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도(竹島)

 

여행일 : ‘19. 11. 20()

소재지 : 충남 홍성군 서부면 죽도리

트레킹 코스 : 선착장해변1전망대뒷장벌아일랜드카페3전망대조가비해변죽도쉼터앞장벌2전망대마을회관선착장(소요시간 : 4.84/ 2시간)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홍성군에서 사람이 살고 있는 유일한 섬으로 주위에 대나무가 많이 자생한다고 해서 죽도(竹島)라는 이름이 붙었다. 천수만(淺水灣)의 고요한 물결 위에 떠있 듯 자리한 본섬을 11개의 꼬맹이 섬들이 호위하는 모양새인데 그 자태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그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덕분에 낭만과 자연이 그대로 보존된 천혜의 섬이다. 죽도는 세 개의 봉우리가 잘록한 허리로 이어져 있다. 해발고도 10m 안팎의 봉우리마다 조망대가 세워졌고, 조망대와 마을을 연결하는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힘들이지 않고 천천히 두어 시간이면 섬 전체를 돌아볼 수 있다. 참고로 이 섬은 20185월 정기여객선이 개통되며 누구나 쉽게 닿을 수 있는 섬이 되었다. 그 덕분에 올해는 해양수산부의 여름에 썸 타고 싶은 섬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래선지 평일인데도 불구하고 배를 증편했을 정도로 관광객들이 붐비고 있었다.


찾아오는 방법

죽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일단 남당항(홍성군 서부면 남당리)’까지 와야만 한다. 섬으로 들어가는 배가 이곳 남당항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서해안고속도로 홍성 IC에서 내려와 29번 국도를, 잠시 후 갈산면소재지(상촌리)에서 40번 국도로 옮겨 타고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남당항이 나온다. 이미 입소문이 난 대하축제는 물론이고, 쭈꾸미축제와 새조개축제를 따로 열 정도로 수산물이 풍부한 고장이다. 이곳을 제2의 고향으로 여기는 바다낚시 마니아들까지 있다면 어느 정도인지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어렴풋하게 윤곽이 잡히는 죽도를 배경삼아 바다에 떠있는 배가 우리를 태우고 갈 홍주해운 소속의 가고파호이다. 길이 20.07m에 무게가 29톤인 유람선 모양의 선박으로 선원을 포함해 총 98명이 탑승할 수 있단다. 이 배는 남당항과 죽도항 사이의 바닷길 2.7km15(9:00. 11:00, 13:00, 14:00, 16:00) 운항한다. 죽도항에서는 9:30, 11:30, 13:30, 15:30, 17:00에 각각 출발하니 참조할 일이다. ! 손님이 많을 때는 배의 운항 횟수를 늘리고 있었다. 배편이 없어서 섬에 못 들어갈 일은 없겠다는 얘기이다. 15분이 채 걸리지 않는 운항시간 덕분일 것이다. 하나 더, 이용 요금은 비도서민의 경우 대인 5000, 소인 2500, 중ㆍ고생 4500, 65세 이상은 4000원이며 도서민의 경우 50% 할인된 금액으로 이용할 수 있다. 미리 예매를 하고 싶을 때는 홍주해운 남당항 매표소(041-631-0103), 죽도항 매표소(041-632-2269)로 문의하면 된다.



배는 15분이 채 되지 않아 죽도에 이른다. 손을 뻗으면 잡힐 듯 가까운 거리라는 얘기이다. 하긴 남당항 선착장에서 낮게 떠 있는 죽도의 윤곽이 보일 정도니 오죽하겠는가. 정기여객선이 다니기 전에는 작은 나룻배로 섬과 육지를 오갔을 정도란다. 그렇게 도착한 죽도의 방파제를 겸한 선착장은 유난히 멀리 바다를 향해 튀어 나갔다. 간만(干滿)의 차이가 크기로 소문난 천수만의 특성 탓에 배를 대는 게 여의치 않아서였을 것이다.



배에서 내리면 가장 먼저 방파제에 그려진 벽화가 시선을 잡아끈다. 색이 바랜데다 지워진 부분도 있지만, 바지락 캐는 풍경, 만선의 기쁨 등 섬 이야기가 담겨있어 정답게 느껴진다.



트레킹은 방파제가 섬과 만나는 곳에서 시작된다. 용트림을 하면서 위로 오르도록 만들어놓은 나무계단의 전면에 죽도둘레길이라는 이름표를 달아놓았으니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 발걸음을 너무 재촉하지는 말고 입구에 세워진 이정표도 한번쯤 살펴보고 길을 나서자. 위에서 내려다본 전경사진과 지명, 방향표시 등 어느 하나 모자람이 없는 이정표이다. ‘천수만의 보물섬, 죽도마을이라는 이름표에 걸맞다 하겠다.



소나무가 가득한 산봉우리 하나를 넘자 깨진 조가비들이 주인노릇을 하고 있는 작은 해안이 나타난다. 푸른 바다 위를 떠다니는 올망졸망한 꼬맹이 섬들이 한 폭의 풍경화를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해안이다.




해안이 끝나면 작은 오름이 시작된다. 그리고 중간쯤에서 길이 나뉜다. 곧장 전망대로 올라가도 되고, 오른편으로 돌다가 올라도 된다. 이곳 죽도 둘레길이 갖고 있는 특징이라 하겠다. 꼭대기를 가운데에 두고 빙 둘러 나있는 탐방로를 따르다가 마음 내키는 곳에서 오르면 언제나 전망대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 이 봉우리는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산자락이 온통 대나무 숲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죽도(竹島)라는 이름의 근원을 유추해 볼 수 있는 풍경이라 하겠다. 대나무가 많이 자생하는 섬을 흔히 죽도라 부르니 말이다. 참고로 우리나라에는 죽도라는 이름을 지닌 섬이 무려 59개나 된다고 한다. 유인도만 해도 9개나 된다니 흔한 이름이라 하겠다. 그만큼 대나무가 흔한 나라라는 얘기도 될 것이고 말이다.



오른편으로 돌다 첫 번째 갈림길에서 위로 올라서니 이층으로 된 1조망대가 나온다. ‘용이 물길을 끊은 섬이라는 뜻을 지닌 옹팡섬 조망대이다. 이층으로 오르면 전망 좋은 곳에 님의 침묵으로 알려진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 1879-1944)선생의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그가 태어난 곳이 홍성(결성면 성곡리)이라는 것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참고로 그를 시인으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그는 독립운동가이자 승려로 더 유명하다. 3·1 만세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 독립선언서의 공약 3을 추가 보완했으며 옥중에서는 '조선 독립의 서(朝鮮獨立之書)‘를 지어 독립과 자유를 주장하기도 했다. 승려로서는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을 지어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했다.




조망대 한편의 포토죤에는 판다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판다는 대나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동물이니 죽도의 이미지를 형상화했다고 보면 되겠다.



만해스님의 어깨 너머에로는 널따랗게 시야가 열린다. 탁 트인 천수만 풍경과 그 위로 올망졸망 떠 있는 크고 작은 부속 섬들이 보인다. 이곳은 물결이 잔잔하기로 소문난 천수만, 그 위에 돛단배마냥 떠있는 섬들이 마치 한 폭의 풍경화를 보는 것 같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이다.



반대편으로도 멋진 그림이 그려진다. 게의 양 발처럼 바다로 향해나간 특이한 섬의 모양새가 한시도 눈길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조망대를 내려오니 시판(詩板)이 세워져 있다. ’새러 티즈데일 (Sara Teasdale)‘의 선물이라는 시가 눈길을 끈다. 한 평생을 살면서 해본 세 번의 사랑이 각기 웃음과 눈물, 그리고 침묵을 선사했단다. 또한 노래를 주었는가 하면 눈을 뜨게도 했는데, 영혼을 준 것은 세 번째 사랑이었단다. 그렇다면 난 아직도 멀었나 보다. 두 번을 더 사랑해야 영혼을 지닐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참고로 이런 시판들은 제2조망대와 제3조망대에도 여럿 세워져 있었다.



둘레길로 되돌아가 트레킹을 이어간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전망대를 만난다. 밀물 때만 되면 섬으로 되돌아가는 갯바위까지 데크로 다리를 놓았다. 그만큼 조망에 자신이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눈앞에 펼쳐지는 풍광은 턱없이 아름답다. 바다에는 흰색의 돔이 있는 바지선 모양의 인공섬이 떠있다. 낚시체험을 위해 만든 바다낚시공원이란다. 저곳에서는 숭어와 주꾸미, 갑오징어, 우럭 등이 잘 잡힌단다. 이용료는 1인당 4만원이며 3명 이상이 되어야 배의 운항이 가능하다니 참조해 두자. 더불어 천수만의 수심이 깊지 않고 간만의 차이가 심해 입질이 좋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반대편에도 본섬과 연결되어 있는 섬들이 나타난다. ‘큰달섬작은달섬이다. 저 섬들은 만조(滿潮) 시에는 별개의 섬이지만 간조(干潮) 때는 모세의 기적처럼 본섬과 이어져 걸어서 건너갈 수 있다. 참고로 본섬과 큰달섬 사이에는 썰물 때도 물이 빠지지 않는 지름 20m 정도의 물구덩이가 있다고 한다. 이 물구덩이를 죽도 주민들은 용이 승천하다가 떨어져 생겨난 것이라 하여 용난둠벙이라 부른단다.



탐방로는 이제 바닷가를 따른다. 널찍하면서도 관리가 잘 되어 있는 길이다. 바닥은 대부분 야자매트를 깔아 걷기가 아주 편하다. 흙길을 낼 수 없는 곳에는 데크로 다리를 놓았다. 아무튼 바닷가를 따르다보면 곳곳에서 시야가 뻥 뚫린다. 그래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던지 전망데크도 여럿 만들어 놓았다. 덕분에 눈만 들면 잘 그린 풍경화가 눈앞에 펼쳐진다. 아름답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잠시 후 맨몸을 드러낸 갯벌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마을 초입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저 근처에 독살체험장이 있다고 했다. 독살은 해변에 돌담을 쌓아 들물 때 들어온 물고기를 썰물 때 잡는 원시어로 방법이다. 돌 그물인 셈이다. 하지만 아직 물이 덜 빠진 탓인지 독살은 눈에 띄지 않았다. 아니 이미 허물어져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한때는 독살로 물고기를 잡던 시절도 있었으나 효용가치가 떨어진다고 해서 사용하지 않은지 이미 오래되었다니 말이다.



마을에 이르자 섬의 폭이 갑자기 좁아졌다. 두 개의 작은 섬이 모래톱으로 연결된 모양새이다. 아니 육계사주(陸繫砂洲)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옳을 지도 모르겠다. 좁디좁은 공간이지만 길은 둘이나 나있다. 그것도 시멘트로 포장까지 해놓았으니 고속도로나 다름없다. 3조망대로 갈 때는 뒷장불해안으로 난 길을, 그리고 제2조망대를 향해 돌아올 때는 앞장불해안으로 난 길을 따르도록 되어있다. 기껏해야 한 발짝 거리 밖에 되지 않지만 말이다. 참고로 전라도에서는 물이 빠지는 썰물 때 드러나는 너른 모래밭, 갯벌장불이라 부른다. 방언(사투리)이다. 이게 충청도로 넘어오면서 장불로 바뀌었는지도 모르겠다.



바닷가 갯벌에 네모난 둠벙이 만들어져 있다. 그 안에는 밀물 때 들어왔다 갇혀버린 바닷물이 찰랑거리고 있다. 조개잡이를 끝낸 주민들이 뻘밭에서 더럽혀진 손발을 씻기 위해 만들어 놓은 시설물이지 싶다.



아랫마을의 담벼락도 역시 벽화(壁畫)로 채워져 있었다. 요즘은 벽화가 대세라더니 숨겨졌던 마을도 추세는 따를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식상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른 지역들과는 달리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를 연상시키는 민속화(民俗畫)를 그려 넣음으로써 보는 이들로 하여금 친근감을 느끼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곳이 어촌마을인데도 불구하고 그림은 농촌마을의 풍경을 담고 있다는 게 조금 어색했을 따름이다.



섬이 아름답다보니 흔하디흔한 식당까지도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길손에게 손을 내미는 주인 아낙네라고 예쁘지 않을 리가 없다. 돌아오는 길에 들르기로 약속하고 그냥 지나쳤지만 아뿔싸 공염불에 그치고 말았다. 동선(動線)에 따라 이동하다가 선착장 부근의 다른 카페에 들어앉아버렸기 때문이다.



탐방로는 마을의 끄트머리에서 다시 위로 향한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물방울 같은 영롱한 입체조형물을 만난다. 벽면에 크고 작은 그릇들을 붙여놓은 모양새인데, 그 크기나 생김새가 각기 다르다. 아니 한걸음 더 나가 평범하기 짝이 없는 소재를 조화롭게 배열함으로써 예술작품으로 승화시켜버렸다. 일반인과 예술인의 차이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다. 이곳은 전망대의 역할까지도 겸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것도 옹팡섬조망대가 걸터앉은 해안선의 아름다운 풍광이 한눈에 가득 차오르는 명품전망대이다.




이곳의 탐방로도 역시 산허리로 나있다. 산봉우리에 올라앉은 조망대를 가운데에 두고 에둘러서 길을 내놓은 모양새이다. 시야가 뚫리는 곳에는 전망대도 들어앉혔다. 둘레길을 돌면서 아름다운 섬 풍경을 실컷 구경한 다음 정상의 담깨미조망대에 올라 대미(大尾)를 장식하라는 모양이다. 화룡점정(畵龍點睛)이라는 고사성어를 완성시켰다고나 할까?



그렇게 해서 오른 산봉우리는 제3조망대인 담깨비 조망대가 주인이다. ‘담깨비(혹은 당개비)'란 용왕에게 제를 올리는 당산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대나무로 기둥을 받친 조망대에 오르면 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 : 1889-1930) 장군이 여행객들을 반긴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일본군을 대파했던 1920년 청산리대첩(백운평전투, 천수평전투, 어랑촌전투)의 주역이다. 영화 장군의 아들의 주인공 김두한의 아버지로 더 잘 알려진 이분도 역시 홍성이 낳은 인물이란다. 하지만 그는 1930년 일본군이 아닌 공산주의자 박상실(朴尙實)의 흉탄에 맞아 순국했다. 나라보다 이념을 더 중요시하는 공산주의가 세상에서 사라져야 하는 확실한 이유일 것이다.




담깨비전망대가 내놓는 또 다른 볼거리는 죽도의 흔적이다. 중간층에 만들어놓은 공간의 두 면에 흑판을 대고 낙서를 할 수 있도록 했다. 가지고 온 쓰레기는 남김없이 되가져가고 대신 추억만 남기고 가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전망대에 오르면 하늘이 반, 바다가 반이다. 높이에 비해 전망이 시원하다는 얘기이다. 천수만에 동동 떠있는 죽도는 자신보다 작은 11개의 섬을 거느린다. 올망졸망 새끼 섬들이 부러운 듯 그리운 듯 죽도를 둘러싸고 있는 모양새이다. 일부 섬은 물이 들고 남에 따라 가느다란 모래 띠로 이어졌다 끊어지기도 한단다. 이왕에 시작했으니 한걸음 더 나가보자. 본섬의 서쪽에는 큰달섬과 작은달섬, 충태섬이 내려다보이고, 북쪽 방향으로 띠섬(모도), 멍대기(명덕도), 오가리(큰오가도와 작은오가도), 전재기(전도) 등이 늘어서 있다. , 남쪽 끝섬으로는 지마녀, 움마녀, 제일 북쪽 섬으로 꼬장마녀 등이 있다. 마녀의 뜻은 만조시간이 긴 섬이라는 의미이며, 꼬장은 끝장, 제일 북쪽의 끝을 의미한단다.



고개를 돌리니 거대한 풍력발전기가 돌아가고 있는 홍성 쪽의 해안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발아래로는 대나무 숲이 무성하다. 저 대나무들은 한때 주민들에게 유용한 수입원이기도 했단다. 30~40년 전만 해도 대나무로 만든 복조리를 시장에 내다팔아 생계를 유지했다는 것이다. 광천장이나 남당리 도매상에게 넘기곤 했는데 모산포 방조제가 건설되기 전에는 결성장까지 배를 타고 가서 내다 팔기도 했단다. 참고로 죽도의 시누대()’는 고려시대 삼별초의 난당시 삼별초군이 화살(竹箭)을 만들기 위해 베어다 썼다는 얘기도 있다.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강화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진도에 왕국을 세웠던 삼별초는 한때 남동쪽으로 남해도, 서해에서는 안면도까지 장악했었다. 그러니 죽도 역시 삼별초 왕국의 영토였을 것이다.



조망대를 내려오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가 적혀있지 않겠는가. 30년에 가까운 공직생활 동안 내 좌표가 되어준 윤동주의 서시(序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로 시작되는 이 시는 공직을 마치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로 변해 내 책상머리를 지켜줬다. 덕분에 난 대통령상을 비롯한 수많은 상들을 받은 반면 경징계 한 번 받지 않은 채로 영예롭게 공직을 마칠 수 있었다.



이젠 제2조망대로 갈 차례이다. 반대편으로 내려가는 길가는 죽도라는 이름에 걸맞게 대나무 숲이 울창하다. 그 사이로 난 데크로드로 들어서자 천수만의 바닷바람도 한풀 걸러진다. 대신 싱그럽기 짝이 없는 댓잎 서걱거리는 소리만이 귓가를 맴돌다 간다. 그렇게 잠시 내려오니 헬기이착륙장 뒤편에 세워놓은 이정표(마을/ 해변가/ 야영장)가 눈길을 끈다.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나무기둥에 자그만 방향표지판을 매달고 있는 게 여간 자연스럽지가 않은 것이다. 오랫동안 꽁꽁 숨겨져 온 마을 풍경답다 하겠다.



몇 걸음 더 내려가니 하얀 모래사장이 기다랗게 펼쳐진다. 누군가는 이곳을 몽돌해안이라 했었지만 막상 내려서보니 자갈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모래사장도 아니다. 잘게 부서진 조가비들이 하얀색으로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맞다. 이곳 죽도는 새조개가 많이 난다고 했다. 소라나 굴도 넘쳐난다고 했다. 그 조개들이 먹거리라는 자신의 본분을 다하고 난 뒤에도 사람들에게 멋진 볼거리를 남겼나 보다. 이왕에 내려선 해안이니 끝까지 거닐어보기로 했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조가비들이 비명을 지른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여간 싱그러운 게 아니다.



조가비해안의 끄트머리에는 제주도의 해안을 연상시키는 갯바위가 널따랗게 펼쳐져 있다. 검은색에다 구멍까지 숭숭 뚫린 것이 영락없는 화산암이다.



바닷가를 걷다보니 발전용 태양광 패널(panel)들이 널따랗게 펼쳐져 있다. 3년 전쯤인가 이곳 죽도가 에너지 자립 섬이 되었다는 기사를 본 것 같은데 이를 두고 한 말이었나 보다. 당시 기사는 이곳 신재생발전소와 공동어구장, 마을회관 등 죽도에는 저런 패널들이 650여 장이나 설치되어 있다고 했다. 그렇게 생산되는 전력은 201kW, 여기에 913kWhESS설비를 갖춤으로써 에너지 자립을 이룰 수 있었단다. 참고로 ESS(Energy Storage System)란 전기가 남을 때 저장하고 부족할 때 공급하는 에너지 저장장치이다. ! ESS의 축전량 부족을 대비해 100kW급 디젤발전기 3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두자. 하나 더! 통영시의 연대도가 그랬듯이 이곳 죽도 역시 에너지 자립을 이룬 에코아일랜드로 유명해졌다. 태양광만으로 자립을 이루다보니 죽도 주민들이 직접 출연한 에너지 기업 광고가 방송되기도 했다.



해안가에는 야영장이 조성되어 있었다. 폐교 후 공터로 남아 있다가 에너지 자립 섬으로 조성되면서 관광자원으로 탈바꿈되었으니 친환경 캠핑장인 셈이다.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어 시야까지 널찍하다. 해맞이나 해넘이 장소로 이만한 곳도 없겠다. 다만 텐트 가까이에 있는 무덤을 무덤덤하게 넘길만한 배포가 우선이지 싶다. 집사람은 요즘 무덤을 꺼림칙하게 여기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고 했지만 말이다.



야영장 옆에는 죽도 쉼터가 지어져 있다. 작년에 개장할 때만 해도 죽도 홍보관이란 간판을 달고 있었는데 언제 바꿔달았는지 모르겠다. 당시의 기사들은 죽도의 만물상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1층에 들어선 매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특산품 판매장을 겸했다니 말이다. 그 외에도 1층에는 휴게소, 2층에는 사무실과 회의실 등이 들어서 있다고 했었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인기척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을을 빠져나와 2조망대로 향한다. 아까 지나왔던 육계사주를 따르는데 이번에는 오른쪽, 즉 앞장불 방향의 길이다. 이 길의 양 옆, 그러니까 북쪽의 윗마을과 남쪽의 아랫마을 사이의 개미허리 양쪽은 활모양으로 생긴 아담한 모래해안이다. 두 개의 해안인 셈이다. 섬에는 이런 모래해안이 두 개나 더 있다. 북쪽 선착장에서 제1조망대로 가는 해안이 그중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아까 둘러봤던 야영장의 옆에 동서로 길게 펼쳐져 있다.



윗마을에 이르러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자 2조망대로 오르는 들머리가 나타난다. 윗마을의 끝단, 그러니까 햇살민박 옆에 목제의 데크계단길이 놓여있다. 계단 앞에는 죽도 종합 이용안내도를 세워 여행객들의 편의를 도모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죽도의 특산물을 소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봄에는 바지락이 많이 나오고, 여름에는 꽃게, 가을에는 대하, 그리고 겨울에는 새조개가 많이 잡힌단다. 지금은 겨울의 초입, 노릇노릇 잘 구워진 대하를 안주삼아 풍류를 즐긴 뒤, 새조개칼국수로 속을 풀면 궁합이 딱 맞겠다.



이번에도 역시 산허리를 에두르는 길을 따르다 위로 올랐다. 각기 다른 조망을 보여주는 전망대를 두어 곳에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아니 죽도의 얼굴마담이랄 수 있는 대나무 숲길을 더 걸어보고 싶었던 이유일 수도 있겠다. 죽도는 대나무 섬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신우대라 불리는 가느다란 대나무를 쉽게 볼 수 있다. 누군가는 대나무 숲 사이의 탐방로를 따르다보면 바람결 따라 댓잎이 스치는 소리만 들릴 정도로 고요하다고 했다. 이따금 여행객들의 두런두런 말소리가 섞여 들리기도 하지만, 한적하기는 매한가지라면서 말이다. 맞다. 마침맞게 날씨까지 맑다보니 청량한 공기 한 모금 들이키며 천천히 걷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다.



그렇게 올라선 제2조망대는 동바지 조망대라는 별도의 이름을 갖고 있다. 가장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기상관측시설의 곁에 세워진 동바지 조망대의 캐릭터는 고려의 명장 최영(崔瑩 : 1316-1388) 장군이다.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했다는 그도 이곳 횡성 출신이란다. 하지만 최영 장군의 탄생지는 철원과 서산, 개성 등에서도 각기 자기 동네라고 주장한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조망대에는 죽도 갤러리가 들어서 있었다. 이곳도 역시 두 면을 할애했는데 다양한 죽도 사진과 홍성군의 유명인과 유적지 관련 안내자료, 홍성군의 다양한 민속 공예품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동바지조망대에서의 조망도 일품이다. 주택가와 가장 가까운 탓에 오붓한 마을 풍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눈을 조금만 더 높이 들면 사방이 온통 천수만(淺水灣)’이다. 태안반도 남단에서 남쪽으로 쭉 뻗어 내륙 깊숙이 들어온 만이다. 태안과 홍성, 보령, 서산 지역 해안선을 따라 펼쳐진 바다를 남북으로 길게 자리한 안면도가 막아주고 있어 더없이 잔잔한 내해다. 수심이 얕다고 해서 천수만(淺水灣)이란 이름이 붙여졌단다. 참고로 천수만에는 이곳 죽도 말고도 섬이 여럿 더 있다. 북쪽 바다에는 간월도와 황도가 있고 아래쪽 바다에는 보령의 육도와 월도 등이, 만 바깥으로는 원산도와 효자도가 천수만을 호위하듯 서 있다. 천수만이 태풍에도 더없이 잔잔한 호수 같은 것은 그 때문이다.



동바지 조망대까지 둘러봤으면 이젠 선착장으로 되돌아갈 차례이다. 이때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마을회관이다. 옥상에 재미있는 조형물이 올라앉아 있기 때문이다. 낚시하는 가족이다. 조형물의 아이디어가 기발한 탓인지 이곳을 다녀간 여행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신의 블로그에 이 사진을 올려댄다. 참고로 죽도는 24가구에 40여명이 거주하는 작은 섬이다. 면적도 0.17에 불과하다. 그런데 배가 23척이나 된단다. 섬 주민 모두가 배를 소유하고 있는 어부들인 셈이다. 그러니 바다가 곧 그들의 생명선일 것이다. 마을회관의 조형물도 이런 점을 나타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아뿔싸! 동선(動線)을 따르다보니 윗마을의 선착장까지 와버리고 말았다. 아일랜드 식당 사장님과의 약속을 잊어버린 채로 말이다. 그렇다고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 별수 없이 근처 섬마을 카페를 찾았다. 안으로 들어서니 이건 숫제 음식백화점이다. 커피와 차는 기본이고, 스무디와 빙수도 준비돼 있단다. 메뉴판에는 굴밥과 간장백반도 보인다. 안주도 다양하다. 먹태나 감자튀김 등 마른안주는 물론이고 바닷장어구이나 닭날개 같은 진한 안주도 보인다. 심지어는 피자까지 내놓고 있었다. 하지만 난 캔맥주 하나로 만족하기로 했다. 배의 출발시간이 30분이나 앞당겨졌다는 산행대장의 전화를 받았기 때문이다. 죽도에서 죽도의 음식을 맛볼 수 없었으니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짭조름한 갯내음을 품은 바지락칼국수와 얼큰한 우럭 매운탕, 고소하고 걸쭉한 서리태 콩국수 등 다양한 메뉴가 준비되어 있다는데 말이다.



귀경길에는 간월암에 들렀다. 이곳에서 주어진 시간은 무려 2시간, 서너 번이나 와본 곳이니 사진 찍을 일도 없다. 할 일 없이 배회하다 근처 음식점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는 대하와 새우튀김을 안주 삼아 마신 소주가 무려 2, 해물칼국수로 속을 달래봤지만 그렇다고 술이 깰 리가 없다.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줄곧 잠만 잔 이유이다.


낙월도(落月島)

 

여행일 : ‘19. 8. 31()

소재지 : 전남 영광군 낙월면 송이리

산행코스 : 상낙월도 선착장재계미땅재진월교당너매쉼터하낙월리진월교상낙월리상낙월도 선착장(소요시간 : 7/ 3시간 10)

 

함께한 산악회 : 좋은사람들

 

특징 : 영광 법성포에서는 22km, 목포와 70km, 관문인 향화도 포구는 20.5km 떨어진 조그만 섬이다. 남쪽으로 신안군 임자면 해상과 북쪽으로는 각이리 해상, 서쪽으로는 공해상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섬은 대부분 완만한 경사의 구릉으로 이루어졌다. 북서쪽에 발달된 해식애도 다른 섬들에 비해 그 규모가 작은 편이다. 때문에 눈에 담을만한 빼어난 풍경은 별로 없는 편이다. 큰갈마골해수욕장과 외양마지가 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섬의 역사는 꽤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학자들은 600년 무렵으로 본다. 백제가 망하자 왕실과 귀족의 후손들이 피신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여말 선초에 군역과 부역을 피해 도서지역으로 들어가는 백성이 늘었고, 왜구의 침략과 삼별초가 몽골에 항전하여 서남해안 섬들을 점령하면서 군사력이 미치기 어렵게 되자, 섬을 비우는 정책인 공도정책’(1416~1881)을 실시했다. 그래서 현 주민의 선조들은 대부분 임란 이후에 들어온 사람들이다. 참고로 조선 초기만 해도 이 섬은 진월도(珍月島)로 불렸다. 이는 진다리에서 유래한 것으로 진다리는 진흙()이 많은 곳을 의미한다. 이후 진들진덜진달진달이로 되면서, ‘자는 달이 진다는 개념으로 전이되어 떨어질 ()’자와 달 ()’로 표기하게 되었다고 한다. 육지인 영광 법성포쪽에서 이 섬의 위로 달이 지는 모습을 보면 바다로 달이 떨어지는 것같이 보인다는 설과, 섬의 모양 자체가 초승달 모양이라는 설도 있으니 참조한다. ‘해동지도(海東地圖)’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등 고지도에는 낙월도(落月島)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도 알아두자.



찾아오는 방법 : 낙월도로 들어가려면 일단은 영광군 염산면에 위치한 향화도항까지 와야만 한다. 낙월도로 들어가는 여객선이 이곳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엄청나게 너른 주차장에 내리면 영광의 랜드마크라는 칠산타워가 길손을 반긴다. 올해 문을 열었는데 높이가 111m에 이른다니 전남지역의 전망대 가운데 가장 높다 하겠다. 땅끝전망대(39.5m)와 완도타워(76m), 정남진전망대(45.9m), 고흥우주발사대(52m), 진도타워(60m) 등 다른 전망대들은 100m에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타워는 1·2층은 매점과 특산물판매장, 활선어판매장, 향토음식점 등이 입주해 있고 3층엔 하이라이트인 전망대가 있다. 송이도나 낙월도로 들어가는 여객선의 매표소도 1층에 들어있다. 참고로 향화도는 과거에 갯벌로 연결된 섬이었으나 현재는 간척지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 축제기간 중엔 무료라고 해서 칠산타워에 올라보니 영광의 바다와 내륙을 360도 조망할 수 있는 풍경이 훌륭했다. 새우잡이로 유명한 칠산 앞바다를 끼고 반듯반듯한 농지가 형성되어 있었는데, 푸른 바다와 녹색의 들과 산에 눈이 시원해졌다.





송이도까지는 차도선(車渡船)섬사랑 12가 하루 3(07:30, 10:30, 15:30) 왕복 운항한다. 승객 105명과 차량 20대를 한꺼번에 운송할 수 있는 180톤급 여객선이다. 배의 뒤로 보이는 다리는 무안군 도리포(해제면)과 영광군 향화도(염산면)의 해상구간(1,840m)을 잇는 칠산대교(七山大橋)’이다. 연말 개통을 앞두고 마무리공사가 한창인데 수천 년 동안 견우와 직녀처럼 서로 쳐다만 보고 살았던 무안군 도리포와 영광군 향화도가 하나가 될 날이 머지않았다.



느려터진 배에서는 할 일도 없다. 마침 바닥도 온돌이라서 부족한 잠을 청하기로 했다. 그리고 70분 정도 되는 뱃시간을 늘어지게 자고나자 어느덧 낙월도에 도착한다. 낙월도는 면적 1.28에 해안선 길이가 11.2km에 불과한 작은 섬이다. 41개의 무인도를 포함한 52개의 도서(島嶼)로 이루어진 낙월면 관내에서도 안마도와 송이도에 이어 세 번째일 따름이다. 하지만 면소재지여서 공공건물들로 인해 인근의 다른 섬들에 비해 번화하다는 느낌이었다. 참고로 낙월도는 상낙월과 하낙월 두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여객선은 두 섬의 선착장에 모두 정박한다. 하지만 여행객들은 대부분 상낙월도에서 몸을 내린다.



선착장에서 내리면 커다란 표지석이 길손을 맞는다. ‘상낙월도라는 지명 외에도 새우의 고장이라는 부언(附言)까지 달고 있다. 표지석의 맨 위에다 등이 굽은 새우를 그려 넣기까지 했다. 그만큼 이곳 낙월도가 새우와 관련이 깊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1970-80년대 낙월도 주변 바다는 새우의 황금어장이었고, 낙월도는 인근 임자도 전장포와 함께 전국 새우젓 생산량의 50%를 차지했었다. 이에 따른 폐해도 있었다. 목돈을 쥐어보겠다고 멍텅구리배(전통적인 방식으로 새우를 잡는 어선)’를 탔던 사람들이 고된 노역과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부표를 타고 탈출하다가 파도에 휩쓸려 목숨을 잃기도 했던 것이다. 1987년 태풍 셀마 때는 무동력선이었던 멍텅구리배 12척이 난파돼 53명의 어부가 사망하기까지 했다. 그 결과 안전문제와 선원들에 대한 비인간적 처우 등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생각한 정부는 1995년 멍텅구리배를 모두 폐선(廢船)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배 한 척이 100명을 먹여 살렸다는 낙월도의 주요 소득원이 끊긴 셈이다. 멍텅구리배가 폐선된 이후 낙월도의 새우잡이도 쇠락하고 말았다.



선착장 앞 정자 쉼터로 나오니 길이 둘로 나뉜다. 왼편은 목포해경 낙월도파출소(이곳에는 해양파출소 말고도 일반 파출소도 있다)’를 거쳐 상낙월 마을로 연결된다. 파출소 뒤에 보이는 붉은 벽돌건물은 공중목욕탕이다. 갯벌에 빠진 아랫도리도 씻을 겸해서 돌아오는 길에 들어가 봤는데 깔끔하게 청소가 되어 있었고 물도 시원스럽게 쏟아져 나왔다. 아무튼 우린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진행한다. 섬을 한 바퀴 돌 수 있도록 나있는 둘레길을 따르기 위해서이다. 포구에서 시작되는 이 길은 달바위와 몽돌로 이뤄진 재계미해변, 큰갈마골해수욕장, 후박나무가 숲을 이룬 땅재 그리고 바위 두 개가 솟아있는 쌍복바위를 돌아 포구로 이어진다. 상낙월도와 하낙월도를 연결하는 다리를 건너서 하낙월도까지 함께 둘러볼 수도 있다. 둘을 합친다고 해도 3시간이면 족하니 망설이지 말고 나서볼 일이다.



10분쯤 걸었을까 낙월도내연발전소가 나온다. 지난달에 들렀던 송이도의 내연발전소보다 오히려 더 큰 것을 보면 면소재지에 대한 예우일지도 모르겠다. 이 발전소의 바로 아래, 그러니까 낙월도 선착장의 북방파제 위쪽에는 쉼터용 정자가 지어져 있다. 위령비(慰靈碑)도 보인다. 사라호태풍(1959)과 셀마태풍(1967) 등 각종 재해로 사망해 해안가에 묻혀있던 27기의 무연고 유골(새우잡이 어부가 아닐까 싶다)을 발굴·안치하면서 그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것이란다. 안내석은 이곳의 지명을 달바위(月岩)’라고 적으면서 낙월팔경(落月八景)의 하나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낙조(落照)의 명소라는 부언까지 달아놓았다.



배롱나무(목백일홍) 꽃이 곱게 핀 시멘트포장 길을 따라 잠시 걷자 길이 둘로 나뉜다. 누군가는 이곳을 재계미삼거리라고 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땅재고개로 넘어가는 길을 무시하고 오른편으로 진행한다. 이정표가 윗머리(웃머리)로 표시한 방향이다.



길이 조금 좁아졌지만 여전히 시멘트 포장길이 이어진다. 걷는 내내 바다가 시야에서 떠나지 않는다는 점도 같다. 낙월도 트레킹에서 보이는 풍경은 지난번 송이도에서 보던 풍경과 별반 다르지 않다. 주변 바다에는 송이도와 대·소각이도 등 크고 작은 섬들이 떠있는가 하면 햇볕에 반짝이는 은빛 바다는 풍경이 곱다. 조수간만의 차이로 생겨나는 풀등도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썰물이 빠져나가면서 모래사장처럼 섬이 생겨나는 현상인 풀등은 자연현상으로도 신비롭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줘 더욱 신기하다.




산허리를 자르며 구불구불 나있는 둘레길은 물이 흘러가듯 유연하다. 주변 풍경은 길이 구부러질 때마다 다른 멋을 보여준다. 그렇게 잠시 걷자 오른편으로 길이 하나 나뉜다. ‘재계미해변으로 내려가는 길인데 인적이 뜸한 탓에 길은 흔적조차 찾기 힘들다. 하지만 발목을 휘감는 칡넝쿨만 조심한다면 내려갈 수는 있다.



300m 길이라는 재계미해변은 어른 주먹 크기의 몽돌이 깔려있다. 하지만 보여주는 풍광은 보잘 것이 없다. 엊그제 다녀온 백령도의 콩돌해안은 물론이고 지난달에 들렀던 이웃 송이도의 몽돌해안에도 훨씬 못 미친다. 해수욕장으로 문을 열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몽돌의 반대편 바닷물과 맞닿는 곳에는 결이 고운 모래가 파도를 맞이하는데 아기자기한 바위들과 어울려 운치를 더해준다.



둘레길로 되돌아와 트레킹을 잇는다. 둘레길 중간 중간에는 벤치를 놓아두었다. 어떤 곳에는 운동기구도 함께 배치했다. 주변 풍경을 차분하게 감상해보라는 배려용인 모양이다. 섬 주민들에게는 체력단련용인 모양인데 자주 이용하기엔 조금 먼 거리가 아닐까 싶다.



조금 더 걷자 또 다른 길 하나가 바닷가를 향해 나있다. 하지만 길은 이미 없어져 버렸다고 봐야 한다. 하도 사람이 안 다니다보니 토끼나 다니기 딱 좋을 정도로 넝쿨식물들이 가득 차버렸다. 게다가 기시넝쿨까지 섞여있다. 통행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얘기이다. 그렇다고 포기할 내가 아니다. 저 아래에 또 어떤 색다른 풍경이 펼쳐질지 모르니 말이다. 사력을 다해 헤쳐 나간다. 해변까지의 거리가 100m도 채 되지 않는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어렵게 내려선 해안(큰애기고랑이 아닐까 싶다)은 고생한 만큼의 눈요깃거리를 제공하지 못한다. 그저 너덜겅이 끝없이 펼쳐질 따름이다. 고진감래(苦盡甘來)를 외치면서 기어 나왔건만 헛고생만 한 셈이다.



둘레길로 되돌아나가야 하지만 그냥 해안을 따라보기로 한다. 또 다시 풀숲을 헤치고 나갈 일이 너무나 까마득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걷기에 큰 무리가 없어 보이는 해안의 상황도 그런 결정의 한 요인이 되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결정이었다. 너덜이 바위로 변하더니 끝내는 절벽으로 승화해 버렸기 때문이다. 절벽의 아랫도리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있어 아래로 내려설 수도 없었다. 크랙(crack)에 의지해서 바위와 씨름하길 1시간, 둘레길로 걸었을 경우 10분도 채 되지 않을 거리에서 나는 한 시간이나 소모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손바닥과 팔뚝에 수많은 상처를 남기면서 말이다. 어디에 부딪쳤는지 카메라도 고장이 나버렸다. ! 중간에 산자락을 파고들어 보기도 했다는 것을 깜빡 잊을 뻔했다. 길을 내가면서 올라가봤지만 50m쯤 진행하다 포기하고 말았다. 빈틈없이 들어찬 잡목에다 넝쿨식물들까지 뒤엉켜 있어 토끼 한 마리 제대로 통과할 수 없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위험구간이 끝나자 해안을 곱게 장식하고 있는 해식절벽이 눈에 들어온다. 해식동굴(wave-cut terrace)이 보이는가 하면 또 어떤 곳은 씨 아치(sea arch, 독립문처럼 암석 기저부가 뚫린 다리모양의 파식지형)을 만들어 놓기도 했다. 해식지형의 전형적인 변화과정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해식절벽이 해식동굴을 거쳐 씨 아치로 변하고, 씨아치는 또 세월이 흐르면서 시스텍(sea stack, 암석이 파도의 침식을 차별적으로 받아 만들어진 굴뚝 형태의 지형)’으로 발전되기 때문이다.




해식절벽이 끝나자 모래사장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큰갈마골해수욕장이다. 해수욕장은 폭이 200m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결이 고운 모래사장 너머로 갯벌이 길게 펴져있어 얼핏 보기에는 엄청나게 넓어 보인다. 거기다 풍광 또한 빼어난 편이다.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해식절벽이 양 옆을 감싸고 있는가 하면 정면의 적당한 거리에는 송이도와 소각이도, 대각이도 등의 섬들이 있어 눈요깃감으로 제법 쏠쏠하다. ! 썰물 때면 해수욕장의 모래사장 길이가 2까지 늘어난다니 참조한다. 또 하나, 모래사장 너머 갯벌에는 한때 지주식 김양식을 했던 흔적이 보인다. 오래전에 김 양식장은 철거했지만 그때 세웠던 나무 말뚝들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해수욕장을 빠져나와 다시 둘레길로 올라선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재계미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땅재에 올라선다. 옛날 이 고개에는 성황당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정월 초사흘에는 아래 사진에 보이는 팽나무 앞에서 당산제를 지냈단다. 수령이 300년인 저 팽나무는 민간신앙의 본산으로 제사를 지내고 농악놀이를 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또한 섬에서 가장 시원한 곳이라서 여름철이면 주민들의 만남의 장소이기도 했단다. 그래선지 팽나무 아래에는 지금 정자가 지어져 있다.



이정표(선착장 가는길/ 당산 가는길)가 지시하고 있는 당산방향으로 진행한다. 후박나무가 숲을 이룬 경사지 계단을 올라가니 낙월도에서 가장 높은 지점인 당산이 나온다. 하지만 이동통신사의 중계탑이 세워져 있어 정상으로서의 기능은 못하고 있다. 그게 미안했던지 나무그늘 아래에 벤치를 놓아 쉼터로 활용하도록 했다.




잠시 후 누엣머리로 내려가는 갈림길을 만났으나 개의치 않기로 했다. 아까 큰갈마골해수욕장에서 바라보던 풍경일 것 같아서이다. 조금 더 걷자 이번에는 데크전망대가 나온다. 예쁘게 펼쳐지는 바다풍경을 조금 더 차분하게 바라보라는 모양이다. 주변 풍경과 하나가 되어서 말이다.



전망대에서의 조망은 한마디로 끝내준다. 몽돌해수욕장으로 유명한 송이도를 위시해서 소각이도와 목섬, 대각이도가 지척에서 손짓하고, 송이섬과 대각이도 사이로 안마도와 오도, 석만도 등 안마군도들이 멀리서 고개를 내민다. 그 오른편에서 점들로 나타나는 것은 아마 칠산도일 것이다.



다시 길을 나서는데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커다란 바위 하나가 고개를 빼꼼히 내민다. 오랜 세월 먼 바다에서 불어온 거센 바람이 빚어놓은 탓인지 그 자태가 자못 범상치가 않다. 혹시 이정표에서 보았던 쌍복바위일지도 모르겠다. 상낙월도에 똑 같이 생긴 바위가 둘 있는데, 하나는 바닷가에 다른 하나는 산 중턱에 있다고 했으니 말이다. 쌍복바위에는 슬픈얘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마을에 정혼한 두 쌍의 남녀가 있었단다. 나라의 부름을 받는 때가 되어 한 남자는 육군, 다른 남자는 수군으로 입영하게 되었다. 육군으로 입영한 남자는 소식을 자주 전하며 여인의 외로움을 달래주었고 여인 역시 남자의 소식이 올 때마다 목욕재계하고 정성을 들여 남자의 무사함을 기원하였다. 그러나 수군으로 입영한 남자는 떠난 지 몇 해가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고 여인 또한 정성을 들여 치성하지 않았다. 이후 난리가 평정되어 소집되었던 군사들이 집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에 두 여인도 선창에 나가 정혼자의 귀가를 기다렸는데, 두 남자 중 육군에 입영하였던 남자만이 건강한 몸으로 귀향하고 수군으로 입영한 남자는 전사통지서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이에 수군으로 입영한 남자의 여인은 자신의 치성이 부족해서 생긴 일이라 생각해 뒷산 복바위에 올라가 자결하고 말았다. 부모는 불쌍한 딸의 사체를 인양하여 바다가 보이는 산 중턱에 안장하였다. 이후 여인이 부모의 꿈에 나타나 지아비는 바다에 있는데 어찌 혼자 산에 있겠느냐며 바다에서 영혼이나마 서로 만날 수 있도록 관을 무덤에서 파내어 혼숫감으로 준비한 가위·인두·상자·장롱과 함께 바다에 띄어 달라고 부탁했단다. 깜짝 놀란 부모가 딸의 부탁을 들어주었고, 이때 던진 혼수물품들이 모두 상낙월도 해면의 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이젠 하낙월도로 건너갈 차례이다. 상낙월도와 하낙월도는 약 500m 정도의 좁은 수로를 끼고 간만의 차이에 따라 붙었다 나뉘기를 반복한다. 썰물 때면 모래바닥이 드러나면서 하나의 섬으로 변한다는 얘기이다. 그러나 수시로 건너다닐 수는 없었기에 1989년 두 섬 사이에 방조제(防潮堤)를 설치해 차들도 다닐 수 있는 완벽한 하나의 섬이 됐다. 그러나 제방을 쌓은 뒤 해수가 유통되지 않아 갯벌이 죽어가자 2014년 제방 50m를 잘라내 다리를 만들었단다. 이 다리가 바로 진월교이다. 아무튼 이곳 진월교까지 오는 데는 2시간이 걸렸다. 1시간 남짓이면 가능한 거리를 길도 없는 해벽에서 헤매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진월교를 건너는데 두 섬의 사이 바다가 거무튀튀한 배를 드러내고 있다. 썰물 때인지라 바다에 숨어있던 거대한 모래밭이 그 자태를 드러낸 것이다. 아까 낙월도에 들어올 때 선원이 하던 말이 실감이 난다. 바로 코앞에 낙월도를 두고 멀리 돌고 있는 배를 보고 궁금해 하는 나에서 거대한 모래등때문이라고 했었기 때문이다. 100ha에 이르는 거대한 모래등이 썰물 때면 그 자태를 드러내는데 그때가 바로 지금인 것이다. 낙월도 사람들은 이를 풀등이라 부르는데 모래도 아니고 개펄도 아니며 모래와 개펄이 섞여 있어 발자국도 남지 않는 단단한 모래톱이다. 저 풀등은 낙월도 사람들의 중요한 수입원이기도 하단다. 맛이 많이 난다고 하여 맛등이라고도 불리는데 주변 수산시장에서 귀한 몸값을 자랑한단다. 또한 백하새우참새우의 산란지이기도 하며 민어, 꽃게, 농어 등 수산자원이 풍부한 지역이란다.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리자 외양마지가 눈길을 끈다. 서슬 시퍼런 해안절벽이 바다를 향해 길게 뻗어나갔는데 그 위에다 데크로드를 걸쳐놓았다. 갯바위 낚시의 명소로 알려져 있으니 낚시꾼들을 위한 편의시설이 아닐까 싶다.



연도교(連島橋)인 진월교를 건너 하낙월도로 들어선다. 마을 방면으로 이어지는 길을 잠시 따르다 오른쪽에 나타나는 경사진 길로 들어서면 하낙월도 트레킹의 시작이다. 이어서 초원 같은 길을 잠시 걷자 정자가 나타난다. 길은 이곳에서 둘로 나뉜다. 그런데도 마땅찮은 이정표는 오른편만 낚시터 가는길로 표기하고 있다.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자 외양마지가 나온다. ·하낙월도를 통틀어 풍광이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져 있다. 반도처럼 불쑥 튀어나간 바위능선만 해도 아름다운데 거기다 데크 계단까지 만들어놓아 화룡점정(畵龍點睛)으로 승화시켜버렸다. 덕분에 서슬 시퍼런 바위절벽에 걸쳐진 계단이 주변 풍경과 함께 어우러지면서 한 폭의 풍경화가 된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이다.




바닷바람을 맞고 자란 방풍나물이 지천인 능선의 끄트머리로 나가자 조망이 툭 트인다. 좌우로 펼쳐지는 해안절벽은 물론이고 상·하낙월도를 이어주는 진월교가 상낙월도와 함께 어우러진다. 그런데 그 풍광이 자못 멋스럽다.




큰 바위가 어디선가 굴러온 것처럼 바위와 바위 사이에 걸려 있다.



정자 앞 삼거리로 되돌아와 계속해서 둘레길을 탄다. 하낙월도의 둘레길도 조성 자체는 잘 되어 있다. 하지만 관리가 소홀한 탓에 걷기가 불편할 정도로까지 변해있다. 아니 정자쉼터 이후부터는 진행자체가 아예 불가능해져 버렸었다. 찾는 이들이 적은 탓도 있었겠지만 탐방객이 걸을 수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저번 송이도 탐방 때도 거론했었지만 이곳 영광군청의 게으른 행정에 문제가 있지 않나 싶다. 아무튼 하낙월도의 둘레길은 방금 전에 들렀던 와양마지와 할미골, 당너매, 작은골 그리고 전망좋은 장버래쉼터를 거쳐 선착장으로 이어진다.



하낙월도 둘레길은 시야가 탁 트여 걷는 내내 바다와 섬들을 바라볼 수 있다. 임자도와 지도, 어의도, 해제반도가 하늘과 바다를 양분하면서 풍경화 한 폭을 만들어낸다. ! 길을 걷다가 왼편으로 길이 나뉘는 곳을 두어 번 만났으나 이정표가 없기에 그냥 통과해버렸다. 조금 더 걷자 이번에는 정자가 나온다. 권장코스 가운데 하나인 당너매가 이 근처일 텐데도 난 찾아보지를 못했다. 이정표가 세워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너매의 몽돌해변은 낙월도의 자랑 중 하나인 묵석이 많이 발견되는 곳이기에 안타까운 일이라 하겠다.



얼마쯤 걸었을까 정자쉼터가 있는 삼거리(이정표 : 마을 가는 길/ 당너머)가 나온다. 계속해서 둘레길을 따라야 하낙월도의 명소인 장벌해수욕장으로 연결되는데 우린 그만두기로 한다. 칡넝쿨이 길 전체를 뒤덮어버려 더 이상의 진행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난 장벌래쉼터 근처에 있다는 초분(草墳)을 구경할 수가 없었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풍속이기에 기대를 많이 했었는데 아쉬운 일이다.



작은 고개를 넘자 하낙월리가 나온다. 낙월도의 동쪽해변은 갯벌이 많고, 서쪽해변은 절벽이 많아 사람이 사는 마을은 동쪽 산자락에 둥지를 틀었다. 하낙월리는 주민이 69명에 불과한 작은 마을이다. 목포나 영광, 광주 등에 거주하면서 이곳을 오가는 사람들을 뺄 경우 주민의 숫자는 이보다도 훨씬 줄어든단다. 나머지 주민들도 비람이 많이 부는 추운 겨울에는 육지로 나가 살다가 고기잡이가 시작되는 봄에 돌아오는 경우가 많단다. 마을을 돌아다니는데도 주민들이 눈에 잘 띄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마을은 대체로 한적하다는 느낌이다. 모든 행정기관이 상낙월도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유일하게 있는 교회가 가장 큰 건물인데 이마저도 십자가가 없다. 교회의 기능이 이미 사라졌다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마을 앞 너른 공터에는 정자를 지어 주민들의 쉼터로 활용하고 있다. 몇 걸음 더 걷자 이번에는 작은 공원, 쌈지공원을 만들어놓았다. 그 앞에 세워놓은 천하대장군지하여장군돌장승이 길손을 맞는다.



건너편에는 상낙월도가 있다. 초승달처럼 생겼다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또 어떤 사람은 고구마 모양을 하고 있다고도 한다. 무학대사가 이르기를 시안견유시 불안견유불(豕眼見唯豕, 佛眼見唯佛)’이라 하지 않았던가. 보는 사람에 따라 그 생김새 또한 달리 보이는 게 정상이 아니겠는가. 아무튼 상낙월도와 하낙월도는 둘이자 하나이다. 둘 사이에 낀 약 500m 정도의 좁은 수로에 물이 빠지면 모래바닥이 드러나면서 하나의 섬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썰물 때면 길이 생기고, 밀물이 들어오면 바닷물로 뒤덮여 사라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왼편에 보이는 진월교는 오작교(烏鵲橋)이다. 서로를 그리워하던 두 섬이 저 다리를 통해 하나가 됐으니 말이다.



마을 앞을 지나자 잘 만들어진 선착장과 물양장이 나온다. 진월교를 건넌지 50분 만인데, 블랙야크에서 인증장소로 삼는 마을 표지석은 이곳에 세워져 있다. ‘새우의 고장, 하낙월도’. 역시 새우를 내세우고 있다. 그만큼 세우와 인연이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하긴 지금은 비록 퇴락했지만 새우잡이가 전성기를 이루던 시절에는 영광 법성포와 맞먹는 새우젓 상권이 형성되기도 했단다. 어렵던 그 시절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푸른 꿈을 안고 전국 각지에서 청년들이 몰려들어 이 작은 섬이 흥청거렸던 적도 있었단다. 참고로 새우는 잡는 즉시 적당량의 소금과 버무려야 한다. 이때 굵은 소금은 절대 사용해서는 안 되며 가늘고 쉽게 부서지는 소금이어야 한다. 소금 중 최고의 품질은 5월의 봄볕과 바람이 만들어낸 소금이다. 여기에 6월에 잡힌 살이 통통한 새우를 버무린 육젓은 맛과 향 그리고 때깔마저 좋아서 최고의 대접을 받는다.



이젠 상낙월도로 돌아갈 차례이다. 이곳에서도 같은 배를 탈 수 있지만 둘레길 탐방 대신 낚시를 선택했던 권사장님이 갑오징어를 잡아놓았다고 연락을 해왔기 때문이다. 쫄깃쫄깃한 식감의 횟감을 앞에 놓고 반주를 기울일 수 있는데 내 어찌 잠깐의 발품을 마다할 수 있겠는가. 아무튼 진월교를 건너 상낙월도에 들어서자 섬에서는 찾기 힘든 골프연습장이 눈에 띈다. 연습장의 뒤편 언덕 위에도 독특한 외형의 건물이 들어서 있었으나 용도를 확인해 보지는 않았다.



잠시 후 일반 파출소가 보이는가 싶더니 초등학교, 이어서 면사무소와 보건소가 줄을 잇는다. 이곳 낙월도가 면소재지라는 증거일 것이다. 하지만 낙월면에서 가장 큰 섬은 안마도이고 다음이 송이도이다. 낙월도는 세 번째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이곳 낙월도는 예로부터 중심 섬으로 어미섬 역할을 톡톡히 해 왔다고 한다. 섬이 크고 인구가 많다고 면소재지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위치가 어디냐에 따라서 결정된다. 낙월도가 다른 섬을 제치고 면소재지가 된 것은 육지와 가까울 뿐만 아니라 생활권이 목포였다는 것이 원인이었지 싶다. 그렇지 않다면 주민이 234명에 불과한 작은 섬이 어떻게 면소재지가 되었겠는가.



낙월초등학교는 규모가 제법 큰 편이다. 1931년 낙월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하였으며 1950년에 낙월국민학교로 개칭하였다. 1981년에 병설유치원을 개원하였으며 1991년에 낙월서국민학교를 통합하여 현재에 이른다. 초등학교 안에는 작은 도서관도 만들어져 있다고 한다. 기존의 교실을 리모델링한 탓에 규모가 40평도 채 되지 않지만 도서보관실과 공부방 외에도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영화감상실과 부모와 함께 독서할 수 있는 모자방까지 들어서 있단다. 도서 3,400여 권과 DVD 250장을 소장하고 있다니 작은 섬에 있는 멋진 문화공간이라 하겠다.



배가 도착할 때까지의 자투리시간을 이용해 마을을 둘러보기로 한다. 꼼꼼하게 살펴본다고 해도 10분이 채 걸리지 않기 때문이다. 골목으로 들어서자 빈집이 여럿 보인다. 사람이 살고 있는 집도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찾아온 날이 마침 휴일이었던 점을 감안하더라도 너무 한적하다는 느낌이다. 아니 점점 공도화(空島化)되어가고 있다는 요즘의 현실일지도 모르겠다. 문득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라는 시구(詩句)가 생각난다. 새우잡이가 한창이던 1980년대만 해도 낙월도의 유동인구가 1,000여 명이 훨씬 넘었다니 어찌 그런 생각이 나지 않겠는가. 새우잡이배를 타는 사람만 해도 400~500명은 족히 되었다니 얼마나 붐볐겠는가. 그런데도 지금은 민가보다도 공공건물의 숫자가 더 많아 보이는 것이다.



어른 주먹보다 약간 더 큰 돌로 지어진 집도 보인다. 매끈하게 생긴 것이 아까 몽돌해안에서 보았던 그 돌들이지 싶다. 그중 검은 색의 돌들은 묵석(墨石)일 것이고 말이다. 그러고 보니 아까 하낙월도에서는 수석으로 꾸민 꽃밭도 보았었다. 이곳 낙월도가 수석으로 인기가 높은 묵석의 산지로 유명하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나 보다. 그렇게 귀한 돌들을 건축자제로 사용하고 있을 정도라면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돌의 반출이 금지되어 탐석(探石)이 소용없게 되었단다. 수석 애호가들은 아쉽겠지만 모든 자연은 있던 그 자리에 있는 게 순리가 아니겠는가. 참고로 낙월도는 전국에서 이름난 묵석의 산지로 알려진다. 석질이 다이아몬드 다음으로 강해서 묵석 애호가들의 사랑을 많이 받는데 수석 붐이 일었던 1970년대 초반에는 수집가들로 붐비기도 했단다. 수천 년 동안 파도에 시달린 검은 돌들이 무수히 널려 있었는데 그걸 줍겠다고 전국에서 하루에도 수백 명이 몰려왔다는 것이다.



다시 돌아온 향화도항은 영광 천일염·젓갈 갯벌축제가 한창이다. 초대가수의 노랫가락에 맞춰 어깨까지 들썩거리는 사람들도 꽤 보인다. 흥겨운 축제분위기에 한껏 취해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하지만 다른 곳은 조금 썰렁한 느낌이다. ’영광9(靈光九景)의 하나인 칠산타워에서 영광9(靈光九味)의 하나인 젓갈영광9(靈光九品)‘의 하나인 천일염을 내세운 축제인데도 파는 매장은 고작 한 곳씩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축제의 마지막 날이라서 다른 매장들은 이미 철수했는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영광군은 볼거리인 ’9(九景 : 백수해안도로·4대 종교문화유적지· 불갑사·칠산타워·가마미해수욕장·불갑저수지 수변공원·숲쟁이꽃동산·송이도 몽돌해수욕장·천일염전) 외에도 먹을거리인 9(九味 : 굴비한정식·간장게장·황금보리돼지·보리새우·덕자찜·황토갯벌장어·청보리한우·보리떡(백합)와 살거리인 9(九品 : 영광굴비·모싯잎송편·천일염·대마할머니막걸리·간척지쌀·태청딸기·태양초고추·찰보리쌀·설도젓갈)을 함께 선정해 놓고 있다. 경관 좋은 곳에서 놀면서 맛있는 음식도 사먹고, 돌아갈 때는 특산품들을 사가라는 의미일 것이다.



에필로그(epilogue), 이왕에 낙월도에 왔으니 이곳의 명물인 새우에 대해 한걸음 더 나아가 보자. 낙월도를 대표하는 3가지를 고른다면 새우젓과 멍텅구리배인 중선(重船:큰 배) 그리고 묵석(수석)이다. 투박한 전통적인 한선을 개량한 배로 10~17톤에 이르는 무동력선을 멍텅구리배라고 한다. 나무로 만들었는데 돛이나 노는 물론 엔진도 없어 스스로는 움직이지 못한다. 그래서 동력선이 바다 한가운데까지 견인해 가면 그곳에 닻을 내리고 새우잡이를 했다. 멍텅구리배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이다. 당시 낙월도의 인근 바다에서 나는 대표적인 어종은 새우였다. 잡아 올린 새우를 염장한 것이 젓갈인데 5월의 오젓과 6월의 육젓은 뒷맛이 개운하고 담백하며 소화를 돕고 장을 튼튼하게 해 준단다. 동절기에 잡은 새우로 만든 동젓은 임금님께 올리는 진상품이기도 했단다. 동새우로 김치를 담그면 발효가 잘 되고 그 맛이 개운하며 감칠맛이 더해진다고 해서 최근에는 동젓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참고로 서해안의 새우잡이 배인 멍텅구리배는 이미 수백 년 전부터 만들어져서 사용되었다 한다. 예전에는 전라도에서는 중선’(重船: 큰배) 또는 젓중선’, 충청도에서는 실치잡이배’, 경기도에서는 곳배’, ‘젓배(醯船: 젓을 담그는 배)’라고 불렀단다.

대청도(大靑島)

 

여행일 : ‘19. 8. 30()

소재지 : 인천광역시 옹진군 대청면

코 스 : 선진포선착장매바위전망대모래울(기린소나무)서풍받이 트레킹해넘이전망대옥죽동 모래사막농여해변선진포선착장(버스 투어)

 

함께한 산악회 : 좋은사람들

 

특징 : 인천항에서 북서쪽으로 약 171, 옹진반도에서 남서쪽으로 약 40거리에 있으며 백령도(白翎島소청도(小靑島)와 함께 군사분계선에 근접해 있는 국가안보상 전략적 요충지이다. 대청도는 이웃인 백령도와는 완연히 다른 모습이다. 두루뭉술한 분지모양으로 생긴 백령도와는 달리 우람한 남성미를 자랑하는 산들로 이루어져 있다. 때문에 농업이 주축인 백령도와는 달리 어업이 성행하고 있다. 그런 지리적 여건 덕분에 자연을 앞세운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는데 서풍받이농여해변신이 내린 낙원이란 평을 들을 정도로 빼어난 경관들이 많다. 참고로 옛 문헌에 의하면 원래의 이름은 포을도(包乙島)였다고 한다. '푸른 섬'의 우리 음을 한자로 기록한 것이란다. 이를 다시 한자화한 것이 청도(靑島)이다. 또 대청도를 암도(岩島)라고 불렀다고도 하는데 이는 대청도의 섬 주위가 모두 암벽이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으로 추정된다. 아름다운 이름과는 달리 고려 말 대청도는 유배지였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고려 말 김방경 장군이 1278년 왕과 공주 제거 모반의 무고로 이곳으로 유배를 왔고, 고려 출신 기황후를 아내로 맞아 유명한 원나라의 황제 순제(順帝)도 대청도로 유배를 왔었다.


 

찾아오는 방법 : 백령도와 같다. 백령도로 들어가는 길에 들르는 중간기착지이기 때문이다. 에이치해운의 하모니플라워호(07:50 출발)와 고려고속훼리() 소속의 코리아킹호(08:30 출발)와 웅진훼미리호(13:00 출발) 등 하루 3척이 왕복 운항하고 있다. 백령도를 출항지로 삼은 우리는 용기포항에서 730분에서 출발하는 웅진훼미리호를 이용했다. 배를 탄지 30분쯤 지나면 대청도에 이른다. 선진포 선착장에 내리면 아담한 포구에 수많은 어선들이 출어를 기다리고 있다. 옛날이야기이지만 한때 이곳 대청도는 서해 고래잡이의 전진 기지였다고 한다. 1918년 일본은 동양포경주식회사의 포경기지를 이곳에 설치하고 1920년부터 30년 초까지 우리나라 고래잡이의 중심지로 삼았다. 고래잡이를 하는 11~4월에는 130여 명의 일본인 상인이 들어오고 그때 게이샤까지 같이 들어오면서 5가구에 불과하던 선진항은 대청도의 중심지가 되었단다. 1945년 광복 이후 포경업은 막을 내렸지만 선진동에는 아직도 포경회사의 터가 남아있단다. 대청도 근해에서 잡히는 어종도 세월이 흘러가면서 변해왔다. 일제강점기에는 고래잡이가 성행했고, 1950~60년대는 조기와 까나리잡이, 1970~80년대는 홍어잡이, 1990년대부터는 우럭과 볼락 등이 주 어종이라고 한다.




선착장 근처의 등대로 가면 건너편에 있는 탑동해안산책로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해안가 바위벼랑에 걸쳐놓은 데크로드(deck road)검은낭산책로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곱다. 하지만 보수중이라서 직접 가볼 수는 없단다. 일부 구간은 험한 벼랑에 선반처럼 달아낸 잔도(棧道)로 되어있어 그야말로 스릴 만점일 텐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참고로 답동이란 식량이 매우 귀하던 시기에 논이 몇 마지기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저 아래 해변에는 길이가 1km 정도의 완만한 해안이 있어 해수욕장으로 이용된단다.




이곳 대청도의 투어도 역시 버스로 진행된다. 다만 버스의 크기가 조금 작아졌을 따름이다. 도로의 폭이 좁기 때문이라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선진포에서 출발하는 일주도로는 어느 방향으로 가든지 상관없지만 우리는 오른쪽 방향으로 시작했다. 그리곤 첫 번째 방문지로 사탄고개에 위치한 매바위 전망대를 택했다. 이곳이 블랙야크가 정해놓은 대청도의 인증 장소인 삼각산(343m)정상표지석에서 가장 가까운 들머리이기 때문이다. 들머리에 세워진 이정표(삼각산 정상 1.37/ 선진포선착장 5/ 광난두정자각 2.62)는 삼각산 정상까지의 거리를 1.37로 적고 있다. 지척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산악회의 인솔자는 삼각산 등산과 서풍받이 트레킹 중 하나만 선택하란다. 잘못하면 나머지 투어일정을 진행할 수 없다면서 말이다. 시간이 넉넉하다는 가이드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초지일관 밀어붙이니 어쩌겠는가. 블랙야크의 인증사진과 관계없는 우리 부부는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서풍받이 트레킹을 선택했다.



전망대에는 매의 조형물을 커다랗게 세워놓았다. 대청도는 황해도 장산곶에서 대청도를 오가던 매를 채집해 매사냥을 했던 곳으로 유례가 깊다. 중국에서 서해를 횡단하여 날아온 매가 처음으로 찾은 곳이 대청도라서 가을만 되면 이 매를 잡으려는 사냥꾼들이 많이 왔다고 한다. 이 매를 해동청(海東靑 : 사냥용 매를 부르는 말, 매의 옛 이름)이라 부르는데 이런 사실들을 알리기 위해 옹진군에서 세운 것이란다. 최근 조형물이 매가 아니라 독수리라는 논란이 있었으나 우리처럼 문외한들의 눈에는 그게 그거로 보이니 문제될 것은 없겠다. 참고로 이곳 대청도는 고려시대부터 해동청을 기르고 훈련해 사냥했다는 기록이 전해오고 있다. 남북을 오갔던 해동청은 소설가 황석영이 1974년부터 연재한 소설 '장길산'의 첫 대목에 등장하는 장산곶 매로도 알려져 있다.



매바위전망대는 해안가를 향해 날개를 펼치고 누워있는 매 형상의 바위인 수리봉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아름답기로 소문난 사탄동 해안도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다.



고갯마루의 ‘V’자 형 절개지 상부에는 러브 브릿지라는 보행자 전용의 다리가 놓여있다. 길을 내느라 끊어놓은 능선을 다시 이어놓은 셈이다. 누군가는 저 다리를 일러 다목적용이라 했다. 낮에는 산책로로 이용되지만 밤이 되면 내동소재 마을의 야경을 즐기는 곳으로 용도를 바꾼다면서 말이다. 이왕에 시작했으니 삼각산(三角山)’의 내력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자. 삼각산이란 천자나 왕의 도읍에만 사용할 수 있는 지명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곳에 천자나 왕이 있었다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그렇다. 이곳 대청도는 원나라의 순제가 태자시절 귀양(流配)왔던 곳이란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대청도에는 고궁 3, 뒤 칸 1칸과 담의 옛터가 있다고 적혀있는 것이 그 증거라 하겠다. 현재의 대청초등학교 자리가 거택기(居宅基)’라 불리는 궁궐터로 추정된단다. ‘택리지에도 비슷한 내용의 글이 적혀 있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두 번째 방문지는 모래울 해안이다. 원래 이름은 사탄동(沙灘洞)’. 우리말로는 모래여울이란다. 모래가 바람에 실려 아름다운 곡선을 이루는 여울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그런데도 마을표지석은 모래울로 적고 있다. ‘사탄이란 단어가 여행자들에게 좋지 않은 어감을 준다는 것을 눈치라도 챘나보다. 특히 기독교인들에게 말이다. 기독교인들에게 사탄(satan)은 최대의 적대적 이름이지 않겠는가.



모래울해안을 둘러보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해변 뒤쪽의 소나무 숲모래울해변인데 어느 곳을 먼저 들를지를 놓고 고민할 필요는 없다. 탐방로의 끄트머리에서 둘이 서로 만나기 때문이다. 우리 부부는 소나무 숲을 먼저 찾았다. 산자락으로 들어서자 사방에 적송(赤松)이 가득하다. 그런데 하나같이 백년은 훌쩍 넘겼음직한 낙락장송 일색이다. 한그루에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소나무 수백 그루가 해변을 내려다보고 있는 셈이다.



사람들은 이곳의 소나무들을 일러 기린송(麒麟松)’이라 한다. 이곳으로 유배 온 원나라의 순제가 이곳을 거닐던 중 기린송이구나라고 했다는 설화를 덧붙이면서 말이다. 기린은 사슴 형상에 뿔이 있고 전신이 비늘로 덮여 있는 상상의 동물이다. 예로부터 중국에서는 기린의 비늘과 같은 소나무를 기린송이라 불렀고, 기린송이 아들을 가져다준다고 믿었단다. 그렇다면 역사적 사실을 향해 한걸음 더 나가 보자. 1324년 원나라 명종의 태자 도우첩목아(陶于帖木兒)가 계모의 모함으로 대청도에 유배를 왔다가 이듬해 되돌아가 황제(원 순제 1320~1370)가 되었다. 그 흔적은 옥죽포(玉竹浦)와 고주동(庫柱洞) 등의 지명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옥죽포(玉竹浦)는 태자가 들어 온 포구라 하여 태자를 의미하는 옥자(玉子)를 써서 예전에는 옥자포(玉子浦)라 했다. 또한 지금의 고주동은 태자가 창고를 지어 곡식을 쌓아 두었던 곳이란다. 참고로 순제는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로 부인이 고려 출신의 기황후이다. MBC TV 드라마 <기황후>는 총 51부작으로 2013년 방송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 기황후로 배우 하지원, 원 순제의 역에 배우 지창욱이 열연했는데, 드라마의 인기와 함께 드라마의 배경이 된 대청도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고 한다.



데크계단을 내려오면 모래울해안이다. 바람에 날려 온 고운 모래가 아름다운 곡선을 이루고 있는데 그 길이가 무려 1km나 된단다. 모래사장의 주변은 수백 그루의 적송과 기암절벽이 함께 어우러지며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그런데도 해변은 텅 비어있다. 성수기가 아닌데다 평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문득 바다에 풍덩 빠져 수영을 하고 싶다는 유혹에 빠져든다. 하지만 금물이란다. 인근의 다른 해수욕장들과는 달리 파도가 심해서 인명 사고가 몇 번 있었고, 그래서 지금은 해수욕을 통제하고 있단다.



바다에는 사람의 얼굴을 닮았다는 대갑죽도가 돛단배처럼 두둥실 떠있다. 예로부터 대청도 어민들의 무사귀환을 기원하던 섬이다.



모래사장 뒤편 언덕에 올라가보니 대청부채(Iris dichotoma)’에 대한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이곳 대청도에서 최초로 발견된 붓꽃속 식물인데 무분별한 채집으로 인해 지금은 멸종위기 야생식물 2급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단다. 그래선지 이곳 어딘가에서 해당 식물이 자란다면서도 애써 찾지는 말라는 충고까지 해주고 있다. ! 이 부근에는 천연기념물 제66호인 동백나무 자생지도 있다고 했는데 직접 확인해보지는 못했다. 우리나라에서 동백나무가 자랄 수 있는 최북단이라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는가. 이곳에 그런 자생림이 있는 줄도 모르고 찾아온 내가 그걸 본다는 것 자체가 언감생심이 아니겠는가.



아까 매바위 전망대에서 얘기했던 대로 매의 형상으로 생겼다는 산세, 이 매의 목 위로 도로가 나 있는데 고갯마루에 광난두 정자각이 지어져 있다. 삼각산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서풍받이로 들어가기 전 잠시 휴식을 취하라며 지어놓은 정자가 아닐까 싶다. 주변의 뛰어난 풍광도 감상하면서 말이다. 이 정자에 오르면 멀리 독바위해변과 사탄해변 그리고 북쪽에 떠있는 갑죽도가 눈에 들어온다. 이곳은 낙조(落照) 포인트로도 유명하다. 정자에 앉아 바라보는 낙조는 가히 한 폭의 그림이란다. ‘광난두정자각서풍받이트레킹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이 정자각을 기점으로 서풍받이 부근을 한 바퀴 돌고 다시 돌아오게 된다.



이정표(광난두해변 1.0/ 고주동 2.7/ 모래울동 1.2)가 가리키는 광난두해변 방향으로 내려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3가 조금 못되는 서풍받이 산책로는 난이도가 낮은 것으로 알려진다. 트레킹화도 제대로 신지 않은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자주 눈에 띄는 것이 그 증거라 하겠다. 아무튼 밋밋한 산길을 따라 10분쯤 걷자 삼거리(이정표 : 마당바위1,230m/ 기름아가리/ 광난두정자각430m)가 나온다. 기름아가리로 내려가는 길이 왼편으로 나뉘는 곳이나 개의치 않고 직진한다.



10분쯤 더 걷자 이번에는 하늘전망대가 나온다. 안내판에는 해와 달, , 그리고 하늘의 기운을 받아 마음가짐을 새롭게 할 수 있는 천혜의 비경을 담아갈 수 있는 곳이라고 적혀있다. 이곳이야말로 신선들의 휴식처라는 부언까지 달아놓았다. 주변경관이 그만큼 빼어나다는 얘기일 것이다. 안내판의 호언은 과히 틀리지 않았다. 발아래에 있는 갑죽도는 물론이고 그 뒤로는 모래울과 지두리 방향의 해안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서슬 시퍼런 바위절벽으로 솟아올라 거센 파도와 해풍을 막아내고 있으니 또 다른 서풍받이라 하겠다.




능선에는 하얗게 몸뚱이를 드러낸 소사나무가 유난히도 많았다. 거대한 바위로도 막기 힘든 서풍을 가느다란 몸과 가지로 막으며 거칠고 억세게 자란 흔적이 아닐까 싶다. 뻗어나간 각도와 모양새가 예측불허로 자유분방한 소사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선 숲 저편으로 푸른 바다가 자잘하게 미분되고 있다.



밧줄난간에 의지해 봉우리 하나를 더 오르자 다른 전망대가 나타난다. 이름표가 붙어있지 않은 전망대이다. 대신 대갑죽도(大竹島)’에 대한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수면 위로 얼굴 모양의 대갑죽도가 보인다는 것이다. 예로부터 이곳 대청도 어민들이 하늘을 향해 무사귀환을 빌던 섬이라는 부언도 빼놓지 않았다.



발아래 보이는 바다 위에는 사람의 얼굴 형상을 하고 있다는 대갑죽도가 흡사 돛단배처럼 두둥실 떠있다. 예로부터 대청도의 어민들이 무사귀환을 기원하며 빌던 섬으로 이곳 대청도 주민들에게는 매우 소중한 섬이란다.



하지만 내 눈에는 왼편에 보이는 바위절벽이 더 얼굴을 닮았다. 바위 거인이 대갑죽도를 바라보며 활짝 웃는 형상이다.



조금 더 걷자 서풍받이 트레킹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조각바위 언덕(이정표 : 마당바위610m/ 갈대원280m/ 광난두정자각1,050m)’이 나온다. 데크로 만든 예쁘장한 전망대에 올라 주변을 돌아본다. 왼쪽은 줄잡아 100m도 넘어 뵈는 거대한 바위 병풍이고, 오른쪽은 하늘에 쐐기 박듯 치솟은 상어주둥이 형상의 암봉이다. 그런 해안절벽의 가운데서 장대(將臺)처럼 불쑥 튀어나온 기막힌 조망대에 우리가 올라선 것이다. 아무튼 발아래로는 광막한 바다; 그리고 좌우로는 기암괴벽이 펼쳐지는데 이런 풍경에 시선과 마음이 묶이면 누구라도 오래도록 머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수천 년 동안 대륙으로부터 몰아쳐오는 북서풍의 강한 바람과 그 바람이 일으킨 파도들이 거대한 절벽을 조각을 해서 저런 절경이 탄생했을 것이다.




해안이 온통 깎아지른 듯한 수직의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곤 먼 바다에서 불어오는 거센 파도와 바람을 온몸으로 막아내고 있다. 맞다 서풍받이가 본디 중국에서 서해로 거쳐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막아주는 바위라는 뜻에서 붙여진 지명이라니 이름에 걸맞는 풍경이 아니겠는가. ! 누군가는 서풍받이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일몰(日沒)’이라고 했다. 붉은빛이 거대한 바위에 닿으면 바위의 색 또한 오묘한 붉은 기운을 낸단다. 죽기 전에 한 번은 꼭 봐야 할 절경이라고까지 극찬했는데 오후 배로 대청도를 떠나야 하는 우리에겐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서풍받이는 웅장하다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눈앞에 펼쳐지는 해안절벽들은 어느 것 하나 평범한 것이 없다. 거센 바람과 파도가 억겁의 세월 동안 저 해안절벽들을 신묘하게 조각해 놓은 것이다. 자연이란 얼마나 훌륭한 조각가인가. 혹자는 끌로 새겨놓은 듯한 조각들이 이어진 조각바위와 뾰족하게 솟아오른 서풍받이를 일러 삼서트레일(해발 343의 삼각산 등반과 서풍받이 트레킹을 줄인 말이다)’의 백미(白眉)라 했었는데 내 생각도 같다.



왼편으로도 시야가 열린다. 갈대원(광난두해안)으로 이어지는 완만한 경사의 평지가 눈앞에 펼쳐진다. 그 뒤는 독바위해변이 떠받히는데 그쪽도 역시 서슬 시퍼런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풍받이 산책로는 아기자기하다. 길이 썩 넓지는 않으나 걷는 데는 불편함이 없다. 다만 바닥에 크고 작은 돌들이 많이 밟혀 속도를 내기는 힘들다. 나름 바윗길이라 부를 만한 곳도 나온다. 아무나 다닐 수 있다는 소문만 믿고 방심할 일은 아니라는 얘기이다. 그래선지 여러 곳에 벤치를 놓아두었다. 쉬엄쉬엄 걸어보라는 얘기일 것이다.



서풍받이에서 다시 한 번 오름짓을 하자 또 다른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다. 그런데 하늘전망대라는 적은 안내판이 보는 이들을 헷갈리게 만든다. 같은 코스에 같은 이름의 전망대를 하나 더 만들어 놓았으니 어찌 헷갈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무튼 장대(將臺)처럼 튀어나온 전망대에 서자 대륙에서부터 몰아쳐온 북서풍에 갑자기 숨이 턱 막힌다. 이렇게 센 바람이 큰 파도를 일으키며 오랜 세월 절벽을 조탁하지 않았다면 저와 같은 절경이 어떻게 탄생할 수 있었겠는가.



전망대에서의 조망은 일품이다. 좌우로 펼쳐지는 천애절벽은 물론이고 바다 건너 지두리쪽 해안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특히 삼각산에서 뻗어내려 온 능선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게 펼쳐진다. 누군가는 삼각산과 서풍받이를 잇는 삼서 트레일3대 조망처 가운데 하나로 서풍받이전망대를 꼽았었다.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이곳이 더 뛰어나지 않을까 싶다. ! 나머지 두 조망처는 삼각산 정상 근처 ‘330m과 남서쪽 꼬리의 갯바위지대인 마당바위라고 한다.



이후부터는 길이 조금 험해진다. 제법 굵은 바위들이 바닥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런 길을 얼마쯤 걸었을까 삼거리(이정표 : 마당바위/ 갈대원360m/ 조각바위350m)가 나온다. 마당바위에 거리표시가 없는 걸 보면 다 왔다는 얘기일 것이다. ‘마당바위라는 표지판과 마당바위에 대한 안내판까지 세워놓은 것도 이를 뒷받침할만한 증거라 하겠다. 하지만 앞으로도 100m 가까이를 더 내려가서야 마당바위를 만날 수 있었다. 시퍼런 바다를 앞에 두고 있는 마당바위는 완만한 경사를 이룬 거대한 바위다. 얼핏 운동장을 연상시킬 정도로 넓기까지 했다. 참고로 트레킹을 시작한 광난두정자각에서 이곳까지 오는 데는 한 시간 정도가 걸렸다. 이정표에 적힌 거리가 1,660m였던 점을 감한하면 꽤나 더디게 걸은 셈이다. 절경으로 소문난 주변 경관에 자주 눈길을 맞춘 것이 그 원인이 아니었을까 싶다.




마당바위의 끝은 아찔한 낭떠러지다. 난간으로 다가가자 푸른 바다가 한눈에 펼쳐지며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준다. 그 바다 건너에는 이곳 대청도의 아우 격인 소청도가 자리하고 있다. 대청도의 4분의 1크기인데 1908년에 설치되었다는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등대로 유명하다. 또한 소청도에서는 천연기념물 제508호인 분바위도 만날 수 있다. 분바위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박테리아 화석으로 알려져 있다.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갈대원으로 향한다. 길은 산등성이가 아닌 사면(斜面)으로 나있다. 그렇다고 길이 험하지는 않다. 오르내림이 거의 없으니 오히려 걷기 편하다고 보면 되겠다. 그렇게 15분 정도를 걷자 광난두해안(이정표 : 광난두정자가750m/ 조각바위280m/ 마당바위430m)’이 나온다. 잔자갈이 깔려있는 몽돌해안인데 안내판은 갈대원이라고 적고 있다. 마당바위에 세워진 이정표도 이곳을 광난두 대신 갈대원이라 적고 있었다. 해안가가 갈대밭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 요 아래 해안가에 귀순자를 위한 전화가 설치돼 있다는데 직접 확인해보지는 못했다.



이 부근은 갯바위 낚시를 즐기는 이들에게도 인기가 높다고 한다. 출렁이는 푸른 파도를 벗 삼아 서해의 정취를 물씬 느낄 수 있는 곳이란다. 청정해역에서 갓 잡아 올린 물고기의 참맛은 덤이라 하겠다. 이후부터는 오르막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끄트머리에 아까 트레킹을 시작했던 광난두 정자각이 있다. 1시간 30분 정도의 서풍받이 트레킹이 종료된 것이다.



다음은 해넘이 전망대이다. 모래울에서 선진포로 넘어가는 길에 만나게 되는데, 독바위와 서풍받이의 사이 반도처럼 톡 튀어나온 지점의 바위절벽 위에 걸치듯 만들어놓았다.



그런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이곳에서의 조망은 가히 일품이다. 왼편에 보이는 삼각형의 바위절벽은 독바위. 홀로 외롭게 서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저 바위는 저녁노을의 풍경속으로 들어가 소품이 될 때 더욱 멋진 풍광이 연출된단다. 전망대의 이름을 해넘이로 붙여놓은 이유가 아닐까 싶다.



오른편으로는 광난두 해변이 펼쳐진다. 광난두해변의 끄트머리에 있는 송곳니처럼 솟은 바위는 기름아가리라고 한다. ‘아가리라는 게 본디 병·그릇·자루 따위의 구멍의 어귀를 이르는 말일지니 기름항아리의 주둥이정도로 여기면 되겠다.



이번엔 옥죽동에 있는 모래사막으로 갈 차례이다. 몇 개의 고개를 넘자 양지동 들판이 펼쳐지고, 내리막으로 내려와 우측으로 가면 적송보호림이 있다. 그 옆에는 널따란 모래언덕(砂丘)이 펼쳐져 있다. 산등성이에 분포되어 있는 모래언덕은 길이 1.5km에 폭이 600m라고 한다. 꽤 넓은 편이다. 그래서 모래사막이라는 단어를 서슴없이 사용하고 있는 모양이다. 입구에 세워놓은 안내판은 아예 한국의 사하라사막이라며 너스레까지 떨고 있다. 그나저나 이 모래는 신안군 우이도의 모래 언덕과 비슷한 이치라고 한다. 서해의 거대한 겨울 파도가 물밀듯이 옥죽동 해변으로 밀려오면서 모래들이 오랜 세월동안 해변과 산자락에 날려서 쌓인 것이 지금의 모래밭으로 변한 것이란다.



우리나라에도 과연 낙타가 있을까? 그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중동의 사막이라고 착각할만한 풍경을 이곳에서 만났으니 말이다. 모래언덕의 중간어림에 네 마리의 낙타 모조품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사막의 정취를 살리려 했던 모양인데 좀 생뚱맞아 보이지만 낙타의 등에라도 올라보면 중동의 어느 사막에 와 있는 기분을 낼 수 있으니 좋은 아이템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실제 살아있는 낙타를 가져다 놓고 낙타투어를 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고 말이다.



해발이 40m라는 모래언덕에 올라서면 옥죽동해안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대청도에는 크게 5개의 큰 해안이 있는데 동쪽으로 지두리 해안과 농여해안이 있고, 서쪽으로 답동해안, 남쪽으로 모래울해안이 있다. 옥죽동 해안은 북쪽에 위치하는데 이 모래언덕은 저 해안에서 밀려온 모래들이 오랫동안 쌓이면서 만들어놓은 결과물이다. 그런데 모래언덕과 옥죽동해안 사이에 소나무 숲이 경계선처럼 들어서있다. 방풍림이라는데 가이드의 말로는 저 숲으로 인해 모래밭이 점점 줄어들고 있단다. 모래가 바람에 날리면서 배수로를 막고 경작지인 밭까지 덮어버린 것이 조성의 원인이었는데, 최근 자연적인 현상을 그대로 두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다시 소나무를 베어버리고 모래사막을 더 조성키로 했단다.



맨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농여해안이다. 이곳 대청도에는 옥죽포와 농여, 사탄동, 탑동 등 해수욕장이 여럿 있는데, 그중에서도 농여 해수욕장의 규모가 가장 크다. 단단하기로 유명한 백령도의 사곶해변과 마주보는 지리적 요인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곳 농여해안의 모래사장도 역시 단단하기 짝이 없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데도 발자국 하나 남지 않을 정도다. 이곳도 역시 규암에서 비롯된 매우 가는 모래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오른편으로는 널따란 모래사장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물이 빠질 때만 나타나는 현상으로 사람들은 저곳을 풀등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걸어서 들어갈 수 있는 풀등으로는 국내에서 유일하단다. 풀등은 모래가 쌓인 곳에 풀이 수북하게 난 곳을 말한다. 대이작도 풀등이 가장 대표적이지만 그곳은 배를 타야만 갈 수 있다.



단단한 모래밭을 얼마간 걷자 농여해변의 또 다른 매력인 나이테바위가 나온다. ‘나이테란 나무줄기나 가지의 가로 단면에 나타나는 둥근 모양의 테로서 1년 마다 하나씩 생기므로 이 테를 보고 그 나무의 나이를 알 수 있다. 그런데 눈앞에 나타난 바위가 마치 버텨온 오랜 세월을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이 나이테의 문양을 쏙 빼다 닮은 것이다. 대청도의 지질은 국내 최고(最古)10억년의 역사를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 나이테바위를 비롯한 주변 바위들의 나이도 그와 비슷할 것이다. 이곳 농여해변이 올 7국가지질공원(家地質公園, National Geoparks of Korea)’으로 지정된 이유가 아닐까 싶다. 지구과학적으로 중요하고 경관이 우수한 지역으로서 이를 보전하고 교육, 관광 사업에 활용하기 위하여 환경부장관이 인증한 곳이 국가지질공원인데 우리나라는 2011년부터 이 제도가 도입되었다. 그리고 제주에서 접경지역인 DMZ까지 전국에 걸쳐 10곳의 국가지질공원이 있다. 이번 지정에는 대청도(옥죽동 해안사구·미아해변·서풍받이·검은낭)와 소청도(분바위·월띠), 백령도(두무진과 진촌리의 현무암·사곶해변·콩돌해안·용틀임바위)의 다른 명소들도 포함되어 있다.




농여해안은 썰물 때면 미아해안과 연결된다. 둘 모두 곱디고운 모래사장이 넓고 길게 펼쳐져 있는 해변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해안가에 널려있는 기암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더 쏠쏠하다. 어느 것 하나도 같은 모양이 없는데 대부분의 바위들이 예쁜 물결무늬를 하고 있는데다 또 어떤 것은 구멍까지 뚫려있어 포토죤 역할을 톡톡히 해준다. 대청도 사람들은 1.2km 정도의 이 구간에다 농여트레일이라는 이름을 붙여놓았다.



우리가 늘 보아오던 바위들과는 그 생김새부터가 확연히 틀리다. 보통의 지층은 가로로 펼쳐져 있는데, 농여해안의 바위들 대부분은 세로로 서 있다. 퇴적층이 강한 지층 운동을 하다가 세로로 서버리는 바람에 이런 모습을 하게 된 것이란다. 아무튼 모래밭에 널려 있는 크고 작은 나이테 바위들의 모습은 어느 하나 독특하지 않은 것이 없다. 마치 조물주가 만든 조각공원으로 알려진 대만의 예류 지질공원에 와있는 듯하다.





책을 읽다보면 숨이 막힐 듯한 아름다움이라는 표현을 가끔 볼 수 있다. 이곳 농여해안은 그러한 표현을 헌정(獻呈) 받아도 충분할 듯 싶다. 그만큼 이곳의 경관(景觀)이 빼어나기 때문이다. 트레킹에 나선 사람들은 해안의 비경(秘境)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 자기도 모르게 내지르는 감탄사(感歎詞)의 횟수만큼이나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는 손길도 바빠진다.



백령도(白翎島)

 

여행일 : ‘19. 8. 29()

소재지 : 인천광역시 옹진군 백령면

산행코스 : 용기포항사곶해수욕장백령호콩돌해안용트림바위천년송중화동교회몽운사사자바위심청각두무진(버스 투어)

 

함께한 산악회 : 좋은사람들

 

특징 : 인천에서 북서쪽으로 191km 가량 떨어진 서해 최북단의 섬으로 북한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다. 북한 땅인 황해도 장산곶과 고작해야 13거리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비록 경기도(옹진군)이지만 광복 전까지만 해도 황해도의 장연군(長淵郡)에 속해있었던 이유이다. 위치가 위치인지라 섬의 인구 분포는 주민 반, 군인 반이다. 그렇다고 삭막한 분위기는 아니다. 백령도의 자연이 품고 있는 절경 때문이다. ‘서해의 해금강이라 불리는 두무진을 비롯해 효녀 심청의 이야기가 깃든 심청각, 작고 둥근 자갈이 깔린 콩돌해변, 천연비행장이라는 사곶해수욕장 등 보석 같은 풍광들이 여행자를 맞이한다. 참고로 백령도의 원래의 이름은 곡도(鵠島)였다고 한다. ‘()’이 고니(白鳥)나 따오기를 가리키는 한자말이니 백조가 많다는데서 유래된 이름이 아닐까 싶다. 그러다가 섬의 지형이 따오기가 흰 날개를 펼치고 공중을 나는 모습처럼 생겼다 해서 백령도(白翎島)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었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찾아오는 방법 : 백령도로 들어가려면 일단은 인천연안여객터미널까지 와야만 한다. 백령도로 들어가는 쾌속선이 이곳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배는 에이치해운의 하모니플라워호(07:50 출발)와 고려고속훼리() 소속의 코리아킹호(08:30 출발)와 웅진훼미리호(13:00 출발) 등 하루 3척이 왕복 운항하고 있다. 850분에 출발하는 고려고속훼리() 소속의 코리아피스호(고려고속훼리 소속)도 있다고 했으나 터머널의 전광판에는 떠있지 않았다. 어쩌면 성수기에만 다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를 태우고 갈 배는 코리아킹호이다. 매일 오전 830분 인천항 연안여객터미널에서 출항해 대청도를 거쳐 백령도까지 1차례 왕복 운항한다. 백령도에서는 오후 130분께 출발해 인천으로 돌아온다. 최대 속력이 40노트에 이르는 이 쾌속선은 총 449명의 승객과 함께 7.36t의 화물을 적재할 수 있단다.



인천항을 출발한지 4시간 만에 백령도의 용기포항에 도착했다. 거리에 비해 오래 걸린 셈인데, 이는 북한 수역을 피해 인천에서 공해로 나갔다가 백령도로 향하기 때문이란다. 그건 그렇고 백령도에는 여러 곳의 포구가 있다. 하지만 섬의 관문 역할을 하는 곳은 1998년 연안항으로 지정된 용기포항이다. 2층 건물인 여객터미널은 3t급 카페리가 접안할 수 있는 신항(新港)과 함께 2012년에 지어졌다고 한다.




배에서 내리니 백령도에서 머무는 동안 우리의 다리 노릇을 하게 될 대형버스가 기다리고 있다. ‘까나리여행사소속이라는데 버스기사가 가이드의 역할까지 겸하는 시스템이다. 먼저 진촌리(면소재지)에 있는 아일랜드 캐슬에 들러 여장(旅裝)을 푼다. 식당(食堂)까지 겸하는지라 따로 식당을 잡아야하는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점심과 다음날 아침 모두 한식 뷔페로 상을 차렸는데 맛이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런대로 먹을 만은 했다. 하긴 인천에서 200가까이 떨어진 외딴 섬에서 이보다 더 맛깔스런 음식을 찾는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점심을 먹자마자 곧바로 사곶해수욕장으로 이동한다. 백령도에 있는 관광자원(觀光資源)과의 첫 만남이다. 200m 폭의 모래사장이 2에 걸쳐 펼쳐지는 이곳 사곶해수욕장1997년 천연기념물(391)로 지정된바 있다. 이탈리아의 나폴리와 함께 세계에서 2곳 밖에 없다는 특수성 때문이란다. ‘사상누각’(모래 위에 지은 집)이라는 표현에서 잘 나타나듯 모래밭은 단단함이나 견고함과는 정반대인 곳이다. 하지만 이곳 사곶사빈은 바닥이 단단하기 그지없다. ‘천연비행장이라고도 불리우 듯 실제로 한국전쟁 이후 군용 비행기 활주로로 쓰이기도 했단다. 두껍게 쌓여 있는 미세한 석영질 모래층이 무거운 비행기가 내려앉아도 꺼지지 않을 만큼 치밀하고 단단하기 때문이란다. 저 모래사장은 가끔 해병대원들의 극기 훈련장으로 활용되곤 한단다. 그래서 군인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지만, 오늘은 해변(海邊)이 텅 비어있다. 그런 눈요깃거리를 보는 행운(幸運)은 아무에게나 제공되지는 않나보다.





모래사장에 내려서니 생각했던 것 보다는 바닥이 많이 무르다. 비행기는커녕 자동차도 제대로 달리지 못할 것 같이 무른 것이다. 그런 내 느낌은 옳았다. ‘콘크리트소리를 듣던 해변(海邊)은 최근 몇 년 사이에 급격히 물러졌다고 한다. 간척지(干拓地)를 만들기 위해 화동과 사곶 사이에 백령둑과 백령대교(大橋)를 건설(95)한 것이 그 원인이란다. 그로인해 사곶 앞바다의 해수(海水) 흐름이 변하면서, 먼 바다로 쓸려 나가지 못한 점토질 퇴적물이 사곶 모래에 엉켜 붙어 해안(海岸)이 물러졌다는 것이다.



두 번째 방문지는 백령호이다. 20년쯤 전에 있었던 간척사업 때 생겨난 담수호(淡水湖, freshwater lake)인데, 블랙야크에서 원하는 인증물이 이곳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해 최북단 백령도라고 쓰인 거대한 이 비석은 호수의 제방(堤防)에 세워져 있다. 길이가 870m쯤 되는 저 제방으로 인해 백령도는 우리나라에서 8번째로 큰 섬이 되었단다. 당초는 14번째였다니 당시의 공사가 얼마나 컸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91년부터 99년까지 계속된 공사는 350ha의 농경지를 만들어냈고, 그때 함께 생긴 것이 바로 백령호(白翎湖)인데, 호수(湖水)의 넓이가 무려 129ha나 된다. 섬의 모양이 ㄷ자에서 ㅁ자로 바뀔 정도로 거대한 공사였지만, 아쉽게도 담수(潭水)된 물은 아직까지도 농업용수(農業用水)로 활용하지를 못한다고 한다. 호수로 짠물이 유입되는 탓에 제 구실을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 제방의 한쪽 귀퉁이에 백령대교가 놓여있다는 것을 깜빡 잊을 뻔했다. 길이가 50m도 채 되지 않는 꼬맹이 다리인데도 이곳 주민들은 대교(大橋)’라고 부르는 것을 서슴치 않는단다. 백령도에서 가장 긴 다리이기 때문이란다.




세 번째로 찾은 곳은 콩돌해안(海岸 : 천연기념물 제392)이다. 두무진 해안의 반대편 해안에 위치한 콩돌해변(海邊)도 백령도가 아니면 찾아볼 수 없는 진풍경이다. 길이 1가량의 해변 전체가 콩처럼 자잘한 돌로 가득하다. 돌의 크기와 모양이 진짜 콩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 하긴 얼마나 콩과 닮았으면 이름까지도 콩돌이라고 지었겠는가. 이 콩돌들은 백령도에 흔하게 분포된 규암이 억겁(億劫)의 세월동안 파도에 깎이고 씻겨 지면서 만들어 낸 모양이란다. 돌의 색깔도 매우 다채롭다. 보는 사람들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보통은 흰색, 갈색, 회색, 적갈색, 청회색, 청록색 등이라고 말하고 있다. ! 콩돌을 가지고 나가면 안 된다는 것을 깜빡 잊을 뻔했다. 관광안내소에서 경고성 안내방송까지 들려주는 것을 보면 몰래 숨겨나가는 사람들이 꽤 있는 모양이다.




이색적(異色的) 콩돌은 보는 것만으로도 신비(神秘)한 경험이다. 거기다 신발을 벗고 맨발로 산책(散策)까지 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호사(豪奢)는 없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같이 간 사람들이 너나없이 신발을 벗어 들고 걷고 있다. 발바닥 지압에 좋다는 가이드의 친절한 안내가 있었는데, 어느 누가 신발을 벗어 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맨발로 바닷물을 첨벙이는 사람들과, 하얗게 물보라를 일으키는 바다, 그리고 바닥에 깔린 부드러운 자갈들이 한데 어우러지며 영화(映畵) 속의 한 장면을 연출해 내고 있다.



다음은 가이드의 서비스 코스다. 마침 바람이 세게 일고 있으니 파도 구경을 해보라는 것이다. 용트림바위로 가는 길목인데 차에서 내리니 널찍한 선착장이 만들어져 있고 그 주변에는 커다랗고 녹슨 닻이 꽤 많이 널려있다. 하지만 매어 있는 배는 한 척도 없다. 그 빈자리는 먼 바다에서 밀려온 파도가 대신한다. 방파제를 때리면서 치솟아 오르는 물보라가 장관을 이룬다.




다섯 번째로 찾은 곳은 용트림바위. 바위는 절벽(絶壁)에 걸터앉은 전망대(展望臺)의 바로 아래 바닷가에 자리 잡고 있는데, 여러 개의 암석층이 위태롭게 쌓이면서 마치 용()이 하늘로 승천(昇天)하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바위 스스로 하늘을 향해 나선처럼 꼬며 오르는 형상(形象)이 매우 인상적이다. 저곳에는 갈매기와 가마우지가 서식(棲息)하고 있단다. 깎인 절벽 곳곳에 둥지를 튼 갈매기 떼들의 모습이 평소에도 장관(壯觀)을 이루는 곳이다. 천안함의 함미(艦尾) 인양(引揚) 시 모든 방송사들이 이곳 용트림 전망대를 중계 포인트로 삼았었다.






중화동 교회로 가는 길에 장촌마을(長村里)에 들렀다. 지금은 비록 메밀칼국수 집이 있는 곳으로 더 유명하지만 이곳에 400년이나 묵은 노송(老松)이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도로에서 100m쯤 올라가면 만날 수 있는데 입구의 안내판에는 400년 전인 조선시대 선조 때 마을 사람들이 심은 것으로 전해져 온다고 적혀있다. ‘천년송(千年松)’이라는 이름까지도 붙여놓았다. 기껏해야 조선 왕조와 역사를 같이 했을 나무이지만 천년 동안 마을을 보호해 줄 것이라 믿었던 이곳 섬사람들의 바람이 아니었을까 싶다. 동네 사람들의 할아버지. 그 이전부터 천년송이라 불러왔다는 것이 증거이고 말이다.




다음은 중화동교회이다. 지어진지 백 년도 넘었다고 해서 나무로 지어진 한옥(韓屋)을 예상했었는데, 언덕위에 오롯이 앉아있는 교회건물은 의외로 벽돌로 지어진 양옥(洋屋)건물이었다. 중화동 교회는 주민들에 의해 세워진 한국 최초의 자생적(自生的) 교회라는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 1865(고종 2) 주민들의 자발적인 모금(募金)과 봉사(奉仕)로 지어졌다니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외에도 백령도에는 지어진지 100년이 넘는 교회가 2곳이나 더 있다고 한다. 백령도가 중국에서 100km 정도밖에 떨어져있지 않은 탓에, 조선에 기독교를 전파(傳播)하기 위한 교두보(橋頭堡)로 활용되었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교회당 옆에는 기독교역사관을 지어놓았다. 19세기 초에 시작된 백령도와 주변지역에 대한 기독교 선교기록을 모아 전시하고 있는 선교역사박물관이다. 1816년 영국군이 항해 도중 조난당하면서 백령도 중화동에 가장 먼저 기독교를 전파했다고 한다. 그래선지 1896년에 이미 교회가 지어졌다.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라고 한다. 백령도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울릉도처럼 기독교인이 많다는 점이다. 주민의 70-80%가량이 기독교 신자란다. 한국의 기독교 인구가 20% 정도인 점을 감안하면 이것은 엄청난 비율이라 하겠다. 그 이유는 지정학적 요인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시대 육로를 통한 포교가 막히자 선교사들은 바닷길을 이용해 풍선을 타고 자연스럽게 커다란 섬 백령도에 들어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민들의 기독교에 대한 몰입도 역시 지정학적으로 접근하는 게 옳을 것 같다. 북한을 바로 코앞에 두어야하는 위태로운 삶이 적극적인 구원관과 유일신 사상의 체계를 갖춘 기독교와 딱 맞아 떨어졌다고 보면 되겠다는 얘기이다.



축복의 땅이지만 아쉬운 점도 눈에 띄었다. 교회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 있던 커다란 무궁화나무가 뼈대만 앙상한 고사목(枯死木)으로 변해있었기 때문이다. 천연기념물(521)로까지 지정되었을 정도로 나이 먹은 나무였는데 안타까운 일이라 하겠다. 안내판에는 태풍의 피해로 고사했다고 적혀있었으나 가이드는 관리부실이 원인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었다.



심청각으로 가는 도중 가이드로부터 발우(鉢盂)에 대한 얘기를 듣는다. 알다시피 백령도는 1896년에 이미 교회가 세워진 한국 기독교 역사의 거점이다. 그런 역사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백령도 곳곳에는 교회가 많다. 하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사찰은 몽운사가 유일하단다. 백령도는 200년 동안 절이 없었다고 한다. 조선 후기, 생계가 막막한 사람들은 육지로 떠났고 그와 함께 절도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2003년 백령도의 군부대와 인연을 갖고 있던 한 스님이 백령도에 작은 절을 지었는데 이 절의 특징이 발우란다. 그중에서도 백미(白眉)는 단연 티베트에서 건너온 발우라며 절대 놓치지 말라는 충고까지 한다. 어느 고승(高僧)의 두개골로 만들었는데 이 발우에 소원을 빌면 그 바람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다만 두 개를 빌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으니 꼭 하나만 빌라는 넉살까지 빼놓지 않는다.



법당 앞에는 커다란 발우(鉢盂)가 놓여있다. 계단을 딛고 올라서니 발우의 안에도 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발우를 들고 있는 승려상(僧侶像)도 보인다. 그들 주변에는 지폐와 동전들이 수북하다. 발우 안에 동전이 들어갈 경우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을 믿는 사람들이 꽤 되는 모양이다.



법당으로 들어서자 주지인 지명(智明)이 모았다는 발우(鉢盂)들이 중생을 맞는다. '일발삼의(一鉢三衣ㆍ발우 하나와 옷 세벌)'라는 말처럼 발우는 탁발에 의지해 무소유의 삶을 사는 출가 수행자들의 표상이다. 특히 선종에서 발우는 밥그릇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수행의 매개이며, 초조 달마대사로부터 육조 혜능대사에 이르기까지 선사들이 제자들에게 깨달음을 전한 전법(傳法)의 상징이었다. 그런 발우들을 100여 벌이나 모았다는 것이다. 구하(1872~1965)스님, 석주(1909~2004)스님 등 국내의 여러 노스님들이 썼던 발우뿐만 아니라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라마, 대만 불광산사의 성운스님, 미얀마의 우꾸마라 스님, 태국의 프라자라타나 몰리스님 등 외국의 유명한 고승들의 발우도 있다는데 일일이 확인해 보지는 못했다.




조금 더 가자 고봉포구가 나온다. 이곳에는 사자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사자가 입을 벌리고 용맹스레 포효하는 모습 같다고 해서 사자바위라고 불렸으나 최근 이구아나를 닮았다고도 해서 이구아나 바위로도 불린단다. 보는 각도와 파도의 세기에 따라 그 모양을 달리한다더니 사실이었던가 보다. 사자바위 뒤편 멀리 북한 땅이 보인다. 우리 것인데도 가볼 수 없는 북녘 땅, 지금은 비록 막연하게만 보이는 통일이지만 조금씩 현실에 가까워지는 날도 오지 않을까? 사자바위 위 창공을 나는 갈매기처럼 통일의 꿈도 날개를 펴고 날아오를 날이 있을 것이다.




백령도의 북동쪽 끄트머리. 야트막한 산의 정상에는 심청각(沈淸閣)이 세워져 있다. 백령도가 심청전의 무대였던 사실을 기리기 위해 심청이가 공양미 300백석에 몸을 던진 북한의 장산곶 인당수와 인근 대청도 사이의 연봉바위가 동시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건립했다. 그 옛날 심청이가 뛰어들었다는 절벽(絶壁) 아래의 인당수는 민감한 군사지역(軍事地域)이라서 남북한 어느 쪽에서도 접근할 수 없다고 한다. 그 덕분에 중국(中國) 어선들만 희희낙락(喜喜樂樂)이라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저인망(底引網) 그물을 이용해서 고기들을 싹쓸이 해 간다는 얘기이다. 하긴 중국인들은 그런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 그럴 만도 하겠다. 참고로 예로부터 인당수를 지나는 배는 목숨을 걸어야 했다고 한다. 해저(海底)의 바위에 부딪친 해류(海流)가 걷잡을 수 없이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탓에, 수많은 배들이 뒤집혔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주(船主)들은 용왕(龍王)님의 심술을 달래기 위한 제물(祭物)이 필요했던 것이다. 당시에 순결한 숫처녀만 바쳤던 것을 보면, 여자를 보는 용왕님의 시각(視覺)도 우리네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가 보다.



만일 슬픔에 잠긴 그녀의 마음을 공감(共感)하고 싶다면 심청각으로 들어가면 된다. 그녀의 기구하고도 극적인 일생이 아름다운 조형물로 형상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용왕의 도움으로 환생한 심청이 황후마마가 되고, 아버지가 눈을 뜨게 되는 클라이맥스(climax)는 압권(壓卷), 이보다 더 나은 줄거리가 어디 있겠는가. 인생 역전(人生 逆轉)은 평범한 우리네들이 가장 갈망하는 삶일 테니까. 이밖에도 심청전에 관련된 판소리와 영화대본, 고서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한 층을 더 오르면 백령도에 대한 각종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심청각 뒤 너른 마당에는 해풍(海風)에 치마를 날리며 바다로 뛰어드는 심청의 동상(銅像)이 있다. 마당을 둘러싸고 있는 나지막한 담장으로 다가가자 일망무제의 조망이 펼쳐진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곳이 북녘 땅 장산곶이다. 그 왼편으로 유독 검푸르게 보이는 바다가 임당수라고 한다. 10남짓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북한 땅을 눈에 담아보라는 듯 망원경을 설치하는 배려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집사람의 관심은 온통 바위벼랑 아래로 쏠려있다. 백령도의 또 다른 천연기념물(331)인 점박이물범(Phoca vitulina largha)을 구경하고 싶었나보다. 잠시 후 터져 나오는 환호성은 그녀의 눈에 물범이 들어왔다는 증거일 것이다. 맞다. 그녀가 가르켜 주는 방향으로 망원경을 돌리니 꽤나 많은 물범들이 갯바위에서 쉬고 있었다. 날씨와 물때가 맞아야만 볼 수 있다는데 행운이라 하겠다. 참고로 백령도의 물범은 은회색 바탕에 타원형 점무늬를 가진 잔점박이 물범이다. ‘우용’, ‘해표’, ‘강치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데 겨울철에는 중국 발해만의 빙해 위에서 번식해 이듬해 여름이 가까워지면 서해의 풍부한 먹이를 먹으며 성장하기 위해 백령도로 남하한다. 1940년대에는 그 개체 수가 약 8천 마리였는데 현재는 약 300여 마리로 멸종위기에 처해 있어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2014 인천아시안게임의 마스코트가 바로 백령도의 점박이물범이다.




두무진으로 가는 도중 특산품 판매장에 들렀다. 이곳에서는 돌미역과 다시마, 까나리액젓 등 백령도에서 생산하는 특산품(特産品)을 판매하는데, 까나리액젓과 약쑥으로 만든 젤리(jelly)가 특히 인기를 끌고 있었다. ! 조금 전에는 진액(津液)과 환(), 그리고 향() 등 약쑥으로 만든 갖가지 제품을 판매하는 약쑥매장에도 들렀었다. 그런데 안내자의 멘트에서 보약(補藥)의 냄새가 물씬 풍겨 나온다. 보약을 선전할 때에는 보통 대부분 남성의 성기능(性機能) 강화에 뛰어난 효과가 있다는 효능(效能)을 가장 먼저 내세우는데, 이곳에서도 가장 먼저 내세우는 게 남성의 성기능 강화였기 때문이다. 상품을 한 아름씩 안고 버스에 오르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여자들이다. 자기 남편에게 만족하는 여자들이 극히 드물다는 속언(俗言)이 맞기는 맞는 모양이다. 하긴 그래서 이웃집 남자라는 신조어(新造語)가 생겨나지 않았겠는가.



맨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서북쪽 끄트머리에 위치한 두무진(頭門津) 포구이다. 서해의 해금강으로 소문난 두무진의 투어가 이곳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두무진을 둘러보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트레킹 코스인 '두무 비경길'과 포구에서 작은 배를 타고 해안가로 떠나는 유람선 투어다. 같은 풍경을 배에서 보느냐 두 발로 걸으며 보느냐의 차이인데, 각기 다른 감흥이 있다. 기암절벽의 파노라마를 감상하려면 유람선이 제격이다. 그런데도 우리 일행에게 주어진 것은 트레킹’. 그것도 무조건이란다. 유람선투어를 못하는 게 아쉽지만 바람이 세서 배가 뜨지 못한다니 어쩌겠는가.



탐방로는 정비가 잘 되어 있다. 바닷가나 바윗길에는 데크를 깔았는가 하면 산속에 내놓은 오솔길도 걷기에 부담이 없게끔 잘 닦아 놓았다. 잠시 쉬어가라는 배려용으로 정자까지 만들어 놓았음은 물론이다. 하긴 올 7월 환경부로부터 국가지질공원으로 인증까지 받았을 정도이니 이를 말이겠는가. 참고로 두무진의 원래 이름은 '두모진(頭毛鎭)'이었다고 한다. 머리카락처럼 뾰족한 바위가 많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이후 바위의 형상이 마치 장군들이 머리를 맞대고 회의하는 것 같다 하여 '두무진(頭武津)'으로 바뀌었단다.



탐방로를 걷다보면 포구 건너편으로 늘어선 해식절벽이 눈에 들어온다. 잠시 후에 만나게 될 두무진의 바위들과 함께 해식지형의 변화과정을 살펴보는 중요한 자료가 아닐까 싶다. 해식절벽에서 해식동굴을 거쳐 씨 아치(sea arch, 독립문처럼 암석 기저부가 뚫린 다리모양의 파식지형)’로 변하고, ‘씨 아치가 세월이 흐르면 시스텍(sea stack, 암석이 파도의 침식을 차별적으로 받아 만들어진 굴뚝 형태의 지형)’이 되기 때문이다.



해안산책로를 따라 10여분쯤 걷자 웅장한 해안(海岸) 절경(絶景)이 눈앞에 펼쳐진다. 백령도를 다녀온 사람들에게 백령도 제일의 절경을 꼽으라면, 너나 할 것 없이 첫손을 꼽는 곳이 두무진이라고 한다. 해안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올라서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입을 벌리고 만다. 당연히 감탄사 한 마디라도 내뱉어야하건만 다들 조용하기만 하다. 빼어난 경관(景觀)에 취해 벌린 입을 다물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숱한 세월 동안 비바람에 마모(磨耗)되고 파도에 깎여나간 선대암, 코끼리바위, 장군바위, 형제바위 등 기기묘묘한 형상의 바위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서해의 해금강'이라고도 불릴 정도로 빼어난 풍광(風光)을 자랑하는 두무진 해안은 현재 국가문화재인 명승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바닷가로 내려서면 감탄사가 절로 터져 나올 만큼 웅장한 해안절경(海岸絶景)이 눈앞에 펼쳐진다. 숱한 세월 동안 비바람에 마모(磨耗)되고 파도에 깎여 나간 기기묘묘(奇奇妙妙)한 형상의 바위들이 수도 없이 늘어서 있다. ‘마치 대군(大軍)을 호령하는 장수처럼 위풍당당하다.’는 표현이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수많은 기암(奇巖)들이 우뚝 솟아오르고, 깎아지른 암벽(巖壁)은 병풍(屛風)처럼 늘어서 있다. ‘서해의 해금강이라는 수식어(修飾語)가 결코 어색하지 않은 절경인 것이다.





두무진의 풍광(風光)을 노래한 작품으로 백령지가 있다. 조선 중기의 의병장 출신으로 함양군수를 지낸 이대기가 기록한 서책으로, 당쟁(黨爭)에 휘말려서 절해고도(絶海孤島)인 이곳으로 유배(流配)를 온 그가, 두무진을 둘러본 느낌을 적은 글이다. 그는 '늙은 신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또 어느 작가는 두무진의 기암(奇巖)을 일러 웅장하고 거대하되, 위압적이지도 사납지도 날카롭지도 않다.’라고 표현했다. 두 글을 합치면 자연스레 하나의 결론이 도출된다. 오랜 세월 파도와 풍화(風化)에 깎여온 절경은 신이 아니면 결코 만들 수 없었을 것이고, 아마도 그 신은 '늙은 신'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세련된 손끝이 아니고서는 결코 저런 경관(景觀)을 만들어 내지 못했을 테니까.




두무진의 북쪽 끄트머리에 있는 통일기원비를 구경하면서 트레킹은 끝을 맺게 된다. 투어(tour)가 끝났지만 숙소가 있는 진촌으로 돌아가지 않고, 근처 두무진포구에 있는 생선 횟집에 자리를 잡는다. 백령도에서 싱싱한 회를 먹을 수 있는 곳은 두무진포구가 유일하기 때문이란다. 4명이 둘러앉게 되는 상차림은 10만원. 회는 넉넉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부족하지도 않다. 여기에 매운탕에 밥까지 제공되니 1인당 25천이 비싸다곤 할 수 없겠다.


방축도(防築島)

 

여행일 : ‘19. 7. 28()

소재지 : 전북 군산시 옥도면 말도리

트레킹 코스 : 선착장소망교회뒷장불전망대독립문바위모래미장불생끄미장불방축구미장불인어공주상선착장(소요시간 : 2시간 10)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군산 선착장에서 37가량 떨어져 있는 방축도(防築島)는 이름 그대로 막기 위해 쌓은 섬이다. 어깨동무하고 있는 횡경도와 명도, 말도와 함께 바람과 파도로 부터 선유도와 무녀도, 장자도 등 고군산군도(古群山群島)를 보호한다. 면적 2.19(해안선 길이 6.5)80여 명이 살고 있는 작은 섬이지만 역사는 꽤 오래되었다고 한다. 통일신라시대 장보고가 해상권을 장악하고 청해진을 설치할 무렵 당나라 상인들이 표류되어 떠다니다가 이곳에 도착하여 살게 되었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섬에는 독립문바위와 시루떡바위, 노적봉 등 눈요깃거리들이 제법 많은 편이다. 흙으로 뒤덮인 밋밋한 섬이지만 바닷가는 해식애(海蝕崖)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방축도는 하나의 섬에 여러 가지 지명을 담고 있는 섬이다. 북서풍을 막아준다는 의미의 방축금, 가운데 위치한 마을로 경계를 이룬다 하여 샛금·쌩금이·모래미, 마을 섬 길이가 길며 빗겨 다닌다 하여 빗경이·진대성·밝으늘 등으로 불린다.



찾아오는 방법

방축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장자도(군산시 옥도면 장자도리)’까지 와야만 한다. 방축도로 들어가는 여객선이 이곳 장자도 선착장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군산항에서 배를 탈 수밖에 없었으나 신시도와 무녀도를 잇는 고군산대교’, 무녀도와 선유도 사이의 선유대교’, 선유도와 장자교를 잇는 장자대교가 잇달아 놓이면서 차량의 진입이 가능해지자 중간기착지인 이곳 장자도에서도 배를 탈 수 있게 되었단다.



무인도인 횡경도와 방축도, 명도, 말도가 길게 늘어서서 서해에서 밀려오는 바람과 파도를 온 몸으로 막아내는 모양새이다. 나란히 서 있는 이들 섬 앞으로 관리도가 있고, 그 안쪽으로는 선유도, 장자도, 대장도, 무녀도가 서로 연도가 되어 한 몸을 이루고 있다. 이들 섬 안쪽에는 호수와 같은 바다가 있다. 말 그대로 고군산군도 섬들은 섬 속의 섬답게 잔잔하기 짝이 없는 바다 속에서 평온하게 떠있다고 보면 되겠다.



오전 11시에 출발하는 차도선(차도선(車渡船 : 고군산 카페리호)을 타면서 방축도 여행이 시작된다. 군산항에서 출발하는 이 배는 장자도를 중간기지로 삼은 뒤 관리도와 방축도, 명도, 말도, 관리도의 순서로 한 바퀴 돈 다음 장자도로 되돌아온다. 1항차이다. 2항차는 14:00에 장자도를 출발해서 같은 순서로 한 바퀴 돈 다음 이번에는 군산으로 되돌아 나간다. 하지만 낚싯배를 이용하는 사람들도 많은 편이란다. 뱃삯은 조금 비싸지만 시간 조절이 가능한데다 서해의 도원경(桃源境)으로 소문난 십이동파도(十二東波島)까지 함께 둘러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일행은 카페리호(비로 인해 사진촬영 불가)로 들어갔다가 나올 때는 낚싯배를 이용했다. 기상악화를 우려해 덩치가 큰 차도선을 이용했는데, 파도가 높아지자 이게 오히려 장애요인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파도가 높을 경우 차도선은 접안(接岸)이 불가능하단다.



장자도를 출발한지 20분 만에 방축도에 도착했다. 오는 도중에 관리도에 들렀음은 물론이다. 선착장에 내리자 방문을 환영한다는 현판(懸板)이 길손을 맞는다. 이 동네도 역시 관광서비스업의 비중이 서서히 늘어가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참고로 방축도는 고군산군도에 속한 작은 섬이다. 여기서 고군산(古群山)옛날 군산을 의미한다. 현재의 군산은 하나의 도시이지만 원래는 지금의 군산 앞바다에 떠있는 섬들을 아우르는 지명이었다고 한다. 바다 위에 점점이 솟아있는 섬들이 마치 산봉우리의 무리처럼 보여 군산(群山)’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방축도 선착장은 유난히 방파제가 높다. 세찬 바람과 높은 파도를 피해 정박한 배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함일 것이다. 방축도라는 이름에 걸맞는 방어적 축대라 하겠다. 그것으로도 부족했던지 안쪽에 또 다른 방파제를 쌓아올렸다. 간이 물양장(物揚場) 시설을 갖춘 외황(外港)이 못미더운 작은 배들의 대피항으로 사용하고 있지 않나 싶다.



포구에는 관광안내소가 마련되어 있어 출항시간을 못 맞춘 여행객들에게 쉼터의 역할을 해준다. 그 옆 녹색 패넬(panel)에 둘러싸인 건물은 내연발전소이다. 이 발전소에서 나오는 전기는 방축도뿐만 아니라 이웃 섬인 명도와 말도까지 공급된다. 옛날은 저녁 6시부터 12시까지 제한적으로 전기를 공급했지만, 증설이 이루어진 지금은 24시간 전기 공급이 가능해져 냉장고 사용은 물론이고 겨울철 보일러 난방까지도 가능하단다.



마을 담벼락은 온통 벽화(壁畫)들로 채워져 있다. 그런데 하나같이 동양화 기법으로 그려져 있다. 특이하다 하겠다. 마을의 설화(說話)를 벽화로 만드는 사업을 펼쳤다고 하더니 그 영향이 아닐까 싶다. 아무래도 현대화보다는 동양화로 그려놓은 설화가 더 우리에게 익숙할 것이기 때문이다.



길을 나서는데 맞은편에서 전기자동차가 달려온다. 최근 들어 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 아닐까 싶다. ‘탄소제로 ᆞ에너지 자립 섬’, 즉 전기자동차만 돌아다니고, 전기를 자급자족하는 섬으로 가꾸는 게 요즘의 추세이기 때문이다. 작년에는 전남도와 한전KDN간의 에너지산업 육성·조성 업무협력협약식에 참석한 이낙연총리가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이 첨부된 관련기사까지 올라온 적도 있었다.



발전소를 지나 해안도로를 따라 마을로 가다보면 왼쪽 언덕바지에 어업인안전쉼터 건물이 보인다. 이 또한 복지국가를 향해가고 있는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풍경 중의 하나다. 마을로 들어서지 않고 언덕바지로 올라서면 소망교회가 나온다. 교회 앞에서 길이 갈리는데 오른쪽은 도로로 이어지는 길이고 왼쪽은 또 다른 마을로 이어진다. 그건 그렇고 오른쪽으로 보이는 방축구미 마을은 매립한 듯 가운데에 농지가 들어있다. 그 주위로 집들이 들어서 있는 모양새이다. 길도 그 둘레로 이어지는 순환도로 형식이다. 집들도 오밀조밀 있는 것이 아니라 조금은 산만하게 분포되어 있다.



계속해서 순환도로를 따른다. 교회 앞에서 내리막길로 변하는데 이곳에도 마을이 들어섰다. 마을이 끝나갈 즈음 가로수 역할을 하고 있는 울창한 동백나무 숲을 만난다. 이곳에서 샘끄미장불로 이어지는 갈림길(이정표 : 독립문바위/ 샘끄미·동백숲)이 나뉜다.



길을 걷다보면 우물도 만나게 된다.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는 달샘이 아닐까 싶다. 샘은 위를 뚜껑으로 굳게 닫아걸었다. 옆의 작두샘도 녹이 덕지덕지 슬어있는 채로 놓여있다. 지금은 사용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일 것이다. 맞다. 마을에 상하수도가 들어오고 난 뒤부터 죽은 샘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 달샘을 옛날 형태로 복원해놓은 것이다. 달샘을 중심으로 아낙네들이 모여 빨래를 하고, 식수로도 사용하던 옛 추억이 못내 그리웠던가 보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달샘의 복원지는 따로 있었다. 그곳에는 애기돌(작은돌, 모래미돌, 아기·사랑의 상징)과 올돌(넓은 돌, 쌩끄미돌, 여성의 상징인 음), 장돌(긴돌, 방축구미돌, 남성의 상징인 양) 등 샘에서 출토된 3개의 돌도 전시되고 있었다.



어린이놀이터도 만들어 놓았다. 초등학교가 폐교된 이후 어른들만의 섬으로 남아있으려니 했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다. 이곳 방축도의 또 다른 이름은 쌩끄미라고 한다. 섬에서 50여기의 고인돌이 발견되었으니 역사가 깊은 섬이라 하겠다. 그래서 생태문화체험 및 서해안 지질학 연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단다. 2009년도에는 전라북도가 실시한 참 살기 좋은 마을가꾸기 사업콘테스트에서 최우수마을로 선정되기도 했단다. 달샘을 복원하고 동백나무 숲을 조성하는 등의 주민들 노력이 좋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쌩끄미마을은 방축도(防築島)3개 마을 가운데 하나이다. 왼편의 마을을 모래끄미, 중간에 있는 마을을 쌩끄미, 그리고 오른편에 있는 마을은 방축구미라고 부른다. ‘끄미가 마을이란 뜻을 갖고 있다니 은 가운데를 나타내는 방언인 모양이다. ‘쌩끄미가운데 있는 마을이란 뜻이라니 말이다. 역사가 깊은 섬이라 그런지 몰라도 제주도 방언처럼 재미있는 지명이다.



잠시 후 모래와 자갈이 반반으로 섞여있는 해안에 이른다. ‘쌩끄미장불이란다. 이정표는 샘끄미로 적고 있으니 참조한다. 아무튼 장불이란 물이 빠지는 썰물 때 드러나는 너른 모래밭, 갯벌을 뜻하는 전라도 방언이다.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은 앞장불, 뒷장불, 마루장불 같이 위치나 생김새를 나타내는 대명사 뒤에 장불을 갖다 붙인다. 이곳 방축도에도 방축구미장불모래미장불’, ‘뒷장불등이 있다.



쌩끄미 장불은 배를 세워놓을 수가 없어 방축구미장불을 배의 피항지로 삼고 있단다. 고인돌 근처에 있는 모래미장불도 마찬가지란다. 바닷가에 널려있다시피 하는 녹슨 닻들이 그 증거가 아닐까 싶다. 옛날에는 억지로라도 배를 대었겠지만 방축구미에 깔끔한 포구가 들어서고 난 뒤에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을 것이다.




삼거리로 되돌아와 조금 더 걸으면 만나게 되는 정자 앞에서 또 다른 삼거리(이정표 : 독립문바위/ 모래미)가 나타난다. 방축도의 명물인 노적봉을 만나고 싶다면 이곳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 이 부근에 고인돌유적이 있다고 했는데 확인할 수는 없었다. 이정표가 세워져 있지 않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고인돌유적 뿐만이 아니다. 같은 이유로 달샘 복원지도 가보지 못했다.



바다 방향으로 잠시 내려가자 모래사장이 나타난다. 간이선착장이 만들어져 있는 모래미장불이다. 하지만 배는 보이지 않는다. 필요할 때만 배를 댄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래선지 해변에 들어선 서너 채의 가옥들 주변도 잡초만이 무성하다. 건물의 내부도 텅 비어있었음은 물론이다.




자갈이 꽤 많이 섞인 모래사장의 양 옆은 갯바위다. 오른편으로 눈을 돌리면 작은 바위섬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노적봉(露積峯)’이란다. 곡식을 한데 모아 쌓아올린 모양새라는 얘기일 것이다. 밀물 때라서 가까이 다가갈 수는 없었지만, 멀리서 본 노적봉은 바위산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지세가 험했다. 보기 드문 기암(奇岩)이라 하겠다. 거기다 숱한 풍상을 고스란히 다 겪었을 것 같은 소나무가 함께 어우러지며 멋진 경관을 만들어내고 있다. 과연 방축도의 명물 가운데 하나로 꼽힐 만하다.



포구 주변에는 커다란 플라스틱 통들이 널려있다. 인근 해역에서 많이 잡힌다는 멸치를 젓갈로 담아놓은 통들이 아닐까 싶다. 일 년쯤 묵힌 뒤 가장 맛있을 때 김장젓갈로 파는데 주민들의 큰 수익원이라고 한다. 자식 키우고 가르치며 살아온 삶의 흔적인 셈이다.



삼거리로 되돌아와 조금 더 진행하면 방축도 교육회관이 나타난다. 들머리에 세워놓은 이정표에는 펜션이라고 적혀있다. 교육회관으로 지어졌으나 현재는 여행객의 숙박시설로 활용하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건물 앞 송림(松林)에는 운동기구와 벤치, 평상, 그네 등을 놓아두었다. 주민들의 쉼터 역할도 겸하는 모양이다. ! 숲속에는 희망의 섬, 방축도를 꿈꾸며라는 빗돌도 보인다. 행정안전부에서 주관하는 행복한 우리 동네 만들기 사업에 참여하여 대상을 차지한 것을 기념해 세운 것이란다.




교육회관 앞에서 길은 세 갈래(이정표 : 독립문바위/ 등산로/ 펜션)로 나뉜다. 오른편 언덕, 그러니까 등산로라고 표시된 방향의 길목에는 뒷장불전망대가 팔각정으로 지어져 있다. 전망대에 오르면 시야가 활짝 열린다. 이웃 섬인 광대섬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오는데, 유인도서인 명도와의 사이에서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모양새이다. 날씨가 좋으면 십이동파도와 새만금까지 눈에 담을 수 있단다. 그런 풍광들을 사진에 담을 수 있도록 포토죤도 만들어놓았다. 고마운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뜬금없는 시설물도 보인다. ‘관리도 관광안내도를 세워놓은 것이다. 두 섬이 서로 도와가자는 의미일지는 모르겠으나 이곳에서는 관리도가 보이지 조차 않는다. 그런 목적이었다면 관리도가 한눈에 쏙 들어오는 방축구미장불에다 세웠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




이정표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등산로와 독립문바위 사이에는 길이 하나 더 있다. 이 길을 따라 50m쯤 내려가면 뒷장불에 내려선다. 몽돌해변인데 모래미장불이나 쌩끄미장불 만큼 넓지는 않지만 아늑한 것이 해수욕장으로 제격이라 하겠다. 조금 전에 보았던 펜션에서 머문다면 편의시설이 없다는 불편까지 해소할 수 있으니 가족이나 친구들끼리 놀기에 부족함이 없겠다. ! 이곳에는 수석(壽石)으로 제격인 돌들도 제법 보였다. 그래서 돌 수집가들이 몰래 들어와 채집해가기도 한단다. 삼가야 할 일이다.



해변은 양쪽이 모두 해식애(海蝕崖)로 이루어져 있다. 바위 벼랑은 날카롭지도 그렇다고 거대하지도 않다. 대신 낚시꾼들이 앉기엔 안성맞춤인 모양새이다. 누군가 이곳 방축도를 바다낚시의 명소라 했는데 그 말이 사실이었던가 보다.



이젠 독립문바위로 향할 차례이다. 이정표가 지시하는 방향으로 들어서자 울창한 숲속을 헤집으며 데크 로드(deck road)가 놓여 있다. 탐방로는 중간에 놓인 산봉우리 하나를 우회해가며 바위절벽 위에 걸터앉은 전망대로 연결시킨다. 그러다보니 가파른 계단을 길게 오르기도 한다.




탐방로는 정상 갈림길명도 갈림길을 지난 뒤에야 전망대에 데려다 놓는다. 전망대의 위에는 비탈지면서도 좁아터진 여건을 무릅쓰고 팔각정까지 지어놓았다. 여유롭게 독립문바위를 조망하다가 돌아가라는 모양이다.




그럼에도 눈앞에 펼쳐지는 조망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독립문바위도 나뭇가지 사이로 살짝 드러날 따름이다. 방축도와 광대섬을 잇는 인도교가 눈에 들어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명도 방향으로 향한다. 그리고 갈림길 하나를 더 지나자 또 다른 전망대가 나타난다.



전망대에 서자 독립문바위가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나뭇가지 사이로 나타나기 때문에 완벽하지가 않다. 그게 아쉽다면 바닷가로 내려가면 된다.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서 독립문바위를 보려고 바닷가로 내려선다. 동굴이 나타나는가 싶더니 수직에 가까운 바위벼랑이 길손을 맞는다. 벼랑에는 굵은 밧줄이 매어져 있다. 그렇다고 안전까지 보장되지는 않으니 조심해야 할 일이다. 중심을 잘 잡아야 함은 물론이고, 앞뒤 사람 간에 간격을 두는 등 안전에 주의를 기울여야겠다.




잠시 후 바닷가에 내려서면 독립문바위가 코앞이다. 바위는 아랫도리를 물속에 담그고 있다. 밀물 때라서 일 것이다. 그래선지 구멍을 둘러싼 바위 모양이 마치 아치처럼 보인다. 저런 모양새가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독립문과 비슷하다고 해서 같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하지만 이곳 주민들은 구멍바위라고도 부른단다. 바위 한가운데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기 때문이란다. ‘북문바위라고도 불린다니 참조한다.



같은 독립문바위이지만 홍도의 그것만큼은 못하다. 하지만 작은 고깃배는 능히 드나들 수 있단다. 그래선지 이곳은 사진작가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구멍을 빠져나가는 장면이 아니더라도 구멍 뒤쪽으로 배가 지나가는 풍경은 한 폭의 풍경화가 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으로 말이다.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광대섬을 잇는 인도교가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다. 말도와 명도, 방축도 등 3개의 유인도서와 무인도서인 보농도와 광대섬을 인도교(人道橋)로 이어 명품 트레킹코스로 만들겠다며 놓고 있는 다리이다. 참고로 총 4개소에서 진행되는 인도교 설치 계획은 제1교 말도~보농도 308m, 2교 보농도~명도 410m, 3교 명도~광대섬 477m, 4교 광대섬~방축도 83m 등 총 연장 1278m로 설계됐다.



되돌아 나오다가 왼편으로 길이 나있기에 일단은 들어서고 본다. 희미하나마 길이 나있는데다, 방향으로 보아 광대섬으로 연결되는 길일 것 같아서이다. 거기다 방축도와 광대섬 사이에는 출렁다리가 놓여있다는데 어찌 가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또 하나의 명물을 보겠다는 소박한 내 꿈은 이뤄지지 못했다. ‘공사중 출입금지라는 현수막과 함께 길이 끊겨있었기 때문이다. 2개월 전쯤 군산시에서 추진하고 있는 인도교 설치공사가 지지부진하다는 기사를 본 것 같은데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당시 기사는 2022년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는 이 공사가 지난 겨울부터 중단되고 있다고 했다. 한시라도 빨리 재개되어 이 섬들을 한꺼번에 둘러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삼거리로 되돌아와 조금 더 오르면 또 다른 삼거리(이정표 : 정상/ 독립문바위/ 명도)가 나온다. 일단은 정상으로 향하고 본다. 이정표까지 세워져 있으니 어찌 지나칠 수 있겠는가.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널따랗다. 양 옆에 밧줄 난간을 쳐놓았을 뿐만 아니라 조금 가파르다 싶으면 어김없이 통나무 계단을 깔아놓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다니지 않은 탓에 웃자란 잡초가 주인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잡초에 싸대기 두어 대 맞아가며 7분 정도를 오르자 정상이다. 널찍한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은 벤치 두 개가 놓여있을 따름이다. 정상석은 물론이고 그 흔한 이정표 하나 보이지 않는다. 그저 대구 뫼들산악회에서 매달아놓은 표지기(정상, 99.9m)가 이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하지만 이 표지기마저도 봉우리의 이름은 적지 못했다. 이름이 없는 봉우리라는 증거일 것이다.



방축구미 마을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인어상을 만나러 간다. 포구 안쪽에 따로 만들어놓은 피난항의 가장자리를 따르다보면 들머리인 데크 계단이 보인다.



한참 동안이나 가파른 오름짓을 하던 탐방로가 이윽고 내리막길로 변한다. 이어서 사각의 정자를 지나는가 싶더니 하얀 인어상(人魚像) 앞에 데려다 놓는다.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주민들의 정성을 모아 세운 거란다. 왠지 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인어에 대한 설화는 모두 외국의 이야기로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전혀 없는 것은 아니란다. 인천의 장봉도와 여수의 거문도, 부산 해운대에서 인어공주에 대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단다.



인어상 앞에서의 조망은 일품이다. 이곳 방축도가 감싸주고 있는 고군산군도의 섬들이 빠짐없이 눈에 들어오는 것은 물론이고, 선착장을 끼고 있는 방축구미마을은 아예 코앞으로 다가와 있다. 방축도에서 가장 큰 마을로 관광안내소와 발전소, 파출소, 마을회관 등 공공시설이 이곳에 모두 모여 있다. 이왕에 시작했으니 하나 더 알고가자. 이곳 방축도는 행정안전부가 선정한 ‘2018년 휴가철 찾아가고 싶은 33에 꼽히기도 했다. 섬 전문가와 관광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심사단이 휴가를 계획하는 여행자들의 다양한 취향을 고려해서 --’, ‘-’, ‘미지의-’, ‘가기 힘든-등 다섯 가지 주제로 분류해 선정했는데 이곳 방축도가 미지의-에 포함된 것이다. 풍경과 자연경관이 아름답지만 그 동안 잘 알려지지 않아 신비의 섬으로 남아있었다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선착장으로 되돌아와 방파제의 끝으로 다가가자 바위절벽 위에 걸터앉은 인어상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다. 그런데 바위절벽이 시루떡을 찌그러뜨린 모양새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런 바위를 일러 시루떡바위라고 부른단다. 고서(古書)를 쌓아놓은 듯한 모습, 펼쳐놓은 두꺼운 책장이 바람에 날리는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해서 책바위라고 불린단다. 저런 바위들은 과거 조산운동과 같은 큰 규모의 지각운동 때 횡압력으로 만들어진 게 보통이니 참고해두자.



되돌아온 장자도에서 주어진 시간은 무려 3시간, 외톨이 나그네에겐 할 일이 별로 없다. 물회 한 그릇을 안주삼아 소일하다가 방파제로 나오니 우락부락한 바위봉우리로 이루어진 대장도가 바로 건너에 있다. 빼어난 자태이나 수년 전에 이미 올랐던 터이라 감상하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한다. 시멘트바닥에 앉아 대장도의 풍경에 더해 해상낚시터의 부교(浮橋)를 오가는 관광객들 숫자를 헤아리다가 나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들었다. 도원경(桃源境)에 취하다가 잠이 들었으니 운 좋으면 신선(神仙)이라도 만났으련만 난 그러지를 못했다. 신선을 마주할 정도의 수양이 아직 부족함을 그들도 알았나보다.




한숨 잘 잤는데도 주어진 시간은 아직도 많이 남았다. 이번에는 선유도 해수욕장까지 다녀오기로 한다. 두 섬을 잇는 옛 다리를 건너자 진행방향 저 멀리에 선유도가 빼어난 자태를 드러낸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알려진 곳이다. 전국 어디에 내놔도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해수욕장에 이르니 전에 왔을 때는 보이지 않던 타워가 하나 세워져 있다. 짚라인의 탑승장이라는데 차례를 기다리는 줄이 제법 긴 것을 보면 여행객들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모양이다.




에필로그(epilogue), 방축도 여행은 명소 탐방과 인근 섬들에 대한 조망 등 크게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다. 하지만 난 멋진 조망이 펼쳐진다는 큰산의 산행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무심코 앞서가는 일행들을 뒤쫓다보니 쌩끄미장불과 모래미장불 등 명소들을 그냥 지나쳐버렸기 때문이다. ‘100&을 진행하고 있는 그들로서는 인증사진 촬영 장소인 독립문바위를 찾는 게 최우선 목표였을 것이다. 그러니 사진이나 찍고 그 느낌을 글로 옮겨보려는 나와는 그 목적이 완전히 다르다 하겠다. 그런데도 난 그들의 뒤만 쫄쫄 따랐고, 그 결과 주어진 시간에 쫓겨 둘 가운데 하나를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난 조망 산행을 포기했다. 아쉬운 일이지만 어쩌겠는가. 준비가 되지 않은 채로 여행을 따라나선 내 자신을 탓할 따름이다.

송이도(松耳島)

 

여행일 : ‘19. 7. 9()

소재지 : 전남 영광군 낙월면 송이리

산행코스 : 선착장큰마을정수장민머리갯벌(왕복)삼거리작은내끼(왕복)삼거리(쉼터)큰내끼능선삼거리(쉼터)앙골작은마을선착장(소요시간 : 4시간)

 

함께한 산악회 : 좋은사람들

 

특징 : 영광 법성포에서 서쪽 해상으로 약 28km 지점에 위치한 섬으로 섬만으로 이루어진 낙월면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이다. 섬에 소나무가 많고 섬의 형태가 사람의 귀와 같다하여 송이도(松耳島)’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유래는 알 수 없지만 고려시대에는 남사자도로 불리기도 했단다. 섬은 희귀동식물의 서식처로 알려져 있다. 전국 최대 규모로 알려진 왕소사나무군락지가 있을 뿐만 아니라 부속도서인 칠산도에는 세계적인 희귀조 노랑부리백로(천연기념물 361)와 수달(천연기념물 330)이 집단 서식하고 있단다. 특히 4km에 이르는 몽돌(조약돌) 해수욕장은 송이도만이 갖고 있는 자랑거리다. 또한 송이도에서 각이도 사이에는 바닷물이 갈라지는 '모세의 기적'이 나타난다. 바닷길이 열리면 각이도까지 도보로 왕복할 수 있으며, 물이 빠지면 맛조개 등이 많이 잡혀 갯벌체험장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해식애로 이루어진 작은데기와 큰데기도 잠시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하다. 그러나 미숙해 보이는 행정력은 흠이라 하겠다. 그런 좋은 여건들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등산로야 찾는 사람들이 적어서 그랬다고 쳐도, 이정표 하나 없는 곳에서 어떻게 여행을 할 수 있겠는가.


 

찾아오는 방법 : 만지도로 들어가려면 일단은 영광군 염산면에 위치한 향화도항까지 와야만 한다. 이곳에서 만지도로 들어가는 여객선이 출발하기 때문이다. 엄청나게 너른 주차장에 내리면 영광의 랜드마크라는 칠산타워가 길손을 반긴다. 올해 문을 열었는데 높이가 111m에 이른다니 전남지역의 전망대 가운데 가장 높다 하겠다. 땅끝전망대(39.5m)와 완도타워(76m), 정남진전망대(45.9m), 고흥우주발사대(52m), 진도타워(60m) 등 다른 전망대들은 100m에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타워는 1·2층은 매점과 특산물판매장, 활선어판매장, 향토음식점 등이 입주해 있고 3층엔 하이라이트인 전망대가 있다. 송이도나 낙월도로 들어가는 여객선의 매표소도 1층에 들어있다. 참고로 향화도는 과거에 갯벌로 연결된 섬이었으나 현재는 간척지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타워 앞에 영광군 관광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염산면 앞바다에 떠있는 송이도는 두 곳에서 뱃길이 연결되는 것으로 표기되어 있다. 홍농읍의 계마항은 28,5가 떨어져 있고 염산면 향화도까지의 거리는 30.5란다. 하지만 여객선은 향화도항에서 출발한다니 참조한다. 그건 그렇고 안내판은 송이도의 몽돌해수욕장영광9(靈光九景)’의 하나(8)로 꼽고 있다. 공모와 설문조사를 거친 결과이니 경관만 빼어난 것이 아니라 인지도 또한 높다는 얘기일 것이다. 나머지 8경은 백수해안도로와 4대 종교문화유적지(불교·원불교·천주교·기독교), 불갑사, 칠산타워, 가마미해수욕장, 불갑저수지 수변공원, 숲쟁이꽃동산, 천일염전 등이다. 참고로 영광군에서는 먹을거리인 9(九味 : 굴비한정식·간장게장·황금보리돼지·보리새우·덕자찜·황토갯벌장어·청보리한우·보리떡(백합)와 살거리인 9(九品 : 영광굴비·모싯잎송편·천일염·대마할머니막걸리·간척지쌀·태청딸기·태양초고추·찰보리쌀·설도젓갈)도 함께 선정했다고 한다. 경관 좋은 곳에서 놀면서 맛있는 음식도 사먹고, 돌아갈 때는 특산품들을 사가라는 의미일 것이다.



송이도까지는 유진해운 소속의 차도선(車渡船)칠산페리호가 하루 2회 왕복 운항한다. 향화도에서 오전 8시와 오후 230(동절기 오후 2)에 출발한다. 배의 뒤로 보이는 다리는 무안군 해제면과 영광군 염산면을 잇는 칠산대교(七山大橋)’인데 연말 개통을 앞두고 마무리공사가 한창이다.



느려터진 배에서는 할 일도 없다. 마침 바닥도 온돌이라서 부족한 잠을 청하기로 했다. 그리고 90분 정도 되는 뱃시간을 늘어지게 자고나자 어느덧 송이도에 도착한다. 3.68의 면적에 해안선 길이도 15에 불과한 작은 섬이다. 그러나 낙월면에서는 두 번째로 큰 섬이란다. 선사시대 조개무지와 무문토기 조각 등이 발견될 정도로 유서 또한 깊다. 100명쯤 되는 주민들은 대부분 농업과 어업(김 양식)에 종사하나 요즘은 관광서비스업도 늘어가는 추세라 한다. 주말이면 인근 광주 등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선착장에서 내리면 아름다운 섬, 송이도라고 적힌 표지석이 여행객들을 반긴다. 인증사진을 찍으려는 여행들로 항상 붐비는 곳이다. 오른편 해안에는 모래는 없고 대신에 몽돌만 잔뜩 깔려있다. 그것도 하얀색 돌맹이뿐이다. 송이도가 자랑하는 몽돌해수욕장이라는데, 오랜 세월 동안 파도가 깎아낸 부드럽고 동글동글한 모양의 조약돌이 끝없이 펼쳐지면서 색다른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마을표지석 앞에서 길을 좌우로 나뉜다. 왼편은 포구와 내연발전소로 이어지고, 오른쪽이 마을로 가는 길이다. 해수욕장도 물론 오른편이다.



방파제의 왼편은 송이도항이 자리 잡았다. 작은 어선 서너 척이 정박하고 있을 뿐인 한적한 포구이다. 송이도 인근의 바다는 한때 칠산어장이라는 만선(滿船)의 대명사로 불리었을 정도로 황금어장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먼 옛날얘기가 되어 버렸단다. 저런 풍경이 송이도의 현실인 셈이다. 참고로 송이도 인근 바다는 하늘이 내려준 생선, 즉 조기의 최대 산란장이었다. 임금님에게 보내는 진상품으로 유명한 영광 굴비는 이 칠산바다 주변에서 잡혔다는데 그 칠산바다의 중심에 있는 섬이 송이도이다. 1960년대 조기가 많이 잡힐 때 칠산바다는 조기를 잡는 어선들과, 이들이 잡은 조기를 사들여 운반하는 상선들이 바다를 뒤덮여 불야성을 이루었다지만 오늘날 송이도 주변에서 그런 모습은 볼 수 없다. 어족 자원을 보호하지 못했던 탓일까?



마을 표지석의 뒤 언덕에는 광주대학교와 인성고등학교의 설립자인 김인곤(金仁坤) 박사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곳 송이도에서 태어난 그는 어렵게 모은 전 재산을 육영사업에 쏟은 인물이다. 그는 또 13·14·15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정치인이기도 했다. 특히 DJP 단일화로 DJ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포구를 벗어나 첫 번째로 마주치는 마을은 큰말이다. 한자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촌(大村)’이라고 부른단다. 1973년도까지만 해도 송이도에는 큰말, 작은말, 외미, 양골 등에서 107가구 522명의 주민이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큰말과 작은말만 남아있는 등 인구가 대폭 줄어들었단다.



마을로 향하는데 열부진주강유인실적비(烈婦晉州姜孺人實蹟碑)라고 쓰인 빗돌을 모신 비각이 길가에 세워져 있다. 안에는 다른 열녀인 인동 장씨(仁同張氏)의 비석도 모셔져 있다. 하지만 그녀들의 행실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너무너무 잘 가꾸어진 집이 있어 카메라에 담아봤다. 문설주 노릇을 하고 있는 바위에 올려놓은 돌맹이에는 꽃가람이라고 쓰여 있다. ’가람이란 강()을 나타내는 순수한 우리말이다. 사원의 건축물을 가람(伽藍)이라 일컫기도 한다. 주인장은 과연 어떤 의미로 사용했을까? 오른편 문설주의 돌맹이는 ’Welcome to my house’란다. 예쁜 외모를 보는 것만으로도 손님노릇을 하고 싶어지니 어찌할까나.



마을은 길이 복잡하게 나있다. 그러나 어디로 가든 다 만나게 되어 있고 또 거리도 짧은 편이다. 집들은 산재해 있는 편이고 가끔은 폐가도 보인다. 그렇게 좀 걷다보니 법성포초등학교 송이분교가 나온다. 하지만 학교는 문을 닫은 지 이미 오래이다. 그런데도 빈집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곱디고운 잔디가 운동장에 깔려있는가 하면 건물 또한 티 하나 없이 깔끔했기 때문이다. 하얀 석고로 된 두 개의 조형물도 새것같이 또렷했다. 리모델링해서 송이도 친환경가족펜션이라는 숙박시설로 활용하고 있는 덕분이란다.




학교 앞에 펜션의 시설 안내판이 세워져 있으니 꼼꼼히 살펴보고 가길 권한다. 펜션의 건물위치도와 함께 송이도의 지도를 그려 넣었기 때문이다. 처삼촌 벌초하듯이 지나쳐버린 우리 부부는 많은 구간을 중복(重複)으로 걸을 수밖에 없었다. 조금 더 세심히 살폈더라면 무장등이나 왕산봉을 올라보려는 꿈도 애초부터 포기해 버렸을 것이다. 하긴 그랬더라도 이정표 하나 없는 곳에서 길을 제대로 들어선다는 보장은 없었겠지만 말이다.



학교 앞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 잠시 후 마을을 벗어나게 된다. 그리고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임도인 셈인데 시멘트로 포장되었을 뿐만 아니라 차량 두 대가 비켜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널찍하다. 뒤돌아보기라도 할라치면 마을이 한눈에 보인다. 양쪽의 산을 낀 마을이 포근하게 자리를 잡았는데 섬의 크기에 비해 작다는 느낌이다. 네 개의 마을 가운데 두 개만 남았는데도 저 정도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25분 만에 도착한 고갯마루에는 정수장이 들어앉았다. 이곳에서 길은 두 갈래 나뉜다. 아래로 내려가는 길은 민머리갯벌로 연결되고, 큰내끼와 작은내끼로 가려면 오른편 임도로 들어서야 한다. 민머리갯벌을 둘러본 다음에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얘기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도 있다. 이곳 송이도의 명물인 왕소사나무군락지로 들어가는 길이 정수장 옆으로 나있기 때문이다. 샛길을 따라 10분 정도를 들어가면 만날 수 있다는데, 소사나무를 신성시 하는 송이도 사람들은 숲에 터를 닦고 산제(山祭)를 지내왔단다. 1970년대 땔감이 귀했던 시절 주변 산들이 모두 민둥산으로 변했을 때도 소사나무군락지가 무사했던 원인이다. 켜켜이 서린 믿음이 수백 년 전의 모습을 고스란히 남겨둔 셈이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그냥 지나쳐버리고 말았다. 숲의 위치를 모른데다 이정표까지 세워져 있지 않으니 어떻게 찾아갈 수 있겠는가.



고개를 넘자마자 모세의 기적으로 유명한 각이도가 나타난다. 뒤에 보이는 큰 섬이 대각이도, 그 앞은 지금은 무인도가 되어버린 소각이도이다. 오른쪽에 있는 작은 섬은 각이도에 딸린 무인도다.



정수장에서 몇 걸음 더 내려가자 오른편에 송이저수지가 있다. 산악회에서 나누어준 지도에는 무장등으로 가는 길이 이 저수지의 오른편으로 나있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하지만 상수원인 저수지는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그렇다고 우회로가 따로 나있지도 않은 걸 보면 지도가 잘못 그려져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참고로 송이도에는 아직도 초분(草墳)을 하는 풍습이 남아 있다고 한다. 정수장에서 민머리 갯벌로 내려가는 부근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했는데 직접 확인해 보지는 못했다. 초분은 일종의 풀무덤으로 시신 또는 관을 땅 위에 올려놓은 뒤 짚이나 풀 등으로 엮은 이엉을 덮어 두었다가, 2~3년 후 탈곡된 뼈를 씻어(씻골) 땅에 묻는 무덤을 말한다.



10분쯤 내려갔을까 민머리갯벌이 나타난다. 건너편 각이도까지 4.5km(250m)바닷길이 열리는데, 모세의 기적을 보기 위해 일부러 찾는 사람들도 있단다. 갯벌로 내려가는 길가에는 여러 대의 경운기가 주차되어 있었다. 각이도까지의 바닷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다. 바닷물이 빠지면 드러나는 모래등에 지천으로 널려있다는 맛조개를 잡기 위해서이다. 주민들이 갯벌을 포함한 이 일대를 '보물창고'라고도 부른다면 대충 이해가 갈 것이다. 송이도는 다이어트 식품(저칼로리이지만 칼숨과 철분, 단백질이 풍부하단다)’으로 인기 만점인 맛조개의 주산지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맛조개는 크기가 크고 살이 부드러운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데치지 않고 회로 바로 먹어도 맛이 탁월하단다. 저칼로리인데다 칼슘과 철분, 단백질까지 풍부해서 미식가들도 많이 찾는단다. ! 옛날 이 부근에 이미마을이 있었다고 했다. 마을이 후미진 꼬리 부분에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하지만 지금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창고 같은 건물 하나와 방치된 수영장만이 시름을 달래고 있을 따름이었다.



바닷가에 내려서자 너른 갯벌이 펼쳐진다. 바닷물이 빠져 질퍽해진 갯벌은 온통 부드러운 진흙으로 뒤덮여 있다. 천연 머드팩(mud pack)이라 할 수 있겠다. 갯벌 너머는 모래등(풀등이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이라 불린다. 바닷물이 빠지면 등을 드러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다른 한편으론 조개의 한 종류인 맛이 많이 난다고 하여 맛등이라고도 불린단다. 이 일대에서 백합과 맛조개, 동죽이 채취되며, 각 종 갯벌체험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정수장까지 되돌아 나와 이번에는 오른편 임도를 따른다. 가파르지 않은 오르막길을 따라 2~3분쯤 진행했을까 왼편으로 임도 하나가 나뉜다. 이정표가 없어 그냥 지나쳐버렸지만 어쩌면 무장등으로 가는 들머리가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해도 문제는 있다. 이 길을 따를 경우에는 아까 보았던 송이저수지 위의 계곡까지 떨어졌다가 다시 올라야만 무장등 능선으로 연결될 것 같기 때문이다.



정수장에서 10분 정도를 더 걷자 삼거리가 나온다. 앞서가던 일행들이 우왕좌왕하고 있는 게 보인다. 이정표가 없으니 어디로 가야할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일단은 왼편으로 진행하고 본다. 걸어온 길을 가운데에 놓고 왼편으로 가야만 작은내끼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서이다.



4분 후, 오른편으로 임도 하나가 나뉜다. 비포장인데 일단은 들어서고 본다. ‘무장등(147m)’으로 오르는 길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네이버(Naver) 지도도 비슷한 지점을 가리키니 망설일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일행들도 하나같이 무장들으로 가는 길이라고 격려한다. 하지만 뒤따르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작은내끼를 다녀오는 길에 오르려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무장등이라는 자신의 믿음에 대해 확신이 서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이곳 송이도에는 지금 오르려고 하는 무장등 외에도 왕산봉(161m)과 내막봉(111m)이라는 산봉우리가 더 있다.



완만한 오르막길을 따라 10분 남짓 진행하자 산꼭대기가 나온다. 그런데 이곳이 무장등이라는 그 어떤 표식도 눈에 띄지 않는다. 정상석이나 이정표는 물론이고 그 흔한 리본하나 매달려 있지 않은 것이다. 나중에 친환경 가족펜션에서 세워놓은 송이도 지도를 확인해보니 무장등은 다른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다음(Daum)의 지도도 비슷한 지점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까 펜션 앞을 지날 때 사진만 찍지 말고 지도도 좀 꼼꼼히 살펴봤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랬다. 그렇다고 해서 무장등을 찾아갈 수 있다는 보장은 없겠지만 말이다. 등산로는 물론이고 들머리가 어디서 열리는지도 나타나 있지 않으니 무슨 수로 찾아갈 수 있겠는가.



임도는 꼭대기를 넘지만 우리 부부는 되돌아 나오기로 했다. 계속해서 포장임도를 따르고 있는 일행들과 행동을 같이 하기 위해서이다. 가는 길목에 잘 지어진 정자가 보인다. 헛고생한 다리가 힘들다는 신호를 보내오는데 마침 잘되었다.



정자를 지나면서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작은내끼라 불리는 작은 몽돌해안에 내려선다. 아까 배에서 내리자마자 보았던 몽돌들 보다는 굵기가 꽤 굵어졌다. 생김새 또한 거친 모양새이다. 삼거리에서 이곳 작은내끼까지는 35분이 걸렸다. 아까 무장등으로 여겨지는 봉우리까지 올라갔다 오는데 15분 정도가 걸렸으니 실제로는 20분이 걸린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보잘 것이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조약돌의 질은 좀 떨어지지만 해식애(海蝕崖)가 그 부족함을 채워주고도 남기 때문이다. 거대하지도 그렇다고 으스스할 정도로 날카롭지도 않지만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부족함이 없는 바위절벽이 몽돌해안의 좌우로 기다랗게 펼쳐진다.



이곳 작은내끼도 낙조(落照)의 명소로 알려져 있다. 누군가는 송이도의 자랑거리를 늘어놓으면서 그중 제일은 낙조라고 했다. 서해안의 작은 섬들 너머로 지는 노을이 매우 이국적이라는 것이다 .특히 겨울철 눈발이 날리는 송이도 앞바다로 떨어지는 노을은 이곳 섬에서만 만끽 할 수 있는 것으로 영화의 한 장면 같은 환상적인 풍경화 그 자체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런 행운은 주어지지 않았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섬을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오른편 길로 향한다. 5분쯤 걸었을까 이번에는 사거리가 나온다. 정자를 짓고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이번에도 왼편으로 향하고 본다. 눈대중으로 큰내끼가 왼편에 있을 것 같아서이다.



5~6분쯤 걸었을까 큰내끼를 코앞에다 둔 지점에서 왼편으로 길이 나뉜다. 상당히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왼편으로 접어들어 5분쯤 오르자 전망대가 지어져 있다. 수십 마리의 염소들이 우리를 피해 도망치는 걸 보면 그네들에겐 쉼터인 모양이다. 아무튼 임도는 계속해서 비탈진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이 길은 아까 우리 부부가 무장등이라고 여겼던 산봉우리로 연결된다. 부득부득 끝까지 올라갔다 내려온 일행들이 내린 결론이다.



전망대에 서면 발아래에는 해식애로 이루어진 해안선이 펼쳐지고 눈이라도 들라치면 안마도와 오도, 대석만도 등이 잘 조망된다.




전망대에서 내려와 이번에는 큰내끼로 내려선다. 밀물과 썰물에 따라 냇가가 드러나고 덮인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라는데 아까 들렀던 작은내끼와 규모의 차이는 별로 없어 보인다. 자갈의 크기도 비슷하다. 다만 해식애(海蝕崖)가 아까보다는 훨씬 더 커졌다. 해안가 공터에는 캠핑카가 주차되어 있다. 송이도의 자랑거리라는 일몰이라도 보려는 모양이다. 하지만 화장실도 설치되어 있지 않은데다, 근처에 식수로 사용할 수 있는 수원지도 눈에 띄지 않는다.





바위절벽의 규모가 커지다보니 해식동굴도 생겨났다. 이 동굴은 기암괴석을 액자로 두른 듯한 풍경이 일품이다. 그래선지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의 흔적에는 어김없이 들어가 있다. 아무튼 누군가는 저 바위를 일러 거북바위라 했었다. 금세라도 물가로 기어오를 것 같다면서 말이다. 그러나 내 눈에는 촛대바위에 더 가까워 보인다. 까짓 서로 다르게 보인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무학대사도 시안견유시 불안견유불(豕眼見唯豕, 佛眼見唯佛)’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큰내끼를 빠져나와 이번에는 왼편으로 향한다. 어디로 갈까를 놓고 망설이는데, 캠핑카 부부가 아까 우리가 걸어왔던 길과 만나게 된다고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제법 가파른 오르막길을 따라 10분 남짓 진행하자 사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는 오른편으로 진행한다.



이후부터는 능선길이 이어진다.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되지만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대신 눈에 담을만한 볼거리도 없다. 그렇게 15분 남짓 걷다보면 아까 지나왔던 쉼터 사거리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서는 큰내끼와 반대방향으로 진행한다.



10분쯤 걸었을까 오른편에 헬기장이 만들어져 있다. 왼편에는 체육시설도 들어서 있다. 양골마을이 있었던 곳일 게다.



이젠 해안도로를 따른다. 대략 2정도 되는 거리인데 왼쪽으로 바다를 끼고 이어지는 구불구불한 S자형의 해안도로에서는 칠산도가 뚜렷하게 보인다. 난간 아래의 해안은 바위와 커다란 돌들로 이루어져 있고, 해식으로 생긴 동굴과 절리층이 잘 발달된 해안절벽은 경관이 수려하다.



바다 건너에 보이는 섬들은 대노인도와 소노인도일 것이다. 그 뒤는 칠산 앞바다라는 조기어장의 대명사를 만들어냈던 칠산도일 것이고 말이다. 조기가 사라지다시피한 칠산도는 이제 천연기념물들이 터를 잡았다고 한다. 크기가 비슷한 일곱 개 섬에 세계적인 희귀조 노랑부리백로(천연기념물 361)와 수달(천연기념물 330)이 서식하고 있단다. 칠산도에 무리지어 산다는 괭이갈매기도 매력적이다. 환경부에서 전국의 아름다운 소리 100을 선정했는데 살아있는 생물체 중 이곳 괭이갈매기 소리가 1위로 선정되었을 정도란다.



길가 바위들은 하나 같이 차돌(石英, quartz)이다. 도자기의 원료로 사용되는 규석(硅石, silica)의 일종인데 이따가 만나게 될 몽돌해안의 돌들도 같은 성분이란다. 아무튼 바위가 흰색을 띄는 걸로 보아 순도가 높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긴 40년 전 까지만 해도 폭약을 이용해 규석을 채취하던 광산이 있었다니 이를 말이겠는가.



모퉁이를 돌아서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작은마을(小村)’이 나타난다. 모래해변을 끼고 있는 풍경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그래서였을까, 2003년 해양수산부에 의해 아름다운 어촌 100마을로 선정되기도 했고, 2005년에는 ‘6월의 어촌으로도 선정되었다고 한다.



마을로 들어서기 직전 만나는 팽나무 두어 그루가 시선을 끈다. 한 그루는 수령이 천 년을 넘겼을 것이라고 한다. 육지에서도 천 년 수령의 나무를 찾기는 힘들다. 정확한 수령은 측정해 보아야 하겠지만 보통은 아닌 게 분명하다. 팽나무 아래는 작은 공원을 만들어 놓았다. 정자와 파고라, 벤치 외에도 데크와 식수대까지 갖춘 걸 보면 야영장이 아닐까 싶다.



모퉁이를 돌아서면 하얀 자갈마당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송이도를 세상에 알린 몽돌해수욕장이다. 맨발로 걸어도 감촉이 좋을 정도로 아주 작고 부드러운 몽돌들이 3km나 깔려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콩돌 해수욕장이라고도 부른단다. 하지만 이곳 송이도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따로 있다. 바로 몽돌의 색깔이다. 전국에서 백령도해안과 함께 유일하게 하얀색 몽돌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오염되지 않은 푸른 바다와 하얀 조약돌이 깔려있는 30ha의 광대한 해변은 서해에서는 보기 드문 풍경이다.



몽돌위에 주저앉는다. 돌이 깨끗하니 옷 걱정도 없다. 공기놀이 흉내도 해보다가 이번엔 자갈밭에 드러눕는다. 강한 햇빛에 달구어진 돌에서 발생하는 원적외선은 천연의 치료제라고 하지 않았던가. 세균 박멸효과와 성인병 예방, 신경통에 좋다니 이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이런 게 바로 행복인가 보다. 그 행복은 또 다른 여유를 가져다준다. 바다와 쉴 새 없이 부딪치는 몽돌들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그리곤 쉼 없이 달려가는 우리의 인생과도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모난 돌이 점점 둥근 돌로 변하듯, 우리의 인생도 둥글둥글해지니 말이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에 닳고 닳은 몽돌은 아기 피부처럼 매끄럽다. 공깃돌놀이에 딱 좋은 크기부터 두 손으로 들기 어려울 만큼 큼지막한 것까지 각기 다른 돌멩이가 산을 이룬다. 뭍과의 경계에는 보행을 위한 예쁜 데크 길이 놓였지만 사람들은 다들 몽돌 위를 걷는다. 하지만 맨발은 아니다. 천연 지압보다는 낭만이 우선인 모양이다. 아니 맨발로 걷기에는 철이 일러서인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송이도의 몽돌은 반출을 금지하고 있다고 한다. 송이도의 아름다운 해변을 그대로 간직하기 위해서란다. 예쁜 돌을 골라 갖고 놀다가도 돌아갈 때는 하나도 남김없이 해변에 던져두고 가야 할 일이다.



몽돌해변에서는 송이도와 칠산 앞바다로 오고가는 어선과 이를 따르는 갈매기들의 비행을 감상할 수 있다.



에필로그(epilogue), 이번 송이도 여행은 즐거움과 아쉬움이 함께했다. 아쉬움보다는 즐거움이 훨씬 더 컸지만 말이다. 그중 아름다운 경관들을 보는 즐거움이 가장 컸다. 몽돌해수욕장과 해식애로 이루어진 해안선, 그리고 모세의 기적이 일어난다는 각이도까지의 드넓은 갯벌은 그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빼어난 풍경이었다. 두 번째 즐거움은 점심식사를 했던 송이섬펜션(010-8756-9114)’의 주인장이 보여준 친절이라 하겠다. 섬내 유일한 식당이라서 들어간 곳이지만 각종 채소와 해산물을 이용한 밥상은 대도시 맛집보다도 더 맛깔스러웠다.

 

그뿐만이 아니다. 식사를 마치자마자 갯벌로 나간 집사람이 삐뚤이고동으로 여겨지는 바다고동을 한 대접이나 잡아왔는데 싫어하는 기색도 없이 삶아준 것이다. 덕분에 나에게는 더없이 좋은 안주거리가 될 수 있었다. 일행들까지 불러 모아 술판을 벌렸는데 그게 보기 좋았는지 인정 많은 주인장께서 전날 자기네가 잡은 것이라면서 더 크고 실한 바다고동을 한 사발이나 삶아다 주셨다. 그 분위기에 녹은 내가 만취해버렸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영광군청의 행정은 못내 아쉬웠다. 요즘은 섬들마다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여행객들을 맞으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게 대세이다. 그 일환으로 경관 좋은 곳에 산책로를 개설하는 한편 숙소 등의 편의시설들을 확충한다. 이때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이정표를 세우는 일이다. 그래야 초행(初行)에 나선 여행객들이 원하는 곳을 찾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곳 송이도에는 이정표가 전무(全無)했다. 덕분에 우린 물때만 모습을 드러낸다는 약수 샘물과 천연자연림으로 지정된 왕소사나무 군락은 물론이고 탐방기에 꼭 등장하는 동굴도 둘러보지 못했다. 이정표가 없다보니 그 위치가 어디쯤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그래도 나는 인심 좋은 송이도가 좋다. 미진한 행정력 때문에 내팽개쳤던 송이도에 대한 이미지를 한꺼번에 싹 되돌려 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더 찾아오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경관에 이렇게 넘치는 인심이 있으니 어찌 다시 찾지 않고 배기겠는가.

연대도(烟臺島)

 

여행일 : ‘19. 7. 1()

소재지 : 경남 통영시 산양읍 연곡리(연대마을)

산행코스 : 출렁다리선착장북바위전망대오곡도전망대연대봉마을에코체험센터몽돌해수욕장출렁다리(소요시간 : 2시간 20)

 

함께한 산악회 : 좋은사람들

 

특징 : 통영항에서 남쪽으로 18해상에 위치한 작은 섬으로 오곡도(烏谷島)와 함께 연곡리를 이룬다. 면적 0.77에 해안선도 다 합쳐봐야 4.5km에 불과할 따름이다. 하지만 북동쪽 해안가에서 패총(사적 제335)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섬의 역사는 아주 오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아름다운 한려해상 국립공원의 일원이기도 한데, 과거 임진왜란 당시 봉화불을 올려 적군의 침략을 알리던 곳이라 해서 연대도(烟臺島)라는 이름이 붙었단다. 그런데 주민이 80명도 채 되지 않는 이 섬이 지난 2007년부터 매우 특별한 도전을 해오고 있단다. ‘탄소배출 제로화가 바로 그것이다. 석유나 석탄과 같이 지구온난화를 유발하는 화석연료의 사용량을 줄이고 재생에너지를 적극 활용함으로써 지속가능한 발전의 길을 모색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생태적 도전이 결실을 맺으면서 연대도는 이제 에코 아일랜드로서의 새로운 면모를 갖췄단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하는 ‘2012 대한민국 공간문화대상에서 대상(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게다가 인적이 뜸하던 이곳이 생태관광의 모범사례로 이어지며 주민들의 추가적인 소득 창출로까지 이어지고 있다니 대단하다 하겠다.


 

연대도 트레킹은 연대도와 만지도를 잇는 출렁다리이다. 길이 98.1m에 너비가 2m인 이 출렁다리는 2015년에 놓였다. 조성계획은 2010년 연대도가 '명품섬 10'에 선정되면서 세워졌단다.




다리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안정감이 있었다. 덕분에 걸음도 탄탄해진다. 마음까지 느긋해지며 가운데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는 여유까지 생긴다. 다리 아래 두 섬 사이는 암초 해협. ‘자란목도라 부른다는데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다. 작은 낚싯배 하나가 해협을 통과해 연대도의 단애 아래를 항해한다.



한려수도 청정해역을 가로지르는 이 다리에서 바라보는 바다 풍경은 색다른 감동을 선사한다. 다리 앞뒤로 학림도 저도 연화도 욕지도 등 크고 작은 아름다운 섬들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고 멀리 '한국의 나폴리' 통영이 시야에 들어온다. 다리 수십 m 아래 코발트색 짙푸른 바다는 아찔하고 짜릿한 전율을 자아낸다.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출렁다리로 연결된 만지도의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연대도와 만지도는 그동안 닿을 듯 떨어져 살아왔다. 주민들의 마음까지 떨어져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외로움에 젖은 섬과 섬에 새로운 다리가 놓였다. 섬사람들은 이제 서로 바라만 볼 필요가 없어졌고 마음만 먹으면 하시라도 서로를 오간다. 그 다리가 이젠 우리 같은 여행객들의 차지가 되었다. ‘출렁다리라는 눈요깃거리에 더해 두 섬을 한꺼번에 돌아볼 수 있다는 매력에 이끌려 찾아온 사람들이다. 섬으로 봐서도 복덩어리다. 어느 섬에 내리더라도 두 섬에 이익이 되니 -(win-win)’의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



출렁다리에서 내려오면 물양장(物揚場)이 나온다. 너른 마당에는 커다란 천막이 여럿 쳐져있다. 주민들이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는 횟집이란다. 이곳의 주 메뉴는 전복해물라면, 라면에 전복이 통째로 들어가는데 전국 방송을 탔을 정도로 유명해졌다. 그러다보니 요즘에는 연대도에 가면 꼭 먹어봐야 할 음식으로 꼽히기도 한다. 그래도 자신 있게 내놓은 메뉴는 단연 라고 한다. 참돔, 우럭, 뽈락세꼬시, 전복, 해삼 등 직접 잡아 올린 해산물을 주문과 동시에 회를 쳐준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구경하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우리를 태우고 갈 배가 만지도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여유로운 식사를 즐기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개인이 운영하는 식당이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식당은 물론이고 카페에 숙박까지 가능한 연대 펜션도 들어서 있었다. 왼쪽 끄트머리에 보이는 2층 건물은 공중화장실이다. 사용하지 않는 샤워시설을 리모델링했다는데 널찍하면서 깨끗한 게 외국의 내노라하는 유료화장실보다 오히려 한 수 위이다.



바닷가에 조립식 형태의 연대승선장이 보인다. 여객선이 이곳으로 들어오는 모양이다. 참고로 연대도로 들어오는 배는 미륵도 남단의 달아선착장에서 출발한다. 하루 네 번을 운항하는 섬나들이호를 탈 경우 송도와 저도, 학림도를 경유하는데, 시간은 30분 정도가 걸린다.



물양장에는 방문객센터를 겸하고 있는 마을회관이 자리하고 있다. 국내 최초의 패시브 하우스(Passive house)’로 꾸며진 건물이란다. 패시브 하우스란 화석연료를 사용하지 않고 지열이나 태양광 같은 자연 에너지만으로 냉난방을 해결하는 착한 건물이다. 쉽게 말해 보일러나 연탄 없이도 따뜻한 겨울을 날 수 있다는 애기이다. 이를 위해 단열(斷熱)은 기본이다. 기초공사를 할 때는 땅을 깊이 파서 지열을 끌어올린다. 이렇게 하면 여름엔 시원하고 한겨울에도 기름 한 방울 없이 온돌과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단다. 한국패시브건축협회는 기름을 연간 1리터 미만을 사용하는 건물에만 인증서를 주고 있는데, 이 건물엔 아예 기름통 자체가 없단다. 참고로 패시브 하우스(Passive house)’는 에너지를 적극적(active)으로 끌어오는 다른 건물들과는 달리 햇빛이나 사람의 체온, 땅에서 얻은 열에너지 등을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게 차단만 한단다. 이름에 수동적(passive)’이란 단어가 붙은 이유이다.



연대도도 역시 방파제가 선착장의 역할까지 겸하고 있다. 양식작업에 사용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작은 배 몇 척이 정박해 있는 한적한 풍경 또한 만지도와 같다.




야외무대는 연대도 제일의 포토죤이다.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언제나 북적인다.



물양장에는 정자도 지어놓았다. ‘연곡리 연대마을이라고 적힌 마을 표지석은 그 앞에 있다. 연대도에 다녀갔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사람이 인증사진을 찍는 곳이다.



마을로 향한다. 바닥에 지겟길로 인도하는 파란색 선이 그어져 있으니 이를 따르면 된다. 마을회관을 지나자마자 연대도해설사가 사는 집이 있다. 민박과 매점을 겸하는데, 그 옆으로는 경로당이 있다. 연대도 경로당 이름은 구들이다. 어르신들을 위해 온돌을 넣었다는 애기일지도 모르겠다.



몇 걸음 더 걷자 빗돌(碑石) 두 개가 세워져 있다. 왼쪽의 검은 비석은 연대도사패지해면기념비(烟臺島賜牌地解免紀念碑)’이다. 연대도는 섬 전체가 1665년 충무공 사패지(임금이 내려주는 논밭)로 지정되면서 주민들은 소작농이 됐다. 1949년 농지개혁이 일어났지만 일부 대지와 전답은 여전히 충렬사 사패지로 남았다. 그러다가 198987일에야 섬 주민들의 소유가 됐다. 소유권 이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로 보면 되겠다. 다른 하나는 남해안 별신굿을 모시는 별신대(別神臺)’이다. 별신장군(別神將軍)이라고 적혀있는 이 비석을 동네사람들은 배선대라고 부르며 매년 정월 초순 좋은 날을 받아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제를 지낸단다. 참고로 통영의 충렬사(사적 제236)는 성웅 이충무공의 업적을 기념하고 위패를 봉안한 사당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8년 후인 선조 39(1606) 7대 통제사인 이운룡이 공의 충절과 위훈을 숭앙추모하기 위하여 왕명에 의해 건립했다. 숙종 21(1695)에는 연대도(통영시 산양읍 소재)를 사패지로 받아 위토전답을 마련했다. 연대도 사패지 사여를 기록한 비석은 현재 충렬사에 남아 있다.





마을로 들어서자 다양한 문패들이 시선을 끈다. ‘윷놀이 최고 고수, 서재목 손재희의 집에는 목소리 크고 음식 솜씨 좋은 아내 손재희, 연대도 개그맨 서재목 씨가 달리기를 잘하는 김동희 할머니와 함께 사는 집이라고 적혀있다. 전통 어가를 그대로 간직한 백옥수 할머니 집은 영화 백프로에 나온 집이라고 소개한다. 연대도에서 태어나 연대도로 시집 왔다는 허우두리 할머니댁도 보인다. 문패가 곧 집주인의 삶의 현장인 것이다. 덕분에 문패만 봐도 누가 그 집에 사는지 선명하게 그려진다. 한마디로 재미난 볼거리다.



노총각 어부가 혼자 사는 집도 보인다. 화초를 좋아해서 목부작을 잘 만드는 이상동 어촌계장의 집이라며 말이 없어서 답답할 정도지만 사람은 좋단다. 여행 온 노처녀를 노리는 광고가 아닐까? 아무튼 집집마다 걸어놓은 문패는 연대도만의 자랑이다. 문패야 다른 지역에도 달려있지 않느냐고 항의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름만 달랑 적혀있는 다른 곳의 문패와는 격이 다르다. 이곳 연대도의 문패에는 주인장의 삶과 낭만, 그리고 유머까지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하나 읽어가며 걷다보면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는 집주인의 모습이 그려지면서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고인다. 이런 걸 두고 힐링 여행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연대도 지겟길연대도 맑은뜨락 펜션의 오른쪽 옆구리를 낀 골목에서 열린다. 들머리에 이정표(북바위 전망대0.7, 연대도 지겟길 2.3/ 에코체험센터250m)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정표에는 연대도 지겟길 방향에다 선착장이란 지명을 추가하면서 그 거리를 2.3로 적었다. 지금 우리가 서있는 지점이 곧 선착장이니 연대도 지겟길의 길이를 표시해 놓은 게 아닐까 싶다. 맞다. 지겟길의 총 길이가 2,240m이라니 제대로 추론한 셈이다. 그나저나 제주도의 올레길을 연대도에다 옮겨놓은 지겟길은 그다지 멀지 않은 옛날 부모님들이 나무하러 다니던 그 길이란다. 소박하게 복원 된 이 길은 이야기가 있고, 전설이 있으며, 무엇보다 남부해안 상록수림대 사이로 보이는 바다와 섬의 풍경이 독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이 길은 탄소제로의 섬, 생태관광의 섬으로 기획된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로 두발로 걷는 천천히 삶을 지향하는 휴식 공간이란다.



마을 안길을 통과한 파란색 선은 아치형으로 만들어놓은 대문 앞으로 인도된다. ‘연대도 지겟길이라는 이름표도 달고 있다. ‘한려해상 바다 백리길(이하 바다백리길)’ 4구간이라는 첨언도 빼놓지 않았다. 바다백리길이란 한려해상국립공원 통영지구에 조성된 트래킹 코스로 바다를 통해 육지와 연계된 섬길을 걸으며 바다와 섬의 생태·역사·문화를 체험하고 한려해상공원의 아름다움과 섬사람들의 이야기를 느낄 수 있도록 조성해놓은 해양 탐방코스이다. 지난 2014년에 개통되었는데 1구간 미륵도 달아길 14.7km, 2구간 한산도 역사길 12km, 3구간 비진도 산호길 4.8km, 4구간 연대도 지게길 2.3km, 5구간 매물도 해품길 5.2km, 6구간 소매물도 등대길 3.1km 6개 구간 42.1km로 이루어져 있다.





대문으로 들어서면 지극히 에코아일랜드다운 풍경을 만나게 된다. 연대도가 에코아일랜드로 자리 잡는데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태양광발전소이다. 이 발전소는 물질이 빛을 흡수할 때 물질의 표면에서 전자가 생겨 전기가 발생하는 광전효과를 이용한단다. 태양열 발전과는 달리 직접적으로 태양빛에서 전기를 생산하는 방식이라서 친환경에 가장 어울린다는 것이다. 아무튼 3짜리 모듈 50개로 이루어진 150급 발전소인데, 연대도 전 세대에 전기를 공급하고도 남는다니 엉성한 생김새에 비해 효율성 하나는 끝내준다고 봐야겠다.



이젠 지겟길을 걸어볼 차례이다. 울창한 산죽 숲으로 들어서자 삼거리(이정표 : 북바위전망대 0.6, 선착장 2,2/ 마을입구 0.1)가 나온다. 왼편은 연대봉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나 샛길 출입금지팻말을 세워놓아 출입을 막고 있다. 그러고 보면 연대봉은 지겟길에서 빠져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연대봉에서 내려올 때 이 길을 이용했었다. 정상에는 이 구간을 막겠다는 표식을 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길을 울창한 숲속을 헤집으며 나있다. 그러나 가끔은 숲이 열리기도 한다. 그 사이에는 연대도의 아름다운 경관들이 어김없이 들어앉았다. 첫 번째로 선을 뵈는 풍광은 몽돌해안이다. 끄트머리에서 홀로 우뚝 솟아오른 작은 바위섬이 특히 인상적인 해안이다. 저 섬에는 해식동굴도 뚫려있단다.



길은 잘 닦여있다. 지겟길답게 조금 좁아 보이지만 한 사람이 걷기에 불편함이 없다. 조금만 몸을 비튼다면 맞은편에서 오는 사람들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 경사가 가팔라져도 문제될 것이 없다. 조금만 가파르다 싶으면 어김없이 나무계단을 놓았기 때문이다.



가난한 시절, 나무 땔감을 하려고 지게 지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여자들도 나무를 한 단씩 머리에 이고 내려오던 고생길이다. 추억으로만 남아있던 그 길이 이젠 여행객들의 차지가 되었다. ‘지겟길이란 이름을 달고 산책길로 다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 길을 따라 여행객들은 연대봉 산길을 오른다. 생존의 길이 낭만의 길로 변한 것이다.



주위 경관을 감상하며 걷다보니 '복바위 전망대(이정표 : 오곡전망대 0.5, 선착장 1.7/ 마을입구 0.6)'가 나온다. ‘복바위라는 이름에 이끌려 주변을 살펴봤지만 바위는 보이지 않는다. 뭔가 사연이 있을 법한데 뭔지는 모르겠다.



전망대에 오르면 멀리 욕지도 일대의 섬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고 알려져 있다. 그 섬들을 그려 넣은 조망안내도까지 세워놓았으니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내부지도 하나만이 눈에 들어올 따름이다. 짙게 낀 해무가 시야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눈까지 깨끗하게 정화시켜 준다는 그 푸르디푸른 바다 빛깔도 온전히 나타날 리가 없다.



잠시 후 길은 작은 옹달샘으로 안내한다. 산중턱에 이러한 샘이 있다는 게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래선지 옆에는 벤치를 놓고 야생화 이야기나무 이야기라는 안내판도 설치했다. 목이라도 축이면서 잠시 쉬어가라는 배려일 것이다. 하지만 물을 떠 마실 바가지는 보이지 않는다. 물의 양 또한 넉넉하지 않다. 그냥 지나쳐버리는 이유이다.




걷는 내내 길은 울창한 숲길이다. 길은 잠시 야트막한 오르막이 있을 뿐 절대 가파르지 않다. 섬의 5부 능선을 한 바퀴 가로 지르는 탓이다. 그러니 힘이 들 리가 없다. 안전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산비탈에 내놓은 길이지만 조금이라도 위험하다 싶으면 바다 쪽에다 난간을 둘러놓았기 때문이다.



잠시 후 또 다른 전망대(이정표 : 선착장 1.2/ 마을입구 1.1)를 만난다. 이번에는 '오곡도 전망대'라고 한다.



이곳에서는 오곡도를 앞세우고 그 뒤로 비진도가 보인다고 알려져 있다. 전망대 왼편으로 눈을 돌리면 학림도와 그 너머 통영 육지의 끝인 척포마을까지 시야에 잡힌다고 했다. 통영 ES리조트까지 시야에 들어온단다. 그만큼 육지와 지척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이곳도 역시 해무에 가로막히기는 매한가지였다.



또 다시 트레킹을 이어간다. 길은 대부분 평평하지만 가파르게 오르내리는 곳도 나타난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오르내림의 길이가 짧을 뿐만 아니라 나무계단까지 설치해 놓았기 때문이다.



조금 더 걷자 오솔길 하나가 왼쪽으로 나뉜다.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지만 연대봉으로 올라가는 길일 것이다. 그런데 아까와는 달리 통행을 막지는 않는다. 그저 쓰레기 투기와 취사·야영·흡연 등 국립공원에서 하지 말아야할 사항들만 적어 놓았다. 연대봉을 꼭 올라보고 싶었던 우리 부부로서는 다행이라 하겠다.



두말할 것도 없이 오솔길로 들어서고 본다. 그리곤 가파른 오르막길을 치고 오른다. 왔다갔다 갈 지()’자를 쓰고 나서야 겨우 오를 수 있을 정도로 가파른 오르막길이 계속된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오르면 연대봉(烟臺峰)’이다. 섬 정상인 이곳에 봉수대(烽燧臺)가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 삼도수군통제영에서 왜적의 동향을 알리기 위해 섬 정상에 봉수대를 설치하고 봉화를 올렸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때도 이곳 연대봉에서 봉화가 올랐음은 물론이다. 그 신호를 받은 이순신장군이 인근 한산도(閑山島)에서 대승을 거둘 수 있었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이곳에 봉수대가 있었다는 그 어떤 표식도 찾아볼 수 없고, 그저 돌무더기만 수북이 쌓여있을 따름이다. 정상석은 물론이고 그 흔한 이정표도 보이지 않는다. 대구의 산악인 김문암씨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정상표지판이 이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세월은 봉수대의 특징인 조망까지 삼켜버렸다. 울창한 숲이 시야를 완벽하게 막아버린 것이다.



뒤로 돌아가자 새끼줄로 금줄을 쳐놓았다. 신성한 지역으로 들어가지 말라는 경고일 테니 당집이 분명할 것이다. 누군가는 이곳을 연대도의 신전이라 했었다. 하지만 신을 모셔야할 전각은 없고 그저 돌담만 두르고 있을 따름이다. 참고로 연대도의 주민들은 매년 정월 초하루에서 5일 사이, 길일을 택해 당제를 지낸다고 한다. 당은 두 곳이란다. ‘윗당산은 이순신 장군의 혼을 달래주는 산제를 드리는 곳이고, ’아랫당산에서는 장졸들의 영혼을 달래주는 당제를 모신단다. 마지막에는 마을 가운데 있는 별신굿 터에서 별신장군제를 지낸다. 예전에는 무당을 초청하여 3일간 별신굿을 진행했지만, 지금은 스님을 초청해 와서 마을 주민들과 같이 제를 올린단다.



하산을 시작한다. 올라왔던 반대방향이다. 길은 서두르지 않고 서서히 고도(高度)를 낮추어간다. 아까 올라올 때 보다는 그 거리가 많이 길다는 얘기일 것이다. ! 여기서 알아두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은 새로운 코스를 걷는 다는 것 말고는 특별히 눈에 담을 것이 없다. 그러느니 아까 올라왔던 길로 되돌아가 계속해서 지겟길을 타는 것이 훨씬 더 나아 보인다. 전체적인 동선(動線)의 낭비도 줄일 수 있다. 연대도 방문을 계획하고 있는 사람들이 참조하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숲길을 빠져나오자 웃자란 잡초가 갈 길을 막는다. 거기다 칡넝쿨까지 얽혔다. 그 너머로 펼쳐지는 바다에는 가두리양식장이 즐비하다. 마을의 주 수입원인데 우럭과 광어, 참돔 등을 기르고 있단다. 연대도 바다는 청정수역이다. 그러니 잡는 어업이 아주 사라졌을 리가 없다. 예전만 못하지만 지금도 전복, 소라, 고동, 해삼 등이 많이 잡힌다고 한다. 길은 이쯤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곤 울창한 대숲이 만들어낸 터널 속으로 파고든다. 한 점의 빛줄기가 그리울 정도로 어두운 터널이다. 이어서 트레킹을 시작하면서 맨 처음 만났던 이정표를 거쳐 마을로 내려선다.



마을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해안길을 따른다. ‘에코체험센터로 가보기 위해서이다. 잠시 후 길은 둘(이정표 : 연대도 지겟길50m/ 에코체험센터0.1)로 나뉜다. 오른쪽은 섬을 한 바퀴 도는 지겟길이고, 왼쪽은 에코체험센터로 들어가는 해안길로 데크 시설이 되어 있다.



데크로드를 따라 잠시 걷자 에코체험센터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폐교된 조양분교를 리모델링했는데 최대 50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숙박시설과 식당, 강당, 샤워실을 갖추고 있다. 건물은 에코체험센터라는 이름에 걸맞게 태양광과 지열만을 쓰는 패시브 하우스(Passive house)로 꾸몄다고 한다. 운동장도 역시 놀면서 대안 에너지를 학습할 수 있도록 태양열조리기와 자전거발전기 등 다양한 시설을 갖추어 놓았다. 좋은 시설이라 하겠다. 하지만 페인트가 벗겨져 있는 등 관리가 허술해 보이는 것은 흠이라 하겠다.




체험센터의 앞 해안은 조금 거칠기는 하지만 모래사장으로 이루어졌다. 해수욕장으로 제격이라 하겠다. 그러나 개발이 되지 않은 채로 방치되고 있다. 해수욕을 하러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서인지는 몰라도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연대도 유일의 모래해변에다 학림도와 저도가 한눈에 들어오는 조망까지 갖춘 빼어난 조건을 낭비하고 있는 것 같아서이다.



에코체험센터의 앞은 다랭이 꽃밭이다. 마을 뒤편의 묵정밭을 꽃밭이라는 관광자원으로 탈바꿈시킨 것인데 들머리에다 나 여기에길손이라고 적힌 두 개의 장승을 세워 여행객을 맞고 있다. 꽃을 구경하는 것은 좋지만 주민들의 텃밭에 심어진 작물을 다치지는 말아달라는 안내판도 보인다. 그 옆에는 손님을 유혹하는 홍보문구들도 보인다. 세금 안내려고 차도 공짜로 준단다. ! 꽃밭 너머에는 사적 제335호인 연대도 패총(貝塚)’이 있다고 했다. 신석기시대의 유물이 발견되었다지만 아직은 여행객에게 내놓을 만큼 단장되지 않았다고 해서 가보지는 않았다.



다랭이 꽃밭에는 이름 모를 들꽃들이 활짝 피어났다. 누군가 벌노랑이와 톱풀, 달맞이꽃, 꽃향유 등이라고 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이 일대에 개양귀비와 국화, 안개꽃 등이 철따라 피어난다는 얘기도 들은 것 같은데 확인해 볼 수는 없었다. 이 모든 것은 연대도 할머니들이 뿌린 꽃씨의 아름다운 결실이라고 한다.



마을로 돌아와 이번에는 몽돌해안으로 향한다. 골목 입구에 몽돌해변 가는 길이라며 방향표시까지 해놓았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50m쯤 들어가자 국명당(鞠明堂)’이라는 현판을 단 집이 나온다. 어른 키보다도 높은 시멘트담장을 둘렀는데 연대도에 사는 달성 서씨들의 제실(祭室)이라고 한다. 그 옆에는 벽화가 그려진 집도 있다. 이어서 식당을 겸하고 있는 소나무숲 펜션앞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 동네 뒤 언덕에 올라선다. 이곳에 몽돌해안에 대한 안내판을 세워두었다.



몽돌해안으로 내려가다 보니 오른편에도 해안이 하나 더 있다. 꼬맹이 해안인데 나무계단이 놓여있는 걸로 보아 뭔가 볼거리가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직접 확인해 보지는 못했다. 먼저 몽돌해안을 둘러본 다음 천천히 살펴보려고 했는데 위에서 기다리고 있던 집사람의 짜증스런 재촉에 놀라 그 사실을 깜빡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몽돌해안에 내려선다. 아래로 내려갈 수 있도록 목재계단이 놓여있다. 위에서 보았을 때는 아주 좁게 보이던 해안이 막상 내려와 보니 넓이가 제법 된다. 제법 큰 돌멩이들로 이루어진 해안은 세월이 빚은 작품이다. 어느 하나 모난 것이 없는 돌들은 신경통에 좋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여름철만 되면 달궈진 몽돌에 몸을 눕히려는 피서객들로 항상 붐빈단다. 안내판에도 맨발 걷기를 하면 무겁게 느껴지던 발이 가벼워지고 마음과 몸의 평화를 되찾을 수 있다고 적혀 있었다.



건너편에 보이는 바위봉우리는 분명 섬이다. 하지만 물이 빠져나가면 뭍으로 변한다. 섬의 벼랑 위에는 곰솔 숲이 우거져 있다. 푸른 예기를 번뜩이고 있는 게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바닥에 깔린 몽돌을 하나하나 헤아릴 수 있을 만큼 투명한 바닷물과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어우러지며 절경을 이룬다. 누군가는 심신의 힐링이 필요한 사람들은 연대로로 가라고 했다. 내 생각도 같다. 어디로 눈을 돌려도 에메랄드빛 바다와 푸른 산 그리고 해안이 펼쳐지는데, 그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수평선처럼 힐링이 되기 때문이다.


만지도(晩地島)

 

여행일 : ‘19. 7. 1()

소재지 : 경남 통영시 산양읍 저림리(만지마을)

산행코스 : 선착장몽돌해변동백군락지욕지도전망대만지봉해송전망대바람길전망대선착장출렁다리(소요시간 : 1시간 30)

 

함께한 산악회 : 좋은사람들

 

특징 : 통영시에서 남서쪽으로 15km, 산양읍 달아항에서 3.8km 떨어진 해상에 위치한 작은 섬이다. 면적이라고 해봐야 7만 평이 조금 넘고, 해안선 길이도 다 합쳐봐야 2정도라고 한다. 주민은 2015년 기준으로 15가구 33. 찾아오는 사람들도 고작해야 낚시꾼들이 다였다고 한다. 그러던 섬이 최근 여행객들로 넘쳐난단다. ’출렁다리가 놓이고, ’명품마을로 탈바꿈되면서 사람들에게 입소문을 탔기 때문이다. 덕분에 섬에는 식당은 물론이고 펜션과 카페까지 들어섰다. 참고로 만지(晩地)‘라는 지명은 인근에서 가장 늦게 주민들이 정착했다는 데서 유래했단다. 섬이 지네 형상이라는 데서 찾는 사람들도 있다. 닭의 형상이라는 저도(楮島)‘와 솔개 형상인 연대도(烟臺島)‘와 함께 먹이사슬이 연결되므로 모두가 번성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하는 주장이다.


 

찾아오는 방법 : 만지도로 들어가려면 일단은 통영에 있는 연명항의 선착장(통영시 산양읍 연화리 256-1)까지 와야만 한다. 이곳에서 만지도로 들어가는 여객선이 출발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연명항은 통영시 산양읍(彌勒島, 미륵도)의 최남단에 위치한 항구로 통영-대전고속도로 통영 IC에서 내려와 14번 국도를 타고 원문고개(통영시 용남면 장문리)까지 온 다음, ‘1021 지방도, 그리고 영정교차로(통영시 명정동 854-1)에서부터는 ‘67번 지방도‘1021 지방도를 연속해서 타면 된다.



만지도로 들어가는 배는 외모부터가 여객선이라기보다는 유람선에 가깝다. 그래선지 다른 항구처럼 여객선터미널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매표소로 활용하고 있는 컨테이너박스가 부둣가에 놓여있을 따름이다. 그렇다고 편의시설까지 없는 것은 아니다. 널따란 주차장에다 깔끔한 화장실까지 딸려있다.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달아공원을 다녀오기로 했다. 최고의 일출(日出) 명소인 미륵산과 쌍벽을 이루는 일몰(日沒) 명소로 알려져 있는데다, 연명항에서 산양일주도로를 탈 경우 넉넉잡아 한 시간이면 다녀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려수도의 풍광을 눈에 담으며 20분쯤 걷자 한려해상국립공원 동부사무소 산양분소건물이 나온다. 휴게시설인 달아마루와 서로 마주보고 있는 모양새이다. 달아공원으로 가려면 두 건물의 사이로 들어서야 한다.



잘 닦인 산책로를 따라 잠시 걷자 관해정(觀海亭)’에 이어 달아전망대가 길손을 맞는다.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곶(, cape)의 끄트머리에 만들어놓은 전망대이다. 튀어나간 지형이 코끼리의 어금니를 닮았다고 해서 달아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는데, 요즘은 '달구경하기 좋은 곳'이라는 뜻으로도 쓰인단다. 통영 시민들은 보통 '달애'라고 부른다니 참조한다.



시야가 툭 터져있는 전망대는 한려수도의 바다 위에 점점이 떠 있는 한산, 욕지, 사량 등 3개 도서면 관내의 많은 섬들이 조망된다고 한다. ·소 장재도, 저도, 송도, 학림도, 곤리도, 연대도, 만지도, 오곡도, 추도, 욕지열도와 이름 없는 수많은 작은 바위섬에 이르기까지 아름다운 다도해의 풍경이 한눈에 쏙 들어온단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런 행운이 없었다. 어슴푸레한 바다에 해무(海霧)까지 끼면서 시야를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그 아쉬움을 전망대의 양 옆에 세워놓은 조망도(眺望圖)로 달래볼 따름이다. 아무튼 일품으로 알려진 일몰이야 시간을 맞추지 못했으니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섬들까지 눈에 담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아쉬워해야 할 것 같다.



홍해랑 3를 타면서 섬 나들이가 시작된다. 곁에 홍해랑 5가 정박되어 있는 걸로 보아 두 척이 번갈아가며 운행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배는 주말기준으로 첫 배인 830분 편을 시작으로 10, 그리고 11시에서 오후 5시까지는 한 시간 단위로 출발한다. 필요할 경우에는 수시운항도 가능하단다. 첫 배를 예매했던 우리 일행도 예정된 시간보다 40분이나 먼저 항구를 떠났었다. 그렇게 하도 자주 다니다보니 홍해랑호를 만지도의 '마을버스'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단다.



연명항에서 출발한 홍해랑호가 뱃머리를 바다 쪽으로 돌리자 눈앞에 통영의 섬들이 펼쳐진다. 그 섬들 사이를 10분 남짓 달리자 만지도 선착장에 도착한다. 선착장은 조그마한 섬치고는 제법 너른 광장과 대합실로 이루어져 있다. 대합실 옆에는 작은 도서관도 들어섰다. ‘세계위인 슈바이처’ ‘우리동네 느티나무등 제목이 따뜻한 몇 권의 책이 구비되어 있다. 배를 기다리면서 느끼게 될 무료함을 달래보라는 모양이다.



대합실 옆에는 만지도 명품마을에 대한 안내도도 세워놓았다. 만지도가 내세우고 있는 볼거리들을 놓치지 않고 모두 둘러보려면 한번쯤 살펴볼 일이다. 아니 숙소는 물론이고 카페와 음식점에 특산품판매점까지 소개하고 있으니 꼼꼼히 살펴보는 게 좋겠다. 다들 요즘을 일러 정보화시대라 하지 않던가. 아는 것만큼 보게 될 것이고, 아는 것만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바다를 향해 일자로 뻗어나간 방파제는 선착장의 역할까지 겸하고 있다. 주민이 적은 탓인지 정박되어 있는 배가 별로 없다. 배의 크기도 작은 것이 고기를 잡는 용도라기보다는 바다에 널려있는 양식시설을 운영하면서 쓰는 배들로 보인다.



배에서 내리자 선착장 바닥에 그려놓은 지도가 먼저 눈에 띈다. 지금껏 들락거린 섬들에서는 보지 못했던 풍경이다. 그래선지 다들 인증사진을 찍느라 바쁘다. 그림 너머에는 카페 홍해랑이 있다. 그런데 우리가 타고 온 여객선의 이름과 같지 않은가. 맞다. ’홍해랑은 이 마을에서 운영하던 여객선의 이름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2015년 만지도가 14명품마을이 되면서 관광객이 늘어나자 유람선 사업을 하던 ’()만지도해피투어와 협약을 맺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선사(船社)에 내준 이름에 대한 향수를 카페에서 달래고 있는 셈이다.



포토죤도 여러 개를 만들어 마음에 드는 배경을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한마디로 잘 가꾸어져 있다는 느낌이다. 그러고 보니 2015년엔가 이곳 만지도가 명품마을로 지정되었다는 기사를 본 것도 같다. ‘명품마을이란 국립공원 내 주민들이 삶의 터전인 국립공원을 스스로 보전하면서, 잘 보전된 생태계와 경관문화자원을 활용해 주민 소득과 국립공원의 가치를 동시에 높이기 위해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추진하고 있는 사업이다. ‘명품으로 가꾸어나가는데 드는 비용은 공단에서 지원하는데 그 조성사업이 마무리된 모양이다. 참고로 2010년 최초로 만들어진 관매도를 시작으로 현재 총 17개의 명품마을이 전국에 조성되어 있다.





마을로 들어서니 이층으로 지어놓은 마을회관이 길손을 맞는다. ‘명품마을조성사업이 가져다 준 섬 주민을 위한 편익시설일 것이다. 그래선지 1층에는 특산물판매점이 들어앉았다.



마을 초입에 만지도에는 백년 된 우물이 있습니다.‘라고 적힌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안내판은 옛 풍속화를 배경으로 넣음으로써 감칠맛을 한결 더했다. 그 뒤로는 뚜껑이 덮인 우물이 실제로 보인다. 상수도로 인해 지금은 사용을 하지 않지만 우물이 없던 시절에도 만지도는 물의 자급자족이 가능했단다. 이곳 외에도 서너 곳에서 물이 나오는데, 학림도, 연대도 등 물이 부족한 인근 섬 주민들이 배를 타고 빨래를 하러 오곤 했단다. 당시 우물은 식수를 떠가는 장소만은 아니었을 게다. 아낙네들의 사랑방 노릇을 톡톡히 했을 것이다. 가슴에 응어리진 얘기도 오갔을 것이고, 또 어떤 때는 음담패설로 흥흥거리기도 했을 것이다. 상상만 해도 즐거워지지 않는가.




우물이야기 말고도 만지 섬마을 사람들, 고향 만지도를 지키다는 등의 이야기를 담은 안내판들도 여럿 세워져 있다. 스토리텔링이 굉장히 잘 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그중에서도 군소할머니에 대한 얘기가 가장 눈길을 끈다. 예로부터 만지도는 돈이 되는 섬이라고 해서 많은 육지 처녀들이 시집왔다고 한다. 만지도 최고령인 임씨 할머니도 물 건너 척포에서 시집오셨는데 90평생을 만지도에 살면서 7남매를 키워내셨고, 지금도 물속의 군소를 재빠르게 잡아내신단다. 안내판은 할머니의 소소한 일상을 함께 적어 넣음으로서 읽는 이들의 감성을 자아내게 만든다. 이곳 만지도만의 특징이라 하겠다.



안내판만 세워놓은 게 아니다. 대문에 붙여놓은 문패도 구경거리이다. 우물에 기댄 담장을 낀 임인아할러니 댁에는 문어와 군소를 잘 잡는 만지도 최고령 할머니댁’, ‘천지팬션의 대문에는 우리나라 최초 3관왕 카누선수 천인식선수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라고 적혀있다. 그 외에도 동백민박손재주가 많으신 부녀회장님 댁’, 신형범씨 집은 양식업으로 대통령 훈장을 받았다는 내용을 적었다. 마실 나오듯이 느긋하게 걸으면서 읽어보는 재미가 나름대로 쏠쏠하다.




마을 담벼락은 온통 벽화로 채워져 있다. 경상남도 소재 대학교 학생들의 자원봉사가 만들어낸 소중한 작품들이란다. 그림은 만지도 이야기를 만지다라는 주제로 그려졌는데 대학생들이 시안(試案)을 직접 스케치하고 채색하여 완성시켰단다. 요즘 젊은이들 파이팅!’이다. 성조기나 흔들어대는 군상들로 인식되고 있는 우리네 늙은이들이 오히려 한 수 배워야 하지 않을까 싶다.



마을 앞 해안길을 100m쯤 걸었을까 이정표(만지봉0.7/ 선착장0.1) 하나가 세워져 있다. 만지봉으로 연결되는 탐방로는 이곳에서 왼편으로 갈려나간다. 우리 역시 왼편으로 방향을 틀었음은 물론이다. 방향을 틀자마자 화장실이 보인다. 깔끔하게 지어놓은 화장실은 외국의 유료화장실보다도 한결 낫다. 물이 귀한 섬인데도 불구하고 수돗물이 펑펑 쏟아지는 것은 물론이고 깨끗하게 유지·관리되고 있었다.



경사진 골목길을 50m쯤 오르자 삼거리(이정표 : 출렁다리0.4/ 만지봉0.6)가 나온다. 왼편은 출렁다리로 가는 길이란다. 이따가 돌아오는 길에는 왼편으로 진행해야겠다.



몇 걸음만 더 걸어 올라선 고갯마루에서 또 다른 삼거리(만지봉0.6/ 몽돌해변0.2/ 선착장0.2)를 만난다. 이곳에서는 마음 내키는 대로 진행하면 된다. 어디로 가더라도 섬을 한 바퀴 돌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린 몽돌해변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바람 하나 없는 잔잔한 바다에는 가두리 양식장이 들어앉았다. 그 너머로 보이는 부표들은 아마 굴양식장일 것이다.



고개 너머로 내려서니 다리 모양으로 만들어놓은 해안둘레길이 나온다. 명품마을을 조성하면서 만들어놓은 탐방로의 일부분일 것이다. 참고로 만지도의 탐방로는 총 2.5로 그 정점에는 만지봉(99.9)이 있다. 일출과 일몰을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 세 개가 만들어져 있는가 하면 해안둘레길에는 저렇게 나무 덱도 설치했다.



전망대도 만들어 놓았다. 눈앞에 펼쳐지는 조망을 느긋이 즐겨보라는 듯이 벤치도 놓아두었다. 고마운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 옆의 물개 조형물이 뜬금없어 보이는 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인근에 물개가 서식한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기에 하는 말이다. ‘조망안내도도 세워놓았다. 연명항이 있는 미륵도를 가운데에 놓고 추도와 사랑도, 곤리도, 저도, 송도 등이 그려져 있다. 하지만 지금 내 눈앞은 빈 공간뿐이다. 아침이어선지 몰라도 시야가 딱 막혀버렸기 때문이다.



이젠 해안길을 따른다. 깔끔하게 시멘트 포장이 되어있다. 주민들은 만지도를 한 바퀴 도는 이 옛길을 몬당길이라고 부른단다. ‘양지 바른 언덕이라는 뜻의 통영 사투리란다. ! 데크로드의 아래가 몽돌해안이었다는 걸 깜빡 잊을 뻔했다. 하지만 해변이라 부르기가 어색할 정도로 그 범위가 좁았다. 해안이 부족한 섬이다보니 그런 정도에까지 이름표를 달아놓았나 보다.



해안길의 끄트머리에 이르자 멋진 풍광이 펼쳐진다. 아랫도리를 바닷물에 담그고 있는 작은 바위섬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머리에 심지 모양의 소나무를 얹고 있으니 촛대바위로 불러도 손색이 없겠다.



해안길이 끝나면서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산비탈을 헤집으며 길이 나있는데 산자락이 온통 동백나무 천지다. 빛이 스며들지 못할 정도로 울울창창한 것이 동백나무숲으로 유명한 인근 수우도나 지심도에 조금도 뒤질 게 없어 보인다. ’만지(晩地)‘라는 섬의 이름처럼 사람의 손을 덜 탔다는 얘기일 것이다. 만지란 주변 섬 중에 가장 늦게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는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사람 손을 덜 탔기에 생태환경이 보존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명품마을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동백 숲속을 헤치다보면 삼거리(이정표 : 만지봉0.3/ 욕지도전망대0.05/ 동백숲길 만지마을1.0)가 나온다. 만지봉 정상은 왼편, 일단은 오른편에 있는 욕지도전망대로 향한다.



가는 도중에는 요런 쉼터도 만나게 된다.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에 푹 빠져 망중한이라도 즐겨보라는 모양이다.



몇 걸음 더 걷자 바위절벽의 끄트머리에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다. 욕지도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다고 해서 이름 또한 욕지도전망대라고 했단다. 욕지도에서 통영육지로 들어올 때 처음만나는 곳이라 해 들머리전망대라고도 부른단다. 하지만 해무(海霧)에 가로막혀 조망은 트이지 않는다.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대신 좌우로 늘어선 바위절벽이 눈에 들어온다. 날카롭게 허리를 곧추세우고 있는 것이 욕지도를 보지 못한 아쉬움을 털어버리기에 충분한 풍경이라 하겠다. 하긴 누군가도 이런 표현을 썼었다. <사실 욕지도보다는 웅장한 바닷가 벼랑이 더 눈에 들어온다.>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만지봉으로 향한다. 기괴하게 생긴 바위들을 감상하며 걷는 재미가 쏠쏠한 구간이다. 아래 사진은 지도에 나타나 있는 할배바위가 아닐까 싶은데 안내판이 세워져 있지 않아 맞는지는 모르겠다. 이왕에 시작한 스토리텔링이니 경관 좋은 곳까지 그 범위를 늘렸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제법 가파른 길을 잠시 오르자 만지봉 정상(이정표 : 만지마을 0.7/ 욕지도전망대 0.3)이다. 만지봉(99.9m)100m에도 못 미치는 나지막한 산이다. 하지만 만지도에서 하나밖에 없는 산이다. 당연히 크게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주민들은 큰산이라고도 부른단다. 주민들은 그에 합당한 대접이라도 해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분지처럼 널찍한 정상의 한가운데다 돌로 단을 쌓고 그 위에다 커다란 정상석을 모셨다. 그리고 그 주변은 공원으로 가꾸어 놓았다. 경계를 두르고 야생화 꽃밭을 만들었는가 하면, 벤치와 무대를 겸한 평상을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이젠 마을로 되돌아갈 차례이다. 100m쯤 내려왔을까 만지도의 명물이라는 200년 묵은 해송(海松)이 버티고 있다. 그동안 일에 지친 주민들에게 그늘과 휴식처를 내주었다니 고마운 나무라 하겠다. 소나무 아래에는 전망대를 만들어놓았다. 아까 해안둘레길에서 보았던 풍광이 다시 한 번 펼쳐진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아까와는 달리 이번에는 제법 또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제부터 탐방로는 만지도 제일의 경관을 보여준다. 서슬 시퍼런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진 침식해안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그 풍경이 기암절벽과 푸른 바다가 함께 어우러진 동양화나 다름없다.





아까의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출렁다리 방면으로 향한다. 방향을 틀자마자 아치형의 터널이 길손을 맞는다. ’직녀길이란 이름표를 달았는데, 반대편 문에는 견우길이란 문표가 달려있었다. 그렇다면 이 터널은 오작교(烏鵲橋)가 되는 셈이다.



터널이 끝나는 곳에는 또 다른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다. ’바람길 전망대인데 조망안내판에는 소지도와 내부지도, 연화도, 우도, 욕지도, 쑥섬, 노대도, 두미도 등이 눈에 들어온다고 표기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내부지도만 시야에 들어온다. 아직도 해무가 여전하기 때문이다. ! 이곳에는 만지분교에 대한 안내판도 세워져 있었다. 이 부근에 학교터라도 있는 모양이다.




바람길 전망대에서 내려오는데 만지마을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터가 좁은 섬이라선지 해수면 가까이에서부터 언덕 위까지 층을 이루며 집들이 들어서 있다.



선착장으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마을 반대편으로 향한다. 만지도의 명물로 자리 잡은 출렁다리를 만나보기 위해서이다. 이 구간은 데크로드로 연결된다. 백년이나 묵었다는 우물의 위에서 산자락을 따라 난 길을 따를 수도 있으니 참조한다. 데크로드를 걷는데 난간에 풍란(風蘭)‘에 대한 안내판이 걸려있다. 멸종위기종인 풍란의 복원지역이란다. ’풍란은 바람을 좋아하고 공기 중에 있는 수분과 양분을 흡수해 살아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 집에서도 보물 대접을 받는 화분 가운데 하나인데 새하얀 꽃이라도 필 경우에는 온 집안이 향기로 가득 차오른다.



그렇게 얼마를 걷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만지도의 명물로 자리 잡은 출렁다리가 나타난다. 만지도는 원래 낚시꾼들이나 간혹 찾던 미지의 섬이었다. 그러다가 옆 섬인 연대도와 출렁다리로 연결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20151월 연결된 이 출렁다리는 길이 98에 폭이 2로 섬과 바다라는 자연경관을 최대한 활용했다. 두 섬을 가로 지르는 출렁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수십아래 코발트색 짙푸른 바다는 아찔하고 짜릿하다. ! 다리 근처의 모래해변을 빼먹을 뻔했다. 비록 좁지만 만지도와 연대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고운모래가 넉넉하게 쌓여 있었다.



만지도는 아주 작은 섬이다. 그러나 섬에는 카페도 있고, 식당도 있고, 펜션과 민박도 있다. 점심 끼니도 때울 겸해서 우리 부부가 들어간 곳은 이모 전복해물라면‘, 에어컨 바람이 시원한 안으로 들어가 전복해물라면을 주문했다. 상호에까지 등장한 걸 보면 이 집의 대표메뉴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런 내 예상은 적중했다. 전복과 홍합, 꽃게, 오징어 등 다양한 해산물을 넣고 끓인 라면은 시원한 게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명품마을에서 만난 명품요리였다고 하겠다.


산달도(山達島) 당골재산(235m)

 

산 행 일 : ‘19. 6. 29()

소 재 지 : 경남 거제시 거제면 산달도

산행코스 : 산달도 연륙교산후마을해오름정자당골산할목재신전마을연륙교 원점회귀(소요시간 : 1시간 30)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거제도에 딸린 섬 가운데 칠천도와 가조도에 이어 세 번째로 큰 섬이다. 섬의 크기순으로 연륙교가 놓였는데 이곳 산달도는 20189월에 개통됐다. 섬을 둘러볼 수 있는 방법은 등산과 둘레길 트레킹 등 두 가지로 산후마을에서 출발하여 세 개의 봉우리를 넘어 산전마을에 도착하는 산길은 대략 3.5km2시간 정도면 걸을 수 있고, 섬 해안 둘레길도 길이는 7km쯤 되지만 2시간이면 걸을 수 있다. 하지만 둘 모두 특별한 볼거리는 갖고 있지 못하다. 전국에 있는 모든 산을 다 올라볼 요량이 아니라면 일부러 찾아갈 필요는 없겠다는 얘기이다. 참고로 산달도의 원래 이름은 삼달도였다고 한다. 달이 뜨면 북쪽의 당골산과 가운데 뒤뜰산, 남쪽의 건너재산 등 섬에 있는 3개의 봉우리가 함께 비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현재의 이름인 산달(山達)‘은 한자화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이름이지 싶다.


 

산행들머리는 산달삼거리 주차장(거제시 거제면 법동리 177-6)

통영-대전고속도로 통영 IC에서 내려와 14번 국도를 타고 거제도로 들어온다. 신거제대교를 건너자마자 1018번 지방도로 갈아타고 내려오면 오래지 않아 소랑삼거리(거제면 소랑리 산 64-2)에 이른다. 우회전하여 산달연륙교를 건너면 산달삼거리가 나오는데 오른편에 주차장이 있다.




버스에서 내리자 산달연륙교(山達連陸橋)’가 환영의 손짓을 보내온다. 거제면의 법동리와 산달도(산전리)를 잇는 다리인데 창선·삼천포대교처럼 웅장하지는 않지만 오목조목 다듬어진 연륙교의 모습이 나름 운치가 있다. 산달도는 지난해(2018920)까지만 해도 차도선이 오가던 섬 속의 섬이었다. 그러다가 길이 602m의 저 사장교(斜張橋)가 놓임으로써 본섬인 거제도와 연결됐다. 그렇다면 연륙교(連陸橋)가 아니라 연도교(蓮島橋)라고 하는 게 옳을 수도 있겠다.



산후마을로 향하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연륙교 아래 방향으로 난 도로를 따르면 된다. ‘산달도 회주도로로도 불리는 이 도로는 섬을 한 바퀴 돌면서 산후, 실리 산전마을을 지난다. 해안선을 따라 난 도로의 길이는 대략 8km, 마을을 순회하는 버스가 운행된다고 했으나 눈에 띄지는 않았다.



건너편에는 거제도가 버티고 있다. 산달도와 거제도를 나누어 놓은 바다는 낚시꾼들의 놀이터라고 한다. 아니 산달도를 둘러싼 바다 전체가 감성돔과 도다리, 볼락 등이 많이 잡히는 황금어장이란다.



10분쯤 걷자 산후마을이 나타난다. 마을표지석이 보이는가 싶더니 반듯하게 지어놓은 화장실도 보인다. 옛 선착장에다 안내문까지 붙여놓았을 정도로 깔끔하면서도 널찍한 화장실이다. ! 산행을 하면서 흘린 땀을 닦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는 것도 기억해 두자.





잠시 후 정자가 지어진 포구에 이른다. 포구라고 해봐야 한 줄로 쌓아놓은 방파제가 전부였지만 말이다.




부둣가에는 굴 껍데기가 산처럼 쌓여있다. 길 서툰 나그네가 패총(貝塚, 조개무지)으로 오해하기 딱 좋을 정도로 그 부피가 크다. 하긴 인류가 식료로서 조개를 채집한 다음 조갯살을 섭취하고 식용할 수 없는 조개껍질(貝殼)을 폐기하면서 형성된 일종의 쓰레기더미가 패총이니 다를 게 뭐 있겠는가. 이곳 산달도의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아주 오래전에 이곳에 살던 사람들이 패총이란 생활유적을 남겨놓았기 때문이다. 산달도 전등패총은 신석기시대 유물로 1970년 처음 출토됐는데 신석기시대의 토기와 유사한 태토를 가진 무문토기편 등이 나왔고 후등 패총에서는 융기문토기, 단도토기 등이 출토됐다.



산길은 방파제의 반대편으로 열린다. 들머리에 방향표시가 된 산후마을(등산로 입구) 안내판을 세워놓았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산후마을에 대한 이야깃거리라도 적혀있나 하고 안내판을 살펴봤으나 뜬금없이 산달도에 대한 설명만 잔뜩 늘어놓고 있다. 섬에 소토골산과 뒷들산, 건너재산이라는 3개의 산이 있는데 그 사이로 달이 솟아오른다고 해서 삼달이라고 불러오다가 약 400년 전 이 섬에서 정승이 태어난 뒤부터 산달도로 고쳐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안내판은 또 섬에서 발견되었다는 패총에 대한 설명과 함께 소를 키우던 목장과 우군수군절도사의 수영이 설치되어 있었다는 얘기 등도 적고 있었다.



첫 번째로 만나는 삼거리에서는 왼쪽, 두 번째는 오른편으로 진행한다. 첫 번째는 또렷한 길을 선택하면 되고, 두 번째 갈림길에는 이정표(당골재735m/ 산전마을2.4/ 산후마을 등산로입구160m)가 세워져 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




탐방로 주변은 펑퍼짐한데다 경계용 담장까지 쳐져 있는 것이 영락없는 경작지다. 하지만 어느 하나 농작물이 심어지지는 않았다. 묵밭으로 변해있는 것이다. 웃자란 잡초와 칡넝쿨 등이 주인노릇을 하고 있다는 얘기이다. 하긴 대부분의 주민들이 일거리가 많기로 소문난 굴 양식에 매달리다 보니 밭에까지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 키우고, 수확하고, 알을 까고, 패각을 처리하느라 오죽이나 바쁘겠는가.



등산로는 정비가 잘 되어 있다. 잡목과 잡초들을 탐방객들에게 불편을 주지 않을 만큼 잘 정리되어 있고, 경사가 가파른 곳에는 어김없이 통나무 계단을 깔아놓았다. 전형적인 육산(肉山)인데도 불구하고 조금도 미끄럽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산길은 제법 가파르다. 아니 아주 많이 가파르다고 하는 편이 더 옳겠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통나무계단을 깔아놓았기 때문에 조금만 속도를 늦춘다면 부담 없이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35분 만에 당골재산의 정상에 올라선다. 도톰하게 솟아오른 모양새의 정상은 이정표(할묵재 515m/ 산후마을 등산로입구 900m)가 주인노릇을 하고 있다. 정상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이곳이 정상이라는 것을 확실해 줄 물증은 없다. 그저 청산수산악회에서 매달아놓은 표지판(산달도 당골산 235m)이 이곳이 정상임을 추측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이정표 뒤의 나무에는 대부산(大夫山)’이라고 적힌 팻말도 걸려있다. 당골재산의 또 다른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정상의 진정한 주인은 따로 있었다. 돌탑을 쌓아올렸는데 꽂아놓은 장승과 솟대가 기막힌 것이다. 그 구도나 조각솜씨가 웬만한 작가는 넘보지도 못하겠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빼어나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은 예외이다. 빗줄기가 굵어지면서 시야를 딱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그 아쉬움을 국제신문의 탐방기사로 대신해 본다. <정상에서의 시원한 조망은 작은 노고마저 잊게 만든다. 북쪽으로는 연륙교 건너 바위로 된 정상이 인상적인 산방산이 시선을 잡는다. 동쪽과 남쪽으로는 거제의 명산인 선자산과 노자산, 가라산이 불쑥 솟아 있다. 남쪽으로는 다리로 연결된 통영 한산도와 추봉도가 시야를 채운다. 서쪽으로는 시야가 열리는 곳이 많지 않은데 당골재산 정상에 오르기 직전 능선에서 시야가 트인다. 한산도 끄트머리를 지나 서쪽에 케이블카 승강장이 있는 미륵산이 잘 보인다. 여기서 시선을 북쪽으로 조금만 돌리면 통영 시가지 뒤로 멀리 지리산 주 능선이 눈에 들어온다. 또 바로 앞 거제 법동리의 툭 튀어나온 땅끝은 한반도 모양을 닮은 듯이 보인다.>



하산을 시작한다.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할목재, 그러니까 올라왔던 반대 방향이다. 초반은 경사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평평하다. 하지만 벤치가 놓인 쉼터를 지나면서 상황은 확 바뀌어버린다. 심하다 싶을 정도로 가파른 내리막길로 변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려서는 게 부담스럽지는 않다. 돌계단으로도 부족해 몸을 의지할 수 있는 난간까지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 곳에는 통나무계단을 깔았다. 사선(斜線)으로 된 비탈이라서 깔기가 쉽지 않을 텐데도, 보란 듯이 멋진 곡선으로 승화시켜버렸다.





그렇게 10분 남짓 진행하면 할묵재(이정표 : 뒷들산 530m/ 당골재산 515m)에 내려선다. 회주도로가 생기기 전의 산달도는 산을 넘어가는 고갯길이 각 마을을 연결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곳 할묵재도 그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그나저나 이정표 아래서 고민이 시작된다. 뒷들산(217.2)과 건너재산(209)까지 답사를 하느냐로 말이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빗줄기가 점점 거세졌기 때문이다.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육산에서 그나마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정상에서의 조망인데, 이런 빗속에서는 그런 조망마저도 허락하지 않을 게 뻔하지 않는가.




마을로 내려오다가 과수원에 심어진 수종(樹種)에 대한 작은 다툼이 있었다. 사과나 배, 매실, 복숭아 등에 익숙해진 일행들의 눈에 생전 처음 보는 열매가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의견이 분분하더니 오래지않아 생김새가 비슷한 로 의견이 좁혀진다. 내가 알기론 분명 유자(柚子)’인데도 말이다. 결국 이곳 산달도의 가장 중요한 특산물 가운데 하나인 유자가 소수의견으로 밀려나버리고 말았다. 민주주의의 함정이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산달도 유자나무는 1970년대 후반 마을주민 이규종씨가 처음 들여왔다고 한다. 가격이 비싼 유자는 겨울철 마을의 큰 소득원이 됐다. 하지만 최근 가격이 뚝 떨어지면서 유자 생산에 시큰둥해진 편이란다. 그래도 산전마을 63가구 중 25가구가 한 해 170t 가량의 유자를 생산하고 있다니 명산지임에 틀림없다.




할묵재를 넘어온 길은 산전마을로 이어진다. 그 길을 따르다보면 산전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바다 위 굴 양식장의 하얀 부표들이 파도가 일렁거릴 때마다 이리저리 춤을 춘다. 한마디로 아름다운 풍경이다. 날씨까지 맑았더라면 금상첨화였을 텐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그렇게 10분 남짓 내려오면 산전마을에 이른다. 마을 안길로 들어서니 담벼락이 온통 그림으로 도배되어 있다. 그런데 하나같이 물고기들 천지다. 바닷가 마을이라는 특징을 오롯이 살려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산전마을은 산달도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그래선지 포구에 지어놓은 마을회관도 당당히 이 층이다. ‘어업인 안전쉼터도 그 옆에다 별도의 건물로 지어놓았다. 이곳 산전마을에는 산달초등학교(거제초등학교 산달분교장)도 있었다고 한다. 1947년에 개교해서 20033월에 문을 닫을 때까지 총 1140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으며 한때는 재학생의 숫자가 250여 명에 달하기도 했단다. 지금은 비록 잡초 가득한 운동장과 녹슨 철봉과 시소만이 아이들을 그리워하며 자리를 지키고 있겠지만 말이다.




이곳 산달도의 특산물은 위에서 말한 유자외에도 몇 가지가 더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이다. 통영·거제 앞바다에서 생산되는 굴이 전국 생산량의 70% 정도를 차지하는데, 이곳 산달도는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생산지라고 한다. 특히 산달도의 굴은 미국 식품의약품안전청(FDA)으로부터 청정해역 굴로 인정받아 미국으로 수출까지 하고 있단다. 머구리배에 수북이 쌓여있는 부표들이 그 증거가 아닐까 싶다. 며칠 후면 저 부표들은 종패들을 주렁주렁 매단 채로 바다 위에 널브러져 있을 것이다.



가리비껍데기와 굴껍데기를 긴 줄에다 꿴 종패들도 곳곳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하긴 산달도 주민의 80%가량이 굴을 생산한다니 그럴 만도 하겠다. 청정해역의 깊은 바닷물 속으로 들어간 굴은 5~6개월 동안 자라 내년 1~2월이 되면 수확을 시작한단다. ‘바다의 우유로 불릴 만큼 각종 비타민과 미네랄, 칼숨, 단백질 등 영양분이 풍부한 굴은 겨울철 입맛을 돋우는 별미이기도 하다.



굴 껍질을 까는 작업장도 눈에 띈다. 작업량이 만만찮은 모양이다. 알맹이를 빼낸 조개껍데기를 컨베이어벨트(conveyor belt)를 이용해 옮겨야 할 정도로 말이다.




바닷가 갯벌에는 종패를 매달아 놓았던 거치대가 즐비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굴 양식장은 종패를 부표에 매단다. 그렇게 생산되는 굴은 전국으로 팔려나간다. ‘남자는 여자를 위해, 여자는 남자를 위해라는 캠페인과 함께 말이다. 부언(附言)하면 굴은 남자들에겐 스태미나 강장식품이고, 여자들에겐 피부 미용에 좋은 식품이란다. 가격 또한 저렴하다. 굴이 ‘1월의 명품 식품으로 알려지는 이유일 것이다.




산전마을부터는 또 다시 회주도로를 따른다. 그리고 10분 남짓 더 걷자 허름한 화장실을 갖춘 너른 광장을 만난다. 첨부된 지도에 페리선착장으로 표시되어 있는 곳이다. 연륙교가 놓이기 전, 그러니까 차도선이 오가건 시절에는 섬사람들의 만남의 장소였다는 얘기일 것이다. 읍내 볼 일을 보고 오는 사람 등 갖가지 일로 섬을 빠져나갔던 사람들이 해가 질 무렵이면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들릴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매표소가 있었을 자리는 현재 새로운 건축공사가 한창이다. 다리가 놓이면서 섬을 찾는 여행객들의 숫자가 부쩍 늘었다니 카페나 펜션이 들어서지 않을까 싶다.



한쪽 귀퉁이에는 산달섬과 바다라는 표지판과 함께 산달도 등산로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하지만 자리를 잘못 잡은 것 같다. 선착장이 있을 때라면 몰라도 요즘은 주차장에서 트레킹을 시작하는 게 보통이니까 안내판 역시 그쪽으로 옮겨야 하지 않을까 싶다.



가조도(加助島) 옥녀봉(玉女峰, 331.9m)

 

산 행 일 : ‘19. 6 29()

소 재 지 : 경남 거제시 사등면(沙等面) 가조도

산행코스 : 농협 효시공원백석산(신전산)도로노을이 물드는 언덕사등면 가조출장소실전마을임도전망대옥녀봉신교마을(소요시간 : 7.25, 2시간 50)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거제도의 북단 사등면 성포리에서 북쪽으로 약 1떨어진 진해만 해상에 위치한 면적 5.78(해안선 20.3)의 작은 섬이다. 하지만 거제시 관내에서는 칠천도 다음으로 큰 섬이란다. 섬은 중앙의 좁은 지협부에 의해 남북 두 개의 지역으로 구분되는데 해안선이 단조로운데다 침식해안(侵蝕海岸)도 아니다. 때문에 기암절벽 등 눈에 담을만한 절경은 갖고 있지 못하다. 외부에 덜 알려진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2009년에 섬의 남쪽과 거제도의 성포리를 연결하는 가조연륙교(길이 680m, 너비 13m)가 개통되면서부터 원추형으로 솟아오른 옥녀봉을 찾는 등산객들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단다. 참고로 가조도(加助島)라는 지명은 거제도에 딸린 섬으로 거제도를 돕고 보좌한다는 데서 유래되었으며, 같은 연유로 가좌도(加佐島)’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옛날에는 가지매섬으로도 불렸단다.


 

산행들머리는 농협효시공원 입구(거제시 사등면 창호리 2024)

통영-대전고속도로 통영 IC에서 내려와 14번 국도를 타고 거제도로 들어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사등면사무소가 있는 성포리에 이른다. 탐방예정지인 가조도는 이곳 성포리의 최북단에서 20097월에 개통된 680m 길이의 가조연륙교(加助連陸橋)‘로 연결된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만나게 되는 진두마을이 오늘 트레킹의 들머리이다. 참고로 이곳 진두마을은 성포항을 오가는 차도선이 있었던 시절에는 섬사람들의 만남의 장소였다. 장을 보고 돌아오는 사람, 읍내 볼 일을 보고 오는 사람, 갖가지 일로 섬을 빠져나갔던 사람들이 해가 질 무렵이면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이곳으로 모여들었단다.




왼편에 보이는 오르막길로 들어서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금룡정사수협효시공원의 이정표를 참조하면 된다. ! 오른편으로 곧장 가면 논골마을로 연결되니 참고한다. 논이 귀했던 섬에서 다른 마을보다 논이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지금은 농사를 지을 사람조차 없어 잡초만이 무성하단다. 잠시 후 수협효시공원에 올라선다. 수산업협동조합(수협)의 역사가 이곳 거제에서 시작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란다. 1942년 조선어업조합중앙회가 발행한 조선 어업조합 요람에는 <1908710(대한제국의 수산 관련 업무를 관장하던) 농공상부대신의 인가를 받아 최초로 거제시 사등면 창호리 가조도에 거제한산가조어기조합(巨濟閑山加助漁機組合)’이 설립됐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우리나라 수산업협동조합의 효시이자 거제수산업협동조합의 전신이란다.




공원은 7370의 부지에 지하 1, 지상 4층 건물(건축면적 886, 연면적 1314)로 이루어졌다. 1층에는 어구·어업 기록물·어업기술의 발달사·수협의 역사 및 발달사 등이 가지런하게 정리된 전시관과 영상실, 세미나실, 어린이 아카이브, 특산물 판매장이 2층에는 조화의 광장이 들어서있다. 3층과 4층은 실내전망대와 커피하늘이 각각 배치됐다. 4층에는 야외전망대도 만들어 놓았다는데 아쉽게도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문을 열리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이곳 수협효시공원에서 바라보는 저녁노을은 가히 일품이라고 알려진다. 거제의 명소로 소문난 노을이 물드는 언덕보다도 오히려 한 수 위라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른 새벽. 거제도 쪽 바다에 떠있는 작업선이 내쏘고 있는 휘황한 불빛으로 대신해본다. 노을보다야 한참 떨어지겠지만 그나마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공원을 둘러봤으면 이젠 산행을 나설 차례이다. 들머리는 공원의 맞은편 산자락에서 열린다. 도로변에 이정표(신전산1.18/ 가조연륙교0.32)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정표에는 노을길이라는 지명도 표기되어 있다. 아름다운 노을을 볼 수 있는 길이라는 의미란다.



산길의 상황은 괜찮은 편이다. 길이 널찍한데다 경사까지 완만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이른 아침이어선지 공기까지도 상쾌하다.



여명(黎明)의 바닷가에 작은 섬들이 떠있는 게 보인다. 무인도인 멍애섬노루섬이다. 2년쯤 전엔가 이곳 가조도와 멍애섬을 잇는 길이 230m의 출렁다리를 놓는다는 기사를 본 것 같은데 저곳을 두고 한 말이었던가 보다. 당시 기사는 노루섬과 멍애섬을 스카이 레일바이크로 연결시킨다는 내용도 담고 있었다. 그렇다면 공사가 완공되는 2023년 이후에 다시 한 번 찾아봐야 할 것 같다.



산길은 아기자기한 봉우리들을 오르내리며 이어진다. 봉우리 사이의 골이 깊지 않아 크게 힘들지는 않다. 다만 웃자란 잡초들로 인해 길을 찾기가 힘들 때도 있다는 게 조그만 흠일 수도 있겠다. ! 산악회의 리본이 눈에 띄지 않는 것도 특징이라 하겠다.



가끔은 너덜지대도 만난다. 아니 바위의 크기가 저 정도라면 너덜이 아니라 바위지대라고 하는 게 옳을 수도 있겠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40분 만에 백석산(206m) 정상에 올라선다. 펑퍼짐한 분지(盆地) 모양으로 생긴 정상은 텅 비어있다. 정상표지석은 물론이고 그 흔한 이정표 하나 없다. 무당집 처마처럼 너절하게 매달려있는 산악회의 리본들이 이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조망 또한 일절 터지지 않는다. 머무르지 않고 곧장 떠나버리는 이유이다. 참고로 백석산은 국립지리원의 지도에 나온 이름이다. 지역에서는 신전산으로도 불리기도 하는데 요 아래에 있는 신전마을에서 따왔지 않나 싶다. 신전마을은 초원이 풍부해 섶밭이라고 부른데서 유래했단다.



올라왔던 방대 방향으로 하산을 시작한다. 경사가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거기다 미끄럽기까지 하니 주의할 일이다. 흙길이라서 넘어진다고 해도 다칠 위험은 없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12분 정도를 진행하면 도로에 내려선다. 노을길은 이곳에서 반대편 능선으로 이어진다. 이정표(옥녀봉 입구 1.71/ 신전산 0.92) 또한 그쪽 방향을 지시하고 있다. 그러나 길은 막혀있다. 땅 주인이 새로 집을 지었기 때문이란다. 그렇다면 우회로를 새로 내놓던지 하다못해 이정표의 방향표시라도 고쳐놓아야 했지 않았을까 싶다. 거제시청의 무책임한 행정이라 하겠다.



이후부터는 도로를 따른다. ‘가조로인데 잠시 이 도로는 가조서로와 합쳐지면서 해안도로로 변한다.



100m 남짓 내려왔을까 길가에 새들 숲속놀이터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새집이 보인다. 새집 뒤편으로 치고 올라 노을길을 타볼까 고민하다가 그냥 도로를 따르기로 했다. 억지로 뚫고 나가기에는 길이 너무 험해져 있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아스팔트 도로를 걷는다. 불행 중 다행인지 눈에 들어오는 바닷가 풍경이 제법 아름답다. ‘시야가 툭 트이는해안길의 전형적인 특징이 아닐까 싶다.



사위(四圍)가 밝아오면서 바다 풍경 또한 점점 또렷해진다. 바다는 온통 양식시설 일색이다. 국내 굴 총생산량의 60%가 통영 앞바다에서 생산된다고 하니 굴양식장이 분명할 것이다.



바닷가 벼랑에는 동백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 차있다. 나뭇가지에는 열매가 주렁주렁 열려있다. 가끔은 늦깎이 동백꽃도 보인다. 하지(夏至)가 지난지도 모르는 게으름뱅이들이라 하겠다.



섬에는 유독 수국(水菊)이 많았다. 수국의 한자 이름은 수구화(繡毬花)인데, 비단으로 수를 놓은 것 같은 둥근 꽃이란 의미다. 화려함보다는 잔잔하고 편안함을 주는 꽃인데, 수구화에서 수국화를 거쳐 수국으로 변한 것으로 보인다. 길가에는 모시송편의 재료인 모시풀도 많았다. 들깻잎처럼 생긴 잎만이 수국과 비슷할 뿐인데도 난 수국이라고 꾸역꾸역 우겨댔다. 그러다가 잎의 앞면이 초록색인 반면 뒷면은 하얀색이라는 모시풀의 특징을 집사람으로부터 가르침 받았지만 말이다.



도로를 따라 23분 정도를 걷자 '노을이 물드는 언덕'이 나온다. 노을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가조도의 특징을 살리기 위해 만든 일종의 전망대라고 보면 되겠다. 2층으로 된 전망대 외에도 여러 가지 체육시설들을 갖췄다. 벤치도 놓았다. 화장실도 새로 지었음은 물론이다. 주민들을 위한 쉼터의 기능까지 겸한 것이다. ! 전망대로 오는 길에 막혀버린 탐방로의 진입로를 만났다는 걸 깜빡 잊을 뻔했다. 이정표(옥녀봉/ 신전산)에는 진전산 방향에다 폐쇄라고 적고 있었다.



이곳은 일몰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바다 아래로 떨어지는 해를 볼 때면 자연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함께 느낄 수 있단다. 하지만 아쉽게도 노을이 지는 때를 맞추지 못해 일몰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확인해볼 수 없었다. 갤러리로 활용되고 있는 난간에 걸린 거제도의 명승들이 그 아쉬움을 달래주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전망대에 오르자 바다풍경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여명의 바다에는 얼핏 두 개의 섬으로 나뉘어져 보이는 어의도(於義島)’가 두둥실 떠있다. 원래는 크기가 거의 같은 2개의 섬이 서로 마주보고 있었는데 중앙에 사주(砂洲, sand bar)가 발달하면서 하나로 연결되었다고 한다. 그 모양이 흡사 개미를 닮았다 하여 '충의도'라고도 부른단다. 그러나 어의도를 바다 위에 배가 떠 있는 형상으로 본 사람들이 더 많았던가 보다. 배를 움직이자면 어의 여차를 외쳐야 한다면서 어의도라는 이름을 붙여놓았으니 말이다.



어의도의 왼편에 떠있는 자그만 섬은 수도(水島)’이다. 우리말로는 물섬’, 땅 속에서 물이 펑펑솟는 섬이란다. 아무리 가뭄이 심해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 하여 물섬이란 이름이 붙여졌단다. 거제도의 성포항에서 하루에 2번 운항하는 객선이 있긴 하지만 일부러 찾아가는 사람들은 많지 않단다. 그럴만한 볼거리가 없기 때문이다. ! 물섬의 뒤편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있는 섬은 지도(紙島)’이다. 두 섬 모두 통영시에 속해있지만 섬사람들의 생활은 거제에서 이루어진다.



조망을 즐기다가 또 다시 길을 나선다. 삼각뿔처럼 솟아오른 옥녀봉 방향으로 난 도로를 따르면 된다. 가장자리에 보도를 따로 만들어 두었으니 안전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



길가에 세워진 빗돌 하나가 눈에 띈다. ‘고 사인 천일두 처 전주 이씨 열행기실비(故 士人 千日斗 妻 全州 李氏 烈行紀實碑)’라고 적힌 것으로 보아 어느 열녀(烈女)의 뛰어난 행실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인 모양이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기록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안내판도 세워져 있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비석을 세웠을 정도로 타의 귀감이 되는 행실이라면 요즘의 젊은이들에게도 한번쯤 들려주었으면 좋았을 것 같아 하는 말이다.



그렇게 잠시 걸으면 사등면 가조출장소가 나온다. 가조출장소는 주민들의 생활과 생업의 편의를 위해 1987년 설치됐으나 IMF 한파를 겪으면서 8명이던 정원이 2명으로 대폭 줄어 지금은 주민들의 민원 업무만을 담당하고 있단다.



출장소 앞에서 길이 둘로 나뉜다. 왼편은 창촌마을과 계도체험 마을, 탐방로는 실전·유교 마을로 향하는 오른쪽 길을 따른다. 출장소의 대문 옆에 옥녀봉 등산로 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니 참조하면 길이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출장소 담벼락에는 등산로 입구로 가는 방향표시도 해놓았다.



바다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비탈에 기대앉은 실전·유교·신교 마을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다소 복잡한 듯 집들이 밀집되어 있는 모양새이다. 어업과 밭농사가 대부분인 전형적인 가조도의 모습이라 하겠다.



옥녀봉으로 오르는 탐방로는 브런치 카페인 볼리에르의 앞에서 왼편으로 열린다. 출장소에서 5분쯤 떨어진 지점인데 오솔길이 갈리는 지점에 이정표(옥녀봉 정상 1.0/ 가조출장소 0.3)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들머리 부근에는 작은 텃밭들이 제법 많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 실전마을을 실밭개라고도 부른단다.



탐방로는 정비가 잘 되어 있는 편이다. 길을 찾기에 어려움이 없을 정도로 잔가지들이 잘 정리되어 있고, 나무계단도 새것으로 교체한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주기적으로 정비를 해오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오솔길로 들어선지 20분 만에 임도(이정표 : 옥녀봉 정상0.5/ 임도 시점1.9)를 만났다. 임도를 따라 올라오는 방법도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임도에는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벤치도 놓아두었다. 눈앞에 펼쳐지는 멋진 경관을 실컷 즐겨보라는 배려일 것이다. 맞다. 전망대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전망대의 높이가 겨우 5~6m에 불과하지만 시선이 나무의 높이를 살짝 넘기면서 시야를 확보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예외이다. 짙게 낀 안개 때문에 코앞에 있는 거제도까지도 희미하게 나타날 따름이다.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인 후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정상까지는 이제 500m가 남았다. 아직까지 산길은 곱다. 고운 흙길에다 경사까지도 완만하다. 500m나 남았으니 서두를 게 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서서히 가팔라지기 시작하던 산길이 언젠가부터 된비알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얼마나 가팔랐던지 곧장 치고 오르지를 못하고 왔다갔다 갈 지()’자를 쓰고 나서야 겨우 위로 오른다. 그 길은 바위로 이루어진 사면을 헤집기도 한다. 길을 내느라 고생깨나 했겠다. 당시 상황을 조금 더 실감나게 하기 위해 국제신문의 취재기사를 잠시 옮겨본다. <정상까지 남은 거리는 500m인데 이제부터 된비알이다. 괜스레 다리가 뻑뻑해지는 것 같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500m가 높이가 아니라 거리라는 점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가끔은 산딸기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새콤달콤한 맛이 일품인데다 갈증까지 싹 가셔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참을 오르면 드디어 옥녀봉 정상이다. 임도전망대를 출발한지 30분 만이다. 구릉(丘陵)처럼 두루뭉술하게 생긴 정상은 맨 꼭대기에 자리 잡은 나무 한 그루를 제외하고는 잡초로 가득 차있다. 조선시대부터 이곳 가조도에 목장이 있었고, 일제 강점기에는 군마를 사육하면서 훈련을 시키던 장소로 이용되었다고 하더니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참고로 가조도가 우리 역사에 나타난 때는 고려시대다. 고려시대에 가조도목장을 설치했다는 첫 기록이 고려사에 나타나 있다. 고려 성종 2(983)에 칠천도에는 검은 소를 기르고 가조도에는 붉은 거제도 말을 방목하는 목장을 설치했다. ‘가조도 목장은 궁중 수레와 말에 관한 관청의 소관으로 진주감목관이 관장했고, 궁중의 고관대작들이 타고 다니는 붉은 거제도 말을 방목했다는 기록이 있다. 왜구의 침범으로 멀리 피난을 갔다는 기록도 있다. 고려 때인데 왜구의 침범을 피해 지리산 동북쪽 거창현의 속현인 가조현으로 가조도 주민들이 단체로 피난을 갔다는 것이다. 조선 세종 4(1422)에 돌아왔다니 151년 만의 귀향이었던 셈이다.



정상에는 자연석으로 만든 커다란 정상표지석과 이정표(실전마을 1.0/ 계도마을 1.3), 삼각점(거제 21) 외에도 팔각정이 세워져 있다. 문까지 만들어 놓은 정자는 발을 디딜 수 없을 정도로 염소 똥이 가득하다. 문을 꼭 잠가달라는 거제시청의 안내문까지 붙어있는 걸로 보아 이곳 가조도도 야생동물로 변해버린 염소들로 인해 꽤나 시달림을 받고 있는 모양이다. 참고로 옥녀봉에는 옥녀와 선군의 애달픈 사랑의 전설이 서려있다. 먼 옛날 옥녀가 아버지인 옥황상제로부터 노여움을 사 인간 세상에 내려와 벌을 받고 있었다. 천 년 동안 어떤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고 순결하게 지내야만 다시 하늘로 올라갈 수 있다는 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옥녀가 기약했던 천 년을 얼마 남겨 놓지 않았을 때 옥황상제가 옥녀를 시험했던 모양이다. 하늘나라에서 제일 멋있고 잘 생긴 남자 선군을 내려 보내 옥녀를 유혹하게 했으니 말이다. 옥녀가 어찌 그런 사실을 알았겠는가. 두 사람은 사랑에 빠져 세월 가는 줄도 모르고 지냈단다. 화가 난 옥황상제가 옥녀와 선군을 섬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거제 시정시보 제30호에서 발췌)



맨 꼭대기는 커다란 돌무더기로 이루어져 있다. 옥녀봉의 정상에 봉수대(烽燧臺)가 있었다고 하더니 그 흔적이 아닐까 싶다. 계룡산 봉수대와 고성 벽방산, 진해 천자봉 봉수대를 연결하던 봉수대가 이곳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옥녀봉 정상에서의 조망은 뛰어난 것으로 알려진다. 정면에 위치한 삼성조선이 보이는가 하면 거제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계룡산과 또 다른 옥녀봉인 '장승포 옥녀봉'과 국사봉도 보인다고 했다. 하지만 오늘만은 예외이다. 아까도 얘기했다시피 오른쪽으로 툭 튀어나와 있다는 가조도의 일부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안개가 짙게 끼어있기 때문이다.



올라왔던 반대방향으로 하산을 시작한다.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신교마을 방향이다. ! 옥녀봉 정상어림에 있다는 옥녀와 관련된 흔적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활량들이 놀았다는 활량터와 선군이 칠선녀를 데리고 내려왔다는 칠선녀 바위, 옥녀가 목욕했다는 약수터(옥수터), 장구통 바위, 탕근바위 등인데 구체적인 위치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긴 방향조차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안개가 짙게 끼었으니 미리 알았던들 무슨 방법이 있었겠는가.



하산길에는 거제도에 대한 조망이 가능하다. 안개가 짙은 오늘은 비록 햇살을 머금어가는 산봉우리들이 하나같이 실루엣으로 처리되어버리고 말았지만 말이다. 한번쯤은 눈에 담고 싶었던 취도는 위치조차 파악할 수조차 없었다. 참고로 가조도는 러일전쟁(1904~1905)의 아픔을 간직한 섬이다. 송진포에 주둔한 일본군이 취도를 향해 사격연습을 할 때, 이곳 옥녀봉에는 관제탑이 있었단다. 그 후 일본 해군이 러시아 동양함대 '마카로'호 등 37척과 3000명의 병사를 전멸시킨 기념으로 소화 10(1935)에 러일전쟁 승전기념비인 취도기념탑을 세웠다고 한다. 높이 4.17m, 2m의 하얀 탑 상단에는 포탄이 하늘을 보고 박혀있단다. 일본에게는 영광의 흔적이겠지만 우리에게는 뼈아픈 역사라 하겠다.



하산길 역시 잘 다듬어져 있다. 가파른 곳에는 어김없이 나무계단을 놓았고, 어떤 곳에는 밧줄까지 매달아 안전을 도모했다.




그렇게 20분 가까이를 내려오자 장의자 두 개를 놓은 쉼터가 나오고, 이후부터 산길은 완만하게 변한다.



느긋하게 15분쯤 더 걸었을까 진행방향 저만큼에 신교마을이 나타난다. 길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웃자란 잡초들이 주변을 온통 삼켜버렸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왼편으로 진행해야 한다. 잠시 후 야생동물의 침입을 막으려고 쳐놓은 그물망이 보이면 길을 제대로 찾았다고 보면 되겠다.




그물망이 쳐진 밭두렁이 끝나면 계도마을로 이어지는 시멘트포장길이 나온다. 이정표(가조출장소 1.9/ 계도마을 2.7/ 옥녀봉 정상 1.2)가 세워진 걸 보면 산길이 끝났다는 얘기일 것이다.



트레킹 날머리는 신교마을

시멘트 길을 따라 잠시 내려가면 신교마을이 나오면서 가조도 트레킹이 끝을 맺는다. 마을 앞 포구(浦口)에 이르니 자그만 마을인데도 불구하고 마트가 문을 열고 있다. 캔맥주로 목을 축이면서 주인장에게 물어보니 마을 손님보다는 낚시꾼과 펜션 투숙객들이 고객이란다. 그러고 보니 광이만 앞바다에서 멸치와 도다리, 볼락, 감성돔 등이 잘 잡힌다는 기사를 본 것도 같다. 아무튼 오늘 트레킹은 대략 2시간50분이 걸렸다. 올동말동하는 비가 걱정되어 중간에 쉬지를 않았으니 오롯이 걷는 데만 쓴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