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봉산((鷹峰山, 998.5m)

 

산행일 : ‘13. 3. 1(금)

소재지 : 경상북도 울진군 북면과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의 경계

산행코스 : 덕구온천→민씨묘→옛재능선길→응봉산→구.원탕→온정골→용소폭포→덕구온천 (산행시간 : 4시간30분)

함께한 산악회 : 동강산악회

 

특징 : 울진 쪽에서 볼 때 비상(飛上)하고 있는 매의 형상을 닮았다고 해서 매봉산(응봉산)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산 자체의 아름다움보다는 동서남북으로 뻗어나간 골짜기들로 인해 유명세(有名稅)를 타고 있는 산이다. 특히 기암절벽(奇巖絶壁)과 폭포(瀑布)들로 둘러싸인 용소골과 문지골은 많은 산악인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으며, 오늘 걷게 될 온정골도 앞의 두 골짜기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다고 알려져 있다. 참고로 이곳 온정골 입구에는 국내 유일의 노천온천(露天溫泉)인 덕구온천이 자리 잡고 있다.

 

산행들머리는 덕구온천

38번 국도를 이용해서 태백시까지 온 다음, 통리고개를 넘어 427번 지방도(삼척시 방향)와 416번 지방도(호산방향)를 연이어 달리다보면 삼척시 원덕읍의 소재지인 호산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서 7번 국도(울진읍 방향)로 갈아타고 달리다가 울진군 북면소재지에 있는 덕구온천교차로(交叉路)에서 오른편의 917번 지방도로 들어서면 얼마 지나지 않아 덕구온천에 이르게 된다. 참고로 동강산악회의 버스는 영동고속도로를 거쳐 삼척까지 온 다음, 삼척에서 동해안을 일주하는 7번 국도로 갈아탔다.

 

덕구온천단지를 통과한 후 경사(傾斜)가 가파른 시멘트포장도로를 따라 고갯마루로 올라붙으면 산행안내소가 나온다. 응봉산을 오르기 위해서는 이곳에서 입산신고를 먼저 마쳐야 한다. 안내소 옆에 세워진 산행안내도에는 출발지에서 정상까지가 거리가 5.7Km로 표시되어 있다. 온정골을 경유하는 하산코스가 7Km이니 오늘 산행은 12.7Km를 걷게 되는 것이다. 참고로 안내소는 근처에 소형차주차장을 갖추고 있으나, 하산코스를 온정골로 잡을 경우에는 요 아래에 있는 벽산덕구온천콘도가 날머리가 되기 때문에 콘도 주차장에 주차하는 것이 한결 편리하다. 안내소(산불감시초소를 겸함)를 지나 능선으로 이어지는 나무계단을 오르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계단을 오르면 곧바로 능선과 연결되는데,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길은 부드러운 황톳길, 거기다가 경사(傾斜)가 완만(緩慢)하고 넓기까지 하니 걷기가 여간 편한 것이 아니다. 정상까지의 거리가 멀다(5.7Km)보니 구태여 급하게 고도(高度)를 높일 필요가 없었나 보다.

 

 

 

길가에는 온통 소나무 천지이다. 수령(樹齡)이 그리 오래된 것 같지는 않지만 소나무들이 능선을 꽉 채우고 있다. 소나무 숲길을 걷다보면 나무들이 뿜어내는 상큼한 기운에 이내 정신이 맑아진다. 아마 숲이 내뿜는 피톤치드(PhytonCide) 때문일 것이다. 모든 나무는 피톤치드를 발산하지만 그 양(量)에는 차이가 있다고 한다. 침엽수가 활엽수보다 2배 이상 많고, 침엽수 중에서도 편백나무의 피톤치드가 가장 많다. 그 다음이 소나무라고 하니 오늘 산행을 힐링(healing)산행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소나무 향이 코끝을 스치는 웰빙(well-being)코스이니 느긋하게 걷는 것이 당연하건만 집사람의 발걸음은 평지에서보다도 더 빠른 속도를 내고 있다. 오후 1시에 출발한 산행을 해 떨어지기 전에 끝내려면 여유를 부릴 틈이 없기 때문이다. 부지런히 걷다보면 30분 쯤 후에는 ‘민씨 묘(墓)’에 이르게 되고, 다시 10분이 지나면 제1헬기장 위로 올라서게 된다.

 

 

 

제1헬기장을 지나면 산길이 좁아지면서 전형적인 오솔길을 만들어낸다. 경사(傾斜)는 아까보다 조금 더 가팔라지기는 했지만 아직까지는 힘들지 않게 오를 수 있는 수준이다. 길가의 소나무들은 갈수록 그 굵기가 커져가면서 색깔이 붉은색으로 변해간다. 전형적인 금강송(金剛松)의 자태를 보이는 것이다.

 

 

 

방화수(防火水), 산행을 하다보면 곳곳에서 물병을 만날 수 있다. 언젠가 구입한 적이 있는 ‘고로쇠나무 수액(樹液)’을 담았던 병을 쏙 빼다 닮았다. ‘혹시 산불을 끌 때 사용하라는 것이 아닐까요?’ 병을 확인해 본 결과 집사람의 예상이 맞아 떨어졌다. 방화용(防火用) 물이었던 것이다. 다른 산에서는 볼 수 없었던 광경이었는데, 아무래도 산행 중에 심심찮게 보이던 산불의 흔적과 무관(無關)하지는 않으리라.

 

 

제1헬기장에서 20분 정도 더 걸으면 암릉구간이다. 나무로 둘러싸여 조망(眺望)이 일절 트이지 않았는데, 바윗길이 나타나면서 처음으로 시야(視野)가 열린다. 왼편으로 응봉산의 주릉과 주변의 산군(山群)들이 선명하게 나타나는 것 외에는 별다른 볼거리는 없다.

 

분재(盆栽)처럼 잘 생긴 소나무가 암릉을 지키고 있다.

 

 

 

 

 

암릉구간이 끝나면 또 다시 흙길로 변하면서 산길은 온통 짙은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다. 그러다가 이내 제2헬기장에 이르게 된다. 산행을 시작한지 85분, 제1헬기장에서는 45분이 걸렸다. 2Km정도 거리에 45분이 걸렸으니 경사가 약간 가팔라지면서 산행속도도 자연스레 더뎌졌던 모양이다.

 

나무로 만들어진 이정표, 자연친화적인 것 같아 마음에 든다.

 

119의 구조지점 표시판, 지자체(地自體)마다 그 형태가 다르나, 나무말뚝에다 구조지점을 표시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곳 응봉산은 현수막(懸垂幕)을 만들어 나무에다 매달아 놓은 것이 다른 산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제2헬기장에서 정상까지는 1.3Km, 25분이면 충분하다. 그 동안 소나무들 일색이던 능선은 정상에 가까워지면서 수종(樹種)이 바뀌어 간다. 신갈나무와 갈참나무 등 활엽수(闊葉樹)들이 소나무를 대신하여 정상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정상어림에는 눈이 수북이 쌓여있어 아직은 겨울의 끝자락임을 일깨워 준다.

 

 

 

가파른 눈길을 조심스럽게 치고 오르면 드디어 헬기장으로 이루어진 정상이다. 널따란 헬기장의 뒤편 언덕에는 사람의 키보다도 훨씬 큰 정상석이 세워져 있다. 정상표지석을 중심으로 오른편은 우리가 올라온 ‘옛재능선 길’이고, 왼편으로 가면 덕풍계곡으로 가게 된다. 그리고 정상석 뒤편으로 진행하면 큰골과 재량박골로 내려갈 수 있으나, 이용하는 사람들이 드문 탓에 길의 흔적(痕迹)은 희미하다. 온정골(덕구계곡)으로 내려가려면 정상석의 맞은편으로 내려서면 된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50분이 지났다.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일품이다. 동쪽으로는 저 멀리 동해바다가 일렁이고 있고, 반대편에는 백병산과, 함백산을 비롯한 백두대간 능선이 잘 조망된다,

 

 

 

정상에서 온정골로 내려서는 하산길은 한마디로 가파르기 짝이 없다. 어찌나 가파르던지 조심하다보면 산을 오를 때보다 더 산행속도가 더디어 질 정도이다. 하긴 갑자기 600m정도의 고도(高度)를 낮추다보니 별수 없었을 것이다. 조심스럽게 내려딛는 하산 길은 1시간 가까이나 계속된다.

 

 

 

길가에는 고사목(枯死木)이 가끔 보이고, 타다 남은 나무줄기들도 심심찮게 보인다. 아마 오래전에 큰 산불이 있었나보다.

 

 

더딘 하산길이 짜증스럽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산길을 온통 **금강송(金剛松)들이 둘러싸고 있다는 것이다. 가파른 경사(傾斜)에도 불구하고 울진의 자랑거리인 금강소나무가 전봇대처럼 곧게 자라고 있다. 오래된 것은 삼백살이 넘는 나무도 있다고 한다. 그 굵기가 어른 몸통 두셋을 합한 것보다도 더 굵은 나무들이 수두룩하다.

**) 금강송(金剛松)이란 금강산소나무란 뜻으로, 금강산을 비롯한 태백산맥 일대에서 자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외에도 붉은 빛을 띠고 있어서 적송(赤松), 곧게 뻗은 자태가 늘씬한 여인처럼 아름답다고 해서 미인송(美人松), 일제시대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소광리에서 벌목된 소나무가 봉화 춘양역으로 실려 갔다고 해서 춘양목, 왕실의 궁궐을 짓고 관을 짜는 데 사용하여 황장목이라도 불린다.

 

 

 

 

하산을 시작한지 1시간 가까이 흐르면 로프를 이용해야 만이 내려설 수 있는 비탈길을 만나게 되고, 이어서 나타나는 나무계단을 내려서면 낯선 다리(橋) 하나가 눈에 띈다. 영국의 포스교(Forth Railway Bridge)를 본떠서 만든 다리라고 한다. 태풍 매미로 계곡에 설치됐던 다리들이 유실(流失)된 이후, 피해복구(被害復舊) 차원에서 세계의 아름다운 교량(橋梁)을 흉내 낸 다리 13개를 새로 놓았다고 한다. 내내 계곡을 따라 내려가는 산길이 계곡물을 가로지를 때마다 이 다리들을 건너게 된다. 차례로 모습을 드러내는 다리들은 그들이 가진 독특한 형상(形象)을 드러내며 계곡의 아름다움과 묘한 어울림을 만들어내고 있다.

 

 

 

포스교를 지나면 산길은 산의 사면(斜面)을 뚫고 이어진다. 왼편에는 바위로 이루어진 계곡이 아스라이 내려다보인다. 흐르는 물은 비록 적지만 계곡은 곳곳에 소(沼)와 담(潭), 그리고 폭포(瀑布)를 만들어내고 있다.

 

 

 

포스교에서 10분 정도를 걸어 내려오면 원탕(原湯)이다. 따뜻한 온천수(溫泉水)가 샘솟는 작은 분수대가 보이고, 주변은 온천수에 손을 적시려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분수대 옆에는 발바닥 모양의 노천탕도 보이지만, 물은 흐르지 않고 있다. 이곳 원탕은 옛날 사냥꾼의 화살에 상처를 입은 멧돼지가 도망치다가 이곳에서 상처를 치료하고 도망을 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 국내 유일의 자연용출온천수(自然湧出溫泉水)라고 한다.(원탕의 이정표 : 효자샘 1Km, 용소폭포 2.85Km, 덕구온천 4Km/ 정상 2.9Km, 제2헬기장 4.3Km, 제1헬기장 5.5Km)

 

 

 

 

두 번째로 만나게 되는 다리는 중국의 장제이橋(Jiangjiehe Bridge), 그리고 그 다음이 일본의 도모에가와橋(Domoegawa Bridge), 네 번째는 다시 한 번 영국으로 넘어간다. 바로 맨체스터에 있는 트리니티橋(Trinity Foot Bridge)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박지성선수가 활약하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연고지(緣故地)로 삼고 있는 지역이다.

 

 

 

산길 오른편에 자그마한 샘이 하나 눈에 들어온다. 효자샘이라고 불리는 약수(藥水)터인데, 사경을 헤매는 어머니를 모신 효자가 응봉여신(女神)의 도움으로 이곳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 약수를 마신 후 어머니의 병이 나았다는 설화(說話)를 간직한 샘이다. 마침 목이 마른 참이라 벌컥벌컥 바가지채로 마셔본다. 건강에 좋다는 약수를 마시는 것으로는 모자라 빈 물통에도 꼭꼭 채워본다.

 

연리지, 안내판이 아니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엉성하다

 

 

 

 

트리니티橋 다음에는 다리라기보다는 차라리 계단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을 것 같은 다리가 나타난다. 불국사의 청운교(靑雲橋)와 백운교(白雲橋)를 닮았는데, 물론 계곡을 가로지르지도 않는다. 그래서인지 다리에 대한 안내판도 보이지 않는다. 그 다음에 보이는 다리는 경복궁에 있는 취향교(醉香橋)라고 하는데 독특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다음은 스페인의 알라밀로橋(Alamillo Bridge)와 스위스의 모토웨이橋(Mortorway Bridge), 그리고 독일의 크네이橋(Knee Bridge)가 연달아 나타난다.

 

 

 

 

 

10m 남짓한 높이의 비스듬한 암반(巖盤) 위를 물이 타고 흐르는 와폭(臥瀑)의 형상을 하고 있다. 또 위에서 바라보면 낙차에 의한 마모로 만들어진 소(沼)가 여러 개 보인다. 언젠가 설악산에 있는 십이선녀탕에서 보았던 광경과 비슷하게 생겼다. 폭포의 양 옆은 제법 높은 산 사면(斜面)이 둘러싸고 있다.

 

 

모토웨이교를 지나면 우렁찬 굉음(轟音)이 들려온다. 덕구계곡 풍경(風景)의 하이라이트인 용소폭포(瀑布)이다. 용이 되기를 수백 년 기다린 이무기가, 산신(山神)의 도움으로 이곳에서 승천했다고 한다. 그 이무기가 훑고 갔다는 굽이친 소(沼)와 폭포(瀑布)가 장관(壯觀)이다. 폭포 위에 설치된 크네이橋에서 내려다보는 풍경도 일품(一品)이다.

 

 

호주의 하버브릿지橋(Harbor Bridge)와 프랑스의 노르망디橋(Normandy Bridge)를 지나면 눈에 익은 다리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여의도서 한강을 가로지르는 서강대교(西江大橋)이다.

 

 

 

 

 

미국의 금문橋(Golden Gate Bridge)를 마지막으로 다리들의 패션쇼는 끝을 맺는다. 금문교를 지나면 산행이 종료되는 **덕구온천단지이다. 정상을 출발한지 2시간 30분, 원탕에서 이곳까지는 1시간10분이 소요되었다.

**) 덕구온천(溫泉), '국내 유일의 자연 용출 온천'으로 유명한 곳이며, 1년 내내 43℃의 약알칼리성 온천수가 동력(動力)없이도 5m정도 올라온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은 온천수를 데우지 않고 산에서 분출하는 물을 사용하기 때문에 찾는 사람들이 사시사철 끊이지 않는다. 덕구온천에는 전해져 내려오는 설화가 있다. 고려말(高麗末) 창과 활을 잘 쓰기로 소문난 전씨 성(姓)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그가 사냥을 하던 어느 날, 부상을 입고 쫓기던 멧돼지가 계곡물에 몸을 씻더니 언제 아팠냐는 듯이 달아나는 것을 보고, 살펴보니 온천수(溫泉水)가 샘솟고 있더란다. 그 후 주민들이 이 물줄기에 특별한 효능(效能)이 있음을 깨닫고 돌을 쌓아 온천탕을 만들었다고 한다.

 

 

 

단석산(斷石山, 827.2m)

 

산행일 : ‘13. 2 16()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건천읍과 내남면, 산내면의 경계

산행코스 : 천포교장군바위장군봉방대리 마애불진달래능선단석산신선사 마애불상군오덕선원주차장(산행시간 : 4시간30)

 

함께한 산악회 : 기분좋은 산행

 

특징 : 경주시의 최고봉으로 삼국통일을 이룬 김유신 장군과 관련된 전설(傳說)이 짙게 배어있는 산이다. 거대한 바위와 전망대가 유난히 많은 이 산에는 우리 전통 고미술사(古美術史)와 종교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유산(遺産)이 있다. 바로 정상 서쪽 아래 비탈에 자리 잡은 신선사마애불상군이다. 거대한 바위에 새겨진 10개의 불상(佛像)과 보살상(菩薩像)으로 이루어진 마애불상군은 1300여 년 전에 조성된 신라 최초의 석굴사원(石窟寺院)이기도 하다.

 

 

산행들머리는 건천 I.C 근처 강산식당 안내판(건천읍 천포리)

경부고속도로 건천 I.C의 요금소를 빠져나온 후, 국도 20호선을 타고 건천읍 방향으로 300m만 가면 고속도로 굴다리를 만나게 된다. 굴다리를 지나자마자 오른쪽에 강산식당 안내 간판이 보인다. 이곳이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고속도로 굴다리를 빠져나오면 왼편에 고속도로와 나란히 가는 시멘트 포장 소로(小路)가 보인다. 입구에 강산식당 간판이 세워져 있으니 참고하면 된다. 소로로 들어서서 100m정도 걸으면 물기가 보이지 않는 냇가에 이르게 된다. 건천(乾川)이라고 불리는 하천(河川)이다. 장마철 외에는 물이 흐르지 않기 때문에, 물이 마른 하천이라고 해서 건천(乾川)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등산로는 고속도로의 아래를 지나는 하천을 가로지른 후, 건너편 산자락으로 연결된다.

 

 

 

고속도로 위편의 산자락에 올라서면 맨 먼저 눈에 띄는 게 공동묘지(共同墓地)이다. 등산로는 공동묘지를 지나서 5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체육공원까지 생각보다 또렷하게 나 있다. 묘지(墓地) 사이로 난 길을 걷다가 고개를 들어보면 진행방향의 산등성이에 커다란 바위 하나가 돌출(突出)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장군바위라고 한다. 밋밋하기만 한 능선에 유아독존(唯我獨尊)처럼 솟아난 것이 흡사 장군(將軍)처럼 보였나 보다.

 

 

 

공원묘지와 체육공원을 지나면서 산길은 제법 가팔라진다. 전망대(展望臺)가 유난히도 많은 오늘 산행에서 첫 번째로 만나게 되는 전망바위는 공원묘지에서 약 15분 조금 더 되는 거리에 있다. 전망바위에 올라서면 공설운동장을 비롯한 건천읍 시가지(市街地) 전경과 경부고속도로 등이 잘 보인다. 시가지 건너편에 보이는 산은 아마 구미산일 것이다.

 

 

 

전망바위에서 10분 쯤 가파른 능선을 치고 오르면 작은 무덤가에 거대한 바위 하나를 만나게 된다, 장군바위인데, 어떤 사람들은 이를 부정하면서 공기돌 바위라고 부르기도 한다. 산행을 시작해서 여기까지 오는데 30분이 조금 더 지났다. 이곳에서부터 능선은 완만(緩慢)하게 이어진다.

 

 

 

장군바위에서 고도(高度)의 차가 거의 없는 능선을 20분 정도 오르내리다보면 장군봉(457m)이다. 장군봉은 이름이 주는 이미지와는 달리 별다른 특색이 없는, 그저 능선상의 한 지점일 따름이다. 앞서가던 일행이 장군봉이라고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그냥 지나쳤을 정도이다. 물론 이곳이 정상임을 알려주는 그 어떠한 표식(表式)도 없다. 또한 조망(眺望)도 일절 트이지 않는다.

 

 

산행이 시작된 지 꽤 오래 되었지만 거리나 방향을 알려주는 아무런 표지(標識)도 만날 수가 없다. 심지어는 개념도에 나와 있는 장군봉까지도 아무런 표시 없이 방치되어 있을 정도이다. 등산로가 도시근교의 공원(公園)수준으로 잘 닦여 있는데도 이정표 하나 보이지 않는 것이 도리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정상으로 가는 방향을 알려주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작년에 열렸던 진달래 축제때 붙여 놓았던 코팅지가 이정표를 대신하여 정상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기둥에다 고무호스를 얼기설기 매달고 있는 나무는 분명 고로쇠나무일 것이다. 소나무와 참나무가 대부분인 능선에서 어렵게 만난 고로쇠나무을 채취꾼들이 그냥 지나치지 않았을 것이다.

 

 

장군봉을 내려가면 산세(山勢)는 능선이라고 부르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구릉(丘陵)의 형태를 띠고 있다. 하지만 산길이 뚜렷하기 때문에 산행을 이어가는데 불편한 점은 없다. 장군봉에서 10분 조금 넘게 걸으면 산길의 흔적이 뚜렷한 안부사거리에 이르게 되고, 여기서부터 등산로는 444봉으로 오르는 능선을 벗어나 오른편 산허리를 째며 우회(迂廻)를 시킨다. 당연히 오른편의 널따란 길을 따라 진행해야 한다.

 

 

 

오른편으로 우회(迂廻)하던 길은 30분쯤 후에 444봉 뒤의 능선으로 다시 올려놓는다. 능선에 오르면 또 하나의 멋진 전망바위가 기다리고 있다. 바위손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전망바위 위로 올라서면 단석산 정상과 오봉산, 사룡산 등이 눈에 들어온다. 전망바위에서부터 산길은 올망졸망한 봉우리들을 반복해서 오르내리는 능선산행이 계속된다.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20분 정도를 걷다보면 또 다른 전망바위를 만나게 되고, 전망바위를 지나 내려서는 안부에서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전망바위와 진행방향을 막고 있는 거대한 바위의 중간지점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이곳에서는 바위를 곧장 오르는 길 대신에, 오른편에 보이는 내리막길로 진행해야 한다. 그래야만 방대리 마애불상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른편으로 급하게 50m가량 내려섰다가 왼쪽으로 돌면 거대한 바위 절벽(絶壁)이 나타난다. 그 바위 면에 마애불(磨崖佛)이 돋을새김 방식으로 새겨져 있는 것이 보인다. 바로 ‘**방내리 마애불인데 상제암 마애불이라고도 불린다. 작은 돌탑과 제단(祭壇)과 함께 있는 마애불은 둥근 얼굴에 육계가 뚜렷하며 결가부좌(結跏趺坐)를 취하고 있다.

**) 방대리 마애불(磨崖佛). 커다란 바위 아래쪽에 인자하게 생긴 불상(佛像) 하나가 새겨져 있다. 그런데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찾아봐도 그 흔한 안내판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국보급 문화재(文化財)는커녕 지방문화재에도 끼어있지 않은 모양이다. 그렇다면 석공이 새긴 솜씨가 예술성(藝術性)이 떨어졌던지, 아니면 역사적(歷史的)으로 보존할만한 가치가 부족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정교함과 거대한 규모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등산로는 마애불을 앞을 지나 사면(斜面)길로 이어진다. 사면길을 따라 5분 쯤 걸으면 다시 능선 위로 올라서게 되고,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여기부터 경주국립공원입니다.’라고 쓰인 현수막(懸垂幕)이 보이고, 이어서 옹달샘을 만나게 된다. 옹달샘에는 친절하게도 스테인리스 컵까지 비치해 놓았지만 마실 생각까지는 들지 않는다.

 

 

 

함께 걷던 일행이 바위의 생김새가 흡사 챔피언 벨트를 닮았다고 한다. 요즘에야 사람들의 기억(記憶) 저 너머로 사라져버렸지만, 한때는 온 국민들이 환호하던 스포츠가 복싱이었다. 유명우나 장정구 등 한 시대를 풍미하던 선수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저렇게 생긴 챔피언 벨트를 허리에다 차고 있었다.

 

 

국립공원 현수막에서 10분 정도를 더 걸으면 이내 방내리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안부삼거리에 이르게 된다. 이곳 삼거리에서 오늘 산행 중 처음으로 이정표(단석산 정상 1.7Km/ 방내지 1.6Km)를 만나게 된다. 경주국립공원에서 세운 것을 보면 이곳에서부터 국립공원이 시작되나 보다. 이곳 삼거리에서 왼편 길로 내려가면 천주암을 지나 방내지마을에 이르게 된다.

 

 

 

 

방내리 갈림길에서 조금 더 진행하면 능선은 언제 평탄(平坦)하였냐는 듯이 가팔라진다. 작은 봉우리들이 이어지는 능선은 짧고 완만(緩慢)하게 내려섰다가 급하게 오르기를 번복하면서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 간다. 갈림길에서 얼마간 더 걸으면 능선의 왼편에 거대한 바위 하나가 보인다. 오늘 산행 중에서 가장 뛰어난 조망을 보여주는 전망바위이다. 바위 위로 오르면 먼저 잘생긴 소나무 한 그루가 손님을 맞는다. 잘 생긴 바위 앞에 서면 건천시가지와 그 너머에는 경주, 그리고 주변의 산군(山群)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단석산의 구조신고지점 표시판은 다른 산에서 보아오던 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대부분의 산들은 나무 말뚝에다 신고지점 위치를 표기(表記)해 놓았는데 이곳에는 구조지점을 표시한 철판을 나뭇가지에 매달아 놓은 것이 특이하다.

 

 

전망바위를 지나면서 간간히 보이기 시작하던 진달래가 서서히 밀도(密度)를 높이기 시작하더니, 세 번째 이정표(단석산 정상 0.8Km/ 방내지 2.5Km)를 지나면서 부터는 완전히 군락지(群落地)로 변해버린다. 이곳에서부터 정상까지의 능선은 진달래 능선이라고 불리며 봄이면 이곳에서 진달래 축제(祝祭)’가 열린다. 이곳의 진달래군락은 그 크기와 범위가 진달래로 소문난 다른 산들에 비에 뒤떨어지지 않지만, 진달래 꽃 잔치를 한눈에 볼 수가 없다는 것이 흠()이 아닐까 싶다.

 

 

 

진달래가 터널을 만들어내고 있는 숲길을 따라 걷다보면 어느새 단석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방대리 마애불에서 1시간, 산행을 시작한지 3시간 정도의 거리이다. ‘공원 지킴이 쉼터가 있는 정상은 너른 분지(盆地)로 이루어져 있고, 그 북쪽에 커다란 정상석이 자리 잡고 있다. 정상에서는 사방으로 조망(眺望)이 시원스럽게 열린다. 조망안내판 앞에 서서 눈을 들어보면, 송화산과 선도산, 토함산, 조항산 등이 일렬로 늘어서 있는 것이 보인다.(정상의 이정표 : 신선사 1.0Km/ 당고개 3.4Km, OK그린연수원 2.8Km/ 방내지 3.3Km)

 

 

 

 

 

단석산(斷石山)의 정상에는 마치 칼로 자른 듯이 반듯하게 둘로 쪼개진 바위가 있다. 바로 이 바위가 단석(斷石)이라는 산 이름을 낳게 한 바위이다. 바위는 정확하게 둘로 나눠져 있는데, 김유신이 난승(難勝)이라는 신인(神人)으로부터 얻은 신검(神劍)으로 내리친 흔적이라고 한다.

 

 

하산지점으로 정한 신선사로 내려가려면 정상석을 지나 삼각점 쪽으로 난 길로 진행해야 한다. 하산을 시작하자마자 곧 만나게 되는 헬기장을 지나 왼편으로 방향을 잡는다. 이어서 완만한 산길을 따라 20분 정도 내려가다 보면 거대한 바위들이 앞을 가로막는다.(이정표 : 신선사 0.4Km/ 단석산 정상 0.6Km)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10분 정도 더 내려가면 능선의 오른편에 신선사가 보인다.

 

 

 

 

신선사로 방향을 틀면 먼저 강화유리로 지붕을 덮은 거대한 바위 덩어리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국보(國寶) 199호로 지정된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이다. 거대한 바위는 몇 개로 쪼개져 있고, 쪼개진 단면에는 새겨진 불상(佛像)들이 웃고 있다. 천년의 미소들이 정겹기 그지없다.

**)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斷石山 神仙寺 磨崖佛像群 : 국보 제199), 높이 30m의 거대한 암석이 자형으로 솟아 석실을 형성하고 있는데, 북쪽 바위 2개 중 구석 바위에는 거대한 여래상(如來像)을 주존(主尊)으로 하였고, 동쪽 바위에는 보살상을, 남쪽 바위에는 보살상과 명문(銘文)을 조각하여 3(三尊)의 형식을 이루었다. 또한 북쪽의 바위에는 위쪽에 여래와 보살 4구를, 아래에 공양상(供養像) 2구와 여래상 1구를 조각하여 도합 10구의 상을 조각하였다. 동쪽 바위에는 '경주 상인암 조상명기(慶州上人巖造像銘記)'라는 400자 가까운 명문이 음각되었고, 북쪽 바위에는 다른 여래입상 ·보살상과 함께 반가사유상이 조각되었다. 이 마애불상군은 우리 나라 석굴사원의 시원적(始原的) 형식을 보여 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클 뿐만 아니라, 당시 신앙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조성 연대는 7세기 초()경으로 추정된다. <두산백과 참조>

 

 

 

 

신선사(神仙寺)는 마애불의 왼편 아래쪽에 있다. 신선사로 들어서면 맨 먼저 만나게 되는 당우(堂宇)가 대웅보전이고, 그 외에도 산령각 등 몇 채의 당우가 더 보인다. 신선사는 대한불교법화종에 소속된 사찰이다. 7세기(世紀)경에 자장(慈藏)의 제자 잠주(岑珠)가 창건했으며, 이 절에서 김유신(金庾信:595673)이 삼국통일을 위해 기도했다고 전해진다. 원래 신선사라고 불리던 석굴(石窟)은 현재는 작은 암자(庵子)처럼 쓰이고, 50m쯤 아래에 본 절이 들어서 있다. 절의 전각(殿閣)으로는 관음전과 산령각, 요사채 등이 있다. 한편 석굴은 동, , 3()이 갈라진 바위로 둘러싸여 있으며, 옛날에는 지붕을 얹어 사용했다고 한다. 이 석굴의 안쪽 벽에 국보 제199호인 불상과 보살상들(마애불상군)이 새겨져 있다.

* 법화종(法華宗), 김갑열(金甲烈) 스님이 창종(創宗)한 한국 불교 27개 종단의 하나이다. 고려의 대각국사(大覺國師)를 종조(宗祖)로 하고 있으며, 종찰(宗刹)은 무량사(無量寺:서울 성북동 소재)이다. 소의경전(所依經典)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며, 본존(本尊)은 십계만다라(十界曼多羅)이나 불상은 석가모니불을 봉안한다.

 

 

 

산행날머리는 우중골 주차장

신선사를 벗어나 갈지()자로 고도(高度)를 낮추는 오솔길을 따라 300m를 내려오면 신선사 간이주차장, 이어서 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길을 300m쯤 더 내려오면 또 하나의 주차장이 나온다. 경주국립공원 안내도가 세워져 있는 두 번째 주차장은 가파른 경사(傾斜)로 인해 위에 있는 간이 주차장까지 오를 수가 없는 승용차들을 위해 마련된 것이 아닐까 싶다. 두 번째 주차장에서부터는 시멘트 포장도로로 연결된다. 도로를 따라 20분 정도 걸으면 조계종 사찰인 오덕선원(禪院)을 만나게 되고, 또 다시 10분 가까이 더 걸으면 산행이 종료되는 우중골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신선사에서 날머리까지는 대략 1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가산(架山, 901.6m)

 

산행일 : ‘13. 1. 26(토)

소재지 :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과 동명면의 경계

산행코스 : 소야고개→오계산→모래재 삼거리→서문→가산바위→중문→용바위→정상→치키봉→탐방지원센타→가산산성 주차장(산행시간 : 4시간50분)

 

함께한 산악회 : 기분좋은 산행

 

특징 : 동쪽 사면(斜面)이 사람이 다닐 수 없을 정도로 비탈진데다가, 바위절벽까지 몇 곳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는 전형적인 흙산의 모양새를 하고 있다. 또한 정상 어림은 평평한 고원(高原)을 형성하고 있다. 때문에 조선 때에는 이곳에다 산성(山城)을 쌓았는데, 이웃에 위한 금오산성, 천생산성과 함께 주변 지역 방어(防禦)에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산이 그다지 높지 않고, 길 또한 부드러워 가족 산행지로 추천할만하며, 유적답사(遺跡踏査)를 겸한 하이킹 코스로도 적당하다.

 

 

산행들머리는 소야고개 (다부고개, 해발 230m)

중앙고속도로 다부 I.C에서 나와 79번 지방도를 이용해서 5번 국도(國道 : 칠곡방향으로 우회전)로 올라탄다. 이어서 칠곡방면으로 5분이 조금 못되게 달리면 소야고개에 이르게 된다. 산행은 왕복 4차선 도로인 5번 국도의 반대편에서 시작되므로, 질주하는 차량들을 피해서 도로를 무단횡단 해야 하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참고로 길 건너편에 ‘해주최씨세장천(海州崔氏世葬阡)’이라고 적힌 비석(碑石)이 보이니 참조하면 어렵지 않게 들머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산행은 5번국도와 25번국도가 겹쳐서 지나가는 **소야고개에서 시작된다. 도로를 벗어나 50m쯤 산을 바라보고 걸으면 ‘영호당’이라는 당호(堂號)를 내건 ‘해주 최씨’들 제각(祭閣)이 나온다. 제각을 오른편에 끼고 돈 후, 이번에는 문중 묘역(墓域)을 왼편에 끼고 오르면 능선 위로 올라서게 된다. 능선은 왼편에 동명면과 오른편에 가산면을 끼고 이어진다. 능선에 올라서면 먼저 빽빽하게 들어선 소나무 숲이 길손을 맞는다. 능선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간다.

**) 소야고개는 옛날 왕건과 견훤이 혈투를 벌이던 요충지(要衝地)였고, 병자호란과 임진왜란, 6.25 등을 거치며 매 고비마다 치열한 전투를 겪은 곳이다. 또한 이 고개는 조선시대 영남지방에서 한양으로 가던 옛길 영남대로 길목이다. 많은 역과 관원 행상들이 묵어가는 주막촌이 형성되었고, 돈 많은 거상(巨商)들이 몰려들면서 부자가 많은 곳이라 하여 다부원(多富院)이란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산경표(蘇耶峙)와 대동여지도에도 지명이 표기된 곳이다.

 

 

 

짧게 떨어졌다가 길게 오르면서 고도(高度)를 높여가는 능선은, 별다른 볼거리를 제공하지는 못한 채로 지루하게 이어진다. 조망(眺望) 또한 형편없다. 중간에 한번 중앙고속도로가 오른편에 나타난 것을 제외하고는, 빽빽하게 들어찬 나무들이 온통 시야(視野)를 가로막아 버린다. 지루한 오르내림을 45분 정도 계속하다보면 오계산(午鷄山)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오계산 정상은 정상인 줄도 모르고 지나쳐 버리기 쉬울 정도로 정상답지가 않다. 봉우리라기보다는 그저 능선 상에 약간 솟아오른 한 지점이라는 것이 옳은 표현일 것이다. 정상에는 소나무 줄기에 매달린 ‘오계산 466.3m(새마포산악회)’라고 쓰인 코팅지가 정상표지석을 대신하고 있다. 코팅지만 아니라면 어느 누구도 이곳이 봉우리임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오계산을 지나면 능선은 잠깐 고도(高度)를 낮추었다가 다시 긴 오르막길을 만들어 낸다. 이 구간이 오늘 산행에서 가장 힘든 구간일 것이다. 오르막길이 계속해서 길게 이어질 뿐만 아니라, 그 오르막이 가파르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가파른 오르막길은 거의 40분 동안을 치고 오르게 만들다가, 다시 완만(緩慢)하게 변하더니 ‘임도(林道) 삼거리(이정표 : 모래재 1.7km/ 가산바위 1.6km)’에 올려놓는다. 팔공지맥 상의 모래재를 지나는 임도가 그 끝을 맺는 지점이다. 오계산에서 이곳까지는 대략 50분 정도가 걸렸다.

 

 

 

 

 

임도 삼거리를 지나면 산길은 주능선인 ‘**황학지맥 분기봉’을 오른편으로 우회(迂廻)해서 이어진다. 소야고개를 출발해서 이곳 ‘임도 삼거리’까지의 구간은 황악지맥의 일부구간이다. 삼거리를 지나면서 산길에 눈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별로 의미가 없는 이정표(모래재 2.2km/ 가산바위 1.1km)를 지나면서 길바닥의 눈은 위험하다 싶을 정도로 많이 쌓여있다.

**) 황학지맥(黃鶴枝脈), 팔공지맥인 가산의 북서쪽 1.5km지점인 851봉에서 서쪽으로 분기(分岐)하여, 칠곡군 가산면과 동명면 경계를 따라 오계산과 황학산을 지나 남진(南進)하다가 금호강이 낙동강에 합수(合水)하는 달성군 다사면 죽곡리 강정마을에서 맥을 다하는 41.1km의 산줄기다.

 

 

 

온통 눈으로 뒤덮인 사면(斜面)길을 치고 오르면 길은 왼편으로 크게 휘면서 성문(城門)을 통과하게 된다. 바로 **가산산성(架山山城)의 서문(西門)인데, 성문으로 보이지 않고 암문(暗門)처럼 느껴지는 것은, 성루(城樓)도 없을뿐더러 그 규모까지 왜소(矮小)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곳에서 북문 방향으로 진행하면 황학지맥이 분기하는 851.1봉에 닿게 된다. 가산 정상으로 가려면 이정표가 동문을 가리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서문 이정표 : 가산바위 0.6Km/ 북문 0.7Km/ 모래재 2.7Km)

**) 가산산성(架山山城 : 사적 제216호), 조선 후기의 석축(石築)산성으로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 잇따른 외침에 대비하기 위해 가산이라는 천혜의 요새 위에 쌓은 국내 유일의 삼중성(三重城 : 내성, 외성, 중성)이다. 인조 18년(1640년) 경상북도 관찰사 이명웅이 내성을 쌓고, 내성이 완성된 지 60년 후인 숙종 26년(1700년) 당시 관찰사 이세재가 외성을 쌓고, 내성과 외성 사이 중성은 영조 17년(1741년) 관찰사 정익하가 쌓아서 완성하였는데, 그 길이는 약 11.041㎞에 이른다. 산의 정상에 내성, 중턱에 중성, 하단에 외성을 쌓은 3중의 포곡식 석성(石城)으로써, 이웃한 금오산성(金烏山城), 천생산성(天生山城)과 함께 의각(椅角)의 형세를 이루어 군사상 매우 중요한 산성으로 인식되었다.

 

 

 

 

서문에서 낙엽송(落葉松 : 일본이깔나무) 숲을 통과하면 이내 가산산성(山城)의 성벽이 마중 나온다. 무너진 성벽(城壁)을 밟으며 걷다보면 ‘장군정 200m, 학명리 3.8km’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를 만나게 되고 이어서 진행방향 저만큼에 거대한 바위무더기가 보인다. 바로 가산바위이다.

 

 

 

 

**가산바위는 사방이 바위 절벽(絶壁)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철계단을 이용해야만 위로 올라설 수가 있다. 바위 위로 오르면 그 넓이에 놀라 입부터 벌어진다. 80평 정도의 넓이라는데 생각보다 훨씬 더 넓은 것 같다. 이렇게 넓은 반석(盤石)이 산꼭대기에 있다니! 한마디로 자연이 만들어 놓은 아름다운 걸작(傑作)이다. 바위 위는 전망(展望)이 너무 좋다. 칠곡에서 가산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잘 보이고, 그 뒤에는 백운산과 황학산, 유학산 등이 버티고 있다. 또한 동편에는 주산인 팔공산이 거대한 몸집을 보여 준다.

**) 가산바위는 전설(傳說)의 바위이다. 일명 가암(架巖)이라고도 하는데 네면(四面)이 깎아지른 듯이 우뚝 솟아 있는 바위이다. 바위의 위는 80평이 넘는 넓은 평지(平地)로 이루어져 있다. 사방이 트여 있기 때문에 바위 위에 서면 대구광역시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참고로 가산바위에는 도참사상(圖讖思想)에 얽힌 전설 한도막이 전해져 내려온다. 통일신라시대의 고승 도선(道詵)이 지기(地氣)를 다스리려고 바위 위 구멍 안에 쇠로 만든 소와 말의 형상을 묻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구멍은 조선시대 관찰사였던 이명웅(李命雄)이 성을 쌓으면서 없애버렸다고 한다.

 

 

 

 

 

가산바위를 내려와 이번에는 중문(中門)으로 향한다. 가산바위에서 남포루 갈림길(이정표 : 중문 0.1Km/ 남포루 1.0Km/ 가산바위 0.5Km)을 지나면 중문은 금방이다. 성벽위로 난 길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 코스인 듯 바닥이 윤이 날 정도로 반질거린다. 윤이 난다는 것은 그만큼 미끄럽다는 얘기이다. ‘만사는 불여튼튼’이라는 속담(俗談)이 있다. 무슨 일이든지 착실하고 튼튼하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속담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난 눈길에서 미끄러졌고, 팔꿈치에 제법 심한 부상을 당했다. 준비해간 아이젠(Eisen)을 착용하지 않은 방심이 자칫 사고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중문(이정표 : 동문 0.9Km/ 남포루 1.1Km, 여릿재 2.6Km/ 가산바위 0.5Km)에서는 동문(東門) 방향으로 걷다가, 처음 만나는 삼거리(이정표 : 용바위 0.4Km, 유선대 0.5Km/ 동문 0.8Km/ 가산바위 1.1Km)에서 유선대, 용바위 방향으로 진행해야 한다. 용바위와 유선대에서의 뛰어난 조망(眺望)을 포기할 이유가 없을 뿐만 아니라 용바위로 가는 산길의 옆에 가산의 정상이 있기 때문이다.

 

 

 

 

 

용바위와 유선대 방향으로 진행하면 봉우리 위에서 삼거리(이정표 : 용바위 0.1Km, 유선대 0.2Km/ 동문 0.7Km/ 가산바위 1.7Km)를 만나게 되고, 이곳에서 용바위와 유선대로 가는 길은 왼편으로 내려서게 된다. 100m쯤 내려가면 오른편으로 길이 나뉘면서 오른편 나무사이로 바위하나가 내다보인다. 바로 용바위이다. 철계단을 이용해서 용바위 위로 올라서면 잘 만들어진 전망대(展望臺)가 나타난다. 전면에 산군(山群)들이 첩첩이 쌓였는데, 쌓인 산들의 마지막 보루(堡壘)처럼 가장 멀리, 가장 높게 비로봉이 거대한 장벽인 양 버티고 있다.

 

 

 

용바위 갈림길에서 50m정도 더 내려가면 유선대가 나온다. 용바위 전망대보다 한층 더 팔공산 주능선이 잘 보이는 곳이다. 전면에는 팔공산 주능선이 하늘을 가르고 있고, 유선대 아래로 보이는 암릉도 보기가 좋다.

 

 

 

 

아까 지나왔던 봉우리 삼거리에서 왼편으로 발길을 돌리면, 몇 걸음 안 걸어서 가산 정상이다. 두세 평을 넘기지 않을 정도로 좁다란 가산 정상은 정상표지목과 삼각점이 지키고 있다. 정상은 볼품없이 초라한데, 거기다가 사방이 잡목(雜木)으로 에워싸여 조망(眺望)까지도 시원치 않은 편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3시간이 조금 더 지났다.

 

 

 

하산은 정상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돌로 만들어진 이정표가 가리키는 한티재 방향으로 향한다. 한티재로 향하는 능선은, 능선 위로 성벽이 구축(構築)되어있는데, 구태여 성벽을 쌓지 않아도 사람이 오르지 못할 정도로 왼편(동쪽) 사면(斜面)은 날카로운 벼랑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인 것이다.

 

 

 

정상에서 치키봉으로 가려면 중간에 만나게 되는 이정표가 한티재를 가리키는 방향으로 진행해야 한다. 치키봉이 한티재로 가는 구간의 중간쯤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치키봉으로 향하는 등산로는 성벽(城壁) 위로 잘 나 있기 때문에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아까 지나왔던 서문에서 이곳을 거쳐 한티재까지의 구간은 **팔공지맥(八公枝脈)의 일부 구간이다.

**) 팔공지맥(八公枝脈), 낙동정맥에서 분기(分岐)한 보현지맥(普賢枝脈)의 노귀재 남서쪽 0.86km에 위치한 750.6봉(석심산)에서 다시 분기(分岐)해 방가산, 팔공산, 가산, 응봉산, 청화산을 지나 위천과 낙동강의 합수(合水)지점인 상주시 중동면 새띠마을에서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약 120.7km에 달하는 산줄기이다. 황학지맥과 더불어 대구시민의 젖줄이라 할 수 있는 금호강의 북쪽 울타리를 이루고 있다.

 

 

 

성벽(城壁) 위로 난 산길을 따라 40분 정도 걸어 내려오면 갑자기 길가에 바위들의 숫자가 늘어난다. 그런데 그 바위들의 생김새가 하나같이 범상치가 않다. 기괴(奇怪)하게 생긴 바위 무리들을 지나서 조금만 더 진행하면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할아버지 할머니바위’이다.

 

 

 

‘할아버지 할머니바위’를 치키봉 쪽에서 바라보면 영락없는 할아버지 얼굴 모습이다. 할아버지바위 바로 옆에는 할머니바위가 서 있는데, 할아버지바위보다 크기도 작을뿐더러, 할머니의 형상도 유추해내기가 쉽지 않다. 사람들이 그냥 짝을 맞추려다보니 할머니를 슬그머니 끼워 넣은 것이 아닐까 싶다.

 

 

 

 

‘할아버지 할머니바위’에서 50m쯤 더 내려오면 오른편 나무들 사이로 널찍한 바위 하나가 빼꼼히 내다보인다. 혹시나 하고 들어서보니 아니나 다를까 전면(前面)이 시원스럽게 트인 빼어난 전망대(展望臺)이다. 30m 정도의 절벽(絶壁)을 이룬 너럭바위에서는 서쪽으로 남릉이 마주보이고, 남쪽으로는 해원정사가 있는 진남문 방향 계곡이 잘 조망(眺望)된다.

 

 

 

너럭바위에서 3~4분을 더 걸으면 억새가 무성한 헬기장이 나오고, 이어지는 흙길 능선을 따라 걷다보면 10분 후에는 치키봉에 올라서게 된다. 치키봉(이정표 : 진남문 2.7Km/ 한티재 3.2Km/ 동문 1.9Km)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맞은편 능선을 따르면 한티재로 가게 되므로, 진남문으로 하산하려면 이곳에서 오른편에 보이는 능선길을 따라 내려서야만 한다.

 

 

 

치키봉에서 오른편으로 내려서는 하산길도 역시 성벽(城壁)을 따라 이어진다. 치키봉에서 가파른 내리막길을 10분 정도 내려서면, 능선 안부(이정표 : 휴게정자 0.9Km/ 치키봉 0.3Km)에서 산길은 오른편 계곡을 향해 급하게 휘면서 능선을 벗어난다. 이곳에서부터 길은 고와진다. 경사(傾斜)도 완만(緩慢)할뿐더러 길의 폭도 일행끼리 얘기를 주고받으며 걸어도 충분할 정도로 제법 널따랗다.

 

 

 

 

잘 닦인 계곡(물기 없는) 길을 따라 10분 조금 넘게 내려오면 초가지붕 정자(亭子)와 샘터가 있는 삼거리에 닿는다. 정자에서 오른쪽으로 보이는 오르막길은 동문으로 가는 길이다. 이곳 삼거리에서 진남문까지의 1.5Km 정도 되는 길은 시멘트로 포장된 도로로 연결된다. 구불구불 똬리를 틀며 서서히 고도(高度)를 낮추는 도로를 따라 걷다보면 저만큼에 ‘탐방 안내센터’가 보이고, 그 옆에는 해원정사라는 사찰이 근처에 있음을 알려주는 커다란 비석이 하나 세워져 있다.

 

 

 

 

해원정사(解圓精舍), 1965년 곽용득이 창건한 용성사가 이후 1981년에 해원정사로 변경되었다고 한다. 칠곡군에는 1983년 12월에 창건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칠곡군지 참조> 가산산성의 외성(外城) 안에 있는 조계종 사찰(寺刹)로 현재 법당(法堂) 2동, 요사(寮舍) 1동, 산신각(山神閣) 1동 등 총 4개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꿈속에 보살님이 나타나 비석이 있는 곳에 절을 세우라고 하여 이곳에 절을 건립하였다고 전한다.

 

 

 

산행날머리는 가산산성(山城)의 진남문(鎭南門)앞 주차장

해원정사를 둘러보고 다시 도로로 되돌아 나올 필요는 없다. 사찰(寺刹) 옆으로 흐르는 개울을 따라 길이 나 있기 때문이다. 개울 가 길을 따라 진남문을 통과하면 곧이어 주차장이 나오고, 오늘 산행은 이곳에서 끝을 맺는다.

 

 

 

문복산(文福山, 1.013m)

 

산행일 : ‘12. 12. 8(토)

소재지 : 경북 청도군 운문면, 경주시 산내면과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의 경계

산행코스 : 운문령894.8봉 964봉(학대산)→전망바위→문복산 정상→전망바위→가슬갑사터→삼계리 개살피계곡 하류(산행시간 : 4시간)

함께한 산악회 : 월산악회

 

특징 : 경북 청도군과 경주시 산내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서, 이웃한 가지산과 운문산에 비해 산꾼들의 발길이 적은 편이다. 그러나 영남알프스 주봉(主峰)의 하나로서, 1천 미터가 넘는 당당한 산세(山勢)를 자랑한다. 표고 640m의 운문령에서 출발할 경우 크게 힘들지 않게 문복산에 오를 수 있고, 개살피계곡으로 내려서면 물소리가 시원스러운 물놀이까지 함께 즐길 수 있다.

 

 

산행들머리는 운문령

경부고속도로 서울산 I.C에서 내려와 35번 국도(國道/ 경주방향)로 달리다가 언양교차로(交叉路/ 언양읍 동부리)에서 24번 국도로 옮겨 밀양방향으로 진행하다보면 덕현교차로(울주군 상북면 덕현리)에 닿게 된다. 교차로에서 내려와 이번에는 69번 지방도를 따라 운문방향으로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산행이 시작되는 운문령 고갯마루에 올라서게 된다.

 

 

 

운문령 고갯마루 북쪽방향에 보이는 포장마차의 오른편으로 올라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운문령(해발 640m)은 청도군 운문면과 울주군 상북면의 경계를 가르는 고갯마루로서 산꾼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근처에 위치한 산들로 가는 길목인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곳의 해발(海拔)이 높아서 고도(高度) 차이에서 오는 부담을 최소화할 수 있은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북쪽 능선을 타면 오늘 오르려고 하는 문복산이 나오고, 남쪽 능선으로 올라서면 귀바위, 상운산을 거쳐 가지산으로 가거나 쌍두봉으로 가는 길이 된다. 물론 고헌산이 놓여 있는 낙동정맥의 마룻금을 갈 경우에도 이곳에서 북쪽능선을 들머리로 삼는 것이 보통이다.

 

 

 

운문령을 출발해서 채 5분이 되지 않아 능선 위에 올라서게 된다. 굵은 소나무가 간간히 섞여있을 뿐 신갈나무가 대부분인 능선은 한마디로 순하다. 능선은 고저(高低)의 차이가 거의 없을 정도로 완만(緩慢)하고, 거기다 흙길, 비록 길 위에 눈이 쌓여있긴 하지만 그 양(量)이 많지 않기 때문에 걷기에는 조금도 부담이 없다. 나뭇잎이 다 져버린 빈 가지 사이로 언듯언듯 조망(眺望)이 열리는데, 상운산에서 이어지는 산줄기 우측으로 쌍두봉이 머리를 내밀고 있고, 그 우측 멀리 운문산 앞에는 지룡산이 다소곳이 앉아있다.

 

 

 

 

편안한 오솔길을 10분 정도 걸으면 등산로 왼편에 예쁘장하게 생긴 소나무 한그루가 보인다. 낙동정맥 마룻금을 이어가는 산꾼들에게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명품소나무(名品松)이다. 산행에 지친 산꾼들이 잠깐 쉬었다 가라는 듯 통나무로 의자까지 만들어 놓았다.

 

 

 

명품소나무를 지나 조금만 더 걸으면, 능선이 푹 꺼지면서 건너편에 895봉이 마주 보인다. 그리고 그 왼편에 보이는 학대산(964봉)과 문복산의 밋밋한 능선은 말의 등허리를 닮았다. 전형적인 흙산(肉山)으로 고저(高低)가 거의 없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안부로 잠깐 떨어졌던 능선은 다시 가파른 오르막길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그 경사(傾斜)가 벅찰 정도로 가파르지는 않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정상을 향해 오르던 산길이 이번에는 산의 사면(斜面)을 따라 옆으로 휘면서 서서히 오름길을 만들어내고 있다. 낙동정맥 갈림길인 895의 정상을 피해서 우회(迂廻)하는 길이다. 그러나 이 우회로는 겨울철에는 피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사면(斜面)이 많이 가팔라서 산길의 폭(幅) 또한 좁을 수밖에 때문이다.

 

 

 

산행을 시작해서 40분 정도가 지나면 895봉 옆의 능선에 올라서게 된다. 이곳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조금만 더 걸으면 낙동정맥 갈림길(표지석이 세워져 있다)이 나오고, 문복산은 왼편으로 진행해야 한다. 가지산에서 상운산, 운문령을 거쳐 895봉까지 온 낙동정맥의 마룻금은 이곳에서 오른편 능선을 따라 고헌산(1032.8m), 백운산(892m)으로 이어진다.

 

 

 

895봉에서부터 또 다시 산길은 완만(緩慢)해진다. 비록 능선을 오르내리는 일이 몇 번 반복되지만, 그 오르내림의 골이 깊지 않기 때문에, 산행을 하는 데는 조금도 부담이 없는 편안한 산행이 이어진다. 895봉에서 25분 남짓 걸으면 바위로 이루어진 조그만 봉우리 위로 올라서게 되는데, 학대산이라고도 불리는 964봉이다.

 

 

 

 

학대산에서 조금만 더 진행하면 멋진 전망대를 만나게 된다. 영남알프스의 능선답게 사방이 산군(山郡)들로 둘러싸여 있다. 오른편에는 백운산에서 이어진 고헌산 줄기, 그리고 그 왼편에 늘어선 산군들 아래에는 대현리 마을이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왼편으로 눈을 돌리면 가지산과 쌍두봉 등이 눈에 들어오는데, 진행방향 저멀리에서는 문복산이 어서 오라고 손짓하고 있다.

 

 

 

 

 

학대산에서부터는 암릉구간이 꽤 길게 이어진다. 흙으로 이루어진 능선의 한 가운데에 심어진 듯 늘어선 바위들은 얼핏 닭벼슬을 연상시키게 한다. 바위들이 조금 더 크고, 기형적(畸形的)으로 생겼더라면 공룡능선이라는 표현이 어울리겠지만, 그렇지를 못하니 닭벼슬로 격하(格下)시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능선의 바위들은 위험을 느낄 정도로 거대하지도 않지만 일일이 우회(迂廻)를 시키고 있다. 아마 암릉 위로 길을 내기가 어려웠던지, 아니면 바위 위로 올라봐야 아무런 볼거리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제법 긴 바위능선이 끝나면 산길은 다시 반반한 흙길로 돌아온다. 능선을 걸으며 작은 오르내림을 몇 번 겪고 나면, 오른편으로 조망(眺望)이 시원스럽게 트이는 전망(展望)바위가 나타난다. 바위에 올라서면 발아래에 멋진 바위봉우리가 하나 내려다보인다. 문복산의 명물(名物) 중 하나인 드린바위이다. 학대산에서 여기까지 50분 정도 소요되는 능선을 진행하다 보면 내려가는 길을 여러 번 만나게 되지만 개의치 말고 능선을 따라 진행하면 된다. 다만 삼계리로 뻗어나간 능선의 분기점인 964봉에서 헷갈릴 염려가 있으나, 오른쪽의 능선을 타고 간다고 생각하면 될 일이다.

 

 

 

드린바위는 문복산 동쪽 중턱에 있는 폭 100미터, 높이 130미터의 독립된 바위봉우리이다. 인근의 클라이머(climber)들로부터 암벽훈련장으로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데, 75년에 이미 루트(route)가 개척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한동안 방치되던 것을 고헌산악회가 다시 손을 대 98년 5월에 요즘 등반 추세에 맞는 루트로 재탄생 시켰다고 한다. 참고로 드린바위는 중급이상의 실력을 필요로 하는데, 난이도 5.9∼5.11d급 5개 루트가 있으며 오버행(overhang)과 훼이스(face), 크랙(crack)과 레이백(lay back) 등 골고루 혼합되어있다. 특히 해외 거벽등반(Bugaboo Spore,East Ridge)을 대비한 훈련장소로 많이 이용된다고 한다.

 

 

 

전망바위에서 조금(3분 정도) 더 오르면 돌무더기 갈림길이다. 산꾼들이 오가는 길에 하나씩 올려놓은 모양인지, 생김새나 규모가 허접하기 짝이 없다. 돌무더기 옆에는 역시 허접한 이정표((↑문복산, ←삼계리, ↓운문령)가 세워져 있다. 왼편 삼계리 방향으로 조금만 더 나아가면 너럭바위 전망대(展望臺)가 있지만, 눈앞에 보이는 상고대에 홀려 그냥 지나치고 만다. 너럭바위 전망대에서는 백운산, 고헌산으로 이어지는 낙동정맥 능선과, 가지산과 운문산 그리고 억산 등이 잘 조망(眺望)된다고 한다.

 

 

 

 

돌무더기 갈림길과 맞물려있는 헬기장을 지나 정상까지는 소요시간이 5분이 채 안 되는 짧은 거리이다. 헬기장에서는 좌우(左右)로 시야(視野)가 열리지만 지금까지 오면서 즐겼던 조망보다 나을 것은 없다. 정상에 가까워지면서 능선은 온통 하얀 세상으로 뒤바뀌어 있다. 나뭇가지에 하얗게 서리가 내려있는 것이다. 상고대(rime)이다. ‘겨울 산’이라고 해도 흔하게 볼 수 없다는 특별한 만남이 이루어졌으니, 오늘 산행은 이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할 것이다.

* 상고대(rime)란 물방울들이 영하(零下)의 온도에서 나무 등의 물체와 만날 때 만들어지는 서리를 말한다. 밤새 내린 서리가 나뭇가지 등에 하얗게 얼어붙어 마치 눈꽃처럼 피어있는 것을 말한다. 다른 말로는 나무서리, 한자어로 수상(樹霜)이라고도 한다.

 

 

 

열 평 남짓한 분지(盆地)로 이루어진 문복산 정상은 크고 작은 정상표지석 2개만이 외롭게 지키고 있다. 오른편(남동쪽)에 보이는 곳은 경주시 산내면, 이름만 들어도 귀에 익숙한 저곳에는 ‘산내 불고기단지’가 있다. 전에 근무하던 공기업(公企業)의 공사현장이 경주시에 있었기 때문에, 경주에 내려올 때마다 식사 겸해서 들렀던 곳이다. 입이 짧은 나는 남들이 그렇게도 좋아한다는 회가 별로였기 때문에 이를 아는 현장의 간부들이 이곳으로 안내를 한 탓이다. 그 뒤에는 고헌산을 기준으로 우측으로 낙동정맥 갈림길인 894봉이, 좌측으로 소호령, 백운산, 단석산 등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 보인다. 정상은 이곳으로 오던 능선과는 달리 무지막지하게 추웠다. 카메라의 배터리(battery)가 추위에 버티지 못하고 방전(放電)이 되어버릴 정도이다. 오래 버티지 못하고 하산을 서두른다. 정상까지는 2시간이 조금 넘게 걸렸다. 눈길을 아이젠을 착용하지 않고 걷다보니 진행속도가 자연스레 늦어진 것이다.

 

 

 

정상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오른편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길은 서담골봉을 거쳐 옹강산으로 가는 능선이고, 개살피계곡을 거쳐 하산을 하려면 왼편으로 내려서야 한다. 내려가는 길의 초입에 소나무 한 그루가 서있고, 조금 더 진행하면 장의자(長椅子)를 쏙 빼닮은 멋진 소나무가 보이니 참고하면 된다. 멋진 소나무까지는 완만(緩慢)한 내리막길이 이어지지만 수북하게 쌓인 눈으로 인해, 더 이상은 버티지 못하고 스패츠(spats)와 아이젠(Eisen)을 착용하고 만다. 엉덩방아를 찧기 시작하는 집사람을 그냥 놓아둘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다.

 

 

 

 

 

잡목(雜木)으로 인해 진행하기가 번거로웠던 산길은 멋진 소나무를 지나면서 조금은 나아진다. 그러다가 또 하나의 빼어난 전망바위 위에다 올려놓는다. 전망바위에서는 가지산에서 운문산을 거쳐 억산으로 이어지는 영남알프스 주능선을 거의 완벽하게 조망할 수 있다. 정상에서 하산을 시작한지 20분 정도 지났다.

 

 

 

전망바위를 지나면 계곡으로 떨어지는 급경사(急傾斜) 내리막길이 기다린다. 거기다가 바닥이 돌로 이루어져 있어 내려서기가 여간 사납지 않다. 이런 까다로운 길은 가슬갑사유적지(遺蹟地)까지 계속된다. 전망바위에서 10분 정도 내려서면 개살피계곡의 상류에 이르게 된다. 개살피란 말은 가슬갑사 옆의 계곡이라는 경상도의 방언(方言)에서 유래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설이 다수설(多數說)이다. 산길과 조우(遭遇)를 시작하는 계곡은 상류인지라 흘러내리는 물의 양은 비록 적다. 그러나 물줄기가 만들어 내고 있는 빙벽(氷壁)과 고드름은 자못 심상치 않다. 계곡을 만나면서 산길은 계곡을 왼편에 끼고 걷는 길이 된다.

 

 

 

 

전망바위에서 20분 남짓 내려서면 왼편에 갈림길이 하나 보인다. 아까 정상으로 오를 때 만났던 돌무더기 갈림길에서 왼편 삼계리로 내려섰을 경우 이곳에서 만나게 되는 모양이다. 이어서 10분 조금 못되게 걸으면 산죽(山竹) 숲이 푸름을 자랑하고 있고, 그 아래에 빗돌(碑石) 하나가 세워져 있다. 신라시대에 원광법사가 화랑들에게 세속오계를 전했다는 가슬갑사(嘉瑟岬寺)의 유적지(遺跡地)이다. 가슬갑사터는 한 마디로 황량하다. 작은 비석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이다. 이곳이 삼국통일의 초석(礎石)이 된 화랑들의 기본 이념이 발원한 곳임에 비추어볼 때, 역사적 유적지를 방치하고 있는 행정당국의 무관심을 나무라고 싶다. 참고로 세속오계(世俗五戒)에 대한 기록은 여러 문헌(文獻)에서 발견되지만 특히 가슬갑사에서 원광법사가 추항과 귀산이라고 하는 두 명에게 계율(戒律)을 일러 주었다는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정확하게 전해진다.

* 가슬갑사(嘉瑟岬寺), '삼국사기'에는 가실사(加悉寺) 또는 가서사(加西寺)로도 나온다. 6세기 중반인 560년(신라 진흥왕 21년) 한 신승이 대작갑사(지금의 운문사)를 세우고 주변에 대비갑사 천문갑사 소보갑사 가슬갑사 등 4개의 갑사를 더 세웠는데 이를 신라 5갑사(또는 5대 갑사)라 불렀다고 전해온다. 그중 가슬갑사는 서기 600년 중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당대 최고의 승려 원광(圓光)법사가 머무르며 수도했을 만큼 당시로써는 상당한 기풍을 지닌 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후삼국의 혼란기에 무너져 고려 초 보양(寶壤)이 중창을 하였는데, 937년 태조가 운문선사(雲門禪寺)라는 사액(賜額)을 내렸다. 그 뒤의 역사는 전해지지 않고, 언제 폐사되었는지도 알 수 없으며, 현재는 절터만 남아있다.

 

 

 

 

가슬갑사 유적지 조금 못 미쳐서부터 고와지던 산길은 유적지(遺跡地)를 지나면서는 아예 두어 명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걸어도 충분할 만큼 널따랗게 변한다. 산길의 왼편 아래에는 산길과 나란히 보조를 맞추며 흐르고 있는 개살피계곡이 내려다보인다. 길을 걷다보면 간혹 계곡으로 내려갈 수 있는 오솔길이 보이지만, 산악회에서 깔아놓은 안내지(案內紙)는 본래의 산길을 끝까지 고집하고 있다. 뛰어난 풍광(風光)을 자랑하는 폭포(瀑布)와 소(沼), 그리고 담(潭)일지라도, 겨울산행에서는 그다지 흥미를 끌지 못하는가 보다. 나 혼자만이라도 계곡의 풍경(風景)을 카메라에 담아보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카메라의 배터리는 방전(放電)된 지 이미 오래이다. 아쉽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다.

 

 

 

산행날머리는 삼계리 앞의 69번 지방도로

가슬갑사터에서 삼계리를 향해 내려올수록 산길과 나란히 달리던 계류(溪流)는 멀어진다. 가슬갑사터에서부터 시작되는 경사(傾斜)가 거의 없는 흙길을 30분 가까이 걸으면 산행이 종료되는 삼계리이다. 삼계리는 팬션과 민박집, 그리고 음식점 등 유원지 비슷한 풍경(風景)을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계살피계곡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모양이다. 마을 경노당(敬老堂)을 지나 지방도로 내려가다 보면 오른편에 세속오계 정신을 기린 상징물(象徵物)이 보인다. 화랑도 2명이 세속오계가 새겨진 돌을 떠받치는 듯한 모습이다. 상징물을 지나 도로에 서면 남동쪽에 기묘(奇妙)하게 생긴 암봉 하나가 보인다. 바로 산꾼들이 쌍두봉이라고 부르는 바위봉우리로서 아래에서 볼 때에는 하나의 봉우리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상단부가 두 개로 나뉘어 있다.

* 먼 옛날 이 산 깊은 계곡에 신령스런 기운이 감도는 깊은 소(沼)가 있었는데, 거대한 구렁이 두 마리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 구렁이들이 승천을 하는데, 두 번째로 승천(昇天)하던 구렁이가 인근에 살던 사냥꾼형제가 놀라 외치는 소리로 인해 하늘에 닿지 못하고 지상으로 떨어지면서 꼬리로 암봉의 정상부를 내리쳤던 모양이다. 이로 인해 암봉이 두 개로 나뉘었는데, 후세(後世) 사람들이 두 봉우리를 일컬어 형제봉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도덕산(道德山, 703m)-자옥산(紫玉山, 597m)

 

산행일 : ‘12. 11. 18(일)

소재지 : 경북 경주시 안강읍과 영천시 고경면의 경계

산행코스 : 오룡재→봉좌산(천장산) 갈림길→도덕산→자옥산→성산저수지→성산서당(산행시간 : 3시간50분)

함께한 산악회 : 뫼솔산악회

 

특징 : 도덕산이나 자옥산은 다른 산들에 비해 어느 것 하나 자랑할 만한 산세(山勢)를 지니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나 특별히 위험한 코스도 없을뿐더러 산의 주변에 정혜사지 13층석탑(국보 40호), 회재(晦齋)이언적(李彦迪 1491~1553)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세우고 기거하신 독락당(獨樂堂 보물 413호), 그리고 회재를 제향하기 위해 세운 옥산서원(玉山書原 사적154호), 서원에서 보관하고 있는 정덕계유사마방목(보물524호), 삼국사기(보물 525호), 해동명적(보물 526호) 등 수많은 역사적 사료들이 즐비하기 때문에 ‘가족 산행지’로 적합하다. 이 지역 산꾼들에게는 ‘자도천삼(紫道天三)이라 불리는 종주산행코스로 애용되고 있으나, 다른 지역 산꾼들은 낙동정맥을 답사하는 길에 잠깐 짬을 내어 도덕산에 들르는 정도이다.

* 자도천삼(紫道天三)이란 자옥산(570m), 도덕산(708m), 천장산(天掌山, 696m), 삼성산(589m)을 연결하는 산행코스로서 포항, 경주지역에서는 비교적 난이도(難易度)가 있는 코스로 꼽힌다. 산과 산을 연결하는 능선의 고도차(高度差)가 클뿐더러 경사(傾斜)까지 가팔라서 오르고 내리기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산행들머리는 경주시와 영천시를 가르는 고갯마루인 오룡재

건천 I.C에서 내려오자마자 만나게 되는 20번 국도(國道 : 포항방향)를 따라 달리다가 북경주 I.C에서 이번에는 7번 국도(포항방향)로 옮겨 강동면소재지까지 들어간다. 강동 I.C에서 이번에는 28번 국도를 이용하여 안강읍을 통과한 후, 영천시 방면으로 달리다가 하곡리(영천시 안강읍)에서 오른편의 군도(郡道 : 성산서당길)로 접어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산행들머리인 오룡재에 이르게 된다.

 

 

 

오룡고개에서 오른편 임도(林道)로 접어들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산행들머리인 오룡고개는 영천시 고경면 삼포리와 경주시 안강읍 오룡리를 경계 짓는 고갯마루로서 '미룡고개'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동네의 경계(境界)라는 의미보다는 낙동정맥의 마루금으로 더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편이다. 그만큼 이곳 오룡리가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산간벽지(山間僻地)라는 의미일 것이다.

* 낙동정맥(洛東正脈) 강원도 태백시의 구봉산(九峰山)에서 부산 다대포의 몰운대(沒雲臺)에 이르는 산줄기의 옛 이름으로 그 길이가 약 370㎞에 이른다. 경상북도와 경상남도의 동해안과 낙동강유역의 내륙을 가르는 분수령산맥이며, 주요 산으로는 백병산(白屛山, 1,259m), 주왕산(周王山, 907m), 단석산(斷石山, 829m), 가지산(加智山, 1,240m), 취서산(鷲棲山, 1,059m), 금정산(金井山, 802m) 등이 있다.

 

 

오룡마을 전경, 왼편에 보이는 것은 자옥산, 오른편이 삼성산이다.

 

 

진행방향에 보이는 도덕산, 보기만 해도 경사(傾斜)가 보통이 아니다. 너덜지대를 지나 송전탑(送電塔)으로 곧장 치고 오르기 때문에 더욱 경사가 가파를 수밖에 없다. 짧은 거리에서 갑자기 고도(高度)를 높이려면 별 수 없었을 것이다.

 

 

경사(傾斜)가 거의 없는 임도를 따라 걷다보면 오른편에 오룡마을이 오롯이 앉아있는 것이 보이는데, 그 뒤를 삼성산이 든든하게 지키고 있다. 전형적인 산골마을의 옛 풍경(風景)을 간직하고 있는 오룡마을이 왠지 살갑게 다가오는 것은, 문득 내가 태어나고 어린 시절은 보냈던 고향마을을 떠올렸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별로 길지 않은 임도를 벗어나 산길에 접어든 후에도 완만(緩慢)한 경사(傾斜)는 변하지 않는다. 다만 낙동정맥을 답사(踏査)하는 사람들 외에는 다니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 듯, 잡목(雜木)과 칡넝쿨로 가득 찬 산길은 그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다.

 

 

 

 

 

 

오르내림이 없이 이어지던 산길은 30분이 조금 못되어 끝을 맺고, 서서히 가팔라지기 시작하더니 너덜지대를 만나면서 끝내 ‘벌떡 일어서’ 버리고 만다. 그만큼 오르막길의 가파름이 가히 살인적이라는 말이다. 언젠가 ‘코에서 땅 냄새가 난다’는 표현을 쓴 일이 있다. 이는 허리를 펼 수가 없을 정도로 경사(傾斜)가 가파를 때 쓰는 표현이다. 땅 냄새가 코에 솔솔 들어올 정도로 땅바닥에 코를 가까이 대고 산에 오르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 표현이 딱 어울릴 정도로 도덕산 오름길은 가파르기 짝이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길이 길지는 않다는 것이다. 가파른 오르막길에서 땅에다 코를 박고 30분 정도를 오르면 능선의 안부에 올라서게 된다. 안부에서 길은 두 갈래(이정표 : 도덕산 0.5Km/ 봉좌산 4.5Km)로 나뉜다. 도덕산은 오른쪽 방향의 능선을 타면 되고, 낙동정맥의 마루금을 밟으려면 왼편으로 진행해야 한다. 낙동정맥 마루금은 조금 후 천장산 능선을 분가(分家)시킨 뒤에,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봉좌산과 운주산 등을 만들면서 남쪽으로 이어진다.

 

너덜에서 바라본 삼성산

 

 

 

 

이정표에는 도덕산과 봉좌산만 표시가 되어 있을 뿐, 방금 올라온 오룡재는 표기(標記)가 되어 있지 않다. 그만큼 다니는 사람들의 숫자가 많지 않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기야 낙동정맥을 답사(踏査)하는 산꾼들이 아니라면 어느 누가 저런 험한 코스를 일부러 오르내리겠는가.

 

 

‘봉좌산 갈림길’에서 도덕산 정상까지는 금방이다. 갈림길 조금 위에 너럭바위가 보이는데 ‘자연쉼터’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다. 너럭바위는 그 넓이가 어마어마하여 70~80명이 앉아 놀아도 충분할 정도로 널따랗다. 정상으로 이어지는 오름길은 경사(傾斜)가 완만(緩慢)하기 때문에 별 부담 없이 오를 수 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여유까지 부리며 10분 조금 못되게 걸으면 드디어 도덕산 정상이다.

 

자연쉼터

 

 

 

 

도덕산 정상은 돌출된 바위봉우리이다. 정상엔 정상표지석이 세 개가 세워져 있는데, 정상의 높이를 두 가지로 표기(標記)하고 있다. 아마 정상석을 세운 단체(團體)들의 고집이 그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눈여겨보면 그 중 제일 큰 정상석의 뒷면에 도덕산의 유래(由來)가 적혀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라 선덕왕(780년) 때 당나라의 첨의사인 백우경이 참소(讒訴)되어 자옥산에 숨어 살면서 지금의 정혜사지에 영월당과 만세암을 세웠다. 선덕왕이 이곳을 방문한 뒤로 이 산을 두득산(斗德山)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후 회재가 1533년에 옥산리에 오면서 이 산을 도덕산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도덕산에서 왼편으로 내려가면 도덕암을 거쳐 옥산리로 내려가게 되고, 자옥산으로 가려면 능선을 따라 곧바로 나아가면 된다.(도덕산 이정표 : 자옥산 1.9Km/ 도덕사 0.90Km/ 올라왔던 방향에는 표시가 없다)

 

 

 

정상석의 뒤, 동쪽엔 바위로 이루어진 너른 전망대(展望臺)가 있다. 오른편에는 안강읍의 벌판이 펼쳐지고, 왼편에 아련하게 보이는 것은 물론 포항시가지와 동해(東海)바다일 것이다. ‘와! 의외로 멋진 산이네요.’ 연신 환호에 가까운 탄성(歎聲)을 쏟아내고 있는 일행의 말마따나 눈앞에 펼쳐지는 조망(眺望)이 시원스럽기 그지없다. 도덕산을 한 가운데에 두고 천장산과 봉좌산, 그리고 어래산, 자옥산, 삼성산 등이 빙 둘러싸고 있는 형상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광경을 보고 연꽃을 닮았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또 전망대에 서면 발아래에 옥산마을이 조용히 웅크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옥산마을은 무오사화(戊午士禍)로 물러나 이곳에 자리 잡았던 회재 이언적선생과 인연(因緣)이 깊은 곳이다. 이곳에 머무르며 심신(心身)을 수양했다는 그를 연상시킨 탓인지 옥산마을이 유난히도 고요하게 느껴진다. 회재가 저곳에서 학문에 심취했었다면 당연히 주변의 정물(靜物)은 고요 그 자체가 아니었겠는가. 당연히 저곳에는 회재를 배향(配享)하는 옥산서원(玉山書院)이 자리하고 있다.

* 옥산서원(玉山書院), 조선 중종 때 유학자이자 정치가인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 1491∼1553)을 배향(配享)하는 서원(書院)으로서 대원군의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 때에도 훼철(毁撤)되지 않았던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회재는 27세 때 한참 선배인 50세의 망기당(忘機堂) 조한보(曺漢輔)와 태극논쟁(太極論爭)을 벌였다. 조선 유학사에 기록된 최초의 이기논쟁(理氣論爭)이다. 유학의 이론적 기틀을 만든 회재지만 두 차례의 사화를 겪으면서 역사의 격랑에 휘말렸다. 무오사화(1498년)가 일어나자 회재는 외가인 경주 양동리와 가까운 안강읍 옥산리로 귀향했다.

 

옥산저수지와 어래산

 

 

 

도덕산에서 자옥산으로 방향을 잡으면, 5분이 채 되지 않아 또 하나의 뛰어난 전망대(展望臺)를 만나게 된다. 전망바위에 올라서면 오른편 발아래에 성산저수지와 오배마을이 웅크리고 있고, 그 뒤를 삼성산이 위용(威容)을 자랑하며 든든하게 지키고 있다. 삼성산은 그냥 흔한 동네 뒷산이 아니라, 인근 주민들에게는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는 산인가 보다. 산 아래에 있는 저수지의 이름이 성산저수지이고, 또한 서원(書院)의 이름까지도 성산서원인 것을 보면 말이다.

 

 

 

자옥산

 

 

전망대에서 내려오면 길 찾기에 주의해야 한다. 왼편으로 뚜렷하게 나 있는 길은 도덕암으로 내려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자옥산으로 가는 길은 전망바위를 오른편에 끼고 돌아 다시 주능선에 이르면 뚜렷하게 나타난다. 주능선을 타고 내려가다 보면 가끔 뛰어난 전망바위가 나타나니 거르지 말고 올라가 볼 일이다. 의외로 조망(眺望)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이 능선에서는 왼편의 어룡산과 옥산마을 보다는 오른편의 삼성산과 오배마을이 더 잘 조망된다.

 

 

성산저수지와 삼성산

 

 

도덕산에서 40분이 조금 못되게 걸으면 안부사거리(이졍표 :정혜사지 13층석탑 1.65Km/ 자옥산 0.74Km/ 도덕산 1.6Km)에 이르게 된다. 내려서는 길은 가파른 편이지만 다행이도 길바닥은 순한 편이다. 미끄러지는 것만 조심하면 콧노래를 부르며 내려와도 넉넉할 정도이다. 안부에서는 좌우로 하산길이 보인다. 왼편은 정혜사지로 연결되고, 자옥산은 맞은편 능선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 오른편에 오배마을로 내려가는 길이 희미하게 보이지만 이정표에는 표기되어 있지 않다.

 

 

 

안부사거리에서 다시 가파른 오르막이 시작된다. 이 구간도 길은 순하지만 검은 흙길이 물기를 머금을 경우에는 제법 미끄러우니 조심할 일이다. 갈림길을 출발한지 15분 정도가 지나면 자옥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도덕산

 

 

너른 공터로 이루어진 자옥산 정상에는 옥산산수회가 쌓은 돌탑(石塔)과 정상표지석이 있다. 이렇다 할 지형지물이 없는 정상은 참나무들로 둘러싸여 주변의 조망(眺望)을 일절 허락하지 않는다. 이곳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왼쪽으로 내려가면 옥산서원이 나오고, 성산저수지로 내려가려면 능선을 따라 50m쯤 내려가다 오른편 비탈길로 내려서야 한다.(정상 바로 아래의 갈림길에 위치한 이정표 : 계정마을 1.74Km/ 하곡저수지 4.24Km/ 도덕산 1.90Km)

 

 

 

 

꼼꼼이 챙겨보지 못한 덕분에 우린 하곡저수지 방향으로 한참을 더 내려가고야 말았다. 하곡저수지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에는 전망 바위가 여러 곳 있다. 진행방향에는 안강읍 들녘과 포항 쪽 풍경(風景)이 아스라이 펼쳐지고, 오른편에는 성산 저수지와 용마루처럼 산릉(山稜)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는 삼성산이 잘 조망(眺望)된다. 조망을 즐기다보니 이상한 점이 눈에 띈다. 성산저수지로 내려가는 길에 만나야 할 송전탑(送電塔)이 오른편에 보이는 것이 아닌가. 성산저수지 갈림길을 한참이나 지나와 버렸던 것이다. 별수 없이 내려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 올라갈 수밖에 없다.

 

 

 

자옥산에서 성산저수지로 내려가려면 길 찾기에 주의해야 한다. 정상에서 하곡저수지 방향으로 50m쯤 내려가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뉘는데 하곡저수지로 내려가는 길이 너무 또렷하기 때문에 오른편 길을 무심코 지나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왼편 길과 나뉘는 지점의 오른편에 여러 개의 리본이 달려 있으니 꼼꼼히 챙겨보면서 내려선다면 그냥 지나칠 염려는 없을 것이다.

 

 

 

자옥산에서 성산저수지로 내려가는 길은 경사(傾斜)가 매우 가파르다. 거기다가 비탈길에 낙엽까지 수북하게 덮여있기 때문에 엄청나게 미끄럽기까지 하다. 만일 눈이나 비가 올 경우에는 더욱 미끄러워질 것은 불을 보듯이 뻔한 일이다. 거기다가 이용하는 산꾼들이 드물기 때문에 길의 흔적을 찾기가 여간 어렵지 않으니 주의가 필요한 구간이다. 송전탑(送電塔) 부근의 가시넝쿨에 몇 번을 찔리고, 올라오는 것보다 더 힘든 비탈길을 내려가면서 엉덩방아 몇 번 찧다보면 잘 가꾸어진 묘(墓) 몇 기(基)를 만나게 된다. 묘지에서 다시 한 번 비탈길과 씨름하다 보면 진행방향의 나뭇가지 사이로 반가운 얼굴이 보인다. 드디어 성산저수지가 물빛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저수지 둑을 걷다보면 오른편에 오늘 올랐던 도덕산과 자옥산이 우람하게 솟아있는 것이 보인다. 그 위용(偉容)을 조금이라도 더 자랑하고 싶은 모양인지, 저수지의 물 위로 두 산의 자태(姿態)가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둑을 지나서 반대편 도로에 올라선 후, 둑 아래 방향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오른편에 산길 하나가 보인다. 삼성산으로 가는 길이지만 일행끼리 의견을 주고받은 끝에 삼성산을 오르는 것을 포기하기로 결정한다. 산행을 시작한 시간이 1시간 정도가 늦어진 탓에 낙동정맥 종주대원들과 산행종료 시간을 맞추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산행날머리는 성산서당

대신 조금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서 성산서당(聖山書堂)을 둘러보기로 한다. 저수지에서 도로를 따라 10분이 조금 넘게 걸어 내려가면 성산서당이 나온다. 성산서당은 1814년에 지어진 조선 중기의 학자인 정극후선생을 배향(配享)하기 위한 시설로, 처음에는 서원(書院)으로 출발했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을 거치면서 서당(書堂)으로 바뀌는 굴곡의 과정을 거쳤다고 한다. 서당 앞을 흐르는 석천의 건너편에는 날아갈 듯이 날렵하게 지어진 정자(亭子)가 들어 앉아있는 것이 보인다. 정극후선생이 세웠다는 수재정(水載亭)이라는 정자이다. 수재정은 성산을 배경으로 석천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자연석을 이용하여 높게 축대(築臺)를 쌓은 뒤에 그 위에다 정자를 앉혔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가운데 칸은 석천을 바라볼 수 있게 하였고, 양 옆에 온돌방을 두었다고 한다.

* 성산서당(聖山書堂 : 경남 문화재자료 167호),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효종의 왕자시절 스승이었던 정극후(鄭克後)를 추모하기 위해 순조 때 세워졌다. 원래 사우와 서사가 있었으나, 사우(祠宇 = 사당)는 대원군 때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폐사(弊社)되고, 현재는 서사(書舍=서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건물)만 남아있다. 이에 따라 이름도 서원(書院)에서 서당(書堂)으로 바뀌었다. 서원과 서당의 차이는 아마도 위패(位牌)를 모시는 사당(祠堂)이 있고 없음의 차이인 모양이다.

 

수재정

 

 

보현산(普賢山, 1,126m)

 

산행일 : ‘12. 6. 6()

소재지 :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과 청송군 현서면의 경계

산행코스 : 절골보현사능선보현산(천문대)시루봉부약산석기듬법룡사용소리(산행시간 : 4시간30)

함께한 산악회 : 히트산악회

 

특징 : 일명 `모자산(母子山)`이라고도 한다. 이 산이 하나의 맥을 이루므로 이 자체를 보현산맥(普賢山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996년 준공된 천문대로 인해 더욱 알려졌으며, 전형적인 흙산(肉山)으로서 부드러우면서도 웅장한 산세(山勢)가 동서남북 어디에서 보아도 코끼리를 닮았다고 해서 보현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참고로 '普賢'은 코끼리를 상징한 보현보살에서 비롯된 불교식(佛敎式) 이름이다.

 

 

산행들머리는 정각리 절골마을

대구-포항고속도로 북영천 I.C를 빠져나와 안동 방면으로 가는 35번 국도를 타고 가다보면, 화남면 소재지를 거쳐 화북면 소재지에 이르게 된다. 이곳 화북면 소재지에서 1Km쯤 더 들어가면 고현천을 가로지르는 옥계교가 나오는데, 옥계교를 건너기 직전에 우측으로 보이는 2차선 도로(道路 : 별빛로)를 따라 들어가면 된다. 이 도로는 보현산천문대(天文臺)로 올라가는 도로이니 방향을 잡을 때에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별빛로를 따라 들어가다가 버스가 더 이상 들어가지 못하도록 표시해 놓은 지점이 산행들머리인 절골마을 입구이다.

 

 

 

절골 입구에 서 있는 마을표지석을 따라 들어가면 오래된 정자(亭子)나무가 보인다. 느티나무라고 부르는 것이 맞겠지만 수령(樹齡)500년이나 된 지정 보호수(保護樹)이기 때문에 정자나무라고 불러보는 것이다. 정자나무란 동네 어귀에 있는 큰 나무가, 나무그늘 밑에서 사람들이 모여 놀거나 쉴 수 있게끔 공간을 만들어 줄 때 일컫는 말이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나무 아래에는 깔끔하게 지어진 정자가 오롯이 앉아있는 것이 보인다.

오른편이 보현사

 

 

정자나무를 뒤로 하고 마을 안쪽 길을 따라 5분 쯤 들어가면 왼편 개울 건너 언덕배기로 석탑(石塔) 하나가 올려다 보인다.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69호인 정각리3층석탑(正覺里三層石塔)’이다. 신라(新羅) 말기에서 고려(高麗) 초기에 나타나는 장식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좋은 작품(作品)이라기에 가까이서 보려고 철다리로 들어서보지만, 누군가가 다리 끝에 금()줄을 매어 놓아 사람들의 출입을 막고 있다. 거기에다 개 짖는 소리까지 요란해서 부득이 발걸음을 돌리고 만다.

 

 

개울을 끼고 이어지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5분쯤 올라가면 길은 왼편으로 급하게 휘면서 다리()를 건너게 만든다. 계속해서 포장도로를 따라 들어가면 정각사(正覺寺)가 나온다. 만일 보현산으로 가고 싶다면, 왼편으로 휘기 전에 맞은편에 보이는 임도(林道)를 따라 들어서면 된다. 임도로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임도로 들어서서 얼마간 걸으면 상수보호용 철망울타리가 보이고,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서 오름길이 시작된다. 제대로 된 산길이 시작되는 것이다. 산길은 오르막길이 계속되지만 가파르지는 않다. 사방은 온통 참나무 일색, 울창한 숲은 하늘을 가려 한줄기의 빛이 스며드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고 있다.

 

 

 

산행을 시작한지 30분쯤 지나면서 산길은 가파른 오르막길로 변한다. 가도 가도 끝날 줄 모르는 오르막길, 주변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온통 참나무들뿐이다. 오뉴월 무더위는 바람 한 점 불어주지 않는데, 이어지는 산길의 풍물은 조금도 변할 줄을 모른다. 한마디로 짜증나는 구간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듯 싶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30분 정도 오르면 이정표가 세워져있는 사거리가 나타난다. 오늘 산행에서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이정표이다(천문대 0.5Km, 시루봉 0.8Km/ 천문대 0.4Km, 시루봉 0.7Km/ 천문대 주차장 0.3Km/ 숲속교실 1.2Km). 이곳에서 300m지점에 주차장이 있다고 한다. 1시간 이상을 힘들게 올라오기 싫은 사람들을 위해, 승용차로 올라올 수 있도록 산꼭대기까지 도로(道路)가 만들어져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사거리에서는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맞은편 등산로로 올라선다. 왼편으로 방향을 잡아도 천문대로 갈 수 있겠지만, 천문대까지의 거리가 조금은 더 가깝지 않을까 해서이다.

 

 

 

사거리에서 매끈한 통나무로 만들어진 계단을 밟으며 10분 정도 오르면 나무테크로 만들어진 길이 나온다(이정표 : 시루봉 0.7Km/ 천문대 0.3Km/ 숲속교실 1.4Km). 시루봉에서 천문대(天文臺)까지 이어지는 천수누림길 테크로드이다. 천문대어서 300m 정도를 더 연장해서 설치해 놓은 것이다. 테크로드를 따라 잠시 걸으면 오른편에 천문대가 보인다.

 

 

 

 

보현산 정상은 천문대 경내를 통과해야만 만날 수 있다. 전시관(展示館)의 뒤편으로 난 널따란 도로를 따라 100m 정도를 올라가면 돌무더기로 이루어진 언덕위에 정상표지석이 세워져 있고, 정상석 주위에는 누군가가 쌓아놓은 엉성한 돌탑(石塔) 서너 기()가 흩어져 있는 것이 보인다. 정상에 서면 남북으로 뻗어 내려간 낙동 정맥이 잘 조망(眺望)된다. 또한 남쪽의 기룡산과 영천댐, 그리고 서쪽의 팔공산이 선선히 눈에 들어온다.

 

 

 

맞은편 봉우리가 시루봉

 

 

정상에서 내려와 시루봉으로 가는 길에 잠깐 천문대 전시관(展示館)에 들러본다. 난생 처음 보는 시설인지라 큰 기대를 갖고 들어선 전시관은 한마디로 실망 그 자체이다. 전시물이라고는 관측기구(觀測氣球)처럼 생긴 자그마한 조형물(造形物)이 하나 보일 따름이고, 천체(天體) 사진들 몇 장이 벽면(壁面)을 장식하고 있을 따름이다. 내가 알기로는 꽤나 많은 관람객들이 찾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조금 더 알차게 전시관을 꾸몄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 보현산천문대(天文臺), 보현산 정상 일대에 세워진, 대덕연구단지에 있는 한국천문연구원의 지역 천문대이다. 천문대는 밤하늘의 천체(天體)를 관측(觀測)하는 1.8m 광학 망원경(望遠鏡)과 태양의 생생한 모습을 볼 수 있는 태양 플레어 망원경을 운영하고 있으며, 국내에서 제작한 1m 광학 망원경이 현재 시험 가동 중이다. 일반 방문객을 위해 4, 5, 6, 9, 10월의 네 번째 토요일에는 주간공개행사(公開行事)를 진행한다(망원경의 정비를 위해 하절기(7~8)와 동절기(11~다음 해 3)에는 행사를 진행하지 않는다). 참고로 참가비는 무료(無料)이나, 행사시작 5일전까지 예약을 해야만 행사에 참여할 수 있다.

 

 

 

 

천문대에서 시루봉까지 이어지는 능선 길은 작은 쇄석(碎石)이 깔려있다. 보현산에는 인위적(人爲的)으로 조성해 놓은 길이 많은데, 이 길도 그중의 하나가 아닌지 모르겠다. 주변에 조성된 철쭉군락들과 어우러진 산길은 마치 정원을 걷고 있는 느낌이 든다. 천문대에서 헬기장을 거쳐 시루봉까지는 5분 남짓한 거리이다.

* 보현산에는 사람과 자연(自然)이 하나가 되는 길들이 많다. ‘보현산 하늘 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길들은 구들장 길, '천수 누림 길‘, 그리고 '태양 길’, ‘보현산 댐 길’ ‘횡계구곡 길5개의 탐방로(探訪路)로 되어 있다. 보현산 정상으로 오르는 데크로 만들어진 길이 바로 천수(天壽)를 누리고자 하는 사람들이 찾는다는 천수 누림 길이다.

 

 

시루봉 정상은 널따란 분지(盆地)이다. 한쪽 귀퉁이에 정상석(보현산 시루봉 해발 1124.4m)이 세워져 있고, 그 뒤를 산행안내도가 지키고 있다. 패러글라이딩 활공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탓인지 좌우(左右)로 넓고 곱게 바닥을 정비해 놓았고, 한쪽에는 바람의 방향을 읽을 수 있도록 깃발도 매달아 놓았다.

 

 

 

시루봉에서는 사방팔방으로 조망(眺望)이 훤히 트인다. 부약산이 가까이에 있는가하면, 그 뒤에는 선암산과 팔공산이 어렴풋하고, 반대쪽에는 면봉산과 운주산 등 주변의 산들이 각각의 머리를 치켜세우고 있다. 그러나 이곳 보현산보다 높은 산은 팔공산을 제외하고는 없을 것이다.(시루봉 정상 이정표: 천문대 0.3km, 정각리 절골 2.8km)

 

 

 

시루봉의 바로 아래, 그러니까 천수 누림 길의 끄트머리에는 이층으로 된 팔각정(八角亭)이 세워져 있다. 안내도에는 웰빙 숲 관찰전망대라고 표시되어 있지만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점심을 먹는 장소로 이용되고 있는 듯, 왁자지껄한 소음(騷音)과 함께 음식냄새가 코끝을 자극하고 있다.

 

 

 

시루봉 정상에서 철망울타리를 따라 서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이른바 팔공보현지맥(八公普賢枝脈)을 따라 걸어보는 구간이다. ‘왜 철망으로 막아 놓았을까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이어지고 있는 철망의 설치목적이 다들 궁금한 모양이다. 누군가가 장뇌삼() 재배지일 것 같다고 알려주지만 절도예방 시설(施設)치고는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드는지 다들 고개를 갸웃거린다. 시루봉에서 400m쯤 내려오면 산길은 급하게 왼편으로 휘면서 철조망과 이별을 고한다(이정표 : 시루봉 0.4Km/ 법룡사 2.4Km). 35번 국도상의 노귀재로 연결되는 팔공보현기맥과 이별을 고하는 것이다.

* 팔공보현지맥(八公普賢枝脈), 낙동정맥(洛東正脈) 상의 가사령(佳士嶺) 북서쪽 약 1.44km 떨어진 733.9봉에서 분기해 베틀봉과 보현산(普賢山), 시루봉, 방각산(方覺山), 구무산을 거친 후, 위천과 낙동강의 합수점인 새띠마을(경북 상주시 중동면 간물리)까지의 159.2km에 달하는 산줄기이다.

 

 

보현지맥을 떠난 산길은 별 특징이 없이 지루하게 이어진다. 참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진 숲길이 싫증이 날 경우에는 잠깐 산길을 벗어나 숲속으로 들어서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왜냐하면 참취와 당귀, 그리고 비비추 등이 군락(群落)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보현지맥과 헤어지고 1Km 정도를 더 걸으면 난데없는 바위가 앞을 가로막는다(이정표 : 시루봉 1.4Km/ 법룡사 1.4Km). 오른편으로 돌아 바위 위로 오르면 시원스레 조망(眺望)이 터진다. 발아래에는 별빛마을이 펼쳐지고, 진행방향에는 부약산과 석이덤이 늘어서 있다. 전망대에서 석이덤을 가기 위해서는 부약산을 거쳐야만 한다. 부약산은 별다른 특징(特徵)이 없는 야트막한 산봉우리(791m)에 불과하다. 이곳이 부약산의 정상임을 알려주는 아무런 표식(表式)도 없을뿐더러, 워낙 펑퍼짐한 곳이라서 그냥 지나치기 쉽다. 산의 이름도 일부 산행개요도에만 표기되어 있을 뿐, 25,000분의 1 지도에는 표고점(標高點)으로만 표시되어 있을 따름이다.

 

 

 

 

 

갑자기 나타나는 거대한 바위벽을 오른편으로 돌아 오르면 멋진 전망대(展望臺)가 나타난다. 바로 석이덤의 상부(上部)이다. 바위벼랑에 설치된 목책(木柵) 앞에 서면 시원스레 시야(視野)가 열린다. 입석동일대와 별빛마을로 넘어가는 간여재가 그림처럼 내려다보인다. 전망대 뒤편의 소나무 숲을 헤치면 또 하나의 조망터가 나타난다. 바로 앞에 별 특징 없는 부약산이 보이고, 그 오른편에는 보현산이 그 웅장(雄壯)한 자태(姿態)를 보여주고 있다. 저런 모습이 코끼리의 등허리로 보였나 보다.

 

 

 

 

 

 

석이덤에서 내려서서 조금 걷다가, 왼편으로 급하게 방향을 틀며 내려서면 난데없는 체육시설(體育施設)이 나타난다. 이 산중에 누구보고 이용하라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당연히 관리가 되지 않은 탓에 주변에는 잡초(雜草)만이 우거져 있다. 체육시설에서 잠깐 고개를 돌려보면 짙게 우거진 숲 사이로 석이덤이 철옹성마냥 솟아있는 것이 보인다. 전형적인 흙산(肉山)에 솟아오른 거대한 바위봉우리가 차라리 경이(驚異)롭기까지 하다.

 

 

 

 

체육시설을 지나 가파른 경사로(傾斜路)를 잠깐 내려서면, 나무숲 사이로 법용사가 고개를 내민다. 산신각은 그냥 지나치고 대웅전을 둘러본다. 요사(寮舍)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나오지만 누구하나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나같이 특별한 목적 없이 찾는 이들이 심심찮게 나타나는 모양이다.

* 법룡사(法龍寺), 1910년경 황재준이라는 이가 몹쓸 병을 앓고 눕자 그의 아내가 이 산에 와서 백일기도 끝에 얻은 산삼(山蔘)으로 치유되고 나서 세웠다는 전설(傳說)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 산삼을 캔 봉우리 이름도 남편의 약()을 내려주었다고 해서 부약산(夫藥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절의 역사가 오래되지 않은 탓에 규모도 작을뿐더러 보유하고 있는 문화재(文化財)도 없다.

 

 

 

 

산행날머리는 용소리

법룡사에서 시작되는 하산길은 지루하기 짝이 없다. 법룡사가 상당히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지라 산행이 마무리되는 용소리까지는 고도(高度) 차이가 많이 난다. 법룡사에서 용소리까지의 거리인 2.2Km를 내려오는 동안에 서서히 고도를 낮추는 것이 힘들었던지 지그재그로 길을 만들어내면서 이어진다. 그래도 경사(傾斜)를 떨어뜨리지 못한 탓에 내려딛는 발걸음은 잔뜩 힘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볼품도 없는 산이 끝까지 애를 먹이네요.’ 집사람의 말마따나 오뉴월 뙤약볕에 완전히 노출된 비탈길을 걷는다는 것은 보통 고역(苦役)이 아니다. 걷기에 지쳐서 자신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올 즈음이면 드디어 앞이 환히 트이면서 용소리에 닿게 된다(이정표 : 법룡사 2.2Km, 시루봉 4.7Km, 천문대 5.0Km). 용소리 주변은 댐 공사가 한창인지라 중장비의 왕래가 빈번하다.

 

 

 

 

 

 

주왕산(周王山 : 국가명승 제11호, 721m)

 

산행일 : ‘12. 4. 29(일)

소재지 : 경상북도 청송군 부동면

산행코스 : 대전사→주왕산 정상→후리메기 삼거리→제3․2․1폭포→학소대→망월대→주왕굴→무장사→대전사(산행시간 : 4시간20분)

함께한 산악회 : 자유산악회

 

특징 : 산의 모습이 돌로 병풍(屛風)을 친 것 같다 하여 석병산(石屛山)이라고도 불린다. 그다지 높지는 않으나 산세(山勢)가 웅장하고 아름다우며, 곳곳에 기암절벽(奇巖絶壁)이 솟아 있어 경상북도의 소금강(小金剛)이라고 한다. 특히 제3폭포에서부터 시작하여 학소대에 이르는 계곡은 이곳이 과연 세외선경(世外仙境)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이다.

 

 

산행들머리는 주왕산국립공원 탐방안내소

중앙고속도로 서안동 I.C를 빠져나와 34번 국도(國道/ 영덕방향)와 31번 국도(청송방향)를 번갈아 달리다가, 청송읍을 지나자마자 만나게 되는 ‘청운삼거리’에서 좌회전 주왕산로로 접어든다. 주왕산로를 따라 들어가다 하의리의 주왕교(橋)를 건너자마자 왼편의 공원길로 접어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산행이 시작되는 주왕산국립공원 주차장(駐車場)에 이르게 된다. 주차장은 시외버스터미널을 겸하고 있다. 주차장에 도착하면 주왕산 방향에 탐방(探訪)안내소가 보인다. 안내소 안에 깔끔한 화장실이 갖추어져 있으니 이곳에서 볼일을 보고 산행을 나서면 된다. 주차장에서 주전사까지는 음식점들이 줄을 지어 늘어서 있다. ‘음식이 싸고 맛있으니 내려올 때 꼭 들르세요.’ 주인장들의 당부를 귓가로 흘리며 걷다보면 진행방향에 커다란 바위봉우리가 어서 오라고 손짓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대전사 뒤편을 장식하고 있는 기암(旗岩)이라는 바위이다. 일반적으로 기암이라는 표현을 쓸 경우에는, 기이하게 생긴 바위를 뜻하는 기(奇)자를 사용하는 게 보통인데, 이곳은 깃발을 뜻하는 기(旗)자를 쓰는 게 특이하다. 옛날 주왕을 토벌했던 마장군이 깃발을 꼽았던 봉우리이어서 그리 부른다고 한다.

 

 

 

매표소에서 입장료(문화재관람료라고 하나 입장료를 듣기 좋게 표현한 느낌) 2800원을 내고 들어서면 몇 발자국 안가 대전사 앞마당에 도착하게 된다. 대전사는 별로 크지 않은 사찰이다. 그래서 전각(殿閣)들의 숫자도 적을뿐더러 그 규모도 생각보다 왜소(矮小)하다. 그러나 그 왜소함 때문에 대전사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기암과 대전사가 절묘(絶妙)한 조화를 만들어 내고 있다면, 이 또한 아이러니(irony)가 아닐까?

* 대전사(大典寺), 신라 문무왕 때(672년) 의상(義湘)이 세웠다고 전하나, 고려(高麗) 태조 때 눌옹(訥翁)이 창건했다는 설(說)도 있다. 창건 이후의 자세한 역사는 전해지지 않으며, 지금의 전각(殿閣)들은 조선 중기(中期)에 실화(失火)로 전소(全燒)된 뒤 중창된 건물들이다. 문화재(文化財)로는 보물 제1570호로 지정된 보광전(普光殿)이 있다. 절의 이름은 주왕의 설화(說話)에서 유래한다. 중국 당나라의 주도(周鍍)라는 사람이 스스로 후주천왕(後周天王)이라 칭하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크게 패한 후, 신라로 도망 와서 이곳에 숨었단다. 결국 신라에 의해 토벌되었지만, 그의 이름은 산의 이름이 되었고, 주왕(周王)의 아들인 대전도군(大典道君)은 사찰(寺刹)의 이름으로 남게 되었다.

 

 

 

대전사 경내(境內)를 가로질러 주방계곡으로 들어선다. 엊그제 내린 비 때문인지 계곡을 흐르는 물줄기가 어찌나 맑은지 옥빛을 띠고 있다. 널따란 대로를 따라 300m정도를 걸으면 주방천을 가로지르는 기암교(橋)가 보인다. 이곳에서 기암교를 건너면 1.2.3폭포로 가게 되고, 주왕산 정상으로 가려면 오른쪽으로 접어들어야 한다.(이정표 : 제3폭포 3.1km, 제1폭포 2km, 주왕암․주왕굴 1.5km/ 주왕산 2km/ 상의매표소 0.3km)

 

 

 

오른쪽으로 접어들어 산행을 시작하면 일반 산과 국립공원(國立公園)의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다. 다른 보통의 산에서는 결코 볼 수 없을 정도로 등산로를 잘 정비해 놓았다는 점에서다. 자연석(自然石)을 바닥에 촘촘히 심어 놓았는가 하면, 지형지물에 맞게 나무테크로 계단을 만들었고, 심지어는 나무테크를 이용해 각(角)이 없는 길까지 만들어 내고 있다. 당연히 산을 오르는데 훨씬 힘이 덜 든다. 어느 사람들은 자연스러운 맛이 없어졌다고 투덜대기도 하지만, 나는 괜찮다고 본다. 산의 훼손(毁損)을 방지하는데 저보다 낳은 방법이 없다고 하고, 산을 오르는 사람들에게도 힘을 덜어주니 결코 나무랄 일은 아닌 것이다.

 

 

 

 

잘 정비된 등산로를 따라 30분 정도를 오르다보면 왼편에 나무테크로 만들어진 전망대(展望臺)가 보인다. 전망대 위로 오르면 주왕산의 진면목(眞面目)이 그대로 드러난다. 연두색과 초록색의 융단을 깔아놓은 듯 나무의 바다(樹海)가 광활하게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혈암과 장군봉, 그리고 연화봉, 병풍바위, 급수대 등이 주방계곡에서 보는 모습과는 전혀 다른 얼굴로 솟아오르고 있다. 그 기암절벽들을 둘러싸고 있는 푸른 숲이 넋을 잃을 만큼 아름답다. 참으로 멋진 풍광(風光)이다. 주방계곡을 둘러싼 바위산의 신록(新綠)은 주왕산 방향에서 볼 때가 가장 감동적(感動的)이라고들 말한다. 그 말이 실감이 나는 순간이다.

 

 

 

전망대를 지나면서 산길은 가파른 오르막길이 연속된다. 급경사(急傾斜)를 조금이라도 줄여보려고 길은 갈지(之)자를 이루기도 하고, 그것마저도 안 될 경우에는 나무테크로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숨가쁘게 오르다보면 능선안부에 올라서게 된다. 능선에 올라서면 다시 한 번 눈이 호사(豪奢)를 누리게 된다. 좌우로 시야(視野)가 시원스레 열리고 있는 것이다. 혈암과 장군봉, 그리고 연화봉, 병풍바위, 급수대 등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가슴 아픈 흔적, 주왕산의 울창한 소나무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허리에 해당되는 부위에 빗살무늬 흔적들을 지니고 있다. 이는 1960대 중반 당시 산림자원 개발을 한다며 3년간 송진을 채취했던 흔적이라고 한다.

 

 

주변 풍광(風光)을 눈요기로 즐기며 능선을 따라 걷다보면 이내 주왕산 정상이다. 주왕산 정상은 그저 평범한 분지(盆地)일 따름으로 기대한 만큼의 볼거리를 제공하지는 못한다. 공터의 한쪽 귀퉁이에 자연석(自然石)으로 만들어진 정상표지석이 세워져 있고, 그 곁을 산행안내도가 지키고 있다. 올라오는 길에 여러 곳에서 빼어난 조망(眺望)을 즐겼는데, 막상 정상에서는 조망이 시원스럽지 못하다. 그만큼 정상이 주방골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이정표: 제2폭포 3.8km/ 상의매표소 2.3km). 4월의 마지막 주(週), 남녘의 산하(山河)는 지금 진회색 가지마다 연초록의 잎들을 내밀고 있다. 신록(新綠)의 계절(季節)로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산으로 둘러싸인 주왕산, 그 정점(頂點)에 내가 서 있다. 발아래에는 주방천과 신술골이 깔려있다. 뒤편에는 사창골이 있을 것이다. 그 곳에 있었다는 사창암 옛터에는 주왕 김주원과 김헌창, 김범문에 이르는 삼대에 걸친 가슴 아픈 투쟁(鬪爭)의 역사가 엎드려 있을 것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30분 정도 지났다.

* 1034년의 어느 날 가메봉 아래의 사창암에서 ‘주왕사적(周王寺蹟’이 출토(出土)되었다. 신라 말(新羅 末, 920년)에 낭공 대사(郎空 大師)가 기록한 것으로 ‘신라 말 당나라의 주도(周鍍)라는 사람이 반란에 실패하고 이곳에 숨어 들어왔다. 주도는 이곳에 숨어서 세력을 키우다가 신라의 토벌군(討伐軍)에 의해 진압되었다.’라는 내용의 문서(文書)이다. 하나의 전설(傳說)로만 알려졌던 이 얘기는 1997년에 지방의 한 향토사학자에 의해서 새로운 역사적 사실로 재조명(再照明)되었다. 그는 연구를 통해 주왕의 전설은 신라 말기 반역을 꾀했던 김헌창(憲昌)과 김범문(梵文)으로부터 비롯된 이야기라고 주장한다. 김주원의 둘째 아들인 김헌창은 아버지가 왕이 되지 못한 것에 한을 품고 공주(公州)지방에서, 그리고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은 북한산에서 각각 반란을 일으켰지만 실패했다. 주왕사적의 줄거리에 김헌창을 대입할 경우 우연이라 보기 어려울 정도로 맞아떨어지며, 주왕산의 지형, 유적과도 일치한다고 한다. 게다가 주왕사적을 기록한 낭공대사는 김헌창의 아들인 김범문의 수제자(首弟子)였다니 그의 주장에 고개를 끄떡거릴 수밖에 없다.

 

 

 

정상을 내려서서 후리메기로 향한다. 정상에서 살짝 내려앉던 산길은 다시 된비알로 바뀌었다가 또다시 내리막길로 변했다. 후리메기로 내려서려면 조망(眺望)이 좋은 칼등바위에서 왼쪽 지능선을 타야 한다. 가메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비지정(非指定) 탐방로이기 때문에 진입(進入)을 막고 있기도 하려니와, 길 또한 나있지 않다고 봐야할 것이기 때문이다. 칼등바위에서 골짜기로 내려서는 길은 끝없는 계단의 연속이다. 길게 늘어뜨리는 것만 가지고는 경사(傾斜)를 다 죽이지 못했는지, 아예 갈지(之)자를 만들면서 아래로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편안하게 다듬어진 나무테크 계단을 따라 내려서는데 오히려 깊은 산중으로 들어서는 기분이다. 기암괴석(奇巖怪石)과 부드러운 산릉도 숲에 가리고, 파란 하늘도 숲이 만들어낸 그늘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바닥으로 내려선 다음 계곡길을 따라 10분쯤 걸으면 후리메기 삼거리다(이정표 : 제3폭포 1.3km, 가메봉 2.6km). 여기서 오른쪽 사창골 골짜기 길을 따르면 주왕산 최고의 전망대(展望臺)인 가메봉으로 오를 수 있고, 주방천으로 가려면 계곡을 따라 왼편으로 내려가야 한다. 계곡을 따라 걷다보면 인간세상은 아득히 잊혀 진다. 쏴하고 소리 지르는 계곡의 물소리가 경치에 취해 몽롱해진 머리를 일깨운다. 사창골(후리메기골)의 바닥에는 이끼가 두텁게 낀 돌덩이들이 깔려있고, 짤막한 와폭(臥瀑)과 작고 야트막한 소(沼)가 번갈아가며 나타난다. 옥빛 가득한 물가에는 철 이른 피서객(避暑客)들이 옹기종기 앉아있다. 아직은 4월이라고 하지만, 때 이른 초여름 더위는 이미 우리 곁에 다가와 있는 것이다.

 

 

 

후리메기에서 사창골을 따라 30분 정도를 걸어 내려오면 제2폭포 옆의 삼거리(이정표 : 상의입구 3.1km/ 가메봉 3.6km, 주왕산 3.6km/ 제3폭포 0.3km)에 이르게 된다. 계곡을 따라 내려가는 산길은 계곡 사면(斜面)의 경사(傾斜)로 인해 한쪽 면(面)에만 길을 만들기는 힘들었나보다. 다양한 모양의 다리를 이용해서. 여러 번에 걸쳐 계곡을 가로지고 있다. 계곡은 빼어나지는 않지만 다른 계곡들에 뒤떨어지지도 않을 정도의 수려함을 보이고 있다. 사창골이 큰골과 만나는 삼거리에서 제3폭포는 오른편으로 접어들어야 한다. 정상을 출발한지 1시간이 조금 더 지났다.

 

 

제3폭포를 향해 큰골을 거슬러 올라간다. 300m쯤 걸으면 왼편에 계곡으로 내려가는 테크로 된 계단이 보인다. 계곡으로 내려서면 저만큼에 나무테크로 만들어진 예쁘장한 전망대(展望臺)가 보이고, 전망대에 올라서면 제3폭포의 웅장한 자태가 한눈에 들어온다. 거대한 물줄기를 쏟아내고 있는 제3폭포는 2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아래 전망대에서는 폭포의 전모(全貌)가 다 보이지 않는다. 상부(上部)의 폭포는 가려지고 있는 것이다. 상부폭포를 보기위해서는 다시 나무테크 계단을 올라서 절벽(絶壁)의 난간에 걸쳐져 있는 전망대로 올라가야 한다. 제3폭포는 2단 와폭(臥瀑) 자체도 아름답지만 그 아래 옥빛 물을 찰랑찰랑 담고 있는 널찍한 소(沼)의 풍광(風光)도 일품이다.

* 제3폭포는 관광객들을 배려해서 전망대(展望臺)를 아래와 위, 2개나 설치해 놓았다. 위편 전망대에 오르면 폭포 중간의 물이 돈 흔적(痕迹)과, 절벽(絶壁) 안으로 깎인 3개의 구멍이 바라보인다. 얼마나 오랜 세월동안 물에 깎이었으면 저런 형상(形象)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자연이 만들어낸 한 풍경이 경이(驚異)로까지 발전하고 있다. 얼마 전에 폭포들에 관한 새로운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1,2,3폭포로만 불리어서 뭔가 허전했던 폭포(瀑布)들에게 옛 이름을 찾아주기로 했다는 얘기이다. 이곳 청송군청(郡廳)에서 주왕산지(周王山志) 등 문헌을 참고해서 제1폭포는 용추(龍湫)폭포, 그리고 제2, 제3폭포는 절구폭포와 용연(龍淵)폭포로 사용하기로 했다고 한다.

 

 

 

 

제3폭포의 상부(上部)전망대에서 빠져나와 내원동 방향으로 진행한다. 50여m쯤 올라가니 오른편에 ‘입산통제’라는 현수막이 걸려있는 것이 보인다. 산불예방기간인 4월30일까지는 통행을 금지(禁止)한다고 한다. 아침에 절골에서와 같이 내원동도 단 이틀 일찍 온 덕분에 답사가 불가능 한 것이다. 가지 못하는 서운함을 투덜거리며 달래고 있는데 길가에서 쉬고 있던 어느 등산객이 조금도 서운해 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내원동은 이미 사라져버리고 없다면서,,, 세상이 멀어 세상이 그리워하던 내원(內院)마을은 사라져버리고 없다고 한다. 옛 사람들이 깊고 깊은 산속의 마을이라고 해서 '내원'(內院)이라고 불렀다는 마을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환경저해시설(環境沮害施設)이라서 철거(撤去)했다는 국립공원사무소의 안내판(案內板)만이 그 빈자리를 채우고 있더란다. '내원마을을 아시나요?‘ 다들 생경스러운 표정이지만 ’그럼 전기(電氣) 없는 마을은 들어 보셨나요?‘ 그때서야 사람들은 다들 고개를 끄덕거렸었다. 요즘 세상에 전기가 들어가지 않는 곳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내원마을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그 희귀성(稀貴性) 때문인지 등산객들 사이에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더니, 어느 사이엔가 다들 한번쯤은 들러보고 싶은 곳으로 유명세(有名稅)를 타고 말았다. 도심(都心)의 번잡함에 지친 사람들이 동경하던 그런 쉼터를 다시는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언젠가 난 이곳을 찾았었고, 난 쉼터로 변한 분교(分校)에 들어가 난쟁이 의자에 걸터앉아, 방아취에 동동주 한잔 들이키며 인생(人生)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내 앞에 앉아 고개를 끄덕여주던 그리운 얼굴들을 떠올려본다.

 

 

아까 후리메기에서 내려왔던 길과 만나는 삼거리로 돌아 나오면 저만큼에 다리(橋)하나가 보인다. 제2폭포는 다리를 건너기 전에 왼편으로 들어가면 만날 수 있다(이정표 : 제2폭포 0.2km/ 상의입구 3.0km, 제1폭포 0.8km/ 가메봉 3.7km, 제3폭포 0.4km). 동굴을 지나듯이 좁은 길을 200m가량 들어가니 갑자기 눈앞이 훤해진다. 계곡 안이 갑자기 넓어지면서 수려한 모습의 제2폭포가 선을 보인 것이다. 앞쪽만 긴 절벽(絶壁)이고 나머지는 모두 숲인데, 절벽 위에서 맑은 물이 떨어져 내리고 있다. 절벽 위에서 떨어지는 물은 중간에 있는 바위 웅덩이에 일단 머물렀다가 다시 한 번 바닥에 있는 웅덩이로 낙하(落下)를 시작한다. 물에 손을 담가본다. 서늘하다. 망설임 없이 주저앉아 세수부터 하고 본다.

 

 

 

 

제2폭포를 빠져나와 얼마간 걸어 내려오면 진행방향에 암벽(巖壁)이 문설주(門-柱)마냥 서 있는 것이 보인다. 기암절벽(奇巖絶壁) 사이가 좁아지는 구간으로 들어서면 우렁찬 물소리가 들려온다. 제1폭포에 다다른 것이다. 암석(巖石)의 기반(基盤)이 세로로 솟아오르며 만들어낸 빈 공간에, 오랜 세월 동안 물이 흐른 흔적들이 보인다. 흐르던 물이 어디를 후려쳤고, 어디는 감싸고돌았는지 잘 다듬어진 절벽이, 후세(後世) 사람들에게 전해 주고 있는 것이다.

 

 

 

제1폭포는 선녀(仙女)들의 목욕탕(沐浴湯)처럼 생긴 선녀탕과 아홉 마리의 용(龍)이 살았다는 전설(傳說)이 전해져 내려오는 구룡소를 돌아 떨어진다. 아홉 마리의 용이 살기에는 상당히 많이 작아 보이지만, 어떠랴 그럴 것이라고 믿어버리면 편한 것을... 계곡을 흐르는 물은 티 없이 맑고 투명하다. 누가 파란 물감을 풀어놓았을까? 진하게 파랗다. 폭포주변의 기암절벽(奇巖絶壁)들이 다양한 표정을 짓고 있다. 조물주가 아니고서는 결코 저런 작품들을 만들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산길의 주방천은 놀라울 정도로 많은 탐방객들로 혼잡스럽다. 그만큼 이곳의 경치가 빼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그 많은 사람들이 붐비고 있지만 주방계곡의 풍광(風光)이 조금도 변하지 않음은 그만큼 계곡이 웅장하기 때문일 것이다. 거대한 자연 앞에 서면, 인간은 하나의 점에 불과하니까... 쓰러질 듯 덮칠 듯 치솟은 기암절벽(奇巖絶壁)과 괴석(怪石)들이 갖가지 모습으로 절경(絶景)을 빚어내고 있다. 누군가 그랬다. ‘한반도(韓半島)의 지도(地圖)를 호랑이 모양으로 놓고 보면 주왕산은 자궁(子宮)에 해당한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내가 지나온 폭포(瀑布)들과 주변의 협곡(峽谷)은 여성의 깊은 속살이었다는 얘기일 것이고, 계곡(溪谷)을 벗어나고 있는 난, 어머니의 자궁을 떠나 새로운 세상으로 나가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난 절골을 따라 산을 오르면서 흘린 땀과 함께 헛된 마음을 비웠고, 산길을 거닐면서 바라본 하늘에서 찾아낸 새로운 메시지로, 비워놓았던 공간을 다시 채워 넣을 수 있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적은 내 삶이, 잎새(잎사귀의 方言)에 이는 바람에도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이되기를 빌면서 어머니의 자궁을 빠져나온다.

 

 

 

제1폭포를 빠져나오면 건너편에 우뚝 솟은 바위봉우리가 보인다. 하나의 바위로 이루어진 거대한 바위벽은 계곡방향으로 수직의 단애(斷崖)를 만들어 내고 있다. 청학과 백학이 다정하게 살았다는 학소대(鶴巢臺)이다. 옛날 저 바위 위에 있는 소나무에 청학과 백학이 쌍을 이루고 살았는데 지각없는 포수가 백학을 쏘아 잡아버렸다고 한다. 그러자 청학이 며칠을 두고 울다가 이곳을 떠나갔다 하여 새집 소(巢)자를 붙여 학소대(鶴巢臺)라고 부른다고 한다.

시루를 닮았다는 시루봉, 어떤 이는 거인의 얼굴을 닮았다고도 한다.

 

 

 

 

학소대 아래를 통과하면 왼편에 나무테크로 만들어진 계단이 보인다. 주왕암으로 가는 길이다(이정표 : 주왕암․주왕굴 0.8km/ 상의입구 2.0km/ 제1폭포 0.2km). 이곳에서 망월대와 주왕암을 거쳐 자하교(橋)까지의 1Km정도 되는 구간은 비록 산의 경사면을 따라 이어지지만 위험하지는 않다. 국립공원관리소에서 자연관찰로(自然 觀察路)로 잘 가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거기다 더하여 바위나 나무 등의 사물(事物)이나, 계곡바람(溪谷風) 등 현상(現象)에 대한 설명을 적은 안내판을 곳곳에 설치해 놓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이해를 돕게 하고 있다.

 

 

 

바위 협곡 앞에서 잠깐 걸음을 멈추고 골바람으로 땀을 식힌다. 골짜기 앞에는 골바람이 불어오는 이유를 적은 안내판이 서있으니 땀을 식히면서 읽어보라. 그러면 자기도 몰래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다시 주왕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저만큼에 망월대 전망대(展望臺)가 보인다. 대(臺) 위로 오르면 연화봉, 병풍바위, 그리고 시루봉과 급수대가 신록 사이로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다가와 있다. 가운데 봉우리가 연꽃 같이 생겼다 해서 연화봉이고, 연화봉 우측이 병풍바위, 그 앞에 넘어질 듯이 높이 솟아있는 급수대(汲水臺)다. 그 정상에 신라 왕손 김주원이 살았다는 대궐터가 있으며 급수대라 하는 것은 이 바위 위에서 두레박으로 물(水)을 퍼 올렸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란다.

 

 

 

전망대에서 내려와 조금 더 진행하면 왼편 협곡(峽谷) 아래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아담한 사찰(寺刹) 하나가 보인다. 주왕암(周王庵)이다.

* 주왕암(周王庵), 계곡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서 '안절'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주왕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대전사와 함께 창건된 암자(庵子)라고 한다. 문간채인 가학루(駕鶴樓)의 중층(重層) 누각(樓閣) 아래로 들어서면 우측에 주왕암이란 요사(寮舍 : 사찰의 전각이나 산문 외에 승려의 생활과 관련된 건물)채가 있고 우측 높은 곳에 16나한을 모신 법당 나한전이 있다. 요사채의 오른편으로 들어서서 협곡을 따라 올라가면 50m쯤 되는 절벽의 하단에 주왕굴이라고 불리는 동굴이 있다.

 

 

 

 

주왕암 옆으로 난 협곡(峽谷)의 철(鐵)계단을 오르면 주왕이 은거했다는 주왕굴이 나온다. 주왕은 이곳에서 신라 마장군의 화살을 맞고 죽었다고 한다. 주왕굴 입구는 가는 물줄기가 끊임없이 떨어져 내리고 있다. 물줄기가 여러 가닥이기 때문에 폭포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실폭포... 먼저 도착한 아낙내들이 떨어져 내리는 물을 받느라 수선을 떨고 있다. 아마 저 물에 어떤 영험(靈驗)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모양이다. 동굴의 안에는 산신상(山神像)이 모셔져 있다.

* 주왕굴(周王窟) : 세로 5m, 가로 2m 정도의 동굴이다. 주왕이 신라의 마일성 장군과 맞서 싸우다가 크게 패하고 숨어 살던 어느 날 왼쪽 입구에 떨어지는 물로 세수를 하고 있다가 마장군의 화살에 맞아 최후를 마쳤다는 곳이 주왕굴이다. 그때 주왕이 흘린 피가 주방천으로 흘러들었고, 그 이듬해에 붉은 꽃이 피어났다고 한다. 후세(後世) 사람들은 이 꽃을 수달래라고 불렀고, 주왕의 피가 꽃이 되었다고 전해온다고 한다.

 

 

 

주왕굴에서 되돌아 나와 주왕암 앞의 화장실에서 왼편으로 접어들면 무장굴(武藏窟)이 나온다. 옛날 주왕의 부하들이 무기를 숨겼다는 굴이다.

 

 

산행날머리는 대전사 앞 주차장(駐車場, 원점회귀 산행)

무장굴에서 다시 주왕암까지 되돌아 나와야 하지만, 중간쯤에서 왼편에 희미하게 길의 흔적이 보인다. 망설이지 않고 내려서니 의외로 길은 뚜렷하게 열리고 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방골 메인(main) 탐방로로 내려서게 된다. 주방골에 내려서면 주변의 풍경(風景)이 다시 한 번 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손으로 만져도 될 만큼 가까이에 다가와 있던 기암괴석(奇巖怪石)들이 모두 달아나버렸고, 흙산(肉山)으로 변해버린 길 주변은 어린아이 얼굴처럼 해맑은 연두색 잎들만이 가득하다. 굴참나무와 물푸레나무의 연초록 잎들이 풋풋한 소녀의 웃음처럼 싱그럽게 다가온다. 주방골 하산로를 따라 조금만 더 걸어내려가면 곧 자하교가 보이고, 이어서 산행을 시작할 때 헤어졌던 주전사 뒤의 삼거리에 세워진 이정표가 산행이 끝나가고 있다고 알려주고 있다. 대전사에서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길은 난전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인근 아낙들이 자리를 잡고 좌판(坐板)위에 대추, 고추, 산수유 등을 쌓아놓고 팔고 있다. 물론 길가에 늘어선 식당의 아주머니들도 빠질 수는 없을 것이다. 길가에서 빈대떡을 부지런히 뒤집고 있다. ‘맛있으니 잠깐 쉬었다가세요’ 호객(豪客)하는 아주머니들의 말을 못 들은 척하고 가다보면 어느새 주차장에 도착하게 된다.

 

회룡포 비룡산(飛龍山, 190m)

 

산행일 : ‘12. 1. 28(토)

소재지 : 경북 예천군 용궁면

산행코스 : 회룡마을→아미타대불→장안사→회룡대→봉수대→원산성→삼강앞봉→의자봉→적석봉→사림봉→사림재→용포→회룡포→회룡마을(산행시간 : 4시간30분)

함께한 산악회 : 안전산악회

 

특징 : 비룡산만을 목적으로 찾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비룡산은 회룡포라는 명승지(名勝地)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 잠깐 오르는 산이기 때문이다. 회룡포는 맑은 물과 백사장이 어우러져 천혜(天惠)의 경관을 자랑한다(국지지정문화재인 명승지 16호). 회룡포(回龍浦)라는 지명은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乃城川)이 낙동강에 합류되기 직전에 용이 비상처럼 물을 휘감아 돌아간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회룡포를 휘감았던 내성천은 또 다시 비룡산(飛龍山, 190m)을 350도로 휘감은 후, 낙동강으로 흘러간다. 그래서 사람들은 회룡포를 육지속의 섬마을이라고 부른다.

 

 

산행들머리는 용궁면 회룡마을 주차장(駐車場)

중부내륙고속도로 점촌.함창 IC를 빠져나와 문경시내(市內, 점촌)를 통과, 34번국도(國道/ 안동방향)를 타고 예천군 용궁면소재지까지 들어간 후, 924번 지방도(地方道/ 호명面 방향)로 옮겨 달리다가 회룡포전망대 안내판이 보이는 곳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회룡교를 지나 회룡마을 주차장에 닿게 된다. 주차장 조금 못가서 오른편에 서있는 산행안내판의 뒤로 난 시멘트계단을 오르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1층 건물 높이쯤 되는 계단으로 올라서면 용주팔경시비(詩碑)가 보인다. 용주팔경시비는 이 마을 출신 시인 김영락(1831∼1906)씨가 용주팔경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詩)를 새겨놓은 비(碑)이다. * 참고로 용주팔경은 포금산의 밝은 달, 무이의 맑은 바람, 금강(천)의 고기 잡는 불빛, 와우산의 낙조, 비룡산에 걸친 구름, 천축산 저녁 종소리, 말운산의 나뭇꾼 소리, 훤이들의 벼꽃이다.

 

 

 

산길은 용주팔경시비에서 왼편 산사면(山斜面)을 따라 이어진다(이정표 : 회룡대 1.5Km/ 원산성 3.7Km). 경사(傾斜)가 만만치 않은 산길 주변은 온통 소나무 일색이다. 코끝을 스치는 솔향이 짙다. 이 향기 속에는 물론 피톤치드가 그득할 터이니, 오늘 산행은 눈요기에 더하여 건강까지 챙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구태여 길을 재촉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인지 등산로 주변에는 나무의자가 자주 눈에 띈다. 심호흡으로 피톤치드를 양껏 들이마시면서 30분 조금 못되게 오르면 쉼터로 조성된 널따란 공터에 커다란 부처가 한분 모셔져 있다. 아미타대불(大佛)이다.

 

 

 

 

 

아미타대불에서 회룡대로 오르는 길에 보면 오른편에 아담한 산사(山寺)가 내려다보이다. 천년(千年) 고찰(古刹)이라는 장안사이다. 경내로 들어서면 사찰은 그다지 고풍(古風)스러워 보이지는 않는다. 전각(殿閣)들을 최근에 중수(重修)한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최근에 지은 절집답지 않게 분위기는 제법 고즈넉하다.

* 장안사(長安寺), 의상(義湘)의 제자인 운명(雲明)이 창건하였다는 전설이 있으나, 『예천군지』에서는 고려 때 창건된 사찰이라고 적혀있다. 그러나 정확한 역사는 조선 중기 이후의 기록만이 전해진다. 신라가 삼국(三國)을 통일한 후,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위해 금강산과 부산 기장, 그리고 이곳에 장안사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천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사찰이지만 경내 전각(殿閣)을 새로 조성한 지 오래되지 않아 옛 사찰의 풍모는 느껴지지 않는다.

 

 

 

제1전망대(展望臺)인 회룡대(回龍臺)는 장안사에서 아미타대불 쉼터로 되돌아 나와야 한다. 전망대까지는 그리 가파르지 않은 산길에 나무계단까지 있어 쉽게 오를 수 있다. 회룡대는 유서(由緖) 깊은 장소는 아니나 회룡포의 전경(全景)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라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다. 팔각(八角)으로 산뜻하게 지어진 정자(亭子) 내부에는 회룡포의 선전판(‘1박2일 촬영지’ ‘드라마 가을동화의 배경’ ‘여행작가 100명이 선정한 최고의 여행지’ ‘내성천이 350도 휘감아 도는 육지속의 섬마을’)과 예천군수가 쓴 회룡대기가 걸려 있다.(이정표 : 봉수대 0.2Km, 원산성 2.2Km/ 장안사 0.3Km, 회룡마을 1.5Km)

* 계단은 300개가 넘으니 만만치 않은 숫자이다. 1박2일에서는 강호동과 멤버들이 ‘가위 바위 보’를 하며 이 계단을 올라갔었다고 한다. ‘1박2일’이 전파를 탄 후로는 똑같이 흉내를 내는 여행객들이 많아졌다나 뭐라나....

 

 

 

회룡대는 물길이 돌아나가는 회룡포의 전경을 촬영하기에 최상(最上)의 위치이다. 사람들마다 카메라를 꺼내들고 특이(特異)하면서도 아름다운 경관을 담기에 여념이 없다. 이웃에 있는 안동 하회마을이나 다른 곳의 뛰어난 물돌이동들이 대부분 태극(太極) 문양인데 비해, 이곳의 문양(文樣)은 물방울을 연상시키고 있다. 풀잎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이슬방울을 닮았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회룡포 경관의 촬영은 전망대 아래에서 하는 것이 좋다. 전망대에서는 나무에 가려 회룡포의 귀퉁이가 조금 잘려나가기 때문이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마을은 그야말로 잘그린 한 폭의 수채화(水彩畵)이다. 반듯반듯한 논밭과 마을, 그리고 백사장과 숲을 에워싼 물줄기가 마치 원을 그리듯 휘돌아 흐른다. 하얀 모래사장이 마을을 감싸고, 그 주변으로 물길이 다시 한 번 감싸고 있는 마을은 말 그대로 육지속의 섬마을의 모습을 하고 있다.

 

 

 

발길을 되돌려 삼거리로 돌아 나오면 봉수대(烽燧臺)에 이르게 된다. 옛터만 남아있던 것을 학계의 고증(考證)에 따라 높이 2.7m의 정방형(正方形)으로 복원한 것이란다. 봉수대 표지판에 적힌 옛 기록에 의하면 동쪽의 서암산(예천읍) 봉수, 서쪽의 소이산(의성 다인) 봉수, 그리고 북쪽의 가불산(문경 산양) 봉수와 서로 연락을 담당하는 군사요충지(軍事要衝地)였다고 한다.(이정표 : 원산성 1.9Km, 용포대 1.0Km/ 회룡대 0.2Km, 장안사 0.5Km)

 

 

 

다시 주능선을 따라 걸으면 두 번째 삼거리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서 왼편으로 가면 ‘제2 전망대‘가 나오고, 원산성은 곧바로 진행하면 된다. 남쪽능선에 있는 제2 전망대도 회룡대와 마찬가지로 내성천이 굽이도는 회룡포를 굽어볼 수 있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회룡포 조망이 회룡대만 못하다는 얘기를 들었기에 탐방을 생략하고 곧바로 원산성으로 향한다.(이정표 : 용포대 0.3Km/ 회룡대 1.0Km, 장안사 1.2Km)

 

 

 

 

산성(山城)을 보기 위하여 다시 주능선 삼거리로 되돌아 나와 원산성으로 향한다. 소나무가 우거진 산길이 펼쳐진다. 하늘을 덮어버릴 정도의 울창한 솔숲 오솔길을 25분 정도 걸어가면 원산성에 닿게 된다. 원산성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絶壁|위에 있기 때문에, 성(城)의 정상에서 사방을 훤히 내다볼 수 있는 자연의 요새(要塞)이다. 거기에다 금천, 내성천, 그리고 낙동강이 합류하는 삼강을 배수진으로 삼을 수 있어서, 예로부터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要衝地)였다. 삼한시대 마한이 이 성에서 백제에 패함으로써 멸망하였고, 그 후로도 신라, 백제, 고구려의 접경(接境)에 위치한 탓에 싸움이 잦았다고 성 안내판에 기록되어 있다. 회룡대에서 봉수대를 지나 원산성까지는 2.2km이며 30여분 소요된다.(이정표 : 성저마을 1.0Km/ 배골 0.8Km/ 제2전망대 1.2Km)

* 원산성(圓山城), 따뷔성 또는 또아리성이라고도 불리며, 삼국사기에는 원형으로 쌓았다하여 ‘원산성’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1.5~3m의 높이로 약920m의 둘레를 흙과 돌을 섞어서 쌓은 성으로서, 전설(傳說)에 의하면 온조가 마한(馬韓)을 정복하고 이 성(城)을 쌓은 후에 백제(百濟)를 열었다고 전해진다.

 

 

 

원산성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오른편은 성저마을로 내려가는 길이고, 비룡산을 일주하고 싶으면 배골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이곳에서 삼강대교와 주막의 모습을 조망 할 수 있다. 배골로 내려가는 길은 급경사(急傾斜) 내리막길, 등산객들의 불편을 덜어주려는 듯 나무계단을 설치해 놓았다. 배골은 강(江)바닥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예쁘장한 나무다리를 설치해 놓았으나 홍수 때는 이용할 수 없을 것 같다.

 

 

 

배골에서부터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그동안 능선을 밟으며 여유를 부린 등산객들을 골려주기나 하려는 듯, 배골에서부터 이어지는 등산로는 강바닥에서 봉우리로 올라갔다가, 다시 강바닥으로 내려서기를 반복한다. 많은 체력(體力)과 인내(忍耐)가 요구되는 구간이다.

 

 

 

한겨울의 쌀쌀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가파른 오르막길은 자연스레 땀방울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마를 스치는 찬바람이 고마워질 무렵이면 제2 전망대와 의자봉의 갈림길인 삼강앞봉에 도착하게 된다(이정표 : 제2전망대 1.0Km/ 의자봉 0.9Km, 사림봉 2.4Km). 산행을 시작한지 대략 2시간 정도가 흘렀다. 잡목(雜木)들을 제거한 덕분인지 시원스레 조망(眺望)이 트이고 있다. 낙동강(洛東江), 내성천(乃城川), 금천(錦川)이 합쳐지는 삼강(三江)이 보이고, 문경 영순면과 예천 풍양면을 잇는 삼강대교(三江大橋) 옆에 ‘삼강주막’의 복원된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고개를 돌려보면 우뚝 솟은 원산성도 바라보인다. 삼강주막은 정상의 전망대보다는 정상 조금 아래에 있는 나무벤치에서 바라보는 것이 훨씬 가깝게 보인다.

* 삼강(三江)주막(酒幕), 낙동강의 본류(本流)와 내성천, 금천의 두 지류(支流)가 만나는 합수머리에 위치한 주막이다. 삼강나루터는 예부터 서울로 가는 길목이었으며, 장사하던 배들이 낙동강을 오르내렸고, 문경새재를 가기 전에는 반드시 거쳐야 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다고 한다. 주막은 삼강나루를 지나는 보부상(褓負商)과 사공(沙工), 그리고 오가는 나그네들의 숙식(宿食)장소로 이용되었다. 2005년 말(末) 마지막 주모(酒母)였던 유 옥련 할머니(당시 90세)가 떠나면서 방치되어 오던 것을 예천군에서 고증(考證)에 따라 재현(再現)한 것이다. 할머니가 운영하던 삼강주막은 회화나무 아래 초가가 전부이고, 나머지는 예천군에서 임의로 지은 것들이다.

 

 

 

 

 

 

산길은 삼강앞봉에서 내리막길을 만들면서 강바닥까지 떨어진다. 나무다리 하나를 지나서 다시 능선을 치고 오르는가 싶더니 또 다시 강바닥으로 뚝 떨어져 버린다. 강바닥은 깔끔하게 쉼터로 조성되어있다. 다들 가던 길을 멈추고 점심상을 차리고 있다. 왼편으로 수양버들이 군락(群落)을 이루고 있고, 큰 길이 골짜기 안으로 나있다. 사림재로 곧장 오르는 길이다.

 

 

 

 

쉼터에서 나무테크로 만들어진 계단을 올라선 후, 강물이 내려다보이는 산길을 따라 얼마간 오르면 이내 의자봉이다. 문득 이곳으로 내려오는 버스 속에서 들었던 산행대장의 안내멘트를 떠올린다. ‘일단 봉우리 위로 올라보면 왜 의자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들 고개를 끄떡인다. 소나무의 굵은 가지가 어른들의 엉덩이 높이에서 길게 옆으로 뻗어있는 것이 마치 의자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의자봉에서부터는 높낮이(高低)의 차(差)가 크지 않은 능선이 이어진다. 묘(墓) 몇 기(基)를 지나면 이내 적석봉이다. 적석봉은 소나무에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이름표를 달고 있다. 정상부근에 별로 크지 않은 바위 덩어리 몇 개가 보인다. 아마 저 바위들 때문에 적석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나 보다. 하긴 ‘삼강앞봉’이라는 이름도 삼강의 앞에 있는 봉우리라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이왕에 관광지로 가꾸려면 조금 더 예쁜 이름으로 지으면 어떨까? 산행을 시작한지 3시간30분 정도 지났다.

 

 

적석봉에서 사림재로 내려가다 보면 오른편으로 사림봉(256m)으로 가는 길이 보인다. 조망이 뛰어나니 시간을 쪼개서라도 꼭 들러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사림봉으로 향하는 산길의 왼편 나무숲 사이로 언뜻언뜻 내성천이 내려다보인다.

 

 

사림봉 정상은 열 평쯤 되는 분지(盆地), 한 가운데에 앙증맞은 정상표지석이 서있다. 오늘 산행 중에 만난 유일한 정상표지석이다. 정상은 3면(面)이 숲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내성천 방향만 조망(眺望)이 트이는데, 그것도 시원스레 열리고 있다. 벼랑위에 세워놓은 전망대(展望臺)에서 바라보는 회룡포의 뒷모습은 아까 회룡대에서 내려다보던 풍경(風景)과는 또 다른 매력을 풍겨준다. 겨울의 회색빛 빈들이 쓸쓸하게 펼쳐지고 있다.(이정표 : 용포마을 1.0Km, 장안사 2.3Km/ 마산리 철쭉군락지 200m)

 

 

 

 

사림봉에서 용포마을로 가려면 사림재라는 자그마한 재 하나를 넘어야 한다.(이정표 : 용포마을 0.5Km/ 적석봉 0.8Km, 사림봉 1.1Km) 사림재는 제2전망대와 용포마을의 갈림길이다. 얼음으로 뒤덮인 내성천과 황금빛 백사장을 바라보면서 잘 정비된 산길을 내려서면 용포마을이다. 용포마을은 흑미농사를 짓는 마을이라고 한다. 민박(民泊)집도 있다. 물론 건너편 회룡포마을에도 민박집이 있다. 오늘 산행을 같이 한 아라치양(孃)이 몇 년 전에 이곳에서 민박을 하며 여행을 즐겼던 추억의 장소라고 한다. 마을에 들어서니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있는 굴길이 눈에 들어온다. 여름에는 일년생(一年生) 식물들이 화사하게 피어났었을 것이다. 굴길의 처마머리에는 ‘흙미 마을’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다.

 

 

 

 

 

용포마을 앞 제방을 넘어 ‘제2 뿅뿅다리’로 내려선다. 참으로 길다는 생각이 먼저 떠오른다. 두 사람이 비켜지나가기에는 비좁을 것 같은데, 어떻게 왕래가 가능할까? 그러나 직접 뿅뿅다리를 걸어보면 그런 의문은 금방 풀려버린다. 서로 비켜지나갈 수 있도록 일정 거리마다 철판을 하나씩 더 대어 놓은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뿅뿅다리를 건너면 고운 모래사장이 펼쳐진다. 만지면 으스러질 것 같은 황금빛 백사장의 고운 모래를 밟으면, 발끝으로 전해져 오는 촉감은 산길을 걸을 때와 또 다른 느낌이다.

* 뿅뿅다리, 계단을 내려와 구멍이 퐁퐁 뚫려있는 다리(橋)를 건너면 회룡포 마을에 들어서게 된다. '뿅뿅다리'라고 불리는 다리인데, 다리 이름에 얽힌 사연이 재미있다. 회룡포를 들고나는 유일한 창구(窓口)였던 이곳에 예전에는 통나무다리가 놓였었는데, 여름만 되면 물에 휩쓸려 떠내려갔다고 한다. 그래서 주민들은 구멍이 뚫린 철판으로 다리를 놓았고, 다리에 구멍이 뚫려 있다고 해서 ‘퐁퐁다리’라고 불렀단다. 그러다 어느 기자(記者)가 취재를 나왔다가, 마을 어르신의 억샌 경상도 발음을 잘못 알아듣고 ‘뿅뿅다리’라고 기사(記事)를 쓰게 되었는데, 그 뒤로 이 다리의 이름은 뿅뿅다리로 굳어져 버렸다고 한다. 다리를 지날 때마다 ‘뿅뿅’ 소리가 난다고 해서 뿅뿅다리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손님이 주인을 밀어내버린 격이나, 뿅뿅이 퐁퐁보다 더 입에 착 달라붙으니 그 기자에게 표창장이라도 주어야하지 않을까? 마을에는 뿅뿅다리라는 이름을 가진 다리가 2개가 있는데, 우리가 건너는 다리는 제2 뿅뿅다리로 불린다.

 

 

 

모래사장을 지나 냇가 둑에 오르면 강둑을 따라 또다시 나타나는 굴길, 이번에는 일년생(一年生) 화초(花草) 대신에 살구나무를 씌워 놓았다. 봄을 상상해본다. 살구꽃으로 화사해질 꽃길은 생각만 해도 행복해진다. 오른편 농경지(農耕地) 너머로 회룡포마을 건너다 보인다. 이곳 회룡포는 드라마 ‘가을동화’와 영화 ‘엄마’의 촬영지(撮影地)이다. 가을동화의 은서와 준서는 저 둑에서 자전거를 타며 어린 시절을 보냈고, 영화 엄마에서는 차멀미를 심하게 하는 엄마가 장맛비로 불어난 강물 때문에 뿅뿅다리를 건너지 못해 애를 태웠었다.

* 회룡포 마을은 6만 평쯤 되는 들판에 9가구 15명의 주민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전형적인 영남의 강촌(江村)마을이다. 원래는 ‘의성포’라 불렸다고 한다. 의성에 살던 경주김씨들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의성포라고 불렸는데, 이곳이 물돌이동으로 유명세(有名稅)를 타면서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이웃 고을인 의성군에 가서 회룡포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몇 년 전에 마을 이름을 회룡포로 바꿨다고 한다.

 

 

 

‘육지 속의 섬, 회룡포’라고 쓰인 커다란 표지석 앞에서 왼편으로 내려서서 ‘제1 뿅뿅다리’를 건너면 회룡마을, 산행을 시작했던 용주팔경시비 앞에 도착하는 것으로 오늘 산행은 마무리 된다. 산행을 시작한지 4시간30분이 조금 못되었다.

 

 

독용산(禿用山, 955m)

 

산행일 : ‘11. 12. 10(토)

소재지 : 경상북도 성주군 가천면과 금수면의 경계

산행코스 : 금봉리 시엇골 입구 주차장→시엇골 왼쪽 능선→성터→성곽 능선→독용산 정상→동문→은광폭포→시엇골계곡→주차장 (산행시간 : 4시간30분)

 

함께한 산악회 : 월산악회

 

특징 : 대체로 산이 보여주는 것은 몇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째 산 자체의 아름다움이니, 이는 대체로 바위산들을 얘기할 때 거론된다. 두 번째는 조망(眺望)으로서. 산행을 하면서 다른 산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경관을 보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그 산이 안으로 품고 있는 경관(景觀)으로서, 일로 치면 계곡미(溪谷美)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구분할 때, 독용산 산행은 두 번째와 세 번째를 함께 볼 수 있는 산이라 할 수 있다. 산행을 하면서 보게 되는 가야산 등 주변의 산군(山群)들이 헌걸차고, 독용산이 자랑하는 시어골이 만들어내는 수많은 소(沼)와 담(潭), 그리고 폭포(瀑布)는 자못 빼어나다. 거기다 영남에서 제일 큰 규모라는 독용산성도 볼 수 있으니 가히 일석이조(一石二鳥)의 산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겨울보다는 여름철에 더 어울리는 산이다. 

 

 

산행들머리는 가천면 금봉리 시어골 입구 주차장

중부내륙고속도로 성주 I.C에서 빠져나와 33번국도(國道/ 고령읍 방향)와 59번 국도(김천시 방향)을 이용해서 가천면소재지까지 들어간다. 이곳에서 국도를 벗어나 왼쪽으로 903번 지방도(地方道)를 따라 들어가다. 독용산성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 곳에서 오른편으로 접어들면 산행들머리인 금봉리에 이르게 된다.

 

 

금봉리 ‘시엇골 계곡’의 입구에는 ‘보강 산삼영농조합’이란 팻말이 세워져있고, 간이화장실까지 갖춘 제법 널따란 주차장(駐車場)이 조성되어 있다. 산행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우선 왼편의 다리를 건너 마을로 들어서야 한다. 인가(人家)가 몇 채 보이지만 버려진지 이미 오래인 듯, 인적(人迹)을 찾을 길이 없고, 구멍이 숭숭하게 뚫린 벽(壁)만 남아 있는 폐가(廢家)는 황량하기만 하다.

 

 

 

마을 끄트머리 집 조금 못 미쳐서 왼편으로 난 농로(農路)를 따라 들어가다가 묘지(墓地)가 보이는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등산로는 뚜렷하지만 잡목(雜木)으로 우거져 있어 걷기가 여간 사납지 않다. 산길도 심심찮게 여러 갈래로 나뉘고, 거기에다 오랫동안 쌓여온 참나무 낙엽들이 수북하게 쌓여있다. 까딱하면 엉뚱한 길로 접어들 염려가 있으니, 산악회 리본을 잘 살펴보며 진행해야 할 것이다.

 

 

 

거친 산길을 헤쳐 나가다보면 몇 번의 갈림길을 만나게 되나, 리본이 많이 붙어 있는 길로 진행하면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독도 주의구간이어선지 리본을 많이 달아놓았다. 어쩌면 이 길이 지도에 표기된 옛길일 것이다. 지능선에 올라서면 길은 다시 뚜렷해진다. 산허리를 옆으로 째는 사면(斜面)길을 따라 진행하면 주능선에 올라서게 된다. 중간에 몇 번의 갈림길이 보이지만, 어느 갈림길을 따르더라도 결국 ‘주능선 길’과 합류하기 때문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

 

 

주능선길은 말 그대로 탄탄대로(坦坦大路)다. 마룻금을 따라 이어지는 뚜렷한 길만 쫓으면 어렵지 않게 산행을 이어갈 수 있다. 그러나 계속되는 오르막길은 가파르기 때문에 무척 힘이 든다. 때는 바야흐로 영하(零下)의 겨울이건만 이마에는 땀방울이 비 오듯이 흘러내리고 있다. 간혹 가다 열리는 나뭇가지 사이로 가야산의 산줄기들이 우람하게 펼쳐지고 있다.

 

 

 

주능선을 치고 오르다가 아무런 특징 없이 밋밋하기만 한 741봉을 넘으면 이내 독용산성과 첫 대면(對面)이 이루어지게 된다. 시작은 원래부터 조금은 아쉬운 법, 무너져 있는 성곽(城郭)은 돌무더기 수준으로 왜소하기 짝이없다.

* 독용산성(禿用山城 , 경상북도 지정기념물 제105호) : 수도산의 줄기인 독용산(955m)의 해발800m 능선과 계곡을 잇는 둘레 7.7Km의 포곡(包谷)식 산성이다. 성의 축조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500여년전(年前) 가야시대에 쌓은 것으로 추정되며, 임진왜란의 피난 중에 발견되었고, 조선 숙종 원년(1675)에 관찰사 정중휘의 주청(奏請)으로 개축(改築)하였다. 영남지방에 구축(構築)한 산성 중 가장 규모가 크다고 한다.

 

 

 

옛 성터를 넘으면 등산로는 왼편에 허물어진 옛 성곽(城郭)을 끼고 이어진다. 길은 고저(高低)가 거의 없는 밋밋한 능선 길, 낙엽이 두텁게 쌓인 길은 곱고 유연하다. 성곽 너머로 얼핏 보이는 바위 위에 올라, 가야산의 산군(山群)들을 보기도 하면서 여유롭게 걷다보면 어느새 남문(南門)터에 닿게 된다. 누각(樓閣)이 없는 남문은 한사람이 겨우 통과할 정도의 넓이로 성벽을 갈라놓았다. 암문(暗門)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올바른 표현일 것이다.(이정표 : 독용산 정상 1.5Km, 주차장 2.8Km)

 

 

 

 

 

 

 

남문을 지나면서부터 길은 아예 자동차길(車道)을 연상시킬 정도로 넓고 판판하게 닦여 있다. 이어서 나타나는 북문 터(北門地), 이정표만 볼 것 같으면 남문을 지나면 서문을 건너 뛴 채로, 곧바로 북문으로 이어진다. 원래 성을 지을 때면 문을 4곳에 만드는 것이 일반적인데도, 독용산성은 서문을 만들지 않았단 말인가? 잘잘못은 역사학자(歷史學者)들의 몫으로 남겨놓고, 산행을 이어간다. 남문에서 500m 정도 걸으면 등산로는 널따란 임도를 벗어나 왼편의 능선으로 향하고 있다.

 

 

 

 

 

 

 

 

 

정상은 시멘트로 포장된 작은 헬기장이다. 커다란 정상석에 쓰인 독용산(禿用山), 산 이름이 참으로 특이하다. 첫 글자가 대머리 독(禿)자이니 민둥산이라는 얘기일까? 정상은 산의 이름을 살리려고 작정이나 한 듯이 주위의 나무를 모조리 잘라내서 민둥산으로 만들어 놓았다. ‘저 禿자는 끌어 모을 禿자로서 이 城을 쌓고 백성들을 끌어 모아 성을 지킨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랍니다.’ 후미대장께서 하시는 말씀이다. 정상에 서면 가야산을 비롯한 주변의 산군(山群)들이 산 그리메를 만들어 내고 있다.(이정표 : 북문지 0.5Km, 영천리(중리) 3.5Km, 시엇골 4.7Km/ 동문 1.0Km, 주차장 2.0Km, 시엇골 4.0Km)

 

 

 

 

 

하산은 산성(山城)의 동문(東門) 방향으로 잡는다. 정상에서 진행 방향 정면으로 급하게 내려서는 뚜렷한 길의 왼편은 역시 성벽(城壁)이다. 능선에서 사면(斜面)길로 내려서는 동문 갈림길까지는 10분, 이곳에서는 왼편의 성벽을 따라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곧장 사면(斜面)길로 내려서는 것보다 거리는 약간 멀지만, 독용산 산행에서 결코 빼 놓을 수 없는 성주호의 조망(眺望)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닥에 깔린 진행표시지를 따라 오른편 사면(斜面)길로 내려선다. 널따란 임도(林道)를 따라 걸으면 5분이 채 안되어서 동문을 만나게 된다. 동문은 복원(復元)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듯 단청(丹靑)색깔이 선명하다. 누각의 좌우로는 성곽이 길게 늘어서 있다. 이곳에서 성문을 빠져나가면 산성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동문에서 시엇골로 내려서는 길은 동문으로 올라오는 임도(林道)를 따라 내려가면 된다. 임도는 사람들이 자주 다니지 않은 듯 싸리나무와 가시나무 넝쿨들로 우거져 있어 걷기가 여간 불편하지 않다. 조금 내려가다 만나게 되는 첫 번째 꺾어지는 지점에서 왼편으로 내려선다. 길은 경사(傾斜)가 심해서 내려서기가 만만치 않다. 이번에는 작고 메마른 개울을 건너 사면(斜面)길을 걷다가 이내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내려선다.

 

 

 

성벽에서 시엇골로 내려서는 길은 무척 가파르다. 등산로는 경사(傾斜)를 조금이라도 줄여 보려는 듯 계속해서 갈지(之)자를 만들어 보지만 가파름은 결코 약해지지 않고 있다. 허리를 세우고 내려서는 것은 언감생심(敢不生心), 엉거주춤 내려서다가, 이내 엉덩이를 땅에 붙이고서야 어렵사리 내려설 수가 있다. 몇 번을 엉덩방아를 찧고서야 시엇골에 내려서게 된다.

 

 

 

시엇골에 내려서면 골짜기는 온통 얼음으로 덮여있는데도, 어디선가 싱그러운 물소리가 들려온다. 얼음 아래로 물이 흐르면서 내지르는 소리인 것이다. 제법 수량이 많은 계곡은 수많은 소(沼)와 담(潭)을 만들어 내며 흘러가고 있다.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산길은 계곡을 따라 바로 내려가다가도, 어느 때는 개울을 건너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지능선으로 올라간 뒤, 사면(斜面)길을 따라 이어지기도 한다. 비록 이정표(里程標)는 보이지 않지만 리본이 곳곳에 매달려 있기 때문에 조금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그런대로 어렵지 않게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계곡의 물소리를 벗 삼아 유유자적 발걸음을 옮긴다. 암반(巖盤)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은 꽁꽁 얼어붙어 빙벽(氷壁)을 만들어내고 있고, 속이 훤히 내다보이는 얼음판 아래로 흐르는 맑고 깨끗한 물은 청량감을 더하고 있다. 개울을 벗어나 작은 언덕을 넘어 암벽의 사면(斜面)을 치고 내려서면 오른편에 거대한 얼음벽이 보인다. 바로 은광폭포(瀑布)이다.

 

 

 

시엇골의 골짜기 안에는 겨울과 가을이 공존하고 있다. 고드름이 쇠창살같이 내려 와 있는데, 계곡의 물소리는 우렁차기만 하다. 물길은 얼음으로 두텁게 덮여 있는데도, 비탈진 내리막길을 내려서느라 흘린 땀방울이 춥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계곡의 공기는 따사롭기만 하다. 계곡 양편으로 솟구친 산세는 하늘만 빼꼼히 열어놓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공기가 따스한가 보다.

 

 

 

산행날머리는 시엇골 입구 주차장(원점회귀)

여느 계곡처럼 하류로 내려갈수록 길이 고와지려니 했지만 사정은 나아지지 않는다. 보기 좋게 예상이 빗나간 것이다. 계곡을 따라 내려가며 바위사이를 건너뛸 때도 있고, 또 어떤 때는 계곡을 좌우로 건너다니기도 해야만 한다. 아마 장마철에는 이 길은 이용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고운 것일지라도 오래 보면 싫증이 나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일 것이다. 그 아름답던 시엇골 계곡이 서서히 지루해지기 시작한다. 이제나 저제나 하며 계곡이 끝나길 고대해 보지만 계곡은 쉽사리 끝을 보여주지 않는다. 입에서 육두문자가 나올 즈음에야 계곡이 환하게 열리며 산행을 시작했던 주차장이 그 모습을 드러내 보인다.

 

 

 

청옥산(靑玉山, 1,276.5m)

 

 

산행일 : ‘11. 8. 27(토)

소재지 : 경북 봉화군 석포면과 소천면의 경계

산행코스 : 넛재 → 고산 습지원(高山 濕地園)→ 청옥산 정상→ 두리봉(1,353m) → 백천계곡 → 현불사 (산행시간 : 쉬는 시간 없이 5시간40분)

함께한 산악회 : 월산악회

 

 

특징 : 청옥산은 한마디로 예쁜 산이다. 산세(山勢)가 아름답다는 얘기가 아니다. 산의 정상에 오르기가 수월해서 그런 표현이 어울린다는 얘기이다. 다른 여느 산들과는 달리 이곳에는 소위 ‘깔딱고개’라고 불리는 가파른 오름길이 없다. 해발이 900m가까운 넛재 중턱에서 산행을 시작했다고는 해도 급격한 경사구간 없이 정상을 밟는다는 것은 참으로 독특한 경험일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산에 비해 특별한 아름다움은 보여주지 못하므로 종주산행이 아닌 청옥산만을 찾는 산행은 권하고 싶지 않다.  

 

 

산행들머리는 31번 국도(國道)상에 있는 넛재

중부내륙고속도로 제천 I.C에서 빠져나와 38번국도(國道/ 태백방향)와 31번 국도(봉화)를 차례로 이어달리다보면 태백시를 지나서 봉화군 석포면과 소천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고갯마루인 넛재(해발 895m)에 이르게 된다.

 

넛재에서 태백방향(봉화석포면 방향)으로 약70여미터 내려가면 쉼터가 보인다. 이곳이 산행들머리이다. 등산로 입구의 도로변에는 삶은 옥수수 등을 파는 간이 휴게소가 생겨있다. 요즘 이곳에서 산행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다. 아니라면 이 도로(道路)를 지나다니는 차량의 운전자들이 잠깐 쉬어가는 곳일 터... 휴게소의 뒤편으로 난 희미한 숲길로 들어선다. 산악회에서 매달아 놓은 시그널 몇 개가 바람에 흩날리고 있다. 사람들이 별로 다니지 않은 듯, 잡초에 덮인 오솔길은 무성한 수풀로 뒤덮여 있어 길을 찾기가 만만치 않다. 그저 발끝의 감각만으로 길을 더듬으며 나아간다. 아마도 입구의 간이휴게소는 지나다니는 차량의 운전자들을 위한 쉼터인 모양이다.

 

 

쉼터에서 시작된 등산로는 주능선에 다다를 때까지 등산로라고 부르기보다는 소로(小路), 아니 오솔길이라고 불러야 옳은 표현일 것이다. 초목(草木)들이 우거진 숲을 헤치며 걸어 올라가면 오래지 않아 주능선에 올라서게 된다. 능선에 가까워지면서 점점 커지던 나무들은 어느새 커다란 고목(古木)으로 변해있다.

 

 

 

주능선에 올라서면 길은 고와진다. 전형적인 흑산(肉山)에 고저(高低)가 심하지 않은 능선길은 걷기에 무척 편하다. 거기다가 짙게 우거진 참나무 숲은 햇빛 한 점 스며들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여름 해는 비록 구름(雲) 속에 숨었다 나왔다가를 번복하고 있지만... 싱그러운 숲길에는 상큼한 기운으로 넘쳐나고 있다.

 

 

 

다양한 초록의 스펙트럼을 가진 숲속의 오솔길을 따라 한참을 걸으면 널따란 공터가 보인다. 감시초소(監視哨所)와 무인감시설비, 그리고 ‘간이 화장실’까지 갖춘 쉼터이다. 청옥산이 숨겨둔 ‘비밀의 화원’인 ‘고산 습지원(高山 濕地園)’이란다. 습지원이라고 해도 자연보호를 위한 별다른 시설은 보이지 않는다. 원래 있었던 습지(濕地)를 원형을 해치지 않은 범위에서 정원(庭園)으로 가꾸고 있단다. 정상을 향해 뻗은 나무테크 주변에는 하얀 들국화가 가을을 재촉하고 있다.

 

 

 

‘나무테크 길’을 밟으며 정상으로 향한다. ‘나무테크 길‘ 옆으로도 흙길이 정상으로 향하고 있다. 이곳을 관리하는 산림청에서 조금 전에 길을 정비했는지 바닥에 떨어져 있는 풀잎들이 아직도 싱싱하다. 길 주변에는 ‘며느리 밥풀꽃’으로 불리는 금낭화며 은방울꽃, 범꼬리 등 우리의 들꽃들이 저마다의 자태를 뽐내고 있다.

 

 

 

 

약간의 오르막길을 올라서면 청옥산 정상이다. 정상은 철제(鐵製)의 무인감시설비가 자리 잡고 있고, 정상의 바로 아래에는 헬기장이 조성되어 있다. 청옥산의 정상은 정상표시석(頂上表示石=木)이 세 개나 있는 부자 봉우리이다. 정상은 높은 원시림에 둘러싸여 조망(眺望)은 별로 트이지 않고 있다. 산림청에서 세워놓은 ‘정상표시 말뚝’ 옆의 돌비석에는 ‘새천년 해돋이는 청옥산에서’라고 적혀있는데도 말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이 지났다. 산행지도에 1시간30분으로 적혀있으니 30분을 단축한 셈이다.

 

 

청옥산은 지금은 거의 사라진 산나물 ‘청옥’에서 이름을 따왔다고도 하고, 산아래 옥(玉)광산에서 푸른 옥이 많이 났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지어졌다고도 한다. 강원도 동해의 두타산 옆 청옥산과 혼동되기도 하는 등 사람들의 시선에서 한 발짝 비켜서 있는 은둔의 산이었으나, 백천계곡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청옥산을 찾는 사람들도 첨차로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정상에서 태백산으로 향하는 능선길을 따른다. 능선은 고저(高低)가 크지 않게 오르내림을 계속하고 있다. 아직도 등산로 주변은 온통 참나무 일색, 자작나무와 단풍나무들이 간간이 보이고 있다. 다만 나무들이 아까보다는 더 굵고 더 오래 묵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길가의 고목들은 얼마나 오래 묵었던지 구멍이 뻥 뚫려있는가 하면, 어떤 것은 허리가 댕강 부러져 아치를 만들기도 한다. 청옥산 정상어림이 고산습지여서일까? 오래된 나무들과 바위들이 온통 짙은 녹색의 이끼들로 덮여있다.

 

 

 

 

등산로에 ‘탐방로는 이쪽으로’라고 적힌 표시판(標示板)이 세워져있다. 가리키는 방향이 세 곳이라고 헷갈릴 필요는 없다. 고산 습지원 탐방로를 안내하는 것으로, 등산로와는 무관하니 말이다. 그냥 왼편으로 진행하면 무리 없이 태백산 방향으로 갈 수 있다.

 

 

전형적인 육산임에도 불구하고 두리봉으로 가는 길에는 중간 중간에 바위구간이 있는 곳을 두어 군데 지나가게 된다. 거대하거나 위험하지는 않을지라도 바윗길은 자칫 지루하기 쉬운 능선산행에서 잠깐이나마 눈요기와 스릴이라는 색다른 재미를 선물해 준다.

 

 

 

 

지난주 내내 기상청(氣象廳)의 홈페이지를 수도 없이 들락거렸다. 토요일에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금요일 아침에서야 비가 안 온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고, 부랴부랴 이곳 청옥산 산행을 신청했었다.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난 비(雨)가 내릴 경우에는 사진촬영은 엄두도 못내는 것은 물론, 카메라가 애물단지로 변해버리기 때문이다. 청옥산의 공기는 벌써 서늘해져 있다. 도시(都市)는 아직도 시커먼 아스팔트마저 녹여버릴 듯한 무더위가 마지막 기승(氣勝)을 부리고 있을 터인데도 말이다. 짓눌렀던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새로운 나를 만나기 위해 떠나는 나들이….푸르른 숲속을 거닐며 나무향기에 취하고, 숲속에서 만나는 청량한 바람은 더위에 지친 정신을 맑게 만들어 주고 있다.

 

 

 

 

오르내림이 심하지 않은 능선길이 갑자기 가파르게 내리막길을 만들어내고 있다. ‘어! 왜 이렇게 내려가고 있지?’ 집사람의 목소리에 근심이 가득한 것은, 그만큼 집사람도 산행에 이력(履歷)이 붙어간다는 의미일 것이다. 능선산행에서 내리막은 곧 오르막을 의미한다. 내리막의 끄트머리에서 다시 오르막이 시작되는 것을 결코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왼편 고산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이 나뉘는 삼거리를 지나, 얼마쯤 더 진행하면 안부 사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왼편은 고선계곡, 오른편은 백천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태백산으로 가려면 곧바로 직진하면 된다. 산행을 시작한지 2시간, 청옥산 정상에서 한 시간이 걸렸다. 지도에 표기된 시간보다는 50분을 단축시켰다. 참고로 청옥산을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곳에서 두리봉과 깃대배기봉을 거쳐 부소봉에서 백천계곡으로 하산코스를 잡는다(요즘은 깃대배기봉에서 오른편 어리골을 거쳐 백천계곡으로 하산코스를 잡는 산악회도 있다). 그러나 부소봉까지 거쳐서 내려오기에는 산행시간 너무 길고, 깃대배기봉에서 내려서는 하산코스는 등산로가 희미해서 길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럴 경우에는 고민할 것 없이 이곳 사거리로 되돌아와서 백천계곡으로 하산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 될 것이다.

 

 

 

두리봉으로 오른다. 오늘 산행에서 제일 고약한 구간이다. 2시간 이상을 걷느라 이미 지쳐있는 상태에서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는 일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청옥산에서부터 고도(高度)를 낮추었던 능선은 다시 가파르게 고개를 들고 있는데, 높여야할 고도가 무려 270m 정도나 된다. 두리봉을 향하는 길은 시종 산죽(山竹) 숲을 헤치며 올라야한다. 이곳까지 오는 길에 만났던 산죽들은 대부분 무릎 아래로 깔리는 난쟁이 산죽이었는데, 이곳의 산죽은 어른의 키를 넘길 정도로 웃자랐다. 갑자기 산죽이 누렇게 변색을 시작하더니 얼마안가 완전히 말라죽어있다. 대나무는 삶을 마치기 전에 종족번식(種族繁殖)을 위하여 꽃을 피운다는데, 두리번거려보지만 꽃을 피우고 있는 산죽은 눈에 띄지 않는다.

 

 

 

 

두리봉 정상은 아무 특징이 없는 그저 그렇고 그런 능선상의 한 봉우리일 따름이다. 물론 정상표시석도 없다. 다만 어느 선답자(先踏者)가 물푸레나무에 매달아 놓은 두리봉이라고 적힌 비닐코팅지가 이곳이 두리봉 정상임을 알려주고 있다. 또 매직으로 두리봉이라고 쓴 리본도 나뭇가지에서 나풀거리고 있다. 여기서 더 이상의 진행을 포기하고 발걸음을 돌린다. 집사람이 이곳에 오르는 것을 포기하고 중간에서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깃대배기봉에서 하산길(下山路)를 찾지 못한 선두그룹이 되돌아 오는 것을 본 집사람은 두리봉까지 오르는 것도 포기하고 길가에 주저앉아 버린다. 가고 싶은 사람만 다녀오라면서... 산행을 시작한지 세 시간이 지났다. 지도에 적혀있는 시간보다 1시간을 단축시켰다.

 

 

두리봉에서 10분 정도 되돌아 나오니 산악회 안내표시가 왼편을 가리키고 있다. 서슴없이 왼편으로 내려선다. 이제부터 최악의 사투(死鬪)가 시작된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얼마만큼 걸어 내려가니 움막이 보인다. 난방시설까지 갖추어진 것을 보면 아마 약초꾼들이 살고 있는 모양이다. 움막 위에 보이는 약수터에서 갈증을 달래본다. 한마디로 말해 물맛은 달면서도 청량하다. 감로수(甘露水)가 따로 없다. 움막 뒤로 돌아 능선으로 오르면 또 다른 움막이 보인다. 그리고 여기에서 길은 끊겨있다. ‘그 능선을 따라 10분 쯤 내려가면 등산로가 보일 것입니다’ 길을 찾느라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움막에서 나온 아저씨가 길을 가리켜 준다. 그러나 길은 보이지 않는다. 그냥 무작정 능선을 따라 내려서라는 얘기였던 것이다.

 

 

 

길이 아닌 곳에서 길을 찾다. 나무를 부둥켜안기도 하고, 미끄러지며 엉덩방아도 찧으면서 10분이 아닌 20분 가까이를 내려가서야 계곡을 만날 수 있었다. 아까 아저씨가 10분이라고 한 것은 그분만의 속도(速度)였던 모양이다.

 

 

 

어리골은 말 그대로 원시의 숲이다.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숲속은 서늘함과 어두침침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어리골 계곡(溪谷)을 따라 트레킹을 시작한다. 인적(人跡)이 끊긴지 오래인 듯 길은 희미하다. 다래넝쿨과 칡넝쿨이 길을 막고, 쓰러져있는 고목(古木)들이 그나마 희미하던 길의 흔적(痕迹)까지도 지워버리고 있다. 길은 수없이 계곡을 가로지르게 만든다. 그다지 넓지 않은 계곡이지만 이끼로 뒤덮인 바위를 짚고 건너뛰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다가 하류로 내려오면서 넓어지는 개울은 건너기가 위험해지기까지 한다. 집사람의 얼굴이 차츰 울상으로 변해간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계곡에 질려버린 모양이다. 그런 집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주는 양, 등산로가 갑자기 뚜렷해진다. 콧노래라도 흥얼거려야겠지만 그러기에는 우리는 이미 너무나 지쳐버렸다. 두 시간 동안이나 계곡과 싸웠으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백천계곡으로 더 잘 알려진 청옥산은, 청정한 환경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다. 참나무와 자작나무, 단풍나무 등 각종 활엽수 고목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숲은 열대지역의 정글을 방불케 할 정도로 울창해 깊고 넓은 숲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다. 두터운 부엽토가 깔린 숲 바닥에는 갖가지 야생화가 철따라 피고 진다.

 

 

 

 

 

계곡을 벗어나면 태백산의 부소봉에서 내려오는 길과 만나는 삼거리이다. 이곳에서 부터는 임도(林道)가 백천계곡을 따라 이어진다. 삼거리의 이정표는 산행종점인 현불사까지 3.9Km가 남았음을 알려주고 있다. ‘휴~~’ 집사람 입에서 나오는 한숨소리가 땅이 꺼질지도 모를 정도로 깊고 처량하다. 벌써 5시간을 걸었는데 또다시 1시간 정도를 걸을 생각을 하니 저절로 한숨이 새어나온 모양이다. 그 한숨소리에 내 마음이 편치 않은 건, 그만큼 집사람을 사랑하고 있음이려니... 임도는 일제 강점기(强占期)에 만들어졌다. 금강송을 베어 내가기 위해 만든 산판도로란다. 계곡 주위 깎아지른 절벽의 바위 위에 뿌리내린 아름드리 금강송(金剛松)들의 모습이 장관이다.

* 금강송(金剛松) : 소나무 중에서 으뜸으로 치는 나무로서 속이 노랗다 해서 황장목(黃腸木), 표피가 붉은 빛을 띤다고 해서 적송, 매끈하게 잘 뻗었다고 해서 미인송, 금강송 목재의 집산지가 춘양이어서 붙여졌다는 춘양목 등 여러 이름을 거느린 자랑스러운 토종 나무이다.

 

 

 

산악회에서 주어진 시간 안에 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현불사에 도착하는 것은 불가능(不可能)해진 지 이미 오래다. 이미 주어진 다섯 시간을 훌쩍 넘겨버렸기 때문이다. 같이 걸어 내려오고 있는 일행분과 함께 백천계곡으로 내려간다. 그리곤 홀라당 벗고 물속으로 뛰어들고 본다. 가슴까지 차오르는 물은 시릴 정도로 차갑다. 얼음처럼 차가운 계곡물에 몸을 담그고 있노라면 신선(神仙)이 부럽지 않다. 도착이 조금 늦었다고 밥을 안 주면 어떠랴 지금 이순간만은 이곳이 바로 천국(天國)인데 말이다.

* 백천계곡 : 원시림과 깊은 소(沼)가 많고 태백산을 비롯해 연화봉, 청옥산, 조록바위봉 등의 높은 산에 감싸여 있어 물이 맑고 수온이 낮다. 이곳 백천계곡은 위도 상 다른 지역에는 서식하지 않는 빙하기 어족인 열목어가 사는 세계최남단 지역이다. 그래서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62년에 천연기념물 제74호로 지정된 바 있다.

 

 

산행날머리는 현불사 주차장

땀으로 찌든 몸뚱이를 깨끗이 씻고 다시 길을 나선다. 차량(車輛)의 진입을 막고 있는 차단기가 길을 가로막고 있다. 차단기를 넘으면 임도는 시멘트 포장도로로 바뀌고, 길가엔 드문드문 늘어선 민가(民家)들도 보인다. 민가 주변의 생각 외로 넓은 텃밭엔 옥수수와 콩, 그리고 고랭지 배추가 튼실하게 자라고 있다. 계곡을 가로지르며 건너편 농가(農家)로 이어지고 있는 나무판자로 만든 다리가 이색적이다. 조록바위봉으로 오르는 길을 알려주는 이정표를 지나면 저 만큼에 오늘 산행이 마무리되는 현불사가 보인다.

 

 

현불사(現佛寺) : 대승불교(大乘佛敎)를 지향하는 불승종(佛乘宗)을 창종(創宗)한 설송스님이 1980년에 세운 사찰로서 불승종의 총본산이다. 불승종의 소의경전(기본 가르침으로 삼고 있는 경전)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법화경)으로서 기도를 통해 깨우침을 얻을 수 있다는 ‘타력신앙(아미타불의 힘을 빌어 깨달음을 얻는 것)’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경전이다. 설송스님의 법력이 높다고(예언?) 소문이 나서 수많은 政官界인사들이 이곳을 찾기도 했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