층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927개의 객실을 운영하고 있다. 승객 2,800명과 차량 420대를 싣고 22노트의 속력으로 달린단다. 배를 타기 위해서는 개찰구를 지나야 한다. 전철을 타듯이 탑승권을 대면 문이 열린다. 줄을 서서 승무원으로부터 뭔가 설명을 듣고 나면 드디어 입장이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객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가 나온다. 참 배를 타기 전 선사(船社)에서 나누어주는 팸플릿(pamphlet)을 챙기는 것을 잊지 말자. 마침 한글로 만들어진 것도 있으니 선내에 머무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팸플릿으로도 어렵다면 승무원을 찾으면 된다. 승무원 중에 우리 동포가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만큼 이곳을 찾는 한국인들이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아무튼 배 안에는 레스토랑과 바는 물론이고 사우나와 면세점, 기념품가게 등 각종 편의시설들을 갖추고 있다. ! 와이파이는 6층과 7층의 데크에서만 터지니 참조하자.

 

 

저녁 아홉 시가 되었는데도 밖은 환하기만 하다. 시간에 맞춰 우리 부부는 선실(船室)을 빠져나간다. 북해바다의 자랑거리로 알려진 일몰(日沒)을 보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구름이 두텁게 낀 하늘은 그런 행운을 주지 않는다. 내일 아침의 일출(日出)을 기대하며 선실로 되돌아간다. 하지만 일출마저도 나와의 만남을 거절해버린다. 새벽 3시에 나가봤지만 이번에는 아예 구름까지 잔뜩 끼어버렸다.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이번 여행에서 본 다른 아름다운 풍경들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행복의 근원은 만족할 줄 아는데 있다고 했다. 오늘만이라도 그 만족을 지켜보기로 한다. ! 행복하다.

 

 

 

 

 

 

에필로그(epilogue), 보통 크루즈라 하면 디너(dinner)나 만찬에 정장과 드레스로 한껏 멋을 내야 하지만 북유럽에서는 마음을 편히 가져도 좋다. 이곳의 크루즈는 7-8만 톤의 페리식 크루즈이므로 호화스런 크루즈 보다는 편안한 분위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크루즈의 선내 나이트클럽이라도 이용해 볼 요량이라면 야시시한 옷 한 벌쯤은 더 챙겨 넣어야 할 일이다. 그럼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인 먹는 얘기로 가보자. 실자라인에서는 뷔페식 식사가 제공된다. 북해에서 꼭 먹어봐야 한다는 훈제 연어가 무제한으로 제공된다니 혁대를 풀어놓고 맘껏 먹어보자. 그뿐 아니라 새우와 소라 등 해산물이 풍부하고 빵, 치즈, 케익 등도 넉넉하게 제공된다. 마침 생맥주와 와인(, )까지 무제한 리필(refill)이 되니 이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여기서 여담(餘談) 하나, 누군가 중국인들이 안 보인다며 좋아하는 게 보인다. 중국인들이 몰려들 때마다 어김없이 난장판이 되므로 그들을 만나는 게 두렵다면서 하는 말이다. 그는 식당에서 부딪쳤던 상황을 떠올리며 넌더리를 친다. 그런 상황은 우리들만의 생각은 아니었던가 보다. 실자라인에서는 중국인들에게는 뷔페식당의 이용권을 팔고 있지 않는다니 말이다. 갑자기 한국인이라는 것에 자부심이 느껴지는 건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 지나가는 길에 객실 상황도 거론해보자. 선실은 밖을 볼 수 있는 seaside와 창문이 없는 inside로 구분되는데 운이 좋았던지 우린 seaside로 배정을 받았다.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이점 때문에 1인당 10만 원 정도를 더 지불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의외이다. 추가요금을 지불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방은 소파가 한쪽에 있고, 침대 4개가 벽에 붙어 있다. 침대를 내려펼치면 한 묶음으로 묶여있는 이불과 요, 베개, 그리고 목욕수건이 튀어나온다. 침대에서 보면 벽걸이 TV와 전화기가 보이고, 오른쪽은 벽장, 왼쪽이 샤워실과 화장실이다. 커피를 마실 수 있는 탁자와 거울도 보인다.

여행지 : 북부 유럽 여행

 

여행일 : ‘17. 6. 19() - 7.1()

여행지 : 러시아(모스크바, 페테르부르크), 에스토니아(탈린). 핀란드(헬싱키), 스웨덴(스톡홀름), 노르웨이(오슬로, 베이토스톨렌, 요정의 길, 게이랑에르 피오르드, 뵈이야 빙하, 베르겐, 하당에르 피오르드, 하당에르비다국립공원), 덴마크(코펜하겐)

일 정 : 6.22() : 탈린(알렉산더 네프스키성당, 시청사 광장, 돔교회, 툼페아 언덕)

 

여행 셋째 날 : 발틱해안에 꽃핀 중세의 진주, 에스토니아 탈린(Tallinn)

 

특징 : 에스토니아(Republic of Estonia, 에스토니아어로는 Eesti Vabariik) : 발트 해 동쪽 해안에 자리 잡은 작은 나라다. 남한 면적의 절반이 채 안 되는 국토에 인구는 132만 명이다. 언어도 슬라브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는 이웃 국가들과는 완전히 다른 우랄어 계통의 핀란드어군이다. 그런 까닭인지 숱한 역사의 시련을 모두 겪었다. 덴마크, 폴란드, 스웨덴, 독일, 러시아 등 주변의 웬만한 나라 중에서 에스토니아를 건드리지 않은 나라가 없을 정도이다. 여러 나라의 통치를 받으며 수천 년 언어와 문화를 보존하여 민족 정체성을 지켜온 것이 놀랍다. 게다가 동유럽도 아닌, 북유럽도 아닌 묘한 위치와 묘한 정체성의 국가라서 더욱 관심을 끈다. 에스토니아는 상고적부터 핀우그리아어파에 속하는 에스토니아인들의 땅이었다. 독일의 프라테스 밀리치아이 크리스티(Fratres militiae Christi)‘에 의해 정복(1227)된 이래 덴마크와 스웨덴, 폴란드, 러시아인들에 의해 지배를 받았다. 10월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가 무너지면서 독일에 할양되었으나 2년도 채 되지 않아 독일의 패망으로 독립국의 지위를 획득하였다. 이후 20년 동안 시민사회로서 뜻깊은 정치학습기를 보낼 수 있었으나, ’·소 불가침조약(1940)‘으로 다시 소연방에 병합되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1991820일에야 노래혁명과 소련의 붕괴로 독립을 되찾았다. 820일은 에스토니아의 국경일이다. 2004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그리고 2004년에는 유럽 연합(EU)에 가입했다. 우리나라와는 19911017일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하였으며, 현재 주 핀란드 한국 대사가 그 업무를 겸임하고 있다. 이 나라의 민족 구성은 65%가 에스토니아인(러시아인 28.1, 우크라이나인 2.5, 벨라루시인 1.6)이다. 공용어로는 에스토니아어를 사용한다. 종교는 대부분 기독교(루터교)이고, 러시아정교도 믿는다.

 

탈린(Tallinn) : 에스토니아의 수도로 핀란드 만()에 속한 탈린 만에 면해 있다. BC 1000년경부터 AD 11세기까지 요새화된 정착지가 이곳에 있었으며, 12세기에는 도시가 형성되었다. 1219년는 데인족이 이곳을 점령하고 툼페아 구릉(丘陵)’에 새 요새를 세웠다. 1285년 한자 동맹에 가입한 후로는 교역이 발달했다. 1346년 튜튼 기사단에게 팔렸다가 1561년 기사단이 해체되면서 스웨덴으로 넘어갔다. 1710년 표트르 대제에게 점령되어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다가 1918년에는 독립국 에스토니아의 수도가 되었다. 1940년 다시 소련에 합병되었고, 1941~44년에는 독일군에게 점령되어 크게 파괴당했다. 19401944~49, 2차례에 걸쳐 탈린에 살던 에스토니아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증거도 없는 반역죄, 독일군에 협력한 죄, 집단화 반대 등의 죄목으로 소련군에 의해 추방당하거나 투옥되었다. 그 결과 러시아인들이 에스토니아의 수도인 이 도시로 이주하여 인구의 35(1970)를 차지한 반면, 토착 에스토니아인은 56로 감소했다. 오늘날의 탈린은 상업 및 어업 항구이며, 공업 중심지이다. 조선업과 기계제작업을 중심으로 여러 분야에 걸친 기계공업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다양한 소비재가 생산되고 있다. 에스토니아의 문화 중심지로서 과학 아카데미, 종합기술대학, 미술대학, 사범대학, 음악학교 등이 있으며, 극장과 박물관도 여럿 있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올드타운(Old Town)’의 대문이라 할 수 있는 비루문(Viru Gate)’의 근처에다 우릴 내려준다. 두 개의 흙벽돌로 만든 첨탑이 양쪽에 있을 뿐 문의 형태는 없다. 아니 첨탑 아래에 문은 있다. 다만 문짝이 없을 따름이다. 아무튼 6시간 동안이나 버스 속에 갇혀있어야 하는 장거리 이동이었다. 페테르부르크에서 이곳 탈린까지는 대략 300km 남짓, 우리나라 같으면 세 시간 거리도 안 되겠지만 교통법규에 충실한 유럽이다 보니 거의 여섯 시간이나 걸려버렸다. 참고로 비루게이트(Viru Gates)는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성벽(城壁)의 동쪽에 위치한 두 개의 탑()으로, ‘올드 타운(舊 市街地)’으로 들어가는 6개의 문() 가운데 하나였다. 비루거리(Viru Street)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탑은 1345년에서 1355년 사이에 건립되어 현재까지 원래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안으로 들어서자 오래 묵은 회색빛 성벽(城壁)이 나타난다. 생각보다 훨씬 높은데 그 위로 통로가 나있다. 통로는 나무를 덧댄 난간을 만들었는가 하면 지붕까지 씌워 놓았다. 난간에는 구멍을 뚫어 숨어서 쳐들어오는 적들을 향해 사격을 할 수 있도록 했다. 가히 난공불락(難攻不落)의 형국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지금은 기념품 등을 파는 장사치들이 점령해버렸다. ()는 결코 문()을 이길 수가 없다고 하더니, ()도 문()에 못지않은 모양이다.

 

 

옛날 분위기 물씬 풍기는 거리로 들어선다. 올드 타운(Old Town) 지역이다. 이 도시는 요새(要塞)와 교회, 중세 가옥들이 밀집해 있는 중앙의 ‘Tompea(톰피아) 언덕과 그 아래에 있는 상인이나 하급관리, 일반서민들이 살던 ‘Lower Town’으로 나누어져 있다. 두 지역을 성곽(城郭)이 둘러싸고 있는데 그 안을 통칭해 올드 타운(Old Town)이라고 부른다. ‘올드 타운은 곧 성곽 도시인 것이다. 도시를 둘러싼 2km 성곽은 유럽에서도 가장 잘 보존된 중세 성곽으로 꼽힌다. 거리에는 15~17세기의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즐비하다. 모두가 동화 속에 나오는 집들처럼 고풍스러운데, 그 안에는 상점과 식당. 카페들이 들어서 있다. 하나 같이 예쁘게 꾸며놓고 여행자들을 반긴다.

 

 

거리에는 보석가게가 유난히도 자주 눈에 띈다. ‘쇼윈도(show window)’에는 주로 호박(琥珀, amber)으로 만든 장신구들이 진열되어 있다. 예로부터 발트 3의 호박은 '발트해의 금'이라고 부를 만큼 중요한 특산품이었고 지금도 발트 여행자들이 가장 사고 싶어 하는 보석이다. 거센 바람이 불어 바다 바닥이 뒤집힌 날 그물로 건져 올리는 발트 호박이 육지 호박보다 잘 마모돼 매끄럽고 아름답게 빛날 뿐만 아니라 그 안에 든 기포도 적어 최고로 쳐준다고 했다. 이왕에 온 김에 집사람에게 줄 선물이라도 하나 살까 해봤지만 일행 가운데 한 사람이 넌지시 귀띔을 해준다. 값이 이미 많이 올라서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톰페아 언덕으로 오르는 초입에 너른 광장이 조성되어 있다. 에스토니아의 독립을 기념하기 위해서 만든 자유광장(Freedom Square)’이라는데 탈린의 큰 행사가 자주 열리는 장소이라고 한다. 한여름의 콘서트부터 불꽃놀이까지 탈린의 행사를 볼 수 있는데 주말에는 탈린 시민들이 아이들 데리고 산책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곳이란다. 지금은 자유로운 열린 광장으로 사용되지만 불과 26년 전까지만 해도 이 나라는 그런 자유가 없었다. 힘없는 나라였던 에스토니아는 과거 독일, 덴마크 등 많은 강대국들의 지배를 받았고 1991년 소련으로부터 독립하기까지 소련의 지배를 받았던 아픔이 있는 나라이다. 다시 되찾은 자유를 기념하기 위해 이 공원을 조성했나보다. 아무튼 십자가 옆으로 놓인 계단을 이용하면 올드타운의 고지대인 톰페아(Toompea) 언덕으로 올라갈 수 있다.

 

 

광장의 한쪽 귀퉁이, 그리니까 톰페아언덕의 맞은편에는 성 요한교회(St. John’s Church)가 자리 잡고 있다. 누가 언제 무슨 목적으로 지은 교회인지는 몰라도 세워져 있는 위치로 보아 자유(Freedom)’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아니 톰페아(Toompea) 언덕과 얽힌 인인이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에스토니아의 건국신화(建國神話)에 나오는 칼렙의 아내와 뭔가 얽혀 있을 지도 모르지 않겠는가. '프리드리히 크로이츠발드(Friedrich R. Kreutzwald)'가 쓴 에스토니아의 건국 서사시(敍事詩) '칼렙의 아들(Kalevipoeg)'에 따르면 에스토니아를 건국한 거인 칼렙의 아내 린다는 남편이 죽자 그의 무덤을 표시해 두기 위해 엄청나게 무거운 돌을 산 위로 가져가려고 했다. 하지만 가는 도중 돌이 갑자기 무거워져 바닷가 근처에 떨어뜨렸다. 그 돌이 떨어진 자리가 바로 탈린의 터줏대감처럼 버티고 서 있는 톰페아 언덕이 됐고, 아내는 슬픔에 잠겨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흘린 눈물은 고여 윌레미스테(Ulemiste)’라는 호수가 됐단다. 전설 같은 신화이지만 현재 탈린에는 톰페아 언덕과 눈물이 고여 만들어졌다는 윌레미스테 호수가 실제로 존재한다.

 

 

언덕 방향에는 유리 십자가가 커다랗게 세워져 있다. 그 옆에는 머릿돌로 여겨지는 검은 대리석 석판(石板)을 세웠다. 석판에 에스토니아어로 뭔가를 적었는데 문장의 앞 단어인 ‘Eesti’가 이 나라 말로 에스토니아공화국인 것은 알겠지만 전체적인 의미는 해독이 불가능하다. 석판의 하단에는 ‘1918-1920’이라는 연도도 적혀있다. 에스토니아는 1918224일에 독립선언을 하고, 1920년에 독립을 이루어냈던 역사가 있다. 아무래도 이와 관련된 숫자를 적어놓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여기서 알아두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또 다시 소련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에스토니아의 진정한 독립은 노래혁명으로 얻어낸 1991년으로 봐야 한다. 따라서 이 독립전쟁 전승탑은 첫 번째로 쟁취했던 독립에 대한 기념탑이다. 아무튼 에스토니아인의 자유를 상징하는 만큼 십자가 주변엔 에스토니아 국기가 자랑스럽게 펄럭이고 있다.

 

 

톰페아언덕으로 오르는 사면(斜面)은 잔디밭을 조성해 놓았다. 그 위에서 망중한(忙中閑)을 즐기고 있는 젊은이들이 몇 보인다. 그런데 그냥 쉬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무릎에 책을 펴놓고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래 저런 젊은이들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에스토니아가 존재했을 것이다. 에스토니아는 인터넷 프로토콜을 이용하여 소비자에게 음성 통신을 제공하는 ‘VoIP(Voice over Internet Protocol, 음성 인터넷 프로토콜)’ 소프트웨어인 스카이프(Skype)’가 개발된 나라이자, 여기저기서 펑펑 터지는 와이파이(Wi-Fi)는 물론이고, 온라인 국민 투표까지 실시된 IT 강국 중 하나이기도 하다. 구 소련시대인 1980년대에 핀란드 방송을 듣고, 자본주의 체제에 대비하기 위해 깨어있던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컴퓨터에 매진, 인터넷 인프라를 구축했던 것이 그 시초라고 한다. 체널을 돌리다보면 KBS-World TV도 수신할 수 있다니 참조한다.

 

 

언덕에 올라서니 거대한 나무 아래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몰려있는 게 보인다. 맨 앞에서 가이드로 보이는 여성이 열변을 토하고 있다. 그렇다. 이곳은 에스토니아의 독립을 가져오게 한 역사의 현장이다. 1988년 탈린 교외에 약 30만 명의 에스토니아인들이 모여 소련에서 금지시켰던 에스토니아의 민요(民謠)를 부르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1989년에는 탈린, 리가, 빌뉴스 등 발트3국의 수도에서 같은 형태의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발트3국의 온 국민들이 인간사슬즉 전 국민이 손에 손을 맞잡고 노래를 불러 러시아로부터 무혈 독립을 얻어낸 것이다. ‘노래혁명이라고 세상에 알려진 사건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탈린은 1991820일 독립국가 에스토니아의 수도가 되었다. 그때 만들었던 인간 띠의 기준점이 바로 이곳이란다. 이를 증명하려는 듯 바닥에 발자국이 찍힌 동판(銅版)을 심어놓았다.

 

 

 

발트 3국과 함께 1940년 소비에트연방에 편입된 에스토니아는 1991년 노래혁명(Singing Revolution)으로 불리는 평화적인 시민혁명을 통해 독립을 쟁취했다. 소련의 압제(壓制)에서도 폭력이나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노래로 대응하였다고 해서 그런 이름을 얻었다. 1989823일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Tallinn)‘에서 라트비아 수도 리가(Riga)‘를 지나 리투아니아 수도 빌니우스(Vilnius)‘에 이르는 600는 독립을 노래하며 손에 손을 맞잡은 200만 시민의 인간 띠로 하나가 됐다. 이들은 거대한 인간 띠를 형성하고, 국기를 흔들며 국가를 부르고, 자유의 열망을 외치는 등 극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이는 인간이 만든 가장 긴 띠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으며, 발트 3국은 현재 이 사건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려고 추진 중이라고 한다. 이와는 별도로 탈린은 우리가 생각지 못한 낯선 풍경을 보여주기도 한다. 지난 시절의 아픈 역사, 우리나라로 치면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의 흔적들 쯤으로 여겨두자. 이곳에서는 그런 오욕(汚辱)의 흔적들을 없애지 않고 에스토니아 역사의 일부분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한때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소련의 비밀경찰들이 활동하던 건물까지도 구시가지에서 탈린 시민들과 소통하고 있다. 참고로 이곳 탈린은 에스토니아의 수도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강대국들이 만들어놓은 지배의 상징이기도 하다. 1219년 덴마크를 필두로 하여, 독일, 스웨덴, 제정 러시아 등이 차례차례 이 연약한 영토를 탐하였고, 그런 지배의 역사는 1990년까지 계속되었다.

 

 

정원처럼 잘 다듬어진 숲길을 따라 몇 걸음 더 옮기면 톰페아 언덕에 쌓아올린 성곽(城郭)을 만난다. 높은 산이 없는 탈린에서 높이 45톰페아 언덕은 마치 산()처럼 느껴진다. 해안가 석회암 절벽에 위치한 톰페아 언덕은 '최고봉'이라는 뜻으로 폭이 400에 길이가 250정도 되는 분지(盆地)로 이루어져 있다. 13세기부터 14세기까지 이곳에 성()과 성벽이 건설됐다. 에스토니아를 정복한 덴마크인들이 세웠다고 전해진다. 성곽은 두께 3, 높이 15로 도시를 감싸며 4.7나 뻗어 있었고 성곽에는 붉은빛 원뿔 모양의 지붕을 이루고 있는 탑()46개나 세워졌다. 이는 북유럽 최고의 철옹성 중 하나였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는 1.85의 성벽에 26개의 타워()만 남아 있을 따름이다. 그래도 다른 도시와 차별되는 탈린만의 분위기를 느끼기에는 충분하다.

 

 

성곽을 지났다싶으면 이젠 널따란 광장(廣場)이 뒤따른다. ‘톰페아 성(Toompea loss)’의 앞마당이라 할 수 있는 광장이다. ‘톰페아 성은 아름다운 핑크빛 파스텔 톤(pastel tone)의 로코코양식(Rococo style, 낙관주의적인 감정을 표현한 건축기법)으로 지어진 옛 통치자들의 궁전(宮殿)이다. ‘톰페아 언덕(툼페아, Toompea)’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은 언덕의 이름과 같은 톰페아 성일 것이다. 현재는 국회의사당으로 쓰이고 있어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되므로 외관만 눈에 담을 수 있을 따름이다. 의사당 꼭대기에는 에스토니아공화국의 삼색기가 펄럭이고 있다. 하지만 옛날에는 덴마크를 필두로 이곳을 지배해오던 권세가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깃발이 매달려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저 깃발은 이제 이 아름다운 도시가 엄연히 에스토니아인들의 소유가 되었음을 만방에 공표하고 있는 셈이 되겠다.

 

 

의사당의 맞은편에는 양파머리 모양의 첨탑을 하고 있는 알렉산더네프스키 성당(Alexander Nevsky Cathedral)이 우뚝 솟아있다. 러시아 정교회의 성당으로 에스토니아가 제정 러시아의 치하에 있던 1900년에 건립되었다. 이 성당은 상트페테르부르크(St. Petersburg) 출신의 미하일 프레오브라즈헨스키(Mikhail Preobrazhenski)‘에 의해 건축되었으며 노브고라드(Novgorod)의 왕자인 알렉산더 야로슬라비츠 네프스키(Novgorod, Alexander Yaroslavitz Nevsky)‘에게 헌정되었다. 네프스키 왕자는 124245페입시 호(Peipsi Lake)‘ 둑에서 벌어진 독일과의 얼음전쟁 (Ice Battle)에서 승리함으로써 독일의 동방 진출을 차단시켰던 인물이다. 성당의 종탑(鐘塔)11개의 종으로 이루어 있으며 탈린에서 가장 큰 종소리를 낸다고 한다. 11개의 종 가운데는 무게가 15톤에 달하는 탈린에서 가장 큰 종도 있다. 예배 전에는 항상 종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성당 내부는 모자이크와 성상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돼 있다. 참고로 발트연안의 국가들에서는 성당이나 교회를 불문하고 ’church(교회)‘라는 단어를 구분 없이 쓴다. 아주 큰 성당일 때에는 ’Cathedral’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그때도 ’church‘를 사용한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없단다.

 

 

의사당과 성당 사이로 난 투박한 박석 길을 따라 천천히 오르면 탈린 시민들의 영원한 마음의 안식처라는 톰교회(Toomkirik)‘가 나온다. 온통 하얀색으로 칠해진 이 교회는 에스토니아 대통령의 이ㆍ취임식이 열릴 만큼 탈린 시민의 정신적 지주가 되는 곳이다. 탈린은 물론 에스토니아에서도 가장 오래된 교회인데 은 돔(dome)지붕을 가리키는 단어이자 교구의 대표 성당인 카테드랄(cathedral)‘을 뜻하기도 한다. 구시가지의 중심을 가리키는 이곳 지명인 톰페아()교회가 있는 언덕(페아)‘이라는 뜻에서 연유한 이유이다. 이 교회는 덴마크가 탈린에 도시를 처음 세운 1219년 무렵 나무로 지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교회의 공식적인 출범은 1240년 석조 건물로 다시 지어 동정녀 마리아에게 봉헌했던 때로 본다. 그래서 공식적인 이름도 '성모 마리아 톰교회(St Mary's Cathedral, Toomkirik)'란다. 탈린 교구를 대표해오던 이 대성당은 16세기 종교개혁 때 개신교의 루터교회로 바뀐다. 그 이후부터 스웨덴계 복음루터교단의 탈린 대교구를 대표하는 교회가 되었다. 참고로 이 교회는 여러 번의 개보수를 거치면서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고딕양식으로 된 건물의 뼈대는 15세기 것이고 내부는 17~18세기, 그리고 아름다운 바로크 첨탑은 맨 마지막인 1779년에 세워졌다.

 

 

루터교회에서 전망대로 가다보면 건물의 벽면에 붙어 있는 부조상(浮彫像) 하나가 눈에 띈다. 음악과 무대 예술을 가르치는 에스토니아 음악연극아카데미건물인데, 부조의 주인은 에스토니아의 연극연출가이자 배우, 평론가, 교육자였던 볼데마르 판소(1920~1977)라고 한다. 그는 1941년 이 학교를 졸업하고모스크바에서 연극을 공부한 뒤 돌아와 탈린 드라마센터에서 활동한 에스토니아 현대 연극의 선구자였다.

 

 

아카데미 건물을 뒤로하고 좁은 골목길을 따라 전망대로 향한다. 예쁘게 지어진 집들이 줄줄이 나타나는 멋진 길이다. 톰페아는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동안 수많은 유럽의 도시들을 가봤지만 탈린만큼 고도(古都)로서의 면모가 확실한 곳도 드물지 싶다. 탈린이 옛 모습을 온전히 지켜낼 수 있었던 데는 뜻밖에도 '나쁜 날씨'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참전국의 폭격기들이 안개가 짙게 낀 탈린의 구도심(舊都心)을 찾지 못해 발트해에 폭탄을 쏟아 부었다는 것이다. 안개가 오조준(誤照準)을 유발해 결과적으로 도시를 보호해낸 셈이다.

 

 

 

중세 13, 14세기에 지은 건축물과 구조물들을 감상하며 구불구불한 골목을 걷다보면 어느덧 전망대에 이르게 된다. 톰페아언덕의 북단(北端)에 위치한 파트쿨리 전망대(Patkuli Vaateplatvorm)’이다. 전망대에는 사람들로 가득한다. 탈린에 들르는 관광객들이 결코 빼먹을 수 없는 장소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긴 어떤 구도로 찍더라도 멋진 사진이 나오는 일류의 포토제닉(photogenic)’ 장소이니 어느 누가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한 카페는 물론이고 글뤼바인을 파는 노점상이나 기념품가게, 그리고 발트해의 명물인 호박(琥珀) 세공품들을 파는 곳들이 주변에 가득한 것을 보면 유명한 관광지라는 것이 실감이 난다. 참고로 톰페아언덕에는 세 개의 전망대가 있다. 2개는 바다를 향해 있어 아름다운 발트해가 한눈에 잘 내려다보이는데, 일몰을 구경할 수 있는 명소로 알려져 있다. 나머지 하나는 도심(都心)을 향해 있다. 올드타운과 신시가지 일부를 조망하기에 딱 좋다고 한다.

 

 

전망대에서는 일망무제의 조망이 터진다. 톰페아 언덕은 고지대(高地帶)지만 기껏해야 해발이 45미터에 불과할 따름이다. 하지만 그 정도만 갖고도 조망을 즐기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국토 전체가 평지인 덕분에 시야를 가로막는 것이 일절 없기 때문이다. 전망대에 서면 중세풍의 우아한 분위기를 간직한 구시가지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붉은 지붕과 뾰족한 구시청사의 첨탑, 그리고 은빛으로 물든 발트해 등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한 폭의 수채화처럼 그려진 탈린 시내를 보고 있노라면 왜 이곳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도시이자 '발트해의 보석'이라 불리는지 그 이유를 금방 깨닫게 된다. 사람들은 좀처럼 전망대를 떠나려 하지를 않는다. 발트해에서 불어오는 말간 바람 몇 줌과 울긋불긋한 구시가지 지붕들이 빚어내는 시각적인 소나타가 너무나 아름답기 때문일 것이다.

 

 

발트해 방향도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바다나 육지 할 것 없이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이곳 에스토니아는 빙하침식이 만들어 놓은 평야지대에 놓여있다. 그러니 산이 보일 리가 없다. 평균 해발고도가 50m에 불과하고 가장 높은 지대라고 해도 318m에 지나지 않는단다. 하지만 산림은 풍부한 편이다. 전체 국토의 7%에 해당하는 삼림이 국가 경제의 주 원동력이 되고 있을 정도란다. 참고로 에스토니아에는 1,400여 개나 되는 크고 작은 호수가 있다. 대부분은 작지만 가장 큰 호수인 페이푸스 호(Lake Peipus)‘는 면적이 3,555에 이르기도 한다. 강줄기도 많아서 162km의 지류인 보한두 강(Võhandu), 파르누 강(Pärnu) 등이 있다. 사방이 푸르게 보이는 이유일 것이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긴다. 다음에 만나게 될 전망대에서 더 나은 조망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가이드의 귀띔이 조금은 위안이 된다.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가야하는 지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좁은 골목길을 지나야 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전망대 근처에 있는 기념품가게의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하도 예스럽기에 카메라를 들이대 봤다. 지하로 내려가게 되어있는데 마치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다. 화장실에 설치된 집기나 소품들도 어느 것 하나 고풍스럽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렇게 잠시 걷다보니 또 다른 전망대가 나타난다. 아까보다는 남쪽 방향, 그러니까 코흐투가()의 끝에 있는 전망대인 코흐투 전망대(Kohtuotsa Vaateplats)‘이다. 가이드의 귀띔대로 아까보다 시야(視野)가 더 넓을 뿐만 아니라 시멘트로 난간까지 만들어 놓았다. 난간에 걸터앉을 경우 일류의 포토죤(photo-zone)으로 변하니 참조한다. 참고로 탈린(Tallinn)은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로 확연히 구분되어 있는데, 구시가지는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구시가지를 걸어서 한 바퀴 도는데 몇 시간이 걸리지 않을 만큼 자그마하지만, 탈린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선 새벽과 대낮, 그리고 저녁 등 세 번을 봐야한다는 말이 있다. 우선 새벽안개가 가시지 전의 인적이 뜸한 골목길에선 수백 년간 이 땅을 지켜온 역사의 흔적들이 느껴지고, 동이 튼 후 사람들의 발걸음이 분주해지면 발트해의 무역 관문(關門)이었던 당시의 활기를 가늠해 볼 수 있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해가 진 뒤에 전망대에 올라가 보는 것이다. 발트해를 오가는 여객선과 구시가지 성벽의 야경을 밝히는 조명, 그리고 신시가지의 화려한 불빛이 조화를 이루는 환상적인 세계를 체험할 수 있단다.

 

 

전망대에 선다. 그리고 서쪽 탈린만부터 동쪽으로 시선을 옮겨본다. ‘파트쿨리 전망대의 조망사진과 같기에 사진을 생략했지만 구시가지 너머 짙푸른 탈린만과 건너편 피리타지역의 반도가 나타난다. 구시가지 왼쪽에는 성올라프교회의 첨탑이 솟아 있다. 높이가 124m나 되는 올라프교회 첨탑은 탈린 어디서나 눈에 띄는 랜드마크(landmark)이다. 시선을 조금 오른쪽으로 옮기면 종탑이 눈에 들어온다. 중세의 목각작품으로 가득한 성령교회 종탑이다. 바로 앞에는 주황부터 빨강까지 따뜻한 빛깔의 지붕을 얹어놓은 집들이 흡사 동화 같은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누군가는 탈린을 일러 붉은색 지붕을 가진 도시라고 적었다. 딱 맞는 표현이 아닐까 싶다. 중세시대의 나지막한 건축물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붉은색 기와를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겨울이 길고 눈이 많이 오는 발트 연안이어선지​ ​그 지붕들이 하나 같이 가파르다.

 

 

사진은 첨부하지 않았지만 코흐투 전망대의 벽에는 ‘the times we had’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혼성 포크트리오인 피터, 폴엔 매리(Peter, Paul&Mary)‘가 불렀던 ‘the good times we had’와 비슷한 문장이다. 우리가 가졌던 시간들... 지금 바라보고 있는 풍광의 좋고 나쁨은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행복은 얼마나 만족하느냐에 달려있다. 눈앞에 펼쳐지는 풍광에 만족한다면 그게 바로 행복이 아니겠는가. 그런 깊은 뜻을 알았던지 집사람도 활짝 웃고 있다.

 

 

 

이젠 구시가지로 내려가야 할 차례이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제한된 시간에 투어를 마쳐야 하는 게 패키지여행의 특징인 것을 말이다. 다음 행선지는 올드타운 중 저지대인 로우타운(Lower Town)이다. 탈린의 구시가지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탈린의 지배세력들이 정치와 행정목적으로 사용하던 건물들이 남아 있는 고지대가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13세기경부터 발트해의 주요 무역 거점지 중 하나로 발전하면서 탈린에 자리 잡기 시작한 무역상들의 건물이 밀집해 있는 저지대(Lower Town)이다. 저지대(Lower Town)로 내려가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짧은 다리라는 이름의 뤼히케 얄그(Lühike Jalg) 거리와, 긴 다리라는 뜻의 픽 얄그(Pikk Jalg)’이다. 이 재미있는 이름의 두 거리는 고지대에서 저지대를 이어주는 골목 두 개를 일컫는다. 시작은 긴 다리라는 픽 얄그(Pikk Jalg)’를 따른다. 길은 폭이 넓은데다 경사까지도 완만하다. ‘마차를 타고 오르내려도 되겠다는 내 혼잣말을 가이드가 들었나보다. 그래서 픽 얄그(Pikk Jalg)’는 귀족들의 전용 길이었다고 일러준다.

 

 

길가에 정체가 불분명한 조형물이 매달려 있기에 카메라를 들이대 봤다. 카페의 입구에 목이 긴 장화를 매달아 놓았는데, 아무리 봐도 카페와는 연관이 없어보였기 때문이다. 생뚱맞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득 머릿속을 스쳐가는 뭔가가 있다. 카페의 앞을 지나는 도로의 이름이 다리(Jalg)’였던 것이다. 그것도 긴 다리픽 얄그(Pikk Jalg)’이다. 골목의 이름을 나타내기 위해 다리를 길게 만들고 거기에다 장화를 신겨놓았는지도 모르겠다. 낭만적으로 말이다.

 

 

잠시 후 길이 나뉘는 곳에서 오른편으로 내려선다. 계단이 놓여있는데 이 골목이 시민들이 사용했다는 짧은 다리, 뤼히케 얄그(Lühike Jalg)’이다. 누군가의 넋두리가 들려온다. ‘저지대에서 고지대로 올라갈 때는 짧은 다리’, 반대로 내려올 때는 긴 다리를 이용해서 내려오면 골목길의 정취를 한껏 더 느낄 수 있는데 역방향으로 걷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불평할 것까지는 없다. 잠시 후에 자유시간이 주어지니 그때 다시 한 번 찾아보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탈린의 고지대는 전체를 아울러 톰페아(툼페아, Toompea)’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그 언덕을 내려가는 길가에는 파스텔 톤(pastel tone)의 고풍스런 건물들이 즐비하다. 멋스러운 건물들이 가득한 탈린 구시가지 거리는 걷는 것만으로도 행복이 충전된다. 카메라 역시 방향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영주가 통치하는 왼편 성안과는 달리 오른편의 다운타운은 상업과 자유무역 지대였다. 그래서 죄를 짓고 성벽을 뛰어넘어 다운타운 지대로 도망치는 사람들은 1년하고도 하루 동안 붙잡히지 않으면 자유의 몸이 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박석(薄石)을 깔아놓은 골목은 한마디로 아름답다. ‘발트해의 진주’, ‘발트해의 순결한 보석’, ‘발트해의 자존심은 탈린(Tallinn)에 따라다니는 수식어들이다. 800년의 역사가 곳곳에 담긴 구시가지를 아무 생각 없이 돌아다니기만 해도 그러한 수식어가 남의 생각만은 아님을 느끼게 된다. 1991년 독립한 이후 북유럽 최고 관광도시로 떠오른 탈린은 독립 20주년을 맞는 2011, 핀란드의 투르쿠(Turku)와 함께 유럽 문화수도로 지정되기도 했다.

 

 

시청광장으로 내려가는 길에 만난 아이스크림 가게(첨부된 사진의 오른편 가게)’, 에스토니아에서 가장 맛있는 아이스크림이 나온다고 해서 자유 시간을 이용해 찾아봤다. 하지만 두어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고 나서야 겨우 찾아낼 수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외국인의 얼굴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비슷하다고들 한다. 외국에 나오면 그곳의 건물 또한 이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건물들이 도대체 구분이 잘 안 되는 것이다. 찾는 것을 그만두어 버릴까 생각도 해봤지만 집사람이 좋아하는 것이기에 물어물어 찾아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고생한 보람은 있었다. 두 가지 종류를 섞어서 맛본 집사람의 평은 최고였기 때문이다. 이런 걸 두고 고진감래(苦盡甘來)’라고 하는가 보다.

 

 

시청광장(라에코아광장)‘에 가까워지면 산타클로스의 유래가 된 성 니콜라스를 수호성인으로 모시는 유서 깊은 니콜라스 교회(St. Nicholas' Church)’가 나온다. 1230년 독일 상인과 기사들을 위해 지어졌으며 탈린성곽이 지어지기 전까지는 요새의 역할도 수행했었다고 전해진다. 1523년 종교개혁 당시 우상을 제거한다는 이유로 많은 성당들이 파괴되었지만 이 교회는 화를 면했다고 한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은 비켜가지는 못했다. 1944년 점령군이었던 독일을 몰아내려는 러시아의 폭격으로 인해 몽땅 부서져버렸기 때문이다. 탈린 사람들은 외지인이 찾아오면 니콜라스 교회를 꼭 둘러보라고 권한다고 한다. 가슴속에 점령군 러시아에 대한 앙금이 여전히 작용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여기에는 '스토리'가 있다. 에스토니아를 강점하던 러시아 정부는 1960년대까지도 성당 수리에 미온적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국제적인 압력에 못 견뎌 마지못해 1980년대에야 복원공사를 해놓았다는 것이다. 그들의 심정에 공감이 가는 건 우리 역시 피지배의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지금은 박물관과 연주회장으로 변해있다니 참조한다. 또한 이 교회에는 105m짜리 첨탑이 있다. 울라프교회의 123m짜리 첨탑보다는 낮지만 위로 오를 경우 아름다운 탈린시가지를 한눈에 볼 수 있다고 한다.

 

 

 

탈린 구시가지는 노천카페의 천국인 모양이다. 아예 길의 가운데까지 테이블들이 점령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리는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는 까다로운 도시 건축법 덕분이라고 한다. 나라에서 정책적으로 신축이나 개축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집을 짓는 것은 물론 수리나 개조를 할 때에도 철저히 시의 통제를 받는단다. 우리나라의 한옥마을정도로 보면 되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그 덕분에 13세기 이래의 전통적인 건축물들이 잘 보존돼 있고 거리 전체의 균형미도 옛날 모습 그대로이다. 도로 포장도 아스팔트 대신 단단한 돌을 깔았다. 삭막한 아스팔트와 느낌이 확연히 다르다. 미로(迷路) 같은 도시의 골목길을 걷다보면 흡사 중세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이다.

 

 

잠시 후 널따란 시청 광장(Town Hall square)’이 나온다. 라에코아광장으로도 불린다니 참조한다. 이곳은 시청건물이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시장으로 이용되어 온 장소였다. 많은 축제가 열렸으며 죄인들을 처형 하는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오늘날에는 시민들의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특히 지금 같은 여름에는 노천카페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건 기본, 수많은 거리 콘서트가 열리는가 하면 수공예품 전시장 등 중세풍의 시장이 열리는 장소로도 사용된다고 한다. 중세 시대의 카니발을 재현하는 '구 시가지의 날행사도 이곳에서 열린다. 행사에 맞춰 찾아올 경우에는 에스토니아의 전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중세시대의 전통 행사인 카니발 퍼레이드, 중세 기사 경연 대회, 활쏘기 대회 등이 펼쳐진다. 참고로 광장에는 매년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전후 한 달 동안 대형 트리(tree)’가 세워진다고 한다. 이는 1441년부터 계속해서 이어온 전통인데, ‘크리스마스트리의 원조 자리를 놓고 라트비아 수도 리가의 시청광장과 다투고 있다. 리가의 시청광장 검은머리전당 앞의 바닥엔 1510년 검은머리 길드 조합원들이 세계 최초로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웠다는 것을 기념하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저지대 한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북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고딕양식의 건물인 구시청사(Raekoda) 역시 성탑과 더불어 탈린 스카이라인의 중요한 부분을 장식한다. 13세기에 건립된 이 건물은 1402년부터 2년에 걸쳐 재건축되어 지금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외벽을 석회암으로 마감하고 지붕은 점토 타일로 얹은 고딕 양식의 옛 시청은 좌우 길이가 37m, 양쪽 너비가 15m 안팎에 이른다. 건물의 지붕은 급경사의 뾰족한 모양을 이룬 박공 구조로 되어 있으며 처마 위에는 용의 머리 형상을 한 물 홈통이 있다. 건물의 창과 입구도 화려하게 장식 되어 있으며 특히 건물 동쪽에는 호리호리한 8각 첨탑이 있는데 이는 후기 르네상스 양식인 왕관 모양으로 되어 있다. 지난 수세기 동안 탈린시 의회의 회의는 물론 탈린의 중요한 행정 사항을 결정하던 시청 건물은 현재 콘서트홀로 사용되고 있다. 구 시청사에서는 두 번째 기둥을 눈여겨볼 만하다. 쇠고리가 걸린 기둥에 죄인을 묶어놓고 토마토 세례를 퍼부었다고 한다. 죄인들 중에는 예전 의회 의원도 포함돼 있었단다. 비밀을 누설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을 어기고 자신의 부인에게 회의 내용을 공개했는데, 결국 이 사실이 발각되는 바람에 광장을 세 바퀴나 기어 다니는 형벌과 함께 사방에서 날아드는 토마토세례를 온몸으로 받아내야만 했단다. 아래 사진과 또 다른 몇 장은 다른 분의 사진을 빌려다 썼다. 새로 산지 얼마 되지 않은 카메라를 들고 여행에 나섰던 탓에 노출조정이 서툴렀던 모양이다.

 

 

첨탑 꼭대기에는 토마스 할아버지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16세기 파수병 차림을 한 풍향계가 돌아간다. 이 풍향계가 달린 첨탑이 시청 건물 중 가장 유명한 곳이며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의 상징이다. 반대편 서쪽 박공 꼭대기에도 또 하나의 풍향계가 서있다. 이번엔 사자가 치켜든 깃발형의 풍향계이다. 1627이라고 새겨져 있는 걸로 보아 첨탑을 고쳐 지은 그 해에 함께 세운 모양이다.

 

 

시청 광장(라에코아광장)에서 꼭 가봐야 할 곳은 1422년부터 현재까지 한 곳에서 영업을 이어가고 있다는 ‘Raeapteek’이라는 약국(藥局)이다. 현존하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약국이라서 지금은 탈린을 방문한 사람이라면 빼놓지 않고 들르는 명소가 됐다. 이 약국에는 고양이의 피와 생선의 눈과 유니콘의 뿔로 만든 파우더를 정력제로 팔았는데, 그때 유니콘을 너무 많이 잡은 바람에 다 사라졌다는 우스갯소리가 전설처럼 내려온다.

 

 

약국의 한쪽 구석에는 당시 사용되었던 말린 두꺼비, 이집트 미라, 불에 그을린 벌들을 비롯한 여러 가지 다양한 약초 등 재료들이(물론 모조품이긴 하지만) 중세시절의 분위기를 되살리며 전시되어 있다. 게다가 약품이 모아져있는 진열장 안에는 약 200년 전 이 약국을 운영하던 가문의 한 젊은이가 후세의 약사들을 위해 남겨둔 편지가 놓여있다. 이런 진열품들을 보고 있노라면 중세와 현재가 한 곳에서 충돌한 4차원의 세계로 들어온 느낌이 들 정도이다.

 

 

시청광장을 둘러본 다음에는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무려 두 시간이나 되니 가보고 싶은 곳은 모두 둘러볼 수 있을 것이다. 가장 먼저 들러봐야 할 곳은 맛있다고 소문난 아이스크림가게이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생맥주를 거르는 일도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리곤 옛날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골목길도 걸어야겠다. 그 첫 번째 시도는 오른편에 있는 성벽까지 나가보는 것이다. 아이스크림 가게 근처에 있는 성 니콜라스교회에서 동쪽으로 난 골목길로 들어선다. 조금 전 아이스크림 가게를 찾아가던 경험으로 보아서는 길이 헷갈려도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현지 주민들과 영어로 대화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하긴 이 나라에서는 영어 외에도 러시아어나 핀란드어까지 통한다니 언어에 대한 걱정은 애초부터 할 필요조차 없었다. 거기다 탈린의 시민들은 친절하기까지 했다. 내 물음에 조금도 귀찮아하지 않고 모두들 친절하게 대답을 해주었다.

 

 

베네가인 듯 싶은 골목에 수도원처럼 담을 둘러친 가톨릭 성당이 하나 숨어있다.성 베드로바울대성당이란다. 탈린교구를 대표하는 주교좌성당(cathedral)’이라는데도 참 소박한 외모를 지녔다. 그렇지 않아도 무신론자가 많다는 에스토니아에서 루터개신교나 러시아정교에도 못 미치는 교세(敎勢) 탓이 아닐까 싶다. 이 성당은 옛 미니크수도회의 카타리나수도원의 후신으로 보면 된다. 13세기 초, 덴마크의 통치와 함께 탈린에 상륙한 성 카타리나수도원1524년 유럽을 휩쓴 종교개혁 때 파괴된다. 1558년 탈린을 점령 통치한 스웨덴은 국교가 루터개신교였기에 가톨릭을 금지해버린다. 18세기 초 러시아 표트르대제가 일으킨 북방전쟁에서 스웨덴이 탈린에서 쫓겨난 뒤 종교의 자유가 다시 오면서 가톨릭의 암흑기도 끝났고 1841년 옛 카타리나수도원 자리 옆에 이 성당이 세워졌다고 한다.

 

 

안으로 들어서면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성당이 나타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활약하던 이탈리아계 건축가 카를로 로시가 설계를 맡았다고 한다. 성당 오른편에는 성 카타리나수도원에 대한 기록과 흔적들을 모아놓은 박물관이 있다.

 

 

 

동쪽 끄트머리까지 걷자 또 다시 성벽이 나타난다. 성 밖으로 나가는 문()은 나있으나 문짝은 보이지 않는 낯선 풍경이다. ()이 쳐들어오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막았을 지가 무척 궁금해진다. 성벽을 따라 잠시 걸어본다. 곳곳에 망루(望樓)로 올라갈 수 있는 나무계단이 놓여있다. 하지만 위로 올라가볼 수는 없었다. 중간쯤에서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도록 자물쇠로 잠가놓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고풍이 완연한 망루에서 햄릿이라도 나타날 것 같은 분위기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To be or not to be)‘를 중얼거리면서 말이다.

 

 

동쪽 성벽을 따라 걷다보면 아래 사진처럼 생긴 희한한 지붕이 있는 골목이 나온다. 탈린에서도 유명한 길드 장인의 거리인 '카타리나 골목(St. Catherine's passage)'라는 곳이다. 14세기 중세시대 장인들의 워크샵이 모여 있던 이곳은 지금도 유리 공예, 보석 세공, 모자, 도자기, 퀼트 등을 제작하는 장인들이 모여 작업을 하고 있다. 관광객들이 장인들의 작업 현장을 구경할 수 있어 탈린 관광의 인기 있는 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골목의 오른편은 1246년부터 1524년까지 존재했던 도미니크수도회인 성카타리나수도원의 남쪽 벽이다. 골목 이름은 이 수도원에서 따왔다. 참고로 카타리나 골목은 중세 종교개혁 전까지 구시가지 내에서 활동했던 카타리나 수도원으로 연결되는 길이란 뜻이다. 현재 수도원은 사라졌지만 1970년대의 대대적인 발굴과 보수 공사 이후 과거 수도원 성내에 안치되었던 귀족들의 비석을 골목 내부로 옮겨놓아 당시 분위기를 상당히 재현해놓았다. 현재는 14개의 수공업 공방이 결정해 조직한 카타리나 길드의 주요 활동 지역이자 중세 분위기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지역으로 일 년 내내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성곽을 둘러보고 난 뒤에는 시청광장으로 되돌아온다. 이때 저지대의 볼거리 가운데 하나라는 픽(Pikk)거리를 따라 걷게 된다. 상공업자들의 공동조합조직인 길드(guild)의 건물들이 늘어서있다. 무역 거점이었던 탈린에 정착해 경제와 무역활동에 종사하던 그들은 중세무역사(中世貿易史)뿐만 아니라 탈린이라는 도시 풍광의 밑그림을 그려준 미학적 관점에서도 엄청난 업적을 남겼다. (Pikk) 거리와 라이(Lai) 거리에 남아 있는 3-4층 높이의 단아한 건물들은 중세 상공인들의 생활방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Pikk)거리의 옛 건물들 대부분은 식당과 갤러리, 호텔, 공연장 등으로 다양하게 쓰이고 있지만 당시 그대로의 모습을 허물지 않고 그대로 남겨두었다고 한다. 탈린 시민들에게 역사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그대로 전달해주기 위해서란다. 주어진 시간이 조금 남아있기에 노천카페에 자리를 잡는다. 그리곤 생맥주부터 주문하고 본다. 집사람은 물론 커피이다.

 

 

꼬마열차도 보인다. 골목골목을 누비며 돌아다니는데 크기가 작다고 해서 웃을 일은 아니다. 그 안에 타고 있는 사름들은 아이들보다 어른들의 숫자가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하긴 외모만 보면 동화나라에서나 나올법한 꼬마열차이니 속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는 투어버스이다. 다만 열차처럼 꾸며놓았을 따름이다.

 

 

다음 목적지인 헬싱키로 가기 위해서는 탈린 항구(Old City Harbour)’로 나가야 한다. 핀란드의 헬싱키를 왕복 운행하는 쾌속선(페리)탈링크(Tallink)’가 이곳해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헬싱키와 탈린을 오가는 셔틀 쉽(shuttle ship)’인 탈링크는 시즌에 따라 하루에 8~9회 정도 운행하는데, 70km 가량 떨어진 헬싱키까지는 대략 2시간이 조금 더 걸린다. 참고로 탈링크(Tallink)는 에스토니아의 국영 선사(船社)‘ESCO’가 운영하는 탈링크 그룹(Aktsiaselts Tallink Group)’에서 운영하는 배를 통칭한다. 물론 개개의 배마다 각자의 이름을 갖고 있다. 이 회사는 스웨덴에스토니아, 헬싱키스톡홀름, 핀란드독일, 스웨덴라트비아 노선을 운영하는 등 발트해 지역의 명실상부한 해상 운송 강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배에는 일반석인 스타클래스(StarClass)’와 스타 컴포트 클래스(Comfort Class)’, 그리고 비지니스 라운지(Business lounge’ 등 세 가지 종류가 있다. 각종 편의 시설을 두루 갖춘 쾌적한 별도의 공간에다 꼬냑과 위스키를 포함한 각종 주류와 음료들을 무제한으로 제공해주는 비즈니스 라운지가 좋겠지만 패키지여행을 따라 나온 우리에겐 언감생심(焉敢生心)일 따름이다. 가이드에게 짐을 맡겨놓고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게 그나마 위로가 될 따름이다. 물론 내 손에는 선내(船內) 카페에서 산 생맥주 잔이 쥐어져 있다. 약간의 위스키를 희석시킨 채로 말이다. 만일 나처럼 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선내에 있는 마트나 화장품코너에 들러볼 일이다. 핀란드의 대표 화장품인 루메네(LUMENE) 칵테일 세럼을 구입하는 기회도 될 것이다.

 

 

하룻밤을 머물렀던 수지호텔(Hotel SUSI), 중심가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을 빼놓고는 나름대로 괜찮은 호텔이다. 시설도 깨끗할뿐더러 제공되는 식사 또한 훌륭한 편이었다. 특히 나 같은 애주가(愛酒家)들에게는 몇 걸음 거리 밖에 되지 않는 곳에 슈퍼마켓이 있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 아닐까 싶다. 보다 싼 가격에 맥주와 안주를 구입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에필로그(epilogue), 러시아에서 에스토니아로 넘어갈 때는 국경에서 두 번을 내려야만 한다. 첫 번째는 러시아 국경을 넘어가면서 거치게 되는 출국심사이다. 이때 러시아에 들어올 때 입국심사를 거쳤다는 증명서인 스탬프(stamp)가 찍혀있는 입국신고서를 제출해야만 한다. 이게 없으면 출국이 불가능하니 절대 분실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이다. 가이드의 얘기로는 이때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신고서에 적혀있는 내용이 사실과 다를 경우 봉변을 당하는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미 지나간 얘기가 되어버렸겠지만 신고서를 작성할 때에 보유 현금(現金) 등 적어야할 항목을 잘 살펴보고 적어야 하겠다. 두 번째는 에스토니아로 들어가기 전이다. 입국심사를 받기 위해서인데 양쪽 심사장의 분위기는 확연히 다르다. 무거운 분위기에 무뚝뚝하기까지 했던 러시아에 반해 이곳 에스토니아는 밝으면서도 여유로움이 묻어난다. ’관광을 위해 찾아왔다는 내 대답을 듣고는 ’welcome‘하며 활짝 웃어주는 게 아닌가. 역시 유로(Euro)에 가입한 나라답다. 참 변한 건 그뿐만이 아니다. 국경을 넘으면 러시아 키릴 문자가 완전히 사라지고 로마 문자로 바뀐다. 바뀐 분위기가 낯설고도 반갑다. 분위기도 한결 부드러워지니 여행이 조금은 편안해진다. 사람들 생김새는 변한 것이 없는데 체제가 하나 바뀌었다고 이렇게 많은 것이 바뀔 수 있을까? 버스는 한적한 시골길을 두 시간을 더 넘게 달려 탈린에 도착한다.

여행지 : 북부 유럽 여행

 

여행일 : ‘17. 6. 19() - 7.1()

여행지 : 러시아(모스크바, 페테르부르크), 에스토니아(탈린). 핀란드(헬싱키), 스웨덴(스톡홀름), 노르웨이(오슬로, 베이토스톨렌, 요정의 길, 게이랑에르 피오르드, 뵈이야 빙하, 베르겐, 하당에르 피오르드, 하당에르비다국립공원), 덴마크(코펜하겐)

 

일 정 : 6.21() : 페테르부르크(여름궁전, 에르미타쥐 박물관, 유람선, 성이삭 성당

 

여행 둘째 날 : 러시아의 야외 박물관 상트 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

 

특징 : 발트해 델타지대의 자연섬과, 운하로 인해 생긴 수많은 섬 위에 세워진 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 제2의 도시다. ‘상트 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표트르베드로의 러시아식 이름이다. 따라서 성스러운 베드로의 도시는 곧 표트르의 도시이기도 하다. 실제로 표트르 1(피터대제, Peter I the Great)’는 이곳 페테르부르크를 ()로마로 만들고자 했다. 그래선지 도시 문장도 바티칸의 문장에서 따왔다고 한다. 제정(帝政) 러시아의 차르 표트르 대제1703페테르스부르크라는 이름으로 건설한 이 도시는 1713년부터 1918년까지 러시아 제국의 수도이기도 했다. 그 영향으로 각종 산업과 문화가 발전한 대도시로 성장했으며, 다수의 학술 연구기관, 미술관, 박물관 등이 위치해 있다. 1914페트로그라드(Petrograd)‘로 개칭되었다가, 1924년 레닌이 죽자 그를 기념하여 레닌그라드라 불렀다. 1980년대 이후 개방화가 진전되면서 1991년에는 옛 이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되찾았으며, ’페테르부르크로 약칭하기도 한다. 이 도시는 네바강() 하구의 101개의 섬과 함께 강 양안(兩岸)에 계획적으로 건설되었다. 말라야()네바강·볼샤야()네바강을 비롯한 수십 개의 분류(分流)에 놓인 500여 개의 다리로 연결된 정연한 거리는 북방의 수도(水都)’로 불려왔다. 북위 60°의 고위도(高緯度) 지역이면서도 온화한 해양성 기후를 보여, 남쪽의 모스크바보다 기온이 높다. 겨울에 네바강과 해안의 바다가 얼지만, 쇄빙선(碎氷船)에 의해 항로는 연중 거의 유지된다. 참고로 습지(濕地)였던 이곳은 14세기까지만 해도 버려진 땅이었다. 이후 러시아 표트르 대제가 스웨덴의 소유였던 이곳을 빼앗은 다음 수비를 목적으로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를 건설하면서 점차 도시로 발전했다. 18세기 들어 러시아 최대의 무역항으로 발전하면서 도시가 급속히 성장했으며, 19세기 후반엔 러시아 혁명의 중심지로 급부상 했다.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 역사지구와 관련 기념물군(Historic Centre of Saint Petersburg and Related Groups of Monuments)’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1990)돼 있다.

 

 

  

페테르부르크의 일정은 넵스키 대로(Nevsky Prospekt)‘에서 시작된다. 표트르대제의 여름별궁으로 가는 길이라서 버스를 탄 채로 차창 밖으로 스쳐지나가는 풍경을 가슴에 담아야 하는 탓에 주마간산(走馬看山)이 될 수밖에 없지만 그 정도만 갖고도 페테르부르크가 어떤 도시인지는 대충 감히 잡힌다. 그만큼 중세시대의 옛 건물들이 양쪽 길가를 빈틈없이 매우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의 생가(生家)‘이고 저것은 무슨 궁()‘, 그리고 저곳에서는 어떤 사건(事件이 일어났었다는 가이드의 말은 귀에 들어앉힐 여유조차 없다. 그런 건물들이 줄줄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내 머리는 그 많은 양을 담아 둘만한 용량이 못되니 어쩌겠는가. 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의 야외 박물관쯤으로 보면 되지 않을까 싶다. ’표트르-파블로프스키 요새(要塞)‘의 건축으로 시작된 건설은 18, 19세기를 거치며 계속되어 수많은 대로(prospect), 광장, 궁전, 정원, 첨탑, 동상, 운하들로 이루어진 독특한 문화 공간을 형성하게 되었다. 오랜 시간을 두고 자연스럽게 팽창한 커다란 시골모스크바와 달리,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축과 토목 계획의 기본 원리는 철저하게 합리성에 의존했다. 당시 사람들이 마침내 이 도시에 기하학이 당도했다.’고 썼을 정도이다. 러시아인들에게 모스크바가 어머니이자 심장과 같다면, 페테르부르크는 머리’, 그것도 차가운아버지의 머리에 해당한다. 이 아버지의 두뇌와 함께 러시아의 근대는 시작되었다. 그곳은 최초의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가 생긴 장소이며, 최초의 공공 도서관, 최초의 극장, 최초의 식물원, 평민 자녀를 위한 최초의 학교가 문을 연 장소다. 참고로 네바강의 거리라는 뜻의 넵스키대로(Nevskii prospekt)’는 이름 그대로 네바강() 어귀 왼쪽 기슭에 위치한 번화가이다. 페테르부르크의 모든 길들은 넵스키 대로로 통한다는 말이 있을 만큼 해군성에서 알렉산드르 넵스키 수도원까지 4.5로 뻗어 있는 이 거리에는 호텔과 레스토랑, 카페, 상점, 음악당 등이 위치하고 있다. 원래는 습한 늪지대였던 이곳은 1710년에 처음으로 길이 뚫리게 되면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대표하는 문화, 상업의 중심지이자 가장 아름다운 거리 중 하나로 손꼽히게 되었다. 거리에는 19세기에 건축된 화려하면서도 아담한 건물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더욱 운치가 있다.(아래 사진은 ’Ploshad Vosstaniya‘라는 이름의 메트로(metro) 역이다. 넵스키대로로 들어가는 입구쯤으로 봐도 되겠다.)

 

 

 

 

아래 사진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5개의 주요 터미널역 중 하나인 모스크바역이다. 역명의 유래는 모스크바 방면으로 가는 열차가 출발하는 곳이라는 뜻. 이곳 러시아는 가고자 하는 지역의 이름을 그곳으로 가는 열차가 출발하는 역의 이름으로 삼는 게 특징이다. 역사의 건축양식은 반대편 종점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역과 비슷하게 생겼다고 한다.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기점/종점역인 모스크바 야로슬라블 역과 블라디보스토크 역이 그러하듯 의도적으로 맞춘 것이 아닐까 싶다. 버스는 계속해서 넵스키대로를 따른다. 도스토옙스키가 즐겨 산책했고 피의 일요일 사건 때도 민중들은 차르를 외치며 이 대로를 행진했다. 도로는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차들이 다니지만 그 외 길가의 건축물들은 모두 당시부터 보존되는 것이 대부분이며 대단히 고풍스럽다. 모이카, 그리바이도바, 폰탄카 등의 3대 운하가 대로를 가로질러 네바강으로 흘러들고 에르미타주 박물관, 러시아 박물관, 카잔 대성당, 피의 성당 등 상트의 주요 관광지들이 대로 가까이에 모여 있어 관광객들의 필수코스가 된다.

 

 

눈에 보이는 건물마다 돌로 지어졌다. 중세 유럽건축물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표트르 대제가 유럽의 문물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증거일 것이다. 표트르에게 페테르부르크는 그 자체로 근대러시아 문화의 새로운 방향성을 표상하는 상징적인 기호였다. 이 도시는 모든 면에서 하나의 도시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러시아인을 유럽인으로 개조하기 위한 유토피아적인 문화 공학의 계획인 것이다. 모스크바적인 중세를 거부하고 유럽식의 근대를 도입하는 것, 그러니까 유럽으로 열린 창인 페테르부르크를 통해 문화적 정체성의 코드를 철저하게 개편함으로써 과거 러시아의 무지하고 후진적인 관습을 버리고 진보적이고 계몽된 근대 서구 세계에 동참하려는 것, 바로 이것이 페테르부르크식 근대의 목표인 것이다. 이런 군주(君主)를 따르는 귀족들은 아마 죽을 맛이었을 게다. 가이드의 설명으로는 자신의 고국에서 하루아침에 외국인이 되는 경험과도 같았을 거란다. 먹고, 입고, 마시고, 인사하는 법과 같은 일상 행위의 모든 규범들을 마치 외국어를 배우듯이 새롭게 익히고 배워야만 했으니 어떠했겠는가. 표트르는 힘들다며 투정을 부리는 귀족들에게 자기가 직접 개작하고 윤색한 책 젊은이를 위한 예법을 나누어주며 따르라고 강요했단다. ‘항시 외국인들과 함께 있는 자신을 상상할 것’, ‘음식을 뱉거나, 나이프로 이를 쑤시거나, 큰 소리로 코를 풀지 말 것.’ 등등... 그렇게 만들어진 도시가 페테르부르크인것이다. 참고로 시인 칸테미르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읊었다. ‘표트르의 영민한 교시를 소중히 하니, 그로써 우리가 갑자기 이미 새로운 민족이 되었기 때문이다.’

 

 

페테르부르크 시가지를 빠져나온 버스는 한참(시내에서 30km 정도 떨어져 있다고 한다)을 더 달리고 나서야 황금빛으로 빛나는 어느 화려한 건축물 앞에서 멈춰 선다. 표트르대제가 여름을 보내기 위해서 지었다는 여름궁전이다. 표트르대제가 만들었다고 해서 페트로 드보레츠(표트르의 궁전)’로도 불린다. 쉽게 말해 황제의 여름 휴양지쯤으로 보면 되지 않을까 싶다. 분수궁전(噴水宮殿) 혹은 페레르고프(Peterhof)로도 불리니 참조한다. 여름궁전(Summer Palace in St Petersburg)은 표트르대제가 파티 장소로 쓰기 위해 만든 것으로, 당시 러시아 제국의 위엄과 황제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한다. 1714~1725년에 걸쳐 완성되었지만 현재의 바로크(Baroque)풍 장식은 겨울궁전을 건축한 바르톨로메오 라스트렐리에 의해 1745년부터 10년간의 공사로 만들어졌다. 러시아와 유럽 최고 건축가들과 예술가들이 총동원되어, 20여 개의 궁전과 140개의 화려한 분수, 7개의 아름다운 공원이 만들어졌다.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 중인 여름궁전의 내부는 라스트렐리의 바로크 양식과, 유리 펠텐 등이 예카테리나 대제를 위해 새로이 장식한 방들의 보다 차분한 신고전주의가 공존하고 있다. 1층에는 표트르 대제의 응접실과 서재, 침실 등이 있으며 2층에는 왕실 대대로 내려오는 가구와 도자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여름궁전의 얼굴은 호화롭기 짝이 없는 대궁전(大宮殿)이다.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 버금가는 궁전으로 만들려했던 결과물이라고 보면 된다. '대궁전''대 폭포', 즉 여러 개의 분수가 있는 기념비적인 워터 피처(연못, 시냇물, 폭포 등을 갖춰 물가의 경치처럼 조경해 놓은 정원)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 워터 피처는 22길이의 중력으로 작동하는 펌프 시스템에 의해 물이 흐르게 되어 있다. ‘대 폭포64개의 조각상들이 물을 내뿜는 계단식 폭포로 이루어져 있다. ‘삼손이라고도 불리는 이 폭포에서 시작되는 운하는 페테르부르크에서 배들이 도착하는 핀란드만()까지 직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언덕위의 궁전에서 핀란드만 방향을 바라볼 때 나타나는 전경이 일품이다.

 

 

 

여름궁전의 백미(白眉)는 사방에 널려있는 140여개의 크고 작은 분수(噴水)들이라 할 수 있다. 관광객들의 발걸음도 자연스레 분수들을 따라 이동한다. 이 정원은 1704년 표트르 1세가 처음으로 착상했으며 1712~1725년 네덜란드식 바로크 양식(Dutch Baroque style)으로 설계되었다. 그리고 모든 분수는 표트르 대제가 직접 설계에 참여해 분수전문가들과 기술자를 지휘했다고 한다. 분수 하나 하나의 기능과 모양을 살펴보면 약 300년 전에 설계했다기에 믿기 어려울 정도로 참신하다.

 

 

 

 

표토르 대제가 처음 만든 이후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뒤를 이은 황제들이 제각각 하부 공원에 덧붙인 폭포와 분수는 물을 사용하여 즐길 수 있는 세계에서 가장 빼어난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공식 정원에 흩어져 있는 다양한 바로크 풍의 파빌리온(pavilion, 別宮)들은 르 블롱등의 작품으로 1714년부터 1726년에 걸쳐 지어졌다. 가장 두드러지는 건물은 동쪽에 위치한 스트렐나의 콘스탄틴 궁전(1797~1807, 안드레이 보로니킨 작)과 별장 궁전(1826~1829, 아담 메넬라프 작), 서쪽에 있는 로모노소프의 중국 궁전(1762~1768, 안토니오 리날디 작) 등이다.

 

 

공원의 끝에는 핀란드만이 있다. 물이 맑다 못해 투명한 바다이다. 궁전 앞 대 폭포에서 이곳까지 운하로 연결되니 황제와 귀족들에게는 이곳 또한 하나의 놀이터가 되었을 수도 있겠다.

 

 

핀란드만 쪽에서 바라보면 대궁전이 정면으로 보인다. 궁전 앞의 중앙 대폭포와 핀란드만은 운하(運河)로 연결시켜 놓았다. 이 운하는 황제와 귀족들이 배를 타고 핀란드만으로 나가기 위해 만들었단다.

 

 

작은 운하(運河)가 핀란드만()과 이어지는 중앙 대폭포는 이곳을 대표하는 명소다. 대궁전 아래쪽에 만들어진 이 폭포(瀑布)64개의 분수가 물을 뿜어대는 7개의 계단을 따라 흘러내리고, 그 주위에는 260개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신화에 나오는 황금빛 조각상들이 세워져 있다. 바로크 예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조각상들이다. 갑자기 사람들이 분수 곁으로 모여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기대에 가득 찬 눈초리로 분수를 바라보고 있다. 기다리기도 잠시. 순간 모든 분수에서 한꺼번에 물줄기가 뿜어져 나온다. 오전 11시 정각, 약속된 시간에 맞춰 음악이 흘러나오며 분수가 일제히 물을 뿜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대분수의 맨 아래 연못에는 황금빛 사자의 입을 찢고 있는 삼손의 동상(銅像)’이 만들어져 있는데 높이 20m의 물이 뿜어져 나온다. 표트르 대제가 스웨덴과의 포르트바 전쟁에서 승리한 날이 성 삼소니아(삼손)’의 기념일이었기 때문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성서(聖書)속의 영웅인 삼손의 동상을 만들도록 했단다. ‘사자는 스웨덴의 국가적 상징물(스웨덴 문장에는 사자가 표시되어 있다)이니 이는 곧 러시아(삼손)가 스웨덴(사자)을 제압한다는 표현이라 할 수 있겠다.

 

 

 

 

궁전은 핀란드만에서 점점 높아지는 테라스 모양의 지형을 이용하여 공원과 궁전을 짓고 수많은 분수와 조각상을 만들었다. 총면적이 1000ha에 이르는 부지는 궁전 뒤편이 높기 때문에 윗공원과 아랫공원으로 나뉘어 만들어졌다. 윗 공원을 언덕위에 지은 이유는 물의 낙차를 이용해 분수를 만들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중에서도 '예술의 진주'라고 불리는 아랫공원은 아름다운 분수와 가로수길, 소궁전 등이 배치되어 야외 조각전시장 같은 느낌을 준다. 대폭포는 반원형의 수영장으로 흘러내리고 수영장의 중앙에는 삼손 상(라이온 입을 찢는 삼손)과 아랫공원 최대의 분수가 있다. 이 대분수에서 시작하는 운하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배들이 도착하는 해변까지 연결되었다고 한다.

 

 

 

대폭포의 장관을 보는 것을 끝으로 여름궁전 투어는 끝을 맺는다. 궁을 빠져나오는데 뭔가가 허전하다. 그래 궁전 내부를 둘러보지 못한 것이다. 물론 궁전 내부에 들어가려면 별도로 입장권을 사야 한다. 그러나 돈이 문제는 아니다. 패키지여행의 특징인 시간제약이 내 발목을 잡았다. 돈이 들더라도 안에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다른 일행들과 따로 행동할 수 없어 대세를 따르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넓은 궁전을 극히 일부만 돌아보고 그 아름다움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게 아쉬웠으나 다음을 기약하고 안타까운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봤자 또 다시 찾아온 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겠지만 말이다.

 

 

페테르부르크 시가지로 돌아오면 또 다시 넵스키 대로(Nevsky Prospekt)’이다. 그만큼 시가지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아무튼 식당으로 가는 길에 대로 주변에 있는 성당들을 둘러보기로 한다. 가이드의 배려지만 안으로 들어가 볼 시간은 주어지지 않는다. 이것 또한 일정에 쫒기는 패키지여행의 특징이니 어쩌겠는가. 첫 번째 방문지는 페테르부르크의 랜드 마크(landmark)’ 역할을 하고 있는 성 이삭 대성당(St. Isaac's Cathedral)’이다. ‘몽페란드(A.Moontferrand)’가 설계한 이 성당은 1818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858년에 완공됐다. 공사기간만 40년이 걸렸으며 공사에 동원된 사람은 무려 50만여 명이나 된다고 한다. 성당 밑에는 24천 개의 말뚝이 박혀 있다는데, 원래 늪지대였던 이곳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서라고 한다. 성당 내부에는 저명한 22명의 화가들이 참여하여 완성한 103점의 벽화와 52점의 캔버스 그림, 그리고 12000여개의 조각으로 만들어진 62개의 독특한 모자이크 프레스코화가 전시되어 있다. 또한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아름다운 전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dome)의 크기가 세계에서 세 번째라는 이삭성당은 러시아 최대 규모의 성당으로 101.5높이의 황금 돔과 8개의 돌기둥, 그리고 화강암 벽돌로 쌓아올린 견고한 건축물이다. 길이 111.2m에 폭이 97.6m, 14천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성당을 장식하는 데는 대리석과 반암, 벽옥 등 40여 가지가 넘는 다양한 석재가 사용되었다. 100kg의 금이 들어갔다는 돔 부분은 물론 내벽을 황금과 대리석, 유리, 화강암 등으로 수놓아 종교를 인정하지 않던 소비에트 정부에서도 훼손하지 못했을 만큼 그 예술성을 인정받았다고 하며 산이 없는 이 도시에서 가장 높은 건물 중 하나다. 그래서 도시의 어느 곳에서도 눈에 쉽게 띈다고 한다. 참고로 이삭이라는 성당 이름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이삭이 아니고 러시아 정교회 성인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그 이삭의 날이 530일인데, 마침 표트르 대제의 생일도 같은 날이어서 결국은 이 황제를 위한 성당으로 건립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봐도 되겠다. ‘표트르 대제 성당이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는 이유일 것이다.

 

 

광장에는 니콜라이 1의 청동 기마상이 세워져 있다. 이삭성당은 1818알렉산더 1때 짓기 시작해서 니콜라이 1세가 죽은 지 3년이 지난 1858년에 완공되었으니 니콜라이 1세가 지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그의 동상을 성당 앞에다 세워놓은 모양이다. ‘니콜라이 1는 로마노프왕조가 배출한 차르 중 한사람으로써 파벨 1마리야 표도로브나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825년 형이었던 알렉산드르 1가 갑자기 죽자, 뒤를 이어 러시아 제국의 새로운 차르에 올랐다. 이후 그는 프랑스혁명으로 유럽의 기존 질서가 위협을 받자 유럽의 헌병이라는 별칭으로 불렸을 정도로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그 과정에서 그는 강력한 전제주의를 실현하는 한편 반대편에 있는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억압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그의 이러한 정책들은 1853년 발발한 크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면서 끝을 맺게 된다. 그리고 이런 충격은 1855년 그의 생애를 마감하게 만든다.

 

 

성 이삭성당의 맞은편에는 마린스키궁(Mariinsky Palace)이라는 아름다운 건축물이 위치하고 있다. ‘니콜라이 1의 청동 기마상이 있는 광장을 사이에 두고 이삭성당과 마주보고 있는 형세로 두 건축물은 너비가 99m에 달하는 파란색 다리로 연결된다. 1839년부터 1844년까지 러시아 제국의 궁정 건축가였던 안드레이 시타켄시네이데르에 의해 건설되었다는데, 궁전의 이름은 이곳에서 살았던 니콜라이 1세 황제의 딸인 마리아 니콜라예브나(Maria Nikolayevna)’ 여대공(女大公)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예술 아카데미의 총재를 지냈으며 예술계의 적극적인 후원자로 알려진다.

 

 

다음은 카잔성당(Our Lady of Kazan Cathedral)’이다. 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들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이 성당은 로마의 산피에트로 대성당을 본뜬 코린트식(네오클래식) 양식의 건물이다. 따라서 석고 대리석 94개를 이어서 성당 주위를 둘러싼 기둥들이 가장 눈길을 끈다. 성당은 스트로하노프 백작의 농노(農奴) 출신 건축가 바로니킨(A. Varonikhin)’에 의해 1801년부터 10년에 걸쳐 지어졌다.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건물 내부에는 19세기 초의 거장들이 그린 이콘(icon)이 있고, 특히 카잔의 마리아 상(Our lady of Kazan)‘이 유명하다고 한다. 성당이 완성된 후 러시아는 나폴레옹 전쟁(1812-1813)에서 승리를 거두었는데, 성당 안에는 그때 프랑스군에게서 빼앗은 107개의 군기와 승리의 트로피 등이 걸려 있다. 나폴레옹 전쟁 승리의 영웅 쿠투초프(Kutuzov) 장군의 장례식이 여기서 거행됐고 그의 무덤 또한 여기에 있다.

 

 

페테르부르크를 대표하는 ’3대 성당중의 나머지 하나는 그리스도 부활 교회(Church of the Savior on Spilled Blood)‘이다. ’알렉산드르 2의 암살사건이 일어났던 곳으로 피의 사원이라는 별칭으로도 더 잘 알려져 있다. 모스크바에 바실리 성당이 있다면 페트로부르크에는 피의 성당이 있다. 바실리 성당이 동화 속 아름다운 그림 같은 건물이라면 피의 성당은 애잔한 듯 화려함이 돋보이는 건물이다. 개혁주의 황제였던 알렉산더 2가 아나키스트(anarchist)의 폭탄 테러에 의해 시해(1881) 당했던 자리에 세워졌기 때문에 그런 느낌을 받았었는지도 모르겠다. 개혁주의 황제가 세상을 떠난 곳이어서 그런지 교회 주변은 낭만과 표현의 공간이다. 거리 악사, 거리 예술가들이 솜씨를 뽐내며 자신을 주장하는 곳이기도 하다.

 

 

점심 후에는 에르미타주 미술관(The State Hermitage Museum)‘으로 향한다. 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오래된 미술관 중 하나로 꼽히는 에르미타주 미술관이 아닐까 싶다. 관광객 중 일부는 이곳만을 들러보기 위에 페테르부르크를 찾기도 한다니 두말하면 뭐하겠는가. 박물관에 오는 관광객만 연 300만 명에 이른단다. 제정러시아의 황궁이며 황제의 평소 집무실이 되었던 겨울궁전(冬宮)’을 포함해 4개의 건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이곳은 그 자체로 페테르부르크 역사와 문화의 상징이다. 1764예카테리나 대제(Catherine the Great)’가 미술관 컬렉션의 기초를 마련하였으며, 외부에 공개되기 시작된 것은 1852년부터이다. 일반에 공개되기 전, 왕실이 겨울궁(Winter Palace)’ 옆에 작은 궁전을 지어 미술 컬렉션을 보관 전시했기 때문에, 그 궁전에 에르미타주(Ermitage: 불어로 은둔소라는 뜻)’라는 닉네임이 붙게 되었고, 이 별칭이 에르미타주 미술관의 기원이 되었다. 참고로 겨울궁전은 1754년부터 건축가 라스트렐리(Bartolomeo Francesco Rastrelli)가 세운 바로크 양식의 대표적인 러시아 건축물이며 에르미타주 미술관의 본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에르미타주 미술관은 겨울궁 뿐 아니라 소에르미타주, 구에르미타주, 신에르미타주, 에르미타주 극장, 예비 보관소(Reserve House) 6개의 건물들이 통로로 연결되어 있다.

 

 

 

로코코 양식으로 지어진 미술관은 입구 중앙 계단부터 화려하다. 영접홀인 문장관에는 8의 황금을 입혀 러시아의 부를 자랑했다. 미술관은 1050개나 되는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황제의 집무실인 표트르1세의 홀과 황금으로 도금이 되어있는 황금의 방‘, 그리고 황실역사와 연관이 많은 게오르기 홀‘, ’문장(紋章) ‘, 러시아의 국장인 쌍두 독수리 문장 아래 금으로 만든 대 옥좌가 위용을 자랑하는 영웅들의 방등 수많은 홀들이 줄줄이 나타난다. 하나 같이 화려하기 짝이 없다는 게 특징이다.

 

 

 

 

 

 

금박으로 장식된 내부에 눈이 부시다. 그러다가 문득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붙들어 매고 있는 진열품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황금으로 만들어진 나뭇가지 위에 공작새 한 마리가 올라앉아 있는 조형물인데 시계라고 한다. 그것도 정확하게 돌아가고 있는 시계이다. 이 시계는 영국에서 들어왔는데 17세기 후반 영국의 기계공학자 제임스 콕스(James Cox)‘가 제작한 것이다. 4시간마다 공작이 날개를 펴면서 울었으나 현재는 특별한 날에만 운다고 한다. 그보다 이 시계는 다른 의미가 더 중요하다. ‘예카테리나 2의 음탕하고 사치스런 면목을 여실히 드러내주는 물건인 것이다. 그녀에게는 50명이나 되는 첩(?)이 있었는데 그중 한명이 이 시계를 선물했다고 한다. 여왕과 만날 시간을 미리 입력해두어 그 시간이 되면 황금공작새가 화려하게 꼬리를 펼치면서 울어댔다고 한다.

 

 

에르미타주의 하이라이트는 회화관이다. 렘브란트와 루벤스를 비롯해 일리야 레핀, 마티스, 샤갈, 고갱 등의 작품들이 너무나 많이 전시되어 있어 이들이 모두 진품일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한다. 이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그림 가운데 하나는 루벤스의 로마식 자비(Roman Charity)’이다. 이 작품은, 로마 시대 죄를 지어 아사형에 처해졌던 아버지 시몬(Simon)이 갇혀있는 감옥에 면회 갔던 딸 페로(Pero)가 굶어 죽어가는 아버지를 위해 자신의 젖을 물리는 장면을 드라마틱하게 묘사했다. 에르미타주에서 만날 수 있는 루벤스의 또 다른 대작으로는 대지와 바다의 결합(The Union of Earth and Water)’이 있다. 이 작품은 높이 2미터가 넘는 대작으로 대지의 신과 바다의 신의 모습이 사람의 실물 크기로 묘사되어 있으며, 루벤스 특유의 격정적이며 강렬한 테크닉으로 신화의 세계를 표현해내고 있다.

 

 

아래 그림은 램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가 그린 제우스를 기다리는 다나야(1636년 작)‘란 작품이다. 1985615, 이 그림은 생을 마감할 뻔 했단다. 괴한에 의해 칼질을 당했다는 것이다. 현재의 그림은 20년간의 작업 끝에 복원(復原)이 된 것으로 손상된 부분을 색조를 짙게 칠하거나 또는 옅게 처리해서 완성시켰다고 한다. 아무튼 렘브란트의 다나에는 남자를 기다리는 따뜻한 연인의 그리움이 강조되어 있다고 한다. 사람들이 하도 많이 몰려있어 사진촬영에 실패했지만 렘브란트의 대표작은 사실 돌아온 탕자라고 봐야 한다. 성경에 실린 유명한 이야기로 방탕하게 살았던 아들이 거지꼴로 집에 돌아와 가족들과 재회하는 그림이다. 아들을 받아주는 아버지의 표정이 매우 인상적인데, 깊은 체념과 고독이 묻어있다. 렘브란트가 이 작품을 그린 시기는 죽기 9년 전인 1660년으로 아버지의 표정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듯 보인다.

 

 

이밖에도 신고전주의와 인상파, 신인상파 등의 작품들이 풍부한 것으로 유명하다. 2층의 일부 전시실 뿐 아니라 3층으로 이어져서 전시하고 있다. 20세기 초반의 근대 회화들은 3층의 남쪽 전시실에서 선보이고 있는데, 마티스(Matisse)를 비롯하여 입체파 화가들인 피카소(Picasso), 말레비치(Malevich), 칸딘스키(Kandinsky) 등의 작품들을 포함하고 있다. 근대 회화 갤러리 옆에 위치한 작은 전시실에서는 독일 낭만주의 회화들을 주로 전시하고 있는데, 특히 19세기 독일을 대표하는 화가 캐스퍼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의 주요한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한편 3층의 서관에는 중국, 인도, 몽고, 티베트 등 동양 미술품들도 전시되고 있다.

 

 

에르미타주 1층 전시실에서는 고대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다. 선사 시대, 고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그리스, 로마 유물 등이 전시되고 있다. 고대 유물 컬렉션에서는 다양한 그리스 유물들도 선보인다. 기원전 5세기의 고대 그리스 도자기, 고대 그리스 도시들로부터 출토된 유물들, 헬레니즘 조각과 각종 카메오를 비롯한 보석류 등도 다양하다. 다만 고대 유물 컬렉션에 포함된 대부분의 그리스 조각상들과 기념비들은 카피본인 경우가 많다는 점을 참조한다.

 

 

서쪽 전시실에서 전시하고 있는 12세기부터 15세기에 이르는 서유럽의 장식 미술품들을 둘러봤다면 이젠 서서히 미술관을 빠져나가야할 차례이다. 아직도 구경해야할 게 수없이 많겠지만 다음 일정이 우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1917년에 있었던 10월 혁명 후, 귀족들로부터 몰수된 수많은 미술품들이 에르미타주 미술관으로 유입되면서 컬렉션의 규모는 훨씬 더 커졌다. 현재 3백만 여 점의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에르미타주 미술관에 보관된 작품을 전부 감상하겠다는 욕심은 금물이다. 작품은 하나당 1분씩만 감상해도 17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하다니 말이다. 또한 미술관으로 사용 중인 건물의 둘레만도 2km나 되고, 350(혹자는 1050개라고도 한다) 개나 된다는 방을 어떻게 단번에 다 둘러볼 수 있겠는가.

 

 

 

박물관 창문 밖으로 아르미타주 광장이 내려다보인다. ‘궁전광장이라고도 불리는데 소비에트 연방을 탄생시킨 1917볼세비키 혁명이 일어났던 역사의 현장이다. 도시의 상징적인 곳으로 지금도 기념일마다 많은 인파로 넘쳐난다고 한다. 광장의 한가운데에 세워진 탑 모양의 구조물은 알렉산드르 기둥(알렉산드롭스카야 깔론나)’이다.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높이가 47.5m나 되는 이 기둥 전체가 하나의 화강암 덩어리로 만들어있다는 게 특징이다. 그 뒤에 보이는 건물은 참모본부이다.

 

 

다음은 오늘의 하이라이트(highlight)라 할 수 있는 유람선(遊覽船) 투어이다. 페테르부르크는 도심(都心)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돼 있는 만큼 골목이나 운하를 따라 걷기만 해도 여행지의 낭만을 느끼기엔 충분하다. 시간에 여유가 있다면 그 길을 따라 걸어보겠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기껏해야 하루뿐이니 차선책을 택할 수밖에 없다. 버스의 차창 너머로 넵스키대로를 구경한 다음, 유람선을 타고 북방의 베니스로도 불리는 도시의 대표적인 민낯 운하(運河)를 둘러보는 것이다. 옛 건물들의 안까지는 들어가 볼 수 없으나 꼭 보아두어야 할 건물들의 외관(外觀)이라도 가슴에 담을 수 있으니 가장 효율적인 투어가 아닐까 싶다.

 

 

운하에는 꽤 많은 유람선(遊覽船)들이 떠다닌다. 네프스키 대로 못지않게 페테르부르크 교통의 요지가 되고 있는 곳이 운하이다. 수많은 수로(水路)들로 이루어진 이 도시를 편하게 둘러보는 데는 유람선만한 게 없다. 페테르부르크를 찾는 관광객들의 필수코스로 자리 잡은 이유일 것이다. 유람선은 선실 외에도 선미(船尾) 부분에 의자가 놓여있으니 원하는 곳에 앉아 주변 경관을 눈에 담기만 하면 된다. 다만 밖을 원할 경우에는 선글라스나 모자를 챙겨가는 것을 잊지 말자.

 

 

배가 출발하자마자 가이드의 설명이 시작된다. 페테르부르크란 도시가 만들어지기까지의 고통스런 역사이야기다. 황제 즉위 이전 유럽을 돌며 여러 나라에서 문화와 기술을 익힌 표트르 대제는 러시아의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유럽을 향해 더 가까운 곳으로 옮기고 전 세계에 내세울만한 문화, 예술의 도시를 건설하고자 한다. 그래서 만들어진 도시가 페테르부르크이다. 1703년 표트르 대제에 의해 시작된 새 수도의 건설은 10년에 걸쳐 늪지대 위에 돌을 쌓아 올린다. 당시 이 아름다운 도시의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도시 건설에 필요한 커다란 돌을 지참하는 것이 시민권을 부여 받을 수 있는 조건이었다고 한다. 늪지데 도시를 만들었으니 그 공사가 순탄하게 진행되었을 리가 없다. 공사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고 한다. 그 시신들은 공사의 원활을 기한다는 명목으로 돌들과 함께 늪에 버려졌다. ‘북방의 베네치아’, ‘유럽을 향한 창’, ‘거룩한 베드로(표트르)의 도시등 수많은 수식어의 끝에 꼭 따라다니는 뼈 위에 세운 도시라는 불명예스런 오명(汚名)을 얻게 된 원인이다.

 

 

페테르부르크는 101개의 섬 위에 세워진 물의 도시이자 운하의 도시이다. 86개의 강과 운하, 101개의 섬이 365개의 다리(교외까지 포함하면 623)로 연결되어 있다. 운하와 강의 사이사이에 들어앉은 뭍에는 고풍스런 건축물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혁명의 혼란 속에서도 문화재는 물론이고 일반 건물에 이르기까지 페테르부르크 시대의 것을 그대로 보존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시 전체가 박물관인 듯한 느낌을 주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표트르대제와 예카테리나 2세를 거친 후 알렉산드르 1(1801~1825)가 다스리던 시기의 러시아는 유럽의 맹주로 떠오르게 된다. 당연히 건축 수요가 증가하게 되었고, 당시 전 유럽의 유명한 조각가와 건축가들이 페테르부르크로 몰려왔다. 그들의 참여로 유럽을 풍미하던 최고의 양식과 스타일로 변한 도시는 18세기 유럽의 초호화판 도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뾰쪽한 첨탑이 특징인 고딕양식(Gothic style)과 아케이드(arcade)에 반원형의 아치를 많이 사용한 로마네스크 양식(Romanesque style), 고딕양식의 구조에다 미적 요소를 가미한 르네상스양식Renaissance style), 그리고 르네상스양식이 진화한 바로크 양식(Baroque style) 등 중세유럽을 풍미했던 갖가지 건축기법들을 동원해 지은 옛 건물들이 줄줄이 늘어서있다. 하나같이 독특한 외형을 지닌 아름다운 건축물들이다.

 

 

유람선의 속도만큼이나 가이드의 입놀림도 빨라져 간다. 숫하게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나 약력들이 쏟아져 나와 혼란스럽지만 하나의 공통점은 있다. 이름의 끝에 이라는 말이 따라 붙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옛날 귀족들은 운하의 가에다 집을 짓는 게 유행이었던가 보다.

 

 

운하의 둑을 따라 고풍스런 건축물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수백, 수천 개의 건물이 모두 저마다 개성과 특색이 있어 보이다. 운하 자체를 살아있는 야외 박물관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겠다. 눈의 호사가 계속된다. 그래서 유람선 투어를 일러 페테르부르크 관광의 백미(白眉)라고 칭송하는가 보다.

 

 

 

유람선 투어 중에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의 주인공인 푸슈킨(Aleksandr (Sergeyevich) Pushkin, 1799-1837)의 생가(生家)를 만날 수 있었으나 사진촬영은 실패했다. 대신 가이드가 전해주는 얘기로 대체해 본다. 푸슈킨은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열두 살 때 페테르부르크 교외에 있는 학습원에 입학해 문학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래 생애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냈다고 한다. 이곳을 무대로 예브게니 오네긴’ ‘대위의 딸등 주옥같은 시편들을 창작한다. 열혈 청년 푸슈킨은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서도 가차 없는 메스를 들이댄다. 근대 러시아의 첫 혁명운동이라고 하는 데카리스트들의 반전제주의 투쟁(1825)과도 호흡을 같이 했음은 물론이다. 갑자기 가이드의 톤이 높아진다. 뭔가 불만이 있다는 표현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설명이 푸슈킨의 아내가 저질렀던 부정으로 치닫고 있다. 아직까지도 1837127일 오후 4시 반에 멈춰있다는 시계에 대한 얘기이다. 결투의 총성이 울렸던 시각이다. 시 외곽의 얼어붙은 대지에서 푸슈킨은 아내 나탈리아의 연인인 프랑스 사관생도 단테스와의 결투에서 상대방이 먼저 쏜 총알에 하복부를 맞고 쓰러졌다. 그리고 이틀 후 눈을 감는다. 그가 추구했다는 명예란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바람피운 마누라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서 결투를 벌였다니 어디 이게 말이나 되는가 말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면,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과연 그는 그가 남긴 싯귀대로 죽어갔을까? 이 도시를 상징하는 문호 도스토옙스키가 페테르부르크를 일러 고전과 퇴폐, 찬란한 아름다움과 우울함이 동시에 피고 지는 세속적인 도시라고 한 표현이 귓가를 맴돈다.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는 내 심정과 거의 유사했기 때문이다.

 

 

아래 주황색 건물은 파벨 1가 지은 미하일롭스키(Michailovska) 궁전이다. ‘예카테리나 여제표트르 3사이에서 태어난 황제인 파벨 1는 이 자리에 있던 엘리자베타 여제의 여름궁전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인 예카테리나 여제의 권력에 대한 야망 탓에 파벨 1세는 42세의 나이가 되어서야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는데, 5년 남짓한 통치기간 중 자신이 태어난 엘리자베타 여제의 여름궁전을 허물고 현재의 미하일롭스키 궁전을 건축했다. 그는 통치 5년 만에 귀족들의 궁정반란으로 살해된다. 그가 살해된 곳 역시 이곳이니 불운한 황제였던 파벨 1세의 생과 사의 역사가 이루어진 곳이라고 할 수 있겠다. 러시아 혁명 이후 기계공학대학이 이곳에 있었기 때문에 한때 기계공대궁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현재는 러시아 박물관 산하의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지어진지 얼마 되어 보이지 않는 건물도 보이긴 한다. 무슨 용도로 쓰이는지는 모르겠다.

 

 

네바강에 가까워지자 왼편에 넓고 푸른 숲이 나타난다. 페테르부르크 시민들의 휴식처인 여름 정원이다. ‘표트르 대제가 살던 소박한 2층짜리 여름 궁전도 이 정원 안에 들어있다. 궁전 안의 실내 장식과 가구가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일반인들에게 공개된다고 하니 시간이 날 경우 한번쯤 들러볼 일이다. 벽 하나를 가득 메울 만큼 커다란 시계도 보게 될 것이다. 아무튼 공원에는 250개나 되는 대리석 조각상(상당수는 그리스의 신화를 모티브)들과 가로수길, 그리고 연못이 조화롭게 잘 배열되어 있다.

 

 

네바강에 들어서자 반가운 풍경 하나가 시야(視野)에 잡힌다. ‘삼성기아자동차의 광고판이다. 가이드의 말로는 두 회사가 이루어낸 노력의 결과란다. 러시아의 경제가 어려웠을 당시 이곳 페테르부르크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어느 누구에게도 내어주지 않던 자리에 광고판을 내걸 수 있게 해주었단다. 그래 대한민국 만세다. 저런 기업들이 있었기에 우리나라가 세계 10대 교역국에 자리 잡을 수 있었을 게다.

 

 

네바 강의 강폭이 넓어지는 곳에 이르면 건너편 저 멀리에 황금빛 첨탑이 나타난다. ‘표트르 대제가 스웨덴 군대를 방어하기 위해 네바강 유역에 구축한 페트로 파블로스키 요새(要塞)’이다. 네바강의 하구 델타지대에 위치한 토끼섬에 지어진 요새로 1706년부터 약 35년이 걸려 완성되었다. 요새를 둘러싼 두꺼운 벽(높이 12미터, 4미터)에는 5개의 문이 만들어져 있다. 6개의 성채 가운데 네바 강으로 향한 나리시킨스키 성채에서는 매일 정오를 알리는 공포를 쏜다고 하니 참조한다. 그건 그렇고 요새가 만들어진 뒤 정작 스웨덴 군대는 단 한 번도 쳐들어온 적이 없었고, 이후 요새는 정치범수용소로 사용됐다고 한다. 도스토예프스키, 고리키, 바쿠닌, 트로츠키 등이 이곳을 거쳐 가면서 이 요새는 러시아의 바스티유라는 별명이 붙었다. 감옥(監獄)으로 변한 요새의 첫 죄수는 아이러니하게도 표트르 대제의 아들 알렉세이 황태자였다. 죄명은 반역죄, 아버지의 정책에 반기를 들고 반란을 모의했다는 것이다. 표트르는 생존의 위협을 받으면서 황위에 올랐다. 외가는 멸문지화를 당했다. 그리고 그는 군인으로 반생을 전장에서 보냈다. 강력한 군주(君主)였지만 대신 남을 잘 믿지는 못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전쟁보다 평화를 추구했던 황태자는 유약했다. 계속되는 아버지의 질책에 두려움을 느낀 아들은 결국 러시아로부터의 탈출을 감행한다. 그러나 빈을 거쳐 나폴리까지 도망했지만 결국에는 러시아로 끌려올 수밖에 없었다. 표트르는 결국 황태자를 포기한다. 그리고 황제는 황태자를 반역죄로 가뒀다. 다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스토리일 것이다. ‘영조와 사도세자얘기 말이다. 또한 표트르의 계획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와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의 수원화성은 새 시대를 향한 야망의 결과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뾰쪽하게 솟아오른 황금빛 첨탑은 같은 이름(파블로프스크)의 성당이다. 예수의 제자인 베드로와 바울을 기념하는 교회로 요새의 이름은 이 건축물에서 따왔다고 전해진다. 성당은 스위스인 건축가 도메니코 토레지니에 의해 1712년부터 건설이 시작되어 1733년에 완성되었다. 그 후 종루에 피뢰침이 없어서 몇 번의 화재를 입었는데, 1756년에는 첨탑과 네덜란드 시계가 불타 버린 일도 있다. 1850년대에는 높이 121.8미터의 새로운 첨탑이 세워져 페테르부르크 최고의 건축물이 되었다. 20년이나 걸려서 만든 만큼 매우 아름다운 건축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는 역대 로마노프 왕가의 황족들이 묻혀있다. ‘황제의 성당인 셈이다. 황제의 성당답게 넓은 공간에 충분한 빛을 받아들이며 지주, 벽기둥, 대리석으로 된 벽과 다양한 색채의 아치, 그리고 금박을 입힌 석고상과 갖가지 빛깔의 키르시탈 샹들리에 등 어느 것 하나 예술품이 아닌 것이 없다고 한다. 특히 이코노스타시스(iconostasis, 聖像 칸막이)는 떡갈나무를 조각하고 금박을 입혀 장엄함을 강조하고 있단다.

 

 

 

유람선은 토끼(자야치) 바실레오스트롭스키 섬을 이어주는 트로이츠키 다리를 통과한 후 조금 더 올라가다가 방향을 튼다. 더 이상은 볼만한 게 없다는 얘기일 것이다. ‘트로이츠키 다리1897-1903년에 프랑스의 에펠에 의해 건설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 구스타프 에펠(Alexandre Gustave Eiffel)’이다. 이 다리가 철제(鐵製) 다리라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아무튼 이 다리는 페테르부르크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지난 2003년이 300주년이었다니 벌써 100년이 훨씬 넘은 셈이다.

 

 

트로이츠키 다리 근처에는 범선(帆船)이 한 척이 정박해 있다. ‘페트롭스키 호위함을 복제(複製)해 만든 것인데, 현재 수상 레스토랑인 '블라고다티(Благодать)'가 문을 열고 있단다. 가이드의 말로는 조금 더 가면 주요 역사유적 가운데 하나인 표트르 대제의 목조 오두막집이 있다고 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최초로 지은(1703) 건물인데 표트르는 이 오두막에서 8년 동안을 살면서 수도 건설에 잠심몰두(潛心沒頭)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오두막에 전시된 소박한 거실과 침실, 서재와 식당, 그가 직접 만든 보트 등 유물은 보는 이로 하여금 숙연하게 만든단다. 마지막으로 가이드는 이 오두막이 덮개로 덮여있는데다 정원으로 둘러싸여 있어 울타리 뒤에 있는 청동흉상에 주목하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치기 쉽다는 주의사항까지 전해준다.

 

 

높이 32m로스트랄 등대 (Rostal Column)’가 있는 바실레오스트롭스키 섬(Vasilievsky Island)‘, 로스트랄이란 라틴어로 뱃머리라는 뜻이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해전에서 승리를 기념하여 원주를 세우고 포획한 배의 뱃머리로 기둥을 장식하였던 것에서 그 이름이 유래 되었는데 러시아도 이를 모방하여 해전의 승리를 기념하여 세운 등대다. 러시아가 바이킹 왕국으로 명성을 떨치던 과거 스웨덴과의 해전시 침몰시킨 스웨덴 뱃머리를 잘라다가 등대에 붙여놓은 것이다. 이는 러시아의 국가적 자부심의 표증이자 세계 최강으로 군림하던 바이킹 해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였음을 기념하는 등대다. 등대를 둘러싼 공원과 바다가 만나는 이곳은 신혼부부들의 화보 촬영이나 관광객들 그리고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사랑받고 있다. 돌아오는 뱃머리에 서니 자연스레 우리의 한강과 비교가 된다. 네바강은 우리의 한강처럼 물이 많이 흐른다. 강폭도 무척 넓어서 건너편의 건축물들이 조그맣게 보일 정도이다. 한강변에도 저런 유적들이 많았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한강도 나름대로의 장점은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름다운 둔치와 주변의 녹지들을 잘만 포장하면 훌륭한 눈요깃감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성냥갑을 쌓아놓은 것 같은 삭막한 풍경의 아파트들이지만 이것 또한 관광용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도 찾아보면서 말이다.

 

 

하룻밤을 머물렀던 옥타브리스카야 호텔(Oktiabrskaya hotel)’, 졸지에 호텔이 변경되는 변고가 생겼다. 예약되어 있던 호텔에서 방을 내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지역행사로 인해 손님들이 몰려온 탓이란다. 백야(白夜) 기간 동안 이곳 페테르부르크에서 축제(祝祭)가 열린다고 하더니 그 정보가 옳았던 모양이다. 그나저나 러시아는 자본주의 시장체제로 들어오려면 아직도 멀었나 보다. 우리나라라면 이미 예약을 해놓은 손님들을 어떻게 내쫓을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옮겨간 곳이 ‘ibis hotel', 다음 날 우린 또 다시 짐을 싸야만 했다. 또 다른 호텔로 옮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찾아든 것이 옥타브리스카야 호텔(Oktiabrskaya hotel)’이다. 옮겨 다녀야 하는 불편에도 불구하고 두 호텔의 시설은 깔끔했고 제공되는 서비스도 좋았다.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다는 입지여건도 장점 중의 하나였다. 특히 옥타브리스카야 호텔은 손가락을 치켜세워 주어도 괜찮을 것 같다. 방까지 널찍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일정상 6시 경에 체크아웃(check out)을 해야만 하는 우리에게 제공되는 도시락은 그동안의 여행에서 받아보지 못했던 훌륭한 내용물들이 포장되어 있었다.

 

 

 

에필로그(epilogue), 커튼(curtain)을 꼭 닫고 자라는 가이드의 당부가 반복된다. 아예 두 겹의 커튼을 모두 펼쳐놓으란다.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빛을 완전히 차단하라는 것이다. 9시 경에 해가 떨어지는데 그 이후에도 어둠이 찾아오지 않아 자칫 커튼이라도 열어둘 경우엔 사방이 훤해서 잠을 이를 수가 없단다. 이게 바로 그 유명한 백야(白夜) 현상이다. 매년 67월이면 나타나는데 우리가 찾아온 지금이 마침 621일이 아니겠는가. 백야가 극에 달한다는 하지(夏至)가 코앞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