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전산(金錢山, 668m)
산행일 : ‘15. 3. 7(토)
소재지 : 전남 순천시 낙안면
산행코스 : 불재→구능수→돌탑봉→궁굴재→삼거리→금전산→헬기장→금강암→극락문(통천문)→낙안온천→금둔사(산행시간: 2시간40분)
같이한 산악회 : 가보기산악회
특색 : 낙안(읍성)에서 바라볼 때 마치 ‘큰 바위의 얼굴’처럼 우뚝 서 있는 금전산의 옛 이름은 ‘쇠산’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100여 년 전부터 ‘쇠’ 금(金)자에 ‘돈’ 전(錢)자를 쓰는 약간은 속물스런 느낌까지 드는 이름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은 불가(佛家)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부처의 뛰어난 제자들인 오백비구(혹은 오백나한)중 금전비구’에서 산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설마 일부러 속물스런 산 이름을 만들기야 하겠는가. 아무튼 금전산은 의외의 모습을 보여준다. 인근의 산들이 전부 전형적인 육산(肉山=흙산)으로 되어있는데 반해 유독 금전산만 바위산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산 전체가 바위산인 것도 아니다. 전체적으로는 육산의 느낌이 강한데 유독 정상부의 서쪽면만 첨탑처럼 솟아오른 암봉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때문에 산행은 산책 같은 편안함과 암릉만이 갖는 빼어난 눈요깃거리를 함께 즐길 수가 있다. 거기다 산행 후에는 ‘낙안읍성’이라는 문화재까지 들러볼 수 있으니 어디다 내놓아도 하나도 빠질 게 없는 괜찮은 산이라는 이야기이다. 이런 산이 어떻게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지 않았을까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 산행들머리는 ‘불재’ 버스정류장
남해고속도로(영암-순천) 순천만 I.C를 빠져나와 2번 국도를 타고 순천방면으로 들어가다 연동삼거리(순천시 교량동)에서 좌회전, 58번 지방도를 따라 낙안읍성방면으로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산행들머리인 ‘불재(버스정류장에는 낙안불재로 표기)’에 이르게 된다. 고갯마루에는 불재정류장과 불재농장이라고 적힌 노란 입간판이 눈에 띈다. 순천-완주고속도로 동순천 I.C에서 내려와 순천만정원을 거쳐 들어오는 방법도 있으니 참조할 일이다. 실제로 가보기산악회의 버스는 이 코스를 이용했다.
▼ 산행들머리는 낙안읍성 방면을 바라보았을 때 오른편으로 열린다. 들머리에 금전산등산로 이정표(불재)와 법황사 이정표가 세워져 있고, 몇 걸음만 더 걸으면 '금전산 안내도'를 만나게 되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임도는 일단 넓다. ‘SUV 차량’이라면 충분히 통행할 수 있을 정도로 경사(傾斜)까지도 느긋하다. 조림(造林)이 잘 된 임도를 따라 5분쯤 걸으면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이정표도 보이지 않고, 길의 폭까지도 얼추 비슷하지만 이곳에서는 오른편, 그러니까 경사가 조금 더 가파르다 싶은 길로 들어서면 된다. 이어서 5분쯤 후에 왼편으로 대한불교일승종 소속의 사찰인 ‘법황사’ 가는 길이 나뉘나 이를 무시하고 곧장 진행하면 된다.
▼ 법황사갈림길에서 다시 5분쯤 더 오르면 다시 왼편으로 길이 나뉜다. 뒤편에 보이는 암릉에 이끌려 들어서보니 비닐하우스 모양의 허름한 건물에 연등(燃燈) 몇 개가 매달려 있다. 명품 후미대장이신 허고문님께 여쭈어보니 ‘구능사’라고 일러주신다. 그러나 말이 사찰(寺刹)이지 사찰이라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언제부턴가 내 의식 속에는 사찰이라면 당연히 번듯한 전각(殿閣)들을 연결시키고 있었던 모양이다. 스님들의 정진(精進) 장소인 사찰을 건물의 외관과 연관 지어서는 안 되는 데도 말이다.
▼ 구능사에서 산길은 가파르게 변한다. 그러나 다행이도 그 거리는 길지 않다. 8분쯤 후에는 집채보다 더 큰 바위 앞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버젓이 ‘구능수’라는 이름까지 갖고 있는 바위이다. 우람한 바위 벽 아래에는 사람 한두 명이 들어 갈만한 크기의 동굴이 있고, 2~3m 위쪽 바위벽에도 작은 냄비 뚜껑만한 구멍이 파여 있다. 구능수에는 재미있는 옛이야기 하나가 전해진다. 예전에 이곳에서 수도하던 한 처사(處士)가 있었는데, 바위 위 구멍에서 하루 분의 쌀이 매일 나와 연명을 했다 한다. 하루는 손님이 찾아와 식량이 모자라자 쌀이 더 나오게 하려고 부지깽이로 구멍을 쑤셔대자 쌀 대신에 쌀뜨물만 흘러내렸다고 한다. 바위 앞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구멍에 붙어있는 석영이 그때 흘러내린 쌀뜨물이 굳은 것이라고 적혀있다. 가지산을 답사하면서 만났던 ‘쌀바위’의 전설과 너무도 유사하다. 또한 바위 아래의 굴에 들어가면 신령스러운 ‘석유구’가 있다는데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얼핏 들여다볼 때 우물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 산길은 오른쪽 산허리를 감아가며 위로 향한다. 구능수의 바위군락을 피하려다보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구능수에서 3~4분쯤 더 오르면 오른편에 바위들이 무리지어 있는 것이 보인다. 놓치지 말고 들어가 봐야 할 곳이다. 멋진 전망대이기 때문이다. 전망대에 서면 산행을 시작했던 불재 너머로 오봉산과 호사산이 차례로 도열하고 있다. 그 왼편에 보이는 들녘은 상사면일 것이다. 그리고 고개라도 돌려볼라치면 이번에는 올라야할 봉우리가 나타난다. 마치 투구의 뿔처럼 생긴 거대한 바위 하나가 유독 시선(視線)을 빼앗는다.
▼ 조망(眺望)을 즐긴 후에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이어지는 산길은 바윗길이 대부분, 덕분에 조망이 시원스럽다. 다만 조금 전에 보았던 풍광과 다를 것이 없기에 그냥 갈 길만 재촉한다. 그러다가 13~4분 후에는 아까 전망대에서 올려다볼 때 투구의 뿔 모양으로 보이던 바위 아래에 이르게 된다. 산길은 더 이상은 버티기 힘들다는 듯이 이곳에다 데크로 된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계단에서 또 다시 조망이 시원스럽게 터진다. 그리나 구태여 이곳에서 시간을 허비할 필요는 없다. 바위를 우회(迂廻)해서 오르면 또 다른 전망대가 나오는데 이곳에서의 조망이 더 뛰어나기 때문이다. 아까 전망대에서 보았던 전경이 또 다시 펼쳐지는데, 아까보다 더 넓고 더 또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특히 이곳 금전산과 함께 낙안의 양대 진산이라는 오봉산이 바로 코앞으로 다가온다.
▼ 이곳에서부터 다시 산길은 주능선을 따른다. 그리고 그 길은 가파르면서도 험상궂다. 그러나 다행이도 가끔 시원스런 조망이 터지기 때문에 오르는 게 고통스럽지만은 않다. 그리고 10분쯤 후에는 돌탑이 있는 ‘590m봉’에 올라서게 된다. 산행을 시작한지 50분쯤 지났다. 돌탑봉에는 벤치 2개를 놓아두었다. 아마 이곳까지 오르느라 고생한 등산객들에게 잠시나마 쉬어가라는 배려인 모양이다.
▼ 돌탑봉에 올랐다면 고생은 일단 끝났다고 보면 된다. 이어지는 산길은 흙길인 데가 경사(傾斜)까지 밋밋하기 때문이다. 돌탑봉을 내려가다 보면 왼편으로 시야(視野)가 열리는 전망바위를 만나게 된다. 낙안읍성과 동교저수지, 그리고 낙안들녘이 넓게 펼쳐진다. 그 너른 들판을 병풍산과 백이산 등이 산군(山群)을 이루며 느슨하게 둘러싸고 있다.
▼ 조망을 즐기다가 다시 산행을 이어가면 안부에서 궁글재를 만나게 된다. 돌탑봉에서 17분 정도가 걸렸다. 벤치를 갖춘 쉼터의 역할까지 겸하고 있는 궁글재는 삼거리(이정표 : 금전산정상 1.7Km/ 낙안휴양림 1.4Km/ 불재 1.7Km), 이곳에서 왼편은 휴양림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정상으로 가려면 계속해서 능선을 타야 함은 물론이다.
▼ 궁굴재를 지나면서 산길은 다시 오르막길로 변한다. 그러나 오르는데 조금도 부담이 없으니 그저 느긋하게 걷기만 하면 된다. 가는 길에 소나무 가지 아래로 나타나는 돌탑봉의 암릉도 구경하면서, 한껏 여유를 부리다보면 14분 후에는 커다란 소나무 아래에 벤치가 놓여있는 무명봉(557m봉)에 올라서게 되고, 이어서 12~3분 후에는 어느덧 정상에 이르게 된다. 정상 조금 못미처, 그러니까 50m도 채 떨어지지 않는 지점에 삼거리(이정표 : 금강암 0.4Km, 낙안온천 1.8Km/ 오공재 2.4Km/ 불재 3.4Km)가 있다. 오른편은 오공재에서 올라오는 길이니 신경 쓸 필요 없이 눈앞에 보이는 정상으로 가면 된다. 들머리에서 정상까지는 1시간 30분이 걸렸다.
▼ 커다란 소나무 몇 그루가 외로운 정상에는 예쁘장하게 생긴 정상표지석 외에도 커다란 돌탑 2기와 벤치, 그리고 흉물스럽게 몸통을 드러낸 삼각점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고는 볼 수 없지만 나름대로 열리기는 한다. 북동쪽에는 조계산과 고동산이 그리고 동쪽에는 광양의 백운산이 나타나지만 그다지 또렷하지는 않다. 날씨가 좋을 때에는 무등산과 하동의 금오산까지 눈에 들어온다는데 말이다.
▼ 하산은 금강암 방향이다. 하산을 시작해서 70~80m쯤 내려가면 헬기장을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의 조망(眺望)도 나쁘지 않다. 남쪽으로 오봉산과 제석산이 뚜렷하고 서쪽 산자락 아래에는 낙안면의 너른 들녘이 펼쳐진다. 들녘 가운데에 들어앉은 낙안읍성은 보너스(bonus)로 치면 될 일이다. 그리고 그 너머로는 호남정맥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조망을 즐기려는데 총무님이 부른다. 그리고 딸기에다 곶감까지 건네준다. 내려오는 버스 안에서도 이것저것 챙겨주었는데, 그런 호의가 집사람에게는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다음에는 과일이라도 넉넉하게 챙겨오자고 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 하산을 시작한지 10분 조금 못되면 편백나무 군락이 나오면서 진행방향으로 시야(視野)가 열린다. 그리고 잠시 후에 만나게 되는 전망바위에서는 아예 뻥 뚫려버린다. 전망바위 위에 올라서면 빼어난 자태의 암릉들이 마치 한 폭의 산수화(山水畵)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가운데에 지붕만 보이는 것이 금강암이고 왼편에 보이는 거대한 바위봉은 원효대이다. 개미처럼 작은 크기의 사람들이 올라있는 봉우리는 물론 의상대일 것이다. 그리고 그 뒤편에는 낙안의 너른 들녘과 읍성(邑城)이 배경처럼 자리 잡고 있다. 의상대 돌탑 뒤로는 백이산과 장군봉 등 보성의 산들도 시야(視野)에 들어온다. 이건 숫제 그림이다. 그것도 잘 그린 한 폭의 풍경화(風景畵) 말이다.
▼ 금강암으로 내려온 등산로는 바위 아래 모셔진 플라스틱(plastic) 지붕의 산신각(이정표 : 낙안온천 1.4Km/ 휴양림관리소 1.5Km/ 금전산정상 0.4Km))에 이어 자연스레 의상대로 이어진다. 도중에 부처님 두 분을 볼 수 있다. 낙안읍성을 굽어보는 듯한 절벽의 한 쪽에 ‘관음좌상마애불’이 새겨져 있는데 아무래도 조성된 지는 얼마 되지 않은 것 같다. 그것보다 눈길을 끄는 부처님은 나무로 만들어진 난간의 너머, 즉 바로 아래가 절벽인 의상대의 끄트머리 바닥에 있다. 일명 ‘자연석조여래좌상’이다. 바위 위가 움푹 패여 있는데, 이곳에 물이 고이면 그 생김새가 영락없이 부처님으로 환생한다고 한다. 마치 오늘처럼 말이다. 물이 없을 경우에는 그냥 지나치기 십상일 수밖에 없음은 물론이다. 누군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지니 그냥 흘려듣지 말고 유념해 두었다가 놓치지 말고 가슴에 담아볼 일이다.
▼ 관음보살상 너머로 금강암이 바라보인다. 집채보다도 훨씬 큰 바위들이 절집 주위를 빙 둘러싸고 있는 것이 풍수지리(風水地理)에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가히 명당(明堂)을 꿰차고 앉았다. 거기다 원효대와 의상대가 문설주 노릇까지 해주고 있으니 잘생기기까지 했다. 하긴 암자에선 의상대를 서대(바위), 원효대를 동대(바위)라고 부른단다.
▼ 의상대의 오른편 바위절벽, 우락부락한 근육질로 이루어진 것이 금강암 방향의 암릉에 비해 하나도 뒤떨어질 것이 없어 보인다.
▼ 의상대에 서면 거대한 바위군락이 맞은편에서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바로 원효대이다. 그러나 저 봉우리는 그저 눈요기로만 만족해야 한다. 올라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더 힘차면서도 위용 있게 보인다.
▼ 의상대를 빠져나오면 송광사의 말사인 금강암(金剛庵)이다. 돌로 쌓은 벽에 기와만 얹어놓은 암자(庵子)는 절집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동네의 여염집에 가깝다. 백제 위덕왕(威德王) 때 검단선사(黔丹禪師)가 창건(創建)하고 신라의 의상대사가 중수(重修)했다는 금강암은 송광사 16국사의 마지막 국사인 고봉화상이 수행하는 등 한때 선풍을 드날렸다. 그때만 해도 원통전, 지장암, 선원, 삼성각 등 부속건물을 지닐 정도로 규모를 제대로 갖춘 사찰이었으나 1948년 10월 여수·순천사건 때 불타버렸다고 한다. 1992년 작은 집을 지어놓은 게 지금의 암자가 되었단다.
▼ 암자를 내려서면 거대한 암벽(巖壁) 아래에서 ‘정진(精進)에 방해가 되니 조용히 해 달라’ 등 서너 개의 당부사항이 적혀있는 안내판을 만나게 된다. 이미 암자를 빠져나왔으니 상관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맨 아래에 적혀있는 ‘길이 매우 비좁고 위험하다’는 경고만 유념하면 된다. 그러나 안내판의 문구와는 달리 산길은 그다지 위험하지 않다.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얘기이다.
▼ 돌계단을 따라 잠시 내려가면 집채만큼 큰 바위들이 뒤엉킨 굴이 하나 나타난다. ‘극락문(極樂門)’이라는 어엿한 이름까지 갖고 있는 통천문(通天門)이다. 이 문을 통과하려면 'S' 모양으로 돌아내려가야 한다. 문 위에서 돌아 내려가면 문 아래에 이르게 되는 형태이다. 만일 이 문을 거꾸로, 그러니까 아래에서 위로 통과한다면 다른 세상으로 빠져나온 느낌이 들 것 같다. 문을 통과하자마자 저만큼 위에 부처님이 계시는 절집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때에 사바세계에서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선 느낌이 들지 않을까?
▼ 내려가는 길은 또렷하다. 아마 금강암의 신도들이 종종 오르내리면서 길은 닦아놓은 덕분일 것이다. 거기다 더해 이곳 순천시가 등산로 정비에 많은 심혈을 쏟아 안전함까지 더해졌다. 이런 때는 주변 풍광을 즐겨볼 일이다. 내려가는 길에 가끔 만나게 되는 기암(奇巖)에다 눈길을 맞추기도 하고, 또 어떤 곳에서는 고개를 뒤로 돌려보기도 한다. 금강암을 가운데에 끼고 있는 의상대와 원효대가 첨탑처럼 우뚝 솟아오른 풍광을 또 다시 내보여준다.
▼ 산행날머리는 금둔사
눈요깃거리를 즐기면서 내려서다보면 이내 857번 지방도에 만나게 되면서 산행은 사실상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총 2시간30분이 걸렸다. 중간에 막걸리를 마시느라 쉰 시간을 감안할 경우에는 2시간20분이 걸린 셈이다. 내려서는 곳에서 길 건너에 보이는 건물은 ‘낙안온천’이다. 아직 입소문은 덜 탔지만 물이 좋다고 소문났으니 산행 후의 피로를 풀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강알칼리성 온천이라서 비누가 필요 없을 정도로 물이 매끄럽다고 하니 말이다. 산행이 종료되는 금둔사는 이곳에서 오른편, 그러니까 오공재쪽으로 600m쯤 더 가야만 만날 수 있다. ‘태백산맥’의 저자이자 이 지역이 배출한 걸출한 소설가인 ‘조정래선생’의 이름을 딴 857번 지방도를 따라서 말이다.
▼ 도로를 따라 20분 조금 못되게 걸으면 도로 오른쪽에 금둔사(金芚寺)를 알리는 작은 표지판과 함께 금둔사 입구가 나온다. 금둔사 입구에서 오르막길을 따라 약 100m쯤 가면 금둔사 일주문이 나오고, 일주문 위에서 선암사의 승선교(昇仙橋 : 보물 제400호)를 닮은 홍교(虹橋 : 다리 밑이 반원형이 되게 쌓은 다리)를 건너면 금둔사의 대웅전이다. 한국불교태고종 소속의 사찰인 금둔사(전통사찰 제79호)는 1530년(중종 25)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금둔사 재금전산(金芚寺 在金錢山)’이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사찰이 존속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는 있으나 정확한 창건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으며, 그저 백제 때 지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지 모르나 폐사(廢寺)되었다가 1984년 이후 지허선사가 불사를 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존 건물로는 대웅전과 태고선원, 유리광전, 약사전, 설선당, 산신각, 범종각, 일주문, 요사 등이 있다. 이외에도 구산선문 중 사자산문을 연 철감(澈鑒)국사와 그의 제자인 징효(澄曉)대사가 수행했다는 동림선원(桐林禪院)터 등 다른 볼거리들이 여럿 있지만 부족한 시간까지 쪼개어가며 둘러봐야 할 만큼 중요하지는 않다.
▼ 금둔사에 들렀다면 가장 먼저 찾아봐야할 곳은 ‘삼층석탑(金芚寺址三層石塔, 보물 제945호)’과 ‘석불입상(金芚寺址石佛碑像, 보물 제946호)’이다. 아까 건넜던 홍교에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좁은 돌계단길이 나오고, 그 끄트머리에 삼층석탑 한 기와 비석 형태의 독특한 석불입상 하나가 숲속 한켠에 조용히 자리하고 있다. 물론 곳곳에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무너져 있던 것을 1979년에 복원한 ‘삼층석탑은’ 이중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부를 올린 통일신라시대의 탑으로 균형이 퍽 잘 잡혀 있다. 전체 높이는 약 4m, 하층기단에 우주와 탱주를 모각했으며 상층기단 각 면에는 팔부신중(八部神衆)을 2구씩 선명하게 조각하였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씩 별개의 돌로 얹었으며, 각 층 몸돌에는 우주를 모각(模刻)하였다. 지붕돌의 층급받침은 모두 5단씩이며 상륜부는 아쉽게도 남아 있지 않다. 또 다른 국보급 문화재인 ‘석불비상’은 삼층석탑과 마찬가지로 9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에서 고려시대로 넘어오면 불상 조각의 수법이 추상화되는 형태를 보이는데, 이곳의 석불은 추상화되기 이전의 신라의 사실적인 조각 수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수작이다. 얼굴 모습과 옷의 조각에서 실제 사람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얼굴이 둥글고 온화하며, 특히 코와 입술선이 곱다. 신체는 환조에 가깝게 불룩하며, 옷의 주름은 형식적이지만 법의는 살결이 보일 듯 얇다. 가슴에 끌어 모은 손가락이나 발가락 등 세부묘사 까지도 소홀히 하지 않은 것이다.
▼ 국보급 문화재를 구경했으면 이번에는 홍매화를 만나볼 차례이다. 어제가 경칩(驚蟄)이었으니 계절적으로는 봄이 맞다. 하지만 봄이 여기저기 남아있는 겨울의 흔적을 지우기엔 아직 만만치 않은 것이다. 봄과 겨울이 밀고 당기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봄의 기운이 센가 싶더니 겨울인 듯 찬바람이 불어오기도 한다. 당연히 꽃소식이 전해지려면 아직은 더 있어야한다는 얘기이다. 그러나 홍매화만은 예외이다. 그 증거는 금둔사에서 찾을 수 있다. 산신각 옆이나 요사채의 뒤편으로 가면 만나게 되는 금둔사의 홍매화는 수령은 얼마 되지 않으나 거제도의 구조라 초등학교(분교)에 있는 백매에 이어 가장 빨리 피는 매화의 하나이다. 이들 매화나무는 ‘납월매(臘月梅)’라고 불린다. ‘납월’은 음력 섣달을 가리키는 말이므로 금둔사 매화나무는 ‘설중매(雪中梅)’, 즉 눈 속의 매화가 된다. 그리고 요사채를 빠져나오는 길에 또 다른 매화나무가 보인다. 이번에는 청매화이다. 그러나 청매화가 꽃망울을 열기에는 아직은 때가 이른 모양이다. 이제야 몽우리를 키워가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역시 홍매가 청매보다 훨씬 더 일찍 꽃망울을 터뜨린다는 것이 증명되는 순간이다.
▼ 귀경 길에 잠깐 낙안읍성(樂安邑城 : 사적 제302호)에 들렀다. 기름진 땅에서 온 백성이 평안히 산다는 ‘낙토민안(樂土民安)’의 뜻을 지닌 낙안(樂安) 땅에 세워진 이 읍성(邑城)은 조선 전기에 쌓은 것으로 전북의 고창읍성, 충남 서산시의 해미읍성과 함께 조선 3대 읍성으로 꼽힌다. 읍성은 요즘 말로 하면 지방계획도시에 해당한다. 처음으로 토성(土城)을 쌓은 때는 조선 태조 6년(1397), 낙안 출신의 전라도 수군절제사 김빈길 장군이다. 왜구(倭寇)의 잦은 침입을 막고자 해서였단다. 석성(石城)으로 중수된 것은 그로부터 300년 후다. 인조 4년(1626) 임경업 장군이 낙안군수로 부임해 4~5m 높이의 성벽을 쌓았단다. 지금의 낙안읍성은 국내 유일의 ‘살아 있는 민속촌’으로 이름 높다. 22만3108㎡(6만7490평) 면적에 300여동의 초가가 옹기종기 모여 있고, 그 안에 100여 세대 300여 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마을은 잘 보존된 전통가옥을 포함해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성곽·객사·비각 등 다수의 문화재도 보유하고 있어 과거의 생활상을 짐작하게 한다. 또 낙풍루·쌍청루·낙민루의 세 큰 문이 성 안의 도로와 긴밀히 연결되며 네 곳에 치성(雉城 :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을 두어 외적을 막으려 한 데서는 조상의 지혜가 엿보인다.
▼ 읍성(邑城) 앞에서 바라본 금전산, 봉우리 아래의 암석지대가 마치 얼음처럼 보여 실제보다 더 높고 강하게 느껴진다. 아마 이곳에서 바라본 금전산의 풍광이 가장 빼어날 것이다. 읍성으로 들어가는 것을 사양하고 입구에 있는 식당가로 들어선다. ‘낙안읍성’은 이번이 벌써 세 번째, 4천원이나 되는 비싼 입장료를 물면서까지 또 다시 둘러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신 이 지방의 명물인 꼬막을 먹어보기로 결정을 내렸다. 인근 득량만과 여자만에서 갓 잡은 꼬막으로 요리한 ‘정식’이 일품인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 짐작은 빗나가지 않았다. 어쩌면 지난해에 들렀던 ‘꼬막정식’의 본고장 벌교에서 먹어본 것보다 한 수 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다만 ‘참꼬막’이 아닌 ‘새꼬막’을 재료로 사용한다는 것만 빼면 말이다. 벌교에서는 외형(外形)이 드러나는 꼬막들은 모두 ‘참고막’을 사용하고 있었다.
♧ 에필로그(epilogue), 이번 주말 산행은 어는 산으로 갈지를 갖고 유독 고민을 많이 해야만 했다. 웬일인지 가보지 않았던 산들을 공지한 산악회들이 두어 개 더 있었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선택한 곳은 금전산, 인터넷 검색을 해본 결과 생각보다 산세(山勢)가 뛰어난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버스에 오르고 보니 오늘도 역시 미안한 생각부터 먼저 든다. 버스 안이 온통 빈자리 천지인 것이다. 오늘도 역시 산악회 최사장님께서 손해를 감수하신 모양이다. 우리야 안 가본 산을 답사(踏査)할 수 있어서 좋지만 이런 손해를 심심찮게 감수해야만 하는 최사장님은 무슨 죄란 말인가.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면 서로서로 좋을 텐데 아쉽다. 요즘 유행하는 ‘윈-윈(win-win)’이라는 화두(話頭)가 생각나기에 하는 말이다. 아무튼 손해를 감수해가면서까지 산행을 진행해 주신 산악회 운영진께 감사드리며, ‘이것저것 챙겨줘서 너무 고맙다’는 말을 총무님께 꼭 전해달라는 집사람의 부탁까지 함께 전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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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에 숨었어도 빼어난 자태까지는 감출 수 없는 용암산-도덕산('14.12.27) (0) | 2015.01.02 |
암릉에서 즐겨보는 뛰어난 다도해의 조망, 운암산-깃대봉('14.9.13) (0) | 2014.09.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