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북부 유럽 여행
여행일 : ‘17. 6. 19(월) - 7.1(토)
여행지 : 러시아(모스크바, 페테르부르크), 에스토니아(탈린). 핀란드(헬싱키), 스웨덴(스톡홀름), 노르웨이(오슬로, 베이토스톨렌, 요정의 길, 게이랑에르 피오르드, 뵈이야 빙하, 베르겐, 하당에르 피오르드, 하당에르비다국립공원), 덴마크(코펜하겐)
일 정 : 6.22(목) : 탈린(알렉산더 네프스키성당, 시청사 광장, 돔교회, 툼페아 언덕)
여행 셋째 날 : 발틱해안에 꽃핀 중세의 진주, 에스토니아 탈린(Tallinn)
특징 : ① 에스토니아(Republic of Estonia, 에스토니아어로는 Eesti Vabariik) : 발트 해 동쪽 해안에 자리 잡은 작은 나라다. 남한 면적의 절반이 채 안 되는 국토에 인구는 132만 명이다. 언어도 슬라브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는 이웃 국가들과는 완전히 다른 우랄어 계통의 핀란드어군이다. 그런 까닭인지 숱한 역사의 시련을 모두 겪었다. 덴마크, 폴란드, 스웨덴, 독일, 러시아 등 주변의 웬만한 나라 중에서 에스토니아를 건드리지 않은 나라가 없을 정도이다. 여러 나라의 통치를 받으며 수천 년 언어와 문화를 보존하여 민족 정체성을 지켜온 것이 놀랍다. 게다가 동유럽도 아닌, 북유럽도 아닌 묘한 위치와 묘한 정체성의 국가라서 더욱 관심을 끈다. 에스토니아는 상고적부터 핀우그리아어파에 속하는 에스토니아인들의 땅이었다. 독일의 ’프라테스 밀리치아이 크리스티(Fratres militiae Christi)‘에 의해 정복(1227)된 이래 덴마크와 스웨덴, 폴란드, 러시아인들에 의해 지배를 받았다. 10월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가 무너지면서 독일에 할양되었으나 2년도 채 되지 않아 독일의 패망으로 독립국의 지위를 획득하였다. 이후 20년 동안 시민사회로서 뜻깊은 정치학습기를 보낼 수 있었으나, ’독·소 불가침조약(1940)‘으로 다시 소연방에 병합되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1991년 8월 20일에야 노래혁명과 소련의 붕괴로 독립을 되찾았다. 8월 20일은 에스토니아의 국경일이다. 2004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그리고 2004년에는 유럽 연합(EU)에 가입했다. 우리나라와는 1991년 10월 17일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하였으며, 현재 주 핀란드 한국 대사가 그 업무를 겸임하고 있다. 이 나라의 민족 구성은 65%가 에스토니아인(러시아인 28.1%, 우크라이나인 2.5%, 벨라루시인 1.6%)이다. 공용어로는 에스토니아어를 사용한다. 종교는 대부분 기독교(루터교)이고, 러시아정교도 믿는다.
② 탈린(Tallinn) : 에스토니아의 수도로 핀란드 만(灣)에 속한 탈린 만에 면해 있다. BC 1000년경부터 AD 11세기까지 요새화된 정착지가 이곳에 있었으며, 12세기에는 도시가 형성되었다. 1219년는 데인족이 이곳을 점령하고 ‘툼페아 구릉(丘陵)’에 새 요새를 세웠다. 1285년 한자 동맹에 가입한 후로는 교역이 발달했다. 1346년 튜튼 기사단에게 팔렸다가 1561년 기사단이 해체되면서 스웨덴으로 넘어갔다. 1710년 표트르 대제에게 점령되어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다가 1918년에는 독립국 에스토니아의 수도가 되었다. 1940년 다시 소련에 합병되었고, 1941~44년에는 독일군에게 점령되어 크게 파괴당했다. 1940과 1944~49년, 2차례에 걸쳐 탈린에 살던 에스토니아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증거도 없는 반역죄, 독일군에 협력한 죄, 집단화 반대 등의 죄목으로 소련군에 의해 추방당하거나 투옥되었다. 그 결과 러시아인들이 에스토니아의 수도인 이 도시로 이주하여 인구의 35%(1970)를 차지한 반면, 토착 에스토니아인은 56%로 감소했다. 오늘날의 탈린은 상업 및 어업 항구이며, 공업 중심지이다. 조선업과 기계제작업을 중심으로 여러 분야에 걸친 기계공업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다양한 소비재가 생산되고 있다. 에스토니아의 문화 중심지로서 과학 아카데미, 종합기술대학, 미술대학, 사범대학, 음악학교 등이 있으며, 극장과 박물관도 여럿 있다.
▼ 우리를 태운 버스는 ‘올드타운(Old Town)’의 대문이라 할 수 있는 ‘비루문(Viru Gate)’의 근처에다 우릴 내려준다. 두 개의 흙벽돌로 만든 첨탑이 양쪽에 있을 뿐 문의 형태는 없다. 아니 첨탑 아래에 문은 있다. 다만 문짝이 없을 따름이다. 아무튼 6시간 동안이나 버스 속에 갇혀있어야 하는 장거리 이동이었다. 페테르부르크에서 이곳 탈린까지는 대략 300km 남짓, 우리나라 같으면 세 시간 거리도 안 되겠지만 교통법규에 충실한 유럽이다 보니 거의 여섯 시간이나 걸려버렸다. 참고로 비루게이트(Viru Gates)는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성벽(城壁)의 동쪽에 위치한 두 개의 탑(塔)으로, ‘올드 타운(舊 市街地)’으로 들어가는 6개의 문(門) 가운데 하나였다. 비루거리(Viru Street)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탑은 1345년에서 1355년 사이에 건립되어 현재까지 원래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 안으로 들어서자 오래 묵은 회색빛 성벽(城壁)이 나타난다. 생각보다 훨씬 높은데 그 위로 통로가 나있다. 통로는 나무를 덧댄 난간을 만들었는가 하면 지붕까지 씌워 놓았다. 난간에는 구멍을 뚫어 숨어서 쳐들어오는 적들을 향해 사격을 할 수 있도록 했다. 가히 난공불락(難攻不落)의 형국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지금은 기념품 등을 파는 장사치들이 점령해버렸다. 무(武)는 결코 문(文)을 이길 수가 없다고 하더니, 상(商)도 문(文)에 못지않은 모양이다.
▼ 옛날 분위기 물씬 풍기는 거리로 들어선다. 올드 타운(Old Town) 지역이다. 이 도시는 요새(要塞)와 교회, 중세 가옥들이 밀집해 있는 중앙의 ‘Tompea(톰피아) 언덕’과 그 아래에 있는 상인이나 하급관리, 일반서민들이 살던 ‘Lower Town’으로 나누어져 있다. 두 지역을 성곽(城郭)이 둘러싸고 있는데 그 안을 통칭해 올드 타운(Old Town)이라고 부른다. ‘올드 타운’은 곧 성곽 도시인 것이다. 도시를 둘러싼 2km 성곽은 유럽에서도 가장 잘 보존된 중세 성곽으로 꼽힌다. 거리에는 15~17세기의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즐비하다. 모두가 동화 속에 나오는 집들처럼 고풍스러운데, 그 안에는 상점과 식당. 카페들이 들어서 있다. 하나 같이 예쁘게 꾸며놓고 여행자들을 반긴다.
▼ 거리에는 보석가게가 유난히도 자주 눈에 띈다. ‘쇼윈도(show window)’에는 주로 호박(琥珀, amber)으로 만든 장신구들이 진열되어 있다. 예로부터 ‘발트 3국’의 호박은 '발트해의 금'이라고 부를 만큼 중요한 특산품이었고 지금도 발트 여행자들이 가장 사고 싶어 하는 보석이다. 거센 바람이 불어 바다 바닥이 뒤집힌 날 그물로 건져 올리는 발트 호박이 육지 호박보다 잘 마모돼 매끄럽고 아름답게 빛날 뿐만 아니라 그 안에 든 기포도 적어 최고로 쳐준다고 했다. 이왕에 온 김에 집사람에게 줄 선물이라도 하나 살까 해봤지만 일행 가운데 한 사람이 넌지시 귀띔을 해준다. 값이 이미 많이 올라서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 톰페아 언덕으로 오르는 초입에 너른 광장이 조성되어 있다. 에스토니아의 독립을 기념하기 위해서 만든 ‘자유광장(Freedom Square)’이라는데 탈린의 큰 행사가 자주 열리는 장소이라고 한다. 한여름의 콘서트부터 불꽃놀이까지 탈린의 행사를 볼 수 있는데 주말에는 탈린 시민들이 아이들 데리고 산책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곳이란다. 지금은 자유로운 열린 광장으로 사용되지만 불과 26년 전까지만 해도 이 나라는 그런 자유가 없었다. 힘없는 나라였던 에스토니아는 과거 독일, 덴마크 등 많은 강대국들의 지배를 받았고 1991년 소련으로부터 독립하기까지 소련의 지배를 받았던 아픔이 있는 나라이다. 다시 되찾은 자유를 기념하기 위해 이 공원을 조성했나보다. 아무튼 십자가 옆으로 놓인 계단을 이용하면 올드타운의 고지대인 톰페아(Toompea) 언덕으로 올라갈 수 있다.
▼ 광장의 한쪽 귀퉁이, 그리니까 톰페아언덕의 맞은편에는 ‘성 요한교회(St. John’s Church)가 자리 잡고 있다. 누가 언제 무슨 목적으로 지은 교회인지는 몰라도 세워져 있는 위치로 보아 ‘자유(Freedom)’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아니 톰페아(Toompea) 언덕과 얽힌 인인이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에스토니아의 건국신화(建國神話)에 나오는 ‘칼렙의 아내’와 뭔가 얽혀 있을 지도 모르지 않겠는가. '프리드리히 크로이츠발드(Friedrich R. Kreutzwald)'가 쓴 에스토니아의 건국 서사시(敍事詩) '칼렙의 아들(Kalevipoeg)'에 따르면 에스토니아를 건국한 거인 칼렙의 아내 린다는 남편이 죽자 그의 무덤을 표시해 두기 위해 엄청나게 무거운 돌을 산 위로 가져가려고 했다. 하지만 가는 도중 돌이 갑자기 무거워져 바닷가 근처에 떨어뜨렸다. 그 돌이 떨어진 자리가 바로 탈린의 터줏대감처럼 버티고 서 있는 ‘톰페아 언덕’이 됐고, 아내는 슬픔에 잠겨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흘린 눈물은 고여 ‘윌레미스테(Ulemiste)’라는 호수가 됐단다. 전설 같은 신화이지만 현재 탈린에는 톰페아 언덕과 눈물이 고여 만들어졌다는 윌레미스테 호수가 실제로 존재한다.
▼ 언덕 방향에는 유리 십자가가 커다랗게 세워져 있다. 그 옆에는 머릿돌로 여겨지는 검은 대리석 석판(石板)을 세웠다. 석판에 에스토니아어로 뭔가를 적었는데 문장의 앞 단어인 ‘Eesti’가 이 나라 말로 ‘에스토니아공화국’인 것은 알겠지만 전체적인 의미는 해독이 불가능하다. 석판의 하단에는 ‘1918-1920’이라는 연도도 적혀있다. 에스토니아는 1918년 2월 24일에 독립선언을 하고, 1920년에 독립을 이루어냈던 역사가 있다. 아무래도 이와 관련된 숫자를 적어놓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여기서 알아두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또 다시 소련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에스토니아의 진정한 독립은 ‘노래혁명’으로 얻어낸 1991년으로 봐야 한다. 따라서 이 ‘독립전쟁 전승탑’은 첫 번째로 쟁취했던 독립에 대한 기념탑이다. 아무튼 에스토니아인의 자유를 상징하는 만큼 십자가 주변엔 에스토니아 국기가 자랑스럽게 펄럭이고 있다.
▼ 톰페아언덕으로 오르는 사면(斜面)은 잔디밭을 조성해 놓았다. 그 위에서 망중한(忙中閑)을 즐기고 있는 젊은이들이 몇 보인다. 그런데 그냥 쉬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무릎에 책을 펴놓고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래 저런 젊은이들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에스토니아가 존재했을 것이다. 에스토니아는 인터넷 프로토콜을 이용하여 소비자에게 음성 통신을 제공하는 ‘VoIP(Voice over Internet Protocol, 음성 인터넷 프로토콜)’ 소프트웨어인 ‘스카이프(Skype)’가 개발된 나라이자, 여기저기서 펑펑 터지는 와이파이(Wi-Fi)는 물론이고, 온라인 국민 투표까지 실시된 IT 강국 중 하나이기도 하다. 구 소련시대인 1980년대에 핀란드 방송을 듣고, 자본주의 체제에 대비하기 위해 깨어있던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컴퓨터에 매진, 인터넷 인프라를 구축했던 것이 그 시초라고 한다. 체널을 돌리다보면 KBS-World TV도 수신할 수 있다니 참조한다.
▼ 언덕에 올라서니 거대한 나무 아래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몰려있는 게 보인다. 맨 앞에서 가이드로 보이는 여성이 열변을 토하고 있다. 그렇다. 이곳은 에스토니아의 독립을 가져오게 한 역사의 현장이다. 1988년 탈린 교외에 약 30만 명의 에스토니아인들이 모여 소련에서 금지시켰던 에스토니아의 민요(民謠)를 부르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1989년에는 탈린, 리가, 빌뉴스 등 발트3국의 수도에서 같은 형태의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발트3국의 온 국민들이 ‘인간사슬’ 즉 전 국민이 손에 손을 맞잡고 노래를 불러 러시아로부터 무혈 독립을 얻어낸 것이다. ‘노래혁명’이라고 세상에 알려진 사건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탈린은 1991년 8월 20일 독립국가 에스토니아의 수도가 되었다. 그때 만들었던 인간 띠의 기준점이 바로 이곳이란다. 이를 증명하려는 듯 바닥에 발자국이 찍힌 동판(銅版)을 심어놓았다.
▼ 발트 3국과 함께 1940년 소비에트연방에 편입된 에스토니아는 1991년 노래혁명(Singing Revolution)으로 불리는 평화적인 시민혁명을 통해 독립을 쟁취했다. 소련의 압제(壓制)에서도 폭력이나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노래로 대응하였다고 해서 그런 이름을 얻었다. 1989년 8월 23일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Tallinn)‘에서 라트비아 수도 ’리가(Riga)‘를 지나 리투아니아 수도 ’빌니우스(Vilnius)‘에 이르는 600㎞는 독립을 노래하며 손에 손을 맞잡은 200만 시민의 ’인간 띠‘로 하나가 됐다. 이들은 거대한 ’인간 띠‘를 형성하고, 국기를 흔들며 국가를 부르고, 자유의 열망을 외치는 등 극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이는 인간이 만든 가장 긴 띠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으며, 발트 3국은 현재 이 사건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려고 추진 중이라고 한다. 이와는 별도로 탈린은 우리가 생각지 못한 낯선 풍경을 보여주기도 한다. 지난 시절의 아픈 역사, 우리나라로 치면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의 흔적들 쯤으로 여겨두자. 이곳에서는 그런 오욕(汚辱)의 흔적들을 없애지 않고 에스토니아 역사의 일부분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한때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소련의 비밀경찰들이 활동하던 건물까지도 구시가지에서 탈린 시민들과 소통하고 있다. 참고로 이곳 탈린은 에스토니아의 수도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강대국들이 만들어놓은 지배의 상징이기도 하다. 1219년 덴마크를 필두로 하여, 독일, 스웨덴, 제정 러시아 등이 차례차례 이 연약한 영토를 탐하였고, 그런 지배의 역사는 1990년까지 계속되었다.
▼ 정원처럼 잘 다듬어진 숲길을 따라 몇 걸음 더 옮기면 ‘톰페아 언덕’에 쌓아올린 성곽(城郭)을 만난다. 높은 산이 없는 탈린에서 높이 45m의 ‘톰페아 언덕’은 마치 산(山)처럼 느껴진다. 해안가 석회암 절벽에 위치한 톰페아 언덕은 '최고봉'이라는 뜻으로 폭이 400m에 길이가 250m 정도 되는 분지(盆地)로 이루어져 있다. 13세기부터 14세기까지 이곳에 성(城)과 성벽이 건설됐다. 에스토니아를 정복한 덴마크인들이 세웠다고 전해진다. 성곽은 두께 3m, 높이 15m로 도시를 감싸며 4.7㎞나 뻗어 있었고 성곽에는 붉은빛 원뿔 모양의 지붕을 이루고 있는 탑(塔)이 46개나 세워졌다. 이는 북유럽 최고의 철옹성 중 하나였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는 1.85㎞의 성벽에 26개의 타워(塔)만 남아 있을 따름이다. 그래도 다른 도시와 차별되는 탈린만의 분위기를 느끼기에는 충분하다.
▼ 성곽을 지났다싶으면 이젠 널따란 광장(廣場)이 뒤따른다. ‘톰페아 성(Toompea loss)’의 앞마당이라 할 수 있는 광장’이다. ‘톰페아 성’은 아름다운 핑크빛 파스텔 톤(pastel tone)의 로코코양식(Rococo style, 낙관주의적인 감정을 표현한 건축기법)으로 지어진 옛 통치자들의 궁전(宮殿)이다. ‘톰페아 언덕(툼페아, Toompea)’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은 언덕의 이름과 같은 ‘톰페아 성’일 것이다. 현재는 ‘국회의사당’으로 쓰이고 있어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되므로 외관만 눈에 담을 수 있을 따름이다. 의사당 꼭대기에는 에스토니아공화국의 삼색기가 펄럭이고 있다. 하지만 옛날에는 덴마크를 필두로 이곳을 지배해오던 권세가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깃발이 매달려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저 깃발은 이제 이 아름다운 도시가 엄연히 에스토니아인들의 소유가 되었음을 만방에 공표하고 있는 셈이 되겠다.
▼ 의사당의 맞은편에는 양파머리 모양의 첨탑을 하고 있는 ‘알렉산더네프스키 성당(Alexander Nevsky Cathedral)이 우뚝 솟아있다. 러시아 정교회의 성당으로 에스토니아가 제정 러시아의 치하에 있던 1900년에 건립되었다. 이 성당은 상트페테르부르크(St. Petersburg) 출신의 ’미하일 프레오브라즈헨스키(Mikhail Preobrazhenski)‘에 의해 건축되었으며 노브고라드(Novgorod)의 왕자인 ’알렉산더 야로슬라비츠 네프스키(Novgorod, Alexander Yaroslavitz Nevsky)‘에게 헌정되었다. 네프스키 왕자는 1242년 4월 5일 ’페입시 호(Peipsi Lake)‘ 둑에서 벌어진 독일과의 얼음전쟁 (Ice Battle)에서 승리함으로써 독일의 동방 진출을 차단시켰던 인물이다. 성당의 종탑(鐘塔)은 11개의 종으로 이루어 있으며 탈린에서 가장 큰 종소리를 낸다고 한다. 11개의 종 가운데는 무게가 15톤에 달하는 탈린에서 가장 큰 종도 있다. 예배 전에는 항상 종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성당 내부는 모자이크와 성상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돼 있다. 참고로 발트연안의 국가들에서는 성당이나 교회를 불문하고 ’church(교회)‘라는 단어를 구분 없이 쓴다. 아주 큰 성당일 때에는 ’Cathedral’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그때도 ’church‘를 사용한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없단다.
▼ 의사당과 성당 사이로 난 투박한 박석 길을 따라 천천히 오르면 탈린 시민들의 영원한 마음의 안식처라는 ’톰교회(Toomkirik)‘가 나온다. 온통 하얀색으로 칠해진 이 교회는 에스토니아 대통령의 이ㆍ취임식이 열릴 만큼 탈린 시민의 정신적 지주가 되는 곳이다. 탈린은 물론 에스토니아에서도 가장 오래된 교회인데 ’톰‘은 돔(dome)지붕을 가리키는 단어이자 교구의 대표 성당인 ’카테드랄(cathedral)‘을 뜻하기도 한다. 구시가지의 중심을 가리키는 이곳 지명인 ’톰페아‘가 ’톰(돔)교회가 있는 언덕(페아)‘이라는 뜻에서 연유한 이유이다. 이 교회는 덴마크가 탈린에 도시를 처음 세운 1219년 무렵 나무로 지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교회의 공식적인 출범은 1240년 석조 건물로 다시 지어 동정녀 마리아에게 봉헌했던 때로 본다. 그래서 공식적인 이름도 '성모 마리아 톰교회(St Mary's Cathedral, Toomkirik)'란다. 탈린 교구를 대표해오던 이 대성당은 16세기 종교개혁 때 개신교의 루터교회로 바뀐다. 그 이후부터 스웨덴계 복음루터교단의 ’탈린 대교구‘를 대표하는 교회가 되었다. 참고로 이 교회는 여러 번의 개보수를 거치면서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고딕양식으로 된 건물의 뼈대는 15세기 것이고 내부는 17~18세기, 그리고 아름다운 바로크 첨탑은 맨 마지막인 1779년에 세워졌다.
▼ 루터교회에서 전망대로 가다보면 건물의 벽면에 붙어 있는 부조상(浮彫像) 하나가 눈에 띈다. 음악과 무대 예술을 가르치는 ‘에스토니아 음악연극아카데미’ 건물인데, 부조의 주인은 에스토니아의 연극연출가이자 배우, 평론가, 교육자였던 ’볼데마르 판소(1920~1977)라고 한다. 그는 1941년 이 학교를 졸업하고 모스크바에서 연극을 공부한 뒤 돌아와 탈린 드라마센터에서 활동한 에스토니아 현대 연극의 선구자였다.
▼ 아카데미 건물을 뒤로하고 좁은 골목길을 따라 전망대로 향한다. 예쁘게 지어진 집들이 줄줄이 나타나는 멋진 길이다. 톰페아는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동안 수많은 유럽의 도시들을 가봤지만 탈린만큼 고도(古都)로서의 면모가 확실한 곳도 드물지 싶다. 탈린이 옛 모습을 온전히 지켜낼 수 있었던 데는 뜻밖에도 '나쁜 날씨'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참전국의 폭격기들이 안개가 짙게 낀 탈린의 구도심(舊都心)을 찾지 못해 발트해에 폭탄을 쏟아 부었다는 것이다. 안개가 오조준(誤照準)을 유발해 결과적으로 도시를 보호해낸 셈이다.
▼ 중세 13, 14세기에 지은 건축물과 구조물들을 감상하며 구불구불한 골목을 걷다보면 어느덧 전망대에 이르게 된다. 톰페아언덕의 북단(北端)에 위치한 ‘파트쿨리 전망대(Patkuli Vaateplatvorm)’이다. 전망대에는 사람들로 가득한다. 탈린에 들르는 관광객들이 결코 빼먹을 수 없는 장소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긴 어떤 구도로 찍더라도 멋진 사진이 나오는 일류의 ‘포토제닉(photogenic)’ 장소이니 어느 누가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한 카페는 물론이고 글뤼바인을 파는 노점상이나 기념품가게, 그리고 발트해의 명물인 호박(琥珀) 세공품들을 파는 곳들이 주변에 가득한 것을 보면 유명한 관광지라는 것이 실감이 난다. 참고로 톰페아언덕에는 세 개의 전망대가 있다. 2개는 바다를 향해 있어 아름다운 발트해가 한눈에 잘 내려다보이는데, 일몰을 구경할 수 있는 명소로 알려져 있다. 나머지 하나는 도심(都心)을 향해 있다. 올드타운과 신시가지 일부를 조망하기에 딱 좋다고 한다.
▼ 전망대에서는 일망무제의 조망이 터진다. 톰페아 언덕은 고지대(高地帶)지만 기껏해야 해발이 45미터에 불과할 따름이다. 하지만 그 정도만 갖고도 조망을 즐기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국토 전체가 평지인 덕분에 시야를 가로막는 것이 일절 없기 때문이다. 전망대에 서면 중세풍의 우아한 분위기를 간직한 구시가지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붉은 지붕과 뾰족한 구시청사의 첨탑, 그리고 은빛으로 물든 발트해 등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한 폭의 수채화처럼 그려진 탈린 시내를 보고 있노라면 왜 이곳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도시이자 '발트해의 보석'이라 불리는지 그 이유를 금방 깨닫게 된다. 사람들은 좀처럼 전망대를 떠나려 하지를 않는다. 발트해에서 불어오는 말간 바람 몇 줌과 울긋불긋한 구시가지 지붕들이 빚어내는 시각적인 소나타가 너무나 아름답기 때문일 것이다.
▼ 발트해 방향도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바다나 육지 할 것 없이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이곳 에스토니아는 빙하침식이 만들어 놓은 평야지대에 놓여있다. 그러니 산이 보일 리가 없다. 평균 해발고도가 50m에 불과하고 가장 높은 지대라고 해도 318m에 지나지 않는단다. 하지만 산림은 풍부한 편이다. 전체 국토의 7%에 해당하는 삼림이 국가 경제의 주 원동력이 되고 있을 정도란다. 참고로 에스토니아에는 1,400여 개나 되는 크고 작은 호수가 있다. 대부분은 작지만 가장 큰 호수인 ’페이푸스 호(Lake Peipus)‘는 면적이 3,555㎢에 이르기도 한다. 강줄기도 많아서 162km의 지류인 보한두 강(Võhandu), 파르누 강(Pärnu) 등이 있다. 사방이 푸르게 보이는 이유일 것이다.
▼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긴다. 다음에 만나게 될 전망대에서 더 나은 조망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가이드의 귀띔이 조금은 위안이 된다.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가야하는 지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좁은 골목길을 지나야 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 전망대 근처에 있는 기념품가게의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하도 예스럽기에 카메라를 들이대 봤다. 지하로 내려가게 되어있는데 마치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다. 화장실에 설치된 집기나 소품들도 어느 것 하나 고풍스럽지 않은 것이 없었다.
▼ 그렇게 잠시 걷다보니 또 다른 전망대가 나타난다. 아까보다는 남쪽 방향, 그러니까 코흐투가(街)의 끝에 있는 전망대인 ’코흐투 전망대(Kohtuotsa Vaateplats)‘이다. 가이드의 귀띔대로 아까보다 시야(視野)가 더 넓을 뿐만 아니라 시멘트로 난간까지 만들어 놓았다. 난간에 걸터앉을 경우 일류의 포토죤(photo-zone)으로 변하니 참조한다. 참고로 탈린(Tallinn)은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로 확연히 구분되어 있는데, 구시가지는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구시가지를 걸어서 한 바퀴 도는데 몇 시간이 걸리지 않을 만큼 자그마하지만, 탈린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선 새벽과 대낮, 그리고 저녁 등 세 번을 봐야한다는 말이 있다. 우선 새벽안개가 가시지 전의 인적이 뜸한 골목길에선 수백 년간 이 땅을 지켜온 역사의 흔적들이 느껴지고, 동이 튼 후 사람들의 발걸음이 분주해지면 발트해의 무역 관문(關門)이었던 당시의 활기를 가늠해 볼 수 있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해가 진 뒤에 전망대에 올라가 보는 것이다. 발트해를 오가는 여객선과 구시가지 성벽의 야경을 밝히는 조명, 그리고 신시가지의 화려한 불빛이 조화를 이루는 환상적인 세계를 체험할 수 있단다.
▼ 전망대에 선다. 그리고 서쪽 탈린만부터 동쪽으로 시선을 옮겨본다. ‘파트쿨리 전망대’의 조망사진과 같기에 사진을 생략했지만 구시가지 너머 짙푸른 탈린만과 건너편 피리타지역의 반도가 나타난다. 구시가지 왼쪽에는 성올라프교회의 첨탑이 솟아 있다. 높이가 124m나 되는 올라프교회 첨탑은 탈린 어디서나 눈에 띄는 랜드마크(landmark)이다. 시선을 조금 오른쪽으로 옮기면 종탑이 눈에 들어온다. 중세의 목각작품으로 가득한 성령교회 종탑이다. 바로 앞에는 주황부터 빨강까지 따뜻한 빛깔의 지붕을 얹어놓은 집들이 흡사 동화 같은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누군가는 탈린을 일러 ‘붉은색 지붕을 가진 도시’라고 적었다. 딱 맞는 표현이 아닐까 싶다. 중세시대의 나지막한 건축물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붉은색 기와를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겨울이 길고 눈이 많이 오는 발트 연안이어선지 그 지붕들이 하나 같이 가파르다.
▼ 사진은 첨부하지 않았지만 ’코흐투 전망대‘의 벽에는 ‘the times we had’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혼성 포크트리오인 ‘피터, 폴엔 매리(Peter, Paul&Mary)‘가 불렀던 ‘the good times we had’와 비슷한 문장이다. 우리가 가졌던 시간들... 지금 바라보고 있는 풍광의 좋고 나쁨은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행복은 얼마나 만족하느냐’에 달려있다. 눈앞에 펼쳐지는 풍광에 만족한다면 그게 바로 행복이 아니겠는가. 그런 깊은 뜻을 알았던지 집사람도 활짝 웃고 있다.
▼ 이젠 구시가지로 내려가야 할 차례이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제한된 시간에 투어를 마쳐야 하는 게 패키지여행의 특징인 것을 말이다. 다음 행선지는 올드타운 중 저지대인 로우타운(Lower Town)이다. 탈린의 구시가지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탈린의 지배세력들이 정치와 행정목적으로 사용하던 건물들이 남아 있는 고지대가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13세기경부터 발트해의 주요 무역 거점지 중 하나로 발전하면서 탈린에 자리 잡기 시작한 무역상들의 건물이 밀집해 있는 저지대(Lower Town)이다. 저지대(Lower Town)로 내려가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짧은 다리라는 이름의 ‘뤼히케 얄그(Lühike Jalg) 거리와, 긴 다리라는 뜻의 ‘픽 얄그(Pikk Jalg)’이다. 이 재미있는 이름의 두 거리는 고지대에서 저지대를 이어주는 골목 두 개를 일컫는다. 시작은 긴 다리라는 ‘픽 얄그(Pikk Jalg)’를 따른다. 길은 폭이 넓은데다 경사까지도 완만하다. ‘마차를 타고 오르내려도 되겠다’는 내 혼잣말을 가이드가 들었나보다. 그래서 ‘픽 얄그(Pikk Jalg)’는 귀족들의 전용 길이었다고 일러준다.
▼ 길가에 정체가 불분명한 조형물이 매달려 있기에 카메라를 들이대 봤다. 카페의 입구에 ‘목이 긴 장화’를 매달아 놓았는데, 아무리 봐도 카페와는 연관이 없어보였기 때문이다. 생뚱맞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득 머릿속을 스쳐가는 뭔가가 있다. 카페의 앞을 지나는 도로의 이름이 ‘다리(Jalg)’였던 것이다. 그것도 ‘긴 다리’인 ‘픽 얄그(Pikk Jalg)’이다. 골목의 이름을 나타내기 위해 다리를 길게 만들고 거기에다 ‘장화’를 신겨놓았는지도 모르겠다. 낭만적으로 말이다.
▼ 잠시 후 길이 나뉘는 곳에서 오른편으로 내려선다. 계단이 놓여있는데 이 골목이 시민들이 사용했다는 짧은 다리, 즉 ‘뤼히케 얄그(Lühike Jalg)’이다. 누군가의 넋두리가 들려온다. ‘저지대에서 고지대로 올라갈 때는 ‘짧은 다리’, 반대로 내려올 때는 ‘긴 다리’를 이용해서 내려오면 골목길의 정취를 한껏 더 느낄 수 있는데 역방향으로 걷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불평할 것까지는 없다. 잠시 후에 자유시간이 주어지니 그때 다시 한 번 찾아보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 탈린의 고지대는 전체를 아울러 ‘톰페아(툼페아, Toompea)’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그 언덕을 내려가는 길가에는 ‘파스텔 톤(pastel tone)의 고풍스런 건물들이 즐비하다. 멋스러운 건물들이 가득한 탈린 구시가지 거리는 걷는 것만으로도 행복이 충전된다. 카메라 역시 방향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 영주가 통치하는 왼편 성안과는 달리 오른편의 다운타운은 상업과 자유무역 지대였다. 그래서 죄를 짓고 성벽을 뛰어넘어 다운타운 지대로 도망치는 사람들은 1년하고도 하루 동안 붙잡히지 않으면 자유의 몸이 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박석(薄石)을 깔아놓은 골목은 한마디로 아름답다. ‘발트해의 진주’, ‘발트해의 순결한 보석’, ‘발트해의 자존심’은 탈린(Tallinn)에 따라다니는 수식어들이다. 800년의 역사가 곳곳에 담긴 구시가지를 아무 생각 없이 돌아다니기만 해도 그러한 수식어가 남의 생각만은 아님을 느끼게 된다. 1991년 독립한 이후 북유럽 최고 관광도시로 떠오른 탈린은 독립 20주년을 맞는 2011년, 핀란드의 투르쿠(Turku)와 함께 유럽 문화수도로 지정되기도 했다.
▼ 시청광장으로 내려가는 길에 만난 ‘아이스크림 가게(첨부된 사진의 오른편 가게)’, 에스토니아에서 가장 맛있는 아이스크림이 나온다고 해서 자유 시간을 이용해 찾아봤다. 하지만 두어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고 나서야 겨우 찾아낼 수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외국인의 얼굴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비슷하다고들 한다. 외국에 나오면 그곳의 건물 또한 이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건물들이 도대체 구분이 잘 안 되는 것이다. 찾는 것을 그만두어 버릴까 생각도 해봤지만 집사람이 좋아하는 것이기에 물어물어 찾아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고생한 보람은 있었다. 두 가지 종류를 섞어서 맛본 집사람의 평은 ‘최고’였기 때문이다. 이런 걸 두고 ‘고진감래(苦盡甘來)’라고 하는가 보다.
▼ ’시청광장(라에코아광장)‘에 가까워지면 산타클로스의 유래가 된 ’성 니콜라스‘를 수호성인으로 모시는 유서 깊은 ‘니콜라스 교회(St. Nicholas' Church)’가 나온다. 1230년 독일 상인과 기사들을 위해 지어졌으며 탈린성곽이 지어지기 전까지는 요새의 역할도 수행했었다고 전해진다. 1523년 종교개혁 당시 우상을 제거한다는 이유로 많은 성당들이 파괴되었지만 이 교회는 화를 면했다고 한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은 비켜가지는 못했다. 1944년 점령군이었던 독일을 몰아내려는 러시아의 폭격으로 인해 몽땅 부서져버렸기 때문이다. 탈린 사람들은 외지인이 찾아오면 니콜라스 교회를 꼭 둘러보라고 권한다고 한다. 가슴속에 점령군 러시아에 대한 앙금이 여전히 작용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여기에는 '스토리'가 있다. 에스토니아를 강점하던 러시아 정부는 1960년대까지도 성당 수리에 미온적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국제적인 압력에 못 견뎌 마지못해 1980년대에야 복원공사를 해놓았다는 것이다. 그들의 심정에 공감이 가는 건 우리 역시 피지배의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지금은 박물관과 연주회장으로 변해있다니 참조한다. 또한 이 교회에는 105m짜리 첨탑이 있다. 울라프교회의 123m짜리 첨탑보다는 낮지만 위로 오를 경우 아름다운 탈린시가지를 한눈에 볼 수 있다고 한다.
▼ 탈린 구시가지는 노천카페의 천국인 모양이다. 아예 길의 가운데까지 테이블들이 점령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리는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는 까다로운 도시 건축법 덕분이라고 한다. 나라에서 정책적으로 신축이나 개축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집을 짓는 것은 물론 수리나 개조를 할 때에도 철저히 시의 통제를 받는단다. 우리나라의 ‘한옥마을’ 정도로 보면 되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그 덕분에 13세기 이래의 전통적인 건축물들이 잘 보존돼 있고 거리 전체의 균형미도 옛날 모습 그대로이다. 도로 포장도 아스팔트 대신 단단한 돌을 깔았다. 삭막한 아스팔트와 느낌이 확연히 다르다. 미로(迷路) 같은 도시의 골목길을 걷다보면 흡사 중세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이다.
▼ 잠시 후 널따란 ‘시청 광장(Town Hall square)’이 나온다. 라에코아광장으로도 불린다니 참조한다. 이곳은 시청건물이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시장으로 이용되어 온 장소였다. 많은 축제가 열렸으며 죄인들을 처형 하는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오늘날에는 시민들의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특히 지금 같은 여름에는 노천카페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건 기본, 수많은 거리 콘서트가 열리는가 하면 수공예품 전시장 등 중세풍의 시장이 열리는 장소로도 사용된다고 한다. 중세 시대의 카니발을 재현하는 '구 시가지의 날’ 행사도 이곳에서 열린다. 행사에 맞춰 찾아올 경우에는 에스토니아의 전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중세시대의 전통 행사인 카니발 퍼레이드, 중세 기사 경연 대회, 활쏘기 대회 등이 펼쳐진다. 참고로 광장에는 매년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전후 한 달 동안 대형 ‘트리(tree)’가 세워진다고 한다. 이는 1441년부터 계속해서 이어온 전통인데, ‘크리스마스트리’의 원조 자리를 놓고 라트비아 수도 ‘리가’의 시청광장과 다투고 있다. 리가의 시청광장 검은머리전당 앞의 바닥엔 1510년 검은머리 길드 조합원들이 세계 최초로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웠다는 것을 기념하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 저지대 한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북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고딕양식의 건물인 구시청사(Raekoda) 역시 성탑과 더불어 탈린 스카이라인의 중요한 부분을 장식한다. 13세기에 건립된 이 건물은 1402년부터 2년에 걸쳐 재건축되어 지금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외벽을 석회암으로 마감하고 지붕은 점토 타일로 얹은 고딕 양식의 옛 시청은 좌우 길이가 37m, 양쪽 너비가 15m 안팎에 이른다. 건물의 지붕은 급경사의 뾰족한 모양을 이룬 박공 구조로 되어 있으며 처마 위에는 용의 머리 형상을 한 물 홈통이 있다. 건물의 창과 입구도 화려하게 장식 되어 있으며 특히 건물 동쪽에는 호리호리한 8각 첨탑이 있는데 이는 후기 르네상스 양식인 왕관 모양으로 되어 있다. 지난 수세기 동안 탈린시 의회의 회의는 물론 탈린의 중요한 행정 사항을 결정하던 시청 건물은 현재 콘서트홀로 사용되고 있다. 구 시청사에서는 두 번째 기둥을 눈여겨볼 만하다. 쇠고리가 걸린 기둥에 죄인을 묶어놓고 토마토 세례를 퍼부었다고 한다. 죄인들 중에는 예전 의회 의원도 포함돼 있었단다. 비밀을 누설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을 어기고 자신의 부인에게 회의 내용을 공개했는데, 결국 이 사실이 발각되는 바람에 광장을 세 바퀴나 기어 다니는 형벌과 함께 사방에서 날아드는 토마토세례를 온몸으로 받아내야만 했단다. 아래 사진과 또 다른 몇 장은 다른 분의 사진을 빌려다 썼다. 새로 산지 얼마 되지 않은 카메라를 들고 여행에 나섰던 탓에 노출조정이 서툴렀던 모양이다.
▼ 첨탑 꼭대기에는 ‘토마스 할아버지’ 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16세기 파수병 차림을 한 풍향계가 돌아간다. 이 풍향계가 달린 첨탑이 시청 건물 중 가장 유명한 곳이며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의 상징이다. 반대편 서쪽 박공 꼭대기에도 또 하나의 풍향계가 서있다. 이번엔 사자가 치켜든 깃발형의 풍향계이다. 1627이라고 새겨져 있는 걸로 보아 첨탑을 고쳐 지은 그 해에 함께 세운 모양이다.
▼ 시청 광장(라에코아광장)에서 꼭 가봐야 할 곳은 1422년부터 현재까지 한 곳에서 영업을 이어가고 있다는 ‘Raeapteek’이라는 약국(藥局)이다. 현존하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약국이라서 지금은 탈린을 방문한 사람이라면 빼놓지 않고 들르는 명소가 됐다. 이 약국에는 ‘고양이의 피와 생선의 눈과 유니콘의 뿔로 만든 파우더를 정력제로 팔았는데, 그때 유니콘을 너무 많이 잡은 바람에 다 사라졌다’는 우스갯소리가 전설처럼 내려온다.
▼ 약국의 한쪽 구석에는 당시 사용되었던 말린 두꺼비, 이집트 미라, 불에 그을린 벌들을 비롯한 여러 가지 다양한 약초 등 재료들이(물론 모조품이긴 하지만) 중세시절의 분위기를 되살리며 전시되어 있다. 게다가 약품이 모아져있는 진열장 안에는 약 200년 전 이 약국을 운영하던 가문의 한 젊은이가 후세의 약사들을 위해 남겨둔 편지가 놓여있다. 이런 진열품들을 보고 있노라면 중세와 현재가 한 곳에서 충돌한 4차원의 세계로 들어온 느낌이 들 정도이다.
▼ 시청광장을 둘러본 다음에는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무려 두 시간이나 되니 가보고 싶은 곳은 모두 둘러볼 수 있을 것이다. 가장 먼저 들러봐야 할 곳은 맛있다고 소문난 아이스크림가게이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생맥주를 거르는 일도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리곤 옛날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골목길도 걸어야겠다. 그 첫 번째 시도는 오른편에 있는 성벽까지 나가보는 것이다. 아이스크림 가게 근처에 있는 ‘성 니콜라스교회’에서 동쪽으로 난 골목길로 들어선다. 조금 전 아이스크림 가게를 찾아가던 경험으로 보아서는 길이 헷갈려도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현지 주민들과 영어로 대화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하긴 이 나라에서는 영어 외에도 러시아어나 핀란드어까지 통한다니 언어에 대한 걱정은 애초부터 할 필요조차 없었다. 거기다 탈린의 시민들은 친절하기까지 했다. 내 물음에 조금도 귀찮아하지 않고 모두들 친절하게 대답을 해주었다.
▼ ‘베네가’인 듯 싶은 골목에 수도원처럼 담을 둘러친 가톨릭 성당이 하나 숨어있다. ‘성 베드로바울대성당’이란다. 탈린교구를 대표하는 ‘주교좌성당(cathedral)’이라는데도 참 소박한 외모를 지녔다. 그렇지 않아도 무신론자가 많다는 에스토니아에서 루터개신교나 러시아정교에도 못 미치는 교세(敎勢) 탓이 아닐까 싶다. 이 성당은 옛 ‘미니크수도회의 ’카타리나수도원‘의 후신으로 보면 된다. 13세기 초, 덴마크의 통치와 함께 탈린에 상륙한 ’성 카타리나수도원‘은 1524년 유럽을 휩쓴 종교개혁 때 파괴된다. 1558년 탈린을 점령 통치한 스웨덴은 국교가 루터개신교였기에 가톨릭을 금지해버린다. 18세기 초 러시아 표트르대제가 일으킨 북방전쟁에서 스웨덴이 탈린에서 쫓겨난 뒤 종교의 자유가 다시 오면서 가톨릭의 암흑기도 끝났고 1841년 옛 카타리나수도원 자리 옆에 이 성당이 세워졌다고 한다.
▼ 안으로 들어서면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성당이 나타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활약하던 이탈리아계 건축가 카를로 로시가 설계를 맡았다고 한다. 성당 오른편에는 ’성 카타리나수도원‘에 대한 기록과 흔적들을 모아놓은 박물관이 있다.
▼ 동쪽 끄트머리까지 걷자 또 다시 성벽이 나타난다. 성 밖으로 나가는 문(門)은 나있으나 문짝은 보이지 않는 낯선 풍경이다. 적(敵)이 쳐들어오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막았을 지가 무척 궁금해진다. 성벽을 따라 잠시 걸어본다. 곳곳에 망루(望樓)로 올라갈 수 있는 나무계단이 놓여있다. 하지만 위로 올라가볼 수는 없었다. 중간쯤에서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도록 자물쇠로 잠가놓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고풍이 완연한 망루에서 햄릿이라도 나타날 것 같은 분위기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To be or not to be)‘를 중얼거리면서 말이다.
▼ 동쪽 성벽을 따라 걷다보면 아래 사진처럼 생긴 희한한 지붕이 있는 골목이 나온다. 탈린에서도 유명한 길드 장인의 거리인 '카타리나 골목(St. Catherine's passage)'라는 곳이다. 14세기 중세시대 장인들의 워크샵이 모여 있던 이곳은 지금도 유리 공예, 보석 세공, 모자, 도자기, 퀼트 등을 제작하는 장인들이 모여 작업을 하고 있다. 관광객들이 장인들의 작업 현장을 구경할 수 있어 탈린 관광의 인기 있는 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골목의 오른편은 1246년부터 1524년까지 존재했던 도미니크수도회인 ’성카타리나수도원‘의 남쪽 벽이다. 골목 이름은 이 수도원에서 따왔다. 참고로 카타리나 골목은 중세 종교개혁 전까지 구시가지 내에서 활동했던 카타리나 수도원으로 연결되는 길이란 뜻이다. 현재 수도원은 사라졌지만 1970년대의 대대적인 발굴과 보수 공사 이후 과거 수도원 성내에 안치되었던 귀족들의 비석을 골목 내부로 옮겨놓아 당시 분위기를 상당히 재현해놓았다. 현재는 14개의 수공업 공방이 결정해 조직한 카타리나 길드의 주요 활동 지역이자 중세 분위기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지역으로 일 년 내내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 성곽을 둘러보고 난 뒤에는 시청광장으로 되돌아온다. 이때 저지대의 볼거리 가운데 하나라는 픽(Pikk)거리를 따라 걷게 된다. 상공업자들의 공동조합조직인 길드(guild)의 건물들이 늘어서있다. 무역 거점이었던 탈린에 정착해 경제와 무역활동에 종사하던 그들은 중세무역사(中世貿易史)뿐만 아니라 탈린이라는 도시 풍광의 밑그림을 그려준 미학적 관점에서도 엄청난 업적을 남겼다. 픽(Pikk) 거리와 라이(Lai) 거리에 남아 있는 3-4층 높이의 단아한 건물들은 중세 상공인들의 생활방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 픽(Pikk)거리의 옛 건물들 대부분은 식당과 갤러리, 호텔, 공연장 등으로 다양하게 쓰이고 있지만 당시 그대로의 모습을 허물지 않고 그대로 남겨두었다고 한다. 탈린 시민들에게 역사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그대로 전달해주기 위해서란다. 주어진 시간이 조금 남아있기에 노천카페에 자리를 잡는다. 그리곤 생맥주부터 주문하고 본다. 집사람은 물론 커피이다.
▼ 꼬마열차도 보인다. 골목골목을 누비며 돌아다니는데 크기가 작다고 해서 웃을 일은 아니다. 그 안에 타고 있는 사름들은 아이들보다 어른들의 숫자가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하긴 외모만 보면 동화나라에서나 나올법한 꼬마열차이니 속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는 투어버스이다. 다만 열차처럼 꾸며놓았을 따름이다.
▼ 다음 목적지인 헬싱키로 가기 위해서는 ‘탈린 항구(Old City Harbour)’로 나가야 한다. 핀란드의 헬싱키를 왕복 운행하는 쾌속선(페리)인 ‘탈링크(Tallink)’가 이곳해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헬싱키와 탈린을 오가는 ‘셔틀 쉽(shuttle ship)’인 탈링크는 시즌에 따라 하루에 8~9회 정도 운행하는데, 70km 가량 떨어진 헬싱키까지는 대략 2시간이 조금 더 걸린다. 참고로 탈링크(Tallink)는 에스토니아의 국영 선사(船社)인 ‘ESCO’가 운영하는 ‘탈링크 그룹(Aktsiaselts Tallink Group)’에서 운영하는 배를 통칭한다. 물론 개개의 배마다 각자의 이름을 갖고 있다. 이 회사는 스웨덴↔에스토니아, 헬싱키↔스톡홀름, 핀란드↔독일, 스웨덴↔라트비아 노선을 운영하는 등 발트해 지역의 명실상부한 해상 운송 강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 배에는 일반석인 ‘스타클래스(StarClass)’와 스타 ‘컴포트 클래스(Comfort Class)’, 그리고 ‘비지니스 라운지(Business lounge’ 등 세 가지 종류가 있다. 각종 편의 시설을 두루 갖춘 쾌적한 별도의 공간에다 꼬냑과 위스키를 포함한 각종 주류와 음료들을 무제한으로 제공해주는 ‘비즈니스 라운지’가 좋겠지만 패키지여행을 따라 나온 우리에겐 언감생심(焉敢生心)일 따름이다. 가이드에게 짐을 맡겨놓고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게 그나마 위로가 될 따름이다. 물론 내 손에는 선내(船內) 카페에서 산 생맥주 잔이 쥐어져 있다. 약간의 위스키를 희석시킨 채로 말이다. 만일 나처럼 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선내에 있는 마트나 화장품코너에 들러볼 일이다. 핀란드의 대표 화장품인 ‘루메네(LUMENE) 칵테일 세럼’을 구입하는 기회도 될 것이다.
▼ 하룻밤을 머물렀던 수지호텔(Hotel SUSI), 중심가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을 빼놓고는 나름대로 괜찮은 호텔이다. 시설도 깨끗할뿐더러 제공되는 식사 또한 훌륭한 편이었다. 특히 나 같은 애주가(愛酒家)들에게는 몇 걸음 거리 밖에 되지 않는 곳에 슈퍼마켓이 있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 아닐까 싶다. 보다 싼 가격에 맥주와 안주를 구입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 에필로그(epilogue), 러시아에서 에스토니아로 넘어갈 때는 국경에서 두 번을 내려야만 한다. 첫 번째는 러시아 국경을 넘어가면서 거치게 되는 출국심사이다. 이때 러시아에 들어올 때 입국심사를 거쳤다는 증명서인 스탬프(stamp)가 찍혀있는 ’입국신고서‘를 제출해야만 한다. 이게 없으면 출국이 불가능하니 절대 분실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이다. 가이드의 얘기로는 이때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신고서에 적혀있는 내용이 사실과 다를 경우 봉변을 당하는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미 지나간 얘기가 되어버렸겠지만 신고서를 작성할 때에 보유 현금(現金) 등 적어야할 항목을 잘 살펴보고 적어야 하겠다. 두 번째는 에스토니아로 들어가기 전이다. 입국심사를 받기 위해서인데 양쪽 심사장의 분위기는 확연히 다르다. 무거운 분위기에 무뚝뚝하기까지 했던 러시아에 반해 이곳 에스토니아는 밝으면서도 여유로움이 묻어난다. ’관광을 위해 찾아왔다‘는 내 대답을 듣고는 ’welcome‘하며 활짝 웃어주는 게 아닌가. 역시 유로(Euro)에 가입한 나라답다. 참 변한 건 그뿐만이 아니다. 국경을 넘으면 러시아 키릴 문자가 완전히 사라지고 로마 문자로 바뀐다. 바뀐 분위기가 낯설고도 반갑다. 분위기도 한결 부드러워지니 여행이 조금은 편안해진다. 사람들 생김새는 변한 것이 없는데 체제가 하나 바뀌었다고 이렇게 많은 것이 바뀔 수 있을까? 버스는 한적한 시골길을 두 시간을 더 넘게 달려 탈린에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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