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수산(嵐峀山, 437.7m)-대령산(大嶺山,652,4m)

 

산행일 : ‘15. 3. 14()

소재지 : 경북 울진군 근남면과 서면, 그리고 원남면의 경계

산행코스 : 울진농업기술센타금강송능남수산굴구지목재소령산대령산기양저수지 위 공터(산행시간 : 4시간30)

함께한 산악회 : 청마산악회

 

특징 : 오늘 산행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소나무와 함께 한 산행이라 할 수 있다. 소나무로 시작해서 소나무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산이 온통 소나무로 뒤덮여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잘생겼기로 소문난 금강송(金剛松)들이다. 다만 수령(樹齡)이 오래되지 않아 금강송 특유의 매력은 좀 덜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또 다른 특징을 들라면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라는 점이다. 덕분에 특별한 볼거리는 제공하지 못한다. 그러나 대신 산길이 순하다는 장점이 있다. 거기다 이라는 고유의 이름이 붙은 봉우리들을 제외하고는 산길이 모두 사면(斜面)으로 나있기 때문에 힘도 들지 않는 편이다. 웰빙(well-being)산행과 힐링(Healing)산행을 겸할 수 있는 산들인 것이다. 외진 산골에서 이런 산을 만났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산행들머리는 울진농업기술센터(울진군 원남면 매화리)

동해고속도로의 종점인 동해 I.C에서 내려와 7번 국도를 타고 울진읍까지 일단 온다. 이어서 울진읍 소재지를 지나 조금 더 달리면 만나게 되는 노음교차로(울진군 근남면 노음리)를 통과하자마자 오른편으로 빠져나오면 성류굴교차로(근남면 구산리)이다. 이곳 교차로에서 왼편 원남로를 따라가다 몽천삼거리(원남면 금매리)에서 오른쪽에 보이는 몽천교()를 건넌 후, 곧바로 좌회전하여 매화매실길을 따라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산행들머리인 울진군농업기술센터에 이르게 된다.

 

 

 

들머리는 농업기술센터 정문의 맞은편 길 건너에 세워진 정자(亭子)의 뒤편에서 열린다. 정자를 막 지나려는데 누군가가 안내판 하나를 가리켜 준다. ‘주차금지안내판인데, 그 아래에 가지고 온 차량은 농업기술센터 주차장에 세울 수 있다고 적혀있다. 그동안 우리가 보아오던 안내판들은 오로지 주차금지라는 문구 하나가 다였다. 어디다 세울지는 차량 소유자의 몫으로 미루면서 말이다. ‘차를 세우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만 달성하면 된다.’는 이기주의적인 발상에서다. 그러나 이곳은 주차할 수 있는 장소를 미리 정해놓고 주차를 금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요즘의 화두(話頭)고객위주의 서비스 제공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서비스를 제공해준 울진군청 관계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산길은 초입부터 사람들의 기를 죽이고 본다. ‘허리를 곧추세우다라는 표현이 생각날 정도로 엄청나게 가파른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은 조금의 누그러짐도 없이 계속해서 위로 향한다. 경사(傾斜)가 너무 심한 곳에서는 이리저리 갈지()자를 만들어가면서 말이다. 이런 가파름은 15분 후에 만나게 되는 제1쉼터(이정표 : 정상 1,700m)에 이를 때까지 계속된다. 쉼터에 이를 때쯤이면 다들 숨이 턱에 걸려있다. 쉼터에 놓아둔 벤치가 완벽하게 빛나는 순간이다. 헐떡이는 숨을 고르기에 안성맞춤이기 때문이다.

 

 

 

1쉼터를 지나면서 산길은 그 기세(氣勢)를 현저하게 누그러뜨린다. 오름길이 계속되지만 완만하기 때문에 조금도 힘들지 않다는 얘기이다. 대신 소나무 숲이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그렇다고 해서 올라오는 길에 소나무가 없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런데도 본격적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1쉼터를 지나면서 금강송(金剛松) 고유의 외형을 지닌 소나무들이 밀집해있기 때문이다.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 오른 황갈색의 소나무들이 말이다. 참고로 금강송은 금강산 소나무의 줄임말이다. 그리고 소나무를 자세히 보면 그 껍질이 황갈색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은 황장목(黃腸木)’, 그 외에도 봉화에서 나는 소나무 목재가 춘양역으로 집결했다가 전국으로 팔려나갔다고 해서 춘양목(春陽木), 팔등신처럼 잘 빠졌다고 해서 미인송(美人松)’이라고도 불린다.

 

 

1쉼터에서 2쉼터까지는 10분 정도, 코끝을 스치는 솔향기에 취해 걷다보면 금방이다. 2쉼터(이정표 : 정상 1,010m)에는 벤치 대신에 평상이 놓여 있는 정도, 별다른 특징은 없다. 당연히 그냥 통과해버린다. 시간에 여유라도 있으면 늘씬한 소나무 그늘에서 복식호흡(腹式呼吸)이라도 해보련만 주어진 시간이 그다지 넉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길가는 온통 소나무들 천지, 짙은 솔향이 코끝을 스치고 있다. 그 향기 속에는 그렇게나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phytoncide)가 듬뿍 묻어 있을 것이다. 소나무가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 중의 하나이니까 말이다. 이런 길에서는 구태여 발걸음을 서두를 이유가 없다. 발걸음은 더디게 그리고 호흡은 크게 하면서 느긋하게 걸어본다. 코끝을 맴돌던 솔향이 온몸으로 펴져나간다. 그리고 심신(心身)은 한없이 맑아진다. 피톤치드의 효과가 아닐까 싶다. 피톤치드는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나무들이 각종 병충해(病蟲害)에 저항하기 위해 배출하는 분비물(分泌物)을 말한다. 이 물질은 사람들에게도 많은 도움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살균작용은 물론이고, 장과 심폐기능을 강화시켜주는 한편, 스트레스 해소에도 뛰어난 효능이 있다는 것이다.

 

 

2쉼터에서 조금만 더 진행하면 임도(이정표 : 정상 730m)로 내려서게 된다. 이곳에서는 왼편으로 방향을 잡는다. 이어서 포장 임도를 따라 얼마간 오르면 임도가 오른편으로 90() 가까이 휘는 지점에서 3쉼터(이정표 : 정상 370m)를 만나게 된다. 산길은 쉼터의 뒤편으로 열린다. 임도를 계속 따를 경우에는 본래의 남수산 정상을 점령하고 있는 군부대와 마주치게 되니 주의할 일이다. 하긴 쉼터에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을 테지만 말이다. 2쉼터에서 3쉼터까지도 10분 정도가 걸렸다.

 

 

 

 

3쉼터를 지나면서 산길은 다시 가파르게 변한다. 그렇다고 힘들다고 생각될 정도로 가파르지는 않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다가 10분쯤 후에는 남수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반반한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은 큼지막한 정상표지석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런데 한자로 적힌 이름이 흔치않은 글자들이다. 남기(嵐氣 : 산속에 생기는 아지랑이 같은 기운) ()자에 산굴(산속에 있는 동굴) (), 두 글자 모두 처음 보는 글자인 것이다. 만일 이곳이 남수산인줄 몰랐더라면 읽느라 골머리께나 썩혔을 듯 싶다. 아무튼 산속의 동굴에서 아지랑이 같은 푸르스름한 기운이 피어오르는 산이라니 그만큼 아름답다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아무리 봐도 아름답다는 느낌이 들지 않은 것을 보면 아무래도 내 감성이 메말라 있는 모양이다. 참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할 것이 하나 있다. 정상표지석이 세워져 있는 봉우리의 실제 이름이다. 이곳을 남봉으로 표기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정상에 세워진 이정표에는 남수산(가진봉)’이라고 적혀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지자체(地方自治團體)에서 표기한 가진봉에 더 무게를 두어야하지 않을까 싶다.

 

 

 

빗돌의 뒷면에는 남수산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사연과 격암(格菴) 남사고(南師古 : 1509~1571)선생이 어린 시절 이곳에서 공부를 하였다고 적어 놓았다. 격암(格庵)은 남수산의 인근에 있는 근남면 수곡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효행과 청렴으로 이름났으며, 평생 소학(小學)을 즐겨 읽었고, 역학(易學풍수(風水천문(天文복서(卜筮관상(觀相)의 비결에 도통하여 예언이 꼭 들어맞았다고 한다. 특히 풍수학(風水學)에 조예가 깊어 전국의 명산을 찾아다니며 많은 일화를 남겼다. 1709(숙종35) 울진(蔚珍)의 향사(鄕祠)에 배향되었으며 문집으로는 격암일고(格庵逸稿)가 있다. 남사고(南師古)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남사고비결(南師古秘訣)이라고도 불리는 격암유록(格菴遺錄)이란 예언서이다. 이 책은 1977년에 처음 소개되고 1987년에 처음 번역되어 출간된 한국의 역사서이자 예언서로, 6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남사고가 어린 시절 신인(神人)’으로부터 전수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현재 대한민국의 역사학계에서는 검토할 가치가 없는 위서(僞書)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현재 전해지는 것은 1977년 이도은(李桃隱, 본명 이용세, 1907~1998)이 필사(筆寫), 기증한 것으로,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정상에서 오늘 산행에서 처음으로 시야(視野)가 트인다. 주변의 나무들 때문에 빈약하기 짝이 없지만 말이다. 정상석 옆에 놓인 벤치에 앉아 조망(眺望)을 즐겨본다. 늘어진 소나무 가지 사이로 올망졸망한 산들이 엿보이지만 어떤 산인지는 분간할 수가 없다. 그저 맨 처음 시야가 열렸다는데 만족하고 대령산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남수산에서 2~3분쯤 진행하면 잘생긴 소나무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 널따란 분지(盆地)가 나타난다. 삼각점(울진 303 재설 2004)이 설치되어 있는 이곳은 아주 유서 깊은 곳이다. 정상표지석의 뒷면에 적혀있던 남사고(南師古)선생이 공부했다는 장소가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다. 이런 인연을 되살리고 싶었던지 잔디밭 한쪽에 평상(平床)까지 만들어 놓아 쉼터를 조성해 놓았다. 옛날에는 이곳에 격암(남사고)선생 학문터라는 팻말이 매달려 있었다는데 우리가 찾았을 땐 눈에 띄지 않았다.

 

 

부드러운 능선을 따라 10분 정도 걸으면 굴구지사거리’(이정표 : 대령산 6.6Km/ 연시골 지품동 1.2Km/ 굴구지 0.7Km/ 남수산 1.2Km)이다. 왼편은 기양리 지품동마을로 내려가는 길, 대령산은 물론 계속해서 능선을 타야 한다. 산길은 한마디로 곱다. 부드러운 흙길에다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되는 능선은 경사(傾斜)까지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거기다 한술 더 떠서 길바닥에는 솔가리(소나무 落葉)까지 수북하게 쌓여 있다. 폭신폭신한 것이 마치 양탄자 위를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이다.

 

 

굴구지사거리를 지나면서 산길은 완만한 오르막길로 변한다. 그리고 10분쯤 후에는 능선안부에서 기양1리 갈림길’(이정표 : 대령산 5.8Km/ 기양12.1Km/ 남수산 2Km)을 만나게 된다. 대령산으로 가려면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크게 방향을 틀어야 한다. 아까 산길의 특징을 설명하면서 곱다라는 표현을 썼다. 그러나 지금 걷고 있는 산길은 그 표현만으론 부족하다. 거기에 착하다라는 표현을 포함시켜야 할 정도로 산길은 구태여 능선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고만고만한 산봉우리들이라서 오른다고 해봐야 그다지 힘들 것 같지도 않은데 산길은 어느 것 하나 오르는 법이 없이 모두다 산의 사면(斜面)을 헤집으며 나있다. 그러다보니 마치 평지를 걷는 것과 같이 편한 길이 계속되는 것이다. ‘송이 길이라서 그럴 것입니다.’ 같이 걷고 있던 갑장(甲長) 최근행사장이 알려주신다. 송이버섯을 따러 다니는 지역 주민들이 송이 운반을 해서 만든 길이라서 그렇다는 것이다.

 

 

 

솔향이 참 짙죠? 건강에 좋다는 피톤치드도 많을 것이고오늘 답사하고 있는 산에 대한 최사장의 예찬론이다. 어쩌면 오늘의 산행코스는 그가 추천했지 않았나 싶다. 내 생각도 그와 같다. 오늘 걷는 산길은 곱고 착해서 걷는데 조금도 무리가 없다. 한마디로 웰빙(well-being)산행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능선은 온통 소나무로 가득하다. 그 소나무들은 살균작용은 물론이고 장과 심폐기능까지 강화시켜준다는 피톤치드(phytoncide)를 몽땅 배출시켜줄 테니 이는 힐링(Healing)산행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다 외진 곳에 숨어 있는 산들이다 보니 개인적으로는 쉽게 찾을 수도 없다. 당연히 산행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빈자리가 많았으니 이해가 안가는 일이다. 만일 산을 추천한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안타까웠겠는가.

 

 

기양리갈림길에서 15분 정도를 더 걸으면 나뭇가지를 얼기설기 엮어 놓은 것이 보인다. 만일 나무들 위로 천막이라도 칠 경우에는 어엿한 막사(幕舍)로 변할 것 같다. 굴뚝이 세워진 것으로 보아 온돌까지 제대로 갖춘 막사 말이다. 지도에 보면 송이 움막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아마 인근 주민들이 송이채취를 하면서 임시 숙소로 사용하는 시설인 모양이다.

 

 

송이움막을 지나면 길가 양쪽에 비닐 끈이 매어진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끈은 등산로를 따라 끝도 없이 이어진다. 송이버섯을 채취하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를 나타내는 금()줄이다. 그만큼 이 부근에 송이버섯이 많다는 증거일 것이고, 방금 전에 보았던 송이움막의 용도가 새삼 실감이 나는 순간이다.

 

 

송이움막에서 소령산 가는 구간은 제법 길다. 그러나 힘들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는 구간이다. 산길이 오르내림이 거의 없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지루하다는 느낌도 들지 않는다. 이 구간에서 제대로 된 금강송들과의 조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드디어 수백 년은 묵었음직한 굵고 늙은 소나무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 오른 것이 금강송(金剛松)의 매력을 한껏 발산하고 있다. 훌륭한 눈요깃감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안타까운 풍경도 눈에 띈다. 눈에 띄는 늙은 소나무들이 하나같이 속살을 허옇게 드러내놓고 있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수난사(受難史)를 보고 있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눈에 보이는 저 흔적들은 일제 때 송진을 채취하느라 마구 벗기고 할퀸 상처들이기 때문이다.

 

 

 

어둑한 숲의 터널에서 진한 솔향기에 킁킁거리다가, 불현듯 길가의 금강송(金剛松)들과 교감(交感)을 나눠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문득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개미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 페르몬(Pheromone)은 과연 무엇일까? 그 페르몬을 어떻게 활용하면 저 금강송과 대화가 가능할까?

 

 

이 부근에서 조망(眺望)까지도 열린다. 능선에 가득한 나무들에 가린 탓에 빈약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오른쪽으로 시야(視野)가 트이면서 멀리 천축산을 비롯한 왕피천 계곡 방면이 눈에 들어온다.

 

 

 

송이움막을 지난 지 30분쯤 후, 소령산이 이쯤이다 싶은데 앞에 가던 최사장이 오른편에 보이는 산이 소령산이란다. 그가 알려주는 봉우리로 향한다. 그러나 산길은 흔적조차 희미하다. 아마 소령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그만큼 드물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아니면 소령산이 어디 있는 줄도 모르고 그냥 지나쳐버렸을 것이고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 산행을 같이한 일행들 대부분도 소령산을 그냥 지나쳐버렸다고 한다. 모르고 지나쳤음은 물론이다.

 

 

잡목(雜木)을 헤치고 올라선 소령산(해발 약 590m)은 의외로 실망스럽다. 돌무더기만 조그맣게 쌓여있을 따름이고 정상표지석은 물론, 그 흔한 이정표 하나 세워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냥 돌무더기만 촬영할 경우 정상인줄도 모를 것 같아 김진수선배께 포즈(pose)를 부탁해본다. 이제야 겨우 조금이나마 느낌이 온다.

 

 

소령산을 오른 후에는 아까 소령산으로 오를 때 헤어졌던 분기점으로 다시 되돌아 내려와야 한다. 삼거리에서 몇 걸음만 더 걸으면 이번에는 이정표까지 갖춘 어엿한 삼거리(이정표 : 대령산 3.4Km/ 기양3리 문니골 3.6Km/ 남수산 4.4Km)를 만난다. 그런데 이정표가 소령산삼거리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소령산으로 올라가는 들머리에서 별로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들머리를 찾기는 불가능할 것으로 보이는 지점에다 소령산이라는 이름을 붙여놓은 것이다. 그것도 소령산으로 가는 방향은 표시조차 하지 않았다. 참고로 이곳 삼거리는 울진군의 3개면(근남면, 원남면, 서면)이 서로 경계를 맞대고 있는 곳이라고 한다.

 

 

▼ 삼거리를 지나면서 산길은 가파른 내리막길로 변한다. 그것도 심하다 싶을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다행이도 그 거리는 짧다. 10분이 채 안되어서 능선안부에 있는 왕피리 갈림길‘(이정표 : 대령산 2.2Km/ 왕피리 속사 1.2Km/ 남수산 5.6Km)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올라가야할 산길의 가파름에 놀라 숨을 고르려는데 김선배께서 산행후기의 제목을 추천해 주신다. ’소령과 대령은 있으나 중령이 없는 산으로 하면 어떻겠느냐?’는 것이다. ‘옳다구나며 나도 모르게 무릎을 친다. 지도(地圖)를 보면서 뭔가 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그의 말을 듣고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 오르는 산들은 ()를 쓰고 있으니 정확히 말해서 군인들의 계급은 아니다. 그러나 크고(), 작음()이 있다면 응당 가운데()도 있어야 하는 것은 상식이리라. 그래서 뭔가 빠진 것처럼 허전했던 모양이다. 나중에 산행을 마치고 이 지역 주민에게 물어보니 중령산이 있기는 하단다. 다만 주능선에서 약간 비켜나 있지만 말이다.

 

 

 

대령산으로 오르는 길은 가파른 오르막길로 시작된다. 급경사(急傾斜)로 한참을 내려왔으니 그만큼, 아니 대령산이 소령산보다 더 높으니 그보다 더 많이 치고 오르려면 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이도 산길은 오름길만을 고집하지는 않는다. 가끔은 중간 중간에 완만(緩慢)한 구간도 선보인다. 마치 가픈 숨이라도 고르라며 선심이라도 쓰듯이 말이다.

 

 

25분 정도를 숨이 턱에 차도록 치고 오르면 드디어 대령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그다지 넓어 보이지 않는 정상에는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고 대령산이라는 이름표를 부여받은 이정표(기양저수지 2.9Km/ 고초령 3.2Km/ 남수산 7Km)가 이를 대신하고 있다. 그 외에도 삼각점과 허술하게 쌓아올린 돌탑이 보일뿐 특별한 볼거리는 제공하지 못한다. 참 이정표에 매달려있는 검은색 정상표지판을 빼먹을 뻔했다. 대구 신암산악회의 김문암씨가 제작한 것으로 정상석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데도 말이다.

 

 

 

정상에 서면 울진 앞바다 방향으로만 시야(視野)가 열린다. 나머지 방향은 나무들이 두텁게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다. 저 멀리에서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는 산은 어쩌면 현종산(417m)일 것이다. 그 위에 보이는 시설물은 통신사의 중계탑일 테고 말이다.

 

 

정상에서 길은 기양저수지와 고초령으로 나뉜다. 우리가 하산지점으로 잡은 무릉관광농원은 원남면 갈면리에 있다. 또 한편으론 기양저수지의 상류에 위치하고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기양저수지방향으로 내려서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린 고초령방향으로 내려선다. 선두대장의 방향지시지를 따라야하는 숙명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길은 수난의 길임을 알아차리는 데는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하산을 시작하면 잠시 후에 헬기장을 만나게 된다. 이곳까지는 선답자들의 기록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비록 그들이 기록한 시간(5)보다는 짧은 시간에 도달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는 후기의 기록과는 확연하게 다른 풍경들이 펼쳐진다.

 

 

 

고초령으로 가는 능선은 작은 봉우리들을 오르내리면서 이어진다. 대령산에 올 때까지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사면(斜面)으로 길이 나있던 아까보다는 훨씬 더 힘이 든다는 얘기이다. 거기다 산길 또한 또렷하지가 않다. 길의 흔적은 있지만 잡목(雜木)들이 곳곳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아마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가끔가다 눈에 띄는 산악회의 시그널(signal)들을 보며 진행방향을 가늠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정상에서 내려선지 30분쯤 되었을까 방향표시지가 왼편으로 향하고 있다. 산악회의 시그널들은 오른편에 붙어있는데도 말이다. 이때부터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다. 길은 아예 보이지도 않은데다 온통 잡목(雜木)들로 가득 차있어 헤치고 나가다보면 싸대기를 얻어맞기 일쑤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능선에 소나무들이 가득하다는 점이다. 만일 심신을 맑게 해주는 솔향도 없었더라면 육두문자(肉頭文字)를 내뱉으며 걷기에 딱 좋은 코스인 것이다. 하여간 이 길이 정상적인 코스가 아닌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다른 이들이 보았다는 무덤이나 송이 움막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왼편으로 방향을 튼 지 20분쯤 되면 저만큼 아래에 폐가(廢家)가 나타난다. 주인이 오래 전에 떠나버린 듯 집은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고, 마당을 점령하고 있는 잡초(雜草)들은 어른의 키를 훌쩍 넘길 정도다. 폐가 앞을 지나면 곧이어 임도에 내려서게 된다. 대령산 정상에서 하산을 시작한지 거의 한 시간이나 지났다.

 

 

 

 

임도는 가도 가도 끝이 없다. 그렇다고 볼거리도 없다. 자칫 여름철에라도 찾았다면 죽음의 구간이라 부르기에 딱 좋은 구간이다. 그래도 어쩔 것인가.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편하게 가져야만 할 일이다. 짜증스러운 마음은 품으면 품을수록 더 깊어지기 때문이다. 그 뒤는 즐거웠던 산행이 최악으로 변해버릴 것이고 말이다. 함께 걷는 일행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길가 암벽(巖壁)에 적혀있는 시구(詩句)를 읽는 여유도 부려본다. 청산영흑벽계수(靑山影黑 碧溪水), ‘청산은 검은 그림자요 시냇물은 푸르게 빛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뒤의 세 구절은 문맥(文脈)의 연결을 시킬 수가 없다. 글씨가 희미해서이다. 아무튼 끄트머리에는 운곡(雲谷)이라고 적혀있다. ()의 대학자 주희(朱憙)의 호가 운곡산인인데, 설마 그의 작품은 아니겠지?

 

 

 

임도를 따른 지 30분쯤 되면 왼편 벼랑에 로프가 매달려 있는 것이 보인다. 아마 대령산 정상에서 기양저수지방향으로 내려섰을 경우 이곳으로 내려오게 되는 모양이다. 벼랑의 생김새나, 날머리인 갈면리 동막마을로 내려가는 오솔길이 연결된다는 점이 선답자들의 글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산행날머리는 기양저수지 위 공터

로프에서 몇 걸음만 옮기면 임도가 왼편으로 급하게 꺾이는 지점에서 오른편으로 오솔길 하나가 나타난다. 날머리인 동막마을로 내려가는 길이다. 그리고 이 길은 잠시 후에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러나 선두의 방향표시지는 왼편을 가리키고 있다. 오른편으로 가는 길이 옳은데도 말이다. 오늘 산행에서 두 번째로 맞는 위험한 구간이다. 가파른 비탈이 미끄럽기까지 한데, 거기다 길까지 새로 열어야 하기 때문이다. 더 이상을 버티지 못하겠는 듯 집사람이 공중으로 부양을 시작한다. 그리고 꽈당 엉덩방아로 이어진다. 다행이 부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아팠을 것이다. 비탈길을 내려서면 산행날머리인 동막마을(원남면 갈면리)이다. 오늘 산행은 총 4시간50분이 걸렸다. 중간에 간식을 먹느라 쉬었던 시간을 감안한다면 4시간30분이 걸린 셈이다. 버스가 주차되어 있는 기양저수지 위의 공터까지는 5분 조금 못되게 더 걸어야 한다.

주산(主山, 310m)-미숭산(美崇山, 757m)

 

산행일 : ‘15. 3. 9()

소재지 : 경북 고령군 고령읍·쌍림면과 경남 합천군 야로면의 경계

산행코스 : 대가야박물관지산리고분군주산성주산 정상청금정전망대삼거리미숭산 정상학생야영장(산행시간 : 3시간30)

함께한 산악회 : 좋은사람들

 

특징 : 주산과 미숭산이 갖고 있는 특징 중 하나는 두 산을 잇는 능선이 누구나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우선 그다지 높지가 않은데다 산세(山勢) 또한 여간 부드러운 게 아니기 때문이다. 거기다 고령군에서 등산로 정비에 얼마나 많은 심혈을 쏟아 부었던지 산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공원에 가깝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거기다 대가야(大伽倻) 고분군(古墳群)’이라는 유적지까지 끼고 있으니 산행을 겸한 가족나들이 코스로 최상이 아닐까 싶다. 박물관과 전시관을 산행코스에 끼워 넣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대가야박물관은 대가야를 중심으로 구석기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고령지역의 역사와 문화가 종합적으로 꾸며져 있고, 박물관 옆에 있는 왕릉전시관은 국내에서 최초로 확인된 순장(殉葬) 무덤인 지산리 44호분을 복원 재현해 놓았다. 대가야의 토기와 금관, 장신구 등의 유물과 순장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기록으로만 전하던 순장의 실상을 확인할 수 있도록 꾸며놓은 것이다.

 

산행들머리는 가야박물관 주차장(고령군 고령읍 지산리)

88올림픽고속도로로 고령 I.C에서 내려와 26번 국도를 타고 고령방면으로 들어가면 잠시 후에 산행들머리인 대가야역사테마관광단지가 나온다. 도로변에 엄청나게 넓은 주차장이 있으니 눈감고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산행은 주차장 건너 대가야박물관 안으로 들어가면서 시작된다. ‘대가야박물관은 옛날 이 지방에 있었던 대가야(大伽倻)라는 나라의 당시 문물(文物)들이 전시되고 있는 공간이다. 잠깐 짬을 내어 둘러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그러려면 휴관일인 월요일을 피해야함은 물론이다. 대가야(大伽倻)는 현재의 경북 고령군을 중심으로 발달했던 여섯 개의 가야연맹체중 하나이다. 그들은 주변 철광산을 개발하여 농기구와 무기를 만들어 농업을 발전시키는 한편 군대의 힘을 키웠다. 그리고 수로왕(首露王)이 세웠다는 낙동강 하구에 있던 금관가야(金官伽倻)가 쇠퇴한 이후에는 대왕(大王)으로 불리며 가야 연맹의 맹주로 올라섰으며, 서기 500년대에 들어서는 백제, 신라와 비슷한 단계까지 성장하였다. 그러나 서기 562년 신라에 병합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참고로 대가야의 건국신화(建國神話)가야산의 산신령에서 시작된다. 가야산 만물상의 여신 '정견모주'와 하늘의 신 '아비가'가 혼인을 하여 두 아들을 두었는데 큰 아들은 대가야의 시조인 '이진아시왕', 그리고 둘째는 금관가야의 시조인 '수로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대가야박물관에서 오른편 언덕으로 올라서고 본다. 원래의 등산로는 박물관의 뒤편으로 나있지만 무턱대고 축대(築臺)를 붙잡고 올라서는 반칙을 범한 것이다. 이유는 단 하나 조금이라도 더 빨리 고분군(古墳群)을 만나기 위해서이다. ‘사적 제79로까지 지정된바 있는 지산동고분군이 내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다. 능선은 온통 커다란 묘()들의 천지, 능선을 따라 올라갈 때마다 크고 작은 고분들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000호분이라는 각각의 이름표를 달고 말이다. 이름표에 정비된 년도가 적혀있는 것을 보면 아마 발굴이 끝났음이리라. 아무튼 이곳 지산동에 있는 고분들 중 조사와 발굴이 끝난 것만 해도 200여 기()에 달한다고 한다.

 

 

 

고분군을 지나다보면 오른편으로 고령시가지가 널따랗게 펼쳐진다. 가히 한 나라가 들어앉을만한 지세(地勢)이다. 그 나라가 바로 철()의 나라이자, 가야금의 나라인 대가야(大伽倻)’였다. 그런 특징들을 알리고 싶었던지 이런저런 안내판들을 묘역 곳곳에다 세워 놓았다. ‘가야의 철 제조에 관한 안내판도 그중의 하나이다. 김현이 지은 소설  ‘현의 노래에서 대장장이 야로는 개포나루에 큰 대장간을 지었다. 그는 이곳에서 쇠를 녹이고 무기를 만들어 온 사방에 퍼뜨린다. 당시 가야의 철 제조법은 뛰어났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철은 일본에까지 수출되었다고 한다. 김훈은 그런 이야기들을 대장장이 야로를 통해 전하고 있는 거나 아닌지 모르겠다.

 

 

 

얼마쯤 올라가니 지산동 44호분(池山洞 44號墳)’석실(石室) 및 석곽(石槨) ·단면도(’·斷面圖)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묘의 크기와 생김새, 그리고 묘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설명해 놓은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순장덧널(殉葬槨)이다. 김훈은 현의 노래에서 아라라는 지밀시녀를 내새워 순장(殉葬)이라는 풍속에 대해서도 이야기 한다. 순장이란 어떤 죽음을 뒤따라 다른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강제로 죽여서, 또는 살아있는 채로 주된 시체와 함께 묻는 장례 습속을 말한다. 이는 살아서 모시던 상전(上典)을 죽어서까지 보필하라는 일종의 주술적, 종교적 행위였다. 살아있는 사람을 생매장하는 풍습, 이는 오로지 통치자들을 위한 행위였을 따름이다. 당연히 그 피해자는 민초(民草)들일 수밖에 없고, 백성들이 싫어하는 행위를 자행하는 그런 나라가 어떻게 온전히 존속될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대가야는 망했을 것이고, 그런 일련의 과정을 김현은 아라를 내세워 나쁜 제도에 반발하는 민초들의 삶을 표현했을 것이다. 그녀가 운명을 박차고 나와, 도망하는 과정에서 대장장이 야로와 그리고 우륵의 제자 니문과 맺는 관계는 물론 양념이었을 테고 말이다.

 

 

 

고분(古墳)들의 축제가 끝나면 길이 두 갈래(이정표 : 주산 정상 0.84Km/ 충혼탑 0.66Km/ 대가야박물관 1.0Km, 대가야고분 관광로 2.8Km)로 나뉜다.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다음 행선지는 주산의 정상, 그러나 혹시라도 이정표의 방향표시를 따르기라도 하게 되면 십중팔구(十中八九) 주산의 정상을 거치지 못하게 될 게 분명하다. 방향표시가 주산을 생략하고 곧바로 미숭산으로 향하는 지름길로 인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산의 정상으로 가려면 이곳에서 충혼탑 방향으로 조금 더 나아가다가 삼거리에서 왼편으로 올라야만 한다. 이정표의 방향표시판이 바닥에 떨어진 채로 방향을 지시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이런 이유와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산행을 시작한지 정확히 30분이 지났다.

 

 

이곳에는 예쁘장하게 생긴 안내도 하나가 더 보인다. 주산과 미숭산 인근의 지도(地圖)를 그린 다음에 서로 연결되는 산길들을 12개 구간으로 나누었다.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길은 1구간인 왕릉 가는 길로 그 길이는 2.9km란다. 이런 안내도는 미숭산에 이를 때까지 심심찮게 만나게 된다. ‘눈물고개 길(6구간)’, ‘청금정 길(7구간)’, ‘불귀의 길(8구간)’, ‘천제단 길(10구간)’이라는 각각의 이름을 선보이면서 말이다.

 

 

이정표가 지시하는 등산로는 산의 사면(斜面)을 헤집으며 이어진다. 주산의 산봉우리를 우회(迂廻)시키는 것이다. 들머리에서 3~4분쯤 걸었을까 비록 희미하지만 오른편에 길이 하나 보인다. 뭔가 있을 듯 같아 일단 들어서고 본다. 이런 곳에서 의외의 볼거리를 만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잠시 뒤에 능선에 올라서니 또렷하게 난 등산로가 보인다. 찰나 간에 스치는 뭔가에 이끌려 지도(地圖)를 꺼내본다. 그리고 오른편에 보이는 가파른 오르막길을 치고 오른다. 아무리 바빠도 주산의 정상을 빼뜨리고 갈 수야 없지 않겠는가. 만일 내가 들어섰던 지점을 놓쳤다고 해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조금만 더 가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이곳에 세워진 이정표(청금정 2.56Km/ 주산 정상 0.24Km/ 대가야박물관 1.59Km)가 주산의 정상을 빼먹고 왔음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50분 정도가 지났다.

 

 

 

 

제법 너른 분지(盆地)로 이루어진 정상에는 예쁘장하게 생긴 정상 안내판‘119의 구호지점 표지목그리고 이정표(청금정 2.8Km, 미숭산 6.0Km/ 충혼탑 1.03Km/ 지산동 고분군 0.53Km)와 둘레길안내도가 세워져 있을 뿐 다른 특별한 볼거리는 없다. 물론 조망(眺望)까지도 트이지 않는다. 주산은 조선시대의 지리지(地理誌)와 지도(地圖)에 대부분 이산(耳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주산이라는 이름은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 : 1911년 조선총독부 간행)에 처음 등장하며, 이산과 구미산(九眉山)이라는 다른 이름도 함께 기재되어 있다. 주산이라는 이름은 고령의 진산(鎭山)이자 주산(主山)이기 때문에 붙여졌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산(耳山)은 금산(錦山), 즉 망산(望山)에서 적이 침입하는 것을 보면 이쪽 산에 그 사실을 알렸고, 이쪽 산이 '듣는 산'이라는 의미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또한 산의 모양이 귀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으니 참조할 일이다.

 

 

정상의 가장 높은 부분을 둥그렇게 둘러싸고 있는 바위무더기가 보인다. 축대(築臺)처럼 생긴 것이 높이는 비록 낮지만 성벽(城壁)을 닮았다. 혹시 이산성(耳山城)이라고도 불리던 주산성(主山城 : 사적 제61)이 아닐까 싶다. 주산의 정상 어림에다 돌로 내성(內城)을 쌓아올렸던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외성(外城)은 둘레가 700m쯤 되는데 흙으로 쌓았다고 하니 아닐 것이고 말이다.

 

 

정상에서 올라왔던 방향으로 다시 되짚어 내려오면 삼거리를 만나게 된다. 아까 잘못 들어섰던 길로 계속 진행했을 경우 만나게 되는 지점이다. 이곳에 이르면 지금까지 보아온 이정표와는 또 다른 이정표(미숭산 5.75Km/ 주산 0.20Km)를 만나게 된다. 판자(板子)로 만들어진 이정표에는 아무런 장식이나 부언(附言)도 없이 그저 주산과 미숭산 사이의 거리만 표기해 놓았다. 그리고 이런 이정표는 미숭산에 이를 때까지 250m 간격으로 계속해서 나타난다. 가고자하는 곳까지의 거리를 헤아릴 수 있기 때문에 산행에 많은 도움이 되는 시설물이다. 이런 게 바로 요즘의 화두(話頭)고객의 눈높이에 맞춘 서비스가 아닐까 싶다. 사소한 것에까지 신경을 써주신 고령군청 관계자분들께 감사를 드려본다.

 

 

미숭산으로 가는 길은 한마디로 곱다. 길바닥이 보드라운 황톳길인데다 경사(傾斜)까지 완만(緩慢)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한술 더 떠 산길은 능선만을 고집하지도 않는다. 꼭 올라가야할 필요가 없는 봉우리들은 어김없이 우회(迂廻)를 시키는 것이다. 그러다가 주산을 내려선지 15분 남짓 지나면 좀 묘하게 생긴 샘터가 나타난다. 샘터가 분명한데도 이제껏 다른 산들에서 보아온 샘터들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여느 여염집의 싱크대를 꼭 빼다 박았다. 샘물도 수고꼭지에서 나옴은 물론이다. 그러나 물이 엄청나게 시원한 걸 보면 지하수를 끌어 올렸음이 분명하다. 마침 체육시설과 벤치를 갖춘 쉼터로 꾸며 놓았으니 목을 축이는 김에 잠시 쉬어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산길을 걷다보면 마치 동네 뒷동산을 산책하고 있는 느낌이 든다. 길이 고운 것은 물론이려니와 곳곳에 벤치(bench)와 체육시설, 거기다 가끔 음수대(飮水臺)까지 만들어 놓았다. 도심(都心) 근처의 공원에서나 만날 수 있는 풍경인 것이다. 그 대표적인 곳이 주산에서 25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반석(盤石) 쉼터이다. 위가 넓적한 바위 주위에다 쉼터를 만들어 놓았는데, 벤치도 모자라 음수대까지 만들어 놓은 것이다. 지금은 비록 물이 나오지 않고 있지만 말이다. 이런 음수대는 차후에도 다시 만나게 된다.

 

 

 

반석쉼터에서 5~6분 정도 더 걸으면 운동장처럼 널찍한 공터에 올라서게 된다. 지도(地圖)가야생수로 표기된 지점(이정표 : 반룡사 3.1Km, 미숭산 3.8Km/ 지산임도 3.0Km/ 주산 2.2Km)이다. 중화리~지산리를 잇는 임도가 지나는 이곳도 역시 공원에 가깝게 잘 가꾸어져 있다. 사각(四角)의 정자 쉼터에는 시비(詩碑)까지 세워놓았고, 그 옆의 약수터는 거북이의 입을 통해 물이 흘러나오도록 했다. 고령군에서는 이 정도 갖고는 성에 차지도 않았던 모양이다. 운동장 한쪽에다 고령지역 아마추어 무선사(HAM)들의 재난재해 구호조직인 통신지원단의 막사(幕舍)까지 지어놓은 걸 보면 말이다.

 

 

 

임도를 가로지르면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제법 가파르면서도 길게 이어진다. 그렇다고 힘들 정도는 아니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임도에서 10분 남짓 올라서면 사방을 관망할 수 있는 위치에다 멋들어지게 정자(亭子) 하나를 지어놓았다. ‘가야금 연주를 듣는 정자라는 청금정(廳琴亭)이다. 그런데 그 이름이 어딘가 귀에 익숙하다. 그렇다. 가야금과 연관된 이름을 갖고 있는 곳 중에 탄금대(彈琴臺)가 있었다. 임진왜란 때 신립 장군이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왜군(倭軍)에 맞서 싸우다가 쓰러졌던 곳 말이다. 그리고 탄금대는 가야가 멸망할 무렵 신라로 건너온 우륵과 인연이 깊은 곳이기도 하다. 그가 금()을 연주했다는 인연으로 탄금대(彈琴臺)라는 이름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이곳에다 비슷한 이름의 정자(亭子)를 지어 놓았을까가 궁금해진다. 그러나 그 궁금증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곳 고령이 대가야가 있었던 지역이고, 우륵이 대가야 사람이었던 것이다. 대가야의 궁중악사(宮中樂士)로 있었던 우륵은 대가야가 멸망할 무렵 가야금을 안고 신라에 투항해 신라인들에게 가야금을 가르쳐줬다고 알려져 있다. 덕분에 우리는 가야시대에 발명된 가야금의 맑고 깊은 소리를 지금도 느낄 수 있게 됐고 말이다. 또 다시 김현의 소설 현의 노래가 생각난다. 소설 칼의 노래남한산성등에서 역사 속 인물들에 천착해온 그는 현의 노래에선 대가야가 멸망하던 무렵에 서있던 우륵에 주목한 바 있다. 우륵이 만들어 신라에 전하고 지금까지도 아름다운 소리로 전해지고 있는 가야금. 가야금 제작을 명령한 가실왕은 다양한 지역에서 사용된 악기를 가야금의 형태로 합치고 각 지역의 음악적 특징을 담은 12곡을 작곡하도록 주문했다고 한다. 대가야가 망할 무렵 우륵이 신라로 건너와 가야금을 전한 것도 가야의 흔적을 후세에까지 전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청금정에서의 조망(眺望)은 일품이다. 마침 바람까지 시원하니 잠시 쉬면서 눈요기를 즐겨볼 일이다. 지나온 주산은 물론이고, 가야할 미숭산까지 이어지는 웅대한 능선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미숭산 왼편으로는 오도산과 두무산이, 그 오른편으로 남산제일봉, 가야산이 보인다. 물론 희미하지만 말이다.

 

 

청금정에서 잠깐 가파르게 떨어진 산길은 잠시 후에는 또 다시 평탄해진다. 그러다가 10분쯤 지나면 마치 거북이가 산자락을 기어오르고 있는 것 같이 생긴 바위를 만나게 된다. 공깃돌을 닮은 바위 등 눈요깃거리가 제법 눈에 띄는 구간이다. 거기다 주변은 울울창창한 소나무 숲길, 이런 곳에서는 구태여 발걸음을 재촉할 이유가 없다. 코끝을 맴도는 진향 솔향, 가슴을 연다. 그리고 숨을 들이마신다. 걷는 발걸음이 경쾌해질 수밖에 없다.

 

 

 

 

눈요기를 즐기면서 느긋하게 걷다보면 반룡사 하산길이 열리는 사거리(이정표 : 미숭산 1.7Km/ 반룡사 1.0Km/ 청금정 1.5Km)이다. 벤치가 서너 개 있어 쉼터를 겸하고 있는 이곳에서 오솔길이 능선을 좌우(左右)로 가르지만 이정표는 세 방향만 표기가 되어 있다. 신리로 내려가는 오른편 길은 이용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증거이리라. 청금정에서 이곳까지는 27분 정도가 걸렸다.

 

 

사거리를 지나면서 산길은 제법 가팔라진다. 그러다가 7~8분 쯤 후에는 길가에 세워진 빗돌(碑石)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천제단(天祭壇)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옛날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던 터란다. 여기에 묘지를 쓰면 아랫마을에 가뭄으로 흉년이 든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표석 뒷면에 이곳에다 묘()를 쓰지 못한다.’라는 경고문을 적어 놓았다. 삶을 지켜내기 위한 인근 주민들의 몸부림인 셈이다.

 

 

 

천제단에서 10분쯤 더 오르면 오른편으로 시야(視野)가 트인다. 산자락이 벼랑수준으로 비탈을 이룬 탓이다. 발아래에 펼쳐지는 들녘은 미숭산자연휴양림이 있는 신리의 들녘일 것이다. 그렇다면 저 저수지는 신동저수지일 테고 말이다.

 

 

 

전망대를 지나면 진달래군락이다. 봄이면 또 다른 아름다움을 선사해주기 충분할 정도로 어른의 키를 훌쩍 넘기는 웃자란 진달래나무들이 능선을 가득 메우고 있다. 산길은 이 부근에서 가파르게 변한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마치 돌담이 무너져 흩어져 있는 것 같은 흔적을 만난다. 천제단에서 35분 남짓 떨어진 지점이다. 옆에 세워진 이미숭장군의 내력을 적어 놓은 안내판을 보면 이곳이 바로 미숭산성(美崇山城 : 경상남도 기념물 제67)터인 모양이다. 미숭산성은 미숭산 정상부의 자연지세를 따라 돌로 둘러쌓은 산성으로 지금은 다 무너져 옛 모습이 남아 있지 않으나,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둘레가 498m이고, 성 안에 못 하나와 우물 여섯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 말기 미숭장군(美崇將軍)이 조선왕조의 성립에 불만을 품고 항전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는 가야와 신라와의 관계에서 전해오던 전설이 후대의 역사적 사건과 연결된 것으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은 삼국시대에 쌓은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시대에는 몽고의 침입 때나 왜구의 침입 때 인근주민들이 이곳에 들어와 생명과 재산을 보전하였다 하며, 조선시대는 봉수(烽燧)가 설치되어 통신을 연결하였던 점에서 예로부터 이곳이 군사적 요충지이었음을 알 수 있다.

 

 

 

 

허물어진 산성을 끼고 잠깐 오르면 삼각점(합천 22, 1988 복구)이 자리한 733.5m봉에 이른다. 이곳에서 산길은 둘(이정표 : 미숭산 정상 0.5Km, 신리임도 1Km/ 용리 상용마을 1.9Km, 반룡사 3.6Km/ 청금정 3.2Km, 반룡사 2.7Km, 주산정상 6.0Km)로 나뉜다. 삼각점 뒤로 난 길은 상용마을로 가는 길, 미숭산 전상으로 가려면 계속해서 능선을 타야만 한다.

 

 

산성에서 미숭산 정상으로 가는 길은 무너져 내린 성터를 따라 이어진다. 조망이 트이지 않은 답답한 길이나 볼거리가 아주 없지만은 않다. 제멋대로 자란 늙은 소나무들이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하기 때문이다. 특히 정상을 200m정도 남겨 놓은 지점에 있는 소나무들은 눈요깃거리 외에도 또 다른 용도로도 활용된다.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부근의 이정표(정상 0.1Km/ 합천종합야영수련원 1.6Km/ 야로초등학교 4.6Km)를 대신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자세한 길 찾기는 뒤에 다시 얘기하도록 하겠다.

 

 

 

 

삼거리에서 조금만 더 오르면 미숭산 정상이다. 들머리에서 3시간이 조금 못 걸렸다. 정상은 도톰하게 솟은 흙봉우리 위에 커다란 바위 몇 개를 포개어 놓은 듯한 형상이다. ‘달각바위라는 어엿한 이름까지 갖고 있는데, 이미숭 장군이 합천군 야로면 월광리에 있는 월광사 석탑(보물 제129)을 보고 활을 당겨서 화살이 석탑에 이르면 이 바위가 '딸깍' 소리를 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1973년 월광리 나무꾼들이 장난삼아 이 바위를 아래로 밀어 떨어뜨렸는데, 그 후 마을의 청소년들이 우연히 큰 화를 입는 일이 속출하였던 모양이다. 마을사람들은 이 불행을 달각바위를 떨어뜨린 탓으로 알고 다시 본래의 자리에 올려놓았지만, 그 후부터는 예전과 같이 움직이지도 않고 소리도 나지 않는다고 한다. 달각바위는 이름에 비해 생김새는 평범하기 짝이 없다. 거기다 바위의 위에다 산불감시초소까지 얹어놓아 더욱 볼품없이 만들어버렸다. 달각바위의 바로 아래에는 합천군에서 커다란 정상표지석을 세워 놓았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합천 땅인 모양이다. 그동안 이곳까지 오면서 보아온 미숭산의 안내판들이 하나같이 고령군에서 세워놓은 것들이기에 미숭산 정상도 응당 고령 땅일 것으로만 알았는데 막상 정상은 군계(郡界)를 살짝 비켜나 버렸다.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일품이다. 가야산 칠불봉과 우두봉이 북쪽에 보이고, 왼쪽 거창 쪽으로는 오도산이 어렴풋하다. 그 너머 덕유산 능선이 우람하게 펼쳐지겠지만 흐릿하니 나타나나 산인 줄도 몰라볼 지경이다.

 

 

하산은 아까 올라왔던 길로 다시 되돌아 내려오면서 시작된다. 100m쯤 내려오면 올라오는 길에 만났던 이정표, 그리고 몇 발자국만 더 내디디면 또 다른 갈림길이 나타난다.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왼편은 주산으로 가는 길, 야영수련원으로 가려면 오른편 길로 들어서야 한다. 그런데 이정표가 없어서, 아니 조금 전에 보았던 이정표가 사람을 헷갈리게 만든다. 이정표대로라면 주능선인 주산으로 가는 길이 갑자기 사라져버린 꼴이다. 아무리 합천군에서 만들었고, 거기다 주산으로 향하는 주능선이 고령군이라고는 하지만 등산로 표시까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하다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참고로 이곳에서는 나무에 매달린 이정표(귀원 10.4Km/ 미숭산 0.2Km)가 가리키는 귀원방향으로 진행하면 된다.

 

 

귀원방향으로 들어서면 산길은 급할 것이 없다는 듯 서서히 고도(高度)를 낮춘다. 거기다 주변은 반반한 분지(盆地)의 형태, 가히 한 무리가 웅거(雄據)할만한 터이다. 이는 조금 후에 만나게 되는 미숭산성안내도가 증명을 해준다. 미숭산성의 주요 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던 터였던 것이다. 미숭산은 이미숭장군을 떼어놓고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산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와 얽힌 인연이 그만큼 깊은 것이다. 본관이 여주(驪州)인 이미숭(李美崇 : 1346~?)장군은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이었음에도 입신은 무반(武班)으로 한 특이한 경력을 가졌다. 관력(官歷)에 대하여는 기록이 소실되어 자세히 남아 있지 않지만, 북방 오랑캐의 침략과 왜구의 노략질이 있을 때마다 전장으로 나아가 적개(敵愾)의 공훈을 세웠으며, 마침내 종3품인 안동장군(安東將軍)에 올랐다고 한다. 그는 이성계가 조선의 왕위에 오르자 이에 항거하여 진서장군 최신(崔信)과 더불어 군사를 일으켰다. 처음에는 주둔지인 충청도 미산(尾山)과 강경에서 접전을 펼치다 패하고, 경상북도 김천의 덕대산에 들어가 성을 쌓고 싸우다 전세가 불리하자 남하하여 경상도 금릉과 성산에서도 격전을 치렀다. 패퇴를 거듭한 끝에 고령과 합천의 접경 지역인 상원산(上元山)에 들어가, 최신 장군 등과 함께 성을 쌓고 군사를 조련하여 후일을 도모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절벽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고 한다. 그 상원산이 지금의 미숭산이 되었다. 지역주민들이 그의 충절을 높이 사서 산의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산행날머리는 합천종합야영수련원

서문을 빠져나오면 평탄한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한마디로 고운 길이다. 바닥이 보드라운 흙길인데다 경사(傾斜)까지도 평탄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산길 또한 능선을 고집하지 않는다. 오를 필요가 없다싶은 봉우리는 살짝 우회(迂廻)를 시키는 것이다. 하나 주의할 점은 있다. 중간에 만나게 되는 두어 곳의 갈림길(귀원방향)이다. 이곳에서는 그저 넓고 반질반질한 길로 진행하면 된다. 서문을 벗어난 지 25분이 지나면 '경남교육청에서 운영하는 종합야영수련원에 내려서게 되고, 이곳에서 5분 정도를 더 내려가면 산행이 종료되는 수련원주차장이다. 오늘 산행은 총 3시간50분이 걸렸다. 정상에서 막걸리를 마시느라 쉬었던 시간을 정도를 감안한다면 3시간30분 정도가 걸린 셈이다.

 

 

주차장에서 올려다본 미숭산,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녹색으로 나타나는 것은 그만큼 소나무들이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청계산(淸溪山, 874m)-대궐터산(748.6m)

 

산행일 : ‘15. 2. 24()

소재지 : 경북 상주시 화남면과 화서면, 그리고 화북면의 경계

산행코스 : 갈령헬기장청계산(두루봉)투구봉산성터대궐터산극락정사견훤사당청계정청계사(산행시간 : 4시간)

 

함께한 산악회 : 가보기산악회

 

특징 : 한마디로 견훤과 얽힌 인연이 깊은 산이다. 그가 신라에 항거하기 전 산성(山城)을 쌓고 군사를 훈련시켰던 곳이기 때문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대궐터산의 산자락 아래에는 견훤의 위패(位牌)를 모시는 사당(祠堂)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산 자체만 갖고도 전국의 어느 명산에 비해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을만한 산세(山勢)를 자랑한다. 산이 온통 울퉁불퉁한 근육질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산행을 하는 내내 기암괴석(奇巖怪石)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고, 바위를 잡고 오르내리며 짜릿한 쾌감도 즐길 수도 있다. 거기다 속리산이나 도장산 등 주변 산군(山群)을 바라보는 뛰어난 조망(眺望)은 보너스(bonus). 하나 아쉬운 것은 이렇게 좋은 산임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버려졌다는 점이다. 정상표지석은 물론이고, 그 흔한 이정표 하나 세워지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안전시설은 아예 기대조차 할 수가 없다. 때문에 산행 내내 가슴을 졸여야한다. 장점과 단점이 공존(共存)하는 산인 것이다.

 

산행들머리는 갈령(상주시 화북면 삼오리)

청주-상주 간 고속도로 화서 I.C에서 내려와 49번 지방도를 타고 화북, 괴산 방면으로 들어가면 동관교차로(상주시 화남면 동관리)가 나온다. 교차로에서 5분쯤 더 진행하다 갈령터널에 들어가기 한 500m쯤 전에서 오른편으로 빠져나와 고갯길을 잠시 올라가면 갈령 고갯마루에 올라서게 된다.

 

 

 

갈령은 화북면(삼오리)과 화남면(동관리)의 경계를 이루는 고갯마루이다. 청계산으로 오르는 산길은 고갯마루에서 화남면 방향으로 50m쯤 내려가다가 왼편으로 열린다. 들머리에 이정표(도장산 7.9Km, 갈림길 0.8Km, 청계사 1.9Km, 극락정사 5.1Km/ 형제봉 2.0Km, 천왕봉 8.6Km)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청계사는 청계산을 잘못 적은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실지로 청계사는 극락정사에서도 한참을 더 내려가야만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산길은 시작부터 엄청나게 가파른 것이 사람들의 기()부터 죽이고 싶은 모양이다. 그러나 걱정이 안도의 한숨으로 변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는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 가파름은 사라져버리고 다음부터는 완만한 오름길이 이어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가파른 곳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길이가 짧기 때문에 힘들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따름이다. 산행을 시작해서 10분 정도 오르면 무인산불감시탑을 만나게 되고, 이어서 몇 발자국만 더 걸으면 헬기장에 이르게 된다. 왼편으로 시야가 트이면서 속리산이 또렷하게 나타난다.

 

 

 

헬기장을 지나서 조금만 더 오르면 커다란 바위가 앞을 가로막는다. 오른편으로 우회하여 오르면 시야(視野)가 시원하게 열리는 전망대(展望臺)가 길손을 맞는다. 건너편에 있는 형제봉이 코앞으로 성큼 다가온다. 형제봉뿐만이 아니다. 청화산과 도장산까지도 내다보인다. 여기뿐만이 아니다. 올라가다 만나는 바위마다 하나 같이 멋진 전망대인 것이다.

 

 

 

헬기장에서 15분쯤 더 올라가면 흔들바위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둥글게 생긴 바위가 하나 보인다. 이곳(이정표 : 서재 3.7Km, 도장산 7.1Km/ 청계사 1.1Km, 극락정사 4.3Km/ 갈령 0.8Km)에서 도장산 가는 길이 나뉜다. 이곳에서의 조망(眺望)도 뛰어나다. 건너편의 형제봉은 물론이고 왼편에 있는 속리산도 훨씬 더 넓고 선명하게 나타난다.

 

 

도장산 갈림길에서 10분 조금 못되게 더 오르면 산불감시 초소가 나온다. 그리고 또 다시 시원스런 조망이 터진다. 진행방향을 제외한 나머지 방향이 툭 터지면서 주변의 높고 낮은 산들이 거침없이 다가온다. 건너편의 형제봉과 그 오른편에 있는 속리산은 물론이고 이번에는 구병산까지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도 은밀한 속살까지 거침없이 보여주면서 말이다.

 

 

 

산불감시초소를 지나면서 산길은 가팔라지기 시작한다. 능선에는 작은 봉우리들이 연이어 늘어서있다. 언제 저걸 다 오르내려야 할까 걱정이 앞선다. 그러나 다행이도 산길은 봉우리 위를 고집하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봉우리들을 우회(迂廻)하면서 나있기 때문이다. 능선의 양 산자락은 바위벼랑을 이루는 곳이 많은 편이나 산길은 계속해서 흙길을 따른다. 조금 힘들 따름이지 위험하지는 않은 구간이라는 얘기이다.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산세(山勢)는 험상궂은 모습으로 변한다. 거석과 암봉이 끊임없이 솟아오르고, 이에 따라 볼거리 또한 끊임없이 나타난다. 언제부턴가 주변이 온통 바위산으로 변해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이도 산길은 바윗길은 피하고 있다. 진행방향을 가로막는 벼랑들을 요리조리 피하면서 길은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산길은 곳곳에서 뛰어난 조망처를 빚어낸다. 조망을 즐기면서 오르다가 마지막으로 오른편으로 우회하여 급하게 치고 오르면 안부, 쳥계산 정상은 이곳에서 왼편이다. 안부까지 오르는 구간은 오늘 같이 눈이 수북하게 쌓여있는 날에는 오르기가 쉽지 않은 코스이다. 가파른 경사(傾斜)에다 미끄럽기까지 해서 자칫 잘못하다간 사고가 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앞서가는 집사람을 바쁘게 쫒던 난, 아이젠(eisen) 착용을 깜빡한 덕분에 거의 네 발로 기어서야 위로 오를 수 있었다.

 

 

정상은 의외로 흙으로 이루어져 있다. 언제 바윗길을 걸어왔느냐고 놀리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그리고 잡목(雜木)으로 둘러싸여 있을 뿐 아무런 특징도 없다. 거기다 정상표지석은 물론이고, 그 흔한 이정표까지도 보이지 않는다. 아까 서두에서 말했듯이 철저하게 버려진 것이다. 마치 이 산과 인연이 깊은 견훤이 역사에서 소외된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대구의 김문암선생께서 나무기둥에 정상표지판을 매달아 놓았다는 것이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청계산은 두루봉이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 산봉우리가 두루뭉술하게 생겼다는 것이다. 또한 이곳을 대궐터산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아마 견훤이 이 산에 웅거하면서 성을 쌓고 대궐을 지었다는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상주의 역사지인 상산지(商山誌 : 1617년 이준(李埈)이 편찬한 상주읍지)’에 청계산이라고 표기한 것으로 보아 정확한 이름은 청계산 두루봉이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대궐터산이라는 이름은 산성 근처에 위치한 삼각점봉에다 붙여야 옳지 않을까 싶다.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기대하지 않는 게 좋다. 약간 빗겨난 곳에서 형제봉과 구봉산이 보이지만 구태여 이곳에서의 조망을 기대할 필요는 없다. 정상의 맞은편에 있는 암봉에서 미진했던 조망을 실컷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청계산이라고 쓰여 있는 돌맹이가 정상석을 대신하고 있는 암봉에 오르면 거침없이 조망이 트인다. 속리산의 톱니 같은 암릉이 만리장성을 쌓아놓은 듯 우뚝하고, 북동쪽으로는 희양산과 문경새재가 지나는 주흘산이 한달음이다.

 

 

 

 

조망을 즐기다가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투구봉으로 가려면 바위벼랑을 내려서야만 한다. 그런데 내려서는 게 만만치 않다. 높이는 별로 높지 않지만 바위벼랑이 깎아지른 직벽(直壁)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그 밧줄이 문제이다. 밧줄에 의지하지 않고는 내려설 수 없을 정도인데 그 벼랑에 매어놓은 로프가 도무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자칫 잘못하다가 로프가 끊어질 정도로 가는데다가 안전을 의심해야할 정도로 낡았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벼랑 아래에서 끊어진 밧줄 조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두루봉에서 내려서면 산길은 바위벼랑을 끼고 이어진다. 오른편에 끼었는가 하면 왼편에 끼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양편에 끼기도 한다. 때문에 눈요깃거리가 심심찮게 나타난다. 울퉁불퉁한 바위벼랑은 기본이고, 기기묘묘(奇奇妙妙)한 바위들이 예고도 없이 불쑥불쑥 나타나는 것이다.

 

 

두루봉 산자락을 빠져나오면 산길은 능선을 따라 이어진다. 가끔가다 바윗길이 나타나지만 위험하다거나, 하다못해 걷기에 힘들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순탄한 길이다. 그러다가 40분쯤 후에는 투구봉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바위에 이르게 된다. 봉우리의 꼭대기가 언젠가 만화에서 보았던 도깨비감투를 영락없이 빼다 박았다. 그래서 투구바위라는 이름을 붙였나 보다. 투구나 감투가 거기서 거길 테니까 말이다.

 

 

투구봉으로 가는 길에 바라본 청계산, 서슬이 시퍼런 암봉으로 이루어진 것이 전국의 어느 명산에 견주어도 뒤질 것이 없을 것 같다.

 

 

진행방향에서 바라본 투구봉은 결코 오를 수 없는 미답의 산봉우리로 보인다. 그러나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있다. 반대편 방향의 삼거리에서 위로 오르면 나타나는 바위벼랑을 이용하면 된다. 슬랩(slab)으로 이루어진 바위벼랑이 약간은 위험하지만 그 정도의 위험도 감수하지 않고 어찌 산행의 묘미(妙味)를 즐길 수 있겠는가. 참고로 정상에 오른 후에는 다시 삼거리로 되돌아와 왼편을 내려서야 대궐터산으로 갈 수 있다.

 

 

 

이 바위 때문에 투구봉이라고 했나보죠?’ 무심코 던지는 집사람의 얘기를 허투루 지나쳐버릴 수 없는 것은 바위의 생김새가 사뭇 투구를 닮았기 때문이다.

 

 

투구봉 정상은 상상 외로 너른 반석(盤石)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까 아래에서 보았을 때 아슬아슬하게 느꼈던 것을 생각해보면 헛웃음이 나올 정도이다. 바위로 이루어진 정상은 사통팔달로 조망(眺望)이 터진다. 방금 전에 지나온 청계산과 잠시 후에 가게 될 대궐터산은 물론이고, 속리산과 청화산. 도장산. 구병산.형제봉 등이 산릉의 사이사이에서 살짝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다.

 

투구봉에서 바라본 대궐터산 방향의 능선

 

 

투구봉을 내려서면 산길은 잠시 까마득한 벼랑 아래를 이리저리 오가며 이어진다. 기묘(奇妙)하게 생긴 바위들을 접할 수 있는 구간이다. ‘이 바위도 투구를 닮았네요.’ 집사람의 말마따나 투구를 닮은 바위들이 유난히도 많이 보인다. 아마 방금 올랐던 봉우리의 이름이 투구봉이라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벼랑아래를 지나면 산길은 다시 능선을 따라 이어진다. 능선은 간간히 바위지대를 만나기도 하지만 조심해야할 정도로 험하지는 않다. 때문에 좌우로 시선을 돌려가며 조망을 즐길 수 있는 여유까지도 누릴 수가 있다. 그 덕분에 왼편으로 나타나는 멋진 암릉을 놓치지 않고 구경할 수가 있었다. 멋진, 그러나 감히 오를 수가 없을 정도로 험한 암릉이다.

 

 

 

눈요기를 즐기며 걷다보면 거대한 바위벼랑이 앞을 가로막는다. 산길은 벼랑을 피해 왼편으로 우회를 시킨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널따란 분지(盆地)를 만나게 된다. 이곳이 바로 견훤이 쌓았다는 산성(山城)이다. 중간에는 물을 가두어 두었을 곳으로 보이는 흔적(濕地)까지 보인다. 가히 수많은 병사가 부대끼며 훈련할만하다. 지형에 따라 험준한 벼랑을 끼고 쌓아올린 천혜의 요새(要塞)에다 식수(食水)와 생활용수까지 갖추었기에 하는 말이다. 견훤은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화북면 장암리(장바위산)에다 산성을 하나 더 쌓았다. 사실 견훤산성이라고 하면 다들 장암리산성으로 알고 있을 정도로 그쪽 것이 더 널리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견훤은 왜 이곳에다 산성을 쌓았을까. 견훤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그의 고향이 호남(湖南)인줄로 안다. 그가 건국했던 후백제가 호남 땅이었고, 그러다보니 그와 얽힌 설화(說話)들이 대부분 그쪽에 몰려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견훤의 고향은 이곳 상주 땅 가은(현재는 문경군)이었다. 서남해 변방(邊方)에서 공을 세워 신라의 장군이 된 견훤은 이곳 상주에서 군사를 양성한다. 그리고 신라 진성여왕 6(892)에 반기(叛起)를 들어 신라의 여러 성을 침공하다가 효공왕 4(900)에는 완산주(전주)에 도읍(都邑)을 정하고 후백제를 세웠다. 비록 고려의 왕건에 패해 나라가 오래가지는 못했지만 그가 후백제 건국의 원대한 꿈을 꾸면서 군사를 양성했던 곳이 바로 이곳인 것이다.

 

 

성산산성, 또는 견훤성이나 대궐터라고도 불리는 이 산성은 둘레가 3.340m인 토석성(土石城)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 탓에 흔적조차 찾기 힘들 정도이다. 성벽이 있었을 법한 자리에는 돌들조차 눈에 뜨지 않고, 그저 도톰하게 솟아오른 흙길로만 남아있을 따름이다. 성안도 역시 어지러운 잡초(雜草)와 잡목(雜木)만이 무성해 세월의 무상함을 전해준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는 없다. 몇 발자국만 더 걸으면 비록 무릎에도 못 차지만 돌담 비슷한 흔적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성터를 지나 가파른 오르막길을 다시 한 번 치고 오르면 삼각점이 있는 대궐터산이다. 투구봉에서 30분 정도가 걸렸다. 그러나 삼각점 외에는 정상표지석이나 이정표 하나 없기 때문에 정상인줄도 모르고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정상표지석이 없는 곳에서 가끔 보이는 산꾼들이 붙여놓은 정상표지목이나 코팅(coating)지조차도 일절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허망해 하는데 같이 산행을 하고 있던 이석암선생(‘마음을 다스리는 산행의 저자)께서 뭔가를 가리키신다. 비록 조잡하기 하지만 정상석이라면서 말이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누군가가 나뭇가지 사이에다 돌맹이를 꽂아놓고 대궐터산이라고 적어 놓았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삼각점에서 약간 비켜난 곳에 있는 소나무 아래에서 열린다. 조금 전에 지나온 투구봉과 청계산이 울퉁불퉁한 근육질을 맘껏 자랑하고 있다.

 

 

 

 

삼각점에서 전망이 좋은 암봉으로 가다보면 암봉 주변이 돌들로 반듯하게 쌓여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마 견훤산성의 망루(望樓)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망루 근처에서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괴상하게 생긴 암봉이 하나 나타난다. 새의 머리를 빼다 박았다. 그런데 뭔가를 열심히 지켜보고 있는 형상으로 느껴지는 것은 지금 내가 서있는 곳이 망루의 역할을 했던 곳이라는 선입감이 작용한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대궐터산에서는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된다. 삼각점이 있는 정상으로 오기 전 2~3분 전쯤에 오른쪽으로 갈려나가는 길 하나가 보였을 것이다. 이게 옳은 하산길이다. 그러지 않고 만일 능선을 따랐을 경우에는 어떻게 하더라도 오른편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생각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만일 끝까지 능선을 탔다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오른편으로 내려서게 되겠지만 이때는 적잖은 고생을 해야만 할 것이다. 길이 아닌 길을 만들면서 내려서야만 하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능선을 따랐다가 우여곡절 끝에 본래의 등산로를 찾는데 애를 먹어야만 했다. 그나마 끝까지 가지는 않고 중간에서 오른편으로 떨어졌지만 말이다.

 

 

우여곡절 끝에 본래의 등산로와 만나니 기괴(奇怪)하게 생긴 바위 하나가 나타난다. ‘암문(巖門)’이라는 어엿한 이름까지 가진 명품바위이다. ‘엉덩이바위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으니 참조할 일이다. 이름 때문에 그냥 지나치지를 못하고 좌우를 오가며 살펴본다. 아니나 다를까 엉덩이를 쏙 빼다 닮았다. 그것도 토실토실하게 살이 오른 어린아이의 엉덩이를 말이다. 이 부근에는 엉덩이바위 뿐만이 아니라 눈요깃거리가 될 만한 바위들이 제법 많으니 발걸음을 재촉하지 말고 눈의 호사(豪奢)를 즐기면서 걸어볼 일이다.

 

 

엉덩이바위를 지나니 왼편이 철망(鐵網)으로 막혀있다. 여기까지 오는 길 내내 길가에 하얀 비닐(vinyl)끈이 매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송이버섯 채취지역이니 들어오지 말라는 금()줄의 의미였을 것이다. 철망으로 막혀있는 것으로 보아 버섯 채취를 막기 위해서 한 것 같지는 않은데, 그렇다면 무슨 용도일까? 어쩌면 요 아래에 있는 극락정사로 내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설치한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철망 근처에서 왼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나뭇가지 사이로 시야(視野)가 열린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바위봉우리 하나가 살포시 고개를 내민다. 그런데 그 생김새가 참으로 범상치 않다.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기괴하면서도 또 한편으론 지극히 아름다운 것이다. 극락정사 뒤편에 용바위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 바위가 아닌지 모르겠다. 용이 여의주를 문 형상이 신비롭기 그지없다는 그 용바위 말이다.

 

 

철망지역을 지나면 또 다시 바위벼랑을 만나게 되면서, 산길은 벼랑을 피해 오른편으로 우회(迂廻)를 시킨다. 덕분에 조망(眺望)이 시원스럽게 터지는 바위전망대를 만나는 행운도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로프에 매달려서야 겨우 아래로 내려설 수 있는 거칠면서도 경사(傾斜)가 가파른 바윗길을 만나기도 한다.

 

 

 

비탈진 바윗길을 내려서면 산길은 또 다시 산의 사면(斜面)을 옆으로 째면서 이어진다. 때문에 별로 힘들지 않은 구간이다. 그저 심심찮게 터지는 조망을 즐기거나 가는 길에 만나게 되는 비박하기 좋은 굴()이나 기웃거리며 걸으면 된다. 그러다 가끔은 아래 사진과 같이 겸손도 배우면서 말이다. 그러다가 대궐터산을 출발한지 50분 남짓 되면 임도에 내려서게 된다. 극락정사를 둘러보고 싶으면 이곳에서 왼편으로 보이는 가파른 임도를 조금 더 올라가야만 한다.

 

 

극락정사는 로버트 로플린이라는 외국인(外國人)이 그린 한 장의 그림으로 인해 화제가 되었던 절이다. 2005년 당시 한국과학기술원(KAIST)의 총장으로 재직하던 그가 설연휴 때 극락정사에 들렀었고, 그때 즉석에서 만년필로 산속 절 풍경을 스케치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국회 업무보고를 하면서, ‘KAIST의 국제화설명 자료로 의원들에게도 공개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산사의 풍경은 화제만큼이나 고즈넉했다. 예쁘게 생긴 암봉을 배경삼아 숲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 선승(禪僧)들의 수행정진 장소로는 이보다 나은 곳이 없겠다 하는 생각이 들어서 하는 말이다.

 

 

 

극락정사를 둘러본 뒤에는 다시 임도를 따라 내려선다. 그리고 임도가 두 갈래로 나뉘는 지점에서 왼편으로 조금 더 내려가다 임도를 벗어나 오른편 산자락으로 난 오솔길로 내려선다. 계곡을 따라 내려가는 오솔길은 한마디로 거칠다. 그렇다고 길이 위험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저 사람들이 별로 다니지 않은 듯 등산로까지 점령해버린 잡목(雜木)과 가시넝쿨들이 자꾸만 갈 길을 방해한다는 얘기이다. 그러나 길을 못 찾을 정도까지는 아니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계곡을 빠져나오면 황토로 잘 지어진 한옥(韓屋)의 앞마당이 나온다. 인적을 느낄 수 없는 마당을 빠져나가면서 보니 정진요리연구소(精進料理硏究所)라는 간판을 달고 있다. 정진요리(精進料理)란 일본의 사찰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전통음식으로서 육류·어패류·달걀을 사용하지 않고 곡물··야채 등의 식물성 재료와 해조류만으로 만든 요리를 말한다. 여기서 '쇼진(精進)'이라는 말은 불교에서 불도를 닦을 때 잡념을 버리고 일심으로 정신수양을 한다는 뜻이다. 음식도 수행이라는 선()의 정신을 근거로 한 선종의 식사법으로 시작되었다는 흔적이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맞는지 알아보려고 집 주위를 잠시 두리번거리다 그냥 발길을 돌린다. 아무런 표식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연구소에서 조금만 더 내려오면 오른편에 자그마한 사당(祠堂) 하나가 보인다. 견훤사당(甄萱祠堂 :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57)으로서 현판에는 후백제 견훤왕묘(後百濟 甄萱王廟)’라고 적혀있다. 19세기 전반에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사당에서 청계마을 사람들은 민속(民俗)인 동제(洞祭)를 지낸다. 매년 음력 정월 보름과 시월 보름에 제사를 지내 견훤장군의 유덕을 기리는 것이다. 그 제사의 주체가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인 것은 마을의 뒷동산과 다름이 없는 대궐터산과 견훤 사이에 얽힌 인연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글은 이렇게 쓰고 있지만 사당을 찾는 데는 사실 우여곡절이 많았다. 청계사에 이르렀는데도 사당이 보이지 않기에 지나가는 차량을 세워 놓고 위치를 확인한 후에 다시 찾아 나섰기 때문이다. 그리고 청계사 뒤편의 언덕을 넘어 사당까지 갔다가 다시 되돌아오는 데는 20분이라는 시간이 더 걸렸다.

 

 

산행날머리는 청계사 앞 주차장

견훤사당에서 몇 발자국만 다 내려오면 청계정이라는 예쁘장한 정자(亭子)가 보인다. 이곳 청계마을에서 최근에 세운 것인데 정자의 생김새에 비해 위치는 별로이다. 정자 아래의 냇가가 워낙 볼품이 없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청계사 방향으로 몇 발자국만 옮기면 암반(巖盤)과 작은 소()가 어우러진 멋진 곳이 나오는데 그곳의 암반 위에 지었더라면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든다. 하여간 청계정에서 청계마을로 들어가지 않고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 잠시 후에는 **)청계사 앞에 있는 주차장에 이르게 되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극락정사에서 청계사까지는 40분이 걸렸다. 그리고 오늘 산행은 총 4시간30분이 걸렸다. 중간에 간식을 하거나 같이 산행을 한 친구, 형우군을 기다렸던 시간을 감안할 경우 4시간10분이 걸린 셈이다.

옹강산(翁江山, 832m)

 

산행일 : ‘15. 1. 24()

소재지 : 경북 청도군 운문면과 경주시 산내면의 경계

산행코스 : 소진리능선갈림길암릉말등바위옹강산용두봉소진봉소진리(산행시간 : 4시간10)

함께한 산악회 : 청마산악회

 

특징 : 옹강산은 영남알프스 산군(山群)의 북쪽 언저리에서 늠름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영남알프스에는 속하지 않는다고 한다. 독립된 산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산이 지닌 특성은 영남알프스의 산군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육산(肉山)과 골산(骨山)의 적절하게 섞어 있는 것이다. 때문에 산세(山勢)는 전국의 내로라는 산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뛰어난 매력을 자랑한다. 특히 소진리에서 정상으로 오르는 길에 만나게 되는 암릉은 옹강산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기암괴석(奇巖怪石)으로 이루어져 있어 눈요깃거리는 물론 짜릿한 긴장감까지 한꺼번에 즐길 수 있는 것이다. 그에 비해 내려오는 길은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정상에서 옹진봉과 소진봉을 거쳐 소진리로 내려오는 능선은 폭신폭신한 흙길에다 경사(傾斜)까지 완만(緩慢)하기 때문에 조금도 무릎에 부담을 주지 않는다. 한마디로 산행코스로는 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산행들머리는 소진리 마을 앞(청도군 운문면 오진리)

대구-부산고속도로 청도 I.C에서 내려와 20번 국도를 따라 경주방면으로 달리다가 운문면 소재지인 대천리에 이르게 된다. 이곳 대천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69번 지방도를 따라 들어가면 운문호를 지나 잠시 후(운문면 오진리 960-6) ‘소진리 표지석을 이정표 삼아 좌회전하면 산행들머리인 소진리 마을 앞이다. 경부고속도로 서울산 I.C에서 내려와 24번 국도를 따라 밀양방면으로 달리다 덕현교차로(울주군 상북면 덕현리)에서 우회전 69번 지방도를 따라 거꾸로 들어오는 방법도 있으니 참조할 일이다. 주차장 역할을 겸하고 있는 마을 앞 공터에서 이르면 정자나무가 정겹게 길손을 맞는다. 보호수(保護樹)로 지정 받아도 될 만큼 크고 오래 묵었다. 이는 이 마을의 역사 또한 오래되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정자나무 아래를 지나 마을 앞길로 들어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마을 앞 개울가, 그러니까 제방(堤防) 역할을 겸하고 있는 길을 따라 5분쯤 올라가면 왼편으로 오솔길이 하나가 열린다. 들머리에 이정표(옹강산 말등바위’ 3.8Km/ 옹강산 4.3Km)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어느 곳으로 가더라도 옹강산 정상에 이를 수 있으니 마음 내키는 대로 선택하면 된다.. 그러나 난 왼편으로 진행할 것을 권하고 싶다. 이 구간이 암릉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암릉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갈 때 그 전모(全貌)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해서이다.

 

 

 

산자락을 옆으로 꿰차고 시작된 산길은 잠시 후에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위로 향한다. 그리고 방향을 틀자마자 가파르게 변하면서 사람들의 기를 꺾어놓고 있다. 허리를 곧게 펴고는 쉽게 올라갈 수 없을 정도로 빨딱 서있는 것이다. ‘코에서 흙냄새가 난다.’는 말이 있다. 허리를 하도 많이 굽히고 산을 오르다보니 코가 거의 땅에 닿을 지경이라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지금 오르고 있는 산길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주변이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거친 숨결 따라 묻혀오는 짙은 솔향이 지쳐가는 심신(心身)을 치유해주기 때문이다.

 

 

산자락으로 들어선지 20분 남짓 지나면 전망이 좋은 바위 위에 올라서게 된다. 고개를 돌려보면 운문호()가 내려다보이고 그 왼편에는 햇빛을 등진 수많은 산들이 실루엣(silhouette)으로 처리되고 있다. 바로 앞에 보이는 산은 지룡산(659m)일 것이고, 그 뒤에 보이는 산들은 아마 영남알프스의 산군(山群)들 중 하나인 억산과 구만산일 것이다.

 

 

 

 

이어서 7~8분쯤 더 올라가면 아예 전망대 천지다. 본격적으로 바윗길이 시작되면서 올라서는 바위마다 시원스럽게 조망이 터지는 것이다. 운문호와 영남알프스의 산군들이 아까보다 더 넓어지면서 파노라마(panorama)로 펼쳐진다. 앞서가던 집사람이 뭔가를 중얼거린다. ‘혀가 빠지게 올라온 보상치고는 괜찮단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던 것을 혀가 빠질 것 같은으로 표현하는 것이 적당한가는 중요하지가 않다. 다만 뭔가를 보고 자신의 느낌을 표현하는 행위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겠는가. 그런 그녀를 보고 난 글의 소재를 삼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이걸 보고 천생연분(天生緣分)이라고 하나 보다.

 

 

 

주변은 온통 소나무 천지, 산자락에 들어서자마자 선을 뵈던 솔숲이 끝날 줄 모르고 계속된다. 다만 그 소나무들의 허리통이 굵어졌을 뿐이다. 거기다 생김새도 달라졌다. 그저 평범하기만 했던 나무들이 어느 틈엔가 분재(盆栽)를 닮아 있는 것이다. 그 굵기만 좀 굵을 뿐 화분 위에 옮겨 심어도 괜찮을 것 같은 기기묘묘(奇奇妙妙)한 소나무들이 사방에 널려있다. 배배꼬며 자라난 기괴(奇怪)한 소나무들이 주변의 기암괴석(奇巖怪石)들과 잘 어울리면서 한 폭의 잘 그린 수묵화(水墨畵)를 만들어내고 있다.

 

 

 

 

 

15분 정도의 암릉구간이 끝나면 또 다시 흙길이 나타나고 이어서 5분쯤 후에는 주능선 삼거리에 올라서게 된다. 왼편은 오진리에서 올라오는 길로서 마산(240m)’신원앞산(379m)’을 거쳐 이곳에 이르게 된다. 삼거리에 세워진 이정표(이정표 : 옹강산 2.6Km/ 오진리 2.1Km/ 소진리 1.5Km)가 참 마음에 든다. 다른 산들에서 보아온 이정표들에는 없는 표기가 하나 더 있기 때문이다. 이정표의 기둥에 적힌 해발(558m)이 바로 그것이다. 꽤 오래전부터 떠도는 화두(話頭) ‘고객만족이라는 단어가 있다. 서비스를 제공할 때 고객(顧客)의 눈높이에 맞추라는 말이다. 산에 세워진 이정표의 고객은 바로 등산객들 테니 이 이정표는 고객들의 요구에 맞도록 제작되어있다고 볼 수 있다. 이정표를 세운 청도군청에 감사를 드려본다.

 

 

 

주능선에 올라선 산길은 일단 그 사납던 기세를 누그러뜨린다. 큰 오르내림이 없이 고만고만한 봉우리들을 연결시키면서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가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가파른 오르막길이 아주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런 오르막길은 금방 끝나기 때문에 그런 표현을 썼을 뿐이다. 삼거리에서 조금만 더 가면 능선은 흙길로 변한다. 그것이 조금은 미안했던지 정상 근처에서 또 하나의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운문호가 사라진 것을 제외하고는 바라보이는 풍경들이 아까와 별반 다르지 않다.

 

 

 

 

이어서 흙길을 따라 10분 남짓 오르면 암릉이 나타난다. 산길은 바위를 오른편으로 우회(迂廻)하면서 나있지만 구태여 그럴 필요는 없다. 약간 위험하기는 하지만 바위능선의 위로도 길이 나있기 때문이다. 바위를 붙잡는 손맛이 참 좋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떤다. 오랜만에 즐겨보는 긴장감이다. 이런 게 좋아서 암벽장비까지 구입해가며 고수들을 따라다니던 때도 있었다. 지금은 비록 장롱 한구석에서 잠을 자고 있지만 말이다.

 

 

 

 

 

바윗길의 특징대로 곳곳에서 조망(眺望)이 트인다. 한마디로 시원스럽다. 운문산과 지룡산, 구만산, 억산 등 헌걸찬 영남알프스의 산군(山郡)들과, 그리고 구룡산과 사룡산, 오봉산, 단석산 등 청도와 경주 쪽 봉우리와 낙동정맥 능선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가히 영남알프스 최고의 전망대라는 소문답다.

 

 

 

 

첫 번째 바윗길을 지나 10분 남짓 더 오르면 또 다른 암릉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말등바위가 있는 암릉, 마치 잊을만하면 암릉이 나타나는 듯 하는 모양새이다. 당연히 산길은 눈요깃거리가 제법 쏠쏠하다. 바위로 이루어진 능선의 자태가 곱고, 거기다 눈을 들기만 하면 영남알프스의 웅대한 마룻금이 어김없이 나타난다.

 

 

 

 

 

 

 

 

세 번째로 만나는 암릉의 아래에 이르니 다들 아이젠(eisen)을 착용하고 있다. 눈앞에 나타난 바윗길이 가파르면서도 높기만 한데, 눈까지 하얗게 쌓여있는 것이다. 거기다 안전시설까지 전무하다보니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다들 안전을 챙긴다. 바람직한 일이다.

 

 

아이젠을 신고서도 힘겨운 씨름을 벌여야 하는 바윗길을 오르면 돌기둥이 뭉쳐져 있는 바위를 만난다. 어떤 이들은 이 바위를 일컬어 주상절리(柱狀節理, pillar-shaped joint)라고도 부른다. 하지만 엄격하게 말해 화산작용으로 인해서 생겨난 주상절리는 아니니 참고할 일이다. 이 바위의 뒤가 오늘 산행의 하이라이트(highlight)인 말등바위이다. 거대한 바위 자체가 하나의 능선을 이루고 있는데, 그 생김새가 흡사 말등처럼 생겼다고 해서 국제신문의 산행팀이 말등바위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말등바위는 전망대(展望臺)로서의 역할도 훌륭하게 수행한다. 영남알프스의 산군들은 물론 낙동정맥의 능선까지 한눈에 잘 들어오는 것이다.

 

 

 

 

말등바위를 지나면 산길은 다시 가팔라진다. 거기다 눈까지 수북하게 쌓여있다. 아이젠도 신지 않은 채로 성큼성큼 올라가버리는 집사람이 신기하기만 하다. 난 산행을 하면 할수록 매사에 조심을 하는 편인데도, 집사람은 나와는 반대로 겁이 없어져가는 것이다. 말등바위에서 15분 남짓 힘겹게 치고오르면 전위봉에 올라서게 되고, 이어서 가파르지 않은 능선길을 조금만 더 타면 옹강산 정상에 이르게 된다. 삼거리에서 1시간20, 산행을 시작한지는 2시간15분이 지났다.

 

 

 

정상은 평범하기 짝이 없다. 10평도 더 될 것 같은 넓은 분지(盆地)에 정상표지석과 이정표(삼계리 3.1Km/ 삼계리재 1.2Km, 문복산 6Km/ 오진리 4.7Km)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 눈여겨 볼만한 특징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조금 전까지 즐겼던 바윗길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할 따름이다. 거기다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조망(眺望)까지도 일절 트이지 않는다. 옹강산에는 홍수와 관련된 전설(傳說) 하나가 전해져 내려온다. 옛날 이 고장에 큰 홍수가 났는데, 이때 산이 물에 다 잠기고 겨우 꼭대기만 남았다고 한다. 그 크기가 옹기만큼 좁았다고 해서 산의 이름을 옹기산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론 산봉우리의 생김새가 옹기를 닮았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도 있으니 참조할 일이다.

 

 

하산은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삼계리방향으로 향한다. 하산길은 가파르게 시작된다. 거기다 참나무 낙엽이 바닥에 두텊게 깔려있어서 미끄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걱정할 일은 아니다. 능선이 흙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넘어지더라도 그저 엉덩방아나 찧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정상에서 내려서서 20분 정도가 지나면 안부에서 오른편으로 갈림길 하나가 나타난다. 이정표는 보이지 않으나 소진리로 내려가는 탈출로이다.

 

 

용진봉으로 가려면 곧장 능선을 따라야 한다. 삼거리에서 10분 남짓 걸으면 ‘635.4m봉이다. 오지의 산에서 익숙한 ·라는 분이 매달아 놓은 팻말 외에도 서래야 박건석선생께서 수리덤봉이라고 적은 코팅(coating)지를 매달아 놓았다. 오늘 산행을 같이 하고 있는데 우리보다 먼저 지나가신 모양이다.

 

 

‘635.4m봉을 지나 조금만 더 가면 용둔붕(龍臀峰)이다. ‘볼기()자를 쓰고 있으니 용둔(龍臀)이란 용의 볼기를 의미한다. 어떻게 해서 얻은 이름인지가 꽤나 궁금해진다. 용의 볼기짝이 어떻게 생겼는지가 상상이 안가기 때문이다. 정상표지석과 이정표(소진리 3.5Km, 신원14.2Km/ 삼계리 1.4Km/ 용강산 1.7Km) 그리고 삼각점(언양401)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정상도 평범하기는 용강산 정상과 다름없다.

 

 

용강산 정상을 내려서서 소진리로 향한다. 하산길은 평범하기 짝이 없다. 그렇고 그런 작은 봉우리들을 계속해서 오르내리며 서서히 고도를 낮추어 갈 뿐 볼거리가 일절 없다. 거기다 주변이 숲으로 덮여있어서 조망(眺望)까지도 트이지 않는다. 그러나 산길만은 언제부턴가 고와졌다. 부드러운 흙길 위에 솔가리(소나무 落葉)까지 수북이 쌓여있다 보니 여간 폭신폭신한 게 아니다. 양탄자가 따로 없다.

 

 

용둔봉에서 30분쯤 더 걸으면 419m봉이다. 이곳에도 역시 ·라는 분이 팻말을 매달아 놓았다. 그 옆에는 아까와 같이 박건석선생께서 소진2이라는 코팅지를 매달아 놓았다. 이곳뿐만 아니다. 그는 조금 전에 지나온 다른 봉우리에는 소진1이라는 이름을 지어놓았었다. 난 고증(考證)없이 산봉우리에다 이름을 짓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지도(地圖)에 없는 이름의 팻말을 보고 길을 헷갈려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서인지는 몰라도 이런 표시지들을 일부러 떼어내면서 산행을 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으로 안다.

 

 

용둔봉을 내려선지 40분 정도 후에는 소진봉에 올라서게 된다. 이곳도 역시 용둔봉과 거의 다름이 없다. 정상표지석과 이정표(소진리 1.6Km/ 신원1, 문명분교 2.3Km/ 옹강산 3.6Km), 그리고 삼각점(동곡 440)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조망도 트이지 않는 것은 물론이다. 날머리인 소진리로 가려면 계속해서 능선을 타야한다.

 

 

앞에 가던 이석암선생께서 건너편 산을 가리키고 계신다. 저 멀리 볼록하게 솟아오른 봉우리가 호거대, 즉 장군봉이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다녀갔던 까치산에서 방음산을 거쳐 호거대로 이어지는 능선이 제법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노익장을 자랑하시는 선생은 60대 중반을 훌쩍 넘기셨어도 매주 주말이면 산을 찾고 있는 분이다. 산행의 느낌을 글로 옮기는 분이시니 만나는 풍경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실 것이다. 그래서 한참이나 나이어린 나보다 더 주변 지리에 밝으실 것이고 말이다. 하긴 그러니까 꿈이 있다면 멈출 수 없다는 자서전(自敍傳)이나 에세이집 마음을 다스리는 산행등을 출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소진리로 내려가는 막바지의 길도 그저 그렇고 그런 길이 계속된다. ‘깔끔하게 치워 놓았네요.’ 간벌(間伐)로 인해 잘려나간 나무들이 사방에 널려있지만 등산로를 침범한 나무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은 것을 보고 하는 말이다. 그동안 산행을 해오면서 간벌한 나무들을 등산로에다 그대로 방치한 사례를 여러 번 봐왔기 때문일 것이다.

 

 

산행날머리는 소진마을(原點回歸)

소진봉에서 15분 정도 더 걸으면 분묘(墳墓) 한 기를 만나게 되고, 조금 후에 산길은 갑자기 가팔라지면 고도를 뚝 떨어뜨린다. 그리고 산악회의 시그널을 보고 들어선 길에서 잡목에 싸대기 두어 대를 맞아가며 내려서면 소진마을에 이르게 되면서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총 4시간10분이 걸렸다. 비록 서서히 걸었으나 쉬지 않고 걸은 시간이다. 참고로 소지마을의 '소진(小津)'은 작은 나루터다란 뜻이다. 이는 옹성산의 이름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전설대로 이곳에 홍수가 나서 물이 불었을 때, 이 마을에 나루터가 있었다는 추론(推論)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에필로그(epilogue), 운문면에 들어서니 만나는 풍경들마다 익숙하게 다가온다. 그만큼 이곳에 많이 왔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아직도 몇 군데 더 남았을 겁니다.’ 이젠 오를 만한 산들은 다 올랐었을 거라는 얘기에 대한 이재택대장의 대답이다. 그의 말을 거꾸로 돌려보자. 이름을 알만한 산들만 해도 손가락으로 다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넘쳐나는 게 이곳 청도이다. 산이 많기로 소문난 지역에서 더 올라야할 산들이 몇 군데 안 남았다는 얘기는 그만큼 자주 이곳을 찾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래서 주변 풍물들이 그렇게 친근하게 보였나 보다. ‘쓰레기만 버리고 가는 게 등산객들로 알려져 있는데 주긴 뭘 줘?’ 청도군으로부터 감사패라도 받아야 하는 게 아니냐는 내 질문에 대한 김진수선배의 대꾸가 날카롭다. 그렇다. 그런 편견(偏見)과 오해를 불식(拂拭)시키기 위해서라도 우리부터 솔선수범해야 할 것이다. ‘아니 온 듯 다녀가소서!’ 언젠가 산에 오르면서 보았던 현수막(懸垂幕)의 글귀와 같이 말이다. 그건 그렇고 오늘 오르는 산은 옹강산이다. ‘자가 들어가는 산은 나라를 통틀어도 찾아보기 힘들다. 어쩌면 이곳 옹강산 외에 전남 화순군에 있는 옹성산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일까? 옹강산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왠지 가슴부터 설레었다. 판소리 가루지기타령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이 판소리에서 변강쇠의 짝꿍이 바로 옹녀였다. 여기서 강쇠는 나무하기가 싫다고 장승(長丞)을 패서 불을 때다가 동증(動症)에 걸려 죽은 게으름뱅이로 그려졌다. 그러나 그의 초절한 정력은 모든 남성들의 로망(roman)이 아닐까 싶다. 그런 그의 짝꿍이 옹녀였으니 어찌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는 나만이 아니었나보다. 우연히 찾아본 부산일보의 기사에도 옹녀와 변강쇠를 떠올렸다고 적혀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곤지산(坤地山, 327.8m)-비봉산(飛鳳山, 432m)-문암산(門岩山, 460m)

 

산행일 : ‘15. 1. 10()

소재지 : 경북 의성군 안계면과 안사면, 다인면의 경계

산행코스 : 양곡리팔각정오현곤지산비봉산문암산(용천봉)문바위샘골(산행시간 : 3시간 5분)

함께한 산악회 : 청마산악회

 

특징 : 오늘 오른 산들, 즉 곤지산과 비봉산, 그리고 문암산은 골산(骨山)과 육산(肉山)이 혼합된 산이다. 대체적으로는 육산으로 보이나 곳곳에 옹골찬 암릉들이 들어차 있는 것이다. 능선은 대체적으로 걷기에 무리가 없을 정도로 완만한 흙길이지만, 비봉산을 오를 때와 문바위 근처의 바윗길은 제법 많은 볼거리를 제공해준다. 거기다 곤지산 능선을 걸으며 즐기는 조망(眺望)도 뛰어난 편이며, 특히 의성의 자랑거리라는 삿갓소나무는 왜 보호수로 지정받았는지 금방 이해가 갈 정도로 그 자태가 빼어나다. 하나 아쉬운 것이 있다면 문암산에서 샘골로 내려가는 하산길이 무척 경사(傾斜)가 가파른데도 안전시설이 일절 안 보인다는 점이고, 더구나 길의 흔적까지도 희미하다는 것이다.

 

산행들머리는 양곡1리 태양마을 경로당(의성군 안계면 양곡리)

중부내륙고속도로 상주 I.C에서 내려와 25번 국도를 이용 구미방면으로 달리다가 낙단 I.C()에서 빠져나와 이번에는 59번 국도(문경방면)를 타고 다인면소재지(面所在地)인 서릉리까지 온다. 이어서 28번 국도를 따라 의성방면으로 들어가다 정안삼거리(단북면 정안리)를 지나 정안교 바로 못미처에서 좌회전하여 양곡2길과 양곡1길을 번갈아 따라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산행들머리인 양곡1(태양마을) 경로당에 이르게 된다.

 

 

 

경로당 옆으로 난 마을길로 들어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길은 마을 안을 통과해 뒤편의 임도로 연결된다. 자동차 통행이 가능한 시멘트포장 임도이다. 물론 승용차만 가능하다. 임도를 따라 15분 남짓 걸으면 왼편에 잘 지어진 한옥단지가 보인다. 대구지방환경청에서 만든 생태체험장이다. 멸종위기 야생생물 2급인 붉은 점 모시나비를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단다. 물론 안내판에는 국내 최대의 붉은 점 모시나비의 서식지이니 다양성보존을 위해 서식지 보호에 협조해 달라는 당부를 빼먹지 않았다.

 

 

 

체험장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삼거리가 나오고 이곳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잡아 들어가면 정자(亭子)와 체육시설을 갖춘 쉼터가 나온다. 산행을 시작한지 25분이 지난 지점이다. 쉼터에 이르기 조금 전에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으니 승용차를 이용해서 이곳까지 오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다. 정자 앞에 세워진 곤지봉 등산로안내판을 살펴본다. 안내판은 이곳에서 고갯마루인 오현을 거쳐 곤지봉에 오른 후, 내려올 때에는 곤지봉둘레길을 따를 것을 권하고 있다. 이럴 경우 4.5Km를 걷게 된단다. 그러나 우린 비봉산과 문암산을 거친 후, 반대편에 있는 샘골로 내려서게 될 것이다.

 

 

정자에서 오른편 길로 들어선다. 물론 이정표(이정표 : 곤지봉 정상/ 곤지봉 숲 탐방로)가 가리키고 있는 곤지봉정상 방향이다. 산길은 계속해서 비포장임도를 따른다. 그리고 8분 후에는 거대한 느티나무가 터줏대감처럼 자리를 잡고 있는 오현(烏峴) 고갯마루에 올라서게 된다.

 

 

오현(烏峴)은 까마귀()가 많이 서식하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서낭당이 고개또는 오디재로 불리기도 한다. 아마 이곳에 서낭당이 있었던 모양이다. 태양마을 사람들이 안사면 만리와 신리로 넘나들던 옛날에는 꽤나 많은 사람들로 붐볐을 것이다. 서낭당까지 있었던 걸 보면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거대한 느티나무만이 덩그러니 남아 당시의 영화를 말해주고 있을 따름이다. 이곳에서 길은 세 갈래로 나뉜다. 오른편으로 가면 돌고개에 이르게 되고, 곤지봉 정상은 물론 왼편으로 가면 된다. 그리고 비록 이정표(정상 1.5Km/ 돌고개 2Km/ 입구 0.3Km)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곧바로 고개를 넘으면 안사면 신리에 이르게 된다.

 

 

 

오현에서 잠깐 5분 남짓 오르면 너럭바위 위에 올라서게 된다. 왼편에 안계면의 너른 들녘이 잘 조망(眺望)되는 곳이다. ‘콘크리트(concrete)로 만들었나요?’ 너럭바위로 오르면서 집사람이 물어온다. 아니나 다를까 길가의 바위들이 마치 콘크리트를 타설해 놓은 것 같이, 암반(巖盤)에 둥글둥글한 자갈들이 박혀있다. 그런 모양이 집사람의 눈에는 토목공사(土木工事) 현장으로 보였나 보다. 그러나 사실 이 바위들은 자연 그대로이다. 이런 바위를 보고 퇴적암의 일종인 역암(礫巖)’이라고 부르는데, 오랜 옛날 강이나 바다의 바닥에 있다가 융기(隆起)작용에 의해서 솟구쳐 올라왔었을 것이다. 이런 바위들은 이곳 말고도 청량산이나 선운산 등 다른 곳들에서도 볼 수 있다.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산길은 아까와는 달리 꽤나 가팔라진다. 거기다 심심찮게 바윗길도 나타난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나무계단을 만드는 등 등산로를 잘 정비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저 맘 놓고 서서히 걸으며 주변 풍광만 즐기면 된다. 바위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바위손이 제법 쏠쏠한 눈요깃거리로 제공되기 때문이다.

 

 

 

나무계단을 지나면 곧이어 잘 생긴 소나무 한그루가 나타난다. 조금 후에 오르게 될 곤지봉 정상에 보호수(保護樹)로 지정 받았을 정도로 멋진 소나무가 있다고 하는데, 이 소나무도 장차 그런 명품송(名品松)으로 잘 자랄 게 분명하다. 옛말에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속담이 그냥 생겨난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예비명품송 바로 위에서 또 다시 조망이 트인다. 아까 정자 옆의 안내판에서 보았던 나무데크 전망대가 이곳이 아닐까 싶다. 바위위에 서면 사방으로 시야(視野)가 트인다. 왼편에는 아까 너럭바위에서 보았던 안계의 너른 들녘이 또 다시 펼쳐진다. 그러나 풍경은 아까보다 훨씬 더 넓어졌다. 안계평야는 수많은 저수지와 양서양수장으로부터 공급되는 용수로 전천후 논농사가 가능하단다. 이러한 여건에다 비옥한 토양(土壤)까지 갖추었으니 질 좋은 쌀이 생산될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것이다. ‘안계 한사랑 쌀이라는 고유의 브랜드(brand)가 이를 증명한다. 그리고 오른편에는 봉암산과 고도산, 국사봉 등 의성의 높고 낮은 산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그리고 결코 빼놓아서는 안 되는 또 하나의 멋진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진행방향에 있는 곤지봉이 멋진 풍경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바위벼랑이 마치 띠를 두르듯이 겹으로 산의 허리를 가르고 있는 모양이 영락없이 시루떡을 닮았다 

 

 

 

 

 

전망대에서 조금 더 진행하면 327.8m봉이다. 327.8m봉은 능선에서 약간 솟아오른 구릉(丘陵)이라고 보는 게 더 옳을 것 같다. 도무지 산봉우리로 보이지 않기에 그냥 지나치려는데, 나뭇가지에 걸려있는 팻말이 보인다. 지맥(支脈) 등 오지(奧地)의 산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라는 분이 매달아 놓은 팻말(보현지맥 327.8m)이다. 그런데 그 옆에 또 하나의 낯익은 코팅(coating)지가 보인다. 바로 서래야 박건석선생이 붙여 놓은 것인데, 이게 좀 문제다. 코팅지에다 곤지산이라고 적어 놓은 것이다. 아마 이곳에 설치된 삼각점을 참조한 모양인데 이는 아무래도 무리인 것 같다. 이 지역 사람들이 조금 후에 오르게 될 삿갓소나무가 있는 봉우리를 정상으로 인식하고 거기에다 정상표지판까지 세워 놓았다면 이를 따르는 게 옳지 않을까 싶다. 참고로 국토지리원에서도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는 지점과 산으로 불리는 지점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산길은 언제부턴가 소나무들 천지로 변해있다. 바람결에 실려 오는 솔향이 짙어졌다 했더니만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산행도 힐링(healing)산행이 분명하다. 저 솔향 속에는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phytoncide)가 가득할 테니까 말이다. 병해충과 곰팡이로부터 스스로가 움직여 피해갈 수 없는 나무는 면역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피톤치드를 끊임없이 뿜어낸다. 이 피톤치드는 사람들의 건강에도 많은 도움을 주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 외에도 숲속에는 정신적 위로의 물질들로 가득하니 이런 산길은 걷는 것 자체가 곧 건강이요 치료이다. 오늘 산행이 힐링산행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삼각점을 지나자마자 멋지게 생긴 바위 하나가 길손을 맞는다. 옆에서 보면 긴 바위벼랑인데 맞은편에서 보면 마치 기둥처럼 생겼고, 또 어떻게 보면 새의 머리를 닮았다. 이 바위 또한 콘크리트를 부어서 일부러 만들어 놓은 것 같다. 오랜 옛날 강이나 바다의 바닥에 있다가 융기(隆起)작용에 의해서 솟구쳐 올라온 흔적으로, 이곳 의성지역이 옛날에는 강바닥이었다가 화산활동으로 인해 위로 솟구쳐 올라왔다는 증거일 것이다.

 

 

멋진 바위를 지나면 나타나는 설치한지 얼마 안 되는 나무계단을 올라서서 조금만 더 걸으면 진행방향 저만큼에 뾰쪽하게 솟아오른 곤지봉() 정상이 나타난다. 오현에서 32, 산행을 시작한지는 55분이 걸렸다. 곤지산(坤地山)은 옛날 이 봉우리에 건지(乾池 : 습기나 물기가 없이 마른 땅)가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한 곤지봉산(坤地峰山)이라 불리기도 한다. 일제(日帝) 때에는 곤지봉(混池峯)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곤()의 본래의 뜻이 땅속으로부터 물이 솟아나온다는 뜻이니 차라리 이 이름이 옳지 않을까 싶다. 바위로 이루어진 이 산의 어딘가에서 비가 올 때에만 물이 솟구쳐 오르는 것을 보고 그런 이름을 지었다고 보는 것이 더 이해가 쉽기 때문이다. 그 샘이 솟구치던 곳이 평소에는 물기가 없으므로 건지(乾池)라고 불렀을 것이고 말이다. 정상에 세워진 표지판이나 산길에서 만난 이정표들에 곤지산이 아닌 곤지봉으로 표기된 것이 그 증거가 아닐까 싶다.

 

 

 

뽈록하게 솟아오른 민둥산인 곤지봉에 이르면 커다란 소나무 한그루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욕심꾸러기 마냥 산꼭대기를 혼자 독차지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 소나무가 바로 곤지산, 아니 의성군의 명물인 삿갓소나무이다. 수령이 무려 350년이나 된 보호수(保護樹)로서 이 지역 주민들이 신성(神聖)시하는 나무란다. 나무는 밑둥치가 두어 아름이 되고 밑둥치부터 세 개의 가지로 벌려져 커 나간 소나무로 마치 삿갓처럼 생겼다. 원래는 일곱 개의 가지였었단다. 그러나 지금은 세 개만 남아있고, 나머지는 가지들은 외과수술을 거친 후 부러져나간 부위를 검은 시멘트로 동여맨 채 애처로운 모습으로 길손을 맞고 있다. 나무를 보며 감탄하고 있는데, 이곳 주민으로 보이는 할머니께서 나뭇가지가 잘려나간 사연을 들려주신다. 어느 농부가 땔감으로 쓰기 위해 이 나무의 가지를 잘라 집으로 갔으나 삿갓소나무의 부정을 타서 집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나무에 깔려죽었다는 것이다. 사실 여부를 떠나 이 지역 사람들이 이 소나무에 대해 느끼는 외경(畏敬)의 크기가 그만큼 크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곤지봉 정상도 뛰어난 전망대의 역할을 수행한다. 왼편, 그러니까 서쪽에는 안계의 너른 평야지대가 끝없이 펼쳐지는데 가만히 보면 하얀 점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널려있다. 저수지들일 것이다. 덕분에 안계평야는 전천후(全天候)로 논농사를 지을 수 있고, 또한 거기서 나오는 쌀들이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물론 반대편에는 첩첩이 쌓인 산들이 조망(眺望)된다.

 

 

곤지봉 정상에서 .내려서는 길은 가파르게 시작된다. 그러다가 2~3분쯤 후에는 오른편으로 갈림길(이정표 : 곤지봉 정상/ 등산로 입구) 하나를 만들어 놓는다. 이곳에서 왼편으로 내려설 경우에는 곤지봉 둘레길을 거쳐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었던 정자(亭子) 쉼터에 이르게 된다 

 

 

 

갈림길에서 다시 3~4분 정도 더 내려서면 잘록한 십자안부에 이르게 된다. 안사면 만리리 오가실마을과 안계면 양곡리 운곡마을을 잇는 재로서, 옛날 이 부근에 선악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해서 선의현(仙義峴)라 불리는 고갯마루이다. 이곳에서 산길은 안계면과 이별을 고한다. 왼편에 안계면, 그리고 오른편에 안사면을 끼고 이어오던 산길이 이곳에 이르면 안계면의 역할을 다인면이 대신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오른편에는 안사면이 변함없이 따라온다.

 

 

능선은 선의현을 지나면서부터 상당히 가파른 오르막길로 변한다. 그리고 꽤 오랫동안 지속된다. 그러나 힘들다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는다. 시야(視野)가 열리는 왼편으로 나타나는 다인면의 들녘을 바라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한 것이 그 원인이지 않을까 싶다. 물론 조금 전에 지나온 곤지봉을 바라보는 재미도 빼 놓을 수 없다. 비록 점으로 보일 만큼 작지만 산꼭대기에 올라앉은 삿갓소나무가 또렷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신의현을 출발한지 15분 남짓 지나면 커다란 바위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어떤 곳에서는 거대한 바위벼랑이 능선의 한 가운데를 떡하니 가로막아버린다. 바윗길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바윗길이라고 해서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산길이 바위를 요리조리 피해가면서 나있기 때문에 별 어려움 없이 위로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중간에 잠깐 안전로프가 보이기도 하지만 밧줄에 의지하지 않고도 오를 수 있을 정도로 산길은 순탄하다.

 

 

 

바윗길은 채 10분이 안되어 끝나고 산길은 또다시 흙길로 변한다. 산길이 제법 가파르게 고도를 높여가지만 그다지 힘들다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폭신폭신한 길바닥이 걷기에 딱 좋은 것이 이유가 아닐까 싶다. 선의현을 출발하지 30분 남짓 지나면 한골 갈림길’(이정표 : 정상 50m/ 한골 2.15Km/ 곤지봉)을 만나게 된다. 오늘 걷게 되는 구간 중에 오현에서 곤지산을 거쳐 비봉산에 이르는 구간은 **)보현지맥(普賢支脈)과 겹친다. 보현지맥은 비봉산에서 우리가 가게 될 문암산 능선과 헤어져 왼편으로 방향을 틀며 비로재(한골)로 향한다. 이곳 삼거리에서 왼편으로 진행할 경우 보현지맥을 따르게 된다는 얘기이다.

(**) 보현지맥(普賢支脈), 태백산에서 흘러내려온 낙동정맥이 청송의 주왕산을 지나 가사령 북서쪽 봉우리(744.6m 대동여지도의 古羅山)에서 남서쪽으로 분기하여 경상북도 상주시 중동면 오상리에서 낙동강을 만나면서 그 숨을 다하는 도상거리 약 151.8km의 산줄기로서 면봉산과 보현산, 석심산, 어봉산, 구무산, 주월산 등 알만한 산들을 거느리고 있다.

 

 

삼거리에서 비봉산 정상은 금방이다. 누군가 쌓아 올린 엉성하고 작은 돌탑과 정상표지판, 그리고 이정표(문암산 1.2Km, 샘골 3.0Km/ 한골 2.2Km, 곤지봉)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정상은 아무런 특징이 없다. 거기다 조망(眺望)까지도 일절 트이지 않는다. 정상표지판에 적힌 이곳의 높이는 482m, 그렇다면 문암산이나 곤지봉보다도 더 높다. 의심스럽지만 보현지맥 지도(地圖)에도 그렇게 나와 있으니 믿을 수밖에 없다. 정상에서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하다. 산행 안내 잘하기로 소문난 청마산악회의 이재택대장까지 헷갈려 했기에 하는 말이다. 하긴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문암산 방향에는 길의 흔적이 잘 나타나지 않고, 대신 이정표가 없는 오른쪽 방향으로 길이 또렷하고 거기다 산악회의 시그널(signal)들까지 여럿 붙어 있으니 어느 누군들 헷갈리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무조건 또렷하게 난 산길을 따르면 된다.

 

 

문암산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2~3분 후에 갈림길 하나가 나타난다. 비록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지만 문암산으로 가려면 이곳에서 왼편으로 내려서야 한다. 능선을 따라 곧장 갈 경우에 용천봉이 나오나 봉 따먹기산행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구태여 다녀올 필요는 없겠다. 그래도 가겠다면 말릴 수야 없겠지만 나뭇가지로 싸대기 두어 대 쯤은 맞을 각오를 해야만 할 것이다. 능선이 온통 잡목(雜木)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갈림길에서 5분쯤 더 가면 용천봉(473m봉이 아닐까 싶다) 정상이다. 싸대기까지 맞아가며 온 것에 비하면 용천봉 정상은 너무 보잘 것이 없다. 능선 상의 한 지점으로 밖에 볼 수 없을 정도로 밋밋한 정상은 잡목(雜木)으로 가득 차있어 쉬어갈 공간조차 제공하지 못한다. 거기다 조망(眺望)까지도 꽉 막혀있다. 물론 정상표지석은 물론 이정표나 삼각점까지도 일절 보이지 않는다. ‘한현우선생과 서래야 박건석선생이 매달아 놓은 정상표시 코팅지가 아니었다면 이곳이 용천봉의 정상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참고로 용천봉은 용이 머물렀다는 용샘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이곳에서 곧장 나아가면 독점산으로 이어진다.

 

 

아까의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왼편으로 향한다. 짙은 소나무 숲 아래로 난 산길은 한마디로 곱다. 보드라운 흙길인데다 그 위에 솔가리까지 두텁게 쌓여 폭신폭신한 게 걷기가 여간 좋은 것이다. ‘이쯤에서 막걸리 마시고 가십시다.’ 앞에 가는 김진수 선배님께 외쳐보지만 들은 척도 안하신다.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다. 그만큼 오늘 산행시간이 짧고, 거기다 산행여건이 편해서일 것이다. 얼마 안 있으면 산행을 끝마칠 수 있을 테고, 그때 더 좋은 음식과 술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구태여 산중에서 마실 일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덕분에 난 술과 안주를 짊어지고 오는 헛고생만 한 셈이 되어버렸다. 갈림길에서 10분 조금 못되게 내려오면 십자안부(이정표 : 문암산 정상 625m, 샘골 3.0Km/ 한골 1.6Km/ 안사(갈수 없음)/ 비봉산 정상 565m)이다. 지도를 보면 이곳의 오른편에 바람골이 있으니 바람재가 아닐까 싶다. 바람이 많이 불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바람재는 안사면의 만리리와 다인면의 송호리를 잇는 고갯마루이다.

 

 

바람재에서 다시 10분 조금 못되게 걸으면 문암산 460m'라는 팻말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것이 보인다. ’·라는 분이 매달아 놓은 것인데, 과연 이곳이 정상인지는 의심스럽다. 조금 후에 또 다른 정상표지판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문암산은 어디가 과연 꼭대기인지를 알 수가 없을 정도로 밋밋하다. 거기다 소나무만 울창할 뿐 아무런 특징이 없다보니 어디가 정상인지 안다는 것이 더 이상하게 보일 정도이다.

 

 

아니니 다를까 5분 정도만 더 걸으면 또 다른 문암산 정상이 나타난다. 정상표지판과 이정표(한골 1.8Km/ 비봉산 정상 1.2Km)가 세워진 것을 보면 이곳이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정상인 모양이다. 다른 산꾼들이 매달아 놓은 정상표지판과 코팅지들이 이를 증명이라도 하고 있는 듯하다. 이곳도 역시 특징이 없기는 매한가지이다. 도대체 산봉우리라는 느낌마저 들지 않는 것이다. 거기다 조망까지도 일절 트이지 않는다. 문암산(門岩山)은 남쪽에서 이 산을 바라볼 때 마치 대문을 열어놓은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서쪽에서 바라보면 문필(文筆)을 닮았다고 해서 문()자가 아닌 문()자를 쓴 문암산(文岩山)이라고 불리기도 한단다. 비봉산에서 문암산까지는 35분이 걸렸다.

 

 

문암산에서 10분 조금 넘게 걷고 있는데 앞에 가던 집사람이 뭔가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나뭇가지에 문바위봉이라고 적힌 코팅지 두 개가 매달려 있다. 역시 한현우선생과 서래야 박건석선생의 작품이다. 아마 지도(地圖)419m봉으로 나와 있는 봉우리에다 이름을 붙여 놓은 모양이다.

 

 

410m봉을 지나면서 산길은 무척 가팔라진다. 거기다 길의 흔적까지도 잘 나타나지 않는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7~8분 정도 조심스럽게 내려서면 거대한 바위무더기가 나타난다. 바로 이 산의 이름을 낳게 한 문바위(門巖)이다. 산길은 거대한 바위 병풍(屛風)아래를 따르더니 잠시 후에 폭이 좁은 바위 사이를 지난다. 병풍처럼 긴 동쪽 문설주와 가운데에 있는 문설주, 즉 목침바위라고 불리는 네모의 기둥 사이로 난 길이다. 아니 이런 곳은 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더 많으니 바위 문(石門이라고 부르는 게 더 옳을 것 같다 

 

 

 

 

 

 

문바위의 바위군락을 빠져나오면 잠시 후에 또 다른 바위 문(石門)’이 보인다. 비록 방금 전에 통과했던 문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규모이지만 분명한 것은 문()은 문이라는 것이다. 석문을 통과하여 위로 오르면 너럭바위가 나온다. 안계면과 다인면의 너른 들녘이 한눈에 잘 들어오는 곳이다. 문바위를 가리키는 이정표까지 세워진 것을 보면 이곳 지자체에서 등산로를 정비했었다는 증거인데, 그렇다면 우리가 내려왔던 산길은 거친 것으로 보아 본래의 등산로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산행날머리는 달제리(다인면)

문바위를 지나면 산길은 또 다시 가파르게 아래로 향한다. 그런데 이번에서 가끔가다 바위까지 섞여있다. 비록 위험하지는 않지만 내려서기가 만만치 않다는 얘기이다. 때문에 산 아래에 있는 임도까지 내려오는데 30분 가까이나 걸렸다. 조심스럽게 내려오느라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린 것이다. 산행이 종료되는 달제리는 923번 지방도를 향해 한참을 더 걸어 나가야 한다. 그러나 5분 후에는 산행을 마칠 수 있었다. 청마산악회 회장님이 농로(農路)까지 버스를 끌고 들어와 점심상을 차려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산행은 3시간 5분이 걸렸다. 물론 쉬지 않고 걸은 시간이다.

 

산행을 마치고 달제리에서 바라본 문암산

 

에필로그(epilogue), ‘무슨 술로 마실래요?’ 버스에서 속옷을 갈아입고 내려오니 점심상을 차리던 집사람이 물어온다. 물론 난 막걸리를 선택했다. 오늘의 뷔페(buffet)음식이 소주 안주로는 맞지 않을 것 같은 게 원인이기도 했지만 반주삼아 마시는 술이니 간단히 끝내고 싶은 생각에서이다. 그러나 이런 바람은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Mr. 홍주인 김사장께서 가지고 온 홍주를 내놓으셨고, 김진수선배께서는 부족한 홍주의 양을 늘리기라도 하려는 듯 소주로 희석을 시켜버렸기 때문이다. 덕분에 노익장(老益壯)을 자랑하는 선배님들과 꽤나 많은 양의 술을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여흥(餘興)이 못내 아쉬웠던 우리는 양재동에 도착해서 영동족발집으로까지 이어졌고, 정담(情談)을 나누다 보니 술은 꽤나 많은 양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게 무슨 대수이겠는가. 모처럼 갖은 즐거운 시간이었으니 말이다. ’현재 벌이가 있는 사람들이 계산을 해야 된다는 이유 아닌 이유를 대가며 부득불 식대(食代)를 내주신 김진수선배님과 갑장(甲長)인 최근행사장께 이 글을 빌어 감사를 드려본다.

까치산(615m)-방음산(581m)

 

산행일 : ‘14. 12. 20()

소재지 : 경북 청도군 운문면과 금천면의 경계

산행코스 : 새마을동산571m까치산555.6m정거고개방음산해들깨봉(614m)호거대운문주차장(산행시간 : 3시간50)

함께한 산악회 : 청마산악회

 

특징 : 영남알프스의 최북단에 자리 잡은 까치산과 방음산은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다. 때문에 흙산의 특징대로 산세(山勢)는 보잘 것이 없다. 거기다 능선이 온통 나무들로 가득 차있어 조망(眺望)까지도 별로이다. 그러나 꼭대기 부분이 암봉으로 이루어진 까치산 정상어림의 능선과 호거대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운문산과 억산 등 영남알프스의 북녘 고산준령(高山峻嶺)들은 물론이고, 옹강산과 지룡산 등 주변의 명산들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또 하나의 특징은 산에서 사람 구경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주변의 명산들에 가려 찾는 사람들이 드문 모양이다. 덕분에 호젓한 산행을 맘껏 즐길 수 있는 장점도 있다. 거기다 비록 충분하지는 않지만 약간의 스릴(thrill)까지도 맛볼 수 있으니 능히 한번쯤은 찾아볼만한 산들이다.

 

산행들머리는 새마을동산(청도군 운문면 방음리)

경부고속도로 건천 I.C에서 내려와 20번 국도를 타고 청도방면으로 달리다가 대천삼거리(청도군 운문면 대천리)에서 좌회전하여 69번 지방도를 타면 도로는 운문호 상류(上流)의 호반(湖畔)을 따라 연결되다가 호수의 끝자락 즈음에서 오늘 산행의 들머리인 새마을동산에 이르게 된다. 계속 달릴 경우 운문령을 넘어 24번 국도 상의 덕현교차로(交叉路 : 울주군 상북면 덕현리)에 이르게 되니 참조할 일이다. 참고로 대구-부산고속도로를 이용해서 청도까지 온 후, 20번 국도를 거꾸로 타고 운문호까지 오는 방법도 있는데, 청마산악회는 이 방법을 택했다.

 

 

 

 

새마을동산은 새마을선진지(先進地)’였던 청도(방음리)를 기리기 위해 각종 기념비와 자료들을 모아 놓은 곳이다. ‘새마을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인 1968년 홍영기(2011년 사망, 19685.16민족상 수상자)씨를 중심으로 한 마을주민들이 마을 이름을 살고파마을이라 명명하고 마을 앞에 버려져 있던 자갈밭 2만평을 개간하고, 공동기와(roofing tile)공장을 만들어 지붕을 개량하는 한편 마을길을 넓혔으며, 마을회관 안에는 공동목욕탕, 그리고 공동정미소(精米所) 등을 만들었다. 이런 일련의 활동들이 1972년부터 본격적으로 불붙기 시작한 새마을운동과 맥을 같이한다 하여 19723월 박정희대통령이 이곳을 직접 방문하여 주민들을 격려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1985년의 운문댐(dam) 건설로 인해 방음동마을이 물속에 잠기게 되자, 역사적운동인 새마을정신까지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물속에 가라앉은 마을의 서쪽 까치산자락에다 새마을동산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참고로 2001년 당시 국회의원 신분이었던 박근혜대통령도 이곳을 방문했다고 하니 부녀와 끈끈한 인연을 맺고 있는 마을인 셈이다.

 

 

 

산행 들머리는 새마을동산에서 버스가 들어왔던 방향(운문댐 혹은 청도읍)으로 도로를 따라 2~3분쯤 가다가 왼편으로 열린다. 쉽게 말해서 가드레일(guardrail)이 처음으로 끊기는 지점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도로를 벗어나 산자락으로 들어서면 한데 어울려있는 묘()들이 가정 먼저 길손을 맞는다. 산길은 이곳에서 희미해진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왼편 45() 방향으로 그러니까 대각선(對角線)으로 묘역(墓域)을 통과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묘역을 지나자마자 널찍한 임도(林道)를 만나게 되고, 산길은 임도를 따라 오른편으로 올라가도록 되어 있다.

 

 

임도를 따라가다 보면 무덤의 무리들이 자주 눈에 띈다. 아마 이 산이 풍수(風水)에 좋은 모양이다. 그러다가 세 번째 묘역을 지나면서, 그러니까 산행을 시작한지 10분쯤 되면 임도는 슬그머니 사라져버리고 대신에 오솔길이 이를 대신한다. 그리고 산길은 서서히 경사(傾斜)가 가팔라져 간다. 길가는 온통 소나무들 천지, 약간의 바람만 불어도 짙은 소나무 향이 코끝에서 맴돈다. 오늘 산행도 역시 웰빙산행(well-being)으로 시작되나 보다.

 

 

산길은 계속해서 오르막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긴 오르막 끝에는 어김없이 평지와 같은 반반한 구간이 나타난다. 마치 잠깐 휴식이라고 취하라는 듯이 말이다.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능선을 오르는데 앞서가는 사람이 배낭에 레인커버(rain cover)를 씌우는 것이 보인다. 아까부터 들려오던 후드득거리는 소리가 못내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지금 내리고 있는 것은 비가 아니라 싸라기 눈일 따름이니 산행에 지장 받을 염려는 없다. 그저 조망(眺望)을 즐기지 못하게 만든 흐린 날씨에게 조그만 불만만 표시하면 될 일이다.

 

 

오솔길로 접어들어 30, 그러니까 산행을 시작한지 40분쯤 되면 주능선 위에 있는 작은 봉우리 위에 올라서게 된다. 호산고개에서 올라오는 길로 보이는 갈림길이 오른편에 보이는 걸로 보아 571m봉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있어야 할 것이 눈에 띄지 않는다. ‘상수원보호구역 92’라고 씌여 있다는 철제 빔(beam)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거기다 발아래에 운문댐이 내려다보인다고 했는데 잔뜩 흐린 날씨 탓에 이것 역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까치산으로 향한다.

 

 

 

까치산 정상은 571m봉에서 왼편으로 뻗은 능선으로 이어진다. 능선을 따라 10분 정도 걸으면 바윗길이 시작되고, 잠시 후에는 까치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바위로 이루어진 까치봉 정상은 발 올려놓을 틈도 없다는 말이 생각날 정도로 비좁다. 그러나 그 비좁은 틈새에다 새까만 오석(烏石)으로 만든 정상표지석까지 세워놓았으니 정성이 대단하다. 참고로 다른 산들에 비해 유독 까치가 많이 살고 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는 까치산은 도롱굴산이라는 다른 이름도 갖고 있다.

 

 

 

 

정상은 조망(眺望)이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다. 방음리 마을과 운문호가 발아래 내려다보이고 옹강산과 문복산은 물론 상운산과 가지산 등 영남알프스의 산군(山群)들이 파노라마(panorama)처럼 펼쳐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구름이 잔뜩 끼어있는 탓에 시계(視界)가 거의 제로(zero)인 상태이다. 발아래에 있다는 운문호만이 희미하게 나타날 뿐 사위는 온통 구름 속에 갇혀있을 뿐이다.

 

 

방음산으로 가는 능선의 초반은 암릉으로 시작된다. 왼편 또는 오른편이 절벽(絶壁)으로 이루어졌고, 또 어떤 곳은 까마득할 정도로 높다란 벼랑도 나타난다. 그러나 절벽위로 난 산길이 여유로울 정도로 제법 넓기 때문에 위험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저 암릉의 특징인 조망(眺望)을 즐기면서 오르내리기만 하면 된다. 이곳에서는 아까 까치산 정상에서 보았던 풍경 외에도, 가지산과 운문산 억산 등의 영남알프스의 고산준령(高山峻嶺)들이 만들어내는 스카이라인(skyline)이 볼만하다고 알려져 있다.

 

 

 

 

 

능선에 솟아오른 작은 봉우리들을 오르내리다보면 30분 후에는 555.6m봉에 올라서게 된다. 삼각점(동곡 311)이 설치되어 있는 이곳을 진동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으니 참고할 일이다. 정상에는 오지(奧地)의 산에서 가끔 만나게 되는 낯익은 표지판이 매달려 있다. ‘.라는 이름으로 만든 표지판인데 이곳을 ‘555.6m으로 표시하고 있다. 그런데 그 아래에 또 하나의 낯익은 코팅(coating)지가 매달려 있는 것이 보인다. 간혹 함께 산행을 하기도 하는 서래야 박건석선생의 작품이다. 그런데 산의 이름이 좀 이상하다. 난데없이 임당봉이라고 적어 놓은 것이다. 아마 요 아래에 있는 임당마을의 이름에서 따온 모양인데, 아무 근거도 없이 봉우리의 이름을 만들어 내는 데에는 난 동의(同意)를 할 수가 없다. 비록 개인이 설치한 것일지라도 무작위(無作爲)의 사람들이 이용하게 될 경우에는 공공재(公共財) 성격으로 변하게 된다. 그렇게 중요한 시설물을 만들면서 자기 마음대로 이름을 붙일 경우 여러 사람들이 헷갈려할 것이고, 자칫 사고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산길은 순하기 짝이 없다. 아니다. 사실은 아까 555m봉에 이르기 전부터 길은 고와졌었다. 흙으로 이루어진 산길은 보드랍기 짝이 없고, 능선에 가득한 소나무들은 자신들의 흔적을 길 위에다 소복하니 남겨 놓았다. 폭신폭신한 솔가리(소나무 落葉) 위를 걷다보면 산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흡사 양탄자 위를 걷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하는 의심까지 들게 만든다. 555m봉에서 10분 남짓 지나면 또 하나의 나지막한 봉우리 위에 올라서게 된다. 아무 특징이 없어서 그냥 지나치려는데 집사람이 뭔가를 가리키고 있다. 가까이 가보니 박건석선생의 정상표시 코팅지가 나무기둥에 매달려 있다. 산의 높이를 458m, 그리고 산의 이름을 정거봉이라고 표기해 놓았다. 조금 후에 정거봉에 내려서게 되는데 아마 거기서 이름을 빌려왔나 보다. 이 또한 동의가 안 되기에 그냥 지나치고 만다.

 

 

 

555m봉에서 내리막길로 접어든 산길은 큰 굴곡이 없이 편안하게 이어진다. 느긋하게 걸으며 사색(思索)이라도 즐겨보기에 딱 좋은 길이다. 458m봉에서 다시 10분 남짓 걸으면 어른 둘이 어깨를 맞대고 걸어도 될 정도의 산길이 능선을 좌우(左右)로 째면서 나있는 것이 보인다. 아마 정거고개일 것이다. 정거고개 뿐만이 아니다. 이 부근의 여러 곳에서 좌우로 난 산길의 흔적들이 눈에 띈다. 그러나 고민할 필요는 없다. 그저 능선을 따르려니 하고 이어가면 될 일이다.

 

 

 

정거고개에서 산길은 능선을 버리고 산자락의 경사면(傾斜面)으로 난 길로 연결된다. 처음에는 산을 오른편으로 우회(迂廻)시키고, 뒤편 안부에서는 왼편으로 우회시키면서 산행이 이어진다. 비록 희미하기는 하지만 능선으로 난 길을 버리고, 굳이 사면길을 따르는 이유는 바닥에 청마산악회의 이대장이 깔아 놓은 방향표시지외에도 새마포산악회의 것까지 보였기 때문이다. 오늘 따라나선 청마산악회의 이대장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허투루 길안내를 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 새마포산악회까지 이렇게 하는 데에는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어차피 거쳐야만 하는 중복구간(방음산에서 해들깨봉)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코스임을 알 수 있었다. 다만 사면으로 난 길은 자칫하면 길을 잃을 염려가 있느니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하다. 만일 그런 상황이 발생했을 때에는 가급적이면 오른편 산자락에서 길을 찾아보라고 권하고 싶다.

 

 

산행을 하다 보니 한 무더기의 비닐(vinyl)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 일행인 한 쌍의 남녀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식사를 하고 있다. 꽤 괜찮은 아이디어(idea)가 아닐까 싶다. 오늘같이 바람이 부는 날에 안성맞춤일 것 같아서이다.

 

 

정거고개에서부터 산의 사면(斜面)으로 연결되는 산길은 꽤나 오래 이어진다. 길은 대부분 좋은 편이지만 사면의 경사(傾斜)가 가파른 구간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곳은 오지(奧地)믜 산을 연상시키는 풍경이 연출되기도 한다. 5분 가까이 되는 구간이 온통 넝쿨식물들로 가득 차있는 것이다. 넝쿨의 주인공은 단연 다래나무, 만일 늦가을에라도 찾았더라면 잘 익은 다래를 신물이 날 정도로 실컷 따 먹을 수 있었을 것 같다. 그런 풍경들이 지루해질 즈음, 그러니까 정거고개를 출발한지 30분쯤 지나면 방음산 자락의 능선안부에 올라서게 된다. 방음산 정상으로 가려면 이곳에서 왼편으로 진행해야 한다. 그러나 방음산에 이어 올라야 할 해들깨봉이나 호거대는 오른편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일단 방음산 정상에 올랐다가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 내려와야 한다. 안부에서 그다지 가파르지 않은 능선을 따라 7~8분 정도 오르면 방음산 정상이다.

 

 

 

방음산 정상은 의외로 평범하다. 능선에 볼록하니 솟아오른 구릉(丘陵)처럼 밋밋하기 때문에 만일 정상표지석이 없었더라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지형도(地形圖)마다 정상의 위치를 다르게 표기하고 있나 보다. 하긴 방음산 자체를 부인하는 사람들까지 있을 정도이니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정상의 오른쪽 끝으로 나서면 작은 바윗돌이 돌출된 곳이 나온다. 그리고 그 아래에 작은 수직(垂直)에 가까운 동굴이 있다. 옛날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는 동물들이 살았을 법한 굴인데, 바람이 나온다고 해서 풍혈(風穴)이라는 이름이 붙었단다. 한편으론 방음굴이라고도 불리기도 하니 참조할 일이다.

 

 

나무로 둘러싸인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별로이다. 세 방향이 꽉 막혀있고, 유일하게 풍혈(風穴)이 위치한 방향으로 시야(視野)가 열리나, 그마저도 나뭇가지 때문에 온전치가 못하다. 그 나뭇가지 사이에 걸린 호거대와 억산을 볼 수 있다고 했는데, 오늘은 이마저도 허락하지 않는다. 아직까지도 짙은 구름에 가린 산하(山河)는 나타날 줄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방음산 정상에서 내려와 해들깨봉(513m)으로 향한다. 해들깨봉으로 가는 길은 안부에 까지 내려섰다가 반대편 능선을 따라 올라서면 된다. 가는 동안 산길은 모두 세 번의 갈림길을 만들어 낸다. 그 첫 번째는 오른편 갈림길로 아까 이곳 방음산으로 올라올 때 지나왔던 곳이며, 그리고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왼편으로 길이 나뉘는데 두 길 모두 호거대로 가는 길이다.

 

 

방음산 정상에서 해들깨봉까지는 15분이면 충분할 정도로 가까운 거리이다. 그리고 산길도 그다지 힘들지 않은 편이다. 정상에서 5분 남짓 내려서면 아까 지나왔던 삼거리, 이어서 5분 정도를 더 걸으면 두 번째 호거대 갈림길’,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금 가팔라진 오르막길을 5분 정도 더 오르면 드디어 해들깨봉이다.

 

 

 

해들깨봉에 올라서니 앞서 올라온 일행 두 사람이 우왕좌왕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해들깨봉을 찾고 있는데 보이지 않는단다. 그도 그럴 것이다. 이곳이 해들깨봉이 분명한데도 선답자(先踏者)가 붙여 놓았다는 정상표시지는 보이지 않고 대신에 호거산이라고 적힌 정상표지석과 삼각점(동곡 435)이 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편의 능선을 따라 올라오는 또 다른 일행들에게 물어봐도 오는 길에 해들깨봉은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나저나 이곳이 해들깨봉임은 분명하다. 해들깨봉의 높이가 613.8m로 알고 있는데, 새로 세워진 정상석에 호거산의 높이를 614m로 표기해 놓은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산의 이름을 함부로 짓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다. 짓는 사람들도 아무런 고민 없이 산의 이름을 지을 리야 없겠지만, 후일 이를 본 사람들은 생각 밖의 이름을 보고 헷갈려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이곳 외에도 몇 곳에서 의외의 봉우리 이름들을 만났었기에 하는 말이다. 아무튼 해들깨봉의 정상은 나무들로 포위되어 있는 탓에 조망(眺望)은 트이지 않는다.

 

 

해들깨봉에서 아까 지나왔던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오른편의 호거대로 향한다. 삼거리를 지나면 잠시 후에 오른편이 바위벼랑으로 이루어지면서 시야(視野)가 트인다. 비록 구름에 갇혀있으나 희미하게 나타는 것은 대비사 아래에 있다는 박곡저수지일 것이다. 그 뒤에 있는 산들은 어느 게 어느 산인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전망대를 지나서 얼마간 더 진행하면 진행방향 저만큼에 호거대의 하얀색 암릉이 불쑥 나타난다. 비록 나무들에 가려있지만 멀리서 봐도 그 생김새가 범상치가 않다. 이어서 나뭇가지 사이에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호거대를 방향삼아 걷다보면 얼마 후에는 거대한 바위벼랑 아래에 이르게 된다. 바로 오늘 산행의 백미(白眉)인 호거대에 이르게 된 것이다. 해들깨봉에서 30분 정도가 떨어진 지점이다.

 

 

 

호거대는 4(四面)이 서슬 시퍼런 절벽으로 이루어진 바위봉우리이다. 때문에 뭔가에 의지 않고는 결코 위로 올라갈 수가 없다. 쇠사슬에 의지해서 10m가까이 되는 벼랑을 오르면 암봉의 위가 의외로 넓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만큼 호거대가 거대한 바위로 이루어졌다는 증거일 것이다. 참고로 호거대는 바위의 생김새가 호랑이가 웅크린 자세를 닮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호거대 외에도 장군봉 또는 등심바위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고 있다.

 

 

 

 

호거대에 올라서면 일망무제(一望無題)로 시야(視野)가 열린다. 그리고 눈의 호사(豪奢)가 시작된다. 맞은편에는 바위봉우리인 지룡산, 그 왼편에는 옹강산이 버티고 있다. 그리고 가지산과 운문산, 억산 등 영남알프스의 고산준령(高山峻嶺)들이 일목요연하게 눈앞에 펼쳐진다. 참으로 오랜만에 즐겨보는 눈터지는 조망(眺望)이다.

 

 

 

실컷 조망을 즐긴 후에 하산을 시작한다. 쇠사슬을 타고 다시 내려오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바위를 바라볼 때 오른편 난 길은 명태재를 거쳐서 운문사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길이고, 호거대의 바위절벽을 끼고 왼편으로 난 길은 주차장으로 곧장 내려가는 길이다. 오른편 명태재로 갈 경우 길은 조금 수월하나 대신 산행시간 더 길어지니 참조할 일이다. 우리 일행은 물론 왼편, 그러니까 약간 더 험한 코스를 이용하기로 한다. 호거대 아래에 있는 조그만 동굴을 통해 건너편 세상을 바라본 뒤에 하산 길을 재촉한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하산 길은 거칠기 짝이 없다. 대부분이 너덜길이고, 어떤 때에는 바위를 붙잡지 않고서는 내려서기조차 어려울 정도의 바윗길도 나타난다. 그러나 험할 뿐이지 위험하다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는다. 이는 어쩌다가 사고를 당하더라도 큰 부상을 입을 정도로 위험하지는 않다는 얘기이다. 그러나 바위지역이라서 길의 흔적을 놓치기 쉬운 단점이 있다. 이때는 산악회에서 매달아 놓은 리본들을 찾아보면 된다. 부산일보와 산악회들의 리본들이 곳곳에 매어져 있으니 방향을 가늠해서 내려서면 큰 어려움 없이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산행날머리는 운문사 주차장

바윗길이 지겨워질 즈음, 그러니까 호거대에서 25분쯤 내려서면 산길은 바위로 이루어진 능선을 떠나 오른편 사면으로 향한다. 그러나 사면길도 편하지는 않다. 경사가 생각보다 더 가파르기 때문이다. 행여나 미끄러질세라 조심조심 15분 정도를 진행하면 이윽고 계곡에 내려서게 되고, 이어서 징검다리를 밟고 운문천을 건너면 잠시 후에 운문사주차장에 이르게 되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총 3시간50분이 걸렸다. 물론 한 번도 쉬지 않았고, 발걸음도 다른 날에 비해 조금 재촉했으니 참조할 일이다.

 

 

운문천을 건너다가 뒤돌아본 호거대, 햇빛을 등진 탓에 희미하게 나타나지만 그 우람함만은 결코 가릴 수가 없다. 

천생산(天生山, 407m)

 

산행일 : ‘14. 11. 15()

소재지 : 경북 구미시 창천면, 신동, 황상동 그리고 선산군 가산면의 경계

산행코스 : 검성지안부암벽아래길 종단철계단미득암정상북문성벽길철계단천룡사산림욕장 주차장(산행시간 : 2시간50)

 

함께한 산악회 : 청마산악회

 

특징 : 남구미 I.C에서 내려와 구미국가산업단지로 들어서면 저 멀리 기괴(奇怪)하게 생긴 산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산의 정상이 마치 한 일()자 모양으로 평평하게 생긴 것이다. 그래서 하늘이 만들지 않고는 이렇듯 깎아낼 수 없다 하여 붙여졌다는 천생산(天生山)이라는 이름 외에도 일자봉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천생산은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가 쌓았고(世宗實錄地理志),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장 곽재우가 왜군과 맞서 싸웠다는 천생산성이라는 사적지(史蹟地)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것은 성곽(城郭)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천연의 산성, 즉 하늘이 아니고서는 이렇듯 깎아낼 수 없다는 수십 길의 바위벼랑이다. 마치 병풍(屛風)처럼 산을 둘러싸고 있는 바위벼랑의 위용(威容)이나 자태(姿態)가 그만큼 빼어나다는 얘기이다. 그 외에 정상에서의 조망도 빼놓을 수 없다. 구미시가지와 금오산 등 주변의 산군(山群)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눈에 들어온다.

 

산행들머리는 검성지() 주차장(구미시 황상동)

경부고속도로 남구미 I.C에서 내려와 33번 국도를 타고 구미국가산업1단지로 들어간다. 낙동강변으로 난 국도를 따르다 LG전자 구미2공장에서 오른편 구미대교(大橋)를 건넌 후 제3단지를 횡단하면 인동광장4거리가 나온다. 사거리에서 곧장 직진하여 얼마간 나아가다 SK문화주유소에서 좌회전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검성지가 보이고, 산행들머리인 주차장은 저수지의 바로 위편에 있다.

 

 

 

주차장에 내리면 왼편에 검성지()가 내려다보인다. 그러나 생각보다는 초라한 모습이다. 구미시민들의 낚시터로 사랑을 받는다는 소문을 들었던 탓에 나름대로 규모를 갖추었을 것이라는 선입견(先入見)을 갖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주차장으로 산을 바라보고 걸으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들머리에 정자(亭子)와 천생산성(天生山城) 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차량이 지나다녀도 충분할 정도로 널따란 농로(農路)를 따라 10분 남짓 걸으면 자그마한 저수지 하나가 나온다. 산성지라는 저수지인데 차라리 연못이라고 부르는 게 더 어울릴 정도로 앙증맞다. 그러나 물고기는 제법 많은가 보다. 아침부터 낚시를 하고 있는 꾼들이 보이는 것을 보면 말이다.

 

 

저수지 왼편의 다리를 건너 산으로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산길 주변은 온통 소나무들 천지, 코끝을 스치는 바람결에 짙은 솔향이 묻어난다. 소나무는 살균기능이 뛰어나다는 피톤치드(phytoncide)를 많이 배출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오늘 산행은 당연히 웰빙산행(well-being)이다. 아니 힐링(Healing)산행이다. 피톤치드가 스트레스(stress) 해소뿐만이 아니라 장()과 심폐(心肺)기능까지 강화된다고 하니 말이다.

 

 

산길은 폭신폭신한 솔밭길이 전부가 아니다. 경사(傾斜)까지 완만한 것이다. 당연히 오르는데 조금도 부담을 주지 않는다. 그러니 걷는 사람들은 그저 코만 킁킁거리면서 오르면 된다. 아니 입을 활짝 벌리고 크게 심호흡을 하는 게 더 옳을 것 같다. 그렇게나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가 바람결에 휩쓸려 다니는데 어떻게 허투루 흘려보낼 수 있겠는가. 최대한으로 속도를 줄여도 10분 정도 후에는 능선에 올라서게 된다. 그만큼 능선까지의 거리가 짧다는 얘기이다.

 

 

능선에 올라서면 산길은 한층 더 경사를 누그러뜨린다. 산길 주변에 가끔 묘()들이 나타나는 것을 제외하면 산길은 아까 능선으로 올라올 때의 풍경과 별단 다른 것이 없다. 울창하게 우거진 소나무들 아래로 난 산길이 평지나 다름없이 반반한 것이다. 이런 길에서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걷는 일에만 열중하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다보면 세속(世俗)의 찌든 때도 자연스레 떨어져 나가버리지 않겠는가. 그러다가 심심하면 한번쯤 고개를 들어봐도 좋을 일이다. 나뭇가지 사이로 정상에서 통신바위까지 이어지는 바위벼랑이 언뜻언뜻 나타났다 사라지기 때문이다. 길게 펼쳐지는 바위벼랑을 바라보다보면 이 산이 왜 방티산(반티이산) 또는 일자봉이라고 불리는지 알아차릴 수 있다. 함지박을 엎어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옆으로 길게 늘어선 모양이 한 일()자로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능선에 올라선지 10분 남짓 지나면 이정표가 없는 갈림길 하나가 나타난다.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 조금 후에는 바윗길로 변하면서, 경사 또한 서서히 가팔라지기 시작한다. 이 길 또한 나름대로의 볼거리를 제공한다. 길가에 보이는 바위들이 저마다 기기묘묘(奇奇妙妙)한 형상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얼핏 해골바위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몇 년 전에 전북 완주군의 장군봉에서 보았던 그 해골바위 말이다.

 

 

 

 

 

올라가는 길의 볼거리는 기괴한 바위뿐만이 아니다. 오르는 길에 가끔 나타나는 조망바위에 오르기라도 할라치면 구미시가지가 한눈에 잘 들어온다.

 

 

 

바윗길을 따라 얼마나 올랐을까 앞서가던 일행들이 우왕좌왕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왼편으로 난 길이 옳은 것 같은데, 벼랑을 따라 난 길의 흔적이 희미해서 자신이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벼랑 아래로 난 오른편 길로 진행하겠단다. 그러나 이 결정은 최악의 선택이 되어버렸다. 정규 등산로가 아닌 위험하기 짝이 없는 곳으로 들어서버렸기 때문이다. 나중에 지역 주민들에게 알아본 결과 이 길은 등산로가 아니라 버섯을 채취하는 사람들이나 지나다니는 길이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말해서 아까의 삼거리에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왼편에서 등산로를 찾아보는 게 옳았다.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산길은 자칫 발을 헛딛기라도 할 경우에는 큰 부상이 예상될 정도로 위험한 길이다. 더군다나 로프 등 그 흔한 안전시설조차도 일절 눈에 띄지 않는다. 하긴 버섯 채취꾼들이나 다니는 이런 곳에까지 안전시설을 설치할 지자체(地方自治團體)는 아마 없을 것이다. 조심조심 그저 조심하는 것 밖에 다른 수가 없는 산행이 계속된다.

 

 

 

벼랑 위로 올라가는 길이 나오기를 학수고대하며 헤쳐다보니 중간에 왼편에 올라오는 희미한 산길 하나가 보인다. 이곳에서부터 산길은 아까보다 조금 더 또렷해진다. 그리고 간혹 가파른 벼랑에 로프가 매달려 있는 것이 보이기도 한다. 비록 몸을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빈약한 밧줄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얼마 후, 그러니까 벼랑아래에서 헤맨 지 40분 남짓 후에 아주 또렷한 등산로를 만나게 된다. 산림욕장(山林浴場)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난 것이다. 그러니까 길을 잘못 들은 탓에 우리가 하산할 때 이용하려고 했던 삼림욕장으로 내려가는 길가 만나게 되는 우()를 범해버리게 된 것이다.

 

 

산림욕장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면 왼편으로 길게 놓인 철계단이 보인다. 이제껏 아래를 맴돌았던 바위벼랑 위로 오르는 길이다. 철계단을 오르면 조망(眺望)이 탁 트이는 암반(巖盤)의 위이다. 바위 위에 서면 오른편에 구미시가지와 그 뒤 금오산이 아련하고, 맞은편에는 또 하나의 천생산(어느 산꾼의 말로는 가짜 천생산이란다), 그리고 그 왼편에는 유학산으로 이어지는 산릉(山稜)이 또렷하다.

 

 

 

 

 

조망을 즐기다가 왼편에 보이는 통나무계단을 따라 잠깐 오르면 약간 경사(傾斜)가 진 널따란 암반(巖盤)이 나타난다. 바로 천생산의 명물이라는 미득암(米得岩)이다.

 

 

미득암은 구미시가지 방향으로 툭 튀어나간 특이한 형상이다. 때문에 정상과 연결된 동쪽을 제외한 세 방향으로 조망(眺望)이 거침없이 열린다. 가장 뛰어난 풍광은 뭐니 뭐니 해도 천생산의 천연성곽(天然城郭)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통신바위에서부터 이어지는 천길 단애(斷崖)는 천생산의 백미(白眉)답게 위풍당당한 위용(威容)뿐만 아니라 그 생김새 또한 빼어나다. 그리고 구미시가지와 금오산은 물론 주변의 산군(山群)들이 거침없이 눈으로 들어온다. 참고로 사자가 하늘을 우러러 포효하는 상을 지니고 있다는 미득암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홍의장군이라 불리던 곽재우와 인연이 깊은 바위이다. 임진왜란 당시 난공불락의 천생산성을 공략하기 위해 왜군(倭軍)이 산기슭에 큰 연못을 파 성안의 물을 마르게 했다고 한다. 이에 곽재우장군은 미득암 바위에 백마(白馬)를 세워두고 쌀을 주르르 부어 말을 씻는 시늉을 했고, 이를 본 왜군들이 산성에 물이 많은 것으로 알고 물러갔단다. 그 뒤로 후세 사람들이 쌀의 덕을 보았다고 하여 '미득암' 또는 미덕암(米德岩)’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천생산 정상은 미득암의 바로 옆이다.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천생산 정상에는 정상표지석 대신에 커다란 천생산유래비(由來碑)’와 빗돌 모양의 사적지정비(史蹟指定碑)’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리고 유래비 앞에 직사각형의 제단(祭壇)을 만들어 놓을 것을 보면 아마 이곳에서 산신에게 제사라도 지내는 모양이다. 참고로 천생산성 유래비의 비문에는 하늘이 낳았다는 천생산(天生山) 그 허리를 두른 성벽(城壁)은 오랜세월 외침(外侵)을 막아낸 역사(歷史)의 흔적, 일찍이 혁거세(赫居世)가 축성(築城)하고 홍의장군(紅衣將軍)이 수축(修築)했다고 적혀있다.

 

 

 

정상에서 통신바위 방향으로 내려간다. 원래 올라오려고 했던 방향을 거꾸로 거슬러 내려가는 것이다. 가는 길 또한 조망이 뛰어나다 왼편이 바위벼랑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벼랑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아까 미득암에서 보았던 풍경들이 다시 한 번 펼쳐지는 것이다.

 

 

 

 

조망(眺望)을 즐기면서 통신바위 방향으로 한참(600m)을 내려가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곧장 나아가면 통신바위로 가게 되고 오른편은 천생산성의 성곽을 따라 다시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다. 삼거리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 조금 후에 천생산성의 북문(北門)이 나타난다. 그런데 그 문이 아무리 봐도 뭔가 허전하다. 그렇다. 문루(門樓)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원래부터 없었는지 아니면 복원(復原)을 하면서 빠뜨렸는지는 몰라도 문루가 없는 문은 부자연스럽기 짝이 없다. 방어(防禦)의 개념이 흐트러지기 때문이다. 적군(敵軍)의 숫자가 아군(我軍)보다 훨씬 많을 때 보다 효율적으로 그 적을 막기 위해 쌓은 성이 산성(山城)이다. 그런 산성에 문이 없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기 때문이다. 적군이 모르게 산속에 조용히 숨어있으려는 것이 아닌 다음에야 말이다.

 

 

 

북문에서 호젓한 산길을 따라 얼마간 걷다보면 왼편에 커다란 바위 하나가 보인다. 지금은 터만 남은 만지암()을 지키고 있는 바위이다. 임진왜란 전, 이 산성(山城) 안에는 만지암이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절의 앞뜰에는 큰 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그 바위에서 늘 김이 솟아났단다. 이 바위에는 조선 중종 때의 주자학자인 송당(松堂) 박영(朴英)과 얽힌 전설(傳說)이 전해져 내려온다. 무예가 출중했던 박영이 이 절에서 공부를 할 때였다. 밤마다 승려(僧侶)들이 이 바위 밑에서 샘솟는 물을 마시기에 박영 또한 마셔보니 마실 때마다 힘이 불끈불끈 솟더라는 것이다. 힘이 세어진 승려들이 역적모의 할 것을 두려워한 박영이 결국 무쇠를 녹여 바위를 통째로 덮어버렸고, 이에 중들도 하나 둘 절을 떠나버렸다는 것이다. 그 후 바위 밑에서는 겨울이면 김이 무럭무럭 솟아오르고, 여름이면 찬바람이 나더란다. 때로 바람이라도 부는 날이면 달그락달그락하는 바가지 소리까지 들리기도 했다는데 믿거나 말거나이다. 아무튼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바위가 그 바위인지는 모르겠지만 물기 한 점 없이 메마른 바위 아래에는 샘 대신 자그만 돌탑들만 무수히 널려있다.

 

 

만지암의 바위 위에 올라서면 남쪽 방향으로 조망이 시원스럽다. 발아래에는 쌍룡사와 장천면의 들녘이 내려다보이고 그 뒤에는 유학산과 가산, 팔공산 등 대구 근교에 첩첩이 쌓여있는 높고 낮은 산들이 줄줄이 눈에 들어온다.

 

 

만지암을 뒤로 하자마자 동문(東門)이 나타난다. 이곳도 역시 문루(門樓)가 없기는 북문과 매 한가지이다. 동문으로 들어서면 최근에 복원했다는 산성이 나타나면서 산길은 성곽 위를 따라 이어진다. 산길의 주변은 온통 가을빛이 완연한데, 그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것은 억새꽃, 햇빛을 등진 채로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하얀 억새꽃들의 군무(群舞)는 가히 환상적이다.

 

 

 

 

산길은 최근에 새로 쌓은 천생산성의 성곽(城郭)을 따라 이어진다. 천생산의 9부 능선을 둘러싸고 있는 천생산성은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을 합쳐 둘레가 2.6에 달한다. 이 산성은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처음 쌓았다는 전설(傳說)이 있을 정도로 깊은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실제로 천생산성의 구축양식은 삼국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며, 이밖에도 곳곳에 삼국시대 무덤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또한 이곳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인 곽재우(郭再祐)와도 밀접한 인연이 있다. 그가 이곳에서 왜군과 싸웠다는 것이다. 그 인연으로 경북기념물 제12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참고로 조선시대의 기록에 의하면 천생산성은 둘레가 324, 성안 넓이가 5()이며, 우물이 하나, 작은 못이 두 개있었다. 그리고 산성의 과반이 천연의 절험이라 했다. 현재 성문과 방탄석, 그리고 당간지주와 군기를 꽂았던 자리 등이 남아 있다.

 

 

 

성곽을 따라 정상 아래의 조망바위로 되돌아 나오면 천생산 위에서의 투어는 끝을 맺는다. 정상을 한 바퀴 돌아보는데 걸린 시간은 대략 50분 정도, 그러나 이 시간은 그다지 중요하지가 않다. 얼마만큼 자세히, 그리고 얼마만큼 주변 경관을 즐기면서 걸었느냐에 따라서 소요되는 시간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천생산의 생김새가 빼어나다는 얘기이다. 하긴 조선조 말의 유명한 진경산수(眞景山水) 화가였던 겸재 정선이 찾아와 그림으로 남겼을 정도이니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의 그렸던 천생산성 그림은 서울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아무튼 철계단을 딛고 가파르게 내려서면 곧이어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능선을 따라 곧장 직진하면 삼림욕장으로 가게 되고, 만일 천룡사를 들르고 싶을 경우에는 왼편으로 내려서면 된다.

 

 

 

 

천룡사로 내려가는 길은 가파르기 짝이 없다. 그러나 다행이도 그 거리는 그다지 길지 않다. 20분을 채 넘기지 않아 천룡사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천룡사(天龍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팔공산 동화사의 말사이다. 비록 말사에 불과하지만 불교대학까지 운영하고 있단다. 그러나 사찰의 규모로 보아서는 대학까지 운영할 정도는 아니게 보인다. 현재의 천룡사는 1951년 이춘백스님이 창건하였으나 경내(境內)에서 고려시대의 와당(瓦當), 탑신(塔身), 축대 등의 유물이 발견되었고, 이곳에 약사사라는 사찰이 있었다고 구전(口傳)되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 중기까지 현 절터에 대규모 사찰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층 규모의 콘크리트 건물인 대웅전과 극락전·삼성각·종각 등의 전각(殿閣)을 비롯하여 19894월 경내 천연암벽에 조각한 높이 2.7m의 마애미륵불상, 199210월 화강석으로 만든 높이 15m의 천생미륵대불 그리고 각종 석물들이 조성되어 있다.

 

 

 

산행날머리는 천생산 산림욕장 주차장

천룡사에서 비포장도로를 따라 7~8분 정도 내려오면 천생산산림욕장 주차장이 나오면서 오늘 산행이 끝을 맺는다. 오늘 산행에 걸린 시간은 총 3시간10, 간식을 먹느라 정상에서 쉰 시간을 감안할 경우 2시간50분 정도가 걸렸다. 그러나 산행시간에 의미를 부여할 필요까지는 없다. 길을 잘못들어 헤맨 시간과 조망을 즐기느라 멈춘 시간 등을 감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천생산의 중턱에 자리잡은 산림욕장은 4km의 산책로를 갖추고 있으며, 교육시설로 숲속교실, 야생화포지, 시명판 등이 있다. 그 외에도 운동시설과 장자나 대피소, 화장실, 음수대 등 수많은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다. 특히 곽재우장군 사진촬영소, 출렁다리(15m), 건강지압로, 십장생조각동산, 99계단 등이 찾는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한다.

무장산(鍪藏山), 624m)

 

산행일 : ‘14. 10. 12()

소재지 : 경북 경주시 암곡동과 포항시 남구 오천읍의 경계

산행코스 : 암곡공원무장사지석탑무장봉억새군락지암곡공원주차장(산행시간: 4시간)

같이한 산악회 : 청마산악회

 

특색 : 무장봉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그동안은 그저 운제산과 토함산을 종주하는 사람들이나 스쳐지나가는 작은 봉우리에 불과했다. 그러다보니 마땅한 이름도 없었고 그저 624봉으로 불렸을 따름이다. 그러던 것이 언제부턴가 정상 어림의 억새초원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고,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등산로정비까지 깔끔하게 해놓은 후부터는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특히 억새가 꽃을 피우는 가을철에는 몰려드는 인파들로 인해 홍역을 치를 지경이란다. 아무튼 무장산의 억새는 뛰어나다, 비록 영남알프스만큼 광활하지는 않지만 억새 자체만을 갖고 얘기할 경우에는 영남알프스보다 오히려 더 뛰어나고 할 수 있다. 영남알프스의 억새는 어른의 허리쯤에나 차는데 반해, 이곳 무장산의 억새는 어른의 키를 훌쩍 넘겨버릴 정도이기 때문이다. 웃자란 억새들이 하얀 꽃을 매달고 바람에 몸을 맡기 채로 흔들리고 있는 장관을 상상해 보라. 한번쯤은 꼭 찾아봐야할 산이다.

 

산행들머리는 암곡주차장(경주시 암곡동 왕산마을)

경부고속도로 경주 I.C에서 내려와 4번 국도를 타고 보문관광단지까지 들어온다. 이어서 단지 내에 있는 한국역사문화음식학교앞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들어가면 덕동호의 상류를 지나 산행들머리인 왕산마을에 이르게 된다. 왕산마을에는 커다란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그러나 가을철에는 몰려드는 차량들을 다 받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인지 붉은색 모자를 쓴 아저씨(해병전우회)들이 차량의 진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주차장에 내리면 선덕여왕 촬영지라고 적힌 커다란 안내판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2009년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MBC드라마 선덕여왕의 일부 장면을 이곳 무장산에서 촬영하였다는 것이다. 선덕여왕 외에도 장안의 화재를 불러일으켰던 영화 태극기를 휘날리며의 전투신도 이곳에서 촬영된바 있다.

 

 

또한 주차장 옆에는 주민들이 무우, 배추, 고추 등 이 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들을 판매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미나리이다. 미나리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청도에 있는 한재미나리를 떠올린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이곳에서도 온상에다 미나리를 제배하기 시작했고, 요즘에는 등산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사람들이 빠뜨리지 않고 챙겨갈 정도로 유명상품이 되어버렸다.

 

 

주차장에서 선덕여왕 촬영지 안내판의 옆으로 난 길로 들어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들머리에 이정표가 두 개(경주시 : 무장봉 억새밭 9.5Km, 국립공원 무장봉 6.7Km))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두 이정표에 표기된 무장봉까지의 거리가 서로 다르다. 경주시에서 만든 이정표는 곧장 무장봉으로 오르지 않고 무장사지를 거쳐 정상으로 올라가는 거리를 표기해 놓은 모양이다.

 

 

 

 

주차장을 지나면 길게 콘크리트길이 이어진다. 중간에 비슷한 풍경의 갈림길들이 가끔 나타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대충 너른 길을 택하면 되고, 그것도 구분이 안 되는 곳에는 이정표들이 방향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국립공원 암곡지킴센터까지는 1Km, 나타나는 풍경들은 하나같이 우리네 고향마을의 모습 그대로이다. 구태여 서둘지 말고 느긋하게 걸으며 옛 추억에 빠져보자. 주변 풍광을 즐기며 걷다보면 20분 후에는 암곡지킴센터에 이르게 된다. 암곡지킴센터에 이르면 반가운 얼굴을 만나게 된다. 원자력환경공단에 근무하는 박동현실장이다. 원자력환경공단은 내가 임원으로 근무했던 직장인데 박실장은 내가 가장 아끼던 직원 중의 한 명이었다. 공단을 떠난 지 벌써 4년이 더 지났지만 그때의 인연이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몇 사람이 더 나오고 싶어 했지만 내일이 국정감사라서 마음만으로 뵙겠다는 전언이다. 하긴 국정감사 대비 때에 사무실을 비운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일 것이다.

 

 

 

 

암곡지킴터(이정표 : 무장사지 2.4Km, 무장봉 5.7Km)에서 계곡을 가로지르며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계곡 곁으로 난 임도를 따라 5분 정도 걸으면 길이 두 갈래(이정표 : 무장사지 2.0Km, 무장봉 5.3Km/ 무장봉 3.1Km/ 암곡 0.4Km)로 나뉜다. 왼편으로 가면 무장사지를 거쳐 무장봉으로 오르는 임도(林道)이고, 오른편은 곧장 무장봉으로 오르는 급경사(急傾斜) 오르막길이다. 어느 길로 진행하더라고 무장봉에 오르기는 매 한가지이지만 우린 왼편의 임도를 따른다. 무장사지를 꼭 들러보고 싶은 것이 그 첫 번째 이유이다. 오른편 급경사 길로 올랐다가 왼편의 임도가 아닌 다른 코스로 내려가야 할 상황이라도 생길 경우에는 자칫 무장사지를 둘러보지 못하는 우()를 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길가의 나무들은 벌써 색동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3일 전에 올랐던 춘천의 삼악산은 아직까지도 녹음이 짙었었는데 의외이다. 단풍은 위쪽에 있는 설악산에서부터 시작해서 점차 아래지역으로 내려오는 게 보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격적인 단풍은 얼마간 더 있어야 할 듯, 그때에 맞춰 이곳을 찾는다면 무르익은 단풍과 억새를 한꺼번에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임도를 따르는 산길은 우선 넓어서 좋다. 함께 산행을 하는 사람들과 나란히 서서 걸으며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경사(傾斜)까지 완만(緩慢)하다보니 체력적인 부담이 없어 마음부터가 편하다. 산길은 계속해서 계곡을 따른다. 계곡의 이름은 암곡(暗谷), 깊고 어두운 골짜기라는 데서 유래한다. 옛날에는 어두울 정도로 깊은 골짜기였었던 모양이다. 하긴 정상어림에 있었던 목장들이 문을 닫았던 이유도 바로 이 계곡 탓이었다. 계곡으로 난 임도의 유지·보수비용을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았던 것이다.

 

 

 

계곡을 따르던 임도가 갑자기 닫히더니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낙석(落石)의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갈림길에서 7~8분 정도 되는 지점(이정표 : 무장사지 0.1Km, 무장봉 3.3Km/ 암곡 2.4Km)이다. 하긴 길의 상황이 괜찮았더라도 무장사지에 들르려면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 금방 또 하나의 갈림길(이정표 : 무장봉 3.3Km/ 무장사지 60m/ 암곡지원세터 2.4Km)이 나타난다.

 

 

 

갈림길에서 직진하면 금방 무장사지(鍪藏寺址)가 나온다. 폐사지(廢寺址)에 들어서면 주변 일대가 제법 광할(廣闊)하다는 느낌이 먼저 든다. 이곳에 자리 잡고 있던 사찰(寺刹)이 제법 컸다는 증거이리라. 그러나 지금 남아있는 것이라곤 빈 터에 박힌 주춧돌과 두 점의 유물이 전부이다. 나무로 만들어진 것들은 불탔거나 삭아버렸으며, 쇠로 만든 것들은 불에 녹았거나 박물관으로 옮겨갔기 때문일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諺傳太宗統三已後(언전태종통삼이후) 藏兵鍪於谷中(장병무어곡중) 因名之(인명지)라고 적어 무장사라는 이름이 생긴 사연을 적고 있다. 그러나 다들 알고 있듯이 삼국통일(668)은 태종 무열왕(제위기간 : 654~661)이 아니라 문무왕 때 이루어졌다. 아마 일연스님이 잘못 적었지 않나 싶다. 무장사(鍪藏寺)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38대 원성왕(元聖王)의 부친인 김효양(金孝讓)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무장사라는 이름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병기와 투구()를 이 골짜기 안에 감추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삼국을 통일한 후 병기가 필요 없는 평화스러운 시대를 열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병장기들을 이곳에 묻었다는 것이다. 일연(日然)삼국유사를 저술할 때까지 절은 남아 있었으나 이 절을 유명하게 만든 미타전(彌陀殿 : 아미타불을 본존불로 모신 전각)’은 허물어졌다고 한다. 그 뒤 언제 폐허가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현재 이곳에는 미타상(彌陀像)을 조성한 인연을 적은 비문인 보물 제125호의 무장사아미타불조상사적비이수 및 귀부(鍪藏寺阿彌陀佛造像事蹟碑螭首 龜趺)’와 숲 사이에 방치되었던 폐탑(廢塔)을 복원한 보물 제126호의 무장사지 삼층석탑(鍪藏寺址 三層石塔)’만이 남아있다. 참고로 미타전은 이 절의 노승(老僧)이 어떤 진인(眞人)이 이 절 석탑의 동남쪽 언덕에 앉아서 서쪽을 향하여 많은 군중들에게 설법을 하고 있는 꿈을 꾸고 나서 건립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미타전 안에는 소성왕(昭聖王)의 비인 계화왕후(桂花王后)가 먼저 세상을 떠난 왕의 죽음을 슬퍼하다가 아미타불에게 지성으로 귀의하면 구원을 맞이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가지고 있던 모든 재산과 재물을 다 희사하여 만든 아미타불상과 신중(神衆 : 화엄신장)이 봉안되어 있었다고 한다.

 

 

무장사 아미타불조상 사적비 이수 및 귀부(鍪藏寺阿彌陀佛造像事蹟碑螭首 龜趺 : 보물 제125), 무장사 미타전에 모셔졌던 불상(佛像)의 조상사적비(造像事蹟碑)로서 높이는 1.33이다. 비신(碑身)은 국립중앙박물관 보관되어 있으며 절터에는 비신을 받쳤던 귀부(龜趺 : 거북 모양으로 만든 비석의 받침돌)와 이수(건축물이나 공예품 따위에 뿔 없는 용의 모양을 아로새긴 형상. 비석의 머리 등에 많이 새긴다)만이 남아 있다. 이 비는 신라 제39대 소성왕의 비 계화부인(桂花夫人)이 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아미타불상을 조성할 때 세운 것으로, 건립연대는 801년으로 추정된다. 이수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는 여섯 글자를 2행으로 새겼는데, 이수 왼쪽 면에는 김정희(金正喜)의 조사기가 별도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 쌍귀부는 일부 파손된 상태이며 이수의 일부분도 부러졌다. 귀부의 발은 도식화되었으며 귀갑 중앙에 장방형의 높다란 비좌를 설정하고 비좌 4면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하였는데, 이처럼 귀부에 십이지신상을 조식한 것은 퍽 특이한 예에 속한다. 잘려진 이수에는 반룡(蟠龍)이 운기문(雲氣文) 속에서 앞발로 여의주를 잡고 있어서 통일신라 초기에 조성된 신라 태종무열왕릉비(新羅太宗武烈王陵碑) 이후 이수가 남아 있는 예가 없기 때문에 통일신라시대 이수의 변천을 파악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대접을 받고 있다.

 

 

 

무장사지 삼층석탑(鍪藏寺址 三層石塔 : 보물 제126),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전형적인 신라석탑의 양식이다. 아래층 기단은 각 면마다 모서리기둥과 가운데기둥 2개를 새겼고¸ 윗층 기단은 동그란 안상(眼象)을 각 면에 2개씩 조각하였다. 탑의 중심부분인 탑신(塔身)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으며¸ 1층 몸돌은 조금 높은 편이다. 몸돌의 각 모서리에는 층마다 기둥 모양이 조각되었을 뿐 다른 장식은 없다. 각 층의 지붕돌은 크기의 줄어든 정도가 적당하고¸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5단이며¸ 처마는 직선을 이루다가 양 끝에서 부드럽게 살짝 들려있다. 1층 몸돌이 조금 높지만 간략화가 심하지 않고¸ 기단부에 새겨둔 안상은 양식상 시대가 내려옴을 의미하므로 9세기 이후에 건립된 것으로 짐작된다. 원래 무너진 채 깨어져 있었던 것을 1963년 일부를 보충하여 다시 세웠다.

 

 

 

절터를 둘러보고 다시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왼편의 무장봉 방향으로 진행한다. 산길은 잠깐 오르다가 이내 떨어지더니 아까 헤어졌던 임도와 다시 만난다. 그리고 얼마 후, 그러니까 절터를 나선지 20분 남짓 지나면 정면으로 시야(視野)가 트이며 능선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능선에 올라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억새밭, 그러나 이건 아니다 싶을 정도로 초라하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후에 임도는 다시 숲속으로 들어서 버린다. 제대로 된 억새군락지는 조금 더 가야만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능선 위로 오른 임도는 얼마 후에 갈림길을 만들어낸다. 망설임 없이 왼편으로 진행한다. 그리고 얼마 후 도톰하게 솟아오른 언덕을 넘으면 눈앞에 억새평원이 펼쳐진다. 정면에 보이는 산사면(山斜面) 전체가 억새밭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이때부터 산길은 양옆으로 억새밭을 끼고 이어진다. 웃자란 억새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모습은 서럽도록 아름답다. 걷는 속도가 갈수록 더뎌진다. 눈이 호사(豪奢)를 누리다가 자칫 발길을 옮기는 것까지도 잊어버렸나 보다. 능선을 걷고 있는 사람들이 벌어진 입을 다물어질 줄 모른다. 억새가 흐드러진 초원의 광활함만으로도 놀라운데, 거기다 새하얀 억새꽃들이 바람 따라 흔들리는 장관이 사람들의 얼을 빼앗아가 버렸나 보다.

 

 

 

 

이 초원(草原)은 원래 오리온이라는 이름을 가진 목장(牧場)이었다. 동양그룹이 자사의 제품 원료를 조달하기 위해 대규모(1485000: 45만 평)로 조성(1970년대)한 것이다. 그러던 것이 1980년대 초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5공 정권 때 재벌의 비업무용 토지 강제매각 조치에 걸려 충청도 음성의 모 축산회사로 넘어갔다. 목장을 넘겨받은 축산회사는 이후로도 목장을 계속 운영하다 1996년 초에 문을 닫았다. 그 이유는 목장으로 올라오는 진입로의 유지·보수비용이 상상을 초월하기 힘들 정도로 많이 들어서였단다. 아까 우리가 올라왔던 임도(林道)가 바로 그 원인이 된 도로이다. 계곡을 따라 이어지다보니 비가 조금만 많이 와도 여기저기 끊겨버렸던 모양이다. 아무튼 그 너른 초지는 자연의 섭리에 따라 차츰 억새군락지로 변하기 시작했고, 종내는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듬뿍 받는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바람에 흩날리는 하얀 억새꽃에 취해 걷다보면 어느덧 정상에 이르게 된다. 능선에 올라선지 30, 산행을 시작한지는 1시간45분이 지났다. 정상은 엄청나게 널따란 분지(盆地)로 이루어져 있다. 분지의 잡목으로 가득 찬 북쪽은 시야(視野)가 차단되어 있고, 초원(草原)이 펼쳐지는 남쪽으로만 시야가 열린다. 그래서인지 남쪽에다 전망데크를 만들어 억새평원을 조망할 수 있게 했다. 그렇다고 북쪽을 그냥 내버려둔 것은 아니다. 분지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커다란 정상표지석의 뒤편, 그러니까 잡목들의 경계선을 따라 커다란 사진(寫眞)들을 전시해 놓았다. 물론 잠깐 한눈을 팔아도 괜찮을만한 풍경들이다. 참고로 정상표지석에는 동대봉산 무장봉이라 새겨져 있다. 원래 무장산이라고도 불렸으나 동대봉산에 딸린 봉우리가 옳다는 의견이 대세가 되어 고쳐진 것이란다.

 

 

 

 

억새는 햇빛을 등졌을 때가 가장 장관(壯觀)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노을을 등지며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구름에 잔뜩 낀 오늘도 나름대로의 멋진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낮게 깔린 구름 속에서 바람에 휘날리고 있는 억새들이 몽환적(夢幻的)인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정상에서의 조망(眺望)도 빼어나다. 초원(草原)의 특징대로 시야(視野)가 뻥 뚫리기 때문이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발아래의 보문단지와 포항 앞바다 그리고 단석산, 토함산, 동대봉산, 함월산, 운제산 등 경주와 포항 지역의 웬만한 산들은 죄다 확인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구름이 잔뜩 끼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큰 불만은 없다. 일기예보(日氣豫報)에는 오늘 비가 올 것이라고 했는데, 아직까지 비가 내리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니까 말이다.

 

 

정상에서의 하산은 다시 억새밭으로 내려서면서 시작된다. 무장산 억새단지는 무려 148에 이른다고 한다. 동양제과의 오리온목장과 오리온목장보다 규모가 더 컸었다는 봉명그룹의 대단위목장이 모두 초원(草原)으로 변한 결과이다. 두 목장(牧場)이 모두 각각의 사연을 갖고 주인이 바뀌었고, 그 후 진입로의 유지·보수비용 과다로 인해 비슷한 시기에 문을 닫게 되었다. 그 결과 너른 초지는 자연의 섭리에 따라 차츰 억새군락지로 변하기 시작했고, 종내는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듬뿍 받는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억새평원을 빠져나오면 이번에는 다시 숲길로 들어서게 된다. 보드라운 흙길로 이루어진 임도를 따라 얼마간 내려오면 산길은 갑자기 가파른 오솔길로 변한다. 오늘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산길다운 산길이다.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에 만난 풍경들을 모두 다 가슴에 담을 수가 없었다. 정상에서 1시간여를 쉬면서 박실장이 준비해온 술과 음식들을 먹은 덕분이다. 불콰하게 술기운이 올랐으니 주변경관이 어떻게 다 눈에 들어오겠는가.

 

 

 

 

산행날머리는 암곡주차장

정상을 출발한지 50분쯤 지나면 임도에 내려서게 되고, 다시 3~4분 후에는 산행을 시작하면서 헤어졌던 갈림길에 이르게 된다. 갈림길 이후에는 아침에 올라왔던 길을 다시 거슬러 내려가게 되는 원점 회귀산행이다. 주변의 경치 또한 아침에 보았던 풍경과 다름없으므로 그저 부지런히 걷는 게 일이다. 조금이라도 빨리 내려가서 이 지역이 자랑하는 미나리를 먹어보기 위해서이다. 갈림길에서 부지런히 걸으면 20분 남짓 후에는 암곡주차장에 다다를 수 있다. 오늘 산행은 3시간 정도가 걸렸다. 물론 순수하게 걸은 시간이다. 오늘 산행을 같이 한 박실장에게 이 글로나마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산행을 같이 해준 것만 해도 고마운데, 먹고 마실 것은 싸들고 산을 오른 것은 물론, 하산 후에는 삼겹살까지 대접을 받았으니 어찌 고맙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다 보면 비닐하우스를 이용한 간이식당들이 많이 눈에 띈다. 간판에는 하나 같이 이곳의 특산물인 미나리를 이용한 음식들을 팔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미나리와 생삽겹살, 삼겹살과 미나리를 한꺼번에 구워먹는 것이다. 가격은 미나리는 한 단에 8천원, 그리고 생삽겹살이 1인분에 7천원이란다. 유원지(遊園地)치고는 상상외로 싸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알아차리는 데는 결코 오래가지 않는다. 주문한 삼겹살의 양이 엄청나게 적게 나오는 것이다. 주인장에게 물어보니 1인분에 100gram이란다. 그러면 그렇지 생삽겹살이 1인분에 7천원이라니 어디 가능한 일이겠는가. 하여간 식당 안에는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등산객들로 붐비고 있다. 그리고 커다랗게 벌린 입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하나같이 미나리에 싼 삼겹살들이다. 등산객들은 그렇게 이중으로 건강을 챙기고 있다. 등산으로 체력을 다지고, 아울러 미나리로는 신체(身體)의 기능을 높이는 것이다. 참고로 미나리의 효능은 해독작용과 중금속배출(복어탕에 미나리를 넣는 것도 독을 중화), 간 기능향상 숙취해소(간의 활동에 도움, 오줌을 잘 나오게 함), 변비(섬유질 풍부하고 창자의 내벽을 자극해서 장의 운동촉진), 고혈압(심혈관계를 맑게 정화) 등 다양하다.

기룡산(騎龍山, 961m)-꼬깔산(737m)

 

산행일 : ‘14. 10. 5()

소재지 : 경북 영천시 화북면과 자양면의 경계

산행코스 : 용화마을 경로당전망바위낙대봉묘각사 갈림길기룡산전망대꼬깔산호수전망대자양초등학교(산행시간 : 4시간20)

함께한 산악회 : 청마산악회

 

특징 : 기룡산과 꼬깔산은 등산마니아들이나 알고 있을 정도로 세상에 덜 알려진 산이다. 그러나 막상 산에 들고 보면 어떻게 이런 산이 아직까지도 숨어 지낼 수 있었을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그 산세(山勢)가 자못 빼어나다. 낙대봉 근처와 기룡산 정상 어림의 바윗길은 스릴(thrill)을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고, 능선에서의 조망(眺望)은 사뭇 시원스럽다. 거기다 암릉을 제외한 나머지 구간은 부드러운 흙길인데다 경사(傾斜)까지 완만해서 걷기가 여간 편한 것이 아니다. 한마디로 괜찮은 산이니 꼭 한번쯤은 들러봐야 할 산으로 꼽고 싶다.

 

산행들머리는 용화리 경로당(영천시 자양면)

익산-포항고속도 북영천 I.C에서 내려와 35번 국도와 28번 국도를 연달아 타고 포항방면으로 달리다보면 임고교차로(交叉路 :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가 나온다. 교차로에서 빠져나와 왼쪽으로 뚫린 69번 지방도를 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영천댐을 만날 수 있다. 이어서 영천댐의 호안(湖岸)을 타라 얼마간 달리다가 용화교()를 건너자마자 왼편으로 방향을 바꾸면 잠시 후에 산행들머리인 용화리에 이르게 된다. 마을 경로당 앞까지 시내버스가 다니니 참조할 일이다.

 

 

용화리 경로당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개울(묘각곡) 옆으로 난 임도를 따라 마을을 가로지르면 금강교(金剛橋)와 묘각교(妙覺橋)가 연이어 나타나는데, 그 이름에 불가의 냄새가 짙다. 아마 저 계곡의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천년고찰(千年古刹)인 묘각사가 그 원인인 아닐까 싶다.

 

 

산행을 시작한지 6~7분쯤 되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오른편은 묘각사로 올라가는 길, 낙대봉을 오르려면 왼편 운곡저수지 방향으로 진행해야 한다. 저수지의 둑을 보고 10m쯤 진행하다 오른편 산자락으로 들어붙는다. 산자락에 커다란 비석(碑石)까지 갖춘 무덤(경주 이씨)이 보이니 참조하면 된다.

 

 

산에 들자마자 의외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아직까지 세상에 덜 알려진 산임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산길이 또렷한 것이다. 관할 지자체에서 그만큼 많은 정성을 들이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산자락에 들어선지 5분쯤 지나면 능선 위로 올라서게 되고, 이어서 15분쯤 더 걸으면 거대한 바위절벽이 앞을 가로막는다. 이 벼랑을 왼편으로 돌아 오르면 멋진 용화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바위전망대가 나타난다. 용화리는 두 개의 큰 산줄기 사이에 들어앉아 있는 형상이고, 그 오른편에는 운곡저수지, 그리고 저 멀리에는 영천댐까지 내다보인다.

 

 

 

낙대봉, 서슬 시퍼런 바윗길 위험할 것 같으나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

 

 

전망바위을 지나면서 시작되는 바윗길을 짧게 치고 오르면 5분 후에는 또 다시 거대한 암벽(巖壁)이 앞을 가로막는다. 이 바위를 에돌아 오르면 또 다른 전망대가 나타난다. 이 곳뿐만이 아니라 곳곳에서 조망(眺望)이 열린다. 바위가 많고 숲이 성긴 암릉의 특성이다. 바위에 서면 용화마을과 영천댐 등 주변 풍광이 아까 보았던 것보다 더 넓게 펼쳐진다.

 

 

 

 

두 번째 전망대에서 바윗길은 끝을 맺고 이어지는 산길은 순수한 흙길로 바뀐다. 그리고 능선의 나무들도 언제부턴가 순수한 참나무 숲으로 바뀌어 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소나무와 반반 정도로 섞여있었는데 말이다. 갑자기 편해진 산길을 따라 6~7분쯤 오르면 낙대봉 (522.8m)정상이다. 낙대봉 정상은 평범하기 짝이 없다. 만일 삼각점(204/2001재설)마저 없었더라면 정상인줄도 모르고 그냥 지나치기 십상일 것이다. 그런 풍경이 못내 안타까웠던지 어느 누군가가 자그만 자연석(自然石)을 세우고 그 위에다 낙대봉이라고 써 놓았다.

 

 

 

정상 근처에서 또 다른 전망바위를 만난다. 용화마을과 영천댐 등 올라오면서 즐겼던 풍경이 조금 더 넓게 또 다시 나타난다.

 

 

일단 낙대봉에 올라서면 이후부터는 수월한 산행이 이어진다. 낙대봉에서 기룡산 정상까지의 거리는 대략 3Km남짓, 그러나 두 봉우리의 표고차는 400m여에 불과하다. 거기다 능선에 깊은 골이 없다보니 가파른 오르내림을 만들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능선은 온통 참나무로 가득 차있다. ‘후드득 후드득도토리 떨어지는 소리라도 들리는 양 길바닥에는 도토리가 지천이다. 앞서가던 총무님이 자꾸만 허리를 굽히는 것을 보니 아마 도토리 줍기에 재미를 붙였나보다. 아니나 다를까 도토리 무게에 짓눌린 그녀는 중간에서 탈출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만큼 도토리가 많이 떨어져 있었다는 얘기이다.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40분 남짓 걷다보면 묘각사 갈림길(이정표 : 기룡산 1.6Km/ 묘각사 0.8Km/ 용화 3.3Km)이 나온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땅바닥에 놓여있는 이정표 2(#1 : 정상 4Km, #2 : 기룡산 2Km)를 만나게 되나 염두에 둘 필요는 없다. 아무래도 거리표시가 잘못된 것 같기 때문이다. 이곳 삼거리에서 오른편으로 내려가면 천년고찰(千年古刹)인 묘각사(妙覺寺)를 만나게 된다. 묘각사에 들렀다가 곧장 기룡산 정상으로 오르는 코스도 개발되어 있으니 취향에 따라 선택할 일이다. 묘각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寺刹)로 신라 선덕여왕 때 의상(義湘: 625702)이 창건하였다. 설화(說話)에 따르면, 창건 당시 동해의 용왕(龍王)이 의상의 설법(法性偈)을 듣고 문득 깨달음을 얻어 승천(昇天)하였단다. 용왕은 하늘에서 감로(甘露)를 뿌렸는데, 이 비가 당시 극심했던 가뭄을 해소하면서 민심이 수습됐던 모양이다. 이에 의상은 묘()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여 절 이름을 묘각사라 하였다는 것이다. 이 절은 고려 때와 조선 중기까지의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1592(선조 25)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44(인조 22)에 요사채를 지은 것을 시작으로 여러 번의 중창을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극락전과 산신각, 요사채 등이 있다.

 

 

묘각사갈림길을 지나면서 오름길이 시작된다. 그러나 오르는데 버겁다는 느낌이 들 정도는 아니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15분 남짓 지그재그로 오르면 또 다른 묘각사 갈림길(이정표 : 기룡산 1.0Km/ 묘각사 1.2Km/ 용화 3.9Km)을 만나게 되나 개의치 않고 통과한다. 묘각사를 들러보고 싶었다면 아까 지나왔던 갈림길에서 내려갔었을 것이다.

 

 

 

 

갈림길에서 조금 더 오르면 오늘 산행 중 처음으로 왼편으로 시야(視野)가 트인다. 화북면의 들녘은 물론 멀리 보현산까지 보이는데, 산꼭대기에 앉아있는 천문대(天文臺)가 앙증스러울 정도로 조그맣다. 그 옆의 산은 아마 기상관측소(氣象觀測所)가 있다는 면봉산일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탑전 갈림길(기룡산 0.6Km, 묘각사 1.5Km/ 탑전 1.9Km/ 묘각사 1.8Km)이 나온다.

 

 

 

보현산이 보였다싶으면 다음부터는 스스럼없이 조망(眺望)이 터져버린다. 이곳부터 정상까지는 암릉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아기자기한 암릉을 오르내리는 이 구간이 기룡산 산행의 백미(白眉)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암릉의 특징대로 곳곳에서 조망이 터지는데, 특히 왼편 보현산을 건너다보며 오르내리는 맛이 일품이다. 물론 오른편에는 오늘 지나왔던 산줄기가 한눈에 들어오고 저 멀리 영천호가 산줄기 사이에서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다.

 

 

 

 

 

 

바윗길은 잘 닦여있어서 위험할 것까지는 없다. 그러나 그나마도 부담스럽다면 우회로(迂廻路)로 에돌아가면 되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능선을 걷다가 문득 옛시조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라는 대나무를 읊은 시조이다. ‘암릉도 아닌, 그렇다고 흙길도 아닌이라는 표현이 딱 어울릴 것 같은 능선은 마음 편히 그저 조망만 즐기면서 걸을 수 있는 재미난 길이다. 심심찮게 터지는 조망(眺望)을 즐기며 20분 정도 걷다보면 어느덧 무인산불감시탑이 지키고 있는 기룡산 정상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2시간10분만에 정상에 도착했다.

 

 

 

 

반반한 바위로 이루어진 정상은 무인산불감시탑 외에도 작고 귀여운 정상표지석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기룡산에는 의상대사와 얽힌 옛이야기 하나가 전해져 내려온다. 옛날 신라시대에 화엄(華嚴 : 佛法의 광대무변함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말)의 진리를 깨달은 의상대사가 이곳에서 절을 열려고 했단다. 그때 이 소식을 전해들은 동해의 용왕(龍王)이 의상의 설법(說法)을 듣기 위해 말을 타고 달려왔단다. 그런 인연으로 얻은 이름이 기룡산(騎龍山)이라는 것이다.

 

 

정상에 서면 일망무제(一望無題)의 조망이 터진다. 왼편(북쪽)에는 천문대가 있는 보현산이 손에 잡힐 듯 가깝고, 그 뒤로는 기상관측소를 이고 있는 면봉산과 베틀봉이 건너다보인다. 그리고 남쪽에는 영남알프스, 동쪽으로는 낙동정맥의 산줄기를 따라 운주산 침곡산이, 서쪽에는 방가산, 봉림산 등이 줄줄이 이어진다.

 

 

 

정상에서의 달콤한 휴식, 제법 많은 사람들이 둘러앉아도 좋을 정도로 널따란 암반(巖盤)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침 오늘은 따스한 햇살이 그리운 가을의 초입, 너나 할 것 없이 퍼질러 앉아 모처럼의 여유를 즐겨본다. 물론 간식과 함께 이다. 이런 게 바로 산행의 재미가 아닐까 싶다.

 

 

정상에서 하산은 꼬깔산이다. 아까 올라왔던 방향과 반대로 내려서자마자 갈림길(이정표 : 꼬깔산(하절, 아산정) 3.4Km, 상기·원각·황새골/ 묘각사 0.9Km/ 묘각사·탑전·용화)이 나온다. 오른편은 묘각사로 내려가는 길, 고깔산으로 가려면 맞은편으로 곧장 내려가면 된다.

 

 

묘각사 갈림길을 지나 조금 더 내려오면 황새골로 내려가는 또 다른 갈림길(이정표 : 꼬깔산(하절·아산정) 3.2km/ 상기·원각·황새골/ 기룡산 2Km, 탑전·용화)이 나오나 무시하고 ‘Y’형의 오른편 길로 진행한다. 이어서 조금 후에는 가야할 능선과 영천호가 살짝 내다보이는 전망대가 나오니 서둘지 말고 조망(眺望)을 즐겨볼 일이다.

 

 

 

전망대를 지나면서 산길은 갑자기 가팔라지면서 고도(高度)를 낮춘다. 그 가파름이 부담스러웠던지 길가에 안전로프를 매달아 놓았다. 그 가파름은 넓은 터를 가진 묘지(墓地)를 만나면서 완만해진다. 산행을 하다보면 이런 묘()들이 유난히도 많이 눈에 띈다. 그만큼 이 산에 명당(明堂)이 많다는 것을 나타내는 또 다른 표현이 아닐까 싶다. 그 하나의 증거가 바로 성곡리 하절에 있다는 효자 정윤량(1515~1580)의 명당터일 것이다. 정윤량(鄭允良) 영천시 자양면(紫陽面) 노항촌(魯巷村) 사람으로 자는 원좌(元佐), 호는 노촌(魯村)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受學)한 정윤량은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버이를 섬김에 정성을 다하였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애통해 하는 모습이 더할 수 없이 애처로웠고 예를 행함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고 한다. 그의 효성에 감복(感服)한 신령이 노승을 보내어 명당터를 알려주었는데 그곳이 바로 성곡리(聖谷里) 하천(夏泉)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노승이 했다는 말을 옮겨본다. 기룡의 좌장혈인 이 혈은 부귀를 겸하여 가운이 융성할 것이며 힘차게 내리 쏟는 기룡의 정기를 받았으니 위인이 날 징조라. 청룡과 백호가 세 겹으로 둘려졌으니 귀인이 날 터이며, 물 흐름이 보이지 않으니 부자도 날 것이요, 이와 같이 크고 귀한 판국에는 손세도 좋아 이 세상이 바로 정 효자요

 

 

이어지는 산길은 다시 밋밋한 능선길이다. 이런 길은 걷기에 편하다. 그러나 구경거리가 없는 게 일반적이다. 이 구간도 역시 그런 육산의 특징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저 앞만 보면서 걷다보면 20(정상에서) 후에는 안부에 이르게 되고, 15분 후에는 이정표(고깔산 1.6Km/ 기룡산 1.7Km)를 만나게 된다. 이후로도 산길은 아무런 특징이 없이 이어진다. 어쩌다 나뭇가지 사이로 지나온 기룡산이 언뜻 나타나기도 하지만 조망(眺望)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빈약하다.

 

 

밋밋한 산길을 따라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다보면 30분 후에는 용화마을 갈림길(이정표 : 하절 2.4km / 용화 / 기룡산 3.3km)을 만나고, 곧이어 고깔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검은 오석(烏石)으로 된 정상표지석과 이정표(아산정 2.5Km/ 하절 2.4Km/ 기룡산 3.3Km), 그리고 삼각점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정상은 한마디로 빈약하다. 특별한 볼거리도 없을뿐더러 조망까지도 허락하지 않는다.

 

 

고깔산 정상에서의 하산은 하절 방향이다. 하산길의 초반은 가파르게 시작된다. 안전로프까지 매어져 있을 정도로 가파르나, 다시 완만한 능선길로 되돌아오는 데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는다. 하산을 시작한지 10분 남짓 지나면 웃지린 잡초(雜草)만 무성한 헬기장에서 신선암갈림길(이정표 : 하절 1.9Km/ 신선암 1.3Km/ 꼬깔산 0.5Km)을 만나게 되고, 이곳에서 하절 방향으로 조금 더 내려오면 나뭇가지사이로 시야(視野)가 열린다. 그리고 그 사이로 푸른 호수가 나타난다. 바로 자양호(紫陽湖)라는 예쁜 이름을 갖고 있는 영천댐이다. 잠시 멈춰 서서 조망을 즐겨본다. 빼어나다고는 볼 수 없으나, 나름대로의 멋을 지닌 호안(湖岸)이 눈길을 끈다. 이런 즐거움이 바로 산행의 묘미가 아닐까 싶다.

 

 

 

 

산행날머리는 성곡리복지회관 옆 주차장

전망대를 지나서 10분쯤 더 내려오면 또 다른 신선암 갈림길(이정표 : 자양초등학교 1.2Km/ 신선암 0.7Km/ 꼬깔산 1.1Km)을 만나게 되고, 자양초등학교 방향으로 20분쯤 더 내려서면 자양초등학교이다. 이미 폐교가 되어버린 학교 운동장에는 뛰어노는 학생들 대신에 텐트들이 즐비하다. 유휴시설을 이용해서 캠핑장을 만들었나 보다. 산행이 종료되는 성곡리 복지회관은 이곳에서도 10분 정도를 더 걸어야 한다. 오늘 산행시간은 총 4시간30분 정도가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정상에서 쉰 시간을 감안할 경우에는 4시간20, 산행거리가 12쯤 되었으니 제법 빨리 걸은 셈이다. 그만큼 산길이 고왔다는 증거일 것이다.

 

 

 

 

날머리인 복지회관 뒤편은 영천댐이다. 영천댐(자양호)은 높이 42m, 제방길이 300m, 총저수량 9,640t으로, 1974년 착공해서 1980년에 준공했다. 포항과 영천의 식수(食水)와 주변 공업단지의 공업용수(工業用水), 그리고 금호강 중류, 하류 유역의 농업용수(農業用水)까지 공급하는 다목적(多目的) (dam)이다. 이 댐의 건설로 인해 자양면의 6개 법정동이 수몰되기도 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으니 유익한 사업이었다고 볼 수 있다. 거기다 어디서 보아도 물과 산이 어우러진 절경이 펼쳐지니 당연히 찾아드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고, 결과적으로는 인근 주민들에게도 많은 도움이 된다고 할 것이다. 그 증거가 호수 주변에 줄줄이 늘어서 있는 붕어찜 전문식당들이 아닐까 싶다.

화악산(華岳山, 930.4m)-철마산(鐵馬山, 634m)

 

산행일 : ‘14. 8. 16()

소재지 : 경북 청도군 청도읍과 경남 밀양시 부북면·상동면·청도면의 경계

산행코스 : 밤티재화악산전망바위윗화악산아래화악산철마산문필봉음지마을(산행시간 : 4시간 40)

같이한 산악회 : 청마산악회

 

특색 : 화악산과 철마산은 같은 능선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언 듯 보면 하나의 산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엄연히 독립된 산이다. 900m가 넘는 화악산은 산이 많은 것으로 소문난 청도에서도 손에 꼽히는 산으로 알려져 있지만 철마산은 웬만한 산꾼들 조차도 생소한 이름일 것이다. 그러나 청도 10대 명산'으로 꼽힐 정도로 청도에서는 알아주는 산이다. 이는 암릉으로 이루어진 산세(山勢)가 자못 빼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그와 반면에 화악산은 전형적인 육산(肉山)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윗화악산과 아랫화악산을 잇는 능선의 암릉이 제법 웅장하기도 하지만 일부분일 따름이고 전체적으로 볼 때는 대부분 흙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아무튼 두 산 모두 조망(眺望)이 뛰어나고 가끔 나타나는 바윗길은 짜릿한 쾌감을 선사한다. 다만 산을 오르내리는 코스가 모두 급경사(急傾斜)라서 엄청나게 미끄럽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일 것이다.

 

산행들머리는 밤티재(청도군 각남면 사리)

대구-부산고속도로 청도 I.C에서 내려와 20번 국도 창녕방면으로 달리다가 녹갈교(: 청도군 각남면 녹명리)를 건너기 바로 직전에 빠져나와 왼편 902번 지방도(한재로)로 옮겨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각남면 사리와 청도읍 상리를 잇는 고갯마루인 밤티재에 올라서게 된다.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밤티재에서 남쪽 방향의 시멘트 축대(築臺)를 올라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화악산 정상은 930m, 그런데 이곳의 높이가 해발 485m이니 조금만(450m) 더 오르면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그 때문인지 산길로 들어서는 일행들의 얼굴 표정이 다들 밝아 보인다. 오늘 산행이 그다지 힘들이지 않고도 마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일 것이다. 그러나 이 생각들이 얼마나 부질없었는가는 금방 깨닫게 된다. 그 고도차(高度差)를 줄이는 거리가 짧다보니 엄청나게 가파른 오르막길이 정상의 바로 턱밑까지 계속되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곳 밤티재에서 반대방향으로 올라가면 청도의 진산(鎭山)인 남산이 나온다.

 

 

산자락으로 접어들어 가파르게 5분 정도를 치고 오르면 산길은 잠깐 안부로 내려섰다가 다시 반대편 능선으로 향한다. 안부에서 보면 오른편으로 산길의 흔적이 보인다. 밤티재의 다른 지점에서 올라오는 길인 모양이다. 안부를 지나면서 산길은 가팔라지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종내는 아예 허리를 곧추 세워버린다. 난 이런 길을 코에서 흙냄새가 난다.’는 표현을 쓴다. 산길이 하도 가파르다보니 코가 거의 땅바닥에 닿을 정도로 가까워진다는 얘기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가끔 나타나는 바위들이 눈요깃거리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꺾일 줄 모르고 계속되는 비탈길을 45분쯤 치고 오르면 성벽 같은 암벽(巖壁) 아래에 이르게 된다. 이 암벽을 왼편으로 우회(迂廻)하면 평양리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삼거리에 이르게 되고, 곧이어 돌탑봉(이정표 : 정상 0.3Km/ 밤티재 1.2Km)에 올라서게 된다.

 

 

 

돌탑봉은 전망대(展望臺)를 겸한다. 밤티재 방향이 바위벼랑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조망(眺望)이 트이는 것이다. 벼랑 위에 서면 조금 전에 산행을 시작했던 밤티재가 발아래에 내려다보인다. 그러나 그 건너에 있을 남산은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아직은 장마가 가시지 않은 탓에 두터운 구름에 갇혀버린 것이다.

 

 

 

돌탑봉에서 화악산 정상은 금방이다. 거기다 경사가 거의 없는 능선으로 이어진다. 마치 이곳까지 올라오면서 고생했던 것에 대한 보상으로 느껴질 정도이다. 한 줄기에서 여러 개의 가지가 갈려나온다고 해서 만지송(萬枝松)이라고도 불리는 반송(盤松)이 도열해 있는 능선을 따라 7~8분쯤 걸으면 드디어 화악산 정상에 이르게 된다. 산행들머리인 밤티재에서 55분이 걸렸다.

 

 

흙으로 이루어진 너른 정상에는 어른의 키만큼 커다란 정상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정상은 인근에서 가장 높은 산답게 시야(視野)가 넓게 열린다. 날씨가 좋을 경우에는 영남알프스의 연봉은 물론이고 비슬산이나 화왕산 등 경남·북의 내로라하는 산봉들이 한눈에 들어오겠지만 아쉽게도 오늘은 산은 그림자도 보여주지 않는다. 사방이 온통 구름에 뒤덮여 있는 탓이다. 참고로 화악산에는 산의 이름과 관련된 전설(傳說)이 하나 전해져 내려온다. 아주 먼 옛날 천지(天地)가 개벽(開闢)될 때 온 세상이 물에 잠겼다고 한다. 이때 화악산에는 황소 한 마리, 비슬산에는 비둘기 한마리, 용각산에는 용() 한 마리가 앉을 자리만큼 물에 잠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화악산 비슬산 용각산이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것이다.

 

 

정상에서 윗화악산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은 온통 웃자란 잡초(雜草)와 넝쿨식물들로 뒤덮여있다. 화악산을 찾는 사람들이 제법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의외이다. 잡초들을 헤치며 나아가다 보면 잠시 후에는 또 다른 돌탑봉을 만나게 된다. 이곳에 있는 갈림길에도 아까 돌탑봉에서 보았던 특이하게 생긴 이정표(윗화악산 1.4km/ 한재 2.6km/ 정상 0.7km)가 세워져 있다. 두 기둥 사이에다 나무판자를 끼워 놓은 다음, 그 판자(板子)에다 각 지점의 방향을 나타내는 화살표와 거리를 새겨 넣었다. 그러나 이런 이정표는 다음 갈림길인 운주암갈림길부터는 철판으로 만든 이정표로 변해버린다.

 

 

 

한재갈림길에서 조금만 더 걸으면 운주암갈림길(이정표 : 아랫화악산 2.3Km/ 운주암 0.5Km/ 화악산 정상 1.2Km)이 있는 875m봉이 나오고 이어서 조금 후에는 헬기장이다. 화악산의 자랑은 뭐니 뭐니 해도 헌걸찬 능선이다. 흙으로 이루어진 마룻금을 마음껏 내달리며 이따금씩 맞닥뜨리게 되는 암릉길은 짜릿한 손맛까지도 선사한다. 흙산과 암릉의 기막힌 조화(調和)가 산행의 재미를 한층 더 높여주는 것이다. 그중 하나인 바윗길이 헬기장을 지나면서 나타난다. 아직 손맛까지 느낄 정도는 아니지만 시야(視野)만은 시원스럽게 뻥 뚫린다. 양쪽이 바위벼랑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능선에 서면 왼편에는 한재가 발아래에 펼쳐지고 그 너머에는 남산이 선명하다. 그리고 오른편에는 밀양의 부북면 일대가 눈에 들어온다.

 

 

 

 

바윗길은 아쉽게도 짧게 끝나버린다. 그렇다고 해서 조망(眺望)까지도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니다. 능선은 아직도 왼편이 벼랑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윗화악산이 가까워지면서 산길은 더욱 볼거리가 늘어난다. 꽤 까다롭고 아기자기한 암릉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기어오르기도 하고 암릉 사이로 빠져나오기도 하며 바윗길을 걷는 즐거움은 자칫 단조로울 능선산행에 활력소가 된다. 이 바윗길은 대개 왼편 불당골(한재) 방향으로 발달되어 있다. 오른편의 각남(청도)과 부북(밀양) 방면의 산자락이 비교적 순한 경사면(傾斜面)으로 이루어진데 반해 왼편 불당골 방향은 매우 가파르거나 수십 길의 바위벼랑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여간 능선으로 난 산길은 경관(景觀)이 아름다울뿐더러 짜릿한 쾌감까지 선물해 준다.

 

 

 

 

 

 

 

깎아지른 절벽 위에 있는 윗화악산의 정상은 두 개의 평평한 분지(盆地)로 이루어져 있다. 정상표지석은 그중 북쪽, 그러니까 한재 방향의 분지에 세워져 있다.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뛰어나다. 산행을 시작할 때부터 산하(山河)를 뒤덮고 있던 구름이 언제부턴가 말끔하게 치워졌기 때문이다. 미나리골 한재와 우리가 지나온 화악산의 능선이 길게 남산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반대편 분지로 자리를 옮기기라도 할라치면 밀양쪽의 부북면 퇴로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가야할 방향에 아래화악산에서 그 너머 철마산으로 이어지는 헌걸찬 능선이 또렷하게 나타나는 것은 물론이다. 화악산에서 윗화악산까지는 50분 정도가 걸렸다.

 

 

 

 

윗화악산에서 내려서는 길은 가파르다. 그 길 양옆에는 진달래나무와 철쭉이 숲을 이루고, 그 틈새를 따라 억새풀이 자리를 같이하고 있다. 이런 진달래 군락(群落)들은 산행 내내 심심찮게 나타난다. 그러고 보니 이곳 화악산은 진달래의 명산으로 알려진 것이 아니겠는가. 만일 초봄에라도 찾아올 경우에는 눈이 실컷 호사(豪奢)를 누릴 것 같다. 정상에서 내려선지 10분 남짓 지나면 철다리를 건너게 되고, 이어서 10분 남짓 더 걸으면 안부사거리(이정표 : 아래화악산 0.5Km/ 한재 1.7Km/ 평밭 2.8Km/ 화악산 3.0Km)에 내려서게 된다. 이쯤에서 산행을 그만두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이곳에서 왼편 한재방향으로 내려서면 된다.

 

 

 

 

 

다시 시작되는 오르막길을 힘차게 앞서가던 집사람이 갑자기 멈춰 서서 어디로 가야할 지를 물어본다. 두말할 것 없이 왼편으로 방향을 잡는다. 능선으로 가야 조금이라도 더 많은 구경거리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내 결정이 옳았음은 금방 증명이 된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서슬이 시퍼런 바위 절벽(絶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비록 굵직한 안전로프가 매달려 있지만 그 높이가 만만찮은데도 집사람의 얼굴 표정은 희희낙락(喜喜樂樂)이다. 요즘 부쩍 짜릿한 손맛에 재미를 들이기 시작하는 집사람은 바위만 보면 그저 매달리고 본다. 그 위험성을 미처 생각할 겨를이 없을 정도로 바위에 흠뻑 빠져있는 것이다.

 

 

 

바위벼랑 위가 바로 아래화악산 정상이다. 제법 너른 분지(盆地)로 이루어진 정상에는 나무데크로 전망대를 겸한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정상석은 데크의 맞은편 벼랑 위에다 세워 놓았다. 데크에 오르면 북쪽에 남산이 또렷하고, 윗화악산을 지나 화악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부드럽게 휘어지는 것이 한눈에 들어온다. 윗화악산에서 아래화악산까지는 40분이 조금 못 걸렸다.

 

 

 

 

아랫화악산의 전망데크에서 내려서자마자 길은 두 갈래(이정표 : 철마산 2.3Km/ 옥교산 6.3Km/ 화악산 3.4Km)로 나뉜다. 왼편 철마산 방향으로 향하면 급경사(急傾斜)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그런데 그 내리막길이 신발이 앞으로 밀리지 않고서는 결코 내려설 수 없을 정도로 그 가파름이 심한 것이 여간 사납지 않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30분 정도 내려서면 무덤이 있는 곳에서 왼편으로 오솔길 하나가 갈려나간다. 길가에 산악회의 시그널들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것을 보면 한재로 내려가는 지름길인 모양이다.

 

 

한재갈림길을 지나면 짙은 소나무 숲속으로 들어서게 된다. 물론 산길은 이곳에서부터 평탄하게 변한다. 눈에 들어오는 소나무들은 하나같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위로 치솟아 오르고 있다. 너무 밀식(密植)을 한 탓에 굵지를 못하고 위로만 향하고 있는 모양이다. 소나무 숲길을 따라 15분 정도를 더 걸으면 안부에 이르면서 또 다른 갈림길이 나타난다. 어쩌면 이곳이 독점이고개일 것이다. 이곳에서 왼편으로 내려가면 음지리가 나온다. 그리고 오른편은 옥산리로 내려가는 하산길이나 사람들이 다니지 않은 탓에 길의 흔적까지도 거의 사라져 버렸다.

 

 

 

 

독점이고개를 지나면서 산길은 다시 오름짓을 시작한다. 그 오름짓은 점점 더 심해지더니 끝내는 다시 코에서 흙냄새가 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허리를 곧추 세워버린다. 산길은 벼랑위로 난 사면길을 지나 다시 한 번 가파른 오름짓을 한 뒤에야 철마산 정상에 올려놓는다. 독점이고개에서 23, 아래화악산에서는 1시간10분 정도가 걸렸다. 제법 널따란 분지(盆地)로 이루어진 철마산 정상은 작고 귀여운 정상표지석이 지키고 있다. 그러나 정상은 또렷한 볼거리를 보여주지는 못한다. 주변의 나무들 때문에 조망(眺望) 또한 트이지 않는다. 그리고 또 하나, 정상 주변에 철마산성(山城)의 성터가 있다고 해서 살펴봤지만 아쉽게도 찾아낼 수가 없었다.

 

 

 

 

철마산을 지나면서 산길은 아찔한 낭떠러지 위로 나있다. 그러나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왼편은 수십 길의 바위벼랑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오른편은 사면(斜面)으로 이루어져 있고, 산길은 벼랑을 약간 빗겨나 오른편 사면을 따라 나있기 때문이다. 이 구간을 걷다보면 산길이 가끔 등산로를 벗어나 왼편으로 샛길을 만드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그 샛길은 들어갔다 다시 되돌아 나와야 한다. 그러나 웬만큼 갈 길이 바쁘지 않다면 그 샛길로 들어서볼 것을 권하고 싶다. 들어서는 샛길마다 그 끝에는 전망바위가 나오고, 바위 위에 서면 미나리로 유명한 한재와 청도의 진산(鎭山)이라는 남산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참고로 한재미나리라는 고유명사를 낳을 정도로 미나리의 생산지로 유명한 한재는 음지리와 평양리, 그리고 초현리 상리 등 남산과 화악산 사이에 형성된 마을들을 아울러서 부르는 지역 이름이다.

 

 

조망을 즐기면서 10분 남짓 걷다보면 또 다른 정상표지석이 나타나 사람을 헷갈리게 만든다. 새로 나타난 정상석에도 철마산이라고 적혀있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지형도(地形圖)에 철마산 정상으로 표시되어 있는 곳으로서 동쪽인 유천마을에서 봤을 때 한껏 먹물을 머금은 붓끝의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문필봉이라고도 부른단다. 그러나 정상은 밋밋한 능선상의 한 지점으로 느껴질 정도이지 산봉우리라는 느낌은 전혀 들지가 않는다. 거기다 비좁은 것은 물론 조망(眺望)까지도 트이지 않는다. 그래서 지형도 상에 정상으로 표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까 지나왔던 곳에다 새로운 정상표지석을 세워 놓았던 모양이다.

 

 

또다시 벼랑 위로 난 길을 걷다보면 잠시 후에는 산길이 오른편으로 휘면서 능선을 벗어나게 된다. 그러나 그냥 벗어나기에는 뭔가 서운했던지 능선의 끄트머리에다 전망대 하나를 만들어 놓는다. 그렇지만 2~3m정도 들어가야 하는 곳에 있는 탓에 무심코 걷다보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으니 유의해야 할 일이다. 거대한 바위벼랑 위 전망대에 올라서면 조망이 활짝 열린다. 가까이에는 암릉이 빚어 놓은 멋진 기암절벽(奇巖絶壁)이 시선을 끌고 눈을 들기라도 할라치면 한재골짜기를 감싸고 있는 화악산과 청도남산을 비롯해 오례산 선의산 용각산 등 주변 명산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전망대를 지나서도 커다란 바위들은 계속된다. 그러나 이 바위군락에서 주의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이 부근에 있는 옥단춘굴을 다녀오려면 길 찾기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옥단춘굴로 가는 길은 이정표가 없는 탓에 들머리를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론 어렵지 않게 찾는 방법도 있다. 그저 국제신문에서 매달아 놓은 노란색깔의 리본((ribbon)만 찾다보면 의외로 쉽게 찾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연거푸 나타나는 노란색 리본을 따라 큰 바위 오른쪽으로 살짝 돌아 10m쯤 가면 능선이 나온다. 이 능선 너머 7~8m쯤 되는 곳에 옥단춘굴이 있다. 옥단춘 굴은 입구의 넓이가 3m에 높이 3m, 깊이 2.5m쯤 되는 아담한 자연동굴이다.

 

 

 

옥단춘굴의 내력과 전설(傳說)은 만만찮다. 청도에 가면 옥단춘이라는 나물이 있다. 주로 식용(食用:장아찌)으로 이용되는 이 나물은 하나의 특징이 있다. 어쩐 일인지 한재 골짜기에서만 서식한다는 것이다. 만일 다른 지역으로 이식(移植)이라도 할라치면 금방 죽어버린다고 한다. 그런데 이 나물에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이 하나 있다. 바로 옥단춘이라는 기생에 얽힌 이야기이다. 옛날 하늘나라의 선녀(仙女)가 옥황상제의 심부름으로 철마(鐵馬)를 타고 이곳을 지나가다가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잠시 쉬고 있었단다. 그러다가 인근에 사는 나무꾼과 사랑에 빠졌는데, 그 사이 철마가 떠나버린 모양이다. 이를 안 옥황상제는 벌칙으로 선녀를 옥단춘이라는 기생으로 환생(幻生)시켰다는 것이다. 옥단춘은 지난날을 깊이 뉘우치며 평생을 풀만 먹고 살았는데, 그 풀이 바로 옥단춘나물이라고 한다. 그 외에도 인근에는 옥단춘과 관련된 지명(地名)들이 여럿 있다. 옥단춘이 다시 태어나고 수도했던 굴이 바로 옥단춘굴이고, 선녀가 철마를 타고 내려왔다는 산이 바로 철마산’, 그리고 철마가 넘어간 동굴 북쪽 아래는 '넘으말(越馬)'이라는 지명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옥단춘굴에서 다시 주등산로로 되돌아 나와 다시 하산 길을 재촉하면 잠시 후 이정표가 없는 삼거리가 나온다. 음지리로 내려가려면 이곳에서 왼편으로 진행해야 한다. 이곳에서 주의할 점은 산악회들이 매달아 놓은 시그널(signal)의 숫자에 연연하지 말라는 것이다. 옥산리(밀양시 상동면)로 내려가는 오른편 길이 훨씬 더 또렷하고 매달린 시그널들도 훨씬 더 많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삼거리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잡으면 6분 후에는 또 다른 갈림길을 만나게 된다. 이곳도 역시 이정표는 없지만 왼편으로 진행하는 게 맞다. 오른편은 초현리(청도군 청도읍)로 내려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초현리 갈림길에서부터 고난이 시작된다. 엄청나게 가파른 내리막길이 나타나는데, 거기다 엊그제 내린 비 때문에 바닥까지 미끄러워 한 발짝 내려딛기가 겁날 정도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함께 산행을 했던 사람들 중에 엉덩방아를 찧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면 그게 더 이상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심지어는 넘어져서 부상을 당한 사람도 있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엉덩방아를 찧어가며 25분 정도 내려서면 밤나무단지에 내려서게 되면서 산길은 드디어 완만(緩慢)해진다.

 

 

산행날머리는 음지리 버스정류장

밤나무단지를 지나면 감나무과수원이 나온다. 내가 알기로 청도는 복숭아가 유명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오늘 만나게 되는 과수원은 감나무가 전부이다. 조금 전 산자락에서 밤나무를 보았지만 잠깐일 따름이고 나머지는 온통 감나무들뿐인 것이다. 수십 년은 묵었음직한 고목(古木)들이 기괴(奇怪)한 모양으로 도열해 있는 과수원들도 보이는 것을 보면 감나무를 재배한 역사가 여간 오래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나중에 확인해본 결과 반시()가 청도의 또 다른 특산품(特産品)임을 알 수 있었다. 과수원을 지나면 드디어 음지리이다. 만일 산행 중에 흘린 땀이라도 씻을 요량이라면 과수원이 끝나기 전에 씻을 곳을 찾아 봐야 한다. 어디라고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902번 지방도(한재로)에 이르기 100m쯤 전이지 아닐까 싶다. 오른편에 보이는 감나무 밭으로 들어서면 시멘트로 구축된 수로(水路)가 나오고, 인공폭포가 있는 수로 아래로 내려가는 사다리가 보일 것이다. 물세례를 맞으며 마시는 시원한 막걸리 한 잔은 천국이 따로 없다. 산행을 미리 끝낸 이대장이 어떻게 내 마음을 알았는지 얼리다시피 한 막걸리를 챙겨온 것이다. 목욕을 마치고 다시 길을 나서면 금방 음지리 버스정류장에 이르게 되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총 5시간 10분이 걸렸다. 간식과 목욕 등으로 중간에 쉬었던 시간을 감안하면 4시간 40분 정도가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