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전산(金錢山, 668m)

 

산행일 : ‘15. 3. 7()

소재지 : 전남 순천시 낙안면

산행코스 : 불재구능수→돌탑봉궁굴재삼거리금전산헬기장금강암극락문(통천문)낙안온천금둔사(산행시간: 2시간40)

같이한 산악회 : 가보기산악회

 

특색 : 낙안(읍성)에서 바라볼 때 마치 큰 바위의 얼굴처럼 우뚝 서 있는 금전산의 옛 이름은 쇠산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100여 년 전부터 ()자에 ()자를 쓰는 약간은 속물스런 느낌까지 드는 이름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은 불가(佛家)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부처의 뛰어난 제자들인 오백비구(혹은 오백나한)중 금전비구에서 산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설마 일부러 속물스런 산 이름을 만들기야 하겠는가. 아무튼 금전산은 의외의 모습을 보여준다. 인근의 산들이 전부 전형적인 육산(肉山=흙산)으로 되어있는데 반해 유독 금전산만 바위산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산 전체가 바위산인 것도 아니다. 전체적으로는 육산의 느낌이 강한데 유독 정상부의 서쪽면만 첨탑처럼 솟아오른 암봉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때문에 산행은 산책 같은 편안함과 암릉만이 갖는 빼어난 눈요깃거리를 함께 즐길 수가 있다. 거기다 산행 후에는 낙안읍성이라는 문화재까지 들러볼 수 있으니 어디다 내놓아도 하나도 빠질 게 없는 괜찮은 산이라는 이야기이다. 이런 산이 어떻게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지 않았을까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산행들머리는 불재버스정류장

남해고속도로(영암-순천) 순천만 I.C를 빠져나와 2번 국도를 타고 순천방면으로 들어가다 연동삼거리(순천시 교량동)에서 좌회전, 58번 지방도를 따라 낙안읍성방면으로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산행들머리인 불재(버스정류장에는 낙안불재로 표기)’에 이르게 된다. 고갯마루에는 불재정류장과 불재농장이라고 적힌 노란 입간판이 눈에 띈다. 순천-완주고속도로 동순천 I.C에서 내려와 순천만정원을 거쳐 들어오는 방법도 있으니 참조할 일이다. 실제로 가보기산악회의 버스는 이 코스를 이용했다.

 

 

 

산행들머리는 낙안읍성 방면을 바라보았을 때 오른편으로 열린다. 들머리에 금전산등산로 이정표(불재)와 법황사 이정표가 세워져 있고, 몇 걸음만 더 걸으면 '금전산 안내도'를 만나게 되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임도는 일단 넓다. ‘SUV 차량이라면 충분히 통행할 수 있을 정도로 경사(傾斜)까지도 느긋하다. 조림(造林)이 잘 된 임도를 따라 5분쯤 걸으면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이정표도 보이지 않고, 길의 폭까지도 얼추 비슷하지만 이곳에서는 오른편, 그러니까 경사가 조금 더 가파르다 싶은 길로 들어서면 된다. 이어서 5분쯤 후에 왼편으로 대한불교일승종 소속의 사찰인 법황사가는 길이 나뉘나 이를 무시하고 곧장 진행하면 된다.

 

 

법황사갈림길에서 다시 5분쯤 더 오르면 다시 왼편으로 길이 나뉜다. 뒤편에 보이는 암릉에 이끌려 들어서보니 비닐하우스 모양의 허름한 건물에 연등(燃燈) 몇 개가 매달려 있다. 명품 후미대장이신 허고문님께 여쭈어보니 구능사라고 일러주신다. 그러나 말이 사찰(寺刹)이지 사찰이라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언제부턴가 내 의식 속에는 사찰이라면 당연히 번듯한 전각(殿閣)들을 연결시키고 있었던 모양이다. 스님들의 정진(精進) 장소인 사찰을 건물의 외관과 연관 지어서는 안 되는 데도 말이다.

 

 

구능사에서 산길은 가파르게 변한다. 그러나 다행이도 그 거리는 길지 않다. 8분쯤 후에는 집채보다 더 큰 바위 앞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버젓이 구능수라는 이름까지 갖고 있는 바위이다. 우람한 바위 벽 아래에는 사람 한두 명이 들어 갈만한 크기의 동굴이 있고, 2~3m 위쪽 바위벽에도 작은 냄비 뚜껑만한 구멍이 파여 있다. 구능수에는 재미있는 옛이야기 하나가 전해진다. 예전에 이곳에서 수도하던 한 처사(處士)가 있었는데, 바위 위 구멍에서 하루 분의 쌀이 매일 나와 연명을 했다 한다. 하루는 손님이 찾아와 식량이 모자라자 쌀이 더 나오게 하려고 부지깽이로 구멍을 쑤셔대자 쌀 대신에 쌀뜨물만 흘러내렸다고 한다. 바위 앞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구멍에 붙어있는 석영이 그때 흘러내린 쌀뜨물이 굳은 것이라고 적혀있다. 가지산을 답사하면서 만났던 쌀바위의 전설과 너무도 유사하다. 또한 바위 아래의 굴에 들어가면 신령스러운 석유구가 있다는데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얼핏 들여다볼 때 우물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산길은 오른쪽 산허리를 감아가며 위로 향한다. 구능수의 바위군락을 피하려다보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구능수에서 3~4분쯤 더 오르면 오른편에 바위들이 무리지어 있는 것이 보인다. 놓치지 말고 들어가 봐야 할 곳이다. 멋진 전망대이기 때문이다. 전망대에 서면 산행을 시작했던 불재 너머로 오봉산과 호사산이 차례로 도열하고 있다. 그 왼편에 보이는 들녘은 상사면일 것이다. 그리고 고개라도 돌려볼라치면 이번에는 올라야할 봉우리가 나타난다. 마치 투구의 뿔처럼 생긴 거대한 바위 하나가 유독 시선(視線)을 빼앗는다.

 

 

 

 

조망(眺望)을 즐긴 후에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이어지는 산길은 바윗길이 대부분, 덕분에 조망이 시원스럽다. 다만 조금 전에 보았던 풍광과 다를 것이 없기에 그냥 갈 길만 재촉한다. 그러다가 13~4분 후에는 아까 전망대에서 올려다볼 때 투구의 뿔 모양으로 보이던 바위 아래에 이르게 된다. 산길은 더 이상은 버티기 힘들다는 듯이 이곳에다 데크로 된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계단에서 또 다시 조망이 시원스럽게 터진다. 그리나 구태여 이곳에서 시간을 허비할 필요는 없다. 바위를 우회(迂廻)해서 오르면 또 다른 전망대가 나오는데 이곳에서의 조망이 더 뛰어나기 때문이다. 아까 전망대에서 보았던 전경이 또 다시 펼쳐지는데, 아까보다 더 넓고 더 또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특히 이곳 금전산과 함께 낙안의 양대 진산이라는 오봉산이 바로 코앞으로 다가온다.

 

 

 

 

이곳에서부터 다시 산길은 주능선을 따른다. 그리고 그 길은 가파르면서도 험상궂다. 그러나 다행이도 가끔 시원스런 조망이 터지기 때문에 오르는 게 고통스럽지만은 않다. 그리고 10분쯤 후에는 돌탑이 있는 ‘590m에 올라서게 된다. 산행을 시작한지 50분쯤 지났다. 돌탑봉에는 벤치 2개를 놓아두었다. 아마 이곳까지 오르느라 고생한 등산객들에게 잠시나마 쉬어가라는 배려인 모양이다.

 

 

 

돌탑봉에 올랐다면 고생은 일단 끝났다고 보면 된다. 이어지는 산길은 흙길인 데가 경사(傾斜)까지 밋밋하기 때문이다. 돌탑봉을 내려가다 보면 왼편으로 시야(視野)가 열리는 전망바위를 만나게 된다. 낙안읍성과 동교저수지, 그리고 낙안들녘이 넓게 펼쳐진다. 그 너른 들판을 병풍산과 백이산 등이 산군(山群)을 이루며 느슨하게 둘러싸고 있다.

 

 

 

조망을 즐기다가 다시 산행을 이어가면 안부에서 궁글재를 만나게 된다. 돌탑봉에서 17분 정도가 걸렸다. 벤치를 갖춘 쉼터의 역할까지 겸하고 있는 궁글재는 삼거리(이정표 : 금전산정상 1.7Km/ 낙안휴양림 1.4Km/ 불재 1.7Km), 이곳에서 왼편은 휴양림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정상으로 가려면 계속해서 능선을 타야 함은 물론이다.

 

 

궁굴재를 지나면서 산길은 다시 오르막길로 변한다. 그러나 오르는데 조금도 부담이 없으니 그저 느긋하게 걷기만 하면 된다. 가는 길에 소나무 가지 아래로 나타나는 돌탑봉의 암릉도 구경하면서, 한껏 여유를 부리다보면 14분 후에는 커다란 소나무 아래에 벤치가 놓여있는 무명봉(557m)에 올라서게 되고, 이어서 12~3분 후에는 어느덧 정상에 이르게 된다. 정상 조금 못미처, 그러니까 50m도 채 떨어지지 않는 지점에 삼거리(이정표 : 금강암 0.4Km, 낙안온천 1.8Km/ 오공재 2.4Km/ 불재 3.4Km)가 있다. 오른편은 오공재에서 올라오는 길이니 신경 쓸 필요 없이 눈앞에 보이는 정상으로 가면 된다. 들머리에서 정상까지는 1시간 30분이 걸렸다.

 

 

 

 

 

커다란 소나무 몇 그루가 외로운 정상에는 예쁘장하게 생긴 정상표지석 외에도 커다란 돌탑 2기와 벤치, 그리고 흉물스럽게 몸통을 드러낸 삼각점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고는 볼 수 없지만 나름대로 열리기는 한다. 북동쪽에는 조계산과 고동산이 그리고 동쪽에는 광양의 백운산이 나타나지만 그다지 또렷하지는 않다. 날씨가 좋을 때에는 무등산과 하동의 금오산까지 눈에 들어온다는데 말이다.

 

 

 

하산은 금강암 방향이다. 하산을 시작해서 70~80m쯤 내려가면 헬기장을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의 조망(眺望)도 나쁘지 않다. 남쪽으로 오봉산과 제석산이 뚜렷하고 서쪽 산자락 아래에는 낙안면의 너른 들녘이 펼쳐진다. 들녘 가운데에 들어앉은 낙안읍성은 보너스(bonus)로 치면 될 일이다. 그리고 그 너머로는 호남정맥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조망을 즐기려는데 총무님이 부른다. 그리고 딸기에다 곶감까지 건네준다. 내려오는 버스 안에서도 이것저것 챙겨주었는데, 그런 호의가 집사람에게는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다음에는 과일이라도 넉넉하게 챙겨오자고 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하산을 시작한지 10분 조금 못되면 편백나무 군락이 나오면서 진행방향으로 시야(視野)가 열린다. 그리고 잠시 후에 만나게 되는 전망바위에서는 아예 뻥 뚫려버린다. 전망바위 위에 올라서면 빼어난 자태의 암릉들이 마치 한 폭의 산수화(山水畵)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가운데에 지붕만 보이는 것이 금강암이고 왼편에 보이는 거대한 바위봉은 원효대이다. 개미처럼 작은 크기의 사람들이 올라있는 봉우리는 물론 의상대일 것이다. 그리고 그 뒤편에는 낙안의 너른 들녘과 읍성(邑城)이 배경처럼 자리 잡고 있다. 의상대 돌탑 뒤로는 백이산과 장군봉 등 보성의 산들도 시야(視野)에 들어온다. 이건 숫제 그림이다. 그것도 잘 그린 한 폭의 풍경화(風景畵) 말이다.

 

 

 

 

 

금강암으로 내려온 등산로는 바위 아래 모셔진 플라스틱(plastic) 지붕의 산신각(이정표 : 낙안온천 1.4Km/ 휴양림관리소 1.5Km/ 금전산정상 0.4Km))에 이어 자연스레 의상대로 이어진다. 도중에 부처님 두 분을 볼 수 있다. 낙안읍성을 굽어보는 듯한 절벽의 한 쪽에 관음좌상마애불이 새겨져 있는데 아무래도 조성된 지는 얼마 되지 않은 것 같다. 그것보다 눈길을 끄는 부처님은 나무로 만들어진 난간의 너머, 즉 바로 아래가 절벽인 의상대의 끄트머리 바닥에 있다. 일명 자연석조여래좌상이다. 바위 위가 움푹 패여 있는데, 이곳에 물이 고이면 그 생김새가 영락없이 부처님으로 환생한다고 한다. 마치 오늘처럼 말이다. 물이 없을 경우에는 그냥 지나치기 십상일 수밖에 없음은 물론이다. 누군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지니 그냥 흘려듣지 말고 유념해 두었다가 놓치지 말고 가슴에 담아볼 일이다.

 

 

 

 

관음보살상 너머로 금강암이 바라보인다. 집채보다도 훨씬 큰 바위들이 절집 주위를 빙 둘러싸고 있는 것이 풍수지리(風水地理)에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가히 명당(明堂)을 꿰차고 앉았다. 거기다 원효대와 의상대가 문설주 노릇까지 해주고 있으니 잘생기기까지 했다. 하긴 암자에선 의상대를 서대(바위), 원효대를 동대(바위)라고 부른단다.

 

 

의상대의 오른편 바위절벽, 우락부락한 근육질로 이루어진 것이 금강암 방향의 암릉에 비해 하나도 뒤떨어질 것이 없어 보인다.

 

 

의상대에 서면 거대한 바위군락이 맞은편에서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바로 원효대이다. 그러나 저 봉우리는 그저 눈요기로만 만족해야 한다. 올라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더 힘차면서도 위용 있게 보인다.

 

 

의상대를 빠져나오면 송광사의 말사인 금강암(金剛庵)이다. 돌로 쌓은 벽에 기와만 얹어놓은 암자(庵子)는 절집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동네의 여염집에 가깝다. 백제 위덕왕(威德王) 때 검단선사(黔丹禪師)가 창건(創建)하고 신라의 의상대사가 중수(重修)했다는 금강암은 송광사 16국사의 마지막 국사인 고봉화상이 수행하는 등 한때 선풍을 드날렸다. 그때만 해도 원통전, 지장암, 선원, 삼성각 등 부속건물을 지닐 정도로 규모를 제대로 갖춘 사찰이었으나 194810월 여수·순천사건 때 불타버렸다고 한다. 1992년 작은 집을 지어놓은 게 지금의 암자가 되었단다.

 

 

암자를 내려서면 거대한 암벽(巖壁) 아래에서 정진(精進)에 방해가 되니 조용히 해 달라등 서너 개의 당부사항이 적혀있는 안내판을 만나게 된다. 이미 암자를 빠져나왔으니 상관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맨 아래에 적혀있는 길이 매우 비좁고 위험하다는 경고만 유념하면 된다. 그러나 안내판의 문구와는 달리 산길은 그다지 위험하지 않다.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얘기이다.

 

 

돌계단을 따라 잠시 내려가면 집채만큼 큰 바위들이 뒤엉킨 굴이 하나 나타난다. ‘극락문(極樂門)’이라는 어엿한 이름까지 갖고 있는 통천문(通天門)이다. 이 문을 통과하려면 'S' 모양으로 돌아내려가야 한다. 문 위에서 돌아 내려가면 문 아래에 이르게 되는 형태이다. 만일 이 문을 거꾸로, 그러니까 아래에서 위로 통과한다면 다른 세상으로 빠져나온 느낌이 들 것 같다. 문을 통과하자마자 저만큼 위에 부처님이 계시는 절집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때에 사바세계에서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선 느낌이 들지 않을까?

 

 

 

내려가는 길은 또렷하다. 아마 금강암의 신도들이 종종 오르내리면서 길은 닦아놓은 덕분일 것이다. 거기다 더해 이곳 순천시가 등산로 정비에 많은 심혈을 쏟아 안전함까지 더해졌다. 이런 때는 주변 풍광을 즐겨볼 일이다. 내려가는 길에 가끔 만나게 되는 기암(奇巖)에다 눈길을 맞추기도 하고, 또 어떤 곳에서는 고개를 뒤로 돌려보기도 한다. 금강암을 가운데에 끼고 있는 의상대와 원효대가 첨탑처럼 우뚝 솟아오른 풍광을 또 다시 내보여준다.

 

 

 

 

산행날머리는 금둔사

눈요깃거리를 즐기면서 내려서다보면 이내 857번 지방도에 만나게 되면서 산행은 사실상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총 2시간30분이 걸렸다. 중간에 막걸리를 마시느라 쉰 시간을 감안할 경우에는 2시간20분이 걸린 셈이다. 내려서는 곳에서 길 건너에 보이는 건물은 낙안온천이다. 아직 입소문은 덜 탔지만 물이 좋다고 소문났으니 산행 후의 피로를 풀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강알칼리성 온천이라서 비누가 필요 없을 정도로 물이 매끄럽다고 하니 말이다. 산행이 종료되는 금둔사는 이곳에서 오른편, 그러니까 오공재쪽으로 600m쯤 더 가야만 만날 수 있다. ‘태백산맥의 저자이자 이 지역이 배출한 걸출한 소설가인 조정래선생의 이름을 딴 857번 지방도를 따라서 말이다.

 

 

도로를 따라 20분 조금 못되게 걸으면 도로 오른쪽에 금둔사(金芚寺)를 알리는 작은 표지판과 함께 금둔사 입구가 나온다. 금둔사 입구에서 오르막길을 따라 약 100m쯤 가면 금둔사 일주문이 나오고, 일주문 위에서 선암사의 승선교(昇仙橋 : 보물 제400)를 닮은 홍교(虹橋 : 다리 밑이 반원형이 되게 쌓은 다리)를 건너면 금둔사의 대웅전이다. 한국불교태고종 소속의 사찰인 금둔사(전통사찰 제79)1530(중종 25)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금둔사 재금전산(金芚寺 在金錢山)’이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사찰이 존속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는 있으나 정확한 창건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으며, 그저 백제 때 지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지 모르나 폐사(廢寺)되었다가 1984년 이후 지허선사가 불사를 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존 건물로는 대웅전과 태고선원, 유리광전, 약사전, 설선당, 산신각, 범종각, 일주문, 요사 등이 있다. 이외에도 구산선문 중 사자산문을 연 철감(澈鑒)국사와 그의 제자인 징효(澄曉)대사가 수행했다는 동림선원(桐林禪院)터 등 다른 볼거리들이 여럿 있지만 부족한 시간까지 쪼개어가며 둘러봐야 할 만큼 중요하지는 않다.

 

 

 

금둔사에 들렀다면 가장 먼저 찾아봐야할 곳은 삼층석탑(金芚寺址三層石塔, 보물 제945)’석불입상(金芚寺址石佛碑像, 보물 제946)’이다. 아까 건넜던 홍교에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좁은 돌계단길이 나오고, 그 끄트머리에 삼층석탑 한 기와 비석 형태의 독특한 석불입상 하나가 숲속 한켠에 조용히 자리하고 있다. 물론 곳곳에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무너져 있던 것을 1979년에 복원한 삼층석탑은이중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부를 올린 통일신라시대의 탑으로 균형이 퍽 잘 잡혀 있다. 전체 높이는 약 4m, 하층기단에 우주와 탱주를 모각했으며 상층기단 각 면에는 팔부신중(八部神衆)2구씩 선명하게 조각하였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씩 별개의 돌로 얹었으며, 각 층 몸돌에는 우주를 모각(模刻)하였다. 지붕돌의 층급받침은 모두 5단씩이며 상륜부는 아쉽게도 남아 있지 않다. 또 다른 국보급 문화재인 석불비상은 삼층석탑과 마찬가지로 9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에서 고려시대로 넘어오면 불상 조각의 수법이 추상화되는 형태를 보이는데, 이곳의 석불은 추상화되기 이전의 신라의 사실적인 조각 수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수작이다. 얼굴 모습과 옷의 조각에서 실제 사람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얼굴이 둥글고 온화하며, 특히 코와 입술선이 곱다. 신체는 환조에 가깝게 불룩하며, 옷의 주름은 형식적이지만 법의는 살결이 보일 듯 얇다. 가슴에 끌어 모은 손가락이나 발가락 등 세부묘사 까지도 소홀히 하지 않은 것이다.

 

 

국보급 문화재를 구경했으면 이번에는 홍매화를 만나볼 차례이다. 어제가 경칩(驚蟄)이었으니 계절적으로는 봄이 맞다. 하지만 봄이 여기저기 남아있는 겨울의 흔적을 지우기엔 아직 만만치 않은 것이다. 봄과 겨울이 밀고 당기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봄의 기운이 센가 싶더니 겨울인 듯 찬바람이 불어오기도 한다. 당연히 꽃소식이 전해지려면 아직은 더 있어야한다는 얘기이다. 그러나 홍매화만은 예외이다. 그 증거는 금둔사에서 찾을 수 있다. 산신각 옆이나 요사채의 뒤편으로 가면 만나게 되는 금둔사의 홍매화는 수령은 얼마 되지 않으나 거제도의 구조라 초등학교(분교)에 있는 백매에 이어 가장 빨리 피는 매화의 하나이다. 이들 매화나무는 납월매(臘月梅)’라고 불린다. ‘납월은 음력 섣달을 가리키는 말이므로 금둔사 매화나무는 설중매(雪中梅)’, 즉 눈 속의 매화가 된다. 그리고 요사채를 빠져나오는 길에 또 다른 매화나무가 보인다. 이번에는 청매화이다. 그러나 청매화가 꽃망울을 열기에는 아직은 때가 이른 모양이다. 이제야 몽우리를 키워가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역시 홍매가 청매보다 훨씬 더 일찍 꽃망울을 터뜨린다는 것이 증명되는 순간이다.

 

 

귀경 길에 잠깐 낙안읍성(樂安邑城 : 사적 제302)에 들렀다. 기름진 땅에서 온 백성이 평안히 산다는 낙토민안(樂土民安)’의 뜻을 지닌 낙안(樂安) 땅에 세워진 이 읍성(邑城)은 조선 전기에 쌓은 것으로 전북의 고창읍성, 충남 서산시의 해미읍성과 함께 조선 3대 읍성으로 꼽힌다. 읍성은 요즘 말로 하면 지방계획도시에 해당한다. 처음으로 토성(土城)을 쌓은 때는 조선 태조 6(1397), 낙안 출신의 전라도 수군절제사 김빈길 장군이다. 왜구(倭寇)의 잦은 침입을 막고자 해서였단다. 석성(石城)으로 중수된 것은 그로부터 300년 후다. 인조 4(1626) 임경업 장군이 낙안군수로 부임해 4~5높이의 성벽을 쌓았단다. 지금의 낙안읍성은 국내 유일의 살아 있는 민속촌으로 이름 높다. 223108(67490) 면적에 300여동의 초가가 옹기종기 모여 있고, 그 안에 100여 세대 300여 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마을은 잘 보존된 전통가옥을 포함해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성곽·객사·비각 등 다수의 문화재도 보유하고 있어 과거의 생활상을 짐작하게 한다. 또 낙풍루·쌍청루·낙민루의 세 큰 문이 성 안의 도로와 긴밀히 연결되며 네 곳에 치성(雉城 :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을 두어 외적을 막으려 한 데서는 조상의 지혜가 엿보인다.

 

 

읍성(邑城) 앞에서 바라본 금전산, 봉우리 아래의 암석지대가 마치 얼음처럼 보여 실제보다 더 높고 강하게 느껴진다. 아마 이곳에서 바라본 금전산의 풍광이 가장 빼어날 것이다. 읍성으로 들어가는 것을 사양하고 입구에 있는 식당가로 들어선다. ‘낙안읍성은 이번이 벌써 세 번째, 4천원이나 되는 비싼 입장료를 물면서까지 또 다시 둘러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신 이 지방의 명물인 꼬막을 먹어보기로 결정을 내렸다. 인근 득량만과 여자만에서 갓 잡은 꼬막으로 요리한 정식이 일품인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 짐작은 빗나가지 않았다. 어쩌면 지난해에 들렀던 꼬막정식의 본고장 벌교에서 먹어본 것보다 한 수 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다만 참꼬막이 아닌 새꼬막을 재료로 사용한다는 것만 빼면 말이다. 벌교에서는 외형(外形)이 드러나는 꼬막들은 모두 참고막을 사용하고 있었다.

 

에필로그(epilogue), 이번 주말 산행은 어는 산으로 갈지를 갖고 유독 고민을 많이 해야만 했다. 웬일인지 가보지 않았던 산들을 공지한 산악회들이 두어 개 더 있었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선택한 곳은 금전산, 인터넷 검색을 해본 결과 생각보다 산세(山勢)가 뛰어난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버스에 오르고 보니 오늘도 역시 미안한 생각부터 먼저 든다. 버스 안이 온통 빈자리 천지인 것이다. 오늘도 역시 산악회 최사장님께서 손해를 감수하신 모양이다. 우리야 안 가본 산을 답사(踏査)할 수 있어서 좋지만 이런 손해를 심심찮게 감수해야만 하는 최사장님은 무슨 죄란 말인가.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면 서로서로 좋을 텐데 아쉽다. 요즘 유행하는 -(win-win)’이라는 화두(話頭)가 생각나기에 하는 말이다. 아무튼 손해를 감수해가면서까지 산행을 진행해 주신 산악회 운영진께 감사드리며, ‘이것저것 챙겨줘서 너무 고맙다는 말을 총무님께 꼭 전해달라는 집사람의 부탁까지 함께 전해드립니다.

화학산(華鶴山, 613.8m)-금성산(錦城山, 468m)-개천산(開天山, 497.2m)-천태산(天台山, 478.1m)

 

산행일 : ‘15. 2. 15()

소재지 : 전남 화순군 청풍면과 춘양면 그리고 도암면의 경계

산행코스 : 청풍리임도화학산접팔재금성산깃대봉개천산홍굴재천태산거북바위개천사주차장(산행시간 : 5시간)

함께한 산악회 : 청마산악회

 

특징 : 오늘은 지도(地圖)에 산()으로 표기된 것들의 숫자만 헤아려도 무려 네 개나 된다. 그런데 이 네 개의 산들은 하나의 능선으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산세(山勢)들은 너무나 다르다. 화학산과 삼성산은 바위 하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전형적인 육산(肉山)이지만, 개천산과 천태산은 전국의 어느 골산(骨山)들에도 뒤지지 않을 정도의 근육질을 자랑하는 암릉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때문에 산행은 극()과 극을 한꺼번에 경험할 수 있게 이어진다. 초반에는 마치 평지와 같은 느낌의 능선을 걷는가 하면, 후반부에는 스릴(thrill) 넘치는 바윗길을 타게 된다. 거기다 천연기념물(天然記念物, natural monument)비자나무 숲(483)’과 전통사찰(傳統寺刹)로 지정된 개천사(52)’까지 끼고 있으니 억지로라도 한번쯤은 찾아볼만한 산이다.

 

산행들머리는 청용리(화순군 청풍면)

호남고속도로 문흥 J.C(광주시 북구)에서 제2순환로로 갈아타고 지원교차로(동구 용산동)까지 와서 이번에는 22번 국도를 타고 화순읍까지 온다. 이어서 29번 국도를 타고 보성방면으로 달리다가 이양면에서 839번 지방도로 옮긴 후에, 청풍면소재지에서 차천을 가로지르는 상촌교를 건넌 후 왼편에 보이는 청용길로 들어서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산행들머리인 청용리에 이르게 된다.

 

 

 

마을 앞에서 왼편으로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들머리에 이정표(화악산 2.5Km)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진행방향에 보이는 정자(亭子)를 기점으로 삼으면 될 일이다. 동네로 들어서는데 주민 한분이 마을로 들어오기 전의 삼거리에서 산행을 시작했으면 편했을 거라고 알려주신다. 등산객들 대부분이 그곳에서 산행을 시작하는 모양이지만 어디서 시작하던지 큰 차이가 없으니 하등에 문제될 것이 없다.

 

 

정자 앞에서 오른편으로 크게 방향을 튼 골목길은 마을의 한 가운데를 통과한다. 동네 안길은 돌담이나 토벽(土壁)에 담쟁이 넝쿨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우리가 어릴 때 보아오던 풍경 그대로이다. 그런 풍경은 마을을 통과하기 직전에 만나게 되는 우물에서 마지막 방점을 찍는다. 집집마다 수도가 놓인 지금에야 그 효용을 잃었겠지만 한때는 저곳에서 이 동네의 모든 소문들이 확대 재생산 되었을 것이다. 온 마을 아낙네들이 모여 방금 텃밭에서 따온 채소를 씻거나 간단한 손세탁들을 하면서 말이다. 누군가 얹어놓은 플라스틱 바가지는 목마른 길손들을 위한 배려인가 보다.

 

 

 

청용마을을 통과하면 잠시 후에 임도(이정표 : 화악산 정상 3Km/ 주차장 가는 길 500m/ 청용마을 500m)를 만나게 되고, 이곳에서부터는 임도(林道)를 따르게 된다. 물론 왼편은 주차장에서 올라오는 길이다. 경사(傾斜)가 거의 없는 임도는 바닥을 넓적한 석판(石板)으로 깔아 놓았을 정도로 정비가 잘 되어 있다. 지난 해 겨울 발칸반도에 갔을 때 깊은 인상을 받았던 산책로가 생각날 정도로 멋진 길이다. 이렇게 좋은 산길을 만들어주신 화순군청 관계자분들께 감사를 드려본다. 비록 이곳 화순군에 있는 산에 올 때마다 드리는 인사지만 말이다.

 

 

산길은 바닥만 고운 게 아니다. 가는 길에 순국열사 무명용사 충혼위령비도 만나게 되고, 누군가가 서툴게 쌓아올린 돌탑들도 눈에 띈다. 화학산은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슬픈 상처가 남아 있는 산이라고 하다. 19514, 대대적인 빨치산(partisan) 토벌작전으로 혈전이 벌어져 적어도 500, 많으면 1000명이 넘는 귀중한 인명이 희생된 비극의 현장이라는 것이다. 그때 희생된 영혼들을 위로하기 위한 비()가 아닐까 싶다.

 

 

이어서 얼마 후, 그러니까 산행을 시작한지 30분 남짓 지나면 약수터에 이르게 된다. 약수터는 정자(亭子)와 벤치 그리고 운동기구까지 갖춘 쉼터를 겸하고 있다. 마침 물맛까지 좋은 편이니 잠시 쉬면서 식수를 보충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정상으로 가는 길은 이곳에서 두 갈래(이정표 : 화학산 급경사 600m/ 화학산 정상 900m)로 나뉜다. 오른편에 보이는 길은 급경사(急傾斜) 오르막길, 시간에 쫒기는 것도 아니기에 왼편으로 향한다. 조금 더 걷더라도 편하게 올라보기 위함이다.

 

 

 

약수터 근처에서 임도는 끝을 맺고 이번에는 오솔길로 변한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가파른 오르막길로 변한다. 드디어 산행다운 산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산길이 가파르게 변해도 올라가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다. 조금만 가파르다 싶으면 어김없이 통나무로 계단을 만들어 오르는데 도움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오솔길로 들어선지 15분쯤 지나면 엄청나게 널따란 헬기장에 올라서게 된다. 이곳에서 정상은 등산안내도가 세워진 오른편으로 열린다. 왼편에 보이는 능선을 따를 경우에는 땅끝지맥이 분기(分岐)되는 호남정맥 상의 노적봉(430m)에 이르게 된다. 또한 땅끝지맥’ 1구간에서 가장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는 각수바위도 만나게 된다.

 

 

헬기장에서 정상을 향해 올라서면 잠시 후에 삼거리(이정표 : 접팔재 1.9Km/ 청용마을입구 3Km/ 삼개봉 1.0Km, 각수바위)가 나온다. 삼거리의 바로 위가 바로 화학산 정상이다. 다음에 가야할 곳이 접팔재이니 정상을 오른 후에는 당연히 이곳 삼거리로 되돌아 내려와야만 한다. 구릉(丘陵) 모양의 널따란 정상에는 정상표지석과 삼각점 외에도 무인산불감시탑과 이곳이 고산철쭉의 군락지(群落地)임을 알리는 안내판 등이 세워져 있다. 화학산은 산세(山勢)가 학()이 날개를 펼쳐놓은 것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풍수리지(風水地理) 상으로 볼 때 큰 화학산과 작은 화학산이라는 한 자웅(雌雄)의 학이 날개를 활짝 펴고 나는 형상인 화학귀소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정상에는 묘()들이 몇 기() 보인다. 들머리에서 화학산까지는 50분 정도가 걸렸다.

 

 

 

 

정상에서의 시야(視野)는 막힘없이 사방으로 뻥 뚫려있다. 한마디로 조망이 일품인 것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정상의 한쪽 귀퉁이에다 팔각의 전망데크를 만들어 등산객들의 조망(眺望)을 돕고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정자였다는데 등산로를 정비하면서 새로 만든 모양이다. 그러나 비가 내리기 일보 전인 오늘은 시계(視界)가 썩 좋지 않다. 그저 금성산과 그 뒤에 있는 개천산 등이 희미하게 나타날 따름이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보림사가 있는 가지산과 나주호()까지도 볼 수가 있다는데 말이다.

 

 

아까의 삼거리로 내려와 이번에는 접팔재방향으로 내려선다. 능선을 따라 난 길은 한마디로 유연하다. 큰 오르내림이 없이 고만고만한 봉우리들을 연결시키면서 이어지는 것이다. 오늘처럼 질퍽거리지만 않는다면 산악마라톤 코스로 딱 좋을 것 같다. 하긴 오늘도 뛰다시피 했다. 물론 심심찮게 나타나는 질퍽거리는 곳을 피해가면서 말이다. 산길은 가는 길에 성적골(정상으로부터 0.4Km)과 동구바골(정상으로부터 1.6Km) 등에서 갈림길을 만든다. 이정표가 낡은 탓에 길 찾기에 도움이 되지 않으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갈림길에 신경 쓰지 말고 그저 능선을 따른다 생각하며 진행하면 되기 때문이다.

 

 

정상에서 내려선지 25분쯤 지나면 능선의 허리를 싹둑 자르며 이어지는 널따란 임도(林道)에 내려서게 된다. 접팔재(이정표 : 깃대봉/ 청풍면 백운리 3.0Km/ 우치마을 3.0Km/ 화학산 정상 2.0Km)로서 청풍면 백운리와 도암면 우치리를 잇는 산길이 지나는 고갯마루이다.

 

 

산길은 임도를 건너 맞은편 능선으로 연결된다. 산길의 풍경은 접팔재를 지나서도 변하지 않는다. 널따란 산길은 밋밋한 능선을 따라 평탄하게 이어지는 것이다. 다만 뒤편에서 화악산이 계속해서 따라오고 있다는 것이 다르다면 다른 점일 것이다.

 

 

 

 

접팔재에서 5분쯤 지나면 오른편 방향이 떨어져 나간 이정표(개천산 2.5Km/ 접팔재 0.4Km, 화학산 2.3Km) 하나가 나타난다. 이곳에서 몇 발짝만 더 오르면 이정표가 없는 또 다른 삼거리가 나온다. 금성산은 이곳에서 오른편에 보이는 능선를 따라야 한다. 그리고 금성산을 둘러보고 난 뒤에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야만 한다. 오늘 오르는 네 개의 산과 한 개의 봉()인 시루봉은 공통점 하나를 갖고 있다. 정상들이 모두 등산로에서 약간씩 빗겨나 있다는 것이다. 많게는 500m정도에서 적게는 몇 십m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떨어져 있는 것이다. 때문에 정상을 둘러보고 난 뒤에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나와만 하는 것도 어김없이 똑 같다.

 

 

어른의 허리춤이나 찰 정도로 낮게 자란 산죽(山竹) 사이로 난 산길을 지나서 얼마간 더 걸으면 금성산 정상이다. 정상은 아무런 특징이 없는 그저 그렇고 그런 밋밋하게 솟아오른 봉우리일 따름이다. 거기다 정상석이나 삼각점은 물론이고 그 흔한 이정표 하나 세워져 있지 않다. 누군가 매직펜(magic pen)으로 살아있는 나무 기둥에다 금성산 469m’라고 적어 놓았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정상인줄도 모르고 지나치기 십상이었을 것이다. ‘능선삼거리에서 금성산을 다녀오는 데는 17분 정도가 걸렸다. 화학산에서 금성산까지는 40분 남짓 걸렸다.

 

 

 

삼거리로 되돌아와 또 다시 주능선을 따른다. 삼거리에서 내려서자마자 거대한 바위가 하나 나타난다. 오늘 산행 중에 처음으로 보는 바위이다. 이제부터 볼거리가 많은 바윗길이 시작되나보다 하는 기대는 허망하게 끝나버린다. 능선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또 다시 평범한 흙길로 돌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는 없다. 내려가는 길에 보면 험상궂을 정도로 날카롭게 서있는 산봉우리가 진행방향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저 정도라면 바위산이 분명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맞은편 산봉우리로 올라가는 길은 험하기 짝이 없다. 가파르게 오르던 산길에 바위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끝내는 안전로프까지 매달아 놓았다. 로프에 의지해야할 정도로 험하게 변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러나 조금 힘이 들 따름이지 위험하지는 않으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금성산 입구 삼거리를 출발한지 13분 정도가 지나면 무명봉에 올라서게 된다. 봉우리 위에 세워진 이정표(임도끝 0.4Km/ 등봉재 0.8Km/ 접팔재 1.1Km)에는 헬기장삼거리라는 이름표가 매달려 있다. 이곳에서는 오른편 등봉재 방향으로 내려서면 된다. 그러나 내려서기 전에 먼저 할 일이 있다. ‘삼거리봉의 건너편에 있는 헬기장에 다녀오는 것이다. 헬기장이 바로 깃대봉이기 때문이다. 금성산에서 깃대봉까지는 20분 남짓 되는 거리이다.

 

 

삼거리봉에서 깃대봉(496.2m)2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널따란 헬기장은 아무런 특징이 없다. 정상표지석이나 삼각점, 이정표 하나 없이 그저 공터로 남아있을 따름이다. 날씨라고 좋을 경우에는 조망(眺望)이라도 좋으련만 오늘은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는다. 헬기장에서 올라왔던 반대방향으로 나가보면 내려가는 길 하나가 열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지도(地圖)에 표기된 임도 갈림길로 내려가는 길이다. 그러나 우린 삼거리봉으로 되돌아 나간다. 선두대장이 깔아놓은 방향표시지를 충실히 따르려 함이다.

 

 

삼거리봉에서 내려서면 얼마 지나지 않아 비스듬히 누운 이정표(개천산2.0km/동해다리/깃대봉)를 만나게 되고, 이어서 잘 자란 편백나무 숲을 지나게 된다. 누군가가 호흡을 크고 느리게 해보란다. 편백나무가 피톤치드(phytoncide)를 가장 많이 배출한다는 것을 알고 있음이리라. 피톤치드는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나무들이 각종 병충해(病蟲害)에 저항하기 위해 배출하는 분비물(分泌物)을 말한다. 이 물질은 사람들에게도 많은 도움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살균작용은 물론이고, 장과 심폐기능을 강화시켜주는 한편, 스트레스 해소에도 뛰어난 효능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길에서는 구태여 발걸음을 서두를 이유가 없다. 발걸음은 더디게 그리고 심호흡은 크게 하면서 느긋하게 걸어본다. 나도 모르게 기분이 상쾌해진다. 피톤치드의 효과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아쉽게도 편백나무 숲은 그다지 오래 이어지지 않는다.

 

 

 

편백나무 숲을 지나면 등봉재삼거리(이정표 : 개천산 0.9km/ 임도끝 0.5km/헬기장0.7km)에 연이어 등봉재(개천산 0.8km/ 개천사 0,8km/ 접팔재 2.2km)를 지나게 되고, 이어서 잠시 후에는 왼편에 임도(林道)가 보인다. 어쩌면 지도에 표기된 임도갈림길이 아닐까 싶다. 임도에 내려가면 승학골이라는 이름표를 단 이정표(개천산 정상 1.0Km/ 동광리 양지마을 2.0Km/ 깃대봉·접팔재 2.8Km)가 반긴다. 그런데 표기된 거리표시가 조금 이상하다. 분명히 아까 등봉재에서 2~3분 정도를 더 걸어왔는데도 거리는 오히려 더 멀어져(0.8km1.0Km)있는 것이다. 산행을 시작할 때 청용리 근처에서도 이와 비슷한 상황을 맞닥뜨렸었는데, 등산로 정비에 많은 정성을 들인 화순군청에서 방심 탓이 아닐까 싶다.

 

 

임도삼거리에서 본격적인 오름길이 시작된다. 그런데 그 오름길의 가파름이 보통이 아니다. ‘산이 허리를 곧추세우고 있다라는 말이 있다. 산의 경사(傾斜)가 엄청나게 가파를 때 쓰는 표현이다. 지금 오르는 길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길게 매어진 안전로프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쉽게 올라설 수 없을 정도로 가파르기에 하는 말이다. 거기다 그 거리 또한 만만치가 않다.

 

 

가파른 오르막길은 15분이 넘게 계속된다. 그러나 그 고생에 대한 보상은 괜찮은 편이다. ‘바위 숲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수많은 바위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 풍경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볼거리가 제법 쏠쏠한 구간이다. 산길은 바위를 왼편에 끼고 우회(迂廻)를 시킨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개천산 삼거리’(이정표 : 개천산 0.1km/ 천태산 1.1km/ 화학산4.7km)에 이르게 된다.

 

 

개천산 삼거리에 이르러 위를 올려다보면 아찔하기 짝이 없다. 험상궂은 바위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과연 올라가는 길이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그러나 막상 오름길에 들어서고 보면 별 어려움 없이 올라갈 수 있다. 비록 가파르기 짝이 없지만 커다란 바위들을 요리조리 잘도 피해가면서 길이 나있는 덕분이다.

 

 

개천산 정상은 의외로 흙으로 이루어져 있다. 바윗길을 타고 오르던 분위기와는 영 딴판인 것이다. 제법 너른 분지(盆地)로 이루어진 정상에는 정상표지석 외에도 무인산불감시탑이 세워져 있다. 아까 등봉재를 지나면서부터 내리기 시작하던 빗줄기가 제법 굵어졌다. 그 탓에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일절 트이지 않는다. 바로 곁에 있는 천태산은 물론이고 날씨만 맑다면 깃대봉과 금성산, 화학산 등이 또렷할 텐데도 말이다. 천태산(개천산)은 중국의 절강성에 있는 천태산과 그 생김새가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천태사를 창건한 도의선사가 당나라에 유학(遊學) 갔을 때 보았던 천태산을 닮았다고 해서 그런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그 뒤에 도선국사가 이를 개천산으로 고쳤다고 한다. 여기서 천태산이라 함은 개천산과 함께 아우르는 이름이다. 옛날에는 천태산과 개천산을 구분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깃대봉에서 개천산까지는 50분 정도가 걸렸다.

 

 

개천산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천태산으로 향한다. 내려가는 길은 가파르게 시작된다. 그리고 얼마 후, 그러니까 개천산을 출발한지 15분 정도가 지나면 이정표(천태산 정상 0.4km/ 음지마을 1.5km/ 개천사 0.7km/ 개천산 정상 0.6km)가 세워진 사거리에 이르게 된다. 홍굴재이다. 오늘의 하산방향에 있는 개천사로 가려면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내려서야 한다. 천태산 정상을 오른 후에는 당연히 이곳으로 되돌아와야 한다는 얘기이다.

 

 

 

홍굴재에서 산길은 다시 오름길로 변한다. 그러나 그다지 가파르지는 않은 편이다. 등산로 주변의 나무나 바위들을 완벽하게 덮어씌우고 있는 송악(Hedera rhombea)을 구경하면서 걷다보면 10분 후에는 헬기장(이정표 : 천태산정상 0.2km/ 안성마을 2.5km/ 개천산정상 1,0km)에 올라서게 된다.

 

 

 

헬기장을 지나면서 산길을 바윗길로 변한다. 한마디로 볼거리가 넘쳐나는 구간이다. 그 첫 번째의 구경거리는 뾰쪽하게 솟아오른 바위 무더기이다. 무더기 하나만으로도 산의 형태를 그려낼 수 있을 정도로 갖가지 모양새의 바위들로 넘쳐난다. 한마디로 뛰어난 볼거리라 할 수 있다. 누군가의 글에서 읽은 적이 있는 불꽃바위가 이곳이 아닐까 싶다.

 

 

 

불꽃바위를 지나서도 암릉은 계속된다. 아쉽게도 그 거리는 짧다. 하지만 아름답다고 느끼는 데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50m가까이 되는 바위벼랑이 주변의 풍경과 잘 어우러지며 멋진 풍광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천태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네요.‘ 산의 이름을 천태만상(千態萬象)에서 따온 것 같다면서 농담처럼 던지는 일행의 우스개가 낯설지 않는 것은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풍광이 그만큼 아름답다는 증거이리라.

 

 

 

 

스릴 넘치는 바윗길을 올라서면 드디어 천태산 정상이다. 개천산에서 30분 남짓 걸렸다. 천태산 정상은 5평 남짓한 작은 분지(盆地)로 이루어진 정상은 검은 오석(烏石)으로 만들어진 정상석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 다른 볼거리는 없다. 가장 뛰어난 볼거리인 조망이 딱 막혀있기 때문이다. 천태산에서의 조망(眺望)은 사뭇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다. 날씨가 웬만큼만 받쳐주어도 보인 다는 무등산은 언감생심(焉敢生心)이고, 코앞에 있는 개천산도 겨우 그 형체만을 내보이고 있다. 어느덧 날씨는 빗발이 거세졌고 그 빗줄기에 가린 산하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버린 것이다. 참고로 천태산은 나주방향에서 보면 마치 붓끝처럼 뾰족하게 보인다고 해서 문필봉(文筆峰), 또는 필봉(筆峰)으로도 불리며, 인근 사람들은 그런 산의 기운을 받아 명필가들이 많이 배출된다고 믿는다고 한다. 개천사는 한때 천불산(千佛山)으로 불린 적도 있다. 개천사에 있던 천불전(千佛殿)이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던 때가 있었던 모양이고, 그 유명세(有名稅)가 결국 산의 이름에까지 영향을 미쳤던가 보다.

 

 

다시 홍굴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개천사 방향으로 내려선다. 산길을 그다지 급할 것이 없다는 듯이 서서히 고도를 떨어뜨려 간다. 그러다가 7분쯤 후에는 거북이를 닮은 특이한 바위 하나를 만나게 된다. 일명 거북이상() 또는 금자상(今玆像)이라고 불리는 바위로서 마치 거북이 한 마리가 천태산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듯한 모양새이다. ‘그동안 봐온 거북이 중에서 가장 잘 생겼네요.’ 함께 산행을 하던 일행의 말마따나 볼수록 살아 있는 느낌을 주는 명품 중의 명품이었다. 그래선지 바위 옆의 안내문을 보면 이 거북이가 정상에 오르면 일본이 망한다하여 일본군(日本軍)들이 목과 발을 잘라버렸다고 한다. 정형외과 수술을 거친 듯 시멘트로 붙인 흔적이 있고, 다리는 적당히 맞춰 놓았다. 견훤이 이 거북이를 보고 영감을 얻어 이곳에서 사찰(寺刹)을 짓고 기도를 하다 후백제를 건국했다는 전설(傳說)이 있을 정도로 그 특이한 생김새만큼이나 품은 얘기들도 다양하다.

 

 

거북이바위에서 조금만 더 내려오면 울창한 비자나무 숲을 만나게 된다. 아까 하산을 시작하면서 간간히 보이던 비자나무들이 무리를 지어 있는 것이다. 천태산 비자나무 군락(天台山 榧子木 群落 : 천연기념물 제483)은 천태산의 동남쪽 기슭에 군락을 이루고 있는데, 그 면적은 대략 10정도 된다. 나무들은 가슴높이의 줄기둘레가 2m를 넘기고 있는 것으로 보아 나이가 300년생쯤으로 추정되고 있다. 밀도는 1001105그루이고 종자 수확량은 해에 따라 변이가 심하나 많을 때에는 70가마니가 얻어진다고 한다. 비자나무는 보통 남해안 등 따뜻한 곳에 분포한다. 따라서 부락근처 또는 사찰주변에 흔한데 이곳 비자나무숲도 자생종(自生種)이 아닌 인공(人工)에 의해서 조성된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참고로 전라남도에서 비자나무가 순림(純林)으로 군락을 이루고 있는 곳은 이곳 외에도 백양사의 사찰림(천연기념물 제153)과 해남 연동(蓮洞)의 윤씨비자림(천연기념물 제173), 고흥 금탑사의 비자나무숲(천연기념물 제239) 등이 있다.

 

 

비자나무 숲을 지나면 곧바로 개천사 뒤뜰에 내려서게 된다. 전통사찰 제52호로 지정된 개천사(開天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로서 828(신라 흥덕왕 3) 도의(道義)선사가 창건하였다. 도의는 821년경 중국에서 남종선(南宗禪)을 이어받았으며 귀국하여 먼저 가지산(迦智山) 보림사(寶林寺)를 창건한 뒤 이 절을 세웠다. 신라 말기에 도선국사가 세웠다는 설도 있으니 참고할 일이다. 1597(선조 30) 정유재란 때 불에 탄 것을 다시 중창하였다고만 전할 뿐 조선말까지의 연혁도 전하는 바가 거의 없다. 다만 개천사중수상량문에 따르면 1907(융희 1)에 법운(法雲)이 중건하였고 일제강점기에는 용화사(龍華寺)라 불렀다. 이후 6.25전쟁 때에 또 다시 불에 탄 것을 1963년 김태봉(金泰奉)이 주민들의 협조로 중건(重建)하여 오늘에 이른다. 천태산에서 개천사까지는 30분이 조금 못 걸렸다.

 

 

절을 벗어나다보면 다섯 개의 부도가 보인다. 1766(영조 42)의 청직당탑(淸直堂塔), 1808(순조 8)의 도암당탑(道庵堂塔), 19세기의 응서당탑(應西堂塔만봉당탑(萬峰堂塔지월당탑(智月堂塔) 등이다. 1990년대에 옥불(玉佛)이 출토되었다고 하나 사라져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산행날머리는 가동저수지 상류에 있는 개천사입구 주차장

개천사에서 빠져나오는 길은 1차선 도로이다. 따라서 승용차는 통행이 가능하나 대형버스는 진입이 제한된다. 따라서 버스의 주차가 가능한 가동저수지의 상류에 있는 개천사 주차장까지는 걸어서 내려가야만 한다. 걸어서 10분 남짓 걸리는 이 길은 짧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길가를 작은 공원(公園)으로 조성하는 등 깔끔하게 꾸며놓은 덕택에 지루한 느낌이 조금도 들지 않는다. 오늘 산행은 총 4시간 20분 정도가 걸렸다. 중간에 간식을 먹느라 쉬었던 30분을 감안할 경우 3시간50분이 걸린 셈이다. 이는 비가 내리기 전에 산행을 마치려고 발걸음을 서두른 결과이니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에필로그(epilogue), 시루봉에서 내려오는데 갑장(甲長)인 유사장께서 홍어회에 소주나 한잔 마시고 내려가잔다. 홍어가 뭔지를 아는 친구한테 부탁해서 준비한 것이라면서 말이다. 마침 준비해간 막걸리가 있어서 옆자리를 꿰차고 앉아본다. 소주에 막걸리, 누군가가 맥주를 꺼내 쏘맥(소주+맥주)까지 만들더니 끝내는 김진수선배께서 가져온 오미자술까지 등장하고 만다. 이건 등산이 아니라 숫제 술()판이다. 그러나 어쩌랴 이것도 하나의 삶인 것을, 그리고 이런 게 좋아 함께 산행을 즐기는 것을 말이다. 그건 그렇고, 무슨 이유로 술 얘기를 꺼내느냐 의문을 갖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문득 김진수선배께서 내게 던진 화두(話頭) 하나가 떠오르기에 그 결과를 정리해보려는 것이다. 뭔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가 내게 던진 한마디는 방금 지나온 시루봉 근처에서 땅끝기맥(岐脈)’이 시작되니 한번 알아보라는 것이다. 산행을 끝내고 돌아와 확인해 바에 의하면 이 부근에서 땅끝기맥이 시작될 거라는 그의 말은 옳았다. 그러나 그 위치는 이 부근이 아니라 초반에 올랐던 화악산 근처였다. 화악산 정상 바로 아래의 헬기장에서 왼편으로 보이던 능선을 따를 경우 연결되는 호남정맥 상의 노적봉(또는 바람봉, 430m)이 땅끝기맥의 분기점(分岐點)이 되는 것이다. 지리적으로 볼 때에는 화순군 이양면 이만리와 장흥군 유치면 대천리 및 장평면 병동리의 경계쯤이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또 하나의 앎을 선사해주신 선배와 맛난 홍어회를 준비해 오신 유사장님께 지면으로나마 감사 드려본다.

도덕산(道德山 325m)-용암산(聳巖山, 546.9m)

 

산행일 : ‘14. 12. 27()

소재지 : 전남 화순군 한천면과 춘양면의 경계

산행코스 : 논재갈림길용암사도덕산갈림길도덕산 왕복금호산성칠형제바위용암산510불암사임도논재갈림길(산행시간: 3시간20)

같이한 산악회 : 청마산악회

 

특색 : 용암산(聳巖山)의 이름은 흔히 쓰는 용 용()’자가 아닌 솟을 용()’자를 쓴다. ‘높이 우뚝 솟았다는 의미다. 사실 용암산의 높이는 547m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왜 높이 우뚝 솟았다는 뜻의 이름을 붙였을까? 이는 용암산이 주변의 다른 산들보다 조금 더 높은 것 외에도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바위로 이루어진 정상이 유난히도 우뚝 솟아 보였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산이 바위로 이루어진데다 인근에서 가장 높기 때문에 조망(眺望)이 뛰어나며, 거기에다 바위산의 특징대로 볼거리가 많고 짜릿한 스릴(thrill)까지 즐길 수 있으니 한번쯤은 꼭 찾아볼만한 산이다. 이러난 장점이 입소문을 탔는지 오지(奧地)의 산임에도 불구하고 꽤 많은 산꾼들이 찾아들고 있다고 한다.

 

산행들머리는 논재갈림길(화순군 한천면 한계리 763-3)

호남고속도로 동광주 I.C에서 내려와 2순환로를 따르다가 지원교차로(동구 용산동)에서 빠져나오면 22번 국도와 만나게 된다. 22번 국도를 따라 화순읍까지 온 후 이번에는 국도 29호선으로 옮겨 보성방면으로 달리다가 모산교차로(화순군 한천면 모산리)에서 좌회전 822번 지방도를 따르면 조금 후에 한천면 소재지인 한계리에 이르게 된다. 한계리로 들어가기 바로 직전 용암사 진입로 표지석을 따라 우회전하여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용암사로 들어가는 삼거리인 논재갈림길에 이르게 된다. 이곳이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버스에서 내려 왼편에 보이는 임도(林道)를 따라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들머리에 용암산장 금오암이라고 쓰인 입간판(立看板)을 이정표 삼아 진행하면 될 것이다. 사실 용암사의 앞에는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그러나 진입로가 좁은 탓에 대형버스는 진입이 불가능하다. 어쩔 수 없이 걸어갈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하지만 진입로 확장공사가 한창인 것으로 보아 용암사 앞에서 산행을 시작할 날도 멀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임도를 따라 얼마간 걸으면 길가에 현 위치를 용암사로 적어 놓은 이정표(정상 2.3Km/ 한천면)와 산행안내도가 보인다. 잠시 멈춰 서서 오늘 걷게 될 코스를 살펴보지만 안타깝게도 지도(地圖)가 낡은 탓에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이정표에서 조금만 더 걸으면 그러니까 들머리에서 15분 남짓 걸으면 용암사의 주차장(이정표 : 정상 2.2Km/ 한천면)을 지나 절의 경내(境內)로 들어서게 된다.

 

 

용암사(聳巖寺)의 마당에 들어서면 왼편에 요사(寮舍), 그리고 오른편엔 오지(奧地)의 절 치고는 제법 큰 대웅전(大雄殿)이 보인다. 대웅전의 뒤편에서 살포시 고개를 내밀고 있는 것은 아마 산신각(山神閣)일 것이다. 용암사는 대한불교조계종소속의 사찰로 1890년 조정기에 의해 창건되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폐사(廢寺)된 금오사(金鰲寺) 터에 절을 지었다고 하지만 조선시대 사료에서는 금오사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으니 근거가 없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1890년에 처음 창건한 것으로 보면 옳을 것이다. 절의 역사는 비록 일천하지만 조계종 원로위원을 지낸 천운(天雲)스님과 백양사 주지를 역임한 암도(岩度)스님 등이 이곳에서 수행(修行정진(精進)하였을 정도로 뛰어난 참선도량(參禪道場)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대웅전, 삼성각, 종루, 요사채 등의 전각(殿閣)들이 있으나 역사가 오래되지 않은 탓에 문화재(文化財)로는 분류되지 않는다.

 

 

등산로는 절 마당의 한가운데를 지나면 만나게 되는 샘의 뒤에서 열린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저 샘이 한천(寒泉)이라는 마을의 이름을 낳게 한 찬샘(源水泉, 寒泉)이 아닐까 싶다. 기록에 의하면 용암산의 산자락에 있었다는 찬샘이라는 샘의 이름을 따서 마을 이름을 찬샘골 또는 냉정리(冷井里)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찬샘을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한천(寒泉)이라는 지명으로 둔갑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샘터 뒤의 돌계단을 올라서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철망(鐵網)을 왼편에 끼고 난 산길은 의외로 편하다. 부드러운 흙길에다 경사(傾斜)까지도 완만(緩慢)하기 때문이다. 철망이 끝나고도 이러한 산길의 특징은 변함이 없다. 그리고 17분 정도 후에는 능선안부에 있는 삼거리(이정표 : 정상 1.5Km/ 용암사 0.7Km)에 올라서게 된다. 이곳에서 용암산 정상은 오른편 방향으로 진행해야 한다. 오늘 오르게 될 또 하나의 산인 도덕산으로 가려면 왼편으로 가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자신이 오르는 산들의 숫자를 세려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구태여 도덕산을 다녀올 필요는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볼거리나 특징, 거기다 특별한 내력조차 없는 봉우리이므로 오르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능선안부 삼거리의 이정표 근처에 서있는 세 사람이 오늘 산행의 스케치(sketch)용 사진 모델(model)이다. ! 깜박 잊고 있을 뻔했다. 왜 모델의 숫자가 갑자기 늘어났는지를 말이다. 오늘 산행지는 광주 인근에 있는 화순이다. 그래서 광주에 살고 있는 여동생 내외에게 산행일정을 알렸더니 일부러 시간을 내어 이곳까지 찾아와 주었다. 고등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다가 일찌감치 혼탁한 속세(俗世)을 훌훌 털어버린 그네들을 난 좋아한다. 그리고 그들만의 여유로운 삶을 한껏 즐기고 있음을 늘상 부러워했다. 이런 이들과 함께 하는 산행이라면 산세(山勢)가 좋고 나쁘고 간에 행복한 산행이 될게 뻔하다. 그렇다면 오늘 산행의 부제(副題)행복한 산행으로 정해보자.

 

 

우리 일행은 왼편에 있는 도덕산으로 향한다. 비록 산의 숫자를 세려는 것은 아니지만 산행기의 내용을 조금 더 충실하게 꾸며보기 위해서이다. 안부삼거리에서 도덕산으로 향하는 길은 의외로 또렷하다. 2~3분쯤 걸었을까 길도 보이지 않는 오른편의 능선을 치고 내려오는 일행들이 보인다. 왼편으로 난 또렷한 길은 도덕산 정상으로 연결되지 않는단다. 그길로 가더라도 정상으로 올라가려면 길이 아닌 곳을 헤치고 나가야한다며, 아예 여기서부터 능선을 치고 올라가라는 것이다.

 

 

길이 보이지 않는 능선, 그러니까 잡목(雜木)과 가시넝쿨들만 가득한 능선을 3~4분 정도 치고 오르면 도덕산 정상이다. 도덕산이란 이름을 가진 산들은 전국에 꽤나 많은 편이다. 그리고 그 산들은 하나같이 전형적인 흙산이라는 동일한 특징들을 갖고 있다. 아마 도덕(道德)이라는 산의 이름과 무관(無關)하지 않을 것이다. 이곳 도덕산 역시 전형적인 흙산이다. 밋밋한 봉우리인 정상은 온통 잡목들이 점령하고 있는 탓에 조그만 공터조차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정상에는 정상표지석은 물론이고 이정표나 삼각점 등 이곳이 정상임을 알려주는 그 어떤 표식(標式)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오늘 산행을 함께 하고 있는 한현우선생이 조금 전에 매달아 놓은 정상표시 코팅(coating)만이 이곳이 정상임을 알려주고 있을 따름이다. 이곳 도덕산이 6,316번째로 오른 산이라는 한현우선생은 내가 평소에 존경하는 산꾼 중의 한명이다. 그 정도로 많은 산을 올랐음에도 결코 자만하지 않고 지금도 일주일에 4~5일은 산을 찾는 다는 그의 열정이 부럽고, 그가 매달아 가고 있는 정상표시지에 적힌 산봉우리의 이름들이 하나도 허투루 적은 것이 없음이 존경스러운 것이다.

 

 

다시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오른편, 그러니까 용암산 정상 방향으로 진행한다. 오른쪽 능선도 도덕산 방향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경사(傾斜)가 거의 없이 시작된다. 그러나 그 편안함은 얼마가지 못한다. 서서히 가팔라지기 시작하던 산길이 오래지 않아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파르게 변해버린 것이다. 그 가파름에 시달리던 산길은 왔다갔다 갈지()자를 만들면서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간다. 그러나 그것 가지고도 안심이 안 되었던 모양이다. 길가에 로프를 연결해 놓아 오르는 사람들이 부여잡고 오를 수 있도록 해 놓은 것을 보면 말이다.

 

 

안부삼거리를 출발해서 15분 조금 못되면 능선(이정표 : 정상 0.9Km, 산성 0.4Km/ 용암사 1.3Km)이 갑자기 널따란 분지(盆地)형태로 변하면서 경사(傾斜) 또한 평탄해진다. 등산로 주변에 보이는 나지막한 봉분(封墳)은 아마 누군가의 묘()인 모양이다. 이후 산길은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 듯 순하게 이어진다. 그러나 묘역을 지나면서 능선에는 굵직한 바위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것도 눈요깃거리가 될 정도로 기괴(奇怪)하게 생긴 바위들이다.

 

 

오르면 오를수록 주변 바위들의 크기가 커질 뿐만 아니라 그 기세(氣勢) 또한 날카롭고 거칠어진다. 서서히 굵어지던 능선의 바위들이 언제부턴가 십여 길 높이의 암릉으로 변해있다. 첫 번째로 만나게 되는 바위등성이이다. 이 암릉은 마치 크나큰 성벽(城璧)을 닮았다. 길게 이어지는 암릉의 양쪽 옆이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등성이의 위가 울퉁불퉁한데다 험하기까지 해서 사람들은 지나다닐 수가 없다. 산길을 어김없이 바위벼랑 아래로 우회(迂廻) 시키고 있는 이유이다. 그러나 꼭 우회만 시키는 것은 아니다. 가끔 바위 위로 올라설 수도 있는데, 올라서는 곳마다 전망대(展望臺)의 역할을 톡톡히 한다. 바위 위에 서면 금전저수지와 그 너머의 능주 시가지가 한눈에 잘 들어온다.

 

 

 

 

 

묘역을 출발한지 10분 쯤 지나면 능선삼거리라는 공식적인 이름을 갖고 있는 이정표(금오산선 0.2Km, 정상 0.7Km/ 전망대)를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진행하면 공식적으로 인정된 첫 번째 전망대가 나온다. 전망대에 서면 도덕산에서 용암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가운데에 놓고, 왼편에는 금전저수지와 능주 들녘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그리고 오른편에는 검설산과 태악산, 노인봉등이 자못 웅장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 뒤에서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는 산들은 모후산과 백아산이 아닐까 싶다.

 

 

 

 

 

다시 능선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정상으로 향한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허물어진 돌담을 만나게 된다. 길가에 세워진 이정표(정상 0.5Km/ 용암사 1.7Km)를 보니 금오산성의 터(金鰲山城址 : 전남도문화재자료 제118)인 모양이다. 옛날에야 성곽(城郭)의 길이가 1Km도 더 되었다지만 지금은 약 100m 정도의 허물어진 성터가 전부라니 말이다. 이곳이 두 번째로 만나게 되는 바위등성이이다. 이곳의 특색은 널찍한 평지(平地)를 한가운데에 두고 양편에 바위들이 성벽처럼 둘러쳐져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바깥쪽은 바위절벽이다. 이러한 자연(自然)조건 때문에 이곳에다 산성(山城)을 구축했었나보다. 바위와 바위 사이의 빈 공간은 인공의 성벽(城壁)을 쌓아가면서 말이다. 금오산성의 역사적 유래는 정확하지 않다. 전해지는 문헌(文獻)들의 내용이 단편적이기 때문이다. 다만 오래전부터 이 성을 몽골 성지(城址)’라고도 불러오는 것으로 보아 고려 때 몽고의 침입 당시 축조(築造)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 후 1636(인조 14) 병자호란 때 다시 수축하였다고 하며, 군량(軍糧)을 쌓아 놓고 훈련하거나 기우소(祈雨所)를 설치하여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기도 했던 곳이라고 전하기도 한다. 성의 규모는 둘레 3,515(1,065m)에 높이는 95(2.8m)이며(1923년 편찬 능주읍지 참조), 자연 암벽과 작은 계곡을 이용하여 축조한 포곡식산성(包谷式山城 : 계곡을 내부에 두고 능선을 따라 쌓는 방식)으로서 내부 활동 공간이 넓지 못한 약점이 있지만 성을 방어하는 데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성벽(城壁)은 안쪽으로 경사(傾斜)를 이루면서 쌓았으며 큰 돌 사이에 작은 돌을 끼워 넣은 형식이다. 자연지형을 최대한 활용해 동벽(東壁)은 암벽(巖壁), 남벽(南壁)은 능선과 가파른 절벽, 서벽(西壁)은 나지막한 봉우리에서 계곡으로 내려가는 능선을 따라 축조했다. 그러나 등산로로 이용되는 바람에 훼손이 심한 상태다. 참고로 능주읍지에 따르면 성 안에는 백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암혈과 용천(龍泉) 및 우단(雩壇)이라는 기우제를 지내던 단()이 있었다고 한다.

 

 

정상으로 가는 길에 간간이 나타나는 전망바위에서는 조망을 즐기기도 하고, 길가에 놓아둔 벤치(bench)에서는 잠시 숨을 고르면서 한껏 여유를 부려본다. 오늘은 모처럼 여동생 내외와 함께 하는 산행이기 때문이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면서 걷다보면 진행방향에 거대한 바위능선이 나타난다. 용암산의 명물인 칠형제바위이다. 용암산은 바위봉우리들이 마치 계단처럼 나뉘어가며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 다른 산들과의 다른 점이다. 바위등성이가 한참을 이어지다가 잠시 흙길로 변한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또 다시 험상궂은 바위등성이, 이렇게 반복을 거듭하면서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가는 것이다. 그 세 번째가 바로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칠형제바위이다. 첫 번째는 아까 지나왔던 성곽을 닮았던 지역이고 조금 전의 금오산성 터는 그 두 번째이다. 그리고 조금 후 둥그스름한 바위봉우리인 네 번째 바위등성이를 지나면 만나게 되는 용암산 정상은 다섯 번째 암봉이다. 반대방향에 있는 510m봉까지 합칠 경우 바위등성이의 숫자는 여섯 개로 늘어난다.

 

 

 

칠형제바위의 위용에 감탄하다 왼편으로 돌아 바위 위로 오른다. 칠형제바위란 가장 큰 바위봉을 맏이로 차차 낮아지는 일곱 개의 기둥 비슷한 바위봉들을 일컫는다. 이 거대한 바위들이 골짜기 아래의 용암사를 향하고 있다고 하는데, 암릉의 끄트머리에 있어야할 용암사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맏이의 위로 올라서면 바위기둥 사이로 금전저수지와 능주들녘이 내려다보이고, 오른편에는 모후산 등 화순의 높고 낮은 산군(山群)들이 도열해 있다. 바위의 생김새도 볼만할뿐더러 조망(眺望)까지 뛰어나니 그야말로 눈이 호사(豪奢)를 누린다.

 

 

 

 

칠형제바위를 지나면 만나게 되는 네 번째 바위등성이는 철사다리를 타고 올라야만 한다. 이 봉우리는 비록 둥그스름한 외형(外形)을 지녔지만 봉우리의 양 옆은 수십 길의 낭떠러지로 이루어졌으니 조심해야 할 일이다. 바위봉에 올라서면 진행방향 저만큼에 용암산 정상이 나타난다. 그 생김새는 이곳 네 번째 등성이와 비슷하나 그 규모는 더 크고 우람하다. 그래서 정상이 아니겠는가. 올라가는 길가를 쇠()로 만든 난간(欄干)으로 막아놓은 것은 왼편에 보이는 까마득한 바위벼랑을 조심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네 번째 등성이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드디어 용암산 정상이다. 칠형제바위에서 12분 남짓, 그리고 용암사에서는 1시간30분 정도가 걸렸다. 10평이 채 안 되는 좁다란 정상에는 정상표지석과 이정표(불암사 1.8Km/ 용암사 2.2Km) 말고도 무인산불감시탑까지 들어 앉아있어 그렇지 않아도 좁은 정상을 가뜩이나 더 비좁게 만들고 있다. 거기다 하나 더 가관인 것은 텐트까지 쳐져있다는 것이다. 산의 정상은 공공(公共)의 성격이 강한 장소이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사진을 찍거나 잠시 멈추어 서서 주변 경관을 감상하는 장소로 이용되기 때문이다. 그런 장소를 자신들만의 공간으로 만들어버린 저런 몰지각한 사람들을 과연 우리는 어떤 시선(視線)으로 바라봐야 옳을까? 따뜻한 시선이 아닐 것은 결코 나만이 아닐 것이다. 참고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능성현편 산천조를 보면 용암산은 금오산(金鰲山)으로 나와 있다. 예전에 산 위에 있던 샘에서 하늘로 올라가려던 금자라가 나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론 울퉁불퉁한 바위봉우리의 형상이 자라를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 아니었을까 싶다.

 

 

바위로 이루어진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더없이 광활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남서쪽에 우뚝 솟은 510m봉이다. 낙락장송(落落長松)을 머리에 얹고 있는 거대한 바위봉우리가 마치 동양화(東洋畵)에서 본 듯한 풍경으로 나타난다. 아마 이곳 용암산에서 가장 빼어난 풍광(風光)이 아닐까 싶다. 그 오른편에는 능주의 들녘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그리고 반대방향으로 고개를 돌릴라치면 저 멀리 무등산이 내다보이고, 동쪽에는 모후산과 조계산이 조망된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월출산까지 볼 수 있다고 하나 오늘은 그저 눈대중으로만 짚어볼 따름이다.

 

 

불암사로 방향, 그러니까 남서쪽 방향의 능선으로 내려서면서 하산이 시작된다. 정상에 세워진 이정표를 보고도 짐작이 가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고개를 한바퀴 빙 둘러보고 나서 가장 잘생긴 바위봉우리가 있는 방향으로 내려서면 된다. 내려가는 길은 무척 가파르다. 안전로프에 의지해서 내려서면 두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510m봉의 첫 번째 바위봉우리가 나온다. 바위봉 방향을 난간(欄干)으로 막아 놓았지만 이를 무시하고 그냥 넘어가 보자. 바위벼랑이 아찔할 정도로 높지만 조금만 주의하면 그다지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잠깐의 위험부담은 그 보답으로 큰 즐거움을 선사한다. 잘생긴 바위봉우리인 510m봉이 적나라하게 선을 보이는 것이다. 높디높은 바위벼랑 위에서 마치 곡예(曲藝)를 하듯 매달려 있는 소나무들, 이를 바라보는 눈이 호사(豪奢)를 누리는 순간이다.

 

 

암봉에서 올려다본 용암산 정상, 사방이 바위벼랑으로 이루어졌다. 다만 조금 경사(傾斜)가 누그러진 방향으로 산길이 나있다고 보면 된다.

 

 

암봉에서 맞은편 510m봉 방향의 바위벼랑을 내려다본다. 조금 위험하긴 해도 그동안의 경험으로 보아 내려갈 정도는 된다. 그러나 난 아까 넘어왔던 난간 쪽으로 발길을 돌리고 만다. 안전시설도 없는 저런 루트(route)로 내려가다 만일 집사람의 눈에 띄기라도 할 경우에는 큰 다툼으로 번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요즘 부쩍 안전에 신경을 쓰고 있는 집사람에 대한 나의 작은 배려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암봉을 우회(迂廻)시키는 길도 만만치만은 않다. 곳곳에 안전로프가 매달려 있고, 그 로프에 의지해야만 내려갈 수 있다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우회로를 내려서면 산길은 철다리를 통해 510m봉과 연결된다.

 

 

510m봉 역시 우회로를 이용한다. 선답자(先踏者)들의 기록에는 이 봉우리를 올랐다고 적혀있지만 아무리 보아도 올라가는 길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510m봉이 바위봉우리인 탓에 우회로(迂廻路) 또한 거의 바윗길 수준이다. 안전로프에 매달려 조심스럽게 내려가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내리막길은 제법 길게 이어진다.

 

 

한참을 앞서가고 있는 동생 내외를 고함쳐 불러 세운다. 준비해온 막걸리로 목이나 축이자며 말이다. 막걸리는 단 한 병, 그러나 그 속에 닮긴 정()은 결코 적지가 않다. 무슨 이야긴가 하면 비록 술의 양()은 적지만 잔이 오가며 주고받는 정담(情談)은 무궁무진하다는 이야기이다. 동생 내외가 준비해온 모시떡과 과일을 안주삼아 마시는 막걸리, 거기에다 삶의 진솔(眞率)한 이야기까지 곁들이니 이보다 더한 행복이 없다. 이게 바로 삶이요 인생인 것이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한참 내려가다 보면 특이한 묘역(墓域)을 만나게 된다. 한 평도 채 되지 않을 것 같은 비좁은 바위틈에다 묘()를 써 놓은 것이다. ‘의성 김씨의 후손들이 쓴 묘인데, 이 또한 언젠가 책에서 본적이 있는 의지의 한국인이 아닐까 싶다. 참 지도(地圖)에 보면 이곳으로 내려오는 길에 갈림길이 나뉘는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내 눈에는 띄지 않았다. 아마 선두대장이 깔아놓은 방향표시지만 보며 진행하다 보니 그냥 지나쳐버렸던 모양이다.

 

 

내려가는 길은 무척 가파르다. 길가에 안전로프를 매어 놓았을 정도이니 미루어 짐작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잠시 후면 기분 좋은 풍광(風光)이 나타나니 너무 서운해 할 필요는 없다. 조금만 더 내려가면 만나게 되는 녹차나무 군락(群落)이 바로 그것이다. 어른의 허리춤에 차오를까말까 할 정도의 자연산 녹차나무들이 온 계곡을 뒤덮고 있는데, 산길은 그 푸르름의 한가운데로 나있다. 이런 길은 생각만 해도 즐겁다. ‘오빠 봄에 다시 내려오세요.’ 봄에 다시 내려와 우전차(雨前茶 : 양력 42021, 즉 곡우 직전에 차 잎을 따서 만든 차)라도 만들어 보잔다. 동생 내외가 살고 있는 전원주택의 뒷동산에도 자연산 녹차나무들이 지천이라면서 말이다.

 

 

녹차길이 끝나면 계곡을 건너게 되고, 이어서 조금 후에는 임도(林道)에 내려서게 된다. 정상에서 50분 정도의 거리이며 실제 산행은 이곳에서 끝을 맺는다고 보면 된다. 이곳에서 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논재갈림길까지는 임도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날머리에 세워진 산행안내도를 보고 논재삼거리로 나가는 길을 찾아보지만 지도(地圖)에는 나와 있지 않다. 등산로를 정비하느라 심혈을 쏟아 부은 화순군청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아쉬운 점이다.

 

 

임도에 내려서면 일단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오른편에 불암사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임도를 따라 3~4분만 올라가면 사방이 기암괴석(奇巖怪石)으로 둘러 쳐진 아늑한 곳에 들어앉은 불암사(佛岩寺)의 절 마당에 들어서게 된다. 불암사는 대한불교조계종대각회 소속의 사찰로서 원래의 이름은 용암사(聳巖寺)이며, ‘화순군사(和順郡史)’에 따르면 877(신라 헌강왕 3)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했다고 한다. 도선국사가 이곳을 지나다가 여덟 폭의 병풍처럼 바위에 둘러싸여 있고, 앞산에는 관음성상(觀音聖像)이 상주(常住)하는 듯한 터에다 절을 세웠는데, 법당 뒤 오른편에만 바위가 없는 것을 애석해하자 하룻밤 사이에 땅속에서 큰 바위가 솟아올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절의 이름을 용암사라 하였단다. 현재 사찰의 역사는 1987년에 주지였던 현산(玄山)이 빈터로 남아있던 옛 용암사(聳巖寺) 터에 법당과 요사를 새로 지으면서 부터이다. 절의 이름을 용암사라 하지 않고 불암사라고 한 것은 1890년에 조정기가 이웃에다 용암사라는 절을 이미 창건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현재 대웅전과 약사전, 삼성각, 요사채 등의 전각들이 있으나 이곳도 용암사와 마찬가지로 보유 문화재는 없다. 참고로 용암사에 대한 기록은 화순읍지 외에도 여지도서(輿地圖書)와 호남읍지(湖南邑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불암사를 둘러보고 내려오다 보면 정상어림이 바위로 이루어진 봉우리 하나가 맞은편에 나타난다. 바로 이 절의 이름을 낳게 했을 거라 추측되는 불암(佛巖) 즉 부처바위란다. 그러나 모든 사물(事物)은 보는 사람들에 따라 각기 다르게 나타나는 법이다. 그 바위를 보고 난 집사람과 여동생이 틀림없는 임산부(姙産婦)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이 그 증거일 것이다.

 

 

산행날머리는 논재갈림길(원점회귀)

불암사에서부터 날머리까지는 임도로 연결된다. 시멘트로 포장된 임도를 따라 내려가면 잠시(5분 정도) 후 임도는 두 갈래로 나뉜다. 이곳에서는 오른편에 보이는 비포장 임도를 따른다. 곧장 포장임도를 따를 경우에는 우봉리를 거쳐 춘양면소재지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비포장 임도는 지루할 정도로 오래 계속된다. 그리고 특별한 볼거리도 없다. 중간에 논재로 추정되는 고갯마루를 넘어설 때 잠깐 나타나는 용암산 정상의 암릉이 그나마 위안을 줄 따름이다. 고갯마루를 내려서면 느닷없이 금오산성이라고 쓰여 있는 커다란 빗돌이 나타난다. 뜬금없이 나타난 금오산성을 보고 놀라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보면 조그마한 글씨로 흑염소, 장어구이라고 적힌 것을 볼 수 있다. 바로 음식점이었던 것이다. 헛웃음을 치며 걷다보면 잠시 후에는 아침에 산행을 시작했던 논재갈림길에 이르게 되면서 오늘 산행(8.5)이 끝을 맺는다. 불암사에서 40, 산행을 시작한지는 3시간30분이 지났다. 막걸리를 마시느라 중간에 쉰 시간을 감안할 경우 3시간20분이 조금 못 걸린 셈이다.

 

 

용암산 산행을 끝내고 운주사로 옮겨서 경내(境內) 투어(tour)를 시작한다. 물론 걸어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므로 운주사까지는 버스를 이용했다. 절의 입구에 들어서니 돈(성인기준 3천원)을 받고 있다. 문화재관람료란다. 운주사를 이미 2번을 찾았던 기억이 있다. 그 마지막은 1980년대 후반, 그때만 해도 사찰(寺刹)의 규모는 보잘 것이 없었고, 돌탑과 돌부처들만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물론 입장료는 받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은 입장료를 받는다. 그것도 3천원이나 말이다. 운주사(雲住寺)대한불교조계종소속의 사찰로서 도선(道詵)이 창건했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운주(雲住)가 세웠다는 설()이나 마고할미가 세웠다는 설도 전해지고 있으니 참고할 일이다. 임진왜란 때 법당과 석불, 석탑 등이 많이 훼손되어 폐사(廢寺)로 남아 있다가 1918년에 박윤동(朴潤東)과 김여수(金汝水)를 비롯한 16명의 시주들이 중건(重建)하였다. 운주사에는 담장이 따로 없다. 완만한 골짜기 안에 그저 돌탑과 돌부처들만이 즐비하다.

 

 

일주문을 지나자마자 수많은 돌탑과 돌부처들이 중생들을 맞는다. 운주사는 운주사라는 절의 이름보다는 천불천탑(千佛千塔)으로 더 널리 알려진 사찰(寺刹)이다. 지금은 비록 석탑(石塔) 12()와 석불(石佛) 70좌만 남아 있을 뿐이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000개의 석불과 석탑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수많은 석탑과 석불이 존재했었다는 것이다. 1942년까지만 해도 석불 213좌와 석탑 30기가 있었다고 하니, 이런 소중한 유산을 보존하지 못한 우리 자신을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아무튼 이곳의 석불들은 10m 이상의 거구에서부터 수십cm의 소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매우 투박하고 사실적이며 친숙한 모습이 특징이다.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19806월에는 절 주변이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된바 있다. 그리고 입구의 **)구층석탑을 시작으로 오층석탑과 칠층석탑, 그리고 원형다층석탑 등, 크기도 모양도 다양한 탑()들이 골짜기 한가운데를 따라 줄지어 서 있다. 물론 이곳 골짜기뿐만이 아니다. 시간을 내어 양쪽 산등성이라도 걸어볼라치면 능선에 드문드문 서 있는 돌탑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크고 작고, 서거나 앉은 불상(佛像)들은 골짜기 바닥에 있기도 하고 양쪽으로 이어진 바위벽에 무리무리 기대어 있거나 산등성이 곳곳에 흩어져 이끼를 입고 있기도 하다. 때로는 머리만 남거나 몸통만 남기도 했으며, 대웅전 뒤편 구석에서 무릎 아래 자잘한 자갈탑들을 거느리고 있기도 하다.

(**) 구층석탑(九層石塔, 보물 796), 넓은 자연석을 놓아 이를 하층 지대석(地臺石) 겸 기단석(基壇石)으로 삼고, 그 위에 상층기단 받침을 3단으로 새긴 다음, 상층기단 겸 탑신(塔身)을 올려놓아 9층까지 이루었다. 위층 기단의 가운데 돌은 4장의 널돌로 짜였고, 네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새긴 뒤 다시 면 가운데에 기둥모양을 굵게 새겨 면을 둘로 나누어 놓았다. 옥개석의 밑면에 받침을 생략하였거나 각 면에 새긴 조각의 특징 등 탑의 조성 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석불감쌍배불좌상(보물 797), 골짜기 중심부에는 팔작지붕에 용마루와 치미(鴟尾, 들보의 양단에 있는 새의 꼬리 내지는 물고기 형상을 한 장식)가 모각된 돌집 안에 석불(石佛) 두 기가 등을 맞대고 앉아 있다. 남향한 불상은 결가부좌(結跏趺坐)하고 오른손을 배에 댔고 북향한 불상은 옷 속에서 두 손을 모아 지권인(智拳印)을 취한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 시대의 지방화된 불상양식이다. 참고로 지권인이란 두 손으로 각각 금강권(金剛拳)을 만들고, 왼 손의 집게손가락을 펴서 오른 주먹 속에 넣고, 오른손의 엄지손가락과 왼손의 집게손가락을 마주 대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오른손은 불계(佛界)를 표하고, 왼손은 중생계(衆生界)를 표한 것이므로 이 결인(結印)으로써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고, 어리석음과 깨달음이 하나라고 하는 깊은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 배불좌상의 뒤편에 보이는 밥그릇을 쌓아 놓은 것 같은 탑은 **)원형다층석탑이다.

(**) 원형다층석탑(圓形多層石塔, 보물 798), 높이 5.71m의 석탑으로 마치 둥그런 밥그릇을 쌓아 놓은 것 같은 특이한 외형을 지니고 있다. 기단(基壇)2단의 둥근 바닥돌에 높직한 10각의 기단면석(基壇 面石)을 짜올리고 그 위로 16장의 연꽃잎을 장식한 돌이 올려진 형태이다. 탑신(塔身)은 몸돌과 지붕돌이 모두 원형이고, 층마다 몸돌 측면에 2줄의 선이 돌려져 있다. 기단갑석(基壇 甲石)의 윗면이 편평하고 옆면이 둥근데 비하여, 탑신의 지붕돌은 아래가 편평하고 윗면이 둥근데, 일반적인 석탑의 형태를 따르지 않은 고려시대 각 지방에 나타났던 특이한 양식으로 보인다.

 

 

운주사를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세웠다는 설은 풍수비보설(風水裨補說)을 근거로 한다. 도선이 우리나라의 지형을 배의 형상으로 보고, 배가 안정되기 위해서는 선복(船腹)에 무게가 실려야 하므로 선복에 해당하는 이곳에 천불천탑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에 못지않게 널리 퍼져 있는 설이 미륵신앙(彌勒信仰)과 관련된 것들이다. 주로 운주사 부처들의 파격적이고 민중적인 이미지에서 뒷받침을 얻은 것들로, 이곳을 반란을 일으킨 노비와 천민들이 미륵이 도래하는 용화세계(龍華世界 : 미륵불의 정토)를 기원하며 신분해방운동을 일으켰던 일종의 해방구로 추정하고 그들의 염원으로 천불천탑이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특히 운주사를 유명하게 하는 데 크게 기여한 황석영의 소설 장길산은 천불천탑과 와불얘기로 말미를 장식함으로써 운주사를 일약 미륵신앙의 성지(聖地)로 부상시켰다. 그러나 운주사는 고려 시대에 창건된 절이고 장길산은 조선 숙종 때의 이야기이니 그저 소설에서나 가능한 픽션(fiction)일 따름이다.

 

 

수많은 불상(佛像)들의 정점은 대웅전 왼편 산등성이에 누워있는 두 기()의 와불(臥佛)이다. 각각 비로자나불좌상과 석가여래불입상인 이 와불들은 실제로는 와불이 아니라 미처 일으켜 세우지 못한 부처들이다. 그리고 이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날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한국의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황석영의 장길산에서 민초(民草)들이 그렇게도 일어나기를 염원했던 그 부처님이 바로 우리 눈앞에 누워있는 것이다.

 

 

에필로그(epilogue), 산행이 끝나면서 동생 내외와도 헤어진다. 아쉽다. 그러나 회자정리(會者定離)라고 이런 게 바로 인생인데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자꾸만 화순에서 손꼽는 음식인 염소탕을 먹고 가라고 하지만 서울에서 내려온 산꾼들과 함께 움직여야 하는 우리 부부에겐 그럴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다. 산악회에서 준비한 음식을 먹고 난 후에는 근처에 있는 운주사에 들렀다가 서울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아쉬운 마음으로 돌아서는데 여동생이 보따리 하나를 건네준다. 부부가 함께 수확한 은행과 대추란다. 지난번에는 말린 호박 등의 밭작물이었는데, 이번에는 건과(乾果)이다. 스스럼없이 받아 들고 본다. 주고받는 정(), 이것 또한 삶의 또 한 방식일 것이기 때문이다.

운암산(雲岩山, 485m)-깃대봉(446m)

 

산행일 : ‘14. 9. 13()

소재지 : 전남 고흥군 고흥읍과 두원면 및 포두면의 경계

산행코스 : 고흥종합운동장산림욕장중섯재병풍바위운암산깃대봉죽순바위서촌마을회관송산초교(산행시간 : 3시간40) 10.6Km

함께한 산악회 : 청마산악회

 

특징 : 산이 높이 솟아 구름 같은 기운이 산을 감싸고 있다는 운암산은 그동안 웬만한 산꾼들 사이에도 낯선 이름으로 남아있었다. 팔영산이나 마복산, 천등산 등 인근의 유명 산들에 가려 철저하게 외면당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최근에 찾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 깃대봉 근처의 암릉과 다도해(多島海)의 뛰어난 조망(眺望)이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탓이다. 찾아본 결과 입소문은 사실이었다. 깃대봉 근처, 그러니까 죽순바위와 그 옆의 암릉은 다른 어느 유명 산들에 비해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은 산세(山勢)를 보여줬고, 곳곳에서 열리는 다도해의 조망은 눈이 시릴 정도였다.

 

산행들머리는 박지성공설운동장(고흥읍 호형리)

영암-순천고속도로 고흥 I.C에서 내려와 15번 국도 고흥방면으로 달리면 고흥읍이 나온다. 고흥읍에 들어서서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남계교차로(交叉路 : 고흥읍 남계리)에서 빠져나오자마자 한전앞 교차로에서 좌회전하여 들어가면 잠시 후에 체육시설단지(體育施設團地)가 나온다.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동 단지에는 박지성공설운동장과 팔영체육관, 테니스장, 그리고 보조축구장 외에도 고흥종합문화회관이 들어서 있다. 복합시설단지로 보는 것이 더 옳을 것 같다. 참고로 박지성공설운동장은 축구영웅 박지성이 이 고장에서 태어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운동장의 공식이름으로 명명했다고 한다.

 

 

 

 

팔영체육관 입구에서 왼편에 보이는 동촌산림욕장으로 들어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그러나 운암산만 가려면 굳이 이곳을 들머리로 삼을 필요가 없다. 이곳을 들머리로 삼을 경우에는 산림욕장(山林浴場)에 딸린 산책로를 거의 한 바퀴 다 돌고 난 뒤에야 운암산으로 향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팔영체육관 뒤쪽을 들머리로 삼을 경우에는 곧바로 운암산으로 향할 수 있어 산행시간을 30분 가까이 줄일 수가 있다. 이러한 상황을 모른 채로 산림욕장에 들어선 우리 일행은 방향을 잃어버렸고, 결과적으로 15분 동안을 우왕좌왕하며 헤매다가 겨우 제대로 된 등산로를 만날 수 있었다.

 

 

 

산림욕장으로 오르는 길은 좀 특이하다. 두세 명이 나란히 옆으로 서서 걸어도 충분할 만큼 널따란 산길을 절반으로 나눈 후에 절반은 통나무를 듬성듬성 바닥에 깐 계단길을 만들었고 나머지 절반에는 야자나무 잎으로 만든 멍석을 깔아 놓았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까지 배려한 마음 씀씀이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그러나 산림욕장 형편은 썩 좋은 편이 아니다. 나무들이 듬성듬성 서있기 때문에 햇볕 막기에도 부족할 정도이기 때문이다.

 

 

산림욕장 입구에서 시작되는 제법 가파른 오름길을 15분 정도 치고 오르면 전망대 노릇을 겸한 정자(亭子)가 있는 쉼터에 이르게 된다. 정자에 오르면 박지성공설운동장이 있는 체육시설단지와 고흥읍 시가지가 한눈에 잘 내려다보인다.

 

 

일단 전망대에 올라서면 산길은 순해진다. 바닥이 고운 흙길에다 경사(傾斜)까지 거의 없는 그야말로 최상의 산책코스로 변한 것이다. 콧노래라도 흥얼거리고 싶은 구간이다. 전망대를 지나면 조금 후에 사각의 정자(亭子)가 있는 제6쉼터가 나오고, 이어서 나타나는 오름길을 다시 한 번 치고 오르면 15분 후에는 산림욕장에서 가장 높은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참고로 이곳 산림욕장에는 100m 또는 200m 간격으로 벤치를 갖춘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삼림욕장의 정상에서 왼편으로 산길이 하나 갈려나간다.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왼쪽에 보이는 오솔길은 **)고흥지맥으로서 들어설 경우 운대고개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우리 일행도 이곳에서 방향을 잃고 15분 동안을 오락가락하며 허송세월(虛送歲月)을 했다. 갈림길 근처의 나무기둥에 하늘기둥이라는 산객(山客)이 매달아 놓은 고흥지맥 238m’이라는 팻말이 보이니 참조할 일이다. 이곳에서부터 운암산까지의 구간은 고흥지맥을 따라 걷게 된다.

(**)고흥지맥(高興地脈), 호남금남정맥의 조약봉에서 분기한 호남정맥이 전라도를 좌우로 양분(兩分)하며 346.3km를 진행하다가 적치봉에 이르러 남동진(南東進)하는 산줄기 하나를 가지 친다. 고흥지맥으로 장군봉, 천봉산, 오무산, 천등산, 유주산 등을 일으키는 도상거리 약 88.9km의 제법 긴 산줄기이다.

 

 

고흥지맥갈림길에서 조금 더 내려오면 삼거리를 만나게 된다. 운암산으로 가려면 이곳에서 왼편으로 접어들어야 하는데 이곳에 세워져 있는 이정표(중섯재 1.5Km/ 삼림욕장 정상 0.3Km)가 좀 문제다. 이정표에서 운암산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그동안 고흥지역의 산들을 오르면서 느낀 점은 등산로 정비에 많은 정성을 쏟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수많은 노력들이 이런 하찮은 실수로 인해 한꺼번에 다 까먹어 버리게 된다는 것이 안타깝다. 삼거리 근처의 쉼터에서 쉬고 있던 이 고장 사람들이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더 많은 시간을 이 부근에서 우왕좌왕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에 하는 말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50분이 지났다. 중간에 길이 헷갈려 우왕좌왕한 시간을 뺄 경우 35분이 걸린 셈이다.

 

 

삼거리에서 중섯재 방향으로 몇 걸음만 옮기면 낯익은 팻말(운암산 정상 3.5Km) 하나가 보인다. 이 지역 산들에서 자주 보게 되는 고흥군 특유의 이정표이다. 그리고 이 팻말들은 100m 또는 200m 간격으로 연이어 나타나다가 중섯재 이후부터 안 보이는 가 싶더니, 운암산 정상부터는 다른 이정표마저 슬그머니 사라져 버린다. 이것 또한 아쉬운 점이다. 등산객들 대부분은 정상으로 올라갔던 코스로 다시 되돌아 내려오는 것을 엄청나게 싫어한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운암산을 오르는 다른 코스에도 이런 팻말들을 설치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하는 말이다.

 

 

중섯재로 향하는 길은 산의 사면(斜面)을 고집하며 나있다. 삼거리에서 사면을 따라 난 길이 중간 어림에 있는 안부를 지나고서도 맞은편 산봉우리로 오르지 않고 왼쪽으로 우회하며 계속해서 사면길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산길은 완만(緩慢)한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거의 평지수준이라는 얘기이다. 삼거리에서 중섯재까지의 거리는 1.5Km, 짧지 않은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힘이 들지 않는 이유이다. 마침 햇살까지 가득하니 구태여 걸음을 재촉할 이유가 없다. 간간히 코끝을 스치며 지나가는 상큼한 풀냄새를 음미하며 느림보의 미학을 시도해 본다. 갑자기 산행이 행복해진다.

 

 

 

느림보의 미학에 너무 빠졌었나보다. 중섯재까지의 거리가 겨우 1.5Km에 불과한데도 25분이나 걸린 것을 보면 말이다. 중섯재는 남쪽(오른쪽)의 중흥마을과 북쪽(왼쪽)의 운곡마을을 잇는 시멘트포장 임도가 지나가는 고갯마루이다. 이정표 두 개(이정표 #1 : 중흥 3.7Km/ 삼림욕장 2.5Km), 이정표 #2 : 수도암/ 송산)와 등산로 안내판(운암산 정상 2.0Km) 하나가 세워져 있는 중섯재는 쉼터를 겸하고 있다. 테이블(table)까지 갖춘 사각(四角)의 정자(亭子)와는 별도로 벤치(bench)까지 배치하는 등 정성을 들인 흔적들이 역력하다.

 

 

쉼터의 맞은편에서 운암산 정상으로 가는 산길이 열린다. 산길은 처음에는 잠깐 완만(緩慢)하게 이어진다. 그러다가 바위지대를 만나면서 갑자기 가팔라지더니 7~8분 후에는 벤치가 놓여있는 쉼터에 이른다. 특이한 점이 없어 그냥 지나치려는데 벤치 옆에 세워진 나무기둥이 눈에 띈다. 이곳이 병풍바위란다. 부랴부랴 숲이 열리는 곳을 찾다가 오른편으로 들어서니 병풍바위의 위가 나오면서 처음으로 시야(視野)가 열린다. 저 멀리 보이는 산들은 아마 천등산과 딸각산일 것이다.

 

 

 

 

 

병풍바위를 지나서도 가파른 오르막길은 계속된다. 산길 주변은 후박나무와 소사나무 등 남해안의 섬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나무들이 간간이 보이나 대부분의 나무들은 내륙의 산들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햇살이 빗방울처럼 스며드는 숲길은 바윗길을 겸한다. 그리고 바윗길의 특징대로 심심찮게 시야(視野)가 트이면서 멋진 조망(眺望)을 보여준다. 여자만()은 빙 둘러싸고 있는 내륙의 품안에 갇혀있고, 그 여자만은 또 자그마한 섬들을 가두어 놓고 있다. 아이러니(irony)가 아닐 수 없다.

 

 

 

가파르게 치고 오르던 산길은 능선삼거리(등산로 안내판 : 정상 0.5Km/ 임도 1.5Km)에서 일단 숨을 죽이면서 얼마동안 완만(緩慢)한 오름길이 이어진다. 그러다가 막바지 몸부림이라도 치려는 듯 왔다갔다 갈지()자를 만들면서 고도(高度)를 높이더니 이내 운암산 정상에 올려놓는다. 산행을 시작한지 정확히 2시간이 지났다. 중간에 길이 헷갈려 허비한 15분을 제할 경우 1시간45분이 걸린 셈이다.

 

 

 

좁다란 공터로 이루어진 운암산 정상은 삼각점(고흥 24)만이 홀로 정상을 지키고 있는 외로운 산이다. 아니 가난한 산이다. 정상표지석은 물론이고 그 흔한 이정표까지도 눈에 띄지 않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저 대구의 산악인 김문암씨가 나뭇가지에 매달아 놓은 정상표지판이 다이다. 그렇다면 운암산의 산신령(山神靈)은 욕심이 없는 게 분명하다. ‘이름표라도 달아 달라는 현몽(現夢)까지 포기한 것을 보면 말이다. 또 하나 운암산의 특징은 조망(眺望)이 트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변이 온통 잡목(雜木)들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비록 이정표는 없지만 운암산 정상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오른편(남쪽)은 깃대봉을 거쳐 중흥으로 가는 길이고, 왼편(북쪽)으로 난 길을 따를 경우에는 수도암삼거리를 거쳐 운대리에 이르게 된다. 만일 운암산에서 조망(眺望)을 즐기고 싶다면 왼편 운대리쪽으로 얼마간 더 나아가면 된다. 팔영산의 올망졸망한 암봉들과 천등산, 비봉산 등이 조망될 것이다. 득량만이 눈에 들어오는 것은 물론이다.

 

 

하산은 깃대봉을 지나 중흥마을로 내려가기로 한다. 평탄하게 시작되는 산길을 따라 70m쯤 걸으면 죽순바위(절터)의 진행방향을 알려주는 이정표가 나타나고, 이어지는 산길은 갑자기 가파른 내리막길로 변한다. 그러나 그 거리는 짧다. 정상에서 내려선지 10분 정도 후에는 안부에 이르게 된다.

 

 

안부에서 잠깐 평탄하던 산길이 점차 가파르게 변하더니 꽤 오랫동안 이어진다. 그러다가 잠시 완만(緩慢)해지나 싶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또 다시 가팔라져 버린다. 어쩌면 오늘 산행에서 가장 힘든 구간이 아닐까 싶다. 가파르고 거칠기야 아까 운암산을 오를 때만은 못하겠지만 그동안 산행을 이어오느라 지친 체력을 감안해서 한 말이다. 가파른 오르막길과의 싸움은 30분 남짓이면 끝을 맺고 드디어 시루봉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운암산 정상을 출발한지 40분 남짓 걸렸다.

 

 

 

서너 평 남짓 되는 분지(盆地)로 이루어진 깃대봉 정상도 역시 정상표지석은 없다. 아까 운암산과 마찬가지로 김문암씨가 매달아 놓은 정상표지판이 정상석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운암산과는 달리 이곳에는 이정표(수도암/ 송산)가 세워져 있다. 이곳 부근이 운암산을 대표할 정도로 아름다운데 대한 대접이 아닌가 싶다. 깃대봉 정상은 삼거리이다. 이곳에서 왼편으로 내려갈 경우에는 수도암(修道庵)이 나온다. 참고로 수도암은 규모는 비록 작지만 통일신라의 흥덕왕(재위 826836) 때 영허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천년고찰(千年古刹)이다. 1083(고려 순종) 도희스님이 창건했고, 1370(고려 공민왕) 영허대사가 중수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문화재로는 나한전인 무루전(無漏殿;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156)이 있다.

 

 

깃대봉의 남쪽, 그러니까 송산리 방향의 바위에 올라서면 한마디로 끝내주는 조망(眺望)이 펼쳐진다. 지금은 가을의 초입, 하늘은 높고 말이 살을 찌운다는 계절이다. 그 계절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화창한 날씨에 짙푸른 하늘은 온 세상을 덮고 있다. 그 아래에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송산리를 중앙으로 놓았을 때 왼편에는 여자만()이 그리고 오른편에는 득량만이 펼쳐진다. 왼편에 보이는 바다는 꼭 여자만이라고 볼 수는 없다. 정확히는 왼편 끝자락에 보이는 팔영산의 뒤편이 여자만이기 때문이다. 팔영산에서 오른편으로 눈을 돌리면 다도해(多島海)의 아름다운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해창만의 바다에 떠다니는 섬들은 아마 와도와 취도, 첨도, 그리고 시호도일 것이다. 그리고 발아래에는 길두리의 간척지(干拓地) 들녘이 펼쳐지고, 그 오른편에는 있는 갈대밭은 물돌이의 곡선(曲線)과 절묘하게 어우러지며 한 폭의 잘 그린 채색화(彩色畵)를 만들어낸다.

 

 

 

 

 

깃대봉에서 송산리 방향으로 하산을 시작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바위봉이 하나 나타난다. 이곳 운암산을 세상에 알린 주인공인 죽순바위이다. 깃대봉에서 죽순봉까지는 겨우 10분 거리, 그러나 이 구간은 거리에 비해 너무나 많은 볼거리를 제공한다. 왼편의 팔영산이 아까보다 훨씬 또렷하게 나타나면서 이번에는 여자만까지 첫선을 보여준다. 그리고 길두리의 바닷가 풍경도 아까보다 훨씬 더 선명해졌다.

 

 

 

 

죽순바위는 거대한 하나의 바윗덩어리로 이루어져있다. 때문에 올라가는 것이 부담스러운 사람들을 위해 난간형식의 안전로프를 설치해 놓았다. 바위 위에 오르면 또 다시 멋진 조망(眺望)이 펼쳐진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 보았던 모든 풍경들이 한결 더 또렷하게 눈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사람들은 뭔가를 보고 눈이 시리다는 표현을 할 때가 있다. 눈이 시릴 만큼 아름답다는 얘기일 것이다. 지금 바라보고 있는 풍경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아름다운 경치에 취하다보면 세속(世俗)의 번뇌(煩惱)까지도 눈 녹듯 사라져버린다. 하긴 이런 아름다움 속에 어찌 번뇌 따위가 찾아들 수 있겠는가.

 

죽순바위에서 바라본 송산리방향, 앞에 보이는 저 봉우리를 올라야 제대로 된 산행을 즐길 수가 있다.

죽순바위에서 바라본 깃대봉

 

 

죽순바위에서 내려와 조금만 더 걸으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운암산이 지닌 절경(絶景)을 제대로 다 보려면 직진을 해야 하는데도 왼편에 보이는 길이 더 또렷하기 때문이다. 운암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대부분 시루봉을 거쳐 송산리 쪽으로 하산을 한다. 그 코스에 죽순바위라는 걸출한 바위가 있는 것 외에도, 스릴(thrill)을 만끽할 수 있는 암릉까지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코스에는 이정표가 하나도 없다. 그런 탓에 길을 잘못 들어 까딱하면 산을 제대로 느껴보지 못할 수도 있다. 이 갈림길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 가슴 떨리는 스릴을 제대로 느껴보려면 흔적은 비록 희미하지만 곧바로 직진해서 맞은편 산봉우리로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봉우리에 오르고 나면 길은 더 희미해진다. 그렇다고 당황할 일은 아니다. 왼편으로 보면 희미하게나마 산길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왼편으로 조금만 더 내려가면 커다란 바위 하나가 나타난다. 올라서는 게 다소 부담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위태롭지만 얼기설기 엮어 놓은 안전로프를 믿고 일단 위로 올라서보자. 다시 한 번 남해바다가 활짝 열리는 것을 볼 수 있다. ‘길두리 갈대밭만 놓고 볼 때에는 오늘 산행 중에 가장 뛰어난 전망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까의 갈림길에서 왼편으로 접어든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손짓을 하고 있는 모습이 까마득하다. 그만큼 이 바위가 높다는 의미일 것이다.

 

 

 

바위에서 다시 내려와 이번에는 조금 전에 올랐던 바위의 왼편으로 진행한다. 거대한 바위절벽 아래를 지난 산길은 조금 후에는 비스듬하게 누운 바위벼랑의 사면(斜面)을 뚫고 이어진다. 비록 안전로프가 매어져 있긴 하지만 주의가 요구되는 구간이다. 왼편이 수십 길의 벼랑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까딱 실수라도 할 경우에는 큰 사고를 불러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벼랑사이로 난 길에 이어 이번에는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내려서는 게 쉽지도 않은 수직(垂直)의 절벽(絶壁), 거기다 짧은 슬랩(slab)도 지나가야 한다. 한마디로 말해 스릴 넘치는 구간이다. 그리고 만일 여성이라면 듬직한 남성의 도움이 절실한 구간이다. 그리고 만난 지 얼마 안 된 연인들이라면 이곳에서 사랑을 키워보면 어떨까 싶다.

 

 

 

 

 

바윗길이 끝나면 정자(亭子)까지 갖춘 또 다른 거대한 바위벼랑 아래에 이르게 된다. 벼랑 아래의 동굴에는 물이 가득 담긴 샘이 하나 있다. 바로 영천샘이다. 플라스틱 바가지가 놓인 곳에 군데군데 촛농이 떨어져있는 것을 보면 뭔가 영험(靈驗)까지 있는 샘인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어느 글에선가 옛날 이곳에 사찰(寺刹)이 있었다고 쓰여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샘물의 수질(水質)은 어떨까? 먼저 다가간 집사람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되돌아 나온다. 마셔서는 안 될 것 같다는 것이다. 다가가 보니 물이 넘치지 않고 고여 있다. 그래서 집사람이 못 마시겠다고 한 모양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샘에서 아래로 파이프(pipe) 하나가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물이 흐르지 않는 이유는 이 파이프를 통해 아래로 흘러갔기 때문인 것이다. 물맛은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시원하면서도 단 것이 감로수(甘露水)가 따로 없었다.

 

 

샘터에서 빠져나오면 산길은 부드러워진다. 들쑥날쑥한 자갈이 깔린 바닥이 다소 부담스럽지만 폭이 넓고 반반한 산길은 무릎에 무리를 주지 않아 좋다. 산길은 정성을 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비록 투박하지만 수십 기()의 돌탑들을 길가에 배치해 놓았고, 심지어는 코스모스까지 일렬로 심어 놓았다. 널따란 산길을 따라 10분 정도 내려오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선두대장의 방향표시지는 왼편으로 깔려있으나 이곳에서는 오른편으로 내려가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싶다. 왼편으로 들어서자마자 갑자기 산길이 거칠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길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이용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는 듯 거칠고 황량했을 따름이지 임도(林道)의 형태는 그대로인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산행날머리는 송산초등학교(폐교) 운동장

샘터에서 25분 조금 못되게 걸어 내려오면 시멘트포장 농로(農路)에 이르게 된다. 산행이 종료되는 송산초등학교는 이곳에서도 다시 15분 정도를 더 걸어야만 한다. 행여 오뉴월에라도 이곳을 찾았더라면 낭패당하기 십상일 거리이다. 뙤약볕을 일절 가리지 못하는 이런 길을 한여름에 걷는다는 것은 낭패 그 이상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가을의 초입, 햇볕은 그다지 따갑지가 않다. 당연히 길가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길은 매실과 무화과, 그리고 감나무가 섞여있는 과수원 사이를 통과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누렇게 익어가는 논들 사이를 지나가기도 한다. 물론 이곳은 시골, 스멀스멀 코끝으로 스며드는 소똥 냄새에 익숙해질라치면 어느새 서촌마을회관에 이르게 되고, 회관 앞 정자나무 아래를 지나 냇가에 이르면 저만큼에 송산초등학교가 보이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에 걸린 시간은 총 4시간, 중간에 알바 등으로 소비한 20분을 감안할 경우 3시간40분이 걸린 셈이다.

 

 

에필로그(epilogue), 오늘 따라나선 산악회는 산행 후에 제공되는 음식이 뛰어난 것으로 입소문을 탄 청마산악회이다. 오늘의 식단도 역시 뷔페(buffet), 십여 가지에 가까운 밑반찬에 시원한 콩나물국은 다른 날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오늘은 색다른 먹을거리가 두 가지나 더 상위에 올라있다. 집나간 며느리를 집으로 돌아오게 만든다는 가을 전어회와 살아서 꿈틀거리고 있는 세발 낙지가 바로 그것이다. 전어회는 김진수선배님 등 세분이 추렴을 해서 제공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세발낙지는 금시초문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산악회 회장님이 별도로 내놓은 것이란다. 오늘 산행에 참가한 사람은 겨우 25, 그러지 않아도 적자를 면키 어려웠을 텐데 참으로 대단한 베풂이다. 오늘의 풍성한 식탁을 마련해준 모든 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를 드려본다.

용추봉(龍湫峰, 584m)-신선봉(神仙峰, 490m)

 

산행일 : ‘14. 8. 28()

소재지 : 전남 담양군 용면과 전북 순창군 쌍치면·구림면의 경계

산행코스 : 주차장용연1폭포용연2폭포가마터용추봉임도신선봉시원정출렁다리용소주차장(산행시간 : 3시간 20)

함께한 산악회 : 산두레

 

특징 : 영화 남부군은 한국에서 만들어진 전쟁영화 중에서 시사(示唆)하는 바가 큰 반전영화(反戰映畵)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 영화의 주요 촬영지 중의 한 곳이 바로 가마골이다. 산의 특징을 설명하면서 왜 골짜기를 거론하는지 의아해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왜냐하면 오늘 오른 용추봉이나 신선봉이 색다른 볼거리가 일절 없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산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이 봉우리들이 품고 있는 골짜기인 가마골은 자못 빼어나다. 마치 중국의 양산박처럼 높은 바위협곡(峽谷)이 구불구불 길게 이어지는 계곡이 자그마치 십리나 된다. 그만큼 골이 깊고 험하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6.25전쟁 때는 가장 치열했던 파르티잔(partisan) 격전지(激戰地)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노령병단 소속 1,000여 명이 그들만의 해방구였던 이곳에서 19553월까지 끈질지게 저항하다 군경(軍警)의 합동작전에 의해 소탕되었다는 것이다. 여러 산이 겹치고 있어 은폐하기 좋고 계곡에는 크고 작은 폭포(瀑布)와 넓은 분지(盆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일 것이다. 수량(水量) 또한 풍부해서 숨어서 저항하기 좋은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산행들머리는 가마골생태공원 주차장

순천-완주고속도로 남원 분기점에서 88올림픽고속도로 광주방향으로 바꿔 타고 달리다가 순창 I.C에서 내려와 792번 도로를 타고 담양 방향으로 가다 보면 가마골생태공원 입구 삼거리가 나온다. 이곳 삼거리에서 오른편으로 들어서면 잠시 후에 산행들머리인 공원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요즘은 국도나 지방도가 잘 닦여있어서 어느 곳으로 들어와도 시간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다. 우리가 타고 온 버스도 호남고속도로 전주 I.C에서 내려와 옥정호(전북 임실군) 근처에서 회문산과 강천산의 근처를 거쳐 이곳으로 왔다.

 

 

 

주차장에서 내려 공원관리사무소 옆으로 난 임도를 따라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생태공원의 입장료는 성인기준 2천원, 관리사무소보다 한참 아래에 있는 매표소에서 입장료를 계산했기 때문에 관리사무소에서는 별도의 절차 없이 그냥 통과할 수 있다. 관리사무소에서 50m쯤 들어가면 삼거리가 나온다. 이정표(용연1·2폭포, 용추사, 1등산로/ 용소, 출렁다리, 3등산로)와 생태공원안내도, 그리고 가마골이라고 쓰인 커다란 화강암 표지석이 있다. 오늘 산행은 용추봉을 오르는 코스이다. 그러나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산보다는 산이 품고 있는 가마골을 보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만큼 가마골이 더 널리 알려져 있다는 얘기이다. 옛날 그릇을 굽던 가마터가 많았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는 가마골은 영산강의 발원지(發源地)이며 민족상잔(民族相殘)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1950년 한국동란 당시 전남북 피난민 3,000여명과 파르티잔(partisan) 1,000여명이 노령병단을 만들어 1955.3월까지 국군(國軍 : 8사단, 11사단) 및 경찰과 대치했었고, 이 전투에서 아군은 445명 전사하였고, 부상자도 800여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승만대통령이 이곳을 직접 방문해 격려했을 정도이니 얼마나 전투가 치열했었는지 짐작이 되고도 남을 것이다. 빨치산은 가마골에 병기시설인 탄약 제조창과 군사학교, 인민학교, 정치보위학교와 정미소까지 설치했다고 한다.

 

 

삼거리에서 오른편 용연폭포 방향으로 들어선다. 당연히 왼편 길은 하산길이 된다. 반반하게 자연석을 깔아놓은 임도(林道)는 온통 단풍나무 천지이다. 등산로를 정비하면서 조성한 모양인데 울창하게 숲을 이루고 있어 가을에 올 경우 멋진 오색의 단풍을 보여줄 것이 틀림없다. 임도의 오른편 방향은 계곡이다. 골은 그다지 깊지 않으나 물줄기는 제법 세다. 요즘 계속되는 남부지방의 폭우가 그 원인일 것이다.

 

 

임도를 따라 잠시 걸으면 다시 삼거리가 나온다. 이곳 삼거리에는 이정표(용연1폭포/ 용연폭포, 용추사)가 하나 세워져 있는데 차라리 없느니만 못한 것 같다. 아예 없었더라면 지도를 보며 능히 찾아갈 수 있는데도, 괜히 만들어 놓은 이정표가 사람을 헷갈리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오른쪽 방향으로 표시된 용연폭포는 아마 2폭포를 이르는 모양인데 2자를 빼먹어 사람을 헷갈리게 하는 것이다. 왼편으로 방향을 잡으면 잠시 후에 용연1폭포 앞에 서게 된다.

 

 

2단으로 이루어진 높이 20m 정도의 용연1폭포는 이 정도의 폭포가 어떻게 해서 세간(世間)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그 경관이 수려하다. 그리고 호쾌하기 짝이 없다. 계곡이 그다지 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장관을 보여주는 것은 엊그제 내린 폭우(暴雨)로 인해 수량이 늘어난 때문일 것이다. 그 때문인지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사진을 찍느라고 분주한 풍경이다. 들머리에서 1폭포까지는 10분 남짓 걸렸다.

 

 

등산로는 폭포 앞을 지나 맞은편 비탈로 올라간다. 그리고 곧이어 아까 헤어졌던 길과 다시 만나면서 산길은 현저하게 완만(緩慢)해진다. 개울을 왼편에 끼고 이어지는 산길은 잠시도 한눈을 팔 틈을 주지 않는다. 오른편 바위절벽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임시폭포들 때문이다. 폭포(瀑布)이면 폭포이지 왜 임시(臨時)라는 수식어(修飾語)를 붙였는지 의문이 드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날씨가 맑을 때에는 없어졌다가 장마 때, 그것도 온 산이 물로 넘쳐나다시피 할 때에만 나타나는 폭포이기 때문이다.

 

 

 

 

개울을 왼쪽 옆구리에 끼고 10분쯤 걸으면 왼편 아래로 내려가는 비탈길이 하나 나타난다. 이 길을 따라 100m쯤 내려가면 무속인(巫俗人)들이 몰래 제()를 지낼 정도로 기()가 세다는 용연2폭포이다. 2폭포는 아까 지나왔던 1폭포보다 더 나은 경관(景觀)을 자랑한다. 높이도 20m였던 1폭포보다 10m정도가 더 높은데다가 물줄기가 중간에 꺾이지 않고 곧바로 아래로 떨어지기 때문에 더욱 웅장하게 보이는 것이다. 2폭포가 1폭포보다 더 나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2폭포에 들르는 것을 포기하고 그냥 지나쳐버린다. 아래까지 내려갔다 다시 올라오는 것이 싫었던 모양이다.

 

 

아까의 갈림길로 되돌아와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폭포 위로 올라가는 짧은 급경사(急傾斜) 구간을 지나면 길은 다시 평평해지면서 널찍한 임도(林道)로 변한다. 이어서 작은 사방댐을 지나면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도로와 연결된다. 2폭포에서 6분 정도의 거리이다. 이곳 삼거리에 이정표(용추사 0.4Km, 가마터 0.5Km/ 신선봉 1.5Km, 용소폭포 2.0Km/ 용연 1·2폭포 0.5Km, 관리사무소 0.8Km)가 세워져 있는데 어쩌면 오늘 산행에서 만난 이정표 중에서 유일하게 거리표시가 되어있는 이정표가 아닐까 싶다. 이곳에서 왼쪽으로 진행하면 신선봉에 오를 수 있다. 만일 용추봉이 볼품없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라면 용추봉을 생략하고 곧바로 신선봉으로 직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널따란 도로를 따라 잠시 걸으면 커다란 규모의 사방댐이 보이고, 이어서 사방댐과 연결된 굴다리 아래를 통과하면 곧바로 또 다른 삼거리가 나온다. 삼거리에 정광사 4’ ‘용추사 200m’라는 표지석 두 개가 세워져 있다. 삼거리로 오는 길에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내가 산속에 들어온 게 맞는가 하는 의구심 말이다. 한참을 산을 올랐기에 산중인줄 알았는데 난데없이 비닐하우스가 나타났으니 어찌 그런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그렇다. 용추사 근처는 너른 분지(盆地)로 이루어져 있어서 사람들이 둥지를 틀고 살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 연유인지 비록 무리지어 살지는 않지만 개까지 거느린 어엿한 농가(農家)가 존재하고 있었다.

 

 

용추사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면 왼편에 제법 너른 저수지가 펼쳐진다. 아까 사방댐으로 보였던 것이 사실은 저수지였던 모양이다. 그리고 낚시금지라고 적혀있는 것을 보면 양어장(養魚場) 역할까지 겸하고 있는 모양이다.

 

 

입구의 표지석에 적힌 200m라는 거리표시가 무색하게 용추사까지의 거리는 제법 되었다. 아마 적힌 숫자의 배는 되지 않을까 싶다. 꾸불꾸불한 길을 돌아 들어가니 용추사가 조용히 나를 맞는다. 용추사는 백양사의 말사(末寺)란다. 건물이라곤 고작 대웅전 역할을 하고 있는 천불전과 삼성각, 그리고 요사채가 전부인 한적한 사찰(寺刹)이다. 거기다 인기척조차 없다. 그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 스님 없는 절간에서 들꽃과 풀벌레들이 대신 수행에 전념하고 있는 모양이다. 오래 머물 이유가 없어 천불전 앞 석조(石造) 샘터에서 물 한금으로 보시를 대신하고 돌아선다. 참고로 이 절은 526(백제 성왕 4)에 창건하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30년에 중창했다고 한다. 물론 6`25전쟁 때도 전화를 그냥 비켜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지금 있는 건물들은 그 후에 새로 지었을 것이다. 용추사를 둘러보고 다시 삼거리로 되돌아 나오는 데는 정확히 11분이 걸렸다.

 

 

표지석이 있는 삼거리에서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오른편에 외형(外形)이 특이한 건물하나가 보인다. 가마골이라는 이곳 지명(地名)을 낳게 한 가마터이다. 1998년 용추사 주변에서 임도 개발 공사를 하다가 발견된 가마터를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復原)했다고 한다. 이 가마는 기와를 굽던 시설로서 당시 3기의 가마터가 발견됐는데 그 중 복원된 것은 2호기란다.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이어지는 도로는 좌우로 꿈틀대면서 위로 향한다. 그렇게 10분 조금 못되게 걸으면 왼편으로 길이 나뉜다. 등산로는 이곳에서 포장도로를 벗어나 왼편으로 향한다. 경사가 완만한데다 넓기까지 한 등산로를 따라 살망살망 걷다보면 채 5분이 안되어서 능선안부에 올라서게 된다. 오른편은 산성산으로 가는 길이니 용추봉은 이곳에서 왼편 능선을 따라 진행해야 한다. 이곳에서부터는 전남과 전북의 경계이자 **)호남정맥의 마룻금을 따라 걷게 된다. 들머리에 산악회 시그널(signal)들이 마치 무당집 처마처럼 어지럽게 매달려 있으니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 호남정맥(湖南正脈), 한반도 13정맥의 하나로, 금남호남정맥(錦南湖南正脈)의 종착지인 주화산에서 갈라져 남서쪽으로 내장산에 이르고, 내장산에서 남진하여 장흥 제암산(帝巖山)에 이르며, 제암산에서 다시 남해를 끼고 동북으로 상행하여 광양 백운산(白雲山)에 이르는 산줄기이다. 이 산줄기는 영산강 유역을 이루는 서쪽 해안의 평야지대와 섬진강 유역을 이루는 동쪽의 산간지대로 갈라놓았다. 주요 산으로는 경각산, 내장산, 백암산, 추월산. 무등산, 제암산, 조계산, 백운산 등 호남지역의 명산들을 거의 다 품고 있다.

 

 

 

능선으로 올라서면 산길은 아무런 특징이 없는 밋밋한 능선으로 변한다. 능선은 온통 참나무들로 둘러싸여 있고, 그 아래에는 산죽(山竹)들 세상이다. 그리고 등산로는 그 산죽들 사이로 나있다. 굳이 용추봉의 특징을 말하라면 정상에서의 조망(眺望) 외에는 길가의 산죽을 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다지 경사(傾斜)가 심하지 않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이다보면 30분 후에는 용추봉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중간 무렵에 지도(地圖)에 나와 있는 506m봉을 지나왔겠지만 실제 봉우리에는 아무런 표시가 없었기 때문에 어떤 게 506m봉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함께 걷고 있는 사람들, 어느 한 사람의 얼굴에서도 힘들다는 표정을 읽을 수가 없다. 물론 그 원인이 지금 걷고 있는 능선의 오르내림이 심하지 않은 평탄한 길이기 때문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날씨라는 변수도 있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동안 기승(氣勝)을 부려오던 더위가 이미 한풀 꺾여있는 것이다. 혼돈스러웠던 올 여름이지만 그 작열했던 무더운 열기는 가을의 오곡에 결실을 안기는 것에서부터 계절은 분명히 가고 있다. 그 계절이 지금 산행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표정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용추봉 정상은 헬기장을 겸하고 있기 때문에 너른 분지(盆地)로 이루어져 있다. 표지석이 없는 정상은 말뚝 모양으로 만든 스테인리스 표지판이 대신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정표도 없음은 물론이다. 정상뿐만이 아니다. 용추봉(신선봉 제외)에는 이정표나 안내도 등 그 어떤 편의시설들도 눈에 띄지 않았다. 철저하게 버려진 것이다. 들머리에서 정상까지는 1시간30분이 걸렸다.

 

 

 

정상은 주위의 나무들을 제거한 탓에 사방으로 시야(視野)가 탁 트여 조망(眺望)이 뛰어나다. 내장산을 비롯해 회문산, 여분산, 무등산, 강천산, 산성산, 추월산 등이 차례로 보인다. 입암산과 내장산이라고 해서 안보일리 없다. 거기다 멀리로는 무등산까지 내다보인다. 그야말로 눈이 호사(豪奢)를 누리는 곳이다.

 

 

산길은 정상을 지나 계속된다. 그리고 별다른 특징이 없다는 점도 계속된다. 맞은편 숲으로 들어가면 산길은 얼마 후에 왼편으로 크게 휜다. 그리고 이어지는 산길은 아까 올라올 때와 마찬가지로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한다. 다만 아까는 고도(高度)를 높여왔지만 이번에는 고도를 낮추어간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그러다가 20분쯤 지나면 삼거리를 만나게 된다. 물론 이곳에도 이정표는 보이지 않는다. 당연히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호남정맥 마룻금인 오른편이 더 또렷한데다 산악회 시그널들이 더 많이 매달려있기 때문이다. 다음 코스인 신선봉은 이곳 삼거리에서 호남정맥과 해어져 왼편으로 내려서야 한다.

 

 

앞서가던 집사람이 냉큼 숲속으로 들어서는 게 보인다. 싸리버섯을 찾았단다. 주위를 살펴보니 버섯이나 산나물이 자라기에 딱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능선의 오른쪽 참나무 숲, 그러니까 응달이다. 거기다 엊그제 내린 비로 인해 습()하기까지 하니 이보다 더 나은 버섯의 발육(發育) 조건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런 내 예상이 맞았나보다. 오늘 산행에서 우리부부는 싸리버섯을 한 소쿠리나 채취했으니까 말이다. 거기다 영지버섯이라는 보너스(bonus)까지 얻었으니 오늘 산행은 그야말로 행운이었다.

 

 

 

호남정맥과 헤어진 후 또 다시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고도(高度)를 낮추다보면 임도(林道)에 내려서게 된다. 임도를 따라 왼편으로 10m만 내려가면 신선봉으로 가는 길이 열린다. 들머리에 이정표(신선봉 0.4Km, 용소 1.0Km/ 용추사 1Km, 관리사무소 1.8Km/ 복흥면 답동 3.0Km, 정광사 3등산로)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이정표다. 거기다 거리표시까지 되어있으니 더 반가울 수밖에 없다.

 

 

 

산죽(山竹) 사이로 난 길을 따라 5분쯤 걸으면 나무의자를 갖추어 놓은 쉼터이다. 쉼터에는 담양군에서 만들어놓은 안내지도(案內地圖)가 보인다. 그러나 이 지도는 참고만 할 뿐 맹신해서는 안 된다. 지도와 현실이 맞지 않아 자칫하면 엉뚱한 길로 빠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이정표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갈림길 어느 곳에서도 이정표는 눈에 띄지 않았고, 어쩌다 하나씩 보이는 이정표도 도대체 산행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산행을 하는데 가장 필요한 거리표시가 없이 그저 방향만 표시해 놓고 있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관리관청(管理官廳)인 담양군청에 정중하게 바래본다. 이왕에 생태공원으로 조성했다면 그에 걸맞게 정비해 줄 것을 말이다.

 

 

쉼터봉에서 잠깐 내려선 산길은 다시 위로 향한다. 그 길에 바위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신선봉이 바위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예고라도 하려는 모양이다. 그리고 곧이어 신선봉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신선봉 정상이라고 쓰인 팻말이 정상석을 대신하고 있는 정상은 남쪽으로 조망(眺望)이 트인다. 바로 오른쪽에 있는 치재산은 물론이고 강천산과 추월산, 무등산, 내장산 등이 아까 용추봉 정상에서보다 한결 더 가까이 보인다. 용추봉에서 신선봉까지는 50분이 걸렸다.

 

 

 

 

 

굽이치는 산릉(山稜)을 바라보는 눈 시림은 감동 그 자체이다. 여름이 가면서 가을로 접어든다. 이 시기의 녹음의 빛깔은 참으로 매혹적이다. 여름을 벗고 가을의 옷을 입기 위한 변화의 모습이 그것이다. 저 녹음은 얼마 후이면 오색의 단풍으로 물들 것이고 그때 사람들은 더 많이 산에 미쳐갈 것이다.

 

 

신선봉에서 용소로 내려가는 길은 급경사(急傾斜) 내리막이다. 거기다 잔돌까지 많기 때문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주의가 필요한 구간이다. 그러나 너무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길가에 굵은 로프로 난간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바윗길 구간뿐만 아니다. 흙길이라도 경사(傾斜)가 심한 곳에는 어김없이 안전로프를 매달아 등산객을 배려하고 있다. 아까 지나왔던 용추봉 구간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30분 가까이 조심스럽게 내려오면 외편이 깎아지른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진 전망바위에 이르게 된다. 나무의자까지 설치된 이곳에서는 가마골과 생태공원의 시설물(施設物), 그리고 가마골의 명물인 출렁다리가 한눈에 잘 들어온다.

 

 

전망바위에서 내려오면 곧이어 시멘트로 지어진 시원정(始源亭)이란 정자가 나온다. 정자(亭子)에 오르면 영산강의 발원지(發源地)인 용소폭포와 가마골의 아름다운 협곡(峽谷)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사방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골짜기 속에서 신비스런 용의 기운이 느껴지며, 잠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 전설(傳說) 속에 빠져 들어본다. 그러나 정자에서 오래 머물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이곳 말고도 출렁다리 등 곳곳에서 이 정도의 조망은 흔하게 터지기 때문이다. 참고로 시원정의 현판(懸板)은 호남지역의 유명한 서예가(書藝家) 장전 하남호선생의 작품이라고 한다.

 

 

시원정 아래의 바위협곡에는 출렁다리가 놓여있다. 가마골을 사이에 두고 양쪽 바위벼랑을 출렁다리로 연결시켜 놓은 것이다. 다리는 68의 길이에 주탑(主塔)의 높이는 12.5, 연분홍의 철 케이블로 만들어져 있다. 다리가 허공에 매달려 있다 보니 사람들이라도 다닐라치면 어김없이 출렁거린다. 그런데 그 높이가 30m가까이 되다보니 다리가 후들거릴 수밖에 없다. 그러니 겁에 질린 사람들을 놀래주려고 일부러 다리 위에서 뛰어대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로 인해 비명을 질러대는 사람들도 생긴다. 뛰어대는 쪽은 하나 같이 남자들이고, 대신에 비명은 여자들 차지이다. 그러나 막상 다리 위에서는 출렁다리의 전모(全貌)가 나타나지 않는다. 만일 다리의 본 모습을 제대로 보고 싶다면 양쪽 바위벼랑 위를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출렁다리가 주변의 암릉 및 푸른 신록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한다.

 

 

출렁다리는 가마골의 명소인 용소폭포(龍沼瀑布가 가장 잘 바라보이는 포인트(point)이다. 다리의 중간쯤에 서면 용소의 전모(全貌)가 적나라하게 펼쳐지는 것이다. 용소는 한 인간의 부질없는 욕심이 불러온 화()에 대한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그 전설의 내용은 대강 이렇다. 옛날 담양 고을에 원님이 새로 부임했는데 그는 풍류(風流)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귀에 아름다운 가마골에 대한 소문이 그냥 넘어갈리 없었을 것이다. 그가 구경할 날짜를 잡고 잠을 자는데 꿈에 백발선인이 나타나더니 내일은 내가 승천(昇天)하는 날이니 오지 말라고 간곡히 부탁하고 사라지더란다. 그러나 원님은 신령의 말을 저버리고 이튿날 예정대로 가마골로 행차했다. 어느 못에 이르러 그 비경에 감탄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 못의 물이 부글부글 소용돌이 치고 주위에는 짙은 안개가 피어오르더니 황룡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러나 황룡은 다 오르지를 못하고 그 부근 계곡으로 떨어져 피를 토하며 죽었단다. 이를 본 원님도 기절하여 회생하지 못하고 죽었다니 한 사람의 부질없는 욕심이 불어온 화()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뒤 사람들은 용이 솟은 못을 용소라고 하고 용이 피를 토하고 죽은 계곡을 피잿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출렁다리를 건넜다가 다시 되돌아 내려오는 것이 일반적인 산행코스이다. 그러나 우리부부는 맞은편 산자락으로 향하는 긴 계단을 오른다. 사령관동굴을 보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계단이 끝났는데도 동굴은 나타나지 않는다. 보이는 것이라곤 삼거리에 세워진 이정표(2등산로, 사령관동굴/ 수변공원/ 시원정, 출렁다리)가 고작이다. 사령관 동굴은 이곳에서도 얼마간 더 올라가야만 하는 모양이다. 우린 여기서 그냥 발걸음을 돌리기로 한다. 끝까지 가보고 싶었지만 얼마나 더 올라가야 동굴이 나올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거리 표시도 되어있지 않은 이정표를 왜 세웠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갈림길에서 수변공원으로 내려간다. 대략 5분쯤 내려갔을까 또 다시 갈림길(이정표 : 용소, 관리소/ 사령관계곡()/ 시원정, 출렁다리)이 나타난다. 이정표를 보니 사령관 동굴은 이곳에서도 갈 수가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그 거리는 꽤 된다는 의미일 것이니 아까 동굴 가는 것을 포기한 우리의 결정은 최선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산행 후에 산행대장에게 물어본 결과 동굴까지 다녀오려면 2Km정도를 더 걸어야 한단다. 그리고 막상 그곳에 가봐야 동굴도 없다면서 안 가길 잘했다고 했다. 갈림길에서 용소 쪽으로 조금만 더 내려오면 수변공원(水邊公園)이 나온다. 수변공원이라고 해서 별다른 것은 없다. 이름 그대로 물가에 조성해 놓은 공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물가에 정자(亭子) 하나와 안내판 몇 개 세워놓은 것이 다이니까 말이다. 공원 앞에 소()자라도 하나 붙였으면 더 좋았지 않았나 싶다.

 

 

수변공원에서 몇 발작만 더 걸으면 용소폭포의 윗자락, 작은 와폭(臥瀑)들이 연이어 만들어내는 물길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물줄기는 중간에서 암반에 걸려 한차례 바위구멍으로부터 힘차게 공중으로 솟구쳐 오른 후 다시 아래를 향해 힘차게 뛰어내린다.

 

 

폭포의 상단에 마련된 전망대에서 주변풍경을 눈에 담다가 아래로 내려오면 용소폭포의 전모(全貌)가 한눈에 들어온다. 폭포는 위에서 볼 때와는 또 다른 모습이다. ()이 승천하다가 피를 토하며 죽었다는 전설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주변 암반(巖盤)은 억겁(億劫)의 세월을 통해 계곡물이 암반을 깎아내려 흡사 용이 꿈틀거리며 지나간 듯한 모양을 만들고 있다. 그리고 그 위를 떨어져 내리는 물줄기는 우람했고, 아래의 소()는 너르면서도 깊었다. 아마 최근에 내린 폭우로 인해 수량이 불어난 덕분일 것이다. 깊은 소가 부담스러웠던지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목책(木柵)을 둘러놓았다. 참고로 용소는 영산강의 시원지(始原池)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서 발원한 영산강 물줄기는 담양읍을 지나 광주, 나주, 영암 등지를 거쳐 목포 앞바다까지 111.5km를 흘러 영산강 하구둑을 통해 서남해로 흘러들게 된다.

 

 

용소폭포를 둘러봤다면 오늘 산행이 끝났다고 봐도 된다. 폭포 입구의 바위협곡을 지나고 나서는 주변 풍경도 그다지 특별한 것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냥 무작정 걷지는 말자. 지금 걷고 있는 가마골계곡은 우리의 아픈 역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한국전쟁(韓國戰爭) 기간 동안 남북 양쪽의 사망자(死亡者) 수는 130만 명이다, 거기다 행방불명자까지 합칠 경우에는 그 수는 무려 241만 명으로 늘어난다. 민족의 아픔이 아로새겨진 용추산 가마골에서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인 6.25전쟁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산행날머리는 생태공원 밖의 주차장

용소폭포에서 25분 남짓 걸어 내려오면 산행을 시작하면서 헤어졌던 용연폭포 갈림길이 나오고 차가 주차되어있는 생태공원 밖의 주차장까지는 이곳에서도 10분 정도를 더 걸어야만 한다. 가마골을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침에 차에서 내렸던 관리사무소 앞 주차장을 산행의 들머리와 날머리로 삼는다. 그러나 만일 회원들에게 제공하는 음식(飮食)을 직접 만드는 산악회라면 우리처럼 생태공원 밖에다 날머리를 잡을 수밖에 없다. 생태공원 안에서는 취사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오늘 산행을 따라나선 산악회가 식사를 직접 만들어서 제공한다는 것은 아니다. 산행을 끝내고 돌아온 회원들에게 시원한 막걸리 사발을 돌리면서 안주로 곁들일 도토리 부침개를 만들려다 부득이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다. 오늘 산행은 3시간 40분이 걸렸다. 중간에 몸을 씻느라 쉰 시간을 감안하면 3시간20분이 걸린 셈이다.

 

에필로그(epilogue), 담양은 대나무의 고장으로 유명하다. 때문에 대나무와 관련된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많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대나무 정원(庭園)인 죽녹원(竹綠苑)과 대나무 마디에다 밥을 해주는 대통밥’. 그리고 떡갈비를 들 수 있다. 가마골에서 담양읍까지는 대략 20분 남짓, 오늘 산행을 따라나선 산악회(산두레)는 이런 고장을 그냥 지나칠 리가 결코 없는 산악회이다. 아무리 귀경시간에 쫓긴다고 해도 죽녹원 정도야 그냥 거를 수도 있겠지만 담양에서의 식사까지 포기할 정도의 산악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 지역의 먹을거리를 놓치지 않고 맛을 보여주는 것으로 전통이 있는 산악회인 것이다. 허나 문제는 대통밥과 떡갈비의 가격이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거기다 지난번 산행에서 영양탕을 준비하느라 금고(金庫)가 바닥났단다. 그래서 바꾼 메뉴(menu)는 쌈밥정식. 대신 돈을 조금 더 주고 제육복음의 양을 늘렸단다. 담양군청에서 추천해준 식당답게 식사는 훌륭했다. 죽순요리를 포함한 16개나 되는 밑반찬은 정갈했고, 된장국은 맛깔스러웠다. 거기다 여러 번에 걸쳐 밑반찬을 보충해주면서도 인상 한번 쓰지 않는 종업원들의 접대 매너(manner)는 신선하기까지 했다. 이 자리를 빌어 산악회관계자 분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모후산(母后山, 918.8m)

 

산행일 : ‘14. 8. 10()

소재지 : 전남 화순군 남면과 순천시 주암면·송광면의 경계

산행코스 : 유마사 주차장집게봉갈림길중봉갈림길용문재모후산중봉집계봉집게봉갈림길유마사 주차장(산행시간 : 4시간)

함께한 산악회 : 청마산악회

 

특징 : 전남권에서 광양의 백운산과 광주의 무등산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산이다. 지리산에 포함된 봉우리들을 제외했음은 물론이다.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산임에도 불구하고 웬만한 산꾼들까지도 그 이름이 생소할 정도로 그동안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오지(奧地)에 위치한 탓에 접근이 어려웠던 이유도 있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사람들을 유인할만한 볼거리가 없었던 게 가장 큰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쉽게 말해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얘기이다. 산줄기의 선도 묵직하고 단순해 안정된 모습이다. 그러던 것이 주암호()가 만들어지면서 서서히 사람들이 찾기 시작하더니 요즘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고 한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주암댐 조망(眺望)이 산꾼들 사이에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때문일 것이다. 거기다 오랜 역사와 전설을 간직한 유마사까지 끼고 있으니 한번쯤은 다녀와야 할 산임에 분명하다.

  

산행들머리는 유마사입구 주차장(화순군 남면 유마리)

호남고속도로 북광주 I.C에서 내려와 외곽순환도로와 22번 국도를 이용해서 화순까지 온다. 화순읍에서도 계속해서 22번 국도를 따라 순천방면으로 달리다가 구암교차로(交叉路 : 화순군 동면 복암리)에서 우회전, 15번 국도를 이용하여 벌교방면으로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남계삼거리(화순군 남면 복교리)가 나온다. 이곳 삼거리에서 왼편으로 4Km정도 들어가면 산행들머리인 유마사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주차장의 한쪽 귀퉁이에 있는 모후산(유마사) 관광안내센터의 왼편으로 난 길로 들어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산행이 시작되자마자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두 길은 유마사의 앞에서 다시 만나게 되나, 난 왼편에 보이는 일주문(一柱門) 코스를 권하고 싶다. 그래야만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설(傳說) 한 가닥을 추려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유마사에 들어가기 전에 보안부터 만나보자. 보안은 유마사를 세웠다는 유마운(維摩雲)의 딸이다. 그녀가 놓았다는 다리인 보안교(: 화순군 향토문화유산 제30)가 바로 일주문의 왼편에 있기 때문이다. 개울로 다가가보면 거대한 바위 하나가 하천의 이쪽과 저쪽을 연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로 보안이 놓았다는 다리인데 바위는 모후산에서 옮겨왔다 전한다. 그것도 치마에 싸서 말이다. 대단한 여자이다. 그러나 보안은 유마사의 창건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의 치명적인 행태를 보이는 여자이니 그냥 믿고 넘어가보도록 보자. 여기서 보안에 대한 전설(傳說) 한 토막을 끄집어 내보자. 유마사를 세운 유마운이 죽자, 절에는 그의 딸인 보안보살과 부전이라는 스님, 이렇게 둘만 남았단다. 젊은 남녀가 오래 같이 있다 보면 정분이 나게 마련인 법, 둘 사이에도 정분이 났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 정분이 부전스님만의 짝사랑(unrequited love)이었던 게 문제였다. 부전의 사랑을 알아차린 보안의 아이디어(idea)는 내기에서 이겨서 사랑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 내기는 뜰채로 물 위에 떠있는 달을 건져 올리는 것이었고, 다들 짐작하겠지만 부전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보안은 건져 올렸단다. 같은 채인데도 그녀가 건질 때는 물이 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정도에서 부전스님이 나가떨어진다면 어찌 짝사랑이라 할 수 있겠는가. 상심한 스님은 결국 몸져눕게 되었고, 이를 안 보안의 처방이 걸작이다. 어느 날 보안이 아파 누워있는 부전을 찾았다. 그리고 보안은 법당 안에 모셔진 탱화(幀畵)를 뚝 떼어 마룻바닥에 깔고 옷을 벗었단다. 그러나 부전은 차마 옷을 벗지 못했다. 사랑이 아무리 깊어도 스님이 어찌 부처님을 깔고 누울 수 있겠는가. 그러자 보안이 노하며 말했단다. ‘너는 만들어 놓는 그림에 불과한 부처는 무섭고, 진짜 살아있는 부처는 무섭지 않느냐?’ 그리고는 백의관세음보살로 변해 하늘로 날아갔다는 것이다.

 

 

슬픈 사랑의 이야기를 뒤로 하며 일주문을 통과하면 주변정리 작업이 한창인 부도 한 기()를 만나게 된다. 선이 아름다운 이 부도는 보물 제1116호로 지정된 유마사해련부도(維摩寺海蓮浮屠). 보안의 아버지 유마운의 것으로 전해지는데 상륜부는 세월 아래로 사라지고 없다. 부도를 지나면 아까 헤어졌던 차도로 다시 올라서게 된다. 그런데 쉽게 올라서지를 못하고 자꾸만 고개를 돌리게 된다. 부전의 아픈 사랑이 나에게까지 전해진 것이 아닐까? 평범한 중생인 난 부처님의 도력보다는 인간적인 부전의 사랑이 더 마음에 끌리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유마사해련부도(維摩寺海蓮浮屠)는 도굴범들에 의해 훼손되어 구조물이 흩어져 있던 것을, 1981년 화순군에서 복원한 것이다. 기단부의 모습이나, 탑신에 새긴 여러 조각의 양식으로 보아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유마사는 한때 호남에서 가장 큰 사찰이었다고 한다. 귀정암(歸靜庵), 금릉암(金陵庵), 운성암(雲城庵), 사자암(獅子庵), 오미암(五味庵), 은적암(隱寂庵), 남굴암(南窟庵), 동암(東庵) 등 수많은 부속 암자(庵子)를 거느릴 정도였다. 하지만 오랫동안 버려졌던 탓에 남아있는 것이라곤 거의 없다. 오래된 것이라곤 그저 조금 전에 들어오는 길에 보았던 보안교와 유마사해련부도(維摩寺海蓮浮屠)가 다라고 생각하면 된다. 구태여 하나 더 들라고 한다면 경헌대로사리탑(敬軒大老舍利塔)도 있다. 해련부도와 함께 1981년에 복원된 사리탑의 대석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동물들이 새겨져 있다. 사찰은 몇 번의 중수과정이 있었으나 6.25때 전소(全燒)되었고, 현재의 건물들은 모두 근래에 새로 지은 것들이다. 그러나 너무 서운해 할 것까지는 없다. 비록 건물들은 새것이지만 대신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傳說)들이 절을 떠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여자, 관세음보살의 화신이었던 여자, 그러니까 본디 관세음보살이었던 여자인 보안에 관한 전설이다. 보안의 아버지 유마운은 요동의 태수였다고 한다. 그는 재물을 많이 챙긴 탐관오리(貪官汚吏)였었나 보다. 그러나 딸인 보안의 청에 의해 과거를 뉘우쳤고, 거두어들인 재물들을 모두 가난한 백성들에게 내놓고 길을 떠난다. 두 부녀(父女)는 걷고 걸어 국경을 넘었고, 모후산 아래까지 왔다. 그리고 모후산의 산자락에 절을 지었고, 그 절을 지킬 스님을 한명 구했는데 그가 바로 아까 보안교를 지나면서 이야기 했던 부전스님이었단다.

 

 

유마사는 현재 선학승가대학원(禪學僧伽大學院)’을 운영하고 있다. 호남에서 유일한 비구니(比丘尼) 교육도량이다. 그러니 남정네들은 당연히 언행에 조심을 해야 할 일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내려오는 길에 물가로 못 내려가게 하는 보살님이 보였다. 말은 상수도원(上水道源) 보호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어쩌면 수행정진(修行精進) 중인 비구니들의 수행에 방해를 막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다.

 

 

유마사로 들어가는 다리(白雲橋)를 건너기 전에 오른편으로 진행한다. 계곡을 따라 오르는 길이다. 차량이 다녀도 될 것 같이 널따란 임도는 깔끔하게 잘 다듬어져 있다. 이곳 화순군에서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등산로를 정비하고 있는 지 실감이 나는 순간이다. 유마교에서 5, 그러니까 산행을 시작한지 10분쯤 되면 이정표(용문재 2.9Km/ 주차장/ 유마사)가 하나 나타난다. 유마사를 들르지 않을 경우에는 주차장에서 곧바로 이곳으로 오게 되는 모양이다.

 

 

첫 번째 이정표를 지나면 곧이어 본격적인 계곡길이 펼쳐진다. 요즘 연달아 남해안을 지나가는 태풍의 영향 탓인지 계곡을 흐르는 물의 양이 제법 많다. 그 덕분에 물 흐르는 소리가 경쾌하다. 평지처럼 수더분한 계곡길을 따라 5분쯤 걸으면 집게봉갈림길(이정표 : 정상 3.9Km/ 집계봉 1.8Km)이 나온다. 오른편 집게봉 방향으로 난 길은 내려올 때 하산길로 이용될 것이다. 이정표 기둥에 이곳의 위치를 정량암으로 표시해 놓은 것을 보면 옛날 이 부근에 정량암이라는 암자(庵子)가 있었나 보다. 산행을 마치고 내려올 때 보니 조금 위에 암자가 들어앉아도 될 만큼 널따란 분지(盆地)가 있었다.

 

 

 

용문재로 향하다보면 좀 특이한 게 하나 눈에 띈다. 등산로 양편에 심어 놓은 나무들이 어딘가 눈에 익은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차()나무들이 아니겠는가. 농원(農園)에서나 재배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차나무들을 그 흔한 정원수 마냥 길가에다 죽 심어 놓은 것이다. 심혈을 기울여 등산로를 정비한 화순군청 관계자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인사를 드리고 싶다. 아무튼 작설차(雀舌茶)라도 한 모금 마시고 싶은 사람들은 이른 봄에 이곳을 찾아오면 제격이 아닐까 싶다. 여린 잎 한 웅큼 따다가 우려먹으면 그게 바로 작설차가 아니겠는가.

 

 

이어서 10분 조금 못되게 더 걸으면 나무데크로 만들어진 계단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 데크의 중간쯤에 오른편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하나 놓여있다. 중봉으로 가는 길(이정표 : 용문재 2.0Km, 정상 3.4Km/ 철철바위 0.9Km, 중봉 1.9Km/ 유마사 1.3Km, 주차장 1.4Km)이다. 뱀골을 거쳐 중봉과 정상에 이르게 되지만 보통 하산길로 이용되기 때문에 무시하고 곧장 용문재로 향한다.

 

 

 

중봉갈림길에서 12분 정도 더 오르면 원두막(園頭幕)을 닮은 정자(亭子) 하나가 나타난다. 정자 뒤로 갈림길(이정표 : 용문재 0.6Km. 정상 2.0Km/ 숯가마터 1.2Km, 철철바위 1.5Km/ 유마사 2.7Km)이 보이지만 무시하고 그냥 직진한다. 모후산을 오를 때에는 산막골 계곡길을 타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정자를 지나면서 산길은 험해진다. 그렇다고 경사(傾斜)가 가파르다거나 바윗길이 나타난다는 의미는 아니다. 최근 남해안(南海岸)을 연달아 지나가고 있는 태풍(颱風)의 영향으로 산길이 온통 파헤쳐져 있다는 얘기이다. 사람들의 통행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깊은 상흔을 낸 것을 보면 이 지역에 얼마나 많은 양의 폭우(暴雨)가 내렸을지 금방 짐작이 간다.

 

 

 

원두막 갈림길에서 20분 정도 더 오르다가 막바지에서 잠깐 가파르게 치고 오르면 용문재에 올라서게 된다. 용문재는 온통 상처투성이다. 정상에 있는 강우레이더관측소까지 삭도(索道)를 놓는 공사가 한창이기 때문이다. 고개에는 등산안내도와 이정표 (정상 1.4Km/ 동복면 유천리 2.9Km/ 도원사 4.8Km, 남계리 11.6Km/ 유마사 3.3Km)외에 다른 안내판 하나가 더 세워져 있는데, 이것이 보는 이들의 눈길을 끈다. ‘모후산 삼나무 숲길에 대한 설명인데, 2008년에 열린 9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장려상인 어울림상을 탔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아름답다는 이 길은 산행을 마칠 때까지 만날 수 없었다.

 

 

용문재에서는 오른편 능선을 탄다. 반대편은 남계리로 이어지는 종주길이기 때문이다.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강우레이더관측소로 올라가는 삭도(索道)와 나란히 나있다. 그렇다고 삭도의 오른편으로 난 널찍한 임도(林道)를 따른다는 얘기는 아니다. 삭도의 왼편으로 산길이 나있는 것이다. 정상으로 향하는 산길은 제법 가파르다. 아니 많이 가파르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이제까지 완만(緩慢)하게 올라왔던 것을 만회라도 하려는 모양이다. 그 길가는 온통 조릿대의 천국이다. 길가 양편에 늘어선 조릿대들이 마치 담장을 쌓아 놓은 것 같은 풍경을 연출할 정도로 울창하다.

 

 

 

 

 

 

산길을 걷다보면 심심찮게 오른편으로 조망(眺望)이 트인다. 삭도를 설치하느라 나무들을 베어냈기 때문일 것이다. 동북면 유천리와 한천리 일대를 비롯해 동북댐으로 이어지는 물줄기까지도 보일 정도이다. 그리고 고도(高度)를 높여갈수록 주변의 경관은 더욱 세세히 드러난다.

 

 

 

산길은 가끔 바위지대를 지나가기도 한다. 한두 번은 안전로프에 매달려야만 하는 곳도 나타난다. 그러다가 시야(視野)가 뻥 뚫린 전망바위에 올라서게 된다. 용문재에서 30분 정도가 걸리는 지점이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 사위가 갑자기 구름으로 뒤덮여버린 탓이다. 아쉬운 마음을 접고 정상으로 향하는데 길가에 곱게 핀 나리꽃이 밝게 웃고 있다. 조금 후에는 날씨가 다시 맑아질 것이니 너무 서운해 하지 말라면서 말이다.

 

 

 

 

 

 

전망대에서 잠깐 내려섰다가 다시 한 번 맞은편 능선을 치고 오르면 강우(降雨)레이더관측소가 나온다. 유마사 쪽 들머리가 한눈에 들어오는 조망(眺望) 좋은 곳이다. 이 관측소(觀測所)는 국토건설부에서 설치한 시설물로 여름철에는 강우, 겨울철에는 강설량(降雪量)을 관측한다. 특히 원거리 태풍감시 등 종합적인 기상관측 레이더와는 달리 반경 100이내의 강우를 집중 관측하며, 최대 3시간까지 국지적(局地的)인 강우를 빠르게 선행 예보할 수 있어 폭우로 인한 홍수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고 한다. 참고로 강우레이더관측소는 비슬산과 소백산, 그리고 이곳 모후산 외에도, 추가로 검단산과 가리산, 서대산에 추가로 설치할 계획이라고 한다.

 

 

 

 

 

강우레이더관측소의 담장 아래를 통과하여 반대편으로 오르면 드디어 모후산 정상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45분이 지났다. 모후산 정상은 엄청나다고 해도 과언(過言)이 아닐 정도로 널따란 헬기장을 겸하고 있다. 정상에는 어른 키만큼 커다란 정상표지석 외에도 이정표 아래에 앙증맞을 정도로 작은 정상표지석 하나가 더 있다. 화순군에서 새로운 정상석을 세우면서 외로워하지 말라며 그대로 놓아둔 모양이다. 참고로 모후산의 원래 이름은 나복산(羅山)이었단다. 그러던 것이 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해 왕비와 태후를 모시고 내려와 가궁을 짓고 환궁할 때까지 1년 남짓 머물렀다고 해서 모후산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후(母后)는 공민왕의 어머니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산세(山勢)가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하다는 의미라고 한다. 그리고 모후산은 한때 모호산(母護山)으로 불리기도 했다. 부근에 있는 동복현의 현감(縣監)을 지냈던 서하당 김성원이 정유재란 때 68세의 나이로 90세 노모를 구하기 위해 맨몸으로 싸우다 전사(戰死)한 곳이 바로 이 산이었기 때문이다  

 

 

 

정상에 서면 사방으로 시야(視野)가 열리면서 일망무제(一望無題)로 탁 트인 조망(眺望)이 펼쳐진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주암호(), 리아스식 해안에 갇혀있는 호수의 물이 유난히도 푸르고, 그 너머에서 반짝이고 있는 것은 어쩌면 득량만()일 것이다. 호수와 바다를 한꺼번에 볼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함께 어우러지는 풍광(風光)이 가히 감동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개라도 들라치면 남도의 산들이 한꺼번에 눈에 들어온다. 우선 날카로운 산줄기로 이루어진 백아산과 육중한 몸매의 무등산은 물론이고, 광양의 백운산과 11시 방향의 지리산까지 남도의 명산들이 파노라마(panorama)처럼 펼쳐지는 것이다.

 

 

 

꽤 오랜 시간을 정상에 머무르다 하산을 시작한다. 물론 중봉과 집게봉이 있는 남릉 방향이다. 하산길은 한마디 가파르다. 비록 허접하기는 하지만 안전로프까지 매달아 놓았을 정도이니 주의가 요구된다. 참고로 내려가는 길의 반대방향에는 고려(개성)인삼의 시배지(始培地)가 있다. 이왕에 다녀올까도 생각해봤지만 그냥 포기하기로 한다. 오늘 같이 무더운 여름날 다녀오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참고로 인삼시배지에 대한 기록은 사도세자의 장인이었던 홍봉한의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와 개성부 유수(留守)를 지냈던 김이재의 '중경지(中京志)'에 나와 있다. 그래선지 몰라도 몇 년 전 이곳에선 120년 된 25000만 원 상당의 천종산삼 8뿌리가 발견됐다고 한다.

 

 

 

내려가는 길이 비록 험해도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내 눈은 결코 멈출 줄을 모른다. 잘만 하면 로또복권(Lotto福券)에라도 당첨되는 셈이니 어찌 멈출 수 있겠는가. 그만큼 이곳 모후산의 산삼(山蔘)은 유명했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동복 삼복(三福)'이란 말까지 생겨났겠는가. 예로부터 모후산은 동복현(同福縣)의 관내였다. 그런데 이곳에 부임한 현감(縣監)들은 하나같이 진상품 때문에 골머리를 썩혔다고 한다. 앞에서 말한 '동복 삼복(三福)'을 구하는 게 만만찮았기 때문이다. 복청(福淸 : 모후산 토종꿀)과 복천어(福川魚 : 동복천의 민물고기)외에 '동복 삼복(三福)'의 나머지 하나가 바로 내가 지금 찾고 있는 복삼(福蔘 : 천종산삼)인 것이다.

 

 

모후산 정상에서 가파르게 내려섰다가 조릿대와 잡목(雜木)이 늘어선 능선길을 따라 작은 오르내림을 몇 번 반복하다보면 중봉에 이르게 된다. 물론 가끔이기는 하지만 주암호의 멋진 풍광을 몇 번 감상했음은 물론이다. 정상에서 26분쯤 걸렸다. 중봉 정상에서 뱀골로 내려가는 길(이정표 : 집게봉 1.0Km/ 유마사 2.3Km/ 정상 1.1Km)이 나뉜다. 뱀골은 여름철에 뱀이 많이 나타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유독 뱀을 싫어하는 성격 탓도 있겠지만 주어진 하산시간도 넉넉해서 집게봉까지 들렀다가 하산하기로 한다  

 

 

산길은 중봉에서 제법 가파르게 떨어졌다가 다시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조릿대와 잡목(雜木)으로 둘러싸인 산길을 따라 24분 정도 걷다보면 집게봉(이정표 : 유마사 2.6Km/ 말걸이재 1.4Km/ 정상 2.1Km)이다. 잡목 때문에 아무것도 볼 수 없었던 풍경이 미안했던지 산길은 집게봉의 정상에 올라서기 바로 직전에 잠깐이나마 숲을 연다. 왼편으로 시야(視野)가 트이면서 주암호가 그 화려한 자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참고로 집게봉은 산봉우리의 생김새가 집게가 입을 벌리고 있는 형상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집게봉에서 오른편으로 내려선다. 곧장 가게 될 경우 말걸이재로 가게 되기 때문이집다. 산길은 바위지대를 살짝 우회(迂廻)한 후에 급경사(急傾斜)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산길은 한마디로 엄청나게 가파르다. 그러나 굵직굵직한 바위들이 심심찮게 나타나기 때문에 지루하지는 않다. 그 대신 바닥은 너덜길, 한 발짝 내려서는 것도 여의치가 않다. 한마디로 엄청나게 험하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6.25때 남로당(南勞黨)이 이곳에다 전남도당위원회를 설치했었나 보다. 토벌군(討伐軍)의 접근이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해서 말이다. 집게봉 9부 능선에는 지금도 빨치산(partisan)이 파놓은 참호(塹壕)가 남아 있다고 한다. 산행 중에 그 흔적이라도 찾아볼까 했지만 아쉽게도 눈에 띄지 않았다. 모후산은 분단의 아픈 현실을 간직한 비운(悲運)의 현장인 것이다.

 

 

산행날머리는 유마사주차장(원점회귀)

가파른 내리막길을 조심스럽기 짝이 없다. 조심조심 내려서보지만 조심하는 것도 한계가 있는 모양이다. 결국 엉덩방아를 찧고 난 뒤에야 아까 산행을 시작하면서 지나갔던 유마사 위의 갈림길에 이르게 되었으니 말이다. 집게봉에서 40분 조금 넘게 걸렸다.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 자세한 구경을 뒤로 미루었던 유마사에 들렀다. 그리고 경내(境內)를 둘러본 뒤 길을 나서면 얼마 지나지 않아 유마사주차장에 이르게 되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총 4시간15분이 걸렸다. 막걸리를 마시느라 정상에서 쉰 30분을 감안할 경우 3시간45분이 걸린 셈이다. 산악회에서 준비한 음식을 먹은 후에 옷을 챙겨들고 주차장 옆의 냇가로 내려간다. 물론 내려가는 것을 막고 있는 보살님의 눈을 피해서이다. 물가에 앉아 발을 씻고 있는데 건너편에 민가(民家)에서 계곡으로 늘어뜨린 계단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곳 주민들은 자유로이 계곡에 드나들 수 있다는 얘기이다. 아까 유마사의 승가대학원을 설명하면서 내가 내렸던 결론이 맞은 셈이다. 상수도원(上水道源) 보호보다는 비구니들의 수행에 방해를 받지 않으려는 것이 더 큰 이유였던 것이다.

 

 

무등산(無等山, 1,187m)

 

산행일 : ‘14. 6. 14()

소재지 : 광주시 북구와 동구, 그리고 화순군 이서면, 담양군 남면의 경계

산행코스 : 원효사지구 공원관리사무소주검동유적지얼음바위 갈림길서석대입석대장불재석불암지공너덜규봉암(광석대)신선대갈림길꼬막재무등산장원효사지구 공원관리사무소(산행시간 : 4시간40)

같이한 산악회 : 좋은 사람들

 

특색 : 광주사람들은 인구 100만이 넘는 대도시 인근에 해발 1000m가 넘는 높은 산이 있는 곳은 광주뿐이라는 것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 무등산이 광주시의 진산(鎭山)이자 모산(母山)이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하긴 시내버스를 타고 30분이면 산의 중턱까지 다다를 수 있으니 어찌 시민들이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웅장하지만 거칠지 않은 산세(山勢)에다 서석대와 입석대 등 주상절리(柱狀節理 : pillar-shaped joint)라는 멋진 자연경관까지 품고 있으니 광주시민들에게는 도심공원(都心公園)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거기다 한적함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석불암과 규봉암코스를 권하고 싶다. 지공너덜의 한쪽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석불암과 광석대가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규봉암은 전국의 어느 산사에 뒤지지 않을 정로로 멋지면서도 한적하기 때문이다.

 

산행들머리는 원효사 주차장(북구 금곡동 산209-5 : 무등로 1550)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창평 I.C에서 내려온 뒤 우회전하여 60번 지방도를 탄다. 잠시 후 고서교차로(交叉路 : 담양군 고서면 성월리)에서 좌회전해 887번 지방도를 따라 들어가면 광주호(光州湖)가 나온다. 광주호 상류에 위치한 가사문학관의 조금 위에 있는 갈림길(남면 지곡리)에서 우회전하여 10분 정도 들어가면 원효사주차장에 닿는다. 산행이 시작되는 공원관리사무소는 식당가 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는 곳에 있다.

 

 

 

 

공원관리사무소의 오른편으로 난 도로로 접어들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장불재로 넘어가는 임도(林道)인데, 들머리에 세워진 이정표(서석대 6.4Km, 장불재 6.4Km, 토끼봉 3.2Km/ 꼬막재 2.0Km, 규봉암 5.5Km, 석불암 5.8Km)를 참조하면 될 것이다. 들머리에서 20~30m쯤 들어가면 왼편에 무등산 옛길입구가 나온다. ‘무등산 옛길이라고 새겨진 자연석(自然石) 옆으로 난 산길로 올라서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지금 오르고 있는 산길은 무등산 옛길이라는 어엿한 이름을 갖고 있다. 무등산 옛길은 광주 도심(都心)에서 원효사를 거쳐 서석대에 이르는 옛사람들이 오르던 길을 복원(復原)한 새 길이다. 옛길은 현재까지 총3구간이 만들어졌다. 1구간은 광주 도심과 무등산 산행을 시작하는 원효사까지, 2구간은 원효사에서 서석대를 오르는 등산이다. 3구간은 광주 도심에서 충장사를 거쳐 담양으로 이어진다. 우리 부부는 오늘 2구간(6.4Km)을 통째로 걷게 되는 것이다. 오늘 우리부부는 복원된 옛길을 걸으며 잃어버린 옛길과, 또 그 길과 함께 사라졌던 옛이야기들을 되돌아보게 될 것이다. 참고로 3구간은 무등산 자락의 낮은 능선을 따라 난 숲길. ‘유적(遺跡)과 가사문화권(歌辭文化圈)으로 걸어가는 역사(歷史)이라고 불린다.

 

 

 

 

길은 곧바로 원시림(原始林) 속으로 들어간다. 제일기도원과의 갈림길을 지나면 길의 이름대로 오감(五感)을 열어야 한다. ‘무등산 옛길2구간은 무아지경(無我之境)의 길이라는 어엿한 이름을 갖고 있다. 이는 산을 정복(征服)하려고 하지 말고 산에 귀를 기울이고, 산을 느끼면서 하나가 되어 보라는 얘기일 것이다. 새소리와 바람소리만이 있는 고요한 산길을 따라 숨소리까지 죽여가면서 조용히 걸어본다. 그런데 앗뿔싸! 늦어도 너무 늦게 걷는 앞사람을 추월하는 내 모습이 집사람의 눈에는 마치 자기를 떼어놓고 도망치려는 것으로 비쳐졌나보다.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나를 추월하더니 뒤도 안돌아보고 내빼버리는 것이 아닌가. 화가 났음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화는 규봉암 근처에서 동생 내외를 만날 때까지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모처럼 복원된 옛길이니 옛날처럼 걸어보면 어떨까? 혼자거나 아니면 둘이서 호젓이 걸어보는 것 말이다. 물론 옛길을 헤칠 수도 있는 쇠지팡이(스틱)는 내버려두고 말이다. 이 길은 오르는 사람들만 이용하도록 설계되었다고 한다(내려올 때는 장불재 방향이나 중봉을 거쳐서 내려오면 된다). 자연 훼손(毁損)을 최소화해 만든 좁은 길을 따라 오르는 사람들을 내려오는 사람들이 방해하지 않도록 하려는 배려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려오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았다. 옛길을 올라가는 사람들이 오감(五感)을 열어 자연과 일체가 될 수 있도록 설계한 이의 뜻을 거스르고 있는 것이다.

 

 

완만(緩慢)하면서도 한적한 산길이 계속된다. 그렇다고 경사(傾斜)가 아주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있기는 하지만 그리 심하지는 않다는 얘기이다. 걷기 딱 좋은 산길을 따라 20분쯤 걷다보면 금()줄에 둘러싸인 반반한 바위 하나가 나타난다. ‘주검동 유적(鑄劍洞 遺蹟)’이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던 김덕령 장군이 칼과 창 등의 무기(武器)를 만들었던 곳이라는 안내판이 바위 옆에 세워져있다. 김덕령 장군의 시호(諡號)는 충장공(忠壯公), 임진왜란 때 혁혁한 공을 세웠던 그는 1596년 이몽학(충청도에서 난을 일으킴)과 내통하였다는 신경행(辛景行)의 무고(誣告)로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으로 인한 장독(杖毒)으로 옥사(獄死)하였다. 남 잘 되는 꼴을 못 보는 나쁜 사람들이 있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매 한가지인가 보다. 참고로 그를 모신 사당(祠堂)이 요 아래 무등산 자락(광주시 북구 금곡동)에 있으며, 광주시 인근에는 그와 관련된 지명들이 많이 분포되어 있다.

 

옛길을 걷다보면 가끔 자연쉼터가 나온다. 물도 마시고 숨도 고르면서 걸어보라는 의미일 것이다.

 

 

주검동 유적에서 한적한 숲길을 따라 7분 정도 더 걸으면 삼거리가 나온다. '물통거리라고 한다. 옛날 이 길은 나무꾼들이 땔감이나 숯을 구워 나를 때 지나다니던 산길이었고, 1960대에는 군부대(軍部隊)에서 보급품을 나르던 길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1980년대부터 사용하지 않다가 옛길이 복원되면서 다시 개방되었다는 것이다. 길가에 그들이 지나다닐 때 마셨던 샘을 복원해 놓았지만 뚜껑을 덮어버린 탓에 물은 마실 수는 없다. 샘의 옆에 만들어 놓은 쉼터에서 꽤 많은 사람들이 망중한(忙中閑)을 즐기고 있는 것을 보면, ’무등산 옛길을 찾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의미일 것이다. 맞다. 광주시민들에게 무등산은 도심공원(都心公園)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물통거리에서 15분 조금 못되게 걸으면 비록 크지는 않지만 반반하게 생긴 바위 하나가 나타난다. 치마바위라는데 바위에 대한 설명은 찾아볼 수 없고, 바위 앞에 원목(原木)을 세우고 그 기둥에다 치마바위라고 적어 놓았을 따름이다. 치마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일까? 아니면 지나가던 선녀(仙女)가 벗은 옷이라도 이 바위 위에다 걸쳐 놓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일까? 이름이 지어진 사연이 궁금했지만 아쉬운 마음만 간직한 채로 그냥 지나치고 만다.

 

 

치마바위를 지나면서 두발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다. 산길이 서서히 가팔라지기 시작한데다가 길바닥까지 너덜길로 변하기 때문에 걷기가 여간 사납지 않다. 가파른 산길을 15분 조금 넘게 치고 오르면 얼음바위 갈림길(이정표 : 무등산 옛길/ 얼음바위 나가는 길)’에 이르게 된다. 누군가가 이정표의 방향표시 아래에 서석대까지 1.2Km가 남았다고 적어 놓았다.

 

 

 

 

얼음바위 갈림길을 지나면서 산길은 더욱 가팔라진다. 그 가파름을 이겨내지 못한 산길은 곧바로 위로 향하지 못하고 왔다갔다 갈지()자를 그리며 위로 향하고 있다. 아마 오늘 산행에서 가장 힘든 구간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이렇게 심한 가파름도 집사람의 발걸음을 붙잡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조금도 속도를 늦추지 않은 채로 내빼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드디어 집사람을 쫒아가기에 지친 내 입에서 비명소리가 새나오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끝내 좀 천천히 가라는 하소연을 하고야 만다. 그러나 집사람은 고개 한번 돌려보지 않고 올라가기에 바쁘다. 아직도 그녀는 온몸으로 나에 대한 불만을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얼음바위 갈림길에서 15분 조금 넘게 오르면 북봉 갈림길’(이정표 : 서석대 0.5Km, 입석대 1.0Km/ 북봉 1.6Km/ 중봉 0.5Km, 원효분소 5.9Km)이다. 이곳에서 만나게 되는 널따란 길은 무등산 정상으로 연결되는 보급로이다. 원시림(原始林)에 가려왔던 시야(視野)는 이 부근에서 처음으로 하늘을 열어준다. 이곳에서 길은 세 갈래로 나뉜다. 왼편은 북봉, 오른편은 중봉으로 가는 길이다. 서석대로 가려면 도로를 가로질러 등산 안내도가 있는 작은 초소(哨所 : 서석대안내소) 앞을 통과해야 한다.

 

 

 

초소 앞을 지나면 또 다시 짙은 원시림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자연석으로 쌓아 만든 돌계단을 밟으며 10분 조금 못되게 오르면 오른편 숲이 잠깐 열리면서 바위 하나가 얼굴을 살짝 내민다. 뛰어난 전망대(展望臺)이니 결코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될 일이다. 누군가 이곳을 하늘이 열리는 곳이라고 표현 것을 본 일이 있다. 그의 표현은 한 치도 틀림이 없었다. 바위 위에 올라서면 먼저 오른쪽 능선에 볼록하게 솟아오른 중봉과 TV중계소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 뒤에는 광주시가지가 널따랗게 펼쳐지고 있다. 또한 고개를 왼편으로 돌리면 서석대가 울창한 숲을 헤치며 머리를 내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한마디로 장관이다.

 

 

 

 

전망대에서 돌계단을 밟으며 잠깐 오르면 오른편에 각을 이룬 바위기둥 들이 나타난다. 아마 주상절리(柱狀節理 : pillar-shaped joint)일 것이다. 무등산의 대표적인 주상절리인 서석대는 이곳에서 조금 더 올라가야 하니까 서석대는 아닐 것이고, 그렇다면 주상절리의 예고편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이곳에서 다시 나무계단을 밟고 오르면 잠시 후에는 서석대전망대(이정표 : 입석대 0.7Km/ 전망대 20m/ 원효분소 6.8Km)에 이르게 된다. 참고로 주상절리(柱狀節理 : pillar-shaped joint)는 용암(鎔巖)이 식을 때 수축되어 생기는 절리(節理 : joint) 중에 단면(斷面)의 형태가 오각형이나 육각형의 기둥모양인 것을 말한다.

 

 

 

서석대 전망대에 서면 서석대(瑞石臺)의 주상절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같은 주상절리이지만 서석대는 조금 후에 만나게 될 입석대보다 침식(侵蝕)이 덜 진행된 상태라고 한다. 때문에 넘어진 바위들이 주변에 널려있는 입석대와는 달리, 직경 1~1.5m인 돌기둥이 30m 높이로 촘촘하게 병풍(屛風)처럼 서 있다는 것이다. 동서방향으로 늘어선 서석대에 저녁노을이라도 비칠라치면 수정처럼 반짝인다 해서 수정병풍이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육당 최남선은 서석대를 보고 이러한 글을 남겼다. ‘좋게 말하면 수정병풍을 둘러쳤다 하겠고 박절하게 말하면 해금강 한 귀퉁이를 떠왔다 하고 싶다그만큼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는 얘기이다. 서석대가 입석대나 광석대(廣石臺 : 규봉)와 가장 큰 차이점은 그 외모(外貌)이다. 서석대는 병풍(屛風)모양을 하고 있지만 입석대나 광석대는 기둥 모양으로 생긴 것이다. 이는 풍화작용(風化作用)의 진행정도 차이라고 한다. 주상절리 옆에 널려있는 너덜겅은 돌기둥이 무너져 쌓인 것이다. 다시 말해 풍화작용이 가장 많이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절리들은 서있거나 누어있거나 간에 암석의 생성(生成)과 풍화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희귀한 자연유적(自然遺跡)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곳 서석대와 입석대를 합쳐 천연기념물(465)로 지정해 놓았다.

 

 

 

 

전망대에서 오늘 산행 중 최고점(最高點)이기도한 서석대 정상부(頂上部)’는 금방이다. 돌계단을 밟으며 왼쪽으로 살짝 우회(迂廻)하여 오르면 드디어 정상부(이정표 : 입석대 0.5Km, 장불재 0.9Km/ 전망대 0.2Km, 중봉 1.2Km)에 닿게 되면서 무등산 옛길도 끝을 맺는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40분 가까이 지났다. 정상부에 세워진 나무말뚝 모양의 이정표에 적혀있는 일련번호는 40, ‘무등산 옛길1, 2구간을 합하면 그 길이가 11.87이니 산행을 하면서 보았던 말뚝들의 간격이 300m이었나 보다. 서석대의 상부는 오늘 산행 중 가장 높은 위치에 있다. 그렇다고 무등산에서 가장 높다는 얘기는 아니다. 군부대(軍部隊)가 점령하고 있는 정상부는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禁止)하고 있기 때문에, 이곳 서석대의 정상부가 일반인들의 출입이 허용되는 곳 중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는 얘기이다.

 

 

 

 

서석대(瑞石臺)의 상부(해발 1100m)에서 바라본 무등산 정상, 천왕봉과 지왕봉, 인왕봉이 우뚝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군부대(軍部隊)가 주둔하고 있는 탓에 아직까지 입산(入山) 통제구역(統制區域)으로 남아있다.

 

 

정상에 서면 사방으로 시야(視野)가 트인다. 남서쪽에는 광주시가지가 드넓게 펼쳐지고, 그 약간 왼편으로는 영암의 월출산까지 조망(眺望)된다. 북동쪽에는 무등산의 정상을 이루고 있는 천왕봉과 지왕봉, 그리고 인왕봉이 눈앞에 훤하다. 입석대(立石臺)와 광석대(廣石臺 : 규봉) 그리고 이곳 서석대(瑞石臺)를 일컬어 무등삼대(無等三臺) 또는 무등산 삼대석경(三大石景)라고 한다. 오늘은 이 세 곳을 모두 둘러보게 되는 일정이다.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전에도 난 이곳 무등산을 여러 번 올라왔었다. 그러나 광석대는 아예 가볼 생각조차 못했었고, 서석대도 고작해야 대()의 머리 위까지만 올라올 수 있었다. 옛길이 열리지 않았던 때라 입석대를 거쳐 서석대의 머리 위까지만 탐방(探訪)이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서석대를 제대로 느낄 수는 없었음은 물론이다.

 

 

 

서석대 정상부에서 잠깐 내려오면 뱀 모양으로 길쭉하게 누워있는 바위가 나타난다. 바로 승천암(昇天岩)이다. 옛날 이 부근의 암자(庵子)에서 수행을 하던 스님이 무엇엔가 쫒기고 있는 산양(山羊)을 구해준 일이 있었단다. 그런데 어느 날 스님의 꿈에 이무기가 나타나 산양을 잡아먹고 승천(昇天)을 해야 하는데 스님이 훼방을 놓았다며 만약 종소리가 울리지 않을 경우에는 스님이라도 잡아먹겠다고 했단다. 그런데 얼마 후 난데없이 우렁찬 종소리가 울렸고, 이에 이무기는 스님을 놓아주고 승천을 했다는 전설(傳說)을 간직한 바위이다.

 

 

 

서석대에서 장불재 방향으로 10분 조금 넘게 내려가면 등산로 왼편에 누워있는 거대한 돌기둥 무더기를 만나게 된다. 단면(斷面)이 사각형(四角形)이거나 오각형 또는 육각형이고 길이가 10m에 이르는 돌기둥이 마치 교각(橋脚)이 무너져 내린 것처럼 널브러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오른편에는 그런 바위들이 마치 그리스(Greece) 신전(神殿)의 기둥이라도 되는 양 똑바로 서있는 것이 보인다. 입석대(立石臺 : 해발 1017m)이다. 입석대는 한 면()1~2m이고 높이가 10~18m5각 또는 6각 기둥 30여 개가 동서로 40m 정도 늘어서서 장관(壯觀)을 연출하고 있다. 돌기둥 사이의 벌어진 틈에는 작은 관목(灌木)이나 이끼가 자라고 있다. 이곳 입석대도 옆에다 전망대를 만들어 찾는 사람들의 눈요기를 돕고 있다.

 

 

 

입석대에서 장불재까지는 10분쯤 내려오면 된다. 광주시와 화순군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장불재는 예전 화순의 동복이나 이서 사람들이 광주를 오갈 때 오르내리던 해발이 900m나 되는 높은 고갯마루이다. 장불재는 종합 쉼터라고 보면 된다. 방송사(放送社)의 송신시설을 배경으로 널따란 공터에 공원안내소와 대피소, 그리고 벤치 등 다양한 시설을 만들어 놓았다. 장불재는 오거리(이정표 : 석불암 1.6Km, 규봉암 1.8Km/ 안양산 3.1Km, 만연산 3.4Km/ 중머리재 1.5Km/ 원효분소 6.4Km/ 입석대 0.4, 서석대 0.9Km), 이곳에서 규봉암으로 가려면 벤치 사이로 난 왼쪽 길로 들어서야 한다.

 

 

 

 

규봉암으로 가는 길은 한마디로 곱다. 경사(傾斜)가 거의 없이 반반한데다가 넓기까지 하다. 바닥도 역시 울퉁불퉁한 곳이 거의 없이 반반한데, 조금이라도 험하다 싶은 곳에는 어김없이 거적을 깔아 놓았다. 장불재에서 200m쯤 걸으면 장불재 쉼터(이정표 : 석불암 1.4Km, 규봉암 1.7Km, 신선대 4.8Km/ 도원마을 3.4Km/ 장불재 0.2Km)을 만나게 되고, 이어서 20분 후에는 석불암 갈림길‘(이정표 : 석불암 0.3Km, 지공너덜0.4Km/ 규봉암 0.6Km/ 장불재 1.3Km)에 이르게 된다.

 

 

 

석불암 갈림길에 이르러 난감한 상황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석불암으로 올라가는 길이 막혀있는 것이다. 석불암의 석축(石築)이 무너져 내린 탓에 안전사고가 예상되어 길을 막았다고 한다. 경고(警告)에도 불구하고 금()줄을 넘고 본다. 어렵게 찾아왔는데 석불암을 건너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석축붕괴 현장쯤이야 조금 돌아가면 될 것 아니겠는가. 물론 집사람에게는 규봉암으로 곧장 진행하라고 이르고 나 혼자서 들어선 것이다.

 

 

 

갈림길에서 올라서면 잠시 후 너덜겅이 나오고 그 끄트머리에 허름한 암자(庵子) 하나가 나타난다. 옛날 도선국사가 참선했다는 바위벽에 마애여래불상(磨崖如來佛像)이 새겨져 있다고 해서 석불암(石佛庵)이라고 불리는 암자이다. 석굴암이라는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니 참조할 일이다. 한국전쟁 당시 절이 불에 타 폐사(廢寺)되었다가 소규모 불전인 운수선원이 들어서면서 절간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단다. 절의 뒤편 암벽(巖壁)에 새겨진 마애여래불상은 구경하기 못하고 암자의 대문 앞에 있는 감로수(甘露水)를 한 모금 마시는 것으로 위안을 삼아본다. 전각(殿閣)을 새로 짓는 불사가 한창이라서 접근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물은 시원하면서도 달았다. 참고로 마애불의 크기는 높이 98에 대좌높이는 36, 그리고 어깨와 무릎 폭은 각각 4072라고 한다. 이 불상은 높이 225에 너비가 200인 석조불감 안에다 새겼다고 한다.

 

 

 

 

 

석불암에서 규봉암으로 가려면 왔던 방향과 반대방향으로 진행해야 한다. 암자(庵子)를 나서자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시 너덜겅이 나타나는데, 아까 석불암으로 올 때 만났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규모가 크다. 인도 승려 지공대사(指空大師)가 이곳에서 좌선수도(坐禪修道)를 하며 법력(法力)으로 돌을 깔았다고 전해오는 지공너덜이다. 무등산에는 지공너덜 말고도 덕산너덜 등 네 개의 너덜이 장관을 이루고 있으나 이 가운데 지공너덜이 가장 크고(4km) 웅장하다고 한다. 너덜은 주상절리의 미래상이다. 절벽에서 떨어진 주상절리가 풍화(風化) 침식(侵蝕)된 지형이 곧 너덜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 지공너덜은 무등산의 역사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오랜 세월의 침식과 풍화의 흔적을 담고 있는 역사 말이다. 그 역사는 중생대(4500~8500만 년 전)에서부터 시작되었고, 그 붕괴과정은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그렇다면 빙하기(氷河期 : glacial age)에 형성되었다는 대구의 비슬산이나 밀양의 만어산 암괴류(岩塊流 : block stream, stone run)보다도 훨씬 더 오래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지공너덜의 끄트머리에 이르면 둥그렇게 쳐진 돌담이 나타난다. 안으로 들어가면 반반한 바위가 저절로 지붕을 만들고 있는 자연석굴(自然石窟)을 만날 수 있다. 석굴 옆의 바위에 지공대사 좌선수도원(指空大師 坐禪修道院)’이라는 글귀가 적혀있는 것을 보면 지공석굴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어떤 이는 이곳을 보조석굴이라고도 부른다. 보조국사(普照國師 : 1158~1210) 지눌(知訥)이 이곳에서 수도(修道)를 했다는 것이다.

 

 

 

지공너덜에서 조금 더 걸으면 자로 재듯 마름질한 돌기둥들이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것이 보인다. 광석대(廣石臺 : 규봉)가 그 자태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기둥의 형상을 보이고 있는 입석대와 닮았고, 또 어떻게 보면 병풍(屛風)을 둘러놓았던 서석대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입석대보다는 돌기둥의 폭()이 크고, 또한 돌기둥의 사이사이에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것은 서석대와는 다른 풍경이다. 결과적으로 광석대(廣石臺)는 앞서 보았던 두 주상절리(柱狀節理 : pillar-shaped joint)와는 또 다른 외양(外樣)을 갖고 있는 것이다. ‘무등산 3대 석대의 하나인 광석대는 규봉(圭峯)이라고 불리기고 하는데, 규봉에는 광석대 외에도 은신대와 풍혈대, 설법대 등 열 개의 대()가 있다.

 

 

광석대(廣石臺)가 보였다싶으면 잠시 후에는 규봉암(圭峯庵)에 이르게 된다. 규봉암이 광석대 앞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규봉암에 이르면 먼저 그 규모에 놀라게 된다. 해발(海拔)950m나 되는 높은 산자락에 위치한 산사(山寺)치고는 제법 큰 규모의 사찰(寺刹)이기 때문이다. 규봉암은 창건연대(創建年代)가 확실하게 전하는 문헌(文獻)이 없고 다만 신라시대에 의상대가 창건하고 순응대사가 중창(重唱)했다고 전해진다. 한편으론 도선국사 또는 보조국사가 창건했다는 설()도 있다. 그나저나 이 절에 신라의 명필 김생(711791)이 쓴 규봉암의 현판이 전해 내려오다가 절취(竊取) 당했다는 기록이 전해지는 것을 보면 천년고찰(千年古刹)임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신증동국여지승람규봉사라고 적혀있을 정도로 고려 후기까지만 해도 상당히 큰 사찰이었던 규봉암은 조선시대 이후 명맥만 이어오다 한국전쟁 때 전소(全燒)되었다. 이후 방치되던 중 1959년 조그마한 법당으로 복구됐으나 결국 폐허(廢墟)가 됐고, 이어 1991년 정인스님이 주지로 부임해 관음전을 중창했고, 일주문과 종각 등을 지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규봉암을 나서면 곧바로 길이 두 갈래(이정표 : 신선대 3.1Km, 꼬막재 3.5Km/ 상상수목원 1.9Km/ 장불재 1.9Km)로 나뉜다. 꼬막재로 가려면 이곳에서 왼편으로 진행해야 한다. 꼬막재로 가는 길도 역시 평지나 마찬가지로 편안한 길이다. 바닥도 역시 초반에는 너덜길이지만 20분쯤 지나면서부터는 흙길로 변한다. 그리고 그 보드라운 흙길은 산행이 종료될 때까지 계속된다. 신선대 갈림길 가까운 곳에서 반가운 얼굴들을 만났다. 점심을 대접하겠다며 찾아온 동생내외가 이곳까지 산을 거슬러 올라온 것이다. 그들이 준비해온 오디주스(juice)로 목을 축이고, 모시떡과 과일로 요기를 하면서 모처럼 망중한을 즐길 수 있었다. 그리고 산을 내려가서는 식당가에 자리를 잡고 관광버스가 서울로 출발할 때까지의 1시간 동안 담소를 즐겼다. 닭볶음탕을 안주삼아 술을 마셨음은 물론이다.

 

 

규봉암에서 여유로운 걸음으로 40분 정도를 걸으면 신선대 갈림길’(이정표 : 꼬막재 1.2Km/ 신선대 0.8Km/ 장불재 4.2Km), 왼쪽 꼬막재 방향으로 들어서면 곧바로 드넓은 초원지대가 나타난다. 가을이면 새하얀 억새꽃으로 장관을 이룬다는 신선대억새평전이다. 이곳은 장불재 및 중봉 근처의 억새평전과 더불어 무등산의 대표적인 억새평전으로 꼽히고 있다.

 

 

 

신선대 갈림길에서 15분 정도 더 걸으면 꼬막재(이정표 : 원효분소 2.0Km/ 규봉암 3.6Km, 장불재 5.4Km)이다. 고개의 형상이 엎드린 꼬막을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옛날 보부상(褓負商)과 유생(儒生)들이 화순과 광주를 오가는 지름길로 삼았다는 고갯마루이다. 한편 주변에 꼬막처럼 생긴 작은 자갈들이 많아서 붙은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꼬막재를 지나면서 산길은 제법 가파른 내리막길로 바뀐다. 그러다가 산길은 울창한 편백나무 숲속으로 들어서게 된다. 편백나무 향이 짙다. 그렇게나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phytoncide)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가 편백나무라고 했으니 코끝을 스치는 짙은 내음에는 피톤치드가 가득할 것이다. 나도 몰래 호흡이 커진다. 그러자 심신(心身)이 맑아지면서 산행에 지쳤던 육신(肉身)에 활기가 차오른다.

 

 

 

산행날머리는 원효사지구 공원관리사무소 앞(원점회귀)

편백나무 숲이 끝나면 이어서 산죽(山竹)길이 나타난다. 그러다가 조금 후에는 오른편에 숲문화학교가 보인다. 옛날에는 무등산장이라는 호텔((hotel)급의 숙박시설이었는데, 언제부턴가 숲문화학교로 바뀌었나보다. 꼬막재에서 30분 거리이다. 문화학교를 빠져나온 후 포장도로를 따라 조금만 더 내려오면 식당가가 나오고, 얼마 안 있어 산행이 종료되는 공원관리사무소 앞에 이르게 된다. 4시간40분이 걸렸다. 그러나 중간에 막걸리를 마시느라 쉬었던 시간을 빼면 4시간20, 오늘 산행거리가 13.5이니 제법 빨리 걸은 셈이다. 그러나 사실은 오르막길이 서석대에서 끝을 맺고 이후부터는 내리막이거나 반반한 길이 계속된 탓일 것이다.

 

 

 

에필로그(epilogue) : 무등산은 우리나라 21번째의 국립공원(國立公園)으로 지정(‘12.12.27)되었다. 그만큼 무등산의 산세(山勢)가 웅장하고 자연생태계(自然生態界)와 주변경관이 보존할 가치가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등산은 아쉬운 점이 있다. 정상 등 중요한 위치들을 군부대(軍部隊)와 방송국의 송신소(送信所) 등이 점령하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산의 정상까지 도로(道路)가 나있음은 물론이다. 덕분에 산()만이 가질 수 있는 한적함은 사라져버린 지 이미 오래이다. 하나 더 아쉬운 것은 산의 정상을 군부대가 점령한 탓에 올라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광주시민들의 요구로 정상 일원이 개방(開放)되었다고는 하지만, 기껏해야 일 년에 서너 번일 뿐이다. 거기다 기껏해야 지왕봉과 인왕봉만 개방될 따름이다. 막상 정상인 천왕봉은 아직도 개방을 불허하고 있다는 얘기이다. 그저 해발 1100m의 서석대에 서보는 걸로 만족해야 한다. 참고로 무등산에는 수달, 구렁이, 삵 등 멸종위기 8종을 포함해 모두 2,296종의 생물이 살고 있다고 한다. 이는 경주국립공원을 제외한 16개 육상 국립공원 가운데 13번째다. 자연경관(自然京觀) 면에서도 입석대와 서석대의 주상절리대를 포함해 61곳이 자원(資源)으로 지정되는 등 16개 공원 중 6번째로 다양한 산봉(山峰)과 기암(奇巖) 등을 거느리고 있다. 

 

마복산(馬伏山, 539m)

 

산행일 : ‘14. 4. 5()

소재지 : 전남 고흥군 포두면

산행코스 : 내산마을마복사안부삼거리마복산마복송집석바위배재외산마을 갈림길외산마을(순수 산행시간 : 3시간10)

같이한 산악회 : 기분좋은 산행

 

특색 : 볼거리가 많은 바위산이지만 위험한 곳은 한군데도 없는 산이다. 산허리의 곳곳에 불끈불끈 솟아있는 기암괴석(奇巖怪石)들이 볼거리를 제공하지만 산길은 어김없이 그 바위들을 피해서 나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능선에 오르면 다도해(多島海)의 멋진 풍광이 파노라마(panorama)처럼 펼쳐진다. 한마디로 잘 그린 한 폭의 그림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렇게 괜찮은 산인데도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팔영산이나 천등산 등 웬만한 산꾼들이라면 누구나 올라봤음직한 소문난 바위산들이 인근에 있어, 그들의 유명세(有名稅)에 눌려 지낸 것이 그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마복산은 전국의 여느 이름난 산들에도 결코 뒤지지 않을 만큼 빼어난 산이다.

 

 

산행들머리는 흥양농협주유소 남부주유소(고흥군 포두면 우주로 1195)

남해고속도로(영암-순천) 고흥 I.C에서 내려와 15번 국도를 타고 고흥·나로도방면으로 달리면 고흥읍과 포두면소재지(面所在地 : 고흥군 포두면 상대리)를 지나 산행들머리인 내산마을(포두면 차동리)에 이르게 된다. 고흥읍에 있는 호형교차로에서 10분쯤 걸리며 왼편 도로가에 흥양농협에서 운영하는 남부주유소가 있고, 맞은편에는 내산마을 표지석마복사입간판이 세워져있으니 참고하면 된다.

 

 

 

 

 

내산마을 표지석뒤로 난 임도(林道 : 마복사 진입로)를 따라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시멘트로 포장된 임도를 따라 2~3분쯤 들어가면 오른편 산자락으로 들어서는 오솔길이 나타난다. 향로봉을 거쳐 마복사로 들어가는 지름길이다. 물론 임도를 따라 들어가도 마복사에 이를 수 있겠지만 시멘트로 포장된 임도보다는 아무래도 산길이 더 자연친화적일 것이다. 당초에 무엇을 표시했었던지도 몰라볼 정도로 낡아버린 등산로 안내판이 들머리에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오솔길은 의외로 또렷하게 나타난다. 사람들이 꽤 많이 다녔다는 의미일 것이다. 산악회 시그널(signal)들이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무당집처럼 거창하게 매달려 있는 것이 보인다. 그다지 경사(傾斜)가 심하지 않은 산길을 13분쯤 걸으면 왼편에 바위봉우리 하나가 수풀사이에서 살짝 고개를 내민다. 바로 향로봉이다. 봉우리라고 부르기가 다소 어색할 정도로 작고 낮지만 한번쯤을 올라가 보자. 기대보다 더 빼어난 경관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향로봉 정상은 한마디로 호쾌한 조망(眺望)을 자랑한다.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있는 마복산과 해창만은 물론이고, 저 멀리 팔영산 자락까지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간척사업(干拓事業)으로 만들어진 해창 들녘이 한껏 푸르러진 것을 보면 몸은 이미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모양이다. 참 이곳 향로봉에는 또 하나의 볼거리가 있다. 바로 석문(石門)이다. 정상에서 바다를 향해 바위 끝으로 다가가면 나타나는데 그 생김새가 자못 기괴(奇怪)하니 놓치지 말고 가슴속에 담아볼 일이다 <!--[endif]--> 

 

 

 

향로봉에서 내려와 잘 가꾸어진 묘역(墓域)을 지나면 길이 세 갈래로 나뉜다.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맞은편 능선으로 오르는 길은 흔적이 희미해서 제외한다 치더라도 좌우(左右)로 난 길의 흔적이 비슷하기 때문에 어디로 가야할지가 헷갈리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어디로 가든지 마지막에는 마복사로 들어가는 임도와 마주치게 되므로 염려할 필요는 없지만 오른편으로 진행하는 것이 가장 가까운 길이니 참고하면 될 일이다. 참고로 우리는 이곳에서 길을 잃고 20분 정도를 헤매는 상황이 발생했다. 오른편으로 들어서면 얼마 지나지 않아 혹시 길을 잘못 들었나 의심하게 되는 상황과 맞닥뜨리게 된다. 산길의 흔적이 갈수록 희미해지는데다가 바닥까지 점점 더 질퍽거려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습지(濕地)를 빠져나오면 저만치에 컨테이너(container) 하나가 보인다. ‘꿈 너머 꿈 농장으로 산길은 컨테이너 박스 뒤로 나있다. 제대로 진행해온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곳에서 엉뚱한 상황과 맞닥뜨리게 된다. 산꾼들 사이에서도 제법 이력(履歷)이 나있는 산꾼으로 알려진 두 분이 길을 잘못 들었다며 되돌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과 함께 아까 지나왔던 사거리까지 되돌아와 우왕좌왕하다가 결국에는 나침반(羅針盤)의 도움을 받아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는 상황이 발생했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그들의 실수를 보며 오늘도 난 또 하나의 속담을 가슴속에 쌓아 본다.

 

 

 

컨테이너(container) 뒤로 돌아 들어가면 금방 시멘트포장 임도와 만나게 된다. 아까 산자락으로 들어서면서 헤어졌던 임도이다. 임도를 따라 잠시만 더 걸으면 마복사입구 사거리(이정표 : 마복사 0.4Km. 마복산 정상 1.2Km/ 해재 2.5Km, 마복산 활공장 Km/ 내산마을 2.0Km)’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50분이 지났다. 그러나 길이 헷갈려 우왕좌왕한 시간을 제외하면 30분 남짓 걸렸을 것이다.

 

 

 

마복사 방향으로 들어서면 얼마 지나지 않아 울창한 대나무 숲이 나타난다. 사찰(寺刹)의 앞에서 보는 대나무 숲은 왠지 낯설다. 지난 10여 년간 산행을 해오는 동안 대부분의 사찰에서 대나무보다는 산죽(山竹)들을 더 자주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하긴 대나무하면 민가(民家)를 떠올리게 되는 관념(觀念)의 작용도 한몫했음은 부인하지 못할 것이고. 아니나 다를까 마복사는 사찰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민초(民草)들의 여염집을 닮았다. 삼간짜리 대웅전은 물론 요사채 등 다른 건물들도 시중에서 흔히 보는 기와집 그대로인 것이다. 물론 단청(丹靑)도 칠해졌을 리가 없다. 참고로 마복사는 한국불교 법화종(法華宗) 소속의 사찰이다.

 

 

 

 

산길은 사찰의 오른편으로 나있다. 사찰을 빠져나가기 전에 만나게 되는 약수터 아래에 문화시설(?)’ 하나가 눈에 띄어 실소(失笑)를 짓게 만든다. 산중에서 만난 샤워장이라니. 실소가 아니라 차라리 신선하다 해야 마땅할 것이다. 아마 사찰에서 처음으로 본 샤워장임이 분명할 것이다. 그 안을 살짝 들여다보면 화들짝 놀라게 되는 문장(文章)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오짐을 오강에 누세요.’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적혀있는 문장은 그 문체(文體)로 보아 여성이 쓴 것이 분명할 터, 비구니이건 아니면 보살님이건 간에 분명히 여성이다. 여성의 속살이라도 훔쳐본양 화들짝 놀라며 얼굴이 붉어진다.

 

 

마복사를 지나면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능선을 타고 오르는 길과 계곡을 통해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다. 갈림길에 이정표가 없다고 고민할 필요는 없다. 이왕에 눈요기를 찾아서 왔다면 당연히 능선을 따라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선택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필수라고 보아야 한다. 갈림길에 이정표를 세워두지 않은 이유이지 않을까 싶다.

 

 

 

능선으로 오르는 길도 그다지 경사(傾斜)가 심하지 않은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마에는 땅방울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흘러내린다. 쌀쌀할 것이라는 기상대의 일기예보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따스한 것을 보면 봄은 이미 우리 곁에 깊숙이 들어와 버렸나 보다. 마복사를 나선지 5분쯤 되면 바윗길이 시작되고 곳곳에서 멋진 바위전망대를 만나게 된다. 고개를 들면 산자락이 온통 수석밭이다. 마복산은 별로 크지 않은 산이다. 그러나 산등성이는 의외로 많은 지릉(支稜)들이 발달해 있는데, 그 지릉들마다 바위 꽃이 활짝 피어 나있다. 그 광경이 마치 설악산에 와 있는 듯하다. 아니 어떤 사람들은 금강산의 축소판(縮小版)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경관(景觀) 때문에 소개골산(小皆骨山)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얻기도 했다. 그리고 고개라도 돌려볼라치면 해창들녘과 해창만, 그 너머의 팔영산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바다와 하늘, 그리고 산들이 조화(調和)를 이루며 잘 그린 한 폭의 산수화를 그려내는 것이다.

 

 

 

 

 

 

주위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광에 취해 느긋이 오르다보면 27(마복사에서) 후에 능선안부 삼거리(마복산 정상 0.6Km/ 목제문화체험장 2.0Km/ 마복사 0.5Km)에 올라서게 된다. 이곳에서 다시 한 번 조망(眺望)이 툭 터진다. 발아래에는 다도해(多島海)가 펼쳐지고, 그 너머에 팔영산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있는 팔영산과 천등산은 암릉미(巖稜美)가 뛰어나기로 정평이 나있는 산들이다. 그러나 이곳 마복산의 암릉도 앞의 두 산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다. 다만 앞의 두 산은 암릉을 오르내리면서 산행을 하게 되는데 비해, 마복산은 암릉을 피해 산길이 나있기 때문에 암릉미는 눈요기로 만족해야 하는 것이 다를 뿐이다. 바라보는 경관(景觀)은 어쩌면 더 뛰어나다고 볼 수도 있다. 이곳 마복산을 금강산에 빗대어 '소개골산(小皆骨山)'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대충 짐작이 갈 것이다.

 

 

 

 

 

안부삼거리에서 능선산행이 시작된다. 능선은 의외로 흙길이 대부분이다. 산 아래에서 볼 때에는 바위산으로 보였는데 막상 오르고 보니 흙산으로 변해있는 것이다. 포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고운 산길을 따라 24분을 걸으면 드디어 마복산 정상이다. 물론 오르는 길에 구태여 발걸음을 재촉할 필요는 없다. 잠깐이라도 고개를 돌릴라치면 멋진 풍광(風光)이 눈앞에 펼쳐지기 때문이다. 고흥은 고흥반도와 주변에 널린 유인도 23개와 147개의 무인도(無人島)들로 이루어져 있다. 당연히 고흥 앞바다는 다도해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그 다도해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파도에 휩쓸려 둥둥 떠다니고 있는 섬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내가 바다에 떠있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발아래에는 남해바다가 널따랗게 펼쳐진다. 저 바다는 다도해해상국립공원(多島海海上國立公園)’으로 지정되어 있을 만큼 아름다운 곳이다. 그 아름다운 바다가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올망졸망한 섬들이 마치 돛단배인양 푸른 바다 위를 둥둥 떠다니고 있다. 그리고 부드러운 선으로 이어지는 해안선(海岸線)과 그 사이 사이 들어앉은 포구(浦口)들은 그냥 풍경이 아니다. 언젠가 인사동 나들이 때 감흥에 젖어 한참을 머물러야했던 산수화(山水畵)가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말이 엎드려 있는 형상으로 생겼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는 마복산의 정상(이정표 : 해재 2.1Km/ 마복사 0.8Km, 내산마을 3.2Km)에는 봉수대(烽燧臺)가 복원(復原)되어 있다. 고려시대에 왜구(倭寇)들의 침략을 대비해서 설치한 시설로 추정된다고 한다. 봉수대 위의 돌무더기 위에 정상표지판이 위태위태하게 세워져 있으나 구태여 이곳에서 인증사진을 찍겠다고 고집할 필요는 없다. 봉수대 아래에 제대로 된 정상표지판이 따로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정상에 올라서면 또 다시 다도해의 멋진 풍광이 펼쳐진다. 올망졸망한 섬들이 돛단배인양 떠다니는 풍경은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이다. 들머리에서 마복산 정상까지는 알바시간을 뺄 경우 1시간30분 정도가 걸렸다.

 

 

 

 

 

정상에서 해재 방향으로 뻗어간 능선은 한마디로 순하다. 가끔가다 바닥이 바위로 된 구간도 나오지만 대부분은 포근포근한 흙길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거기다 고저(高低)가 거의 없는 작은 오르내림만이 계속된다. 이런 길에서는 발걸음을 재촉할 이유가 없다. 고개만 돌리면 나타나는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면서 느긋이 그리고 편안히 걸으면 된다. 마복산을 출발한지 8분쯤 지나면 헬기장을 만나게 되고, 이어서 8분을 더 걸으면 오른편으로 오솔길 하나가 갈려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지도에 중간등산로(이정표 : 해재 1.7Km/ 중간등산로 1Km/ 봉화대 0.5Km)로 표시된 지점이다. 이곳에서 이정표가 가리키는 중간등산로로 내려가면 해재에 마복사로 이어지는 임도와 만나게 된다.

 

 

 

능선을 걸으면 남쪽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닷바람과 함께 진달래꽃이 생긋 웃으며 길손을 맞는다. 그리고 발아래에서는 이름 모를 야생화(野生花)들이 나도 있다면 고개를 배시시 내밀고 있다. 이런 재미가 있어 봄이면 산을 찾게 되는 것일 게다.

 

 

 

 

중간등산로에서 다시 8분쯤 더 걸으면 길가에 잘생긴 소나무 한그루가 보인다. 나무 주위에 말뚝을 박고 금()줄까지 쳐놓은 것을 보면 이곳 고흥군에 특별대우를 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마복산을 대표하는 나무라고 해서 마복송(馬伏松)이라는 이름까지 붙여 놓았다. 소나무의 종류는 반송(盤松), 한 줄기에서 여러 개의 가지가 갈려나온다고 해서 만지송(萬枝松)이라고도 불린다. 아무튼 나지막한 키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가지들을 품고 있는 자태는 안내판의 설명처럼 고고(孤高)하기까지 하다.

 

 

 

마복송을 지나면 얼마 안 있어 거대한 바위무더기를 지나게 되고, 이어서 수백 개의 거대한 바위들이 무리지어 있는 집석바위에 이르게 된다. 마복송에서 20분 정도 떨어진 지점이다. 부산일보에서는 이곳을 조선바위라고 부르고 있는데 어떻게 해서 붙여진 이름인지는 모르겠다. 발아래에 해재가 내려다보이고, ‘우주센터 전망대가 잘 조망되는 집석바위에 서서 행여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절경이 펼쳐진다. 비석(碑石)처럼 네모나게 잘라낸 듯한 바위들이 층층 서있는데 세찬 바람에도 그대로 버티고 서있는 게 신기할 정도이다.

 

 

 

 

 

20명도 훨씬 넘게 앉아도 충분할 정도로 널따란 집석바위(조선바위) 위에는 계란모양으로 생긴 커다란 바위 하나가 언제 굴러 떨어질지 모를 정도로 위태롭게 앉아있다. 그러나 염려는 금물, 장난기가 동한 집사람이 있는 힘을 다해도 끔쩍도 않는다.

 

 

 

 

집석바위에서 해재로 향하면 잠깐 가파른 내리막길이 나타난다. 안전로프가 얼기설기 얽혀있는 바위구간을 통과하면 길은 다시 순해지고 이어서 해재(이정표 : 내산마을 4.5Km/ 패러글라이딩(paragliding) 이륙장 0.7Km/ 노리목재 2.8Km/ 마복산 정상 2Km))에 이르게 된다. 집석바위에서 채 10분이 걸리지 않는다.

 

 

 

 

해재에서는 이정표가 가리키는 내산마을 방향으로 내려선다. 시멘트로 포장된 임도는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으나 이곳만은 예외이다. 고개만 들면 기기묘묘(奇奇妙妙)한 바위 군락(群落)들이 눈에 꽉 차기 때문이다. 수백 개의 크고 작은 바위로 이뤄진 집석바위는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이 위태롭기까지 하다. 눈요기를 즐기며 잠시(10분 조금 못되게) 걷다보면 왼편으로 갈림길(이정표 : 외산마을 2.0Km/ 마복사입구 2.0Km/ 해재 0.3Km) 하나가 나타난다. 지도에 외산마을 갈림길로 표기된 지점이다.

 

 

 

 

산행날머리는 외산마을

갈림길에서 외산마을로 향하는 임도로 빠져나와도 분위기는 바뀌지 않는다. 꾸불꾸불한 임도가 마복산을 향하기라도 할라치면 금방 능선에 피어난 바위꽃들이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갈림길에서 외산마을까지는 2.0Km, 결코 짧은 거리는 아니다. 그러나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다. 위에서 말한 마복산의 조망(眺望) 외에도 길가에서 만나게 되는 편백나무 숲 등 주변 풍광(風光)이 빼어나기 때문이다. 주변 경관(景觀)을 즐기며 느긋하게 걷다보면 45분 후에는 외산마을에 이르게 되고, 버스가 주차되어있는 곳까지는 마을에서 5분만 더 걸어 내려가면 된다.

 

 

쫒비산(536.5m)

 

산행일 : ‘14. 3. 30()

소재지 : 전남 광양시 진상면과 다압면의 경계

산행코스 : 관동마을게밭골재갈미봉(519.8m)쫒비산능선삼거리청매실농원섬진마을주차장(산행시간 : 3시간10분)

함께한 산악회 : 청마산악회

 

특징 : 쫓비산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았던 이름 없는 산이었다. 산이 별로 높지도 않을뿐더러, 전형적인 육산(肉山=흙산)의 특성 상 산세(山勢) 또한 보잘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에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광양지역의 명물로 자리 잡은 매화축제의 영향이다. 머나먼 매화마을까지 찾아와 매화구경 만으로는 아쉬움이 남은 사람들이 자투리시간을 때우기 위해 쫒비산을 오르기 때문이다. 산행과 매화구경을 함께하는 매화산행이라는 신조어(新造語)를 만들어낸 장본인(張本人)이다.

 

 

산행들머리는 관동마을(광양시 다압면 고사리 538-5)

완주-순천고속도로 구례화엄사 I.C에서 내려와 19번 국도를 타고 하동방면으로 달리면 화개장터로 유명한 화개면소재지(面所在地 : 탑리)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서 섬진강을 가로지르는 남도대교(大橋를 건넌 후 861번 지방도(섬진강 매화로)를 따라 광양방향으로 10분 정도 들어가면 산행들머리인 관동마을이 나온다. 도로변에 인근 산들의 등산로를 그려 넣은 커다란 관동마을 안내판이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산행은 마을안내판 옆으로 난 마을길로 들어가면서 시작된다. 그러나 도로를 따라 50m쯤 더 내려가다 오른편으로 들어서도 된다. 두 길은 금방 다시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마을안내판을 보면 이곳에서 개밭골로 오른 후, 갈미봉과 쫒비산을 거쳐 청매실축제장이 있는 매화(섬진)마을까지는 10.7Km, 쉬엄쉬엄 걸어도 4시간이면 충분한 거리이다.

 

 

 

시멘트로 포장된 길은 관동마을을 통과하자마자 곧바로 매실농원 사이를 지나간다. 오른편이나 왼편, 그 어디를 보아도 보이는 것이라곤 온통 매화나무뿐이다. 왜 이곳 다압면을 매화의 고장이라고 부르는지 실감이 나는 순간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어디에도 매화꽃은 보이지 않는다. 말라비틀어진 꽃잎마저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꽃이 저버린 지 이미 오래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산행은 꽃구경이 아니고 그저 그렇고 그런 보통의 산행에다 포인트(point)를 맞추어야할 것 같다. 들머리에서 300m남짓 걸으면 첫 이정표(쫒비산 6.0Km, 매봉 7.3Km)를 만나게 되나 큰 의미는 없다. 갈림길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쫒비산까지의 거리를 알려줄 따름이기 때문이다.

 

 

 

첫 이정표를 지나고서도 매실농원은 계속된다. 그러다가 매실나무단지가 끝나면서 감나무단지가 나타나더니 이내 오른편에 농가(農家)가 하나가 나타난다. 농가 앞에는 유기농 명인이라는 큰 간판(看板)이 달려있다. 전라남도에서 인증(認證 : 8)까지 한 것을 보면 확실히 요즘의 대세는 유기농(有機農)인가 보다.

 

 

 

 

산행을 시작한지 15분쯤 지나면 시멘트포장이 끝난다. 그러나 길의 폭은 줄어들지 않는다. 아직까지는 감나무농원 사이로 난 농로(農路)를 지나고 있다는 증거이다. 중간에 별 의미 없는 이정표(쫒비산 5.2Km, 매봉 6.5Km/ 관동마을 1.3Km)를 하나 더 지나고 나면 정자(亭子)가 나타난다. 비록 과수원(果樹園)의 안에 지어져있지만 주변에 심어져 있는 과일나무들이 감나무인 것으로 보아 쉼터역할을 할 수 있도록 지어진 것이 아닌가 싶다. 아무튼 정자에서는 관동마을과 섬진강이 또렷하게 내려다보인다.

 

 

 

 

정자 근처에서 또 하나의 의미 없는 이정표(쫒비산 4.9Km, 매봉 6.2Km/ 관동마을 1.6Km)를 만난 농로는 얼마 안 있어 끝을 맺는다. 물론 과수원도 이곳에서 끝난다. 농로가 오솔길로 변하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들머리에서 21분 정도 지난 지점이다.

 

 

오솔길로 접어들면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가파른 오르막길은 숨을 헐떡이게 만들지만 그다지 힘들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연록으로 물들어가는 주변의 나무들이 보는 이들에게 활력을 불어넣어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길가 나뭇가지들에 초록빛 물감이 수런수런 번지고 있다. 지난해 가을 이래 자취를 감추었던 빛깔이 다시 번지고 있는 것이다. 없는 듯이 자취를 감추었다가 어느새 계절을 알아보고 물감을 풀고 있는 저런 모습이 바로 우리네 삶이 아니겠는가. 앙상한 가지에서 새 움이 트는 것을 보면서, 그 신기함 속에서 삶의 진리를 배워본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10분 정도 치고 오르면 능선 안부인 게밭골재(이정표 : 쫒비산 3.9Km, 매화마을 7.5Km/ 매봉 5.2Km, 백운산 정상 9.6Km/ 관동마을 2.5Km)에 올라서게 된다. 산행을 시작한지 31분이 지났다. 게밭골재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오른편으로 가면 매봉을 거쳐 백운산으로 가게 되므로, 쫒비산으로 가려면 당연히 왼편에 보이는 가파른 능선을 타고 올라가야 한다.

 

 

 

갈미봉까지는 다시 한 번 가파른 오르막길을 치고 올라야 한다. 오르는 길은 가파른 오르막길이 계속되지만 마냥 힘들지만은 않다. 흐드러지게 핀 진달래꽃들이 심심찮게 길가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게밭골재에서 갈미봉까지는 0.6Km, 대략 16분 정도가 걸린다.

 

 

 

뾰쪽한 산봉우리 임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넓은 정상은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고 누군가 나뭇가지에 매달아 놓은 정상표지판이 이를 대신하고 있다. 정상에서의 인증사진(認證寫眞)이라도 찍을 수 있게 해주었으니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오늘은 인증사진을 찍는 그 조그만 행복조차 허락하지 않는 사람들이 보인다. 점심식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정상표지판 둘레를 점령해버린 것이다. ‘산에 대한 예의를 먼저 배우고 나서 산을 찾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나 혼자만의 고집일까? 산을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정상임을 알려주는 상징물(象徵物)’의 사진을 카메라에 담기를 원한다. 그런데 그런 상징물 앞에서 퍼질러 앉아 먹자판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로 인해 사진촬영이 방해를 받는다면 그날의 산행은 즐거움보다는 짜증스러움으로 변해버릴 것이 뻔하다. 정상의 한쪽 귀퉁이에 세워진 구호지점안내판(관리번호 : 5-26)을 정상표지판 대신 카메라에 담고 쫒비산을 향해 부랴부랴 발걸음을 옮긴다. 잡목(雜木)들로 인해 조망(眺望)조차 허락하지 않는 정상에서 구태여 짜증나는 사람들과 오래 머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갈미봉에서 급하게, 그러나 짧게 고도(高度)를 떨어뜨린 산길은 이후에는 오르내림이 거의 없이 평범하게 이어진다. 가끔가다 중간 중간에 험하지 않은 바윗길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산행이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을 정도이다. 산길은 왼편에 섬진강을 그리고 오른편에는 억불봉에서 백운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의 사이에서 평행선을 긋듯이 길게 이어진다.

 

 

길가다 만난 바위, ‘아니 제 눈에는 거북이로 보이는데요.’ 내 눈에는 누에로 보이는데도 함께 산행을 하고 있는 김선생님의 눈에는 거북이로 보이는 모양이다. 이런 게 바로 삶이 아닐까 싶다. 같은 사물(事物)일지라도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관점(觀點)에 따라 달리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고, 이런 개성(個性)의 차이가 바로 삶일 테니까 말이다.

 

 

 

 

 

밧줄이 매어진 암릉구간을 치고 오르면 산길은 오른편으로 급하게 방향을 튼다. 그러나 곧장 오른편으로 진행해서는 안 된다. 왼편으로 5m정도만 나아가면 오늘 산행에서 처음으로 조망(眺望)이 트이는 멋진 바위전망대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서쪽의 억불봉은 쌍봉으로 나타나고, 억불봉에서 백운봉을 향해 달려가는 능선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 오른편에는 백운산에서 이어지는 매봉과 갈미봉이 또렷하다.

 

 

 

 

 

 

전망대를 지나면 능선은 별 특징이 없는 그렇고 그런 산길이 계속된다. 능선은 고저(高低)가 거의 없는 작은 오르내림이 계속되고, 주변의 나무들로 인해 조망(眺望) 또한 일절 트이지 않는다. 자칫 지루해지기 쉬운 능선이지만 오늘만은 예외이다. 흐드러지게 핀 진달래가 눈요깃거리를 제공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봄의 전령사(傳令使)라는 매화꽃을 보러 왔는데, 매화꽃은 보지 못하고 또 다른 전령사인 진달래꽃을 만나게 된 것이다. 흐드러지게 핀 진달래꽃으로 아쉬움을 달래며 산행을 이어간다.

 

 

 

 

갈미봉에서 쫒비산까지는 3.2Km, 1시간10분이 걸렸다. 그다지 험하지 않은 길인데도 불구하고 제법 많은 시간이 걸린 것은 그만큼 눈요깃거리가 많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 눈요깃거리는 바로 진달래꽃, 길가에 흐드러지게 핀 진달래꽃과 눈 맞추느라 발걸음을 재촉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쫒비산도 역시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고 누군가가 매달아 놓은 정상표지판이 이를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조망(眺望)도 탁 막혀 있는 것이 갈미봉 정상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이곳에는 무인산불감시탑이 세워져 있다는 것이다. 참고로 쫒비산이라는 산의 이름이 산의 모양이 쪼삣(뾰족)하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하는가 하면, 또 다른 한편으로는 산에서 보는 섬진강의 물이 쪽빛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쫒비산에서 산행날머리인 청매실농원으로 가려면 우선 능선을 따라 토끼재로 향하다가 중간지점인 능선삼거리에서 왼편으로 내려서야 한다. 정상에서 토끼재로 향하는 능선도 역시 순한 산길이 이어진다. 포근포근한 흙길인데다 경사(傾斜)까지 완만(緩慢)하기 때문이다. 길가에 핀 진달래꽃에 눈 맞추며 느긋이 35(0.8Km)정도를 걸으면 청매실농원으로 내려가는 길과 나뉘는 능선삼거리에 이르게 된다. 1Km도 채 안 되는 거리를 35분이 걸렸으니 이 구간에서도 산길이 편한 것을 핑계 삼아 느림보의 미학을 음미해 보았나 보다.

 

 

능선삼거리에서 청매실농원으로 방향을 틀면서 드디어 산길의 경사(傾斜)가 가팔라진다. 그리고 매화마을까지 꽤 길게(3.4Km) 이어진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얼마간 걸으면 드디어 눈앞이 시원스럽게 열리면서 섬진강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발아래에는 매화마을이 눈앞에 펼쳐진다. 섬진강을 휘감아 도는 언덕배기에 앉아있는 매화마을에는 이미 봄기운이 완연하다. 아니 너무 무르익어버렸나 보다. 하얗다 못해 푸르른 빛을 띤 매화꽃이 만발했어야할 농원(農園)이 빈가지만이 남은 매화나무들뿐인 것을 보면 말이다.

 

 

 

 

농원(農園) 지역으로 들어서기 직전에 웬 간판하나가 보인다. ‘작물에 손대지 마세요.’ 얼마나 많은 농작물(農作物)들이 등산객들의 손때를 탔으면 저런 문구까지 적어 놓았을까? 매주 주말마다 산을 찾는 나까지 부끄러워지는 순간이다. 사실 산행을 하다보면 가끔 농작물에 손을 대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나 하나쯤이야하는 마음에서이겠지만 하나둘 반복되다보면 막상 농작물의 주인들은 수확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도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었으면 좋겠다 <!--[endif]--> 

 

 

농원(農園)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세트로 활용되었던 가옥(家屋)이다. 영화 취화선와 드라마 다모의 촬영지로 알려진 이곳 청매실농원은 두 작품 외에도 수많은 영화나 드라마의 배경 장소로 사용된바 있다. 33나 되는 방대한 언덕에서 군락(群落)을 이루며 피어나는 매화꽃을 전국에서 으뜸으로 치기 때문이다.

 

 

 

산행날머리는 섬진마을(매화마을) 주차장

영화촬영지를 지나 꽃은 이미 져버리고 빈가지만 남은 과수원을 지나면 청매실농원이다. 농원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무려 2000개에 달한다는 옹기항아리, 매실장아찌와 장 등을 담아 놓은 항아리라고 한다. 농원을 한바퀴 둘러보고 빠져나오면 이내 마을앞 주차장에 이르게 되면서 산행이 종료된다. 주차장 앞에 천막들이 즐비하고 호객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 것을 보면 아직도 매화꽃 축제(祝祭)’는 계속되고 있는 모양이다. 이미 꽃은 져버리고 없는데도 말이다. 며칠만 일찍 왔더라도 흐드러지게 핀 매화꽃 아래에서 축제의 인파속에 나도 함께 휩쓸렸으련만 오늘은 아니다. 분위기를 타는 나로서는 꽃이 없이는 도무지 흥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진한 아쉬움을 남긴 채로 주차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능선삼거리에서 주차장까지는 주변 풍경을 감상하며 천천히 걸어도 한 시간이면 충분하다.

 

 

 

 

 

매화꽃을 찾아왔건만 매화꽃은 보지 못하고 대신 벚꽃만 실컷 구경했다. 간천면(구례군)에서 청매실 농원이 있는 다압면으로 연결되는 도로가에 심어진 벚꽃나무들이 꽃망울을 활짝 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꽃길 구간을 걸어보기로 했다. 걷는 것보다 더 속도(速度)가 떨어지는 버스 안에서 짜증을 부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벚꽃에 취해 걸어보기로 한 것이다. 걸으며 바라본 주변 풍광(風光)은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잇는 것으로 유명해진 남도대교(南道大橋)까지 약 5Km 구간을 걸었는데 흐드러지게 핀 벚꽃들이 전국의 유명한 벚꽃관광지들에 결코 뒤지지 않을 정도로 화사했다. 그러고 보니 이곳 화개장터와 쌍계사권역도 소문난 벚꽃관광지의 하나가 아닌가. 자동차들이 밀리고 있는 이유도 이곳에서 열리고 있는 쌍계사 벚꽃축제의 여파 때문이었던 것이다.

 

 

오봉산(五峰山, 324m)

 

산행일 : ‘14. 3. 16()

소재지 : 전남 보성군 득량면

산행코스 : 오봉산주차장도새능조새바위칼바위청암마을 갈림길오봉산용추폭포칼바위주차장(산행시간 : 3시간10)

함께한 산악회 : 월산악회

 

특징 : 오봉산은 고작 300m 내외에 불과한 작은 봉우리들로 연결된다. 만일 이 산이 내륙(內陸)에 있었다면 숫제 야산 취급을 받았을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막상 산에 올라보면 왜 이산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각광을 받고 있는지 확실히 알게 된다. 다섯 개의 바위봉우리들은 온통 기암괴석(奇巖怪石)들로 이루어졌고, 예당간척지(干拓地) 평야와 득량만의 모습이 마치 한 폭의 수채화(水彩畵)처럼 펼쳐지는 것이다. 거기다 등산로 곳곳에서 신비로운 돌탑까지 만나게 되니, 사시사철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한마디로 득량만() 가에 조용히 숨어 있는 보석같은 산이다.

 

 

산행들머리는 오봉산주차장(득량면 해평리 산 71-1)

순천-영암고속도로 벌교 I.C에서 내려와 2번 국도 보성방면으로 달리다가 군두사거리(득량면 송곡리)에서 좌회전 845번 지방도로 갈아타고 들어가면 득량면의 소재지인 오봉리에 이르게 된다. 이곳 오봉리의 GS칼텍스주유소 앞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851번 지방도로 옮겨 들어가다 잠시 후에 만나게 되는 해평교()를 건너자마자 우회전, 이어서 서부지방산림청 근처에서 이번에는 좌회전하여 기남길로 들어서면 해평저수지 아래 오봉산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오늘 산행이 시작되는 곳이다.

 

 

 

주차장에서 냇가와 평행선을 그리며 난 길(기남길)를 따라 걸어 내려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2분쯤 걸으면 농가(農家)를 만나게 되는데, 농가 바로 직전에 오른편으로 산길이 나있다. 들머리에 이정표(칼바위 등산로)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산길로 접어들면 가장 먼저 길손을 맞는 것은 울창하게 우거진 편백나무 숲이다. 편백나무 아래로 난 길로 들어서는데 문득 왠지 오늘은 행복한 산행이 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아마 편백나무의 영향이 아닐까 싶다. 산행을 시작하자마자 피톤치드(phytoncide)’가 넘쳐난다는 편백나무 숲을 만났으니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지도 모른다. 그런 내 예상은 적중했다. 아름다운 경관(景觀)이 산행 내내 계속되었으니 이 아니 행복이 아니겠는가.

 

 

편백 숲이 끝나면 대나무 숲이 나타난다. 한줄기 빛조차 허락하지 않을 듯이 울창하게 우거진 대나무 숲길은 그윽한 운치(韻致)를 자랑한다. 길을 걷다가 고개를 들어보면 또 하나의 길이 나타난다. 만일 하늘에 길이 있다면 바로 저런 길이 아닐까 싶다. 언젠가 김용해시인의 새는 자기 길을 안다라는 시()에서 보았던 새들이 하늘 높이 길을 내지 않는 것은 그 위에 별들이 가는 길이 있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의 별들이 간다는 길은 바로 저런 길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대나무 숲길이 끝나면 이번에는 산죽(山竹)길이다. 산죽숲길은 대나무숲길보다 오히려 한술 더 뜬다. 마치 동굴처럼 어두침침한 숲길은 햇빛은커녕 바람 한 점 들어올 틈도 보이지 않을 정도인 것이다.

 

 

 

산죽숲이 끝나면 산길은 물기가 없는 골짜기를 따라 이어진다. 그와 함께 산길도 경사(傾斜)가 가팔라진다. 그러나 그 오르막길은 금방 끝을 맺고 산행을 시작한지 20분 후에는 주능선 안부인 도새등(이정표 : 칼바위 2.4Km, 오봉산 4.2Km/ 득량남초등학교 1.9Km/ 용추교 1.5Km)에 올라서게 된다. 능선에 올라서면 갑자기 시야(視野)가 시원스럽게 열리면서 예당간척지(干拓地)와 득량만의 모습이 마치 한 폭의 수채화(水彩畵)처럼 다가온다. 들녘이 이미 연두색으로 옷을 갈아입은 것을 보면 남도에는 이미 봄이 왔나보다. 남녘에서 불어오는 봄바람 속에 싱싱함이 가득 묻어있다. 드디어 행복한 산행이 시작되는 모양이다.

 

 

 

 

 

도새등에서는 오른편 능선을 따라 난 길로 방향을 잡는다. 도새등에서 잠깐 올라서면 특이한 모형의 돌탑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259봉이다. 정상에 오르면 아까 도새등에서 보았던 예당간척지와 득량만이 조금 더 넓게 드러난다. 그리고 그 뒤에는 고흥반도가 좌우로 길게 펼쳐지고 있다. 반대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면 하산지점인 해평저수지, 그리고 그 오른편에 있는 작은 오봉산도 눈에 들어온다.

 

 

! 이런 곳을 모르고 있었네?’ 능선을 걷다보면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튀어나오기 시작한다. 그만큼 바위 능선이 신비스러울 정도로 빼어난 것이다. 산등성이에 솟은 암봉은 날카로운 칼날을 세워놓은 것 같고, 암벽(巖壁)은 마치 병풍(屛風)을 펼쳐놓은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만든다비록 작은 산이지만 심오한 자연미에 저절로 감탄사를 연발하게끔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이어지는 능선은 득량만을 왼편에 끼고 걷는 것과 같다. 왼편의 바위벼랑이 마치 성벽(城壁)처럼 날카롭게 서있어서 시야(視野)를 가릴 것이 아무것도 없는 이유이다. 능선을 걷다가 뒤를 돌아보면 위에서 적은 표현이 금방 이해가 갈 것이다. 성벽모양으로 된 절벽 위를 걸어오고 있는 사람들이 마치 성곽기행(城郭紀行)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연상시키고 있다.

 

 

 

259봉에서 조금만 더 걸으면 조새바위이다. 도새등에서 15분이 조금 못 걸리는 지점에 있는 조새바위는 선사시대(先史時代)의 시조새(Archaeopteryx)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오봉산을 장식하고 있는 수많은 기암(奇巖)중의 하나인 이 바위는 능선에서 볼 때보다, 바위의 아래에서 바라보았을 때 그 형상이 제대로 나타난다. 참고로 시골어촌에서 굴을 까는데 사용하는 기구인 조새에서 따온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아무튼 도새바위 아래에서 산길은 두 갈래(이정표 : 칼바위 1.9Km/ 구룡마을 1.0Km, 금능마을 1.2Km/ 월평마을 2.0Km)로 나뉜다.

 

 

 

조새바위에서 또 다시 조망(眺望)을 즐기며 걷다보면 20분 후에는 336봉에 올라서게 된다. 이곳에도 역시 돌탑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많은 돌탑들은 과연 누가 무슨 연유로 쌓아올린 것일까? 이렇게 많은 탑들을 공들여 쌓으려면 엄청난 시간과 정성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게 과연 개인의 힘으로 가능한 일일지 의심스럽다. 그 의문은 오봉산 정상에서 만난 돌탑에서 해소되었다. 탑에 임광규(林光圭)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는데, 아마 이 탑들을 쌓은 사람이 아닐까 싶다. 그가 오봉산의 탑들을 모두 다 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오봉산의 분위기를 더욱 독특하게 만들어 주었음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336봉에서 밧줄로 된 난간을 잡고 내려섰다가 제법 가파른 바윗길을 올라서면 337봉이다. 336봉에서 10분 정도의 거리이다. 이곳에도 어김없이 돌탑들이 나타나며 바다를 낀 암릉들과 보조를 맞추고 있다. 오봉산에서 가장 뛰어난 구간은 뭐니 뭐니 해도 도새등에서 칼바위까지 이어지는 능선일 것이다. 마치 성곽(城郭)을 걷는 기분으로 걸어야하는 이 구간은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을 정도로 등골이 오싹해지는 공포감을 맛보는 구간이다. 성곽을 닮은 날카로운 암릉과 어우러지는 득량만 바다. 거기에 돌탑까지 얹혀있는 광경은 그야말로 잘 그린 한 폭의 산수화(山水畵)이다.

 

 

 

 

뒤돌아본 337, 암봉 위에 세워진 돌탑이 단애절벽(斷崖絶壁), 바다 등과 함께 어울려 한편의 동화 같은 풍경을 자아낸다.

 

 

 

337봉에서 내려선 산길은 갑자기 숲속으로 들어서버린다. 이제까지와는 사뭇 다른 풍경 속으로 빠져든 것이다. 숲길을 따라 올라선 다음 봉우리에는 이제까지와 다른 돌탑이 길손을 맞는다. 인공(人工)으로 쌓은 탑()이 아니라 자연석(自然石)이 탑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자연석에 조그만 빈틈이라도 보일라치면 어김없이 돌들을 올려놓았으니 이것 역시도 인공의 돌탑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지도 모르겠다.

 

 

 

 

산길은 다시 숲속을 들락거리다가 바위봉 앞에 이른다. 앙증맞은 철사다리를 밟고 위로 오르면 돌탑 2기가 있는 359봉이다. 337봉에서 15분 정도 걸렸다. 그러나 돌탑이 있는 지점은 정상이 아니다. 돌탑에서 왼편으로 10m쯤 더 나아가야 정상에 이를 수가 있는 것이다. 정상에 서면 오늘 산행 중 처음으로 칼바위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칼바위의 앞에 보이는 337봉도 예사롭지 않기는 마찬가지이다. 오봉산에 들어서면 어느 것 하나 예사스러운 것이 없을 정도로 빼어난 것들 천지이다. 그러나 그것들 중에서도 단연 으뜸은 칼바위이다. 매끈하면서도 힘차게 뻗어나간 바위능선의 끄트머리에 날카롭게 치솟은 바위는 강함과 부드러움의 절묘한 조화(調和)를 보여준다. 칼바위는 통일신라 때의 고승인 원효대사와 얽힌 옛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그가 이곳에 터를 잡고 수도에 전념했다는 것이다. 그는 잠시 후에 답사하게 될 용추폭포(瀑布)에서 몸을 씻고 칼바위에 올라 수도를 닦았다고 전해진다. ‘원효대사는 마당발이었나 보죠?’ 함께 산행을 하고 있는 일행의 말마따나 전국을 돌아다니다보면 그와 관련된 유적(遺跡)들이 사방에 널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흔적이 없는 지역이 있다면 차라리 그것이 더 이상할 정도인 것이다.

 

 

 

 

 

359봉을 내려서면 337봉 앞에서 길이 두 갈래(이정표 : 칼바위 0.1Km/ 오봉산 1.6Km/ 득량남초교 3.7Km)로 나뉜다. 두 길은 모두 337봉을 우회(迂廻)하도록 나있다. 왼편은 칼바위를 들르지 않고 곧장 오봉산으로 가는 길이니 당연히 오른편으로 내려선다. 칼바위로 내려가는 길은 너덜길, 아니 구들장길이라고 해야 맞는 표현일 것 같다. 오봉산의 바위들은 다른 산들에서 보아온 바위들과 사뭇 다르다. 널찍하고 얄팍하게 생긴 것이 흡사 구들장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하긴 오봉산의 바위는 예로부터 최고의 구들돌로 명성을 얻었었고, 때문에 일제강점기(日帝强占基)에는 여기서 캐낸 구들돌이 기차에 실려 전국으로 팔려나갔다고 한다. 쇠꼬챙이로 뜯어내고, 득량역까지 소달구지로 실어내는 과정은 비록 힘든 노동이었겠지만 주민들에게는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큰 소득원(所得源)이었을 것이다.

 

 

 

 

갈림길에서 10, 359봉에서는 20분쯤 후에 닿게 되는 칼바위는 그야말로 압도적이다. 이 칼바위 앞에서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오른편은 칼바위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길이니 왼편으로 들어서야 한다. 왼편으로 방향을 잡으면 몇 발자국 걷지 않아 오른편에 바위굴이 하나 나타난다. 일단 들어서고 보니 칼바위의 상부가 올려다 보인다. 굴은 조금 더 안쪽으로 나있지만 바닥의 바위들이 얼기설기 얽혀있는 탓에 막상 들어가는 것은 부담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혹시 이곳이 마당굴이 아닐까 싶다. 돌을 던져 넣으면 득량만 바다로 나온다는 그 바위굴 말이다. 그러나 산행 끝난 뒤에 알아본 바로는 베틀굴이었다.

 

 

첫 번째 굴을 빠져나와 조금 더 나아가면 또 다시 바위굴 하나가 나타난다. 장재굴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굴이다. 바위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사방이 높은 바위벽으로 둘러싸인 공간(空間)이 나온다. 외부와 단절된 독방과 같은 느낌인데, 50여명이 들어서도 충분할 정도로 그 넓이가 장난이 아니다.

 

 

 

장제굴에서는 잠깐 발걸음을 멈추었다 가는 게 좋다. 칼바위의 목 부위에 새겨진 마애불상(磨崖佛像)이 보이기 때문이다. 불상은 사진으로는 비록 잘 잡히지 않지만 육안(肉眼)으로 자세히 살펴보면 제법 또렷하게 나타난다. 이 마애불은 이곳에서 수도를 했다는 원효대사가 직접 새겼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하긴 도력(道力)이 충만했던 원효대사라면 저런 절벽(絶壁)까지 올라가는 게 가능했었을 지도 모르겠다.

 

 

 

칼바위를 둘러보았으면 다시 능선으로 올라서야 한다. 오봉산으로 가는 길이 능선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능선(이정표 : 오봉산 1.5Km/ 칼바위주차장 0.9Km/ 득량남초교 3.8Km)에 올라서면 칼바위의 전모(全貌)가 한눈에 잡힌다. 가히 칼바위전망대(展望臺)라 불릴 만 하다. 끝이 날카로운 칼의 모양으로 생겼다는 등 그 생김새를 사람들마다 각기 다르게 표현하고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새의 머리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보는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른 형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바른 표현일 것이다. 참고로 30m 높이의 칼바위는 끝이 날카로운 칼 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그 모습을 자세히 보면 볼수록 더 기묘(奇妙)하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손바닥을 위로 세우고 손가락들을 모아서 45도 각도(角度)로 굽힌 모양 같기도 하고, 선 채로 깊숙이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모습 같기도 하다칼바위뿐만이 아니다. 거대한 바위들이 뒤엉켜 있는 일대는 갖가지 형상의 바위들이 모여 군락(群落)을 이루고 있다. 그중에는 조선(朝鮮)을 건국(建國)한 이성계의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태조바위라고 부르는 바위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었다.

 

 

 

칼바위전망대 근처에서 만난 청암마을 갈림길(이정표 : 오봉산 1.5Km/ 청암마을 1.3Km/ 득량남초교 3.9Km)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다. 위험한 구간이 다 지났으니 풍류(風流)나 좀 즐겨볼까 해서다. 말이 풍류일 따름이지 별다른 것은 없다. 아이스팩(ice pack)에서 꺼낸 시원한 막걸리를 마시는 것이 전부일 따름이다. 그러나 발아래에 펼쳐지는 득량만을 바라보면서 일행들과 박주(薄酒) 한 잔 나누는 것이 바로 풍류가 아닐까 싶다. 사람이 자기 앞에서 벌어지는 일에 만족한다면 그게 바로 신선놀음일 것이기 때문이다. ‘청암 갈림길을 지나 오봉산까지의 1.5Km구간은 그저 그렇고 그런 평범한 길이 계속된다. 흙길이라서 스릴도 느낄 수가 없고, 숲속을 지나게 되므로 조망(眺望) 또한 시원스럽지가 못하다. 다만 흙길이 부드러워 걷기 좋은 점은 있다. 한동안 평범한 능선길을 따르다가 앞을 가로막는 바위를 짚고 위로 올라서면 다시 한 번 멋진 조망(眺望)이 펼쳐진다. 오른편에는 화죽천 골짜기와 해평저수지, 그리고 칼바위를 비롯한 주변의 바위봉우리들 한꺼번에 그 자태를 드러내는 것이다. 한마디로 멋진 풍광(風光)이다.

 

 

 

조망(眺望)을 즐기다가 다시 산행을 이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오봉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청암마을 갈림길에서 40분 남짓 걸렸다. 오봉산 정상에는 득량만을 배경으로 서있는 정상표지석 외에도 돌탑 2기가 더 자리를 지키고 있다. ‘왜 이곳이 오봉산 정상이 되었을까?’ 정상에 오르자마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다. 높이가 가장 높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산세(山勢)나 조망(眺望)이 다른 곳보다 뛰어나지도 못하다. 아니 다른 봉우리들에 비해 뒤떨어진다고 보아야 옳은 표현일 것이다. ‘산행시간을 늘려 잡으려는 의도가 아닐까요?’ 같이 산행을 하고 있는 일행의 말에 고개가 끄떡여 진다. 만일 이곳에 정상석이 없다면 아까 칼바위에서 하산을 할 사람들이 많았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참 오봉산 정상에 오르기 전에 놓친 것이 하나 있다. 풍혈(風穴)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버린 것이다.

 

 

 

 

오봉산에서 돌탑 3~4개가 서 있는 오봉산성 갈림길(이정표 : 용추폭포 0.5Km/ 백바위 2.5Km, 내곡 5.9Km, 절터 6.3Km/ 칼바위 1.5Km)을 지나 용추폭포 쪽으로 하산을 시작하면 20분이 조금 못되어 용추폭포 2’라는 이름표를 단 이정표(주차장 1.4Km/ 용추산성 0.8Km/ 오봉산 정상 0.5Km, 칼바위 2.0Km/ 등산로 아님)가 세워진 갈림길이 나타난다. 그런데 현재의 위치가 용추폭포라는데 눈을 씻고 찾아봐도 폭포는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용추산성방향으로 들어서면 왜 이곳의 위치를 용추폭포라고 표기했는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용추산성 방향으로 일단 들어서 10m쯤 가다가 오른편으로 보이는 작은 오솔길로 들어서면 용추폭포가 내려다보이는 작은 바위전망대에 올라서게 되기 때문이다. 전망대에 올라서면 해평저수지로 이어지는 바위 협곡(峽谷)이 눈에 들어온다.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바위들로 이루어진 협곡은 또 다른 한 폭의 동양화(東洋畵)를 만들어내고 있다.

 

 

 

 

 

 

전망대에서 잠깐 더 내려가면 이번에는 용추폭포 1’이라는 이름표를 단 이정표(주차장 1.3Km/ 용추산성 0.9Km, 오봉산 0.6Km/ 용추폭포 0.04Km)가 길손을 맞는다. 이곳에서는 두말할 필요가 없이 용추폭포 쪽으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오봉산의 또 다른 명물인 용추폭포를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용추폭포는 양편과 앞이 바위벽을 이루고 있는 통속 같은 곳에 오롯이 앉아 있는 형상이다. 10m 높이의 용추폭포 아래는 소()를 이루고 있는데, 여름 장마철에는 위에서 떨어지는 물줄기와 어우러지며 장관(壯觀)을 이룬다고 한다. 하긴 갈수기(渴水期)인 지금 저 정도의 풍경을 만들어낼 정도라면 능히 그럴 만도 하겠다. 오봉산 정상에서 용추폭포까지는 20분이 걸렸다.

 

 

산행날머리는 해평저수지 위에 있는 칼바위주차장

용추폭포를 빠져나와 하산길을 이어가면 왼편으로 아까 전망대에서 보았던 협곡(峽谷)의 풍경이 다시 한 번 펼쳐진다. 그러나 아까만은 못한 것 같다. 산길을 이어가다 화죽천을 가로지르는 나무다리를 건너면 이번에는 오른편에 울창한 편백나무 숲이 펼쳐진다. ‘캠핑하기에 참 좋은 곳이네요틈만 나면 두 부부가 캠핑을 다닌다는 일행의 말마따나 계곡에는 투명할 정도로 맑은 물이 넘쳐나고, 언덕에는 피톤치드의 왕자라는 편백나무까지 가득하다. 이보다 더 좋은 캠핑장소가 어디 있겠는가. 편백나무 숲이 끝나면 저만큼 아래에 오늘 산행이 끝을 맺는 칼바위주차장(이정표 : 칼바위 0.8Km/ 용추폭포 1.4Km)이 보인다. 용추폭포에서 주차장까지는 25분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