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두바이, 스위스, 이탈리아
여행일 : ‘16. 3. 12(토) - 20(일)
일 정 :
○ 3.13(일) : 두바이
○ 3.14(월) : 스위스(루체른)
○ 3.15(화)-19(토) : 이탈리아(밀라노, 피렌체, 로마, 소렌토, 폼페이, 나폴리, 베네치아, 볼로냐)
여행 여섯째 날 : 물의 도시, 베네치아(Venezia, Venice)
특징 :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베네치아는 이탈리아 북부에 위치한 여의도 면적의 1.5배 크기로 1500여 년 전에 갯벌 위에 세워진 물의도시다.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뻗은 51㎞ 정도 되는 초승달 모양의 석호(潟湖, lagoon) 중심부에 자리 잡은 116개의 섬들이 409개의 다리들로 연결되어 있다. 석호 주변으로 145㎞ 반경까지 포함하는 지금의 도시에는 원래 도시가 있던 섬들을 제외한 주요 섬 10개와 메스트레(Mestre) 및 마르게라( Marghera) 같은 산업이 발달한 본토 자치도시 2개가 포함된다. 베네치아의 역사는 567년 이민족에 쫓긴 롬바르디아의 피난민이 만(灣) 기슭에 마을을 만든 데서 시작된다. 6세기 말에는 12개의 섬에 취락이 형성되어 리알토 섬이 그 중심이 되고, 베네치아 번영의 심장부 구실을 하였다. 비잔틴의 지배를 받으면서 급속히 해상무역의 본거지로 성장하여 7세기 말에는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고, 도시공화제(都市共和制) 아래 독립적 특권을 행사하였다. 13세기 ‘4차 십자군 전쟁’ 이후 세력을 급속히 확대, 중계무역으로 부를 축적하다가 15세기에는 밀라노, 피렌체와 더불어 이탈리아를 장악할 정도로까지 성장했다. 하지만 1797년에 베네치아는 자치권을 잃게 되는데 나폴레옹이 침략해 베네치아를 오스트리아에게 넘겨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다 1866년에야 베네치아는 이탈리아로 다시 돌아왔다. 문화적으로 살펴보면 베네치아는 주로 비잔틴 양식과 북쪽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으로 고딕 양식, 그리고 이탈리아 중부에서 영향을 받은 르네상스 양식이 혼재되어 있는 곳이다.
▼ 아침 일찍 로마를 출발했지만 점심때를 넘기고 나서야 베네치아에 도착한다. 오는 길, 아름다운 구릉(丘陵)지대를 지나왔다. 구릉의 높은 지점마다 잘 지어진 집들이 들어앉아 있었다. 조금 의외이지만 살림이 부유한 사람일수록 구릉의 고지대에 거주하는 게 일반적이란다. 도로의 양측은 대부분 경작지이다. 포도밭이 보이는가 하면 올리브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그렇게 달려온 버스는 ‘자유의 다리’를 건너더니 널따란 주차장에다 우릴 내려놓는다. 베네치아는 차량통행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배를 타고 들어가야만 한단다.
▼ 투어의 시작은 수상택시에 오르면서 시작된다. 베네치아의 교통은 주로 수로(水路)를 이용한다. 아니 수로 하나뿐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수상 택시와 수상버스인 바포레토(Vaporetto), 적색연화선, 경찰쾌속선, 유명한 수동식 곤돌라 등 모든 형태의 수상 운송기관이 운하를 정기적으로 오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여행객들이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이중 수상택시와 버스, 그리고 곤돌라이다. 그중 하나인 수상택시를 타고 운하를 따라 늘어서있는 옛 건축물들을 구경하려는 것이다.
▼ 일상과 전혀 다른 낯선 풍경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차 없는 거리’라니 너무 이질적이지 않는가. 요즘 환경운동의 일환으로 하고 있는 일회성 행사도 아니고 말이다. 아무튼 베네치아의 유일한 교통수단은 걷던지 아니면 곤돌라나 수상택시 또는 수상버스를 타야만 한다. 쓰레기수거차, 엠블런스, 소방차도 모두 물 위를 달리는 배가 담당한단다. 넓은 운하길 좌우에는 귀족들이 살던 저택과 성당 등 화려한 건축물들이 즐비하다. 타임머신을 돌려 천년고도 베네치아로 돌아온 느낌이다. 그리고 그 속에 들어가 역사 속의 인물들과 대화를 시도해 본다.
▼ 수상택시는 중심 수로(水路)인 ‘그란데 운하(Canale Grande)’를 따라 달린다. 베네치아를 두 부분으로 나누는 이 운하는 산마르코 대성당에서 산타키아라 교회까지 자연 그대로의 수로를 따라 S자를 뒤집어놓은 모양으로 뻗어 있다. 길이는 약 3㎞, 폭은 30~60m이며, 평균수심은 5m 정도이다. 미로를 이루는 작은 운하들과 여러 곳에서 연결된다. 운하 양쪽으로는 12~18세기 대리석 저택과 궁전과 성당들, 아름다운 역사적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 첫 번째 만남은 베네치아대학(Università Ca' Foscari Venezia)이다. 도르소두로(Dorsoduro)지구에 있는 ‘카 포스카리’를 캠퍼스로서 사용하고 있는 국립대학이다. 생각보다는 규모가 작아 보인다. 살짝 무시하는 마음이 생길 정도이다. 하지만 종합대학인데다 8개의 학부가 운용되고 있으며, 재학생 또한 약 19,000명에 이른다니 외관만 보고 평가할 일은 아닌 듯하다. 참고로 이 대학은 JTBC 프로그램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에 출연하는 알베르토의 모교이다. 그리고 이 대학에는 ‘한국어과’가 정식으로 설치되어 있다고 한다.
▼ 운하(運河)의 주변에는 옛 건물들이 빼곡히 늘어서 있다. 그리고 그 건물들은 나름대로의 독특한 개성미를 자랑한다. 베네치아에 역사적·예술적으로 중요한 대저택과 옛 주택들이 450여 채나 남아 있다고 했는데 저 건물들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원래의 가문(家門)이 아직까지 보유하고 있는 것들은 거의 없단다. 지금은 돈 많은 일반인들에게 팔려 사무실과 골동품상점으로 변해있으며 일부는 호텔로 개조되어 명성을 얻고 있다고 한다.
▼ 모든 건축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발밑까지 바닷물이 차올랐다. 마치 바다 위에 떠있는 수상가옥(水上家屋)을 보고 있는 느낌이다. 오로지 베네치아만이 보여줄 수 있는 풍경이 아닐까 싶다. 도시 전체가 말뚝이나 돌받침대 위에 세워진 곳이 이곳 말고 또 어디 있겠는가. 저들은 갯벌의 약한 지반을 다지기 위해 수백만 개의 백향목 나무말뚝을 박은 후, 그 위에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들이 일구어 낸 삶의 터전을 보면서 ‘인간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란 궁금증을 갖게 된다.
▼ 얼마 전 EBS-TV에서 방영된 ‘세계 테마기행’의 ‘르네상스 기행’ 편에서 여행 안내자로 나선 김상근 연세대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피렌체에 ‘메디치 가문’이 있었다면 베네치아에는 ‘단돌로 가문’이 있었다.‘고. 이 작은 베네치아를 지중해의 해상무역을 장악하는 거대한 무역국가로 변모시키는 역할을 한 가문이라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이 가문은 13세기의 ’제4차 십자군 원정‘에 참전해서 콘스탄티노플을 점령, 어마어마한 전리품을 베네치아로 가져왔다. 그리고 유럽, 비잔틴 제국, 동방의 이슬람을 상대로 중계무역을 벌여 부를 축적, 베네치아를 부강한 해상왕국으로 만든다. 베네치아는 15세기부터 이탈리아를 장악해간다. 1450년 전성기에 베네치아 상인의 배는 3천여 척, 곤돌라가 2만대에 달했고 예술, 건축 등등 각 분야에서 르네상스가 화려하게 꽃피어 난다. 그리고 1797년 나폴레옹의 침입에 의해 자치권을 잃을 때까지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 얼마쯤 갔을까 ‘산 시메온 피콜로 성당(Chiesa di San Simeon Piccolo)’이 나타난다. 기차로 도착하는 모든 여행객들에겐 베네치아의 첫인상으로 각인되는 이 성당은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대리석 건물 자체가 사람들의 상상을 압도한다. 그나저나 이 성당은 ‘산타 루치아’역 앞 광장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곳에 위치하기 때문에 수상 버스를 탈 경우 가장 먼저 보게 된다고 했다. 그런데 왜 우리 눈앞에는 이제야 나타났는지 모르겠다. 아마 수상택시를 탄 게 그 이유가 아닐까 싶다. 지금 이 배는 가이드가 안내하고 싶은 코스대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신고전주의 양식의 이 건축물은 1718년에 무너져서 1738년에 다시 지은 것이란다. 그런데 이 건축물을 자세히 보면 좀 기형적으로 돔이 거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폴레옹이 베네치아에 도착해서 이 돔을 보고 감탄했다고 했는데, 그의 눈에는 기형적인 것이 오히려 더 아름답게 보였던 모양이다.
▼ 바다에도 ‘교통 신호등(信號燈)’이 있다고 하면 이를 믿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지 의문스럽다. 그런데 그런 상황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거리 운하에 신호등이 당당하게 내걸려 있는 것이다. ‘고정관념을 깨라’는 말이 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말이지만 그저 흘려보내기 바빴는데 오늘 따라 그 말이 절절하게 다가온다. 베네치아는 118개의 섬들이 400개의 다리로 연결되고 있는 도시이다. 작은 섬들로 이어지다 보니 골목길들은 차량이나 수레가 지나다닐 수 없을 정도로 좁고 미로(迷路)처럼 복잡하다. 그래서 발달한 것이 뱃길, 즉 운하(運河)이다. 교통수단 또한 자동차 대신에 크고 작은 선박들이 이용된다. 운하에서도 속도는 엄격히 제한된다. 이는 배가 고속(高速)으로 지나간 뒤에 생기는 물결에 의해 작은 배들이 전복되는 사고를 막기 위한 것이다. 속도를 줄인다고 해서 충돌사고까지 막을 수는 없다. 특히 이런 사거리에서는 말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육지의 도로에서나 볼 수 있었던 교통신호등이 바다에까지 출장을 나온 것으로 보면 될 것 같다.
▼ 아래 사진은 소방서 건물이다. 그런데 소방차는 보이지 않고 도크에 정박된 배만 보일 따름이다. 이런 게 바로 베네치아만이 갖을 수 있는 이색적인 풍경일 것이다. 베네치아는 뱃길, 즉 운하(運河)가 발달되어 있다. 교통수단 또한 크고 작은 선박들이 이용된다. 그러다보니 소방장비도 배를 이용한다. ‘오토 폼파 라구나레(APL : Auto Pmpa Lagunare)라 불리는 소방선(消防船)이다. 낯설게 들리겠지만 우리나라의 소방차쯤으로 보면 되겠다.
▼ 모든 건물들은 바닷물과 맞닿아 있다. 인간의 의지가 만들어낸 뭍(육지)이기 때문이란다. 훈족에 쫓겨 들어올 당시만 해도 이곳은 여섯 개의 자연 섬이 있었고 아주 작은 취락구역이 있었을 뿐. 석호로 이루어진 거대한 뻘 지역이었다. 베네토 사람들은 이곳에서 기적을 만들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썰물 때 물막이용 말뚝을 촘촘히 박는 것이었다. 박히는 깊이만 해도 5미터나 되었다니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게다. 다음은 갇힌 물을 퍼낸다. 그리고 물이 빠진 자리에는 모래와 자갈, 흙을 채워 넣는다. 그렇게 첫 번째 공정이 끝나면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 말뚝을 박는다. 그리고 앞에서 했던 공정들이 다시 반복된다. 그런 일련의 공정을 반복해가며 만들어 낸 도시가 바로 베네치아인 것이다.
▼ 저 멀리 ‘리알토 다리(Ponte di Rialto)’가 보인다. 베네치아의 발원지이자 중심지에 놓인 다리로 베네치아의 ‘랜드 마크(landmark)’이다. 그리고 19세기까지만 해도 대운하를 가로지르는 유일한 다리였다. 원래는 나무다리였는데 1590년 지금의 돌다리로 개축(改築)했단다. 아치형 대리석으로 만든 이 다리의 위는 지붕을 씌운 회랑(回廊)을 두 줄로 들여 가게들을 들여앉혔다. 다리 양쪽엔 가게와 카페, 음식점, 시장이 밀집한 쇼핑가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라면 차승원이 먼저 떠오를 것이다. 치즈가 듬뿍 든 스파게티를 먹고 속이 니글거린 그가 ‘순창아~~’를 외치며 ‘순창 고추장’을 찾던 CF를 찍었던 곳이 바로 저곳 ‘레알토 다리’이기 때문이다.
▼ 베네치아는 자연을 극복하고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낸 도시 중 하나이다. 베네치아의 과거와 현재는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었다. 끝없는 외부의 침입에 도전해야 했으며 물위에 살면서도 물 부족을 겪어야만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현실은 지반 침하와 해수면 상승 때문에 도시 전체가 바다 속으로 가라앉고 있다는 것이다. 2030년이면 사람이 살 수 없게 될 거라는 비관적 전망까지 나온단다. 이에 정부가 침수방지를 위해 섬과 섬을 연결해 수위조절을 하는 ‘모세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단다. 하지만 천문학적으로 돈이 들어가는 탓에 별 진척이 없다고 한다. 최근엔 도시 밑에 바닷물을 주입해 도시 전체를 들어 올리는 아이디어까지 나왔다고 한다. 도시 주변 석호 바닥에 10년 동안 깊이 600~800m되는 우물 형태의 관 12개를 심고 이 관으로 바닷물을 주입하면 20~30cm쯤 도시가 올라간다는 것이다. 국제연합 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 역시 발을 벗고 나섰다. 과학적·기술적 방법을 동원해 유서 깊은 베네치아를 구하자는 범세계적인 운동이다. 그리고 도시가 범람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고안된 여러 방법이 표본실험에 들어갔다고 한다.
▼ 왼편에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Gallerie dell’Accademia)‘이 보인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 세계 최고(最古)의 비엔날레, 역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권위의 국제영화제, 곤돌라와 수상가옥이 연출하는 이국적인 풍경 등등, 이는 베네치아(Venezia)를 수식하는 단어들이다. 인구 30만이 넘지 않는 작은 도시가 세계적으로 알려진 이유는 문화의 힘이 아닐까 싶다. 200년 넘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는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도 그중 하나일 테고 말이다. 이곳은 중세에서 르네상스를 거쳐 18세기에 이르기까지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활동한 이탈리아 화가들의 작품을 주로 전시하고 있다고 한다. 티치아노, 조반니 벨리니, 베로네세, 틴토레토, 젠틸레 벨리니 등 베네치아 화가들의 ‘사원’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란다.
▼ 저만큼에 ‘살루테 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della Salute)’이 나타난다. 물 위에 떠있는 성당의 화려함과 그 규모가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만든다. ‘카날 그란데(Grand Canal)’와 베네치아 석호 중 하나인 ‘바치노 디 산마르코’ 사이에 누워있는 좁은 손가락 모양의 땅 위에 세워진 성당이다. 8각형의 아름다운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17세기의 건축가 론게나(Baldassare Longhena)가 건축한 것이란다. 살루테(Salute)는 건강과 구원을 의미하는 말로, 성당 이름에 살루테라는 단어가 들어간 것은 이 성당이 흑사병이 물러간 이후에 지어진 건축물이기 때문이다. 성당의 내부에는 다양한 걸작들이 있는데, 특히 티치아노(Tiziano Vecellio)의 초창기 작품인 ‘성 마르코와 성인들’, 천장화 ‘카인과 아벨’, ‘가나의 혼인’과 같은 작품을 볼 수 있다고 한다.
▼ 배(수상택시)는 베네치아의 백미(白眉)라는 ‘산마르코 광장’의 앞 선착장에다 우릴 내려놓는다. 선착장에 내리면 운하 건너편에 ‘산 조르조 마조레 성당(Chiesa di San Giorgio Maggiore)이 나타난다. 1559~1580년 건축가 안드레아 팔라디오(Andrea Palladio)가 지은 것으로, 내부에 틴토레토(Jacopo Robustr Tintoretto)의 ‘최후의 만찬’을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일반 여행자들은 ‘산 마르코광장’을 조망하기 위해서 저곳을 찾는다. 종탑에서 바라보는 ‘산 마르코광장’의 전경이 가장 아름답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론 르네상스 문화를 찾다가 이곳을 들른 사람들도 있다. 미켈란젤로가 설계했다는 도서관이 저곳에 있기 때문이다.
▼ 선착장에서 내리면 ‘산 마르코광장’이다. 하지만 우린 곧장 통과해버린다. 곤돌라(gondola) 체험을 위해서이다. 베네치아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교통수단인 곤돌라는 ‘흔들리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곤돌라는 18세기에 와서 표준화되었다. 길이 10.75미터에 너비가 1.75미터이고 색상은 검은색이다. 노는 3미터이다. 곤돌라는 오른쪽으로 기울어지게 만드는 것이 특징인데 왼쪽에 서서 노를 젓는 오른손잡이의 곤돌리에와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라고 한다.
▼ 곤돌라를 모는 사공은 ‘곤돌리에(Gondolier)’라고 부른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단순한 뱃사공은 아니니 유념(留念)할 일이다. 곤돌리에가 되기 위해서는 곤돌라를 모는 조종 능력을 갖추는 것 외에 영어, 역사, 문화 등 다방면에 걸친 자격시험을 통과해야만 한단다. 관광객을 매료시킬 만한 노래 실력 또한 필수. 베네치아 관광 문화 전도사의 자부심을 가슴에 품은, 진정으로 낭만을 아는 사람들이란다. 곤돌라는 어디서든 탈 수 있다. 일정한 기본요금이 정해져 있지만 타기 전에 미리 가격 흥정을 해두는 게 유리하단다. 우리 같은 패키지여행자들은 그럴 필요도 없겠지만 말이다.
▼ 곤돌라는 흔들리는 물결에 몸을 맡긴다. 곤돌리에가 기다란 노로 물결을 뒤로 밀어주면 곤돌라는 앞으로 쑤욱 나아간다. 좁은 운하 터널을 지나면 양쪽으로 빼곡히 들어선 서민주택들이 시간을 중세로 돌아가게 만든다. 다리 아래를 지날 때는 재미있는 풍경이 연출되기도 한다. 다리가 있는 풍경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 우리와는 달리, 다리 위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탄 곤돌라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는다. 서로가 서로의 풍경이 되어주는 것이다.
▼ 모세혈관처럼 도시 곳곳에 뻗어 있는 작은 운하들은 수상도시의 매력을 더해준다. 작은 운하 옆에는 어김없이 레스토랑이 있으니 운하를 바라보며 식사를 즐기는 것만으로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 곤돌라 투어가 끝나고 다시 ‘산 마르코광장’으로 되돌아온다. 광장에 들어선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99m 높이의 종탑(鐘塔. Campanile di San Marco))부터 찾는다. 베네치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라 조망(眺望)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시가지가 한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멀리 북쪽의 이탈리아 본토와 남쪽의 아드리아해까지도 눈에 들어온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난 조망을 포기하고 주변 관광을 택한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늘어선 줄의 맨 끝에 서서 이제나저제나 줄이 줄어들기만 기다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종탑은 9세기 무렵에 세워졌다. 바닷바람에 손상을 자주 입어 몇 차례 재건했다. 1902년에 무너진 것을 1912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지었다.
▼ 집사람이 웃는다. 한 점의 티도 없는 해맑은 모습이다. 멀리 떠나있다 보니 잡다한 일상의 걱정들까지도 훌훌 떨쳐버렸나 보다. 언젠가 웃음에 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영국의 한 의과대학에서 발표한 '어릴 때는 하루에 평균 400~500번을 웃다가 장년이 되면서 하루 15~20번으로 줄어든다.'는 웃음에 관한 연구결과이다. 그런데 웃음을 잃어가는 가장 큰 이유는 경험에서 오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염려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인간이 고민하고 염려하는 일들 가운데 타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과연 얼마나 될까? ‘노먼 빈센트 필(Norman Vincent Peale)’ 박사는 '쓸데없는 걱정'이란 글에서 어느 연구기관의 조사를 인용하여 인간의 걱정에 대하여 분석한 결과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우리가 하고 있는 걱정들은 ‘절대로 발생하지 않을 사건에 대하여 것이 40%이고, 이미 일어난 사건에 대한 것이 30%, 별로 신경 쓸 일이 아닌 작은 것에 대한 것이 22%,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사건에 대한 것이 4%’라는 것이다. 결국 우리들이 해결해야 할 진짜 사건에 대한 걱정은 겨우 4%에 불과하다는 얘기이다. 결국 사람들은 96%의 불필요한 걱정 때문에 기쁨과 웃음, 그리고 마음의 평화까지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집사람은 지금 96%의 필요 없는 걱정들을 내려놓았다는 얘기가 된다. 그게 비록 잠시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왕에 내려놓았으니 까짓 거 다시 집어들 필요가 있을까? 그냥 오래오래 저렇게 즐겁고 행복한 얼굴로 살아갔으면 좋겠다.
▼ ‘산 마르코성당(Basillica San Marco)’의 앞에 선다. 마르코성인(San Marco)의 유해(遺骸)가 모셔진 성당이다. 마르코(Marco)는 마가의 이탈리아식 이름인데 마가복음을 쓴 성인(聖人)이다. 로마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체포했을 때, 마가는 벌거벗은 채 도망을 친 전력이 있다. 마가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에서 교회활동을 하며 아프리카에 최초로 기독교를 전했다. 마가는 68년 알렉산드리아에서 순교한다. 이로부터 수백 년 뒤, 베네치아의 상인들이 2인 1조가 되어, 당시 무슬림(Islam)이 지배하던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마가의 유해를 훔쳐온다. 그들은 완벽 절도를 위해 무슬림들이 꺼리는 돼지고기 밑에 유해를 감추는 지혜까지 발휘했다고 한다. 828년, 마가의 유해를 안전하게 모셔온 베네치아 시민들은 유해를 모실 훌륭한 성당을 짓는다. 그 성당이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이다. 현재 모습은 11세기에 리모델링한 것이란다.
▼ 황금빛 모자이크가 빛나는 ‘산 마르코성당’은 커다란 돔(dome)을 뒤집어쓰고 있는데, 비잔틴과 로마네스크 건축양식이 혼재된 것이 동방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고 한다. 한마디로 아름답기 그지없는 성당이다. 하긴 나폴레옹이 지구상에 가장 아름다운 성당이라고 칭송했을 정도라니 두말하면 잔소리일 것이다.
▼ 성당의 오른편에는 두칼레 궁전(Palazzo Ducale)이 있다. 베네치아가 독립 공화국일 때 국가원수인 '도제'가 집무를 보던 곳이다. 샤를마뉴 대제가 죽은 해인 813년 정부의 중심지로 리알토섬을 택하면서 도제의 요새화된 관저(官邸)로 지어졌다고 한다. 지금의 건물은 15세기에 지은 것이다. 고딕 양식의 건물은 흰색과 분홍색의 아름다운 대리석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지금은 박물관으로 내부가 공개되고 있다. 내부에는 관저로 사용될 때 사용했던 대회의실이나 평의실 등이 있고, 르네상스 양식으로 만들어진 안뜰이 아름답다. 또한 이곳에는 많은 예술품들도 있는데 특히 틴토레토의 ‘천국’은 세계에서 가장 큰 크기로 제작된 유화 작품이라고 한다.
▼ ‘산 마르코 광장’ 입구에는 1268년경에 세워졌다는 거대한 화강암 원기둥 두 개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가져온 것이란다. 서쪽에 있는 원기둥 위에는 베네치아의 첫 수호성인이었던 아마세아의 ‘성 테오도로(San Theodore)’가 창을 들고 악어를 제압하는 청동상이 있고, 동쪽에 있는 원기둥 위에는 ‘성 마르코(San Marco, 마가)’를 상징하는 날개 달린 청동 사자상이 놓여 있다. ‘성 테오도로’와 ‘성 마르코’는 베네치아를 수호하는 양대 수호성인이다.
▼ 광장의 북쪽, 그러니까 성당의 왼편에는 시계탑(Torre dell'orologio)이 있다. 24시간식이며 지구 주변을 달, 태양 그리고 온 우주가 도는 천동설을 채택한 천문 시계이다. 시계 숫자 문양은 황도 12궁과 로마 숫자로 되어 있다. 특이한 점은 바늘시계 위의 패널이 마치 오늘날의 디지털(digital) 시계처럼 시간을 로마 숫자로, 분을 아라비아 숫자로 표시해주는 아날로그(analog) 디스플레이(display) 시계란 점이다. 이 시계는 15세기 후반 한참 전성기를 누리던 베네치아 공화국의 부강함을 뽐내기 위해 만들어진 산물이라고 한다.
▼ 시계 바로 위에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상징인 날개 달린 사자 동상이 있고 맨 위에는 일정한 시간이 되면 종을 치는 사람 동상이 있다. 이 시계는 당시 부둣가에 살던 어민들이 언제 출항해야 하는지와 물이 몰려오는 시간을 아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이 시계탑에는 슬픈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데 시계탑을 완성한 직후 높으신 분들이 시계 기술의 유출을 염려해 장인들의 눈을 멀게 해서 장인들이 평생 탑을 돌보며 살도록 하게 했다는 것이다.
▼ 수세기 동안 베네치아의 사회·정치 중심지였던 산마르코 광장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광장으로 손꼽힌다. 이 광장의 3면에는 아치(arch)로 이루어진 회랑이 줄지어 서 있고, 높이 99m인 캠퍼닐리(Campanile) 종루가 서 있는 동쪽 끝은 황금빛 ‘산마르코 바실리카’와 ‘팔라초 두칼레’의 분홍빛 건물들로 막혀 있다.
▼ 산마르코 광장은 ‘카사노바’에 얽힌 얘기가 많은 편이다. 그중의 하나는 카사노바가 감옥을 탈출한 후 도망을 치면서까지 찾아가 커피를 마셨다는 ‘플로리안 카페’(Caffe Florian)이다. 베네치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단다. 1720년에 문을 연 이 카페는 수많은 위인들의 체취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카사노바 외에도 괴테, 바이런, 찰스 디킨스, 차이콥스키, 바그너, 스트라빈스키, 골도니... 숱한 거장들이 다녀간 명소란다.
▼ 골목길을 포함한 광장 주변에는 세계적인 명품 숍(shop)도 많이 보인다. 밀라노만은 못해도 크게 뒤지지 않을 것 같다. 이탈리아에서는 베네치아가 가장 쇼핑하기 좋은 공간으로 꼽힌다고 한다. 짧은 거리에 수많은 상점들이 밀집해 있기 때문에 쇼핑객들로서는 아주 좋은 쇼핑가가 되는 셈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이곳은 워낙 관광객이 많아서 사진을 찍고 내부를 들여다봐도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는단다. 상대적으로 한적했던 밀라노의 명품 숍에서는 카메라를 들이대기가 어쩐지 뻘쭘했던 게 사실이다. 그러니 실컷 아이쇼핑을 하면서 카메라도 들이대볼 일이다.
▼ 유리공예품을 파는 가게들도 눈에 띈다. 3세기 이래 베네치아의 유리제조 중심지로 유명한 ‘무라노(Murano)섬’에서 만든 것들이란다. 관광객을 위한 기념 소품에서 유리 화병 등의 장식용품, 귀고리, 시계 등의 액세서리, 샹들리에 같은 조명 기구까지 다양한 제품들이 진열되어 있는데, 하나하나가 사람이 어떻게 저런 제품을 만들었을까 의심이 들 정도로 화려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다. 무라노 섬에는 982년부터 유리공장이 설치되었다고 한다. 이 유리 공장의 장인들은 자신들이 지닌 유리 공예 기술을 지키기 위해 일종의 카르텔 조직을 형성했고, 이를 베네치아 공화국에서 암묵해 주었던 모양이다. 무라노 섬만의 유리 공예 기술이 나날이 발전해 왔고, 외부로 유출되지 않았던 이유이다.
▼ 화려하기 짝이 없는 가면(假面)들을 파는 가게들도 많이 눈에 띈다. 베네치아의 전통 가면이란다. 베네치아에는 가면을 쓰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중세 시대에 서민들이 가면을 쓰고 귀족 놀이를 하며 기분을 달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중세 이후부터 귀족에게까지 퍼져, 신분을 숨기기 위해 1년 내내 가면을 쓰고 다니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단다. 그런 풍습이 만들어 낸 것이 베네치아 카니발(Carnival of Venice , Carnevale di Venezia)이다. 매년 약 300만 명의 방문객이 참여하는 세계 10대 축제의 하나다. 12세기 무렵부터 시작된 이 축제는 1월 말에서 2월 초에 시작해서 사순절 전날인 참회 화요일(Mardi Gras, Shrove Tuesday)까지 10여 일간 개최되는데, 베네치아 전역에서 가장행렬이나 공연 등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특히 축제 기간에는 정교하고 화려한 가면들을 볼 수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 저만큼에 작은 다리 하나가 보인다. 17세기에 만들어졌다는 ‘탄식의 다리(Ponte dei Sospiri)’이다. 베네치아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한 이 다리는 작은 운하를 사이에 두고 있는 두칼레 궁전과 감옥을 이어 주는 다리이다. 궁전에서 재판을 받고 감옥으로 가던 죄수들이 한숨을 쉬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베네치아는 홍수가 잦았는데 이때마다 지하 감옥이 물에 잠겨 버렸단다. 그래서 이 다리를 건너 감옥에 들어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는 말이 떠돌았던 모양이다. 그러니 이 다리를 지나는 죄수들이 세상과 하직 인사를 하는 기분으로 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 ‘탄식의 다리’는 카사노바(Giovanni Giacomo Casanova)가 탈출에 성공한 이야기로도 유명하다. 오늘날 카사노바란 이름은 바람둥이, 난봉꾼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평생 동안 놀고먹으면서 어떻게 하면 여자들과 동침할 수 있을까만 생각하는 호색한(好色漢), 또는 평생 한량으로 살아온 유랑백수(流浪白手) 같은 인식이다. 하지만 카사노바는 유식했고 책도 저술하였으며, 정부에서도 일을 했고, 심지어는 법학박사 학위(파두아대학)에다 성직에도 입문하여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인생도 살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는다. 아무튼 그가 풍기문란죄(風紀紊亂罪)로 저 다리 건너에 있는 감옥에 갇혔다가 탈옥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여성(간수장의 아내)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했음은 물론이다. ‘나를 가둘 때 내 의지와 상관없었으니 나 또한 너희들의 의지와 관계없이 이곳을 나가노라.’는 명언을 남기고 유유히 감옥을 빠져나갔단다. 한 세상을 거침없이 자유롭게 살다간 그가 부러워지는 건 무슨 이유일까. 나 또한 자유롭기를 열망하는 남자들 중의 한사람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 시간이 남아 광장 주변의 골목길을 둘러보기로 한다. ‘탄식의 다리’ 건너편 건물, 그러니까 옛날 감옥으로 쓰였다는 건물의 뒷골목로 들어서니 해산물 요리를 파는 식당들이 많이 보인다. 싱싱한 재료들로 만들어내는 다양한 메뉴들이 내걸려 있지만 들어가 보는 것은 사양하기로 한다. 제시된 음식 값을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관광지나 얼추 비슷하겠지만, 물값, 테이블 값, 팁을 합치면 밖에 적혀 있는 음식 값이 곱절로 변해버린다. 우린 카프리섬에서 그런 상황을 이미 경험했었다.
▼ 광장을 빠져나온다. 바닷가에 이르면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탄식의 다리’가 바라보이는 지점이 있는 방향이다. 바닷가를 따라 난 길가에는 노점상들이 즐비하다. 대부분은 기념품으로 된 티셔츠나 모자, 앞치마, 우산 등이고 그림을 파는 곳도 여럿 보인다. 가면을 파는 곳도 상당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 잠시 후 청동 기마상 하나를 만난다. 가리발디(Giuseppe Garibaldi)와 함께 이탈리아를 통일한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Vittorio Emanuele II)’의 동상이다. 이 조각상은 이곳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본토 여러 곳에 세워져 있다. 우리나라의 이순신장군 만큼이나 영웅인가 보다. 아니 장군님한테는 미치지 못할 듯도 싶다. 초등학교 교정에 있는 장군님 동상들까지 합친다면 엠마누엘레의 동상 숫자 정도로는 비교도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투어를 끝내고 주차장으로 돌아올 때에는 수상버스인 ‘바포레토(Vaporetto)’를 이용했다. 노선별로 번호를 붙여 일정한 코스를 운행하는 대중교통 수단이다. 중국 관광객들의 소란스러움에 넌더리를 치다가 겨우 도착한 선착장, 잠깐의 짬을 내어 노천시장을 둘러본다. 의류와 기념품 가게가 대부분이지만 가면 등 없는 물건이 없을 정도로 진열된 상품들이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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