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징 : 오늘 아침에 들렀던 미하스와 마찬가지로 론다(Ronda) 역시 말라가 주에 있는 도시로서 말라가시 서쪽의 론다 산맥에 위치한다. 깊은 엘타호데론다 계곡이 도시가 자리 잡은 두 구릉을 가르고 있는데 계곡으로 과디아로 강의 지류인 그란데 강이 흐른다. 몇 개의 다리가 이 계곡을 가로지르고 있으며 특히 1761년에 건설한 높이 90m의 아치형 구조물이 눈길을 끈다. 이곳은 원래 고대 이베리아인이 거주했던 장소이고 로마 시대에는 아키니포로 알려졌다. 8~15세기에는 무어인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남아 있는 로마 시대 유적과 무어인 유적 가운데 로마식 극장과 전쟁 때 물 봉쇄를 막기 위해 무어인이 만든 도시에서 강에 이르는 지하 계단(1911 복원)이 있다. 무어인들이 통치해오던 것을 1485년 5월 20일에 로마 가톨릭 군주들인 페르난도와 이사벨라가 정복하여 되찾았다.
▼ 미하스에서 론다로 가는 길, 어딘지는 몰라도 산악지역을 지난다. 가이드의 말로는 지름길이라는데, 아슬아슬한 벼랑 위로 길이 나있으니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다. 하지만 좋은 점도 있다. 주변 경관이 마음에 쏙 들 정도로 아름답기 때문이다. 론다로 향하는 길에 펼쳐지는 대평야와 협곡의 경관이 안달루시아 여행의 백미라고 들었는데 이곳을 말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 버스는 공용버스정류장에다 관광객들을 내려놓는다. 론다 투어의 구심점인 누에보다리까지는 꽤나 먼 거리인데도 말이다. 시가지 안은 대형버스의 출입을 막아놓았는지도 모르겠다.
▼ 하지만 시내를 걷는다는 게 꼭 나쁘지만은 않다. 하얀색 건물 일색인 길거리 풍경이 잠깐의 볼거리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아담하게 지어진 성당도 눈에 띈다. 론다는 구시가지에 있는 ‘산타마리아 라 마요르 성당(lglesia de Santa Maria la Mayor)’이 유명한데, 이곳은 신시가지이다보니 성당의 역사도 그다지 오래된 것 같지는 않다. 하여튼 모든 게 새로운 풍경이다. 이런 재미가 있어서 사람들은 낯선 이국땅을 찾아 떠나는 모양이다.
▼ 길을 가다보면 낯선 풍경을 접하게 된다. 모든 건물들이 하나같이 창문의 휘장을 커튼(curtain)이 아닌 셔터(shutter)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 지역만의 특징인데 여름철의 강렬한 햇볕을 차단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란다.
▼ 얼마쯤 걸었을까 잘 가꾸어진 공원이 보이는가 싶더니 이내 원형의 건축물이 하나 나타난다. 스페인에서 가장 오랜(1785년)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론다의 명물 중 하나인 투우장(플라사 데 토로스 : Plaza de Toros)이다. 투우장의 규모는 비록 작으나 이곳 론다가 스페인 투우의 본고장이며 근대 투우의 창설자인 프란시스코 로메로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는 곳이다. 투우시즌에 간간히 투우경기가 열리는 이곳은 보통 때에는 입장료를 받고 내부 관람이 가능하다.
▼ 투우장 한쪽에는 투우의 역사와 로메로, 론다가 배출해낸 유명한 투우사들을 기념하는 박물관이 있다. 하지만 들어가 보는 것은 생략, 그보다는 누에보의 다리를 구경하는 게 더 급했던 때문이다. 대신 경기장을 주변에 세워진 동상(銅像)과 부조(浮彫)들을 둘러보는 것으로 대신한다. 생김새로 보아 론다에서 배출해낸 유명한 투우사들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 투우장 옆에는 투우와 관련된 기념품들을 파는 상점이 있다. 꼭 사지 않아도 되니 한번쯤 들어가 볼 일이다. 볼만한 것들이 제법 많이 진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 투우장을 지나 절벽 쪽으로 이동하면 작은 공원과 그 끝에 테라스(terrace)처럼 생긴 전망대가 있다. 용기를 조금만 낸다면 절벽 앞으로 펼쳐진 멋진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건너편에는 까마득한 단애 위에 걸터앉은 호텔 파라도르(Parador de Ronda)가 위태롭고, 그 뒤에는 론다의 구시가지가 펼쳐진다. 보이는 건물마다 너나할 것 없이 절벽에 올라앉아 있다.
▼ 절벽 저 아래로 난 길이 보인다. tv-N의 여행프로그램 ‘꽃보다’ 시리즈의 할배들이 걸었던 길이다. 그들의 눈을 통해 올라다본 협곡을 이루는 양쪽 절벽과 ‘누에보 다리’는 장관이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꼭 걸어보고 싶었던 코스였다. 하지만 패키지여행에서 그런 호사는 허용되지 않는다. 일정에 쫒긴 여행사가 걸어서 다녀올 만한 시간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긴 할배들도 차량을 이용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 테라스전망대에서 스릴을 즐겼다면 이제는 누에보다리로 이동할 차례이다. 구시가지를 방향으로 절벽을 따라 잠시 걸으면 스페인 정부에서 운영하는 호텔 론다 파라도르(Parador de Ronda)가 나타난다. 벽면에 ‘Paseo de E Hemingway'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소설가 헤밍웨이가 이 건물에 머물면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집필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를 알리기 위한 일종의 홍보문구가 아닐까 싶다. 참고로 파라도르(Parador)는 스페인의 중세 수도원이나 옛 고성, 귀족들이 살았던 저택을 호텔로 개조해 나라에서 직접 운영하는 호텔을 말한다. 스페인에는 약 90여개의 파라도르가 있는데 기본적으로 전망이 좋은 곳에 위치해 있다. 일반 모던한 호텔에 비해서 좀 더 스페인다운 호텔에서 머물러 보고 싶다면 파라도르에서 하루정도 머물러 보는 것도 스페인 여행에 있어 좋은 추억이 될 것이다.
▼ 파라도르에서 바라본 테라스전망대, 천애(天涯)의 절벽 위도 모자라 절벽 밖으로 불쑥 튀어나가기까지 했다. 아까 차마 테라스로 나가지를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던 여자들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
▼ 길은 파라도르를 지나서도 절벽의 위를 고집한다. 하지만 가장자리에 난간을 만들어 놓았으니 위험하지는 않다. 앞을 막는 것이 없으니 거칠 것 없이 시야가 열린다. 건너편 절벽 위에는 하얀색 일색인 구시가지가 펼쳐지고, 협곡을 가로지르는 누에보다리가 코앞으로 다가온다. 한마디로 잘 그린 한 폭의 풍경화가 아닐 수 없다.
▼ 누에보 다리(스페인어: Puente Nuevo)는 론다의 구시가지(La Ciudad)와 신시가지(Mercadillo)를 잇고 있는 세 개의 다리 중 가장 나중에 만들어진 다리로, 과다레빈 강을 따라 형성된 120m 높이의 협곡을 가로지르고 있다. 다리 건축은 1935년 ‘펠리페V세’에 의해 처음 제안되었으며, 8개월 만에 35m 높이의 아치형 다리로 만들어졌으나 무너지면서 5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그로부터 몇 년 뒤인 1751년에 새로이 착공이 이루어져 1793년 다리 완공까지 42년의 기간이 소요되었다. 건축가는 José Martin de Aldehuela이였고, 책임자는 Juan Antonio Díaz Machuca였다. 그는 다리 건축 시에 필요한 거대한 돌들을 들어올리기 위해서 획기적인 기계들을 많이 고안해냈다고 한다. 다리의 높이는 98m이고 타호 협곡(El Tajo Gorge)으로부터 돌을 가져와 축조하였단다.
▼ 누에보다리를 건너기 전 왼편에 광장이 하나 보인다. 에스파냐광장이란다. 누에보다리와 파라도르 근처라서 항상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다. 중간에 동상이 하나 세워져 있지만 누구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도시가 스페인 투우의 양대산맥 중 하나인 것을 감안하면 이 도시가 배출한 유명 투우사의 흉상이 아닐까 싶다.
▼ 마침 점심시간이다. 에스파냐광장의 맞은편 골목으로 들어선다. 이곳도 역시 식당에서 내다 놓은 테이블들이 골목을 통째로 점령하고 있다. 음식 맛은 나름대로 괜찮은 편이었다. 이 골목 어느 식당에 들어가더라도 맛에 실망하는 경우는 없을 것이라는 가이드의 설명으로 미루어보아 현지인이나 관광객들이 자주 찾는 식당가인 모양이다.
▼ 다리를 건넌다. 누에보 다리(Nuevo Puente)는 옛날 아랍인들이 살던 구(舊)시가지(라 시우다드)와 투우장이 있는 신시가지(엘 메르카디요)를 가르고 있는 150미터 깊이의 타호협곡에 걸려 있는 다리이다. 일설에 의하면 구시가지에 살던 사람들이 신시가지에 있는 투우장에 가는 것이 불편해서 놓은 다리라는데 믿거나 말거나이다. 참고로 이 다리는 건축가 알데우엘라에 얽힌 비극적인 사연도 간직하고 있다. 그가 다리를 완공시킨 뒤, 다리 측면 아치에 자신의 이름과 완공 날짜를 새기려다 협곡으로 떨어져 죽었다는 것이다.
▼ 다리를 건너다보면 협곡의 양쪽이 모두 한눈에 잘 들어온다. 어느 방향 할 것 없이 수천 길의 단애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어김없이 주택들이 올라앉아 있다. 하나같이 아슬아슬한 풍경들이다. 관광객들에게는 좋은 눈요깃거리겠지만 말이다.
▼ 천애(天涯)의 절벽이 보면 볼수록 서슬이 시퍼렇다. 그 위에는 ‘하얀 마을’이 누군가 일부러 올려놓기라도 한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아 있다. ‘거대한 절벽이 등에 작은 마을을 지고 있고, 뜨거운 열기에 마을은 더 하얘진다.’는 표현이 구구절절이 가슴에 와 닿는다. 시인 릴케가 조각가 로댕에게 썼다는 편지의 한 구절 말이다.
▼ 구시가지 쪽의 벼랑 위로 난 길로 들어선다. 일단 들어서고 나면 멈추는 곳마다 뛰어난 전망대로 변한다. 이곳도 역시 가장자리를 따라 난간을 만들어 놓았으니 마음 놓고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
▼ 700m가 넘는 고지대에 위치한 '절벽위 도시' 론다는 스페인에서 가장 극적인 풍경을 가진 곳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안달루시아 특유의 하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푸에블로 블랑코(하얀 마을)'를 이루는데 아찔한 바위산 절벽 위에 펼쳐져 있기 때문에 종종 남프랑스의 절벽도시 '에즈'와 비교되기도 한다.
▼ 저만큼 아래에 누에보를 쏙 빼다 닮은 다리 하나가 보인다. 협곡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모두 세 개라고 들었는데 그중 하나인 모양이다.
▼ 누에보다리가 한눈에 잘 들어온다. 자세히 보면 다리 중앙의 아치(arch) 바로 위에 창문이 하나 나있다. 이 방은 감옥부터 바까지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1936년~39년에 일어난 스페인 내전 기간 중 양 측의 감옥 및 고문 장소로도 사용되었으며, 포로 중 몇몇은 창문에서 골짜기 바닥으로 던져져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현재 이 방은 다리의 역사와 건축에 대한 전시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볼거리가 없어 관광객들이 잘 찾지 않는 편이란다.
▼ 구시가지로 들어선다. 기념품 가게들이 즐비한 거리를 따라 한참을 걷다가 발길을 돌리고 만다. 이런 거리 풍경보다는 론다의 자랑거리인 타호협곡과 누에보다리를 한 번 더 눈에 담는 것이 유익할 것 같아서이다. 하지만 구시가지에 또 다른 볼거리가 많다는 것을 알았다면 이런 어리석은 결정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주어진 시간 때문에 비록 주마간산(走馬看山)으로 둘러볼 수밖에 없었을 테지만 말이다. 여행을 마치고 나서야 알게 되었지만 구시가지에는 론다의 또 다른 볼거리들이 모여 있었다.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몬드라곤 궁전과 자연채광을 위해 천장에 별모양의 구멍이 있는 아랍식목욕탕, 그리고 시대에 따라 다양한 건축 양식이 더해진 산타 마리아 라 마요르 성당 등이다.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이 또한 사전준비가 부족했던 내 탓이니 말이다.
특징 : 지중해의 아름다운 마을 미하스(스페인어: Mijas)는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자치지역(Comunidad Autónoma de Andalucía)’을 구성하는 8개 주(州) 가운데 하나인 ‘말라가주(Provincia de Málaga)’의 남부 해안에 위치한 평균 고도가 400m에 이르는 고산(高山) 도시이다. 미하스는 그리스의 산토리니가 연상되는 백색의 마을이다. 푸른 바다를 끼고 산비탈을 따라 겹겹이 들어선 하얀 집들은 한 폭의 그림처럼 평온하게 보인다. 이 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선사시대부터라고 전해진다. 미하스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청동기가 맨 처음 출현한 곳으로 선사 박물관이 이곳에 있다.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것은 그만큼 천혜의 자원이 풍부해 살기 좋은 곳이라는 뜻일 것이다. 산과 바다가 주는 혜택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유럽인들이 선호하는 휴양지로 각광받고 있다. 스페인이나 유럽의 부자들이 여름 별장을 소유하고 있어 마을의 규모에 비해 고급 주택들이 많이 들어서 있다. 그래서인지 미하스의 인구는 50%가 외지인이라고 한다. 로마시대부터 형성된 마을은 하얀 집들이 모여 있는 산비탈 마을 미하스(Mijas)와 해안 마을 카라 미하스(Cala de Mijas)로 구분된다.
▼ 버스는 주차장이 아닌 '바위 성모 광장(Plaza Virgen de la Pena)'에다 관광객들을 내려놓는다. 광장의 한쪽에 ‘관광센터’가 보인다. 한국어로 된 주요 관광지 안내서를 받을 수 있다지만 아직은 문을 열기 전이다. 절벽도시 ‘론다’로 가는 길에 일찍 들른 탓인지 미하스 마을은 아직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움직이는 것들이라고는 상점 문을 열고 있는 주민들과 우리 일행이 다인 듯, 우리처럼 일정에 쫓기는 여행자들 하나 둘이 텅 빈 골목길을 기웃거리고 있을 따름이다. 아니 길가에서 달릴 준비를 하고 있는 미하스의 명물인 마차들을 깜빡 잊을 뻔 했다.
▼ 미하스의 자랑거리라면 뭐니 뭐니 해도 아름다운 경관이다. 하지만 난 여기에다 ‘당나귀’를 하나 더 추가하고 싶다. 사실 내 눈에는 당나귀가 아닌 말(馬)로 보였지만 말이다. 당나귀치고는 너무 날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들 당나귀라고 하니 나도 그에 따르기로 하겠다. 특히 광장 한쪽에다 당나귀의 상(像)까지 만들어 놓았는데 더 이상 우기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그나저나 마차를 이용한 투어는 미하스만이 갖고 있는 매력이 분명하다. 미하스를 모두 둘러보려면 마차가 필수라고 한다. 마을이 산악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보니 골목이 비좁을 수밖에 없어서 택시는 이용할 수가 없단다. 거기다 경사까지 제법 심해 걷는 데도 한계가 있단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마차’, 다시 말해 ‘말 택시’인 셈이다.
▼ 광장의 한쪽 귀퉁이에 있는 성당으로 향한다. 절벽 위에 선 성당을 가운데에 두고 남쪽은 전망대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그 반대편에서 바라보는 조망 또한 뛰어나다. 남쪽과 북쪽의 가운데에는 쉼터를 겸한 자그마한 정원(庭園)을 가꾸어 놓았다.
▼ 성당으로 들어가기 전에 북쪽, 그러니까 산기슭 방향의 조망(眺望)부터 즐겨본다. 보이는 건물들이 하나 같이 하얗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본 듯한 풍경이다. 그렇다. 그리스의 ‘산토리니(Santorini)’가 꼭 이런 풍경이었다. 하지만 난 그리스에는 발을 디뎌보지도 못했다. 어찌된 일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TV에서 보았던 것이다. 낯선 땅을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을 설레는 난, TV에서 방영하는 여행프로그램은 거의 놓치지 않고 전부 보는 편이다. 당연히 'tv-N'의 인기 여행 프로그램인 ‘꽃보다’ 시리즈를 놓쳤을 리가 없다. 특히 할배들이 너스레를 떨며 돌아다니던 그리스는 밤잠을 새워가면서라도 꼭 보아야만 했다. 비록 업무 때문이긴 했지만 난 수없이 많은 나라들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그리스만은 지나가는 길에도 들러보지 못한 낯선 땅이었다. 때문에 그리스라는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설렐 수밖에 없었고, 비록 화면이었지만 할배들을 따라 나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 조망을 즐기다보면 오른편에 꼬맹이 성당 하나가 눈에 띈다. ‘성모발현 성당’이라고도 불리는 '바위 성모 은둔지 성당(Ermita de la Virgen de la Pena)‘이다. 극히 작은 규모이지만 교황 ‘요한바오로 2세’가 다녀갔을 만큼 신성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 성당에는 2가지의 전설(傳說)이 전해진다. 하나는 예전 무어왕조가 지배하던 이슬람 지배시기를 피해 숨겨놓았던 마리아 상이 1548년 한 수도사에 의해 바위에서 발견되었다는 설(說)과 다른 하나는 1580년 후앙과 아순시온 베르날 자매가 성을 산책하다가 종탑위의 비둘기를 봤는데 이 비둘기가 성모 마리아상으로 변했다는 설이다. 그래서 그 자리에 성당을 짓고 이름을 '바위의 성모 은둔지'라고 붙였다 한다.
▼ 성당 입구 오른편에 예수상이 세워져 있다. 성당의 규모에 맞춰 제작되었는지 예수상 또한 자그맣다. 그리고 그 위에는 종(鐘)도 하나 매달려 있다. 저기서 울려나오는 종소리가 지중해를 건넌 아프리카까지 펴져나가기를 기원하면 세운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종소리 따라 하느님을 말씀도 전파되리라는 것을 믿으면서 말이다.
▼ 성당 안에는 작은 제단(祭壇)과 검은 긴 머리의 성녀(聖女)상이 모셔져 있다. 이 마을의 수호성녀인 ‘페냐(Pena)’라고 한다. 성녀는 가슴에 아기천사를 안고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수도사가 발견했다는 성모(聖母)상 인지는 모르겠다. 하여튼 성녀에게는 예쁜 옷을 입혀 놓았다.
▼ 성당은 돌을 쌓아 지은 것처럼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가 보면 바위를 쪼아서 만든 흔적이 고스란히 나타난다. 성당 안에는 작은 전시실을 만들어 놓고 여러 가지의 성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 교황 ‘요한바오로 2세’의 사진도 보인다. 이곳을 다녀갔다고 들었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걸어 둔 모양이다.
▼ 성당의 남쪽은 전망대이다. 지중해를 바라볼 수도 있음은 물론 마을의 풍경까지도 한눈에 잘 들어오는 곳이다. 미하스 관광의 백미(白眉)라고 자부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전망대에 서면 시리도록 푸른 지중해가 손에 잡힐 듯이 펼쳐진다. ‘코스타 델 솔(태양의 해안)’과 해변을 따라 형성된 ‘푸엔히올라(Fuengirola)’라는 마을이 선명하게 보인다. 날씨가 좋을 땐 아프리카 대륙까지도 볼 수 있다고 하지만 오늘은 아닌 모양이다.
▼ 하얀 구름이 둥둥 떠다니는 하늘 아래 산기슭에는 하얀 벽에 붉은 기와를 얹은 아기자기한 주택들이 산기슭을 따라 오밀조밀 모여 있고, 그 옆에는 파란 지중해가 끝도 없이 펼쳐진다. 이 모든 게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며 장관을 이룬다. 마치 동화나라에 들어온 게 아닐까 하는 착각까지 불러일으키게 만든다. 미하스는 특이한 곳이다. 스페인 관광의 일정은 대부분 유적지 투어로 짜여 있다. 이슬람문화와 가톨릭문화가 혼합되어 있는 스페인만의 문화적 특징을 둘러보기 위해서 찾아 온 관광객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문화적 특징이 가장 잘 나타난 유적지에다 부수적으로 가우디의 건축물들과 피카소와 고야 등 스페인이 낳은 세계적 작가들의 작품들을 둘러보는 정도로 일정을 짜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미하스만은 예외이다. 다른 관광지들과는 다르게 유적지를 둘러보는 것이 아닌 자연과 마을 풍광 자체를 즐기는 데 있는 것이다.
▼ 전망대 근처에는 기념품 가게도 있다. 진열장에 올려둘 만한 것들도 보이니 그냥 지나치지 말고 들어가 볼 일이다.
▼ 거리 투어를 시작한다. 왼편 바위벼랑 아래에 이상한 기계가 하나 놓여 있다. 궁금해서 알아보니 일종의 펌프(pump)역할을 하는 기계란다. 기계에 당나귀를 묶은 후, 당나귀를 돌게 해서 아래에 있는 샘물을 끌어 올린다는 것이다. 형식으로 봐서는 우리나라의 연자방아를 닮았지만 용도는 다른 셈이다.
▼ 그 옆에 작은 건물이 하나 보인다. 문이 열려있지 않아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지만 방앗간이란다. 이곳도 역시 당나귀의 힘을 이용해서 동력(動力)을 얻었단다. 안에는 방앗간을 구성하는 기계들과 그 작동 원리를 설명해 놓은 안내판들이 전시되어 있다는데 구경하지는 못하고 아쉬운 발걸음을 옮기고 만다.
▼ 방앗간 옆에 예쁘게 지어진 건물은 카페인 듯, 문을 열려고 준비 중이라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카페의 위는 생김새로 보아 전망대로 활용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곳 또한 올라가보지는 못했다. 올라가는 길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망대에 올라 바라보는 미하스의 풍경은 또 다른 매력일 텐데 아쉽다.
▼ 거리로 들어가기 전에 방앗간의 맞은편에 놓인 벤치로 나아간다. 그리고 다른 각도에서 미하스의 풍광을 가슴에 담아본다. 산자락에 들어앉은 집들의 색깔이 모두 하나같다. 하얀 벽에 갈색 지붕들, 안달루시아 지방의 전통적인 주택양식인 ‘푸에블로 블랑코((Pueblo Blanco)란다. 한국말로는 ’하얀 마을‘, 아무래도 스페인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게 어울리는 것 같다. 동,서,남,북을 가릴 것 없이 유럽에서는 흔하게 갈색지붕들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하얀 벽은 이곳 안달루시아지방 만의 특징이지 않을까 싶다. 햇빛이 강하기로 소문난 지방이다 보니 더위를 피하기 위한 조치가 하나의 과제가 되었을지도 모르겠기에 하는 말이다.
▼ 골목으로 들어선다. '산 세바스티안(San Sebastian)'거리일 것이다. 푸에블로 블랑코와 고전적 디자인의 간판 그리고 가로등 하나하나가 어우러져 멋지면서도 옛스런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거대한 고대 유적들이 없이도 마을자체를 충분히 운치 있게 만들고 있다.
▼ '산 세바스티안(San Sebastian)' 거리는 미하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이자 맛집과 볼거리로 가득한 곳으로 이름 높다. 특히 형형색색 화려한 무늬의 도자기와 타일 문양 장식품, 엽서, 당나귀 모양의 인형 등이 진열된 기념품가게와 가죽제품 가게가 눈에 띈다. 하지만 우리 일행들은 하나 같이 가죽제품 가게를 기웃거린다. 스페인이 가죽제품으로 유명하다는 소문을 들었던 모양이다.
▼ 깔끔한 하얀 집들과는 대조적으로 거리에는 원색이 화려한 물건들로 활기를 띈 상점들이 늘어서 있다. 생활용품에서 장식품에 이르기까지 종류도 다양하고 원색으로 화려하게 만든 아랍풍의 도자기들은 모양과 문양이 독특하다. 노점에 내걸린 옷이나 스카프들도 유난히 원색이 많았다. 참고로 이곳 미하스는 피카소의 고향인 말라가의 이웃이다. 그래서인지 ‘피카소’라고 쓰인 이름표가 달린 가게도 보였다.
▼ 공회당 비슷한 건물에는 주민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몰려있다. 무슨 행사라도 있는 모양이다.
▼ 공공건물 비슷하니 공적인 얘기를 하나 하고 넘어가겠다. 가이드의 말로는 스페인의 경제가 흔들리게 된 원인을 제공한 곳이 바로 이곳이란다. 코스타 델 솔(Costa del Sol), 태양의 해변이라는 말처럼 이곳은 한때 유럽인들의 휴양지가 되었고, 스페인 부의 원천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미국발 경제위기가 유럽으로 확산되면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곳이 되어버렸단다. 즉 스페인의 휴양지에 별장을 가지고 있던 유럽인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스페인의 별장을 처분하기 시작했고, 따라서 스페인의 부동산거품이 꺼진 원인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거품이 빠지면서 스페인의 구매력 또한 추락했을 것이고 말이다.
▼ 한마디로 아름다운 골목이다. 하얀 벽에 걸려 있는 화분들이 골목길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다. 그것도 꽃이 활짝 핀 화분들로 말이다. 하지만 모든 골목마다 모두 꽃화분을 매달아 둔 것은 아니다. 관광객들이 많이 다닐만한 곳만 조성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 꽃길의 중간쯤에서 다시 한 번 마을의 전경이 시야에 잡힌다. 미하스는 파란 하늘 아래 하얗게 물든 '동화 같은 마을'로 알려져 있다. 미하스의 특징은 뭐니 뭐니 해도 산기슭부터 중턱까지 마을 전체에 빼곡하게 들어선 하얀 건물들이다.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의 전통적 주택양식인 '푸에블로 블랑코(Pueblo Blanco)‘인데, 이곳 미하스가 가장 대표적이라고 보면 된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스페인의 산토리니(Santorini)‘라고 일컫는 것을 보면 그 풍경이 얼마나 독특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도시인지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끄트머리 아니 정확히 말해서 골목의 끝은 아니다. 마을길은 계속해서 이어지지만 상점들이 보이지 않기에 끄트머리라는 말을 썼을 따름이다. 하여튼 끄트머리쯤에 이르면 다시 한 번 미하스 마을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도 역시 보이는 것이라곤 온통 하얀 벽에 빨강 지붕을 인 집들뿐이다. 하지만 저런 풍경은 이곳 미하스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햇볕이 뜨거운 안달루시아 지방의 기후에 맞춰 지어진 주택의 전통양식이기 때문에 이 지방에서는 어디서나 만나볼 수 있다. 그런데도 그 많은 마을들을 제치고 미하스라는 이름만이 사람들의 입소문을 탄 데는 사연이 있다. 푸름으로 물든 언덕을 배경으로 빼곡하게 들어찬 하얀 집들이 이 부근을 여행하던 일본인들의 눈길을 끌었던 모양이다. 이후 인상적인 풍경에 반한 그들의 입소문을 통해 일본에 널리 알려졌고, 일본인들이 즐겨 찾는 관광지가 된 것이 그 원인이란다. 다음으로 언제부턴가 우리나라 사람들까지 찾아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얼마 안 있으면 이 마을도 역시 중국인들로 북적이지 않을까 싶다. 그게 그동안 내가 만나왔던 관광지들의 특징이었으니까.
♧ 에필로그(epilogue), 새로운 것들은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 하나라도 더 봐야만 한다. 언제 다시 찾아볼 수 있을지 모르니까 말이다. 배우 이순재가 스페인 여행 중에 했던 ‘이 아름다운 순간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닿는 이유일 것이다. 뜬금없는 말을 왜 하는지 궁금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미하스에서 꼭 들러봐야 하는 곳을 두 곳이나 놓쳐버렸기에 서운해서 하는 말이다. 미니어처 박물관과 투우장(Praza de Toros)이 바로 그곳이다. 기차 한량 크기 정도로 작지만 박물관에는 플라멩코 의상을 입은 벼룩, 투우사 벼룩, 쌀알에 그린 그림, 적의 머리를 베어 작게 만들었다는 주먹만 한 머리(아마존 부족의 비법으로 만들었다는 허풍 같은) 등 웃음이 절로 나오게 만드는 재밌는 볼거리들이 많고, 투우장은 세계에서 가장 작은 투우장이라고 했다. 얼마나 작은지 과연 투우를 할 수 있을지가 의심스러울 정도라는 것이다. 하지만 난 두 가지 모두 보지 못했다. 아니 그런 시설들이 있는지조차 몰랐다. 여행에 대한 사전준비가 부족했던 탓에 꼭 봐야할 것을 놓쳐버린 것이다. 비록 만시지탄(晩時之歎) 이겠지만 앞으로라도 빈틈없는 준비를 해야겠다.
특징 :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 그라나다 주의 주도인 그라나다(Granada)는 시에라네바다 산맥 북서쪽 사면에 헤닐 강을 끼고 발달해 있는 해발고도 689m의 도시이다. 이 지방에 많은 '석류'를 의미하는 스페인어인 '그라나다'에서 도시의 이름이 유래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시(市)의 문장에도 석류가 그려져 있다. BC 5세기에 이베리아족의 정착촌인 엘리비르헤가 있었고 로마 시대에는 일리베리스라고 불렸다. 무어인이 세운 그라나다 왕국의 수도로 스페인에서 무어인 최후의 보루 역할을 하다가 1492년 1월 가톨릭계 군주인 페르난도 2세와 이사벨라 1세에게 함락되었다. 그라나다는 외국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관광지의 하나로 유명한 건축물과 예술품들이 많이 보존되어 있다. 800년간 꽃 피웠던 이슬람 문화와 가톨릭 문화가 융합해서 만들어낸 독특한 것들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빼어난 것을 꼽으라면 서유럽에 자리한 아랍최고의 유적지로 꼽히는 ‘알함브라(Alhambra)’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랍어로 '붉은색'을 뜻하는 알함브라는 궁전(宮殿)과 성곽(城郭)의 복합단지라고 보면 되는데 나스르 왕조의 후계자들이 1238~1358년에 걸쳐 건설했다. 1516~56년에 스페인의 카를 5세가 궁의 일부를 르네상스 양식으로 재건했으며, 펠리페 5세는 전각과 내부의 방을 이탈리아풍으로 바꾸었다. 이후 1821년의 지진으로 많은 손실을 입었으나 1828년에 복원사업이 추진되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궁전은 서북서, 동남동의 방향으로 건물이 뻗어 있으며 전체 면적은 142,000m²이다. 견고하게 쌓아진 벽이 있으며 주위에는 13개의 타워가 있다.
▼ 그라나다로 넘어가는 길가 풍경, 푸름이 우거진 협곡도 보이지만 대부분 황무지에 가까운 삭막한 풍경들이다. 그리고 그동안 한 번도 본적이 없는 풍경도 눈에 들어온다. 구릉(丘陵)의 사면(斜面)을 뚫고 들어간 집들이다. 어떤 곳은 마을 전체가 땅속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 알함브라 입구는 번잡하기 짝이 없다. 입장권을 끊으려는 사람들의 줄은 끝없이 길기만 하고, 매표소 옆에 만들어 놓은 알함브라의 모형도 근처도 혼잡하기만 하다. 그만큼 이곳 알함브라가 여행객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는 증거일 것이다.
▼ <지도 위치> ① 그라나다 문 ② 재판의 문 ③ 카를5세 궁전 ④ 포도주의 문 ⑤ 알카사바 ⑥ 코마레스 탑 ⑦ 사자궁전 ⑧ 산타마리아성당 ⑨ 헤네랄리페궁전
▼ 안으로 들어선다. 길게 늘어선 사이프러스나무들이 관광객들을 맞는다. 하지만 가이드는 투어를 서두르지 않는다. 알함브라가 자랑거리로 삼고 있는 각종 특징들을 다시 한 번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어렵게 찾아온 길이니 하나라도 더 많은 것을 담아가라는 배려일 것이다.
▼ 사이프러스 숲길을 지나면 1952년에 만들어진 야외극장, 오디토리엄(Auditorium theatre)을 만난다. 여름철에는 이곳에서 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 그리고 잠시 후 나무를 각이 지게 다듬어 놓은 정원(庭園)을 만난다. ‘로우어 가든(The lower gardens of the Generalife, 혹은 New gardens)인데 제법 키가 큰 사이프러스를 깍두기 썰 듯이 해 놓은 것이 독특하다. 한가운데에는 작고 길쭉한 연못도 만들어 놓았다. 한마디로 멋진 정원이다. 하긴 무슬림이 지은 궁전인데 어찌 아름다운 정원이 빠질 수 있겠는가. 사막의 무슬림에게 푸른 정원은 어쩌면 오아시스의 또 다른 이름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외모로 볼 때 이건 에스파냐(España)인들이 만든 작품 같다. 문득 유럽을 여행하면서 만났던 정원들, 특히 탄성을 지르기 바빴던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 정원이 연상되는 것이 그 증거가 아닐까 싶다.
▼ 건너편에 알함브라(Alhambra)궁전과 알바이신지구가 보인다. 얼핏 궁전보다는 요새에 가까워 보인다. 하긴 8세기에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한 무슬림 세력이 15세기 말 스페인을 떠나기 전 마지막까지 머물렀던 곳이 그라나다(Granada)였으니, 이곳의 언덕에 자리 잡은 알함브라 궁전은 궁궐이기 전에 요새로서의 기능이 훨씬 더 중요했을 것이다.
▼ 정원을 따라 가다보면 아치(arch)형의 문이 나타난다. 안으로 들면 ‘데스카발가미엔토 안뜰(Patio de Descabalgamieno)’이 나오는데, 다음 건물의 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말에서 내리는 용도로 사용된 벤치에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데스카발가미엔토 안뜰’에서 헤네랄리페(Generalife)로 들어가려면 또 다른 문을 통과해야만 한다. 그런데 문 위에 작은 문양(文樣)이 보인다. 누군가는 코란에서 얘기하는 다섯 개의 계율(신앙, 자비, 기도, 금식, 순례)을 의미한다고 했는데 글쎄다. 헤네랄리페(Generalife)는 ‘알함브라’ 외곽에 있는 건물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고 한다. 14세기에 세워진 왕가의 여름 별궁으로, 알함브라궁전에서 거주하던 왕들이 더위를 피해 휴식을 취하던 별장이란다. 시골 별장을 닮은 이 궁전은 무하마드 2세(Muhammad II)가 지었는데 이슬람식 정원의 전형적 특징을 간직한 것으로 유명하다. 아쉽게도 이곳은 모두 파괴되어 두 개의 소궁전 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넓은 정원이 잘 정돈돼 있다. ‘헤네랄리페(Generalife)’라는 이름은 우아한 천국을 의미하는 아랍어 ‘야나트 알 아리프(Jannat al ⁽Arῑf)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 안으로 들면 아름다운 정원(庭園)이 관광객들을 맞는다. ‘아세키아 중정(Patio de la Acequia)'이다. 아세키아란 수로(水路)란 뜻으로 이름처럼 중정 가운데에 기다란 연못을 두고 그 좌우에 있는 많은 분수(噴水)들이 가느다란 물줄기를 내뿜고 있다. 이곳의 분수들은 궁전을 지을 당시부터 있었던 시설이란다. 인공의 동력인 전기(電氣)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시절에 오로지 물의 낙차(落差)만을 이용해서 저런 시설을 만들었다니 신비롭다는 생각마저 든다. 아니 경이롭다고 하는 게 더 맞는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자연친화적인 삶과 물을 소중하게 생각했던 아랍 사람들의 한 단면이 아닐까 싶다.
▼ 아세키아 중정의 옆면은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런데 사암으로 된 벽면 색깔이 황금색이다. 알함브라의 건물들은 모두 붉은색이라 들었는데 이상하다. 이곳 헤네랄리페 별궁만의 특징일까. 누군가는 이를 두고 인도의 사막도시 ‘자이살메르(Jaisalmer)’에서 보았던 황금색이라고 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헤네랄리페의 실내를 마감한 사암들은 금빛을 띠고 있었다. 의아스런 생각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벽면에 새겨 넣은 장식들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마치 찰흙을 빚어 정교한 부조를 만들어 놓은 듯, 정교한 문양들이 돌에 새겨져 있다. 사람의 손으로 일일이 새긴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싶을 정도로 아라베스크(arabesque : 원래 고대 그리스 공예가들에게서 유래했으나 1000년경 이슬람 공예가들이 종교적 이유로 새·동물·사람 등을 제외시켜 매우 정형화시킨 이슬람 장식 문화)의 향연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탄성이 절로 나오는 경이 그 자체였다.
▼ 회랑은 예쁜 아치로 된 문들이 창문의 역할을 하고 있다. 원형의 문을 통해 바라보는 알함브라 궁전의 전경이 멋있다. 그 오른편은 알바이신지구이다.
▼ 정원의 앞쪽 ‘포르티코(Portico : 건축의 앞면, 앞면의 출입구 부분에 설치된 열주랑 부분) 쪽으로 간다. 아세키아중정의 머리 부분인 이곳은 관례적으로 ’제왕의 홀(Sala Regia)'이라 부른다고 한다. 홀의 전면에는 다섯 개의 연속된 회랑 아치들과 끝에 설치된 알코브(서양식 건축에서 벽의 한 부분을 쏙 들어가게 만들어 놓은 부분)들이 이슬람의 전통적인 이미지를 보여준다.
▼ 벽면을 빈틈없이 메운 아라베스크의 향연들. 우상 숭배를 금한 이슬람의 율법은 인류에게 새로운 아름다움을 선사했다.
▼ 포르티고 오른쪽 계단을 올라가면 또 하나의 정원이 나온다. ‘왕비의 안뜰(Patio de la sultana)’이다. 왕비의 안뜰은 긴 네모의 연못에 분수가 물을 뿜으며, 연못의 안에는 작은 연못이 두 개가 더있고, 그 한가운데에 있는 돌 분수가 물을 내뿜는다. 흡사 정원의 모든 분수들을 총 지휘하고 있는 것 같다. 하여간 별궁 곳곳에서 자그마한 분수들이 끊임없이 솟아오른다. 사막에 익숙한 무슬림들에게 연못과 분수는 정원의 필수품이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전기 동력 없이도 물이 솟구치는 분수를 만들어냈을 테고 말이다.
▼ 왕비의 안뜰에는 말라 죽은 나무 하나가 서있다.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은 죽은 나무를 왜 그냥 놔두고 있는지 궁금하겠지만 여기에는 다 사연이 있다. 옛날 이 나무 아래에서 왕비와 아벤세리하스 가문의 귀족이 밀회(密會)를 즐겼단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왕에게 들켜버렸던 모양이다. 분노한 왕에게는 밀회의 장소를 제공한 나무까지도 괘씸했을 것이다. 그 결과 수로(水路)까지 다른 곳으로 돌려가면서 일부러 나무를 고사(枯死)시켜 버렸다니 말이다.
▼ 알함브라의 특징 중 하나는 수로(水路)가 잘 나있다는 것이다. 이곳을 지을 당시 아랍세력들은 외부 세력과의 장기적인 전쟁을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이럴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은 물이 아닐 수 없다. 그 결과 네바다산맥에서 물을 끌어옴으로써 알함브라를 요새화(要塞化) 시켰던 것이다.
▼ 왕비의 안뜰을 지나 두 개의 사자상이 있는 계단을 오르면 또 다른 정원이 있다. 헤네랄리페 별궁과 그 건너편에 있는 알함브라궁전이 한눈에 잘 들어오는 빼어난 전망대의 역할을 하는 곳이다.
▼ 상부의 정원은 커다란 나무들이 즐비한 것이 흡사 울창한 숲속에라도 들어 선 느낌이다. 이어서 넝쿨식물로 만든 터널을 따라 알함브라궁전으로 향한다. 얼마쯤 갔을까 아까 별궁으로 들어가기 전에 만났던 야외극장이 오른편 아래로 내려다보인다. 하지만 알함브라궁전은 이곳에서도 조금 더 걸어야 나온다. 날씬한 사이프러스나무들이 도열해 있는 멋진 길이다. 그런데 아까 들어왔던 곳으로 다시 되돌아나간다는 느낌이 드는 건 무슨 이유일까. 어쩌면 헤네랄리페별궁과 알함브라궁전은 매표소 근처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 길은 해자(垓字)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 알함브라궁전으로 연결된다. 아니 자세히 보니 해자가 아니다. 성벽(城壁)과 내성(內城) 사이의 공간으로 성을 지키던 군사들의 이동 통로로 이용되었을 듯 싶다.
▼ 다리를 건너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두 곳 모두 성벽을 걷기는 매한가지이지만 왼편은 ‘물의 탑’과 ‘공주 탑’을 둘러볼 수 있고, 오른편으로 갈 경우에는 또 하나의 멋진 물의 정원인 ‘파르탈 정원’을 둘러볼 수 있다. 우리는 오른편으로 향한다.
▼ 성벽 위를 걷다보면 멀리 산 중턱에 지어진 헤네랄리페 별궁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 성벽을 따라 걷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까 해자로 오해했던 이동통로의 안쪽에 겹으로 쌓은 성벽의 위이다. 성벽에는 망루의 역할을 수행했음직한 탑들도 보인다.
▼ 성벽을 따라 걷다보면 아담한 연못과 야자수가 진짜 오아시스처럼 보이는 ‘파르탈 정원(Patio de Partal)’이 나온다. 성벽 방향에 ‘귀부인의 탑’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아름다운 건물이 지어져 있다. 하지만 연못 위로 비치는 풍경이 더 아름다우니 절대 놓치지 말 일이다. 풍부한 물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시에라네바다산맥에서 눈 녹은 물을 끌어들인 노력에 대한 보상일 테고 말이다.
▼ 파르탈 정원엔 크고 작은 연못과 거미줄 같은 수로, 그리고 잘 가꾸어진 조경수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하늘과 구름과 바람, 물 등 자연이 건축물 및 사람과 조화를 이루는 공간이다. 유럽인들이 이곳에 열광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 아치형 문을 통해 알바이신지구가 보인다. 맨 꼭대기에 ‘산 니콜라스 전망대(Mirador de San Nicolas)가 있다. 알바이신 지구의 모습은 신비롭고 아름답다. 경사진 언덕에 베이지색 지붕을 쓰고 있는 하얀 색 집들이 사이프러스 나무와 함께 가득 메우고 있다. 알함브라와는 사뭇 다른 명랑하고 아름답기 그지없는 낭만적인 풍경이다.
▼ 왼편에 ‘산타마리라 성당(Lglesia de Santa Maria)’이 보인다. 1581~1617년 사이에 옛 왕궁의 일부와 이슬람사원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세웠다고 한다. ‘역사는 승자의 몫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이슬람 사원의 일부를 고치는데 그치지 않고, 완전히 헐어버리고 새로 지었지만 이 성당은 스페인에 있는 많은 성당들 중에서 그 규모가 크지도 않을뿐더러 내부 장식 또한 그다지 화려하지 않단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가이드는 일언반구도 없이 그냥 지나쳐 버린다. 그 덕분에 난 귀국을 한 후에야 이 건물이 성당인줄을 알 수가 있었다.
▼ 코너를 돌면 조금 전까지 보아왔던 건물들과는 완연히 다른 느낌의 건물이 하나 나타난다. ‘카를로스 5세 궁전(Palacio de Carlos Ⅴ)’으로 1516~56년에 스페인을 다스렸던 카를 5세(카를로스 1세 : 1516-1556)가 궁의 일부를 허물고 르네상스 양식으로 새로 지은 것이란다. 그는 당대에 유행했던 르네상스 양식으로 궁전의 건축 양식을 수정하는 한편 겨울 궁전은 아예 허물어버렸다고 한다. ‘개악(改惡)’이라는 낱말이 있다. 개선(改善)의 반대말로 ‘고쳐서 도리어 나빠지게 한다.’는 뜻이다.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정교하면서도 화려한 건축물들의 숲 속에 들어앉은 투박한 건축물이 주변 풍경에 전혀 동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기에 하는 말이다. 카를 5세의 행위에 대해 비분강개로 일관하고 있는 가이드의 느낌 또한 나와 같지 않았을까 싶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펠리페 5세(1700–1746) 같은 군주도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주위 전각과 내부 방을 이탈리아식으로 바꾸긴 했지만 무어 인의 양식을 거부하기보다는 좀 더 완성도를 가미했을 따름이라고 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궁전은 스페인 르네상스양식의 걸작으로 꼽히는 것은 물론, 스페인왕실 건축물들 중에서 보석으로 불린단다. 건물의 벽에는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돌 의자가 있고, 마차를 끄는 말들을 매어 두었던 고리도 보인다.
▼ 전체적으로는 거대하지만 투박한 느낌이다. 하지만 입구 쪽 파사드만은 섬세하면서도 우아하다. 벽에는 황제를 묘사했는데 벽 아래쪽에 전승기념부조를 도리아양식으로 조각해 승리의 문을 만들었다.
▼ 궁전 안으로 들어가면 원형의 중정이 나온다. 궁전의 외관이 정사각형이었기에 의외의 풍경으로 다가온다. 카를로스5세가 이슬람 궁전 안에 의도적으로 짓다보니, 기존의 이슬람 궁전과는 다른 뭔가를 원했던 모양이다. 그 결과 네모진 이슬람 궁전의 틀을 벗어난 원형의 중정을 만들었을 테고 말이다. 참고로 옛날에는 이곳에서 투우를 즐겼다고 한다. 지금은 매년 여름 ‘그라나다 국제음악제’가 열린단다.
▼ 중정은 로마의 콜로세움을 연상시키는 둥근 회랑과 열주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층으로 된 대리석 열주(원기둥)들이 둘러싸고 있는데, 1층은 도리아식, 2층은 이오니아식이란다. 두 가지 양식의 기둥들로 둘러싸인 원형의 중정이 우아하고, 간결하면서도 기품 있게 보인다.
▼ 중정을 둘러싸고 있는 건물 1층에는 알함브라 궁전 관련 물품들을 전시하는 ‘박물관’이 있고, 이층에는 그라나다 관련 회화와 공예작품이 소장된 주립미술관이 있다.
▼ 이곳에서도 가슴 뿌듯한 풍경을 만난다. 기념품 가게에 태극기가 내걸려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국기가 유일하다. 자기나라의 국기마저도 걸어 놓지 않았을 정도이니 가슴 뿌듯함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현재 우리나라가 점하고 있는 위상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런 위상은 해외여행에서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20여년, 아니 그보다 훨씬 전부터 해외출장이 잦았던 내 눈에는 시시각각으로 변해가던 우리나라의 위상을 가감 없이 느낄 수 있었다. 이는 우리나라의 국력 증가와 비례한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수출입국의 최전선에 서있던 나 자신을 많이 자랑스러워했었다. 그 현장에서 한걸음 물러난 지금, 새롭게 바라본 세상은 그때보다도 훨씬 더 위상이 높아져 있었다.
▼ 카를로스 5세 궁전을 나와 궁전을 등지고 오른편으로 가면 나사르궁전(Palacio de Nazaries)의 입구이다. 그러나 가이드는 궁전으로 안내하지 않고 그냥 통과해 버린다. 왜 그랬는지는 모른다. 결과적으로 우린 나사르궁전을 들어가 보지 못했다. 가장 중요한 곳을 빼먹었으니 어찌 ’알함브라 궁전’을 관광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통탄할 일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런 줄도 모르고 가이드의 뒤를 졸졸 따르느라 바쁘기만 했다. 귀국 후 여행기를 정리하면서야 그런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누구를 원망할 것인가.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다. 사전에 헤네랄리페별궁과 알함브라궁전을 구별할 줄만 알았어도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가이드에게 항의를 해서라도 꼭 들어가 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리 알아보지도 않고 무턱대고 여행을 떠나왔던 내 방심을 원망해 볼 따름이다.
▼ 그라나다는 에스파냐 지역에서의 마지막 이슬람왕국이다. 원래 그라나다는 아랍인들에 의해 고대도시 일리베리스 근처에 세워진 도시인데 이 고대도시를 중심으로 무하마드 이븐 나스르(Muhammad ibn Nasr)가 나스르왕조(그라나다왕국, 1231~1492)을 열면서 번창했다. 그라나다에 근거지를 정한 이븐 나스르는 한때 베르베르인들이 축성한 알카사바(Alcazaba)라는 요새가 서 있던 언덕 위에 궁전을 짓기 시작했다. 폐허가 된 요새를 코란에서 묘사한 지상천국으로 바꾸어놓겠다고 결심하고, 토목전문가로 하여금 시에라네바다산맥에서부터 흘러내려오는 개울의 물줄기를 바꾸어 운하와 수조 · 분수 · 정원에 물을 댈 수 있도록 관개수(灌漑水)를 개발하게 했다. 그의 계획은 여기까지였다. 뛰어난 이슬람 건축물인 알함브라궁전을 완성하는 것은 그의 후계자들의 몫이었다. 그들은 당시 번성했던 예술과 과학을 바탕으로 화려한 이슬람문화를 꽃피워 내었다. 이 화려한 건물들은 무어인과 스페인의 미술이 결합된 형태이다. 건축 당시는 아랍 계열 인종의 거주가 막바지에 이를 무렵이었으므로 궁전은 안달루시아 지방 미술의 절정기 하반부를 장식한다. 이슬람 왕국의 직접적인 영향권 밖에 있었으므로 예술가의 창작 배경이 더욱 자극될 수 있었던 점도 알람브라 궁전 내의 독특하면서도 왕궁의 위엄을 드높인 한 요소가 되었다. 이후 기독교 세력이 이곳을 재정복(1492년)하면서 정복자들이 궁전을 개조하기 시작하였다. 흰 빛깔의 도료로 바뀐 것도 이때 이뤄진 일로서 도금과 회화 작업도 이 시기에 추가되었고 기존의 가구는 개보수 되거나 혹은 없어졌다. ‘알람브라(alHamra)’는 성벽을 지을 때 붉은색 점토를 이용한데서 생겨난 이름이라니 참조한다. 참고로 지난 198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알람브라 궁전은 유럽에 현존하는 이슬람 건축물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 다시 붉은 담장이 높다란 요새의 통로를 지나면 알함브라 궁전에서 가장 오래됐다는 알카사바(Alcazaba)가 나온다. 알카사바는 성채(城砦)를 뜻하는 아랍어가 스페인어 화된 말로 알함브라 궁전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알함브라의 나머지 영역과 완전히 구별되는 초기의 성채도시(城砦都市)이기도 하다. 9~13세기에 지어진 요새(要塞)로서 전성기 때에는 24개의 망루와 군인숙사, 창고, 목욕탕까지 있었던 곳(Plaza de Armas : 아리마스 광장)이었는데 현재는 그 자취만 남아있을 따름이다. 안으로 들어서면 이곳이 요새였음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군인들이 묵었다는 숙소(Barrio castrense)는 지금은 미로 같은 담장들만 남아 있다.
▼ 안으로 들면 황토색 바닥에 황토색 성벽과 망루가 우뚝 솟아 있었다. 각진 형태의 황토색 벽들이 마치 상기된 얼굴 같다. 벨라탑(Torre de la Vela)에 오른다. 알카사바요새의 중앙에 감시탑으로 지어진 망루이다. 탑 위에는 그리 크지 않은 종이 하나 매달려 있다. 스페인을 통일한 이사벨 여왕이 그라나다를 함락한 기념으로 걸어놓은 종이라고 한다.
▼ 벨라탑에서의 조망은 한마디로 빼어나다. 알함브라의 전경과 알바이신지구, 그리고 집시촌인 사크로몬테(Sacromonte)언덕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반대편의 안달루시아의 그라나다 시가지는 물론이고 멀리 시에라네바다(Sierra Nevada)산맥까지 조망된다. 참고로 하얀 언덕 마을인 '알바이신(Albaicin)'은 구시가지로 아랍인이 집단 거주하던 지역이다. 현재도 유서 깊은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마을 정상에 위치한 전망대에 오르면 환상적인 전망이 펼쳐진다고 한다.
▼ 요새를 둘러보고 나오는 길, 성벽의 위에 수없이 많은 홈들이 파여 있는 게 보인다. 옛날 돌을 올려놓았던 구멍이란다.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들에게 굴러 떨어뜨릴 용도의 돌들이다. 성벽 너머로 바라보이는 그라나다 시가지 풍경이 일품이다.
▼ 알카사바를 빠져나와 아까 그냥 지나쳤던 산타마리아 성당(Lglesia de Santa Maria)의 곁을 지난다. 이번에도 역시 그냥 지나친다. 앞서가는 가이드는 뭐가 그리 바쁜지 모르겠다. 해가 떨어질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고, 호텔에 들어가 저녁식사만 하면 오늘 일정은 끝이 날 텐데도 말이다.
▼ 이어서 잘 다듬어진 사이프러스 나무들 사이를 빠져나오면 ‘산프란시스코 수도원(Convento de San Francisco)'의 부속 건물로 보이는 성당이 보인다. 수도원 건물이 현재 호텔로 활용되고 있다고 하니 저 건물의 용도 또한 같지 않을까 싶다. 잠시 후 매표소에 이르게 되면서 알함브라궁전의 투어가 끝을 맺는다.
▼ 그라나다에서 머문 카미노호텔(Camino de Granada), 깔끔한 객실과 외부 수영장 등 나름대로 시설이 괜찮은 호텔이었다. 특히 호텔 내의 바에서 마신 맥주는 기대 이상이었다. 아침 식사는 중급 수준, 하지만 바르셀로나와 발렌시아에서의 먹었던 질이 떨어지는 식사에 대한 느낌이 강했었던지 이만하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식탁에는 계란이 올라오지 않고 있다.
특징 : 발렌시아는 투리아(Turia)강 어귀의 지중해안에 위치한 스페인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로서 풍부한 문화유산과 아름다운 해변을 지니고 있다. BC 138년 로마의 칼라이쿠스(Callaicus)가 제대군인들을 정착시키면서 생긴 도시로 나중에 로마의 수비대가 주둔하면서 번영했다. 413년 서고트족에 의해, 714년에는 무어족에 의해 정복당한 이곳은 1021년 무어족이 새로 수립한 발렌시아 왕국의 수도가 되었고 1238년 아라곤 왕국에 점령되었으나 발렌시아 왕국은 자체의 법과 의회를 갖추고 독자적인 행정권을 행사했다. 1479년 카스티야 왕국에 통합되어 발달했고 예술도 번창했다. 스페인 내란(1936~39) 기간에는 왕당파의 중심지였다. 발렌시아는 ‘100의 종탑도시’라고 불려왔는데, 그중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발렌시아성당의 미겔레테 탑(Torre del Micalet)과 바로크 양식의 걸작인 6각형의 ‘산타카탈리나 탑(Torre de Santa Catalina)’이 가장 뛰어난 걸작으로 꼽힌다. 그밖에도 ‘발렌시아대성당(Catedral de Santa María de Valencia)’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라 론하(La Lonja)’는 물론이고, 시청광장이라고도 불리는 ‘아유타미엔토광장(Plaza del Ayutamiento)’과 ‘중앙시장(Central market)’ 등 볼거리가 많다.
▼ 발렌시아의 시내 여행은 구(舊)시가지에서부터 시작한다. 아니 구시가지만 둘러보고 발렌시아 여행을 끝내버렸다. 그저 수박 겉핥기식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 모든 게 패키지여행의 특징이니 말이다. 투어의 시작은 세라노 문(Torres de Serranos)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문의 안쪽이 구시가지라고 보면 될 것이다. 19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발렌시아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는 ‘토레스 데 세라노(Torres de Serranos)’와 ‘토레스 데 콰르트(Torres de Quart)’를 제외하고는 모두 철거되었다고 한다.
▼ 토레스 데 세라노(Torres de Serranos) 문은 발렌시아의 유명한 축제인 ‘불의 축제’ 때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곳이다. 거대하고 튼튼하게 만들어진 성벽의 위용은 그 당시 얼마나 강대한 도시였는지를 짐작케 한다. 특히 다리를 이용하지 않고는 성안으로 들어갈 수 없을 만큼 깊게 파인 해자(垓字)가 눈길을 끈다. 외부로부터의 침략이 끊이지 않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 성문(城門)에서 긴 대로를 따라 100m쯤 걷다가 오른편 골목으로 들어선다. 차량이 다니지 않는 보행자 전용로이다. 들머리 왼편에 ‘la casa de los dulces’라는 간판을 단 제과점이 보이니 참조한다. 스페인어를 모르기 때문에 뭔 소린지는 알 수가 없으나 ‘caramelos desde 1953’라고 적힌 것으로 보아 만만찮게 유명한 집이 분명할 게다.
▼ 골목으로 들어서자마자 노천카페가 길손을 맞는다. 아니 길가 있는 식당에서 놓아둔 식탁들이라고 해야 하는 게 더 옳을 것이다. 햇빛 쏘이기를 즐겨하는 유럽인들에게는 친숙한 장소일 것이고 말이다.
▼ 골목에는 상점들이 즐비하다. 명품에서부터 기념품까지 팔고 있는 상품의 종류도 다양하다. 하지만 시간에 쫒기는 우리에게는 눈요기할 시간조차도 주어지지 않는다. 해가 떨어진지 이미 오래이지만 아직까지 저녁식사를 못했기 때문이다. 식사는 오늘 저녁에 머물 호텔에 차려져 있다. 그리고 일정을 서두른다고 해도 10시 안에는 호텔에 도착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찌 가게 안을 기웃거릴 짬이 주어질 수 있겠는가.
▼ 골목을 지나면 비르헨광장(Plaza de la virgen)이다. 그 역사가 로마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되는 이 광장은 늘 붐비는 모양이다. 저녁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제법 많은 것을 보면 말이다. 특히 서성이는 사람들이 관광객이 아닌 현지인들인 것이 그 증거이지 않나 싶다. 하긴 멋지고 고풍스런 건물들로 둘러싸인 이런 곳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거기다 아름다운 조각상들이 들어앉은 예쁜 분수까지 갖추고 있으니 말이다.
▼ 대성당 방향(왼편)에 팔각(八角)으로 지어진 특이한 건축물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탑(塔)처럼 생긴 이 구조물은 대성당의 일부분인 cimborrio라고 한다. 외부의 빛을 안으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고 있다니 일종의 ‘랜턴 타워(lantern Tower)’인 셈이다.
▼ 분수(噴水)의 조각상들은 발렌시아 태생의 조각가 Sivestre de edeta의 작품들이란다. 자세 좋게 누워있는 남자는 Turia강을 나타내는 넵튠(Neptune : 고대 로마 신화에 나오는 ‘바다의 신’)이고, 그 주위의 벌거벗은 여인들은 발렌시아 주변 평야의 8개 도랑(Quart, Benagery Faitanar, Acequia de Tormos, Mislata, Mestalla, Favaro, Rascanya, Rovella)을 나타내는 것이란다. 도랑의 이름들은 아랍사람들로부터 유래된 것이라니 참조할 일이다.
▼ 발렌시아대성당(Catedral de Santa María de Valencia)은 광장과 맞닿아 있다. 그리고 성당의 문(門) 하나는 광장으로 나있다. 사도(使徒, Apostolus)들로 여겨지는 상(像)들이 새겨진 것으로 보아 발렌시아대성당의 북쪽 현관인 ‘사도의 문(Puerta de los Apostoles)’일 것이다. 14~15세기 완성한 ‘사도의 문’은 고딕양식으로 지어진 것이 특징이다. 이 외에도 성당에는 두 개의 출입문이 더 있다. 남쪽 현관인 ‘팔라우 문(Puerta del Palau)’과 정면 현관인 ‘철의 문(Puerta de los Hierros)’이다.
▼ 문이 열려있지 않은 관계로 그냥 지나친다. 정면 현관인 ‘철의 문(Puerta de los Hierros)’으로만 관광객의 입장이 허용되기 때문이다. 발렌시아대성당(Catedral de Santa María de Valencia)은 구시가지의 중심부에 위치한 주교좌 대성당(라세오)이다. 1262년 이슬람 시대의 모스크가 있던 자리에 짓기 시작한 이 성당은 450여 년이 흐른 1702년에야 완성되었다고 한다. 그런 만큼 건축에 사용된 양식이 다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로마네스크와 바로크, 그리고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세 개의 출입문이 유명하다.
▼ 성당 안으로 가는 골목에는 고풍스런 옛 건물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어떤 내력을 갖고 있는 건물들인지가 무척 궁금하다. 누군가의 안내가 꼭 필요한 시점이다. 하지만 갈 길 바쁜 가이드는 그런 내 마음을 아랑곳하지 않고 발걸음을 서두른다. 그런 그녀를 붙잡고 이것저것 물어보는 염치가 내게는 없으니 어쩌겠는가. 모르면 모르는 대로 넘어가고 보자.
▼ 얼마쯤 걸었을까 또 다른 문 하나가 나타난다. 아치형 모양의 생김새로 보아 남쪽 현관인 ‘팔라우 문(Puerta del Palau)’이 아닐까 싶다. 이 문은 착공 당시 것으로 초기 고딕양식이 혼합된 로마네스크 양식이라고 한다.
▼ 잠시 후 성당의 정면 현관인 ‘철의 문(Puerta de los Hierros)’에 이른다. 승천하는 성모마리아상이 화려하면서도 정교하게 새겨진 이 문은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것이 특징이다.
▼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 때 사용했다는 성배(聖杯)가 모셔져 있는 ‘산토 칼리스 예배당(Capilla del Santo Caliz)’은 ‘철의 문’으로 들어서서 오른편으로 방향 틀면 만나게 된다. 짙은 갈색의 잔인 성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을 조각한 12개의 석조물 가운데 유리로 된 보호막 안에 안치되어 있는데, 금으로 된 밭침은 후에 덧붙여진 장식이란다.
▼ 성당 안에서는 종교화 등 수많은 예술품들을 만날 수 있다. 그중에 고야가 그렸다는 종교화 2점이 있다고 하니 놓치지 말고 살펴볼 일이다.
▼ 가톨릭 성인(聖人)들이 남긴 유물들도 가끔 보인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유리함 속에 든 팔이다. 물론 미라(mirra) 상태이다.
▼ 대성당은 ‘벽화 성당’이라고 불릴 정도로, 내부에 벽화가 많다.
▼ 성당을 빠져나오면 잠시 후 휘황찬란한 불빛에 둘러싸인 번화가에 이른다. 발렌시아 시민들의 상업 활동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는 메르카도 구역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곳에는 두 개의 상징적 건물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고딕양식으로 지어진 ‘라 론하(La Lonja)’와 20세기 건축미가 잘 반영된 현대적 건물인 ‘중앙시장(Central market)’이다. 특히 ‘라 론하(La Lonja)’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 건물은 15세기 이슬람 왕궁 터에 실크와 상품 교역 거래소로 지어져 19세기까지 사용되었다고 한다. 무역거래를 위해 사용하던 탁자와 거대한 나선형 기둥으로 장식된 홀, 둥근 천장 등 건물 전체가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한단다. 발렌시아를 찾는 사람이라면 꼭 들러봐야 할 곳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럴만한 여유가 주어지지 않는다. 앞서가는 가이드를 쫒아가려면 주마간산(走馬看山)으로 주변풍경을 눈에 담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서두르는 가이드가 얄밉지만 어쩌겠는가. 이 또한 패키지의 특성인 것을 말이다. 참고로 중앙시장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시장 중 하나라고 한다. 현대적 감각에 역사까지 깃들어 있는 장소로 볼 수 있다. 싱싱한 채소와 과일들이 상점마다 가득하지만, 이곳은 아침시장이기 때문에 오전 7시 30분부터 오후 2시까지만 운영된단다.
▼ 다시 광장으로 되돌아 나온다. 뒤돌아보니 방금 둘러보았던 ‘발렌시아대성당’이 보인다. 문득 그 뒤편에 보이는 성당의 종탑(鐘塔), 즉 미겔레테탑(카탈루냐어: Torre del Micalet)에 올라보지 못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덕분에 난 그렇게나 빼어나다는 발렌시아의 야경(夜景)을 볼 수가 없었다. 시간에 쫒기는 가이드가 일부러 빼먹었는지는 몰라도 아쉽기 짝이 없는 일이다. 진한 아쉬움은 미겔레테탑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다. 집사람의 채근이 있고나서야 겨우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을 정도로 말이다.
▼ 광장을 빠져 나오면서 발렌시아 투어는 끝을 맺는다. 이젠 저녁식사에 곁들여 시원한 맥주 한잔 들이킬 일만 남았다. 잠시 후 도착한 호텔 'Posadas De Espana Paterna'은 시설만 놓고 보면 나름대로 괜찮은 편이었다. 하지만 아침 식사는 최악 그 자체였다. 도시락 형태로 만들어졌는데 구성은 모두 인스턴트식품으로 채워져 있었다. 거기다 내용물 또한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먹기 힘들 정도로 딱딱한 토스트와 비스키트(biscuit) 두어 조각이 다일 정도로 양이 부실할 한데다, 과일 주스(juice) 한 팩에 과일 한 알이 전부였다. 소시지나 베이컨은 물론이고 그 흔한 달걀프라이 조차도 찾아볼 수 없었으니 두말하면 뭘 하겠는가. 호텔에서가 아니라 버스 안에서 먹었다면 차라리 시간이 촉박해서 그랬을 것이라고 위안이라고 했었을 것이다.
여행 둘째 날 오후 : 람브라스거리(Las Ramblas)와 몬주익언덕(Montjuïc Hill)
특징 : 아름다운 예술의 도시로 꼽히는 바르셀로나(Barcelona)는 여행전문 잡지 ‘Travel+Leisure’가 선정한 ‘세계 최고의 도시탑 10(World's Best Cities Top 10)’에서 8위를 차지한 곳이다. 그만큼 문화나 음식, 친절도 등 많은 면에서 뛰어나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천재건축가였던 ‘가우디’의 흔적들은 단연 돋보인다. 가우디가 만들어낸 우아한 건축미가 바르셀로나를 예술과 디자인의 도시로 재탄생시켰기 때문이다. 그중 ‘구엘궁전(Palau Güell)’과 ‘카사 밀라(Casa Mila)’ 등 가우디의 흔적들이 많은 곳이 람브라스거리이다. 또한 이 거리는 자라(Zara), 망고(Mango), 풀&베어(Pull&Bear) 등 스페인 태생의 SPA 브랜드들이 늘어서있는가 하면 행위예술, 댄스, 서커스, 스페니쉬 기타연주 등 우리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는 예술가들이 즐비한 예술의 거리이다. 때문에 바르셀로나를 찾은 사람들이라면 빼놓지 않고 들르는 필수코스이다. 다른 한편으론, 한국인이라면 가우디보다도 황영조를 먼저 떠올리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마라톤에서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금메달을 땄던 곳이 이곳 바르셀로나이기 때문이다. 그보다 먼저 손기정선수가 베를린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기도 했지만 당시에는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뛰었으니 거론하지 않겠다. 하여튼 한국인들의 관광코스에는 올림픽 주경기장이 있는 몬주익언덕(Montjuïc Hill)을 결코 빠뜨리지 않는다. 당시의 영광이 우리 국민들에게 주었던 감명이 그만큼 컸던 게 그 원인이지 않을까 싶다.
▼ ‘성가족성당(Sagrada Familia)‘을 둘러본 후에는 지중해와 접해 있는 항구, 포트 벨(Port Vell)로 간다. 스페인 사람들이 즐겨 먹는다는 ‘빠야’라는 스페인 전통음식을 맛보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항구의 끄트머리에 자리 잡고 있는 ‘엘 치피론(El Chipiron)’이란 식당으로 찾아간다. 맛있는 ‘빠야(Paella)’를 잘 만들기로 유명한 곳이다.
▼ 버스에서 내려 식당으로 가는 중에도 눈길은 바쁘기만 하다. 항구 옆으로 난 길가에 빼꼭히 늘어선 조형물들이 여행객들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관광객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 신경을 쓴 흔적들이 역력하다.
▼ 포트 벨(Port Vell)은 온통 요트들의 세상이다. 가끔 호화스런 요트들도 눈에 띈다. 요트에도 빈부의 격차가 있나보다. 하긴 작은 요트일망정 갖고 있다는 것 자체가 부의 상징일 테지만 말이다.
▼ 식당은 ‘마레마그넘(Maremagnum) 쇼핑몰’ 건물 2층에 자리 잡고 있다. 음식 잘한다는 소문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 첫 번째 증거는 많은 사람들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는 식당풍경이다. 점심시간이 약간 지난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로 붐빈다는 것은 그만큼 음식이 맛있다 얘기일 것이다. 두 번째 증거는 음식 맛이다. 홍합과 여러 가지 해물을 밥과 함께 볶아 내놓는 ‘빠야’는 우리들 입맛에도 딱 맞았다. 부둣가의 싱싱한 해물을 사용한 덕분이 아닐까 싶다. 거기다 창밖으로 지중해의 푸른 물빛을 바라보는 눈의 호사(豪奢)까지 누릴 수 있었으니 더 말하면 잔소리가 아니겠는가. 참고로 빠야(빠에야)의 주재료는 우리에게 익숙한 쌀이며 빠에야팬에 여러 재료를 넣고 쌀과 물을 넣어 끓인 후 살짝 쫄인 음식으로 크게 나눠 ‘해산물 빠에야’와 ‘먹물빠에’가 있다. 하지만 요즘에는 손님의 입맛에 맞춰 '야채빠에야', '버섯 치즈 빠에야' 등 다양한 메뉴가 개발되어 있다. 여기서 드리는 팁(tip) 하나, 스페인 음식은 소금이 많이 들어가는 게 특징이다. 이때를 대비해 소금을 빼달라는 말, 즉 'sin sal(씬 쌀)'이란 문구를 기억해 두자. 빠야를 주문하면서 이 말을 같이 한다면 우리 입맛에 맞는 짭쪼름한 빠에야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 ‘람브라스 거리(Las Ramblas)’로 가기 위해 다리를 건넌다. 파도가 넘실대는 모양을 형상화한 ‘갑판’ 모양의 다리이다. 림블라스 거리의 연장선이라는 뜻으로 'Rambla de Mar', 즉 ‘바다의 람블라’라고도 불린단다. 이 다리는 가끔 상판이 위로 올라가기도 한단다. 큰 배가 지나갈 때란다. 오래 전에 보았던 부산의 ‘영도다리’를 떠올리며 직접 눈으로 볼 것을 기대해보았지만 그런 행운은 주어지지 않았다.
▼ 배도 부르고 하늘은 쾌청하니 저절로 느긋해진다. 캔맥주 하나를 들고 다리를 건넌다. 하지만 걸음걸이의 속도는 최대한으로 늦춘다. 그리고 현지인들처럼 부둣가 햇살 아래에 최대한으로 몸을 노출시켜본다. 초겨울의 햇살은 여름처럼 따갑지만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하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부둣가의 바다는 기대 이상으로 깨끗하고 실눈을 헤집고 들어오는 바다의 반짝임은 보석처럼 잔잔하게 눈부시다.
▼ 다리를 건너면 ‘콜럼버스동상(Mirador De Colom)’이 여행객들을 맞는다. 동상이 서있는 광장은 차와 사람들로 붐빈다. 무엇이 그 지역 사람들의 성품과 느낌을 결정짓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들에게서는 명랑하고 활달한 색조가 진하게 배어 나온다.
▼ 람브라스거리 주변이 골목 풍경, 차량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차도(車道)가 좁은 대신에 이를 가운데에 두고 양편으로 난 인도(人道)는 그 두 배에 이를 정도로 널따란 게 이색적이다. ‘사람이 우선’이라는 그네들의 관념이 만들어낸 풍경이 아닐까 싶다.
▼ 청동과 철,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이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동상’은 왼손에는 지도(地圖)를 그리고 오른손은 저 멀리 바다를 가리키고 있다. 그 쪽 끄트머리에 신대륙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모양이다. 쭉 뻗은 팔과 손가락, 쫙 벌린 다리와 당당한 가슴과 어깨위에 드리워진 망토가 바람에 펄럭인다. 그 기세가 만만찮게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아무튼 바르셀로나 시민들에게 지중해로 대서양으로 신대륙으로 향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 저 동상은 우리에게 뭔가에 대한 결정을 주문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가 가리키는 손가락을 볼 것인가 아니면 그가 가리키는 희망을 볼 것인가’
▼ ‘콜럼버스 동상(Mirador De Colom)’이 있는 이곳에서 도시 중심 ‘카탈루냐 광장(Placa de Catalunya)’까지의 약 1.3km가 ‘람브라스 거리(Las Ramblas)’이다. 이 거리는 유서 깊고 매우 로맨틱한 거리다. 거리에서는 행위 예술가, 뮤지션, 플라멘코 댄서들이 자신들의 예술을 공연 하고 있는데 유럽에 있는 도시들 중 수준 높은 예술가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이기도 하다. 참고로 람블라(rambla)는 스페인어로 ‘나무가 있는, 중앙에 보행자 도로가 있는 길’이란 뜻이란다.
▼ 거리는 초입부터 눈길을 끄는 퍼포먼스(performance) 들이 기다리고 있다. 신화에서나 나옴직한 새가 있는가 하면, 돈키호테(Don Quixote)를 닮은 말 탄 기사도 보인다. 그리고 짝퉁 마이클 잭슨과 조각상을 흉내 낸 카우보이, 문명 비판적인 폐기물 퍼포먼스 등 보기만 해도 즐거운 풍경들이다. 다들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그리고 너나 할 것 없이 행위예술가들 앞에서 포즈를 취한다. 그들 앞에 놓인 모금함에 1유로 정도를 넣는 매너를 잃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 거리 양쪽으로 늘어선 장터 또한 발목을 잡는 또 하나의 블랙홀이다. 아기자기하고 탐나는 갖가지 액세서리에 의류, 장난감 등이 주머니 사정을 보아 주지 않는다. 가죽 제품이 특히 강세라는 스페인이고 보니 작은 가죽 소품 하나라도 챙겨 가고픈 마음에 이곳저곳 샅샅이 훑어보느라 여념이 없다.
▼ 양쪽으로 늘어선 건물들에는 규격화된 상점들이 들어서 있다. 가끔 유명제품을 팔고 있음을 알리는 간판들도 본인다. 람브라스의 또 다른 풍경이다. ‘람브라스 거리(Las Ramblas)’는 아름다우면서도 개성이 있는 거리로 유명하다. 아랍에미리트 최대 도시이자 중심 토후국(土侯國)인 두바이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도시를 설계하면서 이곳 ‘람브라스 거리’의 디자인을 주요 모티브(motive)로 활용했을 정도라니 그 유명세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길거리 화가들도 거리 풍경을 만들어내는데 한몫을 한다. 바르셀로나의 몽마르트로 불리는 ‘Placa josep Oriols’가 아님이 분명한데도 꽤 많은 화가들이 자신들의 그림을 그리며 팔기도 하고 있다.
▼ 주얼리(jewellery) 등 장신구를 파는 행상들과 달콤한 맛의 아이스크림 가게 등 다른 눈요기 거리도 많다. 주말에는 걸어가지 못할 정도로 사람들이 많다고 하는데 이는 틀린 것 같다. 주중인데도 불구하고 맞은편에서 오는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쳐야 할 정도로 붐비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얼굴은 하나 같이 밝다. 친절하기로 소문난 카탈루냐 사람들의 특성이 아닐까 싶다.
▼ 느긋하게 걷다가 이내 발길을 돌리고 만다. 집사람을 콜럼버스동상 근처에 버려두고 왔다는 것이 생각났던 것이다. 화장실이 급하다며 혼자 다녀오라고는 했지만, 그녈 버려두고 나 혼자서 거리구경을 한다는 것이 영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대가는 혹독했다. 가우디의 작품들을 다시 한 번 접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해야만 했던 것이다. 조금만 더 걸으면 가우디가 지었다는 ‘구엘궁전(Palau Güell)’과 고급아파트 ‘카사 밀라(Casa Mila)’를 볼 수 있었지만 어쩌겠는가. 아무리 좋은 구경거리일지라도 내 사랑보다는 한참 아래가 분명하니 말이다.
▼ 람브라스 거리를 둘러본 후에는 몬주익언덕(Montjuïc Hill)으로 향한다. 올림픽경기장(Olympic Stadium)이 있고 시내 전경이 잘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황영조선수가 일본선수를 제치고 선두로 나섰음직한 언덕길을 오르면 올림픽주경기장이 나타난다. 버스는 경기장의 맞은편에다 사람들을 내려놓는다. 커다란 바위들이 몇 개 놓여있는 작은 공원 앞이다. 황영조선수의 올림픽 제패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조형물이란다. 참고로 몬주익의 몬(mont)은 ‘산’, 주익(juic)은 ‘유대인’이라는 뜻으로 유대인의 산을 말한다.‘ 기원전 3세기 전부터 유대인들이 모여 살아온 곳이라는 것이다. 또 한편으론 14세기말 스페인이 통일될 때 가톨릭으로 개종하지 않은 많은 유대인들이 스페인 전역에서 모여와 살던 곳이라고도 한다. 어떤 얘기가 옳던 간에 유대인들이 모여 살던 곳임에는 분명하다.
▼ 한국 교민들은 이곳을 ‘황영조공원’이라고 부른단다.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의 상(像)과 풋프린팅(foot printing)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01년 경기도와 바르셀로나가 상호 협의하여 조성했는데,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과 황영조의 마라톤 금메달을 기념하기 위해서란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경기도에서 세웠을까? 황영조는 강원도 출신이 분명한데도 말이다. 이곳 교민들이 강원도에다 건의를 했으나 응하지 않았고, 그 대안으로 경기도에 부탁하여 만들게 되었다고 가이드가 알려준다. 강원도로서는 좋은 홍보기회를 놓친 셈이다.
▼ 황영조선수를 만났다면 이젠 주경기장(主競技場) 안으로 들어가 볼 일이다. 이 경기장은 1992년 제25회 하계올림픽이 열렸던 장소이다. 그리고 삼척 출신의 황영조선수가 몬주익의 영광을 안고 일약 스타가 되었던 곳이다. 어제 공항에서부터 함께 해온 태권도사범 출신 현지가이드가 열변을 토한다. 기존의 경기장을 거의 손보지 않은 채로 재활용했다는 등 당시의 상황들을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하지만 무슨 말인지는 도통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보다는 황영조선수가 뛰어 들어왔음직한 메인출입구와 그가 테이프를 끊었을 결승점을 눈과 가슴에 넣기 바빴던 것이 그 이유일 것이다.
▼ 고래 모양으로 생긴 올림픽 성화대
▼ 황영조 선수가 월계관을 쓴 이곳 ‘몬주익경기장’의 본래 이름은 ‘에스타디 올림픽 유이스 콤파니스(Estadi Olímpic Lluís Companys)’이다. 이는 몬주익언덕의 채석장 묘지(Fossar de la Pedrera)에 있다는 ‘유이스 콤파니스(Lluís Companys)’라는 사람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이름이란다. 그는 나치 정보원들에게 체포되어 죽임을 당한 카탈루냐의 마지막 대통령이다.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지원하는 프랑코 독재와 싸우기 위해 미국·영국을 포함한 세계 53개국에서 3만 명 이상의 진보세력이 모여들었던 에스파냐(스페인) 내전은 반드시 이겨야 했던 싸움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졌다. 그리고 이 내전에 참전했던 ‘앙드레 말로(Andre Malraux)’는 ‘정의가 패배할 수 있음을, 폭력이 정신을 꺾을 수 있음을, 용기가 보답 받지 못할 수 있음을 배웠다’고 말했다. 그들이 진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사람은 그 역사를 반복하게 된다.’고 ‘조지 산타야나(George Santayana)’는 말했다. 그들이 지게 만들던 사소한 이유, 즉 ‘작은 차이에의 지나친 집착’을 떠올리며 조금은 더 유능해져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 주기경기장을 빠져나오면 각종 조형물이 세워져 있는 널따란 광장이 나온다. 그리고 그 건너편에는 거대한 실내체육관이 버티고 있다. 이곳 몬주익은 1888년 바르셀로나만국박람회를 위한 전시장 개발을 시작으로 올림픽경기장이 들어서고 미술관과 공원 등이 조성되면서 관광의 명소가 되었다.
♧ 바르셀로나 : 이베리아반도 북동부의 지중해를 바라보는 곳에 위치한 카탈루냐 지방의 중심도시로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도시이다. 바르셀로나는 안토니오 가우디(Antonio Gaudi)와 그의 후원자였던 에우세비 구엘(Eusebi Güell Bacigalupi)이 연상되는 도시이다. 하지만 한국인들에게는 ‘꽃할배’의 이순재나 신구, 백일섭, 박근형 등이 먼저 떠오르지 않을까 싶다. 이서진은 덤으로 말이다. 그만큼 꽃할배가 낯선 이국땅을 동경하는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이 컸기 때문이다. 그들 덕분인지는 몰라도 스페인 관광을 하는 중에 심심찮게 한국어를 들을 수가 있었다. 참고로 바르셀로나는 기원전 3세기의 바르시노(Barcino)라는 이름의 도시가 시초이다. 기원전 201년에 로마의 지배에 넘어갔고,이슬람이 이베리아반도를 점령했을 때는 프랑코왕국에 편입되었다가 10세기 후반에 독립을 선언한다. 이후 아라곤왕국의 수도로서 해운, 수공업, 금융의 중심지로 황금기를 누렸으며 14세기에 그 절정에 달했다. 당시의 건축물 가운데 상당수가 구시가지 중심부에 많이 남아 있어 당시의 모습을 충분히 연상할 수 있을 정도다.
여행 둘째 날 오전 :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성가족성당 : Temple Expiatori de la Sagrada Familia)
특징 : 바르셀로나 마요르까 거리에 신 고딕양식으로 세워지고 있는 성당으로 스페인의 세계적인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Antonio Gaudi : 1852-1926)’가 설계하고 직접 건축 감독을 맡은 로마가톨릭교의 건축물이다.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성(聖) 가족'이라는 뜻으로, 예수와 마리아 그리고 요셉을 뜻한다. 원래는 가우디의 스승인 비야르(Francisco de Paula del Villar y Lozano)가 설계와 건축을 맡아 성 요셉 축일인 1882년 3월 19일에 착공하였으나, 비야르가 건축 의뢰인과의 의견 대립으로 중도 하차하고 1883년부터 가우디가 맡게 되었다. 가우디는 기존의 작업을 재검토하여 새롭게 설계하였으며, 이후 40여 년간 성당 건축에 열정을 기울였으나 1926년 6월 사망할 때까지 일부만 완성되었다. 건축 자금을 후원자들의 기부금만으로 충당하여 공사가 완만하게 진행되었으며, 스페인내전과 제2차세계대전 등의 영향으로 공사가 중단되기도 하였으나 1953년부터 공사를 재개하여 현재까지 진행 중이며, 가우디 사후 100주년이 되는 2026년에 완공될 예정이다. 전체가 완성될 경우 성당의 규모는 가로 150m, 세로 60m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중앙 돔의 높이는 약 170m이다. 건축양식은 입체기하학에 바탕을 둔 네오고딕식이다. 구조는 크게 3개의 (**)파사드(Façade)로 이루어져 있다. 3개의 파사드에는 각각 4개의 첨탑이 세워져 총 12개의 탑이 세워지는데, 각각의 탑은 12명의 사도(제자)를 상징한다. 모두 100m가 넘는다. 또 중앙 돔 외에 성모마리아를 상징하는 높이 140m의 첨탑도 세워진다. 한마디로 가우디 건축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으며,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물이기도 하다.
**) 파사드(Façade), 건축물의 주된 출입구가 있는 정면부(正面部)로, 내부 공간구성을 표현하는 것과 내부와 관계없이 독자적인 구성을 취하는 것 등이 있다. 건물 전체의 인상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그 구성과 의장은 매우 중요하다. 보통 장식적(粧飾的)으로 다루어질 때가 많으며, 건축양식의 역사에서 중요한 것이다.
▼ ‘성가족성당’ 즉 ‘사그라다 파밀리아(Sagrada Familia) 성당’의 투어는 성당에서 5분 정도 떨어진 곳에서부터 시작된다. 버스로는 성당 근처까지 접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보여행자들의 출발지인 ‘사그리다 파밀리아역’보다는 가까운 편이다. 이 또한 패키지여행자들의 이점이 아닐까 싶다. 버스에서 내리면 저 멀리 마치 동화 속에서나 나올법한 고성(古城)과도 같은 외형의 성당이 올려다 보인다.
▼ 성당의 첨탑이 시야(視野)에 들어온다. 영락없는 옥수수다. ‘시안견유시 불안견유불(豕眼見唯豕, 佛眼見唯佛)’이라는 말이 있다. 조선 개국 초기의 승려인 무학대사가 한 말로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의미이다. 난 명색이 가톨릭 신자이다. 그것도 몇 십 년을 묵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스럽다고 여기는 첨탑이 주전부리용 옥수수로 보인다는 것은 아직도 내 믿음은 걸음마 수준일 수밖에 없다는 증거일 것이다.
▼ 성당의 상부에는 대형 타워크레인(tower crane) 여러 대가 설치되어 있다. 아직도 공사가 진행 중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신이 머물 지상의 유일한 공간’ ‘인간이 만든 최고의 조형물’로 평가받는 파밀리아 성당의 건축은 100년 넘게 진행 중이다. ‘작품은 긴 시간의 결과여야 한다. 건축하는 기간이 길면 길수록 좋다’는 가우디의 평소 지론이 반영된 결과라고 한다. 가우디의 사후(死後) 다른 건축가들이 공사를 진행하다가 1936년 스페인 내전과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독재, 제2차 세계대전 등으로 중단됐다. 공사는 1952년에 재개됐지만 아직까지도 현재진행형이다. 하지만 성당을 보기 위해 바르셀로나를 찾는 관광객은 매년 32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일부러 공사를 늦추고 있다’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 이유일 것이다. 해마다 벌어들이는 관광수입이 엄청날 것이기 때문이다.
▼ 성당의 경내(境內)로 들어섰다고 해서 곧장 성당 안으로 들어가는 우(愚)는 범하지 말자. 성당의 전경(全景)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최고의 전망대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성당 전면에 위치한 연못가이다. 그러니까 성당에서 볼 때 연못 건너편이라고 보면 된다. 연못가에 이르면 유럽의 여느 성당들과는 다른 울퉁불퉁한 겉모습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저마다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기 시작한다. 그리고 두 눈으로 담고도 넘쳐나는 그 황홀한 광경을 하나라도 놓칠 새라 셔터를 누르는 손가락들이 한없이 바빠진다.
▼ 어마어마하게 큰 규모가 사람을 놀래 키게 만든다. 문득 건축을 시작하면서 대중을 향해 던졌을 가우디이 열변이 떠오른다. 그리고 현재의 모습과 비교해 나가면서 성당의 안을 둘러본다. ‘이 교회는 신이 머무는 곳으로, 기도하는 장소입니다. 여기에 모인 우리 모두는 로마의 카타콤베에 있는 초기 교회에서 기도를 드렸던 사람들과 같은 마음으로 기도를 드립니다.……크리프타 위에는 주 제단을 설치하고 평면도는 라틴 십자형으로 다섯 개의 회랑(回廊)과 바실리카 양식의 회랑 세 개를 만들 것입니다. 세 개의 정문을 갖추고 정면에는 마요르카 거리와 마주한 다섯 개의 회랑에 상응하는 다섯 개의 입구를 갖출 것입니다. 그리고 양 옆 문에는 다섯 개의 회랑에 상응하는 세 개의 입구를 만들 것입니다.……각 정문에 네 개의 탑이 설치되고 삼면에서 12사도를 표현해낼 것입니다.……교회는 돔에서 비추는 빛과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조합되어 아름다움이 넘쳐흐를 것입니다. 영광된 빛이 교회 안의 색채를 밝게 비추겠지요.……이 교회가 세워지는 중요한 이유는 신의 집과 기도와 명상의 집을 만드는 것입니다.……이 교회는 종교를 올바르게 볼 수 있는, 넓게 열려진 공간이 될 것입니다.’
▼ 눈에 들어오는 성당의 생김새는 많이 생소하다. 그동안 늘 보아오던 직선들의 집합체로 지어진 성당들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저게 바로 ‘파밀리아성당’이 갖고 있는 특징 중의 하나인 곡선(曲線)의 미학이란다. 가우디는 ‘곡선(曲線)은 신(神)의 선이고, 직선(直線)은 인간의 선이다’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그의 신념을 펼쳐 놓은 것이 바로 이곳 파밀리아성당이라고 보면 된다. 그의 신념대로 곡선만을 고집해가며 지었기 때문이다.
▼ 성당 안으로 들어간다. '탄생의 파사드(Nativity Façade)'이다. 파사드(Façade)란 건축물의 주된 출입구가 있는 정면부의 문(門)을 말하는데, 파밀리아성당은 크게 3개의 파사드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 보이는 이 ‘탄생의 파사드’는 그리스도의 탄생을 경축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가우디가 직접 감독하여 완성한 유일한 문이다. 이런 점을 인정받아 이 문과 예배실은 '안토니 가우디의 건축(Works of Antoni Gaudí)'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바 있다. 나머지 2개의 문은 '수난의 파사드(Passion Façade)'와 '영광의 파사드(Glory Facade)'인데, 전자는 1954년에 착공하여 1976년에 완성되었고, '영광의 파사드'는 2002년이 되어서야 착공한바 있다. 참고로 3개의 파사드에는 각각 4개의 첨탑이 세워져 총 12개의 탑이 세워지는데, 각각의 탑은 12명의 사도(제자)를 상징한다고 한다. 첨탑들은 모두 100m가 넘는다. 또 중앙 돔 외에 성모마리아를 상징하는 높이 140m의 첨탑도 세워진다. 재료는 석재인데, 1953년 건축을 재개하였을 때 석재가 부족하여 그 뒤에는 인조 석재와 콘크리트를 사용하고 있다. 탑의 모양은 옥수수처럼 생겼고, 내부의 둥근 천장은 나무처럼 생긴 기둥이 떠받치고 있다. 천장은 별을 닮은 기하학적 무늬로 가득 차 있다.
▼ ‘파밀리아 성당’의 정면이 되는 '탄생의 파사드'는 하늘을 찌를 듯한 4개의 포물선(抛物線) 첨탑(尖塔)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첨탑을 이루고 있는 돌 하나하나는 예수의 탄생을 의미하는 정교한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다. 아니 성당 전체가 '돌로 만들어진 성서'로 보면 된다. 장인들이 직접 손과 연장으로 성서에 기록된 장면들과 가르침 등을 장식과 상징들로 구체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가우디가 성당을 지을 당시엔 사람들이 대부분 문맹이어서 성경의 구절을 읽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성당 겉면에 신약성경의 내용을 조각했다. 각각의 문에 새겨진 조각들을 보면서 성경의 내용과 맞춰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일 것이다. 지금 들어가고 있는 ‘탄생의 문’은 예수님의 탄생에서부터 청년 시절까지를 묘사하고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마굿간에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고 이를 동방박사 3인이 축하해주는 장면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리고 인물들 하나하나의 표정과 동작이 살아있는 듯 사실적이라는 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그는 동네 주민들을 실제 모델로 해서 장시간 몸에 기름을 붓고 석고틀을 만들어서 일일이 석고상을 제작하는 방식을 선택했다고 한다. 특히 유대 왕 헤롯의 영아 살해 장면은 한시라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어린아이를 모델로 할 수 없어서 병원에서 어린아이 시체를 가져와서 석고상을 제작했다고 한다. 그의 완벽주의자로서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일화이다.
▼ 성당은 외형적으로 보면, 크게 3개의 문(門 : 파사드)과 12개의 첨탑, 그리고 정중앙의 탑으로 구성되어 있다. 3개의 문(파사드)은 탄생의 문, 수난의 문, 영광의 문을 의미한다. 각각의 문 위에 우뚝 솟은 4개의 첨탑을 합하면 총 12개로 이것은 예수님의 12제자를 상징한다. 그리고 4개의 탑은 복음서를 쓴 인물들 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을, 정중앙엔 예수님을 상징하는 탑이 우뚝 서 있다. 참고로 가우디는 성당을 ‘몬주익 언덕’보다 낮게 지겠다고 했다 한다. 이것은 인간이 만든 건축물을 신이 만든 자연보다 더 높게 지을 수 없다는 그의 신념에서 나온 말이란다.
▼ 성당 안으로 들어서면 또 다시 의외의 풍경과 마주 대하게 된다. 모든 기둥이 하나 같이 온통 거대한 나무들로 이루어진 것이다. 비록 진짜 나무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기둥들은 아치형의 둥근 천장을 떠받치고 있다. 이 또한 파밀리아성당이 갖고 있는 특징 중의 하나이자 가우디의 영감어린 작품이다.
▼ 마치 숲속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다. 아마 기둥들을 나무모양으로 만들었기 때문이지 않나 싶다. 나무가 자리면서 여러 개의 가지들을 쳐나가고, 그 가지들이 위에서 다른 가지들과 만나면서 천장을 받친다. 참으로 기상천외(奇想天外)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천장의 나뭇잎과 꽃모양, 그리고 나뭇가지 모양의 기둥이 조화를 이루며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인간의 머리에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혹시 신의 영역까지 침범해버린 것이나 아닐까 걱정스럽다.
▼ 성당 안의 벽면 아래에 길게 앉을 자리를 만들어 놓았다. 둘러보다는 게 힘들 경우 잠시 쉬어가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이는 어마어마하게 큰 성당의 규모를 알게 해주는 또 다른 징표일 것이고 말이다.
▼ 본당은 가우디의 계획대로 돔과 창을 통해 스며든 자연광(自然光)이 넘쳐난다. 그 자연광으로 인해 덕 극적으로 돋보이는 게 주제단(主祭壇)이다. 돔에서 내려오는 자연광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 제단 앞에 걸린 화려한 천개(天蓋 : 일산 양식의 덮개를 조성하여 장엄을 도모한 조형물) 아래로 예수상이 매달려 있는데, 천개의 위에는 밀이 자라고 아래로는 포도넝쿨이 걸려 있다. 예수의 살과 피를 의미하는 빵과 포도주를 상징한다고 한다.
▼ 지붕을 받쳐주고 있는 52개의 기둥 중 4개에는 ‘사대 복음서’의 저자를 상징하는 동물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을 상징하는 사자, 사람, 황소, 독수리라고 한다.
▼ 화려한 색상의 스테인드글라스로 햇빛이 가득 들어오면 자연 채광이 화려한 조명이 되어서 성당 내부를 환하게 비춰준다. 들어오는 빛의 각도에 따라 실내 분위기가 수시로 달라진다고 한다.
▼ 남쪽 벽면에는 세계 각국의 언어로 주기도문이 적혀있다. 한참을 찾아보니 한국어도 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옵소서.’
▼ 성당 안을 꼼꼼히 살펴봤다면 이젠 밖으로 나갈 차례이다. 나가는 곳은 서쪽으로 난 문, 즉 ‘수난의 파사드(Passion Façade)’이다. 수난의 문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묘사하고 있다. 예수님은 박해를 받아서 당시 형벌인 십자가에 못 박혀 세상을 떠나지만 장사한지 3일 만에 부활한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의 얼굴상은 음각(陰刻)으로 조각해서, 사방 어디에서 보아도 동일하게 보인다. 그 아래는 성녀 베로니카가 피 흘리는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주자, 수건에 예수님의 얼굴 모습이 찍혀 보인다.
▼ 문에 새겨진 조각들을 보다가 문득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벽면에 새겨진 조각들이 아까 성당으로 들어올 때 ‘탄생의 문’에서 보았던 조각들과 사뭇 다른 기법들인 것이다. 그런데 그 각진 기법들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기법이다. 어제 몬세라트에서 성당으로 들어가는 길에 보았던 조각가 ‘수비라치(Josep Maria Subirachs)’의 작품 '산 조르디'와 똑 같은 기법이 분명하다. 내 예상은 적중했다. ‘수난의 파사드(Passion Façade)’는 수비라치가 공사 책임자로 일하면서 만들었다고 한다.
▼ 가우디 사후 가우디의 설계도에 따라 1980년에 완공된 수난의 파사드는 이름만큼이나 고통스러울 정도로 각이 지고 단순하게 표현되어 있다. 수난의 파사드 왼쪽 벽(바라보는 방향)에는 예수를 죽음으로 이끈 유다의 키스상이 있다. 그리고 그 옆엔 4×4 크기의 마방진처럼 생긴 숫자판이 있는데, 그 숫자를 잘 보면 이 숫자판은 마방진(魔方陣, magic square : 거북의 등에 새겨진 신기한 수의 배열)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 숫자판의 숫자들 중에는 ‘10, 14’ 와 같이 중복된 숫자들이 있는데, 이는 1부터 16까지의 숫자가 한 번씩만 들어가야 하는 마방진의 규칙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숫자판의 가로, 세로, 대각선의 합은 모두 33이다. 이 숫자판으로 33이란 수를 만드는 방법은 무려 310가지나 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 33이란 숫자는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기독교에서 33이란 매우 신성한 숫자인데, 요셉이 성모 마리아와 결혼한 나이가 33세였고, 예수가 죽었다고 알려진 나이가 33세였으며, 창세기에서 예수가 나오는 횟수가 33회였고, 예수님이 기적을 행한 횟수가 33회였다고 한다. 참고로 이 가우디코드는 판매용 엽서로 만들어지고 있으며, 그 수익금은 성당을 짓는 기금으로 활용을 하고 있다고 한다.
▼ ‘수난의 문’ 밖에도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그리고 하나같이 금방 떠날 것 같지는 않은 눈초리들이다. 그들의 뇌리(腦裏)에 준 강열한 그 무엇이 아직까지도 그들의 발목의 붙잡고 있는 모양이다. 그들의 시선에 맞춰 내 눈동자도 같이 움직여본다. 거기에는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인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이 있었다. ‘신은 서두르지 않는다.’는 가우디의 주장답게 성당은 아직까지도 현재진행형이다. 1882년 착공됐지만 130여년이 지난 현재에도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건 끝이 있는 법이다. 성당의 공사도 그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얘기이다. ‘기부금과 입장료만으로 건설되고 있는 ’성가족 성당‘은 건축가의 사후 100주년을 맞는 2026년 완공될 예정이라고 한다. 참고로 가우디가 죽은 지 3년 후에 그가 구상한 ’성가족 성당‘의 전체 도면이 확정 발표되었다. 그 후 성가족 성당은 가우디의 작업을 계승하는 건축가들의 기술적인 연구를 바탕으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하나님은 가우디의 영원한 후원자로서, 가우디가 떠난 지금도 「성가족 성당」은 그의 보호 속에 여전히 지어지고 있는 것이다.
▼ 성당을 빠져나오니 벌써 점심시간이다. 바닷가 식당으로 데려다 줄 버스를 타려면 성당에서 한참을 더 걸어야만 한다. 하지만 결코 지루하지는 않다. 줄지어 늘어선 길가 기념품가게의 쇼 윈도우(show window)를 구경하며 걷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게 맘에 들지 않을 경우에는 가끔 뒤돌아보는 재미도 있다. 강열했던 감흥이 아직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있는 파밀리아성당이 그 자태를 드러낸다. 그리고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31살부터 죽기 전까지 성당의 건축에만 매진했던 가우디를 떠올려본다. 하지만 건축물에 대한 감탄만으로 그치진 말아야 할 것이다. 조급증에 시달리는 우리들에게 100년이나 되는 긴 건축기간과 안전의식은 타산지석(他山之石)이 되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참고로 가우디는 사후 성인으로 추대되어 성당 본당의 지하에 묻혀있다고 한다.
♧ 둘쨋날의 일정은 바르셀로나(Barcelona) 시내 투어이다. 바르셀로나는 이베리아반도 북동부의 지중해를 바라보는 곳에 위치한 카탈루냐 지방(autonomous community)의 중심도시로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도시이다. 바르셀로나는 안토니오 가우디(Antonio Gaudi)와 그의 후원자였던 에우세비 구엘(Eusebi Güell Bacigalupi)이 연상되는 도시이다. 하지만 한국인들에게는 ‘꽃할배’의 이순재나 신구, 백일섭, 박근형 등이 먼저 떠오르지 않을까 싶다. 이서진은 덤으로 말이다. 그만큼 꽃할배가 낯선 이국땅을 동경하는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이 컸기 때문이다. 그들 덕분인지는 몰라도 스페인 관광을 하는 중에 심심찮게 한국어를 들을 수가 있었다. 지중해연안에 있는 바르셀로나는 따뜻했다. 11월 중순인데도 한낮에는 여름날씨처럼 무덥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반팔차림으로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눈에 띌 정도였다. 겨울철에도 선글라스는 꼭 챙겨야 하지 않을까 싶다. 참고로 바르셀로나는 기원전 3세기의 바르시노(Barcino)라는 이름의 도시가 시초이다. 기원전 201년에 로마의 지배에 들어갔고 아직 구시가지의 고딕지구라 불리는 곳에는 당시의 성벽이 일부 남아 있다. 이슬람이 이베리아반도를 점령했을 때는 프랑코왕국에 편입되었다가 10세기 후반에 독립을 선언한다. 이후 아라곤왕국의 수도로서 해운, 수공업, 금융의 중심지로 황금기를 누렸으며 14세기에 그 절정에 달했다. 당시의 건축물 가운데 상당수가 구시가지 중심부에 많이 남아 있어 당시의 모습을 충분히 연상할 수 있을 정도다.
▼ 아래사진은 어제 저녁 바르셀로나에서 머물렀던 ‘Bluebay Sant Cugat’. Sant cugat del valles에 위치한 호텔인데, 대중교통(지하철, 버스)의 접근성이나, 규모(객실 96개), 내부시설 등 나름대로 괜찮은 호텔이었다. 하지만 아침 식사는 별로라는 느낌이 들었다. 슬라이스(slice) 햄과 치즈에다 빵은 토스트와 크로와상, 그리고 시리얼(Breakfast Cereal)에다 사과 한 개, 밀크, 주스가 전부인 초간편 메뉴였기 때문이다. 계란 등 유럽이나 미주 등 다른 여행지들에서 보아오던 메뉴들이 많이 빠져 있었던 것이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런 느낌은 여행 내내 지울 수가 없었다. 톨래도와 마드리드를 빼곤 말이다. 혹시 스페인 소재 호텔들의 특징인지도 모르겠다.
여행 둘째 날 오전 : 구엘공원(Park Güell)
특징 : 안토니 가우디의 오랜 후원자이자 사업가, 작가, 정치가였던 에우세비 구엘(Eusebi Güell)은 쾌적한 환경의 주택단지를 만들고 싶어 했다고 한다. 그리고 산 아래의 땅을 사서 가우디에게 설계와 시공을 맡겼는데, 영국식 정원의 형태로 자연과 어우러지게 길을 내고, 부지를 나누어 주택을 짓고, 공동으로 사용하는 시설을 만드는 식이었다. 부지는 총 60개로 나뉘어 있었는데, 당시 가격에 비해 약간 비싸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바르셀로나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불리한 지리적여건 때문에 두 부지만 분양이 되었다고 한다. 이 두 집 중 하나가 지금 가우디 박물관으로 쓰이는 건물이고, 나머지 하나가 카사 트리아스(Casa Trias)다. 공동으로 사용하는 구역은 공사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1914년에 공사가 중단되었고, 1918년에 에우세비 구엘이 사망하면서 이후에 그의 상속자들이 이곳을 바르셀로나 시에 판매하여 1926년에 공원으로 개방되었다. 참고로 구엘 공원(Parque Güell)은 구엘 궁전(Palacio Güell)과 카사밀라(Casa Mila),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탄생의 파사다'와 예배실, 카사비센스(Casa Vicens), 카사바트요(Casa Batlló), 콜로니아 구엘 성당의 지하 예배실(Crypt in Colonia Güell)과 함께 '안토니 가우디의 건축(Works of Antoni Gaudí)'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 주차장에서 내리면 저만큼에 구엘공원의 입구가 보인다. 그러나 이곳은 공원의 정문은 아니고 후문이다. 정문에는 매표소가 없어서 입장이 안 되기 때문이다.. 마침 매표소 옆에 공중화장실이 지어져있으니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볼일을 미리 보고 들어가는 게 좋을 것이다. 투어 중에는 화장실 찾기가 만만찮기 때문이다.
▼ 공원 안으로 들어가면 길을 내는 과정에서 생긴 듯한 벼랑이 나타난다. 그리고 곧이어 돌들을 얼기설기 쌓은 축대(築臺)가 보인다. 축대의 위에도 제멋대로 생긴 돌들을 쌓아 올렸다. 그런데 그게 나름대로의 모양을 갖추고 있는 게 아닌가. 그것도 우리가 평소에 접하지 못했던 기괴한 외형이다. 가우디의 만든 작품이라고 한다. 구엘과 가우디는 이곳에 60호 이상의 고급주택을 지으려고 했단다. 물론 부유층 분양용(分讓用)이다. 하지만 경사(傾斜)가 심한 부지는 돌들이 너무 많아 공사를 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는 그 많은 돌들을 어떻게 치우느냐가 가장 큰 고민이었을 것이다. 다른 곳에다 버리는 일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있다. 미국의 심장전문의사인 로버트 엘리어트(Robert S. Eliet)의 저서 (스트레스에서 건강으로 - 마음의 짐을 덜고 건강한 삶을 사는 법)에서 나온 말이다. 가우디는 이 말을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골칫덩어리였던 돌들을 치워버리는 대신 건축재(建築材)로 활용하는 방법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멋대로 생겨먹은 돌들을 쌓아 ‘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까지 등재를 시켰다. 가우디가 아니라면 결코 이루어내지 못할 일이었을 것이다.
▼ 기둥의 모양이 나무를 쏙 빼다 닮았다. 마치 나뭇가지가 사방으로 퍼지듯 기둥도 위로 올라갈수록 넓어진다. 그런데 저 기둥의 상부(上部) 돌들 하나하나는 인부들이 일일이 붙인 것이라고 한다. 그러다보니 돌이 떨어져 다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고, 이에 주위에서는 설계변경을 요구하는 항의까지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가우디의 신념대로 공사는 이루어졌고 그 결과 저런 멋진 건축물들이 생겨난 것이다.
▼ 기둥 아래에는 의자를 만들어 놓았다. 돌로 만들어졌지만 막상 앉아보면 의외로 편한 느낌이다. 이 모든 게 인체공학적 설계가 가미되었기 때문이란다. 설마 거짓말이야 하겠는가마는 내 가슴에까지 와 닿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아마 의자의 외형이 너무나 거친 게 그 이유이지 않을까 싶다.
▼ 돌기둥의 위는 도로이다. 엉성한 돌기둥의 외형만 보면 그게 믿겨지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동차가 다녀도 끄떡없다니 어쩌겠는가. 그저 놀라울 뿐이다.
▼ 맨 위는 도로이다. 이 곳도 역시 양쪽 난간에 돌기둥들이 세워져 있다. 하지만 아까와는 달리 기둥의 위에다 화분(花盆)을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그 화분에는 하나같이 선인장이 심어져 있다.
▼ 구엘공원의 자랑거리 중 하나는 자갈과 돌로 이루어진 가교(Viaduct)이다. 이런 가교형식의 건축물은 공원 내 다섯 곳에 만들어져 있단다. 전체적으로 비슷한 느낌이나 자세히 살펴보면 각기 다른 모양새이다. 하지만 건축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구태여 일일이 살펴볼 필요까지는 없지 않을까 싶다.
▼ 이 길(산책로)을 따라 위로 오르면 산 위까지 오를 수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어느 누구 하나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없다. 그저 이곳 돌기둥 지역만 둘러보고 하나같이 아래로 내려가 버린다. 하긴 주어진 시간에 더 많은 것을 보려는 관광객들에게는 산책(散策)이라는 것 자체가 하나의 사치였을 것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길을 따라 올라가는 사람들도 몇몇 보인다. 산책 삼아 나온 지역주민들인 모양이다.
▼ 이런 것들을 과연 건축물이라고 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인간이 인위적(人爲的)으로 만들었다기보다는 그저 자연의 일부로 보이기 때문이다. 돌기둥 주변에 심어진 종려나무나 넝쿨식물들과 어우러지는 풍경이 전혀 어색하지가 않다. 주변의 환경에 거슬리지 않고 일체가 되어버린 느낌인 것이다. ‘자연과 건축의 조화’라는 가우디의 신념이 아닐까 싶다.
▼ 가우디가 살던 집, 워낙 분양실적이 저조해서 가우디와 구엘백작 그리고 가우디의 변호사, 이렇게 세 가구만 분양되었다고 한다. 가우디의 집은 현재 박물관(博物館)으로 변했고, 구엘백작의 집은 현재 초등학교 건물로 사용 중이다. 하지만 변호사의 집만은 아직도 그 후손들이 소유하고 있단다.
▼ 공원의 하이라이트인 ‘자연의 광장(Plaça de la Natura)’으로 가는 길, 이곳도 역시 돌기둥들의 연속이다. 그만큼 부지 조성과정에서 나온 돌들이 많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 보수공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도 보인다. 관광지들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비수기(非需期)에 보수공사를 하는 게 일반적이다. 이로 미루어보아 이곳 스페인은 겨울철이 비수기인 모양이다.
▼ 길가에는 노천카페도 보인다. 간단한 요깃거리나 커피, 음료 등을 팔지 않을까 싶다. 물론 맥주도 있을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이런 카페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는 길에 노점상들도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경찰의 단속을 피해 다니는 것을 보면 불법이 분명할 것이다.
▼ 돌기둥들을 구경하며 걷다보면 구엘공원의 하이라이트인 ‘자연의 광장(Plaça de la Natura)’에 이르게 된다. ‘꽃보다 할배’에서 할배들이 한바탕 너스레를 떨었던 곳이다. 이 광장은 둘레를 모두 벤치로 만들어 놓았다. 모자이크 무늬의 벤치이다. ‘혹시 세상에서 가장 긴 벤치가 아닐까?’ 누군가가 너스레를 떤다. 뒤이어 나오는 가이드의 대답은 물론 ‘맞습니다. 맞고요’였다. 돌기둥들을 배경으로 들어앉은 광장의 앞은 바르셀로나가 한눈에 잘 들어오는 테라스(terrace)로 되어 있다. 광장이면서도 테라스의 역할까지 겸하고 있는 구조이다.
▼ 광장의 테라스를 둘러싸고 있는 타일과 유리장식의 벤치는 한마디로 동화적이며 환상적이다. 그리고 아랍식의 이국적인 면모와 미래적인 이미지까지 동시에 담고 있다고 한다. ‘까탈루나 스타일’이기도 한 트랜카디스기법(Trencadis : 타일과 유리, 거울 등을 깨서 모자이크화)이라고 한다. 하나하나의 파편들이 모여져 일정하면서도 창의적인 패턴을 만들어내는 것이 보면 볼수록 경이롭다. 가우디의 아이덴티티(identity)이기도 한 ‘곡선의 미’가 파도를 치듯 물결을 이루는 형식으로 벤치를 이루어나가고 있다. 하지만 이 벤치는 가우디 본인의 작품은 아니라고 한다. 가우디의 오른팔이었던 Josep Maria Jujo가 디자인한 것이란다. 물론 큰 틀과 콘셉트(concept)는 가우디의 것이었다. 하지만 이 공원의 곳곳에는 가우디 측근들의 흔적들도 담겨져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세상에서 가장 긴 벤치’라는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설사 그게 누군가가 농담 삼아 던진 거짓말일지라도 말이다. 스페인에 도착하기도 전부터 동심(童心)으로 돌아가 있던 집사람이 냉큼 벤치에 앉고 본다. 그리고 해맑게 웃는다. 아니 개구쟁이의 민낯이라는 표현이 더 맞는 표정일지도 모르겠다. 나라고 어찌 사양하겠는가. 집사람의 옆에 앉아 망중한(忙中閑)을 즐겨본다. 벤치가 타일로 만들어져서 딱딱하겠다 싶었는데 전혀 그러지 않았다. 생각보다 훨씬 편안했다. 이 모든 게 인체공학적 설계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란다.
▼ 벤치를 따라 광장을 한 바퀴 둘러본다. 정문 쪽으로 나아가면 바르셀로나 시내가 한눈에 잘 들어온다. 시내의 너머에는 지중해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또렷하게 나타나지는 않고 있다. 만일 눈에 들어왔더라면 또 다시 눈물 한 방울 떨어뜨렸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3년 전쯤 일게다. 세미나 참석차 프랑스의 마르세유에 들렀었다. 그리고 이른 저녁을 마친 후, 와인 한 병을 들고 지중해의 해안으로 나갔었다. 저녁 반주로 마신 와인으로 인해 이미 불콰해져 있었음은 물론이다. 해변에서 만난 지중해는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에메랄드빛으로 물든 바다를 본 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리고 뒤이어 나오는 눈물, 그저 우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울다가 가지고 갔던 와인은 마셔보지도 못하고 돌아와야 했던 바다가 바로 지중해였던 것이다.
▼ 정문 앞 광장으로 내려가기 전에 잠깐 산책로에 들른다. 이 산책로는 최대한 주변 환경과 어울리도록 나무 모양처럼 만들었는데, 이 또한 부지를 닦을 때 나온 돌들을 활용한 것이다. 그리고 모티브(motive)는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에서 따왔다고 한다. 산책로를 따라 걷다보면 실제로 파도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재료나 모티브를 자연에서 얻어 자연으로 승화시킨 가우디,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천재 건축가로 치는가 보다.
▼ 산책로를 둘러보았으면 이번에는 ‘살라 이포스틸라(Sala Hipóstila : 기둥을 많이 세운 홀)’라고 불리는 공간이다. 이 공간은 여러 개의 열주(列柱 , colonnade)들이 천장을 받치고 있는데, 공간의 위는 조금 전에 둘러보았던 타일광장이다. 건축 당시 이곳은 시장(市長)으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애초에 이곳이 공동주택단지로 조성되었기 때문에 물건을 사고 팔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90개가 넘는 기둥들은 고대 그리스의 신전(神殿)을 연상시키는 도리스양식(Doric style)이다. 하지만 기둥의 직경을 넓히고 조금 더 육중한 느낌을 주었으며 다주실 천정에는 가우디만의 패턴(pattern)들을 가미함으로써 새로운 느낌을 창출해 냈다고 한다.
▼ ‘살라 이포스틸라(Sala Hipóstila)’는 또 다른 용도를 갖고 있다. 바로 연회(宴會)를 열기 위한 공간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외부로 울려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천장을 일부러 돔(dome) 형태로 만들었다고 한다. 또 하나의 특징은 멀리서 볼 때에 중간 라인이 일직선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가우디는 가까이 있는 것은 낮게, 그리고 안으로 들어갈수록 열주의 길이를 점차 높여갔다고 한다.
▼ 깨진 타일 조각과 버려진 술병 등을 재활용하여 장식한 천장은 섬세함이 돋보인다.
▼ 나뭇잎 모양으로 만들어진 철제 담장이 보인다. 이 또한 가우디의 작품이 아닐까 싶다. 철(鐵)에 얽힌 그의 젊은 시절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20세기의 미켈란젤로(Michelangelo)'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자유로운 사고를 가진 건축가였던 가우디는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덕분에 가우디는 풍부한 볼거리와 대장간에서 쌓은 실험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재료나 형태를 직접 다루면서 그것의 표현적인 본질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가 있었다. 또한 대학 재학 중에는 생활비를 벌 겸해서 여러 장인들의 작업장에서 일을 했다. 장인(匠人) 호세 폰트세레 메스트레스와 건축가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델 빌랴르 이 로사노(Francisco de Paula del Villar Y Lozano)밑에서 제도공으로, 19세기 절충주의 양식의 대가로 바르셀로나에서 유명한 에밀리오 사라 코르테스에게는 조수로 일을 도우며 건축과 장식공예에 관한 감각을 익혀나갔다고 한다.
▼ 공원의 정문(이곳으로의 입장은 불가능하다)에는 경비의 거처와 관리실로 쓰려고 했던 두 채의 건물이 있다. 갈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것이 동화책에서나 보았음직한 집들이다. 특히 독특한 모양의 지붕은 신비롭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마치 반짝거리는 거대한 버섯처럼 보인다. 이는 잘게 부서진 세라믹 파편들이 둥근 지붕 위에서 햇빛을 굴절시키기 때문이란다. 구엘공원에는 허투루 지어진 것들이 하나도 없다. 그 때문인지 서있는 곳마다 멋진 포토존(photo zone)이 되어준다.
▼ 기능적인 면으로 볼 때 ‘살라 이포스틸라(Sala Hipóstila)’는 물을 모으는 곳이기도 하다. 천장으로 내린 비는 가운데가 뚫린 기둥을 통해 아래로 흘러내린다. 배수로 역할을 하기도 하는 기둥을 따라 흘러내린 물은 기둥 밑바닥에 설치된 저수 창고에 모이게 된다. 로마시대에 사용하던 시스템을 가우디가 활용한 것이라고 한다. 저수조에 모인 물은 분수를 통해 밖으로 배출된다. 아래 사진의 중앙에 그 분수들이 배치되어 있다.
▼ 계단에 있는 3개의 분수는 구엘 공원을 더욱더 활기차게 만든다. 지상에 떨어진 빗물이 모이면 세라믹 재질로 된 용의 입으로 토하듯이 나오게 되는데, 이 역시 아폴로 신에 의해 죽임을 당해 매장된 용이 땅속에서 물을 지키고 있다는 그리스 신화를 재구성한 것이란다. 그러니까 저 도마뱀이 지하수의 신 ‘퓨톤(Python)’이라는 얘기이다. 살아있는 듯 꿈틀거리는 용의 형태는 반짝거리는 색색의 타일 조각들과 태양 빛을 쏟아내는 물줄기로 인해 더욱더 생생하게 보인다.
▼ 모자이크문양의 ‘도마뱀 분수’는 구엘공원의 마스코트 (mascot)라 할 수 있다. 스페인 관광책자의 바로셀로나 편에 한번쯤은 꼭 등장하는 명물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분수 앞은 언제나 사람들로 붐빈다. 구엘공원을 다녀갔다는 인증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다.
▼ 까탈루나의 문장(紋章)인 ‘뱀머리’이다. 민족주의자였던 가우디의 의지가 만들어낸 작품이 아닐까 싶다.
▼ 조용하고 고즈넉해 보이는 구엘공원은 바르셀로나 시민들이 휴식을 위해 즐겨 찾는 곳이라고 한다. 하지만 공원 내의 분위기는 겉으로 보이는 것과 사뭇 다르다. 울긋불긋한 건물과 알록달록한 조형물 등 가우디의 톡톡 튀는 작품들 덕분에 상상력과 꿈이 담긴 재기발랄한 공간으로 탈바꿈되어 있다. ‘가우디 동산’ 이라고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는 이유이다.
▼ 관람을 마치고 나가는 길에 만난 담장, 어느 곳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시설이지만 구엘공원에서 만난 담장은 지나가는 길손들의 발걸음을 멈추게끔 만든다. 담장 위의 디자인이 독특했기 때문이다. 디자인뿐만 아니다. 가이드의 말로는 비로부터 담장을 보호할 수 있는 최선의 기법이란다. 원리에 대한 설명을 못 들었으니 맞는지는 모르겠다.
▼ 공원을 빠져 나오는 길, 아까 들어올 때와는 달리 거리의 악사(樂士)가 보인다. 오늘은 스페인 여행의 둘째 날, 여행객들의 눈에는 이색적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너나 할 것 없이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대는 걸 보니 말이다. 하지만 주의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무턱 대고 셔터를 누르는 우(愚)는 범하지 말라는 얘기이다. 최소한 동전 몇 닢이라도 악기 케이스 안에다 넣어 준 뒤에 셔터를 누르는 것이 최소한의 매너(manner)이기 때문이다.
♧ 스페인 : 정열의 나라로 알려진 스페인은 프랑스나 독일, 영국 등 다른 유럽국가에 비해 다소 생소한 나라이다. 그리고 스페인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먼저 플라멩코이나 투우 그리고 축구를 떠올리게 된다. 중세나 고대 유적들을 떠올리는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는 이미지가 많이 다르다는 얘기이다. 그런 스페인이 최근 한국 관광객들에게 최고의 관광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곳곳에 산재한 유적들이 이슬람교, 카톨릭, 유태교 등 다양한 종교가 접목돼 독특한 문화를 연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피카소 등 위대한 예술가들의 흔적과 함께 현대적 세련미가 돋보이는 가우디의 건물들도 만날 수 있다. 참고로 스페인은 유럽의 남서쪽 이베리아 반도에 위치해 있으며, 서쪽으로는 포르투칼, 북쪽으로는 프랑스 그리고 남쪽으로는 모로코가 자리 잡고 있다. 이런 지리적 위치 등으로 인해 아랍과 유럽 문화가 뒤섞여 있다. 또한 스페인은 전통적인 농업국가로 유럽 국가 중에서 농업의 비중이 가장 높으며 감귤, 포도, 올리브 등이 특히 유명하다. 동시에 천혜의 어장인 대서양을 무대로 어업도 활발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관광산업이 중요한 소득원이다.
찾아오는 길 ; 인천공항에서 스페인의 양대 도시인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까지 다니는 직항노선이 있다. 물론 국적기(國籍機)이다. 하지만 우리를 인솔하는 여행사(노랑풍선)는 카타르항공(Qatar Airways)을 이용했다. 덕분에 우린 인천에서 카타르의 수도 도하(Doha)를 거쳐 바르셀로나까지 오는 장장 21시간(도하에서 환승하는데 걸린 4시간 포함)에 이르는 여행을 할 수밖에 없었다. 최소 경비로 일정을 맞추어야만 하는 패키지(package)상품의 특징이니 어쩌겠는가. 하지만 여성들에게는 힘든 일정이었나 보다. 집사람과 처제 등 이번 여행을 함께 다녀온 여성 일행들 모두 앞으로는 환승상품 이용은 사양하겠단다. 경비를 조금이라도 아껴보려는 남자들은 예외였지만 말이다.
▼ 아래 지도에 표기된 행선지 표시와는 조금 다르게 진행되었다.
그라나다에서 론다로 가는 길에 말라가나 프리헬리아나 대신에 미하스를 들렸으며, 리스본과 호까곶을 둘러본 후 마드리드로 가는 길에는 포르투 대신에 파티마(포르투갈)와 톨레도를 경유했다.
▼ 몬세라트의 특징
몬세라트(카탈루냐어: Montserrat, 스페인어: Montserrat)는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의 바르셀로나 근교에 있는 산이다. 해발 1235m의 이 산은 해저(海底)의 융기(隆起) 작용에 의해 만들어진 탓에 태초의 자연을 그대로 보여준다. 특히 6만여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산세가 마치 톱처럼 생겼다고 해서 '톱니 산'이라는 의미의 '몬세라트'라는 이름이 붙었다. 하지만 특이한 산세보다는 ‘검은 마리아상’이 주는 이미지가 더 강하지 않았을까 싶다. 12세기 어느 날, 양치기가 성스러운 빛을 보고 검은 마리아상을 발견해 수도원에 모시면서 더욱 유명해졌기 때문이다. 그 ‘검은 마리아상’은 산 중턱(해발 725m)에 위치한 아서왕의 성배 전설에 등장하는 ‘베네딕트수도회’의 ‘산타 마리아 몬세라트 수도원’에 모셔져 있다. 참고로 해발 1235m에는 산 호안(Sant Joan) 전망대가 있으며, 수도원보다 약간 낮은 곳에 산타 코바(Santa Cova) 전망대가 있다. 수도원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산 호안 전망대에 오르면 하늘과 맞닿은 산 정상이 나온다. 수도원과 기암괴석이 내려다보이고 날씨가 좋은 날은 지중해와 피레네 산맥까지 볼 수 있다고 한다.
▼ 바르셀로나에서 북쪽으로 1시간쯤 차를 타고 달리면 몬세라트 산자락에 도착한다. 몬세라트 탐방의 시작은 산 아래에 있는 케이블카 (cable car)승강장에서 시작된다. 물론 버스를 이용해서 산의 중턱에 위치한 수도원까지 올라갈 수도 있다. 하지만 톱날을 닮았다는 몬세라트산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케이블카를 이용하는 게 가장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 궤도차(軌道車)를 타고 올라가는 방법도 있다. 괜찮은 방법이지만 내려올 때 이용하기로 하고 뒤로 미룬다.
▼ 케이블카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그야말로 환상 그 자체이다. 창밖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기암괴석(奇巖怪石)들의 풍경은 마치 천국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는 듯한 신비로운 감회를 자아내게 만든다. 수도원에 이르기도 전부터 속세(俗世)를 벗어나버린 느낌이다.
▼ 케이블카에서 내리자마자 몬세라트 산의 절경(絶景)이 다시 한 번 눈앞에 펼쳐진다. 케이블카를 타고 오면서 올려다보이던 풍경들이 이제는 정면에서 나타난다. 쉽게 접할 수 없는 경관이니 발걸음을 서둘지 말고 실컷 즐겨볼 일이다.
▼ 이제 되었다 싶으면 수도원으로 이동하면 된다. 가는 길에도 몬세라트의 절경들이 한눈 가득히 들어옴은 물론이다.
▼ 잠시 후 수도원 앞에 이른다. 그런데 의외의 풍경에 놀라고 만다. 한적하면서도 엄숙할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의외로 많은 상업시설이 눈에 띄었던 것이다. ’베네딕트의 산타 마리아 몬세라트‘라는 이름의 이 수도원은 남자 수사만 80여 명이 사는 곳으로 초기에는 성당, 수도원, 박물관으로 이뤄진 작은 수도원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러나 소원을 들어준다는 검은 성모상이 발견된 후 곳곳에서 순례자와 관광객이 인산인해로 몰리면서 상업시설과 숙박시설들이 들어섰단다. 그 시설들이 지금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베네딕트 수도회의 수도원은 나폴레옹의 침략 때뿐만 아니라 과거 카탈루냐가 박해 받던 시절에도 끝까지 살아남은 카탈루냐의 성지이자 스페인 가톨릭의 성지로 유명하다.
▼ 수도원 안으로 들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있다. 물론 전면에 보이는 대성당 건물을 제외하고 말이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Sagrada Familia/Temple Expiatori de la Sagrada Familia)’의 '수난의 파사드' 조각을 맡았던 조각가 ‘수비라치(Josep Maria Subirachs)’의 작품이다. 카탈루냐의 수호성인 '산 조르디'인데, 이 조각과 마주보며 앞에서 움직이면 조각의 눈이 움직이는 사람을 따라 같이 움직인다고 한다. 참고로 수비라치의 작품은 서울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1987년, 그러니까 ‘서울 올림픽’이 열렸던 한 해 전에 전 세계 유명조각가들을 국내로 초빙해 ‘올림픽공원’ 야외에서 작품을 만들어 전시한 일이 있었다. 그가 만든 ‘하늘 기둥(The Pillars of the Sky)’이라는 거대한 작품이 지금도 전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스페인과 한국의 전통을 융화시키고자 의도적으로 한국적인 주제로 작품을 제작했다고 한다. 거인 같은 수직적 형태는 태극기의 음양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고, 그 위에 올려 진 세 개의 입면체는 하늘을 상징한단다. 시간이 된다면 한 번쯤 찾아볼 일이다.
▼ 수도원 입구에는 박물관과 기념품 숍이 있다. 수도원과 몬세라트에 관련된 저명한 예술품들이 진열되어 있는 곳이다. 하지만 들어가 보는 것은 생략한다. 꼭 유료(有料)라서 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성당을 빨리 둘러본 뒤, 몬세라트의 전경을 보기 위해서 주차장 아래에 있는 전망대까지 가야 하기 때문이다.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은 탓에 두 가지를 다 둘러볼 수 없으니 어쩌겠는가. 안타깝지만 조예가 별로 없는 미술품 감상을 포기하기로 한다.
▼ 성당 앞 광장에 서면 또 다시 몬세라트의 절경이 펼쳐진다. 몬세라트(톱니 모양의 산) 라는 이름에 걸맞게 밝게 노출된 기암절벽의 신비로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과연 천재 건축가로 알려진 가우디에게 건축적 영감을 주었을 만도 하겠다. 참고로 이곳 몬세라트는 자연을 사랑하는 만큼이나 신앙심이 깊었던 가우디가 자주 찾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이라도 볼 수 있을까 기대했던 이유이다. 하지만 그런 행운은 따라주지 않았다. 그는 이곳에서 작품의 아이디어만 얻었을 뿐 그 결과는 바르셀로나의 시내에다 쏟아 놓았던 모양이다.
▼ 대성당 안으로 들어간다. 문 근처에 마치 방처럼 만들어진 코너들이 있고, 각기 다른 조각품들이 새겨져 있다. 성당과 관련된 성직자들이거나 아니면 성당에 영향을 끼친 이들의 묘(墓)가 아닐까 싶다.
▼ 문을 통과하면 널따란 광장(廣場)이 나온다. 집사람이 갑자기 양팔을 벌린다. 그녀와 같이 고개를 들고 팔을 하늘로 향한 뒤 기도드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단다. 하지만 집사람의 표현에서는 진지함은 찾아볼 수가 없다. 아무래도 믿겨지지 않는 모양이다.
▼ 예수와 ‘열두 사도상’이 내려다보고 있는 성당의 안마당을 지나면 두개의 문이 있는데 중앙의 문은 대성당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오른쪽 끝의 문으로 들어가면 통로를 따라 성당의 안쪽 제대 위에 있는 성모상으로 가게 된다. 성당은 오른편으로 들어가 왼편으로 빠져 나오는 구조로 되어있다. 성당 안으로 들어간다. 어두컴컴한 통로를 지난다. 이곳도 역시 아까 성당으로 들어설 때와 비슷한 풍경이다. 벽면에 코너를 만들고 인물상을 세워 놓았거나, 아니면 벽면에 돋을 문양으로 사람을 새겼다. 느낌으로 봐서는 성당과 관련된 성인(聖人)들이 아닐까 싶다.
▼ 2층으로 올라간다. 성당의 상징이랄 수 있는 ‘검은 성모마리아상’을 보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입구에 촬영금지 표시가 되어있다. 가이드의 말로는 촬영이 가능하다고 하지만 글쎄다. 명색이 가톨릭신자인데 어찌 하지 말라는 행위를 할 수 있겠는가. 참고로 ‘검은 성모마리아상’은 12세기 말의 로마네스크양식(Romanesque style)의 조각품으로 이 조각품은 성모 마리아를 ‘신의 어머니’ 또는 ‘지혜의 왕위’로 묘사하며 여왕, 어머니 그리고 동정녀를 대표한다. 오른손에는 지구를 뜻하는 구술을 들고 있고 왼손은 ‘태중의 복된 열매’인 아이 예수를 소개한다. 아이 예수는 우리를 축복하고 생명과 다산을 뜻하는 솔방울을 들고 있다. 마리아상은 12세기 ‘산타 코바(Santa Cova)’ 동굴 안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왜 검은 성모마리아인가 라는 것에 여러 가지 설(說)이 있는데. 원래는 검은 색이 아니었는데 오랜 세월 신도들이 바친 등불에 그을려 검어진 것이라고 하는 설(실제로 보면 그냥 검은 대리석 같은 느낌도 있다고 한다.)과 또 다른 설로는 세계 각지의 여러 모습의 성모마리아 중 흑인을 표현 한 것이라는 설 등이 있는데 전자가 유력하다고 한다. 1811년 나폴레옹군의 진격으로 수도원이 파괴되었을 때도 이 마리아상은 독실한 신도들에 의해 지켜졌고, 1881년에는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카탈루냐의 수호 성모가 되었다고 한다.
▼ 위에 오르면 또 다시 여러 조각상들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작은 예배당들도 보인다.
▼ <사진 없이 설명만> 수도원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검은 성모마리아상’은 2층의 중앙어림에 있다. 성상(聖像)은 유리벽으로 둘러져있다. 목재로 만들어진 성상을 보호하기 위한 것일 게다. 유리벽 앞에는 사람들이 줄지어 있다. 성모 마리아 손 위의 지구를 상징하는 구슬 부분이 뚫려져 있는데, 이를 만져보기 위해서이다. 구슬을 정성스레 쓰다듬으며 소망을 기원하면 이루어진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성모상을 촬영하고 싶었지만 꾹 참는다. 참고로 ‘검은 마리아상’은 카탈루냐의 수호성인이라고 한다. 마을 주민들은 나폴레옹군이 침략했을 때에도 검은 마리아상을 지켜냈고, 카탈루냐 언어가 금지된 독재 치하에서도 검은 성모 마리아상 앞에서 카탈루냐어로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지금도 매주 일요일이면 수도원 광장 앞에서 카탈루냐의 민속춤인 '사르다나'를 추며 결속을 다진단다.
▼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stained glass)도 대성당을 아름답게 만드는데 일조를 한다.
▼ 성당 밖으로 나오자 수많은 양초들이 보인다. 소원을 담은 것들이란다. 하나 켜볼까도 생각해봤지만 그만둔다. 걸음을 서둘러야 하나라도 더 많이 가슴에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 다시 성당 안으로 들어간다. 대성당에 들어서면 이렇게 거친 산속에 너무나 아름다운 성당이 숨어있다는 것에 놀란다. 이 성당과 수도원은 15~16세기에 걸쳐 지어졌으며 르네상스 양식이 가미된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19세기 초에 전쟁으로 인해 부분적으로 파괴되었다가 다시 복원되기도 하였다. 그나저나 미사 시간을 맞추지 못해 ‘소년성가대’의 합창은 들을 수 없었다.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하지만 찬찬히 내부를 둘러볼 수 있는 이점은 있었다. 성당은 한마디로 화려하기 짝이 없다. 몇 년 전에 업무를 겸해서 러시아를 둘러봤던 적이 있었다. 그때 러시아정교회 몇 곳을 둘러보면서 참 화려하다 느꼈었는데, 그에 못지않은 것 같다. 다만 색상(色相)을 이용한 정교회와는 달리 이곳은 조각의 화려함이 돋보였지만 말이다.
▼ 종교가 다르거나 없는 사람도 속세를 벗어난 화려하고 웅장한 분위기에 압도돼 절로 숙연한 마음을 갖게 되니 가히 ‘스페인 신앙의 중심지’ 라고 불릴 만도 하다.
▼ 몬세라트의 전경(全景)을 보려고 주차장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이곳으로 오기 전에 검색해본 결과 주차장 아래에 있는 전망대에서 바라볼 때 몬세라토의 전경이 가장 잘 나타났기 때문이다. 비록 정상에 있는 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경에는 못 미치겠지만 말이다. 전망대로 가는 길가에는 마을사람들이 손수 만든 꿀, 무화과, 치즈 등을 판매하고 있었다. 일부는 호객행위까지 하고 있었지만 그냥 지나치고 만다. 서둘러야 전망대를 다녀올 수 있기 때문이다.
▼ 전망대로 내려가기 전에 눈앞에 펼쳐지는 조망(眺望)부터 즐기고 본다. 건너편에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몬세라트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벼랑 위에 세워진 십자가까지 시야에 잡힌다. 아마 저곳까지 트레킹코스로 연결되는 모양이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보면 바위산에 얹힌 듯 걸쳐지어진 수도원이 나타난다. 바로 앞에 보이는 건물은 식당 등 편의시설이다.
▼ 전망대로 내려가는 길에 ‘수비라치(Josep Maria Subirachs)’의 또 다른 조각품을 만날 수 있다. ‘천국의 계단’이라는 작품으로 절벽가까이에 1m높이의 돌덩어리를 계단 모양으로 만들었다. 계단을 밟고 올라가면 천국에 도달한다는 의미로 만들어 졌다고 하지만 구태여 실험까지 해볼 필요는 없을 듯 싶다. 참고로 이 작품은 이곳 카탈루냐 출신의 작가인 ‘라몬 유이(Ramon Llull, 1232~1315)’가 카탈루냐어로 철학서를 집필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조형물이란다.
▼ 천국의 계단 옆에 원형으로 지어진 건물이 하나 보인다. 위층은 흡사 그리스의 옛 신전(神殿)을 닮았다. 그래서일까 이것 또한 예술품으로 보인다. ‘천국의 계단’이라는 유명작품을 이웃으로 둔 덕분인지는 몰라도 말이다.
▼ 전망대는 천 길 낭떠러지의 위에 만들어져 있다. 거기다 난간이 무릎에도 못 미치기 때문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금물(禁物)이다. 하지만 젊은이들에게 그쯤은 문제도 되지 않는 모양이다. 난간에 걸터앉아 사랑노름을 하고 있는 연인들이 있는가 하면, 심지어는 그 위에 올라가 사진촬영에 여념이 없는 처자들도 보인다. 그래서 젊음은 거칠 것이 없다고들 하는가 보다.
▼ 전망대에 서면 건너편 암릉 위에 세워진 십자가가 보인다. 저기가 바로 십자가전망대(Creu de Sant Miquel)이다. 몬세라트의 정상 능선에 위치한 전망대로서 산호안(Sant Joan)전망대와 함께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저곳에 가보기 위해서는 먼저 산악열차를 이용해 산의 위로 오른 다음 능선을 따라 한참을 걸어야 한다. 하이킹을 해야 한다는 얘기이다.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은 당연한 일이다. 패키지 여행객들이 가볼 수 없는 이유일 것이고 말이다. 빈틈없이 꽉 차있는 스케줄(schedule)을 소화하면서 하이킹이라는 호사까지 누린다는 것은 언감생심(焉敢生心)일 것이다.
▼ 전망대에서 조망(眺望)을 즐기는 것을 끝으로 수도원 투어(tour)는 끝을 맺는다. 산악열차 탑승장으로 이동하는데 뭔가 개운치 못한 느낌이 든다. 이유가 뭘까? 그렇다. 어렵게 찾아온 곳인데도 모두 다 둘러보지를 못했던 것이다. 사람들이 몬세라트에서 보고 싶어하는 것들은 크게 세 가지라 할 수 있다. 첫째는 물론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진 몬세라트의 자연경관이다. 둘째는 만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검은 성모상,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서 깊은 '에스콜라니아 소년합창단'의 성가(聖歌)이다. 그런데 시간을 맞추지 못한 관계로 합창단의 성가공연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고, 몬세라트의 자연경관은 절반만 볼 수밖에 없었다. 경관의 나머지 절반은 산악열차를 타고 산의 꼭대기 까지 오른 다음 꽤 길게 하이킹((hiking)을 해야만 하는데 그럴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 모두 둘러봤다면 이젠 내려갈 때다. 이번에는 푸니쿨라(Funicular)를 이용하기로 한다. 푸니쿨라는 밧줄의 힘으로 궤도를 오르내리는 산악열차를 말한다. 물론 엔진은 없다. 수직의 절벽을 꿰며 만들어 낸 구불구불한 궤도길은 아슬아슬하기만 하다. 하지만 아직까지 사고 한번 없었다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저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들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 참고로 이곳 탑승장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산타코바(Santa Cova) 전망대가 있다. 그곳에는 ‘검은 성모상’을 발견한 동굴이 있고, 그 동굴까지는 ‘십자가의 길’이라는 산책로가 나있다. 다녀오는 데는 1시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단다. 그곳에 가면 가우디를 비롯한 유명 조각가들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 허락되지 않는 걸 어쩌랴. 아쉽지만 내일 보게 될 다른 작품들로 위안을 삼기로 한다.
▼ 산 아래 주차장에서 올라다본 몬세라트산, 한나절을 봤는데도 결코 질리지가 않는 풍경이다. 헤어져야 하는 발걸음이 아쉽기만 하다. 하지만 어쩌랴 다음 일정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내키지 않지만 버스에 몸을 싣는다.
♧ 에필로그(epilogue), 여행 첫날이니 남들이 하는 데로 스페인 여행에서의 주의할 점을 적어보겠다. 첫째는 화장실 문제이다. 명색이 OECD(Organiz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인 스페인이니 공원이나 광장에 공중화장실이 없을 리가 없다. 하지만 문이 닫혀있을 때가 많은데다 불결한 편이다. 가급적이면 백화점이나 카페에 딸린 화장실을 이용하는 게 편리하다. 하긴 여러 대륙의 수많은 나라들을 여행해 봤지만 우리나라의 공중화장실 만한 화장실은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둘째는 소매치기를 조심해야 한다. 가이드의 얘기로는 스페인에서 동양인들이라 하면 현금을 많이 갖고 다니는 사람들로 인식된단다. 그렇다면 더 얘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관광지의 유명도와 소매치기의 숫자는 비례하는 법이니, 그들이 먹잇감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긴 치안(治安) 역시 우리나라만한 나라는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나머지 하나는 음료수에 관한 문제이다. 가이드의 얘기로는 석회수라서 끓여먹어도 외국인에게는 맞지 않는단다. 하긴 스페인 사람들도 잘 마시지 않는다니 괜히 모험을 하는 우(愚)는 범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여기에 하나 더 덧붙인다면 현지인들의 낮잠 자는 관습을 염두에 두라는 것이다. ‘시에스타(siesta)’라고 부르는 이 시간(오후 1시에서 4시까지)에는 상점이든 회사든 대다수의 스페인 사람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문을 닫은 채 단잠에 빠진단다. 관광지에서조차 예외가 아닐 때가 종종 있으니 주의가 필요하다.
여행국가 : 독일,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 체코(7개국)
여행 열째 날 오전 : 독일의 로텐부르크(Rothenburg)
특징 : 독일 남동부 바이에른주(州)에 있는 작은 도시로서 정식 명칭은 ’로텐부르크 오프 데어 타우버(Rothenburg ob der Tauber)’. ’타우버 강가의 붉은 성’이라는 뜻이다. 줄여서 ‘로텐부르크(Rothenburg)’라고도 한다. 처음 문헌에 등장한 것은 9세기로 로텐부레로라고 표기되어 있다. 호엔슈타우펜왕조(House of Hohenstaufen : 1138 - 1254) 때 지은 요새(要塞)를 중심으로 도시가 발전하였으며, 13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까지 자유제국도시로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다가 17세기 ‘30년 전쟁’ 이후 쇠퇴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도시의 40% 정도가 파괴되고 소실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완전히 복원돼 중세도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독일에는 수많은 성곽 도시들이 있다. 중세시대에 주변의 공격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튼튼한 성벽들이 지금도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 성곽 도시 가운데서도 로텐부르크는 독일의 가장 전형적인 성곽 마을 형태를 갖추고 있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길을 걷다 보면 중세시대로 타임머신을 타고 간 듯 착각에 빠진다. '중세의 보석'이라 일컬어지는 이유이다.
▼ 다음 행선지인 독일의 로텐부르크(Rothenburg)로 가는 길에 하룻밤을 머무른 독일의 작고 한적한 마을 ‘테네스베르그(Tnnesberg)’, 숙소는 마을 성당의 옆에 위치한 ‘hotel und landgasthof wurzer(Add: Marktplatz 12 92723 Tnnesberg TEL: + 49 (0)96 55 257 Fax: + 49 (0)96 55 8133)’을 이용했다. 전체적으로 현대식이라기보다는 옛스러움을 느끼게 하는 엔틱(antique)풍의 호텔이었다. 물론 규모도 크지 않다. 그러나 내부시설은 깔끔했고, 아침식사는 훌륭했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내린 우리나라 여행객들이 동유럽으로 가는 길에 자주 머무는 곳인 듯, 다녀간 흔적들을 여러 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 성밖의 주차장에서 내리면 ‘로텐부르크’의 성벽(城壁)이 코앞이다. 로텐부르크는 독일 로맨틱가도(Romantische Strasse)의 하이라이트로 꼽히는 도시다. 로맨틱가도는 독일 중남부의 역사적인 도시 뷔르츠부르크(Wurzburg)에서부터 퓌센(Füssen)에 이르기까지의 약 350㎞의 길을 일컫는다. 도로를 따라 고풍스럽고 예쁜 도시들이 가득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여행자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마을은 단연 로텐부르크라는 것이다.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 ‘로맨틱가도의 보석’이란다.
▼ ‘슈피타르 문’의 첨탑, 성의 남문의 역할을 하고 있는 17세기 초에 지어진 견고한 요새로 돌아 쌓아올린 성곽의 푸른 이끼가 오랜 세월의 향기를 내품어 주는 것 같다. 로텐부르크를 둘러쌓고 있는 3.4Km의 이 성곽은 이 도시가 번영을 구가하던 13세기 16세기 사이에 지어졌다고 하며, 지금은 신시가와 구시가의 경계선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 성문(城門)으로 들어서면 곧바로 로텐부르크 시가지이다. 시내는 물론 차량통행이 가능하다. 그러나 튼튼한 두 발을 믿고 천천히 걸어볼 것을 권하고 싶다. 납작한 돌이 깔려 있는 구시가와 성벽을 따라 산책하다 보면 중세도시와 온몸이 하나가 되는 기분이기 때문이다. 내려쬐는 햇볕이 아직은 부담스러운 계절, 산들거리는 바람을 기대하며 중세의 옛 골목을 걷는 기분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이다.
▼ 플렌라인(Ploenlein), 여행사들의 카탈로그에 자주 등장하는 풍경으로 왼편에 보이는 탑은 ‘지버스탑(Siebers Tower)’이고, 탑에 딸린 문은 ‘슈피탈문(Spitaltor Gate)’이다. 비록 사진에는 안 나와 있지만 오른쪽에 보이는 골목에는 코보젤문(Kobolzell Gate/Kobolzeller Tower)이 있다. 이곳 삼거리를 ‘작은 장소’라는 의미의 플렌라인(Ploenlein)이라 부르며, 이곳의 풍경이 로텐부르크의 풍경을 가장 잘 나타내준다고 한다. 그 풍경은 마치 아기자기한 동화나라 같다. 그것도 중세의 풍경을 그대로 간직한 동화나라 말이다. 이 도시에서 가장 뛰어난 포토제닉(photogenic) 포인트가 된 이유일 것이다.
▼ 로텐부르크에는 수백 년 된 건물들이 즐비하다. 옛날 무역상들이 성을 지나칠 때마다 받은 통행세(通行稅)의 수입으로 번영을 누렸던 역사의 흔적이다. 지극히 독일적이 중세의 건물들이 당시의 영화를 전해준다. 그리고 그런 얘기들을 뒤쫓아 매년 350만 명이나 되는 관광객이 찾아온단다. 길바닥의 보도가 반질반질하게 빛을 발하는 이유일 것이다.
▼ 로텐부르크에는 대략 40개 정도의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그중에서 여행객들로부터 가장 주목을 받은 우물은 뭐니 뭐니 해도 시청사 남쪽 길 건너에 있는 600년이나 된 ‘성 게오르그 분수’이다. 분수대의 꼭대기에는 ‘게오르그’란 이름을 낳게 한 ‘성 게오르그(St. George)’의 기마상(騎馬像)이 세워져 있다. 로마 황제의 근위대 기사(騎士)였던 게오르그는 로마 영토인 시레나왕국에서 처녀를 잡아먹던 드래곤(Dragon=龍)을 무찔러 공주를 구하고 그 나라를 기독교로 개종(改宗)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를 박해하던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Gaius aurelius Valerius Diocletianus, 재위 : 284~305)에게 온몸이 찢겨 순교(殉敎)하였다. 이탈리아에선 게오르기우스(Georgius), 영어권에서는 ‘세인트 죠지’, 불어권에서는 ‘생 조루즈’로 불리는 3~4세기의 기독교 성인(聖人)이다. 성 게오르그는 이곳 독일에서만 성인으로 추앙 받은 것은 아니다. 유럽 전역은 물론이고, 러시아에서 발칸, 심지어는 아프리카 북부지역까지도 그의 동상을 세워 기념하는 성인이다. 만일 유럽 등을 여행하다가 말을 탄 기사가 용을 찌르고 있는 동상을 보았다면 ‘성 게오르그’라고 생각하면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사진은 다른 분수의 사진을 포스팅(posting)했다. 무심코 찍은 사진이 떨어 못쓰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 중요한 포인트에서는 보통 두 장씩을 찍는데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다.
▼ 뜬금없이 인도풍의 분수(噴水)도 보인다. 이곳을 지나다니던 상인(商人)들 중에는 인도와 교역하던 이들도 있었던 모양이다. ‘헤른가세(Herrngasse)’에서 만날 수 있다.
▼ 길을 따라 계속 가다 보면 마르크트 광장(Marktplatz)이 나타나고 이곳에 시청사와 시의원회관이 자리 잡고 있다. 시청사는 14세기에 고딕 양식으로 지어지기 시작해 르네상스 양식으로 완성된 건물이다. 시청사의 볼거리는 62m 높이의 탑(塔)이다. 200개의 계단을 올라 탑의 꼭대기에 오르면 그림 같은 구시가지 모습이 한눈에 잡힌단다. 녹색의 초원에 붉은색 기와지붕이 마치 동화 속의 세계처럼 펼쳐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망대(展望臺)에 올라가보지를 못했다. 아니 전망대가 있는 줄도 몰랐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다. 준비해온 내 앎이 그것뿐이니 어쩌겠는가. 오늘도 난 진귀한 구경거리를 놓치는 우(愚)를 범하고 나서야 내 잘못을 깨닫게 된다. 참고로 탑이 있는 하얀 건물은 1250년에 고딕양식으로 지어졌다. 초병들이 보초를 서던 관측소로 지어졌으나 1501년 고딕양식의 쌍둥이 홀이 화재로 파괴된 후, 1572년에 재건되어 현재는 전망대와 화재감시소로 이용되고 있다.
▼ 정시가 되자 사람들은 마르크트광장으로 꾸역꾸역 몰려든다. 시의원 회관 벽에 설치된 벽시계가 보여주는 퍼포먼스(performance)를 보기 위해서다. 이 퍼포먼스는 오전 열한 시부터 오후 다섯 시까지 보여주는데 매시 정각이 되면 시계 좌우의 창이 열리고 인형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30년 전쟁’ 당시에 일어났던 사건 하나를 재현한다. 17세기에 일어났던 ‘30년 전쟁(Thirty Years' War)’은 신교(Protestant)와 구교(Catholic)의 전쟁이었다. 당시 이 도시를 점령했던 ‘요한 체르클라에스 틸리’는 도시전체를 불태우고 신교도들을 처형하라고 했다 한다. 그때 느슈 시장(市長)이 자비를 구했고, 틸리장군은 기상천외한 제안을 하게 된다. 포도주 한 통(3.25리터였다고 한다)을 단숨에 마시면 명령을 철회하겠다는 것이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임무를 완수 못할 리는 물론 없다. 포도주를 '원샷'한 시장은 3일 동안이나 인사불성이 됐다는 이야기 이다. 틸리장군이 약속을 지켰음은 물론이다. 그 사건 이후 로텐부르크에서는 매년 6월 '마이스터트룽크(Meisterrunk)'라는 축제(祝祭)를 열어 당시의 일을 기념한다고 한다. 마이스터트룽크는 '위대한 들이킴'이라는 뜻이란다.
▼ 그러나 마르크트 광장의 벽시계는 명성만큼 대단해 보이지는 않는다. 인형들의 동작도 천천히 잔을 기울이는 게 전부다. 어떤 이들은 허접하다고까지 할 정도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찾아드는 사람들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역사의 옷을 입혀 풀어낸 스토리텔링의 승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마르크트광장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부르크정원’으로 향한다. 이 거리의 이름은 ‘헤른가세(Herrngasse)’, ‘가세(gasse)’란 독일어로 ‘좁은 골목길’이란 말로 보통 중세도시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나 헤른가세는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 그것도 우리나라의 중소도시들이 도로 이름으로 갖다 붙인 대로(大路) 수준으로 말이다.
▼ ‘헤른가세(Herrngasse)’를 따라 걷다가 성당(Franziscan Church)을 지나서 왼편으로 돌면 타우버 협곡의 전경과 로텐부르크의 성곽(城郭)이 한눈에 잘 들어오는 장소가 나온다. 긴 성곽을 따라 늘어선 첨탑과 벽돌색 지붕의 건물들, 그리고 성 아래 마을과 타우버 강을 가로지르는 도펠 다리 등이 파스텔화처럼 은은한 색조를 자랑한다. 역광(逆光)으로 인해 비록 또렷하지는 않지만 얼핏 보이는 풍경만으로도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그래서 누군가가 이 부근을 로텐부르크의 포토제닉(photogenic) 포인트로 꼽았었나보다.
▼ 전망대 근처는 중세풍의 부르크정원(Burggarten)이다. 커다란 나무들과 초록의 잔디, 정원(庭園)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숲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이다. 거기다 회색빛 건물들을 더하면 정원은 금방 동화나라로 변해버린다. 아무튼 식물을 사랑하는 독일인들답게 예쁘게 가꾸어 놓았다. 벤치 등을 갖춘 쉼터를 겸하고 있으니 전망만 즐기지 말고 잠시 쉬었다가 가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로텐부르크의 특산품인 슈니발렌이라도 먹으면서 말이다. 참고로 아래 사진의 뒤편에 보이는 아치(arch)형의 문은 마르크트광장에서 연결되는 부르크문이다. 문을 빠져나오면 부르크공원, 계곡을 따라 지어진 로텐부르크 성곽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조망(眺望) 포인트이다.
▼ 성곽을 빠져나오면 또 다른 산책로가 나타난다. 성벽(城壁) 아래로 난 길은 호젓하기 이를 데가 없다. 그리고 공원으로 잘 가꾸어져 있는데, 성곽의 안쪽과는 또 다른 멋을 보여준다. 빼놓지 말고 걸어봐야 할 코스로 추천하고 싶다.
▼ 되돌아 나오다보면 뾰족한 첨탑이 치솟은 커다란 건물 하나가 보인다. 바로 로텐부르크를 상징하는 고딕양식의 ‘성 야콥 교회(St. Jakobskirche)’이다. 이 교회는 1331년에 짓기 시작하여 190년이 걸려서야 완공되었다. 그리고 가치를 환산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한 예술 작품들을 많이 소장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독일 최고의 조각가라고 칭송받는 틸만 리멘슈나이더(Tilman Riemenschneider)의 나무 조각 작품인 '최후의 만찬'은 보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고 한다. 1505년에 조각된 이 작품은 각 인물의 섬세한 묘사도 뛰어나지만, 특히 두 천사가 받치고 있는 금박의 십자가에 예수의 피가 들어갔다고 전해지는 수정이 박혀 있어 주목을 받는다. 또한 겟세마네에서 예수가 기도하는 장면을 재현해 놓았는데, 거칠고 소박하면서도 정감이 가는 인물들과 예수의 시선 위쪽으로 하나님을 묘사한 것이 눈길을 끈다. 이 밖에도 프란체스코 제단 등 15세기의 여러 제단과 5500개의 파이프로 된 오르간 등을 내부에 갖추고 있다.
▼ 널찍한 돌바닥과 성벽에 낀 푸른 이끼 그리고 붉은 지붕 등이 빚어내는 로텐부르크, 자갈길을 걸으며 고딕, 르네상스, 그리고 바로크 양식의 집들과 분수를 감상하다 보면 혹시 시간이 멈춰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이다. 그리고 이토록 예쁘고 조용한 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된다.
▼ 마을을 돌아다니는데 크리스마스트리(Christmas tree)를 문 앞에 세워 놓은 가게가 눈에 띈다. 이곳 로젠부르크가 슈니발렌(Schneeballen)의 원산지이다. 그리고 어찌 보면 슈니발렌의 생김새는 크리스마스트리에 매다는 장식품을 닮기도 했다. 슈니발렌을 파는 가게인가 하고 들여다보다가 면세(tax free)품 보석을 파는 가게인 것을 알고 실소를 짓고 만다. 엉뚱한 상상력이 너무 멀리 가있었던 모양이다. 하긴 로젠부르크와 슈니발렌의 관계가 그만큼 돈독하다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 누군가 그랬다. 로텐부르크에 가면 꼭 먹어봐야 할 것이 있다고. 바로 전통 과자 슈니발렌(Schneeballen)이다. 최근 국내에도 슈니발렌 전문점들이 생기기 시작했지만 역시 원조는 로텐부르크의 슈니발렌이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거리를 돌아다니다보면 슈니발렌을 파는 가게들이 유난히도 자주 눈에 띈다. 그러고 보니 이곳 로텐부르크 지방의 전통과자가 바로 슈니발렌이 아니겠는가. 슈니발렌은 '눈'을 뜻하는 슈니와 '뭉치다'를 뜻하는 발렌이 합쳐진 단어로 '눈덩이'를 뜻한다고 한다. 둥그렇고 귀엽게 생긴 것이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운석 같기도 하고 종이를 뭉쳐 만든 장미꽃 같기도 하다. 한편 겉 표면에다 하얀 슈거 파우더(sugar powder)를 많이 뿌려 먹어서 영어로는 'snow ball'이라고 불리기도 한단다. 8-10cm 정도 크기의 둥그런 공모양인 슈니발렌은 페이스트리(pastry : 밀가루 반죽 사이에 유지를 넣어 결을 내 구운 빵)이다. 밀가루에 달걀, 설탕, 버터, 크림 등을 넣어 만든 반죽을 길게 늘려 독특한 모양으로 굴리거나 잘라 뭉쳐 만든 후, 이것을 튀겨내면 동글동글한 슈니발렌이 완성된다. 슈니발렌은 먹는 방법도 특이하다. 망치로 부숴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슈니발렌은 속이 비어 있는 과자가 아니라 안에까지 꽁꽁 뭉쳐 있기 때문에 그냥 먹기에는 조금 딱딱할 수도 있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우리부부는 손으로 그냥 부셔가면서 먹었다. 하긴 그래야 이동 중에도 먹을 수 있을 테지만.
▼ 로텐부르크는 성 야곱교회를 위시해서 시청사 그리고 타워나 게이트 등 볼거리로 넘치는 도시지만,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을 하나만 꼽으라면 난 망설임 없이 독일식 전통 목조주택을 들 것이다. 그만큼 이색적인 풍경으로 내 마음속에 각인 되었다는 얘기이다. 하긴 누군가가 그랬다. 독일 남부나 프랑스의 알자스지방에도 이와 비슷한 분위기를 엿볼 수 있으나 여기처럼 아름다우면서도 독특한 분위기를 보여주는 곳은 없다고 말이다. 연수를 겸해서 독일을 거의 한 바퀴 다 돌아본바 있는 내 기억도 주저 없이 그의 말에 공감을 표한다.
▼ ‘마르크트광장(Marktplatz)’에서 이번에는 반대방향으로 진행해본다. 마르크트탑(Markus tower)과 뢰더문(Roder arch)을 보기 위해서이다. 납작한 돌이 깔려있는 골목길을 걷다보면 묘한 기분이 든다. 마치 중세로 돌아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난 지금 시간여행을 하고 있는 거나 아닐까?
▼ 마르쿠스탑(Markus tower), 도시가 형성되던 초기인 1172년에 지어진 것으로 성곽(城郭)을 확장하기 전 처음으로 성이 수축되었을 당시의 성벽에 설치되었던 문(門)이다. 성곽을 외곽으로 확장할 때 성벽을 허물었지만 이 문은 그대로 남겨두어 아직까지 로텐부르크를 상징하는 건축물로 남아있다. 옆에 보이는 회색 건물은 뷔텔하우스(Buttelhaus), 1250년에 건축되어 1510년에 개축되었는데, 1945년에 전쟁으로 파괴되었다가 1959년에 보수되었다. 1960년부터는 문서실로 사용되고 있는데, 원래는 감옥이었단다.
▼ ‘뢰더문(Roder arch)’은 목하(目下) 수리 중, 여행시기가 비수기(겨울철)이다보니 가끔 이런 상황과 맞닥뜨리게 된다. 비수기를 이용해서 관광대상 시설을 보수하는 것이다.
▼ 거리에서 만난 인형, 1년 내내 크리스마스 선물을 판매하고 있는 전문매장이라는 ‘캐테 볼파르트(Käthe Wohlfahrt)’를 찾으러 다니다가 만났다. 덕분에 우리부부는 이 사진 한 장으로 위안을 삼고 ‘인형박물관’의 구경을 포기한다. 주어진 시간이 별로 넉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참고로 부부인 Käthe Wohlfahrt와 Wilhelm에 의해 1964년에 설립된 ‘캐테 볼파르트(Käthe Wohlfahrt)’는 독일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프랑스, 스위스, 미국 등에 50개 이상의 매장을 열고 있는데, 매장 안에는 크리스마스 트리, 촛불, 장난감 병정 등 여러 가지 상품도 있지만, 박물관도 있어 많은 여행자들이 꼭 들리고 싶어 하는 곳이다.
▼ 구시가는 아기자기하고 고풍스러운 주택들이 거리에 죽 늘어서 있다. 동화 속 마을을 보는 듯 잘 단장된 느낌이다. 기념품 상점과 카페, 레스토랑 등은 꽃으로 장식된 건물에 자리 잡아 편안한 느낌을 주고 귀여운 간판들도 많다. 로텐부르크를 왜 로맨틱가도의 보석이라 부르는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 성의 윗부분이 지붕으로 씌워진 성벽은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견고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적의 침입을 막아야하는 원래의 목적에 충실하게 높이 쌓아올린 성벽의 위 안쪽에다 길을 만들고 감시망을 두었다.
▼ 로텐부르크는 전통을 유지하고 중세풍의 도시를 보존하기 위해 외관에 엄격한 규정을 적용하고 있다고 한다. 네온사인은 허가하고 있지 않으며 간판도 반드시 옛 형태로 달아야한다고 한다. 또한 현대식 창문은 허용되지 않으며 독일의 전형적인 십자무늬만 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행국가 : 독일,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 체코(7개국)
여행 여덟째 날 오후-아홉째 날 오후 : 체코의 수도프라하(Praha)
특징 : 블타바강(江:몰다우강) 연변, 라베강(江:엘베강)과의 합류점 가까운 곳에 위치한 체코의 수도이자 정치·경제·문화의 중심도시이다. BC 4000년경부터 프라하(Praha) 분지(盆地)에 사람이 거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슬라브인(人)이 들어온 것은 5·6세기, 그리고 성(城)은 9세기 말에 축조되었다. 12세기에는 이미 중부유럽 최대 도시의 하나로 발전하였으며, 14세기 카렐 4세 때에는 인구 4만 명에 이르는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이후로도 성장을 거듭하다가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로 독립한 이래 수도가 되어왔다. 1968년 1월의 ‘프라하의 봄’으로 부르는 자유화운동이 소련 등 바르샤바 조약군(軍)의 침입으로 짓밟힌 역사적인 사건의 무대가 되기도 했으며, 1993년 1월 1일에는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되면서 체코의 수도가 되었다. 참고로 먹을거리로 스미호프의 맥주와 프라하 햄이 유명하니 한번쯤 맛을 봐야할 일이다.
▼ 프라하에 도착한 것은 어둑어둑해질 무렵, 숙소에 여장(旅裝)을 풀어야 할 시간이다. 그러나 우린 호텔이 아니라 시내로 향한다. 프라하의 야경(夜景)을 보기 위해서이다. 누군가 그랬다. 세계의 야경을 논하면서 체코의 프라하를 빼는 것은 ‘팥 없는 빙수’ 꼴이라고 말이다. 사실 프라하의 야경은 부다페스트의 국회의사당, 파리의 에펠탑과 함께 유럽의 3대 야경으로 꼽힐 정도로 유명하다. 곧바로 호텔에 들지 않고 시내로 들어가는 이유이다. 야경을 보지 않고서 어찌 발 뻗고 잠을 잘 수 있겠는가.
▼ 시가지로 들어서마자 멋들어지게 지어진 옛 건물들이 길손을 맞는다. 그것도 화려한 불빛으로 치장을 하고서 말이다.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양식 등 시대별 예술사의 변천을 담은 건물들이라는데 미술에 문외한(門外漢)인 내 눈엔 그저 아름답게 느껴지기만 할 따름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슴이 뭉클할 정도라면 그 아름다움은 지극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 구시가는 프라하의 중요한 역사적 순간들을 품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아르누보 양식을 대표하는 '프라하 시민회관'이다. 이곳은 '프라하의 봄'과 떼려야 뗄 수 없다. 1912년 지어진 이 건물은 체코인의 자긍심 그 자체다. 연주회장과 전시장, 레스토랑이 공존하는 복합문화공간인 동시에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이 선언(1918년 10월 28일)된 역사적인 장소이기 때문이다. 당시 독립이 선언된 '스메타나 홀'은 수용인원 1,200명의 거대한 홀로 100여 년 전의 실내양식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매년 5월 열리는 체코의 음악제 '프라하의 봄'은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으로 축제의 막을 연다고 한다.
▼ 시민회관의 옆에는 오랜 세월을 그대로 간직한 '화약탑(Powder Tower)'이 있다. 높이 65m의 고딕식 탑으로 1475년 지금의 구(舊)시가지를 지키는 13개 성문(城門) 가운데 하나이자, 대포 요새(要塞)로 건설되었다. 이후 총기 제작공이자 종(鐘) 주조공인 야로스(Tomas Jaros)의 거처 겸 작업실로 개축되었다가, 루돌프 2세 때인 17세기 초에 연금술사들의 화약창고 겸 연구실로 쓰이면서 화약탑으로 불리게 되었다. 화약탑은 프라하의 대부분의 건축물들이 화려한 장식과 다양한 색상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과 달리 어둡고 칙칙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옛날에는 왕과 여왕의 대관식을 거행하는 장소이자, 외국 사신들이 프라하성(城)으로 들어올 때는 꼭 거쳐야 하는 관문으로 이용될 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1960년대부터는 연금술이나 종 주조와 관련된 유물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참고로 화약탑은 신시가지와 구시가지가 각각 시작되는 곳이다.
▼ 화약탑을 둘러본 후에는 카를 다리(Charles Bridge)로 향한다. 프라하 야경의 백미(白眉)는 뭐니 뭐니 해도 카를 다리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곳은 카를다리 교탑(橋塔) 옆 광장이 아닐까 싶다. 광장의 강변에 서면 탁 트인 강 건너편 언덕 위에 웅장하게 터를 잡은 프라하 성과 고풍스러움이 넘쳐흐르는 옛 시가지가 나타난다. 은은한 조명용 불빛이 그 고풍스러움을 한결 더 돋보이게 만들고 있다. 만일 야경으로 유명한 다른 도시들처럼 불빛이 휘황찬란했다면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분위기는 지금만 훨씬 못할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전문가들이 프라하의 야경을 두고 프랑스의 에펠탑이나 부다페스트의 국회의사당 야경보다 화려한 맛은 없지만 초연한 빛을 띠고 있다고 평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이것을 두고 다른 나라는 따라 할 수 없는 프라하만의 스타일과 개성이라고 했다.
▼ 눈앞에 펼쳐지는 야경은 차라리 몽환적(夢幻的)이다. ‘프라하에 갔다면 먹지도 자지도 말고 야경부터 보라’는 어느 글이 실감난다. 아마도 이런 꿈을 깨는 데 꽤나 오랜 세월이 필요할 것 같다.
▼ 광장에서 프라하성의 야경을 실컷 바라봤다면 이젠 카를다리를 걸어볼 차례이다. 구시가와 프라하 성을 잇는 이 다리는 겹겹이 쌓인 오랜 세월에 감히 그 어떤 예술 작품과도 비교할 수 없다. 어떤 이들은 다리 밑을 흐르는 블타바 강(Vltava River)에 비추는 노란 달빛조차 황홀하다고 했을 정도이니 두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유럽의 가장 아름다운 교량 중 하나로 꼽히는 카를다리의 하이라이트는 야경이라 할 수 있다. 조금 전 광장에서 보았던 프라하성의 아름다운 야경이 다시 한 번 펼쳐지는 것은 물론이고, 다리 좌우에 세워진 30개의 성자상(聖者像)들이 조명용 불빛에 은은하게 나타나는 것 또한 무시할 수 없는 볼거리이다.
▼ 프라하는 낮보다 밤이 더 화려하다. 비투스 대성당 첨탑 너머로 해가 지고 프라하 성이 은은한 불을 밝히면 색색의 물감을 풀어놓은 듯 블타바 강이 로맨틱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 분위기에 홀린 ‘프라하의 연인’들은 길을 가다가도 서로를 포옹한 채 그윽한 눈길을 교환한다. 그 ‘연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 카를다리라고 한다. 그들은 다리 위에서 마치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것이다.
▼ 카를 다리에서의 야경을 구경하고 다시 구시가로 향한다. 가는 길에는 갖가지 상점들을 만날 수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띠는 것은 보석가게이다. ‘유리는 체코 역사의 일부이며 전 세계에서 인정받는 체코의 소중한 예술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올 초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렸던 ‘빛의 예술, 보헤미아 유리’ 특별전 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헬레나 코에닉스마르코바 프라하장식미술관장이 했던 말이다. 그의 말처럼 유리는 동유럽 국가 체코를 대표하는 산업이자 예술이며, 보헤미아 지역은 유리의 주산지로서 유럽의 유리문화를 주도해왔다. 그중에서도 특히 크리스털 유리가 유명하다. 시가지를 걷다보면 보석가게 들이 자주 눈에 띄는 이유이다.
▼ 카를 다리까지 둘러봤다면 이번에는 천문시계탑이다. 프라하를 찾는 방문객이라면 누구나 한 번씩은 꼭 찾아본다는 곳이다. 천문시계가 보여주는 퍼포먼스를 구경하기 위해서이다. 1490년에 만들어진 이 시계는 매시 정각마다 예수님과 12제자의 목각인형을 보여준다. 정각이면 시계의 위쪽에 있는 두 개의 문이 열리는데, 이때 목각(木刻)인형들이 회전하면서 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 구시가 광장에서는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건물 등이 다양한 시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틴 성당, 구시청사, 천문시계, 얀 후스 동상까지 다양한 볼거리들이 있는 곳이다. 때문에 관광객들이 많이 몰리는 곳인 만큼 밤늦게까지 매우 혼잡하다. 특히 관광객들의 주머니를 노리는 소매치기도 많은 편이란다. 거기다 음식점이나 길거리 상인들도 조금 높은 가격으로 바가지를 씌우는 일이 많다고 한다. 이를 염두에 두고 식당에 들어간 우리 부부는 눈을 뻔히 뜨고도 당해버렸다. 식사를 마친 후 식대와 맥주 값까지는 계산을 잘했으나, 남은 현지 화폐로 계산을 치르는 과정에서 바가지를 쓰고 말았다. 돌아오는 길에 확인해보니 적정 환율보다 40%정도를 더해서 지급했던 것이다. 식당 종업원의 환율에 따른 결과이다. 괘씸했지만 어쩌랴 이 또한 여행의 추억인 것을.
▼ 밤이 깊어가는 데도 광장에는 사람들로 붐빈다. 매 시각마다 보여주는 천문시계의 퍼포먼스가 끝났는데도 말이다. 구경꾼들이 있는데 어찌 거리의 악사가 빠질 수 있겠는가. 낮에 비해 구경군의 숫자는 비록 떨어지지만 그의 흥은 식을 줄을 모른다.
▼ 오늘은 모처럼 늦은 아침을 먹을 수 있는 날이다. 거의 온종일을 프라하에서 보내기 때문에 다른 날 같이 이른 아침부터 서두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버스는 카를다리에서 1Km쯤 떨어진 블타바(Vltava) 강변에다 우릴 내려놓는다. 어젯밤을 머무른 탑호텔(Top Hotel)이 프라하시의 외곽에 있는 것이 버스를 이용해 이곳까지 온 이유이다. 호텔의 설비나 식사 등은 그동안 돌아다녔던 다른 도시들의 호텔보다 뒤떨어지지 않았지만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개인여행자들에게는 불편할 것 같다.
▼ 투어가 시작되는 카를다리까지는 블타바(Vltava) 강변을 따라 걸어본다. 이곳 또한 여유로운 일정이 가져다준 또 다른 호사일 것이다. 가는 길 강변에 정박해있는 배가 보인다. 숙박이 가능한 배란다. ‘크루즈(cruise)’의 축소판(縮小版) 쯤으로 생각해도 될 듯 싶다.
▼ 카를다리 교탑(橋塔)의 아치형으로 된 문 안쪽으로 들어서기 전 오른편 광장에 잠시 멈춘다. 아니 멈출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올바른 표현일 것이다. 어느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여기가 프라하 성을 가장 잘 바라볼 수 있는 곳 중 하나라는 것은 두 눈이 먼저 알았다. 이곳저곳에서 ‘우와’ 하는 탄성이 들려오는 것을 보면 누구나 보는 눈은 같은 모양이다. 푸른 하늘과 붉은 지붕의 대비, 그리고 예리하게 우뚝 솟은 첨탑의 아름다운 조화는 글로 표현하기가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그리고 부지런히 셔터를 눌러대는 것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 광장에는 ‘카를 4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1848년 독일의 뉘른베르크에서 카를대학 5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프라하에 기증한 것이란다. 그 동상을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이곳 카를교의 교탑(橋塔) 앞에 세웠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교탑이 있는 다리 이름도 ‘카를다리’로 불리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카를 4세(Karl IV)는 룩셈부르크가(家) 출신의 독일 및 보헤미안왕(1346~1355)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1355~1378)이다. 국내적으로는 제국의 체제를 견고하게 정립하였고, 상공업 육성 ·시민층의 보호 ·학예의 장려(1348년 프라하대학 창립)에 힘썼다. 또한 1377년 아비뇽에서 유수(幽囚) 중인 교황을 로마로 귀환케 함으로써 독일의 국제적 지위를 높였다.
▼ 카를다리는 프라하성과 구시가를 오가는 시간여행의 통로다. 그 사연과 역사가 천 년을 넘어선다. 9세기 초(初) 나무로 지어졌던 다리는 홍수로 여러 차례 유실됐고. 현존하는 카를교의 모습을 지니게 된 것은 보헤미아의 왕인 카를 4세 때다. 50년의 공사과정을 거쳐 1406년에 완공됐다. 이 교량은 621미터 길이에 10미터 폭이고 아치가 16개이다. 그리고 다리 위에는 30개에 이르는 조상(彫像)이 줄을 지어 있는데, 모두 체코 최고 조각가들이 17세기 후반부터 250년에 걸쳐 제작한 것들이란다. 런던에 타워 브리지가 있다면 프라하에는 카를교가 있다 할 정도로 프라하의 대표적인 상징물인 이 다리는 흔히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량 중 하나로 꼽힌다.
▼ 프라하성을 향해 카를다리를 건넌다. 다리 위는 빼곡하게 구경꾼들이 채우고 있다. 다리 양 옆에는 현악기로 버스킹(busking : 행인들로부터 돈을 얻기 위해 길거리에서 노래와 연주를 하는 행위)을 하는 이들부터 초상화나 캐리커처를 그리는 화가들, 그리고 아기자기한 기념품을 파는 노점상들이 즐비하다. 체코 출신 감독인 카렐 바섹(Karel Vacek)은 카를다리를 일컬어 ‘프라하성과도 바꿀 수 없다’고 칭송했다고 한다. 체코 국내는 물론이고 다른 나라들까지 앞다퉈가며 영화나 드라마의 배경으로 등장시킨다고 하니, 그의 말이 허언(虛言)이 아니었나 보다.
▼ 카를교의 미학적인 가치는 다리 위에 놓인 동상들 덕분에 더욱 도드라진다. 다리의 난간 양쪽에는 성서 속 인물과 체코의 성인 등 30명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이 동상들은 각자의 개성과 사연을 지니며 카를교의 볼거리가 됐다. 그중 예수 수난 십자가상이 다리 위 동상 중 최초로 세워졌다고 한다.
▼ 30개의 동상(銅像)들 중에서 가장 인기 높은 조각상은 성 요한 네포무크(St. John of Nepomuk)의 상이다. 동상 아래 부조에는 바람을 핀 왕비의 비밀을 밝히지 않아 혀를 잘린 채 강물에 던져지는 요한 네포무크 신부의 모습이 묘사돼 있다. 이 동상 밑 동판에 손을 대고 소원을 빌면 행운이 깃든다는 전설 때문에 그 부분만 반질반질하게 퇴색돼 있다. 그러나 집사람은 미신(迷信)이라며 만지는 것을 거부한다. 할 수 없이 ‘성 요한 네포쿠크’을 만지는 것은 포기하고, 의미가 없는 것이라며 그 옆에 있는 동판에 손을 대보게 했다. 이것 역시 소원을 이루어지게 해준다는 전설이 있기는 매한가지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판과 오른손을 대도록 되어 있는 동판 아래 십자가가 반질반질한 것을 보고도 내말에 속아준 집사람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그리고 난 집사람 모르게 살짝 눈을 감아본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먼 미래를 기약하며 말이다.
▼ 카렐다리를 건너면 프라하성(Prague Castle)과 만날 수 있다. 프라하 성까지는 ‘황금소로’라 불리는 좁은 골목길을 지나 올라가는 것이 관광객들 단골 코스다.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가 작업실로 쓰던 집은 물론이고, 당시 금은 세공사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거리이다. 그러나 우린 다른 코스를 선택한다. 동유럽 여행의 또 다른 재미인 트램(tram)을 이용해 프라하성까지 가기로 한 것이다. 트램이란 일반 도로에 깔린 레일 위를 달리는 노면 전차(street car)이다. 19세기 말(末) 처음으로 실용화시킨 미국에서는 기동성이 뛰어난 버스에 밀려 이미 옛 추억이 되어버렸으나, 독일을 위시한 유럽에서는 전차의 고성능화 및 궤도의 전용노선화 과정을 거쳐 버스를 능가하는 대중교통 수단으로 사랑받고 있다. 위례신도시에도 설치(5호선 마천역에서 8호선 우남역까지)된다고 하니 우리나라에서도 트램을 볼 날이 머지않을 것 같다.
▼ 트램(tram)에서 내려 성(城)으로 향한다. 프라하성(Prague Castle)은 1989년의 '벨벳 혁명(Velvet Revolution : 공산당 체제의 붕괴를 가져온 시민혁명으로 피를 흘리지 않았다고 해서 ‘평화로운’이라는 형용사 ‘벨벳‘을 썼다)' 이후 대중에게 공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프라하성(Prague Castle)은 체코를 대표하는 국가적 상징물이자,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거대한 성이다. 길이 570m에 너비는 128m이며, 9세기 이후 통치자들의 궁전으로 사용된 로브코위츠 궁전 외에 성(聖)비투스대성당과 성조지바실리카, 성십자가교회 등 3개의 교회와 성조지수도원 등 다양한 부속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처음 건설될 당시에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으나, 13세기 중엽에 초기 고딕 양식이 첨가되고, 이어 14세기에는 프라하 출신인 카를 4세에 의해 왕궁과 성십자가교회 등이 고딕 양식으로 새롭게 건축되면서 이 때부터 체코를 대표하는 상징물이 되었다. 그 뒤 블라디슬라프 2세 때 후기 고딕 양식이 가미되고, 1526년 합스부르크왕가가 이 지역을 지배하면서 다시 르네상스 양식이 도입되었다. 그러다 바로크시대인 1753년부터 1775년 사이에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었는데, 시작에서 완성될 때까지 900년이나 걸렸다.
▼ 마침 위병(衛兵)들의 교대 의식(儀式)이 이루어지고 있어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고 있는 궁전을 지키는 위사들인 모양인데, 그 의식이 화려한 것을 보면 관광 상품의 하나로 정착시킨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참고로 프라하성은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이 성립되면서 대통령 관저로 쓰기 시작했으며, 성의 일부는 지금도 대통령 집무실과 영빈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 성안으로 들면 프라하 주교좌(主敎座, cathedra) 성당인 ‘성 비투스 성당(St. Virtus's Cathedral)’이 가장 먼저 눈길을 끈다. 성당의 기원은 925년, 벤체슬라우스 1세(바츨라프) 공작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부터 받은 성물인 ‘성 비투스’의 팔을 보관하기 위해 교회를 지으면서 시작되었다. 1060년 이 성당은 로마네스크양식으로 한 차례 증축되었지만, 오늘날 우리가 보는 당당한 고딕 양식 건물이 지어지기 시작한 것은 1344년(카를 4세 시대)에 접어들어서였다. 건물은 아라스의 마티아스라는 건축가에 의해 프랑스 고딕 양식으로 설계되었는데, 1352년 그가 사망한 후에는 독일 건축가 페테르 파를러가 감독을 맡은 가운데 작업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에도 성당은 완공되려면 먼 상태로 남아 있었으며, 르네상스와 바로크 양식으로 몇 군데 증축되기는 했어도 이 성당은 19세기까지 미완성 상태였다. 1844년, '성 비투스 대성당 완공을 위한 조합'이 탄생해 성당을 고딕 양식으로 완성시키고 고딕 양식이 아닌 장식부를 제거해 버린다는 목적을 세웠다. 진행 과정은 더뎠으며, 성당은 1929년이 되어서야 완성될 수 있었다. 처음 성당을 짓기 시작한지 무려 1천년이 지나서야 완공을 보게 된 것이다. 건축물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하나의 예술품이라고 보는 것이 더 옳을 듯 싶다. 전체 길이 124m에 너비 60m, 높이 33m의 건물은 프라하 성 안에서 가장 화려한 자태를 뽐낸다. 건물은 두 개의 뾰쪽 탑을 거느리고 있는데 남쪽 탑은 96.5m, 서쪽 탑은 82m 높이를 자랑한다.
▼ 대성당의 백미(白眉)는 뭐니 뭐니 해도 체코가 자랑하는 스테인드글라스(stained glass)로 만든 환상적인 벽면이 아닐까 싶다. 성당 안으로 들어서면 스테인드글라스에서 내뿜는 형형색색의 빛이 마치 세례를 받는 듯한 성스러움을 자아내게 만든다. 따스한 기분이 들 정도로 강렬한 빛. ‘프라하의 봄’은 바로 이런 느낌이 아닐까?
▼ ‘성 비투스 성당’ 앞에 있는 대통령궁을 부르는 가슴 아픈 이름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악의 꽃'이다. 이런 이름이 있는 이유는 ‘비투스 성당’을 감싸고 있는 건축물 때문이란다. 1700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을 때, 오스트리아인들은 프라하에서 가장 높은 산에 있는 대성당의 좋은 기운이 프라하로 내려가는 것을 원치 않아 성당의 주변을 막을 수 있도록 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때 일본이 우리나라에 쇠말뚝을 박았던 것과 유사하다고 보면 된다. 그때 만들어진 건물이 바로 대통령궁이란다. 현 체코 대통령은 아직도 그 대통령궁에서 업무를 보고 있다. ‘아픈 역사도 우리의 역사이고 두 번 다시는 이런 일들을 격지 말자’라는 이유에서란다. 이것이 아픈 역사를 받아들이는 체코인들의 마음, 동병상련(同病相憐)을 겪었던 우리도 그냥 흘려듣지 않았으면 좋겠다.
▼ 대통령궁 앞 광장으로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는 것이 보인다. 오늘은 독립기념일(10월28일),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으로부터 독립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그 기념식을 대통령이 주관하는데 오늘 이곳에서 열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시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는 수밖에 없다. 넘쳐날 것이 뻔한 인파도 문제겠지만 그보다는 대통령의 경호를 위한 보안이라도 강화될 경우에는 이곳을 벗어나기조차 어려워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 밝을 때 다시 찾은 화약탑, 왼편이 화약탑이고 오른편이 ‘프라하 시민회관’이다.
▼ 나타나는 풍경들이 왠지 눈에 익다. 인근의 도시들은 몇 곳 방문해봤지만 프라하만큼은 초행길인데도 말이다. 이 낯설지 않은 분위기는 무엇 때문일까? 필요 없는 궁금증에 골머릴 썩히다가 문득 하나의 이유를 떠올린다. 그래 내가 즐겨보는 영화들의 배경이 바로 프라하였다. ‘아마데우스’ ‘미션 임파서블’ ‘트리플X’ ‘블레이드2’... 극장에 앉아 가슴을 졸이며 봤던 장면들을 바로 여기서 촬영했던 것이다.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다. 2005년 가을에 방영되었던 SBS-TV의 인기 주말드라마 ‘프라하의 봄’의 배경 또한 여기였었다. 당시 난 ‘솔직 담백한 외교관과 용감무쌍한 말단 형사가 엮어가는 특별한 사랑 이야기’에 심취했었으니 어찌 그 분위기를 잊을 수 있었겠는가. 프라하의 거리 풍경이 낯설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 바츨라프광장(Wenceslas Square)으로 걸음을 옮긴다. 거리의 이름을 낳게 한 ‘바츨라프 기마상’을 시작으로 800m 정도 뻗은 이 광장에서 1968년 ‘프라하의 봄’이라 불리는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인들의 투쟁은 무력으로 침공한 소련군의 탱크에 짓밟혔다. 슬픈 역사의 흔적조차 찾기 어려울 만큼 지금 바츨라프 광장은 평화롭기만 하다. 바츨라프 광장에서는 번화한 프라하 시가지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름은 광장이지만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와 같은 모습이다. 광장 양편으로 상점과 레스토랑 호텔들이 줄지어 있어 프라하 사람들의 생활모습을 가까이서 엿볼 수도 있다. 또 하나, 이곳에는 세계 10대 박물관으로 손꼽히는 프라하 국립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짬을 내어 한번쯤은 들러볼 일이다.
▼ ‘거리의 악사’도 프라하의 명물 중 하나고 꼽을 수 있다. 프라하성이나 카를다리는 물론 거리를 돌아다니다보면 곳곳에서 연주를 하고 있는 악사들을 볼 수 있다. 그들이 연주하는 악기는 제각각, 악기에 어울리는 곡을 골랐는지 연주곡 또한 제각각이다. 거리의 악사들이 가득한 프라하의 거리를 걷다 보면 마음속에 음악이 가득 차게 된다. 꼭 음악 애호가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이 어찌 행복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사람들은 여행을 떠나나 보다.
▼ 바츨라프광장에 다녀오는 길에 들른 하벨시장(Havel's Market), 장터는 길의 양 옆과 중앙에 길게 꾸려져 있다. 그곳에는 항상 사람들로 넘친다. 물론 생필품을 사려는 현지인들이겠지만 내가 보기엔 여행객들의 숫자가 더 많을 것 같다. 서민들의 생활상을 가장 근접하게 보고 싶은 여행객들이 가장 들러보고 싶어 하는 곳이 바로 전통시장이기 때문일 것이다. 시장에는 없는 것이 없다. 작은 기념품과 인형, 시계, 그림 등 선물용 상품들은 물론이고, 꽃이나 과일 등 다양한 상품들을 팔고 있다. 맥주의 최대소비국 중 하나답게 예쁜 맥주잔도 여러 가지 스타일로 진열되어 있으니 선물용으로 하나쯤 골라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만일 과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체리와 딸기 등 여러 가지 작은 과일들을 하나의 컵에 골고루 담아놓은 것이 좋을 테고 말이다.
▼ 골목길을 걷고 있는데 행위예술가가 보인다. 온몸에 페인팅(painting)을 하고 마치 석고상처럼 꼼짝 않고 서있다. 집사람의 뒤를 따라 걷고 있던 난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한다. 그리고 그 예술가에게 신호를 보낸다. 그녀를 놀래주라는 신호이다. 물론 손가락으로 돈의 모양을 만들어냈음은 물론이다. 과연 내 작전은 대 성공이었다. 그리고 효과도 만점이었다. 까무러칠 정도로 놀라던 집사람이 이어지는 익살스런 그의 연기에 마냥 즐거워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기분 좋아진 나도 ‘원 플러스 원’으로 보답했다. 1유로(EURO)만 주어도 될 것을 감사의 표시로 하나 더 준 것이다.
▼ 다시 돌아온 구시가 광장, 골목길을 통과하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는 광장. 가장 먼저 구시청사 벽에 걸린 천문시계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천문시계는 70m가량의 높이로 1410년에 만들어졌다. 시계가 정각을 알리면 천사의 조각상 양 옆에 있는 두 개의 창문이 열리고 종소리와 함께 12사도(Twelve disciples)들이 그 모습을 비춘다. 천문시계를 지키는 해골은 천천히 움직이며 시간을 알리고 12사도가 모습을 감추면 황금색 닭이 얼굴을 내밀고 목청껏 울부짖는다. 그 모습에 눈을 떼지 못하고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던 관광객들은 황금색 닭의 귀여운 포효에 박수를 보내며 흩어진다. 참고로 천문시계는 1410년 시계공 미쿨라시(Mikulas of Kadan)와 뒷날 카를 대학의 수학교수가 된 얀 신델(Jan Sindel)이 공동으로 제작하였다. 1490년 달력이 추가로 제작되고, 외관이 조각으로 장식되었다. 참고로 천문시계는 상하 2개의 큰 원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위쪽 시계를 칼렌다륨, 아래쪽을 플라네타륨이라고 부른다. 칼렌다륨은 천동설의 원리에 따른 해와 달과 천체의 움직임을 묘사하였다. 일반적으로 1년에 한 바퀴씩 돌면서 연, 월, 일, 시간을 나타낸다. 아래쪽 원은 12개의 계절별 장면들을 묘사하여 제작 당시 보헤미아의 농경생활을 보여준다. 매시 정각에 해골모형이 움직이는 곳은 칼렌다룸의 위이다.
▼ ‘구시가광장’은 ‘얀 후스광장’이라는 또 다른 이름도 갖고 있다. 종교개혁 하면 대부분 마틴 루터(Martin Luther)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루터보다 100년 먼저 종교개혁을 외친 사람이 바로 카를대학 교수였던 ‘얀 후스(Jan Hus)’이다. 하지만 개혁은 성공하지 못하고 공개 화형으로 죽게 된다. 화형 당하기 전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이 ‘진실을 생각하고 진실을 말하고 진실을 행하라’였다고 한다. 순교 5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그의 동상(Jan Hus Monument)이 이곳 광장에 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 광장에 들어서면 70m 높이의 첨탑 두 개가 세워진 틴성당(Kostel Panny Marie Pred Tyne)이 위풍당당한 모습을 드러낸다. 틴 성당은 1365년 세워진 건축물로 고풍스런 외관이 인상적인 곳이다. 내부에는 성모 마리아 상과 예수 그리스도 상이 성당을 지키고 서 있다.
▼ 프라하 투어의 막바지, 떠나기 전에 꼭 눈에 담아야할 풍경이 하나 있다. 바로 프라하의 전경(全景)이다. 이런 풍경을 보기 위해 선택한 곳은 천문시계 탑의 전망대이다. 전망대까지 올라가는 방법은 두 가지, 한가운데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하거나 엘리베이터를 가운데에 두고 빙글빙글 돌면서 오르도록 되어있는 계단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전망대에 오르면 아름다운 프라하의 풍경이 마치 한 폭의 잘 그린 그림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 고딕 양식의 탑 위에서 내려다보는 옛 시가지다. 붉은색의 지붕이 덮인 건물들과 좁은 골목길, 틴 성당과 성 니콜라스 성당 그리고 저 멀리 프라하 성까지 볼 수 있다. 중세의 건물들이 너무도 예쁘다. 로마네스크,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양식의 건축물들이란다. 그래서 구시가가 얻게 된 또 하나의 이름이 ‘건축의 박물관’이란다. 그런 연유로 이곳 구시가는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이런 건축물들에 홀딱 빠졌던 사람 중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람이 하나 있다. 바로 북한의 독재자였던 김일성이다. 그가 프라하를 방문했을 때, ‘한번 꼭 살아보고 여유롭게 즐기고 싶은 곳입니다’라고 했다는데, 그곳이 바로 구시가 광장 주변이었다는 것이다. 마음만 먹지 말고 실행에 옮겼더라면 북한동포들의 삶은 최소한 지금보다는 더 나아졌지 않았을까 싶다. 떠나면서 국민들에게 통치권을 넘겨준다는 가정 하에서 말이다.
▼ 그리고 발아래 구시가 광장에는 거리의 악사가 공연을 하고 있는 것이 내려다보인다. 그를 빙 둘러싼 수많은 인파를 보면서 과연 안토닌 드보르작(Antonin Dvorak) 같은 유명한 음악가 태어날 수 있는 토양을 갖은 나라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참고로 구시가 광장(Old Town Square)은 블타바 강 오른쪽 오래된 구시가의 중심에 위치한 광장이다. 11세기 형성된 이래 오늘날까지 광장으로 쓰고 있다. 194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공화국 몰락 선언, 1968년 프라하의 봄, 1989년 벨벳 혁명이 모두 이곳에서 시작됐다. 틴 성당, 구시청사, 천문시계, 얀 후스 동상 등 다양한 볼거리가 구시가 광장 주변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