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북부 유럽 여행
여행일 : ‘17. 6. 19(월) - 7.1(토)
여행지 : 러시아(모스크바, 페테르부르크), 에스토니아(탈린). 핀란드(헬싱키), 스웨덴(스톡홀름), 노르웨이(오슬로, 발드레스플라야, 요정의 길, 게이랑에르 피오르드, 뵈이야 빙하, 베르겐, 하당에르 피오르드, 하당에르비다국립공원, 덴마크(코펜하겐)
일 정 : 28(수) : 오슬로시 청사, 칼 요한슨 거리, 비겔란조각공원
여행 아홉째 날 :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Oslo)
특징 : 노르웨이와 ‘유틀란드 반도(덴마크)’의 사이에 있는 ‘스카게라크 해협 (Skagerrak)’에서 내륙의 안으로 움푹 들어온 만(灣)의 안쪽에 위치하는 노르웨이의 수도이다. ‘노르세 이야기(The Norse sagas)’라는 북유럽 전설에도 등장하는데, 바이킹의 후예가 사는 곳으로 알려진 것처럼 1049년 바이킹의 왕인 '하랄(Harald Hardråde)'이 건설했다고 전해진다. 중세인 1300년경 ‘호콘 5세(Haakon V)’에 의해 수도로 지정된 이후 노르웨이의 요충지로 거듭났으며 수많은 발전을 거쳐 무역도시로 번성하며 오늘에 이른다. 목재 건물이 많았던 1600년대에는 잦은 화재로 인한 피해를 입다 결국 1624년에는 3일에 걸친 대화재 끝에 도시의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이에 크리스티안 4세는 폐허가 된 오슬로를 복구함과 동시에 근교에 대체 도시 크리스티아니아(Christiania)를 지어 그곳에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1840년대엔 크리스티아니아의 산업적 번성이 이루어지는데 이러한 팽창은 많은 건축적 유산을 남겼으나 1800년대 말 그 추세가 꺾이게 된다. 크리스티아니아가 다시 오슬로라는 이름을 찾게 된 것은 1925년도이다. 이처럼 오랜 역사를 품은 오슬로는 세월을 견뎌낸 수많은 건축물이 즐비하다. 여유롭고 단정한 도심 속에 자리한 중세풍 건물들이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 오슬로 여행의 시작은 시청사(Oslo City Hall)의 뒤에 있는 광장으로부터 시작된다. 오늘 둘러보게 될 시청사는 물론이고 도심(都心)이라 할 수 있는 ‘칼 요한슨 거리(Karl Johans gate)’도 이곳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오슬로가 시작된 ‘아케르스후스 요새(Akershus Fortress)’도 5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 시청광장의 서쪽에는 노벨평화센터가 자리하고 있다. 2005년 개관해 노르웨이 노벨위원회가 선정·시상하는 노벨 평화상의 역사와 역대 수상자 자료를 보관 전시하는 일종의 박물관이다. 건물이 매우 고전적으로 보이는 건 130년 된 옛 오슬로 서부역사를 개조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설계는 아프리카 가나(Ghana)계의 영국 건축가인 ‘데이비드 아디아예(David Adjaye 1966~)’가 맡았다. 가나 외교관의 아들로 태어나 영국에 정착한 뒤 왕실 작위를 받았을 만큼 유명한 인사이다. 아무튼 이곳에는 초대 평화상 수상자인 앙리 뒤낭을 비롯해 테레사 수녀, 넬슨 만델라, 달아이 라마, 우리 김대중 대통령, 버락 오바마까지 역대 수상자들의 자료가 전시되고 있다.
▼ 시의 900주년에 맞춰 준공된 시청사(Radhuset)는 오슬로를 상징하는 건축물로, 공사 계획과 착공은 1920년이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완공된 것은 1950년의 일이다. 낭만주의와 고전주의가 적절히 결합된 아름다운 외관을 지녔다. 두 개의 탑을 가진 시청사의 내부는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작가들의 예술품들로 가득 장식되어있다. 매년 12월이면 노벨상 시상식이 열리는데, 2000년에는 우리나라의 김대중 대통령이 이곳에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 시청 앞 광장은 시청사를 타원형으로 생긴 두 개의 건축물이 둘러싸고 있는 형태이다. 청사를 가운데에 두고 전면의 양쪽에서 둥글게 뻗어 나온 날개 건물이 에워싼 모양새라고 보면 되겠다. 쌍둥이 건물은 아니지만 두 건물이 대칭을 이루고 있음에는 틀림이 없다.
▼ 정면 중앙의 한복판에 오슬로의 상징인 백조 두 마리로 분수(噴水)를 만들어놓았다. 조각가인 ‘Dyre Vaa(1903~1980)’가 만들었다. 노르웨이 소설가 ‘한스 에른스트 칭크(Hans Ernst Kinck 1865~1926)’가 백조를 '오슬로의 영혼'으로 묘사한 이래 백조는 오슬로의 여러 조형물에 즐겨 쓰는 소재가 되었다. 청사의 정면 상단에 매달린 조각상(彫刻像)은 ‘Joseph Grimeland(1916~2002)’라는 조각가의 '오슬로 소녀(Oslopike)'라는 작품이라고 한다. 오른편 벽면에는 지름 5미터짜리 천문시계가 붙어 있다. 태양이 운행하는 궤도를 12 성좌로 나눈 황도 12궁, 서양식 12간지라고 할 수 있는 조디악(12궁도)들이 빙 둘러 있는데, 조각가 ‘Nils Flakstad(1907~1979)’의 부조 작품이란다. 시청사 안팎을 장식하고 있는 이러한 조각과 벽화들은 화가 8명과 조각가 17명이 만든 작품들이다.
▼ 청사 안으로 들어서면 천장까지 툭 트인 메인홀(main hall)이 나온다. 가로 31m, 세로 39m에 높이가 21m인 이 공간은 노벨상의 만찬이 열리는 스톡홀름 시청의 블루홀을 벤치마킹했다고 한다. 한쪽에 계단을 놓아 2층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한 구조도 같다. 다만 스톡홀름의 블루홀은 벽돌 벽을 그대로 노출시킨 데 반해, 이곳은 빙 둘러 벽화로 장식한 점이 다르다. 메인홀과 이층 연회실, 그리고 이층 복도의 벽화들은 '벽화 형제들'로 불리던 세 명의 화가( Axel Revold, Alf Rolfsen, Per Krohg)와 ‘헨릭 쇠렌센(Henrik Sørensen)’이 맡았다고 한다. 벽화에는 노르웨이 사람들의 일상생활, 바이킹 신화, 문화와 역사 등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점령으로 인한 어두운 역사도 잘 표현되어 있다. 독일군이 노르웨이를 점령하고 있던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시청 건축이 잠시 중단되기도 했는데, 그런 아픈 역사를 잊지 않으려는 의도가 아닐까 싶다.
▼ 이곳에서는 다른 나라의 귀빈 영접을 비롯한 다양한 국내외 행사가 열리는데, 특히 1990년부터 노벨 기일인 12월 10일마다 노벨 평화상을 주는 시상식장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우리네 귓가엔 ‘김대중’이라는 이름 석 자만 맴돌 따름이다. 김대중전대통령이 이곳에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노벨은 스웨덴 사람이다. 하지만 노르웨이에서 오래 살았다고 한다. 그의 이름으로 수여되는 노벨상 가운데 평화상을 이곳에서 수여하게 된 이유이다. 평화상만은 노르웨이에서 수여하라는 그의 유언에 따라 매년 12월10일에 시청사에서 상을 수여해오고 있다.
▼ 관람 동선(動線)은 스톡홀름 시청 블루홀처럼 메인홀 한쪽에 놓은 계단을 올라가도록 되어 있다. 이층으로 오르면 메인홀의 베란다로 연결된다. 스톡홀름 시청처럼 이층 복도를 따라 가면서 방들을 구경하는 구조이다. 이곳에서 눈여겨봐야 할 곳은 남서쪽 모퉁이에 있는 작은 방이다. 시민들의 결혼식 장소로 쓰이는 공간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보다는 뭉크(Munch)의 대형 작품이 걸려 있어 더 유명해졌다. 이 방에 걸려있는 '삶(Life)'이란 작품은 ‘2차 세계대전’ 때 노르웨이를 점령했던 나치가 약탈해 갔던 것을 전쟁 후에 돌려받은 것이라고 한다.
▼ 연회장으로 가는 길에 만나게 되는 남쪽 '축제의 회랑(Festival Gallery)'이다. 천장은 전통 바이킹 문양으로 장식했고 왼쪽 벽엔 화가이자 직물염색가 ‘코레 미켈센 욘스보르그(Kåre Mikkelsen Jonsborg 1912~1977)’가 8세기 오슬로 시장 풍경을 묘사한 벽걸이 직물, 태피스트리(tapestry)들이 걸려 있다. 연회장 쪽으로 통하는 문의 벽면에 가득한 그림은 ‘악셀 레볼(Axel Revold 1887~1962)’의 작품으로 노르웨이의 울창한 삼림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입체파 기법으로 그린 것이라고 한다.
▼ 잠시 후 오슬로시의 의사당으로 들어선다. 북유럽의 특징대로 기능적이면서도 생산성이 있어 보이는 구조이다. 다른 한편으론 소박함 속에서도 품위가 있어 보인다고 평하고 싶다. 이 나라는 청사나 의사당을 누구에게나 공개하고 있단다. 그만큼 떳떳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 복도의 곳곳에는 유명 인사들의 흉상(胸像)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벽면에는 도자기로 만든 부조들이 결려 있다. 제작한 사람의 약력을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는데 생각은 나지 않는다.
▼ 시청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연회장이다. 왼쪽 벽엔 1905년 스웨덴으로부터 독립한 이후의 왕인 ‘호쿤 7세’와 ‘울라브 5세’, 그리고 현재의 왕인 하랄 5세와 소냐 왕비의 전신 초상화가 걸려 있다.
▼ 전면에는 ‘윌리 미델파르트(Willi Midelfart 1904~1975)’가 그린 '성장(Growth)'이라는 작품이 그려져 있다. 누드 비치에서 벌거벗고 노는 남녀노소들을 그렸는데, 계급 없는 세상과 사회주의 이상향을 상징한단다. 벽화의 아래에는 연회장의 음식을 나르는 두 개의 문(門)이 나있다. 이 문과 벽화에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벽화는 원래 일층 중앙홀에 쓰려다가 너무 분방한 소재여서 이리로 옮겨졌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옮기려고 하니 문이 벽화를 잘라 먹어 버리더라는 것이다. 그림을 보면 문을 가리키며 메롱 하는 꼬마가 그려져 있다. 짜증이 난 화가가 일부러 그려 넣은 것이란다.
▼ 주방기구들을 진열해놓은 공간도 보인다. 노벨상 행사 때 사용되는 집기들인 모양인데 은(銀)으로 만든 제품들 일색이다. 그리고 그 하나하나는 섬세하면서 아름답기 짝이 없다.
▼ 기념품을 전시하는 공간을 살펴보다가 화들짝 놀라고 만다. 우리나라의 거북선도 진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전통의상을 입은 인형과 중국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방패, 회교사원인 모스크(mosque)의 모형들 사이에서 의젓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 청사의 바깥쪽 벽에는 노르웨이의 국민적 영웅이자 북극 탐험가이자 난민의 아버지인 민중 운동가 ‘프리드쇼프 난센(Fridtjof Nansen 1861~1930)’을 기리는 기념물이 붙어 있다. 그는 1888년 세계 처음으로 그린란드를 횡단했고 1890년엔 북극 탐험에 나서 그때까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북단이었던 북위 83도 59분까지 북상했다. 난센은 대학 교수, 주영 대사를 거쳐 국제연맹 노르웨이 대표를 지냈고 1차 세계대전 후에는 시베리아에 갇혀 있던 포로의 본국 송환과 난민 구제에 앞장선 공로로 1922년 노벨 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그는 나라도 없이 세계를 떠도는 유랑 난민들의 정착을 위해 제3의 피난처로 '난센 여권'을 주창해 실현시키기도 했는데, 그의 부조상 오른쪽 아래에 보이는 게 '난센 여권'이다.
▼ 시청을 둘러본 다음에는 ‘칼 요한슨 거리(Karl Johans Gate)’로 향한다. 중앙역에서 시작해 왕궁까지 오슬로의 중심부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약 1.3㎞쯤 되는 구간으로 오슬로 최대의 번화가이다. 이 거리의 끝 언덕 위에다 왕궁을 건립한 ‘칼 요한’ 왕의 이름에서 이름을 따왔다. 시청 앞에서도 곧바로 연결되는 이 거리는 상점과 레스토랑이 즐비하며 거리의 중심에는 국회의사당이 있다. 이번 투어는 ‘칼 요한슨 거리’를 따라 걷다가 만나게 되는 사연이 있는 건물들의 외관(外觀)을 둘러보는 것만으로 짜여있을 따름이다. 타이트하게 짜인 일정에 쫓겨야만 하는 패키지여행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 거리로 들어서서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건물은 ‘국립극장(Oslo Nationaltheatret)이다. 19세기 말 노르웨이가 스웨덴으로부터 분리·독립하면서 노르웨이 극작가들과 예술가들의 염원을 담아 1899년 문을 열었다. 노르웨이에서 가장 극적인 예술 공연을 펼치는 곳으로 유명하다. 극장 앞 좌측에는 ‘헨리크 입센(Ibsen, Henrik Johan, 1828-1906)’의 동상(銅像)이 세워져 있고, 오른쪽은 노르웨이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초대 극장장인 ‘비에 른손(BjØrnson, BjØrnstjerne, 1832-1910)’의 동상이 지키고 있다. 또한 건물 정면에는 대표적인 노르웨이 출신 극작가인 ‘루드비 홀베르(Ludvig Holberg, 1684-1754)의 조각이 새겨져 있다.
▼ 광장 한쪽에 노르웨이 출신의 작곡가인 ‘할보르센(Johan Halvorsen, 1864-1935)의 동상도 보인다. 베르겐 필하모닉의 수석연주자를 거쳐 1893년부터 지휘자로 활동했다. 1899년 개장한 국립극장의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임명되었고 1929년 은퇴할 때까지 30여 년 동안 지휘자로 활동했다. 이 기간 동안 30여 개의 오페라를 지휘했고 또한 30여 개의 무대음악을 작곡하였다. 은퇴 후에는 마지막 음악적 정열을 집중시켜 세 개의 교향곡과 두 개의 노르웨이 광시곡을 작곡하였다. 할보르센은 그리그가 수립한 노르웨이 민족음악을 발전시켰으나, 그리그와는 확실하게 구분되는 스타일로 작곡하였다. 그리그의 여러 개의 피아노곡을 오케스트라용으로 편곡하였는데, 그 중 하나를 그리그의 장례식에서 연주하였다. 또한 헨델의 바이올린과 첼로 2중주곡을 편곡하여 ’파사칼리아‘를 작곡하였다.
▼ 거리의 동쪽 끄트머리쯤에 있는 오슬로 대성당(Oslo domkirke)이다. 노르웨이의 국교인 루터파 교회의 총본산일 뿐만 아니라 3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 깊은 건축물이다. 1624년 대화재로 불타 버린 도시를 다시 재건하면서 대성당도 함께 건립되었다. 하지만 1686년 화재로 소실되었고, 1694년 다시 짓기 시작해서 1699년에 청록색 탑이 있는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이후 150여 년 동안 시 안에 있는 유일한 성당으로 종교 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고, 현재는 3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시의 상징물이 되었다. 1936년부터 1950년 사이에 제작된 천장의 화려한 벽화와 노르웨이의 대표적인 조각가 비겔란(Vigeland)의 작품인 창문의 스테인드글라스는 놓치지 많아야 할 볼거리이다.
▼ 오슬로 국립미술관(Oslo National Gallery)이다. 노르웨이 최대의 미술관으로 1836년에 개관하였다. 피카소, 르누아르, 세잔, 마네, 모딜리아니, 드가, 뭉크 등 거장들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또한 노르웨이 작가의 작품과 19~20세기 덴마크·핀란드 화가의 작품도 소장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기가 있는 전시관은 ’사춘기‘, ’절규‘ 등 58점의 뭉크(Edvard Munch,1863-1944) 작품을 전시하고 있는 뭉크관이다. 만일 뭉크의 더 많은 작품을 감상하고 싶다면 국립미술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뭉크 미술관‘을 함께 둘러볼 것을 권한다.
▼ ’칼 요한슨 거리‘는 서울의 명동만큼이나 하루 종일 인파로 북적이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카페나 상가가 밀집해 있음은 물론이다. 명색이 유명한 관광지인데 노점상이 보이지 않을 리가 없다. 길바닥에다 좌판을 벌여놓고 기념품이나 민속공예품 같은 것을 파는 사람들도 보인다. 생김새로 보아 남미계 이민자들이 아닐까 싶다. 모금함을 앞에 놓고 각종 악기들로 연주를 하는 사람들도 보인다.
▼ 바닥에 뭔가가 적혀있다. 뭔 소린지는 몰라도 특이하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 거리 곳곳에 옷가게와 노천카페, 식당들이 늘어서 있다. 마치 서울의 명동을 걷고 있는 듯 활기찬 모습이다.
▼ 잔디밭으로 된 정원의 너머에는 국회 의사당이 있다. 반원형 의사당을 가운데에 두고 양쪽으로 날개를 펼친 모양새이다. 스웨덴의 건축가 에밀 빅토르 랑글레트(1824~1898)가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신고전 양식을 섞어 설계했다고 한다. 노르웨이에서 주관하고 있는 노벨 평화상의 초기(1901-1904) 시상식(施賞式) 장소로 이용되던 곳이다. 이 행사장은 ‘노르웨이 노벨협회(1905-1946)’로 옮겨졌다가 ‘오슬로대 법학부(1947-1989)’를 거쳐 1990년부터는 오슬로 시청에서 거행되고 있다.
▼ 노벨상 수상자들이 묵는다는 그랜드호텔이다. 우리나라의 김대중 대통령도 이곳에서 묵었음은 물론이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한국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평화란,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훨씬 더 절실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피상적인 개념보다 노벨평화상의 현장에서 진정한 평화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 거리 끝의 언덕에 있는 왕궁(The Royal Palace of Norway)은 현재 노르웨이 국왕이 기거하고 있는 공식 저택이다. ’카를 14세‘가 지었는데 화려하기보단 소박한 모습이다. 왕궁 내부는 출입할 수 없지만 왕궁 외부와 주변 정원은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있어, 봄과 여름철에는 녹음 속에서 일광욕을 즐기려는 오슬로 시민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왕궁을 지키는 근위병들의 교대식도 볼거리로 알려져 있다. 참고로 나폴레옹의 전사이자, 원래 이름이 ’장바티스트 베르나도트(Jean Baptiste Bernadotte)‘인 칼 요한은 1818년 당시 스웨덴 왕인 동시에 노르웨이를 지배했던 왕이었다.
▼ ’비겔란 조각공원(Vigeland Sculpture Park)‘으로 향한다. 창밖으로 보이는 도심의 모습은 우리나라와는 다른 한가로운 여유가 느껴진다. 새삼 부러움을 느끼며 푸르른 자연에 감탄하고 있을 즈음 비겔란 조각 공원에 도착한다. 비겔란 조각 공원은 원래 개인의 정원으로 시작해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모해오다가, 20세기 초반 조각가 ’구스타브 비겔란(Vigeland, Adolf Gustav, 1869-1943)이 직접 제작한 분수대와 조각들이 전시되면서 비겔란 조각공원으로 명명됐다. 아름다운 자연과 예술 작품이 훌륭한 조화를 이루며, 매해 200만 명 이상이 방문하는 오슬로가 자랑하는 대표적인 문화 공간이다. 참고로 비겔란은 오슬로와 코펜하겐에서 공부했고, 파리에서 몇 달간 머물면서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 1840-1917)’의 작품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비겔란의 조각 작품에는 자연주의적인 정서가 담겨 있으며, 죽음과 남녀 사이의 관계를 주제로 한 인물의 흉상과 부조가 주를 이룬다. 그는 감정과 표현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여 고독과 황홀함이 대조되는 분위기로 인물상을 묘사했다.
▼ 20세기 초, 비겔란은 자신이 일생 동안 영혼을 바쳐 조각한 작품들을 오슬로시에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힌다. 이에 오슬로시는 공원 설계와 작품을 의뢰했고 비겔란은 13년에 걸쳐 청동, 화강암, 주철 등을 사용한 다양한 작품을 준비했다고 한다. 작품을 관통하는 테마(thema)는 인간의 삶과 죽음을 아우르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이다. 1943년, 비겔란은 자신이 온 힘을 기울인 공원이 완성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 후 비겔란의 제자와 오슬로 시민들이 합심해 지금의 공원을 완성했다고 한다. 아무튼 ‘프로그네르 공원(Frognerparken)’이라고도 불리는 이 공원에는 212점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그 가운데 하이라이트는 세계에서 가장 큰 화강암 조각품으로 알려진 '모놀리트(Monolith)'이다. 멀리서 보면 기둥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121명의 실제 크기 남녀가 얽혀 있는 모습이다.
▼ '모놀리트(Monolith)'는 높이가 17m나 되는 하나의 화강암에다 수많은 인간 군상(群像)들이 위로 올라가려는 모습을 표현한 작품으로 20년에 걸쳐 완성한 걸작이다. 121명의 남녀가 서로 엉켜 괴로움으로 몸부림치는 모습이 생동감 있게 묘사되고 있는데, 조각 속의 사람들은 실제 사람 크기로 만들어졌다. 태어나 성장하고 늙어 가는 인생을 표현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아무튼 세계에서 가장 큰 화강암 조각품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공원에서 가장 명물로 꼽히고 있다.
▼ 36개의 다양한 포즈를 한 인간상들이 모놀리트(Monolith)'를 호위하듯 둘러싸고 있다. 인간의 욕망과 투쟁, 희망과 슬픔을 농축시켜 놓은 것들이란다. 즉 갓난아이로 부터 죽음에 이르는 노인까지의 과정을 표현했다는 것이다. 아이들에게는 무한한 사랑을 소년들에게는 드높은 이상을 불어 넣는 반면 성인에게는 사랑과 증오, 고독과 죽음 등을 다루고 있단다. 그런데 모든 조각품들이 하나 같이 발가벗고 있다. 혹자는 이를 두고 공원의 테마(thema)가 인간의 삶과 죽음을 아우르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다른 어떤 이들은 시대에 관계없이 똑 같은 이미지를 전달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하는데 어떤 게 맞는지는 모르겠다.
▼ 건너편 언덕에도 조각상이 세워져 있으나 멀리서 눈요기만 즐기기로 한다. 여러 사람이 띠를 이루며 큰 원형을 만들고 있는 작품인데,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삶의 수레바퀴를 나타내려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 '모놀리트(Monolith)'에서 바라본 정문 방향, 분수공원을 거쳐 입구의 다리까지 거의 대칭으로 이루어져 있다.
▼ 계단을 내려서면 분수대(噴水臺)가 기다린다. 여섯 거인이 받쳐 든 수반에서 물이 흘러넘치는 구조로 만들어져 있다. 분수대를 에워싸고 있는 낮은 담 위로는 20점에 이르는 '나무 인간(Tree People 1906~1914)'이 늘어서 있다. 왕관 모양 나무 안에 다양한 몸짓으로 들어가 있는 군상들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인간의 일생을 순차적으로 표현한 것이란다, 그리고 수반을 들고 있는 여섯 명의 거인들은 젊은이부터 노인까지 조금씩 연령대가 다르다고 한다,
▼ 분수대를 지나면 장미정원이다. 정원의 규모도 작을뿐더러 장미의 종류도 많지 않으나 정성스럽게 꾸며놓은 흔적이 역력하다.
▼ 조각공원을 빠져나오다 보면 널따란 다리를 만나게 된다. 이 다리 또한 조각공원의 명물이다. 길이 100m에 폭이 15m나 되는 다리의 양쪽 난간에는 58점이나 되는 수많은 청동 조각상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인간의 실제 크기에 맞춰 제작된 이 청동상들은 다양한 연령대의 남녀노소가 혼자이거나 둘 또는 여럿이서 어울리고 있는 작품들이다. 남자와 여자, 또는 어른과 아이의 관계를 묘사하고 있단다.
▼ 아래 사진은 '네 천재를 쫓아다니는 남자(Man chasing four geniuses, 1930)라는 작품이다. 말썽꾸러기 아이들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는 아버지를 표현하는 작품으로 보인다. 그런데 아빠의 발끝에 매달린 아이의 팔이 반들반들하게 윤기가 나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만졌다는 증거인데, 그런데는 다 이유가 있단다. 비겔란이 작품을 기증하면서 두 가지의 조건을 붙였다는 것이다. ‘누구나 맘껏 만질 수 있을 것’과 ‘입장료를 받지 말 것’이다. 일생동안 예술만을 추구해온 그 다운 발상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 다리의 명물은 ’화가 난 아이(Angry boy/ Sinnataggen 1928)‘라는 작품이다. 화가 난 아이를 조각해 놓은 작품인데, 그 인기를 반영하듯 손과 발이 반질반질하게 윤기가 돌고 있다. 조각상의 왼손을 만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속설(俗說) 때문인데,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발까지 만졌던 모양이다.(사진이 별로여서 따로 붙이지는 않았다)
▼ 다리의 귀퉁이 네 곳에는 높다란 좌대(座臺)를 세우고 그 위에다 화강암으로 제작된 입상(立像)을 올려놓았다. 남자가 도마뱀에 맞서 싸우는 형상이 둘이고, 나머지 둘은 도마뱀이 각기 여자와 남자를 제압해 껴안고 있는 모양이다. 인생의 고통, 즉 악으로 상징되는 이무기에 굴복하고 밀치고 수긍하는 인생사를 표현했다고 한다.
▼ 공원의 안에도 호수가 있다. 호수가 참 많은 나라라는 게 실감이 나는 순간이다. 누군가 이곳 오슬로를 ‘300개가 넘는 호수와 200여 개의 공원’으로 이루어진 도시라고 했다. 그는 오슬로에서 자연과 인공의 경계를 찾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는 말까지 덧붙였었다. 그래서 이곳 오슬로가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도시로 유럽 전역에 알려져 왔다는 것이다. 한데 최근에는 그런 자연 위에다 뮤지엄(museum)’ 등의 예술적 색채까지 덧입히고 있단다. 이들이 어디에다 중점을 두고 있는지 능히 짐작할 만하다.
▼ 잔디밭에는 남녀노소 다양한 사람들이 한낮의 망중한(忙中閑)을 즐기고 있다. 유모차를 끌고 나와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는 부모들이 있는가 하면, 잔디밭에 누워 책을 읽는 젊은이들도 있고, 또 다른 곳에서는 서로 팔베개를 해주며 사랑노름을 하고 있는 다정한 연인들도 보인다. 맨날 쫒기 듯 살아온 우리에게는 낯선 풍경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도 어색하지도 않아 보이는 건 무슨 이유일까. 한 박자 느리게 살아가는 그네들의 여유로운 삶에 나 또한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 조각공원을 둘러본 다음에는 오슬로항으로 이동한다. 다음 행선지인 덴마크의 코펜하겐으로 가는 ‘크루즈(DFDS SEAWAYS)’를 타기 위해서이다. 배의 승선까지는 1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다. 30분 정도의 자투리시간을 이용해 ‘아케르스후스 요새(Akershus Fortress)’ 쪽으로 가보기로 한다. 오슬로 항구 동쪽 언덕에 세워져 있는 중세의 성채(城砦)이다. ‘호콘 5세(King Håkon V)’가 도시 방어를 위해 1299년에 건립하기 시작한 것으로, 노르웨이 왕이 머물던 성이다. 17세기 초 크리스티안 4세(King Christian IV) 때, 성을 개조하면서 현재와 같은 르네상스 양식의 외관을 갖추게 되었다. 바다에 면해 있는 이 성채는 수도뿐만 아니라 노르웨이 전체에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사실상 아케르스후스 성을 지배하는 자가 노르웨이를 지배해왔다. 현재까지 군사 요새로 이용되고 있으나 낮에는 일반인에게 공개된다. 요새 내에는 하콘 7세와 올라브 5세의 무덤을 비롯해, 군사박물관과 아케르스후스 성이 있다.
▼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바닷가 선착장에 ‘Oslo sightseeing Fjord cruise’라고 적힌 현수막이 걸려있다. 오슬로를 둘러볼 수 있는 크루즈가 운행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선착장에는 유람선 몇 척이 정박해있고, 매표소에는 오슬로를 보여주겠다는 문구도 적혀있다. 이곳 오슬로가 ‘오슬로 피오르드(Oslo fjord)’의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더니 눈에 담을만한 구경거리가 제법 있는 모양이다.
▼ 아쉽게도 요새까지는 가보지 못했다. 30분 가지고는 구경은커녕 성채까지 다녀오기에도 벅찰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별 수 없이 성곽의 옆에 만들어진 전망대까지만 다녀오기로 한다.
▼ 언덕에 오르면 성벽으로 여겨지는 높다란 담이 나타난다. 그 아래는 공터로 그냥 남겨 두었다. 조금 더 걸으면 요새의 안으로 들어갈 수 있지만 이쯤에서 발길을 돌리기로 한다. 아쉽지만 시간이 부족하니 어쩌겠는가.
▼ 전망대에 서면 ‘바이킹의 수도’라는 별명을 얻은 오슬로 항의 전경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아담한 규모인 항구는 유람선과 요트, 어선 몇 척 말고는 비교적 한산한 편이다. 노르웨이가 해상국가임을 감안할 때 의외가 아닐 수 없다. 9백여 년 전 북유럽을 주름잡던 바이킹들이 가장 사랑했던 오슬로는 젊은 분위기를 발산하는 도시다. 유럽국가들 수도와는 달리 시골과 같은 한적함을 느낄 수 있는데, 특히 면적의 3/4이 삼림과 전원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 되돌아 내려오는 길에 뜻밖의 인물을 만난다. 뜬금없이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1882-1945’의 동상(銅像)이 세워져 있는 것이다. 세운 이유도 적어놓지 않았다. 어쩌면 독일군에게 점령당했던 자신들의 흑역사(黑歷史)를 끝낼 수 있게 해준데 대한 감사의 표시인지도 모르겠다. 당시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주역 중의 한사람이 바로 루스벨트일 테니까 말이다. 그게 아니면 국왕인 ‘하랄 5세(Harald V. 1937~, 재위기간 1991~)’와의 인연 때문일 것이다. 독일군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 온 하랄 5세를 전쟁이 끝날 때까지 백악관에서 머물 수 있게 해준 이가 바로 미국 대통령이었던 루스벨트(재임기간, 1933-1945)였기 때문이다.
▼ 승선시간이 되어 배에 오른다. ‘DFDS SEAWAYS’는 스칸디나비아(Scandinavia)의 도시와 도시를 운항하는 덴마크 국적의 크루즈회사로 140년 넘게 북해를 운항하고 있다. 오늘 저녁은 오슬로와 코펜하겐을 잇는 배편을 이용하게 된다. 헬싱키에서 스톡홀름으로 올 때 타고 왔던 실자라인(Silja Line)과 마찬가지로 이 배도 역시 숙식(宿食)을 겸하도록 되어 있다. 4시30분 오슬로를 출발해서 다음날 아침 9시45분에 코펜하겐에 도착하는데, 배의 크기(10층의 데크)도 실자라인과 거의 비슷하다. 길이 212m에 폭이 29m이며, 차량탑승 라인도 1,300m에 이른다. 승객도 물론 2천8백 명이나 태운다. 속도는 22노트이다. 선내에는 다양한 카페와 바(bar), 레스토랑과 엔터테인먼트 등 다양한 부대시설이 준비되어 있다. 특히 가격이 싼 것으로 알려진 선내면세점은 여행자들에게 인기가 좋다. 술 좋아하는 난 현지인의 도움을 받아 품질이 좋다는 보드카 2병을 챙겼고, 집사람은 세일행사중인 초콜릿을 한 바구니나 샀다.
▼ 이번 코스도 역시 저녁식사는 뷔페이다. 그리고 ‘훈제연어’ 역시 무제한으로 제공된다. 하지만 술은 생맥주나 와인 가운에 딱 한 잔만 마실 수가 있다.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식사 후 선실에서 휴식을 취하다 9시쯤에 갑판으로 올라가본다. 지난번에 실패했던 일몰(日沒)을 기다려보기 위해서이다. 면세점에 들러 축배용 캔맥주까지 사들고 올라왔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오늘도 그런 행운은 주어지지 않았다. 저녁노을이라도 볼 수 있었던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그럼 일출은 어땠을까? 3시쯤 일어나 밖에 나가봤지만 오늘은 아예 비까지 내리고 있다. 아무래도 이번 여행은 눈물을 흘릴 정도로 아름다웠던 비경(祕境)들을 보았던 것으로 만족하라는 모양이다.
♧ 에필로그(epilogue), 노르웨이 여행을 하다보면 국기를 게양해 놓은 집들이 자주 눈에 띈다. 국기가 게양되어있지 않은 집들도 빠짐없이 게양대는 만들어져 있다. 노르웨이에서는 국경일은 물론이고 특별히 자기 집안에 경사스러운 일이 있거나 마을에 경사가 있을 때에는 국기를 게양해서 자축하는 게 일상이라고 한다. 국기게양대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일 것이다. 또한 국가와 국기에 대한 노르웨이 국민들의 깊은 애정이 밖으로 드러나는 한 장면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론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복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 이들은 무거운 대가를 지불하고 있다. 모든 국민들이 자기 소득액의 50%를 세금으로 부담하고 있지만 불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한다. 세금을 덜 내려고 속이는 사람도 없단다. 자신들이 내는 세금이 자신과 이웃들에게 틀림없이 혜택이 되어 돌아온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란다. 그런 믿음을 바탕에 깔고 있기에 이네들의 국기에 대해 느끼는 소중함과 애정은 더욱 남다르지 않나 싶다. 국기는 그 나라의 표상이다. 한 때 우리나라에는 국기 게양식과 하기식의 의식이 있었다. 이때는 그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은 물론, 지나가던 사람도 걸음을 멈추고 국기에 대해 경의를 표해야만 했다. 그러던 것이 언제부턴가 사라져 버렸고 태극기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도 줄어들어 버렸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무튼 우리도 노르웨이의 국민들처럼 국기와 친하게 살아갔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시위할 때까지 들고 나오자는 얘기는 물론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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