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두바이, 스위스, 이탈리아

 

여행일 : ‘16. 3. 12() - 20()

일 정 :

3.13() : 두바이

3.14(월) : 스위스(루체른)

3.15(화)-19() : 이탈리아(밀라노, 피렌체, 로마, 나폴리, 폼페이, 소렌토, 베니스, 볼로냐)

 

여행 둘째 날 오전 : 스위스(Switzerland) 루체른(Luzern)의 리기(Rigi)

 

특징 : 스위스는 중부유럽에 있는 연방제공화국이자 인구가 900만 명도 안 되는 자그만 영세중립국이다. 최대 도시는 취리히, 하지만 연방의회와 정부가 많이 위치한 베른이 사실상 수도의 역할을 하고 있다. 공식 명칭은 헬베티아 연방 (Confoederatio Helvetica)이다. 헬베티아는 로마시대 이전부터 스위스지역에 거주하던 헬베티족에서 따온 라틴어명. 국명의 독일어 표기는 Schweiz(슈바이츠), 프랑스어 표기 Suisse''(쉬스), 이탈리아어 표기 Svizzera(스비체라), 로망슈어 Svizra(즈비츠라), 이처럼 지역마다 언어가 달라 스위스의 공용어가 4개나 되기 때문에 라틴어로 공식 명칭을 지었다. 4개 언어를 병기할 공간이 없거나 기타 이유로 한 언어로만 표기해야 할 경우는 4언어 중 어느 하나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 라틴어를 사용한다. EFTA(유럽자유무역연합 : European Free Trade Association)의 가입국이지만, 유럽연합(EU)에는 가입되어 있지 않은 4개국(스위스, 리히텐슈타인,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중 하나이다. 하지만 솅겐조약에는 가입되어 있기에 주변국에서 스위스로 넘어갈 때에는 여권이 필요 없다. 정치적으로는 26개의 주(스위스식 명칭은 칸톤)이 연방을 이루고 있으니 칸톤은 헌법상 영구적 지위를 부여받으며 사실상 별개의 나라 수준의 자치권을 가지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연봉이 높은 국가인데도 제조업이 강세이며, 로슈와 노바티스라는 양대 축을 가진 제약업이 스위스 전체 수출의 30%를 담당하고 있다. UBS와 크레디트스위스를 비롯한 금융산업도 매우 강세이며, 시계산업도 수출의 7% 정도를 차지한다.

리기 산(독일어: Rigi), 루체른의 3대 명산으로 티틀리스(3,238m)와 필라투스(2,132m), 리기 산(1,798m)을 꼽는다. 티틀리스는 사계절 내내 눈을 볼 수 있는 스위스 중부에서 가장 높은 산이며, 필라투스는 용과 유령이 산다는 전설에 걸맞게 험준한 바위산이다. 이 둘에 비해 리기 산은 해발 1752미터의 높이로 가장 낮고 부드러운 인상을 지녔다. 루체른 호와 추크 호에 둘러싸여 있으며 루체른 주와 슈비츠 주 사이에 걸쳐 있다. 여름에는 하이킹, 겨울에는 스키와 썰매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이 곳을 찾는다. 흔히 산의 여왕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1871521일 유럽 최초의 산악 열차가 개통된 곳이기도 하다. 아르트-골다우(Arth-Goldau) 역과 비츠나우(Vitznau) 역을 연결하는 랙 철도(Rigi Bahn), 베기스(Weggis)에서 리기-칼트바트(Rigi-Kaltbad)를 연결하는 곤돌라 리프트, 크레벨(Kräbel) 역에서 리기-샤이데그(Rigi-Scheidegg) 역을 연결하는 케이블카가 운행된다.

 

 

 

루체른 호수 가에 있는 작은 마을 비츠나우(Viznau)에서 내린다. 리기산으로 올라가는 산악열차가 이곳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은 루체른 호숫가를 끼고 이어지는 도로를 따랐다. 끝도 없이 펼쳐지는 호수와 알프스의 준봉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멋진 길이다. 물론 유람선을 이용해서 이곳으로 오는 방법도 있다. 루체른 중앙역 앞에 위치한 선착장에서 이곳 비츠나우로 오는 유람선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에 쫒기는 여행자들에게는 부담이 될 수도 있으니 여행계획을 짤 때 이를 감안해야 할 일이다.

 

 

 

 

 

 

비츠나우(Viznau)는 리기 산기슭에 위치한 작은 휴양 마을이다. 산과 호수를 모두 품은 데다 풍부한 일조량에 온화한 기후까지 지녔다. 열차가 출발할 때까지의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서 마을을 한 바퀴 둘러보기로 한다. ‘톰 소여의 모험을 쓴 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이 했다던 말이 생각난다. 그는 스위스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마을이라고 칭송했다. 그가 머물렀던 곳은 베기스(Weggis)이다. 그러니 그가 얘기했던 마을이 이곳 비츠나우(Viznau)가 아님은 물론이다. 하지만 이웃에 위치한 마을의 풍경이 다르면 얼마나 다르겠는가. 한적함이 한껏 묻어나는 목가적(牧歌的)인 풍광이었다.

 

 

 

 

 

 

호수를 둘러본다. 참으로 빼어난 풍경이다. 잔잔하면서도 영롱한 물결이 끝없이 펼쳐진다. 이른 아침인지라 호수는 텅 비어있다. 한가로이 떠도는 요트라도 한 척 보인다면 더 멋진 그림이 될 텐데 말이다. 호수 너머로는 삐쭉삐쭉한 알프스 산맥이 그림같이 펼쳐지는데, 그 풍경이 비현실적이다 싶을 정도로 아름답다. 참고로 피어발트슈테터(Vierwaldstättersee)가 원칭인 루체른호수는 호수의 최대 폭이 38.1Km, 루체른과 플뤼에렌을 잇는 구간이다. 최대 넓이는 3.3Km, 가장 깊은 수심은 214m, 총 수면면적은 114로 스위스에서 다섯 번째로 큰 호수에 해당한다. 해발고도 434m에 위치하고 있다.

 

 

 

 

노천카페에 앉아 호수를 바라본다. 호수는 한마디로 맑다. 그렇다. 언젠가 루체른호수의 물이 맑아도 너무 맑다는 기사를 읽은 것 같다. 그 기사는 스위스 생물학자인 로만 엔스멩어 크린스의 연구결과를 빌려 루체른 호수의 물이 너무 깨끗해 먹을 것이 사라지고 결과적으로 물고기 수도 급격히 감소했다고 적고 있었다. 얼마나 맑았으면 물고기들조차 살아갈 수 없었을까. 수질개선을 위한 인간의 노력(인산염을 줄이려는)이 이런 결과에까지 이르렀지만 그 노력만큼은 높이 사야하지 않을까 싶다. 물에 손이라도 담가보고 싶었지만 호숫가로 내려가는 길은 보이지 않았다.

 

 

산악열차는 중간에 톱니바퀴가 달려있다. 가파르기로 소문난 산길을 달리기 위해서는 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산악열차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산악열차라고 한다. 스위스의 기술력과 장인 정신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라니 그냥 타보는 것만으로 만족하지는 말자. 그리고 스위스에는 시계를 만드는 기술 말고도 또 다른 뛰어난 기술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자.

 

 

역을 둘러보다 반가운 뭔가를 만난다. ‘낯익을 글자, 즉 한글이다.’ 화장실의 방향을 알리는 표시를 한글로 적어 놓았다. 그만큼 이곳을 찾는 한국인들이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하긴 세계는 지금 한국의 차지가 되어버렸지 않나 싶다. 요즘은 그 어디를 가도 우리나라 말로 얘기를 주고받는 광경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차창 밖으로 목가적(牧歌的)인 풍경이 펼쳐진다. 영롱하게 빛나는 루체른 호수는 끝도 없이 펼쳐지고, 날씨가 조금 더 풀리면 양들의 놀이터로 변하게 될 구릉(丘陵)은 벌써부터 녹색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이국적(異國的)인 풍경, 그렇다. 지금 우린 가장 목가적이라는 스위스에 와 있는 것이다.

 

 

 

 

차창 밖으로 이 지방의 전통가옥들이 스스럼없이 고개를 내민다. 나무로 지은 집들은 하나 같이 덧창을 대고 있다. 그리고 집집마다 수북하게 쌓아 놓은 나무 장작들이 보인다. 추운 겨울을 나야만 하는 이 지방 특유의 기후를 대변하는 것일 게다.

 

 

140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열차는 가파른 산길을 천천히 그러나 능숙하게 타고 올라간다. 얼마쯤 올라갔을까 주변이 온통 숲으로 변해있다. 그것도 온통 하얀 눈을 뒤집어 쓴 채이다. 호수 주변만 해도 푸른 초지로 뒤덮인 것이 완연한 봄날이었는데, 어느새 겨울 풍경으로 변해버렸다. 생각보다는 산이 높은 모양이다. 그리고 또 하나, 기찻길을 따라 뭔가가 함께 이어지고 있다. 나무막대기가 꽂혀있는가 하면, 또 어떤 곳에는 로프가 매어져 있기도 하다. 리기산은 초보 하이커(hiker)들도 여유롭게 즐길 수 있는 하이킹 코스가 마련되어 있다고 들었는데, 하이커들이 길을 찾을 수 있도록 해놓은 표시가 아닐까 싶다.

 

 

종착역인 리기 쿨름(Rigi Kulm, 1,750m)에 이를 즈음, 모든 계절을 품고 있다는 산의 위용이 드러났다. 하지만 오늘은 그 모두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주변이 온통 눈으로 뒤덮여 있는 것이다. 며칠 전에 내렸다는 폭설 탓인 모양이다. 요즘이면 노란 야생화를 만날 수도 있다는데 말이다.

 

 

 

 

 

 

눈도 보통 눈이 아니다. 완벽한 폭설(暴雪)이다. 며칠 전에 내렸다는데도 제설차(除雪車)가 부산을 떨고 있는 것을 보면 그만큼 눈이 많이 내렸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 덕분에 정상까지는 올라가볼 수가 없었다. 아직까지도 길이 나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 멀리 구름 위로 뭔가가 고개를 내민다. 그것도 남들이 눈치를 못 차리게라도 하려는 듯이 슬금슬금 올라오고 있다. 그렇다 알프스가 민낯을 내보이고 있는 것이다.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산악열차를 타자마자 비가 내렸었다. 때문에 알프스에 대한 조망을 포기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산의 정상에 가까워지면서 날씨가 개이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활짝 개어버린 것이다.

 

 

 

 

온통 하얀색으로 덧칠을 한 알프스 산맥의 고봉(高峰)들이 파노라마를 펼치고 있다. 가히 넋을 놓기에 충분한 풍경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리기를 일러 산중의 여왕이라고 하는가 보다.

 

 

내려오는 길, 칼트바트(Kaltbad)역 까지는 올라올 때 타고 왔던 산악열차를 이용한다. 칼트바트(Kaltbad)는 산의 중턱쯤에 있는 마을인데, 산악마을 치고는 꽤나 큰 편이다. 그리고 작은 호텔들이 많이 눈에 띄는 걸로 보아 여행자들이 선호하는 휴양지인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야외 온천시설이 보인다. 호텔의 시설인 모양이다. ‘리기 칼트바트(Rigi Kaltbad) 호텔이 아닐까 싶다. 스위스 출신의 세계적인 건축가 마리오 보타가 지은 스파(spa)가 있다는 그 호텔 말이다. 스파에 앉아서도 웅장하면서도 부드러운 리기산의 풍채를 마주할 수 있다고 들었는데 저곳을 두고 말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케이블카를 타러 가는 길, 온천시설의 사진이 실린 패널(panel)들이 세워져 있다. 조금 전에 보았던 야외온천, 리기 칼트바트(Rigi Kaltbad) 호텔을 홍보하고 있나 보다.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황당한 안내판을 만난다. 위는 화장지를 쓰레기통에 버리지 말고 변기에 넣으라는 표시다. 이해가 간다. 그런데 그 아래에 그려진 변기 위에 올라탄 채로 일을 보지 말라는 그림이 내 신경을 건드리는 것이다. 저렇게 쭈그리고 일을 보는 부류는 대개 동양인들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좌변기가 이미 일상화가 된 우리나라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과거가 되어버렸는데도 말이다. 자존심이 상하지만 어쩌겠는가. 우리나라를 뺀 다른 나라들을 얘기했을 거라며 위안을 삼아본다.

 

 

칼트바트(Kaltbad)에서는 케이블카를 탄다. 케이블카에서 내려다보는 풍광이 뛰어난 볼거리이기 때문이다. 루체른호수와 호반 마을들을 가장 잘 구경할 수 있는 방법은 물론 유람선을 타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같이 시간에 쫒기는 여행자라면 케이블카에 앉아서 구경해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 싶다.

 

 

 

 

구름을 뚫고 내려온 케이블카 창밖으로 루체른 호수의 비경이 활짝 펼쳐졌다. 조금 전까지 한겨울이었던 풍경은 온데간데 없고 구름 아래 세상은 초록빛과 푸른빛 싱그러운 봄날이다. 그 풍경화 속에 루체른호수가 그려진다. 피어발트슈테터 호수(Vierwaldstättersee)가 원래의 이름이니 기억해 둔다. 쾌청하지 않은 날씨가 시야(視野)를 방해하곤 있지만 코발트빛 하늘과 반짝이는 호수를 조망하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다. 호숫가에는 정겨운 호반마을이 그림 같이 앉아 있다.

 

 

 

 

케이블카에서 내리면 베기스(Weggis)이다. 위에서 마크 트웨인스위스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마을이라고 말했다던 그 마을이다. 그 말에 적극 동감한다. 베기스는 리기 산기슭에 위치한 작은 휴양 마을이다. 산과 호수를 모두 품은 데다 풍부한 일조량에 온화한 기후까지 지녀 스위스의 리비에라(Riviera)’로 불리기도 한다. 주민들보다도 오히려 여행자들의 숫자가 더 많다는 그 유명한 관광지 말이다.

 

 

 

다시 내려온 루체른 호숫가, 날씨는 어느새 봄날로 돌아와 있다. 아니 푸른 목초지(牧草地)의 민들레들이 꽃을 피워낸 걸 보면 봄이 이미 무르익었다고 보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아직까지는 양들을 풀어놓지 않았지만 말이다.

 

 

 

 

목초지 주변에 뭔가가 피어있다. 홍매화를 닮았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만년설을 머리에 인 알프스의 준봉들은 이것만으로는 이별을 고하지 않는다. 마치 헤어지는 것이 아쉽기라도 하다는 듯이 다시 한 번 우리들 앞에 나타난다. 이태리로 넘어가는 길목에서다. 울퉁불퉁한 근육질로 이루어진 바위산들이 하나같이 호호백발로 변해있다. 보면 볼수록 장관이다.

 

 

 

 

 

 

취리히에 도착해서 하룻밤을 머무른 ‘ibis Airport hotel' 3성급 호텔로 알고 있는데 일류호텔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깨끗했다. 다만 샴푸 외에는 면도기는 물론, 칫솔과 치약, 그리고 비누, 바디샴푸 등 세면용 일회용품이 비치되어 있지 않은 것이 흠, 이런 풍경은 이태리를 여행하는 동안 내내 마찬가지였으니 흠이라고 볼 수도 없을 것이다. 아침식사도 나름대로 괜찮았다. 아니 이번 여행에서 가장 나았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7일간의 이번 여행에서 겨우 두 번만 계란이 제공되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바로 이곳이었기 때문이다. 그 외에 모닝도 빵과 햄, 베이컨, 그리고 우유와 콘프레이크, 야채샐러드, 과일음료, 커피 등 아침식사에 나올만한 것은 모두 다 나왔으니 첫날부터 횡재를 만났다고 보면 된다.

 

 

여행지 : 스페인 및 포르투칼

 

여행일 : ‘15. 11. 12() - 19()

여행지 : 스페인(바로셀로나, 몬세라토, 발렌시아, 그라나다, 미하스, 론다, 세비아, 톨레도, 마드리드), 포르투칼(리스본, 까보다로까, 파티마)

 

 

여행 일곱째 날 :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Toledo)

 

특징 : 마드리드는 스페인 땅의 한가운데, 해발 635m의 고지대에 위치한 스페인 정치·경제·문화·교통의 중심지이다. 스페인 문화의 발상지이자 스페인의 수도로서 과거의 화려한 유산과 현대적 인프라를 동시에 갖춘 명실상부한 스페인 제1의 도시이다. 1561년 펠리페 2세가 톨레도에서 이곳으로 수도를 천도한 이후 천당과 지옥을 넘나드는 역사적 사건들의 주요 무대가 되었던 이 도시는 장엄한 경관과 풍성한 문화, 여유 넘치는 그들만의 라이프스타일로 전 세계 수많은 여행객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한편 마드리드는 현대적 인프라를 갖춤과 동시에 역사적인 거리와 장소를 간직하고 있다. 마드리드의 거대한 왕궁이 그 중의 하나다. 스페인 국립극장, 세계에서 가장 많은 명작을 보유하고 있다는 평을 받는 프라도 박물관, 스페인의 왕비인 소피아(Reina Sofía)의 이름을 따서 지은 국립 소피아 왕비 예술센터가 이에 포함된다. 참고로 마드리드라는 지명은 기원전 2세기에 로마 제국이 강둑을 중심으로 스페인에 식민지 정착마을을 만들면서 생겨난 것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첫 번째 정착촌의 이름은 마트리쎄(스페인어 : Matrice)였다. 기원후 5세기 동안 미개인들의 침략이 계속되면서 로마는 도저히 정착촌을 지배할 수 없게 되었고 침략자들이 마트리쎄를 지배하게 되었다. 7세기에 이베리아 반도 내에 아라비아계의 침략자가 들어오면서 마르야(아랍어 : Marya 한글: 어머니, 대지의 생명)라는 말에 기원한 마이리트(이베리아계-로망스어 방언 : Mayrit)로 이름이 변한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쓰이던 로마어에서 접미사 it은 장소를 뜻했기에 이름이 변하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근대에서 쓰이는 마드리드는 따라서 모사라베(스페인어 : Mazarabic)에서 유래하여 ‘Matrit’로 되었다가 지금의 Madrid으로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하룻밤을 머물렀던 마드리드의 ‘Holiday Inn Express’호텔(주소 : Calle Argentina S/N Madrid 28922), 마드리드가 왜 스페인의 수도인지를 알게 해주는 호텔이었다. 1주일 이상을 이어온 스페인 여행에서 처음으로 만난 호텔다운 호텔이었기 때문이다. 호텔의 시설이야 거기가 거기일 정도로 거의 모든 호텔들이 깔끔했었다. 하지만 여행 내내 허술한 아침식사 때문에 고생을 했었다. 그러던 것이 세비야에서부터 조금씩 나아지더니 이곳 마드리드에 와서는 유럽의 다른 어느 도시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아침식사가 제공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식사다운 식사를 하자마자 스페인을 떠나게 되는 셈이 되었다. 이 호텔의 또 다른 특징은 가까이에 대형 슈퍼마켓(supermarket)이 있다는 점이다. 귀국 후 가족들과 나누어 먹을 초콜릿을 사기에 안성맞춤이다. 만일 분위기를 잡을 줄 아는 가족이라면 와인이라도 두어 병 주워들면 될 테고 말이다 

 

 

 

 

 

 

 

버스를 타고 스페인광장으로 이동한다. 마드리드는 스페인 회사의 절대 다수가 본사를 두고 있는 곳이다. 그중에는 세계 100대 기업 안에 드는 기업도 3(Telefónica, Repsol-YPF, Endesa)나 있다. 그리고 스페인의 수도로서 정부 청사가 있으며 스페인 왕궁이 있을 뿐 아니라 스페인 정계의 중심이기도 하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하늘을 찌를 듯이 치솟은 수많은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하지만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뜸하다. 출근시간이 되기 전이라서 그런 모양이다.

 

 

 

 

 

 

 

버스가 멈춘 곳은 스페인광장(Plaza España), 플라자 데 에스빠냐(Plaza de España)’이다. 돈키호테의 작가 세르반테스가 근엄하게 앉아있는 곳, 그리고 꽃보다 할배의 스페인 편에서 이순재 할배가 어루만지던 돈키호테와 산쵸가 지키고 있는 광장이다. 스페인광장은 소설 라만차의 돈 키호테 (Don Quijote de La Mancha)’로 유명한 미겔 데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 Saavedra)’의 사후 300주년을 기념하여 1916년 만들어진 광장이다. 소설 돈 키호테는 스페인 황금기의 대표적인 작품이자, 세계적으로도 가장 의미 있는 문학작품으로 칭송 받고 있다. 스페인 사람들에게 세르반테스는 세익스피어와 같은 존재로 여겨진다. 농담이지만 그래서 같은 날에 죽었는지도 모르겠다. 세르반테스가 세익스피어보다 17년 먼저 태어났지만, 둘은 1616423일 같은 날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광장에 들어서면 세르반테스 석상(石像)이 앉아있는 기념탑이 나오고, 바로 앞에 돈 키호테와 산초 판사의 동상이 있다.

 

 

 

그리스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는 스페인은 두 개의 얼굴을 지녔다고 했다. 몽상적인 돈키호테와 실용적인 산초의 모습이다. 그 둘이 지금 활기찬 모습으로 한자리에 모였다. 그리고 그 옛날의 영광을 다 내주고 이제는 고독한 은퇴자의 모습으로 남은 스페인의 현재를 부정이라도 하려는 것인지, 어딘가를 향해 활기차게 출발하고 있다.

 

 

 

기념비의 꼭대기에는 5명이 여신(女神)이 올라 앉아있다. 다섯 개의 대륙(大陸)을 상징한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 책을 읽고 있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무슨 이유일까? 어쩌면 더 많이 알아내라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으니까 말이다.

 

 

 

 

 

스페인광장 주변은 상업지역으로 호텔과 카페, 황공사, 백화점들이 밀집해 있다. 광장 후면에는 1950년대에 Otamendi 형제에 의해 설계된 EdificioEspana(위 사진의 건물) Torre de Madrid가 있다. 두 건물은 현재 아파트 및 호텔로 이용되고 있다고 한다.

 

  

 

스페인광장의 옆에 있는 마드리드왕궁(Palacio Real de Madrid)으로 걸음을 옮긴다. ‘스페인 건축물의 절정이라는 선입견 때문이었을까 왕궁이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그 기세에 압도당해버린다. 왕궁은 부르봉 왕가의 시조이며 베르사이유궁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펠리페 5’세가 베르사이유 궁전을 모델삼아 지었는데, 화재 예방을 위해 돌과 화강암만을 사용했다고 한다. 궁전으로 사용해오다 불타버린 무슬림의 요새를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았지 않나 싶다. 아무튼 이탈리아 건축가 필리포 유바라(Filippo Juvara)와 그의 제자 사게티’, 그리고 사바티니, 로드리게스에 의해 지어진 이 왕궁은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또한 대부분 프랑스와 이태리의 궁전을 흉내 낸 것들이지만 그 화려함과 호화스러움은 모델이 되었던 궁전들을 능가한다고 한다.

 

 

 

1764년 완공했고 펠리페 5세의 아들인 카를로스 3세부터 입주해 1931년까지 역대 스페인 국왕들의 공식 거처로 사용되었으나, 현재는 공식 행사에만 사용되고 실제로 거주하지는 않는다. 사방 150m의 왕궁 안에는 2,800개의 방이 있는데 그중 50개의 방만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특히 베르사유 궁전에서 가장 유명한 거울의 방을 모방해서 만든 옥좌의 방’, 건축가 유바라가 설계한 로코코 양식의 걸작으로 정교함과 화려함이 더해져 호화스러움의 극치를 보여 주는 가스파리니 방’, 벽 전체가 황금 비단으로 꾸며져 있는 황금의 방’, 145명이 한꺼번에 앉아 식사를 할 수 있는 대형 식탁이 자리한 연회장에서 스페인의 화려했던 궁중 생활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왕궁 안의 아르메리아 광장에 있는 약물 박물관도 왕궁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코스이다.

 

 

 

왕궁은 겉모습만 눈에 넣는 것으로 만족한다. 잠시 후 다음 장소로 이동을 해야 한다는 가이드의 협박 수준 재촉 때문이다. 하지만 왕궁은 관람이 가능하다. 물론 입장료(10유로)를 내야 하겠지만 말이다. 왕궁 전망대에서 유럽의 수도(首都) 중에서 가장 녹지가 많다는 마드리드의 전경을 조망할 수도 있고, 규모와 하려함에서 극치를 이룬다는 왕궁 내부를 둘러볼 수도 있다. 그러면서 19세기 대영제국 등장 이전까지 세계 최강이었던 스페인 제국 초전성기 영화를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거기다 시간이라도 조금 남는다면 왕궁 한 켠 무기고(무기박물관)에 들러 역대 왕실이 사용했던 철제 무기와 갑옷들까지 감상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마드리드왕궁 앞에는 오리엔테 광장(스페인어: Plaza de Oriente)’이 있다. 왕궁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서 오리엔테(동쪽)’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광장 중심에는 펠리페 4(재위 1621~1665)의 기마상(騎馬像)이 있다. 이 기마상(위 사진에는 뒷면만 나와 있다)은 이탈리아 조각가 피에트로 타카가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그린 초상화를 참고로 머리를 만들었으며, 가슴은 후안 마르티네스 몬타네스가 만들었다. 펠리페 4세는 마요르광장에 있는 아버지 펠리페 3세의 기마상 보다 더 뛰어난 자신의 동상을 갖고 싶어 했다고 한다. 그의 사후(死後) 1843년 이사벨 2세의 명령으로 오리엔테 광장에 설치됐다. 참고로 광장 동쪽에는 오페라극장인 왕립극장(사진의 동상 뒤에 보이는 건물), 북쪽에는 라 엔카르시온 수도원이 있다.

 

 

 

광장 옆 길가에는 옛 카스티야 왕국을 지배했던 역대 국왕들의 동상(銅像)이 세워져 있다.

 

 

 

왕궁의 외관을 보여주고 나면, 다음 코스는 쇼핑이다. 왕궁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쇼핑센터로 들어서보지만 이내 밖으로 나와 버리고 만다. 중국인 쇼핑객들로 붐비는 가게 안이 너무나 혼잡했기 때문이다. 구경거리가 있긴 했다. 한 사람이 같은 품목을 몽땅 싹쓸이 해버리는 그네들의 쇼핑풍속은 나에게는 분명 낯선 풍경이었다.

 

 

 

 

 

 

쇼핑센터 앞은 작은 광장(廣場)이다. 유럽에서 만나게 되는 익숙한 풍경이다. 광장에서 일행들이 나오기를 기다려보지만 그 끝은 보이지 않는다. 낯선 이국땅, 그것도 면세(免稅)라고 하니 사고 싶은 게 많았던가 보다.

 

 

 

광장에는 원주(圓柱) 모양의 구조물이 세워져 있다. 저런 기둥 위에는 동상(銅像)들이 올라가 있는 게 보통인데도 텅 비어있다. 저렇게 생긴 분수들도 많기에 다가가보지만 물이 나오는 꼭지는 보이지 않는다. 무슨 용도일가가 궁금해지는 순간이다. 네모로나 생겼더라면 오벨리스크라고 치부라도 해버릴 텐데 말이다.

 

 

 

길가에 자전거 몇 대가 세워져 있다. 생김새로 보아 전기 충전용 자전거이지 싶다. 마드리드에서는 전기충전 자전거를 공공시설로 설치하여 대여해 주고 있는 모양이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마드리드에는 이런 자전거 정거장 123개가 시내 곳곳에 설치되어 있고, 1,530대의 자전거를 운영하고 있단다. 마드리드 시민들이라면 1년에 15유로만 내면 일 년 내내 사용할 수 있고, 그밖의 사람들은 20유로라니 참조한다.

 

 

 

기다리다 지쳐 주변을 둘러보기로 한다. 물론 나 혼자서이다. 집사람이 지키고 있다가 일행들이 나오기라도 할 경우엔 나에게 전화해주면 될 일이다. 잠시 후 왕궁을 만난다. 그러나 그냥 지나치는 우()를 범해버리고 만다. 들어가 볼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그러니 시간을 주지 않은 가이드만 탓할 일만도 아니다. 원래부터 일정에 잡혀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금만 더 예습을 해왔더라면 왕궁의 내부는 몰라도 왕궁 안에 있는 정원(庭園)과 왕궁 건물의 전체적인 구조 정도는 볼 수가 있었다. 쇼핑하는 사람들을 기다리던 시간을 이용해서이다. 하지만 난 그런 정원이 있는 줄도 몰랐고, 궁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는 더더욱 몰랐었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다.’ 미리 알아오지 못한 내 잘못이니 과연 누구를 탓하겠는가.

 

 

 

마드리드왕궁과 알무데나 대성당(Catedral de la Almudena)은 왕궁의 앞마당 격인 아르메리아 광장(Plaza de la Armeria)’을 가운데 두고 연결된다. 참고로 마드리드 왕궁은 정원으로 둘러싸여 있다. 왕궁 정면에는 아르메리아 광장이 있고 뒤쪽에는 사바티니 정원, 그리고 양쪽에는 캄포 델 모로(무어족의 캠프)와 오리엔테 광장이 자리를 잡고 있다.

 

 

 

왕궁 앞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 현대식으로 지어진 성당이 하나 나타난다. 그동안 오래 묵은 성당들만 보아오다가 현대식으로 지어진 성당을 보니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산타 마리아 라 레알 데 라 알무데나 대성당(스페인어: Catedral de Santa María la Real de la Almudena de Madrid)’이란다. 이 성당은 마드리드 대교구의 대성당이자 마드리드의 수호 성모(聖母)알무데나를 기리는 성당이기도 하다. 알무데나는 아랍어로 성벽을 뜻하는 알무다이나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마드리드를 점령한 무슬림들이 파괴할까 봐 성벽에 숨겨 놓았던 성모상이 300년 후에 발견되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성당은 1879년 착공되었지만 정치적인 이유와 내전 등의 이유로 100년 넘게 걸려 1993년에 와서야 완공되었다. 공사가 오랫동안 지속된 탓에 이 성당의 부속 건물과 조각상들은 네오고딕 양식에서부터 팝아트 데코 양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양식을 보여준다.

 

 

 

1561년 스페인의 수도가 톨레도에서 마드리드로 이전되었지만, 스페인 교회의 중심지는 여전히 톨레도에 머물러 있었다. 따라서 가톨릭 국가의 새 수도인 마드리드에는 모든 성당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대성당이 없었다. 알무데나의 성모를 위한 대성당을 짓자는 의견이 대두된 이유이다. 건축은 1879년에 시작되었다. 1085년 알폰소 6세가 마드리드를 점령했을 때 파괴되었던 중세시대 이슬람교의 모스크가 있던 자리이다. 이후 스페인 시민전쟁의 발발로 중단되었다가, 1950년에 공사를 다시 시작하여 1993년에 완공되었다. 완공 후 교황 요한 바오로 2에 의해 축성되었으며, 2004년에는 스페인의 제1왕위 계승자인 아스투리아스 공 펠리페와 레티시아 오르티스의 혼배미사가 거행되기도 했다. 참고로 네오 로마네스크 양식의 지하실에는 16세기의 것으로 보이는 알무데나의 성모상이 모셔져 있다.

 

 

 

우리의 명동 같은, 마드리드의 가장 번화가라는 그란비아(Gran Via) 거리는 차를 타고 지나간다. ‘마요르 광장(Plaza Mayor)’도 역시다. 물론 스페인 국도들의 기점이자 소귀나무와 곰 조각상으로 유명한 푸에르타 델 솔(Puerta del Sol)’도 버스를 탄 채이다. 관광지를 제대로 보려면 걷는 게 우선일 것이다. 한번쯤 이름을 들어봤던 녀석들이 어디에 있는지 또 어떻게 찾아가야 할지를 머릿속에 정리하면서 걸어봐야 한다. 그래야만 만나게 되는 모든 것들을 속속들이 알게 될 것이고, 더불어 오래오래 기억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우린 그러지를 못했다. 조금 전에 들렀던 쇼핑센터에서 계획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지체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보고 싶었던 풍물들 또한 주마간산(走馬看山)으로 감상할 수밖에 없었음은 물론이다.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프라도 미술관(Museo del Prado)'이다. 세계 3대 미술관 중 하나라고 불리는 프라도 미술관은 1819년 개관했다. 프라도미술관은 스페인 회화를 세계에서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으며, 이탈리아와 플랑드르 미술의 걸작 등 유럽의 다양한 회화 작품들도 소장하고 있다. 엘 그레코, 벨라스케스, 고야 등 미술계에 큰 족적을 남긴 유명 화가들의 작품 6천여 점을 보유하고 있는 유서 깊은 미술관이다.

 

 

 

 

 

미술관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고야에게 눈인사를 건넨다. 그의 동상만이 만들어져 있는 것을 보면 그의 작품들이 이곳 프라도 미술관을 대표하고 있나 보다.

 

 

 

 

 

워낙 유명한 곳이라서 그런지 미술관 앞은 사람들로 넘친다. 프라도 앞에서 그려야 '그림빨'이 서는지 열심히 스케치에 몰두하고 있는 예비 화가들도 보인다. 한가한 모습들도 눈에 들어온다. 느긋하게 잔디에 누워 늦가을 햇볕을 쬐고 있는 커플들이다. 그리고 또 하나, 귀에 익은 한국어가 곳곳에서 들려온다는 것이다. 누군가 그랬다. 세계는 지금 한국 여행객들 차지라고, 그 말이 맞긴 맞는 모양이다.

 

 

 

 

 

건물로 들어서면서 사진촬영은 끝난다. 촬영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명화들의 보존을 위한 조치일 것이다. 참고로 미술관은 1785카를로스 3후안 데 비야누에바에게 자연과학박물관의 설계용으로 의뢰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신고전주의 양식의 이 건물의 건축은 나폴레옹 전쟁 중에 중단되었다가 1819년 완성되어 왕립화관으로 공개되었다. 왕궁 및 에스코리알에 있는 그림들을 모아 이 소장품을 확장시킨 이사벨 2세가 추방된 뒤 1868년 프라도 국립미술관이 되었다. 소장품은 스페인의 합스부르크가와 부르봉가의 군주들이 수집한 미술품으로 이루어졌다. 20세기에 다른 부속 건물들이 지어지고 수집품도 더욱 늘어났다.

 

 

여행지 : 스페인 및 포르투칼

 

여행일 : ‘15. 11. 12() - 19()

여행지 : 스페인(바로셀로나, 몬세라토, 발렌시아, 그라나다, 미하스, 론다, 세비아, 톨레도, 마드리드), 포르투칼(리스본, 까보다로까, 파티마)

 

 

여행 여섯째 날 : 천년의 고도 톨레도(Toledo)

 

특징 : 마드리드에서 남서쪽으로 67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톨레도는 2000년 역사를 가진 고도(古都), 1561년 수도를 마드리드로 옮기기까지 스페인의 수도였다. 이 도시는 이슬람정복시대와 가톨릭군주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역사와 문화유산을 남겼다. 유대교, 이슬람교, 그리스도교가 각자의 종교와 언어를 인정하고 평화롭게 공존했을 때는 유대인들이 2의 이스라엘로 생각했던 곳이다. 도시 전체가 가톨릭의 관용과 미덕, 순명의 정신을 발산하고 있다. 로마의 역사가 리비우스는 이 도시를 가리켜 '우르브스 파르바, 세드 로코 무니타'(작지만 천연의 요새로 이루어진 도시)라고 기록했다. BC 193년 로마의 장군 마르쿠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에게 정복된 후 톨레툼이라는 이름으로 로마의 주요 식민지이자 카르펜티아의 중심지가 되었다. 6세기에는 서고트 왕국의 왕궁 소재 도시였다. 이곳에서 유명한 공의회가 여러 차례 개최되었는데, 특히 제3차 공의회(589)는 레카레드 왕이 그리스도교로의 개종을 선언한 중요한 공의회였다. 무어인들의 점령기간(712~1085)에는 중요한 모자라브 공동체(아랍어를 사용하는 그리스도교도들의 집단)’의 본거지로서 툴라이툴라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1085년 알폰소 6세에게 점령당한 후 카스티야 왕국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사회적 중심지가 되었다. 그리스도교·아랍·유대 문화가 하나로 융합된 도시인데 그 대표적인 예로 13세기에 현명왕 알폰소 10세에 의해 설립된 통역사학교인 에스쿠엘라데트라둑토레스를 들 수 있다. 1560년 펠리페 2세가 마드리드를 수도로 선택한 이후 시의 중요성이 쇠퇴했다. 참고로 톨레도는 스페인 문화를 가장 잘 대변하는 곳으로 간주되어 시 전역이 국립기념지로 선포되어 있으며, 1986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기도 했다.

 

 

 

파티마에서 톨레도로 오는 길, 차창 밖에 펼쳐지는 풍경은 광활함 그 자체이다. 무슨 국립공원지역이라는 가이드의 설명이 있었지만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다. 아무튼 산악지대 인데도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그런 지형은 아니고 그저 구릉으로 이루어진 고원(高原)이라고 보는 게 옳을 것 같다 

 

 

 

 

톨레도(스페인어: Toledo, 라틴어: Toletum) 시가지로 들어오는 길에 차창 밖으로 멋들어진 다리 하나가 나타난다. 타호(Rio Tajo) 강에 놓인 2개의 다리 중 하나인 알칸타라 다리(Puente de Alcantara)’이다. 이 다리는 산세르반도성() 기슭의 타호강 위에 놓여 있는데, 이 성의 일부는 로마 시대와 무어 왕국시대에 건축되었다. 다른 하나는 13세기에 세워진 산마르틴 다리인데, 이 역시 차창 밖으로 볼 수가 있다. 참고로 '알칸타라'는 아랍어로 '다리'라는 뜻이다. 알칸타라는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만큼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다. 톨레도가 수많은 분쟁을 겪은 도시인만큼 알칸타라도 부침이 많았다. 또한 협곡에 위치해 있는 터라 홍수가 나서 교각이 떠내려가기도 했다. 톨레도만큼이나 알칸타라의 역사도 파란만장했던 셈이다.

 

 

 

톨레도로 들어가기 전 버스가 멈춘다. 그리고 톨레도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니 눈에 넣고 가란다. 전망대에 서면 성곽(城郭)에 둘러싸인 거대한 성채 도시인 톨레도를 한눈에 잘 들어온다. 타호강()변의 벼랑 위에 쌓아올린 성벽은 견고하기 짝이 없어 보인다. 저 성곽 안에는 유대교와 이슬람교, 기독교가 서로 반목하고 또 공존하면서 압축해 놓은 역사의 산물들이 2000년 이라는 시공(時空)을 뛰어넘어 오롯이 남아 있을 것이다.

 

 

 

 

 

발아래에는 타호강이 흐르고 있다. 톨레도가 오래전부터 전략적 요충지가 된 건 타호강 덕분이라고 한다. 톨레도의 구도심(舊都心)은 말발굽처럼 생겼는데 그 주위 3면을 타호강이 휘돌아 나간다. 3면은 협곡 형태를 띠고 있는 터라 톨레도는 천혜의 방어요충지가 되는 셈이다. 그런 타호강에 로마시대에 축조된 다리들이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아까 보았던 알칸타라다리이다.

 

 

 

앙증맞은 꼬마기차가 멈추더니 사람들 몇이 내린다. 아마 관광객들이지 싶다. 듣던 대로 톨레도가 관광도시가 맞긴 맞는 모양이다.

 

 

 

주차장에 내리면 옛 성벽(城壁)이 나타난다. 허물어진 곳도 보이나 대체로 보존이 잘 되어 있는 편이다. 성벽은 대부분 무어인이나 그리스도교도들에 의해 축조되었지만 서고트족이 축조한 곳도 있다고 한다. 1085년에 알폰소 6세가 관례적으로 사용했던 푸에르타비에하데비사그라(10세기)를 비롯하여 여러 시대에 걸쳐 건축된 출입구들이 잘 보존되어 있단다.

 

 

 

 

구시가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해서 위로 올라가야 한다. 그것도 꽤 높이 말이다. 도시가 암석으로 이루어진 구릉의 위에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거리는 대체로 좁은 편이다. 하지만 듣던 바와는 달리 반반한 편이다. 톨레도가 암석지대에 만들어진 탓에 좁고 구불구불한데다, 경사까지 가파르고 지면은 울퉁불퉁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의외이다.

 

 

 

얼마큼 걸었을까 저만큼에 톨레도대성당(Catedral de Santa María de Toledo)이 보이기 시작한다. 에스파냐 가톨릭의 수석성당 답게 그 규모가 대단하다. 동서로 길게 뻗은 십자가 형태를 취하고 있는 대성당은 톨레도대교구의 주교좌성당이기도 하다.

 

 

 

 

 

톨레도대성당 맞은편에는 주교궁이 있다. 그리고 그 옆의 건물은 톨레도 시청이다. 그 사이에 있는 광장을 사람들은 시청사 광장(Plaza del Ayuntamiento)이라 부른단다.

 

 

 

톨레도대성당(Catedral de Santa María de Toledo)은 프랑스 고딕 양식의 대성당으로, 페르난도 3세에 의해 건설이 시작되었는데, 오랜 기간(266)에 걸쳐 지어진 탓에 여러 가지 건축양식이 혼합된 특징을 지니고 있다. 1225년 이슬람 세력을 물리친 것을 기념하기 위해 페르난도 3세의 명에 따라 원래 이슬람 사원이 있던 자리에 고딕 양식을 기반으로 성당을 짓기 시작하여 1493년에 완성되었다. 그 후 세월이 지나면서 증축과 개축을 반복하면서 그 시대를 대표하는 많은 예술가들의 손길을 거쳐 현재의 엄청난 규모(길이 113m, 너비 57m, 중앙의 높이 45m)와 모습을 갖추게 되었고, 현재는 스페인 가톨릭의 총본산이다. 본당 보물실에는 16세기 초 엔리케 아르페가 만든 성체 현시대(Custodia)가 보관되어 있는데, 5,000개의 금 · · 보석으로 만들어져 무게가 무려 180kg, 높이가 3m가량 된다. 또한 본당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 성가대석에는 그라나다가 함락되는 전쟁 장면을 세밀하게 묘사해 놓은 조각이 있으며, 성물실에는 엘 그레코의 종교화와 고야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어서 마치 작은 미술관에 온 것처럼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건물의 남서쪽에 있는 평탄한 문을 통해 대성당 안으로 들어가면 발길은 대개 성모발현 예배당으로 향하게 된다. 성모발현 예배당은 성모 마리아가 발현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성당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제단(大祭壇)이다. 하지만 가이드는 우리를 보물실(예배실을 겸한)로 안내한다. 엄숙함보다는 화려함에 더 매력을 느끼는 여성의 취향이 아닐까 싶다. 하여튼 안으로 들면 보이는 것마다 모두 화려함의 극치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화려한 보석들이 박혀 있는 똘레도 수호성인의 황제관이다. 원래는 이사벨 여왕이 쓰던 왕관이었는데, 1586년 개조한 것이란다. 하지만 더 귀한 보물은 중앙 진열장에 전시된 꾸스또디아(Custodia), 성체현시대이다. (아쉽게도 사진이 잘 못 나와서 게시는 하지 못했다) 1517~1524년 사이 독일 작가가 제작한 이 성체현시대는 원래 180kg의 은으로 만들어졌는데 16세기 말 18kg의 순금으로 도금했다고 한다. 6각형 기단의 이 성체현시대는 수많은 성인들과 꽃무늬 장식들로 꾸며진 여섯 개의 기둥들이 화려하게 장식된 지붕을 떠받는 구조로 만들어졌다.

 

 

 

 

 

톨레도 대성당 안은 전체적으로 어둡다. 그것은 크고 웅장한 벽에 비해 상대적으로 창문이 작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창문을 스테인드글라스로 처리해 빛이 들어올 여지가 더 적어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실내가 어두움으로 해서, 마음은 상대적으로 차분해지고 종교적인 경건함은 증대되는 것 같기도 하다.

 

 

 

  

 

중앙예배당(Main Chapel)으로 간다. 이곳은 제단(祭壇) 뒤에 있는 병풍 형태의 조각이 유명하다. 제단병풍 조각은 시스네로 추기경이 프티 쟝이라는 조각가에게 의뢰해 1498년부터 1504년까지 만든 작품으로, 화려하고 정교하기 이를 데 없다. 7폭의 병풍 형태를 띠고 있으며, 예수의 탄생과 고난 그리고 죽음이 표현되어 있다. 참고로 병풍의 한 가운데에는 아래로부터 위로 5개의 장면이 조각되어 있다. 성모자상, 성체현시대, 예수 탄생, 성모 승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고 병풍의 왼쪽 편에는 예수의 수난과 죽음이 묘사되어 있단다. 이에 비해 오른쪽 편에는 부활과 영광이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양쪽 가장자리에는 이곳 출신의 대주교들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중앙예배당 앞의 예배공간을 통해 하나로 연결되는 공간이 있다. 바로 합창대석이다. 합창대석에서는 삼면 벽을 장식한 조각과 대리석 성모상이 유명하다. 참고로 합창대석은 1489-1495년 로드리고 알레만에 의해 처음 만들어졌다고 한다. 지금 합창대석 아랫부분에는 카스티야-아라곤이 결합한 에스파냐 왕국의 그라나다 정복모습이 조각되었다. 그리고 윗부분은 1535년 타베라 추기경의 명으로 펠리페 데 비가르니와 알론소 데 베르게테가 만들었다. 이들 부조는 르네상스 양식에 속한다고 한다.

 

 

 

 

 

 

 

합창대석 위 벽면에는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되어 있다. 좌우에 있는 파이프 오르간의 양식은 서로 다르다. 왼쪽의 것은 화려한 바로크 양식이고, 오른쪽의 것은 절제된 신고전주의 양식이라고 한다.

 

 

 

 

 

 

합창대석 앞 왼쪽에는 아기예수를 안은 성모상 부조가 서 있다. ‘백색의 성모(Virgen Blanca)’라고도 하고, 다빈치의 모나리자와 비교해서 에스파냐의 모나리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14세기 초 프랑스에서 만들어져 이곳에 기증되었다고 한다. 하여튼 이 성모상은 좀 특이한 편이다. 다른 성모상들은 대부분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이 성모상은 의외로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다. 쉽게 만날 수 없는 특징이니 그냥 지나치지 말자.

 

 

 

성물실(Sacristia)로 간다. 대제단의 왼편에 있다. 실내는 커다랗고 둥근 하나의 천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성물실의 안쪽 정면에는 18세기에 만들어진 대리석 제단(祭壇)이 있다. 제단은 엘 그레코(El Greco)’가 그린 엘 엑스폴리오(El ExpoIio)’ 성의의 박탈이라는 작품으로 장식되어 있다. 1579년에 그려진 이 작품은 엘 그레코가 톨레도에 와서 그린 그림 중 초기의 대작으로 꼽힌다. 이 작품은 주변의 사악한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평온과 엄숙함을 간직한 예수의 표정을 읽을 수 있다. 참고로 엘 그레코(El Greco)’는 그리스 출신의 이탈리아 화가이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그를 그리스 사람이라고 불렀는데, 그 별명이 본명인 도메니코스 테오토코룰로스를 밀어내고 공식 이름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그는 1577년에 죽을 때까지 톨레도에 살며 작품 활동을 한 인연으로 톨레도를 상징하는 화가가 되었다. 원근법을 무시하고 인물들을 기형적으로 길게 묘사하는 그를 편견 없이 받아들이고 후원한 톨레도의 지도자들이 아니었다면 그는 역사 속에 묻혔을 지도 모른다는 평들이 있다.

 

 

 

 

 

성물실로 들어간 사람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위로 치켜든다. 그리고 천장에다 시선을 고정시킨다. 250의 천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대형 프레스코화를 보려는 것이다. 이 그림은 엘 그레코의 제단화와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한 마디로 밝고 화려하다. 황금색의 밝은 색조를 바탕으로 천상에서 지상으로 한 줄기 빛이 내려온다. 하늘나라에서 일데폰소 성인(San Ildefonso)’에게 제의(祭衣)를 내려주는 광경이라고 한다. 그림을 그린 이는 이태리(나폴리)출신의 화가 루카 지오르다노(Luca Giordano, 1632~1705)’이다. 그는 1692년부터 1702년까지 마드리드에서 에스파냐 궁정화가로 활동했는데, 그때 이 그림도 그렸다고 한다.

 

 

 

성물실(Sacristy)은 원래 미사를 올리는데 필요한 제기나 제복 등을 보관하는 곳이다. 그런데 이곳 성물실에는 주로 성화 또는 종교화가 진열되어 있다. 그리고 성당 내의 예배공간과는 달리 조명이 잘 되어 있어 그림이 보기 좋게 되어있다. 이곳에서 눈여겨 봐야할 작품으로 사람들은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의 성화와 지오르다노(Luca Giordano)의 천정화를 꼽는다. 하지만 그 외에도 고야(Goya)와 루벤스(Rubens), 벨라스케스(Velâzqez), 반 다이크(Van Dyck), 모랄리스(Morales) 등 세계적인 화가들의 그림이 소장되어 있으니 놓쳐서는 안 될 일이다. 참고로 고야와 벨라스케스는 엘 그레코와 함께 에스파냐를 대표하는 근대화가다. 이들이 추구한 에스파냐 회화의 주지주의와 실험정신은 피카소, 미로, 달리 같은 현대화가에게로 이어진다.

 

 

 

중앙예배당은 생각보다 어둡다. 빛이 별로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성당 천정에 낸 '엘 트란스파렌테(El Transparente)'라는 채광창이다. 이 채광창을 통해 들어온 빛이 중앙예배당 제단과 병풍을 밝혀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이 채광창은 디에고 데 아스토르가 추기경의 주문으로 건축가 나르시소 토메(Narciso Tome)’가 만들었다. 사람마다 그 느낌이 다르겠지만 톨레도대성당의 채광창은 그동안 내가 봐온 것들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가장 아름다웠다. 대제단의 뒤, 성물(聖物)들을 보관하고 있던 작은 예배당의 조명(照明)을 위해 만든 것인데, 창을 통해 들어온 빛살들이 창틀 주위의 조각 또는 그림들과 어우러지며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채광창으로부터 들어온 빛살을 받아 더욱 빛을 발하는 나르시소 토메(Narciso Tome)의 작품들은 추리게라(Churrigueresque) 양식이다. 추리게라양식은 스페인의 추리게라가문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으로 당시에 추리게라 집안의 삼형제는 모두 이름 있는 건축가였다고 한다. 추리게라 일가가 만들어낸 이 건축양식은 아주 세세한 곳까지 화려하게 장식하는 건축기법이었다. 또한 이 양식은 후기 바로크양식인 로코코양식의 한 갈래로 플라테레스크양식처럼 화려하고 촘촘한 장식을 특징으로 한다. 갈라진 박공벽, 물결치는 듯한 처마와 난간, 회반죽 피막, 꽃 장식 도안으로 가득 찬 실내장식 등이 모두 추리게라 양식의 특징이라고 한다. 특히 나르시소 토메가 디자인한 톨레도대성당의 트란스파렌트는 추리게라양식중에서도 걸작으로 꼽힌다. 나르시소 토메는 금박으로 처리한 햇살과 수많은 천사조각, 그리고 자연과의 조화를 염두에 둔 건축구성을 통해 신비하고 신성한 조화를 만들어 내려고 노력하였다.

 

 

 

 

 

또 하나의 볼거리인 주교실이다. 역대 똘레도 대성당 주교들의 초상화가 한데 모여 있다. 처음 주교에서부터 최근의 주교 초상화에 이르기까지 초상화만으로도 똘레도 대성당의 역사를 알 수 있다.

 

 

 

 

 

 

 

성당에서 자랑하는 아름다움 중에서 결코 빠뜨릴 수 없는 것 중의 하나가 스테인드글라스일 것이다. 이곳 톨레도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도 아름답기 짝이 없다. 성당에는 4개의 측랑과 22개의 부속예배당에 총 750개의 스테인드글라스가 만들어져 있다고 한다.

 

 

 

중앙제단 옆에 커다란 그림 하나가 보인다. 한쪽 벽면을 온통 다 차지할 만큼 커다란 그림이다. 성 크리스토포루스의 이야기를 형상화한 그림인데, 그는 여행자와 자동차 운전자의 수호신으로 동·서방 교회를 막론하고 가장 사랑받는 수호성인들 중 하나라고 한다. 참고로 성 크리스토포루스그리스도를 어깨에 업고 간다.’의 그리스어이다. 성 크리스토포루스는 시리아 출생으로 소아시아에서 선교를 하던 중 순교(殉敎)하였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그는 사람들을 업어 강을 건네주는 일로 생계를 꾸려가던 거인이었는데, 자기보다 더 힘센 사람이 나타나면 그를 섬기겠다고 했다 한다. 어느 날 조그만 아이를 업고 강을 건너는데 너무 무거워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상하게 여긴 그에게 아이는 너는 지금 세계를 옮기고 있다. 나는 네가 찾던 왕, 예수 그리스도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톨레도 대성당을 빠져나와 산토 토메 성당으로 향한다. 비좁은 골목의 양편에는 성벽을 연상케 하는 벽들이 계속된다. 우아함이란 길을 걸으면서도 느낄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톨레도의 골목길이다. 아름다움보다 더 깊이 있고 진한 감동을 주는 우아한 색으로 장식된 담장과 골목길이 이채롭다.

 

 

 

길을 가다보면 아라베스크(arabesque) 문양의 수공예품(手工藝品)을 팔고 있는 선물 가게들이 가끔 눈에 띈다. 똘레도 지역은 세계적인 고대 무기 생산지로서 칼, 방패, 갑옷 등의 품질이 우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때문에 많은 장식용 무기 애호가들로부터 각광을 받고 있다고 한다.

 

 

 

 

 

10분쯤 걸었을까 산토 토메 성당이 나타난다. 작고 아늑한 이 성당은 스페인 화가 엘 그레코의 걸작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식을 소장하고 있는 성당으로 유명하다.

 

 

 

 

 

 

산토 토메 성당은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성당 안에 전시되고 있는 명화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인 모양이다. 덕분에 작품들을 가슴에 담을 수밖에 없다. 그래봤자 오래지 않아 잊혀 질 게 뻔하지만 말이다. 조금 이라도 오래가게 하기 위해 글로나마 옮겨본다. 엘 그레코의 걸작이라는 '성 오르가쓰 백작의 매장(Burial of the Conde de Orgaz)'이다. 480×360크기의 대작인 이 그림은 15783월 산토 토메 성당으로부터 주문을 받아 9개월 만에 완성했다고 한다. 이 그림은 톨레도 지방의 귀족으로 카스티야 왕국의 수석공증인을 지내고 1323년에 죽은 오르가쓰 백작의 장례장면을 표현하고 있다. 오르가쓰 백작은 신앙이 돈독하고 동정심이 많아서 살아있는 동안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많이 도와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산토 토메 성당을 재정적으로 후원해 성직자와 신도들이 비교적 여유 있게 생활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후대 사람들이 그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해 250년쯤 지나서 오르가쓰 백작의 장례식에 관한 전설을 그림으로 그려 성당에 걸기로 결정한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오르가쓰 백작의 장례식날 하늘나라에서 두 성인 아우구스틴(Augustin)과 에스테반(Esteban)이 내려와 시신을 직접 매장했다고 한다. 그리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하느님을 잘 섬기는 사람은 이처럼 보상받을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엘 그레코는 이런 전설을 토대로 천상과 지상에서 동시에 이루어지는 드라마를 그림으로 완성도 높게 표현했다.

 

 

 

산토 토메 성당을 둘러봤다면 이젠 호텔로 돌아갈 차례이다.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 동상(銅像) 하나가 보인다. ‘La Ciudad De Toledo a Juan De Padilla’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니 성공하지 못한 혁명군의 지도자 파딜라(Juan De Padilla, 1490~1521)의 동상인 모양이다. 파딜라는 톨레도의 유서 깊은 귀족가문 출신이다. 1516년 스페인의 왕위에 오른 카를 5세는 외국인들을 고위직에 임명했는데, 이들은 독단적이고 횡포가 심한 행동으로 스페인의 여론을 들끓게 만들었다. 오래지 않아 스페인에서는 카스티야의 전통적인 왕권 견제 방책을 실시해야 한다는 요구가 있었다. 이를 계기로 민중봉기가 일어났는데 이때 총사령관에 선출된 사람이 파딜라이다. 하지만 그는 우여곡절 끝에 황제군에게 사로잡혔고 곧바로 처형되었다.

 

 

 

톨레도는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이는 도시 전체가 모두 볼거리라는 뜻이다. 그러니 톨레도에서는 꼭 어딘가를 향해서 걸어갈 필요는 없다. 그냥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보면 길이 나타나고, 골목이 사라지면 성벽이 보이면서 새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한참을 걷다보면 다시 한 번 구시가지가 눈앞에 펼쳐진다. 마천루가 없는, 톨레도의 풍경은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가 않는다. 이럴 때는 풍경을 바라보며 커피 한 잔에 노래 몇 곡을 즐기면 안성맞춤일 것 같다. 그러면 여행을 다니느라 피곤해졌던 몸과 마음이 한결 풀릴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이드의 뒤꽁무니를 쫒기에 바쁜 나에게는 그럴만한 여유가 주어지지 않는다.

 

 

에필로그(epilogue), 누군가가 현지인에게 물었단다. ‘스페인 여행에서 단 하루밖에 주어지지 않는다면?’이라고. 이때 들었던 대답은 톨레도로 가라.’였단다.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 그라나다 등 볼거리가 넘치는 곳들이 많고 많은데 하필이면 중세 스페인의 수도였던 톨레도였을까? 중세 요새의 모습을 간직한 수려한 경관과 스페인 가톨릭의 총 본산인 톨레도 대성당’, 거기다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식으로 유명한 화가 엘 그레코가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거기다 농담 삼아 하나 더 추가한다면, 영화배우 이보영과 지성이 웨딩화보를 찍었던 곳으로 입소문을 탔었기 때문일 테고 말이다. 하여간 톨레도는 오래된 도시이다. 그래서 볼거리들도 많은 편이다. 위에서 말한 톨레도대성당이나 산토 토메 성당외에도, 시내를 굽어보며 우뚝 서 있는 알카사르(요새)나 아윤타미엔토(18세기초)와 바로크 양식의 많은 교회들, 그리고 신고전주의 양식의 오스피탈델눈시오와 톨레도 중학교, 엘 그레코 저택 박물관과 타예르델모로 박물관, 현대적 양식의 아카데미아밀리타르데인판테리아 등 볼거리들로 넘친다. 하지만 우린 그 많은 것들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여행사의 일정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게 바로 패키지여행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여행을 편하게 할 수 있는데 반해, 보고 싶은 것을 다 보지 못하는 것 말이다.

여행지 : 스페인 및 포르투칼

 

여행일 : ‘15. 11. 12() - 19()

여행지 : 스페인(바로셀로나, 몬세라토, 발렌시아, 그라나다, 미하스, 론다, 세비아, 톨레도, 마드리드), 포르투칼(리스본, 까보다로까, 파티마)

 

여행 다섯째 날 오후 : 포르투갈, 성모 발현지 파티마(Fátima)

 

특징 :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에서 북쪽 141지점에 위치한 파티마(Fatima)는 약 7000명이 살고 있는 작은 마을이지만, ‘파티마 성역이라 불리며 매우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성지(聖地)이다. 1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17513, 포루투칼의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양을 몰고 가던 세 어린이 앞에 성모가 나타나 '전쟁은 곧 끝난다. 앞으로 다섯 달 동안 13일이면 이곳을 찾아오겠다'고 한 후 매월 13일이면 모습을 드러냈다. 세 어린이의 이름은 열살이던 루시아와 사촌이던 프란시스코, 그리고 일곱살 자신타였다. 마지막 모습을 보이던 1013일엔 7만 명이나 되는 사람이 모였다고 한다. 이 파티마의 기적으로 한적하던 시골 마을은 성모발현성지가 되었고 처음 발현한 513일과 마지막 발현한 1013일은 축일이 되어 전 세계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찾아온다.

 

 

 

파티마로 향한다. 야트막한 평지에 푸른 나무들이 우거진 들녘에는 어쩌다가 한 번씩 하얀 벽에 붉은 지붕을 한 집들이 나타날 뿐 전체적으로는 한적한 느낌이다. 푸른색 바탕에 흰색과 주황색이 함께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풍경에 빠져들다 보면 어느덧 파티마에 도착하게 된다. 하지만 아쉽게도 해가 떨어진지 이미 오래이다. ‘까보 다 로카에서 이곳 파티마까지의 거리가 만만찮게 떨어져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호텔(산타마리아)에 여장을 풀자마자 파티마대성당(Sanctuary of Our Lady of Fátima)’으로 향한다. 사위는 이미 어두워진지 오래이다. 방향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캄캄하다. 가이드 뒤만 졸졸 쫒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대성당 앞의 광장은 굉장히 넓다. 광장 오른편으로 간다. 유리벽 안에 뭔가가 전시되어 있다. 1951812일에 세워졌다가 1989119일에 허물어진 베를린장벽을 헐면서 떼어 낸 콘크리트 조각이란다. 이 작은 기념관은 독일에 사는 포르투갈 이민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공산주의의 멸망을 예언한 파티마 성모의 예언을 기리는 의미라고 한다. 대리석에는 루치아와 프란치스코, 히야친따를 부조해 놓고, 그 옆에 신부님이 세 명의 목동에게 사실을 확인하는 장면도 새겼다.

 

 

 

 

 

 

 

1917513, 3명의 어린 목동 루시아(1907-2005)와 사촌 히야친타(1910-1920), 프란치스코(1908-1919) 남매가 평소의 습관대로 묵주 기도를 마치고 주위의 작은 돌들로 집짓기 놀이를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섬광이 비추어서 그네들은 천둥이 치는 줄 알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언덕길을 내려오는 길에 현재의 파티마 대성당이 있는 자리에 이르렀을 때 참나무 위에서 태양보다 더 눈부신 여인이 하얀 묵주를 걸고 서있는 모습을 보았단다. 여인은 목동들에게 기도를 많이 할 것과 앞으로 5개월 동안 계속해서 매월 13, 같은 시간에 와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 후 613일과 713일에 성모의 발현이 있으면서 이 일들이 소문이 나게 되자 성모 발현에 의심을 하는 관리들에게 세 아이들이 끌려가 고초를 당하는 바람에 8월의 발현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대신 성모는 810일에 다른 곳인 발린호스에서 발현하였다고 한다. 그 후 9월에 약속대로 발현이 있자 마지막 발현일인 1013일에는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70,000이 운집한 가운데 발현하여 자신은 '로자리오의 성모(Virgin of the Rosary)'라고 말한 후 태양의 춤이라는 기적을 보여 주었다고 한다. 그 곳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모두가 아무 어려움 없이 태양을 바라 볼 수 있었단다.

 

 

 

1013일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마지막 기적이 일어나고 성모님이 3가지를 얘기했다. 첫째는 포르투갈의 많은 사람들이 부모에게 돌아온다는 평화의 메시지였다, 그리고 둘째는 가톨릭을 핍박하는 나라는 망한다는 공산주의 국가들의 몰락. 셋째는 종교 지도자가 핍박을 받되 힘든 고난에서 벗어난다는 메시지였다. 이후 두 어린이는 폐렴에 걸려 프란치스코가 191944일에 그리고 히야친타는 1920220일 죽었다. 루치아는 갈멜 수도원의 수녀가 되었다. 파티마의 마지막 비밀은 성모 마리아의 고지로 1960년까지는 어느 누구에게도 공개 할 수 없다고 했으며 1960년 이후엔 교황만 읽을 수 있었다. 루치아는 계속 예언을 받았는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1년에 한번 만나 계시 받은 것을 얘기하고 기록했다고 한다. 그 비밀의 마지막 부분은 루치아 수녀에 의해서 1944년 써졌으며, 1957년 이래로 교황청에서 보관되고 있다. 전문적인 소식통들에 의하면, 마지막 비밀은 가톨릭교회 내부에 발생될 혼돈(대혼란, 무질서)에 관한 것이고, 1960년대에 시작되는 신앙의 상실과 교회 내에 만연될 배교(변절)을 예고하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루치아 수녀는 2005214일 타계했다. 먼저 간 프란시스코와 히야친타, 그리고 루치아는 파티마 대성당 지하에 묻혔다.

 

 

 

이후 레이리아의 주교가 이 이야기의 신빙성을 인정하였고 교황청도 이를 확인하여 성지로 결정하였다. 1928년에 대성당의 건축을 시작하여 195310월에 봉헌식이 거행되었다. 한적하던 시골 마을은 파티마의 기적으로 성모발현성지가 되었고 처음 발현한 513일과 마지막 발현한 1013일은 축일이 되어 전 세계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찾아온다. 성당 앞 광장 건너편에는 파티마의 기적 90주년을 기념하여 200466일 착공하여 20071012일 성삼위에 봉헌된 8,500명을 수용하는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성당이 있다. 참고로 대성당은 네덜란드 출신의 건축가 제라르두스 반 크리켄이 설계했으며, 65m의 탑은 63개의 종으로 이루어져 파티마의 아베마리아를 울린다고 한다. 그 중 가장 큰 종은 무게가 12톤에까지 이른다고 한다. 종탑의 십자가와 함께 왕관의 무게는 8톤에 다다랐다고 하는데, 이는 195412월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대성당 꼭대기에 세워졌다. 대성당 내부의 중앙 제대 양편에는 프란치스코와 히야친타의 무덤이 있다. 중앙 제대의 왼편 벽에 발현 당시 레이리아의 주교 호세 알베스 코레이아 몬시뇰이 잠들어 있었다. 그 밖의 여러 경당들에는 청동에 금장식을 한 묵주기도 15단이 부조로 조각되어 있다.

 

 

 

대성당으로 가는 길에 광장에서 두 팔을 벌리고 서 계시는 예수님을 만난다. ‘예수성심상(Monument to the Sacred Heart of Jesus)’이다. 탑 바로 아래에서 생명과 정화를 뜻하는 성수(聖水)를 뜰 수 있다고 한다. 다들 빈병에다 성수를 채우느라 분주하지만 난 그만두기로 한다. 집에까지 가져간다고 해도 보관할만한 또렷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명 아래 대성당이 우뚝 솟아 있다. 그러나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가이드의 안내가 없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대성당은 1928년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건축을 시작하여 195310월에 봉헌식이 거행되었다. 로사리오 성당이라고도 하는데, 15개의 제단과 1952년 설치된 대형 오르간이 있다. 대성당 묘소에 파티마의 기적을 목격했던 당시 세 사람의 무덤이 있으며 파티마의 기적에 관한 내용이 스테인드글라스로 표현되어 있다고 한다. 19825월 파티마 기적을 연구하고 되새기기 위한 바오로 6세 목회센터를 세웠고, 2007년에는 세계에서 4번째로 큰 성삼위성당을 지었다.

 

 

왼편에 유리로 들러 싸인 작은 성당이 보인다. 이곳이 바로 성모님이 발현하신 자리에 세워졌다는 성모 마리아 출현 예배당(The Chapel of Apparitions)’이다. 미사 시간이 아니어선지 성당은 텅 비어있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는 사이에 벌써 몇 사람이 앉아있다. 우리 일행들인데 아마 가톨릭신자들인 모양이다. 참고로 소() 성당은 성모님의 여섯 번째 발현, 즉 마지막 발현인 19171013일에 이곳에 나를 위한 성당을 지으시오.’라는 말씀에 따라, 발현하신 자리에 세운 작은 성당이다. 그러나 이 성당은 192236일 프리메이슨 비밀 결사단이 설치한 다이너마이트에 의해 완전히 폭파되었고, 그 후 여러 차례에 걸쳐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성당 내에는 잘 알려진 바 대로 파티마 성모님의 동상이 모셔져 있다. 대리석의 흰 기둥은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참나무가 있던 자리를 가리킨다. 이곳에서 성모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상처받으신 하느님께 죄의 회개를 위해 희생과 고통을 봉헌할 것, 세계 평화와 전쟁의 종식을 위해 매일 묵주기도를 바칠 것, 마리아의 티 없으신 성심을 세상에 심을 것, 마리아의 성심께 러시아를 봉헌할 것을 요구하셨다. 특히 죄인들의 회개와 특별히 러시아를 위해 기도하고 참회하기를 간구하셨다.

 

 

 

 

성당 정면에 약간 기울어진 왕관을 쓰신 성모님이 유리상자 안에 계시고, 그 뒤에는 작은 집이 보인다. 경건한 마음에 고개가 숙여진다. 그건 가톨릭신자인 나만의 느낌은 아니었을 것이다.

 

 

 

성당 바로 옆에는 초를 봉헌 하는 곳이 있다. 황토 빛의 초는 크기와 굵기가 다양하다. 무인판매대에서 초를 팔고 있으니 하나 정도 구입해서 켜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성모님께 빌 작은 소원 하나 품고서 말이다. 

 

 

 

 

 

이곳저곳을 돌아보다가 일행에서 떨어져버리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아니 사진을 찍다가 그랬다는 것이 더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걱정은 되지 않았다. 그만큼 파티마가 작은 마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방심은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거리는 방향을 잡을 수 없을 만큼 어두웠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없어 길을 물어볼 수도 없었다. 길을 헤매다가 승용차에서 내리는 이곳 주민을 어렵게 만났지만 그는 영어를 못 알아듣는단다. 다행히도 그는 영어가 통하는 주민에게 날 인도해주는 친절을 베풀어 주었다. 성모님이 발현했다는 성스러운 마을에서 살아갈 자격이 충분한 사람이었다. 그것 또한 성모님이 만들어내는 자그만 기적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늦게 도착한 호텔식당, 집사람의 눈초리가 심상찮다.

 

 

 

여행지 : 스페인 및 포르투칼

 

여행일 : ‘15. 11. 12() - 19()

여행지 : 스페인(바로셀로나, 몬세라토, 발렌시아, 그라나다, 미하스, 론다, 세비아, 톨레도, 마드리드), 포르투칼(리스본, 까보다로까, 파티마)

 

 

여행 다섯째 날 오후 : 포르투갈, 까보 다 로카(Cabo da Roca)

 

특징 : ‘땅 끝 마을하면 우리는 먼저 전라남도 해남을 떠올릴 것이다. 우리나라의 제일 남쪽 끝이니까 말이다. 땅 끝 마을이 포르투갈에도 있다. 그 옛날 먼 바다로 나갈 수 없던 시절에는 이곳은 정말 땅의 끝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 유럽의 끝이라는 데는 변함이 없다. 낭만과 여유의 끝을 경험할 수 있다는 까보 다 로카(Cabo da Roca)’는 유럽 대륙의 서쪽 끝이자. 포르투갈의 땅 끝 마을이다. 대서양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이곳은 리스본에서 서쪽으로 약 40떨어져 있다. 특히 140m 높이의 절벽이 대서양의 푸른 파도와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 ‘땅 끝 마을임을 알리는 돌탑이 주요 볼거리인데, 꼭대기에 커다란 십자가가 있다. 이 탑에는 포르투갈의 시인 카몽에스가 남긴 '이곳에서 육지가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는 시구(詩句)가 새겨져 있다. 탑 앞에 서면 대서양의 쪽빛 바다와 시리도록 파란 하늘이 지평선에서 하나가 되며 경계를 잊어버리게 만든다.

 

 

 

리스본을 출발한 버스는 구불구불한 산길을 달린다. 멀미를 유발시키는 전형적인 산길이다. 하지만 그다지 위험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길의 아래편이 벼랑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은퇴 이후 여행을 계속해오면서 가슴을 졸여야만 했던 길이 하나 둘이 아니었던 게 보다 큰 원인이었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1시간 반 정도를 달리면 유럽대륙이 끝나는 곳에 이르게 된다. 이베리아반도의 제일 서쪽 까보 다 로카 곶(바다 쪽으로, 부리 모양으로 뾰족하게 뻗은 육지)’ 그러니까 대서양이라는 바다가 시작되는 곳이다.

 

 

 

 

 

 

 

탈출하듯 버스에서 내리면 거센 바람이 와락 달려든다. 옷깃을 단단히 여민 후에야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넓고 완만한 초원이 펼쳐진다. 유난히도 선인장이 많아 보이는 풀밭이다. 그 선인장들이 꽃이라도 피운다면 장관을 이루겠다. 어느 글에선가 그 시기를 6월쯤이라고 했다.

 

 

 

버스에서 내리면 가장 먼전 바닷가 쪽에 우뚝 솟아 있는 십자가가 눈에 들어온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때로는 매우 심한 바람이 불어 올라오는 언덕 위에 바람을 등지며 우뚝 서 있는 십자가 탑은 아마도 이 바다를 나갔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한 많은 탐험가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위령탑인지도 모르겠다.

 

 

 

 

 

대서양의 반대편 풍경, 바닷가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깊은 산자락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탑으로 곧장 가지 않고 왼편 바닷가 절벽 쪽으로 간다. 회색 빛 하늘과 맞닿아 있는 시퍼런 대서양 바다의 수평선이 눈에 들어온다. 둥그런 모양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험상궂은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진 해안선이 눈길을 끈다.

 

 

 

벼랑 아래로 향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아마 아래까지 내려갈 수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난 이쯤에서 만족하기로 한다. 조망이란 가까이 다가가는 것보다는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한결 더 나음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언덕배기에는 등대가 그림처럼 서있다. 1772년에 세워진 포르투갈 최초의 등대로 지금도 묵묵히 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단다. 구릉(丘陵)으로 이루어진 까보 다 로까는 나무들이라곤 보이지 않는다. 대신 온통 파란 풀밭이다. 대서양의 거센 바람 때문에 몸을 낮출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높이가 140m쯤 된다는 벼랑의 난간에는 펜스가 쳐져있다. 누군가 우리나라의 해군사관생도가 떨어진 이후부터 쳐졌다고 했으나 믿을 일은 아니다. 그저 마음 놓고 벼랑까지 나갈 수 있게 해준 것에만 감사하기로 한다. 만일 펜스가 없었더라면 벼랑까지 다가갈 엄두도 못 냈을 테니까 말이다.

 

 

 

몽환적인 풍경보다 사람들의 발길을 끄는 것은 십자가가 돋은 커다란 기념비다. 십자가 탑에 부착된 돌 판에는 북위 3747, 동경 930이라는 좌표와 포르투갈의 민족시인 루이스 데 카몽이스(Camões, 1524~1580)’의 시구(詩句)가 적혀 있다. <여기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Aqui, onde a terra se acaba, E o mar comeca)> 어쩌면 끝이라고 체념하지 말고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라는 격려의 문구가 아닐까 싶다. 하나의 끝은 다른 하나의 시작일 테니까 말이다. 아무튼 이런 정신을 바탕으로 많은 해양 탐험가들이 배출되었을 것이다. 그 덕분에 한때 세상에서 가장 넓은 식민지들을 거느릴 수 있었을 테고 말이다. 참고로 루이스 데 까몽이스를 포르트갈의 민족 시인으로 만들어 준 것은 우스 루지아다스(Os Lusiadas)’라는 대 서사시이다. 까몽이스는 이 서사시에서 포르투갈의 정복과 항해사들의 영광, 그리고 지난 왕들의 업적, 즉 다시 말하자면, 포르투갈의 역사를 방대한 서사시로 기록했다.

 

 

 

 

 

 

 

 

 

뭍의 끝에 선다. 바람이 와락 달려든다. 포르투갈 사람들의 억센 억양만큼이나 거센 바람이다. 아찔한 절벽 아래에는 바위에 바다가 부서지고 있다. 그리고 그 너머로 대서양이 넘실대면서 쪽빛 바다와 시리도록 파란 하늘이 지평선에서 하나가 되어 경계를 잊어버리게 만든다.

 

 

 

 

해안을 따라 난 산책로에서 고개를 숙이면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파도가 쉴 새 없이 몰아치며 포말을 만든다. 파란 바다와 절벽에 부딪치는 하얀 파도, 그리고 바닷바람! 이것이 전부이다. ‘까보 다 로까에서 특별한 볼거리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저 육지의 끝이라는 감상적인 생각과 여기서부터 바다가 시작된다는 당연하면서도 새로운 이미지로 만족해야 한다. 다만 그 정도로는 마음에 안찬다면 거센 파도에 시달리며 만들어진 해안절벽의 기괴한 아름다움으로 채워볼 일이다.

 

  

 

 

 

절벽 아래에서는 쪽빛 바다가 하얗게 부서지는데, 눈을 조금 더 멀리 하면 어디까지가 바다이고 어디서부터가 하늘인지를 알 수 없는 파란 수평선이다. 아마도 거기서부터 대서양의 거센 바람이 우리를 맞이하러 달려 온 모양이다.

 

 

 

한 바퀴를 돌아 다시 등대로 되돌아오면서 까보 다 로카(Cabo da Roca)’ 투어는 끝을 맺는다. 한가하게 걸어도 1시간이면 충분한 거리이다. 조금 속도를 빨리해서 자투리 시간이라도 남았다면 등대 옆의 흰색 단층 건물로 들어가 볼 것을 권한다. 유럽의 서쪽 끝에 왔다는 증명서를 떼어 주고 있으니 기념으로 한번쯤 받아볼 겸해서 말이다. 물론 유료(有料)이다.

 

 

여행지 : 스페인 및 포르투칼

 

여행일 : ‘15. 11. 12() - 19()

여행지 : 스페인(바로셀로나, 몬세라토, 발렌시아, 그라나다, 미하스, 론다, 세비아, 톨레도, 마드리드), 포르투칼(리스본, 까보다로까, 파티마)

 

 

여행 다섯째 날 오전 : 포르투갈(Portugal)의 리스본(Lisbon)

 

특징 : 포르투갈( Portugal) : 리베리아반도의 끝이자 유럽의 서쪽 가장 끄트머리에서 대서양 연안과 마주하고 있는 포르투갈은 대항해 시대의 꿈과 낭만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나라이다. 덕분에 남한 정도의 국토에 인구 천만 명 정도의 조그마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한때는 세계 최대의 해외 영토를 보유할 수가 있었다. 그로인해 침략과 번영, 패배 등의 수난도 유난히 많았지만 말이다. 15~16세기에 해양왕국으로 지위를 확립하면서 세계 최대의 영토를 소유했지만 18세기 중반 나폴레옹의 침입, 브라질의 독립 이후 국력이 극도로 쇠퇴해졌다.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회교 문화와 중세 이후 그리스도 문화가 혼재하고 있다. 이 조그마한 나라이며 유네스코에 등록된 세계문화유산이 10여 곳이나 되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리스본(Lisbon) : 포르투갈의 수도로 리스보아 주의 중심도시이자, 포르투갈에서 가장 큰 도시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 도시는 BC 12세기에 페니키아 인들이 건설했고, 그 후 그리스인, 카르타고인, 로마인, 서고트족, 이슬람교도 등이 번갈아 이 도시를 장악하고 지배했다. 그 뒤 알폰소 3세가 국토회복을 완료하고, 1243년 리스본을 수도로 정한 뒤 대항해시대의 포르투갈 전성기가 이 리스본을 중심으로 꽃을 피웠다. 15세기 중엽부터 해외 식민지에서 흘러들어오는 재물들로 인해 리스본은 대도시로 급격한 성장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서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불렸으며 16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1755년 리스본 대지진으로 인하여 도시 대부분이 파괴되어 버렸는데 당시의 참상은 바이로 알투의 교회를 가면 볼 수 있다. 그 후 폼발 후작의 힘으로 부흥을 도모하여 새로운 도시계획에 의한 신시가지가 조성되었다. 현재의 리스본은 지진에서 살아남은 구시가지와 새로 조성된 신시가지가 공존하는 차분하고 소박한 멋을 지닌 도시이다. 참고로 리스본이란 이름은 기원전 12세기경 영국의 콘월 지방을 왕래하던 페니키아인이 세운 항구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당시 타구스 강(포르투갈어로 테주 강) 하구에 세워진 이 항구 도시는 페니키아어로 안전한 항구를 뜻하는 알리스 웁보(Allis Ubbo)라 이름 지어졌다고 추정되며, 여기서 리스본이란 이름이 유래했다는 것이다. 또한 로마 이전의 타구스강의 이름인 리소(Lisso) 혹은 루키오(Lucio)에서 이름이 유래했다는 설도 있으니 참조한다.

 

 

 

 

리스본으로 가는 길에 차창 밖으로 나타나는 풍경, 드넓은 평원이 끝없이 펼쳐진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시리도록 푸르다. 그래서 사람들은 포르투갈을 일러 온화한 기후와 청정한 바다 그리고 푸르른 하늘을 가진 나라라고 하는가 보다. 들녘이 그렇게나 넓건만 그냥 놀리는 곳이 없다. 올리브 단지가 길게 이어지나 하면 어느새 포토 밭으로 바뀌었다가 이내 콜크나무숲으로 변해 있다. 그리고 한가하게 풀을 뜯고 있는 가축들이 간간히 보이기도 한다. 목가적(牧歌的)이라는 말이 있다. 전원(田園)의 분위기처럼 평화롭고 고즈넉한 풍경을 말하는데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버스는 우리를 낯선 거리에다 내려놓는다. 도로 건너에 광장이 보인다. 13세기부터 리스본의 대부분 공식행사가 열려왔다는 호시우 광장(포르투갈어: Praça do Rossio)이란다. ‘페드루 4세 광장(포르투갈어: Praça de D. Pedro IV)’이라는 이름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광장 중심에 돈 페드루 4의 동상(銅像)을 세워 놓았다. 페드루 4세는 나폴레옹 전쟁을 피해서 9세인 1807년 말 식민지 브라질로 피난 갔다. 주앙 6세가 1821년 포르투갈로 귀국한 후에도 그는 계속 브라질에 머물러 있었다. 그 후 포르투갈 의회에서 포르투갈·브라질 연합 왕국을 해체하고 브라질을 식민지 지위로 되돌리려 하자 브라질 사람들이 반발하였고, 그는 이에 편승하여 18229월 브라질 독립을 선언하고 브라질 제국의 초대 황제로 즉위했다. 1827년 쿠데타로 포르투갈 국왕이 된 동생과는 1년 동안 전쟁을 하여 18345월 포르투갈을 통일하고 국왕이 되었으나 4달 후 3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로시우 광장 (Praça do Rossio)은 바이샤 지구와 리베르다데 거리를 연결하는 광장으로 정식 명칭은 돈 페드로 4세 광장이다. 광장의 북쪽에는 옛 종교재판소 자리에 지어진 국립극장(Teatro Nacional)이 있다. 이 외에도 광장에 만들어 놓은 화려하게 장식된 프랑스풍 분수가 볼만한다. 참고로 리스본에는 꼭 찾아봐야할 광장이 하나 더 있다. 시간에 쫒긴 우리는 들러보지 못했지만 메르시우Comercio)’라는 이름의 광장(Praca)이다. 로시우 광장에서 번화가인 바이샤(Baixa)지구를 지나 쭉 내려가면 끝에 웅장한 아치 개선문이 보이고, 그 문을 통과하면 태주(Tejo,Tagus)강변에 있는 리스본에서 가장 큰 광장인 코메르시우 광장이다. 광장 중앙에는 조세 1세의 기마상이 있다. 참고로 개선문은 19세기에 세운 것으로 퐁발 후작바스코 다 가마의 조각상이 장식되어 있다. 리스본에는 바스코 다 가마와 관련된 건축물들이 많은데, 인도항로를 개척하여 리스본에 부()를 안겨준 영웅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광장 주변에는 유서 깊은 건물들이 늘어서있어 호시우 광장을 더욱 멋지게 만들어 준다. 그 고풍스런 풍경 속에 옛 성당이 빠진다면 말이 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했기에 아직까지도 저런 건물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을까가 궁금한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알고 나면 간단하다. 비록 외관(外觀)에 한하지만 건물을 제멋대로 고치는 것을 법으로 제한하고 있단다.

 

 

 

또한 광장 주변에는 상점과 레스토랑들이 즐비하다. 광장이 시내중심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역시 이곳에 있는 어느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는다. 물론 난 야외에 놓인 테이블이다. 지나다니는 각양각색의 군상(群像)들을 곁눈질하면서 음식을 먹는 것도 하나의 낭만이기 때문이다. 이곳 리스본에서는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눈에 띈다. 포르투갈이 예전에 많은 식민지를 가졌던 게 원인일 것이다.

 

 

 

오늘의 점심은 바로셀로나에서 먹어봤던 빠에야와 함께 바칼라오(Bacalhau)가 곁들여졌다. 대구를 장시간 소금에 절여서 말린 뒤, 뼈를 발라서 각종 야채 및 올리브유와 함께 곁들여서 먹는 포르투갈의 전통요리란다. 그러나 올리브유를 좋아하지 않는 내 입엔 별로였다. 별 수 없이 생맥주 한 잔을 주문해서 느끼해진 입안을 헹구어야만 했다.

 

 

 

거리는 온통 흰색과 회색의 돌들이 물결 같은 패턴의 모자이크로 깔려 있다. 19세기에 죄수들이 석회석과 현무암 조각을 손으로 모래 위에 박아 넣었다고 한다. 그들의 손길 위에 얼마나 많은 발자국들이 지나갔는지 반들거리는 돌들이 미끄러울 정도이다.

 

 

 

점심을 먹은 후에는 곧바로 벨렘탑(Torre de Belem)으로 향한다. 가는 길에 가이드의 안내 멘트(announcement)가 몇 번 이어졌지만 차량을 멈추지도 않은 채로 지나가면서 하는 말이다 보니 귀에 들어올 리가 만무하다. 그저 머리 위를 지나가는 현수교(懸垂橋)만이 눈에 들어올 따름이다. ‘425일 다리(25 de Abril Bridge)’로서 타구스 강 하구에 위치해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과 남안의 알마다를 잇는 다리이다. 이름은 1974425일 혁명에서 유래했다. 196686일에 완공하였고, 1999년 철도 층이 추가되었다. 붉은 빛이 도는 색깔 때문에 미국의 골든게이트교와 자주 비교되지만, 실제 시공은 샌프란시스코-오클랜드 베이 브리지를 지은 아메리칸브리지컴파니(American Bridge Company)에서 했고, 이로 인해 두 다리 사이의 형태적 유사성이 발견된다. 총 길이는 2,277미터로, 세계에서 23번째로 긴 현수교이다. 위층에는 6차선의 고속도로가, 아래층에는 복선철도가 지나간다. 참고로 이 다리는 1974년까지는 포르투갈의 독재자 살라자르의 이름을 따 살라자르 다리로 불렸다. 그러다가 안토니오 스피놀라장군이 지휘한 군부의 무혈 혁명, 즉 군인들에게 카네이션을 달아주어 카네이션 혁명이라고도 부르는 리스본의 봄을 기념하여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차에서 내리면 넓디 너른 잔디밭이 나온다. 그 끄트머리에 있는 탑이 벨렘탑(Torre de Belem)이다. 강과 바다의 경계에 있는 하얀색 건축물인 벨렘탑은 탑이라고 불리어지고 있으나 탑으로 보이지 않고, 흡사 물위에 떠 있는 거대한 성곽(城郭)처럼 보인다. '벨렘탑'1515'마뉴엘 1'가 항구를 감시하기 위해 세운 탑이다. 태주강이 바다와 만나는 물속에 세웠으나 강의 흐름이 바뀌면서 물에 잠기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탑은 3층으로 이루어졌는데 1층은 조수(潮水)의 차이로 물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데 거기에 죄수들을 가두어 물이 들어올 때는 목까지 물이 차는 고통을 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2층은 포대로 항해의 안전을 수호하는 '벨렘의 마리아상'이 서 있다. 끝으로 3층에는 귀족들의 연회장이다. 참고로 이 벨렘탑은 고깔을 닮은 장식, 동글동글한 포탑, 망루에서 바라보는 일망무제의 풍경이 관전 포인트로 꼽힌다.

 

 

 

 

 

포르투갈이 만들어낸 독특한 건축양식인 마누엘양식(Manuel Style)’의 걸작이라면 뭐니 뭐니 해도 제로니무스 수도원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벨렝탑도 마누엘 양식이 만들어낸 뛰어난 작품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제로니모수도원이 걸작이라면 벨렝탑을 수작(秀作)으로 분류한다 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아무튼 벨렝탑은 '테주강의 귀부인'이란 애칭을 갖고 있다. 물속에 세워졌다고 믿기지 않을 만큼 그 모습이 수려하고, 또한 여자의 드레스 자락처럼 보인다고 해서 얻게 된 이름이란다.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유일 지도 모르겠다.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운 벨렘탑이 아름다운 여인이 되어 출렁이는 물 위를 걸어 나오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탑의 위로 올라가면 타호강과 이를 가로지르는 '425일 다리'가 한눈에 잘 들어온다고 한다. 하지만 난 이를 포기하고 발길을 돌린다. 뒤편 저 멀리 타호강 가에 보이는 발견기념비에 다녀오기 위해서이다. 주어진 시간은 겨우 15, 결론부터 말하지만 마라톤이 가능한 사람이 아니라면 시도조차 하지 말아야 한다. 15분 안에 다녀오려면 제법 속도를 내서 달려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달리는 중에도 주변 경관을 놓칠 수는 없다. 틈틈이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가며 달린다. 작은 요트들이 빼꼭히 들어찬 항구가 눈에 들어온다. 바다를 끼고 살아온 그들의 문화가 반영된 풍경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한때 그렇게나 많은 해외 식민지를 거느릴 수 있었을 테고 말이다.

 

 

 

 

 

드디어 대항해 발견기념비(Padrao dos Descobr Descobrimentos)’에 이른다. 이제 막 출범을 하려는 범선의 역동적인 모습이다. 대항해시대의 항해왕자 엔리케(Infante Dom Henrique) 사망 500년이 되는 1960, 500주년을 기념해 바스쿠 다 가마가 아프리카 항해를 떠난 자리에다 세운 것이란다. 세계를 호령했던 영웅들을 조각조각 새겨 넣은 기념비에는 전성기에 대한 짙은 그리움이 배어 있다. 참고로 엔리케 왕자는 실제로는 항해를 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항해 전문가들을 고용하여 속도가 빠르고 암초에 잘 견디는 선박을 개발하고, 해상 활동을 적극 지원하여 아프리카와 아시아 등 세계의 절반을 식민지화 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새웠다고 해서 항해왕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포르투갈의 엔리케 왕자(Infante Dom Henrique)가 대항해시대를 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대항해시대는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 리스본의 벨렘(Belem)에서 시작됐다. 이때 망망대해 너머 또 다른 세상이 있다고 믿었던 엔리케 왕자는 항해사, 지도제작자 등을 캐스팅해 원정대를 꾸렸다. 그리고 바다로 나갔고, 새로운 항로를 개척했다. 인도를 발견했던 포르투갈의 탐험가 바스쿠 다 가마와 브라질을 찾아냈던 페르두 알바레스 카브랄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이 배에 가득 싣고 온 후추 덕에 포르투갈은 황금기를 맞았고, 엔리케 왕자는 해양왕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높이 53m의 뱃머리 맨 앞에서 범선을 들고 있는 사람이 엔리케이고 그 뒤에 바스코 다 가마, 카몽이스, 마젤란, 바르돌로뮤 디아스 등 포르투갈 사람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인물 30인의 조각상이 있다. 광장 내 대리석 바닥에는 세계지도를 그려 놓고 지역별로 포르투갈이 도착한 년도가 새겨져 있다. 우리나라는 들르지도 않은지 일본 열도에만 ‘1541’의 표시가 있다.

 

 

 

다시 버스를 타고 짧게 이동하면 제로니무스 수도원’(포르투갈어: Mosteiro dos Jerónimos)이 나온다. ‘마누엘양식(Manuel Style)’이라는 독특한 양식으로 지어졌다는 건물이다. ‘마누엘 양식이란 밧줄, , 범선 등 대항해시대의 상징물을 모티브로 하는 화려한 건축 양식을 말하는데, 장대한 해상제국을 실현했던 마누엘 1(Manuel I : 재위 1495~1521)’가 부()를 바탕으로 꽃피웠던 문화양식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마누엘 양식의 결정판이 바로 제로니무스수도원인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수도원의 안은 들어가 볼 수 없었다. 수도원 앞에서 사진 두어 장 찍을 수 있는 시간밖에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제로니모는 히브리어로 된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했다는 이탈리아의 성인이다. 그렇다면 이 수도원의 주요 임무도 문서를 번역하는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수도원은 두 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오른쪽(아래 사진)의 하얀 건물은 성당이고 왼쪽(그 아래의 사진)에 있는 빨간 지붕의 2층 건물은 수도원이었는데 지금은 해양 박물관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170년의 대 공사 끝에 일궈낸 수도원은 포르투갈이 발견의 시대를 이끌어 갔을 때 누렸던 영광을 반영하고 있다. 총길이 300m에 달하는 건물은 화려하고 장엄하다. 특히 수도원 안뜰의 2층 회랑은 아치와 기둥, 벽을 장식한 섬세한 조각이 매우 아름답다고 알려져 있다. 참고로 수도원의 원래 이름은 하이에로니미테스 수도원으로 포르투갈 왕실의 묘()로 사용할 목적으로 지어졌다. 그러다가 훗날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에서 귀환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목적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제로니무스 수도원(Mosterio dos Jeronimos)'엥리케 왕자'의 위업을 칭송하고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항로 발견을 기념하기 위해 1502년 마누엘 1세 때 짓기 시작해 1672년에 완공되었다. 포르투갈을 해양강국으로 만든 엔리케 왕자가 세운 산타 마리아 예배당이 있던 자리이다. 마누엘 양식을 대표하는 이 화려한 건물은 해외로부터 얻게 된 부를 토대로 지은 것으로 대항해 시대의 영광을 보여주는 수도원이다. 수도원 건물은 16세기에 만든 건물과 19세기에 만든 두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는데 매우 웅장하면서도 화려하다. 남문의 입구 위쪽에는 '앙리케 왕자'의 동상이 자리 잡고 있고, 고딕 르네상스 건축물인 산타마리아 교회와 연결되어 있다. 교회의 내부에는 '바스코 다 가마'와 포르투갈 최고의 시인인 '루이스 데 카몽에스'의 석관이 안치되어 있다. 참고로 제로니무스 수도원은 인근에 위치한 벨렘탑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제로니무스 수도원의 안으로 들어갈 것을 포기한 이상, 도로를 건너 건물까지 다가갈 필요는 없다. 건물의 외관(外觀)은 조금 멀리서 보는 것이 차라리 더 나을 것이기 때문이다. 수도원의 전면 도로 건너, 그러니까 내가 지금 서 있는 이곳은 커다란 원형의 연못과 하늘을 찌를 듯이 치솟는 분수(噴水)까지 갖춘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아니 나무들이 보이지 않으니 잔디밭으로 부르는 게 옳을지도 모르겠다. 수도원의 전경(全景)을 눈에 담은 후 발길을 돌리려는데 수도원의 반대편 방향에서 눈에 익은 뭔가가 나타난다. 그렇다 아까 죽어라고 달려와서 보았던 대항해 발견기념비이다. 들르지 않을 거라고 했던 기념비가 바로 코앞에 있는 것이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가이드를 원망해보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어쩌겠는가. 욕이나 실컷 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겠다. 그것마저도 속으로 할 수밖에 없겠지만 말이다. 참고로 수도원이 지어질 당시만 해도 이곳은 테주강이 흘렀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대지진으로 인해 강이 아래로 흘러가게 되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변했다고 한다.

 

 

 

제로니무스수도원을 끝으로 리스본투어는 끝을 맺는다. 완전히 수박 겉핥기이다. 여행자들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근사한 레스토랑보다 먼저 찾는 곳이 있다. 바로 전망대이다. 높은 곳에 올라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풍경을 즐기다 보면 새로운 장소에서만 느낄 수 있는 설렘에 피로가 단번에 날아가기 때문이다. 누군가 그랬다. 리스본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풍부한 해산물 먹거리라고, 하지만 리스본의 진짜 명물은 도시 곳곳에 있는 크고 작은 언덕들이다. 그러나 우리에겐 언덕들을 올라볼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아니 기대조차 할 수가 없었다. 시내에 있는 유명한 광장까지도 버스에 탄 채로 안내하겠다는 가이드에게 올라가보자고 우겨볼만한 배짱이 내게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게 바로 패키지여행의 서러움이 아닐까 싶다. 하다못해 어느 성당의 첨탑에라도 올라가보겠지 기대를 해봤지만 언감생심, 갈 길 바쁜 가이드는 운전기사를 채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긴 오늘 안에 땅끝전망대와 파티마까지 모두 둘러봐야 하니 그녀로서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에필로그(epilogue), 리스본 여행은 한마디로 최악이었다고 할 수 있다. 리스본에서 가장 들러보고 싶은 곳을 들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벨렘탑과 제레니모스수도원을 꼽을 것이다. 건물의 안을 들어가 볼 것을 예상하며 말이다. 그렇지만 우린 외관을 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가이드의 채근에 쫓겨 그나마도 서둘러 곁눈질을 마쳐야만 했다. 이런 게 바로 패키지여행의 한계일 테니 어쩌겠는가. 그러나 투어 일정에 잡혀 있던 에두아루도7세 공원로시우 광장이라도 구경했더라면 조금은 덜 억울하지 않았을까 싶다. 관광객들이라면 하나로도 더 많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일정에 없는 것을 보여주지는 못할망정 기왕에 잡힌 일정은 소화시켰어야 할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아무튼 일곱 개의 언덕으로 이루어진 리스본은 볼거리가 넘치는 도시이다. ‘리스본 대성당이 있는 알파마(Alfama)는 여행엽서에까지 자주 등장하는 리스본의 대표 이미지이고, 영국의 낭만파 시인 바이런이 에덴의 동산이라고 예찬했다는 신트라(Sitra)’는 옛 왕족들의 여름별장이 그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거기다 곳곳에 있는 미라도루(miradouro), 즉 전망대를 빼 놓을 수 없다. 오랜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하며 빛이 바랜 리스본 건물들이 손에 잡힐 듯이 다가오고, 건물들 뒤로는 도도하게 흐르는 타호강이 사람들의 넋을 빼앗기에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여행지 : 스페인 및 포르투칼

 

여행일 : ‘15. 11. 12() - 19()

여행지 : 스페인(바로셀로나, 몬세라토, 발렌시아, 그라나다, 미하스, 론다, 세비아, 톨레도, 마드리드), 포르투칼(리스본, 까보다로까, 파티마)

 

 

여행 넷째 날 오후 : 스페인광장 등 세비야 시가지와 플라멩코 관람

 

특징 : 세비야 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세비야대성당알카사르를 떠올린다. 하지만 세비야에는 다른 볼거리들도 상당히 많다. 그중에 하나가 스페인광장이다. 그리고 광장의 옆에 있는 스페인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원 중의 하나라는 마리아 루이사 공원도 빼 놓을 수 없다. 세비야의 스페인광장은 우리나라의 광고에도 등장했을 만큼 반달 모양인 두 개의 건축물(고고학박물관과 예술 풍습박물관)이 있고 그 모양을 따라 물길을 만들어 놓은 매우 크고 아름다운 광장이다. 어느 여행가는 진정한 스페인광장은 세비야에서 만나볼 수 있다고 했을 정도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까르멘>, <세비야의 이발사> 등 오페라의 무대가 된 도시가 바로 세비야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시간을 쪼개서라도 꼭 플라멩코를 관람해보라는 얘기이다.

 

 

 

알카사르(Real Alcázar de Sevilla) 북쪽에 자리 잡고 있는 옛 유대인 거주 지역인 산타크루스 거리(Barrio de Santa Cruz)’로 향한다. 알카사르의 옆을 지나자마자 산타크루스 거리의 들머리인 자그마한 광장이 나온다. 광장에는 작은 노천카페와 기념품가게가 있다. 스페인의 전통 세공품(細工品)을 파는 가게인데 진열된 제품들이 어느 것 하나 정교하지 않은 것이 없다. 거리를 걷다보면 이러한 광장들을 심심찮게 만나게 된다. 

 

 

 

 

 

 

 

거리는 대부분 좁다. 하지만 둘이 나란히 서서 걸을 정도는 된다. 맞은편에서 오는 사람이라도 만날 경우에는 서둘러 앞뒤로 나뉘어야 하지만 말이다. 이런 풍경은 거리가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이어진다.

 

 

 

길은 성벽을 따라 나있다. 어쩌면 알카사르의 담벼락이 아닐까 싶다. 조금 더 화려하고, 조금 더 좁으며 미로 같은 골목들을 둘러보고 싶을 때에는 왼편에 보이는 골목을 하나 골라잡으면 되지 않을까 싶다. 하여간 산타크루스 거리는 세비야에서 가장 오래된 지역 중의 하나이다. 유대인이 모여 살던 지역이라고 해서 유태인의 거리로도 불린다. 그러나 1492년 유대인들을 몰아내고 세비야의 귀족들이 이곳에 정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골목은 마리아 루이사 공원(Parque de María Luisa)’으로 연결된다. 공원에 이르기 전 예쁘게 지어진 건물이 하나 나타난다. 로시니(Gioacchino Antonio Rossini)가 머물면서 오페라를 작곡하던 집이란다. 세비야는 로시니의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와 비제(Georges Bizet)의 오페라 카르멘’, 그리고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의 오페라 돈 후안의 무대이기도 하다. 참고로 세비야는 스페인의 극작가 티르소 데 몰리나(Tirso de Molina)가 쓴 비극 세비야의 호색가(El burlador de Sevilla)의 주인공 돈 주안(Don Juan)‘이 살던 곳이다. 비제의 카르멘에 등장하는 바람둥이 카르멘의 고향도 이곳 세비야인 것을 보면 문제가 좀 있는 도시이지 싶다. 어쩌면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들이 그런 풍토를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창문만 열면 앞집, 옆집, 아랫집이 다 보이겠기에 하는 말이다. 하여튼 돈 후안은 민간전설에 등장하는 인물로 몰리나의 희극에서 첫 선을 보인 후, 희곡·소설·시 등에서 꾸준히 악당 주인공으로 등장했고,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를 통해서는 큰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돈 주안은 활력, 도도한 자세, 유머 감각 등을 통해 극적 가치를 고조시킨다. 그가 지녔던 소양이 어찌 바람둥이에만 해당되겠는가. 남자들이라면 누구나 지니고 싶은 로망일 것이다.

 

 

 

마리아 루이사 공원(Parque María Luisa)에 이른다. 원래는 산 텔모 궁전(Palacio de San Telmo)의 정원 이었으나 소유주였던 마리아 루이사 공작부인이 1893년 세비야시에 기증하여 세비야시의 소유가 되었고, 세비야시는 1929년의 이베로 아메리칸 박람회 개최를 앞두고 공원을 재단장해 현재의 아름다운 공원으로 만들었단다. 스페인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원 중 하나로 손꼽힌다. 공원에는 연못과 분수, 폭포, 유적 등이 있고 중앙에는 커다란 호수까지 있다는데 스페인광장으로 가는 길은 그중의 일부분을 지나게 된다. 그저 맛보기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공원 곳곳에는 다양한 종의 수목(樹木)들이 즐비하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어마어마하게 큰 저 나무가 아닐까 싶다. 그동안 내가 보아왔던 나무 중에서 가장 크지 않나 싶다. 참고로 세비야를 대표하는 마리아 루이사 공원은 세비야 도심의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시민들로부터 가장 사랑을 받는 휴식처가 된 이유이다.

 

  

 

 

 

공원에는 신대륙발견 기념탑이 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한지 500년이 되었음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탑이란다. 콜럼버스가 타고 떠났던 산타마리아호가 탑의 허리를 지나는데, 배의 양면에는 페르난도와 이사벨 여왕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149283, 핀타호, 니냐호 그리고 산타마리아호로 구성된 세 척의 탐험대는 스페인의 팔로스항을 출발했다. 계속해서 서쪽으로 나아가는 기나긴 항해를 하는 동안, 콜럼버스는 불평과 폭동 등 갖은 고초를 겪은 후에야 같은 해 1012일 육지에 상륙할 수 있었다. 바하마제도의 구아나하니라는 자그만 섬이었다. 콜럼버스는 구세주와 관련지어 이 섬의 이름을 산 살바도르(구세주, 구원자)라 명명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도착한 곳을 인도라 생각하고, 카리브해의 원주민들을 인디오라 불렀다. 그 후 콜럼버스는 12년 동안 총 4차례의 탐험을 했는데 1506년 죽을 때까지 자신이 발견한 곳을 아시아의 인도라고 굳게 믿었다고 한다.

 

 

 

 

 

공원에서 빠져나와 도로를 건너면 에스파냐광장, 즉 스페인광장이다. 그런데 문제는 광장의 생김새이다. 광장이라면 널따란 마당이 나와야 하는데도 3층짜리 건물로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오래된 듯한 고풍스런 건물이다.

 

 

 

 

 

궁금증은 건물을 통과하면서 해소된다. 안으로 들면 널따란 광장이 나타나는 것이다. 에스파냐 광장은 1929년 이베르 아메리카 박람회장으로 사용되기 위해 만들어졌다. 건축가 아니발 곤살레스(Anibal Gonzalez)’의 작품이란다. 그나저나 광장을 둘러싼 건물이 너무 크고 아름다워 광장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궁전 같은 느낌이 든다. 1900년대에 지어졌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섬세하면서도 신비로운 느낌이다. 그래서 여행안내서에 꼭 들러봐야 할 필수코스라고 적어놓은 모양이다.

 

 

 

 

 

극장식 반원 형태의 건물에 둘러싸인 광장은 아줄레주 양식(이슬람의 영향을 받아 채색된 타일로 건물을 장식하는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각 건물을 따라 늘어선 58개의 벤치에는 스페인 각 지역의 지도가 그려져 있어 이채롭다. 또한 스페인 각지의 특성과 역사를 타일에 그려 넣었다. 일로 치면 스페인 역사책인 셈이다. 

 

 

 

 

 

광장을 빙 둘러선 건물과 광장 사이에는 운하가 흐르고 있다. 뱃놀이까지 가능한 운하이다. 그리고 운하에는 네 개의 아치형 다리를 놓아 광장으로 나갈 수 있도록 했다.

 

 

 

 

 

 

 

광장을 거닐다 보면 이 넓고 큰 광장을 에두르고 있는 거대한 건물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니 잘못 표현했다. 좌에서 우로 고개를 돌려야만 전체를 볼 수 있으니 말이다. 무엇에 쓰려고 저렇게 큰 건물을 지었을까? 1929이베로 아메리칸 박람회(Ibero-American Exposition)’를 개최하려고 지었단다. ‘이베로 아메리칸은 라틴아메리카의 후원을 받아 대회를 개최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멀리 마주 보이는 탑이 정면에 운하를 거느리고 의기양양하게 자태를 뽐낸다. 양 옆에 우뚝 서있는 건물은 성당을 닮았다. 하지만 탑이란다. 그래선지 관광객의 입장을 불허하고 있었다.

 

 

 

광장은 한마디로 무지무지하게 넓다. 광장을 둘러싼 건물들은 하나같이 고풍스럽기 그지없다. 한마디로 잘 그린 한 폭의 그림이라 할 수 있다. 다양한 사연을 지닌 고풍의 건물들에 둘러싸인 곳, 외국에서 만나게 되는 광장의 본래 모습이 아닐까 싶다. 외국에서 광장이라 하면 단순히 사람이 모이는 곳이 아니다. 주변의 시설 및 조형물 등과 함께 어우러져 그 지역의 자긍심을 갖게 만든다. 그리하여 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을 매력적으로 끌어들인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떨까? 우리나라라고 해서 광장이 없을 리 없다. 하지만 대부분 단순한 교통광장에 불과하다. 주변에는 아무 것도 없다. 이런 점을 외국에서 만나는 광장과 차이점으로 보면 된다. 짧은 역사 속에서 성장에 급급한 나머지 여유로움을 느끼지 못했던 탓일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스페인광장이라는 이름을 가진 곳은 꽤 많다. 웬만한 도시들마다 하나씩 갖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때문에 앞이나 뒤에 도시의 이름을 붙여서 어디에 있는 스페인광장인지를 구분한다. 이곳 스페인뿐만이 아니고 유럽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문화적 특징이 아닐까 싶다.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곳이 바로 이곳 세비야의 스페인 광장이다. 그 다음은 세르반테스의 동상이 있는 마드리드의 스페인광장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가장 유명한 곳은 스페인보다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스페인광장이다. 17세기에 교황청 스페인대사가 이곳에 본부를 두면서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헵번이 아이스크림을 사먹던 계단으로 유명한 곳이다.

 

 

 

플라멩코 폰이란 단어를 들어본 일이 있을 것이다. 2003년 출시되었던 핸드폰 'LG 싸이언'을 대신하는 낱말인데, 이 제품의 CF에 김태희가 플라멩코를 추는 장면이 나온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당시 그녀가 아름다운 몸매를 맘껏 흔들었던 장소가 바로 이곳 세비야의 스페인광장(Plaza de Espana)’이다. 또한 스페인 광장은 '스타워즈 에피소드 2 클론의 습격'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낮에 시내를 둘러봤다면 밤에는 플라멩코를 관람해야 할 차례이다. 투우와 플라멩코가 있는 정열의 나라가 스페인이고, 스페인 중에서도 이곳 세비야가 플라멩코의 본고장이기 때문이다. 공연을 보러가기 전 저녁식사 때 반주 삼아 와인 한잔 마셔보는 곳도 괜찮을 것 같다. 정열의 춤에 맞춰 어깨춤이라도 따라해 보려면 조금은 얼큰해야 도움이 될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플라멩코를 제대로 감상하고 싶다면 세비야 중심가로 가봐야 한다. 플라멩코를 공연하는 클럽을 따블라오(Tablao)라고 부르는데, 스페인어로 판자를 깔다라는 뜻이란다. 따블라오는 그 이름대로 널빤지로 만든 무대를 갖춘 극장식 레스토랑이다. 세비야 시내에는 8~9군데가 있다. 플라멩코 공연은 보통 오후 8시와 1030분 전후로 2회 공연을 하는데 첫 회 공연은 대개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춤도 쉽고 멜로디도 귀에 쏙 들어오는 구성으로 이뤄져 있다. 세비야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되고 가장 유명한 따블라오는 엘 아레날이라는데 우리는 'El pal acio andaluz'에서 관람을 했다. 자동차로 이동했기 때문에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 지는 물론 모른다. 하지만 공연내용만큼은 엘 아레날에 뒤지지 않았다. 비록 현지가이드의 평이지만 말이다. 공연을 시작하기 전에 알코올(alcohol)이 약간 들어간 음료도 제공된다.

 

 

 

스페인 예술의 기원은 집시문화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집시들은 점술과 말 매매, 연금술 등에 조예가 깊고, 독특한 문화를 이루었지만 유럽 전 지역에서 그랬듯이 스페인에서도 박해받는 존재였다. 집시들은 깊은 슬픔과 고통을 담아 애절한 노래와 춤을 만들었다. 흥겨운 듯 애잔하고 때로는 박력 있으면서도 한을 담은 플라멩코는 이제 스페인을 대표하는 춤이 됐다.

 

 

 

 

 

 

 

 

 

 

 

 

 

세비아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던 호텔인 ‘TRH La Motilla’

시내 중심가에서 자동차로 15분 정도의 거리에 있다. 주거지역에 자리 잡고 있는 이 호텔은 야외수영장은 물론 테니스코트와 대형 테라스까지 갖추고 있다. 현대적으로 지어진 탓인지 발코니까지 갖춘 객실은 깨끗함은 물론 무료 Wi-Fi 및 위성 TV가 제공되고 있었다. 특히 입구에 마련된 비즈니스 사이트가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내 관심은 온통 아침식사에 쏠려있다. 여기서는 과연 계란으로 만든 요리를 먹을 수 있을 지로 말이다. 그런 내 기대를 이 호텔은 저버리지 않았다. 그렇게 고대하던 스크램블은 물론이고 스페인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베이컨까지 곁들일 수 있었으니 이보다 더한 호사 어디 있을까 싶다. 참고로 이 호텔 인근에는 대형 쇼핑 및 레저 센터인 도스 에르마나스 쇼핑센터(Dos Hermanas Shopping Centre)가 자리 잡고 있다. 자투리 시간을 활용한 쇼핑이 가능하다는 얘기이다.

 

 

여행지 : 스페인 및 포르투칼

 

여행일 : ‘15. 11. 12() - 19()

여행지 : 스페인(바로셀로나, 몬세라토, 발렌시아, 그라나다, 미하스, 론다, 세비아, 톨레도, 마드리드), 포르투칼(리스본, 까보다로까, 파티마)

 

 

여행 넷째 날 오후 : 세비야 대성당(Seville Cathedral)

 

특징 : 마드리드에서 남서쪽으로 500km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세비야(Sevilla)는 스페인에서 4번째로 큰 도시다. 이곳 항구는 한 때 스페인과 아메리카 대륙을 잇는 무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하지만 대형 선박의 출입이 가능한 새로운 항구에 밀려 쇠락의 길로 접어들면서 역사적이고 보수적인도시로 명맥을 유지해 왔다. 그럼에도 세비야를 사랑하는 이들이 많은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스페인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투우와 플라멩코의 본고장이 바로 세비야라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여기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세비야대성당(Seville Cathedral)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원래는 이슬람사원의 첨탑이었으나 기독교인들이 개조해 종 28개와 함께 신앙을 상징하는 여성상이 들어선 히랄다탑은 그 특이한 운명으로 인해 스페인에 남아 있는 이슬람 문화의 흔적 중에서도 특히 유명세를 탄다.

 

 

 

가이드가 자 출발합니다.’라고 한 것 같은데 버스는 어느새 세비야(Sevilla) 시내로 들어선다. 생각보다 훨씬 빨리 도착했다. 그 덕분에 늦은 점심을 먹고 론다를 출발했는데도 해가 넘어가려면 아직도 한참 더 남았다. 여행사에서는 그 시간을 활용해 세비야대성당과 에스파냐광장 등 세비야의 주요 관광지는 물론 플라멩코 관람까지 모두 둘러보도록 일정을 짜 놓았다. 오늘도 바쁜 하루가 될 게 분명하다. 세비야는 1492년 이사벨여왕과 페르난도왕이 레콘키스타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다음 무역의 중심지로 성장하게 되었다. 특히 1492팔로스 데 라 프론테라(Palos de la Frontera)’를 출항한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세비야로 돌아오자, 신대륙으로 가는 배의 출항과 무역의 독점권을 차지한 세비야에서 기회를 엿보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 결과 16세기 말경 세비야는 스페인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가 되었다. 그 시기(15199)에 페르디난드 마젤란(Ferdinand Magellan)265명이 탄 5척의 배를 이끌고 출발한 곳도 바로 세비야이다.

 

 

 

 

 

 

과달키비르 강을 따라가던 버스가 커다란 탑 앞에서 선다. 세비야가 자랑하는 또 하나의 명소인 황금의 탑(Torre del Oro)’이란다. 하지만 회색빛으로 우중충한 것이 황금과는 너무 동떨어지게 보인다. 황금빛은 이미 흘러가버린 지 오래인 옛 추억의 한 토막이었던 모양이다. 황금의 탑은 1220년 이곳을 점령하고 있던 이슬람교도들이 건설하였는데, 탑 위를 황금색의 타일로 장식했기 때문에 황금의 탑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황금의 탑은 과달키비르 강을 항해하는 배를 검문하기 위하여 세웠다. 강 건너 편에 세운 8각형의 은의 탑사이에 쇠줄을 치고 통행하는 배를 검문했다는 것이다. 은의 탑은 1755년 대지진에 무너지면서 없어졌다. 은의 탑을 복원해 그때의 광경을 재현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황금의 탑은 현재 해양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페르디난드 마젤란(Ferdinand Magellan)265명이 탄 5척의 배를 이끌고 길고 긴 항해를 출발했던 장소임을 기념하기 위해서란다. 그 시기(15199) 마젤란은 아프리카의 서해안을 따라 내려가다가 항로를 서남쪽으로 돌려 남아메리카의 브라질 해안에 도착했고, 해안을 따라 대서양을 남하하여 태평양으로 들어섰다. 마젤란은 남미대륙의 끝에 있는 해협을 힘겹게 통과하여 태평양에 들어설 수 있었다. 얼마나 힘든 항로였던지 마젤란은 평화로운 모습의 바다에 감명을 받아 태평양(The Pacific Ocean)이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또한 후세의 사람들은 그 험난한 해협에 마젤란의 이름을 붙여 그를 기념하고 있다. 이후 태평양으로 들어선 마젤란은 남태평양에 흩어져 있는 폴리네시아제도, 괌을 경유하여 현재의 필리핀에 도착했다. 나중에 이곳에 식민지를 건설한 스페인의 국왕 펠리페2(Phillip II)의 이름을 따서 붙인 나라 이름이다.

 

 

 

해양박물관이 있다는 탑의 안으로 들어가 보는 것은 사양하고 세비야대성당으로 향한다. 덕분에 황금의 탑의 위도 올라가보지 못했다. ()위에서 바라보는 과달키비르 강과 세비야 시내 풍경이 괜찮다지만 이따가 히랄다탑에서 보면 될 것 같아서이다. 세비야 대성당은 황금의 탑에서 길을 건너면 나온다. 고풍스런 건물들이 즐비한 길이다.

 

 

 

얼마쯤 걸었을까 날렵하게 생긴 말이 이끄는 마차가 보인다. 스페인의 관광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다. 하지만 이곳은 유난히도 더 많은 것 같다. 발밑을 조심하라는 가이드의 경고가 따라 붙을 정도로 말이다. 그녀의 말마따나 길바닥 여기저기에 말똥들이 널려있었다. 그나저나 중세의 마차경험을 해보기 위해서라도 한번쯤 타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마차를 보았다 싶으면 거기가 바로 세비아 대성당(Sevilla Cathedral)’이다. 거대하면서도 화려한 생김새가 성당이라기보다는 왕궁(王宮)에 가깝다. 그것도 눈을 현혹시킬 정도로 호화스런 왕궁이다. 'Magna Hispalensis'라고도 하는 세비야 대성당은 세계에서 가장 큰 고딕양식의 건축물로 로마의 성베드로 성당, 런던의 세인트 폴 사원에 이어 유럽에서 3번째로 큰 교회이다. 히랄다(Giralda)로 알려진 The Almohade Minaret는 르네상스 부흥시기인 1568년에 만들어졌고 대성당은 1401년에 건축이 시작되어 수세기에 거쳐 완공되었다. 고대 모스크의 유적지에 건축되었으며 5개의 본당 회중석과 25개의 예배당을 갖춘 사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적으로 십자가 모형으로 건축되었으며 대성당을 통해 들어갈 수 있는 히랄다탑은 현재 종탑으로 사용되고 있다.

 

 

 

 

 

매표소로 가는 길에 붉은 색 문이 달린 알카사르(alcazar)가 나타난다. 알카사르는 이곳 세비야뿐만 아니라 세고비아와 톨레도 등에도 있다. 같은 이름의 유적이 여러 곳에 있기 때문에 헷갈려하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그저 이슬람 풍의 요새(要塞)’()’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앞에 붙어있는 지역을 보고 어디에 있는 건축물임을 구분하면 된다. 이 외에도 스페인광장이나 마요르광장등의 유사한 경우가 상당히 많으니 미리 알아두면 스페인 여행이 도움이 될 것이다. 아무튼 세비야 알카사르는 이슬람과 가톨릭의 건축양식이 뒤섞인 무데하르양식(Mud jar architecture)이 가장 잘 나타나는 유적 중의 하나이다. 이슬람을 몰아내고 가톨릭 왕이 들어오면서 그들이 남긴 건축물들을 완전히 헐어버리지 않고 개축만 한데서 자연스럽게 이슬람과 가톨릭의 문화가 섞이게 된 것이다. 꼭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이번 여행 패키지에 포함되어 있지 않아서 불가능했다. 거기다 타이트한 스케줄 때문에 개인시간까지 주어지지 않으니 어쩌겠는가. 아쉽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참고로 세비야의 알카사르는 자칫하면 무어인의 궁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왜냐하면 몇몇 개의 방과 안뜰은 알함브라와 매우 비슷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알카사르의 일부분은 무어인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1360년대 이곳을 통치하던 Pedro the Cruel of Castile왕이 알카사르를 재건축하면서 그라나다와 세비야, 코르도바, 발렌시아 등지에서 초기 무어식 건축물을 지었던 노동자들을 고용했는데, 그들의 영향을 많이 받아들인 것이다.

 

 

 

 

알카사르 앞을 지나니 드디어 대성당의 전모가 나타난다. 성당의 오른편에 부속탑으로 우뚝 솟아있는 것이 그 유명한 히랄다탑 (La Giralda)이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이곳은 원래 이슬람 사원이었고 우뚝 솟은 히랄다탑도 원래는 미나레트(Minaret : 모스크의 부속 건물로, 예배 시간 공지를 하는데 사용되는 탑)이었던 것을 지금은 성당의 종탑으로 사용하고 있다. 12세기 말 이슬람교도 알모아데족이 세웠으나 지진으로 파손되었다가 16세기 기독교인들이 전망대와 플라테레스코(Plateresco) 양식의 풍향계가 있는 종루를 설치했다. 이후부터 바람개비라는 뜻의 히랄다(Giralda)’로 불리게 되었단다. 풍향계(Giralda)에서 나온 말이다. 특이하게도 탑에는 계단이 없다. 전해지는 얘기로는 옛날 아랍인들은 말을 타고 탑의 정상까지 올랐다고 한다.

 

 

 

 

 

대성당의 건물을 넣은 인증사진을 찍다가 주변을 둘러본다. ‘tv-N'의 방송프로그램 '꽃보다시리즈의 할배들이 인증사진을 찍느라 부산을 떨었던 장소가 바로 이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들어갔던 식당을 찾아 봤지만 눈에 띄지는 않았다. 하긴 개인시간이 허용되지 않는 패키지여행에서 찾아봤자 뭘 하겠는가.

 

 

 

입장권을 사서 성당에 들면 오렌지나무들이 질서정연하게 도열해 있는 정원(庭園)이 나온다. ‘오렌지 중정(안뜰)’이라는데 이슬람의 흔적이 물씬 풍기는 곳이다. 아무튼 관람을 하느라 지친 다리를 쉬기에 딱 좋은 장소이다.

 

 

 

 

 

이슬람의 흔적이 물씬 풍겨나는 분수(噴水)이다. 중세시대의 유럽 사람들은 물을 싫어해서 목욕도 잘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아랍인들은 물을 좋아해 이런 물과 분수들이 항상 흐르도록 궁전과 사원을 꾸몄다고 한다. 사막에 살던 그들에게 물은 천국을 의미했을 게 틀림없다.

 

 

 

성당 입구의 천정에 코끼리 상아와 악어가 매달려 있다. 리비아 왕이 보내준 것이란다. 지금이야 그리 귀한 것도 아니지만 당시에는 귀물 중의 귀물이었으리라. 하지만 왜 저곳에 매달아 놓았는지는 모르겠다.

 

 

 

 

 

성당의 안으로 들어선다. 성당의 내부는 길이 116m에 넓이가 76m인 직사각형의 구조이다. 그리고 팔로스의 문, 종들의 문, 탄생의 문, 왕의 문, 세례당의 문, 잉태의 문, 왕자의 문, 리카르토의 문 등 총 8개의 문들이 달려있다.

 

 

 

황금의 제단으로도 불리는 주 제단(祭壇)이다. 이슬람문화와 서구문화가 결합된 무데하르 양식(Mud jar architecture)으로 장식되어 있고, 36개의 부분으로 나뉘어 예수의 탄생과 수난, 죽음을 표현하고 있단다. 즉 나무에다 성서에 근거한 수많은 장면들을 섬세하게 조각한 다음 이를 황금으로 덧칠해 두어 화려함을 더했다. 덧칠하는데 사용된 황금 1.5톤은 신대륙에서 가져온 것이란다. 잉카나 마야문명의 유물들을 강탈해 온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목제제단으로는 세계 최대의 규모라니 참조한다.

 

 

 

 

 

 

 

주 제단 앞에는 성가대석이 있다. 그 위는 화려한 파이프오르간(pipeorgan)이 자리 잡고 있다. 1724년에 6000개 이상의 파이프를 사용하여 만든 것이란다. 실로 어마어마한 크기이다. 저렇게 큰 오르간은 과연 어떤 소리를 낼까. 그리고 저렇게 큰 것을 과연 인간이 연주할 수 있을지가 궁금해진다.

 

 

 

성당을 둘러싼 각 방들은 전시관처럼 꾸며 놓았다. ‘세비야 제2미술관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무리요와 고야 등 유명화가들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안을 걷다보면 금줄이 처진 곳이 보인다. 금줄 앞쪽 바닥이 콜럼버스의 둘째 아들인 페르난도의 묘()라고 한다. 그는 아버지 콜럼버스를 따라 탐험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기록을 글로 남겼다고 한다. 그 앞에 스페인 국왕 페르난도3세와 알폰소1세의 등 왕실의 묘가 있으니 참조한다. 

 

 

 

웅장하도록 높게 솟은 기둥위에 아름답게 조각된 천정. 그 주변을 이루는 벽마다 채광을 위해 만들어 놓은 스테인 그라스의 성화들, 구석구석 빈 공간이 없도록 그려진 그림들과 조각품들, 눈에 들어오는 것마다 경이 그 자체이다. 탄성이 절로 나오는 웅장하고 아름답게 치장된 성당이다. 그리고 이런 건축물을 만든 인간의 능력에 찬사를 보내게 된다.

 

 

 

 

 

사람들로 붐비는 것이 보인다. 궁금해서 다가가보니 네 명의 거인들이 관() 하나를 떠받히고 있다. 스페인이 자랑하는 대 탐험가 콜럼버스가 영면(永眠)하고 있는 관이란다. 그리고 네 명의 거인은 당시 스페인을 통치하고 있던 4개의 왕국인 카스티야와 아라곤 그리고 나바라, 레온의 왕들이란다. 그런데 바르게 서있는 앞의 왕들에 비해 뒤에 있는 왕들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앞의 두 왕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을 지지해줬기 때문에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있고, 뒤의 두 왕은 콜럼버스를 지지해주지 않아서 고개를 숙이고 있단다. 또 하나 특이한 점은 관을 바닥이 아닌 공중에다 띄워 놓았다는 점이다. 이에는 사연이 있단다. 우여곡절 끝에 신대륙 탐험의 꿈을 중도에서 접을 수밖에 없었던 콜럼버스는 다시는 스페인 땅을 밟지 않겠다.’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단다. 유언에 따라 아메리카 대륙에 묻혀있던 그의 유해를 수 세기가 지나 스페인으로 데려왔지만 그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관을 땅으로부터 띄어놓았다는 것이다.

 

 

 

 

 

 

 

거울을 통해 올려다본 천정. 화려함과 웅장함을 자랑한다. 눈으로 확인해봐야 그 진가가 나타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고딕양식과 이슬람양식이 합쳐져 화려함을 더하고 있다.

 

 

 

성당은 한마디로 거대하면서도 화려하다. 하지만 외형만 바라보고 다니는 우()는 범하지 말자. 고딕과 신고딕, 르네상스 등 여러 가지 건축양식이 혼재된 종합예술품이나 마찬가지이니 꼼꼼히 살펴볼 일이다. 참고로 세비야 대성당 자리에는 원래 12세기에 지어진 이슬람 사원이 있었다고 한다. 서 고트왕국의 수도였던 세비야가 712년에 지브랄터 해협을 건너온 무어인들에게 정복당해 500년 넘게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는데, 그 당시에 의해 지어진 건축물이다. 13세기 후반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이베리아 반도를 되찾은 기념으로, 1402년에 기존의 이슬람사원을 부수고 새롭게 지은 것이 바로 세비아 대성당이다. 성당이 완공되는 데는 100년이 걸렸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고딕, 신고딕, 르네상스 양식이 모두 혼재되어 있는 종합선물세트 같은 건물이 되었단다.

 

 

 

세비야의 수호신인 성모상이 안치된 왕실 예배당, 무리요의 성화 성모 수태가 있는 회의실, 고야와 수르바란의 그림이 있는 성배실, 무리요의 대표작 산 안토니오의 환상이 그려진 산 안토니오 예배당 등 사원 안은 마치 미술품의 보고라고 할 만큼 유명 작품들이 많다.

 

 

 

 

 

성물(聖物)실에는 금으로 장식된 화려한 성물들이 진열되어 있다. 그림들이 미술관이라는 느낌을 주었다면 이곳은 박물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성물실에 진열된 성물 중에는 예수님이 처형당할 때 쓴 가시 면류관의 한 가시를 안치한 성물도 있단다. 그런데 유럽의 가톨릭국가에 가면 많은 성당들이 저런 형태의 성물들을 마치 경쟁이라도 하려는 듯이 전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히랄다탑 (La Giralda)으로 향한다. 성당 안에서 곧장 오를 수 있으니 일부러 밖으로 나갈 필요는 없다. 98m 높이의 탑은 34개의 오르막길로 이어진다. 그 높이에 미리부터 질리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쉬엄쉬엄 오르다보면 힘든지도 모르게 오를 수 있다. 하긴 붐비는 사람들로 인해 속도를 내려고 해도 낼 수가 없겠지만 말이다. 참고로 히랄다탑의 70m까지는 이슬람사원의 첨탑으로 지어졌을 당시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고, 그 위는 16세기에 추가로 덧붙여졌다고 한다.

 

 

 

빙글빙글 돌아가며 탑 위로 오른다. 창밖으로 나타나는 풍경을 내다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그리고 중간 중간에 전시되어 있는 유물들 또한 잠시의 볼거리로 충분하다. 잠시 후 천정에 매달린 수많은 종()들이 나타난다. 어느새 탑의 꼭대기에 올라선 것이다.

 

 

 

회랑(回廊)으로 된 탑의 꼭대기는 뛰어난 전망대이다. 세비야 구시가지에서 가장 높은 곳이기 때문에 세비야 시내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특히 히랄다 탑에서 바라보는 과달키비르 강변의 석양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성당을 빠져나오는 길에 다시 한 번 히랄다탑이 올려다 보인다.

 

 

 

 

 

 

 

여행지 : 스페인 및 포르투칼

 

여행일 : ‘15. 11. 12() - 19()

여행지 : 스페인(바로셀로나, 몬세라토, 발렌시아, 그라나다, 미하스, 론다, 세비아, 톨레도, 마드리드), 포르투칼(리스본, 까보다로까, 파티마)

 

 

여행 넷째 날 오전 : 절벽 위의 도시, 론다(Ronda)

 

특징 : 오늘 아침에 들렀던 미하스와 마찬가지로 론다(Ronda) 역시 말라가 주에 있는 도시로서 말라가시 서쪽의 론다 산맥에 위치한다. 깊은 엘타호데론다 계곡이 도시가 자리 잡은 두 구릉을 가르고 있는데 계곡으로 과디아로 강의 지류인 그란데 강이 흐른다. 몇 개의 다리가 이 계곡을 가로지르고 있으며 특히 1761년에 건설한 높이 90m의 아치형 구조물이 눈길을 끈다. 이곳은 원래 고대 이베리아인이 거주했던 장소이고 로마 시대에는 아키니포로 알려졌다. 8~15세기에는 무어인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남아 있는 로마 시대 유적과 무어인 유적 가운데 로마식 극장과 전쟁 때 물 봉쇄를 막기 위해 무어인이 만든 도시에서 강에 이르는 지하 계단(1911 복원)이 있다. 무어인들이 통치해오던 것을 1485520일에 로마 가톨릭 군주들인 페르난도와 이사벨라가 정복하여 되찾았다.

 

 

 

미하스에서 론다로 가는 길, 어딘지는 몰라도 산악지역을 지난다. 가이드의 말로는 지름길이라는데, 아슬아슬한 벼랑 위로 길이 나있으니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다. 하지만 좋은 점도 있다. 주변 경관이 마음에 쏙 들 정도로 아름답기 때문이다. 론다로 향하는 길에 펼쳐지는 대평야와 협곡의 경관이 안달루시아 여행의 백미라고 들었는데 이곳을 말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버스는 공용버스정류장에다 관광객들을 내려놓는다. 론다 투어의 구심점인 누에보다리까지는 꽤나 먼 거리인데도 말이다. 시가지 안은 대형버스의 출입을 막아놓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시내를 걷는다는 게 꼭 나쁘지만은 않다. 하얀색 건물 일색인 길거리 풍경이 잠깐의 볼거리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아담하게 지어진 성당도 눈에 띈다. 론다는 구시가지에 있는 산타마리아 라 마요르 성당(lglesia de Santa Maria la Mayor)’이 유명한데, 이곳은 신시가지이다보니 성당의 역사도 그다지 오래된 것 같지는 않다. 하여튼 모든 게 새로운 풍경이다. 이런 재미가 있어서 사람들은 낯선 이국땅을 찾아 떠나는 모양이다.

 

 

 

 

 

 

길을 가다보면 낯선 풍경을 접하게 된다. 모든 건물들이 하나같이 창문의 휘장을 커튼(curtain)이 아닌 셔터(shutter)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 지역만의 특징인데 여름철의 강렬한 햇볕을 차단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란다.

 

 

 

얼마쯤 걸었을까 잘 가꾸어진 공원이 보이는가 싶더니 이내 원형의 건축물이 하나 나타난다. 스페인에서 가장 오랜(1785)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론다의 명물 중 하나인 투우장(플라사 데 토로스 : Plaza de Toros)이다. 투우장의 규모는 비록 작으나 이곳 론다가 스페인 투우의 본고장이며 근대 투우의 창설자인 프란시스코 로메로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는 곳이다. 투우시즌에 간간히 투우경기가 열리는 이곳은 보통 때에는 입장료를 받고 내부 관람이 가능하다.

 

  

 

 

 

투우장 한쪽에는 투우의 역사와 로메로, 론다가 배출해낸 유명한 투우사들을 기념하는 박물관이 있다. 하지만 들어가 보는 것은 생략, 그보다는 누에보의 다리를 구경하는 게 더 급했던 때문이다. 대신 경기장을 주변에 세워진 동상(銅像)과 부조(浮彫)들을 둘러보는 것으로 대신한다. 생김새로 보아 론다에서 배출해낸 유명한 투우사들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투우장 옆에는 투우와 관련된 기념품들을 파는 상점이 있다. 꼭 사지 않아도 되니 한번쯤 들어가 볼 일이다. 볼만한 것들이 제법 많이 진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투우장을 지나 절벽 쪽으로 이동하면 작은 공원과 그 끝에 테라스(terrace)처럼 생긴 전망대가 있다. 용기를 조금만 낸다면 절벽 앞으로 펼쳐진 멋진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건너편에는 까마득한 단애 위에 걸터앉은 호텔 파라도르(Parador de Ronda)가 위태롭고, 그 뒤에는 론다의 구시가지가 펼쳐진다. 보이는 건물마다 너나할 것 없이 절벽에 올라앉아 있다.

 

 

 

 

 

 

 

 

절벽 저 아래로 난 길이 보인다. tv-N의 여행프로그램 꽃보다시리즈의 할배들이 걸었던 길이다. 그들의 눈을 통해 올라다본 협곡을 이루는 양쪽 절벽과 누에보 다리는 장관이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꼭 걸어보고 싶었던 코스였다. 하지만 패키지여행에서 그런 호사는 허용되지 않는다. 일정에 쫒긴 여행사가 걸어서 다녀올 만한 시간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긴 할배들도 차량을 이용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테라스전망대에서 스릴을 즐겼다면 이제는 누에보다리로 이동할 차례이다. 구시가지를 방향으로 절벽을 따라 잠시 걸으면 스페인 정부에서 운영하는 호텔 론다 파라도르(Parador de Ronda)가 나타난다. 벽면에 ‘Paseo de E Hemingway'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소설가 헤밍웨이가 이 건물에 머물면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집필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를 알리기 위한 일종의 홍보문구가 아닐까 싶다. 참고로 파라도르(Parador)는 스페인의 중세 수도원이나 옛 고성, 귀족들이 살았던 저택을 호텔로 개조해 나라에서 직접 운영하는 호텔을 말한다. 스페인에는 약 90여개의 파라도르가 있는데 기본적으로 전망이 좋은 곳에 위치해 있다. 일반 모던한 호텔에 비해서 좀 더 스페인다운 호텔에서 머물러 보고 싶다면 파라도르에서 하루정도 머물러 보는 것도 스페인 여행에 있어 좋은 추억이 될 것이다.

 

 

  

 

 

 

 

 

파라도르에서 바라본 테라스전망대, 천애(天涯)의 절벽 위도 모자라 절벽 밖으로 불쑥 튀어나가기까지 했다. 아까 차마 테라스로 나가지를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던 여자들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

 

 

 

 

 

길은 파라도르를 지나서도 절벽의 위를 고집한다. 하지만 가장자리에 난간을 만들어 놓았으니 위험하지는 않다. 앞을 막는 것이 없으니 거칠 것 없이 시야가 열린다. 건너편 절벽 위에는 하얀색 일색인 구시가지가 펼쳐지고, 협곡을 가로지르는 누에보다리가 코앞으로 다가온다. 한마디로 잘 그린 한 폭의 풍경화가 아닐 수 없다.

 

  

 

 

누에보 다리(스페인어: Puente Nuevo)는 론다의 구시가지(La Ciudad)와 신시가지(Mercadillo)를 잇고 있는 세 개의 다리 중 가장 나중에 만들어진 다리로, 과다레빈 강을 따라 형성된 120m 높이의 협곡을 가로지르고 있다. 다리 건축은 1935펠리페V에 의해 처음 제안되었으며, 8개월 만에 35m 높이의 아치형 다리로 만들어졌으나 무너지면서 5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그로부터 몇 년 뒤인 1751년에 새로이 착공이 이루어져 1793년 다리 완공까지 42년의 기간이 소요되었다. 건축가는 José Martin de Aldehuela이였고, 책임자는 Juan Antonio Díaz Machuca였다. 그는 다리 건축 시에 필요한 거대한 돌들을 들어올리기 위해서 획기적인 기계들을 많이 고안해냈다고 한다. 다리의 높이는 98m이고 타호 협곡(El Tajo Gorge)으로부터 돌을 가져와 축조하였단다.

 

 

 

 

 

누에보다리를 건너기 전 왼편에 광장이 하나 보인다. 에스파냐광장이란다. 누에보다리와 파라도르 근처라서 항상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다. 중간에 동상이 하나 세워져 있지만 누구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도시가 스페인 투우의 양대산맥 중 하나인 것을 감안하면 이 도시가 배출한 유명 투우사의 흉상이 아닐까 싶다.

 

 

 

 

 

마침 점심시간이다. 에스파냐광장의 맞은편 골목으로 들어선다. 이곳도 역시 식당에서 내다 놓은 테이블들이 골목을 통째로 점령하고 있다. 음식 맛은 나름대로 괜찮은 편이었다. 이 골목 어느 식당에 들어가더라도 맛에 실망하는 경우는 없을 것이라는 가이드의 설명으로 미루어보아 현지인이나 관광객들이 자주 찾는 식당가인 모양이다.

 

 

다리를 건넌다. 누에보 다리(Nuevo Puente)는 옛날 아랍인들이 살던 구()시가지(라 시우다드)와 투우장이 있는 신시가지(엘 메르카디요)를 가르고 있는 150미터 깊이의 타호협곡에 걸려 있는 다리이다. 일설에 의하면 구시가지에 살던 사람들이 신시가지에 있는 투우장에 가는 것이 불편해서 놓은 다리라는데 믿거나 말거나이다참고로 이 다리는 건축가 알데우엘라에 얽힌 비극적인 사연도 간직하고 있다. 그가 다리를 완공시킨 뒤, 다리 측면 아치에 자신의 이름과 완공 날짜를 새기려다 협곡으로 떨어져 죽었다는 것이다.

 

 

 

  

 

다리를 건너다보면 협곡의 양쪽이 모두 한눈에 잘 들어온다. 어느 방향 할 것 없이 수천 길의 단애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어김없이 주택들이 올라앉아 있다. 하나같이 아슬아슬한 풍경들이다. 관광객들에게는 좋은 눈요깃거리겠지만 말이다.

 

  

 

 

 

천애(天涯)의 절벽이 보면 볼수록 서슬이 시퍼렇다. 그 위에는 하얀 마을이 누군가 일부러 올려놓기라도 한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아 있다. ‘거대한 절벽이 등에 작은 마을을 지고 있고, 뜨거운 열기에 마을은 더 하얘진다.’는 표현이 구구절절이 가슴에 와 닿는다. 시인 릴케가 조각가 로댕에게 썼다는 편지의 한 구절 말이다.

 

 

 

구시가지 쪽의 벼랑 위로 난 길로 들어선다. 일단 들어서고 나면 멈추는 곳마다 뛰어난 전망대로 변한다. 이곳도 역시 가장자리를 따라 난간을 만들어 놓았으니 마음 놓고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

 

 

 

 

 

 

700m가 넘는 고지대에 위치한 '절벽위 도시' 론다는 스페인에서 가장 극적인 풍경을 가진 곳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안달루시아 특유의 하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푸에블로 블랑코(하얀 마을)'를 이루는데 아찔한 바위산 절벽 위에 펼쳐져 있기 때문에 종종 남프랑스의 절벽도시 '에즈'와 비교되기도 한다.

 

 

 

저만큼 아래에 누에보를 쏙 빼다 닮은 다리 하나가 보인다. 협곡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모두 세 개라고 들었는데 그중 하나인 모양이다.

 

 

 

 

 

누에보다리가 한눈에 잘 들어온다. 자세히 보면 다리 중앙의 아치(arch) 바로 위에 창문이 하나 나있다. 이 방은 감옥부터 바까지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1936~39년에 일어난 스페인 내전 기간 중 양 측의 감옥 및 고문 장소로도 사용되었으며, 포로 중 몇몇은 창문에서 골짜기 바닥으로 던져져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현재 이 방은 다리의 역사와 건축에 대한 전시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볼거리가 없어 관광객들이 잘 찾지 않는 편이란다.

 

 

 

구시가지로 들어선다. 기념품 가게들이 즐비한 거리를 따라 한참을 걷다가 발길을 돌리고 만다. 이런 거리 풍경보다는 론다의 자랑거리인 타호협곡과 누에보다리를 한 번 더 눈에 담는 것이 유익할 것 같아서이다. 하지만 구시가지에 또 다른 볼거리가 많다는 것을 알았다면 이런 어리석은 결정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주어진 시간 때문에 비록 주마간산(走馬看山)으로 둘러볼 수밖에 없었을 테지만 말이다. 여행을 마치고 나서야 알게 되었지만 구시가지에는 론다의 또 다른 볼거리들이 모여 있었다.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몬드라곤 궁전과 자연채광을 위해 천장에 별모양의 구멍이 있는 아랍식목욕탕, 그리고 시대에 따라 다양한 건축 양식이 더해진 산타 마리아 라 마요르 성당 등이다.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이 또한 사전준비가 부족했던 내 탓이니 말이다.

 

 

 

 

 

여행지 : 스페인 및 포르투칼

 

여행일 : ‘15. 11. 12() - 19()

여행지 : 스페인(바로셀로나, 몬세라토, 발렌시아, 그라나다, 미하스, 론다, 세비아, 톨레도, 마드리드), 포르투칼(리스본, 까보다로까, 파티마)

 

 

여행 넷째 날 오전, 스페인의 산토리니, 미하스(Mijas)

 

특징 : 지중해의 아름다운 마을 미하스(스페인어: Mijas)는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자치지역(Comunidad Autónoma de Andalucía)’을 구성하는 8개 주() 가운데 하나인 말라가주(Provincia de Málaga)’의 남부 해안에 위치한 평균 고도가 400m에 이르는 고산(高山) 도시이다. 미하스는 그리스의 산토리니가 연상되는 백색의 마을이다. 푸른 바다를 끼고 산비탈을 따라 겹겹이 들어선 하얀 집들은 한 폭의 그림처럼 평온하게 보인다. 이 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선사시대부터라고 전해진다. 미하스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청동기가 맨 처음 출현한 곳으로 선사 박물관이 이곳에 있다.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것은 그만큼 천혜의 자원이 풍부해 살기 좋은 곳이라는 뜻일 것이다. 산과 바다가 주는 혜택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유럽인들이 선호하는 휴양지로 각광받고 있다. 스페인이나 유럽의 부자들이 여름 별장을 소유하고 있어 마을의 규모에 비해 고급 주택들이 많이 들어서 있다. 그래서인지 미하스의 인구는 50%가 외지인이라고 한다. 로마시대부터 형성된 마을은 하얀 집들이 모여 있는 산비탈 마을 미하스(Mijas)와 해안 마을 카라 미하스(Cala de Mijas)로 구분된다.

 

 

 

버스는 주차장이 아닌 '바위 성모 광장(Plaza Virgen de la Pena)'에다 관광객들을 내려놓는다. 광장의 한쪽에 관광센터가 보인다. 한국어로 된 주요 관광지 안내서를 받을 수 있다지만 아직은 문을 열기 전이다. 절벽도시 론다로 가는 길에 일찍 들른 탓인지 미하스 마을은 아직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움직이는 것들이라고는 상점 문을 열고 있는 주민들과 우리 일행이 다인 듯, 우리처럼 일정에 쫓기는 여행자들 하나 둘이 텅 빈 골목길을 기웃거리고 있을 따름이다. 아니 길가에서 달릴 준비를 하고 있는 미하스의 명물인 마차들을 깜빡 잊을 뻔 했다. 

 

 

 

 

 

미하스의 자랑거리라면 뭐니 뭐니 해도 아름다운 경관이다. 하지만 난 여기에다 당나귀를 하나 더 추가하고 싶다. 사실 내 눈에는 당나귀가 아닌 말()로 보였지만 말이다. 당나귀치고는 너무 날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들 당나귀라고 하니 나도 그에 따르기로 하겠다. 특히 광장 한쪽에다 당나귀의 상()까지 만들어 놓았는데 더 이상 우기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그나저나 마차를 이용한 투어는 미하스만이 갖고 있는 매력이 분명하다. 미하스를 모두 둘러보려면 마차가 필수라고 한다. 마을이 산악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보니 골목이 비좁을 수밖에 없어서 택시는 이용할 수가 없단다. 거기다 경사까지 제법 심해 걷는 데도 한계가 있단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마차’, 다시 말해 말 택시인 셈이다.

 

 

 

 

 

광장의 한쪽 귀퉁이에 있는 성당으로 향한다. 절벽 위에 선 성당을 가운데에 두고 남쪽은 전망대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그 반대편에서 바라보는 조망 또한 뛰어나다. 남쪽과 북쪽의 가운데에는 쉼터를 겸한 자그마한 정원(庭園)을 가꾸어 놓았다.

 

 

 

성당으로 들어가기 전에 북쪽, 그러니까 산기슭 방향의 조망(眺望)부터 즐겨본다. 보이는 건물들이 하나 같이 하얗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본 듯한 풍경이다. 그렇다. 그리스의 산토리니(Santorini)’가 꼭 이런 풍경이었다. 하지만 난 그리스에는 발을 디뎌보지도 못했다. 어찌된 일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TV에서 보았던 것이다. 낯선 땅을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을 설레는 난, TV에서 방영하는 여행프로그램은 거의 놓치지 않고 전부 보는 편이다. 당연히 'tv-N'의 인기 여행 프로그램인 꽃보다시리즈를 놓쳤을 리가 없다. 특히 할배들이 너스레를 떨며 돌아다니던 그리스는 밤잠을 새워가면서라도 꼭 보아야만 했다. 비록 업무 때문이긴 했지만 난 수없이 많은 나라들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그리스만은 지나가는 길에도 들러보지 못한 낯선 땅이었다. 때문에 그리스라는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설렐 수밖에 없었고, 비록 화면이었지만 할배들을 따라 나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조망을 즐기다보면 오른편에 꼬맹이 성당 하나가 눈에 띈다. ‘성모발현 성당이라고도 불리는 '바위 성모 은둔지 성당(Ermita de la Virgen de la Pena)‘이다. 극히 작은 규모이지만 교황 요한바오로 2가 다녀갔을 만큼 신성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 성당에는 2가지의 전설(傳說)이 전해진다. 하나는 예전 무어왕조가 지배하던 이슬람 지배시기를 피해 숨겨놓았던 마리아 상이 1548년 한 수도사에 의해 바위에서 발견되었다는 설()과 다른 하나는 1580년 후앙과 아순시온 베르날 자매가 성을 산책하다가 종탑위의 비둘기를 봤는데 이 비둘기가 성모 마리아상으로 변했다는 설이다. 그래서 그 자리에 성당을 짓고 이름을 '바위의 성모 은둔지'라고 붙였다 한다.

 

 

 

 

 

성당 입구 오른편에 예수상이 세워져 있다. 성당의 규모에 맞춰 제작되었는지 예수상 또한 자그맣다. 그리고 그 위에는 종()도 하나 매달려 있다. 저기서 울려나오는 종소리가 지중해를 건넌 아프리카까지 펴져나가기를 기원하면 세운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종소리 따라 하느님을 말씀도 전파되리라는 것을 믿으면서 말이다.

 

 

 

성당 안에는 작은 제단(祭壇)과 검은 긴 머리의 성녀(聖女)상이 모셔져 있다. 이 마을의 수호성녀인 페냐(Pena)’라고 한다. 성녀는 가슴에 아기천사를 안고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수도사가 발견했다는 성모(聖母)상 인지는 모르겠다. 하여튼 성녀에게는 예쁜 옷을 입혀 놓았다.

 

 

 

성당은 돌을 쌓아 지은 것처럼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가 보면 바위를 쪼아서 만든 흔적이 고스란히 나타난다. 성당 안에는 작은 전시실을 만들어 놓고 여러 가지의 성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교황 요한바오로 2의 사진도 보인다. 이곳을 다녀갔다고 들었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걸어 둔 모양이다.

 

 

성당의 남쪽은 전망대이다. 지중해를 바라볼 수도 있음은 물론 마을의 풍경까지도 한눈에 잘 들어오는 곳이다. 미하스 관광의 백미(白眉)라고 자부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전망대에 서면 시리도록 푸른 지중해가 손에 잡힐 듯이 펼쳐진다. ‘코스타 델 솔(태양의 해안)’과 해변을 따라 형성된 푸엔히올라(Fuengirola)’라는 마을이 선명하게 보인다. 날씨가 좋을 땐 아프리카 대륙까지도 볼 수 있다고 하지만 오늘은 아닌 모양이다.

 

 

 

 

 

 

 

하얀 구름이 둥둥 떠다니는 하늘 아래 산기슭에는 하얀 벽에 붉은 기와를 얹은 아기자기한 주택들이 산기슭을 따라 오밀조밀 모여 있고, 그 옆에는 파란 지중해가 끝도 없이 펼쳐진다. 이 모든 게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며 장관을 이룬다. 마치 동화나라에 들어온 게 아닐까 하는 착각까지 불러일으키게 만든다. 미하스는 특이한 곳이다. 스페인 관광의 일정은 대부분 유적지 투어로 짜여 있다. 이슬람문화와 가톨릭문화가 혼합되어 있는 스페인만의 문화적 특징을 둘러보기 위해서 찾아 온 관광객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문화적 특징이 가장 잘 나타난 유적지에다 부수적으로 가우디의 건축물들과 피카소와 고야 등 스페인이 낳은 세계적 작가들의 작품들을 둘러보는 정도로 일정을 짜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미하스만은 예외이다. 다른 관광지들과는 다르게 유적지를 둘러보는 것이 아닌 자연과 마을 풍광 자체를 즐기는 데 있는 것이다.

 

  

 

전망대 근처에는 기념품 가게도 있다. 진열장에 올려둘 만한 것들도 보이니 그냥 지나치지 말고 들어가 볼 일이다.

 

 

 

 

거리 투어를 시작한다. 왼편 바위벼랑 아래에 이상한 기계가 하나 놓여 있다. 궁금해서 알아보니 일종의 펌프(pump)역할을 하는 기계란다. 기계에 당나귀를 묶은 후, 당나귀를 돌게 해서 아래에 있는 샘물을 끌어 올린다는 것이다. 형식으로 봐서는 우리나라의 연자방아를 닮았지만 용도는 다른 셈이다.

 

 

 

 

 

그 옆에 작은 건물이 하나 보인다. 문이 열려있지 않아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지만 방앗간이란다. 이곳도 역시 당나귀의 힘을 이용해서 동력(動力)을 얻었단다. 안에는 방앗간을 구성하는 기계들과 그 작동 원리를 설명해 놓은 안내판들이 전시되어 있다는데 구경하지는 못하고 아쉬운 발걸음을 옮기고 만다.

 

 

방앗간 옆에 예쁘게 지어진 건물은 카페인 듯, 문을 열려고 준비 중이라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카페의 위는 생김새로 보아 전망대로 활용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곳 또한 올라가보지는 못했다. 올라가는 길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망대에 올라 바라보는 미하스의 풍경은 또 다른 매력일 텐데 아쉽다.

 

 

 

거리로 들어가기 전에 방앗간의 맞은편에 놓인 벤치로 나아간다. 그리고 다른 각도에서 미하스의 풍광을 가슴에 담아본다. 산자락에 들어앉은 집들의 색깔이 모두 하나같다. 하얀 벽에 갈색 지붕들, 안달루시아 지방의 전통적인 주택양식인 푸에블로 블랑코((Pueblo Blanco)란다. 한국말로는 하얀 마을‘, 아무래도 스페인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게 어울리는 것 같다. ,,,북을 가릴 것 없이 유럽에서는 흔하게 갈색지붕들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하얀 벽은 이곳 안달루시아지방 만의 특징이지 않을까 싶다. 햇빛이 강하기로 소문난 지방이다 보니 더위를 피하기 위한 조치가 하나의 과제가 되었을지도 모르겠기에 하는 말이다. 

 

 

골목으로 들어선다. '산 세바스티안(San Sebastian)'거리일 것이다. 푸에블로 블랑코와 고전적 디자인의 간판 그리고 가로등 하나하나가 어우러져 멋지면서도 옛스런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거대한 고대 유적들이 없이도 마을자체를 충분히 운치 있게 만들고 있다.

 

  

 

'산 세바스티안(San Sebastian)' 거리는 미하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이자 맛집과 볼거리로 가득한 곳으로 이름 높다. 특히 형형색색 화려한 무늬의 도자기와 타일 문양 장식품, 엽서, 당나귀 모양의 인형 등이 진열된 기념품가게와 가죽제품 가게가 눈에 띈다. 하지만 우리 일행들은 하나 같이 가죽제품 가게를 기웃거린다. 스페인이 가죽제품으로 유명하다는 소문을 들었던 모양이다.

 

 

 

 

 

깔끔한 하얀 집들과는 대조적으로 거리에는 원색이 화려한 물건들로 활기를 띈 상점들이 늘어서 있다. 생활용품에서 장식품에 이르기까지 종류도 다양하고 원색으로 화려하게 만든 아랍풍의 도자기들은 모양과 문양이 독특하다. 노점에 내걸린 옷이나 스카프들도 유난히 원색이 많았다. 참고로 이곳 미하스는 피카소의 고향인 말라가의 이웃이다. 그래서인지 피카소라고 쓰인 이름표가 달린 가게도 보였다.

 

 

 

 

 

공회당 비슷한 건물에는 주민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몰려있다. 무슨 행사라도 있는 모양이다.

 

 

 

 

 

공공건물 비슷하니 공적인 얘기를 하나 하고 넘어가겠다. 가이드의 말로는 스페인의 경제가 흔들리게 된 원인을 제공한 곳이 바로 이곳이란다. 코스타 델 솔(Costa del Sol), 태양의 해변이라는 말처럼 이곳은 한때 유럽인들의 휴양지가 되었고, 스페인 부의 원천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미국발 경제위기가 유럽으로 확산되면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곳이 되어버렸단다. 즉 스페인의 휴양지에 별장을 가지고 있던 유럽인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스페인의 별장을 처분하기 시작했고, 따라서 스페인의 부동산거품이 꺼진 원인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거품이 빠지면서 스페인의 구매력 또한 추락했을 것이고 말이다.

 

 

 

 

 

 

 

한마디로 아름다운 골목이다. 하얀 벽에 걸려 있는 화분들이 골목길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다. 그것도 꽃이 활짝 핀 화분들로 말이다. 하지만 모든 골목마다 모두 꽃화분을 매달아 둔 것은 아니다. 관광객들이 많이 다닐만한 곳만 조성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꽃길의 중간쯤에서 다시 한 번 마을의 전경이 시야에 잡힌다. 미하스는 파란 하늘 아래 하얗게 물든 '동화 같은 마을'로 알려져 있다. 미하스의 특징은 뭐니 뭐니 해도 산기슭부터 중턱까지 마을 전체에 빼곡하게 들어선 하얀 건물들이다.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의 전통적 주택양식인 '푸에블로 블랑코(Pueblo Blanco)‘인데, 이곳 미하스가 가장 대표적이라고 보면 된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스페인의 산토리니(Santorini)‘라고 일컫는 것을 보면 그 풍경이 얼마나 독특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도시인지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끄트머리 아니 정확히 말해서 골목의 끝은 아니다. 마을길은 계속해서 이어지지만 상점들이 보이지 않기에 끄트머리라는 말을 썼을 따름이다. 하여튼 끄트머리쯤에 이르면 다시 한 번 미하스 마을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도 역시 보이는 것이라곤 온통 하얀 벽에 빨강 지붕을 인 집들뿐이다. 하지만 저런 풍경은 이곳 미하스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햇볕이 뜨거운 안달루시아 지방의 기후에 맞춰 지어진 주택의 전통양식이기 때문에 이 지방에서는 어디서나 만나볼 수 있다. 그런데도 그 많은 마을들을 제치고 미하스라는 이름만이 사람들의 입소문을 탄 데는 사연이 있다. 푸름으로 물든 언덕을 배경으로 빼곡하게 들어찬 하얀 집들이 이 부근을 여행하던 일본인들의 눈길을 끌었던 모양이다. 이후 인상적인 풍경에 반한 그들의 입소문을 통해 일본에 널리 알려졌고, 일본인들이 즐겨 찾는 관광지가 된 것이 그 원인이란다. 다음으로 언제부턴가 우리나라 사람들까지 찾아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얼마 안 있으면 이 마을도 역시 중국인들로 북적이지 않을까 싶다. 그게 그동안 내가 만나왔던 관광지들의 특징이었으니까.

 

 

 

 

 

 

 

에필로그(epilogue), 새로운 것들은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 하나라도 더 봐야만 한다. 언제 다시 찾아볼 수 있을지 모르니까 말이다. 배우 이순재가 스페인 여행 중에 했던 이 아름다운 순간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닿는 이유일 것이다. 뜬금없는 말을 왜 하는지 궁금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미하스에서 꼭 들러봐야 하는 곳을 두 곳이나 놓쳐버렸기에 서운해서 하는 말이다. 미니어처 박물관과 투우장(Praza de Toros)이 바로 그곳이다. 기차 한량 크기 정도로 작지만 박물관에는 플라멩코 의상을 입은 벼룩, 투우사 벼룩, 쌀알에 그린 그림, 적의 머리를 베어 작게 만들었다는 주먹만 한 머리(아마존 부족의 비법으로 만들었다는 허풍 같은) 등 웃음이 절로 나오게 만드는 재밌는 볼거리들이 많고, 투우장은 세계에서 가장 작은 투우장이라고 했다. 얼마나 작은지 과연 투우를 할 수 있을지가 의심스러울 정도라는 것이다. 하지만 난 두 가지 모두 보지 못했다. 아니 그런 시설들이 있는지조차 몰랐다. 여행에 대한 사전준비가 부족했던 탓에 꼭 봐야할 것을 놓쳐버린 것이다. 비록 만시지탄(晩時之歎) 이겠지만 앞으로라도 빈틈없는 준비를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