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수산(九岫山, 339m)
산행일 : ‘12. 11. 25(일)
소재지 : 전남 영광군 백수읍
산행코스 : 대각지→옥녀봉→상여봉→구수산→불복재→봉화령→가자봉→뱀골봉→덕산(산행시간 : 4시간)
함께한 산악회 : 월산악회
특징 : 구수산은 웅장(雄壯)하지도 그렇다고 빼어나지도 않다. 주능선에 서면 위도를 품고 있는 서해(西海)바다가 잘 조망(眺望)된다고는 하지만 그 또한 인근에 있는 다른 산에 비해 뛰어나지도 않다. 그런데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적지 않다고 한다. 이 산이 원불교(圓佛敎)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원불교를 창시(創始)한 소태산대종사가 이곳에서 태어났고, 고행과 구도의 길을 이곳에서 걸었으며, 또한 이곳에서 득도(得道)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구수산 언저리는 어는 곳 하나도 원불교와 관련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다.
* 소태산(少太山, 1891~1943). 원불교(圓佛敎)의 창시자(創始者)로서. 본명은 박중빈(朴重彬)이다. 소태산은 그의 호(號)인데, 원불교를 창립한 이후에는 제자들이 소태산 대종사(少太山 大宗師)라 불렀다. 7세 때부터 우주와 인생의 근본이치에 대한 의심에서 출발해 20년 가까운 구도생활 끝에, 26세 되던 해인 1916년 4월 28일 이른 새벽에 동녘 하늘이 밝아오는 것을 보고 드디어 우주(宇宙)와 인생(人生)의 근본진리를 확연히 깨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깨우침의 경지를 ‘만유가 한 체성이며 만법이 한 근원이로다. 이 가운데 불생불멸의 진리와 인과응보의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뚜렷한 기틀을 지었도다.’ 라고 표현했다. 그가 죽은 뒤에 그의 제자들은 소태산을 후천개벽(後天開闢)의 주세불(主世佛)로 존숭하고 있다. 원불교에서는 소태산이 열반(涅槃)한 6월 1일을 육일대재라 하여 기념한다. 1971년 소태산이 깨달음을 얻은 전라남도 영광의 영산성지 노루목에 그의 대각(大覺)을 기리는 '만고일월'(萬古日月)이라 새긴 기념비를 세웠다.
▼ 산행들머리는 원불교 영산성지(靈山聖地)앞 도로변
서해안고속도로 영광 I.C에서 빠져나와 23번 국도를 이용하여 영광읍까지 들어간 후, 시가지(市街地) 초입(初入)에 있는 단주사거리(영광읍 단주리)에서 오른편의 844번 지방도로로 옮겨 백수읍 방향으로 달린다. 영광읍 시가지를 빠져나오면 금방 만나게 되는 만곡사거리(군서면 만곡리)에서 다시 우회전 하여 842번 지방도를 따라 법성포 방향으로 들어가면 산행들머리인 연산성지(길룡리 영촌마을)에 이르게 된다. 영산성지 앞의 영천교(橋)를 건너 법성포 방향으로 2분(500m) 정도 더 들어가면 도로 왼편에 옥녀봉으로 올라가는 등산로가 보인다. 들머리에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원불교 창시자인 소태산대종사 생가(生家) 뒤로도 등산로가 개설되어 있으며, 등산객들의 대부분은 이 코스를 이용하여 옥녀봉으로 오른다.(이정표 : 제명바위 200m, 옥녀봉 600m, 삼밭재 2Km/ 영산성지사무소 500m)
▼ 산길은 가파르게 시작된다. 이곳으로 들어오면서 버스의 차창(車窓) 너머로 보이던 옥녀봉의 오른편 사면(斜面)은 서슬이 시퍼럴 정도로 날카롭게 서 있었다. 하긴 그런 경사면(傾斜面)으로 난 산길이 가파르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이 차라리 언감생심(焉敢生心)일 것이다.
▼ 산행을 시작하고 5분쯤 지나면 산길의 오른편에 높이가 5~6m쯤 되는 암벽(巖壁)이 보이고, 그 아래에 빗돌(碑石)이 세워져 있다. 들머리의 이정표에서 보았던 제명바위이다. 소태산대종사가 여덟 제자와 함께 ‘정관평(貞觀坪) 방언공사’를 준공(1958.12)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당시에 비석을 세울 비용이 없었기 때문에 정관평이 내려다보이는 바위 위에다 회(灰)를 바르고 정관평 방언공사의 진행과정을 적어 놓았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바위 위에 새겨진 원형이 심하게 마모되자, 1990년에 탁본하여 오석(烏石)에 복원해 놓았다고 한다. 재건한 비문은 국한문을 혼용한 제명을 '정관평 방언조합 제명바위'라 전서(篆書)하고 해서로 재건한 사유를 적어 놓았다.
* 제명바위의 원문(原文), '영광 백수 길룡 간석지 양처 방언조합 조합원 박중빈(朴重彬) 이인명(李仁明) 박경문(朴京文) 김성섭(金成燮) 유성국(劉成國) 오재겸(吳在謙) 김성구(金聖久) 이재풍(李載馮) 박한석(朴漢碩) 대정(大正) 7년 4월 4일 시(始) 대정 8년 3월 26일 종(終)'이라고 해서(楷書)로 쓰여 있다.
▼ 산길은 제명바위를 지나면서 더욱 가팔라진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숨이 턱에 찰 정도로 치고 오르면 정상어림에서 거대한 암벽(巖壁)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바위에다 흰색 페인트로 커다랗게 원(圓)을 그려 놓았다. 저 아래에 보이는 영산성지의 작품일 것이다. 그들이 믿는 원불교의 창시자인 소태산대종사가 옥녀봉의 아래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 원이 그려진 암벽(巖壁)에서 산길은 치고 오르기를 포기하고, 아예 왼편으로 우회(迂廻)를 시키면서 정상으로 향하고 있다. 암벽에서 정상까지는 금방, 아니 들머리에서 옥녀봉 정상까지가 금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20분이면 충분히 옥녀봉 정상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옥녀봉은 법성포를 바라보고 있다 하여 망성봉(望聖峰)이라고도 부른다. 옥녀봉은 소태산대종사가 7세 때부터 수양(修養)을 시작한 곳으로, 원불교도들은 수행의 표본으로 삼고 있다. 소태산은 일곱 살 때부터 옥녀봉에 올라가 하늘의 구름과 마을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고, 우주(宇宙)와 인생(人生)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옥녀봉의 바위에다 원불교의 상징인 원(圓)을 그려 놓았을 것이다.
▼ 옥녀봉에는 정상표지석은 눈에 띄지 않고, 대신 정상표지판만 세 개가 보인다. 그런데 그중 하나는 나뭇가지에 걸려있지만, 나머지 두 개는 바닥에 떨어진 채로 방치(放置)되고 있다. 그런데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표지판에 ‘원불교 청년회’라고 제작자가 적혀있는 것을 보고 이상한 생각이 드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설마 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것에는 제작자가 표시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겠지? 엉뚱한 생각을 하다가 실없는 웃음으로 끝을 맺고 주위를 돌아본다. 건너편에 영산대학교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왼편에는 수문(水門)의 역할을 겸하고 있는 범백교와 그 너머의 법성포 시가지가 잘 조망(眺望)된다.
* 영산성지(靈山聖地)가 위치한 백수읍 길룡리는 원불교를 창시(創始)한 소태산대종사가 탄생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성장과 구도의 과정을 거쳐 대각(大覺)이라는 종교적 체험을 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깨달음을 얻은 후, 그의 아홉 제자들과 함께 이곳에서 원불교를 창립(創立)했다고 한다. 전 세계 500개 교당에 100만 명의 신도를 자랑하는 교세를 증명이라고 하려는 듯 해마다 수많은 순례객(巡禮客)과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소태산이 태어난 생가(生家)터에는 초가집이 옛 모습으로 복원되어 있고, 생가터 남쪽 개울을 건너 노루목에는 소태산이 진리를 깨달았다는 대각지가 있다. 참고로 원불교의 성지로는 소태산대종사가 탄생하여 개교한 영광의 영산성지와 교화의 장인 연익산성지(익산시 신룡동), 그리고 교리를 초안하고 교강을 발표한 벽산성지 등이 있다.
▼ 옥녀봉에서 상여봉으로 가려면 가파르게 내려섰다가 다시 그만큼 올라가야 한다. 가파른 내리막 바윗길에는 안전로프까지 설치해 놓았지만, 아무도 밧줄에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내려선다. 로프에 의지해야할 만큼 위험하지는 않기 때문일 것이다. 안부에 내려서면 왼편으로 구간도실(九間道室)터에서 올라오는 길이 보이지만 무시하고 맞은편 능선으로 진행하면 된다. 상여봉으로 오르다가 잠깐 고개를 돌려보면 방금 지나온 옥녀봉이 안녕을 고하고 있다. 참고로 구간도실이란 소태산의 아홉 제자를 상징하여 건물을 아홉 칸으로 지었다는 원불교 최초 건물이다.
▼ 상여봉은 비석이 없는 묘(墓) 하나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곳도 역시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고, 앙증맞은 정상표지판 하나만 나뭇가지 위에 얹혀있다. 봉우리 옆의 바위 전망대(展望臺)에 올라서면 정관평(貞觀坪) 들녘과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으로 들어왔다는 법성포가 지척이다. 물론 발아래에는 와탄천의 배수갑문이 너른 평원(平原)과 함께 깔려있다. 옥녀봉에서 상여봉까지는 넉넉잡아 20분이면 충분하다.
▼ 등산로 주변의 나무들은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같은 활엽수가 주종을 이루고 가끔 소나무가 섞여서 푸름을 자랑하고 있다. 잿빛으로 앙상한 겨울나무에 소나무의 녹색이 어울리며 생각지도 않은 조화(調和)를 이루어낸다. 같은 성질을 가진 것들끼리만 모인 집단은 쉽게 지루해지기 쉽다. 이렇게 이질적인 집단이 섞여 조화를 이루어 낼 때가 훨씬 자극적이면서도 아름다운 광경(光景)을 연출(演出)해 낼 수 있을 것이다.
▼ 상여봉에서 구릉 같은 능선을 10분 조금 넘게 오르내리면 설레바위봉에 올라서게 되고, 이어서 10분 조금 못되게 더 걸으면 영산성지와 구수리를 잇는 임도(林道)가 지나가는 삼밭재에 이르게 된다. 물론 중간에 영산대학교로 내려가는 삼거리를 만나게 되지만 괘념치 말고 통과하면 된다.
▼ 삼밭재에서는 임도를 따르지 말고 곧장 왼편에 보이는 산길로 접어들어야 한다. 구수산으로 향하는 길은 잠깐 오르막다운 오름길을 선보이다가 이내 완만(緩慢)한 산길로 변해버린다. 가끔 시야(視野)가 열리는 곳에 서면 지나온 능선과 영산성지가 뚜렷하다. 걷기에 편안한 산길에서 여유를 부리며 걷다보면 이내 구수산 정상이다. 삼밭재에서 구수산 정상까지는 천천히 걸어도 20분이면 충분하다.(정상의 이정표 : 불복재 1.8Km/ 삼밭재 0.5Km)
▼ 구수산은 제법 널따란 분지(盆地)로 이루어진 정상을 나무들이 빽빽하게 둘러싸고 있는 탓에 전망(展望)이 일절 트이지 않는다. 아마도 오늘 오르게 되는 수많은 봉우리 중에서 가장 조망이 좋지 않을 것이다. 구수산 정상도 다른 봉우리와 마찬가지로 정상표지석은 눈에 띄지 않는다. 다만 다른 봉우리와 달리 정상표지판이 나무로 만들어져 있다. 구수산의 구(九)는 아홉이요, 수(岫)는 산봉우리이니 이 산은 산봉우리가 아홉 개인 산이란 뜻이다. 인근 사람들은 호랑이 아홉 마리가 동네를 둘러싸고 노리는 산세(山勢)라 하여 구호산(九虎山)이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아홉 봉우리는 옥녀봉과 마촌 앞산봉, 촛대봉, 장다리봉, 대파리봉, 공동묘지봉, 밤나무골봉, 설레바위봉, 중앙봉 등인데, 원불교 창시자 소태산 대종사의 아홉 제자가 이 아홉 봉우리 위에 각각 올라 기도를 드렸다고 하여 원불교에서는 구수산을 신성(神聖)시하다고 한다.
▼ 구수산 정상에서 일단 내려섰다가 다시 능선으로 올라선 후, 이번에는 산허리를 우회(迂廻)하여 오르면 불복재이다(이정표 : 구수산 2.5Km/ 봉화령 1.5Km/ 수두암 0.5Km). 사거리인 불복재에서 오른편을 내려서면 구수리로 연결되고, 왼편으로 진행하면 수두암에 닿게 된다. 구수산에서 불복재까지는 10분 정도가 소요된다.
▼ 불복재를 지나면서 주위 풍경(風景)이 갑자기 변해버린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앙상한 나뭇가지들 일색이던 주위풍경이 갑자기 녹색으로 변해 있는 것이다. 바닥의 풀들도 아직까지 푸름을 자랑하고 있고, 주변의 앙상한 참나무들도 역시 온통 푸른 나뭇잎들이 둘러싸고 있다. 그런데 나무를 둘러싸고 있는 나뭇잎이 참나무 본래의 이파리가 아닌 다른 식물의 잎이라는 게 다르다. 언젠가 남해 보리암과 고창 선운사에서 보았던 송악(An ivy : 남부지방의 산에서 잘 자라는 상록활엽성 만경목)을 닮았다.
▼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강한 탓인지 몰라도 유난히도 많은 나무들이 뿌리를 드러낸 채로 넘어져 있다. 뿌리가 넓적하게 옆으로 펴져 있는 것을 보면 지형(地形)의 특성 탓이 아닐까 싶다. 바위 위에 쌓여있는 흙의 두께가 얇을 경우에는 조금만 바람이 심하게 불어도 뿌리가 나무의 중심을 지탱해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 불복재를 출발해서 20분이 조금 넘게 걸으면 327봉에 올라서고, 조금 후에는 오늘 산행에서 유일한 바윗길을 만나게 된다. 보통의 바위산이라면 바윗길로 쳐주지도 않을 만큼 편안하고 짧은 바윗길이 끝나면, 또 다시 걷기에 부담이 없는 흙길로 바뀐다. 그리고 이내 봉화령에 올라서게 된다. 불복재에서 봉화령까지는 대략 40분 정도가 걸린다.
▼ 봉화령(烽火嶺)은 오늘 산행하는 구간에서 가장 높은(373.8m) 봉우리이다. 주봉인 구수봉(339m)보다도 더 높은 것이다. 그런데 왜 고개를 뜻하는 령(嶺)이라는 글자가 붙었는지 궁금하다. 봉화령에서 길은 두 갈래(봉화령 이정표 : 가자봉 2.2Km/ 모재봉 1.5Km)로 나뉘는데, 왼편은 갓봉과 모재를 거쳐 백수우체국으로 내려가는 길이고, 덕산마을로 가려면 북쪽 능선을 따라 진행해야 한다.
▼ 봉화령에 올라서면 처음으로 서해바다가 조망(眺望)된다. 드넓게 펼쳐지는 바다는 시원하기보다는 차라리 춥게 느껴지고, 백수읍 너머의 넓은 겨울들판은 황량하기까지 하다. 지금은 겨울의 초입인 것이다. 북쪽으로는 법성포가 살짝 고개를 내민다. 그 뒤로 선운산과 변산반도가 어렴풋하다. 굴비로 유명한 법성포는 우리나라에 최초로 불교(佛敎)가 유입된 곳이라고 한다.
▼ 백수읍 우체국을 들머리로 삼아 갓봉을 거쳐 봉화령으로 올라오는 능선, 이곳 봉화령과 구수산을 거쳐 옥녀봉까지를 잇는 종주 코스가 많이 이용된다.
▼ 봉화령에서 덕산으로 이어지는 길은 그야말로 순한다. 불과 400m에도 못 미치는 봉우리를 3.3Km의 긴 구간을 걸어 내려가다 보니 고도(高度)를 떨어뜨리는 것을 구태여 서두를 필요가 없었나 보다. 봉화령에서 15분 정도 내려오면 규격(規格)과 격식(格式)을 갖추어 쌓은 돌무더기를 만나게 된다. 돌이 쌓여있는 형태로 보아 봉화대(烽火臺)터로 보이는데도 안내판 하나 없이 버려져 있는 것이 안타깝다. 봉화대(烽火臺)의 정확한 명칭은 봉수대(烽燧臺)이다. 본래 낮에 올리는 불을 수(燧)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수는 낭연(狼煙)이라고도 하였는데, 이리의 똥을 태워서 연기를 피워 올렸기 때문이다. 이리의 똥을 태워 만든 연기는 바람이 불어도 흔들림이 없이 곧바로 하늘로 올라갔기 때문에 먼 곳에서도 연기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한편 밤에 피우는 것을 봉화라 불렀다. 봉화대 위에 길고(桔橰)라고 하는 틀을 세우고, 그 위에 쇠로 만든 둥우리 같은 것을 놓았다. 그리고 그 안에 땔감을 가득 넣어두고 있다가 긴급한 일이 발생하면 거기에 불을 붙였다. 그러면 하늘 높이 커다란 불꽃이 솟았고, 이 불꽃을 이용해 위급상황을 도성(都城)에 알렸던 것이다.
▼ 걷는 데 부담이 가지 않는 길이다. 낙엽이 수북하게 쌓여 푹신한 것이 마치 양탄자 위를 걷고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이기 때문이다. 울창한 숲에 가린 탓에 보이는 것이라곤 나뭇가지 밖에 없다. 별다른 구경거리가 없는 이런 길에서는 당연히 사색(思索)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소태산대종사도 이런 길을 걸으며 사색을 즐기다가 도(道)를 깨우쳤는지도 모를 일이다.
▼ 능선을 걷다보면 심심찮게 왼편으로 시야(視野)가 열린다. 서해바다가 바로 코앞이다. 가만히 귀 기울여보면 파도소리가 아련히 귓가에 맴도는데, 밀려왔다 밀려가는 바닷물이 하얀 포말을 만들고 있다. 드넓은 바다에는 꼬막껍질을 업어놓은 것 같은 작은 섬들이 드문드문 떠 있다. 가깝게는 보이는 저 섬들은 아마 칠산도, 송이도, 각이도일 것이다. 그렇다면 낙월도나 임자도는 수석(壽石)처럼 보이는 저 섬들 너머 어디엔가 웅크리고 있을 것이다.
▼ 오른편에는 영광지방의 나지막한 산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불갑산과 장암산, 그리고 태청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들이 하늘과 경계를 나누며 금을 그리고 있다. 뒤돌아보면 조금 전에 지나온 구수산의 능선이 꿈틀거리며 뒤따라오느라 정신이 없는데, 오른편 발아래에 보이는 대신저수지는 겨울철 추위에 멍이 들었는지 시퍼렇게 군청색(群靑色)을 띠고 있다. 건너편 산자락에 자리 잡은 농가에서 한줄기 밥 짓는 연기라도 피어오를라치면 을씨년스러운 겨울풍경(風景)이 한결 나아질 텐데 아쉽다.
▼ 봉화대터를 지나서도 산길은 꾸준하면서도 완만(緩慢)하게 고도(高度)를 낮추어 간다. 그러면서 중간 중간에 봉우리들을 만들어 놓는다. 그 중의 하나가 가자봉이다. 등산로 주변에서 가을의 정취를 풍기고 있는 억새를 구경하며 걷다보면 가자골 갈림길(이정표 : 뱀골봉 1.1Km/ 봉화령 2.2Km/ 가자골(해안공원) 0.5Km)을 지나 가자봉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가자골삼거리에서 왼편으로 내려서면 해상공원이다. 이곳에서 뱀골봉으로 하산하는 것 보다는 해상공원으로 내려갈 것을 권하고 싶다. 밋밋한 뱀골봉 능선보다는 서해바다와 기암절벽(奇巖絶壁)이 어우러지며 멋진 조화(調和)를 연출해내는 해상공원의 경관(景觀)을 보는 것이 몇 배가 더 낫기 때문이다. 봉화대터에서 가자봉까지는 대략 20분이 조금 못 걸린다.
▼ 가자봉에서 뱀골봉까지의 구간도 지나왔던 하산길의 풍경(風景)과 큰 변화가 없이 이어진다. 흙으로 이루어진 산길은 경사까지 완만(緩慢)하기 때문에 걷는데 아무런 부담이 없을 정도이다. 가자봉에서 20분 정도를 걸으면 뱀골봉(이정표 : 덕산 1.0Km/ 가자봉 1.1Km)이다. 반반한 바위로 이루어진 뱀골봉 정상에서 다시 한 번 시원스럽게 시야(視野)가 열린다. 서해바다에는 조그만 섬들이 돛단배마냥 떠돌고 있다.
▼ 산행날머리는 백수 해안일주도로
뱀골봉을 지나면서 등산로 주변은 새로운 모습으로 변한다. 참나무들 일색이던 산길이 어느 사이엔가 소나무로 바뀌어 있는 것이다. 하늘을 찌를 듯이 쭉쭉 뻗은 해송(海松)들이 늘어서 있는 길을 걷다보면 저만큼에 덕산마을이 보이고, 이내 산행이 종료되는 백수 해안일주도로에 내려서게 된다. 도로에 내려서면 맨 먼저 가을바람에 파도처럼 일렁이는 억새밭이 반긴다. 봉화령을 출발한지 1시간30분 가까이 되었다.
▼ 산을 내려서면 ‘백수 해안일주도로’이다. 구수산 산자락을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처럼 휘감으며 백수읍까지 이어지는 해안일주도로는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중 9위로 선정된 길이다. 유채꽃과 동백꽃 그리고 코스모스가 사시사철 꽃길을 연출(演出)하고, 아름다운 바다 풍광(風光)과 서해낙조(西海落照)가 빚어내는 자태가 한 폭의 그림과 같다고 해서 선정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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