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南山=錦峰山, 636m)-계명산(鷄鳴山, 775m)

 

산행일 : ‘15. 1. 13()

소재지 : 충북 충주시 안림동·직동·교현동·종민동의 경계

산행코스 : 행복한교회남산등산로깔딱고개남산(금봉산)북문마즈막재계명산범골충주댐공원(산행시간 : 4시간50)

 

함께한 산악회 : 가보기산악회

 

특징 : 충주시의 진산으로 알려진 남산(금봉산)과 계명산은 바로 이웃에 위치하면서도 각자 지니고 있는 특성은 사뭇 다르다. 전형적인 흙산인 남산은 순한 편이지만 바위와 흙이 섞여있는 계명산은 제법 거칠면서도 험하기 때문이다. 충주시에서는 이런 각자의 특성에 맞춰 산을 가꾸어 놓았다. 남산은 체육시설과 편의시설 등을 고루 갖춘 도심(都心) 근린공원(近隣公園)으로 조성했고, 계명산은 등산객들의 기호에 맞춰 산을 정비했다. 특히 남산은 정상으로 올라오는 도로가에 옛 이야기를 담은 그림들을 게시해 이 지방의 역사(歷史)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대몽항전에서 당당히 승리를 이끌어냈던 충주산성과 함께 조상들의 빛난 얼을 되새길 수 있도록 가꾸어 놓은 것이다.

 

산행들머리는 남산 주차장(충주시 교현동)

중부내륙고속도로 충주 I.C에서 내려와 3번 국도와 중원대로를 따라 충주시내 방향으로 잠깐 들어오면 사과나무사거리(달천동)가 나온다. 이곳에서 우회전하여 호수사거리까지 간 후, 또 다시 우회전하여 호암대로와 금봉대로를 연이어 타고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남산아파트 앞에 이르게 된다. 이곳 남산아파트 105동 건너편에서 오른편으로 길(남산1)이 열린다. 이 길을 따라 조금만 더 올라가면 산행들머리인 남산주차장이다.

 

 

 

주차장에서 빠져나와 들어왔던 길과 반대방향으로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주차장의 왼편에 생긴 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제법 큰 전각(殿閣)들을 거느린 대한불교태고종 소속의 대봉정사(大峯精寺)가 보이니 참조할 일이다. 산행을 시작하면 길의 좌우로 사과과수원들이 줄지어 나타난다. 도심(都心)에서까지 사과나무를 볼 수 있는 것을 보면 역시 충주가 사과의 본고장인 모양이다. 그리고 길가에는 심심찮게 음식점들이 나타나는데, 하나같이 도토리 묵밥이라는 메뉴(menu)를 걸어놓고 있다. 이는 이곳 남산이 충주시민들이 스스럼없이 찾는 장소이고, 또한 이 부근에서 도토리가 많이 채집된다는 증거일 것이다. 산행을 마친 사람들이 출출해진 배를 채우려고 들어가는 곳이 음식점일 테니까 말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10분 남짓 지나면 등산로 입구에 이르게 된다. 들머리에 등산로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니 잠깐 멈춰 서서 진행해야할 코스를 살펴본다. 이곳에서 약수터를 거쳐 능선 안부로 오른다. 그리고 계명산 정상까지 간 후, 마즈막재로 내려가는 코스이다. 쉬지 않고 보통 걸음으로 걸으면 2시간이면 충분할 것이다.

 

 

▼ 나무계단을 밟고 올라서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산에 들어서자마자 느끼게 되는 건 숫제 공원(公園)이라는 것이다. 길가에 조그만 틈이라도 생기면, 아니 억지로라도 터를 만들어가며 각종 체육시설과 의자 등의 편의시설(便宜施設)들을 설치해 놓았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그것으로도 부족했던지 시판(詩板)이나 돌탑 등 조경(造景)에까지 신경을 쓴 흔적이 역력하다. 그만큼 충주시민들이 스스럼없이 찾는다는 증거일 것이다.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산에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산행을 끝내고 내려오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길가에 늘어선 운동기구에 매달려 땀을 흘리고 있다. 그들의 활력에 이끌려 인사를 건네 본다. 물론 최대한 경쾌하게 말이다. 두어 마디 이야기를 건네도 될 만큼 산길의 경사(傾斜)가 아직까지는 완만(緩慢)하다.

 

 

등산로 입구에서 15분 정도를 걸으면 왼편에 약수터가 보인다. 깔끔하게 지어진 정자(亭子) 안에 들어있으니 한 모금 마신 후에 다시 산행을 이어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마침 물을 마실 수 있도록 플라스틱 바가지도 비치해 놓았고, 특히 맘 놓고 마시라고 수질분석표까지 옆에 게시해 놓았으니 말이다.

 

 

약수터를 지나면 곧이어 가파르면서도 긴 나무계단이 나타난다. 이름부터가 무시무시한 깔딱고개이다. 깔딱고개란 이곳을 오를 때 숨이 깔딱 넘어갈 정도로 힘이 드는 고개라는 뜻이다. 쉽게 말해 경사(傾斜)가 너무 가파르기 때문에 오르기가 만만찮다는 얘기이다. 그러나 이곳의 깔딱고개는 그다지 힘들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계단을 놓아 한결 편하게 올라갈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탓일 것이다.

 

 

깔딱고개는 5분 정도면 끝이 난다. 그리고 능선안부(이정표 : 창용사 0.3Km, 충주산성 1.28Km/ 범바위 1.87Km/ 등산로입구 0.73Km)에 올라서게 된다. 아까 등산로 초입에서 범바위로 가는 길이 오른편으로 나뉘는 것을 보았는데, 그쪽으로 갔을 경우 이곳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모양이다. 능선 역시 체육시설과 벤치를 갖춘 쉼터로 조성되어 있다. 오늘의 이용객들은 수자원공사 소속의 선수들, 조금 전에 계단을 뛰어서 오르내리던 이들이 바로 이들이었던가 보다.

 

 

일단 능선에 올라서고 나면 산길은 고와진다. 부드러운 흙길에다 경사도 거의 없는 평탄한 길이 계속되는 것이다. 이 길은 중간에 샘골약수터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삼거리(이정표 : 충주산성 0.83Km, 마즈막재 3.03Km/ 샘골약수터 1.09Km/ 0.45Km)를 만나게 되고, 이어서 조금 후에는 오늘 산행에서 처음으로 시야(視野)가 열린다. 가까이에 있는 발치봉과 두릉산은 물론이고, 주흘산과 월악산 등 충청권의 고산준령(高山峻嶺)들이 마치 파노라마(panorama)처럼 펼쳐지고 있다.

 

 

 

조망을 즐기다가 다시 산행을 이어가면 20분 정도 후에는 삼거리(이정표 : 마즈막재 2.2Km/ 재오개 0.8Km/ 샘골약수터 0.83Km, 깔딱고개 1.28Km)를 옆에 끼고 있는 남산의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제법 너른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은 두 개의 정상표지석과 삼각점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별로, 아까 이곳으로 오면서 만났던 조망처나 조금 후에 성곽(城郭) 위에서 만나게 될 조망처에 비하면 보잘 것이 없으니 그냥 지나쳐도 된다. 참고로 남산은 옛날부터 계명산과 함께 충주의 진산(鎭山)’으로 알려졌다. 원래의 이름은 금봉산(錦鳳山)’이었는데, 금봉산은 비단봉황이라는 의미가 더해진 예사롭지 않은 이름이다. 조선 성종 때 만든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조선 후기 김정호가 그린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도 금봉산으로 나온다.

 

 

정상에서 마즈막재로 내려가는 길은 충주산성(忠州山城 : 충청북도 기념물 제31)의 성벽(城壁) 위를 따라 걷게 된다. 충주산성은 남산(금봉산)의 정상부에서 동쪽으로 두 개의 계곡 상단을 에워싼 전형적인 신라 양식의 석축(石築) 산성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보이는 동악성(桐岳城)’으로 추정되며, 동악성(桐岳城=凍嶽城), 남산성(南山城), 금봉산성(錦鳳山城), 마고성(麻姑城)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충주산성은 마고선녀(麻姑仙女)와 관련된 축성설화(築城說話)가 전해져 내려온다. 옛날 금단산 수정봉에 은거하던 마귀할미가 하늘의 계율을 어기고 마구 살상을 하다가 천제의 노여움을 사 하천산 누독복으로 쫓겨나 험한 일을 하게 되었단다. 500년이 지난 후 마귀할미가 개과천선하는 기미가 보이자 천제께서 금봉산에 들어가 성을 쌓고 살라고 하면서 북두칠성을 따라 7일 이내에 축성하도록 했다는 전설이다. 다른 한편으론 조선약사(朝鮮略史)’에 백제 구이신왕 때에 쌓고 개로왕 때에 보수하여 적을 방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개로왕이 충주 안림동 일대에 도읍(都邑)을 옮기려 했다(고구려의 침공으로 이 계획은 불발에 그치고 문주왕에 의해 웅진으로 천도했다)는 전설(傳說)과 일치하고 있으니 참고해 볼 일이다. 참고로 이곳 충주산성은 고려시대의 명장(名將)이었던 김윤후(金允候) 장군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당시 산성방호별감(山城防護別監)으로 있던 그가 주민과 함께 몽고군의 침입을 막아냈던 역사의 현장이 바로 충주산성이기 때문이다.

 

성곽 위를 걷다보면 왼편으로 충주시가지가 온전히 내다보인다.

 

 

성곽(城郭)을 따라가다 보면 잘 생긴 소나무 한 그루를 만나게 된다. 등산로는 이곳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서 산성(山城)을 벗어난다. 그러나 곧바로 성곽을 벗어날 일은 아니다. 소나무 뒤편으로 몇 발작만 더 나가면 시원스런 조망(眺望)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충주호가 잘 내려다보이고 월악산 등 주변의 산군(山群)들이 한눈에 잘 들어오는 곳이다.

 

 

 

 

마즈막재로 내려가는 길은 두 가지이다. 굽이굽이 돌아가는 임도(林道)와 능선을 따르는 지름길이니 각자 편한 대로 선택하면 될 일이다. 물론 임도와 능선길은 여러 번에 걸쳐 만났다 헤어지기를 반복한다. 여기서 난 임도를 따라볼 것을 권하고 싶다. 임도를 따라 걸으며 이곳 충주지역의 역사(歷史)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볼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통일신라시대 당시 국토의 중앙이라는 의미로 충주에 세워진 중앙탑(中央塔)에서 고구려·백제·신라 백성들이 모여 화합을 다지는 장면과 신라의 가야금 명인인 우륵 선생이 탄금대에서 연주하는 모습 등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본 역사적 사실들을 그림으로 표현해서 길가에다 전시해 놓았다. 충주산성에서 대몽항쟁을 펼친 고려 때 김윤후 장군의 늠름한 모습이나 임진왜란 당시 신립 장군이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고 적과 싸우던 모습 또한 빠지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계명산까지 가야만하는 우리는 지름길인 능선을 택했다. 그러나 이 길은 겨울철에는 가급적 피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경사(傾斜)가 너무 가파르기 때문이다. 물론 가파름의 도()가 너무 심한 곳에는 안전로프가 설치되어 있다. 그러나 오늘 같이 산길이 온통 빙판일 경우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너무 꽝꽝 얼어붙은 탓에 아이젠(eisen)과 스틱(stick)까지도 도움이 되지 못 할 정도이니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산 시간은 많이 단축할 수 있으니 참고할 일이다.

 

 

설설 기다시피해서 40분 남짓 내려서면 마즈막재(心項峴)이다. 물론 임도를 5~6번 정도 가로지르며 능선을 따라 내려왔다. 마즈막재는 충주시내 방면 안림동과 충주호 방면의 종민동·목벌동의 경계를 이루는 고갯마루로서 옛날 단양이나 청풍, 수산 및 경상, 강원 일부 지방의 죄수를 충주 감영(監營)으로 이송할 때 이 고개를 넘으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고 해서 마지막 재가 되었다는 애처로운 전설(傳說)을 간직하고 있는 고갯마루이다. 옛날 남산 아래에 사형수들의 처형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죄수들이 이곳으로 끌려와 사형을 당하게 될 때 이 고개는 고향 쪽을 바라볼 수 있는 마지막 장소가 되고, 또 사형장이 가까워 삶의 마지막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는 것이다. 또한 이 고개의 원래 이름은 계명산의 옛 이름인 심항산(心項山)에 붙어있는 고개라고 해서 심항현(心項峴), 또는 마지막재라 불리었다. 그러던 것이 흐르는 세월 따라 고개의 이름 또한 마즈막으로 바뀌어버렸다. 참고로 마즈막재에는 남산에 있는 충주산성(忠州山城)에서 계명산과 잇대어 고개를 차단하는 약 720m의 석축성(石築城)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비록 희미한 흔적만 남아 있을 따름이지만 그만큼 이 고개가 전략적(戰略的)으로 중요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 중요한 역할은 삼국시대 때부터 이어졌다. 충주에서 남한강을 통하여 청풍과 단양, 죽령을 넘나들거나 하늘재를 넘어 영남에 이르는 중요한 길목이었던 것이다.

 

 

마즈막재에서 맞은편 통나무계단을 밟고 올라서면 대몽항쟁전승기념탑이 있다. 1253년 몽고군이 충주성을 공격할 때 산성방호별감(山城防護別監)으로 있던 김윤후 장군의 지휘 아래 관민(官民)이 한 덩어리가 되어 3개월 동안 몽고군을 막아 싸웠다. 이때 김윤후 장군은 공을 세우는 자는 귀천을 가리지 않고 벼슬을 주겠다.’며 독려했고, 몽고군이 견디지 못하고 물러나자 공을 세운 많은 사람들에게 벼슬을 주었다 한다. 이 승전(勝戰)을 기리는 기념탑(記念塔)이 옛 충주성 자리인 마즈막재에 세워져 있는 것이다. 이 탑의 탑신(塔身)은 산성의 성벽을 상징한 화강암으로 조성한 상단부에다 승전일(勝戰日)‘1253을 동판(銅版)으로 제작 부착하고, 탑신의 전면에는 군인(軍人)과 충주백성들의 상()을 배치해 대몽항쟁을 묘사했다. 그리고 벽에는 충주산성의 전적(戰績)을 기록하여 놓았다.

 

 

 

계명산으로 오르는 길은 기념탑 뒤편으로 열린다. 산길은 초입부터 가파르다. 그리고 그것도 부족했던지 점점 더 가팔라져 간다. 그러나 이에 놀라지는 말자. 이 정도에 놀랄 경우에는 조금 후에 할 말을 잃어버릴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가팔라지고 싶어도 더 이상 가팔라질 수가 없을 정도로 산길이 가파르게 변한다는 얘기이다. 이런 가파름이 부담스러웠던지 길가 곳곳에다 로프로 난간을 만들어 놓았다.

 

 

마즈막재를 출발해서 20분 조금 못되게 치고 오르면 너덜지대에 이르게 되고, 이어서 5분쯤 후에는 깔딱고개를 만나게 된다. 아까 남산을 오를 때 만났던 깔딱고개도 이곳에 비할 경우 애기 수준이라고 해도 괜찮을 정도로 이곳의 산길은 허리를 바짝 곧추세우고 있다. 산길은 깔딱고개를 지나서도 끊임없이 가파른 오르막을 만들어내다가 계명산자연휴양림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봉우리(이정표 : 정상 1.4Km/ 계명산자연휴양림 1.4Km/ 마즈막재 0.9Km) 위에다 올려놓는다. 마즈막재에서 40분 조금 못 걸리는 지점이다.

 

 

 

 

 

집사람의 발걸음이 점차 느려지기 시작한다. 함께 산행을 하고 있는 pinetrees님이 저만큼 뒤로 쳐진지는 이미 오래이다. 노익장(老益壯)을 자랑하고 있는 분이 저 정도라면 그만큼 산행이 힘들다는 얘기일 것이다. 이런 곳에서는 얘기를 주고받는 것까지도 삼가는 것이 좋다. 에너지 소비를 최대한 줄이는 게 그나마 덜 지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휴양림갈림길에서 20분 정도 더 오르면 또 다른 봉우리(이정표 : 정상 0.8Km/ 1전망대 0.5Km) 위에 올라서게 된다. 아마 지도에서 703m봉으로 표기된 지점일 것이다. 산길은 이곳에서부터 많은 변화를 보인다. 그동안 흙길이던 것이 갑자기 바위들의 숫자가 부쩍 늘어난 것이다. 비록 바위와 씨름을 해야 하는 짜릿함은 없지만 지루한 감은 많이 사라졌다.

 

 

 

 

쉼 없이 오르내리던 산길이 마치 몸부림이라도 치는 양 마지막 가파른 오르막길을 만들더니 드디어 정상 어림에 있는 헬기장(이정표 : 범골, 범동 2.0Km/ 막은대미재 4.3Km/ 마즈막재 2.6Km) 위에다 올려놓는다. 근처에 있는 정상보다 오히려 조망(眺望)이 더 뛰어난 곳이니 구태여 발걸음을 재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계명산에서 단연 최고이다. 발아래에는 충주호의 리아스(rias)식 호안(湖岸)이 아름답게 펼쳐지고, 그 뒤편에는 충청권의 높고 낮은 산들이 첩첩이 쌓여있다.

 

 

 

헬기장에서 10m만 더 오르면 계명산 정상이다. 대여섯 평 남짓한 정상은 두 개의 정상표지석과 삼각점이 지키고 있다. 마침 정상의 한쪽 귀퉁이에 멋지게 생긴 노송(老松) 한 그루가 웅크리고 있으니 잠시 쉬었다 가도 좋을 일이다. 다만 정상에 올라온 사람들이 사진을 찍는데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마즈막재에서 정상까지는 1시간30, 산행을 시작한지는 3시간30분이 지났다.

 

 

계명산은 원래 오동산(梧桐山) 또는 계족산(鷄足山)으로 불리었다. 전설에 의하면 오동나무가 무성했기 때문에 오동산이라 했고, 백제시대에 지네(百足蟲)가 많아 이를 퇴치하기 위하여 닭들을 방목하니 백족충이 없어져서 계족산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1958년에 계명산(鷄鳴山)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풍수설에 따르면 계족산이 닭발의 형상을 닮았고, 거기다가 이름조차 분산(分散)을 뜻하는 계족(鷄足)이라서 충주에서 큰 부자가 날 수 없었단다. 그래서 충주지역 인사들의 의견과 충주시 의회를 거쳐 닭 울음이 새벽을 알린다.’ 뜻으로 계명산(鷄鳴山)이라고 개칭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심항산(心項山)이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렸다고 하니 참고해볼 일이다. 여기서 계족산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설화(說話)를 하나 옮겨볼까 한다. 옛날 이 산에 지네가 많은 탓에 지네에 물려 죽는 백성들이 많았단다. 그러다가 어느 날에는 성주(城主)의 딸까지 지네에 물려죽고 말았던 모양이다. 이때 성주가 할 수 있는 일은 신()에게 치성(致誠)을 드리는 것 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여간 정성에 감동한 산신령이 일러준 처방대로 산에다 닭을 방목(放牧)하니 과연 지네가 근절되었단다. 그 이후 놓아먹인 닭들이 밟지 않은 데가 한군데도 없다고 해서 계족산(鷄足山)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산은 올라왔던 곳의 반대 방향에서 열린다. 능선 위로 난 길은 일단 좋은 편이다. 가끔 바위도 나타나지만 대체적으로 흙길인데다 오르내림까지 크지 않아서 걷는데 조금도 힘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능선을 따라 10분 조금 못되게 걸으면 하종 갈림길’(이정표 : 범골 2.0Km/ 하종 : 산행안내도에는 텃골로 표시 1.2Km/ 정상 0.3Km)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이곳에서 고민거리가 생겼다. 선두대장이 깔아놓은 방향표시지가 양쪽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원래는 범골로 향해야 하는데 오른편에 또 하나의 표시지가 깔려있는 것을 보면 힘든 사람들은 이곳에서 탈출하라는 의미인 모양이다. 물론 우리는 계속해서 능선을 따르기로 한다. 원래 계획했던 대로 산행을 마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산행을 마친 후에 알게 된 바로는 모든 인원을 다 오른편으로 하산시킬 목적으로 그쪽 방향에만 방향표시지를 깔아 놓았단다. 그렇다면 능선을 향하도록 깔아놓은 방향표시지는 뭐란 말인가. 나만이 아니고, 비슷한 시기에 이곳을 통과한 일행들 일곱 명이 모두 그 방향표시지를 보고 능선을 탔으니 아마 귀신이 장난을 쳤던 모양이다.

 

 

 

하종갈림길을 지나면서 능선의 풍경은 사뭇 달라진다. 능선의 오르내림이 아까보다 조금 더 커졌을 뿐만 아니라, 흙으로 이루어졌던 산길이 어느새 바윗길로 변해있는 것이다. 바위를 잡고 오르내리는 재미가 쏠쏠하고, 거기다 바위 사이에 자리 잡은 멋진 소나무들까지 구경하는 재미까지도 더해준다. 한마디로 눈요기를 즐기면서 걸을 수 있다는 얘기이다. 이러한 산길은 20분 정도 이어지다가 20분쯤 후에 산길이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서(이정표 : 범골 1.0Km/ 정상 1.0Km) 능선을 벗어난다.

 

 

 

 

산길은 능선을 벗어나서도 크게 가팔라지지 않는다. 이는 등산로가 산의 사면(斜面)을 따르지 않고 지능선 위로 나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능선을 따라 한참을 내려온 산길이 또 다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더니 이번에는 완전히 능선을 벗어난다. 그런데 이곳에 세워진 이정표(민마루 1.5Km/ 정상 1Km, 텃골 1.5Km)가 사람들을 헷갈리게 만든다. 아까 주능선을 벗어난 후 한참을 내려왔는데도 이정표에 표시된 정상까지의 거리는 조금도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거기다 또 하나,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방향이 문제이다.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민마루 방향의 능선이 목책(木柵)으로 가로막혀 있는 것이다.

 

 

고민할 필요 없이 그냥 오른편 사면길로 내려선다. 비록 이정표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아무래도 오른편이 범골로 내려서는 길로 보였기 때문이다. 산길은 사면으로 내려선 후에도 가팔라지지 않는다. 더 이상 떨어뜨릴 고도가 남아있지 않은 모양이다. 울창한 낙엽송(落葉松 : 일본이깔나무) 숲을 지나면 드디어 시야(視野)가 터지기 시작하고, 이어서 조금 후에는 등산로 안내판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임도(林道)에 내려서게 된다. 조금 전에 만났던 이해 못할 이정표(정상 1.4Km/ 민마루 2.2Km)는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지나쳐 버려야 함은 물론이다.

 

 

 

 

산행날머리는 충주댐(dam) 공원(휴게소)

마을로 내려가는 시멘트포장 임도는 사과과수원(果樹園) 사이로 나있다. 사과과수원에서부터 산행이 시작되었는데, 마침표도 사과나무들이 찍고 있다. 이곳 충주가 사과의 고장이라는 것이 실감나는 순간이다. 마을을 통과하면 아스팔트 도로를 만나게 된다. 어디로 가야할지로 고민이 되는 지점이다. 계획했던 충주댐휴게소는 이곳에서 왼편으로 가야하지만 우린 오른편으로 향한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고, 방향을 모르기 때문에 대충 충주댐이 있을 만한 방향으로 잡은 것이다. 이 도로를 따라 한참을 올라가면 531번 지방도와 충주시를 연결하는 호안(湖岸)도로를 만나게 되고, 이어서 조금 후에는 충주댐의 위에 조성된 공원(公園)에 이르게 되면서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총 5시간이 걸렸다. 막걸리를 마시느라 중간에서 쉰 시간을 감안할 경우 4시간50분이 걸린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