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룡포 비룡산(飛龍山, 190m)

 

산행일 : ‘12. 1. 28(토)

소재지 : 경북 예천군 용궁면

산행코스 : 회룡마을→아미타대불→장안사→회룡대→봉수대→원산성→삼강앞봉→의자봉→적석봉→사림봉→사림재→용포→회룡포→회룡마을(산행시간 : 4시간30분)

함께한 산악회 : 안전산악회

 

특징 : 비룡산만을 목적으로 찾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비룡산은 회룡포라는 명승지(名勝地)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 잠깐 오르는 산이기 때문이다. 회룡포는 맑은 물과 백사장이 어우러져 천혜(天惠)의 경관을 자랑한다(국지지정문화재인 명승지 16호). 회룡포(回龍浦)라는 지명은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乃城川)이 낙동강에 합류되기 직전에 용이 비상처럼 물을 휘감아 돌아간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회룡포를 휘감았던 내성천은 또 다시 비룡산(飛龍山, 190m)을 350도로 휘감은 후, 낙동강으로 흘러간다. 그래서 사람들은 회룡포를 육지속의 섬마을이라고 부른다.

 

 

산행들머리는 용궁면 회룡마을 주차장(駐車場)

중부내륙고속도로 점촌.함창 IC를 빠져나와 문경시내(市內, 점촌)를 통과, 34번국도(國道/ 안동방향)를 타고 예천군 용궁면소재지까지 들어간 후, 924번 지방도(地方道/ 호명面 방향)로 옮겨 달리다가 회룡포전망대 안내판이 보이는 곳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회룡교를 지나 회룡마을 주차장에 닿게 된다. 주차장 조금 못가서 오른편에 서있는 산행안내판의 뒤로 난 시멘트계단을 오르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1층 건물 높이쯤 되는 계단으로 올라서면 용주팔경시비(詩碑)가 보인다. 용주팔경시비는 이 마을 출신 시인 김영락(1831∼1906)씨가 용주팔경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詩)를 새겨놓은 비(碑)이다. * 참고로 용주팔경은 포금산의 밝은 달, 무이의 맑은 바람, 금강(천)의 고기 잡는 불빛, 와우산의 낙조, 비룡산에 걸친 구름, 천축산 저녁 종소리, 말운산의 나뭇꾼 소리, 훤이들의 벼꽃이다.

 

 

 

산길은 용주팔경시비에서 왼편 산사면(山斜面)을 따라 이어진다(이정표 : 회룡대 1.5Km/ 원산성 3.7Km). 경사(傾斜)가 만만치 않은 산길 주변은 온통 소나무 일색이다. 코끝을 스치는 솔향이 짙다. 이 향기 속에는 물론 피톤치드가 그득할 터이니, 오늘 산행은 눈요기에 더하여 건강까지 챙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구태여 길을 재촉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인지 등산로 주변에는 나무의자가 자주 눈에 띈다. 심호흡으로 피톤치드를 양껏 들이마시면서 30분 조금 못되게 오르면 쉼터로 조성된 널따란 공터에 커다란 부처가 한분 모셔져 있다. 아미타대불(大佛)이다.

 

 

 

 

 

아미타대불에서 회룡대로 오르는 길에 보면 오른편에 아담한 산사(山寺)가 내려다보이다. 천년(千年) 고찰(古刹)이라는 장안사이다. 경내로 들어서면 사찰은 그다지 고풍(古風)스러워 보이지는 않는다. 전각(殿閣)들을 최근에 중수(重修)한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최근에 지은 절집답지 않게 분위기는 제법 고즈넉하다.

* 장안사(長安寺), 의상(義湘)의 제자인 운명(雲明)이 창건하였다는 전설이 있으나, 『예천군지』에서는 고려 때 창건된 사찰이라고 적혀있다. 그러나 정확한 역사는 조선 중기 이후의 기록만이 전해진다. 신라가 삼국(三國)을 통일한 후,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위해 금강산과 부산 기장, 그리고 이곳에 장안사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천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사찰이지만 경내 전각(殿閣)을 새로 조성한 지 오래되지 않아 옛 사찰의 풍모는 느껴지지 않는다.

 

 

 

제1전망대(展望臺)인 회룡대(回龍臺)는 장안사에서 아미타대불 쉼터로 되돌아 나와야 한다. 전망대까지는 그리 가파르지 않은 산길에 나무계단까지 있어 쉽게 오를 수 있다. 회룡대는 유서(由緖) 깊은 장소는 아니나 회룡포의 전경(全景)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라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다. 팔각(八角)으로 산뜻하게 지어진 정자(亭子) 내부에는 회룡포의 선전판(‘1박2일 촬영지’ ‘드라마 가을동화의 배경’ ‘여행작가 100명이 선정한 최고의 여행지’ ‘내성천이 350도 휘감아 도는 육지속의 섬마을’)과 예천군수가 쓴 회룡대기가 걸려 있다.(이정표 : 봉수대 0.2Km, 원산성 2.2Km/ 장안사 0.3Km, 회룡마을 1.5Km)

* 계단은 300개가 넘으니 만만치 않은 숫자이다. 1박2일에서는 강호동과 멤버들이 ‘가위 바위 보’를 하며 이 계단을 올라갔었다고 한다. ‘1박2일’이 전파를 탄 후로는 똑같이 흉내를 내는 여행객들이 많아졌다나 뭐라나....

 

 

 

회룡대는 물길이 돌아나가는 회룡포의 전경을 촬영하기에 최상(最上)의 위치이다. 사람들마다 카메라를 꺼내들고 특이(特異)하면서도 아름다운 경관을 담기에 여념이 없다. 이웃에 있는 안동 하회마을이나 다른 곳의 뛰어난 물돌이동들이 대부분 태극(太極) 문양인데 비해, 이곳의 문양(文樣)은 물방울을 연상시키고 있다. 풀잎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이슬방울을 닮았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회룡포 경관의 촬영은 전망대 아래에서 하는 것이 좋다. 전망대에서는 나무에 가려 회룡포의 귀퉁이가 조금 잘려나가기 때문이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마을은 그야말로 잘그린 한 폭의 수채화(水彩畵)이다. 반듯반듯한 논밭과 마을, 그리고 백사장과 숲을 에워싼 물줄기가 마치 원을 그리듯 휘돌아 흐른다. 하얀 모래사장이 마을을 감싸고, 그 주변으로 물길이 다시 한 번 감싸고 있는 마을은 말 그대로 육지속의 섬마을의 모습을 하고 있다.

 

 

 

발길을 되돌려 삼거리로 돌아 나오면 봉수대(烽燧臺)에 이르게 된다. 옛터만 남아있던 것을 학계의 고증(考證)에 따라 높이 2.7m의 정방형(正方形)으로 복원한 것이란다. 봉수대 표지판에 적힌 옛 기록에 의하면 동쪽의 서암산(예천읍) 봉수, 서쪽의 소이산(의성 다인) 봉수, 그리고 북쪽의 가불산(문경 산양) 봉수와 서로 연락을 담당하는 군사요충지(軍事要衝地)였다고 한다.(이정표 : 원산성 1.9Km, 용포대 1.0Km/ 회룡대 0.2Km, 장안사 0.5Km)

 

 

 

다시 주능선을 따라 걸으면 두 번째 삼거리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서 왼편으로 가면 ‘제2 전망대‘가 나오고, 원산성은 곧바로 진행하면 된다. 남쪽능선에 있는 제2 전망대도 회룡대와 마찬가지로 내성천이 굽이도는 회룡포를 굽어볼 수 있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회룡포 조망이 회룡대만 못하다는 얘기를 들었기에 탐방을 생략하고 곧바로 원산성으로 향한다.(이정표 : 용포대 0.3Km/ 회룡대 1.0Km, 장안사 1.2Km)

 

 

 

 

산성(山城)을 보기 위하여 다시 주능선 삼거리로 되돌아 나와 원산성으로 향한다. 소나무가 우거진 산길이 펼쳐진다. 하늘을 덮어버릴 정도의 울창한 솔숲 오솔길을 25분 정도 걸어가면 원산성에 닿게 된다. 원산성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絶壁|위에 있기 때문에, 성(城)의 정상에서 사방을 훤히 내다볼 수 있는 자연의 요새(要塞)이다. 거기에다 금천, 내성천, 그리고 낙동강이 합류하는 삼강을 배수진으로 삼을 수 있어서, 예로부터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要衝地)였다. 삼한시대 마한이 이 성에서 백제에 패함으로써 멸망하였고, 그 후로도 신라, 백제, 고구려의 접경(接境)에 위치한 탓에 싸움이 잦았다고 성 안내판에 기록되어 있다. 회룡대에서 봉수대를 지나 원산성까지는 2.2km이며 30여분 소요된다.(이정표 : 성저마을 1.0Km/ 배골 0.8Km/ 제2전망대 1.2Km)

* 원산성(圓山城), 따뷔성 또는 또아리성이라고도 불리며, 삼국사기에는 원형으로 쌓았다하여 ‘원산성’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1.5~3m의 높이로 약920m의 둘레를 흙과 돌을 섞어서 쌓은 성으로서, 전설(傳說)에 의하면 온조가 마한(馬韓)을 정복하고 이 성(城)을 쌓은 후에 백제(百濟)를 열었다고 전해진다.

 

 

 

원산성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오른편은 성저마을로 내려가는 길이고, 비룡산을 일주하고 싶으면 배골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이곳에서 삼강대교와 주막의 모습을 조망 할 수 있다. 배골로 내려가는 길은 급경사(急傾斜) 내리막길, 등산객들의 불편을 덜어주려는 듯 나무계단을 설치해 놓았다. 배골은 강(江)바닥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예쁘장한 나무다리를 설치해 놓았으나 홍수 때는 이용할 수 없을 것 같다.

 

 

 

배골에서부터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그동안 능선을 밟으며 여유를 부린 등산객들을 골려주기나 하려는 듯, 배골에서부터 이어지는 등산로는 강바닥에서 봉우리로 올라갔다가, 다시 강바닥으로 내려서기를 반복한다. 많은 체력(體力)과 인내(忍耐)가 요구되는 구간이다.

 

 

 

한겨울의 쌀쌀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가파른 오르막길은 자연스레 땀방울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마를 스치는 찬바람이 고마워질 무렵이면 제2 전망대와 의자봉의 갈림길인 삼강앞봉에 도착하게 된다(이정표 : 제2전망대 1.0Km/ 의자봉 0.9Km, 사림봉 2.4Km). 산행을 시작한지 대략 2시간 정도가 흘렀다. 잡목(雜木)들을 제거한 덕분인지 시원스레 조망(眺望)이 트이고 있다. 낙동강(洛東江), 내성천(乃城川), 금천(錦川)이 합쳐지는 삼강(三江)이 보이고, 문경 영순면과 예천 풍양면을 잇는 삼강대교(三江大橋) 옆에 ‘삼강주막’의 복원된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고개를 돌려보면 우뚝 솟은 원산성도 바라보인다. 삼강주막은 정상의 전망대보다는 정상 조금 아래에 있는 나무벤치에서 바라보는 것이 훨씬 가깝게 보인다.

* 삼강(三江)주막(酒幕), 낙동강의 본류(本流)와 내성천, 금천의 두 지류(支流)가 만나는 합수머리에 위치한 주막이다. 삼강나루터는 예부터 서울로 가는 길목이었으며, 장사하던 배들이 낙동강을 오르내렸고, 문경새재를 가기 전에는 반드시 거쳐야 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다고 한다. 주막은 삼강나루를 지나는 보부상(褓負商)과 사공(沙工), 그리고 오가는 나그네들의 숙식(宿食)장소로 이용되었다. 2005년 말(末) 마지막 주모(酒母)였던 유 옥련 할머니(당시 90세)가 떠나면서 방치되어 오던 것을 예천군에서 고증(考證)에 따라 재현(再現)한 것이다. 할머니가 운영하던 삼강주막은 회화나무 아래 초가가 전부이고, 나머지는 예천군에서 임의로 지은 것들이다.

 

 

 

 

 

 

산길은 삼강앞봉에서 내리막길을 만들면서 강바닥까지 떨어진다. 나무다리 하나를 지나서 다시 능선을 치고 오르는가 싶더니 또 다시 강바닥으로 뚝 떨어져 버린다. 강바닥은 깔끔하게 쉼터로 조성되어있다. 다들 가던 길을 멈추고 점심상을 차리고 있다. 왼편으로 수양버들이 군락(群落)을 이루고 있고, 큰 길이 골짜기 안으로 나있다. 사림재로 곧장 오르는 길이다.

 

 

 

 

쉼터에서 나무테크로 만들어진 계단을 올라선 후, 강물이 내려다보이는 산길을 따라 얼마간 오르면 이내 의자봉이다. 문득 이곳으로 내려오는 버스 속에서 들었던 산행대장의 안내멘트를 떠올린다. ‘일단 봉우리 위로 올라보면 왜 의자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들 고개를 끄떡인다. 소나무의 굵은 가지가 어른들의 엉덩이 높이에서 길게 옆으로 뻗어있는 것이 마치 의자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의자봉에서부터는 높낮이(高低)의 차(差)가 크지 않은 능선이 이어진다. 묘(墓) 몇 기(基)를 지나면 이내 적석봉이다. 적석봉은 소나무에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이름표를 달고 있다. 정상부근에 별로 크지 않은 바위 덩어리 몇 개가 보인다. 아마 저 바위들 때문에 적석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나 보다. 하긴 ‘삼강앞봉’이라는 이름도 삼강의 앞에 있는 봉우리라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이왕에 관광지로 가꾸려면 조금 더 예쁜 이름으로 지으면 어떨까? 산행을 시작한지 3시간30분 정도 지났다.

 

 

적석봉에서 사림재로 내려가다 보면 오른편으로 사림봉(256m)으로 가는 길이 보인다. 조망이 뛰어나니 시간을 쪼개서라도 꼭 들러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사림봉으로 향하는 산길의 왼편 나무숲 사이로 언뜻언뜻 내성천이 내려다보인다.

 

 

사림봉 정상은 열 평쯤 되는 분지(盆地), 한 가운데에 앙증맞은 정상표지석이 서있다. 오늘 산행 중에 만난 유일한 정상표지석이다. 정상은 3면(面)이 숲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내성천 방향만 조망(眺望)이 트이는데, 그것도 시원스레 열리고 있다. 벼랑위에 세워놓은 전망대(展望臺)에서 바라보는 회룡포의 뒷모습은 아까 회룡대에서 내려다보던 풍경(風景)과는 또 다른 매력을 풍겨준다. 겨울의 회색빛 빈들이 쓸쓸하게 펼쳐지고 있다.(이정표 : 용포마을 1.0Km, 장안사 2.3Km/ 마산리 철쭉군락지 200m)

 

 

 

 

사림봉에서 용포마을로 가려면 사림재라는 자그마한 재 하나를 넘어야 한다.(이정표 : 용포마을 0.5Km/ 적석봉 0.8Km, 사림봉 1.1Km) 사림재는 제2전망대와 용포마을의 갈림길이다. 얼음으로 뒤덮인 내성천과 황금빛 백사장을 바라보면서 잘 정비된 산길을 내려서면 용포마을이다. 용포마을은 흑미농사를 짓는 마을이라고 한다. 민박(民泊)집도 있다. 물론 건너편 회룡포마을에도 민박집이 있다. 오늘 산행을 같이 한 아라치양(孃)이 몇 년 전에 이곳에서 민박을 하며 여행을 즐겼던 추억의 장소라고 한다. 마을에 들어서니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있는 굴길이 눈에 들어온다. 여름에는 일년생(一年生) 식물들이 화사하게 피어났었을 것이다. 굴길의 처마머리에는 ‘흙미 마을’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다.

 

 

 

 

 

용포마을 앞 제방을 넘어 ‘제2 뿅뿅다리’로 내려선다. 참으로 길다는 생각이 먼저 떠오른다. 두 사람이 비켜지나가기에는 비좁을 것 같은데, 어떻게 왕래가 가능할까? 그러나 직접 뿅뿅다리를 걸어보면 그런 의문은 금방 풀려버린다. 서로 비켜지나갈 수 있도록 일정 거리마다 철판을 하나씩 더 대어 놓은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뿅뿅다리를 건너면 고운 모래사장이 펼쳐진다. 만지면 으스러질 것 같은 황금빛 백사장의 고운 모래를 밟으면, 발끝으로 전해져 오는 촉감은 산길을 걸을 때와 또 다른 느낌이다.

* 뿅뿅다리, 계단을 내려와 구멍이 퐁퐁 뚫려있는 다리(橋)를 건너면 회룡포 마을에 들어서게 된다. '뿅뿅다리'라고 불리는 다리인데, 다리 이름에 얽힌 사연이 재미있다. 회룡포를 들고나는 유일한 창구(窓口)였던 이곳에 예전에는 통나무다리가 놓였었는데, 여름만 되면 물에 휩쓸려 떠내려갔다고 한다. 그래서 주민들은 구멍이 뚫린 철판으로 다리를 놓았고, 다리에 구멍이 뚫려 있다고 해서 ‘퐁퐁다리’라고 불렀단다. 그러다 어느 기자(記者)가 취재를 나왔다가, 마을 어르신의 억샌 경상도 발음을 잘못 알아듣고 ‘뿅뿅다리’라고 기사(記事)를 쓰게 되었는데, 그 뒤로 이 다리의 이름은 뿅뿅다리로 굳어져 버렸다고 한다. 다리를 지날 때마다 ‘뿅뿅’ 소리가 난다고 해서 뿅뿅다리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손님이 주인을 밀어내버린 격이나, 뿅뿅이 퐁퐁보다 더 입에 착 달라붙으니 그 기자에게 표창장이라도 주어야하지 않을까? 마을에는 뿅뿅다리라는 이름을 가진 다리가 2개가 있는데, 우리가 건너는 다리는 제2 뿅뿅다리로 불린다.

 

 

 

모래사장을 지나 냇가 둑에 오르면 강둑을 따라 또다시 나타나는 굴길, 이번에는 일년생(一年生) 화초(花草) 대신에 살구나무를 씌워 놓았다. 봄을 상상해본다. 살구꽃으로 화사해질 꽃길은 생각만 해도 행복해진다. 오른편 농경지(農耕地) 너머로 회룡포마을 건너다 보인다. 이곳 회룡포는 드라마 ‘가을동화’와 영화 ‘엄마’의 촬영지(撮影地)이다. 가을동화의 은서와 준서는 저 둑에서 자전거를 타며 어린 시절을 보냈고, 영화 엄마에서는 차멀미를 심하게 하는 엄마가 장맛비로 불어난 강물 때문에 뿅뿅다리를 건너지 못해 애를 태웠었다.

* 회룡포 마을은 6만 평쯤 되는 들판에 9가구 15명의 주민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전형적인 영남의 강촌(江村)마을이다. 원래는 ‘의성포’라 불렸다고 한다. 의성에 살던 경주김씨들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의성포라고 불렸는데, 이곳이 물돌이동으로 유명세(有名稅)를 타면서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이웃 고을인 의성군에 가서 회룡포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몇 년 전에 마을 이름을 회룡포로 바꿨다고 한다.

 

 

 

‘육지 속의 섬, 회룡포’라고 쓰인 커다란 표지석 앞에서 왼편으로 내려서서 ‘제1 뿅뿅다리’를 건너면 회룡마을, 산행을 시작했던 용주팔경시비 앞에 도착하는 것으로 오늘 산행은 마무리 된다. 산행을 시작한지 4시간30분이 조금 못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