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북부 유럽 여행
여행일 : ‘17. 6. 19(월) - 7.1(토)
여행지 : 러시아(모스크바, 페테르부르크), 에스토니아(탈린). 핀란드(헬싱키), 스웨덴(스톡홀름), 노르웨이(오슬로, 베이토스톨렌, 요정의 길, 게이랑에르 피오르드, 뵈이야 빙하, 베르겐, 하당에르 피오르드, 하당에르비다국립공원), 덴마크(코펜하겐)
일 정 :
○ 6.20(화) : 모스크바(붉은광장, 성바실리사원, 굼백화점, 크레믈린궁전, 참새언덕)
○ 6.21(수) : 페테르부르크(표트르대제 여름별궁, 에르미타쥐 박물관, 성이삭 성당)
○ 6.22(목) : 탈린(알렉산더 네프스키성당, 시청사 광장, 돔교회, 툼페아 언덕)
○ 6.23(금) : 헬싱키(원로원광장, 마네르헤임거리, 우스펜스키 사원, 시벨리우스 공원)
○ 6.24(토) : 스톡홀름(구시가지인 감라스탄, 왕궁, 시청사, 바사박물관)
○ 6.25(일) : 북유럽 최고의 트래킹코스 베이토스톨렌
○ 6.26(월) : 요정의 길, 게이랑에르피요르드, 뵈이야 빙하, 피얼란드 빙하박물관
○ 6.27(화) : 베르겐(어시장, 그리그 생가), 하당에르 피요르드, 하당에르비다국립공원
○ 6.28(수) : 오슬로(아케르스후스 성, 카를요한거리, 시청사, 비겔란드 조각공원)
○ 6.29(목) : 코펜하겐(늬하운 운하, 아멜리엔보그성, 시청사, 크리스티안보그성, 게피온 분수)
여행 첫째 날 : 크렘린이 전해주는 러시아의 영광, 모스크바(Moskva)
특징 : ① 러시아(Russian Federation) : 1917년 10월 볼셰비키혁명에 의하여 탄생된 사회주의 국가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The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 USSR, 즉 소련)이 1991년 12월 해체되면서 구성된 독립국가연합(CIS)을 구성한 공화국의 하나로 그 주축이 되는 국가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국가로 면적(17,134,237.3㎢)이 미국이나 중국의 2배나 되며, 수도는 모스크바(Moskva)에 두었다. 인구(1억 4242만 3773명, 2015년 현재)는 중국·인도·미국·브라질·인도네시아의 뒤를 이어 세계 6위이며, 국민의 대부분이 러시아인이지만 소수민족 집단도 약 70개에 달한다. 인구의 대부분이 러시아의 서부인 유럽의 거대한 삼각지대에 집중되어 있지만 지난 3세기에 걸쳐서, 특히 20세기 동안 인구가 동쪽의 아시아권(시베리아)으로 계속해서 이동하고 있는 중이다. 종교의 분포는 다양하며 전체인구의 약 82%가 러시아정교를, 약 14%가 회교를 각각 신봉하고 있다. 기타 로마가톨릭이 약 1.5%, 유대교가 약 1.5%, 개신교가 약 0.5%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나라와 러시아와의 관계는 180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1860년 한러수호조약이 체결되면서 양국간의 국교(國交)가 최초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와 광복 후 남북한 대치상황으로 인해 두 나라 관계는 사실상 단절된 상태였다. 그러다가 1988년 9월 고르바초프의 크라스노야르스크연설을 계기로 양국 간의 경제협력의사가 맞물리면서 1990년 9월 30일 국교가 정상화됨에 따라 자원·과학기술·수송·통신 분야에 걸친 각종 협력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였다. 1992년 11월 옐친의 한국방문 시 체결된 한·러 기본조약은 한·러관계가 단순한 관계정상화를 넘어 아시아·태평양지역의 동반자관계로 들어섰음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문화적인 측면을 살펴보자. 사색하기에 적합한 자연환경과 혁명전 사회가 안고 있던 복합성이 정신적 자극제가 되어 문학과 음악에 있어 ’안톤 체호프‘, ’알렉산드르 푸슈킨‘, ’레프 톨스토이‘, ’표트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와 같은 세계적인 거장이 탄생했다. 그리고 1917년의 ’10월 혁명‘이 몰고 온 광범위한 사회변혁은 소설가 ’막심 고리키‘, ’미하일 숄로호프‘,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을 비롯해, 시인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등 유명한 예술가들의 작품 속에 잘 반영되어 있다.
② 모스크바(Moskva), 러시아의 수도(首都)로 세계 최대 도시 가운데 하나이자 국제적으로 중요한 도시이다. 1147년의 연대기에 처음 언급된 이래 러시아 역사의 주요무대로서 자리잡아왔으며, 또한 600년 이상 러시아 정교회의 영적 구심이 되어왔다. 이 연대기에 따르면 그해 4월 4일 수즈달의 공(公)인 유리 블라디미로비치 돌고루키가 '모스크바'에서 동맹자인 노브고로트 세베르스키 공을 위해 '대연회'를 열었다고 한다. 이 기록에 따라 1147년 4월 4일을 이 시의 전통적 기원 날짜로 여겨오고 있다. 돌고루키 공은 1156년에 처음으로 참호를 두른 요새를 세우고 흙으로 방벽을 쌓은 후 그 위에 목재 벽을 쌓고 방책을 만들었다. 이것이 크렘린의 기원이다. 오늘날 크렘린이라는 단어의 기원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성채'나 '가파름'이라는 뜻의 그리스 단어에서 비롯된 말이라는 주장이 있는 한편, 건축용으로 알맞은 목재를 공급하는 침엽수라는 뜻으로 쓰였던 초기 러시아어 '크렘'(krem)이 그 기원이라는 견해도 있다. 14세기에서 18세기 초까지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다. 1712년 ’표트르 1세‘에 의해 새로 건설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수도가 옮겨지기도 했으나, 볼셰비키혁명에 의한 소련의 탄생과 함께 1922년 소련의 새로운 수도가 되었다. 오늘날 모스크바는 러시아의 정치뿐만 아니라 인구, 공업 생산성, 문화, 과학, 교육 등의 면에서도 중심적인 도시이다. 1991년 8월의 쿠데타에 의해 소련 공산당이 무너진 뒤의 독립국가연합에서도 많은 행정기능의 중추역할을 계속 맡고 있으며 러시아 연방 수도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현재 모스크바의 '크렘린과 붉은 광장'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1990년)되어 있다.
▼ 우리를 태운 버스는 ’붉은 광장‘에서 한 블록(bolck) 떨어진 대로변에다 우릴 내려놓는다. 광장으로의 진입이 불가능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모스크바에서 가장 크고 화려하다는 ’굼(GUM)백화점‘의 옆길을 따라 5분쯤 걷자 어마어마하게 큰 광장이 나타난다. 모스크바 시에서 벌이는 모든 의식의 중심지인 ’붉은 광장(Krasnaya Ploshchad)‘이다. 크렘린(Kremlin) 성벽 동북쪽에 있는 붉은 광장은 15세기부터 상인들이 물건을 사고팔던 장소였다. 또 전쟁을 떠나는 군사들이 행진을 하던 곳이자 때때로 정치범이나 흉악범을 시민들 앞에서 처형하던 곳이기도 했다. 직사각형의 광장 중앙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면 러시아 최초의 백화점 굼을 비롯해 크렘린 성벽과 대로를 따라 늘어선 다양한 건물들을 볼 수 있다. 성곽 아래에 ’블라디미르 레닌‘의 미라가 보존되어 있는 ’레닌 묘‘가 있고, 그 반대편에는 국영 백화점인 ’GUM‘, 광장의 북단에는 ’국립 역사박물관‘이 있으며, 그 반대편 즉 남단에는 러시아 정교회의 성당인 ’성 바실리 성당‘과 처형장이었던 ’로브노예‘ 자리가 있다. 참고로 ’붉은 광장(Krasnaya Ploshchad)‘의 'Krasnaya(크라스나야)'는 현대 러시아에서 ’붉은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광장의 이름이 ’붉은 광장‘으로 번역되지만 원래는 ’모든 아름다운 것‘을 나타내던 슬라브어에서 비롯된 단어이다. 원래의 이름은 ’아름다운 광장‘이었다는 얘기이다.
▼ 광장의 북단에 위치하고 있는 ’국립역사박물관‘은 러시아 영토에 살았던 선사 시대 유물부터 로마노프 왕조까지 전 역사에 걸친 다양한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1755년 미하일 로모노소프가 처음 지었을 때만 해도 ’모스크바대학교‘의 학과건물이었으나 ’블라디미르 오시포비치 셔우드‘가 현재의 건물로 재건축했다고 한다. 박물관은 1872년 ’이반 자벨린‘, ’알렉세이 우바로프‘와 그 외 여러 슬라보필(Slavophil, 슬라브派)에 의해 설립되었다고 한다. 주어진 시간이 짧아 내부관람은 생략하기로 한다.
▼ 광장의 남단에 있는 러시아정교회의 성당인 ’대도(代禱)교회(포크로프스키소보르)‘는 복자 ’성 바실리우스 대성당(Saint Basil's Cathedral)‘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독특하고 웅장한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이 대성당은 모스크바 대공국의 황제였던 ’이반 4세‘가 러시아에서 카잔과 아스트라한에 있던 타타르족(몽골족)들을 물리친 것을 기념하며 승리의 중재자인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한 성당이다. 하나로 통일된 러시아의 가치를 드높이고 몽고 타타르와 용감하게 싸우다 희생된 민족 영웅들의 넋을 기리며 러시아 정교로 국민들을 통합시키고 애국심을 북돋기 위해 건축 된 정치적, 종교적 상징물이다. 참고로 ’이반 4세‘는 러시아를 통일시키고 최초로 짜르(황제)에 오른 인물이지만 폭군으로도 악명이 높다. 하늘로 치솟은 양파모양의 작은 돔들은 그 생김새와 색깔이 독특하다. 한마디로 눈을 뗄 수가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대성당을 장식한 색깔들은 아무렇게나 정한 것이 아니고 신약성경 제일 마지막에 등장하는 요한계시록(또는 묵시록)에서 묘사한 천국문과 성벽의 색깔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 1555년 건축을 시작하여 1560년 완공한 대성당은 러시아의 전통적 목조 건축술과 더불어 비잔틴과 서유럽에서 유입된 석조 건축술이 절묘하게 결합된 가장 러시아적이면서 세계적인 건축물이다. 47m짜리 팔각형의 첨탑을 중앙으로 하여 주변에 8개의 양파 모양의 지붕들이 배열되어 있으며 예배당을 형성하는 4개의 다각탑과 그 사이 4개의 원형탑이 솟아 있어 총 9개의 탑이 있다. 어느 방향에서 보더라도 양파모양의 지붕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눈에 담아도 하나도 아프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자태이다. 하긴 ’이반 4세‘가 완공된 대성당의 모습에 반해 이런 아름다운 건물을 두 번 다시는 못 짓게끔 건축을 담당했던 '바르마'와 '보스토니크'의 눈을 멀게 해버렸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올 정도이니 더 말하면 뭐하겠는가. ’이반 그로즈니‘란 이름답게 그의 포악하고 잔인한 일면을 드러낸 유명한 일화다.
▼ 바실리 성당 앞에는 커다란 동상이 하나 서있다. 걸작으로 손꼽히는 ’미닌․포자르스키 기념비‘인데 한 사람은 일어서서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앉아서 위를 올려다보고 있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두 사람은 1612년 폴란드군으로부터 모스크바를 해방시켰다고 해서 영웅으로 불린다. ’쿠즈마 미닌‘은 니지니 노브고로트의 상인이었고, ’드미트리 포자르스키‘는 수즈달의 대공(大公)이다. 두 사람은 애국심을 발휘하여 인민 의용군을 조직, 폴란드군을 격퇴 시켰다고 한다. 그들의 영웅적 행동을 기리기 위해 ’이반 마르토스‘에 의해 1818년에 완성되었는데, 건립 당시에는 붉은 광장의 중앙에 세워졌으나 열병 및 시위를 위한 공간 확보를 위해 이곳으로 옮겨 놓았단다. 기념비의 앞면에 러시아어로 새겨 넣은 문장이 보인다. '시민 미닌과 포자르스키에게 러시아가 감사의 마음을 전하다.'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단다.
▼ 안으로 들어가 보기 위해서는 250루블짜리 입장권을 사야한다. 현재는 내부를 박물관으로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당의 내부 역시 외관에 못지않게 화려하기 짝이 없다. 정교회의 성당에 들어가 볼 때마다 느낀 점이지만 러시아정교회 성당들은 다른 종파의 성당들에 비해 유독 화려한 색상으로 치장되어 있지 않나 싶다. 아무튼 러시아 정교의 오랜 세월에 쌓여온 수많은 흔적들이 건물 내부에 빼곡히 전시되어 있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전시물 하나하나는 종교의 기록이다. 하지만 예술품으로서의 가치도 대단해 보인다. 시간에 조금 여유가 있다면 이 건물이 지어지기까지의 전 과정과 실제 사용되었던 건축양식, 자제, 그리고 이곳이 성당으로 운영되던 시절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러시아정교회 관련 물품들까지 다양하게 둘러볼 수도 있으니 참조한다.
▼ 이 사원이 처음부터 성 바실리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아니라고 한다. 1588년 탁발 수도사인 바실리가 이곳에 묻히게 되면서 그 이름을 따서 성 바실리 사원이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수도사 바실리는 기이한 기적을 많이 행한 예언자로 덕망이 높아 당시 러시아 민중들의 추앙을 받았던 인물로 모스크바 화재 및 이반4세의 앞날을 예언한 것으로도 유명하고 이반4세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는데 그의 죽음을 슬퍼한 이반4세가 사원의 이름에 수도사의 이름을 붙였다고 전해진다.
▼ 바실리 대성당의 맞은편 ’크렘린(Kremlin)‘ 성벽에는 ’스파스카야 탑(구세주 탑)‘이 우뚝 솟아있다. 이 시계탑의 꼭대기의 별은 크렘린 입구의 ’트로이츠까야 탑‘과 마찬가지로 시간에 따라 회전을 한다. 특히 이 탑의 시계는 모스크바의 표준시가 되는데,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과 전투시기, 그리고 크렘린 안에 있는 모든 초소에서 보초들의 교대시간에도 울린다고 한다. 특히 매년 12월 31일이 되면 15분에 한번 씩 시계가 울린다고 한다. 그 소리를 듣기 위해 많은 모스크바 시민들이 ’붉은 광장‘으로 모여든다니 우리나라 보신각 타종 때의 진풍경을 이곳에서도 볼 수 있겠다.
▼ 대성당의 앞에는 ’로브노에 메스토‘라는 원형의 연단(演壇)이 있다. 이 연단은 황제가 전국에 반포하는 포고령을 읽으며 중죄인에 대해 판결을 이곳에서 내렸으며 형을 집행하던 장소라고 한다. 대 농민 반란의 주모자 스테판 라진도 여기에서 처형 되었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죽은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동전을 던지는 등 숨은 관광명소가 되었다. 과거의 무시무시했던 곳이 지금은 여행자들이 의아하게 생각하며 구경할 수 있는 구경거리가 되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irony )라고 할 수 밖에 없다.
▼ 크렘린(Kremlin) 성벽의 앞 한가운데, 아니 ’붉은 광장‘의 가운데쯤이라고 해도 되겠다. 그러니까 광장의 가장 중요한 위치에 흡사 피라미드(pyramid)를 연상시키는 ’레닌 묘(Lenin's Tomb)‘가 들어서 있다. 검붉은 화강암으로 지어진 저 우람한 건축물 안에 방부 처리된 레닌의 시신이 모셔져 있단다. 유리관 속에 넣어 참배객들에게 공개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곳도 직접 들어가 보는 것은 생략하기로 한다. 죽은 시체를 보는 게 썩 마음에 내키지 않아서이다. 아무튼 ’레닌 묘‘의 영향을 받아 일부 사회주의국가 등에서 지도자의 시신을 영구보존 처리하여 안치하는 무덤이 만들어지고 있다.
▼ 번쩍번쩍 광을 낸 이 무덤은 어떤 이들에게는 잊혀지는 편이 나은 과거를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또 다른 이들에게는 빛나는 역사와 국가 지도자에게 바치는 불멸의 기념비이다. 그 당사자인 레닌(Vladimir Ilich Lenin)은 러시아 공산당을 창설하여 혁명을 지도했고 소련 최초의 국가원수가 되었다.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을 창설했으며, 마르크스 이후 가장 위대한 혁명사상가인 동시에 역사상 가장 뛰어난 혁명지도자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17세부터 마르크스의 ’자본론‘ 등 혁명서적을 탐독, 1889년 1월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곧 사회민주노동당을 이끄는 주역이 되었고,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열린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레닌은 1924년 1월 21일 저녁 고리키에서 뇌동맥경화증으로 사망했다. 자유민주주의를 믿는 우리들에게는 거부감이 들지만 공산주의자들에게 그가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 러시아 혁명으로 차르와 소수 귀족계급에 의해 대다수의 민중들이 탄압을 받던 러시아에 평화와 평등을 주었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론을 처음 실현시켰다는 것과 전 세계 약소국 식민국가들과 유럽 각 국가들에 사회주의, 공산주의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국가 지도자 입장에서 최초로 약소국의 완전한 해방을 주장했고, 적극적으로 민족해방세력을 지원했다는 것은 20세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영향과 의의를 갖는다.
▼ ’붉은 광장‘을 사이에 두고 크렘린의 맞은편에는 러시아의 최고급 백화점인 국영백화점(GUM)이 위치하고 있다. 1890년부터 3년에 걸쳐 세워졌으며 러시아혁명 뒤인 1953년에 지금과 같이 개조하였다. 이 백화점은 3층 건물이며 지붕은 유리로 되어 있다. 19세기 말에 건설된 굼 백화점은 모스크바의 또 다른 상징이다. 유리 지붕과 정면부로 이루어진 이 거대한 구조물은 6500평방미터에 달하는 지대에 다리와 보도로 연결된 다섯 개의 평행 통로가 있다. 아라비아의 시장 ‘바자르’를 닮았으며 150개의 상점이 들어서 있는 굼 백화점은 백화점이라기보다는 상가에 더 가깝다. 공산주의가 절정기였을 때 굼에서 돈을 쓰는 것은 돈을 버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고 한다. 볼프강 쾨펜(Wolfgang Koppen)은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복도 · 휴게실 · 계단 등지에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긴 행렬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 여기는 분명 사회주의사회이다. 구매자들 대부분 줄을 서 있는 동안 책을 읽는다. 그러나 그들이 무엇을 사려고 줄을 서 있는지 알 수 없었다.’
▼ 건물이 너무 크고 화려하기 때문에 밖에서 바라볼 때에는 백화점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궁전으로 오해할 수 있을 정도로 멋진 외모를 지녔다. 하긴 냉전시대에 소련 공산당의 체제 선전용으로 이용하기 위해 지었다니 더 말해 뭐하겠는가. 아무튼 소련의 붕괴 이후에는 모스크바를 대표하는 백화점으로 변신하여 현재는 수많은 명품 브랜드들이 입점해 있다.
▼ 아치형으로 만든 출입문 건너편에 ’크렘린‘과 ’레닌 묘‘가 나타난다. 굼백화점과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 굼 백화점은 겉에서 보면 사각형의 거대한 건물처럼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남북으로 길게 4개의 큰 건물을 지어놓고 그 외곽만 이어 붙인 형태이다. 내부는 3층으로 이루어졌는데 가운데 통로는 비어있다. 통로의 위는 전체가 유리로 된 반구형의 돔(dome)으로 만들어져 있어 자연광(自然光)이 그대로 들어온다.
▼ 이층과 삼층은 두 건물 사이의 뚫린 공간을 구름다리로 연결시켜 놓았다. 이 다리의 위가 일류의 ’포토죤(photo zone)‘이 된다. 특히 삼층의 구름다리는 쉼터의 역할도 겸하는 것 같다. 삼층에 있는 패스트푸드점에서 음식을 사들고 나와 구름다리에 놓여있는 테이블에 앉아서 먹는 것이다. 눈앞에 펼쳐지는 백화점 내부 풍경이 나름대로 볼만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아니 하나 같이 아름답고 럭셔리(luxury)한 브랜드들을 눈에 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광장을 다 둘러보고 난 다음에는 모스크바 강이 흐르는 남단(南端)으로 빠져나온다. 우리를 다음 장소로 태워다 줄 관광버스가 레츠키다리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바실리대성당 옆을 지나게 되는데 이 장소가 대성당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다. 사람들이 몰려있어 포즈 취하기가 약간 불편하긴 하지만 조금 기다리는 한이 있더라고 꼭 카메라에 담아보자. 이왕에 얼굴까지 집어넣는다면 금상첨화일 것이고 말이다. 아무튼 ’성 바실리성당‘은 9개의 첨탑이 각기 다른 높이, 다른 모양, 다른 색깔로 이루어져 있어서 철저하게 비대칭형 구조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직선과 곡선이 아주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500년도 훨씬 전에 이런 천재적인 기하학을 건축에 도입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경이로울 뿐이다. 또한 늘 규칙적인 종교 건축물만 보아 오던 나에게 불균형 속의 아름다움이 어떤 것인지를 느끼게 해준다. 궁금증도 풀어볼 겸해서 성당을 한 바퀴 돌아본다. 여러 다른 각도에서 올려다보기 위해서이다. 성당은 보는 자리마다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다가 오고 있었다. 이래서 16세기 러시아의 집중식 성당 건축의 최고봉이라 일컬어지는 모양이다.
▼ 광장의 남단으로 빠져나오면 모스크바 강이 나온다. 그 위에 놓여있는 다리가 ‘레츠치다리’이다. 아래 사진의 다리인데 모스크바 최고의 명소인 붉은 광장과 크렘린 궁전을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는 뷰포인트(viewpoint)라고 한다. 다리에 서면 붉은 광장과 크렘린 궁전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그 모습이 광장에서 보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이다. 하지만 난 거기까지 가보지를 못했다. 다리 근처까지 다 가서 버스를 탔는데도 말이다. 그런 정보를 여행을 마치고 난 다음에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마치 한 장의 그림엽서를 보는 듯한 기분’이 느껴진다고까지 극찬을 들을 정도의 경관인데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다. 여행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음부터는 관련 정보를 더 꼼꼼히 챙겨봐야 하겠다.
▼ 식당으로 이동하는 중에 중세 유럽 축성(築城) 예술의 본보기라는 크렘린(Kremlin)의 남쪽 성벽이 눈에 들어온다. 끝도 없이 길게 늘어선 거대한 성곽이 시야를 가득 메워버린다. 크렘린 성벽 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성당 탑들의 모습이 아까 광장에서 보았던 것들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요새화된 크렘린은 이 시의 중심이자 역사적 구심점이며 러시아의 힘과 권위의 상징이다. 총안(銃眼)이 뚫린 크렘린의 붉은 벽돌벽과 20개의 탑은 1485-1495년에 이태리 건축예술가들과 건축기사들에 의해 세워졌다. 성벽의 총 길이는 2,235m이다. 잘 구워 낸 큼직큼직한 벽돌(한 개 중량 8㎏)을 쌓아서 만든 성벽은 지면의 기복에 따라서 그 높이가 5m에서 19m에 이르며 벽의 두께는 3.5-6.5m이다. 탑들은 여러 층으로 되어 있고 그 중 가장 높은 것은 구세주탑과 삼위일체탑이다. 1990년 유네스코는 이곳 크렘린과 붉은 광장을 합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한바 있다. 참고로 크렘린(Kremlin)이란 러시아어로 성채(城砦) 또는 성벽(城壁)을 가리키는 일반명사이다. 하지만 대문자로 시작할 때는 모스크바의 크렘린 궁전을 의미한다.
▼ 오후의 일정은 크렘린 탐방이다. 약간의 여유시간을 알뜰하게 쓰고파 ‘알렉산드롭스키 정원’을 둘러보기로 한다. 정원은 크렘린 서쪽 성벽 아래로 865m를 뻗어있다. 1812년 나폴레옹군의 침공으로 쑥대밭이 된 도심을 재건하면서 알렉산드르 1세가 명해 만든 러시아 첫 공공 공원(公園)이란다. 황제의 이름이 공원 이름으로 고정된 이유이다. 공원 초입에는 ‘무명용사의 묘(墓)’가 있다. '고국을 위해 쓰러지다'라는 문구를 가운데에 두고 양 옆에 1941과 1945가 나란히 적혀 있다. ‘2차 세계대전’의 시작과 종전 연도일 것이다. 이 묘는 2차 대전 때 모스크바 외곽에서 나치군을 물리친 지 25년 된 1966년 12월에 맞춰 완공했다고 한다. 가운데 대리석 묘엔 모스크바 외곽에 있던 전몰장병 묘지에서 이름 모를 병사의 시신 한 구를 옮겨왔는데, 위에 철모와 월계수 가지를 얹은 군기를 조각해 장식했다. 또한 앞쪽 바닥 별 모양 부조의 가운데에선 '꺼지지 않는 불'이 타오른다. 1957년 이래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르스광장에서 타고 있는 불에서 채화해 온 것이란다. 이렇게 무명용사 시신과 꺼지지 않는 불을 모시는 묘는 1921년 파리 개선문 아래에 ‘1차 대전 무명용사 묘’를 처음 만든 이래 여러 나라에서 본뜨고 있다고 한다. 묘의 양 옆은 위병들이 지키고 있다. 아쉽게도 한 시간마다 하는 위병 교대식은 구경할 수가 없었다. 발을 일자로 쭉 뻗어 들어 올리는 러시아군 특유의 '구스(오리) 스텝'이 볼만하다는데 그럴만한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 정원에는 십자가를 치켜들고 있는 러시아 정교회의 성직자 동상도 세워져 있다. 좌대가 높아 금방 눈에 띄는데 17세기 초 모스크바의 총주교(總主敎)였던 ‘게르모겐(1530~1612)’이라고 한다. 게르모겐은 16세기 말부터 볼가강 지역에서 이민족에게 정교회 전도 활동을 펴다 1606년 모스크바 총주교가 됐다. 그는 폴란드가 모스크바를 점령하자 국민해방군을 결성해 폴란드군을 쫓아내자는 국민봉기 서한을 낸다. 이를 계기로 포자르스키 공작과 푸줏간 주인 미닌이 이끄는 국민군이 폴란드군이 있는 크렘린을 포위하게 되었고, 이에 폴란드군은 크렘린에 가둬놓고 있던 게르모겐에게 국민군 해산을 촉구하는 성명서에 서명하라고 강요하지만 게르모겐은 끝내 거부했고 폴란드군은 그를 죽여 버린다. 1612년 폴란드군이 모스크바에서 쫓겨났음은 물론이다. 게르모겐은 순교하기 앞서 다음 러시아 차르(황제)로 로마노프 가문의 ‘미하일’을 천거했다. 그때부터 러시아혁명까지 300년 넘게 러시아를 통치한 로마노프 왕조가 출발하게 된다. 게로모겐의 국민적 영향력과 그에 대한 존경이 그만큼 컸다는 증거일 것이다.
▼ 공원을 둘러봤으니 이젠 ‘크렘린(Kremlin)’의 안으로 들어가 볼 차례이다. 출입구는 서쪽 성벽 중앙에 있는 ‘트로이츠카야 탑’이다. 높이가 80m로 스무 개의 성벽 탑 가운데 가장 높은데 15세기 말 이탈리아에서 초빙해 온 건축가 ‘알로이시오 다 밀라노’가 설계했다. 이후 여러 차례 이름을 바꿔 오다가 1658년 크렘린 안에 있는 성삼위 수도원 이름을 따 ‘트로이츠키야(트리니티)’라고 부르게 됐다고 전해진다. 첨탑 위에는 소비에트의 상징인 왕별 '루비 스타'가 올라서 있다. 이 탑 아래로 난 문이 해자를 건너 크렘린으로 들어가는 출입구 구실을 하고 있다. 참고로 크렘린(Kremlin)은 모스크바의 중심에 위치한 건축 예술의 기념비로서, 러시아의 심장이자 러시아의 위대함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배들이 운행하는 두 개의 강, 즉 모스크바 강과 녜글린나야강이 서로 만나는 지점인 보로비쯔끼 언덕에 위치하는데, 이곳은 모스크바에서 가장 역사 깊은 지역으로 11세기에 벌써 이곳에는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고 1147년에는 이 지역이 최초로 연대기에 기록된다. 크렘린은 수도인 모스크바가 성장해 감에 따라,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문화적 중심지로서 발전해 가게 된다. 17세기에 대폭적으로 진행된 건축 활동에 힘입어 크렘린은 형태가 변했는데, 바로 오늘날 우리가 보아 눈에 익은 그 모습을 띠게 된다.
▼ 크렘린 안에서 뒤돌아본 ‘트로이츠카야 탑’, 사진 왼편에 보이는 하얀색의 사각형 건물은 1961년에 지어진 콘서트홀이다. 음악회나 발레 등의 연주회가 자주 열린다고 하니 시간이 있을 경우에는 관람해볼 만도 하겠다. 물론 입장료를 물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이 콘서트홀은 ‘크렘린 대회궁전’으로도 불리니 참조한다.
▼ 콘서트홀의 맞은편에는 궁전 무기고(arsenal)가 있다. 하지만 관광객들의 관람은 허용되지 않는가 보다.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도 보이지 않을뿐더러 가이드 또한 그쪽에는 고개도 돌리지 않는다. 투어를 마치고 나올 때 건물주위에 진열해 놓은 대포에 대한 설명은 간단히 해주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입장료를 또 내고 들어가야 하는 무기고 및 다이아몬드 박물관과는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할 일이다. 궁금증을 떨치지 못하고 일단은 건물 가까이 다가가 본다. 제지하는 사람이 없는 걸로 보아 바깥으로 접근하는 것은 허용하고 있는가 보다. 병기고의 주위에는 엄청나게 많은 숫자의 대포들을 전시해놓고 있다. 러시아를 침공했던 나폴레옹군이 버리고 간 대포들이란다.
▼ 다음에 보이는 노란색 건물은 ‘원로원 건물’이다. 이등변 삼각형으로 된 건물로 1917년 혁명 이후 모스크바로 수도를 옮기면서 소비에트 연방 정부 건물로 사용되었는데, 레닌도 이곳에서 1918~1922년까지 통치를 했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이 건물을 대통령궁이라고도 하는데 어떤 게 맞는지는 모르겠다.
▼ 조금 더 걸어 들어가면 ‘소보르나야 광장’에 이른다. 광장의 끝머리 쪽에 위치한 황금색의 자잘한 돔이 가득한 건물은 ‘성모영보성당(Church of the Annunciation, 수태고지 교회)’이다. 이는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잉태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는다.‘는 뜻이다. 그 소식은 가브리엘 천사가 전해주었겠지만 그냥 ’수태고지(受胎告知)‘ 쯤으로 알아두고 넘어가자. 러시아인들은 이 성당을 ’블리고베시첸스키성당‘이라 부른다. 성모영보성당의 왼편에 보이는 건물은 ‘아르항겔리스키 성당’이다. ’블리고베시첸스키성당‘은 다른 교회에 비해 러시아 색채가 강하며 이콘화와 요한묵시록을 소재로 한 프레스코화로 유명하다. 참고로 블라고베시첸스키성당 뒤에 보이는 건물은 황제가 거주하던 ‘크렘린대궁전’이다. 이 궁전은 1812년 나폴레옹의 침공 때 소실된 후 1838~1849년 재건되었다. 700여 객실은 2만여 개의 촛대로 장식돼 있으며 가구·샹들리에·융단·회화·조각 등의 걸작이 전시되어 있어 파리 루브르박물관의 호화로움에 떨어지지 않는다. 1934년 개축 때에는 3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소련최고회의장(현 러시아국회의사당)과 중요한 방 몇 개가 만들어졌다. 그 방 중 가장 화려한 곳은 게오르기 훈장의 방이다.
▼ 크렘린을 상징하는 성당으로는 황금색 지붕이 인상적인 ‘우스펜스키(Cathedral of the Dormition) 대성당’을 꼽을 수 있다. 우리말로는 ‘성모 승천 대성당’으로 불리는데, 아치 모양으로 만들어진 입구 위쪽에 그려진 성화(聖畫)가 일품인 성당이다. 문의 맨 위에는 마리아가 아기예수님을 안고 있는 그림을 그려 넣었다. 1479년에 완공되었고, 1547년부터 러시아황제들의 대관식을 비롯한 국가의 주요 행사장으로 사용되어 오는 등 러시아 정교회를 이끄는 핵심적인 장소이다. 훗날 러시아의 수도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긴 뒤에도 황제의 대관식만큼은 이곳에서 거행되었다고 한다. 우스펜스키 대성당은 소박한 겉모습과는 달리 실내는 매우 아름다운 성화로 꾸며져 있다. 성당 안에는 성모 마리아와 예수, 12사도 등 성경 내용을 담은 성화로 가득하다.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러시아의 대표적인 종교 화가인 ‘디오니시’의 작품이란다.
▼ 크렘린에서 권력의 최고 상징은 2단으로 된 높이 81미터의 ‘이반대제(Ivan Veliki)의 종루(鐘樓)’이다. 1505년 건축이 시작되어 1508년 완공되었다. 당시 모스크바에는 이 종루보다 높은 건물이 없었는데 그것은 종루보다 더 높은 건물을 세울 수 없도록 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이 종루는 수차례 화재와 재난을 견뎠는데 1812년 나폴레옹의 침공 당시 프랑스군의 포격으로 인접한 건물 두 채가 무너졌을 때도 피해를 입지 않았단다. 참고로 영화 ‘러브 오브 시베리아’에서 사관생도들의 임직식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서 촬영되었다고 한다.
▼ 위에서 얘기했듯이 ’블리고베시첸스키 성당‘의 왼편에 보이는 성당은 역대 모스크바의 공후(公侯)와 러시아 황제들의 시신이 잠들어 있는 ’아르항겔리스키 성당(Church of the Archangel)’이다. 러시아 정교회를 수호한다고 전해지는 대천사 미카엘을 모신다고 해서 ‘천사장 교회(Church of the Archangel)’라고도 불리니 참조한다. 이탈리아 출신인 ‘알레비즈 주니어’가 설계한 건물로서 1505-1508년에 지어졌는데, 황금색 돔 하나를 가운데에 두고 은색 돔 네 개가 사방에서 감싸고 있는 형태의 지붕을 하고 있다. 그가 건설한 아르항겔스키 사원의 다섯 머리와 다섯 앱스는 우스펜스키 사원으로부터 유래했지만 사원의 내부 공간에 있어서는 오히려 러시아의 전통적인 정교 건물과 유사하단다. 그는 건축가라기보다는 장식가에 가까웠는데 알레비즈의 이러한 재능은 사원의 외벽장식에서 두드러지게 표현되었다.
▼ ‘이반 대제의 종탑’ 앞에는 거대한 종(鐘) 하나가 전시되어 있다. ‘황제(차르)의 종’이라 불리는 이 종은 1735년 ‘이반 모토린’과 ‘미하일’ 부자(父子)에 의해 만들어졌다. 무게는 약 200톤 정도이고, 종의 직경은 6.6m, 높이는 6.14m로 세계 최대의 종이다. 1836년 지금의 자리에 설치되었는데 아직까지 이 종의 소리를 들은 사람은 없다고 한다. 러시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촬영 장소 중 하나로 꼽히는 이유이다. 이 종은 주조할 당시 화재가 발생했는데 누군가가 불을 끄기 위해 물을 뿌리는 바람에 종에 금이 가서 일부분이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 그로부터 한 세기 뒤 당시의 참사를 되새기기 위해 종을 받침대 위에 얹어놓았다. 깨어진 구멍이 그대로 나 있는 채로 말이다.
▼ ‘12사도 사원’ 옆에도 ‘차르의 대포’라 불리는 볼거리가 하나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대포로 1586년 ‘안드레이 체호브이’에 의해 건조된 것이다. 청동으로 만든 이 대포의 무게는 약 40톤 정도이고 길이는 5.34m, 구경은 890㎜이다. 처음 대포는 스파스카야 망루 근처에 방어용으로 배치되었으나 18세기에 크렘린 안으로 옮겨졌다. 이 대포 역시 한 번도 발사된 적이 없다고 한다. 불운의 상징인 셈이다. 앞에 놓여 있는 포탄은 당연히 장식용이다.
▼ 공항으로 이동하기 전에 잠깐의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서 ‘참새언덕(Vorobyovy Gory)’에 들르기로 한다. 모스크바 강기슭에 있는 언덕인데 모스크바를 내려다볼 수 있는 뛰어난 전망대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참새 언덕(Vorobyovy Gory)은 소련 시절(1935년부터 1999년까지)엔 '레닌 언덕'이라고 이름이 바뀌어져 불러졌었다. 참고로 ‘보로비요비 고리(Vorobyovy Gory)’는 영어로 'Sparrow Hill(참새 언덕)'라고 번역된다. 러시아어로 '고리'는 원래 '산'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 산은 한국인 입장에서 산이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하기 짝이 없는 높이인데, 모스크바가 워낙 평평하다 보니 이 정도도 산이라고 불리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요즘은 아예 ‘언덕’으로 굳어졌다.
▼ 모스크바 강가에 위치한 참새언덕은 그 경치가 빼어나 예전부터 모스크바 시민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알렉산드르 1세는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을 격퇴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이곳에 대성당을 지으려고 했으나 지반이 불안정하여 무산됐다고 한다. 대신 그의 후계자인 니콜라이 1세가 크렘린 근처에 대성당을 짓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바로 구세주 대성당이란다.
▼ 언덕 위에 올라서면 모스크바 전경을 둘러볼 수 있다. 모스크바에서 높은 곳으로 꼽히긴 하지만 해발고도는 겨우 200m에 불과하다. 그러니 보이면 얼마나 보이겠는가. 그나마 이곳에서 담는 모스크바의 전경이 가장 뛰어나기에 사람들이 몰려올 것이다. 아무튼 언덕에서 사진을 찍으면 건너에 있는 루즈니키 경기장은 물론이고 모스크바의 높은 건물들이 카메라에 잘 들어온다.
▼ 시가지의 반대편에는 러시아는 물론 옛 공산권 최고의 대학인 ‘모스크바 국립대학교’가 위치하고 있다. 1755년 1월 25일 설립될 당시에는 붉은 광장에 있었다. 방사형 도시 모스크바의 심장부에 위치한 것만 봐도, 출범 당시부터 러시아를 대표하는 위상을 지녔었다는 것을 쉽게 눈치 챌 수 있다. 처음에는 철학, 법학, 의학 3개 학부만 있는 귀족 출신 위주의 학교였으나,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부터는 프롤레타리아와 농민 자녀에 대해서도 입학을 허가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을 거쳐 소련이 양대 초강대국으로 부상하면서 학교의 위상도 올라가, 당시 공산주의 국가들의 고위층 자녀들은 모스크바 국립대학교로 유학하는 것이 정석 코스로 굳어질 정도였다. 1990년 한소수교 이후에는 한국인 유학생도 상당히 많다고 한다. 다만 모든 과정이 러시아어로 진행되므로 유학 준비가 힘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 하룻밤을 머물렀던 ‘이즈말로브 알파호텔(IZMAYLOVO ALFA HOTEL)’, 전체적으로 시설이 깔끔할 뿐만 아니라 방도 널찍한 편이다. 욕실도 필요한 일회용품은 대부분 다 비치되어 있다. 특히 각층에 냉온정수기가 비치된 것은 최고의 장점이 아닐까 싶다. 너도나도 컵라면을 챙겨들고 나오는 것이 그 증거일 것이다. 아무튼 10일을 훌쩍 넘겨버리는 이번 여행에서 가장 뛰어난 서비스를 제공받았지 않나 싶다.
▼ 창문을 열면 모스크바 시가지가 한눈에 잘 들어온다. 끝없이 펼쳐지는 푸른 숲 너머로 고층빌딩들이 쏙쏙 솟아오른 모습이다. 하지만 산이라곤 일절 눈에 띄지 않는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이 모두이다. 러시아는 역시 광활한 평야지대이다. 우리에겐 낯선 풍경 그 자체이다.
♧ 에필로그(epilogue), 모스크바의 지도를 펼쳐보면 대략 3각 형태를 이루는 크렘린과 그곳 주변의 직4각형 모양의 키타이고로트 및 이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동심원들과 방사상으로 뻗어나가는 선들이 동심원들을 이루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모스크바 강이 시가지 사이를 북서-남서쪽으로 굽이쳐 흐른다. 이런 동심원과 방사상 구조는 이 시가 성장해온 역사적 단계를 나타내며 오늘날까지 뚜렷이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요새의 성벽들을 허물고 그 자리에 만든 불바르노에 환상도로와 사도보예 환상도로, 그리고 더 큰 원을 그리며 있는 모스크바 소(小)환상철도, 모스크바 환상도로 등은 이 시가 계속해서 확대되어왔음을 보여준다. 1960년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는 모스크바 순환도로가 이 시의 행정적 경계선을 이루었으나 그후로 도로 건너편에 있던 몇몇 대규모 그린벨트 지역이 이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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