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요산(逍遙山, 444.2m)-수월봉(363m)

 

산행일 : ‘14. 7. 20()

소재지 : 전북 고창군 부안면

산행코스 : 용산마을건기봉(200.1m)수월봉사자봉(344.6m)연기재소요사소요산연기교()선운사삼거리(산행시간 : 4시간)

함께한 산악회 : 청마산악회

 

특징 : 소요산 하면 대부분 동두천에 있는 소요산을 머리에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전라북도 고창 땅에도 또 하나의 소요산이 있다. 그것도 동두천에 있는 소요산에 결코 뒤지지 않는 산세(山勢)를 지닌 채로 말이다. 그런데 이곳의 소요산을 아는 사람들은 겨우 손으로 꼽을 정도이다. 바로 인천강()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위치한 선운산(경수봉)이 너무나 유명해서 그 위세(威勢)에 철저하게 눌려버린 탓이다. 그러던 것이 최근 고창군에서 소요산 등산로를 개설하고 미당시문학관을 연계하는 <이야기가 있는 천리길 탐방로>를 조성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곰소만 일대의 조망(眺望)이 뛰어나고, 거기다 산행날머리인 연기다리() 근처는 풍천장어로 소문난 곳이니 맛도 볼 겸해서 한번쯤은 시간을 내어 찾아볼 만한 산이다.

  

산행들머리는 용산마을(고창군 부안면 용산리)

서해안고속도로 선운산 I.C에서 내려오자마자 좌회전 22번 국도 법성포방면으로 달리다보면 용산1교차로(交叉路 : 부안면 용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빠져나와 첫 번째 만나는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산행들머리인 용산마을에 이르게 된다(우리를 태우고 온 버스는 옛() 22번 국도를 따라 이곳까지 왔다). 도로변에 있는 마을종합회관의 주차장이 엄청나게 넓으니 자동차는 이곳에다 주차해 놓으면 되지 않을까 싶다.

 

 

 

산행들머리는 종합회관의 주차장에서 부안면소재지 방향으로 100m쯤 떨어진 곳에서 열린다. 산길이 열리는 일제(日帝) 때 최판사가 거주했었다는 고택(古宅)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현재는 사람이 살고 있는 것 같지 않은 최판사댁의 앞마당을 통과한 후, 왼편으로 크게 방향을 틀어 50m쯤 들어가면 오른편 산자락으로 산길이 열린다. 산자락으로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척 거칠다는 느낌이다. 길의 흔적이 거의 나타나지 않을 정도로 희미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길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평소에는 거의 없다는 증거일 것이다.

 

 

 

 

산길을 가득 메운 잡목(雜木)들을 헤치며 15분 조금 못되게 오르면 용산마을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전망바위에 올라서게 된다. 북쪽에는 조금 후에 오르게 될 소요산이 우뚝 솟아있고, 남쪽에는 화시산이 또렷하다. 전망바위에서 건기봉 정상까지는 금방이다. 건기봉 정상은 아무런 특징이 없는 그저 평범한 하나의 산봉우리에 불과하다. 물론 정상표지석도 없다. 그저 새마포산악회에서 붙여 놓은 정상표지판이 정상석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조망(眺望)도 터지지 않음은 물론이다.

 

 

 

 

건기봉에서 수월봉으로 가는 길은 수월봉을 향해 일직선을 그은 다음 선의 오른쪽에서 찾아보는 게 좋다. 잡목(雜木)들을 베어낸 흔적을 쫒아 약간 왼쪽으로 내려섰던 난 한참을 고생하고 나서야 잘못됐음을 알아차리고 되돌아 나오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다시 찾은 산길은 의외로 또렷하다. 조금만 신경을 더 썼더라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을 텐데도 성급한 판단이 화를 불러왔던 것이다.

 

 

건기봉에서 10분 조금 못되게 내려오면 안부에 이르게 되고, 산길은 다시 소나무 숲속으로 들어서면서 반대편의 산봉우리를 향해 오름짓을 시작한다. 수월봉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가끔 조망(眺望)이 시원스럽게 터지는 암릉지대를 지나게 된다. 바윗길의 입맛만 보여주는 첫 번째에 이어 두 번째로 나타나는 암릉은 제법 거창하다. 곧바로 치고 오를 수 없을 정도로 우람한 암벽(巖壁)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오른쪽으로 돌아 위로 오르면 20~30명이 족히 둘러앉아도 될 만큼 널따란 암반(巖盤)이 나타난다.

 

 

 

 

두 곳의 암릉 모두 뛰어난 조망을 자랑하지만 위편에 위치한 암반이 한층 더 뛰어나다. 조금 전에 지나온 건기봉이 마치 삿갓을 엎어 놓은 것처럼 뾰쪽하게 솟아있다. ‘그래서 건기봉이라고 부르는 모양입니다. 건기의 건()두건 건자이거든요’. 건기봉을 그 생김새대로 삿갓봉이라고 고쳐 부르면 좋겠다는 내 말을 듣고 같이 산행을 하고 있는 일행이 건네 오는 말이다. 그러나 산행을 마치고 돌아와 검색해본 결과에 의하면 건기봉(建祺峰 : 일명 노적봉, 건지봉)은 깃발()을 꽂다()는 뜻으로서 굴치(掘峙 : 일명 굴재, 구을치, 구을현) 북쪽 장군봉의 장군이 이곳에 기를 꽂을 것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한편으론 이곳은 일제 때 깃대를 꼽고 측량을 했던 곳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 설()도 있으니 참고할 일이다.

 

 

암반에서 조망을 즐기다가 눈을 돌리는데 문득 안타까운 풍경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너럭바위의 한쪽 귀퉁이에 몸을 기대고 있는 멋지게 생긴 소나무 한그루가 누렇게 말라죽어 있는 것이다. 만일 살아있을 경우에는 명품소나무(名品松)로 불리어도 하등에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로 빼어난 생김새인데도 말이다. 문득 몇 년 전에 이곳을 답사했던 어느 등산객의 말이 생각난다. 푸르고 싱싱한 잎을 되찾을 수 있도록 하루빨리 적절한 치료를 하여 줄 것을 간절히 바라던 그의 심정이 내게 전해지면서 나도 몰래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수월봉으로 가는 길은 오르막길의 연속이다. 가끔 봉우리 같은 것들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산봉우리라 부르기에는 좀 난감한 수준이다. 꼭대기에서 내려서지를 않고 잠시 반반했다가 이내 다시 오르막길로 변하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너럭바위(두 번째암릉)에서 5분쯤 더 가면 전위봉, 수월봉 정상은 이곳에서도 5분 정도를 더 걸어야 나온다. 건기봉에서 수월봉까지는 45, 산행을 시작한지는 1시간5분 정도가 지났다. 수월봉 정상은 아까 지나온 건기봉과 마찬가지로 정상표지석이 없다. 나무기둥에 매달린 새마포산악회의 정상표지판이 이를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곳에는 서래야 박건석선생이 매달아놓은 정상표시 코팅(coating)지가 하나 더 보이는 것이 건기봉과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건기봉과 마찬가지로 조망(眺望)까지도 터지지 않기에 하는 말이다.

 

 

수월봉 정상에서 조망(眺望)이 터지지 않는 것을 갖고 서운해 할 필요까지는 없다. 조금 후에는 눈터지는 조망을 맘껏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정상에서 사자봉 방향으로 몇 걸음만 더 걸으면 나오는 너럭바위가 바로 그곳이다. 수십, 아니 수백 명이 둘러앉아도 충분할 널따란 암반(巖盤)위로 올라서면 일망무제(一望無題)로 시야(視野)가 열린다. 진행방향에 수월봉과 소요산이 또렷하고 왼편에는 비록 희미하지만 선운산이 우뚝하다.

 

 

 

 

 

조망을 즐기다가 능선을 내려서면 17분 후에는 매봉재에 내려서게 된다. 매봉재는 오른쪽의 쇄점마을과 왼쪽에 있는 연기저수지에서 올라올 경우 서로 만나게 되는 고갯마루이다. 그러나 고갯마루에서 양편으로 나있는 길을 찾기란 쉽지 않다. 오랫동안 사람들이 이용을 하지 않은 탓에 잡목(雜木)과 웃자란 잡초(雜草)들이 산길을 점령해버렸기 때문이다. 이 구간의 주변 풍경은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편이다. 그저 주변에 곱게 핀 야생화들이나 구경하면서 묵묵히 걷는 게 일이다.

 

 

 

매봉재를 지나면서 다시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수월봉에서 내려오며 까먹었던 고도(高度)를 다시 올려놓느라 용트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산길은 오산저수지가 잘 내려다보이는 바윗길을 한 차례 지난 후에 사자봉 정상에다 올려놓는다. 사자봉 정상도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고 새마포산악회서래야 박건석선생의 정상표지판이 이를 대신하고 있다. 물론 조망(眺望)도 일절 터지지 않는다. 조금 전에 올라온 일행 한분이 벗어든 윗옷을 비틀며 땀을 짜고 있는 것이 보인다. 오늘 날씨가 그만큼 무덥다는 증거일 것이다. 하긴 내 배낭에 매달린 타월(towel)에서도 끊임없이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다. 물론 내가 흘린 땀방울이다. 짜고 짜도 끊임없이 흘러내리기 때문에 짜는 것을 포기한지 이미 오래되었다.

 

 

 

 

사자봉에서 연기재로 향하다보면 오른편에 전망 좋은 바위가 하나 보인다. 바위 위로 올라서면 오산저수지가 내려다보이고 그 뒤에는 수강산(壽崗山)이 우뚝하다. 수강산은 아픔의 역사를 간직한 산이다. 한말(韓末)의 의병장이었던 강대영(姜大榮)선생이 의병들을 훈련시키던 장소였고, 동학(東學 : 천도교)의 대접주이자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였던 손화중(孫華仲)선생의 피체지(被逮地)로 알려진 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산이 안타깝게도 흉측하게 잘려나간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산비탈이 온통 하얗게 까발려져 있는 것이다. 지자체(地方自治團體)에서 채석장(採石場)으로 허가를 내준 모양인데, 내 좁은 소견으로는 지자체의 수익(收益)도 중요하겠지만 저 정도의 역사흔적을 품은 산들은 자연그대로 보존해서 후손들에게 넘겨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된다.

 

 

사자봉에서 연기재로 내려가는 길은 의외로 또렷하다. 산길을 찾기가 쉽지 않았던 이제까지와는 다른 모습이었기에 의외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날머리로 삼고 있는 연기마을에서 이곳 수월봉과 소요산을 거쳐 다시 연기마을로 내려가는 원점회기 산행을 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의미일 것이다. 아니면 고창군에서 소요산의 등산로를 정비하면서 이곳 수월봉 코스를 포함해서 정비했던지 말이다. 걷기 좋은 산길을 따라 15분 정도 내려서면 밤나무 단지에 이르게 되고, 단지의 가장자리를 잠깐 통과하고 나면 이윽고 연기재에 이르게 된다.

 

연기재는 사각의 정자(亭子)와 이정표, 그리고 간이화장실까지 갖춘 쉼터로 조성되어 있다. 이곳 연기재에서 길은 여러 갈래로 나뉜다. 우선 왼편의 연기마을과 오른편의 검산리를 잇는 임도(林道)가 좌우(左右)로 흐르고, 또 다른 임도 하나는 소요사로 향한다. 그 외에도 우리가 내려온 산길과 질마재로 넘어가는 산길이 더 있으니 오거리이다. 한마디로 교통의 요충지인 셈이다. 그러나 이곳에 세워진 이정표(미당시문학관 2.91Km/ 고인돌박물관 20.13Km)는 산행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고창군에서 새로 만든 둘레길인 고인돌 질마재따라 100리길용으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100리길의 제4코스인 질마재길이 연기마을에서 이곳을 거쳐 질마재고개로 넘어가기 때문일 것이다. 참고로 질마재는 산 아래 바닷가인 좌치 나루터에서 생산한 소금을 부안 알뫼 장터에서 곡물과 교환하기 위해 지고 넘던 고개인데, 고개의 생김새가 소나 말의 안장인 길마처럼 생겼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또한 미당시문학관은 고창이 낳은 한국문학계의 거목 미당 서정주의 작품과 생애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시설이다. 육필원고, 사진자료, 15천점이 전시되고 13세까지 살았던 생가(生家)도 복원해 놓았다.

 

 

 

연기재에서는 시멘트로 포장된 널따란 임도(林道)를 따라 올라가야만 한다. 장승이 들머리를 지키고 있는 오른편의 산길로 들어서서는 안 된다는 얘기이다. 이 길은 '미당문학관'으로 넘어가는 길마재 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소요산 정상으로 가는 길이 아주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능선을 따라 올라가면 소요산 정상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는 천년고찰이라는 소요사의 탐방은 생략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오른쪽 길로 들어서지 말라고 했던 것이다.

 

 

연기재에서부터 더위와의 힘겨운 싸움이 시작된다. 임도의 주변에 큰 나무들이 없어서 따가운 햇볕에 온통 노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거기다 멀기까지 하니 죽을 맛이다. 특히 오늘은 무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고 있는 여름날, 며칠 전에 초복이 지났으니 얼마나 무덥겠는가. 이런 날에는 이 길을 지옥의 길이라고 부른다고 해도 하등에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널따란, 그러나 아무 특징도 없는 시멘트 포장길을 걷다보면 의외의 풍경이 나타나기도 한다. 느닷없는 기암절벽(奇巖絶壁)이 길가에 나타나는 것이다. 마침 왼편으로 시야(視野)가 열리기에 길가 바위 위로 올라서본다. 흡사 제비집처럼 바위벼랑의 좁은 틈새에 비집고 들어선 소요사가 눈에 들어온다.

 

 

 

길고 긴 시멘트 포장길이 신물이 날 즈음이면 저만큼 앞에 어마어마하게 높이 치솟은 바위벼랑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 꼭대기에는 누각(樓閣) 하나가 오롯이 앉아 있다. 바로 소요사의 범종각(梵鐘閣)이다. 절간의 일주문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것 같은 바위벼랑 아래에는 오래된 부도가 하나 있다. 이 부도는 도선국사 것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확인된 것은 아니니 참조할 일이다. 그 곁에 최근에 세운 듯한 기념비 두 개가 더 있으나 큰 의미는 없으니 여기서는 생략하겠다. 그런데 부도를 돌아보다가 의외의 풍경에 눈살을 찌푸리고 만다. 바위벽에 수많은 이름들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어떤 것은 이름들 위에다 감실(龕室) 모양의 지붕까지 새겨 놓았다. 과연 그렇게까지 보호를 받아야할 이름들일까 싶어 한숨을 짓게 만든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풍경들인 것이다.

 

 

벼랑을 돌면 의외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오래된 사찰(寺刹)이려니 하고 기대했는데 막상 눈앞에 나타나는 것은 온통 최근에 지어진 것들뿐이다. 그것도 절간과는 연결고리를 찾기 힘들 정도의 하얀색의 시멘트건물과 조립식 건물들로 말이다. 그러나 2~3층 높이의 시멘트계단을 밟고 위로 올라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주변 풍경이 일시에 변한다. 거대한 암벽(巖壁)의 틈새마다에 들어서있는 대웅전과 종각, 산신각, 칠성각, 요사채 등은 제법 고풍(古風)스런 외모들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특히 종각 옆의 느티나무를 보면 이 절의 역사가 범상치 않음을 눈치 챌 수 있다. 어른들 두세 명이 팔을 펼쳐야만 서로 손이 닿을 수 있을 정도로 밑동이 굵은 느티나무가 이 절의 역사가 오래 됐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느티나무 아래에 놓인 평상에 앉아 뻥 뚫린 조망(眺望)을 즐기는데, 문득 난간에 매달려 있는 판자(板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내 것이라 할 것이 있는가? 내 아들인데, 내 재산인데 하면서 어리석은 자는 괴로워한다. 참으로 그 자신도 그의 소유가 아닌데, 어찌 아들이나 재산의 그의 소유겠는가그리고 맨 아래에는 常笑僧 金輪刻이라고 적혀있다. 소요사가 태고종 사찰로 알고 있는데 이 절의 주지스님의 법명(法名)이 아마 윤각(輪刻)인 모양이다. 요사채 곁에서 감로수(甘露水) 한 바가지로 목을 축이고 돌아서는 길에 뵌 스님은 상소승(常笑僧)’.이라는 말을 듣기에 충분할 정도로 넉넉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참고로 소요사(逍遙寺)신선과 동승이 노니는 산에 들어앉은 절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이절을 누가 지었는지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백제 위덕왕 때 소요(逍遙)라는 스님이 지었다는 설과, 신라 경덕왕 때 황룡사의 스님이었던 연기(烟起)가 인근에 연기사를 세운 후에 현재의 소요사 자리에 부속 암자(庵子)를 세웠다는 설, 그리고 나머지 또 하나는 인도에서 건너온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세웠다는 설 등이다. 그러나 이 모두는 하나의 설()에 불과할 뿐 어느 것 하나 고증된 것은 없다. 소요사는 조선시대 중기까지 진묵대사(震黙大師)와 혜감선사(慧鑑禪師)등 수많은 유명 스님들을 배출하였으나 정유재란과 6.25때 소실(燒失)되었고, 현재의 전각(殿閣)들은 소실 이후 여러 번의 재건을 거듭하며 새로 지은 것들이라고 한다.

 

 

 

 

소요사를 빠져나와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소요산 정상으로 가는 산길의 들머리는 소요사의 돌계단 아래에서 오른편 50m쯤 위의 직각으로 꺾이는 지점(이정표 : 소요산 정상 0.3Km)에서 열린다. 쓰러져있는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방향으로 들어서자마자 산길은 정상을 향해 마지막 몸부림을 친다. 가파른 오르막길로 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행이도 그 거리는 짧다. 15분 정도만 고생하면 정상 바로 아래에 있는 바위봉에 올라서게 된다.

 

 

 

무인산불감시탑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바위봉(이정표 : 부안면 선운리 2.0Km)은 얼핏 보아 정상으로 오인하기 딱 좋겠지만 사실 정상은 이곳이 아니다. 비록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이지만 하여튼 몇 걸음 더 걸어야만 하는 곳에 정상이 따로 있는 것이다. 감시탑 근처에는 벤치 몇 개를 갖춘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마침 시야(視野)까지 열리니 쉬면서 망중한(忙中閑)이라도 즐겨보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이곳에서의 조망(眺望)은 일품이다. 미당 서정주의 시문학관이 있는 북쪽방향으로는 부안면 일대의 들판과 갯벌이 넓게 펼쳐지고, 비록 희미하기는 하지만 그 뒤에는 곰소만과 내변산의 산봉(山峰)들까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왼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선운산은 물론이고 화시산까지 내다보인다. 날씨가 좋을 경우에는 내장산과 입암산 그리고 방장산까지 볼 수 있다지만 오늘은 박무(薄霧, mist) 때문에 그저 마음속으로나 그려볼 따름이다.

 

 

 

 

한동안 조망을 즐기다가 산불감시탑 앞을 지나 몇 발짝 더 오르면 전북의 산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특유의 스테인리스(stainless)로 만든 사각(四角)막대 모양의 정상표지판과 동판(銅版)으로 만든 대삼각점(大三角點)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소요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정상에 서면 다시 한 번 시원스럽게 조망(眺望)이 터진다. 아마 경수봉을 위시한 선운산의 산봉들이 가장 잘 보이는 지점일 것이다. 소요산은 고창의 젖줄인 인천강()을 사이에 두고 높이가 같은 선운산 경수봉과 마주보고 있다고 해서 형제봉, 또는 걸출한 문장가(文章家)들이 많이 배출됐다는 의미로 문필봉이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보천교(普天敎 : 증산교 계열의 신종교)의 창시자인 차경석, 인촌 김성수, 미당 서정주 등이 이 산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는 것이다.

 

 

 

소박할 정도로 좁은 정상에서의 머무름을 포기하고 하산 길을 재촉한다. 몇 사람만 들어서도 빈 공간이 없어져버릴 정도로 정상이 비좁았기 때문이다. 아까 무인산불감시탑이 있던 곳에다 쉼터를 만들었던 이유가 모두 이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하산은 북릉으로 잡는다. 정상에서 잠깐 내려서면 암릉이 나타나면서 다시 한 번 조망(眺望)이 터진다. 또 다시 부안면 뜰과 곰소만이 나타나는데, 아까보다 훨씬 더 가까워져 있다.

 

 

 

 

암릉을 내려서서 조금만 더 걸으면, 그러니까 정상을 내려선지 15분 정도가 지나면 미당시문학관 갈림길’(이정표 : 부안면 선운리 1.5Km/ 소요산 정상 0.5Km)을 만나게 되고, 날머리인 연기마을로 내려가려면 이곳에서 왼편 길로 진행해야 한다. 산길은 한마디로 순하다. 내리막길이 가파르지 않고 거기다 보드라운 흙길이다 보니 내려서는데 조금도 부담이 없다. 산이 낮은데다 날머리까지의 거리까지 멀다보니 급하게 고도(高度)를 떨어뜨릴 필요가 없었던 모양이다. 아까 산을 오를 때와는 딴판으로 잘 닦인, 그러나 호젓한 산길을 편안하게 걷다보면 연기저수지의 아래에 있는 검은 기와집에 이르게 되고, 이곳에서 농로(農路)를 따라 조금만 더 걸으면 연기재로 올라가는 임도(‘고인돌 질마재따라 100리길의 제3코스인 질마재길’)와 만나게 된다. ‘미당시문학관 갈림길에서 이곳까지는 30분 정도가 걸렸다. 아마 무더위 때문에 속도가 많이 떨어졌던 모양이다.

 

 

 

산행날머리는 연기다리 건너의 삼인교차로

질마재길을 따라 10분쯤 내려오면 미당시문학관 갈림길’(이정표 : 미당시문학관 5.09Km/ 도솔암 5.93Km/ 소요사입구 3.77Km)을 만나게 되고, 이곳에서 고인돌 질마재따라 100리길의 제4코인 보은길(소금길)‘을 따라 조금만 더 걸으면 잠시 후에는 산행이 종료되는 연기다리()에 이르게 된다. 오늘 걸은 거리는 대략 8.5Km정도, 산행시간은 총 4시간20분이 걸렸다. 하산 길에 몸을 씻느라 멈춘 시간을 감안하면 4시간 정도가 걸린 셈이다. 오늘 산행에서는 질마재라는 낱말을 유난히도 많이 볼 수 있었다. 질마재하면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하나 있다. 바로 미당 서정주시인(詩人)이다. 그가 길마재마을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는 노년에 고향 질마재의 유년시절을 회상하며 질마재 신화라는 시집을 발간(1975)했다. 그 시집에 수록된 신부라는 제목의 시() 한편을 소개해볼까 한다.

 

<신부는 초록 저고리와 다홍 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안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40년인가 50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 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스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 앉아 버렸습니다.>

 

 

에필로그(epilogue)

주진천(일명: 인천강)을 가로지르는 연기교 다리를 건너면 선운사 입구인 삼인 교차로가 나온다. 도로변에는 온통 풍천장어라는 낱말이 들어간 음식점의 간판들뿐이다. 하긴 복분자에 곁들인다는 고창의 풍천장어는 웬만한 어린아이들도 알고 있을 정도이니 저런 간판들을 달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풍천은 단지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지점을 일컫는 낱말일 뿐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고창에 있는 냇가의 이름쯤으로 알고 있다. 복분자와 자연산장어의 끈질긴 인연이 풍천이라는 낱말을 고유명사(固有名詞)’로 둔갑을 시켜버린 것이다. 그러나 난 풍천장어라는 간판에 눈 한번 팔지 않고 산악회 버스가 주차되어 있는 곳으로 향한다. 산악회에서 준비한 음식이 결코 풍천장어에 뒤지지 않을 것임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버스가 가까워지자 이대장이 달려오더니 마지막 남은 것이라며 캔맥주 하나를 슬그머니 쥐어준다. 시원하다. 아니 달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어울릴 것이다. 그만큼 더위에 지쳤다는 증거이다. 버스에 도착하니 군침이 돌 정도로 맛있는 냄새가 코를 찌른다. 오늘의 메뉴는 옻닭이란다. 나 같이 옻닭을 못먹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자상하게도 삼계탕이 따로 준비되어 있다. 그리고 오늘도 역시 에피타이저(appetizer)인 막걸리와 소주, 맥주는 얼음에 재워져 있고, 오히려 한 술 더 떠서 디저트(dessert)인 수박은 지난번보다 하나가 더 많다. 오늘도 역시 앞자리에 앉은 김진수선배님과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으며 오늘 산행을 마감한다. 그리고 다음 주말의 오대산 산행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