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라오스(Laos)

 

여행일 : ‘17. 2. 28() - 3.4()

일 정 :

3.1() : 비엔티엔 사원관광(왓 씨사켓, 왓 팟 깨우), 불상공원(왓 씨앙 쿠앙). 탕원유원지 선상식. 소금마을 방문, 방비엥(썬셋 모터보트, 유러피안 거리)

3.2() : 방비엥(블루라군, 짚라인, 탐남동굴 튜빙, 쏭강 카약킹)

3.3() : 젓갈마을 방문, 비엔티엔(빠뚜싸이 독립기념탑, 왓 탓 루앙)

   

여행 첫날 오전 : 비엔티안의 사원(Temple)

   

특징 : 라오스 국민의 대부분은 소승불교(小乘佛敎, Hinayana) 신자들이다. 기독교와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도 일부 있지만 소수일 따름이고 국민의 90%는 부처님을 믿는다. 그래선지 시내(市內), 아니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라면 어김없이 불교 사원(寺院)들이 들어서있다. 그들의 생활자체가 곧 불교라는 증거일 것이다. 라오스 여행에서 불교를 떼고 싶어도 뗄 수가 없는 이유이다. 오늘 들른 사원들도 그중 하나라고 보면 된다. 이 사원들은 라오스가 한창 전성기(全盛期)를 누릴 때 지어진 사원들이다. 그러니 라오스 불교를 대표할만한 사원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들러보고 나면 실망부터 하게 된다. 어디에 내세울 만큼 거대하거나 화려하지도 않을뿐더러 보관하고 있는 문화재들 또한 빈약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약소국가의 설움이 아닐까 싶다. 그만큼 태국이나 미얀마 등 주변 국가들로부터 숱하게 침략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수많은 문화재들이 불타 없어지고 약탈당했음은 물론이다.

 

 

   

버스는 우리를 왓 호파깨우(Wat Hophrakeo)‘사원의 정문 앞에다 내려놓는다. 길 건너에도 왓 시사켓이라는 또 다른 사원이 있으니 혼동하지 않도록 한다. ’왓 호빠깨우, 라오스 말로 ''''은 사원을 뜻한다. ''는 스님이 없는 사원을 말하고 ''은 스님이 거주하는 곳이란다. 또한 '파깨우'에머럴드 불상을 의미한다.

 

 

 

 

이 사원은 탓 루앙을 세운 쎗타티랏(King Setthathirath)‘ 왕이 1565년 루앙프라방에 있던 왕도를 이곳 비엔티안으로 천도하면서 란쌍왕국의 상징이랄 수 있는 에메랄드 불상(Phar Keo, 파 깨우)‘을 모시기 위해 건축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1779년 태국에 있던 시암왕국과 전쟁을 치르면서 건물은 소실(燒失)되었고 에메랄드 불상 또한 약탈당했다. 참고로 에메랄드 불상은 아직까지도 방콕의 왕궁사원에 모셔져 있다고 한다. 라오스 국민들로 봐서는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도 태국의 국보 제1로서 말이다.  

 

 

 

현재의 건물은 1936년에 새로 지어졌다. 라오스의 마지막 왕이었던 아누봉, 태국에 본거지를 둔 시암왕국딱씬왕과 치른 전쟁(1779)에서 패하면서 불탔던 것을 당시 이곳을 통치하고 있던 프랑스가 재건한 것이란다.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국내 각지로부터 모아진 불상 등을 모아 전시하고 있다. 참고로 당시 태국에서 빼앗아간 보물은 에메랄드불상 말고도 하나가 더 있었다. 바로 루앙프라방에 있는 파방이란다. 현대에 와서 파방은 태국에서 반납을 하였지만 에메랄드 불상은 아직까지도 태국에 남아 있다. 덕분에 본래는 왕실의 전용 사원이었으나 그 역할을 할 수가 없다고 해서 사원이란 뜻의 을 뺀 호빠깨우로만 불리기도 한단다.

 

 

본당 처마부분에는 세 마리의 코끼리가 새겨져 있다. 라오스가 번성했던 3왕조 시대와 '화합'을 상징하는 것이란다. 그리고 본당의 지붕은 끄트머리를 뾰쪽하게 틀어 올리면서 뭔가를 형상화 시켰다. 메콩강의 수호신으로 라오스인들이 추앙하는 '산갈치' 상이란다. 라오스의 사원이라면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조형물인데, 일반 건축물에도 마치 부적처럼 만들어 놓는다고 한다. 신기한 것은 저 산갈치가 실제로도 잡힌 적이 있다는 것이다. 1978년에 미군들이 메콩강에서 8m가 넘는 산갈치를 잡은 바 있단다. 원래 명칭은 '나가퓌쉬'란다.

 

 

 

본당으로 오르는 계단의 양 옆은 용()을 조각해 놓았다. 불교에서 나오는 설화(說話)를 형상화한 게 아닐까 싶다. 설화는 불교를 사람들이 쉽게 접할 수 있게 하는 효과적인 매개체(媒介體)이다. 불교도들은 기존의 인도 설화를 바탕으로 불교적인 색채를 입힌 이야기들을 많이 만들어냈는데, 부처님 일대기에 등장하는 나가(naga) 역시 이러한 흐름을 반영한 것이다. 부처님의 일생과 관련해 나가가 등장하는 이야기 가운데 대표적인 것 하나만 살펴보기로 하자. 부처님은 네란자라 강가의 우루벨라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고 난 후, 정각도량(正覺道場) 일곱 군데의 나무 아래에서 7일씩을 보냈다고 한다. 이 기간 동안에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무짤린다 용왕이 비바람으로부터 부처님을 보호한 에피소드(episode)이다. 부처님께서 무짤린다나무 아래에서 해탈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을 때였다. 때 아닌 폭풍이 불고 폭우가 쏟아지자, 나무에 의지해 살던 무짤린다 용왕이 나타났다. 무짤린다는 자신의 몸으로 부처님의 온몸을 감싸고 머리를 부채처럼 펼쳤다. 7일 동안의 폭풍우가 그치자 그는 감쌌던 부처님의 몸을 풀고, 한 젊은이로 변신하여 부처님을 찬탄했다고 한다.

 

 

위로 올라서면 사원의 벽면과 기둥의 아름다운 문양이 눈에 확 들어온다. 무엇보다 조각의 정교함이 놀랍기 짝이 없다. ()의 비닐 하나까지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는 것이다. 벽면과 기둥의 장식 또한 무척 아름다웠다.

 

 

 

 

위로 오르면 커다란 불상(佛像) 둘이 손님을 맞는다. 두 손을 앞으로 내밀고 있는 형상이다. 그렇다고 안으로 들어오지 말라는 표시로 받아들이면 안 될 일이다. 거부가 아니라 양보의 의미를 담고 있는 불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잠시 라오스 불상들이 갖고 있는 의미를 살펴보기로 하자. 라오스 불상들은 세 가지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고 한다. 그중 차렷 자세의 불상은 라오스가 농경사회이기 때문에 비가 오기를 바라는 '기우(祈雨)'의 의미이고, 앞으로 손을 내미는 자세는 양보하며 살아가라는 의미와 함께 악()을 물리치는 '항마(降魔)'의 뜻도 포함하고 있단다. 또한 앞으로 손을 모으고 있는 자세는 '수신제가(修身齊家)'의 의미로 먼저 자기를 다스리는 자기관리의 의미란다.

 

 

이 절의 이름은 왓 파깨우(Wat Hophrakeo)’이다. 눈치 빠른 사람들은 태국(방콕)에 있는 왓 프라깨우(Wat Phra Kaew)’와 비슷하다는 느낌이 이미 왔을 것이다. 그렇다. 두 사원(寺院)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원래 이곳에 안치되어 있던 그 유명한 에메랄드불상을 현재는 태국의 왓 프라깨우에서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1779년 씨암왕국이 이곳을 정복하면서 약탈해갔다고 한다. 부처님은 가장 큰 가르침이 평화와 자비일진데, 그의 사상(思想)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할 짓은 아니지 않나 싶다. 그리고 같은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돕지는 못할망정 죽고 죽이는 살상을 일삼아서야 되겠는가.

 

 

가운데 문()은 굳게 닫혀있다. 문에 새겨진 그 무엇인가가 대단히 중요한 예술품이라도 되는가 보다. 유리로 차단벽까지 만들어 둔 것을 보면 말이다.

 

 

안으로 들어보려다 이내 마음을 돌려버린다.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다고 해서이다. 거기다 볼 것도 별로 없다니 일부러 들어가 볼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까짓 불상(佛像)쯤이야 잠시 후 들르게 될 왓 시사켓에서 실컷 보면 될 일이다. 대신 본당(本堂)의 외면에 만들어진 회랑(回廊)을 둘러보기로 한다. 빙 둘러서 꽤나 많은 불상들을 모셔 놓았기 때문이다. 거기다 벽면에 조각해 놓은 장식들도 잠깐의 볼거리로는 충분하다. 정교하게 새겨놓은 불화들이 우리네 눈에는 이국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하긴 부처님의 생김새들도 우리나라의 부처님들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다.

 

 

 

청동불상(靑銅佛像)들은 하도 많이 만져서 반질반질 하다. 그런데 그 불상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다 슬픈 표정이다.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문화재들은 그 나라의 역사를 반영한다. 그러니 이 불상들은 라오스인들의 정서가 담겨있다고 보면 된다. 주변의 강대국들로부터 수없이 침략을 당한 라오스인들의 저변에는 약소국의 설움이 짙게 묻어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라오스의 장인 손에서 태어난 불상의 얼굴 표정이 저리될 것은 불을 보듯이 뻔한 일이 아니겠는가.

 

 

사원은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대통령궁(Laos Presidential Palace)과 이웃해 있다. 1893년 프랑스가 총독의 관저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건물인데, ‘대통령궁이라 불리고는 있지만 주석(대통령)이 거주하지 않아 비어있는 상태란다. 너무 호화롭다는 게 그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사원의 앞마당은 정원(庭園)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조형물도 만들어 두었다. 두 남녀가 각기 뭔가를 들어 올리고 있는데, 뭔지는 모르겠다.

 

 

마당 한쪽에 커다란 항아리가 보인다. 선사시대(先史時代)의 유물인데 이 돌 항아리 속에서 사람 뼈가 발견됐다고 해서 용사의 무덤용 '석관(石棺)'일 것이라는 설()도 있지만 다수의 고고학자들은 저장고나 장례용 관으로 추정한다. 하지만 현지인들은 술동이라고 믿는단다. 항아리의 안에는 지폐(紙幣) 외에도 꽤 많은 동전(銅錢)이 들어있다. 항아리 안에다 무엇인가를 넣으면 넣는 물건의 100배가 되어 나온 다는 속설(俗說) 때문이란다. 그렇다면 관광객들이 던져 넣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라오스의 화폐 단위에는 동전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런 항아리들은 미국과 베트남이 싸우던 월남전 때 라오스 북동부에 있는 '호치민루트'에서 많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미군의 폭격으로 땅이 파이면서 들어난 것이 그 원인이 아닐까 싶다. ’호치민 루트'는 라오스 땅이 분명하다. 그러나 베트남군이 이를 사용하고 있음을 미군이 알아차리고 폭탄을 퍼부었던 곳이다. 베트남 땅에 투하한 폭탄보다 더 많은 양의 폭탄을 쏟아 부었다니 능히 그 양을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땅이 깊게 파이면서 유물들이 들어날 수도 있지 않았겠는가.

 

 

마당 한쪽 귀퉁이에는 몇 개의 나무 밑동을 모아 놓았다. 그런데 그 모양새가 예술에 가깝다. 아직 손질이 덜 된 상태인데도 말이다. 가이드의 말로는 이런 정도 굵기의 나무들은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로 많단다. 그만큼 오래 묵은 나무들이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왓 호파깨우(Wat Hophrakeo)‘ 사원을 나와 왓 씨사켓(Wat Sisaket)‘ 사원으로 향한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 서있는 사원이다. 이 사원은 호파깨우(Wat Hophrakeo)‘와는 달리 스님이 거주하고 있는 사원이다.

 

 

 

 

안으로 들면 또 다른 문()이 나온다. 이 문은 입장료를 내야만이 들어설 수 있는 문이다. 문은 오전 8시부터 12, 그리고 오후 1시부터 4시까지만 열린다니 참고해 방문하도록 하자. ’왓 씨사켓사원의 특징이라면 뭐니 뭐니 해도 수많은 불상(佛像)들을 들 수 있다. 내부에 다양한 재질로 만들어진 엄청난 양의 불상이 있는데, 조그만 것까지 합칠 경우에는 그 수는 무려 10,036개나 된단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가이드가 또 다시 복장검사를 한다. 너무 노출된 옷을 입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특히 여자들의 경우 반바지 차림을 해서는 안 된다. 스님들의 수행에 방해가 될 것을 우려해서란다. 오죽하랴. 이성을 보면 끌리는 것이 사람의 본성일진데, 그걸 참아 가며 수행을 하고 있는 스님들에게 여성의 맨다리가 보이면 흔들리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여성관광객들이 너무 우려할 일은 아니다. 사원에서 치마 같은 천을 빌려주기 때문이다. 몇몇이 빌려 입었는데 어떤 사람은 스타일이 멋지게 나타나기도 한다. 몸매가 받쳐주는 모양이다.

 

 

 

왓 씨사켓(Wat Sisaket)‘ 사원은 비엔티안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으로 1818년에 '짜오 아누웡 왕(King Chao Anouvong)’에 의해 건축되었다. 원래의 이름은 싸타싸핫사람(Satasahatsaram)‘이었다고 한다. 이곳은 옛 왕궁의 앞뜰에 위치하고 있었다는데, 지금의 대통령궁의 바로 앞이다. 시대에 관계없이 권력자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선지 몰라도 왓 씨사켓(Wat Sisaket)‘은 사암(태국의 옛 이름)이 비엔티안을 약탈했을 때도 살아남아 비엔티안에서 현재 가장 오래된 사원으로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참고로 라오스를 이끌던 3왕조 중 이곳 비엔티안 왕국의 마지막 왕이 '아누웡(안우봉)'이었다. 이 왕은 소수의 군대를 이끌고 태국과 싸우다 붙잡혀 태국으로 압송 된지 1년 만에 옥사했다고 한다. 그래서 라오스인들에겐 지금까지도 정신적 지주로 추앙받고 있단다. 알아 두어야할 것이 하나 더 있다. 태국의 북쪽지역은 과거 라오스 땅이었고 현재 태국의 '이산족'은 라오스인들이다.

 

 

 

 

이곳도 역시 본당(本堂)의 안은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이 본당에는 커다란 불상 외에도 천장과 벽면에 석가모니의 일생에 관한 불교 설화가 그려져 있다고 한다. 400년 전의 벽화(壁畫)라니 귀한 문화재일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다는 소릴 듣고 나서 흥미를 잃어버렸다. 거기다 더해 그 그림은 현재 보수작업 중이란다. 그렇다면 더더욱 안으로 들어가 볼 이유는 없어진다.

 

 

사원은 독특한 구조를 갖고 있다. 본당(本堂)과 본당을 에워싸고 있는 회랑(回廊)으로 구분되어 있다. 회랑으로 들어서면 수많은 불상들이 반갑게 맞는다. 숫자는 세어 보지 않았지만 불상의 수가 120개이고 불상 뒤 담에 벽감을 만들어 넣은 불상까지 더했을 때는 6,800여개나 된다고 한다. 실로 어마어마하다.

 

 

 

이 사원은 전쟁에서도 피해를 입지 않고 원형 그대로 남아있는 유일한 사원이란다. 19세기 초 시암왕국과의 전쟁으로 수도인 비엔티안이 함락되었을 때 점령군의 지휘관이 이곳을 보존하기 위해 머리를 써서 원정군의 본부로 사용했기 때문이란다. 가장 오래된 사원인 이곳에는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 만들어진 다양한 불상들이 보존되어있다고 해서 불상 박물관이라고도 불린다. 그 숫자가 1만 개가 넘는다니 가히 그런 이름이 붙을 만도 하겠다.

 

 

불상(佛像)의 대부분은 남자부처님이지만 개중에는 여자부처님도 있다. 유두에 세 개의 선이 드러나 있는 게 여자부처님이란다. 그리고 머리가 없는 불상이 보이는가 하면 눈에 박힌 보석을 빼 가는 바람에 눈이 사라진 불상도 있다. 그만큼 훼손된 불상들이 많다는 얘기이다. 누군가 이 사원에 있는 불상가운데 세 번째 만나는 여자부처님에게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그 말을 따라볼까 하다가 불상의 숫자가 하도 많아 그만두기로 했다. 패키지여행이라는 게 그럴만한 여유시간을 주지 않는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게 하나 있다. 어느 글에선가 이 사원이 비엔티안을 불태운 1829년의 대화재로 다 타고 단지 하나의 탑만 남았다고 했다. 몇 개의 불상과 큰 불상을 포함한 공예품, 그리고 두개의 청동불상과 19세기 초의 공예가 잘 나타나 있는 120개의 석회석으로 만든 불상만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눈앞에 널려있는 이 많은 불상들은 대체 뭐란 말인가. 아까 회랑 한 쪽 편에 파손된 불상들이 따로 보관되어 있었는데, 이를 설명한 게 아닐까 싶다. 불상의 대부분이 머리가 손상되어 있었고, 관광객조차 관심에서 멀어져 쓸쓸히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

 

 

 

회랑 벽의 윗부분을 반 돔형으로 파서 벽감(壁龕)을 만들고 그 안에다 다양한 모습의 불상들을 안치했다. 이런 작은 불상들까지 합칠 경우 왓 싸사켓사원의 불상은 1만개가 넘는단다. 아무튼 이곳엔 목 없는 부처님들도 많다 보인다. 외적이 침략해 머리를 쳐내서 부처님 감옥이라 부르는 곳에 가두었다고 한다. 유리 안에 갇혀 있는 머리 없는 부처님들이 섬뜩하기까지 하다. 참고로 라오스는 미얀마와 태국의 침공으로 패망을 거듭한 나라로서 약소국의 서러움을 무던히도 겪었던 눈물의 나라이다. 하지만 번성하던 때(17세기)도 있었다고 한다. 이른바 란쌍왕국시절인데 이란 ‘100이라는 의미고 코끼리라는 말이다. 당시에는 태국의 치앙마이까지 라오스 땅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라오스가 시간이 흐르면서 미얀마와 태국의 숱한 침공과 프랑스의 식민시대와 지배, 공산화 등을 거쳐서, 대학진학률이 3%인 최빈국이 된 것이다. 의무교육인 초등학교 진학률도 83%에 그치고 6년제인 중학교 진학률은 60%에 불과하고 한다.

 

 

본당의 외벽은 곳곳이 흠투성이다. 아까 보수작업을 하고 있는 현장을 보면서 보고 싶은 것을 보지 못한다고 서운해 했었는데, 이런 상태라면 그런 불평을 해서는 안 되겠다. 그만큼 낡아있다는 얘기이다.

 

 

 

 

문에 새겨진 압살라상이 보인다. 힌두교 경전에 나오는 천상의 무희(舞姬)이다. 불교 사원에서 웬 힌두교 무희이냐고 의아해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두 종교를 연결시키는 것은 크게 어렵지가 않다. 힌두교 경전(經典)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경전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기독교의 성경이나 불교의 불경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힌두교 경전이 그만큼 논리적이고 과학적이라는 의미이며, 종교학자들은 지구상 종교의 아버지가 힌두교라 말하기도 한다.

 

 

회랑을 빠져나오면 몇 채의 건물들이 지어져 있다. 그러니까 본당을 회랑이 둘러싸고 있고, 그 밖에는 이런 부속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왓 씨사켓이 승려들이 상주하는 절이라고 했으니 그들이 거주하는 요사채가 아닐까 싶다.

 

 

누군가는 본당 맞은편에 '탓빠톰'이라는 불탑이 보인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부처님의 유골 일부가 모셔져 있다고도 했다. 콘크리트 색깔의 반구형 건축물이라고 했는데 외모로 보아 이 탑일지도 모르겠다.

 

 

마당에는 수많은 탑()이 세워져 있다. 가이드는 우리나라의 절에서도 볼 수 있는 부도(浮屠)라고 생각하란다. 다만 승려들의 유골을 모시고 있는 우리나라의 부도와는 달리 이곳의 탑들은 이 지방 유력인사의 유골을 보관하고 있단다. 그래선지 모두가 하나같이 화려하기 짝이 없다. 그들이 가진 재력을 자랑이라도 하려는 모양이다.

 

 

 

 

 

 

 

야외 불전(佛殿)도 보인다. 정자(亭子)처럼 꾸민 건물 안에 금빛 찬란한 부처님을 모셨는데 화려하기 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