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발칸반도 및 동구유렵

 

여행일 : ‘14. 10. 19() - 30()

여행국가 : 독일,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 체코(7개국)

 

여행 둘째 날 오후 : 슬로베니아의 포스토이나(Postojna) 동굴

 

특징 : 슬로베니아는 카르스트(Karst) 지형이 유명하다. 카르스트(Karst)라는 단어 자체가 슬로베니아의 지명인 크라스(Kras)에서 가져왔을 정도로 말이다. 크라스 지방에 있는 포스토이나(Postojna)는 세계에서 가장 긴 동굴 중 하나인 포스토이나 동굴(Postojna Caves)’을 보유하고 있다. 동굴의 길이는 무려 24, 관광객들에게 개방된 공간은 그 중 일부이지만 입구에서부터 기차를 타고 들어가야 할 정도로 크고 아름답다. 길이만 긴 게 아니라 동굴 내부도 심히 넓은데, 관광객이 들어가는 가장 깊은 곳에는 10,000명의 청중들을 모아놓고 콘서트를 열 수 있을 정도의 거대한 강당형 공간도 있을 정도이다. 다만 기차 타고 들어갈 때 특별한 안전장구를 주지 않으니 특별히 안전(安全)에 유의하여야 한다. 사진 찍는데 열중하다 자칫 잘못하면 삐져나온 종유석(鐘乳石) 기둥에 머리를 부딪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슬로베니아의 국경 부근에 있는 포스토이나(Postojna)에 도착하면 반듯하게 잘 지어진 건물들이 길손을 맞는다. 식당이나 기념품판매점 등 편의시설들이 들어있는데, 오전에 들렀던 블레드에 비하면 화려하다고 표현해도 좋을 듯 싶다. 이곳에 있는 동굴이 일찍이 관광지로 개발되면서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비엔나(Vienna)보다도 먼저 전기(電氣)가 들어왔다는 얘기가 있는데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포스토이나동굴(Postojna Caves)의 원래 이름은 아델스베르그동굴(Adelsberg Caves)이었다. 오스트리아 지배하던 때 아델스베르그(Adelsberg)시의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슬로베니아지방이 유고슬라비아로 편입되면서 지역 이름이 포스토이나(Postojna)로 개명(改名)되었다. 이에 따라 동굴의 이름 또한 포스토이나로 바뀌게 된 것이다. 아델스베르그(Adelsberg)로 불리던 초기만 해도 동굴은 보잘 것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818년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가 동굴을 방문함으로써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황제의 입동을 위해 안전진단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동벽 30m 높이에서 호화찬란한 새로운 동굴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동굴 내에 안전통로를 개설하였고, 이와 더불어 관람료(觀覽料)를 징수하기 시작했다. 이 관람료를 바탕으로 합리적인 동굴관리와 동굴퇴적물 보호가 이루어졌고, 안내인들을 체계적으로 훈련시킴으로써 관광객들에게 보다 좋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1852년에는 트리에스테(Trieste)에서 아델스베르그(Adelsberg)까지 철도노선이 부설되었고, 동굴로 가는 특별관광열차까지 정기적으로 운행시킴으로써 세계최고의 동굴관광 명소(名所)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참고로 이런 일련의 과정을 계기로 유럽의 여러 나라들도 동굴개발에 대한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나라마다 앞다투어 관광동굴 개발에 열을 올리는 큰 계기가 마련되었다. 또한 신대륙에서도 총 길이 591의 세계최장동굴인 매머드(Mammoth)동굴을 비롯하여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루는 칼즈배드(Carlsbad)동굴, 루레이(Luray)동굴 등이 개발되는 큰 계기가 되었다.

 

 

 

동굴관람은 꼬마 기차(汽車)와 함께 시작된다. 동굴은 일부분만 일반에게 공개(公開)된다. 그러나 그 길이(5.3)는 결코 짧지 않다. 일반인의 관람코스로는 세계에서 가장 긴 이 코스를 걸어서 둘러본다는 것은 애초부터 어렵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관광객들의 편의를 위해 일정 구간에 선로(線路)를 깔고 기관차(機關車)를 운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기관차는 1872년에 최초로 부설되었다. 이어서 20세기에 들어오면서 가스기관차가 도입되었고 1945년 이후에는 전기기관차로 대체되었다. 참고로 포스토이나동굴은 개별 입장이 불가능하다. 한 시간에 한 번씩 꼴로 운행하는 기관차를 타야만 동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기관차의 속도는 제법 빠르다. 옆으로 종유석기둥이 슁슁 지나가니 사진 찍다가 머리가 없어지는 사태가 생기지 않도록 조심해야한다. 동굴 내부의 기온은 선선(10도 내외)하게 느껴지는 편, 기차를 타고 갈 때에는 맞바람 때문에 차갑게 느껴질 수도 있다. 바람막이 옷이라도 한 벌 챙겨가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물론 긴팔바지에 긴팔셔츠를 입는 것은 기본이고 말이다.

 

 

 

투어(tour)를 시작하자마자 이어폰(earphone)부터 끼고 본다. 아까 동굴로 들어설 때 가이드(guide)가 하나씩 나누어 준 것이다. 귀에 끼자마자 동굴해설이 흘러나온다. 물론 한국어이다. 이 통역서비스(service)는 영어, 불어, 독일어 등 주요 국가들에 대하여 제공된다고 한다. 그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나도 모르게 어께에 힘이 들어갔었다. 우리나라의 국력이 그만큼 강해졌다는 증거이니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이 오디오(audio)서비스의 해설은 20개 정도의 구간으로 나뉘어 제공되는데, 어휘(語彙)가 썩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동굴의 발견 시기는 정확하지는 않으나 문헌(文獻)상으로는 17세기에 야네즈 바이카르드 발바소르(Janez Vajkard Valvasor)가 이 동굴에 대해 기술한 것이 최초이다. 그러다가 1818년 오스트리아 최초의 황제인 프란시스 1(Francis )의 방문에 대비한 점검과정에서 주민인 루카 체치(Luka Čeč)가 기존에 알려져 있던 구간 외에 새로운 동굴을 추가로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따라 1819년에 이 동굴을 대중에게 공개하게 되었고, 체치는 이 동굴 최초의 동굴관광 안내자가 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1884년에는 전기조명이 설치되었는데, 이는 당시 동굴이 있던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카르니올라주(Carniola)의 수도 류블리아나(Ljubljana)보다 더 이른 것이었다.

 

 

 

 

 

 

 

포스토이나 동굴(Postojna Caves)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웅장한 카르스트(Karst) 동굴로서 영국출신의 세계적인 조각가 헨리 무어(Hennry Moore)’'가장 경이로운 자연 미술관'이라고 극찬했을 만큼 그 규모가 크다. 그리고 동굴 내부의 종유석 모양이 하도 다양해서 학자들 사이에선 살아있는 지질학 교과서로까지 불릴 정도이다.

 

 

 

 

 

 

 

 

 

 

 

 

 

내부에 들어서면 우선 동굴의 규모에 압도당하고 다양하고 찬란하게 펼쳐지는 종유석(鐘乳石)의 향연(饗宴)에 입이 딱 벌어진다. 빨간 색, 흰 색, 투명한 색 등 기둥의 탄산 함유량과 빛에 따라 나타나는 종유석의 변화를 관찰하다 보면 일행에서 쳐지는 건 다반사다. 특히 사진까지 찍다보면 말이다. 나 역시 자주 뒤로 쳐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집사람으로부터 엄청나게 자주 잔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쩌랴 이렇게 황홀한 광경을 놓아두고 갈 수는 없으니, 가슴에 못다 담은 나머지는 카메라에라도 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동굴 안은 미술관(美術館)을 연상시킨다. 각양각색으로 생긴 수많은 종류의 종유석(鐘乳石)들로 넘쳐나는 것이다. 그것도 눈이 휘둥그러질 정도로 잘생긴 예술작품들이 말이다. 아니 미술관보다 더 뛰어나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내가 돌아본 유럽의 유명한 미술관들 중에서 이보다 더 많은 종류의 미술품들을 소장하고 있는 곳은 없었기 때문이다.

 

 

 

 

 

 

 

 

 

 

 

 

 

 

 

중앙의 콘서트홀(Concert Hall), 천길이 120m에 폭이 50m, 그리고 천정의 높이가 35m의 거대한 광장(hole)이다. 면적이 3000에 이르며 1만 명이 동시에 음악을 감상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포스토이나동굴(Postojna Cave)은 피브카 강(Pivka River)의 유수 작용에 의해 생성되었다. 이는 동굴을 둘러보는 중에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볼 수 있다. 출구로 나가는 중에 보면 협곡처럼 생긴 골짜기가 까마득하게 내려다보이는데 그 아래로 강물이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다. 참고로 동굴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혈거도롱뇽인 이 고장 특유의 올름(olm)이 서식한다고 한다. 동굴을 통과하는 관광노선에 올름이 서식하는 웅덩이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이곳에서만 올름을 직접 볼 수 있다고 한다. 나 역시 그런 행운을 얻을 수 있었다. 비록 웅덩이가 아닌 유리관을 통해서 볼 수 있었지만 하얀색의 도롱뇽은 귀엽기 짝이 없었다. 하도 귀해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동굴투어(tour)가 끝나면 다시 기관차를 타야만 한다. 기관차 승강장 근처에 만들어진 동굴 내 쇼핑센터(shopping center)에서 간단한 기념품 몇 점을 사들고 나오면 포스토이나동굴 투어는 끝이 난다.

 

여행지 : 발칸반도 및 동구유렵

 

여행일 : ‘14. 10. 19() - 30()

여행국가 : 독일,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 체코(7개국)

 

여행 둘째 날 오전 : 슬로베니아의 블레드(Bled)

 

특징 : 슬로베니아(Slovenia)는 유고슬라비아를 구성하였던 여섯 공화국 가운데 하나였으나. 1991년 연방에서 탈퇴하여 독립한 나라로 국토면적은 약 20,251 에 인구는 약 200만 명 정도이다. 북쪽으로는 오스트리아, 서쪽으로 헝가리, 남쪽으로 크로아티아, 서쪽으로 이탈리아와 접하고 있고, 피란(Piran)항을 통해 짧게나마 아드리아해 최북단과 접하고 있어 내륙국만은 면했다. 수도 류블랴나(Ljubljana)는 거의 중앙부에 자리하고 있다. 슬로베니아를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블레드(Bled)와 포스토니아(Postojna)를 둘러보는 것을 거르지 않는다. 그 중에서도 특히 자그마한 빙하호 마을인 블레드를 빼놓고는 슬로베니아의 아름다움을 얘기할 수 없을 것이다. 호수를 끼고 있는 수직 절벽위의 요새(要塞)인 블레드성()과 블레드호수(湖水)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 블레드섬은 우리네 벽에 걸려있는 캘린더(calendar)에서 심심찮게 보아오던 풍경들이다.

 

 

 

 

블레드로 들어가는 길에 보히니 호수(Bohinjj Lake)가에 있는 보히니(Bohinjj)마을에서 머물게 되었다. 슬로베니아 북서부 줄리안 알프스(Julian Alps)의 분지(盆地)에 위치한 작은 마을인 이곳에 들어서면 산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주위가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러나 그런 지정학적인 위치가 오히려 마을 더 뛰어나게 만든다.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호수(湖水)가 주위의 마을이 함께 어우러지는 풍경이 사뭇 신비롭기까지 한 것이다.

 

 

 

하룻밤을 묵은 보히니호텔(Hotel Bohinij), 4층짜리 건물에 일층은 식당 등의 편의시설(便宜施設), 그리고 침실(寢室)2층에서 4층까지 3개 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시골의 작은 마을에 소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침실은 깨끗했고, 제공되는 음식 또한 다른 큰 호텔들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았다.

 

 

 

눈을 뜨자마자 호숫가로 나가본다.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호수는 한마디로 잘 그린 한 폭의 풍경화(風景畵)이다. 호수에는 수많은 오리의 무리들이 떠다니고 있는데 사람이 다가가는데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동안 관광객들과 친숙해진 모양이다. 보히니 호수(Bohinjj lake)줄리안 알프스의 눈동자라고 불릴 정도로 빼어난 풍광을 자랑한다. 그래서 트리글라브 국립공원에 포함시켜 놓은 모양이다. 1924년부터 슬로베니아 정부의 보호를 받아온 보히니(Bohinjj)지역은 청정(淸淨)을 자랑한다. 그 덕분인지 때 묻지 않은 자연을 만끽하며 산책(散策)을 즐길 수 있도록 보히니호수(Bohinj Lake) 주변은 잘 가꾸어져 있다.

 

 

 

 

 

 

 

 

 

호숫가에 있는 작은 교회, 눈이 많이 내리는 지역이어선지 지붕이 가파른 게 특징이다. 눈이 많이 오는 이곳은 겨울철이면 스키어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여름철에는 히이킹과 등산, 수영 그리고 래프팅 등을 즐기기 위해 사람들이 찾고 있으니 산과 호수(湖水)가 이 지역의 삶을 이끌고 있는 셈이다 

 

 

 

호수를 둘러보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이번에는 호텔이 있는 언덕으로 난 샛길로 들어서본다. 공원(公園)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내 판단은 옳았다. 벤치(bench) 등을 갖춘 쉼터로 조성해 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등산객들을 형상화한 동상(銅像)을 세워 놓았다. 그들이 가리키고 있는 하얗게 눈을 뒤집어쓰고 있는 산들이 어쩌면 트리글라브산((Mt. Triglav)일 것이다. 아니면 보겔산((Mt. Vogel)일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트리글라브(Triglav)라는 이름은 이 산을 보힌(Bohinjj)에서 볼 때 산봉우리 3개가 보였기 때문에 붙여졌다는 설이 있지만, 슬라브 신화에 등장하는 신()인 트리글라브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더 유력하다. 이 산은 슬로베니아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산의 디자인은 슬로베니아의 국기와 국장, 그리고 50 센트짜리 동전에까지 사용되고 있다. 1961년 슬로베니아 유일의 국립공원인 트리글라브 산 국립공원의 일부로 지정되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블레드(Bled)로 향한다. 블레드는 슬로베니아 북서부 어퍼카르니올라(Upper Carniola)주에 위치한 작은 빙하호(氷河湖) 마을이다. 알프스 산맥에 위치하고 있는 이 마을에는 슬로베니아의 유일한 섬()이 있고 슬로베니아에서 가장 오래된 성()이 있다. 그 성()과 호수(湖水), 그리고 호수 가운데에 있는 섬은 언제부턴가 우리네 벽()에 걸려있는 캘린더(calendar) 속에 들어와 있었다. 그 풍경들은 죽기 전에 꼭 가야 할 세계휴양지 1001’에 선정될 정도로 아름다움을 인정받고 있다. 시내에는 들르지 않고 먼저 블레드성으로 향한다. 아마 브레드의 투어(tour)를 끝내고나서 들르려는 모양이다. 주차장이 성문(城門)의 바로 앞에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입장권을 사기만 하면 금방 성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성은 위와 아래의 두 개의 정원으로 나뉘어 있다. 그중 아랫정원은 와인판매장과 쉼터 등 편의시설 들이 자리 잡고 있다.

 

 

 

 

아랫정원의 오래된 우물

 

 

 

윗 정원에는 16세기에 건축된 고딕(Gothic) 양식의 예배당(castle chapel)과 박물관(博物館) 등 구경거리가 있다. 건물 왼쪽이 블레드성 예배당(castle chapel)이다. 이 예배당은 바로크(baroque : ‘찌그러진 진주라는 뜻의 포르투갈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르네상스 전성기가 지난 16세기 말부터 17세기까지 유럽 건축미술의 한 특징)양식으로 개조된 모습의 성당으로 꾸며져 있었는데 프레스코 벽화가 훌륭하다. 오른쪽 부분이 박물관으로 박물관 벽에는 헨리크 2세가 주교에서 블레드를 서면으로 건네주는 그림이 걸려있다.

 

 

 

오래전 이 일대에 살았던 슬라브인들의 흔적을 설명해주는 박물관에는 이 지역에서 발굴된 7천에서 4만 년 전까지의 유물(遺物)들을 구석기, 신석기, 그리도 청동기시대의 순서대로 진열하고 있다. 그리고 검과 갑옷 등이 진열되어 있고 가톨릭 성당의 전례로 사용되던 성광과 성합도 전시되어 있다. 또한 박물관에는 1000~1700년의 블레드 주민의 의복, 중세 블레드의 무사, 무기, 가구, 민속품 등이 전시되고 있다.

 

 

 

 

 

박물관을 둘러보다가 이곳에서 근무하고 있는 직원을 찾아본다.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는 옛날 화장실이 궁금해서이다. 그가 일러주는 데로 가보니 요즘의 화장실과 진배없는 공간이 나타난다. 그러나 그 안의 풍경은 사뭇 다르다. 변기(便器)는 보이지 않고 벽에 기대어 만든 의자(倚子) 모양의 나무 단()만 눈에 띄는 것이다. 그 단의 한가운데에 둥그렇게 구멍이 뚫려있다. 나무로 된 뚜껑으로 덮여 있음은 물론이다. 뚜껑을 고정시켜놓아 구멍의 아래를 볼 수는 없었지만 알아본 바에 의하면 구멍의 아래는 성벽의 밖이라고 한다. 밖으로 떨어진 오물(汚物)들은 어쩌면 야생동물들이 처리해 주었을 것이다.

 

 

 

 

 

블레드성 안에 있는 이 교회(castle chapel)16세기에 지어졌으며, 1700년에 고딕(Gothic : 13~15세기에 북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유럽전역에 퍼진 미술양식)양식으로 개조되었고, 벽은 프레스코화(Fresco : ‘방금 회를 칠한 위에라는 이탈리아어에서 나온 낱말로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에 많이 그려진 벽화를 일컫는다)로 장식되었다. 왼쪽 문으로 들어가면 빛이 아름다운 예배당이 나온다. 검은색 나무로 만든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마리아상이 중앙제대에 위에 놓여 있다. 블레드를 기증한 독일 황제 헨리 2(German Emperor Henrik II)와 그의 부인 쿠니군다(Kunigunda)의 프레스코화가 중앙제대 뒷 벽면 좌우에 그려져 있다. 그리고 예배당 천장 돔(dome) 부분의 프레스코화는 삼위일체(三位一體)를 상징한다. 왼쪽에는 십자가를 지신 예수그리스도, 가운데는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 오른쪽이 성부 하나님임은 물론이다.

 

 

 

 

 

블레드성은 깎아지른 듯한 바위 절벽(絶壁) 위에 우뚝 솟아 있는 성으로 아름다운 블레드마을과 브레드호수의 전경(全景)을 한꺼번에 조망(眺望)할 수 있는 곳이다. 블레드성은 작은 호반의 도시를 매우 낭만적인 곳으로 만든다. 성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그야말로 평화롭고 아늑한 휴식이외의 표현은 사족이다. 의자에 앉은 채 호수와 산을 보면서 몸이 느끼는 대로 가만히 있는 것이 블레드를 품는 또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박물관을 둘러보고 아래편 광장으로 내려오는 계단이 블레드호수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조망(眺望) 포인트이다. 계단에서 바라보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반짝이는 블레드 호수이다. 그 호수 안 작은 섬에 있는 빼어난 자태의 성모 승천 교회(Church of the Assumption)가 클로즈업(close up)된다. 그리고 호수 뒤편에는 줄리안 알프스(이탈리아 북동부에서 슬로베니아까지 이어지는 알프스 남쪽 줄기의 석회암 산맥)의 우뚝 솟은 봉우리들이 줄줄이 도열해 있다. 언젠가 그림엽서에서 본적이 있는 풍경이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나 자신도 모르게 알프스의 낙원(樂園)에 온 듯한 기분이 든다.

 

 

 

 

 

성에서 내려다보는 블레드 호수의 전경과 저 멀리 쥴리안 알프스의 봉우리들이 어우러진 경치는 가히 압권이라 할만하다.

 

 

 

성벽 위에 서면 블레드(Bled) 시가지가 눈앞에 펼쳐진다. 블레드는 1004410일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2(Heinrich II)황제가 브릭센(Brixen)의 주교인 알부인 1(Albuin I)에게 하사하면서 문헌(文獻)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한때 루돌프 1(Rudolf I)황제에 의해 신성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는 등 오랫동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해 있다가 1918년에 동 제국이 해체되면서 유고슬라비아왕국에 편입되어 왕실의 여름 거처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블레드성을 둘러보고 난 뒤에는 슬로베니아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인 블레드 호수(Bled lake)로 향한다. 산으로 둘러싸인 빙하호(氷河湖)인 호수의 한복판에 둥지를 튼 섬으로 들어가기 위해서이다. 이 섬은 그 생김새가 빼어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15세기에 지어진 성모 마리아 교회(성모승천성당)’로 인해 더욱 유명해졌다. 이 교회 내부는 1470년에 제작된 고딕 양식의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으며 아름다운 바로크 양식의 가구들이 보존되어 있다.

 

 

 

 

호수(湖水) 안에 있는 섬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오로지 하나뿐이다. 팔뚝 굵고 잘생긴 뱃사공이 노를 젓는 플레타나(pletana)라는 나룻배를 타야만이 섬으로 들어갈 수 있다. 누군가 말하기를 여름에는 수영해서 가는 사람들도 있기는 한다지만 말이다. 나무로 만들어진 이 배는 뱃머리와 배의 양쪽에 승객들이 빙 둘러앉을 수 있도록 되어있으며, 배의 뒤편은 뱃사공이 노를 젓는 공간이다. 모양새는 그다지 크지 않아 보이나 24명이나 되는 우리 일행이 한꺼번에 다 탔을 정도로 그 공간은 의외로 넓었다. 그러나 나무로 만들어진 나룻배의 특성상 좌우로 흔들림이 심해 어떨 때는 위험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을 정도다. ‘배가 움직일 때 사진을 찍는다고 일어나지 마세요.’라는 가이드의 경고(警告)가 꼭 아니더라도 일어설 배짱을 가진 사람은 선뜻 나타나지 않을 듯싶다.

 

 

 

호수가 시끄러워지는 것을 원치 않았던 합스부르크 가문(Habsburg Haus)은 플레타나의 숫자를 23대로 한정해서 허가(許可)를 해주었으며, 그 원칙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단다. 블레드호수가 아직까지도 한적하게 느껴지는 이유일 것이다. 우리가 탄 배의 뱃사공은 아직 미혼이란다. ‘이곳 뱃사공 중에서 가장 잘 생겼고, 가장 친절하답니다.’ 가이드의 설명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이 젊은이는 카메라 앞에서 포즈도 잘 취해주었고, 또한 돌아오는 길에는 사진촬영을 쉽게 할 수 있도록 배의 방향을 좌우로 변화를 주는 매너(manner)까지 갖추고 있었다.

 

 

 

고요함 속에 잠겨 맑은 호수에 가득한 하늘과 산과 숲을 음미하노라면 정말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이 따로 없다. 게다가 호숫가 절벽 위에 세워진 천연요새인 블레드성의 아름다움은 동화적 환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알프스 동남쪽 끝 줄리안알프스가 품은 작은 호수는 그야말로 꿈속의 보금자리이다. 이러한 감동을 글로 표현한다는 것이 어쩌면 아름다움에 대한 모독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배를 타고 섬으로 들어가다 보면 탁 트인 호수의 풍경과 함께 높은 절벽 위에 자리 잡고 있는 블레드 성(Bled Castle)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가슴이 찡해온다. 가슴이 설레일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배를 타고 10분쯤 들어가면 섬에 닿게 된다.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역사가 오래된 이 섬은 교회가 세워지기 이전에는 슬라브(Slav)신화에 등장하는 사랑과 풍요의 여신인 지바(Živa)의 성지(聖地)로 여겨졌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들머리에서부터 그 흔적이 나타난다. 섬에 내리자마자 만나게 되는 99개의 계단이 바로 그 흔적이다. 갓 결혼한 신랑이 신부를 등에 업고 침묵하며 이 계단을 올라 성모승천교회에 있는 사랑의 종을 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전해지면서 이 지방의 많은 신혼부부들이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신부를 들쳐 업고 끙끙거리며 계단을 오르는 풍경은 상상만 해도 상큼해진다. 이런 결혼이야기는 백년해로(百年偕老)로 끝을 맺을 것이다. 물론 끝까지 오른 자에게만 주어지는 축복이겠지만 말이다.

 

 

 

 

 

성당 안에 들어가면 길게 늘어진 밧줄 하나를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줄 앞에는 사람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 성모승천성당의 명물인 `소원의 종`을 쳐보려고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종을 울릴 경우 그 사람의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기대감으로 인해순서를 기다리는 지루함까지도 잊어버린 모양이다. 물론 나와 집사람도 울려보았다. 우리가족과 나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祈願)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종은 쉽게 울려지지가 않았다. 힘에 의지해서 밧줄을 잡아당기는 데에만 신경을 썼기 때문이다. 이 줄은 힘이 능사가 아니고 오히려 조금씩 반동을 주면서 천천히 잡아당겨야만 울린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맑은 종소리가 종루 꼭대기에서 블레드 호수를 향해 울려 퍼지는 것이다. 이 즈음에서 옛이야기 하나, 성주의 젊은 과부인 플록세나는 사재(私財)를 털어 만든 종을 성당에 매달려고 하지만 나룻배를 타고 가던 중 풍랑을 만나 종과 사공이 호수 바닥에 수장된다. 모든 것을 포기한 플록세나는 로마에 가서 수녀가 된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들은 교황이 종을 달았는데 그때부터 소원의 종이 되었다. 그 뒤로 소원이 있든 없든 블레드에 오면 누구든지 종을 쳐볼 생각으로 찾아가는 곳이 되었다고 한다.

 

 

 

 

 

 

 

블레드섬에 갔다면 성당을 들러보는 것은 필수이겠지만 그 외에도 섬의 둘레를 한 바퀴 둘러보아야만 금상첨화(錦上添花)가 될 수 있다. 산책을 하듯 걸으며 바라보는 호수 주변의 풍경은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답다. 숲으로 둘러싸인 주변 풍경은 물론이고, 저 멀리 줄리안알프스(Julian Alps)까지 시야(視野)에 잡힌다. 특히 호수 건너편 절벽에 올라앉은 블레드성은 그림책에서나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풍광을 자아낸다.

 

 

 

 

 

뭍으로 돌아가는 뱃시간이 조금 남아 시계탑에 올라가보기로 했다. 물론 입장권을 사야만 가능하다. ()의 내부 벽면(壁面)을 빙빙 돌아가며 위로 향하는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거대한 시계(時計)가 나타난다. 유리관 속에 들어있는 시계가 얼핏 박물관에 들어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들 들 정도로 고풍(古風)스럽다. 그러나 이 시계는 지금도 돌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것도 시간에 맞춰 종을 울려가면서 말이다.

 

 

 

 

 

 

 

호수에서 되돌아 나오는 길에는 호텔 빌라 블레드(Hotel Vila Bled)를 볼 수 있다. 최고의 전망을 자랑하는 이 호텔은 한때 유고슬라비아 원수 티토(Josip Broz Tito)의 개인 별장이었다고 한다. 주어진 일정에 쫓겨 비록 호텔에는 들어가 보지 못했지만, 호텔 앞 호안(湖岸)에 서면 티토는 물론, 제정 오스트리아와 유고슬라비아의 왕족들이 왜 이곳을 사랑했는지를 금방 알 수 있다. 나룻배들이 한가롭게 떠다니는 널따란 호수 한가운데에는 빼어난 자태의 블레드섬이 오롯이 앉아있고, 건너편 바위절벽에 걸터앉은 블레드성은 누가 보아도 잘 그린 한 폭의 풍경화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투어를 끝내고 블레드마을에 들렸다. 그러나 이는 투어를 위한 것은 아니다. 단순히 점심을 먹기 위해서일 뿐이다. 점심 메뉴는 중국식, 음식은 썩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덕분에 입맛을 중화시키려고 독한 고량주를 주문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먹던 중국음식들과는 사뭇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여행지 : 발칸반도 및 동구유렵

 

여행일 : ‘14. 10. 19() - 30()

 

여행 첫날 오후 : 오스트리아의 짤츠부르크(Salzburg)

 

특징 : 짤츠부르크는 인근 암염(巖鹽)광산 때문에 소금(Salz)의 성(burg)’이라는 독특한 의미를 지닌 도시다. 광산(鑛山)으로 부()를 축적했고 그 경제력을 자양분(滋養分) 삼아 예술혼(藝術魂)을 꽃피워 냈다. 때문에 거리에서 만나는 풍경은 흔히 떠올리는 광산지대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가 태어났으며 아직도 사운드 오브 뮤직투어(tour)가 인기를 끌고 있는 곳이다. 유럽의 한가운데 있어 유럽의 심장으로 여겨지던 짤츠부르크는 오랜 기간 고풍스런 예술과 낭만의 교차로(交叉路)였다. 특히 짤츠부르크는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돼 있을 만큼 역사적·문화적으로 유서가 깊다

 

 

 

 

버스는 신시가지(新市街地)의 버스정류장에다 관광객들을 내려놓는다. 미라벨궁전(Mirabell Palace)이나 구시가지 근처에는 버스의 출입이 통제되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신시가지라고 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모습들은 아니다. 고층건물들 대신에 고풍(古風)스런 외형을 지닌 4~5층 건물들이 줄지어 있는 것이다. 이곳에서 미라벨궁전까지는 걸어서 가야만 한다. 그러나 그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으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모차르트의 아리아(aria) 선율(旋律)에 귀를 기울이며 잠깐 걸으면 미라벨궁전에 이르게 된다.

 

 

 

미라벨궁전(Schloss Mirabell)은 중앙역에서 라이너슈트라세를 따라 조금만 내려오면 만날 수 있다. 궁전은 볼프 디트리히 대주교가 자신의 여인(情婦)이었던 살로메 알트를 위해 1606년에 지었다고 한다. 원래의 이름은 알테나우 궁전이었으나, 그가 대주교에서 물러난 뒤에는 대주교의 별궁으로 사용되었다. 궁전은 바로크(baroque : 르네상스 양식에 비하여 파격적이며, 감각적 효과를 노린 동적인 표현이 특징이다) 건축의 대가인 요한 피셔 폰 에를라흐(Johann Fischer von Erlach)가 조성하였고, 18세기 초 힐데브란트(Johann Lukas von Hildebrandt)라는 건축가가 개축한 뒤 미라벨 궁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세기에 화재가 일어난 이후 오늘날의 모습으로 복원(復原)하였으며, 1959년 이후에는 시청사로 사용되었다. 처음에는 바로크 양식으로 건축하였으나, 화재 이후 건물 외부의 섬세한 무늬가 모두 소실됨에 따라, 1818년 복원하는 과정에서 단순한 고전파 양식의 건축물로 바뀌었다. 참고로 건물 내부에는 모차르트가 6세 때 대주교를 위해 연주를 했다는 대리석의 방(Marmorsaal)’이 있는데, 오늘날에도 여전히 실내악 연주회가 열린다고 한다.

 

 

 

 

 

궁전에 들어서면 장미가 가득한 꽃밭과 궁전건물이 가장 먼저 손님을 맞는다. 그리고 왼편에는 미라벨궁전을 세상에 알린 장본인인 정원(庭園)이 있다. 바로크풍의 미라벨 정원은 꽃이 흐드러진, 휴식(休息)과 상념(想念)의 공간이다. 꽃망울에서 시선을 떼고 잠시 고개를 들면 호헨잘츠부르크성이 병풍처럼 드리워져 있다. 

 

 

 

 

 

북쪽 문 앞에는 정교한 청동조각으로 꾸민 페가수스(Pegasus :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날개 달린 천마) 분수(噴水)가 있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The Sound of Music)’에서는 마리아가 아이들과 함께 이 부근을 배경으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계단을 따라 한발 한발 내딛다 보면 정말 도레미 송이 들리는 듯하다.

 

 

 

 

 

궁전 앞에 펼쳐져 있는 정원이 바로 아름답기로 명성이 자자한 미라벨정원(Mirabell garten)이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Sound of Music)’에서 여주인공 마리아가 아이들과 '도레미 송'을 불렀던 곳으로 더욱 널리 알려져 있는 곳이다. 미라벨정원은 전체적인 조화를 중시하여 조성하였으며, 분수와 연못, 대리석 조각물과 많은 꽃들로 잘 장식되어 있다.

 

 

 

 

 

정원을 거닐다 보면 가슴속이 훈훈해짐을 느낀다. 억지스러움이 배제된 채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정원이 무척 정감이 있다. 터널로 꾸며진 길이나 아무 장식(裝飾) 없이 나무들만 도열해 있는 길, 어느 하나 버려지지 않고 가슴속에 차곡차곡 쌓여온다. 그 한 귀퉁이에 마리아가 아이들과 함께 부르고 있는 도레미 송도 끼어있음은 물론이다.

 

 

 

 

 

정원의 중앙에는 분수(噴水)를 배치해 놓았다. 그리고 그 주위에는 1690년 모스트(Most)가 그리스 신화 속 영웅을 조각한 작품들이 늘어서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유럽의 많은 바로크 예술품들을 전시해 놓았다는 바로크 박물관이 있다.

 

 

 

 

 

 

 

 

 

 

 

미라벨 궁정을 빠져나와 오가는 전기버스를 피하면서 조금 더 걷다보니 길가 철제문(鐵製門) 문살 사이로 현대식으로 지어진 3층짜리 하얀색 건물이 하나 내다보인다. 문이 굳게 닫혀있는 건물의 안마당에 카라얀의 동상(銅像)이 세워져 있고, 대문에 카라얀(Herbert von Karajan)의 이름이 적혀있는 것을 보면, 아마 그의 생가(生家)인 모양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마에스트로(maestro)인 그는 뛰어난 지휘자(指揮者)이기도 하였지만, 그보다는 조수미에게 신이 내린 목소리라는 극찬을 했다고 해서 우리에게 더욱 친숙해진 인물이다. 잘츠부르크는 참으로 음악과 관련이 깊은 도시이다. 천재 작곡가 모차르트 하나만으로도 모자라, 카라얀까지 더하고 있으니 말이다. 성가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만들어진 것이나,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Sound of Music)’이 이곳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것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을 것 같다.

 

 

 

 

 

 

 

카라얀의 생가를 지나 잘차흐 강(Salzach River)을 가로지르는 슈타츠(Staats) 다리를 건넌다. 짤자흐강을 중심으로 도심(都心)이 신·구시가지(新舊市街地)로 나뉘어있는 탓에 이 강을 건너야만 구시가지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다리에서 바라보는 풍경 또한 일품이다. 다리 아래를 지나는 유람선은 한가롭기만 하고, 건너편 언덕에는 호엔잘츠부르크 성채(Hohensalzburg Castle)가 조용히 앉아있다. 언젠가 본 듯한 그림이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풍경은 난간에 덕지덕지 매달려있는 자물쇠뭉치이다. 아마 이곳도 영원한 사랑을 바라는 연인들이 기원(祈願)의 장소로 삼고 있는 모양이다.

 

 

 

 

 

 

 

 

 

다리를 건너서 조금만 더 걸으면 구시가지의 중심가인 게트라이데 거리(Getreidegasse)에 이르게 된다. 거리는 도시의 상징인 호헨잘츠부르크성()을 향하여 아름다운 쇼핑가를 이루고 있으며, 잘츠부르크의 문화적 특성과 매력이 함축되어 있다. 구시가지 구경거리는 좁고 오래된 게트라이데 거리(Getreidegasse)’를 골목골목 누비는 것이다. 거리 양쪽으로 보석가게, 꽃집, 옷가게 등과 레스토랑, 커피숍 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데 골목을 누비다보면 간판에 매달린 작은 조각들을 볼 수 있다. 철제, 유리, 금도금 등 다양한 재료가 총동원되었는데, 갖은 기교와 장식이 다 들어가 있어 거리를 돋보이게 만드는데 일조(一助)를 하고 있다. 가게에서 판매하고 있는 물건을 상징(象徵)하는 것이라고 한다. 아마 글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던 시대에 소비자들이 자기가 사고 싶은 물건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 유래가 되었지 않나 싶다. 그러니까 상형문자(象形文字)의 역할을 톡톡히 한 셈이다. 구시가지에 들어서서 가장 먼저 느낀 점은 참 사람이 많다이다. 어쩌면 이 자그마한 도시의 주민들이 모두 나온 것이나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러나 사실은 대부분이 관광객(觀光客)들이다. 그만큼 세상의 사람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잘츠부르크는 도시 그 자체만으로도 유럽 최고의 관광지(觀光地)임을 자랑한다. 차갑고 맑은 공기, 만년설로 뒤덮인 높은 산들과 푸른 숲, 그리고 동화 속 나라처럼 산 위에 늘어선 성채(城砦)와 첨탑(尖塔), 그 가운데로 그림같이 흐르는 강이 있는 작은 도시는 어려서부터 우리네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던 유럽의 어느 고도(古都)가 갖고 있어야 할 이미지(image) 바로 그것이다. 게다가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과 모차르트의 출생지라는 점은 이곳을 세계 관광객들이 당연히 들러야 하는 곳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동화적(童話的)인 일탈(逸脫)을 꿈꾸며 너도나도 찾아오지 않을까 싶다.

 

 

 

짤츠부르크하면 뭐니 뭐니 해도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이곳에 음악의 신동(神童)’이라고 불리는 모차르트의 생가(生家)가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인지 도심(都心) 곳곳에서 그의 흔적이 묻어난다. 특히 구시가(舊市街) 전역은 모차르트를 상징하는 것들로 분주하게 채워져 있을 정도이다. 모차르트의 광장(廣場)과 동상(銅像) 외에도 박물관(博物館)이 별도로 세워져 있으며 모차르트 초콜릿, 모차르트 향수 등도 팔리고 있다. 짤츠부르크의 또 하나 명물이 된 모차르트 쿠겔른(Mozart Kugeln) 초콜릿은 지금으로부터 100년이 훌쩍 넘는 1890년에 처음 만들어 졌다. 겉포장에 모차르트의 얼굴이 새겨져 있는데 이 초콜릿은 이곳 짤츠부르크 외에도 비엔나는 물론 이웃나라의 다른 도시들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게트라이데 거리를 걷다보면 진한 노란색의 6층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짤츠부르크의 상징이다시피 한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의 생가(生家)이다. 정면 4층 창 아래에 모차르트의 생가라고 씌어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756127일 태어난 모차르트가 17세까지 살던 집으로 모차르트의 생활상을 살펴볼 수 있다. 모차르트의 유년시절 작품이 탄생한 곳으로, 현재는 모차르트가 생전에 사용하던 침대, 바이올린, 피아노, 악보, 초상화, 편지 등이 전시(展示)되어 있다고 하나 이곳도 역시 주어진 일정에 쫒기다보니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잘츠부르크는 오스트리아의 도시이다. 그러니 오스트리아의 특징을 가져야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중의 하나는 카페(café)가 많다는 것이다. 카페의 도시 비엔나(Vienna)처럼 수많은 그리고 질 좋은 카페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그곳에서는 한낮에 편히 앉아서 휴식을 취할 수도 있고, 향기로운 커피와 비엔나풍의 케이크를 즐기면서 한때를 보낼 수도 있다.

 

 

 

 

 

게트라이데 거리를 걷다보면 마치 중세시대(中世時代)로 돌아온 것 같은 아련한 느낌에 빠져들게 된다. 옛날로 돌아간 마음으로 느릿느릿 걷다보면 널따란 광장(廣場)이 나타난다. 이곳이 바로 레지던츠광장(Square Residents)이다. 이곳에는 역대 대주교들의 궁전(宮殿)이었던 레지던츠궁과 대성당, 그리고 구()시청이 자리 잡고 있다. 참고로 짤츠부르크에서 가장 큰 광장인 이곳은 로마네스크 성당이 있었을 때만 해도 집 몇 채와 무덤이 전부였다고 한다. 그러던 것을 대주교과 다 허물고 자신의 성당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짤즈부르크 대성당(Salzburg Cathedral)744년에 세워진 후 1181년부터 1200년까지 20년에 걸쳐 후기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증축 되었다. 1598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612마르쿠스 시티쿠스 주교에 의해 바로크(baroque)양식과 로마네스크(Romanesque)양식이 혼합되어 재건축 되었다. 그후에도 대성당은 제 2차 세계대전때 폭격으로 대부분이 파괴된 후 1만 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기도 했다. 대성당 입구에는 믿음, 소망, 사랑을 상징하는 베드로와 바울 등 짤즈브룩을 지킨 성인들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으며 성당내부에는 6.000 가닥의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되어 있다.

 

 

 

 

 

 

 

 

해마다 7~8월이면 대성당 광장(廣場)에서 짤츠부르크 음악제가 열린다. 이때는 행사의 하이라이트(highlight)인 연극 예더만(Jedermann)을 공연하는 무대가 설치되어 축제(祝祭)의 광장으로 변신하는 것이다. 음악제가 열릴 때면 도시는 선율에 취해 화려하게 흥청거린다고 한다. 또한 크리스마스철이 되면 비엔나의 시청 광장처럼 크리스마스 마켓이 들어서기도 한단다. 그리고 또 하나의 볼거리는 대성당 보물과 대주교들의 소장품을 전시해놓은 돔 박물관이다. 대성당 입구 오른쪽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만날 수 있다.

 

 

 

 

 

 

 

호엔잘츠부르크 성(Hohensalzburg Castle)은 짤츠부르크의 상징이다. 묀히스베르크산 120m 지점, 그러니까 구시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이곳 미라벨 궁전에서뿐만 아니라 구시가지(舊市街地) 어디에서든 잘 보인다. 성채(城砦)1077년 건축한 철옹성으로 신성로마제국(독일) 황제와 로마 교황 사이에 주교 서임권 투쟁(1075~1122)을 벌이던 시기에 잘츠부르크 대주교 게프하르트가 남부 독일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세웠다. 15~16세기 동안 증축보수 작업을 진행해 17세기에 이르러서야 지금의 모습이 완성됐다고 한다. 성 내부에는 당시 대주교(大主敎)들이 기거하던 황금의 방과 의식의 방, 중세 고문기구가 전시되어 있는 방, 200개 파이프 소리가 엄청나 잘츠부르크의 불(황소)’이라 부르는 오르간 등 볼거리가 많다고 한다. 특히 화려한 금으로 장식한 거실과 조각품을 통해 당시 대주교들의 사치스러운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단다. 참고로 성의 전망대에서는 돔 광장과 잘자흐(Salzach)강 등 잘츠부르크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정해진 일정에 쫓기다보니 성채에 올라가볼 수는 없었다.

 

 

 

 

 

 

 

 

15세기에 건축되었다는 구()시청이다.

 

 

 

 

 

세계에서 가장 작은 이층집, 대성당에서 신시가지로 다시 되돌아 나오는 길에 만날 수 있다.

 

 

 

신시가지(新市街地)로 되돌아가는 길에 다시 만나게 되는 잘차흐 강(Salzach River). 주위는 이미 어두워지고 있다. 그래선지 다리 주변에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잘차흐강과 어우러진 호헨잘츠부르크 성의 야경(夜景)은 아름답기로 정평이 나있다. 구시가의 풍취를 더욱 그윽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 야경을 감상하기 위해 저녁마다 강변과 다리가 북적인다는데 그 북적임이 시작되고 있나보다.

 

 

 

짤츠부르크의 투어(tour)가 끝나면 저녁식사도 거른 채 다음 행선지로 향한다. 이웃나라인 슬로베니아(Slovenia)에 있는 블레드(Bled)라는 자그마한 마을이다. 국경(國境)을 넘다보니 그 거리는 당연히 꽤 멀다. 저녁식사를 호텔에 도착해서야 만나게 될 여행객들은 중간에 들르는 휴게소에서 요기(療飢)를 때우면 된다. 참을 만 한 사람들은 나처럼 생맥주를 한잔 마시거나, 집사람처럼 커피를 주문해도 좋을 일이다.

 

 

 

여행지 : 발칸반도 및 동구유렵

 

여행일 : ‘14. 10. 19() - 30()

여행국가 : 독일,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 체코(7개국)

 

여행 첫날 오전 : 오스트리아의 짤츠 캄머굿(Salzkammergut)

 

특징 : 짤츠캄머굿(Salzkammergut)은 오스트리아어로 소금광산이라는 뜻이란다. 오스트리아가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 지방임에도 불구하고 값비싼 소금을 생산하는 광산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독일어 사전을 찾아보면 캄머굿(kammergut)은 왕실의 영지라는 뜻이니 알아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아무튼 짤츠캄머굿은 알프스의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으며 70여개의 크고 작은 호수(湖水)로 이루어진 휴양지(休養地)이다. 영화 사운드오브뮤직(The Sound of Music)의 배경이 됨으로서 더욱 알려졌으며 산과 호수 그리고 마을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풍경이 돋보인다고 해서 세계문화유산(世界文化遺産)으로까지 지정(1997)된바 있다.

 

 

 

찾아오는 길 ; 일단 프랑크푸르트까지는 국적기(國籍機 : 아시아나항공)를 이용한 후, 프랑크푸르트에서 오스트리아에 있는 짤츠캄머굿까지는 버스를 이용했다. 이 거리는 말이 쉽지 하루를 꼬빡 잡아먹을 정도로 힘든 일정이다. 비행기를 12시간이나 타야만하고, 버스도 최소한 6시간 이상을 타야만 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하루에 목적지까지 가지를 못하고 중간 지점에 있는 데겐도르프(Deggendorf)라는 조그만 도시에서 일박을 하고 다음날 짤츠캄머굿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이는 짤츠캄머굿까지의 거리가 멀어서만은 아니고, 이곳 유럽연합(EU)의 엄격한 교통정책(交通政策)이 그 원인이다. 이곳에서는 하루에 운전(運轉)을 할 수 있는 시간이나 거리, 그리고 일정거리를 달렸을 경우 운전자가 의무적으로 쉬어야 하는 시간 등이 엄격하게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늦은 시간에 목적지에 들어갔을 경우, 다음날 늦은 시간에야 다시 버스를 운행할 수 있기 때문에 구태여 늦은 시간까지 여행을 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이다.

 

 

오스트리아로 넘어가는 길에 하룻밤을 묵었던 데겐도르프(Deggendorf), 독일 바이에른주에 속한 자그만 교육도시(敎育都市)로서 특히 경영학(經營學) 분야에 경쟁력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비록 규모는 크지 않지만 신성로마 때 꽤 높은 분이 살았을 정도로 역사가 오래된 도시이다.

 

 

 

 

 

 

 

버스에서 내리면 해발 542m의 알프스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장크트 길겐(St. Gilgen)이란 마을이다. ‘장크트 길겐은 인구 3,760명이 사는 작은 마을로서 볼프강(Wolfgang)호수를 끼고 발달한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서 나그네들은 아주 평화롭게 보이는 호수(湖水)와 그림 같은 집들 그리고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우람한 산들을 만나게 된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호숫가 선착장(船着場)으로 간다. 유람선을 타고 볼프강호수를 둘러보기 위해서이다. 너무나 조용하고 평화스럽게 잘 꾸며진 마을, 누군가 내쉬는 한숨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그 한숨소리는 뭔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넘쳐서 내쉬는 것이 분명하다. 이런 경치를 보고 감탄을 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호수가 벤치에 앉아 호수와 어우러진 주변 경관을 보노라면 어느 누구라도 무릉도원(武陵桃源)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아니 요즘의 젊은이들은 유토피아(Utopia)를 생각 할 지도 모르겠다.

 

 

 

 

 

눈에 들어오는 호수(湖水)의 풍경은 한마디로 동화 속 풍경이다. 푸르디푸른 호수의 끝자락 너머엔 알프스(Alps)의 준봉(峻峰)들이 도열해 있고, 가까이 다가온 산자락에는 주황색 모자를 쓴 주택들이 다소곳이 앉아있다. 이 모든 것은 동화 속에서나 가능한 풍경일 것이다. 참고로 볼프강 호수는 13Km의 둘레와 1.9 Km의 길이, 최고 수심 114 미터로 쌍트길겐과 쌍트볼프강을 연결한다. 또한 볼프강 호수는 매우 우수한 수질과 수상 스포츠를 즐기기에 적합한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어 여름철에는 각종 수상스포츠대회가 이곳에서 열린다고 한다.

 

 

 

 

 

유람선에 올라 적당한 자리에 앉는다. 유람선은 50명 가까이 탈 수 있을 정도로 넓으니 구태여 자리를 잡겠다고 뛸 필요는 없다. 그리고 전망이 좋은 자리를 잡겠다고 고집을 부릴 필요도 없다. 주변 경관(京觀)을 잘 볼 수 있도록 배의 앞머리(船首)와 뒷머리(船尾)에 의자까지 놓은 공간을 만들어 두었기 때문이다.

 

 

 

배에서 바라본 장크트 길겐(St. Gilgen) 마을, 언젠가 캘린더(calendar)에서 보았던 풍경들이 펼쳐지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오지(奧地) 중에서도 오지인 이곳까지 찾아오고 있는 모양이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나이겠지만...

 

 

 

 

 

 

 

 

 

수정 같이 맑은 물은 무척 깊고 푸른색을 띄고 있다. 가끔가다 물밑이 보이는 낮은 지역도 지나고 깎아지른 절벽 옆을 지나 조금 가다 보면 이곳 학생들이 여름학교로 사용한다는 잘 지어진 건물 앞을 지나기도 한다.

 

 

 

 

 

 

 

 

 

경사(傾斜)가 완만한 푸른 초원(草原)위에 하나 둘씩 떨어져 있는 그림 같은 집들이 눈에 들어온다. 호수 바로 옆으론 개인 보트(boat) 정박장(碇泊場)을 설치한 집들도 보인다. 만일 여름철에 찾았더라면 물놀이하는 가족들의 모습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이곳이 소문난 여름 휴양지(休養地)이니까 말이다.

 

 

 

 

 

 

 

배를 타고가다 보면 왼편에 높다란 산이 하나 나타난다. 그 꼭대기에 있는 건물도 눈에 들어온다. 샤프 베르그(Schafberg)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등반열차의 종착역인데, 역에는 호텔과 그 호텔에서 운영하는 레스토랑까지 갖추고 있다고 한다. 참고로 샤프 베르그등반열차(Schafbergbahn)는 약 100년 전에 만들어졌는데, 경사(傾斜) 30()를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 하도록 설계를 하여 해발 1,783m 까지 올라가게 하였단다. 가이드(guide) 말로는 사운드 오브 뮤직(The Sound of Music)’에서 이 열차를 타는 장면이 나온다는데, 영화를 본지가 하도 오래된 탓에 기억은 나지 않는다.

 

 

 

 

 

유람선에서 내리면 장크트볼프강(St. Wolfgang)이라는 마을이다. 인구 2,792명이 살고 있는 이곳은 12세기부터 필 그림(Pilgrim : 순례자)들이 정착해서 만든 해발(海拔) 고도(高度) 540m의 마을이다. 호숫가 언덕에 자리 잡은 이 마을은 한마디로 아름답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아름다운 경관을 보기 위해서 이곳을 찾기도 하지만 또 다른 것을 구경하기 위해서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은둔자들의 전설(傳說)에 따르는 전통을 계승했다는 성당이 바로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레겐스부르그(Regensburg)의 주교인 St. Wolfgang에 의하여 만들어졌다는 이 성당에는 1481년에 미카엘 파커(Micheal Pacher : 1435~1498)가 만든 주제단(主祭壇, high altar)이 있는데, 고딕(Gothic)예술의 뛰어난 걸작(傑作)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성당에 들르지는 못했다. 꽉 짜여 진 스케줄(schedule)이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장크트 볼프강(St. Wolfgang)에서 버스를 이용해 다시 장크트 길겐(St. Gilgen)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시내 투어(tour)가 시작된다. 그러나 투어라는 말을 붙이기에 민망할 정도로 짧은 코스이다. 자그마한 마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기자기한 골목은 무척 아름답다. 그리고 아주 예쁘게 단장한 골목들 사이에는 식당과 호텔, 기념품가게 들이 즐비하다.

 

 

 

마을에는 모차르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모차르트의 할아버지가 시장과 판사 생활을 했던 이곳은 모차르트의 어머니(1720) 고향이기도 했다. 누나 난넬(Nannerl)과 어머니가 같이 생활했던 흔적이 남아 있는 모차르트의 외가(外家)는 볼프강 호수 바로 옆이며 집 일부는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참고로 난넬의 남편인 바론 베르크톨추 손네베르그(Baron Berchtoldzu Sonnerburg)’ 역시 이곳에서 모짜르트의 할아버지처럼 시장을 역임했다고 한다.

 

 

 

 

 

 

 

 

 

 

 

시청 앞 광장에는 모차르트가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 모습을 한 작은 분수(噴水)가 서있다. 모차르트를 기념하기 위해서 1927년에 세운 것이란다.

 

 

 

 

 

길겐마을에는 유람선 투어 외에도 꼭 들러봐야 할 또 하나의 코스가 있다. 바로 쯔뵐프호른(Zwölferhorn)산을 올라가 보는 것이다. 구태여 산을 올라갈 필요가 있냐는 의문을 갖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지방에 있는 수많은 호수들과 알프스의 준봉(峻峰)들을 조금 더 자세히, 그리고 더 가깝게 보고자 했을 때 뵐프호른산보다 더 나은 곳이 없기 때문이다. 정상어림까지 케이블카가 운행되고 있으니 산을 오르는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케이블카는 정상 근처의 능선에다 손님들을 내려놓는다. 승강장에서 나무계단을 밟고 조금만 오르면 전망대(展望臺)가 나타난다. 오전에 배를 타고 지나갔던 볼프강호수는 물론이고 조금 전에 눈요기를 즐겼던 길겐마을, 그리고 시선을 조금만 더 들면 하얗게 눈을 뒤집어쓰고 있는 알프스의 준봉(峻峰)들이 아스라이 펼쳐진다. 등반열차(bahn)가 올라 다닌다는 샤프 베르그(Schafberg)산이 가깝고도 선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물론이다.

 

 

 

 

 

 

 

 

 

 

 

전망대에서 정상까지는 금방이다. 능선을 따라 3~4분 정도만 걸으면 해발 고도(高度)1,552m라는 쯔뵐프호른(Zwölferhorn)산의 정상이다. 커다란 십자가가 세워진 정상에 서면 또 다시 눈터지는 조망이 펼쳐진다. 아까 전망대에서 보았던 볼프강호수는 물론이고, 이번에는 몬트제호수와 바트 이슬(Bad Ischl)호수 등 짤츠캄머굿(Salzkammergut) 지방에 있는 크고 작은 호수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것이다. 이 호수들이 주변의 산들과 어우러지며 한 폭의 잘 그린 산수화를 그려내고 있다.

 

 

 

 

 

 

 

 

 

 

 

 

 

 

 

 

 

여행일 : '13. 3. 20-22

 

 

 

둘째 날은 이번 ‘시장개척단’에 참가한 업체들과 현지 바이어들과의 미팅이 있는 날이다. 이번 행사에 참가한 업체들은 각각 테이블 한 개씩을 차지하고 우리가 제공한 통역과 함께 5~6명의 바이어들과 차례로 미팅을 갖게 된다. 아침 10시에 시작된 만남은 오후 6시가 다 되도록 진지하게 이어졌고, 그 결과 기대했던 것 보다 더 알찬 수확을 거둘 수 있었다. 이런 결과는 이번 행사를 함께 진행해준 터키측 관계자들의 수고와, 특히 ‘터키기계협회’ 회장님의 적극적인 협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셋째 날은 ‘2013 터키 기계전(WIN Ⅱ World of Jndustry)’을 관람하는 날이다. 이스탄불에 있는 'TUYAP Fair, Convention & Congress Center'에서 열리는 국제 기계전시회로서 세계에서 1,744개 업체들이 그들이 만드는 제품들을 전시하는 동종 업계에서는 알아주는 전시회(展示會)이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현대중공업 등 대기업들이 참가하고 있었으며, 중소기업들도 따로 한국관을 만들어 각자의 제품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전시품목 중 산업자동화와 전기전자 등 여러 분야에서 ‘시장개척단’에 참여한 업체들과 연관이 있기 때문에 참관하게 된 것이다. 참고로 이번에 우리와 함께 간 ‘파스텍’이라는 로봇 부품회사도 부스 한 개를 차지하고 바이어들과 상담을 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넷째 날은 유관기관 방문의 날이다. 오전에는 ‘보아지치대학(Bogazici University)'을 방문, 보이지치 대학은 1863년에 설립된 150년 전통의 터키 명문대학이다. 이 대학의 컴퓨터공학부에서 인공지능연구소를 두고 있는데, 이 연구소 내에 ’Robotics Work Group'을 포함한 총 3개의 Work Group을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번 시장개척단에 참가한 업체들은 모두 로봇관련 기업들이다.

 

 

 

 

 

 

 

 

 

 

 

 

 

 

 

 

 

오전 일정을 끝내고 이스탄불상공회의소를 방문하기 전에 식당에 들러 피데(pide)를 주문한다. 피데(pide)가 터키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대표음식이기 때문이다. 피데는 터키에서 일상 음식으로 먹는 대중적인 빵이다. 터키식 피자인데, 이탈리아의 피자가 피데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터키에서 생산되는 질 좋은 밀가루를 반죽하여 배 모양으로 만든 후에 그 안에다 야채와 고기, 치즈 등을 넣고서 화덕에 구운 것이다. 피자와는 달리 반죽할 때에 치즈를 넣지 않기 때문에 기름기가 전혀 없어 담백한 것이 우리 입맛에 딱 맞았다.

 

 

 

 

 

 

 

 

 

오후에는 ‘이스탄불 상공회의소(Istanbul Chamber Commerce)'을 방문하여 관계자들로부터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이스탄불상공회의소는 1880년에 설립된 터키 퇴대규모의 비정부기구로서 회원사만 30만여 업체에 달한다. 동 상공회의소는 연간 50여건 이상의 무역사절단, 그리고 15개의 전시회, 100여건 이상의 정보교류 컨퍼런스와 세미나를 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상공회의소의 회원사가 아니면 무역업을 할 수 없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여행지 : 이스탄불(터키)의 히포트롬, 블루모스크와 토프카프궁전

여행일 : '13. 3. 23(토)

 

 

 

터키에서의 마지막 날, 이곳에 온지도 벌써 5일째 이다. 오늘은 오전에 투어를 하고 공항으로 이동해야 한다. 오늘의 첫 번째 여행지는 **히포드롬(Hippodrome), 즉 전차경기장이다. 경기장이 있는 언덕으로 올라서니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건축물들이 보인다. 자세히 살펴보니 소피아성당이다. 소피아성당이 오늘 둘러보려는 히포드롬 및 블루모스크와 채 5분도 안 되는 거리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맨 마지막으로 들릴 토프카프 궁전(Topkapi Palace)도 물론 여기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다. 이스탄불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널린 수많은 문화유산(文化遺産)들을 보고 놀라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유네스코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구시가(舊市街) 역사지구’안에 옹기종기 모여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히포드롬이 있었던 ‘술탄 아흐멧 광장(廣場)’은 가히 이스탄불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다. 히포드롬을 중심으로 오른편이 블루모스크이고, 맞은편에는 성소피아 성당이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아래에는 지하궁전이다. 거기다 10분도 채 안 걸리는 거리에 토프카프궁전과 그랜드 바자르가 있으니 눈에 띄는 것마다 문화유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히포드롬(Hippodrome), 히포드롬이란 경마와 전차경주가 벌어졌던 고대 그리스의 원형경기장을 말하는데, 영화 벤허에서 보았던 ‘이륜마차 경기장’을 상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이스탄불의 히포드롬은 이곳을 정복한 로마황제 ‘셉티무스 세베루스’가 AD 203년에 건설했고, AD 330년에는 콘스탄틴대제가 규모를 확장하였다고 한다. 당시 로마에 있던 ‘시쿠스 맥시무스’경기장 다음으로 큰 경기장인데, ‘U'형의 경기장에 최대 10만 명까지 수용했다고 하니 그 규모가 얼마나 컸었던가를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현재는 히포드롬의 건축물이 있던 자리에 ‘술탄 아흐멧 광장’을 조성해 놓았다. 현재의 히포드롬에는 과거의 웅대한 모습은 다 사라지고 고대 이집트의 오벨리스크, 청동 뱀 기둥, 유스티니아누스 기념탑 등 세 개의 기념물이 독일이 만들어 기증한 분수대와 함께 남아 있을 따름이다. 광장(廣場)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이집션 오멜리스크’이다. ‘디킬리타쉬’라고도 불리는데 이 오벨리스크는 3500년전 이집트의 파라오가 전쟁에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AD390년 비잔틴황제 테오도시우스1세는 이집트 룩소르에 있는 카르낙의 아몬신전에서 이 기둥을 가져와 현재 위치에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델피의 아폴론신전에서 가져온 ‘뱀기둥’이다. 페르시아와 싸운 ‘팔라테아 전투’에서 그리스가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인데, AD326년 콘스탄틴대제가 그리스에서 가져와 이곳에 세웠다고 한다. 뱀기둥은 세 마리의 뱀이 서로 몸을 꼬면서 위로 올라가는 형상이다. 그런데 뱀의 머리가 보이지 않는다. 오스만제국 때 돌에 맞아 부서졌기 때문이란다. 떨어져나간 머리중의 하나는 1847년 성소피아성당의 보수공사 때에 발견되어 현재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에 전시되고 있고, 또 하나는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단다. 나머지 하나의 조형물은 콘스탄틴7세가 만들었다는 대리석 기둥이다. 자신의 할아버지인 바실레우스를 기념하기 위해 광장의 중앙에 만들었는데, 원래는 기둥의 외부가 청동으로 입혀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3세기 초에 십자군(十字軍)이 이곳을 점령하였을 때에 동전(銅錢)을 만들기 위해 떼어가 버렸다고 하니, 십자군이 본래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민간에 큰 피해만 주었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두 번째로 둘러보려는 블루모스크는 히포드롬(Hippodrome)의 바로 옆에 붙어있다. 사원(寺院)으로 들어서니 수많은 사람들이 모스크의 문 앞에 길게 늘어서 있다. 우리들처럼 기도가 없는 틈새 시간을 이용해서 모스크의 내부를 구경하려는 사람들일 것이다. 기도가 있는 시간, 특히 금요일에는 이교도(異敎徒)들의 출입을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스크 내부는 신발을 신고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벗어서 비닐봉지 안에 넣어 들고 가야만 한다. 물론 비닐봉지는 교회에서 나누어주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홀 안은 딱 반으로 나눠서 관광객들이 들어갈 수 있는 곳과 예배를 보는 곳으로 구분해 놓았다.

 

 

 

모스크 안으로 들어서면 성소피아 성당보다 훨씬 잘 관리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홀(hall)의 중앙에 서서 고개를 들어보면 가운데의 커다란 돔(dome)에 수많은 작은 돔을 얹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수많은 기둥이 받치는 각각의 아치(arch)위에 작은 돔이 둥글게 솟았고, 돔 숫자는 점점 작아지다가 마지막 거대한 중앙 돔에 이르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이다. 돔 주변에는 수많은 창을 내어 자연의 빛이 내부로 비치게 했다. 돔 위에는 황금색 장식을 달았고 맨 꼭대기에는 이슬람을 상징하는 별과 초승달을 얹었다.

 

 

 

 

 

 

 

블루 모스크는 전 세계에서 여섯 개의 미나렛을 갖고 있는 유일한 모스크로 오스만 제국 술탄은 매주 금요일 이곳에서 예배를 보았다고 한다. 내벽은 수만 장의 청, 록, 흑, 홍색의 화려한 이즈니크산 타일로 장식되어 있으며, 특히 꽃나무나 과일을 표현한 갤러리의 타일이 가장 아름답다. 참고로 2층은 여자들이 기도하던 곳이나, 보존을 위해서 통행을 막아 놓았다. 물론 여자들의 기도처를 홀의 맨 뒤편에 재배치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터기 사람들 다음으로 많은 게 한국 사람들...’ 터키에 머무르는 동안 내내 느꼈던 생각이다. 그만큼 낯익은 얼굴들을 시내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덕분에 호객꾼들이 내지르는 언어 또한 귀에 익었다. ‘반에 반값에 줄게요.’ ‘나도 먹고 살아야지요’ 등등... 이게 바로 국력(國力)인가 보다. 90년대 후반에 유럽을 처음으로 찾았을 때에는 한마디로 들을 수 없었던 한국어가 이제는 스스럼없이 흘러나오니 말이다.

 

 

 

 

 

 

 

술탄 아흐멧 모스크(Sultan Ahmed Mosque)는 터키를 대표하는 사원이며, 사원의 내부가 파란색과 녹색의 타일로 장식되어 있기 때문에 '블루 모스크(Blue Mosque)'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졌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제14대 술탄 아흐멧 1세가 1609년에 짓기 시작하여 1616년에 완공했다. 아흐멧은 성소피아 성당을 이슬람교가 사용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더 큰 모스크를 만들라고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성소피아 성당 보다 한참 후에 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돔 크기를 더 키울 수는 없었다고 한다. 그만큼 소피아성당을 지은이들의 기술이 뛰어났다는 것을 반증하는 증거일 것이다. 이스탄불에서 가장 높은 지역에 위치하기 때문에 먼 곳에서도 그 장대한 돔(dome)과 미나렛(minaret)을 바라볼 수가 있다.

 

 

 

 

블루모스크에서 바라본 소피아성당

 

 

 

터기에서의 마지막 여행지는 토프카프 궁전(Topkapi Palace)이다. 토프카프궁전은 블루모스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있으므로 천천히 걸어가면 된다. 이 궁전은 오스만투르크제국의 7대 술탄 '메메드 2세'가 건축했으며, 현재는 술탄이 사용하던 무기, 의복 등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19세기 중반 돌마바흐체 궁전이 새로 지워질 때까지 오스만투르크제국의 정치와 문화 중심지였다. 보스포루스해협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는데, 옛날 이 언덕에 대포가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토프카프'의 '토프'는 '대포'라는 의미이고, '카프'는 문이라는 의미이다. 궁전은 세 개의 문과 네 개의 중정(中庭 : 정원)이 있다.

 

 

 

첫 번째 문을 들어서서 제1정원으로 들어서면 비잔티움제국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 지은 ‘하기아 이레네’ 성당이 있다. 이곳은 오스만투르크제국이 비잔티움제국을 정복한 후에도 원래 형태로 남겨 두었다. 그러나 비잔티움제국의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투르크 왕의 근위병들이 막사로 사용한 것을 보면 말이다.

 

 

 

 

 

두 번째 문 안에 있는 제2정원(庭園)부터는 박물관(博物館)으로 이용되고 있다. 때문에 입장권을 사야만이 궁전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다. 예전에 주방으로 사용했던 자리는 현재 도자기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고, 보물관에서는 술탄이 사용하던 왕좌, 생활 도구, 장식품 등과 보석으로 장식된 다양한 장식물을 볼 수 있다. 그밖에도 1517년 셀림 1세가 이집트를 정복하고 가져왔다는 무함마드의 수염과 이빨, 그리고 ‘모세의 지팡이’ 등 성물(聖物)들이 보관된 성물관(聖物館) 등 수많은 유물들을 장르별로 분류하여 전시하고 있다. 특히 수천 개의 루비가 박힌 촛대, 86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등 루비, 사파이어, 다이아몬드, 옥, 크리스탈로 넘치는 보물관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하나 안타깝게도 사진촬영을 금지하고 있어 그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마음속에만 담을 수밖에 없었다.

 

 

 

 

 

 

 

 

 

 

여행지 : 이스탄불(터키) 피에르 로띠 언덕

여행일 : '13. 3. 21(목)

 

 

 

전시회 투어 일정을 마치고 오후에는 ‘피에르 로띠 언덕(Pier loti hill)’으로 향한다. 프랑스의 작가인 피에르 로티가 이곳의 경치에 반해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머물렀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단다. 피에르 로띠 언덕은 공동묘지의 제일 위에 있다. 서서히 걸어도 20분이면 충분할 거리지만, 모처럼 보는 케이블카를 이용해서 올라가 본다.

 

 

 

 

 

 

 

언덕에는 전망대(展望臺)가 만들어져 있는데 전망대에 올라서면 발아래에 ‘골든 혼(Gólden Hórn)’이 펼쳐진다. ‘골든 혼’은 이스탄불의 내항(內港) 역할을 하고 있는 바다로서 옛날 동로마제국이 멸망할 때 보물들을 정복자들에게 넘겨주지 않기 위해서 바다에 수장(水葬)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한편으로는 석양(夕陽) 무렵이면 바닷물이 금빛으로 물든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이중에 난 후자를 믿고 싶다. 멸망 당시 동로마의 재정(財政) 상태는 대포 한 문(門)도 제대로 구입할 수도 없을 정도로 돈이 메말랐음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언덕에는 찻집들이 즐비하다. 로띠가 이곳에서 차를 마신 것을 본떠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너나할 것 없이 차를 마시는 모양이다. 로띠는 터키에서 군인으로 근무할 때에 터키인 유부녀를 사랑했는데, 근무를 끝내고 일시 귀국했다가 다시 돌아와 보니 그녀가 죽은 후였다고 한다. 그는 이 언덕에서 그녀를 그리워하며 여생을 보냈고, 이곳 사람들은 이를 기려 언덕에 그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러나 궁금한 것이 있다. 당시 터키는 정통 이슬람국가였으니 그녀는 당연히 히잡(hijab)을 썼을 것이다. 그런데 로띠는 어떻게 그녀의 얼굴을 보았을까?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들은 불륜(不倫)을 나누었고, 여자는 나중에 불륜사실이 들통 나서 명예살인을 당하였다고 한다.

 

 

 

 

 

 

 

피에르 로띠 언덕에 있는 찻집에서는 터키의 전통 차와 전통 커피를 판다. 미세한 커피분말을 그냥 끓이는 터키의 전통커피는 너무 진하기 때문에 2~3분 정도 가루가 바닥으로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마시는 것이 좋다. 전통커피를 마시고 난 후에 점을 쳐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커피를 다 마시고 난 다음에 커피잔 받침대에 잔을 통째로 뒤 엎은 후, 커피진액이 만들어 내는 문양을 보고 점을 쳐보는 것이다.

 

 

 

 

 

로띠언덕에서 커피 한 잔 마시고 천천히 걸어 내려오면 ‘술탄 에윱 모스크’가 나온다. 술탄 에윱 모스크는 마호메트를 도와준 성자(聖者) ‘아부 에윱’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이슬람교도들에게는 종교적으로 매우 성스러운 곳이다. 에윱은 메카, 메디나, 예루살렘과 함께 이슬람의 중요한 순례지로 꼽히며, 터키 전역에서 수많은 참배객들이 찾아온다. 성스럽게 여기다보니 다른 모스크와는 다르게 엄숙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으며, 특히 여성의 경우 머리 수건을 쓰지 않으면 입장이 불가하다고 한다. 터키 여성들은 다른 이슬람국가들과는 달리 머리카락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데도 말이다.

 

 

 

 

 

이스탄불에는 다양한 대중 교통수단이 있다. 지하철과 버스, 그리고 택시는 다른 도시들과 같으나, 이곳에는 지상을 달리는 전철과 아시아와 유럽을 왕복하는 선박(船舶)이라는 색다른 교통수단을 보유하고 있다.

 

 

 

내가 머무는 ‘할리데이 인’호텔에서 5분 정도 거리에 ‘제바히르 백화점’이 있기에 들렀다. 물론 귀국해서 친지들에게 드릴 선물을 찾아보기 위해서이다. 물론 첫날 들렀던 ‘그랜드 바자르’에서 구입해도 되겠지만, 난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물품을 선물하는 습관이 있다. 내가 찾는 물건은 이곳 터키의 특산품인 ‘올리브비누’와 ‘석류엑기스’인데, 이 상품을 가장 싸게 살 수 있는 곳은 슈퍼마켓이다. 그래서 이스탄불에서 가장 큰 백화점 중 하나인 제바히르백화점을 찾은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슈퍼마켓이 없는 백화점은 없으니까 말이다.

 

 

 

 

 

 

여행지 : 이스탄불(터키)의 보스포루스해협과 그랜드 바라르

여행일 : '13. 3. 19(화)

 

 

 

점심 후에는 에미노뉴(Eminonu) 부두로 이동한다. 보스포루스 해협(Bosporus Str. ─海峽)을 둘러보기 위해서이다. 보스포루스 해협을 제대로 보려면 해협을 왕복하는 ‘보스포루스 크루즈’를 이용해야 하는데, 크루즈가 출발하는 곳이 에미노뉴(Eminonu) 부두인 것이다. 이곳을 출발한 배는 아시아 쪽 해안에 있는 부두로 가서 다른 관광객들을 태운 후에 제2유라시아대교까지 간다. 그리고 올 때에는 그 반대로 온다고 생각하면 된다. 둘러보는 시간은 대략 1시간30분쯤 걸린다.

 

 

 

항구의 옆에는 노천(露天)에 간이식당들이 늘어서있다. 그리고 물위에도 아담하고 예쁜 지붕 얹은 배들이 떠 있는 것이 보인다. 고등어캐밥을 팔고 있는 식당들이란다. 아니나 다를까 생선냄새가 장난이 아니다. 하긴 집집마다 고등어를 굽고 있으니 비린내로 넘쳐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비린내에 질려 사진만 찍고 얼른 배 위로 올라서버린다. 이스탄불에서 가장 맛있는 요리중의 하나라는 고등어캐밥이라지만 비린내가 싫었고, 또 한편으로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입맛에는 맞지 않는다는 선답자들의 얘기를 들었던 탓이다. 참고로 고등어캐밥은 빵의 가운데에다 구운 고등어를 통째로 놓고 그 위에 야채를 얹은 일종의 샌드위치라고 보면 편할 것이다.

 

 

 

 

 

보스포루스 해협(Bosporus Str. ─海峽)은 아시아 대륙과 유럽 대륙과의 경계를 이루는 해협(길이 30km, 넓이 550∼3,000m, 수심 60∼125m)이다. 고대부터 흑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중요한 수로(水路)인데다가 마르마라해의 출입구에 해당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다. 특히 1453년 이래 이곳을 장악한 터키는 방위를 목적으로 양안(兩岸)을 요새화(要塞化)한바 있다.

 

 

 

 

 

배가 출발해서 제일 먼저 지나는 곳은 영국의 빅토리아여왕이 선물한 무게 4.5톤의 크리스탈(crystal) 샹들리에가 있다는 돌마바흐체궁전(Dolmabahςe Saray)이다. 유럽해안을 따라 600m가량 뻗어있는 궁전은 술탄 압둘 마지드가 1853년에 대리석으로 지은 궁전으로서,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을 본뜬 탓에 유럽풍이다.

 

 

 

 

 

해협을 횡단하는 유라시아 대교(大橋:일명 보스포루스교, 1973년에 완공)는 세계 유수의 현수교(懸垂橋)로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국제간선도로이다. 크루즈를 이용해 해협을 오르내리다보면 해협의 양안이 한눈에 들어온다. 양 기슭에는 신시가지와 구시가지가 공존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보스포루스 해협은 지형적으로는 일종의 익곡(溺谷)으로 양안은 급사면(急斜面)을 이루고 있으나 풍경은 빼어났다. 양쪽 기슭을 따라 펼쳐지는 아름다운 경치가 매우 인상적이다. 숲 속으로는 고급스러운 건축물들이 많은데 주변 풍광과 어우러진 것이 보기에도 아늑하다. 때문에 해협의 양안(兩岸)에 늘어선 아름다운 별장들은, 유럽의 부자들이 하계(夏季) 별장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대교에 가까워지면 마호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기 위해 지었다는 히사르(Hisar)를 만나게 된다. 히사르는 성(城)을 일컫는 터키어로서 해협의 양쪽에 하나씩 세워져 있다. 유럽 쪽에 있는 3개의 성을 루메르 히사르(Rumeili Hisar), 그리고 아시아 쪽에 있는 하나를 아나돌르 히사라고 부른다. 마호메트 2세는 이 성에다 대포를 설치하고 콘스탄티노플을 도우러 오는 다른 나라들의 배를 통과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보스포루스 크루즈를 마치고 다시 소피아 성당 근처로 돌아온다. 이번에는 터키의 전통시장인 그랜드 바자르(Grand Bazaar, Covered Bazaar)를 둘러보기 위해서이다. 그랜드 바자르는 터키어로 카파르 차르쉬(Kapar Carsi) 즉 '덮여있는 시장'이라는 뜻이다. 시장은 아치형 돔 지붕으로 덮여있는데, 지붕 위의 풍경은 영화에서 자주 등장한다. 최근에도 ‘007 스카이 폴’과 ‘테이큰 2’에서 그 모습을 보였었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실내 시장으로, 현재 60여 개의 미로(迷路) 같은 통로에 5,000여 개의 상점이 있다. 시장에는 금․은 세공품을 포함한 각종 보석류, 피혁류, 카펫, 향신료, 형형 색색의 도자기와 기념품을 포함한 각종 공예품과 특산품 등을 판매하고 있다. 이스탄불을 찾는 관광객들이라면 누구 할 것 없이 꼭 들르게 되는 이스탄불의 대표적인 관광명소이다.

 

 

 

 

 

 

 

기념품 대신에 마실 것을 찾아본다. 오랫동안 걸은 다리를 좀 쉬게 할 요량에서다. 물론 맥주라도 한잔 들이키면서 말이다. 그러나 시장을 한 바퀴 다 돌아도 맥주는 눈에 띄지 않는다. 물론 시장 곳곳에 탁자까지 갖춘 휴게시설이 있으나, 하나같이 차나 과일 주스(juice)를 팔 따름이다. 그러다가 시장을 벗어날 즈음에 어느 호객꾼의 부르짖음에서 맥주라는 낱말을 찾아내고 반갑게 자리에 앉는다. 맥주가 한참 후에야 배달되는 것은 아마 이 나라의 특성 때문일 것이다. 공공장소에서는 술 마시는 것을 금기시하기 때문이다.

 

 

 

 

여행일 : '13. 3. 19(화)

여행지 : 이스탄불(터키)의 성 소피아성당

 

 

 

12시간 가까운 비행 끝에 새벽 5시에 이스탄불 공항에 내렸다. 아직은 어둠이 완전히 가시지 여명(黎明)의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가이드(guide)가 기다리고 있었다. 가이드의 안내로 비행장에서 30분 쯤 거리에 있는 호텔에 여장을 푼다. 비록 몸은 많이 피곤하지만 잠을 자는 것이 더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어설픈 토막잠이지만 12시간 동안 자다 깨다를 번복했기 때문일 것이다. 10시에 시내 투어를 시작하기로 하고 호텔에 여장을 푼다. 숙소인 ‘Holiday Inn Sisli Istanbul' 호텔은 세계적인 체인망을 갖춘 호텔답게 깨끗하고 아늑했다. 그런데도 가격은 아침식사 포함해서 8만원이 넘지 않으니 저렴한 편이다. 그렇다고 터키의 모든 물가(物價)가 싼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나라의 2배 가까이나 되는 휘발유 값하며 음료수 값 등 대부분의 물가는 한국보다 더 비싼 편이다. 특히 한 병에 3만5천원이나 하는 소주 값은 가히 살인적인 수준이다. 덕분에 우린 미리 준비해 간 팩소주를 저녁에 홀짝거릴 수밖에 없었다. 불어터진 컵라면을 안주 삼아서 말이다.

 

 

 

기내에서 아침식사를 했지만, 너무 적은 탓인지 8시가 채 못 되었는데도 여간 배가 고픈 게 아니다. 별수 없이 호텔을 빠져나와 길 건너에 있는 작은 식당으로 들어서니 사람들로 북적인다. 뵈랙(Borek)이라는 빵을 파는 식당이다. 뵈랙은 일에 쫒긴 터키인들이 아침식사를 대신해서 즐겨 먹는 음식이란다. 뵈랙은 커다란 빵 안에다 고기나 치즈, 채소 등을 채운 것으로 한국의 튀김만두를 연상시키는 음식이다. 다양한 재료로 속이 가득차서 한 끼 음식으로 충분하며, 특히 터키식 홍차인 차이(Chai)와 함께 먹으면 제격이다. 차이(Chai : 아래 사진)는 터키식 홍차로서 터키사람들이 물마시듯이 마시는 차이다. 공공장소에서 술 마시는 것을 금기시하기 때문에 차 마시는 문화가 발달되었다고도 하나. 내 생각으로는 터키의 물이 그냥 마실 수 없을 정도로 나쁘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도로나 상점, 심지어는 노점상까지도 물을 팔고 있는 것을 보면 내 추측이 맞을 지도 모른다. 차이는 지나칠 정도로 설탕을 많이 넣는 것이 특징인데, 아마 지나칠 정도로 강한 떫은 맛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지기 때문일 것이다.

 

 

 

이스탄불에서의 첫 번째 여행지는 소피아성당이다. 버스에서 내려 성문(城門)처럼 생긴 문을 통과하니 주차장이 나온다. 이곳은 아무래도 따로 주차요원이 있는 모양이다. 주차장에 가득 찬 차량들이 흡사 바둑판 위의 바둑돌처럼 거의 빈틈없이 붙어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곳의 차들은 앞의 것부터 차례차례 빼주지 않으면 결코 빠져 나올 수가 없을 것 같다. 블루모스크 오른편 담벼락 아래에 있는 주차장을 지나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 오른편에 소피아성당이 보인다. 그리고 왼편에 보이는 건물은 이슬람사원인 ‘블루 모스크’이다.

 

 

 

 

 

 

 

 

시장뿐만 아니라 시내 곳곳에 예쁜 기념품가게들이 많이 있었으나, 그냥 지나치고 만다. 아마 동심을 잃어버린 나이 탓인지도 모르겠다.

 

 

블루 모스크

 

 

 

 

 

소피아성당은 현재 박물관(博物館)으로 이용되기 때문에 입장료를 내야만이 들어갈 수가 있다. 소피아성당(Ayasofya)은 이곳이 동로마제국의 수도(콘스탄티노플)였을 때에 그리스도교의 대성당으로 지어졌다. 터키 지배 때에는 이슬람교의 모스크가 되었고, 현재는 박물관으로 쓰인다. 콘스탄티누스 대제(大帝)가 지었던 ‘성스러운 예지(叡智)’(하기아 소피아)에 바친 구당(舊堂 : 325)은 두 차례의 화재 끝에 없어지고 537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하여 새로 지어졌다. 안타까운 것은 오스만투르크 제국(Osman Turk Empire)의 정복으로 인해 비잔틴미술의 최고봉으로 찬사를 받던 당시의 예술품들이 대부분 사라졌다는 것이다. 다만 근년에 앞방(前室)과 2층 복도의 벽면에서, 석회칠 속에 그려져 있던 9∼13세기의 모자이크의 일부가 발견되어, 그 고도의 기술과 뛰어난 표현이 주목을 끌고 있다. 당내에는 대소의 주두(柱頭) 조각으로 대표되는 비잔틴의 세련된 장식 조각들이 적지 않게 남아 있다.

 

 

 

 

 

 

 

 

 

 

 

 

성당의 내부는 기독교문화와 이슬람문화가 섞여있다. 기독교식 바탕 위에 이슬람의 글자나 문양이 섞여있는 것이다.

 

 

 

 

중앙에서 고개를 들어보면 돔형으로 생긴 천장의 웅장함에 놀라게 된다. 천장을 중심으로 사방에 뚫린 창으로 들어오는 빛이 너무 아름답다.

 

 

 

 

 

 

 

1층에 있는 땀 흘리는 기둥, 구멍에 엄지손가락을 넣고 한 바퀴를 돌리면서 세 번을 빌면 그 바라는 바가 이루어진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나도 시도해 봤지만 돌리는데 신경을 너무 쓴 탓인지, 소원을 빈다는 것을 깜빡 잊어버렸다.

 

 

 

 

예수와 성모마리아 그리고 세례자 요한이 그려진 ‘데이시스(deisis)’ 성화

 

 

 

 

아기를 안고 있는 성모마리아

 

 

아기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마리아, 양쪽은 왕과 왕비라고 한다.

 

 

 

소피아성당을 둘러보고 나니 벌써 점심시간이다. 근처에 있는 식당에 들러 터키 전통요리 중의 하나인 케밥을 주문해본다. 케밥(kebab)의 원래 뜻은 ‘꼬챙이에 끼워 불에 구운 고기’로 터키의 대표적인 요리이다. 중국 및 프랑스 요리와 함께 세계 3대 요리의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주재료는 소고기와 양고기이나, 우리가 주문한 종합세트에는 닭고기도 들어 있었다. 참고로 케밥의 종류는 200~300가지에 이를 정도이며, 매우 다양하고 지방마다 특색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숯불 회전구이인 도네르(Doener) 케밥, 진흙 통구이인 쿠유 케밥, 꼬치구이인 시시(Shish) 케밥 등이 있다. 케밥은 빵, 야채와 함께 먹으며 식사 후에는 터키차나 커피를 마신다.

 

 

 

 

 

터키의 빵 행상, 수북하게 쌓인 빵을 머리에 이고 가는 모습이 이채롭다. 손도 안대고 걷는데 옛날 물동이를 이고 다니던 우리나라 여자들은 저리가라 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걷는다.

 

 

 

 

톰스크 대학 방문기(訪問記)

 

소재지 : 러시아 로보시비리스크주 톰스크시

일정 :

‘12. 3. 23(토) 10:00 인천공항 출발

14:45 ~ 20:40 브라디보스토크 도착 및 출발(6시간 대기)

3. 23(토) 22:45 노보시비리스크 도착(알랙세이교수의 영접)

3. 24(일) 04:30 톰스크 도착(버스이용, 본아파트 체크인)

14:00 톰스크 시내 투어(16:00, 켄체로프敎授 주최 晩餐)

3. 24(월) 09:00 톰스크대학 총장과의 미팅(대학 본관 대회의실)

10:00 ~ 17:00 공식 일정(인공지능연구소, 물리공학연구소, 전력공학연구소, 천연자원연구소 순환미팅)

18:30 대학기숙사로 숙소 이동 및 공식만찬

3.25(화) 09:00 ~ 17:00 비파괴연구소 및 로봇연구소 미팅

11:00 한국 방문단 발표 및 양자간 의견교환

14:00 스포츠센터 방문 및 공식만찬(미하일교수)

3.25(수) 09:00 ~ 13:30 톰스크 출발 및 노보시비리스크 도착

14:00 ~ 19:00 노보시비리스크 투어

3.26(목) 00:30 노보시비리스크 출발, 베이찡 경유 김포 도착

 

방문목적 : 경인(京仁)지역과 톰스크 대학(大學)간 기술 교류(技術 交流), 올 2월에는 톰스크 대학의 교수 5명이 한국으로 와서 IMT(Intelligence mechatronics)관련 세미나에 페널(panel)로 참여를 한바있고, 이번에는 우리나라에서 러시아를 방문하여 톰스크대학 부설연구소의 교수들과의 미팅을 통해 양국(兩國)간 기술협력을 도모하는 일정, 러시아측의 성의(誠意) 있는 안내(案內)와 발표 기대했던 효과를 달성할 수 있었다.

* 톰스크(Tomsk), 러시아 톰스크주(州)의 주도(州都)로서 인구는 48만8,800명(2004년)이다. 시베리아 러시아 남부, 오비강(江)의 지류인 톰강(江) 연안에 있으며, 시베리아 철도의 지선이 지난다. 시베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로서 1604년 요새가 축조되었으며, 후에 시베리아와 유럽 및 러시아의 교역으로 번영하였다. 한 때는 광활한 시베리아의 중심지였으나 시베리아 철도(鐵道)가 노보시비르스크를 통해 오비강을 횡단하게 되자 노보시비르스크에게 그 중심 역할(役割)을 내주었다.

 

 

 

인천공항에서 대한항공을 타고 2시간이 조금 더 넘게 날아가면 중간기착지인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게 된다. 참고로 공항에 도착하면서 시계의 시침을 두 시간만 더 앞으로 나아가게 해 놓으면 현지시간과 같아진다. '동방을 정복하라'라는 뜻으로 예전에는 해삼위(海參崴) 또는 해삼시로 알려졌던 블라디보스토크는, 인구가 약 60만 명쯤 되는 러시아 극동(極東)의 군사기지(軍事基地)이며, 연해주지방의 행정(行政)중심지이다. 공항에서 시내까지는 약 1시간 정도가 걸리니 택시로 이동(移動)하기에는 다소 무리, 조금 지루하겠지만 공항근처에서 소일(消日)하기로 결정하고 국내선(國內線) 비행기 탑승건물로 자리를 옮긴다.

< 블라디보스토크 공항 >

 

 

 

 

 

국내선 청사(廳舍)에는 식당과 다과점, 커피점, 그리고 기념품 가게와 약국 등이 있으나 가격(價格)은 만만치 않다. 우리나라에서 사먹는 가격을 생각하면 될 것이다. 대합실(待合室)에 있는 편의(便宜)시설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에는 공항 앞의 광장(廣場) 맞은편에 있는 모텔로 가면 된다. 가격은 조금 비싸지만, 맛있는 식사와 함께 피아노 연주를 듣는 낭만(浪漫)을 즐길 수 있으니까. 또한, 깔끔한 회의실에서 커피 향을 음미(吟味)하며 진행 중인 업무를 정리하는 여유도 부릴 수 있다.

< 공항광장 맞은편의 모텔 : 식당과 회의실 및 휴계실을 갖추고 있으며, 라이브음악도 감상할 수 있다.>

 

 

< 광장 한쪽 귀퉁이에 있는 전시용 비행기 >

 

 

< 운행중인 버스, 기아자동차의 로고가 뚜렷하다 >

 

 

 

지루한 기다림에 짜증이 날 즈음, 갑자기 승객들이 북적대기 시작하더니, 9시 가까이야 러시아 국내선 비행기는 드디어 공항을 이륙(離陸)한다. 노보시비리스크에 도착시간이 11시가 조금 못되니 시간상으로는 2시간 남짓이지만 시차(時差)를 감안할 경우 6시간이 넘는 장거리 여행으로 변해버린다. 기내식(햄, 야채, 빵, 밥과 섞인 닭고기 볶음 등인에 양도 충분하고 맛도 괜찮은 편이다.) 후의 포만감에 잠깐 졸다보면 어느새 노보시비리스크이다. 공항에는 톰스크대학의 알렉세이 교수가 마중을 나와 있다. 함께 통역으로 따라 온 올가(女)양을 만나면서 걱정이 시작된다. 그녀의 한국어 실력이 겨우 ‘6개월짜리 한국어 연수(硏修)’가 전부이기 때문이다.

 

 

< 노보시비리스크 공항 >

 

 

 

 

 

 

톰스크시를 향해 달리는 도로(서울에서 부산 정도의 거리)는 온통 눈(雪) 녹은 물과 아직까지 덜 녹은 눈들이 두텁게 뒤엉켜있어서 노면(路面)상태가 엉망이다. 우리를 실은 자동차는 달리는 중에 몇 번인가를 눈 위에서 미끄러지며 아찔한 순간을 연출한다.(도로변에는 뒤집힌 채로 방치된 차(車)들도 눈에 띄었다). 달리는 중에 요기도 할 겸해서 들른 식당, 우리나라로 치면 고속도로 휴게소 정도이다. 편의점과 함께 운영하고 있는 식당은 보기보다 깔끔하고 음식도 우리 입맛에 맞는 편이다. 카페테리아식(cafeteria, 셀프서비스 간이식당)이니 스프와 꼬치구이 등 입맛에 맞는 종류를 골라 먹으면 된다. 맥주나 보드카를 곁들여 마셔도 가격(價格)은 그다지 부담되지 않는 수준이다.

 

 

 

 

 

 

 

노보를 출발한지 6시간(평상시는 5시간 정도) 가까이 되면 기다란 다리(橋) 하나가 보인다. 그 너머에 보이는 도시가 톰스크시이다. ‘본 아파트’라는 호텔에 여장(旅裝)을 풀자마자 잠자리에 들고 본다. 시간으로 보면 이제 먼동이 틀 시간이지만 긴 여행에서 쌓인 피로를 풀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호텔 규모(規模)는 모텔 정도로 작지만, 스파(spa) 등 각종 편의(便宜)시설을 갖춘 내부는 괜찮은 편이다. 하룻밤에 20만원을 넘기는 숙박비는 장기 투숙객들에게는 다소 부담이 될 듯 싶다.

 

 

 

 

 

 

오후 2시에 통역(通譯)인 올가양이 다른 러시아여자 한 명을 데리고 나타난다. 시내 투어를 안내할 문화해설사라고 한다. 그리 크지 않은 도시(都市)인 톰스크를 돌며, 러시아정교회 성당과, 최초의 요새(要塞), 그리고 톰강(강의 이름을 따서 톰스크라는 도시이름이 생겼단다)등을 돌아본다. 시내 중심가(中心街)를 제외하고는 통나무집들이 자주 눈에 띈다. 통나무집들은 한마디로 예술(藝術) 그 자체이다. 보이는 나무집들마다 어느 것 하나, 같은 것이 없을 정도로 각각의 뛰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White Lake공원(公園), 인터넷에서 검색되기에 제법 규모가 큰 공원으로 알았는데 호수(湖水)를 끼고 있는 공원은 왜소(矮小)하기 짝이 없다. 호수로 들어가는 입구에 인공위성(人工衛星)의 유인(有人) 착륙선(着陸船)(아마 모형일 것이다)이 전시되어 있다. 최초에 달의 표면을 밟은 우주인(宇宙人) 중의 한사람이 이곳 출신이라고 한다.

 

 

 

 

 

 

 

 

 

 

러시아정교회 성당(聖堂), 이곳 톰스크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성당 두 곳에 들렀다. 세계 곳곳의 성당을 많이 구경해봤지만 이곳 같이 화려(華麗)한 성당은 처음 본 것 같다. 건물의 외부(外部)는 일반 성당과 다를 것이 없는데, 일단 안으로 들어서면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화려하기 그지없다. 원색(原色)을 사용해서 그린 예수님과 성모(聖母)님 그리고 기타 성인(聖人)들의 초상화(肖像畵)는 살아 움직이는 듯이 생생하고, 그 밖의 벽면(壁面)은 온통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다. 러시아정교회(正敎會)의 특징인 모양인데, 러시아 방문이 처음인 내 눈에는 신기하게만 보이는 모양이다.

 

 

 

 

 

 

 

 

 

또 하나, 다른 나라의 성당과 다른 점은, 성당 내부에 의자가 없는 것이다. 이는 함께 모여서 예배(禮拜)를 보는 장소로 이용되지 않는 다는 의미인데, 이들은 과연 어디에 모여서 하느님을 모시는 의식(儀式)을 거행하는지 궁금하다. 성당 내부에는 교회 신자들이 끊이지 않고 들어오는데, 모두들 교회 내부를 꽉 채우고 있는 액자(額子) 속의 사진들을 향해 기도를 하며 돌고 있다. 사진틀 앞에는 탁자와 촛대들이 황금빛으로 번쩍이고 있다. 비록 엉터리 신자이지만 나 또한 천주교 신자, 예수님과 성모님 상 앞에서 경건히 기도를 드려본다. ‘이번 일정이 의도한데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유명작가(有名作家)의 집이라는데 아무리 이름을 기억하려고 해도 머릿속에 남아나지 않다. 그만큼 러시아말은 우리 귀에 익숙하지 않은 탓일 것이다. 아무튼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자주 보게 되는 생가복원(生家復元)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 요즘에는 이 지역(地域)의 작가들이 모여서 차(茶)도 마시면서 문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교류(交流)의 장소로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톰스크 역사박물관(歷史博物館), 톰스크 시내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먼 옛날 정복자(征服者)들이 새로운 지역을 개척하려면, 맨 먼저 흙이나 돌 또는 목재를 이용해서 요새(要塞)부터 만들었다. 맹수는 물론 원주민(原住民)들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이다. 톰스크도 1604년에 이곳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요새를 제일 먼저 세웠을 것이고, 그 자리는 이 박물관(博物館) 자리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아쉽게도 지금은 옛날 모습은 찾아 볼 수 없고, 다만 건물 벽(壁)에 그려진 걸개그림을 보며 그 형상을 추측해 볼 따름이다. 건물의 맨 위에 보이는 것은 요새의 망루(望樓)를 복원(復元)해 놓은 것이다.

 

 

 

 

 

 

 

 

< 톰스크시를 개척할 당시의 요새를 재현한 그림 >

 

 

 

톰스크 시가지(市街地)를 싸고 흐르는 톰강(江), 톰스크라는 시(市)의 이름은 이 강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란다. 강 건너에 검게 보이는 부분은 시베리아의 상징(象徵)인 울창한 숲이다. 침엽수림(針葉樹林)인데 도로변에서 잣을 파는 주민(住民)들이 심심찮게 눈에 띄는 것을 보면, 잣나무도 많이 심어져 있는 것 같다.

 

 

 

 

 

 

 

 

 

 

 

 

 

시장(市長)의 딸이 살고 있다는 집, 역사적(歷史的)으로야 특별한 의미가 없는데도 관광객(觀光客)들이 많이 찾는 편이란다. 나무에다 정교하게 새겨 놓은 아름다운 문양(紋樣)들은, 하나하나가 예술품(藝術品)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빼어난 조각품(彫刻品)들이다. 비록 역사(歷史)는 오래되지 않았을지라도 그 사물(事物)이 지닌 아름다움만 뛰어나다면 관광자원(觀光資源)으로 활용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증명(證明)하고 있는 것이다.

 

 

 

삼일 동안 이어진 만찬(晩餐)은 첫날은 켄체로프교수님이 개인적으로 열어주었고, 둘째 날과 셋째 날은 대학당국에서 공식행사로 개최되었다. 이틀 동안 연속된 공식만찬은 교내에 있는 식당에서 개최되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후생관(厚生館)으로 불러야할 듯 싶으나, 그 서비스는 물론 시설(施設)이나 음식 맛이 시내의 일반식당(一般食堂)에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았다. 회관 안은 젊은 학생들로 북적대고 있다. 신입생 환영회(新入生 歡迎會)라고 한다. 그런데 그들 근처에 술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나라 대학의 신입생환영회와 다르다면 다른 점일 것이다.

<켄체로프교수님이 초대한 첫날의 만찬 장소>

 

 

 

 

 

 

 

<대학 총장님이 초대한 둘째 날 만찬>

 

 

 

 

 

 

 

< 연구 책임 교수진들과 함께한 셋째 날 만찬>

 

 

 

 

 

 

추가적인 여행 팁(tip)으로 시베리아 타입(type) 사우나(sauna)에 대하여 소개해 드리고자 한다. 항공편이 쉽지 않은 시베리아는 쉽게 올수 있는 곳이 아니다. 이왕에 왔으면 시베리아 고유(固有)의 사우나에 들러볼 것을 권하고 싶다. 풀장과, 열수탕, 휴식 공간, 침실 등을 갖춘 사우나는 상상(想像)외로 이용료가 비싸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8~10명이 공동(公同)으로 이용할 수 있으니, 비용을 분담한다면 생각보다 저렴한 가격(價格)에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돈을 조금(?) 더 내고 추가(追加)서비스를 받는 다면, 사우나는 갑자기 무릉도원(武陵桃源)으로 변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