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시산((火矢山, 403.2m)

 

산행일 : ‘14. 10. 4()

소재지 : 전북 고창군 아산면과 부안면, 고창읍의 경계

산행코스 : 소굴치시루봉거북바위화시봉백운재옥녀봉행정치고인돌유적지(산행시간 : 4시간)

함께한 산악회 : 청마산악회

 

특징 : 화시산은 웬만큼 산에 이골이 난 사람들조차도 그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꼭꼭 숨어있던 산이다. 주변에 있는 선운산이나 방장산 등의 명성에 철저하게 가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 부쩍 찾는 사람들이 늘었다고 한다. 화시산의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세계문화유산인 고인돌유적지를 끼워 넣은 산행계획을 짜는 산악회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시산은 고인돌유적지가 아니더라도 한번쯤은 찾아볼만한 산이다. 투구바위나 촛대바위, 상여바위 등 기암괴석(奇巖怪石)들이 솟아오른 산세(山勢)가 다른 유명산들에 뒤지지 않을뿐더러 능선에서 바라보는 조망(眺望) 또한 일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산을 오르고 나면 짜증이 날 수도 있으니 미리 염두에 둘 일이다. 관할 지자체(地方自治團體)에서 산을 그냥 버려둔 탓에 산행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백운재에서 고인돌유적지를 향해 능선을 타고 가는 코스는 잘못하면 욕설까지 튀어나올 정도이니 이용하지 말 것을 권한다.

 

산행들머리는 소굴치(고창군 아산면 용계리)

서해안고속도로 선운산 I.C에서 내려와 22번 국도를 타고 영광방면으로 달리면 얼마 지나지 않아 용산교차로에 이르게 된다. 교차로에서 빠져나와 734번 지방도를 타고 자 모양을 그리면서 진행하면 소굴치고갯마루가 나타난다. 설명이 조금 복잡한 것 같지만 퍼블릭코스(public course)인 선운산골프장(골프존 카운티 선운)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고갯마루라고 생각하면 된다.

 

 

 

소굴치는 고창군 아산면(용계리)과 부안면(용산리)의 경계를 이루는 고갯마루이다. 용계리를 정면에 놓고 왼편의 절개지를 올라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길의 흔적이 희미하다고 하지만 들머리에 용산리라고 쓰인 입간판이 세워져 있으니 이를 참조하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산길의 흔적을 찾아가며 가파르게 5분 정도를 치고 오르면 능선에 올라서게 되고, 이어지는 산길은 또렷해지면서 경사(傾斜) 또한 완만해진다.

 

 

산길 주변은 소나무 숲 사이로 나있다. 간간이 잡목(雜木)이 섞여있을 뿐 비록 굵지는 않지만 온통 소나무들 천지이다. 코끝을 스쳐가는 바람결에 진한 솔향이 물씬 풍겨오는데, 그 솔향 속에는 그렇게나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phytoncide)가 잔뜩 배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산행은 행운이 분명하다. 산행과 겸해서 힐링(healing)까지 함께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거기다 산길까지 평탄하다보니 자연스레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가끔 열리는 나뭇가지 사이로 오른편에는 선운산골프장, 그리고 왼편에는 복분자 농공단지(農工團地)’가 내다보인다. 농공단지 뒤에 버티고 있는 산은 얼마 전에 다녀온 수월봉과 소요산이 아닐까 싶다.

 

 

산행을 시작한지 20분쯤 지나면 아무런 특징이 없는 첫 번째 봉우리에 올라서게 되고, 이어서 잠깐 아래로 내려섰다가 다시 맞은편 능선으로 향하면서 가파른 오르막길로 변한다. 거기다 바윗길까지 빈도(頻度)를 높이다보니 위로 향하기가 다소 부담스러웠나보다. 산길이 왼편으로 우회(迂廻)를 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얼마쯤 올랐을까 또렷하지는 않지만 오른편에 봉우리 위로 향하는 산길이 하나 보인다. 왼편으로 난 길이 훨씬 더 또렷한데도, 집사람은 오른편으로 들어서고 본다. 그녀의 선택에는 조그만 망설임도 보이지 않는다. 아마 집사람도 고진감래(苦盡甘來)’의 의미를 알아가는 모양이다. 힘들고 위험한 곳에 올라야만 더 많은 눈요깃감을 만날 수 있다는 진리를 말이다. 이 산봉우리가 바로 투구봉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30분이 조금 더 지났다.

 

 

투구봉은 사전에 알고 있던 봉우리의 생김새와는 완전 딴판이다. 멀리서 봤을 때는 으스스한 바위봉우리인데 막상 오르고 보니 그저 밋밋한 흙봉우리에 불과한 것이다. 다만 화시산 방향이 수직의 암벽(巖壁)으로 이루어져 있을 따름이다. 하여튼 투구봉에 오르면 시야(視野)가 활짝 열린다. 진행방향에는 화시산이 우뚝하고 왼편에는 부안면의 너른 들녘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투구봉에서 내려서서 5분쯤 지나면 안부에 이르게 되고, 이어서 8분쯤 더 오르면 첫 번째 전망대에 올라서게 된다. 전망대에 서면 투구봉의 전모(全貌)가 한눈에 잘 들어온다. ‘투구봉보다 시루봉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옳은 것 같지 않나요?.’ 함께 산행을 하고 있는 일행이 동의를 구해온다. 그의 말마따나 봉우리의 모양이 흡사 시루를 뒤엎어 놓은 것처럼 생겼다. 투구를 얹어 놓은 형상이라는 표현은 어쩌면 스토리텔링(storytelling)과정에서 만들어 낸 이름이 아닐까 싶다. 말이 나온 김에 투구봉에 전해지는 옛이야기 한 토막을 적어볼까 한다. 구전(口傳)에 의하면 옛날 어느 왕자가 난을 피해 이곳으로 왔다가 후일을 준비할 곳으로 화시산을 잡았단다. 그는 소굴치에서 가마를 타고 화시봉으로 오르다가 덥고 힘들어서 쓰고 잇던 투구를 벗어 놓았는데 이때 벗어 놓은 투구가 바위로 변한 것이 투구바위라는 것이다.

 

 

 

 

 

 

 

첫 번째 전망대를 지나 조금 더 진행하면 안부같이 푹 꺼진 곳에서 송곳니처럼 위로 솟아오른 거대한 바위 하나를 만나게 되고, 이어서 가파른 철계단을 밟고 오르면 촛대봉이다. 촛대봉은 이름에 걸맞게 뛰어난 조망(眺望)을 보여준다. 촛대처럼 뾰쪽하다 보니 사방으로 시야(視野)가 열리는 것이다. 조금 전에 보았던 투구봉이 조금 더 멀어졌지만 훨씬 넓게 보이고, 오른편의 부안면 들녘 한 가운데는 서해안고속도로가 일직선으로 뚫으며 지나가고 있다.

 

 

 

일단 촛대봉에 올라섰다 싶으면 그 다음부터는 곳곳이 전망대이다. 가는 길에 자그만 바위봉우리들이 곳곳에 나타나는데 봉우리마다 뛰어난 조망(眺望)을 보여주는 것이다. 주요 포인트는 물론 투구봉이다. 투구봉을 가운데에 두고 왼편에는 선운산골프장, 그리고 오른편에는 부안면의 너른 들녘이 펼쳐진다. 골프장의 필드(field) 위에는 골프마니아(mania)들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조망뿐만이 아니다 숲을 헤치며 위로 솟아오른 기암괴석들도 아름다운 풍경을 만드는데 일조를 하고 있다. 촛대바위와 가마바위는 물론이고 이름 모를 바위들조차 예사로운 것이 하나도 없다. 아까 위에서 얘기했던 그 왕자 일행이 밤이 되자 촛불을 밝히고 요기와 휴식을 취하게 되었는데 그 초가 촛대바위로 변했고, 화시산으로 오르는 길이 너무 가팔라서 버리고 간 가마가 가마바위(상여바위)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왕자를 수행했던 장수가 호랑이를 몰아내고 왕자를 모셨던 왕자굴도 있다지만 낡고 어설픈(글씨가 잘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이정표 덕분에 그냥 지나쳐버리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혹시 거북이바위가 아닐까? 조금 옹색하긴 하지만 또 다른 거북이 모양의 바위를 발견하지 못해서 하는 말이다.

 

 

또 다시 나타나는 거대한 바위를 이번에는 오른편으로 돌아 오르면 언덕 같은 봉우리 위에 올라서게 된다. 무재등(이정표 : 화시봉 0.3Km/ 고인돌 유적 6.2Km/ 용흥리 3.0Km)이다. 그런데 이정표의 방향표시가 화시봉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지워져 있다. 아마 방향표시를 헷갈리게 표시했다고 해서 누군가가 지워버린 모양이다. 하여간 화시봉 정상에 오른 후에는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 나와야 한다.

 

 

무재등에서 숲길을 따라 5분 정도를 더 걸으면 화시산 정상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이 조금 더 지났다. 작은 헬기장으로 이루어진 정상은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고 삼각점 하나만이 외롭게 지키고 있다. 예전에는 이정표가 정상표지석을 대신하였던 모양이지만 지금은 있으나 마나이기 때문에 삼각점만이 외롭게 지킨다는 표현을 썼다. 이정표가 하도 낡아서 글씨가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내내 이곳 지자체인 고창군에서 산을 버려두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등산로의 상태는 물론이고 이정표 등 시설물 들이 하나같이 방치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느낌은 갈수록 심해지게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등산로의 상태가 더욱 더 나빠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빼어난 산세를 지녔음은 물론 세계문화유산(世界文化遺産)까지 낀 귀한 관광 상품을 그냥 내버려 둔다는 것은 죄악이나 마찬가지이다. 한 명이라도 더 많은 관광객(觀光客)들이 찾아오도록 하는 것이 요즘의 추세인데도, 이왕에 찾아온 사람들까지 발걸음을 돌리게 만드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열 명이 하는 칭찬보다, 한 명이 하는 흉의 파장이 더 크다는 진리를 염두에 두었으면 한다.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뛰어나다. 먼저 이정표 뒤에 있는 바위 위에 올라서면 골프장이 빤히 내려다보인다. 오늘은 시계(視界)가 좋은 덕분에 필드(field) 위를 오가는 골퍼(golfer)들까지도 환히 보일 정도이다. 그리고 동쪽으로는 신림면 일대와 방장산, 그리고 고창읍시가지 일부와 두승산이 보이고, 서북쪽엔 소요산과 배풍산이 우뚝하다. 물론 들녘을 지나는 서해안고속도로도 또렷하게 나타난다. 참고로 화시산에는 재미난 설화(說話)가 하나 전해져 내려온다. 화실봉에 오래전부터 불귀신(火神)들이 살고 있어 밤만 되면 신림면 임리 마을을 자꾸 불태웠다고 한다. 그러자 주민들이 선인(仙人)에게 가르침을 구했고, 그의 말에 따라 오리 솟대를 세우고 매년 정월 열나흘에 당산제를 지냈는데, 지금도 이 마을의 풍습으로 전해져 내려온다는 것이다.

 

 

 

무재등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왼편 길로 진행한다. 산길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급경사(急傾斜)로 변하더니 이내 바위벼랑으로 끝마무리를 지어버린다. 벼랑위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오른쪽은 안전로프에 의지해야만 하고, 왼편은 나무 등걸을 붙잡아야만 아래로 내려갈 수 있다.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어렵기는 매 한가지이나 난 오른편 길을 권하고 싶다. 오른편이 조금 더 위험하지만 힘은 덜 들기 때문이다. 다만 조심할 것은 안전로프에 모든 체중을 다 싣지는 말라는 것이다. 두 가닥의 로프 중 한 가닥이 끊어져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이처럼 위험한 곳에 매어놓은 로프를 끊어진 채로 방치하고 있는 지자체의 무관심을 다시 한 번 질책해 본다.

 

 

 

 

다행이 서슬 시퍼런 내리막길은 10분 정도면 끝을 맺고 이어지는 산길은 평탄하게 이어진다. 그러다가 무재등에서 내려선지 20분 남짓 지나면 안부에 이르게 된다. 아무래도 이곳이 된재가 아닐까 싶은데 삼태마을로 내려가는 갈림길은 보이지 않는다. 된재는 고갯마루를 넘나들던 나무꾼들이 고되다는 뜻으로 붙였다는 이름이다. 그러나 길이 흔적조차 사라져버린 것을 보면 요즘은 이 길을 지나다닐 나무꾼들이 사라져버린 탓이 아닐까 싶다. 산이 만들어내는 풍경이 세월의 변화에 발맞춰 변해버린 모양새이다.

 

 

안부(된재)에서 다시 10분 조금 못되게 걸으면 나지막하게 쌓아올린 석축(石築)이 보인다. 크고 작은 돌들을 담처럼 쌓아올렸는데 얼핏 보면 예비군훈련 때나 사용하는 참호(塹壕)를 닮았다. 그러나 지도에는 한국전쟁 방어진지라고 표기되어 있다. 한국전쟁 때 빨치산(partizan)들을 막기 위해 쌓았던 방어진지라는 것이다.

 

 

방어진지에서 다시 5분쯤 더 걸으면 널따란 임도(林道)가 지나가는 안부에 내려서게 된다. 바로 백운재이다. 화시산 정상에서 백운재까지는 40분이 조금 더 걸렸다. 오래전 백운재에는 운곡과 운양을 오가던 길손들의 목마름을 달래주던 주막(酒幕)이 있었다고 한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너른 분지(盆地)에는 아름드리 느티나무 두 그루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금은 지은 지 얼마 안 되는 정자(亭子)가 느티나무 아래를 차지하고 있지만 말이다.

 

 

백운재에 세워진 이정표가 또 다시 사람을 헷갈리게 한다. 앞으로 가야할 범바위가 직진인 것은 맞다. 그리고 오른편이 운곡서원인 것도 맞다. 그런데 왼편 방향이 백운재로 표기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은 백운재가 아니고 어디란 말인가? 아마 백운마을의 표기가 잘못되었지 않았나 싶다. 만일 고인돌유적지로 가려면 이곳 백운재사거리에서 오른편으로 하산할 것을 권하고 싶다. 능선을 타게 되는 범바위코스를 탈 경우 여러 번에 걸쳐 후회를 하게 될게 뻔하기 때문이다. 잡목(雜木)과 명감나무 등 가시넝쿨로 가득 찬 능선코스는 사람들이 지나다니기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백운재에서 산길은 다시 오름짓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 오름길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파르지는 않다. 그렇다고 쉬운 것도 아니다. 산길을 꽉 채우고 있는 잡목들이 자꾸만 진행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런 길을 20분 남짓 오르면 운곡저수지와 부안면 들녘 등 좌우로 시야(視野)가 열리고, 곧이어 바위봉우리인 범바위에 올라서게 된다. 참고로 운곡저수지는 영광원자력발전소의 생활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1984년에 축조(築造)된 담수용량 600만 톤의 커다란 인공호수(人工湖水)이다. 한때 고창군의 상수도원으로도 활용되었으나 부안댐의 물이 공급되면서 상수도보호구역의 지정이 해제되었다.

 

 

 

 

범바위는 오봉(五峰)의 하나일 것이다. 이곳 오봉에서 화시산까지의 다섯 봉우리를 일컬어 오봉이라고 한다니 말이다. 범바위에 올라서면 왼편, 그러니까 동쪽으로의 조망(眺望)이 시원스럽게 트인다. 발아래에는 고인돌휴게소가 내려다보이고, 서해안고속도로의 건너편에는 호남의 명산인 방장산이 우뚝하다.

 

 

 

범바위에서 화암봉까지 연결되는 능선은 작은 봉우리들을 반복적으로 오르내리면서 이어진다. 범바위를 지나면서 고난(苦難)의 행군이 시작된다. 그렇다고 범바위까지 오는 산길이 좋았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이제부터 만나게 되는 산길의 상태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편이었기에 하는 말이다. 산길은 비록 희미하지만 길의 흔적을 못찾을 정도까지는 아니다. 그러나 잡목(雜木)들이 산길을 가득 매우고 있어서 한걸음 내딛기조차 여간 사납지 않다. 잡목만 해도 그나마 나은 편이다. 명감나무가 유난히도 많다보니 잡목에 싸대기를 맞는 것으로도 부족해서 가시에 찔리기 일쑤다. 에이 ××’ 함께 산행을 하고 있는 일행들의 입에서 쌍소리가 심심치 않게 새나온다. 맞다. 욕을 얻어먹어도 싼 산이다. 아니 욕을 얻어먹어야 하는 것은 이 산이 아니고 이 산을 관할하고 있는 지자체여야 한다. ‘화시산과 고인돌유적지를 하나로 묶을 경우 뛰어난 관광자원이 될 것인데도, 이렇게 내버려두고 있다면 욕을 얻어먹어도 싸다 할 것이다.

 

 

거친 산길과 싸우면서 30분 정도 진행하다보면 회안재(回雁)에 이르게 된다. 누군가의 글을 보니 요 아래에 있는 운곡저수지에 겨울철새인 기러기가 다녀간다고 했다. 그렇다면 기러기가 찾아 올 것을 어떻게 알고 기러기가 돌아오는 고개라는 지명을 지었단 말인가. 참으로 지혜로운 우리네 조상들이다. 당시에는 기러기가 먹이를 찾을만한 운곡저수지도 없었기에 하는 말이다.

 

 

그러나 마냥 욕설만 튀어나오는 산길은 아니다. 산길이 간혹 암릉을 만나면서 시야(視野)를 활짝 열어주기 때문이다. 부처손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전망바위 위에 서면 고창의 너른 들녘이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고, 그 한가운데에는 고창시가지가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그 왼편에 버티고 있는 산은 물론 방장산이다.

 

 

회안재를 지나고서도 산길은 작은 봉우리들을 오르내리면서 계속된다. 산행을 이어가다보면 언제부터인가 산길이 깔끔하게 정비가 되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거리상으로 보아 부안읍 경계에서부터이지 않을까 싶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회안재를 출발한지 1시간 정도가 지나면 또 하나의 작은 봉우리 위에 올라서게 된다. 아마 옥녀봉일 것이다. 옥녀봉에서 다시 15분 조금 못되게 내려가면 송전탑(送電塔)이 있는 행정치에 이르게 된다. 예전에 산내면과 고창을 오가던 고갯마루인 행정치는 운곡저수지가 축조(築造)된 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으나 수종갱신사업으로 임시도로가 났다. 산행은 이 임시도로를 따른다. 원래 예정했던 코스는 맞은편의 화암봉을 오르내린 후 작업고개에서 고인돌유적지로 내려가도록 되어있는데 이상한 일이다. 산행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화암봉으로 오르는 길이 얼마나 거칠던지 도무지 헤치고 올라갈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행정치에서 임도를 따라 왼편으로 10분 남짓 내려서면 송암마을에 내려서게 되고, 마을 안길을 통과한 후 마을 진입로를 따라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길게 걸으면 드디어 고인돌(支石墓,dolmen)군락지이다. 사적 제391호인 고창고인돌유적(,Gochang Dolmen Sites)은 고창읍 죽림리 매산마을을 중심으로 동서 1,764m 범위에 440여 기가 분포되어 있다. 남방식, 북방식, 지상석곽형 등 다양한 형식과 크기의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는 한국에서 가장 큰 고인돌 군락지이다.

 

 

 

 

고인돌유적은 사방에 널린 고인돌 외에도 화장실이나 정자(亭子), 벤치, 그리고 인공연못, 코스모스 꽃밭 등 편의시설들을 두루 갖춘 공원(公園)으로 깔끔하게 조성되어 있다. 하긴 유네스코(UNESCO : United Nations Educational,Scientific and Cultural Organization)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200012)되었을 정도로 빼어난 선조들의 유산을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 유적은 기원전 20003000년의 장례 및 의식 유적으로 선사시대의 기술 및 사회발전을 생생히 보여주는 뛰어난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유적지의 들머리 근처에 옛 사람들의 생활상을 재현해 놓았다.

 

 

산행날머리는 고인돌유적지 주차장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유적지를 둘러보고 나면 매표소에 이르게 된다. 이 매표소는 왼편에 보이는 건물, 즉 박물관으로 들어가는 입장권을 파는 곳이다. 들어가 볼까 하다가 그냥 발걸음을 돌리고 만다. 주차장의 한쪽 모퉁이에 벌여 놓았을 점심상이 자꾸만 구미를 당겼기 때문이다. 그만큼 오늘 따라나선 청마산악회의 점심상은 맛있기로 유명하다. 그러나 꼭 음식 때문만은 아니다, 역사에 도통했던 아버님을 늘 옆에서 보아온 난 비록 사학자들에게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어느 정도 수준에는 다다라 있는 편이다. 당연히 옛사람들의 유물이나 유적은 꽤나 많이 둘러본 편이고, 이에 대한 지식 또한 어느 정도는 머릿속에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미련 없이 음식상으로 직행했던 것이다. 오늘 산행은 총 4시간40분이 걸렸다. 그러나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서 쉰 시간을 감안할 경우 4시간 정도가 걸렸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