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련산(白蓮山, 754.1m)
여행일 : ‘17. 1. 8(일)
소재지 : 전북 임실군 청운면과 강진면, 운암면의 경계
산행코스 : 수동마을→용소폭포→헬기장→갈담리갈림길→백련산→칠백리고지(706m)→용동마을갈림길→이윤마을→용동마을(산행시간 : 4시간10분)
함께한 사람들 : 기분좋은 산행
특징 : 호남정맥이 진안 성수산으로 북진하는 길목인 팔공산에서 남서쪽으로 가지를 친 능선에 위치한 산으로 아래에서 볼 때에는 바위산으로 보이기도 하나 막상 올라보면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다. 바윗길 한번 걸어보지 않고 산행을 마치게 된다는 얘기이다. 이는 산행 중에 특별히 눈에 담을 만한 비경은 눈에 띄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조망(眺望)만은 뛰어나다. 백련산의 정상 등 산행을 시작하기 전에 보았던 바위지대들의 근처에서 시야가 활짝 열리기 때문이다. 아무튼 걷기 좋은 육산에다 조망까지 뛰어나니 명산의 반열에 올려놓아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한번쯤은 꼭 찾아봐야할 산이라는 얘기이다.
▼ 산행들머리는 학석마을(임실군 강진면 방현리)
완주-순천간고속도로 임실 I.C에서 내려와 30번 국도(745번 지방도와 병행)를 타고 태인·부안방면으로 달리면 임실읍과 청웅면사무소를 지나 강진면(임실군) 소재지인 갈담리가 나온다. 이곳 강진사거리에서 우회전하여 군도(郡道)를 타고 옥정호 방향으로 들어가면 잠시 후 방현마을 입구에 이르게 된다. 군도의 왼쪽 옆구리를 따라 확·포장된 27번 국도가 함께 달리며 버스가 멈추는 들머리 부근에는 버스정류장(방현리)이 설치되어 있으니 참조한다.
▼ 오른편에 보이는 다리를 건너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7분 후 학석마을에 이른다. 마을회관에 ’보건진료소‘ 시설이 들어서있는 것이 제법 규모가 큰 마을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마을 앞으로 난 길이 끝나갈 즈음 길이 둘로 나뉜다. 어디로 가야할 지를 놓고 우왕좌왕하는데 마을주민이 우리를 부른다. 마을 안길을 통과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뭘 보겠다고 이런 산골까지 찾아왔느냐‘면서 말이다. 하긴 이곳 학석마을을 산행들머리로 삼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개설된 등산로도 물론 없다. 그저 선답자들이 오가면서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길의 흔적만이 나있을 따름이다.
▼ 마을 안길을 통과하면 길은 산자락을 따른다. 오른편에는 소나무 묘목들을 심어 놓았다. 분재(盆栽)처럼 예쁘게 자란 것이 공을 들여 키운 흔적이 역력하다. 양묘장이 끝나는 곳에서 또 다시 길이 둘로 나뉜다.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오른편으로 가야하는데도 왼편의 길이 훨씬 더 또렷하기 때문이다. 그저 폭포가 있을만한 계곡, 즉 조금이라도 더 크다 싶은 계곡을 방향으로 삼으면 되지 않을까 싶다. 누가 보더라도 오른편을 꼭 찍겠지만 말이다.
▼ 산비탈을 따라 잠시 오르면 용소폭포가 나타난다. 산행을 시작한지 18분 만이다. 이 폭포는 조금 전에 지나온 마을의 이름을 따서 ’수동폭포‘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으니 참조한다. 그만큼 입소문을 덜 탔다는 증거일 것이다. 아무튼 높이가 10m쯤 되어 보이는 폭포는 빼어난 자태를 자랑한다. 갈수기임에도 불구하고 떨어지는 물줄기 또한 제법 거세다. 세간의 입소문을 탄 유명폭포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보통의 다른 폭포들에는 뒤질 게 하나도 없어 보인다. 이 정도라면 진작부터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을 텐데도 아직까지도 입소문을 타지 않은 이유를 모르겠다.
▼ 폭포의 반대방향으로 나가본다. 바위의 좁은 틈 사이로 물길이 나았다. 그리고 그 끝은 서슬 시퍼런 바위절벽이다. 그러고 보니 이곳 용소폭포는 ‘3단’으로 이루어졌다고 들었던 것 같다. 그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게 높이가 20m쯤 되는 ‘제2폭포’라고 했다. 그는 자태는 아름다우나 가장 규모가 작은 ‘제3폭포’도 있다고 했다. 아무튼 그는 굽이치며 떨어지는 물줄기가 용(龍)이 꿈틀거리는 형상을 흡사하게 닮았다고 하면서 가운데 폭포를 자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절경을 직접 볼 수는 없었다. 그러려면 저 아래로 내려가야만 하는데 일행들은 이미 저만큼에서 달리다시피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 정상으로 가는 길은 폭포의 상단으로 나있다. 이후부터는 계곡과 묵밭을 오가며 이어진다. 정식으로 개설된 등산로가 아니어선지 길은 또렷하지가 않다. 하지만 길을 못 찾을 정도까지는 아니다. 이 코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드물다는 것을 감안해 볼 때 의외가 아닐 수 없다. 이런 곳은 사람들의 발길이 조금만 뜸해도 길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게 보통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이 지역(강진면)의 자율방범대원들이 등산로를 정비하곤 한다는 기사를 읽었던 것 같다. 등산로 주변의 잡목과 잡초를 제거한 것은 물론 이정표 등 편의시설에 대한 보수까지 했다는 내용이었는데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 갑자기 대나무 숲이 나타난다. 부근에는 축대(築臺)였을 것으로 생각되는 흔적들도 보인다. 인가(人家)가 있었지 않았나 싶다. 작은 밭뙈기일망정 어느 것 하나 내버려두지 않던 우리네 아버지 어머니들이라면 능히 그러고도 남았을 것이다.
▼ 산길은 계속해서 계곡을 따른다. ‘물방아골’이란다. 중간에 ‘수통골’과 ‘무너미골’을 지난다는데 웃자란 잡초와 잡목들 때문에 분간할 수는 없었다. 아무튼 계곡에는 물기가 없다. 겨울 가뭄이 생각보다 심했던가 보다. 그게 아니라면 장마 때나 물이 흐르는 건천(乾川)이었을 것이고 말이다.
▼ 그렇게 20분 조금 못되게 진행하면 산길은 계곡을 벗어나 산자락으로 들어선다. 산길은 시작부터 가파르다. 그리고 그 가파름은 시간이 갈수록 더 심해진다. 그냥 치고 오르지를 못하고 왔다갔다 갈지(之)자를 그리고 나서야 고도(高度)를 높여갈 정도라면 어느 정도인지 미루어 짐작이 갈 것이다.
▼ 숨이 턱에 차서 오르기를 20분 남짓, 산길의 경사가 조금 누그러졌다 싶더니 널따란 헬기장이 나온다. 먼저 올라온 일행 몇 명이 바닥에 널브러져 쉬고 있는 게 보인다. 가파른 오르막길이 그만큼 힘들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 헬기장을 지나자마자 갈림길이 나타난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이정표(정상↑ 0.5Km/ 갈담리→ 4.5Km/ 방현리↓ 2.7Km)를 만난다. 오른편에 보이는 길은 강진면의 소재지인 ‘갈담리’에서 올라오는 길이다.
▼ 쓰러진 나무가 길을 막고 있다. 낮게 깔린 탓에 아래로 지나가는 것이 쉽지가 않다. 아니 납작 엎드려야만 겨우 길을 열어줄 정도이다. 아무래도 오늘은 예절교육까지 받아야 하는 날인가 보다 누군가 ‘높이 오를수록 자세를 낮추라’고 했다. 자세를 낮추는 것은 꼭 높은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예절교육은 자세를 낮추는 것부터 시작해보자.
▼ 잠시 후 가파른 오르막길이 다시 시작된다. 아니 아까보다 경사가 더 심해졌다. 이럴 경우에는 한 가지 방법 밖에 없다. 속도를 뚝 떨어뜨린 채로 한 걸음 한 걸음 오르는 것 말이다. 그런 마음을 눈치라도 챘는지 오르막길에는 통나무계단을 깔아 놓았다. 썩어 문드러진 것들이 많기는 하지만 말이다.
▼ 헬기장을 출발해서 20분쯤 지나면 주능선(이정표 : 정상→ 0.2Km/ 갈담리↓ 4.8Km)에 올라선다. 왼편 능선은 사봉과 뻘곡산으로 이어지나 산길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등산객들이 다니지 않는 코스라는 얘기일 것이다. 정상은 물론 오른편 능선을 따르면 된다.
▼ 주능선에 올라선 다음부터는 수월한 산행이 이어진다. 가팔랐던 산길이 사나웠던 그 기세를 뚝 떨어뜨리는 것이다. 그렇게 조금 더 진행하면 이정표(정상 0.1Km/ 갈담 4.9Km)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묘역(墓域)이 나온다. ‘칠백리고지’가 있는 왼편으로도 길이 나있지만 이정표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 또 다시 가팔라진 오르막길을 잠시 오르면 암릉이 나타난다. 벼랑에 가까운 암릉에는 나무계단이 놓여 있다. 3년 전쯤엔가 이곳 지자체에서 백련산의 등산로를 정비했다는 기사(記事)를 본 적이 있는데 그때 만들어 놓은 모양이다. 기사는 강진리(강진면의 소재지인 갈담리를 잘 못 표현한 게 아닐까 싶다)의 등산로 입구에서부터 백련산 정상에 이르는 5.75km 구간을 정비하면서 전망대와 이정표 등의 기본시설은 물론이고 위험구간에는 목재계단을 새로 설치했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었다. 내가 태어난 곳의 바로 이웃에 위치한 산이기에 관심 있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옛날에는 밧줄을 매어놓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초심자들에겐 많이 부담스러운 구간이었을 것 같다.
▼ 계단의 위로 올라서면 시야가 툭 트인다. 아예 벤치까지 놓아둔 걸 보면 푹 쉬면서 조망을 즐겨보라는 모양이다. 일단은 앉고 본다. 인근에서 가장 높은 회문산은 물론이고 원통산과 용궐산 등 주변의 산군들이 빠짐없이 눈에 들어온다. 특히 건너편 산자락에 자리 잡은 ‘임실호국원(任実護國院)’이 눈길을 끈다.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사람들을 사후(死後)에 모시는 국립묘지(國立墓地)이다. 예로부터 국립묘지는 명당(明堂) 중의 명당만을 골라 조성된다고 알려져 있다. 조국을 위해 희생한 영령들을 모시는 곳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영산(靈山)으로 소문난 백련산을 마주보는 곳에 자리 잡은 임실호국원 역시 예외는 아니다. 예로부터 이 지역에는 ‘생거부안(生居扶安) 사후임실(死後任實)’이란 말이 전해져 내려온다. 생전에 살기는 부안이 가장 좋고, 죽어서는 임실에 묻혀야 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국립묘지를 쓸 묘역을 임실 땅에서 찾았을 것이고, 결국에는 ‘조선 8대 명당(明堂)’으로 알려진 백련산을 바라보는 곳에다 ‘임실호국원’을 조성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아무튼 국립묘지에 안장되는 것만으로도 영예인데 명당 풍수까지 갖췄으니 호국원에 묘를 쓴 이들은 명당운까지 누리는 셈이다. 참고로 전국에는 8개의 국립묘지가 있다. 국립묘지의 효시는 물론 국립서울현충원이다. 흔히 동작동 국립묘지로 알려진 곳이다. 전후인 1954년 조성된 이곳은 한국전쟁과 여순사건 등에서 발생한 국군 전사자나 순직자들을 서울 장충사에 안치하면서 국립묘지의 출발이 됐다. 나머지 국립묘지들은 국립대전현충원이 1985년 문을 열었고 이어 국립 4·19민주묘지(4·19혁명)와 5·18민주묘지(광주민주화운동), 3·15민주묘지(3·15마산의거)가 개장됐다. 호국원은 3개가 있다. 2000년 경북 영천호국원에 이어 2002년 임실호국원이 개원했고, 2007년에는 이천호국원이 문을 열었다.
▼ 꽤 오래 조망을 즐기다가 다시 정상으로 향한다. 몇 걸음을 걸은 것 같지 않은데 삼거리가 나온다. 이정표(백련산↑ 50m/ 칠백리고지← 2.94Km)를 보니 잠시 후에 가게 될 칠백리고지가 이곳에서 나뉘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정상을 둘러본 다음에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잠시 후 정상에 올라선다. 정상에는 ‘섬진강 홍수통제소’가 들어있다는 네모난 건물 한 동과 무인산불감시탑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들머리에서 이곳 정상까지는 1시간 40분이 걸렸다.
▼ 홍수통제소 건물의 옥상은 전망대로 꾸며 놓았다. 한쪽 귀퉁이에 산불감시초소도 보인다. 시야가 잘 트인다는 이점을 살린 모양이다.
▼ 전망대에서의 조망은 일망무제로 펼쳐진다. 시야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일절 없기 때문이다. 옥정호의 빛나는 물결 넘어 모악산과 국사봉, 회문산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가 하면 지리산 성삼재에서부터 천황봉까지의 백리길 능선이 아스라이 실루엣으로 펼쳐진다. 그 앞에 있는 원통산과 무량산, 용골산이 코앞으로 성큼 다가옴은 물론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동쪽으로도 선각산과 내동산 등 전북 동부의 수많은 산들이 첩첩이 쌓여있다.
▼ 잠시 후에 걷게 될 능선도 한눈에 잘 들어온다. 가장 높게 보이는 봉우리가 ‘칠백리고지’인데 일단은 그곳까지 갈 계획이다. 그리고 주능선을 벗어난 다음 왼편 지능선을 따라 걷다가 이윤마을로 내려가는 일정이다. 한 바퀴를 돌게 되는 셈인데 제법 먼 거리이다. 하지만 다행이도 큰 오르내림은 없어 보인다. 산행을 이어가는데 큰 부담이 없을 것 같다는 얘기이다.
▼ 자연석으로 만든 커다란 정상석은 홍수통제소 건물의 앞에다 세워 놓았다. 이정표는 보이지 않는다. 길이 나뉘지 않으니 세울 필요가 없었던 모양이다. 참고로 백련산(白蓮山)이라는 산의 이름은 신기마을에서 바라본 상봉 모습이 마치 하얀 연꽃봉우리 같이 생겼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다른 한편으론 영취산(靈鷲山)이라 부르기도 한다는데 이름에 얽힌 사연은 모르겠다.
▼ ‘임실호국원(任実護國院)’이 내려다보이는 곳에는 벤치까지 놓아두었다. 조망을 즐기면서 호국영령(護國英靈)에 대한 추모도 함께 해보라는 모양이다.
▼ 정상 아래의 삼거리로 되돌아 나와 산행을 이어간다. 길게 놓인 스테인리스 계단을 내려서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사동마을로 내려가는 길이 오른편으로 나뉘는데, 이곳에 세워진 이정표(칠백리고지 2.90Km/ 사동(절안) 1.90Km/ 백련산 0.90Km, 신기마을 1.90Km)가 눈길을 끈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각 방향 거리의 끝자리들이 똑 같은 것이다. 이런 쓸데없는 생각까지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오늘 산행이 생각보다 훨씬 수월했나보다.
▼ 칠백리고지 방향으로 산행을 이어간다.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서서히 고도를 낮추어간다. 썩 고맙지만은 않은 상황이다. 내려간 만큼 다시 올라가야 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들 때문에 산을 인생에 비유하는 사람들도 있다. 산에 오르내림이 있듯이 인생 또한 굴곡(屈曲)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삶이 힘들다고 해서 결코 낙망하지는 말라고 권한다. 다음에는 분명 좋은 기회가 찾아올 것이라면서 말이다.
▼ 하산을 시작한지 13분쯤 되었을까 숲이 열리는가 싶더니 시야(視野)가 툭 터진다. 길가의 한쪽 면이 바위벼랑으로 이루어진 덕분이다. ‘칠백리고지’로 연결되는 진행방향에 한쪽 면이 바위벼랑으로 이루어진 봉우리 두 개가 나타난다. 누군가 그쪽으로 연결되는 능선에 ‘쌍선대’라는 두 개의 큰 바위가 솟아있다고 했는데 이를 두고 하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 잠시 후 기묘하게 생긴 소나무 한 그루를 만난다. 하나의 뿌리에서 두 줄기가 자랐는데 그 둘이 마치 두 마리의 뱀이 뒤엉켜 있는 듯한 형상을 만들어내고 있다. 한마디로 괴이하기 짝이 없는 자태이다. 이 정도의 생김새라면 ‘명품소나무’의 반열에 올려놔도 손색이 없겠는데 아직까지 입소문을 타지 않은 이유를 모르겠다. 생김새로 보아 ‘용송(龍松)’이란 이름을 얻고도 남겠는데 말이다.
▼ 얼마쯤 걸었을까 능선을 벗어난 길이 왼편으로 우회(迂迴)를 한다. 능선의 꼭지점을 따라 거대한 암릉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까 전망바위에서 ‘쌍선대’으로 추정했던 봉우리들이 아닐까 싶다. 이런 바위벼랑들이 곳곳을 차지하고 있어서 산 아래에서는 바위산으로 보였을 것이다.
▼ 하산을 시작한지 35분 만에 ‘이윤마을 갈림길’(이정표 : 칠백리고지↑ 1.09Km/ 이윤리← 0.7Km/ 백련산↓ 1.82Km)이 있는 능선 안부에 내려선다. 조금이라도 수월하게 하산을 하고 싶다면 이곳에서 왼편으로 내려가면 된다. 하산지점까지의 거리가 가장 짧을 뿐만 아니라 경사까지도 느긋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고도를 많이 까먹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쯤에서 탈출해도 될 이유는 또 있다. 계속해서 능선을 타봐야 볼만한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 하지만 난 ‘칠백리고지’까지 가보기로 한다. 버스를 출발시키겠다는 시간이 되려면 아직도 멀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보다는 새로운 코스를 걸어보겠다는 유혹이 더 컸다고 보는 게 옳겠다. 아무튼 맞은편으로 올라서는 능선은 제법 가파르게 시작된다. 그런 다음에는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서서히 고도를 높여간다.
▼ 벌목(伐木)을 끝낸 오른편 능선이 시원스럽게 트여 있다. 그 덕본에 조망이 시원스럽다. 덕대산과 선각산, 팔공산 등 수많은 산들이 첩첩이 쌓여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은 끄는 건 마이산이 아닐까 싶다. 말의 귀를 닮았다는 두 개의 암봉이 아슴푸레하게나마 시야에 잡히기 때문이다.
▼ 14분 후 ‘원두복 갈림길’(이정표 : 칠백리고지↖ 0.49Km/ 원두복→ 2.51Km/ 백련산↓ 2.43Km)을 만난다. 오른편은 원두복마을(청웅면 두복리)로 연결된다.
▼ 칠백리고지를 향해 고도를 높이다보면 왼편으로 시야(視野)가 열리기도 한다. 그리고 뽈록하게 솟아오른 백련산의 정상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혹자는 저 모습을 보고 ‘거대한 배의 형상’이라고 했다. 그런데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으니 문제다. 그저 준수하게 생긴 하나의 봉우리일 따름인 것이다. 조선 개국초기의 승려인 무학대사는 ‘시안견유시 불안견유불(豕眼見唯豕, 佛眼見唯佛)’이라는 말을 했다.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의미이다. 이로 미루어보아 내 수양은 아직도 멀었나 보다.
▼ ‘원두복 갈림길’에서 14분 만에 ‘칠백리고지’에 올라선다. 사방이 숲으로 둘러싸인 평범하기 짝이 없는 곳이다. 이곳 ‘칠백리고지’는 ‘6.25 전쟁’의 산물이다. 전투에 참여했던 군인들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아무튼 6.25 당시 이곳 백련산은 빨치산(partizan)들의 주요 활동 무대였다. ‘조선노동당 전북도당 유격대’ 사령부가 주둔했던 회문산의 이웃에 위치한 지리적 여건 때문이었을 것이다. 100만 권의 책이 팔려나갔고, 관객 70만 명을 기록했던 영화 ‘남부군’의 빨치산 활동 무대가 바로 회문산 주변이었기 때문이다. 국군의 토벌작전이 시작되면서 전투기들의 폭격을 피해 숨어든 곳 또한 이곳 백련산이었다. 백련산 자락에 있던 부흥광산(江津面 白蓮里 山 154번지)의 동굴에 무려 600여 명이나 숨어들었다는 것이다. 이들에 대한 마지막 토벌은 1952년 2월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광산의 굴에 불을 때기 시작하여 장장 7일간을 계속해서 청솔가지와 고춧대, 고추 등을 태워 굴속에 있던 빨치산들을 모두 질식사 시켰다. 작전을 전개하기 전, 굴 안에다 스피카방송을 통해 투항할 것을 권했으나 골수 빨치산들이 양측 통로에 무장하고 자수하려는 자를 사살함으로써 거의 모두가 질식사하였고 한다. 겨우 한두 명 정도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여생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 ‘칠백리고지’에서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하산은 이정표(이윤리↖ 2.61Km/ 모시울산↗ 1.86Km/ 백련산↓ 2.92Km)가 가리키고 있는 이윤마을 방향이다. 내려가는 길은 대체로 순한 편이다. 떡갈나무 잎이 두텁게 깔린 길이 조금 미끄럽기는 하지만 경사(傾斜)가 완만해서 내려서는 게 부담스럽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저 변화가 거의 없는 탓에 지루한 느낌이 든다는 게 흠(欠)이라면 흠일 것이다.
▼ 지루하게 이어지는 내리막이지만 조그만 위안거리는 있다. 오른편 나뭇가지들 사이로 옥정호(玉井湖)가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겨울 산행이라고 해서 모든 것이 다 삭막하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만일 나뭇잎이 무성한 여름철이었다면 언감생심(焉敢生心), 호수를 내다보는 꿈은 애초부터 꾸어볼 수도 없었을 것이다.
▼ 반듯하게 쓴 묘(墓) 하나가 능선을 독차지 하고 있다. 백련산 산행의 특징 중 하나가 이런 묘들을 유난히도 자주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하긴 이곳 백련산이 영산(靈山)으로 소문나 있으니 어찌 묘들이 몰려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예로부터 이곳 백련산에는 ‘조선 8대 명당(明堂)’ 중의 하나인 ‘잉어 명당’이 있다고 전해 온다. 옛날 그곳에 묘를 쓰려고 땅을 파내려가자 널빤지 같은 암반(巖盤) 아래에서 놀던 잉어 두 마리 중 한 마리가 뛰어나왔다고 한다. 사람들이 얼른 암반을 다시 내려놓고 그 위에 묘를 썼는데, 후손들이 명당바람으로 큰 부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명당을 가운데에 두고 우측에 ‘그물봉’이 있고, 앞산은 ‘작살봉’, 회진마을 맞은편의 ‘다래끼봉’ 등이 에워싸고 있는데, 주위에 형성된 산들의 지명과 모습이 너무나 흡사하여 대 명당으로 불린다. 아무튼 그물봉은 필봉리에서 뻗어 내려온 산줄기인데 그 형상이 마치 그물이 잉어를 포획하려는 모습이고, 작살(고기잡는 창)봉은 작살이 누어있는 형태이며, 다래끼(고기망)봉은 어느 곳에서 보아도 다래끼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한다. 모두 잉어를 잡는 용구세트로 구성된 봉우리 이름이다. 지방 주민들의 신성한 물고기 관념이 풍수사상(風水思想)과 결합해서 드러난 문화현상이 아닐까 싶다.
▼ 능선을 탄지 20분쯤 되면 갈림길(이정표 : 용동마을↑/ 이윤마을←/ 칠백리고지↓)이 나타난다. 혹시라도 버스를 대절해서 이곳으로 왔다면 어느 곳으로 가던지 상관이 없다. 두 코스 모두 주차가 가능한 용동마을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다만 조금이라도 편한 코스를 원한다면 왼편으로 진행할 일이다. 하지만 승용차를 갖고 왔다면 상황을 달라진다. 틀림없이 당신은 이윤마을에다 차를 놓아두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필히 왼편으로 내려가라는 얘기이다.
▼ 왼편으로 내려선다. 벼랑으로 느껴질 만큼 엄청나게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그리고 그런 가파름은 20분을 훌쩍 넘길 정도로 지긋지긋하게 이어진다. 이런 때는 조심하는 게 상책이다. 자칫 방심하다가 미끄러지기라도 할 경우엔 생각보다 큰 부상으로 연결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지긋지긋했던 내리막길이 끝나는 곳에서 멋진 고사목(枯死木)을 만난다. 고진감래(苦盡甘來), 비탈길을 내려오느라 고생한데 대한 보상이라도 되는 모양이다.
▼ 저만큼 아래에 이윤마을이 나타난다. 그리고 갈림길에서 내려선지 정확히 27분 만에 마을에 도착한다. 마을 앞에는 ‘칠백고지’로 올라가는 방향을 표시해 놓은 이정표와 ‘백련산 등산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이곳 이윤마을에 차를 세워두고 원점회귀 산행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던데 많은 도움이 될 듯 싶다.
▼ 이윤마을에서부터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른다. 차선이 하나뿐인지라 버스는 다닐 수가 없다. 하지만 승용차들은 예외이다. 서로 비켜 지나가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정도로 넓다. 길가에는 정자(亭子)까지 갖춘 전원주택들도 보인다. 그만큼 산골마을의 풍광이 뛰어나다는 증거일 것이다.
▼ 도로는 이윤계곡을 옆구리에 끼고 나있다. 이윤계곡은 어디다 내세울 만큼 수려하지는 않다. 협곡(峽谷)을 이루는 양 옆의 바위벼랑이 거대하지도 않은데다 흐르는 물 또한 많지가 않다. 하지만 잠시 쉬어가는 데는 부족함이 없을 듯 싶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곳곳에다 공중화장실을 만들어 두었다. 그만큼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인간들이 이런 멋진 곳을 그냥 놓아두었을 리가 없다. 전주순복음교회에서 만든 ‘옥정호 영성원’도 그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가장 멋지다 싶은 곳에다 자기네들만의 왕국을 차려놓았다.
▼ 산행날머리는 용동마을(임실군 강진면 방현리)
그렇게 30분 정도를 걸으면 저만큼에 용동마을이 나타나면서 오늘의 산행이 종료된다. 전주로 이어지는 27번 국도변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오늘 산행은 총 4시간 20분이 걸렸다. 땀을 씻느라 중간에 쉬었던 시간을 감안할 경우 4시간 10분이 걸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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