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북부 유럽 여행

 

여행일 : ‘17. 6. 19() - 7.1()

여행지 : 러시아(모스크바, 페테르부르크), 에스토니아(탈린). 핀란드(헬싱키), 스웨덴(스톡홀름), 노르웨이(오슬로, 베이토스톨렌, 요정의 길, 게이랑에르 피오르드, 뵈이야 빙하, 베르겐, 하당에르 피오르드, 하당에르비다국립공원), 덴마크(코펜하겐)

 

일 정 :

6.20() : 모스크바(붉은광장, 성바실리사원, 굼백화점, 크레믈린궁전, 참새언덕)

6.21() : 페테르부르크(표트르대제 여름별궁, 에르미타쥐 박물관, 성이삭 성당)

6.22() : 탈린(알렉산더 네프스키성당, 시청사 광장, 돔교회, 툼페아 언덕)

6.23() : 헬싱키(원로원광장, 마네르헤임거리, 우스펜스키 사원, 시벨리우스 공원)

6.24() : 스톡홀름(구시가지인 감라스탄, 왕궁, 시청사, 바사박물관)

6.25() : 북유럽 최고의 트래킹코스 베이토스톨렌

6.26() : 요정의 길, 게이랑에르피요르드, 뵈이야 빙하, 피얼란드 빙하박물관

6.27() : 베르겐(어시장, 그리그 생가), 하당에르 피요르드, 하당에르비다국립공원

6.28() : 오슬로(아케르스후스 성, 카를요한거리, 시청사, 비겔란드 조각공원)

6.29() : 코펜하겐(늬하운 운하, 아멜리엔보그성, 시청사, 크리스티안보그성, 게피온 분수)

      

여행 첫째 날 : 크렘린이 전해주는 러시아의 영광, 모스크바(Moskva)

 

특징 : 러시아(Russian Federation) : 191710월 볼셰비키혁명에 의하여 탄생된 사회주의 국가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The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 USSR, 즉 소련)199112월 해체되면서 구성된 독립국가연합(CIS)을 구성한 공화국의 하나로 그 주축이 되는 국가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국가로 면적(17,134,237.3)이 미국이나 중국의 2배나 되며, 수도는 모스크바(Moskva)에 두었다. 인구(142423773, 2015년 현재)는 중국·인도·미국·브라질·인도네시아의 뒤를 이어 세계 6위이며, 국민의 대부분이 러시아인이지만 소수민족 집단도 약 70개에 달한다. 인구의 대부분이 러시아의 서부인 유럽의 거대한 삼각지대에 집중되어 있지만 지난 3세기에 걸쳐서, 특히 20세기 동안 인구가 동쪽의 아시아권(시베리아)으로 계속해서 이동하고 있는 중이다. 종교의 분포는 다양하며 전체인구의 약 82가 러시아정교를, 14가 회교를 각각 신봉하고 있다. 기타 로마가톨릭이 약 1.5, 유대교가 약 1.5, 개신교가 약 0.5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나라와 러시아와의 관계는 180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1860년 한러수호조약이 체결되면서 양국간의 국교(國交)가 최초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와 광복 후 남북한 대치상황으로 인해 두 나라 관계는 사실상 단절된 상태였다. 그러다가 19889월 고르바초프의 크라스노야르스크연설을 계기로 양국 간의 경제협력의사가 맞물리면서 1990930일 국교가 정상화됨에 따라 자원·과학기술·수송·통신 분야에 걸친 각종 협력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였다. 199211월 옐친의 한국방문 시 체결된 한·러 기본조약은 한·러관계가 단순한 관계정상화를 넘어 아시아·태평양지역의 동반자관계로 들어섰음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문화적인 측면을 살펴보자. 사색하기에 적합한 자연환경과 혁명전 사회가 안고 있던 복합성이 정신적 자극제가 되어 문학과 음악에 있어 안톤 체호프‘, ’알렉산드르 푸슈킨‘, ’레프 톨스토이‘, ’표트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와 같은 세계적인 거장이 탄생했다. 그리고 1917년의 ’10월 혁명이 몰고 온 광범위한 사회변혁은 소설가 막심 고리키‘, ’미하일 숄로호프‘,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을 비롯해, 시인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등 유명한 예술가들의 작품 속에 잘 반영되어 있다.

 

모스크바(Moskva), 러시아의 수도(首都)로 세계 최대 도시 가운데 하나이자 국제적으로 중요한 도시이다. 1147년의 연대기에 처음 언급된 이래 러시아 역사의 주요무대로서 자리잡아왔으며, 또한 600년 이상 러시아 정교회의 영적 구심이 되어왔다. 이 연대기에 따르면 그해 44일 수즈달의 공()인 유리 블라디미로비치 돌고루키가 '모스크바'에서 동맹자인 노브고로트 세베르스키 공을 위해 '대연회'를 열었다고 한다. 이 기록에 따라 114744일을 이 시의 전통적 기원 날짜로 여겨오고 있다. 돌고루키 공은 1156년에 처음으로 참호를 두른 요새를 세우고 흙으로 방벽을 쌓은 후 그 위에 목재 벽을 쌓고 방책을 만들었다. 이것이 크렘린의 기원이다. 오늘날 크렘린이라는 단어의 기원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성채''가파름'이라는 뜻의 그리스 단어에서 비롯된 말이라는 주장이 있는 한편, 건축용으로 알맞은 목재를 공급하는 침엽수라는 뜻으로 쓰였던 초기 러시아어 '크렘'(krem)이 그 기원이라는 견해도 있다. 14세기에서 18세기 초까지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다. 1712표트르 1에 의해 새로 건설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수도가 옮겨지기도 했으나, 볼셰비키혁명에 의한 소련의 탄생과 함께 1922년 소련의 새로운 수도가 되었다. 오늘날 모스크바는 러시아의 정치뿐만 아니라 인구, 공업 생산성, 문화, 과학, 교육 등의 면에서도 중심적인 도시이다. 19918월의 쿠데타에 의해 소련 공산당이 무너진 뒤의 독립국가연합에서도 많은 행정기능의 중추역할을 계속 맡고 있으며 러시아 연방 수도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현재 모스크바의 '크렘린과 붉은 광장'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1990년)되어 있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붉은 광장에서 한 블록(bolck) 떨어진 대로변에다 우릴 내려놓는다. 광장으로의 진입이 불가능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모스크바에서 가장 크고 화려하다는 (GUM)백화점의 옆길을 따라 5분쯤 걷자 어마어마하게 큰 광장이 나타난다. 모스크바 시에서 벌이는 모든 의식의 중심지인 붉은 광장(Krasnaya Ploshchad)‘이다. 크렘린(Kremlin) 성벽 동북쪽에 있는 붉은 광장은 15세기부터 상인들이 물건을 사고팔던 장소였다. 또 전쟁을 떠나는 군사들이 행진을 하던 곳이자 때때로 정치범이나 흉악범을 시민들 앞에서 처형하던 곳이기도 했다. 직사각형의 광장 중앙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면 러시아 최초의 백화점 굼을 비롯해 크렘린 성벽과 대로를 따라 늘어선 다양한 건물들을 볼 수 있다. 성곽 아래에 블라디미르 레닌의 미라가 보존되어 있는 레닌 묘가 있고, 그 반대편에는 국영 백화점인 ’GUM‘, 광장의 북단에는 국립 역사박물관이 있으며, 그 반대편 즉 남단에는 러시아 정교회의 성당인 성 바실리 성당과 처형장이었던 로브노예자리가 있다. 참고로 붉은 광장(Krasnaya Ploshchad)‘'Krasnaya(크라스나야)'는 현대 러시아에서 붉은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광장의 이름이 붉은 광장으로 번역되지만 원래는 모든 아름다운 것을 나타내던 슬라브어에서 비롯된 단어이다. 원래의 이름은 아름다운 광장이었다는 얘기이다.

 

 

 

 

광장의 북단에 위치하고 있는 국립역사박물관은 러시아 영토에 살았던 선사 시대 유물부터 로마노프 왕조까지 전 역사에 걸친 다양한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1755년 미하일 로모노소프가 처음 지었을 때만 해도 모스크바대학교의 학과건물이었으나 블라디미르 오시포비치 셔우드가 현재의 건물로 재건축했다고 한다. 박물관은 1872이반 자벨린‘, ’알렉세이 우바로프와 그 외 여러 슬라보필(Slavophil, 슬라브)에 의해 설립되었다고 한다. 주어진 시간이 짧아 내부관람은 생략하기로 한다.

 

 

 

 

 

광장의 남단에 있는 러시아정교회의 성당인 대도(代禱)교회(포크로프스키소보르)‘는 복자 성 바실리우스 대성당(Saint Basil's Cathedral)‘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독특하고 웅장한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이 대성당은 모스크바 대공국의 황제였던 이반 4가 러시아에서 카잔과 아스트라한에 있던 타타르족(몽골족)들을 물리친 것을 기념하며 승리의 중재자인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한 성당이다. 하나로 통일된 러시아의 가치를 드높이고 몽고 타타르와 용감하게 싸우다 희생된 민족 영웅들의 넋을 기리며 러시아 정교로 국민들을 통합시키고 애국심을 북돋기 위해 건축 된 정치적, 종교적 상징물이다. 참고로 이반 4는 러시아를 통일시키고 최초로 짜르(황제)에 오른 인물이지만 폭군으로도 악명이 높다. 하늘로 치솟은 양파모양의 작은 돔들은 그 생김새와 색깔이 독특하다. 한마디로 눈을 뗄 수가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대성당을 장식한 색깔들은 아무렇게나 정한 것이 아니고 신약성경 제일 마지막에 등장하는 요한계시록(또는 묵시록)에서 묘사한 천국문과 성벽의 색깔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1555년 건축을 시작하여 1560년 완공한 대성당은 러시아의 전통적 목조 건축술과 더불어 비잔틴과 서유럽에서 유입된 석조 건축술이 절묘하게 결합된 가장 러시아적이면서 세계적인 건축물이다. 47m짜리 팔각형의 첨탑을 중앙으로 하여 주변에 8개의 양파 모양의 지붕들이 배열되어 있으며 예배당을 형성하는 4개의 다각탑과 그 사이 4개의 원형탑이 솟아 있어 총 9개의 탑이 있다. 어느 방향에서 보더라도 양파모양의 지붕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눈에 담아도 하나도 아프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자태이다. 하긴 이반 4가 완공된 대성당의 모습에 반해 이런 아름다운 건물을 두 번 다시는 못 짓게끔 건축을 담당했던 '바르마''보스토니크'의 눈을 멀게 해버렸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올 정도이니 더 말하면 뭐하겠는가. ’이반 그로즈니란 이름답게 그의 포악하고 잔인한 일면을 드러낸 유명한 일화다.

 

 

바실리 성당 앞에는 커다란 동상이 하나 서있다. 걸작으로 손꼽히는 미닌포자르스키 기념비인데 한 사람은 일어서서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앉아서 위를 올려다보고 있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두 사람은 1612년 폴란드군으로부터 모스크바를 해방시켰다고 해서 영웅으로 불린다. ’쿠즈마 미닌은 니지니 노브고로트의 상인이었고, ’드미트리 포자르스키는 수즈달의 대공(大公)이다. 두 사람은 애국심을 발휘하여 인민 의용군을 조직, 폴란드군을 격퇴 시켰다고 한다. 그들의 영웅적 행동을 기리기 위해 이반 마르토스에 의해 1818년에 완성되었는데, 건립 당시에는 붉은 광장의 중앙에 세워졌으나 열병 및 시위를 위한 공간 확보를 위해 이곳으로 옮겨 놓았단다. 기념비의 앞면에 러시아어로 새겨 넣은 문장이 보인다. '시민 미닌과 포자르스키에게 러시아가 감사의 마음을 전하다.'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단다.

 

 

안으로 들어가 보기 위해서는 250루블짜리 입장권을 사야한다. 현재는 내부를 박물관으로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당의 내부 역시 외관에 못지않게 화려하기 짝이 없다. 정교회의 성당에 들어가 볼 때마다 느낀 점이지만 러시아정교회 성당들은 다른 종파의 성당들에 비해 유독 화려한 색상으로 치장되어 있지 않나 싶다. 아무튼 러시아 정교의 오랜 세월에 쌓여온 수많은 흔적들이 건물 내부에 빼곡히 전시되어 있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전시물 하나하나는 종교의 기록이다. 하지만 예술품으로서의 가치도 대단해 보인다. 시간에 조금 여유가 있다면 이 건물이 지어지기까지의 전 과정과 실제 사용되었던 건축양식, 자제, 그리고 이곳이 성당으로 운영되던 시절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러시아정교회 관련 물품들까지 다양하게 둘러볼 수도 있으니 참조한다.

 

 

이 사원이 처음부터 성 바실리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아니라고 한다. 1588년 탁발 수도사인 바실리가 이곳에 묻히게 되면서 그 이름을 따서 성 바실리 사원이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수도사 바실리는 기이한 기적을 많이 행한 예언자로 덕망이 높아 당시 러시아 민중들의 추앙을 받았던 인물로 모스크바 화재 및 이반4세의 앞날을 예언한 것으로도 유명하고 이반4세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는데 그의 죽음을 슬퍼한 이반4세가 사원의 이름에 수도사의 이름을 붙였다고 전해진다.

 

 

바실리 대성당의 맞은편 크렘린(Kremlin)‘ 성벽에는 스파스카야 탑(구세주 탑)‘이 우뚝 솟아있다. 이 시계탑의 꼭대기의 별은 크렘린 입구의 트로이츠까야 탑과 마찬가지로 시간에 따라 회전을 한다. 특히 이 탑의 시계는 모스크바의 표준시가 되는데,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과 전투시기, 그리고 크렘린 안에 있는 모든 초소에서 보초들의 교대시간에도 울린다고 한다. 특히 매년 1231일이 되면 15분에 한번 씩 시계가 울린다고 한다. 그 소리를 듣기 위해 많은 모스크바 시민들이 붉은 광장으로 모여든다니 우리나라 보신각 타종 때의 진풍경을 이곳에서도 볼 수 있겠다.

 

 

 

대성당의 앞에는 로브노에 메스토라는 원형의 연단(演壇)이 있다. 이 연단은 황제가 전국에 반포하는 포고령을 읽으며 중죄인에 대해 판결을 이곳에서 내렸으며 형을 집행하던 장소라고 한다. 대 농민 반란의 주모자 스테판 라진도 여기에서 처형 되었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죽은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동전을 던지는 등 숨은 관광명소가 되었다. 과거의 무시무시했던 곳이 지금은 여행자들이 의아하게 생각하며 구경할 수 있는 구경거리가 되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irony )라고 할 수 밖에 없다.

 

 

크렘린(Kremlin) 성벽의 앞 한가운데, 아니 붉은 광장의 가운데쯤이라고 해도 되겠다. 그러니까 광장의 가장 중요한 위치에 흡사 피라미드(pyramid)를 연상시키는 레닌 묘(Lenin's Tomb)‘가 들어서 있다. 검붉은 화강암으로 지어진 저 우람한 건축물 안에 방부 처리된 레닌의 시신이 모셔져 있단다. 유리관 속에 넣어 참배객들에게 공개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곳도 직접 들어가 보는 것은 생략하기로 한다. 죽은 시체를 보는 게 썩 마음에 내키지 않아서이다. 아무튼 레닌 묘의 영향을 받아 일부 사회주의국가 등에서 지도자의 시신을 영구보존 처리하여 안치하는 무덤이 만들어지고 있다.

 

 

번쩍번쩍 광을 낸 이 무덤은 어떤 이들에게는 잊혀지는 편이 나은 과거를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또 다른 이들에게는 빛나는 역사와 국가 지도자에게 바치는 불멸의 기념비이다. 그 당사자인 레닌(Vladimir Ilich Lenin)은 러시아 공산당을 창설하여 혁명을 지도했고 소련 최초의 국가원수가 되었다. 3인터내셔널(코민테른)을 창설했으며, 마르크스 이후 가장 위대한 혁명사상가인 동시에 역사상 가장 뛰어난 혁명지도자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17세부터 마르크스의 자본론등 혁명서적을 탐독, 18891월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곧 사회민주노동당을 이끄는 주역이 되었고,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열린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레닌은 1924121일 저녁 고리키에서 뇌동맥경화증으로 사망했다. 자유민주주의를 믿는 우리들에게는 거부감이 들지만 공산주의자들에게 그가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 러시아 혁명으로 차르와 소수 귀족계급에 의해 대다수의 민중들이 탄압을 받던 러시아에 평화와 평등을 주었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론을 처음 실현시켰다는 것과 전 세계 약소국 식민국가들과 유럽 각 국가들에 사회주의, 공산주의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국가 지도자 입장에서 최초로 약소국의 완전한 해방을 주장했고, 적극적으로 민족해방세력을 지원했다는 것은 20세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영향과 의의를 갖는다.

 

 

 

붉은 광장을 사이에 두고 크렘린의 맞은편에는 러시아의 최고급 백화점인 국영백화점(GUM)이 위치하고 있다. 1890년부터 3년에 걸쳐 세워졌으며 러시아혁명 뒤인 1953년에 지금과 같이 개조하였다. 이 백화점은 3층 건물이며 지붕은 유리로 되어 있다. 19세기 말에 건설된 굼 백화점은 모스크바의 또 다른 상징이다. 유리 지붕과 정면부로 이루어진 이 거대한 구조물은 6500평방미터에 달하는 지대에 다리와 보도로 연결된 다섯 개의 평행 통로가 있다. 아라비아의 시장 바자르를 닮았으며 150개의 상점이 들어서 있는 굼 백화점은 백화점이라기보다는 상가에 더 가깝다. 공산주의가 절정기였을 때 굼에서 돈을 쓰는 것은 돈을 버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고 한다. 볼프강 쾨펜(Wolfgang Koppen)은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복도 · 휴게실 · 계단 등지에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긴 행렬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 여기는 분명 사회주의사회이다. 구매자들 대부분 줄을 서 있는 동안 책을 읽는다. 그러나 그들이 무엇을 사려고 줄을 서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건물이 너무 크고 화려하기 때문에 밖에서 바라볼 때에는 백화점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궁전으로 오해할 수 있을 정도로 멋진 외모를 지녔다. 하긴 냉전시대에 소련 공산당의 체제 선전용으로 이용하기 위해 지었다니 더 말해 뭐하겠는가. 아무튼 소련의 붕괴 이후에는 모스크바를 대표하는 백화점으로 변신하여 현재는 수많은 명품 브랜드들이 입점해 있다.

 

 

아치형으로 만든 출입문 건너편에 크렘린레닌 묘가 나타난다. 굼백화점과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굼 백화점은 겉에서 보면 사각형의 거대한 건물처럼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남북으로 길게 4개의 큰 건물을 지어놓고 그 외곽만 이어 붙인 형태이다. 내부는 3층으로 이루어졌는데 가운데 통로는 비어있다. 통로의 위는 전체가 유리로 된 반구형의 돔(dome)으로 만들어져 있어 자연광(自然光)이 그대로 들어온다.

 

 

 

 

 

 

 

 

이층과 삼층은 두 건물 사이의 뚫린 공간을 구름다리로 연결시켜 놓았다. 이 다리의 위가 일류의 포토죤(photo zone)‘이 된다. 특히 삼층의 구름다리는 쉼터의 역할도 겸하는 것 같다. 삼층에 있는 패스트푸드점에서 음식을 사들고 나와 구름다리에 놓여있는 테이블에 앉아서 먹는 것이다. 눈앞에 펼쳐지는 백화점 내부 풍경이 나름대로 볼만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아니 하나 같이 아름답고 럭셔리(luxury)한 브랜드들을 눈에 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광장을 다 둘러보고 난 다음에는 모스크바 강이 흐르는 남단(南端)으로 빠져나온다. 우리를 다음 장소로 태워다 줄 관광버스가 레츠키다리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바실리대성당 옆을 지나게 되는데 이 장소가 대성당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다. 사람들이 몰려있어 포즈 취하기가 약간 불편하긴 하지만 조금 기다리는 한이 있더라고 꼭 카메라에 담아보자. 이왕에 얼굴까지 집어넣는다면 금상첨화일 것이고 말이다. 아무튼 성 바실리성당9개의 첨탑이 각기 다른 높이, 다른 모양, 다른 색깔로 이루어져 있어서 철저하게 비대칭형 구조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직선과 곡선이 아주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500년도 훨씬 전에 이런 천재적인 기하학을 건축에 도입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경이로울 뿐이다. 또한 늘 규칙적인 종교 건축물만 보아 오던 나에게 불균형 속의 아름다움이 어떤 것인지를 느끼게 해준다. 궁금증도 풀어볼 겸해서 성당을 한 바퀴 돌아본다. 여러 다른 각도에서 올려다보기 위해서이다. 성당은 보는 자리마다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다가 오고 있었다. 이래서 16세기 러시아의 집중식 성당 건축의 최고봉이라 일컬어지는 모양이다.

 

 

광장의 남단으로 빠져나오면 모스크바 강이 나온다. 그 위에 놓여있는 다리가 레츠치다리이다. 아래 사진의 다리인데 모스크바 최고의 명소인 붉은 광장과 크렘린 궁전을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는 뷰포인트(viewpoint)라고 한다. 다리에 서면 붉은 광장과 크렘린 궁전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그 모습이 광장에서 보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이다. 하지만 난 거기까지 가보지를 못했다. 다리 근처까지 다 가서 버스를 탔는데도 말이다. 그런 정보를 여행을 마치고 난 다음에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마치 한 장의 그림엽서를 보는 듯한 기분이 느껴진다고까지 극찬을 들을 정도의 경관인데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다. 여행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음부터는 관련 정보를 더 꼼꼼히 챙겨봐야 하겠다.

 

 

 

식당으로 이동하는 중에 중세 유럽 축성(築城) 예술의 본보기라는 크렘린(Kremlin)의 남쪽 성벽이 눈에 들어온다. 끝도 없이 길게 늘어선 거대한 성곽이 시야를 가득 메워버린다. 크렘린 성벽 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성당 탑들의 모습이 아까 광장에서 보았던 것들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요새화된 크렘린은 이 시의 중심이자 역사적 구심점이며 러시아의 힘과 권위의 상징이다. 총안(銃眼)이 뚫린 크렘린의 붉은 벽돌벽과 20개의 탑은 1485-1495년에 이태리 건축예술가들과 건축기사들에 의해 세워졌다. 성벽의 총 길이는 2,235m이다. 잘 구워 낸 큼직큼직한 벽돌(한 개 중량 8)을 쌓아서 만든 성벽은 지면의 기복에 따라서 그 높이가 5m에서 19m에 이르며 벽의 두께는 3.5-6.5m이다. 탑들은 여러 층으로 되어 있고 그 중 가장 높은 것은 구세주탑과 삼위일체탑이다. 1990년 유네스코는 이곳 크렘린과 붉은 광장을 합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한바 있다. 참고로 크렘린(Kremlin)이란 러시아어로 성채(城砦) 또는 성벽(城壁)을 가리키는 일반명사이다. 하지만 대문자로 시작할 때는 모스크바의 크렘린 궁전을 의미한다.

 

 

오후의 일정은 크렘린 탐방이다. 약간의 여유시간을 알뜰하게 쓰고파 알렉산드롭스키 정원을 둘러보기로 한다. 정원은 크렘린 서쪽 성벽 아래로 865m를 뻗어있다.1812년 나폴레옹군의 침공으로 쑥대밭이 된 도심을 재건하면서 알렉산드르 1세가 명해 만든 러시아 첫 공공 공원(公園)이란다. 황제의 이름이 공원 이름으로 고정된 이유이다. 공원 초입에는 무명용사의 묘()’가 있다. '고국을 위해 쓰러지다'라는 문구를 가운데에 두고양 옆에 19411945가 나란히 적혀 있다. ‘2차 세계대전의 시작과 종전 연도일 것이다.이 묘는 2차 대전 때 모스크바 외곽에서 나치군을 물리친 지 25년 된 196612월에 맞춰 완공했다고 한다. 가운데 대리석 묘엔 모스크바 외곽에 있던 전몰장병 묘지에서 이름 모를 병사의 시신 한 구를 옮겨왔는데, 위에 철모와 월계수 가지를 얹은 군기를 조각해 장식했다. 또한 앞쪽 바닥 별 모양 부조의 가운데에선 '꺼지지 않는 불'이 타오른다. 1957년 이래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르스광장에서 타고 있는 불에서 채화해 온 것이란다. 이렇게 무명용사 시신과 꺼지지 않는 불을 모시는 묘는 1921년 파리 개선문 아래에 ‘1차 대전 무명용사 묘를 처음 만든 이래 여러 나라에서 본뜨고 있다고 한다. 묘의 양 옆은 위병들이 지키고 있다. 아쉽게도 한 시간마다 하는 위병 교대식은 구경할 수가 없었다. 발을 일자로 쭉 뻗어 들어 올리는 러시아군 특유의 '구스(오리) 스텝'이 볼만하다는데 그럴만한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원에는 십자가를 치켜들고 있는 러시아 정교회의 성직자 동상도 세워져 있다. 좌대가 높아 금방 눈에 띄는데 17세기 초 모스크바의 총주교(總主敎)였던 게르모겐(1530~1612)’이라고 한다. 게르모겐은 16세기 말부터 볼가강 지역에서 이민족에게 정교회 전도 활동을 펴다 1606년 모스크바 총주교가 됐다. 그는 폴란드가 모스크바를 점령하자 국민해방군을 결성해 폴란드군을 쫓아내자는 국민봉기 서한을 낸다. 이를 계기로 포자르스키 공작과 푸줏간 주인 미닌이 이끄는 국민군이 폴란드군이 있는 크렘린을 포위하게 되었고, 이에 폴란드군은 크렘린에 가둬놓고 있던 게르모겐에게 국민군 해산을 촉구하는 성명서에 서명하라고 강요하지만 게르모겐은 끝내 거부했고 폴란드군은 그를 죽여 버린다. 1612년 폴란드군이 모스크바에서 쫓겨났음은 물론이다. 게르모겐은 순교하기 앞서 다음 러시아 차르(황제)로 로마노프 가문의 미하일을 천거했다. 그때부터 러시아혁명까지 300년 넘게 러시아를 통치한 로마노프 왕조가 출발하게 된다. 게로모겐의 국민적 영향력과 그에 대한 존경이 그만큼 컸다는 증거일 것이다.

 

 

공원을 둘러봤으니 이젠 크렘린(Kremlin)’의 안으로 들어가 볼 차례이다. 출입구는 서쪽 성벽 중앙에 있는 트로이츠카야 탑이다. 높이가 80m로 스무 개의 성벽 탑 가운데 가장 높은데 15세기 말 이탈리아에서 초빙해 온 건축가 알로이시오 다 밀라노가 설계했다. 이후 여러 차례 이름을 바꿔 오다가 1658년 크렘린 안에 있는 성삼위 수도원 이름을 따 트로이츠키야(트리니티)’라고 부르게 됐다고 전해진다. 첨탑 위에는 소비에트의 상징인 왕별 '루비 스타'가 올라서 있다. 이 탑 아래로 난 문이 해자를 건너 크렘린으로 들어가는 출입구 구실을 하고 있다. 참고로 크렘린(Kremlin)은 모스크바의 중심에 위치한 건축 예술의 기념비로서, 러시아의 심장이자 러시아의 위대함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배들이 운행하는 두 개의 강, 즉 모스크바 강과 녜글린나야강이 서로 만나는 지점인 보로비쯔끼 언덕에 위치하는데, 이곳은 모스크바에서 가장 역사 깊은 지역으로 11세기에 벌써 이곳에는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고 1147년에는 이 지역이 최초로 연대기에 기록된다. 크렘린은 수도인 모스크바가 성장해 감에 따라,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문화적 중심지로서 발전해 가게 된다. 17세기에 대폭적으로 진행된 건축 활동에 힘입어 크렘린은 형태가 변했는데, 바로 오늘날 우리가 보아 눈에 익은 그 모습을 띠게 된다.

 

 

크렘린 안에서 뒤돌아본 트로이츠카야 탑’, 사진 왼편에 보이는 하얀색의 사각형 건물은 1961년에 지어진 콘서트홀이다. 음악회나 발레 등의 연주회가 자주 열린다고 하니 시간이 있을 경우에는 관람해볼 만도 하겠다. 물론 입장료를 물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이 콘서트홀은 크렘린 대회궁전으로도 불리니 참조한다.

 

 

 

콘서트홀의 맞은편에는 궁전 무기고(arsenal)가 있다. 하지만 관광객들의 관람은 허용되지 않는가 보다.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도 보이지 않을뿐더러 가이드 또한 그쪽에는 고개도 돌리지 않는다. 투어를 마치고 나올 때 건물주위에 진열해 놓은 대포에 대한 설명은 간단히 해주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입장료를 또 내고 들어가야 하는 무기고 및 다이아몬드 박물관과는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할 일이다. 궁금증을 떨치지 못하고 일단은 건물 가까이 다가가 본다. 제지하는 사람이 없는 걸로 보아 바깥으로 접근하는 것은 허용하고 있는가 보다. 병기고의 주위에는 엄청나게 많은 숫자의 대포들을 전시해놓고 있다. 러시아를 침공했던 나폴레옹군이 버리고 간 대포들이란다.

 

 

 

다음에 보이는 노란색 건물은 원로원 건물이다. 이등변 삼각형으로 된 건물로 1917년 혁명 이후 모스크바로 수도를 옮기면서 소비에트 연방 정부 건물로 사용되었는데, 레닌도 이곳에서 1918~1922년까지 통치를 했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이 건물을 대통령궁이라고도 하는데 어떤 게 맞는지는 모르겠다.

 

 

조금 더 걸어 들어가면 소보르나야 광장에 이른다. 광장의 끝머리 쪽에 위치한 황금색의 자잘한 돔이 가득한 건물은 성모영보성당(Church of the Annunciation, 수태고지 교회)’이다. 이는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잉태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는다.‘는 뜻이다. 그 소식은 가브리엘 천사가 전해주었겠지만 그냥 수태고지(受胎告知)‘ 쯤으로 알아두고 넘어가자. 러시아인들은 이 성당을 블리고베시첸스키성당이라 부른다. 성모영보성당의 왼편에 보이는 건물은 아르항겔리스키 성당이다. ’블리고베시첸스키성당은 다른 교회에 비해 러시아 색채가 강하며 이콘화와 요한묵시록을 소재로 한 프레스코화로 유명하다. 참고로 블라고베시첸스키성당 뒤에 보이는 건물은 황제가 거주하던 크렘린대궁전이다. 이 궁전은 1812년 나폴레옹의 침공 때 소실된 후 1838~1849년 재건되었다. 700여 객실은 2만여 개의 촛대로 장식돼 있으며 가구·샹들리에·융단·회화·조각 등의 걸작이 전시되어 있어 파리 루브르박물관의 호화로움에 떨어지지 않는다. 1934년 개축 때에는 3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소련최고회의장(현 러시아국회의사당)과 중요한 방 몇 개가 만들어졌다. 그 방 중 가장 화려한 곳은 게오르기 훈장의 방이다.

 

 

크렘린을 상징하는 성당으로는 황금색 지붕이 인상적인 우스펜스키(Cathedral of the Dormition) 대성당을 꼽을 수 있다. 우리말로는 성모 승천 대성당으로 불리는데, 아치 모양으로 만들어진 입구 위쪽에 그려진 성화(聖畫)가 일품인 성당이다. 문의 맨 위에는 마리아가 아기예수님을 안고 있는 그림을 그려 넣었다. 1479년에 완공되었고, 1547년부터 러시아황제들의 대관식을 비롯한 국가의 주요 행사장으로 사용되어 오는 등 러시아 정교회를 이끄는 핵심적인 장소이다. 훗날 러시아의 수도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긴 뒤에도 황제의 대관식만큼은 이곳에서 거행되었다고 한다. 우스펜스키 대성당은 소박한 겉모습과는 달리 실내는 매우 아름다운 성화로 꾸며져 있다. 성당 안에는 성모 마리아와 예수, 12사도 등 성경 내용을 담은 성화로 가득하다.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러시아의 대표적인 종교 화가인 디오니시의 작품이란다.

 

 

크렘린에서 권력의 최고 상징은 2단으로 된 높이 81미터의 이반대제(Ivan Veliki)의 종루(鐘樓)’이다. 1505년 건축이 시작되어 1508년 완공되었다. 당시 모스크바에는 이 종루보다 높은 건물이 없었는데 그것은 종루보다 더 높은 건물을 세울 수 없도록 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이 종루는 수차례 화재와 재난을 견뎠는데 1812년 나폴레옹의 침공 당시 프랑스군의 포격으로 인접한 건물 두 채가 무너졌을 때도 피해를 입지 않았단다. 참고로 영화 러브 오브 시베리아에서 사관생도들의 임직식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서 촬영되었다고 한다.

 

 

위에서 얘기했듯이 블리고베시첸스키 성당의 왼편에 보이는 성당은 역대 모스크바의 공후(公侯)와 러시아 황제들의 시신이 잠들어 있는 아르항겔리스키 성당(Church of the Archangel)’이다. 러시아 정교회를 수호한다고 전해지는 대천사 미카엘을 모신다고 해서 천사장 교회(Church of the Archangel)’라고도 불리니 참조한다. 이탈리아 출신인 알레비즈 주니어가 설계한 건물로서 1505-1508년에 지어졌는데, 황금색 돔 하나를 가운데에 두고 은색 돔 네 개가 사방에서 감싸고 있는 형태의 지붕을 하고 있다. 그가 건설한 아르항겔스키 사원의 다섯 머리와 다섯 앱스는 우스펜스키 사원으로부터 유래했지만 사원의 내부 공간에 있어서는 오히려 러시아의 전통적인 정교 건물과 유사하단다. 그는 건축가라기보다는 장식가에 가까웠는데 알레비즈의 이러한 재능은 사원의 외벽장식에서 두드러지게 표현되었다.

 

 

이반 대제의 종탑앞에는 거대한 종() 하나가 전시되어 있다. ‘황제(차르)의 종이라 불리는 이 종은 1735이반 모토린미하일부자(父子)에 의해 만들어졌다. 무게는 약 200톤 정도이고, 종의 직경은 6.6m, 높이는 6.14m로 세계 최대의 종이다. 1836년 지금의 자리에 설치되었는데 아직까지 이 종의 소리를 들은 사람은 없다고 한다. 러시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촬영 장소 중 하나로 꼽히는 이유이다. 이 종은 주조할 당시 화재가 발생했는데 누군가가 불을 끄기 위해 물을 뿌리는 바람에 종에 금이 가서 일부분이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 그로부터 한 세기 뒤 당시의 참사를 되새기기 위해 종을 받침대 위에 얹어놓았다. 깨어진 구멍이 그대로 나 있는 채로 말이다.

 

 

 

 

 

‘12사도 사원옆에도 차르의 대포라 불리는 볼거리가 하나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대포로 1586안드레이 체호브이에 의해 건조된 것이다. 청동으로 만든 이 대포의 무게는 약 40톤 정도이고 길이는 5.34m, 구경은 890이다. 처음 대포는 스파스카야 망루 근처에 방어용으로 배치되었으나 18세기에 크렘린 안으로 옮겨졌다. 이 대포 역시 한 번도 발사된 적이 없다고 한다. 불운의 상징인 셈이다. 앞에 놓여 있는 포탄은 당연히 장식용이다.

 

 

공항으로 이동하기 전에 잠깐의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서 참새언덕(Vorobyovy Gory)’에 들르기로 한다. 모스크바 강기슭에 있는 언덕인데 모스크바를 내려다볼 수 있는 뛰어난 전망대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참새 언덕(Vorobyovy Gory)은 소련 시절(1935년부터 1999년까지)'레닌 언덕'이라고 이름이 바뀌어져 불러졌었다. 참고로 보로비요비 고리(Vorobyovy Gory)’는 영어로 'Sparrow Hill(참새 언덕)'라고 번역된다. 러시아어로 '고리'는 원래 ''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 산은 한국인 입장에서 산이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하기 짝이 없는 높이인데, 모스크바가 워낙 평평하다 보니 이 정도도 산이라고 불리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요즘은 아예 언덕으로 굳어졌다.

 

 

모스크바 강가에 위치한 참새언덕은 그 경치가 빼어나 예전부터 모스크바 시민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알렉산드르 1세는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을 격퇴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이곳에 대성당을 지으려고 했으나 지반이 불안정하여 무산됐다고 한다. 대신 그의 후계자인 니콜라이 1세가 크렘린 근처에 대성당을 짓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바로 구세주 대성당이란다.

 

 

언덕 위에 올라서면 모스크바 전경을 둘러볼 수 있다. 모스크바에서 높은 곳으로 꼽히긴 하지만 해발고도는 겨우 200m에 불과하다. 그러니 보이면 얼마나 보이겠는가. 그나마 이곳에서 담는 모스크바의 전경이 가장 뛰어나기에 사람들이 몰려올 것이다. 아무튼 언덕에서 사진을 찍으면 건너에 있는 루즈니키 경기장은 물론이고 모스크바의 높은 건물들이 카메라에 잘 들어온다.

 

 

 

 

시가지의 반대편에는 러시아는 물론 옛 공산권 최고의 대학인 모스크바 국립대학교가 위치하고 있다. 1755125일 설립될 당시에는 붉은 광장에 있었다. 방사형 도시 모스크바의 심장부에 위치한 것만 봐도, 출범 당시부터 러시아를 대표하는 위상을 지녔었다는 것을 쉽게 눈치 챌 수 있다. 처음에는 철학, 법학, 의학 3개 학부만 있는 귀족 출신 위주의 학교였으나,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부터는 프롤레타리아와 농민 자녀에 대해서도 입학을 허가하였다. 2차 세계대전을 거쳐 소련이 양대 초강대국으로 부상하면서 학교의 위상도 올라가, 당시 공산주의 국가들의 고위층 자녀들은 모스크바 국립대학교로 유학하는 것이 정석 코스로 굳어질 정도였다. 1990년 한소수교 이후에는 한국인 유학생도 상당히 많다고 한다. 다만 모든 과정이 러시아어로 진행되므로 유학 준비가 힘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룻밤을 머물렀던 이즈말로브 알파호텔(IZMAYLOVO ALFA HOTEL)’, 전체적으로 시설이 깔끔할 뿐만 아니라 방도 널찍한 편이다. 욕실도 필요한 일회용품은 대부분 다 비치되어 있다. 특히 각층에 냉온정수기가 비치된 것은 최고의 장점이 아닐까 싶다. 너도나도 컵라면을 챙겨들고 나오는 것이 그 증거일 것이다. 아무튼 10일을 훌쩍 넘겨버리는 이번 여행에서 가장 뛰어난 서비스를 제공받았지 않나 싶다.

 

 

창문을 열면 모스크바 시가지가 한눈에 잘 들어온다. 끝없이 펼쳐지는 푸른 숲 너머로 고층빌딩들이 쏙쏙 솟아오른 모습이다. 하지만 산이라곤 일절 눈에 띄지 않는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이 모두이다. 러시아는 역시 광활한 평야지대이다. 우리에겐 낯선 풍경 그 자체이다.

 

 

 

에필로그(epilogue), 모스크바의 지도를 펼쳐보면 대략 3각 형태를 이루는 크렘린과 그곳 주변의 직4각형 모양의 키타이고로트 및 이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동심원들과 방사상으로 뻗어나가는 선들이 동심원들을 이루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모스크바 강이 시가지 사이를 북서-남서쪽으로 굽이쳐 흐른다. 이런 동심원과 방사상 구조는 이 시가 성장해온 역사적 단계를 나타내며 오늘날까지 뚜렷이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요새의 성벽들을 허물고 그 자리에 만든 불바르노에 환상도로와 사도보예 환상도로, 그리고 더 큰 원을 그리며 있는 모스크바 소()환상철도, 모스크바 환상도로 등은 이 시가 계속해서 확대되어왔음을 보여준다. 1960년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는 모스크바 순환도로가 이 시의 행정적 경계선을 이루었으나 그후로 도로 건너편에 있던 몇몇 대규모 그린벨트 지역이 이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여행지 : 두바이, 스위스, 이탈리아

 

여행일 : ‘16. 3. 12() - 20()

일 정 :

3.13() : 두바이

3.14() : 스위스(루체른)

3.15()-19() : 이탈리아(밀라노, 피렌체, 로마, 소렌토, 폼페이, 나폴리, 베네치아, 볼로냐)

 

여행 일곱째 날 : 현자들의 도시, 볼로냐(Bologna)

 

특징 : 이탈리아 북부 포(Po)평원과 아펜니노(Appennino)산맥 사이에 위치, 에밀리아 로마나(Emilia Romagna)주의 주도(州都), 인구기준으로 이탈리아에서 7번째로 큰 도시이며 로마시대부터 있는 에밀리아 가도에 위치하고 있다. 2000년에는 유럽의 문화수도로 지정된바 있다. 도시의 기원은 로마시대 이전이며, 6세기에 비잔틴의 지배를 받았으나 12세기에는 강력한 자치도시가 되었다. 1249년에 프리드리히 2세를 격파하여 더욱 강대해졌다. 그후 장기간의 내란 끝에 1506년부터는 교황령()이 되었으며, 나폴레옹전쟁 때를 제외하고는 이탈리아 통일 때까지 교황령으로서 평화를 누렸다. 중세 이래로 유럽의 학문과 예술의 중심지로서 유명하였으며, 11세기에 창설된 볼로냐대학은 법학의 볼로냐파와 함께 널리 알려졌다. 17세기에는 회화(繪畵)에서 볼로냐파가 크게 활약하였다. 아케이드가 있는 거리·시청사·궁전 등이 남아 있어 중세를 회상케 한다. 풍요한 농업지대에 위치하여 상공업의 중심을 이루었으며, 공업으로는 기계·자동차 제조·식료품가공 등이 활발하다.

 

 

 

버스는 우릴 대로변에다 내려놓는다. 구시가지로의 차량진입이 제한되고 있기 때문이란다. 이탈리아는 ZTL(Zona Traffico Limitato)이라고 하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우리나라 말로 하면 차량 출입 제한지역인데, 유적들을 보호하기 위해 차량의 출입을 통제하는 제도이다. 때문에 대부분의 볼거리들은 모두 ZTL 안에 들어 있다고 보면 된다.

 

 

 

 

 

 

옛 건물들이 즐비한 골목으로 들어선다. 볼로냐의 중심인 마죠레 광장(Piazza Maggiore)’으로 가는 길이다. 누군가 그랬다 이탈리아의 참 멋과 맛을 보기 위해서는 볼로냐에 가야한다라고. 이는 사람들의 성향은 물론이고, 음식 또한 이탈리아를 나타내기에 충분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 선입견 때문인지는 몰라도 볼로냐는 처음부터 내 마음에 쏙 든다. 우선 높은 건물들이 없어서 좋다. 거기다 눈에 보이는 건물마다 하나 같이 고색창연(古色蒼然)하다. 옛 냄새가 물신 풍기는 것이다. 그리고 때지어 몰려다는 관광객들도 보이지 않는다. 동양인들도 우리가 전부임은 물론이다. 조금은 귀한 대접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아직 구시가지는 아닌 모양이다. 볼로냐의 특징 중 하나라는 회랑(回廊)이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볼로냐의 모든 건물들은 회랑을 통해 외부 세계와 연결된다고 한다. 중세에는 건물을 지을 때 의무적으로 회랑을 만들도록 규정함으로써, 사유지의 일부 공간을 공적인 장소로 제공하여 모든 시민들이 공유하도록 했다고 전해진다.

 

 

각 건물마다 다양한 양식으로 만들어진 회랑의 효용성은 많다. 사람들이 길을 가면서 눈이나 비를 피하는 데도 안성맞춤이며, 여름에는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 주고, 겨울에는 차가운 바람을 어느 정도 막아 주기도 한다. 또한 커피나 포도주를 한 잔 마시면서 담소하기에도 좋은 공간이다. 볼로냐 사람들이 아끼고 사랑하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이름 모를 성당도 보인다. 붉은 색상의 외관이 지어진지 꽤나 오래되었나 보다. 볼로냐는 세 가지 별명을 갖고 있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빨간 도시 볼로냐 (Bologna la rossa)’이다. 르네상스나 바로크 등 건축양식은 다양하지만 도시가 전체적으로 붉은 색을 띠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어떤 이는 이 도시가 좌파성향이 강한 이유로 도시의 색상을 들기도 하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다른 하나는 현자들의 도시 볼로냐(Bologna la dotta)’이다. 프랑스의 파리에 있는 소르본(Sorbonne)과 함께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볼로냐대학이 있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맨 마지막은 뚱보들의 도시 볼로냐(Bologna la grassa)’이다. 비옥한 포(Po)평원의 농산물(고기, 치즈, 와인)로 만들어 온 풍부한 음식문화가 미식(美食)의 나라 이탈리아 내에서도 독특하기로 정평이 나있기 때문이란다.

 

 

널따란 주차장이 보인다. 이곳 볼로냐는 ZTL(Zona Traffico Limitato), 우리나라 말로는 차량 출입 제한지역을 운영하기 있다고 했는데, 이후부터는 차량의 통행을 제한하나 보다.

 

 

 

 

길을 가다보면 식당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그러고 보니 이곳 블로냐는 먹거리로 유명한 고장이다. ‘살찐도시 볼로냐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말이다. 예로부터 볼로냐 사람들은 다양한 먹거리를 즐기는 식도락가들이었다고 한다. 살찐 미식가들이 많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살기 좋은 도시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왕에 볼로냐에 왔다면 라구(Tagliatelle al lage. 볼로냐 스파게티)나 모르타델리(mortadella, 볼로냐 소시지) 정도는 꼭 먹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10여분 쯤 걸었을까 널따란 광장이 나타난다. 볼로냐의 중심인 마죠레 광장(Piazza Maggiore)이다. 13세기 중엽에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현재 시청 건물로 쓰이고 있는 꼬뮤날레성이 1287년에 지어졌으니 광장이 만들어진 때부터 볼로냐의 중심이었던 셈이다. 예전에는 시민들을 위한 시장이 열리던 곳이었으며, 특히 여름에는 이 곳에 야외무대가 개설되어 음악회 등이 열린다. 또한 광장에는 볼로냐를 대표하는 건축물들이 모두 모여 있다. 산 페트로니오 성당(Basilica di San Petronio)과 아쿠르시오 궁전(Palazzo d’Accursio), 포데스타 궁전(Palazzo del Podesta), 엔조 황제의 건물(Palazzo Re Enzo), 반치 성(Palazzo dei Banchi) 등이다.

 

 

광장에 들어서면 독특한 형상의 분수(噴水)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잠블로냐(Giambologna)가 완성시킨 넵튠분수(Fontana del Nettuno)’이다. 분수의 중앙에는 바다의 신 넵튠(포세이돈)이 창을 들고 서 있고, 그 아래로 네 귀퉁이마다 인어가 젖을 짜고 있는 형태이다. 아쉽게도 분수는 물을 내뿜지 못하고 있다. 이 지방에 가뭄이라도 들었나보다. 그 덕분에 난 구경거리 하나를 놓쳐버렸다. 분수가 정상적으로 작동이 되었더라면 인어가 가슴으로 물을 내뿜는 광경을 볼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리고 오래전 브뤼셀(Brussels)오줌싸개 소녀(Jeanneke Pis)’ 동상 앞에서 웃다가 그만두었던 나머지를 마저 웃어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광장의 정면에 성 페트로니오(Petronio) 성당이 있다. 그런데 그 외관(外觀) 어쩐지 부자연스럽다. 아랫부분은 웅장한 규모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는데, 그 위는 붉은 색 벽돌들을 대충 쌓아놓은 형상이다. 물론 거기에는 이유가 있단다. 14세기 말에 공사가 시작된 이 성당은 자유 도시 볼로냐를 상징하고자 하였고, 이후 공사가 진행되면서 그 규모는 더욱 확장될 계획이었단다. 1514년의 설계도에 의하면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보다 더 커다란 규모로, 그야말로 세계 최대의 성당으로 건축될 예정이었다는 것이다. 그러자 교황 피우스 6가 더 이상의 확장을 금지시켰고, 결국 어중간한 형태로 마무리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길이 132m, 57m의 이 성당은 영원한 미완성 작품으로 남게 되었단다. 참고로 성당은 죠반니 다 모데나, 아미코 아스펠티니, 로렌쵸 코스타, 프란체스코 화란챠의 회화를 수장하고 있으며, 2대의 오르간역시 1475년의 것으로 이탈리아의 오래된 귀중품 중의 하나이다. 성당의 오른편 건물은 1381년에 지어진 노타이 궁전(Palazzo dei Notai)이다. 작고 우아한 모습이다.

 

 

 

대성당의 좌측에 보이는 건물은 볼로냐대학(Università di Bologna)의 옛() 건물이다. 지금은 시립도서관으로 쓰이고 있다고 한다. 수도원의 대강당에서 시작한 볼로냐 대학은 1088년에 설립된 유럽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대학이다. 아니 세계 최초의 대학이다. 중세 시대, 기독교 진영의 많은 유럽 지식인들을 끌어 모았던 유럽의 지적활동의 중심지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따라서 13세기부터 15세기 사이의 많은 예술작품과 문서들, 그리고 유명 중세 재판관들의 무덤들이 있다. 이들은 중세 교육기관으로써의 유명세를 더해주는 볼로냐 대학교의 위대한 문화적 자산들이다. 대학은 스투디움(Studium)이라고 불리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는데, 이는 선생이 각각의 학생들에게서 교육료를 받아 교육하는 시스템이었다. 이곳에서 수학한 유명한 인물들로는 신곡을 쓴 단테, 페트라르카, 토머스 베켓, 교황 니콜라오 5,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 등이 있다. 최근의 역사에서는 생물학적 전기를 발견한 루이지 갈바니, 무선 통신의 선구자 굴리엘모 마르코니 등이 있다. 대학은 현재 23개의 학부와 68개의 학과, 그리고 93개의 도서관들로 편제(編制)되어 있는데, 아직까지도 이탈리아에서 가장 존경받고 다이나믹한 교육관으로 간주된다고 한다.

 

 

 

광장의 오른편에는 코뮤날레 성(Palazzo d'Accursio o Comunale)이 있다. 이 성의 주인이었던 Accursio 가족이 살았던 건물인데, 13세기 이후 계속 개축되었기 때문에 각 시대의 건축 양식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건축물이다. 정문 위에는 볼로냐 출신의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의 동상이 있다. 그레고리우스 13세는 이전에 사용하던 율리우스력을 개량하여 그레고리력을 만든 사람이다. 문 왼쪽에는 테라코타로 만든 성모자상도 보인다. 1200년부터 시의회 의사당으로 사용되었는데 현재는 시청과 미술관이 들어서 있다.

 

 

 

포데스타 궁전(Palazzo del podesta), 1485년 아리스토텔레 피오라반니의 설계로 착공되었는데,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임명한 도시의 장관이 머무는 곳이었다고 한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오리지널 파사드(Façade)가 남아있는 유일한 건물로 중앙에 있는 탑이 땅에 세워지지 않고, 둥근 천정의 칼럼 위에 세워진 것이 특징이란다. 현재는 그 용도를 달리해 가게와 사무실로 쓰이고 있다. 1층에는 카페가 있어 마조레 광장을 바라보기에 좋다.

 

 

엔초 궁전(Palazzo Re Enzo)인데 1246년에 완공되었다. 볼로냐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2세 황제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그의 아들인 엔초왕을 사로잡아 1249년에서 1272년 그가 죽을 때까지 23년간을 유폐했던 곳이란다.

 

 

 

 

 

 

 

광장에는 앙증맞은 관광열차도 보인다. 앉아서 시내를 한 바퀴 둘러보는 재미도 있겠다. 다만 시간의 여유가 전제되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볼로냐를 소개하는 책자들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두개의 탑(La due Torri)’으로 향한다. ‘리졸리(Rizzoli) 거리를 따라 5분 정도만 걸으면 된다. 거리의 끄트머리에 뾰쪽하게 솟아오른 아시넬리 탑(Torre degli Asinelli)이 보이니 길이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거리의 양편은 오래된 건물들이 수두룩하다. 하나 같이 화려한 건물들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명품가게들이 수두룩하다. 볼로냐에서 가장 부티 나는 쇼핑가가 아닐까 싶다.

 

 

길가에는 포르티코(Portico), 즉 고깔 모양 또는 아치 형태의 회랑(回廊)들이 늘어서 있다. 어느 것 하나 예술적이지 않는 게 없다. 건축의 관점에서 볼 때 회랑은 독특한 공간이다. 엄밀하게 말해 내부도 아니고 외부도 아니다. 그야말로 안과 밖이 공존하는 영역인 것이다. 블로냐의 회랑은 공간의 효용성을 최대한으로 활용하고 있다. 회랑은 주로 보행자들의 길로 이용되지만, 위쪽은 건물로 대개 사무실이나 주거 공간이 자리 잡고 있다.

 

 

포르타 라베냐나 광장(Piazza di Porta Ravegnana)’에 가까워질수록 두개의 탑(La due Torri)’은 점점 커진다. 그리고 끝내는 카메라에 집어넣지 못할 정도로 커져버린다. 볼로냐의 탑들은 우리들이 여행을 하면서 흔히 만나게 되는 여느 탑들과는 많이 다르다. 다른 탑들이 군사적인 기능(유사시 신호를 주거나, 적의 침입을 방어)을 위해 지어진데 반해, 볼로냐의 탑들은 귀족들이 자신들의 막강한 부와 사회적인 위신, 그리고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쌓았기 때문이다. 서로 경쟁이라도 하려는 듯이 세우다보니 12세기 말에는 그 숫자가 거의 100여 개에 달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동안 전쟁과 화재, 천재지변(벼락) 등으로 대부분이 무너지고 현재는 20여개의 잔해만이 남아 있단다. 그중 두 개가 도시의 중앙에 남아있는데, 그게 바로 저 앞에 보이는 아시넬리 탑(Torre Asinelle)가리센다 탑(Torre Garisenda)’이다.

 

 

 

1109년에 공사를 시작해서 1119년에 완공된 아시넬리 탑(Torre Asinelle)’은 네모진 설계로 높이는 97m이다. 48m 높이의 가리젠다 탑(Torre Garisenda)’과 나란히 서 있는데 둘 모두 상당히 기울어져 있단다. 지반침하 때문이라고 하는데, 혹자는 건축기술을 과시하기 위해서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이라고도 한다. 아무튼 또 하나의 피사의 사탑(Torre di Pisa)’이 아닐까 싶다.

 

 

탑의 앞에는 동상(銅像)이 하나 세워져 있다. 이곳의 수호성인이자 5세기 이곳의 주교였던 페트로니오 성인의 동상(La Statua di San Petronio)’이다. 1872년 교통문제로 다른 곳으로 옮겨졌던 것을 최근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단다.

 

 

탑의 아래에 진열장이 보인다. 자기(瓷器)로 만든 여러 가지 조형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아래에 가격표가 놓여있는 것으로 보아 기념품이라도 팔고 있는 모양이다.

 

 

 

 

아시넬리 탑(Torre Asinelle)’의 꼭대기는 전망대이다. 486개의 계단을 올라야만 하기 때문에 다소 힘이 들겠지만, 이를 감내할 경우에는 먼진 조망을 즐길 수 있다고 한다. 볼로냐시가지가 한눈에 잘 들어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올라가보는 것은 사양키로 한다. 아니 올라갈 수가 없다. 비행기의 출발시간에 맞추려는 가이드의 채근에 쫓기다보니 올라가보는 것은 언감생심(焉敢生心)이 아닐 수 없다.

 

 

 

 

(Le Du Torri)의 옆에 성당이 하나 보인다. 누군가 성 바르톨로메오(Saint Bartholomew)성당이라고 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귀국 후에 검색을 해봤지만 확인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성당의 안으로 들어가 본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크다. 그리고 엄청나게 오래된 듯한 느낌이다.

 

 

 

 

성당은 온통 성화(聖畵)들로 치장되어 있다. 벽면은 물론이고 천장이나 돔(dome) 등 빈틈 하나 없이 성화들이 들어차 있는 것이다. 그것도 화려하기 짝이 없는 성화들이다. 어느 유명한 대성당에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풍경이다.

 

 

 

 

이곳도 역시 자그만 제단(祭壇)들이 꽤나 많이 보인다. 그리고 사연은 모르겠지만 하나 같이 멋진 그림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Le Du Torri)에서 조금 더 가면 볼로냐대학이 나온다. 유럽, 아니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대학이다. 꼭 한번 들러보고 싶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다. 서울로 돌아가는 비행기 시간에 맞추려면 서둘러야 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볼로냐대학은 11세기경 로마 법학자 이르네리우스가 이 지방에서 제자들을 가르친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1158년 황제 프리드리히 1세는 이 지역의 학생집단을 자치단체로 공인, 학생들은 도시로부터 독립한 독자적인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고, 이것이 볼로냐대학의 핵심이 되었다. 13세기 후반에는 교사(校舍)를 짓고, 법학뿐 아니라 신학·철학·의학도 강의하게 되었는데, 특히 의학부는 세계 최초로 해부학을 교수한 것으로 유명하다. 1802년 국립대학으로 개편되었다.

 

 

마조레 광장으로 되돌아 나오는 길, 사람들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늘어서있는 게 보인다. 점심 무렵이라서 공식적인 행사라도 있으려니 했는데 천만의 말씀이란다. 공연(公演)을 관람하기 위해 줄지어 서있다는 것이다. 무슨 공연인지는 서로 간의 의사소통 부족으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만 영어가 서투른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줄의 맨 앞이 1384년에 지어진 메르칸치아 궁에 닿아 있다. 비교적 보존상태가 양호한 고딕양식의 건물이다. 그동안 상공회의소 건물로 사용되어 오다가 요즘엔 갤러리로 쓰이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저들은 혹시 그림 전시회를 관람하려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문화에 대한 사랑이 대단한 나라가 아닐 수 없다. 아무리 토요일이라지만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문화행사가 열린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룻밤을 머물렀던 ‘city of art hotel’, 이 호텔의 특징은 현관에 예술품들을 진열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모조품이겠지만 말이다. ‘art’라는 호텔 이름과 무관하지 않을 듯 싶다. 그다지 크지 않은 규모의 호텔이었지만 전체적으로 깔끔했다. 내부시설도 나름대로 괜찮았다. 하지만 이 호텔에서는 와이파이(wi-fi)’의 사용 요금을 받고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처음으로 맞닥뜨린 불행한 상황이다. 물론 돈이 아까워서는 아니다. 방방곡곡 어디에서나 팡팡 터지는 나라에서 살아오다보니 요금을 내야 하는 상황이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여행지 : 두바이, 스위스, 이탈리아

 

여행일 : ‘16. 3. 12() - 20()

일 정 :

3.13() : 두바이

3.14() : 스위스(루체른)

3.15()-19() : 이탈리아(밀라노, 피렌체, 로마, 소렌토, 폼페이, 나폴리, 베네치아, 볼로냐)

 

여행 여섯째 날 : 물의 도시, 베네치아(Venezia, Venice)

 

특징 :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베네치아는 이탈리아 북부에 위치한 여의도 면적의 1.5배 크기로 1500여 년 전에 갯벌 위에 세워진 물의도시다.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뻗은 51정도 되는 초승달 모양의 석호(潟湖, lagoon) 중심부에 자리 잡은 116개의 섬들이 409개의 다리들로 연결되어 있다. 석호 주변으로 145반경까지 포함하는 지금의 도시에는 원래 도시가 있던 섬들을 제외한 주요 섬 10개와 메스트레(Mestre) 및 마르게라( Marghera) 같은 산업이 발달한 본토 자치도시 2개가 포함된다. 베네치아의 역사는 567년 이민족에 쫓긴 롬바르디아의 피난민이 만() 기슭에 마을을 만든 데서 시작된다. 6세기 말에는 12개의 섬에 취락이 형성되어 리알토 섬이 그 중심이 되고, 베네치아 번영의 심장부 구실을 하였다. 비잔틴의 지배를 받으면서 급속히 해상무역의 본거지로 성장하여 7세기 말에는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고, 도시공화제(都市共和制) 아래 독립적 특권을 행사하였다. 13세기 ‘4차 십자군 전쟁이후 세력을 급속히 확대, 중계무역으로 부를 축적하다가 15세기에는 밀라노, 피렌체와 더불어 이탈리아를 장악할 정도로까지 성장했다. 하지만 1797년에 베네치아는 자치권을 잃게 되는데 나폴레옹이 침략해 베네치아를 오스트리아에게 넘겨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다 1866년에야 베네치아는 이탈리아로 다시 돌아왔다. 문화적으로 살펴보면 베네치아는 주로 비잔틴 양식과 북쪽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으로 고딕 양식, 그리고 이탈리아 중부에서 영향을 받은 르네상스 양식이 혼재되어 있는 곳이다.

 

 

 

아침 일찍 로마를 출발했지만 점심때를 넘기고 나서야 베네치아에 도착한다. 오는 길, 아름다운 구릉(丘陵)지대를 지나왔다. 구릉의 높은 지점마다 잘 지어진 집들이 들어앉아 있었다. 조금 의외이지만 살림이 부유한 사람일수록 구릉의 고지대에 거주하는 게 일반적이란다. 도로의 양측은 대부분 경작지이다. 포도밭이 보이는가 하면 올리브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그렇게 달려온 버스는 자유의 다리를 건너더니 널따란 주차장에다 우릴 내려놓는다. 베네치아는 차량통행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배를 타고 들어가야만 한단다.

 

 

 

 

투어의 시작은 수상택시에 오르면서 시작된다. 베네치아의 교통은 주로 수로(水路)를 이용한다. 아니 수로 하나뿐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수상 택시와 수상버스인 바포레토(Vaporetto), 적색연화선, 경찰쾌속선, 유명한 수동식 곤돌라 등 모든 형태의 수상 운송기관이 운하를 정기적으로 오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여행객들이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이중 수상택시와 버스, 그리고 곤돌라이다. 그중 하나인 수상택시를 타고 운하를 따라 늘어서있는 옛 건축물들을 구경하려는 것이다.

 

 

일상과 전혀 다른 낯선 풍경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차 없는 거리라니 너무 이질적이지 않는가. 요즘 환경운동의 일환으로 하고 있는 일회성 행사도 아니고 말이다. 아무튼 베네치아의 유일한 교통수단은 걷던지 아니면 곤돌라나 수상택시 또는 수상버스를 타야만 한다. 쓰레기수거차, 엠블런스, 소방차도 모두 물 위를 달리는 배가 담당한단다. 넓은 운하길 좌우에는 귀족들이 살던 저택과 성당 등 화려한 건축물들이 즐비하다. 타임머신을 돌려 천년고도 베네치아로 돌아온 느낌이다. 그리고 그 속에 들어가 역사 속의 인물들과 대화를 시도해 본다.

 

 

 

수상택시는 중심 수로(水路)그란데 운하(Canale Grande)’를 따라 달린다. 베네치아를 두 부분으로 나누는 이 운하는 산마르코 대성당에서 산타키아라 교회까지 자연 그대로의 수로를 따라 S자를 뒤집어놓은 모양으로 뻗어 있다. 길이는 약 3, 폭은 30~60m이며, 평균수심은 5m 정도이다. 미로를 이루는 작은 운하들과 여러 곳에서 연결된다. 운하 양쪽으로는 12~18세기 대리석 저택과 궁전과 성당들, 아름다운 역사적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첫 번째 만남은 베네치아대학(Università Ca' Foscari Venezia)이다. 도르소두로(Dorsoduro지구에 있는 카 포스카리를 캠퍼스로서 사용하고 있는 국립대학이다. 생각보다는 규모가 작아 보인다. 살짝 무시하는 마음이 생길 정도이다. 하지만 종합대학인데다 8개의 학부가 운용되고 있으며, 재학생 또한 약 19,000명에 이른다니 외관만 보고 평가할 일은 아닌 듯하다. 참고로 이 대학은 JTBC 프로그램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에 출연하는 알베르토의 모교이다. 그리고 이 대학에는 한국어과가 정식으로 설치되어 있다고 한다.

 

 

운하(運河)의 주변에는 옛 건물들이 빼곡히 늘어서 있다. 그리고 그 건물들은 나름대로의 독특한 개성미를 자랑한다. 베네치아에 역사적·예술적으로 중요한 대저택과 옛 주택들이 450여 채나 남아 있다고 했는데 저 건물들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원래의 가문(家門)이 아직까지 보유하고 있는 것들은 거의 없단다. 지금은 돈 많은 일반인들에게 팔려 사무실과 골동품상점으로 변해있으며 일부는 호텔로 개조되어 명성을 얻고 있다고 한다.

 

 

 

 

모든 건축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발밑까지 바닷물이 차올랐다. 마치 바다 위에 떠있는 수상가옥(水上家屋)을 보고 있는 느낌이다. 오로지 베네치아만이 보여줄 수 있는 풍경이 아닐까 싶다. 도시 전체가 말뚝이나 돌받침대 위에 세워진 곳이 이곳 말고 또 어디 있겠는가. 저들은 갯벌의 약한 지반을 다지기 위해 수백만 개의 백향목 나무말뚝을 박은 후, 그 위에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들이 일구어 낸 삶의 터전을 보면서 인간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란 궁금증을 갖게 된다.

 

 

 

 

얼마 전 EBS-TV에서 방영된 세계 테마기행르네상스 기행편에서 여행 안내자로 나선 김상근 연세대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피렌체에 메디치 가문이 있었다면 베네치아에는 단돌로 가문이 있었다.‘. 이 작은 베네치아를 지중해의 해상무역을 장악하는 거대한 무역국가로 변모시키는 역할을 한 가문이라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이 가문은 13세기의 4차 십자군 원정에 참전해서 콘스탄티노플을 점령, 어마어마한 전리품을 베네치아로 가져왔다. 그리고 유럽, 비잔틴 제국, 동방의 이슬람을 상대로 중계무역을 벌여 부를 축적, 베네치아를 부강한 해상왕국으로 만든다. 베네치아는 15세기부터 이탈리아를 장악해간다. 1450년 전성기에 베네치아 상인의 배는 3천여 척, 곤돌라가 2만대에 달했고 예술, 건축 등등 각 분야에서 르네상스가 화려하게 꽃피어 난다. 그리고 1797년 나폴레옹의 침입에 의해 자치권을 잃을 때까지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얼마쯤 갔을까 산 시메온 피콜로 성당(Chiesa di San Simeon Piccolo)’이 나타난다. 기차로 도착하는 모든 여행객들에겐 베네치아의 첫인상으로 각인되는 이 성당은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대리석 건물 자체가 사람들의 상상을 압도한다. 그나저나 이 성당은 산타 루치아역 앞 광장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곳에 위치하기 때문에 수상 버스를 탈 경우 가장 먼저 보게 된다고 했다. 그런데 왜 우리 눈앞에는 이제야 나타났는지 모르겠다. 아마 수상택시를 탄 게 그 이유가 아닐까 싶다. 지금 이 배는 가이드가 안내하고 싶은 코스대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신고전주의 양식의 이 건축물은 1718년에 무너져서 1738년에 다시 지은 것이란다. 그런데 이 건축물을 자세히 보면 좀 기형적으로 돔이 거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폴레옹이 베네치아에 도착해서 이 돔을 보고 감탄했다고 했는데, 그의 눈에는 기형적인 것이 오히려 더 아름답게 보였던 모양이다.

 

 

바다에도 교통 신호등(信號燈)’이 있다고 하면 이를 믿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지 의문스럽다. 그런데 그런 상황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거리 운하에 신호등이 당당하게 내걸려 있는 것이다. ‘고정관념을 깨라는 말이 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말이지만 그저 흘려보내기 바빴는데 오늘 따라 그 말이 절절하게 다가온다. 베네치아는 118개의 섬들이 400개의 다리로 연결되고 있는 도시이다. 작은 섬들로 이어지다 보니 골목길들은 차량이나 수레가 지나다닐 수 없을 정도로 좁고 미로(迷路)처럼 복잡하다. 그래서 발달한 것이 뱃길, 즉 운하(運河)이다. 교통수단 또한 자동차 대신에 크고 작은 선박들이 이용된다. 운하에서도 속도는 엄격히 제한된다. 이는 배가 고속(高速)으로 지나간 뒤에 생기는 물결에 의해 작은 배들이 전복되는 사고를 막기 위한 것이다. 속도를 줄인다고 해서 충돌사고까지 막을 수는 없다. 특히 이런 사거리에서는 말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육지의 도로에서나 볼 수 있었던 교통신호등이 바다에까지 출장을 나온 것으로 보면 될 것 같다.

 

 

아래 사진은 소방서 건물이다. 그런데 소방차는 보이지 않고 도크에 정박된 배만 보일 따름이다. 이런 게 바로 베네치아만이 갖을 수 있는 이색적인 풍경일 것이다. 베네치아는 뱃길, 즉 운하(運河)가 발달되어 있다. 교통수단 또한 크고 작은 선박들이 이용된다. 그러다보니 소방장비도 배를 이용한다. ‘오토 폼파 라구나레(APL : Auto Pmpa Lagunare)라 불리는 소방선(消防船)이다. 낯설게 들리겠지만 우리나라의 소방차쯤으로 보면 되겠다.

 

 

모든 건물들은 바닷물과 맞닿아 있다. 인간의 의지가 만들어낸 뭍(육지)이기 때문이란다. 훈족에 쫓겨 들어올 당시만 해도 이곳은 여섯 개의 자연 섬이 있었고 아주 작은 취락구역이 있었을 뿐. 석호로 이루어진 거대한 뻘 지역이었다. 베네토 사람들은 이곳에서 기적을 만들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썰물 때 물막이용 말뚝을 촘촘히 박는 것이었다. 박히는 깊이만 해도 5미터나 되었다니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게다. 다음은 갇힌 물을 퍼낸다. 그리고 물이 빠진 자리에는 모래와 자갈, 흙을 채워 넣는다. 그렇게 첫 번째 공정이 끝나면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 말뚝을 박는다. 그리고 앞에서 했던 공정들이 다시 반복된다. 그런 일련의 공정을 반복해가며 만들어 낸 도시가 바로 베네치아인 것이다.

 

 

 

 

저 멀리 리알토 다리(Ponte di Rialto)’가 보인다. 베네치아의 발원지이자 중심지에 놓인 다리로 베네치아의 랜드 마크(landmark)’이다. 그리고 19세기까지만 해도 대운하를 가로지르는 유일한 다리였다. 원래는 나무다리였는데 1590년 지금의 돌다리로 개축(改築)했단다. 아치형 대리석으로 만든 이 다리의 위는 지붕을 씌운 회랑(回廊)을 두 줄로 들여 가게들을 들여앉혔다. 다리 양쪽엔 가게와 카페, 음식점, 시장이 밀집한 쇼핑가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라면 차승원이 먼저 떠오를 것이다. 치즈가 듬뿍 든 스파게티를 먹고 속이 니글거린 그가 순창아~~’를 외치며 순창 고추장을 찾던 CF를 찍었던 곳이 바로 저곳 레알토 다리이기 때문이다.

 

 

베네치아는 자연을 극복하고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낸 도시 중 하나이다. 베네치아의 과거와 현재는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었다. 끝없는 외부의 침입에 도전해야 했으며 물위에 살면서도 물 부족을 겪어야만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현실은 지반 침하와 해수면 상승 때문에 도시 전체가 바다 속으로 가라앉고 있다는 것이다. 2030년이면 사람이 살 수 없게 될 거라는 비관적 전망까지 나온단다. 이에 정부가 침수방지를 위해 섬과 섬을 연결해 수위조절을 하는 모세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단다. 하지만 천문학적으로 돈이 들어가는 탓에 별 진척이 없다고 한다. 최근엔 도시 밑에 바닷물을 주입해 도시 전체를 들어 올리는 아이디어까지 나왔다고 한다. 도시 주변 석호 바닥에 10년 동안 깊이 600~800m되는 우물 형태의 관 12개를 심고 이 관으로 바닷물을 주입하면 20~30cm쯤 도시가 올라간다는 것이다. 국제연합 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 역시 발을 벗고 나섰다. 과학적·기술적 방법을 동원해 유서 깊은 베네치아를 구하자는 범세계적인 운동이다. 그리고 도시가 범람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고안된 여러 방법이 표본실험에 들어갔다고 한다.

 

 

 

 

왼편에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Gallerie dell’Accademia)‘이 보인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 세계 최고(最古)의 비엔날레, 역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권위의 국제영화제, 곤돌라와 수상가옥이 연출하는 이국적인 풍경 등등, 이는 베네치아(Venezia)를 수식하는 단어들이다. 인구 30만이 넘지 않는 작은 도시가 세계적으로 알려진 이유는 문화의 힘이 아닐까 싶다. 200년 넘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는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도 그중 하나일 테고 말이다. 이곳은 중세에서 르네상스를 거쳐 18세기에 이르기까지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활동한 이탈리아 화가들의 작품을 주로 전시하고 있다고 한다. 티치아노, 조반니 벨리니, 베로네세, 틴토레토, 젠틸레 벨리니 등 베네치아 화가들의 사원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란다.

 

 

 

저만큼에 살루테 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della Salute)’이 나타난다. 물 위에 떠있는 성당의 화려함과 그 규모가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만든다. ‘카날 그란데(Grand Canal)’와 베네치아 석호 중 하나인 바치노 디 산마르코사이에 누워있는 좁은 손가락 모양의 땅 위에 세워진 성당이다. 8각형의 아름다운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17세기의 건축가 론게나(Baldassare Longhena)가 건축한 것이란다. 살루테(Salute)는 건강과 구원을 의미하는 말로, 성당 이름에 살루테라는 단어가 들어간 것은 이 성당이 흑사병이 물러간 이후에 지어진 건축물이기 때문이다. 성당의 내부에는 다양한 걸작들이 있는데, 특히 티치아노(Tiziano Vecellio)의 초창기 작품인 성 마르코와 성인들’, 천장화 카인과 아벨’, ‘가나의 혼인과 같은 작품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수상택시)는 베네치아의 백미(白眉)라는 산마르코 광장의 앞 선착장에다 우릴 내려놓는다. 선착장에 내리면 운하 건너편에 산 조르조 마조레 성당(Chiesa di San Giorgio Maggiore)이 나타난다. 1559~1580년 건축가 안드레아 팔라디오(Andrea Palladio)가 지은 것으로, 내부에 틴토레토(Jacopo Robustr Tintoretto)최후의 만찬을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일반 여행자들은 산 마르코광장을 조망하기 위해서 저곳을 찾는다. 종탑에서 바라보는 산 마르코광장의 전경이 가장 아름답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론 르네상스 문화를 찾다가 이곳을 들른 사람들도 있다. 미켈란젤로가 설계했다는 도서관이 저곳에 있기 때문이다.

 

 

 

 

선착장에서 내리면 산 마르코광장이다. 하지만 우린 곧장 통과해버린다. 곤돌라(gondola) 체험을 위해서이다. 베네치아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교통수단인 곤돌라는 흔들리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곤돌라는 18세기에 와서 표준화되었다. 길이 10.75미터에 너비가 1.75미터이고 색상은 검은색이다. 노는 3미터이다. 곤돌라는 오른쪽으로 기울어지게 만드는 것이 특징인데 왼쪽에 서서 노를 젓는 오른손잡이의 곤돌리에와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라고 한다.

 

 

곤돌라를 모는 사공은 곤돌리에(Gondolier)’라고 부른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단순한 뱃사공은 아니니 유념(留念)할 일이다. 곤돌리에가 되기 위해서는 곤돌라를 모는 조종 능력을 갖추는 것 외에 영어, 역사, 문화 등 다방면에 걸친 자격시험을 통과해야만 한단다. 관광객을 매료시킬 만한 노래 실력 또한 필수. 베네치아 관광 문화 전도사의 자부심을 가슴에 품은, 진정으로 낭만을 아는 사람들이란다. 곤돌라는 어디서든 탈 수 있다. 일정한 기본요금이 정해져 있지만 타기 전에 미리 가격 흥정을 해두는 게 유리하단다. 우리 같은 패키지여행자들은 그럴 필요도 없겠지만 말이다.

 

 

곤돌라는 흔들리는 물결에 몸을 맡긴다. 곤돌리에가 기다란 노로 물결을 뒤로 밀어주면 곤돌라는 앞으로 쑤욱 나아간다. 좁은 운하 터널을 지나면 양쪽으로 빼곡히 들어선 서민주택들이 시간을 중세로 돌아가게 만든다. 다리 아래를 지날 때는 재미있는 풍경이 연출되기도 한다. 다리가 있는 풍경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 우리와는 달리, 다리 위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탄 곤돌라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는다. 서로가 서로의 풍경이 되어주는 것이다.

 

 

모세혈관처럼 도시 곳곳에 뻗어 있는 작은 운하들은 수상도시의 매력을 더해준다. 작은 운하 옆에는 어김없이 레스토랑이 있으니 운하를 바라보며 식사를 즐기는 것만으로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곤돌라 투어가 끝나고 다시 산 마르코광장으로 되돌아온다. 광장에 들어선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99m 높이의 종탑(鐘塔. Campanile di San Marco))부터 찾는다. 베네치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라 조망(眺望)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시가지가 한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멀리 북쪽의 이탈리아 본토와 남쪽의 아드리아해까지도 눈에 들어온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난 조망을 포기하고 주변 관광을 택한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늘어선 줄의 맨 끝에 서서 이제나저제나 줄이 줄어들기만 기다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종탑은 9세기 무렵에 세워졌다. 바닷바람에 손상을 자주 입어 몇 차례 재건했다. 1902년에 무너진 것을 1912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지었다.

 

 

집사람이 웃는다. 한 점의 티도 없는 해맑은 모습이다. 멀리 떠나있다 보니 잡다한 일상의 걱정들까지도 훌훌 떨쳐버렸나 보다. 언젠가 웃음에 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영국의 한 의과대학에서 발표한 '어릴 때는 하루에 평균 400~500번을 웃다가 장년이 되면서 하루 15~20번으로 줄어든다.'는 웃음에 관한 연구결과이다. 그런데 웃음을 잃어가는 가장 큰 이유는 경험에서 오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염려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인간이 고민하고 염려하는 일들 가운데 타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과연 얼마나 될까? ‘노먼 빈센트 필(Norman Vincent Peale)’ 박사는 '쓸데없는 걱정'이란 글에서 어느 연구기관의 조사를 인용하여 인간의 걱정에 대하여 분석한 결과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우리가 하고 있는 걱정들은 절대로 발생하지 않을 사건에 대하여 것이 40%이고, 이미 일어난 사건에 대한 것이 30%, 별로 신경 쓸 일이 아닌 작은 것에 대한 것이 22%,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사건에 대한 것이 4%’라는 것이다. 결국 우리들이 해결해야 할 진짜 사건에 대한 걱정은 겨우 4%에 불과하다는 얘기이다. 결국 사람들은 96%의 불필요한 걱정 때문에 기쁨과 웃음, 그리고 마음의 평화까지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집사람은 지금 96%의 필요 없는 걱정들을 내려놓았다는 얘기가 된다. 그게 비록 잠시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왕에 내려놓았으니 까짓 거 다시 집어들 필요가 있을까? 그냥 오래오래 저렇게 즐겁고 행복한 얼굴로 살아갔으면 좋겠다.

 

 

 

산 마르코성당(Basillica San Marco)’의 앞에 선다. 마르코성인(San Marco)의 유해(遺骸)가 모셔진 성당이다. 마르코(Marco)는 마가의 이탈리아식 이름인데 마가복음을 쓴 성인(聖人)이다. 로마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체포했을 때, 마가는 벌거벗은 채 도망을 친 전력이 있다. 마가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에서 교회활동을 하며 아프리카에 최초로 기독교를 전했다. 마가는 68년 알렉산드리아에서 순교한다. 이로부터 수백 년 뒤, 베네치아의 상인들이 21조가 되어, 당시 무슬림(Islam)이 지배하던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마가의 유해를 훔쳐온다. 그들은 완벽 절도를 위해 무슬림들이 꺼리는 돼지고기 밑에 유해를 감추는 지혜까지 발휘했다고 한다. 828, 마가의 유해를 안전하게 모셔온 베네치아 시민들은 유해를 모실 훌륭한 성당을 짓는다. 그 성당이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이다. 현재 모습은 11세기에 리모델링한 것이란다.

 

 

황금빛 모자이크가 빛나는 산 마르코성당은 커다란 돔(dome)을 뒤집어쓰고 있는데, 비잔틴과 로마네스크 건축양식이 혼재된 것이 동방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고 한다. 한마디로 아름답기 그지없는 성당이다. 하긴 나폴레옹이 지구상에 가장 아름다운 성당이라고 칭송했을 정도라니 두말하면 잔소리일 것이다.

 

 

성당의 오른편에는 두칼레 궁전(Palazzo Ducale)이 있다. 베네치아가 독립 공화국일 때 국가원수인 '도제'가 집무를 보던 곳이다. 샤를마뉴 대제가 죽은 해인 813년 정부의 중심지로 리알토섬을 택하면서 도제의 요새화된 관저(官邸)로 지어졌다고 한다. 지금의 건물은 15세기에 지은 것이다. 고딕 양식의 건물은 흰색과 분홍색의 아름다운 대리석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지금은 박물관으로 내부가 공개되고 있다. 내부에는 관저로 사용될 때 사용했던 대회의실이나 평의실 등이 있고, 르네상스 양식으로 만들어진 안뜰이 아름답다. 또한 이곳에는 많은 예술품들도 있는데 특히 틴토레토의 천국은 세계에서 가장 큰 크기로 제작된 유화 작품이라고 한다.

 

 

 

산 마르코 광장입구에는 1268년경에 세워졌다는 거대한 화강암 원기둥 두 개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가져온 것이란다. 서쪽에 있는 원기둥 위에는 베네치아의 첫 수호성인이었던 아마세아의 성 테오도로(San Theodore)’가 창을 들고 악어를 제압하는 청동상이 있고, 동쪽에 있는 원기둥 위에는 성 마르코(San Marco, 마가)’를 상징하는 날개 달린 청동 사자상이 놓여 있다. ‘성 테오도로성 마르코는 베네치아를 수호하는 양대 수호성인이다.

 

 

 

 

광장의 북쪽, 그러니까 성당의 왼편에는 시계탑(Torre dell'orologio)이 있다. 24시간식이며 지구 주변을 달, 태양 그리고 온 우주가 도는 천동설을 채택한 천문 시계이다. 시계 숫자 문양은 황도 12궁과 로마 숫자로 되어 있다. 특이한 점은 바늘시계 위의 패널이 마치 오늘날의 디지털(digital) 시계처럼 시간을 로마 숫자로, 분을 아라비아 숫자로 표시해주는 아날로그(analog) 디스플레이(display) 시계란 점이다. 이 시계는 15세기 후반 한참 전성기를 누리던 베네치아 공화국의 부강함을 뽐내기 위해 만들어진 산물이라고 한다.

 

 

시계 바로 위에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상징인 날개 달린 사자 동상이 있고 맨 위에는 일정한 시간이 되면 종을 치는 사람 동상이 있다. 이 시계는 당시 부둣가에 살던 어민들이 언제 출항해야 하는지와 물이 몰려오는 시간을 아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이 시계탑에는 슬픈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데 시계탑을 완성한 직후 높으신 분들이 시계 기술의 유출을 염려해 장인들의 눈을 멀게 해서 장인들이 평생 탑을 돌보며 살도록 하게 했다는 것이다.

 

 

수세기 동안 베네치아의 사회·정치 중심지였던 산마르코 광장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광장으로 손꼽힌다. 이 광장의 3면에는 아치(arch)로 이루어진 회랑이 줄지어 서 있고, 높이 99m인 캠퍼닐리(Campanile) 종루가 서 있는 동쪽 끝은 황금빛 산마르코 바실리카팔라초 두칼레의 분홍빛 건물들로 막혀 있다.

 

 

 

 

산마르코 광장은 카사노바에 얽힌 얘기가 많은 편이다. 그중의 하나는 카사노바가 감옥을 탈출한 후 도망을 치면서까지 찾아가 커피를 마셨다는 플로리안 카페’(Caffe Florian)이다. 베네치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단다. 1720년에 문을 연 이 카페는 수많은 위인들의 체취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카사노바 외에도 괴테, 바이런, 찰스 디킨스, 차이콥스키, 바그너, 스트라빈스키, 골도니... 숱한 거장들이 다녀간 명소란다.

 

 

골목길을 포함한 광장 주변에는 세계적인 명품 숍(shop)도 많이 보인다. 밀라노만은 못해도 크게 뒤지지 않을 것 같다. 이탈리아에서는 베네치아가 가장 쇼핑하기 좋은 공간으로 꼽힌다고 한다. 짧은 거리에 수많은 상점들이 밀집해 있기 때문에 쇼핑객들로서는 아주 좋은 쇼핑가가 되는 셈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이곳은 워낙 관광객이 많아서 사진을 찍고 내부를 들여다봐도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는단다. 상대적으로 한적했던 밀라노의 명품 숍에서는 카메라를 들이대기가 어쩐지 뻘쭘했던 게 사실이다. 그러니 실컷 아이쇼핑을 하면서 카메라도 들이대볼 일이다.

 

 

유리공예품을 파는 가게들도 눈에 띈다. 3세기 이래 베네치아의 유리제조 중심지로 유명한 무라노(Murano)에서 만든 것들이란다. 관광객을 위한 기념 소품에서 유리 화병 등의 장식용품, 귀고리, 시계 등의 액세서리, 샹들리에 같은 조명 기구까지 다양한 제품들이 진열되어 있는데, 하나하나가 사람이 어떻게 저런 제품을 만들었을까 의심이 들 정도로 화려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다. 무라노 섬에는 982년부터 유리공장이 설치되었다고 한다. 이 유리 공장의 장인들은 자신들이 지닌 유리 공예 기술을 지키기 위해 일종의 카르텔 조직을 형성했고, 이를 베네치아 공화국에서 암묵해 주었던 모양이다. 무라노 섬만의 유리 공예 기술이 나날이 발전해 왔고, 외부로 유출되지 않았던 이유이다.

 

 

화려하기 짝이 없는 가면(假面)들을 파는 가게들도 많이 눈에 띈다. 베네치아의 전통 가면이란다. 베네치아에는 가면을 쓰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중세 시대에 서민들이 가면을 쓰고 귀족 놀이를 하며 기분을 달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중세 이후부터 귀족에게까지 퍼져, 신분을 숨기기 위해 1년 내내 가면을 쓰고 다니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단다. 그런 풍습이 만들어 낸 것이 베네치아 카니발(Carnival of Venice , Carneval‎e di Venezia)이다. 매년 약 300만 명의 방문객이 참여하는 세계 10대 축제의 하나다. 12세기 무렵부터 시작된 이 축제는 1월 말에서 2월 초에 시작해서 사순절 전날인 참회 화요일(Mardi Gras, Shrove Tuesday)까지 10여 일간 개최되는데, 베네치아 전역에서 가장행렬이나 공연 등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특히 축제 기간에는 정교하고 화려한 가면들을 볼 수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저만큼에 작은 다리 하나가 보인다. 17세기에 만들어졌다는 탄식의 다리(Ponte dei Sospiri)’이다. 베네치아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한 이 다리는 작은 운하를 사이에 두고 있는 두칼레 궁전과 감옥을 이어 주는 다리이다. 궁전에서 재판을 받고 감옥으로 가던 죄수들이 한숨을 쉬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베네치아는 홍수가 잦았는데 이때마다 지하 감옥이 물에 잠겨 버렸단다. 그래서 이 다리를 건너 감옥에 들어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는 말이 떠돌았던 모양이다. 그러니 이 다리를 지나는 죄수들이 세상과 하직 인사를 하는 기분으로 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탄식의 다리는 카사노바(Giovanni Giacomo Casanova)가 탈출에 성공한 이야기로도 유명하다. 오늘날 카사노바란 이름은 바람둥이, 난봉꾼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평생 동안 놀고먹으면서 어떻게 하면 여자들과 동침할 수 있을까만 생각하는 호색한(好色漢), 또는 평생 한량으로 살아온 유랑백수(流浪白手) 같은 인식이다. 하지만 카사노바는 유식했고 책도 저술하였으며, 정부에서도 일을 했고, 심지어는 법학박사 학위(파두아대학)에다 성직에도 입문하여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인생도 살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는다. 아무튼 그가 풍기문란죄(風紀紊亂罪)로 저 다리 건너에 있는 감옥에 갇혔다가 탈옥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여성(간수장의 아내)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했음은 물론이다. ‘나를 가둘 때 내 의지와 상관없었으니 나 또한 너희들의 의지와 관계없이 이곳을 나가노라.’는 명언을 남기고 유유히 감옥을 빠져나갔단다. 한 세상을 거침없이 자유롭게 살다간 그가 부러워지는 건 무슨 이유일까. 나 또한 자유롭기를 열망하는 남자들 중의 한사람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시간이 남아 광장 주변의 골목길을 둘러보기로 한다. ‘탄식의 다리건너편 건물, 그러니까 옛날 감옥으로 쓰였다는 건물의 뒷골목로 들어서니 해산물 요리를 파는 식당들이 많이 보인다. 싱싱한 재료들로 만들어내는 다양한 메뉴들이 내걸려 있지만 들어가 보는 것은 사양하기로 한다. 제시된 음식 값을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관광지나 얼추 비슷하겠지만, 물값, 테이블 값, 팁을 합치면 밖에 적혀 있는 음식 값이 곱절로 변해버린다. 우린 카프리섬에서 그런 상황을 이미 경험했었다.

 

 

광장을 빠져나온다. 바닷가에 이르면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탄식의 다리가 바라보이는 지점이 있는 방향이다. 바닷가를 따라 난 길가에는 노점상들이 즐비하다. 대부분은 기념품으로 된 티셔츠나 모자, 앞치마, 우산 등이고 그림을 파는 곳도 여럿 보인다. 가면을 파는 곳도 상당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잠시 후 청동 기마상 하나를 만난다. 가리발디(Giuseppe Garibaldi)와 함께 이탈리아를 통일한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Vittorio Emanuele II)’의 동상이다. 이 조각상은 이곳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본토 여러 곳에 세워져 있다. 우리나라의 이순신장군 만큼이나 영웅인가 보다. 아니 장군님한테는 미치지 못할 듯도 싶다. 초등학교 교정에 있는 장군님 동상들까지 합친다면 엠마누엘레의 동상 숫자 정도로는 비교도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투어를 끝내고 주차장으로 돌아올 때에는 수상버스인 바포레토(Vaporetto)’를 이용했다. 노선별로 번호를 붙여 일정한 코스를 운행하는 대중교통 수단이다. 중국 관광객들의 소란스러움에 넌더리를 치다가 겨우 도착한 선착장, 잠깐의 짬을 내어 노천시장을 둘러본다. 의류와 기념품 가게가 대부분이지만 가면 등 없는 물건이 없을 정도로 진열된 상품들이 다양하다.

 

여행지 : 두바이, 스위스, 이탈리아

 

여행일 : ‘16. 3. 12() - 20()

일 정 :

3.13() : 두바이

3.14() : 스위스(루체른)

3.15()-19() : 이탈리아(밀라노, 피렌체, 로마, 소렌토, 폼페이, 나폴리, 베니스, 볼로냐)

 

여행 다섯째 날 오후 : 로마(Roma)의 문화재들

 

특징 : 로마(이탈리아어: Roma)는 이탈리아의 수도이자 라치오 주의 주도로, 테베레 강 연안에 있다. 로마시의 행정구역 면적은 1,285로 서울시의 2배정도이고, 2014년 현재 인구는 290여만 명이다. 로마 건국 신화에 따르면 로마 건국 원년은 기원전 753년으로 2500여년의 역사를 가진 것으로 얘기되지만, 인류는 그 전부터 이 지역에 정착하여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를 형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기 로마는 라틴인, 에트루리아인, 그리고 사비니인으로 구성되었다. 한때는 서양 문명을 대표하는 도시로서 로마 제국의 수도였고, 로마 가톨릭교회의 중심지였으며, 그 역사 덕분에 유럽 문명사회에서는 로마를 가리켜 세계의 머리(Caput mundi)’, ‘영원한 도시(la Città Eterna)’라고 부른다. 서로마제국 멸망이후로 로마시는 서서히 교황의 정치적 영향을 받게 되었다. 서기 8세기부터 1870년까지 로마()는 교황령의 수도가 되었다. 이탈리아의 통일이후 1871년에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가 되었고, 2차 세계대전 이후 지금까지 이탈리아의 수도로 자리 잡고 있다.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지역은 거리가 좁고 대부분이 테베레 강가의 동쪽에 위치해 있다. 로마의 과거의 영광의 흔적인 기념 석조물들 또한 대부분이 이 지역에 있다.

 

 

 

로마 시내 투어를 위해 바티칸시국을 빠져 나온다. 길은 생각보다 넓었다. 베르니니가 염두에 두었다는 좁고 어두운 골목길을 예상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성 베드로 광장이 조금 더 광활하게 보이기 위해 좁고 어두운 골목길로 남기를 원했다고 한다. 하지만 무솔리니가 카스텔 산탄젤로에서 성 베드로 대성당까지 이어지는 큰길(大路), 즉 화해의 길(Via della Conciliazione)을 개통하면서 그 길목에 있던 궁전과 성당 및 여러 고택들을 모두 철거해버려 베르니니의 의도는 빛이 바래버렸다. 문득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문구가 떠오른다. 얼토당토않은 시점에서 떠오르는 말이었으니 염두에 둘 필요는 없겠지만 옳은 말이지 싶다. 로마는 이제 제국의 중심지가 아니었지만 여전히 정신적인 수도로 남아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티칸시국인근 식당 근처의 광장에도 오벨리스크(obelisk)가 보인다.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는 전 세계에 28개가 분포되어 있다고 한다. 그중에 12개는 로마에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저것도 그중의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배불리 식사를 마친 다음에는 메르세데스 벤츠사의 벤 (VAN)에 오른다. 로마 시내는 대형버스의 출입이 제한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걸어서 시내관광을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벤은 우리를 로톤다광장(Piazza della Rotonda)’ 근처에다 내려놓는다. 로톤다(Rotonda)는 라틴어 ‘fotundus(원형의)’에서 파생된 말로 원형 또는 타원형의 건축물을 뜻한다. 둥그런 평면구조를 가진 로톤다는 윗부분이 돔으로 되어있는 독립적 건물을 말하는데, 판테온(Pantheon)이 그 대표적인 건축물로 꼽힌다. 그렇다면 판테온 앞의 광장 이름으로 안성맞춤이지 않나 싶다. 판테온과 첫 만남은 신선한 충격으로 시작되었다. 반질반질한 대리석으로 지어졌을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막상 눈앞에 나타난 것은 콘크리트로 지어진 거대한 구조물이었기 때문이다. 나무와 벽돌로 형틀을 만들고 그 위에 콘크리트를 부어가며 만들었다고 한다.

 

 

 

 

신전의 벽면(壁面)을 따라 걷다보면 판테온(Pantheon)의 앞으로 나오게 된다. 전면을 이루고 있는 16개의 거대한 기둥이 보는 이들을 압도해버리는 신전이다. 판테온은 그리스어로 모든 신라는 뜻으로 다신교인 고대 로마에서 모든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만든 신전이다. 판테온은 기원전 27년에 아그리파(아우구스투스 대제, 즉 케사르를 계승한 인물인 옥타비아누스 대제의 사위)가 만든 것이다. 80년 낙뢰로 소실되자 120년경 하드리아누스(Hadrianus)’ 황제가 재건하기 시작했고 안토니우스 피우스(Antonius Pius)’ 황제 때 완성되었다. 이때 남쪽을 향해 있던 건물의 문을 북쪽으로 향하게 하여 로톤다 광장을 조성했다고 한다.

 

 

 

 

안으로 들어선다. 건물의 안은 성당이다. 609년 비잔틴의 포카스 황제가 교황 보니파치오 4세에게 이 건물을 공식적으로 기증하자, 이를 받은 교황이 성모 마리아와 순교자들에게 바치는 성당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참고로 성당의 안에는 이탈리아 건국의 영웅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묘가 있다. 성모 마리아 상 아래는 천재 화가인 라파엘로의 무덤도 있다.

 

 

 

 

판테온의 하이라이트는 뭐니 뭐니 해도 돔(dome)이다. 지름 43.3m19세기까지만 해도 세계에서 가장 폭이 넓은 지붕이었다. 저 돔은 단 하나의 문을 제외한 어떤 출입구나 창문도 없는 원통형의 벽 위에 지지가 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콘크리트로 된 한 겹의 외피로 건설되었는데, 콘크리트에는 화산암과 부석이 많이 함유되도록 하여 무게를 줄였다고 한다. 또한 돔 내부의 표면은 깊은 우물천장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수직·수평으로 살을 만드는 효과를 내어, 전체 하중을 줄이는 효과를 낳았단다. 판테온의 높이는 판테온의 지름과 같다. 돔의 최고점에는 지름 9m의 구멍, 즉 오쿨루스(Oculus)가 있어 건물 내부로 빛을 끌어들인다. 이 오쿨루스를 통해 들어오는 햇빛, 달빛이 판테온 벽면에 반사되는 모습을 보고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같은 르네상스 거장들조차도 천사의 디자인이라고 극찬을 했다고 한다. 특히 미켈란젤로는 성 베드로 성당의 지붕을 만들 때 이곳 판테온의 지붕을 참조했다고 한다.

 

 

다음은 로마의 중심지이자 로마 교통의 요지인 베네치아 광장(Piazza Venezia)’이다. 광장 정면에는 엄청나게 큰 흰색 대리석건물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Monumento di Vittorio Emmanuele II)’이 자리 잡고 있다. 1885년에 건축을 시작해서 1911년에 완성한 이 기념관은 이탈리아 통일(1870)의 위업을 달성한 초대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하기만 이 건물은 주위 경관과 어울리지 않는 색깔과 규모 때문에 케이크 덩어리’, ‘타자기라는 비난을 받았었다고 한다. 실제로 보니 위화감이 들 정도로 말도 안 되게 큰 건물이었다. 아마도 이탈리아 역사에 있어 가장 기념하고 싶은 리더였기 때문에 이렇게 큰 건물을 지었던 모양이다. 하여간 건물의 전면 중앙에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기마상이 있으며 그 밑에는 세계 제1차 대전때 산화한 무명용사의 무덤이 있다. 참고로 백색이 강조된 이 건물은 신고전주의 양식의 마지막 기념물로 알려져 있으며, ‘조국의 제단이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

 

 

기념관은 대단한 볼거리다. 하지만 그보다 더 눈에 확 들어오는 게 있다. 광장의 한켠에 설치되어 있는 삼성의 광고판이다. 15년 전쯤인가 런던에 출장을 간 일이 있었다. 당시 안내를 맡았던 대사관 직원께서 가장 열을 내서 설명해주던 게 바로 삼성의 광고판이었다. 런던에서 가장 좋은 위치라면서 그 광고판을 볼 때마다 우리나라의 국력을 느낀다고 했었다. ‘외국에 나가면 모두가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그래! 나는 지금 외국에 나와 있는 것이다.

 

 

다음 행선지는 대전차 경기장인 치르코 마시모(Circo Massimo)’이다. 로마 귀족들을 열광시키던 전차 경주가 열렸던 대전차 경기장은 로마에 있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 중 하나이다. 지금은 비록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황량하지만 25만 명이나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규모였다고 한다. 이 경기장은 영화 벤허의 촬영지로 유명하다. 트랙의 위 언덕에 선다. 말고삐를 잡아채며 힘차게 마차를 이끌던 찰톤 헤스턴(Charlton Heston)’의 영상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환청일까? 말발굽 소리와 전차 바퀴 소리, 그리고 관중의 함성까지 들리는 듯하다. 한편 이곳은 초기 기독교 신자들이 집단으로 처형을 당했던 아픔의 상처가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경기장 너머에 폐허(廢墟)처럼 보이는 곳이 고대 로마 황제들의 주거지였던 팔라티노 언덕(Colle Palatino)’이다. 2천 년 가까운 오랜 세월에 부대끼며 많이 훼손되었지만, 화려했던 옛 영광을 간직한 채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나무그늘이 길게 드리워진 넓은 공간은 현재 로마주민들의 산책로로 이용되고 있다. 화창한 날씨이다. 양지바른 언덕에 앉아 하염없이 여유를 즐기고 싶어진다. 벤허의 옛 이야기라도 떠올리면서 말이다.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in Cosmedin)’으로 향한다. 전차경기장에서 가깝기 때문에 도보로 이동한다.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성당6세기에 지어진 성당으로, ‘발렌타인데이(Saint Valentine’s Day)‘의 유래가 된 성 발렌타인(Saint Valentine)’의 유골이 모셔져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7층 높이로 지어진 로마네스크 양식의 종탑이 아름다운 성당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것에는 도통 관심이 없나보다. 너나 할 것 없이 기괴하게 생긴 조각상 앞으로 모여들고 있기 때문이다. 진실의 입(Bocca della Verita, Mouth of Truth)이란다. 청춘 남녀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던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소피아 로렌이 잔뜩 겁을 먹은 채로 손을 집어넣던 그 조각상이다.

 

 

진실의 입(Bocca della Verita, Mouth of Truth)은 성당의 입구 한쪽 벽면에 있는 얼굴 앞면을 둥글게 새긴 대리석 가면(플루비우스의 얼굴)이다. ‘진실의 입이란 이름은 입에다 손을 넣고 거짓말을 하면 강의 신() ‘플루비우스(Pluvius)’가 손을 잘라버린다는 전설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중세시대에는 일부 영주들이 사람들에게 손을 넣게 하고 몰래 잘라버리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 진실의 입은 예술성이 돋보이는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영화 로마의 휴일에 나오면서 세계적인 관광명소가 되었다.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포로 로마노보다도 훨씬 더 보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오드리 헵번처럼 입에다 손을 넣어보기 위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줄의 맨 끝에 가서 선다. 좀 꺼림칙하겠지만 짚고 넘어가야할 것이 있다. 이 조각상의 용도에 관한 얘기이다. 이 조각상은 고대 로마시절 하수도 뚜껑으로 사용되던 것으로 추정된단다. 수염이 있는 남자의 얼굴(눈과 코, )에 구멍이 뚫려있는데, 이 구멍으로 물이 빠졌을 거란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수채 구멍에다 손을 집어넣고 있는 셈인가?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성당앞에 코린트양식의 돌기둥이 원형을 이루고 있는 신전(神殿)이 하나 보인다. 로마에 현존하는 대리석 건축물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헤라클레스 신전(Tempio di Ercole Vincitore)’이다. 이 신전은 포룸 로마눔 안에 있는 베스타 신전과 모양이 매우 비슷해서 르네상스 시대 이후로 보통 베스타 신전이라고 불렸지만, 사실 베스타 여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헤라클레스 신전이다. 이 신전은 기원전 179년에서 142년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카르타고를 제압하고 나서 그리스와 시리아의 일부를 손아귀에 넣은 로마가 지중해의 패권국가가 되었을 때이다.

 

 

근처에 기념비 비슷한 것도 하나 보인다. 하지만 영어로 표기가 되어 있지 않아 그게 뭔지는 모르겠다.

 

 

캄피돌리오 광장(Piazza di Campidoglio)’으로 향한다. ‘베네치아 광장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을 왼쪽으로 끼고 연결된다. 광장으로 오르는 길은 완만한 경사의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미켈란젤로가 설계했다는 계단이다. 이곳은 과거 정치의 중심지였다. 캄피돌리오라는 뜻 역시 수도라는 의미의 캐피탈(Capital)이다. 그러다 보니 외국 사절들이 말을 타고 올라갈 수 있는 완만한 경사가 필요했단다.

 

 

 

 

언덕에 오른다. 로마제국의 제16대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ntoninus)’의 기마상이 가장 먼저 반긴다. ‘로마 5현제(賢帝)’의 마지막 황제이며 후기 스토아파의 철학자로 명상록(瞑想錄, Tōn eis heauton diblia)’을 남긴 사람이다. 이 기마상은 약 2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라테란 광장에 있었던 것을 미켈란젤로가 캄피돌리오 광장을 설계하면서 1538년에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하지만 진품은 카피톨리노 박물관에 있다고 하니 참조한다. 참고로 옛날에는 이 동상을 기독교를 인정했던 콘스탄티누스 대제(Portrait of Constantine)’의 상()인 것으로 알았단다. 때문에 이곳에서 예배도 드리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기마상은 기독교를 박해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상이다. 당시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가 궁금해진다.

 

 

광장은 세 개의 건물로 둘러 싸여 있다. 가운데 건물은 고대 로마의 문서 보관소이었는데 지금은 시청사로 사용되고 있다. 시청사를 중심에 놓고 정확한 대칭을 이루도록 양 옆에 콘세르바토리 궁전과 누오보 궁전을 배치했다. 위에서 보면 세 개의 건물이 계단과 합쳐져 마치 한 송이의 꽃처럼 나타난다고 하는데, 사람들은 이 광장을 르네상스 시대의 최고 걸작으로 꼽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참고로 누오보 궁전과 콘세르바토리 궁전은 현재 카피톨리노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1471년에 창설된 유럽 최고의 박물관으로 아름다운 천정벽화로 유명하다. 누오보 궁전박물관(Palazzo Nuovo)과 콘세르바토리 박물관(Conservatori)으로 양분되어 있으며 미켈란젤로의 설계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초기 로마, 그리스시대의 조각상과 청동상부터 18~19세기의 회화작품들까지 다양한 전시품이 소장되어 있다.

 

 

카피톨리노광장에서 조금만 내려오면 포로 로마노(Foro Romano)’가 한눈에 들어오면 멋진 전망대를 만난다. 포로로마노의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도 전체를 둘러볼 수 있는 뛰어난 조망처이다. ‘포로 로마노는 고대 로마인들의 생활 중심지이다. ‘로마인 이야기를 통독한 사람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장소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여행하는 관광객들에게는 자칫 지겨울 수도 있는 곳이다. 거의 원형을 잃어버린 건축물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이번 여행에서는 포로 로마노의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먼 거리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일정을 짜 놓았다.

 

 

 

 

포로 로마노는 시민정치의 산물로 라틴어로는 포룸 로마눔(Forum Romanum)’라 한다. ‘포로(foro)’는 공공광장이라는 뜻으로, 영어 포럼(Forum)’이라는 말의 어원이다. 즉 로마인들의 공공광장으로 해석되며, 이 광장에서 정치, 종교 등의 현안 문제들에 대해 시민들의 의견을 듣고 토론하던 장소였다. 당시 이곳은 하수시설이 완벽했고 신전과 공공기구가 마련되었고 대중목욕탕까지 갖춘 정치, 상업, 종교 활동의 주 무대였다.

 

 

원주 여덟 개가 높이 솟아 있는 것은 사투르누스 신전(Tempio di Saturno)’의 흔적인데 나라의 보물을 보관한 곳이었다. B.C 497년경에 세워졌다고 했으니 나이가 25백세 쯤 되겠다. 사투르누스 신전의 왼편에서 시선을 끄는 건물은 203년에 지어진 세베루스 황제(Emperor Septimius Severus)’의 개선문이다. 세베루스 황제는 카라칼라 목욕탕을 짓게 한 카라칼라 황제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세베루스 개선문 근처에 마메르틴 감옥소가 있었다고 하는데 베드로와 성 바오로가 감금되었던 감옥소라고 한다. 그 외에도 이곳은 가장 오래된 개선문이며 보존상태까지 양호한 티투스의 개선문(Arcodi Tito)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개선문', 그리고 잔해만 남아 있는 막센티우스의 바실리카(Basilica)’, '에밀리아의 바실리카', '로물루스의 신전', '파우스티나 신전', ‘베스타 신전’, ‘율리아의 공회당’, ‘원로원 건물등 수많은 유적들로 이루어져 있다.

 

 

 

 

우측으로 보이는 언덕은 로마의 일곱 개 언덕 중 역사가 가장 오래된 팔라티노 언덕이다. ‘테베레 강(Fiume Tevere)’에 버려져서 늑대에게 키워졌던 로물루스가 정착한 바로 그 언덕이란다. B.C 753년 로물루스가 이곳 팔라티노 언덕에다 세웠던 나라가 바로 로마인 것이다. 키 큰 소나무 사이로 고대 로마 황제가 살았던 저택 자리가 있다.

 

 

 

스페인광장으로 향한다. 걸어서 이동하다보니 제법 시간이 걸리는 편이다. 자칫 지루할 수도 있으려니 하고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옛길을 따르다보면 그런 생각이 들 겨를은 결코 없다. 계속해서 나타는 새로운 풍경들이 잠시도 한눈을 팔 수 없게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All roads lead to Rome)’는 말이 있다. 17세기의 프랑스 작가 라 퐁텐의 우화에 맨 처음 나온 말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에 빗대어 모든 여행은 로마로 통한다.’라고도 했다. 시간 탓일지도 모르겠으나 난 후자에 동의하고 싶다. 이곳 로마가 세상의 모든 여행지로 통하는 통로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여행자들은 그들이 보고 느낀 것을 메모하는 게 보통이다. 그리고 그 메모에는 여행지의 풍물과 역사, 그리고 문화 등 다양한 내용들이 기록된다. 당시의 기록들은 여행 후에 다시 재구성된다. 그 과정에서 빠지지 않고 거론 되는 곳이 바로 로마이다. 세상 곳곳에서 만났던 문화의 뿌리를 캐며 올라가다보면 어디선가는 꼭 로마라는 단어가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마는 모든 여행자의 종착지가 된다. 그러니 어찌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 수 있겠는가.

 

 

 

 

가는 길에는 아래와 같은 성당도 보인다. 가이드의 설명이 있었지만 다른 것에 신경 쓰느라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얼마쯤 걸었을까 도로가 넓어진다. 목적지인 스페인광장에 거의 다 왔는가 보다. ‘성모마리아 동상으로 추측되는 동상이 눈에 띄는 등 주변 분위기가 스페인광장으로 연결되는 콘도티 거리(Via Condotti)’라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명품으로 소문난 거리이다.

 

 

 

 

잠시 후 눈에 익은 광장과 계단이 반긴다. 로마 여행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스페인 광장(Piazza di Spagna)’에 이른 것이다. 이곳은 여행객뿐만 아니라 로마 시민들의 휴식처로 언제나 수많은 인파로 붐비는 명소다. ‘스페인 광장이란 이름은 17세기 이곳에 있었던 스페인 대사관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겉으로 보기엔 작은 광장과 낮고 좁은 계단뿐이지만 이곳은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헵번이 쪼그려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었던 바로 그곳이다. 그 후 로마 최고의 명소가 됐다. 광장에서 바라보는 계단 위 삼위일체 성당(Trinita dei Monti)’의 종탑과 오벨리스크가 아름답다. 그런데 그 풍경이 그동안 생각해왔던 것과는 완전히 딴판이다. 세계 각국 사람들이 앉아 사랑을 속삭이거나 생각에 잠겨 있어야 하건만 137개의 계단이 텅텅 비어있는 것이다. 보수공사를 하느라 계단의 출입을 막아놓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젤라또(Gelato, 이태리식 아이스크림)를 사먹는 것까지 생략되어 버렸다. 뭐니 뭐니 해도 젤라또는 계단에 앉아서 먹어야 제멋이다. ‘오드리 헵번이 영화에서 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멋을 부릴 장소가 사라져 버렸으니 젤라또를 사야할 의미까지 없어져버린 것이다. 아니 살 수는 있었다. 다만 길게 늘어선 줄의 맨 끝에 서서 기다리느니 다른 장소에서 사는 게 더 현명하겠다고 생각한 것이 더 큰 이유일 것이다.

 

 

이왕에 로마의 휴일이야기가 나온 김에 이 영화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 보자. 이 영화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남녀노소에 관계없이 세계 영화사상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 중의 하나이다. 또한 오드리 헵번(Audrey Hephurn)’을 알고 싶으면 이 영화를 보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그녀를 단번에 은막의 여왕과 세기의 요정으로 만들었고 1953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겨 준 불후의 명작이다. 지성과 도덕적 강직함을 겸비한 품위 있는 미남 스타, ‘그레고리 펙(Gregory Peck)’이 상대역을 맡았고 우리 생애 최고의 해(The Best Years of Our Lives, 1946)’로 오스카 감독상을 받고 벤허(Ben Hur, 1959)’티파니에서 아침을(Breakfast At Tiffany’s, 1961)’ 등의 명작을 만든 세계적 거장 월리엄 와일러(Walliam Wyler)’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그럼 이제는 영화의 내용으로 들어가 보자. 친선 순방차 로마를 방문한 가상의 왕국 공주인 (오드리 헵번)’은 엄격한 왕실의 규율과 복잡한 의전, 빈틈없이 타이트한 일정이 싫다. 그래서 변장을 한 채로 몰래 담을 넘은 그녀는 무작정 로마의 밤거리를 거닌다. 하지만 잠자리에 들기 전에 먹었던 안정제 때문에 스페인 광장에 놓인 벤치 위에 쓰러져 그만 잠이 들고 만다. 그러다가 우연히 앤 공주의 유럽여행 취재 임무를 띠고 특종 기사를 노리던 로마 특파원 미국기자 조 브래들리(그레고리 펙)’의 도움을 받는다. 다음날 아침 도와준 여자가 앤공주임을 안 그는 사진기자 어빙 래도비치(에디 앨버트)’를 불러 비밀 촬영 작전을 짠다. 그러다가 둘은 사랑하는 사이가 되고,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끝내는 헤어진다는 스토리이다. 특종 기사용 사진이 폐기되었음은 물론이다. 아무튼 이 영화는 공주가 퇴장하고 난 기자회견장에서 선뜻 자리를 뜨지 못하고 서성대며 아쉬운 사랑을 안으로 새기는 라스트 신(last scene)’이 하이라이트이다.

 

 

스페인 계단 바로 앞에는 '바르카차의 분수(Fontana della Barcaccia)'가 있다. ‘낡은 배의 분수라는 의미인데 테베레 강에서 와인을 운반하던 바르카차를 본떠 만들었단다. 이탈리아 바로크를 대표하는 조각가이자 건축가인 로렌초 베르니니(Giovanni Lorenzo Bernini)’의 아버지인 피에르토 베르니니(Pierto Bernini)’가 로마의 큰 홍수 후 하나 남은 조각배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했다고 한다. 이 분수의 물은 트레비 분수와 함께 로마에서 가장 깨끗하고 맛있는 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물을 받아 마시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품질은 보증되지 않는가 보다.

 

 

트레비 분수(Fontana di Trevi)’로 향한다. 좁은 골목길 양편으로는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 상점이 즐비하다. 스페인 광장에서 10분쯤 좁은 골목을 이리 저리 걷다 보니 트레비 분수가 불쑥 나타난다. 트레비(Trevi)는 삼거리라는 뜻이다. 삼거리에 위치한 분수 앞으로 좁은 골목길이 여러 개 나 있는 것이 보인다.

 

 

 

 

트레비 분수(Fontana di Trevi)’는 로마에 현존하는 가장 큰 규모의 분수이다. 높이 25.9m에 너비가 19.8m에 이른다. 고대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명한 처녀의 샘(Aqua Virgina)’으로 전쟁에서 돌아온 병사들에게 물을 준 한 처녀의 전설을 분수로 만든 것이다. 분수의 정면 오른쪽 위에 이런 일화를 담은 조각품이 있다. 고대 로마 시대는 풍부한 수원과 총 14개의 거대한 수로망(水路網)이 있어 로마 전역에 물을 공급했다. 하지만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많은 이민족들이 침입하면서 이 수로망을 파괴해버렸다. 그로 인해 물 부족 현상이 발생했다. 이런 물 부족은 15세기 이후에 들어서면서 새로이 로마를 재정비하려던 교황들이 여러 수도교와 분수를 만들면서 해소되었다. 그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이 트레비 분수이다. 평범했던 이 분수는 1732년 교황 클레멘스13니콜라 살비(Nicola Salvi)’에게 명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트레비 분수의 중앙에 있는 근엄한 모양의 부조물은 바다의 신인 포세이돈(Poseidon)’이며, 양쪽에 말을 잡고 있는 두 명의 신은 포세이돈의 아들인 트리톤(Triton)’이다. 종종 테베레 강이 범람해서 이곳까지 물에 잠길 때가 많아지자 바다의 신을 만들어 이를 막고자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분수 왼쪽에 날뛰는 말은 풍랑을 상징하고, 오른쪽의 말은 고요한 물을 상징한다. 건물 제일 위를 보면 라틴어로 ‘CLEMENS VII’라고 클레멘스의 이름이 적혀 있고, 그 아래에 ‘AQVAM VIRGINEM’이라고 적어 처녀의 샘 분수라는 것을 명명하고 있다. 양쪽에 있는 4개의 여인 조각상은 4계절을 상징한다고 한다.

 

 

트레비 분수는 바로크 양식(baroque樣式)’의 마지막이자 최고의 걸작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이 트레비 분수가 유명하게 된 원인은 따로 있다. 영화 로마의 휴일로 인해 스페인 계단이 유명해졌듯이, ‘트레비분수는 영화 달콤한 인생(La dolce vita)’으로 인해 유명해졌다. 주인공인 마스트로이안니와 여주인공이 분수에 뛰어드는 장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잘 들어갔나요?’ 북새통을 이루는 인파속으로 겨우겨우 비집고 들어간 집사람이 동전을 던지고 나서 내게 물어온다. 내 대답은 물론 예스. 서있기도 어려운 비좁은 공간에서 오른팔을 왼쪽어깨 뒤로 뻗어 동전을 던진다고 생각해보라. 그 고생을 하는 그녀에게 어찌 안 들어갔다고 얘기할 수 있겠는가. 아무튼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지면 로마로 다시 돌아올 수가 있고 두 번째 던지면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고 세 번째 던지면 그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첫 번째 동전이 분수에 잘 들어갔으니 집사람은 언젠가 다시 로마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나는 그녀를 졸졸 따라다닐 것이고 말이다. 집사람은 더 이상 동전을 던지지 않았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이미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으니까. 참고로 트레비 분수는 아리따운 처녀가 전쟁에서 돌아오는 지치고 목마른 병사에게 물을 떠 주었다는 아름다운 옛이야기를 품고 있는 곳이다. 그래서 동전에 얽힌 사랑 얘기들이 만들어졌나 보다. 주의해야 할 점이 하나 있다. 물속에 있는 동전을 꺼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로마시가 정기적으로 수거하여 로마 내 문화재 복원과 보호에 쓰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매일 3,000유로 정도가 분수대 바닥에 쌓인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전을 던지고 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콜로세움(Colosseum in Rome)이다. 로마의 상징이자 세계 7대 불가사의 건축물로 꼽히는 '콜로세움'은 이탈리아 여행자들이 거르지 않고 꼭 찾아가는 명소다. 이 원형의 극장에서는 고대 검투사들의 칼싸움, 맹수와 인간과의 사투, 물을 채워 넣고 하는 모의 해전 등 처참하고 잔혹한 게임들이 벌어졌었다. 아무튼 '콜로세움'은 겉에서만 둘러봐도 그 웅장한 크기와 분위기에 압도된다.

 

 

로마의 상징인 콜로세움(Colosseum in Rome)은 거대한 원형경기장으로 당시 로마인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네로 황제의 황금 궁전 뜰에 있었던 인공호수를 메운 자리에 세워진 콜로세움은 AD 72(베스파시아누스 황제)에 건설을 시작하여 80(티투스 황제)에 완성된 대형 원형투기장 겸 극장이다. 맹수들과 생사를 겨루는 검투사의 경기와 서커스나 사파리 공연 등이 이곳에서 열렸다. 콜로세움 바로 앞에 서면 사진으로 봤던 것보다 훨씬 크고 웅장한 규모에 놀란다. 콜로세움은 직경이 긴 쪽이 188m, 짧은 쪽이 156m, 둘레 약 527m인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바깥벽의 높이는 48m에 이른다. 그리고 경기장 내부의 길이는 87m에 폭은 55m, 80개 정도가 되는 출구에 55천명 이상의 관객이 입장할 수 있었단다. 4층으로 지어진 건물은 신분에 따라 자리를 따로 지정 받았으며 1층은 도리아식, 2층은 이오니아식, 3층은 코린트식의 양식의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다.

 

 

 

 

콜로세움 바로 앞에는 콘스탄티누스 개선문(Arco di Constantino)’이 서있다. 로마시대 개선문 중 가장 규모가 크다고 한다. 밀라노 칙령(313)으로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패권 쟁탈전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해서 지은 것이란다. 파리의 개선문은 나폴레옹이 이 개선문을 흉내 내서 만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독립문이나 인도 델리의 인디아게이트 등 세계의 많은 기념문들은 파리의 개선문을 모방했다. 그렇다면 이 모든 문들의 원조가 바로 이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이 되는 셈이다.

 

 

 

개선문을 빠져나가면서 오늘의 일정, 즉 로마 시가지 투어가 끝난다. 로마에는 유럽 문화유적의 40%가 모여 있다고 한다. 하루 종일 그런 로마를 걸었다. 그리고 로마제국과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를 거쳐 온 수많은 건축물들을 도심 곳곳에서 만났다. 누군가 그랬다. 이곳 로마는 ‘1000년쯤 된 건물이라고 하면 눈길 한번 던지고, 100년쯤 된 건물은 신축이라며 쳐주지도 않는 도시라고. 그가 말한 로마를 걸을 때 로마인이 된 것처럼 로마를 사랑해보자는 또 다른 한마디를 염두에 두고 걸어본 하루였다. 버스에 오르고 나서도 유적지를 돌아보며 느꼈던 황홀한 감동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하긴 화려한 문화를 꽃피운 르네상스로의 시간여행이 어디 그리 쉽게 사라질 수 있겠는가.

 

 

 

 

여행지 : 두바이, 스위스, 이탈리아

 

여행일 : ‘16. 3. 12() - 20()

일 정 :

3.13() : 두바이

3.14() : 스위스(루체른)

3.15()-19() : 이탈리아(밀라노, 피렌체, 로마, 소렌토, 폼페이, 나폴리, 베니스, 볼로냐)

 

여행 다섯째 날 오전 : 세계 가톨릭의 본향, 성 베드로 대성당(Basilica di San Pietro in Vaticano)

 

특징 : 성 베드로 대성당(라틴어: Basilica Sancti Petri, 이탈리아어: Basilica di San Pietro in Vaticano)은 바티칸 시국 남동쪽에 있는 대성당을 말한다. 바티칸 대성당(Basilica Vaticana)이라고도 부른다. 성지 가운데 하나이자 기독교 세계의 모든 교회 가운데 가장 거대한 교회로 유일무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개신교를 제외한 기독교의 전승(애초에 개신교는 전승을 인정하지 않는다)에 따르면, 서기 67년에 순교한 예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자 로마의 초대 주교, 즉 교황 성 베드로의 무덤 위에 대성당을 건립했다고 한다. 성 베드로의 시신이 대성당의 제대 아래에 묻혀 있는 까닭에 옛날부터 교황이 선종하면 그 시신을 제대 아래에 안치해오고 있다. 대성당은 그 종교성과 역사성, 예술성 때문에 세계적인 순례 장소로 유명하다. 또한 르네상스부터 바로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예술계의 거장들이 주임 건축가 직책을 계승하면서 오랜 세월에 걸쳐 지은 건축 작품으로서 당대의 가장 위대한 건축물로 여겨진다. 로마의 모든 초창기 성당들처럼 대성당 역시 입구가 동쪽에 있으며 후진(後陣)은 서쪽 끝에 있다.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에 흠뻑 빠져 있다가 밖으로 나오면 바티칸의 중앙에 있는 성 베드로 대성당(St Peter’s Basilica)‘이 보인다. 현지 발음으로는 산 피에트로 대성당이니 참조한다. 로마 가톨릭의 총본산인 이 성당은, 베드로의 무덤 자리에 세워진 성당이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한 성인으로, 예수의 12제자 중 한 명이었으며, 기독교 초대 주교이자, 1대 교황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는 하늘나라 열쇠를 주며 그에게 반석이라는 의미인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었고, 기독교의 반석이 되었다. 그래서 베드로를 상징하는 것이 열쇠라고 한다.

 

 

시스티나 성당(라틴어: Aedicula Sixtina)’은 바티칸 시국에 있는 교황의 관저인 사도 궁전 안에 있는 성당이다. 건축 양식이 구약성경에 나오는 솔로몬의 성전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전하며,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산드로 보티첼리 등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들이 그린 프레스코 벽화가 구석구석에 그려져 있다. 그 가운데서도 미켈란젤로는 교황 율리오 2세의 후원을 받으면서 1508년에서부터 1512년 사이에 성당의 천장에 12,000점의 그림을 그렸다. 성당의 이름은 1477년에서 1480년 사이에 기독교의 오래된 옛 대성당(Cappella Magna)을 복원했던 교황 식스토 4(SiXtus IV)’의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식스토 4세의 치세(治世)이래, 시스티나 성당은 교황이 종교적·직무상의 활동을 하는 장소로서의 소임을 해 왔다. 오늘날에는 전 세계의 추기경들이 모두 모여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는 종교적 의식인 콘클라베(Conclave)를 여는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보다 일반적인 용도로는 교황이 직접 미사를 집전하는 성당으로 활용하고 있다.

 

 

 

 

벽면에 부착된 석상들을 눈여겨보면서 광장으로 나온다. ‘성모 마리아성 베드로의 상()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349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순교한 베드로가 묻혀 있던 자리에다 거대한 바실리카를 세울 것을 명하였다. 대성당의 기원으로 보면 되겠다. 이후 1506년 율리우스 2세 교황에 의해 지금의 대성당이 지어지게 된다. 대성당 공사는 120년 동안 지속되었고, 당대 최고의 천재들이 모여 만들었다. 처음 착공은 브라만테(Donato d' Aguolo Bramante)가 했고, 이후 상갈로,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베르니니 등이 합류해 당대 최고의 성당으로 완성시킨 것이다. 성당의 길이는 187m이고, 내부에는 11개의 예배당이 있다.

 

 

 

 

광장에는 줄을 맞춰 의자가 놓여있다. 무슨 행사라도 있는 모양이다.

 

 

광장에 서면 성 베드로 대성당이 한눈에 들어온다. 가장 거대한 기독교 성당에 속하며, 바티칸 영토를 포함하여 2.3헥타르(5.7에이커)의 넓이를 가졌다. 그리고 최대 6만 명 이상의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대성당 내부에는 500개에 달하는 기둥과 400개가 넘는 조각상이 세워져 있고, 따로 분리된 44개의 제대(祭臺)10개의 돔(dome)이 있으며, 1300개에 달하는 모자이크 그림들이 벽면에 장식되어 있다. 눈에 들어오는 외관을 살펴본다. 대성당의 정면 중앙부 상단에는 베르니니의 제자들이 만든 13개의 조각상이 있다. 그리스도와 세례 요한을 중앙에 놓고 11명의 사도들을 그 둘레에다 배치했다. 그리고 정면 양쪽 끝에는 종탑(Campanile)을 배치했다. 그중 왼쪽의 종탑은 1931년부터 전자식(시계)으로 작동하고 있단다.

 

 

대성당 앞에는 성 베드로 조각상(Statue of St. Peter)’이 있다. 광장에서 봤을 때 정면부 왼편이다. 1462년 교황 비오 2(Pius II)’ 파올로 디 마리아노(Paolo di Mariano)‘와 그의 공방이 조각했던 것을, 교황 비오 9가 더 크게 조성한 것이란다. 베네치아 출신 조각가 주세페 데 파브리스(Giuseppe De Fabris)’1840년에 제작했는데, 4.91m 높이의 좌대(座臺) 위에 올려져있으며 조각상의 높이만 5.55m에 이른다. 조각상의 오른손은 베드로의 지물인 천국의 열쇠 한 쌍을 들고 있으며, 왼손에는 두루마리를 쥐고 있다. 늘어뜨려진 두루마리에는 라틴어로 'ET TIBI / DABO / CLAVES / REGNI / CAELORUM'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이는 마태오 복음서 1619'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를 의미한다. 그리고 사진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성 바오로 조각상(Statue of St. Paul)’도 있다. 정면부의 오른편이다. 볼로냐 출신의 조각가 아다모 타돌리니(Adamo Tadolini)’1838년에 제작했으며 조각상 높이는 5.55m이다. 조각상의 오른손은 바오로의 지물인 칼을 비껴들고 있으며, 왼손에는 두루마리를 펼쳐들고 있다. 늘어뜨려진 두루마리에는 히브리어로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413'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가 새겨져 있다.

 

 

 

입구 회랑에서 성당의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은 모두 다섯 개가 있다. 그중 맨 오른쪽에 있는 청동 문이 거룩한 문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갖고 있는 성년의 문(Porta Santa)’이다. 1950년 성년을 기념해 스위스의 신자들이 제작하여 기증한 이 문에는 열여섯 편의 성경 이야기가 부조되어 있다. 원래는 100년마다 문을 열었으나 그 간격이 50년으로, 다시 25년으로 줄었다. 25년마다 돌아오는 희년의 첫 날, 교황이 은망치로 벽돌벽을 두들겨 이 문을 열고 순례자들이 출입할 수 있게 한다. 가장 최근에 개폐된 일시는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가 자비의 희년을 기념하여 개문한 2015128일이다. 그 덕분에 우린 거룩한 문으로도 불리는 성년의 문을 통해 대성당 안으로 들어가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참고로 나머지 4개의 문은 죽음의 문(Door of Death)과 선악의 문(Door of Good and Evil) 그리고 필라레테 문(The Filarete Door), 성사의 문(Door of the Sacraments) 등이다.

 

 

대성당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몇 가지 지켜야할 것이 있다. 복장에 관한 것인데, 모자를 써서는 안 되고, 슬리퍼도 안 된다. 끈으로 묶는 슬리퍼는 되지만 해변용 슬리퍼는 안 된다. 여자든 남자든 너무 노출이 심한 옷 역시 안 된다. 반바지와 면(綿)티에다 운동화가 가장 무난할 것 같다. 이 규정은 가톨릭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1998년 사도회법을 통하여 강화된 것이라고 한다.(원칙적으로 남성의 경우 반바지도 입장 불가이지만 여행자의 경우 양해가 된다.)

 

 

성당 내부로 들어서자 나도 몰래 눈이 휘둥그레진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화려했기 때문이다. 과연 기독교 세계의 모든 교회 가운데 가장 위대한 교회라는 칭호를 받을 만하다.

 

 

 

 

오른쪽 복도에서 미켈란젤로(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의 유명한 걸작 피에타(Pieta)’를 만난다. 미켈란젤로가 불과 25세에 만든 작품으로, 성모 마리아께서 십자가에 묶여 죽임을 당한 예수님을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다. 예수의 늘어진 시신을 안고 있는 마리아의 모습에서 애절한 슬픔이 묻어 나온다.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가 서명을 새겨 넣은 유일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데, 자신의 이름을 마리아의 어깨띠에 새겨 넣었다고 한다. 참고로 피에타가 제작되기 전, 의뢰인(프랑스의 추기경인 장 드 빌레르’)은 미켈란젤로에게 조건을 내걸었다고 한다. ‘로마에서 지금까지 한 번도 본적이 없을 만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각품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피에타가 고대 그리스나 로마 시대의 조각들마저 압도한다는 찬사를 받았으니 결국 의뢰인과 맺은 계약조건을 이행한 셈이다.

 

 

피에타는 유리 막으로 차단되어 있다. 테러(terror)에 대한 보호 조치라고 한다. 이 걸작은 1972년 엄청난 수난을 겪었다. 정신병 환자인 한 청년이 자신을 예수라고 칭하면서 이 작품을 망치로 12번이나 찍어내려 성모마리아의 왼팔과 얼굴이 손상되고 말았다. 일부 파편들이 사라졌지만 바닥에 떨어진 미세한 가루까지 찾아내 정성스럽게 복원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사건 후 피에타는 유리 막 너머로만 바라볼 수 있게 됐다. 그나저나 대단한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엄청나게 큰 대리석을 깎아내 조각했는데 어떻게 저렇게 매끈하고 아름다운 굴곡과 따스함을 만들어 낼 수 있었는지 정말 불가사의하다. 그래서 모세상’, ‘다비드상과 함께 미켈란젤로의 3대 걸작중 하나로 꼽히는가 보다.

 

 

어느 것 하나 예술품이 아닌 것이 없다. 화려하기 짝이 없는 천장도 그중 하나이다.

 

 

13세기 아르놀포 디 캄피오(Arnolfo di Cambio)’가 제작한 성 베드로의 청동상(Statue of St. Peter)’이다. 이 청동상은 대성당을 방문하는 신자들이 동상의 발을 만지면서 기도하기 때문에 발이 반질거린다. 성 베드로의 이름이 반석(盤石)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그의 발을 만지면 기도가 이루어진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 성당의 베드로상 뿐만 아니란다. 다른 성당에서 만나게 되는 베드로상들도 너나할 것 없이 발이 반질거린다고 한다. 하긴 기도가 이루어진다니 어느 누군들 만지지 않고 배기겠는가. 하지만 내 눈엔 성인의 발보다도 그의 손가락이 더 흥미로워 보인다. 승리의 표시인 알파벳 ’V'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누가, 언제, 어떤 이유로 만들었는지가 늘 궁금했었다. 그런데 그 범인이 베드로성인이셨을 지도 모르겠다. ‘그리스도(Christ여 영원하라!’를 외치기 위해서 말이다. 참고로 청동상의 위쪽에는 살레시오 수도회의 설립자 성 요한 보스코(Giovanni Melchiorre Bosco)1857년 임시 희년을 선포하면서 이 청동상의 발에 입을 맞춰야 대사를 받을 수 있다고 한 교황 복자 비오 9(B. Pius IX)의 모자이크 초상화가 장식되어 있다. 성 베드로의 축일인 629일에는 금실로 수놓은 제의를 이 청동상에 입히고 미사를 집전한단다.

 

 

대성당의 한가운데에는 중앙 제대(祭臺, 제단의 옛말)가 있다. 교황이 미사를 집전하는 곳이다. 그 위를 닫집 모양의 발다키노(Baldacchino)가 덮고 있는데, 그 높이가 꼭대기의 황금 십자가 부분까지 무려 29m나 되며 무게는 자그마치 37,000kg에 달한다.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의 작품인 이 발다키노는 1625우르바노 8의 명령에 따라 1633629일 성 베드로의 축일에 완성되었다. 하지만 이 발다키노(Baldacchino)는 높은 예술성에도 불구하고 제작 당시에는 과다한 청동 사용 때문에 비난의 대상이었다. 심지어 판테온 내부 천장에서 수십 톤의 청동을 떼어 와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한편 이곳은 전통적으로 새로 임명된 주교 또는 로마를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세계 각국의 주교단들이 자신들이 맡은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며 아울러 교회제도에 순종하겠다는 서약이나 갱신을 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전통은 6세기경부터 생겼다. 중앙 제대 밑에는 성 베드로를 포함한 역대 교황의 시신이 안치된 지하 묘지가 있다.

 

 

발다키노(Baldacchino)의 지붕을 받치는 네 개의 나선형 기둥은 마치 소용돌이치듯 감겨 있는 모양을 띠고 있는데 이는 사람의 영혼이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것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내부 중앙에는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가 빛을 뿜어내는 모습으로 부조되어 있고, 위쪽으로 네 명의 천사가 화관을 하늘로 끌어올리고 있다. 또 다른 작은 천사들은 삼중관과 열쇠, 칼과 복음서를 들고 있다. 삼중관과 열쇠는 성 베드로를, 칼과 복음서는 성 바오로를 상징하고 있다. 참고로 발다키노는 천개(天蓋)라고도 불리며, 교황 우르바노 8세가 20대 청년 베르니니에게 명해 1625년부터 1633년까지 8년에 걸쳐 청동을 주재료로 금박을 입혀 제작된 바로크 양식의 걸작이다.

 

 

 

발다키노의 위에는 미켈란젤로가 설계했다는 대성당의 돔(dome)이 있다. 돔의 높이는 136.57미터다. 올려다보고 있으면 너무나 아득해서 실제의 높이를 가늠한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데 빌딩 15층 높이쯤 된다고 한다. 이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돔이다. 돔의 안쪽 지름은 41.47m, 앞서 만들어진 두 개의 거대한 돔들(고대 로마의 판테온, 초기 르네상스의 피렌체 대성당의 돔)보다 조금 작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가들은 어떻게 하면 이 건물이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돔으로 보이게 할지 해결책을 찾으려고 판테온과 피렌체 대성당의 돔을 참고했다고 한다. 돔 공사는 자코모 델라 포르타(Giacomo della Porta)’폰타나(Domenico Fontana)’가 끝마쳤다. 교황 식스토 5의 치세 마지막인 1590년이다. 새 교황 그레고리오 14세는 폰타나가 채광창을 완성한 것을 보고 식스토 5세에게 경의를 표하는 명각을 돔 안쪽 틈에 새기도록 하였다. 그리고 다음 교황인 클레멘스 8세는 대성당 안에 십자가를 세우게 했다. 이 십자가의 양팔 부분은 두 개의 납 용기로, 한쪽에는 성십자가의 파편과 성 안드레아의 유골이 들어 있으며, 다른 한쪽에는 거룩한 양의 원형 초상화를 담고 있다고 한다.

 

 

대성당 내부에는 400개가 넘는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고 한다. 아래 사진으로 첨부되어 있는 피오 10세의 기념비베네딕토 15세의 기념비’, ‘그레고리 13세의 기념비그리고 가톨릭을 위해 왕위까지 내던진 스웨덴의 여왕 크리스티나의 기념비외에도 수많은 조각상들이 성당 내부 곳곳에 들어앉아 있다.

 

 

 

 

 

 

 

 

 

 

 

 

! 이분도 손가락으로 뭔가를 만들고 있다. 승리(Victory)를 나타내는 ‘V'자 모양이 분명하다. 아까 베드로 성인의 상을 보면서 우리가 무의식중에 만들고 있는 ‘V'의 기원을 베드로 성인에서 찾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분은 베드로성인에게서 전수를 받았나 보다. 웃자고 한 얘기이니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실은 ‘V'자를 맨 처음 표시한 사람이 영국의 처칠 수상으로 알려지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이 나치에 점령당하고 영국만 홀로 싸우고 있을 때 처칠은 승리의 ‘V' 표시를 상징삼아서 희망과 비전을 제시했다. 당시 전쟁 소식을 전하던 각 나라의 신문들마다 ‘V'자 표시를 하는 처칠의 모습이 항상 헤드라인을 장식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왕에 나온 김에 ‘V'자에 얽힌 옛 얘기를 하나 더 해보자. ‘V'자의 기원이다. ‘V'의 기원은 600년 전에 일어났던 백년전쟁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415년 프랑스 북부의 작은 마을인 아쟁쿠르에서 영국의 왕 헨리5세가 이끄는 6,000명과 2만 명의 프랑스군이 전투를 벌였다. 그런데 활을 쏘는 영국 병사들의 실력이 워낙 뛰어나 프랑스군들이 고전을 면치 못했단다. 그래서 프랑스군들이 전쟁에서 이기면 영국 궁수들의 두 손가락, 즉 활시위를 당기는 집게손가락과 가운데손가락을 잘라버리겠다고 경고를 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전투는 영국군이 승리하게 되었고, 영국군 궁수들이 도망가는 프랑스군들을 향해 두 손가락을 들어올리며 내 손가락은 무사하다고 조롱한데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V'자 표시가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세상에 널리 퍼지게 되었으니 승리는 역시 전쟁의 산물인 모양이다.

 

 

 

 

 

 

 

대성당에는 따로 분리된 제대(祭臺)44개나 갖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건 성 세바스티아노 경당(Chapel of St. Sebastian)’이 아닐까 싶다. 경당의 제대 윗부분을 장식하는 성화는 3세기 로마 제국의 군인이었다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 발각되어 화살형에 처해졌으나 죽지 않고 살아남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앞에서 그리스도교 박해를 비판한 후 다시 처형당한 성 세바스티아노(Sebastiano)의 순교 장면을 그린 것이다. ‘도메니코 참피에리(Domenico Zampieri)’1628~1631년에 그림으로 그렸는데, 이를 다시 피에트로 파올로 크리스토파리(Pietro Paolo Cristofari)’1730~1736년에 모자이크화로 교체했다. 제대(祭臺)의 아래쪽에는 교황 복자 인노첸시오 11(B. Innocentius XI)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그는 원래 대성당 지하 무덤에 안장되었지만 1956107일 비오 12세 때 시복되면서 관을 열었는데 사후 267년이 지났음에도 유해가 부패하지 않은 상태였다고 한다. 이로부터 55년 뒤인 201153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시복을 기념해 사람들이 보다 가까이에서 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여기에 관을 마련하고 대성당 지하 무덤에 있던 유해를 이장했다

 

 

이 외에도 '성 히에로니무스(St. Eusebius Hieronymus) 제대(아래 사진)', ‘성체 경당(Blessed Sacrament Chapel)’, 세례 경당(Baptistery Chapel), 무염시태 제대(Altar of Immaculate Conception) 등 수많은 제대들을 만날 수 있다.

 

 

 

 

 

 

 

 

 

 

밀랍인형 같은 것도 보인다. 하지만 인형이 아니란다. 교황의 시신(屍身)이란다. 부활에 대한 믿음 때문에 저렇게 보존한다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성당들은 예배를 드리는 곳이기도 하지만 성인들의 무덤으로도 사용되는 게 일반적이다. 지금 둘러보고 있는 베드로 성당을 베드로의 무덤위에다 지은 것도 그런 연유에서가 아닐까 싶다. 참고로 대성당은 베드로성인의 무덤 위에 지어졌다. 하지만 그의 무덤 외에도 백 개가 넘는 무덤들이 있다고 한다. 대부분 대성당 바로 밑 지하 동굴에 자리 잡고 있단다. 이곳에는 성 베드로를 시작으로 역대 교황의 대부분을 비롯하여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Sant’ Ignazio di Antiochia, St. IGNATIUS of Antioch)’, 신성 로마 제국의 오토 2세 황제, 작곡가 조반니 피에르루이지 다 팔레스트리나(Giovanni Pierluigi da Palestrina)도 매장되어 있다. 본국에서 추방당해 교황 클레멘스 11세에게 망명을 신청해 의탁한 영국의 가톨릭교도 왕족인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James Francis Edward Stuart)‘와 그의 두 아들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 그리고 헨리 베네딕트 스튜어트도 이곳에 묻혀 있다. 또한,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의 아내인 마리아 클레멘티나 소비에스카와 왕위를 포기하고 가톨릭 신앙으로 회심한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도 이곳에 묻혀 있다.

 

 

눈앞이 빙빙 거린다. 너무 많은 작품들이, 그것도 너무나 뛰어난 걸작들이 끊임없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모든 작품들을 몸과 마음, 눈과 머리로 받아들였지만 내 머리가 지닌 용량으로는 그 모든 것을 담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성당에서 버틸 수도 없는 일이기에 아쉽지만 성당을 빠져나온다. 베르니니가 설계했다는 바로크 건축의 걸작인 산 피에트로 광장(Piazza di San Pietro)이 눈앞에 펼쳐졌다. 시야가 뻥 뚫리는 기분이다. 30만 명이나 수용할 수 있다는 거대한 규모, 화려한 장식, 과장되고 극적인 분위기를 모두 다 갖춘 이 곳은 크리스마스 미사, 부활절 미사 등 큰 행사 때 마다 뉴스에서 자주 보았던 그곳이다. 성당 안에서 부딪쳤던 신선한 충격들의 여파 탓인지 아까 성당으로 들어갈 때와는 또 다른 의미로 내게 다가온다.

 

 

밖으로 나오니 독특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보인다. ‘스위스 근위대란다. 화려한 옷만큼이나 근위대에 얽힌 사연도 흥미롭다. 이들의 바티칸과의 인연은 1505율리우스 2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율리우스 2세는 성 베드로 대성당을 개축하면서 스위스연방에다 용병을 요청했고, 그 결과 취리히와 루체른에서 약 200여명이 알프스를 넘어 로마에 입성했다고 한다. 그 후 모략과 술수로 교황에 오른 클레멘스 7가 스페인 왕실의 공격을 받게 되는데, 당시 살아남은 40여명의 스위스 근위병들이 교황과 추기경들을 산탄젤로성으로 대피시킴으로써 임무를 완수했다고 한다. 교황청은 그들의 용맹성에 감탄해 정식 근위대로 발탁하게 됐다는 것이다. 매년 56일이면 신참 용병들의 교황과 교회에 대한 충성 서약식이 거행되는데, 옛날과는 달리 요즘엔 지원자가 점점 줄고 있다고 한다.

 

 

 

 

 

성 베드로 광장(Piazza San Pietro)잔 로렌초 베르니니(Giovanni Lorenzo Bernini)’1656~1667년에 걸쳐 설계, 완성한 크고 아름다운 광장으로 최대 30만 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다. 그리고 광장에 운집한 보다 많은 군중들이 대성당 정면에 있는 강복의 발코니와 사도 궁전에서 거행되는 교황의 강복 장면을 볼 수 있도록 원 두 개를 겹친 타원형으로 평면을 만들었다. 성 베드로의 대표적인 지물이 열쇠이기 때문에 광장의 모양은 열쇠 구멍 모양이다. 로마 시내의 좁은 골목길을 지나다가 광활한 광장이 갑자기 시야에 펼쳐지게 해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한 것이 베르니니의 의도였으나, 1929211일 체결된 라테라노 조약으로 교황청과 이탈리아 정부가 화해한 것을 기념해 베니토 무솔리니가 카스텔 산탄젤로에서 성 베드로 대성당까지 이어진 화해의 길(Via della Conciliazione)이라는 대로를 개통하면서 그 길목에 있던 궁전과 성당 및 여러 고택들을 모두 철거해버려 베르니니의 의도가 빛을 바랬다.

 

 

 

 

 

광장의 중앙에는 거대한 오벨리스크(Obelisk)가 세워져 있다. 높이 25.5미터(기단부까지 합친 높이는 41m)에 무게가 무려 320톤이나 된단다. 저 오벨리스크는 기원전 30년경쯤 이집트에 있던 로마 총독 코르넬리우스 갈루스(Cornelius Gallus)’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명을 받들어 알렉산드리아의 포룸 율리움(Forum Julium)’에 세운 것이다. 37년 칼리굴라 황제가 로마로 가져와 테베레 강 서안에 만든 개인용 전차경기장에 세웠는데, 자르지 않고 통째로 운반하기 위해 길이 105m에 넓이가 20m나 되는 대형선박까지 건조했던 일로 유명하다. 로마제국의 멸망 이후 방치되어 오다 1500년 뒤 교황 식스토 5의 명령에 따라 도메니코 폰타나(Domenico Fontana)’에 의해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참고로 오벨리스크 위에 올려진 청동제 십자가 내부에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모후인 성녀 헬레나가 예루살렘 성지순례 때 발견해서 가져온 성 십자가의 일부가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오벨리스크를 중심으로 양쪽에는 화려한 바로크 문양으로 장식된 두 개의 분수대(The Fountains)가 자리 잡고 있다. 대성당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오른쪽 분수대는 지금의 대성당 정면을 설계한 카를로 마데르노의 작품이며, 왼쪽의 것은 도메니코 폰타나가 설계한 작품이다. 이 두 분수대는 광장의 아름다운 조화와 균형을 위해 건축했다고 하는데 종교적인 의미로 생각한다면, 하느님의 성전에 들어가기 전에 물로써 죄를 깨끗이 씻어야 한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더욱 크다. 실제로 반세기 전까지만 해도 대성당에 순례 왔던 사람들은 모두 양쪽 분수대의 물을 손으로 떠서 머리 위에 먼저 뿌린 후 대성당 안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대회랑(Colonnade)은 베르니니의 설계로 1656~1667년에 걸쳐 만들어진 광장 주변을 둘러싼 타원형 열주 회랑이다. 마데르노가 설계한 대성당의 화려한 정면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기둥 양식 중 가장 단순한 도리아식 중 토스카나식을 사용했다. 16m 높이의 토스카나식 대리석 기둥 284개와 벽에서 돌출된 기둥 88개가 4개의 열을 이루며 회랑을 형성하고 있다. 대회랑 위에는 난간과 함께 베르니니의 제자들이 제작한 역대 교황과 성인들의 3.24m 높이 조각상 140개가 늘어서 있다. 성 베드로 광장 바닥에는 '회랑의 중심(Centro del Colonnato)'이라고 새겨진 원판이 깔려 있는데 이곳에 서면 4개씩 늘어선 대회랑의 기둥들이 겹쳐져 하나로 보인다고 한다.

 

 

 

 

영화 우리에겐 교황이 있다(We Have a Pope, Habemus Papam)’에서 교황성하에 선출된 멜빌은 선언 연설 직전 극심한 스트레스를 보이며 연설을 거부하고 교황청을 떠나버린다. 며칠 만에 돌아온 그는 끝내 교황직을 수락하지 않고 스스로 사퇴해버린다. 당시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의 등장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던 수많은 사람들, 그들이 목을 빼고 바라보던 발코니는 과연 어디일까? 누군가는 자주 빛 벨벳 커튼이 쳐진 방이라고 했다. 또 어떤 이는 정면 2층에 있는 3개의 발코니 중 중앙부의 발코니라고 했다. 하지만 내 안목으로는 그 발코니를 찾아 낼 수가 없었다. 하여간 그때 멜빌이 섰던 그 발코니는 '강복의 발코니(Loggia delle Benedizioni)'라고 불린다. 원로 추기경단이 콘클라베에서 새로운 교황이 선출되었음을 선언하는 장소이자, 새 교황이 광장에 운집한 군중 앞에서 첫 강복을 하는 우르비 에트 오르비(Urbi et Orbi)가 열리는 장소로 유명하다. 이외에도 매년 성탄절과 부활절 정오에 교황이 전 세계에 보내는 우르비 에트 오르비(라틴어: Urbi et Orbi)’ 또한 여기서 이뤄진다.

 

 

 

 

에필로그(epilogue). 대성당의 투어는 이것으로 끝난다. 하지만 뭔가 허전하다는 느낌이 든다.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무릎을 탁 치고 만다. 그렇다. 큐폴라(cupola, 잔을 엎어 놓은 모양의 작은 dome)를 못 올라본 것이다. 성 베드로 광장과 로마 시내를 조망할 수 있다는 그 전망대 말이다. 만일 551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게 거추장스럽다면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면 되는데도 말이다. 주어진 시간이 넉넉하진 않았지만 서두르면 다녀올 수는 있었다. 그런데도 올라가보지 못한 이유는 메모를 하지 않는 평소의 내 습관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탈리아로 오기 전부터 올라가본다고 염두에 두었는데도, 막상 현장에 도착하고 나서는 그만 깜빡해버린 것이다. 만일 메모를 하는 습관만 가졌었더라면 이런 일은 결코 생기지 않았겠기에 하는 말이다. 후회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지나가버린 일을, ‘소 잃고 외양간이라도 고쳐야겠다.’ 그래야만 똑 같은 후회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게 될 것이다.

여행지 : 두바이, 스위스, 이탈리아

 

여행일 : ‘16. 3. 12() - 20()

일 정 :

3.13() : 두바이

3.14() : 스위스(루체른)

3.15()-19() : 이탈리아(밀라노, 피렌체, 로마, 소렌토, 폼페이, 나폴리, 베니스, 볼로냐)

 

여행 다섯째 날 오전 : 나라 안의 나라 바티칸시국(Vatican City State)’의 박물관(Musei)

 

특징 : 유럽 여행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게 이탈리아이다. 그중에서도 여행객들이 빼놓지 않고 꼭 들리는 곳이 바로바티칸시국(Vatican City State)’이다. 이탈리아의 로마 북서부에 있는 면적 0.44km²에 불과한 이 곳은 인구 1,000명이 안 되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이다. 하지만 바티칸은 교황이 지배하는 독립국으로, 가톨릭 최고의 성지다.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작은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인류에 미치는 영향력만큼은 매우 강력하다. 가톨릭의 본거지로 종교적 구심점 역할을 할 뿐 아니라 문화예술의 보고이기도 하다. 강력한 권력을 누렸던 교황들이 수집한 고문서,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의 명작을 비롯해 뛰어난 예술품들이 가득해 발길 닿는 곳마다 당대의 명작이 눈을 사로잡는다. 가톨릭신자는 물론 로마를 방문한 세계 각국의 여행자들이 꼭 한번 바티칸을 들리는 이유다.

 

바티칸박물관(이탈리아어 : Musei Vaticani) : 세계 최대급 규모의 미술관 가운데 한 곳으로 로마 가톨릭교회에 의해 세워진 광대한 전시관에는 수세기에 걸친 예술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바티칸 궁은 총 1400개가 넘는 방들로 이루어진 궁전이다. 그중 교황들이 모아 온 예술 작품들을 전시한 몇몇 건물이 박물관이라고 보면 된다. 참고로 바티칸 궁1377년 교황이 아비뇽 유수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퇴락한 권위를 다시금 세우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진 궁전이다. 그러다 보니 그 화려함과 웅장함이 극치에 달한다. 건물들은 1550년대부터 짓기 시작한 것이다. 박물관은 안에 전시되어 있는 작품들뿐만 아니라 건물의 외관 또한 하나의 예술품이라는 얘기이다. 바티칸 박물관은 교황 율리우스 2(1503~1513)가 개인적으로 모아 두던 소장품들의 전시에서 그 기초를 찾을 수 있다. 현재의 박물관의 모습은 교황 클레멘스14(1769~1774)와 피우스 6(1775~1799)가 적극적으로 후원해 기초를 다졌다. 이후에 고레고리우스 16세는 이탈리아 남부 지방에서 수행되던 발굴 작업으로 발견된 고고학적 유물들을 가지고 에트루스코 박물관을 설립한다(1837). 또한 바티칸 궁궐에서 소장할 수 없던 이집트 탐사에서 발견한 고대 물품들과, 바티칸과 카피톨리노 박물관에 소장되던 물품들, 그리고 로마 시대의 석상들과 모자이크들을 소장한 이집트 박물관(1839)도 설립했다. 이후 1900년대에 박물관 모습이 정비되었고 1970년도에 들어서서 지금의 박물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2000년도에는 지금의 박물관 입구가 건립되어 본격적인 바티칸 박물관의 맥을 잇고 있다. 하지만 일반 관람객들에게 모든 전시물이 공개되지는 않는다.

 

 

 

버스에서 내려 바티칸시티(Vatican City)로 가는 길, 가이드의 채근이 심하다. 조그만 차이로 인해 안으로 들어가는 시간이 많이 늘어나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입장객들이 늘어선 줄이 시간과 비례해서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버린단다. 그 덕분에 우린 뛰다시피 해서 바티칸시티의 성벽(城壁) 아래에 도착했다. 바티칸 전체를 둘러싼 이 성벽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듯, 845년 외세의 침략을 받은 이후에 쌓은 것이라고 한다. 서두른다고 부산을 떨어봤지만 그게 그거였나 보다. 먼저 도착한 여행자들이 만들어 놓은 줄이 그 끝이 안 보일 정도로 길었기 때문이다. 입장은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늘어선 줄이 들어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속도는 지렁이가 기어가는 수준에 가깝다. 왜 그렇게 속도가 느린지는 게이트 앞에 이르러서야 알게 되었다. 반대편의 줄이 끝나야만 우리 쪽 줄의 입장이 허락되고 있는 것이다. 박물관의 관람 시스템(system)온라인(on-line) 예약을 위주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이란다. 때문에 우리같이 현장에서 티켓을 구입한 사람들은 입장을 하다가도 온라인 예약자들이 오면, 그들을 먼저 들여보낸 후에야 다시 입장이 가능한 것이다.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검색대들 통과해야만 한다. 그런데 그 통과절차가 거의 국제공항 수준이다. 하긴 그럴 만도 하겠다. 비록 작다고는 하지만 바티칸시티(Vatican City)도 어엿한 국가임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우린 지금 국경을 넘어가고 있는 셈이 된다. 거기다 세계적인 문화재들로 가득 차 있는 곳이니 어찌 허술하게 통과를 시켜줄 수 있겠는가.

 

 

검색대를 무사히 통과하면 이어폰 달린 수신기가 지급된다. 이곳에서 잠깐의 짬이 허락된다. 박물관 안에는 화장실이 없으니 미리 다녀오라는 것이다. 그 시간에 난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사진에서 보아오던 조각품들이 보인다. ‘벨베데레의 토르소(Belvedere Torso)’는 알겠는데 다른 것들의 이름은 생각이 안 난다. 나도 기억이 흐려지는 나이가 되었는가 보다. 참고로 이 조각품들은 모조품이다. 진품은 잠시 후 박물관 안의 전시장에서 만날 수 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위로 오른다. 이번에도 역시 조각품들을 만나게 된다. 하나 같이 맨몸이다. 그리고 거침없이 성기(性器)들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누구하나 그것에 신경 쓰는 사람들은 없다. 여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예술과 외설(猥褻)의 차이인가 보다.

 

 

 

 

 

 

바티칸 투어는 기본적으로 미술관 여행이다. 본격적으로 관람하기 전 개략적인 해설과 눈 여겨 봐야 할 작품에 대한 설명이 30분 이상 이어진다. 이를 위한 공간이 '피냐의 안뜰(Cortile della Pigna)'이다. '피냐의 안뜰''천체 중의 천체'라는 현대 조각 작품과 고대 로마를 상징하는 거대한 '솔방울의 분수'가 인상적이다.

 

 

본격적인 투어를 시작하기 전에 잠시 햇볕을 쬐며 숨을 고르는 곳이다. 박물관 안에서 지켜야할 기본 에티켓과 전시된 예술품에 대한 기초 소양을 미리 알아두는 것은 물론이다.

 

 

정면으로 바티칸 박물관(이탈리아어 : Musei Vaticani) 건물이 보인다. 바티칸박물관은 성 베드로성당(바티칸대성당)에 인접한 교황궁 안에 있는 여러 미술관 등을 아우른다. 하지만 곳곳에 작품이 있어 발길 닿는 곳은 전부 박물관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참고로 박물관의 시초는 1503년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아폴론 상을 궁 안의 벨베데르 정원에 들여온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3년 뒤 라오콘 군상이 더해졌는데, 이때부터 박물관의 역사가 시작됐다고 보는 탓에 2006500주년 행사가 열렸다고 한다. ‘라오콘 군상을 더 중요하게 여겼던 모양이다.

 

 

 

 

로마를 상징한다는 4미터가 넘는 거대한 '솔방울의 분수'이다. 저 솔방울로 인해 솔방울 정원이라는 또 다른 이름도 갖고 있단다. 솔방울 조각 아래 계단은 미켈란젤로가 설계했고 계단 앞 양쪽에 위치한 두 사자 조각은 BC 4백년에 만들어졌는데 이집트의 것이라고 한다.

 

 

지구의 환경오염을 경고하는 지구 보양의 조형물 천체 속의 천체도 눈에 띈다. '아르날도 포모도로(Arnaldo Pomodoro)'의 작품이란다.

 

 

광장의 한켠에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최후의 심판등의 그림이 전시돼 있다. 이는 시스티나 예배당에서는 사진 찍는 것을 금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림의 앞에는 수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작품 설명에 열을 올리고 있는 가이드들도 보인다. 시스티나 예배당 안에서는 작품에 대한 설명도 할 수 없기 때문이란다. 설명은 대부분 기독교와 로마의 역사, 성경의 주요 장면들, 작가와 작품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미술사에 관심이 많은 이들에겐 더 없이 좋은 기회이고, 그렇지 않은 여행자에게도 충분히 호기심을 자극할 만하다.

 

 

 

 

 

 

 

 

바티칸 박물관 내부로 들어간다. 바티칸의 궁전을 박물관으로 만든 것이다. 박물관 입구 왼쪽에 있는 계단으로 오르면 바로 이집트 박물관 쪽으로 갈 수 있다. 계단에 오르기 전 오른쪽으로 길고 넓은 통로에 각종 조각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키아라몬티 전시관(Museo Chiaramonti)’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곳을 그냥 지나쳐버린다. 앞으로 보게 될 예술품에 대한 기대감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곳 역시 상당히 중요한 곳이다. 브라만테가 만든 복도이며, 이곳의 조각물은 기원전의 작품에서 기원후 1, 2세기에 걸친 오래된 작품들이 많다. 이탈리아 고대사와 복식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장소로 알려져 있다. 참고로 키아라몬티(Chiaramonti)1800~1823년에 교황으로 재직한 인물이다. 1807년에 안토니오 카노바의 계획으로 이 복도에 1000개가 넘은 조각물을 전시했다.

 

 

키아라몬티 전시관에 있는 여러 조각 작품들은 전부 진품이란다. 그리고 이 전시관에 있는 작은 조각품 하나에 불과할지라도, 다른 박물관에 가면 최고의 대접을 받고도 남을 작품들이 수두룩하단다. 그러나 이곳에는 워낙 뛰어난 작품들이 많아서 안타깝게도 대개의 작품들은 작은 명찰 하나만을 달고 구석에 전시되어 있다. 누군가 그랬다. ‘이곳 구석의 조각물 5개만 있으면 한국에다 큰 미술관을 만들고도 남는다.’. 그 말이 거짓이 아닐 수도 있겠다.

 

 

 

 

벨베데레 궁전의 뜰(Cortile Ottagonable)에 든다. 팔각형 형태의 뜰로, 역대 교황들이 모아 놓은 조각상들이 있다. 이 곳에서 그리스 시대부터 로마를 거쳐 1800년대까지의 다양한 조각들이 전시돼 있는 피오-클레멘타인 박물관(Pio-Clementine Museum)’을 접할 수 있다. 박물관은 동물의방’, ‘뮤즈의 방’, ‘원형의 방’, ‘그리스 십자가의 방등 여러 개의 전시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미술관에서 가장 주목해봐야 할 작품은 라오콘 군상(Laocoon and His Sons)’이다. 이 조각상이 미술관의 역사와 맥을 같이하기 때문이다. 1506114,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500년 전. 로마의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 인근의 포도밭에서 조각상 하나가 발견되었다. 그리스 신화 속 아폴론 신의 점술사이자 신관인 라오콘(Laocoon)을 새긴 조각상이다. 당시 교황이었던 율리오 2세는 이 조각상을 구매하여 바티칸에 진열하여 일반 대중들이 볼 수 있게 했는데, 후세 사람들은 이 시점을 비오-클레멘스 박물관(Pio-Clementine Museum)’의 기원으로 보고 있다. 참고로 라오콘(Laocoon)은 독신을 지키겠다던 맹세를 어기고 자식을 낳았다는 이유로 아폴론 신이 보낸 포르케스와 카리보이아(또는 쿠리시아나 페리보이아)라는 2마리의 큰 바다뱀에 깔려 그의 쌍둥이 아들인 안티파스와 팀브라이우스(또는 멜란토스)와 함께 죽었다. 이런 벌을 받게 된 또 다른 이유는 그리스인들이 놓고 간 목마를 성내에 들여서는 안 된다고 트로이인들에게 경고함으로써 천기를 누설했기 때문이다. 앞에 있는 조각상은 뱀에게 질식당해 죽어가는 장면이라고 보면 된다. 고통으로 뒤틀린 라오콘의 육체와 일그러진 표정,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핏줄과 뱀을 떼어 내려 안간힘을 쓰는 그의 팔은 보는 이로 하여금 공포마저 느끼게 한다. 다른 곳에 비해 커진 손과 다리, 그리고 지나치게 왜소하게 묘사된 두 아들 때문에 전체적인 비례는 맞지 않지만 강렬한 감정 표현을 저해하지는 않는다. 미켈란젤로는 이 조각을 '예술의 기적'이라고 했으며 그의 후기 작품들, 특히 미완성의 '피에타'들은 여기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티그리스강 석상(Stautue of the Tigirs River)’도 눈여겨 볼만하다. 나일강을 의인화한 조각상인 휴식을 취하고 있는 나일강의 신(Staute of the Nile recumbent)’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 작품으로 라오콘군상과 마찬가지로 헬레니즘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다.

 

 

 

 

그리스 신화의 가장 이상적인 남성상인 벨베데레의 아폴로(Apollo del Belvedere, Apollo Belvedere)’도 눈에 담는다. 활을 쏜 직후 날아가는 화살을 응시하고 있는 아폴로 상()’은 미()와 조화, 그리고 균형감까지 갖춘 고전미(古典美)의 표준이다. 기원전 4세기 무렵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이 작품에 대해 독일의 미술사가이자 고고학자인 빙켈만(Johann Joachim Winckelmann)자연과 예술,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상의 성취라고 평가했을 정도이다. 남성의 육체를 어쩌면 이처럼 아름답게 묘사할 수 있을까? 또 하나 아폴로의 어깨와 팔에 걸쳐진 망토의 사실적인 주름과 그의 발에 신겨진 샌들은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비너스 펠릭스(Venus Felice), 기원전 4세기경에 프락시텔레스(Praxiteles)가 만든 비너스상을 모방하여 만든 작품이란다. 이 조각의 얼굴은 2세기경의 한 여왕후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부인인 파우스티나이거나 혹은 코모두스의 부인이며, 파우스티나의 며느리인 크리스피나의 모습으로 추정 된단다.

 

 

벽감 곳곳을 장식하고 있는 고대 로마의 조각들. 하나하나가 미술의 모범으로 삼을 만하다. 말 그대로 '고전'의 작품들이 계속 이어진다. ‘안토니오 카노바(Antonio Canova)’의 작품인 메두사의 머리를 들고 있는 페르세우스(Perseus and the head of Medusa)’도 그중의 하나이다.

 

 

뮤즈의 방(Sala delle Muse)에는 그리스 로마시대에 나오는 9명의 뮤즈여신상이 전시돼 있다. 학물, 예술, 시 등을 주관하는 신으로, 티볼리에 있는 하드리아누스 별장에서 발굴한 것을 복사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방에서 최고 인기 있는 작품은 토르소이다, 미켈란젤로가 그 자체만으로도 완벽하다고 극찬한 작품이다. 애초부터 머리와 팔다리가 없는 형상으로 발견된 벨베데레의 토르소(Belvedere Torso)’는 강렬한 남성미를 느끼게 한다. 짐승 가죽을 깔고 앉아있는 남성의 상체만 남아있는데, 아테네의 아폴로니오스가 조각한 것이라고 한다. 트로이 전쟁의 영웅 중 한 명인 아이아스 장군이 자결하는 모습으로 추정된단다. 특히 이 작품을 좋아했던 미켈란젤로는 작품의 나머지 부분을 완성해달라는 의뢰가 들어오자 '이것만으로도 완벽한 인체의 표현'이라 극찬하며 거절했다고 한다. 미켈란젤로의 예술 정신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이곳은 동물들의 조각을 모아놓은 동물의 방(Sala Degli Animali)’이다. 훌륭한 조각가가 되기 위해서는 동물모양으로 기초를 닦은 후 인체조각으로 넘어가는 수순을 밟았다고 한다.

 

 

 

 

 

 

 

원형의 방(Sala rotonda)은 돔으로 된 천장이 인상적이다. 이 돔은 로마 판테온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크기가 21.6m에 이른다. 전체적으로 큰 원형을 그리고 있는 이 방에는 헤라클레스, 주피터, 안토니우스, 하드리아누스황제, 헤라 등 로마 황제의 두상과 그리스, 로마의 신상들이 전시돼 있다.

 

 

중앙의 커다란 그릇모양의 대리석 욕조(浴槽)희대의 폭군이었던 네로황제가 사용했던 것이란다. 원경 5m 크기의 적색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는데, 적색대리석이 하도 귀하던 시대라서 황제 이외에는 사용할 수 없었다고 한다. 욕조가 꽤 높아 어떻게 올라갔을까 의문을 갖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해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노예를 엎드리게 한 다음, 그의 등을 딛고 올라가면 그만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욕조가 놓인 바닥은 모자이크로 되어 있다. 오트리꼴리 욕장 유적에서 통째로 가져온 것인데, 고대 로마의 솜씨를 엿볼 수 있는 섬세한 무늬가 특징이다. 이 모자이크는 로마신화를 주제로 한 1세기 때의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은 그리스 십자가의 방(Sala a Croce Greca, Greek Cross Gallery)’이다. 입구 양쪽을 지키고 있는 텔라몬(Telamons)은 파라오(Pharaoh)로 분()한 안티누스(Antinous)의 상()을 말하는데, 이탈리아어로는 텔라모네(Telamone)’라 하고 치오치(Cioci)‘로도 알려져 있다. 이집트의 아스완에서 가져온 붉은 화강암이나 섬장암으로 된 이 조각상의 높이는 3.35m1450년경 빌라 아드리아나(Villa Adriana‘에서 발견되었다.

 

 

그리스 십자가의 방(Sala a Croce Greca)’은 그리스 십자가 모양으로 디자인 된 방으로 붉은 화강암으로 만든 붉은 석관(石棺)들이 전시되어 있다. 전쟁하는 장면의 부조가 있는 석관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딸 콘스탄차이다. 또한 전쟁의 여신 아테네이지스가 그려진 원형 모자이크로 장식된 바닥도 눈길을 끈다. 모자이크는 투스콜라나(Tuscolana) 지역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그리스십자가의 방과 연결된 계단을 올라가면 시스티나예배당으로 연결되는 복도가 길게 이어진다. 복도의 양 옆에는 다양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교황 클레멘토 14가 만들고 피오 6가 확장한 피오 클레멘티노 미술관(Museo Pio Clementino)이란다. 이 구역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공간은 촛대의 방(Galleria dei Candelabri)’이다. 고대에 무덤 속을 밝히기 위해 놓았던 촛대와 꽃병, , 그리고 작은 조각상들이 전시되어 있다. 하지만 천장화가 더 눈길을 끈다. 성서의 이야기를 알려주는 화려한 프레스코로 장식돼 있는데, 화려하기 그지없기 때문이다. 촛대의 방은 8개의 촛대 모양의 조각상들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곳의 대표 작품은 아르테미스 여신상과 주신 바코사티로스상이다.

 

 

 

 

두 번째로 만나게 되는 공간은 아라찌의 방(Galleria degli Arazzi)이다. 예술가들의 그림 위에 직공들이 수를 놓은 작품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각 그림은 원근감과 입체감을 최대로 살려, 100% 그림이지만 마치 섬세하게 조각을 해 놓은 듯하다. 이 곳은 타피스트리 회랑이라고도 불리는 데 타피스트리는 두꺼운 실로 직조된 것 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리스어로는 카펫’. 그래서 카펫의 방또는 융단의 방으로도 불린다. 이 곳의 대표작품은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이 작품은 어느 곳에서 바라봐도 그리스도의 시선이 따라온다고 해서 유명하다. 19세기 교황 레오 13세 조각품이 아라찌의 방문 입구에 있다.

 

 

 

 

아라찌의 방에 있는 천정화도 눈여겨 볼만 하다. 얼핏 보면 조각처럼 보이지만 그림이란다. 부조처럼 보이도록 입체감을 살려 그린 회화라는 것이다.

 

 

맨 마지막으로 들르게 되는 곳은 지도의 방(Le Galleria delle Mappe)이다. ‘시스티나 예배당으로 가기 직전의 길이 120m에 너비가 6m인 복도이다. 이곳에는 교황이 주재하는 성당 40개가 있는 지역을 그린 지도를 통해 그 당시의 역사와 지도 작성법을 엿볼 수 있도록 해놓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지도에는 도통 관심이 없나보다. 다들 치켜든 고개를 내릴 줄 모르는 걸 보면 말이다. 그들을 따라 고개를 들어본다. 천장이 온통 황금빛의 그림들로 이루어져 있다. 아름답다. 그런데 그림이 조금 이상하다. 그림의 중간 중간에 사람을 조각해 놓은 것이다. 새로운 장르인가 하는데 곁에 있던 외국인이 놀라 부르짖는다. ‘그림이라는 것이다. 그의 말을 듣고 다시 한 번 눈을 치켜 떠본다. 그의 말대로 그림이 맞았다. 어떻게 사람이 저런 작품을 창조해낼 수 있었을까 싶다.

 

 

지도의 방을 지나면 시스티나 예배당(Cappella Sistina)’으로 연결되는 통로를 만난다. 한 달 내내 구경을 해도 부족하다는 바티칸 박물관 관람을 두 시간이 채 되기도 전에 끝내버렸다. 처삼촌 벌초하듯이 한 셈이다. 그러다보니 빠뜨린 곳도 많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아쉬웠던 곳은 바티칸 박물관의 하이라이트라는 라파엘로의 방(Stanza di Raffaello)‘이다. '서명의 방(Stanza della Segnatura)'에 있다는 그 유명한 '아테네 학당'을 구경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계단을 통해 지하로 내려간다. 극비리에 만들어진 요새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드디어 시스티나 예배당의 안이다. 예배당의 천장은 온통 그림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시스티나에서는 사진촬영 금지는 물론이고 절대정숙이 요구된다. 천장의 그림은 프레스코화로 그려졌는데 이 프레스코화라는 게 단순한 붓질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벽에 물감이 스미게 하는 방법이라고 한다. 벽에 회반죽을 바르고 회반죽이 마르기 전에 물감을 먹여야 하는데 이토록 어려운 프레스코 기법으로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보존력이 탁월하기 때문이란다. 미켈란젤로는 천장에 매달려 천장화를 그렸다. 9개의 틀로 나누고 9개의 틀을 다시 34개의 면으로 나누어 창세기의 내용을 그렸는데 천장의 중앙에다가 하느님으로부터 생명을 부여받는 최초의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를 공평하게 표현했다. 이번에는 눈을 돌려 벽화를 본다. 역시 미켈란젤로가 그렸다는 '최후의 심판'이 있다. 미켈란젤로는 이 그림에서 예수님을 나체로 표현했다. 그리고 천사들로 하여금 흑인노예 둘을 하늘로 인도하도록 했다. 미켈란젤로는 박애주의자였던 모양이다.

 

 

 

여행지 : 두바이, 스위스, 이탈리아

 

여행일 : ‘16. 3. 12() - 20()

일 정 :

3.13() : 두바이

3.14() : 스위스(루체른)

3.15()-19() : 이탈리아(밀라노, 피렌체, 로마, 소렌토, 폼페이, 나폴리, 베니스, 볼로냐)

 

여행 넷째 날 오후 : 황제들의 휴양지, 카프리섬(Isola di Capri)

 

특징 : 나폴리 만의 남쪽 입구 부근에 있으며, 소렌토 반도와 마주보고 있는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섬으로 최고봉은 솔라로 산(589m)이다.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이 섬은 그리스의 식민지이었으며, 로마 제국 초기에는 황제들의 휴양지로 이용되었다. 중세 때 몬테카시노 대수도원에 귀속되었고 아말피 공화국의 일부였다가 나폴리 왕국에 넘어갔다. 나폴레옹 전쟁 중에는 프랑스와 영국에 번갈아가며 점령당하다가 1813년 양 시칠리아 왕국에 반환되었다. 이후 카프리는 남부 이탈리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휴양지 중 하나가 되었다. 물이 부족하지만 기후가 온화하여 식물이 잘 자라는 곳으로 이탈리아에서 가장 다양한 식물상이 분포하며 수많은 종류의 철새 도래지이기도 하다. 섬의 이름은 카프라(capra : '염소')나 카프로스(kapros : '멧돼지') 두 단어 중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높다. 섬에는 아름다운 해수욕장과 수많은 호텔 및 별장들이 있으며, 나폴리와 소렌토로 이어지는 증기선과 수중익선들이 자주 운행된다. 관광업 이외의 산업으로는 농업(포도·올리브·감귤류)과 어업이 이루어진다. 1978년 본토와 연결된 해저 수로가 완공되어 담수가 공급되면서 각종 산업부문이 활성화되고 있다고 한다.

 

 

 

소렌토를 출발한 쾌속선은 30여분 만에 카프리섬의 북쪽 해안에 있는 마리나 그란데(Marina Grande)’ 항으로 들어간다. 방파제로 보호되고 있는 것이 파도가 거셀 때도 있는 모양이다. 하긴 북풍이 특히 강하게 불 때를 대비해서 남쪽에다 마리나 피콜라 (Marina Picolla) 항을 따로 만들어 두었다니 두말하면 잔소리일 것이다. 참고로 이곳 카프리섬은 여행사들이 옵션 투어로 판매하는 상품 중의 하나이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거대하면서도 가파른 바위 절벽들이 눈에 들어온다. 섬이 온통 바위벼랑으로 둘러싸여 있는 듯한 모양새이다. 바위의 색깔이 하얀 것으로 보아 아마 석회암인 모양이다. 로마 초기 황제들은 이 섬을 휴양지(카프레아이)로 이용하였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거주했으며, 티베리우스 황제는 여러 채의 별장을 지었다. 그들은 뭣 때문에 이런 척박한 땅에다 별장을 지었는지가 궁금하다. 섬을 둘러보는 동안 주의 깊게 살펴볼 일이다. 하여간 카프리는 세기의 결혼식주인공 영국 다이애나 비의 허니문 여행지로 알려져 유명세를 더한다. 축구 스타 박지성도 이곳에서 밀월의 단꿈을 꿨다. 파블로 네루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담아 화제가 됐던 영화 일 포스티노(Il Postino)’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항구 옆에 있는 해수욕장을 찾았다. 셔틀버스를 타려면 아직도 한참을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버스가 시간제로 운행하는지가 궁금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아니올시다이다. 이용하려는 사람들에 비해 버스의 숫자가 턱없이 부족했던 게 그 원인이었다. 결국 가이드들끼리 가위바위보로 순번을 정하게 되었고, 그 결과 우리 팀이 맨 꼴찌로 밀려나버렸던 것이다. 당연히 시간이 남을 수밖에 없었고, 그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찾은 곳이 이곳에서 유일하다는 해수욕장이다.

 

 

자그만 해수욕장에는 우리와 함께 섬에 들어온 사람들뿐이다. 여름철이면 비키니 차림의 휴양객들로 넘쳐나겠지만 지금 같은 비수기에는 관광객들 차지가 되는 게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래도 시간이 남아 근처의 노천카페에 자리를 잡는다. 그리곤 피자와 생맥주를 시켜 놓고 잠시나마 망중한을 즐겨본다. 하지만 계산을 치르다가 난 까무러질 뻔 했다. 맥주 값이 피자 보다 더 비싼 것이다. 두둑한 자릿세가 포함된 가격이란다. 주인장과 잠깐의 실랑이 끝에 그냥 값을 치루고 말았다. 미리 물어보지 않고 주문한 내 잘못이 크니 어쩌겠는가.

 

 

전망대로 가기 위해서는 먼저 아나카프리(Anacapri)’까지 올라가야 한다. 전망대까지 왕복하는 리프트가 그곳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아나카프리까지는 마이크로버스(Microbus)가 운행된다. 물론 유료이다. 하지만 19세기에 마차 길이 뚫리기 전까지만 해도 스칼라 페니차(Scala Fenicia, 페니키아의 계단)라고 불리는, 800개의 계단을 통해서만 왕래가 가능했다고 한다.

 

 

아나 카프리로 올라가는 길은 까마득한 절벽을 따라 나있다. 절벽에다 만들어 놓은 나선형의 길을 따라 미니(mini) 버스가 흡사 곡예라도 하듯이 올라간다. 오금이 저리고 아찔하다. 도로는 차 한 대 겨우 비켜갈 정도로 좁다. 빨간 소방차를 비치해 놓은 작은 소방서와 커다란 화분 하나 크기의 로터리는 세계에서 가장 작다고 한다.

 

 

아찔한 절벽도로를 따라 달리는 버스의 차창 밖으로 멋진 풍경이 펼쳐진다. 쪽빛 바다를 낀 하얀 집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옛날 그리스의 지배하에 있었다더니만 그 영향을 받은 모양이다. 하여간 하얀 집들과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코발트빛 바다가 한데 어우러지면서 멋진 그림을 만들어 낸다. 한마디로 장관이다. 그리고 탄성이 절로 나온다.

 

 

 

 

곡예운전은 꽤 오랫동안 계속된다. 그리고 기나긴 가슴조림의 고통을 겪게 하고 난 뒤에야 아나카프리에다 내려놓는다. 아나카프리는 주민들의 고통스런 역사이다. 해적들의 약탈을 피해 해변가의 정착지를 버리고 해안보다 훨씬 높은 지대로 피난을 와서 만든 마을이기 때문이다.

 

 

관광객들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안도의 숨고르기에 들어간다. 손바닥이 촉촉하게 젖어있다는 것은 잊어버린 지 이미 모래이다. 그리고 리프트 탑승장으로 이동한다.

 

 

안나 카프리는 산위에 있는 또 다른 도시이다. 그래선지 카프리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카프리가 레스토랑과 상점들로 번화한 편이라면 아나 카프리는 카프리보다 작지만 고즈넉하고, 소박하고 서민적이다. ‘아우구스투스 정원(Giardini di Augusto)’과 움베르트광장의 시계탑, 작고 예쁜 성당 등 옛 건물들과 아기자기한 상점, 호텔들이 있어 평화로운 휴식을 취하기 알맞다. 하지만 이렇게 높은 곳에다 취락지(聚落址)를 조성한 것은 조망을 위해서가 아니란다. 해적들의 침범과 약탈을 피해서이다. 숨어살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래선지 외부에 알려진 것은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다. 근대에 들면서 카프리섬이 2의 지브롤터라 불릴 정도로 지중해 방어의 요충지가 됐고, 우여곡절 끝에 영국에 점령당하면서 따뜻하고 아름다운 휴양지로 유럽에 널리 알려지게 됐다. 이후 19세기 후반부터는 유럽 예술가들이 즐겨 찾으면서 문학작품에도 자주 등장하는 명소가 됐다.

 

 

아나 카프리의 빅토리아광장에서 1인용 리프트(lift)를 타고 몬테 솔라로(Monte Solaro, 해발 589m)’에 오른다. 허공에 매달리는 것이 두려운 고소공포증 환자들이라면 다소 부담이 될 수도 있겠으니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떨어져도 죽지 않을 정도의 높이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발아래에 펼쳐지는 수채화 같은 풍경은 자신이 지금 리프트에 매달려 있다는 것까지도 잊게 만들어 버린다. 곳곳에서 피어나는 이름 모를 야생화는 물론이고, 산자락에 자리 잡은 그리스풍의 하얀 집들이 한시도 눈길을 떼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일인용 체어리프트(chair lift)에 앉는다. 나무로 된 것이 약간은 허술해 보인다. 거기다 안전장차까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리프트가 출발함과 동시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시원한 바람을 쏘이며 발아래에 펼쳐지는 풍경에 쏙 빠져버렸는데, 그런 걱정이 어느 틈새를 비집고 들어올 수 있겠는가. 이런 걸 보고 눈이 호사를 누린다고 말하는가 보다.

 

 

 

고도가 높아짐에 따라 눈앞의 풍경이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꼭 하늘을 날고 있는 기분이다. 그래. ‘하늘로 오르는 그네라는 표현이 어울리겠다. 하지만 마냥 빠져있을 수만은 없다. 앞서가는 집사람이 자꾸만 뒤를 돌아보기 때문이다. 이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싶다는 마음을 몸으로 표현하는 것일 게다. 그리고 그런 집사람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다보면 어느덧 정상에 도착하게 된다.

 

 

 

 

전망대는 다양한 꽃과 나무로 아기자기하게 조성되어 있다. 정상은 서는 곳마다 모두 조망처이다. 어느 곳을 둘러봐도 그림이고 카메라 셔터만 누르면 작품이 된다. 이런 환상적인 아름다움이 있어 로마의 황제들이 이곳에 별장을 지었나 보다. 그래서 혹자는 이곳 카프리를 일러 속이 붉은 카프리의 오렌지처럼 달고 상큼한 휴양지라고 말하기도 했다.

 

 

 

 

카프리섬 전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보이는 주택의 대부분이 흰색이다 보니 섬 전체가 온통 흰색 천지이다. 여기에 코발트색 바다가 흰색을 더욱 도드라지게 하면서 이국적(異國的)인 정취를 물씬 풍긴다. 한마디로 아름답다. 왜 이곳이 지중해의 보석이라 불리는지 수긍이 간다. 참고로 카프리는 그 아름다움으로 인해 고대 로마 시대부터 사랑을 받아왔다.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카프리 섬의 빼어난 경치에 반해 몇 배나 더 큰 이스키아 섬을 내놓고 카프리 섬을 사들여 자신만의 낙원으로 만들었다. 이후 티베리우스 황제도 이 섬에 12개의 별장을 세워 여생을 보냈다. 오늘날까지도 세계적인 부호들의 별장이 세워지고, 많은 영화의 촬영지로 이용되고 있을 정도로 끊임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

 

 

 

 

 

 

코발트블루 빛 바다와 깎아지른 듯이 서 있는 절벽이 연출하는 절경이 조화롭다. 잉크를 물에 풀면 저런 빛이 나올까? 푸른 바닷물 빛에 눈이 시리다.

 

 

 

 

뒤로 나아가니 수영장이 보인다. 산꼭대기에 수영장이라니 선뜻 수긍이 가지 않는다. 로마 황제들이 이곳 가프리섬을 휴양지로 삼았다더니 그때에 지어진 시설일지도 모르겠다.

 

 

조금 더 나아가본다. 또 다시 너른 바다가 눈앞에 펼쳐진다. 에메랄드빛으로 나타나는 바다가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곱다. 그리고 그 뒤로 소렌토반도가 눈에 들어온다. 폼페이를 삼킨 베수비오산도 아득하게 보인다. 날씨가 좋은 탓인가 보다.

 

 

 

 

 

 

바위틈 사이에 핀 작은 꽃까지 예쁘게 보이는 것은 내 마음의 또 다른 표현일 것이다. 행복에 취하다보면 보는 것마다 모두 아름다운 법이니까 말이다.

 

 

내려가고 싶지 않은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리프트에 오른다. 일정에 맞춰 이동해야만 하는 패키지의 특성 상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저 눈에 담았던 극한의 아름다움들을 가슴으로 옮겨 차곡차곡 쌓아두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 수밖에 없다.

 

 

가프리섬을 출발한 배는 50분쯤 후에 나폴리의 산타 루치아(Santa Lucia)에 도착했다. ‘세계 3대 미항(美港)’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이탈리아 남서부 나폴리 만()에 면하여 있는 거대한 항구도시 나폴리는 캄파니아 주(Campania)의 주도(州都)이다. 지적(知的) 활동의 중심지이자 이탈리아 남부지역의 금융 중심지이다. 나폴리 왕국과 양시칠리아 왕국의 수도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폴리를 보다 널리 알린 건 따로 있다. 나폴리가 끼고 있는 해안이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만()의 하나란다. 이탈리아에는 'Vedi Napoli e poi muori!‘라는 속담이 있다고 한다. ’나폴리를 보고 죽자는 얘기란다. 그 정도로 아름다운 항구라는 얘기일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폴리를 세계 3대 미항(美港)의 하나로 꼽는데 망설이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통영을 보고 사람들은 한국의 나폴리라고 부른다. 그 증거로 사람들은 통영 앞바다의 물결이 잔잔한 것을 든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가곡 산타 루치아(Santa Lucia)’를 들먹인다. 이탈리아의 작곡가 코트라우(Cottrau, T.)가 작곡한 나폴리 민요(民謠)이다. ‘창공에 빛난 별 물위에 어리어 바람은 고요히 불어오누나.’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별이 물빛에 어릴 정도로 나폴리의 앞바다가 잔잔하다는 것을 노래하고 있다. ‘바다이되 바다가 아닌 것처럼 바다가 잔잔하다는 것이다. 실제 나폴리에 와보니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나폴리의 전체적인 풍경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바닷물만은 위에서 말한 표현과 너무나도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잔잔하다는 얘기이다.

 

 

선착장에 내리자 썩 내키지 않는 안내가 전해진다. 나폴리에서는 시가지(市街地) 투어가 없단다. 선착장에서 주차장까지의 거리는 대략 200~300m, 고작 이 정도를 걷는 일정을 갖고 어떻게 패키지여행의 경유지라고 버젓이 홍보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일종의 사기 같아 보여서 하는 말이다. 급히 여행사에서 나누어준 안내서를 살펴본다. 그냥 나폴리 항구 관광이라고만 적혀있다. 하지만 그 아래에는 나폴리에 대한 전체적인 설명이 적혀있다. 사람을 헷갈리게 하는 방법도 참 여러 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어처구니가 없지만 어쩌겠는가. 저렴한 가격으로 따라 나온 여행이니 안내를 하는 대로 따라다닐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항구를 빠져나오다 보면 커다란 성채(城砦)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앙주(Anjou)가의 요새카스텔 누오보((Castel Nuovo ,새로운 성)’란다. 이탈리아인들이 마스키오 안조이노(Maschio Angioino)’라고 부르는 이 요새는 샤를 1세가 지은 13세기의 건축물이다. 앙주가와 뒤를 이은 아라곤 왕들이 거처로 사용했으며 탑의 가운데에 보이는 승리의 아치는 15세기에 아라곤의 알폰소가 나폴리에 입성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사실상 이 성은 15세기 알폰소에 의해 많이 개조되었기 때문에 현재 모습의 대부분으 아라곤양식을 보인단다. 현재는 시청의 청사로 사용되고 있다.

 

 

 

 

버스를 이용해 나폴리를 빠져나오면서 창밖에 비치는 시가지의 풍경을 눈에 담는다. 아쉽기 짝이 없다. 시내 곳곳에 널려있는 문화재들을 무의미하게 그냥 지나치고 있으니 말이다. 조금 전에 보았던 카스텔 누오보는 물론이고, 노르만의 지배 시대에 지어진 성채 카스텔 델로보(Castel dell’Ovo, 달걀의 성)’와 앙주가의 무덤이 있는 14세기의 교회 산타 키아라(Basilica di Santa Chiara)’, 프란체스코회의 교회안 산 로렌초 마조레(San Lorenzo Maggiore)’, 17세기 도메니코 폰타가 에스파냐 왕족들을 위해 지었다는 나폴리의 왕궁인 팔라초 레알레(Palazzo Reale)’, 그리고 로마의 판테온을 연상시키는 플레비시토광장(Piazza Plebiscito)산 프란체스코 디 파롤라(San Francesco di Paola)’ 등 수많은 유적들이 시내 곳곳에 널려있다.

 

 

 

호텔에 도착했다. 사위는 아직까지도 훤한데, 남은 일정은 저녁식사뿐이란다. 이렇게 시간이 여유로웠다면 나폴리에서 관광지 하나쯤 들러보았으면 어땠을까 싶다. 그래야 최소한 나폴리를 다녀왔다는 얘기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그러나 여유로운 일정 덕분에 좋은 일도 있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호텔 근처를 배회하다가 멋진 카페를 만났기 때문이다. 배가 불러 그냥 하우스 맥주만 주문했는데 간단한 안주까지 가져다주는 센스는 기본, 거기다 맥주의 맛 또한 거의 환상적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맛이었기 때문이다. 몰핀이라는 이름의 하우스맥주를 가장 좋아한다. 강남역 근처에 있는 맥주가게에서 파는데 그 맛이 새콤하면서도 달짝지근한 것이 여간 마시기 좋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마시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취해버리기 때문에 더욱 좋아한다. 그래서 난 술에다 마약을 탄 게 아닌가 하고 의심까지 했었다. 마침 맥주의 이름까지도 아편의 일종인 몰핀(morphine)‘이었기 때문이다. 하여간 끝내주는 맥주 맛이었다. 거기다 또 하나 좋은 점이 있었다. 주인여자가 젊은데다 미모까지도 빼어나다는 것이다. 친절은 기본이고 농담 끝에 맥주 값까지 깎아준다. 이보다 더 나은 맥주집이 어디 있겠는가. 누군가 인생은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했다. 오늘과 같은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나폴리를 그냥 지나친 것은 못내 아쉽지만, 그 덕분에 이렇게 좋은 시간을 보냈으니 이런 게 바로 새옹지마가 아니겠는가.

 

 

 

 

여행지 : 두바이, 스위스, 이탈리아

 

여행일 : ‘16. 3. 12() - 20()

일 정 :

3.13() : 두바이

3.14() : 스위스(루체른)

3.15()-19() : 이탈리아(밀라노, 피렌체, 로마, 나폴리, 폼페이, 소렌토, 베니스, 볼로냐)

 

여행 넷째 날 오후 : 절벽 위의 도시, 소렌토

 

특징 : 소렌토는 캄파니아주 소렌토반도에 위치한 아담한 어항이다. 로마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의 휴양지였던 카프리와 함께 아름다운 바다로 유명하다. 소렌토라는 지명 또한 로마인들이 이곳을 그리스 신화 속 바다의 요정인 시레나(Sirena)의 땅이라는 뜻으로 수렘툼(Surrentum)’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다. 이탈리아 남부 도시들이 그러하듯 소렌토 또한 절벽 위에 위치해 있다. 구불구불한 지역적 특성으로 소렌토 해안에서는 날이 좋을 때면 나폴리는 물론 폼페이를 삼켰던 베수비오 화산까지 볼 수 있다. 역사적 의의가 있는 건축물로는 여러 차례 개축된 주교 성당과 14세기에 건축된 아름다운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수도원, 캄파니아의 장식미술품과 중세의 조각·그림 및 고전양식의 유물들이 소장되어 있는 코레알레디테라노바 박물관 등이 있다.

 

 

 

폼페이 스카비 벨라 데이 미스테리역(POMPEI scavi Villa dei Misteri)’으로 향한다. 쏘렌토로 가는 열차가 이곳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허전한 느낌은 대체 뭐란 말인가. 뭔가를 놓아두고 온 그런 느낌말이다. 그러다가 가슴을 탁 치고 만다. 그렇다. 이곳 폼페이의 특산물인 레몬(lemon)으로 만든 레몬에이드(Lemonade)’를 맛보지 못했던 것이다. 투어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근처 가게에 들러 한 잔 사보려고 했는데 깜빡 해버린 것이다. 폼페이가 전해주는 메시지가 나에겐 과할 정도로 강렬했던 모양이다.

 

 

 

 

 

 

기차가 들어온다. 나폴리와 소렌토 구간을 운행하는 옛날 우리나라의 통일호에 해당된다고 보면 된다. 그저 지저분하고 불편했던, 그래서 아련한 추억 속에서나 떠올리게 되는 그런 열차 말이다. 두어 해 전인가 전남의 곡성 땅에서 관광열차로 부활시켜 놓은 것을 보았는데, 여기서는 아직까지 정규열차로 운행되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열차 안으로 들면 통일호라는 이미지는 한순간에 싹 가셔버린다. 생각보다는 객실이 쾌적했기 때문이다. 손님들 대부분은 여행객, 간혹 현지인들도 보인다. 다들 하나 같이 웃는 얼굴들이다. 여행객들이야 눈앞에 펼쳐질 새로운 풍경에 대한 기대에 들떠서 이겠지만 현지인들은 무슨 이유일까? 간단하다. 이탈리아인들이 밝고 친절하다는 것은 예로부터 널리 알려진 사실이 아니겠는가.

 

 

 

 

차창 밖으로 소렌토의 외곽 지역 풍경이 펼쳐진다. 들녘이 나타나는가 싶더니 마을에 가까워지면서 주택의 빈도가 점차 늘어간다. 주택들의 사이사이에는 과수원들이 들어 앉아 있다. 대부분이 포도나무이다. 하지만 저곳 어디엔가는 레몬나무도 들어앉아 있을 것이다. 이곳 소렌토의 특산물이라니까 말이다.

 

 

달리는 길에는 역()도 만난다. 그런데 그 역의 외관(外觀)이 말이 아니다. 스프레이 낙서투성이인 것이다. 건물이 온통 울긋불긋한 글자와 그림들을 뒤 짚어 쓰고 있다. 하지만 보기 싫지는 않다. 여행자들에게 이국에서 만난 낯선 풍경은 새롭게 받아들여야 할 색다른 풍경의 하나일 따름이니까 말이다. 사람들은 저런 행위를 일러 그라피티(graffiti)라고 부른다. 벽이나 화면에 스프레이 페인트로 그리는 그림과 낙서로서, 흡사 장난치듯 물감을 분무기로 내뿜어서 신속히 완성한다. 참고로 이 행위는 1960년대 뉴욕 빈민가에서 시작돼 세계로 퍼졌다. 당초는 갱들이 영역을 표시하는 수단으로 쓰이다가, 차츰 정치·사회적인 비판의 메시지를 담았다. ·디제이·비보이와 함께 힙합문화의 네 요소로 꼽힌다.

 

 

폼페이역을 출발한지 50분 정도 지나 도착한 쏘렌토역. 역을 빠져나오자 청동상 하나가 여행객들을 맞는다. 이탈리아의 민요이자,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돌아오라 소렌토로를 작사한 잠바티스타 데 크루티스(Giambassista De Curtis)’의 흉상이다. 민요 발표 80주년을 기념해 지난 1982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이 노래는 소렌토를 이탈리아의 대표 관광지 중 한 곳으로 만들어냈다. 소렌토에 주민보다 여행객이 더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이곳 쏘론토를 먹여 살리는 셈이다. 그러니 손님들한테 가장 먼저 선을 뵈는 게 어쩌면 당연하다 할 것이다.

 

 

 

 

시내로 들어가는 길, ‘코르소 이탈리아(Corso Italia)’를 따라가는 길이다.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다. 누군가 그랬다. '이탈리아에는 철학자 대신 음악가가, 영국은 음악가가 아닌 철학자가 나오는 것은 날씨 때문이다.'라고. 이 같은 말은 이탈리아의 햇살과 무관하지 않다. 눈부신 햇살 속에서는 누구나 밖으로 나와 활기차게 돌아다니면서 노래를 흥얼거린다. 음악가가 많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일 것이다. 대신 우중충한 날씨가 대부분인 영국에서는 집 안에 틀어박혀 있는 시간이 많을 것이므로 생각하는 시간 또한 자연스럽게 길어질 것이고 말이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마음껏 햇살을 누릴 수 있는 곳으로 '세계 3대 미항' 중 하나인 나폴리를 꼽는다. 그렇다면 이곳 쏘렌토 또한 날씨가 좋아야 한다. 나폴리의 바로 근처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은 설일 뿐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쏘렌토는 지금 빗속에 잠겨있다. 그것도 제법 많은 양이다.

 

 

길가의 가로수들이 과일나무이다. 그리고 붉은 색 과일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이곳 소렌토의 특산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레몬(lemon)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레몬이 매달려 있어야 하건만 내 눈에는 오렌지로 보이니 문제다. 원래부터 둘의 생김새가 비슷할지니 내가 혼동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역에서 도보로 5분여 만에 소렌토 마을의 중심인 타소광장(Piazza Tasso)에 도착했다, 소렌토를 대표하는 유명한 작가 토르콰토 타소(Torquato Tasso)’의 이름을 딴 광장이다. 소렌토의 여행은 이곳에서부터 시작된다. 참고로 토르콰토 타소는 르네상스 문학 최후의 시인으로 그의 최대 걸작 해방된 예루살렘은 후기 르네상스 정신을 완전히 종합한 것으로 유럽 문단에 큰 영향을 주었다.

 

 

광장에 도착하자마자 자유시간이다. 물론 배의 출항시간에 맞추라는 가이드의 엄명이 뒤따른다. 어디로 갈까? 갑자기 생긴 여유시간이기에 준비가 있었을 리가 없다. 가이드의 말을 잘 들어(?) 폼페이 일정이 빨리 끝났다고 해서 주어진 포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보통의 여행자들이 하는 습관을 따라보자. 옛 거리를 둘러볼까 하다가 그냥 시장으로 결정을 내린다. 그 고장의 풍물은 시장에서 가장 밀접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곳 소렌토는 젤라또(gelato)가 맛있는 곳으로 소문이 나있다. 젤라또란 과즙, 과육, 우유, 설탕, 때로는 커피나 향초 등을 섞은 것을 얼려 만드는 이탈리아식 아이스크림이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겨울에도 찾지 않고는 못 배기길 정도로 좋아하는 식품이라고 한다. 그러니 아무리 바빠도 맛보는 것을 빼먹어서는 아니 될 일이다. 아이스크림 가게를 하나 골라서 들어서고 본다. 아니나 다를까 매장에는 손님들이 버글버글하다. 그곳도 부족했던지 다녀간 흔적들까지 고스란히 남아있다. 손님들이 남기고간 사진들이 매장 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이다. 물론 하나같이 유명인사들일 것이다. 일반인들의 사진까지 붙여 놓을 공간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판매대 앞에 선다. 이젠 주문을 해야 할 차례이다. 젤라또를 퍼주는 예쁜 언니가 뭘 먹겠느냐며 턱짓으로 진열장을 가리킨다. 하지만 쉽게 고르기에는 종류가 너무 많다. 눈치가 보이지만 별 수 없다. ‘맛을 봐야 맛을 안다고어떤 맛인 줄을 알아야 주문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보다 그녀는 친절했다. 조금의 짜증스런 기색도 없이 친절하게 가르쳐 준다. 만일 이곳이 한국이었다면 저 언니의 얼굴에 미소까지도 더해졌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쩌겠는가. 여긴 한국이 아니라 이탈리아인 것을.

 

 

 

 

 

 

젤라또를 맛봤다면 이젠 시장 나들이이다. 도로를 따라 걷다가 뒷골목으로 들어선다. 좁은 골목길에는 여행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소소한 쇼핑의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상점들이 늘어서있어 잠시라도 한눈을 팔다보면 주어진 시간은 훌쩍 흘러가 버린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과일들이다. 갖가지 과일들이 진열되어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레몬이다. 그렇다. 이곳의 특산품은 레몬이었다.

 

 

 

 

그리고 다음은 귀금속가게이다. 관광지에 귀금속이 없을 리가 없다. 특히 이태리는 패션의 고장이 아니겠는가.

 

 

 

 

이번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이 나타난다. 진열된 옷가지들이 길거리까지 삐져나온 것이 영락없는 우리나라 전통상가의 모습이다. 그중 여행자들의 눈길을 끄는 건 단연코 가죽제품을 파는 가게이다. 특히 가방에 관심들이 많아 보인다.

 

 

 

 

다시 돌아온 타소광장, ‘안토니오 아바테(St. Antonio Abate)’의 동상이 반긴다. 쏘렌토의 수호성인이란다.

 

 

광장은 마을의 중심이자 여행자들에게는 모임의 장소이다. 소렌토의 구시가로 들어서는 입구이기도 하다. 또한 배를 타고 카프리를 방문하려고 할 경우 절벽 위의 마을인 쏘렌토에서 선착장이 있는 마리나 피콜라로 내려가는 길이 나뉘는 곳이기도 하다. 광장 주변에는 아름다운 건축물이 많다. 그리고 소렌토의 볼거리와 호텔, 레스토랑 등 여행자 편의시설들은 모두 다 이 광장을 중심으로 뒷골목에 몰려 있다고 보면 된다.

 

 

타소광장은 시내 곳곳을 누비는 귀여운 미니 관광 열차인 시티 트레인(city train)’이 출발하는 곳이다. 시간을 내어 한번쯤 타고 시내를 돌아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광장에 있는 다리에서 내려다보면 마리나 피콜라(Marina Piccola)’ 항구로 나가는 도로가 보인다. 협곡(峽谷)에다 길은 낸 모양이다. 그런데 그 경사가 장난이 아니다. 절벽의 위에서 아래로 급하게 내려가려면 별 수 없었을 것이다.

 

 

항구로 가는 길에 또 다시 안토니오 아바테(St. Antonio Abate)’의 동상을 만난다. 국기가 내걸려있는 것이 이번에는 관공서 앞에서이다. 시청사가 아닐까 싶다.

 

 

항구로 가는 길, 뭔가 허전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 보고 싶은 것을 못보고 떠나기 때문에 생긴 아쉬운 느낌이다. 이곳 소렌토 근처에는 꼭 들러봐야 할 마을 두 곳이 있다. 그중 하나는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선정한 죽기 전에 꼭 가 봐야 할 곳’ 1위에 뽑힌 포지타노(Positano)이다. 소렌토가 품은 푸른 바다와 해안절벽에 더해 알록달록한 색감을 자랑하는 집들까지 빼곡하게 들어서있다는 마을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여행자들이 으레 이탈리아의 남부 도시라고 일컫는 아말피(Amalfi)이다. 온화한 기후와 아름다운 해안으로 인해 유럽 최고의 휴양지중 하나로 꼽히는 곳이다. 이 두 마을의 곳곳에 있는 고급 별장들이 할리우드의 톱스타들의 것일 정도로 돈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고급 휴양지이다. 마을 앞 해안에 떠 있는 수많은 요트들 또한 그들의 것임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우린 항구로 향한다. 카프리섬으로 들어가는 배 시간을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아쉬움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지만 어쩌겠는가. 이 또한 패키지여행의 특징인 것을.

 

 

항구(Marina Piccola)까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하지만 가능하면 천천히 걷고 싶은 거리이다. 눈에 담고 싶은 풍경들이 계속해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소렌토가 아름다운 건 지중해 덕분이다. 아시아와 유럽, 그리고 아프리카에 갇힌 바다 지중해는 일조량이 많고 물이 맑다. 비린내도 없다고 한다. 그런 바다에 요트들이 떠다니는 풍경을 상상해보기 바란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릴 것이다.

 

 

아찔한 절벽 끝에 다닥다닥 붙은 원색의 건물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처음으로 보는 풍경이 너무 이질적이어서 더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나 싶다. 우리나라로 치면 벼랑에 제비집처럼 걸쳐진 암자(庵子)들이라고 보면 되겠다. 그럴 때도 난 넋을 잃고 바라봐야 했다. 그보다 더 이질적인 풍경을 만났으니 지금 내 심정이 어떻겠는가.

 

 

 

 

 

 

항구(Marina Piccola)로 내려가는 길은 가파르기 짝이 없다. 절벽의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야 하기 때문이다. 만만찮은 내리막길이다. 하지만 좋은 점도 있다. 눈앞에 펼쳐지는 주변 경관이 사뭇 빼어나기 때문이다.

 

 

 

 

 

 

항구에 내려선다. 눈앞에 해안절벽이 펼쳐진다. 새파란 물빛의 지중해. 아찔한 절벽 끝에는 원색의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눈앞에 펼쳐진 평화로운 풍경은 보는 이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풍경, 밤이 되면 낮과는 또 다른 몽환적인 분위기가 풍겨질 것이 분명하다. 유러피언들 사이에서 가장 핫한 휴양지로 각광을 받고 있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엑셀시어 비토리아 호텔(Excelsior vittoria hotel)이 보인다. 절벽 위 건물 중 맨 오른쪽이다. ‘엔리코 카루소(Enrico Caruso)’가 묵었다는 5성급 호텔이다. 카루소는 나폴리 출신의 테너가수로 몬테카를로의 오페라극장,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 등에 출연하였다. ‘벨칸토창법(bel canto)‘의 모범으로 인정받았으며 20세기 초의 오페라 황금시대를 구축하였다. 사실 소렌토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테너들에 의해 애창되는 '돌아오라 소렌토'가 세계 휴양도시로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명한 유적지 하나 없는 곳에 노래 한 곡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도시가 과연 세계에서 또 있을까? 그러나 나폴리 해안의 푸른 바다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켰고, 유명한 예술가들이 문학, 그림, 음악 등을 통해 세상에 이 도시를 소개했다.

 

 

항구(Marina Piccola)에서 올려다본 풍광은 아름답기 짝이 없다. 저런 풍광이 있었기에 세계적인 문호들이 이곳을 찾았을 것이다. 독일을 대표하는 요한 볼프강 괴테와, 영국 낭만파 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 미국을 대표하는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 등이다. 그들은 이곳에서 많은 영감을 얻어갔다고 한다. 그만큼 이곳은 예술가들에게 생명의 원천이 됐다.

 

 

 

 

푸른 바다와 파란 하늘에 어우러진 하얀 집들이 만들어내는 소렌토 풍경은 너무 아름다워 노랫말처럼 이곳을 방문한 사람이라면 잊지 말고 다시 돌아오라는 느낌을 충분히 갖는다.

 

 

카프리까지는 쾌속선을 이용한다. 빠르고 쾌적하지만 단점도 있다. 선창으로 나가볼 수 없기 때문이다. 쏘렌토처럼 아름다운 풍광을 지닌 고장에서는 조금 천천히 달리더라도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더 자세히 보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다.

 

 

카프리로 들어가는 길, 선창 밖으로 이탈리아의 남부해안이 펼쳐진다. ‘아말피해안이다. ‘아말피 해안은 소렌토, 포지타노, 아말피까지 이어지는 해안을 말한다. 지중해의 푸른 하늘과 코발트 빛깔 바다를 배경으로 깎아지른 듯한 해안 절벽을 따라 늘어선 집들이 인상적인 것이 특징인 해안이다. 해발 약 200m까지 계단처럼 빼곡하게 들어선 집들의 모습이 워낙 아름다워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선정한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50중 지상낙원 첫 번째로 꼽은 곳이다. 1997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하다.

 

 

해안을 따라 집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마치 하얀 띠를 두른 듯하다. 아말피해안은 유럽인들이 선호하는 고급 휴양지로 알려져 있다. 특히 유명 할리우드 스타들의 별장이 유난히도 많다고 한다. 지금 저 어딘가에서 지중해의 따스한 햇살과 여유로움을 만끽하고 있는 스타들이 있을 수도 있겠다.

 

 

 

 

여행지 : 두바이, 스위스, 이탈리아

 

여행일 : ‘16. 3. 12() - 20()

일 정 :

3.13() : 두바이

3.14() : 스위스(루체른)

3.15()-19() : 이탈리아(밀라노, 피렌체, 로마, 나폴리, 폼페이, 소렌토, 베니스, 볼로냐)

 

여행 넷째 날 : 사라진 역사의 도시 폼페이(pompei)

 

특징 : 폼페이는 BC 6세기경에 그리스의 지배를 받다가 BC 80년부터는 로마의 지배를 받아 온 도시이다. 이후 이 지역은 폼페이뿐만 아니라 에르클라네움(Herculaneum : 오늘날의 에르콜라노)이 발전하기 시작해서 폼페이 지역의 전체 인구는 약 3만 명에 육박했다. 화산 폭발의 징조는 이미 62년에 일어났다고 한다. 당시 인근 도시였던 에르클라네움은 이미 폐허가 되어 있었지만 폼페이는 그때까지도 건재하였단다. 그러다가 79824베수비오 화산(Monte Vesuvio)’이 폭발했다. 그리고 수많은 시민들이 7m 이상의 화산재에 파묻혀 사망하였다. 그 후 전설로만 내려오던 폼페이 유적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 작업은 1748년도에 이루어졌고, 현재 발굴 작업은 거의 완료된 상태이지만 곳곳은 아직까지도 작업 중에 있다.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폼페이는 이탈리아 내에서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곳이다.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 때 화산재에 묻혀 버린 폼페이는 그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당장 어제의 일처럼 선명하게 모든 것이 보존되어 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절대 자신의 고향인 폼페이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저주받은 도시 출신이라는 것을 알리기 싫어했기 때문이다. 폼페이는 1748년에 본격적으로 발굴이 시작되었는데, 이 발굴 작업의 여파가 굉장해서 전 유럽에 고대 그리스풍의 유행이 새로 생기기 시작했을 정도이며 유럽의 부호들도 너나할 것 없이 이 발굴 작업에 뛰어들었단다. 서유럽에서 유물, 유적은 단순한 예술품 이외에 엄청난 부를 안겨 줄 수 있는 또 다른 노다지였기 때문이다.

 

 

 

투어는 정문 앞에 있는 주차장에서부터 시작한다. 차에서 내리면 매표부터 한다. 이때 관광용 작은 책자를 하나 얻어내는 센스((sense)를 발휘해보자. 물론 공짜이다. 그리고 입장 전에 책장을 넘겨 지도부터 찾아보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폼페이는 조개껍질 모양을 하고 있다. 주변보다 조금 높은 곳에 도시가 만들어져 있으며, 남북과 동서로 두 개의 큰 도로가 나있다. 동쪽 문으로는 마차가 들어올 수 있었다고 한다. 맨 위쪽에 위치한 신전(神殿)부터, 오른쪽 맨 구석에 있는 원형경기장까지 고루 갖추고 있는 완벽한 계획도시란 것을 알 수 있다.

 

 

 

 

 

 

안으로 들면 벼랑을 파서 만든 것 같이 보이는 집들이 보인다. 마치 아파트를 보는 듯하다. 2000년도 더 되는 그 옛날에 저런 구조물들을 어떻게 만들 수 있었을까? 그저 감탄만 나올 뿐이다.

 

 

어제 피렌체의 미켈란젤로의 언덕에서 보았던 우산소나무가 또 보인다. 이번에는 아예 가로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첫 번째로 만나게 되는 유적은 검투사(劍鬪士) 구역이다. 영화의 제목으로 익숙한 글래디에이터(gladiator)’들이 생활하던 숙소와 연습장 등의 부속시설들로 이루어져 있다. 검투사란 로마제국 당시 원형경기장에서 사람과 사람 또는 사람과 맹수가 격투를 벌이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원래 고대 에트루리아인들이 수장(首長)의 장례의식의 일부로 행하던 풍습에서 유래한 것으로, 기원전 3세기부터 로마로 유입된 후 제정(帝政)시기 제국 전역으로 퍼져 유행처럼 행해졌다. 당시 권력자가 시민의 인기를 얻기 위한 유흥거리로 거행했으며, 대부분의 검투사는 전쟁포로노예범죄자였지만 일반 자유인들도 돈을 벌기 위해 참가했다고 한다.

 

 

고대 로마의 법정 건물에서 유래한 특수한 건축 양식인 바실리카 양식(basilica樣式)’ 즉 전체 모양은 직사각형이고 중앙에 본당, 측면 복도 및 반원 벽이 아치 또는 돔형 감실로 되어 있는 양식으로 열주(列柱 , colonnade)들이 늘어서 있다. 그런데 기둥의 재질이 대리석이 아니다. 대리석이라는 게 원래 기둥으로는 쓸 수 없기에 항상 의문을 품어왔는데 그런 내 생각이 옳았던 모양이다. 대리석은 워낙 무르기 때문에 다루기는 쉽지만 무거운 하중을 배겨내기에는 무리다. 그래서 대리석은 장식용 건축재로 쓰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 대전제(大前提)에 어긋나지 않게 이곳의 기둥들도 내부에 벽돌이나 콘크리트를 썼다. 그리고 겉면에다 대리석을 붙이거나, 대리석 모양의 회칠을 했다. 이런 기법들은 폼페이를 둘러보는 내내 눈에 띄었다. 대리석을 붙인 곳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곳에서는 회칠을 하고 있었다. 당시라고 해서 대리석 가격이 쌌을 리는 없다. 주 이용객이 누구냐에 따라 겉면의 치장을 달리 했었나 보다.

 

 

오른편에 문들이 보인다. 검투사들이 머물렀던 방이 아닐까 싶다. 누군가 그랬다. ‘폼페이의 멸망은 타락한 도시에 대한 신()의 벌이라고. 그 타락의 한 단면을 지금 보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목숨을 걸고 하는 경기를 즐긴다는 게 타락이 아니고 뭐겠는가. 그때 목숨을 걸고 경기를 치렀던 노예들은 간 곳이 없고, 그들이 남겨 놓은 처절했던 한()만이 허공을 맴돌고 있다.

 

 

검투사 구역을 지나면 로마식 반원형극장이다. 800명을 수용할 수 있는데, 복구가 완료되어 현재는 공연장으로 활용되기도 한단다. 관광객들이 여럿 무대로 내려가 있다. 그들의 웅성거림이 여기까지 들려오는 걸 보면 울림에 대한 설계가 제대로 되었던 모양이다. 극장은 본디 그리스인들의 발명품이었다. 로마인들은 그것을 받아들여 자기들만의 무대로 만들었다. 본래 부채꼴이었던 무대를 키워 반원형으로 만든 것도 로마인들이었다. 무대가 넓고 가림막이 있어 좀 더 다양한 무대로 변신할 수 있는 장점 때문이란다.

 

 

 

 

 

 

원형극장을 지나면 열주(列柱 , colonnade)들이 나온다. 어떤 이의 지도에서 신전(인터넷 검색 창에도 뜨지 않기에 이름은 생략했다)이라고 표기되어 있는 것을 보았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다음은 상가이다. 별다른 특징이나 설명이 없기에 그냥 지나친다.

 

 

 

 

앞서가던 집사람이 돌판에 발을 얹고는 웃고 있다. 그런데 그 웃음이 왠지 계면쩍어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 본다. 대처 그럴 만도 하겠다. 그녀의 발아래 깔린 돌에 남자의 생식기(生殖器)가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남성의 성기는 행운의 상징이기도 하다. 행운을 가져다주는 것은 좋지만 남 보기가 좀 남세스러웠던 모양이다. 하여간 이 돌판은 항상 물에 젖어있다고 한다. 그래야만 성기가 나타나기 때문이란다. 뉘앙스{nuance)가 좀 묘하다고 해서 그냥 지나쳐 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자, 그리고 성기가 가리키는 방향을 잘 살펴보고 지시에 따라보자. 창녀촌이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알아 두어야 할 것은 창녀촌과 남성 성기는 특별한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제우스의 전령신(傳令神), 즉 사자(使者)의 역할을 수행하는 헤르메스(Hermes)는 남성성기로 대표되는 헤르마(herma)로부터 왔다. 헤르마(그리스의 델로스에 있는 헤름,Herm’이라는 조각상이 대표적이다)는 원래 방향지시의 역할을 수행해왔다. 그리스시대 때만해도 갈림길에는 발기한 성기를 가진 헤르마가 서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성기가 가리키는 곳이 꼭 창녀촌일 필요는 없다는 얘기이다.

 

 

잠시 후 창녀촌을 만난다. 폼페이는 가까이에 항구가 있었기 때문에 많은 배들이 드나들었다. 가까이에 미세노라는 대형항구가 있어서 붐빌 정도까지는 아니었겠으나 적지 않은 선원들이 폼페이로 들어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조금 전에 보았던 안내판(성기)를 보고 이곳을 찾았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생각보다는 크지도, 그렇다고 화려하지도 않다. 어린이들과 함께 들어가는 가족들을 보고 걱정했는데 필요 없는 걱정이 되어버렸다. 참 잊어버릴 뻔 했다. 입구에 벽화가 그려져 있는 것을 말이다. 흐린 탓에 뭐가 그려져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창녀들이 손님을 받았던 침대가 보인다. 그런데 크기가 너무 작다. 옛 로마인들의 체격이 작다고 들었는데 그 말이 사실이었던가 보다. 만일 체격이 큰 사람이라도 들어왔을 경우엔 어떻게 처리를 했을 지가 궁금해진다. 손님을 받는 방이 이곳(깔끔한 곳도 있었지만 사람들이 붐벼 사진촬영은 하지 못했다) 말고도 몇 개 더 있었지만, 전체적인 규모는 작았던 것으로 보인다. 폼페이가 중소도시였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침대가 갖춰진 방에는 벽화(壁畵)가 그려져 있다. 성행위를 하고 있는 원색적인 춘화도(春花圖)이다. 이런 야한 그림들을 대놓고 그렸다고 해서 로마인들이 성적으로 타락했다고 말하는 거나 아닌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판단일 것 같다. 그런 그림들은 방안에만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의 뱃사람들에게는 꼭 필요한 매뉴얼 (manual)이 아니었을까 싶다. 어떤 방식으로 성행위를 하는 지를 알려주는 데는 이만한 것이 없을 것 같아서이다. 하여간 이 벽화들은 모조품이다. 진품은 나폴리국립고고학박물관(Museo archeologico nazionale di Napoli)’에 있다고 한다.

 

 

 

앞에 보이는 건물은 창녀들이 머물던 방이 있던 곳이란다. 창녀라는 뉘앙스에 심기가 상했는지 집사람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다. 괜히 포즈를 잡으라고 했나 보다.

 

 

본격적인 시가지 투어로 들어간다. 그런데 바닥이 색다르다. 도로의 포장을 돌로 해놓은 것이다. 고대(古代)에 도시 전체를 돌로 포장을 한 곳은 이곳 로마뿐이었다고 한다. 돌로 치장된 도시를 상상해보자. 그리고 왜 사람들이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고 했는지를 떠올려 보자. 그들의 마음이 이해가 갈 것이다. 하여간 서로마의 멸망 이후 유럽에는 1천년 동안이나 도로포장 기술이 사라졌다고 한다. 기술적인 문제보다는 경제적 부담이 그 원인이 아닐까 싶다. 천문학적으로 들어갈 재원을 충당할 수 있는 나라가 과연 몇이나 되었겠는가.

 

 

도로를 걷다보면 곳곳에 징검다리가 놓여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로마의 도로는 배수시설이 잘 되어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웬일일까?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누군가가 알려준다. 도로에 널려있는 오물들을 피하기 위해서란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럴 만도 하겠다. 로마의 도로는 기본적으로 차도(車道)와 인도(人道)가 구분되어 있다. 차도에는 주요 이용고객인 동물들이 배설한 분뇨(糞尿)들이 쌓여있었을 것은 당연하다. 이를 요령껏 피해 다니기 위해 만들어낸 로마인들의 지혜가 바로 저 징검다리가 아닐까 싶다.

 

 

묻혀있던 상수도관이 밖으로 노출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로마시대 때부터 사용하던 것이라는데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관이 쇠파이프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그 재질이 구리는 아니었다. 만일 그랬더라면 놀라 까무러지기라도 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물을 받아 마실 수 있는 공동상수도이다. 그런데 가이드가 가리키고 있는 부분이 움푹 파여 있다. 물을 받아 마시려면 손을 짚어야만 하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짚었기에 단단하기만 했던 돌이 저렇게까지 움푹 파이는 지경이 되었을까.

 

 

마차가 더 이상 들어오지 못하도록 입구를 막아 놓은 돌들이 보인다. 우리나라로 치면 하마비(下馬碑)쯤 되는 셈이다. 이곳 이탈리아도 역시 신전(神殿) 등의 중요한 시설들이 있는 장소에는 마차의 출입을 제한했던 모양이다.

 

 

여기서부터는 신들이 거주하던 장소이다. 로마인들은 도시의 중심에다 신전과 바실리카(basilica : 재판소나 집회장, 관공서 등 공공의 목적으로 사용되는 대규모 건물)를 지었다. 정치의 중심과 종교의 중심을 이웃으로 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집회는 물론, 제사장의 집전 하에 제사도 지냈다.

 

 

아폴로 신전(Temple of Apollo in Pompeii)이다. 중앙광장의 서쪽, 바실리카 북쪽에 위치하며, 기원전 6세기에 세워진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이후 여러 차례 증축과 개축의 역사를 거친 것으로 보인다. 이 신전은 원래 이오니아식 기둥 48개가 떠받치고 있었는데 네로 황제때 코린트 양식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 신전에서 가장 성스러운 곳은 중앙에 높게 쌓아올린 제단으로 첼라라고 부른단다. 그리고 이 신전에서는 활을 쏘는 모습으로 서 있는 아폴로신과 사냥의 여신 다이아나를 모신다. 또한 머큐리 신에게도 제사를 올렸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바실리카(Basilica)이다. 폼페이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이나 지어진 시기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입구 주변에서 출토된 타일 조각의 표식으로 로마 시대 이전에 지어졌다고 추측된다. 이 곳은 도시의 법원이자 경제 중심지였다.

 

 

폼페이의 포룸(forum de Pompei)은 폼페이에서 가장 넓고 가장 중요한 집회장이었다. 이곳에서 정치, 경제 활동이 이루어졌고 여러 동상들이 세워져 있었다. 주변에 아폴로 신전과 여러 가게들이 있었다. 포룸은 말 그대로 중앙, 혹은 광장의 역할을 하던 폼페이의 정중앙이다. 가로 32m, 세로 142m의 직사각형 광장으로 삼면이 지붕 있는 주랑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광장 중앙에서 서쪽에 해당하는 부분이 연설자가 시민들에게 연설을 하던 곳이다. 주랑 남쪽으로는 당시 폼페이 주요 인사들의 동상을 세워 놓았던 기단이 남아 있다. 포로의 남쪽, 동쪽, 서쪽은 모두 주랑에 가려져 있으며 부근의 주요 건물들 중 북쪽의 주피터 신전만이 지금까지 온전하게 남아 있다.

 

 

 

 

 

 

다음 찾은 곳은 공동목욕탕 유적이다. 로마는 도시들마다 필수적으로 공동목욕탕을 갖고 있었다. 각자의 집에 목욕탕을 구비하기 어려운 여건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욕장을 만남의 장소로 활했던 로마인들의 특성이 가장 중요한 원인이 아니었을까 싶다. 하여간 그런 전통이 계속되면서 공동목욕탕은 로마인들의 상징이 되었다.

 

 

목욕탕의 본 건물 밖은 아래 그림과 같은 회랑과 함께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목욕탕은 남탕과 여탕을 구분했다. 하지만 신분의 차별은 두지 않았다고 한다. 황제들조차도 벌거벗고 일반 시민들과 함께 어울렸다는 것이다. 로마 시내에 황제들이 세운 목욕탕이 몇 개 남아있는데 자기도 함께 사용하려고 지은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로마인들의 목욕법은 복잡했다. 온탕, 증기욕, 냉욕을 차례로 거쳤단다. 안으로 들면, 그에 따른 시설들이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벽화도 그려 넣었다. 공간들을 그대로 비워놓지 않고 조각이나 그림 등 다양한 장식들로 꾸민 것이다.

 

 

 

 

 

 

자연의 빛을 끌어들여 실내를 밝히는 채광시설은 천정부위에다 배치했다. 천정은 빛을 효율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끔 돔(dome)형식으로 설계되었다. 또 하나 천정에는 위에서 아래로 홈을 팠다고 한다. 물이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곧장 떨어지지 않고 벽면을 따라 내려가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 물방울의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이 또 하나의 예술이었다니 당시 폼페이 사람들의 생활상이 능히 짐작이 간다.

 

 

귀족들이 모여 살던 구역이다. 발굴된 유물에 따라 비극시인의 집, 목신의 집, 베티의 집, 비너스의 집 등으로 분류하고 있다. 폼페이는 로마 지도자들이 휴양지나 별장 등을 많이 지었던 곳이다. 사시사철 해가 뜨기 때문에 건강에 좋을 뿐만 아니라 겨울에도 화산의 지반열(地盤熱)이 있어 그다지 춥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닥에 그려진 모자이크화도 눈에 띈다. 어느 귀족 저택의 바닥을 장식하던 것이란다. 알렉산더 대왕이 다리우스 페르시아 왕과 싸운 장면이 모자이크로 그려진 곳도 있다.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유명한 작품이란다. 하지만 진품은 지금 나폴리국립고고학박물관(Museo archeologico nazionale di Napoli)’에 보관중이란다.

 

 

 

 

길 가운데 있는 또 다른 공동상수도에 관광객들이 모여 있다. 뭐가 그리 흥미로운지 가이드의 설명에 하나 같이 푹 빠져있다. 현재도 이탈리아 전역에는 저런 상수도가 산재해 있다고 한다.

 

 

폼페이는 상가지구와 주택지구, 그리고 관공서지구 등으로 구획되어 있다. 식당으로 보이는 이 건물에는 여러 구의 화덕이 설치되어 있고, 각종 음식저장용 창고와 함께 넓은 홀을 갖추고 있었다.

 

 

 

이탈리아 피자의 근본은 화덕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탈리아 피자의 원조를 나폴리로 든다. 하지만 원초적인 화덕의 모습은 이곳 폼페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어느 한 곳에는 가축을 이용해서 곡식을 찧는 방아틀과 화덕의 시설들이 그대로 놓여 있기도 했다. 일부 학자들이 이곳 폼페이에서 화덕피자의 유래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 이유일 것이다.

 

 

잡동사니들을 모아 놓은 창고 비슷한 건물이 보인다. 폼페이에서 발굴된 유물들 중 덜 중요한 것들을 모아놓은 곳이라는데 옛날에도 그런 용도로 쓰였다고 하니 일편단심으로 원래의 소임을 수행하고 있나 보다. 중요한 것들은 모두 나폴리국립박물관으로 가고 그 축에 들지 못하는 것들이 모여 있는데, 그중의 대부분은 포도주를 담았던 용기들이다. 로마인들은 술을 대단히 좋아했었나 보다.

 

 

 

 

폼페이에서 발견된 사람들도 보인다. 화산재 속에 묻혀있던 사람들이 세월이 흐르다보니 인체는 사라지고 빈 공간만 남았단다. 그 공간에 석회를 부어서 만들어낸 것이다. 질식하여 죽어가는 모습들이 다양하다. 언뜻 보면 예술가들이 만들어 낸 작품 같아 보이기도 하지만, 그들은 하나 같이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의 처절한 몸부림이다. 당연히 숙연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게 옳지 않을까 싶다.

 

 

건너편에 보이는 저 산이 어쩌면 베수비오 화산일 것이다. 낙타등 모양으로 생긴 두 개의 봉우리라는데 구름에 가려 확인할 수는 없다. 베수비오화산은 지금으로부터 20만이 조금 안된 홍적세 말기에 처음 생긴 비교적 역사가 짧은 화산이란다. 20만년이 짧다니 다른 화산들은 과연 얼마나 오래되었을까? 실감이 안 난다. 하여튼 이 화산의 분출은 약 17,000년 전부터 시작되었으며 그 후 주봉인 그란 코노는 79번의 분출이 있었다. 간헐적으로 지진을 일으키다 마침내 79824일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다. 폼페이와 스타비아이(Stabiae)를 화산재로 뒤덮어버렸고, 흘러내린 진흙은 에르쿨라네움을 파묻어버렸다. 당시의 대참사 상황은 작가 플리니우스(Gaius Plinius Caecilius Secundus)가 역사가 타키투스(Publius Cornelius Tacitus)에게 보낸 2통의 편지에 잘 묘사되어 있다. 만일 그 편지의 내용을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시오노 나나미(鹽野七生)’로마인의 이야기를 찾아보면 된다. 8위기와 극복편에다 그 편지를 번역해서 실어 놓았으니까. 너무나도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아쉬움과 함께 다시 한 번 폼페이와 베수비오 화산을 눈에 담고 발길을 돌린다. ‘시간이 멈춘 도시' 폼페이에서 정말로 시간이 멈추기를 바랐던 것은 역시 욕심이었나 보다.

 

 

 

가이드가 발걸음을 재촉한다. 오늘 일정이 빠듯한 모양이다. 그 덕분에 원형경기장은 들러보지 못했다. 2만 명이나 수용이 가능하다는 그 경기장을 말이다. 내일 들르게 될 로마의 콜로세움(Colosseum)에서 실컷 보라는 모양이다. 하지만 우리의 일정에는 콜로세움의 안으로 들어가는 코스가 들어있지 않았으니 문제다. 덕분에 난 다른 사람들이 올린 그림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만일 그래도 목마름이 가시지 않는 다면 다시 한 번 로마를 찾아가야만 할 것이다. 하여튼 이것으로 폼페이의 투어는 끝난다.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럴 경우에는 나폴리에 있는 국립 고고학 박물관(Museo Archeologico Nazionale)’을 찾으면 된다. 폼페이 유적에서 발굴된 유물의 대부분이 그곳에 소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없어 폼페이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나폴리 고고학 박물관방문해볼 것을 권하는 여행책자까지 있을 정도니 얼마나 많은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을지 미루어 짐작이 가능할 것이다.

 

 

여행지 : 두바이, 스위스, 이탈리아

 

여행일 : ‘16. 3. 12() - 20()

일 정 :

3.13() : 두바이

3.14() : 스위스(루체른)

3.15()-19() : 이탈리아(밀라노, 피렌체, 로마, 나폴리, 폼페이, 소렌토, 베니스, 볼로냐)

 

여행 셋째 날 : 이탈리아의 피렌체(Firenze)

 

특징 :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 지방의 수도이다. 영어로는 플로렌스(Florence)인데 꽃 같은 도시라는 의미란다. ‘로마의 딸이라 불리었던 고대 로마의 도시 때부터 교통, 무역의 요충지이며 특히 중세 이탈리아 도시들의 번영시대부터 르네상스 시대까지 이탈리아 뿐 아니라 전 유럽의 금융업, 직물업의 중심지로서 풍성한 번영을 누렸다. 12세기 이래 공화국으로 교황파에 속했고, 14세기의 페스트 대유행 후 은행가들의 활약으로 서서히 부를 축척해 갔으며 15세기에는 메디치(Medici)가의 지배체제가 확립됨과 동시에 번영의 절정에 서게 된다. 그러나 15세기 말 메디치가의 몰락, 프랑스군 침입, 사보나롤라의 신성정치, 경제적지반의 붕괴 등에 의해서 도시국가를 기반으로 하는 인문주의적 르네상스 문화는 쇠퇴하였다. 현재 이 도시는 관광업이 경제활동의 주요 기반을 이루고 있다. 르네상스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해 왔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도시 곳곳에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산재되어 있다. 공화국정 청사가 있었던 팔라초 베키오(13세기 착공)와 이 도시의 정신적 중심인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1296~1461), 대성당 부속의 산 조반니 세례당(11세기 창건, 안드레아 피사노 및 기베르티의 문짝 장식), 종탑(지오토 설계), 산 미니아트 알 몬테 성(로마네스크 양식), 산타 크로체 성당(지오토의 벽화), 산타 · 마리아 · 노벨라 성당(마사치오의 벽화),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 성당(마조리노 및 마시치오의 벽화), 산 로렌초 성당(브루넬레스키 개축, 메디치 예배당, 라우렌치아나 도서관), 산 마르코 수도원(프라 안젤리코의 벽화 · 판화) 등이 대표적인 관광명소이다.

 

 

 

아침 일찍 밀라노를 출발한 버스는 점심 무렵이 다 되어서야 피렌체에 도착한다. 그리곤 꼬불꼬불 길을 누비고 다니더니 작은 언덕에다 우릴 내려놓는다. 미켈란젤로 언덕(Piazzale Michelangelo)’이라는데, 피렌체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라고 보면 된다.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피렌체 시가지 전체가 한눈에 쏙 들어오기 때문이다.

 

 

 

 

 

 

언덕은 널따란 광장으로 조성되어 있다. 미켈란젤로 탄생 4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이란다. 광장의 한가운데는 청동으로 만들어진 동상이 하나 세워져 있다. 미켈란젤로가 만들었다는 다비드(David) 이다. 하지만 이 동상은 복제품이다. 진품은 이곳 피렌체에 있는 아케데미아 미술관(Galleria dell'Accademia)’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참고로 다비드상은 미켈란젤로가 만든 최고의 걸작으로 골리앗을 이긴 용감한 다비드를 모델로 삼았다. 매끈한 얼굴, 온몸에 힘을 준 긴장된 근육, 팔목의 심줄까지 사실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시원한 바람이 부는 언덕에 서면 피렌체의 눈부신 전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붉은 지붕으로 가득한 피렌체 시가지와 그 중앙에 우뚝 자리한 평온하고도 고요한 두오모 성당. 그리고 시내를 가로지르는 아르노 (Fiume Arno)’. 이 모든 풍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한눈에 쏙 들어온다. 단테가 베아트리체와 사랑에 빠질 수 있었던 게 이런 아름다운 풍경이 뒷받침해 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저 멀리 아르노강(Fiume Arno)의 가장 좁은 곳에다 세웠다는 베키오 다리(Ponte Vecchio : 이탈리아어로 오래된 다리라는 뜻)’가 보인다. 1345년에 건설된 베키오 다리는 피렌체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다. 원래 이 자리에는 로마 시대에 지어진 나무다리가 있었는데, 홍수로 휩쓸려가자 새로 건설한 것이란다. 다리 위에 가게로 쓰이는 건물이 만들어져 있는 곳으로 유명하며, 원래는 푸줏간 가게가 있었으나, 지금은 보석상, 미술품 거래상과 선물 판매소가 들어서 있다. 이 다리는 아르노강의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기에 좋은 장소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세기의 연인인 단테와 베아트리체가 만났던 장소로 알려지면서 더욱 입소문을 탔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그만큼 그들의 사랑이 낭만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다리와 주변에는 자물쇠가 많이 채워져 있다. 사랑의 징표인 자물쇠를 열쇠로 채우고, 열쇠를 강에 던져 버리는 연인들이 많기 때문이란다.

 

 

 

 

능선을 따라 쌓은 옛 성벽까지도 한 폭의 그림으로 다가온다. 저 그림에다 저녁노을을 색칠해보면 어떨까. 그야말로 환상적인 아름다움이 아닐까 싶다.

 

 

괴이하게 생긴 소나무들이 눈에 띈다. 언젠가 청도(경북)에 있는 통내산(筒內山, 674.4m)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에 만났던 소나무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천연기념물(295)로 까지 지정되어 있는 그 처진소나무(Weeping Japanese Redpine , 柳松)’말이다. 저렇게 생긴 소나무를 이탈리아에서는 우산소나무(Pinolo, 영어로는 Stone Pine 또는 umbrella pine)라 부른다고 한다. 그리고 가로수로까지 심을 정도로 이탈리아 전역에 산재해 있단다. 미끈하게 큰 줄기의 끝에 가지와 솔잎이 우산처럼 펼쳐진 모양이 예쁘기 때문일 것이다. 화가들이 작품 소재로 쓸 정도로 이곳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나무라고 보면 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프랑스의 화가 장 자크 에네(Jean Jacques Henner)가 그린 우산 소나무가 있는 이탈리아의 풍경(Paysage d'Italie. Pins parasols)’을 들 수 있다. 현재 아비뇽 프티팔레 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젠 시가지 투어를 시작할 차례이다. 하지만 버스는 시가지로 들어가지를 못하고 외곽에다 우릴 내려놓는다. 성곽의 망루를 닮은 건축물 옆이다. 아마 대형버스의 시가지 출입을 통제하고 있나 보다. 하긴 시가지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있다니 그럴 만도 하겠다.

 

 

피렌체(Firenze)는 토스카나 공작령의 수도, 이탈리아의 수도 등 다양한 지위를 누리며 긴 역사를 이어왔다. 14~16세기에는 예술을 비롯하여 상업과 금융 그리고 학문 등의 분야에서 높은 위치를 점하기도 했다. 당시의 흔적들이 도시 곳곳에 스며들어 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일까? 평범하게 생긴 건물들까지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선입견이라는 게 중요하긴 중요한 모양이다.

 

 

 

 

얼마나 걸었을까 직사각형의 널따란 광장을 만난다. 피렌체에서 가장 오래된 산타크로체 광장(Santa Croce Piazza)이란다. 광장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관광객들이 대부분이지만 아이들과 함께 나온 사람들도 심심찮게 보인다. 산책삼아 나온 피렌체 시민들인 모양이다. 그만큼 주민들에게는 친숙한 장소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래선지 광장 주변의 좁은 골목길에는 잡화를 파는 상점들이 많다. 가죽제품들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가벼운 마음으로 소품 하나 구입해도 좋을 것 같다.

 

 

광장의 한쪽에 산타 크로체 성당(Basilica di Santa Croce)’이 있다. 1295아르놀포 디 캄피오 (Arnolfo di Cambio)’가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성당으로 건축한 피렌체 고딕 양식의 걸작이다. ‘산타 크로체성스러운 십자가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 성당은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상징인 타우 십자가T자 형태로 건축되었다. 성당 내에는 많은 예술품들이 있다. 특히 지오토(Giotto di Bondone)와 그의 제자인 타데오 가디(Tadeo Gaddi)가 만든 14세기 프레스코화가 유명하다. 바르디 예배당에 그려진 이 프레스코화는 프란체스코 성인의 일생을 묘사한 것으로, 서양 회화 최초로 밤의 장면을 묘사한 것이 특징이다. 또한 이 성당에는 치마부에의 십자가에 달린 예수도 있는데, 이 작품은 1966년에 있었던 홍수로 크게 손상이 되었지만, 이 성당에 보관된 작품들 중에서 걸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그 밖에도 도나텔로(Donatello)성 수태 고지등의 걸작들을 이 성당에서 만날 수 있다.

 

 

이 성당이 유명한 이유는 바로 성당 내에 있는 유명인의 무덤들 때문이다. 내부에는 미켈란젤로와 갈릴레오, 마키아벨리, 로시니 등의 무덤이 있고 시신(屍身)이 없는 단테의 가묘(假墓)도 있다. 생애 마지막에 추방을 당한 그가 라벤나에서 객사했기 때문이란다. 시신을 돌려달라고 라벤나에게 계속 요구하고 있지만, 라벤나가 끝까지 거부하고 있어 아직까지도 라벤나에 묻혀 있단다. 그래서 성당 앞에 단테의 동상(銅像)을 세워 놓았는지도 모르겠다. 찾을 길 없는 시신을 대신해서 말이다.

 

 

다음 방문지는 피렌체 두오모(Firenze Duomo)’이다. 두오모까지 가려면 다리품을 꽤나 팔아야만 한다. 하지만 지루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눈에 띄는 건물들마다 그 생김새가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하기 때문이다. 길가에 이탈리아의 국기가 걸려있는 건물들도 보인다. 공적(公的)인 건물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가는 방향에 바르젤로 미술관(Museo Nazionale del Bargello)’인류박물관이 있다고 했는데 혹시 그 건물들일지도 모르겠다.

 

 

 

 

얼마쯤 걸었을까 하얀색으로 지어진 거대한 건축물이 나타난다. 옆에다 네모로 각진 말뚝을 닮은 높다란 탑()까지 거느리고 있다. 피렌체를 대표하는 대성당, ‘피렌체 두오모(Firenze Duomo)’이다.

 

 

두오모(Firenze Duomo)’는 피렌체에서 가장 높이가 큰 건축물이자, 유럽에서는 네 번째로 큰 성당이란다. 특히, 하얀색, 핑크색, 녹색의 대리석이 기하학적 무늬를 이루고 있는 아름다운 외관을 가지고 있는데, 원래 이름은 꽃의 성모 마리아라는 뜻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Santa Maria del Fiore)’이다. 성당의 건축은 1296년 시작되어 1371년 본당이 완공되었다. 하지만 돔([dome)은 르네상스 건축의 선구자인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에 의해 1437년에야 완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브루넬레스키는 아무런 철근이나 콘크리트의 도움 없이 벽돌만으로 돔을 쌓아 올렸다. 돔의 내부에는 바사리(Giorgio Vasari)와 그의 제자들이 그린 프레스코화 최후의 심판이 그려져 있으며, 돔의 꼭대기에는 전망대가 있어 463개의 계단을 올라가면 멋진 피렌체의 전경을 볼 수 있다.

 

 

대성당 옆으로 82m 높이의 조토의 종탑이 보인다. 대성당과 같은 재질, 그리고 같은 기법으로 쌓아올린 건축물인데 사각 기둥 모양의 외형을 갖고 있다. 414개의 계단을 통해 위로 오르면 피렌체시가지가 한눈에 잘 들어온다고 한다. 또한 두오모 성당의 '돔 지붕'을 볼 수 있다고 해서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있다. 하지만 올라가보는 것은 사양한다. 10유로의 티켓 값이 아까워서만은 아니다. 아까 미켈란젤로의 언덕에서 보았던 풍경보다 나을 것이 없어보였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탑은 조토(Giotto, di Bondone : 12661337)가 제작을 시작(1334)하여 그가 죽은 후, 제자 안드레아 피사노가 완성(1359)했다. 지어질 당시만 해도 이탈리아에서 가장 높은 탑이었다고 한다.

 

 

 

 

피렌체 두오모는 어제 보았던 밀라노 두오모와는 많이 다르다. ()을 만나겠다면서 끝없이 하늘을 찌르는 날카로운 뾰족 첨탑(尖塔)이 아니고 팔각형의 짙은 분홍색 지붕에 하얀 대리석 띠를 두른 모습인 것이다. 초기 르네상스의 분위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란다.

 

 

두오모의 파사드(Façade)1587년에 무너져 버려서 현재의 정문은 1887년도 작품이다. 하지만 원래의 흔적을 따르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여인의 아름다운 란제리 레이스 자락 같은 장식들은 옷감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밀가루로 빚어놓은 것도 아니다. 딱딱하고 무거운 대리석을 일일이 조각해 만든 것이란다. 참고로 원래의 장식들이 궁금하다면 두오모 박물관에 가볼 일이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와 도나텔로의 마다레나그리고 베로키오, 미켈로초, 폴라이올로가 세운 제단 등도 볼 겸해서 말이다.

 

 

유명한 관광지에 빠질 수 없는 것들이 몇몇 있다. 그중에서도 기념품 좌판대와 거리의 화가들은 어딜 가나 눈에 띈다. 이곳이라고 해서 그들이 없을 리가 없다. 아니 다른 곳들보다 더 많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만큼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기 때문이다.

 

 

두오모를 마주하고 있는 건물도 눈길을 끈다. 고대 로마의 신전 터에 5세기에서 11세기 무렵에 지어진 산 조반니(Battistero di San Giovann) 세례당이다. 두오모와 마찬가지로 하얀색인데, 피렌체의 수호성인인 성 조반니에게 바치기 위해 지어진 성당이란다. 두오모처럼 대리석이 사용되었으며 서쪽을 제외하고 총 3개의 문이 있다.

 

 

예배당은 신곡의 작가 단테가 세례를 받은 곳이라고 해서 입소문을 탔다. 하지만 그보다는 동쪽으로 난 문()이 더욱 유명하다. 세례 요한의 일생을 그린 남문, 즉 주된 출입문을 제켜버릴 정도로 뛰어난 기법으로 제작된 이 문은 로렌초 기베르티라는 건축가의 작품이란다. 구약을 배경으로 만든 이 문이 얼마나 정교하고 아름다웠던지 그에 반한 미켈란젤로가 천국의 문이라고까지 극찬했다니 더 말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소문 탓인지 문의 앞은 사람들로 언제나 붐빈다. 가까이 다가가보기도 힘들 정도이다. 하지만 현재의 작품은 진품이 아니라 모조품이라니 참조하자.

 

 

 

 

 

 

두오모는 두오모와 세례당, 그리고 돔, 죠토의 종탑이 한 세트이다. 건축물들의 거대한 집합체인 것이다. 위아래로 고개를 끄떡거리다가, 그것으로도 모자라 좌우로 돌려야만 한꺼번에 눈에 담을 수 있을 정도로 그 규모가 크다. 덕분에 여백의 미는 보여주지 못한다. 이 건물들은 아르놀포 디 깜비오가 설계하고 감독했다. 하지만 꼭대기의 붉은 돔은 브루넬레스키의 작품이다. 지면에서부터 돔 꼭대기까지의 높이는 106미터이다. 참고로 이 위대한 건축물은 예우를 깍듯이 받고 있다고 한다. 이보다 더 높은 건축물을 세우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두오모를 다 둘러봤다면 이젠 단테 생가로 갈 차례이다. 성당에서 벗어나 좁디좁은 골목길을 따라 걷는데 이색적인 풍경들이 눈에 띈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있는 골목을 향해 머리를 내밀고 있는 건물들이다. 아래는 골목이 분명하건만 위는 건물로 변해있는 것이다. 대지가 넉넉하지 않은 고장에서 사람이 살아갈 공간을 조금이라도 더 늘려보려는 눈물겨운 노력의 결실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문제점도 있을 것 같다. 공용공간을 먼저 차지하려고 서로 싸우는 일이 비일비재해질 것 같아서이다.

 

 

잠시 후 단테의 생가(Casa di Dante)’에 이른다. 원래 단테(Dante)가 살던 집은 없어졌지만, 피렌체 시가 단테가 살았던 위치의 건물을 사들여 단테 기념관으로 지은 것이란다. 단테는 12655월 피렌체에서 태어났으며, 드란데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후에 단테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기념관은 단테 탄생 700주년이었던 1965년 처음 문을 열어 일반인에게 공개되기 시작했는데, 일곱 개의 방에 걸쳐 단테의 침실과 서재, 그리고 그의 행적을 시대별로 정리해 놓은 자료들을 전시해 놓았다. 특히 불후의 명작으로 꼽히는 단테의 신곡전편을 인쇄한 것을 계단 벽에 걸어 두었다. 보티첼리가 그린 신곡의 삽화도 이곳에 전시되어 있다.

 

 

 

 

단테는 르네상스 시대의 문예 부흥의 선구자로 불릴 뿐만 아니라 현대 이탈리아어의 기초를 세운 사람이다. 또한 그의 명작인 신곡은 후일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신곡에서 묘사한 지옥의 세계를 우리는 시스티나 예배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단테는 피렌체에서 추방을 당했다. 그리고 라벤나에서 죽었다. 라벤나에 있는 단테의 무덤 앞에는 꺼지지 않는 작은 등불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기름 값을 피렌체에서 지불한단다. 그를 내쫓은 속죄의 의미라는 것이다. 매년 9월 둘째 일요일마다 이 기름을 옮기는 의식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이왕에 이야기가 나온 김에 그의 사랑이야기도 끄집어내 보자. 단테는 9살 때 1살 아래인 베아트리체를 베키오 다리에서 만난다. 아름다운 소녀를 본 단테는 이때부터 베아트리체에 대한 사랑과 찬미의 마음을 간직한다. 그리고 9년 후 우연하게 산타 크로체 성당 앞에서 만난 그녀와 다시 이야기를 나눈다. 단테가 그녀의 정중한 인사에 지극한 행복을 느꼈음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베아트리체는 곧 자신의 가문에 걸 맞는 바르디 가문의 시모네에게 시집을 갔고 24세의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그렇다고 단테가 영원한 여인 베아트리체를 기억에서 지워버렸을 리가 없다. 24살의 나이로 요절한 그녀를 그의 작품 신곡으로 옮겨 온 것이다. 참고로 베아트리체의 집은 단테의 집에서 50m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흔적조차 없다.

 

 

단테 기념관 앞의 작은 광장 바닥에는 단테의 흉상(胸像)이 있다. 이 흉상을 밟으면 행운이 온다고 해서 많은 관광객들이 기념관 앞의 바닥을 뚫어져라 뒤진다. 그냥 보면 단테의 흉상이 보이지 않고 물을 뿌려야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가이드 투어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떠난 뒤 물기가 있는 곳에서 흉상을 찾아내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시뇨리아 광장으로 향한다. 또 다시 좁은 골목길을 걷는다. 그리고 또 다른 대지 활용법을 구경하게 된다. 아까는 베란다 형식으로 공용면적을 침범했었는데, 이번에는 두 건물을 아예 연결시켜버렸다.

 

 

드디어 시뇨리아 광장(Piazza della Signoria)’을 만난다. 중세 이후 지금까지 피렌체 행정의 중심지이다. 지금도 시청사로 사용되고 있는 베키오 궁전과 르네상스 시대 유명 예술인들의 조각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옥외 미술관 로지아 데이 란치(Loggia del Lanzi)’가 있다. 가까운 거리에 르네상스 시대 최고의 회화 걸작들을 모아 놓은 우피치 미술관과 아까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바라보았던 피렌체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 폰테 베키오가 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피렌체 정치의 중심이 되는 광장이다. 공화정 시대에 피렌체 시민들은 이 광장에 모여 토론을 하고, 거수투표도 하면서 공공 모임에 참여하였다. 광장 중앙에는 넵튠의 분수가 있고, 분수 옆에는 지암볼로냐(Giambologna)가 만든 코시모 1( Cosimo I de' Medici, 1519.6.12.~1574.4.21)’의 동상이 있다. 이 동상의 주인인 코시모 1세는 토스카나 지역을 통치하던 인물이다. 뛰어난 정치적 수완으로 메디치 가문을 피렌체 최고의 가문으로 만든 장본인이다.

 

 

 

 

넵튠의 분수(Fountain of Netpune)’이다. 넵튠(Neptune)은 바다의 신 포세이돈(Poseidon)을 뜻한다. 그리스에 살던 바다의 신이 로마로 이민(移民)을 오면서 개명(改名)을 했다보다. 하여튼 이 작품은 물의 요정에 둘러싸인 넵튠을 묘사하고 있다. 암만나티(Bartolomeo Ammannati)1575년 작품인데, 토스카나 해군이 승리한 피렌체 해전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한 것이란다.

 

 

분수 근처에 청동으로 된 둥근 바닥돌이 깔려 있는 곳은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가 화형에 처해진 장소다. 사보나롤라는 도미니크회의 수도자이며, 종교 개혁에 앞장섰기 때문에 반감을 사서 다른 도미니크회 성직자 2명과 함께 화형에 처해졌다.

 

 

궁전의 테라스에는 르네상스 시대 조각 걸작이 전시되어 있다. ‘도나텔로(Donatello : 본명은 Donato di Niccolò di Betto Bardi)’유딧과 홀로페르네스(Judith and Holofernes), 미켈란젤로의 다비드(David)의 복제품(원래 이곳에 있던 진짜 미켈란젤로의 작품은 지금 피렌체의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있음), 바초 반디넬리의 헤라클레스와 카코스(Hercules and Cacu)’ 등이다. ‘이라는 뜻의 피렌체라는 이름처럼 르네상스(renaissance)가 활짝 꽃피었던 도시이기에 가능한 풍경이 아닐까 싶다.

 

 

광장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옛날 건물, 혹은 오래된 건물이라는 뜻의 베키오 궁전(Palazzo Vecchio)’이다. 높은 창문과 돌출된 발코니가 마치 요새 같은 느낌을 준다. 1294년에 지어졌고 나중에 부온탈렌티(Bernardo Buontalenti)’와 바자리(Giorgio Vasari)에 의해 확장 건설되었다. 처음 만들 때는 요새로 만들어졌지만 1540년에 메디치 가문이 이 궁전에 들어와 10년 정도 이곳에 머물다가 피티 궁전으로 이사를 갔다. 이때 사람들이 새 건물을 누오보, 옛 건물을 베키오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시청사(市廳舍)로 사용되고 있는 이 건물은 정원이 유명하며, 500인의 방(Salone Cinquecento)과 시뇨리아의 방(Cappela della Signoria), 우디엔자의 방(Sala dell’Udienza)에는 많은 미술품들이 보관되어 있다. 하지만 날짜별로 달리 개관(유료)하고 있기 때문에 시간을 잘 맞추어야 미술품들을 구경할 수 있다.

 

 

 

 

 

 

베키오 궁전의 맞은편에는 로지아 데이 란치(Loggia dei Lanzi)’가 있다. 그러니까 광장의 오른편에 있는 작은 회랑(回廊)이다. 이곳은 14세기 말 코시모 1세에 의해 비가 오는 날의 집회 장소로 세워진 것인데, 지금은 예술 작품들의 복제품을 전시하는 야외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유명한 작품으로는 메두사(Medusa)의 목을 왼손에 높이 쳐들고 있는 첼리니(Benvenuto Cellini)페르세우스’, 그리고 지암볼로냐(Giambologna)사비네 여자들의 겁탈등을 들 수 있다.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야단스럽게 세 사람이 뒤엉켜 격하게 움직이고 있는 비정형의 곡선형태가 눈길을 끄는 작품이다.

 

 

광장에는 마차들도 보인다. 마차를 타고 시내를 한 바퀴 둘러보라는 모양이다. 마차를 타고 고풍스런 건물들 사이를 누비면서 영화로웠던 메디치 가문의 일원으로 돌아가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이것 또한 여행의 낭만일 테니까 말이다. 참고로 죠반니 디 비치 메디치Giovanni di Bicci Medici)’는 은행가였다. 정치적으로 수완이 좋은 그의 아들 코지모(Cosimo I de' Medici)는 완전히 권력을 장악했으며, 로렌초(Lorenzo de' Medici)는 많은 지식인들을 돌봐 주었다. 이때 활동한 작가가 단테, 지오토, 페트라르카 그리고 보카치오다. 그 이후에도 계속 피렌체는 메디치 가문이 장악했는데 이때 활동한 예술가로는 브루넬레스키, 마사초, 베아토, 안젤리코, 필리페, 리피, 도나텔로, 미켈란젤로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등이 있다.

 

 

 

광장을 다 둘러봤다면 이젠 피렌체를 떠나야할 시간이다. 오늘 저녁에 머물 숙소가 로마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로마에서도 1시간을 더 들어가야만 한다. 가격이 저렴한 호텔을 잡다보니 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여간 로마로 가려면 아까 버스에서 내렸던 곳으로 돌아가는 게 우선이다. 먼저 단테의 생가 쪽으로 잠시 걷다가 산타 크로체 광장으로 방향을 틀면 된다. 돌아가는 길 역시 미로(迷路) 같은 골목길의 연속이다. 하지만 눈요깃거리도 있다. 예쁘장한 가죽제품들을 전시한 매장들이다. 이름을 대면 알만한 유명한 브랜드도 종종 눈에 띈다. 이곳도 역시 가죽산업이 활발한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