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두바이, 스위스, 이탈리아

 

여행일 : ‘16. 3. 12() - 20()

일 정 :

3.13() : 두바이

3.14(월) : 스위스(루체른)

3.15(화)-19() : 이탈리아(밀라노, 피렌체, 로마, 나폴리, 폼페이, 소렌토, 베니스, 볼로냐)

 

여행 둘째 날 : 스위스(Switzerland) 루체른(Luzern)

 

특징 : 취리히 남서쪽, ‘루체른 호의 북서부로부터 발원하는 로이스 강을 끼고 있는 자그마한 도시로 8세기에 세워진 베네딕투스 수도회의 장크트루시아리아 수도원에서 도시의 이름이 유래했다. 1230년경에 생고타르 수로가 개통된 후, 라인 강 상류와 롬바르디 지방 사이의 중요한 교역 중심지로 발달했다. 합스부르크가의 루돌프 4(독일의 루돌프 1)는 독립을 원했던 시민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1291년 수도원과 시를 사들였다. 루돌프의 뒤를 이은 계승자들의 치하에서 발생한 정치적 불안 때문에 이곳은 1291년 우리·슈비츠·운터발덴 주들이 결성한 동맹에 1332년 가입했다. 이 동맹은 합스부르크 군대와 싸운 젬파흐 전투(1386) 후 독립을 얻었다. 1579~1874년에는 로마 교황 대사의 주재지였고, 1798년에 이 시의 귀족 정권이 나폴레옹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물러난 뒤, 한동안 헬베티아 공화국의 수도였다가 1803년 주도의 지위를 되찾았다. 스위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환경을 가진 곳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으며, 카펠 다리와 빈사의 사자상이 이 도시의 관광명소이다.

 

 

 

 

루체른(Luzern) 시내로 들어선 버스는 중앙역 앞의 다리를 건너자마자 6층짜리 빌딩 앞에다 우리를 내려놓는다. 빌딩 상단에 부커러(Bucherer), 그 아래에는 로렉스(Rolex)가 회사의 로고와 함께 적혀있다. 두 회사 모두 스위스가 자랑하는 시계의 명가이다. 이로보아 명품시계 판매장인 게 분명하다. 이왕에 시계 이야기가 나온 김에 스위스가 왜 시계 제조의 강국이 되었는지 알아보자. 스위스가 시계 강국이 된 것은 약 500년 전에 일어난 종교개혁과 관련이 있다. 16세기에 로마 가톨릭을 반대하면서 종교개혁을 주장한 프랑스의 장 칼뱅(존 캘빈)’은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스위스 제네바로 피신하게 된다. 이후에도 프랑스 정부가 종교 탄압을 계속하자 칼뱅을 지지하던 프랑스 내 위그노교도 40만여 명이 스위스,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등지로 탈출한다. 당시 위그노들은 주로 정밀기술을 보유한 기술자들이었는데, 이들 중 시계를 만드는 장인들이 주로 정착했던 곳이 바로 스위스의 제네바였다는 것이다. 당시 칼뱅을 비롯한 칼뱅주의자들은 청빈을 중시한 반면, 보석으로 치장하고 시간을 지키지 않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이런 영향을 받아 보석 대신 시계의 보급이 늘었고, 제네바에서 성행하던 보석 가공 기술과 섞이면서 시계 제조 기술이 더욱 발달하게 되었단다. 17세기 들면서 제네바에 시계조합이 탄생했고, 1845년경 시계산업이 기계화되면서 시계의 생산량이 크게 늘어났다. 이후 스위스 사람들은 자기들이 만든 시계를 짊어 메고 알프스산맥을 넘어 유럽 각국에 시계를 팔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스위스 시계의 우수성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참고로 스위스에서는 2년마다 하나뿐인 시계 경매행사가 열린단다. 이때 명품 시계 제조업체들이 자기들이 만든 시계를 출품하는데, 지난해에는 88억 원짜리 시계가 출품되어 영화배우 브래드 피드에게 낙찰되기도 했다. 동 행사에서 얻어지는 수익금은 전액 희귀근육질환 연구에 쓰인다고 하니 우리나라 기업들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니나 다를까 매장 안은 온통 명품시계들 천지다. 아이쇼핑으로 만족하고 그냥 빠져나오고 만다. 비싼 가격의 시계가 나에겐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며늘아기로부터 선물 받은 시계까지도 아직까지 서랍 속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더 이상 무슨 시계가 필요하겠는가. 여유시간으로 넘치는 나 같은 은퇴자들에겐 시계란 게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그것도 아니라면 현직에 있을 때 대통령표창 수상 기념으로 받았던 쌈지막한 시계가 아직까지도 내 손목을 벗어날 줄 모르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고 말이다.

 

 

 

 

루체른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카펠교(Kapellbrucke)이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지붕 덮인 목조교(木造橋)라는 이 다리가 루체른의 상징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카펠교는 도심(都心)을 가로지르는 호수 위에 놓여있다. 우리가 버스에서 내린 로렉스 매장의 근처이다. 때문에 금방 다리에 이를 수가 있다. 하지만 난 도로를 따라 길게 걸어보기로 한다. 곧장 카펠교로 가지 않고 그 아래에 놓은 평범한 다리를 먼저 건너보려는 것이다. 그래야 카펠교의 전모(全貌)를 눈에 담을 수 있을 것 같아서이다.

 

 

가는 길에는 예쁘게 생긴 분수(噴水)도 보인다. 이곳뿐만이 아니다. 크고 작은 광장마다 어김없이 분수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오래되어 보이는데다 찬찬히 들여다보면 나름 귀엽기까지 하다.

 

 

길가에는 다양한 상점들이 들어서 있다. 그중에서도 시계나 보석가게 등이 많이 눈에 띈다. 어느 것 하나 만만찮은 가격들일 것 같다.

 

 

 

 

 

 

길가 건물들은 그다지 오래되어 보이지 않는다. 이쪽 방향이 구시가지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상한 일이다. 눈에 들어오는 건물들이 어느 것 하나 고풍스런 중세 건물로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외벽에 중세풍의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는 그 건물들 말이다.

 

 

 

 

 

 

드디어 로맨틱한 옛 건물이 나타난다. 지붕이 베른(Bern)의 농가 풍으로 지어진 중세건물이다. 용도가 궁금하다. 십자가가 눈에 띄지 않는 걸로 보아 교회가 아닌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깃발이 내걸려 있어 공공기관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내 추측이 맞았다. 시청사라는 것이다. 17세기 초의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물이란다. 오래된 도시는 역시 청사까지도 고전적(古典的)이다. 하긴 이런 풍경들이 있어 여행자들이 찾아올 것이다. 참고로 청사의 강 쪽에 있는 오픈 아케이드에서는 매 주 시장이 들어선단다.

 

 

 

 

골목을 빠져 나오면 로이스(Reuss)’강이다. 이어서 카펠교의 바로 아래쪽에 놓여있는 다리를 건넌다. 이름 없는 다리에 불과하지만 카펠교가 가장 잘 보이는 다리이기 때문이다. 가이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포토 죤(photo zone)’으로 이곳을 지목했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카펠교가 한눈에 잘 들어온다.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걷는 동안 카펠교는 보는 각도에 따라서 약간씩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때문에 다리를 다 건널 즈음에는 카펠교는 더 이상의 비밀을 간직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반대편, 로이스(Reuss)강의 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예수교회(Jesuitenkirche)도 한눈에 들어온다. 바로크 양식의 교회로 1666년 짓기 시작하여 1677년 완성된 건물이다. 양파와 같은 돔 지붕 모양의 2개의 탑을 거느린 파사드가 멀리서 보기에도 아름답다. 흰색과 분홍색을 기조로 한 로코코 양식의 장식으로 채색되어 있는 내부도 화려하고 아름답다고 알려져 있으니 한번쯤 들어가 볼 일이다.

 

 

 

 

다리를 건너는 동안 카펠교를 실컷 볼 수 있다는 게 이 무명교의 장점이다. 하여튼 루체른에 오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찾는 곳이 카펠교(Kapellbrücke=카펠브뤼케)’이다. 루체른을 대표하는 랜드 마크(land mark)’이기 때문이다. 카펠교는 루체른을 오랜 시간 지켜온 수문장의 느낌으로 로이스 강을 관통한다. 1333년 루체른을 방위하기 위한 요새의 일부로 세워진 이 다리는 유럽에서 가장 길면서도 가장 오래된 나무다리라고 한다. 19938월의 화재(火災)로 거의 모두가 파괴되었으나 몇 달이라는 짧은 가간에 재건축이 이루어졌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다리는 예전과 완벽히 똑같은 복제품이라고 보면 된다. 그림 또한 3분의 2가 파괴되었다. 화가들이 사진을 참조로 해서 다시 그려야 했기 때문에 그림 교체 작업은 다리의 재건축보다는 훨씬 더 오래 걸렸다고 한다.

 

 

 

 

 

 

무명의 다리를 다 건넜으면 이번에는 카펠교를 걸어보는 순서이다. 다리에 올라서면 나지막이 삐걱대는 소리와 나무 냄새에 고색창연한 아름다움의 정수를 느낄 수 있다. 200m에 이르는 이 다리는 처음에는 곧게 시작된다. 하지만 곧바로 45도 각도로 굽어져 맞은편 강변에 닿는다.

 

 

우아한 형태의 이 다리 위를 덮고 있는 지붕의 들보에는 스위스 역사상 중요한 사건이나 루체른 수호성인의 생애를 표현한 112매의 삼각형 판화 그림이 걸려 있다. 이 중에는 17세기 하인리히 베그만( Heinrich Wagman)’의 작품도 10여 점이 있다고 한다.

 

 

 

 

다리 중간에는 팔각형 석조의 바서투름(Wasserturm=물의 탑)이 있다. 등대(燈臺)를 겸한 루체른 방위 탑으로, 위급할 때에는 시민에게 경종을 울려 알리는 종각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감옥, 고문실, 금고실 등 다양한 용도로 쓰였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기념품을 파는 상점이 들어서 있다.

 

 

 

 

카펠교에서 바라본 로이스(Reuss) 강변(江邊) 풍경, 루체른을 둘로 나누며 흐르는 강가에는 중세 스위스를 느끼게 하는 고풍스런 건물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조금 전 카펠교를 눈에 담으며 거닐었던 무명의 다리도 한눈에 잘 보인다. 참고로 저곳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15세기에 지어진 슈프로이어 다리가 있다. 그리고 그곳에도 역시 당시 사람들이 그려놓았던 그림들이 있다. 하지만 두 다리의 그림은 다르다. ‘스위스 성인에 관한 그림이 그려진 이곳 카펠교와는 달리 슈프로이어 다리에는 인간의 생과 죽음에 대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반대편에는 루체른역이 보인다. 서울역의 건축모델이 되었다는 건축물이다.

 

 

맞은편 강변에 닿았으면 이번에는 또 다른 다리를 이용해 로이스강을 건넌다. 루체른역으로 가기 위해서이다. 옛 서울역의 건축모델이 되었던 건축물이라니 어찌 가보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다리를 건너면 루체른의 대문이라고 할 수 있는 루체른역이 나온다. '스위스 속의 작은 스위스'를 찾아 루체른에 오는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처음으로 발을 딛게 되는 곳이 바로 이 역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의 대부분은 이곳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취리히에서 열차를 탄다. 최근 루체른은 스위스 최고의 관광지로 입소문을 타고 있다. 스위스만의 매력으로 불리는 요소들을 모두 품고 있기 때문이다. 지도를 펼쳐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다. 주도인 루체른과 접해 있는 호수, 이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리기, 필라투스, 티틀리스 등 알프스의 명산들. 이들이 자아내는 수려한 풍광들이 루체른을 스위스 최고의 관광 도시로 거듭나게 한 것이다.

 

 

하지만 내가 찾던 그런 건축물은 눈에 띄지 않았다. 원래의 기차역은 불에 타 사라져 버렸단다. 그저 아치(arch)형의 파사드(façade)만이 남아 아쉬운 마음을 달래줄 따름이다.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건축 1001’에 선정된 벨기에의 안트베르펜 중앙역(Antwerp Central Station)’이 사라져버린 루체른역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하니, 언제 한번 다시 찾아봐야겠다. 2001년도에 들렀을 때는 그런 줄도 모르고 그냥 지나쳐 버렸기 때문이다. 하긴 국제회의 참석을 위한 출장 중이라 그럴만한 여유도 없었겠지만 말이다.

 

 

역의 옆에는 ‘KKL Luzern'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특이한 건물이 있다. 스위스는 원래 눈이 많이 오는 나라이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경사가 진 지붕의 집을 짓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도 이 건물은 지붕이 평평하게 지어졌기에 특이하다는 표현을 썼다. 이 건물이 바로 그 유명한 루체른문화컨벤션센터(Kultur und Kongresszentrum Luzern)로 전 세계의 최정상급 오케스트라와 지휘자, 연주가들이 모이는 것으로 소문난 음악축제인 루체른 페스티벌(Luzern Festival)’이 열리는 곳이다. 1938년 시작된 이 축제에는 베를린 필하모니, 빈 필하모니 등 세계 최정상급 오케스트라와 지휘자들이 초청된다.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가 루체른의 교외 트립셴(Tribschen)에 있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옛 거주지에서 저명 음악가들을 모아 특별히 결성한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지휘하면서 시작되었는데 1970년 축제 때부터는 테마를 정해 진행하기 시작했다. 매년 여름 약 4주일간 100여 개의 연주회가 열리며 12만 명의 관객이 찾아든다고 한다.

 

 

 

 

점심을 위해 빈사의 사자상부근에 있는 ‘Angolo Pizza & Pasta’을 찾았다. 이름만 봐도 뭐를 잘 만드는 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피자를 안주 삼아 맥주 두어 잔을 마시다가 파스타를 먹기에 딱 좋은 식당이 아닐까 싶다. 음식 맛도 뛰어났음은 물론이다.

 

 

식사를 마치고 빈사의 사자상으로 향한다. 식당의 맞은편으로 난 골목길이다. 들머리 오른편에 ‘Old Swiss House'라는 식당이 있다. 한국 여행객들 사이에는 고상한 실내장식과 품격 있는 식사가 제공되는 것으로 알려진 식당이니 참조한다. 다만 우리가 들렀던 식당보다는 돈을 조금 더 써야함을 각오해야 한다.

 

 

골목 입구에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니 참조한다. 작은 글씨로 써져있지만 워낙 단조로운 골목이라서 눈에 잘 띈다.

 

 

 

 

공원 앞에서 만난 시계가게, 가게의 위치 때문인지 앞에다 사자 조형물을 세워 놓았다. 하지만 빈사의 사자와는 완전히 다른 형상이다. 뛰어 오르기 일보직전의 활기에 넘치는 사자의 모습인 것이다.

 

 

빈사의 사자상이 있는 작은 공원 안으로 들어선다. 루체른의 또 다른 랜드마크이다. 안으로 들면 작은 연못이 나타난다. 연못을 사이에 두고 회색빛 사자가 등에 창이 박힌 채 마지막 순간을 맞고 있다. 죽어가면서까지 지키고 있는 흰 백합의 방패는 부르봉 왕가를 상징한단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의 사자는 1792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났던 당시 스위스 용병들이 그들을 고용했던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지키다가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상징하고 있단다.

 

 

 

 

 

 

빈사의 사자상1792년 프랑스 혁명 당시 루이 16세의 왕가를 지키다가 전사한 700여 명 스위스 용병들의 명복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다. 덴마크 조각가 토르발트젠의 작품으로 창을 꽂은 채 잠든 사자의 모습에서 숙연함이 느껴진다. 사자상 아래에는 스위스 전사들의 이름이 모두 새겨져 있다.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빈사의 사자상에 대해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감동적인 조각품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빈사의 사자상바로 옆에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인다. 입장료를 받기에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루체른의 흥미로운 역사를 보여주는 빙하공원(Gletschergarten Luzern)’이란다. 지금은 빙하로 덮여 있지만 알프스의 산자락은 2000만 년 전만 해도 야자수와 호수로 이뤄진 열대지방으로 공룡들이 서식하던 지역이었다고 한다. 2만 년 전의 지각변동으로 인해 빙하로 덮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1972년에 발견된 이 동굴에는 야자나무 화석, 빙하에서 녹은 물이 급류를 이뤄 바위를 침식시키면서 생긴 소용돌이 모양의 구멍과 둥근 바위, 돌 등이 있어 수만 년 전 빙하로 덮여 있던 루체른의 모습을 추측할 수 있게 해준다고 한다. 공원 안쪽에는 루체른과 스위스 중부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전시하는 박물관도 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