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봉(城主峰, 533m)
산 행 일 : ‘21. 10. 9(토)
소 재 지 : 전라북도 순창군 쌍치면
산행코스 : 둔전교→사기점 마을→부엉바위→성주봉→암릉(하이라이트)→둔전마을(순창샘물공장)→둔전교(소요시간 : 5.4km/ 2시간 10분)
함께한 사람들 : 기분좋은 산행
특징 : 정맥(正脈)은 물론이고 기맥(岐脈)이나 지맥(支脈), 분맥(分脈), 단맥(短脈), 여맥(餘脈)으로도 검색이 되지 않는 의문의 산줄기에 놓인 산. 그저 호남정맥의 용추봉에서 분기한 산줄기가 치재산을 거친 다음 추령천에서 숨을 다하기 직전에 일궈놓은 나지막한 산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산세만큼은 전국의 어느 명산에 뒤지 않을 정도로 빼어나다. 전형적인 육산인데도 천애절벽을 끼고 있어 ‘보는 재미(조망)’와 ‘즐기는 재미(스릴)’를 한꺼번에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추령천 건너에 위치한 하서 김인후 선생의 강학당 ‘훈몽재(訓蒙齋)’ 또한 성주봉이 품은 자랑거리다. 허나 지자체에서 내팽개쳐 놓은 것은 흠이라 하겠다. 이정표나 밧줄 등 안전시설이 전무한 것은 물론이고 길은 흔적조차 찾기 힘들다. 산행에 이골이 난 사람이 아니라면 전문가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는 얘기이다.
▼ 산행들머리는 ‘둔전교’(순창군 쌍치면 둔전리)
호남고속도로 정읍 IC에서 내려와 국도 29호선을 타고 담양방면으로 내려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순창군으로 들어서게 되고, 곧이어 쌍치면 관내에 있는 둔전리에 이르게 된다. 둔전마을 버스정류장 근처의 다리(둔전교)가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 성주봉의 들머리는 두 군데. 즉 둔전마을(순창샘물공장)과 둔전사방댐 뿐이다. 치재 쪽에서 올라오는 길도 있지만 이용하는 이들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치재 방향은 자신이 오른 봉우리의 숫자를 헤아려가는 사람들이 ‘산수봉’과 ‘황새봉’이란 봉우리를 따먹기 위해 다니는 길이라고 보면 되겠다.
▼ ‘둔전교(屯田橋)’ 다리를 건너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둔전사방댐 근처의 사기점 마을까지 도로가 나있으나 일차선이라서 대형버스의 진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둔전(屯田)이란 고려·조선 시대에 군량을 충당하기 위하여 변경이나 군사 요충지에 설치한 토지를 말한다. 이곳 둔전리에도 군사 훈련장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주둔병의 군량을 제공하기 위한 논밭도 있었을 터. 병사들의 막사가 있었던 곳에 마을이 형성되었고 현재의 둔전리가 되었단다.
▼ 다리 아래로는 추령천(秋嶺川)이 유유히 흘러간다. 복흥면(순창군) 서북쪽 끝에 있는 추령봉(내장산)에서 발원하여 복흥면과 쌍치면을 거쳐 산내면(정읍시)에서 옥정호로 들어가는 섬진강의 지류이다. 옥정호(玉井湖)는 물이 맑기로 유명한 호수다. 그러니 추령천의 물 맑음이야 두말하면 잔소리. 은어낚시나 다슬기 채취에 여념이 없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눈에 띄는 게 그 증거라 하겠다.
▼ 한로(寒露)가 어제였으니 이젠 완연한 가을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둔전마을 앞 뜨락의 고개 숙인 벼들은 풍요로운 가을기운을 한껏 전해준다. 누렇게 익어가는 벼를 보면서 걷다보니 내 마음도 풍성해진다. 옛 사람들은 내 마음이 넉넉해져야 상대방에게도 너그러울 수 있다고 했다. 그러니 가을은 모든 이들에게 너그러운 계절일 수밖에 없다.
▼ 잠시 후 ‘순창 샘물’이 얼굴을 내민다. 뒤를 받쳐주고 있는 멋진 바위산을 주민들은 ‘가락(물레 손잡이)봉’이라 부른단다. ‘가락봉에 가락 들어간다’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가락봉 아래에 생수공장이 들어섰고, 가락(물 뽑아 올리는 대롱)을 집어넣었으니 옛말 틀린 거 하나도 없다.
▼ 추령천 건너에서는 ‘훈몽재(訓蒙齋)’가 한번쯤 들러보라며 손짓한다. 을사사화로 조정의 분위기가 어지럽던 시기, 1547년 양재역 벽서사건이 일어나면서 김인후(金麟厚, 1510-1560)의 친구인 유희춘·노수신·김희년 등이 유배를 가게 된다. 그러자 옥과 현감으로 있던 하서(河西, 김인후의 호)는 벼슬을 내려놓고 잠시 고향인 장성에 머물다가 부모님과 함께 처가인 순창 점암촌(지금의 둔전리)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경관 좋은 저곳에 강학당을 짓고 후학을 양성했단다.
▼ 산행을 나선지 20분. ‘사기점’ 마을에 도착했다. ‘사기점’이란 사기그릇 따위를 만드는 곳을 말한다. 그러니 옛날 이 근처에 가마터가 있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이 마을에서 남동쪽으로 1.5㎞ 가량 떨어진 도둑골 일대에서 광범위하게 흩어져 있는 자기(분청사기와 백자) 조각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가마터도 함께 발견되었다니 사기점이란 지명은 그 가마터에서 유래되지 않았나 싶다.
▼ 오는 도중 블루베리 과수원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다. 사기점 마을 앞에는 ‘블루베리 체험농장’이라는 입간판도 세워놓았다. 그만큼 많이 재배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긴 얼마 전 순창군에서 블루베리를 활용해 아동 면역력 개선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건강기능식품(슈퍼케이 키즈비타민)까지 출시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 10분 조금 못되게 더 걷자 굵직한 소나무에 ‘도로 끝’이란 팻말이 걸려있다. 조금 더 들어간 곳에는 아예 차단봉으로 길을 막아버렸다. 이후의 임도는 차량통행을 제한하겠다는 얘기일 것이다.
▼ 잠시 후, 그러니까 산행을 나선지 25분 만에 ‘둔전 사방댐’에 도착했다. 이어서 사방댐과 임도 사이의 능선으로 올라붙으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 산길은 처음부터 거칠다. 잡목과 가시넝쿨로 뒤덮인 곳에서 길을 찾아야 함은 물론이고, 곳곳에서 쉽지 않은 바윗길을 만난다. 그러나 바윗길이 아무리 험해도 멋진 산을 오른다는 설렘에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땀 흘리는 족족 꿀맛 같은 경치로 되갚아준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 바위에 올라서자 발아래로 빼어난 풍광이 펼쳐진다. 옥녀봉을 만난 추령천 물길이 에돌면서 만들어놓은 예술품이다. 사진으로는 확인이 안 되지만 추령천은 이 부근에서 산태극수태극을 만들어낸다. 어디에 빼놓아도 뒤지지 않을 절경이기에 지자체인 순창군에서는 추령천의 강변을 따라 ‘훈몽재 선비의 길’이라는 명품 둘레길까지 조성해 놓았다.
▼ 시선을 조금 옮기자 이번에는 추령천 너머에서 백방산(柏芳山)이 손짓한다. 하서 선생은 저 산자락에 강학당인 ‘훈몽재’를 지어놓고 후학을 양성했다.
▼ 산길은 릿지(ridge) 구간이 계속된다. 계단은커녕 밧줄도 매어져있지 않는 순수한 바윗길이다. 그러니 무서울 수밖에. 하지만 스릴만은 10점 만점에 20점이다. 그 스릴은 겁까지 없애버리는 모양이다. 천 길 낭떠러지 위에서도 저리 유연한 자세를 취하는 걸 보면 말이다.
▼ 앞서가던 집사람이 소나무에 걸터앉더니 냉큼 포즈부터 취하고 본다. 암릉을 오르다보면 저런 멋진 소나무들을 심심찮게 만나게 된다.
▼ 햇살은 완연한 가을날이다. 따가울 정도로 반짝거리지만 그게 부담스럽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런 햇살의 변주곡에 몸을 맡긴 바윗길은 마냥 아름다울 뿐! 손바닥 발바닥으로 눈으로 손으로 달콤한 산행의 맛이 전해온다. 이런 재미로 우리부부는 오늘도 산을 찾았다.
▼ 고도감 높은 벼랑에 올라서면 성취감이 주는 꿀맛은 정점에 이른다. 그 맛에 취한 집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만세를 부른다. 그래 저런 맛에 산, 그것도 바위산에 오를 것이다.
▼ 또 하나의 바위봉우리를 넘자 그보다 훨씬 큰 바위봉우리가 얼굴을 내민다. 성주산 암릉의 백미라는 ‘부엉바위’다. 어떤 이는 ‘부엉’이라는 지명의 어원을 부엉이가 사는 바위라는 데서 찾고 있었다. 그럴 듯한 가설이다. 인간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을 찾는다면 저만한 곳이 또 어디 있겠는가.
▼ 바윗길은 경사가 무척 가파르다. 크랙(crack, 바위틈)을 붙잡고 올라야 하니 난이도가 결코 쉽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거칠게 튀어나온 표면 덕분에 발이 전혀 밀리지 않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고도감에 비해 산행이 어렵지 않은 이유이다. 그렇다고 조심하는 것까지 잊지는 말자.
▼ 암릉에는 바위손이 널려있다시피 했다. 꽃을 피우지 않지만 숲 다양성의 일익을 담당하는 양치식물의 하나이다. 그런데 안쪽으로 돌돌 말려있는 게 바위손도 가뭄을 타나보다. 하긴 척박한 바위로도 모자라 물기까지 부족했으니 어찌 제대로 된 외모를 지닐 수 있겠는가.
▼ 부엉바위에 올라서서 까마득한 고도감을 만끽해본다. 그러자 눈앞에 펼쳐지는 조망의 즐거움이 극에 달한다. 리처드 버크는 ‘갈매기의 꿈’에서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고 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조금 전에 보았던 풍경화의 폭이 아까보다 한참이나 넓어졌다. 거기다 추령천의 물돌이도 아까보다 훨씬 더 고와졌다. 저 물돌이를 돌아가면 ‘가인 김병로(街人 金炳魯, 1888-1964)’ 선생의 생가가 나올 것이다.
▼ 20분 정도의 바윗길이 끝나자 이번에는 전형적인 흙길이 나타난다. 하지만 길은 더 사나워졌다. 산자락이 온통 잡목과 넝쿨식물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길을 찾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거기다 숲을 헤치며 오르다보면 찔리고 할퀴는 것은 물론이고, 심심찮게 싸대기까지 맞을 수밖에 없다. 성주봉을 초보 산꾼들에게 권할 수 없는 이유이다.
▼ 암릉이 끝나갈 즈음 서툴게 쌓아올린 돌탑 하나가 눈에 띈다. 누군가가 험상궂은 암릉을 무사히 올라올 수 있게 해준 산신령께 감사라도 드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 산길은 무척 가파르다. 하지만 버겁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어쩌면 잡목과의 힘겨운 싸움 때문에 가파름 정도는 신경 쓸 여지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문득 최인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길 없는 길’이 떠오른다. 한국불교의 중흥조인 경허선사와 만공선사를 축으로 한국 불교의 진리를 빌어 인간이 나아가야할 길을 알려주는 장편소설이다. 길 없는 곳에서 길을 찾는다고나 할까? 선답자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길에서 선두대장의 방향표시지에 의지해 길을 찾다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 그렇게 20분 정도를 오르자 뜬금없는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산에 이골이 난 산꾼들도 고개를 내두를 정도로 험하고 높은 산중에 무덤이 들어서 있는 것이다. 그것도 의젓하게 묘비까지 갖췄다. 이런 묘들은 이후로도 여럿 눈에 띈다. 인근에 위치한 회문산(回文山)의 지운(地運)을 기대하며 쓴 묘들이 아닐까 싶다. 우리나라의 5대 명당(明堂) 가운데 하나가 회문산이니 말이다. 전설적인 풍수가 홍성문(洪成文)은 회문산에서 도통(道通)한 후, 묘혈(墓穴)과 관련된 책자를 적었는데, 이 책에서 회문산 정상에 24혈이 있다하며, 오선위기혈에 묘를 쓰면 당대부터 발복하여 59代까지 간다고 했다. 그러니 어느 누가 조상의 묘를 쓰지 않고 배겨내겠는가?
▼ 정상에 이를 즈음 길이 둘로 나뉘고 있었다. 치재로 연결되는 능선의 분기점인 것 같아 집사람에게 포즈까지 취하게 했으나 이는 잘못된 판단이었다. 집에 돌아와 확인해보니 아까 만났던 묘역의 근처에서 길이 나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길이 하도 사납다보니 무심코 지나쳐버렸던 모양이다.
▼ 산자락으로 들어선지 55분 만에 성주봉의 정상에 올라섰다. 하지만 두루뭉술한 것이 정상이란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거기다 정상석은 물론이고 그 흔한 이정표 하나 찾아볼 수 없으니 어느 누가 이곳이 정상인줄 알겠는가. 그저 함께 산행을 하고 있는 그린나레 산행대장이 붙여놓은 정상표시지가 이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 함께 왔으나 답사 코스를 달리한 ‘배하사’라는 또 한 명의 베테랑 산꾼이 매달아놓은 정상표시지도 보인다. 그는 둔전마을을 들머리로 삼아 이곳 성주산을 오른 다음 인근의 황새봉(443m)과 산수봉(308m), 철마봉(350m)까지 모두 둘러보는 장거리 산행을 소화했다.
▼ 오른편으로 크게 방향을 꺾어 하산을 시작한다. 하산 구간도 역시 길은 또렷하지 않다. 그저 선두대장이 깔아놓은 방향표시지가 인도하는 대로 따라갈 따름이다. 그런데도 무덤이 두어 기나 있다. 발복(發福)이 얼마나 절박했으면 걸어서 올라오기도 힘든 이곳에까지 무덤을 써야만 했을까.
▼ 잠시 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조망을 즐기고 있는 일행 몇이 눈에 들어온다. 성주봉의 하이라이트인 바윗길이 시작되는 것이다.
▼ 바윗길의 가장 큰 매력은 물론 가슴조리는 ‘스릴’이다. 조망도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인데,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올망졸망한 산하를 품은 풍경화 한 폭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으로다. 참! 사진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맨 오른편에는 회문산이 있다.
▼ 고개를 살짝 돌리자 이번에는 잠시 후 오르내리게 될 능선이 눈에 쏙 들어온다. 푸른 숲속에 감춰져 있지만 저 능선은 바윗길의 연속이다. 바위의 크랙에 의지해서 내려가야만 하는 구간이 수두룩하고, 거기다 양 옆은 서슬 시퍼런 바위절벽이 계속된다.
▼ 집사람은 요즘 선글라스의 매력에 쏙 빠져 있다. 평소의 그녀는 바위절벽이라면 무섬증 때문에 제대로 서지도 못한다. 그런데도 카메라만 들이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부리나케 선글라스부터 쓰고 본다. 하긴 사랑하는 이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은 게 인간의 본성이 아니겠는가.
▼ 이제 바윗길이 시작된다. 양 옆이 수십 미터에 이르는 낭떠러지라서 초보자는 고도에서 오는 공포를 극복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 조심 또 조심해야 할 일이다. 쉬운 등반 동작일지라도 높이로 인한 공포 때문에 몸이 굳어 자칫 실수로 이어질 수 있으니 말이다.
▼ 바위에 매달리다시피 해가며 내려가는 집사람의 모습에서 설악산의 ‘용아장성(龍牙長城)’을 떠올렸다면 너무 나간 것일까? 용의 이빨처럼 날카로운 암봉이 줄지어 있다는 데서 유래된 용아장성은 등반이 금지되어 있을 정도로 위험한 코스다. 그러니 이곳 성주봉을 용아장성에 비유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겪고 있을 집사람의 가슴조림은 내가 옛날 용아장성에서 느꼈던 스릴에 조금도 뒤지지 않을 것이다.
▼ 바윗길은 꽤 오래 지속된다. 크랙을 붙잡고 오르내리다 그게 어려울 때는 바위를 피해 우회한다. 이때 스릴과 조망을 함께 즐길 수 있는데, 그걸 계룡산처럼 느낀 사람도 있었던 모양이다. ‘자연성릉’이라 부르며 눈앞에 펼쳐지는 아기자기한 바윗길과 조망에 혀를 내둘렀다고 적고 있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나무계단 등 인간의 손길로 덧칠을 해버린 자연성릉을 어디 감히 이곳에 비유할 수 있을까?
▼ 정신 나간 진달래가 꽃망울을 활짝 열었다. 고도감에서 오는 공포감이 저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네 발로 기어 다녀야 하는 곳이니 꽃이라고 해서 온전할 수 있겠는가.
▼ 왼쪽 방향도 심심찮게 시야가 열린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였는데도 추령천이 만들어놓은 들녘이 제법 넓다. 첩첩이 쌓인 산들 너머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건 내장산이 아닐까 싶다.
▼ 하산을 시작한지 26분. 선두대장의 방향표시지가 왼편으로 바뀐다. 능선을 벗어나라는 것이다. 능선으로도 길의 흔적이 보이는데 말이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능선을 따라보려다 집사람에게 지청구만 엄청 들었다. 집사람의 눈에 비치는 나는 언제나 변함없는 초보 산꾼인 모양이다. 그나저나 이후로도 길이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거기다 이 구간은 능선도 아니어서 아마추어가 길을 찾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나 역시 선두대장의 표시에 의지해 무의식적으로 내려가고 있을 따름이다.
▼ 그렇게 15분쯤 내려왔을까 또 다른 무덤이 나타난다. 이번에는 망주석에 상석까지 제대로 갖췄다. 하지만 수십 년은 족히 내팽개쳐두었는지 상태는 극히 엉망이다. 복(福)이 이미 고갈되어 버린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풍수란 본디 믿을게 못 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 산행날머리는 둔전마을(순창 생물공장 옆)
암릉을 비켜 내려선지 25분 만에 ‘둔전마을’에 내려섰다. 이어서 마을 앞길을 지나자 다리 곁에 산악회의 버스가 주차되어 있다. 성주봉 산행이 종료된 것이다. 오늘은 쉬는 시간 없이 2시간 10분을 걸었다. 5km 남짓 되는 거리, 그것도 2/3정도가 산길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제법 빨리 걸은 셈이다.
▼ 산악회의 다음 일정은 장군봉을 오르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등산 대신 ‘훈몽재 선비의 길’을 답사해 보기로 했다. ‘전북천리길’에까지 끼인 둘레길이라니 그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겠는가. 이곳 ‘둔전마을’에서 훈몽재까지는 1km 남짓. 추령천의 지류인 방산천을 50m쯤 거슬러 올라가다 아래 사진의 잠수교를 건너면 된다. 29번 국도를 따라 정읍방면으로 100m쯤 가다가 ‘중안마을 버스정류장’에서 차도를 이용해 들어가는 방법도 있다. 정류장 옆에 ‘훈몽재’라 적힌 입간판이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다리를 건너자 길이 세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추령천의 강둑을 따라가는 방법, 다른 하나는 방산천을 거슬러 올라가다 차도를 이용해 훈몽재로 간다. 하지만 우리는 농로를 따르기고 했다. 길가를 장식하고 있는 하얀 갈대꽃 무리가 집사람의 방심을 자극하는데 어쩌겠는가.
▼ 눈요깃거리는 갈대꽃뿐만이 아니다. 조금 전에 올랐던 성주봉이 그 빼어난 자태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이번에는 장군봉이 눈에 쏙 들어온다. 만만찮은 산세인데, 다녀온 이들의 전언에 의하면 산길까지 거칠단다. 그러면서 훈몽재를 다녀온 우리 부부의 선택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 그렇게 20분 남짓 걸었을까 ‘훈몽재(訓蒙齋, 전라북도 지정문화재자료 제189호)’가 얼굴을 내민다. 조선 유학의 큰 별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선생이 1548년 순창 점안촌의 백방산(667.8m) 자락에 지은 강학당이다. 인종 임금의 세자시절 스승이자, 호남출신으로 유일하게 문묘에 배향된 그는 이곳에서 제자들을 당대의 석학으로 길러냈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들은 ‘훈몽재 복원사업’을 통해 2009년에 다시 태어났다. 전주대학교 박물관의 발굴조사 과정을 거쳤음은 물론이다.
▼ 입구로 들어서자 삼연정(三然亭)이 길손을 맞는다. ‘훈몽재 복원사업’ 때 지은 팔각정으로 하서 김인후가 산(山)·수(水)·인(人) 등 세 자연을 노래한 ‘자연가’(自然歌)에서 명칭을 따왔다. 청산도 절로 절로 녹수도 절로 절로(靑山自然自然 綠水自然自然), 산도 절로 물도 절로 산수간에 나도 절로(山自然水自然 山水間我亦自然), 이 중에 절로 자란 몸이 늙기도 절로하리라(已矣哉自然生來人生 將自然自然老)
▼ 맨 안쪽에는 강학당(講學堂)인 훈몽재(訓蒙齋)가 들어앉았다. 병을 이유로 벼슬을 사양한 선생은 장성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러다가 명종의 부름이 계속되자 1548년 봄 처가가 있는 이곳 점암촌(둔전리)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이곳에 초당을 세우고 편액을 훈몽(訓蒙)이라 내건 다음 당대의 석학 변성온·기효간·조희문·양자징·정철 등을 길렀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터만 남아 있다가 위에서 말한 복원사업을 통해 중건되었다. 현재는 단국대학교에서 정년하고 강원도 산중에 ‘산동서당’을 짓고 강학을 하던 고당 김충호 산장이 하서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후학들을 양성하고 있단다.
▼ 아래 사진은 ‘훈몽재 복원사업’ 때 훈몽재의 부속 건물로 중건된 ‘자연당(自然堂)’이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훈몽재는 1680년 무렵 선생의 5대손인 자연당 김시서(金時瑞, 1652-1707)에 의해 복원됐다. 그는 훈몽재 옆에 하서 선생의 ‘자연가’에서 뜻을 취한 ‘자연당’이란 초당도 함께 지었다고 한다. 이후 훈몽재와 함께 사라졌다가 복원사업에 의해 교육생들을 위한 숙박시설로 되살아난 것이다.
▼ 맨 앞에는 숙박과 교육의 역할을 겸하는 ‘양정관(養正館)’이 들어섰다. 양정관이란 이름은 매산 홍직필(洪直弼, 1776-1852)의 훈몽재기(訓蒙齋記)에 수록된 하서 선생의 교육이념인 ‘몽이양정(蒙以養正, 어리석은 사람을 바르게 기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양정관 뒤의 건물은 ‘양생당’이다. 오래 살기 위해 몸과 마음을 편안히 하고 병에 걸리지 않게 노력한다는 의미를 지닌 취사·샤워·세탁 등 편의시설이 갖추어진 공간이란다.
▼ 훈몽재 앞마당에는 커다란 지석묘가 있었다. 청동기시대에 만들어진 남방식 지석묘로 규모(길이 4.9m×폭 2.43m×높이 1.4m)가 큰 편이라서 권력을 가진 자의 무덤으로 추정된단다. 이로보아 훈몽재는 청동기시대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에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 훈몽재 앞 천변에는 거북이를 닮은 바위가 있다. 선생이 제자들에게 대학을 가르쳤다는 너럭바위로, 하서의 제자인 정철이 썼다는 대학암(大學巖)이 각자되어 있다.
▼ 사람을 불러 모았으니 어찌 포토죤 하나 없겠는가. 앞마당에 한옥을 형상화한 조형물을 세워 이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기도록 했다.
▼ 자 이제 ‘선비의 길’을 걸어볼 차례이다. 이 둘레길은 전북천리길의 한 축을 담당한다. 그래선지 ‘현재에서 따라가 보는 선비의 시간’이라고 적인 스탬프보관함에는 전북천리길의 스탬프 북이 보관되어 있었다. 참고로 순창의 전북천리길 구간은 선비의 길을 비롯해서 순창-장군목길, 강천산길 등 3곳이다.
▼ ‘선비의 걸음으로 걷는 역사문화 탐방길’이란 부제를 단 탐방로는 동국 18현 중 호남에서 유일하게 문묘에 배향된 하서 김인후 선생이 제자를 양성한 훈몽재에서 출발해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선생의 생가를 거쳐 낙덕정에 이르는 6km 길이의 둘레길이다.
▼ 길을 나선다. 하서 김인후 선생은 물론 문하생들도 여가를 이용해 이 길을 걸었을 것이다. 470여 년 전 선비들이 걸었을 그 길을 지금 내가 걷는다. 싱그러운 녹음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길은 데크로 조성되어 걷기가 한결 편했다. 그 여유로움 덕분일까 문득 그들이 추구하던 도(道)가 머릿속에서 맴돈다. ‘길 도(道)’이니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제대로 가는 게 도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공자도 도척(盜跖, 중국 춘추 시대의 큰 도적)에게도 도가 있다고 했을 것이다.
▼ 트레킹을 시작하자마자 ‘사진 찍기 좋은 곳’이란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물길을 향해 툭 튀어나간 테라스형의 전망대와 추령천, 거기다 삼연정까지 집어넣으면 인생샷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꼭 이곳만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눈길 드는 곳마다 하나같이 아름다운 풍광을 선사하니 말이다.
▼ 눈앞에 펼쳐지는 풍광은 우리의 눈과 마음을 정화해주는 역할을 한다. 잠시 이층 전망대 올라 성주봉과 그 산자락에 터를 잡은 사기막 마을을 감상해보는 것도 좋고, 시간에 여유라도 있다면 천가로 내려가 발이라도 담아볼 일이다. ‘느림보의 미학’을 따라보기 딱 좋은 코스라는 얘기이다.
▼ 물 위를 스치듯이 날아가는 백로(왜가리일지도 모르겠다) 한 마리가 눈에 들어온다. 힘찬 날갯짓이 마치 다른 일정을 포기하면서까지 찾아준 우리를 환영이라도 하는 듯하다.
▼ 산자락을 따라 길게 늘어선 데크와 추령천의 풍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평화롭게 느껴진다. 그런데도 탐방로는 텅 비어있다. ‘언택트 관광’이 최고의 미덕이 된 코로나19 팬데믹 시국에서 이만한 관광지도 없을 텐데 말이다. 아직도 입소문을 덜 탄 모양이다.
▼ 이곳 쌍치는 ‘복분자’로 유명한 곳이다. 그래선지 탐방로 주변은 온통 복분자 넝쿨로 뒤덮여 있었다. 참고로 복분자의 원조 생산지가 전북 고창이라면 순창지역은 복분자 역사를 다시 쓰고 있는 지역이라 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쌍치복분자는 주·야간 일교차가 13도나 되는 내륙성 기후 영향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탁월한 당도와 단단한 과육은 지녔다고 한다.
▼ 절개지 사면에 뿌리를 내린 운지버섯이 보여 카메라에 담아봤다. 운지버섯은 마치 구름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서양에서는 칠면조의 꼬리 깃털 같은 느낌이 든다고 생각했는지 이를 ‘터키 테일 버섯(Turkey Tail Mushroom)’이라고 부른다. 실제로 기왓장처럼 버섯 갓이 겹쳐져 있는 모습을 보면 마치 구름이나 칠면조의 꼬리 깃 같은 느낌이 드는 게 사실이다.
▼ 데크가 끝날 무렵 수중보가 나타났다. 이곳 추령천, 아니 심심산골을 흐르는 하천들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들녘다운 들녘이 없으니 커다란 저수지보다는 저런 수중보를 만들어 농용수를 확보하는 게 가장 효율적이지 않겠는가.
▼ 데크의 끝. 수중보의 옆에는 사과정(麝過亭)이란 정자가 2층으로 지어져 있었다. 우리가 흔히 보는 육각정이나 팔각정이 아니라 사각으로 지어진 정자인데, 하서가 지은 백년초해(百聯抄解)라는 시의 구절 ‘사과춘산초자향(麝過春山草自香)’에서 따온 이름이다. 사과정이 있는 곳의 풍경이 사향노루가 지나다닐듯한 곳으로 은은한 향기가 피어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단다.
▼ 사과정에서 탐방로는 황토를 다져놓은 황톳길로 변한다. 이 구간은 맨발로 걸어도 좋을 듯 싶다. 하지만 우리 부부의 나들이는 딱 여기까지였다. 주어진 시간이 빠듯했기 때문이다. 모든 사법 종사자들이 귀감으로 삼는다는 가인(김병로)의 생가를 둘러보지 못한 게 아쉽기는 하지만 어쩌겠는가. 다음을 기약하며 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둔전마을로 되돌아 올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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