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직산(珷織山, 578.5m)

 

산 행 일 : ‘21. 4. 15(목)

소 재 지 : 전라북도 순창군 구림면

산행코스 : 금평교→옥새바위→한반도 전망대→정상→제2전망대→스핑크스바위→수변산책로→호정소→금평교(거리/ 소요시간 : 7.2km/ 2시간 45분)

 

함께한 사람들 : 산두레

 

특징 : 두 번째로 산두레를 따라나섰다. 미답의 산만을 오른다는 내 고집 탓에 본의 아니게 격주로 만나게 됐다. 이번 산은 내가 태어난 고향의 산이라는 또 다른 특징도 있다. 오래 전 현직에 있을 때이다. ‘무진장(무주·진안·장수를 줄여서 부르는 단어이다) 촌에서 출세했다’는 내 농담을 들은 한 지인은 ‘산에다 간짓대를 걸쳐놓고 턱걸이를 할 수 있는 곳’에서 온 놈은 출세한 게 아니냐는 농담으로 나에게 반격을 했었다. 이는 순창도 역시 무지막지한 산골이라는 얘기일 것이고, 그러다보니 내 고향임에도 불구하고 올라보지 못한 산들이 아직도 사방에 널려있다. 무직산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눈에, 아니 가슴에 담아둘만한 기암괴석들을 실컷 구경할 수 있음은 물론이고, 한반도를 닮은 지형을 눈에 담을 수 있는 보기 드문 산인데도 말이다. 거기다 호정소 수변산책길은 또 어떠한가. 아무튼 내 고향에도 이런 멋진 산이 있다는데 자부심을 갖기에 충분한 산이었다.

 

▼ 산행들머리는 ‘금평교’(순창군 구림면 금천리 558-21)

호남고속도로 전주 IC에서 내려와 국도 21호선, 이어서 구이교차로에서 27호선을 타고 순창방면으로 오다 장암교차로(임실군 덕치면 장암리 624-5)에서 빠져나온다. 이어서 일중교 아래를 통과해 회문산로를 타면 얼마 지나지 않아 금평교에 이르게 된다. 다리 건너에 있는 자그마한 주차장이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 무직산의 들머리는 정확히 셋이다. 금평마을(금천리) 앞의 금평교, 통안마을(율북리), 그리고 산내마을(안정리) 근처의 ‘잠수교’이다. 하지만 십중팔구는 금평교에서 시작해 금평교로 돌아오는 원점회귀 산행을 한다. 그래야만 옥새바위와 한반도전망대, 호정소 등 무직산이 품은 명소들을 빠짐없이 둘러볼 수 있기 때문이다.

▼ 치천(淄川)을 오른편 옆구리에 차고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탐방로는 치천의 제방 위로 나있다. 참!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산행안내도(위의 사진)를 한번쯤 살펴보고 길을 나서라는 말을 깜빡 잊을 뻔했다. 안내도는 ‘호정소 수변산책로’를 가운데 두고, 무직산 등산로 및 둘레길(만일사와 회문산자연휴양림을 잇는다)을 끼워 넣었다. 그래선지 등산로도 무직산 대신 ‘호정소’라는 어처구니없는 이름표를 달았다. 하지만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시간에 맞춰 트레킹 코스를 정하면 될 일을...

▼ 200m쯤 걸었을까 이정표 하나가 세워져 있다. 그런데 이정표에 매달려 있어야 할 방향표시판들이 하나같이 땅에서 나뒹굴고 있는 게 아닌가. 거기다 한술 더 떠서 3개의 방향표시판(호정소 등산로, 호정소 수변산책로, 만일사 3.2㎞)에는 무직산이란 지명은 눈에 띄지도 않는다. 위에서 얘기했듯이 지자체의 무성의한 행정 행위 탓일 것이다. 아무튼 이곳은 ‘호정소 수변산책로’와 ‘무직산 등산로’가 나뉘는 지점이라는 것쯤은 기억해두도록 하자.

▼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방향표시판 가운데 하나는 ‘만일사(萬日寺)’이다. 백제 무왕(673년) 때 창건(절을 세운 이는 未詳이다)된 만일사가 3.2㎞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절은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와 인연이 깊다고 전해진다. 무학대사가 이성계를 임금의 자리에 오르게 하고자 만일 동안 이곳에서 기도했기 때문이다. ‘만일사’라는 이름의 유래이기도 하다. 절에 이런 내용이 닮긴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이 비석에는 순창고추장이 대궐에 진상하게 된 내력도 적고 있단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우리나라에 고추가 전래된 것은 임진왜란 이후이다)와는 조금 다르니 믿고 말고는 각자의 몫이다.

▼ 왼쪽으로 크게 방향을 튼다. 직각에 가깝다고 보면 되겠다. 이어서 황톳길 임도를 따라 올라간다. 참! 방향을 틀지 않고 강변을 따라 계속 진행하면 치천(淄川)이란 마을이 나온다는 것도 기억해두자. 마을 앞 하천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게 아니라 남에서 북으로 거꾸로 흘러간다고 해서 치천(淄川)이란 이름이 붙은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한지(韓紙) 공장이 20여 곳이나 있었다고 한다. 마을 주위에서 닥나무가 많이 자란데다 맑은 물이 풍부해서 선자지(扇子紙) 같은 고급 품질의 종이도 제조했었단다.

▼ 이때 왼편으로 시야가 활짝 열린다. 조금 전에 산행을 시작했던 금평교가 발아래로 내려다보이는가 하면, 치천 너머 들녘에는 금평(錦坪)마을이 그림같이 앉아있다. 금평(錦坪)은 평평한 비단 자락을 의미한다. 지형이 ‘회문산가(回文山歌)’에 나오는 옥녀가 비단을 짜는 ‘옥녀직금(玉女織錦)’의 형상과 유사한데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하나 더. 마을의 옛 이름은 ‘베트라(베틀아우)’였다고 한다. ‘베틀아우’가 베틀과 그에 맞는 여러 가지 도구를 말하는 것일지니 옛 지명 또한 옥녀직금에서 유래되었지 않나 싶다.

▼ 임도를 따라 8분쯤 올라가자 나무다리가 놓여있다. 이곳에서 산속으로 파고들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산속으로 들어섰어도 길은 여전히 널찍했다. 오르막길의 경사도 걷기 딱 좋을 정도로 완만한 편이었다.

▼ 5분쯤 더 걷자 오솔길로 변하면서 산길 또한 가팔라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버거울 정도는 아니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속도만 조금 떨어뜨리면 될 일이니 말이다. 거기다 반반으로 섞여있는 소나무에서는 솔향기까지 솔솔 보내오는 게 아닌가. 힘이 들기는커녕 오히려 활기로 넘치는 산행이 이어진다.

▼ 산행을 시작한지 22분 만에 무직산의 정상이 조망되는 널찍한 바위에 올라설 수 있었다. 조망은 그것만이 아니다. 산자락 아래를 휘돌아가는 치천에 더해 호정소까지 한눈에 담을 수 있다.

▼ 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바위를 우회하여 암반지역으로 나가자 소나무 숲에 가려져있던 그 바위가 자태를 드러낸다. 무직산의 내노라하는 볼거리 가운데 하나인 ‘옥새바위’인데, 바위가 하도 크다보니 혹자는 ‘옥새봉(玉璽峰, 385m)’이라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올라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바위에다 ‘봉우리 봉(峰)’ 자를 붙이는 것은 좀 무리일 듯. 그나저나 임금의 옥새(玉璽)처럼 소중하게 관리되어야 할 산하겠지만 위로 오를 수 있도록 밧줄 하나쯤은 매어두어도 좋았지 않았을까 싶다.

▼ 옥새바위부터는 기분 좋은 산길이 이어진다. 사방이 온통 소나무 세상이라서 숨을 들이킬 때마다 짙은 솔향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것이다. 저 내음 속에는 그렇게나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가 듬뿍 들어있을 것이다. 여기까지 올라오느라 지쳐있던 심신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말끔히 치유되어버리는 이유이다.

▼ 10분 후 ‘412.8m’봉에 올라선다. 어떤 이들은 이곳을 ‘옥새봉(玉璽峰’으로 부르고 있었다. 옥새바위에다 ‘봉(峰)’ 자를 붙이는 건 무리라면서 말이다. 무당집 처마처럼 매달아놓은 수많은 표지기들은 이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는 거나 아닐까?

▼ 옥새봉에서 가파르게 내려선다. 아래로 내려뜨린 데크 계단이 푸른 심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인데, 건너편으로는 잠시 후면 오르게 될 무직산이 흡사 장벽처럼 버티고 있다. 산길은 정비가 잘 되어있다는 느낌이다. 탐방로 주변의 잡목들을 다듬어놓았는가 하면, 조금이라도 위험하다 싶은 곳에는 이런 계단이나 안전로프 심지어는 철제난간까지 설치했다. 또한 갈림길마다 이정표를 세워두었음은 물론이다. 그 방향표지판이 바닥에 떨어졌는데도 보수를 않은 것은 흠이었지만 말이다.

▼ 안부에 이른 산길은 또 다시 가파른 오름짓을 시작한다. 아니 내려올 때보다 훨씬 더 가팔라졌다. 그래선지 바위 사이에다 설치해놓은 계단마저도 ‘갈 지(之)’ 자를 쓰고 나서야 겨우 고도를 높인다.

▼ 계단을 올라서면 ‘제1전망대’가 나온다. 무직산의 전면을 장식하고 있는 수직의 절벽 위에다 데크로 전망대를 만들었다. 전망대 아래의 절벽은 그 모양이 마치 성벽을 쌓아 놓은 것처럼 생겼다고 한다. 그런 생김새로 인해 이 산에서 ‘무직’이란 장군이 살고 있었다는 전설까지 만들어냈단다.

▼ 전망대에 서자 기막힌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태극모양으로 휘돌아가는 치천(緇川)의 물길이 우리나라의 지도를 쏙 빼다 닮은 그림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저런 형상은 정선의 ‘병방치’ 및 ‘상정바위’, 영월 ‘선암마을’, 영동 ‘월류봉’, 나주 ‘느러지’ 등 네댓 곳에서만 만날 수 있다. 그만큼 희귀한 풍경이라는 얘기인데, 그런 기경을 이런 오지의 산에 만난 것이다. 그것도 괜찮은 그림이다. 다른 곳보다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렇다고 썩 뒤지지도 않는 형상을 그려내고 있다.

▼ 전망대 이후는 가파른 오르막길의 연속이다. 엄청나게 가파른 구간도 있다. 오죽했으면 밧줄난간까지 설치해 놓았을까.

▼ 숨이 턱에 차게 20분쯤 오르자 오른편으로 길이 하나 나뉜다. 율북리의 통안마을에서 올라오는 길인데 이곳의 이정표(무직산 0.4㎞/ 통안마을 1.7㎞/ 금평마을 2.25㎞)도 방향표시판이 두 개나 땅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얼마 전,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이곳 지자체에서 대대적으로 등산로를 개설하고 정비해왔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도 저 모양이라면 그들이 한 다른 행정 행위들은 또 어떻겠는가. 한심한 일이다.

▼ 이후부터는 경사가 거의 없는 순한 길이 이어진다. 가끔은 가팔라지기도 하나 아까에 비할 바는 아니고 거기다 거리까지도 짧다. 그렇게 5분쯤 걷자 오르막이 끝나는 곳에 산불감시초소가 버티고 있다. 무직산의 정상에 올라선 것이다. 초소를 지키던 산불감시원이 반기는 걸 보면 빼어난 산세에 비해 찾는 이들은 무척 적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참고로 무직산은 회문산과 관련된 풍수지리설에 등장한다. 증산교 교주 강증산이 말하는 다섯 신선이 바둑을 두는 오선위기(五仙圍基) 형상이라는 것이다. 회문산 정상(회문봉)이 주인이고, 서쪽 신선봉(장군봉)과 남쪽 무직산은 바둑을 두고, 동쪽 성미산과 서쪽 여분산은 훈수를 하는 형상이라고 한다. 들머리에서 정상까지는 정확히 1시간 10분이 걸렸다. 

▼ 두세 평이나 됨직한 좁아터진 정상에는 생소한 모양새의 정상석이 설치되어 있었다. 말뚝처럼 돌기둥을 심어놓고 그 윗면에다 이곳이 ‘무직산 정상(578.5m)’임을 표시했다. 하지만 먼저 다녀간 이들의 기록은 대부분 정상을 다른 곳으로 지적하고 있었다. 이 정상석이 세워진지 얼마 되지 않는다는 증거일 것이다.

▼ 정상에서의 조망은 빼어난 편이다. 한국의 5대 명당이 있다는 회문산이 북쪽으로 보이는가 하면, 서쪽으로는 추월산과, 광덕산 다가온다. 반대편에도 산중 고을인 순창의 수많은 산들이 첩첩이 쌓여있다. 그 뒤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것은 남원고을의 산들이 분명하다. 어머니의 품새라는 지리산이 고리봉에서 문덕봉으로 이어지는 마룻금을 포근히 감싸주고 있는 모양새이다.

▼ 하산을 시작한다. 50m쯤 걷자 능선이 갑자기 바윗길로 변한다. 온통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아름답기 짝이 없는 능선이다. 맞다. 무직산은 ‘옥돌 무(珷)’에 ‘짤 직(織)’ 자를 쓴다. ‘옥돌로 짠 산’이란 의미의 낱말을 어디 허투루 사용할 수 있겠는가. 저렇게 빼어난 산세가 있었기에 그런 이름이 가능했을 것이다. 참! 선답자들은 이곳을 정상으로 적고 있었다. 자연석으로 성벽을 쌓은 것처럼 생긴 바위봉우리로 표현하면서 소나무에 앙증맞은 표지판이 걸려있다고 했다.

▼ 뒤돌아보니 방금 넘어온 바위가 사람의 머리에 사자의 몸매를 한 스핑크스(sphinx)처럼 생겼다. 사람의 얼굴치고는 한참 못생겼지만 몸통은 영락없는 스핑크스다. 하지만 산행을 끝내고 확인해보니 이 바위는 무직산에 널린 기암괴석 가운데 하나일 뿐이란다. 이렇듯 무직산은 수려한 자연환경과 볼거리를 간직하고 있는 산이다. 송림과 아기자기한 암릉, 수려한 경치, 사방이 탁 트인 조망, 명산이 갖추고 있는 요소들을 어느 하나 빼먹지 않았으니 무직산을 명산의 반열에 올려놓아도 손색이 없다 하겠다. 거기다 호정소 수변산책로 따라 돌아오는 원점회귀 산행까지 가능하지 않겠는가.

▼ 또 다른 바위는 개를 닮았다. 동네 어귀를 어슬렁거리던 누렁이를 쏙 빼닮았다. 이뿐 아니라 이 부근은 눈만 아니라 가슴에까지 담아두어도 충분할 만큼 잘 생긴 바위들이 수두룩하다.

▼ 기암괴석에 홀려 기웃거리다보니 어느덧 두 번째 한반도지형 전망대이다. 이곳도 역시 날카롭게 선 바위절벽 위에다 전망대를 걸쳐놓았다. 다만 한반도처럼 생긴 지형을 정면 대신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것만 다를 뿐이다.

▼ 전망대에 서면 물돌이 남쪽 끝에서 움푹한 호정소가 얼굴을 내민다. 하지만 한반도의 생김새는 아까의 제1전망대보다 훨씬 못하다. 한반도라기보다는 차라리 남성의 생식기라고 하는 게 나을 듯. 그래서 금평마을 사람들이 호정소가 ‘U’자 모양의 여자 자궁이며, 한반도 모양의 지형을 자궁에 삽입된 성난 남근으로 보는지도 모르겠다.

▼ 고개를 돌리면 순창과 임실을 가르는 회문산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회문산은 첩첩산중을 이루고 있는 데다, 서쪽을 제외한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어 예로부터 천혜의 요새로 알려져 왔다. 그래선지 역사적으로도 많은 사연을 품고 있다. 동학혁명과 구한말 의병활동의 근거지였고, 빨치산 전북도당 유격대 사령부가 이곳에 자리 잡고 오랫동안 저항한 곳으로 소설 ‘남부군’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천주교의 전래 초기에 순교한 이들의 묘가 안치된 성지이며, 비현세적 삶을 사는 갱정유도(更定儒道)의 발상지도 회문산의 ‘금강암’이다.

▼ 전망대에서 내려가는 길엔 계단이 길게 놓여있다. 덕분에 회문산 방향의 조망이 다시 한 번 펼쳐지는데, 그 중심에는 이성계와의 인연을 내세우는 ‘산내마을’이 있다. 고려 말쯤 만일사에 머무르던 무학대사를 찾아가던 이성계가 이 마을의 어느 농가에서 고추장의 전신으로 여겨지는 ‘초시’를 반찬 삼아 점심을 얻어먹었더란다. 그런데 배가 너무 고팠던 탓인지 그게 엄청나게 맛있었던 모양이다. 훗날 조선을 세운 이성계가 당시의 맛을 잊지 못해, 순창군수에게 고추장을 진상할 것을 명했다니 말이다. 그게 조선시대 말까지 궁궐에서 쓰는 고추장의 역사가 되었단다.

▼ 조금 더 걷자 크고 동그란 바위 하나가 산내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부처님을 닮았다는 ‘불(佛) 바위’이다. 사람의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모가지 바위’라고도 불린단다. 등산객들은 또 ‘스핑크스 바위’라는 이름으로 부른단다. 조형미가 부족한 내 눈에는 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대만의 야류지질공원에서 보았던 ‘여왕머리 바위(女王頭)’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 뭔가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형상의 바위가 있어 카메라에 담아봤다. 그 생김새에 얻어온 ‘두꺼비’라는 어엿한 이름을 갖고 있는 바위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생쥐바위’나 ‘카멜레온바위’라고도 부른다.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그 생김새가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바라보는 사람들의 입맛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 두꺼비바위에서 산길은 갑자기 고도를 떨어뜨린다. 밧줄난간에 의지하지 않고는 내려서기가 난감할 정도의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동절기나 우기에는 안전사고에 주의해야겠다.

▼ 다행히도 그 가파름은 잠깐이며 끝난다. 그리고는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조금씩 고도를 낮추어간다.

▼ 잠시 후 무직산의 또 다른 자랑거리인 칼날능선에 올라섰다. 흡사 공룡의 등줄기라도 되려는 듯 바위능선이 날카롭게 솟아오른 능선이다. 능선은 양쪽이 모두 서슬 시퍼런 절벽.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철제난간을 세워놓았으니 행여 다리라도 후들거릴 경우에는 이에 의지하면 된다. 정상에서 이곳까지는 30분이 걸렸다.

▼ 칼날능선에서의 조망도 뛰어나다. 조망의 백미인 한반도 지형은 물론이고, 그 뒤를 받쳐주고 있는 강천산과 추월산 등도 한눈에 쏙 들어온다. 그나저나 보면 볼수록 아름다운 풍경이다.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한 한국의 어느 산악인은 ‘눈으로 마시고 가슴으로 담는다’는 표현을 썼었다. 맞다. 나도 오늘은 그리해보자. 그래야 저 아름다운 풍광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담아갈 수 있지 않겠는가.

▼ 칼날능선에서 내려서는 구간도 역시 바윗길이다. 이곳은 안전시설도 없다. 하지만 조금만 주의하면 서서도 내려갈 수 있으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 바윗길이 끝난 다음에도 가파른 내리막길은 조금 더 계속된다. 그러다가 밀양 박 씨 묘 이후부터는 평지와 다름없어진다.

▼ 잠시 후, 발복한 후손들이 썼음직한 묘역이 나타난다. 그러고 보니 산행 중에도 꽤 많은 무덤들을 볼 수 있었다. 그중 한둘은 후손들이 찾아보기도 힘들 정도로 높은 곳에다 쓰기도 했다. 어쩌면 명당을 찾다보니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이곳 회문산 일대는 우리나라 5대 명당(明堂) 중의 하나라고 하지 않았던가. 홍문대사(홍성문)가 이곳에서 도통(道通)한 후, 묘혈(墓穴)과 관련된 책자를 적었는데, 이 책에서 회문산 정상에 24혈이 있다며, 오선위기혈에 묘를 쓰면 당대부터 발복하여 59대까지 간다고 했다니, 어느 누가 조상의 묘를 쓰지 않고 배겨내겠는가?

▼ 묘역을 빠져나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임도에 내려선다. 무직산 산행이 끝난 것이다. 정상에서 1시간쯤 되는 지점인데, 이후부터는 ‘호정소 수변산책로’를 따라 걷게 된다. 산행을 시작했던 ‘금평교’까지인데 호정소의 물길을 따라 조성된 탐방로라 해서 ‘호정소 수변산책로’라는 이름이 붙었다.

▼ 탐방로는 이제 치천의 제방을 따른다. 호정소는 원래 물이 맑기로 유명하다. 게다가 기암괴석들까지 널려있어 눈에 들어오는 풍경마다 한 폭의 산수화가 된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이다. 참! 아래 사진에서 치천 뒤로 보이는 바위절벽은 ‘부채바위’라고 했다.

▼ 풍경이 예쁜 그림은 물길을 건너는 다리마저도 아름답게 만드는 모양이다. 흔하디흔한 잠수교마저도 풍경화를 완성시키는 화룡첨정이 될 수 있는 걸 보면 말이다. 그건 그렇고 저 다리를 건넌 다음 조금만 더 내려가면 안심마을에 이른다고 했다. 마을 앞 천변에다 각을 짓고 미륵불을 모시는 마을로 유명하다. 전설에 의하면 큰 비로 인해 마을이 물에 잠길 뻔했으나 이 미륵불로 인해 침수 피해를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침수피해를 면한 마을 사람들이 미륵불을 물에서 건져냈고, 매년 정월 제사를 지내오고 있단다.

▼ 치천 너머로 보이는 저 고갯마루는 옛날 지게를 지고 넘던 고갯길인 ‘노루목재’이다. 산행을 하는 내내 바라보던 ‘한반도 지형’의 모가지 부분인데, 이 지형은 회문산에서 쭉 뻗어 나온 산줄기가 목을 길게 하고 호정소에서 물을 마시는 ‘노루형’으로 생겼다고 한다. 그런데 저 고갯마루에 도로가 생기면서 마을에 재앙이 생기기 시작했단다. 노루목재에 길을 뚫으면서 장정 11명 정도가 영문도 모르게 죽어갔다는 것이다. 노루목이 잘려나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주민들이 부랴부랴 노루목 부분을 현재와 같은 철제로 지붕을 만들어 재를 연결하는 공사를 한 후부터 별다른 화는 없었다고 한다.

▼ 오른편에서 따라 오는 치천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세찬 물길에 괴성을 지르는 기암괴석에 너른 갈대밭까지 더했다. 호정소 풍경은 4~5월 강가에 버들이 필 때와 10월 황금 들녘 때가 특히 아름답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우린 때를 제대로 맞춰 찾아왔다고 보겠다.

▼ 산책로는 ‘밀양 박씨 세장산’ 표지석을 지나면서부터 태고의 풍경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태극 모양으로 물길이 휘돌아 감기는 물돌이 지형, 즉 감입곡류하천(嵌入曲流河川)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하천이 원래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오랜 세월 동안 지반의 융기 또는 침식을 반복하며 깊게 팬 것이라는데, 그 정점에 호정소(湖瀞沼)가 있다. 이런 명소를 지자체에서 그냥 놓아둘 리가 없다. 강변을 따라 데크 탐방로를 놓고 호정소에는 전망대까지 만들어두었다.

▼ 호정소 앞의 바위에는 공룡발자국이 새겨져 있다고 했다. 하지만 직접 확인해보는 것까지는 그만두기로 했다. 까짓 사도와 추도, 낭도로도 모자라 고성의 상족암까지 찾아가서 실컷 보지 않았던가. 그건 그렇고 물길 건너는 아까 무직산에서 바라보이던 우리나라 지형의 하단부이다. 뽈록하게 튀어나온 형상인데 인근 사람들은 이게 움푹 팬 호정소를 마주보고 있어 풍수지리상 음양이 조화를 이루는 모양새라고 한단다. 발기한 남근이 유(U)자 모양의 자궁에 삽입된 형태라는 것이다.

▼ 수변산책로 탐방의 백미는 호정소다. 유난히 넓은 웅덩이에 못된 이무기가 살고 있어서 비린 생선을 먹고 지나가면 나타나서 문다는 전설까지도 재미있다. 그나저나 이 아름다운 하천은 섬진강 시인 김용택이 태어난 임실 진메마을 앞에서 섬진강이란 이름으로 합류된다.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이니 김용택시인이 이곳을 다녀가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그가 읊조린 싯귀. 그 아름다운 구절들 가운데 하나쯤은 이곳 치천의 풍경도 들어있을 것이다.

▼ 바위를 스쳐가는 물길은 맑디맑다. 이런 환경이 있었기에 순창의 명물인 고추장이 태어났을 것이다. 깊은 산골에서 흘러나온 맑은 물과 여름철 장마 때 떠내려 온 토사가 만들어놓은 비옥한 토지에서 생산된 쌀, 그리고 배수가 잘 되는 비탈진 밭에서 자란 고추가 합쳐지면서 순창 고추장으로 승화되었기 때문이다.

▼ 산행날머리는 금평교(원점회귀)

호정소를 지나면 탐방로는 또 다시 흙길로 변한다. 왼편에는 심심찮게 과수원을 나타나고, 오른편으로는 잔잔한 물길이 따라온다. 저 물속에는 다슬기가 지천이란다. 그렇다면 다슬기를 먹이로 하는 반딧불이가 많을 것은 어쩌면 당연한 노릇. 거기다 운이 좋으면 물가에서 노닐고 있는 수달도 만날 수 있다니 밤나들이도 괜찮은 일정이 될 수 있겠다. 그나저나 강변으로 내려선지 30분 만에 금평교에 도착하면서 오늘 산행은 종료됐다. 오늘은 7.2㎞를 걷는데 2시간 45분이 걸렸다. 비록 꼴찌로 산행을 마쳤지만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 오늘 산행은 보너스까지 주어졌다. 산악회에서 무직산 산행에 더해 순창의 진산인 ‘금산(錦山)’까지 오를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순창읍의 중심이랄 수 있는 ‘터미널사거리’에서 광주방면으로 잠시 진행하다가 순창경찰서를 오른편에 끼고 우회전하면 순창여중이 나온다. 이곳에서 200m쯤 더 올라가면 지하차도가 나오고 이를 통과하면 ‘실상암’ 표지석이 큼지막하게 세워져 있다. 금산의 산행들머리인데, 그 옆의 ‘일절유심조 신불심(一切唯心造 信佛心)’라는 비석이 더 눈길을 끈다. 까짓 신불심이야 절간이려니 처도,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나의 마음가짐 하나하나에 좌우된다니 이 얼마나 의미심장한 말인가.

▼ 먼저 ‘실상암(實相庵)’부터 들러보기로 했다. 순창 읍내에 자리하고 있는 이 암자는 1936년 순창읍 순화리에 거주하는 이가화(일명 正實行)와 주운대사(柱雲大師)의 제기로 창건했다고 한다. 이 절을 창건할 때 순창여자중학교에 위치하고 있는 3층석탑(전북 유형문화재 제26호)으로부터 상서로운 빛이 이곳에 비쳤다고 해서 절 이름을 실상암이라 지었다고 한다. 인기척을 느낄 수 없는 경내에는 대웅전, 요사채 2동, 석탑, 관음보살상이 있었다.(Daum 백과에서 발췌하여 정리)

▼ 등산로를 가운데에 두고 왼편에는 순평사(淳平寺)가 있다. 이 절도 역시 인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그러니 누가 언제 어떤 연유로 지었는지 알 수 없을 수밖에. 들리는 얘기로는 따로 법당도 없이 여승 몇이 주석하는 인법당(因法堂)으로 유지되어오다가 1995년 대웅전을 새로 짓고 불상도 모셨다고 하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아니 조계종 원로의원이던 ‘활안 대종사’의 이력에 이곳이 포함되어 있는 걸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을 것이다. 스님이 1945년부터 5년간 이곳에서 행자생활을 했다니 말이다. 하지만 이 절에는 조선시대 초기의 작품이라는 ‘금동여래좌상(金銅如來坐像)’를 보유하고 있었다. 비록 다른 사찰의 것을 옮겨다 놓았다지만 명색이 전라북도의 유형문화재(165호)이니 한번쯤 살펴볼 일이다.

▼ 자 이젠 산행을 나서보자. 탐방로는 한마디로 곱다. 널찍한 길은 윤기가 돌 정도로 정비가 잘 되어 있다. 경사가 조금이라도 있다 싶으면 어김없이 침목 계단을 놓았고, 흙길을 고집하는 사람들에게는 야자매트를 깔아 질퍽거리지 않고도 오르내릴 수 있도록 했다. 거기다 조망이 좋거나 아름다운 숲길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벤치를 놓았다. 언제든 쉬어가라고, 자기 속도로 가라고, 천천히 가도 괜찮다고 속삭이는 듯하다. 나무와 함께 어우러진 의자 자체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 10분쯤 올랐을까 길이 둘(이정표 : 팔각정↑/ 오솔길←/ 순평사↓)로 나뉜다. 침목계단이 놓여있는 오른편은 팔각정을 거쳐 금산의 정상으로 연결된다. 왼편도 역시 정상으로 연결된다. 다만 오솔길을 걷게 된다는 것만 다를 뿐이다. 아니 팔각정을 거치지 않는다는 것도 다르다 하겠다.

▼ 삼거리를 지나면서 탐방로는 180도로 변한다. 엄청나게 가팔라져 버린 것이다. 덕분에 이 구간은 계단에서 시작해 계단에서 끝난다. 심지어는 바위에다 철제계단까지 걸쳐놓았다. 그냥은 오를 수 없을 정도로 비탈진데다 또 어떤 곳에서는 거대한 암벽까지 길을 막아서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 숨이 턱에 차게 15분을 올라서니 금성정(禽鍟亭)이란 현판을 달고 있는 팔각정이 반긴다. 주변에는 운동기구와 벤치를 설치해 주민들의 건강지킴이 휴식공간으로 만들었다. 그만큼 순창 사람들에게 가까운 산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금산은 순창이라는 동네의 뒷산이다. 제주도에 한라산이 있고, 남원에 지리산이 있듯이 이곳 순창에는 금산이 있다.

▼ 팔각정에 오르니 순창 읍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발아래에 있는 순창여중은 물론이고 경천을 가로지르며 지나가는 시가지가 널따랗게 펼쳐진다. 하지만 고층건물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 흔한 아파트도 이곳에서는 귀하신 몸이 된다. 그만큼 낙후된 지역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 팔각정을 지나면서부터는 바윗길의 연속이다. 덕분에 어설프게나마 릿찌 산행도 즐겨볼 수 있다.

▼ 산행을 시작한지 35분 만에 정상에 올랐다. 구릉을 연상시키는 정상에는 오석으로 만든 정상석과 삼각점(순창 23), 그리고 이정표(골프장/ 오솔길←/ 팔각정↓)가 지키고 있었다. 참고로 금산(錦山, 432.9m)은 일명 추산(追山)으로도 불리며 순창의 북쪽에 솟은 순창읍의 기(氣)를 조성하는 진산이다. 금산이란 이름은 풍수지리상 옥녀가 비단을 짜는 옥녀직금(玉女織金) 형상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풍수지리의 대가인 홍성문대사가 지은 회문산가에서 그 유래를 찾는 사람들도 있다. 책에 기술된 ‘천마는 동주(東走)하고 홍안(鴻雁)은 남비(南飛)로다.’를 ‘말은 동쪽으로 달리고 기러기는 남쪽인 순창읍 방향으로 날아간다’로 해석하면서 ‘비단 금(錦)’자 대신에 기러기가 내려앉는 형상의 ‘새 금(禽)’자를 쓴다는 것이다.

▼ 정상에서의 조망은 그야말로 일품이다. 북쪽은 두류봉과 성미산 너머로 회문산과 백련산이 지켜주고, 동쪽은 건지산과 채계산 너머로 문덕봉과 고리봉이 솟구쳐 올랐다. 청명한 날에는 지리산까지 보인다지만 오늘은 거기까지가 다이다.

▼ 다른 일행들은 골프장 방향으로 넘어가 반대편 산릉을 타고 출발지로 되돌아온다지만 우리 부부는 이곳에서 오솔길을 따라 하산하기로 했다. 버스로 이동해서 오르게 될 무직산에 대한 체력안배용 배려이다. 내려가는 길은 ‘갈 지(之)’자를 쓰면서 서서히 고도를 낮춰간다. 바닥에 내려서자 소나무 숲길이 반긴다. 그런데 소나무가 다른 지역에 비해 유난히도 곧게 자랐다. 이 지역 사람들의 올곧은 정신을 닮아서일지도 모르겠다. 이곳 순창이 녹두장군 전봉준의 마지막 항거지이자, 면암 최익현이 항일 무장투쟁을 벌였던 곳이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 단종 때의 선비 신말주(신숙주의 동생)가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해 칩거했으며, 중종 때는 순창·담양·무안 고을의 수령들이 목숨을 걸고 단경왕후(端敬王后)의 복위를 결의했던 곳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