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여산(冊如山, 342m)
산행일 : ‘14. 3. 27(목)
소재지 : 전북 순창군 적성면·동계면과 남원시 대강면의 경계
산행코스 : 책암마을 버스정류장→무수재→금돼지굴봉→당재→순창 책여산(송대봉)→황굴왕복→장군봉→칼바위능선→괴정교(24번국도)→남원 책여산(361m)→밤나무단지→송정체육공원(산행시간 : 3시간40분)
같이한 산악회 : 산두레
특색 : ‘물 맑은 섬진강(蟾津江)을 배경삼아 강변에 우뚝 솟아오른 책여산은 마치 여덟 폭 병풍을 펼쳐놓은 것처럼 빼어난 풍광(風光)을 자랑하는 바위산(石山)이다. ‘어! 이렇게 괜찮은 산을 지금까지 모르고 지냈네요.’ 함께 산행을 하고 있던 일행이 내뱉는 말이다. 꼭 그만이 아니다. 다른 일행들도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빼어난 산이라고 극찬(極讚)들이다. 산의 형상이 마치 책을 쌓아 놓은 것 같이 생겼다는 책여산(冊如山)은 화산(華山)이라는 다른 이름도 갖고 있다. 여자의 비녀처럼 섬세하고 그림처럼 아름답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찾는 이들마다 입을 다물지 못하는 것을 보면 화산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뛰어나다는 증거일 것이다.
▼ 산행들머리는 책암마을 버스정류장
완주-순천고속도로 오수 I.C에서 내려와 13번 국도 담양·옥과 방면으로 달리면 삼계면과 동계면을 지나 평촌삼거리(남원시 대강면 평촌리)에 이르게 된다. 이곳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730번 지방도를 따라 유등·순창방향으로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산행들머리인 책암마을에 닿게 된다. 옥택천(川)을 가로지르는 책암교(橋) 건너기 바로 전에 있는 88고속도로의 교각(橋脚) 아래이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산행은 교각 옆 절개지(切開地)에 놓인 시멘트계단을 이용하여 ‘88고속도로’로 올라가면서 시작된다. 이어서 고속도로 순찰용 ‘점검로(點檢路)’를 따라 잠깐 더 올라가면 이내 능선으로 올라서게 된다. 일단 능선에 올라서고 나면 산길은 순해진다. 급할 것이 없다는 듯이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가고 있는 것이다. 거기다 솔가리(소나무 落葉)가 수북하게 쌓인 길바닥은 부드럽다 못해 폭신폭신한 느낌까지 줄 정도이다.
▼ 능선은 온통 소나무들이 점령하고 있다. 꽃망울을 활짝 열고 있는 진달래가 가끔 눈에 띌 뿐 눈에 보이는 것은 온통 소나무들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산행은 당연히 웰빙(well-being)산행이다. 마침 산행코스까지 짧으니 모처럼 ‘느림보의 미학’을 시험해 보자. 서서히, 그리고 느긋이 발걸음을 옮기며 깊게 숨을 들이쉰다. 솔향 가득한 청량한 바람이 폐를 가득 채운다. 그 바람 속에는 그렇게나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phytoncide)가 가득할 것이다. 이런 게 바로 행복 아니겠는가. 고만고만한 작은 오르내림을 몇 번 반복하면서 30분 정도 걷다보면 무수재(이정표 : 금돼지굴 1.9Km/ 입암 0.7Km/ 무수리 1.0/ 유촌(책암) 2.8Km)에 이르게 된다. 무수재는 남원시 대강면 입암리와 순창군 적성면 무수리를 잇는 고갯마루이다. 한때는 두 동네 사람들이 심심찮게 넘나들었을 이 고개는 지금은 인적이 끊긴 지 오래다. 하긴 널찍한 도로가 사통팔달로 뚫린 요즘에 이런 고개를 넘으려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 무수재에서 잠깐 가파르게 올라서면 또다시 완만(緩慢)한 산길이 이어지지만 산길의 풍경은 아까와는 딴판으로 변한다. 능선에 바위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조망(眺望)이 트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능선에서 바라보는 좌우(左右) 풍경은 사뭇 다르다. 오른편의 남원 방향은 산릉(山稜)들이 첩첩이 쌓여있는데 반해, 반대편의 순창 땅은 너른 들판, 바둑판처럼 반듯하게 정돈된 들녘이 보는 이의 마음까지 시원하게 만들어 준다.
▼ 심심찮게 터지는 조망(眺望)을 즐기면서 고만고만한 작은 오르내림을 몇 번 반복하다보면 22분 후에는 금돼지굴봉(이정표 : 당재/ 금돼지굴봉 정상/ 책암)에 올라서게 된다. 산길은 금돼지굴봉 아래에서 짧게나마 갑자기 가파른 오르막길로 변한다. 아마 반전(反轉)이 없는 진행이 미안하기라도 했던 모양이다. 어느 곳이고 옛이야기 한 토막 품지 않은 곳이 있을까마는 이곳 금돼지굴봉도 전설(傳說) 하나를 지니고 있다. 옛날 요 아래에 있는 적성현(縣)에 부임한 원님들이 하나같이 모두 부인(婦人)들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그러던 끝에 머리 좋은 원님이 한명 부임하게 됐고, 그는 자기 부인의 치마허리에 명주실을 달아 놓고 사라지길 기다린다. 다음날 아침 날이 새고 보니 어김없이 부인은 사라졌고, 명주실을 따라 굴에 도착한 원님이 우여곡절 끝에 금돼지를 죽이고 자기 부인을 구출했다는 이야기이다. 굴(窟)을 한번 찾아볼까 했지만 굴의 위치를 알려주는 어떤 표시도 발견할 수가 없어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 ‘하양 허씨‘ 묘(墓)가 있는 금돼지굴봉의 정상에서는 오른편 남원방향의 시야(視野)가 열린다. 문덕봉에서 삿갓봉을 거쳐 고리봉에 이르는 능선이 길게 늘어서 있고, 그리고 북동방향에는 조금 후에 올라갈 송대봉이 눈에 들어온다.
▼ 금돼지굴봉에서 당재로 내려가는 길은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그 가파름이 못내 거북했던지 길가에 안전로프로 난간을 만들어 놓았고, 로프로도 버티지 못하는 구간에는 철(鐵)계단을 설치해 놓았다. 당연히 위험도는 제로(zero), 맞은편에 불끈 솟아오른 송대봉(순창책여산)을 구경하면서 느긋하게 내려서도 좋을 일이다. ‘계단이 71개이네요.’ 오늘 산행이 여유롭기는 여유로운 모양이다. 계단의 숫자까지 헤아리며 내려오는 사람이 있을 정도라면 말이다.
▼ 금돼지굴봉에서 짧게 내려서면 입암마을 갈림길(이정표 : 당재/ 입암/ 금돼지굴봉), 이어서 널따란 임도를 따라 조금 더 걸으면 능선 안부인 당재(이정표 : 송대봉 0.2Km8/ 황굴 0.48Km/ 등산로 입구 0.44Km, 책암마을 5.1Km)에 닿게 된다. 금돼지굴봉에서 10분 조금 못되는 거리이다. 운동시설과 장의자를 갖춘 쉼터로 조성된 당재에는 ‘저렇게 커야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커다란 이정표가 눈길을 끈다. 크기만 했지 거리표시가 없어 산행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오늘 산행에서 꼭 봐두어야 할 황굴을 가는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능선을 따라가다 안부에서 황굴로 내려갈 수도 있고 또 다른 방법은 산의 사면(斜面)을 따라 우회(迂廻)를 해도 된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오른편 능선을 따르는 것이 옳다. 사면을 따라 우회를 할 경우에는 황굴로 내려가는 길이 나뉘는 안부와 당재 사이에 있는 책여산의 정상을 오르는 것을 빼먹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 당재에서 통나무계단을 밟고 10분 정도 오르면 순창책여산 정상(이정표 : 송대봉 0.02Km/ 장군바위 0.20Km, 등산로입구 1.34Km/ 당재 0.27Km)이다. 정상으로 오르는 길목에는 식탁까지 설치해 놓았다. 이곳 지자체에서 책여산에 쏟고 있는 정성이 피부로 느껴지는 순간이다. 책여산 정상은 거대한 바위로 이루어진 암봉이라고 보면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철제 빔(beam)으로 구조물을 세우고 나무계단을 만들어 바위 위로 올라가도록 해 놓았다. 물론 그 위에는 나무데크로 전망대를 만들어 찾는 이들이 마음 편히 주변 경관(景觀)을 구경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신경을 써준 순창군청에 감사를 드려본다. 허나 아쉬운 것은 정상표지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상을 전망대(展望臺)로 개조하면서 지역 산악회에서 세워 놓았던 정상표지석을 치워버린 모양이다. 참고로 이곳 송대봉은 최영 장군과 인연이 깊은 산봉우리이다. 최영장군이 장수군 산서면에 있는 치마대(馳馬台)에서 화살을 날린 후 말을 달려 이곳에 도착했는데 화살이 눈에 띄지 않더란다. 말 위에서 활의 시위를 당기고 말을 달리면 말이 화살보다 먼저 가거나 표적에 거의 동시에 도착하는 것이 예사였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늦어빠진 말은 필요 없다며 자신이 타고 온 용마(龍馬)의 목을 베었다고 한다. 그러나 말의 목을 벤 후에 화살이 날아오는 것을 보자 자신의 경솔함을 크게 후회했다는 것이다.
▼ ‘순창 책여산’은 화산(華山=花山)이나 채계산(釵笄山), 또는 송대봉(松薹峯)이라고도 불린다. 책여산에다 굳이 ‘순창’이라는 지역 이름을 넣은 이유는 반대편에 또 하나의 책여산이 있기 때문이다. 그 둘을 구분하기 위해 순창과 남원이라는 지역 이름을 각각 붙여 놓은 것이다. 참고로 ‘남원 책여산’은 1937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전까지는 남원군이었지만 지금은 순창군 적성면이다. 전망대 역할을 하고 있는 정상에 서면 어머니의 젖가슴처럼 푸근한 섬진강이 발아래 흐르고, 그 건너에는 적성면의 너른 들판이 펼쳐진다. 들녘이 온통 푸른 것을 보면 봄은 우리 곁에 이미 와 있었던 모양이다.
▼ 정상에서 바라본 장군봉
▼ 책여산 정상에서 내려와 대나무 숲길을 지나면 잠시 후에 능선 안부(이정표 : 황굴 0.235Km/ 송대봉 0.165Km)에서 오솔길 하나가 왼편으로 갈려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황굴(窟)로 가는 길로서 정상에서 5분 조금 못되는 거리이다. 이곳에서 일단 황굴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 나와야 한다. 황굴에서 느긋하게 조망(眺望)까지 즐기다 돌아와도 20분이면 충분한 거리이니 꼭 들러볼 일이다.
▼ 침목계단을 따라 잠시 내려가면 또 하나의 갈림길(이정표 : 당재 0.365Km/ 황굴 0.115Km/ 송대봉 0.285Km)이 나온다. 아까 당재에서 우회(迂廻)했을 경우에는 이 길로 오게 된다.
▼ 당재갈림길에서 황굴은 지척이다. 그러나 그 길은 제법 스릴(thrill)이 넘친다. 문경의 ‘토끼비리’를 떠올리게 만드는 이 길은 바위절벽의 중간어림에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난간이다. 테라스(terrace)처럼 생겼다고 생각한다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수백 길 높이의 단애(斷崖)를 피해 가급적 안쪽으로 발걸음을 바짝 붙이며 걷다보면 금방 황굴에 이르게 된다.
▼ 오래전에 이곳에는 꽤 큰 사찰(寺刹)이 있었다고 한다. 과거시험을 보려는 많은 선비들이 이곳에서 공부를 했다고 하니 영험 또한 뛰어났던 모양이다. 그러나 지금은 옛날의 영화(榮華)는 찾아볼 수 없다. 그저 널따란 공터만이 덩그런데, 옛날 뜨락이 있었을 성 싶은 곳에 장의자 하나만이 외롭게 자리를 지키고 있을 따름이다. 황굴은 적성면 들녘을 조망(眺望)하기에는 최적의 장소다. 눈을 크게 뜨면 한창 푸르름을 자랑하고 있는 청보리의 줄기까지 보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들녘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다.
▼ 다시 능선으로 되돌아 나와 철계단을 밟고 맞은편 봉우리로 올라선다. 장군봉으로 올라가는 스릴 넘치는 이 구간이 오늘 산행의 하이라이트(highlight)이다. 온통 바윗길이기 때문에 옛날에는 초보자들은 오를 엄두도 못 내던 구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나 부담 없이 오를 수 있게 되었다. 로프가 매달려 있던 구간들을 모두 철(鐵)계단으로 바뀌었고, 칼날처럼 날카롭던 암릉 위에는 철로 다리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철 구조물 덕분에 안전도는 높아졌지만 반면에 간을 졸이던 스릴을 더 이상 느껴볼 수 없다는 것은 애석한 일이다.
▼ 왼편에 보이는 바위벼랑이 책여산이라는 이름을 얻게 했다. 이 벼랑을 산 아래에서 바라보면 수직(垂直)의 절벽(絶壁) 위에 겹겹이 얹혀 있는 암벽층이 마치 책을 차곡차곡 쌓아놓은 모습과 흡사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 좌우로 터지는 조망(眺望)을 즐기며 긴 철제구조물을 건너면 드디어 장군봉이다. 황굴갈림길에서 12분이 걸렸다. 장군봉에 오르면 산불감시초소가 있고, 정상에는 집채처럼 커다란 바위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철계단을 밝고 바위 위로 올라서면 다시 한 번 시야(視野)가 탁 트인다.
▼ 장군봉을 지나서도 짜릿한 바윗길은 계속된다. 조금 전에 지나왔던 철제구조물 설치구간보다는 암릉이 덜 날카롭지만 스릴(thrill)은 더욱 뛰어나다. 이곳에는 아무런 안전시설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길은 안전지대로 나 있지만 짜릿한 쾌감을 느껴보려면 바위벼랑 가까이로 바짝 다가서서 걸으면 된다. 새들도 위태로워서 앉기를 꺼려했다는 아슬아슬한 칼바위와 소나무 숲(松林)이 한데 어우러진 암릉이 눈앞에 펼쳐진다. 게다가 바위끝 벼랑에라도 서면 발아래에는 도도하게 흐르는 섬진강이 내려다보인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지는 바둑판같은 들녘, 오늘 산행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다. 누군가는 이곳을 용아장성의 축소판이라고 표현했다. 조금 과장된 면은 있지만 크게 어긋난 표현은 아닐 것이다. 기이한 형상의 바위와 섬진강, 그리고 푸른빛이 넘실거리는 들녘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눈길을 떼지 못하게 하고 있다.
▼ 바윗길이 끝나면 가파른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내려가는 길에 마치 산사태가 난 것처럼 산의 사면(斜面)이 무너져 내린 곳이 눈에 들어온다. 어쩌면 광산개발이 만들어낸 흉물스러운 몰골이 아닐까 싶다. 내 기억으로는 이 근처에 규석광산(硅石鑛山)이 있었기 때문이다.
▼ 내려가는 길도 어김없이 안전시설을 잘 갖추어 놓았다. 조금만 위험하다 싶으면 어김없이 안전로프나 나무계단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장군봉 정상을 내려선지 25분쯤 지나면 이정표(송대봉 1.36Km/ 황굴 1.43Km)와 산행안내도가 세워진 24번 국도에 내려서게 된다. 산행을 시작한지 정확히 2시간10분이 지났다. 참고로 괴정교는 남원과 순창 적성을 잇는 24번 국도와 적성과 동계(오수)를 잇는 21번(13번) 국도가 교차하는 지점이다. 두 개의 도로가 교차하면 사거리가 되어야 하는데도 삼거리로 불리는 이유는 남원방향으로 잠시 동안 두 도로가 겹치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이곳은 독집삼거리로 불렸다. 교차지점 근처에 돌로 지어진 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남원책여산 아래에 자리잡은 독집은 아직도 예전모습 그대로이지만 피서철에만 문을 여는지 지금은 문이 굳게 닫혀있다.
▼ 24번 국도를 따라 남원방향으로 향하는 괴정교를 건너면 왼편으로 산길이 열린다. 비록 이정표는 세워져있지 않지만 ‘남원 책여산’으로 오르는 길이다. 산길로 들어서면 처음부터 가파른 오르막길이 길손을 맞는다. 그리고 그 오르막길은 길게 이어진다. 아마 오늘 산행에서 가장 힘든 구간일 것이다.
▼ 남원책여산을 오르는 길에 돌아본 순창책여산, 산봉우리가 섬진강과 어우러지는 모습이 잘 그린 한폭의 동양화를 연상시킨다.
▼ 처음부터 간간히 보이기 시작하던 바위들이 고도(高度)를 높여가면서 점점 그 숫자를 늘려가더니 정상에 가까워지면 아예 암릉으로 변해버린다. 그러나 그 날카로움은 순창책여산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래서 순창군청에서도 남원책여산까지는 등산로를 정비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해둔 모양이다. 그러나 눈요깃거리는 순창책여산보다 차라리 더 낫다. 순창책여산은 커다란 한 묶음의 암릉으로 되어 있어서 그 생김새가 거의 천편일률적(千篇一律的)이었는데, 이곳 남원책여산의 바위들은 각양각색(各樣各色)의 형상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특히 두꺼비 모양으로 생긴 바위들은 자신도 몰래 웃음을 짓게 만든다.
▼ 길가에 늘어선 바위들을 구경하면서 걷다보면 이내 ‘남원책여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괴정교를 출발한지 40분 남짓 지났다. 남원책여산의 정상은 특별할 것이 없는 평범한 산봉우리에 불과하다. 흙으로 이루어진 산봉우리에 바위 몇 개가 올라앉은 형상이라는 것이 옳은 표현일 것이다. 정상에는 정상표지석은 물론 그 흔한 이정표 하나 찾아볼 수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누군가 자연석에 굵은 글씨로 ‘책여산 361m'라고 써 놓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뒤에 보이는 바위 위에도 누군가가 ’책여산‘이라고 써놓은 돌맹이를 올려놓았다.
▼ 하산길에 바라본 동계면 들녘
▼ 산행이 종료되는 동계면 서호리의 구송정유원지로 내려가는 길은 가파른 내리막길로 시작된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곳곳에 나타나는 바위벼랑은 우회(迂廻)하면 되고, 이마저도 안 되는 곳에는 굵직한 안전로프가 매어져 있기 때문이다. 정상을 내려선지 25분쯤 되면 밤나무단지에 이르게 된다.
▼ 일단 밤나무단지에 내려서면 산행이 끝난 것과 마찬가지다. 산행이 종료되는 구송정공원까지는 아직도 15분 이상을 더 걸어야 하지만 경사(傾斜)가 거의 없는 임도(林道)라서 걷는데 조금도 부담이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느긋하게 걸으며 주의의 풍광(風光)을 즐겨도 좋을 일이다. 꽃망울을 활짝 열고 있는 매화나무 아래서 코끝을 쫑긋거리며 매화꽃 향기에 취해보는 것도 좋고, 길가에 퍼질러 앉아 봄나물을 뜯어보는 것도 하나의 행복일 것이다.
▼ 산행날머리는 구송정(九松亭)공원 주차장
봄나물을 뜯느라 정신이 없는 집사람과 보조를 맞추다보면 오수천(川)이 나오고, 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면 산행이 종료되는 구송정공원 주차장이다. 구송정(九松亭)은 조선 숙종 때 당시 서호마을에 살고 있던 70세 이상 된 노인들이 소나무를 심은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그들의 모임이 구송회(九松會)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문(詩文)과 서예(書畵) 그리고 창(唱) 등에 능했던 노인들은 이곳에 모여 세상을 등지고 풍류를 즐겼다 한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서호주민들이 뜻을 모아 1975년 구송정(九松亭) 공원을 세웠는데, 매년 여름철이면 울창한 숲과 물을 찾아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고 한다.
▼ 산행이 끝나면 늦은 점심, 오늘은 무슨 음식을 제공해줄까 많이 궁금해진다. ‘산두레’는 그 지역의 토속음식(土俗飮食)을 제공해주기로 유명한 산악회이기 때문이다. 이곳은 섬진강(현지에서는 적성강이라고 부른다)에서 많이 잡히는 민물고기를 이용한 매운탕으로 유명하다.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화탄매운탕집’은 전국의 미식가(美食家)들이 찾아오는 곳으로 소문나 있을 정도이다. 물론 나도 10여 년 전에 들러본 일이 있었다. ‘법(法)’ 개정을 위한 ‘공청회(公聽會)’를 몇몇 도시에서 개최하면서 지나가는 길에 들렀었는데 기대에 못지않게 그 맛이 뛰어났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오늘의 점심은 남원의 오수면소재지(面所在地)에서 한단다. 오수의 명품 음심은 ‘보신탕’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이곳의 ‘보신탕’도 먹어본 일이 있었고 그 맛도 뛰어났던 것으로 기억된다. 오수(獒樹)라는 마을은 개(犬)와 관련된 전설(傳說)을 갖고 있는 마을이다. 장날 술에 취한 주인이 돌아오는 길에 풀밭에 누워 잠이 들었는데 그때 마침 불이 났던 모양이다. 그러자 데리고 다니던 개가 냇가에서 자신의 몸에 물을 적신 후 주인이 잠들어있는 곳의 주변을 뒹굴면서 불이 번져오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충견(忠犬) 덕분에 주인은 목숨을 건졌지만 기르던 개는 끝내 불에 타 숨졌다고 한다. 주인이 개를 땅에 묻고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표시를 해 두었는데 그 지팡이에서 순이 돋아 거대한 나무로 자라나자 사람들이 개 오(獒)자에 나무 수(樹)자를 붙여 오수(獒樹)라는 지명을 붙였다는 것이다. 개와 관련된 아름다운 이야기를 갖고 있는 고장에서 개를 이용한 음식이 유명하다니 아이러니(irony)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일까 산악회에서 준비한 음식은 ‘소머리국밥’, 생각보다 음식 맛은 뛰어났다. 주문을 받고서야 만들기 시작한다는 파김치, 갓김치, 겉절이김치 등은 싱싱하면서도 감칠맛이 있었고, 특히 검은 깨로 만든 묵은 일품이었다. 장안집(642-5268)이니 오수에 들를 일이 있다면 한번쯤 들어가 볼 것을 권하고 싶다.
♧ 에필로그(epilogue)
사실 책여산은 내가 어릴 때에 몇 번 올라본 기억이 있는 산이다. 이곳에서 4Km도 채 떨어지지 않은 ‘중산리’라는 작은 마을이 내가 태어난 곳이기 때문이다. 그때는 등산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탓에 섬진강변에서 물장난을 치고 놀다가 심심하면 금돼지굴까지 다녀오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에 고향을 떠나 전주로 유학을 갔으니 벌써 5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버렸다. 그 때문일까? 산의 지형(地形)이 눈에 익지를 않다. 내 기억으로는 지금의 황굴이 그때 금돼지굴로 알고 올라왔던 굴(窟)로 보이기 때문이다. 기억을 되살려보려고 금돼지굴을 찾아봤지만 그 어디에도 금돼지굴의 위치를 알려주는 표시를 찾아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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