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덕산(萬德山, 408.6m)

 

산행일 : ‘13. 6. 30(일)

소재지 : 전남 강진군 도암면

산행코스 : 석문공원(대석문)→용문사→290봉→바람재→만덕산(깃대봉)→백련사→다산초당→다산유물전시관(산행시간 : 5시간)

함께한 산악회 : 기분 좋은 산행

 

특징 : 만덕산은 요즘 등산객들이 선호하는 100대 명산(名山)은 엄두도 낼 수 없고, 1000대 명산에나 끼일 수 있을까말까 하는 정도의 남도 끝자락에 위치한 작고도 나지막한 산이다. 그러나 이 산을 찾고 있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주작산과 덕룡산의 암릉에 반한 사람들이 두 산과 비슷한 느낌을 보여주는 덕룡산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천년고찰(千年古刹)인 백련사와 백련사의 ‘동백 숲’, 그리고 정약용선생의 18년 강진 유배기간 중 11년을 머물렀다는 다산초당(茶山草堂)까지 끼고 있으니 많은 사람들이 덕룡산을 찾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꼭 등산이 아니더라도 한번쯤은 찾아볼 것을 권하고 싶다. 아이들과 함께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으로 이어지는 산책로를 거닐면서 혜장스님과 다산에 얽힌 옛 이야기라도 한 토막 들려준다면, 이보다 더 나은 가족여행은 없을 것이다.

 

 

산행들머리는 석문공원(대석문)

남해고속도로(영암-순천) 강진 I.C에서 내려와 2번 국도를 이용해서 강진읍까지 온 후, 평동교차로(交叉路 : 강진읍 남포리)에서 18번 국도를 타고 해남방향으로 10분 남짓 더 달리면 55번 지방도의 분기점인 계라삼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좌회전하여 55번 지방도를 따라 들어가면 석문공원(公園)이다. 석문산을 사이에 두고 덕룡산이 시작되는 남쪽의 협곡(峽谷)을 소석문, 그리고 만덕산이 시작되는 북쪽의 협곡을 대석문이라고 부른다. 강진군에서는 대석문 일원을 깔끔하고 예쁘게 다듬어 ‘석문공원’이라는 이름을 붙여 놓았다.

 

 

 

산행은 도로정비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석문공원에서 조금 비켜난 지점에서 열린다. 공원(석문리 방향)이 끝나는 곳에 이르면 왼편에 다리가 하나 보인다. 다산유적지로 들어가는 군도(郡道)와 연결되는 다리이다. 다리 건너에 ‘정다산유허지통로(丁茶山遺虛趾通路)’라는 비석(碑石)이 세워져 있으니 참조하면 된다. 참고로 유허지(遺虛址)란 역사적 사실이 기록만 남아 있고, 그 장소에 유물(遺物)이나 문화재(文化財)가 전혀 없는 곳을 말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장소에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비석을 세워 기념하고 있는데, 이러한 비석을 유허비라고 부른다. 만덕산으로 가기 위해서는 우선 용문사에 들러야 한다. 물론 석문공원에서 곧바로 석문정을 경유해서 290봉으로 올라가는 방법도 있지만, 오늘 따라나선 산악회는 석문정을 거치지 않고 용문사에서 곧바로 290봉으로 치고 오르는 코스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용문사는 ‘유허지 비석’이 세워져 있는 곳에서 왼편으로 들어가면 된다. 비석 근처에 용문사의 진행방향을 알려주는 표지석이 세워져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흔한 일주문 하나도 없는 용문사는 입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 요사채 비슷한 건물은 아직까지도 공사가 한창인데, ‘큰법당’이라고 쓰인 대웅전 현판이 가장 눈길을 끈다. 최근에 지어진 절답게 석가모니불을 본존불(本尊佛)로 모신 본당(本堂)을 대웅전이라고 하지 않고, 한글로 ‘큰 법당’이라고 적어 놓은 것이다. 요즘 새로 지은 절간에서 자주 보이는 표현이다. 그러나 고려시대(12세기 전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토불(土佛)을 모시고 있는 것을 보면 옛날부터 이 부근에 사찰이 있었지 않았나 싶다. 이 토불은 1975년 개금불사(改金佛事) 때부터 큰 법당(大雄殿)의 부처님으로 모셨다고 한다.

 

 

대웅전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데, 스님께서 산행들머리를 알려주신다. 그런데 그 길이 고맙게도 ‘큰법당’ 옆에서 시작되는 지름길이다. 사실 이정표까지 갖춘 정규등산로는 공사 중인 건물의 옆에서 열린다. 구태여 다시 내려갔다 올라가는 번거로움을 피하게 해주는 저런 마음이 불자(佛者)들의 실천덕목인 육바라밀(六波羅蜜) 가운데 제1의 덕목인 보시(布施)의 참모습이 아닐까 싶다. 큰법당 옆의 벌거숭이 산비탈을 잠깐 올라서면 금방 숲속으로 들어서게 된다.

 

 

 

만덕산으로 오르는 길에 잠깐 뒤돌아보면 가히 일품인 풍광(風光)이 펼쳐진다. 건너편 석문산(石門山)의 기기묘묘(奇奇妙妙)한 바위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괴석의 사이마다 자리 잡은 녹음 짙은 나무들이 바위들과 한데 어우러지면서, 한 폭의 잘 그린 산수화(山水畵)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 아래로 난 55번 지방도는 곧지 않고 아직까지 굽은 채로 남아 남도의 풍치를 한층 더 자아내게 만든다. 석문산을 넘으면 또 하나의 협곡(峽谷)이 나온다. 사람들은 그곳을 소석문, 그리고 아까 산행을 시작했던 석문공원 일대를 대석문이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석문산이 양쪽에 두 개의 협곡(峽谷)을 끼고 있는 것이다. 두 협곡 사이에 있는 석문산에서는 놓치지 말고 찾아봐야할 곳이 있다. 바로 합장암터이다. 소석문에서 10분쯤 산을 오르면 마치 합장을 하고 있는 것처럼 생긴 두 개의 바위가 나타난다. 20여m가 넘는 거대한 바위가 양쪽으로 갈라져 있고, 그 안쪽에는 암굴(巖窟)이 패여 있다. 암굴에는 조그만 샘도 있다. 합장암의 앞에는 창건연대가 알려지지 않은 암자(庵子)가 있었으나 1900년대에 붕괴되어 없어져버렸다고 한다. 절터의 앞은 시원스럽게 트여있는데, 덕룡산과 강진만이 잘 조망(眺望)된다고 한다.

 

 

 

만덕산으로 가기 위해서는 먼저 290봉으로 올라가야 한다. 만덕산으로 향하는 주능선의 시작점이기 때문이다. 용문사를 출발하자마자 바윗길이 시작된다. 비록 중간 중간에 흙길이 섞여있다고는 하지만 바윗길을 가파르고 거칠다. 까다로운 바윗길을 10분쯤 오르면 삼거리(이정표 : 백련사 5.23Km/ 석문공원 0.58Km/ 용문사 0.35Km)에 이르게 된다. 왼편에 보이는 길은 석문공원에서 석문정(石門亭)을 거쳐 올라오는 길이다. 이정표에 만덕산은 표기되어 있지 않으나 백련사 방향으로 진행하면 된다. 삼거리를 지나자마자 또 다시 나타나는 가파르고 거친 바윗길에서 10분쯤 더 고생을 해야 첫 봉우리인 290봉(부산일보 지도에는 286봉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봉우리 위에 붙어있는 표지판을 참조했음)에 올라설 수가 있다. 참고로 석문공원에서 곧바로 올라오는 길에 만나게 되는 팔각(八角)으로 지어진 예쁘장한 정자(亭子)인 석문정(石門亭)은 조국(祖國)의 광복에 힘쓴 선열(先烈)들을 기념하기 위하여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첫 번째 봉우리인 290봉은 바위로 이루어진 보잘 것 없는 봉우리에 불과하다. 그러나 생김새와는 달리 조망(眺望)은 그야말로 뛰어난 편이다. 사방의 풍경들이 가슴이 시리도록 멋지게 펼쳐지는 것이다. 남쪽방향에 석문산이 코앞에 다가와 있고, 그리고 그 뒤에 덕룡산과 주작산이 늘어서 있다. 직벽(直壁)의 단애(斷崖)로 이루어진 석문산은 위용(偉容)을 자랑하고 있고, 석문공원은 발아래에 놓여있다. 저 멀리로는 별매산과 가학산, 흑석산 줄기까지 조망되고, 약간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월출산도 눈에 들어온다.

 

 

 

 

290봉에서 조금만 더 걸으면 오른편으로 길이 하나 열려있는 것이 보인다. 만덕광업소채광지에서 올라오는 길이다. 이정표(용문사 0.48Km/ 만덕광업소 채광지)의 오른쪽 방향은 페인트가 벗겨져있는데 누군가가 친절하게도 만덕광업소채광지라고 적어 놓았다. 이어지는 능선은 비록 바윗길이지만 고저(高低)의 차가 거의 없는 완만(緩慢)한 능선이 계속된다. 바위로 이루어진 능선은 암릉 산행의 멋을 한껏 즐길 수 있는 코스다. 스릴(thrill)을 즐기면서 바위들을 오르내리다보면 양옆으로 보이는 풍경들이 매우 대조적이다. 한쪽은 강진만(灣) 바다가 펼쳐지고, 다른 한쪽은 녹음이 짙은 산과 푸른 들판이 눈에 들어온다.

 

 

 

290봉을 지나서도 근육질의 암릉은 계속된다. 그러나 온전한 암릉으로 보기에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곳곳에서 긴 흙길 구간이 자주 나타난다. 바윗길에서의 스릴(thrill)이 떨어지기 때문에 서운하기도 하지만 오늘 같이 무더운 여름날에는 차라리 이런 길이 좋지 않을까 싶다. 숲으로 둘러싸인 흙길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서늘해지는 그늘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앞에 나타나는 바위들이 뾰쪽하게 생겨서 붙잡고 오르는 것이 다소 부담스럽지만 그리 어렵지는 않다. 바위의 결이 거칠어서 미끄럽지 않기 때문이다. 이곳의 바위들은 규사(quartz sand, 硅砂)성분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강하면서도 표면이 거친 것이 특징이다.

 

 

 

290봉에서부터 1시간 가까이 계속되는 암릉은 산행의 묘미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구간이다. 아기자기한 암릉에서 스릴을 만끽하면서 산 아래에 펼쳐지는 강진만(灣)을 실컷 구경할 수 있다. 시야(視野)가 확 특이는 암릉은 강진만이 한눈에 들어오는 뛰어난 전망대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강진만하면 구강포를 빼 놓을 수가 없다. 많은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이 구강포의 아름다움을 글로 쓰거나 그림으로 그려냈지만, 그 곳이 정확히 어디인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아름다운 지명인 구강포(九江浦)에서 아홉 개의 강물이 만나 바다로 스민다고 하지만, 실지의 구강포에서는 강과 바다 그리고 하천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것이다. 아홉 강은 아홉 고을의 물로 바뀌기도 하고, 작은 개울의 물도 강의 범주 속으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강은 또 바다가 된다. 아홉 개의 강물이 무엇인지 주민들도 잘 모르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참고로 양광식 문사고전연구소장이 강진신문에 기고한 글을 적어본다. 그는 강진만의 가장 남쪽에 있는 마량, 대구, 칠량, 강진읍의 어딘가에 해당되는 포구(浦口)인 것 같은데, 아직까지 제대로 정리가 되어있지 않다면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외손자인 윤정기가 지은 동환록(東寰錄) 등 고전(古典)에 적힌 내용들을 참고하여 지역을 추론(推論)해보았다. 대구면의 중저마을과 가우도의 동쪽부터 남쪽에 있는 백사마을까지가 구강포의 영역이었을 것으로 추정한 것이다.

 

 

 

진행방향에 뾰쪽한 바위봉우리가 나타난다. 아마도 만덕산의 정상인 깃대봉인 모양이다. 허리를 뻣뻣하게 곧추세운 봉우리가 저 위까지 올라야할 사람들을 시작도 하기 전부터 잔뜩 주눅 들게 만들어버린다. 그러나 깃대봉은 저 봉우리에서도 한참을 더 올라가야 한다. 그것도 무시무시하게 날을 세운 암릉을 요리조리 피해서 말이다. 능선을 걷다보면 늘어선 바위 사이사이에서 웅크리고 있는 진달래들을 볼 수가 있다. 저 진달래들이 꽃봉오리를 활짝 열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조그맣게 무리를 지은 진달래들이 바위틈에 숨어서 분홍빛 얼굴을 살짝 내밀고 있는 광경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거기다 하나 더, 능선의 바위들을 건너뛴다고 상상해보자. 발밑에 내려다보이는 진달래 꽃송이들이 발길 따라 하늘거릴 것이 분명하다. 이 얼마나 가슴 시리는 광경이겠는가.

 

 

 

능선을 따라 오르내리던 산길은 293봉을 지나고 나면 흙산으로 변한다. 그동안 걸어온 바윗길 자체를 부정이라도 하려는 듯이, 산길은 전형적인 흙길의 풍경을 그대로 보여준다. 낙엽이 수북인 쌓인 오솔길은 폭신폭신한 것이 걷기에 여간 좋은 게 아니다. 암릉길을 오르내리며 맞았던 바람이 없는 것이 다소 서운했지만, 대신에 짙게 우거진 숲이 그늘을 만들어 주기 때문에 참을만하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이 있다. 고생 끝에 즐거움이 온다는 얘기이다. 지금 걷고 있는 구간이 이를 증명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동안 험한 암릉길을 오르내리느라 엄청나게 많은 땀방울을 흘렸는데, 지금은 길이 고운데다가 길가에 들꽃까지 보여 눈까지 호강을 시켜주니 말이다. 보드라운 능선을 따라 넘실대는 한줄기 바람이 이마에 맺혔던 땀방울을 훔쳐간 지 이미 오래이다. 저 멀리에 만덕산이 보이는데, 바람재로 넘어가는 임도는 구불구불 곡선을 그리며 아름답게 꿈틀거리고 있다.

<영락제(堤)와 계라리 방향>

 

 

 

 

암릉이 끝나고 얼마간 더 걸으면 이정표(바람재 1.47Km/ 용문사 3.04Km)를 만나게 되고, 이어지는 산길은 바위 하나 보이지 않는 순수한 흙길이다. 이정표를 지나면서 산길은 널찍한 임도(林道)로 연결된다. 임도가 끝나는 봉우리(280봉)에 경찰의 무선통신시설이 설치되어 있는데 아마도 시설을 관리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임도인 모양이다. 물론 280봉에 오기까지는 봉우리 두어 개를 더 넘어야만 한다.

 

 

 

무선통신시설을 지나면서 약간 가파른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람재에 내려서게 된다. 내려오는 길은 햇빛이 스며들지 못할 정도로 숲이 짙게 우거져 있다. 소사나무들이 자주 눈에 띄는 것을 보면 남도의 바닷가 근처에 자라잡고 있는 산이라는 게 실감이 난다.

 

 

 

유독 바람이 세차게 분다고 해서 고개이름까지도 같은 이름으로 붙여진 바람재는 만덕산으로 오르기 직전에 있는 안부이다. 바람재는 이정표(바람재 240m : 임도 0.32km/ 만덕산기도원 0.29km/ 용문사 4.51km/ 옥련사 2.6km)가 세워져 있는데, 정작 진행해야 하는 만덕산은 표기가 되어 있지 않다. 준비해간 지도(地圖)가 아니더라도 산세(山勢)만 보고도 진행할 수 있을 정도로 능선이 또렷하게 나타나지만, 그러다가 자칫 큰 낭패를 볼 수도 있으니 이런 곳에서는 독도(讀圖)에 주의가 요구된다. 산행을 시작한지 2시간30분이 지났다.

 

 

 

바람재를 지나면서 산길은 가파르기 이를 데가 없는 오르막길로 변한다. 오늘 산행에서 가장 힘든 구간이다. 무더운 여름 날씨에 한 발짝 옮기기도 힘들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가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보는 즐거움이 있다는 것이다. 그림 같은 산릉(山稜)들과 저 멀리 남해바다가 함께 펼쳐진다. 다도해(多島海)의 섬들이 덕룡, 주작산으로 이어지는 바위 능선과 절묘하게 어울리며 기막힌 아름다움을 연출하고 있다. 언젠가 TV에서 본 영상들이 마치 파노라마(panorama)처럼 펼쳐지며 눈앞에서 출렁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지금 걷고 바윗길도 온통 멋진 기암괴석들로 이루어져 있다. 산행을 시작하면서 만났던 암릉보다 아름다움이 한결 더 뛰어나다고 볼 수 있다.

 

 

 

 

바람재에서 가파르기 이를 데가 없는 암릉길을 힘겹게 오르면 진행방향을 거대한 암봉 하나가 떡하니 가로막고 있다. 암봉의 왼편에 서 있는 멋진 입석(立石)바위를 구경하면서 오른편으로 돌면, 잠깐 쉬었다가기에 적당한 바위봉우리가 나타난다. 그러나 깃대봉으로 오르는 길은 암봉을 피해 오른편으로 잠깐 떨어졌다가, 다시 위를 향하도록 나있다. 잠시 쉬었다 가기에 시간이 부담스러운 사람들은 바위봉을 생략하고 곧장 깃대봉으로 향하면 된다. 그러나 웬만하면 한번쯤 들렀다가기를 권하고 싶다. 어떤 사람들은 이곳을 ‘마당봉’이라고도 부르는데, 마치 마당처럼 평평하고 넓다고 해서 그런 이름을 붙인 게 아니가 싶다. 아무튼 이곳에서의 조망(眺望)은 환상적이다. 덕룡산과 주작산의 암릉이 두륜산으로 이어지고 있고, 북쪽으로는 월출산까지 눈에 들어온다.

 

 

 

 

암봉을 우회(迂廻)하여 올라선 산길은 다시 아래를 향하고 있다. 깃대봉은 이곳이 아니고 건너편에 보이는 봉우리이기 때문이다. 마당바위봉에서 10분 조금 넘게 오르면 다산초당 갈림길(이정표 : 깃대봉 0.54km/ 바람재 0.26km/ 다산초당 1.13km)이 나온다. 바람재에서 겨우 260m를 올라왔는데도 벌써 20분이 훨씬 넘게 걸렸다. 그만큼 가팔랐고, 거기다가 무더위에 체력까지 떨어진 탓일 것이다. 비록 높지 않은 산이지만 바위로 이루어진 능선은 예상외로 즐겁다. 한 봉우리를 넘으면 또 다른 봉우리가 나타나고, 또 다른 봉우리를 넘으면 또다시 봉우리가 나타나는 것이 능선산행의 묘미(妙味)이다. 오늘 산행이 바로 그런 산행인 것이다. 더구나 아무 곳으로 고개를 돌려도 눈에 들어오는 아름다운 풍경은 생경스럽기 짝이 없다. 그로인해 능선산행의 즐거움은 한층 더 배가(倍加)된다.

 

 

 

다산초당 갈림길에서 깃대봉까지는 20분이 조금 넘게 걸린다. 물론 이 시간도 체력이 소모된 것을 감안한 것이다. 깃대봉까지 가려면 중간에 한번 깊게 떨어졌다가 다시 가파르게 올라가야 하는 고생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깃대봉 정상에서 5m쯤 못미처에서 백련사로 내려가는 길이 오른편으로 갈려나가고, 이어서 오늘 산행의 최고봉인 깃대봉에 올라서게 된다. 산행을 시작한지 3시간 20분이 지났다. 바람재에서 이곳까지 30분이 걸린다는 사전조사가 무색하게 50분이나 걸린 것은 그만큼 체력소모가 큰 산행이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바위산인 깃대봉의 정상은 의외로 흙으로 이루어져 있다. 10평 정도의 분지(盆地)로 이루어진 정상은 검은 돌로 만들어진 정상표지석과 삼각점이 지키고 있다.

 

 

 

깃대봉에 올라서면 일망무제(一望無題)로 조망(眺望)이 열린다. 북쪽으로 월출산이 그림같이 펼쳐지고, 동북쪽의 제암산과 그 오른편에 있는 천관산도 한눈에 들어온다. 저 멀리 남동쪽으로 보이는 산은 아마도 완도의 상황봉일 것이다. 그리고 남쪽에 첩첩(疊疊)이 쌓인 덕룡산과 두륜산의 산릉은 꿈결처럼 황홀하다. 만덕호와 강진만도 잘 보이고, 반대쪽에는 월출산으로 이어지는 이름 없는 무명봉들이 길게 능선을 이루고 있다. 발아래에는 강진만의 농경지(農耕地)들이 잘 맞춰진 퍼즐조각처럼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다. 지금쯤 저곳에서는 심은 지 얼마 안 되는 벼들이 힘차게 자양분(滋養分)을 끌어올리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필요한 것들을 아낌없이 주는 강진만은 바라만보고 있어도 넉넉함으로 넘쳐난다.

 

 

 

 

하산 길은 두 갈래다. 곧바로 직진하면 필봉을 거쳐 옥련사로 가게 되며, 백련사로 가려면 조금 전에 지나왔던 갈림길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백련사로 발길을 옮기면 만덕호(湖)와 그 너머의 강진만(灣)이 눈앞에 펼쳐진다. 10분 조금 못되게 내려서면 이내 순탄한 길로 변하고, 다시 10분 조금 못되게 걸으면 산길은 능선을 벗어나 오른쪽 사면(斜面)으로 방향을 튼다. 백련사로 내려가는 길이다.

 

 

 

갈림길에서 직진하여 5분 조금 넘게 더 내려서면 수백 년 묵은 동백나무 7000여 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는 천년고찰(千年古刹) 백련사다. 백련사(白蓮寺)는 예상보다 크고 장중하다. 돌로 마무리한 축대(築臺) 위에 커다란 만경루와 대웅전이 넉넉하게 자리 잡고 있다.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에 버금가는 이름으로 알려진 천태종의 거목(巨木) 요새스님이 수행지로 삼기에 충분한 터인 것이다. 대웅전은 개보수 공사가 한창인데 절집 마당 곳곳에 수백 년 된 배롱나무와 동백나무가 의연하게 버티고 서 있다. 배롱나무 옆 절간에 들어서니 불교용품을 팔고 있는 코너의 앞에 팥빙수를 판다고 적혀있는 것이 아닌가. 마침 허기가 지던 참이니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무더위 탓에 식욕(食慾)을 잃어 점심을 걸렀기 때문이다. 예쁘장한 보살님이 직접 만들어주는 오디를 듬뿍 넣은 팥빙수는 8천원이라는 돈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그 맛이 훌륭했다.

* 백련사는 만덕산에 있다고 해서 만덕사(萬德寺)라고 불리기도 한다. 사찰의 창건은 통일신라시대 말기인 839년에 무염(無染) 스님이 창건하였으나 중요한 수도도량으로 면모를 달리한 것은 1211년 요세(了世)가 크게 중창한 뒤부터이다. 요세는 보현도량(普賢道場)을 개설하고 실천 중심의 수행인들을 모아 결사(結社)를 맺었다. 이것이 송광사를 중심으로 한 수선사(修禪社)와 쌍벽을 이루었던 백련사결사(白蓮社結社)이다. 이후 백련사는 여덟 명의 국사를 배출했을 정도로 남도의 중심사찰이었다. 조선시대에 들어 지금의 모습으로 이어진 백련사는 다산 정약용과 교류하며 차와 학문을 논하였던 혜장선사에 의해 다시 한 번 알려졌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과 시왕전(十王殿), 나한전(羅漢殿), 만경루(萬景樓) 등의 건물이 있으나 국보급 문화재(文化財)는 없고, 대신 천연기념물(151호)을 품고 있다. 바로 ‘동백 숲’이 있다.

 

 

 

 

다산초당을 가기위해 백련사를 벗어나자마자 고승(高僧)들의 부도(浮屠)들이 숨어있는 ‘동백나무 숲이 나타난다. 백련사 일대는 우리나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의 ‘동백 숲’을 자랑한다. 얼마나 뛰어났으면 천연기념물(151호)로 까지 지정을 받았겠는가. 동백나무는 백련사 주변 1.3ha에 걸쳐서 1,500여 그루가 분포되어 있는데, 다산초당에서 11년을 살았던 다산(茶山)선생도 백련사의 동백 숲을 무척 사랑했다고 한다. 백련사 동백나무는 굵고 키도 크다. 어른 몸통 3배에 달하는 둥치를 자랑하는 나무도 있다고 한다. 덕분에 동백나무 숲은 화창한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컴컴할 정도다.

 

 

 

백련사에서 다산초당(茶山草堂) 넘어가는 길의 매력은 오솔길 같은 산길이다. 그 길 가엔 차나무들이 자생하고 있다. 차밭 너머로 강진만과 구강포가 그림처럼 펼쳐지고 있다. 참고로 차(茶)중에서는 곡우(穀雨)에서 입하(立夏)사이에 트는 새싹을 따서 만드는 작설차(雀舌茶)를 최고로 친다. 참새 '작(雀)' 자에 혀 '설(舌)'자를 쓰는데 참새의 혀만큼 새 순이 올라와 있을 때 따서 만든 차라는 뜻이다.

 

 

 

‘차밭’을 지나 다산초당(茶山草堂)으로 가는 길로 접어든다. 초당(草堂)까지의 800m 산길은 부드러운 흙길이다.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은 다산선생이 벗이자 스승이며 제자이기도 했던 백련사 혜장선사와 교유(交遊)하며 산책했던 바로 그 길이다. 다산선생과 혜장스님은 옛날 이 길을 뻔질나게 오고갔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때에는 둘이서 함께 걸으면서 사상을 뛰어넘는 담론(談論)을 이어가기도 했을 것이다. 지금은 두 사람이 함께 걷고도 남을 정도로 넓게 단장되어 예전의 포근한 맛은 사라졌지만, 그래도 따뜻한 차 한 잔에 깊은 우정을 나누던 두 분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오솔길의 낭만은 풍성(豊盛)해지고도 남는다. 문득 다산선생이 지었다는 산문 한 구절을 떠올려 본다. ‘지구는 둥글고 사방의 땅은 평평하다. 그러니 내가 있는 곳보다 더 높은 곳은 세상에 없다. 그런데도 곤륜산이나 형산, 곽산을 오르며 높은 곳을 찾아다니는 사람이 있다. 지나간 과거는 쫓아가 잡을 수 없고 다가올 미래는 기약할 수 없다. 지금 이 상황보다 더 즐거운 때는 없다. 그런데도 좋은 수레를 갈망하고 논밭에 마음 태우며 기쁨을 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땀을 흘리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평생토록 헤매면서 오로지 저것을 바랄 뿐, 이것을 참으로 누려야 하는 줄 모른 지가 오래되었다.’

 

 

 

다산초당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의 왼편에 이층으로 된 정자(亭子) 하나가 보인다. 천일각(天一閣)이라는 정자인데 ‘하늘 끝 한 모퉁이’라는 뜻의 천애일각(天涯一閣)을 줄인 것이라고 한다. 이 정자는 다산의 유배(流配)시절에 지어진 것은 아니고 지난 1970년대에 강진군에서 건립했다, 다산이 이곳에 서서 이미 승하한 정조와 거문도에 유배(流配)중이던 형 정약전을 그리워했을 것이라고 여겨서 이곳에다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이층에 오르면 강진군의 생각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강진만과 구강포가 한 폭의 그림으로 성큼 다가온다.

 

 

 

천일각 옆에 있는 고갯마루(이정표 : 다산초당 600m/ 깃대봉 900m/ 백련사 200m)를 넘어 오솔길을 걷다보면 곧바로 동암(東庵)에 닿는다. 백련사에서 느긋하게 걸어도 30분이면 도착하는 거리이다. 동암 바로 옆에 ‘다산초당(茶山草堂)’이 자리하고 있다. 다산이 '목민심서'를 비롯한 600여 권 저서 대부분을 이곳에서 썼다고 전해지는 공간이다. 다산 정약용선생은 11년간을 이곳에서 머물렀다. 강진에서의 유배(流配)생활이 18년이었으니 대부분의 유배생활을 이곳에서 한 샘이다. '다산초당(茶山草堂)'은 으리으리한 기와집이다. 그러나 반듯하게 잘 지어진 기와집이 어색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기와집이 초당(草堂)이라는 이름에도 부합(附合)되지 않을뿐더러, 다산의 정신과도 어울리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초가(草家)로 바꾸는 게 맞지 않을까 싶다. 추사의 글씨를 집자해 놓았다는 '다산초당'이라는 현판이 정겹게 다가오는 것은, 아마 공직생활 내내 지표로 삼아왔던 목민섬서(牧民心書)를 지은 분의 글씨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다산초당과 초당 뒤의 정석(丁石·유배 해제 때 다산이 글을 써서 새긴 바위)과 서암(西庵) 등을 둘러보고 내려선다. 다산초당 근처에는 의외로 동백나무가 많이 보인다. 다산이 유배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구해다 심은 나무란다. 대단한 애착이 아닌가 싶다. 귀양을 온 다른 선비들은 일부러라도 동백나무를 베어버리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이다. 보통 동백꽃은 두 가지 느낌으로 표현된다. ‘바람 난 아가씨처럼 나뭇가지에 매달려 이리저리 흔들리는 살아있는 꽃’이 그 하나요, 다른 하나는 ‘모가지 째 뚝뚝 떨어져 바닥에 낭자한 선혈의 꽃’이다. 대부분의 선비들은 동백꽃을 후자로 보았기 때문에 멀리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산은 자신의 목은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산행날머리는 다산유물전시관 주차장

다산초당에서 식당 등 편의시설(便宜施設)이 있는 귤동마을까지는 금방이다. 경사(傾斜)가 제법 가파른 돌계단을 내려서면 아스팔트 길가에서 동네 할머니들이 농산물을 팔고 있는 것이 보이나 그냥 지나쳐버린다. 당신이 직접 기른 농산물인지 확신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도로를 따라가다 첫 번째로 만나게 되는 삼거리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언덕을 넘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다산유물전시관에 이르게 된다. 초당에서 유물전시관까지는 15분 정도가 걸리는데 위에서 말한 삼거리에서 오른편으로 돌지 않고 곧바로 진행할 경우에는 한참을 더 돌아와야 하므로 길 찾기에 주의를 하면서 진입을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