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無等山, 1,187m)

 

산행일 : ‘14. 6. 14()

소재지 : 광주시 북구와 동구, 그리고 화순군 이서면, 담양군 남면의 경계

산행코스 : 원효사지구 공원관리사무소주검동유적지얼음바위 갈림길서석대입석대장불재석불암지공너덜규봉암(광석대)신선대갈림길꼬막재무등산장원효사지구 공원관리사무소(산행시간 : 4시간40)

같이한 산악회 : 좋은 사람들

 

특색 : 광주사람들은 인구 100만이 넘는 대도시 인근에 해발 1000m가 넘는 높은 산이 있는 곳은 광주뿐이라는 것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 무등산이 광주시의 진산(鎭山)이자 모산(母山)이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하긴 시내버스를 타고 30분이면 산의 중턱까지 다다를 수 있으니 어찌 시민들이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웅장하지만 거칠지 않은 산세(山勢)에다 서석대와 입석대 등 주상절리(柱狀節理 : pillar-shaped joint)라는 멋진 자연경관까지 품고 있으니 광주시민들에게는 도심공원(都心公園)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거기다 한적함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석불암과 규봉암코스를 권하고 싶다. 지공너덜의 한쪽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석불암과 광석대가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규봉암은 전국의 어느 산사에 뒤지지 않을 정로로 멋지면서도 한적하기 때문이다.

 

산행들머리는 원효사 주차장(북구 금곡동 산209-5 : 무등로 1550)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창평 I.C에서 내려온 뒤 우회전하여 60번 지방도를 탄다. 잠시 후 고서교차로(交叉路 : 담양군 고서면 성월리)에서 좌회전해 887번 지방도를 따라 들어가면 광주호(光州湖)가 나온다. 광주호 상류에 위치한 가사문학관의 조금 위에 있는 갈림길(남면 지곡리)에서 우회전하여 10분 정도 들어가면 원효사주차장에 닿는다. 산행이 시작되는 공원관리사무소는 식당가 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는 곳에 있다.

 

 

 

 

공원관리사무소의 오른편으로 난 도로로 접어들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장불재로 넘어가는 임도(林道)인데, 들머리에 세워진 이정표(서석대 6.4Km, 장불재 6.4Km, 토끼봉 3.2Km/ 꼬막재 2.0Km, 규봉암 5.5Km, 석불암 5.8Km)를 참조하면 될 것이다. 들머리에서 20~30m쯤 들어가면 왼편에 무등산 옛길입구가 나온다. ‘무등산 옛길이라고 새겨진 자연석(自然石) 옆으로 난 산길로 올라서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지금 오르고 있는 산길은 무등산 옛길이라는 어엿한 이름을 갖고 있다. 무등산 옛길은 광주 도심(都心)에서 원효사를 거쳐 서석대에 이르는 옛사람들이 오르던 길을 복원(復原)한 새 길이다. 옛길은 현재까지 총3구간이 만들어졌다. 1구간은 광주 도심과 무등산 산행을 시작하는 원효사까지, 2구간은 원효사에서 서석대를 오르는 등산이다. 3구간은 광주 도심에서 충장사를 거쳐 담양으로 이어진다. 우리 부부는 오늘 2구간(6.4Km)을 통째로 걷게 되는 것이다. 오늘 우리부부는 복원된 옛길을 걸으며 잃어버린 옛길과, 또 그 길과 함께 사라졌던 옛이야기들을 되돌아보게 될 것이다. 참고로 3구간은 무등산 자락의 낮은 능선을 따라 난 숲길. ‘유적(遺跡)과 가사문화권(歌辭文化圈)으로 걸어가는 역사(歷史)이라고 불린다.

 

 

 

 

길은 곧바로 원시림(原始林) 속으로 들어간다. 제일기도원과의 갈림길을 지나면 길의 이름대로 오감(五感)을 열어야 한다. ‘무등산 옛길2구간은 무아지경(無我之境)의 길이라는 어엿한 이름을 갖고 있다. 이는 산을 정복(征服)하려고 하지 말고 산에 귀를 기울이고, 산을 느끼면서 하나가 되어 보라는 얘기일 것이다. 새소리와 바람소리만이 있는 고요한 산길을 따라 숨소리까지 죽여가면서 조용히 걸어본다. 그런데 앗뿔싸! 늦어도 너무 늦게 걷는 앞사람을 추월하는 내 모습이 집사람의 눈에는 마치 자기를 떼어놓고 도망치려는 것으로 비쳐졌나보다.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나를 추월하더니 뒤도 안돌아보고 내빼버리는 것이 아닌가. 화가 났음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화는 규봉암 근처에서 동생 내외를 만날 때까지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모처럼 복원된 옛길이니 옛날처럼 걸어보면 어떨까? 혼자거나 아니면 둘이서 호젓이 걸어보는 것 말이다. 물론 옛길을 헤칠 수도 있는 쇠지팡이(스틱)는 내버려두고 말이다. 이 길은 오르는 사람들만 이용하도록 설계되었다고 한다(내려올 때는 장불재 방향이나 중봉을 거쳐서 내려오면 된다). 자연 훼손(毁損)을 최소화해 만든 좁은 길을 따라 오르는 사람들을 내려오는 사람들이 방해하지 않도록 하려는 배려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려오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았다. 옛길을 올라가는 사람들이 오감(五感)을 열어 자연과 일체가 될 수 있도록 설계한 이의 뜻을 거스르고 있는 것이다.

 

 

완만(緩慢)하면서도 한적한 산길이 계속된다. 그렇다고 경사(傾斜)가 아주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있기는 하지만 그리 심하지는 않다는 얘기이다. 걷기 딱 좋은 산길을 따라 20분쯤 걷다보면 금()줄에 둘러싸인 반반한 바위 하나가 나타난다. ‘주검동 유적(鑄劍洞 遺蹟)’이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던 김덕령 장군이 칼과 창 등의 무기(武器)를 만들었던 곳이라는 안내판이 바위 옆에 세워져있다. 김덕령 장군의 시호(諡號)는 충장공(忠壯公), 임진왜란 때 혁혁한 공을 세웠던 그는 1596년 이몽학(충청도에서 난을 일으킴)과 내통하였다는 신경행(辛景行)의 무고(誣告)로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으로 인한 장독(杖毒)으로 옥사(獄死)하였다. 남 잘 되는 꼴을 못 보는 나쁜 사람들이 있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매 한가지인가 보다. 참고로 그를 모신 사당(祠堂)이 요 아래 무등산 자락(광주시 북구 금곡동)에 있으며, 광주시 인근에는 그와 관련된 지명들이 많이 분포되어 있다.

 

옛길을 걷다보면 가끔 자연쉼터가 나온다. 물도 마시고 숨도 고르면서 걸어보라는 의미일 것이다.

 

 

주검동 유적에서 한적한 숲길을 따라 7분 정도 더 걸으면 삼거리가 나온다. '물통거리라고 한다. 옛날 이 길은 나무꾼들이 땔감이나 숯을 구워 나를 때 지나다니던 산길이었고, 1960대에는 군부대(軍部隊)에서 보급품을 나르던 길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1980년대부터 사용하지 않다가 옛길이 복원되면서 다시 개방되었다는 것이다. 길가에 그들이 지나다닐 때 마셨던 샘을 복원해 놓았지만 뚜껑을 덮어버린 탓에 물은 마실 수는 없다. 샘의 옆에 만들어 놓은 쉼터에서 꽤 많은 사람들이 망중한(忙中閑)을 즐기고 있는 것을 보면, ’무등산 옛길을 찾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의미일 것이다. 맞다. 광주시민들에게 무등산은 도심공원(都心公園)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물통거리에서 15분 조금 못되게 걸으면 비록 크지는 않지만 반반하게 생긴 바위 하나가 나타난다. 치마바위라는데 바위에 대한 설명은 찾아볼 수 없고, 바위 앞에 원목(原木)을 세우고 그 기둥에다 치마바위라고 적어 놓았을 따름이다. 치마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일까? 아니면 지나가던 선녀(仙女)가 벗은 옷이라도 이 바위 위에다 걸쳐 놓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일까? 이름이 지어진 사연이 궁금했지만 아쉬운 마음만 간직한 채로 그냥 지나치고 만다.

 

 

치마바위를 지나면서 두발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다. 산길이 서서히 가팔라지기 시작한데다가 길바닥까지 너덜길로 변하기 때문에 걷기가 여간 사납지 않다. 가파른 산길을 15분 조금 넘게 치고 오르면 얼음바위 갈림길(이정표 : 무등산 옛길/ 얼음바위 나가는 길)’에 이르게 된다. 누군가가 이정표의 방향표시 아래에 서석대까지 1.2Km가 남았다고 적어 놓았다.

 

 

 

 

얼음바위 갈림길을 지나면서 산길은 더욱 가팔라진다. 그 가파름을 이겨내지 못한 산길은 곧바로 위로 향하지 못하고 왔다갔다 갈지()자를 그리며 위로 향하고 있다. 아마 오늘 산행에서 가장 힘든 구간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이렇게 심한 가파름도 집사람의 발걸음을 붙잡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조금도 속도를 늦추지 않은 채로 내빼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드디어 집사람을 쫒아가기에 지친 내 입에서 비명소리가 새나오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끝내 좀 천천히 가라는 하소연을 하고야 만다. 그러나 집사람은 고개 한번 돌려보지 않고 올라가기에 바쁘다. 아직도 그녀는 온몸으로 나에 대한 불만을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얼음바위 갈림길에서 15분 조금 넘게 오르면 북봉 갈림길’(이정표 : 서석대 0.5Km, 입석대 1.0Km/ 북봉 1.6Km/ 중봉 0.5Km, 원효분소 5.9Km)이다. 이곳에서 만나게 되는 널따란 길은 무등산 정상으로 연결되는 보급로이다. 원시림(原始林)에 가려왔던 시야(視野)는 이 부근에서 처음으로 하늘을 열어준다. 이곳에서 길은 세 갈래로 나뉜다. 왼편은 북봉, 오른편은 중봉으로 가는 길이다. 서석대로 가려면 도로를 가로질러 등산 안내도가 있는 작은 초소(哨所 : 서석대안내소) 앞을 통과해야 한다.

 

 

 

초소 앞을 지나면 또 다시 짙은 원시림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자연석으로 쌓아 만든 돌계단을 밟으며 10분 조금 못되게 오르면 오른편 숲이 잠깐 열리면서 바위 하나가 얼굴을 살짝 내민다. 뛰어난 전망대(展望臺)이니 결코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될 일이다. 누군가 이곳을 하늘이 열리는 곳이라고 표현 것을 본 일이 있다. 그의 표현은 한 치도 틀림이 없었다. 바위 위에 올라서면 먼저 오른쪽 능선에 볼록하게 솟아오른 중봉과 TV중계소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 뒤에는 광주시가지가 널따랗게 펼쳐지고 있다. 또한 고개를 왼편으로 돌리면 서석대가 울창한 숲을 헤치며 머리를 내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한마디로 장관이다.

 

 

 

 

전망대에서 돌계단을 밟으며 잠깐 오르면 오른편에 각을 이룬 바위기둥 들이 나타난다. 아마 주상절리(柱狀節理 : pillar-shaped joint)일 것이다. 무등산의 대표적인 주상절리인 서석대는 이곳에서 조금 더 올라가야 하니까 서석대는 아닐 것이고, 그렇다면 주상절리의 예고편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이곳에서 다시 나무계단을 밟고 오르면 잠시 후에는 서석대전망대(이정표 : 입석대 0.7Km/ 전망대 20m/ 원효분소 6.8Km)에 이르게 된다. 참고로 주상절리(柱狀節理 : pillar-shaped joint)는 용암(鎔巖)이 식을 때 수축되어 생기는 절리(節理 : joint) 중에 단면(斷面)의 형태가 오각형이나 육각형의 기둥모양인 것을 말한다.

 

 

 

서석대 전망대에 서면 서석대(瑞石臺)의 주상절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같은 주상절리이지만 서석대는 조금 후에 만나게 될 입석대보다 침식(侵蝕)이 덜 진행된 상태라고 한다. 때문에 넘어진 바위들이 주변에 널려있는 입석대와는 달리, 직경 1~1.5m인 돌기둥이 30m 높이로 촘촘하게 병풍(屛風)처럼 서 있다는 것이다. 동서방향으로 늘어선 서석대에 저녁노을이라도 비칠라치면 수정처럼 반짝인다 해서 수정병풍이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육당 최남선은 서석대를 보고 이러한 글을 남겼다. ‘좋게 말하면 수정병풍을 둘러쳤다 하겠고 박절하게 말하면 해금강 한 귀퉁이를 떠왔다 하고 싶다그만큼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는 얘기이다. 서석대가 입석대나 광석대(廣石臺 : 규봉)와 가장 큰 차이점은 그 외모(外貌)이다. 서석대는 병풍(屛風)모양을 하고 있지만 입석대나 광석대는 기둥 모양으로 생긴 것이다. 이는 풍화작용(風化作用)의 진행정도 차이라고 한다. 주상절리 옆에 널려있는 너덜겅은 돌기둥이 무너져 쌓인 것이다. 다시 말해 풍화작용이 가장 많이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절리들은 서있거나 누어있거나 간에 암석의 생성(生成)과 풍화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희귀한 자연유적(自然遺跡)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곳 서석대와 입석대를 합쳐 천연기념물(465)로 지정해 놓았다.

 

 

 

 

전망대에서 오늘 산행 중 최고점(最高點)이기도한 서석대 정상부(頂上部)’는 금방이다. 돌계단을 밟으며 왼쪽으로 살짝 우회(迂廻)하여 오르면 드디어 정상부(이정표 : 입석대 0.5Km, 장불재 0.9Km/ 전망대 0.2Km, 중봉 1.2Km)에 닿게 되면서 무등산 옛길도 끝을 맺는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40분 가까이 지났다. 정상부에 세워진 나무말뚝 모양의 이정표에 적혀있는 일련번호는 40, ‘무등산 옛길1, 2구간을 합하면 그 길이가 11.87이니 산행을 하면서 보았던 말뚝들의 간격이 300m이었나 보다. 서석대의 상부는 오늘 산행 중 가장 높은 위치에 있다. 그렇다고 무등산에서 가장 높다는 얘기는 아니다. 군부대(軍部隊)가 점령하고 있는 정상부는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禁止)하고 있기 때문에, 이곳 서석대의 정상부가 일반인들의 출입이 허용되는 곳 중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는 얘기이다.

 

 

 

 

서석대(瑞石臺)의 상부(해발 1100m)에서 바라본 무등산 정상, 천왕봉과 지왕봉, 인왕봉이 우뚝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군부대(軍部隊)가 주둔하고 있는 탓에 아직까지 입산(入山) 통제구역(統制區域)으로 남아있다.

 

 

정상에 서면 사방으로 시야(視野)가 트인다. 남서쪽에는 광주시가지가 드넓게 펼쳐지고, 그 약간 왼편으로는 영암의 월출산까지 조망(眺望)된다. 북동쪽에는 무등산의 정상을 이루고 있는 천왕봉과 지왕봉, 그리고 인왕봉이 눈앞에 훤하다. 입석대(立石臺)와 광석대(廣石臺 : 규봉) 그리고 이곳 서석대(瑞石臺)를 일컬어 무등삼대(無等三臺) 또는 무등산 삼대석경(三大石景)라고 한다. 오늘은 이 세 곳을 모두 둘러보게 되는 일정이다.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전에도 난 이곳 무등산을 여러 번 올라왔었다. 그러나 광석대는 아예 가볼 생각조차 못했었고, 서석대도 고작해야 대()의 머리 위까지만 올라올 수 있었다. 옛길이 열리지 않았던 때라 입석대를 거쳐 서석대의 머리 위까지만 탐방(探訪)이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서석대를 제대로 느낄 수는 없었음은 물론이다.

 

 

 

서석대 정상부에서 잠깐 내려오면 뱀 모양으로 길쭉하게 누워있는 바위가 나타난다. 바로 승천암(昇天岩)이다. 옛날 이 부근의 암자(庵子)에서 수행을 하던 스님이 무엇엔가 쫒기고 있는 산양(山羊)을 구해준 일이 있었단다. 그런데 어느 날 스님의 꿈에 이무기가 나타나 산양을 잡아먹고 승천(昇天)을 해야 하는데 스님이 훼방을 놓았다며 만약 종소리가 울리지 않을 경우에는 스님이라도 잡아먹겠다고 했단다. 그런데 얼마 후 난데없이 우렁찬 종소리가 울렸고, 이에 이무기는 스님을 놓아주고 승천을 했다는 전설(傳說)을 간직한 바위이다.

 

 

 

서석대에서 장불재 방향으로 10분 조금 넘게 내려가면 등산로 왼편에 누워있는 거대한 돌기둥 무더기를 만나게 된다. 단면(斷面)이 사각형(四角形)이거나 오각형 또는 육각형이고 길이가 10m에 이르는 돌기둥이 마치 교각(橋脚)이 무너져 내린 것처럼 널브러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오른편에는 그런 바위들이 마치 그리스(Greece) 신전(神殿)의 기둥이라도 되는 양 똑바로 서있는 것이 보인다. 입석대(立石臺 : 해발 1017m)이다. 입석대는 한 면()1~2m이고 높이가 10~18m5각 또는 6각 기둥 30여 개가 동서로 40m 정도 늘어서서 장관(壯觀)을 연출하고 있다. 돌기둥 사이의 벌어진 틈에는 작은 관목(灌木)이나 이끼가 자라고 있다. 이곳 입석대도 옆에다 전망대를 만들어 찾는 사람들의 눈요기를 돕고 있다.

 

 

 

입석대에서 장불재까지는 10분쯤 내려오면 된다. 광주시와 화순군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장불재는 예전 화순의 동복이나 이서 사람들이 광주를 오갈 때 오르내리던 해발이 900m나 되는 높은 고갯마루이다. 장불재는 종합 쉼터라고 보면 된다. 방송사(放送社)의 송신시설을 배경으로 널따란 공터에 공원안내소와 대피소, 그리고 벤치 등 다양한 시설을 만들어 놓았다. 장불재는 오거리(이정표 : 석불암 1.6Km, 규봉암 1.8Km/ 안양산 3.1Km, 만연산 3.4Km/ 중머리재 1.5Km/ 원효분소 6.4Km/ 입석대 0.4, 서석대 0.9Km), 이곳에서 규봉암으로 가려면 벤치 사이로 난 왼쪽 길로 들어서야 한다.

 

 

 

 

규봉암으로 가는 길은 한마디로 곱다. 경사(傾斜)가 거의 없이 반반한데다가 넓기까지 하다. 바닥도 역시 울퉁불퉁한 곳이 거의 없이 반반한데, 조금이라도 험하다 싶은 곳에는 어김없이 거적을 깔아 놓았다. 장불재에서 200m쯤 걸으면 장불재 쉼터(이정표 : 석불암 1.4Km, 규봉암 1.7Km, 신선대 4.8Km/ 도원마을 3.4Km/ 장불재 0.2Km)을 만나게 되고, 이어서 20분 후에는 석불암 갈림길‘(이정표 : 석불암 0.3Km, 지공너덜0.4Km/ 규봉암 0.6Km/ 장불재 1.3Km)에 이르게 된다.

 

 

 

석불암 갈림길에 이르러 난감한 상황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석불암으로 올라가는 길이 막혀있는 것이다. 석불암의 석축(石築)이 무너져 내린 탓에 안전사고가 예상되어 길을 막았다고 한다. 경고(警告)에도 불구하고 금()줄을 넘고 본다. 어렵게 찾아왔는데 석불암을 건너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석축붕괴 현장쯤이야 조금 돌아가면 될 것 아니겠는가. 물론 집사람에게는 규봉암으로 곧장 진행하라고 이르고 나 혼자서 들어선 것이다.

 

 

 

갈림길에서 올라서면 잠시 후 너덜겅이 나오고 그 끄트머리에 허름한 암자(庵子) 하나가 나타난다. 옛날 도선국사가 참선했다는 바위벽에 마애여래불상(磨崖如來佛像)이 새겨져 있다고 해서 석불암(石佛庵)이라고 불리는 암자이다. 석굴암이라는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니 참조할 일이다. 한국전쟁 당시 절이 불에 타 폐사(廢寺)되었다가 소규모 불전인 운수선원이 들어서면서 절간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단다. 절의 뒤편 암벽(巖壁)에 새겨진 마애여래불상은 구경하기 못하고 암자의 대문 앞에 있는 감로수(甘露水)를 한 모금 마시는 것으로 위안을 삼아본다. 전각(殿閣)을 새로 짓는 불사가 한창이라서 접근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물은 시원하면서도 달았다. 참고로 마애불의 크기는 높이 98에 대좌높이는 36, 그리고 어깨와 무릎 폭은 각각 4072라고 한다. 이 불상은 높이 225에 너비가 200인 석조불감 안에다 새겼다고 한다.

 

 

 

 

 

석불암에서 규봉암으로 가려면 왔던 방향과 반대방향으로 진행해야 한다. 암자(庵子)를 나서자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시 너덜겅이 나타나는데, 아까 석불암으로 올 때 만났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규모가 크다. 인도 승려 지공대사(指空大師)가 이곳에서 좌선수도(坐禪修道)를 하며 법력(法力)으로 돌을 깔았다고 전해오는 지공너덜이다. 무등산에는 지공너덜 말고도 덕산너덜 등 네 개의 너덜이 장관을 이루고 있으나 이 가운데 지공너덜이 가장 크고(4km) 웅장하다고 한다. 너덜은 주상절리의 미래상이다. 절벽에서 떨어진 주상절리가 풍화(風化) 침식(侵蝕)된 지형이 곧 너덜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 지공너덜은 무등산의 역사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오랜 세월의 침식과 풍화의 흔적을 담고 있는 역사 말이다. 그 역사는 중생대(4500~8500만 년 전)에서부터 시작되었고, 그 붕괴과정은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그렇다면 빙하기(氷河期 : glacial age)에 형성되었다는 대구의 비슬산이나 밀양의 만어산 암괴류(岩塊流 : block stream, stone run)보다도 훨씬 더 오래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지공너덜의 끄트머리에 이르면 둥그렇게 쳐진 돌담이 나타난다. 안으로 들어가면 반반한 바위가 저절로 지붕을 만들고 있는 자연석굴(自然石窟)을 만날 수 있다. 석굴 옆의 바위에 지공대사 좌선수도원(指空大師 坐禪修道院)’이라는 글귀가 적혀있는 것을 보면 지공석굴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어떤 이는 이곳을 보조석굴이라고도 부른다. 보조국사(普照國師 : 1158~1210) 지눌(知訥)이 이곳에서 수도(修道)를 했다는 것이다.

 

 

 

지공너덜에서 조금 더 걸으면 자로 재듯 마름질한 돌기둥들이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것이 보인다. 광석대(廣石臺 : 규봉)가 그 자태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기둥의 형상을 보이고 있는 입석대와 닮았고, 또 어떻게 보면 병풍(屛風)을 둘러놓았던 서석대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입석대보다는 돌기둥의 폭()이 크고, 또한 돌기둥의 사이사이에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것은 서석대와는 다른 풍경이다. 결과적으로 광석대(廣石臺)는 앞서 보았던 두 주상절리(柱狀節理 : pillar-shaped joint)와는 또 다른 외양(外樣)을 갖고 있는 것이다. ‘무등산 3대 석대의 하나인 광석대는 규봉(圭峯)이라고 불리기고 하는데, 규봉에는 광석대 외에도 은신대와 풍혈대, 설법대 등 열 개의 대()가 있다.

 

 

광석대(廣石臺)가 보였다싶으면 잠시 후에는 규봉암(圭峯庵)에 이르게 된다. 규봉암이 광석대 앞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규봉암에 이르면 먼저 그 규모에 놀라게 된다. 해발(海拔)950m나 되는 높은 산자락에 위치한 산사(山寺)치고는 제법 큰 규모의 사찰(寺刹)이기 때문이다. 규봉암은 창건연대(創建年代)가 확실하게 전하는 문헌(文獻)이 없고 다만 신라시대에 의상대가 창건하고 순응대사가 중창(重唱)했다고 전해진다. 한편으론 도선국사 또는 보조국사가 창건했다는 설()도 있다. 그나저나 이 절에 신라의 명필 김생(711791)이 쓴 규봉암의 현판이 전해 내려오다가 절취(竊取) 당했다는 기록이 전해지는 것을 보면 천년고찰(千年古刹)임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신증동국여지승람규봉사라고 적혀있을 정도로 고려 후기까지만 해도 상당히 큰 사찰이었던 규봉암은 조선시대 이후 명맥만 이어오다 한국전쟁 때 전소(全燒)되었다. 이후 방치되던 중 1959년 조그마한 법당으로 복구됐으나 결국 폐허(廢墟)가 됐고, 이어 1991년 정인스님이 주지로 부임해 관음전을 중창했고, 일주문과 종각 등을 지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규봉암을 나서면 곧바로 길이 두 갈래(이정표 : 신선대 3.1Km, 꼬막재 3.5Km/ 상상수목원 1.9Km/ 장불재 1.9Km)로 나뉜다. 꼬막재로 가려면 이곳에서 왼편으로 진행해야 한다. 꼬막재로 가는 길도 역시 평지나 마찬가지로 편안한 길이다. 바닥도 역시 초반에는 너덜길이지만 20분쯤 지나면서부터는 흙길로 변한다. 그리고 그 보드라운 흙길은 산행이 종료될 때까지 계속된다. 신선대 갈림길 가까운 곳에서 반가운 얼굴들을 만났다. 점심을 대접하겠다며 찾아온 동생내외가 이곳까지 산을 거슬러 올라온 것이다. 그들이 준비해온 오디주스(juice)로 목을 축이고, 모시떡과 과일로 요기를 하면서 모처럼 망중한을 즐길 수 있었다. 그리고 산을 내려가서는 식당가에 자리를 잡고 관광버스가 서울로 출발할 때까지의 1시간 동안 담소를 즐겼다. 닭볶음탕을 안주삼아 술을 마셨음은 물론이다.

 

 

규봉암에서 여유로운 걸음으로 40분 정도를 걸으면 신선대 갈림길’(이정표 : 꼬막재 1.2Km/ 신선대 0.8Km/ 장불재 4.2Km), 왼쪽 꼬막재 방향으로 들어서면 곧바로 드넓은 초원지대가 나타난다. 가을이면 새하얀 억새꽃으로 장관을 이룬다는 신선대억새평전이다. 이곳은 장불재 및 중봉 근처의 억새평전과 더불어 무등산의 대표적인 억새평전으로 꼽히고 있다.

 

 

 

신선대 갈림길에서 15분 정도 더 걸으면 꼬막재(이정표 : 원효분소 2.0Km/ 규봉암 3.6Km, 장불재 5.4Km)이다. 고개의 형상이 엎드린 꼬막을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옛날 보부상(褓負商)과 유생(儒生)들이 화순과 광주를 오가는 지름길로 삼았다는 고갯마루이다. 한편 주변에 꼬막처럼 생긴 작은 자갈들이 많아서 붙은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꼬막재를 지나면서 산길은 제법 가파른 내리막길로 바뀐다. 그러다가 산길은 울창한 편백나무 숲속으로 들어서게 된다. 편백나무 향이 짙다. 그렇게나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phytoncide)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가 편백나무라고 했으니 코끝을 스치는 짙은 내음에는 피톤치드가 가득할 것이다. 나도 몰래 호흡이 커진다. 그러자 심신(心身)이 맑아지면서 산행에 지쳤던 육신(肉身)에 활기가 차오른다.

 

 

 

산행날머리는 원효사지구 공원관리사무소 앞(원점회귀)

편백나무 숲이 끝나면 이어서 산죽(山竹)길이 나타난다. 그러다가 조금 후에는 오른편에 숲문화학교가 보인다. 옛날에는 무등산장이라는 호텔((hotel)급의 숙박시설이었는데, 언제부턴가 숲문화학교로 바뀌었나보다. 꼬막재에서 30분 거리이다. 문화학교를 빠져나온 후 포장도로를 따라 조금만 더 내려오면 식당가가 나오고, 얼마 안 있어 산행이 종료되는 공원관리사무소 앞에 이르게 된다. 4시간40분이 걸렸다. 그러나 중간에 막걸리를 마시느라 쉬었던 시간을 빼면 4시간20, 오늘 산행거리가 13.5이니 제법 빨리 걸은 셈이다. 그러나 사실은 오르막길이 서석대에서 끝을 맺고 이후부터는 내리막이거나 반반한 길이 계속된 탓일 것이다.

 

 

 

에필로그(epilogue) : 무등산은 우리나라 21번째의 국립공원(國立公園)으로 지정(‘12.12.27)되었다. 그만큼 무등산의 산세(山勢)가 웅장하고 자연생태계(自然生態界)와 주변경관이 보존할 가치가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등산은 아쉬운 점이 있다. 정상 등 중요한 위치들을 군부대(軍部隊)와 방송국의 송신소(送信所) 등이 점령하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산의 정상까지 도로(道路)가 나있음은 물론이다. 덕분에 산()만이 가질 수 있는 한적함은 사라져버린 지 이미 오래이다. 하나 더 아쉬운 것은 산의 정상을 군부대가 점령한 탓에 올라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광주시민들의 요구로 정상 일원이 개방(開放)되었다고는 하지만, 기껏해야 일 년에 서너 번일 뿐이다. 거기다 기껏해야 지왕봉과 인왕봉만 개방될 따름이다. 막상 정상인 천왕봉은 아직도 개방을 불허하고 있다는 얘기이다. 그저 해발 1100m의 서석대에 서보는 걸로 만족해야 한다. 참고로 무등산에는 수달, 구렁이, 삵 등 멸종위기 8종을 포함해 모두 2,296종의 생물이 살고 있다고 한다. 이는 경주국립공원을 제외한 16개 육상 국립공원 가운데 13번째다. 자연경관(自然京觀) 면에서도 입석대와 서석대의 주상절리대를 포함해 61곳이 자원(資源)으로 지정되는 등 16개 공원 중 6번째로 다양한 산봉(山峰)과 기암(奇巖) 등을 거느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