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스페인 및 포르투칼
여행일 : ‘15. 11. 12(목) - 19(목)
여행지 : 스페인(바로셀로나, 몬세라토, 발렌시아, 그라나다, 미하스, 론다, 세비아, 톨레도, 마드리드), 포르투칼(리스본, 까보다로까, 파티마)
여행 다섯째 날 오전 : 포르투갈(Portugal)의 리스본(Lisbon)
특징 : ① 포르투갈( Portugal) : 리베리아반도의 끝이자 유럽의 서쪽 가장 끄트머리에서 대서양 연안과 마주하고 있는 포르투갈은 대항해 시대의 꿈과 낭만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나라이다. 덕분에 남한 정도의 국토에 인구 천만 명 정도의 조그마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한때는 세계 최대의 해외 영토를 보유할 수가 있었다. 그로인해 침략과 번영, 패배 등의 수난도 유난히 많았지만 말이다. 15~16세기에 해양왕국으로 지위를 확립하면서 세계 최대의 영토를 소유했지만 18세기 중반 나폴레옹의 침입, 브라질의 독립 이후 국력이 극도로 쇠퇴해졌다.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회교 문화와 중세 이후 그리스도 문화가 혼재하고 있다. 이 조그마한 나라이며 유네스코에 등록된 세계문화유산이 10여 곳이나 되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② 리스본(Lisbon) : 포르투갈의 수도로 리스보아 주의 중심도시이자, 포르투갈에서 가장 큰 도시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 도시는 BC 12세기에 페니키아 인들이 건설했고, 그 후 그리스인, 카르타고인, 로마인, 서고트족, 이슬람교도 등이 번갈아 이 도시를 장악하고 지배했다. 그 뒤 알폰소 3세가 국토회복을 완료하고, 1243년 리스본을 수도로 정한 뒤 대항해시대의 포르투갈 전성기가 이 리스본을 중심으로 꽃을 피웠다. 15세기 중엽부터 해외 식민지에서 흘러들어오는 재물들로 인해 리스본은 대도시로 급격한 성장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서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불렸으며 16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1755년 리스본 대지진으로 인하여 도시 대부분이 파괴되어 버렸는데 당시의 참상은 바이로 알투의 교회를 가면 볼 수 있다. 그 후 폼발 후작의 힘으로 부흥을 도모하여 새로운 도시계획에 의한 신시가지가 조성되었다. 현재의 리스본은 지진에서 살아남은 구시가지와 새로 조성된 신시가지가 공존하는 차분하고 소박한 멋을 지닌 도시이다. 참고로 리스본이란 이름은 기원전 12세기경 영국의 콘월 지방을 왕래하던 페니키아인이 세운 항구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당시 타구스 강(포르투갈어로 테주 강) 하구에 세워진 이 항구 도시는 페니키아어로 안전한 항구를 뜻하는 알리스 웁보(Allis Ubbo)라 이름 지어졌다고 추정되며, 여기서 리스본이란 이름이 유래했다는 것이다. 또한 로마 이전의 타구스강의 이름인 리소(Lisso) 혹은 루키오(Lucio)에서 이름이 유래했다는 설도 있으니 참조한다.
▼ 리스본으로 가는 길에 차창 밖으로 나타나는 풍경, 드넓은 평원이 끝없이 펼쳐진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시리도록 푸르다. 그래서 사람들은 포르투갈을 일러 온화한 기후와 청정한 바다 그리고 푸르른 하늘을 가진 나라라고 하는가 보다. 들녘이 그렇게나 넓건만 그냥 놀리는 곳이 없다. 올리브 단지가 길게 이어지나 하면 어느새 포토 밭으로 바뀌었다가 이내 콜크나무숲으로 변해 있다. 그리고 한가하게 풀을 뜯고 있는 가축들이 간간히 보이기도 한다. 목가적(牧歌的)이라는 말이 있다. 전원(田園)의 분위기처럼 평화롭고 고즈넉한 풍경을 말하는데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 버스는 우리를 낯선 거리에다 내려놓는다. 도로 건너에 광장이 보인다. 13세기부터 리스본의 대부분 공식행사가 열려왔다는 호시우 광장(포르투갈어: Praça do Rossio)이란다. ‘페드루 4세 광장(포르투갈어: Praça de D. Pedro IV)’이라는 이름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광장 중심에 ‘돈 페드루 4세’의 동상(銅像)을 세워 놓았다. 페드루 4세는 나폴레옹 전쟁을 피해서 9세인 1807년 말 식민지 브라질로 피난 갔다. 주앙 6세가 1821년 포르투갈로 귀국한 후에도 그는 계속 브라질에 머물러 있었다. 그 후 포르투갈 의회에서 포르투갈·브라질 연합 왕국을 해체하고 브라질을 식민지 지위로 되돌리려 하자 브라질 사람들이 반발하였고, 그는 이에 편승하여 1822년 9월 브라질 독립을 선언하고 브라질 제국의 초대 황제로 즉위했다. 1827년 쿠데타로 포르투갈 국왕이 된 동생과는 1년 동안 전쟁을 하여 1834년 5월 포르투갈을 통일하고 국왕이 되었으나 4달 후 3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로시우 광장 (Praça do Rossio)은 바이샤 지구와 리베르다데 거리를 연결하는 광장으로 정식 명칭은 ‘돈 페드로 4세 광장’이다. 광장의 북쪽에는 옛 종교재판소 자리에 지어진 국립극장(Teatro Nacional)이 있다. 이 외에도 광장에 만들어 놓은 화려하게 장식된 프랑스풍 분수가 볼만한다. 참고로 리스본에는 꼭 찾아봐야할 광장이 하나 더 있다. 시간에 쫒긴 우리는 들러보지 못했지만 ‘메르시우Comercio)’라는 이름의 광장(Praca)이다. 로시우 광장에서 번화가인 바이샤(Baixa)지구를 지나 쭉 내려가면 끝에 웅장한 아치 개선문이 보이고, 그 문을 통과하면 태주(Tejo,Tagus)강변에 있는 리스본에서 가장 큰 광장인 코메르시우 광장이다. 광장 중앙에는 조세 1세의 기마상이 있다. 참고로 개선문은 19세기에 세운 것으로 ‘퐁발 후작’과 ‘바스코 다 가마’의 조각상이 장식되어 있다. 리스본에는 바스코 다 가마와 관련된 건축물들이 많은데, 인도항로를 개척하여 리스본에 부(富)를 안겨준 영웅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 광장 주변에는 유서 깊은 건물들이 늘어서있어 호시우 광장을 더욱 멋지게 만들어 준다. 그 고풍스런 풍경 속에 옛 성당이 빠진다면 말이 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했기에 아직까지도 저런 건물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을까가 궁금한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알고 나면 간단하다. 비록 외관(外觀)에 한하지만 건물을 제멋대로 고치는 것을 법으로 제한하고 있단다.
▼ 또한 광장 주변에는 상점과 레스토랑들이 즐비하다. 광장이 시내중심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역시 이곳에 있는 어느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는다. 물론 난 야외에 놓인 테이블이다. 지나다니는 각양각색의 군상(群像)들을 곁눈질하면서 음식을 먹는 것도 하나의 낭만이기 때문이다. 이곳 리스본에서는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눈에 띈다. 포르투갈이 예전에 많은 식민지를 가졌던 게 원인일 것이다.
▼ 오늘의 점심은 바로셀로나에서 먹어봤던 빠에야와 함께 바칼라오(Bacalhau)가 곁들여졌다. 대구를 장시간 소금에 절여서 말린 뒤, 뼈를 발라서 각종 야채 및 올리브유와 함께 곁들여서 먹는 포르투갈의 전통요리란다. 그러나 올리브유를 좋아하지 않는 내 입엔 별로였다. 별 수 없이 생맥주 한 잔을 주문해서 느끼해진 입안을 헹구어야만 했다.
▼ 거리는 온통 흰색과 회색의 돌들이 물결 같은 패턴의 모자이크로 깔려 있다. 19세기에 죄수들이 석회석과 현무암 조각을 손으로 모래 위에 박아 넣었다고 한다. 그들의 손길 위에 얼마나 많은 발자국들이 지나갔는지 반들거리는 돌들이 미끄러울 정도이다.
▼ 점심을 먹은 후에는 곧바로 벨렘탑(Torre de Belem)으로 향한다. 가는 길에 가이드의 안내 멘트(announcement)가 몇 번 이어졌지만 차량을 멈추지도 않은 채로 지나가면서 하는 말이다 보니 귀에 들어올 리가 만무하다. 그저 머리 위를 지나가는 현수교(懸垂橋)만이 눈에 들어올 따름이다. ‘4월 25일 다리(25 de Abril Bridge)’로서 타구스 강 하구에 위치해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과 남안의 알마다를 잇는 다리이다. 이름은 1974년 4월 25일 혁명에서 유래했다. 1966년 8월 6일에 완공하였고, 1999년 철도 층이 추가되었다. 붉은 빛이 도는 색깔 때문에 미국의 골든게이트교와 자주 비교되지만, 실제 시공은 ‘샌프란시스코-오클랜드 베이 브리지’를 지은 아메리칸브리지컴파니(American Bridge Company)에서 했고, 이로 인해 두 다리 사이의 형태적 유사성이 발견된다. 총 길이는 2,277미터로, 세계에서 23번째로 긴 현수교이다. 위층에는 6차선의 고속도로가, 아래층에는 복선철도가 지나간다. 참고로 이 다리는 1974년까지는 포르투갈의 독재자 살라자르의 이름을 따 살라자르 다리로 불렸다. 그러다가 ‘안토니오 스피놀라’장군이 지휘한 군부의 무혈 혁명, 즉 군인들에게 카네이션을 달아주어 카네이션 혁명이라고도 부르는 ‘리스본의 봄’을 기념하여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 차에서 내리면 넓디 너른 잔디밭이 나온다. 그 끄트머리에 있는 탑이 벨렘탑(Torre de Belem)이다. 강과 바다의 경계에 있는 하얀색 건축물인 벨렘탑은 탑이라고 불리어지고 있으나 탑으로 보이지 않고, 흡사 물위에 떠 있는 거대한 성곽(城郭)처럼 보인다. '벨렘탑'은 1515년 '마뉴엘 1세'가 항구를 감시하기 위해 세운 탑이다. 태주강이 바다와 만나는 물속에 세웠으나 강의 흐름이 바뀌면서 물에 잠기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탑은 3층으로 이루어졌는데 1층은 조수(潮水)의 차이로 물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데 거기에 죄수들을 가두어 물이 들어올 때는 목까지 물이 차는 고통을 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2층은 포대로 항해의 안전을 수호하는 '벨렘의 마리아상'이 서 있다. 끝으로 3층에는 귀족들의 연회장이다. 참고로 이 벨렘탑은 고깔을 닮은 장식, 동글동글한 포탑, 망루에서 바라보는 일망무제의 풍경이 관전 포인트로 꼽힌다.
▼ 포르투갈이 만들어낸 독특한 건축양식인 ‘마누엘양식(Manuel Style)’의 걸작이라면 뭐니 뭐니 해도 ‘제로니무스 수도원’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벨렝탑도 ‘마누엘 양식’이 만들어낸 뛰어난 작품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제로니모수도원이 걸작이라면 벨렝탑을 수작(秀作)으로 분류한다 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아무튼 벨렝탑은 '테주강의 귀부인'이란 애칭을 갖고 있다. 물속에 세워졌다고 믿기지 않을 만큼 그 모습이 수려하고, 또한 여자의 드레스 자락처럼 보인다고 해서 얻게 된 이름이란다.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유일 지도 모르겠다.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운 벨렘탑이 아름다운 여인이 되어 출렁이는 물 위를 걸어 나오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 탑의 위로 올라가면 타호강과 이를 가로지르는 '4월 25일 다리'가 한눈에 잘 들어온다고 한다. 하지만 난 이를 포기하고 발길을 돌린다. 뒤편 저 멀리 타호강 가에 보이는 ‘발견기념비’에 다녀오기 위해서이다. 주어진 시간은 겨우 15분, 결론부터 말하지만 마라톤이 가능한 사람이 아니라면 시도조차 하지 말아야 한다. 15분 안에 다녀오려면 제법 속도를 내서 달려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 달리는 중에도 주변 경관을 놓칠 수는 없다. 틈틈이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가며 달린다. 작은 요트들이 빼꼭히 들어찬 항구가 눈에 들어온다. 바다를 끼고 살아온 그들의 문화가 반영된 풍경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한때 그렇게나 많은 해외 식민지를 거느릴 수 있었을 테고 말이다.
▼ 드디어 ‘대항해 발견기념비(Padrao dos Descobr Descobrimentos)’에 이른다. 이제 막 출범을 하려는 범선의 역동적인 모습이다. 대항해시대의 항해왕자 엔리케(Infante Dom Henrique) 사망 500년이 되는 1960년, 500주년을 기념해 ‘바스쿠 다 가마’가 아프리카 항해를 떠난 자리에다 세운 것이란다. 세계를 호령했던 영웅들을 조각조각 새겨 넣은 기념비에는 전성기에 대한 짙은 그리움이 배어 있다. 참고로 엔리케 왕자는 실제로는 항해를 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항해 전문가들을 고용하여 속도가 빠르고 암초에 잘 견디는 선박을 개발하고, 해상 활동을 적극 지원하여 아프리카와 아시아 등 세계의 절반을 식민지화 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새웠다고 해서 ‘항해왕’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 포르투갈의 엔리케 왕자(Infante Dom Henrique)가 대항해시대를 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대항해시대는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 리스본의 벨렘(Belem)에서 시작됐다. 이때 망망대해 너머 또 다른 세상이 있다고 믿었던 엔리케 왕자는 항해사, 지도제작자 등을 캐스팅해 원정대를 꾸렸다. 그리고 바다로 나갔고, 새로운 항로를 개척했다. 인도를 발견했던 포르투갈의 탐험가 ‘바스쿠 다 가마’와 브라질을 찾아냈던 ‘페르두 알바레스 카브랄’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이 배에 가득 싣고 온 후추 덕에 포르투갈은 황금기를 맞았고, 엔리케 왕자는 ‘해양왕’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 높이 53m의 뱃머리 맨 앞에서 범선을 들고 있는 사람이 엔리케이고 그 뒤에 바스코 다 가마, 카몽이스, 마젤란, 바르돌로뮤 디아스 등 포르투갈 사람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인물 30인의 조각상이 있다. 광장 내 대리석 바닥에는 세계지도를 그려 놓고 지역별로 포르투갈이 도착한 년도가 새겨져 있다. 우리나라는 들르지도 않은지 일본 열도에만 ‘1541’의 표시가 있다.
▼ 다시 버스를 타고 짧게 이동하면 ‘제로니무스 수도원’(포르투갈어: Mosteiro dos Jerónimos)이 나온다. ‘마누엘양식(Manuel Style)’이라는 독특한 양식으로 지어졌다는 건물이다. ‘마누엘 양식’이란 밧줄, 닻, 범선 등 대항해시대의 상징물을 모티브로 하는 화려한 건축 양식을 말하는데, 장대한 해상제국을 실현했던 ‘마누엘 1세(Manuel I : 재위 1495~1521)’가 부(富)를 바탕으로 꽃피웠던 문화양식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그 ‘마누엘 양식’의 결정판이 바로 제로니무스수도원인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수도원의 안은 들어가 볼 수 없었다. 수도원 앞에서 사진 두어 장 찍을 수 있는 시간밖에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제로니모는 히브리어로 된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했다는 이탈리아의 성인이다. 그렇다면 이 수도원의 주요 임무도 문서를 번역하는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 수도원은 두 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오른쪽(아래 사진)의 하얀 건물은 성당이고 왼쪽(그 아래의 사진)에 있는 빨간 지붕의 2층 건물은 수도원이었는데 지금은 해양 박물관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170년의 대 공사 끝에 일궈낸 수도원은 포르투갈이 ‘발견의 시대’를 이끌어 갔을 때 누렸던 영광을 반영하고 있다. 총길이 300m에 달하는 건물은 화려하고 장엄하다. 특히 수도원 안뜰의 2층 회랑은 아치와 기둥, 벽을 장식한 섬세한 조각이 매우 아름답다고 알려져 있다. 참고로 수도원의 원래 이름은 ‘하이에로니미테스 수도원’으로 포르투갈 왕실의 묘(墓)로 사용할 목적으로 지어졌다. 그러다가 훗날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에서 귀환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목적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 제로니무스 수도원(Mosterio dos Jeronimos)은 '엥리케 왕자'의 위업을 칭송하고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항로 발견을 기념하기 위해 1502년 마누엘 1세 때 짓기 시작해 1672년에 완공되었다. 포르투갈을 해양강국으로 만든 엔리케 왕자가 세운 ‘산타 마리아 예배당’이 있던 자리이다. 마누엘 양식을 대표하는 이 화려한 건물은 해외로부터 얻게 된 부를 토대로 지은 것으로 대항해 시대의 영광을 보여주는 수도원이다. 수도원 건물은 16세기에 만든 건물과 19세기에 만든 두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는데 매우 웅장하면서도 화려하다. 남문의 입구 위쪽에는 '앙리케 왕자'의 동상이 자리 잡고 있고, 고딕 르네상스 건축물인 산타마리아 교회와 연결되어 있다. 교회의 내부에는 '바스코 다 가마'와 포르투갈 최고의 시인인 '루이스 데 카몽에스'의 석관이 안치되어 있다. 참고로 제로니무스 수도원은 인근에 위치한 벨렘탑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 제로니무스 수도원의 안으로 들어갈 것을 포기한 이상, 도로를 건너 건물까지 다가갈 필요는 없다. 건물의 외관(外觀)은 조금 멀리서 보는 것이 차라리 더 나을 것이기 때문이다. 수도원의 전면 도로 건너, 그러니까 내가 지금 서 있는 이곳은 커다란 원형의 연못과 하늘을 찌를 듯이 치솟는 분수(噴水)까지 갖춘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아니 나무들이 보이지 않으니 잔디밭으로 부르는 게 옳을지도 모르겠다. 수도원의 전경(全景)을 눈에 담은 후 발길을 돌리려는데 수도원의 반대편 방향에서 눈에 익은 뭔가가 나타난다. 그렇다 아까 죽어라고 달려와서 보았던 ‘대항해 발견기념비’이다. 들르지 않을 거라고 했던 기념비가 바로 코앞에 있는 것이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가이드를 원망해보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어쩌겠는가. 욕이나 실컷 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겠다. 그것마저도 속으로 할 수밖에 없겠지만 말이다. 참고로 수도원이 지어질 당시만 해도 이곳은 테주강이 흘렀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대지진으로 인해 강이 아래로 흘러가게 되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변했다고 한다.
▼ 제로니무스수도원을 끝으로 리스본투어는 끝을 맺는다. 완전히 수박 겉핥기이다. 여행자들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근사한 레스토랑보다 먼저 찾는 곳이 있다. 바로 전망대이다. 높은 곳에 올라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풍경을 즐기다 보면 새로운 장소에서만 느낄 수 있는 설렘에 피로가 단번에 날아가기 때문이다. 누군가 그랬다. 리스본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풍부한 해산물 먹거리라고, 하지만 리스본의 진짜 ‘명물’은 도시 곳곳에 있는 크고 작은 언덕들이다. 그러나 우리에겐 언덕들을 올라볼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아니 기대조차 할 수가 없었다. 시내에 있는 유명한 광장까지도 버스에 탄 채로 안내하겠다는 가이드에게 올라가보자고 우겨볼만한 배짱이 내게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게 바로 패키지여행의 서러움이 아닐까 싶다. 하다못해 어느 성당의 첨탑에라도 올라가보겠지 기대를 해봤지만 언감생심, 갈 길 바쁜 가이드는 운전기사를 채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긴 오늘 안에 땅끝전망대와 파티마까지 모두 둘러봐야 하니 그녀로서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 에필로그(epilogue), 리스본 여행은 한마디로 최악이었다고 할 수 있다. 리스본에서 가장 들러보고 싶은 곳을 들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벨렘탑과 제레니모스수도원을 꼽을 것이다. 건물의 안을 들어가 볼 것을 예상하며 말이다. 그렇지만 우린 외관을 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가이드의 채근에 쫓겨 그나마도 서둘러 곁눈질을 마쳐야만 했다. 이런 게 바로 패키지여행의 한계일 테니 어쩌겠는가. 그러나 투어 일정에 잡혀 있던 ‘에두아루도7세 공원’과 ‘로시우 광장’이라도 구경했더라면 조금은 덜 억울하지 않았을까 싶다. 관광객들이라면 하나로도 더 많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일정에 없는 것을 보여주지는 못할망정 기왕에 잡힌 일정은 소화시켰어야 할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아무튼 일곱 개의 언덕으로 이루어진 리스본은 볼거리가 넘치는 도시이다. ‘리스본 대성당’이 있는 알파마(Alfama)는 여행엽서에까지 자주 등장하는 리스본의 대표 이미지이고, 영국의 낭만파 시인 바이런이 ‘에덴의 동산’이라고 예찬했다는 ‘신트라(Sitra)’는 옛 왕족들의 여름별장이 그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거기다 곳곳에 있는 미라도루(miradouro), 즉 전망대를 빼 놓을 수 없다. 오랜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하며 빛이 바랜 리스본 건물들이 손에 잡힐 듯이 다가오고, 건물들 뒤로는 도도하게 흐르는 타호강이 사람들의 넋을 빼앗기에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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