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마니아 여행 #8 : 시기쇼아라

가을하늘 추천 0 조회 2 19.06.11 08:47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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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 : 불가리아 - 루마니아

 

여행일 : ‘19. 5. 29() - 6.5()

세부 일정 : 소피아릴라소피아(1)플로브디프벨리코 투르노보(1)이바노보부카레스트(1)시나이아브란브라쇼브(1)루피아시비우시기쇼아라(1)투르다클루지나포카

 

여행 다섯째 날 : 시기쇼아라(Sighișoara)

 

특징 : 트란실바니아 지방의 무레슈(Mureș) 주에 속한 도시로 타르나바 강(Târnava River) 유역에 있다. 시기쇼아라는 12세기 헝가리 왕국이 국경 방어 차원에서 이주시킨 트란실바니아 작센인 장인과 상인들에 의해 형성된 도시이다. ‘작센인이 트란실바니아 지방에 세운 7개의 성채도시 가운데 여섯 번째라는 뜻의 라틴어 카스트룸 섹스(Castrum Sex)’로도 불리는 이유이다. 이후 몽골제국의 침입을 겪으며 시기쇼아라 성채는 끊임없이 보강되어 높은 성탑과 성벽 등을 갖추게 되었다. 이때 각각의 길드(guild)들이 저마다 성탑을 쌓고 관리해왔다 그러다가 1337년 자치시로 승격되었으며, 트란실바니아 지방의 중심지로서 교역이 발달하면서 1516세기 크게 번성했다. 성채의 규모가 더욱 넓혀졌고 오스만제국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보강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17세기 이후 잇단 화재와 지진 피해에다 길드의 특권까지 사라지면서 급격히 쇠락했다. 루마니아의 땅이 된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부터이다. 원래의 주인이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왕국이 전쟁에서 졌기 때문이다. 199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시기쇼아라 역사 지구(Historic Centre Sighisoara)’가 있으며 드라큘라의 모델이 된 블라드 체페슈가 태어난 곳으로도 유명한 도시이다.


 

버스는 우릴 산 아래에 있는 주차장에다 내려놓는다. 다른 옛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이곳 시기쇼아라도 대형버스의 올드 타운(old town)’ 진입을 막고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곳이 뉴타운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주변의 건축물들이 하나같이 중세풍의 냄새를 물씬 풍기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곳으로 오는 도중 들렀던 다른 도시들의 독일식 건축물과 하나도 다를 게 없다. 하긴 작센인이라는 뜻의 사시(Saşi)’라고 불리던 트란실바니아 작센인들이 세운 도시이니 이를 말이겠는가.





그다지 가파르지 않는 오르막길로 들어서면서 투어가 시작된다. 시비우를 나설 때부터 내리기 시작한 빗줄비가 제법 굵어졌지만 걷는 데는 조금도 지장이 없다. 도로의 바닥을 돌로 깔아놓았기 때문이다. 유럽의 옛 도시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인데 걷기에 조금 불편하다는 단점이 있지만 비가 올 때는 질퍽거리지 않는다는 장점도 갖고 있다.



주변 경관을 살펴가며 잠시 걷자 성문(城門)이 나타난다. ‘재단사의 탑(Tailors' Tower)’이라는데 이 도시의 특징을 한마디로 대변해주는 건축물이라 하겠다. 시기쇼아라가 길드(guild), 즉 장인과 상인들이 중심이 되어 세운 요새도시이기 때문이다. 12세기 헝가리 왕국의 지역 방어체제 구축을 위해 이주해온 독일인(트란실바니아 작센인)들은 각 길드 별로 도시 방어를 위한 성탑을 쌓고 관리했다. ‘신발 장인의 탑(Schusterturm)’, ‘정육업자의 탑(Fleischerturm)’ 등 개개의 길드 이름이 붙여진 이유이다. 하지만 1676, 1736, 1788년에 큰 화재로 건축물 상당수가 파괴되었으며, 특히 1676년의 화재 때는 당시 있던 건축물의 75% 정도가 불타버리는 수난을 겪었다고 전해진다. 19세기 이후 길드조직이 특권을 잃으면서 도시도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고, 한때 14개에 이르던 성탑도 시계탑을 포함해 9개만 남아있을 따름이다.



성의 안으로 들어서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또 다른 문()이 얼굴을 내민다. 두 건물의 2층을 회랑으로 연결하고 그 아래에 아치형의 문 2개를 내놓았다. 이 지역 건축물들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이 지역의 오래된 집들은 대부분 측면으로 아치형 출입통로가 나있으며 작은 부지 탓에 때로는 인접한 집들이 서로 통로를 공유하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 더 들어가자 또 다른 성탑(城塔)하나가 길을 떡하니 막고 있다. 아니 조금 전에 지나왔던 재단사의 탑보다 훨씬 더 커졌다. 시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시기쇼아라 시계탑(Sighişoara Clock Tower)’으로 2m나 되는 두꺼운 벽과 함께 적들이 도시로 진입하는 것을 어렵게 했을 4개의 포탑이 마련되어 있다. 29명의 병사들이 상주하던 이 시계탑은 방어적인 목적 외에도 의회 개최장소나 기록보관소, 마을의 보물을 보관하는 용도로 쓰였다고 한다. 현재는 역사박물관으로 쓰이고 있으며 시기쇼아라 역사지구를 대표하는 상징물로 꼽힌다.



도시를 대표하는 탑답게 눈이 번쩍 띌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다. 애초 30m 높이였으나 16세기에 현재와 같은 64m 높이로 증축되었다고 한다. 1676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이듬해 재건되었고 이후에도 몇 차례 수리를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1894년 오스트리아 출신의 건축가에 의해 다채로운 색을 입은 지붕을 얹은 바로크 양식으로 개축되었단다.



탑에 시계가 장착된 것은 1604년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나무로 만든 시계를 설치했다가 1648년에 금속 시계로 교체했다. 시계 옆 벽감에 있는 나무상들도 흥미롭다. 요새를 향하고 있는 벽에는 평화, 정의의 신들이 천사와 함께 시간에 따라 움직이고, 도시를 향하고 있는 벽에는 요일을 나타내는 행성의 신들이 날짜에 따라 움직인단다.



시계탑의 가장 주된 용도는 물론 출입문이다.



문이 굳게 닫혀있어 시계탑 내부는 구경하지 못했다. 1899년부터 트란실바니아 지역의 공예품과 각종 자료를 전시한 시립 역사박물관으로 바뀌어 있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아담하게 꾸며진 박물관 안쪽에는 1670년대 이후의 중세 약학, 인종학, 미술 관련 유물 등이 전시되어 있단다. 특히 나선형 계단을 따라 맨 위층으로 올라가면 시계와 나무상들이 돌아가는 기계장치를 볼 수 있다고 했다. 또한 꼭대기의 전망대에 서면 시기쇼아라 시가지가 한눈에 쏙 들어온단다. 빨간 타일로 덮인 구시가지의 지붕들 사이로 조약돌이 촘촘히 박힌 폭 좁은 거리가 선을 긋고 있는 16세기 색슨인들의 주거환경을 내려다볼 수 있다는 것이다.



시계탑에서 왼편으로 조금 더 걸으면 대장장이의 탑(Ironsmiths' Tower)’을 만날 수 있다. 내부에 무료로 전시물을 볼 수 있다는데 이곳도 역시 문이 닫혀있었다. 참고로 시기쇼아라의 방어 시스템은 중세 길드가 세운 930m 길이의 성벽과 14개의 탑, 5군데의 요새가 주를 이뤘다고 한다. 요새와 탑은 당시 기술로는 가장 뛰어난 방어기능을 담당하게끔 만들어졌단다.



대장장이의 탑근처의 성벽에 서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곳 구시가지와 대비되는 신시가지가 널따랗게 펼쳐진다. 시기쇼아라는 구시가지가 위치한 언덕을 휘감고 흐르는 트르나바(Trnava) 을 경계로 신·구 시가지가 나뉘어진다. 참고로 신시가지는 19세기 이후에 조성되었다고 한다. 언덕위에 있는 구시가지는 행정과 문화의 중심지로 그 기능을 계속 이어갔지만 상업과 공예활동 등은 확장단계에서 요새가 소실된 저지대로 이동했단다.




시계탑 옆에는 장식이 없는 파사드 형태의 작은 교회가 있었다. ‘도미니카 수도원(Dominican Monastery)’이 이 근처에 있었지만, 현재는 수도원에 있던 작은 교회(St Mary)’만 남아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저 교회를 두고 하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내부는 들어가 보지 못했다. 아니 소박한 외모에 흥미를 잃었다는 게 보다 더 옳은 표현이겠다. 그래서 다른 이의 글을 옮겨 그 분위기를 살펴본다. <교회 안은 500년 된 아름다운 프레스코화와 르네상스풍의 의자, 로마네스크 양식의 예배당 등이 어우러져 무척 인상적이다. 수백 년 동안 시기쇼아라의 기독교인들에게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상징으로 여겨져 온 장소. 이 교회는 작은 규모와 달리 엄숙함과 장중한 무게감으로 충만하다.>




구시가지 내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멋진 건물이 바로 시청(City hall)이다. 고딕과 바로크 양식이 대부분인 도시에서 르네상스양식으로 지어진 건축물을 만났으니 화려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거기다 3만 명이 조금 넘는 도시의 청사치고는 엄청나게 큰 규모이다. 그래선지 학술제나 음악콘서트 등이 저곳에서 열린다고 한다.




시계탑 바로 앞의 광장에 서면 유독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는 노란색 3층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이 블라드 체페쉬(Vlad Ţepeş)‘가 태어나 어린 시절 살았던 그의 생가이다. 시기쇼아라는 드라큘라 이야기의 실제 주인공인 블라드 체페슈 3가 태어난 곳으로 전형적인 중세 루마니아 양식을 지닌 저 집은 드라큘라 백작의 모델이 된 그가 1431년에 태어나서 가족과 함께 네 살이 되던 1435년까지 실제로 살았던 집이란다. 이후 드라큘라 가족은 남쪽의 트르고비슈테로 이주하게 된다. 참고로 드라큘라 백작1456년부터 1462년까지 왈라키아 지방을 통치한 블라드 백작에게서 영감을 얻은 아일랜드 출신의 작가 브램 스토커가 재탄생시킨 가공의 인물이다 




건물 입구에는 촌스럽지만 철로 만들어진 용()이 걸려 있었다. 블라드 3체페쉬의 아버지인 블라드 2드라쿨용의 기사단의 일원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용의 기사단의 ‘Dracul’이라는 칭호를 받았고 드라쿨이라는 이름을 즐겨 사용했단다. 용의 조형물을 걸어놓은 이유가 아닐까 싶다. 다른 한편으로 ‘Dracul’은 용맹하다는 뜻과 용(Dragon)이라는 뜻, 그리고 악마라는 뜻이 혼용된다고 한다. 소설 속의 드라큘라 백작처럼 꼭 나쁜 의미만은 아니라는 얘기이다. 실제로 시기쇼아라 주민이나 루마니아인들은 블라드 2블라드 3를 훌륭한 위인으로 꼽고 있단다.



드라큘라백작의 생가는 현재 레스토랑으로 성업 중이다. ‘드라큘라의 집으로 불리는 이 레스토랑은 마을에서 가장 멋진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1층은 나무탁자에 둘러앉아 생맥주 한 잔을 들이키기에 그만이고, 고딕식 가구로 인테리어를 꾸민 2층의 아늑한 레스토랑에서는 훌륭한 수프와 루마니아 전통요리를 맛보며 기분 좋은 저녁을 만끽할 수 있다. 2층은 또 블라드 체페쉬에 대한 기록이나 기념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우리 일행도 이곳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드라큘라 백작의 도시에 찾아왔으니 그의 집, 아니 그가 앉았었을 지도 모르는 식탁에 앉아 와인을 곁들인 만찬을 즐겨보는 것 또한 여행의 묘미가 아니겠는가. 안으로 들어서니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손님들이 많았다. 여행의 즐거움을 나만 원하는 것이 아니었나보다.



이젠 시기쇼아라의 명소인 산상교회로 올라가 볼 차례이다. 조금 전에 통과했던 재단사의 탑(Tailors' Tower)’ 조금 못미처까지 되돌아간 다음 왼편 골목으로 들어서면 된다. 산상교회로 가는 골목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파스텔톤으로 채색된 구시가의 주택들과, 낡았지만 세월이 쌓여 있는 골목길이 주는 소박한 아름다움이 넘치는 매력을 풀풀 발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알록달록 예쁜 집들과 기념품 가게들을 기웃거리며 걷다보면 ’Scara acoperita‘라고 적힌 긴 터널형 계단의 입구가 나온다. ‘학생의 계단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1642년 높은 언덕 위에 위치한 학교와 교회까지 오르내려야 하는 학생과 신도들을 위해 건설되었다고 한다.



사방이 막혀 밖은 보이지 않았지만 눈에 담을 만한 풍경 하나쯤은 만날 수 있었다. 175개의 계단이 끝나갈 즈음 거리의 악사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경쾌한 리듬이었는데 십여 명의 학생들이 몸까지 흔들어가며 음악에 맞춰 흥을 돋우고 있었다.



계단을 빠져나오자 학교 건물이 얼굴을 내민다. 조금 전 거리의 악사 앞에서 몸을 흔들던 학생들의 크기로 보아 고등학교가 아닐까 싶다. 벽면에 ‘1619’라는 숫자가 적혀있었는데 설립연도가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고딕양식으로 지어진 본관에 적힌 ‘1901’은 재건축 년도 쯤 되겠다.




몇 걸음 더 오르면 이번에는 작은 공원과 함께 산상교회(Church on the Hil, 山上敎會)’가 길손을 맞는다. ‘산 위에 지어진 교회라는 데서 유래된 이름인데 트란실바니아 지역에서 고딕양식으로 지어진 가장 대표적인 건축물로 평가 받는단다. 교회는 1345년 짓기 시작해 180년 후인 1525년에 완성되었다. 1838년에는 지진 피해를 입어 복구 과정을 거치기도 했다. 참고로 이 교회는 원래 니콜라스 성인에게 봉헌된 가톨릭교회였다고 한다. 1547년 작센인들에 의해 개신교로 바뀌었단다.



내부는 생각했던 것 보다는 수수했다. 1480년에 만들어졌다는 설교단을 비롯하여 15세기에 제작된 귀중한 조각품들이 있다. 채색이 화려한 그림들이 여럿 걸려있는가 하면, 벽면에는 500년 전에 그려졌다는 프레스코화도 여럿 보였다. 또한 로마의 옛 유적지에서나 볼 법한 조각품의 잔해들을 복도에 늘어놓아 오래된 건축물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특이한 점은 예배당의 지하에 또 다른 공간이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다. 무덤으로 사용되던 곳이 아닐까 싶은데 텅 비어있었다.



언덕교회 뒤쪽에는 묘지예배당(Capela Cimitirului)’이 자리 잡고 있었다.



교회 앞 전망 좋은 곳에 서면 시기쇼아라의 신시가지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시기쇼아라는 시비우처럼 독일인이 건설한 도시로 중세에는 시비우와 쌍벽을 이룰 만큼 융성했지만 지금은 아주 작은 도시로 변모해 있었다.




산상교회에서 내려올 때는 우회로를 이용했다. 계단을 내려서는 게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똑 같은 길을 또 다시 걷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자취로 반질반질하게 닳아져버린 돌길을 따라 내려오는 도중에는 한층 더 예스러워진 풍경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내려오는 도중에 두 개의 성탑(城塔)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정육업자의 탑(Butchers' Tower)’모피상의 탑(The Furriers' Tower)’이다. ! 산상교회를 한바퀴 둘러보는 도중에는 밧줄 제작자의 탑(opemakers' Tower)’도 눈에 띄었었다. ‘요새도시인 시기쇼아라는 수공업자와 상인들이 중심이 되어 세운 도시다. 그들은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14개의 성탑을 세웠는데 각 탑들은 도시의 길드, 즉 수공업자나 상인 조합에서 세우고 길드의 이름을 붙여서 불렀다. 때문에 재단사의 탑, 모피상의 탑, 제화업자의 탑 등의 흥미로운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산상교회 근처에서 이들 가운데 셋을 눈에 담은 것이다.



재단사의 탑근처로 되돌아오니 비가 그쳐있다. 마음에 여유가 생긴 덕분인지 아까는 그냥 흘려보냈던 기념품가게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앙증맞은 상점들은 안을 기웃거려도 누구 하나 싫어하는 기색이 없다. 아니 오히려 가게 주인들은 따뜻한 미소와 함께 훈훈한 인심을 베풀어 주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곳 시기쇼아라를 일러 세상이 급변해도 여전히 수백 년 전의 골목과 인심이 어우러져 낯선 여행자의 마음까지 금세 편안해지게 만든다고 칭송하는가 보다.



산상교회에서 헤어졌던 두 길은 학생의 계단에서 다시 하나로 합쳐지고 아까 투어를 시작하면서 들어왔던 재단사의 탑(Tailors' Tower)’을 지나 조금 더 걸으면 신발장인의 탑(Shoemaker’ Tower)’이 나온다. 신발 제조업자들이 돈을 모아 지은 탑일 텐데 문이 잠겨있어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입구에 붙어있는 설명문도 루마니아어로 적혀있어 판독이 불가능했다.




신발 장인의 탑맞은편에는 로마 가톨릭 교회(Roman Catholic Church)’가 있다. 예쁘게 지어진 건축물이나 그 내력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정면에 붙여놓은 표지판에서 건축년도가 1896년이라는 것만 알아낼 수 있었다.




교회 앞의 작은 공원에는 페퇴피 산도르(Sándor Petőfi : 1823-1849)’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헝가리의 위대한 시인이자 혁명가 중 한사람으로 알고 있는데, 그의 동상이 왜 이곳에 세워졌는지 모르겠다. 아니 그가 헝가리 혁명당시 트란실바니아 군대의 사령관 요제프 벰장군의 부관으로 근무했다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르겠다. 이곳 시기쇼아라가 바로 트란실바니아가 아니겠는가.



구불구불한 대리석 길들과 조용한 광장과 탑들, 온전히 보존된 성채와 주택들 사이를 거닐다 보면 여행자의 마음은 낭만에 젖고 시간은 저절로 과거로 회귀한다. 파스텔 톤으로 채색된 골목에 들어선 나 자신도 마치 중세시대로 와 있는 듯한 착각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길가에 미니자동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저 차를 타고 올드타운을 돌아볼 수 있다고 한다. 미니열차도 탈 수 있다고 했는데 눈에 띄지는 않았다.



숙소가 위치한 트르나바(Trnava)’ 강가로 내려오자 시청과 가톨릭교회 등 언덕 위에 들어선 건축물들이 아름다운 풍경으로 펼쳐진다, 특히 아까 골목을 걸을 때는 카메라의 앵글에 들어오지 않던 시청의 거대한 청사도 이곳에서는 촬영이 가능했다.




하룻밤을 머문 더블트리 바이 힐튼 호텔 시기쇼아라 카발레르(Double Tree by Hilton Hotel Sighisoara-Cavaler)’, ‘트르나바(Trnava)’ 강가에 위치한 4성급 호텔로 시기쇼아라 구시가지에 대한 조망이 가장 큰 장점이다. ‘더블트리 바이 힐튼'프리미엄 비즈니스 호텔'을 표방하는 세계적인 브랜드의 호텔이다. 그래선지 투숙객들을 위한 각종 편의시설들을 두루 갖추고 있었고, 객실과 욕실의 청결도도 뛰어났다. 다만 샤워시설이 욕조 안에 들어있어 주의하지 않을 경우 미끄러질 염려가 있었다.



호텔에 여장을 푼 뒤, 신시가지를 둘러보기로 했다. 그러나 금방 발길을 돌려버렸다. 특별한 볼거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성 삼위일체 성당((Biserica Sfanta Treime din Sighisoara)'도 없었더라면 카메라의 셔터를 누를 일도 없었을 뻔했다. 백색 톤으로 산뜻하게 지어진 성당은 중세의 궁전을 쏙 빼다 닮았다. 정교회의 예배당이라는데 역사는 그리 오래되어 보이지 않았다.



성 삼위일체 성당에서 올려다본 구시가지 풍경이다. 완전체로 보존되고 있는 옛 도시이지만 말 위에 올라탄 기사나 검은 수도복을 입은 성직자는 보이지 않았다. 비가 내리는데도 신비로움을 조장하는 희뿌연 운무도 없었다. 훼손되지 않은 건물에만 중세의 형적이 남아있을 뿐, 500년 뒤로 밀린 인간의 삶은 현세에 머물러 있었다.



내일이면 이번 여행도 끝을 맺는다. 비행기에서 이틀을 자는 것으로 짜여진 58일의 이번 일정은 길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불가리아와 루마니아라는 결코 작지 않은 두 나라를 돌아다니느라 많은 시간을 버스 속에서 때워야만 했다. 힘든 여정이었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그런 일정과의 이별도 우리 부부에겐 시원함보다는 섭섭함으로 다가온다. 하나라도 더 보고 싶은 마음으로 지구촌 구석구석을 6년 째 누비고 다니는 중이니 이를 말이겠는가. 지금 집사람이 짓고 있는 미소 속에는 그런 그녀의 속마음이 감추어져 있을 것이다.


여행지 : 불가리아 - 루마니아

 

여행일 : ‘19. 5. 29() - 6.5()

세부 일정 : 소피아릴라소피아(1)플로브디프벨리코 투르노보(1)이바노보부카레스트(1)시나이아브란브라쇼브(1)루피아시비우시기쇼아라(1)투르다클루지나포카

 

여행 다섯째 날 : 시비우(Sibiu)

 

특징 : 루마니아 중부 트란실바니아 지방에 위치한 도시로 고대 다키아가 로마에 점령된 후 식민도시로 건설됐다. 그 후 12세기 독일인 이민자들이 정착하면서 14세기에는 독일계 주민들의 행정·상업 중심지로 번창했는데 독일인들이 만든 일곱(시비우, 브라쇼브, 비스트리차, 클루지나포카, 메디아슈, 세베슈, 시기쇼아라) 도시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였으나 1차 대전 이후 루마니아 왕국의 영토로 넘어왔다. 하지만 독일의 문화적 흔적은 여전히 강렬하게 남아 있단다. 1928년에는 루마니아 최초의 동물원이 이곳에 세워지기도 했으며, 역사적으로 여러 차례 전쟁 피해를 입었지만 학교와 성당 등 중세 독일식의 유적이 남아 있다. 2007년 유럽연합은 유럽의 문화수도로 이 도시를 지정했으며, 중세도시 분위기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버스는 우릴 붉은 벽돌로 쌓아올린 두터운 성벽의 밖에다 내려놓는다. 저 성벽의 안에 들어있는 구시가(Old city)는 대형버스의 진입이 통제되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이끼가 두텁게 내려앉은 성벽을 보니 마치 중세로 시간여행을 떠난 듯하다. 누군가는 이곳 시비우를 루마니아 문화의 중심지라 했다. 역사를 품은 저런 풍경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표현이었을 것이다.

 

 

 

 

 

 

성벽의 안쪽과 바깥쪽은 산책로로 잘 가꾸어 놓았다. ‘포브스(Forbes)’는 시비우를 유럽에서 가장 살고 싶은 이상적인 도시 8로 선정하기도 했다. 저런 풍경이 있었기에 가능했지 않나 싶다. 그나저나 숙소를 시비우로 정했을 경우 아침 산책코스로 안성맞춤이겠다.

 

 

 

 

구시가에 들어서자 눈에 들어오는 건물들이 하나같이 유럽 스타일 일색이다. 이곳 시바우가 본디 독일계 이주민들이 만들어 놓은 도시이기 때문이란다. 트란실바니아 지역을 지배하고자 했던 헝가리 국왕은 특이하게도 헝가리인이 아니라 독일인을 강제로 이주시켜 도시를 건설토록 했다. 그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던 곳이 시비우와 시기쇼아라였는데, 근면했던 독일인들은 훗날 길드를 조직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고 번성하기에 이른다. 루마니아 곳곳에서 중세 유럽의 진향(眞香)이 배어나게 된 이유란다.

 

 

 

 

중세의 풍경을 고이 간직한 도시인데 분수(噴水)가 빠질 리 없다. 널따란 광장(廣場)과 광장을 둘러싼 아름다운 건축물들, 그리고 거리 곳곳에 들어서있는 저런 분수들이 중세도시의 특징이 아니겠는가.

 

 

중세 건물들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 걷다보니 어느덧 엄청나게 너른 광장(廣場)에 이른다. 이름 또한 큰 광장(Piața Mare. Grand Square Sibiu. Large Square)’인데 18세기의 아름다운 바로크 양식으로 건설된 로만 가톨릭 성당과, 루마니아 최고의 박물관으로 손꼽히는 브루켄탈 궁전이 있어서 더욱 빛나는 곳이다. 참고로 이곳 대광장은 루마니아 민주화혁명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장소이기도 하다. 1989년 민주화혁명이 발생했을 때 대광장 주변에서 총격전이 벌어져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유럽의 문화의 특징은 광장이라 할 수 있다. 유럽의 도시에 있어서 광장은 필수 요인이기 때문이다. 유럽의 광장문화는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agora)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고라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고대 시민들은 이 아고라에서 토의하고 연설하는 등 민주주의 시초를 행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다보니 자연스럽게 아고라는 시민생활의 중심지가 되었고, 주변에 공공생활에 필요한 시설물들이 속속 들어섰다. 회의장과 사원, 점포 등이 바로 그것이다. , 정치, 종교, 경제의 중심이자 구심의 역할을 하는 곳이 광장인 것이다. 이러한 광장은 중세에 넘어오면 종류가 다양해진다. 대성당이나 교회 앞에 있는 교회광장, 왕족이나 귀족 대저택 앞의 시민광장(시뇨리아), 시장이 열리는 시장광장 등이 대표적이다. 이곳 시비우의 대표적인 건물은 시청사이다. 그러니 대광장은 시민광장인 셈이다.

 

 

 

 

광장은 예쁘장한 유럽풍의 건물들로 포위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은 단연 시청사이다. 루마니아 국기가 걸려있으니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저 건물에 관광안내소가 들어있다는 점을 참고해 두자.

 

 

시청사의 오른편 건물은 가톨릭성당(Biserica Romano Catolică)이다. 내부 장식과 스테인드글라스가 아름답다고 알려져 있지만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시간이 부족했던 것도 아닌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그저 수박 겉핥기에 그치고 있는 내 여행 스타일을 탓해 볼 따름이다.

 

 

아래 건물은 브루켄탈 국립박물관(Brukenthal National Museum)으로. 루마니아에서 가장 오래된 박물관이자 유럽 전체에서도 두 번째로 오랜 역사를 지닌 박물관이라고 한다. 브루켄탈 박물관은 행정과 관리는 통합되지만 미술관과 민족관, 민속관 등 위치가 각각인 여섯 개의 박물관으로 이루어지며, 브루켄탈 저택의 박물관은 브루켄탈 국립박물관의 본관이라고 할 수 있다. 통상 브루켄탈 박물관이라고 하면 이곳을 가리킨단다. 박물관으로 개조된 브루켄탈 저택은 루마니아의 바로크 양식 건물 중에서도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18세기 말 트란실바니아 통치자였던 사무엘 폰 브루켄탈(Samuel von Brukenthal) 남작의 저택으로 1777년에 건설을 시작해 1787년에 완공되었다. 1817년 개관했다는 미술관은 주어진 자유시간이 부족해 들어가 보지 못했다. 그래서 다른 이의 글을 빌려 내부 전시물을 정리해본다. 미술관에는 루벤스와 보티첼리, 반다이크를 비롯한 유럽 화가들의 회화작품 1,090점이 전시되어 있다. 네덜란드 학파, 플랑드르 학파, 이탈리아 학파는 물론 독일, 오스트리아까지 유럽 전역에 걸쳐 다양한 작가의 작품을 망라하며, 루마니아 거장들의 작품 1,500점도 별도로 전시되어 있다. 2층에는 15세기부터18세기까지 미술품, 골동품, 동전, 희귀 서적 등 저택의 주인이었던 브루켄탈의 개인 소장품이 별도로 전시된다.

 

 

광장을 둘러보다 문득 시비우의 눈이라고 불리는 독특한 독일식 건축양식 창문과 눈이 마주쳤다. 지금은 묘한 웃음을 짓는 것으로 보이지만, 독재자 차우셰스쿠 시절에는 국민을 감시하던 독재자의 눈초리처럼 보인다고 해서 감시자의 눈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 시비우를 일러 건축물 하나에도 역사와 더불어 사회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는 흥미로운 곳이라고 말한다.

 

 

감시자의 눈은 주택 지붕의 채광창이자 통풍용 창이다. 찢어진 듯한 눈초리 형상이 마치 그 옛날 독재자가 지배하던 시절 국민들을 억누르던 감시의 눈과 같다고 해서 그런 무시무시한 이름이 붙여졌고 한다.

 

 

광장에는 루마니아 교육의 아버지로 불린다는 게오르기 라자르(Gheorghe Lazăr.1779~1823)’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1818년 부카레스트에 루마니아 최초의 언어학교(Romanian language school)를 설립한 사람이란다.

 

 

정체불명의 시설도 보였다. 옆면에 수도꼭지가 매달려 있는 걸로 보아 음수대(飮水臺, drinking fountain)가 아닐까 싶다.

 

 

대광장의 뒷골목으로 들어가자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에반겔리카 교회(Biserica Evanghelica)‘가 나온다. 12세기에 세운 로마 가톨릭교회가 있던 자리에 1520년 개신교인 루터파가 새로 지은 교회당이다. 중앙에 다섯 개의 첨탑이 우뚝 솟은 교회는 시비우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하지만 내부가 화려하게 장식된 가톨릭교회들과는 달리 단순하고 장식이 많지 않은 것이 특징이란다.

 

 

 

 

 

 

교회 내부는 들어가 보지 못했다. 주어진 시간에 탐방을 마치려다보니 발길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북쪽 벽면에 그려졌다는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를 표현한 9m 높이의 거대한 프레스코화를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해버렸다. 특히 루마니아에서 가장 크다는 파이프오르간을 보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독일 장인이 1671년에 만든 것을 1914년에 개조했다는데, 6,000개의 파이프가 장착되어 있다니 얼마나 웅장하겠는가. 하지만 예비지식 없이 여행을 떠나온 내 탓이니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에반겔리카 교회의 앞은 후에트 광장(Huet Square)’이다. 이곳도 역시 고딕 양식의 오래된 건물들로 둘러싸여 있다는 점은 큰 광장과 마찬가지다. 그 규모가 꼬맹이라는 점만 다르다고 보면 되겠다.

 

 

광장 서쪽에는 14세기에 창설된 중등학교가 자리 잡고 있었다. 18세기 트란실바니아 통치자였던 브루켄탈의 이름을 따서 사무엘 폰 브루켄탈 학교라고 불린다. 시비우에서 유일하게 모든 수업이 독일어로 진행되는 학교로, 시비우에 중세도시를 건설했던 독일인들의 전통이 남아 있다고 한다. 현 건물은 1786년에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조금 더 걸으면 루마니아 최초의 철골 다리인 거짓말의 다리(The Liar's Bridge/ Podul Minciunilor)’가 나온다. 이 다리에서 물건을 팔던 상인들이 손님을 끌기 위해 과장된 거짓말을 섞어 판매 경쟁을 벌였기 때문이라거나, 한창 사랑에 불타오르는 젊은 연인들이 금세 변해버릴 사랑의 약속을 했던 데서 다리 이름이 나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다리는 예쁜 꽃들로 치장되어 있었다. 정교한 쇠장식으로 치장된 난간의 아름다움으로도 부족했던 모양이다. 참고로 1859년에 건설될 당시의 다리 이름은 단순히 철교였다고 한다. 나중에 이 다리 위에서 거짓말을 하면 다리가 무너진다는 이야기가 덧붙여지면서 거짓말쟁이의 다리라는 별칭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단다. 꼭 속설이 아니더라도 이 다리에서는 진실만을 말해야 할 것 같다. 근처 건물들의 지붕에서 감시자의 눈들이 시퍼렇게 지켜보고 있으니 말이다.

 

 

다리 아래로는 자동차가 다니는 길이 나있다. 위쪽 마을과 아래쪽 마을을 이어주는 오크네이(Ocnei)’ 거리란다.

 

 

 

 

다리를 건너면 소광장(Piața Mică, The Small Square)’이다. 후에트광장과는 조금 전에 지나온 좁은 골목으로 연결되며 대광장과는 시계탑 아래로 난 문을 통해 연결된다. 소광장도 잘 보존된 아름다운 중세 건물들로 둘러싸여 있는 것이 대광장과 별반 다를 게 없다. 하지만 소광장 주위의 많은 건물들이 현재 박물관으로 쓰인다는 점은 다르다 하겠다. 과거 약국이었던 건물에 들어선 약학박물관을 비롯해 색슨족 박물관, 세계 민족박물관, 트란실바니아 문명박물관 등이 모두 소광장 주변 건물을 활용하고 있다.

 

 

 

 

광장에는 지붕을 올린 좌판들이 일렬로 서있는 풍경도 볼 수 있다. 혹자는 구시가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세 광장들은 조금씩은 다른 특징들을 갖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곳 소광장은 주로 상인과 직인들의 거처나 상점이 많았던 일종의 비즈니스가 지역이라 했다. 그렇다면 규격화된 저 노점상들은 옛 특징을 현대에 재현해 놓은 셈이다.

 

 

광장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물은 트란실바니아 문명박물관으로 쓰이는 아트하우스(Sibiu Arts House)’이다. 15세기에 지어졌으며 1층에 8개의 아치가 일렬로 늘어선 주랑이 있고, 다갈색 지붕이 특징적인 깔끔하면서도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가게로 사용되던 1층에는 과거 정육점들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훗날 모직물을 파는 상인들이 사용하다가 18세기에는 곡식저장고로 쓰였고, 1765년에는 잠시 극장으로 쓰이기도 했다. 월드뱅크의 지원을 받아 완벽한 복원작업을 거친 후 2004년부터 트란실바니아 문명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박물관에는 의복, 직물, 도자기, 성물 등 4만 점이 넘는 각종 유물이 전시되어 있으며, 이 중 1만여 점은 역사적으로 가치도 높고 희귀한 자료들이란다.

 

 

 

 

소광장을 둘러싼 건물들도 역시 감시자의 눈들 일색이다. 아니 게슴츠레하게 뜬 것이 영락없이 웃는 모습이다. 그래선지 저 독특한 독일식 건축양식은 마주할 때마다 입가에 미소를 머물게 한다.

 

 

소광장과 대광장이 접하는 곳에는 도시의 상징인 시의회 탑(Sibiu Council Tower)’이 서있다. ‘시계탑으로도 불리는데 특별히 꾸미지 않은 모습에 깔끔한 흰색으로 칠해졌으며 13세기에 건설되었다. 시의회 탑이라는 이름은 바로 옆 건물이 시비우 최초의 시청으로 쓰였기 때문에 붙었다. 애초에는 방어용 성벽의 관문 역할을 했지만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때로는 감옥으로, 때로는 시민들의 옥수수 창고로 다양한 역할을 해왔다. 부분적인 붕괴와 재건 과정을 거쳤으며, 1829년 마지막 층을 증축하고 지붕을 올리면서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단다.

 

 

 

도시의 전경을 살피기 위해 탑의 안으로 들어가 봤다. 나선형으로 만들어진 계단을 따라 오른다. 비좁은데다 경사까지 져서 내려오는 사람이라도 만날라치면 부대껴야 하는 불편을 감수 해야만 한다. 이런 계단은 전시장을 만나면서부터는 삐꺽거리는 나무계단으로 변한다.

 

 

 

 

 

올라가다 만나게 되는 작은 공간들은 전시장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올드 시티(Old city) 미니어처가 만들어져 있는가 하면 갤러리(gallery)로 꾸며진 공간도 2개 층이나 있었다.

 

 

 

 

그중에서도 단두대가 놓인 공간이 가장 눈길은 끌었던 것 같다. 아래 사진과 같은 기념사진을 원하는 관광객들이 줄을 지어있었을 정도니 말이다.

 

 

거창한 기계시설도 만날 수 있었다. 아까 광장에서 바라보던 시계의 태엽이다. ! 조금만 신경을 쓴다면 기계가 돌아가는 광경도 구경할 수 있을 것이다.

 

 

맨 위층은 전망대로 꾸며 놓았다. 이 시계탑으로 연결되는 대광장과 소광장은 물론이고 아름다운 시비우 시가지가 한눈에 쏙 들어오는데 고딕 냄새가 물씬 나는 교회와 붉은색 지붕들이 아름다운 풍경화를 그려내고 있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이다.

 

 

각 방향에는 전경 사진을 내걸어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과 비교할 수 있게끔 했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했던지 중요 건축물에는 이름까지 적어 넣어 이해를 돕고 있다. 그만큼 역사적인 건축물들을 많이 품고 있다는 자신감일 것이다.

 

 

 

 

광장에서 빠져나오는 도중에도 중세의 옛 건물들이 줄줄이 나타났다. 아래 건물도 그 가운데 하나인데 정체는 알 수 없었다. 루마니아의 국기까지 걸려있는 걸로 보아 예사 건물은 아닌 게 분명했다.

 

 

 

 

구시가를 빠져나오는 길에 콘서트홀(Thalia Concert Hall)’이 눈에 띈다. 시비우의 독특한 지붕양식과 현대적인 외모를 함께 지니고 있다. 구시가지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예쁘장한 풍경이다.

 

 

 

이어서 ‘Carpenters Tower’가 눈에 들어온다. 성벽과 함께 시비우를 보호하던 중요한 방어시설이었다. 조금만 시간을 할애한다면 ‘Harquebusiers Tower’, ‘Potters Tower’과 같은 다른 망루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여행지 : 불가리아 - 루마니아

 

여행일 : ‘19. 5. 29() - 6.5()

세부 일정 : 소피아릴라소피아(1)플로브디프벨리코 투르노보(1)이바노보부카레스트(1)시나이아브란브라쇼브(1)루피아시비우시기쇼아라(1)투르다클루지나포카

 

여행 다섯째 날 : 루피아 요새(Cetatea Rupea)

 

특징 : 루마니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중세의 요새 중 하나이다. 브라쇼브 카운티와 무 레스 카운티 경계, cohalm언덕의 꼭대기에 위치한 요새는 오랜 시간동안 전략적 위치에서 주변 언덕과 계곡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피난처의 역할을 했다. 1432년과 1437년에 터키에게 약탈당했고, 1643년에는 엄청난 화재로 폐허가 되어 버려졌다. 이후 오랫동안 방치되어 오다가 2002년 정부의 노력으로 성채가 복원되면서 루마니아에서 가장 매력적인 관광지 중 하나로 탈바꿈되었단다.

 

 

 

요새로 가는 도중 차창 너머로 나타나는 루피아요새의 전경을 눈에 담을 수 있다.

 

 

 

 

 

 

 

차에서 내리면 요새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바위절벽 등 험준한 지세를 이용한 다른 요새들과는 달리 이곳은 언덕 위에다 쌓아올렸다. 그마저도 경사가 밋밋하니 성벽의 높이나 두께의 강도를 한껏 높였지 않을까 싶다.

 

 

 

 

 

 

이곳 루피아 요새는 최근들어 관광객들이 부척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 그러니 기념품 판매점이 들어서지 않을 리가 없다. 하지만 요새를 모티브(motive)로 사용한 상품은 눈에 띄지 않았다. 요새를 브랜드로 사용할 정도까지는 이르지 못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기념품에 흥미를 잃으니 자연스레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가게 주변에는 요새의 내력을 적은 안내판과 조감도 외에도 성채의 복원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관광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배려일 것이다. 하지만 루마니아어로 적어놓아 이방인에게는 그림의 떡이 되고 말았다, 하긴 영어로 적어놓았다고 해도 전체를 이해하기는 불가능했겠지만 말이다.

 

 

 

 

이젠 성채를 둘러볼 차례이다. 그런데 황토색 성벽에 뾰쪽한 첨탑이 어쩐지 눈에 익다. 유럽보다는 아랍 문화권에서 흔히 보아오던 모양새였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시설은 ‘Bacon Tower’이다. 성채의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식량창고로 사용했지 않나 싶다.

 

 

 

 

개개의 건축물 앞에는 가운데 성채의 성문(The middle fortress gate)’, ‘예배당(The chapel)’ 등과 같은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건물의 용도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외형들이 엇비슷하기 때문에 탐방객들에게는 꼭 필요한 배려라 할 수 있겠다.

 

 

성곽은 두 겹으로 쌓여 있었다. 안쪽의 성벽도 견고하게 쌓아올린 것이 난공불락에 가깝게 보였다.

 

 

 

 

 

 

 

 

 

 

중문(Middle Fortress Gate)을 통과하자 ‘Ungra Tower’라고 적힌 건물이 나온다. ‘Ungra’가 루마니아의 Braov County에 있는 코뮌의 이름인 것은 알겠는데, 건물의 용도는 모르겠다.

 

 

이어서 나타나는 것은 ‘The chapel’, 루마니아가 본디 하느님을 믿는 나라이니 예배당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 시설이라 하겠다.

 

 

 

 

 

 

 

 

 

 

 

 

 

 

내성(內城)에도 망루가 견고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상부에는 왕궁(The throne chamber)이 들어서 있었다. 높은 사람들이 조망 좋은 곳에 사는 건 고금을 막론하는 모양이다.

 

 

 

 

 

 

맨 꼭대기 건물에는 상부 거주지(The top lodge)’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장대(將臺 : 장수가 지휘하는 곳)가 있어야 할 자리이다. 아니나 다를까 내부에 탁자 하나만 덜렁 놓여있을 따름이다. 거주지라기보다는 장수의 지휘소로 이용되었다고 보는 게 옳지 않을까 싶다.

 

 

 

 

상부(The top)에서의 조망은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요새는 지역을 수호하기 위해 적군의 활동을 감시하는 곳이다. 그러니 조망이 뛰어날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아무튼 상부는 보초 한 명만 세워놓아도 개미 한 마리 숨어들지 못하게 보였다.

 

 

 

 

 

 

 

 

 

내려올 때는 왕궁 옆으로 난 통로를 이용했다. 왕궁이라고 해도 텅 비어있는 상태이니 눈요깃거리가 있을 리 없다.

 

 

 

 

 

 

 

이번에는 아까 올라왔던 반대방향으로 걸어봤다. 물론 내성(內城)의 위이다.

 

 

 

맨 마지막으로 만난 건물은 필사(筆寫)의 방(scribe tower)’이었다. 요즘으로 말하면 인쇄소라고나 할까? 루피아 요새는 그다지 크지 않은 성채이다. 그럼에도 갖출 것은 다 갖추었다고 보면 되겠다.

 

 

 

 

 

 

여행지 : 불가리아 - 루마니아

 

여행일 : ‘19. 5. 29() - 6.5()

세부 일정 : 소피아릴라소피아(1)플로브디프벨리코 투르노보(1)이바노보부카레스트(1)시나이아브란브라쇼브(1)루피아시비우시기쇼아라(1)투르다클루지나포카

 

여행 넷째 날 : 브라쇼브(Brasov)

 

특징 : 루마니아 중부 카르파티아산맥의 북쪽 기슭에 위치하는 도시로 브라쇼브 주의 주도(州都)이기도 하다. 몰다비아·왈라키아·트란실바니아 지방을 잇는 교통·상업의 중심지이며, 동쪽의 오스만제국과 서쪽의 유럽을 잇는 교역로에 위치하여 중세시대부터 트란실바니아 작센인의 식민지로 발전했다. 헝가리는 트란실바니아의 식민지화를 위해 12세기에서 13세기에 걸쳐 이곳에 독일인들을 집단 이주시킨다. 이들은 이후 트란실바니아 작센인(이하 작센인)‘이라 불린다. 13세기 초에는 몽골과 터키의 침입을 대비해 튜턴기사단에게 브라쇼브를 맡겨 국경수비를 강화시킨다. 13세기 중반 기사단이 물러갔지만 작센인들은 남는다. 이 시기 브라쇼브는 독일어로 크론슈타트(Kronstadt) 혹은 라틴어로 코로나(Corona)라 불렸다. 헝가리왕에게 특권을 부여받은 작센인들은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한편 정치적 영향력을 키워갔다. 반면에 루마니아인들은 시민으로 인정을 받지 못한 채 슈케이(Schei)라 불리는 외곽지역에 모여 살았다고 한다. 20세기까지만 해도 브라쇼브에는 루마니아인보다 작센인이 더 많았단다. 그러다가 1918년 트란실바니아지역이 루마니아에 합병되면서 브라쇼브도 루마니아의 도시가 되었고,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루마니아가 소련의 영향아래 공산화가 되면서 독일계 주민들은 서독으로 이주한다.

 

 

 

버스는 우릴 구시가지(Old town)의 입구에 있는 버스정류장에다 내려놓는다. 다른 옛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대형버스의 진입을 막고 있는 모양이다. 참고로 브라쇼브는 중세와 현대가 함께 호흡하고 있는 특이한 도시로 알려져 있다. 도시의 반쪽은 현대식 건물로, 다른 반쪽은 중세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중 구() 시가지를 오늘 방문하게 되는데, 예전 중세 시대의 집들이 나무나 돌로 만들어진 원형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존되고 있단다.

 

 

 

 

 

 

 

 

’T’자형 도로의 뒤로 보이는 건물은 조지 바리티투 도서관(Biblioteca judeteana george barititu)‘이란다. 그 옆으로 보이는 건물도 공공건물로 보이나 용도는 알 수 없었다.

 

 

 

 

중세풍의 옛 건물들을 오른편에 끼고 걷는다. 왼편은 브라쇼브에서 가장 크다는 중앙공원(parcul central)이다. 예쁜 꽃들과 나무들이 한데 어우러지며 멋진 경관을 만들어낸다니 시간이 있다면 한번쯤 둘러볼 일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길가에 놓아둔 벤치에라도 앉아 공원이 주는 분위기에라도 빠져볼 일이고 말이다. 아무튼 도로가 널찍한데다 공원까지 끼고 있는 것이 시민혁명 때는 큰 역할을 했을 수도 있었겠다. 이곳 브라쇼브는 차우셰스쿠 통치에 반대한 시민들의 봉기가 처음으로 발생한 곳이기도 하니 말이다. 1987년 당시 임금삭감과 긴 노동시간, 식량배급 등에 불만을 품은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기본 식량 확보를 요구하며 거리로 나섰었다.

 

 

잠시 후 만나게 되는 삼거리에서는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이곳 역시 옛 건물들이 즐비하다. 아니 눈에 들어오는 건물들 모두가 하나같이 중세풍이다. ! 이곳 브라쇼브에서는 세월이 만들어놓은 독특한 문화를 엿보는 게 중요하단다. 도시가 루마니아는 물론이고 헝가리와 독일의 문화까지 혼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헝가리의 식민지였던 이곳 브라소보를 독일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세웠기 때문이란다. 때문에 지금도 독일계 루마니아인들이 이곳에 많이 거주하는 등 독일의 영향이 아주 강하단다. 도시 이름 자체를 ‘Kronstadt’라는 독일어로 표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곁가지로 나뉘는 골목도 아름답기는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저런 풍경을 보고 마치 독일에라도 와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고 했다. 그것도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도시란다. 독일인들이 이곳에 이주하면서 만들어진 도시라서가 아닐까 싶다.

 

 

걷는 도중에 성 페트루시 파벨 교회(St. Petrusi Pavel)‘라는 정교회를 만났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앞서가는 가이드의 뒤를 쫒기에 바빴기 때문이다.

 

 

 

 

역사를 품고 있는 작은 거리를 따라 걸으면 아름다운 색으로 칠해졌거나 멋지게 다듬어진 바로크 건축물들을 만날 수 있다.

 

 

오래된 중세 건물들을 눈에 담으며 걷다보면 삼각형 모양으로 훤하게 뚫린 광장이 나온다. 브라쇼브 구시가의 핵심인 스파툴루이 광장(Casa Sfatului)’이다. 의회광장이라 부르는 광장의 중앙에선 원형 분수가 물줄기를 힘차게 뿜고 있고, 분수대 주변 대리석 의자에는 사람들이 앉아 여유롭게 휴식을 즐긴다. 이 광장에서는 1968년에 시작된 '황금사슴벌레(Cerbul de Aur, Golden Stag) 뮤직 페스티발'이 매년 늦은 여름(2018년의 경우 829일부터 92일까지)에 열린다고 한다.

 

 

 

 

광장은 오래된 중세 건물들로 둘러싸여 있다. 광장과 주변 건물들이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풍경이 동유럽 제일이라고 극찬하는 이들까지 있을 정도이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광장 북쪽에는 붉은 지붕과 노란 시계탑이 예쁘게 조화를 이룬 옛 시청 건물이 서 있다. 현재 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건축 당시 용도는 48m 높이의 감시탑이었다고 한다. 15세기 증축 과정에서 58m로 더 높아졌다. 감시탑 꼭대기에서 병사들이 적의 침입 등 위급 시 나팔을 불어 시민에게 알렸다고 한다. 그래선지 나이 지긋한 시민들은 아직도 이곳을 트럼펫의 탑이라 부르기도 한단다. 매일 오후 6시면 당시의 상황을 재현하는 이벤트가 열린다고 했는데 시간이 맞지 않아 구경하지는 못했다. 병사와 나팔수 복장을 한 사람들이 나팔을 부는 등 쏠쏠한 눈요깃거리를 제공한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흰색 돔 위에 십자가가 있는 건물은 루마니아 정교회인 스판타아도미래 교회라고 한다. 13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정교하고 고풍스러운 외관 덕분에 교회라기보다 궁전 혹은 호텔 같은 인상을 준다. 참고로 루마니아인들은 정교회 신자이건 아니건 간에 정교회 교회력을 지킨다고 한다. 또한 신자가 아닌 사람들도 평생에 2, 그러니까 태어날 때와 죽을 때는 꼭 정교회를 찾는단다.

 

 

 

 

스파툴루이 광장과 이 도시의 메인 도로인 공화국 거리(Rebublicii Strada)가 만나는 곳에 서면 검은 교회(Black Church, 또는 흑색교회)’가 수줍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제단이 있는 뒤쪽 면이라고 보면 되겠다. 브라쇼브가 속해 있는 트란실바니아 지방에서 가장 큰 독일식 고딕 건축물로, 1385년에 짓기 시작해 15세기 완공할 때까지 100년 가까이 걸렸다. ‘검은 교회란 이름은 1689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군대의 공격을 받아 건물 외부와 내부가 불에 타 검게 그을린 데서 유래했단다. 38m에 길이가 89m인 이 교회는 독일 여행 때 보았던 뮌헨성당 만큼이나 웅장해 보였다.

 

 

외관은 복원을 통해 해마다 조금씩 그을음을 벗겨내고 있다고 한다. 그 때문에 검은 벽돌과 흰 벽돌이 섞인 모자이크 같다는 느낌이 든다. ‘검은 교회라는 이름이 무색해졌다는 얘기이다.

 

 

외벽은 르네상스와 바로크 양식의 영향을 받은 조각상들로 장식돼 있다.

 

 

벽면에 부조(浮彫)된 조형물들을 구경하며 돌다보면 교회의 전면부가 그 자태를 드러낸다. 이 교회는 독일인들에 의해 세워졌다. 지금도 독일계 루마니아인들이 예배를 드리는 루터파 교회의 본산이라고 한다. 전형적인 독일식 고딕양식으로 지어진 이유일 것이다. 100년이라는 긴 세월을 거쳐 완공된 교회는 또 다른 인고(忍苦)를 세월을 100년이나 겪어야만 했다. '검은 교회라는 이름을 얻게 만든 화재 이후 재건에 걸린 시간이다. 65.5.m 높이의 종탑도 이 때 만들어졌는데, 종탑 안에는 루마니아에서 가장 무거운 6,300kg짜리 종이 매달려 있다고 한다. 이처럼 역사적으로나 규모면에서 브라쇼브 최고의 건축물이자 상징으로 꼽힌다.

 

 

 

 

 

 

내부는 들어가 보지 못했다. 아니 일부러 들어가지 않았다는 게 옳은 표현이겠다.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1839년에 만들었다는 파이프오르간을 구경 못하는 우()를 범해버렸다. 베를린 부흐홀츠(Buchholz)사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단 하나의 제품이라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미리 알아보지 못하고 여행을 떠나온 내 잘못이 아니겠는가. 참고로 총 4000개의 파이프 관으로 만든 이 오르간은 유럽 남동쪽 지역에서 가장 큰 것이라고 한다. 음의 공명과 우아하고 정교한 음향 덕에 이전 시대는 물론, 지금도 큰 규모의 클래식 콘서트에 쓰일 정도로 귀한 악기이자 보물이란다.

 

 

교회를 한 바퀴 돌다보면 '요하네스 혼테루스(Johannes Honterus, 1498~1549)'의 동상을 만날 수 있다. ‘비엔나(Vienna) 대학을 졸업한 그는 이 지역에서 종교개혁을 주도하고 이곳에서 일생을 마친 '트란실바니아의 사도'였다. 인도주의자이며 신학자로 선교활동과 교육에 큰 공헌을 하였으며 특히 1535년에는 트란실바니아 최초의 인쇄소도 세웠단다. 동상아래에는 그의 업적이 새겨져있다.

 

 

 

 

동상의 손이 가리키는 곳에는 요하네스 혼테루스 기념관이 있다.

 

 

이 근처에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있다고 했는데, 혹시 학교 건물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돌아온 광장, 아까보다 관광객들의 숫자가 많이 늘었다. 유럽의 광장은 주민들의 삶의 중심이자 터전이 되어 온 곳이다. 이곳도 만찬가지라고 보면 되겠다. 그러니 드넓은 공터가 있을 건 뻔한 일, 1945년부터 1990년까지는 이곳에서 장이 서기도 했단다.

 

 

 

스파툴루이광장에서 공화국광장으로 가는 리피블리카거리에는 야외 카페가 즐비하다. 이 거리가 보행자 전용도로라서 가능했을 것이다.

 

 

광장의 남동쪽에 위치한 해발 900m템파 산(Tampa Mountain)‘은 구시가와 신시가를 나누는 역할을 한다. 도보나 케이블카를 이용해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데 그 푸른 언덕에다 할리우드에서나 볼 법한 커다란 글씨체로 브라쇼브(Brasov)라고 적어 넣었다. 브라쇼브가 원래 이곳 탐파산 위에 지어진 요새에서 출발했다고 하더니 이를 선전이라도 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건물들의 뒤로 하얗게 보이는 건축물은 백색탑(Turnul Alb)’이다. 브라쇼브 성벽을 따라 있는 요새 가운데 하나로 1494년에 그 옆에 있는 흑색 탑과 함께 축조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저 건축물은 광장에서 볼 때는 사각으로 나타나지만 뒤는 둥글게 지어졌다. 원통을 절반으로 뚝 잘라놓았다고 보면 되겠다.

 

 

 

 

백색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는 흑색 탑(Turnul Negru)이 자리하고 있다. 원래 용도는 봉화탑이었는데 1559년에 번개에 맞아서 검은 그을음이 남으면서 흑색탑이라 부르기 시작했단다.

 

 

스파툴루이 광장에서 탐파 산방향으로 10분 조금 못되게 걸으면 브라쇼브를 대표하는 건축물인 스케이 성문(Poarta Schei)’이 여행객을 반긴다. 옅은 노란색의 예쁜 모양이 눈길을 사로잡는 이 문은 생김새와는 다르게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13~17세기 색슨족의 지배를 받던 시기 루마니아 원주민은 이 문과 성벽으로 격리된 스케이 지구에서만 거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성으로 들어올 때는 오직 이 문으로만, 그것도 정해진 시간에 통행료를 내고 성안을 오갈 수 있었고, 성안에서는 주택을 비롯한 어떤 재산도 소유할 수 없었단다. 1827년에 다시 지어진 현재의 문은 차가 다닐 수 있는 문 옆으로 사람들이 다닐 수 있는 작은 문이 따로 나 있다.

 

 

슈케이 문을 지나 조금 더 걸으면 아주 좁은 골목을 만날 수 있다. ‘스포리 거리(Strada sforii)’라고 적힌 화살 모양의 까만 이정표가 붙어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이정표를 따르다보면 비좁기 짝이 없는 골목이 나타난다. 135cm에 길이가 80m인 이 골목은 성인 2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데, 가다 보면 점점 더 좁아져 결국에는 혼자 걸어갈 수밖에 없는 정도가 된다. 골목을 걷다보면 연인의 골목이라는 별명을 만들어내게 만든 이유가 눈에 띄기도 한다. 연인을 어깨에 태우고 사진을 찍는 광경 말이다. 17세기 고문서에도 언급된 이 골목은 원래 소방도로의 기능을 했었다고 한다.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뒷골목을 들어가 봤다. 누군가는 이 도시를 일러 독일풍의 중세도시라고 했다. 13세기 독일인들이 이곳에 이주하면서 도시가 생겼고 이후 루마니아인들과 헝가리인들이 함께 공존하면서 발전해왔기 때문이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내 눈에는 발칸의 다른 도시들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시계요새(Cetatuia de pe straja)’로 여겨지는 성곽은 버스정류장으로 돌아오는 길에 먼 거리로만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글에 꼭 등장하기에 가보고는 싶었지만 산꼭대기에 위치하고 있으니 어쩌겠는가.

 

 

누군가 브라쇼브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곳이 다섯 군데라고 했다. ‘스파툴루이 광장(Piața Sfatului)’역사박물관(Muzeul de Istoriei)’, 검은 교회, 탐파 산, 그리고 성 니콜라스 교회(Saint nicolas church) 등이다. 이중 앞의 세 곳은 무리를 짓고 있어 한꺼번에 둘러볼 수 있는 반면, 탐파산과 성 니콜라이교회는 보다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만 가능하다. 그래서 미처 가보지 못한 성 니콜라스교회는 다른 사람의 사진을 잠시 빌려다 썼다. 참고로 성 니콜라스 교회1392년 나무로 지어지고 1495년에 석조 구조물로 대체됐으며 18세기에 확장을 거쳐 지금은 비잔틴, 바로크 및 고딕 양식이 혼재된 건축학적 걸작이 됐다. 다른 중세 교회들처럼 커다란 나무문이 있고 방호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 안에 높은 첨탑을 자랑하는 교회가 마치 왕국의 성 같은 위용을 보여준다.

 

 

 

하룻밤을 머물렀던 엠비언트 브라쇼브 호텔(Hotel Ambient Brasov rumnien)’

구시가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호텔로 4성급이라는 격에 부끄럽지 않은 편의시설을 보유하고 있었다. 객실의 크기나 청결도도 이만하면 최상급. 욕실에 일회용 세면도구와 드라이기가 비치되어 있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아침 제공되는 식사는 중간 정도였다.

 

 

여행지 : 불가리아 - 루마니아

 

여행일 : ‘19. 5. 29() - 6.5()

세부 일정 : 소피아릴라소피아(1)플로브디프벨리코 투르노보(1)이바노보부카레스트(1)시나이아브란브라소브(1)루피아시비우시기쇼아라(1)투르다클루지나포카

 

여행 넷째 날 : 드라큘라의 성으로 더 잘 알려진, 브란 성(Castelul Bran)

 

특징 : 브란(Bran) : 브라쇼브 시로부터 약 30k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브란, 포아르타(Poarta), 프레델룻(Predeluţ), 시몬(Şimon), 소호돌(Sohodol)이라고 하는 다섯 개의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이 마을은 13세기 초 튜턴 기사단(Teutonic Order)‘이 디트리히슈타인(Dietrichstein)이라는 나무로 된 요새를 건설하면서 역사가 시작됐다. 1242년 몽골에 의해 요새가 폐허화되었다가 1377년 헝가리의 지기스문트 왕이 현재의 브란 성 부근에 석재로 된 요새를 건설할 것을 명령하면서 재건됐다고 한다.

 

브란 성(Castelul Bran) : 일명 '드라큘라의 성'으로 알려지면서 동유럽 최고의 관광지가 된 곳. 1212년 독일 기사단의 요새로 만들어졌으나 1920년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리 여왕에게 헌정되었고, 이후 대대적인 개조를 통해 애초 요새로서의 외양이 사라지고 낭만적인 여름 궁전으로 바뀌었다. 그 덕분에 시대에 따른 새로운 양식이 추가되면서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등 다양한 양식이 결합된 특징을 갖게 되었단다. 브란성이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드라큘라의 성으로 알려지면서부터다. 1897년 아일랜드 작가 브램 스토커가 흡혈귀 소설 드라큘라를 쓰면서 왈라키아 공국의 군주 블라드 3를 가상모델로 삼았는데, ’블라드 테페슈또는 블라드 드라큘라로 불리던 그가 이 성에 머물렀던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브란성의 투어는 브라쇼브 주(Judeţul Brașov)에 위치한 산골마을인 브란(Bran)에서 시작된다. 동명(同名)의 성()이 먼저인지 아니면 마을이 먼저인지는 모르겠지만 성에 딸린 작은 마을이라고 보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다가 브란 성이 드라큘라의 성으로 입소문을 타면서 이곳 역시 유명 관광지로 변했을 것이고 말이다. 참고로 드라큘라 이야기는 15세기에 이 지역을 통치했던 블라드 테페슈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재위기간에 적과 범죄자를 가혹하게 다뤄 악명을 떨쳤다고 전해진다.

 

 

 

 

매표소로 들어가는 골목은 엄청나게 많은 가게들이 들어서 있다. 기념품뿐만 아니라 의류와 잡화 등 진열해놓은 품목들도 다양했다. 식당이나 호텔도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그만큼 관광객들로 넘친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긴 연간 60만의 여행자들이 이곳을 찾는다니 이를 말이겠는가. 참고로 카리스마 넘치는 뱀파이어 이야기는 소설로 발표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이어서 영화 등으로 리메이크 되면서 드라큘라 백작은 세계적으로 유명 인사가 되었다. 하지만 소설을 쓴 스토커는 사실 이곳을 방문한 적도 없단다.

 

 

 

 

드라큘라로 먹고 사는 동네답게 곳곳에서 드라큘라의 조형물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인파에 밀려 걷다보면 어느새 매표소이다. 입장권은 성인 기준으로 40레이(한화로 약 12,000), 나처럼 65세 이상의 노인(30레이)과 학생(대학생 25레이, 고교생 이하 10레이)들은 할인된 가격으로 구입이 가능하다. 입장은 연중무휴(年中無休)이나 입장시간은 동절기(11~3: 9~16)와 하절기(9~18)를 구분해서 운영한다. 단 월요일은 계절에 관계없이 12시부터 문을 연단다.

 

 

표를 사서 안으로 들자 잘 꾸며진 공원이 관광객들을 맞는다. 호수까지 갖춘 울창한 숲속에 산책로는 물론이고 관광객들을 위한 카페까지 들어앉혔다. 산책로를 따라 걷다보면 두어 종류의 조형물도 눈에 띈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브란성보다도 더 예쁘게 꾸며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공원에서 바라보는 성곽(城郭)은 한 폭의 풍경화로 나타난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이다. 드라큘라의 성이라는 분위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은 채 일반적인 중세 성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절벽 위에 아슬아슬하게 올라앉아 있는 것이 그저 예쁘기만 할 따름이다.

 

 

 

 

 

성은 뾰족한 탑과 지중해풍의 지붕을 벽돌이 에워싸고 있는 모양새이다. 건물은 시대에 따라 새로운 건축양식이 추가되면서 고딕과 르네상스, 바로크 등 다양한 양식이 결합되어 있단다.

 

 

 

공원 산책이 끝났으면 이젠 성으로 들어가 볼 차례이다. 성은 제법 가파른 오르막길의 끄트머리에 있다. 길가에는 두어 종류의 깃발들이 걸려있다. 그런데 온통 박쥐(흡혈?)들로 채워져 있는가 하면 저녁에는 혼자 돌아다니지 말라는 등 겁주는 문구들을 적어놓기도 했다. 아마 음산함을 모티브로 삼은 모양이다.

 

 

길을 걷는데 귀여운 달팽이가 보인다. 앞서가던 집사람이 걸음까지 멈추어가며 호들갑을 떤다. 으스스한 분위기를 연상하며 걷고 있었기에 낯선 풍경일 수도 있겠다.

 

 

성 앞에서 십자가를 만났다. 드라큘라는 십자가를 두려워한다고 했다. 어둠이 깔리면 나타난다는 드라큘라로부터 관광객들을 보호해주기 위해서 세운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싱거운 추측을 해본다.

 

 

안으로 들어가는 초입의 계단은 새로 만들어놓은 것이지 싶다. 지금과 같은 형태였다면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못 막아냈을 게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오른편에 보이는 부분은 감시탑이라고 했다. 가이드로부터 이에 대한 설명이 있었지만 사진촬영에 바빠 한쪽 귀로 흘려듣고 말았다.

 

 

 

경비실을 지나자 역대 성주들의 초상화가 걸려있었다. 소설 드라큘라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블라드 테페슈(Vlad Tepes)의 초상화(아래사진의 오른쪽에서 네 번째)도 보인다. ‘브람 스토커드라큘라는 사실 '브란 성을 배경으로 쓴 것은 아니란다. 이 분의 이름이 주는 느낌과 약간은 잔인했던 성주였다는 것이 소설의 모티브로서 채택된 것이 아닐까 싶다.

 

 

 

 

성은 밖에서 보다 안에서 바라볼 때가 더 아름다웠다. 서있는 장소를 불문하고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하나같이 한 폭의 그림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내부의 방들을 구경하다보면 마리 여왕(Queen Marie)과 공주 일레아나의 이런저런 삶과 관련된 얘기들을 적어 놓은 기록물들을 만난다. 그러나 관광객들의 관심은 온통 드라큘라에 쏠려있는 모양이다. 너나 할 것 없이 드라큘라의 흔적이라도 찾으려는 듯이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닐 따름이다. 참고로 이 성은 1920년 루마니아 공국들의 통일에 기여한 마리여왕에게 헌정되었다. 여왕이 죽은 후 일레아나 공주가 성을 물려받았으나 루마니아가 공산권이 되면서 후손들은 소유권을 박탈(1948) 당했다. 이후 정부가 국가문화재로 지정(1956)하여 중세역사미술박물관으로 재탄생시켰으나 2006년 합스부르크 왕가의 후손이 성의 소유권을 되찾아갔다고 한다.

 

 

 

 

 

 

 

 

 

 

레지나 마리아(Regina Maria)의 방도 보인다. 그녀로 여겨지는 흉상이 모셔져 있는 걸 보면 그녀가 머물던 공간이 아닐까 싶다.

 

 

 

 

 

 

‘Sala gotica‘라고 적힌 안내판도 보인다. 하단에 ’the gothic room’라고 덧붙여 놓은 걸 보면 이 부근은 고딕양식으로 꾸며놓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방어용으로 지어진 탓에 외관은 작고 단순하다. 하지만 내부는 좁고 가파른 비밀통로가 미로(迷路)로 얽혀있다. 그렇게 작은 방들이 연결되니 처음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길을 잃기 십상이다. 암살에 시달리던 성주가 찾아낸 지혜의 산물이란다.

 

 

내부는 층별로 전시관이 만들어져 있다. 층과 층은 좁은 계단으로 연결된다. 사람들이 사는 듯 물건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고 드라큘라 사진 대신, 어여쁜 왕비와 공주 사진이 눈길을 잡아끈다.

 

 

 

 

내부는 회랑(回廊) 모양의 복도가 만들어져 있다. 덕분에 어디서나 중정(中庭)이 눈에 훤하게 들어온다.

 

 

성 안은 관광객들로 넘쳐난다. 그래선지 밖이 내다보이는 공간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다. 하나같이 카메라 렌즈의 사냥감을 찾느라 분주한 모습들이다. 나 또한 그 가운데 한 명이었지만 말이다.

 

 

성의 꼭대기에는 조망이 툭 트이는 공간도 만들어져 있었다. 옛날에는 망루로 쓰였을지도 모르겠다.

 

 

 

 

작은 창문 사이사이로 브란마을이 내려다보인다. 푸른 숲속에 들어선 집들은 하나같이 붉은 지붕에 하얀 벽면이다. 발칸지역, 아니 지중해나 흑해 연안에서 만나는 일상적인 풍경이라 하겠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낯선 풍경이다. 이질적인 아름다움으로 다가오는 이유일 것이다.

 

 

 

 

아래쪽에 있는 회전식 창문은 두꺼운 목재로 만들어져 있었다. 적을 공격하고 난 후 외부로부터 날아오는 화살이나 총탄을 피하기 위한 방편이지 싶다.

 

 

블라드 테페슈(Vlad Tepes)‘의 초상화가 붙어있는 방도 보였다. 그가 생활하던 공간이 아닐까 싶다. 소설 드라큘라의 주인공으로 묘사돼 더욱 유명해진 그는 루마니아 첫 독립 국가인 왈라키아 공국의 통치자로 재위했던 인물이다. 테페슈라는 말은 그의 본명이 아닌 별명이었다. ‘창 꽂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테페슈가 별명이 된 이유는 당시 그가 적을 창에 꽂아 처형하고 그 모습을 보며 만찬을 즐기는 잔혹함을 보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가 살아 있을 때는 테페슈보다는 드라큘라로 더 많이 불렸다. 서명을 할 때도 본명이 아닌 블라드 드라큘라라고 서명을 하는 등 드라큘라라는 별명을 좋아했단다. 그래서 소설도 블라드 테페슈 공을 주인공으로 묘사하면서 드라큘라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물론 소설 속에서 흡혈귀로 묘사되는 것은 실제와 다르게 과장이 있긴 하다. 그래도 잔혹했던 블라드 테페슈와 그를 모티브로 한 드라큘라라는 소설 덕분에 루마니아에는 많은 관광 명소들이 탄생했다.

 

 

 

 

 

 

당시의 의상은 물론이고 쇠창살과 철도끼 등 중세시대 무기들도 전시되어 있다. 하지만 몸서리쳐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박물관에 진열된 물건일 뿐이다. 드라큘라라는 선입견을 갖고 으스스할 준비를 하고 성을 방문하지만 실제로는 동화 속에 나옴직한 멋진 고성이다.

 

 

 

 

 

 

이왕에 시작했으니 한걸음 더 나가보자. 소설 드라큘라(Dracula)‘는 영국의 작가 브램 스토커(Bram Stoker : 1847-1912)‘에 의해 쓰여 졌다. 흡혈귀 드라큘라 백작과 처음 만난 조너선 하커와 조너선의 부인 미나, 시워드 박사, 흡혈귀가 된 희생자 루시 웨스턴라 등 주요 등장인물의 일기와 일지 형태로 쓰여진 이 이야기는 트란실바니아의 흡혈귀가 초능력을 사용해 영국으로 건너가 자기가 먹고 살아야 할 피를 얻기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킨다는 줄거리이다. 1890, 스토커는 민속학에 정통했던 부다페스트대학(헝가리 소재)의 교수 아르미니우스 뱀버리로부터 동유럽의 흡혈귀 설화를 듣고 드라큘라에 대한 착상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몇 년 동안 도서관을 다니며 블라드 테페슈를 비롯한 흡혈귀들의 설화와 전설을 조사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출간된 드라큘라는 현실적인 가상의 글을 모아 놓은 형태의 서간체 소설이다. 엄청난 인기를 얻은 이 소설은 연극과 영화로도 여러 차례 만들어져 역시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루마니아인들의 영웅이었던 블라드 드라큘라는 역사적 사실과 무관하게 스토커의 드라큘라와 동일시되었다. 더불어 브란성도 드라큘라가 실존했던 증거인 양 관심을 모았다.

 

 

 

 

중정에는 우물이 있었다. 우물 아래로 비상통로가 나있다는데 눈으로 확인해 볼 수는 없었다. 그저 관광객들이 던져놓고 간 지폐와 동전들만이 어지럽게 나뒹굴고 있었을 따름이다.

 

 

 

 

 

에필로그(epilogue) : 드라큘라성에서는 관광객들을 위한 파티가 열리기도 한다는데 직접 체험해 보지는 못했다. 성의 투어를 끝내면 야외에 설치한 텐트 안으로 안내되고, 이어서 좀비 치어리더들과 영화 속에 등장하는 기괴한 옷을 입은 이들이 분위기를 한껏 이끌어준다고 했다. 피를 주제로 한 붉은 칵테일을 바에서 만들어 내면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이 칵테일을 권한다는 것이다. 중세 시대의 성에서 밤에 진행되는 파티라니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좋은 추억거리 하나 만들어 갈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하긴 그런 멋진 행사가 아무 때나 열릴 리는 없겠지? 더우기 우리 같이 대낮에 투어를 끝내버린 관광객들이라면 기대조차 할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여행지 : 불가리아 - 루마니아

 

여행일 : ‘19. 5. 29() - 6.5()

세부 일정 : 소피아릴라소피아(1)플로브디프벨리코 투르노보(1)이바노보부카레스트(1)시나이아브란브라소브(1)루피아시비우시기쇼아라(1)투르다클루지나포카

 

여행 셋째 날 : 시나이아 수도원(Sinaia Monastery)

 

특징 : 카르파티아의 진주라 불리는 휴양도시 시나이아의 근원이자 상징이 된 수도원으로 발라키아공국의 왕인 미하이 칸타쿠지노(Mihail Cantacuzino)’1695년에 세웠다. ‘시나이아란 이름이 붙게 된 유래는 성경에 등장하는 시나이아반도의 시나이아산(시내산)’처럼 이 지역을 루마니아의 성스러운 영지로 여겼기 때문이란다. 이는 또 지역의 이름으로 굳어지기도 했다. 현재 20여 명의 정교회 수도사들이 거주하고 있다. 수도원 부지는 수도사들의 독방이 있는 낮은 건물로 둘러싸인 두 곳의 뜰로 구분되고, 각 뜰의 중앙에 비잔틴 양식의 그리 크지 않은 교회 건물이 서 있다. 하나는 1695년에 세운 것으로 옛 교회라고 불리고, 나머지 하나는 1846년에 세워졌는데 규모가 더 커서 큰 교회라고 불린다. 도서관이자 박물관으로 쓰이는 작은 방에는 1668년 최초로 루마니아어로 번역된 성경을 비롯해 필사본과 성상 등이 보관되어 있는데, 루마니아 최초의 종교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펠레슈 성을 출발한 버스는 한눈 팔 사이도 없이 시나이아수도원에 도착해버린다. 10분이 채 안되었을 것이다. 너무 빨리 도착해서였을까? 버스는 우릴 수도원에서 5분 정도 떨어진 곳에다 내려놓는다. 숲속에 들어앉은 아름다우면서도 고풍스런 건축물들을 구경하면서 걸어보라는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시나이아는 이름난 휴양도시이다. 그러다보니 경제력이 넉넉한 층들이 자신들의 별장을 이곳에 짓게 되었고, 또한 각자의 취향에 맞게 설계한 탓에 건물들마다 개성이 강한 외관들을 지니게 되었단다.

 

 

 

 

이곳이 휴양지로 알려지게 된 계기는 카를 1세가 여기에 별장인 펠레슈 성을 지으면서 부터라고 한다. 왕족이나 귀족들이라고 아름다운 곳을 찾지 않았을 리가 없다. 수도인 부쿠레슈티와 기차노선이 연결되면서부터는 왕족들도 이곳에서 여름휴가를 즐기게 되었단다. 루마니아가 낳은 세계적인작곡가 게오르그 에네스쿠도 여기서 여름을 보냈단다.

 

 

 

 

 

 

잠시 후 고풍스런 수도원 하나가 그 자태를 드러낸다. ‘시나이아 수도원으로 화려하다거나 규모가 크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하지만 루마니아 정교회 신자들에게는 정신적 지주로서의 존재감이 대단하단다. 수도원의 이름이 도시의 이름으로 굳어진 이유일 것이다. 수도원은 발라키아공국의 왕인 미하이 칸타쿠지노(Mihail Cantacuzino)’1695년에 세웠다. 성경에 등장하는 시나이아산(이집트의 시나이아반도 소재)’에 성지순례를 다녀온 그가 자신의 영지를 모세가 십계명을 받았던 시나이아산처럼 성스럽게 여겼기 때문이란다.

 

 

수도원으로 들어가는 문의 오른편에는 종루(鐘樓)가 자리하고 있었다. 1892년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지는 종은 그 무게가 무려 1,700kg도 넘는단다.

 

 

경내로 들어서면 1846년에 지어졌다는 큰 교회가 그 자태를 드러낸다. 루마니아의 전통양식인 뾰쪽한 모양의 돔을 갖고 있으며, 전체적으로는 아름다운 색체를 띠고 있다. 1846년 카롤 1세가 세웠는데 기존에 있던 구교회보다 규모가 크다고 해서 큰 교회라 불린단다. 정교회의 특징이랄 수 있는 화려한 성당 내부는 촬영이 금지되어 있었다.

 

 

 

 

곁에 있는 초록색 건물은 수도사들이 사용하는 건물이고, 반대편에는 종루와 역사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역사박물관에는 칸타쿠지노 가문의 유물들과 1668년 루마니아의 최초 성경 등 의미 있는 종교적 유물들을 많이 전시하고 있다는데 문이 닫혀있어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초를 꽂고 기도하는 곳도 보인다. 유럽의 성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경내에는 나무십자가와 함께 철로 만든 독수리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터기 지배 시절에 만들어졌는데 쇠망치로 두드려 수도사들에게 예배시간을 알려주었단다. ()이었던 셈이다. 조형물은 독수리의 머리가 두개인데 각각 국가와 교회를 상징한단다. 머리 가운데는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왕관이 있다. 조형물 옆에는 타께 이오네스꾸(Tacho Ionescu : 1859-1918)’의 무덤이 있었다. 1918-1920년 파리강화조약 때 루마니아 대표단을 이끌었던 인물이란다.

 

 

음수대(飮水臺)의 특이한 생김새에 이끌려 카메라에 담아봤다.

 

 

교회를 마주보고 작은 문(中門)을 지나면 낮은 건물들이 중정(中庭)을 빙 둘러싸고 있다. 수도사들이 살고 있는 수도원이다. 1690년도에 세워졌는데 처음에는 12명의 수도사로 시작했다고 한다. 지금은 더 많은 수의 수도사들이 머무르고 있단다. 수도원은 전체적으로 소박하고 정결한 느낌이다. 수도사들의 청빈한 삶과 수도에 정진하는 모습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고나 할까?

 

 

 

 

 

 

 

 

중정의 한가운데에는 자그마한 예배당이 터를 잡았다. 1695년 수도원이 처음으로 문을 열 당시 건축된 () 교회인데 17세기 말에 약간 증축한 것을 제외하곤 건축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단다.

 

 

 

 

 

옛 교회는 성서의 내용을 담은 프레스코화가 잘 보존되어 있다. 건물을 바치고 있는 기둥의 부조(浮彫)가 특이하며, 입구의 벽면에 그려 넣은 천국과 지옥의 프레스코화가 유명하다.

 

 

 

 

교회 내부는 많이 작다. 하지만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었다.

 

 

 

 

 

 

 

 

 

 

경내를 둘러보는데 검은 수도복을 입은 수도사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수도원에는 저런 수도사들이 20명 정도 거주하고 있단다.

 

 

 

 

점심을 먹으러 들렀던 팰리스호텔(Palace Hotel Sinaia)’인데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상에 오른 메뉴는 미티데이(mititei)’, 루마니아 국민들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는 음식이란다. 생김새는 우리의 떡갈비와 매우 흡사하나 고기의 종류와 부위가 다르다고 한다. 대부분 유럽 음식이 그렇듯 고기의 간이 세고 향도 강했으나 내 입에는 딱 맞았다. 함께 나온 감자도 바삭하게 구워져 맛과 식감이 뛰어났다. ‘미티데이는 루마니아의 국민술이라는 추이카(tuica)’라는 술을 곁들여 마시는 게 현지 전통 방식이라고 한다. 추이카는 자두로 만든 브랜디의 일종인데, 난 한국산 소주에 루마니아산 맥주인 우르수스(Ursus)를 섞어 반주로 삼았다. 한국 사람에겐 역시 한국 술이 제격 아니겠는가.

 

 

 

 

점심 후에는 30분 정도의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마침 호텔의 뒤편이 ‘Central park’라서 모처럼 눈요기도 즐기면서 소일할 수 있었다. 이곳 시나이아는 '카르파티아' 산맥의 해발 800m 고지대에 위치한 휴양지이다. 그러니 자연경관이 뛰어날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다. 공원은 그런 특징들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독일의 무성한 숲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숲속에는 산책로와 더불어 정자와 벤치 등 편의시설들을 고루 갖추었다. 페인트칠을 해놓은 거목의 그루터기들도 전시해 놓았다. 공원을 조성하면서 베어낸 것들이 아닐까 싶다.

 

 

 

 

 

 

 

 

동상도 여럿 보였다. 하지만 누구인지는 알아낼 수 없었다.

 

 

공원의 한쪽 귀퉁이에는 중세의 궁전을 연상시키는 건축물이 들어앉았다. 화려한 외관에 이끌려 다가가보니 카지노(casino)란다. 1912년에 카를 1세에 의해 지어졌으며 지금은 컨벤션센터로 사용된다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자그만 묘역(墓域)도 보였다. 국기를 게양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대포까지 진열해 놓은 걸 보면 나라를 지키다 순국한 이들이 잠들어 있는 모양이다.

 

 

 

다음 일정이 기다리고 있는 브란으로 가는 길에 부체지산(Bucegi Mt. 2,504m)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카라이만 봉(caraiman peak)에는 기네스북에까지 오른 십자가(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가 세워져 있다는데 육안으로 식별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조명이 켜지는 밤에만 구경할 수 있나보다. 참고로 이 십자가는 루마니아 2대국왕의 부인인 마리아 왕비가 1차 세계대전 승전 기념으로 국민들에게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잊지 말고 항상 십자가를 바라보며 신앙을 지키라는 뜻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여행지 : 불가리아 - 루마니아

 

여행일 : ‘19. 5. 29() - 6.5()

세부 일정 : 소피아릴라소피아(1)플로브디프벨리코 투르노보(1)이바노보부카레스트(1)시나이아브란브라소브(1)루피아시비우시기쇼아라(1)투르다클루지나포카

 

여행 넷째 날 : 루마니아의 국보 1, 펠레슈성(Peleş Castle)

 

특징 : 카르파티아의 진주라고 불리는 휴양도시 시나이아에서 단연 최고로 꼽히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카를 1(Carol I)’의 명에 의해 1873년에 건설을 시작한 이 성은 네오르네상스 양식으로 설계되었으며, 처음에는 독일 건축가 빌헬름 도데러(Wilhelm Doderer), 나중에는 그의 제자 요하네스 슐츠(Johannes Schultz)가 공사를 감독하여 완성시켰다. 이후 왕가의 여름 휴양지로 활용되었으며, 1914년 카를 1세가 죽자 이곳에 묘를 만들었다. 정교한 장식을 새긴 나무로 만든 건물 외관은 물론 건물 내부와 정원, 주변경관까지 모든 것이 아름답고 화려하다. 카르파티아 산맥의 우뚝 솟은 봉우리와 숲으로 둘러싸인 모습도 장관을 이루며 건물은 정면에 조각정원이 딸린 커다란 공원 안에 세워져 있다. 성을 지을 때 경비실, 사냥용 별장, 마구간, 발전소 등 부속건물들까지 같이 건설되었으며, 자체 발전소를 갖추고 있어 유럽에서 전력을 사용해 불을 밝힌 최초의 성이기도 하다. 중앙난방을 사용한 최초의 성이었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루마니아의 국보 1로 지정되어 있는 이유일 것이다.

 

 

 

펠레슈 성을 둘러보려면 우선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약 두 시간 가량 떨어진 시나이아(Sinaia)’라는 도시까지 와야만 한다. 시나이아는 카르파티아 산맥이 있는 프라호바 주의 한 도시인데 경관이 수려하여 예전부터 휴양도시로 유명했다고 한다. 그래서였는지 루마니아 왕국의 초대 왕이었던 카를 1세는 이곳에 여름 별장으로 펠레슈 성을 지었다.

 

 

 

 

성은 마을 주차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어 울창한 숲속을 잠시 걸어야만 만날 수 있다.

 

 

숲길이 끝나면 중세풍의 건물들이 관광객을 맞는다. 펠레슈성의 부속건물인데 성과 비슷한 형식의 네오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져 하나같이 아름답다. 펠레슈 성보다 규모만 작다고 보면 되겠다.

 

 

 

 

 

 

펠레슈성은 그동안 보아왔던 유럽의 다른 성들과는 많이 다른 외관을 갖고 있었다. 우중충해 보이던 다른 석성(石城)들과는 달리 높이 솟은 첨탑 등 동화 속에서나 만나볼 법한 아름다운 외관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목재와 그림이 함께 섞인 독특한 외관은 그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양식이었다. 또한 성은 주변의 자연경관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푸른 나무숲은 물론이고 주변의 산릉들까지 시야에 들어오는 등 여름궁전이라는 목적에 딱 어울리는 풍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궁전에 이르면 아름다운 벽화가 그려진 뜰이 나온다. 그림은 궁전의 하얀 벽면을 채우고 있는데 주 건축재인 목재와 잘 어우러지며 보는 이에게 새로운 감흥을 불러일으키게 만든다. 건물은 독일 건축가와 체코 건축가가 설계를 맡았으며, 목재와 벽돌, 대리석 등을 이용한 독일의 신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이젠 안으로 들어가 볼 차례이다. 입장료는 기본이 20레이(5유로)이다. 하지만 이는 1층에 한정된다. 3층까지 모두 둘러보고 싶다면 50레이를 추가로 내야만 한다. 거기다 사진이라도 찍고 싶을 경우엔 32레이(8유로)를 따로 지불해야만 한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셈이다. 그렇다고 사진촬영을 포기할 수야 없지 않겠는가. 점심상에 올릴 요량이었던 반주를 빼내기로 하고 카메라를 챙기는 이유이다. 참고로 이곳 루마니아는 EU 회원국이지만 자체 화폐 레우(Leu·복수형은 레이)를 쓴다. 1레우는 300원 안팎이다. 현지 맥주 한 캔이 5레이, 담배 한 갑이 8~10레이, 1.5리터 생수가 2~3레이여서 전반적인 생활 물가는 한국보다 조금 낮은 편이라고 한다.

 

 

궁전은 총 3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방이 무려 170개나 된단다. 내부는 전체적으로 목제로 꾸며진 모양새였다. 나무로 만들어진 기둥이나 난간, 벽면은 빈틈없이 조각이 되어있었고, 천정에 그려진 그림과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까지 무엇 하나 놓칠 것이 없는 곳이었다. 곳곳에 배치해 놓은 수천 점에 달하는 그림과 조각품들도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구경거리였다.

 

 

 

 

 

 

 

 

 

 

성은 10세기 후반의 르네상스와 바로크, 로코코 양식이 혼용된 독일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물이다. 건축 당시 터키와 알바니아, 체코 등에서 유명한 건축가들을 불러들였고 400명의 인부가 동원되었단다. 성의 내부와 외부는 모두 나무 재질의 화려함을 살려서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건 각종 무기들이었다. 1903년부터 1906년까지 조성된 무기의 방에는 4,000점에 달하는 유럽과 동양의 무기류가 전시되어 있는데, 얼마나 다양한지 그야말로 박물관이 따로 없는 것 같았다.

 

 

 

 

 

 

 

 

 

 

내부는 사치스러울 정도로 호화롭게 꾸며져 있다. 아름다운 도자기와 금이나 은으로 만든 접시, 크리스탈 샹들리에, 멋진 조각들, 그림,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가구들까지 어느 것 하나 호화롭지 않은 것이 없었다.

 

 

 

 

 

 

 

 

왕궁도서실에는 황제가 유사시에 다른 곳으로 피해 이동할 수 있도록 비밀문도 만들어 놓았다. 설명을 듣기 전에는 눈치를 채지 못할 만큼 감쪽같았다.

 

 

 


 

 

 

 

수많은 방들 중에는 시리아와 이란, 이라크, 터키, 알바니아, 인도, 중국, 아프리카 등에서 수집한 각종 물건이 전시된 국왕 집무실과 이탈리아 가구로 꾸며진 이탈리아 룸, 100년도 더 된 크리스탈 거울이 걸린 베네치아 룸, 음악회와 영화를 즐기던 극장 등이 눈길을 끈다.

 

 

 

 

 

유럽 미술가들의 회화작품 2,000여 점도 소장되어 있다.

 

 

 

 

 

 

 

 

1875년에 지은 옛날 건축물임에도 불구하고 이 성에는 세 가지의 최신 설비가 장치되어 있다고 한다. 첫째는 천정 자동 개폐식 환기 장치이고 둘째는 음식을 나르는 엘리베이터 시설, 셋째는 중앙 집진식 청소 장치란다.

 

 

 

 

 

 

 

 

 

 

 

 

 

 

아쉽게도 펠레슈성의 또 다른 볼거리라는 정원은 지나쳐버리고 말았다. 정원 안쪽에 조각공원이 있다는데 아쉬운 일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가이드의 뒤만 쫄쫄 따라다는 게 패키지여행의 특징이 아니겠는가. 떠나오기 전에 예습이라도 해두었으면 잠시라도 짬을 내었을 텐데 그러지도 못했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으니 이쯤은 감수해야 할 일일 것 같다.(사진은 다른 분의 것을 빌려왔다)

 

 

언덕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면 규모가 조금 작은 성 하나가 나온다. 독일 '호헨쫄레른' 왕가 출신의 카를 1세가 자신의 조카이자 미래의 왕이 될 페르디난드 왕자 부부를 위해 1899년 건축을 시작해 1902년에 완공한 펠레쇼르 성(Castelul Pelisor)’이다. 그는 펠레슈 성을 유난히도 싫어한 페르디난드의 부인 마리를 위해 펠레슈 성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언덕 위에 이 성을 지었다. 때문에 마리 왕비의 개인적인 취향이 많이 반영되었다고 한다. 펠레슈 성보다 더 여성스러운 느낌이라는 것이다. 건축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그게 다 그거로 보였지만 말이다.

 

 

 

 

 

아르누보 양식으로 장식되어 있다는 내부는 들어가 볼 수 없었다. 덕분에 관람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는 호화스런 내부 장식도 볼 수 없었다. 루마니아의 두 번째 왕이었던 페르디난드가 숨을 거둔 방과 침대는 물론이고, 한때 차우세스쿠 대통령이 사용하던 별장의 모습도 볼 수 있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여행지 : 불가리아 - 루마니아

 

여행일 : ‘19. 5. 29() - 6.5()

세부 일정 : 소피아릴라소피아(1)플로브디프벨리코 투르노보(1)이바노보부카레스트(1)시나이아브란브라소브(1)루피아시비우시기쇼아라(1)투르다클루지나포카

 

여행 셋째 날 : 루마니아의 수도, 부카레스트(Bucharest)

 

특징 : 루마니아(Romania) : 발칸 반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갖고 있는 국가로 BC 1세기 경 다치아(Dacia)인에 의해 트란실바니아·왈라키아·몰다비아를 통일하여 강력한 제국을 형성했다. AD 105년에는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정복당했고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 이때 로마의 정착민들과 다키아인들 사이에 결혼하는 이민족간의 혼합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 새로운 민족이 생성되었단다. ‘로마인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과 토지라는 의미의 루마니아(Romania)’는 이를 근거로 한단다. 이후 제1차 세계대전 후까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지배를 받았으며 오스만 투르크의 발칸반도 진출 때에는 그들의 지배도 받게 된다. 1877년이 되어서야 러시아ㆍ투르크의 7차 전쟁의 결과로 마침내 독립국가를 이루고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으로 트란실바니아 지역과 불가리아의 도브루자 지역을 획득해 루마니아 최대의 전성기를 맞는다. 하지만 1944년 소비에트 군대에 의해 점령당했고, 1948년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의 위성국가가 되었다. 그러다가 198912월의 유혈 시민혁명으로 독재자 니콜라이 차우셰스쿠가 처형당함으로써 공산정권은 막을 내렸다. 이어서 1990년에는 보통선거가 실시되었고 루마니아 공화국으로 거듭난다. 2004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했고, 2007년에는 유럽연합(EU)의 회원국이 되었다. 참고로 루마니아는 한반도의 1.1배쯤 되는 국토에 21백만 명 남짓되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은 2717달러란다. 석탄·석유·천연가스 등의 천연자원이 풍부한 덕분이다. 종교는 정교(Orthodox)86.7%로 지배적이며 가톨릭 4.7%, 개신교가 3% 이다. 또 하나 동유럽에서 유일한 라틴 계열의 민족이라는 것도 기억해 두자.

 

부카레스트(Bucharest) : 루마니아의 수도로 자국 언어로는 부크레슈티(Bucresti)‘, ‘행복이 가득한 곳이라는 뜻을 담고 있단다. 부쿠레슈티가 기록에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1459년이다. 중세 이래 왈라키아 공국의 수도가 되어오다가 1861년 왈라키아와 몰다비아의 합방으로 루마니아가 성립되자 그 수도가 되었다. 그 이후 부쿠레슈티는 급속도로 성장, 동쪽의 파리라는 별칭을 얻었다. 그만큼 아름다운 거리를 자랑했다는 애기이다. 하지만 지금은 구 시가지의 일부만 옛 자취를 유지하고 있고 오래된 건물과 교회는 독재를 이어온 공산당의 손에 산산이 파괴되었다. 대신 공산당 본부와 인민의 궁전 같은 엄청나게 거대한 건물만 눈길을 끈다. 1차 세계대전 승리 기념으로 프랑스 파리를 본떠서 부카레슈티 개선문을 만들었고 승리의 광장을 중심으로 8거리가 있고 공원 등 녹지 시설이 풍부하다.

 

 

 

부카레스트 여행은 혁명광장(Piata Revolutiei)에서부터 시작된다. 이곳은 1989년 시민혁명 당시 독재자 차우셰스쿠(Ceausescu,N.)의 명령에 따라 시위대에게 무차별 사격이 이루어졌던 장소이며, 또한 그가 공산당 본부 건물에서 황망히 헬리콥터로 탈출하는 장면을 TV로 본 세계 시민에게 낯익은 곳이기도 하다. 루마니아 혁명은 사실 구 유고연방 TV를 볼 수 있었던 서쪽 티미쇼아라에서 먼저 시작돼 며칠 후 부카레스트로 번져왔다. 당시 이란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차우셰스쿠는 1221일 부카레스트에서 친위시위로 맞불을 놓아 권력을 과시하려 했다. 그러나 혁명광장에 모인 친정부 군중까지도 반정부·반공산당 시위대로 변한다. 시위의 규모는 계속 커져 1222일에는 루마니아 국영 TV를 장악하고 혁명의 승리를 선포하게 된다. 루마니아의 민주주의를 태동시킨 시민들의 피와 눈물로 얼룩진 장소인 셈이다. 그래서 공화국 광장이라는 이름도 혁명 광장으로 바뀌었단다. 선입견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직도 광장 어디선가 혁명의 함성이 들리는 것만 같다. 참고로 시민혁명에 놀란 차우셰스쿠는 공산당사 옥상에서 헬리콥터로 급히 탈출했으나 몇 시간 후 체포되고 성탄절에 총살당했다.

 

 

혁명광장의 중앙에는 1941년에 건립된 구() ‘공산당본부(Fostul Comitet Central al Partidului Comunist Roman)’가 우뚝 서있다. 1989년의 시민혁명 당시 독재자 차우세스쿠가 저 건물의 테라스에서 시민들에게 자신을 지지해 줄 것을 요구했단다. 하지만 광장에 모인 친정부 군중까지도 반정부·반공산당 시위대로 변했고, 시위대를 진압하던 군대마저 시민들의 편이 되자 위기에 몰린 그는 저 건물의 옥상에서 부인과 함께 헬기를 타고 탈출한다. 조종사의 배신으로 불과 3일 만에 경찰에게 체포되었지만 말이다. ‘인민의 전당으로 이전한 상원의사당이 2005년까지 사용했다고 해서 세나트(Senat)’라고도 불리며, 현재는 행정과 내무를 담당하는 정부기관이 들어있단다.

 

 

광장에는 길쭉한 창에 타원형 조형물이 꼽혀서 피를 흘리고 있는 듯한 모양새의 탑()이 세워져 있다. 혁명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기 위한 혁명 기념탑이자 위령탑이란다. 뒤편에는 1989년의 혁명 당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비에 새겨져 있다. 이 나라를 민주주의 탈바꿈시킨 역사의 기록인 셈이다. 그런데도 비면(碑面)은 낙서로 가득 차있다. 30년 밖에 지나지 않은 위대한 사건을 벌써부터 잊은 사람들도 있었나보다. 아니 25m나 되는 창에 감자를 꽂아놓았다며 기념탑을 냉소적으로 평가하는 현지인들이 많다던데 그에 대한 반발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구 공산당본부 건물의 왼편 도로 건너에는 괴상한 모양새의 건물이 지어져 있다. 아래는 중세풍인데 그 위를 높다란 현대식 건물이 올라타고 있는 것이다. 저 건물은 차우세스쿠 정권 당시 청사를 드나드는 사람들을 감시하기 위한 비밀경찰들의 관사로 사용되던 곳이었다고 한다. 공산정권이 무너진 후 집주인이 건축허가를 신청하자 어찌됐던 기념비적인 건축물이니 2층까지는 원래 모습을 유지하라고 해서 저런 모양새로 변했단다.

 

 

 

 

 

광장의 한쪽, 그러니까 북쪽의 왕궁처럼 생긴 웅장한 바로크의 건물은 부크레슈티대학 중앙도서관이다. 이 도서관은 1893년에 건축된 이래 여러 번의 증축과정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1989년 혁명 후에 일어난 화재로 크게 파괴되었으나 복원되어 2001년에 재개관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200만 권이 넘는 장서 중 1/4이 타버리는 참화까지는 피할 수가 없었단다. 참고로 부크레슈티대학의 모체는 1694년 왈라키아의 통치자 콘스탄틴이 세운 왕립아카데미. 1776년 입실란티(Alexsandru Ipsillanti)왕이 교육과정을 개혁하여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라틴어 등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1854년에는 법학분야에서 최초로 졸업생을 배출하기도 했다. 1864년 쿠자(Alexsandru Ioan Cuza)왕이 법학, 과학, 문학 분야를 통합하여 오늘날의 부크레슈티대학을 만들었다.

 

 

 

 

 

도서관의 앞에는 루마니아왕국의 초대 국왕이었던 카롤1(Carol I)’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오랜 통치기간(1866~81 공작, 1881~1914 )에 많은 군사적·경제적 발전을 이룩했으나 압도적인 농촌 인구가 안고 있는 기본 문제에 대처하는 데는 실패했다고 알려지는 왕이다. 토지를 갈망하는 농민의 요구를 소홀히 한 탓에 19071만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피비린내 나는 농민반란을 야기시켰기 때문이다. 그의 통치로 행정부는 상당한 권위와 안정을 얻었으나, 기회주의적인 공작정치는 루마니아 공직사회가 안고 있는 최악의 병폐로 고질화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혁명광장의 한쪽 축은 옛 왕궁을 개조한 루마니아 국립미술관(루마니아어: Muzeul Naţional de Artă al României)’이 장식한다. 한때 왕궁으로 쓰였던 만큼 웅장하고 화려한 외관을 갖고 있다. 이 건축물은 1812년 부유한 상인 디누쿠 골레스쿠(Dinucu Golescu)’의 저택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아들이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건물을 팔았고, 대대적인 확장공사를 거쳐 1859년부터 왕궁으로 사용되었다. 왕궁은 1948년부터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주로 루마니아 중세와 현대 미술가들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으며 특히 니콜라에 그리고레스쿠(Nicolae Grigorescu)의 컬렉션이 유명하단다. 동양을 포함한 국제적 소장품도 자주 전시된단다. 회화, 조각, 도자기, 직물, 자수, 은세공품 등 다양한 장르의 115천여 작품을 소장하고 있단다.

 

 

 

 

혁명광장의 앞에는 루마니아 18세기에 건설된 루마니아 정교회가 있다. 붉은 벽돌조로 지어진 이 건물은 정교회의 특징인 목이 긴 두 개의 첨탑을 가지고 있다. 1722년 귀족 크레출레스쿠와 그의 부인 사프타(Safta)’의 의뢰로 지어졌다고 한다. ‘크레출레스쿠 교회(Biserica Kretzulescu)’라는 이름을 얻게 된 이유일 것이다. 루마니아의 독자적인 비잔틴 양식으로 건축된 건물은 1940년과 1977년의 지진 및 1989년의 혁명에도 끄떡없이 도시 한복판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입구에는 루마니아 정교회의 관례대로 죽은 자와 산 자에게 바쳐진 두 개의 촛대가 있으며, 내부로 들면 금빛 이코노스타시스(Iconostasis : 이콘을 거는 칸막이)가 눈부시다는데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주어진 자유시간이 넉넉했는데도 말이다. 사전준비 부족으로 교회에 대한 앎이 일천했으니 어쩌겠는가.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말도 있지 않겠는가. 그래도 내부에 당대의 유명 화가 게오르게 타타레스쿠의 작품 선악을 심판하는 신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아쉬워 할 수밖에 없었다.

 

 

이동 중에 대여용으로 여겨지는 자전거 거치대도 보였다. 우리에게는 조금 낯선 풍경일 수도 있으나 유럽에서는 이미 하나의 대중교통 수단으로 자리 잡은 지 이미 오래이다.

 

 

도서관의 옆에는 아테네 음악당(Ateneul Roman)’이 있다. 1888년 프랑스의 건축가 알베르 갈레옹에 의해 지어졌다는 이 건물은 부쿠레슈티를 대표하는 건축물 가운데 한 곳으로 손꼽힌다. 네오클래식과 바로크, 이오니아 양식 등 다양한 양식이 혼합된 데다 그리스 스타일의 돔 지붕을 만들었기 때문에 아테네 음악당’, 아테네움(Athenaeum)’이라고도 불린다. 내부 또한 화려하기로 유명하단다. 화려한 조각이 장식돼 있고, 화가 페트레스쿠의 루마니아 역사를 담은 그림이 돔 천장에 아름답게 그려져 있단다. 건물은 한때 서커스 장으로 이용되기도 했었지만, 지금은 오페라나 오케스트라 연주 등 음악회가 주로 열리는 공연장으로 사용되고 있단다.

 

 

 

 

음악당은 고대 그리스의 신전을 보는 듯하다. 건물이 워낙 아름답다보니 이곳을 바탕으로 화보나 웨딩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다고 알려져 있다. 내가 방문했을 때도 웨딩사진을 찍고 있는 신혼부부들이 두어 쌍이나 보였다. 외관만큼이나 화려하다는 실내는 들어가 보지 못했다. 문이 굳게 닫혀있었기 때문이다.

 

 

중요 건물들의 안내를 마친 가이드는 우리에게 1시간의 자유시간을 준다. 이 근처가 구시가지(Old town)이니 찬찬히 둘러보란다. 그의 말마따나 혁명광장 주변의 건물들은 하나같이 중세의 모양새를 하고 있다. 신고전주의인 네오클래식 스타일(Neoclassical Style)‘ 이랄까?

 

 

 

 

 

 

 

 

 

 

 

거리는 한마디로 멋지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역사가 오랜 멋진 건물들과 사회주의 시절 건설한 네모진 콘크리트 건물들과 마구 섞여 경관을 흉하게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혹시 무질서하다는 평가를 받는 서울의 건축물도 외국인들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까 걱정이다.

 

 

 

 

 

 

조금 더 걸으니 이번엔 아예 현대식 건물들 일색이다. 그만큼 구시가지가 작다는 증거일 것이다. 공산당이 다스리던 시절 오래된 건물과 교회들이 산산이 파괴되었다고 하더니 사실이었나 보다.

 

 

 

집결지인 혁명광장 근처에 있는 카페에서 생맥주를 한잔 시켰다. 집사람은 물론 커피다. 그리곤 갈증을 풀면서 사람구경을 시작한다. 약속시간에 이를 즈음 화장실까지 다녀왔으니 일석삼조(一石三鳥)’인 셈이다.

 

 

 

 

혁명광장을 떠난 버스는 우리를 인민궁전(Palatul Parlamentului)’의 앞에다 내려놓는다. 인민궁전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크다. 독재자 차우세스쿠가 본인의 힘과 권력을 보여주기 위해 북한의 주석궁을 본떠 지은 세계적인 규모의 궁전으로 단일 행정 건물로는 미국 국방부(펜타곤) 다음으로 크다고 한다. 건물은 총 12개 층으로 구성되어 있고 방이 3천개가 넘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규모로 지어졌는데, 인민궁전을 짓는 과정에서 국민들의 혈세가 엄청나게 투입된 것은 물론 문화재를 훼손하기까지 해서 원성이 자자했던 곳이다. 추후 인민궁전을 계기로 혁명의 바람이 불었고, 악명 높은 독재자 차우세스쿠는 궁전이 완공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처형당했다. 참고로 차우세스쿠가 처음부터 잘못 했던 것은 아니란다. 자동차 등의 제조업과 석유화학 등의 중화학공장을 설립하는 등 초기에는 국정을 잘 이끌어나갔다고 한다. 하지만 북한을 세 번씩이나 방문하고 길일성을 만나면서 확 바뀌었단다. 국민은 굶겨야 말을 잘 듣는다는 등 북한의 체제를 잘못 배워왔고, 체제유지를 위해 서로가 감시하는 사회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인민을 위한 집이라는 명칭으로 처음 건설을 시작했기에 인민궁전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사실은 차우세스쿠 대통령 개인을 위한 거대한 궁전이었다. 궁전을 짓기 위해 차우세스쿠는 설계 공모전을 열었고, 당시 무명이었던 건축가 안가 페트레스쿠가 선정돼 1984년 건축을 시작했다. 모든 건축 자재는 루마니아의 국산 자재만을 사용했다고 한다. 차우세스쿠는 저 건물의 발코니에서 인민들에게 손을 흔들고 싶어 했단다. 하지만 최초로 손을 흔들게 된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마이클 잭슨이었다고 한다. 세상에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보안 검색을 마치고 안으로 들어서자 놀라 벌어진 입이 다물어질 줄 모른다. 12개 층에 3000개가 넘는 방이 있는데, 내부는 3500여 톤의 수정으로 만든 480개의 샹들리에, 20의 양모 카펫, 금과 은으로 장식한 벨벳 등으로 꾸며져 있단다. 가이드는 폭 18m, 길이 150m에 이르는 회랑과 총 면적 2200m2의 대형 홀이 특히 아름답다며 설명에 열을 올린다. 하지만 이 화려한 궁전은 건축 초기부터 국민의 혈세를 남용하고, 궁전의 건축을 위해 문화재를 훼손하는 등의 일로 국민들의 원성이 엄청났었다. 결국 차우세스쿠는 궁전의 완공을 지켜보지 못한 채 시민들이 일으킨 혁명으로 처형당했다. 1997년 이후 건물은 루마니아 상류 관리 청사로 쓰이기 시작했고, 지금은 루마니아 국회와 국제학회장, 결혼식 피로연을 비롯한 다양한 행사장 등으로 사용하고 있다.

 

 

 

 

 

 

 

 

 

 

 

 

건물로 빙 둘러싸인 가운데 공간에는 작은 공원을 만들어 놓았다. 분수까지 만들어져 있는 등 본 건물의 크기만큼이나 실내정원의 규모도 크다.

 

 

카메라의 렌즈가 작아서 건물 전경을 한꺼번에 담을 수 없었는데, 눈치 빠른 가이드가 우릴 궁전의 정면으로 안내해준다. 인민궁전을 배경으로 삼아 인증사진을 찍기에 최상인 곳이다. 그뿐 아니라 대칭으로 지어놓은 맞은편 건물들도 사진 배경으로는 그만이라 하겠다.

 

 

 

 

 

 

 

 

개선문(Arcul De Triumf)’은 지나가는 길에 차창 밖으로 구경했다. 아래 사진은 함께 여행을 했던 의사선생님의 사진을 얻어 썼다. 저녁식사 후에 개선문까지 다녀왔다며 사진을 보내준 덕분이다. 아무튼 개선문은 1922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루마니아 용사들의 승리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단다. 처음에는 목조에 회반죽을 입혔으나 1930년대에 들어서 루마니아 조각가들이 새롭게 건축해서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 개선문을 다녀온 의사선생의 말로는 개선문 근처에 부쿠레슈티에서 가장 큰 헤라스트라우 공원(herastrau park)’이 있다고 했다. 공원 내에 루마니아 각 지방 전통 가옥을 예전 모습 그대로 재현해 놓은 농촌 박물관도 있다고 했으나 호텔 근처를 한 바퀴 돌아보는 것으로 만족한 나로서는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따라나선 패키지여행 상품은 보여주는 것만 볼 수밖에 없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덕분에 난 부크레슈티에서도 몇 곳의 명소를 놓쳐야만 했다. 그 가운데서도 국립 역사박물관(아래 사진)’을 가보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스와 로마, 헝가리, 이탈리아의 제노바 상인, 오토만 제국, 러시아의 지배를 거쳐 국민국가로 성장한 루마니아의 독특한 역사기록을 놓쳤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기회가 주어졌더라면 이 나라 역사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부끄럽고, 무엇이 자랑스러운지를 알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스타브로폴레오스 교회(Biserica Stavropoleos)’도 가보지 못했다. 1724년 건립된 역사 깊은 정교회 교회인데, 무려 300년 가까이 된 입구 쪽 베란다와 아름다운 프레스코화가 돋보이는 곳이다. 지진이 많았던 지역이라 스타브로폴레오스 교회 또한 많이 훼손되었고, 교회의 돔 역시 지진의 여파로 무너져 내렸지만 20세기 들어 복원되었다고 한다.

 

 

부쿠슈레티에서 인민궁전 만큼은 아니더라도 유명한 랜드 마크로 손꼽히는 건물은 마누크 여인숙(Manuc’s INN)‘이다. 아르메니아 사업가인 ’Emanuel Mârzaian‘에 의해 1808년 처음 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의 터키식 이름인 ’Manuc-bei‘라는 이름이 더 잘 알려져 있어서 마누크 여인숙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마누크 여인숙은 루마니아에서 가장 오래된 호텔인데 19세기 중반에는 부쿠레슈티에서 가장 중요한 상업중심 건물이기도 했다. 도매점, 소매점, 객실과 술집이 한데 어우러진 요즘 말로는 주상복합 건물이라 해도 될 듯하다. 1842년에는 잠깐 동안 시청사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여인숙이라는 명칭처럼 도시의 하층민들이 머물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레스토랑과 상점이 들어있다

 

 

 

 

왕궁 터(Palatul Si Biserica Curtea Veche)’도 못 둘러봤다. 구시가지에 위치하고 있으니 기초상식이 조금만 있었더라면 능히 찾아볼 수 있었을 것이니 이는 순전히 나의 불찰이었다 하겠다. 아무튼 이 왕궁 터는 14~18세기의 루마니아 왕들이 살았던 왕궁이 있던 곳이다. 이곳에 거주했던 왕 중에는 우리에게 드라큘라 백작으로 잘 알려져 있는 블라드 체페슈가 있는데, 그는 15세기에 이곳에 살았다. 지금은 지진과 화재로 인해 왕궁이 거의 소실되어 터만 남아 있지만 성터 중앙에는 블라드 공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하나 더, 왕궁 터 바로 옆에는 1545년에 건설된 성 안토니 교회가 있는데 이 교회는 부쿠레슈티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라고 한다.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왕들의 대관식이 열렸던 곳이란다.

 

 

하룻밤을 머물렀던 풀만 호텔 부카레스트(Hotel Pullman Bucharest Wolrd Trade Center)’

무역센터 안에 들어있는 4성급 호텔답게 널찍하면서도 깔끔한 객실과 화장실을 보유하고 있다. 기본적인 세면도구와 드라이기도 구비되어 있다. 공용시설로는 헬스장과 사우나, 실내 수영장, 마사지, 테니스장 같은 레크리에이션장이 제공된다. 아침식사도 빵과 햄, 샐러드 등 종류가 다양해 든든히 먹을 수 있었다.

 

 

조망도 뛰어난 편이다. 커튼을 열면 부카레스트시가지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호텔에 여장을 풀고 나서 주변을 돌아보기로 했다. 호텔 주변은 공원처럼 잘 가꾸어져 있었다. 그 속에 자유언론회관(House of the free Press)’이 들어앉았다. 루마니아 건축가 호리아 마이쿠1956년 소련 사회주의 리얼리즘 형식으로 지은 건축물이다. 모스크바 주립대학 본관을 모티브로 삼았다는 얘기가 있는데 그러고 보니 모스크바 여행 중에 한번쯤 본 것도 같다. 언론회관 앞 광장의 초입에는 자유를 향한 날개라는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세 개의 날개가 자유를 향해 하늘로 날아오르는 형상인데 지긋지긋한 공산주의에서의 해방을 기념하기 위해 100톤의 스테인리스강으로 높이 20m의 조형물을 만들었단다. 루마니아의 조각가 미하일 부크 레이의 작품인데 솟아오른 봉우리는 공산주의에 저항하며 싸우다 쓰러져간 이들의 무덤으로 해석된단다

 

 

체육관처럼 지어진 ‘Romexpo’도 근처에 있었다. 엑스포(EXPO) 등 각종 전시회가 열리는 곳이다. 이밖에도 몇 개의 건물을 더 보았으나 사진 게재는 생략했다.

 

 

 

에필로그(epilogue), 루마니아 사람들은 자신들의 민족적·문화적 특징이 로마의 영향에서 비롯되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러한 정체성은 주요 대륙으로 이어지는 통로에 자리 잡은 루마니아의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끊임없이 재확인되었다. 루마니아인들은 스스로를 고대 로마인과 다키아인의 후손이라고 여긴다. 고대 로마인은 AD 105년 트라야누스 황제 통치기에 남부 트란실바니아를 정복했다. 그리고 다키아인들은 도나우 평원의 북부 산악지대와 트란실바니아의 분지에서 살았다. 271년 아우렐리아누스 황제 통치기에 로마인들이 철수할 무렵에는 로마의 정착민들과 다키아인들 사이에 결혼하는 이민족간의 혼합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새로운 민족이 생성되었다. 루마니아 언어의 라틴적 뿌리와 대부분의 루마니아인들이 믿는 동방정교회가 이러한 두 문화의 혼합에서 기인했다. 이후 5세기 훈족의 도래로부터 14세기 왈라키아 공국과 몰다비아 공국이 등장할 때까지 루마니아 사람들은 외부 침략으로 인해 역사 문헌에서 사실상 사라졌다. 비잔틴왕국과 오스만제국, 합스부르크제국, 러시아 등 이웃 국가들의 야망의 격전지 역할을 할 때도 했다. 그러다가 1859년 왈라키아와 몰다비아 공국이 통합되었고, 1877년 그들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독립 선언 직후에 루마니아는 공용어를 키릴 알파벳에서 라틴어로 바꾸었으며, 서유럽, 특히 프랑스에서 고등교육을 받기 위해 학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덕분에 유럽 근대 국가로서는 뒤늦게 출발했지만, 루마니아는 20세기에 세계적 명성을 얻은 여러 인물들을 배출했다. 그들 중에는 작곡가 게오르게 에네스쿠, 극작가 외젠 이오네스코, 철학자 에밀 시오랑, 종교 역사가 미르케아 엘리아데, 노벨 문학상 수상자 조지 E. 펄라디 등이 있다.

여행지 : 불가리아 - 루마니아

 

여행일 : ‘19. 5. 29() - 6.5()

세부 일정 : 소피아릴라소피아(1)플로브디프벨리코 투르노보(1)이바노보부카레스트(1)시나이아브란브라소브(1)루피아시비우시기쇼아라(1)투르다클루지나포카

 

여행 셋째 날 : 이바노보의 암석 교회군(Rock-hewn Churches of Ivanovo)

 

특징 : 불가리아의 북동부 루센스키롬 강계곡 이바노보 마을 주위에는 많은 암굴 성당, 예배당, 수도원이 모여 있다. 이는 12세기에 수도사들이 동굴을 파서 만들어 놓는 것이라고 한다. 수도사들은 바위를 깎아 수도실, 교회당, 예배당을 건설했다. 당시 수도원 수가 약 40개에 달했고 그 외의 종교 시설 용지도 300개나 있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수사들이 수도생활을 하던 곳이었으나 13세기에 성당이 세워진 뒤에는 불가리아 종교·문화의 중심지로 변했단다. 하지만 대부분은 현존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두자. 이들 수도원 건축물 안에는 13세기부터 14세기에 걸쳐 제작된 프레스코 벽화가 남아 있으며 이는 중세 불가리아 미술의 걸작으로 여겨지고 있다. 1979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되었다.

 

 

 

버스에서 내리니 매표소가 코앞이다. 관람료를 내야한다는 얘기이다. 하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까지 지정되었다는데 어찌 무료일 수가 있겠는가. 오늘 들르게 될 동굴은 이바노보 암석교회 군에 들어있는 교회 가운데 하나이다. 단단한 암석들을 잘라 수도실과 교회, 예배당 등을 만들었는데, 이런 시설들은 장차 불가리아 정교회의 총 대주교가 될 요아킴(Joachim)이 자리를 잡으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1220년대부터 17세기까지 수도사 들이 거주했었단다. 주위에는 40여 개의 교회와 300개 정도의 다른 종교 시설도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거의 남아있지 않단다.

 

 

 

 

들머리에는 루센스키롬 자연공원(Rusenski Lom Nature Park)’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이바노보 암굴교회군의 유적들이 공원지역의 안에 들어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설명을 키릴문자로만 적혀놓아서 공원의 이름 외에는 아무것도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 옆에 암굴교회에 대한 안내판도 세워져있었으나 꼼꼼히 살펴보지는 못했다. 가이드의 뒤를 쫒아가기에 바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진촬영까지도 깜빡 해버렸다는 것이다. 일단 사진을 찍은 다음 귀국해서 번역해보는 습관을 갖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덕분에 난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당시 방문했던 곳이 주의 계곡 성당이려니 해볼 따름이다. 아니 가장 뛰어난 프레스코화를 보유하고 있다는 코라(Khora) 수도원일지도 모르겠다. ‘암석교회 군()’ 중에서 현재 개방하고 있는 곳이 단 한군데뿐이라는데도 정확한 명칭을 모르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잠깐의 방심이 불러온 화라 하겠다. 사진만 찍었더라면 귀국해서 번역이라도 해봤을 것이고 그랬다면 이런 아쉬움은 없었을 게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남동부 유럽의 기독교 예술 작품 중에서 걸작으로 평가받는 프레스코화까지 놓칠 수는 없으니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이곳의 프레스코화는 그리스정교의 교리를 담고 있다고 한다. 그림을 그린 이들은 타르노보회화파인데 그들은 헬레니즘 예술 작품과 누드화, 풍경화를 선호했었단다.

 

 

매표소 앞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오른편은 계단길이고 왼편은 경사가 거의 없는 오르막길이다. 안내판은 탐방의 순서를 아스팔트 길, 늙은 수사의 길, 절벽지대, 나무다리, 암굴교회의 순으로 적어놓았다. 왼쪽 방향을 말하는데, 경사가 거의 없어서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이용할 수 있으나 대신 거리는 2배 이상으로 늘어난다는 것쯤은 알아두자. 하지만 난 오른편에 보이는 계단으로 오를 것을 적극 추천한다. 힘이야 조금 더 들겠지만 10분이 채 되지 않아 목적지(암굴교회)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나처럼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사람들에게 특히 좋은 순서라 하겠다. 내려올 때 안내판에서 권하는 코스를 따르면 계단을 내려오면서 무릎 통증으로 끙끙대야하는 고역을 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얘기했던 대로 오른편은 계단으로 시작된다. 아니 계속해서 계단이 이어진다. 제법 힘들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계단의 경사가 버겁지 않을 만큼 가파른데다 길이도 10분이 채 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힘들다면 속도를 조금 떨어뜨리면서 쉬엄쉬엄 오르면 될 일이고 말이다.

 

 

 

계단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T’로 나뉜다. 길이 나뉘는 지점에 암석교회가 있다는 화살표지가 있으니 찾아가는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몇 걸음 더 걷자 바위벽 사이의 틈새로 암굴교회의 입구가 드러난다.

 

 

암굴교회는 서너 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천연의 동굴을 다듬어 만들다보니 2/3 정도로 층이 낮은 곳도 있다. 벽면은 고르지 못한 모양새이다. 기존의 암벽에 약간의 손질을 더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조금 거칠게는 보여도 순수한 아마추어인 수도사들의 작품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밖으로 뚫린 공간에는 테라스까지 만들어 놓았다. 이만하면 수도생활을 하는데 조금도 불편하지 않았겠다. 테라스에 서면 루센스키롬 강을 사이에 둔 건너편 바위절벽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이바노보에 이런 종교 시설들이 300여 개에 달한다고 했으니 어쩌면 저곳에도 이런 암굴교회기 있을지도 모르겠다.

 

 

 

 

앞에서 얘기했던 반 층 정도 낮은 방이다. 이곳은 외벽을 판자로 막고 창문까지 내놓았다. 물론 후세 사람들이 새로 만든 것이겠지만 옛 사람들의 것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벽면에 그려진 프레스코 벽화가 이를 증명한다 하겠다.

 

 

 

 

내부의 프레스코 벽화들은 13세기 초 무명 화가들이 풍부한 표현력을 바탕으로 성인상과 그리스도의 수난을 그렸다고 한다. 하지만 종교화에 문외한인 내 눈에는 그들이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다가오지 않는다. 성경 내용을 머리에 떠올려봤지만 결과는 같았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다. 그동안 축적해 온 내 앎이 일천할지니 더 이상 어쩌겠는가. 그저 옛 사람들이 성서 이야기를 주제로 한 프레스코화를 그렸는데 그게 문화적 가치가 있다고 해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는 것쯤으로 정리해 볼 따름이다.

 

 

 

 

 

 

 

 

벽화의 보존 상태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엉망이었다. 천정과 벽면에 마멸된 곳이 보이는가 하면 그림도 원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이 훼손되어 있었다. 혹독한 기후와 세찬 바람, 지진과 산사태 탓일 것이다. 거기다 더하여 오랜 세월동안 잊히기까지 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또 하나 눈길을 끄는 풍경은 기념품 가게이다. 좌판에 기념품들을 진열해 놓았는데 대부분은 이콘화를 그려 넣었다. 그나저나 낯선 나라이니 토를 달 일은 아니지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까지 지정되어 있는 유적과는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라 하겠다. ! 혹자는 불가리아를 역사적 건축물에 대한 관리가 소홀하고 관광산업이 그다지 발전하지 않았지만 그게 오히려 사람들이 계산적이지 않고 순수함이 남아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고 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문화유산을 잘 보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내려올 때는 앞에서 얘기했던 대로 안내판이 추천했던 코스를 따른다. 무릎에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코스를 추천해준 안내판의 의도를 알아 보고팠다는 것이 더 큰 원인이었다.

 

 

걷다보면 작은 동굴들을 여럿 만난다. 벽화는 보이지 않지만 사람들이 머물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곳도 있다. 아니 그들이 남겼을 흔적들도 눈에 띈다.

 

 

 

 

 

조금 더 걷자 암벽지대가 나타난다. 아니 서슬 시퍼런 바위절벽이 넓게 펼쳐지고 있다는 게 옳은 표현이겠다. 아까 들머리에서 살펴봤던 안내판에 적혀있던 문구 파노라믹 락(panoramic Rock)’이 이해가 가는 순간이다. 혹자는 이곳을 미국의 그랜드캐니언에 비유하기도 한다. 동감이다. 조금 왜소하기는 해도 크게 뒤지는 풍경은 아니라 하겠다.

 

 

 

 

 

 

 

 

계곡은 바위절벽이라는 병풍을 펼쳐놓은 모양새이다. 이곳은 불가리아의 북동부다. 루센스키롬 강 계곡의 이바노보 마을 주변이다. 12세기 경부터 수도사들이 동굴을 파 신앙생활 했던 곳이다.

 

 

 

 

내려오는 길에 안내판 하나를 만났다. 지도에 교회와 성채, 새 등을 그린다음 지명으로 보이는 단어들까지 적어 넣었는데 온통 키릴문자라서 전하고자하는 메시지는 눈치조차 챌 수가 없었다.

 

 

 

진행방향 저만큼에 허리를 곧추세운 바위절벽이 눈에 들어온다. 벽면에 작은 테라스가 돌출되어 있는 걸 보면 아까 들렀던 암굴교회가 분명할 것이다.

 

 

 

 

매표소로 되돌아오니 노점상 둘이 전을 펼쳐놓고 있다. 그들도 역시 이콘화를 팔고 있는데 가장 많은 것은 성모자상과 예수상이다. 그리고 역사 속의 성인 그림도 많다. 상대적으로 성인 게오르기의 그림이 눈에 많이 띈다. 다른 성인의 이름도 키릴문자로 표기해 놓았지만 읽을 수 없어 누군지 확인할 수가 없었다. 아무튼 난 다듬은 소나무 껍질에다 그려 넣은 이콘화를 하나 샀다. 우리 집 서재의 한쪽 귀퉁이를 차지하기에 부족함이 없어보였기 때문이다.

 

 

인터넷을 검색하다 보면 이바노보의 볼거리가 두어 곳이 더 있음을 알려준다. 중세의 교회유적과 성채유적이 남아있는 ‘Medieval Town Cherven’과 암굴교회와 프레스코화가 뛰어난 바사르보보 암굴수도원(Basarbovo Rock Monastery)’이다. 그중에서도 ‘St. Dimitrii Basarbovski’가 머물렀다고 해서 유명해진 바사르보보 암굴수도원을 못가본 것은 특히 아쉽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여행사에서 보여주는 것만 볼 수 있다는 게 패키지여행의 특징이 아니겠는가. 아쉬운 마음에 다른 분의 블로그에서 사진 두어 장을 얻어다 올려본다. 아래 글은 또 다른 이가 소개했던 글이다. <이 수도원은 2차 불가리아왕조 시대에 만들어진 수도원이나 역사에 처음으로 기록된 것은 터키의 세금 등록부상 1431년의 일이다. 수도원에 있었던 사람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은 St. Dimitrii Basarbovski이다. 그는 1685년에 근처 Basarbovo에서 태어났고, 그의 삶 대부분을 수도원에서 보냈다. 이 수도원은 현재 불가리아 내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암석 수도원이며, 빼어난 경관으로 유명하다. 주차를 하고 나니 놀라운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가 정교회의 수도원이 맞나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눈에 보이는 모습을 보고 떠오른 것은 중국 신장위구르의 쿠쳐의 키질 천불동이었다. 그 배치나 구조가 너무나 흡사했기 때문이다. 바위 절벽에 군데군데 석굴이 파져 있고, 그 절벽으로 계단들이 나 있는 모습이 똑같았다. 수도원의 옆으로 계속 이어진 절벽에 아마도 석굴들이 더 있을 듯 싶었다. 여기는 명확하게 수도원이 만들어진 곳 보다 앞쪽에 벽화가 그려진 방치되다시피 한 석굴이 있었다.>

 

 

 

 

이젠 루마니아로 넘어갈 차례이다. 두 나라는 도나우강(Donau river)을 국경으로 하고 있다. 강을 가로지르는 철교를 건너면 루마니아 국경검문소가 기다린다. 불가리아 국경검문소도 지나왔음은 물론이다.

 

 

 

 

 

이제부터는 루마니아 땅이다. 그런데 주변 풍경이 확 바뀌어 있다. 산릉이 대부분이었던 불가리아와는 달리 사방이 온통 평야지대인 것이다. 또 다른 특징도 있다. 불가리아에 비해 건물의 상태가 많이 양호해졌다. 아무래도 불가리아보다 생활형편이 많이 좋은가 보다.

 

여행지 : 불가리아 - 루마니아

 

여행일 : ‘19. 5. 29() - 6.5()

세부 일정 : 소피아릴라소피아(1)플로브디프벨리코 투르노보(1)이바노보부카레스트(1)시나이아브란브라소브(1)루피아시비우시기쇼아라(1)투르다클루지나포카

 

여행 둘째 날 : 벨리코 투르노보(Veliko Turnovo)

 

특징 :

벨리코 투르노보(Veliko Turnovo) : 불가리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곳 가운데 하나로 기원전 3000년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2 불가리아 제국 시기인 1187-1393년에는 왕국의 수도이기도 했는데, 당시 이름은 투르노보였다. 이후 도시의 가치를 기념하기 위해 '위대한'이라는 뜻을 지닌 형용사 벨리코를 붙였단다. ’이반 아센 2(Ivan Asen II)’ 치하의 최 전성기에는 비잔틴 제국을 압도하고 발칸반도 대부분을 지배했던 적도 있다. ‘3의 로마로 불리던 시기이다. 그러나 아센 왕이 죽자 쇠퇴하기 시작해 숙적인 비잔틴 제국에 굴복 당했다. 1398년에는 오스만 왕조와 3개월에 걸친 수도 공방전 끝에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투르노보는 다시 각광을 받게 되는데 이는 500년에 걸친 터키 지배에서 벗어난 신생 불가리아 왕국의 첫 국회가 이곳에서 열렸기 때문이다. 1878년 베를린조약에 따라 승인된 불가리아 공국은 이곳을 수도로 삼았고, 1879417일에는 최초의 불가리아 의회가 이곳에서 소집되었으며, 이때 불가리아 최초의 헌법이 제정됐다. 이 헌법은 불가리아의 수도를 소피아로 이전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으며 소피아는 지금도 불가리아의 수도로 남아 있다.

 

차레베츠 성(Tsarevets Fortress) : ’투르노보의 과거는 차레베츠 성(요새)’에서 찾아볼 수 있다. 비잔틴 시대 5세기에서 8세기에 걸쳐 건립된 성은 864년 동방정교를 국교로 택한 이후 1396년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기 전까지 협곡 위의 요새였다. 성곽은 오스만 제국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으나 그동안의 발굴 작업으로 지금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현재까지 400개 이상의 주택, 18개의 교회, 여러 개의 수도원, 상점, 성문과 타워 등이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한다.

 

 

 

투르노보의 투어는 차레베츠 성(Tsarevets Fortress)’으로 들어가는 입구 앞 광장에서부터 시작된다. 구시가지와 접한 곳이라서 고풍스런 건물들이 많이 눈에 띄는데 그보다는 붉은 항아리로 만든 화분이 더 눈길을 끈다. 고고학박물관에서나 만날 법한 모양새로 생겼기 때문이다. 이 도시의 오랜 역사를 나타내려는 아이디어가 아닐까 싶다.

 

 

 

 

 

 

 

 

'장미의 고향'이라고 불리는 카잔루크벨리코 투루노보로 오는 도중 차창을 통해 엿볼 수밖에 없었다. 여행일정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계 장미 생산량의 80%가 이곳에서 생산된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특히 5월이면 방문의 최적기가 아니겠는가. 만발한 장미꽃으로 인해 마을 전체가 장미 향기로 가득 찰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일정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는 패키지니 어쩌겠는가. 그저 차창 밖으로 스쳐지나가는 장미가 심어진 꽃밭들이 바라보며 위안을 삼아볼 따름이다.

 

 

버스에서 내리자 거대한 성곽으로 둘러싸인 차레베츠 성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그 꼭대기에는 성모 승천교회가 자리 잡았다. ‘차레베츠 성은 자연이 빚어놓은 지형을 최대한 활용해 지은 요새다. 성문 앞은 해자(垓字)로 차단되어 있다. ‘얀트라 강(Yantra river)’이 해자이다. 도개교(跳開橋 : 몸체가 위로 열리는 구조로 된 다리)처럼 성 안에서 줄을 잡아당기면 외부와 차단되었다. 성으로 들어가는 외길의 양쪽이 천혜의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가히 철옹성이라 하겠다.

 

 

성의 입구에 이르자 차레베츠 성의 문장이 새겨진 방패에 앞발을 얹고 있는 사자상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조형물 아래에는 ‘1186-1393’이라는 숫자가 새겨져있다. 벨리코 투르노보가 1185부터 1393년까지 2차 불가리아제국의 수도였으니 당시에 사용하던 문장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1393년 오스만 투르크에 점령되면서 파괴되었던 요새는 현재 복원 중에 있다.

 

 

잠시 후 첫 번째 성문을 만난다. 성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이 문을 통과해야만 한다. 양 옆이 낭떠러지로 이루어진 곳에 길을 만들고 그 입구에다 성문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오스만 투르크에 점령될 때까지 난공불락의 요새로 존재할 수 있었던 건 이런 천혜의 지형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오른쪽 산자락에 자리한 건물군은 투르노보 대학교(Veliko Tarnovo University)‘라고 한다. 세상을 품을 듯이 두 팔을 벌리고 있는 동상이 이색적이다. 성 에프티미(Св. Евтимий)로 제2차 불가리아제국 정교회의 마지막 대주교였다고 한다. 그는 투르노보 인문학파를 만들어 불가리아 문화도 진흥했다고 해서 불가리아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대주교라고 한다.

 

 

몇 걸음 더 걸으면 두 번째 성문이다. 이곳도 역시 말끔하게 복원되어 있다. 오스만 제국에 의해 철저히 파괴된 이 요새는 현재도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옛 영화를 복원하는 일이라 하겠다. 흔히 벨리코 투르노보를 불가리아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도시라고 부르는데, 그 저변에는 위대한 시절에 대한 향수도 한 축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참고로 요새의 성곽은 두 번째 성문에서 좌우로 퍼져나간다.

 

 

 

 

안으로 들어서자 성벽에 뭔가가 적혀있다. 요새의 문장과 함께 1965-1972‘라는 숫자도 보인다. 하지만 키릴문자라서 그 내용은 알 수가 없었다.

 

 

성문 옆의 건물터는 문지기 병사들을 위한 시설이 있던 자리가 분명할 것이다.

 

 

 

건너편 산등성이도 하얀 띠를 두르고 있다. 하지만 저건 인간이 쌓아올린 성벽이 아니고 자연이 빚어놓은 암벽일 따름이란다. 천연의 성벽인 셈이다.

 

 

한때는 집이었을 터엔 이젠 관광객들의 발걸음만 분주하다. 길재가 읊조렸던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는 싯귀에 딱 어울리는 풍경이 아닐까 싶다. 또 다른 아쉬움도 있다. 귀족들 집터와 왕궁 터 등 유적들이 사방에 널려있으나 대부분 흔적만 남아있을 뿐 그에 대한 안내판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 옛날 이곳에 살던 사람들의 일상까지 가슴에 담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서쪽으로 난 작은 문에는 망루가 설치되어 있다. 모양새로 보아 정탐과 수비의 기능을 겸했을 게 분명하다. 참고로 성곽에는 정문 외에도 2개의 성문이 더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작은 문(little gate)과 동쪽에 있는 프랑크족 문(Frankish Date)’이다. 이 외에도 성에는 4개의 높은 탑이 있었고, 정교회 성당도 5개나 있었다고 한다.

 

 

 

 

타워도 올라가 볼 수 있었다. 오래된 소품들로 장식해 놓은 내부가 중세의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건 단두대(斷頭臺)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그 앞에 놓인 광주리의 용도가 궁금하다. 설마 자른 목을 담았던 것은 아니겠지?

 

 

 

망루에 오르자 시야가 확 트인다. 주위를 한 눈에 살펴볼 수 있어 적을 감시하기에 최상이었겠다. 하긴 그래서 이곳에 망루를 만들었지 않았겠는가. 성의 아래에는 붉은색 지붕의 마을이 자리 잡았다. 성과 마을 사이에는 얀트라강이 흐르는데 여간 평화로워 보이는 게 아니다. 불가리아는 세계 최장수의 나라로 알려져 있다. 저렇게 평화로운 곳에서 사니 어찌 장수를 누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성벽은 난공불락이라 불려도 좋을 만큼 높으면서도 견고했다. 하지만 과거의 화려했던 왕조는 이슬처럼 사라지고 그 흔적만 남아있다. 난공불락으로 보이지만 결국에는 적에게 무너졌다는 증거일 것이다. 아무리 견고한 성일지라도 지키는 데는 한계가 분명히 있다. 그것을 지켜낼 만한 힘이 필요하다는 얘기이다. 부국강병(富國强兵)이라는 얘기도 있지 않는가. ! 무섭게도 성벽에는 어떤 안전장치도 존재하지 않았다. 올라갔다가 떨어지면 최소한 중상 아니면 사망이다. 물론 올라가지 말라는 표지판이 잊을만하면 한 번씩 나온다. 그렇다고 그만둘 사람이야 없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성벽 자체에 두께가 있어서 바람이 세게 불지만 않으면 안전해 보이긴 했다.

 

 

구시가지 쪽의 풍경은 가히 환상적이다. 얀트라강(Yantra river)이 살아있는 뱀이 꿈틀거리는 모양새이다. 얀트라강은 불가리아 중부를 동서로 관통하는 발칸산맥(불가리아어: 스타라 플라니나)에서 발원해 북으로 가브로보, 벨리코 투르노보, 비얄라를 지나 도나우강에 합류한다. 총 길이는 285이며 전형적인 사행천이다. 그런데 그 정도가 벨리코 투르노보에서 가장 심하단다. 얀트라강은 이곳에서 S자를 세 번이나 그리면서 도시를 감싸 흐른다. 특히 사라피나 하우스 지역에서 보면 강이 마치 세 줄기로 흐르는 것 같다고 한다.

 

 

요새의 꼭대기로 올라가는 길에는 피라미드를 닮은 조형물도 볼 수 있었다. 뭔가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모양인데 키릴문자로 적혀있어서 그 내용은 알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불가리아 여행을 하다보면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키릴문자는 마치 이색적인 부호 같아서 더욱 이국적 풍경을 느끼게 한다.

 


 

 

영화에서나 보아오던 병기들도 보인다. 관광객들의 눈요기를 위한 소품일 것이다.

 

 

뒤돌아본 투르노보 시가지, 얀트라 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가장자리에 자리 잡은 집들이 그림 같다. 도시는 꾸불꾸불한 얀트라 강 협곡에 거의 수직으로 솟아 있는 능선 위에 자리하고 있다. 이 강으로 인해 마을은 스베타고라·차레베츠·트라페지차라고 하는 3개의 돌출지대로 구분된다고 한다. 능선의 경사가 심했던지 계단식으로 지어진 가옥들이 마치 한 채씩 쌓아놓은 것처럼 보인다.

 

 

 

자매결연 관계였던 프라하에서 요새 복원기념으로 보내주었다는 종탑도 보인다. ‘행운의 종’ 4개를 설치하여 국가 행사시에는 4, 위급시에는 3개를 울린다고 한다.

 

 

명색이 유명 관광지인데 기념품 가게라고 없겠는가. 다만 이곳은 이콘을 위주로 파는 노점상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이콘장터는 불가리아 국민의 신심을 엿보게 해준다. 그래선지 온갖 이콘을 가득 실은 상인들의 수레는 관광객의 주요한 촬영 대상이 되기도 한다. 대부분 값싼 복제품이었으나 가정에 비치해 놓기에는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비스듬한 언덕길을 오르는데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스피커와 조명시설들이 눈에 띈다. 어둠이 깔리면 펼쳐지는 레이저 쇼를 위한 시설이란다. ‘빛과 소리(Sound and light)라고 불리는 이 쇼는 형형색색의 레이저가 성 정상을 향해 발사되는데 이때 종소리와 구슬픈 불가리아 민속음악이 뒤섞인단다. 하지만 우린 구경을 하지 못했다. 거세어진 빗줄기로 인해 공연이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상에 오르자 성모승천 교회(Patriarchal Cathedral St. Ascension)가 그 온전한 모습을 드러낸다. 이 성당은 11세기 말에서 12세기까지 수도원교회로 지어졌었다가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것을 이반 알렉산더 대왕 때 재건축하여 불가리아를 대표하는 총대주교좌 성당이 되었지만, 오스만제국이 벨리코를 점령하면서 또 다시 교회는 파괴되었다. 이후 폐허상태로 남아있던 것을 20세기 후반 다시 건축했고 1985년부터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단다.

 

 

 

 

 

 

 

 

 

 

 

안으로 들자 성화들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그런데 어색하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성화가 너무 현대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1393년부터 500년 동안 고통을 받아왔던 피지배 민족의 과거를 현대 작가인 테오판 소케로프(Teofan Sokerov)‘가 그려서 이 교회의 복원 시기에 맞춰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성경속의 성인들이 아닌 불가리아 역사상 기념할만한 사건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그렸다는 것이다.

 

 

 

 

 

 

뒤에서 바라본 성모승천 교회

 

 

불가리아 왕국의 역대 대주교의 이름이 새겨진 석판. 오스만 제국에 의해 독립국으로서의 명이 끊긴 1394년에 기록이 멈춰 있다.

 

 

교회의 바로 아래에는 왕궁터가 있다. 차르 22명이 거주했다는 곳이다. 이곳 투르노보가 한때 차르(Tsarsㆍ러시아 황제)의 도시로 불리던 이유이기도 하다.

 

 

건너편 언덕에도 성곽이 복원되어 있다. 그 주변은 어수선한 것이 지금도 발굴 중인 모양이다. 이곳 투르노보의 또 다른 역사지역인 트라페지차(Trapezitsa)’가 아닐까 싶다. 옛날 저곳에는 지위가 높은 사람이나 성직자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참고로 구시가지 왼쪽의 스베타 고라 언덕에는 2차 불가리아 왕국시대(12-14세기)에 생긴 투르노보 학교가 있다. 이 학교의 연구 전통은 현재 키릴 메소디우스 대학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불가리아 어문학, 러시아 어문학, 역사, 예술 분야 전공이 유명하단다.

 

 

 

 

되돌아 내려오는데 아름다운 꽃밭을 만났다. 처음 보는 꽃이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다시 돌아온 주차장, 구시가지의 입구쯤으로 보면 되겠다. 벨리코 투르노보에는 기원전 3000년 경부터 사람이 살았다. 이후 불가리아 제국의 수도로서 발전을 거듭할 당시에는 '3의 로마'라는 별명도 가졌을 정도로 급속한 발전을 거듭했으나 14세기 말, 오스만 제국의 점령으로 인해 대부분의 마을과 성당이 소실된다. 현재 남아있는 것은 불가리아 최고의 요새였던 차르베츠의 성벽 흔적과 조그마한 마을이 전부이다. 과거의 영광은 기록으로만 확인할 수 있을 따름이다.

 

 

제국의 옛 수도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거리는 한산했다. 그것도 대부분이 현지인, 관광객의 빈도는 높지가 않다. 그래선지 인사를 건네 오는 학생들을 심심찮게 눈에 띈다. 그런데 하나같이 곤니찌와이다. 우리를 일본관광객으로 알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관광객들에게 이곳은 아직까지 낯선 관광지에 불과하다는 증거이다. ‘I'm from Korea’다 요놈들아! 큰소리로 돌려주지만 몇몇은 알아듣지도 못하는 눈치다. 세계 12위의 GDP(Gross Domestic Product) 대국을 몰라보다니 괘씸한 놈들,

 

 

구시가지(Old Town)를 둘러보지는 못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시내구경을 나가려고 했으나 부담스러울 정도로 빗줄기가 거세졌기 때문이다. 투르노보의 대부분 지역이 불가리아의 역사·문화 사적지로 복구되어 고대의 건축물과 마을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아니 우리가 머문 호텔이 구시가지에 위치하고 있으니 오가며 눈에 담았던 풍경에 만족하기로 하자.

 

 

구시가지와 신시가지 경계에는 어머니 광장이 있는데, 이곳에는 전몰자 추모비인 '어머니 불가리아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네 가지 전쟁에서 전사한 사람들을 추모하는 기념비라고 한다.

 

 

하룻밤을 머물렀던 ‘Hotel Premier Veliko Turnovo’

대형버스가 들어올 수 없는 외진 곳에 위치한 작은 호텔. 1대 뿐인 엘리베이터도 캐리어를 갖고 탈 경우 2명이면 끝이다. 방뿐만이 아니라 욕실도 작아 샤워도 욕조에 들어가서 해야만 한다. 그나마 간단한 세면도구와 드라이기를 갖춘 건 다행이라 하겠다. 가운과 실내화를 비치해 놓은 건 의외였고 말이다. 식사도 다른 호텔들에 비해 처지는 수준이었다.

 

 

 

에필로그(epilogue) : 시간 부족과 빗줄기 때문에 둘러보지 못한 명소 두어 곳을 다른 이들의 글을 빌어 소개해볼까 한다. 우선 성 키릴ㆍ메토디 거리 주변에 위치한 성 니콜라 교회를 들 수 있다. 민족 부흥기인 1836년에 완성된 교회로 외관은 소박하나 인테리어는 매우 장엄하다. 또 키릴 문자를 고안한 수도사 형제 이름을 딴 성 키릴ㆍ메토디 교회가 있는데 종루는 거장 피체프가 만들었다. 그리고 지붕이 선명한 푸른색을 가진 성 처녀 강탄 성당도 있고, 성 디미타르 교회는 제2 불가리아 왕국의 아센 왕이 비잔틴 제국을 물리친 것을 기념하여 세운 교회로 가장 아름다운 교회이나 현재는 박물관으로 이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