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황산(鳳凰山, 460.3m)-금오산(金鰲山, 323m)

 

산행일 : ‘15. 7. 25()

소재지 : 전남 여수시 돌산읍(突山島)

산행코스 : 작곡재수죽산봉화산봉양고개갈미봉봉황산율림치금오산금오봉향일암임포마을(산행시간: 4시간10)

같이한 산악회 : 청마산악회

 

특색 : 호남정맥이 지나는 백운산 자락에서 흘러나온 여수지맥(麗水枝脈)은 여수반도를 지나서도 여맥(餘脈)이 이어진다. 그 힘이 강하지는 않지만 길게 이어져 돌산도, 금오도 등의 섬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 때문인지 돌산도(突山島)에는 400m 내외의 산들이 즐비하다. 오죽했으면 섬의 이름까지도 산((()를 합하여 만들어 냈겠는가. 돌산 최초의 군지(郡誌)여산지(廬山志)’에서는 그 여덟() 개의 산을 천왕산과 두산, 대미산, 소미산, 천마산, 수죽산, 봉황산, 금오산 등으로 꼽고 있다. 아무튼 이 산들은 대부분 부드러운 능선을 그리고 있어 편안한 산행을 즐기기에 좋다. 게다가 산을 오르면 어느 방향으로도 남해를 조망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특히 금오산 자락에 자리 잡은 향일암에서 선현들의 자취를 느껴보다가, 귀경 길에 이 고장의 특산품인 돌산 갓김치라도 한 단지 사가지고 돌아온다면 더할 나위 없는 즐거운 산행이 될 것이다.

 

산행들머리는 봉양고개(돌산읍 금봉리 산181)

남해고속국도 순천 I.C에서 내려와 여수 방면 국도 17번을 따른다. 여수가 종점이던 17번 국도는 현재 돌산읍(여수시) 소재지인 군내리까지 연장되어 있다. 돌산도로 들어선 국도는 종점에 이르기 바로 전에 섬의 등줄기라 할 수 있는 산릉(山稜)을 두 번에 걸쳐 가로지르는데 이중 두 번째 고갯마루가 바로 봉양고개이다. 원래는 작곡재에서 산행을 시작하려고 했었으나 무더위와 습기(濕氣)가 많은 점을 감안해서 코스를 조금 줄여 봉양고개를 산행 들머리로 삼았다. 봉양고개는 두루뭉술해서 어디가 고갯마루인지 구분이 힘들 수도 있다. 이럴 경우에는 봉양마을 진입로에 위치한 버스정류장을 찾으면 된다.

 

 

 

산행은 버스정류장의 맞은편으로 난 임도(林道)로 들어서면서 시작된다. 들머리에 돌산종주 등산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산행을 시작하자마자, 그러니까 들머리에서 10m쯤 거리에 있는 갈림길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갈림길에 돌산종주 등산코스이정목(수죽산 1.9Km)이 세워져 있으나 왼편으로 약간 비켜나 있는데다가 웃자란 잡초에 가려 그것마저도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아래 사진은 잘 못 들어선 임도의 풍경이다. 저만큼 앞서 가던 집사람이 다시 돌아오고 있는데도 얼굴표정은 의외로 밝다. 어쩌면 울창하게 우거진 주변의 편백나무 숲 때문이 아닐까 싶다. 건강에 좋다는 편백나무 숲은 일부러라도 찾아가는 곳이니 말이다.

 

 

약간 밋밋한 경사의 오르막길을 12분 정도 걸으면 널따란 분지(盆地)가 나타난다. 마치 공을 들여 가꾼 잔디광장(廣場)’을 연상시킬 정도로 잔디가 곱게 잘 자라있다. 광장을 가로지르는 임도가 보인다. 임도는 오늘 산행의 특징 중 하나이다. 산행을 마칠 때까지 손가락으로 헤아리는 것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많은 임도를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잔디광장을 지나면서 산길은 제법 가팔라진다. 10분 정도를 계속해서 올라야하니 그 거리 또한 제법 긴 편이다. 이어서 평평해진 길을 따라 6분쯤 더 걸으면 갈미봉 정상이다. 갈미봉은 산봉우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밋밋하다. 거기다 정상표지석이나 이정표도 보이지 않는다. 만일 어느 산꾼들이 매달아 놓은 정상표시 코팅(coating)마저 없었더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정상인줄도 모르고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갈미봉을 지난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점차 고도(高度)를 높여간다. 그렇다고 작은 오르내림만 계속되는 것은 아니다. 중간에 임도라도 만날라치면 그 다음의 어김없이 가파른 오르막길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 첫 번째 임도는 갈미봉에서 12분 정도 떨어진 곳에서 만난다.

 

 

임도를 지나면서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거기다 거리까지 제법 길다. 한마디로 힘이 든다는 얘기이다. 길가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힘내세요!’라고 쓰인 코팅지가 이를 증명한다 할 것이다. 그러나 벌써부터 겁을 먹어서는 안 된다. 잠시 후에 만나게 되는 봉황산을 오르는 구간은 이보다 훨씬 더 심하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힘겨운 오르막길은 19분이나 계속되다가 묘()가 점령하고 있는 정상에 올라서고 나서야 끝이 난다. 지도에 401m봉으로 표기된 지점이 아닐까 싶다.

 

 

401봉에서 내려서는 길은 상당히 가파르다. 조심스럽게 5분 정도를 내려서면 또 다른 임도를 만난다. 이어서 5분 정도를 임도를 따르다가 다시 산자락으로 난 오솔길로 들어선다. 또 다시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오르막길과의 힘겨운 싸움은 10분 남짓 계속된다. 그리고 그 끄트머리에서 길이 두 갈래로 나뉘는 것을 볼 수 있다. 정상은 이곳에서 왼편에 있다. 물론 정상을 둘러본 다음에는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 나와야한다. 왼편으로 방향을 잡자마자 무인산불감시탑이 나타나고, 이어서 잠시 후에는 전망대를 겸한 봉황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돌산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답지 않게 봉황산의 정상은 보잘 것이 없다. 하긴 전형적인 육산(肉山)에서 볼거리를 찾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語不成說)일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조망이라도 트인다는 점이다. 만일 여수시에서 전망대를 만들어 놓지 않았더라면 주변의 잡목(雜木)들이 이마저도 훼방을 놓았을 것이 분명하다. 또 하나 아쉬운 점은 정상표지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저 봉황산의 유래를 적어 놓은 안내판과 119의 구호지점표시목에서 어렴풋이나마 이곳이 정상임을 눈치 챌 수 있을 따름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가끔 산행을 같이 하고 있는 서래야 박건석선생이 매달아놓은 정상표시 코팅지가 보인다는 것이다. 인증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꺼리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고마운 일이다. 참고로 봉황산(鳳凰山)은 이름 그대로 '봉황'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영락없는 봉황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전망대에 오르면 툭 터지는 조망(眺望)을 즐길 수 있다. 먼저 진행방향으로는 희미하지만 금오산이 조망된다. 구름에 가린 탓이다. 그리고 금오산의 왼편 그러니까 전면(前面)에는 넓디넓은 남해바다고 끝없이 펼쳐지는데, 그 뒤에 흐릿하게 나타나는 것은 어쩌면 남해도 일 것이다. 비록 눈에는 들어오지 않지만 그 중간쯤에는 움푹 파여 들어간 앵강만()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잔잔하기만 한 앵강만의 가운데에는 노도가 돛단배마냥 떠다닐 것이고 말이다. 노도는 조선의 정치가이자 문장가인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이 당쟁에 휩쓸려 귀양살이를 하다 생을 마감한 곳이다. 서포는 3년 남짓한 노도 유배생활 중에 한글소설인 구운몽사씨남정기등을 집필하고 눈을 감았다.

 

 

봉황산 정상에서 10분 정도를 내려서면 또 다시 임도를 만난다. 그리고 10분 가까이를 임도를 따라 걷게 된다. 그러다가 이정표(율림치 2.5Km/ 봉황산 1Km)가 보이면 임도를 벗어나 왼편 산자락으로 들어서야 한다.

 

 

산자락으로 들어서서 394m봉을 오른다. 이곳에서부터 바위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아직까지는 대부분 바닥에 깔려있어 만족스러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조망을 허락을 허락해주니 고마운 일이다. 전망바위에 서면 봉황산 등 지나온 능선과 바다가 조망되지만 사진은 일부러 뺐다. 잠시 후에 만나게 될 또 다른 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경들과 흡사했기 때문이다.

 

 

394m봉을 오르내리는 데는 20분 정도가 걸린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또 다른 임도를 만나게 된다. 임도를 가로질러 맞은편 산자락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눈요기가 시작된다. 공깃돌을 닮은 바위(어떤 사람들은 흔들바위라고 적었다)와 손가락을 닮은 바위 등 기암괴석(奇巖怪石)들이 줄줄이 나타나는 것이다. 전망바위 또한 빼놓을 수 없다. 바위에 올라서면 바닷가에 자리 잡은 율림리와 그 건너편에 있는 밤섬이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조망을 즐기다가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된다. 그러나 경사가 만만치 않아 쉽지만은 않은 구간이다. 전망바위에서 15분 정도 걸으면 산불감시초소가 나오고 이어서 율림치로 내려가는 가파른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잠시 후에 오르게 될 금오산이 건너편에 또렷하다.

 

 

 

산불감시초소에서 10분 조금 못되게 내려오면 율림치이다. 율림치는 봉황산에서 금오산으로 이어지는 능선 중 가장 낮은 안부인데, 율림리 사람들이 읍소재지인 금성리로 넘어 다니던 고갯마루이다. 고갯마루에는 널따란 주차장 외에도 정자(亭子)와 식당까지 갖추고 있어 쉼터의 역할까지 톡톡히 수행하고 있다. 주차장의 남쪽 끝에 있는 금오산의 들머리에는 국립공원 안내도와 금지사항을 적은 안내판 등 다도해국립공원에서 설치한 시설물들이 몇 개 세워져 있다. 여기서부터 국립공원이 시작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산자락으로 들어서면서 고단한 싸움이 시작된다. 금오산으로 오르는 능선은 아까 지나온 401m봉이나 봉황산만큼 가파르지는 않다. 거기다 첫 번째 봉우리는 정상을 피해 오른편으로 우회(迂廻)를 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길바닥은 아까에 비해 훨씬 더 거칠다. 아까는 흙으로 이루어졌던데 반해 이번에는 크고 작은 돌들이 깔려 있어 걷기가 생각보다 훨씬 더 불편한 것이다. 거기다 이곳까지 오느라 지친 탓에 떨어진 체력도 문제가 된다. 이럴 경우에는 그저 서서히 걷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40분 정도를 오르면 드디어 정상이다. 거리에 비해 꽤나 많은 시간이 걸린 셈이다. 걷다 쉬기를 반복하면서 오른 탓일 것이다.

 

 

10평 남짓한 공터로 이루어진 금오산 정상은 평범하기 짝이 없다. 물론 정상표지석도 없다. 그저 여수1동산악회에서 세운 스테인리스 스틸(stainless steel) 재질(材質)의 말뚝이 정상석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물론 조망도 거의 트이지 않는다. 참고로 금오산이란 이름은 향일암(向日庵)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고려 광종 때 윤필대사가 산의 바위들이 마치 거북의 등처럼 쩍쩍 갈라졌다고 해서 절의 이름을 원통암(圓通庵)에서 금오암(金鰲庵)이라고 바꾸었고, 그로 인해 산 이름도 금오산이라고 불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금오산은 이곳이 아니라 금오봉을 이르는 말로 보인다. 아무런 특징도 찾아볼 수 없고 그저 밋밋한 봉우리에 불과한 이런 곳에다 그런 거창한 표현을 쓴다는 것 자체가 어울릴 것 같지가 않기에 하는 말이다.

 

 

그러나 조망이 좋지 않은 정상을 탓할 필요는 없다. 이후부터는 조망 좋은 곳을 심심찮게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어떤 곳에서는 오른편으로 시야(視野)가 열리면서 올망졸망한 돌산도의 남쪽 섬들이 눈에 들어온다. 아마 화태도와 대·소횡간도, 나발도, ·소두라도, 개도 등일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는 왼편으로 열리기도 한다. 아까 봉황산 능선을 걸으면서 보았던 율림리와 그 건너편에 있는 밤섬이 또 다시 나타난다.

 

 

곳곳에서 조망을 즐기다보면 커다란 바위봉우리인 317m봉에 올라서게 된다. 317m봉은 금오산에서 조망이 가장 넓게 트이는 전망대 같은 곳으로 북으로는 금오산의 모산인 봉황산이 하늘금을 이루고, 동쪽에는 앞서 나타났던 풍경들이 각도만 바꿔서 다시 나타난다. 그리고 서쪽으로는 백야도, 횡간도, 화태도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멀리 고흥반도의 팔영산도 보인다지만 오늘은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317m봉을 지나면서 산길은 또 다시 내리막길을 만든다. 비록 경사(傾斜)가 가파르지만 나무계단을 놓는 등 안전시설을 잘 갖추었다. 국립공원을 걷고 있다는 실감이 나는 순간이다.

 

 

 

317m봉에서 15분 정도를 걸으면 삼거리(이정표 : 금오봉 정상 350m/ 임포주차장 1.2Km)가 나온다. 왼편에 보이는 길은 금오봉이나 향일암을 거치지 않고 곧장 임포마을로 내려가는 길이다. 이곳에서는 물론 주능선을 타야겠지만 만약 체력이 다했다면 이곳에서 탈출하면 된다. 사실 오늘 산행을 함께한 일행들 중에도 상당수의 사람들이 이곳에서 탈출했다고 한다. 그만큼 오늘 산행이 힘들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참고로 금오봉의 최단거리 산행코스는 임포마을에서 이 갈림길로 올라와 금오봉에 오른 뒤 향일암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갈림길을 지나면서 바윗길이 시작된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비록 손으로 붙잡고 올라야하는 경우도 있지만 어렵지 않게 올라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15분 정도를 오르면 드디어 금오봉 정상이자 오늘 산행의 하이라이트(highlight)이다. 특별히 크지도 않고 그렇다고 멋지지도 않은 바위덩어리들이 올망졸망 모여 있는 정상에는 자그마한 사각의 정상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오늘 산행에서 유일하게 만난 정상석이다. 이곳 사람들로부터 가장 많이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정상어림의 바위들은 하나같이 쩍쩍 갈라진 문양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 생김새가 마치 거북의 등껍질을 닮았다. 이것을 보고 윤필대사가 요 아래에 있는 향일암의 이름을 원통암에서 '자라 오()'자를 붙여 금오암으로 고쳤다고 한다. 그 영향으로 산 이름도 금오산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금오봉 정상에서 조망은 일망무제(一望無題)로 펼쳐진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바다는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이다. 산 위에서 내려다본 바다는 호리병처럼 육지를 향해 깊숙이 파고들었다. 개도와 금오도, 횡간도, 화태도 등 크고 작은 섬들이 그 속에 풍덩풍덩 빠져 있다. 그리고 왼편에는 이미 눈에 익숙해져버린 풍경들이다. 그렇다면 진행방향은 과연 어떤 풍경일까. 기암절벽(奇巖絶壁)으로 이루어진 암릉이 바다를 향해 내리뻗었고 그 끄트머리에 임포마을이 웅크리고 있다. 반도 모양으로 바다로 파고든 꼬리 양쪽으로 짙푸른 바다가 한없이 펼쳐진다. 오후의 햇살에 녹아든 산과 바다가 한 폭의 잘 그린 풍경화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금오봉에서 내려가는 약 400m의 구간, 바위사이를 이어주는 계단을 따라 내려가는 길은 그야말로 환상 그 자체다. 전국의 어느 명산에도 손색이 없는 절경이 이어지는 것이다. 앞마당처럼 널찍하거나 기둥처럼 서있는 바위들이 아래편의 풍경과 잘 어울리고 있다. 금방이라도 바다로 굴러 떨어질 것 같은 바위도 보인다. 거기다 시선이라도 잠깐 옮기면 이번에는 눈터지는 조망(眺望)이 펼쳐진다. 아까 정상에서 보았던 아름다운 풍경들이 다시 한 번 그림처럼 펼쳐진다. 눈의 호사(豪奢)는 암릉이 끝나고서야 끝을 맺는다.

 

 

 

계단을 따라 내려서면 숲 속 기와지붕이 눈길을 끈다. 산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좁디좁은 바위틈으로 들어서자 향일암(向日庵)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잠시 후 만나게 되는 천연의 바위굴(石門) 두 곳을 지나면 곧바로 대웅전이 나온다. 거북의 목 뒤에 위치했다는 향일암의 원래 이름은 원통암(圓通庵)이었다. 그래선지 이곳의 본전(本殿)은 대웅전이 아니고 원통보전이다. 무려 5kg이나 나가는 금으로 단장해 금오암과 영구암이란 옛 이름에 황금사찰이란 이름까지 얹게 했던 원통보전은 소실(燒失) 이전 빛나던 옛 모습은 사라져 버렸지만 오후 햇살에 반짝이는 바다 풍광은 그 어느 보석 못지않게 빛나고 있다.

 

 

원통보전 주변의 바위들 위에는 작은 돌들이 포개져 있다. 동전들도 보인다. 누군가의 간절한 소망을 담은 것들이리라. 그러나 보다 더 큰 공덕을 쌓고 싶은 사람들은 대웅전 뒤로 올라간다. 그곳에 일명 흔들바위라고 불리는 바위가 있기 때문이다. 바위는 마치 경전(經典)을 펼쳐 놓은 듯한 형상이다. 그래선지 이 바위를 한 번 흔들 경우 경전을 사경(寫經)한 것과 같은 공덕을 쌓을 수 있다고 전해진다. 불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흔들어 볼 일이다.

 

 

향일암(向日庵 : 전남문화재자료 제40)은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로 백제 의자왕 19(659)에 원효(元曉)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돌산군지인 여산지 참조). 창건 당시의 이름은 원통암(圓通庵)이었다. 신라의 고승이 백제의 영토였을 남도의 끝자락에 사찰을 세우게 된 연유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쉽게 말해 믿을 수 없다는 얘기이다. 하여튼 이 절은 고려 광종(958) 때 윤필(輪弼)대사가 중창한 뒤 금오암(金鰲庵)이라 개칭(改稱)하였으며, 현재의 이름인 향일암(向日庵)’은 조선 숙종 때 인묵대사가 지금의 자리로 암자를 옮기고 남해바다에서 떠오르는 일출(日出) 풍광이 너무도 아름답다고 해서 해를 향하는 암자(庵子)’라는 의미로 새로 지은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경내(境內)는 대웅전(원통보전)과 관음전, 용왕전, 삼성각, 종각, 요사채, 종무실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건물들은 모두 1986년에 새로 지었는데, 이중 대웅전과 종각, 종무실은 2009년 말에 전소(全燒) 되었던 것을 20125월에 복원하였다. 이 외에도 책륙암(冊六庵)이나 영구암(靈龜庵) 등의 이름을 얻게 된 사연들이 있으나 그냥 생략하겠다.

 

 

대웅전 뒤편으로 숨은 듯 비좁은 바위 길을 따라가면 바다를 잘 보이는 곳에 자리 잡은 관음전이 있다. 향일암에서도 가장 깊고 높은 곳에 자리한 이 전각은 깎아지른 거대한 암벽 아래 있는 원효스님이 수도하던 터에 지은 것이라 한다. 동백나무에 둘러싸여 있는 관음전 옆으로는 수월관음보살과 무릎 꿇고 합장한 선재동자의 석상이 모셔져 있다. 참고로 향일암은 양양 낙산사, 남해 보리암, 강화 보문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4해수관음기도도량 (海水觀音祈禱道場)’으로 꼽힌다. 당연히 영험이 있을지니 한번쯤 들어가 보는 것은 어떨까. 꼭 뭔가를 빌지 않아도 좋다. 그냥 관음전 앞에서 남해바다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보상은 충분할 테니까 말이다. 오른쪽으로는 금오열도가 수묵화 같은 풍광으로 그려져 있고 발아래로는 한일()자 바다가 한없이 펼쳐진다.

 

 

향일암에서의 고요함은 일주문(一柱門)을 벗어나면서 깨어지고 만다. 그렇다고 향일암이 한적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사실 암자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다만 어느 정도 부처님의 감화를 받았는지는 몰라도 많은 인파에도 불구하고 시끌벅적하지는 않았다는 얘기이다. 그 조용함이 일주문 밖으로 나오자마자 소란스러움에 묻혀버렸다는 얘기이다. 산중 사찰을 돌아다니다 보면 가끔 불이문(不二門)’을 만날 수 있다. ‘진리는 둘이 아니라 하나다라는 뜻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절에서는 보통 본당으로 들어가는 곳에 세운다. 이 문을 통과해야만 진리의 세계인 불국토(佛國土)에 들어갈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부처와 중생이 본디 하나이니 이 같은 불이(不二)의 뜻을 알게 되면 해탈할 수 있으므로 해탈문(解脫門)이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일주문(一柱門)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이는 가람에 들기 전에 세속(世俗)의 번뇌를 불법(佛法)의 청량수로 말끔히 씻고 들어오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일주문을 일러 불법(佛法)의 세계로 들어가는 경계선이라고 했다. 이를 증명해주려고 일주문을 나서자마자 중생들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 나타난 모양이다. 이곳 돌산도는 갓으로 유명한 고장이다. 그리고 그들은 갓김치라는 별미를 만들어 냈다. 그 갓김치를 진열해 놓은 상점들이 쭉 늘어서 있다. 그리고 손님을 부르는 외침이 곳곳에서 들려온다. 맛이라도 보라는 얘기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우리 부부는 갓김치를 샀다. 그것도 고들빼기김치와 파김치까지 골고루 말이다. 이 또한 부대끼며 살아가는 참맛이 아니겠는가.

 

 

산행날머리는 향일암주차장

산행을 다 마쳤다는 안도감에 마음이 느긋해진다. 갓김치를 파는 아주머니와 농담 몇 마디 나누다 동동주까지 얻어 마시는 즐거움도 맛본다. 물론 공짜다. 언젠가 TV에서 보았던 재래시장이 생각나는 순간이다. 그러나 그런 즐거움이 한숨으로 변해버린 것은 채 한순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대형버스 주차장은 이곳에서도 1Km 이상을 더 걸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미 지쳐버린 다리는 맨몸으로 걷는 것만도 힘겨운데, 무려 5에 가까운 김치까지 들고 20분 이상을 걸어서야 주차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늘 산행은 총 5시간20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서 쉬었던 15분과 향일암을 둘러보는데 걸린 15분을 감안하더라도 4시간50분이나 걸린 셈이다. 이는 무더위로 인해 속도가 많이 처진 탓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