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왕산(周王山 : 국가명승 제11호, 721m)
산행일 : ‘12. 4. 29(일)
소재지 : 경상북도 청송군 부동면
산행코스 : 대전사→주왕산 정상→후리메기 삼거리→제3․2․1폭포→학소대→망월대→주왕굴→무장사→대전사(산행시간 : 4시간20분)
함께한 산악회 : 자유산악회
특징 : 산의 모습이 돌로 병풍(屛風)을 친 것 같다 하여 석병산(石屛山)이라고도 불린다. 그다지 높지는 않으나 산세(山勢)가 웅장하고 아름다우며, 곳곳에 기암절벽(奇巖絶壁)이 솟아 있어 경상북도의 소금강(小金剛)이라고 한다. 특히 제3폭포에서부터 시작하여 학소대에 이르는 계곡은 이곳이 과연 세외선경(世外仙境)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이다.
▼ 산행들머리는 주왕산국립공원 탐방안내소
중앙고속도로 서안동 I.C를 빠져나와 34번 국도(國道/ 영덕방향)와 31번 국도(청송방향)를 번갈아 달리다가, 청송읍을 지나자마자 만나게 되는 ‘청운삼거리’에서 좌회전 주왕산로로 접어든다. 주왕산로를 따라 들어가다 하의리의 주왕교(橋)를 건너자마자 왼편의 공원길로 접어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산행이 시작되는 주왕산국립공원 주차장(駐車場)에 이르게 된다. 주차장은 시외버스터미널을 겸하고 있다. 주차장에 도착하면 주왕산 방향에 탐방(探訪)안내소가 보인다. 안내소 안에 깔끔한 화장실이 갖추어져 있으니 이곳에서 볼일을 보고 산행을 나서면 된다. 주차장에서 주전사까지는 음식점들이 줄을 지어 늘어서 있다. ‘음식이 싸고 맛있으니 내려올 때 꼭 들르세요.’ 주인장들의 당부를 귓가로 흘리며 걷다보면 진행방향에 커다란 바위봉우리가 어서 오라고 손짓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대전사 뒤편을 장식하고 있는 기암(旗岩)이라는 바위이다. 일반적으로 기암이라는 표현을 쓸 경우에는, 기이하게 생긴 바위를 뜻하는 기(奇)자를 사용하는 게 보통인데, 이곳은 깃발을 뜻하는 기(旗)자를 쓰는 게 특이하다. 옛날 주왕을 토벌했던 마장군이 깃발을 꼽았던 봉우리이어서 그리 부른다고 한다.
▼ 매표소에서 입장료(문화재관람료라고 하나 입장료를 듣기 좋게 표현한 느낌) 2800원을 내고 들어서면 몇 발자국 안가 대전사 앞마당에 도착하게 된다. 대전사는 별로 크지 않은 사찰이다. 그래서 전각(殿閣)들의 숫자도 적을뿐더러 그 규모도 생각보다 왜소(矮小)하다. 그러나 그 왜소함 때문에 대전사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기암과 대전사가 절묘(絶妙)한 조화를 만들어 내고 있다면, 이 또한 아이러니(irony)가 아닐까?
* 대전사(大典寺), 신라 문무왕 때(672년) 의상(義湘)이 세웠다고 전하나, 고려(高麗) 태조 때 눌옹(訥翁)이 창건했다는 설(說)도 있다. 창건 이후의 자세한 역사는 전해지지 않으며, 지금의 전각(殿閣)들은 조선 중기(中期)에 실화(失火)로 전소(全燒)된 뒤 중창된 건물들이다. 문화재(文化財)로는 보물 제1570호로 지정된 보광전(普光殿)이 있다. 절의 이름은 주왕의 설화(說話)에서 유래한다. 중국 당나라의 주도(周鍍)라는 사람이 스스로 후주천왕(後周天王)이라 칭하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크게 패한 후, 신라로 도망 와서 이곳에 숨었단다. 결국 신라에 의해 토벌되었지만, 그의 이름은 산의 이름이 되었고, 주왕(周王)의 아들인 대전도군(大典道君)은 사찰(寺刹)의 이름으로 남게 되었다.
▼ 대전사 경내(境內)를 가로질러 주방계곡으로 들어선다. 엊그제 내린 비 때문인지 계곡을 흐르는 물줄기가 어찌나 맑은지 옥빛을 띠고 있다. 널따란 대로를 따라 300m정도를 걸으면 주방천을 가로지르는 기암교(橋)가 보인다. 이곳에서 기암교를 건너면 1.2.3폭포로 가게 되고, 주왕산 정상으로 가려면 오른쪽으로 접어들어야 한다.(이정표 : 제3폭포 3.1km, 제1폭포 2km, 주왕암․주왕굴 1.5km/ 주왕산 2km/ 상의매표소 0.3km)
▼ 오른쪽으로 접어들어 산행을 시작하면 일반 산과 국립공원(國立公園)의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다. 다른 보통의 산에서는 결코 볼 수 없을 정도로 등산로를 잘 정비해 놓았다는 점에서다. 자연석(自然石)을 바닥에 촘촘히 심어 놓았는가 하면, 지형지물에 맞게 나무테크로 계단을 만들었고, 심지어는 나무테크를 이용해 각(角)이 없는 길까지 만들어 내고 있다. 당연히 산을 오르는데 훨씬 힘이 덜 든다. 어느 사람들은 자연스러운 맛이 없어졌다고 투덜대기도 하지만, 나는 괜찮다고 본다. 산의 훼손(毁損)을 방지하는데 저보다 낳은 방법이 없다고 하고, 산을 오르는 사람들에게도 힘을 덜어주니 결코 나무랄 일은 아닌 것이다.
▼ 잘 정비된 등산로를 따라 30분 정도를 오르다보면 왼편에 나무테크로 만들어진 전망대(展望臺)가 보인다. 전망대 위로 오르면 주왕산의 진면목(眞面目)이 그대로 드러난다. 연두색과 초록색의 융단을 깔아놓은 듯 나무의 바다(樹海)가 광활하게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혈암과 장군봉, 그리고 연화봉, 병풍바위, 급수대 등이 주방계곡에서 보는 모습과는 전혀 다른 얼굴로 솟아오르고 있다. 그 기암절벽들을 둘러싸고 있는 푸른 숲이 넋을 잃을 만큼 아름답다. 참으로 멋진 풍광(風光)이다. 주방계곡을 둘러싼 바위산의 신록(新綠)은 주왕산 방향에서 볼 때가 가장 감동적(感動的)이라고들 말한다. 그 말이 실감이 나는 순간이다.
▼ 전망대를 지나면서 산길은 가파른 오르막길이 연속된다. 급경사(急傾斜)를 조금이라도 줄여보려고 길은 갈지(之)자를 이루기도 하고, 그것마저도 안 될 경우에는 나무테크로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숨가쁘게 오르다보면 능선안부에 올라서게 된다. 능선에 올라서면 다시 한 번 눈이 호사(豪奢)를 누리게 된다. 좌우로 시야(視野)가 시원스레 열리고 있는 것이다. 혈암과 장군봉, 그리고 연화봉, 병풍바위, 급수대 등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 가슴 아픈 흔적, 주왕산의 울창한 소나무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허리에 해당되는 부위에 빗살무늬 흔적들을 지니고 있다. 이는 1960대 중반 당시 산림자원 개발을 한다며 3년간 송진을 채취했던 흔적이라고 한다.
▼ 주변 풍광(風光)을 눈요기로 즐기며 능선을 따라 걷다보면 이내 주왕산 정상이다. 주왕산 정상은 그저 평범한 분지(盆地)일 따름으로 기대한 만큼의 볼거리를 제공하지는 못한다. 공터의 한쪽 귀퉁이에 자연석(自然石)으로 만들어진 정상표지석이 세워져 있고, 그 곁을 산행안내도가 지키고 있다. 올라오는 길에 여러 곳에서 빼어난 조망(眺望)을 즐겼는데, 막상 정상에서는 조망이 시원스럽지 못하다. 그만큼 정상이 주방골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이정표: 제2폭포 3.8km/ 상의매표소 2.3km). 4월의 마지막 주(週), 남녘의 산하(山河)는 지금 진회색 가지마다 연초록의 잎들을 내밀고 있다. 신록(新綠)의 계절(季節)로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산으로 둘러싸인 주왕산, 그 정점(頂點)에 내가 서 있다. 발아래에는 주방천과 신술골이 깔려있다. 뒤편에는 사창골이 있을 것이다. 그 곳에 있었다는 사창암 옛터에는 주왕 김주원과 김헌창, 김범문에 이르는 삼대에 걸친 가슴 아픈 투쟁(鬪爭)의 역사가 엎드려 있을 것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30분 정도 지났다.
* 1034년의 어느 날 가메봉 아래의 사창암에서 ‘주왕사적(周王寺蹟’이 출토(出土)되었다. 신라 말(新羅 末, 920년)에 낭공 대사(郎空 大師)가 기록한 것으로 ‘신라 말 당나라의 주도(周鍍)라는 사람이 반란에 실패하고 이곳에 숨어 들어왔다. 주도는 이곳에 숨어서 세력을 키우다가 신라의 토벌군(討伐軍)에 의해 진압되었다.’라는 내용의 문서(文書)이다. 하나의 전설(傳說)로만 알려졌던 이 얘기는 1997년에 지방의 한 향토사학자에 의해서 새로운 역사적 사실로 재조명(再照明)되었다. 그는 연구를 통해 주왕의 전설은 신라 말기 반역을 꾀했던 김헌창(憲昌)과 김범문(梵文)으로부터 비롯된 이야기라고 주장한다. 김주원의 둘째 아들인 김헌창은 아버지가 왕이 되지 못한 것에 한을 품고 공주(公州)지방에서, 그리고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은 북한산에서 각각 반란을 일으켰지만 실패했다. 주왕사적의 줄거리에 김헌창을 대입할 경우 우연이라 보기 어려울 정도로 맞아떨어지며, 주왕산의 지형, 유적과도 일치한다고 한다. 게다가 주왕사적을 기록한 낭공대사는 김헌창의 아들인 김범문의 수제자(首弟子)였다니 그의 주장에 고개를 끄떡거릴 수밖에 없다.
▼ 정상을 내려서서 후리메기로 향한다. 정상에서 살짝 내려앉던 산길은 다시 된비알로 바뀌었다가 또다시 내리막길로 변했다. 후리메기로 내려서려면 조망(眺望)이 좋은 칼등바위에서 왼쪽 지능선을 타야 한다. 가메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비지정(非指定) 탐방로이기 때문에 진입(進入)을 막고 있기도 하려니와, 길 또한 나있지 않다고 봐야할 것이기 때문이다. 칼등바위에서 골짜기로 내려서는 길은 끝없는 계단의 연속이다. 길게 늘어뜨리는 것만 가지고는 경사(傾斜)를 다 죽이지 못했는지, 아예 갈지(之)자를 만들면서 아래로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편안하게 다듬어진 나무테크 계단을 따라 내려서는데 오히려 깊은 산중으로 들어서는 기분이다. 기암괴석(奇巖怪石)과 부드러운 산릉도 숲에 가리고, 파란 하늘도 숲이 만들어낸 그늘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 바닥으로 내려선 다음 계곡길을 따라 10분쯤 걸으면 후리메기 삼거리다(이정표 : 제3폭포 1.3km, 가메봉 2.6km). 여기서 오른쪽 사창골 골짜기 길을 따르면 주왕산 최고의 전망대(展望臺)인 가메봉으로 오를 수 있고, 주방천으로 가려면 계곡을 따라 왼편으로 내려가야 한다. 계곡을 따라 걷다보면 인간세상은 아득히 잊혀 진다. 쏴하고 소리 지르는 계곡의 물소리가 경치에 취해 몽롱해진 머리를 일깨운다. 사창골(후리메기골)의 바닥에는 이끼가 두텁게 낀 돌덩이들이 깔려있고, 짤막한 와폭(臥瀑)과 작고 야트막한 소(沼)가 번갈아가며 나타난다. 옥빛 가득한 물가에는 철 이른 피서객(避暑客)들이 옹기종기 앉아있다. 아직은 4월이라고 하지만, 때 이른 초여름 더위는 이미 우리 곁에 다가와 있는 것이다.
▼ 후리메기에서 사창골을 따라 30분 정도를 걸어 내려오면 제2폭포 옆의 삼거리(이정표 : 상의입구 3.1km/ 가메봉 3.6km, 주왕산 3.6km/ 제3폭포 0.3km)에 이르게 된다. 계곡을 따라 내려가는 산길은 계곡 사면(斜面)의 경사(傾斜)로 인해 한쪽 면(面)에만 길을 만들기는 힘들었나보다. 다양한 모양의 다리를 이용해서. 여러 번에 걸쳐 계곡을 가로지고 있다. 계곡은 빼어나지는 않지만 다른 계곡들에 뒤떨어지지도 않을 정도의 수려함을 보이고 있다. 사창골이 큰골과 만나는 삼거리에서 제3폭포는 오른편으로 접어들어야 한다. 정상을 출발한지 1시간이 조금 더 지났다.
▼ 제3폭포를 향해 큰골을 거슬러 올라간다. 300m쯤 걸으면 왼편에 계곡으로 내려가는 테크로 된 계단이 보인다. 계곡으로 내려서면 저만큼에 나무테크로 만들어진 예쁘장한 전망대(展望臺)가 보이고, 전망대에 올라서면 제3폭포의 웅장한 자태가 한눈에 들어온다. 거대한 물줄기를 쏟아내고 있는 제3폭포는 2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아래 전망대에서는 폭포의 전모(全貌)가 다 보이지 않는다. 상부(上部)의 폭포는 가려지고 있는 것이다. 상부폭포를 보기위해서는 다시 나무테크 계단을 올라서 절벽(絶壁)의 난간에 걸쳐져 있는 전망대로 올라가야 한다. 제3폭포는 2단 와폭(臥瀑) 자체도 아름답지만 그 아래 옥빛 물을 찰랑찰랑 담고 있는 널찍한 소(沼)의 풍광(風光)도 일품이다.
* 제3폭포는 관광객들을 배려해서 전망대(展望臺)를 아래와 위, 2개나 설치해 놓았다. 위편 전망대에 오르면 폭포 중간의 물이 돈 흔적(痕迹)과, 절벽(絶壁) 안으로 깎인 3개의 구멍이 바라보인다. 얼마나 오랜 세월동안 물에 깎이었으면 저런 형상(形象)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자연이 만들어낸 한 풍경이 경이(驚異)로까지 발전하고 있다. 얼마 전에 폭포들에 관한 새로운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1,2,3폭포로만 불리어서 뭔가 허전했던 폭포(瀑布)들에게 옛 이름을 찾아주기로 했다는 얘기이다. 이곳 청송군청(郡廳)에서 주왕산지(周王山志) 등 문헌을 참고해서 제1폭포는 용추(龍湫)폭포, 그리고 제2, 제3폭포는 절구폭포와 용연(龍淵)폭포로 사용하기로 했다고 한다.
▼ 제3폭포의 상부(上部)전망대에서 빠져나와 내원동 방향으로 진행한다. 50여m쯤 올라가니 오른편에 ‘입산통제’라는 현수막이 걸려있는 것이 보인다. 산불예방기간인 4월30일까지는 통행을 금지(禁止)한다고 한다. 아침에 절골에서와 같이 내원동도 단 이틀 일찍 온 덕분에 답사가 불가능 한 것이다. 가지 못하는 서운함을 투덜거리며 달래고 있는데 길가에서 쉬고 있던 어느 등산객이 조금도 서운해 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내원동은 이미 사라져버리고 없다면서,,, 세상이 멀어 세상이 그리워하던 내원(內院)마을은 사라져버리고 없다고 한다. 옛 사람들이 깊고 깊은 산속의 마을이라고 해서 '내원'(內院)이라고 불렀다는 마을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환경저해시설(環境沮害施設)이라서 철거(撤去)했다는 국립공원사무소의 안내판(案內板)만이 그 빈자리를 채우고 있더란다. '내원마을을 아시나요?‘ 다들 생경스러운 표정이지만 ’그럼 전기(電氣) 없는 마을은 들어 보셨나요?‘ 그때서야 사람들은 다들 고개를 끄덕거렸었다. 요즘 세상에 전기가 들어가지 않는 곳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내원마을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그 희귀성(稀貴性) 때문인지 등산객들 사이에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더니, 어느 사이엔가 다들 한번쯤은 들러보고 싶은 곳으로 유명세(有名稅)를 타고 말았다. 도심(都心)의 번잡함에 지친 사람들이 동경하던 그런 쉼터를 다시는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언젠가 난 이곳을 찾았었고, 난 쉼터로 변한 분교(分校)에 들어가 난쟁이 의자에 걸터앉아, 방아취에 동동주 한잔 들이키며 인생(人生)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내 앞에 앉아 고개를 끄덕여주던 그리운 얼굴들을 떠올려본다.
▼ 아까 후리메기에서 내려왔던 길과 만나는 삼거리로 돌아 나오면 저만큼에 다리(橋)하나가 보인다. 제2폭포는 다리를 건너기 전에 왼편으로 들어가면 만날 수 있다(이정표 : 제2폭포 0.2km/ 상의입구 3.0km, 제1폭포 0.8km/ 가메봉 3.7km, 제3폭포 0.4km). 동굴을 지나듯이 좁은 길을 200m가량 들어가니 갑자기 눈앞이 훤해진다. 계곡 안이 갑자기 넓어지면서 수려한 모습의 제2폭포가 선을 보인 것이다. 앞쪽만 긴 절벽(絶壁)이고 나머지는 모두 숲인데, 절벽 위에서 맑은 물이 떨어져 내리고 있다. 절벽 위에서 떨어지는 물은 중간에 있는 바위 웅덩이에 일단 머물렀다가 다시 한 번 바닥에 있는 웅덩이로 낙하(落下)를 시작한다. 물에 손을 담가본다. 서늘하다. 망설임 없이 주저앉아 세수부터 하고 본다.
▼ 제2폭포를 빠져나와 얼마간 걸어 내려오면 진행방향에 암벽(巖壁)이 문설주(門-柱)마냥 서 있는 것이 보인다. 기암절벽(奇巖絶壁) 사이가 좁아지는 구간으로 들어서면 우렁찬 물소리가 들려온다. 제1폭포에 다다른 것이다. 암석(巖石)의 기반(基盤)이 세로로 솟아오르며 만들어낸 빈 공간에, 오랜 세월 동안 물이 흐른 흔적들이 보인다. 흐르던 물이 어디를 후려쳤고, 어디는 감싸고돌았는지 잘 다듬어진 절벽이, 후세(後世) 사람들에게 전해 주고 있는 것이다.
▼ 제1폭포는 선녀(仙女)들의 목욕탕(沐浴湯)처럼 생긴 선녀탕과 아홉 마리의 용(龍)이 살았다는 전설(傳說)이 전해져 내려오는 구룡소를 돌아 떨어진다. 아홉 마리의 용이 살기에는 상당히 많이 작아 보이지만, 어떠랴 그럴 것이라고 믿어버리면 편한 것을... 계곡을 흐르는 물은 티 없이 맑고 투명하다. 누가 파란 물감을 풀어놓았을까? 진하게 파랗다. 폭포주변의 기암절벽(奇巖絶壁)들이 다양한 표정을 짓고 있다. 조물주가 아니고서는 결코 저런 작품들을 만들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 하산길의 주방천은 놀라울 정도로 많은 탐방객들로 혼잡스럽다. 그만큼 이곳의 경치가 빼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그 많은 사람들이 붐비고 있지만 주방계곡의 풍광(風光)이 조금도 변하지 않음은 그만큼 계곡이 웅장하기 때문일 것이다. 거대한 자연 앞에 서면, 인간은 하나의 점에 불과하니까... 쓰러질 듯 덮칠 듯 치솟은 기암절벽(奇巖絶壁)과 괴석(怪石)들이 갖가지 모습으로 절경(絶景)을 빚어내고 있다. 누군가 그랬다. ‘한반도(韓半島)의 지도(地圖)를 호랑이 모양으로 놓고 보면 주왕산은 자궁(子宮)에 해당한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내가 지나온 폭포(瀑布)들과 주변의 협곡(峽谷)은 여성의 깊은 속살이었다는 얘기일 것이고, 계곡(溪谷)을 벗어나고 있는 난, 어머니의 자궁을 떠나 새로운 세상으로 나가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난 절골을 따라 산을 오르면서 흘린 땀과 함께 헛된 마음을 비웠고, 산길을 거닐면서 바라본 하늘에서 찾아낸 새로운 메시지로, 비워놓았던 공간을 다시 채워 넣을 수 있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적은 내 삶이, 잎새(잎사귀의 方言)에 이는 바람에도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이되기를 빌면서 어머니의 자궁을 빠져나온다.
▼ 제1폭포를 빠져나오면 건너편에 우뚝 솟은 바위봉우리가 보인다. 하나의 바위로 이루어진 거대한 바위벽은 계곡방향으로 수직의 단애(斷崖)를 만들어 내고 있다. 청학과 백학이 다정하게 살았다는 학소대(鶴巢臺)이다. 옛날 저 바위 위에 있는 소나무에 청학과 백학이 쌍을 이루고 살았는데 지각없는 포수가 백학을 쏘아 잡아버렸다고 한다. 그러자 청학이 며칠을 두고 울다가 이곳을 떠나갔다 하여 새집 소(巢)자를 붙여 학소대(鶴巢臺)라고 부른다고 한다.
▼ 시루를 닮았다는 시루봉, 어떤 이는 거인의 얼굴을 닮았다고도 한다.
▼ 학소대 아래를 통과하면 왼편에 나무테크로 만들어진 계단이 보인다. 주왕암으로 가는 길이다(이정표 : 주왕암․주왕굴 0.8km/ 상의입구 2.0km/ 제1폭포 0.2km). 이곳에서 망월대와 주왕암을 거쳐 자하교(橋)까지의 1Km정도 되는 구간은 비록 산의 경사면을 따라 이어지지만 위험하지는 않다. 국립공원관리소에서 자연관찰로(自然 觀察路)로 잘 가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거기다 더하여 바위나 나무 등의 사물(事物)이나, 계곡바람(溪谷風) 등 현상(現象)에 대한 설명을 적은 안내판을 곳곳에 설치해 놓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이해를 돕게 하고 있다.
▼ 바위 협곡 앞에서 잠깐 걸음을 멈추고 골바람으로 땀을 식힌다. 골짜기 앞에는 골바람이 불어오는 이유를 적은 안내판이 서있으니 땀을 식히면서 읽어보라. 그러면 자기도 몰래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다시 주왕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저만큼에 망월대 전망대(展望臺)가 보인다. 대(臺) 위로 오르면 연화봉, 병풍바위, 그리고 시루봉과 급수대가 신록 사이로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다가와 있다. 가운데 봉우리가 연꽃 같이 생겼다 해서 연화봉이고, 연화봉 우측이 병풍바위, 그 앞에 넘어질 듯이 높이 솟아있는 급수대(汲水臺)다. 그 정상에 신라 왕손 김주원이 살았다는 대궐터가 있으며 급수대라 하는 것은 이 바위 위에서 두레박으로 물(水)을 퍼 올렸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란다.
▼ 전망대에서 내려와 조금 더 진행하면 왼편 협곡(峽谷) 아래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아담한 사찰(寺刹) 하나가 보인다. 주왕암(周王庵)이다.
* 주왕암(周王庵), 계곡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서 '안절'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주왕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대전사와 함께 창건된 암자(庵子)라고 한다. 문간채인 가학루(駕鶴樓)의 중층(重層) 누각(樓閣) 아래로 들어서면 우측에 주왕암이란 요사(寮舍 : 사찰의 전각이나 산문 외에 승려의 생활과 관련된 건물)채가 있고 우측 높은 곳에 16나한을 모신 법당 나한전이 있다. 요사채의 오른편으로 들어서서 협곡을 따라 올라가면 50m쯤 되는 절벽의 하단에 주왕굴이라고 불리는 동굴이 있다.
▼ 주왕암 옆으로 난 협곡(峽谷)의 철(鐵)계단을 오르면 주왕이 은거했다는 주왕굴이 나온다. 주왕은 이곳에서 신라 마장군의 화살을 맞고 죽었다고 한다. 주왕굴 입구는 가는 물줄기가 끊임없이 떨어져 내리고 있다. 물줄기가 여러 가닥이기 때문에 폭포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실폭포... 먼저 도착한 아낙내들이 떨어져 내리는 물을 받느라 수선을 떨고 있다. 아마 저 물에 어떤 영험(靈驗)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모양이다. 동굴의 안에는 산신상(山神像)이 모셔져 있다.
* 주왕굴(周王窟) : 세로 5m, 가로 2m 정도의 동굴이다. 주왕이 신라의 마일성 장군과 맞서 싸우다가 크게 패하고 숨어 살던 어느 날 왼쪽 입구에 떨어지는 물로 세수를 하고 있다가 마장군의 화살에 맞아 최후를 마쳤다는 곳이 주왕굴이다. 그때 주왕이 흘린 피가 주방천으로 흘러들었고, 그 이듬해에 붉은 꽃이 피어났다고 한다. 후세(後世) 사람들은 이 꽃을 수달래라고 불렀고, 주왕의 피가 꽃이 되었다고 전해온다고 한다.
▼ 주왕굴에서 되돌아 나와 주왕암 앞의 화장실에서 왼편으로 접어들면 무장굴(武藏窟)이 나온다. 옛날 주왕의 부하들이 무기를 숨겼다는 굴이다.
▼ 산행날머리는 대전사 앞 주차장(駐車場, 원점회귀 산행)
무장굴에서 다시 주왕암까지 되돌아 나와야 하지만, 중간쯤에서 왼편에 희미하게 길의 흔적이 보인다. 망설이지 않고 내려서니 의외로 길은 뚜렷하게 열리고 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방골 메인(main) 탐방로로 내려서게 된다. 주방골에 내려서면 주변의 풍경(風景)이 다시 한 번 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손으로 만져도 될 만큼 가까이에 다가와 있던 기암괴석(奇巖怪石)들이 모두 달아나버렸고, 흙산(肉山)으로 변해버린 길 주변은 어린아이 얼굴처럼 해맑은 연두색 잎들만이 가득하다. 굴참나무와 물푸레나무의 연초록 잎들이 풋풋한 소녀의 웃음처럼 싱그럽게 다가온다. 주방골 하산로를 따라 조금만 더 걸어내려가면 곧 자하교가 보이고, 이어서 산행을 시작할 때 헤어졌던 주전사 뒤의 삼거리에 세워진 이정표가 산행이 끝나가고 있다고 알려주고 있다. 대전사에서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길은 난전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인근 아낙들이 자리를 잡고 좌판(坐板)위에 대추, 고추, 산수유 등을 쌓아놓고 팔고 있다. 물론 길가에 늘어선 식당의 아주머니들도 빠질 수는 없을 것이다. 길가에서 빈대떡을 부지런히 뒤집고 있다. ‘맛있으니 잠깐 쉬었다가세요’ 호객(豪客)하는 아주머니들의 말을 못 들은 척하고 가다보면 어느새 주차장에 도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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