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산(道德山, 703m)-자옥산(紫玉山, 597m)

 

산행일 : ‘12. 11. 18(일)

소재지 : 경북 경주시 안강읍과 영천시 고경면의 경계

산행코스 : 오룡재→봉좌산(천장산) 갈림길→도덕산→자옥산→성산저수지→성산서당(산행시간 : 3시간50분)

함께한 산악회 : 뫼솔산악회

 

특징 : 도덕산이나 자옥산은 다른 산들에 비해 어느 것 하나 자랑할 만한 산세(山勢)를 지니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나 특별히 위험한 코스도 없을뿐더러 산의 주변에 정혜사지 13층석탑(국보 40호), 회재(晦齋)이언적(李彦迪 1491~1553)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세우고 기거하신 독락당(獨樂堂 보물 413호), 그리고 회재를 제향하기 위해 세운 옥산서원(玉山書原 사적154호), 서원에서 보관하고 있는 정덕계유사마방목(보물524호), 삼국사기(보물 525호), 해동명적(보물 526호) 등 수많은 역사적 사료들이 즐비하기 때문에 ‘가족 산행지’로 적합하다. 이 지역 산꾼들에게는 ‘자도천삼(紫道天三)이라 불리는 종주산행코스로 애용되고 있으나, 다른 지역 산꾼들은 낙동정맥을 답사하는 길에 잠깐 짬을 내어 도덕산에 들르는 정도이다.

* 자도천삼(紫道天三)이란 자옥산(570m), 도덕산(708m), 천장산(天掌山, 696m), 삼성산(589m)을 연결하는 산행코스로서 포항, 경주지역에서는 비교적 난이도(難易度)가 있는 코스로 꼽힌다. 산과 산을 연결하는 능선의 고도차(高度差)가 클뿐더러 경사(傾斜)까지 가팔라서 오르고 내리기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산행들머리는 경주시와 영천시를 가르는 고갯마루인 오룡재

건천 I.C에서 내려오자마자 만나게 되는 20번 국도(國道 : 포항방향)를 따라 달리다가 북경주 I.C에서 이번에는 7번 국도(포항방향)로 옮겨 강동면소재지까지 들어간다. 강동 I.C에서 이번에는 28번 국도를 이용하여 안강읍을 통과한 후, 영천시 방면으로 달리다가 하곡리(영천시 안강읍)에서 오른편의 군도(郡道 : 성산서당길)로 접어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산행들머리인 오룡재에 이르게 된다.

 

 

 

오룡고개에서 오른편 임도(林道)로 접어들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산행들머리인 오룡고개는 영천시 고경면 삼포리와 경주시 안강읍 오룡리를 경계 짓는 고갯마루로서 '미룡고개'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동네의 경계(境界)라는 의미보다는 낙동정맥의 마루금으로 더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편이다. 그만큼 이곳 오룡리가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산간벽지(山間僻地)라는 의미일 것이다.

* 낙동정맥(洛東正脈) 강원도 태백시의 구봉산(九峰山)에서 부산 다대포의 몰운대(沒雲臺)에 이르는 산줄기의 옛 이름으로 그 길이가 약 370㎞에 이른다. 경상북도와 경상남도의 동해안과 낙동강유역의 내륙을 가르는 분수령산맥이며, 주요 산으로는 백병산(白屛山, 1,259m), 주왕산(周王山, 907m), 단석산(斷石山, 829m), 가지산(加智山, 1,240m), 취서산(鷲棲山, 1,059m), 금정산(金井山, 802m) 등이 있다.

 

 

오룡마을 전경, 왼편에 보이는 것은 자옥산, 오른편이 삼성산이다.

 

 

진행방향에 보이는 도덕산, 보기만 해도 경사(傾斜)가 보통이 아니다. 너덜지대를 지나 송전탑(送電塔)으로 곧장 치고 오르기 때문에 더욱 경사가 가파를 수밖에 없다. 짧은 거리에서 갑자기 고도(高度)를 높이려면 별 수 없었을 것이다.

 

 

경사(傾斜)가 거의 없는 임도를 따라 걷다보면 오른편에 오룡마을이 오롯이 앉아있는 것이 보이는데, 그 뒤를 삼성산이 든든하게 지키고 있다. 전형적인 산골마을의 옛 풍경(風景)을 간직하고 있는 오룡마을이 왠지 살갑게 다가오는 것은, 문득 내가 태어나고 어린 시절은 보냈던 고향마을을 떠올렸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별로 길지 않은 임도를 벗어나 산길에 접어든 후에도 완만(緩慢)한 경사(傾斜)는 변하지 않는다. 다만 낙동정맥을 답사(踏査)하는 사람들 외에는 다니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 듯, 잡목(雜木)과 칡넝쿨로 가득 찬 산길은 그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다.

 

 

 

 

 

 

오르내림이 없이 이어지던 산길은 30분이 조금 못되어 끝을 맺고, 서서히 가팔라지기 시작하더니 너덜지대를 만나면서 끝내 ‘벌떡 일어서’ 버리고 만다. 그만큼 오르막길의 가파름이 가히 살인적이라는 말이다. 언젠가 ‘코에서 땅 냄새가 난다’는 표현을 쓴 일이 있다. 이는 허리를 펼 수가 없을 정도로 경사(傾斜)가 가파를 때 쓰는 표현이다. 땅 냄새가 코에 솔솔 들어올 정도로 땅바닥에 코를 가까이 대고 산에 오르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 표현이 딱 어울릴 정도로 도덕산 오름길은 가파르기 짝이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길이 길지는 않다는 것이다. 가파른 오르막길에서 땅에다 코를 박고 30분 정도를 오르면 능선의 안부에 올라서게 된다. 안부에서 길은 두 갈래(이정표 : 도덕산 0.5Km/ 봉좌산 4.5Km)로 나뉜다. 도덕산은 오른쪽 방향의 능선을 타면 되고, 낙동정맥의 마루금을 밟으려면 왼편으로 진행해야 한다. 낙동정맥 마루금은 조금 후 천장산 능선을 분가(分家)시킨 뒤에,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봉좌산과 운주산 등을 만들면서 남쪽으로 이어진다.

 

너덜에서 바라본 삼성산

 

 

 

 

이정표에는 도덕산과 봉좌산만 표시가 되어 있을 뿐, 방금 올라온 오룡재는 표기(標記)가 되어 있지 않다. 그만큼 다니는 사람들의 숫자가 많지 않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기야 낙동정맥을 답사(踏査)하는 산꾼들이 아니라면 어느 누가 저런 험한 코스를 일부러 오르내리겠는가.

 

 

‘봉좌산 갈림길’에서 도덕산 정상까지는 금방이다. 갈림길 조금 위에 너럭바위가 보이는데 ‘자연쉼터’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다. 너럭바위는 그 넓이가 어마어마하여 70~80명이 앉아 놀아도 충분할 정도로 널따랗다. 정상으로 이어지는 오름길은 경사(傾斜)가 완만(緩慢)하기 때문에 별 부담 없이 오를 수 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여유까지 부리며 10분 조금 못되게 걸으면 드디어 도덕산 정상이다.

 

자연쉼터

 

 

 

 

도덕산 정상은 돌출된 바위봉우리이다. 정상엔 정상표지석이 세 개가 세워져 있는데, 정상의 높이를 두 가지로 표기(標記)하고 있다. 아마 정상석을 세운 단체(團體)들의 고집이 그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눈여겨보면 그 중 제일 큰 정상석의 뒷면에 도덕산의 유래(由來)가 적혀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라 선덕왕(780년) 때 당나라의 첨의사인 백우경이 참소(讒訴)되어 자옥산에 숨어 살면서 지금의 정혜사지에 영월당과 만세암을 세웠다. 선덕왕이 이곳을 방문한 뒤로 이 산을 두득산(斗德山)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후 회재가 1533년에 옥산리에 오면서 이 산을 도덕산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도덕산에서 왼편으로 내려가면 도덕암을 거쳐 옥산리로 내려가게 되고, 자옥산으로 가려면 능선을 따라 곧바로 나아가면 된다.(도덕산 이정표 : 자옥산 1.9Km/ 도덕사 0.90Km/ 올라왔던 방향에는 표시가 없다)

 

 

 

정상석의 뒤, 동쪽엔 바위로 이루어진 너른 전망대(展望臺)가 있다. 오른편에는 안강읍의 벌판이 펼쳐지고, 왼편에 아련하게 보이는 것은 물론 포항시가지와 동해(東海)바다일 것이다. ‘와! 의외로 멋진 산이네요.’ 연신 환호에 가까운 탄성(歎聲)을 쏟아내고 있는 일행의 말마따나 눈앞에 펼쳐지는 조망(眺望)이 시원스럽기 그지없다. 도덕산을 한 가운데에 두고 천장산과 봉좌산, 그리고 어래산, 자옥산, 삼성산 등이 빙 둘러싸고 있는 형상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광경을 보고 연꽃을 닮았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또 전망대에 서면 발아래에 옥산마을이 조용히 웅크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옥산마을은 무오사화(戊午士禍)로 물러나 이곳에 자리 잡았던 회재 이언적선생과 인연(因緣)이 깊은 곳이다. 이곳에 머무르며 심신(心身)을 수양했다는 그를 연상시킨 탓인지 옥산마을이 유난히도 고요하게 느껴진다. 회재가 저곳에서 학문에 심취했었다면 당연히 주변의 정물(靜物)은 고요 그 자체가 아니었겠는가. 당연히 저곳에는 회재를 배향(配享)하는 옥산서원(玉山書院)이 자리하고 있다.

* 옥산서원(玉山書院), 조선 중종 때 유학자이자 정치가인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 1491∼1553)을 배향(配享)하는 서원(書院)으로서 대원군의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 때에도 훼철(毁撤)되지 않았던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회재는 27세 때 한참 선배인 50세의 망기당(忘機堂) 조한보(曺漢輔)와 태극논쟁(太極論爭)을 벌였다. 조선 유학사에 기록된 최초의 이기논쟁(理氣論爭)이다. 유학의 이론적 기틀을 만든 회재지만 두 차례의 사화를 겪으면서 역사의 격랑에 휘말렸다. 무오사화(1498년)가 일어나자 회재는 외가인 경주 양동리와 가까운 안강읍 옥산리로 귀향했다.

 

옥산저수지와 어래산

 

 

 

도덕산에서 자옥산으로 방향을 잡으면, 5분이 채 되지 않아 또 하나의 뛰어난 전망대(展望臺)를 만나게 된다. 전망바위에 올라서면 오른편 발아래에 성산저수지와 오배마을이 웅크리고 있고, 그 뒤를 삼성산이 위용(威容)을 자랑하며 든든하게 지키고 있다. 삼성산은 그냥 흔한 동네 뒷산이 아니라, 인근 주민들에게는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는 산인가 보다. 산 아래에 있는 저수지의 이름이 성산저수지이고, 또한 서원(書院)의 이름까지도 성산서원인 것을 보면 말이다.

 

 

 

자옥산

 

 

전망대에서 내려오면 길 찾기에 주의해야 한다. 왼편으로 뚜렷하게 나 있는 길은 도덕암으로 내려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자옥산으로 가는 길은 전망바위를 오른편에 끼고 돌아 다시 주능선에 이르면 뚜렷하게 나타난다. 주능선을 타고 내려가다 보면 가끔 뛰어난 전망바위가 나타나니 거르지 말고 올라가 볼 일이다. 의외로 조망(眺望)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이 능선에서는 왼편의 어룡산과 옥산마을 보다는 오른편의 삼성산과 오배마을이 더 잘 조망된다.

 

 

성산저수지와 삼성산

 

 

도덕산에서 40분이 조금 못되게 걸으면 안부사거리(이졍표 :정혜사지 13층석탑 1.65Km/ 자옥산 0.74Km/ 도덕산 1.6Km)에 이르게 된다. 내려서는 길은 가파른 편이지만 다행이도 길바닥은 순한 편이다. 미끄러지는 것만 조심하면 콧노래를 부르며 내려와도 넉넉할 정도이다. 안부에서는 좌우로 하산길이 보인다. 왼편은 정혜사지로 연결되고, 자옥산은 맞은편 능선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 오른편에 오배마을로 내려가는 길이 희미하게 보이지만 이정표에는 표기되어 있지 않다.

 

 

 

안부사거리에서 다시 가파른 오르막이 시작된다. 이 구간도 길은 순하지만 검은 흙길이 물기를 머금을 경우에는 제법 미끄러우니 조심할 일이다. 갈림길을 출발한지 15분 정도가 지나면 자옥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도덕산

 

 

너른 공터로 이루어진 자옥산 정상에는 옥산산수회가 쌓은 돌탑(石塔)과 정상표지석이 있다. 이렇다 할 지형지물이 없는 정상은 참나무들로 둘러싸여 주변의 조망(眺望)을 일절 허락하지 않는다. 이곳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왼쪽으로 내려가면 옥산서원이 나오고, 성산저수지로 내려가려면 능선을 따라 50m쯤 내려가다 오른편 비탈길로 내려서야 한다.(정상 바로 아래의 갈림길에 위치한 이정표 : 계정마을 1.74Km/ 하곡저수지 4.24Km/ 도덕산 1.90Km)

 

 

 

 

꼼꼼이 챙겨보지 못한 덕분에 우린 하곡저수지 방향으로 한참을 더 내려가고야 말았다. 하곡저수지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에는 전망 바위가 여러 곳 있다. 진행방향에는 안강읍 들녘과 포항 쪽 풍경(風景)이 아스라이 펼쳐지고, 오른편에는 성산 저수지와 용마루처럼 산릉(山稜)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는 삼성산이 잘 조망(眺望)된다. 조망을 즐기다보니 이상한 점이 눈에 띈다. 성산저수지로 내려가는 길에 만나야 할 송전탑(送電塔)이 오른편에 보이는 것이 아닌가. 성산저수지 갈림길을 한참이나 지나와 버렸던 것이다. 별수 없이 내려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 올라갈 수밖에 없다.

 

 

 

자옥산에서 성산저수지로 내려가려면 길 찾기에 주의해야 한다. 정상에서 하곡저수지 방향으로 50m쯤 내려가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뉘는데 하곡저수지로 내려가는 길이 너무 또렷하기 때문에 오른편 길을 무심코 지나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왼편 길과 나뉘는 지점의 오른편에 여러 개의 리본이 달려 있으니 꼼꼼히 챙겨보면서 내려선다면 그냥 지나칠 염려는 없을 것이다.

 

 

 

자옥산에서 성산저수지로 내려가는 길은 경사(傾斜)가 매우 가파르다. 거기다가 비탈길에 낙엽까지 수북하게 덮여있기 때문에 엄청나게 미끄럽기까지 하다. 만일 눈이나 비가 올 경우에는 더욱 미끄러워질 것은 불을 보듯이 뻔한 일이다. 거기다가 이용하는 산꾼들이 드물기 때문에 길의 흔적을 찾기가 여간 어렵지 않으니 주의가 필요한 구간이다. 송전탑(送電塔) 부근의 가시넝쿨에 몇 번을 찔리고, 올라오는 것보다 더 힘든 비탈길을 내려가면서 엉덩방아 몇 번 찧다보면 잘 가꾸어진 묘(墓) 몇 기(基)를 만나게 된다. 묘지에서 다시 한 번 비탈길과 씨름하다 보면 진행방향의 나뭇가지 사이로 반가운 얼굴이 보인다. 드디어 성산저수지가 물빛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저수지 둑을 걷다보면 오른편에 오늘 올랐던 도덕산과 자옥산이 우람하게 솟아있는 것이 보인다. 그 위용(偉容)을 조금이라도 더 자랑하고 싶은 모양인지, 저수지의 물 위로 두 산의 자태(姿態)가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둑을 지나서 반대편 도로에 올라선 후, 둑 아래 방향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오른편에 산길 하나가 보인다. 삼성산으로 가는 길이지만 일행끼리 의견을 주고받은 끝에 삼성산을 오르는 것을 포기하기로 결정한다. 산행을 시작한 시간이 1시간 정도가 늦어진 탓에 낙동정맥 종주대원들과 산행종료 시간을 맞추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산행날머리는 성산서당

대신 조금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서 성산서당(聖山書堂)을 둘러보기로 한다. 저수지에서 도로를 따라 10분이 조금 넘게 걸어 내려가면 성산서당이 나온다. 성산서당은 1814년에 지어진 조선 중기의 학자인 정극후선생을 배향(配享)하기 위한 시설로, 처음에는 서원(書院)으로 출발했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을 거치면서 서당(書堂)으로 바뀌는 굴곡의 과정을 거쳤다고 한다. 서당 앞을 흐르는 석천의 건너편에는 날아갈 듯이 날렵하게 지어진 정자(亭子)가 들어 앉아있는 것이 보인다. 정극후선생이 세웠다는 수재정(水載亭)이라는 정자이다. 수재정은 성산을 배경으로 석천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자연석을 이용하여 높게 축대(築臺)를 쌓은 뒤에 그 위에다 정자를 앉혔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가운데 칸은 석천을 바라볼 수 있게 하였고, 양 옆에 온돌방을 두었다고 한다.

* 성산서당(聖山書堂 : 경남 문화재자료 167호),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효종의 왕자시절 스승이었던 정극후(鄭克後)를 추모하기 위해 순조 때 세워졌다. 원래 사우와 서사가 있었으나, 사우(祠宇 = 사당)는 대원군 때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폐사(弊社)되고, 현재는 서사(書舍=서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건물)만 남아있다. 이에 따라 이름도 서원(書院)에서 서당(書堂)으로 바뀌었다. 서원과 서당의 차이는 아마도 위패(位牌)를 모시는 사당(祠堂)이 있고 없음의 차이인 모양이다.

 

수재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