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금산(禹金山, 331.5m)

 

산행일 : ‘15. 7. 28()

소재지 : 전북 부안군 상서면

산행코스 : 개암산천305m우금산성우금산묘련재우금바위원효굴개암사개암사주차장(산행시간 : 2시간30)

 

함께한 산악회 : 기분 좋은 산행

 

특징 : 변산반도국립공원 동북부 지역에 위치한 산으로서 전체적으로 볼 때에는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나 특이하게도 거대한 두 개의 바위봉우리가 솟아올랐다. 마치 주변의 있었어야할 바위의 기세(氣勢)들이 한 곳으로 모여 위로 솟구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봉우리들이 우람스럽다. 거기다 생김새까지 뛰어나다보니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또 하나 사람들을 찾아오게 만드는 것이 있다. 바로 산자락에 자리 잡은 유서 깊은 고찰(古刹) 개암사와 아름다운 호수 개암저수지이다. 거기다 우금바위를 파고 들어간 원효굴이나 배틀굴, 그리고 원효방까지 더하면 어느 유명 관광지에 못지않은 볼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산행들머리는 개암산천(부안군 상서면 감교리 567-17)

서해안고속도로 부안 I.C에서 내려와 부안읍 방향 30번 국도를 탄다. 잠시 후 봉황교차로(交叉路 : 부안읍 동진면 봉황리)에서 좌회전 23번 국도를 타고 줄포(부안군) 방향으로 달리면 얼마 지나지 않아 봉은삼거리(상서면 감교리)에 이른다. 이곳 삼거리에서 이번에는 우회전하여 개암사 방향으로 들어가면 개암저수지 바로 아래에 있는 개암산천이라는 음식점 앞에 이르게 된다.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길가에 커다란 음식점 입간판에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닭과 오리요리 전문식당인 개암산천입간판의 오른편 뒤로 들어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산길은 시작부터 가파르다. 힘겨운 오르막길이 제법 오래 이어질 것이라던 산행대장의 말이 맞는 모양이다. 그녀도 아직 가보지 못한 코스라고 해서 틀려주기를 간절히 빌었는데도 말이다. 오늘 같이 무더위와 습기(濕氣)가 한꺼번에 높은 날에는 훨씬 더 힘들 수밖에 없는 구간이다. 그러나 다행이도 가파른 오르막길은 5분도 채 되지 않아 끝을 맺는다. 고맙게도 산행대장의 말이 틀려준 것이다.

 

 

 

능선은 온통 소나무들이 차지하고 있다. 아까부터 짙은 솔향이 코끝을 스치고 있는 이유이다. 그 향기 속에는 그렇게나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phytoncide)가 듬뿍 묻어 있을 것이다. 소나무가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 중의 하나이니까 말이다. 이런 길에서는 구태여 발걸음을 서두를 이유가 없다. 발걸음은 더디게 그리고 호흡은 크게 하면서 느긋하게 걸어본다. 코끝을 맴돌던 솔향이 온몸으로 펴져나간다. 그리고 심신(心身)은 한없이 맑아진다. 피톤치드의 효과가 아닐까 싶다. 피톤치드는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나무들이 각종 병충해(病蟲害)에 저항하기 위해 배출하는 분비물(分泌物)을 말한다. 이 물질은 사람들에게도 많은 도움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살균작용은 물론이고, 장과 심폐기능을 강화시켜주는 한편, 스트레스 해소에도 뛰어난 효능이 있다는 것이다.

 

 

능선을 걷다보면 납작 엎드려야만 겨우 길을 열어주는 곳도 만나게 된다. 이 근처에 부안 마실길9코스인 반계 선비길이 지나간다더니 벌써부터 예절교육을 시키고 있나보다. 누군가 높이 오를수록 자세를 낮추라고 했다. 자세를 낮추는 것은 꼭 높은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예절교육은 자세를 낮추는 것부터 시작해보자.

 

 

산행을 시작한지 30분쯤 지나면 왼편으로 난 갈림길이 보인다. 아마 묘련골에서 올라오는 길인 모양이다. 개의치 않고 능선을 탄다. 산길은 산길을 하나 더 합치고 나서도 변함이 없다. 길 찾기가 힘들 정도로 잡목(雜木)과 웃자란 잡초들이 능선에 가득한 것이다.

 

 

이어지는 산길은 완만(緩慢)한 오르막길이다. 물론 내려가는 구간도 있다. 그러나 그 거리가 짧은데다가 경사(傾斜)까지 약하기 때문에 거의 느낄 수 없을 정도이다. 그저 계속해서 올라간다고 생각하면 된다는 얘기이다. 산이 낮다보니 급하게 고도(高度)를 올릴 필요가 없었나보다.

 

 

산행을 시작한지 40분이 지나면 번갈아가면서 좌우로 조망(眺望)이 트인다. 오른편으로는 상서면의 들녘이 펼쳐지는데, 그 가운데에 보이는 물빛은 아마 청림제일 것이다. 그리고 저 멀리 거대한 바위봉우리도 하나 보인다. 주위가 온통 흙산인지라 큰 바위를 찾아볼 수 없는데 유독 저 바위만이 거대하게 솟아올랐다. 일대의 바위들을 모두 모아다가 하나로 뭉쳐 놓은 모양이다. 아니면 근방의 지기(地氣)가 모여 하나의 바위로 솟구쳤던지 말이다. 자 바위가 바로 우금산의 명물인 우금바위이다. 그 명물을 오늘 처음으로 조우(遭遇)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후부터는 우금바위를 옆에 끼고 걷는 산행이 이어진다.

 

 

 

산에 들어섰고, 그리고 능선으로 난 오솔길을 걸었다. 오감(五感)을 일깨우는 산 향기, 숲을 스치는 바람의 숨결이 느껴진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지쳤던 마음이 회복되어 있음을 느낀다. 이 모든 게 산길이 편한 덕분이 아닐까 싶다. 비록 잡목(雜木)과 웃자란 잡초가 갈 길을 더디게 만들고 있지만 능선은 완만하고 흙길은 걷기에 딱 좋다. 이런 산행이 바로 힐링(healing)산행일 것이다.

 

 

 

조망을 즐기면서 걷다보면 잠시 후에는 지도상의 305m봉에 올라서게 된다. 산행을 시작한지 한 시간 만이다. 305m봉은 정상석이나 그 흔한 이정표 하나 없는 보잘 것 없는 산봉우리에 불과하지만 조망(眺望)만은 괜찮은 편이다. 부안군 일원의 산들이 마치 키 재기라도 하려는 듯이 올망졸망하게 늘어서 있다. 비록 연무(煙霧)에 가려 어느 산이 어느 산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305m봉에서 산길은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이어지는 산길도 거칠기는 매한가지이다. 능선의 주인노릇을 하고 있는 잡목과 잡초들이 자꾸만 갈 길을 더디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걷다보면 본래의 모습을 거의 간직하고 있는 옛 성곽(城郭)을 만난다. 지방기념물 제20호인 우금산성(禹金山城)이다.

 

신라와 당나라에 의해 백제가 멸망(660)하고 난 뒤, 왕족 복신(福信)과 승려(僧侶) 도침, 왕자 부여풍(扶餘豐)’은 백제유민을 이끌고 백제 부흥운동을 펼쳤다. 그 마지막 근거지가 개암사를 품고 있는 주류성, 즉 우금산성이다. 4년에 걸친 백제부흥운동이 실패로 끝나면서 백제는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그 망국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역사의 현장이 바로 이곳인 것이다. 우금산성에 대한 기록은 조선 영조 때에 엮은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성곽(城郭) 부안조'우진고성(禹陣古城)은 우금성이라고도 부르는데 변산에 있다. 우진암으로부터 산을 따라 양쪽 기슭을 타고 내려와 골짜기에 합쳐지는데 둘레는 10리요, 민간에 전하기로는 삼한시대에 우() () 두 장군이 성을 쌓고 군대를 주둔시켰던 곳이다. 지금은 모두 퇴폐하였는데 그 골짜기에 묘암사가 있다'고 묘사되어 있다.

 

 

 

 

100m쯤 되는 성벽구간은 끝나갈 즈음 산길은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이어서 능선을 따라 10분 조금 못되게 진행하면 우금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공터를 만들어내지 못할 정도로 비좁은 정상의 한가운데에는 서툴게 쌓아올린 돌탑(石塔)이 점령하고 있다. 앙증맞게 생긴 정상표지석과 삼각점은 돌탑의 앞에다 자리를 잡았다. 돌탑의 뒤를 지키고 있는 국기봉이 여간 듬직한 게 아니다. 봉에 매달린 태극기가 온전하지 못한 게 흠이지만 말이다. 참고로 우금산은 한국의 신종교(新宗敎) 중 하나인 증산교(甑山敎)를 창시했던 강증산(姜甑山)의 자취가 서린 곳이다. 그가 천지공사(天地公事)를 했던 곳이 바로 우금산에 자리 잡은 개암사라는 것이다. 증산교는 1902년 강일순(姜一淳)이 창시한 종교로서 창시자의 호(甑山)를 따라 증산교라고 부르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신도들이 외는 주문인 태을주(太乙呪)훔치훔치…….’로 시작하는 것을 본떠 훔치교(吽哆敎)라고도 불리었다. 증산교에서 말하는 천지공사란 강일순이 구천상제의 권능으로 천지의 운도를 뜯어고쳐 말세의 재앙과 불행을 제거하고 후천세계를 개벽한다는 것을 말한다. 증산교는 강일순의 사후(死後) 수없이 많은 지파로 갈라졌으며, 대표적인 교단으로는 현재 증산도와 대순진리회, 태극도 등이 있다.

 

 

정상에서의 시야(視野)는 넓다. 사방으로 막힘이 없는 것이다. 가까이에 있는 멋진 바위줄기도 보이고 골짜기 건너에 있는 쇠뿔바위와 의상봉 등 변산의 아름다운 기암괴봉(奇巖怪峰)들도 볼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오른편으로도 올망졸망한 산들이 수없이 널려있다. 이곳 부안 땅이 서해안에 자리 잡은 평야지대라고 예상했던 내 앎이 순식간에 허사가 되는 순간이다.

 

 

정상에서 우금암으로 가는 길은 즐거움의 연속이다. 빼어난 자태의 우금암을 바라보며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중간에 마치 시루떡 모양의 바위가 곳곳에 자리를 잡은 282봉을 넘으면 이내 묘련재에 이르게 된다. 우금산 정상에서 20분이 조금 못 걸린 지점이다. 이곳에서 왼편은 묘련골로 내려서는 길, 우금바위로 가려면 곧장 능선을 따르면 된다.

 

 

 

묘련재에서 조금 더 나아가면 거대한 암벽을 만난다. 산길은 그 벼랑을 피해 오른쪽으로 우회로(迂廻路)를 만든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우금바위를 파고 들어간 작은 동굴 앞에 이르게 된다. 베틀굴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동굴로서 비록 규모는 작으나 깊이는 제법 된다.

 

 

 

 

 

베틀굴에서 왼편 비탈길로 올라선다. 입구에 세워진 출입금지를 알리는 현수막(懸垂幕)은 잠깐 무시하기로 한다. 우금바위를 조금 더 가까이에서 바라 싶다는 욕망이 너무나 간절했기 때문이다. 2~3분쯤 올라섰을까 두 암봉의 사이에 있는 안부에 이른다. 누군가 우금산이라고 쓰인 정상표지판을 매달아 놓았다. 그러나 이 정상판은 자리를 잘못 잡았다. 이곳은 우금바위, 우금산의 정상은 이곳이 아니라 아까 지나왔던 331m봉이다. ‘서래야 박건석선생이 매달아 놓은 정상표시 코팅지도 역시 자리를 잘못 잡았기는 매한가지이다.

 

 

 

왼편 벼랑으로 접근해 본다. 바위의 갈라진 틈을 따라 아슬아슬하게 길이 나있다. 잠깐 오르다가 이내 발걸음을 돌리고 만다. 안부에서 바라보고 있는 집사람의 표정이 여간 사나워보였기 때문이다. 하긴 그렇지 않아도 더 이상은 진행이 불가능 했을 것이지만 말이다. 그만큼 오르는 길이 아슬아슬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확실한 안전장비를 준비하지 않았다면 접근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안부에서 이번에는 오른편으로 향한다. 10m쯤 되는 절벽에 로프가 매달려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전성을 생각해 오르는 것을 포기했지만 난 올라보기로 한다. 매어져 있는 로프가 생각보다는 굵은데다가 매듭까지 만들어져 있어 오르는 것이 별로 어려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건 나만의 생각은 아니었나보다. 먼저 오른 일행들 몇 사람이 둘러앉아 간식을 먹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참고로 우금바위는 위금암, 우금암, 우진암, 울금바위 등 여러 가지의 다른 이름을 갖고 있다. 또 이와 관련된 여러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도 물론이다. 이 바위에 대한 첫 번째 기록은 고려 무신정권 때의 문신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쓴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17에 나온다. '위금암은 신라 장군 위금이란 이가 이 바위에 와서 석성을 쌓고 적을 막았는데 아직도 흔적이 남아있다. 따라서 위금암이라 부른다.'는 기록이다. 또한 조선시대 인문지리서(人文地理書)'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1432년 맹사성 등이 편찬)' 부안현 산천 조에는 '우진암(禹陣巖)'으로 나와 있고, '변산의 고스락에 있다. 몸통이 둥글고 높고 크며 눈처럼 하얗게 보인다. 바위 아래 굴이 세 개 있고, 각각 그 굴에 중이 거처하고 있으며, 바위 위는 평평하여 올라가 조망할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른 한편으론 이 바위에서 김유신 장군과 당나라의 소정방이 만났다고 해서 우금바위라는 얘기도 있지만 그냥 흘려버려도 괜찮을 듯 싶다.

 

 

 

우금바위에 오르면 일망무제(一望無題)의 조망(眺望)이 펼쳐진다. 오늘 산행의 하이라이트(highlight)이다. 위용을 자랑하는 건너편 암봉은 보면 볼수록 위엄으로 넘치고,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한 벼랑 아래 푸른 숲 속 한가운데에는 개암사가 다소곳이 들어앉아 있다. 그리고 서쪽에는 변산의 산자락이 너울너울 물결을 친다. 개암사를 품속에 안은, 시원한 바람이 맴도는 이 공간에 재미난 옛이야기들이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다.

 

 

 

 

다시 베틀굴로 되돌아와 산행을 이어나가면 잠시 후 삼거리에 이른다. 벤치를 갖춘 쉼터를 겸하고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오늘 처음으로 이정표(개암사 800m/ 월정약수터 2.53Km)를 만나게 된다. 아쉽게도 우금바위 방향은 나타나있지 않았다. 반질반질하도록 길이 잘 닦여있는데도 말이다. 아마 위험하니 그쪽 방향으로는 얼씬도 하지마라는 모양이다. 베틀굴 앞에 세워져 있던 출입금지플레카드(placard)가 그 증거였을 것이다. 이정표의 기둥에 부안 마실길이라 적혀있는 것이 보인다. 부안판 둘레길로 보면 된다. 그중 9코스(반계선비길)이 이곳을 지나간다고 해서 이정표에다 이를 표기해 놓은 모양이다. 예로부터 부안은 맛과 풍경, 이야기 등 세 가지 즐거움이 있어 변산삼락(邊山三樂)’이라 불려왔다. 이러한 삼락(三樂)을 직접 느껴볼 수 있도록 꾸민 길이 부안 마실길이다. 총 길이가 163Km인데, 변산 마실길 66km(8개 코스)와 내륙 마실길 97km(6개 코스)로 구성돼 있다. 부안의 맛과 멋을 느껴볼 겸 해서 한번쯤은 걸어볼만한 길이지 않나 싶다.

 

 

삼거리에서 왼편 개암사 방향으로 내려서서 어른의 키를 훌쩍 넘기도록 웃자란 산죽(山竹) 숲길을 잠시 걸으면 우금바위의 벼랑 아래에 자리 잡은 커다란 두 겹의 굴이 나온다. 우금바위의 랜드마크(land mark)라 할 수 있는 원효굴이다. 원효굴은 반달 모양으로 높이 20~30m, 20~30m에 깊이 역시 20~30m 될 것 같다. 마치 큼직한 실내체육관의 반쪽처럼 보인다. 그 안쪽의 굴은 높이 7~8m, 10m, 깊이 6~7m쯤 되어 수도하기에 매우 좋을 듯싶다.

 

 

 

원효굴에서 우린 원효와 의상의 흔적을 읽을 수 있다. 원효와 의상이 마지막 백제의 땅에 와 개암사를 중창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누군가는 백제 유민의 망국의 한을 위로하고 그들의 패배의식을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키려는 목적이었다고 말한다. 신라의 삼국통일을 물리적인 통일이 아닌 정신적인 통일로 한단계 업그레이드 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 개암사는 백제의 마지막이자 삼국통일의 진정한 시작점이 된다. 믿거나 말거냐는 본인 마음에 달려있지만 말이다.

 

 

굴에 앉아 바깥쪽을 내다보면 거대한 창문을 통해 하늘을 보는 기분이다. 과연 원효대사는 이곳에서 무엇을 바라보고, 또 무엇을 생각했을까. 창 없는 창을 통해 나타나는 세상이 원효의 눈에는 어떻게 비쳐졌을지 궁금하다. 그렇다면 내 눈에는 과연 무엇이 보일까. 결과는 뻔했다. 세파(世波)에 부대끼며 살아가기 바쁜 중생에 불과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증명하는 셈이 되어버렸으니까 말이다.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는 얘기이다. 그저 천정의 바위틈에서 거꾸로 매달려 자라고 있는 작은 나무들만이 눈에 들어왔을 뿐인 것이다. 하긴 물기가 전혀 없는 데도 불구하고 꿋꿋이 자라고 있는 나무들을 보고 끈질긴 삶의 의지를 읽기는 읽었다.

 

 

원효굴 앞에 세워진 이정표(개암사 0.7Km/ 만석동 5.7Km) 곁에는 우금산성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백제 의자왕 20(660) 무렵 복신(福信)장군이 백제의 유민을 규합하여 나당연합군에 대항하다가 패한 유서 깊은 곳으로서 그 길이만 해도 3Km가 넘는단다. 그러나 사실 이 부근에서는 성터의 흔적을 볼 수 없다. 우리야 305m봉에서 우금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에서 옛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성곽(城郭)을 보았지만, 처음으로 이곳에 오른 사람들에게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시설물일 수도 있겠다.

 

 

이정표 근처에서 희미한 길의 흔적이 하나 왼편으로 나타난다. 이곳에도 역시 출입을 금()하는 서슬 시퍼런 현수막(懸垂幕)이 걸려있다. 그냥 들어서고 본다. 비록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을망정 원효대사가 암자(庵子)를 지었다는 원효방을 멀리서라도 기웃거릴 수 있을까 해서이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또 다른 출입금지 현수막을 만난다. 이번엔 위험해서 출입을 금()한단다. 현수막의 바로 옆은 우금바위가 빚어 놓은 수직(垂直)의 바위벼랑이다. 원효방으로 가는 길은 그 벼랑의 중간쯤에 아슬아슬하게 나있다. 만일 미끄러지기라도 할 경우에는 최소한 중상은 각오해야 한다. 벼랑을 부둥켜안다 시피해서 굴 쪽으로 다가가보면 원효방이 나타난다. 바위절벽에 커다란 굴이 두 개가 뚫려있다. 반반한 동굴의 앞마당 끝에는 난간이 만들어져 있다. 스님들이 수행했던 흔적이 아닐까 싶다. 그건 그렇고 저 동굴 밑에는 조그만 웅덩이가 있어 물이 괸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원래 물이 없었으나 원효가 이곳에 수도하기 위해 오면서부터 샘이 솟아났단다.

 

 

원효방을 먼발치에서 구경하고, 아니 겉모습만 힐끗 보고나서 아까의 삼거리로 되돌아 나온다. 그리고 본격적인 하산을 시작한다. 내려가는 길 초반은 제법 가파르다. 그냥 내려서지를 못하고 갈지()자로 길을 만들고서야 내려설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그런 구간은 금방 끝을 맺는다. 산이 본래 낮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산길은 곱다고 볼 수 있다. 경사(傾斜)가 완만한데다가 바닥 또한 흙으로 이루어져 고른 편이기 때문이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15분 남짓 걸었을까 저만큼에 개암사(開巖寺)가 나타난다. 절 마당에 서자 대웅전이 그 자태를 드러낸다. 대웅전의 지붕 위에는 우금바위가 우뚝 솟아 있다. 이 절을 위해 누군가 일부러 만들어 놓은 것 같다. 그만큼 개암사와 잘 어울린다는 얘기이다. 그리고 울금바위에서 좌우로 나뉜 산줄기는 마치 사찰을 호위라도 하려는 듯 빙 둘러싸고 있는 형상이다. 나도 모르게 무릎을 치고 만다. 그리곤 대뜸 내뱉는 한마디는 참 기가 막힌 곳에 들어앉았구나.’이다. 풍수에 문외한(門外漢)인 내가 보기에도 천하의 명당(明堂)으로 보였던 것이다.

 

 

개암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로 백제 무왕 35(634) 묘련(妙漣)이 창건하였다 전한다. 삼국통일 후 원효(元曉)와 의상(義湘)이 우금암(禹金巖) 밑의 굴속에 머물면서 중수(676)하였고, 고려 충숙왕 1(1314)에는 원감국사(圓鑑國師)가 조계산 송광사에서 이곳 원효방(元曉房우금굴)으로 와서 지금의 자리에 절을 중창하여, 대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단다. 이후로도 조선 정조7(1783)의 승담(勝潭) 등 여러 번의 중수(重修)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현존하는 당우(堂宇)로는 대웅보전(大雄寶殿)을 비롯하여 인등전, 응향각, 응진전, 일주문과 월성대 및 요사가 있다. 이 가운데 대웅보전은 보물 제292호로 지정된 정면 3,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서 대표적인 조선 중기 건물이다. 이 외에도 보물 제1269호인 영산회괘불탱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인 석조지장보살 좌상(123)’, ‘개암사 동종(126)’이 있다. 참고로 개암이라는 이름은 기원전 282년 변한의 문왕이 진한과 마한의 난을 피하여 이곳에 도성을 쌓을 때, ()와 진()의 두 장군으로 하여금 좌우 계곡에 왕궁전각을 짓게 하였는데, 동쪽을 묘암(妙巖), 서쪽을 개암이라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대웅전은 조선시대에 다시 지어진 건물이다. 팔작지붕 다포식 건물로 장중함을 느끼게 한다. 자세히 보면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고 적힌 현판이 건물에 비해 유난히 작은 것을 알 수 있다. 현판 뒤 2개의 도깨비 모양의 귀면상(鬼面像)을 가리지 않기 위함이란다. 대웅전 정면에 귀면상을 내건 사찰은 흔치 않은데, 이런 점을 살리기 위한 결과라는 것이다. 대웅전 안에 들어가 천장을 올려다보면 또 한 번 놀란다. 오밀조밀한 조각들이 마치 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정교하게 조각된 용()들이 몸부림치고, 연꽃 위에선 봉황(鳳凰)이 자태를 뽐내고 있다. 부처 머리 위의 닫집의 화려함도 놀랍다. 그 작은 닫집 안에서 꿈틀대고 있는 용이 무려 5마리나 된단다. 그러나 확인해 보는 것까지는 생략하고 발길을 돌린다. 불심(佛心)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난, 그저 상황을 제대로 인식만 하면 되니까 말이다.

 

 

절을 막 빠져나오려는데 특이한 다리 하나가 눈에 띈다. 평범하게 생긴 것이 주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양새이지만, 다리의 이름에다 불이교((不二橋)라고 붙인 경우는 난생 처음으로 본다. 불이(不二)진리는 둘이 아니라 하나다라는 뜻에서 유래하는 말이다. 그리고 절에서는 보통 본당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문()에다가 그 이름을 붙인다. ‘불이문(不二門)’이라고 말이다. 이는 이 문을 통과해야만 진리의 세계인 불국토(佛國土)에 들어갈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부처와 중생이 본디 하나이고, ()과 사(), 그리고 만남과 이별 또한 알고 보면 그 근원은 하나이니 이 같은 불이(不二)의 뜻을 알게 되면 해탈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이문은 해탈문(解脫門)이라고도 불린다. 그런데 왜 이런 다리에다 불이(不二)’란 이름을 붙였을까. 본당에서 멀리 떨어져있고, 거기다 일반 대중이 수시로 건너다니는 이런 곳에다 말이다. 무릇 해탈이 스님들만의 전유물(專有物)이 아닐지니 진리를 깨닫는 자 누구라도 해탈에 이를 수 있고, 불국토에 들 수 있음을 알려주려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산행날머리는 개암사주차장

불이교에서 절 밖으로 빠져나오는 길 또한 아름답기 그지없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위로 치솟은 전나무들은 그 생김새만 갖고도 눈요깃감으로 부족함이 없고 거기다 코끝을 스쳐가는 짙은 솔향은 산행에 지친 육신(肉身)을 원위치로 되돌려 놓는다. 콧노래가 저절로 나오는 순간이다. 그렇게 흥얼거리며 얼마간 걷다보면 일주문이 나온다. 그런데 일주문의 현판이 좀 이상하다. 개암사의 뒷산이 우금산으로 알았는데 능가산(楞伽山)으로 적혀있는 것이다. 개암사를 중창하여 대사찰로 만들었다는 원감국사(圓鑑國師)가 능가경(楞伽經)을 강의하면서 많은 사람을 교화했다고 들었는데, 어쩌면 그것을 이유로 능가산이란 또 다른 이름을 얻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일주문을 나서 사바세계로 들어서면 저만큼에 우리를 태우고 갈 버스가 보이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총 3시간30분이 걸렸다. 그러나 소요 시간에 의미를 둘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눈요기를 즐기는데 얼마만큼 시간을 할애하느냐에 따라 걸리는 시간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것저것 다 빼고 순수하게 걷는 시간만 헤아린다면 2시간30분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