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대산(靈臺山, 666m)-오봉산(五峰山, 625m)-칠봉산(七峰山, 524m)

 

여행일 : ‘17. 2. 21()

소재지 : 전북 임실군 성수면과 장수군 산서면의 경계

산행코스 : 구암마을회관구암소류지임도열두구부(이정표)영등할매바위뒷재임실 영대산장수 영대산(왕복)당재오봉산분통골정상칠봉산전망데크아침재(산행시간 : 3시간)

 

함께한 사람들 : 갤러리산악회


특징 : 장수 5악 중의 하나라는 영대산을 위시해서 오봉산, 칠봉산 등 오늘 오른 산들은 모두가 다 전형적인 육산(肉山)들이다. 때문에 가슴에 담을 만한 산세는 보여주지 못한다. 기억에 남을 만한 눈요깃거리 또한 없다. 조망도 마찬가지이다. 영대산 정상과 오봉산 등 산불이 휩쓸고 지나간 지역 외에는 보잘 것이 없다. 흙산이 갖고 있는 일반적인 특징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둘러볼만한 고찰(古刹)이 있는 것도 아니다. 만일 압계서원까지 없었더라면 기억에 남을 만한 볼거리가 전무했을 것이다. 극에 달한 지역 이기주의를 빼놓았을 경우엔 말이다. 하지만 좋은 점도 있다. 보드라운 흙길이라서 오래 걸어도 부담이 없기 때문이다. 거기다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는 능선의 경사(傾斜) 또한 거의 없는 편이다. 운동 삼아 산을 찾은 사람들에게는 좋은 코스일 수도 있겠다. 아무튼 오지(奧地)의 산들을 찾아다니는 사람이 아니라면 일부러 찾아올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산행들머리는 구암마을회관(장수군 장수읍 대성리)

순천-완주고속도로 오수 I.C에서 내려와 13번 국도를 타고 장수방면으로 달리다 산서면소재지인 동화리의 산서정류장 앞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군도(郡道. 동백로)를 따라 들어가다 학선리 삼거리(압곡마을 조금 못미처)에서 또 다시 좌회전 하면 잠시 후에 구암마을에 이르게 된다.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마을회관의 옆으로 난 마을 안길로 들어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하지만 먼저 들러봐야 할 곳이 하나 있다. 이왕에 이곳 학선리(귀암촌)까지 왔으니 말이다. 바로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35로 지정되어 있는 압계서원(鴨溪書院)이다. 그러나 마을 왼편의 산자락에 숨어있는 듯 자리를 잡고 있는 사원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위치를 알려주는 이정표 또한 찾아볼 수 없다. 별수 없이 동네 어르신을 찾아 방향을 물어보기로 한다. 그리고 난 그네들의 친절을 마주하는 행운을 얻을 수가 있었다. 서원까지 직접 안내를 해주시는가 하면, 잠겨 있는 사당의 문까지 열어줘 모시고 있는 분들의 위패를 직접 참배할 수 있도록 해주신 것이다. 참고로 압계라는 이름은 서원 앞을 흐르는 개울()에서 따온 것이란다.



압계서원(鴨溪書院)1789(정조 13)에 지방 유림의 공의(共議)로 창건되었다. 처음에는 고려의 명신 육려(陸麗)와 임옥산(林玉山), 박이항(朴以恒) 3인의 신위(神位)를 모시다가 1798(정조 22)에 박이겸(朴以謙)을 그리고 1799년에는 전설(全渫)을 추가 배향함으로써 모두 다섯 분의 위패가 봉안되었으며, 이때 강당 울흥재(蔚興齋)를 건립하였다. 그 후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해오던 중 1868(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후손과 유림에 의하여 유허지(遺墟地)에 제단을 마련하고 향사를 계속하여 왔다. 그러다가 1958년에 후손의 협력으로 서원을 복원하면서 후손의 의견에 따라 전설(全渫)을 향사에서 제외시켰다. 반면에 1960년대 전라북도 유림회의 공의에 따라 문암 육홍진(陸洪鎭)을 추가 배향하였다.



아래의 건물은 신주(神主)를 모셔놓은 사우(祠宇)인 압계사(鴨溪祠)이다. 이밖에도 서원의 강당으로 사용하는 4칸짜리 울흥재(蔚興齋. 위의 사진)와 상의문(尙義門), 산앙문(山仰門), 협문(夾門), 고사(庫舍) 등이 있다.



마을로 되돌아 나와 마을안길을 통과한다. 마을회관 앞에 이정표(영대산 등산로 입구 0.58Km)가 세워져 있어 어렵지 않게 방향을 잡을 수 있다. 이어서 시멘트로 포장된 농로를 따라 부지런히 걸으면 6분 후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버티고 있는 작은 저수지를 만난다. 겨울 가뭄이라도 들었는지 거의 바닥을 드러내놓고 있다.




저수지 앞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 3분 후에는 차량이 회전할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공터에 이른다. 마을회관 앞의 이정표에 적혀있던 등산로 입구인 모양이다. 들머리에는 이정표(영대산 2.48Km, 무수밭골 0.555Km) 외에도 커다란 등산안내도를 세워져 놓았다. 장수군 관할 지역만 그려놓은 반쪽짜리 지도에 불과하지만 한번쯤 살펴보고 난 뒤에 산행을 시작하는 것도 좋을 듯 싶다. 영대산 정상까지 올라가는 데는 많은 도움이 될 테니까 말이다.



개설한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임도(林道)를 따라 들어가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첫 번째로 임도가 방향을 트는 곳에 이르자 산악회에서 깔아놓은 진행방향표시지가 오른편 계곡을 가리킨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지시였다. 오래 전에는 이 길로 다녔었는지 몰라도 지금은 잡목(雜木)만이 무성했기 때문이다. 5~6분 정도를 헤매면서 싸대기 두어 대를 얻어맞고 난 뒤에야 임도에 다시 올라선다. 곧장 임도를 따랐으면 되었을 것을 일부러 사서 고생을 한 꼴이 되어버렸다.



이번에도 임도가 방향을 튼다. 이곳도 역시 왼편방향으로 틀고 있다. 등산로는 이곳에서 임도를 벗어난다. 절개지(切開地) 사면(斜面)을 따라 돌계단을 놓고, 밧줄난간까지 설치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등산로는 정비가 잘 되어있다. 그것도 최근에 정비를 한 모양이다. 가파른 곳에는 돌이나 통나무를 이용하여 계단을 설치했다.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에는 어김없이 이정표를 세워두었다. 곳곳에 벤치를 놓아두는 배려도 잊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그렇게 잠시 오르면 등산로가 오른편으로 크게 방향을 튼다. 이곳에 세워진 이정표(열두구부0.365Km/ 쇠종골0.555Km)의 하단에 무수밭골이라고 적혀있다. ’무수란 일년생 채소인 무의 또 다른 표현이다. 지역에 따라서 무수 또는 무시라고 불리는데 이 지역에서는 무수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하지만 밭을 만들 만한 터는 보이지 않는다. 지명에 대한 의심이 드는 순간이다. ’쇠종골이라는 지명 역시 마찬가지이다. ’쇠종이란 쇠로 만든 종()을 뜻하는 말일 게다. 그렇다면 절집이 있는 골짜기를 나타내는 지명이 분명할 텐데,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그곳, 즉 아까 산행을 시작했던 들머리에서는 그런 절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북한지역에서는 큰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란다고 해서 무수골이라는 지명을 쓰기고 한단다. 이곳에서도 그런 의도로 쓰였을지 몰라서 거론해봤다.



산길은 사면(斜面)을 따라 나있다. 왼편 산자락에 바위들이 들어앉았지만 암릉으로 치기에는 조금 옹색하다. 어이서 조금은 펑퍼짐해진 산자락을 따라 잠시 오르면 임도로 다시 올라서게 된다. 무수밭골에서 7, 마을에서 산행을 시작한지는 30분이 지났다.



새로 만든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임도(林道)를 따라 30~40m쯤 걷다가 다시 옛길로 올라선다. 이정표가 없으니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임도를 새로 내느라 길의 흔적 또한 희미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눈대중으로 대충 거리를 재본 다음에 왼편 산자락으로 치고 오르는 수밖에 없지 않나 싶다. 10m쯤 위에서 통나무계단을 만났다면 제대로 올라온 셈이다.



잠시 후 능선에 올라선다. 그리고 그곳에서 '열두구부'라는 낯선 지명이 적혀있는 이정표(큰영두0.490Km/ 무수밭골0.365Km)를 만난다. 흑산도에 가면 열두구비도로라는 지명이 있다. 흑산도아가씨 노래비가 서있는 언덕으로 올라가는 도로이다. 그렇다면 이곳도 역시 열두 곳에서 구부러졌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표현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화순에도 열두구비재가 있으니 참조한다.



열두구부의 바로 위에서 산길은 능선을 버린다. 그리고 산자락을 옆으로 째면서 이어진다. 벼랑에 가까운 사면(斜面)으로 길이 나있지만 위험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길의 폭이 생각보다 넓기 때문이다. 그저 굽이굽이 돌고 있는 산길을 걸으며 열두구부라는 지명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볼 따름이다.




산허리를 감아 돌자 작은 계곡에 벤치 두어 개를 놓은 쉼터가 조성되어 있다. 쉼터에는 안내판과 함께 작은 돌 하나가 서있다. 생김새로 보아서는 영락없는 제주도의 돌하르방이다. 하지만 이 바위는 '영등할매라는 어엿한 이름을 갖고 있다. 곁에 세워진 이정표(뒷재 0.320Km/ 열두구부 0.490Km)에는 이곳의 지명을 큰영두라고 적어놓았다. 안내판을 보니 영등할미를 이곳에서는 영두할미라고도 부르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작은 영등할매라는 바위가 또 하나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눈에 띄지는 않았다.



안내판의 글을 대충 옮겨본다. 음력으로 2월을 우리조상들은 영등맞이를 하는 바람달또는 영등달이라고 불렀다. 2월 초하루 오전1시경에 바람의 여신인 영등이 하늘에서 내려와 인간들의 생활을 하나하나 살피고 다니다가 보름날이나 20일쯤에 다시 올라가기 때문이다. 영등이 내려오는 2월 초하루를 '영등날', 바람님날'이라고 부르는데 보통 이때부터 꽃샘바람이 분다고 한다. 매년 2월에 이 영등할매(바람의신) 바위에 제사를 지내는데, 자식을 낳지 못하는 여성들이 지극정성으로 치성을 드리면 자식을 낳는다는 전설도 있다. 옛날엔 상사화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으며 나무꾼들의 쉼터이기도 했단다. 그 하단에는 문헌에 의하면 영등할미(영두 할미바위)로도 쓰인다고 적어 놓았다.



큰영두(영등할매바위)를 지나자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두 산줄기의 사이를 왔다갔다 갈지()자로 길이 나있어 오르는 게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기 때문이다.



8분 정도 올라서자 능선안부에 있는 뒷재가 나온다. 삼거리(이정표 : 660고지230m/ 큰영두320m)인 이곳에서 왼쪽 능선을 따라야만 영대산에 이를 수가 있다. 반대편 능선은 지름재를 거쳐 성수산으로 연결되니 참조한다.



뒷재를 지나면서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코에서 흙냄새가 난다고 하던 어떤 이의 말이 생각날 정도로 가파르기 짝이 없는 오르막길이다. 그 길이가 짧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 아닐까 싶다. 7분 정도면 임실 영대산에 올라설 수 있기 때문이다.



잠깐의 힘겨루기가 끝나면 ’666고지에 올라선다. ‘임실 영대산으로 불리는 봉우리이다. 10평도 훨씬 넘는 널따란 정상은 벤치 몇 개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힘겹게 올라온 이들을 위한 배려일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낯선 풍경을 대하게 된다. 접경을 이루고 있는 임실군과 장수군에서 따로따로 이정표를 세워놓은 것이다. 이곳의 지명 또한 다르게 적었다. 임실군에서 세운 이정표(오봉산 1.44Km/ 구름재 4.78Km)영대산으로 표기한 반면에 장수군의 이정표(영대산0.410Km/ 오봉산1.44Km, 아침재 4.48Km/ 뒷재0.230Km)‘666고지라고 이곳의 높이를 지명으로 나타냈다. 지독한 지역 이기주의가 아닐까 싶다. 영대산의 정상이 서로 자기 것이라고 우기고 있는 것이다. 차분하게 다시 거론해보자. 장수군에서는 이곳이 임실 영대산이라는 것을 부정한다. 그저 아무런 의미도 없는 666m 높이의 산봉우리라고 치부해버린다. 반면에 이곳이 영대산이라고 주장하는 임실군에서는 이곳에서 400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장수 영대산을 아예 빼먹어 버렸다. 인정 자체가 싫다는 노골적인 의사표시이다. 그러다보니 이정표를 두 개나 설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우리가 낸 혈세(血稅)를 낭비한 셈이 되었고 말이다. 사람들의 눈총을 받아 마땅한 일이 분명하다. 요즘 세간에 떠도는 화두(話頭) 중에 협치(協治)’라는 단어가 있다. 두 군()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협치를 해간다면 좋은 결과가 나오겠기에 거론해봤다. 세금을 낸 민초의 한사람으로서 말이다.




장수 영대산으로 향한다. 가는 길에 웃자란 잡초들이 점령해버린 폐 헬기장을 지났다싶으면 7분 후에는 초장숲 갈림길’(이정표 : 영대산 정상/ 전망데크1.060Km, 초장숲 2.29Km/ 666고지0.410Km)을 만난다. 이정표에 나와 있는 초장 숲은 초장마을에 있는 숲을 뜻한다. 마을회관 뒤쪽에 소나무 숲이 그윽하게 자리 잡고 있는데, ’생명 숲에서 주관한 아름다운 마을 숲부분에서 상()을 받기도 했다니 시간이 날 경우 한번쯤 찾아봐도 좋겠다. 초장이란 이름은 마을의 지형을 풍수적으로 볼 때 마치 풀 속에 뱀이 들어 있는 초중반사(草中盤蛇)’의 형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삼거리에서 몇 걸음만 옮기면 장수 영대산의 정상이다. 서너 평도 채 되지 않는 비좁은 정상에는 공들여 쌓아올린 케언(cairn)과 스테인리스로 된 정상표지 말뚝이 세워져 있다. 높이가 666.3m이니 임실 영대산(666m)’보다는 높은 셈이다. 그게 0.3m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두 지자체에서 영대산을 놓고 서로 자기네 것이라고 우기고 있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자부심을 가져도 되겠다. 이곳에서 주의할 게 하나 있다. 올라왔던 반대방향에 능곡(2.3Km)으로 연결되는 길이 나있지만 임실 영대산으로 되돌아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뛰어난 편이다. 비록 남쪽으로만 열리지만 사방이 꽉 막혀있던 임실 영대산에 비할 바가 아니다. 팔공산(1,151m)과 호남정맥(湖南正脈)이 파노라마(panorama)처럼 펼쳐지는가 하면, 팔공산에서 시작되는 성수지맥(聖壽枝脈) 또한 또렷하게 나타난다. ‘영산영월(靈山迎月)’이란 사자성어(四字成語)가 있다. ‘장수팔경(長水八景)’의 제7경을 말하는데, 이곳 영대산을 풍광을 나타내는 것이란다. 산에 떠오르는 저녁달을 오뫼에서 바라보면 신선이 달 속의 항아선녀를 맞이하는 선경처럼 나타난다는 것이다. 여기서 오뫼란 오산리에 있는 산, 즉 영대산을 이른다. 그만큼 이곳 영대산의 조망이 뛰어나다는 얘기가 될 것이다. 참고로 장수팔경에는 매산청풍(梅山淸風)과 노평낙안(蘆坪落雁), 유천표모(柳川漂母), 용추만풍(龍湫晩風), 단평비폭(丹坪飛瀑), 송탄어적(松灘漁笛), 반계은린(磻溪銀麟) 등이 더 있다.



임실영대산으로 되돌아와 산행을 이어간다. 대체적으로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되지만 어떤 곳에서는 골이 깊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곳에서는 어김없이 가팔라진다. 600m급의 봉우리들을 연결시키는 능선임을 감안할 때 생각보다는 어려운 산행이 이어진다.



그렇게 25분 정도를 진행하면 능선안부에 내려선다. 좌우로 희미하게나마 길의 흔적이 나타나는 걸로 보아 당재인 모양이다. ! 잊고 지나갈 뻔 했다. 고개에 내려서기 바로 직전의 봉우리에서 화마(火魔)가 휩쓸고 간 아픈 상처를 만났다는 것을 말이다. 오산저수지와 그리 넓어 보이지 않는 산서면의 들녘이 나타나지만 사진은 생략한다. 잠시 후에 오르게 될 오봉산에서 바라보는 경치와 거의 비슷하기 때문이다.



당재를 지나면서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거리 또한 제법 멀지만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통나무계단을 놓아 서서히만 오른다면 생각보다는 쉽게 올라설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산불로 인해 훤해져버린 왼편으로 시야(視野)까지 활짝 열린다. 서서히 오르면서 조망을 즐기다보면 힘들다는 생각까지도 잊어버리게 된다. 오산저수지와 산서면의 들녘이 발아래로 펼쳐지는데 아까 보다 폭이 훨씬 더 넓어졌다. 그만큼 고도가 높아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9분 만에 올라선 봉우리에서 이정표(분통골정상 0.32Km/ 오봉산 0.03Km/ 1.44Km) 하나를 만난다. 물론 당재에서부터 걸린 시간이다. 뒤돌아보면 임실영대산과 장수영대산 등 우리가 걸어왔던 산릉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이곳으로 올라오면서 보았던 산서면 방향의 풍경이 계속해서 펼쳐짐은 물론이다.




오른편으로 향한다. 오봉산의 정상이 주능선에서 30m쯤 약간 비켜나있기 때문이다. 대여섯 평쯤 되어 보이는 정상은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관할지자체인 임실군에서는 말뚝 모양의 정상표지목도 세워 놓았다. ‘숲으로 가자는 캐치 프레이즈(catch phrase)를 내걸었는데 높이를 620m로 적어 놓았다. 근처의 나무에는 정상표지판도 매달려 있다. 대구지역 산악인인 김문암씨의 작품이다. 그런데 높이가 625m이다. 둘 중의 하나는 틀렸다는 얘기인데 어떤 것이 틀렸는지는 모르겠다.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물론 분통골정상을 향해서이다. 안부를 향해 내려가는 길은 한마디로 예쁘다. 불에 타다 남은 고사목(枯死木)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고, 그 뒤에 펼쳐지는 산서면의 들녘 또한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하다 할 것이다.



반대방향으로도 시야가 트인다. 발아래에는 오봉저수지가 조용히 웅크리고 있고, 고덕산과 상봉산, 성수산 등이 그 뒤를 바치고 있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산들은 내동산과 덕태산, 선각산 등일 테고 말이다.



또 다시 작은 오르내림 두어 번을 반복하고 나면 15분 후에는 근처에서 가장 높아 보이는 봉우리에 올라서게 된다. 정상에 세워진 이정표(칠봉산0.43Km/ 조치마을1.41Km/ 오봉산0.82Km)는 이곳의 지명을 분통골 정상로 적어놓았다. 보면 볼수록 묘한 이름이다. ’이란 보통 골짜기를 이르는 말이기 때문이다. 골짜기에 어찌 정상이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산행 후에 검색을 해봤으나 그 연유는 끝내 찾을 수가 없었다. 아무튼 이곳에서는 직각(直角)에 가깝게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곧장 진행했을 경우에는 조치마을에서 산행이 끝나버리니 주의한다.



분통골정상을 지나면서 산길은 매우 가팔라진다. 통나무계단을 놓아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내려서는 게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안부에 이른 산길이 이번에는 위로 향한다. 그리고 그 길은 굵직한 소나무들로 가득 찬 능선을 따른다. 은은한 솔향에 취해 걷게 되는 멋진 구간이다.




그렇게 10분쯤 진행하면 이정표(전망데크 1.03Km/ 분통골정상 0.63Km)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삼거리를 만나다. 이정표는 이곳을 칠봉산이라 적고 있다. 하지만 정상은 이곳에서 20m쯤 더 진행해야 만날 수 있으니 주의한다. 이정표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왼편에 보이는 희미한 길로 들어서면 잠시 후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한두 평이나 됨직한 정상에는 정상표지판이 매달려 있다. 이것도 역시 김문암씨의 작품이다. 참고로 이곳 칠봉산에서 곧장 직진하면 미륵암으로 내려가게 된다.



또 다시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된다. 칠봉산이란 이름에 걸맞게 올망졸망한 봉우리들이 계속해서 나타난다. 전망데크까지 30분 조금 못되게 걸리는 이 구간의 특징은 지루하다는 것이다. 육산(肉山)의 특징대로 눈요깃거리가 일절 없기 때문이다. 그저 앞만 보고 걷는 산행이 이어진다.



그게 미안했던지 중간에 시야를 열어주기도 한다. 산불 때문인지 아니면 벌목(伐木)으로 인해선지는 몰라도 왼편 산자락이 텅 비어 있기 때문이다. 발아래에 지사면의 들녘이 펼쳐지는데, 장수나 임실 지방이 대부분 산악지형으로 이루어진 것을 감안할 때 엄청나게 널따랗다고 할 수 있다.



조망을 즐기고 나면 산길은 다시 한 번 고도(高度)를 뚝 떨어뜨린다. 통나무계단을 놓아야 할 정도로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그런 다음에는 위로 향한다. 이번에는 왼편 산자락이 바위벼랑으로 되어있다. 지자체에서는 이게 좀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길가에 밧줄 난간을 만들어 아래로 추락하는 것을 방지했다.




그렇게 30분 조금 못되게 진행하면 데크로 만들어진 전망대(이정표 : 아침재 0.76Km/ 칠봉산 1.03Km)를 만난다. 그다지 넓지 않은 전망대에 오르면 조금 전에 보았던 지사면의 너른 들녘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그 뒤로 보이는 산들은 봉화산과 덕재산 등이 아닐까 싶다. 그 너머에 고개를 내밀고 있는 건 회문산일 것이고 말이다.




본격적인 하산이 시작된다. 제법 가파른 내리막길이지만 소나무 숲을 뚫고 나있어 힘들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는다. 아니 피곤함이 가시면서 오히려 활력이 더 솟구친다고 할 수도 있다. 소나무가 내뿜고 있는 피톤치드(phytoncide)의 영향이 아닐까 싶다. 피톤치드의 효능 중에는 몸으로 스며드는 각종 병균의 살균기능 외에도 심폐기능을 강화시키는 효능도 있다니까 말이다.



산행날머리는 721번 지방도 상의 아침재

콧노래가 저절로 흘러나오게 만드는 멋진 길이 계속된다.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던 노랫가락이 언제부턴가 타령으로 변했다. 그리곤 아직도 익히고 싶은 소망이 채 가시지 않는 판소리로 이어진다. 물론 자작곡인데 앞서가는 집사람이 가만히 있는 걸로 보아 나름대로 격식이 갖추어졌나보다. 그렇게 18분 정도를 내려서자 저 만큼에 아침재가 내려다보이면서 오늘 산행이 끝난다. 오늘 산행은 총 3시간이 걸렸다. 목을 축이느라 중간에 멈추었던 시간이 채 10분을 넘기지 않았으니 오롯이 걷는데 걸린 시간으로 보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