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류산(御留山 490m)-마니산(摩尼山, 639.8m)-노고산(老高山, 429m)
산행일 : ‘14. 2. 9(일)
소재지 : 충북 영동군 심천면, 양산면 그리고 옥천군 이원면의 경계
산행코스 : 태조마을→임도→어류산→546봉→사자머리봉→마니산→480봉→노고산→죽산마을(산행시간 : 5시간10분)
함께한 산악회 : 기분좋은 산행
특징 : 어류산과 마니산, 그리고 노고산에 대한 첫 느낌은 한마디로 ‘버려졌다’는 것이다. 마니산 외에는 정상표지석 조차 보이지 않고, 그 흔한 이정표 하나 보이지 않는다. 그런 산이니 등산로 정비가 안 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바위로 이루어진 산세(山勢)는 의외로 수준급이다. 만일 천태산 등 명산(名山)들로 넘쳐나는 지역(영동군)만 아니었다면 귀한 대접을 받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산에 이골이 난 산꾼들이 아니라면 어류산과 노고산은 권하고 싶지 않다. 바윗길이 너무 거칠고, 산길 또한 아마추어들이 찾기에는 그 흔적이 너무 희미하기 때문이다.
▼ 산행들머리는 기호리 태소마을(영동군 심천면)
대전-충무고속도로 금산 I.C에서 내려와 영동방면으로 달리면 송호국민관광단지를 지나 외마포삼거리(영동군 양강면 묵정리)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서 좌회전하여 금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잠시 후에 심천면 명천리에 있는 삼거리에 이른다. 이곳에서 다시 좌회전하여 금강을 가로지르는 금호교(橋 : 심천면 기호리 665)를 건너면 기호리이다. 금호교를 건너자마자 좌회전하여 금강을 따라 내려가면 산행들머리인 태소마을에 이르게 된다. 도로변에 커다란 자연석으로 만든 ‘태소(太沼)마을’ 표지석과 ‘마을의 유래’가 적혀있는 빗돌이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마을 표지석 옆에 있는 버스정류장에서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들어서자마자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것은 보호수(保護樹 : 영동 7-5, 51)로 지정된 떡갈나무, 이곳 주민들이 나뭇잎의 많고 적음을 보고 농사의 풍흉(豊凶)을 점쳤다는 전설(傳說)을 갖고 있는 나무라고 한다. 들어가는 길에 보면 전면에 어류산이 보무도 당당하게 서있다. 어류산은 고려말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공민왕이 잠시 머물렀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 유명세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산은 험한 모습, 성채(城砦)의 형상을 하고 있는 바위절벽은 인간들의 접근을 쉽게 허락할 것 같지가 않다.
▼ 시멘트포장 임도를 따라 5분쯤 들어가면 차단기(遮斷機)가 길을 막고 있다. 차량의 통행을 막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 국유림(國有林)인 모양이다. 차단기를 넘어 5분쯤 더 올라가면 산길이 오른편으로 열린다. 그러나 산길의 흔적은 또렷하지가 않다. 그 흔한 산악회의 시그널(signal) 하나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저 어류산 정상이 있는 방향을 눈대중으로 삼으면서 무작정 올라갈 수밖에 없다.
▼ 초입부터 이를 데 없이 가파르던 산길은 시간이 흘러도 결코 누그러질 줄을 모른다. 거기다가 길의 흔적까지 사라진 산길은 온통 잡목(雜木)과 가시넝쿨(명감나무) 천지이다. ‘에이~ ××’ 육두문자(肉頭文字)가 절로 튀어 나올 수밖에 없을 정도로 산길이 거친 것이다. 긁히고, 찔리고, 싸대기를 얻어맞는 것으로도 부족했던지 낮게 깔린 나뭇가지들은 아래로 지나가는 것까지도 허락해주지 않는다. 아예 납작 엎드려야만 겨우 길을 열어주는 정도이다. 그래 오늘은 예절교육까지 받아야 하는 날인가 보다.
▼ 거친 산길을 오르느라 입에서 단내가 날 즈음이면 능선에 닿으면서 오른편이 열린다. 오른편이 바위벼랑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아까 태소마을에서 출발할 때 위풍당당하게 보이던 바위절벽(絶壁)의 위로 올라선 것이다. 바윗길을 오르는 것은 힘들지만, 그에 따른 보상은 넉넉한 편이다. 위험이 항시 도사리고 있는 대신에 시야(視野)가 열리는 것이다. 바위벼랑 아래에 산행을 시작했던 태소마을이 조용히 웅크리고 있고, 그 뒤에는 금강이 굽이굽이 흐르는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 능선에 날카롭게 선 바위들을 잡고 오르거나, 오르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바위들은 우회(迂廻)하면서 능선을 치고 오르면 어느덧 어류산 정상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정확히 50분이 지났다. 어류산 정상은 어렵게 올라선 보람도 없이 보잘 것이 없다. 정상임을 알려주는 정상표지석도, 그렇다고 쉬었다갈 수 있는 자그마한 공간도 내주지 않는다. 그러나 바위벼랑 끄트머리에 위치한 덕분에 조망(眺望)은 뛰어나다. 아찔한 고도감(高度感)이 느껴지는 벼랑 끝을 딛고 서면 눈앞에 펼쳐지는 산하(山河)는 한편의 파노라마처럼 황홀하기 그지없다. 속리산과 민주지산, 덕유산을 잇는 백두대간(白頭大幹)의 산릉이 헌걸차고, 가까이로는 백화산과 월이산 등이 눈앞에서 출렁이고 있다. 물론 발아래에서는 금강의 물줄기가 유유히 흘러간다.
▼ 마니산으로 가는 길은 정상 근처에서 왼편으로 열린다. 내려가는 길은 아찔할 정도로 경사(傾斜)가 가파른 내리막길, 누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모두들 아이젠(Eisen)을 착용하고 있다. 다들 긴장된 표정들이다. 그만큼 산비탈이 허리를 곧추세우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산길은 곧장 아래로 내려서지를 못하고 왔다갔다 갈지(之)자를 그리면서 서서히 고도(高度)를 낮추어간다.
▼ 스틱과 산길 주변의 나무들에 의지해서 18분 정도를 조심스럽게 내려서면 능선 안부에 이르게 된다. 안부에서부터는 임도(林道)로 보이는 산길을 따라 걷게 된다. 구태여 ‘임도로 보인다’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길에 잡목(雜木)들이 가득한 탓에 임도라는 생각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만큼 오랫동안 정비를 하지 않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임도는 고맙게도 산봉우리 하나(441봉?)를 오른편으로 우회(迂廻)하더니, 15분 후에는 임도를 벗어나 능선으로 연결된다.
▼ 능선으로 들어서면 산길은 다시 가팔라지기 시작한다. 비록 아까 올랐던 어류산만은 못하지만 그렇다고 쉽지는 않다. 그 기세(氣勢)를 약간 누그러뜨렸을 뿐 가파르기는 매 한가지인 것이다. 숨이 턱에 차오를 듯이 20분 정도를 치고 오르니 ‘사자머리봉’이라고 쓰여 있는 종이 한 장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흩날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선두대장인 이상혁선생이 붙여 놓은 모양이다. 그러나 사자머리봉은 이곳(546봉)이 아니라는 사람들도 있다. 그중 하나는 다음에 오르게 될 능선의 전망대이고, 다른 하나는 전망대에서 조금 더 나간 지점에 있다. 세 번째 지점에는 ‘서래야 박건석’ 선생이 만든 정상표시 코팅(coating)지가 매달려 있다.
▼ 546봉에서 15분 정도를 가파르게 내려서면 안부에서 왼편으로 희미한 갈림길 하나가 나뉜다. 이정표는 없지만 아마 중심이마을로 내려가는 길일 것이다.
▼ 전망대로 올라가는 길에 바라본 546봉, ‘사자머리를 닮았네요.’ 누군가가 감탄하지만 내 눈에는 그리 보이지 않으니 문제다. ‘부처의 눈에는 모든 게 부처로 보인다.’라는 무학대사의 말이 사실이라면 큰일이다.
▼ 안부에서 다시 맞은편 능선으로 가파르게 치고 오르면 거대한 바위벽이 앞을 막는다. 바위벽을 왼편으로 우회(迂廻)하여 오르면 그다지 경사(傾斜)가 심하지 않는 슬랩(slab)이 길손을 맞는다. 구태여 엎드릴 필요도 없이 슬랩을 통과하면 바위전망대가 나타나면서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 사자머리봉이라고 불리는 봉우리 중의 하나인데,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곳을 사자머리봉으로 부르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싶다. 바위로 이루어진 생김새가 사자머리에 가장 가깝게 보였기 때문이다. 안부에서 이곳까지는 25분 정도가 걸렸다.
▼ 전망대에서 다시 마니산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한다. 3분쯤 걸었을까 길가 나뭇가지에 코팅(coating)지 하나가 매달려있는 것이 보인다. ‘사자머리봉 562m’, 만드느라 고생하신 서래야 박건석선생의 노고에는 감사를 드리지만, 봉우리의 위치에 대해서는 선뜻 공감이 가지 않는다. 고유(固有)의 이름을 갖기에는 너무나 밋밋하고 평범한 봉우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 다시 마니산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기면 산길은 다시 내리막길로 변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깊게 떨어지지는 않는다. 내려서기에 딱 좋을 정도로 완만(緩慢)한 길을 얼마간 내려오면 산악회 시그널(signal)들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안부에 이르게 된다. 중심이재일 것이다. 이곳에서 왼편으로 하산하면 중심이 마을로 이어지는 계곡길이고 오른편으로 하산하면 평계리 평촌마을이다.
▼ 중심이재에서 다시 한 번 짧게 치고 오르면 너럭바위인 마당바위를 만나게 된다. 향로봉의 모습을 가장 멋지게 마주할 수 있는 전망대(展望臺)다. 어류산과 마니산 사이에 우뚝 선 향로봉의 위용은 단연 압권(壓卷)이다. 거의 100m가 넘는 수직 바위봉으로 이루어진 향로봉(520m)은 오늘 산행에서 가장 뛰어난 그림일 것이다. 마당바위에서 그다지 험하지 않은 슬랩을 치고 오르면 또 다시 향로봉의 전경이 눈을 즐겁게 해준다.
▼ 마당바위에서 마니산으로 향하는 능선은 오르내림이 거의 없이 이어진다. 중심이재를 출발해서 30분 조금 넘게 지나면 낮은 돌담이 눈에 들어온다. 마니산성(山城)터이다. 성곽(城郭)은 아이들이 돌팔매질 할 때 몸을 숨기기 딱 좋을 만큼의 높이다. 그만큼 낮다는 이야기이다. 고려말 홍건적의 난을 피해 남쪽으로 쫓기던 공민왕은 옥천까지 내려와서 왕가권속들은 영국사에 머물게 하고 자기는 마니산성에서 독전(督戰)하였다고 한다. 그때 쌓은 성이 마니산성이다. 이렇게 험하고 깊은 산이라면 설사 왕이 숨어 있다고 하더라도 왕을 잡겠다고 일부러 올라올 적군은 없었을 것 같다. 그러니 당연히 성곽을 높이 쌓아올릴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참고로 마니산에서 영국사로 넘어가는 길에는 누교리란 지명이 있는데 이는 공민왕이 영국사를 왕래할 때 우피(牛皮 : 소가죽)을 이어매어 놓은 소가죽다리를 이용하여 왕래하였다 하여 생긴 지명(地名)이라 한다. 또한 영국사는 나라의 안녕과 전란(戰亂)이 하루빨리 평정되기를 밤낮없이 빌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전한다.
▼ 성터를 지나면서 눈꽃잔치가 시작된다. 더 정확한 표현을 빌리자면 상고대(霧氷 : rime)잔치이다. 상고대란 안개 등의 미세한 물방울들이 영하(零下)의 기온으로 인해 나뭇가지 등에 얼어붙은 현상을 말한다. 당연히 고산지대(高山地帶)에서나 볼 수 있는 귀한 눈요깃감이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미세한 얼음조각들은 가히 환상 그 자체이다. ‘사진 한 장 찍어주세요’ 묵묵히 발걸음만 옮기던 일행이 친구들에게 자랑하겠다며 핸드폰을 건네면서 하는 말이다. 그의 말마따나 주변은 온통 황홀한 아름다움만 가득하다. 하긴 이런 곳에 어찌 부정이 들어올 수 있겠는가.
▼ 상고대잔치에 심신을 내맡기며 걷다보면 어느덧 마니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10평 정도의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에는 충청북도 특유의 검고 각진 정상표지석과 삼각점이 놓여있다. 정상을 둘러싸고 있는 잡목(雜木)들로 인해 조망(眺望)은 트이지 않는다. 이곳 마니산은 조금 전에 지나온 어류산과는 다른 모양이다. 어류산은 사람의 발자국조차 찾아볼 수 없었는데, 꽤 많은 등산객들이 꾸역꾸역 정상으로 올라오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시끌벅적함이 싫어져 정상에서 머무는 것을 포기하고 노고산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참고로 마니산(640m)의 전체적인 지형은 한 마리의 문어가 금강을 향해 발을 뻗친 모양이라 한다.
▼ 노고산으로 향하는 산길이 오늘의 하이라이트(highlight)이다. 바윗길이 시작되는 것이다. 산길은 바위와 바위 사이를 오가며 이어지고, 길게 매달린 로프를 잡고 슬랩을 내려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한마디로 스릴이 넘치는 코스라는 이야기이다.
▼ 바윗길이 끝나면 산길은 다시 숨을 죽인다. 그리고 건너편에 480봉이 그 모습을 나타낸다. ‘저게 노고산일까요?’ 같이 걷고 있는 일행의 질문에서 이제 그만 산행을 끝마쳤으면 하는 마음이 저절로 묻어나오고 있다. 그만큼 오늘 산행이 길면서도 험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능선안부에 가까워지자 왼편에 갈림길 하나가 얼핏 보인다. 역시 중심이마을로 내려가는 길이다. 정상에서 33분이 지난 지점이다. 갈림길에서 3분 정도 더 걸으면 능선안부, 그러나 이곳에서는 갈림길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 안부에서 다시 오름길이 시작된다. 그러나 그 경사(傾斜)는 그다지 심하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수월하지는 않다. 경사가 약한 대신에 바위들이 나타나면서 길이 사나워진 것이다. 능선에 박혀있는 거친 바위들만 장애물(障碍物)이 아니다. 능선에 가득한 잡목(雜木)들이나 사람들의 손을 타지 않은 얽히고설킨 가시덤불 또한 피하고 싶은 장애물이다. 헤치고 나아가는 것이 차라리 전쟁(戰爭)과 같다. 그렇게 22분 정도 악전고투(惡戰苦鬪)를 치르다보면 480봉에 올라서게 된다. 480봉 정상에서 다시 한 번 조망이 터진다. 동쪽에는 시루봉과 어류산, 그리고 남쪽에는 민주지산 등 백두대간이 거대한 장막을 치고 있다. 그리고 서쪽에는 천태산과 갈기산, 물론 북쪽에는 월이산과 서대산이 보인다. 물론 굽이굽이 흐르는 금강은 보너스다. 한마디로 눈이 호사(豪奢)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 480봉에서 능선은 오른편으로 휜다. ‘거기가 노고산인가요?’ 함께 걷던 일행이 건너편 산봉우리에서 웅성거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큰소리로 외친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아니올시다.’이다. 노고산은 왼편에 보이는 다른 산봉우리인 것이다. 480봉에서 오른편으로 휜 산줄기는 앞의 봉우리에서 왼편으로 급하게 휘면서 내리막길을 만든다. 내리막길은 다행이도 경사(傾斜)가 가파르지 않다. 자기 몸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휘늘어진 소나무 숲을 지나면 너른 공터, 아마 묘역(墓域)을 조성하려고 벌목(伐木)을 한 모양이다. 이어서 능선안부에 이르게 된다. 480봉에서 25분이 걸리는 지점이다.
▼ 안부에서 그다지 가파르지 않는 능선을 치고 오르면 노고산이다. 노고산 정상은 정상표지석은 물론이고 그 흔한 이정표 하나 보이지 않는다. 다만 정상 주위에 옛날 할머니들이 앞치마로 날라 쌓았다는 작고도 초라한 노고산성(老姑山城)의 흔적만이 눈에 띌 따름이다. 그리고 또 하나 서툴게 쌓아올린 작은 돌탑이 하나 보인다. 오가는 등산객들이 하나하나 올려놓고 간 결과일 것이다. 다행이도 나무기둥에 ‘노고산 429m’라고 쓰인 코팅지가 하나 매달려있다. 선두대장인 이상혁선생이 만들어 붙여 놓은 모양이다. 참 고마운 일이다. 만일 코팅지만 아니었더라면 자칫 정상 인줄도 모르고 그냥 지나쳤을 번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480봉에서 40분, 안부에서는 15분이 걸렸다.
▼ 하산은 왼편 능선을 타고 내려선다. 잠시 능선을 따라가다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서 산길이 갑자기 험해진다. 언뜻 보면 길이 없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산비탈은 날카롭게 허리를 곧추세우고 있다. 때문에 산길은 곧장 아래로 향하지 못하고 지그재그로 왔다 갔다 하면서 서서히 고도(高度)를 낮추어 간다. 눈과 낙엽, 그리고 급경사(急傾斜), 이런 길에서 엉덩방아는 필수이다. 한 손은 스틱, 그리고 나머지 한 손은 길가 나뭇가지에 의지하면서 미끄러지듯 내려서는 고된 실랑이는 꽤 오랫동안 이어진다.
▼ 산행날머리는 죽산마을쏟아질 듯 깊이 떨어진 뒤에야 산길은 제 모습을 찾아간다. 울창하게 우거진 소나무 숲을 지나 물기 하나 없는 작은 계곡을 건넌 후, 맞은편 산릉을 하나 더 넘으면 잘 꾸민 묘역(墓域)이 나타난다. ‘밀양 박씨들의 선산(先山)이다. 문외한(門外漢)이 보아도 명당(明堂) 같네요.’ 함께 산행을 하고 있는 일행이 하는 말마따나, 전면이 시원스럽게 열리는 것이 내가 보기에도 명당으로 보일 정도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묘지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길에는 침목(枕木)계단까지 길게 놓여있다. 자손들이 잘 되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계단을 내려선 후, 농로(農路)를 따라 잠시 더 걸으면 이내 죽산마을회관 앞에 이르게 되면서 산행이 종료된다. 노고산 정상에서 35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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