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수산(嵐峀山, 437.7m)-대령산(大嶺山,652,4m)
산행일 : ‘15. 3. 14(토)
소재지 : 경북 울진군 근남면과 서면, 그리고 원남면의 경계
산행코스 : 울진농업기술센타→금강송능→남수산→굴구지목재→소령산→대령산→기양저수지 위 공터(산행시간 : 4시간30분)
함께한 산악회 : 청마산악회
특징 : 오늘 산행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소나무와 함께 한 산행’이라 할 수 있다. 소나무로 시작해서 소나무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산이 온통 소나무로 뒤덮여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잘생겼기로 소문난 금강송(金剛松)들이다. 다만 수령(樹齡)이 오래되지 않아 금강송 특유의 매력은 좀 덜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또 다른 특징을 들라면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라는 점이다. 덕분에 특별한 볼거리는 제공하지 못한다. 그러나 대신 산길이 순하다는 장점이 있다. 거기다 ‘산’이라는 고유의 이름이 붙은 봉우리들을 제외하고는 산길이 모두 사면(斜面)으로 나있기 때문에 힘도 들지 않는 편이다. 웰빙(well-being)산행과 힐링(Healing)산행을 겸할 수 있는 산들인 것이다. 외진 산골에서 이런 산을 만났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 산행들머리는 울진농업기술센터(울진군 원남면 매화리)
동해고속도로의 종점인 동해 I.C에서 내려와 7번 국도를 타고 울진읍까지 일단 온다. 이어서 울진읍 소재지를 지나 조금 더 달리면 만나게 되는 노음교차로(울진군 근남면 노음리)를 통과하자마자 오른편으로 빠져나오면 성류굴교차로(근남면 구산리)이다. 이곳 교차로에서 왼편 원남로를 따라가다 몽천삼거리(원남면 금매리)에서 오른쪽에 보이는 몽천교(橋)를 건넌 후, 곧바로 좌회전하여 매화매실길을 따라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산행들머리인 ‘울진군농업기술센터’에 이르게 된다.
▼ 들머리는 농업기술센터 정문의 맞은편 길 건너에 세워진 정자(亭子)의 뒤편에서 열린다. 정자를 막 지나려는데 누군가가 안내판 하나를 가리켜 준다. ‘주차금지’ 안내판인데, 그 아래에 ‘가지고 온 차량은 농업기술센터 주차장에 세울 수 있다’고 적혀있다. 그동안 우리가 보아오던 안내판들은 오로지 ‘주차금지’라는 문구 하나가 다였다. 어디다 세울지는 차량 소유자의 몫으로 미루면서 말이다. ‘차를 세우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만 달성하면 된다.’는 이기주의적인 발상에서다. 그러나 이곳은 주차할 수 있는 장소를 미리 정해놓고 주차를 금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요즘의 화두(話頭)인 ‘고객위주의 서비스 제공’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서비스를 제공해준 울진군청 관계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 산길은 초입부터 사람들의 기를 죽이고 본다. ‘허리를 곧추세우다’라는 표현이 생각날 정도로 엄청나게 가파른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은 조금의 누그러짐도 없이 계속해서 위로 향한다. 경사(傾斜)가 너무 심한 곳에서는 이리저리 갈지(之)자를 만들어가면서 말이다. 이런 가파름은 15분 후에 만나게 되는 제1쉼터(이정표 : 정상 1,700m)에 이를 때까지 계속된다. 쉼터에 이를 때쯤이면 다들 숨이 턱에 걸려있다. 쉼터에 놓아둔 벤치가 완벽하게 빛나는 순간이다. 헐떡이는 숨을 고르기에 안성맞춤이기 때문이다.
▼ 제1쉼터를 지나면서 산길은 그 기세(氣勢)를 현저하게 누그러뜨린다. 오름길이 계속되지만 완만하기 때문에 조금도 힘들지 않다는 얘기이다. 대신 소나무 숲이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그렇다고 해서 올라오는 길에 소나무가 없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런데도 본격적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1쉼터를 지나면서 금강송(金剛松) 고유의 외형을 지닌 소나무들이 밀집해있기 때문이다.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 오른 황갈색의 소나무들이 말이다. 참고로 금강송은 ‘금강산 소나무’의 줄임말이다. 그리고 소나무를 자세히 보면 그 껍질이 황갈색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은 ‘황장목(黃腸木)’, 그 외에도 봉화에서 나는 소나무 목재가 춘양역으로 집결했다가 전국으로 팔려나갔다고 해서 춘양목(春陽木), 팔등신처럼 잘 빠졌다고 해서 ‘미인송(美人松)’이라고도 불린다.
▼ 1쉼터에서 2쉼터까지는 10분 정도, 코끝을 스치는 솔향기에 취해 걷다보면 금방이다. 2쉼터(이정표 : 정상 1,010m)에는 벤치 대신에 평상이 놓여 있는 정도, 별다른 특징은 없다. 당연히 그냥 통과해버린다. 시간에 여유라도 있으면 늘씬한 소나무 그늘에서 복식호흡(腹式呼吸)이라도 해보련만 주어진 시간이 그다지 넉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길가는 온통 소나무들 천지, 짙은 솔향이 코끝을 스치고 있다. 그 향기 속에는 그렇게나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phytoncide)가 듬뿍 묻어 있을 것이다. 소나무가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 중의 하나이니까 말이다. 이런 길에서는 구태여 발걸음을 서두를 이유가 없다. 발걸음은 더디게 그리고 호흡은 크게 하면서 느긋하게 걸어본다. 코끝을 맴돌던 솔향이 온몸으로 펴져나간다. 그리고 심신(心身)은 한없이 맑아진다. 피톤치드의 효과가 아닐까 싶다. 피톤치드는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나무들이 각종 병충해(病蟲害)에 저항하기 위해 배출하는 분비물(分泌物)을 말한다. 이 물질은 사람들에게도 많은 도움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살균작용은 물론이고, 장과 심폐기능을 강화시켜주는 한편, 스트레스 해소에도 뛰어난 효능이 있다는 것이다.
▼ 2쉼터에서 조금만 더 진행하면 임도(이정표 : 정상 730m)로 내려서게 된다. 이곳에서는 왼편으로 방향을 잡는다. 이어서 포장 임도를 따라 얼마간 오르면 임도가 오른편으로 90도(度) 가까이 휘는 지점에서 3쉼터(이정표 : 정상 370m)를 만나게 된다. 산길은 쉼터의 뒤편으로 열린다. 임도를 계속 따를 경우에는 본래의 남수산 정상을 점령하고 있는 군부대와 마주치게 되니 주의할 일이다. 하긴 쉼터에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을 테지만 말이다. 2쉼터에서 3쉼터까지도 10분 정도가 걸렸다.
▼ 3쉼터를 지나면서 산길은 다시 가파르게 변한다. 그렇다고 힘들다고 생각될 정도로 가파르지는 않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다가 10분쯤 후에는 남수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반반한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은 큼지막한 정상표지석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런데 한자로 적힌 이름이 흔치않은 글자들이다. 남기(嵐氣 : 산속에 생기는 아지랑이 같은 기운) 남(嵐)자에 산굴(산속에 있는 동굴) 수(峀), 두 글자 모두 처음 보는 글자인 것이다. 만일 이곳이 남수산인줄 몰랐더라면 읽느라 골머리께나 썩혔을 듯 싶다. 아무튼 산속의 동굴에서 아지랑이 같은 푸르스름한 기운이 피어오르는 산이라니 그만큼 아름답다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아무리 봐도 아름답다는 느낌이 들지 않은 것을 보면 아무래도 내 감성이 메말라 있는 모양이다. 참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할 것이 하나 있다. 정상표지석이 세워져 있는 봉우리의 실제 이름이다. 이곳을 ‘남봉’으로 표기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정상에 세워진 이정표에는 ‘남수산(가진봉)’이라고 적혀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지자체(地方自治團體)에서 표기한 ‘가진봉’에 더 무게를 두어야하지 않을까 싶다.
▼ 빗돌의 뒷면에는 남수산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사연과 격암(格菴) 남사고(南師古 : 1509~1571)선생이 어린 시절 이곳에서 공부를 하였다고 적어 놓았다. 격암(格庵)은 남수산의 인근에 있는 근남면 수곡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효행과 청렴으로 이름났으며, 평생 소학(小學)을 즐겨 읽었고, 역학(易學)·풍수(風水)·천문(天文)·복서(卜筮)·관상(觀相)의 비결에 도통하여 예언이 꼭 들어맞았다고 한다. 특히 풍수학(風水學)에 조예가 깊어 전국의 명산을 찾아다니며 많은 일화를 남겼다. 1709년(숙종35) 울진(蔚珍)의 향사(鄕祠)에 배향되었으며 문집으로는 격암일고(格庵逸稿)가 있다. 남사고(南師古)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남사고비결(南師古秘訣)이라고도 불리는 격암유록(格菴遺錄)이란 예언서이다. 이 책은 1977년에 처음 소개되고 1987년에 처음 번역되어 출간된 한국의 역사서이자 예언서로, 총 6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남사고가 어린 시절 ‘신인(神人)’으로부터 전수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현재 대한민국의 역사학계에서는 검토할 가치가 없는 위서(僞書)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현재 전해지는 것은 1977년 이도은(李桃隱, 본명 이용세, 1907년~1998년)이 필사(筆寫), 기증한 것으로,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 정상에서 오늘 산행에서 처음으로 시야(視野)가 트인다. 주변의 나무들 때문에 빈약하기 짝이 없지만 말이다. 정상석 옆에 놓인 벤치에 앉아 조망(眺望)을 즐겨본다. 늘어진 소나무 가지 사이로 올망졸망한 산들이 엿보이지만 어떤 산인지는 분간할 수가 없다. 그저 맨 처음 시야가 열렸다는데 만족하고 대령산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 남수산에서 2~3분쯤 진행하면 잘생긴 소나무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 널따란 분지(盆地)가 나타난다. 삼각점(울진 303 재설 2004)이 설치되어 있는 이곳은 아주 유서 깊은 곳이다. 정상표지석의 뒷면에 적혀있던 남사고(南師古)선생이 공부했다는 장소가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다. 이런 인연을 되살리고 싶었던지 잔디밭 한쪽에 평상(平床)까지 만들어 놓아 쉼터를 조성해 놓았다. 옛날에는 이곳에 ‘격암(남사고)선생 학문터’라는 팻말이 매달려 있었다는데 우리가 찾았을 땐 눈에 띄지 않았다.
▼ 부드러운 능선을 따라 10분 정도 걸으면 ‘굴구지사거리’(이정표 : 대령산 6.6Km/ 연시골 지품동 1.2Km/ 굴구지 0.7Km/ 남수산 1.2Km)이다. 왼편은 기양리 지품동마을로 내려가는 길, 대령산은 물론 계속해서 능선을 타야 한다. 산길은 한마디로 곱다. 부드러운 흙길에다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되는 능선은 경사(傾斜)까지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거기다 한술 더 떠서 길바닥에는 솔가리(소나무 落葉)까지 수북하게 쌓여 있다. 폭신폭신한 것이 마치 양탄자 위를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이다.
▼ ‘굴구지사거리’를 지나면서 산길은 완만한 오르막길로 변한다. 그리고 10분쯤 후에는 능선안부에서 ‘기양1리 갈림길’(이정표 : 대령산 5.8Km/ 기양1리 2.1Km/ 남수산 2Km)을 만나게 된다. 대령산으로 가려면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크게 방향을 틀어야 한다. 아까 산길의 특징을 설명하면서 ‘곱다’라는 표현을 썼다. 그러나 지금 걷고 있는 산길은 그 표현만으론 부족하다. 거기에 ‘착하다’라는 표현을 포함시켜야 할 정도로 산길은 구태여 능선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고만고만한 산봉우리들이라서 오른다고 해봐야 그다지 힘들 것 같지도 않은데 산길은 어느 것 하나 오르는 법이 없이 모두다 산의 사면(斜面)을 헤집으며 나있다. 그러다보니 마치 평지를 걷는 것과 같이 편한 길이 계속되는 것이다. ‘송이 길이라서 그럴 것입니다.’ 같이 걷고 있던 갑장(甲長) 최근행사장이 알려주신다. 송이버섯을 따러 다니는 지역 주민들이 송이 운반을 해서 만든 길이라서 그렇다는 것이다.
▼ ‘솔향이 참 짙죠? 건강에 좋다는 피톤치드도 많을 것이고’ 오늘 답사하고 있는 산에 대한 최사장의 예찬론이다. 어쩌면 오늘의 산행코스는 그가 추천했지 않았나 싶다. 내 생각도 그와 같다. 오늘 걷는 산길은 곱고 착해서 걷는데 조금도 무리가 없다. 한마디로 웰빙(well-being)산행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능선은 온통 소나무로 가득하다. 그 소나무들은 살균작용은 물론이고 장과 심폐기능까지 강화시켜준다는 피톤치드(phytoncide)를 몽땅 배출시켜줄 테니 이는 힐링(Healing)산행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다 외진 곳에 숨어 있는 산들이다 보니 개인적으로는 쉽게 찾을 수도 없다. 당연히 산행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빈자리가 많았으니 이해가 안가는 일이다. 만일 산을 추천한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안타까웠겠는가.
▼ ‘기양리갈림길’에서 15분 정도를 더 걸으면 나뭇가지를 얼기설기 엮어 놓은 것이 보인다. 만일 나무들 위로 천막이라도 칠 경우에는 어엿한 막사(幕舍)로 변할 것 같다. 굴뚝이 세워진 것으로 보아 온돌까지 제대로 갖춘 막사 말이다. 지도에 보면 ‘송이 움막’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아마 인근 주민들이 송이채취를 하면서 임시 숙소로 사용하는 시설인 모양이다.
▼ 송이움막을 지나면 길가 양쪽에 비닐 끈이 매어진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끈은 등산로를 따라 끝도 없이 이어진다. 송이버섯을 채취하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를 나타내는 금(禁)줄이다. 그만큼 이 부근에 송이버섯이 많다는 증거일 것이고, 방금 전에 보았던 ‘송이움막’의 용도가 새삼 실감이 나는 순간이다.
▼ 송이움막에서 소령산 가는 구간은 제법 길다. 그러나 힘들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는 구간이다. 산길이 오르내림이 거의 없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지루하다는 느낌도 들지 않는다. 이 구간에서 제대로 된 금강송들과의 조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드디어 수백 년은 묵었음직한 굵고 늙은 소나무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 오른 것이 금강송(金剛松)의 매력을 한껏 발산하고 있다. 훌륭한 눈요깃감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안타까운 풍경도 눈에 띈다. 눈에 띄는 늙은 소나무들이 하나같이 속살을 허옇게 드러내놓고 있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수난사(受難史)를 보고 있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눈에 보이는 저 흔적들은 일제 때 송진을 채취하느라 마구 벗기고 할퀸 상처들이기 때문이다.
▼ 어둑한 숲의 터널에서 진한 솔향기에 킁킁거리다가, 불현듯 길가의 금강송(金剛松)들과 교감(交感)을 나눠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문득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개미’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 페르몬(Pheromone)은 과연 무엇일까? 그 페르몬을 어떻게 활용하면 저 금강송과 대화가 가능할까?
▼ 이 부근에서 조망(眺望)까지도 열린다. 능선에 가득한 나무들에 가린 탓에 빈약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오른쪽으로 시야(視野)가 트이면서 멀리 천축산을 비롯한 왕피천 계곡 방면이 눈에 들어온다.
▼ ‘송이움막’을 지난 지 30분쯤 후, 소령산이 이쯤이다 싶은데 앞에 가던 최사장이 오른편에 보이는 산이 ‘소령산’이란다. 그가 알려주는 봉우리로 향한다. 그러나 산길은 흔적조차 희미하다. 아마 소령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그만큼 드물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아니면 소령산이 어디 있는 줄도 모르고 그냥 지나쳐버렸을 것이고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 산행을 같이한 일행들 대부분도 소령산을 그냥 지나쳐버렸다고 한다. 모르고 지나쳤음은 물론이다.
▼ 잡목(雜木)을 헤치고 올라선 소령산(해발 약 590m)은 의외로 실망스럽다. 돌무더기만 조그맣게 쌓여있을 따름이고 정상표지석은 물론, 그 흔한 이정표 하나 세워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냥 돌무더기만 촬영할 경우 정상인줄도 모를 것 같아 김진수선배께 포즈(pose)를 부탁해본다. 이제야 겨우 조금이나마 느낌이 온다.
▼ 소령산을 오른 후에는 아까 소령산으로 오를 때 헤어졌던 분기점으로 다시 되돌아 내려와야 한다. 삼거리에서 몇 걸음만 더 걸으면 이번에는 이정표까지 갖춘 어엿한 삼거리(이정표 : 대령산 3.4Km/ 기양3리 문니골 3.6Km/ 남수산 4.4Km)를 만난다. 그런데 이정표가 ‘소령산삼거리’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소령산으로 올라가는 들머리에서 별로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들머리를 찾기는 불가능할 것으로 보이는 지점에다 ‘소령산’이라는 이름을 붙여놓은 것이다. 그것도 소령산으로 가는 방향은 표시조차 하지 않았다. 참고로 이곳 삼거리는 울진군의 3개면(근남면, 원남면, 서면)이 서로 경계를 맞대고 있는 곳이라고 한다.
▼ 삼거리를 지나면서 산길은 가파른 내리막길로 변한다. 그것도 심하다 싶을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다행이도 그 거리는 짧다. 10분이 채 안되어서 능선안부에 있는 ’왕피리 갈림길‘(이정표 : 대령산 2.2Km/ 왕피리 속사 1.2Km/ 남수산 5.6Km)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올라가야할 산길의 가파름에 놀라 숨을 고르려는데 김선배께서 산행후기의 제목을 추천해 주신다. ’소령과 대령은 있으나 중령이 없는 산으로 하면 어떻겠느냐?’는 것이다. ‘옳다구나’며 나도 모르게 무릎을 친다. 지도(地圖)를 보면서 뭔가 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그의 말을 듣고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 오르는 산들은 ‘재’ 령(嶺)를 쓰고 있으니 정확히 말해서 군인들의 계급은 아니다. 그러나 크고(大), 작음(小)이 있다면 응당 가운데(中)도 있어야 하는 것은 상식이리라. 그래서 뭔가 빠진 것처럼 허전했던 모양이다. 나중에 산행을 마치고 이 지역 주민에게 물어보니 ‘중령산’이 있기는 하단다. 다만 주능선에서 약간 비켜나 있지만 말이다.
▼ 대령산으로 오르는 길은 가파른 오르막길로 시작된다. 급경사(急傾斜)로 한참을 내려왔으니 그만큼, 아니 대령산이 소령산보다 더 높으니 그보다 더 많이 치고 오르려면 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이도 산길은 오름길만을 고집하지는 않는다. 가끔은 중간 중간에 완만(緩慢)한 구간도 선보인다. 마치 가픈 숨이라도 고르라며 선심이라도 쓰듯이 말이다.
▼ 25분 정도를 숨이 턱에 차도록 치고 오르면 드디어 대령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그다지 넓어 보이지 않는 정상에는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고 ‘대령산’이라는 이름표를 부여받은 이정표(기양저수지 2.9Km/ 고초령 3.2Km/ 남수산 7Km)가 이를 대신하고 있다. 그 외에도 삼각점과 허술하게 쌓아올린 돌탑이 보일뿐 특별한 볼거리는 제공하지 못한다. 참 이정표에 매달려있는 검은색 ‘정상표지판’을 빼먹을 뻔했다. 대구 신암산악회의 김문암씨가 제작한 것으로 정상석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데도 말이다.
▼ 정상에 서면 울진 앞바다 방향으로만 시야(視野)가 열린다. 나머지 방향은 나무들이 두텁게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다. 저 멀리에서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는 산은 어쩌면 현종산(417m)일 것이다. 그 위에 보이는 시설물은 통신사의 중계탑일 테고 말이다.
▼ 정상에서 길은 기양저수지와 고초령으로 나뉜다. 우리가 하산지점으로 잡은 ‘무릉관광농원’은 원남면 갈면리에 있다. 또 한편으론 기양저수지의 상류에 위치하고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기양저수지’방향으로 내려서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린 고초령방향으로 내려선다. 선두대장의 방향지시지를 따라야하는 숙명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길은 수난의 길임을 알아차리는 데는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하산을 시작하면 잠시 후에 헬기장을 만나게 된다. 이곳까지는 선답자들의 기록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비록 그들이 기록한 시간(5분)보다는 짧은 시간에 도달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는 후기의 기록과는 확연하게 다른 풍경들이 펼쳐진다.
▼ 고초령으로 가는 능선은 작은 봉우리들을 오르내리면서 이어진다. 대령산에 올 때까지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사면(斜面)으로 길이 나있던 아까보다는 훨씬 더 힘이 든다는 얘기이다. 거기다 산길 또한 또렷하지가 않다. 길의 흔적은 있지만 잡목(雜木)들이 곳곳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아마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가끔가다 눈에 띄는 산악회의 시그널(signal)들을 보며 진행방향을 가늠할 수 있다는 점이다.
▼ 정상에서 내려선지 30분쯤 되었을까 방향표시지가 왼편으로 향하고 있다. 산악회의 시그널들은 오른편에 붙어있는데도 말이다. 이때부터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다. 길은 아예 보이지도 않은데다 온통 잡목(雜木)들로 가득 차있어 헤치고 나가다보면 싸대기를 얻어맞기 일쑤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능선에 소나무들이 가득하다는 점이다. 만일 심신을 맑게 해주는 솔향도 없었더라면 육두문자(肉頭文字)를 내뱉으며 걷기에 딱 좋은 코스인 것이다. 하여간 이 길이 정상적인 코스가 아닌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다른 이들이 보았다는 무덤이나 ‘송이 움막’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 왼편으로 방향을 튼 지 20분쯤 되면 저만큼 아래에 폐가(廢家)가 나타난다. 주인이 오래 전에 떠나버린 듯 집은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고, 마당을 점령하고 있는 잡초(雜草)들은 어른의 키를 훌쩍 넘길 정도다. 폐가 앞을 지나면 곧이어 임도에 내려서게 된다. 대령산 정상에서 하산을 시작한지 거의 한 시간이나 지났다.
▼ 임도는 가도 가도 끝이 없다. 그렇다고 볼거리도 없다. 자칫 여름철에라도 찾았다면 죽음의 구간이라 부르기에 딱 좋은 구간이다. 그래도 어쩔 것인가.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편하게 가져야만 할 일이다. 짜증스러운 마음은 품으면 품을수록 더 깊어지기 때문이다. 그 뒤는 즐거웠던 산행이 최악으로 변해버릴 것이고 말이다. 함께 걷는 일행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길가 암벽(巖壁)에 적혀있는 시구(詩句)를 읽는 여유도 부려본다. 청산영흑벽계수(靑山影黑 碧溪水), ‘청산은 검은 그림자요 시냇물은 푸르게 빛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뒤의 세 구절은 문맥(文脈)의 연결을 시킬 수가 없다. 글씨가 희미해서이다. 아무튼 끄트머리에는 운곡(雲谷)이라고 적혀있다. 송(宋)의 대학자 주희(朱憙)의 호가 운곡산인인데, 설마 그의 작품은 아니겠지?
▼ 임도를 따른 지 30분쯤 되면 왼편 벼랑에 로프가 매달려 있는 것이 보인다. 아마 대령산 정상에서 ‘기양저수지’ 방향으로 내려섰을 경우 이곳으로 내려오게 되는 모양이다. 벼랑의 생김새나, 날머리인 갈면리 동막마을로 내려가는 오솔길이 연결된다는 점이 선답자들의 글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 산행날머리는 기양저수지 위 공터
로프에서 몇 걸음만 옮기면 임도가 왼편으로 급하게 꺾이는 지점에서 오른편으로 오솔길 하나가 나타난다. 날머리인 동막마을로 내려가는 길이다. 그리고 이 길은 잠시 후에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러나 선두의 방향표시지는 왼편을 가리키고 있다. 오른편으로 가는 길이 옳은데도 말이다. 오늘 산행에서 두 번째로 맞는 위험한 구간이다. 가파른 비탈이 미끄럽기까지 한데, 거기다 길까지 새로 열어야 하기 때문이다. 더 이상을 버티지 못하겠는 듯 집사람이 공중으로 부양을 시작한다. 그리고 꽈당 엉덩방아로 이어진다. 다행이 부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아팠을 것이다. 비탈길을 내려서면 산행날머리인 동막마을(원남면 갈면리)이다. 오늘 산행은 총 4시간50분이 걸렸다. 중간에 간식을 먹느라 쉬었던 시간을 감안한다면 4시간30분이 걸린 셈이다. 버스가 주차되어 있는 기양저수지 위의 공터까지는 5분 조금 못되게 더 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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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어난 산세에도 불구하고 버림받은 청계산-대궐터산('15.2.24) (0) | 2015.03.02 |
영남알프스의 끝자락에 있지만 독립된 산, 옹강산('15.1.24) (0) | 2015.0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