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산(牛岩山, 353m)-상당산(上黨山, 491.5m)-낙가산(洛迦山, 483m)

 

산행일 : ‘15. 11. 24()

소재지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산행코스 : 삼일공원우암산상당산성상당산동문남문남암문출렁다리깃대산낙가산김수녕양궁장(산행시간 : 4시간50)

함께한 산악회 : 기분좋은 산행

 

특징 : 청주의 진산이라는 우암산은 물론, 상당산과 것대산 낙가산 등 나머지 세 개의 산 역시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다. 때문에 바위다운 바위 하나 없는 산은 특별한 산세(山勢)를 보여주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청주시민들로부터 가장 사람 받고 있는 산() 중의 하나이다. 산이 별로 높지 않아 접근성이 좋은데다 상당산성이라는 빼어난 곡선미를 지닌 옛 산성까지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때문인지 청주시청에서는 산을 아예 시민들의 휴식처로 가꾸어 놓았다. 잘 정비된 길에는 벤치나 정자, 체육시설 등은 물론이고 산길 곳곳에다 화장실까지 만들어 놓았다. 거기다 산성을 빙 둘러 둘레길을 조성해 놓았다. 둘레길을 따라 성을 한 바퀴 돌고 난 뒤에, 낙가산이나 우암산 등 나머지 산들을 연계시킨다면 하루의 산행코스로는 이만한 코스도 없을 듯 싶다.

 

산행들머리는 삼일공원 주차장(청주시 상당구 수동 159-1)

경부고속도로 청주 I.C에서 내려와 좌회전, 36번 국도를 타고 청주 시내로 들어온다. 시내를 통과할 즈음 만나게 되는 상당삼거리(상당구 수동)에서 좌회전, 곧이어 나타나는 수협은행 청주지점앞 사거리에서 우회전 하면 잠시 후 삼일공원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산자락으로 놓인 나무계단을 밟고 오르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들머리에 우암산 걷기길 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니 한번쯤 살펴보고 길을 나설 일이다. 하지만 이 안내도는 우암산만 그려져 있을 따름이다. 이왕이면 상당산까지 아울렀으면 좋았을 텐데도 말이다.

 

 

 

산행을 서두를 필요는 없다. 주차장 바로 아래에 꼭 둘러봐야 할 시설이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열들의 숭고한 넋을 기리고, 후손에게는 3·1정신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조성된 삼일공원(三一公園)이다. 공원에는 광복 68주년을 기념해서 세웠다는 항일독립운동기념탑이 있고, 그 옆에는 동상(銅像) 몇 개가 반원형으로 둘러서 있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충청북도 출신인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 1861~1922)와 우당 권동진(1861~1947), 청암 권병덕(權秉悳, 1867~1944), 동오 신홍식(申洪植, 1872~1937), 은재 신석구(申錫九, 1875~1950), 청오 정춘수(鄭春洙) 등 여섯 명이다. 하지만 이 중에서 정춘수는 3·1운동 후 변절하여 민족지도자로서의 품위를 잃었다 하여 199628일 시민단체에 의해 동상이 철거되었다고 한다. 좌대(座臺)만 남아 있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그것마저도 사라지고 횃불 모양의 조각품 하나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주차장으로 돌아와 산행을 시작한다. 산행은 데크로 만들어진 계단을 오르면서 시작된다. 계단이 끝나면 곧이어 완만한 능선이 길손을 맞는다. 그런데 능선이 온통 빨갛게 물들어 있는 게 아니겠는가. 겨울이 무르익어가고 있는 시점에 가을의 낭만을 만나다니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오는 도중에 산행대장이 멋진 가을 경치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하더니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가을의 풍경화(風景畵)는 이것으로 끝이었다. 이후부터는 보여주는 그림마다 앙상한 초겨울 일색이었던 것이다.

 

 

산길은 완만한 편이다. 가끔 통나무계단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자지 가파르지 않아 오르는데 별 어려움이 없다. 걷는 것 그 자체를 즐기면서 걸어볼 일이다. 마침 등산로 주변에는 갖가지 체육시설들까지 갖추어져 있다. 준비운동 없이 산행을 시작했다면 몸이라도 풀어볼 일이다. 거기다 곳곳에 벤치도 놓아두었다. 이건 숫제 산을 통째로 웰빙(well-being)공간으로 바꿔놔 버렸다.

 

 

 

산행을 시작한지 15분 남짓 지나면 성공회 성당에서 올라오는 길과 합쳐지는 삼거리(이정표 : 우암산 정상1.2Km/ 성공회성당0.8Km/ 삼일공원0.5Km)를 지나게 되고, 이어서 7~8분 후에는 하늘을 향해 치솟은 거대한 철탑들을 만나게 된다. KBSMBC의 방송 송신탑(送信塔)들이다.

 

 

송신탑에서 잠시 내려서면 안부삼거리(이정표 : 우암산 정상0.6Km/ 보현사0.5Km/ 삼일공원1.1Km)이다. 우암산 정상으로 가는 길은 이곳에서 둘로 나뉜다. 하지만 잠시 후에 다시 합쳐지니 마음 내키는 대로 진행하면 된다. 구태여 고민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얘기이다. 다만 자연생태학습공원(自然生態學習公園)’의 관찰로(觀察路)를 따르고 싶다면 오른편 계곡길로, 육산(肉山)으로 이루어진 우암산에서 제대로 된 바위라도 하나 구경하고 싶다면 왼편의 능선 길을 따르면 될 일이다.

 

 

왼편 능선을 따른다. 행여 색다른 볼거리라도 있을까 해서이다. 하지만 어설픈 바위들을 제외하고는 눈요깃거리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하긴 바위다운 바위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순수한 흙산에서 저 정도의 생김새라면 눈요깃거리로 쳐도 불만은 없을 것이지만 말이다.

 

 

어설픈 바윗길을 잠시 치고 오르면 산불감시 망루(이정표 : 우암산 정상/ 안덕벌1.2Km/ 삼일공원1.6Km)가 나타난다. 왼편은 안덕벌에서 올라오는 길이다. 정상은 체육시설들이 설치된 오른편 방향이다.

 

 

체육시설을 지나면 또 다시 삼거리(이정표 : 광덕사/ 우암산 생태터널/ 송신탑)이다. 우암산 정상은 오른편 광덕사 방향으로 조금 더 가야만 만날 수 있다. 상당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에서 약간 비켜나 있기 때문이다. 우암산 정상을 둘러본 뒤 다시 이곳 삼거리로 되돌아 나와야만 함은 물론이다.

 

 

 

잠시 후 청주의 진산(鎭山)이라는 우암산(牛岩山)에 오른다. 산세가 소가 누운 모양새와 같다하여 와우산(臥牛山)이란 이름으로도 불리는 산이다. 전국의 읍지(邑誌)들을 모아 성책(成冊)여지도서(輿地圖書)’에서 관아의 동쪽 2리에 있다. 상령산에서 뻗어 나와 향교의 으뜸이 되는 줄기가 된다.’라는 설명을 덧붙이면서 와우산으로 적고 있는 것이 그 증거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택리지(擇里志)’에 기록된 '당이산(唐羡山)'이나 대모산(大母山), 모암산(母岩山), 장암산(壯岩山), 목암산(牧岩山), 목은산(牧隱山) 등 수많은 별칭(別稱)들을 갖고 있기도 하다. 별칭들 중 몇몇에 목()이란 글자가 들어 있는 걸로 봐서 옛날 이 부근에 목장이 있었나 보다. 그렇다면 이곳이 서원팔경(西原八景) 중 제7경인 우산목적(牛山牧笛)이 아닐까 싶다. 목동들의 피리소리가 자못 들을만하다는 그 와우산 말이다. 서원(西原)이란 이곳 청주의 옛 이름이다. 청주는 백제의 상당현이었다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뒤 685(신문왕 5)에 서원소경(西原小京)을 설치했다. 이후 757(경덕왕 16)에 전국 행정구역 명칭을 중국식으로 고치면서 서원소경을 서원경(西原京)으로 바꿨다. 청주라는 이름으로 개칭한 것은 고려 개국 후 태조 23(940) 부터였다. 그러니까 서원팔경이란 청주에서 가장 빼어난 8가지의 볼거리라는 얘기이다. 서원팔경이 어떻게 전해졌는지는 잠시 후에 만나게 될 또 다른 서원팔경에서 얘기해보도록 하겠다.

 

 

삼거리로 되돌아와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상당산으로 향하는 능선은 가파른 내리막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그 가파름은 안부(鞍部)에 있는 바람매기고개에 이를 때까지 상당히(20) 오랫동안 계속된다. 고도(高度)를 많이 떨어뜨렸음은 당연한 일이다. 우암산이 상당산에서 갈라져 나온 하나의 봉우리에 불과한데도 불구하고 이름에 ()’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이유일 것이다.

 

 

바람매기고개는 지금 왕복 6차선 도로가 나있다. 본의 아니게 능선이 끊어져 버린 셈이다. 이에 따라 청주시에서는 고갯마루에다 생태터널을 만들어 놓았다. ·물들이 마음 놓고 오고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 길이 낮에는 사람들의 차지가 되는 모양이다. 터널 위에다 벤치까지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해 놓았다. 쉼터의 한켠에서 커피봉사를 하는 분들이 보인다. 읽어보라고 주는 팸플릿(pamphlet)을 보니 동산교회라는 인근 교회에서 나온 모양이다. 참으로 고마운 분들이다. 하지만 그들의 봉사활동을 욕되게 하는 사람들도 일부 보였다. 커피를 마시고 난 일회용 컵들이 등산로 주변 곳곳에서 나뒹굴고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바람매기고개란 바람을 막아주는 고개라는 뜻이다. 옛날 상리(상당구 율량동 상리) 사람들이 명암약수터로 갈 때 이용하던 고개인데, 길이 험하고 높아 바람을 막아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인용)

 

 

바람매기고개를 지나면서 능선은 다시 오름짓을 시작한다. 그러나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가는 것을 보면 그다지 급할 것이 없나보다. 하긴 3.5Km 정도가 떨어진 상당산성까지 가는 동안 고도를 200m만 높이면 되니 구태여 서두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바람매기 고개 근처에서 청주랜드갈림길(이정표 : 상당산성 3.4Km/ 청주랜드0.5Km/ 삼일공원3.5Km/ 우암산 정상1.1Km)을 지나 별다른 특징이 없는 능선을 15분 정도 더 걸으면 안부사거리(이정표 : 산성1.6Km/ 명암동0.2Km/ 율량30.3Km/ 생태육교1.8Km)에 이른다. 오른편에 보이는 돔(dome)처럼 생긴 건물이 청주랜드인가 보다.

 

 

 

사거리를 지나면서 능선은 서서히 가팔라져 간다. 그러다 쉼터용 정자(亭子)를 지나면서부터는 제법 가파르게 변한다. 그렇다고 버거울 정도는 아니다. 그저 조금 전까지 걸어온 것에 비해 상당히 가팔라졌다는 의미이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 가파름 끝에 약수터가 있다. 어쩌면 이렇게도 절묘한 곳에 자리 잡았을까. 힘들게 올라온 이들에게는 감로수(甘露水)가 따로 없을 것이기에 하는 말이다. 앞서가던 집사람까지 불러 샘물을 마셔본다. 아니나 다를까 그 맛은 시원하면서도 달았다.

 

 

약수터까지 왔다면 상당산성(上黨山城)은 다 온 것이나 다름없다. 10분이 채 안되어 성벽 아래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성벽은 나무데크 계단을 이용해 오르도록 해 놓았다. 계단의 아래에 세워진 안내판에 한남금북정맥에 대한 설명이 적혀있는 걸로 보아 정맥이 이곳을 지나가는 모양이다. 그리고 성벽 위에는 조망도(眺望圖)가 세워져 있다. 조금 전에 올랐던 우암산은 물론이고, 가까이는 청주시내가 멀게는 미호천과 증평평야까지 펼쳐진다지만 짙은 안개에 잠겨버린 산하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고 있다. 겨우 보이는 풍경 또한 보잘 것이 없다. 상당산성을 둘러싸고 있는 구름이 서원팔경(西原八景)의 제4경인 상당귀운(上黨歸雲)에 꼽힐 정도로 자못 빼어나다고 알려졌는데도 말이다. 구름과 안개의 차이 때문인 모양이다.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아름다운 것을 볼 수 있는 행운은 하늘이 도와주어야만 가능한 일이 아니겠는가. 서원팔경은 1930년대 이병연이 쓴 조선환여승람이라는 책에 수록돼 있다. 이 책은 각 지역의 정보를 적은 지리지(地理志)’인데, 아쉽게도 저자가 누구인가는 알려지지 않는다. 아무튼 서원팔경은 당시 청주사람들 사이에 회자될 만큼 아름다운 곳임은 분명하다 할 것이다. 참고로 서원팔경의 나머지 다섯은 석교석구(石橋石狗 : 남석교에 서 있는 돌 개), 금천어화(金川漁火 : 쇠내개울의 고기잡이 횃불), 동장철학(銅檣鐵鶴 : 철당간 위에 앉아있는 학), 선루제월(仙樓霽月 : 망선루에 걸려있는 달), 봉림조하(鳳林朝霞 : 봉림에 자욱한 아침안개)이다.

 

 

왼편 방향의 성벽을 따른다. 서문(西門)인 미호문(弭虎門)을 향해 걷는 길이다. 왼편으로 시야(視野)가 넓게 터지지만 안타깝게도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없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미호문에 닿는다. 미호문은 거대한 2개의 무사석을 쌓고 그 위에 장대석을 올려놓았다. 바깥쪽으로 돌출된 성벽이 옹성의 형태를 띤 것이 이 문의 특징이다. 사적 제212호인 상당산성은 상당산(또는 상령산) 능선을 따라 쌓은 둘레 4.2km의 산성이다. 초기(백제시대)는 흙으로 쌓은 토성(土城)이 이었으나 조선시대 임진왜란을 겪고 나서는 충남 서산 해미읍성에 있던 충청병마절도사영을 청주로 옮겨(1716, 숙종 42)오면서 돌을 쌓아 석성(石城)으로 만들었다. 일정하지 않은 석재로 수직에 가까운 성벽을 구축하고 그 안쪽은 토사(土砂)로 쌓아올리는 내탁공법(內托工法)으로 축조하였으며 높이는 4.7m이다. 현재 남아 있는 성곽시설로는 남문을 비롯하여 동문과 서문, 3개의 치성(雉城 : 성벽에서 돌출시켜 쌓은 성벽), 2개의 암문(暗門 : 누각이 없이 적에게 보이지 않게 숨겨 만든 성문), 2곳의 장대(將臺), 15개의 포루(砲樓)터 외에 성안 주둔병력의 식수를 대기 위한 대소 2곳의 연못이 있다.

 

 

계속해서 성벽을 따른다. 구불구불 이어진 성벽의 곡선미가 가장 아름다운 구간으로 알려져 있다. 산성은 마치 뱀처럼 구불거리며 모퉁이를 돌아 사라진다. 청주는 충주, 보은과 더불어 삼국시대 때 영토다툼이 빈번했던 격전지(激戰地)이다. 그 흔적을 잘 보여주는 것이 정교하게 쌓은 산성(山城)이라 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자연과의 조화가 아름답고, 우아한 곡선미가 돋보이는 곳이 바로 청주의 상당산성(上黨山城)이다. 이 산성은 이웃에 위치한 다른 산성들(삼년·충주·덕주·미륵·온달·장미산성)들과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되어 세계유산 등재를 기다리고 있다. 그 중요성이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상당산에도 둘레길이 나있다. 상당산성의 성벽을 따라 한 바퀴 도는 길이다. 그런데 이 둘레길은 성곽(城郭)길 외에도 숲으로 난 길을 하나 더 두고 있다. 우린 물론 성곽 위를 걷고 있다. 안개 때문에 비록 조망(眺望)을 즐기지는 못하지만 부드럽게 휘어지는 성곽의 곡선미라도 실컷 눈에 담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여름철 뙤약볕이라면 숲길이 더 낫지 않을까 싶다. 두 길은 걷는 내내 이어지고 갈라지기를 반복한다. 길은 중간에 백화산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기도 하고, 또 어떤 곳에서는 포루터(砲樓址)나 성안의 물을 밖으로 내보내는 시설인 수구(水口) 등 유적들을 만나면서 이어진다.

 

 

성벽으로 올라선지 30분이 조금 못되었을 즈음 오른편 산자락으로 오솔길이 하나 열린다. 상당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다. 하지만 이곳에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지 않다. 산악회 시그널(signal)들이 몇 개 매달려 있을 따름이니 주의해서 살펴볼 일이다. 서너 평 넓이의 공터로 이루어진 상당산 정상은 말뚝 모양의 정상표지석과 삼각점이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어지럽게 까발려져 있어 보기가 흉할 정도이다. 옛날에 이곳에 있었다는 포루(砲樓)라도 복원하려는 모양이다. 정상에서의 시야(視野)는 넓게 열리는 편이다. 비록 안개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말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2시간20분이 지났다.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된 것을 보면 이달 중순에 다녀온 스페인과 포르투갈 여행에서 쌓인 피로가 만만치 않았던 모양이다.

 

 

상당산에서 정점을 찍은 산등성이는 완만하게 내리막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잠시 후 개구멍처럼 뚫린 문()이 하나 나온다. 문루(門樓)는 보이지 않는다. 이곳이 동암문(東暗門)이다. 암문은 적의 눈을 피해 몰래 사람이 드나들거나 식량을 운반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비밀문(秘密門)이다.

 

 

동암문을 지나면 잠시 후 아담한 진동문(鎭東門)에 이른다. 진동문은 산성의 동문이다. 이곳에서 성벽길이 끝난다. 보수공사로 인해 길이 막혀 있기 때문이다. 우회해서 다시 성벽으로 올라설 수도 있겠지만 그만두기로 한다. 그보다는 산성마을을 둘러보고 싶어서이다. 덕분에 1992년에 복원했다는 동장대는 들리지 못했다. 장대는 우두머리 장수가 군사를 지휘하는 곳으로 일반적으로 사방이 잘 조망되는 곳에 세운다.

 

 

진동문과 헤어지면 곧바로 산성마을이다. 제법 큰 저수지를 끼고 있는 산성마을은 닭백숙과 대추술로 유명하다. 1990년대 전후로 이 마을의 집 중 70% 이상이 닭백숙과 대추술을 팔았다고 한다. 특히 대추술은 청주의 대표 전통주로 유명했다. 같이 걷고 있던 일행 몇이 식당으로 들어가지만 우리 부부는 그만두기로 한다. 구수한 두부에다 대추술이라도 한잔 곁들이고 싶었지만 도시락을 준비해왔기 때문이다. 산악회 버스의 출발시간에 맞추려면 부지런히 걸어야 싸온 도시락을 비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저수지를 왼편에 끼고 돈 후, 산자락을 치고 오른다. 저수지 보수공사로 인해 저수지 왼편이 막혀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문 앞에 있는 너른 잔디광장에 들러보려면 왼편 도로를 따르는 것이 옳은 방법이다.

 

 

잠시 후 남문(南門), 즉 공남문(控南門)에 올라선다. 상당산성의 정문 격인 공남문은 우아한 무지개 형태이고, 문짝에는 도깨비가 그려져 있다. 성문의 안은 특이하게도 옹벽(甕壁)으로 되어 있다. 성문 바깥쪽에 옹성(甕城)을 쌓은 다른 성곽과 달리 성 안쪽에다 내옹성을 만든 셈이다. 자연지형을 이용했다지만 적군이 성 안으로 곧바로 들어올 수 없도록 하기 위해 만든 성문방어벽인 셈이다.

 

 

남문을 나선다. 혹시라도 뭔가 볼거리를 놓칠까 해서이다. 성 밖은 너른 잔디밭이다. 그리고 그 끝에서 비석(碑石) 하나가 길손을 맞고 있다. 매월당 김시습의 유산성(遊山城)’ 시비(詩碑)이다. ‘꽃다운 풀 향기 짚신에 스며들고, 활짝 갠 풍광 싱그럽기도 하여라. 들꽃마다 벌이 와 꽃술 따 물었고, 살진 고사리 비 갠 뒤라 더욱 향긋해라. 멀리 바라보니 산하는 웅장하고, 높이 오르니 의기는 드높아라. 사양을 말고 저녁 내내 바라보게, 내일이면 남방으로 떠나갈 것이니우리 국토의 순례를 즐겼던 김시습 선생이 상당산성을 빼먹었을 리가 없다. 꽃피는 춘사월(春四月)에 상당산성을 찾은 김시습은 산성에 올라 시를 남기고 낙가산 아래 보살사에서 하룻밤을 머문 뒤 전라도로 향했다고 한다. 그 시를 새겨놓은 것이다.

 

 

남문으로 다시 돌아와 다시 둘레길을 따른다. 이번에는 산길이다. 보드라운 황토로 이루어진 산길이 여간 고운 게 아니다. 그렇다고 성벽으로부터 돌출시켜 전방과 좌우 방향에서 접근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한 장치인 치성(雉城)을 둘러보는 걸 빼먹었을 리는 없다. 하긴 산길과 성곽길이 바로 옆이기 때문에 마음만 먹는다면 놓치려고 해도 놓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남문에서 10분쯤 걸으면 남암문(南暗門)이다. 것대산으로 가려면 이곳에서 암문으로 빠져나가야 한다. 문 앞에 것대산 가는 길, 1Km 지점 출렁다리 경유)라고 쓰인 안내판이 세워져 있으니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산성을 한 바퀴 둘러보는 데는 1시간10분이 걸렸다.

 

 

암문을 나서면 잠시 후 길이 두 갈래(이정표 : 것대산 1.7Km/ 산성 서문 1.2Km, 산성 남문 0.6Km)로 나뉜다. 왼편에 보이는 오솔길은 아까 남문 앞 잔디광장에서 보았던 왼편 산자락으로 나있던 오솔길로 연결되는 모양이다. 이어서 별 특징이 없는 능선을 따라 10분 정도를 걸으면 출렁다리가 나온다.

 

 

출렁다리 아래에는 왕복 2차선의 도로가 지나고 있다. 예전에는 것대산과 상당산성을 오갈 때 이 도로를 무단 횡단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사고도 가끔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런 불상사를 막기 위해 놓은 다리가 바로 출렁다리라고 한다. 다리 입구에는 두 개의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안전을 위하여 한꺼번에 30명 이상이 건너지 말라는 내용과 다른 하나는 다리의 보호를 위해 건널 때 등산용 스틱을 사용하지 말라는 내용이다. 하여간 출렁다리는 스릴 만점이다. 다른 곳에서 만났던 출렁다리들 보다 유난히 더 흔들리기 때문이다. 1.5m에 길이라고 해봐야 고작 50m를 넘기지 못하는 데도 말이다.

 

 

 

출렁다리에서 15분 조금 못되게 더 걸으면 우암어린이회관으로 내려가는 길이 나뉘는 삼거리(이정표 : 상봉재70m, 낙가산 정상 2.5Km/ 우암어린이회관2.7Km/ 상당산성1.1Km)에 이르게 되고, 곧이어 상봉재(이정표 : 낙가산2.4Km/ 것대마을1.5Km/ 옹달샘0.1Km/ 상당산성1.1Km)에 내려서게 된다. 상봉재는 옛날 미원이나 낭성의 소몰이꾼들이 청주로 소 팔러 다니며 넘나들던 고개라고 한다. 이 고개는 남편의 유지(遺志)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자결을 하고 만 기생 김해월의 전설(傳說)도 간직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청주군관이 1728년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다 전사하였는데, 애첩이었던 김해월이 낳은 아이가 단명 운이라며 스님이 아이를 절에 맡기고 10일 한번 이 고개에서 만나되 고개를 넘지 말라했는데 애첩이 반가운 마음에 고개를 넘자, 아이가 달려오다 연못에 빠져 죽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정표에 나와 있는 옹달샘은 청주를 길게 관통하는 무심천의 발원지라고 하니 참조할 일이다. 참고로 청주에서 가장 높은 고개라는 상봉(上峰)고개는 상봉산에 있는 고개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고개는 것대산에 있는 고개라고 해서 것대고개라는 또 다른 이름도 갖고 있다. 상봉산과 것대산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으니 둘 모두 맞는 이름일 것이다. 하지만 요 아래에 있는 마을의 이름이 것대인 걸로 보아 것대고개가 더 어울리지 않나 싶다. 것대에서 명암동 중봉(中峰)로 넘어가는 고개이기 때문이다.

 

 

상봉재를 지난 능선은 다시 오름짓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다지 가파르지는 않은 편이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더 걸으면 다섯 개의 봉수대로 이루어진 것대산봉수대(烽燧臺 : 충청북도문화재자료 제26)’가 나온다. 동서길이 26m, 남북너비 15.5m인 이 봉수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청주목편에 '것대산 봉수는 청주 동쪽 11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봉수는 문의현(文義縣) 소이산(所耳山)과 진천현(鎭川縣)의 소을산(所乙山) 사이 중간거점 봉수로서의 역할을 했다. 민묘(民墓)들로 인해 파괴되어 북쪽면과 동쪽면의 일부만이 남아있었으나 2009년에 불을 피워 연기를 올리던 봉대(烽臺:봉돈수대(燧臺)를 복원해 놓았다.

 

 

봉수대 아래에는 화장실까지 갖춘 주차장이 만들어져 있다. 이곳에서 통일준비 한마음 봉화 대축제가 열렸다는데 이때 만들어진 시설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주차장을 지나 조금만 더 가면 드디어 깃대산 정상이다. 상당산성의 남암문에서 이곳까지는 40분이 걸렸다.

 

 

것대산 정상에는 검은 오석(烏石)으로 만든 충청북도 특유의 정상표지석과 이정표(낙가산 정상1.4Km/ 한남금북정맥의 선도산4.8Km/ 상봉재1.3Km) 외에도 정자(亭子)와 깃대 등의 다른 시설들도 갖추고 있다. 패러글라이딩(paragliding) 활공장을 겸하고 있어 그에 필요한 시설들일 것이다. 한편 상당산성에서부터 함께 이어오던 한남금북정맥은 이곳에서 왼편으로 갈려나가니 참조할 일이다. 참고로 '것대산'은 옛 문헌에 '거차대산(居次大山)' 또는 '거질대산(居叱大山)' 등으로 차자(借字 : 남의 나라 글자를 빌려서 자기나라 말을 적는 것)되어 나온다. '居次大''居叱大'는 모두 '것대'로 재구된다. '거질대산''居叱大'''이 차자 표기에서 '의 표기인 줄을 모르고 음으로 읽은 지명이라고 한다. 또한 '것대'는 상당산성(上黨山城) 밖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거죽'(居竹)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것대'의 어원(語源)은 알려지지 않는다.

 

 

것대산에서 낙가산으로 이어지는 산길은 한마디로 순하다. 보드라운 흙길인데다 경사까지도 완만한 것이다. 산책하는 기분으로 20분 남짓 걸으면 낙가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참 한 가지를 빠뜨릴 뻔 했다. 낙가산을 오르기 직전에 가파른 오르막길을 치고 올라야만 한다는 것을 말이다.

 

 

가운데가 약간 솟아오른 분지(盆地) 모양으로 이루어진 정상의 가장 윗자리는 무덤이 차지하고 있다. 무덤에게 자리를 내준 정상표지석은 그 아래에 뻘쭘하게 앉아있는 모양새이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산만한 풍경이라는 느낌이 든다. 정상석과 이정표(원봉공원(용암동성당) 5.5Km/ 것대산 1.4Km) 그리고 산불감시초소와 이동통신사의 철탑, 운동기구 등이 이곳저곳에 어지럽게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낙가산 정상도 빼어난 풍광을 자랑한다. 낙가석조(落伽夕照) 즉 낙가산에서 본 저녁노을이 서원팔경(西原八景)의 가장 윗자리(1)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풍경은 아무 때나 보여주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시간이 일러 낙조를 볼 수 없는 것은 그렇다 치고라도 아직까지도 안개가 걷히지 않아 조망까지 딱 막아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정상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오른편은 김수녕양궁장으로 내려가는 길이고, 왼편으로 가면 동남택지개발예정지구로 내려서게 된다. 오른편으로 향한다. 하산 길은 가파르게 시작된다. 하지만 금방 완만해지더니 갈림길(이정표 : 양궁장1.9Km/ 원봉공원5.1Km/ 낙가산 정상0.4Km) 하나를 만든다. 이어서 노랗게 물든 낙엽송 숲길을 가파르게 내려서면 13~4분 후에는 또 다른 삼거리(이정표 : 양궁장0.6Km/ 보살사0.7Km/ 낙가산1.7Km)를 만난다. 이정표에 나와 있는 보살사가 김시습선생이 머물렀다는 사찰이 아닐까 싶다.

 

 

산행날머리는 김수녕양궁장 주차장

하산 길을 얘기할 때 알아두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다보면 가끔은 제법 높은 봉우리가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어김없이 우회로(迂廻路)를 만들고 있으니 구태여 올라갈 필요는 없다는 얘기이다. ‘보살사 갈림길을 지난 후 제법 긴 데크계단을 내려서면 산길은 다시 완만하게 변하고 이어서 잠시 후에는 김수녕양궁장주차장(이정표 : 낙가산 정상 2.3Km)에 내려서게 되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김수녕양궁장(金水寧洋弓場)‘88 서울올림픽에서 2관왕, ‘89 세계양궁선수권에서 전관왕에 오르는 등 세계 최고의 여궁사로 부각한 충청북도 출신인 김수녕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조성된 양궁장이다. 총공사비 402,400여 만 원을 투입하여 1994년에 건립한 시설로서 8322대지에 국제양궁연맹(FITA)이 공인한 주경기장과, 보조경기장, 본부석 및 부대시설, 주차장 등을 갖추고 있다. 오늘 산행은 총 5시간이 걸렸다. 중간에 간식을 먹느라 쉬었던 시간을 감안할 경우 4시간50분이 걸린 셈이다.

 

갈모봉(582m)

 

산행일 : ‘15. 8. 22()

소재지 : 충북 괴산군 청천면과 경북 문경시 가은읍의 경계

산행코스 : 선유동주차장칠형제바위안부삼거리정상남봉비행기바위선유동휴게소선유구곡선유동주차장(산행시간 : 선유동휴게소까지 2시간)

함께한 산악회 : 가보기산악회

 

특징 : 괴산은 구곡(九曲)의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구곡을 꼬리에다 붙이고 있는 계곡들이 많다는 얘기이다. 구곡(九曲)이란 중국 남송의 유학자인 주희(朱熹, 1130~1200)가 말년에 푸젠성(福建省) 무이산 계곡에 설정한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떠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빼어난 산천경승을 배경으로 한 아홉 굽이에 이름을 지은 성리문화구현의 공간이다. 전국에 100여 곳이 있는데, 이곳 괴산에 7개나 밀집해 있다. 특히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과 관련한 유적이 많은 화양구곡(華陽九曲)은 지난해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110호로 지정됐을 정도이다. 화양구곡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또 하나의 멋진 구곡이 있다. 퇴계 이황(李滉, 1502~1570)선생께서 이름을 지었다는 선유구곡(仙遊九曲)이다. 이 선유구곡을 품고 있는 산이 바로 갈모봉이다. 때문에 갈모봉 자체보다는 선유구곡으로 인해 세상에 알려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암괴석과 조망 등 다른 유명산들과 견주어도 뒤질 게 없는 산세를 지녔지만 산행코스가 짧기 때문에 갈모봉 하나만 갖고는 이곳까지 찾아오기가 어정쩡했기 때문이다. 요즘은 많은 산악회들이 선유구곡에서의 물놀이를 함께 넣어 산행계획을 짜고 있고, 이로 인해 갈모봉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산행들머리는 선유동주차장(괴산군 청천면 관평리 518-1)

중부내륙고속도 문경새재 I.C에서 내려와 901번 지방도를 타고 가은읍으로 들어온다. 가은읍에서 922번 지방도로 바꿔 타고 청천면(괴산군) 방면으로 들어가면 선유동 계곡이다. 잠시 후에 만나게 되는 상관평 삼거리(가은읍 완장리)’에서 왼편 517번 지방도로 옮겨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산행들머리인 괴산 선유구곡의 입구에 위치한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화장실 등 각종 편의시설을 갖춘 주차장은 생각했던 것 보다 엄청나게 크다. 그만큼 선유구곡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매표소 옆으로 난 도로를 따라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산행을 나서기 전 혹시나 해서 두리번거려 보지만 산행안내도는 보이지 않는다. 고작 괴산군 관광안내도선유구곡 안내도가 전부이다. 이유는 금방 알게 됐다.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갈모봉의 탐방을 금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매표소에서 100m쯤 들어가면 계곡매점이 나온다. 여름철에 민박(民泊)을 겸한단다. 매점의 바로 앞에 길마봉이라고 쓰인 팻말이 보일 것이다. 비록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만든 시설물은 아니지만 이를 따라야 한다. 화살표 방향은 개울이다. 그리고 개울에는 징검다리가 놓여있다. 웬만한 장마에도 끄떡없을 정도로 든든하니 망설이지 말고 건너고 볼일이다.

 

 

 

개울을 건너 맞은편 언덕으로 오른다. 그런데 입구에다 경고문을 적은 현수막을 매달아 놓았다. ‘남군자산갈모봉의 출입을 금한단다. 물론 국립공원관리공단의 작품이다. 위반하면 과태료가 30만원이나 된다지만 누구 하나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그냥 지나친다. 바닥이 반질반질하게 윤이 나있는 것을 보면 이런 막무가내 통과는 오늘 하루뿐만이 아닌 모양이다. 뭔가 이유가 있어 입산을 통제하고 있겠지만, 만일 그 이유가 타당하다면 적극적으로 막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차라리 입산을 풀 것이고 말이다. 사실 갈모봉은 서울 인근 산들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등산로는 정비가 필요할 정도로 많이 황폐해져 있었다. 그래서 차라리 입산을 해제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어렵게 얘기해 보는 것이다.

 

 

언덕을 오르면 잘 가꾼 묘역(墓域)이 나온다. 산줄기의 끝자락에 위치해 조망이 뛰어난 곳이다. ‘배산임수(背山臨水)’라는 말이 있다. 풍수지리에서 택지를 정할 때 이상적으로 여기는 요건으로, 뒤에는 산이나 언덕이 있고 앞에는 강이나 개울 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승을 떠난 인간들이 쉬어야 할 묘역도 이와 다를 게 없다고 봐야 한다. 한마디로 이곳이 명당으로 보였다는 얘기이다. 갈모봉을 배경 삼아 화양천의 상류인 삼송천이 흐르고 있는 송면리 들녘을 내려다보고 있는 배산임수의 명당자리 말이다. 그 풍경은 잠시 후에 만나게 될 전망바위에서의 조망사진을 보고 미루어 짐작하면 된다.

 

 

묘역을 지나면 평범한 산길이 이어진다. 물론 흙길이다. 그러나 얼마 안가 산길은 서서히 바위의 빈도를 높여간다. 그러다가 10분쯤 후, 그러니까 산행을 시작한지 15분쯤 후에는 전망 좋은 바위 위에 올라서게 된다. 아까 묘역에서 보았던 풍광이 다시 한 번 펼쳐지는데, 그 넓이는 훨씬 더 광활해졌다.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 자신의 한계를 깨길 원했던 갈매기 조나단의 말이 증명되는 순간이라고나 할까? 하여튼 발아래에 내려다보이는 송면리 인근의 들녘은 물론이고, 그 뒤에 있는 낙영산과 가령산, 그리고 도명산과 백악산까지 손에 잡힐 듯이 가깝게 다가온다.

 

 

 

 

조망을 즐기다 다시 길을 나서면 2~3분 후 거대한 바위들이 한꺼번에 몰려 있는 것이 보인다. 바로 갈모봉의 명물 중 하나인 칠형제바위이다. 산길은 그 바위들의 사이로 나있다. 다시 말해 석문을 통과한다고 보면 될 것 같다. 그러나 이곳에는 그저 바위 사이를 빠져나가는 것만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잠시 짬을 내서라도 바위 위로 올라가 볼 것을 강력 추천한다. 올라가는 게 약간 부담스러울 수도 있을지 모르나 그만한 보람은 있다. 좌우로 시야(視野)가 열리는데 그 풍광이 자못 빼어나기 때문이다. 물론 좌우를 다 보고 싶다면 두 번을 올라야 하겠지만 말이다. 왼편은 조금 전에 보았던 낙영산 쪽 풍경이 펼쳐지고, 오른편으로는 대야산을 비롯한 수많은 산군(山群)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칠형제바위를 지나면서 산길은 다시 평범하게 변한다. 그리고 완만(緩慢)하면서도 긴 오름과 짧은 내림을 반복하면서 고도(高度)를 높여간다. 가파른 오르막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경사가 힘들 정도는 아니고 그 거리 또한 오래지 않아 끝을 맺기 때문에 힘들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는 얘기일 따름이다.

 

 

평범하던 산길은 오래가지는 않는다. 15분쯤 지나면 길가에 다시 커다란 바위들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이어서 5~6m 정도의 바위벼랑이 앞을 가로막는다. 바위에 안전로프가 매어져 있으나 구태여 로프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오를 수는 있다. 그보다는 로프가 매달린 곳까지 오르는 구간이 더 힘들다. 바위가 수직(垂直)에 가까울 뿐만 아니라 마땅히 잡고 오를만한 크랙(crack)도 발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고달픈 삶은 갈모봉에도 있었다. 척박(瘠薄)한 바위틈에서 자라는 것만으로도 힘겨운데, 거기다 사람들이 빈번하게 다니는 등산로에 자리 잡았다. 그것만 해도 다행일 것이다. 그나마 그곳이 뭔가에 의지하지 않고는 도무지 오를 수 없는 난코스라는 게 문제다. 크랙이 발달하지 않은 암벽이다 보니 사람들은 뭔가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을 테고, 그 덕분에 소나무의 줄기는 반질반질하게 윤이 나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나무는 굳세게 잘 자라고 있다. 그 모습에서 난 또 하나의 삶을 배웠고 말이다.

 

 

바위 위에 오르면 다시 한 번 시야(視野)가 뻥 뚫린다. 이번에는 한두 곳이 아니고 거의 사방으로 열린다. 우선 진행 방향으로는 갈모봉 정상이 올려다 보이고, 오른편에는 희양산에서 대야산을 거쳐 조항산과 청화산에 이르는 백두대간의 마룻금, 그리고 왼편에는 가령산과 낙영산, 백악산이 시원스럽다.

 

 

전망바위, 아니 바위로 이루어진 봉우리이니 전망봉이라고 부르는 게 옳겠다. 전망봉을 내려서면 또 다시 평범한 산길이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그렇게 20분 정도를 걸으면 안부에 내려서게 되고, 산길은 이내 가파른 오르막길로 바뀐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다른 산들에 비하면 그 가파름이란 게 우습게 보일 수도 있을 정도로 만만하기 때문이다.

 

 

오름길의 가파름이 약해서일까 주변의 풍물들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까지 생긴다. 가끔 나타나는 기묘한 바위들은 물론이요. 어쩌다 짧은 바윗길이라도 만날라치면 어김없이 시야가 열리면서 그동안 이곳까지 올라오면서 보았던 풍경들이 다시 한 번 펼쳐진다. 아니 하나 더 있다. 조금 전에 올랐던 전망바위봉이 멋진 풍경으로 변해 눈앞으로 성큼 다가오는 것이다.

 

 

산행지도를 보면 바위의 이름들이 꽤나 많이 적혀있다. 그런데 그 이름들 중에 뼈져있는 흔한 이름이 하나 있다. 바로 거북이바위이다. 그 생김새가 하도 흔하기에 어디를 가나 하나쯤은 갖고 있는 이름인데 갈모봉에서는 안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 골라보았다. 갈모봉 정상 근처의 안부 조금 못미처에서 발견한 것인데 위로 올라가는 거북이의 형상을 닮았지 않는가.

 

 

볼거리들에 눈길을 맞추면서 20분 조금 못되게 오르면 갈모봉 정상과 남봉의 사이에 있는 안부 삼거리에 올라서게 된다. 정상은 이곳에서 왼편이다. 그러나 하산지점인 선유동휴게소가 오른쪽 방향이기 때문에 정상에 올랐다가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 나와야만 한다. 정상으로 가는 길은 많이 파이고 훼손이 심하다. 넘치도록 많은 사람들이 찾는데도 불구하고 산을 그대로 방치해 온 탓일 것이다.

 

 

삼거리에서 4~5분쯤 더 오르면 드디어 갈모봉 정상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정확히 1시간10분이 지났다. 정상은 약 10평 정도의 평평한 공터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정상을 몇 개의 너럭바위들이 정상을 둘러싸고 있는 모양새이다. 말뚝 모양으로 생긴 정상표지석은 그 너럭바위들 중 하나의 앞에 세워져 있다. 아니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다고 하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다. 세 동강이로 부러진 기둥이 조금만 건들어도 무너질 것 같기에 하는 말이다. 이정표는 보이지 않는다. 아니 오늘 산행에서는 이정표 비슷한 것도 보지 못했다. 하긴 입산을 통제시키고 있는 처지에 이정표를 세운다는 게 더 이상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건 그렇고 갈모봉은 산의 모양이 비가 올 때 갓 위에 덮어쓰는 우장(雨裝)과 같이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뛰어나다. 또한 너럭바위들이 정상을 둘러싸고 있어 쉬면서 조망을 즐길 수 있도록 편의성까지 제공해준다. 동쪽에서 남쪽으로 장성봉과 대야산, 조항산, 청화산 등을 품은 백두대간이 아스라이 이어지고 있고, 송면에서 버리미기재로 달리는 포장도로가 평화롭다. 또한 북쪽으로는 군자산과 남군자산이 눈앞에 가까이 와 닿고, 남쪽에는 백악산, 가령산, 도명산 그리고 그 너머로 종유석을 세워 놓은 듯한 문장대가 아스라하다. 하나 아쉬운 것은 연무(煙霧) 때문에 또렷하지가 않다는 것이다. 만일 날씨까지 좋았더라면 가히 환상적인 풍경이 펼쳐지지 않았을까 싶다.

 

 

 

되돌아온 안부삼거리에서 이번에는 오른편으로 진행한다. 잘 정돈된 길을 따라 잠깐 걸으면 큰 바위들이 여러 개 있는 남봉 정상에 이른다. 남봉을 지나면서 본격적인 하산이 시작된다. 갑자기 가팔라진 내리막길을 잠시 내려가면 슬랩(slab)이 나오면서 갈모봉의 비경이 펼쳐진다.

 

 

하얀 화강암 반석(盤石)이 넓고 길게 뻗어 내리는데, 반석의 양 옆에는 키 작은 소나무들이 자리 잡고 있다. 희디흰 화강암 반석을 더욱 돋보이게 해주는 나무들이다. 슬랩을 걷는다. 폭이 넓은데다 경사까지 약하기 때문에 조망을 즐기는 여유까지 부려본다. 슬랩의 끄트머리에 있는 비행기바위와 찐빵바위의 윗부분이 내려다보이고 그 뒤편에는 대야산과 조항산, 청화산 등이 빼어난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사진을 찍고 있는데 집사람이 호들갑을 떨면서 나를 부른다. 바위의 생김새를 보라는 것이다. ‘찐빵을 쏙 빼다 닮았단다. 그러나 내 눈에는 우주선을 닮아 보이니 문제다. ‘우리 부부는 일심동체(一心同體)가 아닌가 보다며 반대방향으로 다가가니 이번에는 내 눈에도 찐빵의 형상이 나타난다. 바위를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서 다른 형상으로 나타났던 모양이다.

 

 

찐빵바위 근처에서 다시 한 번 시야(視野)가 뻥 뚫린다. 아니 이곳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열린다고 하는 편이 더 옳은 표현이겠다. 그러나 이곳만의 특징은 있다. 갈모봉 제일의 경관이라는 비행기바위가 일목요연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사진을 찍느라 잠깐 앉았는데 일어나기가 싫어질 정도이다. 화강암 슬랩이 만들어내는 기기묘묘한 풍경이 그만큼 빼어나다는 증거일 것이다.

 

 

 

 

암릉을 타고 내려오는 길에는 가끔 늙은 소나무들이 눈에 띈다. 그 생김새들이 예사롭지 않은 것이요 아래 삼송리(三松里)에 있는 소나무, 즉 비비꼬고 올라간 나무줄기가 용과 흡사하다고 해서 용송(龍松)’이라는 다른 이름까지 갖고 있는 왕소나무(천연기념물 제290)’의 영향을 받은 것이나 아닐까 싶다.

 

 

 

바위능선은 20분 정도 계속된다. 그리고 다시 마사토로 된 길로 되돌아간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왼쪽 방향의 길이 또렷하지만 오른편의 바위 사이로 난 길로 들어선다. 뭔가 색다른 게 있지나 않을까 해서이다.

 

 

 

바위 사이를 통과하자마자 바위가 나타나면서 오른편으로 시야가 열린다. 눈앞에는 맞은편 산자락의 바위벼랑이 그 빼어난 자태를 펼쳐 보이고, 그 왼편에는 가령산과 낙영산, 그리고 백악산이 늘어서 있다. 한마디로 기막힌 조망이다. 그리고 오른편 길을 선택했던 내 결정이 잘 되었다는 것이 증명되는 순간이다.

 

 

 

 

전망바위를 내려서면 흙길과 바윗길이 번갈아가면서 나타난다. 아니 거의가 바윗길인데 가끔 흙길이 섞여 있다는 것이 더 옳을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괜찮게 생긴 바위들이 가끔씩 나타나고, 이런 바위들을 구경하며 걷는 재미가 제법 쏠쏠한 구간이다. 이런 길은 약 20분 정도 계속된다.

 

 

 

바윗길이 끝나면 다시 곱디고운 흙길이 나타나고, 이어서 울창한 숲속으로 난 길을 따라 6분쯤 더 내려오면 선유동휴게소바로 아래에 있는 임도이다. 화양천(華陽川)의 상류인 삼송천(三松川)으로 선유구곡(仙遊九曲)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임도에 내려서면서 사실상 산행이 종료된다고 보면 된다. 이곳에서부터 날머리인 주차장까지는 선유구곡을 따라 길이 나있다. 따라서 얼마만큼 주변의 경관을 둘러보느냐에 따라 시간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오늘 산행은 2시간25분 정도가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정상에서 20분 정도를 쉬었으니 사실상의 산행시간은 2시간 정도가 걸린 셈이다.

 

 

 

선유동휴게소에서 물가로 내려간다. 계곡은 웅장하다기 보다는 아기자기 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듯 싶다. 계곡이 거대한 바위협곡으로 이루진 것도 아니고 주변의 바위들 또한 거창한 것들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저 옛날 옛적 힘센 장사들이 공깃돌로 삼았다고 해도 믿을 만큼 아담 사이즈인 것이다. 거기다 물의 양 또한 넉넉한 편은 아니다. 그러니 장마 때만 아니라면 물에 빠질 위험도 없다. 계곡이 온통 어린이들로 바글바글한 이유가 아닐까 싶다.

 

 

냇가를 따라 내려가면 잠시 후 커다란 바위 몇 개가 보인다. 선유구곡(仙遊九曲) 중 제9곡인 신선이 숨어 살았다는 은선암(隱仙巖)과 거북을 닮은 모양이라는 8곡 구암(龜巖), 그리고 7곡인 기국암(碁局巖), 즉 바위 바닥이 바둑판 모양으로 생긴 바위란다. 그러나 생각했던 것 보다는 그 규모가 왜소하다. 그리고 거북을 닮았다는 기암을 제외하고는 그 생김새도 썩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하긴 나 같이 평범한 중생이 어떻게 이황(李滉)선생님의 감성(感性)을 쫓아 가겠는가마는 선유구곡과의 첫 만남은 실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실망감이 너무 컸던 때문인지 어느 나무꾼이 기국암에서 바둑을 두고 있는 신선들의 대국을 구경하다가 도끼자루 썩는 줄 몰랐다는 전설이 깃든 제6곡인 난가대(爛柯臺)는 카메라에 담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그리고 5공인 와룡폭(臥龍瀑) 또한 지나가는 길에 마지못해 한 컷 담았을 뿐이다. 와룡폭을 지나면 임도는 개울을 가로질러 건너편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잠시 후에 또 다시 가로지른다. 그 사이에 제4곡인 연단로(鍊丹爐)가 있다. 옛날 도사들이 바위로 금단을 끓였다는 바위이다. 그러나 그 생김새가 썩 마음에 와 닿지 않아 사진을 올리는 것은 생략했다.

 

이어서 층암절벽이 마치 학이 둥지를 틀고 있는 것처럼 생겼다는 제3벽 학소대(鶴巢臺, 일명 학소암)와 하늘로 향한 바위들이 일품인 제2벽 경천벽(擎天壁). 즉 하늘을 떠받치는 형상이라는 바위벼랑은 길을 가는 중에 만나게 된다. 냇가에 있는 바위가 아니라 바위절벽이기 때문이다. 선유계곡은 웅장한 남성미(男性美) 대신 섬세하고 우아한 것이 여성미를 풍기는 계곡이다. 혹시 퇴계(退溪)선생이 추구했던 도학(道學)의 이상세계가 이런 것이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송면리 송정마을의 함양 이씨 댁에 들른 퇴계가 반했던 경관이니 나름대로 그의 이상세계와 뭔가 연결고리가 있었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그만큼 그는 이곳 선유동의 경관에 반했었고, 9개월이나 이곳에 눌러앉아 지내면서 선유구곡의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산행날머리는 선유동주차장(원점회귀)

석굴형으로 생긴 바위라는 제1곡 선유동문(仙遊洞門)은 계곡을 건너는 마지막 다리 근처에서 만나게 된다. ‘선유동문이라는 글씨가 음각(陰刻)되어 있는 바위 등 여러 개의 바위들이 겹겹이 쌓여 있는 형상이다. 그리고 선유동문을 나서면서 구곡은 끝을 맺는다. 선유동문이 구곡의 입구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누군가 선유동계곡의 절경에 취하면 누구나 신선(神仙)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난 계곡을 벗어나서도 인간으로 남아있었다. 아마 절정에 취하지 못했었나보다. 그 절경이라는 게 내 마음을 빼앗지 못할 정도로 빼어나지 못했던지, 아니면 그런 경지에 이르지 못할 정도로 내 수양이 부족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삼태산(三台山, 875.7m)-누에머리봉(864m)

 

산행일 : ‘15. 8. 11()

소재지 : 충북 단양군 어상천면과 영춘면의 경계

산행코스 : 단산중고교용바위골전망대누에머리봉삼태산누에머리봉임도고수골천인사임현리(산행시간 : 3시간10)

 

함께한 산악회 : 가보기산악회

 

특징 : 산이 많기로 소문난 단양군에서도 더 깊이 꼭꼭 숨어있는 산이 삼태산이다. 그래선지 웬만큼 산에 이력이 붙었다는 산꾼들 조차도 그 이름을 낯설어하는 사람들이 많은 편이다. 다만 영춘지맥의 마룻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지맥을 하는 사람들은 예외하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지(奧地)의 산 답지 않게 등산로는 잘 닦여 있는 편이다. 지자체에서 심혈을 기울여 가꾸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찾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추세란다. 그나저나 산행은 쉽지 않다. 해발이 900m를 넘기지 못할 정도로 나지막한 산이지만 정상까지 이르는 거리가 짧은 탓에 등산로 전체가 가파른 오르막길의 연속인 것이다. 다만 다행인 것은 곳곳에 통나무계단과 로프 등 안전시설을 설치해 놓아 조금이나마 산행에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시간을 내어 찾아보라고는 권하고 싶지 않다. 조망이나 산세(山勢) 등 가슴에 담아둘만한 특별한 볼거리가 없기 때문이다.

 

산행들머리는 단성중학교(단양군 어상천면 임현리 311)

중앙고속도로 제천 I.C에서 내려와 태백방면 38번 국도를 탄다. 잠시 후 장평천()을 가로지르는 두학3(: 제천시 흑석동)를 지나자마자 국도를 빠져나와 522번 지방도를 타고 영춘(단양) 방면으로 달리다보면 중간쯤에서 어상천면의 소재지인 임현리에 이르게 된다. 이곳 임현리에 있는 단산중고교가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학교 정문 오른편에는 크고 오래 묵은 느티나무 몇 그루가 서있다. 수령(樹齡)250년이 넘었다고 해서 단양군의 보호수(38)로까지 지정된 나무다. 이 나무의 앞으로 난 임도(林道)를 따라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들머리에 삼태산 등산안내도와 이정표(삼태산 등산로입구, 애기누리봉, 삼태산 정상/ 어상천 소재지)가 세워져 있으니 한번쯤 살펴보고 난 뒤에 산행을 나서볼 일이다. 들머리 근처에 세워진 또 다른 이정표가 이곳에서 정상까지의 거리가 2.6Km임을 알려주고 있다.

 

 

 

어상천의 특산품은 수박과 고추로 알려져 있다. 거기다 하나 더한다면 마늘이 아닐까 싶다. 10여 년 전에 이곳에서 우체국장으로 재직했던 후배가 특산품이라며 위의 세 가지를 보내주었으니 틀림없을 것이다. 이는 이 지역이 석회암 지대인데다 중성에 가까운 약산성의 토양(土壤), 그리고 밤낮의 큰 일교차(日較差) 등 최상품의 농산물을 생산하는데 꼭 필요한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기 때문이란다. 특히 어상천수박은 씨가 적다는 장점 말고도 당도(糖度)가 다른 곳에 비해 월등히 높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껍질이 얇음에도 불구하고 오래 보관하여도 쉬 상하지 않는단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단산중학교 앞의 로터리에 수박 조형물이 세워놓았다.

 

 

임도를 따라 들어가면 4분쯤 후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이정표(삼태산 정상/ 어상천면 소재지)가 지시하는 대로 왼편으로 진행한다. 이어서 1분쯤 후에 만나는 또 다른 갈림길에서는 오른편 오솔길로 들어선다.

 

 

 

오솔길로 들어서기 직전에 뒤돌아본 풍경, 어상천면의 소재지가 들어선 곳이지만 들녘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계곡으로 인해 생겨난 넓지 않은 땅을 붙여먹고 살아가는 모양새이다. 그만큼 이곳 어상천면이 산골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오솔길로 들어서면 곧이어 시멘트로 포장된 널따란 공터가 나온다. 산으로 향하는 방향에 세워진 이정표(삼태산 정상 2.3Km/ 단산중고교 300m)에 적혀 있는 이름표로 미루어보아 체육공원으로 조성하려 했던 모양인데 아직까지는 텅 빈 상태로 남아있다.

 

 

공터를 지나면 또 다른 공터가 나온다. 널따란 것이 조금 전의 공터와 거의 비슷하지만 이번 것은 포장이 되지 않은 잔디밭 상태이다. 이곳 역시 체육공원으로 조성하려다 만 모양이다.

 

 

두 번째 공터를 지나면 이번에는 나무계단이 나타난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여러 번에 걸쳐 상황 설명을 한 탓에 거리가 먼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들머리에서 이곳까지는 겨우 10분이면 충분한 거리이다. 그건 그렇고 계단을 올라서면 제법 너른 오솔길로 이어진다. 허나 길의 상태는 엉망이다. 길은 넓지만 온통 칡넝쿨과 웃자란 잡초(雜草)들이 길을 점령해버린 탓이다.

 

 

잠시 후 갈림길(이정표 : 삼태산 정상 2.1Km/ 어상천면 소재지 400m)이 나타난다. 왼편은 어상천면소재지에서 올라오는 길이란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나온 길 말고도 면소재지에서 올라오는 또 다른 길이 있었던 모양이다. 우리도 역시 면소재지에서 올라왔으니까 말이다.

 

 

갈림길을 지나 작은 봉우리 하나를 넘는다. 고개를 넘다보면 오른편으로 조망(眺望)이 트인다. 아까 산행 초기에 보았던 어상천 방향이다. 아까보다 고도(高度)를 높인 탓인지 조금 더 넓게 시야(視野)가 열리지만 좁디좁은 협곡(峽谷) 안에 들어선 마을이란 느낌에는 변화를 주지 못한다.

 

 

봉우리를 넘어 임도(林道)로 내려선다. 산행을 시작한지 20분 만이다. 널따란 임도에는 운동기구 몇 가지와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해 놓았다. 산행안내도와 이정표를 세워 등산객들을 배려했음은 물론이다. 사실 이곳까지 오는 동안에는 여러 곳에서 길이 헷갈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곳에는 어김없이 이정표를 세워놓아 등산객들을 배려하고 있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곳까지 찾아올 수 있었던 이유이다. 그런 배려는 이곳 임도에서 특히 돋보인다. 임도에 내려서는 곳(이정표 : 삼태산 정상 1.7Km/ 어상천 소재지 900m) 하나로는 모자란다고 생각되었던지 건너편의 들머리에까지 이정표(용바위골 290m/ 단산중고교 900m)를 세워놓은 것이다.

 

 

임도를 가로질러 맞은편 산자락으로 들어선다. 산길은 용바위골이라는 골짜기를 따라 나있다. 어엿한 이름까지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골짜기에는 물기 한 점 보이지 않다. 우기(雨期)가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저렇게 물기가 말라있는 것으로 보아 전형적인 건천(乾川)인 모양이다. 골짜기를 따라 잠시 올라가면 용암정(龍岩亭)’이라는 반듯하게 지어진 이층짜리 정자가 나온다. 하지만 아쉽게도 골짜기에 물이 흐르지 않아 그 풍취(風趣)를 반감시키고 있다. 정자 앞 이정표(용바위골 : 삼태산 정상 1.4Km/ 단산중고교 1.2Km)

 

 

 

 

정자의 아래는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누군가의 글에 의하면 그 바위에 새겨진 모양이 승천하는 용()을 빼다 닮았다고 해서 용바위(龍岩)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했다. 그러나 내 눈에 들어온 용바위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작고 초라했다. 그 형상을 찾아보고 말 것도 없이 자리를 떠버린 이유이다. 그러나 아무리 초라해도 이름이 없는 것 보다는 있는 것이 훨씬 나을 게다. 그래야 사람들이 사진이라도 한 컷 촬영하고 지나갈 테고, 이는 아래의 사진이 붙어 있는 내 산행기가 증명한다 할 것이다.

 

 

정자를 지나면서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통나무계단을 놓아 조금이라도 수월하게 오를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지만 그 가파름 이겨낸다는 것은 애초부터 언감생심(焉敢生心)이라 할 것이다. 그만큼 가파르다는 얘기이다. 거기다 그 오르막길은 길기까지 하다. 해발이 채 900m도 되지 않는다고 만만하게 보았다가 된통 당하는 순간이다. 이 고통이 빨리 끝나주기만 빌어본다. 그러나 그 버거운 싸움은 시작에 불과했다.

 

 

12~13분 정도를 힘겹게 오르면 드디어 능선에 올라서게 된다. 능선에는 이정표(삼태산 정상/ 어상천면소재지) 외에도 벤치를 놓아두었다. 올라오느라 고생했으니 잠시 숨이라도 고르고 가라는 배려인 모양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곳에서 영춘지맥과 만난다고 했다. 이 능선이 영춘지맥이라는 것이다. 참고로 영춘지맥(寧春支脈)이란 영월지맥과 춘천지맥을 합한 것을 일컫는다. 즉 한강기맥 상의 청량봉(1,052m)에서 북쪽으로 분기한 산줄기가 하뱃재로 고도(高度)를 낮추다가 다시 솟구쳐 응봉산(1,103 m)과 백암산(1,099m), 소뿔산(1,118m), 가리산(1,051), 대룡산(899m), 봉화산(515m), 새덕봉(488m)을 거쳐 춘천의 경강역 뒤편 북한강에서 그 맥을 다하는 약 125km의 춘천지맥에다 영월지맥을 합친 것이라는 얘기이다. 영월지맥은 한강기맥 상에 있는 삼계봉(1,065m)에서 남동쪽으로 분기한 산줄기가 태기산(1,261m), 덕고산(705m), 치악산(1,288m), 감악산(954m), 삼태산(876m), 태화산(1,027m)을 거쳐 남한강에서 가라앉는 약 136km의 산줄기이다. 영춘지맥은 지맥중에서 가장 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웬만한 산들은 능선에 올라서고 난 후에는 그 기세(氣勢)를 누그러뜨리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삼태산은 그런 편견(偏見)을 깨버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 무지막지한 가파름을 조금도 변화시키지 않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길가에다 로프로 난간을 만들어두었다는 점이다. 정 힘이 부칠 때는 붙잡고 오를 수 있도록 말이다.

 

 

가파름과의 사투(死鬪)는 끝도 없이 이어진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중간에 잠깐씩이나마 숨 돌릴 틈을 준다는 점이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짧게는 5분에서 길게는 10분 정도 치고 오르면 각 정점(頂點)에 올라서게 되고, 이때 1~2분 정도씩 완만하게 변하는 것이다. 마치 또 다시 만나게 될 가파른 오르막길을 대비라도 하라는 듯이 말이다.

 

 

 

그렇게 30분 조금 넘게 힘겨운 싸움을 하다보면 갑자기 오른편으로 시야(視野)가 툭 트인다. ‘절벽이니 추락을 주의하라는 경고판의 기능까지 겸하고 있는 이정표(삼태산 400m)가 알려주는 대로 오른편이 절벽이다. 시야가 막히지 않는 이유이다. 전망대에 서면 삼태산보다도 훨씬 높은 산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연무(煙霧) 때문에 희미해서 구분이 잘 안되지만 어쩌면 박지산과 태화산, 그리고 소백산이 아닐까 싶다. 이런 조망은 잠시 후(이정표 : 어산천소재지 2.2Km)에 또 한 번 펼쳐진다.

 

 

 

전망대를 지나면서 산길은 능선을 버리고 산의 사면(斜面)을 따라 우회로(迂廻路)를 만든다. 능선으로 길을 내기가 버거웠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길이 편해진 것은 결코 아니다. 길가에 위험표지판이 내걸려 있을 정도로 사면은 거의 비탈에 가깝다. 거기다 가파름도 여전하다. 그러나 찾아온 시기가 눈이 쌓여있는 겨울철만 아니라면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다. 안전로프가 매어져 있기 때문에 조금만 조심한다면 별다른 어려움 없이 통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위험지역을 지나서도 오르막길은 계속된다. 거기다 가파른 기세(氣勢)를 조금도 누그러뜨리지 않은 채로이다. 중간에 그 기세가 약간 누그러진 곳에서 별 의미 없는 이정표(삼태산 정상 450m/ 용바위골 1.0Km)를 만난 뒤, 다시 한 번 가파른 오르막길을 치고 오르면 누에머리봉 직전의 안부에 올라서게 된다. ‘물푸레나무 군락지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이정표(누에머리봉/ 삼태산 정상/ 용바위골 1Km)가 세워진 이곳 삼거리에서 누에머리봉 정상은 왼편으로 10m쯤 떨어져 있다. 전망대에서 누에머리봉까지는 30, 산행 들머리에서는 1시간35분이 걸렸다.

 

 

누에머리봉은 조망(眺望)이 막혀있어 갑갑하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많이 어수선하다는 느낌 또한 지울 수가 없다. 정상석이 세 개나 세워져 있는가하면 그것으로도 부족하다고 생각되었는지 나무에다 정상판까지 매달아 놓았다. 다른 한쪽에는 신윤호라는 사람이 지었다는 만추(晩秋)’라는 시가 적혀있는 시판(詩板)도 매달려 있다. 이정표(고수골 1.7Km/ 삼태산 875.8m)국가지점번호(라사 7684 0387)’ 표지판이 빠졌을 리가 없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정상에는 원형의 식탁을 두 개나 놓아두었다. 1천 미터에 가까운 산의 정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동네 뒷산의 느낌이 강하게 드는 이유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세 개나 되는 정상석도 모자라 정상판까지 하나 더 만들었지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곳은 분명 누에머리봉인데도 모두가 다 삼태산으로 표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누군가 가운데 정상석의 앞면에다 삼태산 누에머리봉 정상 864.2m’라고 적은 코팅지를 붙여 놓았다는 점이다. 참고로 누에머리봉은 누에처럼 생긴 삼태산의 머리 부분에 해당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삼태산으로 향한다. 아까의 안부삼거리에서 오른편 능선을 따르면 된다. 능선을 따라 난 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7~8분쯤 걸었을까 주변 나무들을 둥그렇게 줄로 연결시켜 놓은 것이 보인다. 그 안에는 동굴 하나가 시커멓게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 일부 지도(地圖)수직굴로 표기된 곳인데 사람들이 빠지지 않도록 금()줄을 쳐놓은 모양이다. 밖에서 보면 그 입구가 좁지만 고수골에 위치한 일광굴과 서로 통한다는 이야기도 있으니 참조할 일이다.

 

 

 

 

 

수직굴에서 6~7분 정도를 더 진행하면 삼태산 정상이다. 10평 남짓한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엔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고 대신 이정표(방산미 1.2Km/ 누에머리봉 300m)와 삼각점(영월 24, 1995 재설)이 이곳이 정상임을 알려주고 있다. 하긴 그마저도 이곳이 어느 산의 정상이라는 것을 빼먹은 채 그저 정상이라고만 표기했을 뿐이지만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서래야 박건석선생께서 이정표에다 삼태산 875.8m'이라고 적은 코팅지를 매달아 놓았다는 점이다. 덕분에 인증사진을 찍을 수 있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산행 초반에 이야기 했던 영춘지맥은 이곳에서 올라왔던 방향의 반대편 능선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이정표에는 나타나있지 않으니 종주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그쪽 방향으로 글씨가 적혀있지 않은 판자(板子)가 대어져 있으니 참조하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각설하고 삼태산 정상도 누에머리봉과 마찬가지로 조망은 트이지 않는다. 주변이 짙은 숲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삼태산이라는 이름은 산의 생김새가 마치 큰 삼태기 세 개를 엎어 놓은 것 같이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누에머리봉으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고수골 방향으로 하산을 시작한다. 삼태산 정상을 다녀오는 데는 30분 정도가 걸렸다. 하산은 이정표가 지시하고 있는 방향으로 내려가면 된다. 완만하게 시작되는 내리막길이다. 길이 편해서인지 주변 풍광이 눈에 들어온다. 아니 어쩌면 그 풍광이 독특했기 때문일 것이다. 정상근처에서 만났던 이정표에는 이곳이 물푸레나무 군락지라고 적혀있었다. 이 부근에 물푸레나무가 몰려 자라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 외에 눈에 띄는 나무는 참나무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고수골로 내려가는 능선에다 주목(朱木)나무를 심어 놓은 것이다. 그것도 한두 그루가 아니기에 특이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주목나무 식재(植栽)구역을 지나면서 산길은 가팔라진다. 그 가파름은 아까 용바윗골에서 올라올 때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지 않다. 산길은 그 가파름이 부담스러웠던지 길가에다 안전로프를 매달아 놓았다. 그리고 그 로프는 끝도 없이 이어진다. 앞서가는 집사람의 표정은 이미 사색(死色)으로 변해있다. 내려서는 코스 자체를 부담스러워하는 집사람이기에 이런 내리막길은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왔을 것이 틀림없다.

 

 

무려 20분 가까이를 사정없이 떨어지던 내리막길은 어느 지점에서 잠깐 숨을 고른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낙엽송 숲을 만나면서 또 다시 가파르게 변해버린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통나무로 계단을 만들어 미끄러움을 방지했다는 점이다. 그렇게 10분 남짓 더 내려서면 임도(이정표 : 고수골 400m/ 삼태산 정상 1.5Km)에 이른다.

 

 

 

임도에 내려선 다음에는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100m 남짓 걷다가 이번에는 오른편 오솔길로 내려선다. 들머리에 이정표(고수골 300m/ 등산로)가 세워져 있으니 참조하면 된다.

 

 

오솔길로 내려선 후에는 산길이 고와진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급경사(急傾斜) 내리막길에서 고생했던 것에 대한 보상이라도 주려는 모양이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이정표(이정표 : 임현리/ 일광굴/ 삼태산)가 있는 삼거리,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진행할 경우 일광굴(日光窟)이 나온다. 그런데 앞서가던 집사람이 비명을 지르더니 쏜살같이 도망을 쳐 나오는 게 아닌가. 아무래도 벌집을 건드렸나보다. 영문도 모른 나도 망설이지 않고 함께 도망을 치고 본다. 이런 걸 두고 일심동체(一心同體)’부창부수(夫唱婦隨)’라고 하는 게 아닐까? 비록 집사람만 땅벌에 쏘였지만 말이다. 참고로 일광굴은 삼태산 허리에 있는 석회암 자연동굴로 길이는 1에 이른다. 입구에서 50~60m 정도 들어가면 종유석이 흘러내려 돌고개를 이루고, 조금 더 들어가면 돔형의 광장이 있다. 광장에서 위를 바라보면 구멍이 뚫린 천장에서 한 줄기 빛이 쏟아져 장관을 이루는데, 일광굴이라는 명칭은 여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또 동굴 안에는 높이 6m의 석판에 바둑판이 그려져 있는데, 옛날에 신선들이 바둑을 두며 놀던 곳이라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한편 일광굴은 죽령폭포와 칠성암(七星岩), 북벽(北壁), 구봉팔문(九峰八門), 금수산(錦繡山), 온달성(溫達城) 그리고 고수동굴(古藪洞窟)과 함께 2 단양팔경의 하나로 꼽히는데, 낙석(落石)의 위험이 있어 현재는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삼거리에서는 망설이지 않고 곧장 임현리 방향으로 내려선다. 같이 산행을 하고 있는 마음을 다스리는 산행의 저자 이석암선생으로부터 일광굴이 폐쇄(閉鎖)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임현리 쪽으로 방향을 틀자마자 널따란 공터가 나타난다. 지금은 비록 칡넝쿨로 둘러싸여 황폐해졌지만 일광굴이 본격적으로 관광객을 맞을 경우 주차장으로 사용하면 딱 좋겠다. 아니 처음부터 그런 용도로 만들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공터를 지나면서 산길은 가파른 내리막길로 변한다. 산길은 그 가파름을 배겨내지 못하고 왔다갔다 갈지()자를 그리며 아래로 향한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다. 가파른 내리막길이 끝날 즈음 산길의 흔적이 희미해져 버린 것이다. 좌우를 두리번거리는데 바닥에 깔린 선두대장의 방향표시지가 오른편으로 진행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머리는 왼편으로 가라고 조르지만 어쩌겠는가. 선두대장을 믿어보기로 한다. 물론 길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앞서간 이들의 흔적을 따를 뿐이다. 다행이도 잠시 후 정상에서 내려오는 정규 등산로(이정표 : 삼태산 정상 2.2Km)를 만나게 되고, 이어서 또 다른 갈림길(이정표 : 일광굴 0.2Km/ 삼태산 정상 2.4Km)에 이른다. 오른편에 보이는 길은 일광굴로 올라가는 길이다. 임도에서 이곳 삼거리까지는 20분 정도가 걸렸다.

 

 

 

일광굴을 밖에서나마 보고 올까 하다가 그냥 발길을 돌린다. 오랫동안 사람들이 다니지 않은 탓에 길이 없어져 버리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임현리로 방향을 잡고 내려가면 금방 천인사에 이르게 된다. 누가 언제 어떤 사연으로 지었는지도 알 수 없는 조그만 사찰인 천인사는 텅 비어있다. 새로 지으려고 철거중이란다. 한쪽 귀퉁이에서 절간을 지키고 있는 불상(佛像) 앞에서 약수로 목만 축이고 곧바로 절은 나선다.

 

 

천인사를 빠져나오면 곧이어 작은 골짜기를 만나게 된다. 냉큼 내려서고 본다. 산에서 흘렸던 땀을 씻고 가기에는 충분할 정도의 물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팬티 바람으로 물속에 앉아보지만 채 1분을 버티지 못하고 빠져나오고 만다. 얼음물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물이 차가웠던 탓이다.

 

 

산행날머리는 임현리(어상천면) 앞 도로

새 옷으로 갈아입고 내려오면 동네 안길, 아니 아까 지나왔던 천인사에서 동네까지가 100미터가 채 되지 않으니 장소를 구분하는 것에 의미를 둘 필요는 없겠다. 아무튼 동네에 들어서면 우물이 하나 보인다. 지붕까지 씌워 놓았지만 식수로 사용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땀을 씻고 가도 문제될 게 없어 보인다는 얘기이다. 아니나 다를까 함께 산행을 한 일행들이 땀을 씻고 있다. 좀 난감한 상황까지 연출되고 있으나 그들끼리의 놀이이니 문제될 게 뭐 있겠는가. 아무튼 우물에서 50미터 정도만 더 걸어 나가면 주차장처럼 널따란 도로에 이르게 되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총 3시간30분 정도가 걸렸다. 간식과 목욕을 위해 중간에서 쉬었던 시간을 감안한다면 3시간10분 정도가 걸린 셈이다.

 

도로에서 바라본 삼태산의 모습이다.

가섭산(迦葉山, 709.9m)-봉학산(鳳鶴山=수리봉, 570.8m)

 

산행일 : ‘15. 5. 28()

소재지 : 충북 음성군 음성읍과 충주시 신니면의 경계

산행코스 : 봉학골산림공원 주차장예비군훈련장임도가섭산길마재봉학산(수리봉)두호2두호1산림공원관리사무소산림공원 주차장(산행시간: 3시간 20)

함께한 산악회 : 산두레

 

특징 : 가섭산은 높이가 비록 700m 초반에 불과하지만 큰 산으로 대접받는다. 주변이 평야나 낮은 고개로 둘러싸인 탓에 멀리서도 잘 보일 만큼 높아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지정학적 중요성으로 인해 옛날부터 이곳에는 봉수대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 그 자리는 방송사와 통신사의 송신탑들이 차지하고 있다. 시대가 바뀌었어도 그 중요성은 변치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산은 전형적인 육산, 중간 봉학산(수리봉)의 정상어림 바위 몇 개를 제외한다면 산행 내내 바위다운 바위라곤 구경조차 할 수 없다. 당연히 길은 보드라운 흙길, 거기다 경사(傾斜)까지 완만하다보니 걷는데 조금도 무리가 없다. 또한 들머리에 산림욕장까지 끼고 있으니 가족산행지로 추천받기에 부족함이 없다 할 것이다.

 

산행들머리는 봉학골산림공원 주차장(음성군 음성읍 용산리)

평택-제천고속도로 음성 I.C에서 내려와 37번 국도를 이용하여 음성읍내까지 온다. 중간에 신천교차로(음성읍 신천리)에서 좌회전하여 516번 지방도를 타야 가능하다. 이어서 읍내에 있는 유신아파트 앞 평촌사거리(평곡리)에서 좌회전하면 읍내를 통과한 후 용산리(음성읍)에 이르게 된다. 이곳 용산리에 있는 삼거리에서 이번에는 우회전하여 용광로230번길을 따라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산행들머리인 봉학골산림욕장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주차장에 내리면 오른편에 가섭산이 보인다. 두루뭉술한 것이 멀리서 봐도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다. 그 정상어림에 우후죽순처럼 솟아난 것들은 아마 송신탑(送信塔)들일 것이다. 꽤나 멀리 떨어져있음에도 불구하고 선명하게 나타나는 것을 보면 그 크기가 얼마나 클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산림욕장 방향으로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50m 남짓 들어가면 오른편에 충북 자연환경 100선의 명소 봉학골이라고 써진 빗돌(碑石)이 보인다. 빗돌 오른편에 보이는 예비군종합훈련장안으로 들어간다. 예비군들만 들어가는 곳으로 지레짐작하고 쭈뼛거릴 필요는 없다. 가섭산 등산로와 연결시키는 임도(林道)가 예비군훈련장 안으로 나있기 때문이다.

 

 

훈련장 정문으로 들어서자마자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등산로는 오른편 임도이다. 코너에 봉학골 테마임도 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니 한번쯤 살펴보고 산행을 시작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 잠시 후에 작은 개울을 건너는 다리가 나오고, 이어서 조금 더 올라가면 임도는 고풍스러운 산책로로 바뀐다. 길바닥을 예쁘장한 석판(石板)들로 운치 있게 꾸며놓은 것이다. 마치 중세 유럽의 옛 골목을 걷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멋진 길이다. 그래서 봉학골 웰빙(well-being)임도라고 자신 있게 자랑하고 있는 모양이다.

 

 

 

산책로 주변은 온통 예비군 훈련장, 이곳저곳에서 예비군들이 훈련에 한창이다. 문득 30년도 더 지난 옛날 생각이 난다. 그리고 우리 때보다 더 열심히 훈련에 열중하고 있는 요즘 젊은이들을 보며 참으로 대견하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은 심한 얼차렷도 없어졌다는데 저 정도라면 우리네 의식수준도 선진국에 결코 뒤질게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 또한 국민소득과 비례해 가는 모양이다.

 

 

임도로 들어서서 얼마간 걸으면 좌측으로 테마임도가 갈려나간다.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임도를 따른다. 임도 주변의 나무들이 언제부턴가 낙엽송(落葉松 : 일본이깔나무)으로 변해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위로 솟구친 덕분에 선선한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다.

 

 

산행을 시작한지 20분쯤 지나면 임도 오른편으로 오솔길이 열린다. 들머리에 이정표(가섭산 800m, 정크아트 600m)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산자락으로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산자락으로 들어서서도 산길은 급할 것 없다는 듯이 느긋하기만 하다. 임도와 별반 차이가 없이 완만하게 이어진다는 얘기이다. 거기다 주변의 나무들도 아직은 낙엽송들이다. 그저 임도가 오솔길로 변했을 따름이다.

 

 

임도를 떠난 지 6분쯤 지나면 능선사거리(이정표 : 중계소 0.7Km/ 정크아트 0.5Km/ 예비군훈련장 0.8Km)에 올라서게 된다. 가섭산 정상은 왼편, 그러니까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중계소 방향이다. 맞은편은 정크아트란다. 정크아트(Junk Art)1950년대 유럽과 미국에서 일어난 현대미술의 한 조류(潮流), 일상(日常) 속의 잡동사니나 망가진 기계 부품 따위를 이용하여 작품을 만드는 것을 말하는데 이곳에는 과연 어떤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을까가 자못 궁금해진다. 기회가 있을 때 한번쯤 들러봐야겠다.

 

 

 

일단 능선에 올라섰다 싶으면 산길은 계속해서 능선을 따른다. 그리고 가팔라진다. 마치 이제껏 편하게 왔으니 이제부터라도 산행의 참맛을 느껴보라는 듯이 말이다. 그렇다고 지레부터 겁먹을 필요는 없다. 그 가파름이 버겁게 느껴질 정도는 아니고, 또한 끝없이 계속되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대략 6~7분 정도를 가파르게 오르다가 잠시 완만해지고 또 다시 가파르기를 반복하면서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가는 것이다.

 

 

앞서가던 집사람이 엎드린 채로 부지런히 손을 놀리는 것이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산딸기를 따고 있다. 붉고 탱글탱글한 산딸기들이 그녀의 손바닥 안에 그득하다. 날 주기 위해 따서 모으고 있는 것이다. 언제나 맛있는 것은 자신보다는 나를 먼저 챙기는 그녀, 어찌 이런 여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아직까지 다른 여자에게 곁눈질 한번 하지 않고 살아온 이유일 것이다.

 

 

능선으로 올라선지 30분 정도가 지나면 길이 두 갈래(이정표 : 수리봉 1.5Km)로 나뉜다. 왼편 사면(斜面)으로 난 길은 수리봉 가는 길, 가섭산 정상은 계속해서 능선을 따라야 한다.

 

 

갈림길을 지나면 잠시 후에 가섭산 중계소로 오르는 시멘트포장 임도가 나오고, 왼편으로 방향을 틀었다싶으면 오른편에 오솔길이 나타난다. 철망으로 된 중계소 담장을 따라 난 길이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무인산불감시탑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가섭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산행을 시작한지 정확히 1시간이 지났다. 물론 쉬지 않고 걸은 결과이다.

 

 

가섭산은 석가모니 부처의 십대 제자인 가섭존자(迦葉尊子)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따른 옛이야기 하나가 전해져 오기에 옮겨볼까 한다. 고려 초기 가섭산 중턱에 암자(庵子)가 하나 있었는데, 그 암자를 지키는 행자승이 청경하고 단정하여 그의 수행에 머리를 숙이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당연히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그 스님을 생불(生佛)로 대하곤 하였다. 후에 그 스님이 입적을 하였는데 신기하게도 스님의 시체가 근처에서는 볼 수 없는 싱싱한 보리수 나뭇잎으로 둘러싸여 있었다는 것이다. 이 광경을 본 신도들이 부처님이 스님을 인도해 갔음이 분명하다고 해서 이 암자가 있는 산을 가섭산(迦葉山)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당시의 시대상황에서 유래된 이름이었을 것이라고 추론(推論)해볼 수도 있다. 가섭존자(迦葉尊者)는 석가모니의 10대 제자 중 한 사람으로, 부처가 죽자 손수 다비식을 집행한 인물이다. 그후 가섭존자는 부처가 살아생전 죽림정사로 가는 도중에 입었던 가사(袈裟)를 지닌 채 중인도 마가타국에 있는 계족산을 반으로 갈라 그 사이로 들어가, 미래의 부처인 미륵불이 나타나면 전하기 위해 수행 정진하고 있다고 한다. 이른바 미륵신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미륵신앙이란, 가섭존자가 기다리고 있는 미륵불이 이 땅에 왕림하여 전쟁과 가난이 없는 극락세상을 만들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충청북도 지역은 삼국시대와 후삼국시대에 걸쳐 미륵신앙이 민중의 강력한 신앙으로 형성되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당시 이 지역이 고구려와 신라, 백제의 각축장이었다는 사실과 깊은 관련이 있다. 삼국의 각축장이었던 이 지역에 전쟁이 없는 평화를 염원하는 갈구가 고려 전기에 지명으로까지 나타났을 수도 있는 것이다.

 

 

정상에 오르면 가장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다. 마치 숲을 연상시킬 정도로 하늘을 향해 솟구친 수많은 철탑(鐵塔)들이다. ‘공중파(空中波) 방송사들과 이동통신사들의 송신탑(送信塔)들이다. 탑들이 정상 어림을 빈틈이 없을 정도로 빼꼭히 채우고 있는 것이다. 옛날에는 이곳에 봉수대(烽燧臺)가 설치되어 동쪽으로는 충주 마산(馬山), 그리고 북쪽으로는 음성 망이산(望夷山) 혹은 마이산(馬耳山)봉수에 각각 연결하는 통신기지(通信基地) 역할을 수행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그 자리를 통신사들의 중계기지가 차지하고 있다. 시대가 바뀌면서 새로운 시설에 자리만 내주었을 뿐 하고 있는 역할은 똑같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가섭산이 인근에서 가장 높아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능선으로 된 가섭산 정상은 그 넓이가 제법 너른 편이다. 웬만한 건물쯤은 거리낌 없이 들어앉을 정도로 평평한 것이다. 수없이 많은 중계시설들이 거침없이 이곳저곳에 들어선 이유일 것이다. 충청북도 특유의 검은 오석(烏石)으로 된 정상표지석은 무인산불감시탑의 바로 앞에 세워져 있다.

 

 

정상에서는 걸칠 것 없이 시야(視野)가 열린다. 주변에 나무들이 있기는 하지만 키가 작아 조망에 지장을 줄 정도까지는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어디가 어디인지는 분간은 할 수가 없다. 연무(煙霧)가 자욱한 탓이다. 그저 바로 코앞에 솟아있는 중계시설들의 철탑으로 위안을 삼을 뿐이다. 아쉬운 마음으로 흐릿한 풍경을 바라보다가 문득 음성팔경(陰城八景)을 떠올린다. 이곳 가섭산에 음성팔경으로 꼽히는 풍경이 하나 있기 때문이다. 바로 가섭모종(迦葉暮鐘)’이다. 가섭산의 저녁 종소리가 듣는 이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포근히 감싸준다는 것이다. 흐릿한 풍경에서 저녁의 어스름이 연상되었던 모양이다.

 

 

오늘도 난 아는 것만큼 보인다.’라는 진리를 되뇌는 우()를 범해버리고 말았다. 사전 준비를 소홀히 했던 탓에 실제 정상을 밟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실제 정상은 정상표지석이 세워진 이곳이 아니라, 사실은 아래 사진에서 보이는 저 철탑들 근처였다. 그곳에 삼각점과 작은 봉수대가 있었다는 것을 산행이 끝나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에서야 알게 된 것이다. 그 정도뿐 안 되는 내 앎을 가지고 어찌 많은 것을 볼 수 있었겠는가.

 

 

중계소 오른편 철망을 따라 잠시 내려서면 갈림길(이정표 : 길마재 0.8Km/ 임도 0.7Km/ 중계소 0.1Km)이 나온다. 왼편(임도 방향)은 아까 정상으로 올라오기 바로 직전에 헤어졌던 곳으로 연결이 되며, 우리가 가야할 곳은 오른편 길마재 방향이다 

 

 

갈림길에서 100m쯤 더 가면 산길은 왼편으로 크게 방향을 튼다(이정표 : 길마재 0.7Km/ 중계소 0.2Km). 능선을 벗어난 느낌이 들기 때문에 혹시라도 길을 잘못 들었을까 걱정이 될 수도 있는 구간이다. 산길은 이때부터 제법 가파르게 경사를 낮춘다. 그리고 중간에 작은 봉우리를 한번 오르내린 후 길마재(이정표 : 수리봉 0.6Km/ 관리사무소 1.0Km/ 가섭산 0.9Km)에 내려서게 된다. 정상에서 15분 남짓 걸렸다. 길마재는 신니면 선당리 사람들이 음성 장에 다닐 때 넘나들던 고갯마루이다. 그 생김새가 마치 길마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길마란 짐을 싣거나 수레를 끌기 위하여 소나 말 따위의 등에 얹는 안장을 말한다.

 

 

 

 

길마재를 지나면서 산길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가파르게 변한다. 오늘 산행에서 가장 힘든 구간이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다행이도 그 거리는 짧다. 숨을 헐떡거리며 7분쯤 오르면 왼편에 소나무에 둘러싸인 전망바위가 나타난다. 음성읍 방향으로 시야(視野)가 열리나 연무(煙霧) 때문에 어디가 어딘지는 구분이 잘 안 된다.

 

 

 

 

전망대에서 5~6분만 더 오르면 봉학산(수리봉)이다. 이정표(두호21.3Km/ 삼림욕장 1.4Km/ 중계소 1.5Km)가 세워진 삼거리 오른편에 있는 공터에 낯익은 코팅(coating)지가 보인다. 가끔 산행을 같이 하고 있는 한현우씨가 매달아 놓은 것이다. 그가 오른 4,439번째 산이라면서 말이다.

 

 

 

그러나 봉학산의 실제 정상은 이곳이 아니다. 실제 정상은 삼거리에서 왼편 삼림욕장 쪽으로 50m쯤 떨어진 곳이 있다. 남쪽 사면(斜面)이 바위벼랑으로 이루어진 정상에는 의외로 넓은 공터로 이루어져 있다. 칠이 다 벗겨진 철판(鐵板)에다 매직으로 봉학산이라고 써놓은 안내판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 별도의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는다. 정상에서 서쪽으로 오솔길이 하나 열린다. 산림욕장으로 내려가는 길이니 체력이 약한 사람들은 이곳에서 탈출하면 될 일이다. 참고로 봉학산은 산의 형태가 백학(白鶴)이 짝을 지어 날려는 형국(白鶴雙飛形: 풍수지리설의 백학쌍비형)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가섭산과 마찬가지로 봉학산 또한 음성팔경(陰城八景)의 하나를 품고 있다. 봉학초부鳳壑樵夫)로서, '봉학골 나무꾼의 구성진 노랫소리가 듣는 이의 심금(心琴)을 울린다.‘는 것이다.

 

 

 

 

아까의 공터봉으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두호2봉으로 향한다. 두호2봉까지는 30분 이상이나 되는 제법 먼 거리이다. 그러나 작은 오르내림만 반복될 뿐 아무른 특징이 없는 길이 계속된다. 10분 조금 못되어 첫 번째 안부(이정표 : 두호20.8Km/ 수리봉 0.5Km)에 내려서면 왼편으로 관리사무소로 내려가는 길이 갈리고, 또다시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다보면 15분 후에는 두 번째 안부(이정표 : 두호20.2Km/ 수리봉 1.1Km/ 관리사무소 1.3Km)에 내려서게 된다.

 

 

 

 

안부에서 다시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산길은 그 가파름이 부담스러웠는지 왔다갔다 갈지()자를 그리면서 겨우겨우 고도를 높여가고 있다. 그러나 다행이 그 거리는 짧다. 10분이 채 안되어서 두호2(선지봉) 정상에 올라설 수 있기 때문이다.

 

 

 

서너 평 남짓한 공터로 이루어진 두호2봉 정상도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두호2'이라는 명찰을 단 이정표(두호11.4Km/ 수리봉 1.3Km)가 이를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특별한 볼거리도 없다. 거기다 조망(眺望)까지도 터지지 않는다.

 

 

두호1봉으로 향한다. 두호1봉까지는 내려가는 길이 계속된다. 가파르다가 완만하기를 반복하면서 계속해서 고도(高度)를 까먹다보니 필요 없는 걱정이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이러다가 별개의 산을 다시 오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나저나 산길은 또렷하다. 거기다 보드라운 흙길이다 보니 가끔 나타나는 비탈길에서도 내려서는데 별로 부담을 느끼지 않을 정도이다. 가뭄 때문에 발을 내디딜 때마다 먼지가 폴싹폴싹 올라오는 것만 빼면 말이다.

 

 

 

 

두호2봉을 내려선지 30분쯤 되면 안부(이정표 : 두호10.2Km/ 관리사무소 0.6Km/ 두호21.2Km)에 내려서게 된다. 이어서 맞은편 능선을 향해 가파르게 5분 정도를 치고 오르면 두호1봉 정상이다.

 

 

 

두호1봉 정상도 정상표지석이 없기는 두호2봉과 마찬가지다. 조망을 허락하지 않는 것도 같다. 그러나 이곳에는 이정표 대신에 정상표지판(두호1봉 해발 490m)이 이를 대신하고 있다. 2봉보다 한참이나 낮음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표지판에 적힌 높이가 좀 이상하다. 두호2봉의 높이가 574m, 2봉에서 30분 정도를 계속해서 고도(高度)를 까먹었는데도 아직까지 490m의 해발을 유지하고 있다면 이게 더 이상한 일이지 않겠는가. 선답자의 글에서 GPS에 고도가 375m로 찍혔다고 하는 걸 읽은 적이 있는데 그게 옳지 않나 싶다.

 

 

두호1봉을 지나면서 산길은 가파른 내리막길로 변한다. 조심스럽게 내려서다보면 한두 번 오른편으로 시야(視野)가 열린다. 산림욕장 아래에 있는 용산저수지와 그 너머의 음성시가지가 잘 조망된다. 이어서 비탈길 막바지에 나타나는 낙엽송 군락을 지나면 13~4분 후에는 산림공원에 내려서게 된다.

 

 

 

산행날머리는 봉학골삼림욕장 주차장(원점회기)

산을 내려서면 정자(亭子)가 길손을 맞는다. ‘봉학골 산림공원(일명 삼림욕장)’에 내려선 것이다. 잘 가꾸어진 공원으로 들어서서 다리를 건너면 장승공원이다. 그러나 장승은 보이지 않고 호랑이와 원숭이 같은 동물들과 장수풍댕이 등의 곤충들 상()이 만들어져 있다. 아이들이 좋아하기에 딱 좋은 장소이다. 이어서 관리사무소 앞을 지나 밖으로 나오면 아침에 산행을 시작했던 주차장에 이르게 되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총 3시간35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서 쉬었던 시간을 감안할 경우 3시간 20분이 걸린 셈이다. 참고로 1998년에 문을 연 이 공원은 130규모로 솟대, 조각공원, 맨발숲길, 식물원, 물레방아. 삼림욕장, 운동시설, 놀이시설, 자연학습관 등의 다양한 시설을 갖추고 있고, 정자 1동과 산책로, 화장실, 텐트장, 간이 수영시설 등의 편의 시설도 구비되어 있다. 특히 봉학산 등산로의 시점과 종점을 이곳에서 할 수 있도록 해놓아 주말이면 많은 사람들이 찾아든다고 한다.

덕의봉(德義峰/만월령, 491m)-도덕봉(道德峰, 543.5m)

 

산행일 : ‘15. 4. 30()

소재지 : 충북 옥천군 청산면과 청성면의 경계

산행코스 : 청산파출소느티나무(백운리)오른쪽능선도덕봉만월고개401m헛고개분기봉덕의봉약수터팔각정청산장터(산행시간 : 3시간25)

함께한 산악회 : 강송산악회

 

특징 : 풋풋한 인심을 자랑하는 청산면을 좌청룡우백호처럼 감싸고 있는 산이 바로 도덕봉과 덕의봉이다. 두 산 모두 전형적인 육산(肉山), 육산의 고질적인 특징대로 특별한 볼거리는 없다. 만일 도덕봉 정상과 덕의봉 하산 길에서 간혹 터지는 조망(眺望)까지도 없었더라면 그야말로 지루하기 딱 좋은 산세(山勢)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고장 사람들은 이 산들을 즐겨 찾는다고 한다. 산길이 반듯하게 나있는 게 그 증거일 것이다. 산길이 넓은데다가 경사(傾斜)까지 거의 없는 탓에 체력이 웬만한 사람이라면 큰 부담 없이 오를 수 있다는 게 그 원인이 아닐까 싶다. 거기다 산이 온통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 코끝에 솔향을 매달고 걸으면서 피톤치드까지 온몸으로 흡수할 수 있으니 힐링(healing)산행까지 가능하다. 멀리서도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산행들머리는 청산파출소(옥천군 청산면 지전리)

당전-영덕고속도로 보은 I.C에서 내려와 19번 국도를 타고 영동방면으로 달리면 청산면 소재지인 지전리에 이르게 된다. 이곳 지전리에 있는 청산파출소 앞이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청산파출소 앞은 널따란 공터로 5일에 한 번씩 전통 장이 서는 곳이다. 보통 때는 빈터로 그냥 남아있을 것은 당연한 일, 우리가 타고 온 버스가 이곳에 주차를 한 이유이다. 우리가 산행을 끝내고 되돌아올 때까지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청산파출소 앞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50m정도 가면 사거리, 이번에는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면사무소가 있는 방향이다. 다음부터는 갈림길에 관계없이 곧장 직진한다. ‘조진사 고가(趙進士 古家)' 안내판이 있는 사거리를 지나면 다음은 청산고등학교진입로다, 이때 오른편에 도덕봉등산로 안내도가 세워져 있지만 속지 말고 그냥 지나친다.

 

 

 

길을 가다보면 담벼락마다 예쁜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이 보인다. 그림들은 간혹 요즘의 세태를 그린 것들도 보이지만 대부분은 민화(民畵)들을 그려 놓았다. 그리고 그 솜씨가 자못 빼어나다. 전문화가가 그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그동안 전국 곳곳에서 벽화(壁畵)로 치장된 담벼락들을 보아왔다. 그리고 수많은 곳에서 그저 장난삼아 그린 것 같은 그림들을 만났었다. 그래서 벽화란 다 그런 것이려니 했다. 그런 그릇된 고정관념(固定觀念)을 확 바꾸어버린 그림들을 이곳에서 보게 된 것이다.

 

 

 

능선으로 오르는 길은 청산고등학교진입로를 지나 다음에 만나게 되는 5거리(청산면 백운리)에서 오른편으로 열린다. 파출소에서 10분 남짓 되는 지점이다. 오거리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버티고 있으니 참조하면 된다. 이곳 오거리에는 도덕봉등산로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잠깐 멈춰 서서 가야할 길을 미리 파악해 둔다면 산행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오거리에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도덕봉 등산로 중 1코스로서 거리는 2,196m란다. 오거리에서 능선까지는 10분 정도의 거리, 임도는 능선의 바로 아래에 있는 농가에까지 연결되어있다. 거리가 멀지도 않지만 가는 길에 잘 지어진 전원주택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다. 특히 주택의 축대에 소담스럽게 피어나 봄꽃들이 볼만하다.

 

 

능선으로 가는 길에 바라본 덕의봉,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다.

 

 

마지막 농가에서 오른편 산자락으로 들어붙는다. 그리고 3분 후에는 능선 위로 올라서게 된다. 능선에 오르면 오른편으로 시야(視野)가 열린다. 청산면의 들녘이 제법 넓다. 그 뒤를 바치고 있는 산들은 팔음산과 백화산일 것이다.

 

 

 

 

능선위로 올라서면 잠시 후에 오른편으로 난 길 하나가 보인다. 이 또한 느티나무가 있던 백운리에서 올라오는 길인 모양인데, 아까 우리가 지나왔던 길의 중간 어디에서 나뉘었는지 모르겠다. 이후부터 길은 탄탄대로이다. 서너 사람이 나란히 옆으로 서서 걸어도 될 만큼 너른데다가 경사(傾斜)까지도 거의 없는 것이다. 길이 편하다보니 자연스레 주위를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곱게 핀 들꽃들에 눈을 맞춘다. 마침 주변은 온통 붓꽃 군락지, 보라색 꽃 잔치를 열고 있다.

 

 

 

능선은 온통 소나무들 세상, 중간에 참나무 군락지가 나타나기도 하지만 잠깐일 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소나무라고 보면 된다. 덕분에 산행은 시작부터 상큼하게 시작된다. 코끝에서 맴도는 솔향 덕분일 것이다. 세계적 석학 하버트 벤슨(Herbert benson) 박사는 마음으로 몸을 다스려라는 책에서 스트레스와 심신의 고통에 시달리는 현대인에게 명상과 휴식을 통해 질병의 80%를 치유할 수 있다고 했다. 마침 지금 걷고 있는 산길은 넓을 뿐만 아니라 경사(傾斜)까지도 거의 없다. 명상을 즐기면서 걷기에 딱 좋다는 얘기이다. 거기다 신선한 공기와 솔향까지 더할 수 있으니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오늘 산행은 당연히 웰빙(well-being)산행, 아니 힐링(healing)산행이라 할 수 있다. 거기다 소나무는 피톤치드(phytoncide)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저 솔향이 피톤치드로 가득 차 있음은 당연하다. 아까부터 심신이 한없이 맑아진 이유일 것이다. 피톤치드의 효능 중에는 몸으로 스며드는 각종 병균의 살균기능 외에도 심폐기능을 강화시키는 효능도 있기 때문이다. 명상에 의한 힐링(healing)에다 피톤치드의 효능까지 더 했으니 이보다 더한 힐링이 어디 있겠는가.

 

 

 

능선은 편하기 그지없다. 등산로의 대부분은 평탄하고 오름길이라고 해봐야 완만하기 짝이 없다. 그런 산길을 50분 조금 못되게 오르면 슬랩(slab)으로 이루어진 바위벼랑이 앞을 가로막는다. 왼편으로 우회로가 나있으나 구태여 돌아갈 필요는 없다. 벼랑의 경사도 급하지 않을뿐더러 굵은 로프까지 매어 놓았기 때문이다.

 

 

 

바위벼랑을 지나면 산길은 갑자기 가팔라진다. 그러나 다행이도 길지는 않다. 10분이 채 안되어 정상어림에 만들어진 헬기장에 올라서게 되기 때문이다. 정상은 헬기장의 바로 위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10분 정도가 지났다. 물론 천천히 걸은 결과이다.

 

 

 

봉긋하게 솟아오른 구릉(丘陵) 모양으로 된 정상은 주객(主客)이 전도(顚倒)된 느낌이다. 손님이어야 할 무인산불감시탑이 주인인 정상표지석보다 더 위용을 자랑하고 있기에 하는 말이다. 또 하나 아쉬운 점은 꼭 있어야할 이정표가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이다. 비록 삼각점(관기 24)이 세워져 있으나 이곳의 지리좌표(위도와 경도, 그리고 표고)를 알려줄 뿐 도덕봉을 둘러싼 지점이나 방향 등을 알 수 없기에 하는 말이다.

 

 

 

정상은 사방으로 막힘이 없는 시원한 풍광을 펼쳐 보인다. 남쪽에는 백화산이 그리고 동북방향에는 속리산이 또렷하다. 또한 서쪽에는 청산의 또 다른 명산인 덕의봉이 코앞에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물론 남쪽으로도 활짝 열린다. 청산면 일대와 그 곳을 적시고 흐르는 보청천이 평화로운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덕의봉으로 가는 능선은 정상 아래의 헬기장에서 서쪽으로 열린다. 비록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으나 길이 또렷하기 때문에 헷갈릴 염려는 없을 것이다. 내려가는 길은 제법 가파르다. 그러나 가파르다는 느낌이 들 틈이 없다. 주변이 온통 고사리 밭이라서 새로 나온 고사리 순을 채취하느라 정신들이 없기 때문이다. 아까 도덕봉으로 올라올 때부터 보이던 고사리들이 도덕봉을 지나면서 아예 군락지로 변해버린 것이다. 부지런하게 손을 놀린 집사람 덕분에 우리부부는 일 년 내내 제사상(祭祀床)에 올리고도 남을 만한 양을 뜯을 수 있었다. 아니 우리 부부만이 아니다. 함께 산행을 한 마음을 다스리는 산행의 저자 이석암선생과 산행을 안내해주신 강송산악회 대장님께서 보태주신 양도 제법 되었으니 말이다.

 

 

정상에서 20분쯤 내려서면 만월고개이다. 고사리를 꺾느라 지체된 시간이 감안되지 않았으니 참조해야 할 일이다. 만월고개는 만월리 사람들이 넘나들던 고갯마루이다. 이 마을 사람들은 청산면소재지가 생활권이어서 도덕봉과 덕의봉 사이 언덕에 길을 내어 청산면 소재지를 오갔다. 공부하는 학생들이 새벽과 밤을 마다않고 넘나들었고 장날이면 장보러가는 어른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마을사람들의 애환(哀歡)이 서렸던 고갯길은 지금은 옛이야기로만이 남아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그 자리는 산을 오르는 등산객들이 대신하고 있다. 만일 체력이 다한 사람들은 이곳에서 왼편으로 하산하면 된다. 참 잊은 것이 하나 있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이정표(덕의산/ 백운리)를 만났다는 얘기이다. 비록 방향만 표시된 단순한 이정표이지만 말이다.

 

 

 

만월고개에서 다시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상당히 가파른 길이다. 그러나 오르막길은 12~3분이면 정상에 올라설 수 있을 정도로 그 거리가 짧다. 402m봉은 별다른 특징이나 볼거리가 없는 그저 그렇고 그런 봉우리의 하나이다. 물론 정상표지석도 없다. 다만 이름표 없는 이정표(덕의봉/ 백운리) 하나가 주인노릇을 하고 있을 뿐이다.

 

 

 

402m봉에서 다시 6분쯤 내려서면 헛고개이다. 내리막길은 아까 도덕봉에서 내려올 때와는 달리 경사(傾斜)가 완만해서 내려서기가 수월한 편이다. 헛고개에 이르면 좌우로 길이 나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비록 지도(地圖)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아까 만월고개와 같은 장소로 연결되지 않을까 싶다.

 

 

 

헛고개에서 다시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능선으로 연결되는 산길은 비록 가파르지는 않지만 제법 길게 이어진다. 그리고 15분쯤 후에는 분기봉(461.4m)에 올라선다. 이곳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오른편은 금마산을 거쳐 여치고개로 연결되며 덕의봉으로 가려면 계속해서 능선을 따라야 한다. 분기봉은 비록 삼거리이나 이정표에는 덕의봉과 백운리 두 곳만 표기되어 있으니 참조할 일이다.

 

 

 

분기봉에서 덕의봉까지는 대략 700m정도, 오르내림이 거의 없는 능선으로 연결되며 대략 18분 정도가 걸린다. 그렇다고 오르막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덕의봉 바로 아래에서 마지막 몸부림인양 잠깐의 오름짓을 하고 나면 드디어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도덕봉 정상에서 이곳까지는 대략 1시간15분 정도가 걸렸다.

 

 

 

덕의봉 정상은 평범하기 짝이 없다. 정상표지석은 물론이고 그 흔한 이정표 하나 보이지 않는다. 트랭글(tranggle)이란 애플리케이션에서 매달아 놓은 정상표지판과 서래야 박건석선생의 정상표시 코팅지가 정상석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조망(眺望) 또한 허락하지 않는다. 주변이 울창한 참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정 조망을 원한다면 정상의 조금 아래에 있는 무덤에서 약간이나마 허락되니 하산 길에 즐기면 될 일이다. 보청천이 흐르는 청산면의 너른 들녘 너머로 영동의 백화산이 조망된다.

 

 

정상으로 올라왔던 반대방향으로 하산을 시작한다. 진행방향에 묘()가 한 기()가 있으니 참조하면 된다. 전망이 탁 트이는 것이 풍수지리에 문외한인 내 눈에도 명당자리로 보인다. 하긴 그렇지 않다면 누가 이렇게 높은 곳에다 묘를 썼겠는가.

 

 

이어서 조금만 더 내려오면 또 다른 전망대(展望臺)에 이른다. 너른 터를 활용이라도 하려는지 벤치를 갖춘 쉼터로 만들어 놓았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청산면의 조망(眺望)은 가히 장관이라 하겠다. 발아래에 시가지가 널따랗게 펼쳐짐은 물론이고, 백화산을 비롯한 높고 낮은 충청도의 산들이 그 뒤를 받치고 있다. 시원스런 조망으로 봤을 때 이곳이 혹시 망운암의 옛 절터가 아닐까 싶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이나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다같이 덕의산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 그 망일암(望日庵) 말이다. 청산팔경(靑山八景) 중에서도 가장 빼어났다는 망일효종(望日曉鍾)은 덕의봉 중턱에 있던 망일암(望日唵)의 새벽 종소리를 노래한 것이다. 망일암에서 백년을 하루같이 새벽에 종을 울리는데, 그 종소리는 모든 중생에게 대자대비(大慈大悲)한 부처님의 뜻을 널리 전한다는 것이다.

 

 

전망대를 지나면 산길은 갑자기 가팔라진다. 지도(地圖)급경사구간으로 표시된 지점이다. 지도의 진위(眞僞)를 검증(檢證)이라도 하려는 듯 산길은 가파르기 짝이 없다. 그리고 가파름을 배겨내지 못한 산길은 끝내 밧줄을 매어놓고야 말았다. 주변에 날선 바위벼랑들이 연이어 나타나는 것을 보면, 이 정도의 급경사(急傾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조심스럽게 내려가는데 앞서가던 집사람이 멈춰 서서 탄성을 지르고 있는 것이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사랑나무라는 간판을 달고 있다. 뿌리가 다른 소나무 두 그루가 나뭇가지로 엉켜 마치 하나의 나무처럼 자라고 있는 형상이다. 이런 상황을 두고 우리는 보통 연리지(連理枝)’라고 부른다. 다른 곳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기에 그냥 지나치려는데 집사람의 표정이 뭔가 심상치가 않다. 그리고 잠시 후에 그 원인을 알게 된 나 또한 감탄을 금치 못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사랑나무라는 이름표에 공감을 하게 된다. 나뭇가지로 연결된 모양새가 영락없이 성교(性交)를 하고 있는 형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혹시 제단(祭壇)이라도 보일까 해서이다. 대개 이런 곳에는 득남(得男)을 원하는 이들이 만든 제단이 있음을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런 제단은 눈에 띄지 않았다. 덕분에 우리 부부는 늦둥이이라도 하나 얻으려 했더니 하늘이 말린다는 농담으로 끝을 맺으며 발길을 돌린다.

 

 

 

사랑나무에서 조금만 더 내려오면 약수터이다. 정상에서 대략 25분 정도 걸린 것 같다. 약수터는 정규 등산로에서 오른쪽으로 약간 비켜난 산모롱이에 위치하고 있다. 물맛이라도 보려면 산자락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몇 걸음 더 걸어야 함은 물론이다.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는다는 이 약수터는 덕의봉의 자랑거리로 알려져 있다. 물을 뜨려고 먼 곳에서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란다. 그만큼 물맛이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찾아보면 실망부터 하게 된다. 옹달샘 안의 물은 그 양이 많지도 않고 물빛 또한 맑아 보이지 않는다. 특히 옆에 걸려있는 시험성적서에는 마시는 물로 부적합하다고 적어놓고 있다. 가지런히 매달린 플라스틱 바가지가 할 일을 잃어버린 셈이다. 당연히 물맛 보는 것을 포기하고 발걸음을 돌리고 만다.

 

 

약수터를 빠져나오자마자 또 다시 전망이 확 트인다. 벤치 몇 개를 갖춘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벤치에 앉으면 청산면 소재지가 발아래에 일목요연하게 펼쳐진다. 그리고 옆에 있는 소나무 가지에 훌라후프(hula hoop) 몇 개가 걸려있는 것으로 보아, 약수를 뜨러 오는 사람들이 몸을 풀고 내려가는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 외에도 국기게양대와 태양열집열판이 설치되어 있으나 용도는 모르겠다.

 

 

쉼터를 지나면서 산길은 한없이 고와진다. 보드랍기 짝이 없는 황톳길 위에는 솔가리(소나무 落葉)들 까지 수북하게 쌓여 폭신폭신한 것이 마치 양탄자 위를 걷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물론 조망 좋은 곳에 만들어진 쉼터도 만난다. 청산면 시가지뿐만 아니라 그 뒤를 받치고 있는 백화산까지도 선명하게 나타난다. 산길은 능선을 따라 연결된다. 가끔 왼편으로 갈림길이 나뉘기도 하지만 신경 쓸 필요는 없다. 능선으로 난 길이 더 고울 뿐만 아니라 면소재지로 가는 최단 코스이기 때문이다.

 

 

산책로(散策路) 같은 편안한 길을 따라 걷다보면 반듯하게 지어진 팔각정을 만나게 된다. 약수터에서 10분 정도의 거리이다. 주변에 체육시설과 벤치까지 갖춘 제대로 된 쉼터이다. 정자 앞 전망 좋은 위치에다 전망대까지 만들어 놓았다. 데크에 서면 다시 한 번 청산면소재지가 눈앞에 펼쳐진다. 백화산을 비롯한 높고 낮은 산들이 그 뒤를 받치고 있음은 물론이다.

 

 

산행들머리는 청산파출소 앞 장터(원점회귀)

정자에서 침목(枕木)계단을 밟으며 가파르게 잠깐 내려서면 산길은 다시 완만하게 변하고, 잠시 후에는 임도에 내려서게 된다. 이어서 시멘트포장 임도를 따라 잠시 걸으면 마을로 들어서게 된다. 그리고 마을 안길을 걸으며 잠시나마 꿈결 같은 고향의 맛에 빠지다보면 어느덧 청산파출소 앞에 이르게 되면서 오늘 산행(6.9km)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3시간35분이 걸렸다. 중간에서 간식을 먹느라 쉬었던 시간을 감안할 경우 3시간25분이 걸린 셈이다. 물론 고사리를 채취하면서 서서히 걸은 결과이다.

 

에필로그(epilogue), 산행을 끝내고 소머리국밥집에 자리를 잡는다. 산악회에서 찰밥과 약간의 술을 제공한다고는 하지만 술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안주거리가 더 절실했기 때문이다. 마침 버스가 주차되어 있는 부근에 국밥집이 있어서 무턱대고 들어선 게 이집이다. 그리고 그 선택이 잘 되었음을 알아차리는 데는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땀을 씻을 수 있느냐는 내 질문에 주인아주머니는 안방에 딸린 샤워장까지 내주는 친절을 베푼다. 주인장의 친절뿐만이 아니다. 음식 맛 또한 뛰어났다. 국물은 쫀득쫀득하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진했고, 국물 속에 든 고기 또한 감칠맛이 있었다. 이게 다 주인장이 밤을 세워가며 직접 끓여낸 결과란다. 그러나 사실 이 지역의 향토음식은 생선국수이다. 생선국수란 생선국물에 밀국수 사리를 넣은 국수를 말한다. 생선을 뼈째 푹 우려냈기 때문에 구수한 맛이 일품이고 단백질, 칼슘, 지방 비타민이 풍부하여 성장기 어린이, 노약자에게 좋다고 알려져 있다. 때문에 이곳 청산면 사람들뿐만 아니라 전국의 식도락가들이 이따금 찾는 별미 중의 별미이다. 충남 금산에 가면 어죽이라는 향토음식이 있다. 쏘가리·메기·빠가사리(동자개) 등 온갖 민물고기를 푹 곤 다음 쌀·수제비·국수를 넣고 걸쭉하게 끓인 음식이 어죽이다. 그 어죽에서 걸쭉한 쌀·수제비를 뺀 대신 칼칼한 국물에다 국수를 말아먹는 것이 생선국수라고 보면 된다. 이왕에 옥천까지 왔으니 생선국수를 먹어보는 것이 정상이겠지만 생선 비린내를 싫어하는 탓에 그냥 눈에 띄는 식당에 들어섰는데 의외로 내 식성에 딱 맞았으니 이 또한 행복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힐링(Healing)이라는 오늘 산행의 명제(命題)에 웰빙(well-being)이라는 또 다른 의미 하나가 더해진다.

남산(南山=錦峰山, 636m)-계명산(鷄鳴山, 775m)

 

산행일 : ‘15. 1. 13()

소재지 : 충북 충주시 안림동·직동·교현동·종민동의 경계

산행코스 : 행복한교회남산등산로깔딱고개남산(금봉산)북문마즈막재계명산범골충주댐공원(산행시간 : 4시간50)

 

함께한 산악회 : 가보기산악회

 

특징 : 충주시의 진산으로 알려진 남산(금봉산)과 계명산은 바로 이웃에 위치하면서도 각자 지니고 있는 특성은 사뭇 다르다. 전형적인 흙산인 남산은 순한 편이지만 바위와 흙이 섞여있는 계명산은 제법 거칠면서도 험하기 때문이다. 충주시에서는 이런 각자의 특성에 맞춰 산을 가꾸어 놓았다. 남산은 체육시설과 편의시설 등을 고루 갖춘 도심(都心) 근린공원(近隣公園)으로 조성했고, 계명산은 등산객들의 기호에 맞춰 산을 정비했다. 특히 남산은 정상으로 올라오는 도로가에 옛 이야기를 담은 그림들을 게시해 이 지방의 역사(歷史)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대몽항전에서 당당히 승리를 이끌어냈던 충주산성과 함께 조상들의 빛난 얼을 되새길 수 있도록 가꾸어 놓은 것이다.

 

산행들머리는 남산 주차장(충주시 교현동)

중부내륙고속도로 충주 I.C에서 내려와 3번 국도와 중원대로를 따라 충주시내 방향으로 잠깐 들어오면 사과나무사거리(달천동)가 나온다. 이곳에서 우회전하여 호수사거리까지 간 후, 또 다시 우회전하여 호암대로와 금봉대로를 연이어 타고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남산아파트 앞에 이르게 된다. 이곳 남산아파트 105동 건너편에서 오른편으로 길(남산1)이 열린다. 이 길을 따라 조금만 더 올라가면 산행들머리인 남산주차장이다.

 

 

 

주차장에서 빠져나와 들어왔던 길과 반대방향으로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주차장의 왼편에 생긴 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제법 큰 전각(殿閣)들을 거느린 대한불교태고종 소속의 대봉정사(大峯精寺)가 보이니 참조할 일이다. 산행을 시작하면 길의 좌우로 사과과수원들이 줄지어 나타난다. 도심(都心)에서까지 사과나무를 볼 수 있는 것을 보면 역시 충주가 사과의 본고장인 모양이다. 그리고 길가에는 심심찮게 음식점들이 나타나는데, 하나같이 도토리 묵밥이라는 메뉴(menu)를 걸어놓고 있다. 이는 이곳 남산이 충주시민들이 스스럼없이 찾는 장소이고, 또한 이 부근에서 도토리가 많이 채집된다는 증거일 것이다. 산행을 마친 사람들이 출출해진 배를 채우려고 들어가는 곳이 음식점일 테니까 말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10분 남짓 지나면 등산로 입구에 이르게 된다. 들머리에 등산로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니 잠깐 멈춰 서서 진행해야할 코스를 살펴본다. 이곳에서 약수터를 거쳐 능선 안부로 오른다. 그리고 계명산 정상까지 간 후, 마즈막재로 내려가는 코스이다. 쉬지 않고 보통 걸음으로 걸으면 2시간이면 충분할 것이다.

 

 

▼ 나무계단을 밟고 올라서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산에 들어서자마자 느끼게 되는 건 숫제 공원(公園)이라는 것이다. 길가에 조그만 틈이라도 생기면, 아니 억지로라도 터를 만들어가며 각종 체육시설과 의자 등의 편의시설(便宜施設)들을 설치해 놓았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그것으로도 부족했던지 시판(詩板)이나 돌탑 등 조경(造景)에까지 신경을 쓴 흔적이 역력하다. 그만큼 충주시민들이 스스럼없이 찾는다는 증거일 것이다.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산에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산행을 끝내고 내려오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길가에 늘어선 운동기구에 매달려 땀을 흘리고 있다. 그들의 활력에 이끌려 인사를 건네 본다. 물론 최대한 경쾌하게 말이다. 두어 마디 이야기를 건네도 될 만큼 산길의 경사(傾斜)가 아직까지는 완만(緩慢)하다.

 

 

등산로 입구에서 15분 정도를 걸으면 왼편에 약수터가 보인다. 깔끔하게 지어진 정자(亭子) 안에 들어있으니 한 모금 마신 후에 다시 산행을 이어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마침 물을 마실 수 있도록 플라스틱 바가지도 비치해 놓았고, 특히 맘 놓고 마시라고 수질분석표까지 옆에 게시해 놓았으니 말이다.

 

 

약수터를 지나면 곧이어 가파르면서도 긴 나무계단이 나타난다. 이름부터가 무시무시한 깔딱고개이다. 깔딱고개란 이곳을 오를 때 숨이 깔딱 넘어갈 정도로 힘이 드는 고개라는 뜻이다. 쉽게 말해 경사(傾斜)가 너무 가파르기 때문에 오르기가 만만찮다는 얘기이다. 그러나 이곳의 깔딱고개는 그다지 힘들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계단을 놓아 한결 편하게 올라갈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탓일 것이다.

 

 

깔딱고개는 5분 정도면 끝이 난다. 그리고 능선안부(이정표 : 창용사 0.3Km, 충주산성 1.28Km/ 범바위 1.87Km/ 등산로입구 0.73Km)에 올라서게 된다. 아까 등산로 초입에서 범바위로 가는 길이 오른편으로 나뉘는 것을 보았는데, 그쪽으로 갔을 경우 이곳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모양이다. 능선 역시 체육시설과 벤치를 갖춘 쉼터로 조성되어 있다. 오늘의 이용객들은 수자원공사 소속의 선수들, 조금 전에 계단을 뛰어서 오르내리던 이들이 바로 이들이었던가 보다.

 

 

일단 능선에 올라서고 나면 산길은 고와진다. 부드러운 흙길에다 경사도 거의 없는 평탄한 길이 계속되는 것이다. 이 길은 중간에 샘골약수터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삼거리(이정표 : 충주산성 0.83Km, 마즈막재 3.03Km/ 샘골약수터 1.09Km/ 0.45Km)를 만나게 되고, 이어서 조금 후에는 오늘 산행에서 처음으로 시야(視野)가 열린다. 가까이에 있는 발치봉과 두릉산은 물론이고, 주흘산과 월악산 등 충청권의 고산준령(高山峻嶺)들이 마치 파노라마(panorama)처럼 펼쳐지고 있다.

 

 

 

조망을 즐기다가 다시 산행을 이어가면 20분 정도 후에는 삼거리(이정표 : 마즈막재 2.2Km/ 재오개 0.8Km/ 샘골약수터 0.83Km, 깔딱고개 1.28Km)를 옆에 끼고 있는 남산의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제법 너른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은 두 개의 정상표지석과 삼각점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별로, 아까 이곳으로 오면서 만났던 조망처나 조금 후에 성곽(城郭) 위에서 만나게 될 조망처에 비하면 보잘 것이 없으니 그냥 지나쳐도 된다. 참고로 남산은 옛날부터 계명산과 함께 충주의 진산(鎭山)’으로 알려졌다. 원래의 이름은 금봉산(錦鳳山)’이었는데, 금봉산은 비단봉황이라는 의미가 더해진 예사롭지 않은 이름이다. 조선 성종 때 만든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조선 후기 김정호가 그린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도 금봉산으로 나온다.

 

 

정상에서 마즈막재로 내려가는 길은 충주산성(忠州山城 : 충청북도 기념물 제31)의 성벽(城壁) 위를 따라 걷게 된다. 충주산성은 남산(금봉산)의 정상부에서 동쪽으로 두 개의 계곡 상단을 에워싼 전형적인 신라 양식의 석축(石築) 산성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보이는 동악성(桐岳城)’으로 추정되며, 동악성(桐岳城=凍嶽城), 남산성(南山城), 금봉산성(錦鳳山城), 마고성(麻姑城)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충주산성은 마고선녀(麻姑仙女)와 관련된 축성설화(築城說話)가 전해져 내려온다. 옛날 금단산 수정봉에 은거하던 마귀할미가 하늘의 계율을 어기고 마구 살상을 하다가 천제의 노여움을 사 하천산 누독복으로 쫓겨나 험한 일을 하게 되었단다. 500년이 지난 후 마귀할미가 개과천선하는 기미가 보이자 천제께서 금봉산에 들어가 성을 쌓고 살라고 하면서 북두칠성을 따라 7일 이내에 축성하도록 했다는 전설이다. 다른 한편으론 조선약사(朝鮮略史)’에 백제 구이신왕 때에 쌓고 개로왕 때에 보수하여 적을 방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개로왕이 충주 안림동 일대에 도읍(都邑)을 옮기려 했다(고구려의 침공으로 이 계획은 불발에 그치고 문주왕에 의해 웅진으로 천도했다)는 전설(傳說)과 일치하고 있으니 참고해 볼 일이다. 참고로 이곳 충주산성은 고려시대의 명장(名將)이었던 김윤후(金允候) 장군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당시 산성방호별감(山城防護別監)으로 있던 그가 주민과 함께 몽고군의 침입을 막아냈던 역사의 현장이 바로 충주산성이기 때문이다.

 

성곽 위를 걷다보면 왼편으로 충주시가지가 온전히 내다보인다.

 

 

성곽(城郭)을 따라가다 보면 잘 생긴 소나무 한 그루를 만나게 된다. 등산로는 이곳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서 산성(山城)을 벗어난다. 그러나 곧바로 성곽을 벗어날 일은 아니다. 소나무 뒤편으로 몇 발작만 더 나가면 시원스런 조망(眺望)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충주호가 잘 내려다보이고 월악산 등 주변의 산군(山群)들이 한눈에 잘 들어오는 곳이다.

 

 

 

 

마즈막재로 내려가는 길은 두 가지이다. 굽이굽이 돌아가는 임도(林道)와 능선을 따르는 지름길이니 각자 편한 대로 선택하면 될 일이다. 물론 임도와 능선길은 여러 번에 걸쳐 만났다 헤어지기를 반복한다. 여기서 난 임도를 따라볼 것을 권하고 싶다. 임도를 따라 걸으며 이곳 충주지역의 역사(歷史)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볼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통일신라시대 당시 국토의 중앙이라는 의미로 충주에 세워진 중앙탑(中央塔)에서 고구려·백제·신라 백성들이 모여 화합을 다지는 장면과 신라의 가야금 명인인 우륵 선생이 탄금대에서 연주하는 모습 등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본 역사적 사실들을 그림으로 표현해서 길가에다 전시해 놓았다. 충주산성에서 대몽항쟁을 펼친 고려 때 김윤후 장군의 늠름한 모습이나 임진왜란 당시 신립 장군이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고 적과 싸우던 모습 또한 빠지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계명산까지 가야만하는 우리는 지름길인 능선을 택했다. 그러나 이 길은 겨울철에는 가급적 피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경사(傾斜)가 너무 가파르기 때문이다. 물론 가파름의 도()가 너무 심한 곳에는 안전로프가 설치되어 있다. 그러나 오늘 같이 산길이 온통 빙판일 경우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너무 꽝꽝 얼어붙은 탓에 아이젠(eisen)과 스틱(stick)까지도 도움이 되지 못 할 정도이니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산 시간은 많이 단축할 수 있으니 참고할 일이다.

 

 

설설 기다시피해서 40분 남짓 내려서면 마즈막재(心項峴)이다. 물론 임도를 5~6번 정도 가로지르며 능선을 따라 내려왔다. 마즈막재는 충주시내 방면 안림동과 충주호 방면의 종민동·목벌동의 경계를 이루는 고갯마루로서 옛날 단양이나 청풍, 수산 및 경상, 강원 일부 지방의 죄수를 충주 감영(監營)으로 이송할 때 이 고개를 넘으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고 해서 마지막 재가 되었다는 애처로운 전설(傳說)을 간직하고 있는 고갯마루이다. 옛날 남산 아래에 사형수들의 처형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죄수들이 이곳으로 끌려와 사형을 당하게 될 때 이 고개는 고향 쪽을 바라볼 수 있는 마지막 장소가 되고, 또 사형장이 가까워 삶의 마지막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는 것이다. 또한 이 고개의 원래 이름은 계명산의 옛 이름인 심항산(心項山)에 붙어있는 고개라고 해서 심항현(心項峴), 또는 마지막재라 불리었다. 그러던 것이 흐르는 세월 따라 고개의 이름 또한 마즈막으로 바뀌어버렸다. 참고로 마즈막재에는 남산에 있는 충주산성(忠州山城)에서 계명산과 잇대어 고개를 차단하는 약 720m의 석축성(石築城)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비록 희미한 흔적만 남아 있을 따름이지만 그만큼 이 고개가 전략적(戰略的)으로 중요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 중요한 역할은 삼국시대 때부터 이어졌다. 충주에서 남한강을 통하여 청풍과 단양, 죽령을 넘나들거나 하늘재를 넘어 영남에 이르는 중요한 길목이었던 것이다.

 

 

마즈막재에서 맞은편 통나무계단을 밟고 올라서면 대몽항쟁전승기념탑이 있다. 1253년 몽고군이 충주성을 공격할 때 산성방호별감(山城防護別監)으로 있던 김윤후 장군의 지휘 아래 관민(官民)이 한 덩어리가 되어 3개월 동안 몽고군을 막아 싸웠다. 이때 김윤후 장군은 공을 세우는 자는 귀천을 가리지 않고 벼슬을 주겠다.’며 독려했고, 몽고군이 견디지 못하고 물러나자 공을 세운 많은 사람들에게 벼슬을 주었다 한다. 이 승전(勝戰)을 기리는 기념탑(記念塔)이 옛 충주성 자리인 마즈막재에 세워져 있는 것이다. 이 탑의 탑신(塔身)은 산성의 성벽을 상징한 화강암으로 조성한 상단부에다 승전일(勝戰日)‘1253을 동판(銅版)으로 제작 부착하고, 탑신의 전면에는 군인(軍人)과 충주백성들의 상()을 배치해 대몽항쟁을 묘사했다. 그리고 벽에는 충주산성의 전적(戰績)을 기록하여 놓았다.

 

 

 

계명산으로 오르는 길은 기념탑 뒤편으로 열린다. 산길은 초입부터 가파르다. 그리고 그것도 부족했던지 점점 더 가팔라져 간다. 그러나 이에 놀라지는 말자. 이 정도에 놀랄 경우에는 조금 후에 할 말을 잃어버릴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가팔라지고 싶어도 더 이상 가팔라질 수가 없을 정도로 산길이 가파르게 변한다는 얘기이다. 이런 가파름이 부담스러웠던지 길가 곳곳에다 로프로 난간을 만들어 놓았다.

 

 

마즈막재를 출발해서 20분 조금 못되게 치고 오르면 너덜지대에 이르게 되고, 이어서 5분쯤 후에는 깔딱고개를 만나게 된다. 아까 남산을 오를 때 만났던 깔딱고개도 이곳에 비할 경우 애기 수준이라고 해도 괜찮을 정도로 이곳의 산길은 허리를 바짝 곧추세우고 있다. 산길은 깔딱고개를 지나서도 끊임없이 가파른 오르막을 만들어내다가 계명산자연휴양림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봉우리(이정표 : 정상 1.4Km/ 계명산자연휴양림 1.4Km/ 마즈막재 0.9Km) 위에다 올려놓는다. 마즈막재에서 40분 조금 못 걸리는 지점이다.

 

 

 

 

 

집사람의 발걸음이 점차 느려지기 시작한다. 함께 산행을 하고 있는 pinetrees님이 저만큼 뒤로 쳐진지는 이미 오래이다. 노익장(老益壯)을 자랑하고 있는 분이 저 정도라면 그만큼 산행이 힘들다는 얘기일 것이다. 이런 곳에서는 얘기를 주고받는 것까지도 삼가는 것이 좋다. 에너지 소비를 최대한 줄이는 게 그나마 덜 지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휴양림갈림길에서 20분 정도 더 오르면 또 다른 봉우리(이정표 : 정상 0.8Km/ 1전망대 0.5Km) 위에 올라서게 된다. 아마 지도에서 703m봉으로 표기된 지점일 것이다. 산길은 이곳에서부터 많은 변화를 보인다. 그동안 흙길이던 것이 갑자기 바위들의 숫자가 부쩍 늘어난 것이다. 비록 바위와 씨름을 해야 하는 짜릿함은 없지만 지루한 감은 많이 사라졌다.

 

 

 

 

쉼 없이 오르내리던 산길이 마치 몸부림이라도 치는 양 마지막 가파른 오르막길을 만들더니 드디어 정상 어림에 있는 헬기장(이정표 : 범골, 범동 2.0Km/ 막은대미재 4.3Km/ 마즈막재 2.6Km) 위에다 올려놓는다. 근처에 있는 정상보다 오히려 조망(眺望)이 더 뛰어난 곳이니 구태여 발걸음을 재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계명산에서 단연 최고이다. 발아래에는 충주호의 리아스(rias)식 호안(湖岸)이 아름답게 펼쳐지고, 그 뒤편에는 충청권의 높고 낮은 산들이 첩첩이 쌓여있다.

 

 

 

헬기장에서 10m만 더 오르면 계명산 정상이다. 대여섯 평 남짓한 정상은 두 개의 정상표지석과 삼각점이 지키고 있다. 마침 정상의 한쪽 귀퉁이에 멋지게 생긴 노송(老松) 한 그루가 웅크리고 있으니 잠시 쉬었다 가도 좋을 일이다. 다만 정상에 올라온 사람들이 사진을 찍는데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마즈막재에서 정상까지는 1시간30, 산행을 시작한지는 3시간30분이 지났다.

 

 

계명산은 원래 오동산(梧桐山) 또는 계족산(鷄足山)으로 불리었다. 전설에 의하면 오동나무가 무성했기 때문에 오동산이라 했고, 백제시대에 지네(百足蟲)가 많아 이를 퇴치하기 위하여 닭들을 방목하니 백족충이 없어져서 계족산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1958년에 계명산(鷄鳴山)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풍수설에 따르면 계족산이 닭발의 형상을 닮았고, 거기다가 이름조차 분산(分散)을 뜻하는 계족(鷄足)이라서 충주에서 큰 부자가 날 수 없었단다. 그래서 충주지역 인사들의 의견과 충주시 의회를 거쳐 닭 울음이 새벽을 알린다.’ 뜻으로 계명산(鷄鳴山)이라고 개칭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심항산(心項山)이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렸다고 하니 참고해볼 일이다. 여기서 계족산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설화(說話)를 하나 옮겨볼까 한다. 옛날 이 산에 지네가 많은 탓에 지네에 물려 죽는 백성들이 많았단다. 그러다가 어느 날에는 성주(城主)의 딸까지 지네에 물려죽고 말았던 모양이다. 이때 성주가 할 수 있는 일은 신()에게 치성(致誠)을 드리는 것 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여간 정성에 감동한 산신령이 일러준 처방대로 산에다 닭을 방목(放牧)하니 과연 지네가 근절되었단다. 그 이후 놓아먹인 닭들이 밟지 않은 데가 한군데도 없다고 해서 계족산(鷄足山)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산은 올라왔던 곳의 반대 방향에서 열린다. 능선 위로 난 길은 일단 좋은 편이다. 가끔 바위도 나타나지만 대체적으로 흙길인데다 오르내림까지 크지 않아서 걷는데 조금도 힘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능선을 따라 10분 조금 못되게 걸으면 하종 갈림길’(이정표 : 범골 2.0Km/ 하종 : 산행안내도에는 텃골로 표시 1.2Km/ 정상 0.3Km)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이곳에서 고민거리가 생겼다. 선두대장이 깔아놓은 방향표시지가 양쪽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원래는 범골로 향해야 하는데 오른편에 또 하나의 표시지가 깔려있는 것을 보면 힘든 사람들은 이곳에서 탈출하라는 의미인 모양이다. 물론 우리는 계속해서 능선을 따르기로 한다. 원래 계획했던 대로 산행을 마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산행을 마친 후에 알게 된 바로는 모든 인원을 다 오른편으로 하산시킬 목적으로 그쪽 방향에만 방향표시지를 깔아 놓았단다. 그렇다면 능선을 향하도록 깔아놓은 방향표시지는 뭐란 말인가. 나만이 아니고, 비슷한 시기에 이곳을 통과한 일행들 일곱 명이 모두 그 방향표시지를 보고 능선을 탔으니 아마 귀신이 장난을 쳤던 모양이다.

 

 

 

하종갈림길을 지나면서 능선의 풍경은 사뭇 달라진다. 능선의 오르내림이 아까보다 조금 더 커졌을 뿐만 아니라, 흙으로 이루어졌던 산길이 어느새 바윗길로 변해있는 것이다. 바위를 잡고 오르내리는 재미가 쏠쏠하고, 거기다 바위 사이에 자리 잡은 멋진 소나무들까지 구경하는 재미까지도 더해준다. 한마디로 눈요기를 즐기면서 걸을 수 있다는 얘기이다. 이러한 산길은 20분 정도 이어지다가 20분쯤 후에 산길이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서(이정표 : 범골 1.0Km/ 정상 1.0Km) 능선을 벗어난다.

 

 

 

 

산길은 능선을 벗어나서도 크게 가팔라지지 않는다. 이는 등산로가 산의 사면(斜面)을 따르지 않고 지능선 위로 나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능선을 따라 한참을 내려온 산길이 또 다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더니 이번에는 완전히 능선을 벗어난다. 그런데 이곳에 세워진 이정표(민마루 1.5Km/ 정상 1Km, 텃골 1.5Km)가 사람들을 헷갈리게 만든다. 아까 주능선을 벗어난 후 한참을 내려왔는데도 이정표에 표시된 정상까지의 거리는 조금도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거기다 또 하나,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방향이 문제이다.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민마루 방향의 능선이 목책(木柵)으로 가로막혀 있는 것이다.

 

 

고민할 필요 없이 그냥 오른편 사면길로 내려선다. 비록 이정표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아무래도 오른편이 범골로 내려서는 길로 보였기 때문이다. 산길은 사면으로 내려선 후에도 가팔라지지 않는다. 더 이상 떨어뜨릴 고도가 남아있지 않은 모양이다. 울창한 낙엽송(落葉松 : 일본이깔나무) 숲을 지나면 드디어 시야(視野)가 터지기 시작하고, 이어서 조금 후에는 등산로 안내판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임도(林道)에 내려서게 된다. 조금 전에 만났던 이해 못할 이정표(정상 1.4Km/ 민마루 2.2Km)는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지나쳐 버려야 함은 물론이다.

 

 

 

 

산행날머리는 충주댐(dam) 공원(휴게소)

마을로 내려가는 시멘트포장 임도는 사과과수원(果樹園) 사이로 나있다. 사과과수원에서부터 산행이 시작되었는데, 마침표도 사과나무들이 찍고 있다. 이곳 충주가 사과의 고장이라는 것이 실감나는 순간이다. 마을을 통과하면 아스팔트 도로를 만나게 된다. 어디로 가야할지로 고민이 되는 지점이다. 계획했던 충주댐휴게소는 이곳에서 왼편으로 가야하지만 우린 오른편으로 향한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고, 방향을 모르기 때문에 대충 충주댐이 있을 만한 방향으로 잡은 것이다. 이 도로를 따라 한참을 올라가면 531번 지방도와 충주시를 연결하는 호안(湖岸)도로를 만나게 되고, 이어서 조금 후에는 충주댐의 위에 조성된 공원(公園)에 이르게 되면서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총 5시간이 걸렸다. 막걸리를 마시느라 중간에서 쉰 시간을 감안할 경우 4시간50분이 걸린 셈이다.

마성산(馬城山, 409.3m)-이슬봉(454.3m)

 

산행일 : ‘14. 9. 11()

소재지 : 충북 옥천군 군북면과 안내면, 옥천읍의 경계

산행코스 : 장계대교참나무골산이슬봉며느리재마성산섯바탱이고개육영수생가(산행시간: 4시간)

같이한 산악회 : 산두레

 

특색 : 마성산 하면 웬만큼 산행에 이력이 붙은 사람들이라면 천성장마(天聖長馬 : 천태, 대성, 장룡, 마성산)를 떠올릴 것이다. 그만큼 천성장마 종주코스가 산악인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옥천에는 천성장마의 한 축인 마성산 외에도 다른 두 개의 마성산이 더 있다. 바로 옥천읍 교동리에 위치한 마성산(409m)과 옥천읍 죽향리에 위치한 또 다른 마성산(335m)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옥천 사람들은 이 산들을 서로 구분하기 위해 교동리에 있는 산은 원래대로 마성산이라고 부르고, 천성장마 종주코스에 포함된 마성산(510m)서마성산그리고 죽향리에 있는 마성산을 동마성산이라고 구분해서 부른단다. 이 산들 중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산은 단연 교동의 마성산일 것이다.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이 뛰어난 것은 물론 산자락에다 정지용 생가와 문학관육영수 여사 생가등 테마(theme)를 한데 묶어 관광지로 개발해 놓았기 때문이다.

 

산행들머리는 장계유원지(옥천군 군북면 장계리)

경부고속도로 옥천 I.C에서 내려와 37번 국도를 타고 보은방면으로 달리다보면 대청호반에 위치한 장계국민관광지에 이르게 된다. 관광지에서 대청호를 가로지르는 장계대교(大橋)를 건너기 직전에서 등산로가 열린다.

 

 

 

장계대교(大橋)를 건너기 바로 직전에 있는 사거리에서 왼편으로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들머리에 세워져 있는 장계길이라고 쓰인 도로표지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들어서면 된다. 들머리의 반대편은 장계국민관광지(國民觀光地)’이다. 놀이기구와 식당 등이 밀집해 있는 곳으로 옛날에는 인근에서 가장 인기 있는 휴양지(休養地)였다. 하지만 이젠 옛날이야기로만 남아있을 뿐이란다. 주변에 다른 놀이동산들이 하나 둘 늘어나면서 그저 매운탕이나 도리뱅뱅이를 먹고 싶은 사람들이나 찾을 따름이라는 것이다.

 

 

 

들머리로 들어서서 몇 걸음 걷지 않으면 오른편에 이정표 하나가 보인다. 이슬봉과 마성산으로 가는 들머리임을 알려주는 이정표인데 길까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막아 놓은 지 꽤 오래된 모양이다. 이정표 옆에 우회등산로라고 적힌 커다란 안내판이 세워져 있으니 안내판이 지시하는 방향으로 진행하면 된다. 들머리에서 2~3분쯤 걸으면 37번 국도를 새로 놓는 공사현장이 나오고,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2~3분 더 걸으면 도로공사로 인해 생긴 절개지(切開地) 모서리를 따라 길게 놓인 계단길이 나타난다. 이 도로공사 때문에 기존의 등산로를 폐쇄했던 것이다.

 

 

 

절개지 위로 올라서면 이정표(이슬봉, 욱계/ 옥천, 보은)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거리표시가 없어 산행에는 도움이 되지 않지만 이정표의 꼭대기에 붙어있는 향수 바람길이라는 이름표가 눈길을 끈다. ‘향수 바람길이란 행정안전부가 주관하는 친환경생활공간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된 옥천의 둘레길을 말한다. 30여 년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대청호의 아름다운 수변(水邊) 23·2를 친환경 녹색길로 만들었다. '향수(鄕愁)'라는 길의 이름은 이 고장이 낳은 걸출한 시인(詩人) 정지용(鄭芝溶)향수라는 시()에서 모티브(motive)를 따왔다.

 

 

 

절개지를 지나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산길은 한마디로 가파르다. 그 가파름이 다소 부담스러웠는지 침목(枕木)으로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그 계단은 오르고 또 올라도 끝이 없다. 500m도 채 되지 않은 나지막한 산이 처음부터 사람의 기()를 죽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 부담을 가질 필요까지는 없다. 오늘 걷게 될 거리를 모두 합쳐도 10Km 정도밖에 되지 않으니 걸음을 재촉할 필요 없이 쉬엄쉬엄 걸으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마침 길가 곳곳에 벤치(bench)까지 놓아두었으니 힘이 들 경우 잠시 쉬어가면 된다.

 

 

 

 

산길을 걷다보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대청호 오백리길이라는 팻말들이 자주 눈에 띈다. 그리고 산길은 이 팻말들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연결된다. 오늘 걷고 있는 산길이 대청호 오백리길9구간 및 제10구간의 일부 구간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대청호 오백리길충청권 광역연계협력사업의 일환으로 20107월부터 3년간에 걸쳐 만들어진 전체 길이가 200에 달하는 둘레길로서 총 21개 구간으로 나뉘어져 있다. 대청호를 빙 둘러 조성된 대청호 오백리길은 인접한 5개 지자체(대전시 동구·대덕구, 충북 옥천·보은·청원군)의 도보길인 대전 호반길옥천 향수길’, ‘청남대 사색길등을 비롯해 주변 등산로와 산성길, 임도 등까지 담고 있다.

 

 

 

가파른 오르막길은 25분 정도면 끝이 나고 다음에는 한결 느슨해진 오르막길이 나타난다. 그리고 10분이 지나면 드디어 참나무골산 정상이다. 산행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이정표(이슬봉/ 장계리)와 벤치 몇 개가 지키고 있는 정상은 보잘 것이 없다. 물론 정상표지석도 없다. 그저 눈대중으로 정상이려니 짐작할 따름이다. 정상 어림은 온통 참나무들 천지, ‘참나무골산이라는 이름은 이렇듯 참나무들이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싶다. 조망(眺望)까지 트이지 않은 곳에서 오래 머물 일이 없어 그냥 지나쳐 버린다.

 

 

참나무골산을 지나면서 산길은 경사(傾斜)가 거의 없다싶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바닥도 부드러운 흙길, 콧노래가 절로 나올 정도로 편안한 산길이다. 거기다 이슬봉에 가까워지면서 왼편의 나뭇가지 사이로 대청호가 얼핏얼핏 나타났다 사라지곤 한다. 호수(湖水)의 물돌이가 만들어내는 풍경들이 눈에 들어오면서 걷는 이의 마음을 평안하게 만들어 준다. 올라오는 동안 쌓였던 피로를 말끔하게 씻어내 주는 것은 물론이다.

 

 

 

참나무골산에서 25분 정도가 지나면 이슬봉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들머리에서 1시간10분이 걸렸다. 정상표지석과 이정표(수변전망대/ 소정리/ 장계리) 그리고 삼각점(보은315/1980재설)이 지키고 있는 이슬봉은 특별한 볼거리가 없다. 거기다 조망(眺望)까지도 트이지 않는다. 사방이 잡목(雜木)으로 막혀있기 때문이다. 오늘 산행의 주산(主山)은 마성산이다. 그러나 높이로만 볼 때에는 이곳 이슬봉이 마성산보다 50m정도가 더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이라는 이름 대신에 봉()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렇듯 아무런 볼거리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슬봉을 지나면서 눈이 호사(豪奢)를 누리기 시작한다. 왼편 대청호 방향이 벼랑으로 이루어져 있는 덕분에 곳곳에다 뛰어난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전망대에 서면 대청호가 그려내는 산수화가 눈앞에 펼쳐진다. 그것도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가 말이다. 마침 가을의 냄새를 품은 서늘한 바람까지 불어온다. 산행을 하면서 흘렀던 땀방울은 소리 없이 사라져버린 지 이미 오래이다. 하나 아쉬운 점도 하나 있다. 물빛이 녹색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물 흐름이 오랫동안 멈추었을 때 생긴다는 녹조(綠潮, water-bloom)현상이 아니기를 빌어본다.

 

 

 

 

눈이 호사를 누리는 대신에 산길은 조금 험해진다.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의 골은 아까보다 훨씬 깊어졌고, 또한 그 길은 약간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파르게 변해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산길이 구태여 능선을 고집하지 않고 대부분 사면(斜面)으로 나있다는 점이다. 거기다 길가에 안전로프를 길게 매어놓아 심장 약한 사람들을 돕고 있다. 만일 안전로프가 없었더라면 벼랑위로 난 길에서 오금을 저려했을 사람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심심찮게 나타나는 전망대에서 눈앞에 펼쳐지는 경관(景觀)을 즐기며 걷다보면 40분쯤 후에는 339m봉에 올라서게 되고, 이 봉우리에서 조금만 더 내려서면 오늘 산행에서 가장 뛰어난 조망 장소를 만나게 된다. 전망대에 서면 맞은편 산자락이 마치 반도(半島)처럼 대청호를 향해 고개를 내밀고 있고, 그 반도의 양옆을 감싸고 있는 대청호의 물돌이가 아름답게 펼쳐진다. 금강과 대청호가 만나며 고요한 물이 휘감아 돌고 있는 풍경은 한 폭의 잘 그린 그림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마지막 전망대에서 20분 조금 못되게 내려오면 며느리재이다. 물론 이 구간도 크고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연결된다. 이곳 며느리재는 세 지점에서 갈림길을 만들어낸다. 그 첫 번째가 국원삼거리로 내려가는 길이 나뉘는 며느리재 #1(이정표 : 마성산 1.8Km/ 국원삼거리 2.0Km/ 장계대교 6.3Km)이고, 두 번째는 안터마을로 가는 길이 나뉘는 며느리재 #2(이정표 : 마성산 1.6Km/ 안터마을 4.7Km/ 장계대교 6.5Km),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변전망대 갈림길(이정표 : 국원마을/ 수변전망대/ 이슬봉)이다. 이 세 곳의 갈림길 중에서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곳이 있다. 바로 수변전망대갈림길이다. 마성산이 있어야할 자리에 난데없이 국원마을이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이정표에 적힌 지명(地名)에 관계없이 국원리방향으로 진행해야 한다.

 

 

 

 

며느리재에서 다시 오름길이 시작된다. 그리고 10분쯤 지나면 아무런 특징도 없는 작은 산봉우리 위에 올라서게 된다. 그런데 이곳에 검은 오석(烏石)으로 된 빗돌이 하나 세워져 있다. 삼국시대에 축조된 퇴뫼형(산봉우리를 빙 둘러 쌓은 형태) 산성(山城)인 늘티산성터란다. 빗돌에는 석축산성(石築山城)이라고 적혀있으나 주변은 완전한 흙산, 어디에고 석축을 쌓았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봉우리의 크기로 보아 산성이라기보다는 보루(堡壘)에 더 가까웠을 것 같고, 쌓았던 시기가 오래이다 보니 그 흔적조차 없어졌지 않았나 싶다.

 

 

 

 

늘티산성에서 또 다시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다보면 6분 후에는 오른편에 작은 산골마을이 내려다보이는 늘티재에 이르게 되고, 이어서 산길은 서서히 가팔라지면서 위로 향한다. 마성산을 위한 마지막 몸부림일 것이다. 그러다가 10분 후에는 개활지에 이르게 되면서 오른편으로 시야(視野)가 열린다. 첩첩이 쌓여 있는 충청권의 높고 낮은 산군(山群)들이 한눈에 잘 들어오는 곳이다. 정상은 이곳에서도 20여분을 더 진행해야 한다. 오르막길이지만 그다지 힘들지 않게 생각되는 것은 능선의 나무들이 언제부턴가 소나무들로 바뀌어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소나무들이 품어내는 피톤치드(phytoncide)를 들이키다 보면 까짓 피로쯤이야 냉큼 도망가 버렸을 테니까 말이다.

 

 

 

 

 

막바지 오름길과 싸우다보면 어느덧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정상은 두 개의 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랫단은 헬기장, ‘장룡산악회에서 세운 정상표지석과 삼각점은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윗 단에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차양막 아래에는 나무의자까지 가져다 놓았다. 이곳에 배치된 산불감시요원은 꽤나 착실한가 보다. 초소에 잇대어 차양막(遮陽幕)까지 설치해 놓은 것을 보면 말이다. 한여름 뙤약볕에도 자리를 비우지 않으려는 마음가짐에 찬사를 보낸다. 이슬봉에서 2시간 산행을 시작한지는 3시간 정도 지났다.

 

 

 

정상은 사방이 확 트이기 때문에 조망(眺望)이 일품이다. **)팔음지맥의 산줄기와 도덕봉과 장령산, 서대산이 차례대로 눈에 들어온다.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조망은 근거리에 있는 환산과 구()옥천 시가지라 할 수 있다. 물론 동쪽에는 조금 전에 지나온 이슬봉이 바라다 보인다.

(**) 팔음지맥(八音枝脈), 백두대간(白頭大幹) 상의 봉황산에서 남서(南西)쪽으로 분기(分岐)하여 천택산, 팔음산, 천금산을 만들고 천관산과 철봉산을 지나 금강2교에서 그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57.7km의 산줄기이다. 북쪽의 보청천과 남쪽 송천(초강천)의 분수령(分水嶺)이 된다.

 

 

 

하산은 이정표(육영수 생가 2.6Km/ 며느리재 1.6Km)가 가리키고 있는 육영수생가 방향으로 내려서면서 시작된다. 내려서는 길은 제법 가파르다. 그러나 그다지 오래 걸리지는 않는다. 10분 남짓만 내려서면 안부사거리인 섯바탱이고개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오른쪽에 보이는 섯바탱이로 내려가는 길이 외에 왼편으로도 내려가는 길이 희미하게 보이나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겠다.

 

 

 

섯바탱이고개(이정표 : 육영수생가 2.2Km/ 마성산 0.4Km)를 지나면서 길은 왼쪽 사면(斜面)을 가로지르면서 이어진다. 그리고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서서히 고도(高度)를 낮추어간다. 경사(傾斜)가 거의 없는 산길은 걷기는 편하지만 볼거리는 일절 없다. 주위가 온통 짙은 숲으로 가려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오른편에 교동저수지가 보이면 산행이 거의 끝났다고 생각하면 된다. 조금 후에는 교동마을에 내려서게 되기 때문이다. 마성산 정상에서 40분 정도 걸렸다.

 

 

 

산에서 내려오면 널따란 한옥(韓屋)단지의 뒷담이다. 새로 복원(復原)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인이자 박근혜 대통령의 모친인 육영수여사 생가(生家)이다. 19251129일 이 집에서 태어난 육영수 여사는 어린 시절을 쭉 이곳에서 보냈다고 한다. 1974년 이후 방치되어오다가 철거되어 터만 남았던 것을 2002426일 육영수 생가지(陸英修 生家址)가 충청북도 기념물 123호로 지정되면서 다시 복원되었다는 것이다. 옥천군에서는 200412월 안채 복원사업(復元工事)를 시작하여 6년 후인 20105월 건물 13동과 담장 석축 등 부대시설들을 모두 마무리 지었다. 육영수 여사는 우리 역사상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최고의 영부인으로 많은 국민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단다.

 

 

이 집은 흔히 교동집(校洞宅)’이라 불리던 옥천지역의 명가로서 1600년대부터 김(), (), () 삼정승(三政丞)이 살았던 곳이다. 이 가옥은 1894년경에 축조되어 조선시대 상류 계급의 건축구조를 대표할 수 있는 집이었다고 한다. 1918년 육영수 여사의 부친인 육종관(陸種寬)씨가 매입하고 기단을 높여 개축했다고 전해진다. 당시에는 10여 동의 건물이 있었다고 하며 사랑채, 내당, 사당, 별당 등이 팔작지붕의 형태를 지닌 가옥이었다고 한다.

 

 

산행날머리는 육영수여사 생가입구의 주차장

주차장은 육영수여사 생가에서 조금 더 걸어야만 나온다. 200m 남짓 되는 거리이니 볼 것 다 보고 난 뒤의 걸음 거리치고는 제법 된다. 그러나 지루하지는 않다. 바닥을 예쁘장한 색깔의 도료(塗料)로 덧칠 해놓은 도로가 정겹고, 행여나 걷다가 덥기라도 할라치면 잠시 쉬었다 가라고 정자(亭子)까지 지어놓은 센스(sense)까지 발휘했다. 물론 정자는 우람한 당산나무(느티나무)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무려 370년이나 묵어 보호수(保護樹)로 지정(옥천 5)될 정도로 우람한 나무 아래에다 말이다. 당산나무에서 데크로 만들어진 이동로를 따라 조금만 더 걸으면 주차장에 이르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총 산행시간은 4시간10,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 쉰 시간을 감한할 경우 3시간50분이 걸렸다. 거리가 대략 10Km 남짓 되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은 셈이다.

 

 

에필로그(epilogue), 옥천하면 생각나는 음식은 작은 민물고기를 팬(pan)에 동그랗게 돌려 담아 조린 도리뱅뱅이올갱이 해장국이다. 그러나 오늘 산두레에서 점심 메뉴(menu)로 정한 음식은 의외로 도토리 묵밥이란다. 원래 묵밥 하면 제천을 꼽는 게 보통인데도 옥천에서 묵밥을 산다고 해서 의외라는 표현을 썼다. 그러나 어디 산두레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음식을 고를 산악회이겠는가. 총무님의 말로는 옥천군청에다 음식을 추천해 줄 것을 부탁드렸고, 그 결과물이 바로 묵밥이라는 것이다. 거기다 그들은 옥천에서 가장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다는 음식점(구읍할메묵집. 전화 732-1853)까지 추천해 주었단다. 단체예약은 받지 않는다는 주인장을 설득해서 찾아간 식당은 비록 크지는 않았지만 음식만은 정갈하면서도 맛깔스러웠다. 즐거운 산행 후에 만나게 되는 맛난 음식은 그 자체가 행복이다. 그래서 오늘 산행에서도 한 웅큼의 행복을 담아올 수 있었다. 이 모든 게 산악회 관계자분들의 고생 덕분일 것이다. 그들에게 글로서나마 감사를 드린다.

 

금수산(錦繡山, 1,015.8m)-망덕봉(望德峰, 926m)

 

산행일 : ‘14. 8. 9()

소재지 : 충북 제천시 수산면과 단양군 적성면의 경계

산행코스 : 상천주차장보문정사용담폭포망덕봉얼음골재금수산들뫼삼거리상천주차장(산행시간 : 4시간 20)

함께한 산악회 : 좋은 사람들

 

특징 : 금수산의 옛 이름은 백운산(白雲山)이었다. ‘하얀 구름에 둘러싸인 신비로운 산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금수산(錦繡山)으로 개명(改名)을 했다. 단양군수로 내려와 있던 퇴게 이황(15011570)선생에 의해서이다. 그는 단풍이 고운 백운산에 들렀다가 그 풍경에 반해버렸단다. 그리고 그 풍경이 마치 비단에 수를 놓은 것처럼 아름답다며 산의 이름을 금수산으로 바꿔버렸다는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이다. 그러나 단 하나 그냥 흘려버릴 수 없는 점은 산이 너무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 증거는 간단하다. 그동안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이 이 산의 아름다움을 칭송해온 것이 바로 그 증거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금수산에는 계절과 상관없이 등산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산행들머리는 상천리주차장(수산면 상천리 722-1 : 상천길 85)

중앙고속도로 북단양 I.C에서 내려와 532번 지방도를 타고 제천방면으로 잠깐 달리다가 두 번째 만나는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학현소야로를 따라 청풍호(충주호)까지 들어간다. 청풍호()를 가로지르는 청풍대교(大橋)를 건너기 바로 직전에 좌회전하여 호반(湖畔)따라 달리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산행들머리인 상천리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주차장 앞 도로 건너편에 있는 다리(백운교)를 건너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들머리에 산행안내도와 이정표(망덕봉 2.8Km, 금수산 3.5Km)가 세워져 있으니 길을 잘못 들 염려는 없을 것이다. 들머리에는 금수산의 진행방향을 알리는 이정표 외에도 또 다른 이정표 하나가 눈길을 끈다. 제천 청풍호 자드락길의 진행방향을 알려주는 이정표이다. 청풍호반을 끼고 있는 백운동마을은 산수유로 유명한 산골마을이다. 그리고 제천 자드락길 4코스의 종점이기도 하다. 또한 백운동마을은 봄이면 오래 묵은 돌담을 배경으로 샛노란 산수유 꽃이 골골마다 노란 띠를 두르는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고 가을에는 빨간 산수유열매가 점묘화(點描畵)를 그린단다. 그 점을 인정받았는지 2012년에는 충북 최초로 슬로시티(Slowcity)로 이름을 올린바 있다.

 

 

 

백운동 마을길로 들어서면 원목(原木)으로 만들어진 이정표(전통 휴게공간/ 보문정사, 금수산, 용담폭포)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국립공원에서 보지 못했던 형식의 이정표인 것을 보니 아마 이 동네에서 세워 놓은 모양이다. 궁금증에 이끌려 방향을 틀어보니 멋진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기이하게 생긴 10여 그루의 늙은 소나무들이 마치 마을의 수호신(守護神)이라도 되는 양 마을 앞을 떡하니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 나무 아래에는 벤치(bench) 몇 개를 갖춘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혹여 충주호에 물안개로 피는 날이면 극단의 아름다움을 빚어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멋진 풍광이다.

 

 

 

마을 안을 통과하는 골목길은 그다지 길지 않다. 거기다 그다지 급할 것이 없는데도 발걸음은 자꾸만 빨라져간다. 대부분의 산꾼들이 갖는 고질적인 습관이다. 이곳 백운동마을은 슬로시티(Slowcity)로 등록된 곳, 슬로시키는 공해(公害) 없는 자연 속에서 전통문화와 자연을 잘 보호하면서 자유로운 옛 농경시대로 돌아가자는 국제운동(國際運動), 그런 곳에서 느림보의 삶을 추구하자는 슬로시티에서까지 습관적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는 나쁜 습관 말이다. 휴게소에서 바쁜 걸음으로 6분쯤 걸으면 펜션(pension)과 식당을 겸하고 있는 백운산장에 이르게 된다.

 

 

백운산장을 지나면 곧이어 보문정사가 나타난다. 허허벌판에 옛날 집 두어 채가 전부인 보문정사는 온통 웃자란 잡초(雜草)와 잡목(雜木)들 속에 갇혀있는 느낌이다. ‘보문정사라는 이름을 보아서는 사찰(寺刹) 같은데도 사찰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아무래도 건물들이 절간이라기보다는 여염집에 더 가깝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시간을 내서 안으로 들어가 볼 생각까지는 들지 않아 그냥 지나쳐 버린다. 인터넷에서조차 검색이 되지 않은 시설까지 둘러볼 필요는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보문정사를 지나서 조금만 더 가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뉘면서 등산로는 왼편 비포장 길로 이어진다. 갈림길은 이곳뿐만이 아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에 두어 번의 갈림길을 만났지만 거론을 하지 않았던 이유는 갈림길마다 이정표가 세워져 있어서 길이 헷갈릴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비포장길로 접어들면 곧바로 복숭아 과수원(果樹園)이 시작되고, 과수원이 끝나는 지점에서 산길은 다시 둘(이정표 : 망덕봉 탐방로/ 금수산 탐방로)로 나뉜다. 왼쪽은 망덕봉을 지나 금수산 정상을 찍고 내려오는 길, 오른쪽은 그 반대로 돈다. 이곳에서는 왼쪽 코스를 따르는 게 보통이다. 망덕봉 구간에 워낙 큰 바위들이 많아 하산 코스로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갈림길에서 망덕봉으로 방향을 잡으면 조금 후에 목교(木橋)를 건너게 되고, 이어서 가파르고 험한 암릉구간이 나타난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위험한 곳에는 어김없이 철()계단 등 안전시설을 설치해 놓았기 때문이다. 경사(傾斜)가 제법 심한 철계단을 조심스럽게 오르면 폭포전망대가 나온다. 그리고 금수산을 진동시키고 있는 용담폭포(龍潭瀑布)가 화려한 자태를 드러낸다. 허나 선녀탕(仙女湯)은 나무들에 가린 탓에 잘 보이지 않아 아쉽다. 용담폭포는 백운동(白雲洞) 골짜기를 흘러내리는 물이 만들어 낸 3단으로 된 높이 30m의 폭포이다. 물이 절벽 아래에 있는 5m 깊이의 소()에 떨어지면서 물보라를 일으키는 모습이 마치 승천(昇天)하는 용()을 연상시킨다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주변에 널린 바위와 노송(老松)들이 잘 어우러지며 절경을 이루고 있어 금수산의 백미(白眉)로 꼽는다. 용담폭포와 선녀탕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온다. 옛날 중국의 주나라 왕이 세수를 하다가 대야에 비친 폭포를 보았다고 한다. 주왕은 신하들에게 동쪽으로 가서 이 폭포를 찾아오라고 명령했는데 바로 그 폭포가 용담폭포였다는 것이다. 갈림길에서 이곳 전망대까지는 13분 정도가 걸렸다.

 

 

 

 

 

계단을 오르면서 고개를 돌려보면 산행을 시작했던 백운동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조금이라도 오른편으로 시선을 옮길라치면 월악산이 그 위용을 자랑하며 고개를 내민다. 그렇다. 지금 오르고 있는 금수산은 월악산 국립공원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폭포전망대에서 조금 위로 오르면 등산로의 좌우를 금()줄로 막아 놓은 것이 보인다. 그리고 추락주의, 미끄럼주의라고 적힌 경고판을 금줄에 매달아 놓았다. 그러나 아름다운 경관(景觀)에 취한 산객들의 눈에는 저렇게 서슬 시퍼런 경고판까지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다. 꽤나 많은 사람들이 금줄을 넘어가면서까지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잡느라 분주한 것을 보면 말이다. 선녀탕이 내려다보일지도 모르겠기에 나도 다가가 보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순서를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 것 같아 포기하고 산행을 계속한다. 그러나 오른편으로 트인 오솔길을 찾는 일은 멈추지 않는다. 혹시라도 선녀탕으로 내려가는 길이 보일까 해서이다. 누군가의 글에서 상탕과 중탕, 그리고 하탕으로 이루어진 선녀탕이 폭포(瀑布)의 상단(上端)에 있다고 했다. 그리고 선녀탕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려면 정규등산로에서 벗어나 약 100m의 내리막길을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와야 한다고 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선녀탕으로 내려가는 길은 눈에 띄지 않았다.

 

 

 

폭포 전망대를 지나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그럼 조금 전에 올라왔던 암릉은 무엇이었느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거기에 대한 내 답변은 그곳도 역시 제대로 된 바윗길이었다.’이다. 다만 조금 전까지는 본격적인 산행을 위한 전주곡이었을 따름인 것이다. 산길은 오르면 오를수록 급경사(急傾斜)의 바윗길이 이어진다. 그러다가 어떤 곳에서는 아예 허리를 곧추 세워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오늘 우리가 걷고 있는 금수산은 국립공원(國立公園), 관리공단(管理工團)에서 위험한 등산로를 그대로 놓아 둘 리가 없는 것이다. 위험한 곳에는 어김없이 철제난간과 나무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산길은 결코 심심할 틈을 내주지 않는다. 곳곳에서 울퉁불퉁한 암릉을 구경시켜주다가, 혹시 막혀버리기라도 할라치면 이번에는 길가에 기괴하게 생긴 바위들이 그 빈자리를 채워준다. 기암(奇巖)들뿐만이 아니다. 기이하게 생긴 소나무들도 곳곳에서 눈에 띈다. 그런데 기괴한 소나무들은 하나같이 그 뿌리를 바위 틈새에 내리고 있다. 척박한 곳에서 힘겹게 살아가다보니 그 고통 때문에 저리도 몸을 비틀고 있나 보다.

 

 

 

폭포전망대를 출발한지 40분쯤 되면 진짜로 허리를 곧추 세워버린 암릉구간이 나타난다. 산길은 그 경사(傾斜)를 배겨내지 못하고 긴 나무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계단의 위로 올라서면 멋진 바위능선이 눈앞에 펼쳐진다. 올라올 때 심심찮게 나타났다 사라지던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암릉이 이젠 발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것이다. 암릉 너머에는 내륙(內陸)의 바다인 청풍호가 월악산 주변의 멋진 바위산들과 한데 어우러지며 기막히게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산자락 하나가 온통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바위들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선 소나무들로 인해 바위산이라기보다는 푸른 숲으로 둘러싸인 흙산으로 보일 정도이다. 그 푸른 소나무 숲을 뚫고 튀어나온 기묘(奇妙)한 형상의 기암(奇巖)들이 몇 개 보인다. 금수산의 명물인 족두리바위와 독수리바위다. 특히 독수리바위의 형상(形象)은 사람들을 감탄시키기에 충분할 정도로 그 기상이 늠름하다. 마치 금방이라도 청풍호로 짓쳐 내려가 물고기라도 한 마리 채 오려는 양 날개를 접은 채 호수를 응시하고 있는 형상이 또렷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아름다운 주변 경관에 푹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 다시 산행을 시작하면 또 다시 거친 바윗길이 시작된다. 아까보다 한술 더 뜬다고 봐도 과언(過言)이 아닐 것이다. 이곳에도 역시 나무계단을 설치해 놓았는데, 계단도 놓지 못할 정도로 거친 구간에는 쇠파이프로 난간을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그 위에서 다시 한 번 족두리바위와 독수리바위가 조망(眺望)된다. 그러나 그 형상은 아까만큼은 또렷하지는 않다. 위에서 내려 보다보니 독수리나 족두리 모양이 잘 나오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청풍호와 월악산 등 주변의 풍광은 아까보다 한층 더 뛰어난 모습으로 나타난다.

 

 

 

서슬 시퍼런 바윗길 구간이 끝나면 흙길이 시작된다. 그렇다고 아예 바위구간이 통째로 없어져 버린 것은 아니다. 가끔 바윗길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아까 지나왔던 바윗길에 비해 너무 왜소하기 때문에 바윗길로 보이지 않을 따름인 것이다. 산길은 두어 번의 급경사(急傾斜) 구간을 지나고 나서 안부삼거리(이정표 : 망덕봉 0.1Km/ 금수산 1.8Km/ 상천주차장 2.7Km)에 올라선다. 망덕봉 정상은 이곳에서 왼편으로 100m도 채 떨어지지 않고 있다.

 

 

 

망덕봉 정상은 널따란 분지(盆地)로 이루어져 있다. 거기다 조금 전의 안부삼거리에서 거의 평지수준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산봉우리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그저 능선 상에 밋밋하게 솟아오른 한 지점으로 보인다는 얘기이다. 거기다 잡목(雜木)에 둘러싸인 탓에 조망(眺望)까지도 일절 트이지 않는다. 산행을 시작한지 정확히 두 시간이 지났다.

 

 

 

망덕봉에서 금수산으로 가는 길은 흙길이다. 초반에 심하게 가파른 침목(枕木)계단을 내려서면 조금 후에 왼편으로 갈림길 하나가 열린다. 비록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지만 들머리에 산악회의 시그널(signal)들이 덕지덕지 매달려 있는 것을 보면 얼음골로 내려가는 길이 아닐까 싶다.

 

 

 

첫 번째 갈림길을 지나면 산길은 잠깐 완만(緩慢)한 오름세를 보이다가 다시 아래로 제법 깊고 가파르게 떨어진다. 그리고 그 끝에서 희미하나마 좌우로 갈림길이 나타난다. 물론 이곳도 역시 이정표가 세워져 있지 않아 어디로 내려가는 길인지는 알 수가 없다.

 

 

두 번째 갈림길을 지나면 길가에 바위가 하나 나타난다. ‘새를 쏙 빼다 닮았네요.’ 흙길을 걷다가 뜬금없이 바위가 나타나는 바람에 집사람의 눈길을 끌었던 모양이다. 집사람의 말마따나 영락없는 새다. 그것도 귀엽고 앙증맞은...

 

 

능선은 또 다시 작은 오르내림을 두어 번 반복한 후에 가파른 오르막길로 변한다. 그리고 소나무 한 그루가 있는 바위지대에 올라서게 되는데, 그냥 지나치지 말고 한번쯤 올라가 볼 것을 권하고 싶다. 바위 위에서 보는 풍경이 장관이기 때문이다. 금수산 정상이 눈에 들어오면서 정상의 한 축을 구축하고 있는 바위벼랑이 멋진 모습으로 나타난다.

 

 

 

 

바위전망대에서 가파르게 내려서면 상학마을 갈림길’(이정표 : 금수산 0.3Km/ 상학마을 2.0Km/ 망덕봉 1.6Km)이 있는 살개바위고개이다. 이곳에서 왼편으로 진행하면 상학리로 내려가게 된다. 금수산 정상으로 가려면 물론 맞은편 능선에 놓인 나무계단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 계단의 끝은 전위봉, 금수산 정상은 전위봉에서 잠깐 내려섰다가 반대편 사면(斜面)에 놓인 나무계단을 다시 한 번 올라야 만날 수 있다  

 

 

 

 

정상으로 오르다보면 왼편에 바위 하나가 얼핏 보인다. 그냥 지나치지 말고 이곳도 한번쯤 올라가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지나온 전위봉과 금수산 산자락의 바위 벼랑들이 선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다만 하나 아쉬운 것은 단양 방향의 산들이 벌거벗고 있다는 점이다. 시멘트 공장들이 통째로 깎아먹은 산들의 모습이 흉물스럽게 다가오는 것이다.

 

 

 

조망(眺望)을 즐기다가 다시 나무계단을 오르면 드디어 금수산 정상이다. 망덕봉에서 1시간이 조금 못 걸렸다. 금수산 정상은 망덕봉과 달리 뾰족한 바위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때문에 정상은 인색하다 싶을 정도로 비좁다. 어른 한두 명이 서기만 해도 더 이상의 빈틈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비좁은 것이다. 금수산을 찾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감안할 때 대단히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정상석을 배경으로 인증사진을 찍는 것이 보통인데 자칫 잘못하면 그 순서를 기다리며 서있을 공간조차 나오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는 정상을 이루고 있는 바위의 사면(斜面)에다 나무데크로 누대樓臺)를 만들어 놓았다. 덕분에 정상은 제법 너른 공간으로 변해있다.

 

 

 

 

비록 정상은 비좁지만 정상에 서면 더없이 너른 풍경과 마주할 수 있다. 사방으로 시야(視野)가 열리면서 중부내륙의 산군(山群)들이 널따랗게 펼쳐지는 것이다. 북쪽으로는 금수산의 지봉인 신선봉과 동산이 눈에 들어온다. 지나온 망덕봉 옆으로는 충주호(忠州湖)가 펼쳐진다. 이곳 제천지역 저 호수를 충주호라 부르지 않는다고 한다. 청풍면을 끼고 있다고 해서 청풍호라고 부른단다. 그리고 남쪽에는 월악산과 대미산 등을 지나는 백두대간이 옅은 연무(煙霧) 속에서 수묵화(水墨畵)를 그려내고 있다. 또한 동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소백산의 산봉들이 불쑥 솟아오르고 있다.

 

 

 

정상에서 상천리 방향으로 내려서면서 하산이 시작된다. 철계단을 내려서면 평평한 너럭바위들이 숲속 곳곳에 널려있다. 잠시 쉬어가거나 점심식사 자리로 안성맞춤인 곳이다. 아니나 다를까 무리를 지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앉아서 쉬고 있는 것이 보인다. 하산 길은 능선의 암릉이 부담스러웠던지 오른편으로 우회(迂廻)시키며 나있다. 그러다가 다시 능선으로 올라섰다 싶더니 이내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서 주능선을 벗어나 버린다.

 

 

하산길은 가파른 내리막길이 계속된다. 그러나 그다지 힘이 들지는 않는다. 돌과 흙이 알맞게 섞여있기 때문에 내려딛는데 별 부담이 없기 때문이다. ‘유난히도 선바위들이 많네요.’ 맞다. 집사람의 말대로 심심찮게 나타나는 거대한 바위들이 하나같이 하늘을 향해 반듯이 솟아올랐다. 정상을 출발한지 20분쯤 지나면 상학리 갈림길’(이정표 : 상천주차장 3.0Km/ 상학주차장 2.3Km/ 금수산 0.5Km)을 만나게 된다. 지도에 들뫼삼거리라고 표기되어 있는 갈림길이 아닐까 싶다. 오늘 산행은 원점회귀 산행이니 당연히 상천주차장으로 내려가면 된다.

 

 

 

상학리 갈림길을 지나면서 산길은 지루해진다. 아까는 하다못해 심심찮게 나타나는 선바위들이라도 구경하는 맛이 있었지만, 갈림길을 지나면서부터는 눈에 담을 만한 볼거리가 일절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거기다 산길은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여 조망(眺望)까지도 완전하게 막혀있다. 그저 비탈진 내리막길을 묵묵히 내려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산길은 20분 넘게 계속된다.

 

 

 

산행날머리는 상천리주차장(원점회귀)

지루한 산길에 욕지거리라도 나올 즈음이면 아래를 향해 길게 놓인 나무계단이 나타나고, 이어서 15분 정도를 더 걸으면 맑은 물이 흐르고 있는 계곡이 나타난다. 요 아래에 있는 용담폭포의 수원(水原)인 정낭골이다. 산길은 잠깐 동안 정낭골을 따른다. 그러다가 다시 계곡과 헤어져 산의 사면(斜面)을 옆으로 꿰며 이어지더니 잠시 후에는 산행을 시작하면서 헤어졌던 용담폭포 앞 갈림길에 내려서게 된다. 산행이 종료되는 상천리주차장은 이곳에서도 다시 15분 정도를 더 내려가야 만나게 된다. 오늘 산행은 총 5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간식을 먹느라 쉬었던 시간을 감안할 경우, 순수 산행시간은 4시간20분 정도가 걸린 셈이다.

 

 

사랑산(647m) 또는 제당산(祭堂山)

 

산행일 : ‘14. 7. 26()

소재지 :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산행코스 : 용추교585삼거리봉사랑산독수리바위코끼리바위용추슈퍼소나무 연리목용추폭포용세골용추교(산행시간 : 4시간 40)

같이한 산악회 : 가보기산악회

 

특색 : 괜찮은 산세(山勢)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야산이나 악휘봉 등 주변의 명산(名山)들에 가려 숨어 지내던 사랑산이 언제부턴가 사람들로 붐비게 되었다고 한다. 사랑산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부터란다. 사람들은 살아가다 일이 잘 안 풀릴 경우에는 이름을 바꾸는 경우가 종종 있다. 산이라고 해서 이름을 바꾸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산도 개명(改名)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경기도 가평의 연인산이고, 또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꼽을 만하다. 이곳 사랑산도 이름을 바꾸고 나서부터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으니 개명이 성공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원래 산신제(山神祭)를 지내는 제당골이 있다고 해서 제당산(祭堂山)이란 이름으로 불리던 평범했던 산이 1999년에 용추폭포 인근에서 '사랑나무'로 불리는 연리목(連理木)이 발견됨으로써 사랑산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고, 그 결과 인근의 명산들과 어께를 나란히 하는 유명세(有名稅)를 떨치게 된 것이다. 아무튼 한번쯤은 꼭 들러봐야 할 산이다.

 

산행들머리는 에코황토마을 앞 도로(괴산군 청천면 후영리 8)

중부내륙고속도로 괴산 I.C에서 내려와 19번 국도를 이용해서 괴산읍내까지 들어온다. 괴산읍내를 지나서도 계속해서 19번 국도를 따르다가 지경삼거리(청천면 지경리)에서 좌회전 515번 지방도(도경로) 청천면소재지 방면으로 들어가면 오래지 않아 용추교에 이르게 된다. 이곳 용추교를 건너기 바로 직전에 좌회전하여 용세골 방향으로 200m쯤 들어가면 오른편에 멋지게 지어진 기와집이 한 채 보인다. 산행들머리인 에코황토마을(Naver지도 참조)'이다  

 

 

 

도로에서 에코황토마을 진입로를 겸한 다리를 건너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펜션(pension)인 듯한 에코황토마을의 앞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 얼마 지나지 않아 화사한 무궁화축제가 막을 연다. 길가에 커다란 무궁화나무들이 줄지어 늘어서있는데 나무마다 화사한 꽃들을 가득 피우고 있는 것이다. 그 무궁화축제가 막을 내릴 즈음에 산길이 열리게 된다. 길가에 사랑산 등산로라고 쓰인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산길은 인삼밭 두렁을 통해 산자락으로 들어서게 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산길은 무던히도 가파른 오르막길의 연속이다. 오늘은 무더운 여름날, 거기다 가랑비까지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그런데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다들 비옷을 입지 않은 채로 산을 오르고 있다. 하긴 이런 날 비옷을 입는다면 비 맞는 것 이상으로 땀에 젖을 것이 뻔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다행이도 그 거리는 짧다. 15분이면 지능선에 올라서게 되고, 이어지는 산길은 그 사나운 기세(氣勢)를 많이 누그러뜨리기 때문이다.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간다. 짧은 내림과 긴 오름이 계속된다는 얘기이다. 참나무들과 소나무들이 사이좋게 섞인 숲을 뚫고 난 산길은 의외로 또렷하다. 산을 찾는 사람들이 예상외로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러나 산길은 특별한 볼거리는 제공하지를 못한다. 그저 앞사람의 등이나 보면서 걷는 게 일이다. 그렇게 32분 정도를 진행하면 585m에 올라서게 된다.

 

 

 

585m봉을 지나서도 오르내림은 계속된다. 그러나 이번의 것들은 그 깊이나 가파름이 아까보다는 제법 심해졌다.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의 골들이 아까보다 확연하게 깊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특별한 볼거리가 없다는 것은 아까와 달라지지 않는다. 아직도 날씨는 비가 오락가락한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줄기를 맞으며 30분 정도 걷다보면 갈림길이 있는 644m봉에 올라서게 된다. 왼편에 보이는 길은 사랑산의 명품 소나무라는 연리목(連理木)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644m봉에서 사랑산 정상은 지척이다. 경사(傾斜)가 거의 없는 완만(緩慢)한 능선을 따라 5분 남짓만 걸으면 사랑산 정상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흙으로 이루어진 정상은 소나무들이 차지하고 있고, 검은 오석(烏石)으로 만들어진 정상표지석은 그중 가장 굵은 소나무 그늘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소나무들 외곽을 또 다시 굴참나무들이 둘러싸고 있는 탓에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트이지 않는다. 한마디로 이름에 걸맞지 않을 정도로 볼품이 없다는 얘기이다. 산행들머리에서 정상까지는 1시간30분이 조금 못 걸렸다.

 

 

 

정상에 오르면 사람들은 대부분 정상부근에서 한숨 돌리는 것이 보통이다. 정상에서의 조망을 즐기면서 가지고 온 간식거리를 먹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사랑산은 정상에서 머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조망도 트이지 않은데다 마땅히 자리를 잡을 만한 곳도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곧바로 남동릉으로 하산을 시작하면 된다. 소나무기둥에 매달려 있는 자연휴게소라고 쓰인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방향이다. 정상 바로 아래에 여러 사람이 둘러앉을 만한 바위쉼터들이 곳곳에 나타날 것이다.

 

 

 

하산길 초반에 만나게 되는 기암(奇巖), 일행 중 누군가가 코끼리를 닮았다고 한다. 그런데 내 눈에는 아무리 봐도 코끼리의 모양새가 그려지지 않는다. 그런 나를 보고 집사람은 심미안(審美眼)이 없다며 놀려댄다. 주눅이 들 수밖에 없는 난 그저 묵묵히 일행을 따라갈 뿐이다. 그러나 집사람의 의기양양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나중에 진짜 코끼리바위를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자연휴게소 방향으로 하산을 시작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오른편 늙은 소나무 그늘 아래에 숨어있는 너럭바위 하나가 나타난다. 바위의 끝이 바위벼랑으로 이루어진 덕분에 시야(視野)가 뻥 뚫리는 멋진 조망처이다. 날씨가 좋을 경우에는 주변 산군(山群)들의 빼어난 자태를 구경할 수 있으련만 아쉽게도 오늘은 비가 온 뒤끝인지라 사위는 온통 구름에 뒤덮여 있다.

 

 

전망바위에서 조금만 더 내려가면 독수리바위이다. 길이 4m에 높이가 2m 정도인 이 기암(奇巖)은 독수리가 다소곳이 앉아 있는 모습으로, 머리와 부리, 꼬리 등이 실제 독수리와 너무 흡사하다.

 

 

독수리바위에서 조금 더 내려가다가 길을 벗어나 오른편으로 조금만 더 들어가면 숲속에 숨어있는 두루뭉술하게 생긴 바위 하나가 보인다. 정상에서 25분 남짓 되는 지점이다. 누군가 이 바위를 곰바위라고 표현한 것을 보았는데, 왜 그런 이름을 붙였는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바위의 생김새가 곰()처럼 우직하다는 게 그 원인이 아닐까 싶다. 하여간 나무기둥을 붙잡고 바위 위로 오르면 조망(眺望)이 시원스럽게 터진다. 구름이 아직 완전히 벗겨지지 않은 탓에 확실하게 감을 잡을 수는 없지만 희미하게 보이는 산들은 아마 가령산과 낙영산, 도명산, 백악산 등일 것이다.

 

 

 

잠깐의 방심이 화를 불러올 수 있다.’ 누구나 귀에 익숙한 말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부분 이 잠깐의 방심을 낀 채로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오늘 우리 일행만 해도 그렇다. 곰바위에서 빠져나오면 610m, 이곳에서 만나게 되는 삼거리에서 왼편으로 진행해야 하는데도 우리 일행은 오른편 길로 들어서고 만 것이다. 그 원인은 자연휴게소이정표, 정상에서부터 보였던 터라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인 게 1시간 동안 알바를 하는 화()를 불러온 셈이다. 화양계곡으로 내려가는 오른편 길보다 사그막골로 내려가는 왼편 길이 훨씬 또렷한데도 말이다.

 

 

인생지사 새옹지마(人生之事 塞翁之馬)란 말이 있다. 인생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은 변화가 많아서 예측하기가 힘들다는 뜻이다. 이 말은 우리 일행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화양계곡 방향으로 길을 잘못 들어선 탓에 1시간 동안 알바를 했지만 그 대신 사랑산에 숨겨진 비경(秘境)들을 조금이라도 더 둘러볼 수 있는 행운을 얻었기 때문이다.

 

 

 

 

화양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은 심심할 틈이 없는 길이다. 산길은 계속해서 바위들을 오르내리면서 이어지고, 또 어떤 때는 안전로프에 매달리는 등 짜릿한 스릴(thrill)을 즐기게 만든다. 거기다 길가에서 마주치게 되는 기암괴석(奇巖怪石)들과 암봉위에서 바라보는 조망은 일종의 보너스(bonus)이다. 한마디로 눈이 호사(豪奢)를 누리는 구간이다.

 

 

 

 

아까 길을 잘못 들어섰던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왼편 사기막골 방향 진행한다. 정확히 1시간 동안 알바를 한 셈이다. 산길은 바닥이 반질반질할 정도로 잘 나있다. 이런 길을 잠깐의 방심으로 놓쳤다고 생각하니 헛웃음만 나올 따름이다. 왼편으로 들어서면 얼마 지나지 않아 넓적한 바위를 위태롭게 올라타고 있는 둥그런 바위 하나가 나타난다. 사람의 얼굴을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흔들바위 같기도 한 이 바위의 이름은 사랑바위란다. 사랑바위는 바위에다 뽀뽀를 하면 반드시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전설(傳說)을 갖고 있다. 집사람에게 전설을 이야기 해주며 바위에다 뽀뽀를 해보라는데 굳이 안하겠단다. 이미 사랑이 이루어졌는데 뭐가 더 필요하겠냐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녀는 내 고집을 꺾지 못하고 끝내는 뽀뽀를 하고야 말았다. ‘이승뿐만 아니라 다음 생인 후생(後生)에서도 사랑하는 사이가 되고 싶다.’는데 어찌 뿌리칠 수 있었겠는가.

 

 

 

 

사랑바위에서 조금만 더 내려오면 전망바위에 닿는다. 갈림길에서 20분 가까이 되는 지점이다. 지도에 3 전망바위로 표기된 지점이다. 너른 암반(巖盤)의 위편에는 코뿔소바위라는 이름을 갖은 바위 하나가 놓여있다. 길이 2m에 높이가 2m 정도인 이 바위는 코뿔소가 북쪽으로 세차게 달려가는 모습이라는데 내 눈에는 글쎄요이다. 아무리 봐도 그런 형상이 그려지지 않는 것이다. ‘감성(感性)이 부족한 것이려니하고 다시 한 번 자세히 살펴보지만 도저히 안 나타나는 걸 어떻게 하랴. 그나저나 이곳은 왼편이 수십 길 절벽(絶壁)으로 이루어진 탓에 조망(眺望)이 뛰어나다. 사랑산을 통틀어 조망이 가장 뛰어난 곳이니, 잠시 쉬면서 배 터지게 주변 산하(山河)의 아름다움을 감상해보면 어떨까. 북으로 사기막리 너머로 옥녀봉과 군자산이 보이고, 동쪽에는 백두대간이 하늘금을 이룬다. 장성봉을 위시해서 대야산과 조항산, 청화산 등의 고산(高山)들이 헌걸차게 이어지고 있다.

 

 

 

 

3 전망바위에서 조금 더 내려오면 만나게 되는 기암(奇巖), 사람의 얼굴을 쏙 빼다 닮았다. 그것도 우리의 오래된 조상들을...

 

 

전망바위에서 10분쯤 더 내려오면 거대한 바위무더기가 앞을 가로막는다. 산길은 왼편으로 우회(迂廻)를 하도록 나있지만 한번쯤 암릉 위로 올라가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이 바위가 바로 2 전망바위이기 때문이다. 암릉 위로 올라서면 아까 코뿔소바위 근처에서 보았던 조망(眺望)이 다시 한 번 눈부시게 펼쳐진다. 이 암릉의 북쪽 끝이 바로 코끼리바위이다. 바위의 생김새가 코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는 코끼리를 빼다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코끼리바위에도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가 전해져 내려온다. 코끼리의 늘어진 코를 만지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얘기이다. 집사람이 이번에는 두말 안하고 늘어진 코를 잡고 본다. 이미 사랑에 익숙해져 버린 모양이다.

 

 

 

 

 

코끼리바위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거짓말 좀 보태서 슬랩(slab)이라 불러도 좋을 만한 바위지대가 나타난다. 바위를 내려서는 길에 사기막리가 한눈에 잘 보인다고해서 1 전망바위라는 이름을 얻었다. 1전망바위를 내려서면 산길은 다시 흙길로 변하고, 소나무가 많은 평범한 산길을 따르다보면 조금 후에는 임도(林道)에 내려서게 된다. 이어서 널따란 임도를 따라 10분 정도 더 내려가면 사기막리이다. 코끼리바위에서 이곳까지는 30분 가까이 걸렸다.

 

 

 

사기막리(沙器幕里)는 괴산(청천면) 땅에 있는 오지(奧地)마을의 하나이다. 드문드문 농가가 자리하고 있고 마을은 한적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전형적인 농촌풍경임에도 불구하고 잘 지어진 전원주택과 민박(民泊)’ 간판들이 가끔 눈에 띄는 것을 보면, 우리가 생각해오던 산골마을은 이미 아닌 모양이다. 하긴 상시로 운영되고 있는 슈퍼마켓(supermarket : 용추슈퍼)’까지 있는 마을을 어떻게 오지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는 사랑산과 사랑산 아래에 위치한 용추폭포(瀑布)를 찾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참고로 사기막리(沙器幕里)는 고려시대 사기를 굽는 막사가 있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마을을 지날 때 눈이라도 크게 치켜 떠보는 것은 어떨까? 마을 어딘가에 있을 옛 가마터에서 백자와 분청사기들이 우르르 쏟아질지도 모를 일이다.

 

 

마을을 빠져나오면 작은 개울을 만나게 된다. 용추폭포로 가려면 이 개울을 따라 내려가야 한다. 전형적인 시골길을 따라 10분 남짓 걸으니 임시로 세운 몽골텐트가 눈에 띈다. 사용용도를 궁금해 하며 지나는데, 근처에 청천면 관광안내도’(이정표 : 용추폭포 0.6Km/ 사기막리 1.2Km)물놀이 위험안내판이 세워져 있는 것이 보인다. 간이화장실까지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보면 유원지(遊園地)로 관리되고 있는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숲 너머로 보이는 냇가는 하얀 암반(巖盤) 위로 맑은 물이 흐르는 것이 여느 유명 유원지에도 결코 뒤지지 않을 풍모를 지니고 있다.

 

 

 

 

관광안내도에서 8분 정도 더 걸으면 용추폭포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용추폭포에 이르기 전에 왼편을 잘 살펴보라는 얘기이다. 사랑산이라는 이름을 낳게 한 연리목(連理木)’을 보려면 왼편 산자락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들머리에 이정표가 세워져 있지 않은 탓에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용추폭포로 내려가는 나무계단에 이르기 50m쯤 전에 왼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산악회 시그널(signal)들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것이 보일 것이다. 왼편 산자락으로 접어들어 2분쯤 올라가면 사랑산의 명물(名物)인 연리목을 만날 수 있다. 연리목 또는 **)연리지(連理枝)나란히 붙어 있는 나뭇가지를 말하며, 뿌리가 다른 두 그루의 나무가 사이좋게 합쳐진다는 의미이다. 그중 가지가 붙은 나무는 연리지, 몸통이 붙은 나무는 연리목이라 한다. 그래서 연리지는 H자 모양이고, 연리목은 Y자를 뒤집어 놓은 형상이 된다. 이곳 연리목은 수령 약 70년에 둘레 1m쯤 되는 소나무 두 그루가 3~4m 높이쯤에서 달라붙어 하나가 되었다. 그래서 중부지방산림관리청에서는 이 나무를 연리목으로 분류하고, 보호수(1997-5)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참고로 이 연리목의 하단 두 줄기 사이 틈새는 약 45cm. 이 틈바구니 사이로 부녀자가 빠져나가면 아들을 낳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 연리지의 故事는 후한말(後漢末)의 대학자 채옹(蔡邕)에서 유래됐다. 효성이 지긋하기로 소문난 채옹은 어머니가 병으로 자리에 눕자 3년 동안을 옷도 벗지 않은 채로 간병을 했다고 한다. 병세가 악화되었을 때에는 100일 동안이나 잠자리에 들지도 않고 보살폈으나 끝내 돌아가셨다. 그 후 옹의 집 앞에 나무 두 그루가 싹이 나더니 점점 자라면서 가지가 서로 붙더니 마침내는 한 그루처럼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연리지라는 단어는 원래 효심(孝心)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던 것이 다정한 연인(戀人)의 상징으로 사용된 것은 당() 시인(詩人) 백락천(白樂天)에 의해서다. 백락천은 당현종과 양귀비의 비극적인 사랑을 장한가(長恨歌)라는 장대한 서사시로 읊었다. 그는 당현종이 양귀비의 무릎을 베고 누워 하늘의 별을 쳐다보면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이렇게 노래했다고 한다. 장한가의 끝 구절이다.

七月七日長生殿(칠월칠일장생전) 77일 장생전에서

夜半無人和語時(야반무인화어시) 깊은 밤 사람들 모르게 한 맹세

在天願作比翼鳥(재천원작비익조) 하늘에선 비익조가 되고,

在地願爲連理枝(재지원위연리지) 땅에선 연리지가 되자고 간곡히 하신 말씀...

天長地久有時盡(천장지구유시진) 하늘과 땅은 차라리 끝간 데가 있을지라도,

此恨綿綿無絶期(차한면면무절기)님을 사모하는 이 마음의 한은 끝이 없으리다.

 

 

 

다시 임도로 되돌아와 50m쯤 더 걸으면 나무데크로 된 계단이 아래 계곡을 향해 길게 놓인 게 보인다. ()이 승천(昇天)했다는 전설을 갖고 있는 용추폭포(龍湫瀑布)로 내려가는 계단이다. 계단 아래에 있는 전망데크에 서면 폭포가 한눈에 들어온다. 마치 여인네의 아랫도리처럼 생긴 소()를 향해 하얀 폭포가 힘차게 떨어지고 있는 형상이다. 폭포의 상부와 하부는 널찍한 반석지대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차()는 대략 12m 정도, 고운 화강암 절벽이 마치 병풍(屛風)을 두른 듯 이어진 사이로 커다란 물줄기가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장관이다. 쪽빛으로 빛날 정도로 깊어 보이는 담()에 구명튜브 몇 개가 떠있는 것이 보인다. 아마 불상사에 대비해서 띄워 놓은 모양이다.

 

 

 

산행날머리는 에코황토마을 인근 도로

용추폭포를 지나서도 산길은 용세골 골짜기를 따라 계속해서 이어진다. 그러나 눈요깃감은 현저하게 줄어든다. 계곡이 점점 넓어지는 대신에 협곡(峽谷)이라는 인상을 풍기게 만들던 바위들이 점점 사라져 버린 탓이다. 그렇게 15분 남짓 걸으면 용세골의 민가(民家)들이 보이고(이정표 : 덕평리 4.7Km/ 용추폭포 0.5Km), 이곳에서부터는 시멘트포장 도로를 따라 걸어야 한다. 15분 가까이 되는 이 길은 오뉴월 땡볕이라도 내려쬘 경우에는 가히 지옥의 행군이 되기 십상인 길이다. 그러나 장점도 있다. 길가에 보이는 과수원(果樹園)에 들어가 나뭇가지에 매달려있는 싱싱한 과일을 직접 채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복숭아와 자두를 각기 한 자루씩 가득 들고 아침에 출발했던 장소로 돌아 나오면서 산행이 끝을 맺는다. 오늘 산행은 총 5시간5분이 걸렸다. 중간에 목욕 등으로 쉰 시간을 뺄 경우 4시간40분을 걸은 셈이다. 그러나 중간에 알바를 1시간 정도 했으니, 제대로 진행할 경우 3시간40분 정도 걸린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도락산(道樂山, 964m)

 

산행일 : ‘14. 6. 6()

소재지 : 충북 단양군 단성면과 대강면의 경계

산행코스 : 상선암주차장상선암제봉(弟峰)도락산삼거리신선봉도락산도락산삼거리채운봉큰선바위상선암주차장(산행시간 : 4시간10)

 

함께한 산악회 : 기분좋은 산행

 

특징 : 온통 바위로 덮여있다는 표현이 제격인 산이다. 때문에 등산로가 기암괴석(奇巖怪石) 사이사이로 날 수밖에 없고, 그 길은 좁으면서도 가파르다. 위험한 구간이 많음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대신 제대로 스릴(thrill)을 맛볼 수 있으니 까짓 약간의 위험을 마다할 이유는 없다. 거기다 바위산의 특징대로 멋진 경관(景觀)과 탁 트인 조망(眺望)까지 보여주니 한마디로 뛰어난 산이라고 볼 수 있다. ‘도락산(道樂山)이라는 이름값을 톡톡히 하고 있는 산이라는 말이다.

 

  

산행들머리는 상선암주차장(단양군 단성군 가산리 882 : 선암계곡로 790)

중앙고속도로 단양 I.C에서 내려와 5번 국도를 타고 제천방면으로 달리다가 북하삼거리(단성면 북하리)에서 좌회전하여 충주호(忠州湖) 쪽으로 들어간다. 이어서 충주호를 가로지르는 우화교()를 건너자마자 우화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상선암휴게소에 이르게 된다. 휴게소 조금 위에 있는 다리를 건너면 상선암주차장이 나오는데 산행은 이곳에서 시작된다. 참고로 단양팔경(丹陽八景)의 대미 제8경인 상선암(上仙岩)은 이 다리에서 약 200m쯤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상선암은 비록 크고 널찍한 바위는 없으나 작고 올망졸망한 바위들이 서로 모여 소박하고 정겨운 풍경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암반(巖盤)을 따라 흐르는 물줄기가 무지개다리 아래로 떨어지는 광경이 가히 한 폭의 그림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상선암이라는 이름은 조선 명종 때 우암 송시열의 수제자였던 수암 권상하(遂菴 權尙夏)가 지었다고 전한다.

 

 

 

주차장을 빠져나와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따라 상선마을로 올라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길 주변에 식당을 겸한 민박(民泊)집들이 여럿 보이고, 거기에다 카페까지 들어서있는 것을 보면 상선마을은 이미 한적한 산골마을이 아니었다. 어엿한 관광지(觀光地)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올라가는 길에 주인할머니께 여쭤보니 손수 두부를 만드신단다. 솜씨도 엿볼 겸 하산 길에 들러 두부와 도락산막걸리를 주문해 보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맛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양념장을 묻히지 않아도 될 정도로 두부가 짠 덕분에 고소한 맛을 잃어버린 것이다. 아마 성수기(盛需期)가 아니라서 보관하기 쉽게 간을 하다 보니 너무 짜진 게 아닌가 싶다. 참고로 음식점에서는 음식을 주문할 경우 산행에서 흘린 땀을 씻을 수 있는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산행을 시작한지 5분쯤 지나면 길이 세 갈래(이정표 : 도락산/ 도락산(상선암)/ 송림사/ 주차장)로 나뉜다.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이 두 갈래로 나뉘지만 곧장 정상으로 향하지 않고 상선암(上禪庵)을 거쳐 가기로 한다. 조금 후에 두 길이 다시 만나기도 하지만, 의상(義湘)대사가 창건(創建)했다는 고찰(古刹)에 들러보기 위해서이다. 참고로 이곳에서 도락산 방향으로 약간 올라가면 다시 Y자 형의 삼거리가 나오는데, 왼쪽 방향으로 진행할 경우에는 상선암 앞에서 아까 헤어졌던 상선암 경유 길과 다시 만나게 되고, 오른편은 채운봉을 거쳐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다.

 

 

삼거리에 2~3분만 걸으며 한국불교태고종(韓國佛敎太古宗)의 말사(末寺)인 상선암(上禪庵)이다. 상선암은 화엄종의 창시자인 의상(義湘)대사가 창건한 사찰로서 당시에는 선암사(仙巖寺)라 불리었다. 조선 순조(1822)와 철종(1857) 때에 중수(重修)를 하였으나 1910년에 대웅전이 헐리는 등 거의 폐허(廢墟)화된 것을 1956년 대웅전을 다시 세우면서 이때 이름도 상선암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그런 탓인지 천년고찰(千年古刹)임에도 불구하고 당우(堂宇)는 보잘 것이 없다. 사찰(寺刹)의 멋을 보여주는 건물이라곤 6칸의 맞배집인 대웅전 하나뿐, 나머지 건물들은 일반 여염집의 외양(外樣)을 하고 있을 따름이다. 참고로 이곳 상선암은 숙종 때 좌의정을 지냈던 권상하(權尙夏)가 공부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그는 이곳에서 크게 깨달음 얻어 스승인 송시열로부터 아낌을 받았다고 한다.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은 여염집을 닮은 요사채(寮舍)의 옆에서 열린다. 들머리에 이정표(도락산 3.0Km/ 상선암주차장 0.3Km)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가파른 산길이 시작부터 사람들의 기()를 죽인다. 어쩌면 오늘 산행이 만만치 않을 것임을 미리 알려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산자락으로 접어들어 12~3분쯤 오르면 철계단이 나타나면서 바윗길이 시작된다. 이어지는 산길은 앞을 가로막고 있는 바위들을 우회(迂廻)하거나 그러지도 못할 경우에는 아예 바위를 넘어 가면서 진행하게 된다. 바윗길이 경사(傾斜)까지 가파르다보니 안전(安全)이 염려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조금만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곳에는 어김없이 철제(鐵製)로 계단이나 난간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조금만 조심하면 별 어려움 없이 통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윗길에서 스릴을 즐기며 20분 정도 오르면 주능선(이정표 : 도락산 2.2Km/ 상선암 주차장 1.1Km) 위에 올라서게 된다. 능선에 올라서면 경사(傾斜)는 일단 수그러든다. 그러나 바윗길은 더욱 험해진다. 여전히 계속되는 바윗길이 그 폭()이 좁은데다가 사면(斜面)이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험한 바윗길이 다소 겁나기도 하지만 대신 훌륭한 눈요깃감들이 이를 보상해주기 때문에 섭섭해 할 필요는 없다. 능선의 곳곳을 차지하고 있는 노송(老松)들은 물론이고, 바위의 갈라진 틈새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가냘픈 소나무들도 등산객들의 시선을 빼앗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 소나무들은 생김새까지도 수려(秀麗)하다. 한마디로 자연이 만들어낸 분재(盆栽)’이다.

 

 

 

제봉으로 향하는 능선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간다. 다행이도 능선은 바윗길만 계속되지는 않는다. 바윗길과 흙길이 번갈아가며 나타나는 것이다. 능선에 올라서서 15분 남짓 걸으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능선으로 곧장 올라가는 길 외에도 왼편으로 우회(迂廻)하도록 사면(斜面)길이 나 있다. 생각할 것도 없이 곧장 능선으로 치고 오른다. 이런 곳은 대부분 내가 좋아하는 바윗길이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능선 위는 멋진 바윗길이었다.

 

 

 

길지 않은 바윗길에 이어 너덜길 비슷한 비탈진 구간을 치고 오르면 15분 정도 후에는 이정표(도락산 1.5km/ 상선암주차장 1.8km)가 있는 전위봉이다. 혹시 이곳이 제봉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제봉의 정상은 이곳에서 100m쯤 더 가야 만날 수 있었다. 제봉 정상은 무심코 지나치기 십상이다. 제봉 정상의 바로 아래에서 길이 오른편으로 휘었기 때문이다. 나도 역시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다가 인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돌려보니 이정표(도락산 1.4km, 신선봉 1.0km/ 상선암주차장 1.8km) 앞에서 메모(memo)를 하고 있는 사람이 눈에 들어온다. 혹시나 하고 올라보니 제봉 정상이 아니겠는가. 제봉 정상은 의외로 평범한 흙봉우리이다. 이곳으로 올라올 때 지났던 능선들이 과연 바위능선이 맞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로 말이다. 만일 이정표에 제봉이라고 적혀있지 않았더라면 아무도 이곳이 제봉인지 눈치 채지 못할 것이다. 산행들머리에서 제봉까지는 1시간10분이 걸렸다.  

 

 

 

제봉에서 오른편으로 난 내리막길을 따라 도락산으로 향한다. 능선은 초반에 잠깐 흙길로 이어지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바윗길로 변한다. 그러다가 멋진 바위봉우리 위로 올라서게 된다. 어쩌면 형봉(兄峰)이 아닐까 싶다. 형봉은 아까 지나왔던 제봉과는 영 딴판이다.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바위는 그 생김새부터가 범상치 않고, 그것도 부족했던지 주변의 낙락장송(落落長松)들까지 구색을 맞추고 있다. 한 폭의 동양화를 그려내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이다.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하산 길에 만나게 될 채운봉과 검봉이 보인다.

 

 

 

형봉에서 가파르게 내려서면 능선안부에서 삼거리를 만나게 된다. ‘도락산삼거리인데 도락산 정상은 이곳에서 직진해야 한다. 그러나 도락산 정상을 오른 후에는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 나와야만 한다. 산행을 시작했던 상선암주차장으로 원점회기 하려면 이곳에서 채운봉을 거쳐 상선암으로 내려가야 하기 때문이다.

 

 

도락산삼거리에서 도락산 정상으로 가는 길이 오늘 산행의 하이라이트(highlight)이다. 삼거리에서 맞은편에 보이는 봉우리를 사면(斜面)길로 우회(迂廻)한 뒤, 산뜻한 나무계단을 밟고 올라서면 12분 후에는 마당바위이다.

 

 

 

 

얼마나 넓으면 마당바위라는 이름까지 얻게 되었을까? 이름 그대로 마당바위는 100명도 훨씬 넘는 인원들이 한꺼번에 둘러앉아도 될 만큼 넓었다. 신선봉이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는 마당바위의 중간에는 직경이 1m쯤 되는 웅덩이가 하나 파여 있다. 처녀가 물을 퍼내면 금세 소나기가 쏟아져 다시 물을 채운다는 전설(傳說)이 담긴 바위연못이다. 우리가 올라간 때에도 연못에는 제법 많은 양의 물이 고여 있었다. 그러나 손이나 발을 담가보는 것은 금물, 오랜 가뭄 탓인지 녹조(綠潮 : water-bloom)현상을 보이고 있는 물은 탁하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마당바위는 오늘 산행에서 가장 뛰어난 조망(眺望)을 자랑한다. 왼편에 어렴풋이 보이는 것은 어쩌면 광덕암일 것이다. 광덕암은 옛 대궐터로 박혁거새가 금수산에서 태어난 후 현재의 광덕암 터에서 정사(政事)를 펼쳤다는 전설(傳說)이 전해지는 곳이다. 그리고 고개라도 들라치면 황정산과 수리봉, 문수봉, 용두산 등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마당바위에서 도락산 정상은 20분 정도의 거리이다. 이어지는 멋진 바윗길을 걷다보면 10분 후에는 내궁기갈림길(이정표 : 도락산 0.3Km/ 내궁기 1.4Km/ 도락산삼거리 0.3Km)에 이르게 되고, 곧이어 나타나는 나무다리(木橋)를 건넌 후 맞은편 산자락을 치고 오르면 도락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도락산 정상은 의외의 풍경(風景)을 보여준다. 내내 바윗길로만 이어지던 산길이 갑자기 흙길로 변하더니 정상 역시 흙으로 이루어진 밋밋한 봉우리로 나타난 것이다. 정상으로 올라오는 길에 만났던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바윗길이 과연 사실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이다. 색다른 눈요깃거리도 없음은 물론이다. 검은 오석(烏石)으로 만든 충청북도 특유의 정상표지석과 나무의자 몇 개를 제외하고는 볼품이 없다. 정상은 어수선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정상을 빙 둘러싸고 있는 각종 안내판 들이 너무 많아서 차라리 없는 것만도 못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거기다 잡목(雜木)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조망(眺望)까지도 트이지 않는다.

 

 

도락산삼거리로 되돌아 나와 이번에는 왼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채운봉을 거쳐서 상선암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채운봉으로 향하면 곧 봉긋하게 솟아있는 채운봉이 앞에 나타나면서 가파른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이어서 경사(傾斜)가 가파른 오르내림이 반복되는데, 짜릿한 스릴(thrill)을 만끽할 수 있는 구간이다. 길은 칼처럼 삐죽삐죽 솟은 바위 사이를 요리조리 파고들어 만들어져 있다. 발 하나 디딜 평평한 공간이 없을 정도로 능선의 양쪽 사면(斜面)이 날카롭다. 바위에 박아 만든 쇠()난간이 없다면 도저히 걸을 수 없을 정도로 경사가 급하고 험하다. 그러나 그 난간을 잡고 오르내리는 맛은 제법 쏠쏠하다. 그 덕분에 위험하다는 생각은 아예 비집고 들어올 틈조차도 없다.

 

 

 

도락산은 소백산(1,440m)과 월악산(1,093m) 중간에 있는 바위산으로 산자락 일부가 월악산국립공원 안에 들어 있다. 도락산은 사방이 바위 천지이다. 시선을 드는 곳마다 온통 바위뿐이라는 얘기이다. 당연히 주위 경관이 빼어날 수밖에 없다. 하긴 나라에서 보증하는 아름다움이 아니겠는가. 이곳이 월악산국립공원(國立公園)에 포함되어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때로는 삐죽하게 솟아오르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묵직한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는 바위능선은 화강암(花崗巖:granite)과 편마암(片麻岩:gneiss)으로 이루어졌다. 그 바위들이 주변의 노송(老松)들과 어우러지며 기막힌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짜릿한 스릴(thrill)을 즐기면서 바윗길을 오르내리다보면 7분 후에는 철다리를 만나게 되고, 다시 10분쯤 더 걸으면 채운봉에 올라서게 된다. 채운봉은 작은 공터일 뿐 별다른 특징이 없다. 물론 이곳이 채운봉이라는 아무런 표식(表式)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래도 특징 하나를 꼭 들어보라면 정상에서 몇 걸음 더 진행하면 나타나는 말안장을 닮은 바위를 꼽고 싶다. 심심풀이로 말을 타듯이 바위 위에 걸터앉으면 조망(眺望)이 시원스럽다. 바위 너머에 월악산 국립공원을 형성하고 있는 산군(山群)들이 첩첩이 쌓여있다.

 

 

채운봉을 지나서도 짜릿한 바윗길은 계속된다. 채운봉에서 내려오는 길은 한마디로 간담이 서늘한 길이다. 그만큼 경사(傾斜)가 가파른 바윗길이란 얘기이다. 날머리인 상선마을의 표고(標高)254m이다. 그런데 도락산의 정상 높이가 964m이니 그 차()700m가 넘는다. 어지간한 1,000m급의 높은 봉우리를 오른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 표고차를 줄이면서 내려가다 보니 이렇게 날이 선 바윗길이 연속될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이런 곳에서는 방심은 금물(禁物), ()난간을 붙잡는 손에 힘을 주어야함은 물론이고, 내려딛는 발걸음마다 주의를 게을리 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위험한 한편으론 재미가 쏠쏠하기도 하다. ()난간을 잡고 내려오면서 느끼는 스릴이 말초신경(末梢神經)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는 얘기이다. 요즘 부쩍 암릉산행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한 집사람도 흥이 난 모양이다. 지금쯤 무릎이 아프다고 징징거려야 할 시간인데도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내려가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채운봉에서 내려오는 바윗길, 바라보기만 해도 간담이 서늘해진다.

 

 

채운봉에서 내려섰다가 다시 가파른 오르막길을 짧게 치고 오르면 흔들바위(이정표 : 상선암주차장 2.2km/ 도락산 1.3km)이다. 채운봉에서 20분 정도의 거리이다. 로프로 만든 난간의 너머에 보이는 널찍한 바위가 흔들바위란다. 제법 크고 옆으로 퍼지기까지 한 바위지만 힘을 가하면 쉽게 흔들린다고 한다. 요즘 부쩍 장난치기 좋아하는 집사람이 난간 밖으로 넘어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설마 저게 흔들릴 리가 있겠냐는 생각도 있었겠지만 생김새가 별로인 것이 일부러 넘어갈 마음을 없애버린 모양이다.

 

 

흔들바위 바로 위에서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그냥 오른쪽으로 난 사면(斜面)길을 따른다. 능선으로 난 길은 탐방로가 아니라며 길을 막아놓았기 때문이다. 능선을 따라 올라가면 만나게 되는 봉우리가 검봉일 것이다. 흔들바위에서 20분 남짓 걸으면 큰선바위이다. 사면(斜面)의 탐방로를 따라 얼마간 걸으면 검봉(?)에서 내려오는 갈림길(이정표 : 상선암주차장 2.0km/ 도락산 1.5km/ 탐방로 아님)을 만나게 되고, 이어서 산길은 가파른 내리막길로 변한다. 흙길이 가파르기까지 하다 보니 조금은 부담스러웠던가 보다. 길게 침목(枕木)계단이 놓여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곳뿐만이 아니다. 산길이 대부분 이렇게 가파르다보니 곳곳에 이런 침목계단과 나무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내려가는 길에도 눈요깃거리는 끊이지 않고 나타난다. 잘생긴 노송(老松)이 길가에 나타나는가 하면 도락산의 서슬 시퍼런 암릉이 한눈에 들어오는 멋진 조망처가 심심찮게 나타나는 것이다.

 

 

 

가끔 오른편으로 시야(視野)가 터지는데, 아까 지나갔던 제봉의 능선을 이루고 있는 서슬 시퍼런 암릉이 눈앞에 펼쳐진다.

 

 

 

흔들바위를 출발해서 20분 남짓 내려오면 큰선바위(이정표 : 상선암주차장 1.5Km/ 도락산 2.0Km)에 이르게 된다. 이어서 10분 정도 더 걸으면 작은선바위(이정표 : 상선암주차장 1.0Km/ 도락산 2.5Km)이다. 30분 정도 걸리는 제법 먼 거리이지만 지루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만큼 눈요깃거리가 많다는 의미일 것이다. 큰선바위와 작은선바위는 길가에 뾰쪽하면서도 거대한 바위가 하나씩 놓여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놓여있다라는 표현을 썼는가하면 바위를 제외하고는 주위가 온통 흙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마치 어디선가 바위가 날아와 이곳에 똑 떨어진 형상이라고 생각한다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산행날머리는 상선암주차장(원점회귀)

작은선바위에서 6분쯤 더 내려오면 물기 하나 없는 건천(乾川)을 가로지르는 철다리(이정표 : 상선암주차장 0.7km/ 도락산 2.8km)를 만나게 되고, 이곳에서부터 산길은 갑자기 넓어진다. 그리고 저만큼 아래에 상선마을이 나타난다. 길가에 잘 지어진 전원주택들을 구경하며 널따란 임도(林道)10분 조금 못되게 걸어 내려오면 제봉으로 올라가는 길과 나뉘는 삼거리에 이르게 되고, 5분 후에는 아침에 산행을 시작했던 상선암주차장에 이르게 되면서 산행이 종료된다. 총 소요시간은 4시간10분이 걸렸다. 중간에 막걸리를 마시느라 잠깐 쉬었지만 10분이 채 안되니 이를 감안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에필로그(epilogue) : 우암 송시열은 '깨달음을 얻는 데는 나름대로 길()이 있어야 하고, 거기에는 또한 즐거움()이 뒤따라야 한다'는 뜻으로 도락산(道樂山)의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산행 하나에도 깨달음의 길이 있단다. 그렇다면 난 그동안 어떠한 산행을 해왔을까? 아무래도 산을 오르내리기에 급급했었던 게 아닐까 싶다. 별 생각 없이 산을 대했던 것 같아 왠지 부끄러워진다. 그러나 우암이 말한 하나는 지켰던 것 같아 나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린다. 바로 즐거움이다. 어느 산이건 산에 오를 때마다 즐거움을 느껴오기 때문이다. 오늘 오른 도락산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