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두산(鳳頭山, 753.7m)

 

산행일 : ‘15. 11. 3()

소재지 : 전남 곡성군 죽곡면과 월등면 그리고 순천시 황전면의 경계

산행코스 : 조태일문학관 주차장능파각봉서암성기암외사리재농곡갈림길봉두산북봉계곡전원주택절재태안사(산행시간 : 4시간)

 

함께한 산악회 : 가보기산악회

 

특징 : 국제신문에서는 봉두산을 소개하면서 산이 아름다운 태안사에 가려 있다고 했다. 해당 글은 가야산 해인사나 조계산 송광사 등 5대 총림을 예로 들면서 명산(名山)에 대찰(大刹)은 필연이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갔다. 그리고 그러지 못한 안타까운 예로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산세를 지닌 봉두산이 태안사라는 유래 깊은 명찰 때문에 철저히 가려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본 봉두산의 산세는 뛰어나지 않았다. 천년고찰인 태안사를 빼 놓으면 특별한 볼거리가 없을뿐더러 조망(眺望) 또한 보통 수준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오늘 산행은 국제신문 산행팀이 걸었던 코스를 따랐다. 북봉을 답사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판단이었다. 아무런 특징이나 볼거리가 없는 북봉을 다녀오는데 너무나 큰 희생을 치렀기 때문이다. 가파른 경사의 산길은 험악하기만 했고, 희미한 길의 흔적을 찾아내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국제신문의 리본을 찾아가며 진행했지만 계곡에서부터는 리본조차 보이지 않아 결국에는 알바를 할 수밖에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산행을 마칠 수는 있었지만 두 번 다시 걷고 싶지 않은 코스였다.

 

산행들머리는 태안사 주차장(곡성군 죽곡면 원달리)

순천-완주고속도로 황전 I.C에서 내려와 17번 국도를 타고 순천방면으로 달리다가 괴목삼거리(순천시 황전면 괴목리)에서 오른편 840번 지방도로 갈아탄다. 월등면(순천시)의 소재지인 대평리에 이르면 면사무소 앞에서 857번 지방도가 갈리나 이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840번 지방도를 탄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만나게 되는 태안사갈림길(곡성군 죽곡면 원달리)에서 우회전하여 잠시 들어가면 산행이 시작되는 조태일문학관의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물론 이곳까지 그냥 들어오지는 못했다. 매표소에서 1인당 1,500원씩을 막무가내로 걷어갔기 때문이다. 태안사가 위치한 골짜기가 몽땅 태안사의 소유인 모양이다. 그냥 산행만 할 거라고 해도 끝까지 돈을 받아가는 것을 보면 말이다. 분하기 짝이없지만 그나마 다른 절에 비해 입장료가 싼 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다.

 

 

 

널따란 주차장의 한켠에 마치 전원주택처럼 지어진 건물이 보인다. ‘조태일시문학기념관(趙泰一詩文學記念館)’이다. 현실의식이 강해 민중시인 혹은 저항시인으로도 분류되는 조태일(1941-1999)‘ 시인을 기리기 위한 기념관이다. 그는 태안사에서 대처승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여순사건 때 절에서 나오게 되었단다. 그 후 임종을 맞아 시인에게 고향을 찾으라는 유언을 했다고 한다. 조태일은 그 유언을 지키기 위해 삼십 년 만에 태안사를 찾게 되었고 그곳에서 자신의 문학세계를 만들어갔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태안사는 시인의 시작임과 동시에 끝이 되는 셈이다. 기념관이 이곳에 자리 잡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기념관은 고인의 유물전시 및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5,859의 부지에, 건축면적 419.49, 연면적 558.83의 규모로 지어졌는데 조태일 시인의 유품과 작품, 시인을 기리는 문학작품 등 2,000여점이 전시된 조태일시문학기념관과 그가 수집했던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시집인 최남선의 백팔번뇌’, 최초의 번역시집 오뇌의 무도등 희귀본에서 최근 작품까지 3,000여점의 시집이 전시된 시집전시관으로 나누어져 있다. 참고로 시인 이윤하(건축사사무소 노둣돌 대표)의 설계로 지어진 조태일시문학기념관은 제1회 대한민국 목조건축 대전에서 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태안사로 들어가는 도로를 따라 들어가며 산행이 시작된다. 들머리에 커다란 봉두산 등산안내도곡성군 관광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니 한번쯤 살펴보고 가면 산행에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등산안내도를 잘 보아 둘 것을 권한다. 그리고 안내도에 표기된 대로 봉두산 정상에서 하산을 하는 코스선택을 권한다. 고생문이 훤한 다른 봉우리로의 연계산행을 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얘기이다. 태안사로 들어가는 길은 산속을 거니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한가로운 숲길의 연속이다. 그 숲이 단풍으로 붉게 물들어 한층 더 돋보인다. 잠시 후 일주문이 나온다. 그런데 흔히 보아오던 ‘0000가 아니라 그냥 동리산문(桐裏山門)’이라고만 적혀있다. 낯설지만 금방 고개가 끄떡여진다. 그렇다. 이곳 태안사가 바로 신라시대 구산선문(禪門九山)’의 하나였던 동리산파桐裏山派)’의 중심사찰이었던 것이다. 참고로 신라의 구산선문(九山禪門)’은 신행이 연 희양산문(봉암산문), 도의가 연 가지산문(북악), 홍척이 연 실상산문(남악), 현목이 연 봉림산문(혜목산문), 무염이 연 성주산문(숭암산문), 도윤이 연 사자산문, 범일이 연 사굴산문, 이염이 연 수미산문, 그리고 혜철이 연 동리산문을 이르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선맥의 가지는 후세들이 편의상 분류한 것일 뿐 근본은 같다는 학설이 요즘 대두하고 있다.

 

 

길은 계곡을 따라 나있다. 차가 지나다닐 때는 먼지가 풀풀 날리는 옛길이다. 하지만 아름다우면서도 편안한 느낌을 주는 정감어린 길이다. 아기자기한 바위들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계곡과 울창한 숲이 함께 어우러지며 멋진 풍경을 만들어낸다. 중간 중간에 정심교, 반야교, 해탈교 등 나름대로 특징이 있는 다리를 놓아 그 풍치(風致)를 한결 더 돋보이게 했다.

 

 

 

붉게 물든 단풍에 취해 걷는다. 이런 길은 최대한 서서히, 그리고 마음에 여유를 갖고 걸어야 옳다. 쉽게 말해 느림보의 미학을 추구하면서 걷는 게 최선이라는 얘기이다. 하지만 주어진 시간 때문에 그럴 수는 없다. 다만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가슴에 담기 위해 부지런을 떨어본다. 그래도 다 못 넣은 부분은 카메라에 담을 수밖에 없다.

 

 

 

태안사로 이어지는 진입로는 1.5, 산행을 시작한지 대략 25분 정도가 지나면 진행방향 저만큼에 고색창연한 누각(樓閣)이 하나 나타난다. 다리 역할을 겸하고 있는 전각(殿閣)인 능파각(凌波閣 :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82)이다. 누각 아래로 흐르는 계곡을 따라 숲이 울창하고, 바위에 낀 이끼가 정겨움을 준다. 능파각은 계곡의 양쪽에 바위를 이용하여 돌로 축대(築臺)를 쌓고 그 위에 두 개의 큰 통나무를 받쳐 건물을 세우는 형식으로 지어졌다. 마침 난간에다 자리까지 만들어 놓았으니 잠시 쉬었다 가보자. 여름이면 시원한 계곡의 물소리를 들리겠지만, 지금 같은 만추(晩秋)엔 단풍과 떨어지는 낙엽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태안사의 얼굴인 능파각은 금강문(金剛門)으로 누각(樓閣)을 겸한 일종의 다리인 것이 특징이다. ‘능파(凌波)’란 계곡의 물굽이가 아름답게 어우러져 있다는 의미. 그 아름다움을 미인의 가볍고 우아한 걸음걸이에 비유해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한 이 다리를 건너면 세속의 번뇌를 던져버리고 부처님의 세계로 진입함을 상징한단다. 참고로 이 건물은 신라 문성왕 12(850)에 혜철선사가 처음으로 세웠고, 고려 태조 24(941)에는 윤다(允多)가 중수하였다. 그 뒤 파손되었던 것을 조선 영조 43(1767)에 복원하였다.

 

 

능파각을 건너면 아름드리 전나무와 소나무가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 숲길이 길손을 맞는다. 이 길을 따라 잠시 걸으면 길이 세 갈래로 나뉜다. 왼편은 일주문, 그리고 오른편은 봉서암과 성기암으로 가는 길이다. 가운데로 난 길은 봉두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일 것이다. 오른편으로 향한다.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암자(庵子)가 하나 나타난다. 봉서암(鳳西庵)이란다. 승방으로 보이는 건물이 법당인 극락보전(極樂寶殿)보다 훨씬 더 큰 것을 보면 참선(參禪)을 위해 지어진 암자인 모양이다. 태안사는 시작부터 선종(禪宗) 사찰의 중심이었다. 그런 풍토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참선을 위해 만든 부속암자가 무려 아홉 곳에 이르는 것이 그 증거일 것이다. 참고로 나머지 여덟 곳의 암자는 천불전, 성귀암, 봉천암, 가은암, 명적암, 삼일암, 보현암, 계현암, 야은정사이다.

 

 

 

봉서암을 빠져나와 이번에는 성기암으로 향한다. 차량이 다닐 수 있을 정도로 길이 넓으나 삭막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붉게 물든 단풍이 아름다운 울창한 숲길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옛길을 따라 10분 조금 못되게 걸으면 왼편으로 난 오솔길(이정표 : 외사리재 0.3Km) 하나가 보인다. 외사리재로 올라가는 길이다. 하지만 곧장 고개를 향해 오르는 우()는 범하지 말자. 오른편에 있는 성기암이란 암자가 제법 볼만하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옛길을 따르면 몇 발짝 걷지 않아 성기암(聖祈庵)에 이른다. 작은 산중 암자인 성기암도 역시 참선(參禪)이 주업인 모양이다. 산신각처럼 생긴 작은 법당인 성공전(聖供殿)보다 승방이 훨씬 더 큰 것을 보면 말이다. 법당 앞에는 커다란 바위 하나가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라도 세워 놓은 것 같이 서있다. ‘이 암자에 성기(性器)가 많아요?’ 함께 걷던 집사람이 넌지시 물어온다. 설마 집사람이 저 바위를 보고 하는 말이야 아니겠지만 또 어떻게 보면 성기를 닮은 것 같아 보이기도 하는 바위이다. 그러고 보니 성기라는 요상한 낱말이 들어간 암자의 이름뿐만이 아니라 바위까지도 요상하게 생겼던 것이다. 하지만 성공전(聖供殿)이란 성인(聖人)에게 공양을 올린다,’는 뜻이다. 성기암(聖祈庵)도 역시 성인에게 기원한다.’는 의미를 지녔음이 당연하다.

 

 

다시 삼거리로 돌아 나와 산자락으로 들어선다. 경사가 가파르지 않는 등산로는 통나무로 계단까지 만들어 놓는 등 정비까지 잘 되어있다. 부담 없이 오를 수 있음은 물론이다.

 

 

여유로운 걸음으로 10분 조금 넘게 오르면 능선 안부인 외사리재이다. 이정표(이정표 : 정상2Km/ 헬기장0.3Km/ 태안사0.7Km)에는 삼거리로 표시되어 있지만 외사리재는 사거리이다. 오른편은 원달재(곡성군 죽곡면 원달리)에서 올라오는 길이고, 고개를 넘을 경우에는 순천시 월등면 월룡리가 나온다. 봉두산 정상은 물론 왼편이다. 하지만 정상을 제외하고는 모두 막혀있다. 곁에 세워진 또 다른 이정표를 이용해 원달재 방향이 폐쇄되어 있음을 알리고, 월룡리로 넘어가는 길은 아예 표기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원달재로 이어지는 능선 길은 또렷한 편이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다니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정상으로 향한다. 붉게 물든 단풍이 아름다운 길이다. 거기다 경사까지 완만해서 조금도 힘이 들지 않는다. 한껏 여유를 부리면서 아름다운 풍광에 빠져본다. 이런 게 바로 행복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런 즐거움이 있어 사람들은 가을 산을 찾는가 보다.

 

 

얼마쯤 걸었을까 길가에 팻말 하나가 보인다. ‘119 구호지점 표지판이다. 이 표지판은 위치번호와 지명, 그리고 해발고도까지 적어 놓아 등산객들에게 많은 도움을 준다. 하지만 너무 믿어서도 안 될 일이다. ‘길가 큰바위라는 지명을 보고 큰바위를 찾아 한참을 헤매었기에 하는 말이다. ‘큰바위라는 어엿한 이름까지 얻었으니 뭔가 볼만할 거라 지레짐작하고 찾아봤지만 큰바위는 커녕 작은바위도 눈에 띄지 않았다. 이곳은 삼거리, 표지판 덕분에 왼편으로 난 거친 산길을 한참이나 내려갔다 돌아오는 번거로움을 겼었던 것이다.

 

 

오늘도 우린 예()를 배운다. 자연이 우리에게 고개를 숙이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산이기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다. ‘인자요산(仁者樂山)’이란 말이 있다. 논어(論語)에 나오는데 知者樂水(지자요수)‘와 함께 붙어서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지혜(智慧)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이 말은 역()으로 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어질게 되고, 물을 좋아하는 사람은 지혜로워 진다고 풀이할 수도 있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겸손하게 고개를 숙이는 게 익숙해질 때 어질 인()‘은 완성되지 않겠는가.

 

 

능선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산길이 편하다보니 움직이는 시선(視線)까지도 편안해진다. 그리고 나름대로의 액자(額子)를 만들어 간다. 그것도 아름다운 그림이 들어있는 살아있는 액자이다. 만추(晩秋)의 가을 풍경화 속에서는 푸름과 붉음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푸름을 자랑하는 산죽(山竹) 숲 위에서 끝물의 단풍이 막바지의 아름다움을 처연하게 펼쳐낸다.

 

 

얼마쯤 걸었을까 왼편 능선을 따라 길게 쳐진 철조망이 보인다. 태안사에서 팻말을 매달아 놓았다. 길이 없으니 들어오지 마라는 안내판이다. 태안사로 내려가는 길이 이곳에 있었던 모양이다.

 

 

낙엽이 수북하게 쌓인 길을 걷는다. 끝없이 이어지는 산죽(山竹) 길의 연속이다. 아직도 산길은 급할 것이 없다는 듯이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간다. 그러다가 네모로 각진 커다란 바위 하나를 만난다. 외사리재에서 30분 정도의 거리이다. ‘119 구호지점표지판큰바위(해발 560m)’라고 적었는데 역사책에서 보아오던 광대토대왕비를 쏙 빼다 닮았다. 뭔가 사연이 있을 것 같아 유심히 살펴본다. 누군가가 불심(佛心)’이라고 적어 놓았다. 그리고 그 오른편에는 한자로 쓴 문장(文章)도 보인다. 바위 면이 고르지 않아 판독은 불가능했지만 공들여 쓴 흔적이 역력했다.

 

 

큰바위를 지나면서 산길은 가팔라진다. 아마 오늘 산행에서 가장 힘든 구간이지 않을까 싶다. 잠시 후 해발 620m 지점에서 너른 무덤을 만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가파르게 치고 오르면 외동골삼거리(이정표 : 봉두산 정상0.4Km/ 농곡(괴목)4.8Km/ 화지마을5.6Km)이다. 오른편은 괴목마을(순천시 황전면)에서 올라오는 길이다. 큰바위에서 이곳 삼거리까지는 16분 정도가 걸렸다.

 

 

 

정상으로 향한다. 태안사 방면으로 불완전하게나마 시야(視野)가 열리는 넓적바위(해발 715m)'를 지났다싶으면 곧이어 오른편에 커다란 바위가 나타난다. 봉두산에서 가장 빼어난 조망처가 이곳에 있으니 그냥 지나쳐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자. 정규 등산로에서 약간 빗겨나 있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다간 그냥 지나쳐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아 하는 말이다.

 

 

 

전망대에 서면 남동쪽, 그러니까 순천시 황전면 방향으로 시야가 열린다. 저 멀리 순천-완주간 고속도로가 보이고, 순천 쪽 들머리인 봉성마을에서 계곡을 따라 올라오는 길과 광산으로 파헤쳐진 흉물스러운 모습도 보인다. 그리고 그 뒤에는 높고 낮은 산들이 첩첩이 쌓여있다. 지리산과 백운산을 이루는 연봉들일 것이다.

 

 

전망대에서 정상은 금방이다. 거기다 거의 경사가 없는 반반한 능선으로 연결된다. 대여섯 평 남짓한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에는 정상표지석과 이정표(태안사2.5Km/ 봉성마을5.4Km/ 화지마을6.0Km, 농곡(괴목)마을 5.2Km)는 물론이고 삼각점(구례305, 1985재설)과 구호지점표지판까지 갖추고 있다. 갖추어야할 것은 다 갖춘 셈이다. 참고로 봉두산(鳳頭山)은 봉황의 머리를 의미한다. 하지만 봉두산의 옛 이름은 동리산(桐裏山)이었다. 태안사를 품은 주변 산세가 오동나무 줄기 속처럼 아늑하다고 해서 '오동나무 동()' 자를 써 '동리산(桐裏山)'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태안사 일주문 현판이 '동리산 태안사'로 적혀 있는 것을 그 증거로 보면 된다. 산 이름이 언제 바뀌었는지는 몰라도 두 이름에 연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봉황이 서식하는 나무가 곧 오동나무이니 동리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를 봉황의 머리즉 봉두산으로 부른다고 해도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얘기이다. 들머리에서 봉두산 정상까지는 2시간이 조금 못 걸렸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조금 전에 지나왔던 전망대와 거의 비슷하게 터진다. 다만 잠시 후에 오르게 될 북봉을 볼 수 있고, 잡목에 가려 완전하지는 않지만 다른 방향의 산들도 내다보인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일 것이다. 그나저나 주변은 온통 산들의 천지이다. 순천쪽 황학리의 작은 들판을 제외하고는 사방을 둘러 온통 산뿐이다.

 

 

하산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왼편은 절재를 거쳐 곧장 태안사로 내려가는 길이고 곧장 능선을 탈 경우 북봉을 거쳐 태안사로 내려가거나 상한봉으로 연계산행을 할 수 있다. 북봉으로 향한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봉성마을 방향이다. 북봉으로 향하는 능선은 몸의 중심을 잡기가 어려울 정도로 가파르게 시작된다. 그러나 다행히도 길가에 로프로 난간을 만들어 붙잡고 내려갈 수 있도록 해놓았다. 고마운 일이다.

 

 

하산을 시작한지 10분 남짓 지나면 오른편으로 또렷하게 난 길이 하나 나뉜다. 지도에 봉선갈림길로 표기되어 있는 지점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이 길로 내려갈 경우 월산리(순천시 황전면)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또 다른 갈림길을 만난다. 오른편은 상한봉(526m)으로 연결되는 능선길이다. 바닥에 청산수산악회에서 깔아 놓은 진행방향표시지가 보인다. 북봉에 다녀오라는 것으로 보아 그들은 상한봉과 연계산행을 했었던 모양이다.

 

 

상한봉 갈림길에서 몇 걸음만 더 내디디면 북봉 정상이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정상은 텅 비어있다. 정상표지석은 물론이고 그 흔한 이정표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만일 서래야 박건석선생께서 매달아 놓은 정상표시 코팅(coating)지마저 없었더라면 이곳이 정상인줄도 모르고 그냥 지나치기 십상일 것이다. 봉두산 정상에서 북봉까지는 15분이 조금 더 걸렸다.

 

 

북봉에서 본격적인 하산이 시작된다. 비록 희미하기는 하지만 길은 흔적을 찾을 수는 있다. 그러다가 잠시 후 폐()헬기장을 지나면서부터는 그 흔적마저도 아예 사라져 버린다. 거기다 경사(傾斜)까지도 엄청나게 가팔라져 길을 찾을 여유조차도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국제신문에서 매달아 놓은 노란색 리본이 심심찮게 눈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것마저도 없었더라면 길 찾기는 애초부터 불가능했을 것이다.

 

 

가파르고 험한, 거기다 수북이 쌓인 낙엽 때문에 미끄럽기까지 한 내리막길과의 싸움은 버겁기만 하다. 악전고투(惡戰苦鬪)란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 싸움은 지겨울 정도로 오래오래 이어진다. 하산을 시작한지 30분이 다 되어서야 계곡에 내려서게 되면서 그 힘겨운 싸움이 드디어 끝을 맺는 것이다.

 

 

고생 끝에 내려선 계곡은 한마디로 곱다. 붉은 단풍이 너무나 아름다워 차라리 처연한 느낌이 들 정도이다. 가을이 사그라져가는 아쉬움을 처절한 몸부림으로 나타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죽을 고생이 끝났다는 안도감만 해도 행복에 겨운데 이런 아름다운 풍경까지 보태지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어깨춤이 절로 나오는 순간이다.

 

 

계곡을 만났다싶으면 곧이어 공터가 나타난다. 아마 누군가가 전원주택을 짓기 위해 부지를 조성한 모양이다. 공터부터는 임도로 연결된다. 이 공터에서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된다. 그냥 임도를 따를 경우 상한마을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공터의 한쪽 귀퉁이에 매달려있는 '사유지이니 철대 출입을 금한다'는 현수막 뒤로 진행해야 옳다. 그러나 우린 임도를 따라 아래로 내려가는 우()를 범해버렸다. 산악회의 리본이 보이지 않아 절재로 향하는 들머리를 찾기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물론 국제신문의 리본도 아까 계곡으로 내려서기 얼마 전부터 보이지 않았다. 이는 국제신문 산악회가 걸었던 코스에서 이탈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임도를 따라 내려간다. 얼마 후 전원주택 몇 채가 나타난다. 길을 묻기 위해 문을 두드려 보았지만 인기척이 없는 걸로 보아 주말에만 머무르는 모양이다. 별 수 없이 지도를 보고 방향을 잡는다. 그리곤 이내 다시 발길을 돌려 내려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아까 만났던 공터의 조금 아래에서 오른편 산자락으로 들어선다. 가끔 일반 산악회의 리본이 보이지만 길의 흔적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상한마을에서 절재로 연결되는 코스임에도 불구하고 길이 희미한 걸 보면 이 코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증거일 것이다. 여기서 드리는 힌트(hint) 하나. 길의 흔적이 사라질 경우에는 물기 없는 계곡을 따라 오르면 비록 험하기는 하지만 절재에 이를 수는 있다.

 

 

우여곡절 끝에 해발 535m의 절재(이정표 : 태안사1.3Km/ 봉두산1.1Km. 상한1.0Km)에 오른다. 계곡에 내려선지 30분이나 지난 것을 보면 얼마만큼 헤맸는지 이해가 갈 것이다. 왼편은 봉두산 정상에서 곧장 내려오는 길이다. 이 길을 따랐더라면 쉽게 내려왔을 길을 산행거리를 조금 더 늘려보려다 죽을 고생을 했던 것이다. 그것도 특별한 볼거리도 없는 코스를 걸으면서 말이다.

 

절재에서부터는 일사천리로 이어진다. 단풍이 붉게 물든 아름다운 산길이다. 하지만 간혹 돌길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렇다고 망설일 수는 없다. 주어진 시간에 맞추기가 빠듯해서이다.

 

 

거의 뛰다시피 15분 정도를 걸으면 임도에 내려서게 된다. 119의 구호지점표지판에 등산로입구(해발 381m)'로 표기된 지점이다. 내려서는 곳에는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잠시 숨을 돌리고 다음 행선지로 가라는 의미일 것이다.

 

 

임도삼거리에서는 왼편으로 향한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천년고찰인 태안사(泰安寺 : 도문화재 자료 23)에 이르게 된다. 태안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시절인 742년 법명이 알려지지 않은 신승(神僧) 셋이서 절터를 잡고 대안사(大安寺)라 하면서 개산한 것으로 전한다. 하지만 태안사가 한국 불가를 크게 선양한 계기는 서당지장(西堂地藏)으로부터 법을 전수받은 혜철선사가 847(문성왕 9)이 절에 주석하면서 동리산문을 열때 부터였다. 고려 태조 때에는 광자대사(廣慈大師) 윤다(允多)가 중창하여 선문구산(禪門九山)의 하나인 동리산파(桐裏山派)의 중심사찰로 삼았다. 동리산파의 개산조인 혜철국사(慧徹國師)가 머물렀던 이 절에 윤다가 132칸의 당우(堂宇)를 짓고 대사찰을 이룩하였던 것이다. 고려 초에는 송광사·화엄사 등 전라남도 대부분의 사찰이 이 절의 말사였으나, 고려 중기에 송광사가 수선(修禪)의 본사로 독립됨에 따라 사세(寺勢)가 축소되었다. 6·25전쟁 때 대부분 불타버렸던 것을 근래에 중창불사가 이루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천불보전·만세루(萬歲樓해회당(海會堂선원(禪院능파각(凌波閣일주문 등이 있다.

 

 

 

태안사에는 몇 점의 중요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혜철의 부도인 보물 제273호의 적인선사 조륜청정탑(寂忍禪師照輪淸淨塔)과 윤다의 부도인 보물 제274호의 광자대사탑(廣慈大師塔) 그리고 보물 제275호인 광자대사비(廣慈大師碑), 보물 제956호인 대바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4호인 천순명동종(天順銘銅鐘) 등이다.

 

 

태안사의 일주문이다. 그런데 산의 이름을 봉두산(鳳頭山)’이 아닌 동리산(桐裏山)’이라고 적고 있다. 그만큼 구산선문(禪門九山)’의 하나였던 동리산파桐裏山派)’의 중심사찰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는 표현이 아닐까 싶다. 참고로 태안사는 최남선(崔南善)과 인연이 있다. 1925년 이곳을 찾은 그가 신라 이래의 이름 있는 절이요, 또 해동에서 선종(禪宗)의 절로 처음 생긴 곳이다. 아마도 고초(古初)의 신역(神域) 같다.’고 극찬한 곳이 바로 태안사이기 때문이다.

 

 

산행날머리는 태안사주차장

일주문과 방생못 안에 세워진 부처님의 진신사리탑을 구경하며 태안사를 빠져나오면 충의문(忠義門)’이란 현판을 단 시설이 보인다.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인 경찰충혼탑(警察忠魂塔)’이란다. 1950.6.25일 발발한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이 남침하자 한정일 경찰서장과 300여명의 곡성경찰은 이곳 봉두산 기슭에 있는 태안사 경내에다 작전 지휘본부를 차렸다. 이후 매복 작전으로 순천에 주둔했던 북한군 제603기갑연대를 압록교 부근에서 섬멸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으나, 북한군의 태안사 작전지휘본부 기습공격을 막는 과정에서 경찰관 48명이 장렬하게 전사했다고 한다. 이를 기리기 위해 세운 시설이라는 것이다. 또한 매년 86일에는 전남지방경찰청 주관으로 이곳에서 위령제(慰靈祭)’를 열고 있다고 한다. 산행은 충혼탑 바로 앞에 있는 주차장에서 종료된다. 아까 산행을 시작할 때 지나갔던 능파각의 바로 앞이기도 하다. 오늘 산행은 총 4시간15분이 걸렸다. 중간에 간식을 먹느라 쉬었던 시간과 길이 헷갈려 지체했던 시간을 제외하면 4시간 정도가 걸린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