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명산(道明山, 643m)
산행일 : ‘11. 8. 15(월)
소재지 :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산행코스 : 낙영산입구→공림사→낙영산→미륵산성→도명산→마애삼존불상→학소대→와룡암→화양2교(탐방지원센터→화양1교 야영장(산행시간 : 4시간20분)
함께한 산악회 : 안전산악회
특징 : 도명산은 총 6㎞에 달하는 화양구곡을 끼고 있어 여름철 계곡 산행지 중 단연 으뜸으로 꼽힌다. 우암 송시열이 중국의 우이산(武夷山) 구곡(九曲)에 빗대어 골짜기마다 일일이 이름을 붙일 정도로 빼어난 계곡미를 자랑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낙영산과 도명산 일대는 기암괴석(奇巖怪石)과 아름다운 노송(老松)들로 가득 차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곳곳이 절경(絶景)이다.
▼ 산행들머리는 공림사 주차장
중부내륙고속도로 괴산 I.C에서 빠져나와 19번국도(國道/ 보은방향)와 37번 국도(보은방향)를 따라 달리다가, 청천면 상신리 ‘사담 팜스테이 마을’에서 공림사 안내판을 보고 개울을 따라 들어가면 공림사 주차장이 나타난다.(참고로 중부고속도로 증평 I.C에서 들어오는 방법도 있는데, 안전산악회에서는 증평에서 들어오는 코스를 이용했다.)
* 사담마을 조금 못미처 도로변에 자그마한 쉼터가 마련되어 있다. 물레방아와 수많은 장승들이 늘어서있는 깜찍하고 예쁜 공원(公園)이다. 조성공사(造成工事)가 마무리되지 않았는지 물레방아는 마지막 마무리공사가 한창이다. 참고로 공림사 주차장에는 화장실이 없으니 이곳 쉼터의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고 공림사로 들어가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 공림사 주차장에는 화장실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임시로 사용되고 있는 모양으로 주차장의 노면(路面)도 포장이 되어있지 않다. 이번 장마에 물길이 깊게 파인 채로 방치되고 있어서, 작은 승용차는 주차하기가 만만치 않을 것 같다. 주차장을 빠져나와 시멘트 포장길을 조금만 오르면 공림사이다. 절 뒤로 낙영산의 바위벼랑이 하안 배를 드러내 놓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오늘 산행은 저 슬랩(Slab)을 밟고 오르게 될 것이다.
▼ 공림사에 들어서려면 먼저 우람하게 자란 느티나무들의 아래를 지나가야만 한다. 거대한 느티나무들은 녹음(綠陰)으로 짙게 물든 잎들을 무성하게 매달고 있다. 오뉴월 염천(炎天)의 더위에 찌든 중생(衆生)들을 끌어안기에 충분할 정도로... 절의 오른편에는 수령이 천년(千年) 가까이 되는 늙은 느티나무가 서 있다. 천년이라는 오랜 세월동안 얼마나 많은 중생들이 이 나무 아래에서 쉬어 갔으며, 그들은 또 얼마나 많은 고뇌(苦惱)들을 내려놓고 갔을까?
* 공림사(空林寺), 신라 경문왕 때 자정선사(慈淨禪師)가 창건한 사찰(寺刹)로서 법주사의 말사이다. 자정선사의 법력을 백성들이 칭송하자 경문왕이 그 인물됨을 알고 국사의 칭호와 공림사라는 절 이름을 지어 액자를 하사(賜額寺刹)한 것으로 전해진다. 임진왜란과 6.25전쟁 때 건물의 대부분이 소실(燒失)되었고, 현존하는 건물들은 1960년대 이후에 재건한 것들이다. 국가지정 문화재(國家指定 文化財)는 보유하고 있지 않다.
▼ 산행은 공림사의 삼성각(三聖閣) 뒤로 난 오솔길을 따라 들어가면서 시작된다. 따라서 공림사 경내(境內)를 둘러보는 것은 덤으로 얻는 즐거움, 거기다 문화재라도 몇 점 보유하고 있었더라면 선현(先賢)들의 채취까지도 덤으로 얻어갈 수 있었으련만, 아쉽게도 이곳 공림사에는 국보(國寶)급 문화재(文化財)를 보유하고 있지 않다. 그래서 당연히 문화재관람료도 받지 않는다. 삼성각 뒤로 난 오솔길로 접어든다. 공림사 경내를 통과하면서 혹시라도 스님들이 뭐라고 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된다. 나뿐만이 아니라 다들 그런 생각이 들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오솔길이 로프로 막혀있다. 등산객들이 사찰(寺刹) 경내를 통과하는 것을 막고 있는 것이다. 스님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로프를 넘어 산행을 계속한다. 그 누구라도 사찰입구로 되돌아 나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 산(山)자락으로 접어들면 잎이 무성한 활엽수들이 먼저 등산객들을 맞는다. 바닥에 널린 돌맹이들 때문에 걷기가 다소 불편하지만 경사(傾斜)가 완만(緩慢)하기 때문에 참지 못할 정도로 힘들지는 않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만나게 되는 바위지대, 경사가 점점 가팔라지더니 나중에는 아예 허리를 곧게 펴고는 못 걸을 정도로까지 변해버린다. 장마철의 찐득한 습기 때문일까? 흐르는 땀은 방울의 수준을 넘어 웬만한 빗줄기로 변해버린다. ‘비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안개도 아닌 것이...’ 이를 일컬어 안개비라고 한다. 순수한 우리말로는 <는개>... 산행을 시작하면서 우리를 맞는 것은 바로 <는개>였었다,
▼ 가팔라지던 길은 끝내 바위벼랑 아래에서 발길을 멈추게 만들고야만다. 왼편의 바위벼랑에 로프가 매달려 있는 것이 보인다. 로프를 이용해 바위 위로 오르면 낙영산이 자랑하는 슬랩(Slab)이다. 경사가 조금 완만한 초반(初盤)의 슬랩은 맛보기 수준, 곧이어 나타나는 두 번째 슬랩은 경사가 가팔라서 릿지(Ridge)로 오르는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우회하면 슬랩의 위로 쉽고 안전하게 오를 수 있다. 슬랩의 곳곳에 생긴 크랙(crack)에 꽂혀있는 소나무들이 경이롭다. 저렇게 척박(瘠薄)한 바위틈에서도 꿋꿋이 살아가고 있는 강인한 생명력에 찬사를 보내본다.
▼ 슬랩을 지나면 또다시 등산로는 바윗길과 흙길이 번갈아가며 나타난다. 그러다가 완벽한 흙길로 변하면서 헬기장이 있는 685봉에 올라서게 된다. 한때는 낙영산이라고 불리던 곳이다. 그러나 국립지리원에서 발행한 지형도에 표기된 현재의 낙영산은 이곳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한참을 더 가야만 만날 수 있다.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진행하면 무영봉을 지나 가령산에 닿게 된다.
▼ 685봉에서 낙영산 정상까지 이어지는 능선은 낙영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간이다. 곳곳에 기암괴석(奇巖怪石)이 널려있는데, 그 사이사이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소나무들과 어우러져 잘 그린 한 폭의 동양화(東洋畵)를 만들어 내고 있다. 공림사 방향은 바위벼랑이기 때문에 조망이 뛰어나련만 구름에 뒤덮인 산하(山河)는 그 자태를 보여주지 않고 있다. 날씨가 화창한 날에는 천황봉에서 상학봉까지 속리산 줄기가 하늘금을 그리고 있을텐데...
▼ 바위를 잡고 오르거나 우회해가며 두 개의 암봉을 지나면 드디어 낙영산 정상이다. 낙영산 정상은 산의 정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이다. 정상에 세워진 말뚝모양으로 생긴 정상표지석만 아니라면 그냥 지나쳐버릴 정도로 흙으로 이루어진 밋밋한 분지(盆地)이기 때문이다. 정상은 사방이 나무들로 막혀있어서 일절 시야(視野)가 열리지 않는다. 증명사진을 찍는 외에는 오래 머물 이유가 없기 때문에 곧바로 절고개로 발걸음을 옮긴다. 산꾼들의 생각은 이심전심(以心傳心)인지 낙영산 정상은 텅 비어있다. 산행을 시작한지 한 시간이 조금 더 지났다.
▼ 낙영산 정상에서 경사가 심하지 않은 내리막길을 따라 내려오면 능선 안부인 절고개에 닿게 된다. 절고개는 낙영산과 조봉산쪽 쌀개봉 사이의 고개로 돌로 쌓은 산성(山城)터가 남아있다. 일명 도명산성이라고 불리는 미륵산성이다. 이 절고개는 사거리로서 왼편으로 내려서면 공림사가 나오고, 곧바로 직진하면 쌀개봉을 거쳐 조봉산으로 가게 된다. 내가 가려고하는 도명산은 이곳에서 오른편 계곡으로 내려서야 한다.
* 괴산 미륵산성(槐山 彌勒山城), 도명산(道明山)에 있는 포곡형(包谷形 : 계곡과 산정을 함께 두름) 석축산성으로 일명 도명산성이라고도 한다. 성의 둘레가 5.1km에 이르며, 인공으로 석축한 부분만도 3km가 넘는 대규모의 산성으로서, 성안에는 풍부한 수원과 충분한 생활공간이 있어서 외적(外敵)이 침입하였을 때 주민들이 들어가 농성하기 알맞은 입지여건을 갖추고 있다. 출토되는 유물이나 축성기법(築城技法)으로 보아 이 산성을 처음 쌓은 시기는 통일신라 말기인 9∼10세기경으로 추정되며, 사적(史蹟) 제401호로 지정되어 있다.
▼ 절고개에서 도명산으로 가려면 계곡을 따라 꽤나 길게 내려섰다가 다시 올라가야만 한다. 길은 전형적인 흙길, 고운 찰흙으로 이루어진 길은 걷기에 아무런 부담이 없다. 행여 지나가는 사람들이 치일 새라, 나뭇가지로 떠받치고 있는 커다란 바위 곁을 지나가면서 웃다보면 어느덧 이름 모를 고갯마루에 도착하게 된다. 왼편에 거대한 바위절벽이 보인다. 도명산방향이니 저 벼랑만 올라서면 도명산 정상일 것이다. ‘위험하니 절대 올라가지 마세요!’ 여성 산행대장의 말이 아니더라도 집사람의 매서운 눈초리를 무시하고 바위에 들어붙을 수는 없다. 아쉬운 입맛만 다시면서 우회로(迂廻路)로 발걸음을 옮긴다.
▼ 도명산의 허리를 가로지르는 우회로(迂廻路)를 따라 얼마간 걷다가, 가파른 오르막길을 치고 오르면 학소대에서 올라오는 등산로와 만나는 삼거리이다. 이곳에서부터 정상까지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깔끔하게 잘 정비되어 있다. 경사가 심하다 싶으면 통나무계단이 놓여있고, 바윗길이 조금만 위험하다 싶으면 어김없이 철제로 안전시설(安全施設)을 만들어 놓았다.
▼ 맞은편 무영봉과 가령산 산자락들은 치마바위를 연상케 하는 바위들을 가득 두르고 있다. 초록의 바다위에 떠있는 하얀 바위들이라니...
▼ 삼거리에서 만난 어느 산악동호회, 다들 젊고 여자들은 다들 예쁘고 날씬하다. 그러나 그녀들의 입담은 40~50대 아줌마들 수준, 그것도 다라질 대로 달아빠진 아줌마들보다 더한 음담패설(淫談悖說)을 아무 거리낌 없이 내뱉고 있다. 그것도 큰 소리로... 더 이상 듣기가 민망한지 집사람의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한다. 걸음을 재촉해서일까? 깜짝할 사이에 도명산 정상에 도착해 있다.
▼ 도명산 정상은 순수한 바위이다. ‘바위 위에 바위’... 광장을 연상케 할 정도로 널따란 암반(巖盤) 위에 집채(집의 한 덩이)만한 바위 3개가 놓여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오석(烏石)으로 만들어진 정상표지석이 보인다. 올라오는 길에 추월했던 동호회원들이 도착하기 전에 우선 정상표지석 앞에서 증명사진부터 찍고 본다. 그들이 도착하면 사진촬영이 만만치 않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산악회 선두대장이 권하는 시원한 막걸리를 한잔 두잔 마시다보니 어느새 얼큰하다. 술기운에 올라본 정상의 바위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그야말로 일망무제(一望無題)이다. 큰소리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외쳐보고 싶지만 행여나 도명산의 도(道)라도 깨뜨릴까 두려워 참는다.
▼ 정상의 주변은 큰 바위들과 멋지게 자란 소나무가 잘 어우러지고 있다. 특히 운치를 더하는 건 용의 몸통처럼 힘찬 굴곡을 가진 소나무들이다. 기암과 노송이 어우러지고, 그 너머에 펼쳐지고 있는 가령산의 암릉까지 더해본다. 그림에는 문외한인 내 눈에도 한 폭의 산수화가 부담 없이 그려지고 있다. 한 번에 휙 둘러보기 아까울 정도로 시원한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 정상에서 하산은 학소대 방향으로 내려선다. 정상으로 오르는 길에 만났던 삼거리까지 되돌아가, 아까 낙영산에서 올라왔던 길을 버리고 학소대 방향으로 직진하면 거대한 바위들이 길을 막고 서 있다. 깎아지른 듯한 수직의 암벽에 세 개의 불상(佛像)이 새겨져 있다. 고려초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마애불이다.
* 도명산 마애삼존불상(磨崖三尊佛像), ‘ㄱ’자로 꺾인 암벽에 선각(線刻)방식으로 새겨진 3분의 부처님이다. 고려 초기에 조성(造成)된 것으로 추정되며 제일 큰 것은 그 길이가 무려 14m나 될 정도로 거대하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40호로 지정되어 있다.
▼ 마애불(磨崖佛)을 지나면 가파른 바윗길의 연속이다. 철다리를 내려서기도 하고 밧줄을 잡아야할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위험할 정도는 아니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 짧지 않은 거리를 내려오면 화양계곡이다. 우거진 숲길을 따라 잠시 걸으면 이내 학소대교가 나오고, 대교에서 바라보이는 우측의 벼랑이 학소대이다.
▼ 화양대교에서 이어지는 길은 수준급으로 잘 정비되어 있다. 구절양장(九折羊腸)의 화양계곡을 왼편에 끼고 이어지는 도로는 화양3교를 건너면서 화양계곡을 오른편에 놓여있다. 비포장으로 자연미를 잃지 않고 있는 도로는 자동차 두 대가 비켜가고도 남을 만큼 충분히 넓지만 차량통행을 제한하고 있어 한적하기 이를데가 없다.
▼ 화양구곡(華陽九曲) 중 제8곡인 학소대
▼ 큰 바위가 물가에 우뚝 솟아 그 높이가 능히 구름을 찌를 듯하다는 제6곡 '능운대'
▼ 제5곡인 '첨성대'는 경주의 천체관측소와 같은 이름이다. 경주의 첨성대가 인위적인 건축물이라면 이곳의 첨성대는 자연의 작품이라는 것이 다를 뿐 역할은 똑같다. 화양3교 우측 등산로에서 마주 보이는 이 바위덩어리에는 '비례부동'(非禮不動)이라는 큰 글씨가 새겨져 있단다. '예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는 뜻의 이 글귀는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의 글씨라고 한다. 바위 맨 위에서 별을 관측했다는데 과연 어느 누가 그리했을까????
▼ 화양3교를 건너면 곧이어 송시열이 서재로 썼다는 암서재가 암반위에 다소곳이 앉아있다. 그리고 조금 더 하류에는 화양구곡에서 제일 아름답다는 금사담이다. 금빛 모래가 물속에 가득 깔려있다는 금사담은 물놀이 나온 인파들로 넘치고 있다. 이 근처에 효종의 부음을 듣고 송시열이 매일 아침 슬피 울었다는 읍궁암이 있으나, 어느 바위인지는 구분할 수가 없었다. 암서재와 금사담 근처의 도로변은 음식점들이 꽉 들어차 있고, 술손님들이 떠드는 왁자지껄한 소리가 시장을 연상시키고 있다.
* 송시열은 조선의 선조 때부터 숙종조까지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친 인물로,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北伐計劃)을 추진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송시열은 ‘임금은 8년 동안 제대로 한 일이 아무것도 없다.’라는 내용이 담긴 <정유봉사(丁酉封事)>라는 상소(上疏)까지 올릴 정도로 북벌정책(北伐政策)에 강하게 반대를 했던 사람이다. 결국 효종이 실권(實權)을 넘겨주면서까지 북벌에 대한 송시열의 협조를 구했지만, 기득권을 잃을 염려가 있는 일에 송시열이 신명을 바쳤을 리는 없다. 불벌준비가 지지부진하자 효종과 송시열간에 담판이 이루어졌고<기해독대(己亥獨對, 1659>, 독대가 있고 2달 후 효종이 승하하게 되면서 북벌정책도 그 생명을 마감하고 만다. 정유봉사에서 보듯이 ‘사대부(士大夫) 우대’라는 기득권보호에 열을 올리며 효종를 압박하던 그가 과연 효종의 부음을 전해 듣고 바위에 올라 통곡을 했을지는 의심스럽다. 만일 통곡을 했을 정도라면 일종의 쇼가 아니었을까? 아니면 그의 제자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에 불과할 것이니, 그렇다면 저 읍궁암은 큰 의미가 없어진 그저 평범한 바위로 전락(轉落)할 수밖에 없다.(이덕일의 ‘조선 왕을 말하다’ 내용을 참조했음)
▼ 암서재와 금사담의 맞은편에 화양서원(華陽書院)이 있다. 송시열이 죽은 후 문하생인 권상하 등이 세운 것으로 조선 후기 사림(士林)을 이끌던 서원(書院)이기도 하다. 당시에는 화양서원의 위세가 대단해서 인근의 수령들은 화양서원의 요구를 감히 거절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였을까? 화양서원은 대원군에 의해 철폐되는 아픔을 맛보았고, 최근에야 복원되었다.
* 송시열은 조선(朝鮮)의 역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유명한 인물이다. 물론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개개인마다 시대마다 다르겠지만, 사약을 받고 죽었음에도 유교의 대가들만이 오른다는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전국의 수많은 서원(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그의 죽음은 신념을 위한 순교로 이해되었고, 그의 이념을 계승한 제자들에 의해 조선사회는 움직였다. 그가 조선사회에 끼친 영향력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역사가 승자가 기록하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모든 흠결을 다 감쌀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기득권보호를 위한 당파(黨派)싸움의 한쪽 축(老論)이었고, 모화사상(慕華思想)에 빠진 선비였다. 무이구곡에 비해 화양구곡을 지칭한 것이나, 주자의 운곡정사(雲谷精舍)를 모방해 암서재(岩棲齋)라는 정자를 세운 것만 봐도 능히 그의 사대성(事大性)을 짐작하게 한다. 송시열은 이곳에서 중국(中國) 방식을 따르기 위해 명나라 복장과 평정건(平頂巾)을 사용했다고 한다. 거기다 더해 부인에게도 명(明)나라 여자처럼 쪽을 지게하고, 아이들에게는 머리를 쌍각으로 땋아서 드리우게 하였을 정도이다. 조선을 이끌어가던 최고의 지도자가 이렇게까지 중국을 사모했으니, 일반 사대부(士大夫)들은 과연 어떠했을까? 그 결과가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를 불러오지는 않았을까?
▼ 화양계곡을 끼고 이어지는 길은 우선 널따랗다. 차량(車輛) 두 대가 비켜지나가고도 여유가 남을 정도이다. 널따란 도로의 양(兩)쪽으로는 수백 년은 됨직한 느티나무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짙은 녹음으로 물든 느티나무 숲은 걷는 이의 기분을 맑게 해준다. 학소대에서 화양교까지 이어지는 결코 짧지 않은 거리를 걷는데도 조금도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걷다보면 이곳이 속리산국립공원(國立公園)에 속해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도로 옆에 조금이라도 공터가 있을라치면 어김없이 멋들어진 공원으로 꾸며 놓았다. 화양계곡은 한마디로 말해 잘 가꾸어진 공원(公園)이다. 구절양장처럼 굽이굽이 흐르는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화양구곡의 숲길은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매력과 낭만을 주기에 충분하다.
▼ 산행날머리는 화양1교 근처에 있는 야영장
화양2교의 탐방안내소에서 화양1교까지의 구간은 거리도 만만치 않을뿐더러, 인도(人道)가 따로 만들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걸어서(徒步) 내려가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오고가는 차량(車輛)들을 피해 걷는 일은 싫지만, 사람이 잘 다니지 않은 덕택에 의외로 횡재(橫財)를 얻는 행운도 누릴 수 있다. ‘저 아래 개울가에 보이는 것이 복숭아 아니나요?’ 눈이 좋은 집사람 덕분에 우린 꽤나 많은 자연산 복숭아를 수확하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제1곡인 '경천벽', 층암절벽이 깎아지른 듯 솟아 있는 바위의 모습이 마치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것과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보통 자동차를 이용해서 화양구곡을 찾을 경우 놓치게 되는 곳인데, 산악회에서 집결지(集結地)를 화양1교로 정해준 덕분에 구경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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