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마니아 여행 #8 : 시기쇼아라
여행지 : 불가리아 - 루마니아
여행일 : ‘19. 5. 29(수) - 6.5(수) 세부 일정 : 소피아→릴라→소피아(1)→플로브디프→벨리코 투르노보(1)→이바노보→부카레스트(1)→시나이아→브란→브라쇼브(1)→루피아→시비우→시기쇼아라(1)→투르다→클루지나포카
여행 다섯째 날 : 시기쇼아라(Sighișoara)
특징 : 트란실바니아 지방의 무레슈(Mureș) 주에 속한 도시로 타르나바 강(Târnava River) 유역에 있다. 시기쇼아라는 12세기 헝가리 왕국이 국경 방어 차원에서 이주시킨 트란실바니아 작센인 장인과 상인들에 의해 형성된 도시이다. ‘작센인이 트란실바니아 지방에 세운 7개의 성채도시 가운데 여섯 번째’라는 뜻의 라틴어 ‘카스트룸 섹스(Castrum Sex)’로도 불리는 이유이다. 이후 몽골제국의 침입을 겪으며 시기쇼아라 성채는 끊임없이 보강되어 높은 성탑과 성벽 등을 갖추게 되었다. 이때 각각의 길드(guild)들이 저마다 성탑을 쌓고 관리해왔다 그러다가 1337년 자치시로 승격되었으며, 트란실바니아 지방의 중심지로서 교역이 발달하면서 15〜16세기 크게 번성했다. 성채의 규모가 더욱 넓혀졌고 오스만제국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보강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17세기 이후 잇단 화재와 지진 피해에다 길드의 특권까지 사라지면서 급격히 쇠락했다. 루마니아의 땅이 된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부터이다. 원래의 주인이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왕국이 전쟁에서 졌기 때문이다. 199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시기쇼아라 역사 지구(Historic Centre Sighisoara)’가 있으며 드라큘라의 모델이 된 ‘블라드 체페슈’가 태어난 곳으로도 유명한 도시이다.
▼ 버스는 우릴 산 아래에 있는 주차장에다 내려놓는다. 다른 옛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이곳 시기쇼아라도 대형버스의 ‘올드 타운(old town)’ 진입을 막고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곳이 뉴타운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주변의 건축물들이 하나같이 중세풍의 냄새를 물씬 풍기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곳으로 오는 도중 들렀던 다른 도시들의 ‘독일식 건축물’과 하나도 다를 게 없다. 하긴 ‘작센인’이라는 뜻의 ‘사시(Saşi)’라고 불리던 ‘트란실바니아 작센’인들이 세운 도시이니 이를 말이겠는가. ▼ 그다지 가파르지 않는 오르막길로 들어서면서 투어가 시작된다. 시비우를 나설 때부터 내리기 시작한 빗줄비가 제법 굵어졌지만 걷는 데는 조금도 지장이 없다. 도로의 바닥을 돌로 깔아놓았기 때문이다. 유럽의 옛 도시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인데 걷기에 조금 불편하다는 단점이 있지만 비가 올 때는 질퍽거리지 않는다는 장점도 갖고 있다. ▼ 주변 경관을 살펴가며 잠시 걷자 성문(城門)이 나타난다. ‘재단사의 탑(Tailors' Tower)’이라는데 이 도시의 특징을 한마디로 대변해주는 건축물이라 하겠다. 시기쇼아라가 길드(guild), 즉 장인과 상인들이 중심이 되어 세운 요새도시이기 때문이다. 12세기 헝가리 왕국의 지역 방어체제 구축을 위해 이주해온 독일인(트란실바니아 작센인)들은 각 길드 별로 도시 방어를 위한 성탑을 쌓고 관리했다. ‘신발 장인의 탑(Schusterturm)’, ‘정육업자의 탑(Fleischerturm)’ 등 개개의 길드 이름이 붙여진 이유이다. 하지만 1676년, 1736년, 1788년에 큰 화재로 건축물 상당수가 파괴되었으며, 특히 1676년의 화재 때는 당시 있던 건축물의 75% 정도가 불타버리는 수난을 겪었다고 전해진다. 19세기 이후 길드조직이 특권을 잃으면서 도시도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고, 한때 14개에 이르던 성탑도 시계탑을 포함해 9개만 남아있을 따름이다. ▼ 성의 안으로 들어서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또 다른 문(門)이 얼굴을 내민다. 두 건물의 2층을 회랑으로 연결하고 그 아래에 아치형의 문 2개를 내놓았다. 이 지역 건축물들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이 지역의 오래된 집들은 대부분 측면으로 아치형 출입통로가 나있으며 작은 부지 탓에 때로는 인접한 집들이 서로 통로를 공유하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 조금 더 들어가자 또 다른 성탑(城塔)하나가 길을 떡하니 막고 있다. 아니 조금 전에 지나왔던 ‘재단사의 탑’보다 훨씬 더 커졌다. 시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시기쇼아라 시계탑(Sighişoara Clock Tower)’으로 2m나 되는 두꺼운 벽과 함께 적들이 도시로 진입하는 것을 어렵게 했을 4개의 포탑이 마련되어 있다. 29명의 병사들이 상주하던 이 시계탑은 방어적인 목적 외에도 의회 개최장소나 기록보관소, 마을의 보물을 보관하는 용도로 쓰였다고 한다. 현재는 역사박물관으로 쓰이고 있으며 시기쇼아라 역사지구를 대표하는 상징물로 꼽힌다. ▼ 도시를 대표하는 탑답게 눈이 번쩍 띌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다. 애초 30여m 높이였으나 16세기에 현재와 같은 64m 높이로 증축되었다고 한다. 1676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이듬해 재건되었고 이후에도 몇 차례 수리를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1894년 오스트리아 출신의 건축가에 의해 다채로운 색을 입은 지붕을 얹은 바로크 양식으로 개축되었단다. ▼ 탑에 시계가 장착된 것은 1604년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나무로 만든 시계를 설치했다가 1648년에 금속 시계로 교체했다. 시계 옆 벽감에 있는 나무상들도 흥미롭다. 요새를 향하고 있는 벽에는 평화, 정의의 신들이 천사와 함께 시간에 따라 움직이고, 도시를 향하고 있는 벽에는 요일을 나타내는 행성의 신들이 날짜에 따라 움직인단다. ▼ 시계탑의 가장 주된 용도는 물론 출입문이다. ▼ 문이 굳게 닫혀있어 시계탑 내부는 구경하지 못했다. 1899년부터 트란실바니아 지역의 공예품과 각종 자료를 전시한 시립 역사박물관으로 바뀌어 있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아담하게 꾸며진 박물관 안쪽에는 1670년대 이후의 중세 약학, 인종학, 미술 관련 유물 등이 전시되어 있단다. 특히 나선형 계단을 따라 맨 위층으로 올라가면 시계와 나무상들이 돌아가는 기계장치를 볼 수 있다고 했다. 또한 꼭대기의 전망대에 서면 시기쇼아라 시가지가 한눈에 쏙 들어온단다. 빨간 타일로 덮인 구시가지의 지붕들 사이로 조약돌이 촘촘히 박힌 폭 좁은 거리가 선을 긋고 있는 16세기 색슨인들의 주거환경을 내려다볼 수 있다는 것이다. ▼ 시계탑에서 왼편으로 조금 더 걸으면 ‘대장장이의 탑(Ironsmiths' Tower)’을 만날 수 있다. 내부에 무료로 전시물을 볼 수 있다는데 이곳도 역시 문이 닫혀있었다. 참고로 시기쇼아라의 방어 시스템은 중세 길드가 세운 930m 길이의 성벽과 14개의 탑, 5군데의 요새가 주를 이뤘다고 한다. 요새와 탑은 당시 기술로는 가장 뛰어난 방어기능을 담당하게끔 만들어졌단다. ▼ ‘대장장이의 탑’ 근처의 성벽에 서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곳 구시가지와 대비되는 신시가지가 널따랗게 펼쳐진다. 시기쇼아라는 구시가지가 위치한 언덕을 휘감고 흐르는 ‘트르나바(Trnava) 강’을 경계로 신·구 시가지가 나뉘어진다. 참고로 신시가지는 19세기 이후에 조성되었다고 한다. 언덕위에 있는 구시가지는 행정과 문화의 중심지로 그 기능을 계속 이어갔지만 상업과 공예활동 등은 확장단계에서 요새가 소실된 저지대로 이동했단다. ▼ 시계탑 옆에는 장식이 없는 파사드 형태의 작은 교회가 있었다. ‘도미니카 수도원(Dominican Monastery)’이 이 근처에 있었지만, 현재는 수도원에 있던 ‘작은 교회(St Mary)’만 남아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저 교회를 두고 하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내부는 들어가 보지 못했다. 아니 소박한 외모에 흥미를 잃었다는 게 보다 더 옳은 표현이겠다. 그래서 다른 이의 글을 옮겨 그 분위기를 살펴본다. <교회 안은 500년 된 아름다운 프레스코화와 르네상스풍의 의자, 로마네스크 양식의 예배당 등이 어우러져 무척 인상적이다. 수백 년 동안 시기쇼아라의 기독교인들에게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상징으로 여겨져 온 장소. 이 교회는 작은 규모와 달리 엄숙함과 장중한 무게감으로 충만하다.> ▼ 구시가지 내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멋진 건물이 바로 시청(City hall)이다. 고딕과 바로크 양식이 대부분인 도시에서 르네상스양식으로 지어진 건축물을 만났으니 화려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거기다 3만 명이 조금 넘는 도시의 청사치고는 엄청나게 큰 규모이다. 그래선지 학술제나 음악콘서트 등이 저곳에서 열린다고 한다. ▼ 시계탑 바로 앞의 광장에 서면 유독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는 노란색 3층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이 ’블라드 체페쉬(Vlad Ţepeş)‘가 태어나 어린 시절 살았던 그의 생가이다. 시기쇼아라는 드라큘라 이야기의 실제 주인공인 ‘블라드 체페슈 3세’가 태어난 곳으로 전형적인 중세 루마니아 양식을 지닌 저 집은 드라큘라 백작의 모델이 된 그가 1431년에 태어나서 가족과 함께 네 살이 되던 1435년까지 실제로 살았던 집이란다. 이후 드라큘라 가족은 남쪽의 트르고비슈테로 이주하게 된다. 참고로 ‘드라큘라 백작’은 1456년부터 1462년까지 왈라키아 지방을 통치한 ‘블라드 백작’에게서 영감을 얻은 아일랜드 출신의 작가 ‘브램 스토커’가 재탄생시킨 가공의 인물이다. ▼ 건물 입구에는 촌스럽지만 철로 만들어진 용(龍)이 걸려 있었다. 블라드 3세 ‘체페쉬’의 아버지인 블라드 2세 ‘드라쿨’은 ‘용의 기사단’의 일원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용의 기사단의 ‘Dracul’이라는 칭호를 받았고 드라쿨이라는 이름을 즐겨 사용했단다. 용의 조형물을 걸어놓은 이유가 아닐까 싶다. 다른 한편으로 ‘Dracul’은 용맹하다는 뜻과 용(Dragon)이라는 뜻, 그리고 악마라는 뜻이 혼용된다고 한다. 소설 속의 드라큘라 백작처럼 꼭 나쁜 의미만은 아니라는 얘기이다. 실제로 시기쇼아라 주민이나 루마니아인들은 ‘블라드 2세’와 ‘블라드 3세’를 훌륭한 위인으로 꼽고 있단다. ▼ 드라큘라백작의 생가는 현재 레스토랑으로 성업 중이다. ‘드라큘라의 집’으로 불리는 이 레스토랑은 마을에서 가장 멋진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1층은 나무탁자에 둘러앉아 생맥주 한 잔을 들이키기에 그만이고, 고딕식 가구로 인테리어를 꾸민 2층의 아늑한 레스토랑에서는 훌륭한 수프와 루마니아 전통요리를 맛보며 기분 좋은 저녁을 만끽할 수 있다. 2층은 또 ’블라드 체페쉬‘에 대한 기록이나 기념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우리 일행도 이곳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드라큘라 백작의 도시에 찾아왔으니 그의 집, 아니 그가 앉았었을 지도 모르는 식탁에 앉아 와인을 곁들인 만찬을 즐겨보는 것 또한 여행의 묘미가 아니겠는가. 안으로 들어서니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손님들이 많았다. 여행의 즐거움을 나만 원하는 것이 아니었나보다. ▼ 이젠 시기쇼아라의 명소인 ’산상교회‘로 올라가 볼 차례이다. 조금 전에 통과했던 ‘재단사의 탑(Tailors' Tower)’ 조금 못미처까지 되돌아간 다음 왼편 골목으로 들어서면 된다. 산상교회로 가는 골목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파스텔톤으로 채색된 구시가의 주택들과, 낡았지만 세월이 쌓여 있는 골목길이 주는 소박한 아름다움이 넘치는 매력을 풀풀 발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 알록달록 예쁜 집들과 기념품 가게들을 기웃거리며 걷다보면 ’Scara acoperita‘라고 적힌 긴 터널형 계단의 입구가 나온다. ‘학생의 계단’ 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1642년 높은 언덕 위에 위치한 학교와 교회까지 오르내려야 하는 학생과 신도들을 위해 건설되었다고 한다. ▼ 사방이 막혀 밖은 보이지 않았지만 눈에 담을 만한 풍경 하나쯤은 만날 수 있었다. 175개의 계단이 끝나갈 즈음 ‘거리의 악사’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경쾌한 리듬이었는데 십여 명의 학생들이 몸까지 흔들어가며 음악에 맞춰 흥을 돋우고 있었다. ▼ 계단을 빠져나오자 학교 건물이 얼굴을 내민다. 조금 전 거리의 악사 앞에서 몸을 흔들던 학생들의 크기로 보아 고등학교가 아닐까 싶다. 벽면에 ‘1619’라는 숫자가 적혀있었는데 설립연도가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고딕양식으로 지어진 본관에 적힌 ‘1901’은 재건축 년도 쯤 되겠다. ▼ 몇 걸음 더 오르면 이번에는 작은 공원과 함께 ‘산상교회(Church on the Hil, 山上敎會)’가 길손을 맞는다. ‘산 위에 지어진 교회’라는 데서 유래된 이름인데 트란실바니아 지역에서 고딕양식으로 지어진 가장 대표적인 건축물로 평가 받는단다. 교회는 1345년 짓기 시작해 180년 후인 1525년에 완성되었다. 1838년에는 지진 피해를 입어 복구 과정을 거치기도 했다. 참고로 이 교회는 원래 니콜라스 성인에게 봉헌된 가톨릭교회였다고 한다. 1547년 작센인들에 의해 개신교로 바뀌었단다. ▼ 내부는 생각했던 것 보다는 수수했다. 1480년에 만들어졌다는 설교단을 비롯하여 15세기에 제작된 귀중한 조각품들이 있다. 채색이 화려한 그림들이 여럿 걸려있는가 하면, 벽면에는 500년 전에 그려졌다는 프레스코화도 여럿 보였다. 또한 로마의 옛 유적지에서나 볼 법한 조각품의 잔해들을 복도에 늘어놓아 오래된 건축물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 특이한 점은 예배당의 지하에 또 다른 공간이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다. 무덤으로 사용되던 곳이 아닐까 싶은데 텅 비어있었다. ▼ 언덕교회 뒤쪽에는 ‘묘지예배당(Capela Cimitirului)’이 자리 잡고 있었다. ▼ 교회 앞 전망 좋은 곳에 서면 ‘시기쇼아라’의 신시가지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시기쇼아라는 시비우처럼 독일인이 건설한 도시로 중세에는 시비우와 쌍벽을 이룰 만큼 융성했지만 지금은 아주 작은 도시로 변모해 있었다. ▼ 산상교회에서 내려올 때는 우회로를 이용했다. 계단을 내려서는 게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똑 같은 길을 또 다시 걷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자취로 반질반질하게 닳아져버린 돌길을 따라 내려오는 도중에는 한층 더 예스러워진 풍경들을 만날 수 있었다. ▼ 내려오는 도중에 두 개의 성탑(城塔)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정육업자의 탑(Butchers' Tower)’과 ‘모피상의 탑(The Furriers' Tower)’이다. 참! 산상교회를 한바퀴 둘러보는 도중에는 ‘밧줄 제작자의 탑(opemakers' Tower)’도 눈에 띄었었다. ‘요새도시’인 시기쇼아라는 수공업자와 상인들이 중심이 되어 세운 도시다. 그들은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14개의 성탑을 세웠는데 각 탑들은 도시의 길드, 즉 수공업자나 상인 조합에서 세우고 길드의 이름을 붙여서 불렀다. 때문에 재단사의 탑, 모피상의 탑, 제화업자의 탑 등의 흥미로운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산상교회 근처에서 이들 가운데 셋을 눈에 담은 것이다. ▼ ‘재단사의 탑’ 근처로 되돌아오니 비가 그쳐있다. 마음에 여유가 생긴 덕분인지 아까는 그냥 흘려보냈던 기념품가게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앙증맞은 상점들은 안을 기웃거려도 누구 하나 싫어하는 기색이 없다. 아니 오히려 가게 주인들은 따뜻한 미소와 함께 훈훈한 인심을 베풀어 주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곳 시기쇼아라를 일러 세상이 급변해도 여전히 수백 년 전의 골목과 인심이 어우러져 낯선 여행자의 마음까지 금세 편안해지게 만든다고 칭송하는가 보다. ▼ 산상교회에서 헤어졌던 두 길은 ‘학생의 계단’에서 다시 하나로 합쳐지고 아까 투어를 시작하면서 들어왔던 ‘재단사의 탑(Tailors' Tower)’을 지나 조금 더 걸으면 ‘신발장인의 탑(Shoemaker’ Tower)’이 나온다. 신발 제조업자들이 돈을 모아 지은 탑일 텐데 문이 잠겨있어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입구에 붙어있는 설명문도 루마니아어로 적혀있어 판독이 불가능했다. ▼ ‘신발 장인의 탑’ 맞은편에는 ‘로마 가톨릭 교회(Roman Catholic Church)’가 있다. 예쁘게 지어진 건축물이나 그 내력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정면에 붙여놓은 표지판에서 건축년도가 1896년이라는 것만 알아낼 수 있었다. ▼ 교회 앞의 작은 공원에는 ‘페퇴피 산도르(Sándor Petőfi : 1823-1849)’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헝가리의 위대한 시인이자 혁명가 중 한사람으로 알고 있는데, 그의 동상이 왜 이곳에 세워졌는지 모르겠다. 아니 그가 ‘헝가리 혁명’ 당시 트란실바니아 군대의 사령관 ‘요제프 벰’ 장군의 부관으로 근무했다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르겠다. 이곳 시기쇼아라가 바로 트란실바니아가 아니겠는가. ▼ 구불구불한 대리석 길들과 조용한 광장과 탑들, 온전히 보존된 성채와 주택들 사이를 거닐다 보면 여행자의 마음은 낭만에 젖고 시간은 저절로 과거로 회귀한다. 파스텔 톤으로 채색된 골목에 들어선 나 자신도 마치 중세시대로 와 있는 듯한 착각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 길가에 미니자동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저 차를 타고 올드타운을 돌아볼 수 있다고 한다. 미니열차도 탈 수 있다고 했는데 눈에 띄지는 않았다. ▼ 숙소가 위치한 ‘트르나바(Trnava)’ 강가로 내려오자 시청과 가톨릭교회 등 언덕 위에 들어선 건축물들이 아름다운 풍경으로 펼쳐진다, 특히 아까 골목을 걸을 때는 카메라의 앵글에 들어오지 않던 시청의 거대한 청사도 이곳에서는 촬영이 가능했다. ▼ 하룻밤을 머문 ‘더블트리 바이 힐튼 호텔 시기쇼아라 카발레르(Double Tree by Hilton Hotel Sighisoara-Cavaler)’, ‘트르나바(Trnava)’ 강가에 위치한 4성급 호텔로 시기쇼아라 구시가지에 대한 조망이 가장 큰 장점이다. ‘더블트리 바이 힐튼’은 '프리미엄 비즈니스 호텔'을 표방하는 세계적인 브랜드의 호텔이다. 그래선지 투숙객들을 위한 각종 편의시설들을 두루 갖추고 있었고, 객실과 욕실의 청결도도 뛰어났다. 다만 샤워시설이 욕조 안에 들어있어 주의하지 않을 경우 미끄러질 염려가 있었다. ▼ 호텔에 여장을 푼 뒤, 신시가지를 둘러보기로 했다. 그러나 금방 발길을 돌려버렸다. 특별한 볼거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성 삼위일체 성당((Biserica Sfanta Treime din Sighisoara)'도 없었더라면 카메라의 셔터를 누를 일도 없었을 뻔했다. 백색 톤으로 산뜻하게 지어진 성당은 중세의 궁전을 쏙 빼다 닮았다. 정교회의 예배당이라는데 역사는 그리 오래되어 보이지 않았다. ▼ ‘성 삼위일체 성당’에서 올려다본 구시가지 풍경이다. 완전체로 보존되고 있는 옛 도시이지만 말 위에 올라탄 기사나 검은 수도복을 입은 성직자는 보이지 않았다. 비가 내리는데도 신비로움을 조장하는 희뿌연 운무도 없었다. 훼손되지 않은 건물에만 중세의 형적이 남아있을 뿐, 500년 뒤로 밀린 인간의 삶은 현세에 머물러 있었다. ▼ 내일이면 이번 여행도 끝을 맺는다. 비행기에서 이틀을 자는 것으로 짜여진 5박8일의 이번 일정은 길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불가리아와 루마니아라는 결코 작지 않은 두 나라를 돌아다니느라 많은 시간을 버스 속에서 때워야만 했다. 힘든 여정이었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그런 일정과의 이별도 우리 부부에겐 시원함보다는 섭섭함으로 다가온다. 하나라도 더 보고 싶은 마음으로 지구촌 구석구석을 6년 째 누비고 다니는 중이니 이를 말이겠는가. 지금 집사람이 짓고 있는 미소 속에는 그런 그녀의 속마음이 감추어져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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