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령도(白翎島)

 

여행일 : ‘19. 8. 29()

소재지 : 인천광역시 옹진군 백령면

산행코스 : 용기포항사곶해수욕장백령호콩돌해안용트림바위천년송중화동교회몽운사사자바위심청각두무진(버스 투어)

 

함께한 산악회 : 좋은사람들

 

특징 : 인천에서 북서쪽으로 191km 가량 떨어진 서해 최북단의 섬으로 북한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다. 북한 땅인 황해도 장산곶과 고작해야 13거리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비록 경기도(옹진군)이지만 광복 전까지만 해도 황해도의 장연군(長淵郡)에 속해있었던 이유이다. 위치가 위치인지라 섬의 인구 분포는 주민 반, 군인 반이다. 그렇다고 삭막한 분위기는 아니다. 백령도의 자연이 품고 있는 절경 때문이다. ‘서해의 해금강이라 불리는 두무진을 비롯해 효녀 심청의 이야기가 깃든 심청각, 작고 둥근 자갈이 깔린 콩돌해변, 천연비행장이라는 사곶해수욕장 등 보석 같은 풍광들이 여행자를 맞이한다. 참고로 백령도의 원래의 이름은 곡도(鵠島)였다고 한다. ‘()’이 고니(白鳥)나 따오기를 가리키는 한자말이니 백조가 많다는데서 유래된 이름이 아닐까 싶다. 그러다가 섬의 지형이 따오기가 흰 날개를 펼치고 공중을 나는 모습처럼 생겼다 해서 백령도(白翎島)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었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찾아오는 방법 : 백령도로 들어가려면 일단은 인천연안여객터미널까지 와야만 한다. 백령도로 들어가는 쾌속선이 이곳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배는 에이치해운의 하모니플라워호(07:50 출발)와 고려고속훼리() 소속의 코리아킹호(08:30 출발)와 웅진훼미리호(13:00 출발) 등 하루 3척이 왕복 운항하고 있다. 850분에 출발하는 고려고속훼리() 소속의 코리아피스호(고려고속훼리 소속)도 있다고 했으나 터머널의 전광판에는 떠있지 않았다. 어쩌면 성수기에만 다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를 태우고 갈 배는 코리아킹호이다. 매일 오전 830분 인천항 연안여객터미널에서 출항해 대청도를 거쳐 백령도까지 1차례 왕복 운항한다. 백령도에서는 오후 130분께 출발해 인천으로 돌아온다. 최대 속력이 40노트에 이르는 이 쾌속선은 총 449명의 승객과 함께 7.36t의 화물을 적재할 수 있단다.



인천항을 출발한지 4시간 만에 백령도의 용기포항에 도착했다. 거리에 비해 오래 걸린 셈인데, 이는 북한 수역을 피해 인천에서 공해로 나갔다가 백령도로 향하기 때문이란다. 그건 그렇고 백령도에는 여러 곳의 포구가 있다. 하지만 섬의 관문 역할을 하는 곳은 1998년 연안항으로 지정된 용기포항이다. 2층 건물인 여객터미널은 3t급 카페리가 접안할 수 있는 신항(新港)과 함께 2012년에 지어졌다고 한다.




배에서 내리니 백령도에서 머무는 동안 우리의 다리 노릇을 하게 될 대형버스가 기다리고 있다. ‘까나리여행사소속이라는데 버스기사가 가이드의 역할까지 겸하는 시스템이다. 먼저 진촌리(면소재지)에 있는 아일랜드 캐슬에 들러 여장(旅裝)을 푼다. 식당(食堂)까지 겸하는지라 따로 식당을 잡아야하는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점심과 다음날 아침 모두 한식 뷔페로 상을 차렸는데 맛이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런대로 먹을 만은 했다. 하긴 인천에서 200가까이 떨어진 외딴 섬에서 이보다 더 맛깔스런 음식을 찾는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점심을 먹자마자 곧바로 사곶해수욕장으로 이동한다. 백령도에 있는 관광자원(觀光資源)과의 첫 만남이다. 200m 폭의 모래사장이 2에 걸쳐 펼쳐지는 이곳 사곶해수욕장1997년 천연기념물(391)로 지정된바 있다. 이탈리아의 나폴리와 함께 세계에서 2곳 밖에 없다는 특수성 때문이란다. ‘사상누각’(모래 위에 지은 집)이라는 표현에서 잘 나타나듯 모래밭은 단단함이나 견고함과는 정반대인 곳이다. 하지만 이곳 사곶사빈은 바닥이 단단하기 그지없다. ‘천연비행장이라고도 불리우 듯 실제로 한국전쟁 이후 군용 비행기 활주로로 쓰이기도 했단다. 두껍게 쌓여 있는 미세한 석영질 모래층이 무거운 비행기가 내려앉아도 꺼지지 않을 만큼 치밀하고 단단하기 때문이란다. 저 모래사장은 가끔 해병대원들의 극기 훈련장으로 활용되곤 한단다. 그래서 군인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지만, 오늘은 해변(海邊)이 텅 비어있다. 그런 눈요깃거리를 보는 행운(幸運)은 아무에게나 제공되지는 않나보다.





모래사장에 내려서니 생각했던 것 보다는 바닥이 많이 무르다. 비행기는커녕 자동차도 제대로 달리지 못할 것 같이 무른 것이다. 그런 내 느낌은 옳았다. ‘콘크리트소리를 듣던 해변(海邊)은 최근 몇 년 사이에 급격히 물러졌다고 한다. 간척지(干拓地)를 만들기 위해 화동과 사곶 사이에 백령둑과 백령대교(大橋)를 건설(95)한 것이 그 원인이란다. 그로인해 사곶 앞바다의 해수(海水) 흐름이 변하면서, 먼 바다로 쓸려 나가지 못한 점토질 퇴적물이 사곶 모래에 엉켜 붙어 해안(海岸)이 물러졌다는 것이다.



두 번째 방문지는 백령호이다. 20년쯤 전에 있었던 간척사업 때 생겨난 담수호(淡水湖, freshwater lake)인데, 블랙야크에서 원하는 인증물이 이곳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해 최북단 백령도라고 쓰인 거대한 이 비석은 호수의 제방(堤防)에 세워져 있다. 길이가 870m쯤 되는 저 제방으로 인해 백령도는 우리나라에서 8번째로 큰 섬이 되었단다. 당초는 14번째였다니 당시의 공사가 얼마나 컸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91년부터 99년까지 계속된 공사는 350ha의 농경지를 만들어냈고, 그때 함께 생긴 것이 바로 백령호(白翎湖)인데, 호수(湖水)의 넓이가 무려 129ha나 된다. 섬의 모양이 ㄷ자에서 ㅁ자로 바뀔 정도로 거대한 공사였지만, 아쉽게도 담수(潭水)된 물은 아직까지도 농업용수(農業用水)로 활용하지를 못한다고 한다. 호수로 짠물이 유입되는 탓에 제 구실을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 제방의 한쪽 귀퉁이에 백령대교가 놓여있다는 것을 깜빡 잊을 뻔했다. 길이가 50m도 채 되지 않는 꼬맹이 다리인데도 이곳 주민들은 대교(大橋)’라고 부르는 것을 서슴치 않는단다. 백령도에서 가장 긴 다리이기 때문이란다.




세 번째로 찾은 곳은 콩돌해안(海岸 : 천연기념물 제392)이다. 두무진 해안의 반대편 해안에 위치한 콩돌해변(海邊)도 백령도가 아니면 찾아볼 수 없는 진풍경이다. 길이 1가량의 해변 전체가 콩처럼 자잘한 돌로 가득하다. 돌의 크기와 모양이 진짜 콩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 하긴 얼마나 콩과 닮았으면 이름까지도 콩돌이라고 지었겠는가. 이 콩돌들은 백령도에 흔하게 분포된 규암이 억겁(億劫)의 세월동안 파도에 깎이고 씻겨 지면서 만들어 낸 모양이란다. 돌의 색깔도 매우 다채롭다. 보는 사람들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보통은 흰색, 갈색, 회색, 적갈색, 청회색, 청록색 등이라고 말하고 있다. ! 콩돌을 가지고 나가면 안 된다는 것을 깜빡 잊을 뻔했다. 관광안내소에서 경고성 안내방송까지 들려주는 것을 보면 몰래 숨겨나가는 사람들이 꽤 있는 모양이다.




이색적(異色的) 콩돌은 보는 것만으로도 신비(神秘)한 경험이다. 거기다 신발을 벗고 맨발로 산책(散策)까지 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호사(豪奢)는 없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같이 간 사람들이 너나없이 신발을 벗어 들고 걷고 있다. 발바닥 지압에 좋다는 가이드의 친절한 안내가 있었는데, 어느 누가 신발을 벗어 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맨발로 바닷물을 첨벙이는 사람들과, 하얗게 물보라를 일으키는 바다, 그리고 바닥에 깔린 부드러운 자갈들이 한데 어우러지며 영화(映畵) 속의 한 장면을 연출해 내고 있다.



다음은 가이드의 서비스 코스다. 마침 바람이 세게 일고 있으니 파도 구경을 해보라는 것이다. 용트림바위로 가는 길목인데 차에서 내리니 널찍한 선착장이 만들어져 있고 그 주변에는 커다랗고 녹슨 닻이 꽤 많이 널려있다. 하지만 매어 있는 배는 한 척도 없다. 그 빈자리는 먼 바다에서 밀려온 파도가 대신한다. 방파제를 때리면서 치솟아 오르는 물보라가 장관을 이룬다.




다섯 번째로 찾은 곳은 용트림바위. 바위는 절벽(絶壁)에 걸터앉은 전망대(展望臺)의 바로 아래 바닷가에 자리 잡고 있는데, 여러 개의 암석층이 위태롭게 쌓이면서 마치 용()이 하늘로 승천(昇天)하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바위 스스로 하늘을 향해 나선처럼 꼬며 오르는 형상(形象)이 매우 인상적이다. 저곳에는 갈매기와 가마우지가 서식(棲息)하고 있단다. 깎인 절벽 곳곳에 둥지를 튼 갈매기 떼들의 모습이 평소에도 장관(壯觀)을 이루는 곳이다. 천안함의 함미(艦尾) 인양(引揚) 시 모든 방송사들이 이곳 용트림 전망대를 중계 포인트로 삼았었다.






중화동 교회로 가는 길에 장촌마을(長村里)에 들렀다. 지금은 비록 메밀칼국수 집이 있는 곳으로 더 유명하지만 이곳에 400년이나 묵은 노송(老松)이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도로에서 100m쯤 올라가면 만날 수 있는데 입구의 안내판에는 400년 전인 조선시대 선조 때 마을 사람들이 심은 것으로 전해져 온다고 적혀있다. ‘천년송(千年松)’이라는 이름까지도 붙여놓았다. 기껏해야 조선 왕조와 역사를 같이 했을 나무이지만 천년 동안 마을을 보호해 줄 것이라 믿었던 이곳 섬사람들의 바람이 아니었을까 싶다. 동네 사람들의 할아버지. 그 이전부터 천년송이라 불러왔다는 것이 증거이고 말이다.




다음은 중화동교회이다. 지어진지 백 년도 넘었다고 해서 나무로 지어진 한옥(韓屋)을 예상했었는데, 언덕위에 오롯이 앉아있는 교회건물은 의외로 벽돌로 지어진 양옥(洋屋)건물이었다. 중화동 교회는 주민들에 의해 세워진 한국 최초의 자생적(自生的) 교회라는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 1865(고종 2) 주민들의 자발적인 모금(募金)과 봉사(奉仕)로 지어졌다니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외에도 백령도에는 지어진지 100년이 넘는 교회가 2곳이나 더 있다고 한다. 백령도가 중국에서 100km 정도밖에 떨어져있지 않은 탓에, 조선에 기독교를 전파(傳播)하기 위한 교두보(橋頭堡)로 활용되었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교회당 옆에는 기독교역사관을 지어놓았다. 19세기 초에 시작된 백령도와 주변지역에 대한 기독교 선교기록을 모아 전시하고 있는 선교역사박물관이다. 1816년 영국군이 항해 도중 조난당하면서 백령도 중화동에 가장 먼저 기독교를 전파했다고 한다. 그래선지 1896년에 이미 교회가 지어졌다.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라고 한다. 백령도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울릉도처럼 기독교인이 많다는 점이다. 주민의 70-80%가량이 기독교 신자란다. 한국의 기독교 인구가 20% 정도인 점을 감안하면 이것은 엄청난 비율이라 하겠다. 그 이유는 지정학적 요인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시대 육로를 통한 포교가 막히자 선교사들은 바닷길을 이용해 풍선을 타고 자연스럽게 커다란 섬 백령도에 들어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민들의 기독교에 대한 몰입도 역시 지정학적으로 접근하는 게 옳을 것 같다. 북한을 바로 코앞에 두어야하는 위태로운 삶이 적극적인 구원관과 유일신 사상의 체계를 갖춘 기독교와 딱 맞아 떨어졌다고 보면 되겠다는 얘기이다.



축복의 땅이지만 아쉬운 점도 눈에 띄었다. 교회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 있던 커다란 무궁화나무가 뼈대만 앙상한 고사목(枯死木)으로 변해있었기 때문이다. 천연기념물(521)로까지 지정되었을 정도로 나이 먹은 나무였는데 안타까운 일이라 하겠다. 안내판에는 태풍의 피해로 고사했다고 적혀있었으나 가이드는 관리부실이 원인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었다.



심청각으로 가는 도중 가이드로부터 발우(鉢盂)에 대한 얘기를 듣는다. 알다시피 백령도는 1896년에 이미 교회가 세워진 한국 기독교 역사의 거점이다. 그런 역사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백령도 곳곳에는 교회가 많다. 하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사찰은 몽운사가 유일하단다. 백령도는 200년 동안 절이 없었다고 한다. 조선 후기, 생계가 막막한 사람들은 육지로 떠났고 그와 함께 절도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2003년 백령도의 군부대와 인연을 갖고 있던 한 스님이 백령도에 작은 절을 지었는데 이 절의 특징이 발우란다. 그중에서도 백미(白眉)는 단연 티베트에서 건너온 발우라며 절대 놓치지 말라는 충고까지 한다. 어느 고승(高僧)의 두개골로 만들었는데 이 발우에 소원을 빌면 그 바람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다만 두 개를 빌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으니 꼭 하나만 빌라는 넉살까지 빼놓지 않는다.



법당 앞에는 커다란 발우(鉢盂)가 놓여있다. 계단을 딛고 올라서니 발우의 안에도 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발우를 들고 있는 승려상(僧侶像)도 보인다. 그들 주변에는 지폐와 동전들이 수북하다. 발우 안에 동전이 들어갈 경우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을 믿는 사람들이 꽤 되는 모양이다.



법당으로 들어서자 주지인 지명(智明)이 모았다는 발우(鉢盂)들이 중생을 맞는다. '일발삼의(一鉢三衣ㆍ발우 하나와 옷 세벌)'라는 말처럼 발우는 탁발에 의지해 무소유의 삶을 사는 출가 수행자들의 표상이다. 특히 선종에서 발우는 밥그릇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수행의 매개이며, 초조 달마대사로부터 육조 혜능대사에 이르기까지 선사들이 제자들에게 깨달음을 전한 전법(傳法)의 상징이었다. 그런 발우들을 100여 벌이나 모았다는 것이다. 구하(1872~1965)스님, 석주(1909~2004)스님 등 국내의 여러 노스님들이 썼던 발우뿐만 아니라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라마, 대만 불광산사의 성운스님, 미얀마의 우꾸마라 스님, 태국의 프라자라타나 몰리스님 등 외국의 유명한 고승들의 발우도 있다는데 일일이 확인해 보지는 못했다.




조금 더 가자 고봉포구가 나온다. 이곳에는 사자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사자가 입을 벌리고 용맹스레 포효하는 모습 같다고 해서 사자바위라고 불렸으나 최근 이구아나를 닮았다고도 해서 이구아나 바위로도 불린단다. 보는 각도와 파도의 세기에 따라 그 모양을 달리한다더니 사실이었던가 보다. 사자바위 뒤편 멀리 북한 땅이 보인다. 우리 것인데도 가볼 수 없는 북녘 땅, 지금은 비록 막연하게만 보이는 통일이지만 조금씩 현실에 가까워지는 날도 오지 않을까? 사자바위 위 창공을 나는 갈매기처럼 통일의 꿈도 날개를 펴고 날아오를 날이 있을 것이다.




백령도의 북동쪽 끄트머리. 야트막한 산의 정상에는 심청각(沈淸閣)이 세워져 있다. 백령도가 심청전의 무대였던 사실을 기리기 위해 심청이가 공양미 300백석에 몸을 던진 북한의 장산곶 인당수와 인근 대청도 사이의 연봉바위가 동시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건립했다. 그 옛날 심청이가 뛰어들었다는 절벽(絶壁) 아래의 인당수는 민감한 군사지역(軍事地域)이라서 남북한 어느 쪽에서도 접근할 수 없다고 한다. 그 덕분에 중국(中國) 어선들만 희희낙락(喜喜樂樂)이라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저인망(底引網) 그물을 이용해서 고기들을 싹쓸이 해 간다는 얘기이다. 하긴 중국인들은 그런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 그럴 만도 하겠다. 참고로 예로부터 인당수를 지나는 배는 목숨을 걸어야 했다고 한다. 해저(海底)의 바위에 부딪친 해류(海流)가 걷잡을 수 없이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탓에, 수많은 배들이 뒤집혔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주(船主)들은 용왕(龍王)님의 심술을 달래기 위한 제물(祭物)이 필요했던 것이다. 당시에 순결한 숫처녀만 바쳤던 것을 보면, 여자를 보는 용왕님의 시각(視覺)도 우리네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가 보다.



만일 슬픔에 잠긴 그녀의 마음을 공감(共感)하고 싶다면 심청각으로 들어가면 된다. 그녀의 기구하고도 극적인 일생이 아름다운 조형물로 형상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용왕의 도움으로 환생한 심청이 황후마마가 되고, 아버지가 눈을 뜨게 되는 클라이맥스(climax)는 압권(壓卷), 이보다 더 나은 줄거리가 어디 있겠는가. 인생 역전(人生 逆轉)은 평범한 우리네들이 가장 갈망하는 삶일 테니까. 이밖에도 심청전에 관련된 판소리와 영화대본, 고서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한 층을 더 오르면 백령도에 대한 각종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심청각 뒤 너른 마당에는 해풍(海風)에 치마를 날리며 바다로 뛰어드는 심청의 동상(銅像)이 있다. 마당을 둘러싸고 있는 나지막한 담장으로 다가가자 일망무제의 조망이 펼쳐진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곳이 북녘 땅 장산곶이다. 그 왼편으로 유독 검푸르게 보이는 바다가 임당수라고 한다. 10남짓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북한 땅을 눈에 담아보라는 듯 망원경을 설치하는 배려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집사람의 관심은 온통 바위벼랑 아래로 쏠려있다. 백령도의 또 다른 천연기념물(331)인 점박이물범(Phoca vitulina largha)을 구경하고 싶었나보다. 잠시 후 터져 나오는 환호성은 그녀의 눈에 물범이 들어왔다는 증거일 것이다. 맞다. 그녀가 가르켜 주는 방향으로 망원경을 돌리니 꽤나 많은 물범들이 갯바위에서 쉬고 있었다. 날씨와 물때가 맞아야만 볼 수 있다는데 행운이라 하겠다. 참고로 백령도의 물범은 은회색 바탕에 타원형 점무늬를 가진 잔점박이 물범이다. ‘우용’, ‘해표’, ‘강치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데 겨울철에는 중국 발해만의 빙해 위에서 번식해 이듬해 여름이 가까워지면 서해의 풍부한 먹이를 먹으며 성장하기 위해 백령도로 남하한다. 1940년대에는 그 개체 수가 약 8천 마리였는데 현재는 약 300여 마리로 멸종위기에 처해 있어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2014 인천아시안게임의 마스코트가 바로 백령도의 점박이물범이다.




두무진으로 가는 도중 특산품 판매장에 들렀다. 이곳에서는 돌미역과 다시마, 까나리액젓 등 백령도에서 생산하는 특산품(特産品)을 판매하는데, 까나리액젓과 약쑥으로 만든 젤리(jelly)가 특히 인기를 끌고 있었다. ! 조금 전에는 진액(津液)과 환(), 그리고 향() 등 약쑥으로 만든 갖가지 제품을 판매하는 약쑥매장에도 들렀었다. 그런데 안내자의 멘트에서 보약(補藥)의 냄새가 물씬 풍겨 나온다. 보약을 선전할 때에는 보통 대부분 남성의 성기능(性機能) 강화에 뛰어난 효과가 있다는 효능(效能)을 가장 먼저 내세우는데, 이곳에서도 가장 먼저 내세우는 게 남성의 성기능 강화였기 때문이다. 상품을 한 아름씩 안고 버스에 오르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여자들이다. 자기 남편에게 만족하는 여자들이 극히 드물다는 속언(俗言)이 맞기는 맞는 모양이다. 하긴 그래서 이웃집 남자라는 신조어(新造語)가 생겨나지 않았겠는가.



맨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서북쪽 끄트머리에 위치한 두무진(頭門津) 포구이다. 서해의 해금강으로 소문난 두무진의 투어가 이곳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두무진을 둘러보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트레킹 코스인 '두무 비경길'과 포구에서 작은 배를 타고 해안가로 떠나는 유람선 투어다. 같은 풍경을 배에서 보느냐 두 발로 걸으며 보느냐의 차이인데, 각기 다른 감흥이 있다. 기암절벽의 파노라마를 감상하려면 유람선이 제격이다. 그런데도 우리 일행에게 주어진 것은 트레킹’. 그것도 무조건이란다. 유람선투어를 못하는 게 아쉽지만 바람이 세서 배가 뜨지 못한다니 어쩌겠는가.



탐방로는 정비가 잘 되어 있다. 바닷가나 바윗길에는 데크를 깔았는가 하면 산속에 내놓은 오솔길도 걷기에 부담이 없게끔 잘 닦아 놓았다. 잠시 쉬어가라는 배려용으로 정자까지 만들어 놓았음은 물론이다. 하긴 올 7월 환경부로부터 국가지질공원으로 인증까지 받았을 정도이니 이를 말이겠는가. 참고로 두무진의 원래 이름은 '두모진(頭毛鎭)'이었다고 한다. 머리카락처럼 뾰족한 바위가 많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이후 바위의 형상이 마치 장군들이 머리를 맞대고 회의하는 것 같다 하여 '두무진(頭武津)'으로 바뀌었단다.



탐방로를 걷다보면 포구 건너편으로 늘어선 해식절벽이 눈에 들어온다. 잠시 후에 만나게 될 두무진의 바위들과 함께 해식지형의 변화과정을 살펴보는 중요한 자료가 아닐까 싶다. 해식절벽에서 해식동굴을 거쳐 씨 아치(sea arch, 독립문처럼 암석 기저부가 뚫린 다리모양의 파식지형)’로 변하고, ‘씨 아치가 세월이 흐르면 시스텍(sea stack, 암석이 파도의 침식을 차별적으로 받아 만들어진 굴뚝 형태의 지형)’이 되기 때문이다.



해안산책로를 따라 10여분쯤 걷자 웅장한 해안(海岸) 절경(絶景)이 눈앞에 펼쳐진다. 백령도를 다녀온 사람들에게 백령도 제일의 절경을 꼽으라면, 너나 할 것 없이 첫손을 꼽는 곳이 두무진이라고 한다. 해안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올라서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입을 벌리고 만다. 당연히 감탄사 한 마디라도 내뱉어야하건만 다들 조용하기만 하다. 빼어난 경관(景觀)에 취해 벌린 입을 다물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숱한 세월 동안 비바람에 마모(磨耗)되고 파도에 깎여나간 선대암, 코끼리바위, 장군바위, 형제바위 등 기기묘묘한 형상의 바위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서해의 해금강'이라고도 불릴 정도로 빼어난 풍광(風光)을 자랑하는 두무진 해안은 현재 국가문화재인 명승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바닷가로 내려서면 감탄사가 절로 터져 나올 만큼 웅장한 해안절경(海岸絶景)이 눈앞에 펼쳐진다. 숱한 세월 동안 비바람에 마모(磨耗)되고 파도에 깎여 나간 기기묘묘(奇奇妙妙)한 형상의 바위들이 수도 없이 늘어서 있다. ‘마치 대군(大軍)을 호령하는 장수처럼 위풍당당하다.’는 표현이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수많은 기암(奇巖)들이 우뚝 솟아오르고, 깎아지른 암벽(巖壁)은 병풍(屛風)처럼 늘어서 있다. ‘서해의 해금강이라는 수식어(修飾語)가 결코 어색하지 않은 절경인 것이다.





두무진의 풍광(風光)을 노래한 작품으로 백령지가 있다. 조선 중기의 의병장 출신으로 함양군수를 지낸 이대기가 기록한 서책으로, 당쟁(黨爭)에 휘말려서 절해고도(絶海孤島)인 이곳으로 유배(流配)를 온 그가, 두무진을 둘러본 느낌을 적은 글이다. 그는 '늙은 신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또 어느 작가는 두무진의 기암(奇巖)을 일러 웅장하고 거대하되, 위압적이지도 사납지도 날카롭지도 않다.’라고 표현했다. 두 글을 합치면 자연스레 하나의 결론이 도출된다. 오랜 세월 파도와 풍화(風化)에 깎여온 절경은 신이 아니면 결코 만들 수 없었을 것이고, 아마도 그 신은 '늙은 신'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세련된 손끝이 아니고서는 결코 저런 경관(景觀)을 만들어 내지 못했을 테니까.




두무진의 북쪽 끄트머리에 있는 통일기원비를 구경하면서 트레킹은 끝을 맺게 된다. 투어(tour)가 끝났지만 숙소가 있는 진촌으로 돌아가지 않고, 근처 두무진포구에 있는 생선 횟집에 자리를 잡는다. 백령도에서 싱싱한 회를 먹을 수 있는 곳은 두무진포구가 유일하기 때문이란다. 4명이 둘러앉게 되는 상차림은 10만원. 회는 넉넉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부족하지도 않다. 여기에 매운탕에 밥까지 제공되니 1인당 25천이 비싸다곤 할 수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