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북부 유럽 여행
여행일 : ‘17. 6. 19(월) - 7.1(토)
여행지 : 러시아(모스크바, 페테르부르크), 에스토니아(탈린). 핀란드(헬싱키), 스웨덴(스톡홀름), 노르웨이(오슬로, 베이토스톨렌, 요정의 길, 게이랑에르 피오르드, 뵈이야 빙하, 베르겐, 하당에르 피오르드, 하당에르비다국립공원), 덴마크(코펜하겐)
일 정 : 6.23(금) : 헬싱키(원로원광장, 우스펜스키 사원, 암석교회, 시벨리우스 공원)
여행 넷째 날 : 북유럽의 흰 수도, 헬싱키(Helsinki)
특징 : ① 핀란드(Republic of Finland) : 헬싱키(Helsinki)에 수도를 두고 있으며, 서남쪽의 발트 해와 남쪽의 핀란드만(灣) 그리고 서쪽 보트니아만(灣) 등의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가 하면, 스웨덴과 노르웨이, 러시아와는 국경을 맞대고 있다. 핀란드인(국민은 2016년 통계로 5,498,211명이며, 이 가운데 93%가 핀란드인이고 스웨덴인이 6%)들은 스칸디나비아족과 발트 인종에 속한다. 2개의 공식 언어가 사용되는데, 대부분의 국민은 핀란드어를 쓰고 소수만이 스웨덴어를 사용한다. 국민 대부분은 복음주의 루터교(89%)에 속한다. 기원전 1500년경 현재의 핀란드 지역에 처음 정착한 핀족(우랄어족)은 12세기 초 스웨덴(에리크 9세)에 정복되어 스웨덴의 일부로 병합된 뒤 19세기 초까지 스웨덴의 지배를 받았다. 나폴레옹전쟁 후에는 러시아에 할양되어 러시아의 대공국으로 자치령이 되었으나, 그 뒤 ‘핀란드인의 핀란드’라는 민족적 자각운동이 싹트기 시작하여 러시아의 끈질긴 러시아화 정책에도 불구하고 1917년 12월 6일 의회 결의로 독립을 선언하였고, 1919년에는 헌법을 제정하였다. 독립 이후 두 차례에 걸친 러시아와의 전쟁(1939∼1944)에서 패하여 영토의 일부가 러시아에 할양되고 많은 액수의 배상금을 지불하였다. 1948년 소련의 제의로 체결된 핀·소우호협력상호원조조약에 따라 핀란드의 중립외교정책이 확인되었고, 양국의 기본관계가 정립되어 오늘에 이른다. 소련 붕괴 후 서방 진영에 접근하여, 1994년에는 EU 가입에 합의하고, 2000년에는 유로를 도입했다. 남북한 동시 수교국으로 우리나라와는 1973년 8월에 외교관계가 수립되었다. 남북한 동시수교국으로 1973년 주핀란드 한국 상주공관, 1977년 9월 주한 핀란드 상무관실 개설에 이어 1978년 11월에는 대사관으로 승격되었다. 한국과 핀란드 사이에는 사증면제협정(1974. 3)과 이중과세방지협정(1979. 2), 경제기술협력협정(1979. 9) 등이 체결되어 있다.
② 헬싱키(Helsinki) : 핀란드의 수도이며 육지의 남쪽 끝에 위치한 해항(海港)이자 핀란드의 산업 중심지이다.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유럽 각국의 수도 가운데 가장 북쪽에 있다. 헬싱키는 1550년 스웨덴의 구스타프 바사 왕이 세웠다. 핀란드 만 반대편에 있는 레발(지금의 에스토니아 공화국에 있는 탈린)과 경쟁하기 위해서이다. 이후 잡다한 사건들을 겪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헬싱키는 발트 해 연안의 번영하는 무역 도시들과 경쟁 상대가 되지 못한 소규모의 해안 도시에 불과했다. 1748년 헬싱키 항구 외곽에 요새(要塞)가 건설되어 위상이 조금 높아지기는 했지만 1809년 스웨덴이 핀란드 전쟁에서 러시아에 패해 핀란드가 러시아령 자치 대공국이 된 후에야 헬싱키의 본격적인 발전이 시작되었다. 1812년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스웨덴의 영향을 줄이기 위해 핀란드의 수도를 투르쿠에서 헬싱키로 옮겼다. 1827년에는 핀란드 내 유일한 대학이었던 투르쿠의 오보 왕립 아카데미(Åbo Kungliga Akademi, 헬싱키대학의 전신)도 헬싱키로 이전되었다. 새로이 핀란드의 수도가 된 헬싱키는 그 후 수십 년간 놀라운 성장과 개발을 거듭하여 20세기에 독립국의 수도가 되는 기반을 갖추었다. 헬싱키의 변화는 도심의 건축을 통해 잘 살필 수 있는데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흉내 낸 신고전주의 건축 양식은 이때로부터 유래되었다. 또한 철도의 건설과 산업화는 헬싱키의 성장에 큰 기여를 하였다.
▼ 항구에 기다리고 있는 버스는 우릴 태우더니 헬싱키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원로원광장(핀란드어: Senaatintori 세나틴토리)’에다 옮겨 놓는다. 19세기 초 투르쿠(Turku)에서 헬싱키로 수도를 이전하면서 조성되었는데, 헬싱키를 내려다보는 상징적인 존재로 자리 잡았다. 다른 한편으론 헬싱키 관광의 시작점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정사각형으로 만들어진 광장은 일단 엄청나게 넓다. 광장의 바닥에는 무려 40만 개나 되는 화강암 포석(鋪石)을 깔아 놓았다. 그리고 한가운데에다 ‘알렉산드로 2세’의 동상(銅像)을 배치하고 그 주위를 헬싱키 대성당과 정부 청사 등이 둘러싸게끔 만들었다. 남쪽의 길 건너에는 상가가 들어앉았다. 아무튼 이 건물들은 대부분 19세기에 지어졌다. 고풍스러운 멋이 넘치는 이유일 것이다.
▼ 광장의 정면에는 눈이 부실정도 새하얀 ‘헬싱키 성당(Tuomiokirkko)’이 자리 잡고 있다. ‘루터란 대성당(Lutheran Cathedral)’으로도 불리니 기억해 두자. 설계는 건축가 ‘카를 루빙 엥겔(Carl Ludvig Engel)’가 맡았다. 1830년에 착공해 1852년에 완공되었는데, 예전에는 ‘성니콜라스(St. Nicholas)교회’ 또는 단순히 '큰 교회'라고 불렸다. 네오클래식((neoclassic, 신고전주의) 양식의 웅장한 건물과 푸른색 돔이 눈에 띄고, 햇빛이 밝은 날에는 눈부실 정도로 빛나는 상아색 외벽이 인상적이다. 중앙 돔은 네 측면 어디에서도 보이며, 아연으로 만들어진 지붕 위에는 예수의 12제자의 동상이 있다. 처음에는 중앙의 돔만 있었으나, 후에 네 귀퉁이의 돔이 보완되었는데, 이 건물은 바다에서 바라볼 때가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오늘날 핀란드 인구의 85%인 4백 40만 명이 루터파(Lutheranism) 교회의 신자로 등록되어 있는 만큼, 이곳에서는 각종 국가적인 종교행사가 거행되며 전시회, 파이프오르간 연주회 등 대학과 시민들의 문화공간으로서의 역할도 겸한다. 아무튼 성당의 새하얀 벽면이 푸른 하늘과 어우러져 유난히 도드라져 보인다. 지을 때부터 밝은 녹색 돔과 흰색의 주랑이 청명한 하늘과 완벽한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설계되었고 전해진다.
▼ 안으로 들면 회중석과 제단(祭壇)이 눈에 들어온다. 가톨릭 성당과 비슷한 것 같지만 꾸밈이 거의 없는 정갈한 모습이다. 이따가 ‘암석교회’를 설명하면서 거론이 되겠지만 소박함을 중요시하는 ‘루터교’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제단의 뒤편에는 성화가 걸려있다. 러시아 출신의 화가인 ‘폰 베프’가 그린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라고 하는데,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가 선물했다고 전해진다.
▼ 광장의 한가운데에 있는 동상(銅像)의 주인공은 러시아 황제이자 ‘핀란드 대공’이었던 ‘알렉산드르 2세(1855~1881)’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 투어를 안내할 때 ’그리스도 부활 교회(Church of the Savior on Spilled Blood)‘와 인연이 있다고 설명한바 있는, 급진 혁명조직인 아나키스트(anarchist)의 폭탄 테러에 의해 살해(1881) 당한 그 개혁주의 황제 말이다. 그가 피 흘린 자리에 세웠다고 해서 ’피의 사원‘이라는 별칭이 붙게 되었음도 다시 한 번 기억해 두자. 하나 더, 그가 행한 가장 큰 치적이 ’농노(農奴)의 해방‘이라는 점도 함께 기억해 보자.
▼ 알렉산드르 2세가 죽고 3년이 지난 1894년에 핀란드 최고 조각가 ’타나켄‘과 ’루넨베르그‘를 동원해 그의 동상을 세운 것은 핀란드 의회의 자발적인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왜 하필이면 지배자의 동상을 세웠을까가 궁금할 것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광화문 앞 서울광장에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 동상이 서있는 거나 마찬가지이니 말이다.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다. 알렉산드르 2세가 핀란드 의회를 재건시키고 핀란드에 더 많은 자치권을 줬기 때문이란다. 핀란드 사람들이 그를 얼마나 좋아했는지는 그의 생일에 맞춰 동상을 제막하면서 그 날을 공휴일로 삼았던 데서도 잘 드러난다. 하지만 러시아의 굴레를 벗어나면서 한때 철거문제가 대두되기도 했다. 러시아와의 전쟁 및 2차 세계대전 때의 구국 영웅이었던 ’만네르하임(Friherre Carl Gustaf Emil Mannerheim, 1867-1951)‘으로 바꾸자는 구체적 제안까지 나왔었다고 한다. 하지만 ’알렉산드르 2세‘는 아직까지도 제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다. 표면적으로 내세운 이유는 ’교육목적‘이라지만 내 생각에는 러시아라는 강대국의 옆에 위치한 지정학적(地政學的) 요인이 작용했지 않나 싶다. 명목보다는 실리를 취한 것이다. 이런 눈치작전은 소련과 조약(1948)을 맺고 소련의 적대국인 서방에 군사기지로 자국의 영토를 빌려주지 않는다는 약속까지 하게 된다. 그 대가로 정치적 자율성을 얻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런 약소국의 생존법을 일러, ’핀란드화(Finlandization)’라고도 하니 참조해두자. 아래 사진은 다른 분의 사진을 빌려다 썼다. 바로 위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내가 촬영한 사진들이 엉망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새로 산지 얼마 되지 않은 카메라를 들고 여행을 떠나온 탓에 노출 조정을 잘못했던 모양이다.
▼ 광장의 동쪽, 그러니까 오른편에는 원로원(元老院)이 있다. 위에서 헬싱키를 설명하면서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드르 1세’가 투르크에 있던 수도를 이곳으로 옮겼다고 했었다. 계몽정책을 펴던 그는 ‘핀란드공국’에 자치권을 후하게 주면서 독자적으로 의회와 행정부를 구성 운영할 수 있는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를 허용한다. 여기서 '군주(君主)'란 ‘핀란드 대공(大公)’, 즉 러시아의 황제가 됨은 물론이다. 최종 결정은 자기가 하겠다는 심산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대공국 초기까지 서부 투르크에 있던 수도는 1812년에 헬싱키로 옮겨졌다. 당시에 광장을 조성하면서 함께 들여놓은 것이 바로 ‘국가 평의회(원로원)’이다. 이 건물의 이름이 자연스럽게 광장의 이름으로 굳어졌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현재 이 건물은 총리실을 비롯한 정부 청사로 쓰고 있다. 아래사진도 빌려온 사진이다. 이분의 것은 다른 곳에서도 여러 장 사용되었다. 거기다 이분의 글은 내가 글을 쓰는데 많은 도움까지 줬다. 이 자리를 빌어 미안하면서도 고맙다는 인사를 드려본다.
▼ 원로원의 맞은편, 그러니까 광장의 서쪽(왼편)엔 핀란드 최고 명문대인 ‘국립 헬싱키대’의 본관이 자리 잡았다. 국립대 역시 옛 수도 투르크에 있었다가 화재로 불탄 뒤 1832년 이곳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 원로원광장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면 나면 한 시간 정도의 자유시간이 주어진다. 헬싱키 성당의 안을 기웃거리거나, 그렇지 않으면 광장의 근처를 거닐어도 좋다고 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5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마켓광장(Market Square)을 빼먹으면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것이라는 가이드이 설명이다. 그러니 안 가볼 수도 없다. 항구로 이어지는 길은 고풍스런 옛 건물들이 줄줄이 늘어선 멋진 길이다. 거기다 깨끗하기까지 하다. 배에서 내려 원로원광장으로 오는 길에 느꼈던 헬싱키의 첫 인상과 같다고 보면 되겠다. '정갈하고 깨끗하다'란 느낌말이다. 잘 닦여 있는 자전거 도로, 쓰레기가 안 보이는 길가, 규격에 맞춰서 반듯하게 올려져있는 집들이 어느 것 하나 허술함이 없어 보인다. 헬싱키 중심부의 많은 건물들이 ‘카를 루빙 엥겔(Carl Ludvig Engel)’의 영향을 받았다고 들었는데, 지금 보고 있는 건물들도 그중 일부분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다면 이 도시의 대표적인 자랑거리인 ‘디자인’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고 말이다. 이곳 헬싱키는 2012년 '세계디자인의 수도'로 선정된바 있기에 연관시켜 보았다. 아무튼 국내에서도 사랑받는 디자인 브랜드인 아르텍과 마리메꼬, 이딸라 등이 모두 여기에 자리 잡고 있다.
▼ 두어 블록 정도를 걷자 항구의 선착장이 나타난다. 싱싱하고 값싼 생선이 많다고 해서 ‘피쉬마켓(FishMarket)’으로 불리기도 하는 ‘마켓광장(Market Square, 핀란드어로는 Kauppatori)’이다.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너른 광장에는 싱싱한 해산물은 물론이고 꽃가게와 과일가게, 그리고 기념품으로 선물하기 좋은 수공예품 등 다양한 물건들을 팔고 있다. 하지만 손님들은 그다지 많아 보이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이제 겨우 10시를 조금 더 넘겼을 따름이다. 6시 30분에 장이 열렸으나 점심시간까지는 시간이 조금 더 남았다. 아직은 손님들이 몰려올 시간이 아닌 것이다.
▼ 헬싱키는 발트해를 품고 있는 항구도시다. 그래선지 주택으로 치면 앞마당이라 할 수 있는 바다에 집채만 한 크루즈로부터 유람선과 바지선, 그리고 돛단배까지 다양한 크기와 종류의 배가 구불구불한 해안선을 따라 정박해 있다.
▼ ‘헬싱키 시민의 부엌’이라는 마켓광장은 헬싱키 서민들의 일상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항구에 위치한 이곳은 현지인들이 많이 이용하는 곳이다. 발트해에서 갓 잡은 신선하고 값싼 해산물은 물론이고, 싱싱한 채소와 과일 등 서민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품목들이 매일 거래되기 때문이다. 특히 레스토랑과 노천카페가 많아 간단하게 배를 채우려는 사람들로 항상 북적이면서 만들어내는 왁자지껄한 소란스러움이 시장 특유의 생동감을 더해 준다.
▼ 광장마켓의 주요 품목은 뭐니 뭐니 해도 신선하고 값싼 해산물과 채소, 과일 등 서민들의 먹거리이다. 다음으로는 꽃집이 많아 보인다. 헬싱키 시민들이 꽃을 좋아한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 외에도 수공예 모직물이나 각종 액세서리, 핀란드 토산품 등도 눈에 띈다. 아무튼 구경하는 재미가 꽤 쏠쏠하다. 여기서 가이드가 귀띔해주는 정보 하나.. 해질 무렵이면 아름다운 석양을 감상하며 식사를 할 수 있는데, 그 분위기를 못 잊어 많은 시민들이 자주 이용한단다.
▼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한국에서 자주 보던 포장마차를 닮은 노천식당이다. ‘유럽식 포장마차촌’이라고 보면 되겠다. 아무튼 국내외를 막론하고 먹거리촌의 풍경은 비슷한가 보다. 하긴 먹고사는 게 어디 다를 필요가 있겠는가. 언젠가 국내의 모 축제장에서 만났던 노신사의 넋두리가 생각난다. 뭔가 볼만한 게 있을까 해서 물어물어 찾아왔는데 구경거리는 하나도 없고 맨 포장마차만 늘어서 있더라는 불만 섞인 목소리였다. 이곳도 역시 꽤 많은 포장마차들이 널찍하게 포진하고 있다. 가장 시끌벅적한 곳 역시 포장마차이다. 그 이유는 가이드의 귀띔으로 알 수가 있었다. 물가 비싸기로 유명한 북유럽에서 부담 없는 가격에 즉석요리를 맛볼 수 있는 곳이라서 여행객들뿐만 아니라 현지 주민들도 자주 찾는다는 것이다.
▼ 이곳 핀란드 사람들이 가장 즐겨먹는 음식 중 하나는 ‘연어구이’이다. 그리고 이곳 마켓광장은 그 연어구이를 가장 싸게 먹을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물가 비싼 헬싱키에서 10유로만 내면 풍요로운 만찬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포장마차를 이용해야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내가 들여다본 포장마차의 안에는 늘씬하면서도 아름다운 금발의 처녀들이 줄무늬 상의에 분홍색 앞치마를 둘러 멘 채로 손님을 맞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민이 시작된다. 아침식사를 배불리 한 탓에 아직까지도 배가 꺼지지 않았으니 어쩌란 말인가. 인기 메뉴 중의 하나인 ‘연어구이와 볶은 감자, 야채(FRIED SALMON WITH POTATOES & VEGETABLES)’ 등이 푸짐하게 함께 나오는 플레이트(plate)를 고르더라고 10유로면 충분할 텐데 말이다.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어제 저녁에 맛봤던 ‘훈제연어’로 만족하기로 하며 발길을 돌린다.
▼ 광장의 한가운데에 이집트의 오벨리스크(obelisk)처럼 생긴 조형물이 하나 세워져 있다. ‘황후의 오벨리스크’ 또는 ‘황후의 돌’이라 불리는 기념탑인데, 아까 원로원광장에서 보았던 ‘알렉산드르 2세’의 동상과 같은 맥락으로 보면 되겠다. 그 증거는 꼭대기에 올라앉은 ‘쌍독리상’이다.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문장이기 때문이다. 독립이 되고 나서도 허물지 않은 이유는 아까 원로원광장에서 거론했었기에 여기서는 생략하겠다. 아무튼 이 조형물은 러시아의 지배하에 있던 ‘핀란드 공국’ 시절(1833) ‘니콜라이 1세’ 황제 부부가 이곳 헬싱키를 방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그들이 배에서 내려섰던 곳에다 세웠다고 전해진다. 헬싱키대성당을 설계했던 ‘카를 루드비히 엥겔’의 작품이란다.
▼ 광장을 돌아다니다 보면 원로원광장이 있는 방향을 북(北)으로 높고 볼 때, 북동쪽 방향에 멋지게 지어진 건물 하나가 또렷이 나타난다. ‘우스펜스키사원(Uspenski Cathedra)’이다. 마켓광장과 거의 맞닿을 정도로 가깝지만 가보는 것을 사양하고 원로원광장으로 되돌아나간다. 가이드의 인솔 하에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다음 방문지는 ‘우스펜스키사원’이다.
▼ 예정대로 아까 마켓광장에서 건너다보였던 우스펜스키 교회(Uspenski Cathedral)로 간다. 이 건축물은 암반(巖盤)으로 이루어진 작은 언덕 위에 지어졌다. 항구에서 쉽게 눈에 띄었던 이유일 것이다. 하늘로 솟아오른 13개의 첨탑은 그리스도와 12제자를 의미하는 조형물이란다. 핀란드 국민의 대부분(85%)은 루터교 신자이다. 반면에 러시아정교회의 신자는 극히 소수이다. 그런데도 성당 건물은 거대하면서도 화려하기 짝이 없다. 러시아의 오랜 지배가 만들어낸 흔적들이 어디 그렇게 만만하겠는가.
▼ 핀란드가 러시아의 지배 아래 있던 1868년, 성모승천을 기념하여 비잔틴 슬라브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정교회 성당이라고 한다. 러시아의 건축가 ‘알렉세이 고르노스타예프(Aleksei Gornostaev)’가 동방 정교회의 전통에 따라 설계했는데, 빨간 벽돌이 외벽을 이루고 있고 핀란드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독특한 양식의 돔 지붕이 인상적이다. 성당을 지을 때 건축 자재는 물론 실내장식까지 러시아에서 실어 날랐다고 전해진다.
▼ 성당 내부도 화려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천정이 높아 탁 트이다보니 전면 또한 넓을 수밖에 없다. 그 넓은 공간은 다양한 아이콘으로 장식되어 있다. 그리스도와 열두 사도들을 나타내고 있다는데 이 역시 화려하면서도 웅장하다.
▼ 성당에서의 조망(眺望)은 뛰어나다.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지리적 요건 덕분이다. 북동쪽으로는 크고 작은 배들이 정박해 있는 항구의 너머로 높고 낮은 굴뚝들이 솟아올랐다. 공업지역이 위치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참고로 헬싱키의 주요산업은 식품과 금속가공, 인쇄, 섬유, 의류 등이다. 베르트실레 조선소와 유럽에서 규모가 가장 큰 아라비아 도자기류 공장은 국제적으로 유명하다.
▼ 대통령궁도 시야(視野)에 잡힌다. 대통령이 사는 관저는 세우라사리섬(Seurasaari Island) 근처에 있고, 저곳은 대통령이 국정을 보는 집무실이다. 5km쯤 떨어진 관저에서 출퇴근한다고 보면 되겠다. 애초(1814)에는 부유한 상인의 집으로 지어졌다가 1837년 러시아 황제가 겸하는 핀란드 대공의 궁(宮)으로 삼았고 1917년 독립 후 대통령궁이 되었다. 아무튼 멀리서 보기에는 소박한 외형을 지녔다. 핀란드 사람들의 국민성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이곳 핀란드는 세계에서 가장 정치적 부패가 적은 나라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기 때문이다. 2008년 민간 활동 단체인 ’국제 투명성 기구‘에서 시행한 ’정치부패 인식지수 조사‘에서 2004년까지 1위를 지키다가 2009년에는 6위로 떨어졌지만 누가 뭐라 해도 부패가 적은 나라임에는 틀림이 없다.
▼ ‘북유럽의 흰 수도’ 또는 ‘발트해의 아가씨’라는 애칭으로도 불리는 시가지도 한눈에 잘 들어온다. 내가 느낀 핀란드는 ‘파란 나라’이다. 파랑은 하늘과 바다를 떠올리게 해 평화롭고 여유롭다. 이 나라의 국기처럼 하얗고 파란 나라. 그래서인지 이 나라 사람들의 표정은 밝아 보였다. 삶에 여유가 있는 나라. 잔잔하고 여유로운 삶이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영화 ‘카모메 식당(Kamome Diner, 일본 제작)’의 배경지가 되기에 충분한 나라이다. 인상 좋은 이 도시와 한국의 첫 인연은 ‘스포츠’가 아니었을까 싶다. 1952년, 당시 한국전쟁이 한창인 데도 불구하고 이곳 헬싱키에서 개최된 ‘하계올림픽’에 한국선수단(6개 종목에 21명)이 출전했었기 때문이다. 결과는 비록 동메달 2개(복싱의 강준호와 역도의 김성집)를 얻는데 그쳤지만 ‘한국선수단’은 핀란드 대통령으로부터 최고 체육문화상을 받는 등 각국의 선수단들로부터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지난 대회에 이어 또 다시 메달을 딴 김성집의 일화(逸話)는 빼앗긴 나라에서 태어난 스포츠맨의 애환이 절절이 묻어난다. 그는 1937년에 이미 세계 신기록을 기록했었기 때문이다. 일본 역도연맹이 조선 선수들의 전력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자 올림픽에 역도를 출전시키지 않는 바람에 김성집은 올림픽에 나갈 수조차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해방 후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나가 한국인 최초의 메달리스트가 되었으니 영광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이미 전성기를 훌쩍 넘겨버린 탓에 동메달에 그쳤지만 말이다. 은퇴 후 김성집은 체육계에 몸담아 태릉선수촌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2016년 2월 20일 타계하였다.
▼ 세 번째 방문지는 핀란드를 찾아온 관광객들이 빼놓지 않고 찾아본다는 ‘암석교회’이다. 기존의 교회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암석 교회인데 교회 내부는 천연 암석의 특성을 살린 독특한 디자인으로 구성돼 있다. 암석 사이로 물이 흐르고 파이프 오르간이 이색적이다. 자연의 음향효과를 충분히 고려해 디자인 돼 음악회장으로도 자주 이용된다고 한다. 기독교 신자가 꼭 아니더라도 그 자체로 교회가 참 예쁘기 때문에 들릴 만한 곳이다. 교회는 마치 땅속에서 솟은 듯 보이기도 하며, 아주 오래전부터 그곳에 서 있었던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팸플릿(pamphlet)에 의하면 외형(外形)을 이루는 암석 벽은 극한의 기후와 화염포로 인한 타격으로부터 교회를 보존하기 위해 고안된 것으로, 오래된 핀란드의 숲을 연상시킨다고 한다.
▼ 이곳은 암석(巖石)을 쪼아서 만든 공간에 유리로 자연광이 비출 수 있게 설계되었다. 원래의 이름이 ‘템펠리아우키오 교회(Temppeliaukio Church)’인데도 ‘암석교회’로 더 잘 알려진 이유이다. 건축가 겸 가구 디자이너인 ‘티모(Timo)’와 ‘투오모 수오말라이넨 (Tuomo Suomalainen)’ 형제가 맡아서 1960년대에 완성했다고 한다. 원형으로 된 유리지붕을 통해 교회당 안으로 빛이 스며든다. 주변의 자연물과 빛이 음악과 마찬가지로 예배당 안에 들어온 이들이 종교적 의식에 더욱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 유리로 된 돔(dome) 너머로 파란 하늘이 나타난다. 하얀 구름 한 조각이 흡사 돛단배라도 되는 양 그 위를 돛단배처럼 유유히 떠다니고 있다. 갑자기 한줄기 빛 조각이 교회 안으로 스며든다. 암석으로 둘러진 공간을 비추는 태양빛이 자못 경건함을 자아낸다. 건물 내부는 천연 암석의 느낌을 그대로 살린 것이 특징이다. 깎아낸 바위들을 다시 쌓아 놓아 방음과 외부 충격을 줄이는 차단 효과도 뛰어나다고 한다. 천장과 외벽 사이 원형으로 창을 만들어 최대한 자연광이 들어오도록 설계됐으며, 천장 중앙 부분은 음향효과를 높이기 위해 약 3만m의 구리선을 돔 모양으로 둥글게 엮어서 만들었다. 조명효과와 음향효과가 뛰어나 많은 건축가의 모델이 되고 있단다.
▼ 위에서도 얘기했듯이 교회는 소박함 그 자체이다. 루터교(Lutheranism)의 우상(偶像)에 대한 거부와 검소한 절제가 건축에까지 이어졌음이리라. 그동안 보아오던 교회들은 하나같이 크고 화려함을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높고 웅장한 천장과 색색의 스테인드글라스, 그리고 화려한 조각상 등 다른 교회에서 흔히 보아오던 장식물들은 일절 찾아볼 수 없다. 소박한 나무의자와 작은 오르간, 단상이 전부인데, 난쟁이들이 파낸 것 같은 거친 바위벽은 마치 태초부터 존재하던 장소인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헬싱키 최고의 명소로 꼽히는 이유일 것이다. 참고로 개신교가 주류인 국가들의 교회는 가톨릭의 성당에 비해서 규모나 장식적인 면에서 검소한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점은 훗날 현대건축의 시발점이 된 모더니즘 건축에서 장식이 사라지는데 영향을 끼친 요소 중 하나가 되었다.
▼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시벨리우스공원(Sibelius Park)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핀란드가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 ’장 시벨리우스(Jean Sibelius, 1865-1957)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원이다. 시벨리우스는 조국 핀란드에 대한 사랑과 민족의식 고취를 주제로 한 곡들을 작곡해 핀란드인들에게는 더욱 의미가 깊은 작곡가이다. 특히 1899년에 작곡한 ‘핀란디아’는 러시아 지배를 받던 핀란드인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한 작품으로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참고로 시벨리우스는 핀란드인들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사람들 가운데 한명이다. 그가 사랑받는 이유는 핀란드에 대한 사랑과 민족의식에 관한 주제가 담긴 음악(핀란디아, 칼레발라, 투오넬라의 백조 등)을 작곡하여 핀란드인들의 가슴 깊은 곳까지 울려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러시아는 그들이 지배할 당시 시벨리우스의 음악을 연주하지 못하도록 하였단다.
▼ 공원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24톤의 강철로 만든 ‘파이프 오르간’ 모양의 시벨리우스 기념비와 그 옆의 시벨리우스 두상이다. 핀란드의 대표적인 여류 조각가 ‘엘라 힐투넨(Eila Hiltunen)’이 1967년 시벨리우스 사후 10주년을 기념해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이 가운데 은빛으로 빛나는 600개의 강철 파이프는 물결 모양으로 세움으로써, 마치 시벨리우스의 음악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은 효과를 내고 있다. 파이프오르간이 시벨리우스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몰라도 높이 8.5m에 전면 너비 10.5m, 그리고 측면 너비가 6.5m인 이 기념비와 시벨리우스 두상은 공원의 상징물이자 헬싱키를 대표하는 명물이 되었다.
▼ 이 공원의 특징은 자유분방함이라고 해도 좋겠다. 다른 곳들과는 달리 조형물들을 자유롭게 만질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 좌대인 암반 위에 올라가 사진을 찍는 것은 기본, 만져보거나 심지어 어떤 사람은 두들겨 보기도 한다. 핀란드 사람들에게는 듯 깊은 조형물이 분명할진데 두들기는 짓까지는 그만두었으면 좋겠다. 참고로 이 조형물은 파이프의 중앙이 포토죤(photo zone)이다. 한가운데에 앉아 하늘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댈 경우 예쁜 사진이 나오기 때문이다. 카메라의 노출 조정을 제대로 하지 못한 난 쓸만한 사진을 한 장도 건지지 못했지만 말이다.
▼ 그 오른편 자연암반을 축대처럼 깎아놓은 위에 시벨리우스의 두상이 있다. 스웨덴계 핀란드인 가정에서 태어난 시벨리우스는 러시아 통치하에서 핀란드어로 가르치는 최초의 학교였던 핀란드 교원양성학교에서 공부했다. 이때 핀란드의 문학, 특히 그에게 있어 지속적인 영감의 근원이 되었던 핀란드의 신화적인 서사시 ‘칼레발라(Kalevala)’를 접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포횰라의 딸(Pohjola's Daughter)’과 ‘루온노타르(Luonnotar)’ 등을 포함한 그의 많은 교향시들이 이 서사시에서 비롯되었단다. 법률가가 되려 했던 원래의 목표를 바꾼 그는 음악에만 전념하게 된다. 20대 중반에 핀란드를 떠나 베를린과 빈에서 계속 공부했으며, 그곳에서 작곡가인 ‘로베르트 푹스’와 ‘카를 골트마르크’로부터 사사(師事)받았다. 핀란드로 돌아오자마자 발표한 그의 최초의 대규모 관현악 작품 ‘쿨레르보 교향곡 Kullervo Symphony(1892)’은 큰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이 작품과 그 뒤를 잇는 작품들인 ‘엔 사가(En Saga)’와 ‘카렐리아(Karelia) 등으로 그는 핀란드의 대표적인 작곡가로 부상한다. 핀란드 의회는 이런 시벨리우스의 재능을 인정하여 그에게 연금을 지급하도록 의결(1897)했다. 이후 그는 창작에만 전념하다 92세에 생을 마쳤다고 한다.
▼ 공원은 바닷가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바다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내륙으로 들어앉은 데다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 바다가라기 보다는 오히려 내륙 깊숙한 곳에 위치한 호수 같다는 느낌이 더 강하다. 그 덕분인지 기념 조형물들과 자연경관이 함께 잘 어우러지며 멋진 경관을 만들어내고 있다. 좋은 공기를 마시며 산책하기에 딱 좋은 곳이라는 얘기이다. 마침 바닷가에 오두막집처럼 생긴 카페까지 들어서 있다. 120년이나 묵었다는 ’레가타‘라는 카페인데, 실내 식탁이 넷밖에 안 되는 작은 카페에 불과하지만 골동품 식기와 악기, 그림들을 가득 채워 분위기를 한껏 돋아놓았다. 2014년 헬싱키 최고의 커피숍으로 선정되기까지 했다니 한번쯤 꼭 들러볼 일이다. 향이 가득한 커피와 함께 금방 구워낸 계피빵 한 조각 입에 문다면 분위기는 한껏 고조될 게 분명하다. 참! 카페의 화장실은 공짜이니 그냥 지나치지 말자, 대신 커피 한 잔 쯤은 팔아주는 매너도 잊지 말고 기억해 두자.
▼ 조형물의 바로 앞에는 아이스크림 가게도 보인다. 아이스크림 마니아에 가까운 집사람이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리가 없다. 냉큼 하나 주워들고 본다. 계산은 물론 그녀의 뒤만 졸졸 따라다니는 내 몫이다. 그렇다고 귀찮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즐겁다. 거스름돈을 내주는 금발의 미녀에게 홀딱 반한 게 원인일 수도 있겠다.
▼ 헬싱키의 투어가 끝나면 또 다시 2시간 넘게 걸리는 긴 여정이 시작된다. 우리를 코펜하겐으로 실어다줄 크루즈선박이 헬싱키에서 북서쪽으로 160㎞ 정도 떨어진 해안도시 투르쿠항에 정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1812년까지 핀란드의 수도였던 이곳은 한때는 스웨덴의 통치를 받았던 탓에 스웨덴어를 모국어로 쓰는 인구도 많으며 스웨덴식 이름인 ‘오보’로도 불린다. 중세의 성(城)과 대성당 등이 도시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아우라 강‘과 함께 어우러지는 전형적인 유럽의 모습을 마주할 수 있다지만 이를 둘러볼 시간은 없었다. 배의 출항시간에 맞춰 항구에 도착하게끔 일정이 짜져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북유럽은 육로로 여행하는 것도 좋지만 각 나라 사이를 ‘크루즈(cruise)’를 이용해 다니는 것이 더욱 편하고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 특히 크루즈는 자면서 이동하므로 숙박과 이동 두 가지를 하나로 해결 할 수 있는 장점이 있어 여기저기 부지런히 다녀야 하는 북유럽 여행에는 더할 나위 없는 수단이 된다. 여행의 간결함이 생명인 패키지여행에서 이를 놓쳤을 리가 없다. 이곳 ‘투르크(핀란드)’에서 스웨덴의 ‘스톡홀름’까지 구간에 ‘탈링크 실자 라인 크루즈(Tallink Silja Line)’를 포함시켰다. 오늘 저녁에 이 배에 오르면 내일 아침이나 되어야 스톡홀름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 투르쿠에서 스톡홀름으로 가는 크루즈는 ‘바이킹라인(Viking Line)’과 ‘실자라인(Silja Line)이 있다. 이중 실자라인을 탈 경우, 20:55분에 출발하여 다음날 아침 6:30분에 스톡홀름에 도착한다. 참고로 헬싱키에서 출발할 수도 있다. 다만 17:30분에 출발해서 다음날 10시에 스톡홀름에 도착하게 되므로 일정관리에 약간의 차질이 발생할 수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우리를 태우고 갈 배는 ’발틱 프린세스(Baltic Princess)호‘, 배의 길이 212m에 넓이는29m, 10층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927개의 객실을 운영하고 있다. 승객 2,800명과 차량 420대를 싣고 22노트의 속력으로 달린단다. 배를 타기 위해서는 개찰구를 지나야 한다. 전철을 타듯이 탑승권을 대면 문이 열린다. 줄을 서서 승무원으로부터 뭔가 설명을 듣고 나면 드디어 입장이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객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가 나온다. 참 배를 타기 전 선사(船社)에서 나누어주는 팸플릿(pamphlet)을 챙기는 것을 잊지 말자. 마침 한글로 만들어진 것도 있으니 선내에 머무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팸플릿으로도 어렵다면 승무원을 찾으면 된다. 승무원 중에 우리 동포가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만큼 이곳을 찾는 한국인들이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아무튼 배 안에는 레스토랑과 바는 물론이고 사우나와 면세점, 기념품가게 등 각종 편의시설들을 갖추고 있다. 참! 와이파이는 6층과 7층의 데크에서만 터지니 참조하자.
▼ 저녁 아홉 시가 되었는데도 밖은 환하기만 하다. 시간에 맞춰 우리 부부는 선실(船室)을 빠져나간다. 북해바다의 자랑거리로 알려진 일몰(日沒)을 보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구름이 두텁게 낀 하늘은 그런 행운을 주지 않는다. 내일 아침의 일출(日出)을 기대하며 선실로 되돌아간다. 하지만 일출마저도 나와의 만남을 거절해버린다. 새벽 3시에 나가봤지만 이번에는 아예 구름까지 잔뜩 끼어버렸다.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이번 여행에서 본 다른 아름다운 풍경들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행복의 근원은 만족할 줄 아는데 있다’고 했다. 오늘만이라도 그 만족을 지켜보기로 한다. 아! 행복하다.
♧ 에필로그(epilogue), 보통 크루즈라 하면 디너(dinner)나 만찬에 정장과 드레스로 한껏 멋을 내야 하지만 북유럽에서는 마음을 편히 가져도 좋다. 이곳의 크루즈는 7-8만 톤의 페리식 크루즈이므로 호화스런 크루즈 보다는 편안한 분위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크루즈의 선내 나이트클럽이라도 이용해 볼 요량이라면 야시시한 옷 한 벌쯤은 더 챙겨 넣어야 할 일이다. 그럼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인 먹는 얘기로 가보자. 실자라인에서는 뷔페식 식사가 제공된다. 북해에서 꼭 먹어봐야 한다는 ‘훈제 연어’가 무제한으로 제공된다니 혁대를 풀어놓고 맘껏 먹어보자. 그뿐 아니라 새우와 소라 등 해산물이 풍부하고 빵, 치즈, 케익 등도 넉넉하게 제공된다. 마침 생맥주와 와인(백, 적)까지 무제한 리필(refill)이 되니 이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여기서 여담(餘談) 하나, 누군가 ‘중국인’들이 안 보인다며 좋아하는 게 보인다. 중국인들이 몰려들 때마다 어김없이 난장판이 되므로 그들을 만나는 게 두렵다면서 하는 말이다. 그는 식당에서 부딪쳤던 상황을 떠올리며 넌더리를 친다. 그런 상황은 우리들만의 생각은 아니었던가 보다. 실자라인에서는 중국인들에게는 뷔페식당의 이용권을 팔고 있지 않는다니 말이다. 갑자기 ‘한국인’이라는 것에 자부심이 느껴지는 건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참! 지나가는 길에 객실 상황도 거론해보자. 선실은 밖을 볼 수 있는 seaside와 창문이 없는 inside로 구분되는데 운이 좋았던지 우린 seaside로 배정을 받았다.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이점 때문에 1인당 10만 원 정도를 더 지불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의외이다. 추가요금을 지불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방은 소파가 한쪽에 있고, 침대 4개가 벽에 붙어 있다. 침대를 내려펼치면 한 묶음으로 묶여있는 이불과 요, 베개, 그리고 목욕수건이 튀어나온다. 침대에서 보면 벽걸이 TV와 전화기가 보이고, 오른쪽은 벽장, 왼쪽이 샤워실과 화장실이다. 커피를 마실 수 있는 탁자와 거울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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