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스페인 및 포르투칼
여행일 : ‘15. 11. 12(목) - 19(목)
여행지 : 스페인(바로셀로나, 몬세라토, 발렌시아, 그라나다, 미하스, 론다, 세비아, 톨레도, 마드리드), 포르투칼(리스본, 까보다로까, 파티마)
여행 넷째 날 오후 : 세비야 대성당(Seville Cathedral)
특징 : 마드리드에서 남서쪽으로 500km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세비야(Sevilla)는 스페인에서 4번째로 큰 도시다. 이곳 항구는 한 때 스페인과 아메리카 대륙을 잇는 무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하지만 대형 선박의 출입이 가능한 새로운 항구에 밀려 쇠락의 길로 접어들면서 ‘역사적이고 보수적인’ 도시로 명맥을 유지해 왔다. 그럼에도 세비야를 사랑하는 이들이 많은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스페인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투우와 플라멩코의 본고장이 바로 세비야라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여기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세비야대성당(Seville Cathedral)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원래는 이슬람사원의 첨탑이었으나 기독교인들이 개조해 종 28개와 함께 신앙을 상징하는 여성상이 들어선 히랄다탑은 그 특이한 운명으로 인해 스페인에 남아 있는 이슬람 문화의 흔적 중에서도 특히 유명세를 탄다.
▼ 가이드가 ’자 출발합니다.’라고 한 것 같은데 버스는 어느새 세비야(Sevilla) 시내로 들어선다. 생각보다 훨씬 빨리 도착했다. 그 덕분에 늦은 점심을 먹고 론다를 출발했는데도 해가 넘어가려면 아직도 한참 더 남았다. 여행사에서는 그 시간을 활용해 세비야대성당과 에스파냐광장 등 세비야의 주요 관광지는 물론 플라멩코 관람까지 모두 둘러보도록 일정을 짜 놓았다. 오늘도 바쁜 하루가 될 게 분명하다. 세비야는 1492년 이사벨여왕과 페르난도왕이 레콘키스타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다음 무역의 중심지로 성장하게 되었다. 특히 1492년 ‘팔로스 데 라 프론테라(Palos de la Frontera)’를 출항한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세비야로 돌아오자, 신대륙으로 가는 배의 출항과 무역의 독점권을 차지한 세비야에서 기회를 엿보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 결과 16세기 말경 세비야는 스페인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가 되었다. 그 시기(1519년 9월)에 페르디난드 마젤란(Ferdinand Magellan)이 265명이 탄 5척의 배를 이끌고 출발한 곳도 바로 세비야이다.
▼ 과달키비르 강을 따라가던 버스가 커다란 탑 앞에서 선다. 세비야가 자랑하는 또 하나의 명소인 ‘황금의 탑(Torre del Oro)’이란다. 하지만 회색빛으로 우중충한 것이 ‘황금’과는 너무 동떨어지게 보인다. 황금빛은 이미 흘러가버린 지 오래인 옛 추억의 한 토막이었던 모양이다. 황금의 탑은 1220년 이곳을 점령하고 있던 이슬람교도들이 건설하였는데, 탑 위를 황금색의 타일로 장식했기 때문에 황금의 탑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황금의 탑은 과달키비르 강을 항해하는 배를 검문하기 위하여 세웠다. 강 건너 편에 세운 8각형의 ‘은의 탑’ 사이에 쇠줄을 치고 통행하는 배를 검문했다는 것이다. 은의 탑은 1755년 대지진에 무너지면서 없어졌다. 은의 탑을 복원해 그때의 광경을 재현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 황금의 탑은 현재 해양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페르디난드 마젤란(Ferdinand Magellan)이 265명이 탄 5척의 배를 이끌고 길고 긴 항해를 출발했던 장소임을 기념하기 위해서란다. 그 시기(1519년 9월) 마젤란은 아프리카의 서해안을 따라 내려가다가 항로를 서남쪽으로 돌려 남아메리카의 브라질 해안에 도착했고, 해안을 따라 대서양을 남하하여 태평양으로 들어섰다. 마젤란은 남미대륙의 끝에 있는 해협을 힘겹게 통과하여 태평양에 들어설 수 있었다. 얼마나 힘든 항로였던지 마젤란은 평화로운 모습의 바다에 감명을 받아 태평양(The Pacific Ocean)이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또한 후세의 사람들은 그 험난한 해협에 마젤란의 이름을 붙여 그를 기념하고 있다. 이후 태평양으로 들어선 마젤란은 남태평양에 흩어져 있는 폴리네시아제도, 괌을 경유하여 현재의 필리핀에 도착했다. 나중에 이곳에 식민지를 건설한 스페인의 국왕 펠리페2세(Phillip II)의 이름을 따서 붙인 나라 이름이다.
▼ 해양박물관이 있다는 탑의 안으로 들어가 보는 것은 사양하고 세비야대성당으로 향한다. 덕분에 ‘황금의 탑’의 위도 올라가보지 못했다. 탑(塔)위에서 바라보는 과달키비르 강과 세비야 시내 풍경이 괜찮다지만 이따가 ‘히랄다탑’에서 보면 될 것 같아서이다. 세비야 대성당은 황금의 탑에서 길을 건너면 나온다. 고풍스런 건물들이 즐비한 길이다.
▼ 얼마쯤 걸었을까 날렵하게 생긴 말이 이끄는 마차가 보인다. 스페인의 관광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다. 하지만 이곳은 유난히도 더 많은 것 같다. 발밑을 조심하라는 가이드의 경고가 따라 붙을 정도로 말이다. 그녀의 말마따나 길바닥 여기저기에 말똥들이 널려있었다. 그나저나 중세의 마차경험을 해보기 위해서라도 한번쯤 타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 마차를 보았다 싶으면 거기가 바로 ‘세비아 대성당(Sevilla Cathedral)’이다. 거대하면서도 화려한 생김새가 성당이라기보다는 왕궁(王宮)에 가깝다. 그것도 눈을 현혹시킬 정도로 호화스런 왕궁이다. 'Magna Hispalensis'라고도 하는 세비야 대성당은 세계에서 가장 큰 고딕양식의 건축물로 로마의 성베드로 성당, 런던의 세인트 폴 사원에 이어 유럽에서 3번째로 큰 교회이다. 히랄다(Giralda)로 알려진 The Almohade Minaret는 르네상스 부흥시기인 1568년에 만들어졌고 대성당은 1401년에 건축이 시작되어 수세기에 거쳐 완공되었다. 고대 모스크의 유적지에 건축되었으며 5개의 본당 회중석과 25개의 예배당을 갖춘 사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적으로 십자가 모형으로 건축되었으며 대성당을 통해 들어갈 수 있는 히랄다탑은 현재 종탑으로 사용되고 있다.
▼ 매표소로 가는 길에 붉은 색 문이 달린 알카사르(alcazar)가 나타난다. 알카사르는 이곳 세비야뿐만 아니라 세고비아와 톨레도 등에도 있다. 같은 이름의 유적이 여러 곳에 있기 때문에 헷갈려하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그저 이슬람 풍의 ‘요새(要塞)’나 ‘성(城)’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앞에 붙어있는 지역을 보고 어디에 있는 건축물임을 구분하면 된다. 이 외에도 ‘스페인광장’이나 ‘마요르광장’ 등의 유사한 경우가 상당히 많으니 미리 알아두면 스페인 여행이 도움이 될 것이다. 아무튼 ‘세비야 알카사르’는 이슬람과 가톨릭의 건축양식이 뒤섞인 무데하르양식(Mud jar architecture)이 가장 잘 나타나는 유적 중의 하나이다. 이슬람을 몰아내고 가톨릭 왕이 들어오면서 그들이 남긴 건축물들을 완전히 헐어버리지 않고 개축만 한데서 자연스럽게 이슬람과 가톨릭의 문화가 섞이게 된 것이다. 꼭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이번 여행 패키지에 포함되어 있지 않아서 불가능했다. 거기다 타이트한 스케줄 때문에 개인시간까지 주어지지 않으니 어쩌겠는가. 아쉽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참고로 세비야의 알카사르는 자칫하면 무어인의 궁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왜냐하면 몇몇 개의 방과 안뜰은 알함브라와 매우 비슷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알카사르의 일부분은 무어인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1360년대 이곳을 통치하던 Pedro the Cruel of Castile왕이 알카사르를 재건축하면서 그라나다와 세비야, 코르도바, 발렌시아 등지에서 초기 무어식 건축물을 지었던 노동자들을 고용했는데, 그들의 영향을 많이 받아들인 것이다.
▼ 알카사르 앞을 지나니 드디어 대성당의 전모가 나타난다. 성당의 오른편에 부속탑으로 우뚝 솟아있는 것이 그 유명한 히랄다탑 (La Giralda)이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이곳은 원래 이슬람 사원이었고 우뚝 솟은 히랄다탑도 원래는 미나레트(Minaret : 모스크의 부속 건물로, 예배 시간 공지를 하는데 사용되는 탑)이었던 것을 지금은 성당의 종탑으로 사용하고 있다. 12세기 말 이슬람교도 알모아데족이 세웠으나 지진으로 파손되었다가 16세기 기독교인들이 전망대와 플라테레스코(Plateresco) 양식의 풍향계가 있는 종루를 설치했다. 이후부터 ‘바람개비’라는 뜻의 ‘히랄다(Giralda)’로 불리게 되었단다. 풍향계(Giralda)에서 나온 말이다. 특이하게도 탑에는 계단이 없다. 전해지는 얘기로는 옛날 아랍인들은 말을 타고 탑의 정상까지 올랐다고 한다.
▼ 대성당의 건물을 넣은 인증사진을 찍다가 주변을 둘러본다. ‘tv-N'의 방송프로그램 '꽃보다’시리즈의 할배들이 인증사진을 찍느라 부산을 떨었던 장소가 바로 이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들어갔던 식당을 찾아 봤지만 눈에 띄지는 않았다. 하긴 개인시간이 허용되지 않는 패키지여행에서 찾아봤자 뭘 하겠는가.
▼ 입장권을 사서 성당에 들면 오렌지나무들이 질서정연하게 도열해 있는 정원(庭園)이 나온다. ‘오렌지 중정(안뜰)’이라는데 이슬람의 흔적이 물씬 풍기는 곳이다. 아무튼 관람을 하느라 지친 다리를 쉬기에 딱 좋은 장소이다.
▼ 이슬람의 흔적이 물씬 풍겨나는 분수(噴水)이다. 중세시대의 유럽 사람들은 물을 싫어해서 목욕도 잘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아랍인들은 물을 좋아해 이런 물과 분수들이 항상 흐르도록 궁전과 사원을 꾸몄다고 한다. 사막에 살던 그들에게 물은 천국을 의미했을 게 틀림없다.
▼ 성당 입구의 천정에 코끼리 상아와 악어가 매달려 있다. 리비아 왕이 보내준 것이란다. 지금이야 그리 귀한 것도 아니지만 당시에는 귀물 중의 귀물이었으리라. 하지만 왜 저곳에 매달아 놓았는지는 모르겠다.
▼ 성당의 안으로 들어선다. 성당의 내부는 길이 116m에 넓이가 76m인 직사각형의 구조이다. 그리고 팔로스의 문, 종들의 문, 탄생의 문, 왕의 문, 세례당의 문, 잉태의 문, 왕자의 문, 리카르토의 문 등 총 8개의 문들이 달려있다.
▼ ‘황금의 제단’으로도 불리는 주 제단(祭壇)이다. 이슬람문화와 서구문화가 결합된 무데하르 양식(Mud jar architecture)으로 장식되어 있고, 36개의 부분으로 나뉘어 예수의 탄생과 수난, 죽음을 표현하고 있단다. 즉 나무에다 성서에 근거한 수많은 장면들을 섬세하게 조각한 다음 이를 황금으로 덧칠해 두어 화려함을 더했다. 덧칠하는데 사용된 황금 1.5톤은 신대륙에서 가져온 것이란다. 잉카나 마야문명의 유물들을 강탈해 온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목제제단으로는 세계 최대의 규모라니 참조한다.
▼ 주 제단 앞에는 성가대석이 있다. 그 위는 화려한 파이프오르간(pipe-organ)이 자리 잡고 있다. 1724년에 6000개 이상의 파이프를 사용하여 만든 것이란다. 실로 어마어마한 크기이다. 저렇게 큰 오르간은 과연 어떤 소리를 낼까. 그리고 저렇게 큰 것을 과연 인간이 연주할 수 있을지가 궁금해진다.
▼ 성당을 둘러싼 각 방들은 전시관처럼 꾸며 놓았다. ‘세비야 제2미술관’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무리요와 고야 등 유명화가들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 안을 걷다보면 금줄이 처진 곳이 보인다. 금줄 앞쪽 바닥이 콜럼버스의 둘째 아들인 페르난도의 묘(墓)라고 한다. 그는 아버지 콜럼버스를 따라 탐험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기록을 글로 남겼다고 한다. 그 앞에 스페인 국왕 페르난도3세와 알폰소1세의 등 왕실의 묘가 있으니 참조한다.
▼ 웅장하도록 높게 솟은 기둥위에 아름답게 조각된 천정. 그 주변을 이루는 벽마다 채광을 위해 만들어 놓은 스테인 그라스의 성화들, 구석구석 빈 공간이 없도록 그려진 그림들과 조각품들, 눈에 들어오는 것마다 경이 그 자체이다. 탄성이 절로 나오는 웅장하고 아름답게 치장된 성당이다. 그리고 이런 건축물을 만든 인간의 능력에 찬사를 보내게 된다.
▼ 사람들로 붐비는 것이 보인다. 궁금해서 다가가보니 네 명의 거인들이 관(棺) 하나를 떠받히고 있다. 스페인이 자랑하는 대 탐험가 콜럼버스가 영면(永眠)하고 있는 관이란다. 그리고 네 명의 거인은 당시 스페인을 통치하고 있던 4개의 왕국인 카스티야와 아라곤 그리고 나바라, 레온의 왕들이란다. 그런데 바르게 서있는 앞의 왕들에 비해 뒤에 있는 왕들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앞의 두 왕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을 지지해줬기 때문에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있고, 뒤의 두 왕은 콜럼버스를 지지해주지 않아서 고개를 숙이고 있단다. 또 하나 특이한 점은 관을 바닥이 아닌 공중에다 띄워 놓았다는 점이다. 이에는 사연이 있단다. 우여곡절 끝에 신대륙 탐험의 꿈을 중도에서 접을 수밖에 없었던 콜럼버스는 ‘다시는 스페인 땅을 밟지 않겠다.’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단다. 유언에 따라 아메리카 대륙에 묻혀있던 그의 유해를 수 세기가 지나 스페인으로 데려왔지만 그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관을 땅으로부터 띄어놓았다는 것이다.
▼ 거울을 통해 올려다본 천정. 화려함과 웅장함을 자랑한다. 눈으로 확인해봐야 그 진가가 나타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고딕양식과 이슬람양식이 합쳐져 화려함을 더하고 있다.
▼ 성당은 한마디로 거대하면서도 화려하다. 하지만 외형만 바라보고 다니는 우(愚)는 범하지 말자. 고딕과 신고딕, 르네상스 등 여러 가지 건축양식이 혼재된 종합예술품이나 마찬가지이니 꼼꼼히 살펴볼 일이다. 참고로 세비야 대성당 자리에는 원래 12세기에 지어진 이슬람 사원이 있었다고 한다. 서 고트왕국의 수도였던 세비야가 712년에 지브랄터 해협을 건너온 무어인들에게 정복당해 500년 넘게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는데, 그 당시에 의해 지어진 건축물이다. 13세기 후반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이베리아 반도를 되찾은 기념으로, 1402년에 기존의 이슬람사원을 부수고 새롭게 지은 것이 바로 세비아 대성당이다. 성당이 완공되는 데는 100년이 걸렸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고딕, 신고딕, 르네상스 양식이 모두 혼재되어 있는 종합선물세트 같은 건물이 되었단다.
▼ 세비야의 수호신인 성모상이 안치된 왕실 예배당, 무리요의 성화 「성모 수태」가 있는 회의실, 고야와 수르바란의 그림이 있는 성배실, 무리요의 대표작 「산 안토니오의 환상」이 그려진 산 안토니오 예배당 등 사원 안은 마치 미술품의 보고라고 할 만큼 유명 작품들이 많다.
▼ 성물(聖物)실에는 금으로 장식된 화려한 성물들이 진열되어 있다. 그림들이 미술관이라는 느낌을 주었다면 이곳은 박물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 성물실에 진열된 성물 중에는 ‘예수님이 처형당할 때 쓴 가시 면류관의 한 가시’를 안치한 성물도 있단다. 그런데 유럽의 가톨릭국가에 가면 많은 성당들이 저런 형태의 성물들을 마치 경쟁이라도 하려는 듯이 전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 히랄다탑 (La Giralda)으로 향한다. 성당 안에서 곧장 오를 수 있으니 일부러 밖으로 나갈 필요는 없다. 98m 높이의 탑은 34개의 오르막길로 이어진다. 그 높이에 미리부터 질리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쉬엄쉬엄 오르다보면 힘든지도 모르게 오를 수 있다. 하긴 붐비는 사람들로 인해 속도를 내려고 해도 낼 수가 없겠지만 말이다. 참고로 히랄다탑의 70m까지는 이슬람사원의 첨탑으로 지어졌을 당시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고, 그 위는 16세기에 추가로 덧붙여졌다고 한다.
▼ 빙글빙글 돌아가며 탑 위로 오른다. 창밖으로 나타나는 풍경을 내다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그리고 중간 중간에 전시되어 있는 유물들 또한 잠시의 볼거리로 충분하다. 잠시 후 천정에 매달린 수많은 종(鐘)들이 나타난다. 어느새 탑의 꼭대기에 올라선 것이다.
▼ 회랑(回廊)으로 된 탑의 꼭대기는 뛰어난 전망대이다. 세비야 구시가지에서 가장 높은 곳이기 때문에 세비야 시내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특히 히랄다 탑에서 바라보는 과달키비르 강변의 석양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 성당을 빠져나오는 길에 다시 한 번 히랄다탑이 올려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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