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도(草島)

 

여행일 : ‘18. 3. 27()

소재지 : 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 초도리

트리킹 코스 : 대동선착장순환도로 일주정강재남서릉상산봉(339m)정자바람재북릉대동선착장(소요시간 : 4시간 30)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여수에서 서남쪽으로 67, 거문도에서 북쪽으로 25지점에 위치한 면적 7.72의 작은 섬이자, 초도군도의 중심 섬이다. 예로부터 풀과 바닷새가 많다 하여 초도(草島) 또는 조도(鳥島)라고 불리어왔다. 중앙에 위치한 상산봉(上山峰, 339m)은 기복이 비교적 큰 산이지만 경사는 완만한 편이다. 해안은 돌출한 갑()과 깊숙한 만()이 교대하며 이어진다. 이런 여건으로 인해 섬을 빙 둘러싸고 취락이 형성되어 있다. 탐방로도 단순한 편이다. 최고봉인 상산봉을 가운데에 두고 빙 둘러서 내놓은 일주도로를 따라 한 바퀴 도는 트레킹코스와 정강재에서 올라 바람재로 내려오는 산행코스로 나눌 수 있다. 이중 초도 트레킹의 백미(白眉)는 상산봉 정상에서 즐기는 조망이다. 암봉으로 이루어진 정상 자체도 아름답지만, 정상에서 바라보는 바다 풍경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그 경관이 빼어나다.


 

찾아오는 방법

초도로 들어오는 방법은 손죽도나 거문도와 같다고 보면 된다. 여수에서 출발하는 쾌속선이 거문도까지 들어가는데 이 배가 외나로도와 손죽도에 이어 초도에서 기항(寄航)하기 때문이다. 손죽도를 떠나 30분 정도를 달리니 초도(대동)항의 길게 이어진 방파제가 쾌속선을 맞는다. 양쪽으로 길게 이어진 방파제에는 쌍등이 있다. 가운데 방파제는 일자형으로 바다 한 가운데 있는 것으로 오른쪽은 노랑등대다. 배는 하얀등대와 빨간등대 사이의 뱃길을 타고 미끄러지듯이 스며든다. 선착장에 내리면 상산봉과 그 아래에 자리 잡은 대동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섬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포근한 모양새를 갖췄다. 그래선지 이곳 주민들은 어업과 농업을 겸하며 살아간단다. 식량의 자급률이 높다는 것이다. 바다도 풍성한 편이란다. 인근 해역이 물살이 세지 않고 영양분이 많아 전복과 꾸죽(뿔소라), 홍합 등이 잘 자라며 미역과 가사리, , 돌김 같은 해조류와 배말, 성게 등 자연산 건강식들이 풍부하다는 것이다. 특히 초도 홍합은 해녀들이 잠수해 채취하는데 크기가 어른 손바닥만 하며 그 맛 역시 양식 홍합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나단다.




대동마을 포구는 그 크기만큼이나 물양장(物揚場)도 넓다. 웬만한 운동장도 이보다는 덜할 것 같다. 거기다 시멘트로 포장까지 되어 있다. 웬만큼 큰 행사를 치른다고 해도 터가 부족할 일은 없겠다. ! 그러고 보니 이곳 초도에서 자연산 홍합을 비롯한 패류와 해조류 등 해산물을 테마(thema)로 한 섬마을 웰빙축제를 연다는 기사를 본 것도 같다. 8년쯤 전의 기사인데 조수 간만의 차가 큰 영등철 사리에 맞춰 바닷물이 갈라지는 3월에 연다고 했는데, 올해도 열렸는지는 모르겠다. 그나저나 섬마을 축제를 여는 데는 이만한 장소도 없겠다. 참고로 대동마을은 구미, 읍동, 읍포, 큰마을 등으로 불리어왔다. 조선시대 말엽인 1896년에 신설되었던 돌산군(突山郡) 삼산면 시절에는 구미리라고 불렀다는데 이 시절에 편찬된 여산지(廬山志 : 1899년 돌산군수 서병수가 편찬한 읍지)’에서는 '읍동'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 이후에 큰 마을이라는 의미를 한자말로 바꿔 부른 게 대동마을이라는 것이다. 마을 앞에 버티고 있는 깨끗하고 현대화된 복지회관과 어민회관이 이 마을이 초도에서 가장 큰 마을이라는 걸 증명해주는 것 같다.



배에서 내리니 민박집에서 보내준 트럭이 기다리고 있다. 배낭을 옮겨다준다는 것이다. 숙소가 마을이 아니었던 게 미안했던가 보다. 하긴 숙소가 건너편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어 한참을 걸어서 올라가야만 했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 아무튼 오늘 저녁에 머무를 곳은 두산민박(전화 : 010-3566-6346)이다. 여행을 좋아하던 주인장 김성균씨가 초도에 여행 왔다가 아름다운 풍경에 반해 주저앉게 되었단다. 당시 눈여겨 봐두었던 두산건설의 현장사무소 건물을 매입해서 민박집을 열었다는 것이다. 우리 부부는 다른 민박집을 구해 머물렀으니 시설의 상태는 모르겠지만, 음식 하나만은 마음에 쏙 들었다. 가짓수도 많았을 뿐만 아니라 그 하나하나가 정갈스러우면서도 맛깔스럽기 짝이 없었다. 하긴 섬에서 직접 채취한 재료를 육지의 기법으로 만들어냈으니 어찌 맛이 있지 않았겠는가. 이는 여행을 같이 한 일행들 모두의 의견이었음을 첨언해 둔다.



짐을 풀자마자 트레킹에 나선다. 초도여행의 시작점은 쾌속선이 들고나는 대동마을이다. 초도에는 크게 대동리·의성리·진막리 등 세 개의 부락이 있는데 대동리에서 시작하는 일주도로가 이들 부락을 모두 아우른다. 섬 최고봉인 상산봉을 한가운데 놓고 빙 둘러서 내놓은 일주도로를 한 바퀴 돈다고 보면 되겠다. 거리는 대략 7Km 내외, 2시간 정도가 걸린다.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은 초도중학교이다. 1967년에 문을 열었다니 벌써 50년도 더 된 일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지금은 텅 비어있다. 작년에 문을 닫았단다. 기껏해야 1년뿐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운동장에는 잡초만이 무성하다. 인적이 끊겨버린 채 거문중학교장 명의의 서슬 시퍼런 경고판만 세워져 있을 따름이다. 전남교육감 소유의 시설물이니 무단사용하지 말란다. 아무튼 이곳도 역시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했던 모양이다. 점점 공도화(空島化) 되어가는 요즘의 추세를 말이다.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아픔은 요 아래에도 있다. ‘초도초등학교도 텅 비어있기는 매한가지란다. 1937년에 문을 열었다니 중학교보다도 훨씬 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데도 세월의 추를 거스를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80년 영욕(榮辱)의 세월이 이젠 옛 이야기로 변해버린 것이다. 한때는 같은 섬에 있는 의성분교와 진막분교 외에도 손죽분교와 광도분교, 평도분교, 소거문도분교 등의 분교들을 거느리기도 했다는데 말이다.



20분 정도 걸었을까 바람재(이정표 : 의성마을1.5Km/ 상산봉1.5Km/ 대동마을1.0Km)가 나온다. 의성마을과 대동마을을 잇는 고갯마루인데, 상산봉으로 올라가는 등산로과 이곳에서 연결되니 유념해 두자. 참고로 바람재는 섬사람들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바람으로 인해 얻은 이름이라고 한다. 샛바람이 불면 파도가 크게 일어 고기잡이뿐만 아니라 김, 미역, 톳 등을 따는 갯것도 힘들어 진다. 그 샛바람을 막기 위해 쌓은 바람재성()’이 옛날 이곳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 덕분에 대동마을은 겨울에도 항상 따뜻했다고 한다. 하지만 의성마을 사람들은 대동 마을 사람들이 대동의 복()이 의성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바람재성()’을 쌓았다고 믿고 있단다. 두 마을 사이에 갈등이 심했을 것은 불을 보듯이 뻔하다.



시멘트로 포장된 길은 삭막한 편이다. 바닷가 풍경은 어쩌다 한 번씩 나타날 뿐이고, 그마저도 나무숲에 가려 반의 반쪽으로 줄어들었다. 반대방향도 마찬가지다. 아무런 특징도 없는 산자락만이 계속해서 나타날 따름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걷고 있는 지금이 이른 봄철이라는 점이다. 만일 여름철에라도 찾아왔다면 오뉴월 땡볕에 고생깨나 했겠다. 그늘을 만들어줄 가로수들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20분 남짓을 더 걷자 왼편 바닷가에 들어앉은 작은 포구(浦口)가 나타난다. 아까 바람재에서 거론했던 의성마을이다. ‘본동경촌이라는 두 개의 단위부락으로 이루어졌는데, 원래는 이성(利成)’ 또는 '이성금(利成金)'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마을 공동묘지 부근의 '솜널이'란 지역의 바위 부근에서 철이 많이 나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1914년 여수군으로 이관되면서 의성리라 부르게 되었단다. 마을로 내려가 볼까를 놓고 고민하다가 그만 발길을 돌리고 만다. 약속된 저녁식사 시간이 다 되어가기 때문이다. 아쉬움을 대신하여 마을 앞 바닷가에 세워진 석조기념비에 대한 사연을 옮겨본다. 1882년에 삼산면(초도,거문도, 손죽도)사람들 115명이 낡은 돛단배를 타고 바람과 해류를 이용해 울릉도까지 가서 생활하다가 새로운 배를 만들어 타고 귀환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울릉군지(2007.2.28.발행)’에도 나와 있는 사실인데, 주민들은 이 일을 목숨을 걸고 울릉도와 독도를 개척하여 영토를 확보한 역사적 사건으로 여겨 기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길을 나선다. 진막마을에 이르기 조금 전에 왼편으로 자그만 섬 하나가 나타난다. 아마 초도판 모세의 기적이 일어난다는 ()목섬일 것이다. 그리고 그 옆에 보이는 섬은 돈키호테바위일 게고 말이다. 목섬까지의 거리는 200m, 한 달에 아홉 번 폭이 7~80m 정도로 물이 갈라지면서 '신비의 바닷길'을 연다고 한다. 이때 바닥이 드러나면서 멍게와 해삼, 전복, 소라 등의 다양한 해산물을 잡을 수 있단다. 싱싱한 갯것체험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바닷가로 내려가는 건 사양하기로 한다. 물이 차있는 지금에야 그저 그렇고 그런 섬 가운데 하나일 따름일 테니까 말이다.



의성마을에서 3Km 남짓 더 걸으면 진막마을이다. 임진왜란 때 조선수군이 진을 쳐 '진막(陣幕)'이라 불렀다는 마을인데 앞바다에 있는 안목섬으로 더 유명하다. 사리 때면 걸어서 다닐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바닷물이 갈라진 틈에서 웰빙해산물을 맘껏 채취할 수 있다고 해서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온다고 한다. 마을 인근에 있는 몽돌찜질로 유명한 대풍해수욕장도 가족단위 관광객들을 끌어들이는 요인 중 하나라고 한다. 파랑에너지가 집중되는 헤드랜드(hedland)나 암석해안 주변의 만입부에 형성되는 자갈해안(pebble or shingle beach)의 일종인데, 입구에 세워진 안내판에 몽돌이라고 적혀 있는 걸 보면 자갈의 크기가 콩돌보다는 크다는 얘기일 것이다. ! 중간에 정강마을을 지나왔다는 걸 깜빡 잊을 뻔했다. 초도에 있는 두 개의 해수욕장 중 나머지 하나가 있는 마을인데, 은빛모래와 깨끗한 바닷물이 자랑인 해수욕장이다.



오른편에 내연발전소가 보였다 싶으면 일주도로 트레킹은 끝난다. 웬만한 섬들은 육지에서 전기를 끌어오는데, 이곳 초도는 그게 어려웠던가 보다. 아니 손죽도에서도 얘기했지만 직접 발전하는 것이 더 경제적이어서 일수도 있다.



둘째 날이다. 아침식사를 마치자마자 상산봉 산행에 나선다. 산행의 들머리는 정강재, 3Km 내외의 거리가 부담스러울 거라며 민박집 주인장께서 트럭으로 들머리까지 실어다 준다. 고마운 일이다. 그 덕분에 시간이 남아돌아 북릉까지 산행을 이어갈 수 있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들머리에는 이정표(의성마을1.6Km/ 상산봉1.5Km/ 진막마을1.6Km, 정강해수욕장 0.8Km)가 세워져 있다. 걸어서 왔더라도 들머리를 못 찾는 일은 없었을 것 같다.



산자락으로 들어서자마자 철근을 엮어 만든 문이 나타난다. 문의 양 옆으로는 울타리가 처져있다. 어설프긴 하지만 뭔가의 통행을 막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런 문들은 산행 중에 여러 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상산봉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산길은 상당히 가파르다. 하지만 통나무계단이 놓여있어 오르는 데는 부담이 별로 없다. 아니 푸름에 겨운 주변 풍경에 도취하다보면 힘들다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다. 누군가 이곳 초도를 온화한 해양성기후라고 하더니 맞는 모양이다. 그는 이곳에 난대림이 자생하며, 또한 아열대성식물이 자생하는 곳도 있다고 했다.



산행을 시작한지 30분 만에 능선에 올라선다. 이곳에도 울타리를 치고 길에는 문()을 내놓았다. 그렇다면 소유주(所有主) 간의 경계를 나누는 울타리가 아닐까 싶다. 유해동물이 민가로 내려오는 것을 막으려했다면 이런 능선에까지 울타리를 칠 이유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 누군가 이곳 초도의 풍경을 적으면서 섬 곳곳에서는 소들이 드러누워 방목을 즐긴다.’고 했었는데 놓아먹이는 소들이 남의 땅으로 넘어가지 말라고 쳐놓았을 지도 모르겠다.



능선에 올라선 산길은 그 경사를 확 떨어뜨린다. 대신 커다란 바위들이 그 빈도(頻度)를 높여간다. 또 다른 특징은 주변이 온통 동백나무 숲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때를 맞춰 찾아왔는지 나무들마다 꽃망울을 활짝 열었다. 동백나무는 12월 초순부터 4월 하순까지 꽃을 피운다. 지금이 3월이니 그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하는 적기에 찾아온 셈이다.



동백꽃은 나무에 매달려 있을 때도 곱지만, 바닥에 떨어진 후에도 처연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동백꽃이 양면성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이유이다. 시인묵객이라면 새색시처럼 수줍은 꽃이라는 이미지로 표현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선홍빛 피의 애처로움이란 이미지도 있다. 옛날 선비들에게는 후자가 주는 이미지가 더 강했던 모양이다. 귀양을 간 곳에 동백나무라도 있을 경우에는 가차 없이 잘라버렸다니 말이다. 땅바닥에 떨어진 동백꽃을 보고 자신의 목이 댕강 떨어지는 것을 연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 난 선비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닌가 보다. 시체처럼 누워있는 낙화(落花)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새색시의 붉은 볼처럼 고운 꽃들만 눈에 차오르는 걸 보면 말이다.



가끔가다 커다란 바위들도 만난다. 놓치지 말고 꼭 올라가 볼 일이다. 하나 같이 뛰어난 조망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초도는 육지와의 거리 때문에 외해성(外海性) 환경에 속한다. 이런 섬들에서는 파랑에 의한 침식작용이 강하기 때문에, 경사가 급한 암석해안이나 해식애, 해식동의 발달이 탁월하여 경관이 매우 아름다운 편이다. 그런 곳 가운데 하나가 정강마을의 해안인데, 그게 지금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그 뒤에 보이는 섬은 바다낚시꾼들이 즐겨 찾는다는 납대기섬일 것이다. 또 다른 낚시터인 밖목섬도 눈에 들어오는 것은 물론이다.




꽃에 눈을 맞추다보면 어느덧 망금산에 이른다. 능선에 올라선지 5분만이다. 망금산은 산으로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나지막하면서도 밋밋한 바위봉우리이다. 그러다보니 정상표지석이 세워져 있을 리가 없다. 이정표도 물론 없다. 그러나 그 자태만은 빼어나다. 흐드러지게 핀 동백 꽃밭에서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는 형상이 귀엽기까지 한 것이다. 조망 또한 뛰어나다. 오면서 보았던 풍경들 외에도 이번에는 의성마을 포구까지 시야에 잡힌다.




상산봉을 향해 다시 길을 나선다. 동백나무 숲길은 계속된다. 하지만 아까보다는 그 개체수를 많이 줄였다. 대신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있는 상산봉의 정상이 심심찮게 눈에 들어온다.



그렇게 15분 정도를 진행하면 산길이 가팔라진다. 그리고 그 끝에서 거대한 바위벼랑이 앞을 가로막는다. 오른편으로 우회(迂廻)를 하면 정상 바로 아래에 있는 암릉 위로 올라서게 된다. 뛰어난 조망(眺望)을 자랑하는 곳이다. 또한 바다에 널린 수많은 섬들을 배경으로 삼을 수 있어 포토죤(photo zone)으로도 사랑을 받는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앞서 오른 일행들이 자리를 비워줄 줄 모르고 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조금이라도 더 예쁜 사진을 찍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 아니겠는가.



절벽 옆으로 수평선이 보인다. 군데군데 이빨처럼 솟은 작은 섬들이 앙증맞다. 파도에 몸을 맡긴 채로 둥둥 떠 있는 섬. 외롭다. 섬은 외로움이다. 섬은 사람을 그리워하며 바다를 지킨다. 그리고 나 같은 떠돌이 여행자들이 그 섬에 찾아든다.



바다에는 크고 작은 수많은 섬들이 떠있다. 초도를 한가운데에 두고 사방으로 널려있는 형상이다. 초도군도(草島群島)란다. 원도(圓島)와 장도(長島), 중결도(中結島), 대마도(大馬島), 용도(龍島)와 안목섬, 밖목섬, 둥글섬, 납대기섬, 술대섬, 취섬, 솔거섬 등 이름도 예쁜 작은 섬들로 구성되어 있다.



의성마을 포구도 다시 한 번 눈에 들어온다. 둥글게 감싸고 있는 포구에 평화롭게 들어앉은 마을 풍경이 오래오래 눈길을 붙잡는다. 그 오른편 끄트머리에서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는 섬은 솔거섬일 것이다. 왕볼락과 참돔의 입질이 좋아 낚시꾼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조망을 즐겼다면 이젠 정상으로 오를 차례이다. 바위에 기대여 설치한 계단을 오르면 드디어 상산봉이다. 정상은 두 개의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그 가운데 하나에다 전망데크를 만들고 아담한 정상표지석을 세웠다. 조금 좁기는 하지만 서로 간에 양보만 한다면 기념사진 찍는 데는 무리가 없어 보인다.





또 다른 바위에도 정상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이번엔 자연석에다 이름을 새겼다.



가슴에 별이 진 사람 초도로 가라로 시작되는 김진수 시인의 초도에 가면라는 시가 적혀있는 시판(詩板)도 보인다. ‘여수 참여연대라고 적어놓은 걸 보면, 요즘 직책인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여수지부장자리보다 시민운동가라는 직책이 더 좋았던가 보다. 아무튼 그는 소바탕길로 상산봉에 오르면 낮고 낮은 햇살에도 퍼덕이는 금비늘을 볼 수 있다고 노래했다. 시선을 돌려본다. 바람이 이는 바다에 햇살이 쏟아지자 놀란 물결이 금비늘을 퍼덕이고 있다. 시인의 눈이 얼마나 정확했는지를 금새 알아차린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한마디로 빼어나다. ‘상산봉이란 남해 일원의 여러 산 중 최상급에 속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그 이름에 걸맞는 조망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선 북쪽의 예미로부터 대동마을과 남동쪽의 의성마을과 남서쪽의 진막마을이 한눈에 쏙 들어오고 안목섬과 밖목섬의 바닷길이 갈라지는 현상도 손에 잡힐 듯이 눈앞에 있다. 멀리 눈을 돌리면 삼산면에 속한 손죽도와 거문도, 백도가 짙푸른 바다와 함께 눈에 차오른다. 다른 이들은 청산도와 생일도, 거금도, 외나로도까지 시야에 들어온다고 했는데, 직접 확인해볼 수는 없었다. 오늘 같이 시계가 좋은 날에도 확인이 안 된다면 내 눈이 나쁜 건가?



조금 전에 보았던 올망졸망한 섬들이 다시 한 번 나타난다. 하나같이 정겨운 이름을 갖고 있는 섬들이다. ‘둥글섬은 둥글게 생겼다 하여, ‘진대섬은 길다 해서, ‘구멍섬은 섬에 구멍이 나 있다 하여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 일행 중 누군가 카프리섬에 온 것 같다!‘고 중얼거린다. 아니 나도 그 섬에 가보았지만 내가 보았던 카프리섬보다 몇 배나 더 빼어났다. 카프리섬에서는 저렇게 고운 섬들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젠 산을 내려갈 때다. 발길을 돌리니 아까 올라올 때는 무심코 지나쳤던 맞은편 바위봉이 눈에 들어온다. 아니 그 뒤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바다풍경이 더 눈길을 끌었다고 보는 게 옳겠다. 해무(海霧)에 잠겨있는 섬들이 몽환적인 풍경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어제 손죽도에서 보았던 삼각산 보다는 조금 덜하지만 저런 아름다운 경관을 보는 게 어디 흔한 일이겠는가.




정상 바로 아래의 이정표(대동마을2.5Km/ 정강해수욕장2.3Km/ 상산봉 정상)가 가리키고 있는 대동마을 방향으로 향한다. 쉽게 말해 바람재로 내려가는 능선을 탄다고 보면 된다. 능선길은 휘파람이 절로 나올 정도로 널찍하다. 양옆으로 펼쳐지는 바다 풍광을 가슴에 담으며 내려서다보면 몸과 마음은 한껏 편안해진다.



고개를 돌리니 상산봉 정상이 코앞으로 성큼 다가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서성이고 있는 걸 보면, 아름다운 풍광에 반한 이들이 차마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누군가는 극한의 기쁨은 슬픔과 경계가 없다고 했다. 몰래 눈물 한 방울 톡 떨어뜨린 나 또한 그런 심정이었을 게다.



10분 정도를 내려오자 팔각의 정자가 지어져 있다. 고운 잔디가 심어져 있는 주변에는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이제부터 길은 엄청나게 넓어진다. 자동차가 다녀도 충분하겠다. 5분쯤 지나자 또 다른 정자를 만난다. 이번에는 동남아에서나 볼 수 있는 지붕을 씌워놓았다. 이곳도 역시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판석을 깔아놓았을 정도로 잘 정비된 길을 따라 15분 조금 못되게 걷자 바람재가 나온다. 정상에서 내려선지 30분 만이다. ‘바람재에서 고민이 시작된다. 계속해서 북릉을 탈 것인가 아니면 이쯤에서 산행을 접을 것인가를 놓고서이다. 결론은 뻔했다. 점심때까지의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있는데 어찌 그만둘 수가 있겠는가.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어제 시간제약 때문에 꾹 참고 지나칠 수밖에 없었던 바람재성()’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보기로 했다. 의성과 대동 마을 사이에 갈등을 빚게 만들었던 바람재성()’이 과연 어떻게 생겼는지는 확인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성터의 흔적은 눈에 띄지 않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두 마을을 연결하는 도로, 즉 지금 내가 서있는 일주도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사라져버렸단다. 제주(祭酒)와 제사 음식을 만들기 위한 물을 공급해주던 큰달샘(참샘)’도 저수지 공사로 없어져 버렸단다.



반대편 능선으로 향한다. 도로를 건넌 다음 대동마을 방향으로 몇 걸음만 내려가면 들머리가 나온다. 임도로 되어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임도의 초입은 철문으로 막혀있다. 이번에는 아예 쇠사슬로 묶어놓기까지 했다. 하지만 우린 개의치 않고 안으로 들어선다. 북릉으로 들어서는 진입로임을 뻔히 알고 있는데 어찌 그냥 돌아설 수 있겠는가.



잠시 후 능선으로 올라선다. 그리고 이후부터는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아무런 특징이 없는 밋밋한 능선이다. 거기다 펑퍼짐하게 퍼져있다 보니 조망도 별로이다. 그저 어쩌다 한 번씩 빼꼼히 고개를 내미는 주변의 섬들과 길가에 널리다시피 한 정금나무의 붉은 열매가 눈에 들어올 따름이다. 하지만 등산로를 가꾸려는 의지가 돋보이기도 한다. 길가에 동백나무를 새로 심어 놓은 걸 보면 말이다.



길을 걷다가 오른편 나무숲 사이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풍경에 발길이 멈춰진다. 초도 주변으로 작은 섬들이 올망졸망 떠있는 것이다. 아까 정상에서 거론했던 정겨운 이름의 섬들, 즉 둥글섬과 진대섬, 구멍섬일 것이다. 또 다른 섬들은 솔대섬과 취섬이 분명하다.



반대편으로는 아까 올랐던 상산봉이 가까이 다가와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완만한 구릉(丘陵) 모양으로 생겼다. 저래서 이곳 초도가 물이 많다고 소문이 난 모양이다. 하긴 비록 소규모이긴 하지만 논농사까지 지었었고, 내연발전소가 들어오기 전에는 진막마을에 시간당 80kw를 생산하는 자그마한 수력발전소까지 있었다니 두말하면 뭐하겠는가.



주변에는 드릅나무들도 많이 보인다. 하지만 채취는 금물이다. 민박집 주인장의 말로는 산주인들이 심어놓았다는 것이다. 능선은 또 칡넝쿨들이 지천이다. 일부러 심어놓은 동백나무들이 몸살을 앓고 있을 정도이다. 그게 안타까웠던지 일행 한 분이 간간히 넝쿨을 걷어내면서 걷고 계신다. 일흔을 넘기신 분의 모습이 보기 좋아 따라 해볼까 하다가 아서라로 마무리 짓고 만다. 너무 힘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비록 귀찮은 넝쿨식물에 불과하지만, 역사의 바늘을 조금만 거꾸로 돌려보면 칡은 정말 고마운 식물이었다. 뿌리, 줄기, , 꽃 모두 요긴하게 쓰였다. 갈근(葛根)이라 불리는 칡뿌리는 흉년에 부족한 전분을 공급하는 대용식이었으며, 갈근탕을 비롯한 여러 탕제(湯劑)에 쓰였고 질긴 껍질을 가진 줄기는 삼태기를 비롯한 생활용구로 널리 이용되었다. ‘동의보감(東醫寶鑑)’은 칡꽃(葛花)에 대한 효능도 적고 있다. ‘칡꽃(갈화)과 소두화(팥꽃)를 같은 양으로 가루를 내어 먹으면 술을 마셔도 취할 줄 모른단다. 술을 좋아하는 나에게 딱 맞는 효능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40분 조금 못되게 진행하면 북릉의 끝자락에 있는 봉우리에 올라서게 되고, 이어서 하산을 시작하다보면 오른편에 예미마을이 보인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예미마을과 대동마을을 잇는 도로에 내려서게 된다. 상산봉 종주산행이 끝난 것이다. 오늘 산행은 총 3시간이 걸렸다. 상산봉 정상에서 30분 정도를 놀았으니 2시간30분이 걸렸다고 보면 되겠다.




돌아오는 길에는 나로도(고흥군 봉래면)에 있는 우주과학관에 들렀다. 거문도로 들어가지를 못한 여객선이 그냥 나로도로 귀항해버려 도착시간이 1시간 반이나 단축되었기 때문이다.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기상악화가 도움을 주는 경우도 있나보다. ‘나로우주 센터는 우리나라의 우주개발 현황과 우주의 비밀을 체험할 수 있는 곳으로, 대한민국이 자체 기술로 인공위성을 우주 공간으로 쏘아 올리기 위해 건설한 최초의 우주발사체 발사기지이다. 이곳에 있는 우주 과학관에는 다양한 첨단 과학 전시물이 전시되어 있다. 우주과학에 관한 기본원리, 로켓, 인공위성, 우주탐사 등을 주제로 한 작동 체험 전시품 32종을 포함한 90여 종의 전시품이 있다. 이곳에는 우주개발 4D영상관, 야외 로켓전시장, 정보 검색관, 별자리관측 체험관, 로켓발사 체험관 등 다양한 시설이 마련되어 있어 우주 과학 관련 교육 및 체험 학습이 가능하다. 또한, 야외 전시장에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사한 우주 발사체인 나로호의 실물 크기만 한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섬에다 조성하다보니 한쪽 면은 바다와 연결된다. 자잘한 몽돌들이 깔려있는 너른 바닷가는 주변 경관이 아름다워 여름철에는 해수욕장으로도 한몫을 톡톡히 수행할 것 같다. 납작한 몽돌이 찜질용으로 사용해도 충분할 것 같기에 하는 말이다.


손죽도(巽竹島)

 

여행일 : ‘18. 3. 26()

소재지 : 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 손죽리

트레킹코스 : 선착장내연발전소삼각산 왕복지지미재깃대봉(242m) 왕복봉화산북쪽 능선선착장마을길이대원사당손죽분교선착장(소요시간 : 4시간)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여수에서 남서쪽으로 58지점에 있는 여의도 면적의 1.04배쯤 되는 작은 섬(3.015)으로 주변의 여러 섬들과 함께 손죽열도를 구성하고 있다. 섬은 대부분 산지와 구릉으로 이루어졌는데, 마을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깃대봉(242m)을 중심으로 능선이 섬을 두르고 있다. 왼쪽 끝에는 우뚝 솟은 삼각산의 쌍봉이, 그리고 오른쪽으로는 낮은 산허리가 선착장 부근까지 이어진다. 바다는 깊게 만입되어 U자 형태를 이루니 더할 수 없이 오붓하고 아늑한 느낌이다. 탐방로도 지형에 맞게 개설되어 있는데, 대체로 바위벼랑 위로 길이 나있기 때문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이 눈을 즐겁게 해준다. 이곳은 원래 고흥반도에 가까워 고흥군에 속했다. 이후 1914년 일제의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여수로 편입되었다. 이때 손대도(損大島)에서 손죽도(巽竹島)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원래의 이름인 손대도(損大島)는 임진왜란 때 이 섬 앞바다에서 이대원(李大源) 장군이 왜구들과 싸우다 순국한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곳 주민들이 큰 인물을 잃었다는 아쉬움으로 그런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전부터 손죽도라는 지명은 존재하였으며, 섬에 시누대가 많아 시누대섬이라 부르던 것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라는 설도 있으니 참조한다.


 

찾아오는 방법

손죽도로 가기 위해서는 우선 나로도 연안여객선 터미널까지 와야만 한다. 목적지로 들어가는 배가 이곳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남해고속도로(영암-순천) 고흥 IC에서 내려와 15번 국도를 타고 남진하면 고흥읍을 지나게 되고, 이어서 나로도대교를 건너면 동일면(고흥군)의 본섬인 내나로도가 나오고, 계속해서 15번 국도를 타고 가다 나로2대교를 건너면 이번에는 봉래면(고흥군)의 본섬인 외나로도에 들어선다. 이어서 봉래교차로(봉래면 신금리)에서 우회전하면 곧이어 목적지인 연안여객선터미널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타고 갈 배는 오션호프 해운()조국’, 문재인정부의 민정수석인 조국씨가 아니니 오해말길 바란다. 아무튼 이 배는 하루에 두 번(8:30, 14:30) 운행되며 손죽도까지는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돌아올 때는 1시간 30분쯤 더 걸린다. 초도와 거문도를 거쳐서 돌아오기 때문이다. 돌아올 때에는 같은 회사 소속의 줄리아아쿠아호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두 배가 교대로 운항하고 있는 모양이다. 참고로 여수항에서 들어가는 방법도 있다. 같은 배의 최초 출항지가 여수항이기 때문이다. 1만원 정도의 추가 요금과 1시간 정도의 시간이 더 걸리는 것은 감수해야만 한다. 또한 고흥의 녹동항에서 출발하는 철부선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으나 배의 속도가 느릴 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섬까지 경유하면서 가니 굳이 이용을 권할 정보는 아닐 것 같다.



30분 조금 못되게 달리자 손죽도이다. 섬은 하트() 모양으로 생겼다. 하트의 움푹하게 파인 부분, 즉 북쪽해변에 만()이 형성되면서 폭풍우에도 끄떡없을 만큼 안전한 항구를 만들어 놓았다. 배에서 내리자 마을 전체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자기만의 개성을 자랑이라도 하듯 알록달록한 집들이 빽빽이 들어서있다. 마을 앞은 하얀 모래사장이다. 이 백사장이 바다 속까지 훤히 보이는 파란 바다와 어우러져 있다. 한마디로 한적하면서도 아름다운 풍경이다. 그래 사람들은 이런 풍경이 좋아 섬을 찾아올 것이다.




배에서 내리면 이대원 장군의 동상(銅像)이 길손을 맞는다. 하지만 조악한 관광기념품처럼 썩 세련되어 보이지는 않는다. 목숨을 던진 장수의 비장감을 찾아볼 수 없다는 얘기이다. 그런데 그게 더 친근감이 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판에 박은 듯이 똑 같은 관제(官製)의 동상, 즉 근업하고 위압적인 형상이 이어서가 아닐까 싶다. 사실 이 동상은 이따가 만나게 될, 섬의 남쪽에 세워져있는 진짜 동상을 모사한 것이란다. 이대원장군에 대한 얘기는 잠시 후에 만나게 되는 다른 동상에서 다시 거론해 보자.



배에서 내리면 건너편에 있는 커다란 바위산과 마주한다. 아랫도리가 물안개에 잠긴 것이 몽환적인 분위기를 한껏 연출하고 있다. 아니 절해고도에서 쌍둥이처럼 솟은 두 봉우리가 마치 영화 속에서나 나옴직한 잃어버린 세계로 들어가는 문() 같다는 느낌을 준다. 삼각산이라는 이름을 가졌단다. 봉우리의 끝이 뾰쪽하게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싶다.




점심을 예약해놓은 민박집에다 배낭을 맡겨놓고 곧장 트레킹을 나선다. 이때 고민에 빠진다. 박근례 할머니가 직접 담가 판다는 막걸리를 트레킹을 하는 중에 마실 것인가. 아니면 트레킹을 마친 후에 마실 건가를 놓고 말이다. 과거 육지에서의 술 반입을 엄두도 내지 못하던 시절, 대부분의 섬 막걸리는 제사에도 쓰고 마을 사람들이 나눠 마시기 위해 자생적으로 생겨났다. 이제는 소주나 맥주 등 각종 술들이 배편으로 쉽게 들어오게 되었지만, 막걸리는 유통기간이 짧은 탓에 그 전통의 명맥에 의지해 오고 있단다. 아무튼 이 막걸리가 맛있다고 소문나있으니 마셔보는 건 선택이 아니라 필수일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트레킹을 마친 후에 마시게 되었지만 막걸리 맛은 일품이었다. 한약재를 세 가지나 넣어 만들었다는 할머니의 자랑을 증명이라도 하듯 은은한 한약냄새가 코끝을 간질이고 걸쭉한 맛은 다 마시고 난 뒤에도 다시 한 번 입맛을 다시게 만들었다.



첫 번째 답사할 곳은 삼각산이다. 해안을 따라 난 시멘트포장길을 5분쯤 걷자 손죽도 내연발전소가 나온다. 이곳까지 전기를 끌어오는 게 어려웠던가 보다. 아니 직접 발전하는 게 경제적이어서 일지도 모르겠다. 탐방로는 발전소 건물을 오른편에 끼고 반 바퀴를 돌도록 나있다.



그렇게 잠시 걷자 왼편 산자락으로 길이 하나 나뉜다. 방향을 틀어 잠시 오르면 철갑 옷을 입은 장수의 동상이 나타난다. 이대원 장군이다. 약관의 나이에 녹도만호에 부임했던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5년 전인 1587년 손죽도 앞바다에 침입한 왜구와의 전투에서 최후를 맞았다. 전투 중에 목숨을 잃었지만 실제로는 상급자의 시기와 질투 때문에 죽음으로 내몰린결과였다. 이대원 장군은 그해 1월 소록도 앞바다에서 벌인 왜구와의 첫 해전을 승전으로 이끌었다. 그런데 급작스러운 왜구의 침입에 경황이 없어 상급자인 전라좌수사 심암에게 보고하지 않고 출전을 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장군이 공을 독차지했다고 시기하게 된 심암은 왜구가 손죽도를 점령하자 피로에 지친 100명의 군사만을 이끌고 출전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날이 밝으면 군사를 더 모아 출전하겠다는 호소도 통하지 않았다. 장군은 손죽도로 향하며 응원군을 거느리고 와달라고 부탁했으나 사흘 밤낮으로 펼쳐진 전투에 응원군은 없었다. 왜구에게 붙잡힌 이 장군은 돛대에 묶여 갈고리로 찍히면서도 항복을 거부하다가 뭍으로 끌려 나와 살해당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스물두 살이었다. 이왕에 나온 김에 그가 마지막 순간에 손가락을 잘라 피로 썼다는 절명 시를 옮겨본다. <진중에 해 저무는데 바다 건너와 슬프다 외로운 군사 끝나는 인생 나라와 어버이께 은혜 못 갚아 원한이 구름에 엉켜 풀리지 않네.>




이대원장군의 동상으로 올라가는 길 근처에서 오른편으로 또 다른 오솔길이 나뉜다. 이정표(이대원장군 묘20m/ 손죽도 갯가길20m)에는 갯가길로 표기되어 있는데, 해안을 따라 내놓은 산책로쯤으로 보면 되겠다. 총 연장이 300m쯤 되는 이 길은 끄트머리까지 갔다가 다시 되돌아 나와야 하는 애로가 있다. 하지만 꼭 들어가 볼 것을 권한다. 바닷가 갯바위 위로 내놓은 데크로드에서 바라보는 주변풍광이 제법 빼어나기 때문이다.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를 들으며 걷다보면 어느덧 끄트머리에 닿는다. 햇살이 따뜻하다. 바람이 몸에 부딪친다. 끄트머리의 갯바위는 포토죤(photo zone)으로 제격이다. 화산암처럼 구멍이 숭숭 뚫린 바위 자체도 볼거리지만 건너편 손죽마을과 선착장, 그리고 부속섬인 반초섬이 사진의 배경으로 삼기에 딱 좋기 때문이다.




삼거리로 되돌아와 삼각산으로 향한다. 잠시 후 길이 둘(이정표 : 삼각산 전망대200m/ 생활폐기물 처리장150m)로 나뉘지만 왼편은 생활폐기물처리장으로 가는 길이니 염두에 두지 말자. 오른편으로 방향을 잡자마자 커다란 소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그 아래에는 무덤 한 기가 자리 잡고 있다. 이대원장군의 가묘(假墓)인데 경기 평택에 사는 이대원 장군의 후손들이 1990년에 만든 것이란다. 또한 해마다 3월이면 숭모제(崇慕祭)를 올리고 있단다.



잠시 후 만나게 되는 울창한 산죽 숲을 빠져나오면 데크계단이 나타난다. 삼각산 산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계단은 바위벼랑에다 기대어 만들었다. 그러다보니 그냥 위로 향하지를 못하고 왔다갔다 갈지()’ 자를 쓰고 나서야 겨우 고도(高度)를 높여간다. 계단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다. 절벽에 걸쳐있기 때문에 위험스럽다는 느낌도 든다. 그러나 시설을 만든 지자체를 믿고 일단 올라가보자.




무서움을 참는데 대한 보상은 괜찮은 편이다. 고개를 돌려보면 바닷가 기암절벽이 발아래에 펼쳐지는데 아름답기 짝이 없다.



5분쯤 오르자 첫 번째 전망대가 나타난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없다. 사방이 온통 해무(海霧)에 잠겨있기 때문이다. 그저 발아래에 펼쳐지는 바닷가 풍경에 만족할 수밖에 없다. 첨부된 사진도 내려오는 길에 겨우 촬영한 것이다.




계속해서 계단을 오르자 또 다른 전망대가 나온다. 이번에도 역시 보이는 것은 없다. 아니 있다. 뾰쪽하게 생긴 봉우리 하나가 해무 너머에서 고개를 쏙 내밀고 있다. 손죽열도에 속한 무인도 가운데 하나인 나무여도가 아닐까 싶다. 감성돔을 찾는 낚시꾼들이나 찾을 정도로 외지고 험한 바위섬 말이다.



두 번째 전망대를 지나면서 탐방로는 흙길로 변한다. 아니 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암봉을 피해 왼쪽으로 잠시 우회(迂廻)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어서 나타나는 나무계단을 오르면 드디어 정상이다. 이곳도 역시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다. 그 덕분에 눈앞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광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손죽도 마을이 평온하게 내려다보인다. 그 왼편에는 선착장과 반초섬이 있다. 아까 갯가길의 끄트머리에서 보았던 풍경들이다. 아니 장거리도와 소거문도까지 머리를 내밀고 있는 걸 보면 그 범위가 훨씬 더 넓어졌다. 그만큼 고도(高度)가 높아졌다는 증거일 것이다.




맞은편에는 삼각산의 쌍봉 중 나머지 하나가 버티고 있다. 마음만 먹는다면 길을 낼 수도 있음직 한데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미답(未踏)의 봉우리로 남겨두고 싶었던 모양이다. 뭔가 궁금함이 남아있어야 또 다시 손죽도를 찾아올 게 아니겠는가.



내연발전소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마을 뒤편으로 난 임도를 따른다. 삼각산을 다녀오는 데는 대략 1시간 정도가 걸렸다. 아무튼 지지미재로 연결되는 시멘트포장 도로의 양쪽 가장자리를 따라 벚나무를 심어놓았다. 시간이 조금 흐른다면 또 하나의 멋진 볼거리를 제공해 주겠다.



8분쯤 걷자 길이 둘로 나뉜다. 그렇다고 어디로 가야할 지를 놓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따가 능선 안부에서 다시 만나게 되니 말이다. 일단 오른편으로 들어서고 본다. 푸릇푸릇 돋아나고 있는 풀빛이 무척 고와보였던 것이 그 원인이었을 게다. 길은 무척 잘 닦여 있다. 널따란데다 경사도 별로 없을 뿐더러, 통나무로 계단까지 깔아 놓았다.



그렇게 12분 정도를 진행하자 팔각정이 지어져 있는 능선 안부에 올라선다. 깃대봉과 봉화산의 사이에 있는 지지미재이다. 지지미재는 섬사람들이 삼월 삼짇날에 꽃전을 부쳐 먹으며 잔치를 벌이던 자리라고 한다. 모든 마을 주민들이 이곳 잿마루에서 1주일 넘게 밤낮을 쉬지 않고 춤과 노래를 부르며 화전놀이를 즐겼다는 것이다. 옛날 이곳 손죽도에는 300가구에 500여 세대가 북적이며 살기도 했었다. 그때 지지미재에서 펼쳐졌다던 화전놀이는 얼마나 떠들썩했을까? 참고로 '지지미'란 이름은 화전놀이에서 유래됐다. 여수지역에선 화전을 보통 부쳐서 먹기 때문에 '부쳐리'라고 하고 지져먹는다는 뜻으로 '지지미'라고도 하는데 꽃전의 다른 이름인 지지미가 땅 이름이 된 것이다.



지지미재에서 길은 둘로 나뉜다. 이정표(손죽도항2.6Km/ 손죽마을800m)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오른편에 보이는 널찍한 임도를 따를 경우 손죽도의 최고봉인 깃대봉으로 올라서게 된다. 봉화산은 물론 반대방향이다. 깃대봉을 오르고 난 뒤에는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 내려와야 한다는 얘기이다. 아무튼 길은 차량이 다녀도 될 정도로 무척 넓다. 정상에 자리 잡고 있는 통신시설을 관리하기 위해 내놓은 임도일 것이다. 대신 경사는 무척 가파르다. 올라가는 게 만만찮다는 얘기이다.



숨이 턱에 차오를 정도로 헉헉대며 10분 정도를 오르자 드디어 깃대봉이다. 제법 너른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은 텅 비어있다. 정상표지석이나 이정표 등 이곳이 깃대봉의 정상임을 알려주는 표식이 일절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그저 여수연안 해상교통관제센터(VTS)’에서 세운 통신시설이 이 모든 것을 대신해 주인노릇을 하고 있을 따름이다. ‘VTS(Vessel Traffic Service), 즉 해상교통관제센터는 항공기의 관제를 실시하는 관제소의 해상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CCTV와 레이더, 육안, AIS(Automatic Identification System, 선박자동식별장치) 등을 이용해 각 선박의 침로. 속력 등의 정보를 이용하여 각 선박간의 위험, 충돌 여부를 확인, VHF를 이용해 관제를 실시한다. 뿐만 아니라 입/출항 보고, 기상 악화 시 통제. 사고 발생시 통항관제의 업무도 수행하고 있다. 참고로 깃대봉이란 이름은 1896년 무렵 일본이 지도 제작을 위해 측량 기점으로 산꼭대기에 기를 꽂았던 데서 유래한단다.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뛰어난 편은 아니다. 동북쪽 방향으로만 시야가 열리면서 장거리도와 소거문도, 그리고 암벽으로 이루어진 해안선이 나타날 뿐이다. 주변의 잡목(雜木)들 때문에 그마저도 아랫도리가 잘려나가 버렸다.



지지미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봉화산으로 향한다. 깃대봉 방향과는 달리 오솔길 수준이다. ! 깜빡 잊을 뻔 했다. 팔각정 주위에 정성들여 꽃밭을 만들어 놓았다는 것을 말이다. 언젠가 섬사람들의 화전놀이 재현(再現) 계획에 대한 기사를 본 것 같은데, 그 일환으로 조성해 놓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화전놀이가 계획대로 재현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화전놀이를 하는 날에 외지 사람들이 찾아와서 예전처럼 북적이는 잔치가 됐으면 한다는 주민들의 바람도 첨언되어 있었는데 그 바람이 꼭 이루어졌길 기대해본다.



오솔길로 들어서자마자 이정표(손죽도항 2.5Km/ 목넘전망대 30m/ 깃대봉 500m) 하나가 길손을 맞는다. 오른편에 목넘전망대가 있다니 어찌 들어가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전망대에서의 조망은 그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조금 전에 다녀온 깃대봉을 물론이고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진 손죽도의 남쪽 해안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봉화산으로 향한다. 조선시대 왜구나 적의 침입을 주변 지역에 미리 알리기 위해 설치한 요망소가 있었다는 산이다. 길은 산비탈을 헤집으며 나있다. 그러다보니 여의치 못한 곳에는 계단을 놓기도 했다. 물론 벤치도 빼먹지 않았다. 이왕에 경관 좋은 곳에 왔으니 쉬엄쉬엄 즐기면서 걸어보라는 배려일 것이다.



잠시 후 이정표(손죽도항 2.3Km/ 깃대봉 700m)와 함께 세워진 진입금지라는 팻말이 보인다. 밧줄난간 뒤에 보이는 암봉에 올라가지 말라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그게 봉화산의 정상이라는데 어찌 그냥 넘어갈 수 있겠는가. 배낭을 벗어놓고 살그머니 올라가본다. 옛날 봉화대가 있었다는 산이니 그에 걸맞는 공터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정상은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넓었다. 그러나 봉수대의 흔적은 눈에 띄지 않았다. 정상표지석이 보이지 않는 것은 물론이다. 다만 봉수대가 있었던 자리답게 진행방향의 능선은 물론이고 왼편의 마을전경과 동북쪽 해안의 깎아지른 듯한 기암절벽이 내려다보이는 등 조망은 괜찮은 편이다. 하지만 사진게재는 생략하기로 한다. 같은 풍경들을 이따가 다시 만나게 되는데, 이게 더 화려하기 때문이다.



이후부터 탐방로는 해안의 기암절벽을 끼고 이어진다. 길은 아찔한 벼랑을 끼고 계속되는데, 그마저도 부족했던지 아슬아슬한 벼랑의 위에다 전망대까지 만들어 놓았다. 조심조심 난간에 의지해 아래를 내다본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코발트빛 바다가 반짝이고 있다. 눈길을 조금 돌리니 천애(天涯)의 해안절벽이 눈에 차오른다. 아름답다. 눈물겹도록 아름답다는 표현은 이런 때 쓰는가 보다.




갑자기 평평한 흙길이 나오는가 싶더니 왼편으로 길이 하나 갈려나간다.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지만 손죽마을로 연결되는 길일 게다. 잠시 후 길은 또 다시 바위벼랑의 위로 이어진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경사가 심하거나 위험하다 싶은 곳마다 나무계단을 놓아 위험성을 제거했으니 마음 놓고 주변경관을 즐기기만 하면 될 일이다. 그런 점을 감안했는지 이 구간에도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세 번째 전망대를 지나자 주변 풍경이 크게 변한다. 이번에는 초지(草地)로 이루어진 구릉(丘陵) 형태의 언덕이 나타나는 것이다. 바람이 섬의 잔등을 타고 넘는 초지의 들판에서는 바로 곁에 있는 장거리도(네이버 지도에는 반초섬)와 소거문도는 물론이고, 그 너머의 먼 바다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 이 부근에서 손죽마을로 내려가는 갈림길이 또 하나 있다는 것을 깜빡 잊을 뻔 했다. 이번에는 이정표(손죽도항1.5Km/ 손죽마을200m/ 깃대봉1.5Km)까지 세워놓았다. 지지미재에서 이곳까지는 35분 정도가 걸렸다.




편의 조망도 훌륭하다. 발아래에 있는 손죽마을은 물론이고 그 건너에 버티고 선 삼각산이 그 늠름한 자태를 드러낸다.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암봉이 손죽도 제일의 절경답게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만들어준다.



멋진 볼거리를 그냥 지나치지 말라는 듯이 이곳에도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다. 보여주는 풍경이 아까와는 또 다르니 거르지 말고 꼭 올라가 보자. 꽤 여럿의 섬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저 섬들은 한꺼번에 아우를 경우 손죽열도(巽竹列島)가 된다. 중심 섬인 손죽도를 비롯하여 소거문도와 광도, 평도 등의 유인도와 반초섬, 나무여, 갈키섬, 검둥여 등의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다. 손죽도가 가장 규모가 큰 섬이어서 손죽열도라 부르게 되었더란다.




전망대를 지나자 제법 높은 산봉우리가 앞을 막는다. 누군가는 이곳을 마제봉이라고 적고 있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봉우리로 오르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경사가 완만해서 별 무리 없이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대신 바위벼랑에서 멀리 떨어져서 길이 나있기 때문에 볼거리는 별로 없다.



봉우리를 넘자마자 정자 하나가 잠시 쉬었다가라며 길손을 붙잡니다. 그래 잠시 쉬었다 가보자. 정자에 오르니 아랫어미 너머에 있는 반초섬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길게 늘어선 손죽열도의 많은 섬들 가운데 가장 규모가 작은 무인도로, 기껏해야 10분이면 섬을 한 바퀴 돌아볼 수 있어 무시하기 쉽지만, 낚시꾼들 사이에는 조황이 좋기로 정평이 난 섬이다. 반초섬 너머로는 코발트빛 망망대해가 펼쳐진다. 보트 한 척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바다를 향해 나아간다. 한마디로 멋진 풍광이다. 이런 풍광이 놓치기 싫었는지 조금 아래에다 또 다른 전망대를 만들어놓았다. 하지만 정작 반초섬은 머리꼭지만 보이고 그 너머에 있는 손죽열도에 속해있는 또 다른 무인도인 지마도(池馬島)가 선명하게 시야에 잡힌다. 섬의 정상부분이 질마()처럼 오목하게 들어갔다 해서 질마섬으로 부르다가 지마섬으로 변했는데, 낚시꾼들이 즐겨 찾는다고 한다.




이젠 본격적인 하산만 남았다. 탐방로는 구릉처럼 완만하면서도 펑퍼짐한 언덕을 따라 나있다. 그래선지 울타리 안에 놓아먹이는 염소들이 간간이 보인다. 울창한 산죽 숲도 보인다. 곧고 굵은 것이 거의 대나무 수준이다. 하긴 저 정도는 되었기에 손죽도(巽竹島)’라는 이름을 낳았지 않았겠는가. 산죽 숲을 빠져나오면 선착장이 나오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 트레킹은 총 3시간 15분이 걸렸다. 그러나 소요시간에 의미를 둘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주변 경관에 따라 걷는 속도가 제멋대로였으니 말이다.



마을로 돌아와 골목길로 들어선다. 이대원장군의 사당을 찾아보기 위해서이다. 섬마을은 대개 거센 바닷바람을 막기 위한 돌담이 흔하다. 이곳 손대도 사람들도 역시 작은 돌들을 정성스럽게 쌓아 울타리를 만들고, 바람을 피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만들었다. 그 돌담 사이로 골목길이 이어진다. 그 돌담에 자연의 손길과 사람의 손길이 더해져 한 폭의 그림 같은 길들을 만들어 냈다. 오랜 세월 동안 바닷바람과 싸우며 이끼를 얹었고, 담쟁이넝쿨이 돌담을 보듬으면서 멋스러움을 더해준다. 그냥 돌담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승화되어버린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돌담 울타리에다 따로 문을 내지 않은 집들도 많다. 몇 곳을 기웃거리니 집집마다 훌륭한 정원을 꾸며놓은 게 아닌가. 언제인지 정확하진 않지만, 이곳 주민들 사이에서 정원을 가꾸는 게 유행처럼 퍼졌다고 한다. 울창한 난대림의 숲처럼 가꿔놓았는가 하면 손바닥만 한 뜰에도 나무와 꽃을 심었다. 또 어떤 집은 분재를 내다놓기도 했다.



수령이 250년이나 되었다는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감싸고 있는 마을의 중앙에 이르자 자그마한 사당(祠堂) 하나가 길손을 맞는다. 이대원 장군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있는 충렬사(忠烈祠 :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39)’이다. 이 사당은 1590(선조 23)에 최초로 건립되었다.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퇴락과 수리를 거듭해 오다가 1983년 마을주민들의 정성으로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번엔 이대원장군의 사후(死後)에 일어난 일들을 살펴보자. 임금은 패전과 군율 미준수 책임을 물어 심암을 조사할 것도 없이 의당 형구에 채워 본도로 이송한 뒤, 문에서 참수하여 여러 진에 조리를 돌려야 된다.’고 하여 서울 당고개에서 효수(梟首)시켰다. 우수사 원호와 다른 여러 장수들도 문책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이겠지만 조정에서는 적의 재침에 대비하여 군기를 수리하고, 봉수나 망대의 일을 단속하는 등 만반의 준비태세를 갖추도록 했는데, 특히 전라도의 연해지역에 대한 방어책이 강화되었다. 임진왜란 때에 왜군이 방비가 튼튼한 전라도로 들어오지 않고 부산포로 들어온 이유란다. 새옹지마(塞翁之馬)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그건 그렇고 사당 옆에는 효자비도 세워져 있다. 이곳 손죽도를 우국충절과 효를 덕목으로 살아온 마을이라 부른다고 해도 나무랄 이는 없겠다.



마을 안길을 한 바퀴 돌아 동네를 빠져나오니 아까 삼각산을 가면서 지나갔던 도로가 나온다. 그 길가에 초도초등학교 손죽분교가 자리 잡고 있다. 조그만 섬치고는 건물이 커다란 편이다. 하긴 1923년에 문을 열었다니 최소한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한때는 분교(分校)3개나 거느렸을 정도로 번성을 누리던 이 학교는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채 1985년에는 자신이 오히려 초도초등학교의 분교로 내려앉고 말았다. 현재는 거문초등학교의 분교라고 한다. 모교였던 초도초등학교가 폐교(廢校)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란다. 아무튼 각진 돌을 쌓아 지은 이 학교의 건물은 기억해둘만한 내력을 갖고 있단다. 마을 주민들이 건너편 산자락에서 바위를 깨서 손수 지게로 져 날라서 지어냈다는 것이다. 운동장에는 책 읽는 소녀상과 횃불 든 소년상이 나란히 서 있다. 운동장 한쪽에도 유관순 의사와 정재수 효자상, 이승복 어린이의 낡은 동상이 푸른 바다를 보고 있다.



에필로그(epilogue), 손대도는 가고 싶은 섬에 선정(2017)된바 있다. 전남도에서 추진하고 있는 사업인데, 존재 자체가 친환경적인 섬을 개발하되, 토목사업을 통한 개발행위를 하지 않고 공정여행·착한여행·생태여행지로 조성하는 게 목적이란다. 주민들이 섬을 떠나지 않고, 고향을 떠나 도시 노동자로 떠도는 청년들이 돌아와 '살고 싶은 섬'으로 조성하는 것이다. 2015년 여섯 개의 섬(여수 낭도, 강진 가우도, 고흥 연홍도, 완도 소안도, 신안 반월박지도, 진도 관매도)이 최초로 선정된 이래, 2016년 장도와 생일도가 합류하였고, 2017년 기점·소악도와 함께 손죽도가 포함된 것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섬 전체에서 인위적인 색체를 지우려 한 노력이 엿보였다. 바람직한 방향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수천 년 동안 바람과 파도에 부대끼며 스스로 멸할 것은 멸하고 겨우 살아남은 고유한 생태계를 개발이라는 침입자로부터 막아주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주민들이 겪어야할 불편 또한 무시할 수 없을 게 분명하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 주민들이 떠나지 않고, 오히려 고향을 떠났던 젊은이들이 돌아오게 만드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고 싶은 섬사업이 성공하길 비는 것은 나만의 아집(我執)일지도 모르겠다.

개도(蓋島) 여행

 

여행일 : ‘18. 3. 23()

소재지 : 전남 여수시 화정면 개도리

트레킹 코스 : 여석선착장모전삼거리샘골고개생금산 팔각정봉화산(338m)천제봉(天祭峰, 320m)화산마을개도막걸리 도가개도선착장여석선착장(소요시간 : 4시간 30)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여수에서 남쪽으로 21.5쯤 떨어져 있는 섬으로 면적이 9.94이니 크지도 그렇다고 작지도 않은 섬으로 보면 되겠다. 섬은 산이 많은 편이다. 봉화산(烽火山, 338m)과 천제봉天祭峰, 320m) 외에도 200m 내외의 산들이 많다. 산행은 3개의 큰 봉우리를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한다. 평범한 육산이지만 짙푸른 바다에 떠있는 수많은 섬들을 보면서 걷는 매력적인 산행이다. 개도는 남쪽의 금오열도를 비롯해 월호도·자봉도·제리도·하화도·백야도 등 크고 작은 섬들로 둘러싸여 있다. 개도라는 이름도 주위에 작은 섬들을 거느리고 있다는 뜻에서 덮을 개()를 썼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개도의 주산(主山)이라 할 수 있는 화개산(華蓋山)의 모양이 솥뚜껑 모양을 닮아서 그렇게 붙여졌다는 게 정설이다. 봉화산과 천제봉이 개의 두 귀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으니 참조한다. 섬에서 길게 튀어나온 지형이 개 꼬리 모습이라 개도라는 얘기가 있다. 충무공의 난중일기(亂中日記)’에는 개이도(介伊島)’라는 지명으로 나온다. 이는 개도이두식(吏讀式)‘으로 표현한 이름이란다. 참고로 개도는 2010년 행정자치부 선정 명품 섬 베스트10’에 뽑힌바 있다. 맛과 멋이 잘 어우러진 친환경 명품 섬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란다.


 

찾아오는 방법

개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일단 백야도 선착장까지 와야만 한다. 섬으로 들어가는 배가 이곳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순천-완주고속도로 동순천 IC에서 내려와 17번 국도를 타고 여수방면으로 달리다가 덕양교차로(여수시 소라면 덕양리)에서 22번 지방도로 갈아타면 여수죽림개발지구와 화양면을 지나 백야도의 관문이랄 수 있는 백야대교(白也大橋)’에 이른다. 백야도와 육지를 연결시키기 위해 20054월에 놓은 다리로 이 다리가 놓이기 전까지만 해도 이곳 백야도에 오려면 화양면의 힛도선착장(안포리)’에서 도선을 타는 불편을 감수해야만 했었다. 참고로 백야도(白也島)는 여수시에서 남서쪽으로 18.5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섬으로 여수시 화정면(華井面)‘의 소재지인 백야리(白也里)가 이곳에 있다. ’백야도란 섬의 주봉인 백호산(白虎山) 정상의 하얀색 바위들로 인해 섬까지도 하얗게 보인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하얀색 바위의 모습이 호랑이를 닮아서 백호산이라는 이름이 지어졌는데, 1896년 돌산군(突山郡)을 설치할 때에는 그 이름이 섬의 이름(白虎島)이 되기도 했다. 1914년에 여수군에 편입되면서 다시 백야도가 되었다.



배를 기다리는 중에 일출(日出)을 만났다. 올 정초에도 나는 이곳에 있었다. 새로운 해에 걸맞는 새로운 해를 맞이하기 집을 나섰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활짝 퍼져버린 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건너편 산자락에 막혀 해가 올라왔을 때는 햇살이 이미 퍼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해가 오늘은 산자락을 비켜나서 떠오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행운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번 여행 또한 행운의 연속이 될 것만 같다.



운항중인 배는 태평양해운 소속의 대형카페리3‘, 차도선(車渡船)인 이 배는 제도와 개도, 상화도, 하화도, 사도를 거쳐 낭도까지 운행한다. 개도의 여석항까지는 14(6:55, 8:00, 11:30, 14:50) 운항되며, 돌아올 때에는 종점인 낭도에서 배를 돌려 이번에는 역방향으로 운항하는데, 7:20, 10:30, 14:00, 17:20에 여석항을 출발한다. 참고로 여수여객선터미널에서 들어오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백야도에서 들어오는 것보다 2배나 더 오래 배를 타야만 하는 불편을 감수해야만 한다.



30분 조금 못되게 달려온 배는 우릴 여석항에다 내려놓는다. ’개도의 주된 항구는 화산항이나 먼저 멈추는 곳에서 내리기로 한 것이다. 참고로 여석은 숫돌 '()'에 돌 '()'자를 쓰며 숫돌기미라고도 부른다. 마을 부근에 전라좌수영 수군들의 병기를 다듬던 숫돌의 재료가 되는 돌이 많다고 해서 숫돌기미라고 부르던 것을 한자로 고친 것이란다.




여석마을 방향으로 들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잠시 후 만나게 되는 여석삼거리(이정표 : 여석마을/ 생태탐방로/ 여석선착장)‘에서 오른편의 생태탐방로 쪽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 또 다시 나타나는 모전삼거리에서는 왼편 화산선착장 방향으로 진행한다. 이정표(생태탐방로/ 화산선착장/ 여석선착장)에 표기되어 있는 지명으로 인해 다소 헷갈릴 수도 있으나 곁에 개도사람길 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니 참조하면 될 것이다. 참고로 모전삼거리모전마을로 가는 길이 나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모전마을은 띠밭몰이라고도 하는데 마을이 잔디의 다른 말인 가 많은 지역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5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에게는 아련한 추억이 있는 식물이다. '삐비'라고도 불리는데, 잎으로 피기 직전에 불룩하게 튀어나오는 줄기를 쪽 빼내서 하얀 솜털 같은 것을 입에 넣어 껌처럼 씹어 먹으면 달짝지근하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20분 조금 못되어 샘골고개에 올라선다. 이곳에도 역시 개도사람길 안내도와 함께 이정표(팔각정(봉화산) 전망대/ 한려선착장)가 세워져 있다. 그런데 화산마을에 있는 선착장의 이름이 화산에서 한려로 바뀌어 있다. 사소한 잘못이라 치부할 수도 있겠으나 바로 잡았으면 좋겠다. 이정표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곧장 직진하면 개도에서 가장 큰 마을인 화산마을에 이른다. 반대편, 그러니까 우리가 올라왔던 방향은 개도의 여섯 마을 중 서쪽에 있는 세 개의 마을인 서삼리(여석·모전·호령)로 연결된다.



오른쪽 산자락으로 난 산길로 들어선다. 팔각정(봉화산) 방향이다. 숲으로 둘러싸인 산길은 시작부터 가파르다. 그것도 버겁다 싶을 정도로 가파르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심하게 가파른 곳에는 통나무로 계단을 놓았기 때문이다. 그저 속도만 조금 떨어뜨린다면 별 어려움 없이 올라설 수 있다는 얘기이다.



그렇게 15분쯤 오르면 생금산(191m)‘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정상은 팔각정이 주인노릇을 하고 있다. 정상석이나 이정표 등 이곳이 생금산의 정상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표식을 일절 찾아볼 수 없다는 얘기이다. 그 흔한 정상표지판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저 준비해온 주전부리나 하면서 쉬었다가라는 듯이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정자에 오르면 맑은 바다위에 누에모양 섬이 반긴다. 하화도다. 그 뒤로 상화도와 추도, 제도, 낭도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스탬프로 꾹 찍어 갖고 싶은 한 폭의 그림엽서 같다. 고흥 쪽의 여러 섬들과 여수도 한 눈에 들어옴은 물론이다. 누군가는 바닷가 포구에 자리 잡은 서삼리의 세 마을 전경이 눈에 닿을 듯 내려다보인다고 했으나 확인할 수는 없었다.



봉화산으로 향한다. 팔각정에서 100m 거리에 있는 전망바위에서는 화산마을 전체와 가야할 봉화산이 삿갓처럼 보인다. 이어서 전망대를 지났다싶으면 산길은 가파르게 변한다. 해발이 200m에도 못 미치는 산 치고는 많이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그렇게 10분쯤 내려서니 너른 초지(草地)가 나타난다. 옛날 군마(軍馬)를 기르던 곳이란다. 개도는 조선시대에 화양면 곡화목장에 속했다고 한다. 지금은 소를 키우지만 그 때만 해도 군마를 기르던 곳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선지 초지에다 판석(板石)을 깔아 놓았다. 사방에 널린 소똥으로부터 길손을 보호하려는 배려가 아닐까 싶다. 이왕에 나온 김에 이와 관련된 전설 한 토막을 옮겨볼까 한다. 요 아래 화산마을에서 자라고 있는 마녀목이라 불리는 300여년 된 커다란 느티나무가 그 주인공이다. ‘마녀목마녀악마를 뜻하는 게 아니고, 말을 좋아했던 한 소녀를 뜻하는 마녀(馬女)이니 오해말기 바란다. 조선시대 이곳 개도에서는 군마들을 길렀는데, 마부 이돌수의 딸 복녀점박이라는 어린 말 한 마리를 특히 좋아했다고 한다. 전쟁이 나자 조정에서 군마를 동원했는데 이 어린 말도 끌려갔고, 소녀는 슬픔에 잠겼다. 그런데 얼마 뒤 어린 말이 바다를 헤엄쳐 섬으로 돌아와 소녀와 만났고, 끝내 소녀의 품에서 숨을 거뒀다고 한다. 말의 주검을 묻은 곳에서 나무가 자라 올랐는데, 이것이 마녀목이라는 얘기다. 이후 이곳 주민들은 남의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을 가리켜 '점박이 말만도 못한 사람'이라며 나무랐다고 한다.



초지는 한두 곳이 아니다. 어떤 곳에는 돌담까지 쌓아 아예 방목장(放牧場)으로 꾸며놓았다. 울창한 소나무 숲길을 지나 쉼터를 겸하도록 해놓은 안부에 이르니 갈림길이 나타난다. 생금산과 천제봉 사이의 재로 오른편으로 내려가면 호령(號令)’ 마을이 나온다. 마을 뒷산이 꼭 호랑이처럼 생겼다고 해서 '호야개', '호녁개'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지금의 호령마을이 되었다. 왼편은 물론 화산마을로 연결된다. 개도에는 이 두 마을 외에도 월호와 신흥, 월항, 여석. 모전 등의 단위마을들이 있다.




또 다시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그것도 엄청나게 가파르다. 오늘 산행에서 가장 힘든 구간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이 구간 전체가 힘들다는 얘기는 아니다. 10분 정도 잡목 숲을 지긋하게 오르는 동안 섬다운 조망이 한 꺼풀씩 벗겨지기 시작한다. 왼편 발아래에는 화산마을이 똬리를 틀고 있고, 다른 편에는 아까 생금산에서 보았던 풍경이 다시 한 번 펼쳐진다. 아니 아까보다 훨씬 더 화려한 그림으로 변해있다.






밋밋한 구릉(丘陵)처럼 생긴 정상에는 정상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그런데 적혀있는 지명(地名)이 보는 이들을 헷갈리게 만든다. ‘봉화산(337.8m)’으로 적어놓은 것이다. 이곳뿐만이 아니다. 등산안내도나 이정표 등 여수시에서 설치한 모든 시설물들은 하나같이 이곳을 봉화산으로 표기하고 있었다. 국토교통부의 산하기관인 국토지리정보원에서 제작한 지도(地圖)에는 천제봉으로 나와 있는데도 말이다. 그렇다고 관할 지자체에서 표기한 지명이 틀렸다는 얘기는 아니다. 온갖 사료(史料)와 구전(口傳)들을 다 뒤진 뒤에 결정했을 테니까 말이다. 다만 틀린 지명을 바로잡는 것도 지자체에서 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일 테니, ‘국토지리정보원에 지명변경 요청을 추진해 주었으면 좋겠다.



이곳이 봉화산이라고 해도 문제는 남는다. 조망(眺望)이 썩 좋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금오도 쪽으로 시야가 열릴 따름이다. 봉화대의 특징이 툭 트이는 시야(視野)인데도 말이다. 또한 봉수대(烽燧臺)였음을 알려주는 흔적도 눈에 띄지 않는다. 참고로 여수에는 돌산의 방답진 봉수대와 화양면 봉화산의 백야곶 봉수대가 서울로 올라가는 봉수로의 직봉 역할을 했다. 직봉 사이를 잇는 간봉과 요망대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는데, 지금도 곳곳에 흔적들이 남아있다. 이곳 개도의 봉화산은 금오도의 망산에서 백야곶 봉수대를 잇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 봉우리인 천제봉으로 향한다. 산길은 옛날에는 따로 떨어져 섬이었다는 곶(). 육고여가 한눈에 쏙 들어오는 바위전망대를 지난 다음 가파르게 아래로 향한다. 그리고 상당히 오랫동안 이어진다. 그래서 천제봉의 원래 이름이 화개산이었나 보다. 봉화산과 화개산이 완전히 별개의 산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얘기이다.



천제봉과 봉화산 사이의 안부에는 널따란 재가 있다. 바다에서 오르는 만낭골과 화산마을로 내려가는 논밭골이 만나는 지점인데, 방향표지판이 사라져버린 이정표의 기둥만이 이곳이 갈림길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지 길의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다.



산길은 안부를 지나자마자 오름짓을 시작한다. 곧이어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되는가 싶더니 9부 능선에서 너덜지대로 우회(迂廻)를 한다. 하지만 가파름 때문은 아니다. 앞을 가로막는 바위벼랑이 그 원인이다. 그렇게 우회를 한 산길은 반대편 능선에 오르고 나서야 끝을 맺는다. 이곳에 세워진 이정표(천제봉0.1Km/ 개도사람길0.5Km/ 봉화산0.3Km)가 길이 둘로 나뉨을 알려주고 있다. 천제봉의 정상은 물론 왼편이다. 하지만 개도의 절경이라는 해안절벽을 보려면 오른편으로 가야만 한다. 정상을 둘러본 다음에는 이곳으로 되돌아 나와야 한다는 얘기이다.



잠시 후 천제봉 정상에 올라선다. 봉화산에서 20, 산행을 시작한지는 1시간 20분이 지났다. 정상은 무너져 내린 옛 성터처럼 돌무더기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실은 제단(祭壇)이란다. 요 아래 화산마을에서 지내오고 있는 민속행사인 천제(天祭)를 지내기 위해 쌓아올렸다는 것이다. 마을사람들은 이곳을 상당이라 부르며, 산 중턱에는 기우집이 있어 매년 음력 31일 자정 무렵이면 제를 모시기 전에 몸과 마음을 닦고 정성을 드린다고 한다. 또 다른 민속행사인 당산제(堂山祭)32일 오후 5시쯤 지낸단다.



정상은 삼각점 하나만 외로울 뿐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이정표(화산마을 1.2Km/ 봉화산 0.4Km, 개도사람길 0.6Km)를 겸한 정상표지판(천제봉 해발 328m)을 세워두었다. 이곳의 지명도 역시 국토지리정보원의 지도와는 다르게 표시되어 있다. 참고로 천제봉의 원래 이름은 화개산(華蓋山)이라고 한다. 명칭의 유래는 전해지지 않으나 덮을 개()’를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산의 생김새가 솥뚜껑을 닮았다는 데서 온 이름이 아닐까 싶다. 그러다가 이곳에서 천제를 지낸다고 해서 천제봉(天祭峰)’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얻게 됐을 것이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훌륭하다.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른 바다에는 동남방향으로 금오도와 동북방향의 돌산도, 서북쪽으로는 하화도와 사도가 두둥실 떠올랐다. 그 뿐만이 아니다. 서쪽으로 팔영산과 나로도까지 보일 정도다. 개도를 소개할 때 거느릴 개()’ 자를 쓰는 이유이다. 크고 작은 한려해상의 섬들 중심에 왕좌처럼 자리 잡고 있다는 얘기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풍광은 육고여가 아닐까 싶다. 바다 쪽으로 길고 좁게 뻗어나간 곶()인데, ‘개도의 개꼬리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또 다른 이들은 지네능선이라고도 부른단다.



화산마을로 연결되는 능선을 따라 하산을 시작한다. 조금 전의 삼거리로 되돌아가 개도사람길(2코스)’로 내려갔어야 했는데도 그만 놓쳐버리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다. 미술사학자 유홍준 교수의 저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처음 등장한 표현이다. 답사기가 100만권이 넘게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이 표현이 사람들 사이에서도 널리 쓰이게 되었다. 아무튼 이 말이 실감나는 하루가 되어버렸다. 사전지식이 부족했던 탓에 개도 제일의 절경을 그만 놓치고 말았기 때문이다. 참고로 2코스 경관의 핵심은 길게 튀어나온 뭍고여’(육고여)와 등대섬(고여), 그리고 바닷가 절벽이다. 2개의 바위로 이뤄진 등대섬과 뭍고여 등의 경관을 감상할 수 있도록 망원경이 설치된 전망대도 한 곳에 마련되어 있다고 한다.



화산마을로 내려가는 길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풍경이다. 암릉지대가 형성된 능선을 따라 멋진 해안절벽들이 눈길을 잡아당긴다. 큰 바위로 된 산등성마루는 곳곳에서 연속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하나같이 사방을 둘러볼 수 있는 전망대 역할을 톡톡히 수행한다.



오른편에 청석포 해변과 그 너머의 월항리쪽 해안이 내려다보인다. 물이 잠겨 있는 곳은 상수도용 저수지일 것이다. 바다 건너에 보이는 커다란 섬은 비렁길로 유명한 금오도가 분명하다. 참고로 청석포는 앞에 펼쳐진 바다가 망망대해에서 태풍과 거센 파도를 직접 받는 곳으로 돌의 색깔이 푸른빛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청석포의 너른 바위는 예전 잠깐 시름을 잊고 흥겹게 화전놀이를 하던 곳인데, 반듯반듯하게 떼어 내어 온돌의 구들장으로 내다 팔았던 흔적도 볼 수 있다고 한다.



숲을 가운데에 두고 나타나던 바위등성이가 뚝 끊겨버린다. 이젠 바윗길이 끝나는 가 생각했더니 이번에는 아예 바위봉우리가 나타난다. 사방으로 시야가 툭 터지는 멋진 전망대이다. ‘고래등 바위로 망루에 서 있는 기분이 들 정도로 조망이 뛰어난 곳이다.




진행방향의 능선 뒤에는 월호도와 화태도, 대두라도 등 크고 작은 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오른편 바다 건너에서는 커다란 덩치의 금오도가 그 속살을 드러낸다. 함구미 용두에서 시작하는 비렁길이 켜켜이 싸여가며 나타날 정도로 지척이다. 왼편 발아래에는 화산마을이 웅크리고 있다. 마을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개도중학교와 화정초등학교의 체육관과 누런 운동장도 눈에 띈다.



하산을 시작한지 40분 만에 신흥마을로 내려가는 길이 나뉘는 삼거리(이정표 : 화산/ 신흥마을/ 천제봉·봉화간)에 이른다. 이곳에서라도 우린 신흥마을 쪽으로 방향을 잡았어야 했다. 배성금과 청석금 등 멋진 바위경관들을 눈에 넣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린 화산마을로 내려서고 말았다. 그런 멋진 곳이 있다는 것 자체를 몰랐으니 어쩌겠는가.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내친김에 월항리까지 가보는 게 좋다고 했다. 일대 해안에 멋진 바위경관이 많다는 것이다. ‘월항(月項)’은 본디 닭목’, 닭의 목처럼 가늘고 긴 지형에서 비롯한 지명이다. 달목·달이목으로 불리다, 한자로 적으면서 월항이 됐다. 주민들은 지금도 월항리 일대를 달이목으로 부른다. 긴 목 주변에서 바라보는 내해의 바위자락 경관과 섬들 모습이 자못 빼어나단다.



화산마을로 내려가는 길은 거의 임도 수준이다. 두 명이 나란히 걸어도 충분할 만큼 널따란데다 경사까지도 완만하다. 눈에 들어오는 풍경 또한 곱다. 마을 앞 해안은 물론이고 야도와 자봉도 등 크고 작은 섬들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흡사 돛단배라도 되는 양 일렁이는 파도에 통째로 몸을 맡기고 있다.



그렇게 20분 조금 못되게 내려서면 화산마을이다. 마을로 들어가는 밭둑에는 매화가 벌써 꽃망울을 터뜨렸다. 마을 안길에 심어놓은 홍매화도 보조를 맞추었다. 나도 여기 있다며 꽃망울을 활짝 연 채로 짙은 매화향을 내뿜고 있다. 아무튼 섬 산행은 이쯤에서 끝났다고 보면 되겠다. 오늘 산행은 2시간 50분이 걸렸다. 주요 포인트에서 조망을 즐긴 것 외에는 오롯이 걷는 데만 걸린 시간으로 보면 되겠다. 참고로 화산마을은 개도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큰 동네또는 대동이라고 불러오다가 화개산이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1952년경부터 화산마을로 부르게 되었다. 화산마을에는 웃몰, 아랫몰, 건너몰과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해서 별촌이라고 부르던 작은 마을들이 있다. 이왕에 나온 김에 재미있는 얘기 하나쯤 더 짚어보자. ‘운꼬지라고도 하는 별촌마을의 찰떡여는 파도에 잠겼다 드러났다 하는 바위가, 파도에 부딪히면서 찰떡찰떡 소리를 낸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마을을 빠져나온 후, 화산(개도)선착장 쪽으로 방향을 틀자마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개도막걸리공장이 나타난다. 재일(在日) 기행작가인 정은숙씨의 막걸리 기행에도 나왔을 정도로 입소문을 많이 탄 곳이다. 원료로 사용하고 있는 물, 즉 개도의 양대 산인 화개산봉화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그만큼 깨끗하면서도 맛이 뛰어나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하긴 죽어가는 말도 살렸다는 복녀의 전설에까지 나올 정도이니 두말하면 잔소리가 아니겠는가. 참고로 어느 전문가는 개도막걸리를 탁한 맛보다는 목넘김이 상큼하고 탄산의 쏘는 맛과 단맛이 가미된 느낌이라고 평가하면서, 합성감미료를 섞었으니 전통주라기보다는 가공주로 보는 게 옳다고 했다. 또한 그는 이미 명맥이 끊어져버린 전통 개도막걸리대신에 시대의 흐름에 맞게 맛을 변형시켜 기존 막걸리의 맛과는 차별화된 새로운 맛으로 재탄생시켰다고도 했다. 그게 사람들의 입맛을 돋우었던 모양이다. 전국 각지에서 개도막걸리를 판매하고 있다니 말이다.



무턱대고 안으로 들어서니 사장님께서 어디서 오셨나며 길손을 맞는다. 그리곤 막걸리 한 병을 내놓으신다. 멀리서 왔으니 맛이라도 보고 가라는 것이다. 안주는 달랑 김치 하나이다. 하지만 그게 뭐 대수겠는가. 일단 한 대접 들이키고 본다. 요즘 한창 주가를 높이고 있는 이연복 셰프가 극찬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막걸리가 주스 같다. 단맛과 상쾌함이 돈다는 표현을 썼었다. 그러나 난 상큼한 우유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그러니 맛이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게 오해였다는 걸 알아차리는 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선착장 근처의 횟집에서 반주로 내준 개도막거리가 내 입맛을 돋우었기 때문이다. 주인아주머니의 말마따나 일반인들의 입맛에는 약간 숙성된 막걸리가 제격이었던 모양이다.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친 난 발걸음을 돌려 양조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네 병을 챙겨 배낭에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서울 도착할 때쯤이면 익어있겠지?



선착장으로 가는 길가에는 생선 횟집은 물론이고, 반듯한 규모의 철공소도 보인다. 부둣가에는 제법 큰 크레인(crane)도 설치되어 있다. 번성했던 시절을 떠올리게 만드는 풍경들이 아닐까 싶다. 하긴 한때는 섬 인구가 3000명을 넘기도 했고 김 양식으로 잘 나가던 시절에는 강아지도 기왓장을 물고 갈 정도로 기와집이 많았었단다.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게 있다. 오른편에 보이는 엄청나게 너른 간척지(干拓地)이다. 그런데 황무지로 그냥 버려져 있는 게 아닌가. 염분과 칼륨 등을 제거하기 위한 물이 부족한 탓에 농작물을 재배할 수 없기 때문이란다. 그렇다면 타 용도로 전환해서 사용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아직까지 방치하고 있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얘기이다.



주조장에서 조금 더 진행하면 개도선착장이 나온다. ‘개도사람길은 계속해서 해안도로를 따르면 된다. 그렇다고 여객선매표소를 그냥 지나치는 우()는 범하지 말자. 건물의 안에 갤러리(gallery)가 꾸며져 있기 때문이다. 60여 점의 액자가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것이다. 여수 중앙동 동남스튜디오 소속 사진작가 김성환(37)씨의 작품인데, 주민들의 일상생활과 삶의 모습을 담은 스냅사진들이라고 한다. 아무튼 사진의 주인공들은 하나 같이 행복한 미소를 머금고 있어, 보는 이들의 마음까지도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 여객선을 대기하는 주민들과 관광객들의 무료함을 달래줌은 물론이다.




계속해서 해안도로를 따른다. 잠시 후 식당을 겸하고 있는 개도펜션의 앞에서 길이 둘로 나뉘지만 역시 해안가를 따라 진행한다. ! 깜빡 잊을 뻔 했다. 점심은 갯마을 식당에서 했다. 자연산 광어가 한 접시에 3만원, 날것을 못 먹는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는 갑오징어가 준비되어 있었다. 고기나 조개를 잡으면 배에 매달아둔 그물주머니에 넣어두었다가 손님이 오면 건져서 요리를 해준다니 모처럼 싱싱한 해산물로 배를 채워볼 일이다. 마침 주머니 사정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손님이 해주라는 대로 그 가격에 맞춰서 요리를 해준다니 말이다.



선착장에 이른다. 이곳에서부터는 해안 산책로를 따른다. 들머리에 이정표(생태탐방/ 화산선착장)가 세워져 있으니 찾는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또 다른 시설물도 보인다. 개도의 명소를 소개하는 두 개의 개도 안내판과 함께 개도사람길 안내도’, 그리고 여수십경(麗水十景 : 진남관, 오동도, 향일암, 돌산대교, 거문도등대, 백도, 사도, 영취산진달래, 여수 국가산업단지, 여자만 갯벌)’여수십미(麗水十味 : 서대회, 돌산갓김치, 갯장어회, 군평선이, 생선회, 장어구이, 굴구이, 해물탕, , 한정식, 게장백반)‘를 홍보하는 여수시 관광안내도를 세워놓았다.



바다는 온통 양식시설들로 꽉 차있다. 이곳 개도가 본디 어류와 전복 양식의 천국이라고 하더니 맞는 모양이다. 특히 개도산 전복은 참전복이란 상품명으로 전국에 팔려나가고 있단다.



바닷가에는 팔뚝길이만한 숭어들이 떼를 지어 놀고 있다. ‘물 반 고기가 반이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집사람의 입맛 다시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려온다. 그냥 지나치기가 무척 아쉬웠던 모양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지금 내 손에는 투망이 없는 걸 말이다.



이정표를 따르지 않고 바닷가 쪽으로 조금 더 나가자 또 다른 들머리(이정표 : 화산전망대 200m, 여석전망대 700m)가 나타난다. 이번에는 해안가를 따라 데크로 길을 내놓았다. ‘개도사람길’ 1코스일 것이다. ‘개도사람길이란 개도 주민들이 오래전부터 이용해온, 마을과 마을을 잇는 통로를 따라 만든 둘레길이라는 뜻이다. 둘레길은 지금 걷고 있는 화산선착장에서 호령마을까지의 1코스(4.5)와 호령마을에서 상수도용 저수지(배성금) 사이의 2코스(3.14)가 마련돼 있다. 저수지에서 월항리 적목마을을 잇는 3.5가량의 3코스는 현재 공사 중이란다.



길은 해안가 산비탈을 헤집으며 나있다. 대부분은 흙길이나 그게 어려운 곳에는 데크 로드를 만들기도 했다. 가끔은 해안 가까이로 내려가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바다풍경을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해송과 동백, 후박나무 등의 상록수림이 우거진 오솔길로 보면 되겠다. 그렇게 10분쯤 걸었을까 둘레길에서 약간 비켜난 곳에 화산전망대가 만들어져 있다. 데크로 만든 전망대에는 화정면 지도개도사람길 안내도와 함께 조망도를 세워 실물과 대비해 볼 수 있도록 했다. 앞에 보이는 커다란 섬이 제도이며, 그 왼편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건 백야도란다. 제도의 오른편에는 여수시가지와 그 뒤의 산들을 그려 넣었으나 실경(實景)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꽤나 먼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다시 나선 길은 아까와 다를 게 없다. 계속해서 해안선을 따른다는 얘기이다. 그러니 주변의 풍광도 아까와 다름이 없다. 아니 바닷가 풍경이 아까보다는 조금 더 자주 나타나긴 한다. 누군가는 개도의 둘레길을 일러 남해바다의 푸른 바람을 온 몸으로 안으며 한적한 여유와 섬사람들의 질퍽한 그리움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해풍산행길이라고 했다. 그의 표현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변화가 별로 없는 그저 그렇고 그런 오솔길이 쭉 이어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20분 정도를 걸으니 길이 둘로 나뉜다. 여석전망대로 내려가는 길이 나뉘는 곳인데 이정표(여석마을1.4Km/ 여석전망대60m/ 화산마을950m)가 세워져 있으니 놓칠 일은 없을 것이다. 이정표가 지시하는 방향으로 잠시 내려서면 데크로 지어놓은 전망대가 나타난다. 이곳도 화산전망대와 같은 시설물들을 세워놓았다. 조망도와 비교해가면서 섬들에 눈을 맞춰본다. 제도와 백야도를 왼편에 놓고, 오른편에는 자봉도가 자리 잡았다. 그 사이에는 여수시가지를, 그리고 뒤에는 천마산과 대미산, 봉수산, 봉화산, 천왕산 등을 그려 넣었지만 시야에 잡히지는 않는다.



이젠 여석선착장으로 가는 길만 남았다. 1.4Km나 되는 이 구간은 아무런 볼거리도 없다. 그저 앞만 보며 걷는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그렇게 25분쯤 걸었을까 진행방향 저만큼에 여석마을이 나타나면서 오늘 트레킹이 종료된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가 밭고랑에는 여수의 명물이라는 방풍나물이 자라고 있다. 풍을 예방한다는 나물이다. '방풍나물'은 꽃이 피기 전에 모두 베어버린다고 한다. 웃자란 잎은 딱딱해서 먹을 수도 없지만 그대로 놔둬 꽃이 피면 다시 돋아나 감당을 못하기 때문이란다. 베어내고 놔두면 뿌리에서 새싹이 돋아난다고 하니 경제성이 높은 나물이라 하겠다. 아무튼 저 마을에는 여수의 상징인 벅수 2기가 세워져 있다고 한다. 2기의 돌벅수 중 남자상은 할아버지 벅수로 바다 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여자상은 할머니 벅수로 마을 쪽을 바라보고 있다. 2기 모두 무관(無冠)의 민머리형이며, 명문은 여수 다른 벅수와 같이 남정중(南正重)’화정려(火正黎)’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풍도(豊島) 여행

 

여행일 : ‘18. 3. 19()

소재지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풍도동

트레킹코스 : 풍도선착장은행나무복수초·바람꽃 군락지후망산(候望山, 176m)대극군락지북배해안해안도로등대풍도선착장(소요시간 : 3시간)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대부도에서 남서쪽으로 24km 떨어져 있는 풍도는 섬 둘레 5.4, 전체 면적이 1.84k에 불과한 작은 섬으로, 2017년 기준 124명의 주민이 대부분 어업에 종사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만큼 농사를 지을만한 땅이 드물다는 증거일 것이다. 북배 지역의 해식애를 빼놓고는 섬의 경관 또한 딱히 내세울 것이 없다. 그런데도 요즘은 민박으로 벌어들이는 부수입이 제법 짭짤하단다. 이곳이 복수초와 노루귀, 바람꽃, 대극, 현호색 등 아름다운 야생화들이 군락을 이루며 자라고 있다는 것이 세간에 입소문을 탔기 때문이다. 특히 풍도바람꽃과 풍도대극 등 이곳 풍도에서만 자생하는 야생화도 두 종이나 된단다. 이로 인해 야생화에 매혹된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몰려온다. 그런데 배편은 하루에 한 번만 운항하니 그들이 머물 집들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처럼 당일치기로 다녀가기도 한다. 안산의 탄도항이나 당진의 도비도항, 서산 삼길포항 등지에서 단체로 유람선이나 낚싯배를 빌려 아침 일찍 섬에 들어 한나절 돌아본 뒤 오후에 되돌아 나오곤 한다. 참고로 풍도라는 지명은 섬 주변에 수산자원이 풍부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1914년 이전에는 단풍나무 풍()를 써서 풍도(楓島)라고 하였다가,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부천군에 편입되면서부터 현재의 풍도(豊島)로 바뀌었다고 한다


  

찾아오는 방법

풍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일단 서산시 대산읍에 있는 삼길포항까지 와야 한다. 섬까지 태워다 줄 유람선이 이곳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이때 알아두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정기여객선은 인천여객선터미널이나 대부도 방아머리선착장에서 타야만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매일 1회씩만 운행하기 때문에 당일치기 섬 여행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로 인해 우리 같은 단체 여행객들은 삼길포항에서 유람선이나 낚싯배를 빌려 타고 섬으로 들어가는 게 보통이다. 참고로 삼길포항은 서산 대호방조제의 서쪽에 위치하는 항구로 서해안의 미항으로 불린다. 인근 해역에서 우럭이 많이 잡힌다고 해서 매년 우럭축제가 열리곤 한다.



우리를 태우고 갈 뉴스타호, 20톤 급의 작은 유람선인데도 정원은 86명이나 된단다. 산악회 둘이 연합해서 이용해도 괜찮겠다. 그러나 이 배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예약이 필수이다. 정기 항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곳 삼길포항에는 이런 유람선들이 몇 척 더 있는데, 평소에는 인근에 있는 난지도와 소난지도, 비경도, 대조도, 소조도, 도비도 등을 돌아보는 코스로 운행된다고 한다.



배를 탄지 50분쯤 지나자 풍도에 도착한다. 배에서 내리면 산비탈에 기대어 들어선 섬마을이 나타난다. 고작 1.84에 불과한 꼬맹이 섬인 점을 감안하면 제법 큰 규모이다. 그런데 이곳의 주소가 좀 묘하다. 당진군의 석문에서 12밖에 떨어지지 않았는데, 그보다 배나 먼 곳에 있는 안산시의 주소(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풍도동)를 쓰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이곳 풍도는 조선시대 당진팔경(唐津八景) 중 여덟 번째인 풍도요망(豊島遙望)’으로 일컬어졌다고 한다. 요망(遙望)이란 먼 곳을 바라본다.’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풍도요망(豊島遙望)’멀리 풍도가 보인다라는 뜻이 된다. 아니면 풍도에서 먼 곳을 바라본다는 얘기일 것이고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곳 풍도는 조선시대에는 단풍섬(楓島)’이라 불릴 정도로 단풍나무가 많은 섬이었다. 그러니 가을이면 얼마나 아름다웠겠는가. 이로보아 멀리서 바라본 풍도가 극히 아름답다고 해서 팔경에 뽑혔지 않나 싶다.




선착장에는 풍차(風車)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예쁘장한 게 사진 촬영 때 배경으로 삼기에는 좋겠으나 이곳과는 어떤 인연이 있는지 모르겠다. 섬 이름인 풍도풍차가 같은 자 돌림이라서 일까? 아니면 로시난테를 탄 돈키호테가 풍차를 향해 돌진하듯 여행객들이 몰려들면 좋겠다는 내심을 담았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풍차의 옆에다 만들어놓은 승객대기소의 기둥에는 야생화 보물섬, 풍도라고 적힌 입간판이 매달려 있다. 꿩의 바람꽃과 복수초, 천남성 등 야생화의 사진도 함께 그려져 있다. 물론 풍도대극과 풍도바람꽃 등 이곳에서 발견되는 변종(變種)의 사진이 빠졌을 리가 없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 왼편에 대남초등학교 풍도분교장(大南初等學校 豊島分校場)’이 보인다. 1933년에 진명학원으로 문을 열었고, 1943년에는 8명의 첫 졸업생을 배출했다니 제법 역사가 있는 학교라 하겠다. 1958년에 풍도국민학교로 승격되기도 했으나, 1986년에는 다시 분교(分校)로 격하되었다고 한다. 또한 올해는 신입생이 없어 입학식도 열지를 못했단다. 이 학교도 세월의 무게를 배겨내지 못한 셈이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자 마을 복지회관이 나온다. 이층으로 지어졌으니 섬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라 할 수 있겠다. 이곳도 노인들을 위한 복지시설을 갖추고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구성원이 노인들이라는 섬의 특성을 살린 실버복지말이다. 냉난방시설 등 공동생활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비용부담 없이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게 요즘의 실버복지라 할 수 있겠다. 아무튼 건물의 외벽(外壁)에는 그림을 그려 넣었다. ‘세계 3대 미항가운데 하나라는 베네치아를 닮은 그림인데, 복지제도가 잘 갖추어진 이탈리아에 못지않은 시설을 갖추고 있다는 은근한 자랑일지도 모르겠다.



허물어져가는 빈집들도 몇 보인다. 이곳도 역시 다른 섬들과 하나도 다를 게 없는 모양이다. 주민들이 점점 노령화(老齡化)되어가다가 끝내는 공도(空島)로 변해 버는 추세 말이다. 하긴 이곳은 그게 더 심화될 수밖에 없는 여건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혹자는 풍도(豊島)’를 주변에 수산자원이 풍부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풍도의 주변에는 갯벌이 없다. 때문에 이곳 사람들은 해마다 겨울철만 되면 수산물을 채취하기 위해 인근 섬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그만큼 정주(定住) 여건이 좋지 않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마을을 벗어나면 길은 밭두렁을 따라 이어진다. 하지만 고갯마루에서 임도와 만나는 걸 보면 다른 길도 있었나 보다. 아무튼 이정표가 없으니 고갯마루에 서있는 마치 부채처럼 생긴 거대한 나무를 목표로 삼아 진행하면 된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0분 만에 풍도를 지키는 수호신과 같은 은행나무가 여행객들을 맞는다. 나이가 무려 400살이나 되는 이 은행나무는 높이 25m에 가슴높이 둘레가 7.5m로 성인 다섯 사람이 팔을 벌려야 닿을 만큼 거대하다. 또한 밑동부터 여러 가지로 갈라져 자랐고, 가지마다 하늘로 뻗치면서 마치 거대한 꽃처럼 보인다. 풍도 주민들은 이 노거수(老巨樹)를 조선시대 인조(仁祖) 임금이 심었다고 믿는다. 이괄(李适)이 평안도에서 반란을 일으켜 남쪽으로 내려와 서울을 에워싼 일이 있었다. 여기까지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때 난을 피해 서울을 떠난 임금이 남양에 이르러 배를 타고 풍도에 잠시 머무른 적이 있다고 한다. 이때 섬에 머문 기념으로 은행나무 두 그루를 심고 대부도로 떠났다는 것이다. 때문에 주민들은 이 나무를 어수거목(御手巨木)이라고 부른다. 인조가 심은 나무라는 뜻이다. 661년 나당 연합군의 장수로 왔던 소정방(蘇定方)이 귀국하던 중 풍도의 풍광에 반하여 들렀다가 심어 놓았다는 얘기도 전해지니 참조한다. 하지만 둘 모두 역사적 사실이 아니니 알아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2003년 보호수로 지정되었으며, 관리는 안산시에서 하고 있다.



은행나무 옆에는 마을 사람들의 쉼터로 이용되는 정자(亭子)가 지어져 있으며, 나무의 아래에는 은행나무샘이라 불리는 샘()이 있다. 은행나무가 수맥(水脈)을 끌어 당겨 만든 특이한 샘인데, 풍도가 옹진군에 속해있던 시절에는 옹진군에 속한 140여 개 섬 가운데에서 물맛이 가장 좋기로 소문났었다고 한다. 하지만 물을 마실 형편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덮개를 씌우고 플라스틱 바가지까지 놓아두었지만 물이 고여 있는데다 청소까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정자에 오르면 마을 풍경과 바다가 한눈 가득히 들어온다. 하지만 딱 거기가지다. 그 너머의 바다는 짙은 해무(海霧) 속에 잠겨버렸기 때문이다. 덕분에 당진 쪽의 육지는 물론이고 난지도와 육도까지도 사라져버렸다.



야생화 군락지로 향한다. 정자의 오른편으로 난 산자락을 따르면 된다. 널따란 길을 따라 200m쯤 더 가면 또 다른 은행나무를 만날 수 있다. 그것도 역시 수령이 500년이 넘었다지만 보러가는 것은 그만두기로 한다. 일부러 찾아가야 할 만한 내력을 지니고 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군락지로 올라가려는데 위험구간 출입제한 및 임산물 불법채취 금지안내판이 눈에 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런 곳에다 세워놓았는지 모르겠다. 자칫 야생화군락지의 출입을 금한다는 오해를 불러 일으킬만한 곳에 자리 잡고 있기에 하는 말이다.



50m쯤 올랐을까 야생화가 아파해요. 보호해 주세요.’라는 현수막이 보인다. 옛날보다 꽃이 많이 줄었다는 얘기가 들리더니 야생화보호를 위해 주민들이 발 벗고 나섰나 보다. 맞다. '야생화의 천국'이라는 풍도, 하지만 이 명성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풍도의 야생화가 예쁘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사람들의 방문이 급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꽃을 보기만하고 가는 것까지 나무랄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사진 찍는 사람들이다. 이제 막 피기 시작한 꽃들에게 수난을 주기 때문이다. 꽃대를 촬영하기 위해 보온재인 낙엽을 들춰내서 야생화의 주변을 맨땅으로 만드는가 하면, 심지어는 꽃대를 잘라내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더 큰 문제는 사람들의 발길이다. 길을 따라 유도밧줄을 설치하고 들어가지 말라고 안내판까지 붙여 놓았지만, 이를 무시하고 넘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꽃을 찍는답시고 마구 짓밟고 다니다보니 낙엽 속에서 올라오던 꽃대가 발길에 깔려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심지어는 깔판을 가져와 그 위에 몸을 누이고 엎드려서 촬영하는 사람도 있다니 더 말하면 뭐하겠는가.



풍도를 아껴주세요라고 적힌 입간판도 보인다. 옆에는 이곳에서 볼 수 있는 꽃들의 사진도 넣었다. ‘풍도 카페 예뻐요라는 첨언까지 해두었다. 그렇다. 풍도는 상상을 뛰어 넘는 꽃의 섬이다. 이때만큼은 풍도가 아니라 화도(花島). 복수초, 변산바람꽃, 노루귀, 풍도대극 등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군락을 이룬다. 천상의 화원이 바로 이곳인 것이다. 그런 환경을 부디 해치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주민들이 하고 있는 게다. 소문난 '야생화의 천국'은 이곳 풍도 말고도 많은 편이다. 점봉산 곰배령이나 지리산 노고단도 그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그곳은 훼손 문제가 크게 대두되지는 않는다. 정해진 탐방로 외에는 사람이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야생화도 탐방로 안에서만 촬영할 뿐이다. 야생화는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을 눈으로만 즐기면 좋겠다. 굳이 사진에 담고 싶다면 조금 떨어져서 찍었으면 좋겠다. 사람의 끝없는 욕심 때문에 짓밟히는 야생화가 없었으면 좋겠다.



조금 더 올라가자 하얀 줄이 쳐져 있는 게 보인다. 탐방로를 벗어나지 말라는 금()줄이다. 금줄 너머는 천지가 복수초(福壽草)’. 한두 송이가 아니라 온 땅을 노랗게 색칠하고 있는 모양새이다. 행여나 밟을세라 사뿐사뿐 걸어본다. 황금색 꽃잎을 여는 복수초는 일본에서는 새해 복을 전한다는 의미로 선물로 애용된다. '얼음새꽃'이라는 우리말 이름이 예쁜 꽃이다



원수를 갚겠다는 의미로 무섭게 들리는 복수초는 사실은 복()과 장수()를 함께 써서 복 많이 받고 오래 살아라.’라는 의미를 지닌 꽃이다. 이 꽃은 스스로의 열로 눈을 녹이고 꽃을 피운다. 전국 각지에 분포하지만 그리 흔한 꽃도 아니다. 빠른 곳은 2월부터, 느린 곳은 5월까지 핀다. 한걸음 더 나아가 보자. 꽃잎 한가운데에는 밝고 선명한 노란색 수술이 가득 모여 있고, 수술 속에는 도깨비방망이처럼 돌기가 난 연둣빛 암술이 자리 잡고 있다. 풍도의 복수초는 대부분 가지복수초로 보면 된다. 가지복수초는 복수초에 비해 줄기가 많이 갈라지고, 꽃이 더 크고, 잎이 꽃과 함께 나며, 꽃받침 잎이 5-6개로 적고 꽃잎보다 짧은 게 특징이다.





탐방객안내소가 있는 안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자 이젠 바람꽃이 지천이다군락이라는 표현이 모자랄 지경이다. 풍도에서만 자란다는 풍도바람꽃일 것이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꽃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노루의 귀처럼 솜털이 보송보송한 노루귀와 제비꽃, 개별꽃, 천남성, 현호색 등 꽤 여러 종류의 야생화들이 두툼한 낙엽 사이에서 고개들을 내밀고 있다.



풍도바람꽃(Eranthis pungdoensis B.U. Oh)’은 변산바람꽃의 변종으로 하얀 꽃받침이 깔때기 모양으로 더 크고, 꽃잎이 노란색이 도는 녹색이라서 하얀 꽃받침과 푸른빛이 도는 수술이 특징이다. 향토식물학자 김재길씨에 의해 처음 발견되어 2009년 변산바람꽃의 신종으로 학계에 알려진 이후 20111월 풍도바람꽃으로 정식 명명되었다. 참고로 바람꽃의 학명은 아네모네이다. 그리스 신화의 미소년 아도니스가 멧돼지에게 받혀 죽은 뒤 흘린 피에서 자라났다는 그 아네모네이다. 서양에서는 진홍빛 아네모네가 대세라지만, 풍도바람꽃은 순백색이다.




대극도 고개를 내밀고 있다. 아니 누군가가 주변의 낙엽을 치워버린 탓에 억지로 맨몸을 드러낸 꼴이 되었다. 조금 전에 보았던 현수막은 바로 이런 짓을 하지 말라는 부탁이었던 모양이다. 그냥 촬영만 했더라면 좋으련만 조금 더 나은 작품을 얻는답시고 이렇게 파헤쳐 놓는 것이다. 이런 점을 감안해보니 그냥 은둔의 섬으로 남아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그러나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말이 있듯 무릇 비밀이란 오래갈 수 없는 법이다. 비밀의 정원은 소문나지 않을 수 없었고, 급기야는 인기 TV 예능 프로그램 등에도 소개되면서 국내 최고의 야생화 자생지로 전 국민에게 알려졌다. 그 결과 지금과 같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풍경들을 만나게 되는 상황에 이르렀고 말이다.



이젠 후망산으로 오를 차례이다. 산책로는 탐방안내소 뒤편으로 열린다. 길은 한마디로 곱다. 보드라운 흙길에 경사 또한 걷기에 딱 좋을 만큼만 가파르다. 비로 인해 미끄럽다는 게 작은 흠()일 수도 있겠다.



5분 조금 못되게 올랐을까 도톰하게 솟아오른 지점에 이른다. ‘후망산(候望山)’ 정상이다. 하지만 독립된 봉우리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저 약간 솟아오른 능선 상의 한 지점으로 보는 게 옳겠다. 그러니 정상표지석이 세워졌을 리가 없다. 그 흔한 이정도 보이지 않는다. 함께 걷던 일행의 고도계(高度計)가 아니었더라면 이곳이 정상인줄도 모르고 그냥 지나쳤을 게 분명하다. 참고로 후망산은 호망산(胡望山)으로도 불린다. 일본과 청나라가 아산만에서 교전할 때에 청인들이 망을 보던 산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후대로 오면서 변음이 되어 후망산이 되었다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후망산 꼭대기에 일본이 승리의 깃발을 꽂았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이다. 다른 한편으론 옛날에 풍도 주민들이 산에 올라 바다에 해적이 출몰하는지 망을 보아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과, 풍도의 아낙네들이 전라도로 세곡을 실으러 간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이 산에 올라 망을 보았다는 데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하산은 북배쪽이다. 이동통신사의 송신탑이 세워져 있는 방향으로 진행하면 된다. 잠시 후 군부대로 연결되는 차도에 내려서게 되고, 산책로는 차도와의 접점에서 오른편 산비탈로 내려선다.



가파른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그렇다고 내려서는 게 버겁다는 얘기는 아니다. 비로 인해 젖은 땅이 하도 미끄러워 다소 부담스러울 따름이다.



이 근처는 대극의 군락지이다. 대극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아직 분류기준이 명확하지는 않지만 꽃의 밑동을 싸고 있는 총포(總苞) 안쪽의 털 유무에 따라 붉은대극풍도대극등으로 나눈다고 한다. 4월이 되면 어른 무릎까지 자란다는 이 대극은 그때가 되면 찬란한 초록으로 된다. ‘풍도대극(Euphorbia ebracteolata var. coreana Hurus)’은 붉은대극 보다 잎이 좁고 총포 내에 털이 밀생하는 특징을 가지는 것을 확인해 변종으로 처리하며 학명을 붙였다. 또한 동위효소 분석결과 독특한 대립인자를 갖고 있어 붉은대극 집단과의 유전성 동질성이 매우 낮다고 한다.



풍도대극은 이른 봄 붉은 보라색으로 올라와 연녹색의 청순한 잎으로 자란다. 창칼 같은 잎새가 꽃잎을 삥 둘러 있어 큰 대()’창 극()’을 쓴다. 붉은대극과 같은 속()에 속하며 생김새도 비슷하다.



비탈진 내리막길이 끝나는가 싶으면 길이 둘로 나뉜다. 풍도의 명물이라는 북대는 이곳에서 왼편으로 가야한다. 입구에 출입을 금지한다는 경고판이 세워져 있지만 이를 무시하고 들어서야 한다. 아까도 거론했었지만 왜 세웠는지를 알 수가 없는 시설물이다. 아무튼 북대를 둘러보고 난 후에는 이곳으로 되돌아 나와야 한다. 북대에서 길이 끊겨있기 때문이다.



왼편으로 방향을 틀자마자 또 다시 길이 나뉜다. ‘북대는 왼편으로 가야하지만 오른편 길도 놓쳐서는 결코 안 된다. 그 끄트머리에 있는 바위벼랑이 숨겨진 명소이기 때문이다. ‘북대를 온전히 볼 수 있는 유일한 전망대라고 보면 되겠다. 눈앞에 펼쳐지는 풍도의 붉은 바위는 소문대로 절경이다. 나뭇잎이 져버린 계절이라 조금 덜하지만 풀잎이 녹색으로라도 물들 경우엔 붉은바위와 함게 장관을 이룰 것 같다.




되돌아 나와 이번에는 왼편 길로 향한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풍도 트레킹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북배에 닿는다. ‘북대는 붉은 바위를 뜻하는 붉바위에서 유래된 지명으로 추정되는데, 풍도 서쪽 해안을 이루고 있는 잘 알려지지 않은 비경(祕境)이다. 북배의 붉은 바위는 그 색감이 오묘하며 파란 바다와 어울려 절경을 이룬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백패킹(backpacking)의 천국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백패커(backpacker)들을 만날 수 없다. 20174월부터 이를 전면 금지시켰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풍도는 수도권에서 가까운데다 아름다운 바다와 다양한 야생화를 볼 수 있다는 특이성 때문에 사진작가와 백패커들이 즐겨 찾는 곳이었다. 대신 섬은 쓰레기와 오물로 인해 몸살을 앓아왔다. 아무데서나 용변을 보는가 하면, 무분별하게 취사를 했고, 각종 쓰레기는 스스럼없이 내버렸다. 이를 견디지 못한 주민들이 백패킹을 금지한다는 특단의 조치를 내린 것이다.



바위 너머로는 무인등대가 세워진 북배딴목이 보인다. 밀물 때는 풍도 안의 또 다른 섬이 되고, 썰물 때는 바닷길이 열려 풍도와 연결되는 모세의 기적을 연출하는 곳이다. ‘은 외딴, ‘은 목처럼 가늘게 이어져 있다는 뜻이라고 한다.



아까의 삼거리로 되돌아 나와 이번에는 오른편으로 향한다. 낡은 건물이 보이는 방향이다. 잠시 후 흉하게 파헤쳐진 채석장(採石場)이 풍도의 아픔을 전해준다. 170m높이의 석산(石山)으로 오랜 동안 이곳 풍도의 경관을 해쳐왔단다. 지난 2004년 채석장허가는 끝이 났지만 석산 입구에는 당시 사용하던 장비들이 녹슨 채로 방치되어 있다.



이제부터는 해안선을 따라 난 비포장도로를 따른다. 잠시 후 만나게 되는 겟드레해변은 모래사장이 일절 보이지 않는 해안이다. 크지도 그렇다고 작지도 않은 거무스레한 돌들이 널려있을 따름이다. 이곳 풍도의 특징 중 하나란다. 이 일대의 섬들은 섬의 서쪽 만입부에 모래사장을 끼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풍도 주변 해역은 파랑의 힘이 강해서 모래와 같은 작은 퇴적물이 모두 제거되어 간석지(干潟地)나 사빈(沙濱)이 형성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안을 그냥 버려둔 것은 아니다. 바닷가에 펜션을 지어 자갈밭에서라도 해수욕을 즐길 수 있게 해놓았다.



해무가 짙은 바다 풍경이 고즈넉하다. 풍도해전 당시 청나라 수군들이 떠내려 왔다는 청옆골 해변이 바로 옆이니, 저 바다에도 수많은 시체들이 떠다녔을 것이다. 참고로 이곳 풍도 앞바다는 풍도해전(豊島海戰)이 일어났던 역사의 현장으로 한국 근대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894년 일본군 함대가 청군 함대를 공격하면서 일으킨 이 전투를 시발점으로 청일전쟁이 발발했기 때문이다. 전투는 일본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피해가 전무한 일본과는 달리 청나라는 수많은 전함이 격침 또는 대파됐다. 준비한 자와 준비하지 않은 자의 차이가 그런 결과를 만들어냈다고 보면 되겠다. 싱겁게 끝난 풍도해전은 청일전쟁의 예고편이었다. 이어서 전개된 청일전쟁에서 일본은 연전연승하며 전쟁 발발 8개월 17일 만에 청의 항복을 받아냈다. 대신 청은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해야만 했고 그로 인해 무수히 많은 것을 잃었다. 조선에 대한 종주권(시모노세키 조약 제 1조가 조선이 독립국이라는 점을 확인한다는 내용이었다)도 이때 잃었다. 그렇다면 독립국이라 재확인된 조선은 보다 당당해졌을까? 그렇지 않다. 청나라 대신에 일본의 속국(屬國)이 되었을 뿐이다. 자나 깨나 당파싸움이나 일삼던 위정자들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으니 결과는 뻔하지 않겠는가. 두 번 다시는 우리나라에 그런 상황이 생기지 않았으면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손으로 선택할 수 있는 정치인들을 잘 골라 뽑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잠시 후 또 다른 해안을 만난다. ‘진달래석이라는 수석(壽石)의 채집 장소로 유명한 진장수리해변이 아닐까 싶다. 해안에 널린 자그마한 돌들이 약한 붉은색을 띠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붉으면서도 각진 모가 없는 몽돌들이 깔려있는 것이다. 서해의 거친 파도에 시달리느라 각진 모는 사라지고 저런 모양으로 변했나보다. 돌에 새겨진 문양이 수려하다는 선입견 때문인지는 몰라도 해안을 따라 켜켜이 쌓여있는 몽돌들이 세월과 자연의 신비함을 더해준다.



오른편 산자락에 긴 계단이 놓여있다. 그 위에는 등대지기가 없는 풍도등대(豊島燈臺)’가 있다. 서해안의 요충지인 평택과 당진항을 드나드는 배들의 안전운항을 위해 1985년에 세운 등대이다. 야간이면 6초 간격으로 백색불빛이 깜빡거리며 이 불빛은 15Km 떨어진 곳에서도 볼 수 있단다. 입구에는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주변의 자연경관이 빼어나다는 자랑을 적은 안내판도 세워두었다. 150개도 넘는 계단을 오르면 등대의 주위에다 벤치를 놓았다. 주변 경관을 실컷 구경해보라는 모양이다.




등대에 오르면 바다건너에 있는 부도(鳧島)가 눈에 들어온다. 섬의 생김새가 마치 물오리가 두둥실 떠서 오수(午睡)를 즐기는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도깨비가 많다고 하여 도깨비 섬이라고도 불린다. 또한 많은 도깨비를 쫓기 위해 도깨비가 제일 싫어하는 피()와 소금()을 섞는다는 의미로 피염도(血鹽島)’라고도 불린단다. 저 섬은 역사가 100년도 더 되는 등대(燈臺)로 입소문을 탔다. 인천항관문에 위치하고 있다는 지역적 이유로 1904년에 벌써 등대가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위치의 중요성에 걸맞게 항로표지의 주요기능인 광파·전파·음파표지를 모두 갖춘 등대이다. 이 등대의 등탑은 높이 15.2m, 지름 3m 규모로 불빛은 15초에 한번 반짝인다. 2001년에는 국내 최초로 국산화한 프리즘 렌즈를 이용한 회전식 대형등명기를 설치하여 약 50km의 먼 곳에 있는 선박에서도 식별이 가능하도록 광력을 증강하기도 했다.



해안가 몽돌해변이 잘 보이는 곳에 2층으로 된 어촌체험마을 건물이 있다. 1층은 마을회관이다. 나머지 12층은 냉난방기, TV, 냉장고 등 편의시설을 갖춘 방 5개로 꾸몄다. 어촌체험 숙박시설인데 큰 방은 1517명까지 묵을 수 있단다. 도로 건너 바닷가에는 데크로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창서도와 창도 등 주변의 섬들은 물론이고 바다 건너에 있는 영흥도화력발전소까지도 한눈에 쏙 들어온다.



해안선을 끼고 난 도로의 콘크리트 구조물에 뭔가가 적혀 있는 게 보인다. 풍도마을의 사연들, 즉 마을의 역사를 기록해 놓은 것이란다. 풍도의 60세대를 대상으로 주민과 함께 사라져가는 섬의 이야기, 생활사를 채집하여 시각화 작업을 해놓았다는 것이다. 지역민들은 물론이고 풍도를 방문하는 모두가 지역에서 사라져가는 문화와 역사를 보존하고 발전 시켜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경기문화재단의 문화활생공명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만들어졌는데 참여 작가의 이름을 적어 넣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굴 딴 돈으로 인천으로 유학 보냈다는 문장의 옆에는 굴을 따는 아주머니의 삽화도 그려 넣었다. 아무튼 이 글들을 읽으며 걷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그 가운데 일부를 옮겨본다. 전쟁 때 부모 잃고 9살에 민며느리로 시집와서 고생만 죽도록 하고 새끼 낳고 사니까 그래도 좋다는 송춘순 할머니 얘기가 있는가 하면 주민들을 실어 나르던 여객선 왕경호 이야기, ‘삭발스님 머리 모양 온산을 깎았고, 백호 넘는 가옥이 동네 가득 추녀 맞댔지, 한때는 천명 가까운 주민 살았고, 황해 푸르러 정기 감도는 곳 둥실 떠 있다 내 고향 풍도라는 싯귀(詩句)도 적혀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인천상륙작전이 이뤄진 곳, 맥아더 장군의 태극기가 있던 곳이라는 글귀도 보인다. 이곳 풍도가 맥아더장군과 얽힌 이야기 하나쯤 갖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3시간 만에 다시 돌아온 풍도항(豊島港), 배의 출항시간은 아직도 멀었다. 마음까지 여유로워졌는지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풍도 포구(浦口)는 둥그렇게 생긴 만의 안에 들어있는 모양새이다. 둥그렇게 방파제를 쌓고 그 가운데를 조그맣게 뚫어 배가 드나들 수 있도록 했다. 배를 묶어두는 선착장까지 갖추고 있음은 물론이다. 비록 인공(人工)으로 만들어졌지만 웬만한 태풍에는 끄덕도 없겠다. 방파제의 양쪽 끝에는 빨강색과 하얀색의 꼬마등대를 새워두었다. 경계표시이겠지만 항구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만드는 조형물로서도 톡톡히 한몫을 하고 있다고 봐야겠다.



시간의 여유는 주변 풍광까지도 여유롭게 만들어주나 보다. 바다 풍경까지도 여유롭게 다가오는 걸 보면 말이다. 육도와 난지도 등 바다에 널려있는 크고 작은 섬들은 물론이고, 연기를 내뿜고 있는 굵은 굴뚝들까지도 시야에 들어온다. 왼편은 당진화력발전소일 것이고 오른편은 대산 석유화학공단이 아닐까 싶다.



민가의 대부분은 민박간판을 내걸었다. 어업에서 관광업으로 주업이 바뀐 셈이다. 부업(副業)으로는 산에서 채취한 나물을 팔면서 말이다. 주민들이 내다파는 산나물은 달래사생이나물이다. 그중 이름부터가 생소한 사생이나물이 눈길을 끈다. 민박집의 점심상에 이 나물이 올라왔기에 맛을 보니 미나리향이 강하다. 주인장께 물으니 다른 지방에서는 전호나물이라 부를 거란다. 그렇다면 향이 유독 강한 돌미나리정도로 보면 되겠다. 눈이 쌓인 늦겨울부터 싹을 틔우기 때문에 추위에 시달리면서 향을 키웠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 나물은 우리네 식탁에 가장 빨리 올라오는 산나물 중의 하나이다. 생으로 무쳐먹거나 끓는 물에 데쳐먹어도 좋고, 삼겹살 먹을 때 상추와 함께 싸먹으면 그 맛이 끝내준단다. 물론 부침개를 만들어 먹는 방법도 있다.



섬마을에서 놓칠 수 없는 풍경이 또 하나 있다. 바로 빨랫줄에 매달린 생선들이다. 이 생선들은 살을 에이는 겨울바람에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면서 건어물로 다시 태어난다. 그리고 육지로 건너간 아들딸들의 밥상머리에 올라갈 것이다.


비진도(比珍島) 여행

 

여 행 일 : ‘18. 3. 7()

소 재 지 : 경남 통영시 한산면 비진리

산행코스 : 내항선착장한산초등학교팔손이나무 자생지외항마을비진해수욕장망부석전망대미인전망대선유봉노루여전망대비진암외항선착장(소요시간 : 3시간)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통영에서 남쪽으로 10.5지점, 한산도에서는 남쪽으로 3지점에 위치한 작은 섬으로 해안선 길이 9.0에 면적은 2.77이다. 모양과 크기가 비슷한 두 개의 섬이 550m 길이의 모래톱(砂洲, sandbar)을 사이에 두고 남·북 방향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중 볼거리는 남쪽에 있는 바깥섬에 몰려있다. 여러 곳의 전망대에서는 안섬과 연결되는 모래톱은 물론이고 주변의 섬들이 빠짐없이 눈에 들어온다. 절벽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해식애(海蝕崖) 또한 실컷 구경할 수 있다. 또 다른 볼거리는 비진해수욕장이라 할 수 있겠다. 개미허리처럼 잘록한 모래톱을 달리 부르는 이름인데 이 모래톱을 사이에 두고 안섬과 바깥섬이 마치 아령처럼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서쪽해변은 잔잔한 바다와 모래가 덮인 백사장인 반면, 동쪽 해변은 거친 물살과 작은 조약돌로 이루어진 몽돌해변이다. 양쪽이 모두 바다라서 일출과 일몰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는 것 또한 특징이라 할 수 있겠다. 참고로 비진도(比珍島)‘란 섬의 형상이 마치 거대한 구슬 옥자가 푸른 비단 폭에 싸인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다른 한편으론 산수가 수려하고 풍광이 훌륭할 뿐만 아니라 해산물이 풍부하여 보배()에 비()할 만한 섬이란 뜻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조선시대에는 비진도의 한자를 非珍島非辰島로 쓰기도 했다.


 

찾아가는 길 : 일단은 통영항 여객터미널까지 와야만 한다. 비진도로 들어가는 배가 이곳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들어가는 배는 차도선(車渡船)과 쾌속선(快速船)이 있다. 통영항 여객터미널에서 비진도로 가는 배는 오전 7, 11, 오후 230분 세 차례 운항한다. 돌아오는 배는 오전 930, 오후 150, 5시에 비진도를 출발한다. 주말에는 달리 운항되고 있다고 한다. 오전 7, 오전 9, 오전 11, 오후 15, 오후 230분에 들어갈 수 있고, 오전 930, 오전 955, 12, 오후 130, 오후 4시에 나올 수 있단다. 하지만 바다 상황에 따라 변동이 많으니 운항사인 한솔해운(055-645-3717, 055-641-0313)에 미리 문의해보는 것이 좋겠다.



비진도를 왕래하는 여객선의 운항사는 한솔해운이다. 우리를 태우고 들어간 배는 섬사랑 3‘, 나올 때는 이보다 한참 큰 한솔 2를 이용했다. 둘 모두 매물도로 들어가는 길에 잠깐 들르는 기항지(寄港地)로 삼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비진도의 외항(外港)까지만 운항한단다. 파도가 높은 탓에 매물도의 뱃길이 끊겼다는 것이다. 그 덕분에 뱃길에서 즐기는 눈요깃감도 사라져 버렸다. 한산도와 오곡도 등 올망졸망한 섬들을 구경하는 재미로 지루할 틈도 없다했는데, 오늘은 파도가 높아 갑판으로 나갈 수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통영항을 출발한지 30분쯤 지나자 뱃길로 10.5인 비진도(比珍島)의 내항(內港)에 도착한다. 계획에는 없었지만 이곳에서 내리기로 한다. 원래는 외항(外港)에서 내릴 예정이었으나 트레킹코스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계획을 변경한 것이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내항에서 외항까지의 해안도로를 왕복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잘못이었다. 해안도로 말고도 옛길이 나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들머리를 찾기가 힘들었지만 말이다. 덕분에 우린 시간이 남아돌아 통영으로 태워다줄 배가 들어올 때까지 1시간이나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방파제를 빠져나오면 비진 내항이라고 쓰여 있는 2층짜리 건물이 길손을 맞는다. 마을회관으로 담벼락에는 이곳 내항의 풍경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맨 오른편에 적혀있는 ’12이라는 글귀가 눈길을 끈다. KBS-2TV '해피선데이12'의 멤버들이 이 벽화(壁畫)를 그렸다는 표시라고 한다. 2013년에 DJ 성시경이 손편지로 받은 내항마을 주민들의 사연을 신청곡과 함께 전해주는 '비진도 FM 라디오' 편이 이곳 마을회관에서 진행되었는데, 이때 마을 이장의 부탁으로 그렸다는 것이다. 물론 벽화 아티스트들의 도움을 받았겠지만 감동코드를 담은 그들의 진심이 돋보이는 그림이라 할 수 있겠다. 아무래도 ’12이라는 지명도가 보다 많은 여행객들을 불러 모으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마을회관의 왼쪽에 위치한 경로당의 앞에는 위령탑(慰靈塔)‘이 세워져 있다. 한국전쟁과 월남전에서 전사(戰死)한 마을 청년들을 기리는 비석이라고 한다. 탑은 1981년 전국 풀베기 대회 때 받은 우승 상금으로 세웠단다. 그 오른편에 자리 잡은 송공비(頌功碑)도 눈에 띈다. 사업으로 벌어들인 돈을 동네의 일에 희사한 것을 칭송하는 비석인 모양인데, 한자로 적혀있기 때문에 옳게 해석했는지는 모르겠다.



마을회관과 경로당 사이, 정면으로 산을 바라보며 콘크리트길이 나있다. 알록달록한 지붕이 정겨운 마을 안길을 따라 200m쯤 들어가면 1937년에 개교했다는 한산초등학교 비진분교가 나온다. 2002SBS-TV를 통해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순수의 시대'를 촬영했던 명소이다. 젊은이들의 우정과 사랑을 그린 이야기였는데, 주인공이었던 고수와 김민희가 천연잔디가 깔려있는 저 운동장에서 함께 뛰어 놀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텅 비어있을 따름이다. 아이들도 보이지 않는다. 한해 졸업생이 50명에 달할 때도 있었으나 세월의 무게를 배겨내지 못한 채 2012년에 폐교(廢校)되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사라져버린 빈 운동장에는 숨결이 없는 소녀 하나만이 책을 읽고 있을 따름이다. 아니 신사임당과 충무공께서도 함께 자리를 지키고 계신다.



교문에는 오줌 누는 아이 동상이 서 있다. 그 아래에서 올려다보고 있는 아이는 여자로 보이는데, 호기심을 못 이겨 남자아이가 쉬하는 장면을 엿보는 거나 아닌지 모르겠다. 애들이니 요즘에 유행하고 있는 미투운동(Me Too movement)‘과는 별 관련이 없겠지?



다시 회관으로 되돌아 나와 이번에는 팔손이 자생지로 향한다. 통영시에서 만들어 놓은 이정표(팔손이군락지0.1Km, 비진도 산호길2.1Km, 비진도 외항1.5Km, 올레길2.0Km)를 따르면 된다. 하지만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만들어놓은 이정표(비진도 산호길 2.1Km, 외항마을 1.9Km)에는 그에 관한 정보가 나와 있지 않으니 참조한다. 아무튼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자마자 길이 둘로 나뉘고, 오른편 바닷가를 따르자 곧이어 널따란 공터가 나타난다. 525,721넓이의 팔손이나무 자생지는 이 공터와 경계를 맞대고 있다. 이 나무는 남부지방에서는 정원수로 많이 심기 때문에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지만 온대지방에서 자라는 식물이기에 국내의 자생지(自生地)는 흔치 않다고 한다. 특히 비진도가 국내 팔손이나무 자생지 중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어 천연기념물(63)로 지정·보호되고 있단다.



팔손이나무는 두릅나무과에 속하는 상록관목으로 경상남도 남해와 거제도 등 해변의 산골짜기에서 자란다. ’팔손이라는 이름은 잎이 손바닥모양과 같이 7-9갈래로 갈라진데서 생겨났으며, ’팔각금반(八角金盤)‘ 또는 팔금반(八金盤)‘, ’팔수목(八手木)‘ 등으로도 불린다. 이 나무에는 슬픈 이야기 하나가 전해진다. 옛날 인도에 바스바라는 공주가 있었는데, 공주의 열일곱 생일날 어머니가 예쁜 쌍가락지를 선물로 주었다. 그런데 공주의 한 시녀가 공주방을 청소하다가 반지에 호기심이 생겨 양손의 엄지손가락에 각각 한 개씩 껴 보았다. 그러나 한번 끼워진 반지가 빠지지 않자 겁이 난 시녀는 그 반지 위에 다른 것을 끼워 감추었다. 반지를 잃고 슬퍼하는 공주를 위해 왕이 궁궐의 모든 사람을 조사하자, 시녀는 왕 앞에서 두 엄지를 제외한 여덟 개의 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때 하늘에서 천둥과 번개가 치고 벼락이 떨어지는 순간 그 시녀는 팔손이나무로 변했다고 전해진다.



이젠 외항마을로 간다. 공터 입구의 갈림길에서 이번에는 교회가 바라보이는 오르막길로 방향을 잡으면 된다. 이 길은 비진도의 서쪽, 쉽게 말해 오른쪽 해안선을 따라 나있는 시멘트 포장도로이다. 삭막한 시멘트길이 싫은 사람이라면 옛 사람들이 걷던 코스를 이용해도 된다. 아까 들렀던 한산초등학교 비진분교 앞을 지나면 산자락을 헤집으며 난 오솔길로 연결된다. 이 길은 비진도의 동쪽 해안선을 따라 나있다. 아무튼 난 보다 수월한 시멘트 포장길을 택했다. 이 길을 걷다보면 심심찮게 시야가 열린다. 오곡도와 한산도 등 주변 섬들이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고도(高度)가 낮은 탓에 섬인지 육지인지가 구분이 안 된다는 게 흠이라 하겠다.



그렇게 16분쯤 걷자 고갯마루에 올라선다. 길가에 배수지(配水池)가 만들어져 있는 걸로 보아 이곳 비진도에도 상수도시설이 설치되어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언젠가 해저관로(海底管路)를 통해 내륙의 물을 끌어온다는 기사를 읽은 것 같은데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내리막길이 시작되면서부터 본섬과 마주보고 있는 작은 섬이 간간이 눈에 들어온다. 천연방파제의 역할을 하고 있는 춘복도인데, 아기자기한 갯바위들이 많아 우뭇가사리와 톳, 고동, 전복 등 해산물이 풍부해서 비진도 어민들의 생계에 중요한 수입원이 된다고 한다. 이 아담한 섬은 여러 개의 이름을 갖고 있다. 볼록한 배를 닮은 모양새 때문에 아무 음식이나 가리지 않고 맛있게 먹어 배를 채운다는 뜻으로 충복도(充腹島)’, 하늘의 복덕이 충만한 섬이라 해서 충복(充福)이라고 부르기도 했고, 봄이면 봄처녀처럼 다양한 옷을 갈아입고 아름다움을 뽐낸다고 해 춘복도(春福島)가 되었다. 충복도의 뒤로는 오곡도와 내부도, 외부도가 떠 있다.



길가에 평산 신씨(平山 申氏)’의 효열기행비(孝烈紀行碑)가 세워져 있다. 조금 전에는 경주 이씨(慶州 李氏)’의 절효기실비(節孝紀實碑)도 만났었다. 그런데 둘 모두 여자들을 기리고 있다는 게 눈길을 끈다. 이곳뿐만이 아니다.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만나본 효행비(孝行碑)들은 남자들보다는 여자들의 것이 더 많았었다. 그 이유가 궁금해진다. 그리고 여필종부(女必從夫)’ 등의 고리타분한 강요에 의한 결과가 아니었기를 가만히 빌어본다.



다양한 모양새의 해송(海松)과 이따금 불어오는 해풍, 거기다 새파란 바다를 벗 삼아 걷길 25분여, 진행방향 저만큼에 외항마을이 나타난다. 외항마을은 밧목, 바깥비진이라고도 불린다. 안섬과 밧섬(바깥 섬) 사이를 연결하는 백사장이 학의 긴 목처럼 생겨 바깥목으로 일컬어졌단다. 외항마을의 자랑은 뭐니 뭐니 해도 수려한 해변이다. 쭉쭉 뻗은 소나무가 일품인 소나무숲속공원도 빼놓을 수 없다. 바다가 보이는 곳에 벤치를 놓아 피서는 물론이고 조망까지도 즐길 수 있다.



바다이야기 펜션옆으로 내려서서 이번에는 비진해수욕장의 모래사장을 걷는다. 모래가 부드럽고 수심이 얕은데다 수온까지 알맞아 여름철 휴양지로는 최적지로 꼽히는 곳이다. 1977년에 문을 연 비진도해수욕장은 모래사장의 길이가 550m이다. 이곳이 섬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제법 큰 해수욕장이라 할 수 있겠다. 개장은 7월 중순부터 8월 말까지 날씨 상황을 봐서 여는데 보통 40~50일 정도가 된단다. 참고로 모래사장의 왼편은 외항마을이다. 이미 입소문을 타버린 이곳은 내항마을과 달리 많은 민박집이 있다. 골목 안으로 들어가면 마을 중앙에 마을회관과 마을보건소가 나란히 있다.



안섬과 바깥섬은 모래톱(砂洲, sandbar)으로 연결된다. ‘목메기라고도 불리는데, 한가운데를 시멘트로 포장을 해놓아 차량통행이 가능하도록 했다. 이 모래톱의 오른쪽, 그러니까 비교적 파도가 잔잔한 서쪽 해변은 은빛 모래사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외해(外海)의 파도가 들이치는 동쪽은 주먹만 한 몽돌부터 어른 몸통만 한 바윗돌이 지천이다. 오랜 세월 빗물과 파도에 씻긴 바위가 모난 외모를 버리고 동글동글하게 모양을 다듬었고, 먼 바다에 있던 모래가 조류에 실려와 오목한 비진도 앞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그 너머 바다는 비취빛, 다른 표현을 빌면 영롱한 산호색이다. 둘레길의 이름이 산호길이 된 이유일 것이다. 아무튼 십여 년 전에 만들어놓은 이 콘크리트길이 요즘은 애물단지로 변했단다. 오른편(서쪽)에 있는 모래해변의 모래가 파도의 영향으로 동쪽 몽돌해변으로 자꾸 넘어가면서 모래해변이 점차 축소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콘크리트길을 더 높이던지, 아니면 길을 아예 걷어 내버려야 하지 않을까 싶다.



모래톱의 끝, 그러니까 바깥섬의 들머리는 국립공원탐방안내소가 자리 잡았다. 출입구 창문에 비진도 산호길 워크스테이션(workstation)’이라고 적힌 안내문이 붙어있는 걸로 보아 요즘은 주업이 산호길 안내로 바뀌었나보다. 아무튼 화장실을 갖추고 있으니 길을 나서기 전에 이용하면 좋겠다. 그밖에도 이 부근에는 사진 찍기 좋게 만들어놓은 외항마을 표지판과 나무액자 같은 커다란 포토존(photo zone)이 설치되어 있다. 뒤편에는 가슴가리개를 닮았다는 비진도와 꽃담이 곱다는 비진암에 대해 설명해 놓은 안내판 두 개와 이광섭의 망부석이라는 시를 적어 넣은 시판(詩板)도 세워놓았다.



외항마을 선착장에서 남쪽 섬의 산자락을 향해 파란 선()이 그려져 있다. 섬을 한 바퀴 도는 산호길로 안내하는 선이라고 보면 되겠다. 선을 따라가자 길이 둘로 나뉜다. 이정표(선유봉1.7Km/ 선유봉3.2Km/ 선착장0.3Km)에는 양쪽 방향 모두에다 선유봉을 표시해 놓았다. ‘산호길이 바깥섬을 한 바퀴 돌아보도록 나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아무튼 우린 왼쪽으로 올라가서 선유봉을 둘러본 뒤에 오른쪽 길로 내려오기로 했다.



파란색 안내 선은 산자락 아래에 있는 비진도 게이트까지 이어진다. 아치형으로 만들어진 외형이 눈에 익다. 국립공원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 있겠다. 아무튼 이제부터 산호길이 시작된다고 보면 되겠다. 참고로 산호길은 바다 위의 국립공원인 한려수도에 만들어진 둘레길이다.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비진도와 매물도 등 통영 앞바다의 6개 섬에 탐방로를 개설해 한려해상 바다백리길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그중 하나가 길이 4.8산호길인 것이다. 나머지는 미륵도(달아길) 14.7, 한산도(역사길) 12.0, 연대도(지겟길) 2.3, 매물도(해품길) 5.2, 소매물도(등대길) 3.1등으로 이 모두를 합칠 경우 41.1가 되므로 둘레길의 이름에다 ‘100라는 단위(單位)를 넣었다.



() 안으로 들어서자 섬치고는 제법 너른 경작지(耕作地)가 나타난다. 비좁은데다가 경사까지 가파른 섬의 지형지세(地形地勢)를 최대한으로 살려서 어른 머리만한 돌을 쌓아올리고 그 위에다 작은 밭들을 만들었다. 그런데 그게 마치 층층의 계단을 보는 듯하다. 남해 가천마을의 다랑이논처럼 생겼다는 얘기이다. 저 다랑이밭 위에 푸른 농작물이라도 자란다면 한 폭의 멋진 그림이 될 수도 있겠다.



대나무밭을 지나면 이정표(선유봉1.2Km/ 선착장0.8Km)가 있는 삼거리이다. 오른편으로 꺾어 선유봉 방향으로 오른다. 잠시 후 울창한 숲길로 들어선다. 길도 가팔라진다. 아니 엄청나게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그냥 치고 오르지를 못하고 왔다갔다 갈지()’자를 그리고 나서야 겨우 고도(高度)를 높일 수 있을 정도이다. 길 주변에는 구실잣밤나무와 사약의 재료로 쓰였던 천남성, 청미래덩굴, 붉나무 등이 자주 눈에 띈다. 누군가는 해병대나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육박나무와 비진도가 원산지인 비진도콩 등 다른 자생식물들도 많이 자라고 있다고 했다. 그는 가히 생태박물관이라는 표현까지 사용했었다. 마침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개개의 나무에다 이름표까지 매달아 놓았으니 서둘지 말고 읽어보면서 산을 올라보자.



땀을 한바가지나 흘리고 난 뒤에야 삼거리(이정표 : 선유봉0.9Km/ 망부석전망대30m/ 선착장1.1Km)를 만나게 되고, 왼편으로 방향을 틀자 목제 데크로 만들어 놓은 망부석전망대가 나온다. 바다건너의 용초도와 죽도는 물론이고 그 뒤에 있는 한산도와 추봉도, 거제도 등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멋진 전망대이다. 마침 전망대의 한켠에다 조망도를 설치해 놓았으니 눈앞에 펼쳐지는 실경(實景)과 비교해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일 것 같다. 하지만 전망대의 이름을 낳게 한 망부석바위‘, 즉 콧날이 오똑한 여인의 옆얼굴을 닮았다는 바위는 눈에 띄지 않는다. 옛날 선녀가 내려와 이곳에서 한 남자를 만나 행복하게 살다가 바다로 나간 남자가 풍랑을 만나 돌아오지 못하자, 기다림 끝에 망부석이 됐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바위라고 해서 기대를 했었는데 아쉬운 일이다. 탐방안내소에서 이곳까지는 25분이 걸렸다.




다시 길을 나선다. 가파른 오르막길이 또 다시 시작된다. 하지만 침목계단에다 통나무난간까지 만들어놓았으니 조금만 속도를 늦춘다면 별 어려움은 없겠다.



10분 정도 더 오르면 산호길에 있는 다섯 곳의 전망대 가운데 가장 빼어난 조망을 보여준다는 미인전망대에 이른다. 비진도의 안섬과 바깥섬을 연결하는 모래톱을 온전히 볼 수 있는 유일한 조망대(眺望臺)이다. ‘미인전망대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유가 아닐까 싶다. 섬이 아름다운 비진도의 또 다른 이름은 '미인도'. 그러니 최고의 조망대에 미인이라는 이름을 붙여주는 게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요 아래에 있는 바위의 이름이 미인바위라는 데서 만들어진 이름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런 넋두리를 늘어놓는 것은 그만큼 이곳에서의 조망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데크에 서면 비진도 최고의 절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안섬과 바깥섬을 연결하고 있는 개미허리처럼 잘록한 모래톱(砂洲, sandbar)이 한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곳 비진도를 두 개의 섬이 아령처럼 연결되어 있다고 했다. 아니 가슴가리개처럼 생겼다고도 했다. 그렇다면 저곳은 선뜻 거론하기조차 거북스러운 은밀한 부위가 될 수도 있겠다. 아무튼 모래톱의 양 옆에는 에메랄드빛의 산호바다가 펼쳐진다. 그야말로 영롱한 산호색이다. 이곳 비진도의 둘레길 이름이 산호길이라고 불리는 이유일 것 같다. 그뿐만이 아니다. 주변에 널린 섬들도 빠짐없이 시야에 잡힌다. 그 풍광에 압도돼 지금까지의 고생이 거짓말처럼 한꺼번에 사라져버린다.



이젠 선유봉으로 갈 차례이다. 나무계단을 오르자 커다란 바위 두 개가 상하로 층을 이루고 있는 게 보인다. 바위의 앞에는 흔들바위에 얽힌 전설을 적어 놓았다. 지상에 살던 청년과 결혼한 한 선녀가 어느 날 하늘로 올라가게 되었는데, 모시고 살던 시어머니의 식사가 걱정돼 땅으로 내려 보낸 것이 바로 흔들바위라는 것이다. 밥공기처럼 생긴 것이 흔들릴 것 같지도 않아 그냥 지나쳐 버린다.




흔들바위 위의 ’290m를 지난 산길은 가파르게 아래로 향한다. 맞은 방향도 역시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나무계단을 갈 지()‘자로 놓아가며 최대한으로 경사를 줄여놓았기 때문이다. 서서히만 오르내린다면 별 무리가 없을 것이라는 얘기이다.



이후부터는 완만한 오르막길이 이어진다. 그리고 5분쯤 후에는 선유봉 정상에 올라선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30, ’산호길의 들머리인 탐방안내센터에서는 1시간 정도가 걸렸다. 서너 평쯤 되는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에는 정상표지석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선유봉, 해발 312m’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이정표(선착장 3.2Km/ 선착장 2.0Km)가 이를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참고로 선유봉이라는 이름은 선유대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정상 근처에 선유도인들이 수행하던 동굴의 이름이 선유대란다.



선유봉 정상은 절반의 조망만 허용해준다. 북쪽은 소나무가 시야(視野)를 가리고 있지만 남쪽은 망망대해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그래선지 남쪽에다 2층으로 전망대를 지어놓았다. 전망대에 오르면 망망대해에 떠있는 죽도와 가왕도, 매물도, 소매물도 등이 눈에 들어온다. 그 뒤에서도 크고 작은 섬들이 수도 없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난간에 세워진 조망도를 살펴보니 거제도와 장사도, 소병대도, 어유도, 홍도 등이 표기되어 있다. 땀도 식힐 겸 전망대에 앉으니 가까이에는 에메랄드빛 바다가 특유의 깨끗함으로 시선을 유혹하고, 먼 바다에는 해무(海霧)가 낮게 깔려 마치 한 폭의 수채화를 감상하는 것 같다.




이젠 하산이다. 하산길은 전망대 옆으로 이어진다. 가파른 곳도 잠시 나타나긴 하지만 대부분은 완만한 경사로 이루어진 기분 좋은 내리막길이다. 거기다 가끔은 시야가 트이면서 남해의 푸른 바다까지 구경시켜준다.



그렇게 25분쯤 내려서자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비탈에 지어진 전망대(이정표 : 선착장 2.2Km/ 선유봉 1.0Km)가 길손을 맞는다. ’비진도전망대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데, 이곳에서의 조망 또한 뛰어나다. 마침 조망도가 세워져 있어 눈앞에 펼쳐지는 실경(實景)과 비교해가며 살펴본다. 가까이에 있는 내·외부지도와 연대도, 오곡도는 물론이고 연화도와 욕지도, 우도, ·하노대도, 남도, 두미도, 추도, 수우도, 사량도 등 주변의 섬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눈에 쏙 들어온다.




잠시 후 벼랑 위에 지어진 또 다른 전망대를 만난다. ’노루여전망대라고 한다. 험한 지형 탓에 노루들이 떨어져 죽는 경우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아슬아슬하기 짝이 없는 바위벼랑에 걸터앉았다. 마을 주민으로 보이는 분이 한려해상국립공원동부사무소 명의의 쓰레기 투척 금지현수막을 달고 있는 게 보인다. 또 다른 여성분은 쓰레기를 줍고 있다. 그만큼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들이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도 빈 술병 몇 개가 길가에 버려져 있었다. 요즘의 대세는 가져온 것을 되가져 가는 매너인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노루여 전망대에서의 조망도 일품이다. 전망대에 서면 외부지도와 내부지도, 연대도, 오곡도가 성큼 코앞으로 다가온다. 그 뒤에 있는 연화도와 욕지도, 우도, 두미도, 추도 등도 자신도 함께 있다며 고개를 내밀고 있다. 이곳도 역시 조망도가 세워져있는데 하단에는 노루여(노루여울, 獐灘)와 설풍이치에 대한 설명을 해놓았다. 옛날 선유봉 일대에는 노루가 많이 서식했는데, 사람들이 이 노루를 몰아 벼랑 아래로 떨어뜨려서 포획하곤 했단다. 이때 떨어진 노루를 가끔은 지나다니는 배에서 건져 올렸다고 해서 노루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노루같이 생긴 여(암초)가 있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설도 있단다. 그러나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는 이 모든 것을 부정했다. 한 개의 작은 섬()이 해안절벽 전체의 이름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곳의 옛 지명인 장탄(獐灘)에 주목한다. ’노루 장()‘자에 여울 탄()‘이니 물살이 센 곳을 나타내는 지명이 아니겠는가. ’설핑이치(雪風峙)‘라는 지명에 대해서도 적었다. 옛날부터 정초가 되면 북풍한설의 눈보라가 몰아쳤는데, 이때 바다로 쑥 내민 이 등마루에 눈바람이 받쳐 은세계의 설경을 이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이후부터는 가파른 내리막길의 연속이다. 거기다 왼편은 아찔한 바위절벽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가파른 곳마다 계단을 놓았고 바다 쪽 벼랑에는 목제난간을 설치했다. 전망 좋은 곳에는 벤치까지 놓아두었다. 가파른 해안 절경과 쪽빛 바다를 실컷 즐겨보라는 배려일 것이다. 이런 곳에서는 구태여 발걸음을 재촉할 필요가 없다. 최대한으로 속도를 늦추고 눈앞에 펼쳐지는 절경에 취하고 볼 일이다. 저 멀리 희미하게나마 시야에 들어오는 섬은 모 음료회사의 CF 배경으로 등장했다는 무인도인 소지도일 것이다.




해안 절경을 바라보며 걷는다. 설핑이치와 성주여, 안노루여 등 파도가 때리고 깎고 바람이 다듬어 놓은 기암절벽과 괴석들이다. 자연이 빚은 조각품에 '' 하고 입이 저절로 벌어진다. 바다로 눈을 돌려보자. 욕지도 천황봉과 연화도 연화봉이 아스라이 보인다. 섬은 마치 수평선에 떠 있는 것 같다.



그렇게 15분 정도를 내려가면 설풍치라는 바위벼랑이 나온다. 설풍치는 '눈바람 언덕'이란 뜻이다. 북풍한설 눈보라가 휘몰아칠 때면 바다 위로 쑥 내민 등마루에 눈이 쌓이면서 은세계의 설경을 이룬다는 비경(祕境)이다. ’슬핑이치‘, 또는 갈치바위라고도 불린다지만 갈치 같이 생겼다는 뜻은 아니란다. 바위 앞의 안내문에 따르면 태풍이 불 때마다 파도가 이 바위 위로 넘나들면서 소나무 가지에 갈치들을 걸쳐놓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라 함은 해안선에 툭 불거진 단애(斷崖)를 일컫는 말이란다. 그렇다면 단애(斷崖, scarp, escarp)란 무얼 말하는 것일까. 수직 또는 급경사의 암석사면을 말하는데, 단층운동에 의해 형성된 것을 단층애, 요곡운동에 의해 형성된 것은 요곡애(撓曲崖, flexure scarp)라고 한다. 화산용암류의 말단이 급애를 이루는 경우에는 화산애(火山崖, volcanic cliff)라고도 한다. 침식작용에 의해 형성되는 단애를 침식애(侵蝕崖, erosion cliff)라 부름은 물론이다.




산호길은 이곳 설풍치(이정표 : 수포마을0.3Km, 선착장 1.8Km/ 선유봉1.4Km)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이며 완만해진다. 동백나무와 후박나무 등 상록수들이 꽉 들어찬 기분 좋은 산책코스이다.



8분쯤 더 걷자 돌로 쌓은 담이 나타난다. 가까이 다가가니 비진암(比珍庵)의 요사(寮舍)를 둘러싸고 있는 담장이다. 이 작은 섬에도 있을 건 다 있는 모양이다. 아까 안섬의 내항마을에서는 교회를 만났었는데, 이곳 바깥섬에 사찰(寺刹)이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서로 다른 섬에 위치하고 있으니 다툴 일도 없겠다.



아까 탐방안내소에서 꽃담이란 안내판을 보았었다. 비진암에 대해 낮은 꽃담이 감싸 안은 자그만 섬마을이라고 적고 있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길바닥에는 시들은 동백꽃이 나뒹굴고 있다. ’. 꽃이 떨어졌다. 멍든 곳 하나 없이 붉은 이파리 그대로다. 채 시들기도 전에 작정한 듯 훌쩍 뛰어내린다. 말리고 싶다.절정에서 추락하는 동백을 보고 소설가 김훈은 백제가 멸망하듯이라고 표현했다. 필 때보다 질 때가 더욱 아름답다는 동백꽃이 얼마나 비장하면서도 아름다웠으면, 떨어지는 동백꽃잎에 비장(悲壯)’이라는 표현까지 썼을까?



비진암 옆에는 돌담만 남은 수포마을이 있다. 집이 2~3채 있었으나 이젠 인적이 끊긴 채로 마을은 텅 비어 있다. 그저 때 이르게 핀 매화꽃만이 옛날 이곳에 사람이 살았었음을 상기시켜 줄 따름이다.



이젠 산호길의 막바지다. 수포마을에서 외항마을로 향하는 산길은 동백나무 군락이 만들어져 있다. 숲은 울창하다 못해 차라리 어두움을 만들어 내고 있다. 또한 굵기까지 하다. 지심도나 수우도 등에서 만났던 동백나무들 보다 훨씬 더 굵은 것이다. 이때, 또 다시 바다가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되풀이한다.



트레킹의 날머리는 외항마을선착장

그렇게 20분 조금 못되게 걷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외항마을이 나타난다. 외항마을은 반듯반듯한 건물들이 들어서있는 게 전형적인 부촌(富村)의 모습이다. 어느 글에선가 비진도를 살기 좋은 섬마을이라고 적고 있었는데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당시 기사에서는 섬마을 주민들이 대부분 어선어업과 펜션, 민박업 등으로 생활이 여유로운 데다 어촌계 소득도 만만찮기 때문에 다들 살림이 넉넉하다고 했다. 어촌계는 전복 양식을 하면서 벌어들이는 수익을 마을 주민들에게 분배한다고 했다. 그게 연간 300만 원이나 된다니 특별히 돈 쓸 데가 없는 섬마을 노인들의 생활비로는 거뜬하지 않겠는가. 아무튼 오늘 트레킹은 3시간이 걸렸다. 중간에 쉬지를 않았으니 오롯이 걷는 데만 걸린 시간이라고 봐야겠다.


공룡의 놀이터, 추도(鰍島)

 

여행일 : ‘18. 1. 1()

소재지 : 전라남도 여수시 화정면 낭도리

산행코스 : 사도선착장추도오른편해안 공룡흔적추도분교뒷해안왼편해안 공룡흔적(소요시간 : 1시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사도에서 1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웃 섬으로 약 200년 전 전주 이씨함안 조씨가 입도하여 살았다고 전하며, 화정면의 유인도서(有人島嶼) 중 가장 작은 섬이다. 명칭은 화정면 관내에서 아주 작은 섬이라 하여 고기 중에서 작은 미꾸라지와 비교하여 추도라 부른 데서 유래가 되었다. 이 섬에 취나물이 많이 자생하여 자를 썼으나 한자로 고치는 과정에서 미꾸라지 추()자로 변음(變音)되었다는 설도 있으니 참조한다. 이 섬은 공룡발자국화석 산지로 그 이름을 세상에 알렸다. 사도 일원에서 발견된 공룡발자국 화석의 약 50%가 이곳에 몰려있을 정도이다. 또한 이곳은 돌담으로도 유명하다. 여름의 태풍과 해일, 겨울의 추위에 가옥과 가축을 지키기 위해서, 돌담을 쌓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인간의 생존 수단이었을 것이다.


 

찾아오는 방법

추도(鰍島)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일단 사도(沙島)까지 들어와야만 한다. 추도로 들어가는 여객선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이곳 사도에서 낚싯배를 이용해서 들어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사도에 대한 설명은 편에서 자세히 소개했기에 이곳에서는 생략하기로 하겠다.




추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사도에 사는 마을 주민의 선박(낚싯배)을 이용해야 한다. 정기여객선이 운항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리 연락만 해두면 언제라도 이용할 수 있으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 미리 배편을 부탁하는 등의 절차를 거를 경우 전체적인 시간 안배에 지장을 초래할 수도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배를 타고 5분 정도나 달렸을까 저만큼에 추도가 보인다. 손바닥을 펴기라도 할라치면 금방 가려버릴 것만 같은 자그마한 섬이다. 하지만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진 섬의 풍경은 자못 범상치가 않다. 아름다운 해안절벽이 방문객의 혼을 빼앗는다. 뭔가 볼거리가 많아 보이는 섬이다.



섬 마을이 아담하다. 집은 여러 채인데 주민은 할머니 딱 한 분만이 살고 계신단다. 이 섬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공룡발자국으로 유명하다. 추도는 사도 화석단지와 같이 중생대 백악기 후기(7천만 년 전)에 형성된 아시아에서 가장 젊은 공룡발자국 화석단지이다. 이곳 추도에서만 약 1,800여점의 공룡발자국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또한 등록문화제로 지정된 마을 돌담길도 눈에 담을만한 풍경이다. 주변 풍광과 잘 어우러져 인상적인 섬마을 풍경을 보여준다.



안내판에 의하면 인간들이 살기 훨씬 이전인 중생대 백악기(145백만년-65백만년 전)에 살았던 공룡의 흔적들이 남해안에서 발견되는데, 공룡발자국과 공룡알, 공룡뼈 등 다양한 종류의 이들 화석들은 세계 최대 규모로 추정된다고 한다. 공룡이 사라진 것은 중생대 말 약 6500만전 전이다. 그런데 이곳 추도에서 약 7000만 년 전 퇴적층에서 공룡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시아 공룡화석지 가운데 마지막으로 형성된 곳이다. 멸종 위기에 처한 공룡이 마지막 피난처를 찾아 이동해 모여든 곳이 한반도의 남단인 추도 일대였을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추도 선착장에 내리면 돌담길이 가장 먼저 외지인을 맞는다. 외딴섬의 고단한 생활사를 오롯이 품고 있는 데다, 경관 측면에서도 보전가치가 뛰어나 문화재청에서 등록문화재(367)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담장은 흙을 쓰지 않고 돌로만 쌓은 강담이다. 크기와 형태는 일정하지 않지만 길이 10~50, 두께 50안팎의 큰 돌, 작은 돌을 서로 맞물려 쌓았다. 돌담의 규모는 비록 작지만 견고하고 집약적으로 형성되어 있어서 좋은 볼거리를 제공한다. 경관도 좋을 뿐 아니라 도서지방의 생활사와 주택사의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담장은 집 둘레를 둘러막아 벽처럼 쌓은 것으로 대지경계를 이룬다. 도난방지를 목적으로 하는 부속 공작물의 하나이기도 하다. 외담(한 줄로만 쌓아올린 담)과 맞담(돌멩이를 겹으로 마주 놓아 쌓은 돌담)으로 구분되나 담장의 대부분은 맞담으로 보면 되겠다. 돌담은 삐뚤삐뚤하고 불규칙적이며 비정형적이고 아무렇게나 쌓은 것 같지만, 그 자연스러움 안에 아름다움이 묻어난다.



돌담은 대개 주변에 널려있는 돌로 쌓는데, 자연석을 다듬지 않고 그대로 사용해 서민적이다. 제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무너지지 않고 세월과 함께 늙어간다. 이렇게 오랜 세월을 견뎌 낸 돌담은 우리네 향토적인 서정이 고스란히 담긴 소중한 문화재요, 문화유산이다. 쌓은 방식도 고대의 성곽과 비슷한 형태를 갖고 있다는 게 특징이다. 이런 돌담길을 따라 걷다보면 어느새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느낌마저 든다.



마을 앞 돌담길 한가운데에는 수백 년은 묵어 보이는 느릅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마을의 상징이랄 수도 있는 노거수(老巨樹)이다. 마을의 역사를 오롯이 품고 있을 것이라는 얘기이다. 그러니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이라도 해서 나무가 지닌 옛이야기 하나쯤 만들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오른편에 보이는 바위 절벽으로 향한다. 책을 쌓아놓은 것처럼 생긴 층리(層理) 암벽(岩壁)으로 이루어져 있다. 부안의 채석강(採石江, 대한민국의 명승 제13)과 비슷한 외형이라고 보면 되겠다. 바위가 층리를 이루다보니 그 층리를 따라 길이 나있다. 절벽임에도 불구하고 위험하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길이 잘 나있다.






대표적인 층리현상이 보이는 암벽 사잇길을 지나면 다시 넓은 마당바위, 옆은 책을 차곡차곡 쌓아놓은 듯한 층리암벽이다.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은 공룡발자국을 찾아보는 것이다. ‘천연기념물 제434로 지정(20032)되어 있는 이 공룡발자국 화석산지는 전남 및 경남 지역 해안의 이미 발견된 공룡화석지를 연결하고 일본과 중국 등을 연결하는 중생대 백악기의 범아시아 생태환경 복원이 가능한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런 곳을 처삼촌 벌초하듯이 다녀갈 수야 없지 않겠는가. 참고로 공룡발자국은 대부분 회색 내지 암회색 세립질 사암이나 실트스톤 이암층에서 발견된다고 한다. 발자국화석이 산출되는 성층면에는 건열과 연흔 등의 퇴적구조와 무척추동물의 생흔화석이 함께 산출되는 게 보통이란다. 또한 사도 일원에 분포하는 응회암에는 규화목이 보존되어 있다. 이들은 구과류(Coniferous)에 속하는 2개 속(Cupressinoxylon, Taxodioxylon)이 확인되었으며, 특히 낭도리의 식물화석은 그 조직을 관찰한 결과 ‘Taxodioxylon’1개의 쌍자엽식물(Dicotylodonous)의 목재로 확인되었다.




너른 암반지대는 공룡발자국의 분포지역이다. 하지만 발자국은 눈에 띄지 않는다. 물때가 맞지 않아 바닷물이 암반의 위에서까지 넘실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아쉽지만 그 흔적은 사도에서 찾아보기로 하고 이만 발길을 돌린다. 참고로 이곳 추도는 천연기념물 제434로 지정되어 있는 사도 일원의 공룡발자국화석 산지 및 퇴적층(堆積層)’ 중에서도 가장 많은 공룡발자국이 발견된 지역이다. 전체의 50% 정도가 이곳 추도에 몰려있다고 보면 되겠다. 참고로 이곳 추도에서 발견된 보행렬은 조각류 및 수각류의 보행렬들로서, 특히 조각류 보행렬들이 우세하게 나타난다고 한다. 발자국의 크기는 크게 30를 기준으로 두 개 그룹으로 구분되는 양상을 보여 준다. 공룡의 이동속도는 사도에서 발견된 발자국의 크기가 30~40에 집중되어 속도가 다양했던 것과는 달리, 추도는 정상적인 분포 곡선을 그려 몸의 크기와 속도의 일반적인 상관관계를 잘 보여 주고 있다. 보행렬을 통해 계산된 공룡의 이동속도는 몸이 큰 조각류보다 작은 수각류가 대체로 더 빠른 속도를 보였다.



차별 침식(侵蝕)과 퇴적 층리 현상을 통해 형성된 장엄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추도의 층리 지형은 현대 화가가 그린 추상화처럼 정연하고 오묘하다.



바다가 보여주는 경관도 만만찮다. 바로 옆에 보이는 층리암벽은 물론이고, 바다 건너에 있는 증도(시루섬)와 장사도가 멋진 경관이 되어 성큼 다가온다. 장사도(진뎃섬)기다랗게생긴 것이 마치 뱀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사도에서 볼 때에는 그저 동그랗게만 보이는 섬이 이곳에서는 길게 펼쳐져 보인다. 왜 장사도란 이름이 붙여졌는지를 확연히 느낄 수가 있다.



마을로 다시 돌아와 느티나무가 있던 곳에서 이번에는 마을 안길로 들어선다. 이번에도 역시 길게 늘어선 돌담이 길손을 맞는다. 삐뚤삐뚤 할수록 마찰력이 커지기 때문인지, 담장은 무너짐이 없이 잘 보존되어 있다. 어쩌면 우리 대에서 사라져 버릴 수 있는 마을 돌담길을, 문화재로 등록함으로써 돌담에 밴 향토적 서정까지 함께 보존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동네가 끝나갈 무렵 우물이 하나 나타난다. 사용을 하지 않은 지 오래인 듯 토관(土管)에 구멍까지 뻥하니 뚫려있다. 하긴 요즘 세상에 저런 우물을 사용하는 곳이 어디 있겠는가. 안을 들여다보니 시커먼 구멍만 보일뿐 바닥은 보일 생각조차 않는다. 샘이 깊다는 것은 그만큼 물이 귀한 곳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골목길을 조금 오르면 옛 추도분교 터가 나온다. 건물은 퇴락하고 운동장은 잡풀이 무성하지만 '독서하는 소녀상' 만큼은 그대로 남아 있어 무상함을 더한다. 추도(鰍島)는 화정면의 유인도(有人島) 중에서 가장 작은 섬이다. 지금은 비록 할머니 한 분만 살고 계시지만 한때는 열두 가구가 살기도 했단다. 그때만 해도 100여 명의 사람들이 서로 부대끼며 살아갔단다. 이곳 여산초교 추도분교가 그 증거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이 조그만 섬에 초등학교가 있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 아니겠는가.




학교 안으로 들어서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낡아있다. 지붕은 사라진지 이미 오래고, 벽면까지도 여러 곳이 무너져 내렸다. 완전히 폐허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난달엔가 내가 읽었던 기사(記事)는 어떻게 된 거란 말인가. ‘하나린 협동조합‘2017년 대한민국 마을기업 창업 아이디어 경진대회에서 최우수상(행정안전부장관상)’을 수상했다는 기사 말이다. ‘하나린 협동조합은 이 지역 청년들과 문화예술인 6명이 만든 협동조합이다. 이들은 조합의 설립목적으로 무인도화 되고 있는 추도에 관광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함으로써 일자리를 창출을 통해 청년층을 유입시켜 궁극적으로는 추도의 섬마을공동체를 복원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구체적인 사업으로 추도의 빈집을 보수한 돌담스테이’, 건강한 섬 밥상, 그리고 바다체험&추도 밤 문화체험 등을 들었다. 또한 추도 내에 있는 추도분교와 관사를 활용해 지역 아티스트(artist)와 협업을 통한 갤러리(gallery)로 리모델링(remodeling)하여, 여행자쉼터 마련, 섬살이학교 사업 등을 하겠다는 포부도 밝혔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그들이 구상했던 사업수행이 애초부터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다. 폐건물을 완전히 밀어버리고 새로운 건물을 지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분명하다.



산등성이를 넘어 반대편 바닷가로 향한다. 누군가는 섬의 양 끝이 엎어지면 코 닿을 만큼가깝다고 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좁은 공간속에 등록문화재와 천연기념물을 두 개나 품고 있다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섬의 앞뒤 거리는 어느 정도나 될까? 두말할 필요도 없다. 섬이 옆으로 길게 늘어져있다 보니 앞뒤의 거리는 한달음도 안 된다. 몇 걸음 걸은 것 같지도 않은데 이미 해안에 닿아있더라는 얘기이다.



바람길을 따라 걷는다. 아까 노거수 아래에 바람길이라고 적혀있었으니 맞는 이름일 것이다. 고갯마루에 올라서니 오른편 해안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바다 건너에는 사도와 중도(간뎃섬), 증도(시루섬), 장사도(진뎃섬) 등이 일렬로 늘어서있다, 그런데 그 풍경은 아까 바닷가에서 보았을 때보다 훨씬 더 넓어졌다. 그만큼 고도(高度)가 높아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잠시 후 해안에 이른다. 펑퍼짐한 암반과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진 해안선이다. 그런데 이곳의 바위들은 층리(層理)를 이루고 있지는 않다. 보통의 바위들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이곳에는 공룡발자국이 없다.






바위에 서면 남해의 너른 바다가 끝도 없이 펼쳐진다. 발아래에 있는 작은 뒷여와 그 너머에 있는 부도를 제외하고는 바다가 텅 비어있다. 망망대해라는 얘기이다.





마을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마을 왼편으로 향한다. 추도의 또 다른 비경이 그쪽에 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산 중간을 자른 듯한 바위 협곡(峽谷)을 만난다. 협곡을 넘나드는 여행객들이 실루엣(silhouette)으로 처리되면서 멋진 작품으로 다시 태어나는 최고의 포토죤(photo zone)이다.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협곡을 넘으면 반대편 해안이다. 다시 바다가 열리고, 꽤 넓은 마당바위도 나타난다. ‘용궁 가는 길이라 부르는 아름다운 바위 협곡이다. 공룡의 발자국들이 찍혀있다는 마당바위의 좌측은 수직 암벽이다. 변산반도 채석강의 축소판을 보는 듯, 억겁의 세월을 거쳐 켜켜이 층리를 이룬 바위 모양새가 장관이다.




해안을 따라 조금 더 나아가자 바위 벼랑과 널찍하게 펼쳐진 바위 바닥이 나타난다. 바위는 칼로 자른 시루떡처럼 직사각형으로 떨어져 나온다. 구들장을 쌓아올린 것 같다. 여기에서 발견된 백악기 시대의 공룡 발자국 행렬(보행렬)84m로 세계 최대 길이라고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곳 역시 암반의 위에까지 물이 차올랐다. 발자국의 식별이 불가능하다는 얘기이다. 참고로 이 일대에는 65백만 년에서 81백만 년의 연대를 보이는 백악기(白堊紀, Cretaceous Period) 후기 지층들, 즉 경상층군 상부에 해당하는 지층들이 분포하고 있다. 이들 퇴적암은 대부분 측방 연속성이 양호한 역암·사암·이암·실트스톤 및 셰일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 퇴적암 외에 응회암·집괴암·암맥·암상 등 화성암이 협재(挾在)되거나 관입된 상태로 발달한다. 참고로 이곳 사도 일원(사도·낭도·추도·목도·적금도)공룡발자국화석 산지 및 퇴적층2002년에 한국의 백악기 공룡해안(Korean Cretaceous Dinosaur Coast)’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된데 이어, 20032월에는 천연기념물 제434호로 지정되었다. 그만큼 보존가치가 높다는 증거일 것이다. 하긴 아시아 지역에서 지금까지 발견된 공룡화석지 중 가장 젊은 시대(7,000만년 전)에 살았던 공룡의 흔적을 보여주는 곳으로, 세계적으로도 가장 긴 조각류 공룡보행렬(84m 이상)이 발견되었다니 그럴 만도 하겠다. 또한 각종 식물화석과 목재화석(탄화목) 및 생흔화석 등과 함께 연흔·건열 등 다양한 퇴적구조가 발견되어 백악기 후기 공룡들의 생태나 서식 환경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지역이기도 하단다.



추도의 또 다른 볼거리 중 하나는 섬 전체를 에워싸고 있는 퇴적암층이다. 많은 이들이 변산반도의 채석강보다 오히려 위라고 칭찬을 해댈 정도이다. 내가 봐도 그런 것 같다. 추도의 퇴적암층은 확실히 남다른 데가 있다. 거인이 먹던 시루떡처럼 층층이 쌓인 퇴적암층의 규모도 대단하려니와, 다양한 모양새 또한 장관이다.




추도의 가장 큰 매력은 호젓함이다. 인적이 뚝 끊긴 추도 해안가 바위에 걸터앉아 있노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마냥 머무르고만 싶어진다. 시원스레 불어오는 해풍의 청량함은 자연풍의 진수를 만끽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아름다운 경관으로 넘치는 사도(沙島)

 

여행일 : ‘18. 1. 1()

소재지 : 전라남도 여수시 화정면 낭도리

산행코스 : 백야항사도선착장돌담체험학습장둘레길공룡발자국 산지중도(간데섬)증도(시루섬)선착장(소요시간 : 2시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여수시 화정면 낭도(狼島)의 동쪽에 있는 섬으로서 섬 중앙 평지에 마을이 있고, 중도(간데섬)와 다리로 연결되며 육계사주(陸繫砂洲:육지와 섬, 섬과 다른 섬이나 암초 사이에 모래나 자갈 등이 쌓여 연결된 퇴적 지형)로 증도(시루섬)와 연결된다. 임진왜란 당시 성주 배씨가 입도한 후 인동 장씨가 입도하여 마을을 이루고 있으며, 사도를 중심으로 중도(간데섬)와 증도(시루섬추도·장사도(진대섬나끝·연목 등 6개 섬이 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7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전체적인 윤곽은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2월 보름등 연 5회에 걸쳐 2~3일 동안 일어나는 물 갈라짐 시기에 볼 수 있다고 한다. 이때는 780m(15m) 길이로 이들 7개 섬이 ㄷ자모양으로 이어지면서 장관을 연출한단다. 그뿐만이 아니다. 본도 항구에서 20분간 해변 도로를 따라 걸어 들어가면 마주치는 증도(시루섬)의 기암(奇巖)들도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주요 관광지로는 사도해수욕장이 있으며, 특히 세계 최장의 보행렬(84m)을 포함해 400여 개의 공룡 발자국이 발견되었다. 참고로 사도(沙島)’란 섬 주위에 모래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찾아오는 방법

사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일단 백야도 선착장까지 와야만 한다. 사도로 들어가는 배가 이곳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순천-완주고속도로 동순천 IC에서 내려와 17번 국도를 타고 여수방면으로 달리다가 덕양교차로(여수시 소라면 덕양리)에서 22번 지방도로 갈아타면 여수죽림개발지구와 화양면을 지나 백야도의 관문이랄 수 있는 백야대교(白也大橋)’에 이른다. 백야도와 육지를 연결시키기 위해 20054월에 놓은 다리로 이 다리가 놓이기 전까지만 해도 이곳 백야도에 오려면 화양면의 힛도선착장(안포리)’에서 도선을 타는 불편을 감수해야만 했었다. 참고로 백야도(白也島)는 여수시에서 남서쪽으로 18.5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섬으로 여수시 화정면(華井面)‘의 소재지인 백야리(白也里)가 이곳에 있다. ’백야도란 섬의 주봉인 백호산(白虎山) 정상의 하얀색 바위들로 인해 섬까지도 하얗게 보인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하얀색 바위의 모습이 호랑이를 닮아서 백호산이라는 이름이 지어졌는데, 1896년 돌산군(突山郡)을 설치할 때에는 그 이름이 섬의 이름(白虎島)이 되기도 했다. 1914년에 여수군에 편입되면서 다시 백야도가 되었다.




오늘은 정월 초하루이다. 다들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길 원하는 날이고, 우리 또한 송구영신(送舊迎新)‘의 마음으로 한반도의 최남단에 위치한 이곳 백야도까지 들어왔다. 또 운이라도 좋으면 사도로 들어가는 배의 선상에서 일출(日出)을 볼 수도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하지만 일출시간(7:36)과 배의 출항시간이 맞지 않아 선착장에서 해돋이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건너편 산자락 위로 떠오르는 해를 말이다. 그런 우리의 간절한 바람이 하늘에 통했던지 우린 무사히 일출을 구경할 수 있었다. 햇살이 약간 퍼져버린 해였지만 새로운 해에 새로운 희망을 가져다주기엔 부족함이 없지 않을까 싶다. 올해도 작년만큼, 아니 작년보다 훨씬 더 건강하고 즐겁고 행복한 한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사랑하는 아들, 딸네 가족들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운항중인 배는 태평양해운 소속의 대형카페리3‘, 차도선(車渡船)인 이 배는 제도와 개도, 상화도, 하화도를 먼저 들른 다음 사도선착장에 이르게 되는데 시간은 대략 1시간 정도가 걸린다. 이 배는 13(8:00, 11:30, 14:50) 운항하며, 돌아올 때에는 종점인 낭도에서 배를 돌려 이번에는 역방향으로 운항하는데, 사도에서 내리고 난 후, 정확히 45분 후에 백야도로 나가는 배가 도착한다고 보면 되겠다.



사도로 가는 길에 들르는 하화도(下花島), 섬 전체에 동백꽃과 진달래, 선모초가 만발한다고 해서 꽃섬으로 불리게 된 섬이다. 4년 전에 들렀을 때만 해도 보이지 않던 구름다리가 떡하니 버티고 있다. 올 봄엔가 큰골에다 꽃섬다리(길이 100m×1.5m)’라는 이름의 출렁다리를 놓았다는 기사를 본 것 같은데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기존의 둘레길(꽃섬길, 5.7)만 갖고도 섬 트레킹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는데, 구름다리까지 갖추었으니 이젠 찾는 사람들이 한층 더 늘어나겠다.



한 시간 남짓 지난 후 사도선착장에 도착한다. 이곳 사도(沙島)와 저 앞에 보이는 또 다른 공룡유적지인 추도(鰍島)를 모두 둘러보는데 주어진 시간은 4시간 15(도착 8:45, 출발 13:10), 추도에 들어갔다 오는데, 1시간 정도, 그리고 나머지는 이곳 사도를 둘러보는데 쓰면 적당하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이곳 사도 일원은 시간이 멈춘 섬으로 알려져 있다. ‘바람도 화석이 되고, 사랑도 돌이 되어 굳어진다.’니 작심하고 찬찬히 둘러볼 일이다.




선착장에 내리면 최근에 지어진 듯한 깨끗한 관광센터와 거대한 공룡 두 마리가 서서 관광객을 맞는다. ‘공룡의 섬이라는 명성에 걸맞는 환영인사가 아닐까 싶다. 거대한 저 공룡의 이름은 티라노사우루스(Tyrannosaurus)’, 지구상에 살았던 육식 공룡 중 가장 무섭고 사납다고 해서 폭군도마뱀이라고도 불린다. 아이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할 것 같다. ! 깜빡 잊을 뻔했다. 행여나 정보자료라도 얻어 본답시고 관광안내센터에 들어가 볼 필요는 없다. 건물은 현대식으로 잘 지어져 있지만 안은 텅 비어있기 때문이다. 상주직원은 물론이고 안내자료 또한 비치되어 있지 않다. 비수기(非需期)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마을 앞에는 정자(亭子)와 벤치를 갖춘 쉼터를 조성해 놓았다. 그 옆에는 어른의 키를 훌쩍 넘길 정도로 큰 빗돌을 세워두었다. ‘신비의 섬, 사도(沙島)’란다. 옳은 표현이라 할 수 있겠다. 현대판 모세의 기적이라 불리는 바다 갈라짐 현상이 일어나면 두 섬을 이어주는 신비로운 바닷길이 열리는 것은 물론, 1억 년 전 공룡들이 뛰어놀던 섬으로 천연기념물인 공룡발자국화석 산지 및 퇴적층을 품고 있으니 말이다.




빗돌 옆에는 사도 공룡발자국 화석산지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이곳 사도와 낭도, 추도에 분포되어 있는 화석산지들 외에도 거북바위와 사도해수욕장, 탄생굴 등 둘러볼만한 명소도 표기해 놓았다. 트레킹을 나서기 전에 꼼꼼히 살펴본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는 얘기이다.




마을 안길로 들어가 사도(沙島)의 명물이라는 돌담부터 둘러보기로 한다. 이곳은 흙을 쓰지 아니하고 돌로만 쌓은 강담구조로 돌의 크기와 형태는 일정하지 않다. 편평한 것부터 둥근 것까지 다양하며 대체적으로 길이가 10에서부터 큰 것은 30~50안팎이다. 큰 돌과 작은 돌이 서로 맞물린 형태이며 두께는 50내외이다. 담장은 담쟁이넝쿨이 두텁게 둘러싸고 있다. 내력이 있어 보인다는 얘기이다. 하긴 이 지역의 돌담은, 도서지방의 생활사와 주택사의 두가지면에서 학술가치가 높을 뿐만 아니라, 경관적인 측면에서도 보존가치가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점을 눈여겨본 정부에서도 이곳과 추도의 돌담을 함께 묶어 등록문화제(367)로 지정해 놓았다.



관광센터 앞에서 오른편 길로 들어가면 체험학습장이 조성되어 있다. 여기에는 예전에 사도에서 살았던 공룡들의 모형과 이 일대(사도, 낭도, 추도 등)에서 볼 수 있는 공룡 발자국 화석들을 모형으로 떠 놓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게 꾸며놓았다. 거기다 더해 공룡에 대한 다양한 자료들도 접할 수 있도록 했다. 가족단위, 특히 어린 학생들이 있다면 학습에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그중에서도 크기가 33cm나 되는 공룡의 발자국 복제 모형이 눈길을 끈다. 전남대 공룡연구센터와 전남대 학생들이 여러 날 동안 현장에서 그 본을 따서 미술전공 학생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만들어낸 작품이란다. 민간인들의 창의적인 기획물을 여수시에서 받아 들였단다.



이젠 둘레길을 따를 차례이다. 잠시 후 정자(亭子)를 만난다. 시야(視野)가 툭 터지는 멋진 전망대로 바다 건너에 있는 고흥 나로도우주선 전망대가 보인다. 저 정도면 엄청나게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도 여객선은 왜 여수 쪽만을 고집할까? 행정구역의 차이가 그 원인이지 않을까 싶다. 아무래도 적자노선(赤字路線)은 지자체에서 보전을 해주어야 할 테니까 말이다. 참! 깜빡 잊을 뻔했다. 마을 안길로 들어서지 않을경우 둘레길을 타보지 못하고 곧장 중도로 가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오른편은 깎아지른 절벽이다. 그런데 그 암벽의 모양이 특이하게 생겼다. 고릴라 얼굴을 떠올리게 만드는 것이다. 콧구멍도 있고 눈썹도 보인다. 절벽 아래에는 검푸른 바다가 출렁이고 있다.



계속해서 둘레길을 따른다. 어른의 키를 훌쩍 넘길 정도로 웃자란 조릿대(山竹) 숲길을 지나자 이번에는 소나무 숲길이 나타난다. 아기자기한 숲길이 계속되는데, 바닷가 쪽으로는 목책(木柵) 난간이 둘러쳐져 있다. 해안절벽으로 이루어졌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래선지 오른편으로 시야가 열리면서 고흥 쪽 바다가 한눈에 잘 들어온다.




조금 더 진행하자 가지가 기묘하게 휘어진 소나무 한 그루를 만난다. 휘휘 늘어진 가지의 무게가 버거웠던지 지지대(支持臺)로 받쳐놓았을 정도로 소나무가 우람하다. 수백 년은 됨직한 소나무. 마을을 지켜주는 나무로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완만한 비탈길을 따라 조금만 더 오르면 정상이다. 아니 사도에도 산이 있다고 할 수가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그러니 정상이라기보다는 언덕이라고 표현하는 게 옳을 수도 있겠다. 아무튼 정상에는 정자가 지어져 있고, 오른편 아래에는 벤치쉼터가 보인다. 쉼터 아래는 깎아지른 절벽이다. 내려다보기에도 어지럽다. 추락위험 표시와 함께 목제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절벽 아래에는 바닷물에 반쯤 잠긴 바위지대가 있다. 이곳에서 보면 바위섬이 사도 본섬과 이어져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떨어져 있는 섬이란다. ‘딴여라는 이름의 암초(暗礁)가 아닐까 싶다. ‘다음이나 네이버의 지도에는 이곳을 시루섬이라고 표기했다. 하지만 시루섬은 증도(甑島)’의 또 다른 이름이니 참조한다.



잠시 후 시야가 툭 트이면서 발아래에 사도교(沙島橋)와 중도(中島)가 내려다보인다. 사도교 뒤편 멀리 추도(鰍島)도 보인다. 중도의 오른편에는 시루섬이라는 증도(甑島)가 있고, 중도의 뒤편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섬은 장사도(長蛇島)이다. 중도와 시루섬, 장사도는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無人島)이고, 추도에는 할머니 한 분만이 살고 있단다.





사도의 끄트머리, 그러니까 사도교를 건너기 직전 오른편 해안은 공룡발자국화석 산지이다. 바닷가 너른 암반(巖盤)으로 내려가니 빗살무늬로 갈라져 있는 암반 위에 흉터 비슷한 흔적들이 찍혀있다. 공룡발자국들인 모양이다. 안내판에는 이곳에서 조각류 보행렬수각류 보행렬’, 그리고 소형 수각류 보행렬등이 발견되었다고 적혀있지만, 아마추어들의 눈에는 그저 비슷비슷한 발자국들일 따름이다. 안내판이 아니었다면 이곳에 공룡발자국이 있는 줄도 모르고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아무튼 이 지역은 아시아에서 가장 젊은 공룡 발자국 화석지라고 한다. 7000만 년 전인 백악기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단다. 사람들은 공룡이 바다를 건너 왔을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과거 공룡이 살던 시절 이 지역은 육지와 연결되어 있었다. 지금과는 달리 하천이 흐르고 곳곳에 넓은 호수가 있는 육지 환경이었다는 것이다. 때때로 화산이 폭발하기도 했음은 물론이다.




천연기념물 제434로 지정(20032)되어 보호를 받고 있는 이곳 사도 일원의공룡발자국화석 산지 및 퇴적층(堆積層)’은 사도와 추도, 낭도, 목도, 적금도 등 5개 섬 지역의 백악기 퇴적층에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다. 조사결과 공룡발자국화석은 총 3,546점으로 사도에서 755, 추도에서 1,759, 낭도에서 962, 목도에서 50, 적금도에서 20점이 각각 발견되었다고 한다. 종류도 다양해 앞발을 들고 뒷발만으로 걷는 조각류, 육식공룡인 수각류, 목이 긴 초식공룡인 용각류 등의 발자국이 발견되었다. 이 중에서 조각류 발자국이 전체의 81%에 달할 정도로 많이 나타났다. 한편 연속된 발자국들, 즉 보()행렬의 화석이 나왔는데, 연장성이 매우 좋은 길이 84m의 보행렬 화석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공룡화석 이외에도 규화목, 식물화석, 연체동물화석, 개형충, 무척추동물, 생흔 화석과 연흔, 건열 등의 교과서적인 퇴적구조들이 다량 발견되었다. 그로인해 전남 및 경남 지역 해안의 이미 발견된 공룡화석지를 연결하고 일본과 중국 등을 연결하는 중생대 백악기의 범아시아 생태환경 복원이 가능한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고 한다.




사도교를 건너 중도로 향한다. 길은 섬의 왼편 해안을 따라 나있다. 섬의 초입에서 산등성이로도 오솔길이 나있으나 그냥 해안도로를 따르기로 한다. 들머리 여기저기에 휴지 뭉치가 내버려져 있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해안길을 걷는다. 바다와 섬을 바라보면서 걷는 멋진 길이다. 이 길의 중간쯤에는 정자(亭子)를 배치해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옆에는 화장실을 갖춘 샤워장도 마련되어 있다. 근처 모래사장을 해수욕장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중도가 끝나면 길은 바다로 내려선다. 모래톱이 증도, 즉 시루섬까지 연결되어 있다. 주민들이 양면해수욕장이라고 부르는 모래사장으로, 썰물 때만 나타나니 한국판 모세의 기적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여름철에 물 빠진 시간에는 해수욕을 즐길 수 있다는 얘기이다. 이제부턴 모래사장을 걷는다. 좌우로 바다가 일렁이고 있다. 그 바다에는 작은 섬들이 떠다닌다. 그 섬들이 마치 넘실대는 파도에 버거워하는 돛단배를 닮았다. 막혔던 가슴이 툭 터지면서 서서히 바다와 하나가 되어간다. 잠시 후, 이미 바다가 되고 섬이 되어버린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모랫길 왼편에는 장사도(長蛇島)가 있다. 하지만 들어갈 수는 없다. 물이 덜 빠진 탓에 길이 나타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장사도의 옛 이름은 진뎃섬이었다. ‘기다란 섬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따라서 장사도란 명칭도 섬의 형상이 기다란 뱀처럼 생겼다는 데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모랫길을 건너면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작은 섬, ‘시루섬(甑島, 증도)이다. 시루섬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거북이를 쏙 빼다 닮은 바위가 하나 있다. 그래서 이름까지도 거북바위란다. 바위 앞의 안내판에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이 바위의 모형을 보고 거북선 제작의 아이디어(idea)를 얻었다고 적혀있다. 또한 이 바위는 용궁(龍宮)으로 들어가는 길을 지키라는 용왕님의 명령을 지금까지도 수행하고 있는 중이란다. 그렇다면 이 근처에 용궁이 있다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그냥 지나치지 말고 주위라도 한번쯤 살펴볼 일이다. 재수 좋으면 그들이 흘린 보석 한두 점 주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시루섬은 왕성한 화산활동으로 형성된 섬이다. 때문에 사도의 섬들 중에서 가장 볼거리가 많은 편이다. 시루섬의 최고명물인 얼굴바위도 그중 하나이다. 이 바위는 이마와 코, , 목이 사람얼굴을 쏙 빼다 닮았다. 사람 키로 수십 배 높이의 암벽에 자연적으로 만들어졌는데도 이마 위 머리털까지 영락없는 사람 모습이다. 자연의 예술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어느 유명한 조각가가 저런 작품을 만들 수가 있을까? 조물주만이 가능한 일일 것이다.



얼굴바위를 지나면 해안가 좌측으로 감자모양으로 생긴 바위 두 개가 보이고, 이어서 거대한 장군바위와 마주친다. 엄청나게 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지 않을까 싶다. 바위 아래에 있는 사람 크기를 보면 이 바위가 얼마나 거대한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 바위 근처에서 바라보는 바다 풍경이 일품으로 알려져 있으니 놓치지 말 일이다.





장군바위를 지나면 용미암(龍尾岩)과 마주친다. 용암(熔岩, lava)이 바다로 흘러내리다 급격하게 식으면서 형성된 지형인데, ()의 꼬리를 닮았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전체적인 모양새는 용의 꼬리가 바다로 이어져 있고 몸통은 병품바위를 기어오르는 형상이다. 용미암을 지나 오른편 코너를 돌면 갑자기 넓은 마당바위가 나타난다. 수백 명이 너끈히 앉아 쉴 수 있을 정도의 넓이라고 해서 멍석바위라는 이름이 붙었다.



멍석바위에 오르면 다시 시야가 트이면서 고흥 나로도우주선전망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아까 절벽 위에서 내려다봤던 딴여도 지척으로 보인다. 산책로에서 내려다봤을 때는 하나로 보였던 바위섬이 이곳에서 보니 두 섬 사이가 갈라진 모습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되돌아 나오는 길, 오른편에 보이는 장사도까지 길이 열려있다. 아까 시루섬으로 들어갈 때만해도 바닷물이 가득했는데, 지금은 물이 완전히 빠져 바닷길이 선명하게 열려있다. 장사도 들어가는 길은 양면해수욕장길과는 달리 널찍한 바위들이 깔려있는 돌길이다. 아무튼 장사도로 들어가 보는 것은 사양하기로 한다. 눈여겨 볼만한 것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양면해수욕장의 모랫길을 빠져나오면 중도, 아까 들어갈 때는 보지 못했던 멋진 해안선이 눈에 들어온다. 그게 아깝기라도 했던지 여행객 몇 명이 해안가 바윗길을 둘러보고 있는 게 보인다.



사도교를 건넌 다음에 이번에는 오른편 해안을 따른다. 모래사장이 길게 펼쳐진다. 작은 섬임을 감안할 때 엄청나게 긴 모래사장이라 할 수 있겠다. 그 끄트머리에는 섬이 하나 오롯이 앉아있다. 사도(沙島) 인근의 7개 섬 중의 하나인 나끝섬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이 섬에는 거대한 소나무 몇 그루가 그림같이 자라고 있다. 그 가치를 인정받아 보호수(保護樹)로 지정이 되어 있는데 가장 나이가 어린 게 200살도 더 먹었단다.




방파제(防波堤)로 연결되어 이제는 섬이라고도 볼 수 없는 나끝섬에 오르면 건너편에 작은 바위섬 하나가 나타난다. 7개 섬 가운데 하나인 연목일 것이다. 그 오른편에 보이는 섬은 추도(鰍島)이다. 사도와 추도는 바닷길이 열리기도 한다. 그러니까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과 2월 보름 등 연 5회에 걸쳐 2~3일 동안 물 갈라짐 현상이 일어난단다. 한국판 모세의 기적이 이곳에서도 일어나는 셈이다. 이때는 사도와 중도(中島), 증도(甑島, 시루섬), 장사도(長蛇島), 나끝섬, 면목섬 등 7개 섬이 모두 하나의 섬으로 연결된단다. 추도와 연목 외의 섬들은 평소에도 연결된다. 나끝섬과 중도는 이미 방파제와 다리로 연결되어 있으며, 사도와 시루섬, 장사도는 매일 바다가 갈라져 건널 수 있다.



사도에서 유일한 식당이다. 부족한 주량(酒量)도 채워볼 겸해서 찾았지만 주인장은 외출중이다. 혹시나 하고 마을회관에 들렀더니 마침 십여 명의 주민들이 우루루 몰려나오신다. 섬 주민이 20명이 채 안된다고 했으니 동네사람들 대부분이 다 모여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주인아저씨의 얼굴은 이미 불콰하다. 회관에서 반주(飯酒)라도 나누고 계셨던지 모양이다. 그 여파는 따뜻한 인심으로 돌아왔다. 소주 한 병에 4천 원씩 받는데 오늘은 기분이 좋으니 3천 원만 받으시겠단다. 소주 2병에 맥주 2캔을 샀는데, 안주로 시금치와 콩나물에 감태나물까지 푸짐하게 내놓으신다. 하지만 뒷짐을 진 채로 바라보고 계시는 아주머니의 표정은 완전히 일그러져있다. 아저씨께서 하고 계시는 처사가 마땅찮다는 의사표시일 것이다. 혹시라도 나 때문에 부부싸움이라도 나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엄동설한이 이제 막 시작되었는데, 이곳의 동백나무는 벌써부터 꽃망울을 활짝 터뜨렸다. 그만큼 기온이 높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렇다. 여기는 따뜻한 남쪽나라가 분명하다. 오늘 하루 장갑을 끼지 않고 돌아다녔는데도 조금도 손이 시리지 않았었다.


백아도(白牙島) 여행 : 백아장성(남릉) 암릉 산행

 

여 행 일 : ‘17. 10. 25()-26()

소 재 지 :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 백아리

산행코스 : 보건소마을발전소마을 고갯마루전망봉넙작골암릉남봉오섬 전망대발전소마을 고갯마루보건소마을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덕적군도(德積群島)의 중심 섬인 덕적도에서 남서쪽으로 14Km 지점에 있는 면적 3.13에 해안선 길이가 12.1쯤 되는 작은 섬이다. 1310(충선왕 2)에 남양부(南陽府)가 설치된 이후 조선 초기까지 남양도호부에 속하였다. 1486(성종 17)에 인천도호부로 이속되었고,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으로 경기도 부천군에 소속되었다. 1973년에 옹진군으로 편입되었으며, 1995년에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 백아리가 되었다. 백아도의 옛 이름은 배알도(拜謁島)였다. 조선 후기 김정호(金正浩)가 편찬한 전국 지리지인 대동지지(大東地志)’ 덕적도진 항목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섬의 모양이 허리를 굽히고 절하는 것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하지만 후세 사람들의 눈에는 섬의 전체적인 모양새보다는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암릉이 더 중요하게 생각되었던 모양이다. 그 생김새가 흰 상어의 이빨을 닮았다면서 백아도(白牙島)라 고쳐 부른 것을 보면 말이다. 아무튼 해안선은 대부분 암석해안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동쪽의 만입부에 일부 사빈해안(沙濱海岸, 파랑 등의 작용으로 바닷가에 모래가 쌓여 이루어진 해안지형)이 분포한다. 때문에 취락은 섬의 남쪽과 동쪽의 만입부에 집중해 있다.


 

산행들머리는 발전소마을로 넘어가는 고갯마루

산행은 어제 북릉을 타고 내려왔던 고갯마루에서 시작된다. 그러니까 반대방향의 능선을 탄다고 보면 되겠다. 들머리에 이정표(남봉1.6Km/ 발전소마을0.3Km/ 보건소마을2.1Km)가 세워져 있으니 길이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고갯마루에서 남봉 정상까지는 1.6정도. 들머리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곧장 능선을 타고 오르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산봉우리를 왼편으로 우회(迂廻)시키는 편한 길이다. 우리부부는 왼편의 수월한 길로 진행했지만 곧장 능선을 타는 게 옳은 방법이었던 것 같다. 시작부터 멋진 조망(眺望)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아래 사진은 우회로의 풍경이다. 어른의 키를 훌쩍 넘길 정도로 웃자란 조릿대가 숲을 이루는 곳이 나오기도 하는데, 전체적으로 경사가 거의 없는 완만한 사면길이 이어진다.



그래서 돌아오는 길에 보았던 경관을 역() 순서로 올려본다. 잘 닦인 산길을 따라 5분쯤 오르면 오른편으로 난 바윗길이 보인다. 그러나 정규등산로가 아니기 때문에 주의하지 않을 경우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정규 등산로가 암릉의 아래로 반듯하게 나있기 때문이다.



바위벼랑 아래로 나있는 산길을 따라 5분쯤 걸으면 오른편으로 오르는 길이 보인다. 본래의 등산로에서 비켜나 있다고 해서 망설이지 말고 일단은 오르고 볼 일이다. 조금만 고생하면 그보다 몇 배의 보상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암릉에서의 조망(眺望)은 끝내준다. 일단은 백아도의 백미(白眉)로 알려진 남릉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이렇게 작은 섬에서 어떻게 저런 암릉을 만들어 낼 수 있었을까? 울퉁불퉁한 근육질로 이루어진 것이 차라리 경이롭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거기다 그런 아름다운 풍경들이 시시각각으로 변화를 주는 게 아닌가. 능선이 고도(高度)를 높여감에 따라 눈앞에 펼쳐지는 그림의 화폭 또한 점점 더 넓어져가는 것이다.




바다 풍경도 만만찮다. 동쪽으로 시야가 툭 트이면서 덕적군도의 수많은 섬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반도처럼 돌출된 부분이 선대부리이고, 그 앞에 보이는 작은 섬은 도랑도가 아닐까 싶다.




이왕에 오른 김에 암릉을 타고 끄트머리까지 가보기로 한다. 진행방향의 반대편이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마을이 잘 내려다보이는 바위 위에 올라선다. 마을 앞에는 태양광발전소에서 설치해 놓은 태양광집열판이 숲을 이루고 있다. 그 앞에는 풍력발전기도 몇 개 보인다. ‘큰 마을로 불리던 동네 이름을 발전소마을로 바꾸게 만든 장본인이라 할 수 있겠다. 이 마을에 있는 백아발전소에서는 태양광 250kw를 생산해 백아도에서 필요한 전체 전력의 90%를 커버한다고 한다. 나머지는 풍력 발전기 10kw짜리 4개가 전체 전력생산의 10%를 처리한다. ‘탄소제로섬(에코아일랜드)’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만든 시설들이다. 각설하고 햇빛과 바람자원에서 얻어진 전기는 직접 수용가에 공급하게 된다. 남는 전기는 ESS(에너지저장설비)에 저장해 야간과 주간 일조량이 부족할 때 공급한다. 이 에너지저장설비는 하루 이상 백아도 주민들이 사용하기에 충분한 용량이라고 한다.



섬은 전기와 물만 있으면 얼마든지 생존이 가능하다고 한다. 바다로 가면 먹거리가 늘 있고, 필요한 채소들을 텃밭에서 키워서 먹으면 된다는 것이다. 닭도 키우고, 염소도 키우니 육류도 부족함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런 자급자족의 섬 생활인지라 그들의 삶은 친환경 그 자체다. 그래서 추진하고 있는 게 대한민국 1호 탄소 제로섬이라고 한다. 주민들 모두가 함께 탄소제로의 꿈이 이루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운동에다 정부는 신재생에너지융복합지원사업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프로젝트는 백아도에서 시범사업으로 시작해 도서지방에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사업이다. 여러 에너지원을 복합적으로 보급하는 이 사업은 2개 이상의 친환경에너지를 병합해 보급하고 있다. 백아도는 태양열과 풍력을 복합적으로 건설해 섬 내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풍력발전기(風力發電機) 몇 대가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저 발전기는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발전기의 그림자가 불과 6m에 불과할 정도로 지근거리에 있는 태양광발전소(太陽光發電所)’에 영향을 미친다고 해서 18m 풍력발전기를 12m로 강제 절단해버렸기 때문이란다. 그 결과 실제 풍속이 2.32로 감소해버렸고 발전효율이 1.08%에 불과해 정상적인 발전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머지않아 발전기의 이설(移設)이 이루어질 것 같다.



첫 번째 봉우리를 내려오면 능선길이 잘록해지는 곳에서 안부를 만난다. 첨부된 지도에 표기된 백아장성에서 자가 놓여있는 지점이다. ‘넙작골이라는 지명으로 표기된 지도도 있으니 참조한다. 이곳의 특징은 두 암벽이 만나는 곳에 협곡(峽谷)이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 일부러라도 쪼개놓은 것처럼 날카롭게 쪼개져 있다. 그 사이로 바다가 내려다보이는데, 아슬아슬한 것이 여간 위험스런 게 아니다. 하지만 그런 풍경이 좋다고 해서 비탈까지 내려가 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간혹 보인다. 안전시설을 설치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아까 들머리에서 왼편으로 나뉘었던 우회로(迂廻路)는 이곳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이제부터 바윗길이 시작된다. 그렇다면 조금 전에 올랐던 암릉은 무엇이었냐며 의아해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조금 전에 올랐던 암릉은 정규 등산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조망을 위해 일부러 올라가봤을 따름인 것이다. 아무튼 능선을 따르다보면 깎아지른 해안절벽이 아찔하게 내려다보인다. 조망도 거론해 볼만하다. 왼편으로 거북섬과 광대도, 울도 등 주변 섬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남릉에서 바라본 큰마을(발전소마을)쪽 풍경, 해안의 왼편 끄트머리에 선착장이 마련되어 있다. 옛날에는 정기여객선이 배를 대던 곳이나 작은마을과의 사이에 도로가 난 다음부터 선착장은 폐쇄되었고, 이젠 동네 주민들의 어선이나 대는 게 전부인 한적한 포구로 변했다.





수직에 가까운 절벽임에도 불구하고 오르는데 큰 어려움은 없다. 크랙(crack)이 붙잡기 딱 좋을 만큼 잘 발달되어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백야도의 기반암은 백악기(白堊紀, Cretaceous Period) 말 내지 제3기 초기의 화산활동의 결과로 형성된 화산암 계통의 유문암(流紋岩, rhyolite)으로 이뤄져 있다. 암릉이 밝은 색을 띄는 이유이다.





남릉은 온통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암릉으로 이루어져 있다. 김정호(金正浩)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 배알도(拜謁島)‘라고 적었던 섬의 이름이 백아도로 바뀐 이유일 것이다. ‘정적이고 부드러운 이미지에서 동적이고 남성적인 이미지로의 변신, 즉 섬의 모양새가 허리를 굽히고 절하는것보다는 흰 상어의 이빨에 더 가깝다고 본 것이다. 내가 보기에도 요즘 사람들의 안목이 더 정확했던 것 같다.




눈에 들어오는 해안마다 온통 거대한 해식애(海蝕崖)로 이루어져있다. 백아도 일대는 지질학적 시간 규모로 볼 때 원래 마식령 산줄기의 끝자락에 연한 육지였다가 최후빙하기가 극에 달했던 18천 년 전부터 기온 상승으로 빙하가 물러나면서 해수면이 급격히 상승해 현재의 도서 지역으로 남은 곳이다. 때문에 도서 전역의 해안선은 매우 복잡한 리아스식 해안을 띤다. 그리고 그 해안은 해풍과 파식에 의한 해식동, 해식애, 시스텍 등과 같은 침식지형과 조류·파랑·해풍에 의해 만들어진 해빈, 그리고 사구와 같은 퇴적지형이 고르게 발달해 있다.



가파른 바윗길이 계속된다. ()지고 날카로운 것이 스치기만 해도 생채기가 날 것 같다. 이런 곳에서는 그저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 바윗결을 살펴가며 조심스럽게 오른다.




바윗길은 위험스러운 만큼이나 그 보상 또한 뛰어나다. 아니 보상이 더 크다고 보는 게 옳겠다. 어느 하나 시선을 눈을 붙잡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제자리에 서서 한 바퀴를 돌아본다. 용의 등뼈를 닮았다는 암릉은 물론이고, 크고 작은 섬들이 떠다니는 서해의 너른 바다가 빙둘러가며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한마디로 장관이다. 조물주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경관이 아닐까 싶다.




남봉으로 가는 길엔 바위능선과 깎아지른 해안절벽이 아찔하게 보이고, 왼쪽에는 거북섬, 광대도, 그리고 멀리 울도 주변 섬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남봉은 높이가 불과 145m인 나지막한 산이지만, 해안절벽 위에 높이 솟아 있어 공룡 능선처럼 생겼다.




남봉암릉은 내륙의 바위봉우리들에 비해 어떻게 보면 더 매력적일 수 있다. 안개로 덮인 서해안에 점점이 떠있는 섬들을 바라보며 행복에 젖는 일은 내륙에서는 느낄 수 없는 최상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낚시꾼들이나 찾을 만큼 자연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것이 백아도만의 또 다른 매력이다. 그나마 일반인들에게 알려진 것도 2012한국방송‘12프로그램에 소개되면서다.



이 능선은 백아장성이라는 애칭을 갖고 있다. 설악산의 용아장성(龍牙長城, 대한민국의 명승 제102)’에 빗대어 사용하는 말로 섬의 등뼈가 용의 이빨을 닮은 산세를 지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니까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상어의 이빨에 견줄 바가 아닌, 그보다 훨씬 더 뛰어난 암릉을 보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무튼 이 암릉은 거대한 바위능선과 깎아지른 암벽으로 되어 있어 경관이 웅장하고 환상적이다. 설악산 공룡능선의 축소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은 이유일 것이다.




펼쳐지는 풍경마다 아름답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문득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이라는 문구가 떠오른다. 이백(李白)이 쓴 산중문답(山中問答)’에 나오는 글귀로 별천지가 있는데 인간 세상이 아니다.’, 즉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이르는 말이다. ‘산중문답은 이백이 당현종(唐玄宗)을 떠난 후에 지은 시로, 자연에 묻혀 사는 즐거움을 노래한 소박하면서도 도가적인 풍류가 스며있는 시다. 그가 정계에 대한 욕심을 버렸기에 이런 시가 가능했을 것이다. ‘타산지석(他山之石)’이라고 난 오늘 또 하나의 교훈을 배운다. ‘무릉도원이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불필요한 속된 욕심을 버리고 살면 바로 내가 기거하는 곳이 바로 무릉도원(武陵桃源)이 아니겠는가.’ 이는 곧 별유천지비인간이 별 것 아니라는 얘기이다. 아무튼 이왕에 거론했으니 문장 전체를 한번 읊어보고 가자. <어찌하여 푸른 산에 사느냐고 묻기에,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지만 마음 절로 한가롭네, 복사꽃 물 따라 아득히 흘러가니, 별천지에 인간 세상이 아닐세(問余何事棲碧山, 笑而不答心自閑, 桃花流水杳然去, 別有天地非人間)>





그렇게 한참을 오르자 드디어 남봉 정상이다. 정상은 텅 비어있다. 정상표지석이나 이정표 등 이곳이 정상임을 알려주는 표식이 일절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그저 삼각점 하나가 이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만일 삼각점마저 없었더라면 이곳이 정상인 줄도 모르고 그냥 지나쳤을 것 같다. 암릉의 한 부분으로 여길 수밖에 없을 만큼 밋밋했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능선을 탄다. 진행방향 저만큼에 이곳보다도 훨씬 더 높은 봉우리가 보였기 때문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봉우리가 진짜 정상이었다.




이후로도 바윗길은 계속된다. 하지만 아까보다는 난이도(難易度)가 많이 낮아졌다. 경관 또한 아까보다 훨씬 못하다.




잠깐 아래로 떨어지던 산길은 안부를 지나면서 가파른 오르막길로 변한다. 너무 가팔라서 뭔가에 의지하지 않고는 오르기가 힘들 지경이다. 하지만 흙길인데다 붙잡을 만한 나뭇가지도 보이지 않는다. 스틱이 꼭 필요한 구간이 아닐까 싶다. 그런 오르막길이 생각보다는 짧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이면 남봉의 정상에 올라선다. 이곳도 역시 텅 비어있기는 매한가지이다. 비록 깨진 채로이지만 삼각점 하나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도 아까 만났던 봉우리와 같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남릉에서 가장 높은 곳이 이곳이라는 점이다. 남릉의 정상을 이곳으로 봐야한다는 얘기이다.




남봉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썩 뛰어난 편은 아니다. 주변의 잡목들이 시야의 상당부분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가장자리로 나아가면 시야가 트인다. 백아장성의 암릉을 가운데다 놓고 왼편에는 발전소 마을과 마을을 둘러싼 해안선, 그리고 사진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오른편으로 보건소 마을이 보인다. 두 마을의 가운데에 있는 능선을 따라 보건소 마을까지 등산로가 개설되어 있다.



백아도의 주변은 무인도들이 마치 병풍처럼 섬을 에워싸고 있다. 그래선지 멀리 떨어진 섬이 아니라 육지에 가까이 있는 섬이라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다. 그래서 섬 어느 곳에서든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사방의 풍경은 무척이나 아름답다. 이곳을 찾았던 어느 기자는 탐방기사에서 백아도에 태양광과 풍력발전소가 들어선 이유를 이런 경관에서 찾고 있었다. 나 역시 동감(同感)이다. 깨끗하고 아름다운 섬과 바다를 지키기 위한 인간의 생각과 상상들이 모여 탄소 제로를 향한 꿈을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정상에서 보면 올라온 반대방향으로 희미하게나마 길의 흔적이 보인다. 일단은 진행하고 본다. 길이 나있다면 그곳에 뭔가가 있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그런 내 예상은 어긋나지 않았다. 5분쯤 내려갔을까 오늘 산행에서 가장 뛰어난 전망대를 만났기 때문이다. 오섬이 바라보이는 곳인데, 수십 미터 낭떠러지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사진을 촬영하다가 자칫 실수라도 하면 추락할 수 있으므로 아주 조심해야 한다.



눈앞에 섬 하나가 나타난다. ‘소매물도를 연상시키는 작은 섬으로 오섬(烏島)’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그러고 보니 까마귀를 닮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니 아름다운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게다. 아무튼 오섬은 큰마을과 지척이지만 중간 수심이 깊어 배를 타고 가야 하는 무인도다.



정상으로 되돌아와 다시 한 번 조망을 즐긴다. 백아도 전체가 한 폭의 풍경화가 되어 눈앞에 펼쳐진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이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아름다운에 빠져 있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점심때까지는 보건소마을에 도착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젠 올라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 내려가기만 하면 된다. 그렇다고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된다. 바윗길에서의 방심은 자칫 사고를 불러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에필로그(epilogue), 요즘 백아도는 핫한 섬으로 뜨고 있다. 이미 관광명소로 자리 잡은 이웃 섬 굴업도를 찾았던 사람들의 눈에 백아도의 멋진 경관이 비쳤던 모양이다. 이 때문에 백아도에도 덩달아 사람들의 발길이 늘고 있다. 아름다운 백아도의 자연과 환상의 트래킹 코스가 조금씩 알려지면서 사람들로 붐비는 굴업도를 피해 백아도로 오는 백패커들이 늘었고, 굴업도 1박에 백아도 1박을 더해 23일의 일정으로 백아도를 찾는 배낭족들도 늘어나고 있다. 주민들도 덩달아 바빠졌다고 한다. 주업인 어업에 숙박업을 겸하는 이들이 점차 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백아도(白牙島) 여행 : 북릉 산행

 

여 행 일 : ‘17. 10. 25()-26()

소 재 지 :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 백아리

산행코스 : 보건소마을선착장봉화대흔들바위돌출암봉송신탑당산발전소마을 고갯마루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덕적면(인천시 옹진군)의 본섬인 덕적도로부터 약 14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인구 56(2016년 기준)의 작은 섬이다. 해안선 길이도 14km에 불과하다. 선갑도와 문갑도·대이작도·승봉도 등과 함께 덕적군도(德積群島)를 이루며, 부속섬으로 오섬과 광대도·계섬·벌섬 등의 무인도가 있다. 섬의 모양은 전체적으로 ''자형이며 주위가 모두 벼랑으로 되어있어 배를 댈 만한 곳이 거의 없는 섬이다. 다른 한편으론 남북으로 길쭉하게 보이기도 하는데, 북쪽에는 표고 145m 고지가 북동단에 위치하고, 남쪽은 141m 고지가 남단에 위치한다. 섬의 대부분은 이 두 고지를 연결하는 능선이 구릉(丘陵)을 이루고 있어 평탄면이 적다. 섬의 동편해안은 굴곡이 많고 만곡지형(彎曲地形, 활처럼 굽어져 완만한 곡선을 이루는 지형)을 이루고 있다. 섬의 서편 해안은 경사가 급한 해안절벽으로 해식애(海蝕崖, sea cliff, 파도의 침식 작용과 풍화 작용에 의해 해안에 생긴 낭떠러지)와 파식대(波蝕台, wave-cut platform, 암석 해안이 침식 작용을 받으면서 해식애 아래에 형성되는 평평한 침식면)가 발달했다.


 

찾아가는 길 : 일단은 인천연안여객선 터미널까지 와야만 한다. 백아도가 속해있는 덕적군도의 중심섬인 덕적도로 들어가는 배가 이곳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들어가는 배는 차도선(車渡船)과 쾌속선(快速船)이 있다. 차도선인 덕적아일랜드호11(9:50), 쾌속선은 코리아나호코리아익스프레스호(카페리)‘13(주말기준, 8:00, 9:10, 15:00, 날짜에 따라 시간이 다르니 사전확인 필요) 운항한다. 시간은 쾌속선의 경우 1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 대부도의 방아머리선착장에서도 대부고속페리호11회 운항한다고 하니 참조한다. 이때는 2시간 30분이 소요된단다.






2시간을 훌쩍 넘기고서야 덕적도에 이를 수가 있었다. 차도선을 탔으니 어쩌겠는가. 가격이 싼 대신에 불편은 감수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아무튼 덕적도는 인천 연안부두에서 남서쪽으로 약 77떨어진 곳에 위치한 8개의 유인도와 33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진 덕적군도(德積群島)의 본섬(인구 1900여 명)이다. 섬의 이름은 일제강점기 때 섬에 들어온 일본인들이 주민들의 덕성에 감동을 받아 덕적도(德積島)로 정했다고 한다. 섬 주민들의 어질고 온화한 성품과 달리 섬의 자연환경은 척박(瘠薄)한 편이다. 국수봉(해발 314m), 비조봉(292m), 운주봉(231)을 중심으로 섬의 대부분이 산지(山地)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전체 면적 36.50가운데 농경지는 2.77에 불과하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그런 자연환경이 장점으로 바뀌었다. 산과 바다를 함께 즐길 수 있는 산행이 가능한 곳으로 알려져 전국의 트레커(trekker)들을 불러 모으는 요인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배에서 내리면 덕적군도를 순환하는 또 다른 차도선인 나래호가 기다리고 있다. 이 배는 짝수 날이냐 아니면 홀수 날이냐에 따라 방향이 다르다. 짝수 날에는 덕적도에서 문갑도와 지도·울도를 거쳐 백아도로 가고, 홀수 날에는 반대방향으로 문갑도와 굴업도를 거쳐서 백아도로 들어간다. 굴업도를 거쳐 들어갈 경우 1시간20분 정도가 소요된다.



백아도로 가는 길에 바라본 덕적도, 가운데의 바위봉우리가 비조봉(飛鳥峰 , 292m)으로 덕적도에 들른 트레커들이 가장 많이 찾는 산이다. 조망(眺望)이 일품이기 때문이다. 정상에 오르면 서포리해수욕장과 선착장, 그리고 섬내의 산들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특히 바다 위에 떠있는 올망졸망한 섬들은 한 폭의 잘 그린 그림으로 다가온다.



나래호는 굴업도를 지나 더 먼 바다로 나간다. 해무(海霧) 사이로 거뭇하게 나타나는 수많은 섬들과 갈아서 세운 듯한 가파른 절벽은 덕적군도 초입에서 보았던 것과는 위용부터가 다르다. 눈앞에 펼쳐지는 크고 작은 무인도들이 아름다운 실루엣을 만들어낸다. 그런 아름다움은 선단여라는 세 개의 돌기둥으로 이루어진 바위섬에서 절정을 이룬다.




선단여에는 애달픈 남매의 사랑이야기 하나가 전해져 내려온다. 오랜 옛날 백아도에 늙은 부부와 남매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부모님이 갑자기 돌아가시자 외딴섬에서 외롭게 살고 있던 마귀할멈이 여동생을 납치해갔다.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된 오빠는 배를 타고 낚시를 하던 중 풍랑을 만나 이름 모를 섬에 흘러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서 아름다운 아가씨를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이 여인은 오래전에 헤어졌던 자신의 여동생이었다. 이들의 사랑을 안타깝게 여긴 하늘은 선녀를 보내 둘의 관계를 설명해주었으나, 남매는 이 사실을 부인하고 차라리 죽는 것이 났다고 고집을 부렸다고 한다. 격노(激怒)한 하늘은 오빠와 동생, 그리고 마귀할멈에게 번개를 때려 죽게 했단다. 그 후 이곳에는 3개의 절벽이 솟아나게 되었고, 이를 애통해 하던 선녀가 붉은 눈물을 흘리며 승천했다는 것이다.



문갑도와 굴업도를 먼저 들른 배는 1시간 남짓이나 지난 후에야 허허벌판으로 이루어진 백아도선착장에 이른다. 아니 여객선 대합실까지 버젓이 갖추고 있다. 다만 산자락에다 지어놓아 눈에 띄지 않았을 따름이다. 잠깐 이 대합실은 그냥 흘려듣지 말고 꼭 기억해 두자. 백아도에 있는 두 개의 등산코스 중 북릉코스가 이 건물의 왼편에서 열리기 때문이다.



선착장의 오른편에 거대한 바위 군락이 펼쳐진다. ‘기관차바위이다. 그 생김새가 증기기관차와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하지만 내 눈은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다. 사람의 형상을 쏙 빼다 닮은 작은 바위 하나가 그 꼭대기에 올라앉아 있는 것이다. 고기잡이 떠난 낭군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아낙네가 영락없다. 당연히 그녀의 시선은 먼 바다에 고정되어 있다. 문득 망부석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그래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고 그녀의 염원이 내 가슴에까지 와 닿았나보다.



선착장에는 트럭이 두 대나 나와 있다. 민박집에서 손님을 태우러온 것일 게다. 우리 일행의 숫자가 많아 두 집에 나누어 머물기 때문에 두 대가 마중을 나왔고 말이다. 이는 탐방객의 숫자가 많을 경우 여러 집에 분산해서 머물러야 한다는 얘기이다. 잠시 후 트럭은 보건소마을에 이른다. 백아도에는 두 개가 마을이 있다. 하나는 보건소가 있는 보건소마을(옛 이름은 작은 마을)이고 다른 하나는 발전소가 있는 발전소마을(큰 마을)이다. 단순하기 짝이 없는 이름들이 정겹게 느껴진다. 단순함의 승리라 할 수도 있겠다. 두 마을에는 20여 가구가 살아가고 있단다.



마을 입구에 세워진 커다란 표지석에는 어르금이라고 적혀있다. 그 아래에 괄호를 여닫으면서 안에다 백아도라고 적어놓았다. 백아도에 있는 어르금마을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아무튼 오늘 저녁은 이 동네에서 묵는다. 이 마을 이장님 댁이다. 방 하나에 5~6명이 배정되었는데, 여러 사람이 함께 뒹구는 것을 싫어하는 우리 부부는 3만원의 웃돈을 주고 별도의 방을 사용했다. 숙소는 일단 깔끔한 편이었다. 물론 방마다 욕실도 갖추었다. 그리고 제공되는 식사도 훌륭했다. 도착한 날 점심부터 다음날 점심까지 네 끼가 나오는데, 매 끼마다 다른 종류의 생선이 나오는 것은 물론, 직접 기른 채소로 담았다는 여러 종류의 김치와 직접 잡은 해산물을 재료로 쓴 밑반찬들도 하나 같이 맛깔스러웠다. 섬 음식이 맛없다는 얘기는 이젠 흘러간 옛 얘기쯤으로 치부해버려도 되겠다.



점심 식사를 마친 후 북릉을 답사해보기로 한다. 들머리는 아까 배에서 내렸던 선착장의 여객선대합실왼쪽에서 열린다. 입구에 지워져버린 지 이미 오래인 백아도 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산길은 가파르게 시작된다. 150m도 채 되지 않는 나지막한 산임을 감한할 때 의외가 아닐 수 없다. 그만큼 섬이 작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정상까지의 거리가 하도 짧다보니 그만한 고도(高度)를 높이는데도 가파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잠깐이면 가파른 구간이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이후부터 산길은 완만해진다. 널따란데다 길가의 잡초까지 제거가 되어있는 등 정비가 잘 되어 있다. 지자체에서 심혈을 기울여 관리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렇게 잠시 오르면 북릉의 정상인 봉화대에 올라선다. 누군가는 이곳을 141m라고 표기했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서너 평쯤 되는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은 텅 비어있다. 정상표지석이 세워져 있지 않다는 얘기이다. 그 흔한 이정표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한가운데에 설치해 놓은 삼각점(백아도 302) 하나가 이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또 하나, ‘봉화대라는 이름에 걸맞는 흔적들도 보이지 않는다. 봉화대가 있었다면 그에 어울리는 돌무더기가 있어야하건만 일절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잘못 알려진 지명인 것 같다.



정상 근처에는 크고 작은 바위들이 꽤나 많이 보인다. 하지만 길이 바위를 피해가며 나있어 산행을 하는 데는 조금도 지장이 없다. 그저 기묘하게 생긴 바위들의 형상이나 살펴가며 진행하면 될 일이다. 한자로 자 모양을 하고 있는 아래 사진도 그중 하나이다. 전북 남원에 있는 풍악산의 트레드마크(trademark)인 바위와 거의 비슷한 풍모를 갖췄다.



잠시 후 흔들바위가 나온다. 바위절벽 위에 거대한 또 하나의 바위가 요람처럼 놓여 있다. 두세 명이서 함께 흔들면 거짓말같이 바위가 흔들린다고 한다. 하지만 집사람 혼자서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이 바위는 5년 전인 2012년에 방영되었던 KBS-2TV'해피선데이-12' 출연자들이 뛰어놀던 명물이다. 당시 나영석 PD’ 팀에서 최재형 PD’ 팀으로 바뀐 제작진들은 첫 번째 촬영지로 이곳 백아도를 골랐다. 엄태웅과 이수근, 김종민, 김승우, 차태현, 성시경, 주원 등의 출연자들은 2월의 강추위에도 불구하고 갯벌에서 ‘3종 경기를 펼치는가 하면, 심지어는 등목까지 했었다.



흔들바위에 올라서면 시야가 툭 트인다. 그리고 주변 경관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보건소마을과 앞바다가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오늘 걷게 될 북릉이 일목요연하게 펼쳐지는가 하면 내일로 예정되어 있는 남릉도 눈에 들어온다. 오른편, 그러니까 백아도의 서쪽 해안도 시야에 잡힌다. 날카로운 수직의 해벽으로 이루어진 게 백야도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흔들바위를 지나면서 산길은 상당히 가팔라진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상당히 가파른 오르막길로 연결된다. 오늘 산행에서 가장 가파른 구간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내륙의 다른 산들에 비할 바는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는 말자.



그렇게 올라선 봉우리에서 멋진 전망바위를 만난다. 굴업도와 가도, 각흘도 등 덕적군도(德積群島)의 섬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서해의 대표적인 해양설화(海洋說話)망구할매설화의 중심지다. 일종의 창세(創世) 신화인 망구할매 이야기는 옹진군도의 탄생기(誕生記)이다. 거인인 망구할매가 한양(서울)으로 보낼 삼각산(북한산)을 만들려고 문갑도 남쪽 선갑도에 100개의 골짜기가 있는 산을 쌓아 올렸는데, 만든 뒤 세어 보니 한 골짜기가 부족하자 화가 난 망구할매가 산을 내려쳤고 이 흙이 흩어지면서 문갑도와 울도, 백아도. 지도, 각흘도 등의 섬이 생겨났다는 이야기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조금 더 오르면 또 다른 전망바위를 만난다. 이번에는 북서쪽 해안의 수직절벽이 또렷이 눈에 들어온다. 역광으로 인해 사진이 선명치는 않지만 그 장대함만은 숨길 수가 없다. 아무튼 백아도의 해안은 해식애, 파식대, 노치(해식와), 타포니 등의 침식 지형이 발달되어 있다. 지질은 중생대 백악기의 경상누층군에 해당하는 산성 화산암류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암질은 유문암질 응회암이 대부분이며, 부분적으로 집괴암이 발견되기도 한다. 인근 섬들과 마찬가지로 화산지형에 잘 나타나는 주상절리가 발달되어 있다.




안부에 내려선다. 왼편에 보건소마을로 내려가는 길이 있는 지점이다. 하지만 다른 특징이 더 눈길을 끈다. 누군가 재배라도 한 것처럼 달래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집사람이 아니다. 냉큼 주저앉더니 달래를 캐고 본다. 연장도 없이 맨손으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많이 캘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달래가 굵고 실했기 때문일 것이다.



뒤돌아본 능선, 방금 지나온 흔들바위를 거쳐 봉화대로 이어진다. 왼편, 그러니까 섬의 서쪽 해안이 수백 길의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졌다. 백아도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경사가 급한 해안절벽으로 해식애(海蝕崖, sea cliff, 파도의 침식 작용과 풍화 작용에 의해 해안에 생긴 낭떠러지)와 파식대(波蝕台, wave-cut platform, 암석 해안이 침식 작용을 받으면서 해식애 아래에 형성되는 평평한 침식면)가 발달했다는 특징 말이다.



안부에서 어느 정도 가파름을 보이던 산길은 이후부터는 큰 오르내림이 없이 완만하게 이어진다. 그렇게 얼마쯤 더 걸으면 길이 둘로 나뉜다. 다음에 오르게 될 기지국이 있는 봉우리는 이곳에서 왼편 방향이다. 하지만 우린 직진해보기로 한다. 잘 닦여 있는 길이 뭔가 특별한 볼거리가 있을 것이라는 예고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 우리의 예상은 적중했다. 잠시 후 뛰어난 전망대를 만났기 때문이다. 까마득한 절벽 위에 만들어진 전망대는 추락방지를 위해 밧줄로 난간을 만들어 놓았다. 그렇다고 해도 조심은 필수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풍경을 보려고 오른편으로 이동하다보면 밧줄난간을 벗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곳까지 오면서 보았던 그림들 중에서 가장 빼어난 작품이 아닐까 싶다.



전망대에 이르면 갑자기 앞이 훤하게 트이면서 기지국 북서쪽 해벽과 돌출 암봉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지를 정도로 빼어난 경관이다. 특히 바다 속에 몸을 담그고 있는 듯한 형상의 거대한 돌출 암봉은 백미(白眉)라 할 수 있겠다. 사자모습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고릴라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보는 각도에 따라서 달리 보인다는 얘기이다.




반대편, 그리니까 오른편 방향에도 거대한 해벽이 늘어서있다. 절벽 아래에는 물이 고여 있는 웅덩이 모양의 요철바위도 보이고, 수십 마리의 악어 떼가 뭍으로 기어오르는 듯한 모양의 기암들도 눈에 들어온다.



아까의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기지국 방향으로 진행한다. 굵거나 큰 나무가 없는 구릉(丘陵) 형태의 능선을 따른다. 그러다보니 고개를 돌릴 때마다 주변 풍광들이 모두 눈에 들어온다. 해가 서서히 기울면서 등산로 바로 오른편 암벽이 역광(逆光)으로 색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바다에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망부석처럼 보이기도 하고, 배부른 임산부 모습 같기도 하다.




오른편에는 조금 전에 조망했던 돌출 암봉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 맞은편에는 아까 우리가 올랐던 전망대가 수백 길의 절벽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다. 아무튼 보이는 곳마다 깎아지른 바위절벽과 해식동굴들로 이루어져 있다. 웅장한 것이 한마디로 장관이 아닐 수 없다. 그에 따라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대는 내 손길도 역시 쉴 사이 없이 바빠진다.




짧지만 바윗길도 나타난다. 안전시설이 필요 없을 정도로 밋밋한 바윗길이지만 돌출 암봉과 북서쪽 해안이 마지막으로 바라보인다.




잠시 후 소나무 숲으로 들어선다. 그동안 주인노릇을 해오던 소사나무가 소나무에게 안방을 내어준 셈이다. 그렇다고 그동안에 소나무 숲이 없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이렇게 굵고 오래묵은 소나무들이 없었을 뿐이다, 그나저나 북릉에는 유독 섬소사나무가 많다. 어떤 곳에서는 아예 군락을 이루고 있다. 섬소사나무는 자작나무과에 속하는 식물로서 거문도와 백아도에서 주로 자라는데, 한 봉우리에 꽃이 많이 달리는 특징으로 일반 소사나무와 구분된다.



조금 더 올라서자 두어 개의 송신탑(送信塔)이 서있는 산꼭대기가 나온다. 다른 이들의 글에서 기지국으로 표현되는 지점이다. 정상에는 송신탑과 함께 현재는 사용하지 않는 군부대 터가 흉물스러운 모습으로 남아 있다. 수년 전에 인근 덕적도로 군부대가 이전하면서 그 시설들만 폐허로 남아있다고 하더니 그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시설의 안을 기웃거려본다. 행여나 당시 군인들의 숨결이라도 느껴질까 해서이다. 하지만 허탕이다. 그런 정서를 느끼기에는 너무 나이를 많이 먹어버렸나 보다.



군인들이 썼던 것으로 보이는 초소도 보인다. 초소 너머로 나타나는 경관이 자못 빼어나다. 정면에는 남봉능선과 발전소 마을, 좌측으로는 보건소마을과 앞바다의 섬들이 그림같이 펼쳐져 있다.



하산을 시작한다. 잠시 후 안부사거리(이정표 : 당산0.2Km/ 발전소마을0.3Km/ 보건소마을1.3Km/ 기지국0.1Km)에 내려선다. 발전소마을과 보건소마을 사이에 지금과 같은 찻길이 나기 전까지 두 마을 사람들이 넘나들던 고갯마루이다. 오늘 저녁에 머물 보건소마을은 이곳에서 왼편 방향이다. 하지만 계속해서 능선을 타기로 한다. 내일 오르게 될 남릉의 들머리가 있는 고갯마루까지 내려가 보기 위해서이다. 아무튼 옛날에 이 길은 두 마을은 잇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고갯길이 싫은 사람들은 우리가 타고 왔던 여객선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두 마을 모두 정박하던 여객선은 이제 작은마을에만 배를 댄다. 두 마을 사이에 찻길이 생겼기 때문이다. 엄청나게 편해진 셈이다. 반면에 나빠진 점도 있다. 백아도 뒤편의 특이한 지형, 즉 기암괴석과 멋진 절벽을 더 이상 감상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잠시 후 당산 정상에 올라선다. 이곳도 역시 텅 비어있기는 매한가지이다. 정상표지석이나 이정표는 물론이고 이곳에는 삼각점도 설치되어 있지 않다. 각설하고 이곳 당산성황당을 연상시키는 지명이다. 하지만 그런 흔적은 눈에 띄지 않는다. 성황당이 있었다면 돌맹이 몇 개 정도는 나뒹굴어야 할 텐데도 그렇지 못하다는 얘기이다. 아무래도 성황당은 이곳 정상이 아니라 산자락 어디쯤엔가 자리 잡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차! 깜빡하고 빼먹을 뻔 했다. 정상으로 오르는 길에 폐가(廢家) 몇이 보였다는 것을 말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부근에 군부대(軍部隊)가 있었다고 하더니 그 흔적들이 아닐까 싶다.



이젠 본격적인 하산만 남아있다. 내려가는 길, 진행방향 저만큼에 발전소마을이 내려다보인다. 발전소마을의 옛 이름은 큰 마을이었다. 백아도에 있는 두 개의 마을 중 규모가 컸기 때문이다. 이는 규모가 큰 해군 레이더 부대가 1990년대 중반까지 이곳에 주둔하고 있었던 데서 기인한다. ‘부대마을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갖고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해군 레이더부대가 주민들에게 여러 혜택을 안겨준 건 사실. 전기가 없던 동네에 전기를 들여왔고, 해군기지에서 일반 가정에 유선 전화기를 사용할 수 있게끔 해주기도 했다. 또 직업군인 자녀들의 교육 문제 해결을 위해 백아분교가 들어섰다. 수확철이면 젊은 군인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단다. 하지만 이젠 구전(口傳)으로나 떠도는 옛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잠시 후 내려선 고갯마루에는 이정표(보건소마을2.1Km/ 발전소마을0.3Km/ 당산0.4Km)가 세워져 있다. 조금 위에 또 다른 이정표(남봉1.6Km/ 발전소마을0.3Km/ 보건소마을2.1Km)도 보인다. 고개를 넘으면 큰 마을로 불리던 발전소마을이다. 그러나 옛 이름인 큰 마을은 더 이상 사용할 수가 없게 되었다. 해군의 군부대가 떠난 뒤론 작은 마을로 불리던 보건소마을보다도 훨씬 더 작아졌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보건소와 파출소, 교회 등이 모두 다 보건소마을에 몰려있다. 아무튼 이곳은 내일 오르게 될 남릉의 들머리이기도 하니 꼭 기억해두자.



보건소마을로 향한다. 보건소마을과 발전소마을 사이에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나있으니 이를 따르면 된다. 마을과 마을을 잇는 해안도로는 잔잔한 파도소리가 절벽에 울려 운치를 더한다. 예전에는 절벽에 막힌 마을과 마을을 배를 타고 다니거나 산을 넘어 다니기도 했을 터이다. 아무튼 가는 길에는 모래사빈이 보이는가 하면 양식장으로 여겨지는 시설도 눈에 띈다. 다른 섬들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풍경들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 ‘흰 상어의 이빨이라는 섬의 이름에서 풍기는 이미지와는 달리 백아도(白牙島)는 매우 아늑한 섬이었다. 아니 아늑하다 못해 지나치게 조용하다고 해야 할까.



해안길을 걷다보면 백아도의 동쪽 해안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덕적군도의 수많은 섬들이 바람이 잔잔한 바다에 마치 돛단배라도 되는 양 두둥실 떠있다. 계섬과 관도, 멍애섬, 상벌도 등 백아도의 부속섬들은 물론이고, 지도와 선갑도, 문갑도, 굴업도 등도 선명하게 시야에 잡힌다. 그 뒤에는 덕적도가 버티고 있다. 아무튼 눈에 들어오는 섬마다 하나같이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선지 보이는 그림마다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마을이 가까워지자 널따란 백사장이 나타난다. 1Km는 족히 넘겠다. 모래의 질도 여간 곱고 부드러운 것이 아니다. 해수욕장으로 개발해도 충분하겠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편의시설 하나 없는 백사장은 텅 비어있다. 낚시꾼이나 찾아올 정도로 한적한 섬인지라 개발할 필요성이 없었던 모양이다. 참고로 마을 앞에도 조금 적기는 하지만 반원형의 모래사장이 있다. 왼쪽에는 방파제도 만들어져 있다. 두세 척의 작은 고깃배가 정박해 있는 한적하기 짝이 없는 포구(浦口)이다.



에필로그(epilogue), 백아도에 대한 느낌은 인심 좋은 섬이라 할 수 있겠다. 오가다 만난 주민들은 하나같이 웃음기를 띤 얼굴들이었고, 오가는 말들 속에는 친절함이 가득했다. 저녁에는 주인장인 이장님이 직접 잡았다는 생선회를 주문해봤다. 자연산 우럭이 13만원이라니 어찌 그냥 지나갈 수가 있겠는가. 그런 우리부부의 심정을 눈치라도 챘는지 횟감을 다듬던 이장님이 더 넉넉하게 챙겨주신다. 다음날 아침식사 때 회덮밥을 만들어 먹어야 했을 정도로 말이다. 또 하나, 이번 여행은 섬 음식이 맛없다는 선입견을 완전히 떨쳐버리는 계기가 되었다. 직접 기른 야채로 만든 각종 김치들과 바다에서 직접 잡았다는 해산물을 재료로 쓴 밑반찬들은 하나 같이 훌륭했다. 특히 게장소라장은 일미(一味)였다. 돌아오는 길에 몇 개 사왔을 정도였다면 대충 짐작이 갈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얘기할 것은 자연산 굴이다. 일정을 끝내고 선착장으로 나오는데 바닷가에서 굴을 채취하고 있는 주민들이 보였다. 그녀들에게 부탁해 한 봉지를 사왔는데 이게 회무침은 물론이고 미역국까지 만드는 요리마다 궁합이 잘 맞은 것이다. 아무래도 백아도에 대한 추억은 꽤 오랫동안 갖고 갈 것 같다.

영산도(永山島)

 

여행일 : ‘16. 5. 8()

소재지 :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면 영산리

산행코스 : 선착장신당전망대깃대봉천박재삼거리앞뒷된볕산 암릉천박재영산리(산행거리 : 4)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흑산도에서 동남쪽으로 4지점에 위치한 작은 섬으로 면적은 2.25이고, 해안선 길이는 7.9이다. 대흑산도·가거도·대둔도(大屯島다물도(多物島대장도(大長島) 등과 함께 흑산군도를 이룬다. 섬은 남동쪽 해안이 단조롭고 급경사의 사면(斜面)을 이루는 반면, 북서쪽 해안은 완만한 경사에 만()이 형성되어 있다. 마을은 만의 입부(入部)에 집중되어 있다. 경작지가 거의 없기 때문에 주민들의 소득은 대부분 바다에서 얻어진다. 이 섬의 특징은 뭐니 뭐니 해도 아름다운 경관이라고 봐야 한다. 규암(硅巖)과 사암(砂巖)으로 이루어진 암릉은 육지의 유명 바위산들에 비해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거기다 섬의 해안 대부분이 암석으로 이루어진 탓에 영산팔경(永山八景)’이란 말을 만들어냈을 정도로 빼어난 절경들이 곳곳에 널려있다. 때문에 영산도 탐방은 암릉을 걸어보는 산행과 함께 유람선 투어를 꼭 끼워 넣어야 할 일이다.


 

찾아오는 방법

영산도로 가기 위해서는 우선 흑산도까지 와야만 한다. 영산도로 들어가는 배를 뒷대목(흑산면 예리)에서 탈 수 있기 때문이다. 정기적인 여객선은 없다. 동네에서 운영하는 도선(渡船)이니 미리 연락을 주어야만 제시간에 배를 이용할 수 있다. ! 뒷대목으로 가는 길이 좀 애매하니 거론해보기로 하겠다. 흑산도에는 섬을 일주하는 순환도로가 있다. 예리항에서 이 도로가 좌우로 갈라지는데, 뒷대목으로 가기 위해서는 왼쪽 길을 택해야 한다. ‘면암 최익현선생의 유배지인 천촌마을 방향이다. 이 길을 따라 200m쯤 걸으면 고갯마루가 나온다. 이때 왼편 바닷가에 사각의 정자가 주인노릇을 하고 있는 뒷대목 선착장이 보이니 길을 찾아 내려가면 된다.




뱃길로 10분 남짓, 짙은 해무(海霧) 너머 그림처럼 떠있던 영산도가 와락 품안으로 안겨든다. 선착장 물빛은 곱디 고운 청잣빛이다. 속이 보일 듯 말 듯 희뿌옇다. 청물이 들 때면, 바닥까지 훤히 보인단다. 참고로 영산도는 1일 출입인원을 최대 ‘50으로 제한하고 있다고 한다. 섬 전체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고, 이미 보유하고 있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해치지 않기 위해서란다. 바다도 마찬가지로 외부 낚시꾼들의 출입은 금지되어있다. 주민들조차 자체 금어기(禁漁期)를 정해놓고 해산물을 보존한다니 그들을 나무랄 일은 아니다. 풍요로운 자원을 가지고 있지만 소득을 얻는데 연연하지 않는... KBS-2TV다큐멘터리 3에서 영산도를 바보섬으로 표현한 이유일 것이다. 주변에서 그들을 바보라 부른다면서 말이다.



배에서 내리면 널따란 광장(廣場)이 나타난다. 광장 뒤편 바위절벽에 국립공원, 영산도 명품마을이라는 문구가 로고(logo)처럼 붙어있다. 문구 앞에 홍어를 그려 넣은 것은 이 고장이 홍어의 고장이란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2012년 국립공원관리공단은 영산도가 보유한 생태 자원과 섬 문화 자원, 그리고 주민들의 열정을 높이 평가해 이 섬을 명품마을로 선정했다. ‘명품마을 사업은 국립공원에 포함된 마을 중 자연과 문화가 잘 보전된 지역을 선정해 주민과 함께 마을 만들기를 추진하고자 시작된 프로젝트다. 2010년 진도의 관매도를 시작으로 2013년까지 전국에서 9곳이 명품마을로 지정된바 있다. 명품마을 지정 이후 영산도에서는 1년여에 걸친 자원 조사와 자문 작업이 이뤄졌고, 마을 펜션과 식당, 탐방로 조성, 벽화 사업 등도 추진되었다. 또한 여름 휴가철에는 소규모의 관광객만이 출입할 수 있는 진짜 명품마을로 탈바꿈되었다. 이와는 별도로 영산도는 1981다도해 해상 국립공원(흑산영산도지구)’2009유네스코 생물권보존지역으로 지정되었으며, 2013년에는 환경부의 생태우수마을농촌체험·휴양마을’, 2014생태관광 모델지역(환경부 소관)’으로 선정된바 있다. 특히 2016년에는 좋은이웃 밝은동네시상(광주방송문화재단 주관)에서 밝은동네 분야 으뜸상에 선정되기도 했다. 천혜의 관광자원을 훼손하지 않고 쾌적한 생태환경을 유지하면서 주민의 인식변화를 계기로 지역발전을 모색하는 등의 마을공동체 운영이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이다.



로고(logo)를 위에서 둘러싸는 모양새로 적어 넣은 명품마을 백년을 꿈꾸다.’라는 문구는 마을의 규모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이곳 영산리 마을 주민들의 염원일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비록 22가구에 50명도 채 되지 않는 작은 마을이지만 한때는 98가구에 450여명이나 살았을 정도로 번성(蕃盛)했다니까 말이다. 당시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의 수도 100명이나 되었단다. 이 조그만 섬에 파출소와 보건소, 큰 규모의 초등학교 등 여타 다른 작은 섬에서는 볼 수 없는 시설들이 들어서있는 것이 그 증거란다. 그러니 어느 누군들 옛날의 영화를 그리워하지 않겠는가.



넓지 않은 갯벌에서 미역을 채취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겨우 두 명이서 작업을 하고 있지만 마을 공동 작업으로 봐야할 것이다. 이 마을에서는 대부분의 소득사업이 공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KBS-2TV의 인기 프로그램인 '다큐멘터리 3'의 애청자인 난 이곳 영산도를 소개한 바보섬에 살고 있네편도 놓치지 않았었다. 당시 방송은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미역을 채취하고, 거둬온 미역을 똑같은 양으로 분리한 다음 추첨식으로 나눠가지는 만보라는 분배방식을 소개하고 있었다. 체력과 능력에 상관없이 함께 일하고 똑같이 나눠가지는 그네들의 공동체 생활을 보며 세속에 찌들은 내 가슴을 따뜻하게 데우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이를 먹어 일을 많이 하지 못하는 사람들 대신 그만큼 일을 더해주는 젊은이들이 있는 삶, 욕심내지 않고 서로서로 도와가며 더불어 사는 삶이 있는 곳, 이런 곳이 바로 유토피아(utopia), 즉 이상향(理想鄕)이 아니겠는가.



배에서 내리자 주민 한 분이 우릴 기다리고 계신다. 그리고 선착장에서 50m쯤 떨어진 등산로 입구까지 우리를 인도한 다음, 이곳 영산도에 대해 설명을 해주신다. 그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산의 생김새에 대한 설명이다. 마을 뒤편에 늘어서 있는 바위봉우리들의 형상이 산발한 여인네가 풍요로운 젖가슴을 드러낸 채 누워있는 모양새라는 것이다. 이런 형상은 도선(渡船)을 타고서 보면 더욱 또렷해진다고 한다. 아무튼 산비탈에 놓인 나무계단을 따라 올라가면서 탐방은 시작된다. 잠깐! 아무리 바빠도 들머리에 세워놓은 영산도 안내도는 꼭 살펴보고 출발하자. 최소한의 상식이라도 지니고 산에 오르는 게 산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는가.




가파른 계단을 잠시 오르면 조그만 건물 두 동이 보인다. 윗 건물 앞에 당산(하당)’이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어장신(漁場神)김첨지영감을 모시는 곳인데, 이 영감님이 배, 어장, 해초 등의 보호를 관장하는 신()으로 둑제의 신이란다. ‘둑제는 소머리를 통째로 올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흑산도 홍어잡이의 시초가 이곳 영산도에서 시작되었다고 믿고 있을 정도로 전통적인 어업활동이 활발하던 영산도 주민들이 만들어낸 신앙(信仰)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이곳에는 상당과 하당, 그리고 제기실(祭器室)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상당은 눈에 띄지 않았다. 하당과는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는가 보다.



그런데 모셔져 있는 초상화는 아무리 봐도 여자의 형상이다. 안내문에는 김첨지영감을 모신다고 적혀있는데도 말이다. 안내판의 그림도 역시 여자 그림이기는 매한가지이다. 어느 글에선가 상당에서 당할아버지당할머니’, ‘별방도련님’, ‘소조아기씨님’, ‘산신님등을 모신다고 했는데, 그쪽에 붙어있어야 할 그림 하나가 이리로 자리를 옮겨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다면 아직은 내 눈이 덜 여물었다는 증거일 것이고 말이다. 여행을 끝내고 자료를 정리하다가 처녀의 혼을 모신 흑산도의 진리에 있는 당집의 신을 모셔왔다는 다른 이의 글을 발견했는데, 옳은지는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도 당집 앞에 세워진 안내판의 내용과 부합(符合)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당집 주위는 오래묵은 나무들로 우거져 있다. 그중에는 소나무들도 꽤 보인다. ‘영산팔경(永山八景)’ 중 제1경인 당산창송(堂山蒼松)’, 오래된 소나무들이 당산의 기와집 2동을 둘러싸고 있는 아름다운 풍경은 이곳을 두고 하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팔경의 나머지 일곱은 기봉(箕峰)에 아침햇살이 비칠 때 신비로운 풍광이 만들어진다는 기봉조휘(箕峰朝輝)2이고, 층암절벽에서 떨어지는 폭포물로 만병을 고친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비류폭포(飛流瀑布)3이 된다. 천연석탑(天然石塔)이라는 제4경은 자연이 빚은 석탑과 석수를 말하고, 용이 승천한 곳이라고 전해지는 제5경 용생암굴(龍生岩窟)과 사람의 코를 닮은 바위에 물이 드나들며 코고는 소리를 낸다는 제6경 비성석굴(鼻聲石窟)도 별스러운 재미가 있는 곳이다. 바닷물이 바위를 빚어 만든 아름다운 석문인 제7경 석주대문(石柱大門)은 영산팔경의 하이라이트이며 섬의 최고봉인 문암산의 높은 구름과 황혼의 조화로 자연의 신비스러운 풍경을 만들어내는 문암귀운(門岩歸雲)이 영산팔경의 대미를 장식한다.



잠시 후 능선에 올라선다. 능선과 만나는 지점에서 왼편으로 약간 비켜난 곳에 데크전망대 하나가 만들어져 있다. 영산도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빼어난 조망처이다. 마을을 감싸주고 있는 앞된볕산은 물론이고 해무(海霧)에 가리다시피한 흑산도도 눈에 들어온다. ‘앞된볕산은 자신의 위세를 자랑이라도 하려는 양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몸매를 한껏 자랑하고 있다.



닮아도 너무 닮았네요.’라며 집사람이 탄성을 지른다. 아까 선착장에서 보았던 때보다 훨씬 더 여성의 몸매를 닮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여인의 얼굴, 젖가슴, 불룩 튀어나온 배 등 신체와 대비되는 부분들을 일일이 지적해준다. 맞다. 다른 건 몰라도 뽈록하니 솟아오른 것이 여성의 젖가슴을 쏙 빼다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이후부터 탐방로는 능선을 탄다. 그리고 그 능선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간다. 작은 바위 조각들이 널브러진 곳이 심심찮게 나타나지만 산을 오르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다. 그보다는 길가에 피어난 들꽃들을 구경하는 즐거움이 더 크다고 보면 되겠다.



거기다 가끔 암릉구간이 나오면서 조망(眺望)이 터지기도 한다. 높은 암릉을 타다보면 왼쪽 아래로 흑산군도의 푸른 바다가 펼쳐지고, 오른쪽 아래로는 명품마을 영산리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항아리처럼 움푹 파인 만()의 안에 아늑하게 들어앉아 있는 모양새이다. 이렇게 전망 좋은 암릉은 대략 20분 정도 이어진다.



영산리 마을이 내려다보인다. 집들마다 알록달록한 색채의 옷을 입었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이 벌인 국립공원 명품마을 조성사업의 결과라고 한다. 공단은 지난 2010년 관매도를 시작으로 섬과 산 등 국립공원 안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정주 여건 개선 사업을 지속적으로 벌여왔다. 영산도는 그 가운데 여덟 번째 결과물이라고 한다.



마을 뒤편에 있는 영산도의 명물인 앞된볕산도 성큼 눈앞으로 다가온다.





탐방로를 찾는데 어려움은 없다. 산길이 외길인데다 잘 닦여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중간에 세 곳이나 이정표(#1 : 깃대봉 0.6Km/ 선착장 0.7Km, #2 : 깃대봉 0.4Km/ 선착장 0.8Km, #3 : 깃대봉 0.3Km/ 선착장 1.0Km)를 만들어 두었다. 얼마쯤 왔는지, 그리고 앞으로 얼마나 남았는지를 확인해볼 수가 있어 산행에 많은 도움이 된다. 또 다른 특징도 있다. 이 구간은 침침한 활엽수림이 펼쳐지는 대신 조망은 탁 막혀있다는 얘기이다. 대신 호젓한 산행을 즐길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그렇게 1시간 가까이를 오르자 드디어 깃대봉이다. 정상은 한 평도 채 되지 않을 정도로 비좁다.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는다. ‘깃대봉, 해발고도 185m’라고 적힌 이름표 달고 있는 이정표(노인회관 1.5Km/ 선착장 1.2Km)가 이를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잡목들 때문에 조망 또한 트이지 않는다. 오래 머물지 않고 그냥 출발해버리는 이유이다. 하지만 이곳 깃대봉은 영산팔경(永山八景)’ 중 제2경인 기봉조휘(箕峰朝輝)를 만들어낸 장소이다. 아침햇살이 이 봉우리에 비칠 때 신비로운 풍광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얘기하는 기봉(箕峰)’은 깃대봉을 말한다니 참조한다.



하산을 시작한다. 아니 된볕산으로 향한다고 하는 게 옳겠다.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노인회관방향이다. 잠시 아래로 내려섰다가 다시 오르니 왼편에 목책(木柵)을 둘러 난간을 만들어놓았다. 수백 길의 낭떠러지 아래로 푸른 바다가 넘실거린다. 위험구간이라 할 수 있다.




그 덕분에 시야(視野)가 툭 트이면서 일망무제의 조망이 펼쳐진다. 하지만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방향으로 보아 진도 쪽에 있는 섬들이 보일만도 한데 말이다. 아무래도 해무(海霧)의 방해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사진은 바다 쪽 벼랑을 찍은 것으로 대신해봤다. 수직의 바위벼랑이 눈요깃감으로 제법 쏠쏠했기 때문이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삼각점(흑산 12)이 있는 봉우리(해발 220m)에 올라선다. 삼각점이 있는 걸로 보아 어쩌면 이곳이 실제의 깃대봉정상일지도 모르겠다. 아까 이정표가 세워졌던 곳보다는 이곳이 훨씬 더 정상답기 때문이다. 더 높기도 하거니와 조망(眺望)까지도 시원스럽게 터진다. 하긴 이 정도는 되어야 영산팔경의 제1경인 기봉조휘(箕峰朝輝)’에 어울리지 않겠는가. 이때의 기봉조휘는 아침햇살에 비치는 신비로운 풍광을 일출의 장관으로 보면 되겠다.



삼각점 부근에서의 조망은 한마디로 끝내준다. 건너편에 아직도 해무(海霧)가 덜 걷힌 흑산도가 신기루처럼 나타난다. 언젠가 미술관에서 보았던 몽환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던 동양화를 연상시키는 풍경이다. 영산도는 흑산도와 떼어놓고 얘기하기 힘든 섬이다. 흑산도로서는 영산도가 남동쪽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을 막아주니 늘 고마운 존재였을 것이고, 영산도에게는 배로 10분 거리에 있는 큰 섬 흑산도가 든든한 버팀목이었을 것이다.



앞된볕산도 눈앞으로 성큼 다가와 있다. 하얗게 빛나고 있는 암릉이 묘한 아름다움을 발산하고 있다. 하얀색이 특징인 규암(硅岩, quartzite)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참고로 규암의 또 다른 특징은 단단하다는 것이다. 전라도 말로 산독인 규암은 유리의 원료로 사용된다.



그렇게 30분 조금 못되게 걷자 천박재가 나온다. ‘품위가 없고 상스럽다?’ 썩 좋지 않은 어감(語感)의 이름이 아닐 수 없다. 아무래도 이곳의 지질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다. 조금 전에도 얘기했듯이 이곳 영산도의 바위들은 규암으로 이루어졌는데, 규암의 특징이 바로 매우 얇고 척박한 토양을 만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환경에 시달리며 살았을 삶이 어찌 평탄했겠는가. 아무튼 길은 이곳에서 오른쪽을 향해 직각으로 방향을 튼다. 이정표(노인회관 0.8Km/ 깃대봉 0.7Km, 선착장 2.0Km) 역시 오른편으로만 방향표시를 하고 있다. 하지만 계속해서 능선을 타는 것도 가능하다. 참고로 천박재에서는 앞된볕산과 뒷된볕산의 암봉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새 한마리가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가는 형상과 흡사하다.



넓적한 바위에 앉아 잠시 고민에 빠져본다. ‘된볕산으로 가보고 싶은데, 그쪽 능선 방향에다 넘어가지 말라는 의미로 보이는 금()줄을 쳐놓았기 있기 때문이다. 고민의 결과는 뻔했다. 영산도의 명물인 앞된볕산을 빼먹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아래 사진에서 집사람의 뒤에 보이는 산은 뒷된볕산이다. 왼편이 수직의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졌지만 등산로는 잘 나있는 편이다. 밧줄난간까지 만들어놓아 안전성까지 확보되어 있다.



능선을 따라 10분 조금 못되게 걷자 길이 둘로 나뉜다. 물론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다. 누군가 화살표 모양의 조형물을 좌우 양쪽으로 매달아 놓았을 따름이다. 미리 검색해본 사진에서는 화살표 위에 지명이 적혀있었는데 그새 지워져버린 모양이다. 아무튼 이곳에서 왼편은 이곳 영산도에서 가장 높다는 뒷된볕산(241.6m)’으로 가는 길이고, 영산도의 명물인 앞된볕산(212m)’은 오른편이다. 이곳에서는 왼편으로 가는 것이 옳다. 정상을 둘러보고 이곳으로 되돌아 나온 후에 앞된볕산으로 가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뒷된볕산의 답사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등산을 하다가 바위에서 떨어지면서 파열되었던 인대가 아직도 덜 아물었기 때문이다. 나 혼자라면 무리를 해서라도 올라가보겠지만 집사람의 서슬 시퍼런 눈초리 앞에서는 그런 시도 자체가 어불성설(語不成說)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앞된볕산의 답사는 허락해줬다는 것이다. 비록 위험하지 않은 곳까지만 진행하는 것으로 다짐을 해줬지만 말이다.



울창한 숲길을 잠시 헤쳐 나가자 진행방향에 하얀색 바위봉우리가 나타난다. ‘앞된볕산이다. 이쯤에서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하다. 정상으로 가려면 오른편으로 약간 비켜난 곳에 보이는 바위능선을 포기하고 왼편의 숲 방향에서 길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걸 몰랐던 우리는 바위벼랑을 기어오르고야 말았다. 거의 수직에 가까운 직벽이지만 오르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된볕산은 규암(硅岩, quartzite)으로 이루어져 있다. 규암은 보통 눈처럼 흰색을 띤다. 암릉이 하얗게 보이는 이유이다. 또한 미세하게 각이 진 절리를 가지며, 동결작용(凍結作用)에 의해 각력(角礫)으로 깨진다. 덕분에 암릉을 오르기는 수월한 편이다. 바위가 단단한데다 각이 지기 때문에 붙잡거나 의지하기에 좋기 때문이다.



암릉의 위로 오르자 실로 어마어마한 경관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 조그만 섬에 저리도 거대한 암릉이 어떻게 들어설 수 있을까.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영산도(永山島)를 감싸고 있는 산의 이름을 영산(永山)’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흑산도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흑산(黑山)이 곧 흑산도(黑山島)이듯, 영산(永山)의 산 이름이 곧 영산도(永山島)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원래는 영산(靈山)이었으나 언제부턴가 영산(永山)으로 바뀌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조그만 섬에 저렇게 거대한 암릉이 펼쳐지는 것을 보고 어느 누가 신령스럽게 생각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지금은 된볕산이라고 부른다. 영산리 마을 사람들이 뒷산을 바라볼 때 하루 종일 햇볕이 되게(전라도 방언) 쪼이는 산이라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 눈앞에 보이는 저 바위봉우리는 앞된볕산이라고 부르면 되겠다.




앞된볕산의 험준한 암릉을 가운데에 놓고 오른편으로는 흑산군도와 영산리의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지고, 왼쪽 아래로는 폐가만 남아있다는 액기미마을의 해안이 내려다보인다. 그 너머로는 웅장한 흑산도가 의젓하게 버티고 있다.




깃대봉 방향으로도 암봉이 하나 있다. 아까 데크전망대에서 보았을 때 임신한 배 모양으로 뽈록하게 튀어나왔던 부분이 아닐까 싶다. 지도에 얼굴바위로 표기된 지점일 것 같아 요리조리 살펴봤지만 얼굴의 형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더 이상의 무리한 진행은 그만두기로 하고 천박재로 되돌아 나온다. 그리고 본격적인 하산을 시작한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경사까지도 그다지 가파르지가 않다. 거기다 가끔은 흑산군도까지 조망이 되는 멋진 길이다.



그렇게 30분쯤 진행하면 마을(이정표 : 노인회관 2.0Km/ 깃대봉 1.3Km, 선착장 2.5Km)에 내려선다. 마을 뒷산을 한 바퀴 돌아 다시 마을로 돌아온 셈이다. 내려오는 길가의 집들은 모두 높은 담장이 둘러싸고 있다. 처마 끝까지 올라오는 것이 제주도의 옛집들과 비습한 외관(外觀)을 보여준다. 집뿐만이 아니다. 담장은 파와 감자, 고추 등 작물들까지도 바람으로부터 보호해 주고 있었다. 돌이 많은 섬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바람이 많다는 것은 섬이 지니는 일반적인 특징이니 거론할 필요도 없고 말이다. 그런데 그 담들이 하나같이 반듯반듯하게 잘도 쌓아놓았다. 오래 묵지 않아 고풍스러운 맛은 덜하지만 서서히 담쟁이덩굴로 뒤덮여가고 있으니 이 또한 문제가 되지 않을 게 분명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하나의 포토존(photo zone)이 생겨날 것 같다는 얘기이다.



돌담길을 지나자 학교 건물이 나온다. ‘흑산초등학교 영산분교장이란다. tvN에서 방영하는 섬총사에서는 이곳 영산도를 소개하면서 학생 수가 한 명 뿐이었다면서 취학 사실을 과거형으로 만들었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떻게 되었을까? 교정이 깨끗한데다. 태극기까지 옥상에서 펄럭이는 걸로 보아 아직까지도 문은 열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또 다른 취학아동이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KBS-2TV다큐멘터리 3에서는 이곳 영산도가 명품마을이 된 데는 고향으로 돌아온 40-50대 젊은 층들의 역할이 크다고 했었다. 올망졸망한 애들을 연상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건 그렇고 공공시설이 학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곳에는 2층으로 반듯하게 지어진 보건소도 있고, 목포경찰서에서는 치안센터까지 만들어놓았다.



바닷가 쪽으로 잠시 내려오자 소풍객들의 쉼터인 피크닉장이 나온다. 빙 둘러 돌담을 쌓은 공간을 서너 개쯤 만들고 그 안에다 나무로 만든 야외용 식탁을 배치했다. 비록 공동이긴 하지만 싱크대도 만들어 놓았다. 음식물을 준비해온 탐방객들을 위한 배려일 것이다. 이어서 치안센터가 나왔다싶으면 이번에는 캠핑장이다. 야영 장비를 갖추고 찾아온 백패커(backpacker)들을 위한 시설이다. 이곳은 아예 바비큐(barbecue)를 해먹을 있도록 숯불화로까지 준비해 놓았다. 세간의 화두(話頭)고객만족CS : customer satisfaction)를 보게 되다니, 명품마을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명품마을로 추켜세우고 싶다.



캠핑장 아래에는 영산상회라는 마켓(market)이 있다. 2년쯤 전인가 방영했던 KBS-2TV ‘다큐멘터리 3바보섬에 살고있네편에서는 이 섬에는 가게와 식당, 그리고 자동차가 없다고 했다. 관광객을 위한 시설이라고는 펜션 두 동과 마을식당 한 곳이 전부라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영산도도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던 모양이다. 비록 문은 열고 있지 않지만 이렇게 버젓한 마켓을 차려놓았으니 말이다.



점심식사는 마을에서 공동으로 운영하는 식당 부뚜막에서 했다. 이번 여행을 주관하고 있는 산악회(좋은 사람들)에서 미리 예약을 해놓았기 때문이다. 내놓는 음식마다 뛰어난 맛을 자랑한다는 소문을 들은 게 예약을 한 이유란다. 그 소문은 사실이었다. 손수 기른 채소와 직접 잡은 생선을 이용해서 만들어내는 음식은 그들의 정성까지 더해져서 어느 하나 맛없는 것이 없었다. 특히 묵은지와 갓김치는 그야말로 일미(一味)였다. 따로 안주를 시키지 않고도 소주 한 병을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이 비워버렸다면 이해가 갈 것이다. 참고로 이 마을은 친환경의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부단의 노력을 하고 있다. '영산각'이라고 불리는 마을 특산품인 자연산 돌미역의 품질을 지키기 위해 양식이나 외부 미역반입을 철저히 막고 이를 어긴 주민은 조합자격을 박탈해버릴 정도라고 한다. 자연산 홍합은 자체적으로 금어기를 설정해 '많이 팔기'보다는 '제대로 키워 팔기'에 집중하고 있단다. 그 덕분에 영산도의 자연산 미역과 홍합은 옆 섬마을 주민들도 찾는 '없어서 못 파는' 특산품으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특히 홍합은 명품마을 사업 전 6천 원 하던 값이 무려 4배로 뛰었다고 한다. 술안주로 가장 선호하는 게 홍합이기에 얼마간 사보려고 했지만 나 역시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마을길을 걷다보면 담벼락에 그려진 벽화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벽화로 유명한 통영의 '동피랑'마을을 연상시키는 풍경이다. 명품마을사업을 하면서 그린 그림들이라고 한다. 이 벽화들은 이재호 화백의 재능 기부를 통해서 만들어졌단다.



영산도를 빠져나가는 길에 섬에서 운영하는 도선을 이용해 섬을 반 바퀴 정도 둘러보기로 했다. 해안은 온통 깎아 세운 듯한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덕분에 눈에 들어오는 풍경마다 절경이다. 태초의 신비마저 느껴진다.



암벽으로 이루어진 해안선만 계속되던 바닷길에 난데없이 모래사장을 낀 해변이 나타난다. 혹시 액기미마을 해안일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이곳 영산도에는 영산마을만 있는 게 아니라고 했었다. 지금은 비록 이름만으로 남았지만 옛날에는 10여 가구의 주민들이 살던 의젓한 마을이 있었다는 것이다. 마을의 이름은 액기미’, 액운 있는 사람은 오지 말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란다.



영산도의 수직 절벽은 칼로 자른 듯 날카롭게 바다와 마주하고 있다. 영산도가 아니고는 볼 수 없는, 그것도 배를 타고 나오지 않았다면 결코 믿을 수 없는 신비로운 절경에 눈앞에 펼쳐진다. 저절로 벌어진 입이 쉽게 다물어지지 않는 비경들의 연속이다. 거울같이 맑고 푸른 바닷물이 파도에 밀려 물보라를 날리는 모습과 어우러진 기암괴석을 바라보면 천지창조의 오묘함에 감탄하게 된다.




얼마쯤 달렸을까 영산팔경(永山八景)’ 중 대표 절경으로 꼽히는 '석주대문(石住大門)'이 장엄하게 눈앞에 펼쳐진다. 파도가 몰아쳐 절벽을 깎아 섬과 바다를 잇는 아치형의 돌기둥을 만들었다. 자연과 세월이 만들어낸 숨막히는 아름다움이다. 풍랑이 몰아치면 그 속으로 피하곤 했다는 구전도 전해진다. 옛날 중국 청나라와 교역을 할 때 이곳을 지나는 배들이 풍랑을 만나게 되면 이 대문 안으로 대피했다는 것이다. 주위의 바다가 거센 파도 때문에 요동을 쳐도 이 대문바위 안에만 들어오면 거짓말처럼 바람이 잔잔해져 풍랑이 잠자기를 기다려 안전한 항해를 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아무튼 배가 지나가도 될 만큼 거대한 기둥을 통과해 반대편에서 바라보면 기다란 코를 바다에 처박은 코끼리의 모양이 나타나 일명 '코끼리 바위'라고도 불린다. 또한 영산도 사람들은 영산도를 지탱하는 지둥바위(기둥바위의 전라도 방언)라고도 부른단다.


에필로그(epilogue), 영산도라는 이름은 의외로 큰 의미를 갖는다. 120나 떨어진 영산포영산강이란 지명이 이 섬의 이름을 따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조선시대는 왜구에 시달리는 섬 지역에 대해 공도정책(空島政策)을 썼다. 당시 이곳 영산도 주민들도 섬을 떠나 나주지역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그들은 고향을 그리워하며 새로운 터전에 영산포라는 이름을 붙이는 한편, 그 옆의 강은 영산강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이왕에 온 김에 영산도라는 지명을 갖게 된 이유도 한번 짚어보자. 두 가지인데 영산화. 영산홍(映山紅)’이 많이 핀다는 데서 연유했다는 설과, 섬의 산세가 신령스러운 기운이 깃든 곳이라 하여 영산도(靈山島)’라 했다는 설이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전자로 알고 있다. 나도 역시 그랬다. 하지만 영산도에는 영산화가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후자가 옳을 수도 있겠다. 비록 다른 곳에서도 흔한 밋밋한 이야기이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