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봉(象皇峰, 644m)

 

산행코스 : 대구미전망바위심봉(598m)상황봉하느재백운봉(白雲峰, 600m)업진봉(544m)숙승봉(宿僧峰, 461m)원불교 청소년수련원(산행시간 : 4시간40)

소재지 : 전라남도 완도군 완도읍과 군외면의 경계

산행일 : ‘14. 1. 1()

같이한 산악회 : 온라인산악회

 

특색 : 완도 본섬과 완도를 둘러싸고 있는 섬들을 한꺼번에 구경하면서 산행을 즐길 수 있는 조망(眺望)이 뛰어난 산이다. 상황봉을 위시하여 심봉과 백운봉, 그리고 업진봉, 숙승봉 등 다섯 개의 봉우리 들이 완도 본섬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다섯 개의 봉우리들을 함께 아우르는 이름은 갖고 있지 못하다. 최근 이곳을 찾는 등산객들 사이에서 오봉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지만 아직 공식화(公式化)되지는 못하고 있다.

 

산행들머리는 대구미마을 주차장(駐車場)

남해고속도로(영암-순천)고속도로 강진무위사 I.C를 빠져나와, 13번 국도를 따라 달리다가 완도대교를 건너면 목적지인 완도(莞島)이다. 다리를 건넌 후, 오른편에 보이는 77번 국도를 따라 들어오면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드라마 해신(海神)의 촬영지인 대신리를 지나, 오늘 산행의 들머리인 완도읍 화흥리 대구미마을에 다다르게 된다.

 

 

 

대구미 마을의 새동백수퍼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들머리에 상황봉 등산로 안내도와 이정표(상황봉 3.8Km, 심봉 3.3Km)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시멘트도로를 따라 잠시 오르면 그리 넓지 않은 등산로(이정표 : 상황봉 3.2Km)가 왼편에 나타난다.

 

 

 

산으로 들어서면 먼저 커다란 소나무가 군락(群落)을 이루고 있는 것이 보인다. 동백나무나 후박나무 등 상록활엽수만이 울창할 것으로 예상했었기에 낯설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근처에 무덤 몇 기()가 보이는데, ()를 쓴 사람들이 심은 것이 아닐까 싶다. 산길은 무덤 뒤에 있는 짙은 숲속으로 연결된다. 등산로는 초반에 상당히 급경사(急傾斜)를 보이고 있다. 산의 초입에서 주종을 이루던 상록활엽수는 산이 고도(高度)를 높여가면서 점차 앙상한 가지만 허공에 걸고 있는 관목(灌木)들로 바뀌기 시작한다.

 

 

 

산행을 시작하고 20분 남짓, 그러니까 산으로 들어선지 10분 남짓이면 능선위로 올라서게 된다. 일단 능선에 올라붙고 나면 언제 가팔랐느냐는 듯이 길은 편해진다. 그리고 조망(眺望)이 터지면서 처음으로 바다가 보이기 시작한다. 특히 능선을 걷다가 바위라도 만날라치면 어김없이 전망대(展望臺) 노릇을 하고 있다. 전망대에 서면 대구리 마을 전체가 한눈에 조망된다. 마을 앞은 바둑판같은 논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고, 그 옆 산봉우리 너머로 김양식장으로 조성된 바다가 펼쳐지고 있다. 여름과 겨울이 공존(共存)하는 곳, 능선에서 만나게 되는 소사나무를 보면서 느낀 소감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동백나무와 후박나무 등 상록활엽수(常綠闊葉樹)들이 가득한 푸른 숲속을 걸으면서 여름을 느꼈었는데, 능선에 오르자마자 나뭇잎이 다 떨어지고 빈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소사나무가 가득한 것이다. 불과 10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여름과 겨울이 번갈아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능선을 걷다보면 생소한 모양을 하고 있는 119구호지점 표지판을 만날 수 있다. 말뚝 모양으로 생긴 다른 산들과는 달리 판자(板子)로 만들어 나뭇가지에 매달아 놓은 것이 이색적이다. 안내판은 구호지점 안내 외에도 이정표의 역할까지 수행하고 있어 등산객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 2봉 등 지도(地圖)에도 나와 있지 않은 봉우리들의 이름을 적어 놓은 것은 흠()이라면 흠일 것이다. 지명(地名)을 표시하려면 다른 사람들이 다 알 수 있는 지명을 표기(標記)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싶다. 119의 안내판대로라면 심봉은 4, 그리고 상황봉은 5봉이 된다. 백운봉과 업진봉, 그리고 숙승봉을 넣지 않고도 완도의 오봉산이 이미 완성되어버리는 것이다. 능선에 올라 10분 쯤 더 걸으면 119가 이름표를 붙여 놓은 제1, 그리고 제2봉과 제3봉이라는 봉우리들을 넘으면서 산길이 연결된다. 그러나 봉우리들이 올망졸망하고 굴곡이 거의 없다시피 하기 때문에 명확히 안부라고 느껴질 만한 곳은 없다. 산길이 한마디로 유순하다는 의미이다.

 

 

전망대(구호지점 안내판에서는 2)에서 바라본 상황봉, 왼편에 뽈록하게 솟아오른 바위봉우리가 심봉이고, 상황봉은 그 오른편에 있는 완만하게 솟아오른 봉우리이다. 지금 산행을 하고 있는 이 산은 모두를 아우르는 이름이 없다. 상황봉을 중심으로 심봉과 백운봉, 그리고 업진봉, 숙승봉 등 다섯 개의 봉우리들이 독립된 이름을 갖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던 것이 이곳을 찾는 등산객들 사이에서 오봉산(五峯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하고 있다. 다섯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졌다고 해서이다. 그러나 오봉산이라는 이름은 전국에 너무 흔하다. 그래도 완도를 대표하는 아니 완도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산인데 말이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스토리텔(Storytelling)라도 해서 산을 아우르는 이름을 하나 만들었으면 좋겠다.

 

 

2봉을 지나서 산길을 맞은편에 보이는 산봉우리를 오른편으로 우회(迂廻) 한다. 구태여 올라갈만한 가치가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우회를 한 산길은 안부에서 갈림길 하나를 만난다. 갈림길에는 산행안내도와 이정표 2(#1 : 상황봉/ 대구미, #2 : 세트장 3.7Km) 외에도 119구호지점 안내판(3: 20.8Km/ 상황봉 0.9Km)’ 하나가 더 보인다. 그런데 이 구호안내판에 적혀있는 위치표시가 조금 애매하다. 이곳은 봉우리가 아닌 안부인데도 ‘3이라고 적혀있는 것이다. 아마 조금 전에 우회했던 산봉우리를 3봉으로 표기하지 않았을까 싶다.

 

 

갈림길을 지나면 산길은 다시 가팔라지기 시작한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치고 오르면 이번에는 거대한 암벽(巖壁)이 앞을 가로막는다. 안전장비의 도움 없이 거뜬히 올라서니 또 다시 바위 벼랑이 앞을 가로막는다. 그런데 로프에 매달려 바동거리고 있는 모습들이 위험천만하기 짝이 없다. 암벽이 수직(垂直)으로 되어있는 데다가 몸을 비틀면서 힘을 써야만 위로 오를 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참고로 이런 오름이 부담스러운 사람들은 뒤쪽으로 우회(迂廻)하면 되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들머리에서 심봉까지는 1시간20분 정도가 걸렸다.

 

 

심봉은 오늘 산행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봉우리 중 하나이다. 거대한 바위로 이루어진 쉼봉 정상은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커다란 정상표지석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넓고 평탄한 바위지대로 이루어진 정상은 수십 명이 앉아 식사를 해도 여유가 있을 정도이다. 옛날에는 나무꾼들이 쉬어가던 장소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쉰다라는 의미를 넣어 쉼봉이라고 불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심봉으로 변한 모양이다. 정상은 고도(高度)가 높고 주변에 나무가 없는 탓에 주변의 경관을 조망(眺望)하기 좋은 전망대 역할을 한다. 광활한 산자락에는 초록빛 난대림이 융단처럼 깔려 있고, 완도 남부 일대와 넓은 바다가 눈앞에 펼쳐지지만 아쉽게도 연무(煙舞) 때문에 또렷하게 나타나지는 않는다.

 

심봉 정상에서 바라본 상황봉 

상황봉으로 가는 능선에서 바라본 심봉, 바위봉우리가 우람하다.

 

 

쉼봉을 내려서자마자 갈림길 하나가 나타난다. 아까 쉼봉 아래에서 우회했을 경우 다시 만나게 되는 지점이다. 쉼봉에서 상황봉까지는 10분도 채 걸리지 않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다. 거기다 고저(高低)가 거의 없는 능선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진행하는데 전혀 부담이 없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여유 있게 걷다보면 갑자기 문설주처럼 서있는 바위틈을 지나게 된다. 상황봉의 바로 아래에서다. 어떤 사람들은 이곳을 통천문(通天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곳을 지나면 곧이어 상황봉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상황봉 정상은 오늘 오르게 되는 다섯 개의 봉우리 중에서 유일하게 흙으로 이루어져 있다. 꽤 넓은 분지(盆地)로 이루어진 정상의 가장 높은 곳에는 잡석(雜石)으로 엉성하게 쌓아올린 봉수대(烽燧臺)가 자리를 잡고 있고, 그 아래에 네모난 정상표지석이 옆으로 누워있다. 상황봉은 해상왕 장보고와 깊은 인연을 갖고 있다. 그가 해상왕국(海上王國)을 만들면서 자신을 코끼리황제에 비유하고, 왕국에서 제일 높은 이 산봉우리를 상황봉(象皇峰)이라고 지었단다. 그러나 완도는 그로 인해 큰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신라는 장보고의 세력을 소멸시키기 위해 이곳 토착민(土着民)들을 전북 김제로 강제이주 시켜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고려 말이 되어서야 다시 완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상황봉 정상은 한마디로 볼품이 없다. 다른 봉우리들이 바위로 이루어졌는데 비해 흙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사방으로 터지는 조망(眺望)은 시원스럽다. 다도해(多島海)의 수많은 섬들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저 섬에 가고 싶다라는 이름표를 단 다도해 조망도(眺望圖)가 정상에 세워져 있는 것은 이를 증명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정상에서는 다도해 풍경 외에도 호남 남해안의 유명한 산들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북쪽에 있는 달마산과 두륜산, 주작산, 덕룡산인데, 아쉽게도 오늘은 그 형태만이 눈에 들어올 따름이다.

 

 

 

 

상황봉에서 내려와 백운봉으로 향한다. 정상에서 내려서자마자 대야리갈림길(이정표 : 백운봉 2.5Km/ 대야리 3.4Km/ 상황봉)을 만나게 되고, 이어지는 산길은 내리막길이다. 그렇다고 마냥 내리막길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가끔 오르기도 하지만 길지도 그렇다고 가파르지도 않기 때문에 오르막길로 느껴지지 않을 따름인 것이다. 상황봉에서 20분 남짓 내려오면 나무데크로 만들어진 전망대(展望臺) 하나가 나온다. 2전망대(119 구호지점 안내판 ; 하느재 0.7Km/ 상황봉 1.3Km)이다. 전망대에 오르면 전면에 대야저수지 너머로 남해바다가 펼쳐지고, 왼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백운봉의 거대한 바위봉우리가 우뚝하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백운봉

 

 

2전망대에서 조금만(8) 더 걸으면 안부사거리(이정표 : 2전망대 0.5Km, 백운봉 1.0Km/ 숙승봉 5.6Km/ 수목원정문 4.0Km/ 상황봉 1.4Km)에 내려서게 된다. 대야리와 완도수목원을 잇는 임도가 지나가는 하느재라는 고갯마루이다. 그런데 숙승봉을 가리키는 방향이 오른쪽 임도를 향하고 있다. 숙승봉을 가기 위해서는 백운봉과 업진봉을 거쳐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말이다. 부랴부랴 지도를 확인해 본 결과, 이곳에서 임도(林道)를 따라 진행할 경우 앞의 두 봉우리를 거치지 않고도 숙승봉에 이를 수가 있었다. 또 하나 헷갈리는 것이 있다. 아까 지나왔던 전망대에 붙어있던 구호지점안내판에는 그곳이 제2전망대라고 적혀있었는데, 하느재의 이정표는 다른 방향으로 제2전망대를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하느재에서 또 다른 전망대까지는 금방이다. 평지와 다름없는 산길을 따라 걸으면 4분이 채 안되어서 3층으로 된 목조(木造)전망대를 만나게 된다. 수리를 준비하고 있을 정도로 낡은 전망대를 조심조심 오르면 아까 지나왔던 전망대에서 보았던 조망(眺望) 외에도, 이번에는 군외면 쪽에 있는 섬들까지 눈에 들어온다. 3층으로 된 전망대는 3층에서만 조망이 트인다. 그렇다면 1층과 2층은 잠시 쉬어가라고 만들어 놓았을 것이다. 그런 때문인지 20~30명이 둘러앉아도 충분할 만큼 넓게 조성해 놓았다 

 

 

 

하느재를 지나면서 시작된 상록활엽수 숲은 전망대를 지나면서 더욱 짙어진다. 동백나무보다 후박나무의 개체수가 더 많은 숲은 겨울철인데도 푸르기만 하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웃자란 나무들로 인해 숲은 어두울 정도인데, 고개를 들면 허공에 또 하나의 길이 어렴풋이 나타난다. 길 양쪽으로 가지런히 선 나무들이 가지 위에서 길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고저(高低)가 거의 없이 오르내리던 산길은 헬기장을 지나면서 제법 가파른 오르막길을 만들어낸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20분 조금 못되게 치고 오르면 드디어 백운봉 정상이다. 하느재에서 35분 조금 넘게 걸렸다.

 

 

백운봉 정상은 전망 좋은 너럭바위들이 넓게 펼쳐져 있다. 네모난 바위들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모습으로, 그 아래쪽은 수십 길 낭떠러지로 되어있다. 그런데 아까 지나왔던 봉우리들에서 봤던 익숙한 정상표지석이 이곳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절벽위의 네모난 커다란 바위에 백운봉이라고 적어 놓았을 따름이다. 자연석(自然石)을 활용해서 정상표지석을 만든 것이다. 인증사진을 찍으려고 정상석으로 다가가던 집사람이 자꾸만 주춤거린다. 정상석 아래가 수십 길의 낭떠러지이다 보니 다리가 후들거리는 모양이다. 백운봉에서도 다도해(多島海) 풍경은 시원스럽다. 수십 개의 섬들이 넘실대는 바다 위를 떠다니고 있는 광경이 펼쳐진다. 시야(視野)를 가리던 연무(煙舞)가 서서히 걷혀가고 있는지 아까 심봉이나 상황봉에서 보다는 한층 또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백운봉에서 내려서서 200m쯤 더 걸으면 대야리 갈림길(이정표 : 숙승봉 1.8km/ 대야리 3.6km/ 백운봉 0.2Km)을 만나게 된다. 오른쪽은 대야리로 내려가는 길이니 체력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숙승봉 방향으로 곧장 나아가면 된다. 백운봉에서 업진봉으로 이어지는 길도 유순한 편이다. 비록 중간에 바위구간이 두어 번 나타나지만 우회(迂廻)하면 되고, 나머지 구간은 큰 오르내림이 없기 때문이다. 백운봉에서 20분 남짓 걸으면 업진봉에 올라서게 된다.

 

 

업진봉 정상은 너른 암반(巖盤)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한가운데에 서있는 눈에 익숙한 정상표지석이 우람하지만, 왠지 텅 빈 느낌이 드는 이유는 어쩌면 정상이 너무 넓은 탓이 아닐까 싶다. 왼편(서쪽) 방향이 툭 트여있기에 다가가보니 전력선을 조심하라는 경고판이 보인다. 아마 활공장(滑空場)으로 이용되고 있는 모양이다. 활공장너머로 군외면 시가지(市街地)와 완도와 육지를 연결하고 있는 완도대교가 한눈에 들어온다. 오른편에는 물론 다도해의 올망졸망한 섬들, 오는 길에 보아왔던 풍경과 별반 다를 게 없다. 하긴 다른 점이 하나 있기는 하다. 진행방향에 거대한 암봉으로 이루어진 숙승봉이 우뚝 솟아있는 것이다.

 

업진봉 정상에서 바라본 숙승봉

 

 

 

업진봉을 지나면서 산길은 고도(高度)를 뚝 떨어뜨리기 위해 가파르게 변한다. 길가의 나무들도 언제부턴가 소사나무로 바뀌어 있다. 빈가지 사이에 허공이 열리는 앙상한 겨울풍경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소사나무 군락은 오래지 않아 끝이 나고 다시 상록활엽수림이 변하더니, 이번에는 억새들이 군락(群落)을 이루고 있는 너른 평원이 길손을 맞는다.

 

 

 

업진봉에서 내려오는 길에 바라본 숙승봉, 마치 거대한 바위 하나가 우뚝 솟아있는 형상이다. 참고로 숙승봉은 백운봉 정상에서 보면 사람의 얼굴 형상, 그리고 하산지점인 불목리에서는 정수리 위의 외뿔을 잃은 거대한 동물형상으로 보인다고 한다. 그렇다면 숙승봉이라는 이름은 백운봉에서 바라본 형상을 보고 붙였나보다. 숙승봉이 잠든 스님의 얼굴에서 모티(motive)를 따왔다고 하니 말이다.

 

 

억새군락지를 지나면 송전탑(送電塔)이 있는 임도(林道)에 내려서게 된다. 아까 하느재에서 임도를 따라 진행했을 경우 이곳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임도를 건너 다시 맞은편 능선으로 들어서서 10분 남짓 걸으면 산길은 오르막으로 변하면서 길이 둘로 나뉜다. 숙승봉으로 가려면 이곳에서 오른편에 보이는 비탈길로 올라가야 한다. 왼편은 숙승봉을 오르지 않고 우회(迂廻)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오른편 비탈길을 오르면 만나게 되는 긴 철계단을 다시 한 번 힘겹게 치고 오르면 드디어 숙승봉 정상이다. 업진봉을 출발한지 40분 정도가 지났다. 마치 볼록렌즈처럼 가운데가 뽈록하니 솟아오른 모양으로 생긴 숙승봉에는 가장 뽈록한 부분에 낯익은 정상표지석이 의젓하게 서있다. 정상에 서면 하산하는 방향으로 다도해의 풍광이 시원스레 조망된다. 아늑하고 포근한 마을 풍경들이 유난히도 정겹게 느껴지는 것은 포근한 날씨 탓만은 아닐 것이다. 넓은 암반으로 이루어진 바위봉우리 위에서 내려다보는 다도해(多島海)의 조망(眺望)은 한마디로 환상적이다. 만일 이렇게 뛰어난 절경(絶景)일지라도 마음에 여유가 없다면 가슴에 담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눈이 호사를 마음껏 누려도 된다. 여유롭게 산행을 즐길 수 있을 만큼 산길이 완만(緩慢)하기 때문이다.

 

 

 

 

숙승봉 정상에서 하산방향인 불목리 방향으로 내려다보면 울창한 숲속에 기와집들이 오밀조밀하게 들어차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로 '해신(海神)‘의 신라방 촬영세트장이다. ’()‘으로 불리던 장보고는 언젠가부터 신()으로 승격해 버렸다. 무역입국(貿易立國), 무역으로 살아가는 우리나라의 현실이 그렇게 만든 모양이다. 그 덕분에 저 아래에 보이는 드라마 세트장은 완도의 주요 관광상품이 되었다. 그로 인해 강제이주까지 당했던 이곳 토착민들에게 그가 늦게나마 보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산행날머리는 원불교수련원 옆에 있는 저수지(貯水池) 위쪽으로 난 지방도

숙승봉에서의 하산은 아까 정상과 만났던 철계단의 반대편으로 내려서면서 시작된다. 안전로프와 철계단을 이용해서 바위지대를 내려서도, 산길의 가파름은 약해질 줄을 모른다. 숙승봉에서 원불교수련원까지는 1.5Km, 동백나무 숲이 우거진 숲길이다. 상황봉을 오르고 내릴 때 제일 큰 매력은 뭐니 뭐니 해도 푸른 난대림(暖帶林) 숲을 걷는 일이다. 산의 대부분이 동백나무, 후박나무, 소사나무 등 난대성 상록활엽수(常綠闊葉樹)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특히 오늘처럼 한 겨울에 푸른 숲을 걷는 일은 경이로움 그 자체이다. 내리막길은 속도를 내기가 어려울 정도로 가파르다. 때문에 내려서는 시간이 더 걸렸던 모양이다. 원불교수련원 입구(이정표 : 숙승봉 1.5Km, 백운봉 3.5Km, 상황봉 6.0Km)까지 40분이 걸린 것을 보면 말이다. 이곳에서 왼편에 보이는 저수지의 제방(堤防)을 따라 잠깐 걸으면 오늘 산행이 종료되는 지방도가 나온다. 원래의 날머리는 불목리에 있는 덕운동주차장이었으나 완도회센타에서의 자유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늘리기 위해 코스를 단축한 것이다. 상황봉을 오르고 내릴 때 제일 큰 매력은 뭐니 뭐니 해도 푸른 난대림(暖帶林) 숲을 걷는 일이다. 산의 대부분이 동백나무, 후박나무, 소사나무 등 난대성 상록활엽수(常綠闊葉樹)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특히 오늘처럼 한 겨울에 푸른 숲을 걷는 일은 경이로움 그 자체이다. 

 

 

 

 

 

만덕산(萬德山, 408.6m)

 

산행일 : ‘13. 6. 30(일)

소재지 : 전남 강진군 도암면

산행코스 : 석문공원(대석문)→용문사→290봉→바람재→만덕산(깃대봉)→백련사→다산초당→다산유물전시관(산행시간 : 5시간)

함께한 산악회 : 기분 좋은 산행

 

특징 : 만덕산은 요즘 등산객들이 선호하는 100대 명산(名山)은 엄두도 낼 수 없고, 1000대 명산에나 끼일 수 있을까말까 하는 정도의 남도 끝자락에 위치한 작고도 나지막한 산이다. 그러나 이 산을 찾고 있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주작산과 덕룡산의 암릉에 반한 사람들이 두 산과 비슷한 느낌을 보여주는 덕룡산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천년고찰(千年古刹)인 백련사와 백련사의 ‘동백 숲’, 그리고 정약용선생의 18년 강진 유배기간 중 11년을 머물렀다는 다산초당(茶山草堂)까지 끼고 있으니 많은 사람들이 덕룡산을 찾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꼭 등산이 아니더라도 한번쯤은 찾아볼 것을 권하고 싶다. 아이들과 함께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으로 이어지는 산책로를 거닐면서 혜장스님과 다산에 얽힌 옛 이야기라도 한 토막 들려준다면, 이보다 더 나은 가족여행은 없을 것이다.

 

 

산행들머리는 석문공원(대석문)

남해고속도로(영암-순천) 강진 I.C에서 내려와 2번 국도를 이용해서 강진읍까지 온 후, 평동교차로(交叉路 : 강진읍 남포리)에서 18번 국도를 타고 해남방향으로 10분 남짓 더 달리면 55번 지방도의 분기점인 계라삼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좌회전하여 55번 지방도를 따라 들어가면 석문공원(公園)이다. 석문산을 사이에 두고 덕룡산이 시작되는 남쪽의 협곡(峽谷)을 소석문, 그리고 만덕산이 시작되는 북쪽의 협곡을 대석문이라고 부른다. 강진군에서는 대석문 일원을 깔끔하고 예쁘게 다듬어 ‘석문공원’이라는 이름을 붙여 놓았다.

 

 

 

산행은 도로정비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석문공원에서 조금 비켜난 지점에서 열린다. 공원(석문리 방향)이 끝나는 곳에 이르면 왼편에 다리가 하나 보인다. 다산유적지로 들어가는 군도(郡道)와 연결되는 다리이다. 다리 건너에 ‘정다산유허지통로(丁茶山遺虛趾通路)’라는 비석(碑石)이 세워져 있으니 참조하면 된다. 참고로 유허지(遺虛址)란 역사적 사실이 기록만 남아 있고, 그 장소에 유물(遺物)이나 문화재(文化財)가 전혀 없는 곳을 말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장소에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비석을 세워 기념하고 있는데, 이러한 비석을 유허비라고 부른다. 만덕산으로 가기 위해서는 우선 용문사에 들러야 한다. 물론 석문공원에서 곧바로 석문정을 경유해서 290봉으로 올라가는 방법도 있지만, 오늘 따라나선 산악회는 석문정을 거치지 않고 용문사에서 곧바로 290봉으로 치고 오르는 코스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용문사는 ‘유허지 비석’이 세워져 있는 곳에서 왼편으로 들어가면 된다. 비석 근처에 용문사의 진행방향을 알려주는 표지석이 세워져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흔한 일주문 하나도 없는 용문사는 입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 요사채 비슷한 건물은 아직까지도 공사가 한창인데, ‘큰법당’이라고 쓰인 대웅전 현판이 가장 눈길을 끈다. 최근에 지어진 절답게 석가모니불을 본존불(本尊佛)로 모신 본당(本堂)을 대웅전이라고 하지 않고, 한글로 ‘큰 법당’이라고 적어 놓은 것이다. 요즘 새로 지은 절간에서 자주 보이는 표현이다. 그러나 고려시대(12세기 전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토불(土佛)을 모시고 있는 것을 보면 옛날부터 이 부근에 사찰이 있었지 않았나 싶다. 이 토불은 1975년 개금불사(改金佛事) 때부터 큰 법당(大雄殿)의 부처님으로 모셨다고 한다.

 

 

대웅전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데, 스님께서 산행들머리를 알려주신다. 그런데 그 길이 고맙게도 ‘큰법당’ 옆에서 시작되는 지름길이다. 사실 이정표까지 갖춘 정규등산로는 공사 중인 건물의 옆에서 열린다. 구태여 다시 내려갔다 올라가는 번거로움을 피하게 해주는 저런 마음이 불자(佛者)들의 실천덕목인 육바라밀(六波羅蜜) 가운데 제1의 덕목인 보시(布施)의 참모습이 아닐까 싶다. 큰법당 옆의 벌거숭이 산비탈을 잠깐 올라서면 금방 숲속으로 들어서게 된다.

 

 

 

만덕산으로 오르는 길에 잠깐 뒤돌아보면 가히 일품인 풍광(風光)이 펼쳐진다. 건너편 석문산(石門山)의 기기묘묘(奇奇妙妙)한 바위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괴석의 사이마다 자리 잡은 녹음 짙은 나무들이 바위들과 한데 어우러지면서, 한 폭의 잘 그린 산수화(山水畵)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 아래로 난 55번 지방도는 곧지 않고 아직까지 굽은 채로 남아 남도의 풍치를 한층 더 자아내게 만든다. 석문산을 넘으면 또 하나의 협곡(峽谷)이 나온다. 사람들은 그곳을 소석문, 그리고 아까 산행을 시작했던 석문공원 일대를 대석문이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석문산이 양쪽에 두 개의 협곡(峽谷)을 끼고 있는 것이다. 두 협곡 사이에 있는 석문산에서는 놓치지 말고 찾아봐야할 곳이 있다. 바로 합장암터이다. 소석문에서 10분쯤 산을 오르면 마치 합장을 하고 있는 것처럼 생긴 두 개의 바위가 나타난다. 20여m가 넘는 거대한 바위가 양쪽으로 갈라져 있고, 그 안쪽에는 암굴(巖窟)이 패여 있다. 암굴에는 조그만 샘도 있다. 합장암의 앞에는 창건연대가 알려지지 않은 암자(庵子)가 있었으나 1900년대에 붕괴되어 없어져버렸다고 한다. 절터의 앞은 시원스럽게 트여있는데, 덕룡산과 강진만이 잘 조망(眺望)된다고 한다.

 

 

 

만덕산으로 가기 위해서는 먼저 290봉으로 올라가야 한다. 만덕산으로 향하는 주능선의 시작점이기 때문이다. 용문사를 출발하자마자 바윗길이 시작된다. 비록 중간 중간에 흙길이 섞여있다고는 하지만 바윗길을 가파르고 거칠다. 까다로운 바윗길을 10분쯤 오르면 삼거리(이정표 : 백련사 5.23Km/ 석문공원 0.58Km/ 용문사 0.35Km)에 이르게 된다. 왼편에 보이는 길은 석문공원에서 석문정(石門亭)을 거쳐 올라오는 길이다. 이정표에 만덕산은 표기되어 있지 않으나 백련사 방향으로 진행하면 된다. 삼거리를 지나자마자 또 다시 나타나는 가파르고 거친 바윗길에서 10분쯤 더 고생을 해야 첫 봉우리인 290봉(부산일보 지도에는 286봉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봉우리 위에 붙어있는 표지판을 참조했음)에 올라설 수가 있다. 참고로 석문공원에서 곧바로 올라오는 길에 만나게 되는 팔각(八角)으로 지어진 예쁘장한 정자(亭子)인 석문정(石門亭)은 조국(祖國)의 광복에 힘쓴 선열(先烈)들을 기념하기 위하여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첫 번째 봉우리인 290봉은 바위로 이루어진 보잘 것 없는 봉우리에 불과하다. 그러나 생김새와는 달리 조망(眺望)은 그야말로 뛰어난 편이다. 사방의 풍경들이 가슴이 시리도록 멋지게 펼쳐지는 것이다. 남쪽방향에 석문산이 코앞에 다가와 있고, 그리고 그 뒤에 덕룡산과 주작산이 늘어서 있다. 직벽(直壁)의 단애(斷崖)로 이루어진 석문산은 위용(偉容)을 자랑하고 있고, 석문공원은 발아래에 놓여있다. 저 멀리로는 별매산과 가학산, 흑석산 줄기까지 조망되고, 약간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월출산도 눈에 들어온다.

 

 

 

 

290봉에서 조금만 더 걸으면 오른편으로 길이 하나 열려있는 것이 보인다. 만덕광업소채광지에서 올라오는 길이다. 이정표(용문사 0.48Km/ 만덕광업소 채광지)의 오른쪽 방향은 페인트가 벗겨져있는데 누군가가 친절하게도 만덕광업소채광지라고 적어 놓았다. 이어지는 능선은 비록 바윗길이지만 고저(高低)의 차가 거의 없는 완만(緩慢)한 능선이 계속된다. 바위로 이루어진 능선은 암릉 산행의 멋을 한껏 즐길 수 있는 코스다. 스릴(thrill)을 즐기면서 바위들을 오르내리다보면 양옆으로 보이는 풍경들이 매우 대조적이다. 한쪽은 강진만(灣) 바다가 펼쳐지고, 다른 한쪽은 녹음이 짙은 산과 푸른 들판이 눈에 들어온다.

 

 

 

290봉을 지나서도 근육질의 암릉은 계속된다. 그러나 온전한 암릉으로 보기에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곳곳에서 긴 흙길 구간이 자주 나타난다. 바윗길에서의 스릴(thrill)이 떨어지기 때문에 서운하기도 하지만 오늘 같이 무더운 여름날에는 차라리 이런 길이 좋지 않을까 싶다. 숲으로 둘러싸인 흙길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서늘해지는 그늘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앞에 나타나는 바위들이 뾰쪽하게 생겨서 붙잡고 오르는 것이 다소 부담스럽지만 그리 어렵지는 않다. 바위의 결이 거칠어서 미끄럽지 않기 때문이다. 이곳의 바위들은 규사(quartz sand, 硅砂)성분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강하면서도 표면이 거친 것이 특징이다.

 

 

 

290봉에서부터 1시간 가까이 계속되는 암릉은 산행의 묘미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구간이다. 아기자기한 암릉에서 스릴을 만끽하면서 산 아래에 펼쳐지는 강진만(灣)을 실컷 구경할 수 있다. 시야(視野)가 확 특이는 암릉은 강진만이 한눈에 들어오는 뛰어난 전망대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강진만하면 구강포를 빼 놓을 수가 없다. 많은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이 구강포의 아름다움을 글로 쓰거나 그림으로 그려냈지만, 그 곳이 정확히 어디인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아름다운 지명인 구강포(九江浦)에서 아홉 개의 강물이 만나 바다로 스민다고 하지만, 실지의 구강포에서는 강과 바다 그리고 하천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것이다. 아홉 강은 아홉 고을의 물로 바뀌기도 하고, 작은 개울의 물도 강의 범주 속으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강은 또 바다가 된다. 아홉 개의 강물이 무엇인지 주민들도 잘 모르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참고로 양광식 문사고전연구소장이 강진신문에 기고한 글을 적어본다. 그는 강진만의 가장 남쪽에 있는 마량, 대구, 칠량, 강진읍의 어딘가에 해당되는 포구(浦口)인 것 같은데, 아직까지 제대로 정리가 되어있지 않다면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외손자인 윤정기가 지은 동환록(東寰錄) 등 고전(古典)에 적힌 내용들을 참고하여 지역을 추론(推論)해보았다. 대구면의 중저마을과 가우도의 동쪽부터 남쪽에 있는 백사마을까지가 구강포의 영역이었을 것으로 추정한 것이다.

 

 

 

진행방향에 뾰쪽한 바위봉우리가 나타난다. 아마도 만덕산의 정상인 깃대봉인 모양이다. 허리를 뻣뻣하게 곧추세운 봉우리가 저 위까지 올라야할 사람들을 시작도 하기 전부터 잔뜩 주눅 들게 만들어버린다. 그러나 깃대봉은 저 봉우리에서도 한참을 더 올라가야 한다. 그것도 무시무시하게 날을 세운 암릉을 요리조리 피해서 말이다. 능선을 걷다보면 늘어선 바위 사이사이에서 웅크리고 있는 진달래들을 볼 수가 있다. 저 진달래들이 꽃봉오리를 활짝 열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조그맣게 무리를 지은 진달래들이 바위틈에 숨어서 분홍빛 얼굴을 살짝 내밀고 있는 광경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거기다 하나 더, 능선의 바위들을 건너뛴다고 상상해보자. 발밑에 내려다보이는 진달래 꽃송이들이 발길 따라 하늘거릴 것이 분명하다. 이 얼마나 가슴 시리는 광경이겠는가.

 

 

 

능선을 따라 오르내리던 산길은 293봉을 지나고 나면 흙산으로 변한다. 그동안 걸어온 바윗길 자체를 부정이라도 하려는 듯이, 산길은 전형적인 흙길의 풍경을 그대로 보여준다. 낙엽이 수북인 쌓인 오솔길은 폭신폭신한 것이 걷기에 여간 좋은 게 아니다. 암릉길을 오르내리며 맞았던 바람이 없는 것이 다소 서운했지만, 대신에 짙게 우거진 숲이 그늘을 만들어 주기 때문에 참을만하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이 있다. 고생 끝에 즐거움이 온다는 얘기이다. 지금 걷고 있는 구간이 이를 증명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동안 험한 암릉길을 오르내리느라 엄청나게 많은 땀방울을 흘렸는데, 지금은 길이 고운데다가 길가에 들꽃까지 보여 눈까지 호강을 시켜주니 말이다. 보드라운 능선을 따라 넘실대는 한줄기 바람이 이마에 맺혔던 땀방울을 훔쳐간 지 이미 오래이다. 저 멀리에 만덕산이 보이는데, 바람재로 넘어가는 임도는 구불구불 곡선을 그리며 아름답게 꿈틀거리고 있다.

<영락제(堤)와 계라리 방향>

 

 

 

 

암릉이 끝나고 얼마간 더 걸으면 이정표(바람재 1.47Km/ 용문사 3.04Km)를 만나게 되고, 이어지는 산길은 바위 하나 보이지 않는 순수한 흙길이다. 이정표를 지나면서 산길은 널찍한 임도(林道)로 연결된다. 임도가 끝나는 봉우리(280봉)에 경찰의 무선통신시설이 설치되어 있는데 아마도 시설을 관리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임도인 모양이다. 물론 280봉에 오기까지는 봉우리 두어 개를 더 넘어야만 한다.

 

 

 

무선통신시설을 지나면서 약간 가파른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람재에 내려서게 된다. 내려오는 길은 햇빛이 스며들지 못할 정도로 숲이 짙게 우거져 있다. 소사나무들이 자주 눈에 띄는 것을 보면 남도의 바닷가 근처에 자라잡고 있는 산이라는 게 실감이 난다.

 

 

 

유독 바람이 세차게 분다고 해서 고개이름까지도 같은 이름으로 붙여진 바람재는 만덕산으로 오르기 직전에 있는 안부이다. 바람재는 이정표(바람재 240m : 임도 0.32km/ 만덕산기도원 0.29km/ 용문사 4.51km/ 옥련사 2.6km)가 세워져 있는데, 정작 진행해야 하는 만덕산은 표기가 되어 있지 않다. 준비해간 지도(地圖)가 아니더라도 산세(山勢)만 보고도 진행할 수 있을 정도로 능선이 또렷하게 나타나지만, 그러다가 자칫 큰 낭패를 볼 수도 있으니 이런 곳에서는 독도(讀圖)에 주의가 요구된다. 산행을 시작한지 2시간30분이 지났다.

 

 

 

바람재를 지나면서 산길은 가파르기 이를 데가 없는 오르막길로 변한다. 오늘 산행에서 가장 힘든 구간이다. 무더운 여름 날씨에 한 발짝 옮기기도 힘들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가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보는 즐거움이 있다는 것이다. 그림 같은 산릉(山稜)들과 저 멀리 남해바다가 함께 펼쳐진다. 다도해(多島海)의 섬들이 덕룡, 주작산으로 이어지는 바위 능선과 절묘하게 어울리며 기막힌 아름다움을 연출하고 있다. 언젠가 TV에서 본 영상들이 마치 파노라마(panorama)처럼 펼쳐지며 눈앞에서 출렁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지금 걷고 바윗길도 온통 멋진 기암괴석들로 이루어져 있다. 산행을 시작하면서 만났던 암릉보다 아름다움이 한결 더 뛰어나다고 볼 수 있다.

 

 

 

 

바람재에서 가파르기 이를 데가 없는 암릉길을 힘겹게 오르면 진행방향을 거대한 암봉 하나가 떡하니 가로막고 있다. 암봉의 왼편에 서 있는 멋진 입석(立石)바위를 구경하면서 오른편으로 돌면, 잠깐 쉬었다가기에 적당한 바위봉우리가 나타난다. 그러나 깃대봉으로 오르는 길은 암봉을 피해 오른편으로 잠깐 떨어졌다가, 다시 위를 향하도록 나있다. 잠시 쉬었다 가기에 시간이 부담스러운 사람들은 바위봉을 생략하고 곧장 깃대봉으로 향하면 된다. 그러나 웬만하면 한번쯤 들렀다가기를 권하고 싶다. 어떤 사람들은 이곳을 ‘마당봉’이라고도 부르는데, 마치 마당처럼 평평하고 넓다고 해서 그런 이름을 붙인 게 아니가 싶다. 아무튼 이곳에서의 조망(眺望)은 환상적이다. 덕룡산과 주작산의 암릉이 두륜산으로 이어지고 있고, 북쪽으로는 월출산까지 눈에 들어온다.

 

 

 

 

암봉을 우회(迂廻)하여 올라선 산길은 다시 아래를 향하고 있다. 깃대봉은 이곳이 아니고 건너편에 보이는 봉우리이기 때문이다. 마당바위봉에서 10분 조금 넘게 오르면 다산초당 갈림길(이정표 : 깃대봉 0.54km/ 바람재 0.26km/ 다산초당 1.13km)이 나온다. 바람재에서 겨우 260m를 올라왔는데도 벌써 20분이 훨씬 넘게 걸렸다. 그만큼 가팔랐고, 거기다가 무더위에 체력까지 떨어진 탓일 것이다. 비록 높지 않은 산이지만 바위로 이루어진 능선은 예상외로 즐겁다. 한 봉우리를 넘으면 또 다른 봉우리가 나타나고, 또 다른 봉우리를 넘으면 또다시 봉우리가 나타나는 것이 능선산행의 묘미(妙味)이다. 오늘 산행이 바로 그런 산행인 것이다. 더구나 아무 곳으로 고개를 돌려도 눈에 들어오는 아름다운 풍경은 생경스럽기 짝이 없다. 그로인해 능선산행의 즐거움은 한층 더 배가(倍加)된다.

 

 

 

다산초당 갈림길에서 깃대봉까지는 20분이 조금 넘게 걸린다. 물론 이 시간도 체력이 소모된 것을 감안한 것이다. 깃대봉까지 가려면 중간에 한번 깊게 떨어졌다가 다시 가파르게 올라가야 하는 고생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깃대봉 정상에서 5m쯤 못미처에서 백련사로 내려가는 길이 오른편으로 갈려나가고, 이어서 오늘 산행의 최고봉인 깃대봉에 올라서게 된다. 산행을 시작한지 3시간 20분이 지났다. 바람재에서 이곳까지 30분이 걸린다는 사전조사가 무색하게 50분이나 걸린 것은 그만큼 체력소모가 큰 산행이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바위산인 깃대봉의 정상은 의외로 흙으로 이루어져 있다. 10평 정도의 분지(盆地)로 이루어진 정상은 검은 돌로 만들어진 정상표지석과 삼각점이 지키고 있다.

 

 

 

깃대봉에 올라서면 일망무제(一望無題)로 조망(眺望)이 열린다. 북쪽으로 월출산이 그림같이 펼쳐지고, 동북쪽의 제암산과 그 오른편에 있는 천관산도 한눈에 들어온다. 저 멀리 남동쪽으로 보이는 산은 아마도 완도의 상황봉일 것이다. 그리고 남쪽에 첩첩(疊疊)이 쌓인 덕룡산과 두륜산의 산릉은 꿈결처럼 황홀하다. 만덕호와 강진만도 잘 보이고, 반대쪽에는 월출산으로 이어지는 이름 없는 무명봉들이 길게 능선을 이루고 있다. 발아래에는 강진만의 농경지(農耕地)들이 잘 맞춰진 퍼즐조각처럼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다. 지금쯤 저곳에서는 심은 지 얼마 안 되는 벼들이 힘차게 자양분(滋養分)을 끌어올리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필요한 것들을 아낌없이 주는 강진만은 바라만보고 있어도 넉넉함으로 넘쳐난다.

 

 

 

 

하산 길은 두 갈래다. 곧바로 직진하면 필봉을 거쳐 옥련사로 가게 되며, 백련사로 가려면 조금 전에 지나왔던 갈림길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백련사로 발길을 옮기면 만덕호(湖)와 그 너머의 강진만(灣)이 눈앞에 펼쳐진다. 10분 조금 못되게 내려서면 이내 순탄한 길로 변하고, 다시 10분 조금 못되게 걸으면 산길은 능선을 벗어나 오른쪽 사면(斜面)으로 방향을 튼다. 백련사로 내려가는 길이다.

 

 

 

갈림길에서 직진하여 5분 조금 넘게 더 내려서면 수백 년 묵은 동백나무 7000여 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는 천년고찰(千年古刹) 백련사다. 백련사(白蓮寺)는 예상보다 크고 장중하다. 돌로 마무리한 축대(築臺) 위에 커다란 만경루와 대웅전이 넉넉하게 자리 잡고 있다.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에 버금가는 이름으로 알려진 천태종의 거목(巨木) 요새스님이 수행지로 삼기에 충분한 터인 것이다. 대웅전은 개보수 공사가 한창인데 절집 마당 곳곳에 수백 년 된 배롱나무와 동백나무가 의연하게 버티고 서 있다. 배롱나무 옆 절간에 들어서니 불교용품을 팔고 있는 코너의 앞에 팥빙수를 판다고 적혀있는 것이 아닌가. 마침 허기가 지던 참이니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무더위 탓에 식욕(食慾)을 잃어 점심을 걸렀기 때문이다. 예쁘장한 보살님이 직접 만들어주는 오디를 듬뿍 넣은 팥빙수는 8천원이라는 돈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그 맛이 훌륭했다.

* 백련사는 만덕산에 있다고 해서 만덕사(萬德寺)라고 불리기도 한다. 사찰의 창건은 통일신라시대 말기인 839년에 무염(無染) 스님이 창건하였으나 중요한 수도도량으로 면모를 달리한 것은 1211년 요세(了世)가 크게 중창한 뒤부터이다. 요세는 보현도량(普賢道場)을 개설하고 실천 중심의 수행인들을 모아 결사(結社)를 맺었다. 이것이 송광사를 중심으로 한 수선사(修禪社)와 쌍벽을 이루었던 백련사결사(白蓮社結社)이다. 이후 백련사는 여덟 명의 국사를 배출했을 정도로 남도의 중심사찰이었다. 조선시대에 들어 지금의 모습으로 이어진 백련사는 다산 정약용과 교류하며 차와 학문을 논하였던 혜장선사에 의해 다시 한 번 알려졌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과 시왕전(十王殿), 나한전(羅漢殿), 만경루(萬景樓) 등의 건물이 있으나 국보급 문화재(文化財)는 없고, 대신 천연기념물(151호)을 품고 있다. 바로 ‘동백 숲’이 있다.

 

 

 

 

다산초당을 가기위해 백련사를 벗어나자마자 고승(高僧)들의 부도(浮屠)들이 숨어있는 ‘동백나무 숲이 나타난다. 백련사 일대는 우리나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의 ‘동백 숲’을 자랑한다. 얼마나 뛰어났으면 천연기념물(151호)로 까지 지정을 받았겠는가. 동백나무는 백련사 주변 1.3ha에 걸쳐서 1,500여 그루가 분포되어 있는데, 다산초당에서 11년을 살았던 다산(茶山)선생도 백련사의 동백 숲을 무척 사랑했다고 한다. 백련사 동백나무는 굵고 키도 크다. 어른 몸통 3배에 달하는 둥치를 자랑하는 나무도 있다고 한다. 덕분에 동백나무 숲은 화창한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컴컴할 정도다.

 

 

 

백련사에서 다산초당(茶山草堂) 넘어가는 길의 매력은 오솔길 같은 산길이다. 그 길 가엔 차나무들이 자생하고 있다. 차밭 너머로 강진만과 구강포가 그림처럼 펼쳐지고 있다. 참고로 차(茶)중에서는 곡우(穀雨)에서 입하(立夏)사이에 트는 새싹을 따서 만드는 작설차(雀舌茶)를 최고로 친다. 참새 '작(雀)' 자에 혀 '설(舌)'자를 쓰는데 참새의 혀만큼 새 순이 올라와 있을 때 따서 만든 차라는 뜻이다.

 

 

 

‘차밭’을 지나 다산초당(茶山草堂)으로 가는 길로 접어든다. 초당(草堂)까지의 800m 산길은 부드러운 흙길이다.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은 다산선생이 벗이자 스승이며 제자이기도 했던 백련사 혜장선사와 교유(交遊)하며 산책했던 바로 그 길이다. 다산선생과 혜장스님은 옛날 이 길을 뻔질나게 오고갔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때에는 둘이서 함께 걸으면서 사상을 뛰어넘는 담론(談論)을 이어가기도 했을 것이다. 지금은 두 사람이 함께 걷고도 남을 정도로 넓게 단장되어 예전의 포근한 맛은 사라졌지만, 그래도 따뜻한 차 한 잔에 깊은 우정을 나누던 두 분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오솔길의 낭만은 풍성(豊盛)해지고도 남는다. 문득 다산선생이 지었다는 산문 한 구절을 떠올려 본다. ‘지구는 둥글고 사방의 땅은 평평하다. 그러니 내가 있는 곳보다 더 높은 곳은 세상에 없다. 그런데도 곤륜산이나 형산, 곽산을 오르며 높은 곳을 찾아다니는 사람이 있다. 지나간 과거는 쫓아가 잡을 수 없고 다가올 미래는 기약할 수 없다. 지금 이 상황보다 더 즐거운 때는 없다. 그런데도 좋은 수레를 갈망하고 논밭에 마음 태우며 기쁨을 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땀을 흘리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평생토록 헤매면서 오로지 저것을 바랄 뿐, 이것을 참으로 누려야 하는 줄 모른 지가 오래되었다.’

 

 

 

다산초당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의 왼편에 이층으로 된 정자(亭子) 하나가 보인다. 천일각(天一閣)이라는 정자인데 ‘하늘 끝 한 모퉁이’라는 뜻의 천애일각(天涯一閣)을 줄인 것이라고 한다. 이 정자는 다산의 유배(流配)시절에 지어진 것은 아니고 지난 1970년대에 강진군에서 건립했다, 다산이 이곳에 서서 이미 승하한 정조와 거문도에 유배(流配)중이던 형 정약전을 그리워했을 것이라고 여겨서 이곳에다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이층에 오르면 강진군의 생각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강진만과 구강포가 한 폭의 그림으로 성큼 다가온다.

 

 

 

천일각 옆에 있는 고갯마루(이정표 : 다산초당 600m/ 깃대봉 900m/ 백련사 200m)를 넘어 오솔길을 걷다보면 곧바로 동암(東庵)에 닿는다. 백련사에서 느긋하게 걸어도 30분이면 도착하는 거리이다. 동암 바로 옆에 ‘다산초당(茶山草堂)’이 자리하고 있다. 다산이 '목민심서'를 비롯한 600여 권 저서 대부분을 이곳에서 썼다고 전해지는 공간이다. 다산 정약용선생은 11년간을 이곳에서 머물렀다. 강진에서의 유배(流配)생활이 18년이었으니 대부분의 유배생활을 이곳에서 한 샘이다. '다산초당(茶山草堂)'은 으리으리한 기와집이다. 그러나 반듯하게 잘 지어진 기와집이 어색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기와집이 초당(草堂)이라는 이름에도 부합(附合)되지 않을뿐더러, 다산의 정신과도 어울리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초가(草家)로 바꾸는 게 맞지 않을까 싶다. 추사의 글씨를 집자해 놓았다는 '다산초당'이라는 현판이 정겹게 다가오는 것은, 아마 공직생활 내내 지표로 삼아왔던 목민섬서(牧民心書)를 지은 분의 글씨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다산초당과 초당 뒤의 정석(丁石·유배 해제 때 다산이 글을 써서 새긴 바위)과 서암(西庵) 등을 둘러보고 내려선다. 다산초당 근처에는 의외로 동백나무가 많이 보인다. 다산이 유배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구해다 심은 나무란다. 대단한 애착이 아닌가 싶다. 귀양을 온 다른 선비들은 일부러라도 동백나무를 베어버리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이다. 보통 동백꽃은 두 가지 느낌으로 표현된다. ‘바람 난 아가씨처럼 나뭇가지에 매달려 이리저리 흔들리는 살아있는 꽃’이 그 하나요, 다른 하나는 ‘모가지 째 뚝뚝 떨어져 바닥에 낭자한 선혈의 꽃’이다. 대부분의 선비들은 동백꽃을 후자로 보았기 때문에 멀리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산은 자신의 목은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산행날머리는 다산유물전시관 주차장

다산초당에서 식당 등 편의시설(便宜施設)이 있는 귤동마을까지는 금방이다. 경사(傾斜)가 제법 가파른 돌계단을 내려서면 아스팔트 길가에서 동네 할머니들이 농산물을 팔고 있는 것이 보이나 그냥 지나쳐버린다. 당신이 직접 기른 농산물인지 확신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도로를 따라가다 첫 번째로 만나게 되는 삼거리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언덕을 넘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다산유물전시관에 이르게 된다. 초당에서 유물전시관까지는 15분 정도가 걸리는데 위에서 말한 삼거리에서 오른편으로 돌지 않고 곧바로 진행할 경우에는 한참을 더 돌아와야 하므로 길 찾기에 주의를 하면서 진입을 해야 할 것이다.

 

 

 

 

설산((雪山 , 522.6m) - 괘일산(掛日山, 441m)

 

산행일 : ‘13. 6. 29(토)

소재지 : 전남 곡성군 옥과면․오산면, 담양군 무정면, 전북 순창군 금과면의 경계

산행코스 : 과치재→무이산(304.5m)→괘일산→쉼터→금샘→설산→392봉→성륜사→주차장(산행시간 : 4시간10분)

함께한 산악회 : 월산악회

 

특징 : 곡성군에는 동악산과 봉두산 그리고 통명산 등 등산객들에게 제법 알려진 산들이 있다. 1천 미터가 넘는 산들이 전국에 널려있는데도 700m 정도밖에 안 되는 산들이 사람들에게 입소문을 타는 이유는 단 하나이다. 산들이 남성미(男性美) 넘치는 근육질의 바위로 이루어져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설산과 괘일산은 그런 산들보다도 한참이나 더 낮은 500m 남짓한 산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국의 등산객들이 심심찮게 찾아든다고 한다. 그것은 아찔한 고도감(高度感)을 느낄 정도로 날카롭게 선 정상어림의 바위절벽이 사람들의 눈길을 끌어서일 것이다. 설산의 바위는 규사(硅砂) 성분이 많아서 멀리서 보면 하얗게 빛난다고 한다. 그 광경이 마치 산 정상에 하얗게 눈이 쌓여있는 것 같아 보이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참고로 호남정맥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구태여 무이산을 오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등산로가 엉망일뿐더러 특별한 볼거리도 없기 때문이다.

 

 

산행들머리는 13번 국도의 과치재

호남고속도로 옥과 I.C에서 내려와 13번 국도를 따라 담양방면으로 달리면 채 5분도 되지 않아 과치재에 올라서게 된다. 과치재는 담양군 무정면과 곡성군 오산면의 경계를 가르는 야트막한 고갯마루이다. 고갯마루에 신촌주유소가 있으니 참조하면 된다.

 

 

 

주유소에서 옥과 방향으로 30m 정도를 내려와 13번 국도를 가로지르면 산등성이로 오르는 오솔길이 보인다. 들머리에 이정표(무이산 정상 2.5Km, 괘일산 정상 4.2Km)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오솔길로 들어서면서부터 고난(苦難)이 시작된다. 산길이 사람이 지나다닐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인 것이다. 이 길은 등산객들이 제법 많이 찾고 있는 **호남정맥(湖南正脈)의 일부 구간이다. 그런데도 나 몰라라 방치하고 있는 지자체의 무관심을 탓하며 산행을 시작한다.

**)호남정맥(湖南正脈), 전북 장수군에 있는 주화산(珠華山 : 금남호남정맥의 끝 지점)에서 시작해서 호남내륙을 관통한 후, 광양만의 외망포구에서 그 생명을 다하는 도상거리가 430Km인 남한에 있는 9정맥 중에서 가장 긴 산줄기이다. 호남정맥은 내장산, 백암산, 추월산, 강천산, 무등산, 천운산, 제암산, 일림산, 방장산, 조계산, 백운산 등 수많은 명산(名山)들을 품고 있는데, 이 산줄기에 의해 서쪽 해안(海岸)의 평야지대와 섬진강 유역을 이루는 동쪽의 산간지대로 나누어진다. 

 

 

 

‘새로 산 바지인데 걱정이네요’ 집사람이 결코 엄살을 떠는 것이 아니다. 산길을 온통 쓰러진 나무들이 가로막고 있다. 지난해에 몰아쳤던 태풍(颱風)을 못 배기고 넘어진 모양이다. 길을 가로막고 있는 나무들을 위로 넘거나, 아니면 나무 아래를 기어나가다가, 그것도 안 될 경우에는 새로 길을 내며서 진행할 수밖에 없다. 쓰러진 나무들이 없는 지점이라고 해서 나을 것은 하나도 없다. 길이 안 보일 정도로 잡목(雜木)들이 우거져 있는데, 거기다가 한 술 더 떠서 명감나무나 찔레나무 등 온통 가시넝쿨이 아랫도리를 휘어 감는다. 따가울 뿐만 아니라, 가시에 긁힌 바지가 보푸라기가 일어서 엉망이다. 그래서 집사람이 새로 입고 나온 바지를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15분 정도를 힘들게 진행하면 엉망진창인 산길이 끝을 맺으면서 자그마한 산봉우리 위에 올라서게 된다. 봉우리를 지나면서 산길은 제법 또렷해진다. 그러나 정비(整備)로 인해 뚜렷해진 것은 결코 아니다. 그저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발길에 의해 자연스럽게 그리 되었을 따름이다. 봉우리에서 3분 정도 내려서면 만나게 되는 안부에서 산길이 맞은편 봉우리로 올라가는 게 아니라 왼편으로 우회(迂廻)를 하고 있다. ‘정맥은 봉우리를 피하지 않는 것이 정상인데...’ 아니나 다를까 우회를 한 봉우리의 뒤편에서 봉우리를 넘어오는 산길을 만날 수 있었다. 이어지는 산길은 별다른 특징이 없는 밋밋한 풍경(風景)이 이어진다. 산세(山勢)도 내세울만한 것이 없고, 거기다가 능선을 빈틈없이 채우고 있는 소나무들로 인해 조망(眺望)까지도 꽉 막혀있다. 능선은 자그마한 봉우리들을 넘으면서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간다. 그다지 가파르지 않은 경사(傾斜)를 유지하면서 짧게 내려섰다가 길게 올라서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능선을 오르내리는 것이 지겨워질 즈음이면 묘(墓) 하나를 만나게 된다. 봉분(封墳)은 비록 허물어져 가고 있지만, 돌이끼가 잔뜩 낀 상석(床石)까지 갖춘 것을 보면 뼈대 있는 집안의 묘지임이 분명할 것이다. 묘지를 지나면 금방 정상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한 시간쯤 지났다.

 

 

 

봉우리답지 않게 무디게 생긴 무이산 정상에는 정상표지석이 없다. 대신에 소나무 줄기에 나무판자로 만들어진 ‘정상표지판’이 두 개나 매달려 있다. 비록 높지도, 그렇다고 잘생기지도 못한 봉우리지만 호남정맥에 자리 잡고 있다는 지리적 이점을 톡톡히 보는 모양이다. 하긴 옛말에도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으라.‘는 격언(格言)까지 있으니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물론 봉우리의 한가운데에는 삼각점(순창458)이 심어져 있다.

 

 

무이산에서 괘일산 방향으로 10분 조금 못되게 내려서면 안부사거리에 닿게 된다. 오른편은 성림수련원으로 내려가는 길이고, 왼편으로 내려가면 무정면(담양군)이다. 안부로 내려서는 길에는 진행방향의 소나무 숲 사이로 괘일산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한다. 얼핏얼핏 보이는 거대한 암릉이 사람의 기(氣)를 단번에 꺾어버리고도 남을 정도이다. 첫 번째 사거리에서 조금만 더 진행하면 임도 사거리에 이르고, 다시 10분쯤 더 걸으면 또 다른 임도 삼거리에 닿는다. 오른편으로 성림수련원 내려가는 길과 나뉘는 이곳 삼거리에서 오늘 산행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이정표(괘일산, 설산/ 성림수련원)를 만나게 된다.

 

 

 

 

 

 

임도삼거리에서 임도(林道)를 따라 괘일산으로 가는 길은 짙은 소나무 숲이 계속된다. 작달막한 키의 토종 소나무들이 군락(群落)을 이루고 있는가 하면, 또 어떤 곳에서는 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 오르고 있는 것도 보인다. 길가의 소나무들을 벗 삼아 걷다보면 거대한 암벽(巖壁)이 앞을 가로막는다. 드디어 괘일산에 이른 것이다. 앞을 가로막는 암벽을 왼편으로 우회(迂廻)하여 오르면 이정표(괘일산 0.5Km, 설산 2.6Km/ 성림수련원 0.8Km)가 길손을 맞으며 현재의 위치를 알려준다.

 

 

 

 

 

 

이정표를 지나면 산길은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서 바위능선을 타고 오르게 된다. 이어지는 바윗길은 암릉의 전형적인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 뛰어난 조망(眺望)을 선사하는 것이다. 발아래에는 수련원과 저수지가 깔려있고, 그 너머에는 백아산이 아스라하다. 바위에 얹혀있는 작은 소나무들이 바위들과 어울리며 멋지게 조화(造化)를 부리고 있다.

 

 

 

 

잠깐 조망을 즐기다가 정상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면 또 하나의 멋진 전망대(展望臺)가 손님을 맞이한다. 아니 두 곳 뿐만이 아니다. 오른편이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시야(視野)가 열리는 곳마다 뛰어난 전망대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전망대에 서면 일부러 조각(彫刻)이라도 해 놓은 것 같이 잘 다듬어진 바윗돌이 왼편에 우뚝 솟아있다. 그 옆으로 곡성의 산하(山河)가 펼쳐지며 잘 그린 그림 한 장을 만들어놓는데 한마디로 장관이다. 그리고 잠깐 옆으로 시선을 돌리면 지나온 무이산은 물론 곡성의 명산인 동악산과 통명산, 그리고 백아산이 또렷하게 눈에 들어온다.

 

 

 

 

 

두 번째 전망대를 지나 조금만 더 올라가면 임도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삼거리(이정표 : 괘일산 0.1Km/ 임도 0.5Km/ 성림수련원 1.2Km)에 이르게 된다. 삼거리 근처에서도 오른편으로 시야(視野)가 열리면서 곡성의 산하(山河)가 다시 한 번 넓게 펼쳐진다. 분지(盆地)로 이루어진 옥과 들녘을 둘러싼 산자락들이 제법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옥과면에게 안녕을 고하고 남쪽으로 달려가는 호남고속도로가 멀리 산과 산 사이로 보일 듯 말듯 이어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갈 길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바위를 왼편으로 돌아 오르면 드디어 괘일산 정상이다. 좁다란 분지(盆地)로 이루어진 괘일산 정상은 아까 지나왔던 무이산과 마찬가지로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는다. 이곳도 역시 검은색 나무판자(板子)로 만들어진 정상표지판이 걸려있을 따름이다. 무이산에서 괘일산까지는 한 시간 가량이 걸렸다. 참고로 괘일산은 ‘해가 산에 걸렸다’는 뜻이다. 옥과면 방향에서 볼 때에는 온종일 하늘을 떠돌던 해가 괘일산 너머로 사라지면서 하루를 마감한다. 그 때문에 괘일산이라는 이름이 붙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다. 지는 해가 하얀 암릉 위에 걸려있는 것을 보면서 말이다. 석양(夕陽)의 황혼(黃昏)에 붉게 물든 암릉을 상상해본다. 소름이 끼치도록 아름다울 것이 뻔하다. 설산낙조(雪山落照)라는 말이 있다. 곡성팔경(谷城八景)의 하나로, 설산에서 바라보는 낙조가 빼어나다는 얘기이다. 여기서 잠깐 발상(發想)을 전환(轉換)해보자. 지는 해를 보겠다고 바위로 이루어진 험산(險山)에 오를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아마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지는 해를 설산에 올라가지 않고도 보는 방법은 없을까? 옥과 들녘에서 설산의 암릉 위로 지는 석양을 보면 될 것이다. 황혼에 물든 암릉의 자태는 그야말로 빼어날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 아름다움이 설산보다 괘일산이 더 뛰어난 게 아닐까 싶다. 괘일산이라는 이름까지 붙인 것을 보면 말이다.

 

 

 

괘일산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자못 빼어나다. 무이산과 만덕산을 거쳐 남쪽으로 뻗어가던 호남정맥이 불쑥 솟구치며 무등산을 만들고 있고,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동악산은 물론, 화순의 백아산까지도 가깝게 다가온다. 남원 땅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문덕봉과 고리봉은 아기자기한 암릉을 한껏 자랑하고 있고, 맞은 편 설산은 괘일산과 어께를 마주하고 있다. 옥과 방향으로 발아래 깔려있는 산촌(山村)마을은 아마도 설옥리일 것이다.

 

 

 

괘일산에서 설산으로 가는 길은 암릉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암릉이 끝나는 지점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린다. 앞을 가로막는 바위들을 우회(迂廻)하기도 하지만, 어떨 때는 조망(眺望)을 즐기기 위해 바위 위로 오르다보니 자연히 시간이 지체되는 것이다. 바윗길을 걷다보면 자연스레 눈이 즐거워진다. 괘일산과 설산의 암릉이 한 폭의 잘 그린 그림처럼 연속해서 펼쳐지기 때문이다. 괘일산은 의외의 장소에서 정상을 나타내는 이정표(설산정상 2.1Km/ 쉼터 1.3Km/ 성림수련원 1.3Km)를 만나게 된다. 정상을 나타내는 이정표가 정상이 아니라 정상에서 설산 쪽으로 한참 떨어진 곳에 세워져 있는 것이다.

 

 

 

 

설산방향으로 가는 길은 도처(到處)에 멋진 전망대(展望臺)가 널려있다. 스스럼없이 나타나는 절벽(絶壁)에서의 조망도 뛰어나지만, 어쩌다가 앞을 가로막는 바위들은 이보다 한층 더 뛰어나다. 능선을 가다가 혹시라도 암봉이 보일라치면 그냥 지나치지 말고 올라가 보자. 올라오느라 고생한 것을 충분히 보상해주고도 남을 만한 뛰어난 조망(眺望)을 선사해 주기 때문이다.

 

 

 

 

암릉이 끝나는 지점에서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된다. 오른편으로 희미하게 길의 흔적이 보이지만, 얼마안가 절벽을 만나면서 길이 끊겨버리기 때문이다. 암릉 끝으로 다시 돌아와 보면 왼편으로 희미하게 나 있는 내리막길이 보인다. 오솔길을 따라 조금만 내려가면 아까 정상에서 내려오는 정상적인 등산로와 만나게 된다. 암릉을 내려서면 산길은 고와진다. 소나무가 가득한 흙길은 솔가리(소나무 落葉)가 수북이 쌓여 폭신폭신하기까지 하다. 능선 중간에서 작은 봉우리 하나를 넘으면 수련원에서 올라오는 임도를 만나게 된다. 임도에 자동차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보면 이곳까지 차량통행이 가능한가 보다. ‘임도의 끝’은 장의자를 갖춘 작은 쉼터로 조성되어 있다. 이곳에는 특이하게도 이정표가 2개(이졍표 #1 : 괘일산 1.2Km, 이정표 #2 : 설산 0.9Km/ 괘일산 1.3Km/ 수도암(임도) 2.0Km)나 세워져 있다. 임도를 사이에 두고 사이좋게 양편에 하나씩 세워진 것이다.

 

 

 

 

쉼터(임도 끝)에서 5분쯤 더 가면 갈림길이 나온다. 왼편에 보이는 길은 그동안 같이 달려오던 호남정맥이 다시 갈라져나가는 길이다. 설산으로 가려면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진행해야 한다. 갈림길에서 오른편으로 조금 더 진행하면 또 다른 갈림길(이정표 : 설산 0.4Km/ 임도 0.4Km/ 괘일산 2.1Km)이 나온다. 오른편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길이 임도로 내려가는 길이다. 

 

 

 

임도 갈림길을 지나면서 오늘 산행에서 가장 힘든 오르막 구간을 만나게 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오르막길이 통나무 계단으로 깔끔하게 정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속도가 결코 빨라질 수는 없다. 오늘 같이 폭염(暴炎)주의보가 내려진 무더운 여름날에 속도를 내는 행위는 자칫 사고를 부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10분정도를 오르막길과 싸우다보면 거대한 암벽(巖壁)이 앞을 가로막는데, 암벽 위로 오를 수 있도록 나무계단이 놓여있다.

 

 

나무계단을 오르면 금샘이다. 금샘은 쪼개진 듯 바위가 갈라진 틈 사이에서 솟아나는 석간수(石間水)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나같이 뚱뚱한 사람들은 결코 들어갈 수가 없는 금(禁) 뚱뚱이의 영역이다. 바위 틈새가 그만큼 좁다는 얘기이다. 덕분에 집사람이 떠다주는 물을 편하게 마시는 호사(豪奢)를 누렸다. 호사를 누린다는 선입감(先入感) 때문인지는 몰라도 물맛은 달고도 시원했다.

 

 

 

 

금샘에서 바위벼랑을 오른편에 끼고 잠깐 치고 오르면 능선안부에 올라서게 된다. 능선안부에는 선두대장이 깔아놓은 표시지가 보인다. 좌우(左右) 양쪽으로 방향표시를 해 놓고 오른편 방향표시 아래에다 조망이 보잘 것 없다고 적어 놓았다. 안부에서 왼편으로 급하게 방향을 틀면 얼마 안 있어 곡성군 특유의 이정표(설산 정상/ 수도암, 성금샘터/ 금샘, 괘일봉)를 만나게 되고, 이어서 조금만 더 진행하면 또 다시 갈림길(이정표 : 순창 풍산/ 괘일봉(임도끝)/ 설산정상)을 만나게 된다. 왼편 능선을 따라난 길(순창 풍산방향)은 아까 괘일산 아래의 쉼터 근처에서 갈려나갔던 길이 이곳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모양이다.

 

 

 

 

 

풍산갈림길에서 정상은 바로 코앞이다. 10평도 넘는 널따란 분지(盆地)로 이루어진 설산의 정상은 순창방향은 쇠사슬 난간으로 막혀있다. 아마도 그쪽 방향이 바위벼랑으로 이루어진 탓일 것이다. 쇠사슬에 매달린 리본들이 무당집처럼 거창한데, 그 앞에 작고 귀여운 정상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설산 정상에서 길은 두 갈래(이정표 : 성륜사 2.9Km, 지동입구 4.2Km/ 수도암 0.9Km/ 괘일산 2.1Km)로 나뉜다. 오른편은 수도암으로 내려가는 길이고, 성륜사로 하산지점을 잡은 경우에는 올라왔던 길과 반대방향으로 내려서면 된다. 설산 정상에서 성륜사로 내려가기 전에 수도암에 다녀오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수도암까지의 암릉을 타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같이 무더운 여름날에는 피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괘일산에서 설산까지는 1시간10분이 걸렸다.

 

 

 

 

설산 정상에 올라서면 의외로 시야(視野)가 막혀있다. 사방으로 탁 트인다는 사전지식과 달라 어리둥절하다. 북쪽 방향만 시원스럽게 시야가 트이고, 남쪽은 숲으로 꽉 막혀있는 것이다. 만일 남쪽의 조망(眺望)을 즐기고 싶다면 수도암 방향으로 조금 더 진행하면 된다. 수도암 방향의 암릉에서 조망이 트이기 때문이다. 동쪽에 있는 동악산과 문덕봉, 그리고 고리봉이 남성미(男性美) 넘치는 근육질을 자랑하고, 남쪽에는 무등산이 버티고 있다. 그리고 서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괘일산의 암봉이 코앞에 다가와 있다. 사방으로 높고 낮은 산들이 첩첩이 쌓여있어, 강원도 땅에 들어온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할 지경이다. 그래도 이곳은 남도의 땅이다. 아무리 산들에게 포위 되었다고 해도 너른 들녘 한 자락이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 것이다. 발아래에 옥과 들녘이 넓게 펼쳐지고 그 사이를 지나는 호남고속도로에는 수많은 차들이 꼬리를 물고 있다.

 

 

옥과 들녘을 바라보면서 성륜사로 내려가는 하산 길은 거리가 제법 멀다. 그러나 흙길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내려서는데 조금도 부담이 없는 편한 길이 계속된다. 하산을 시작한지 30분이 조금 더 지나면 능선안부에서 갈림길(이정표 : 성륜사 1.3Km/ 등산로 아님/ 설산 정상 1.6Km)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오른편 길은 통행을 금지시키고 있다. 아마 성륜사로 내려가는 길인 모양이다. 선원(禪院)까지 갖추고 있는 성륜사 스님들의 수행에 방해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안부갈림길을 지나도 능선은 고도(高度)를 더 이상 떨어뜨리지 않는다. 오히려 갈수록 고도를 더 높이고 있다. 작은 봉우리를 오르내리던 산길은 능선 상에 우뚝 솟은 392봉에다 올려놓는다. 392봉은 흙으로 이루어진 밋밋한 봉우리이지만 조망(眺望)은 사뭇 시원스럽다. 능선에 웃자란 나무들이 별로 없는 덕분일 것이다.

 

 

 

 

392봉을 지나면서 산길은 갑자기 가파른 내리막길로 변한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 가파름의 정도가 내려서기에 부담스러울 정도는 아닐뿐더러, 그마저도 힘들 경우에는 길가에 메어있는 로프에 의지해서 내려오면 되기 때문이다. 길지 않은 가파른 내리막길이 끝나면 10명이 앉아도 여유로울 만큼 넓고 반반한 바위를 만나게 되고, 이어지는 산길은 경사(傾斜)가 거의 없는 흙길이 계속된다. 그러다가 산길이 능선을 벗어나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서(이정표 : 성륜사 0.4Km/ 지동입구 1.6Km/ 설산 정상 2.5Km) 나무숲 사이로 ‘옥과미술관’이 빼꼼히 고개를 내민다.

 

 

 

 

옥과미술관(玉果美術館)은 한 화가(畵家)의 뜻 있는 선의(善意)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전남 무안출신의 ‘아산(雅山) 조방원(趙邦元)’화백이 바로 그 사람이다. 그가 기증(寄贈)한 미술품 6700여 점과 부지 1만3000여㎡을 바탕으로 전라남도에서 미술관을 건립한 것이다. 1996년 문을 연 미술관은 1층에 남도 작가들의 동·서양화 40여 점이 전시돼 있고, 2층에는 조 화백이 기증한 소치 허련 선생의 사군자, 추사 김정희의 서간문, 퇴계 이황의 시 등 귀중한 문화재들이 전시(展示)되어 있다고 한다. 사람들은 눈에 띄지 않고 대신 개들만이 요란하게 짖어대고 있는 미술관 앞을 지나면서 문득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 하나, ‘과연 누가 이곳까지 미술품을 관람하러 올까?’ 해답은 미술관 관계자들만이 알 것이다.

 

 

산행날머리는 성륜사주차장

옥과미술관에서 잠깐만 내려서면 성륜사(聖輪寺)이다. 성륜사는 청화(淸華)스님이 1990년에 창건한 역사가 오래되지 않은 사찰(寺刹)이다. 하지만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수행승으로 꼽히는 청화스님이 수행하다가 입적(入寂)한 곳으로 잘 알려졌다. 10만평에 대웅전, 지장전, 성련대, 조선당, 백련당, 금강선원(불교대학) 등 수많은 전각(殿閣)들을 거느리고 있을 정도로, 20여년 남짓한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사찰의 규모는 제법 큰 편이다. 창건자인 청화스님의 유명세 덕을 본 모양이다. 이 외에도 성륜사에는 적멸보궁(寂滅寶宮)이 있다. 2001년에 스리랑카로부터 부처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셔오면서 이를 안치하기 위해 지은 것이라고 한다. 참고로 청화스님은 한국불교의 큰 기둥인 송만암 (宋曼庵)대종사의 계보를 잇는 큰스님이다. 만암스님의 상좌인 금타스님을 스승으로 백양사 운문암에서 출가(1947년)한 스님은 40여 년간 상무주암, 백장암 등 20여 곳의 토굴을 옮겨 다니며 하루 한 끼와 장좌불와(長坐不臥 : 눕지 않고 늘 좌선하는 것)를 수행한 것으로 유명하다. 성륜사를 빠져나와 100m쯤 더 걸으면 일주문 앞에 만들어 놓은 주차장에 이르게 되면서 산행이 종료된다. 설산정상에서 날머리인 주차장까지는 1시간 정도가 걸렸다.

 

 

 

두방산(斗傍山, 489m)-병풍산(屛風山, 481.7m)

 

산행일 : ‘13. 5. 11(토)

소재지 : 전남 고흥군 동강면과 보성군 벌교읍의 경계

산행코스 : 당곡마을→용흥사→귀절암→두방산→병풍산→비조암(飛鳥岩, 458m)→첨산(尖山, 313m)→첨산산장 (산행시간 : 4시간30분)

함께한 산악회 : 월산악회

 

특징 : 두방산은 정상어림에 귀절암(庵)이 있었다고 해서 귀절산이라고도 불리며, 말의 명당(明堂)자리가 있다고 해서 말봉산, 그리고 임진왜란 때의 명장(名將) 송득운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서산이라고도 부르는 등 여러 개의 이름을 갖고 있는 산이다. 한편 두봉산은 오늘 답사(踏査)하게 되는 병풍산과 첨산, 그리고 봉두산과 더불어 동강면의 4대 명산(名山)으로 꼽힌다. 산은 흙산(肉山)의 형태를 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능선은 암릉으로 이루어진 게 특징이다. 덕분에 기암괴석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고, 거기에다 주변의 조망(眺望)까지 덤으로 즐기는 호사(豪奢)를 누릴 수 있다. 오늘 함께 걷게 되는 첨산은 생김새는 앞의 두 산에 비해 뒤떨어지지만 사람들에게는 더 알려진 산이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에서 김범우의 눈을 통해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첨산을 신비로운 산으로 표현하고 있다.

 

 

산행들머리는 당곡마을(동강면 대강리) 표지석

남해고속도로(영암-순천) 고흥 I.C에서 내려와 15번 국도를 타고 고흥방면으로 1.4Km쯤 들어가면 만나게 되는 매곡교차로(交叉路 : 동강면 매곡리)에서 이번에는 대강리로 넘어가는 군도(郡道)를 따라 조금만 더 들어가면 당곡마을(동강면 대강리)이 나온다. 도로변에 깔끔하게 지어진 화장실까지 갖춘 주차장이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주차장 모서리에 세워진 산행안내도에 오늘 걷게 될 산행코스를 그려보고 난 후에 산행을 시작한다. 두방산으로 들어가는 길은 주차장의 길 건너편으로 나 있다. 들머리에 '두방산(용흥사) 1㎞'라고 쓰인 안내판이 세워져 있으니 참조하면 된다. 길은 자동차가 다닐 수 있도록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는데, 아마 두방산 자락에 있는 용흥사 불자(佛者)들에 대한 배려인 모양이다. 도로를 따라 걷다보면 진행방향에 뚜렷하게 보이는 산이 두방산이다. 오른쪽 저 멀리에는 오늘 맨 마지막으로 오르게 될 첨산이 이름처럼 뾰쪽하게 솟아있는 것이 보인다. 등산로입구 이정표(두방산 정상 1.85Km, 용흥사 0.75Km, 등산로 입구 0.35Km)

 

 

 

 

 

시멘트 도로를 따라 10분 조금 못 되게 걸으면 길 오른편에 저수지가 보이고, 둑 근처에서 길은 두 갈래(이정표 : 두방산 정상 1.5Km/ 용흥사 0.4Km)로 나뉜다. 이곳에서 왼편 산자락으로 접어들 경우 곧바로 정상으로 오르게 되지만, 등산객들의 대부분은 용흥사로 방향을 잡는다. 용흥사를 거쳐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 조금 더 멀기는 하겠지만, 두방산에서 가장 큰 사찰(寺刹)을 그냥 지나치는 것 보다는 낫다는 의미일 것이다. 물론 두 길은 해조암터 아래 삼거리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정상으로 곧장 오르는 산길을 포기하고 도로를 따라 곧장 들어가면 10분 후에는 용흥사에 이르게 된다. 용흥사는 경사(傾斜)진 산자락에 자리 잡은 아담한 절간이다. 비록 대웅전과 삼성각, 종각, 그리고 요사채가 전부이지만 시골에 소재한 절간치고는 제법 규모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용흥사(龍興寺)는 한국불교 태고종 소속의 사찰(寺刹)로서, 1930년경 서영민거사가 창건했다. 6.25전쟁 때 불에 타 없어지자 1953년 김상호스님이 다시 창건하여 용흥사라고 이름 붙였다. 1974년 대웅전, 1976년 종각을 중건(重建)하였으며, 1998년 승범 스님이 법당을 새로 건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용흥사에는 스토리텔링에 의해 만들어진 창건설화(創建說話)가 있다. 그러나 그 설화가 이치에 맞지 않으니 그저 웃고 넘어가도 될 일인지는 모르겠다. 역사를 날조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설화의 내용은 대강 이렇다. 옛날 임진왜란 때 부상을 당한 장수(將帥)가 용흥사에서 머물렀는데 어떤 약을 써도 효과가 없었단다. 그러다가 근처에 사는 아낙이 장수를 데리고 기바위골에 들어가 정성으로 기도하니 장수의 병이 씻은 듯이 나았고, 그 장수는 다시 전쟁터에 나가 큰 공을 세웠다는 것이다. 법당 아래에 수도파이프가 보이기에 목을 축여본다. 시원하고도 맛있는 물맛을 기대한 내 바램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이 물은 미지근하다. 생수(生水)를 기대했건만 아쉽게도 어디엔가 모아두었다가 사용하는 물인가 보다. 참고로 용흥사에서는 나로도의 우주발사기지가 보이는데, 발사대에서 쏘아 올리는 장면이 가장 잘 보이는 곳 중의 하나라고 알려져 있다.

 

 

 

 

절을 한 바퀴 둘러본 후에는 절 앞의 주차장으로 되돌아 나와야 한다. 주차장 모서리에 거대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있다. 보호수(保護樹)로 지정되었는데 수령이 3백년이나 되었단다. 오래된 느티나무는 대부분 마을이나 절간 등 사람들이 머무르던 근처에서 발견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다면 용흥사의 역사(歷史)도 300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산행을 이어간다.

 

 

 

느티나무를 지나자마자 길은 두 갈래(이정표 : 두방산 정상 1.1Km/ 코재 1.64Km, 병풍산 1.4Km)로 나뉜다. 이곳에서는 코재로 가는 임도(林道)를 버리고 왼편 산자락으로 접어들어야 한다. 산자락으로 접어들면 산길은 점차 가팔라지다가 종내는 허리를 펼 수 없을 정도로 까지 변해버린다. 대부분의 산들은 이렇게 가파를 경우에는 이리저리 방향을 틀면서 고도(高度)를 높여가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이 오름길은 초지일관(初志一貫)으로 곧게 올라가고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사람들의 인내(忍耐)를 시험해 보려는 모양이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숨이 턱이 차게 20분 정도 오르면 삼거리(이정표 : 두방산 정상 0.5Km/ 용흥사 0.7Km/ 당곡저수지 0.8Km)를 만나게 된다. 아까 당곡저수지에서 헤어졌던 정상으로 곧장 가는 길과 다시 만나는 지점이다. 삼거리를 지나면 너덜지대가 나오고, 너덜지대 다음에는 시누대가 무성한 해조암터이다. 당곡마을 입구에서 해조암터까지는 45분 정도가 걸린다.

 

 

 

사람의 키를 훌쩍 넘기는 울창한 시누대숲을 통과하면 20m는 족히 넘을 것 같은 거대한 암벽(巖壁)이 앞을 가로막는다. 사람들이 귀절암이라고 부르는 바위절벽이다. 얼핏 처음 듣는 사람들은 귀절암이라고 하면 암자(庵子)이거니 하겠지만 사실은 커다란 바위이다. 암벽에는 동굴 세 개가 뚫려있다. 그중 두 군데는 동굴 깊숙한 곳에 물이 고여 있다. 동굴의 상단 바위틈에서 자그만 물방울들이 방울방울 떨어져 조그만 웅덩이 샘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피부병 치료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약수인데, 왼편의 것이 물의 양도 많을뿐더러 맛도 뛰어나다. 이곳 귀절암에는 약수(藥水)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조선 중종 24년(1529년)에 어느 도인(道人)이 두방산 상봉에 있는 귀절암의 바위동굴에서 약수를 마시다가 부처님을 만난 후에, 바위 옆에다 해조암이라는 암자(庵子)를 지었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말기에 불에 타 없어진 절터에는 시누대만이 울창하게 자라고 있다. 또한 도인이 마셨다는 동굴 속의 약수는 피부병치료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하여 심심찮게 사람들이 찾는다고 한다. 귀절암 동굴 앞에 서면 보성 앞바다인 여자만 방향으로 조망(眺望)이 거리낌 없이 시원스럽다.

 

 

 

 

귀절암에서 급경사를 10분 정도 더 올라가면 능선 위에 올라서게 되는데, 이곳이 전망대삼거리(이정표: 병풍산 1.82Km/ 전망대50m/ 용흥사 2.5Km)이다. 두방산으로 가려면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진행해야 하지만 구태여 발걸음을 서두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곳에서 왼편으로 50m만 더 나아가면 멋진 바위전망대(展望臺)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툭 튀어나온 전망바위에 올라서면 오른쪽 발아래에는 동강면의 들녘이 바둑판처럼 잘 정돈되어 있고, 그 뒤에는 득량만이 펼쳐진다. 그리고 고개를 왼편으로 살짝 돌리면 여자만과 고흥반도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그 뒤에 보이는 산들은 아마 팔영산과 운암산일 것이다. 전망대삼거리 이정표에 대해서 한마디 해야 할 것 같다. 느닷없이 병풍산이라는 지명(地名)이 튀어나온 이유를 모르겠다. 왜 두방산을 건너뛴 채로 두방산으로 갔는지도 모르겠고, 1.82Km라는 거리표기도 얼토당토않기 때문이다. 참고로 두방산에서 0.86Km 떨어진 코재에서 병풍산은 1Km이상을 더 가야만 나온다. 아무래도 두방산을 병풍산으로 잘못 표기한 것이 아닌가 싶다.

 

 

 

 

삼거리로 돌아와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병풍산방향으로 진행하면 멋진 풍광(風光)이 끊임없이 펼쳐진다. ‘섬 산행 기분이 나네요.’ ‘아니 섬 산행보다 더 뛰어난데요.’ 같이 걷는 사람들의 말마따나 신비롭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능선은 색다른 풍경(風景)을 보여준다. 주상절리와 비슷한 기암(奇巖)들이 뾰쪽한 능선을 일렬로 장식하고 있는 광경이 마치 용(龍)의 등허리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이다. 거기다가 좌우로 펼쳐지는 다도해(多島海) 풍경까지 한눈에 들어오니 그야말로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능선을 따라 바위봉우리를 두어 개 넘다보면 마치 좌대(座臺)처럼 생긴 널찍한 암반(巖盤) 위에 길쭉한 바위 하나가 서있는 것이 보인다. 좌대처럼 생긴 바위를 신선대(神仙臺), 그리고 그 위에 서있는 바위를 장군바위라고 부른다. 우뚝 선 모습이 장군(將軍)의 기상을 닮았다는 장군바위는 누운 여자의 속눈썹에 해당된다고 해서 눈썹바위라고도 부르기도 하고, 흔들린다고 해서 흔들바위라고도 한다. 이 장군바위에는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옛적에 이 능선에 100개의 바위가 늘어서 있었는데, 산 뒤쪽에 사는 보성 사람들이 바위가 해를 끼친다는 이유로 99개를 쓰러트렸으나 장군바위를 쓰러트리려고 할 때 마른하늘에서 천둥번개가 쳐서 남았다는 전설(傳說)이 바로 그것이다.

 

 

 

 

장군바위를 지나 맞은편의 가파른 암릉을 치고 오르면 두방산 정상이다. 지나온 능선이 온통 바윗길인데도, 의외로 정상은 흙으로 이루어진 5평 남짓 되는 분지(盆地)이다. 봉우리를 바위들이 온통 둘러싸고 있는데도, 봉우리의 꼭짓점 부분만 흙인 것이다. 정상에는 말뚝 모양으로 생긴 정상석과 삼각점(순천 24)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정상은 사방이 막힘없는 뛰어난 조망대(眺望臺)이다. 서쪽에는 득량만이 펼쳐지고, 고개를 북쪽 방향으로 서서히 돌리면 제암산과 일림산, 초암산 등 철쭉으로 소문난 보성의 산들, 그리고 이어서 고동산 등 호남정맥의 산군(山群)들이 늘어서 있는 것이 보인다. 물론 남쪽에는 여자만과 팔영산이 펼쳐지고 있다. 전망대삼거리에서 이곳 정상까지는 대략 600m정도 되고, 걷는데 40분 정도 소요가 된다. 당곡마을 입구를 출발한지 1시간 30분이 가까이 되었다.

 

 

 

 

정상에서 바라볼 때 동쪽 골짜기 너머로 보이는 봉우리가 병풍산이다. 그러나 능선은 북동쪽으로 흐르다가 서서히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상석 뒤로 내려서면서 산행을 이어간다. 내려가는 길도 바윗길이지만 생각보다는 위험하지 않다. 그래도 바윗길이니 약간의 주의는 필요할 것이다. 따라서 구태여 서두르지 말고 서서히 걸으며 주변의 조망(眺望)을 즐기면 된다. 마침 맞게 주변 조망도 뛰어나고, 능선을 만들고 있는 기암(奇巖)들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하다.

 

 

 

잠시 바윗길을 내려가면 '통행금지'라고 쓰인 팻말이 바윗길을 떡하니 막고 있다. 위험하니 왼쪽 사면(斜面)으로 우회(迂廻)하라는 모양인데 구태여 그럴 필요는 없다. 바윗길이 그리 험하지도 않을뿐더러 길도 잘 나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좌우로 터지는 조망(眺望)이 시원스럽기 때문에 일부러라도 바윗길을 따라볼 일이다.

 

 

 

 

바윗길을 내려가다 만나는 철계단 두 개를 잇달아 내려서면 길은 갑자기 흙길로 변한다. 이어지는 완만(緩慢)한 능선을 따라 자그마한 구릉(丘陵) 몇 개를 넘으면 자그만 돌탑이 길손을 맞이하는 코재삼거리(이정표 : 비조암 1.9Km/ 용흥사 1.64Km/ 두방산 0.86Km)이다. 이곳에서 왼편에 보이는 산길은 아까 용흥사 앞 이정표에서 헤어졌던 산길이 올라오는 길이다.

 

 

 

 

다음에 가야할 목적지가 병풍산인데도 이정표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어리둥절할 필요는 없다. 병풍산은 비조암으로 가는 길목에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비조암을 가리키는 방향으로 진행하면 된다. 비조암 방향으로 진행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봉두산 갈림길(이정표 : 봉두산/ 병풍바위/ 두방산)’이 나온다. 봉두산은 동강면의 4대 명산(名山) 가운데 하나이다. 잠깐 다녀오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그냥 지나치고 만다. 봉두산까지의 거리가 얼마만큼 떨어졌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곳 삼거리에서는 병풍바위를 가리키는 방향으로 진행하면 된다.

 

 

 

‘봉두산 갈림길’을 지나서도 산길은 완만(緩慢)한 능선을 계속해서 오르내린다. 그러다가 우뚝 솟은 산 아래에서 길이 두 갈래(병풍바위삼거리 이정표 : 비조암/ 비조암(약자)/ 두방산)로 나뉜다. 어디로 가든지 비조암으로 가는 길인데 노약자(老弱者)는 왼편 사면(斜面)길로 가라는 얘기이다. 그러나 비조암으로 곧장 가는 사면길로 진행할 경우 병풍산을 건너뛰고 곧장 비조암으로 가게 되는 낭패를 보게 된다. 오른편에 보이는 가파른 오름길로 진행해야만 병풍산 정상으로 오를 수가 있기 때문이다.

 

 

 

병풍바위를 향해 가파른 오름길을 10분 조금 못되게 치고 오르면 산봉우리에서 삼거리를 만나게 된다. 이 삼거리가 바로 병풍산 정상이다. 병풍산 정상에는 이정표(비조암 0.82Km/ 용흥사 1.4Km/ 두방산 1.82Km)가 정상석을 대신하고 있다.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내려가면 용흥사가 나온다. 병풍산 정상은 잡목(雜木)으로 가려져 있어 조망이 썩 좋지는 않다. 그저 비조암과 첨산, 그리고 남해가 있는 남쪽 한 방향만 트이고 있을 따름이다. 코재에서 병풍산 정상까지는 20분 정도가 걸린다.

 

 

 

병풍산에서 내려오는 길은 굉장히 가파르다. 그래서 노약자들은 병풍산을 우회(迂廻)해서 비조암으로 곧장 가라고 권했던 모양이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짧게 내려서면 아까 헤어졌던 우회로를 다시 만나게 된다. 산을 내려서서 비조암으로 가는 길에는 유난히도 뾰쪽하게 치솟은 첨산과 새가 나는 모습처럼 생겼다는 비조암이 나타났다 사라지다를 반복하고 있다. 거대한 바위가 마치 하늘을 날아갈 듯이 날개를 펼치며 비상(飛上)을 꿈꾸고 있다.

 

 

 

 

거대한 비조암의 바위벼랑을 왼편으로 돌아 정상으로 오르면 마치 평지(平地)에 올라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만큼 비조암의 위가 넓다는 얘기이다. 비조암 정상도 병풍산과 마찬가지로 정상석 대신에 이정표(운동마을 1.15Km/ 두방산 2.8Km)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수백 명이 둘러 앉아 식사를 해도 충분할 정도로 넓은 비조암은 방금 지나온 병풍산이 있는 서쪽 방향만 시야(視野)를 가릴 뿐, 나머지 세 방향은 막힘이 없이 시원하게 조망(眺望)이 트인다. 주변에 흩어진 마을들과 남해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병풍산에서 비조암까지는 20분 정도 걸린다.

 

 

 

 

비조암에서 첨산으로 가기 위해서는 운동마을 방향으로 내려서야 한다. 운동마을을 향해 바윗길을 짧게 내려서면 길이 두 갈래(이정표 : 첨산 2.3Km/ 운동)로 나뉜다. 이곳에서 왼편으로 진행하면 고인돌공원과 운동마을로 내려가는 길이다. 비조암 바로 아래를 지나는 너덜길을 통과하면 길은 흙길로 변한다. 그리고 완만(緩慢)한 길과 경사(傾斜)가 제법 심한 길이 번갈아 이어진다. 가는 길에는 얼핏얼핏 첨산이 그 자태를 드러낸다. 예로부터 지역주민들이 신령스럽게 여기며 오르는 것을 삼간다고 하는 첨산은 다가갈수록 붓끝처럼 더욱 뾰족하고 우람하다. 비조암을 출발한지 20분이 조금 더 지나면 안부사거리(이정표 : 첨산/ 운동/ 원매곡/ 비조암)에 이른다. 만일 첨산을 오르기가 체력적으로 부담스러운 사람들은 이곳에서 운동마을이나 원매곡마을로 탈출하면 된다.

 

 

 

 

 

 

안부사거리를 지나 맞은편 능선으로 붙으면 시작부터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지금까지 산행을 이어오느라 체력(體力)이 고갈되었기 때문에, 아까 두방산에 오를 때보다 차라리 힘이 더 드는 구간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비록 썩었지만 그래도 통나무계단이 설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20분 정도 오르고 이어지는 완만한 바윗길을 10분 조금 못되게 오르면 드디어 첨산 정상이다.

 

 

비좁은 바위봉우리인 첨산 정상에는 정상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생김새는 병풍산의 정상석과 비슷한데 다만 크기가 조금 더 작은 정도이다. 첨산의 정상도 시야(視野)가 사방으로 뻥 뚫린다. 운동마을과 원매곡마을 등 주변 마을들은 물론, 비조암에서 병풍산을 거쳐 두방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호쾌하다. 남쪽의 바다는 더 이상 가까워질 수가 없을 정도로 코앞까지 다가와 있다.

 

 

 

하산은 택촌마을로 잡는다. 택촌마을은 비록 이정표(흥덕사 0.8Km/ 비조암 2.3Km)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흥덕사 방향으로 진행하면 된다. 내려가는 길은 거친 바윗길이다. 많이 위험하지는 않지만 주의가 요구되는 구간이다. 바윗길을 따라 10분이 조금 넘게 내려가면 산길이 흙길로 변하면서 경사(傾斜)도 또한 완만(緩慢)하게 변한다. 그리고 삼거리(이정표 : 택촌/ 흥덕사/ 첨산)를 만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흥덕사 방향은 오른편으로 휘면서 첨산의 아랫자락을 감으면서 돌고 있다. 택촌마을은 곧장 직진하면 된다.

 

 

 

 

 

산행날머리는 택촌마을의 첨산산장

‘흥덕사 갈림길’에서 산행이 종료되는 택촌마을의 ‘첨산산장’까지는 의외로 멀다. 갈림길에서 산 아래에 있는 농로(農路)까지의 거리는 얼마 되지 않지만, 전신주(電信柱)를 엮어 만든 다리를 건너 만나는 되는 시멘트 길을 따라 10분 남짓 걸어야만 첨산산장에 이를 수가 있기 때문이다. 15번 국도변에 위치한 첨산산장은 매점과 주점 등을 두루 갖춘 종합휴게시설이다. 비록 화장실에서이지만 간단하게나마 땀을 닦을 수가 있어 다행이다. 첨산 정상에서 첨산산장까지는 50분 남짓 걸렸다. 비조암에서 첨산산장까지는 보통 걸음보다 조금 더 천천히 걸은 탓에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금오도(金鰲島) 대부산(貸付山, 382m)

 

산행일 : ‘13. 4. 13(토)

소재지 : 전남 여수시 남면 금오도

산행코스 : 함구미선착장→팔각정→대부산→칼이봉→느진목→옥녀봉→우학리(산행시간 : 4시간20분)

함께한 산악회 : 안전산악회

 

특징 : 우리나라에서 21번째로 큰 섬인 금오도(金鰲島)는 지형이 자라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다른 한편으론 조선시대 궁궐을 짓거나 보수할 때, 임금의 관(棺)을 짜는 재료인 소나무를 기르고 가꾸던 황장봉산이었을 만큼 원시림이 잘 보존된 곳으로, 숲이 우거져 검게 보인다고 해서 ‘거무섬’으로도 불렸다고 한다<조선왕조실록>. 섬 산행의 가장 큰 매력(魅力)은 지루하지가 않다는 점이다. 등산코스가 아무리 험준하거나 길어도 별로 지루하게 느껴지지가 않는다. 어디에서든 눈길만 돌리면 상쾌한 바다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기 때문이다. 산길을 걸으면서 바다를 볼 수 있는 매력(魅力)에 푹 빠진 사람들은 아무리 멀고 외딴섬이라도 천 리 길 다리품이 아깝지 않다고 한다. 금오도의 대부산도 그런 매력을 듬뿍 갖고 있는 산이다.

 

 

이번 산행은 무박(無泊)으로 진행할 수밖에 없다. 금오도에 이르기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뿐만 아니라, 배편을 이용해야만 하는 번거로움까지 있기 때문이다. 버스에서 선잠을 자면서 돌산도에 도착하니 새벽 5시, 산악회에서 나누어준 식사를 마친 후에 다들 향일암으로 향한다. 향일암에서 일출(日出)을 감상하기 위해서이다. 나는 이미 두어 번을 올라봤기에 향일암으로 오르는 것을 생략하고 주차장에서 일출을 맞이하기로 한다. 해돋이는 한마디로 장관(壯觀)이다. 흠 하나 없는 온전한 해가 떠오른 것이다. 그 동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일출을 보았지만 오늘 같이 온전한 해돋이는 결코 본 일이 없었던 것 같다.

 

 

 

금오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선 금오도로 들어가는 도선(渡船)이 출발하는 돌산도의 신기항까지 와야 한다. 먼저 완주-순천고속도로를 이용해서 순천까지 온 후, 17번 국도로 갈아타고 신기항까지 오면 된다. 신기항에서 금오도의 여천선착장까지 오전 7시45분부터 대략 1시간 간격으로 왕복 운항한다. 도선은 우리가 타고 온 버스 외에도 수십 대의 승용차를 더 실을 정도로 크니 안심하고 승선해도 된다.

 

 

 

배 위에서 바라본 금오도, 맨 왼쪽이 팔각정이 있는 봉우리, 그 옆이 대부산일 것이다. ‘뭔가 닮은 것 같지 않아요?’ 집사람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젖가슴’이라는 말이 튀어나올 정도로 여성의 가슴을 쏙 빼다 박았다.

 

여천선착장

 

 

산행들머리는 함구미선착장 갈림길

산행들머리는 함구미선착장 갈림길이다. 섬 일주도로에서 내려다본 함구미 마을은 짭짤하고 비릿한 냄새가 코에 확 풍길 것 같은 전형적인 어촌마을이다. 함구미(含九味)란 지명은 해안(海岸)의 기암절벽(奇巖絶壁)이 아홉 골짜기의 다양한 절경으로 이뤄졌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마을 앞 포구가 크고 넓어 한구미라고 하던 우리말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함구미(含九味)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여천선착장에서 이곳 함구미까지는 섬(島) 일주도로를 운행하는 버스가 다니니 이용하면 된다.

 

 

 

 

섬 일주도로의 함구미선착장(船着場) 뒤편 일주도로의 끄트머리 근처(갈림길에서 50m쯤 떨어진 지점)에서 산행이 시작된다. 들머리에 산행안내도와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본격적으로 산행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먼저 마을길을 지나야 한다. 올레길 같은 골목길의 양 옆은 온통 돌담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어른의 키를 훌쩍 넘길 정도로 무척 높다. 세찬 바람을 막아내기 위해 돌이 많은 섬의 특성을 잘 활용한 사람들의 지혜가 아닐까 싶다. 돌담은 대문을 따로 달지 않았어도 각(角)지게 만들었기 때문에 집 안이 내다보이지는 않는다.

 

 

 

마을 돌담길을 지나 산길로 들어선다. 대부산 산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등산로 주변에는 간간히 동백나무가 보이는데 나무아래 풀섶(풀숲의 사투리)에 떨어져 내린 붉은 꽃이 서러울 정도로 곱다. 마을을 벗어나 10분 조금 못 되게 올라가면 또 다시 돌담을 만나게 된다. 이번의 것은 조금 전의 돌담만큼 높지는 않지만, 대신 더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세월의 흔적이 묻어난다. 돌담 안에는 사람의 흔적이 역역한 빈 집들도 간혹 보인다. 저 집에서 자연과 함께 살아가던 돌담을 닮은 소박한 사람들은 이제는 없다. 이곳까지 오르내리기가 불편하다보니 전부 바다 가까운 곳으로 이주했을 것이다.

 

 

 

산을 오르다 뒤를 돌아보면 벌써 마을은 저만큼 멀어지고, 그 너머 다도해(多島海)는 아름다운 풍광(風光)을 한껏 자랑하고 있다.

 

 

텅 빈 마을을 지나 5분쯤 더 올라가면 또 다시 돌담이 보인다. 이번에는 돌담 안은 온통 빈터로 남아있다. 아주 오래 전에 이주해버린 탓에 가옥의 잔해(殘骸)까지도 흔적 없이 사라져버린 모양이다. 돌담길을 지나서 너덜길까지 통과하면 숲속에 긴 의자까지 갖춘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쉼터에서 능선에 들어서면 나무껍질이 온통 하얀 나무들 천지이다. 소사나무 군락(群落)이다, 생존력이 매우 강해 비탈진 능선이나 바람이 센 정상에서도 번성하는 소사나무의 특성대로 산등성이에 군락을 이루고 있다. 우리 주변에서 커다란 나무로서 보다는 분재(盆栽)로 만날 기회가 많은데, 이곳에서는 크게 잘 자라 군락을 이루고 있다.

 

 

 

소사나무 군락을 지나면 이내 375봉이다. 이 봉우리에는 전망대를 겸한 팔각정(八角亭)이 세워져 있다. 정자(亭子)에 올라서면 크고 작은 수많은 섬들이 눈앞으로 도열한다. 대두라도 소두라도 소횡간도 대횡간도 나발도 월호도 돌산도가 한 눈에 보인다. 멀리 여수 시가지도 아련하다. 섬들이 점점이 떠 있는 바다 풍경(風景)은 한없이 아름답다. 경이롭기까지 한 풍경은 여행객의 발길을 붙들고 한동안 놓아주질 않는다. 저 멀리 수평선에서 끝없이 밀려오는 그리움은 가슴을 일렁이게 한다.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이들의 얼굴에 환한 꽃이 피어난다. 아름다움에 취해 자기도 몰래 행복(幸福)해진 모양이다.

 

 

 

팔각정에서부터는 휘파람이 절로 나올 정도로 평탄한 능선길이 이어진다. 능선에는 온통 소사나무가 울창하고, 소사나무 사이사이에는 진달래가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앉아있다. 연분홍 진달래꽃은 스러져 가는 봄을 안타까워하는 듯 마지막 힘을 다해 꽃망울 활짝 터뜨리고 있다. 대부산으로 가는 길에는 흙길과 바윗길을 번갈아 지나게 된다. 간간이 나타나는 바윗길 구간에서는 산과 바다를 동시에 감상하며 걷는 호사(豪奢)를 누릴 수 있다.

 

 

 

 

가야할 남쪽 능선. 대부산을 걷다보면 가끔 작은 해송(海松)들을 볼 수 있다. 황장목(黃腸木) 새끼들이다. 금오도는 원래 황장목 해송의 천연군락지로 명성이 나있던 곳이다. 숲이 크고 무성했던지 거무섬(巨茂島)이라는 이름까지 얻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의 조정에서는 궁궐과 지방 관청을 축조하기 위하여 목재를 철저히 관리하면서, 금오도의 거대한 수림(樹林)을 황장봉산으로 지정하여 보호하였다. 금오도의 황장목은 단단하고 쉽게 썩지 않기 때문에, 건축자재로 소문난 춘향목 이상으로 가치를 인정받았다고 한다.

 

 

‘바다 색깔이 너무 곱네요.’ 집사람의 말마따나 바다는 비취빛으로 빛나고 있다. 화려하게 빛나는 바다 위에 올망졸망한 수많은 섬들이 떠 있다. 마치 모이를 찾아 모여드는 새때를 보는 것 같다.

 

 

바윗길의 바다 쪽은 급경사(急傾斜)의 벼랑이지만, 바위의 윗면이 넓기 때문에 공포감은 느낄 필요가 없다. 그저 눈의 호사만 누리면 된다. 다도해의 풍광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 중의 하나가 대부산 조금 못미처에 있는 바위이다. 길목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바위를 오른편으로 우회(迂廻)하여 위로 오르면 또 다시 일망무제(一望無題)의 다도해 풍광이 시원스레 펼쳐진다. 바다 건너편에는 개도와 대·소두리도 그리고 화태도와 돌산도가 손에 잡힐 듯 가깝다. 가벼운 전율마저 느껴질 만큼 조망(眺望)이 탁월하다.

 

바위에서 뒤돌아보면 지나온 능선과 팔각정이 보인다. 이곳이 대부산의 정상어림인데도 맞은편 372봉에 있는 팔각정이 더 높아 보인다.

 

 

 

팔각정에서 천천히 조망(眺望)을 즐기며 20분 조금 넘게 걸으면 대부산 정상이다. 대부산 정상은 아주 평범하다. 소사나무숲 한복판에 세워져 있는 이정표(문바위 1.29Km/ 함구미 1.6Km)만 아니라면 이 섬의 최고봉이라는 사실을 짐작하기조차 어려울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 부부도 이곳이 정상인줄 모르고 지나쳐 버렸다. 산을 한참이나 내려가다가 되돌아와 인증사진을 찍어야만 했다. 정상은 소사나무가 우거져서 시야(視野)가 트이지 않기 때문에, 다들 머무르지 않고 그냥 지나쳐버린다. 대부산은 얼마전에 매봉산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고 한다. 궁궐토지(宮闕土地)로 되어있던 섬을 1886년에야 일반인에게 출입을 허용하였고, 일제 강점기(日帝 强占期)에는 산을 임대해서 삼림을 개척하였다. 이때 빌렸다는 의미의 대부산(貸付山)이 산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왜 매봉산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엉겁결에 얻게 된 이름을 엉겁결에 잃게 된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정상에서 조망(眺望)이 트이지 않는다고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20m정도만 더 걸으면 만나게 되는 바윗길이 뛰어난 전망대이기 때문이다. 바윗길은 바다 쪽이 바위벼랑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거침없이 시야(視野)가 열린다. 눈앞에 펼쳐지는 섬들은 물론이고, 저 멀리 돌산도의 신기항에는 연륙교 공사가 한창이다.

 

 

 

대부산에서 바윗길과 흙길을 번갈아가며 30분 정도 걸으면 문바위(이정표 : 칼이봉 1.29Km/ 대부산 2.1Km)가 나온다. 커다란 바위 두 개가 양쪽에 솟아 있는 모습이 문처럼 생겼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문바위의 문설주 역할을 하는 양 옆의 바위 위에서 다시 조망(眺望)이 트이지만 아까보다는 한참 뒤진다.

 

 

 

 

 

문바위에서 다시 15분 정도를 걸으면 여천마을로 내려가는 길이 갈리는 삼거리 쉼터(이정표 : 칼이봉 0.5Km/ 여천 0.8Km/ 문바위 0.79Km)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서 아침에 배에서 내린 여천선착장까지는 800m 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여천에서 이곳으로 올라와 대부산을 경유하여 함구미선착장으로 내려간 후, 금오도의 또 하나의 명품인 비렁길을 걷는다고 한다. 산행과 비렁길,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고 싶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코스인 것이다.

 

 

 

 

여천갈림길에서 10분 정도 지나면 칼이봉에 올라서게 된다. 칼이봉도 대부산과 마찬가지로 별 특징이 없기는 매 한가지이다. 이곳도 역시 이정표(느진목 1.29Km/ 문바위 1.29Km)만 아니라면 정상인 줄도 모르고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칼이봉에서 내려서면 또 다시 눈은 호사(豪奢)를 누리게 된다. 진행방향의 나무들 사이로 시야(視野)가 열리면서 남해바다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번의 바다는 아까와는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올망졸망한 섬들의 숫자가 현저하게 줄어든 대신에 바다는 멀리 망망대해(茫茫大海)의 끝에다 수평선을 만들어 내고 있다.

 

 

 

칼이봉을 내려서면 거대한 동백나무 군락을 만나게 된다. 햇빛 한 점 스며들지 못할 정도로 숲이 울창하게 우거졌는데, 크고 작은 나무들이 가는 줄기들을 하늘을 향해 뻗고 있다. 저마다 햇빛을 보기 위해 키 경쟁이라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 숲은 난대림(暖帶林)의 진수를 보여준다. 동백나무와 후박나무 그리고 비자나무는 물론 나무에 기생하는 부착식물들이 지천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소나무를 제외하고는 온통 헐벗은 나무들뿐이었는데, 이곳은 온통 푸르름에 넘쳐난다. 마치 여름 산행을 하는 착각에 빠질 정도로 사방이 온통 푸른 잎들로 꽉 차있다. 이런 숲에서는 가끔 불어오는 바람까지고 신선하기 짝이 없다. 자신들도 모르게 입가에는 한줄기 미소가 묻어난다. 칼이봉에서 20분 정도 걸으면 느진목(이정표 : 옥녀봉 2.7Km/ 대유 0.3Km/ 느진목 0.5Km/ 칼이봉 1.29Km)이다. 만일 육지로 돌아가는 배시간이 빠듯하다면 이곳에서 왼편에 보이는 길로 내려가면 된다. 대유에서 여천선착장까지는 지척이기 때문이다. 이런 길은 무리에 휩싸이지 말고 홀로 걸어야 더 운치(韻致) 있다. 아니 어쩌면 혼자보다는 둘이 걷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른다. 같이 걷는 게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이렇게 호젓한 산길에서 주고받는 사랑의 밀어(蜜語)는 그 농도가 더울 짙어질 수밖에 없을 테니까.

 

 

 

 

숲길 위에는 생명을 다한 동백꽃들이 시체마냥 널브러져 있다. 물론 붉은 꽃망울을 활짝 터트리고 있는 나무들도 보인다. 아마 게으름을 피우다가 제철을 놓쳐버린 모양이다. 지금은 4월 중순, 금오도가 자랑하는 ‘산벚꽃’도 이미 져버린 늦은 봄인 것이다. 보통 동백꽃은 두 가지 느낌으로 표현된다. ‘바람 난 아가씨처럼 나뭇가지에 매달려 이리저리 흔들리는 살아있는 꽃’이 그 하나요, 다른 하나는 ‘모가지 째 뚝뚝 떨어져 바닥에 낭자한 선혈의 꽃’이다. 대부분의 선비들은 동백꽃을 후자로 보았기 때문에 동백꽃을 멀리했다고 한다. 특히 귀양살이를 하는 선비들은 아예 나무를 베어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동백꽃을 찾아 천리 길도 멀다 않고 떠난다. 세월 따라 인심도 변한 탓이리라... 동백은 추위에 약하지만 해풍(海風)엔 강하다고 한다. 그래서 남해안의 섬들에서 이렇게 광활한 동백나무 군락(群落)들이 자주 눈에 띄는 모양이다. 동백나무 군락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이어진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는 동백나무 군락지라는 오동도가 인근에 있지만 이곳도 그에 못지않을 듯싶다.

 

 

 

느진목사거리에서 다시 30분 조금 못되게 걸으면 소유갈림길사거리(이정표 : 옥녀봉 0.5Km/ 소유 0.6Km/ 느진목 0.6Km/ 냉수동 0.8Km)가 나온다. 갈림길에 가까워지면서 진행방향에 옥녀봉이 그 자태를 들러내면서 정상이 가까워졌음을 알려준다.

 

 

 

 

칼이봉을 출발해서 녹음이 짙은 동백나무 숲 아래로 난 길을 1시간 조금 못되게 걸으면 옥녀봉이다. 가는 길에 두어 개의 봉우리를 넘고, 또 대유와 소유 탈출로를 지나면 약간 가파른 오르막길이 나타난다. 그리고 앞을 가로막는 바위를 피해 왼편으로 우회(迂廻)하여 오르면 드디어 옥녀봉이다. 옥녀봉에는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傳說)이 하나 있다. 옛날 하늘에서 네 명의 선녀가 금오도의 아름다움에 반해서 내려왔는데 셋은 승천하였지만 한명의 선녀는 올라가지 못하고 금오도에서 살게 되었다고 한다. 옥녀봉이라는 이름은 그 선녀의 이름에서 따온 모양이다. 옥녀가 이곳 바위 위에서 베를 짜다가 베틀의 북을 놓친 것이 유송리 앞 바다의 납덕섬이 되었더란다. 참고로 지금도 옥녀봉 근처에서는 벌채하는 것을 금기시 하고 있다. 벌채가 곧 옥녀의 치마를 벗기는 모양새이기 때문이란다.

 

 

 

 

옥녀봉의 북동쪽은 날카로운 수직 암벽으로 되어 있다. 때문에 시야(視野)가 뻥 뚫리면서 시원스레 조망(眺望)이 터진다. 대부산에서 누리는 마지막 눈의 호사(豪奢)이다. 멀리 떠있는 섬들은 산행을 하는 내내 보아온 섬들이고, 발아래에 수항도와 형제도가 보이는데, 수항도에 집들이 보이는 것은 조그만 섬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살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옥녀봉에서 능선산행이 끝나는 곰바위까지는 1.9Km, 길이 거칠지 않기 때문에 30분이면 도착할 수 있다. 옥녀봉에서 검바위는 동백나무 숲 아래를 걷는 것 외에는 별다른 특징이 없기 때문에 해찰을 부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싱싱한 산나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다르다. 길가에 두릅나무가 꽤나 많이 보이기 때문이다. 부지런한 집사람은 오늘도 역시 부지런히 손을 놀렸고, 한 끼 먹거리로 충분할 만큼의 양을 뜯을 수 있었다.

 

 

 

 

 

산행날머리는 우학리선착장

능선산행의 끝은 섬 일주도로이다. 도로를 건너 검바위까지 진행할 수 있으나, 밭에서 일하고 있는 아주머니의 말에 의하면 특별한 볼거리가 없다고 한다. 더 이상 능선산행을 이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일주도로를 따라 남면 소재지인 우학리로 향한다. 도로를 따라 내려가다가 지름길을 찾아 도로를 가로지르면 20분이면 우학리에 있는 우실마을회관에 이르게 된다. 비렁길을 걷고 온 아주머니들의 양손에는 비닐봉지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금오도의 특산품인 ‘방풍나물’과 ‘고사리’를 구입한 모양이다. 여천선착장에 도착한 집사람이 방풍나물 2봉지를 챙겨든다. ‘한 봉지에 5000원'이면 거저먹기란다. 집사람은 그것도 부족했는지 ’여수수산시장‘에 들러 돌김과 멸치, 그리고 북어포에 갓김치까지 푸짐하게 챙겨 담는다. 그 많은 걸 혼자 짊어질 난 괴롭지만, 집사람은 그런 내 애달픔에는 관심조차 없다.

 

 

 

금강산(金剛山, 482.7m) - 만대산(萬垈山, 480m)

 

산행일 : ‘13. 1. 13(일)

소재지 : 전남 해남군 해남읍과 마산면, 옥천면의 경계

산행코스 : 금강저수지→3봉→전망대(화원지맥)→만대산→금강재→금강산→성터→쉼터→금강저수지(산행시간 : 4시간30분)

함께한 산악회 : 기분 좋은 산행

 

특징 : 금강산은 해남의 진산(鎭山)으로 시가지(市街地)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금강산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하면 생경스럽다는 느낌이 먼저 들 것이다. 백운산이나 신선봉처럼 같은 이름을 갖은 산들이 전국에 여럿인데도 유독 금강산만 그런 느낌이 드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그만큼 북녘 땅에 있는 금강산이 우리들 가슴 속에 워낙 뚜렷하게 각인(刻印)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금강산은 인근에서 비교적 높은 편이라서 조망(眺望)이 뛰어나다. 또 한편으로는 산이 그다지 높지 않고 산길이 부드럽기 때문에 가족 산행지로 추천할 만하다.

 

 

산행들머리는 해남읍(해리) 금강저수지

영암-순천고속도로 강진 I.C에서 내려와 13번 국도의 완도방면으로 달리다가 해남읍에 이르러, 신안교차로(交叉路 : 해남읍 신안리)에서 빠져나와 시가지를 통과(중앙교차로에서 좌회전⇒버스터미널4거리에서 우회전⇒백두아파트 앞 3거리에서 좌회전⇒해남건강지원센터 4거리에서 직진)하면 산행이 시작되는 금강저수지의 제방(堤防) 아래에 이르게 된다.

 

 

 

금강저수지 둑(堤防)을 5m쯤 남겨놓은 지점에서 오른편으로 갈라지는 산길로 들어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들머리에 산행안내도와 ‘일당길’이라고 쓰인 표지석이 세워져 있으니 참조하면 될 것이다. 등산로의 초입은 부드러운 흙길에다가 경사(傾斜)까지 완만(緩慢)하기 때문에 느긋한 마음으로 산행을 시작할 수 있다. 산길을 걷다보면 등산로가 참 특이하다는 생각이 든다. 길의 바닥을 목재(木材)로 보강했는데, 토사(土砂)의 유출을 방지하는 것은 물론, 배수로(排水路)의 역할까지 가능하도록 설계해 놓았다. 또한 길가에는 동백나무를 촘촘히 심어 놓는 등, 등산로 관리에 신경을 쓴 흔적이 역력하다.

 

 

 

 

 

완만하게 시작된 산길은 10분이 지나면 운동기구를 갖춘 팔각정 쉼터에 이르게 된다. 팔각정은 전망대(展望臺)의 역할까지 수행하고 있는 듯, 해남 시가지(市街地)와 종합운동장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그러나 위로 올라갈수록 조망이 더욱 시원스러워지니 구태여 발걸음을 지체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팔각정을 지나면서 산길은 갑자기 가팔라진다. 그러나 길이 좌우(左右)로 왔다갔다 갈지(之)자를 그리면서 위로 오르기 때문에 그다지 힘들지는 않은 편이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쉬엄쉬엄 25분 정도 오르면 거대한 바위가 앞을 가로막는다. 오른편으로 우회(迂廻)하여 위로 오르면 제법 널따란 암반(巖盤)이 나타나고, 한쪽 귀퉁이에 3봉이라고 쓰인 정상표지석이 서 있다.(3봉 이정표 : 만대산 정상 0.9Km, 금강산 정상 5.1Km/ 금강저수지 2.5Km)

 

 

 

3봉에 올라서면 발아래에 우슬재와 해남공설운동장 그리고 해남 읍내(邑內)가 훤히 내려다보이고, 그 오른편에는 금강산과 금강곡저수지 그리고 금강계곡의 일부가 시야(視野)에 들어온다. 공설운동장을 넘어 저 멀리에는 두륜산이 우뚝 서있는데, 올망졸망한 봉우리들이 예쁜 ‘산 그리메(그림자의 옛말)’를 그려내고 있다. 의외의 장소에서 뛰어난 조망대를 만난 것이다.

 

 

 

 

 

3봉에서 다시 가팔랐다가 완만(緩慢)해지기를 번갈아 하는 능선을 따라 10분 쯤 진행하면 1봉으로 여겨지는 봉우리 위로 올라서게 된다. 그러나 봉우리 위에는 정상표지석은 커녕 그 흔한 이정표 하나도 보이지 않고, 다만 누군가가 바위 위에다 ‘1봉 정상’이라고 적어 놓았을 뿐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1봉으로 오는 길에 2봉을 지나왔을법한데, 도대체 어떤 봉우리가 2봉인지는 어림짐작조차도 불가능하다. 지나온 능선에는 봉우리가 2개나 되기 때문이다. 참고로 지도에는 1봉과 2봉을 3봉의 아래에 두고 있다. 그렇다면 1봉은 운동기구가 있는 팔각정쯤이 될 것이다. 그러나 과연 팔각정이 있는 지점을 봉우리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자못 의심스럽다. 그렇다면 2봉은 과연 어느 지점을 이른단 말인가. 참고로 만대산 아래에는 ‘전남학생교육원’이 소재하고 있다. 만대산을 학생들의 극기(克己) 훈련 코스로 이용하고 있는 모양으로, 교육원에서 곳곳에다 이정표를 세워놓았다. 그러나 그들이 세운 이정표는 무시하고 지나치는 게 유리하다. 전망대를 정상이라고 표기하는 등 그들만의 지명(地名)을 표기하고 있어서, 까딱하면 헷갈릴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1봉 정상을 출발한지 5분쯤 지나면 헬기장에 이르게 된다. 이곳은 **화원지맥과 만나게 되는 지점으로 헬기장의 끄트머리에 학생교육원에서 세운 이정표(정상 200m/ 1봉 정상 200m/ 금강산)가 보인다. 이정표가 정상이라며 가리키고 있는 방향으로 10분 가까이 진행하면 조망(眺望)이 시원스럽게 트이는 전망바위이다. 전망바위 위로 올라서면 코앞에 다가와 있는 두륜산을 볼 수 있다.

**) 화원지맥, 호남정맥(湖南正脈)상의 바람재에서 분기(分岐)하여 땅끝까지 이어진 산줄기를 ‘땅끝기맥’이라 부른다. 이 땅끝기맥 산줄기를 따라 내려오다 첨봉(352봉)에서 남서쪽으로 분기하는 산줄기를 화원지맥이라고 일컫는데, ‘신산경표’의 저자(著者)인 박성태라는 사람이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화원지맥은 해남읍내(邑內)를 감싸 안으면서 덕음산과 만대산, 금강산을 만들고, 이어서 운거산 등 여러 산을 만들어 나가다가, 해남군 화원면 매월리 바닷가로 가라앉은데, 그 도상거리는 약76.5km가 된다.

 

 

 

 

다시 헬기장으로 되돌아 나와, 이번에는 이정표가 가리키는 금강산 방향으로 산행을 이어간다. 만대산을 지나 금강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화원면 매월리 바닷가까지 이어지는 화원지맥의 일부구간이다. 만대산으로 향하는 길은 한마디로 말해 곱다. 비록 오르내리는 구간이나 바위구간이 나오기도 하지만 아까와 같은 가파른 오르막길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바닥이 흙길에다 낙엽까지 쌓여있어서 여간 폭신폭신한 것이 아니다. 안부 삼거리(이정표 : 옥천 영신임도 0.8Km/ 만대산 정상 0.9Km, 금강산 정상 5.4Km/ 금강저수지 2.6Km)를 지나 조망(眺望)이 시원스럽게 터지는 전망바위 능선을 20분 조금 못되게 걸으면 만대산 정상에 이르게 된다.

 

 

 

 

한국판 ‘피사의 사탑(Tower of Pisa), 차곡차곡 쌓여있는 바위들이 비스듬하게 기울어있기 때문에 위태롭게 보이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저렇게 수십, 아니 수백 년 동안을 버텨왔을 테니까.

 

 

 

 

만대산 정상은 의외로 실망스럽다. 정상에는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고, ‘만대산 정상’이라고 쓰인 이정표(금강산 정상 4.5Km/ 금강저수지 3.5Km)가 정상석을 대신하고 있다. 정상은 나무테크로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으나 조망(眺望)은 기대만큼 시원스럽지가 않다. 전망대의 난간 앞에 서면 해남읍내와 옥천면 그리고 만대산 줄기가 눈에 들어온다.

 

 

 

 

만대산에서 금강재로 가는 길은 전형적인 흙산(肉山)에 나 있는 부드러운 흙길을 따라 걷게 된다. 안부를 통과해서 올라간 체육공원 갈림길(이정표 : 체육공원주차장 1.7Km/ 금강산 정상 3.1Km/ 만대산 정상 1.4Km)에서 오른편으로 내려가면 두산을 잇는 능선에서 가장 낮은 지점인 금강재(이정표 ; 금강저수지 2.1Km/ 금강산 정상 2.3Km/ 만대산 정상 1.9Km, 삼봉 3.9Km)에 이르게 된다. 이 금강재는 옥천면 사람들이 해남에 장보러 다닐 때 넘나들던 고갯마루이다.

 

 

 

산행 중에 우연히 눈에 띈 연리지(連理枝), 연리지(連理枝)란 ‘나란히 붙어 있는 나뭇가지’를 말하며, 뿌리가 다른 두 그루의 나무가 사이좋게 합쳐진다는 의미이다. 그런 귀한 연리지를 우연찮게 산행 중에 발견하게 된 것이다. 한 해가 새로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상서로운 나무를 만났으니, 틀림없이 올 한 해는 만사형통(萬事亨通)할 것이다.

* 연리지의 故事는 후한말(後漢末)의 대학자 채옹(蔡邕)에서 유래했다. 효성이 지긋하기로 소문난 채옹은 어머니가 병으로 자리에 눕자 3년 동안을 옷도 벗지 않은 채로 간병을 했다고 한다. 병세가 악화되었을 때에는 100일 동안이나 잠자리에 들지도 않고 보살폈으나 끝내 돌아가셨다. 그 후 옹의 집 앞에 나무 두 그루가 싹이 나더니 점점 자라면서 가지가 서로 붙더니 마침내는 한 그루처럼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연리지라는 단어는 원래 효심(孝心)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던 것이 다정한 연인(戀人)의 상징으로 사용된 것은 당(唐)의 시인(詩人) 백락천(白樂天)에 의해서다. 백락천은 당현종과 양귀비의 비극적인 사랑을 장한가(長恨歌)라는 장대한 서사시로 읊었다. 그는 당현종이 양귀비의 무릎을 베고 누워 하늘의 별을 쳐다보면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이렇게 노래했다고 한다. 장한가의 끝 구절이다.

 

七月七日長生殿(칠월칠일장생전) 7월 7일 장생전에서

夜半無人和語時(야반무인화어시) 깊은 밤 사람들 모르게 한 맹세

在天願作比翼鳥(재천원작비익조) 하늘에선 비익조가 되고,

在地願爲連理枝(재지원위연리지) 땅에선 연리지가 되자고 간곡히 하신 말씀...

天長地久有時盡(천장지구유시진) 하늘과 땅은 차라리 끝간 데가 있을지라도,

此恨綿綿無絶期(차한면면무절기)님을 사모하는 이 마음의 한은 끝이 없으리다.

 

 

 

 

 

금강재를 지나면서 산길은 다시 오르막이 시작된다. 그러나 그다지 가파르지는 않기 때문에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오르막길을 쉬엄쉬엄 20분 가까이 걸으면 무명봉에 올라서게 된다. 봉우리의 한쪽 귀퉁이에 있는 나뭇가지에 ‘419m’라고 고도(高度)를 적어놓은 표지판이 걸려있는 것이 보인다. 표지판의 아래에 적혀있는 ‘준.희’라는 이름이 왠지 친근하게 느껴진다. 오지(奧地)의 산을 답사하면서 심심찮게 만나왔던 이름이기 때문일 것이다. 봉우리에서는 금강산과 흑석산이 잘 조망된다.

 

 

 

 

 

 

무명봉에서 안부로 내려섰다가 다시 오르막길을 치고 오르면 널따란 헬기장(이정표 : 금강산 정상 0.4Km/ 금강재 1.9Km, 만대산 정상 3.8Km)이다. 진행방향에 보이는 금강산이 아까 무명봉에서 볼 때보다 더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헬기장에서 금강산 방향으로 내려서면 안부에서 팔각정 삼거리(이정표 : 팔각정 2.1Km/ 금강산 정상 0.2Km/ 금강재 2.1Km)를 만나게 되고, 이어서 맞은편 능선으로 100m쯤 오르면 또 하나의 팔각정 갈림길(이정표 : 팔각정 2.1Km/ 금강산 정상 0.1Km/ 헬기장 0.3Km, 금강재 2.2Km, 만대산 정상 4.1Km)을 만나게 된다. 금강저수지로 하산하려면 금강산을 둘러본 뒤에 이곳으로 다시 돌아와야만 한다.

 

 

 

팔각정 갈림길에서 금강산 정상은 금방이다. 맞은편에 보이는 바위를 붙잡고 올라서서 조금만 더 걸으면 금강산 정상이다. 금강산 정상도 아까의 만대산 정상과 마찬가지로 나무테크로 쉼터 겸 전망대(展望臺)를 만들어 놓았다. 굳이 만대산과 다른 점을 찾아내라면, 이곳에는 정상표지석이 있고, 그 정상석이 나무테크의 중간쯤을 뚫고 나와 있다는 것이다.

 

 

 

 

전망대에서는 사통팔달로 시야(視野)가 터진다. 난간에 다가서면 해남 읍내(邑內)와 그 뒤에 있는 두륜산이 가히 환상적으로 펼쳐진다. 안개에 절반쯤 가린 산들이 ‘산 그리메’를 그리며 독특한 아름다움을 한껏 발산하고 있다. 고개를 돌려보면 흑석산이 바라보이고, 그 뒤에 희미하게 나타나는 것은 어쩌면 월출산일 것이다.

 

 

 

 

하산은 산행을 시작했던 금강저수지이다. 금강저수지로 내려가려면 금강산을 둘러본 뒤에 아까 지나왔던 ‘팔각정 갈림길’로 되돌아 나와야만 한다. 갈림길에서는 이정표가 가리키는 팔각정 방향으로 진행하면 된다. 팔각정 방향으로 발길을 돌리자마자 곧이어 너덜지대가 길게 이어진다. 너덜 같이 보이는 이 돌무더기가 금강산성(山城)의 옛터라고 한다. 성(城)터는 5분 이상 제법 길게 이어진다.

 

 

 

성터를 지나면 금방 금강샘 입구 갈림길(이정표 : 금강샘 입구 0.1Km/ 우정봉 삼거리 0.2Km, 미암바위 0.9Km, 팔각정 1.7Km/ 금강산 정상 0.5Km)을 만나게 되고, 이어서 우정봉 삼거리(이정표 : 우정봉 0.8Km, 금강체육공원 1.7Km/ 팔각정 1.5Km/ 금강산 정상 0.7Km)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서는 망설일 필요가 없이 우정봉 방향으로 진행하는 것이 좋다. 정상표지석까지 갖춘 우정봉은 조망(眺望)도 뛰어날뿐더러, 산길도 비교적 깔끔하게 잘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정봉삼거리에서 팔각정을 향해 10분 정도 더 내려가면 운동시설을 갖춘 쉼터인 팔각정 갈림길(이정표 : 팔각정 1.0Km/ 팔각정 1.0Km/ 우정봉삼거리 0.5Km, 금강산 정상 1.2Km)이 나온다. 이곳에서는 어느 길로 가던지 팔각정에 이르게 되니, 만일 팔각정으로 내려갈 예정이라면 어느 길을 선택해도 문제될 것은 없다. 그러나 금강저수지로 가려면 이곳에서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금강저수지로 내려가는 산길이 맞은편 무명봉 위에서 나뉘기 때문에 맞은편 봉우리를 향해 올라서야만 하기 때문이다.

 

 

 

 

산행날머리는 금강저수지(원점회귀)

팔각정 갈림길에서 봉우리로 올라서면 왼편으로 오솔길 하나가 희미하게 보인다. 이 오솔길이 금강저수지로 내려가는 길이다. 오솔길은 사람들이 발길이 뜸한지 거칠기 짝이 없다. 잡목(雜木)과 잡초(雜草)들이 발걸음을 붙잡기 일수 인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길의 흔적이 끊어지지 않고 희미하게나마 나타난다는 것이다. 지루하도록 길게 이어지는 경사(傾斜)진 오솔길을 20분 정도 걸어 내려오면 임도(林道)를 만나게 되고,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5분 쯤 더 걸으면 산행이 종료되는 금강저수지가 보이기 시작한다.

 

 

축령산(鷲靈山, 621.6m)

 

산행일 : ‘12. 12. 1(토)

소재지 : 전남 장성군 북일면⁃서삼면과 전북 고창군 고수면의 경계

산행코스 : 추암마을 주차장→왼편 임도→서우재→능선→축령산정상→건강숲길→금곡마을 갈림길→숲내음 숲길→추모비삼거리→추암마을(산행시간 : 4시간)

함께한 산악회 : 월산악회

 

특징 : 옛 이름은 취령산(鷲靈山)이며, 문수산이라고도 부르는데, 산세(山勢)만 놓고 볼 것 같으면 일부러 찾아갈 필요가 없는 이름 없는 산이다. 높지도 그렇다고 깊지도 않은 흙산(肉山)인데다 산세까지도 다른 산들에 비해 보잘 것이 없다. 그러나 요즘의 축령산은 사람들로 넘쳐난다. 뭔가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볼거리가 생겼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산림청에서 운영하고 있는 ‘치유의 숲’ 때문이다. 국내 최대의 편백나무 숲인 ‘치유의 숲’이 요즘 세간(世間)의 화두(話頭)인 힐링(Healing)과 맞물리면서 도시민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이다. 하기야 편백나무에서 만들어내는 피톤치드(PhytonCide)보다 더 나은 심신(心身) 치료제가 어디 있을까 싶다.

* 축령산의 숲은 자연이 만든 숲이 아니라 인공(人工)으로 조성(造成)한 숲이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헐벗게 된 산을 지금의 모습으로 만든 사람은 독립운동가 출신인 고(故) 임종국 선생이라고 한다. 그는 1956년부터 20년간 사재(私財)를 털어 596ha에 임야에 253만 그루의 편백나무와 삼나무만을 심고 가꿨다. 양잠 등으로 모은 상당한 재산도 모자라 빚까지 져가며 조림(造林)을 계속했다고 한다. 60년대 말의 혹독했던 가뭄 때에는 온 가족이 물지게를 지고 비탈길을 오르내리기도 했단다. 한 개인이 흘린 피와 땀의 결실을 후대(後代)인 우리들이 덕을 보고 있는 셈이다.

 

산행들머리는 추암리 괴정마을 주차장

고창-담양 고속도로 장성물류 I.C를 빠져나오자마자(300m) 우회전한 후에 축령산 휴양림(休養林) 표지판을 보고 진행한다. 몇 번 만나게 되는 갈림길에서 휴양림 안내판을 보고 전진하다가, 편백로와 추암로가 만나는 네거리에서 우회전, 추암저수지 방면으로 간다. 이어서 그럴듯한 한옥(韓屋)들을 새로 짓거나 이미 지어진 홍길동 숲 마을을 지나 추암마을 입구까지 올라가면 된다. 산행이 시작되는 추암마을에는 그리 넓지 않은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고, 주차장 한편에는 식음료(食飮料)를 파는 간이식당까지 갖추어져 있다.

 

 

 

산행의 출발점은 추암마을 주차장이다. 안내소 왼쪽으로 난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축령산 휴양림 안내센터 방향으로 10분(이정표에 500m라고 적혀있으나 믿음이 가지 않는다)정도 걸으면 길이 두 갈래(이정표 : 숲치유센터 1.6Km(30분)/ 전망대 5.3Km(132분)/ 추암마을 0.5Km(10분)로 나뉜다. 이곳에서 곧바로 직진하면 휴양림으로 가게 되고, 왼편은 축령산 능선으로 연결시키는 임도(林道)이다. 만일 편백나무를 이용한 치유(治癒)를 위해서 축령산에 온 것이 아니라면, 이곳 삼거리에서는 왼편으로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곧바로 휴양림으로 진행할 경우에는 조망(眺望)도 즐길 수 없을뿐더러 산행거리도 너무 짧아지기 때문이다.

 

 

 

차량(車輛)이 다녀도 충분할 정도로 널따란 임도는 시멘트포장구간과 비포장구간이 번갈아가며 구불구불 길게 이어진다. 임도는 걷기가 편안해서 일행과 담소(談笑)를 나누며 걷기에 딱 좋다. 차량이 다닐 목적으로 만들어진 탓에 널따라면서도 경사(傾斜)가 완만(緩慢)하기 때문이다. 도로 주변에 보이는 나무들은 대부분 참나무 등 잡목(雜木)이 주종인데, 가끔 나타나는 편백나무 숲을 보고 너무 왜소하다고 지레짐작하면 안 될 일이다. 편백나무로 유명한 축령산휴양림은 아직 들어서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 번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정제된 산소를 듬뿍 마실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숲길을 걷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제일은 편백나무 숲이라고 할 수 있다. 편백나무가 가장 많은 피톤치드(phytoncide)를 내뿜어주기 때문이다. 정제된 산소와 힐링(Healing)에 좋다는 피톤치드를 마시며 걷는 길에서는 사람들은 자연스레 사색(思索)을 시작하게 된다. 사색하기 싫은 사람들도 별 수 없다. 걷기 시작하면 밑도 끝도 없이 사색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면, 한동안 가슴을 짓눌러오던 고민 한 조각은 해결 된지 이미 오래되었다.

 

 

 

느긋하게 담소를 나누며 40분가량 걷다보면 어느새 서우재 고갯마루에 올라서게 된다(이정표 : 전망대 2.5Km(65분)/ 추암마을 2.8Km(48분)/ 길 없음). 서우재에서는 임도의 오른편에 보이는 능선으로 올라붙어야 한다. 비록 이정표에 붙어있던 전망대 표지판이 바닥에서 뒹굴고 있지만, 임도 방향의 표지판에 길 없음이라고 적혀있으니 참조하면 될 일이다. 서우재 고갯마루에 가까워지면서 오른편 사면(斜面)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가끔 보이지만 개의치 말고 진행하면 된다. 능선으로 오르는 지름길이지만 구태여 산행을 서두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능선산행이 시작되면 조망(眺望)은 왼편으로만 열린다. 왼편의 사면(斜面)은 조림지(造林地)로서 편백나무의 크기가 어른의 키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오른편은 빼꼭하게 들어찬 참나무들이 시야(視野)를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서우재에서 10분 조금 못되게 오르면 능선에 정자(亭子) 하나가 세워져 있다. 이정표<전망대 1.5Km(35분)/ 서우재 0.5Km(10분), 추암마을 3.3Km(56분)>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오른편으로 등산로가 희미하게 보인다. 아까 서우재로 올라오면서 보았던 지름길로 들어섰을 경우, 이곳으로 올라오게 된다. 시야(視野)가 뻥 뚫린 왼편으로 고창의 들판이 널따랗게 펼쳐지고 있다.

 

 

 

 

 

너른 고창들판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는 고창-담양간 고속도로를 보여주는 것을 끝으로 왼편도 시야(視野)가 가려버린다. 이후부터 능선은 고저(高低)의 차이가 거의 없는 오르막길이 계속된다. 가끔 제법 가파른 오르막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잠깐이면 끝나기 때문에 별 어려움이 없이 산행을 즐길 수가 있다. 능선을 걷는 시간이 늘어나는 것에 비례해서 머릿속에 든 궁금증의 크기 또한 커져간다. 축령산 하면 편백나무 숲을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고, 나 또한 편백나무 숲을 걷기 위해 찾아왔건만, 막상 편백나무 숲은 아무리 찾아봐도 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축령산 정상에 가까워오면서 능선의 경사(傾斜)가 점점 가팔라지고, 산길의 주변에 보이는 커다란 바위들의 숫자 또한 늘어나기 시작한다. 이곳의 바위는 유난히도 하얀 것이 우리가 평소에 보아온 여느 바위들과는 사뭇 다르다. 바위들의 생김새도 제법 기기묘묘(奇奇妙妙)하기 때문에 가슴에 담노라면 짧은 오르막길 정도는 금방 지나가 버린다.

 

 

 

 

 

서우재를 출발한지 50분 정도면 정상에 도착하게 된다. 100평도 더될 정도로 널따란 분지(盆地)로 이루어진 정상에는 이층으로 지어진 정자와 무인산불감시탑, 그리고 이정표와 의자, 산행안내판 등 제반 편의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지만, 유독 정상표지석만 눈에 띄지 않는다. 아마도 이곳에 오르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등산보다는 편백나무 숲을 보기 위해 찾아오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정상의 이정표 #1 : 추암마을 5.3Km(106분)/ 숲 치유센터 0.6Km(12분)/ 조림성공지 1Km(20분), 이정표 #2 : 안내센터 0.6Km/ 금곡안내소 1.7Km)

 

 

 

정상은 숲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정자(亭子)에 오르지 않고는 조망의 즐거움을 누릴 수 없다. 이층으로 된 정자에 오르면 갑자기 시야(視野)야 뻥 터진다. 내장산과 백암산이 멀리서 실루엣처럼 펼쳐지고, 반대편의 고창 벌판 뒤편으로는 태청산과 장암산 그리고 불갑산이 도열해 있다. 그리고 발아래에 깔려있는 산기슭에는 그렇게도 고대했던 편백나무 숲이 푸름을 자랑하고 있다.

 

 

 

 

 

하산은 이정표가 표시하고 있는 금곡안내소 방향으로 진행하면 된다. 내려가는 길도 올라왔던 길과 마찬가지로 고저(高低)의 차이가 거의 없을 정도로 부드럽게 이어진다. 길가에 하얀 바위들이 심심찮게 보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정상에서 금곡마을 갈림길인 임도(林道)까지의 구간을 ‘건강 숲길’이라고 부른다. 축령산은 편백나무와 삼나무 등 침엽수림으로 소문났지만 정작 건강숲길은 산죽과 참나무 등 다양한 나무들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건강 숲길’이란 이름이 붙여진 이유는 간단해진다. 능선을 오르내리며 건강을 다지라는 의미일 것이다. 비록 능선의 경사는 완만(緩慢)하지만, 금곡마을 갈림길에서 능선으로 붙으려면 경사(傾斜)가 가파른 오르막길이 제법 길게 이어지기 때문이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려면 산책은 당연히 등산으로 변할 것이고, 그 뒤에 건강이 따라오는 것은 필연일 것이기 때문이다.

 

 

 

‘건강 숲길’을 걷다보면 다른 산에서는 보지 못한 시설물이 눈에 띈다. 갈림길에 세워 놓은 정자가 바로 그것이다. 한 개의 기둥 위에 둥그런 초가지붕을 얹은 것이 흡사 우산을 빼다 닮았다. 나름대로 운치(韻致)가 있어 보이는 게 축령산의 이미지까지 한층 업그레이드(upgrade)해 주고 있다. 조그만 것에 까지 세심한 주의를 기우리는 것을 마다 않는 산림청관계자들에게 찬사를 보내드린다.

 

 

 

 

 

 

 

‘건강 숲길’을 걷다가 첫 번째 갈림길(이정표 : 금곡안내소 0.7Km/ 고 임종국선생 수목장 0.6Km/ 안내센터 1.6Km)에서는 직진, 두 번째 갈림길(이정표 : 금곡안내소 0.5Km/ 안내센터 1.8Km)에서는 오른편의 금곡안내소 방향으로 진행한다. 갈림길에서부터 급경사(急傾斜)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산길이 조금만 거칠어도 안전로프가 매어져 있고, 거기다 내리막길의 거리도 짧기 때문이다.

 

 

 

참나무와 산죽 등 잡목(雜木)이 주인노릇을 하고 있는 급경사 내리막길을 내려서면 오늘의 주 메뉴인 편백나무 숲이 시작된다. 그러나 그 길이는 그다지 길지 않다. 산길이 다시 능선 위로 올라서기 때문이다.

 

 

 

쭉쭉 뻗은 편백나무를 보고 있노라면 문득 잘 빠진 미녀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아름드리나무가 군살 같은 곁가지 하나 없이 미끈한 몸통 줄기를 뽐내고 있기 때문이다. 편백나무는 사시사철 푸른 상록수(常綠樹)다. 상록수 숲은 푸름의 아름다움을 보고 즐길 수 있게 해준다. 하늘을 향해 거침없이 쭉쭉 뻗어 있는 편백나무와 삼나무의 위용(偉容)은 대단하다. 구불구불한 길과 망망한 나무가 만들어낸 바다(樹海), 마치 외국에서나 볼 법한 풍광(風光)을 보여주고 있다. 그 덕분인지 축령산 숲의 아름다움은 이미 여러 차례 공인을 받았다. 산림청이 ‘22세기 후손에게 물려줄 숲’으로 지정했고, 2000년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도 우수상을 받았다고 한다. 한 사람의 선각자(先覺者)가 품었던 꿈이, 현실로서 이루어져 우리에게 귀감이 되고 있는 것이다. 숲에 들어서면 나무들이 뿜어내는 상큼한 기운에 이내 정신이 맑아진다. 숲이 내뿜는 피톤치드(PhytonCide) 때문이다. 모든 나무는 피톤치드를 발산하지만 그 양(量)에는 차이가 있다. 침엽수가 활엽수보다 2배 이상 많고, 침엽수 중에서도 편백나무의 피톤치드가 가장 많다. 전국의 삼림욕장 중 이곳을 첫 번째로 꼽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삼나무는 상록수인데요.’ 능선에 즐비한 낙엽송(落葉松:일본이깔나무)을 보고 삼나무라고 했더니 여동생이 바로잡아준다. 축령산에 오기 전에 취득한 사전정보에는 이곳 축령산의 조림지(造林地)에는 편백나무와 삼나무만 있다고 했다. 그 말만 믿고 낙엽송이라고 추측했던 내 판단을 뒤집은 결과는 참으로 무참했다. 졸지에 무식이 탄로나버린 것이다.

 

 

낙엽송 숲이 끝나면 화장실과 조그만 초소를 갖춘 임도에 내려서게 된다. 이곳에서 왼편의 임도를 따라가면 영화 '태백산맥'과 '서편제'의 촬영지였던 금곡영화마을로 가게 된다. 물론 오늘의 주인공을 만나려면 임도를 따라 오른편으로 진행해야 한다. 산악회에서 바닥에 깔아놓은 쪽지에는 임도를 건너 반대편 능선으로 올라설 것을 지시하고 있다. ‘하늘 숲길’을 따라 전망대까지 갔다가 돌아오라는 얘기이다. 그러나 반대편 능선으로 올라보니, 숲길을 온통 신갈, 상수리, 졸참, 굴참나무 등 활엽수림(闊葉樹林)이 차지하고 있다. 당연히 앙상한 나뭇가지 외에는 볼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구태여 삭막(索莫)한 겨울풍경을 보는 것에 시간을 허비하는 것 보다는 차라리 편백나무 숲길을 산책하는 것이 났다 싶어 그냥 뒤돌아 나와 버린다.

* 금곡 영화마을, 영화 ‘태백산맥’과 ‘내 마음의 풍금’, 그리고 드라마 ‘왕초’의 배경이 됐던 초가 마을이기 때문에, 꼭 산행과 연관을 짓지 않더라고 한번쯤은 시간을 내 둘러볼 만한 곳이다. 20여 가구 정도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인데, 아직까지도 전형적인 시골 풍경(風景)을 지니고 있다. 아니 요즘에는 조금 변했다고 한다. 축령산이 개발되면서 길바닥은 정갈하게 포장되었고, 축령산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이 들릴만한 음식점과 찻집 등이 들어섰다. 덕분에 오지(奧地)라는 느낌은 다가오지 않지만, 봉우리를 배경삼고 다랑논을 낀 풍경(風景)은 여전히 산촌마을을 지향하고 있다고 한다. 아직까지는 자연과 마을이 한 단위의 공간(空間)처럼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금곡마을 갈림길에서 휴양림안내소까지 이어지는 임도를 ‘숲내음 숲길’이라고 부른다. 이 길은 들어서면 눈이 번쩍 뜨인다. 길가, 아니 산 전체가 편백나무와 삼나무들로 가득 차 있다. 아름드리 편백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쭉쭉 솟았다. 눈만 호사(豪奢)를 누리는 게 아니다. 눈에 뒤질세라 코끝을 흐르는 짙은 솔향기를 닮은 냄새에 정신이 아찔해져 온다. ‘숲내음 숲길’은 따로 산행기가 필요 없다. 임도를 따라 걷다가 오른편이나 왼편에 길이 보이면 무조건 내려가 보면 된다. 웬만큼 구경하다가 되돌아 나오면 되기 때문이다. 숲길을 넓고 반반하다. 평탄한 임도(林道)는 자동차로도 오갈 수 있지만, 구태여 그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삼림욕(森林浴)을 겸해 천천히 걸어도 두 시간이면 넉넉하기 때문이다. 나무를 심기 위해 만들었던 임도가 지금은 훌륭한 산책로(散策路)가 되었으니, 천천히 걸으면서 임종국 선생에게 마음으로나마 감사를 드려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그런 마음으로 숲속을 걷다보면, 다른 숲에서보다 유난히 몸과 마음이 맑아지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장성 치유의 숲(산림청 운영)’은 국내 3대 ‘산림(山林) 치유센터’중 하나이다. 편백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국내 최대의 난대림(暖帶林) 조림지(造林地)이기 때문에, 삼림욕하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편백나무는 피톤치드(phytoncide)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이다. ‘장성 치유의 숲’에는 암환자 등 질병(疾病)의 치료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피톤치드(phytoncide)가 식물이 병원균이나 해충, 곰팡이 등에 저항하려고 내뿜거나 분비(分泌)하는 물질로서, 삼림욕을 통해 피톤치드를 마시면 스트레스(stress)가 해소되고 장(腸)과 심폐기능이 강화되며 살균(殺菌)작용까지 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나머지 두 곳은 횡성의 청태산 기슭에 자리 잡은 ‘숲체원(한국녹색문화재단 운영)’과 양평의 용문산 자락에 위치한 ‘산음(山陰) 휴양림(국립자연휴양림관리소 운영)’이다.

 

 

 

‘치유의 숲’에서의 치유(治癒)는 본래 자연요법이나 대체요법에서 사용하던 어휘다. 서양의학의 ‘치료(Treatment)’와 구분되는 의미로 ‘테라피(Theraphy)’ 또는 ‘힐링(Healing)’의 번역어였다. 한데 요즘엔 힐링으로 통일되는 분위기다. 올해 서점가를 달군 힐링 서적은 말할 것도 없고, 힐링투어나, 힐링캠프, 심지어는 힐링푸드나 힐링무비까지, 너나 할 것 없이 힐링을 팔고 있다. 테라피가 아니라 힐링으로 정리되면서 요즘 치유는 위안에 가까운 개념으로 쓰이고 있다. 물론 여행이나 레저에서도 힐링이 대세(大勢)임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너 나 할 것 없이 힐링 열풍인데 그중에서도 유독 산림청이 더욱 열심인 것(오늘 찾는 치유의 숲도 산림청에서 운영하고 있다.)은 그들만이 갖고 있는 장점을 살리기 위해서일 것이다. 에코힐링투어(Eco-Healing Tour)가 숲에서만 가능한 건 아니지만, 면역력 증대 등 숲이 지닌 치유 기능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월등하기 때문이다.

 

 

 

우람한 편백나무 숲길을 걷다보면 간혹 '치유필드'가 보인다. 편백나무 아래에는 곳곳에 평상을 만들어 놓았다. 제법 추운 겨울날씨임에도 불구하고 평상위에 드러누운 사람들이 보인다. 아마 피톤치드를 이용해서 병든 몸을 치료하고 있는 모양이다. 축령산 ‘치유의 숲'에는 봄, 여름, 가을철뿐만 아니라 겨울철까지도 매일 아토피나 천식 환자는 물론 암 환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고 한다. 꼭 '치유필드' 뿐만이 아니다. 지금은 비록 텅 비어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 숲속에는 많은 사람들로 붐볐을 것이다. 삼삼오오 자리를 깔고 앉아, 넘치도록 흘러나오는 피톤치드에 일상에서 지친 자신들의 심신(心身)을 내맡기면서 말이다. 그래서 이 숲의 이름이 .치유의 숲‘인 것이다.

 

 

 

한때 우리 사회는 웰빙(Well-Being) 신드롬에 빠진 때가 있었다. 몸에 좋은 여행, 몸에 좋은 음식 등등, 그러나 그 웰빙에서는 서민들이 넘보기 어려운 ‘고급스러움(Luxury)’이 느껴진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요즘의 화두인 힐링(Healing)에는 고급스러움보다는 일상에서 지친 서민들의 피난처라는 느낌에 더 가깝다. 경쟁에 몰리고 일상에 찌든 서민들이 치유를 위한 몸부림이 곧 힐링인 것이다. 그리고 그 피난처 중의 하나가 오늘 찾은 장성의 ‘치유의 숲’이다. 요즘에는 고단한 심신(心身)을 달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산을 찾는다. 불황이라는 의류업계에서도 레저용품 만은 호황이라는 뉴스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산을 오르기에 힘이 부치는 사람들은 산 아래에 있는 숲이라도 찾는다. 그들은 숲속을 걸으면서 세파(世波)에 지친 심신을 치유(Healing)하기를 원한다. 숲의 다양한 환경요소를 활용해 인체(人體)의 면역력(免疫力)을 높이고 건강을 회복시키려는 것이다. 인체의 면역력을 높여주는 물질이 바로 피톤치드(phytoncide)이다. 피톤치드는 식물을 의미하는 피톤(phyton)과 살균력을 의미하는 치드(cide)의 합성어로 숲 속의 향긋한 냄새를 만들어 낸다. 피톤치드는 심리적인 안정감을 주고 말초 혈관을 단련시키며 심폐 기능을 강화시킨다. 기관지 천식과 폐결핵 치료, 심장 강화에도 도움이 되고 피부를 소독하는 약리 작용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피톤치드의 효과는 산 중턱이 가장 좋다고 한다. 그리고 삼림욕(森林浴)은 일사량(日射量)이 많고 온도와 습도가 높은 시간대가 가장 효과적이라고 알려져 있다.

 

 

 

‘치유의 숲’을 걷는 일은 일정한 격식(格式)이 없다. 아니 구태여 격식을 차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저 숲길을 걸으며 오감(五感)을 일깨워 몸과 마음을 치유하면 된다. 그냥 걷다가 심심하면 그곳에서 숲에 벌러덩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거나, 그것이 싫다면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숲을 바라보아라. 그저 쉬는 것으로도 치유의 일부가 되기 때문이다. 나무들이 뿜어내는 향내음에 취하다보면 어느새 발걸음은 가벼워진다. 어서 오라고 팔랑이는 침엽수림의 푸른 손짓도 정겹기 그지없다. 넘치도록 쏟아지는 피톤치드(PhytonCide)에 마음은 명경지수(明鏡止水)처럼 맑아진다.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쉼터가 서너 곳뿐인 단조로움이 차라리 여유로워서 더 좋다.

 

 

 

‘숲내음 숲길’을 걷다보면 나무로 테크를 만들어 놓은 것이 보이니 그냥 지나치지 말고 꼭 들어가 보자 ‘습지원(濕地院)’이라는 습지도 만날 수 있고, 아름드리 편백나무가 가장 밀집된 지역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숲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심신의 안정에 효과를 주는데 특히 녹시율(綠視率)이 높을수록 정서적 안정감이 증가한다고 한다. 이와 함께 바람소리 나뭇잎소리 계곡물소리 등 소리가 쾌적감과 평안감을 주고, 나뭇잎으로 필터링된 간접 햇빛은 비타민D 합성에 기여하고 세로토닌을 잘 분비시켜 활력과 생기를 준다고 한다. 사람들이 숲을 찾는 일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행위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이런 효과를 알고도 숲을 찾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산림청에서 발표한 ‘산림치유 효과에 대한 연구’를 보면 숲이 갖고 있는 치유효과가 엄청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제대 서울백병원과 국립산림과학원의 공동연구에서 우울증 환자에게 4주간 산림치유를 실시했더니 상태가 크게 호전됐다고 한다. 또 고혈압 환자를 대상으로 연구했더니 혈압이 9.6㎜Hg(수축기)~4.5㎜Hg(확장기) 낮아졌고, 소아(小兒)아토피(atopy) 환자도 진단 척도가 평균 7점이나 떨어졌다고 한다. 스트레스 호르몬과 심장박동, 혈압은 낮아지고 면역세포는 증강되는 등 건강 회복에 숲이 대단한 효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효과는 숲이 가진 다양한 치유(治癒:Healing) 인자(因子) 덕분이라고 한다. 숲은 피톤치드, 음이온, 산소, 경관, 소리, 햇빛 등 다양한 요소가 결합돼 심신(心身)에 평안함과 쾌적감을 준다고 한다. 가령 숲에 풍부한 피톤치드의 주성분은 테르펜(terpene)이라는 유기화합물인데 들이마시면 심신에 상쾌함을 주고 피로회복을 촉진시킨다. 음이온은 뇌파의 알파파를 증가시켜 마음을 안정시켜주고, 숲속에 풍부한 산소도 신진대사와 뇌의 활동을 촉진시켜 준다고 한다. 그런 산소의 농도(濃度)가 도시 공기 중에는 20.9%이나, 산림에는 이보다 1~2% 더 많다고 하니, 숲은 자연스레 치유의 기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장성의 편백나무는 모두가 잘생겼다. 나무의 평균 높이는 20m정도, 위를 향해 쭉쭉 잘도 뻗어 올랐다. 위를 보려면 한참을 올려다봐야 할 정도이다. 수십 년 묵은 편백나무와 삼나무들이 수백만 그루가 군락(群落)을 이루고 있다. 단일 군락지로 국내 최대 규모의 숲이라고 한다. 지금 걷고 있는 편백나무 숲길은 그 옛날 홍길동이 숱하게 걸으면서 다니던 길이란다(장성군의 주장). 그렇다면 당시에 홍길동은 별 볼일이 없는 길에서 수련을 쌓았었나 보다. 당시에는 이렇게 멋진 편백나무 숲이 아닌 소나무나 참나무가 하늘을 덮고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사실 장성군은 요즘 홍길동 때문에 눈코 뜰 새가 없이 바쁘다. 실존(實存) 여부를 놓고 논쟁이 일고있던 홍길동을 실제로 존재했었다고 주장하더니, 최근에는 모든 홍길동 캐릭터와 상표권까지 소송과 등록을 통해 확보해 놓고 있다. 홍길동 생가(生家)터를 복원(復原)한 것도 모라자, 대단위 홍길동 테마파크까지 조성했으니 장성 땅이 온통 홍길동판인 것이다.

 

 

숲은 ‘병원’이다. 특히 바쁘고 치열하게 사느라 생채기가 난 도시의 환자들에게 효과가 크다. 국립산림과학원은 숲에서 배출하는 피톤치드가 암이나 아토피, 천식 등의 치료에 효과가 있다는 연구결과를 내 놓았다. 일본의 니혼의과대학에서도 같은 연구결과를 내놓았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편백나무가 가장 빽빽하게 자라고 있는 곳이 이곳 장성의 축령산이고, 그래서 전국에서도 가장 삼림욕하기 좋은 곳으로 소문이 자자하다. 언젠가 장성군에서는 우울증과 아토피에 특효약인 자오스민에 관한 발표를 한 일이 있었다. 전라남도보건환경연구원이 흙길이 조성된 도내 휴양림(休養林) 6곳의 토양(土壤)을 대상으로 실시한 지오스민 함유량 조사 결과, 장성 축령산이 136.1㎍/㎏ 로 도내 휴양림 중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는 것이다. 지오스민(Geosmin)은 숲에 들어서면 맡을 수 있는 독특한 흙냄새를 풍기는 탄소와 수소 그리고 산소로 만들어진 무색(無色), 무미(無味)의 천연물질로써, 방성균에 의해 부엽토(腐葉土)가 쌓인 토양의 상층에서 대부분 생성된다. 이 지오스민은 초조함이나 불안감을 완화해 정서적 안정을 통한 우울증 치유에 효과적이며, 면역력이 증가하고 피부세포도 건강해져 아토피(atopy) 진균을 없애는 자연항암제로 불리기도 한다. 또한 뇌의 이완도와 활성화가 증가되고 집중도가 높아지는 반면, 스트레스가 감소하는 효능이 있다고 한다.

 

 

 

숲내음 숲길이 끝나면 임도의 왼편에 ‘휴양림 안내소’가 보인다. 안내소 건너편에 ‘고 임종국선생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장성 치유의 숲’은 조림왕(造林王)으로 불리는 고 임종국 선생(林種國 1915~1987)이 1956년부터 20년 동안에 걸쳐 조성한 편백, 삼나무 숲에 만들어져 있다. 1987년 선생이 작고한 이후, 2002년 산림청이 숲을 매입하고 2007년엔 체험의 숲으로 지정한 데 이어 2010년에 치유의 숲으로 조성했다고 한다. 쉼터가 있는 ‘하늘 숲길(2.7km)’, 축령산 주능선을 걷는 ‘건강 숲길(1.97km)’, S자 숲길이 아름다운 ‘숲내음 숲길(2.2km)’, 고 임종국 선생을 수목장한 나무가 있는 ‘산소숲길(1.9m)’ 등 4개의 걷기 좋은 길이 조성되어 있다.

* 산림청은 임씨를 ‘숲의 명예전당’에다 모셨다. 그가 남기고 간 숲에 기념비도 세웠다. 산림청은 고향(순창)의 선산에 모셔져 있던 그의 유골을 이곳으로 옮겨와, 축령산 중턱의 한 그루 느티나무 아래에다 수목장(樹木葬)을 했다. 임씨는 죽어서도 나무 곁을 떠나지 않은 것이다.

 

 

 

산행날머리는 추곡마을(원점회귀)

휴양림 안내소를 나와 200m쯤 내려가면 차량 통행을 막을 목적으로 만든 차단기(遮斷機)가 나타나고, 아침에 산행을 시작했던 추암마을 주차장은 임도를 따라 1.5Km 정도를 더 걸어 내려가야 만날 수 있다. 주차장까지 이어지는 시멘트포장도로는 특별한 볼거리가 없기 때문에 자칫 지루하기 쉬운 코스이다. 이럴 때에는 다른 소일거리를 찾아야 한다. 아직까지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붉은 감이나, 흐드러지게 핀 꽃을 연상시키는 피라칸타(firethorn)의 핏빛 열매를 감상하며 걷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구수산(九岫山, 339m)

 

산행일 : ‘12. 11. 25(일)

소재지 : 전남 영광군 백수읍

산행코스 : 대각지옥녀봉상여봉구수산불복재봉화령가자봉뱀골봉덕산(산행시간 : 4시간)

함께한 산악회 : 월산악회

 

특징 : 구수산은 웅장(雄壯)하지도 그렇다고 빼어나지도 않다. 주능선에 서면 위도를 품고 있는 서해(西海)바다가 잘 조망(眺望)된다고는 하지만 그 또한 인근에 있는 다른 산에 비해 뛰어나지도 않다. 그런데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적지 않다고 한다. 이 산이 원불교(圓佛敎)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원불교를 창시(創始)한 소태산대종사가 이곳에서 태어났고, 고행과 구도의 길을 이곳에서 걸었으며, 또한 이곳에서 득도(得道)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구수산 언저리는 어는 곳 하나도 원불교와 관련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다.

* 소태산(少太山, 1891~1943). 원불교(圓佛敎)의 창시자(創始者)로서. 본명은 박중빈(朴重彬)이다. 소태산은 그의 호(號)인데, 원불교를 창립한 이후에는 제자들이 소태산 대종사(少太山 大宗師)라 불렀다. 7세 때부터 우주와 인생의 근본이치에 대한 의심에서 출발해 20년 가까운 구도생활 끝에, 26세 되던 해인 1916년 4월 28일 이른 새벽에 동녘 하늘이 밝아오는 것을 보고 드디어 우주(宇宙)와 인생(人生)의 근본진리를 확연히 깨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깨우침의 경지를 ‘만유가 한 체성이며 만법이 한 근원이로다. 이 가운데 불생불멸의 진리와 인과응보의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뚜렷한 기틀을 지었도다.’ 라고 표현했다. 그가 죽은 뒤에 그의 제자들은 소태산을 후천개벽(後天開闢)의 주세불(主世佛)로 존숭하고 있다. 원불교에서는 소태산이 열반(涅槃)한 6월 1일을 육일대재라 하여 기념한다. 1971년 소태산이 깨달음을 얻은 전라남도 영광의 영산성지 노루목에 그의 대각(大覺)을 기리는 '만고일월'(萬古日月)이라 새긴 기념비를 세웠다.

 

 

산행들머리는 원불교 영산성지(靈山聖地)앞 도로변

서해안고속도로 영광 I.C에서 빠져나와 23번 국도를 이용하여 영광읍까지 들어간 후, 시가지(市街地) 초입(初入)에 있는 단주사거리(영광읍 단주리)에서 오른편의 844번 지방도로로 옮겨 백수읍 방향으로 달린다. 영광읍 시가지를 빠져나오면 금방 만나게 되는 만곡사거리(군서면 만곡리)에서 다시 우회전 하여 842번 지방도를 따라 법성포 방향으로 들어가면 산행들머리인 연산성지(길룡리 영촌마을)에 이르게 된다. 영산성지 앞의 영천교(橋)를 건너 법성포 방향으로 2분(500m) 정도 더 들어가면 도로 왼편에 옥녀봉으로 올라가는 등산로가 보인다. 들머리에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원불교 창시자인 소태산대종사 생가(生家) 뒤로도 등산로가 개설되어 있으며, 등산객들의 대부분은 이 코스를 이용하여 옥녀봉으로 오른다.(이정표 : 제명바위 200m, 옥녀봉 600m, 삼밭재 2Km/ 영산성지사무소 500m)

 

 

 

산길은 가파르게 시작된다. 이곳으로 들어오면서 버스의 차창(車窓) 너머로 보이던 옥녀봉의 오른편 사면(斜面)은 서슬이 시퍼럴 정도로 날카롭게 서 있었다. 하긴 그런 경사면(傾斜面)으로 난 산길이 가파르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이 차라리 언감생심(焉敢生心)일 것이다.

 

 

 

 

산행을 시작하고 5분쯤 지나면 산길의 오른편에 높이가 5~6m쯤 되는 암벽(巖壁)이 보이고, 그 아래에 빗돌(碑石)이 세워져 있다. 들머리의 이정표에서 보았던 제명바위이다. 소태산대종사가 여덟 제자와 함께 ‘정관평(貞觀坪) 방언공사’를 준공(1958.12)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당시에 비석을 세울 비용이 없었기 때문에 정관평이 내려다보이는 바위 위에다 회(灰)를 바르고 정관평 방언공사의 진행과정을 적어 놓았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바위 위에 새겨진 원형이 심하게 마모되자, 1990년에 탁본하여 오석(烏石)에 복원해 놓았다고 한다. 재건한 비문은 국한문을 혼용한 제명을 '정관평 방언조합 제명바위'라 전서(篆書)하고 해서로 재건한 사유를 적어 놓았다.

* 제명바위의 원문(原文), '영광 백수 길룡 간석지 양처 방언조합 조합원 박중빈(朴重彬) 이인명(李仁明) 박경문(朴京文) 김성섭(金成燮) 유성국(劉成國) 오재겸(吳在謙) 김성구(金聖久) 이재풍(李載馮) 박한석(朴漢碩) 대정(大正) 7년 4월 4일 시(始) 대정 8년 3월 26일 종(終)'이라고 해서(楷書)로 쓰여 있다.

 

 

 

 

산길은 제명바위를 지나면서 더욱 가팔라진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숨이 턱에 찰 정도로 치고 오르면 정상어림에서 거대한 암벽(巖壁)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바위에다 흰색 페인트로 커다랗게 원(圓)을 그려 놓았다. 저 아래에 보이는 영산성지의 작품일 것이다. 그들이 믿는 원불교의 창시자인 소태산대종사가 옥녀봉의 아래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원이 그려진 암벽(巖壁)에서 산길은 치고 오르기를 포기하고, 아예 왼편으로 우회(迂廻)를 시키면서 정상으로 향하고 있다. 암벽에서 정상까지는 금방, 아니 들머리에서 옥녀봉 정상까지가 금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20분이면 충분히 옥녀봉 정상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옥녀봉은 법성포를 바라보고 있다 하여 망성봉(望聖峰)이라고도 부른다. 옥녀봉은 소태산대종사가 7세 때부터 수양(修養)을 시작한 곳으로, 원불교도들은 수행의 표본으로 삼고 있다. 소태산은 일곱 살 때부터 옥녀봉에 올라가 하늘의 구름과 마을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고, 우주(宇宙)와 인생(人生)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옥녀봉의 바위에다 원불교의 상징인 원(圓)을 그려 놓았을 것이다.

 

 

 

옥녀봉에는 정상표지석은 눈에 띄지 않고, 대신 정상표지판만 세 개가 보인다. 그런데 그중 하나는 나뭇가지에 걸려있지만, 나머지 두 개는 바닥에 떨어진 채로 방치(放置)되고 있다. 그런데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표지판에 ‘원불교 청년회’라고 제작자가 적혀있는 것을 보고 이상한 생각이 드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설마 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것에는 제작자가 표시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겠지? 엉뚱한 생각을 하다가 실없는 웃음으로 끝을 맺고 주위를 돌아본다. 건너편에 영산대학교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왼편에는 수문(水門)의 역할을 겸하고 있는 범백교와 그 너머의 법성포 시가지가 잘 조망(眺望)된다.

* 영산성지(靈山聖地)가 위치한 백수읍 길룡리는 원불교를 창시(創始)한 소태산대종사가 탄생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성장과 구도의 과정을 거쳐 대각(大覺)이라는 종교적 체험을 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깨달음을 얻은 후, 그의 아홉 제자들과 함께 이곳에서 원불교를 창립(創立)했다고 한다. 전 세계 500개 교당에 100만 명의 신도를 자랑하는 교세를 증명이라고 하려는 듯 해마다 수많은 순례객(巡禮客)과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소태산이 태어난 생가(生家)터에는 초가집이 옛 모습으로 복원되어 있고, 생가터 남쪽 개울을 건너 노루목에는 소태산이 진리를 깨달았다는 대각지가 있다. 참고로 원불교의 성지로는 소태산대종사가 탄생하여 개교한 영광의 영산성지와 교화의 장인 연익산성지(익산시 신룡동), 그리고 교리를 초안하고 교강을 발표한 벽산성지 등이 있다.

 

 

 

옥녀봉에서 상여봉으로 가려면 가파르게 내려섰다가 다시 그만큼 올라가야 한다. 가파른 내리막 바윗길에는 안전로프까지 설치해 놓았지만, 아무도 밧줄에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내려선다. 로프에 의지해야할 만큼 위험하지는 않기 때문일 것이다. 안부에 내려서면 왼편으로 구간도실(九間道室)터에서 올라오는 길이 보이지만 무시하고 맞은편 능선으로 진행하면 된다. 상여봉으로 오르다가 잠깐 고개를 돌려보면 방금 지나온 옥녀봉이 안녕을 고하고 있다. 참고로 구간도실이란 소태산의 아홉 제자를 상징하여 건물을 아홉 칸으로 지었다는 원불교 최초 건물이다.

 

 

 

 

 

상여봉은 비석이 없는 묘(墓) 하나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곳도 역시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고, 앙증맞은 정상표지판 하나만 나뭇가지 위에 얹혀있다. 봉우리 옆의 바위 전망대(展望臺)에 올라서면 정관평(貞觀坪) 들녘과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으로 들어왔다는 법성포가 지척이다. 물론 발아래에는 와탄천의 배수갑문이 너른 평원(平原)과 함께 깔려있다. 옥녀봉에서 상여봉까지는 넉넉잡아 20분이면 충분하다.

 

 

 

 

등산로 주변의 나무들은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같은 활엽수가 주종을 이루고 가끔 소나무가 섞여서 푸름을 자랑하고 있다. 잿빛으로 앙상한 겨울나무에 소나무의 녹색이 어울리며 생각지도 않은 조화(調和)를 이루어낸다. 같은 성질을 가진 것들끼리만 모인 집단은 쉽게 지루해지기 쉽다. 이렇게 이질적인 집단이 섞여 조화를 이루어 낼 때가 훨씬 자극적이면서도 아름다운 광경(光景)을 연출(演出)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상여봉에서 구릉 같은 능선을 10분 조금 넘게 오르내리면 설레바위봉에 올라서게 되고, 이어서 10분 조금 못되게 더 걸으면 영산성지와 구수리를 잇는 임도(林道)가 지나가는 삼밭재에 이르게 된다. 물론 중간에 영산대학교로 내려가는 삼거리를 만나게 되지만 괘념치 말고 통과하면 된다.

 

 

 

 

삼밭재에서는 임도를 따르지 말고 곧장 왼편에 보이는 산길로 접어들어야 한다. 구수산으로 향하는 길은 잠깐 오르막다운 오름길을 선보이다가 이내 완만(緩慢)한 산길로 변해버린다. 가끔 시야(視野)가 열리는 곳에 서면 지나온 능선과 영산성지가 뚜렷하다. 걷기에 편안한 산길에서 여유를 부리며 걷다보면 이내 구수산 정상이다. 삼밭재에서 구수산 정상까지는 천천히 걸어도 20분이면 충분하다.(정상의 이정표 : 불복재 1.8Km/ 삼밭재 0.5Km)

 

 

 

구수산은 제법 널따란 분지(盆地)로 이루어진 정상을 나무들이 빽빽하게 둘러싸고 있는 탓에 전망(展望)이 일절 트이지 않는다. 아마도 오늘 오르게 되는 수많은 봉우리 중에서 가장 조망이 좋지 않을 것이다. 구수산 정상도 다른 봉우리와 마찬가지로 정상표지석은 눈에 띄지 않는다. 다만 다른 봉우리와 달리 정상표지판이 나무로 만들어져 있다. 구수산의 구(九)는 아홉이요, 수(岫)는 산봉우리이니 이 산은 산봉우리가 아홉 개인 산이란 뜻이다. 인근 사람들은 호랑이 아홉 마리가 동네를 둘러싸고 노리는 산세(山勢)라 하여 구호산(九虎山)이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아홉 봉우리는 옥녀봉과 마촌 앞산봉, 촛대봉, 장다리봉, 대파리봉, 공동묘지봉, 밤나무골봉, 설레바위봉, 중앙봉 등인데, 원불교 창시자 소태산 대종사의 아홉 제자가 이 아홉 봉우리 위에 각각 올라 기도를 드렸다고 하여 원불교에서는 구수산을 신성(神聖)시하다고 한다.

 

 

 

 

구수산 정상에서 일단 내려섰다가 다시 능선으로 올라선 후, 이번에는 산허리를 우회(迂廻)하여 오르면 불복재이다(이정표 : 구수산 2.5Km/ 봉화령 1.5Km/ 수두암 0.5Km). 사거리인 불복재에서 오른편을 내려서면 구수리로 연결되고, 왼편으로 진행하면 수두암에 닿게 된다. 구수산에서 불복재까지는 10분 정도가 소요된다.

 

 

 

불복재를 지나면서 주위 풍경(風景)이 갑자기 변해버린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앙상한 나뭇가지들 일색이던 주위풍경이 갑자기 녹색으로 변해 있는 것이다. 바닥의 풀들도 아직까지 푸름을 자랑하고 있고, 주변의 앙상한 참나무들도 역시 온통 푸른 나뭇잎들이 둘러싸고 있다. 그런데 나무를 둘러싸고 있는 나뭇잎이 참나무 본래의 이파리가 아닌 다른 식물의 잎이라는 게 다르다. 언젠가 남해 보리암과 고창 선운사에서 보았던 송악(An ivy : 남부지방의 산에서 잘 자라는 상록활엽성 만경목)을 닮았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강한 탓인지 몰라도 유난히도 많은 나무들이 뿌리를 드러낸 채로 넘어져 있다. 뿌리가 넓적하게 옆으로 펴져 있는 것을 보면 지형(地形)의 특성 탓이 아닐까 싶다. 바위 위에 쌓여있는 흙의 두께가 얇을 경우에는 조금만 바람이 심하게 불어도 뿌리가 나무의 중심을 지탱해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불복재를 출발해서 20분이 조금 넘게 걸으면 327봉에 올라서고, 조금 후에는 오늘 산행에서 유일한 바윗길을 만나게 된다. 보통의 바위산이라면 바윗길로 쳐주지도 않을 만큼 편안하고 짧은 바윗길이 끝나면, 또 다시 걷기에 부담이 없는 흙길로 바뀐다. 그리고 이내 봉화령에 올라서게 된다. 불복재에서 봉화령까지는 대략 40분 정도가 걸린다.

 

 

 

 

봉화령(烽火嶺)은 오늘 산행하는 구간에서 가장 높은(373.8m) 봉우리이다. 주봉인 구수봉(339m)보다도 더 높은 것이다. 그런데 왜 고개를 뜻하는 령(嶺)이라는 글자가 붙었는지 궁금하다. 봉화령에서 길은 두 갈래(봉화령 이정표 : 가자봉 2.2Km/ 모재봉 1.5Km)로 나뉘는데, 왼편은 갓봉과 모재를 거쳐 백수우체국으로 내려가는 길이고, 덕산마을로 가려면 북쪽 능선을 따라 진행해야 한다.

 

 

 

 

봉화령에 올라서면 처음으로 서해바다가 조망(眺望)된다. 드넓게 펼쳐지는 바다는 시원하기보다는 차라리 춥게 느껴지고, 백수읍 너머의 넓은 겨울들판은 황량하기까지 하다. 지금은 겨울의 초입인 것이다. 북쪽으로는 법성포가 살짝 고개를 내민다. 그 뒤로 선운산과 변산반도가 어렴풋하다. 굴비로 유명한 법성포는 우리나라에 최초로 불교(佛敎)가 유입된 곳이라고 한다.

 

 

 

백수읍 우체국을 들머리로 삼아 갓봉을 거쳐 봉화령으로 올라오는 능선, 이곳 봉화령과 구수산을 거쳐 옥녀봉까지를 잇는 종주 코스가 많이 이용된다.

 

 

봉화령에서 덕산으로 이어지는 길은 그야말로 순한다. 불과 400m에도 못 미치는 봉우리를 3.3Km의 긴 구간을 걸어 내려가다 보니 고도(高度)를 떨어뜨리는 것을 구태여 서두를 필요가 없었나 보다. 봉화령에서 15분 정도 내려오면 규격(規格)과 격식(格式)을 갖추어 쌓은 돌무더기를 만나게 된다. 돌이 쌓여있는 형태로 보아 봉화대(烽火臺)터로 보이는데도 안내판 하나 없이 버려져 있는 것이 안타깝다. 봉화대(烽火臺)의 정확한 명칭은 봉수대(烽燧臺)이다. 본래 낮에 올리는 불을 수(燧)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수는 낭연(狼煙)이라고도 하였는데, 이리의 똥을 태워서 연기를 피워 올렸기 때문이다. 이리의 똥을 태워 만든 연기는 바람이 불어도 흔들림이 없이 곧바로 하늘로 올라갔기 때문에 먼 곳에서도 연기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한편 밤에 피우는 것을 봉화라 불렀다. 봉화대 위에 길고(桔橰)라고 하는 틀을 세우고, 그 위에 쇠로 만든 둥우리 같은 것을 놓았다. 그리고 그 안에 땔감을 가득 넣어두고 있다가 긴급한 일이 발생하면 거기에 불을 붙였다. 그러면 하늘 높이 커다란 불꽃이 솟았고, 이 불꽃을 이용해 위급상황을 도성(都城)에 알렸던 것이다.

 

 

 

걷는 데 부담이 가지 않는 길이다. 낙엽이 수북하게 쌓여 푹신한 것이 마치 양탄자 위를 걷고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이기 때문이다. 울창한 숲에 가린 탓에 보이는 것이라곤 나뭇가지 밖에 없다. 별다른 구경거리가 없는 이런 길에서는 당연히 사색(思索)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소태산대종사도 이런 길을 걸으며 사색을 즐기다가 도(道)를 깨우쳤는지도 모를 일이다.

 

 

 

 

 

 

능선을 걷다보면 심심찮게 왼편으로 시야(視野)가 열린다. 서해바다가 바로 코앞이다. 가만히 귀 기울여보면 파도소리가 아련히 귓가에 맴도는데, 밀려왔다 밀려가는 바닷물이 하얀 포말을 만들고 있다. 드넓은 바다에는 꼬막껍질을 업어놓은 것 같은 작은 섬들이 드문드문 떠 있다. 가깝게는 보이는 저 섬들은 아마 칠산도, 송이도, 각이도일 것이다. 그렇다면 낙월도나 임자도는 수석(壽石)처럼 보이는 저 섬들 너머 어디엔가 웅크리고 있을 것이다.

 

 

오른편에는 영광지방의 나지막한 산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불갑산과 장암산, 그리고 태청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들이 하늘과 경계를 나누며 금을 그리고 있다. 뒤돌아보면 조금 전에 지나온 구수산의 능선이 꿈틀거리며 뒤따라오느라 정신이 없는데, 오른편 발아래에 보이는 대신저수지는 겨울철 추위에 멍이 들었는지 시퍼렇게 군청색(群靑色)을 띠고 있다. 건너편 산자락에 자리 잡은 농가에서 한줄기 밥 짓는 연기라도 피어오를라치면 을씨년스러운 겨울풍경(風景)이 한결 나아질 텐데 아쉽다.

 

 

 

봉화대터를 지나서도 산길은 꾸준하면서도 완만(緩慢)하게 고도(高度)를 낮추어 간다. 그러면서 중간 중간에 봉우리들을 만들어 놓는다. 그 중의 하나가 가자봉이다. 등산로 주변에서 가을의 정취를 풍기고 있는 억새를 구경하며 걷다보면 가자골 갈림길(이정표 : 뱀골봉 1.1Km/ 봉화령 2.2Km/ 가자골(해안공원) 0.5Km)을 지나 가자봉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가자골삼거리에서 왼편으로 내려서면 해상공원이다. 이곳에서 뱀골봉으로 하산하는 것 보다는 해상공원으로 내려갈 것을 권하고 싶다. 밋밋한 뱀골봉 능선보다는 서해바다와 기암절벽(奇巖絶壁)이 어우러지며 멋진 조화(調和)를 연출해내는 해상공원의 경관(景觀)을 보는 것이 몇 배가 더 낫기 때문이다. 봉화대터에서 가자봉까지는 대략 20분이 조금 못 걸린다.

 

 

 

 

가자봉에서 뱀골봉까지의 구간도 지나왔던 하산길의 풍경(風景)과 큰 변화가 없이 이어진다. 흙으로 이루어진 산길은 경사까지 완만(緩慢)하기 때문에 걷는데 아무런 부담이 없을 정도이다. 가자봉에서 20분 정도를 걸으면 뱀골봉(이정표 : 덕산 1.0Km/ 가자봉 1.1Km)이다. 반반한 바위로 이루어진 뱀골봉 정상에서 다시 한 번 시원스럽게 시야(視野)가 열린다. 서해바다에는 조그만 섬들이 돛단배마냥 떠돌고 있다.

 

 

 

산행날머리는 백수 해안일주도로

뱀골봉을 지나면서 등산로 주변은 새로운 모습으로 변한다. 참나무들 일색이던 산길이 어느 사이엔가 소나무로 바뀌어 있는 것이다. 하늘을 찌를 듯이 쭉쭉 뻗은 해송(海松)들이 늘어서 있는 길을 걷다보면 저만큼에 덕산마을이 보이고, 이내 산행이 종료되는 백수 해안일주도로에 내려서게 된다. 도로에 내려서면 맨 먼저 가을바람에 파도처럼 일렁이는 억새밭이 반긴다. 봉화령을 출발한지 1시간30분 가까이 되었다.

 

 

 

 

산을 내려서면 ‘백수 해안일주도로’이다. 구수산 산자락을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처럼 휘감으며 백수읍까지 이어지는 해안일주도로는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중 9위로 선정된 길이다. 유채꽃과 동백꽃 그리고 코스모스가 사시사철 꽃길을 연출(演出)하고, 아름다운 바다 풍광(風光)과 서해낙조(西海落照)가 빚어내는 자태가 한 폭의 그림과 같다고 해서 선정되었다고 한다.

 

 

 

 

추월산(秋月山, 731.2m)

 

산행일 : ‘12. 11. 3(토)

소재지 : 전남 담양군 용면과 전북 순창군 복흥면의 경계

산행코스 : 복리암 마을 입구→복리암 마을→지능선→복리암 정상→수리봉추월산보리암봉보리암추월산 관광단지(산행시간 : 4시간)

함께한 산악회 : 월산악회

 

특징 : 가을밤 산꼭대기에 보름달이 걸려 좀체 기울어지지 않는다 해서 추월산(秋月山)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호남(湖南)의 5대 명산(名山 : 사람마다 다르게 꼽고 있음) 중 하나로서 산 전체가 전라남도 기념물 제4호로 지정되어 있다. 상봉(보리암 정상) 언저리 절벽(絶壁)에는 제비집처럼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보리암이 자리 잡고 있고, 봉우리 위로 오르면 추월산의 허리를 돌아가며 펼쳐지는 담양호가 발아래에 환상적(幻想的)으로 펼쳐진다. 또한, 호남의 3대 산성(山城) 중 하나라는 건너편의 금성산성(金城山城)이 잘 조망(眺望}된다.

 

 

산행들머리는 복리암 마을로 들어가는 초입에 위치한 ‘숲속의 호수 펜션’

88고속도로 담양 I.C를 빠져나와 29번 국도를 이용 담양읍내(邑內)를 통과한 후, 정읍방향으로 15분 정도를 달리다보면 담양호(湖)국민관광단지가 나온다. 원래 산행을 시작하려고 했던 부리기고개나, 계획변경으로 인해 새로운 산행들머리가 된 복리암 마을 입구는 이곳에서 5분 정도를 더 들어가야 한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29번 국도를 따라 담양방향으로 달리고 있다. 이길을 따라가면 위에서 말한 산행들머리와 국민관광단지를 거쳐 담양에 이르게 된다. 원래는 담양에서 추월산으로 들어오는 것이 옳겠지만, 순창에 위치한 강천산에 먼저 들러 강천산 등반을 원하는 사람들을 내려주고 나서 추월산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사실은 강천산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추월산으로 오고 있는 중이다. '가는 날이 마침 장날'이라고 오늘이 마침 순창전통고추장 축제(祝祭)가 열리는 날이라고 한다. 축제장으로 가는 차량(車輛)과 강천산으로 단풍놀이 가는 차량들이 뒤엉켜서 도로가 아예 주차장(駐車場)으로 변해버렸다. 강천사로 들어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강천산 산행을 원했던 사람들까지 모두 실고서 추월산으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버스가 예고된 산행 들머리인 ‘견양동 마을‘로 들어가는 부리기고개를 지나치는 것이 보인다.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어느새 버스는 월계리에 위치한 ’숲속의 호수 펜션‘ 앞에서 멈추고 있다. 이 지점은 ’복리암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가 분명하니 아마 산행코스를 변경하려나 보다. 이곳으로 오면서 너무 많은 시간이 지체되었기 때문에 산행코스를 단축(短縮)하려는 모양인데, 그럴 경우에는 코스를 변경하기에 앞서 산행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먼저 양해를 구하는 것이 우선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숲속의 호수 펜션’ 오른편으로 난 시멘트포장(鋪裝) 도로를 따라 복리암 마을로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복리암은 사찰(寺刹)이 아닌 감나무와 토종 벌통을 주요 소득원(所得源)으로 삼고 있는 마을의 이름이라고 한다. 도로를 걷다보면 전면에 수리봉의 암릉이 위압적으로 펼쳐진다. 길을 가다보면 왼편이나 오른편으로 갈라지는 길을 두어 번 만나게 되나 무시하고 전면에 보이는 수리봉을 향하여 진행하면 어렵지 않게 복리암 마을에 이를 수가 있다. 산행을 시작한지 10분 조금 넘게 걸으면 복리암 마을이 보인다. 마을에 이르기 전에 오른편 밭둑을 지나 곧바로 숲으로 들어설 수도 있으나, 마을을 통과한 후에 산으로 오르는 코스를 이용하기로 한다.

 

 

 

마을을 통과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컨테이너 박스로 만든 농가(農家)가 보이고 포장된 길은 이곳에서 끝을 맺는다. 비포장 농로(農路)를 따라 얼마간 더 올라간 후, 오른편으로 꺾어 산으로 접어든다. 산길은 잡목(雜木)으로 둘러싸여 거칠기만 하지만 얼마 전까지는 경작지(耕作地)였던 듯, 길가에는 감나무들이 즐비하다. 감나무에 빨갛게 매달린 감에서 가을 정취가 물씬 풍겨 나오고 있다

 

 

 

 

잡목(雜木)과 칡덩굴이 진을 치고 있는 산길이 짧게 끝나면 산길은 이내 가파른 오르막길로 변해 버린다. 비탈길을 따라 10분 정도 걸으면 제법 모양새를 갖춘 사면(斜面)길이 나타나고, 곧이어 능선 안부에 올라서게 된다. 오른편에 능선을 따라 올라오는 산길이 보인다. 아까 밭두렁을 지나 능선으로 붙었을 경우에 이곳에서 만나게 된다. 등산로 주변은 굵은 소나무들로 가득 차 있다. 이어지는 산행은 능선을 따라 이어진다. 가파른 능선을 10분 조금 넘게 치고 오르면 칼로 쪼갠 듯 둘로 갈라진 전망바위 하나가 나온다. 오른쪽 멀리 담양호와 금성산이 함께 어우러진 풍경(風景)이 멋지다.

 

 

 

전망바위에서 잠깐 완만(緩慢)하던 산길이 다시 가파른 오르막길로 변해버린다. 오늘 산행에서 가장 힘든 구간이다. 비록 힘이 들지만 그나마 자그마한 위안거리가 있어 조금은 위로가 된다. 오른편의 빈 나뭇가지 사이로 깃대봉의 기암절벽(奇巖絶壁)이 내다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가파른 오르막길은 급하게 오르는 것 보다는 호흡을 조절해가며 쉬엄쉬엄 오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깃대봉의 잘생긴 암릉을 구경하면서 쉬엄쉬엄 오르면, 20분 후에는 수리봉의 아랫자락에 이르게 되고,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우회(迂廻)하여 10분 조금 넘게 치고 오르면 주능선 삼거리에 이르게 된다. 주능선삼거리에는 좀 특이한 이정표(추월산 정상/ 견양동, 천치재/ 복리암 마을) 하나가 세워져 있다. 어느 부분 하나 돌출된 곳이 없는데도 정상이라는 지명(地名)을 붙이고 있는 것이다. ‘복리암 정상’이란 과연 무엇을 뜻일까? 나중에 만나게 되는 ‘보리암 정상’은 산봉우리이기 때문에 정상이란 단어(單語)가 이해가 갔지만, 이곳에서 보는 정상이란 단어는 왠지 낯설기만 하다.

 

 

 

 

 

주능선 삼거리(복리암 정상)에서 수리봉 정상까지는 10분 거리이다. 이곳에서 수리봉을 거쳐 추월산 정상까지는 호남정맥의 마루금을 따라 진행된다. 왼편이 벼랑으로 이루어진 능선을 오르다가 뒤돌아보면, 깃대봉의 암릉이 멋지게 펼쳐지고 있다. 그 너머에 보이는 산들은 아마 장군봉과 신선봉 등 내장산이 빚어 낸 준봉(峻峰)들일 것이다. 경사(傾斜)가 있는 산길을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허리를 굽히게 된다. 뻣뻣하게 허리를 세우고서는 결코 비탈길을 오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산이 사람에게 겸손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샘이다. 아무리 뻣뻣하게 세워왔던 자존심(自尊心)일지라도 자연 앞에서는 당연히 굽힐 수밖에 없으니 이보다 더 좋은 교육(敎育)방법이 또 어디에 있을까 싶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30분 정도가 지났다.

 

 

 

수리봉은 독수리를 닮은 형상(形象)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다섯 평 정도나 되는 정상에는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고 대신 ‘수리봉 정상’이라는 이름표를 단 이정표(추월산 1.7Km/ 복흥면 3.5Km/ 사법연수원 2Km)가 정상석을 대신하고 있다. 이정표에 적혀있는 사법연수원은 ‘대법원(大法院) 가인(街人) 연수관(硏修館)’을 말하는데, 가인(街人)은 우리나라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김병로(金炳魯)씨의 호(號)이다. 가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고향인 순창 땅에다 연수관을 지었다고 한다.

 

 

 

수리봉의 정상은 사방이 탁 트여서 조망(眺望)이 아주 좋다. 북쪽에는 복리암 마을과 견양동 마을이 발아래로 내려다보이고, 그 뒤를 바치고 있는 내장산의 장군봉과 연자봉, 신선봉 등이 잘 조망된다. 그 옆에 보이는 산은 아마 백암산과 입암산일 것이다. 강천산과 금성산은 정상에서 추월산 방향으로 약간 비켜난 곳에 있는 전망바위에서 더 선명하게 나타난다. 금성산은 산성(山城)의 성벽(城壁)까지도 뚜렷하고 그 뒤에 강천산이 의젓하게 버티고 있다. 금성산의 앞에 보이는 호수(湖水)는 물론 담양호이다.

 

 

 

수리봉에서 추월산으로 향하는 길은 맨 먼저 가파른 바윗길과 함께 시작된다. 바윗길의 왼편은 수십 길의 단애(斷崖)로 이루어졌으나, 그렇다고 지레 겁을 먹을 필요까지는 없다. 담양군청에서 별도의 안전시설(安全施設)을 설치할 필요를 못 느꼈을 정도로 무난하기 때문이다. 그냥 약간의 스릴을 즐기면서 내려가면 된다. 바윗길을 내려섰다가 맞은편 능선으로 올라서면 또 다시 전망바위에 올라서게 된다.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면 수리봉의 암릉과 그 암릉에 안겨 있는 촛대바위(수리바위)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다. 진행방향에는 물론 담양호가 푸른빛으로 빛나고 있고, 뒤를 받치고 있는 금성산의 산성(山城)이 만들어 내는 곡선(曲線)이 아름답게 흐르고 있다.

 

 

 

 

수리봉에서 추월산 정상까지 이어지는 능선은 양면성(兩面性)을 띠고 있다. 왼편은 수백 길 높이의 단애(斷崖)로 이루어진 바위절벽이나, 오른편은 밋밋한 흙산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산길도 단애에서 약간 오른편으로 비켜나 있다. 그러나 왼편 바위벼랑에 뿌리를 박고 있는 기암괴석(奇巖怪石)을 구경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진행방향의 왼편 벼랑 아래에는 호수(湖水) 중에서 가장 맑고 깨끗하다는 담양호반(湖畔)이 줄곧 따라다녀 운치(韻致)를 더한다.

 

 

 

온통 참나무로 이어지는 능선은 한마디 곱다. 비록 왼편이 바위 벼랑이나, 산길은 벼랑에서 오른쪽으로 살짝 비켜나면서 이어지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나지막한 봉우리 몇 개를 넘게 되지만 고저(高低)의 차이가 크지 않기 때문에 오르내리는데 조금도 부담이 없을 정도이다. 비석(碑石) 없는 묘(墓)도 지나고, 심심찮게 나타나는 전망대(展望臺)에서 시원스런 조망(眺望)까지 즐기면서 걷는 발걸음을 가볍기까지 하다. 시리도록 푸르른 하늘, 그리고 길게 펼쳐진 암릉과 절묘(絶妙)하게 어우러지고 있는 산하(山河), 비록 낙엽이 다 져버린 빈 나무로 가득하지만, 이 얼마나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풍경(風景)인가. 그런 계절을 좋아하기에 조금이라도 더 오래 보듬고 싶었는데, 가을은 이미 저만큼 도망가 있다. 능선에 부대끼며 넘어오는 바람결이 스산하기만 한데, 손끝을 간질이는 바람자락은 벌써 시리기만 하다. 며칠 전에 추적이던 가을비에 슬쩍 겨울이 묻어왔던 모양이다. 푸르른 하늘이 깊어도 너무 깊어서 가을이 빠져나갈 수 없기를 바랐는데...

 

 

 

조망(眺望)을 즐기면서 걷다보면 만나게 되는 바위봉우리인 720봉를 우회(迂廻)하면 진행방향의 나뭇가지 사이로 추월산이 내다보이기 시작한다. 수리봉을 출발해서 50분 정도가 지나면 무덤 하나를 지나면서 월계리 갈림길을 만나게 된다(이정표 : 월계리 1.1km/ 추월산정상 400m/ 견양동). 월계리 갈림길에서 산길은 다시 오르막길로 변한다. 오르막길을 쉬엄쉬엄 오르다보면 능선 위에 가을하늘이 펼쳐지고 있다. 펼쳐진 가을 하늘이 푸르다 못해 시리다. 시리도록 아름다운 저 하늘을 무의미하게 그냥 흘려보내지 말자. 파란 바탕에 뭔가 의미 있는 그림 하나 수놓아 보는 것도 괜찮지 않겠는가. 사랑하는 마음 한번 풀어보는 것은 어떨까? 보는 사람마다 당연히 사랑으로 젖어갈 것이고, 사랑에 물든 그들은 틀림없이 행복(幸福)해 질 것이다.

 

 

 

 

월계삼거리에서 10분 정도를 걸으면 호남정맥과 나뉘는 능선분기점 갈림길(이정표 : 보리암 정상 1.2Km, 주차장 2.4Km/ 추월산 정상 0.1Km, 밀재 2.3Km/ 월계리 1.3Km, 견양동 4.2Km)이다. 이곳에서 ‘보리암 상봉’은 왼편으로 진행해야 하고, 추월산 정상은 오른편 호남정맥을 따라서 100m를 더 올라가야 만나게 된다. 추월산 정상은 서너 평이나 됨직한 비좁은 바위 봉우리, 그 흔한 정상표지석 하나 보이지 않고, 그 빈자리를 아랫도리에 ‘추월산 정상’이라는 이름표를 단 이정표(里程標)가 대신하고 있다. 그러나 정상석이 없다고 해서 정상이 아닐 수는 없는가 보다. 정상석 대신 이정표를 배경삼아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붐비는 것을 보면 말이다.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보잘 것이 없다. 주변의 대부분을 잡목(雜木)들이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호남정맥의 밀재 방향으로 시야(視野)가 트이고 있고, 그 왼편은 월산면 들녘이다. 너른 평야(平野)가 반듯하면서도 예쁘장하게 선을 그리며 자릴 잡고 있고, 그 사이사이를 구릉(丘陵) 같은 산들이 헤엄치는 거북이 등껍질 같은 폼으로 떠 있다. 숨 가쁘게 올라온 정상, 어렵게 올라온 걸음이니 구태여 서둘러 내려갈 필요는 없다. 배낭을 벗어 놓고 잠깐 쉬었다 가보는 게 어떨까? 물론 벗어 놓은 배낭 위에다 고단한 삶에 찌든 시름 한 조각 얹어 놓고서 말이다. 근심 걱정을 털어내고 바라보는 발아래 세상은 또 다른 세상, 아름다워도 너무 아름다울 것이다. 그런 아름다움을 쫒아서 사람들은 산에 오르는 것이 아닐까?

 

 

정상에서 삼거리로 되돌아 나온다. 아까 지나왔던 호남정맥의 마루금은 북쪽이고 보리암 가는 길은 동남쪽으로 향하고 있다. 보리암 방향으로 진행하면 곧바로 급경사(急傾斜) 내리막길과 맞닥뜨리게 된다. 비록 위험할 정도는 아니지만 조심스럽게 내려서면 금방 완만(緩慢)한 흙길이다.

 

 

보리암 상봉으로 가는 능선은 초반에는 굴곡이 심한 바윗길이지만 이내 부드러운 흙길로 변한다. 부드러운 흙길을 걷다보면 헬기장과 쌍태리 갈림길(이정표 : 보리암 정상 0.9Km/ 쌍태리 1.1Km/ 추월산 0.8Km)을 만나게 되고, 이어서 산죽(山竹)으로 둘러싸인 무인(無人)산불감시탑을 지나 암릉으로 올라서면 전망바위 위이다. 북쪽으로는 아까 지나왔던 호남정맥의 마루금이 힘차게 이어지고 있는데, 굽이굽이 이어진 능선엔 바위산의 힘과 흙산의 부드러움이 알맞게 어우러지고 있다. 물론 남쪽도 열리고 있다. 쌍태리와 오성리를 비롯한 마을들, 그리고 월산면의 들녘이 발아래 펼쳐진다.

 

 

 

 

 

 

바위 전망대(展望臺)에서 ‘보리암 정상’은 금방이다. ‘보리암 정상’은 흙으로 이루어진 좁다란 분지(盆地), 이곳도 다른 봉우리들과 마찬가지로 정상석 대신에 이정표(거리표시 없이 1등산로, 2등산로, 추월산 정상의 방향만 지시하고 있다)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얼핏 버려진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은 나만의 느낌일까? ‘보리암 정상’은 상봉이라고도 부르는데, 여기에 쓰인 암이라는 글자는 바위봉우리를 뜻하는 바위 암(巖)자가 아니고 사찰을 뜻하는 암(庵)자를 쓰고 있다. 따라서 ‘보리암 정상’이란 보리암 뒷산 꼭대기를 나타내는 말일 것이다.

 

 

정상에서 보리암으로 가려면 왼편으로 내려서야 하지만, 곧바로 진행하는 것보다는 잠깐 오른편에 보이는 전망바위에 올라가 보는 것이 좋다. 시원스럽게 조망(眺望)이 트이는데 그 풍광(風光)이 가히 장관이기 때문이다. 오른편에 열십자 모양으로 유유히 흐르는 담양호(湖)의 끝자락이 내려다보이고, 호수(湖水) 건너편 금성산은 산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城壁)과 성루(城樓)까지도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호수(湖水)의 기묘(奇妙)한 굴곡(屈曲)과 아기자기한 산등성이의 부드러운 흘러내림이 조화로워 제 아무리 무뚝뚝한 이라도 감탄을 금하기 힘든 광경(光景)이다.

 

 

보리암 상봉에서 내려가는 길은 2가지이다. 보리암을 경유해서 국민관광단지로 내려가는 1등산로와, 보리암을 들르지 않고 곧장 국민관광단지로 내려갈 수 있는 2등산로이다. 이곳에서는 1등산로를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산 거리도 짧을뿐더러, 유서 깊은 보리암(菩提庵)까지 둘러볼 수 있기 때문이다. 보리암으로 방향을 틀자마자 나무테크로 만들어진 전망대가 나타난다. 아마 추월산에서 가장 조망(眺望)이 뛰어난 곳일 것이다. 전망대에 서면 진행방향으로는 성벽(城壁)의 윤곽까지 또렷한 금성산과, 그 너머의 강천산이 가깝게 다가오고, 왼편에는 아까 지나온 호남정맥의 마루금, 그리고 오른편에는 신선봉 능선이 또렷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보리암으로 향하는 긴 나무계단 아래에는 담양호의 리아스식 해안(rias coast)이 아름답게 펼쳐지고 있다.

 

 

 

보리암으로 내려서는 길은 암릉에다가 무척 가파르기까지 하다. 그러나 미리부터 겁먹을 필요는 없다. 위험한 곳에는 어김없이 나무계단과 로프 등 안전시설을 설치해 놓았기 때문이다. 위험을 느끼지 않으니 당연히 주위를 돌아볼 여유가 생긴다. 진행방향에 아까 보리암 정상에서 보았던 담양호와 금성산, 그리고 강천산이 다시 한 번 아름답게 펼쳐지고 있다. 조망(眺望)을 즐기면서 10분 남짓 내려서면 만나게 되는 이정표(보리암 0.1Km/ 보리암 정상 0.5Km)에서 철(鐵)다리를 내려갔다가 다시 철사다리를 올라서면 보리암이다.

 

 

 

보리암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김덕령장군의 부인 흥양 이씨(李氏)의 순절비가 세워져 있다. 비문(碑文)에 따르면 이씨(李氏)부인이 왜적에게 쫓기다가 이곳 절벽에서 몸을 던져 순절(殉節)하였다고 한다. 새운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커다란 순절비 옆에 자그마한 순절비(殉節碑)와 동순지(同殉址) 표지석이 보인다. 정유재란 때 남원이 함락되자 김덕령장군의 부인인 흥양 이씨가 이곳에서 순절하고, 장군의 매부인 창의장 김응회가 그의 모친 성씨와 함께 순절했으며, 또 장군의 처남인 이인경과 이원경의 부인인 광산 김씨와 제주 양씨 동서가 함께 순절했다는 애절한 내용이다. 헌종(1840년) 때 담양부사 조철영이 흥양 이씨의 순절(殉節)을 기리는 비문(碑文 : 김충장공 덕령부인흥양이씨만력정유매담양추월산왜적순절처 = 金忠壯公 德齡夫人興陽李氏萬曆丁酉罵潭陽秋月山倭賊殉節處)과, 임진왜란 당시 목숨을 바쳐 싸웠던 역사적 인물들을 새겨 놓았다는 바위벽이, 순절비의 왼편에 보이지만 이끼에 덮여있는 탓에 판독(判讀)할 수는 없었다.

 

 

법당에 들어가지 전에 약수터에 들러 먼저 물부터 한 모금 마시고 본다. 이곳 보리암의 약수(藥水)가 물맛이 좋기로 소문났기 때문이다. 선입견(先入見) 때문인지는 몰라도 물맛이 시원하면서도 달게 느껴진다. 아니면 하도 물줄기가 약해서 물을 받느라 고생한 탓에 물맛이 달게 느껴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문득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고사성어(故事成語)가 떠오르기에 하는 말이다.

 

 

보리암(菩提庵 :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9호)은 추월산 상봉 아래의 절벽(絶壁) 끝에 매달려 있어, 옛날에는 사다리를 이용해야만 오를 수 있는 암자(庵子)였다고 한다. 고려(高麗)시대 지눌(知訥)스님이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에서 나무로 만들어서 날려 보낸 매가 내려앉은 곳(불좌복전 : 佛座福田)에 창건한 사찰(寺刹)이라는 설화(說話)가 전해져 내려온다. 중창(重創) 및 중건(重建)의 역사가 정확하지 않을뿐더러, 특기할만한 문화재(文化財)도 보유하고 있지 않다. 참고로 그때 지눌이 3마리를 날려 보냈는데 나머지 2마리는 장성 백양사 터와 순천 송광사 터에 내려앉았다고 한다. 보리암은 법당인 대웅전과 요사(寮舍)채가 전부이다. 보리암은 서쪽과 북쪽 뒤를 거대한 암벽(巖壁)이 둘러싸고 있다. 물론 아래 바닥도 암벽(巖壁), 그 위에 평평한 공간을 조성해서 암자(庵子)를 지어 놓았다. 남동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바위 위에 거대한 느티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가지가 두 개로 갈라지고 있는 것이 마치 암자(庵子)를 수호하고 있는 것 같다.

 

 

 

보리암은 절벽에 지지대를 만들고 콘크리트를 채워서 마당으로 조성(造成)한 것이다. 마당 끝 벼랑의 경계는 쇠(鐵)난간이 아닌 대나무 울타리가 대신하고 있어 한결 친근한 생각이 든다. 무채색에 가까운 빛바랜 대나무가 보리암의 오랜 역사를 연상시키게 만드는 것이다. 마당 끝으로 나아가면 울타리 너머로 보이는 조망이 장관이다. 담양호가 발아래 깔려있고, 건너편에 마주보이는 금성산성과 어우러지는 풍광(風光)이 가히 절경(絶境)이다. 남해 금산의 보리암도 암봉 위에 덜렁 얹혀 있었는데, 추월산 보리암도 마찬가지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이렇게 암봉 위에 위태롭게 얹혀야 하는 모양이다. 이왕에 온 명승지(名勝地)이니 구태여 발걸음을 재촉하지 이유가 없다.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景觀)을 가슴에 차곡차곡 담고서야 발걸음을 돌린다.

 

 

다시 갈림길로 되돌아 나오면, 이어지는 하산길은 가파른 내리막길의 연속이다. 계속해서 가파른 나무계단들이 줄을 잇는데 가끔 오른편에 너른 마당바위가 보인다. 마당바위에 서면 보리암이 한눈에 들어온다. 보리암은 산중턱의 바위 벼랑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다. 마치 절벽(絶壁)에 매달린 제비집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지금 서있는 곳에서 위에 보이는 보리암까지는 암릉, 바위들이 만들어내는 선이 거칠어서 도저히 사람이 다닐 수가 없을 것 같은데도, 사람들은 꼬리를 물고 오르내리고 있다. 바위 사이사이로 절묘하게 등산로가 나 있는 것이다. 다시 국민관광단지를 향해 하산을 시작하면 진행방향에 담양호가 펼쳐지는데, 그 푸른 물결이 가슴을 시원하게 씻어주는 느낌이다.

 

 

 

 

 

가파른 암릉길에는 어김없이 나무계단이 설치되어 있어 한결 수월하게 하산할 수 있다. 하지만 계단의 경사(傾斜)가 많이 가파르니 주의하는 것이 좋다. 특히 눈앞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경(風景)에 정신을 뺏겨 주의를 산만(散漫)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일이다. 조망(眺望)을 즐기면서 길고 긴 나무계단을 내려서면 이번에는 그다지 험하지 않은 너덜지대로 변한다. 구불구불 길게 이어지는 너덜길 가에는 철 지난 단풍나무 몇 그루가 마지막 몸부림을 치고 있다. 대부분의 활엽수(闊葉樹)들은 잎이 다 져서 빈 나뭇가지만 허공에 걸려있는데, 단풍나무들은 빛이 바래버린 나뭇잎들을 아직도 가지 위에 얹어 놓고 있는 것이다. 추월산 단풍은 단풍 그 자체만으로 보면 사실 인근의 내장산이나 강천산에 비할 바가 못 된다. 하지만 잘 그린 산수화(山水畵)에 어찌 단풍 하나만 넣을 수 있겠는가. 당연히 주변 풍물(風物)도 함께 넣어야 할 것이다. 추월산의 기암괴석(奇巖怪石)과 발아래 펼쳐지는 담양호를 하나의 화폭(畵幅)에 담을 경우 그 아름다움은 전국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일대 장관(壯觀)으로 변해 버린다. 여기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환상적인 조망(眺望)까지 곁들이게 되면 오늘 산행은 그야말로 눈이 호사(豪奢)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보리암을 출발해서 30분 가까이 내려서면 왼편 바위절벽 아래에 커다란 굴이 보인다. 깊이가 5m쯤 되는 굴의 안에는 돌로 제단(祭壇) 비슷하게 쌓아 놓았으나 별다른 의미는 없는 것 같고, 굴의 앞에는 벤치를 만들어 놓았다. 계단을 싫증이 나도록 오래 내려왔으니 잠깐이나마 숨을 돌리고 가라는 배려인 모양이다. 시간에 여유라도 있다면 굴 앞에 세워진 추월산보리암중창공덕비(秋月山菩提庵重創功德碑)의 비문(碑文)을 읽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 추월산보리암중창공덕비(秋月山菩提庵重創功德碑)에는 ‘보조국사 지눌(知訥)이 고려 신종(1198년) 때 지리산 화엄사의 산내 암자인 상무주암(上無住庵)에서 나무로 매(鷹)를 만들어 날리고 그 매가 앉은 자리에 터를 잡고 암자(庵子)를 지었으니 그 이름이 보리암이더라’ 하는 이야기도 새겨져 있다.

 

 

 

석굴에서 너덜길을 따라 15분 정도 내려오면, ‘보리암 정상’에서 보리암을 거치지 않고 곧장 내려오는 2등산로를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부터 등산로 주변은 수십 년은 족히 묵음직한 소나무 숲으로 변한다. 피톤치드(phytoncide)가 그득한 소나무향을 맡으며 10분 정도 내려가면 임진왜란 격전지기념비가 발길을 멈추게 만든다. 이곳에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의병진지(義兵陣地)가 포진하고 있었는데, 100여명의 왜병(倭兵)이 기습하여 3시간여의 치열한 전투 끝에 지휘관 이하 15명의 의병(義兵)이 전사한 곳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사건은 정유재란 때의 일이었으니 1597년경이었을 것이다. 비문에는 사건 발생일을 1908년11월 25일로 적고 있으나 아마 착오인 모양이다. 어쨌든 나라를 위해 던진 선열들의 장렬한 죽음일진데, 우리가 지녀야할 숙연한 마음을 기껏 날자가 좀 잘못 적혀있다고 해서 어찌 약하게 만들 수 있겠는가

 

 

 

산행날머리는 담양호 국민관광단지 주차장

전적비에서 주차장은 금방이다. 울울창창하게 우거진 소나무 숲 아래를 잠깐 걸으면 어린이 놀이시설이 보이고, 그 아래가 국민관광단지 주차장이다. 마침 주차장 근처에 순창에 있는 전통고추장 마을에서 밑반찬을 팔러 나온 분이 있어서 깻잎 절임을 조금 구입했다(집에 돌아와 먹어보니 향이 진하고 감칠맛이 있었지만 너무 질긴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추월산 주차장 앞에는 담양호 국민관광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담양호 위로 나무다리가 설치되어 있고, 건너편 강변을 따라 나무 데크로 산책로를 조성해 놓았다. 금성면(金城面)에 있는 금성산성(山城)과 강천산 강천사(剛泉寺) 등을 아우르는 호반유원지(湖畔遊園地)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 담양호(潭陽湖), 영산강(榮山江) 유역개발사업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4개 댐(長城湖, 光州湖, 羅州湖, 潭陽湖)중의 하나로 1976년에 완공되었다. 제방(堤防) 높이 46m, 길이 316m의 규모에 6,670만 톤의 물을 저장하는데, 이 호수(湖水)의 물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깨끗하다고 알려져 있다. 담양호의 물이 항상 가득한 것은 이 지역의 지명(地名)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담양이 한자로 못 담(潭)자 쓰듯이 예로부터 이 지역이 전국에서 가장 강우량이 많아서 붙은 이름이기 때문이다. 고려 성종 때의 지명도 담주(潭州)였다.

 

 

최악산(最岳山, 728m) - 동악산(動樂山 : 대장봉, 형제봉)

 

산행일 : ‘12. 8. 11()

소재지 : 전라남도 곡성군 삼기면과 곡성읍의 경계

산행코스 : 삼기초교(원등리)능선최악산대장봉형제봉공룡능선청류동계곡도림사주차장(산행시간 : 순수 산행시간 5시간)

 

함께한 산악회 : 월산악회

 

특징 : 동악산의 대장봉과는 불과 1km이내여서 위치상 동악산의 한 봉우리라고 할 수도 있는데, 지도에는 별개의 이름으로 등재(登載)되어 있다. 그것은 도림사를 축()으로 하여 동악산을 오를 경우, 원형의 축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산행을 할 경우에는 동악산과 별개로 하여 산행코스를 잡는 것 보다는 동악산을 종주(縱走)하면서 대장봉을 지나가는 길에 잠깐 짬을 내어 최악산에 다녀오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다. 최악산이 독자적으로 찾을만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산행들머리는 삼기초등학교

호남고속도로 곡성 I.C를 빠져나와 27번 국도를 타고 순창방면으로 달리다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산행들머리인 삼기초등학교(삼기면소재지 소재)에 이르게 된다. 산행은 학교 왼편으로 난 시멘트포장 농로(農路)를 따라 들어가면서 시작된다.

산행들머리는 삼기초교(붉은 색으로 표시된 괴소리의 삼기중학교가 아님)

 

 

초등학교에서 본격적으로 산행이 시작되는 산자락까지는 꽤나 길게 이어진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농로(農路)를 따라 걷다보면 진행방향에 최악산이 우뚝 솟아있는 것이 보인다. 농로의 주변에 보이는 밤나무에 매달려있는 밤송이가 제법 굵어진 것을 보면 아마 가을이 가까워졌나 보다. 들머리에서 10분 조금 넘게 들어가면 만나게 되는 갈림길에서, 최악산은 오른편으로 진행해야 한다. 삼거리에 산행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니 길을 헷갈릴 염려는 없을 것이다.

 

 

 

삼거리에서 오른편으로 들어서서 잠시 걸어 들어가면, 산자락과 처음으로 만나는 지점의 왼편에 등산로가 열려있는 것이 보인다. 들머리에 이정표(거리표시 없이 그저 방향만 표시)가 세워져 있으나, 이를 무시하고 그냥 지나칠 것을 권하고 싶다. 다선사 방향으로 진행하다 맹이골을 타고 올라갈 경우, 최악산 정상까지 올라가는 시간을 한 시간 이상 단축(短縮)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왼편 산자락(능선)으로 오를 경우 산길이 희미해서 오르기가 불편할뿐더러, 특별한 볼거리도 없기 때문에 지루한 산행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산자락으로 올라서자마자 문득 오늘 고생 좀 하게 생겼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등산객들이 즐겨 이용하지 않는 코스인 모양으로, 산길이 온통 잡목(雜木)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능선의 경사(傾斜)는 그다지 가파르지 않지만, 여러 번 오르내림을 계속하면서 꾸준히 고도(高度) 높여간다. 소나무와 참나무가 알맞게 섞인 능선은, 울창한 숲으로 둘러 쌓여있기 때문에 조망을 일절 허용하지 않고 있다. ‘코스를 잘못 잡은 것 아닌가?’ 불만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된다. 아니나 다를까 오른편 나뭇가지 사이로 얼핏얼핏 보이는 최악산 정상이 자꾸만 멀어지고 있다.

 

 

 

그저 앞사람의 뒤통수만 바라보며 걷는 지루한 산행을 두 시간 정도 하다보면, 능선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위로 올라서게 된다. 그러나 지도(地圖)상에는 고도(高度)표시조차 되어 있지 않은 무명봉(無名峰)으로 남아있다. 이 봉우리의 한쪽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바위 위에서 처음으로 시야(視野)가 열리는데, 초악산 정상이 바로 눈앞에 있는 듯이 선명(鮮明)하게 바라보인다. 탈진(脫盡)된 체력(體力)도 보충할 겸 영선씨가 가지고온 얼음막걸리를 나누어 마신다. 부근에 쉬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보이는 것을 보면, 다들 힘들었나 보다.

▼ 최악산

 

 

무명봉에서 다시 가파르게 내려서서 얼마간 더 진행하면 안부(鞍部 : 산의 능선이 말안장 모양으로 움푹 들어간 부분) 삼거리를 만나게 된다(이정표 : 다선사 1.5Km/ 원동리 3.6Km/ 초악산 정상).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내려가면 맹이골을 거쳐 아까 우리가 출발했던 들머리에 이르게 된다. 만일 산행을 시작하면서 만났던 갈림길에서 다선사 방향으로 진행했었다면, 2Km가까이를 단축시킬 수 있었음을 이정표가 증명해 주고 있다. 특히 특별한 볼거리도 없는 봉우리들을 오르내리는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인데도 고생을 사서 한 꼴이 된 것이다.

 

 

 

안부삼거리를 지나면서 능선은 바윗길로 변하기 시작한다. 앞을 가로막는 암벽(巖壁)을 기어오르다가, 어려울 경우에는 우회(迂廻)를 하면서 오르면 전위봉(前衛峰)에 올라서게 된다. 모처럼 시원스레 조망(眺望)이 트이는 곳이다. 한쪽 면이 바위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진행방향 오른편에는 아까 산행안내도에서 보았던 배바위 능선이 멋지게 펼쳐지고 있고, 뒤돌아보면 힘들게 올라왔던 능선과 삼기면 들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배바위

삼기면 들판

 

 

등산로는 전위봉을 지나면서부터 본격적인 암릉으로 변한다. 각양각색(各樣各色)으로 바위 생김새 외에도 주변의 조망(眺望)까지 트이기 때문에 그만큼 볼거리도 풍성해진다. 거기다 바윗길을 기어오를 때, 바위를 붙잡으며 손맛까지 느낄 수 있으니 등산객들이 좋아할만한 코스일 것이다. 당연히 조금 전까지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던 짜증은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길지 않은 바윗길이 끝나면, 또다시 부드러운 흙길이 잠깐 이어지다가 최악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최악산의 정상은 밋밋한 능선 상에 있는 그저 그렇고 그런 봉우리 중의 하나일 따름이다. 특별히 가슴에 담아둘만한 것이 없는 정상에는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고, 나뭇가지에 나무판자(板子)로 만들어진 정상표지판(곡성 초악산 728m) 하나만이 외롭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거기다 더해 정상주변을 울창하게 둘러싸고 있는 참나무들 때문에 조망(眺望)까지도 허락하지 않고 있다. 산행을 시작한지 벌써 3시간 가까이 지났다.

* 이곳 주민들은 최악산을 초악산(鷦岳山)이라고 부르는데, 정상의 큰 바위사이에 학의 혈()이 있고, 산의 형태가 학이 비상하는 모습이라고 해서 초학산(鷦鶴山)이라 부르다가, 음의 변환과정을 초악산으로 변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국토지리원의 지도에는 최악산으로 등재(登載)되어 있으며, 곡성 제일의 악산(岳山)이라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최악산에서 대장봉으로 가는 길은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을뿐더러, 오르내림도 크지 않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진행할 수 있다. 최악산 정상에서 짧게 내려와 산의 사면(斜面)을 따라 잠시 걸으면 삼거리를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 대장봉은 왼편으로 진행해야 하지만 잠깐 짬을 내여 오른편으로 들어서보자. 743봉인데 볼거리가 제법 쏠쏠하기 때문이다. 743봉은 널따란 전망바위로 이루어져 있으며, 바위 한쪽 귀퉁이에 잘생긴 거북이 한 마리가 웅크리고 앉아있다. 이곳에서는 대장봉과 형제봉(성출봉)이 조망되며, 그 두 봉우리의 사이에는 공룡능선이 갇혀있다.

 

 

 

 

743봉에서 부드러운 흙길을 따라 잠시 걸으면 멋진 조망(眺望)과 넉넉한 품을 자랑하는 대장봉(서봉) 위에 올라서게 된다. 별로 크지 않은 참나무와 소나무 몇 그루에 포위당하고 있는 대장봉 정상은 특별히 기억해 두어할 의미는 없는 봉우리다. 그러나 그냥 지나치지 말고. 잠깐 짬을 내어 서쪽에 보이는 작은 틈새로 들어가 보자. 자기 시야(視野)가 뻥 뚫리면서 주변의 산군(山群)들이 잘 조망되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올라오느라 힘들었던 여정(旅程)을 다시 한 번 되새기다보면, 그 고통스러웠던 능선들이 어느새 친근해져 있음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대장봉의 다른 한쪽에서는 형제봉과 공룡능선이 잘 조망되며, 공룡능선 너머로는 곡성읍 시가지가 내다보인다(대장봉 이정표 : 동악산 3.9km/ 형제봉 0.6km/ 삼기원동 4.4km)

 

형제봉

▼ 공룡능선과 뒷편의 곡성읍 시가지

 

 

대장봉에서 형제봉으로 가기 위해서는 오른쪽으로 내려서야 한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10분 조금 못되게 내려서다보면 안부 사거리에 있는 헬기장에 이르게 된다(이정표 : 형제봉 0.3Km/ 원효골 2.2Km/ 배넘이재 1.9Km, 동악산 4.2Km, 도림사 4.6Km/ 우회로). 이곳에서 오른편의 억새가 무성한 폐()헬기장으로 들어서면 원효골로 내려가게 되며, 왼편은 대장봉을 거치지 않고 배넘이재로 가게되는 우회(迂廻)로이다. 참고로 이곳 동악산의 이정표는 철판(鐵板) 위에다 방향표시를 그림으로 그려 놓았기 때문에, 꼼꼼하게 챙겨보지 않으면 낭패를 볼 수도 있으니 유의해야 한다.

 

 

 

 

헬기장에서 가파른 오르막길을 따라 10분 조금 넘게 오르면 동악산 최고의 높이지만 주봉(主峰)으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 형제봉이다. 그러나 형제봉이라고 등재되어 있는 지도(地圖)와는 달리 정상표시석을 대신하고 있는 팻말에는 성출봉(동봉)이라고 적어 놓고 있다. 산행 중에 만났던 모든 이정표(입간판)마다 형제봉이라고 적어놓고 있으면서도, 정상팻말에는 성출봉이라고 표기하다니 어인 망발(妄發)인지 모르겠다. 심지(心志) 곧은 어느 길손이 매직펜(magic pen)으로 형제봉이라고 적어 놓은 것이 보인다. 오는 길에 막걸리를 마시느라 4번이나 쉬었더니 벌써 4시간 가까이가 흘러버렸다. 체력이 고갈되기 쉬운 여름산행에서 한잔의 막걸리는 피로회복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성출봉 팻말의 맞은편에 벤치를 갖춘 작은 쉼터가 보이고, 그 뒤 너른 공터에는 허영호 등반기념 표석과 이정표(형제2, 국민관광단지 2.8Km/ 길상암 0.8Km, 도림사 2.4Km/ 원효골 2.6Km, 동악산 2.2Km, 도림사 4.5Km)가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서 오늘 산행의 백미인 공룡능선으로 가려면 왼편 길상암 방향의 철계단을 밟고 내려가야 한다. ()계단 위에 올라서면 진행방향에 부채바위에서 이어지는 공룡능선과 청류동계곡과 길상골, 그리고 동악산 정상과 신선바위 등이 잘 조망(眺望)된다.

 

공룡능선

공룡능선을 줌으로 당겨본 것

 

 

형제봉에서 가파른 철계단을 밟고 내려서서 공룡능선으로 향한다. 이어서 또 다시 나타나는 다른 철계단을 밟고 내려섰다가, 안부(팻말 : 동봉 철계단 660m, 위치번호 02~06)에서 다시 가파른 바윗길을 치고 오르면 부채바위이다. ‘저 문을 통과해 보세요.’ 부채바위로 오르는 길에 보이는 바위문(石門)을 통과해 보라고 꼬드겨보지만, 결코 날씬하다고 볼 수 없는 집사람과 영선씨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든다. 잘못하다가는 망신살이 뻗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부채바위의 뒤편은 뛰어난 전망대(展望臺)이다. 이곳에 서면 공룡능선의 기기묘묘(奇奇妙妙)한 바위들이 늘어서 있는 것이 잘 보이며, 그 뒤편의 동악산도 잘 조망된다.

 

부채바위

공룡능선과 뒷편의 동악산

 

 

부채바위를 내려서서 잠시 산죽(山竹)길을 걷다보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이정표 : 동악산 2.6km/ 도림사 1.8km/ 형제봉 0.7km). 형제봉에서 20분 정도 떨어진 지점이다. 오른편은 도림사로 곧장 내려가는 길이고, 공룡능선을 계속해서 오르내리고 싶다면 맞은편 동악산 방향으로 진행하면 된다.

 

 

 

공룡능선은 푸르름을 자랑하는 소나무와 기기묘묘(奇奇妙妙)한 바위들이 잘 어우러지고 있다. 일명 '동악산 공룡능선'이라 불리는 이 능선은 설악산 공룡능선에 빗대어 명명된 곳. 규모와 높이 면에서는 비교가 안될 만큼 작지만, 날카로운 암릉이 늘어서 있어 '작은 공룡능선'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듯하다. 능선이 비록 바윗길이지만 바위가 거칠지 않기 때문에 그다지 위험하지는 않은 편이다. 이런 곳에서는 발걸음을 재촉하지 말고 느긋하게 걸어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주변의 빼어난 풍광(風光)을 감상하면서 암릉을 오르내리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기 때문이다.

 

 

 

 

 

 

암릉 오르내리는 즐거움에 빠져 시간 가는 것을 모르고 걷다보면 진행방향 저만큼에 거대한 암봉이 나타난다. 암봉 위에는 기묘하게 생긴 바위 하나가 놓여 있다. 언젠가 마분봉에서 보았던 우주선바위와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조금 방향을 바꾸어보면 사람들이 꺼리는 모양((人糞)으로 변하기도 한다. 봉우리 뒤편은 수직(垂直)의 바위절벽이기 때문에 등산로는 이곳에서 암봉의 왼편 아래로 우회시키고 있다.

 

 

 

암봉에서 내려서는 길은 엄청나게 가파르기 때문에, 안전로프나 등산로 주변의 나뭇가지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쉽게 내려설 수 없을 정도이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힘겹게 내려서서, 물기 한 방울 없는 계곡(乾川)을 건너면 배넘어재에서 내려오는 주 등산로 만나게 된다. 형제봉에서 이곳까지는 1시간이면 충분하다.

 

 

 

배넘이재 갈림길에서 도림사로 향하는 등산로는 청류동계곡을 오른편과 왼편에 번갈아가며 끼고 이어진다. 세 번의 갈림길을 지나고 나면(공룡능선 갈림길 이정표 : 도림사 1.5km/ 동악산 2.2km/ 형제봉 1.7km/ 배넘어재 1.2km)(동악산 갈림길 : 동악산 1.8km/ 형제봉 1.7km/ 배넘어재 1.6km)(신선바위 갈림길 : 도림사 1km/ 동악산 1.9km, 신선바위 1.2km/ 동악산 1.9km/ 배넘어재), 청류동계곡을 가로지르는 철다리(3)를 건너 길상암 갈림길을 만나게 된다(이정표 : 형제봉 2km, 길상암 1.2km/ 도림사 0.4km/ 동악산 2.5km, 배넘어재 2.3km). 아까 지나왔던 공룡능선 초입의 길상암 갈림길에서 오른편으로 내려올 경우 곧바로 이곳에 이르게 된다.

 

 

 

 

길상암 갈림길에서 계곡의 물의 양이 많아지기 시작한다. 당연히 물의 양과 정비례(正比例)로 사람의 숫자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곳 청류동은 뛰어난 여름피서지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곳이기 때문이다.

* 청류동계곡은 하류로 내려올수록 평평한 암반(巖盤)들의 숫자가 늘어난다. 수많은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이 청류동계곡을 찾아왔던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계곡의 너른 암반에는 그들이 지은 한시(漢詩)들이 곳곳에 새겨져 있다. 하긴 이렇게 풍광(風光)이 빼어난 곳에서라면 어느 누군들 시인묵객이 되지 못하겠는가. 옥수(玉水)는 암반과 암반 사이에다 수많은 소()와 담()을 만들어 놓고 있다.

 

 

 

 

길상암 갈림길에서 청류동계곡을 가로지르는 철다리 두 개를 더 건너면 오른편에 도림사가 보인다. 도림사는 규모는 별로 크지 않지만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고찰(古刹)이다.

* 도림사(道林寺), 신라 무열왕 때(660) 원효(元曉)가 세웠는데, 그 당시 풍악(風樂)의 음률(音律)이 온 산을 진동하였으므로 동악산이라고 불리게 되었고, 도인(道人)이 숲같이 모여들었다 하여 도림사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 후 도선국사와 지환, 처익 등 스님들의 중창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문화재(文化財)로는 조선 숙종 9(1683)에 제작된 도림사 괘불(보물 제1341)이 있다. 최근에는 템플스테이(Temple Stay) 프로그램 운영 사찰로 지정돼 있기도 하다.

 

 

 

산행날머리는 도림사 주차장

도림사를 벗어나 주차장에 이르는 길도 왼편에 청류동계곡을 끼고 이어진다. 청류동 계곡은 너른 바위들이 유난히 많이 널려있다. 계곡의 맑은 물은 그 암반(巖盤)들을 넘거나 혹은 휘돌면서 흘러내려간다. 전남기념물 제101호로 지정돼 있는 청류동계곡은 옛날부터 수많은 시인묵객(詩人墨客)과 고승(高僧)들이 다녀갔던 곳으로 유명하다. 여름철에는 피서객들로 넘쳐나는 곳이기도 하다. 아니나 다를까 계곡은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