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플섬(Purple Island), 반월도(半月島)-박지도(朴只島)

 

여행일 : ‘21. 4. 24(토)

소재지 : 전라남도 신안군 안좌면 반월리와 박지리

트레킹 코스 : 소곡리주차장→문 브릿지→반월선착장→마을카페→어깨산→반월도 당숲→마을카페→퍼플교→박지선착장→박지당산→라벤더정원→박지선착장→퍼플교→두리매표소(소요시간 : 4시간)

 

함께한 사람들 : 청산수산악회

 

특징 : 섬 1004개를 보유해 ‘천사섬’이라는 세계적 닉네임까지 얻은 신안군. 그중에서도 보랏빛으로 소문난 두 섬이 있다. 박지도와 반월도가 바로 그곳인데 어촌 지붕과 다리 등을 모두 보랏빛으로 칠한 가운데, 이른 봄에는 보라색 유채가, 5~6월엔 라벤더, 9~10월엔 아스타국화가 퍼플색감을 이어간다. 최근에는 외국 언론들에까지 보도되면서 국제적으로도 명성을 얻어가고 있다. 지난해 독일 최대의 위성TV방송인 ‘프로지벤(Prosieben)’과 홍콩의 유명 여행 잡지 ‘유 매거진(U magazine)’에 소개됐는가 하면, 올해는 미국 CNN에서 ‘사진작가들의 꿈의 섬’이라 소개했고, 폭스 뉴스(FOX NEWS)도 ‘퍼플섬의 독창성’을 조명했다. 로이터통신도 ‘퍼플에 흠뻑 젖은 한국 섬이 관광객들을 불러 모은다’는 제목으로 기사를 타전한바 있다.

 

▼ 트레킹 들머리는 소곡리주차장(신안군 안좌면 소곡리)

무안-광주고속도로 북무안 IC에서 내려와 국도 77호선을 타고 압해도까지 일단 들어온다. 압해읍사무소 앞에서 우회전하여 국도 2호선으로 갈아타고 길고 긴 천사대교를 건너면 암태도. 기동삼거리(암태면 기동리)에서 좌회전하여 805번 지방도를 타면 팔금도, 팔금도 끄트머리에서 ‘신안1교’를 건너면 안좌도에 이른다. 안좌중학교를 지나자마자 만나는 삼거리에서 우회전, 첫 번째 만나는 삼거리에서는 좌회전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두리선착장 근처에 조성된 널따란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퍼플섬 트레킹의 들·날머리인데 차에서 내리자 퍼플나라에 들어온 착각에 빠진다. 퍼플교 입구까지 이어지는 보행도로도 마을을 소개하는 안내판도 모두 보라색이기 때문이다.

▼ 우리 부부처럼 산까지 올라보려는 사람들을 위해 등산로가 잘 나타나 있는 지도를 첨부해봤다. 새로 놓인 다리. 즉 단도(매표소)와 반월선착장을 잇는 ‘문브릿지’가 빠져있지만 등산로를 찾기에는 이만한 게 없어보여서이다.

▼ 관광안내소 부근의 조형물에서 ‘보랏빛(purple) 다리’와 ‘퍼플섬’이 있기까지의 과정을 엿볼 수 있었다. 박지도와 반월도를 한꺼번에 나타내려는 듯, 반으로 자른 박의 위에 반달을 얹고 그간의 추진과정을 적었다. 얘기는 평생을 박지도에서 살아온 김애금 할머니의 ‘두 발로 걸어서 육지로 나가고 싶다’는 소망에서 시작된다. 사연을 접한 신안군에서 안좌도의 두리선착장과 박지도, 박지도와 반월도를 잇는 총 연장 1.46㎞의 나무다리를 놓았다는 것이다. 지자체와 주민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특색 있는 섬을 만들기 위해 머리를 맞댔고, 당시 섬에 지천으로 피어있던 왕도라지꽃과 꿀풀꽃 등의 자연환경을 살려 섬 전체를 보라색으로 가꾸기 시작했단다.

▼ 바닥에 그려놓은 보라색 선을 따라 바닷가에 이르자 ‘신안갯벌 도립공원’이란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맞다. 이곳 안좌면. 아니 신안군의 갯벌은 지난 달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홈페이지에까지 소개되었을 정도로 유명한 갯벌이다. ‘한국 갯벌은 아주 생산적인 에코시스템’이라며 미네랄이 풍부한 갯벌에 생존하는 미생물들이 해양을 정화하여 많은 철새들의 중요한 중간 기착지가 된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신안 천일염이 강한 바람과 태양으로 만들어진다’며 천일염에 많은 양의 수분, 칼슘, 칼륨, 마그네슘 등 미네랄이 풍부하다는 호평도 덧붙였다.

▼ 보라색 선은 두리마을 앞 바다에 있는 꼬맹이 섬 ‘단도’까지 이어진다. 2020년 이곳 단도와 반월도를 잇는 ‘문 브릿지((Moon Bridge)’를 놓으면서 이곳에다 매표소를 설치했기 때문이다. 단도와 본섬을 방파제로 연결시켰음은 물론이다. 참! 퍼플섬을 탐방할 때 모자와 선글라스는 필수다. 퍼플교와 해안산책로 등 탐방로에 햇빛을 피할만한 그늘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친절하게도 매표소에서 햇볕을 가릴 수 있는 보랏빛 우산을 빌려 주니 말이다. 팁 하나 더. 보라색 옷이나 모자, 가방, 스카프 또는 머그컵을 소지한 사람은 입장료(3천원)를 면제 받는다. 무료입장 여부를 정하는 보랏빛 물건에 대한 판단은 표를 파는 이의 재량이란다.

▼ 자 이젠 퍼플섬으로 들어가 보자. 먼저 들러볼 섬은 반월도. 안좌면의 단도와 반월도를 잇는 ‘문 브릿지’를 건너면 된다. 이 다리는 ‘퍼플교’로 통하는 세 개의 보랏빛 다리 가운데 맨 마지막으로 놓였다. 총연장은 416m. PE부잔교(313m)에다 콘크리트 부잔교(2기, 20m)와 소형어선 통행을 위한 해상교량(63m)이 복합된 국내 유일한 ‘해상 보행교’이다.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부잔교(浮棧橋)란 수위에 따라 위아래로 자유롭게 움직이는 다리를 말한다.

▼ 다리 중간에는 쉼터도 만들어 놓았다. ‘느림보의 미학’이랄까? 쉬엄쉬엄 걸으며 주변 경관을 하나도 놓치지 말고 가슴에 담아가라는 배려일 것이다. 그런데 앉아보면 미세한 출렁거림이 느껴진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안전이 보장되는 시설이니 그저 짜릿한 쾌감이나 즐기면 될 일이다.

▼ 테이블에 앉으면 또 다른 퍼플교인 ‘소망의 다리’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반월도와 박지도를 잇는 다리인데, 저 다리를 배경삼아 사진을 찍을 경우 인생샷을 건지는 행운이 주어지기도 한다. 아니 퍼플교는 어딜 가더라도 인생 사진을 찍을 수 있다. 푸른 바다 위에 놓인 보라색 다리와 그 위의 파란 하늘이 동화 속 세상처럼 신비롭기 때문이다.

▼ 소형어선의 통행을 위해 만들어놓은 ‘해상교량’은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항상 붐빈다. 보랏빛에 더해 입체감까지 주어지니 단체사진 찍기에 저만한 곳도 없겠다. 참! ‘문 브릿지’는 평상시에는 해상보행교이다. 하지만 큼지막한 선박이라도 지나갈라치면 다리가 열리는 장관을 연출한단다. 그렇다고 아무 때나 열리지는 않으니 때를 잘 만나야만 그런 이색적인 장면을 눈에 담을 수 있을 것이다.

▼ 출렁다리를 건너면 ‘반월도 선착장’. 이정표 역할까지 겸하고 있는 커다란 표지석이 길손을 반긴다. 반월도(半月島)는 섬의 형태가 사방 어느 곳에서 보더라도 반달 모양으로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런 반월도에는 두 개의 마을이 있다. 선착장이 있는 이곳이 ‘토촌마을’. 또 다른 마을인 ‘반월마을(안마을)’은 해안도로를 따라 2㎞쯤 걸으면 만날 수 있다.

▼ 신안군의 브랜드인 ‘천사 섬(1004)’ 조형물도 보인다. 맞다. 이곳 신안군은 섬을 무려 1,004개나 보유하고 있단다. ’섬 마케팅‘으로 관광자원화 할 정도이니 오죽하겠는가. 참고로 해양수산부는 2015년 기준 우리나라 섬의 숫자를 3,358개(유인도 482개, 무인도 2,876개)라고 발표한바 있다. 그중 전라남도는 무려 65%인 2,165개의 섬을 보유하고 있다. 그렇다면 전라남도 섬의 절반가량이 신안군 소속인 셈이다.

▼ 섬에 들어서자 보랏빛 세상이 펼쳐진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강렬한 보랏빛인 것이다. ‘토촌마을’의 지붕은 물론이고 도로와 자동차, 화장실, 안내표지, 심지어 쓰레기수거함까지 온통 보라색으로 물들었다. 하긴 이 정도는 되어야 ‘하늘에서 내려다 본 세상은 온통 보랏빛 물결’이더라는 기사를 올릴 수 있지 않겠는가.

▼ 보랏빛의 정점은 ‘재활용품 수거함’이 찍고 있었다. 리사이클(recycle)의 터닝 포인트까지 보랏빛으로 물들었으니 더 이상 할 말이 어디 있겠는가.

▼ 바닷가를 따라 내놓은 해안산책로를 따라 어깨산의 들머리가 있는 ‘마을카페’로 향한다. 산책로의 주변은 꽃밭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라벤더와 루드비키아, 접시꽃, 아스타국화, 자엽안개나무, 팥꽃나무 등 보랏빛의 꽃을 피우는 꽃나무들을 심었다.

▼ 화사하지는 않지만 보랏빛 꽃망울을 열고 있는 나무가 있어 카메라에 담아봤다. ‘우애’라는 꽃말을 갖고 있는 라일락인 것 같은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 보랏빛 꽃밭을 기웃거리며 잠시 걷자 Purple Island ‘반월도 카페’가 잠시 쉬어가라며 손짓한다. 맛있는 커피와 간식을 사 먹을 수 있는 카페(현재는 양심 무인카페 운영 중)로 마을 주민이 운영하고 있다는데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아무튼 그 옆에는 보라색 공중전화 부스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네모난 공중전화 대신 자그마한 벽걸이 다이얼 전화가 걸려 있어 이국적이란 느낌이 들었다.

▼ ‘반월도 카페’로 다가가자 거대한 보라색 반달이 반긴다. 어린 왕자와 사막여우가 보라색 반달 위에 앉아 건너편 박지도를 바라보고 있는 조형물이다. 이곳은 소문난 포토죤이기도 하다. 차례를 기다리는 줄이 제법 기니 눈치껏 찍고 빨리 자리를 비워주는 게 좋다.

▼ 반월도와 박지도는 자전거를 타고 섬을 돌아 볼 수도 있다. 아니 자전거 이용을 적극 권해본다. 박지도와 반월도의 둘레길이 각각 4.2km, 5.7km나 되므로 하루 만에 두 섬을 걸어서 구경하는 게 힘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요금은 1시간 당 5천원(청소년 3천원). 자전거 대여소에서 빌리면 된다.

▼ 어깨산 등산로는 ‘마을카페’와 ‘자전거대여소’ 사이에 있다. 들머리에 이정표(딸당 0.5㎞, 어깨산 정상 0.9㎞/ 박지도 1.5㎞)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정표에는 ‘대덕산(큰재)’란 지명까지 적혀있었다. 봉우리 따먹기나 하는 사람들이 찾는 봉우리인데 1.3k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단다.

▼ 들머리에는 어깨산등산로 안내판도 세워놓았다. 이곳을 출발해 정상과 절골재를 거친 다음 안마을로 내려오는 1.8㎞ 길이의 코스가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그런데 반월도의 또 다른 산봉우리인 ‘대덕산’은 누락되어 있다. 일부러 찾아볼 필요까지는 없다는 신호가 아닐까 싶다.

▼ 50m쯤 들어가 산자락에 부딪힌 등산로는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꺾이는 지점에 세워진 이정표를 참조하면 된다. 이어서 50m 남짓 더 가자 이번에는 길이 둘로 나뉜다. 그런데 왼편(첨부된 사진의 무덤 방향). 그러니까 산자락으로 파고드는 길이 더 또렷하니 문제다. 옳다구나 하고 산자락으로 들어선 우리 부부는 죽도록 고생만 하고 되돌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희미해지더니 나중에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 삼거리로 되돌아 나오니 샛별산악회(광주광역시 소재)에서 매달아놓은 리본에 ‘등산로 없음’이란 글씨가 보인다. 아까는 왜 눈에 띄지 않았는지 모른다. 이후부터는 한눈팔지 않고 널찍한 임도를 따르기로 했다.

▼ 산을 오르는데 오른편으로 시야가 열리면서 이색적인 풍광이 눈앞에 펼쳐진다. 보라색으로 물든 아름다운 다리가 바다 위에 놓여있는가 하면, 주민들이 사는 동네 지붕도 하나같이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 등산로는 한마디로 잘 다듬어져 있다. 널찍한데다 조금이라도 가파르다싶으면 어김없이 자연석으로 계단을 쌓았다. 그렇게 0.5㎞쯤 오르자 ‘딸당’이다. 반월도 할아버지당의 딸을 모신 제당이라는데 기품 있는 동백나무 두 그루 앞에 제단이 있다.

▼ 몇 걸음 더 걷자 이번에는 ‘돌탑공원’이 나온다. 이 돌탑들은 반월도 출신 장상순(69세) 님께서 2016년 봄부터 건강을 기원하며 틈틈이 시간을 내어 정성스레 쌓아 올린 것들이라고 한다.

▼ 정상에 가까워졌는데도 길은 여전히 널따랗다. 아니 오히려 더 넓어진 듯하다. 그만큼 정성들여 가꾼 결과가 아닐까 싶다.

▼ 돌탑공원에서 10분 남짓 더 오르면 반월도 최고봉인 ‘어깨산(210m)’의 정상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40분. 트레킹을 시작한지는 1시간 10분 만이다. 정상은 헬기장처럼 넓다. 쉬어가라는 듯 벤치도 놓여있다. 하지만 정상석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 흔한 선답자의 ‘표지기’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저 ‘어깨산 정상’이라는 이름표를 단 이정표가 이 모든 것을 대신할 뿐이다. 참고로 어깨산이란 지명은 산의 지형이 사람의 어깨와 같이 생겼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한자어로는 견산(肩山)이 된다.

▼ 반대편 급경사지대를 잠시 내려가자 만호정(萬戶亭)에 닿는다. 봉수대가 들어앉기 딱 좋은 곳에 우뚝 솟은 팔각정이다.

▼ 정자의 옆에는 수직의 바위절벽인 ‘만호바위(萬戶岩)’가 있다. 바위에서 바라보면 일만 가구가 보인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단다. 그만큼 시야가 넓게 터진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난간으로 나가자 다도해의 풍광이 널찍하게 펼쳐진다. 이제는 본섬(안좌도)이 되어버린 ‘우목도’는 물론이고. 도초도와 비금도, 사치도 수치도 등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그렇다면 저 섬들에 일만 호가 살고 있다는 얘기일까?

▼ 이후의 산길은 고운 편이다. 널찍한 것은 기본. 거기다 경사까지 없으니 콧노래라도 부르기에 딱 좋은 구간이라 하겠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걷자 울창한 대나무 숲속에 감추어진 ‘절골재(이정표 #1 : 안마을← 0.5㎞/ 달바위→/ 만호바위↓ 0.4㎞ 이정표 #2 : 대덕산→)’가 나온다. 삼거리인 이곳에서 안마을은 왼편이다. 오른편은 물론 대덕산. 30분 정도 크게 한 바퀴 도는 원점회귀 코스다.

▼ 봉 따먹기에 관심이 없는 우리 부부의 발걸음은 안마을로 향했다. 이어서 원시림을 연상시키는 울창한 숲길을 통과하자 널찍한 바다가 눈앞에 펼쳐진다. 정상에서 내려선지 35분 만에 안마을에 이른 것이다. 마을 앞바다에 떠 있는 작고 귀여운 섬은 ‘노루섬’이라고 한다. 한자로 장도(獐島)로 표기되기도 한다.

▼ ‘반월 새벽교회’ 앞에서 길은 둘로 나뉜다. 양쪽 모두 섬 일주도로지만 우리는 조금이라도 덜 걸어도 되는 왼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몇 걸음 더 걷지 않아 ‘당숲’에 이르렀다. 주민들이 마을의 평안과 풍어를 기원하던 숲이다. 참! 반대편으로 가면 ‘반월마을’이 나오는데, 섬 주민들이 ‘마을 식당’을 운영한다니 시간이 나면 한번쯤 들러볼 일이다. 마을에서 나는 재료로 밥상을 차리는데 제철 재료로 만들기 때문에 건강하면서도 맛있는 음식을 맛볼 수 있단다.

▼ 도로변에 있는 이 ‘당숲’은 제14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공존상’을 받기도 했다. 300년 된 팽나무와 동백, 후박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는데, 매년 정월 대보름날이면 마을 주민들이 이곳에 모여 마을의 평안과 풍어를 기원하며 제를 지낸다 한다.

▼ 반월마을은 ‘인동 장씨(仁同 張氏)’가 모여 사는 집성촌이라고 한다. 시조 금용 할아버지로부터 시작된 인동 장씨의 반월도 정착은 400여 년 전 경북 인동에서 금용(金用) 시조의 23대손으로 태어난 할아버지의 입주로 시작됐다고 전해진다. 그래선지 당숲 근처에 그네들의 제각(祭閣)이 떡하니 들어서 있었다. 마을 뒷산이 그네들의 세장산(世葬山)임을 알리는 커다란 빗돌도 세 개나 세워놓았다.

▼ 이제 탐방로는 해안산책로를 따른다. 이곳 반월도나 박지도는 섬 둘레에 아름다운 바다를 낀 해안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어 걷거나 또는 자전거를 빌려서 돌아볼 수 있다. 또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산책로를 따라 산행을 즐길 수도 있다.

▼ 다음은 ‘소망의 다리’를 건너볼 차례이다. 아까 어깨산을 오를 때 들머리로 삼았던 ‘마을카페’ 앞에서 시작되는데, 평생을 박지마을에서 살아온 김매금 할머니의 ‘걸어서 섬을 건너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담아 만든 다리라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반월도와 박지도를 잇는 이 나무다리의 길이는 915m. 물론 차량 통행이 불가능한 보행자 전용의 다리이다.

▼ 다리가 길어서인지 중간 두어 곳에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아니 ‘슬로시티’는 아니지만 너무 서둘지 말고 쉬엄쉬엄 걸으면서 아름다운 주변 경관을 가슴에 담아보라는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참! 다리가 처음 개통되었을 때만해도 이 다리는 디자인이 다소 밋밋했다고 한다. 하지만 컬러 마케팅을 거쳐 보라색 옷으로 갈아입은 후로는 반월도·박지도의 랜드 마크가 됐다.

▼ 다리를 건너는데 물 빠진 갯벌에 ‘노두길’ 하나가 살포기 그 자태를 드러낸다. 애틋한 사랑 얘기가 스며있는 ‘중(스님) 노두길’이다. 옛날 박지도 산속에 조그마한 암자가 있었고 반월도 뒷산에도 아담한 암자가 하나 있었다고 한다. 박지도 암자에는 젊은 비구니 스님 한 분이, 반월도 암자에는 비구 스님 한 분이 살았다. 얼굴을 본적은 없지만 서로를 그리워하던 스님과 비구니는 썰물 때면 돌무더기를 바다에 쌓아 징검다리를 만들면서 두 섬을 이으려 했다. 수년이 지난 후 마침내 두 사람은 바다 한 가운데 돌무더기에서 서로 만나 얼싸 안았지만 그만 밀물이 들어와 두 사람을 삼켜버리고 말았단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그들이 쌓아올린 노둣길은 아직까지 남아 슬픈 사랑의 얘기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이번에는 아까 반월도로 건너올 때 이용했던 ‘문 브릿지’가 성큼 다가온다. 수위에 따라 위아래로 움직이는 PE부잔교이나 해상교량을 만들어 놓아 소형 어선이 지나다닐 수도 있도록 했다.

▼ 박지도에 가까워지자 선착장 근처의 편의시설들이 눈에 들어온다. 화장실 말고도 술까지 파는 휴게실이 들어서 있어 나처럼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쉬어가기에 딱 좋은 곳이다.

▼ 생각보다 긴 다리를 건너 두 번째 섬인 ‘박지도(朴只島)’에 다다랐다. 박지도는 박 씨가 처음 들어와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1700년께 ‘김해 김씨’가 이주 정착해 마을이 형성됐다는 구전도 전해진다. 섬의 지형이 박 모양이라 하여 ‘바기섬’ 또는 ‘배기섬’이 되었다는 설에 믿음이 가는 이유이다. ‘범죄 없는 마을’임을 자랑하는 빗돌도 보인다. 하긴 도망갈 수도 없는 곳에서 죄를 지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 선착장에 세워놓은 커다란 조형물이 시선을 끈다. 박지도를 상징하는 조형물인데, 반으로 갈라놓은 조롱박에서 샘물이 흘러나오는 모양새다. 이 조형물 앞은 관광객들로 항상 붐빈다. 퍼플섬을 찾은 탐방객들이 인증샷을 찍는 필수 코스로 통하기 때문이다.

▼ 섬은 걷지 않고도 둘러볼 수 있다. 3천원만 지불하면 전동 셔틀이 섬을 한 바퀴 돌아준다. 친환경 전기차를 타고서 섬 이곳저곳의 풍경과 섬사람의 생활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은 섬 여행의 또 다른 재미가 분명하다.

▼ 박지도에서의 첫 일정은 당산(堂山)을 오르는 것이다. 등산로는 마을표지석 뒤쪽에서 열린다.

▼ 들머리에 섬길(둘레길) 및 산책로를 그려 넣은 ‘안내판’이 세워져있으니 산을 오르기 전에 한번쯤 꼭 살펴볼 일이다. 당산 등산로(산이 낮아서인지 산책로라는 표현을 쓰고 있었다)에다 둘레길의 절반씩을 끼워 넣은 2개의 코스에다 섬을 일주하는 코스 등 3개의 코스로 나누었다.

▼ 왼편은 2.1㎞ 길이의 ‘박지도 둘레길이다. 이따가 산행을 마치고 나서 저 길을 따라 이곳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 산으로 오르다가 뒤돌아본 풍경은 가히 일품이다. 박지도에서 안좌도의 두리매표소를 잇는 퍼플교와 바다의 풍경이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 왼편으로는 또 다른 퍼플교인 박지도와 반월도를 잇는 다리가 길게 놓여있다. 조형미를 가미한 오른편 다리와는 달리 일직선으로 뻗어나가는데, 끝이 보이지 않는 탓에 더 길게 느껴진다.

▼ 잠시 후 산책로는 울창한 숲속으로 파고든다. 원시의 숲을 걷는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숲이 우거져 있다. 안내판은 이 나무들을 ‘사스피레(구정풀)’로 적고 있었다. 보통 꽃다발의 바닥나무로 이용되는데 마을에서 보호수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단다.

▼ 산행을 시작한지 15분 만에 박지당산(130m)의 정상에 올라섰다. 산꼭대기에 당(堂)이 있었다고 해서 ‘당산’이란 이름의 붙여졌는데, 주민들은 매년 정월 대보름날 마을의 안녕과 질병퇴치를 위해 흠 없는 송아지의 각을 떠서 당제를 지내왔다고 한다. 외지의 등산객들이 다른 곳의 당산과 구분하기 위해 섬의 이름을 앞에 붙여 ‘박지당산’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이 이젠 본명으로 굳어져버렸다.

▼ 정상은 자그마한 언덕 같은 암반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반월도의 어깨산을 바라보고 앉아 기(氣)를 받으면 만사형통 한다는 ‘기바위’이다. 그렇다면 사실 여부는 제켜놓고라도 일단은 앉고 볼 일이다. 설사 기를 못 받는다고 뭐가 문제겠는가. 잠시나마 쉬었으니 하산길이 편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 올라온 반대편. 그러니까 ‘900년의 우물(우실샘)’ 이정표를 따라 5분 정도 내려가면 울창한 상록수 숲속에 들어앉은 우물을 만날 수 있다. 900년이나 묵었다는 ‘우실샘’인데, 세월의 사실여부는 확인할 수 없고 그저 크기가 약수터 수준이라는 정도. 바가지까지 놓여있지만 고인 물이라서 썩 내키지는 않는다. 참! 이정표는 아직도 ‘우실샘’이라 적고 있었다. 위에 있는 암자터와 연계해 ‘사랑샘’으로 이름을 바꾼다는 기사가 있었는데, 아직도 계획단계에 머물고 있는 모양이다. 젊은 연인들이 선한 천사의 마음으로 다리를 건너와 중노두를 함께 걸으면서 사랑을 확인해보는 일정. 이 얼마나 가슴 설레는 콘셉트인가. 하루빨리 계획대로 되었으면 좋겠다.

▼ 정상으로 되돌아가 ‘박지당’으로 향한다. 갈림길(이정표 : 정상← 70m/ 박지당↑ 180m/ 우실샘↓ 150m)에 ‘당산 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니 참조하면 되겠다. 지도를 보면 ‘암자 터’란 지명이 눈에 띈다. 옛날 박지도와 반월도의 사이에 노두길을 놓았다는 스님. 즉 애틋한 사람의 전설을 만들었던 비구니 스님이 머물던 암자의 터일지도 모르겠다.

▼ 몇 걸음 더 걷자 또 다른 삼거리(이정표 : 해안산책로↑ 0.9㎞/ 박지당← 50m/ 우실샘↓ 350m). 고민할 필요도 없이 왼편으로 들어서자 빙 둘러서 돌담을 쌓아놓은 널따란 공터가 나온다. 안내판은 이곳을 ‘박지제당(朴只祭堂)’으로 적고 있었다. 매년 정월 대보름날 마을의 안녕을 위해 당제를 지내오던 곳이란다. 하지만 지금은 중단되었다는 사실도 적었다.

▼ 박지마을로 내려가는 길 또한 울창한 상록수림 지대다. 등산로를 정비하면서 심은 듯한 굵지 않은 측백나무 숲길도 지난다. 그렇게 10분쯤 내려서자 ‘바람의 언덕’이 반긴다. 바다 쪽으로 시야가 툭 터지는 언덕인지라 바람이 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지명의 유래가 아닐까 싶다.

▼ 언덕의 꼭대기에는 ‘바람의 언덕’이란 조형물과 함께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사진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예쁜 보랏빛의 공중전화 박스도 세워져 있었다. 당장이라도 누군가에게 전화를 해야만 할 것 같은 분위기이다.

▼ 언덕 너머에는 박지마을이 들어앉았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반월도와 박지도의 주민들은 각기 ‘마을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특히 박지마을은 ‘마을호텔(성수기 4인실 6만원, 8인실 12만원)’까지 준비되어 있다니 참조하면 되겠다.

▼ 바람의 언덕에는 ‘라벤더 정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상당히 큰 규모의 라벤더 꽃밭이다.

▼ 그러나 퍼플섬에 어울리는 보랏빛 꽃 라벤더는 구경할 수 없었다. 6~7월이나 되어야 꽃을 피우기 때문에 철모르고 피어난 꽃들이 듬성듬성 보일 따름이다. ‘풍부한 향기’라는 꽃말처럼 향수나 화장품의 재료로 사용될 정도로 향기가 좋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참! 라벤더(lavender)에는 ‘정절, 기대, 대답해주세요’와 같은 또 다른 꽃말도 있다는 걸 기억해 두자.

▼ 자그만 웅덩이까지도 관광 자원화 했다. 이름 하여 ‘생태 둠벙’. 농사를 짓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든 웅덩이란 얘기일 것이다. 이게 또 다양한 생물의 터전이 된다는 의미에서 ‘생태’라는 단어를 덧붙였을 게고 말이다.

▼ 박지마을에서 퍼플교로 가는 길은 두 갈래다. 해안산책로와 숲 산책로 어느 곳을 택하든 1.4㎞ 거리다. 일단 해안산책로를 따라 걷고 본다. 이때 길 오른편으로 광활한 갯벌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그런데 아까 반월도에 들어올 때 보다 바닷물이 훨씬 더 빠져나갔다. 밀물 때 가득 차있던 바다가 썰물 때가 되자 통째로 사라지면서 속살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게 꼭 인생을 보는 것 같다. 우리네 삶도 저렇게 비움과 채움이 반복되는 과정이 아니겠는가.

▼ 잠시 후 ‘숲 산책로’로 옮겨 걸었다. 정성들여 닦아놓은 길이 고운데다가 햇빛까지 가려주는 숲길을 놓아두고 일부러 해안산책로를 걸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 숲 산책로 중간에서 ‘혹이 붙은 이당나무(예덕나무)’를 만났다. 좀 색다른 모습의 꽃을 피우는 낙엽소교목인데, 나무줄기가 온통 혹으로 뒤덮여 있는 것이다.

▼ 박지도까지 모두 둘러봤다면 이젠 출발지인 안좌도(두리선착장)로 되돌아갈 차례이다. 이때도 역시 퍼플교를 이용하면 된다. 두리마을과 박지도를 잇는 이 다리의 길이는 547m. 아까 건너왔던 다리. 즉 반월도를 잇는 또 다른 퍼플교와 함께 2008년에 완공됐다.

▼ 이 다리는 아까 박지도로 들어올 때 건너왔던 다리와는 또 다른 외모를 지냈다. 다리 중간에 너른 공간을 만들어 쉼터를 배치했던 아까와는 달리 이번에는 양 옆으로 길게 다리를 놓은 다음 그 끄트머리에다 쉼터를 만들어놓은 것이다. 이런 곳에서는 그냥 앞만 보고 내달릴 일은 아니다. 쉬엄쉬엄 걷다가 목교 아래도 한번쯤 내려다보라는 얘기이다. 다리 아래로 펼쳐진 비옥한 갯벌에서 맘 놓고 뛰어다니는 짱뚱어와 안좌도의 특산물이라는 감태를 눈에 담을 수 있을 것이다.

▼ 어떤 이들은 퍼플교를 ‘천사의 다리’라 부르기도 한다. 천사의 마음으로 이 다리를 건너란 뜻도 되고 이 다리를 건너면 천사가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된다면서 말이다.

▼ 다리 건너 ‘두리매표소’에는 퍼플교의 역사를 알려주는 공간이 만들어져 있었다. 안좌·반월·박지도의 역사와 함께 퍼플교의 설치 배경을 적었다. 또한 과거와 현재의 사진을 나란히 게시함으로써 눈으로 직접 대비해 볼 수 있도록 했다. 참! 관광객들 사이에는 보라색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기념품 가게를 겸한 매표소에서 파는 상품 가운데 가장 인기가 높은 상품이 자수를 넣은 보라색 티셔츠(2만원)라더니 사실이었던가 보다.

 

애도(艾島, 쑥섬)

 

여행일 : ‘21. 4. 19(월)

소재지 : 전라남도 고흥군 봉래면 사양리

트레킹 코스 : 선착장→갈매기카페→난대원시림→환희의 언덕→야생화정원→여자산포바위→신선대→성화등대→동백길→사랑의 돌담길→선착장(소요시간 : 1시간 30분)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고흥반도 최남단의 외나로도항 선착장 건너편으로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이는 자그마한 섬(면적이 0.32㎢로 봉래면을 구성하는 6개의 유인도 가운데 가장 작은 섬이란다)이다. 애도(艾島)는 쑥이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그래선지 섬사람들은 행정명칭인 애도(艾島)보다는 ‘쑥섬’이라는 옛 이름으로 불리기를 원한단다. 애도의 ‘애’자가 ‘쑥 애(艾)’이니 그게 그거겠지만 무릇 인간에겐 수구초심(首丘初心)의 마음이 있다지 않는가. 아무튼 사는 집보다 집을 헐어낸 공터가 더 많은 이 한적한 섬이 최근 입소문을 탔다. 수백 년간 사람 발길이 닿지 않은 ‘난대원시림’과 수백 종의 꽃들이 피어나는 ‘비밀의 하늘정원’. 그리고 다도해의 아름다운 풍광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특히 올해에는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2년마다 엄선하는 ‘2021~2022 한국관광 100선’에 선정되기도 했다.

 

▼ 찾아오는 방법

쑥섬(이후 애도 대신 쑥섬으로 통일한다)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일단 ‘나로도 연안여객선터미널(고흥군 봉래면 신금리)’까지 와야만 한다. 애도를 왕복하는 배가 이곳 ‘나로도항’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남해고속도로(영암-순천) 고흥 IC에서 내려와 국도 15호선을 타고 내려오면 내나로도를 거쳐 이곳 외나로도에 이르게 된다. 참! 작년 2월 말엔가 여수와 고흥을 잇는 연륙·연도교 4개가 한꺼번에 개통된 뒤로는 화양반도를 거쳐서 이곳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데 산악회 버스는 옛 노선을 끝까지 고집하고 있었다.

▼ 쑥섬 탐방은 의외로 간단하다. 선착장에 세워져 있는 지도를 핸드폰에 저장한 후, 지도에 표기된 일련번호대로 걷기만 하면 된다. 두어 곳에서 단축코스가 나오나 이정표가 큼지막하게 세워져 있으니 헷갈릴 일도 없다.

▼ 승선권을 구입했다고 다가 아니다. 배를 타기 전 간단하게나마 섬에 대한 안내가 선행된다. 눈과 가슴에 담아둘만한 명소들을 코스를 따라가며 설명해주는데, 마스크 쓰기나 주민들과의 접촉 삼가기 등 섬에서 주의해야 할 사항들도 살짝 곁들인다. 참! 배낭의 반입을 금지하는 이유도 설명하고 있었다. 음주가무에 쓰레기 투기까지 만악(萬惡)의 근원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서란다. 내가 생각해도 잘 한 일이다. 하나 더. 5000원의 입장료도 받고 있었다. 쑥섬의 탐방로를 가꾸고, 정원을 다듬는 등 마을을 가꾸는 비용에 쓰인단다.

▼ 이곳 나로도항과 쑥섬을 오가는 배는 이름까지도 ‘쑥섬호’이다. 정원이 12명이라는 배는 선실과 선미에 자리가 만들어져 있었다. 하지만 승무원들이 섬으로 들어갈 때는 선실, 반면에 나올 때는 선미만 앉을 수 있도록 통제하고 있었다.

▼ 배를 타러 나가는데 건너편에 있는 쑥섬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그런데 0.326㎢ 밖에 되지 않는 자그만 섬이 카메라의 앵글에 집어넣을 수조차 없을 정도로 커져있다. 그 정도로 가깝다는 얘기이다. 시셋말로 멀리뛰기 한번이면 섬으로 들어갈 수도 있겠다.

▼ 나로도항에서 배를 탔다싶은데 다 왔으니 어서 내리란다. 그렇게 5분이 채 걸리지 않아 꼬맹이 어선 두세 척만이 한가로운 쑥섬에 배가 닿았다. 선착장은 남방파제 끝에 만들어놓은 부잔교(浮棧橋)다. 조수간만의 차가 그만큼 크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건 그렇고 한가롭기 짝이 없는 저 포구도 크고 작은 어선들로 붐비던 때가 있었다고 한다. 이 배들이 서남해안을 누비며 삼치, 민어 등의 고기를 잡아 뭍사람조차 부러워할 지경이었단다.

▼ 배에서 내리자 마을 어귀의 ‘갈까’가 반긴다. 갈까는 갈매기카페의 줄임말. 원통형의 이층 건물에 지붕을 갈매기 조형물로 장식했다. 마을 주민들이 운영하는 무인 카페인데 냉장고의 음료수를 꺼내 마시고 대금은 돈통에 넣으면 된다. 그 옆의 또 다른 건물은 로컬 푸드 판매장인 ‘쑥섬’이다.

▼ 선착장을 빠져나오는데 ‘왔냐~옹’이라는 고양이 조형물이 반긴다. 쑥섬의 마스코트가 고양이인 모양이다. 맞다. 마을에는 현재 17가구 26명의 주민들과 40여 마리의 고양이가 공존하고 있다한다. 그러니 주민의 수보다 더 많은 고양이가 섬을 대표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노릇 않겠는가. ‘고양이 섬’이라는 쑥섬의 애칭이 이를 증명한다 하겠다. 마을에 사는 ‘고양이 할머니’도 유명하다. 이 섬의 길거리를 먹이를 찾아 헤매는 고양이들에게 손수 먹이를 주다보니 그런 애칭을 얻게 되었단다.

▼ 본격적인 탐방은 ‘갈까’ 앞에서 시작된다. 카페 앞에 탐방로 입구임을 알리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90m만 더 가면 멋진 숲이 있고, 900m를 더 가면 별정원이 나온다며 거리까지 적었다. 그게 다가 아니다. 카페 안에 있는 화장실을 꼭 들른 다음 트레킹을 시작하라는 것. 탐방로에는 화장실이 없으니 허투루 여기지 말고 꼭 들렀다 가자.

▼ ‘100m만 가면 되는 길’이라는 또 다른 이정표를 믿고 가벼운 마음으로 트레킹에 나서본다. 초입의 계단. ‘헐떡길’이 상당히 가팔라 보이지만 까짓 100m쯤이야 못 참겠는가. 그렇게 잠시 올라서자 쑥섬의 속살인 원시림이 펼쳐진다. 덩굴들이 우거진 가운데 태양을 보고 싶은 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경쟁적으로 솟아오르면서 숲의 하늘을 모두 가렸다. 대부분 서어나무, 후박나무, 육박나무 등 숲이 가장 안정화된 곳에서 자란다는 나무들이다. 안내판에 나타난 이름은 ‘난대 원시림’. 보존 가치를 인정받아 제17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누리상’을 받기도 했단다.

▼ 숲으로 들어가자 경고판이 먼저 반긴다. 쑥섬 주민들이 신성시하는 곳이니 소중하게 여기고 아껴주란다. 마을의 발전을 위해 별수 없이 개방했으나 400년 동안이나 비원(祕園)으로 보존해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숨은 그림 찾기’까지 하지 말라는 얘기는 아니다. 나무가 하도 오래 묵다보니 기괴한 문양들을 만들어놓았는데 이걸 찾는 재미가 제법 쏠쏠한 것이다. 옥황상제의 심부름으로 하늘에서 내려온 말(위의 그림), 어머니의 젖가슴을 닮은 ‘당할머니 나무’, 옥황상제의 귀염둥이라는 ‘코알라(아래 사진)’ 등 그 모양새도 각양각색이다.

▼ ‘총리나무’도 만날 수 있었다. 쑥섬에 들른 이낙연 전남도지사와 함께 사진을 찍은 인연을 갖고 있는 엄청나게 굵은 ‘푸조나무’이다. 기념사진의 배경이 된지 2개월이 채 되지 않아 이낙연씨가 국무총리가 되었다면서 뭔가 바라는 게 있으면 빌어보라고 권한다. 400년 묵은 당숲에 새로운 당나무(堂木)가 탄생한 셈이다.

▼ ‘난대 원시림’을 지나자 가파른 오르막길이 나타난다. 하지만 2~3층 높이의 돌계단만 오르면 끝나니 걱정할 일은 아니다.

▼ 계단의 끄트머리에서 포토죤을 만났다. 좌우가 바뀐 한반도 모형에다 피사체를 집어넣을 경우 인생샷 하나쯤은 너끈히 건질 수 있단다.

▼ 인생샷 얻기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따가운 눈초리는 기본.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포즈를 잡다가는 인생샷은커녕 보통의 사진 하나도 얻기 힘들다.

▼ 몇 걸음 더 걸으면 또 다른 포토죤이다. 이곳에서도 인생샷을 건질 수 있다고 했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만은 않았다. 구도를 채 잡지도 않았는데 서너 명이나 내 뒤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덕분에 안내판과는 전혀 다른 엉뚱한 사진이 나와 버렸다.

▼ 포토죤을 지나자 ‘환희의 언덕’이 그 자태를 드러낸다. 안내판은 ‘가슴이 뻥 뚫리시죠?’로 시작된다. 그만큼 조망이 좋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환희의 언덕은 탁 트인 바다와 멀리 보이는 섬들이 이루는 풍광에 자연스레 마음속 감탄이 나오는 곳이다.

▼ 해식애로 둘러싸인 작은 섬도 눈에 들어온다. 아까 배를 타고 들어오면서 보았던 꼬맹이 섬으로 본섬과는 방파제로 연결되어 있다. 쑥섬은 본섬과 저 무인도 등 두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안내판은 저 섬에서 ‘인어’와 ‘큰바위 얼굴’을 찾아보라는 숙제까지 던져준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그런 형상이 그려지지 않으니 문제다. 무학대사는 ‘시안견유시 불안견유불(豕眼見唯豕, 佛眼見唯佛)’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칠십 평생을 살아왔건만 아직도 내 수양은 멀었나 보다.

▼ 환희의 언덕이 자랑하는 조망도 살펴보자. 여기는 ‘다도해 해상국립공원’. ‘다도해’라는 이름에 걸맞게 수많은 섬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왼쪽 무리는 소거문도와 거문도, 손죽도. 가운데는 초도와 청산도이다.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더 많은 섬들이 눈에 들어온다. 시산도와 거금도, 소록도 등 큼지막한 섬들은 물론이고, 지죽도와 대염도, 석환도, 머구섬 등 꼬맹이 섬들이 널따란 바다를 점점이 수놓고 있다.

▼ ‘무덤이 아닙니다.’라고 적힌 안내판 하나가 눈길을 끈다. 사람이 죽으면 육지로 나가 화장시키는 게 기본. 횡사나 액사를 하면 초분을 만들었다가 좋은 날을 잡아서 섬 밖에다 미리 만들어놓은 선산으로 모시고 나간다고 한다. 이는 섬에다 무덤을 만들지 않기로 한 주민들의 약속이란다. 그나저나 이로 인해 개와 닭, 봉분(封墳)이 없는 ‘3무(無)의 섬’이라는 별칭까지 얻어냈으니 약속 이행이 또 하나의 관광자원이 된 셈이다.

▼ 섬의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은 ‘몬당길’이다. ‘만만하다’, ‘마땅하다’는 뜻의 전라도 사투리 ‘몬당하다’에서 나온 이름이라고 한다. 이 길은 또 ‘아버지의 길’이라는 애칭으로도 불리고 있었다. 쑥섬지기인 김상현씨의 아버지(김유만님)가 아들과 쑥섬 방문객들을 위해 계속해서 길을 가꾸어오고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 ‘몬당길’을 지나면 쑥섬의 절정인 ‘바다 위 비밀정원’에 이른다. 쑥섬 산책길을 조성한 김상현씨 부부가 특히 정성을 들인 곳으로, 1천600㎡ 정도의 평평한 분지에다 별정원(코티지정원)과 달정원, 태양정원 등 대한민국 최초의 우주발사체 나로호를 쏘아올린 지역답게 우주와 연관된 주제로 꾸며놓았다. 이밖에도 수국정원, 치유정원(허브정원) 등을 서브메뉴로 넣었다.

▼ 전라남도의 민간정원 제1호인 이곳은 쑥섬에서만 볼 수 있는 비경 중에 비경이다. 첫 번째 만남은 ‘별정원’. 380여 가지의 꽃들이 사계절 피고 지는 ‘코티지 정원(cottage garden)’으로 KBS-TV의 ‘인간극장 : 그 섬엔 비밀정원이 있다’와 EBS의 ‘한국기행’ 등 다수의 프로그램에 등장했던 곳이기도 하다.

▼ 파란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곳에 펼쳐진 야생화의 향연에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다. 사계절 내내 저런 풍경이 연출된다니 만일 무릉도원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이곳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비밀정원’이라는 은밀한 이름까지 붙여놓았다. 국내외를 불문하고 보기 드문 풍경이라면서 말이다.

▼ 고개를 돌리자 바다 건너에 있는 ‘나로도항’이 코앞으로 다가온다. 2㎞가 채 되지 않는 거리인데다 티 하나 없는 날씨까지 받쳐주니 손을 뻗으면 금방이라도 닿을 것 같다. 하나 더. 외나로도와 쑥섬 사이에 놓은 저 바다는 ‘봉호(蓬湖)’라 불리기도 한단다. 하도 잔잔하다보니 평온한 호수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 꽃밭에 만들어놓은 포토죤도 역시 고양이 차지였다. 하긴 고양이들이 주민들보다 더 많이 살고 있다고 해서 ‘고양이 섬’으로까지 불린다는데 오죽하겠는가.

▼ 트레킹은 꽃구경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곳곳에 세워놓은 시판(詩板)의 시와 명언(名言)들을 읽어보는 재미도 제법 쏠쏠하다.

▼ 커다란 이정표가 눈길을 끌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힘이 부칠 경우 이곳에서 탈출할 수 있음을 알려주는 이정표인데, 이 정도면 초등학생들도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쉽게 찾아갈 수 있겠다.

▼ 쑥섬의 자랑거리는 뭐니 뭐니 해도 꽃밭이다. 380여 종의 다양한 꽃들이 사시사철 피고지면서 이곳을 찾는 방문자들에게 향기와 함께 아름다운 추억을 선사한다. 이 꽃밭들은 교사와 약사로 맺어진 김상현·고채훈 부부가 직접 연구하며 꽃씨를 심고 쑥섬에 맞는 꽃모종을 만들어서 가꾸어왔다고 한다. 이 프로젝트는 지난 2000년 ‘사회에 기여하는 삶을 살자’고 약속하고 쑥섬 가꾸기를 지상과제로 정하면서 시작됐단다.

▼ 별정원을 지나면 ‘문학정원&인연정원’이다. 섬이나 꽃 관련 작품 중 가장 인상적인 부분을 팻말에 담고 쑥섬을 좋아해 주는 사람들의 마음을 팻말에 담아서 만들어 가는 정원이라고 한다.

▼ 그래선지 ‘한 줄로 읽는 책’이란 이름표를 달고 있는 팻말들이 유난히도 많이 눈에 띄었다. 가슴에 담아둘만한 내용들이니 하나하나 읽어보면서 산책을 즐겨보라는 얘기일 것이다.

▼ ‘문학정원&인연정원’도 역시 꽃밭으로 이루어져 있다. 눈만 들면 사방이 온통 꽃으로 둘러싸이는 이유일 것이다. 맞다. 쑥섬의 정원은 이름도 생소한 다양한 꽃들이 1년 내내 피고지고를 반복한단다. 섬 밖에서는 결코 알 수 없는 비밀의 화원이 사방으로 트인 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아래 사진은 칡넝쿨을 제거해줬더니 이렇게 예쁜 석부작(石附作)으로 변했다고 자랑하는 팽나무이다.

▼ 정상으로 향한다. 능선을 따라 꾸민 듯 꾸미지 않은 평탄한 산책길이 이어진다. 나무 사이로 간간이 보이는 바다를 옆에 두고 햇살을 받으며 산책길을 걷는다.

▼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이제껏 보아왔던 풍광들이 한꺼번에 눈에 들어온다. 기화요초가 가득한 산상화원은 물론이고 다도해의 널따란 바다가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 ‘여자 산포바위’를 만났다. 쑥섬에서는 경치가 좋은 곳에서 놀거나 잠시 쉬는 것을 ‘산포’한다는 표현을 쓴단다. 그렇다면 이곳은 여자들이 명절에 음식을 가져와 가무를 즐기고 가정의 안녕을 기원했던 곳이 된다. 100m쯤 떨어진 곳에는 남자들이 놀던 ‘남자 산포바위’도 있었다. 이 섬에는 다양한 남녀 짝짓기놀이 문화가 전해져 내려오는데, 이곳은 짝짓기가 이루어지던 곳 가운데 하나였다고 한다. 각각의 지정된 장소(남·녀 산포바위)에서 놀던 남녀가 중간지점에서 만나 서로의 애틋한 마음을 전했다는 것이다.

▼ 남·녀 산포바위 사이. 아니 남자산포바위 근처에 세워놓은 앙증맞은 ‘정상표지판’이 보는 이들의 웃음을 자아내게 만든다. 쑥섬 정상의 높이는 고작 ‘83m’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에베레스트(8848m)와 백두산(2750m), 한라산(1950m) 등과 비교해도 별 차이가 없다며 너스레까지 떨고 있다.

▼ 이젠 또 다른 명소인 성화등대로 가볼 차례이다. 내려가는 도중 ‘인간극장에서 주인공이 빠진 곳’이라고 적힌 팻말이 눈에 띄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가슴이 아니라 눈에 담기조차 어색한 풍경일지라도 ‘스토리텔링’을 거치고 나면 이렇게 새로운 얘깃거리로 탈바꿈 될 수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 조금 더 걷자 와우형(臥牛形)이라는 쑥섬의 풍수를 알리는 안내판 하나가 얼굴을 내민다. 와우형이란 소가 비스듬히 누워있는 형상의 지형을 말하는데 안내판은 이곳이 와우형 지형에서 가장 중요한 소의 머리 부분이라고 적고 있다. 거기다 소의 머리답게 팽나무 한 그루가 뿔처럼 자란다는 너스레까지 떨고 있다. 또 하나의 멋진 스토리텔링이라 하겠다.

▼ 잠시 후 ‘선택의 길’에 내려섰다. 왼편은 성화등대로 가는 길로 거친 길이라고 적었다. 반면에 동네로 이어지는 오른편 길은 야자매트를 깐 덕분에 덜 거칠단다.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지점이라는 얘기이다. 그렇다고 해서 쑥섬의 또 다른 비경인 해안절벽을 둘러보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마는.

▼ 왼편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신선대’이다. 하늘의 신선이 내려와서 바둑을 두고 거문고를 타며 놀다간 자리라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다. 안내판은 바위 주변의 잘생긴 소나무들와 함께 다도해 조망을 이곳 신선대의 자랑거리로 적고 있었다.

▼ 계단을 따라 잠시 내려서자 푸른 바다 위로 2000년 전반기에 만들어진 성화등대가 우뚝하다. 생김새가 성화를 닮았다고 해서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데, 등대 주변은 고흥반도 남쪽 끝자락과 작은 섬들 사이로 지는 해를 감상할 수 있는 일몰 명소로 알려져 있다.

▼ 성화등대에서 가파른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눈길을 사로잡는 비경이 기다리고 있다. 널따란 너럭바위와 수직을 이룬 해안절벽이 푸른 바다와 어울린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 너럭바위 옆 깎아지른 기암절벽은 안으로 동굴이 뚫려 바닷물이 들락거린다. 행실이 좋지 않은 탁발승이 자신의 법력을 과시하다 빠져죽었다는 전설이 있는 ‘중 빠진 굴’이다. 참! 배를 빌려 타고 이 일대를 둘러보는 방법도 있다고 했다. 그럴 경우 수직의 기암이 장엄한 신선대나 재미난 전설을 간직한 대감바위를 보다 더 확실히 살펴볼 수 있음은 물론이고, 사자바위나 두꺼비바위 같은 기암괴석들도 추가로 눈에 담을 수 있다고 한다.

▼ 고개를 조금 돌리자 망망대해가 펼쳐지면서 다도해의 크고 작은 섬들이 그림처럼 다가온다. 바다와 만나면서 리아스식 해안을 이룬 고흥반도는 멀리서 육지의 존재감을 과시한다.

▼ ‘선택의 길’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덜 거친 길을 따라 마을로 향한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커다란 후박나무를 만난다. 그늘 아래에는 통나무의자가 놓여있었다. 쑥섬을 자주 찾는 어느 독지가가 손수 만들어서 기증한 것이란다.

▼ 마을로 내려서기 전 ‘우끄터리 쌍우물’을 만났다. 우측 끄트머리에 위치한 두 개의 공동우물로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깨끗한 위 우물은 식수, 아래 우물은 위쪽 우물이 넘쳐흘러 생겨난 것으로 빨래 등의 허드레용으로 사용했다는데, 상수도가 놓인 지금은 둘 모두 사용하지 않는다.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볼 수도 있다. 그렇다고 마시는 것은 금물. 그저 손이나 씻어보는 걸로 만족하자.

▼ 바닷가로 내려와 왼편으로 나가자 바위지대가 펼쳐진다. 높지는 않지만 통행을 불가능할 듯. 그래선지 탐방로도 이곳이 끝이다. 오른편에 보이는 섬은 ‘사양도’이다. 섬에 두 봉우리가 우뚝 솟아있다고 해서 주민들은 ‘남자의 섬’이라 부른다. 대신 이곳 쑥섬은 ‘어머니의 섬’ 또는 ‘여자의 섬’으로 불린다고 한다.

▼ 바닷가를 따라 난 길은 일명 ‘동백길’이다. 200~300년 된 동백나무들이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3~4월쯤이면 동백꽃이 땅으로 내려오면서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그런 풍광에 도취라도 해보라는 듯이 동백나무 그늘 아래에다 열 개도 넘는 벤치를 놓아두었다.

▼ 안내판은 이 동백길을 ‘최불암 선생님이 좋아하신 길’이라고 적고 있었다. 2018년 ‘한국인의 밥상’을 이곳 쑥섬에서 찍었는데, 당시 이곳에서 오프닝 멘트를 했었다고 한다.

▼ 이곳도 역시 ‘숨은 그림 찾기’의 명소이다. 울창한 숲 곳곳 특이한 형상의 나무에 시선을 맞춰보라는 얘기이다. 상상의 동물인 용처럼 생긴 나무, 머리를 풀어헤친 듯한 나무 등 다르게 생긴 모양대로 제각기 다른 이야기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 마을은 북동쪽 바닷가에 들어앉았다. 하지만 돌담에 둘러싸인 공터들이 꽤 많이 눈에 띈다. 사람이 떠난 빈 집을 헐어낸 공간이리라. 맞다. 1973년만 해도 이곳은 64가구 397명이 북적댔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17가구 26명 정도가 호젓하게 살아갈 따름이니 저런 빈 터들이 많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자그만 섬이지만 음식점도 들어섰다. 백반을 메인 메뉴로 삼고. 섬의 특산품인 쑥을 넣은 부침개를 사이드메뉴로 내놓고 있었다. 그런데 밥집으로 들어가는 골목의 담장이 참 높다. 아니 눈에 들어오는 마을의 돌담들이 하나같이 처마에 이를 정도로 높이 쌓여 있다. 연근해이지만 이곳을 지나는 태풍 역시 만만찮다는 얘기일 것이다.

▼ 마을로 들어오면 주택가 사이에 ‘사랑의 돌담길’이라는 팻말이 걸려있다. 이곳은 옛날 섬 마을에 살던 남녀들이 어른들 몰래 만나던 장소였다고 전해진다. 세월이 흐른 지금은 탐방객들이 사진을 찍고 추억을 장식하는 자리가 됐다.

▼ 좁디좁은 마을안길이라고 보면 된다. 그 양쪽에 크기도 다르고 모양도 각기 다른 작은 돌들을 정교하게 짜 맞춘 돌담을 쌓았다. 그것도 골목을 따라 구불구불 잘도 굽었다. 하긴 저 정도는 되어야 몰래 숨어서 사랑을 속삭일 수 있었지 않겠는가.

▼ 마을 앞 바닷가에 세워놓은 포토죤도 역시 ‘고양이’이다. 요번 것은 ‘반갑다~옹’. 고양이가 허리를 곧추세우면 반갑다는 의사표시라도 되는 모양이다. 참! 섬을 돌아다니다보면 실물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고 했다. 이들은 외부인들이 오면 도망을 가기는커녕 스스로 다가와 애교도 부린단다. 사람과 고양이가 오랜 세월을 함께 해 왔다는 반증이리라. 그러다보니 요즘은 쥐도 잡지 않은 채 놀고먹는다는 안내원의 넋두리도 들을 수 있었다. 얼마나 포동포동 살이 쪘기에 그럴까가 궁금했지만 불행히도 고양이는 눈에 띄지 않았다.

▼ 한국전력의 옛 건물까지도 관광객의 흥미를 북돋우는 소품으로 등장했다. 아니 1976년에 첫 점화를 했다니 지역단위 문화유산으로 등재해도 손색이 없겠다. 맨 아래에 적힌 점화 당시의 이장 이름이 그 증거가 아니겠는가.

▼ 길가 담벼락은 벽화로 꾸며졌다. 설치미술을 하는 젊은 작가들의 재능기부로 탄생했다는데, 고양이에게 사료를 챙겨주는 할머니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가 하면, 그 옆에는 고양이 몇 마리를 초상화처럼 그려 넣었다. 고양이를 대할 때 주의해야할 사항도 빼먹지 않았다. 고양이가 먼저 다가오지 않는 한 가까이 다가가지 말라며, 지금처럼 고양이가 보이지 않는 것은 조용한 곳에서 쉬고 있기 때문이란다.

▼ 마을을 빠져나오는데, 게처럼 지어진 민박집 앞에서 지역 특산물인 쑥과 톳, 돌미역으로 만든 제품들을 팔고 있었다. 그런데 쑥가루와 쑥선식, 쑥식혜 등 쑥으로 만든 웰빙 제품이 대다수이다. 맞다. 이 섬의 이름은 ‘애도’. ‘쑥 애(艾)’ 자를 쓰고 있지 않는가. 이름에 걸맞는 상품이라 하겠다. 하지만 입도 전 섬에 대해 설명해주던 안내원은 쑥이 많아서가 아니라 쑥이 좋아서 쑥섬이라 부른다고 했다. 그래선지 섬을 둘러보는 동안 쑥밭은 구경하지도 못했다. 그렇다면 저 제품의 원료는 대체 뭐란 말인가.

 

대도(大島)

 

여행일 : ‘21. 2. 21(일)

소재지 :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대도리

트레킹 코스 : 선착장→대도마을→범선전망대→금모래펜션→이순신공원→대도스톤헨지→워터파크→농섬인도교→스타우드리조트→연도교→선착장(소요시간 : 2시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하동(금남면)의 노량항에서 뱃길로 20분 거리(4km)에 있는 대도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격전지인 노량해협의 한복판에 위치한 섬으로 0.32㎢의 본섬과 크고 작은 부속섬 6개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섬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1690년. 남해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며 살던 부부가 입도하면서부터라고 한다. 덕분에 하동군 유일의 유인도가 되었는데, 그들의 후손이 늘어나면서 마을을 이뤄 ‘장수 이씨’ 집성촌이 되었단다. 주변 바다가 섬과 뭍으로 둘러싸여 태풍 등 자연재해로부터 안전했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다 해산물까지 풍부하다니 이보다 더 나은 삶의 현장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하지만 우리 같은 여행자들에겐 너무 작은 섬일 수도 있다. 유인도이긴 하지만 고작 20만 평도 되지 않아 한 바퀴 둘러보는데 2시간이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여기저기 덧칠을 많이 했다. 대도스톤헨지(명상의 언덕), 이순신공원, 곰솔전망대, 농섬인도교 등의 볼거리들을 곳곳에 들어앉혀 투어시간을 꽤나 늘려놓은 것이다. 스타우드리조트나 해양펜션 같은 멋진 숙박시설들도 여럿 있으니 하루쯤 묵어갈 수도 있겠다.

 

▼ 찾아오는 방법

대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일단 ‘노량항(하동군 금남면 노량리)’까지 와야만 한다. 대도를 왕복하는 여객선이 이곳 ‘노량 선착장’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남해고속도로(순천-부산)의 하동 IC에서 빠져나와 19번 국도를 타고 남해방면으로 내려오다 금남교차로(하동군 금남면 송문리)에서 빠져나오면 ‘노량항(露梁港)’이 코앞이다. 하동과 남해도 사이의 거친 바다에서 이슬방울(露) 같은 작은 배가 바다를 건너는 다리(梁) 노릇을 했다는 뜻을 지닌 마을이다. 정확한 지명은 원래의 노량, 즉 구노량과 대비되는 ‘신노량’이다. 구노량에 비해 항만시설도 클 뿐만 아니라, 면사무소와 우체국, 파출소, 수협 등의 공공기관이 모두 이곳에 모여 있다. 참고로 구노량에는 '한려 나루터'가 있다. 대가야시대부터 어선의 기항지였고, 문모라성(남해군)으로 들어가는 도선장이며 일본과 교역한 최대 무역항이자 국제항이었다고 한다.

▼ 이곳 노량항과 대도를 오가는 차도선(車渡船) ‘대도 아일랜드호’이다. 정박지인 대도에서 30분 전에 출발하여 노량항에서 손님을 태운 다음 대도로 되돌아가는 형태로 운영되는데, 매일 오전 7시에서 오후 6시까지 하루 6회 노량항을 출발한다. 하지만 우리 일행에게는 그림의 떡이 되고 말았다. 정원보다 한참이나 줄여 태우라는 군청의 코로나19 방역지침에 크게 어긋나는 인원이라서 태워다 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 무슨 해괴한 일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엊그제 예약을 위해 전화를 했을 때 미리 알려 주었어야 하지 않았겠는가. 무슨 일을 하던 그에 합당한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 ‘구하라 그리하면 얻을 것이다.’는 성경 말씀처럼 각고 끝에 낚싯배를 이용하여 섬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찾아냈다. 낚싯배의 정원은 7명. 섬까지 왕복하는 데는 25분이 걸린다. 섬에 도착한 팀을 둘로 쪼개기만 한다면 코로나 방역지침에도 딱 맞는 섬 투어가 되는 것이다. 다만 첫 팀과 마지막으로 들어가는 팀의 간격이 2시간을 훌쩍 넘긴다는 것은 큰 흠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금상첨화’는 못되어도 ‘궁여지책’은 되지 않겠는가.

▼ 승선 차례를 기다리다 항구 주변을 돌아보기로 했다. 노량항의 방파제에는 빨강과 하양 말고도 노란색 등대가 하나 더 있었다. 빨강등대는 배가 항구로 들어올 때 항로의 오른쪽에 설치돼 항구가 왼쪽에 있음을 알린다. 하양등대는 그 반대다. 그에 반해 노랑등대는 ‘접근 금지’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니 이 근처의 수심이 낮거나 아니면 암초가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건 그렇고 방파제에는 꽤나 많은 낚시꾼들이 망중한을 즐기고 있었다. 매년 가을 이곳 노량항에서는 ‘참숭어 축제’가 열린다고 했다. 부두의 조형물도 역시 숭어다. 그러니 저들 또한 숭어를 낚고 있을 게 분명하다.

▼ 항구의 끄트머리에서는 아주 작은 섬 하나를 만났다. 썰물이면 육지와 연결되는 ‘학섬’이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학(鶴)처럼 생겼다고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항구 뒷산인 연대봉 자락과 연결하면 이 섬이 학의 머리에 해당한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주장한다. 참! 학섬의 뒤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섬이 잠시 후에 들어가게 될 ‘대도’이다.

▼ 학섬의 명물인 ‘코뿔소바위’를 줌으로 땅겨봤다. 주민들은 중앙에 뻥 뚫린 구멍을 ‘돌개구멍’이라 부른단다. 하지만 저 바위는 주민들보다 사진작가들로부터 더 사랑받는다고 한다. 저 구멍 속에다 황금빛 석양을 집어넣으면 기막힌 작품사진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하나 더. 음력 2일과 3일에는 보너스로 초승달까지 담을 수 있다니 한번쯤 때를 맞춰볼 일이다.

▼ 배가 출발하면 가장 먼저 노량대교가 눈에 들어온다. 2018년 개통한 노량대교는 세계 최초로 기울어진 교각과 3차원 케이블이란 기술을 적용해 만들었다고 한다. 그 뒤에 보이는 남해대교가 어느 정도 일본 기술과 자재를 활용했다면 46년 뒤에 지은 노량대교는 순수 국내 기술로 건설됐단다. 참고로 1973년에 준공한 남해대교는 당시 국내 최초의 현수교이자 동양에서 가장 긴 현수교였다.

▼ 대도에 가까워지자 바다 위에 떠있는 커다란 시설물이 나타난다. 참숭어 양식장이 아닐까 싶다. 녹차 먹인 참숭어가 대도의 특산품으로 꼽힌다니 말이다. 참숭어는 백질과 기능성 성분인 EPA·DHA 등을 다량 함유해 성인병 예방에 효과가 있는 겨울철 별미로 알려져 있다. 특히 이곳 대도에서 기른 참숭어는 노량해협의 거센 조류에서 녹차 사료를 먹고 자란 탓에 육질이 단단하고 쫄깃해서 최고의 횟감으로 쳐준다고 한다.

▼ 너른 바다 곳곳에는 낚시용 무동력선이 터를 잡았다. ‘해상콘도’라고도 불린다는데 하나같이 화장실까지 갖춘 방갈로 형이다. 저 정도면 수상 방갈로의 탄생지인 ‘타히티’의 것만은 못하겠지만 낚시 겸해서 하룻밤 머물다가기에는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타이티 방갈로의 특징이 룸 내부에서 라군(lagoon)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이곳은 다도해의 푸른 바다에다 손맛까지 더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선지 낚시꾼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명물이 된 지 오래라고 한다.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숙식을 하며 낚시를 하는 색다른 경험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 노량항을 출발한지 15분 만에 ‘대도(大島)’에 도착했다. ‘큰 섬’이라는 지명에 걸맞지 않게 작고 앙증맞은 섬인데, 저지난해 말 방영된 KBS-1TV '6시 내 고향'의 ‘섬섬옥수’ 코너가 세간의 주목을 받는데 한몫했단다. 참고로 대도는 한 무리의 섬 가운데 가장 크다고 해서 ‘큰섬’으로 불린다. 남북으로 길게 띠처럼 이어졌다고 해서 옛날에는 ‘띠섬’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또한 노량항에서 바라보면 섬이라기보다 차라리 바다 건너의 육지처럼 커 보인다는 데서 연유된 지명이라는 설도 있으니 참조한다.

▼ 대도의 남쪽 맨 끝에다 만들어놓은 선착장은 부잔교(浮棧橋)를 이용했다. 이곳 노량해협의 조수간만 차가 그만큼 크다는 얘기일 것이다. 안내판은 이 선착장을 ‘피셔리나항’이라 적고 있었다. 피셔리나(fisherina)란 기존 어항에 레저, 레크리에이션 공간 등 어촌관광 기반 시설을 갖춘 다기능 어항을 말한다. 요트, 모터보트 등의 선박을 위한 항구인 마리나(marina)를 약간 줄여놓았다고 보면 되겠다.

▼ 배에서 내리면 선착장 앞에 있는 빨간 풍차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네덜란드에서나 볼 법한 풍경이지만 어엿한 절간이다. 반야용선이라는 배에다 법당을 차려 산사순례와 방생으로 인기를 모았던 동운 스님이 대도섬을 살리기 위해 토지와 건물을 매입하여 지은 어엿한 사찰이기 때문이다. 지은 목적이 목적인지라 2층에 법당을 두고 1층에서는 카페 겸 식당을 운영하고 있단다.

▼ 선착장에는 ‘대도섬 안내도’가 세워져 있었다. 대도는 넓이라고 해봐야 고작 0.32㎢에 불과한 작은 섬이다. 해안선의 길이도 5㎞ 밖에 되지 않는다. 특히 섬을 둘러보는 데는 한 가지 방법 밖에 없다. 섬의 양 끝을 연결시키는 방법이 동쪽 해안(서쪽 해안은 절벽이다)과 섬의 한가운데를 잇는 구릉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방향을 오른쪽이나 왼쪽 가운데 하나를 골라 걷기만 하면 된다.

▼ 부둣가에는 ‘쌈지공원’도 조성되어 있다. 이곳이 섬이라는 것을 나타내려는 듯 돛단배를 대표 조형물로 삼았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어색하다는 느낌이 드는 이유는 어째서일까? 대도가 바로 파라다이스인데도 불구하고 또 다른 이상향이라도 찾으려는 듯이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남자상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부가 아닌 검객 차림을 한 것이며, 돛 아래에 만들어놓은 남근도 썩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 이곳에서 출토된 것인지는 몰라도 나무 화석인 ‘목화석(木化石)’도 전시되어 있었다. 지층에 묻힌 나무줄기에 물에 녹은 이산화규소가 외부로부터 스며들어 나무의 형태 그대로 굳어져 화석화된 돌이다

▼ 대도마을로 들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바닷가에 축대를 쌓아 널찍하니 길은 냈는가 하면 반대편 산자락은 꽃밭으로 만들었다. 펜더와 인어공주 등 수많은 조형물들이 일렬로 서서 탐방객들을 반기는 모양새이다.

▼ ‘대도 파라다이스’라는 글자 조형물도 보인다. 이곳 대도가 걱정이나 근심이 없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곳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이 바로 ‘파라다이스’라고 자부하는 이들이 얼른 보고 싶어진다. 행복이 저 너머에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을 말이다.

▼ 잠시 후 ‘큰 동네’라 불리는 대도마을에 이른다. 동쪽 해안의 중간쯤에 형성되어 있는 마을은 얼핏 계단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바닷가 도로변이 일층. 그 뒤의 집들은 층을 달리해가며 위로 올라간다. 또 하나. 대도의 주택 역시 마당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해안길은 마을 공동의 마당이 된다. 섬마을의 일반적인 특징이라 하겠다. 여느 섬들과 다른 점도 있다. 눈에 들어오는 집들이 하나같이 깔끔하다는 것이다. ‘파라다이스’라는 칭호에 어울리게 잘 사는 마을인가 보다. 하긴 육지와 가까운 덕에 이미 오래 전부터 수중파이프로 전기와 상수도를 들여왔다니 이를 말이겠는가.

▼ 마을 앞에는 파라솔을 쳐둔 쉼터가 있었다. 목재로 바닥을 깔고 그 위에 파라솔을 씌웠다. 식탁을 겸할 수 있는 벤치를 놓아두었음은 물론이다. 커다란 화분을 빙 둘러놓아 멋까지 더했는데, ‘장수이씨 집성촌’이라는 부제를 단 ‘대도마을’ 표지석은 이 쉼터의 앞에 세워놓았다. 그런데 표지석 옆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저 아름다운 여인은 누구일까?

▼ 종합안내판이 세워져 있어 카메라에 담아봤다. 조감도를 그린 다음 그 위에다 관광시설과 숙박시설, 그리고 편의시설들을 일일이 표시해놓았다. 각 시설의 연락처도 빼놓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 조그만 공간이라도 더 만들어내려는 노력도 엿보인다. 바다에다 원형의 기둥을 세운 다음 나무로 바닥을 만들고 그 위에 파라솔을 설치했다. 가장자리는 철제 난간을 둘러 떨어지는 것을 방지했고, 파라솔 안에는 식탁을 겸할 수 있는 벤치를 놓아두었다. 그 오른편으로는 남해대교가 그림처럼 나타난다. 다리 앞에 위치한 작은 섬(대·소왜도가 아닐까 싶다)이 남해대교를 반으로 갈라놓은 모양새이다.

▼ 모퉁이를 돌아서자 또 다른 포구가 나타난다. ‘우럭개’로 불리는 작은 동네이다. 이 마을의 포구 앞에는 주지섬과 둥글섬이 떠있다. 그보다 위쪽에는 조각섬과 넓은섬도 있다. 이렇듯 대도 앞바다는 올망졸망 좁은 바다 위에 여러 개의 섬이 수놓아져 있는 해역이다. 그래서 대도를 둘러싼 바다는 웬만한 폭풍주의보에도 잔잔함을 잃지 않는다고 한다. 바다 안에 갇힌 호수인 셈이다.

▼ 두 번째 포구를 지나자 매립공사가 한창인데 그 옆에는 아까 섬으로 들어오면서 보았던 낚시용 방갈로가 떠있다. 하긴 물고기들의 놀이터로 소문난 곳인데 그런 포인트를 놓칠 낚시꾼들이 어디 있겠는가. 맞다. 대도 앞바다는 겨울부터 봄까지는 노래미와 도다리, 여름에는 농어, 가을에는 돔, 돌문어 등 계절마다 다양한 어종이 낚시꾼들의 손맛을 즐겁게 해준단다. 거기다 회맛까지 뛰어나다고 한다. 빠른 물의 흐름 때문에 생선의 육질이 단단해졌기 때문이다.

▼ 탐방로는 이제 해안선을 벗어나 언덕으로 올라선다. 이때 가로수용으로 심어놓은 매화나무가 눈길을 끈다. 아니 꽃망울을 활짝 연 매화꽃송이가 코로나로 얼어붙었던 내 마음을 녹여주었다고 보는 게 더 옳겠다. 매화는 옛 선비들이 글공부를 하다가 여유시간에 즐겨 그린 꽃이다. 찬 서리와 눈을 의식하지 않고 꼿꼿이 언 땅에서도 때가 되면 어김없이 꽃을 피워 기품 있는 향기를 풍겨주기 때문이다.

▼ 섬의 끄트머리에 있는 언덕으로 오르자 ‘범선전망대’가 나온다. 하동의 진산인 금오산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언덕 위에 범선 한 척이 올라앉은 모양새이다. 내부에는 식탁용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고, 사방에는 망원경을 배치해 전망대의 기능을 한층 업그레이드 시켰다.

▼ 배는 한쪽 팔을 잃고 ‘후크’를 팔에 낀 ‘후크선장’이 지키고 있었다. 그는 ‘제임스 메튜 배리(James Matthew Barrie)’가 쓴 희곡 ‘피터 팬 : 자라지 않는 소년’과 소설 ‘피터와 웬디’에 나오는 등장인물이다. 그는 또 주인공 ‘피터팬’을 괴롭히는 악랄한 인물로 그려진다. 그런 인물이 지키고 있다면 이 배의 안전성은 이미 보장되었다고 보면 되겠다.

▼ 전망대는 눈터지는 조망을 자랑한다. 시야를 가로막는 게 없어 대도의 주변 풍경이 일목요연하게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대도는 7개의 부속 섬(넓은섬·조각섬·둥글섬·주지섬·장도·농섬·밴월도)들이 떠다니는 아름다운 바다를 끼고 있다. 작은 섬들이 떠다는 예쁜 바다지만 유독 더 눈길이 가는 곳은 단연 노량 앞바다이다. 저 너머로 보이는 남해도의 어디쯤엔가 충무공 유적지인 관음포가 있을 것이다. 이 바다가 바로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해전지이니 말이다. 200여 척의 적군을 침몰시키고 마지막 한 척의 배까지 모두 침몰시키려다 근접 전투에서 유탄을 맞아 죽음을 맞이했던 전장이다.

▼ 전망대 근처에는 ‘파고라’도 세워져 있었다. 여름에 찾아오는 탐방객들을 위한 배려일 것이다. 거기다 식수대까지 갖추었으니 이보다 더한 배려가 어디 있을까 싶다.

▼ 이젠 본격적인 투어에 나설 차례이다. 섬은 한마디 잘 꾸며져 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산책로라 하겠다. 특히 남북으로 길게 뻗어나간 능선을 따라 내놓은 산책로는 대도섬 트레킹의 핵심이라 하겠다. 공원과 정원 등 각종 볼거리들을 능선 곳곳에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런가하면 박석(薄石)을 곱게 깐 길가는 봄, 여름, 가을 없이 꽃밭으로 변한단다. 갖가지 관상용 꽃들을 심어 탐방로 주변이 온통 환상적인 꽃 세상이 된다는 것이다.

▼ 모퉁이를 돌아서는데 바닷가로 연결되는 길이 희미하게 보이기에 따라 내려가 봤다. 그리고 모래 반 조개껍데기 반인 아주 작은 해변을 만났다. 그렇다고 지닌바 풍경까지 작은 것은 아니다. 하얀 모래사장과 바위절벽, 그리고 바다 건너의 하동화력발전소가 한데 어우러지며 아름다운 풍경화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 자그만 섬이라고 해서 경작지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작은 터라도 나올라치면 어김없이 마늘 등의 채소를 심었다.

▼ 걷다보면 대도를 둘러싸고 있는 풍경이 일목요연하게 펼쳐진다. 대도는 본섬과 농섬을 비롯해 크고 작은 7개의 섬이 띠를 형성한 듯 줄지어 서있어 장관이다. 그럼 남해대교가 있는 동쪽 바다부터 살펴보자. 가장 왼쪽, 즉 북쪽에 위치한 섬이 ‘넓은 섬’이고, 그 다음 섬이 ‘조각섬’이다. 그리고 북방파제 앞에 위치한 섬이 ‘동굴섬’이고 그 아래에 위치한 섬이 ‘주지섬’이다. 주지섬 아래 즉 남쪽 끝에 위치한 섬은 ‘장도’라는 섬으로 이 섬에는 등대가 있다. 이 다섯 개의 섬이 일렬로 서서 대도 동쪽 해안, 그러니까 마을이 있는 해안을 보호하고 있는 모양새이다.

▼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섬진강 하구 쪽 풍경이 수채화처럼 펼쳐진다. 그 중심에는 광양제철이 있다. 저기에 '갈사'만에 자리한 '하동화력발전소'와 바다 건너의 '여천화학공단'까지 합치면 개발의 아이콘(Icon)이 된다. 누군가는 눈살을 찌푸리는 풍경이겠지만 저런 시설이 있었기에 우리의 국력이 세계에서도 탑클래스에 들어갈 수 있지 않았겠는가.

▼ 탐방로는 오르내리기를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이때 눈터지는 조망이 좌우로 펼쳐진다. 파란 바다가 눈앞에 펼쳐지는데 눈과 가슴으로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을 즐기다보면 걸음은 자연스레 느려져 간다. 마침 주어진 시간에 맞추면 되니 느리게 걷는다고 재촉하는 이도 없다. 그러고 보니 ‘느림보의 미학’이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 ‘이상덕 정원’으로 여겨지는 언덕을 둘러본 다음 건너편에 보이는 정자로 갔다. 어떤 이는 이곳을 ‘곰솔전망대’라 불렀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루에 올라가더라도 새로운 풍경은 눈에 띄지 않으니 일부러 찾아갈 필요는 없겠다.

▼ 정자의 주변을 살피는데 문정남 선생님의 표지기가 눈에 띄는 게 아닌가. 다산(多山), 다봉(多峰)의 대부라 할 수 있는 분인데 이곳 대도에도 산이 있다며 우리와 함께 섬에 들어왔었다. 아무튼 어느 글에선가 대도에서 가장 높은 곳을 ‘높은 재’라 부른다고 했는데 이곳을 이르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국제신문 산악회에서 거론한 ‘다물만당(45m)’이라는 봉우리는 지중해펜션의 뒤쪽에 있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 탐방로는 능선의 꼭대기를 살짝 비켜나기도 한다. 섬진강 하구와 광양제철을 실컷 보게 되는 구간이다.

▼ 그렇게 잠시 걷다보면 언덕 아래로 ‘금모래 힐링펜션’이 내려다보인다. 지금은 펜션으로 변해있지만 1947년 개교하여 2008년에 폐교되었다는 노량초등학교 대도분교이다. 그런데 운동장과 바다의 경계가 좀 애매하다. 거기다 운동장도 아이들 손바닥만큼이나 작다. 축구라도 할라치면 수영은 필수였겠다. 살짝만 차도 바닷물에 퐁당 빠져버렸을 테니 말이다.

▼ 펜션 옆으로 보이는 섬은 ‘밴월도’와 ‘투구섬’이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지는 않았다. 물이 빠지면 걸어서도 건널 수 있다지만 지금은 밀물 때라서 그러지를 못하는데 일부러 다가갈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물이 차올랐을 때 군대의 철모로 변한다는 ‘투구섬’의 형상은 조금 멀리서 바라보아야 제멋이라지 않는가.

▼ ‘이순신 공원’도 조성되어 있었다. 관음포를 바라보고 있는 충무공의 동상에 더해 팔각정을 지어놓았는데,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이곳에 상륙하여 휴식을 취한 것이 인연이 되었단다. 아니 그보다는 눈앞에 펼쳐지는 대도의 앞바다가 충무공께서 최후 전투를 벌인 '노량해협(露粱海峽)'이라는 게 보다 큰 이유가 아닐까 싶다.

▼ 조금 더 가면 ‘명상의 언덕’이다. 남해대교와 섬진강의 하구가 시선의 양쪽으로 걸치는 이곳은 아름다운 꽃밭으로도 유명하다. 혹자는 언덕으로 오르는 이 길이 마치 천국으로 가는 꽃길을 장식해 놓은 게 아닐까 착각할 정도로 아름답다고 했을 정도이다. 하지만 때를 잘못 맞춘 탓인지 꽃은 찾아볼 수 없었고 그저 바닥에 깔려있는 꽃이 없는 꽃잔디만 눈에 들어올 따름이다.

▼ ‘명상의 언덕’의 본래 이름은 ‘대도 스톤헨지’이다. 석재기둥을 빙 두른 모양새를 영국 Salisbury 평원의 ‘스톤헨지(Stonehenge)’에서 모티브를 따왔다는 얘기일 것이다. 고대 앵글로색슨어로 ‘공중에 매달린 바윗돌’이란 뜻의 이 스톤헨지는 그 특이한 구조 때문에 아틀란티스 후예들이 건설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래선지 이곳 대도의 스톤헨지도 기둥에다 고대 중원대륙을 지배한 배달한국의 금문(今文)이라는 난해한 문양을 새겨 넣었다. 아무튼 이 선사암각화를 바라보며 선현들의 얼을 떠올리다보면 삶의 화두 하나쯤 얻어갈지 또 누가 알겠는가.

▼ 다음은 지중해펜션이다. 이름처럼 지중해의 연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건물. 즉 주황색 지붕에 하얀 벽면으로 된 펜션이다. 이 숙박시설 뒤에는 언덕이나 다름없는 산이 하나 있다. 국제신문 산악회에서 ‘다물만당(45m)’이라 표기한 산봉우리인데 막상 길이 나있지 않아 올라보지는 못했다. 들머리를 찾지 못한 게 원인일 수도 있겠지만 이렇듯 대도는 정규 탐방로만 벗어나면 길이 사라져버린다. 그렇다고 탐방로가 끊겨 있는 것도 아니어서 헷갈리는 곳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 ‘다물만당’을 찾으려고 한참을 헤매다가 내려오니 트레킹을 시작했던 ‘풍차식당’이다. 아니 풍차식당의 뒤라고 하는 게 옳겠다. 아무튼 이 구간에 나는 ‘하늘공원’이라는 또 하나의 볼거리를 놓쳐버렸다. 장수이씨 입도 기념동산이라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 풍차식당의 오른편에는 물놀이장이 들어앉았다. 하동군에서 운영하는 워터파크로 ‘대도 파라다이스라’는 이름을 갖고 있단다. 워터파크는 메인 풀과 착수 풀, 어린이 풀 등 3개의 풀장과 자이언트슬라이드, 워터슬라이드, 미니슬라이드, 샤워시설 등으로 구성되어 있어 누구나 물놀이를 즐길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물놀이장 주변에는 아이들이 마음 놓고 뛸 수 있는 에어바운스와 다양한 놀이시설도 있다. 거기다 워터파크 앞에는 인조 잔디가 깔린 축구장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 워터파크를 오른편에 끼고 돌면 잠시 후 편의점이 나온다. 관광안내소와 글램핑장도의 관리까지 겸하는지 관련 간판도 걸려있다. 참! 그 옆에는 ‘어업인안전센터’도 들어서 있었다.

▼ 조금 더 가면 농도로 넘어가는 인도교가 나온다. 그런데 오른편 해안선을 따라 도로공사가 한창이다. 아까 탐방로가 속절없이 끊겨있었던 것은 저 공사가 마무리되지 않아서였던 모양이다.

▼ 자 이젠 ‘농섬’으로 들어가 볼 차례이다. ‘농섬’은 폭은 좁지만 좌우로 길어서 남쪽 해안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본섬에서 들어가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철근콘크리트로 지은 연도교를 이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농도의 서쪽 끝과 본섬의 서남쪽 끝을 연결시켜놓은 ‘인도교(人道橋)를 건너면 된다.

▼ 다리의 길이는 224m, 본섬인 대도와 농섬 사이의 해협에 7개의 철제 교각을 세우고 너비 2.5m의 상판은 나무를 깔았다. ‘돈을 쏟아 부어도 너무 부었네. 정부의 지원이 너무 과했던 거 아녀?’ 함께 다리를 건너던 일행이 내뱉는 넋두리가 귓전을 때린다. 내 생각도 같았다. 하지만 여행을 마치고 알아보니 개발비의 대부분은 주민들 몫이었다고 한다. 하동화력발전소 건설에 따른 어업소멸 보상금을 쾌척했다는 것이다. 그 종자돈에다 정부의 지원금을 더했단다. 이 일련의 과정은 대도 주민들의 섬 사랑 깊이를 측정할 수 있게 해준다. 다른 한편으론 광양제철소와 여수 율촌산단, 갈사산업단지의 조성 등으로 인해 위축된 어업. 즉 삶의 터전에 대한 두려움이 그만큼 컸다는 반증도 될 것이고 말이다.

▼ 다리 중간에는 가로세로 10m의 정사각형 낚시터도 만들어 놓았다. 참! 그러고 보니 대도 앞바다가 물고기들의 놀이터로 소문이 자자하다고 했다. 특히 민물고기인 ‘은어의 주산지’라고도 했다. 갈사만의 매립으로 은어의 숫자가 현저히 줄어들었다지만 아직도 이곳을 찾는 낚시꾼들이 꽤 많은 모양이다.

▼ 이 다리는 저녁 무렵에 건너야 제멋이라고 한다. 바다 건너로 보이는 광양제철 너머로 해가 넘어갈 때가 가장 아름답다는 것이다.

▼ 농섬 해변의 한쪽 면 900m 구간에는 나무데크로 해변산책로를 만들었다. 밀물 때 걸으면 마치 바다 위를 걷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만드는 멋진 산책로이다. 반면에 썰물 때 바닷물이 빠져나가면 산책로 아래는 갯벌이 민낯을 드러낸다고 한다. 누군가는 대도의 진면목은 바닷물이 빠질 때 드러난다고 했다. 물때에 따라 다르지만 물이 한 번 빠지면 수백 미터 폭의 갯벌이 드러나는데 조개나 굴이 지천으로 널려있어서 심심찮게 주을 수 있다는 것이다. 굴은 ‘꿀’이라고도 불린다. 맛이 ‘꿀맛’이어서다. 그러니 지금처럼 찬바람이 돌 때는 그 자리에서 따는 대로 까먹으면 된다. 갯벌체험의 진미라 하겠다.

▼ 저 멀리 아치형의 다리가 보인다. 이곳 농섬과 본섬을 잇는 연도교(連島橋)이다. 그런데 다섯 개로 나뉜 아치의 규모가 작아 나룻배 정도나 지나다닐 수 있겠다. 그건 그렇고 저 다리 아래는 썰물 때 물이 빠지면 바닥이 드러나는 갈라짐 현상이 연출되기도 한단다. 탐방객들이 조개류를 채취할 수 있는 기회이다.

▼ 바닷가를 따라 내놓은 데크로드를 걷다보면 가끔 갯벌로 내려가는 계단을 만나기도 한다. 맞다. 대도는 섬과 섬 사이에 펼쳐진 수심이 10m 이내의 평탄한 해저로 이루어져 있어 바지락과 고동, 낙지 등 다양한 어패류가 서식한다고 했다. 주민들은 이런 뛰어난 자연조건을 활용하여 갯벌체험장을 열고 있다고도 했다.

▼ 얼마쯤 걸었을까 반원형의 쉼터가 조성되어 있다. 벤치를 놓아두었는가 하면 주변은 야자나무 등의 열대목과 함께 동백나무로 치장을 했다.

▼ 길이 나뉘는 쉼터에서 정자가 지어져있는 언덕으로 올라가 봤다. 남해도 최고봉인 망운산이 조망되는 곳인데 ’해양 식물원‘과 접해 있었다. 곰솔을 바탕에 깔고 야자나무와 동백나무 등으로 치장을 했을 뿐 특별한 볼거리는 없는 식물원이다. 하지만 아고라와 벤치를 놓아두었으니 잠시 쉬어가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것 같다.

▼ 해양식물원을 빠져나와 반대편으로 향하니 지중해풍. 즉 주황색 지붕에 하얀색 벽면으로 치장하고 있는 스타우드리조트가 나왔다. 세계적인 호텔 체인인 스타우드(Star wood) 그룹의 체인인지는 모르겠으나 제법 큰 규모임은 분명하다. 터도 노량해협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 좋은 곳에 잡았다.

▼ 리조트 앞의 연도교를 건너면 또 다시 ’풍차식당‘이 나오면서 트레킹이 끝난다. 해물 밑반찬과 함께 나오는 풍차정식이 푸짐하면서도 정갈하다고 입소문을 탄 식당이다. 바다를 바라보며 차를 마실 수도 있단다. 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문이 닫혀있는 탓에 맛보는 것은 다음으로 미를 수밖에 없었다. 그건 그렇고 오늘 트레킹은 2시간이 걸렸다. 전체 거리가 5.5㎞인 점을 감안하면 무척 더디게 걸은 셈이다. 이는 섬의 풍광이 시간가는 줄도 몰랐을 정도로 아름다웠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 에필로그(epilogue), 대도는 트레킹을 하기에 안성맞춤인 섬이다. 산책로 어디에서나 푸른 바다를 조망할 수 있음은 물론이고 비록 인공이지만 볼거리들을 곳곳에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거기다 탐방로 대부분을 꽃길로 조성해 카멜레온처럼 사시사철 색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도 있단다. 하지만 이에 대한 앎이 부족했던 우리는 방문시기를 잘못 맞추는 우를 범했다. 봄부터 가을까지 온갖 화초로 뒤덮여 섬 전체가 꽃동산이 된다는데, 하필이면 겨울철에 찾았으니 말이다. 그나마 날씨가 좋아 ‘아름다운 어촌 100선(2003년)’에 선정되었을 정도로 빼어나다는 풍광을 실컷 볼 수 있었다는 점은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여자도(汝自島)

 

여행일 : ‘20. 11. 15(일)

소재지 : 전라남도 여수시 화정면 여자리

트레킹 코스 : 소여자도 선착장→큰등쉼터→붕장어다리→우측 해변→대동마을→개미허리길→마파치마을→붕장어다리→소여자도 선착장(소요시간 : 3시간 15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여수에선 여자만(汝自灣), 순천에선 순천만이라 부르는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의 중심에 위치한 작은 섬이다. 보성에선 ‘가막만’이라고도 부른다니 참조한다. 여수시 관내의 365개의 섬 가운데 하나인 여자도는 ‘소(또는 松)여자도’와 ‘대여자’도 2개의 유인도 및 5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유인도인 두 섬을 합쳐도 해안선은 7㎞를 넘지 않는다. 거기다 가장 높은 곳이라고 해봐야 해발이 51m에 불과하다. 다른 섬들에 자랑할 만한 특별한 볼거리를 갖고 있지 못한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두 섬을 연결하는 ‘붕장어다리’가 놓이면서 여자도 주민들에게도 자랑거리가 생겼다. 길이 560m의 이 다리는 붕장어가 힘차게 움직이는 모습을 형상화해 사진의 배경으로 최적화시켰다. 거기다 다리 곳곳에 낚시터를 만들어 동호인들의 구미까지 동하게 했다. 주말이면 여자도로 들어가는 여객선이 붐비는 이유일 것이다.

 

▼ 찾아오는 방법

여자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일단 ‘섬달천(여수시 소라면 복산리)’까지 와야만 한다. 여자만을 왕복하는 여객선이 이곳 ‘섬달천 선착장’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남해고속도로(영암-순천)의 진입구간이라 할 수 있는 해룡 IC에서 빠져나와 17번 국도를 타고 여수방면으로 내려오다 덕양교차로(여수시 소라면 덕양리)에서 22번 지방도로 갈아탄다. 죽림사거리(소라면 죽림리)에서 우회전하여 863번 지방도로 옮기고, 잠시 후 신흥리교차로(소라면 복산리)에서는 좌회전하여 달천길로 들어서면 얼마 지나지 않아 ‘달천도’가 나온다. 참고로 ‘달천’이란 이 일대를 아우르는 지명이다. 육지 쪽은 ‘육달천’이며, 다리로 이어져 있는 섬 쪽은 ‘섬달천’으로 구분하여 불린다.

▼ 지도를 조금은 꼼꼼히 살펴볼 일이다. ‘여자도(汝自島)’라는 지명이 생긴 근원이기 때문이다. 본섬을 중심으로 주위에 몰려 있는 섬들의 배열이 공중에서 보면 ‘너 여(汝)’자를 닮았다는 것이다. 거기다 육지와 거리가 너무 멀어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한다는 뜻에서 ‘스스로 자(自)’ 자를 붙여 ‘여자도(汝自島)’라 했단다. 본래의 이름인 ‘넘자섬’이 한자화 되는 과정에서 ‘여자도’로 변했다는 주장도 있다. ‘넘’은 남이란 뜻을 가진 여(汝)로 해석하고 ‘자’는 소리 나는 대로 자(自)로 표기하면서 여자도가 되었다는 것이다.

▼ 버스에서 내리니 바다 건너 여자도가 바로 코앞이다. 그런데 납작하니 옆으로 펴진 게 도무지 산이라곤 없는 모양새이다. 맞다. 사람들은 섬의 저런 모양새에서 ‘여자도’라는 지명의 유래를 찾기도 했다. ‘넘자섬’이 한자화 되는 과정에서 여자도(汝自島)가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넘’은 넘는다는 뜻이며 ‘자’는 산을 말하는 옛말. 이는 파도가 산을 넘을 정도로 섬의 높이가 낮다는 말로 풀이되며, 낮은 구릉으로 이루어진 여자도의 지형과도 딱 맞아떨어진다 하겠다.

▼ 우리가 타고 갈 ‘여자호’이다. 유람선 느낌의 여객선으로 정원은 47명, 매표소가 따로 없어서 편도 5천원인 뱃삯은 배에서 직접 받는다. 배는 매일 4회(8:40, 11:40, 14:40, 18:00). 여자도에서도 같은 횟수(8:00, 11:00, 14:00, 17:30)로 출발한다. 참고로 오래 전 ‘여자도’는 오지 중의 오지 섬이었다고 한다. 여수항에서 출발하는 여객선을 타면 순천만과 가막만에 이어 화정면의 섬들까지 돌고 돈 뒤에야 겨우 여자도에 배를 댔기 때문이다. 그게 5시간이나 걸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20분이면 섬달천으로 건너가 여수로 나가는 시내버스(90번)를 이용하면 된다.

▼ ‘섬달천’을 출발한지 20분 만에 ‘소여자도(小汝自島)’에 도착했다. 섬 전체를 소나무가 따스하게 감싸고 있는 모양새이다. ‘송여자도(松汝自島)’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이유일 것이다. 섬의 남쪽 해안에는 ‘송여자’라는 마을이 들어서 있다. ‘대동마을’ 및 ‘마파지마을’과 함께 여자리를 구성하고 있는 3개의 단위부락 가운데 하나로 여자도로 들어오는 여객선의 첫 기항지이기도 하다. 참고로 여자도는 마을마다 선착장이 들어서 있다. 본섬인 대여자도와 부속섬인 소여자도를 다리로 잇고, 마을과 마을을 도로로 연결시켰지만 자동차의 운행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배가 자동차 역할을 하는 셈이다.

▼ 배에서 내리면 이 섬의 자랑거리인 ‘붕장어다리’가 눈에 들어온다. 힘센 붕장어가 꿈틀거리는 모습을 형상화한 보행자 전용의 다리로, 대여자도와 소여자도를 연결하는 역할과 함께 낚시꾼들에게는 일류의 낚시터가 되어주기도 한다.

▼ 마을로 들어서자 해양 폐기물을 이용한 센스 있는 벽화가 눈길을 끈다. 참고로 ‘소여자도(小汝自島)’는 작은 여자도란 뜻으로 본래 이름은 ‘솔넘자’였다. 여기서 ‘솔’은 작다는 의미인데, 한자로 고치는 과정에서 ‘송여자도(松汝自島)’가 되었다고 한다. 섬의 뒷산에 소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어 ‘송(松)’자를 붙였다는 얘기도 있으니 참조한다.

▼ 선착장에서 빠져나오자 ‘여자도 유래와 둘레길 안내도’가 눈에 띈다. 단순한 눈요기 보다 섬에 대한 앎이 먼저라는 배려일 것이다. 하지만 아쉽다는 생각도 든다. 여자도 전체에 대한 내용을 담았더라면 더 돋보이지 않았을까?

▼ 안내도 앞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서 1.7㎞쯤 되는 ‘송여자도 둘레길’이 시작된다. 안내도 옆의 등산로 푯말을 참고하면 되겠다. 등산로는 여기서 우측으로 30m쯤 가면 시작된다. 곧장 숲이다. 하지만 해안가 갯바위지대를 따라가는 사람도 더러 보였다. 썰물 때라서 길이 열려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 산으로 들어서기 전, 눈이라도 돌릴라치면 여자만의 드넓은 바다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실루엣으로 마무리한 여수반도(麗水半島)를 배경삼은 바다는 ‘돈북섬’만이 외로운데, 작은 어선 하나가 이를 달래주기라도 하려는 듯 부지런히 달려간다. 참고로 섬 전체가 푸른 풀밭으로 덮여있다고 해서 ‘풀섬’으로도 불리는 ‘돈북섬’은 평소 낚시가 잘 되는 곳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외로운 저녁 바다에서 불을 밝혀주는 등대가 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섬이다.

▼ 탐방로는 정비가 잘 되어 있다. 울창한 소나무와 사스피레나무가 만들어주는 그늘도 좋다. 옛사람이 걸었을 법한 지겟길은 본래의 흙길에 돌이 있어 자연스럽게 계단 역할을 한다. 그렇지 못한 곳에는 통나무 계단을 깔아 탐방객들의 편의를 도모했다. 또한 곳곳에 등산로 푯말을 세워 길을 잃고 헤매는 일도 미리 없앴다.

▼ 산속으로 들어서는데 짙은 솔향이 코끝을 스쳐간다. 소나무는 그렇게나 좋다는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 중 하나. 그래선지 장거리 여행에 지친 심신이 새로워진 느낌이다. 하긴 사람이 호흡을 통해 피톤치드를 흡수하면 스트레스가 완화되고 심리적으로 안정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5분쯤 올랐을까 잘 지어진 정자가 길손을 맞는다. 하지만 특별한 조망은 보여주지 못한다. 빽빽하게 들어찬 소나무들 사이로 등대가 걸터앉은 ‘돈북섬’이 살짝 들어나 보일 뿐이다.

▼ 10분쯤 더 걷자 ‘큰등’이다. 봉긋하니 솟아오른 구릉(丘陵)에는 잠시 쉬어가라는 듯 벤치가 놓여있다. 야외용 식탁을 배치했는가 하면 아까 선착장에서 보았던 안내도도 보인다. 지난 2014년 행정안전부에서 공모한 ‘찾아가고 싶은 섬’ 사업에 여자도가 선정되면서 조성한 쉼터란다. 이곳은 소여자도에서 가장 높은 지점이기도 하다. 그래선지 판독이 불가능한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었다.

▼ 둘레길 주변에는 묵밭이 많이 보였다. 여자도가 자급자족하며 스스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밭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은 밭농사를 하는 사람이 없어진 탓에 저렇게 칡넝쿨과 잡초들만이 무성한 묵밭으로 변해버렸다.

▼ 북동쪽 모퉁이를 돌아서자 여자만에 ‘납계도’가 떠오르고, 이어서 여자도 본섬을 잇는 ‘붕장어다리’가 성큼 다가온다. 폭 3m에 길이가 560m인 연도교로 지난 2012년 4월에 준공됐다.

▼ 송여자도 둘레길의 끝자락에는 아담하고 예쁜 집이 들어서 있다. 1968년 문을 열어 2007년에 문을 닫았다는 옛 송여자분교(소라초등학교)이다. 하지만 지금은 ‘솔’이라는 민박집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두 가족이 함께 사용할 수 있는 별채와 일반 객실 2개, 거기다 세미나실까지 마련되어 있어 가족여행은 물론이고 회사 차원의 연수 장소로도 사랑받고 있단다. 참! 이곳은 여자도에서 하나뿐인 공중화장실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30분 만에 도착한 ‘붕장어다리’. 여자도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2012년 개통된 이 다리 덕분이다. 길이 560m의 이 다리는 ‘붕장어다리’라는 이름처럼 붕장어가 힘차게 움직이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상하좌우로 볼륨을 주었으니 예쁘게 생겼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언제부턴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 가운데 하나로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고, 이를 카메라에 담아보려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 되었다.

▼ 다리에 올라서자 ‘몽(夢)’이라는 조형물이 여행객들을 맞는다. 대어를 낚아 올리고 있는 동상인데, 큰 물고기를 낚아 올리고 싶어 하는 모든 낚시꾼들의 꿈을 표현한 듯 싶다. 그래. 이곳 여자도의 수역에서 감성돔과 노래미, 갯장어, 숭어 등이 많이 잡힌다니 월척이라도 꿈꿔볼 일이다.

▼ ‘붕장어’라는 애칭만큼이나 다리는 예쁘게 생겼다. 보행자 전용의 이 다리는 여느 다리처럼 밋밋한 일자 형태가 아니다. 좌우로 위아래로 요동치는 커다란 붕장어가 꿈틀거리는 모습이다. 하지만 주민들의 눈에는 지네가 기어가는 형상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지네다리’라고도 부른다니 말이다. 참! 다리의 끝에는 휴게소도 들어서 있었다. 낚시꾼들의 매점 역할은 물론이고 식당 및 숙박시설로도 운영된다고 한다.

▼ 다리에는 모두 7개의 낚시터가 마련되어 있다. 벤치에 구명정까지 배치한 낚시터에는 ‘시판(詩板)’까지 걸어놓아 낭만까지 가미했다. 그 가운데서도 ‘섬에서 배우는 사랑 법’이라는 시가 눈길을 끈다. 섬은 외롭지 않고, 다만 조용한 사랑을 하고 있어 외로워 보일 뿐이란다. 그건 그렇고 낚시 삼매경인 사람에게 조황을 물어보니 피라미 한 마리 못 잡았단다. 그렇다면 ‘감성돔’의 포인트라는 소문은 거짓말 아니냐는 우문(愚問)에는, 입질이야 좋은 날이 있으면 나쁜 날도 있지 않겠냐는 현답이 돌아온다. 맞다. 세상 이치가 다 그런 것 아니겠는가.

▼ 오른쪽. 그러니까 여자도의 동북쪽 바다에 떠있는 섬은 ‘납계도’이다. 높이가 8m밖에 되지 않는 아주 납작한 섬이어서 ‘납닥섬’이라고 했는데, 한자화 되는 과정에서 납(蠟)으로 닦은 닭(鷄)으로 풀어쓰면서 ‘납계도’가 되었다고 한다. 그 왼편으로 보이는 더 작은 섬은 ‘동굴섬’이다.

▼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자 검은 바위섬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주민들이 ‘검둥여’라고 부르는 섬에는 전봇대 하나가 세워져 있다. 뜬금없이 보이겠지만 교환식 전화기를 이용하던 시절에 전화선을 연결하던 시설이란다. ‘검둥여’는 최고의 갯바위 낚시터이기도 하다. 여름철이면 낚시꾼 간에 자리 쟁탈전이 벌어질 정도란다.

▼ 다리를 건너자 길은 둘로 나뉜다. 직진은 ‘마파지’ 마을을 거쳐 대동마을로 연결되는 시멘트도로. 한적한 시골풍경이 펼쳐지는 평범한 길이다. 이정표는 없지만 오른편 해안가를 따라 난 데크길을 따르는 이유이다. 아니 대여자도의 매력은 섬의 오른편 해안을 따르는 트레킹이라는 귀띔을 이미 들었는데 어찌 딴 생각을 품을 수 있겠는가. 해식절벽과 검은 모래해변, 검은 자갈해변, 공룡알을 촘촘히 박아 놓은 듯한 지형이 지질박물관을 방불케 한다는 것이다.

▼ 200m 길이의 데크길이 끝나면 여자도가 자랑하는 비경인 암반지대가 시작된다. 곰보빵처럼 울퉁불퉁한 기반암은 마치 공룡의 알집을 보는 것 같다. 중성화산암류(中性火山巖類)의 집괴암에 박혀 있던 돌조각이 빠져나가고 염분이 주변 암석을 깎아 더 큰 구멍을 만들면서 생긴 현상이란다. 저렇게 벌집처럼 보이는 지형을 타포니라고 부른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그나저나 마치 우주의 외딴 행성에 온 것 같은 분위기지만 길의 상황은 별로다. 바닥이 울퉁불퉁해서 걷기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 철분이 많은 붉은 암괴를 지나자 ‘검은 모래해변’이다. 아니 모래라기보다는 자갈에 더 가깝다. 그것도 몽돌이 아니고 맨발로는 밟지 못할 정도로 각이 져있다. 혹시라도 ‘레이니스피야라(Reynisfjara)’라는 지명을 들어봤을지 모르겠다. 아이슬란드의 최남단에 위치한 해변인데 1991년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전 세계 비 열대해변 중 방문해야할 TOP 10’으로 선정되기도 했던 ‘검은색 모래사장(Black Sand Beach)’으로 유명한 해변이다. 제주 삼양해변의 ‘검은 모래’도 우리나라에서는 꽤 유명한데, 두 해변의 공통점은 용암이 굳어진 화산암이 바닷물에 잘게 부서지면서 자갈과 모래로 변했다는 것이다. 이곳 여자도의 검은 모래도 같은 과정을 거쳤을지도 모르겠다. 마침 주변의 암석들도 화산암의 흔적을 보이고 있지 않겠는가.

▼ 해변이 끝나는 곳에는 또 다른 데크길이 놓여있다. 하지만 공사가 한창이어서 통행은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붕장어다리’로 되돌아갈 수야 없는 노릇. 마침맞게 바닷물이 빠져나가면서 길까지 열어주지 않겠는가. 조금은 부담스러웠지만 그냥 바윗길을 타보기로 했다. 그리고 우린 무사히 다음 해안에 이를 수 있었다.

▼ 모퉁이를 돌아서자 ‘검은 자갈’로 이루어진 또 다른 해변이 나타난다. 사람의 때를 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상태인 해변으로 수심이 완만할 뿐만 아니라 물빛도 맑다. 편의시설만 확충하면 일류의 해수욕장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의 근원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자갈이 하나같이 각이 져있었기 때문이다. 신발을 신어야만 걸을 수 있는 해수욕장을 어느 누가 찾아오겠는가.

▼ 두 번째 해안에서 다음 해안으로 연결되는 바윗길에는 별다른 안전시설이 없었다. 만조 때는 걸을 수 없는 구간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붕장어다리까지 되돌아가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물이 빠져나간 지금은 하등 문제될 게 없다. 그저 납계도와 동굴섬 등 주변 풍경을 눈요기 삼아 걷기만 하면 된다.

▼ 이곳에서 나는 여자만 입구에 있는 사도(沙島)에서 마주쳤던 ‘용미암(龍尾岩)’과 비슷한 풍경을 만났다. 용암(熔岩, lava)이 바다로 흘러내리다 급격하게 식으면서 형성된 지형인데, 바위벼랑을 기어오르던 사도와는 달리 이곳은 바닥에 누워있다. 바다에서 멈춘 용암의 기록 보관소 같다고나 할까.

▼ 세 번째 해안도 ‘검은 자갈해변’이다. 자갈이 조금 더 커졌지만 각이 져있기는 매한가지이다. 참고로 여자도는 수산자원보전지구로 지정될 만큼 수산자원의 서식 및 산란에 적합한 환경을 갖고 있다. 우리나라 갯벌 중 가장 좋은 등급인 2등급의 갯벌로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는 여자도의 남쪽 해안에 해당될 따름이다. 북쪽해안은 수심이 깊어 간조에도 갯벌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해안이 온통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바닥을 드러낸 곳도 검은 자갈해변이 전부이다.

▼ 해안의 끄트머리. 왼편 산자락의 나뭇가지에 산악회의 리본이 매달려 있었다. 바닷가 트레킹은 이쯤에서 접고 본래의 길로 되돌아가라는 시그널일 것이다.

▼ 하지만 난 계속해서 바닷가를 따랐다. 바윗길이 아까보다 조금 더 험해졌지만 진행하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오히려 눈요깃거리가 더 늘어났다. 고진감래(苦盡甘來). 이 정도의 풍경이라면 약간의 고생을 어찌 마다하겠는가.

▼ 아득한 옛날. 호랑이가 담배 먹던 시절이라면 거인이 공기놀이하기에 딱 좋은 바위들이 대여섯 개나 널려있다. 어느 기자가 거론하던 ‘샘 북쪽 너머’란 뜻의 골짜기. 즉 ‘샘북넘’은 이곳을 두고 하는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옛날 장정 열 명이 들어도 들지 못하는 바위를 최 장군이란 사람이 들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니 말이다.

▼ 중국의 태행산(太行山) 여행길에 왕망령(王莽嶺)에서 보았던 ‘소태항(小太行)’을 닮은 풍경도 만났다. 작은 기암괴석들이 수 없이 널려있는 모양새가 태항산맥을 닮았다는 그 바위 무리들 말이다. 아니 내가 보기에는 이곳의 바위들이 오히려 한수 위이다.

▼ 나처럼 모험을 감행한 사람이 쌓아올렸음직한 돌탑도 보인다. 서툴지만 주변 풍광과 어우러지면서 한 폭의 풍경화를 만들어낸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이다.

▼ 해안 트레킹을 시작한지 50분. 모퉁이를 돌아서자 저만큼에 대동마을이 나타난다. 바닷가 갯바위를 축대삼아 들어선 ‘초등학교’이다. 그 오른편으로 보이는 섬은 보성군에 속해있는 장도(獐島)이다.

▼ 갯바위와 한판 씨름을 한 뒤에야 바다와 어깨를 맞댄 학교에 올라섰다. ‘소라초등학교 여자분교’.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풍광이 곱다. 운동장에서 공을 차면 조금 전에 지나온 저 바다로 풍덩 빠지는 아주 작은 아담한 운동장에 교사도 아주 단출하다. 두 칸 정도의 교실이 분교의 유일한 교육 시설. 너무 작아서인지 앙증맞을 정도로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이승복 동상과 이순신 장군상 등 각종 조형물들도 세워져 있다. 책 읽는 소녀상은 팽나무 근처에다 따로 배치했다. 맞다. 책이란 본디 조용한 곳에서 읽는 법이다.

▼ 운동장 끝에는 거대한 팽나무 두어 그루가 자리를 틀었다. 미니 학교지만 100년이 넘었을 법한 고목들이 학교의 나이를 어림잡게 한다. 팽나무 뒤의 학교 담장을 넘어서면 바로 바닷가다. 담벼락이 방파제 역할을 한다. 바다를 접하는 학교. 파도 소리가 아름답게 들려온다.

▼ 이젠 ‘대동마을’을 돌아볼 차례이다. 마을은 포구의 동쪽 나지막한 평지에 형성되어 있다. 바다를 바라보고 선 마을은 전면에 공공시설을 배치했다. 최근에 지어진 듯한 이층 건물은 마을회관이다. 그 옆의 붉은 지붕은 초등학교. 정자와 나란히 붙어있는 또 다른 이층 건물은 간판이 없었다. 옛 마을회관이 아닐까 싶다. 경로당과 파출소도 보인다.

▼ 대동마을의 포구는 외항과 내항으로 나뉘어 있었다. 조수간만의 차가 큰 여자도의 특징. 즉 간조(干潮) 때마다 바닥을 드러내는 내항의 약점을 보완하고자 바깥쪽에 방파제 하나를 더 쌓았다.

▼ 선착장에서 바라보면 대동마을의 외항과 내항이 한꺼번에 눈에 들어온다. 포구 뒤로 보이는 건물은 1994년에 가동을 시작한 내연발전소. 섬의 북쪽 끝자락 언덕을 혼자서 독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섬사람들은 불만이 없다. 저 시설 덕분에 집집마다 세면장과 수세식 화장실, 세탁기 등 편리한 문화생활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 방파제를 걷다가 산책 나왔다는 동네 주민을 만났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주변 풍경을 물어보니 자세히 설명해 주신다. 기다랗게 펼쳐진 북쪽의 섬은 보성군에 들어있는 장도(獐島, 아래 사진). 하지만 길어서 장도가 아니라 생김새가 노루와 비슷하다고 해서 ‘노루 장(獐)’자를 썼다고 한다. 그밖에도 순천만 건너로는 고층의 아파트들이 줄줄이 늘어섰고, 바다 건너 고흥 땅에서는 팔영산이 나도 있다며 실루엣으로 그림 같은 풍경을 풀어놓는다.

▼ 이제 마을안길로 들어가 볼 차례이다. 그런데 ‘여자대동길’이라는 골목의 이름이 왠지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남정네들끼리만 걸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이니 말이다. 어쩌면 남녀의 정분을 유난히도 중히 여기는 마을일지도 모르겠다. 맞다. 골목 입구에 서너 개나 세워놓은 열행비(烈行碑)가 그 증거가 아니겠는가. 그건 그렇고 골목길로 들어서자 곳곳에 밭이 있고 빈집도 더러 보인다. 빈집일 뿐 아니라 폐가도 있다. 하지만 철제 종각이 눈길을 끄는 ‘대동교회’에서는 삶의 흔적도 엿볼 수 있었다.

▼ 이 마을에도 역시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어촌답게 바닷가 풍경이 그려져 있는가 하면 꽃과 새들... 삐뚤빼뚤 썼지만 시도 적혀있다.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라는 글귀도 보인다. 하나같이 세련되지는 못했지만 벽면을 채우고 있는 그림들은 다시금 옛 추억을 떠올리게 만든다.

▼ 해발이 51m에 불과한 여자도는 물이 터무니없이 부족한 곳이다. 아무리 샘을 파도 간기가 있는 물이 나온다고 한다. 그래서 여자도는 여자들이 물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단다. ‘고생고생 물 고생’이라는 말까지 있었다니 오죽했겠는가. 아무튼 사람이 아무리 살고 싶어도 물이 없으면 살 수가 없는 법이다. 이 마을에도 우물이 3개나 있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2개는 간기가 있었고, 간기 없는 동네 가운데 우물은 멍석으로 덮어 놓았다가 일시에 배급을 했단다. 전하는 말로는 당시의 양동이에는 높이에 맞추어 금을 놓았었다고 한다. 물싸움이 안 나게 하려는 지혜였다.

▼ 30분 가까운 대동마을 투어가 끝났으니 이젠 ‘마파지’를 거쳐 소여자도로 되돌아갈 차례이다. 교회 옆으로 해서 난 시멘트 길을 따라 올라가면 마파지로 가는 길이 나타난다. 좌우로 밭을 거느린 길은 외줄기다. 아니 잘 닦인 도로이다. 차도 거뜬하게 다닐 수 있을 만한 길. 그러나 여자도에는 차량 이용이 불가능하다. 그만한 도로가 없고 육지에서 차를 가져올 수단도 없다. 그런 길의 중간에는 이름도 예쁜 ‘개미허리’가 있다. 양쪽 바다가 길의 바로 아래까지 움푹 파고는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지는 곳이다. 하지만 나에겐 식상하기 짝이 없는 길이기도 하다. 하고많은 나무 중에 하필이면 벚나무를 가로수로 심어놨기 때문이다. 왕벚나무의 원산이 한국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벚나무는 분명 일본의 나라꽃이다.

▼ 여자도는 동남쪽으로 길게, 그러면서 폭이 좁다. 그래서 대동 마을에서 마파지로 가는 길목은 말 그대로 길목이다. 그 덕분에 좌우로 드넓은 바다와 섬들이 한꺼번에 들어와 걷는 재미를 더한다. 왼쪽에는 여수반도를 배경으로 납계도와 동굴섬이 떠있고, 반대편(아래 사진) 저 멀리로는 ‘고흥반도’가 실루엣으로 펼쳐진다. 발아래로 내려다보이는 해변은 활처럼 둥글게 생겼다는 모래톱. 즉 ‘활꼬밭’이 아닐까 싶다. 그 너머는 ‘매물섬’일 것이고 말이다.

▼ 고개를 넘다보면 저수조(貯水槽)가 눈에 띈다. 여자도는 고기가 많이 잡히고 갯벌에서 패류 채취가 풍족하여 부유한 섬이다. 그러나 식수난은 아직도 제대로 해결이 되지 않고 있단다. 소형 관정을 아무리 파 보아도 염기 있는 물만 나오는 실정이란다. 그렇다면 저 저수조는 섬사람들의 생명줄인 셈이다.

▼ 언덕을 넘자 ‘마파지’ 마을이 얼굴을 내민다. 여자도의 남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로 남풍 즉 마파람이 부는 마을이라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여자도에서 가장 먼저 생긴 마을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때 ‘남원 방씨’가 승주군 낙안면 선조(현 보성군 벌교읍 장양리)에서 섬으로 들어와 이곳 마파지 마을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뒤를 이어 들어온 ‘초계 최씨’는 대동마을에 뿌리를 내렸고 말이다. 그건 그렇고 선착장으로 이어지는 골목길은 외길이다. 그 사이사이에는 샛길이 나있는데, 들어가 보면 빈집들이 더러 눈에 띄는 한적한 풍경이다. 하지만 마파지는 ‘중계민원처리소’와 ‘보건진료소’가 들어서 있는 여자도의 행정 중심지이다. 그런데도 마을 앞 포구는 생각보다 훨씬 작았다. 정박 중인 배도 눈에 띄지 않고, 마을 표지석이 세워진 방파제도 다른 곳처럼 포구를 감싸지 않은 채 바다를 향해 일직선으로 뻗어있을 따름이다. 기항지가 아닌 선착장으로만 이용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 골목을 통해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또 다른 포구가 나타난다. 빙 둘러 쌓아올린 방파제 안에까지 바닷물이 차있는 것이 천혜의 항구이다. 그래선지 마을 앞 포구에 비해 제법 큰 편이고 배들도 많이 정박해 있었다. 마을 앞 선착장에 물이 빠져나가면 여객선도 이곳에다 배를 댄다고 한다.

▼ 마파지선착장에서 붕장어다리로 가려면 마을 안길로 되돌아가야 하지만 그냥 해안을 따르기로 했다. 썰물 때라서 바닷길이 열려있었기 때문이다. 지름길을 놓아두고 일부러 돌아갈 필요야 없지 않겠는가.

▼ 트레킹을 시작한지 3시간. 배가 들어오려면 아직도 1시간이나 남았다. 시간도 때울 겸해서 찾은 식당은 붕장어다리가 한눈에 쏙 들어오는 명당자리에 터를 잡았다. 눈에 들어오는 다리는 붕장어가 살아서 꿈틀거리는 형상이다. 붕장어 특유의 힘찬 몸놀림으로 솟구치는 몸통이 잘 표현된 것 같다.

▼ 다시 돌아온 ‘붕장어다리’, 코앞으로 다가온 소여자도의 포구 앞에는 ‘솔섬(동도)’이 있다. 방파제 역할을 하는 바위섬으로 물이 빠지면 걸어서 건널 수도 있는데, 이때 다슬기 잡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단다.

 

낭도(狼島)

 

여행일 : ‘20. 10. 31(일)

소재지 : 전라남도 여수시 화정면 낭도리

트레킹 코스 : 선착장→쉼터전망대→역기미분기점→낭도산→역기미 삼거리→장사금해수욕장→남포등대→신선대→주상절리→낭도해수욕장→선착장(소요시간 : 4시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여수시의 ‘여자만 해넘이전망대’에서 고흥군(영남면)의 ‘우천리’까지는 기껏해야 10㎞에 불과하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둘은 ‘여자만’에 가로막혀 마치 딴 나라처럼 멀기만 했다. 그러다가 올 2월 조발도와 둔병도, 낭도, 적금도를 다섯 개의 다리로 연결시키면서 이제 가까운 이웃이 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섬이 여우를 닮았다는 낭도(狼島)인데, 이 섬도 다리의 개통과 함께 큰 변신을 했다. 섬에서 가장 높은 ‘상산’으로 오르는 네 개의 등산로(여산마을·규포마을·규포선착장·역기미삼거리)를 정비했는가 하면, 섬의 남쪽과 동쪽 해안에는 ‘낭만낭도 섬 둘레길’ 3개 코스가 조성됐다. 최근 이 섬이 관광객으로 붐비는 이유이다. 그건 그렇고 이 섬의 자랑거리는 동남해안을 따라 발달된 해식애(海蝕崖)다. 특히 부안의 채석강을 연상시키는 천선대와 주상절리가 발달된 신선대는 흔히 만날 수 없는 비경이라 하겠다. 트래킹을 하는 내내 조망되는 다도해의 풍경 또한 낭도만의 자랑거리이다.

 

▼ 트레킹 들머리는 여산마을(여수시 화정면 낭도리 1010)

백야도(여수시 화정면)의 백야항에서 느려터지게 달리는 차도선을 타야만 이를 수 있었던 개도가 이제 자동차로도 들어갈 수 있게 됐다. 올 2월 말 여수와 고흥을 잇는 연륙·연도교 4개가 한꺼번에 개통된 덕이다. 국내에 코로나19가 한참 확산되고 있을 때여서 개통식도 하지 못했지만 15년 동안 6684억 원이나 쏟아 부으면서 만들어낸 다리들이다. 남해고속도로(영암-순천) 도롱 IC에서 빠져나와 17번 국도를 타고 여수방면으로 내려오다 덕양교차로(여수시 소라면 덕양리)에서 22번 지방도로 갈아타고 내려오면 여자만의 끄트머리인 공정마을(여수시 화양면 장수리)이 나온다. 이곳에서 새로 놓인 조화대교와 둔병대교, 낭도대교를 연이어 건너면 목적지인 낭도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타고 온 버스는 낭도항으로 들어가는 굴다리의 앞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선착장 근처에 널찍한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지만 마을 도로가 협소한 탓에 대형버스의 진입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 오늘 트레킹은 낭도항 물량장 근처에서 출발한다. 능선(등산로 1코스)을 따라 낭산 정상에 올라선 다음, 등산로 4코스를 이용해 ‘역기미삼거리’로 내려온다. 이후는 ‘낭만낭도 섬 둘레2길’과 ‘낭만낭도 섬 둘레1길’을 연이어 답사한 후 출발지인 굴다리로 되돌아오는 원점회기 코스다. 트레킹 도중 바닷가를 오르내리며 낭도의 명소들을 빠짐없이 둘러봄은 물론이다.

▼ 길은 마을 앞 해안가를 따라 나있다. 오가는 승용차가 서로 비켜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좁은데, 이 길을 따라 걷다보면 수령이 300년도 넘은 느티나무가 나오고, 이어서 노인정과 농협지소, 게스트하우스, 치안센터를 차례로 지난다.

▼ 바닷속 풍경이 그려진 핑크빛 벽화가 섬마을에 들어왔음을 실감나게 한다. 대문에는 문패 대신에 주인장의 캐리커처를 그려 넣었다. 거기다 보는 이의 감성을 자극하는 글귀까지. 오가는 차량들을 피해가야만 하는 비좁은 골목길이지만, 스쳐 지나가는 벽화가 가득한 불편에 한줄기 위로가 되어준다.

▼ 길가 담벼락은 ‘낭만의 섬, 낭도’를 알리는 문장과 예쁜 벽화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다. 그 가운데서도 남장여자-여장남자들의 축제인 ‘낭도 카니발’을 알리는 벽화가 눈길을 끈다. 낭도 전 주민이 참여하는 가장무도회이자 청춘남녀가 사랑을 구애하는 연애장소로 활용되던 낭만의 무대였지만 지금은 중단된 상태란다.

▼ 마을길을 빠져나오자 주차장을 겸하고 있는 낭도항의 물량장이 나온다. 국가어항이라선지 생각보다 훨씬 큰 규모이다. 하지만 물양장은 주차된 차량들을 제외하고는 정적이 감도는 풍경이다. 다리가 새로 놓이면서 여객선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사라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나마 ‘낭산정’과 마을카페, 그리고 그 앞에 자리 잡은 포장마차가 조금은 부산스러울 수도 있겠다는 느낌. 하지만 지금은 이마저도 문이 닫혀 더욱 썰렁한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을 따름이다.

▼ 물량장 입구에 낭도산 등산안내도와 함께 ‘화정면 낭도리 여산 마을’이라는 여산마을 유래비 겸 표지석이 있었다. 낭도란 섬 전체가 여우를 닮았다고 하여 ‘이리 낭(狼)’ 자를 써 ‘낭도’라 하였다가 이후 낭도의 모든 산이 수려하다 하여 ‘고을 여(麗)’ 자와 ‘뫼 산(山)’ 자를 써서 ‘여산’이라 하였다는 내용이다. 또한 여산마을은 임진왜란 당시 성명 미상의 강릉 유씨가 처음 들어와 정착하면서 시작되었다고 적고 있다. 주민 수(175가구 307명)까지 적는 친절을 베풀고 있으나 개발 바람이 한창인 지금은 이보다 훨씬 늘어났을 것이다.

▼ 근처에는 ‘낭도’에 대한 안내판도 세워져 있었다. ‘싸목싸목 걷는 섬, 낭만낭도’라는 이름표 아래에다 4개 코스로 이루어진 ‘상산 등산로’와 3개 코스로 나누어진 ‘섬 둘레길’을 지도와 함께 설명해 놓았는가 하면, 그 오른편에는 ‘상산 봉수대’와 ‘공룡발자국 화석’ 등 낭도가 자랑하는 명품 경관을 사진을 첨부해가며 자랑하고 있었다.

▼ 물량장에 만들어놓은 널따란 주차장을 지나자 왼편으로 길이 하나 나뉜다. 출발지인 굴다리에서 10분쯤 되는 지점이다. 상산의 들머리인데 이정표(상산 등산로 입구←)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어서 부드러운 오르막길이 마을 뒤 언덕배기까지 이어진다. 삼거리인 이곳에선 여산마을(게스트 하우스)로 연결되는 직진길 대신 오른쪽 ‘상산 등산로’ 방향, 10분 뒤 갈림길에서는 왼쪽 길로 간다.

▼ 이후부터 탐방로는 능선을 따른다. 길은 밭 사이로 나있다. 바람막이 하나 없이 그대로 속살을 비추고 있는 밭은 자갈이 반. 말 그대로 척박한 땅이다. 언덕배기마다 골을 만들고 밭을 일궜다. 바다를 향한 밭은 억척스러움마저 느껴진다.

▼ 시야를 가릴 게 없어선지 눈을 들자 낭도 앞바다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를 기다란 방파제가 둘로 나누고 있는 모양새. 그 끝에는 빨간 등대가 자리 잡고 있다. 빨강 등대 오른편에는 육지와 떨어진 또 다른 방파제. 일자형의 이 방파제에는 항로 곁의 하얀 등대 외에도 끝자락에 노란 등대 하나가 더 있다. 노란 등대 옆에는 섬도 하나 있다. 바로 ‘대납도’이다.

▼ 시선을 오른편으로 약간 비틀자 ‘낭도 선착장’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다. 끄트머리의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곳에 지어진 정자는 대합실 겸 쉼터이다. 그 왼편은 매립지로 접안시설이 자리 잡고 있다. 사방이 탁 트인 정자, 낭산정(狼山亭)이 들어선 이곳은 원래 바다에 서식하는 게와 같이 생겼다 하여 ‘기섬’이라고 불리던 곳인데, 매립공사를 거쳐 현재는 여객선 접안 시설로 활용되고 있다.

▼ 언덕에서 바라보는 여산마을 풍경은 섬답게 다소곳하고 아기자기 하다. 형형색색의 지붕을 이고 있는가하면 돌담으로 이어지는 마을길도 조붓해서 정겹다. 참고로 여산마을은 규포마을 및 사도마을과 함께 ‘낭도리’를 구성하고 있는 세 개의 자연부락 가운데 하나이다. 또한 가장 크고 중심이 되는 마을이기도 해서 화정면 출장소와 치안센터, 농협, 보건진료소 등의 행정기관이 들어서있기도 하다. 낭도중과 여산초교도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폐교되었단다.

▼ 삼거리를 지나서 25분이면 콘크리트길이 끝나고 자연스럽게 산길과 연결된다. 해송 숲이 하늘을 가리는 아름다운 능선길이다. 길의 상태 또한 곱다. 부드러운 흙길만 해도 고마운데 조금만 가파르다 싶으면 어김없이 침목 계단을 놓았다. 그뿐만 아니다. 흙길에는 야자나무 매트를 깔아 흙길의 고질적 고민인 질퍽거림도 없앴다.

▼ 산자락으로 들어선지 12분, 새로 지어진 듯한 ‘데크전망대’가 길손을 맞는다. ‘쉼판터 전망대’라는데, 섬을 둘러보다 보면 이런 전망대를 여러 곳에서 만날 수 있다. 이들의 조망 대상은 대부분 사도(沙島)와 그 주변 섬들이다. 하지만 이곳은 주변의 나무가 추도(鰍島)를 위시한 나머지 섬들을 가려버렸다. 아쉬운 점이라 하겠다.

▼ 전망대에 오르자 다도해의 아름다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 중심은 사도(沙島)이다. 공룡 발자국과 현대판 모세의 기적으로 널리 알려진 바다 갈라짐 현상 등 볼거리가 사방에 널려있는 명품 섬이다. 그렇게 좋은 경관을 지자체에서 놓아두었을 리가 없다. 여수시가 관광 활성화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사도와 낭도 간 연도교 가설공사를 계획했음은 물론이다. 문화재청의 불허로 보류되면서, 이에 대한 대안으로 수상버스(유람선)를 건조해 사도 인근 섬을 선상 투어하는 것으로 결정되었지만 말이다.

▼ 조금 더 걷자 밑둥치 둘레가 3m는 됨직한 해송이 가지를 뻗고 위용을 뽐낸다. 이곳에서도 다도해의 풍광을 맛볼 수 있다. 아니 조금 전에 만났던 전망대보다 오히려 한 수 위이다. 그래선지 소나무 아래에다 벤치 두어 개를 놓아두었다. 눈앞에 펼쳐지는 조망을 느긋이 즐겨보라는 배려일 것이다.

▼ 거침없이 사방으로 뻗어나간 나뭇가지 아래 잔잔한 바다에는 작은 섬들이 차분하다. 너무 고요해서일까 그게 한 폭의 풍경화가 된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으로 말이다. 풍경은 역시 자연이 그려낸 것이 최고인가 보다. 그림으로까지 승화되지는 않았지만 고즈넉한 저 섬마을 안 골목엔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돌담길도 있다. 한번쯤은 눈여겨 봐두어야 할 가치가 있는 문화재이다.

▼ 다시 길을 나서면 5분쯤 되는 지점(이정표 : 정상↑/ 규포마을←/ 낭도선착장↓)에서 ‘규포마을’로 연결되는 등산로(2코스)와 만난다. 이어서 가파름을 더해가는 산길을 따라 조금 더 오르자 이번에는 ‘역기미 분기점’. 우리 일행이 하산 코스로 이용하려는 등산로(4코스)가 시작되는 지점이므로 상산을 둘러본 뒤에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야 한다. 참! 이곳에도 이정표(상산 정상↑/ 역기미 삼거리→/ 낭도선착장 ↓)가 세워져 있었다. 아니 길이 나뉘는 지점이나 주요시설이 있는 지점에는 어김없이 이정표를 세워놓아 길 찾기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었다. 다만 거리표시를 해놓지 않은 점은 아쉬웠지만 말이다.

▼ 역기미분기점부터는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아니 엄청나게 가파르다. 침목 계단만으로는 부족해 밧줄난간까지 만들어 놓았다면 대충 이해가 갈지도 모르겠다. 5분쯤 되는 이 구간이 버거울 경우 밧줄에 의지해서 올라가라는 배려일 것이다.

▼ 그렇게 힘들게 올라선 상산(280.2m)의 정상은 돌무더기가 작은 봉우리를 이루고 있었다. ‘봉수대’의 흔적일 것이다. 하지만 낭도봉수에 해안 관련문헌이나 자료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고흥봉수’와 ‘돌산 방답진 봉수’를 연결하는 역할을 수행했을 것으로 추정해 볼 따름이다. 참고로 조선의 봉수는 셋으로 구분된다. 전국 모든 봉수의 집결지여서 중앙봉수라고도 불린 서울 목멱산의 경봉수(京烽燧)와 해륙과 변경의 최전선에 위치한 연변봉수(沿邊烽燧), 그리고 경봉수와 연변봉수를 연결하는 내지봉수(內地烽燧)였다. 그 중에서 연변봉수는 바다정찰과 신호전달, 해안경비뿐만 아니라 적의 침략 시 자체적으로 응전, 방어하는 임무까지 맡고 있었다. 그러니 이곳 낭도봉수도 연변봉수의 하나가 아니었을까 싶다.

▼ 정상에서의 조망은 썩 뛰어나지는 않다. 나뭇가지로 둘러싸여 어디에 뭐가 있는지 알아차릴 정도의 시야만 열어준다. 그저 조발도(早發島)와 둔병도(屯兵島), 적금도(積金島) 등 ‘백리 섬 섬길’을 이루는 여러 섬들과 이 섬들을 잇는 ‘조화대교’와 ‘둔병대교’가 실체에 가깝게 눈에 들어올 따름이다. ‘조화대교’는 170m 높이의 주탑(主塔)이 설치된 ‘사장교(斜張橋)’다. 상판을 지탱하는 수많은 케이블이 색다른 원근감을 선사하는데, 고흥으로 가는 첫 관문임을 알리듯 위풍당당한 모습이다. 같은 사장교인 ‘둔병대교’는 주탑의 곡선미가 강조되어 한층 여성스럽다. 주탑에서 조발도 쪽으로 뻗은 케이블이 상판의 양쪽 끄트머리가 아닌 도로 중앙선과 연결된 점도 독특하다.

▼ 역기미분기점으로 되돌아와 하산을 시작한다. 1~2분쯤 걷다가 만나게 되는 삼거리에서 왼편 오솔길로 들어선다. 그런데 이게 만만찮은 형세이다. 사뭇 가파른데다 바닥이 마사토로 이루어져 미끄럽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안전에 대한 조치는 일절 이루어지지 않았다. 실제로 내려오는 도중에 엉덩방아를 찧는 사람들이 여럿 보였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등산로 정비에 힘을 쏟은 여수시청으로서는 천려일실(千慮一失)이라 하겠다. 밧줄 하나만 매어놓아도 안전에 대한 걱정이 끝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 하산 길, 정상에서 못다 한 조망에 대한 갈증이 조금이나마 풀린다. 다도해의 특징을 여실히 보여주는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돛단배라도 되는 양 두둥실 떠있는 섬들은 하계도(下鷄島)와 상화도(上花島), 하화도(下花島), 등일 것이다.

▼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해서 30분쯤 내려서면 ‘역기미삼거리(이정표 : 장사금 해수욕장→/ 규포선착장←/ 상산등산로↓). ‘낭만낭도 섬 둘레길’의 2길과 3길이 나뉘는 지점으로 우리가 가려고 하는 신선대와 천선대는 이곳에서 오른편(장사금 해수욕장 방향)으로 진행해야 한다. ‘섬 둘레2길’이자 따뜻한 남녘의 섬답게 상록수가 울창한 아름다운 숲길이다. 싸목싸목 걷기에 딱 좋은 길이기도 하다.

▼ 둘레길로 들어서자마자 증도(시루섬)와 장사도(진뎃섬), 추도 등 사도 주변의 섬들이 조망되는 ‘데크 전망대’를 만나게 되고, 몇 걸음 더 걷자 이번에는 바닷가로 길이 열리면서 방금 전 훑어보던 풍경이 다시 한 번 눈앞에 펼쳐진다. 아니 바닷가에 터를 잡은 민가들까지 눈에 들어올 정도로 주변 섬들이 가까워졌다. 가장 왼쪽의 섬은 화정면의 유인도서(有人島嶼) 중 가장 작은 추도(鰍島)이다. 고기 중에서 작은 미꾸라지와 비교하여 추도라 부른 데서 유래된 이름이란다. 추도는 ‘공룡발자국화석 산지’로 그 이름을 세상에 알렸다. 사도 일원에서 발견된 ‘공룡발자국 화석’의 약 50%가 이곳에 몰려있을 정도이다.

▼ 둘레길 대신에 이번에는 바닷가를 따라봤다. 저렇게 해식애(海蝕崖)가 발달해 있으니 숨겨진 비경이라도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저 정도의 지형을 만들 정도의 해식작용이라면 절벽(sea cliff)에 동굴(sea cave) 몇 개쯤은 뚫어놓을 것이고, 이게 세월이 흐르면서 ‘씨 아치(sea arch, 독립문처럼 암석 기저부가 뚫린 다리모양의 파식지형)’를 거쳐 ‘시스텍(sea stack, 암석이 파도의 침식을 차별적으로 받아 만들어진 굴뚝 형태의 지형)’으로 변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 마침 간조(干潮) 때라서 길도 나있었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 안전에 각별히 신경 써야만 한다. 해식애가 발달된 곳이라서 크랙에 의지해서 오르내려야만 하는 바위절벽이 심심찮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거기다 물기가 듬뿍 배인 갯바위는 미끄럽기 짝이 없었다.

▼ 바닷가에는 기기묘묘하게 생긴 바위들이 수없이 널려있었다. 타포니(tafoni) 현상이라는데, 타포니란 염풍화작용으로 암석에 동굴처럼 구멍이 뻥뻥 뚫린 지형을 말한다. 멀리서 보면 벌집이나 해골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혹자는 골다공증 바위라 부르기도 한다. 그런 갯바위들을 오르내리며 20분 정도 이동하자 ‘낭도상수원’이 얼굴을 내민다. 작은 모래사장 뒤편 언덕에 다소곳이 들어앉았다.

▼ 상수원 앞 해안에는 꼬맹이 고깃배 한 척이 매어져 있는 작은 선착장이 들어서 있었다. 선착장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한마디로 끝내준다. 바다 가운데 지친 파도가 쉬었다 가는 작은 섬, 그 옆을 지나는 고기잡이 배 등 모든 풍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 선착장에서 바닷길이 끊긴 탓에 다시 ‘둘레길’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남해의 섬답게 늦가을인데도 불구하고 동백나무와 사스레피나무, 해송 등의 상록수들이 푸름을 자랑하고 있다. 이 길을 걷다보면 우거진 나무 사이사이에서 남해바다가 코발트 빛 피부를 드러낸다. 분위기에 취해 바다를 바라보며 감탄하고, 해안 단애에 부딪치는 파도소리에 귀를 씻어본다. 모처럼 갖는 여유라선지 그 순간순간이 매우 서정적이고 낭만적으로 다가왔다.

▼ 잠시 후 정자에서 또 다시 바닷가로 내려선다. 그리고 갯바위를 오르내리며 조금 더 걷자 ‘장사금 해수욕장(長沙金 海水浴場)’이 얼굴을 내민다. ‘역기미3거리’에서 ‘섬 둘레2길’을 시작한지 50분 만이다. ‘장사금’이란 지명은 금빛 나는 모래가 비단처럼 곱게 펼쳐져 있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그만큼 아름답다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거기다 돌담을 쌓아 정취를 더한 해수욕장 진입로도 눈에 담을 만했다.

▼ 낭도에는 두 개의 해수욕장이 있다. 접근성과 이용 측면에서는 마을과 가까운 ‘낭도해수욕장’이 편리하겠지만, 해변 풍광과 고즈넉함을 고려한다면 단연 ‘장사금해수욕장’이다. ‘모세의 기적’으로 유명한 사도와 추도를 위시한 섬 무리들을 한꺼번에 눈에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장사금해수욕장에서 빠져나오면 ‘산타바 오거리’. 사방에 밭을 개간해 놓은 낮은 고개에 남포등대, 장사금해수욕장, 여산마을로 가는 길이 다섯 갈래로 나뉘어져 있는데, ‘낭만낭도 섬 둘레길’의 1길과 2길이 나뉘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제부터 1길을 걷게 된다는 얘기이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1길(또는 주차장)’로 들어서서 50m쯤 걷다가 삼거리를 만나면 오른편 ‘남포등대’ 방향으로 진행한다. 이어서 70~80m쯤 더 가면 나오는 삼거리(이정표 : 산타바 해변↑/ 섬 둘레1길→/ 산타바5거리↓)에서도 역시 오른편 방향이다.

▼ 자그만 구릉을 넘는 이 구간은 사도(沙島) 일대의 아름다운 풍광을 한눈에 담게 해준다. 본섬인 사도를 중심으로 중도(간데섬)와 증도(시루섬)·추도·장사도(진대섬)·나끝·연목 등 6개 섬이 ’ㄷ‘자 모양을 이루는데, ‘중도’와 다리로 그리고 ‘증도’는 육계사주(陸繫砂洲)로 연결된다. 저 7개 섬들은 또 하나로 연결되기도 한단다. 정월 대보름과 2월 보름 등 물 갈라짐 현상이 심할 때면 ‘모세의 기적’이 일어나면서 장관이 연출된다는 것이다.

▼ 언덕배기를 넘자 또 다른 삼거리(이정표 : 남포등대↑/ 천선대→/ 산타바5거리↓). 남포등대로 향하는 직진방향의 숲길로 들어서자 몇 개의 벙커가 눈에 띈다. 해안으로 접근하는 간첩들을 잡기 위해 경계근무를 서던 초소일 것이다. 요즘은 귓전으로 흘려버릴 사연이겠지만 이토록 아름다운 곳에서 우리 역사의 뒤안길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 이어서 가파른 내리막길을 내려서자, 갯바위에 걸터앉은 하얀 등대가 반갑다며 손짓한다. 낭도의 또 다른 볼거리인 ‘남포등대’이다. 이 등대는 사도와 낭도 근처에서 조업하는 선박들의 안전을 위해 1971년에 세웠다고 한다. ‘송곳여’와 ‘중천여’라는 암초가 바닷속 어디쯤에 숨어 있는 줄을 알고 난 다음부터는 난파 사고가 당연히 사라졌을 것이고 말이다.

▼ 둘레길로 되돌아갈까 하는데 바닥에 그려진 화살표가 눈에 띈다. 그런데 이 화살표의 꼬리에 ‘천선대’라는 이름표가 달려있는 게 아닌가. 거기다 이런 화살표는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아까도 얘기했다시피 지금은 바닷물이 빠져나간 상태. 조금 위험할지도 모르겠지만 길이 열려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바윗길에 도전해 본다.

▼ 파도가 일렁이는 절벽 위에 서자 켜켜이 쌓인 세월과 자연의 신비감이 더해진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걸 즐길만한 여유가 없다. 오르내려야 할 바위벼랑은 서슬이 시퍼렇고, 그 아래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이니 어찌 한눈을 팔 수 있겠는가. 그저 바위에 박혀있는 동글동글한 돌맹이들에서 공룡의 알을 떠올려 봤을 따름이다. 마침 이 부근이 ‘공룡발자국 화석지’라고 하지 않았던가.

▼ 크랙에 매달려 오르기를 5분 여, 기묘한 지층과 주상절리가 어우러진 갯바위 지대를 만난다. 가히 선녀들이 놀만한 곳이라 하여 ‘천선대’라 불리는데, 낭도의 바닷가 지형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아름다운 해안이다. 아니 깎아서 세운 것 같은 해안의 낭떠러지 단애(斷崖)다. 약 20m 높이의 해안절벽은 오랜 세월 동안 파도에 깎이고 부서져, 책 수십만 권을 차곡차곡 쌓아놓은 것 같은 독특한 지형이 되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수북하게 쌓아 놓은 시루떡 같다고도 한다니 보는 이의 생각에 따라서 그 형상도 달리 나타나는가 보다. 그나저나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는 풍경이다.

▼ 천선대의 바닥은 끝없는 바위멍석을 깔아놓은 듯하다. 바위가 거북 등껍질처럼 갈라진 데다 높낮이 차가 있어 발 디딜 곳을 확인하고 천천히 걸어야 한다. 참! 이 부근에 있다는 공룡의 발자국은 찾지 못했다. 바닥에 나있는 수많은 흔적들 가운데 어떤 것이 공룡의 발자국인지를 구분할만한 혜안이 나에겐 없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곳 낭도와 인근의 다른 섬들에는 천연기념물 제434호인 공룡발자국 화석지가 있다. 사도(3곳)의 755점을 비롯하여 추도(2곳) 1,759점, 낭도 962점, 목도 50점, 적금도 20점 등 총 3,546점이 분포되어 있단다. 종류도 다양해 앞발을 들고 뒷발만으로 걷는 조각류, 육식 공룡인 수각류, 목이 긴 초식 공룡인 용각류 등의 발자국이 발견되었고, 이 중 조각류 발자국이 전체의 81%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진다.

▼ 해식애(海蝕崖)로 이루어진 천선대는 바다의 수석전시장이다. 바닷물 침식에 의해 층을 이룬 절벽 아래로 편마암층이 닳고 닳아 벼루처럼 반들반들하고 산자락 아래의 층암절벽은 수만 권의 책을 쌓아놓은 듯하다. 그래선지 이곳을 부안의 채석강(彩石江)보다 한수 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꽤 된단다. 원래의 채석강은 강물에 배를 띄우고 놀던 중국 시인 이태백이 강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다 물에 빠져 죽었다는 전설의 강물이다. 그만큼 아름다웠다는 얘기일 것이다. 문득 천선대의 너른 암반 위에다 술자리를 펼쳐보고 싶어진다. 그리고 이태백처럼 술 한 잔 기울여보고 싶다. 이곳 천선대도 채석강의 풍광에 비해 하나도 뒤질 게 없으니 말이다.

▼ 퇴적층 절리(節理)에 너럭바위만 있는 게 아니다. 얼마쯤 걸었을까 시루떡 모양의 바위들이 한꺼번에 사라져버린 것이다. 대신 먼 바다에서 밀려온 거센 파도가 몽돌이라는 색다른 구경거리를 만들어놓았다. 그게 비록 꾸밈이 없는 소탈한 모양새이지만 말이다. 치장하지 않은 게 매력인 이곳에서 절대 놓쳐서 안 될 게 있다면 그건 파도와 몽돌이 빚어내는 이중주다. 그 소리를 듣다보면 귀가 깨끗하게 씻기고 가슴 속까지 후련해진다. 한 마디로 기가 막히다.

▼ 자갈밭을 지나자 바윗길은 더욱 거칠어진다. 10m도 넘어 보이는 절벽이 산자락과 맞닿아 있는 것이다. 거기다 절벽 아래 바다는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시퍼렇다. 더 이상의 진행이 불가능하다는 얘기이다. 하는 수없이 둘레길로 되돌아가니 ‘천선대 가는 길’이라 적힌 이정표가 세워져 있었다. 그렇다면 천선대는 간조 때만 탐방객과의 만남을 허락하는 모양이다.

▼ 다시 올라선 둘레길. 지겟길을 연상시키는 옛길을 따라 잠시 걷자 컨테이너박스를 활용한 간이카페 ‘신선대 낭만캠핑’이 길손을 맞는다. 내걸고 있는 메뉴는 ‘후박나무 해물전’, 미소 고운 주인 아낙네에 구수한 기름 냄새까지 더해져 나그네의 침샘을 자극하지만 걸음을 멈출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금주령에 발이, 아니 목줄기가 묶인지도 벌써 3주. 중독에 가까운 술꾼인 나에게 술이 없는 안주는 극약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 이왕에 막걸리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곳 낭도에서만 맛볼 수 있다는 ‘낭도 젓샘막거리’ 얘기도 한번 해보자. 젖샘에서 난 물로 빚는다는 이 막걸리는 100년의 전통을 자랑한단다. 이웃하고 있는 섬 사도에 젖샘과 젖샘바위가 있는데, 옛날에 아이를 낳은 산모가 정성을 다해 빌면 젖이 많이 났다고 한다. 젖이 잘 나오지 않을 때, 이 샘물로 씻으면 젖이 샘처럼 솟았다고도 전해진다. 그런 약수로 술을 빚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건 숫제 보약인 셈이다. 여기서 팁 하나! 이 막걸리를 제대로 마셔보고 싶다면 여산마을 뒷골목에 있는 양조장으로 가면 된다. ‘도가식당’이란 간판으로 식당을 겸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항시 손님들로 붐비기 때문에 번호표를 받고 대기를 해야만 하는 번거로움 쯤은 감수해야만 한다.(첨부된 사진은 다른 분의 것을 빌려왔다)

▼ 조금 더 걷다가 ‘신선대’ 이정표를 보고 바닷가로 내려선다. 그리고 나무계단이 끝나는 곳에서 펑퍼짐한 암반과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진 해안선을 만난다. 층층이 쌓인 퇴적암이 누워있거나 서있는 등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다르게 부서졌던 천선대와는 확연히 다른 풍경이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풍광만큼은 그랜드캐니언이 부럽지 않다. 그 풍경이 하도 고왔기에 사람들은 이곳을 신선이 살만한 곳이라 했다. ‘신선대(神仙臺)’라 불리는 이유이다.

▼ 낭도의 주상절리(柱狀節理)는 이곳 신선대에서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명품 주상절리들에 익숙해진 내 눈에는 실망 그 자체였다. 무등산의 입석대나 서석대처럼 거대하지도, 그렇다고 제주도(중문)의 대포해안이나 포항의 달전리처럼 예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난 주상절리 근처에 있다는 ‘쌍용굴’과 ‘신선샘’을 그냥 지나쳐버리는 우를 범하고 말했다. 그 또한 보잘 것이 없을 것으로 지레짐작해버렸기 때문이다. 칠십에 가깝게 살아오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살아왔다고 자신했건만 아직도 내 수양은 멀었는가 보다.

▼ 그렇다고 실망할 것 까지는 없다. 오죽했으면 신선이 내려와 살만하다고까지 극찬했겠는가. 해식애가 만들어낸 비경들 말고도 이곳 신선대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일품이기 때문이다. 바다에는 ‘나무섬(木島)’이 돛단배처럼 떠다니고 그 뒤로는 나로우주발사대까지 시야에 잡힌다.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아까 길이 끊겨 둘레길로 올라가야만 했던 천선대와 남포등대까지 이어진 해안단애가 절경을 이루고 있다.

▼ 바윗길은 신선대에서 완전히 끝을 맺는다. 그리곤 해안가 산비탈에 내놓은 ‘둘레1길’을 따른다. 낭도의 둘레길은 대개 이렇다. 남해의 바닷가가 다 그러하듯 섬 남쪽은 먼 바다에서 거세게 불어 닥치는 파도가 만들어낸 해식애의 절벽과 단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위로 ‘비렁길’이 이어지는데, 그마저도 못한 곳에는 산비탈에 기대어 길을 냈다. 그런 특징을 살려 바다를 향한 전망대를 만들어두기도 했다.

▼ 전망대에 서자 휘늘어진 나뭇가지 아래로 자그만 섬 하나가 나타난다. 시골 양반이라도 되는 양 머리 꼭대기에 나무 몇 그루를 이고 있다고 해서 ‘나무섬(木島)’으로 불리는 무인도이다. 그 옆의 작은 바위섬은 ‘넙덕여’, 고래를 닮았다고 해서 ‘고래여’라고도 한단다. 여기서 ‘여’는 바위나 암초를 뜻한다.

▼ 5분 남짓 더 걸었을까 붉은 등대가 지키고 있는 낭도방파제가 나온다. 무척 긴 방파제로 여산 앞바다가 호수처럼 잔잔한 것은 저 방파제 덕분일 것이다. 탐방로는 이 방파제의 입구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 해안길을 따라 낭도해수욕장으로 향한다.

▼ 그렇게 잠시 걷자 ‘낭도해수욕장’이 손짓한다. 물이 맑고 경사가 완만한데다 방파제 안에 들어있어 먼 바다로부터 밀려오는 거센 파도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물빛이 예쁜 해수욕장은 넋 놓고 바라보기만 해도 행복해진다. 그래선지 늦가을인데도 불구하고 해변에서 노닐고 있는 가족들이 여럿 보였다. 모래사장 뒤편에는 최근 문을 열었다는 ‘거기휴게소’가 들어앉았다. 마당 쪽으로 펼쳐지는 풍경을 벗 삼아 낭도의 명물인 ‘젓샘 막걸리’라도 한잔 걸치기에 딱 좋은 곳이다.

▼ 해수욕장 옆, 폐교된 ‘낭도중학교’의 널찍한 운동장에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멋지다. 학생 한 명에 교직원 네 명이 근무하는 섬 학교로 화제가 되기도 했던 학교다. 이제는 문이 닫힌 공간. 다들 정지된 시간 속의 고요한 풍경이겠거니 하겠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모래사장을 운동장 삼았던 이 학교는 현재 변신 중이기 때문이다. 학교가 문을 닫은 이래 최근까지 수련장으로 이용되어 왔으나, 편의시설을 갖춘 캠핑장으로 탈바꿈하기 위해 리모델링하는 중이란다. 그건 그렇고, 낭도 트레킹은 이곳에서 끝났다고 보면 된다. 이제는 아까 지나왔던 길을 되돌아나가는 일만 남았기 때문이다. 오늘 트레킹은 총 4시간 30분이 걸렸다. 준비해간 간식을 먹느라 쉬었던 시간을 감안해도 4시간 가까이나 걸렸으니 거리에 비해 많이 걸린 셈이다. 바닷가 바위벼랑을 걷는 게 그만큼 어려웠다는 얘기일 것이다.

외연도(外煙島)

 

여행일 : ‘20. 9. 26(토)

소재지 :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외연도리

트레킹 코스 : 외연도선착장→서쪽 방파제→일출전망대→망재산→고래조지→고라금→내연발전소→누적금→돌삭금→작은명금→큰명금→약수터→노랑배→봉화산→헬기장→당산→외연초교→외연도선착장(소요시간 : 4시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바다 안개로 인해 섬의 형태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외연도는 대천항에서 뱃길로 두 시간을 달려가야 만날 수 있는 서해의 고도(孤島)이다. 보령시에 속한 70여개 섬 가운데 육지와 가장 멀리 떨어진 섬이기도 하다. 그래선지 섬 주민들은 고요한 새벽, 잔바람에 실려 온 닭 울음소리를 중국에서 들려오는 것이라 믿었다고 한다. 그만큼 섬사람들의 심리적 거리가 까마득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섬의 넓이는 대략 20만 평. 크지는 않지만 바다에서 곧바로 솟아오른 세 개의 산봉우리와 바다가 어우러져 멋진 경관을 보여준다. 이름도 참 예쁘다. '연기에 가린 듯 아득하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그래선지 지난 2007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관광 활성화를 위해 '가고 싶은 섬'으로 뽑기도 했다. 우리나라 수많은 섬 가운데 '가고 싶은 섬'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곳은 지금까지 외연도를 포함해 4곳(완도의 청산도, 신안의 홍도, 통영의 매물도)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외연도는 낯설다. 그래서 외연도는 덜 붐빈다. 그나마 낚시꾼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난 정도다.

 

▼ 찾아오는 방법

외연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일단 ‘대천항(보령시 신흑동)’으로 와야만 한다. 외연도를 왕복하는 여객선이 이곳 대천여객선터미널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6~9월 기준으로 하루에 2번(08:00. 14:00) 운항한다. 비수기는 평일에 한해 1회(10:00)만 운행되기도 하니 배편을 미리 확인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참고로 기착지인 외연도에서는 승객의 승하선을 위해 10분간 멈추었다가 되돌아온다.

▼ 우리가 타고 갈 ‘웨스트 프론티어호’이다. 쾌속선으로 215명의 승객을 실을 수 있으며, 선박의 톤수는 140톤. 썩 크지는 않지만 선내에 매점까지 갖추고 있다. 중간에 호도와 녹도를 거쳐 외연도로 들어가는데, 외연도까지의 배 삯은 성인 기준으로 1만6500원이다.

▼ ‘대천항’을 출발한지 1시간 40분 만에 ‘외연도’에 도착했다. 섬으로 접어들자 바다로부터 솟아오른 세 개의 산이 보인다. 동쪽 끝에 위치한 것이 봉화산(아래 사진, 279m)이다. 중간이 당산(73m)이고, 서쪽 끝에 망재산(171m)이 있는데 오늘 트레킹은 이 산들을 모두 올라보는 것으로 계획되어 있다. 세 개의 산에 둘러싸인 섬 한가운데는 아주 낮은 지대를 이루고 있어 마을이 형성되기에는 안성맞춤이다. 그곳에 외연도 마을이 들어앉았다. 섬은 큰 편이지만 마을은 단 하나. 보이는 것이 전부다.

▼ 크고 기다란 방파제에 안전하게 둘러싸인 항구는 잘 축조된 계단식 선착장과 물양장을 갖추고 있다. 포구에는 꽤 많은 고깃배들이 정박하고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출어를 위해 쉬는 시간인 듯 외연도는 전체적으로 고즈넉한 분위기이다. 저 배들은 주로 야간에 조업을 나간다고 한다. 그런데 이게 끝내주게 아름다웠던 모양이다. 수많은 어선들이 대낮처럼 불을 밝히며 고기를 잡는 풍경을 '외연도 어화'라고 하면서 '보령 8경'의 하나로 꼽는 걸 보면 말이다.

▼ 선착장에는 ‘외연도 나들터’라는 방문자센터가 지어져 있었다. 여객선터미널을 겸하는데 꾸며놓은 뽄새는 대천항보다 오히려 한 수 위이다. 외연도의 바다와 숲속에 사는 동식물들을 입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는가 하면, 외연도초등학교 학생들의 사진과 아이들이 만든 소식지도 전시해 놓았다. 또한 외부 벽면에는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의 것으로 보이는 손도장과 그들이 남긴 멘트를 벽화처럼 그려 넣었다. 참! 외연도는 무인해설시스템인 RF-ID을 운영하고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스마트폰에 앱을 다운받은 후 방문자센터에서 빌려주는 목걸이 형태의 RF-ID를 연동하면 안내판이 설치된 곳에서 자동으로 해설을 들을 수 있다.

▼ 왼편 망재산을 향해 마을 앞길을 걸으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골목마다 어촌풍경을 그린 예쁜 벽화들이 눈길을 끈다. 외연도초등학교 학생들이 서울에서 온 작가들과 함께 그린 작품이라는데 시간이 되면 동네 벽화를 따라 골목길을 걸어보는 것도 멋진 산책이 될 것 같다. 그건 그렇고 자그마한 섬인데도 마을은 번화한 모습이었다. 해양경찰대 및 보령경찰서의 지소, 보건진료소, 우체국 등의 관공서 외에도 민박집과 식당, 가게들이 여럿 보인다. 부녀회에서 운영하는 펜션도 하나 있단다.

▼ 망재산 등산로는 서쪽 방파제의 입구에서 열린다. 들머리에 ‘망재산 등산로’라는 이름표를 단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정표의 망재산 방향은 텅 비어있다. 그러니 산자락으로 파고든다는 생각으로 진행하면 된다. 참! 방파제 근처에 까나리액젓 발효 탱크가 수도 없이 늘어서 있다는 걸 깜빡 잊을 뻔했다. 맞다. 이곳 외연도는 까나리액젓의 생산지로 유명하단다. ‘까나리’라는 멸치 비슷한 생선으로 담는 액젓인데, 이곳 외연도가 가장 유명한 까나리 어획 및 액젓의 제조기지라고 한다.

▼ 터널을 이루고 있는 산죽 숲을 지나자 길이 둘로 나뉜다. 들머리에서 5분 조금 못되는 지점이다. 이정표는 이곳에서 왼쪽으로 170m쯤 떨어진 곳에 ‘일출전망대’가 있음을 알려준다. 그러니 어찌 들어가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 3분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일출전망대는 그저 바닷가 언덕일 따름이다. 전망대가 아니라 조망터라고 불러야 옳지 않을까 싶다. 뿐만 아니라 어떠한 안전시설도 보이지 않는다. 일출을 보지 않으려면 일부러 찾아올 필요가 없다는 얘기이다.

▼ 그렇다고 조망까지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다. 잡목에 살짝 가려있긴 하지만 외연도 마을과 동·서방파제, 그리고 ‘수도(水島)’가 동쪽에서 고개를 내미는가 하면, 서쪽으로는 무마도(貿馬島)와 석도(石島), 오도(梧島), 거기다 당산양도의 일부까지 조망된다.

▼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정상으로 향한다. 산길은 초반부터 가파르다. 아니 정상에 이를 때까지 계속해서 가파르다. 거기다 가슴에 담아둘만한 볼거리까지 없으니 힘들기만 할 뿐이다. 그저 동백나무에서 소사나무로 변하는 식생의 변화와 외연도 마을과 주변 섬들이 두어 번 조망되는 것이 전부이다. 그것도 주변의 나무들이 풍경화의 아랫도리와 옆구리를 대부분 갉아먹어 버렸다.

▼ 그렇게 15분 정도 올라서니 드디어 정상이다. 하지만 정상이라는 느낌은 전혀 없다. 봉긋하니 솟아오르지도 않았고, 정상석이나 이정표 등 이곳이 망재산의 정상이라는 그 어떤 표식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저 앞서 다녀간 이들이 매달아놓은 리본이 무당집 처마처럼 덕지덕지 매달려 있을 따름이다. 정상에서의 조망 또한 썩 뛰어나지 않았다. 오르내리는 도중에 만나는 바위지대에서 바라보는 조망이 정상보다 훨씬 뛰어나다.

▼ 하산은 반대방향이다. 가파르기 짝이 없는데다 안전시설까지 없으니 안전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래선지 올라올 때보다 2분을 떠 쓴, 17분이 걸려서야 반대편 해안에 내려설 수 있었다. 그렇게 내려선 바닷가는 굴업도의 개머리언덕을 연상시키는 초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지명은 ‘고래조지’. 바다로 튀어나간 곶(串)의 생김새가 고래의 성기를 닮았다하여 그런 난감한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이름이야 어떻든 이곳 고래조지는 고라금과 함께 횡견도와 대청도 사이로 길게 여운을 남기며 스러져가는 해넘이를 볼 수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 고래조지는 외연도의 최고 비경을 구경할 수 있는 핫플레이스다. 외연열도(外煙列島)를 형성하고 있는 수많은 섬들이 한눈에 쏙 들어오기 때문이다. 바로 앞의 섬은 당산양도이다. 그 뒤로 보이는 큰 섬은 오도, 왼편의 작은 섬은 무마도이다. 오도의 오른편에는 소횡경도와 횡경도가 있다. 그리고 연이어 나타나는 대청도와 중청도, 소청도가 외연열도라는 풍경화를 완성시킨다.

▼ 이렇게 경치 좋은 곳을 그냥 지나칠 수야 없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냉큼 바위위로 올라간 집사람이 포즈부터 잡고 본다. 그녀의 뒤로 외연열도의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다. 때를 잘 맞춘다면 저 사진의 배경으로 일몰의 장관까지 넣을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이곳을 ‘처음 와본 사람들은 있어도, 한 번만 와본 사람은 없다’고까지 했다. 외연도에 처음 온 사람들은 대부분 ‘당산 상록수림’이나 ‘누적금에서 노랑배까지의 해안산책로’, ‘봉화산 등산로’ 등을 찾는데, 이곳 고래조지를 한번이라도 와본 사람은 꼭 다시 찾는다는 것이다. 그만큼 아름답다는 얘기일 것이다.

▼ 아름다운 경관에 취해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대다가 다음 행선지로 향한다. 망재산의 아랫자락을 헤집으며 난 길은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청도(靑島 : 대청도·중청도·소청도)를 왼편 옆구리에 차고 이어진다. 파란색의 바위가 많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는데, 가장 큰 섬인 대청도는 고려 충렬왕 때 최유엄이 바른말을 하다가 귀양 온 섬으로 유명하다. 그는 유배를 온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천하낙원이 따로 없다며 이 섬을 극찬했다고 한다. 참고로 중청도와 매바위 사이에 있는 소청도는 썰물 때만 고개를 내미는 자그마한 바위섬이다. 보통 때는 바다 속에 웅크리고 있으니 섬이라기보다는 암초라고 하는 게 옳다.

▼ 탐방로는 바닷가 바위절벽 위로 아슬아슬하게 나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바위구간에 굵직한 밧줄을 매어놓았는가 하면, 비탈진 곳에도 밧줄난간을 둘러쳐 안전을 도모했다. 그렇다고 안전을 무시하라는 얘기는 아니다. 조심조심 걷는 것은 기본. 그러다 시야가 열리기라도 하면 대청도와 중청도, 사학금이 들어간 멋진 풍경을 눈에 담아보라는 얘기이다.

▼ 그렇게 걷기를 20분, 마을이 살짝 얼굴을 내미는 언덕에 이르고, 여기서 길게 놓인 계단을 이용해 바닷가로 내려서면 ‘고라금’이다. 외연도의 해안은 ‘금’이라 부른다. 오랜 세월, 거센 파도가 다듬어 놓은 몽돌과 바위가 햇살에 반짝이는 것을 보고 그리 불렀단다. 유난히도 크고 둥글게 변한 그것들이 황금색으로 빛나기라도 했던 모양이다. 덕분에 외연도에서는 사학금이나 돌삭금, 누적금, 작은명금, 큰명금 같은 예쁜 이름의 해안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 ‘고라금’은 동글동글한 자갈밭을 가운데에 놓고 크고 투박한 바위들이 양 옆을 감싸고 있는 모양새이다. 해변에 내려서면 대청도와 중청도, 소청도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그 덕분에 여행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이곳은 캠핑족들이 선호하는 곳이라고 한다. 대청도와 중청도 사이로 길게 여운을 남기며 넘어가는 해넘이를 제대로 볼 수 있기 때문이란다. 몽돌에 부딪히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동안 쌓였던 온갖 시름이 씻은 듯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래선지 캠핑족들을 위한 데크도 만들어놓았다. 아니 이곳 말고도 외연도 곳곳에 이런 데크가 만들어져 있었다.

▼ 고라금에서 다시 계단을 올라간 후 넓은 흙길을 2~3분 정도 내려가니 한국전력 소속의 내연발전소가 나온다. 철문에는 외연도 해수담수화시설 안내판도 걸려 있다. 외연도의 식수는 샘물을 퍼 올려 저장해놓은 저장탱크의 물을 정수해 사용한다. 그래도 부족한 물은 바닷물을 담수(淡水)로 바꿔 공급한단다.

▼ 한전 앞 삼거리에서 좌회전하면, 잠시 후 연못까지 갖춘 공원에 이른다. 규모가 크지 않지만 주민들을 위한 다양한 운동시설과 쉼터 등이 마련되어 있다. 이 공원의 모퉁이에 세워놓은 이정표(망재산 1.7km, 고라금 430m/ 당산 450m, 누적금520m)가 왼편으로 방향을 꺾으라고 일러준다. 당산·누적금 방향이다. 이어서 만나게 되는 또 다른 갈림길(이정표 : 누적금 190m, 돌삭금 460m/ 당산 등산로 520m)에서는 누적금 방향이다. 당산은 맨 마지막에 들러볼 예정이기 때문이다.

▼ 조금 더 걷자 또 다른 삼거리가 나온다. 고라금에서 15분쯤 되는 지점인데 직진하면 ‘누적금’, 오른편은 고개 넘어 ‘돌삭금’으로 가는 길이다. 누적금은 백패커(backpacker)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다. 그래선지 캠핑 사이트처럼 생긴 데크도 만들어 놓았는데 시야가 툭 트이는 게 전망대로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예쁜 몽돌이 깔려있는 자그마한 해안에 내려서니 왼쪽으로는 횡견도, 정면에는 대청도와 중청도, 그리고 오른편으로 상투바위가 또렷이 보인다. 참고로 누적금(노적금)이란 지명은 바닷가 바위들의 모양새가 볏단(노적)을 쌓아 놓은 것 같다는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노적을 쌓아 올린 듯한 바위를 이용해 외연도 주민들을 먹여 살린 전횡장군의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다.

▼ ‘누적금’에서 빠져나와 ‘돌삭금’으로 향한다. 제법 너른 임도를 따라 걷는데 뱀이 자주 출몰하는 지역이라는 경고판이 세워져 있다. 웃자란 저 잡초더미 어디에 뱀이 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걸음이 빨라진다. 도망치듯이 작은 고갯마루를 넘자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돌삭금의 대문 겪인 산죽터널이 길손을 맞는다. 누적금에서 10분 조금 못되는 지점이다.

▼ 산죽밭을 지나면 ‘돌삭금’이다. 이곳도 역시 몽돌이 아름다운 해안이다. 아니 조금 전에 지나왔던 두 곳보다 한수 위라고 해야겠다. 큰 바위들이 들어선 양 옆이야 같은 모양새이지만 가운데의 자갈밭에 더 작고 아름다운 자갈들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조망은 고라금만 못한 편이었다. ‘노랑배’까지 이어지는 바닷가와 망망대해가 눈에 들어올 따름이다.

▼ ‘돌삭금’부터는 해외, 그것도 유명 여행지에서나 만날 법한 잘 닦인 탐방로를 따른다. 넓적한 돌을 바닥에 깔았는가 하면, 바닷가 쪽에는 통나무로 난간을 둘러 멋스러움을 더했다. 그게 달력에 넣어도 될 만큼 아름다운 풍경화를 그려내는 것이다.

▼ 바닷가로 내려가는 시멘트계단이 놓여있기에 내려가 봤더니 기괴한 문양을 한 바위들이 쪼개져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신기했다.

▼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운 경관에 취해 걷다보면 어느덧 ‘작은 명금’이다. 햇빛에 반짝이는 몽돌이 금처럼 보인다는 명금해변은 몽돌의 크기에 따라 큰 명금과 작은 명금으로 나뉜다. 참고로 작은명금은 삼거리이다. 이곳에서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올라가면 마을로 갈 수 있다.

▼ ‘큰 명금’은 작은 명금에서 지근거리에 있다. 두 해변 모두 외연도의 대표적인 몽돌해안인데 ‘큰’이란 몽돌의 크기가 굵다는 수식어이다. 실제로도 눈에 띄는 몽돌마다 타조알 만큼이나 굵직굵직했다.

▼ ‘명금’을 끝으로 탐방로는 바닷가를 떠난다. 노랑배로 이어지는 이 길은 해안 쪽으로 이어지지 않고 봉화산 허리길로 이어진다. 그래서 큰 명금에서 오른쪽으로 올라간다. 잘 닦인 탐방로를 따르다보면 바다와 숲은 걷는 이의 호흡과 시선에 자연스레 일치된다. 해변을 떠나면서 한마디. 외연도는 하도 물이 맑아 어디에 들어가도 바닥이 훤히 보일 정도다. 그런데도 외연도에는 번듯한 해수욕장이 하나도 없다. 몽돌해변이라고 해도 돌멩이 크기가 커서 해수욕장으로는 맞지 않다.

▼ 약간의 오르막길을 잠시 걷자 위장병에 효험이 있다는 ‘약수터’가 나온다. 곁의 팽나무 그늘 아래에는 쉼터도 만들어 놓았다. 병도 고친다는 소문에 혹해서 다가가다 그곳에서 새참을 먹고 있던 주민들을 만났다. 그들은 마스크를 끼고 걷는 우리 부부가 보기 좋다며 버터로 구워낸 전복을 권했다. 그것도 이곳 외연도의 해녀(海女)들이 물질로 건져 올린 자연산이란다. 거기다 나는 소주까지 두어 잔, 심심찮게 대작을 즐기는 편인데도 불구하고 얼큰하게 취해버렸다. 술이 아니라 그네들의 인심에 취했을 것이다.

▼ 우물 부근에서 길은 둘(이정표 : 노랑배 930m/ 명금 220m)로 나뉜다. 이정표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오른편은 마을로 연결된다. ‘노랑배’는 물론 산 허릿길을 따라야 한다. 이 길을 걷다가 ‘해막(解幕) 터’를 만났다. 해막은 당제 기간에 예상되는 출산의 ‘피 부정’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마을신의 영역인 마을에서 임신부를 마을 바깥으로 피신시켜 그 기간 동안 생활하며 때로는 출산도 하도록 만든 오두막이다. 때문에 피막(避幕) 또는 산막(産幕)이라고도 불렀는데 지금은 오두막은 없어지고 돌담 만 남아 있다. 해막 아래에는 물이 마르지 않는 ‘해막샘’도 있었다고 하는데 눈에 띄지는 않았다. 칠월칠석날 탯물을 맞으러 간다면서 샘물로 몸을 씻는 세시풍속까지 있었다는데 말이다

▼ 그렇게 20분쯤 걷자 바닷가 방향 길가에 데크가 들어앉았다. 매배와 상투바위, 매바위는 물론이고 대청도와 중청도, 횡경도까지 눈에 들어오는 멋진 전망대이다. 다만 웃자란 잡목들이 그런 풍경화의 아랫도리를 잘라먹어 버리는 것은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 그게 아쉬웠던지 전망대에는 주요 포인트의 설명을 곁들인 조망안내도를 세웠다. ‘10가지 보물섬’이란 외연도의 별명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그 10가지 보물은 안개, 하늘, 태양, 바다, 몽돌, 바위, 무인도, 상록수림, 풍어당제와 아이들이다.

▼ 몇 걸음 더 걸으니 ‘노랑배’이다. 노랑배는 노란빛을 띠는 암석이 해안절벽을 이룬 곳이다. 이 절벽이 커다란 배의 앞머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배’ 자를 첨가했단다. 그렇다면 ‘고깔배’나 ‘마당배’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혹시 ‘바위’를 ‘배’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해답이 보이지 않는 ‘노랑배’의 어원에 대한 의문이었다. 아무튼 이곳 ‘노랑배’에는 해안절벽 위에 2개의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 가운데 왼편의 것은 병풍바위와 돌삭금, 명금 등 외연도의 해안산책길과 매바위, 대청도, 소청도 등이 잘 조망된다.

▼ 가장 눈길을 끄는 풍경은 역시 여인바위와 매바위 등 특이한 모양의 바위섬들이다. 여인바위는 상투를 튼 머리모양이라고 해서 ‘상투바위’, 혹은 중이 바람을 등지고 비는 형상과 닮았다고 해서 ‘중 둥글 빈대기 바위’라고도 부른다. 그 옆에는 여인바위를 보호하듯 매바위가 바닷가에서 웅크리고 금방이라도 날개를 펼치려는 듯 우람하게 솟아있다. 그 뒤로 가까이 보이는 바위섬은 중청도이며, 상투바위 쪽으로 툭 튀어나온 해안절벽은 ‘매배’라고 부른다.

▼ 노랑배의 또 다른 전망대는 외로움이 포인트다. 망망대해에 작은 바위섬 하나만이 눈에 들어올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하도 멀다보니 관찰용 망원경까지 설치해 놓았다. 지도에는 저 섬을 ‘관장도’라고 표기해 놓았던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그렇다고 그게 다는 아니다. 이 전망대가 외연도에서 서해 일몰을 가장 아름답게 볼 수 있는 곳 가운데 하나로 꼽히기 때문이다. 중청도와 대청도 너머로 떨어지는 일몰이 빼어나게 아름답다는 것이다.

▼ 노랑배를 빠져나오니 곧이어 삼거리가 나온다. 봉화산 등산로는 이정표가 가리키는 오른편 방향이지만 우리 부부의 당초 계획에는 없었다. ‘마당배’라는 색다른 볼거리를 눈에 담고 싶어서이다. 하지만 들머리에 세워놓은 경고판에 발목이 잡혀버렸다. 나무를 해 나르던 ‘지게 길’이라서 길이 좁고 험하니 트레킹에 능숙한 사람만 가라는 것이다. 거기다 웃자란 잡초와 잡목 때문에 통행이 어렵다는 산행대장의 경고까지 있었으니 어찌 모험을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다녀온 사람들은 탐방로의 정비가 잘 되어 있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했다. 주민들이 조심하라는 의미로 ‘위험’이라는 조금 과장된 경고판을 세워놓은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 억지춘향 격으로 택한 ‘봉화산 등산로’는 썩 좋지 않았다. 경사가 심한데다 대부분의 구간이 ‘너덜길’이기 때문이다. 정상까지 20분이면 충분하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 그렇게 올라선 ‘봉화산’은 지명처럼 봉화대가 주인이다. 주인에 대한 예의였는지 정상석은 세워놓지 않았다. 이곳이 정상이라는 것을 알리는 다른 표식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이곳이 ‘봉화대터’였음을 알리는 ‘안내판’ 하나가 이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참고로 외연도 봉화대는 조선전기 왜적을 감시하고 바다건너 중국을 경계하는 역할과 조선후기 자주 출몰했던 이양선에 대응하기 위한 충청수영의 권설봉수(權設烽燧 : 군영에서 자체적으로 운영하던 봉수)였다. 어청도 봉수에서 시작된 신호가 외연도, 녹도, 원산도를 거쳐 충청수영성 남쪽 1.2㎞ 지점에 있는 ‘망해정 봉수(보령시 오천면)’로 전달되는 시스템이다. 하지만 할 일이 없어져버린 지금은 둘레 24.5m의 원형 석축만 남아있을 따름이다. 아니 봉화대를 감싸고 있던 높이 130~200㎝의 담장만 남았다.

▼ 정상에서의 조망은 쏠쏠한 편이다. 섬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고 외연열도의 일부가 보인다. 외연열도는 외연도를 어미섬으로 하여 인근 10여개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멀리 떨어진 황도를 제외하고는 대청도·중청도·소청도·외연도·수도·당산양도·무마도·석도·횡견도·외횡견도·외오도·오도 등이 나란히 줄지어 있다. 그 가운데 횡견도, 황도, 오도 등에는 지난 1970년대까지도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 북한과 대치된 상태에서 간첩들의 해상 침투로 인한 안보 취약지구가 되면서 외연도나 육지로 이주하고 지금은 무인도가 되었다.

▼ 하산을 시작한다. 남쪽해안을 바라보며 외연도 마을로 내려서는 코스인데, 덕분에 무마도와 오도, 횡간도, 석도 등 남서쪽 바다에 떠있는 외연열도의 섬들을 눈에 담아볼 수 있다. 외연도의 자연은 육지와 가까운 섬과는 다른 색을 가지고 있다. 안개가 깊은 섬이라지만 그것이 걷힌 하늘, 태양, 바다는 더욱 진하고 또 선명했다.

▼ 앞서가던 집사람의 엎드리는 빈도가 잦아지는가 싶더니 이윽고 주저앉아 버린다. 그리곤 달래 채취에 여념이 없다. 근처가 아예 달래 밭이었던 것이다. 이 달래는 아까 뜯었던 갓과 함께 김치로 변해, 모래쯤이면 우리 집 밥상에 올라올 것이다. 또한 노릇노릇 구워진 삼겹살에라도 곁들일라치면 술안주로는 이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을 정도이다.

▼ 정상에서 15분쯤 내려섰을까 안내판 두 개가 세워진 공터가 나온다. 우측으로는 사학금, 상투바위, 매바위, 돌삭금, 작은 명금 등 해안 명소들을 소개하고 좌측으로는 등대섬 수도를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외연도 마을과 망재산의 뒤편바다에 떠있는 섬들이 더 잘 보이는 곳이다. 오도와 횡견도, 대청도, 중청도 등 외연열도의 대부분을 한꺼번에 눈에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잠시 후 널찍한 데크 쉼터에 내려선다. 이정표(봉화산 정상 510m/ 명금 490m, 마을 650m)는 두 곳의 방향만 표시하고 있지만 사실 이곳은 삼거리이다. 외연도마을을 조망할 수 있는 봉화산 마루까지 길이 나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부부에겐 흥미를 끌지 못했기에 다녀오지 않았다. 대신 이곳에서 반주를 곁들여가며 느긋하게 점심식사를 즐겼다.

▼ 이젠 ‘당산’으로 가볼 차례이다. 명금 방향으로 내려서는 길, 마을 뒤쪽의 식수저장소와 헬기장이 보인다. 그 뒤로 보이는 짙은 숲이 당산이다. 잠시 후 탐방로는 노랑배 갈림길(이정표 : 명금 250m, 노랑배 950m/ 봉화산 정상 800m)에 이르게 되고, 당산은 이정표에 방향표시가 나타나지 않는 방향으로 진행하면 된다.

▼ 헬기장과 대기측정소 사잇길을 지나자 외연도의 북쪽 해안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전망데크(캠핑용이라는 사람도 있었다)’가 나오고, 이어서 긴 나무계단 한 가닥이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당산으로 오르는 산책로인데 당산을 한 바퀴 돌 수 있도록 내놓았다. 참고로 당산은 마을 풍어제의 ‘주무대’이다.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이면 마을 주민이 모여 풍어와 안전을 위해 당제를 지내고 띠배를 만들어 마을 앞바다에 띄우는 '풍어당놀이'가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는데, 역사가 벌써 400여 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외연도의 당제(堂祭, 충남도 무형문화재 제54호)는 풍어당제(전횡장군 사당)와 산제(산신당), 용왕제(띄배 퇴송), 안당고사(마을 어귀) 등으로 짜여있다. 당제를 지내는 동안 당주는 일체 말을 해서는 안 되고, 당제에서 한복 3벌을 위패에 걸치는 것과 ‘지태’라 불리는 소를 제물로 올리는 것은 다른 당제에서 보기 드문 전통이다.

▼ 산을 반 바퀴쯤 돌자 사당 하나가 나온다. 옛날 중국 제(齊)나라의 무장(武將) 전횡(田橫)을 모시는 사당이다. 전횡은 제나라가 망하고 한(漢)나라가 들어서자 자신을 따르는 500여 명의 군사와 함께 쫓기는 몸이 되어 동쪽으로 도망가다 외연도에 상륙하여 정착하게 된다. 그러나 한 고조가 항복하지 않으면 섬을 토벌하겠다며 자신의 신하가 될 것을 요구하자 섬사람 및 군사들의 안전을 위해 낙양으로 건너가 자결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이를 계기로 섬사람들은 전횡을 수호신으로 받들어 사당을 짓고 지금까지 풍어당제 기간에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참! 사당 뒤에 있다는 ‘연리지나무’는 눈에 띄지 않았다. 각기 다른 뿌리에서 자란 두 그루의 동백나무가 이어진 틈새 없이 공중에서 맞닿아 하나의 가지로 연결되어 일명 '사랑나무'로 불린다고 했는데 안타깝게도 지난 2010년 태풍 '곤파스'로 인해 가지가 부러졌단다.

▼ 당산은 하늘 한 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수목들로 가득 차 있었다. 수세기 동안 자연 그대로 보존되어 온 후박나무, 동백나무, 식나무 등의 상록활엽수와 팽나무, 찰피나무 등의 낙엽활엽수가 울창하다. 특히 높이 20m에 줄기 직경이 1m도 넘는 팽나무와 높이가 18m에 이른다는 동백나무들이 섞여 있어 장관이다. 면적은 3만 2,727㎡. 규모는 크지 않지만 외연도를 비롯한 우리나라 남서부 도서지방의 옛 모습을 짐작케 하는 귀중한 자원으로 알려져 있다. 외연도상록수림이 천연기념물(제136호)로까지 지정된 이유가 아닐까 싶다.

▼ 당산에서 내려오면 10가지 보물 중 아이들의 보금자리인 외연도초등학교다. ‘이승복 소년’과 ‘봉화를 든 남자아이('체력은 국력)' 동상으로 대체된 정문으로 들어서면 알록달록한 7칸의 2층짜리 건물이 떡 버티고 있다. 옥상에는 태양열 집열판이 세워져 있고 단상 지붕 위에는 시계가 있다. 학생 수가 6명인 점을 감안하면 대단한 시설이라 하겠다. 다른 한편으론 오른쪽에다 작은 섬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현대적인 건물로 ‘주민복합센터’를 지어놓은 이유도 될 것이고 말이다. 정문 앞은 기준점(외연도의 경도와 위도 표시)과 정자쉼터, ‘책 읽는 소녀상’이 배치된 공원으로 꾸며져 있었다.

♧ 에필로그(epilogue), 외연도 트레킹은 정확히 4시간이 걸렸다. 느긋하게 즐겼던 점심시간까지 합쳐도 5시간을 채 넘기지 못한다. 때문에 1시간이나 되는 자투리시간이 부담이 되어 버렸다. 우리가 타고나갈 여객선의 1항차와 2항차의 시간차는 6시간. 우리 마음대로 그 시간을 단축시킬 수야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그런데 섬이란 게 본디 시간을 때울만한 시설이 빈약하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거기다 코로나19라는 작금의 현실은 식당까지도 문을 닫아버렸다. 즐거워야 할 여유시간이 고역으로 바뀐 이유이다. 이 모든 것의 발단은 트레킹의 속도조절을 잘못해서 일어난 결과이지 싶다. 경관 좋기로 유명한 외연도이니 조금 더 꼼꼼히 들여다본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또 하나. 잘못된 정보도 문제가 됐다. 마당배까지의 길이 걸을 수 없을 정도로 험하다는 멘트만 없었어도 여객선터미널에서 부지하세월(不知何歲月)로 동내 개와 놀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안 섬티아고 순례길트레킹

 

여행일 : ‘20. 7. 11()

소재지 : 전라남도 신안군 증도면 대기점도·소기점도·소악도·진섬·딴섬

트레킹 코스 : 대기점도 선착장대기점도(베드로의 집, 안드레아의 집, 야고보의 집, 요한의 집, 필립의 집)소기점도(바르톨로메오의 집, 토마스의 집)소악도(마태오의 집, 작은 야고보의 집)진섬(유다 다테오의 집, 시몬의 집)딴섬(가롯 유다의 집)소악도선착장(소요시간 : 3시간 30)

 

함께한 사람들 : 가보기 산악회

 

 

특징 : 순례길 하면 떠오르는 곳이 산티아고이다. 순례란 두 다리로 하는 명상이며 사색이자 치유의 시간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찾는 이유일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순례길이 있다. 천사의 섬‘. 신안의 대기점도와 소기점도, 소악도, 진섬, 딴섬까지 다섯 개의 섬에 열두 제자를 상징하는 12개의 교회를 짓고 길을 이어 섬티아고 순례길이란 이름을 붙였다. 이 작은 교회들을 찾는 길은 해안을 돌아야 하고 노두길을 건너는가 하면 낮은 언덕을 넘고 마을을 지나고 숲길을 걸어야 한다. 이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어김없이 서 있는 멋진 열두 개의 꼬맹이 교회가 기다린다. 그 길이 국내 최초의 섬 순례길이자 한국의 산티아고, 이름 하여 섬 산티아고이다.

 

찾아오는 방법

대기점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일단 송공항 여객선터미널까지 와야만 한다. 섬으로 들어가는 여객선이 이곳 송공항(신안군 압해읍 송공리)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서해안고속도로 죽림 JC(무안군 삼향읍 맥포리)’에서 2번 국도로 갈아타고 압해도로 들어온 다음, 송공교차로(신안군 압해읍 송공리 3-3)에서 빠져나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송공항에 이르게 된다. 참고로 전남은 섬 부자다. 우리나라 3,300여 개 섬 중 2,165개가 전남에 있다. 그중에서도 신안군에 1004개가 모여 있단다. 신안군을 천사 섬이라 부르는 이유다.

 

 

선착장에 서면 끝도 없이 뻗어나간 다리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압해도(押海島)와 암태도(巖泰島)를 잇는 천사대교201944일에 개통했다. 총연장이 10.8나 될 뿐만 아니라 사장교와 현수교를 동시에 배치한 국내 최초의 다리라고 한다. ‘천사대교라는 이름은 1004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신안군의 지역 특성을 반영하여 지어졌다. 암태도 쪽의 사장교는 주경간의 길이를 1004m로 건설하여 1004개의 신안군 섬들을 모티브로 했고, 135m의 주탑 정면에는 마름모꼴 형태(가로보)를 새겨 넣어 '신안 다이아몬드 제도'를 형상화했단다.

 

 

우리가 타고 갈 해진해운(061-279-4222) 소속의 천사 아일랜드호이다. ‘천사섬인 신안군에서는 배까지도 천사인 모양이다. 송공항과 병풍도를 하루 4(6:50, 9:30, 12:50, 15:30) 왕복하는 이 차도선(車渡船)은 중간에 당사도와 소악도, 매화도, 소기점도, 대기점도에 들른다. 하지만 돌아올 때는 대기점도와 소기점도를 거른다는 점은 꼭 기억해 두자. 또 하나, 배 시간이 계절과 물때, 기상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 배에 오르기 전 신분증 검사를 하면서 발열체크까지 함께 하고 있었다는 걸 깜빡 잊을 뻔했다. 섬 주민들의 건강을 지켜주려는 노력의 일환이지 싶다.

 

 

송공항을 출발한지 1시간 만에 대기점도 선착장에 도착했다. 다섯 개의 섬에 12사도의 교회가 들어서 있으나 선착장은 대기점도와 소기점도, 그리고 소악도 등 세 곳에 만들어져 있다. 그런데도 이곳 대기점도에서 내린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위에서 얘기했듯이 병풍도에서 뱃머리를 돌린 배가 돌아갈 때는 이곳에 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감안한 신안군에서도 대기점도선착장에서 섬티아고 순례길을 출발하도록 했다.

 

 

 

섬에 들어선 예배당의 주인은 예수의 열두 제자인 베드로, 안드레아(안드레), 야고보, 요한, 필립(빌립), 바르톨로메오(바돌로매), 토마스(도마), 마태오(마태), 작은 야고보, 유다 타대오, 시몬, 가롯 유다이다. 순례길은 1번 베드로의 집부터 12번 가롯 유다의 집까지 순서대로 연결시킨다. 생김새가 제각각인 이 예배당들은 내부도 독특한 분위기의 작은 기도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12사도의 이름과 병행해 건강ㆍ생각ㆍ그리움ㆍ평화ㆍ생명ㆍ감사ㆍ인연ㆍ기쁨ㆍ소원ㆍ칭찬ㆍ사랑ㆍ지혜의 집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어 종교와 상관없이 자신을 돌아보는 사색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대기점도 선착장에서 내리면 산토리니(Santorini)의 건축물처럼 흰색과 파란색이 돋보이는 베드로의 집이 먼저 반긴다. 코발트블루 사파이어 지붕과 눈부시게 흰 회벽. 이색적인 풍경이 단숨에 섬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과 시선을 빼앗아버린다. 건물 옆에는 자그만 종도 매달아 놓았다. 여행자들은 누구 할 것 없이 종을 울리며 순례의 첫 발걸음을 내디딘다.

 

 

 

김윤환 작가가 설계했다는 건강의 집안은 수채화가 얌전하다. 전면에 십자가를 걸고 그 아래 제단에는 촛대를 놓았다. 그리고 둘 사이에는 창문을 배치해 하시라도 바다를 내다볼 수 있도록 했다. 빙 둘러 의자를 놓아 기도를 드리고 싶은 순례자들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선착장에 자리한 탓인지 화장실을 갖춘 유일한 예배당이기도 하다. 예배당이 대합실로도 이용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12사도의 길순례는 대기점도 선착장에서 시작된다. 순례길 시작을 알리는 작은 종을 치고 방파제 겸 선착장 길을 따라 걸었다. 방파제가 시작되는 지점에 분홍색 자전거를 빌려주는 대여소가 있어 잠시 걸음을 멈춘다. 12의 거리를 부담스러워하는 집사람 친구에게 자전거를 권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그녀는 교회 두어 곳만 건너뛰고 완주하겠다며 손사래를 친다. 우리 부부야 물론 두 발로 걷는 게 원칙이다. 참고로 마을에서 운영하는 자전거 대여소는 이곳 말고도 소악도 선착장에 하나 더 있다. 빌린 곳과 다른 대여소에 반납해도 된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15000원인 이용료는 1만 원으로 늘어난단다. 대여 문의 : 010-6612-5239

 

 

두 번째 예배당인 안드레아의 집을 향해 길을 나선다. 특별할 게 없는 밋밋한 풍경이 펼쳐진다. 맞다. 대기점도는 수려한 경관을 지닌 섬이 아니다. 병풍도와 소기점도를 잇는 노두 외에 별다른 볼거리가 없는 평범한 섬이다. 그러나 전라남도가 섬의 노두에 관심을 가지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지난 2018'가고 싶은 섬' 사업 대상지로 기점도와 소악도가 선정되면서 사업의 일환으로 작은 예배당들이 지어졌다. 예수의 열두 제자 이름을 딴 12개의 예배당이다. 집짓기에는 국내외 작가들이 참여했다.

 

 

길을 잃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길이 나뉘는 곳마다 이정표를 세웠음은 물론이고, 잊을만하면 순례자의 길이라 적힌 방향표시판이 나타난다. 이렇게 연결되는 예배당들은 대기점도와 소기점도, 소악도, 진섬, 딴섬 등 5개 섬 12에 배치됐다. 이 예배당들은 바닷물이 빠지면서 드러나는 노두를 건너야 만날 수 있다. 하루 두 번 바닷길이 열리니 '기적'이요, 12개의 예배당을 차례로 만나니 '순례'. 그래서 기적의 순례길이 된다.

 

 

오른편 해안도로를 따라 돌아가면 대기점도의 북촌마을이다. 병풍도를 건너는 노두길 입구에 소나무와 정자가 함께 어우러진 파란색 지붕의 예배당이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다. ‘안드레아 성인생각하는 집이다. 이원석 작가가 설계한 이 독특한 예배당은 양파 모양의 민트색 지붕이 눈길을 끈다. 첨탑에 고양이 두 마리가 올라가 있는가 하면 예배당을 지키는 것도 고양이다. 양파는 섬에서 많이 재배하는 농작물이다. 고양이는 주민들보다도 더 많이 섬에서 살고 있다. 섬 풍경을 돋보이게 해주는 건축물이라 하겠다.

 

 

내부는 소박하게 꾸며졌다. 원탁의 제단과 촛대를 넣은 벽감, 그리고 거칠게 쪼아낸 벽면 속에 갇힌 십자가가 전부이다. ! 얼핏 뜯어낸 것처럼 보이는 창문 너머로 병풍도를 잇는 노두길이 훤히 보인다는 걸 깜빡 잊을 뻔했다.

 

 

세 번째 예배당인 야고보의 집으로 가는 길은 바닷가를 따라 나있다. 하지만 순례길이 다 이런 것은 아니다. 이곳처럼 해안을 도는가 하면 노두길을 건너고 낮은 언덕을 넘고 마을을 지나고 숲길을 걸어야 한다. 그렇게 7~8분쯤 걸었을까 길이 둘로 나뉜다. 왼편은 네 번째 예배당인 요한의 집으로 가는 길이다.

 

 

이정표를 보고 길을 찾는 방법에 대해 알아보자. 이곳의 이정표(3. 야고보의 집 가는 길400m/ 4. 요한의 집 가는 길400m)처럼 양 방향이 모두 표시된 지점은 해당 교회를 둘러본 뒤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야 한다. 대신 한쪽 방향만 표시된 이정표는 그 교회에서 다음 순서의 교회로 별도의 길이 나있다는 의사 표시이다. ! 각각의 예배당에도 다음 예배당까지의 거리와 방향을 담은 이정표를 세워놓고 있었다. 모시는 성인과 설치작가의 이름도 적었다. 하지만 작가의 제작 의도에 대한 상세 설명을 곁들이지 않은 점은 아쉬웠다.

 

 

오른편으로 방향을 잡아 7~8분쯤 걸었을까 숲속에 들어앉은 노란색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세 번째 예배당인 야고보의 집이다. 이렇듯 12개의 예배당은 5개의 섬의 언덕과 바닷가, 갯벌 위, 호수 등에 골고루 분산되어 있다. 독특한 개성을 갖췄지만 공통점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작가들은 국내외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 작품 제작 기간 동안 섬 주민들과 생활하며 주민들의 이야기와 애환을 고스란히 담으려고 노력했단다.

 

 

김강 작가가 디자인했다는 야고보의 집(그리움의 집)’빨간 지붕과 하얀 벽으로도 모자라 처마 끝에다 기둥까지 세워놓은 것이 흡사 소박한 태국 건축물을 보는 것 같다. 통나무 디자인의 문을 열고 내다본 내부도 특이했다. ‘봉덕사의 종비천상이 그려져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작은 예배당들은 특정 종교의 틀을 벗어났다. 개신교인들한테는 예배당, 천주교인들에게는 공소, 불자들에겐 암자일 수 있다. 여행자에게는 물론 아름다우면서도 편안한 쉼터다.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왼편 요한의 집으로 향한다. 여느 시골과 다름없는 논두렁과 밭두렁을 구경하며 10분쯤 걷다가 갈림길(이정표 : 4. 요한의 집1.1/ 5. 필립의 집200m)을 만나면 왼편으로 방향을 잡는다. 이 길은 요한의 집을 거쳐 대기점도 선착장으로 연결된다.

 

 

가는 도중 만나게 되는 옛 증도초등학교 대기점분교는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래도 순례자의 섬 공방제작소를 설치·운영해보려는 신안군의 눈에는 활용가치가 있었던 모양이다. 저 폐교를 대수선해 여행자들이 공예품을 만들어보는 체험 공방과 현대인들의 지친 삶에 안식을 주는 영혼의 쉼터를 조성할 계획이란다.

 

 

북풍을 피할 수 있는 아늑한 남촌마을을 지나자 네 번째 예배당인 '요한의 집(생명평화의 집)'이 나온다. 첨성대를 쏙 빼다 닮은 모양새에다 지붕과 창의 색깔유리가 아름다운 예배당이다. 치마처럼 펼쳐진 계단과 염소 조각상도 눈길을 끈다. 이 예배당은 염소를 키우는 오지남 할아버지가 내준 밭에다 지었다고 한다. 그래선지 박영균 작가는 할아버지의 사연을 설계에 담아 보답을 했다. 창을 바다 대신에 밭쪽으로 내놓은 것이다. 그 창문 너머로 먼저 떠난 할머니 봉분이 보인다.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소기점도(이정표의 필립의 집방향)로 향한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지붕이 요정의 고깔처럼 예쁜 '필립의 집(행복의 집)'에 이른다. 대기점도와 소기점도를 잇는 노두가 있는 곳이다. 덕분에 바다와 접한 풍광이 매우 아름답다. 이 예배당은 툴루즈에 거주하는 작가가 프랑스 남부의 건축양식으로 지었다고 한다. 인근 바닷가에서 주워 온 갯돌로 벽돌 사이를 메웠는가 하면, 물고기 비늘 모양의 목재를 지붕에 붙이고, 주민이 사용하던 절구통까지 건축재로 사용하는 등 지역의 정서를 담으려 한 노력이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는다.

 

 

작가인 장 미셀 후비오는 프랑스 국적이다. 프랑스풍의 건축기법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는 이유일 것이다. 그중 하나는 예배당 안에서 만날 수 있다. 제단 뒤의 십자가 창이 유럽의 성당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스테인드글라스로 만들어져 있다.

 

 

 

필립의 집에서 대기점도와는 이별을 고한다. 그리고 소기점도로 연결되는 노두길로 들어선다. 오래전 사람들은 섬과 섬 사이 갯벌에 돌을 던져 길을 만들었다. 돌을 던져 만든 징검다리 노두길은 섬을 이었고 이제는 섬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 잇는다. 노두길은 하루에 두 번씩 사라졌다 생겼다 한다. 물이 차면 수평선 아래로 숨었다가 물이 빠지면 다시 나타나는 신비함 때문에 기적의 순례길이라는 다른 이름도 가지고 있다.

 

 

노두길 양편으로 갯벌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남해바다는 바닷물이 빠지면 바다만큼 넓은 갯벌이 나타난다. 신안, 특히 이곳 증도 연안은 갯벌로 유명하다. 생태적 가치를 인정받아 국내 최초 갯벌 도립공원,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 국가 갯벌습지보호지역, 람사르습지로 지정되었으며, 지난 2004년 해양수산부 평가에서도 압해도, 여자만과 함께 국내 8대 갯벌 중 최우수 등급을 받았다.

 

 

노두길을 건너 소기점도에 접어들면 호수 한가운데에 바르톨로메오의 집(감사의 집)’이 꽃처럼 떠 있다. ‘장 미셀 후비오작가의 두 번째 작품인데 다리를 없애고 배를 타고 건너가서 기도할 수 있게 설계했다고 한다. 하지만 배는 보이지 않았다. 공사가 아직 덜 끝나서란다. 유일하게 접근할 수 없는 예배당으로 남은 이유이다. 위치뿐만 아니라 그 생김새도 특이하다. 호루라기 모양으로 생긴 예배당이 얼핏 스테인드글라스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보는 위치에 따라 색이 달라지는 색유리라고 한다. 직접 다가가 볼 수는 없었지만 저수지에 비친 고운 반영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예배당이었다.

 

 

조금 더 들어가자 갈림길이 나온다. 왼편은 소기점도 선착장으로 가는 길. 순례길은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섬을 횡단한다. 이어서 반대편 해안에 이르자 알록달록한 컨테이너박스 두 개가 숲속에서 얼굴을 내민다. ‘12사도 예배당을 짓는데 참여한 장 미셀 후비오와 푸고, 부루노, 얄룩 등 외국 작가들이 숙식하며 거주하던 공간이라고 한다. 작가들이 떠난 이 공간은 리뉴얼을 거쳐 순례길 전시관으로 선보일 예정이란다.

 

 

순례길은 다시 바닷가를 따른다. 이때 진행방향 저만큼에 소악도로 연결되는 노두길이 나타난다. 그 중간에 하얀색 예배당이 보이지만 무턱대고 가버리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노두길 입구에 위치한 게스트하우스 조금 못미처에서 일곱 번째 예배당인 토마스의 집으로 가는 길(이정표 : 토마스의 집200m)이 나뉘기 때문이다.

 

 

갈림길에서 빠져나와 산자락을 타고 돌자 잔디밭 언덕에서 바다를 보고 있는 토마스의 집이 얼굴을 내민다.

 

 

푸른 초원을 배경으로 삼은 토마스의 집(인연의 집)은 단정한 사각형의 예배당이다. 흰색 외벽과 진한 파란 나무문이 돋보이는데 신비한 빛깔의 푸른 안료는 모로코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무색 단순미의 극치로 평가받는 이 예배당은 예수의 오병이어기적을 소재로 삼았다고 한다. 김강 작가의 두 번째 작품이다.

 

 

안으로 들어가 본다. 바닥에 별과 달 모양의 색유리를 박고, 내부에 손바닥 크기의 성경책을 두어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바다도 압권이다.

 

 

노두길로 넘어가는 언덕길에서의 조망은 가히 환상적이다. 소기점도와 소악도 사이의 바다가 드넓게 펼쳐지는데 그 끄트머리에서 돛단배처럼 떠 있는 작은 섬들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큰새미섬과 작은새미섬, 큰외섬, 비계도 등일 것이다. 거기다 증도면의 섬들에서는 보기 힘든 소기점도의 바위절벽도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점심은 마을기업에서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061-246-1245)에서 했다. 소악도로 넘어가는 노두길의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데 식당도 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택한 메뉴는 8000원짜리 백반. 된장국에 생선과 나물, 장아찌, 해산물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다들 맛의 고장다운 솜씨라는 평가였다. ! 술안주용으로 물김 전(8천원)’과 병어회(3만원)도 내놓고 있었다. 이밖에도 대기점도에 대기점민박(010-9226-2093)·노두길민박(010-3726-9929), 소악도민박(010-3499-6292, 소악도), 12사도민박(010-6261-2207, 소기점도) 등이 있으니 취향에 맞게 이용하면 되겠다.

 

 

소기점도소악도도 노두길로 연결된다. 이 노두길은 섬과 섬을 이어주기도 하지만 물이 들어오면 언제 길이 있었냐는 듯 다시 둘로 나뉜다. 기점·소악도의 유일한 자랑거리가 된 이유이다. 아마 이 섬을 이어주고 떨어지게 하는 노두길이 아니었으면 이만큼 매력 있는 섬으로 다가오지 않았을 것이다.

 

 

소악도와 소기점도를 잇는 노두길에서 만난 여덟 번째 예배당 마태오의 집(기쁨의 집)’은 멀리에서도 존재감을 뽐냈다. 갯벌 위에 세운 이 예배당은 양파 모양의 금빛 지붕이 특징인 러시아 정교회를 닮았다. 노두길의 중간에 위치한 탓에 물이 차면 작은 섬이 되고 예배당은 바다위에 둥실 떠있는 아름다운 모습이 된다고 한다.

 

 

김윤환 작가의 두 번째 작품이라는 예배당의 안은 의외로 소박했다. 천정에 매달린 샹들리에(chandelier)와 벽면의 촛대, 금빛의 원통 제단이 전부이다. 화려하기 짝이 없는 외관과는 딴판이라 하겠다.

 

 

대신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바다 풍경이 일품이다. 설계의 포인트를 바다 조망에 두었나 보다.

 

 

소악도에서는 꽤 너른 들녘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선지 벼가 심어진 논도 많이 보였다. 기점·소악도의 주민들은 마늘과 양파를 기른다. 참깨와 고구마를 땅에서 내고, 김과 감태를 주는 바다와 낙지를 얻고 새우를 기르는 갯벌에 엎드려 산다. 살아가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얘기이다. 그러던 섬이 이제 위로와 안식을 찾는 사람들이 찾는 가고 싶은 섬이 되었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처럼 고요한 섬의 길을 걸으려고 뭍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이다.

 

 

대하양식장도 가끔 보였다. 천일염, 섬초, 김 등과 함께 신안군의 특산물 가운데 하나이다. 인기척이 없는 양식장은 한가로워 보였다. 로맨틱한 섬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풍경이라 하겠다. 하지만 섬에서의 삶은 육지보다 훨씬 더 치열하다.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마라고 했던가? 섬에서 기른 저 대하는 길러서 판매하기까지 많은 노력이 요구된다.

 

 

순례길에는 관광용 예배당만 있는 건 아니다. 주민들 삶의 한 단면이랄 수 있는 소악교회도 만날 수 있었다. 부대시설로 운영하고 있는 자랑께라는 ‘Pilgrims house(순례자의 집)’이 눈길을 끄는데 문준경 전도사의 얼을 잇고 있다고나 할까? 실제로 ‘12사도 순례길이 생긴 배경에는 한국 개신교 최초의 여성순교자라는 문준경(1891~1950) 전도사가 있다. 신안이 고향인 그녀는 여성으로는 드물게 경성성서학원에서 공부한 후 증도로 돌아와 이 섬 저 섬을 돌아다니며 11개의 교회를 개척했으나, 한국전쟁 중 좌익 세력에 의해 피살당했다. 그래선지 지금도 섬 주민의 90% 이상이 기독교인이라고 한다. 증도면 사무소 인근에 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관이 있다.

 

 

아홉 번째 예배당을 찾으려면 소악도의 끄트머리까지 가야 한다. 진섬으로 넘어가는 노두길 초입에서 둑길을 따라 100m쯤 들어가면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 집에서나 나올 법한 작고 소박한 예배당을 만나게 된다.

 

 

장 미셀이 설계한 작은 야고보의 집(소원의 집)’은 프로방스풍의 오두막이 생각나는 예배당이다. 어부들이 거친 바다로 나가기 전 기도하는 유럽의 어부들의 기도소에서 착안했다고 한다. 해당 성인이 어부였음을 드러낸 푸른 물고기 형상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인상적이다. 물결모양의 청동지붕과 섬에서 나는 나무형태 그대로 만든 문, 대청마루 형태의 바닥, 배 밑바닥 모양의 천정도 특이하다.

 

 

소악도와 진섬도 역시 노두길로 연결된다. 기점·소악도 인근 해역은 갯벌의 고장이다. 끝없이 펼쳐진 갯벌은 안개를 이불처럼 덮고 일렁이는 바다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하루에 두 번은 어김없이 배를 드러낸다. 이때 우리는 수많은 생명체를 만난다. ‘칠게짱뚱어가 달리기 시합을 하는가 하면, 보일동말동한 작은 구멍에서는 보말고동이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 이런 호기를 놓칠 주부들이 어디 있겠는가. 언제 다리가 아팠냐는 듯이 갯벌로 들어서버린다.

 

 

진섬 노두길을 건너면 열 번째 예배당인 유다 타대오의 집(칭찬의 집)’이 길가에서 반긴다. 톱니바퀴 같은 지붕에 하얀 건물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몽환적인 작은 예배당이다. 손민아 작가가 설계를 맡은 파스텔 톤의 이 예배당은 어구가 어지럽던 쓰레기장에 지었다고 한다. 주변은 털머위와 해국 등 자생식물을 심어 작은 공원으로 조성했다.

 

 

내부는 소박하게 꾸며졌다. 십자가 하나 달랑 걸어놓았는가 하면, 그 아래에 놓아둔 원목 제단은 아예 다리도 없다. 대신 바닷가로 창문을 내 눈이 호사를 누리도록 했다. 예배당의 크기는 10(3) 남짓. 혼자서 조용히 묵상하기 좋을 정도의 공간이다.

 

 

작은 타대오의 집앞에서 길은 둘로 나뉜다. 왼편은 소악도 선착장으로 가는 길, 다음 행선지인 열한 번째 예배당은 물론 오른편으로 가야 한다. 바닷가를 잠시 따르다가 해안 언덕으로 방향을 틀면 진섬의 남쪽 언덕, 솔숲 그늘 아래에 자리 잡은 열한 번째 예배당 시몬의 집이 나온다. 모든 공간이 바다로 열려 있어 일몰 사진의 포인트로 알려진 곳이다.

 

 

사랑의 집으로도 불리는 이 예배당은 문이 없고 앞뒤가 시원하게 열려있는 공간이다. 빈 공간을 바람과 파도소리와 넉넉한 바다 풍경이 채운다. 치유의 공간이기를 바라는 강영민 작가의 의도가 반영돼 있단다. 개선문을 연상시키는 상단부에는 강영민 작가의 유명한 캐릭터 조는 하트(Sleeping heart)’가 한없이 평화롭게 졸린 눈으로 순례자들을 맞는다.

 

 

12사도의 마지막 예배당으로 가는 길은 산죽 숲 사이로 나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썰물 때에는 모래사장을 따라 걸어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갯벌 세상인 기점·소악도에서는 흔치 않은 풍경이기 때문이다. 되돌아올 때는 물론 산죽 숲길을 이용하면 된다.

 

 

김 양식장의 장대 너머로 천사대교가 그 거대한 몸집을 드러내고 있다.

 

 

열두 번째 예배당인 가롯 유다의 집(지혜의 집)’은 진섬에서 모래해변으로 연결되는 딴섬(바다물이 만조일 때는 갈 수 없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에 있다. 이번에는 노두길도 없다. 그러니 물이 조금만 들어와도 길은 바다가 된다. 물때를 맞추지 못한 순례자들이 건너다만 보고 발길을 돌리는 이유이다. 예배당은 붉은 벽돌에 뾰족지붕을 한 고딕양식으로 지어졌다. 모래 해변 너머로 보이는 그 풍경이 언뜻 사진으로 많이 본 프랑스의 몽생미셀 수도원과 흡사하다. 그래선지 밀물 때문에 들어가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한단다.

 

 

손민아 작가가 디자인했다는 예배당의 안은 외부와는 달리 너무나 소박했다. 자그만 십자가 놓인 제단은 투박한 나무의자, 재단 뒤의 벽도 십자가 하나와 두 개의 촛대가 걸려있는 게 전부다. 허무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하지만 그런 서운함 정도는 예배당 옆 붉은 벽돌을 나선형으로 돌려 쌓은 종탑을 발견하면서 금방 사라져 버린다. ‘이곳에서 열두 번 종을 울리며 지치고 힘들고 뒤틀린 심사를 하나씩 허공에 날려버리고, 새로운 일상으로 돌아갈 힘과 지혜를 얻으라는 의미로 만들었다고 한다.

 

 

트레킹 날머리는 소악도 선착장

순례길 탐방은 가롯 유다의 집에서 종료된다. 하지만 섬을 떠나기 위해서는 소악도선착장까지 가야만 한다. 아까 진섬으로 들어올 때 만났던 유다 다테오의 집까지 되돌아나간 다음 해안길을 따라 선착장으로 가면 된다. 3시간 30분짜리 섬티아고 순례길이 끝을 맺는 것이다. 그리고 오후 225분 출발 여객선을 타면서 기점·소악도와 아쉬운 이별을 고한다. 여행의 참맛이라는 고요해진 섬을 음미해보지 못한 아쉬움이다. 갯벌 위로 떨어지는 붉은 해, 밤새 섬을 휘감은 회색빛 해무, 푸른 밤 노두길을 비추는 하얀 보름달, 그리고 산책 나설 때 동행해주는 민박집 강아지 복실이...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지는 아름다운 풍경이 아닌가.

 

 

 

에필로그(epilogue), ‘순례자의 섬’, 혹은 순례자의 길은 전남도에서 추진 중인 가보고 싶은 섬 사업의 하나다. 대기점도, 소기점도와 소악도 등 이름도 생소한 작은 섬에 작은 예배당 열두 개를 세워 여행 수요를 끌어올리겠다는 계획이다. 노두길로 연결된 순례자의 길은 총 12. 1마다 하나씩 총 12개의 작은 예배당을 세웠는데, 이는 예수의 열두 제자를 상징한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모티브를 따왔다는 이 길은 기독교를 전체 주제로 삼았다. 섬 주민의 90% 가까이가 기독교인이란 점에서 보듯, 기독교는 구상 단계부터 큰 몫을 했다. 이 프로젝트에는 모두 11명의 공공조각과 설치미술 작가들이 참여했다. 한국에서는 김윤환 총감독 등 6명이, 해외에서는 장 미셸 후비오등 프랑스와 포르투갈, 독일 출신의 작가 5명이 참여했다. 예배당은 국내에서 처음 시도되는 건축미술형태의 작품들이다. 건축가가 아닌 조각가, 설치미술가들이 집을 짓는, 일종의 실험적 형태로 진행됐다. 예배당은 섬 주민들에게 땅을 기증받아 노둣길 주변이나 야트막한 언덕, 호수, 마을 입구 등에 세워졌다. 대기점도에 5, 소기점도에 2, 소악도에 4개다. 그리고 맨 마지막 예배당인 가롯 유다의 집딴섬이라 불리는 소악도 끝자락의 작은 무인도에 들어섰다. 예배당의 크기는 두 평을 넘지 않는다. 한두 명이 들어가 기도하거나 묵상하기 딱 좋은 크기다. 하지만 예배당이라고는 해도 기독교인만 찾을 수 있는 공간은 아니다. 여행자 누구나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다. 예배당 안에서 가부좌를 틀고 참선을 할 수도 있고, 기도를 하거나, 메카를 향해 절을 하거나, 혹은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할수도 있다. 방문자에 따라서 암자가 될 수도, 공소나 기도소, 쉼터가 될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자은도(慈恩島) 해사랑길 트레킹

 

여행일 : ‘20. 6. 21()

소재지 : 전라남도 신안군 자은면.

트레킹 코스 : 천사대교무한의 다리해넘이길분계해변응암산 왕복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목포시에서 서북쪽으로 약 30떨어져 있는 자은도는 부속 섬으로 두리도와 소두리도·상나배도·중나배도·하나배도 등을 두고 있으며, 동남쪽으로 약 2.3지점에는 암태도와 추포도가 마주하고 있다. 한편 자은도는 우리나라에서 열두 번째로 큰 섬으로, 섬에 대한 고정관념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바다와의 거리가 멀어 해변산중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곳이다. 거기다 토질까지 좋아 주민들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한다. 땅과 바다에서 나는 물산이 풍성하니 사람의 인심 또한 후할 수밖에 없다. 자애롭고() 은혜롭다()는 지명은 이에서 유래한단다. 그런 풍요의 땅에 내놓은 둘레길이 해사랑 길인데, 국토부의 해안누리길 5선 가운데 하나로 꼽힐 정도로 멋진 걷기 여행길이다. 오늘은 4개 코스로 나누어진 해사랑길1코스인 해넘이길)2코스인 간들속삭임길의 일부구간을 걷게 된다. 눈길이 가는 곳마다 푸른 바다가 드넓게 펼쳐지는 멋진 산책길이다.

 

찾아오는 방법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은도의 관문은 이웃섬인 암태도(巖泰島)오도선착장이었다. 두 섬을 이어주는 길이 675m의 다리(은암대교)를 건너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19년 압해도(押海島)와 암태도를 이어주는 길이 10.8의 천사대교가 놓이면서 이젠 차량을 이용해 자은도까지 들어갈 수 있게 됐다. 서해안고속도로 죽림 JC(무안군 삼향읍 맥포리)’에서 2번 국도로 갈아타고 압해대교를 건너 압해도로 들어간다. 이어서 천사대교를 건너면 암태도이다. 암태도로 들어온 다음 기동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805번 지방도를 타고 은암대교를 건너면 자은도이다.

 

 

자은도 방문의 시작은 천사대교로부터 시작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오도선착장(암태면 신석리)’이다. 천사대교를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는 곳이 오도선착장인데, 어찌 이런 곳을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그나저나 이곳 오도선착장은 다리가 놓이기 전부터 자은도와 암태도의 관문이자 주민들의 사랑방이었다. 그러다가 다리 개통으로 뱃길이 끊기자 전망대로 그 임무를 바꿨고, 현재는 전망데크를 중심으로 페리 터미널과 매점 등 각종 편의시설이 들어서 있다.

 

 

오도선착장의 백미는 누가 뭐래도 전망데크에서의 천사대교 조망이다. 끝도 없이 뻗어나간 다리가 한눈에 쏙 들어오기 때문이다. 눈요기를 마친 사람들은 너나없이‘1004’라고 적힌 조형물 앞에서 줄을 선다. 조형물과 천사대교를 배경으로 한 인생샷이라도 건져보고 싶은 모양이다.

 

 

전망데크에서 바라보는 천사대교의 위용은 참 대단하다. 압해도(押海島)와 암태도(巖泰島)를 잇는 연도교(連島橋)천사대교는 국내 최초로 사장교와 현수교를 동시에 배치한 교량으로 총연장은 10.8이며, 201944일 개통을 했다. 천사대교(千四大橋)라는 이름은 1004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신안군의 지역 특성을 반영하여 지어졌다. 암태도 쪽의 사장교는 주경간의 길이를 1004m로 건설하여 1004개의 신안군 섬들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135m의 주탑 정면에는 마름모꼴 형태(가로보)를 새겨 넣어 '신안 다이아몬드 제도'를 형상화했다. 그나저나 저 다리가 놓임으로써 암태도를 비롯해 자은도, 팔금도, 안좌도, 자라도 등 다섯 섬은 이젠 섬 아닌 섬이 됐다. 서로 연결된 기존의 연도교와 이번에 개통된 천사대교 덕에 뭍과 다름없는 공간으로 벽해상전한 셈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암태도는 서울과 광주에서 고속버스 정기노선까지 투입됐다고 한다.

 

 

오도선착장으로 들어오는 여객선은 이제 없다. 그 빈자리를 이젠 세일 요트가 차지했다. 44명이 탈 수 있는 55피트급 쌍동선으로 오도선착장에서 출발해 천사대교와 당사도를 오가며 다도해 바다정원을 조망할 수 있다고 한다. 뱃삯은 성인 기준으로 2만원, 하루 6(10, 1130, 14, 1530, 5, 8) 운항하는데 승선시간은 1시간이란다. 참고로 요트를 타고 돌아보는 인근 섬들은 다이아몬드 제도라고도 불린다. 암태도와 자은도, 비금도, 도초도, 하의도, 신의도, 장산도, 안좌도, 팔금도 등 9개 섬들이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펼쳐져있기 때문이다.

 

 

선착장 뒤 언덕에는 이층짜리 팔각정을 배치했다. 하지만 일부러 올라가볼 필요는 없겠다. 선착장에서 바라보는 풍경과 대동소이하기 때문이다. 아니 사진만 놓고 보면 선착장보다 오히려 한 수 아래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철탑 하나가 사진의 한가운데서 비켜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자은도로 들어가는 도중에 갑자기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최근 암태도에서 가장 핫한 사진명소를 지난다는 것이다. 자은도와 천사대교로 향하는 갈림길인 기동삼거리의 한 벽화를 보고 하는 말들이다. 노부부의 인물벽화로 벽화 주인공은 집주인인 문병일(78)·손석심(78)씨라고 한다. 눈에 띄는 점은 지역민을 그린 것뿐만 아니라 담장 안쪽의 애기동백을 활용한 입체적인 구조다. 애기동백이 시골 어르신들의 단골 헤어스타일인 일명 뽀글이파마머리로 환골탈태했다. 최근 공개된 이 벽화는 신안군의 제안으로 3년 전 낙향한 지도 출신의 작가가 그렸다고 한다.

 

 

해넘이길트레킹은 송산교차로(신안군 자은면 송산리 310-2)에서 시작된다. 해넘이길은 이곳 송산교차로에서 시작해 한운선착장과 둔장해수욕장, 사월포 입구를 거쳐 두모정류장에 이르는 코스이다. 하지만 우린 곧바로 둔장해수욕장으로 가서 무한의 다리를 둘러본 다음, 해넘이길을 역방향으로 돌아보기로 했다. 빠듯한 귀경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이다. 덕분에 우린 두모체육공원과 사월포 입구를 거쳐 두모정류장에 이르는 1/3 정도의 구간은 걸어보지 못했다. ‘바다 내음 나는 모래길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색다른 풍경을 보여준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둔장어촌체험·휴양마을로 들어가는 아치형 대문 옆에는 행복한 장수촌이라는 홍보문구가 적힌 커다란 마을표지석과 이정표(윈드비치 0.7) 외에도 해사랑길안내판을 세워놓았다. 해사랑길이란 자은도를 걸어서 한 바퀴 돌 수 있도록 내놓은 자은도판 올래길이다. 총거리 9.7(실제로는 12)해넘이길(1코스)’을 시작으로 2코스인 간들속삭임 길(11.5)’3코스 다은모래길(11.5)’, 4코스 그리움마루길(5.5)’이 뒤를 잇는다. 해사랑길의 첫 번째 코스인 해넘이길은 자은도의 한운리와 송산리 일대 12의 해안길로 거의 전 구간에서 천사의 섬신안의 섬과 바다를 조망할 수 있으며, 특히 해넘이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을 정도로 낙조가 아름다운 길이다. 해넘이길 코스에는 2,980m에 달하는 백사장과 울창한 소나무숲을 품고 있는 둔장해수욕장, 그리고 어촌체험마을들이 포함되어 있다. 인천 강화군의 호국 돈대길과 전북 부안의 변산 마실길’, 경남 고성의 공룡화석지해변길’, 부산 영도의 절영해안 산책로와 함께 해양수산부에서 정한 대한민국 해안누리길’ 5대 대표노선에 선정되어 있기도 하다.

 

 

탐방로는 들녘을 헤집으며 나있다. 길가 드넓은 밭에는 양파가 한가득이다. 이곳 자은도가 좋은 토질과 바닷바람이 키운 품질 좋은 마늘의 주산지라고 했는데 그 자리를 이젠 양파가 차지했나 보다. 참고로 자은도는 해수욕장도 많고 찰진 갯벌이 있어 휴양지로서 최적의 조건을 갖췄다. 하지만 막상 자은도에 들어와 보면 섬이라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는다. 섬의 사이사이에 끝없이 너른 들녘이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1920년대부터 시작된 간척사업 덕분이란다.

 

 

길손을 반기는 짙푸른 소나무 숲 그늘을 지나자 둔장 해수욕장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해변산책길을 홍보하는 안내판에는 이곳이 신안 갯벌도립공원임을 알리고 있다. 세계 5대 갯벌 가운데 하나로 인정받은 해안이란다. 초입에서 만난 둔장어촌계 체험장에는 그 갯벌을 눈에 담을 수 있도록 바다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그밖에도 정자와 잔디 등이 있어 야영하기에도 불편함이 없을 정도다. 체험장 뒤로는 소나무 숲이 길게 펼쳐진다. 바닷가의 해송이야 흔하디흔한 수종이지만 동양최대 규모의 송림 숲이라며 무념무상의 길이라는 이름까지 붙여놓았다.

 

 

전망대에 서면 손에 잡힐 듯 가까운 할미섬이 가장 먼저 반긴다. 할미섬은 독살로 유명해진 섬이다. 동양에서 가장 큰 규모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아직도 이곳 주민들은 독살을 이용해 고기를 잡곤 한다는데, 썰물 때면 할미섬 부근에 둘러쳐진 독살이 들어나기도 한단다. 그래서 이를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섬까지 걸어가기도 했었는데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무안군청에서 관광객 유치를 위해 무한의 다리라는 길이 1004m의 해상목교를 놓았기 때문이다. 참고로 '무한의 다리'라는 이름은 무한대()를 내포하는 88일 섬의 날을 기념하고 섬과 섬이 다리로 연결돼 있는 연속성과 끝없는 발전의 의미를 담고 있단다.

 

 

바닷가를 따라 설치해놓은 해넘이길 탐방데크를 따라 주차장 쪽으로 향한다. 할미섬까지 이어지는 천사대교가 한눈에 쏙 들어오는 경관 좋은 산책길이다. 하지만 눈에 거슬리는 풍경도 눈에 띈다. 피서객 유치를 위해 지어놓은 원색의 방갈로들이 하나도 성한 게 없을 정도로 방치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민의 혈세로 만들어진 시설이라면 조금 더 신경을 써서 관리하면 좋지 않을까 싶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몰려온다는데 이들을 노리는 시설이라고 없겠는가. 깔끔한 화장실을 갖춘 너른 주차장에는 특산물판매장과 함께 식음료를 파는 상점들이 꽤 많이 들어서 있었다.

 

 

관광객들을 위한 포토죤도 만들어 놓았다. 그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소망의 노을이란 조형물이다. 임진왜란 당시 이곳으로 피신한 명나라의 탈영병 두사춘(杜思忠, 일명 두사춘)’이 품었던 고향을 그리워하고 귀향하고픈 간절한 소망을 표현한 것이란다. 저 조형물의 동그라미 안에 노을빛으로 물든 해를 담으면 사진에 출품해도 될 만한 명품사진을 얻을 수 있단다.

 

 

 

다리 입구에는 이곳 신안군의 또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는 ‘1004’ 조형물과 함께 無限의 다리(Ponte Dell’ Infinito)’라고 적힌 큼지막한 표지석을 세웠다. 신안군의 ‘1() 1뮤지엄(museum)’ 아트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조각가 박인선과 세계적인 건축가 마리오 보타가 지은 이름이라는데 섬과 섬을 다리로 연결한다는 연속성과 끝없는 발전을 희망하는 마음을 담았단다.

 

 

이젠 무한대교를 걸어볼 차례이다. 길이 1004m에 폭이 2m인 이 다리는 구리도고도를 거쳐 최종 목적지인 할미섬까지 갈 수 있도록 놓여있다. 다리에 들어서면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는 기분이다. 터널처럼 곡선으로 디자인한 난간 때문이다. 구리도까지 곧게 뻗은 다리는 구리도 앞에서 왼쪽으로 휘어나간다.

 

 

다리를 걸으면서 즐기는 조망은 일품이다. 자은도의 바위해안이 좌우로 펼쳐지는가 하면 바다에는 이름 모를 작은 섬들이 여린 파도에 몸을 의탁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작은 섬들은 한 개였다가, 두 개가 되고, 또 어느 날은 물이 차서 해변조차 사라져버린 신비로운 바다가 된다. 다리에서의 즐거움은 그뿐만이 아니다. 귀를 즐겁게 해주는 시원한 바닷소리는 덤이다.

 

 

구리도에 이른 다리는 90도에 가깝게 휘어서 최종 목적지인 할미도로 향한다. 그리곤 중간에 고도라는 바위섬에서 다시 한 번 휜다. 하지만 고도는 바닷가로 내려설 수 없다. 물이 빠졌을 때만 수면 위로 나오는 암초이기 때문이다. 고도로 향하는데 끝없는 바다로 들어가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든다. 지금처럼 밀물 때만 느낄 수 있는 호사다. 무한의 다리는 이처럼 밀물 때는 찰랑거리는 바닷물에 아랫도리를 담가 마치 바다 위를 걷는 스릴을, 반면에 썰물 때는 갯벌의 풍요를 만끽할 수 있다. ! 다리가 거쳐 가는 구리도는 면적이 1,488(450)에 불과한 꼬맹이 섬이다. 본섬인 자은도와 모래톱으로 연결되는데 사방이 온통 바위벼랑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선지 커다란 시스택으로 표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가슴에 담아둘만한 볼거리는 없다.

 

 

다리의 끝은 할미섬이다. 구리도와 고도는 들어갈 수 없으나 할미도는 마음껏 둘러볼 수 있다. 다리에서 내려와 오른편에 보이는 대나무 숲길로 들어선다. 할미도의 자랑거리라는 독살을 보기 위해서이다. 독살은 서해안의 조수간만의 차이를 이용하는 전통적인 고기잡이 방식이다. 해안에 돌을 쌓아 밀물이 되면 고기가 같이 들어왔다가 썰물이 되면 물이 빠지면서 돌담에 남은 고기를 잡는 방식이다. 참고로 독살은 남해도의 죽방렴(竹防廉)과 같은 원시어업의 한 종류로 석방렴(石防簾)’이라고도 부른다. 죽방렴이 센 물살을 이용한다면 독살은 조수간만의 차이를 이용한다. 갯벌에 2m 높이의 돌담을 쌓아 밀물에 들어온 고기를 썰물에 걷어내는 식이다.

 

 

 

바닷가에 내려섰으나 기대했던 독살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저 울퉁불퉁한 갯바위들이 사방에 널려있을 따름이다. 그 갯바위에는 앙증맞은 칠게가 바위틈새를 쉴 새 없이 들락거리고 있었다. 이곳 자은도의 갯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의 하나이다. 섬의 반대편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갯벌에 사는 생명의 에너지가 자꾸 붙든다.

 

 

사방에 널려있는 갯바위들 위에는 각각의 염원(念願)을 품은 크고 작은 돌탑들이 수없이 올라앉았다. 개중에는 신기에 가깝게 쌓아올린 것들도 보인다. 바라는 바가 얼마나 간절했기에 저런 정교함이 발현했을까 싶다.

 

 

할미섬 주변에는 세월을 머금은 기암괴석이 숲을 이룬다. 그 가운데서도 촛대를 쏙 빼다 닮은 바위 하나가 유독 눈길을 끈다. 구멍이 숭숭 뚫린 돌과 칼로 그은 듯 선이 새겨졌다. 바닷가 기암괴석들 모두가 다 그렇듯 이 바위도 긴 세월 동안 파도에 깎이고 비바람에 씻긴 끝에 만들어졌다. ‘시스택(sea stack, 암석이 파도의 침식을 차별적으로 받아 만들어진 굴뚝 형태의 지형)’이라고도 하는 이러한 바위는 한국의 동해안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마치 촛대의 형상을 닮았다하여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촛대바위라고 부른다.

 

 

반대편에는 관광안내소가 들어서 있다. 갯바위로 연결되는 자갈밭에는 비치파라솔을 배치해 여행객들의 편의를 도모했다. 주변 풍경을 감상하다 가라는 배려일 것이다.

 

 

바다 건너 산자락은 풍력발전기들이 차지했다. 해변으로 들어서면서 윈드 비치(Wind beach)’라고 적힌 팻말을 보았는데, 그 바람이 저 거대한 발전기가 힘찬 날갯짓을 할 수 있을 만큼 거셌던 모양이다.

 

 

무한의 다리를 빠져나와 다시 해넘이길탐방로를 따른다. 주차장을 오른편에 끼고 둔장해변을 빠져나가면 ’T’자형 삼거리(이정표 : 송산 정류장7/ 둔장마을320m/ 둔장어촌체험장 500m)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왼편 송산정류장 방향으로 진행하면 된다. 이후부터 탐방로는 임도를 따른다. 오늘처럼 무더운 여름날에는 고역을 치러야만 하는 코스이다. 한운마을에 이를 때까지 오뉴월 땡볕을 가려줄만한 나무그늘을 한 번도 만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파고라나 정자 같은 인공 그늘이라도 만들어두었으면 좋으련만 이마저도 보이지 않는다. 소나무 숲길을 걷게 된다는 해넘이길 안내판을 무색하게 만드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초반에는 조금 전에 둘러본 무한의 다리가 조망된다. 위에서 바라보는 무한의 다리는 아까와는 달리 너른 바다를 양분하듯이 놓여있다. 그나저나 이 구간은 비록 임도를 따르지만 경사가 심하지 않아 평지나 다름없다. 덕분에 느긋하게 걸으며 눈앞에 펼쳐지는 주변 풍광을 감상하기에 딱 좋은 곳이다.

 

 

임도는 산허리를 꿰뚫으며 나있다. 산은 높거나 깊지 않고, 숲이 우거진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폭 3m나 되는 임도가 나있다. 1980년대 후반 산불 감시와 산불 예방을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란다. 그렇게 30분쯤 걷자 삼거리가 나온다. 전망 좋은 쉼터로 가는 길이 나뉘는 이곳에는 이정표(송산정류장5.2/ 쉼터0.57/ 둔장어촌체험마을2.5)‘와 국가지점표지판(나라 6868-6048) 외에도 신안섬 자전거길의 인증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고교항에서 시작해 이곳 해넘이길을 거쳐 분계해수욕장에 이르는 22.7의 자전거길인데, 핸드폰 앱을 이용해 인증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뱀이 똬리를 틀 듯 구불대는 탐방로를 따라 걷다보면 심심찮게 조망이 열린다. 그리곤 굴곡진 곳에 숨어있던 작은 모래사장들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귀엽고 작은 바위섬들과 함께이다. 이곳 자은도에 50여 개에 이르는 해변과 9곳의 해수욕장이 있다더니 사실이었던가 보다.

 

 

임도 구간에서 유일하게 만난 정자이다. 바다 건너에 있는 신안의 수많은 섬들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등 조망도 썩 뛰어나다. 쉬어가기 딱 좋은 곳이란 얘기이다. 아니 임도 유일의 그늘이니 쉬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자를 지나면서 눈의 호사가 시작된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시원스런 조망이 열리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서도 백미는 소나무 몇 그루를 머리에 이고 있는 옥도가 아닐까 싶다. 오와 열이 반듯한 김 양식장의 장대와 조화를 이루며 멋진 풍경화를 그려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망을 즐기면서 걷다보면 한운리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마을 표지석은 천사마을이라고 적고 있다. 이 마을의 새로운 명소인 캠핑&글램핑사무실은 아예 천사섬이란 이름표를 달았다. 참고로 한운(閑雲)이란 마을 이름은 구름 가운데 있는 반달과 같이 생긴 이 마을의 지형에서 유래했다. 여유로운 이름을 가진 이 마을도 일제강점기에는 한가롭지 못했다. 마을 뒷산에 일본군이 참호를 파고 주둔하면서 중국의 침략을 방어했고, 자은도의 곡물과 수산물을 착취해간 것이다. 일본인들은 곡물이나 수산물을 군산이나 목포로 가져갔고, 주민들의 삶은 피폐해졌다. 당시 일본인들이 얼마나 몹쓸 짓을 했는지 주민들은 지금도 마을 뒷산에 있는 일본군의 참호 근처에는 발걸음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한운마을은 참 한가로운 마을이다. 모래사장 안쪽에는 소나무가 줄지어 서 있고, 갯벌에는 자갈이 많이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 길지 않은 선착장이 있다. 선착장 주변에 배는 하나도 없고, 저 멀리 김을 재배하던 장대만 한가로이 서 있다.

 

 

 

한운마을에서 송산교차로 나가는 구간은 드넓은 들녘이 펼쳐진다. 자은면은 여덟 면이 바다이고, 마을 숫자보다 해수욕장이 많은 섬이지만 수산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5% 남짓이라고 한다. 해넘이길에 걸터앉은 한운마을과 둔장마을도 마찬가지다. 주민 대부분은 벼농사를 하거나 양파나 마늘 등의 밭농사를 짓고 있다. 참고로 출발지인 송산교차로로 원점 회귀한 오늘 트레킹은 총 2시간 40분이 걸렸다. 물론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 쉬었던 시간이 포함됐다.

 

 

두 번째 방문지는 둔장해수욕장에서 서남쪽으로 10쯤 떨어져 있는 분계해수욕장이다. 분계해수욕장은 백사장 뒤편으로 울창하게 우거진 소나무 숲길이 조성돼 있다. 조선시대에 바다에서 불어오는 해풍과 태풍을 막기 위한 방풍림으로 만들어진 이 숲은 2010'11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 천년의 숲 부분에서 아름다운 어울림상을 받기도 했다.

 

 

 

바닷가로 나가자 해안을 따라 펼쳐진 노송 숲이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하다. 그렇게 넓지는 않으나 깨끗한 모래사장과 해안을 따라 펼쳐진 이 송림은 여인송 숲이라는 어엿한 이름까지 갖고 있다.

 

 

이 숲의 자랑거리는 단연 여인송(女人松 : 목책을 둘러놓은 나무)’이다. 여인이 하늘을 향해 다리를 벌리고 있는 모습을 보는 듯한 이 노송은 가슴 아픈 사연을 담고 있다. 먼 옛날 분계 마을에 가난하지만 고기잡이를 하면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부부가 있었다. 어느 날 사소한 말다툼을 벌이고 고기잡이를 나간 남편이 큰 풍랑을 만나 돌아오지 않았다. 후회한 부인은 날마다 이곳에 올라 우각도 너머 수평선을 바라보며 남편의 무사 귀환을 애타게 빌며 가다렸다. 부인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분계의 제일 큰 소나무에 올라 남편이 배를 타고 오는 환상을 보곤 하였다. 어느 추운 겨울날 기다림에 지친 아내는 소나무에서 거꾸로 떨어져 동사하게 되었다. 그 후 돌아온 남편이 아내의 시신을 수습하여 그 소나무 아래에 묻어주자 나무는 거꾸로 선 아름다운 여인의 자태를 닮은 여인송으로 변해 지금까지 남아 있다고 한다.

 

 

분계해변도 자은도를 찾은 관광객들이 빼놓지 않고 들르는 곳이다. 그러니 화장실과 캠핑사이트 등 그들을 위한 시설은 필수다.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한 포토죤도 만들어 놓았다. 하트모양 그네와 신안 자은도 해사랑길네모 프레임은 훌륭한 사진 포인트이자 쉼터 역할을 해준다.

 

 

소나무 숲길을 벗어나자 탐방로는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1.2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응암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으로 정상까지 탐방로가 잘 닦여있다. 탐방로를 따라 걷다보면 휴양림(이정표 : 응암산 정상1.0/ 휴양림0.6/ 해수욕장0.3)’과 해수욕장(이정표 : 정상510m/ 해수욕장/ 경로당)‘, 낚시터(이정표 : 정상0.3/ 낚시터0.1/ 해수욕장1.2) 등으로 연결되는 갈림길을 만나기도 하지만 이정표가 세워져 있어 길이 헷갈릴 일은 없다.

 

 

울창한 숲속을 오르지만 가끔은 조망이 열리기도 한다. 이때 해식애로 이루어진 바닷가 풍경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모래섬으로 알려진 자은도답지 않은 풍경이라 하겠다. 아무래도 응암산은 먼 바다를 향해 고개를 내밀고 있나 보다.

 

 

정상으로 향하는 능선은 무척 가파르다. 하지만 통나무 계단과 데크계단을 설치해 버겁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웃자란 잡초로 뒤덮인 구간도 있었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신성한 명산이라서 뱀이 전혀 없다니 말이다. 거기다 산봉의 바위가 날카로운 매의 모습으로 늘 사방을 지켜준다니 무얼 더 걱정하겠는가.

 

 

주차장을 출발한지 40분 만에 정상에 올랐다. 아름다운 풍경화가 사방으로 그려지는 멋진 봉우리이다. 하지만 정상석은 물론이고 그 흔한 이정표 하나 보이지 않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참고로 매바위산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 산은 자은면의 명산으로 소문났다. 각 지방의 풍수들이 명당자리를 찾으려고 수시로 찾아올 정도란다. 그래선지 소원을 빌기 위해 이곳을 찾는 사람들도 많단다. 하지만 부정한 사람이 기원을 하면 갑자기 불이 나서 화상을 입고 병신이 된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정상에서 바라보는 바다 풍경은 만만찮다. 발아래에는 작은 소나무 숲을 머리에 인 우각도와 상대섬이 내려다보이고 고개를 더 들면 철새 서식지로 유명한 칠발도 앞 바다가 가없이 펼쳐진다.

 

 

해수욕장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오른편으로 향한다. 잠시 후 내려선 바닷가는 온통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해식애로 이루어져 있다. 먼 바다로부터 밀려오는 거센 파도와 맞닿아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절벽의 곳곳에는 구멍이 숭숭 뚫려있다. 파도가 만들어낸 해식동굴(sea cave)‘들이다. 이런 곳은 통상 코끼리바위라고 불리는 씨 아치(sea arch)와 촛대바위로 불리는 시스텍(sea stack)’이 함께 등장하는 게 보통이다. 해식절벽에서 해식동굴을 거쳐 씨 아치로 변하고, ‘씨 아치가 세월이 흐르면 시스텍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해식지형의 변화과정도 살펴볼 겸 조금 더 멀리 나가보고 싶었지만 물이 차있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바다로 눈을 돌리면 널디 너른 백사장이 펼쳐진다. 썰물 때라 그런지 더 넓어 보이는 백사장 끝에 쪽빛으로 빛나는 바다가 출렁인다. ‘분계해수욕장은 항아리처럼 움푹하게 파인 해안의 입구를 우각도와 함께 상대섬이 막아서고 있는 모양새이다. 저 섬들이 먼 바다에서 밀려오는 거센 파도를 막아주는 탓에 이곳 분계해수욕장의 물이 저렇게 잔잔하나 보다.

 

 

 

주차장으로 나갈 때는 해수욕장의 모래사장을 걸어보기로 했다. 내륙의 해수욕장에서는 보기 힘든 가는 입자의 모래라서 마치 부드러운 솜이불 위를 걷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밟을 때 발이 깊숙이 빠지지도 않는다. 자원공학을 전공한 친구의 말로는 바람에 실려 온 규사(硅砂)가 쌓였기 때문이라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그건 그렇고 서해의 해변에서 모래 백사장의 완벽한 모습을 보는 건 운이라고 했다. 어떤 시간은 물이 차서 해변이 사라지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새하얀 모래 백사장이 끝도 없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운이 반쯤 있었던 모양이다. 눈앞에 펼쳐지는 모래사장의 폭이 그렇게 넓지도, 그렇다고 좁지도 않아 보이니 말이다.

원산도(元山島)

 

여행일 : ‘20. 2. 3()

소재지 : 충남 보령시 오천면 원산도리

트레킹 코스 : 77번 국도구치마을사창마을진말마을오로봉오봉산-증봉산오봉산 해수욕장사창해수욕장77번 국도원산도해수욕장(소요시간 : 3시간)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충청도에서 안면도 다음으로 큰 섬으로 대천항에서 서쪽으로 11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섬은 동서방향으로 길게 뻗어 있는데 서쪽에 위치한 오로봉(五老峰, 118m)을 제외하면 50m 이하의 낮은 구릉지와 평지가 대부분이다. 그래선지 해안선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고 있는 해수욕장들 외에는 특별한 볼거리가 없었다. 또한 이 섬은 남쪽이 사빈(沙濱)으로 이루어진 반면 북쪽은 해안선의 출입이 심하다는 특징도 있다. 그 만입부들은 대개 간척(干拓)이 되어 농경지로 이용된다. 때문에 주민들은 섬인데도 불구하고 반농반어(半農半漁)의 삶을 영유한단다. 참고로 이 섬은 과거 고만도 또는 고란도(孤蘭島)라 불렸다. 그러다가 자를 고을과 같은 의미를 가진 ()‘자로 고쳤고, 거기에 섬 자체가 구릉(丘陵)이 많을 뿐만 아니라 생김새까지 뫼 산()’자를 닮았다는 특이점을 더해 원산도라 했단다. 1914년 일제(日帝)의 식민통치 편의를 위해 시행됐던 행정구역 개편이 만들어낸 일화가 아닐까 싶다.


 

찾아오는 방법 : 서해안고속도로 홍성 IC에서 빠져나와 ‘40번 국도를 이용 광리교차로(홍성군 서부면 광리)까지 온다. ‘서산A지구 방조제방면이다. 96번 지방도로 옮겨 서산A지구서산B지구방조제를 연속해서 건너면 원청사거리(태안군 남면 원청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좌회전하여 77번 국도로 바꿔 타면 안면도를 종단한 후 원산도에 이르게 된다. 작년 말 안면도와 원산도가 다리(원산·안면대교)로 연결되면서 배를 타지 않고도 입도(入島)가 가능해졌다

 

트레킹 들머리는 오봉산해수욕장으로 들어가는 길가의 펜션 신축현장

원산·안면대교를 건넌 다음 처음으로 만나는 교차로(보령시 오천면 원산도리 558-311)에서 오른편으로 빠져나온다. 이어서 오봉산 해수욕장방향으로 잠시 들어가면 펜션단지 신축현장이 나온다. 작년 말에 개통된 원산·안면대교에 이어 내년에는 대천항을 잇는 해저터널까지 연결된다니 저런 펜션들이 늘어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대형버스는 딱 이곳까지만 진입이 가능하단다. 오봉산해수욕장과 초전마을까지 도로가 나있지만 단차선(單車線)이라서 맞은편에서 오는 차량이라도 마주칠 경우 대책이 없기 때문이다. 거기다 회차(回車)를 시킬 만한 공간도 없다니 어쩌겠는가.



원산도(元山島)고을 원()’자에다 뫼 산()’자를 첨가한 지명이다. 섬의 생김새는 정말 뫼 산()’ 자를 떠올리게 한다. 자의 각 획에 해당하는 곳에 원산 1, 2, 3리로 이루어진 마을들이 자리 잡고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원산 1리는 원산도의 행정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선촌과 진고지, 간사지 등으로, 원산 2리는 선촌항과 더불어 대천항에서 출발하는 여객선이 취항하고 있는 저두(猪頭)와 점촌(店村), 개경, 구치(鳩峙) 마을로, 그리고 원산 3리는 진촌(鎭村), 사창(射倉), 초전(草箭), 관가 마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봉산해수욕장 방향으로 들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10분쯤 걸었을까 구치(鳩峙) 마을이 나온다. 포구가 없는 걸 보면 이 마을의 주업은 농업인가 보다. 하긴 마을 앞의 들녘이 저렇게 넓으니 구태여 바다로 나갈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십자가에 지붕까지 씌운 교회가 보이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저 정도로 소중하게 십자가를 모시는 교회를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조금 더 걸으면 어마어마하게 너른 들녘이 나타난다. 그 끄트머리를 방조제(防潮堤)가 지키고 있는 걸로 보아 간척지(干拓地)인 모양이다. 아니 간사지들이라고도 불린다는 간척평야가 맞다. 방금 전에 지나온 구치마을도 이 간척지 제방 축조 때 인부들이 기거하면서 생겨난 마을이라고 한다. 그래서 '공장'이라고도 불린단다.



제방 앞에서 왼편으로 꺾으면 원산도의 가운데 부분에 위치한 사창(射倉)’ 마을에 이른다. 옛날 곡식 3,500여 섬을 저장하던 사창이 있던 자리라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라는데 윗말과 도랫말(턱금말, 구억말), 아랫말 등으로 나뉜다고 한다. 그나저나 마을 앞에는 버스정류장이 지어져 있었다. 아니 어느 마을이나 똑 같은 풍경이었다. 이는 버스가 운행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여객선이 선착장에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마을버스가 다녔다고 했는데 다리가 놓인 지금도 운행하는지는 오르겠다.



마을 앞 표지석(이정표를 겸한다)은 이 마을 남쪽에 사창해수욕장이 있음을 넌지시 귀띔해준다. 손길이 많이 타지 않아 아직도 태초의 자연 풍경을 간직하고 있는 해수욕장이란다. ! 선답자들은 사창에서 바라보는 해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래 남을 만큼 찬란하다고 했다. 하지만 일출인지 일몰인지는 구분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곳을 말하는지 아니면 이따가 들르게 될 사창해수욕장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마을 앞에는 서해의 명물인 '갯벌'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썰물이 되면 저 갯벌은 훨씬 더 넓어진다고 한다. 물이 빠지면 드러나는 갯벌에는 조개가 지천이다. 이곳 원산도에서는 '맛조개'가 많이 잡힌단다. 그렇다고 아무나 조개를 잡을 수는 없다. 어민들의 생활터전인 양식장이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갯벌 끄트머리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푸른 봉우리는 밤섬시루섬일 것이다. 밤섬은 원래 섬이었지만 언제부턴가 육지와 연결되면서 섬 아닌 섬이 되었단다.



조금 더 걸으면 진촌(鎭村)’이다. 사창과 섬창 사이에 있는 마을로 넘말, 진말, 섬창말 등이 있다. 이곳에서 길은 둘로 나뉜다. 원산도의 명물 가운데 하나인 오봉산해수욕장은 왼편이다. 계속해서 해안길을 따르면 섬창을 거쳐 초전(草箭)’ 마을에 이르게 된다. 선촌마을 및 저두마을과 함께 선착장을 갖고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또 윗말과 풋살, 안동네로 나뉜다. 구치에서 진말까지 오는데 10분이면 충분했다. 그만큼 가깝다는 얘기이다.



진촌에는 방파제도 없었다. 그런데도 포구에 조그마한 배들이 한 폭의 그림처럼 오밀조밀하게 정박해 있다. 최소한 대여섯 집은 바다에 얹혀 살아가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바다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원산·안면대교가 눈에 들어온다. 왕복 4차로의 저 다리는 1.8로 전국에서 6번째로 길다. 2010(12)부터 2019(1227)까지 9년간 2,082억 원의 공사비가 투입됐다. 여기에 대천항으로 연결되는 6.9km의 해저터널이 2021년 완공될 경우 대천항에서 안면도 영목항까지 자동차 이동 거리는 94.39km에서 14.1km로 줄어든단다. 시간은 1시간50분에서 10분대로 단축된다.



초전마을 방향으로 잠시 걷다가 왼편 골목으로 들어간다. 오봉산으로 오르기 위해서이다. 이곳 말고도 초천마을이나 오봉산해수욕장에서 오르는 방법도 있다.



마을 안길을 통과하면 언덕 위로 오르는 가파른 오르막길이 나타난다. 하지만 거리가 하도 짧아서 힘들다는 생각이 들 겨를도 없이 언덕 위에 올라선다.



언덕에는 가족 묘역(墓域)이 들어서 있었다. 맨 위쪽은 납골당, 그 아래로 석물까지 갖춘 봉분 서넛이 들어서 있었다. 선답자들은 추계 추씨진주 강씨의 묘역이라고 적고 있었는데 직접 확인해보지는 않았다.



언덕에서의 조망은 일품이다. 진촌마을과 그 앞의 갯벌은 물론이고 반대편의 초전마을(아래 사진)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초전마을은 바다를 향해 길게 뻗어나간 선착장이 나름대로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그 뒤에 있는 섬은 군관도(軍官島)이다. 옛날 오천에 주둔하고 있던 수군절도영의 문을 지키는 군관의 역할을 했다는 바위섬이다. 그 뒤에서 나도 있다며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있는 바위섬은 거북이의 형성을 쏙 빼다 닮았다는거북바위일 것이다.



이젠 능선을 따라 오봉산으로 향한다. 산책로처럼 완만하게 시작된 산길은 조금씩 가팔라진다. 그러다가 끝내는 갈 지()’자를 쓰고 나서야 고도를 높일 수 있을 정도로 가파르게 변해버린다.



10분 정도의 힘겨운 싸움을 치른 뒤에야 우린 오봉산의 최고봉인 오로봉(118m)에 올라설 수 있었다. 뽈록하니 솟아오른 정상에는 봉수대(烽燧臺)가 복원되어 있다. 왜적의 침략이나 긴급한 상황이 닥쳤을 때 멀리 외연도에서 녹도를 거쳐 온 신호를 오천 수영성의 수군절도사로 연락을 취하던 곳이다. 그렇다면 연변봉수(沿邊烽燧)였다는 얘기일 것이다. 이 연변봉수는 바다정찰과 신호전달, 해안경비뿐만 아니라 적의 침략 시 자체적으로 응전, 방어하는 임무까지 맡고 있었음도 기억해 두자.



해발고도가 116m인 봉수대에는 삼각점(고남 419)이 설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정상표지석이나 이정표는 보이지 않는다. 블랙야크에서 세운 것으로 보이는 &인증표지판이 이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참고로 원산도는 높지 않은 봉우리가 많은 구릉성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산 이름만 봐도 오봉산, 안산, 큰산, 당산, 범산, 증봉산 등 여럿이다. 그중 오봉산에 있는 이곳 오로봉이 116m로 가장 높다.




봉수대답게 정상에서의 조망은 일품이다. 왼쪽으로 보령화력발전소에서 오른쪽 서천군 장항제련소까지 주변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주변 바다를 점점이 수놓은 서해안의 보석 같은 섬들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으며, 새로 놓인 원산·안면대교도 손에 잡힐 듯 가깝다. ! 이곳은 일출의 명소로도 유명세를 탔다. 이른 아침 찾아오면 멀리 대천항 너머 산 위로 장엄하게 떠오르는 해를 맞이할 수 있단다.




이젠 증봉산으로 갈 차례이다. 올라왔던 반대방향으로 또렷하게 길이 나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증봉산으로 연결되는 능선은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된다. 이곳 오봉산이 다섯 형제가 어깨동무를 한 것 같은 형상이라더니 그 말이 맞은 모양이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진행하자 오봉산의 정상에 올라선다. 하지만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았다. 그 흔한 이정표 하나도 세워놓지 않았다. 그저 오봉산 정상이라고 적힌 선답자의 리본이 이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렇다고 조망이 트이는 것도 아니다. 오봉(五峰)에 대한 스토리텔링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내 바람은 여기서 그만 놓아주기로 했다.




오봉산을 지난 산길은 서서히 아래로 향한다. 이어서 느긋하게 8분쯤 걸었을까 산길은 안부사거리로 뚝 떨어진다. 이정표는 없지만 증봉산은 맞은편이다. 하지만 증봉산 정상까지 갔다가 다시 되돌아와야 한다. 다음 행선지인 오봉산해수욕장이 이곳에서 왼편으로 내려가야만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오른편은 초전마을로 내려가는 길이다.



다시 시작된 오르막길을 따라 5분쯤 진행했을까 무너져가는 건물이 주인노릇을 하고 있는 봉우리에 올라선다. 이곳이 바로 증봉산(102.2m)’의 정상이다. 증봉산도 역시 정성표지석이나 이정표 등은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대신 알만한 산꾼들이 매달아놓은 리본들이 이곳이 증봉산의 정상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젠 범산으로 갈 차례이다. 올라왔던 반대방향으로 내려서서 2분쯤 걸었을까 반대방향에서 올라오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보잘 것이 없어서 범산 탐방을 그만두기로 했다는 것이다. 앞서가던 집사람이 그들처럼 발걸음을 돌려버린다. ‘레이디 퍼스트가 되어버린 세상에서 나라고 별 수 있겠는가. 나 또한 그녀 뒤를 뒤쫓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안부사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오봉산해수욕장으로 향한다. 임도처럼 널찍한 산길은 등산로답지 않게 경사까지도 거의 없었다.



산에서 내려오자 민박집 여럿이 늘어서 있다. 소나무 숲속에는 이국적 풍모의 펜션이 여러 동() 들어섰다. 식당과 가게를 겸하는 상가들도 보인다. 누군가 이곳을 소개하면서 민박에서 캠핑까지, 백사장에서 갯벌까지, 섬 해변의 특색을 모두 갖추었다고 하더니 옳은 표현이라 하겠다. 또한 그는 최고의 가족단위 피서지라는 칭찬도 빼놓지 않았었다.



! 저 부근에 관가(관개)’ 마을이 있다고 했는데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었다. 아까 오로봉에서 만났던 봉수대를 관리하던 관아(官衙)가 있었다는 마을 말이다. 홍주관할의 이 관청이 있던 자리에서는 현재도 기와조각이 출토된다고 했다.



바다에는 작은 섬 하나가 두둥실 떠올랐다. 그 오른편에 삽시도가 들어앉았고, 둘을 에워싼 하늘은 뭉게구름이 두둥실. 이 모든 것이 함께 어우러지며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을 완성시킨다.



해수욕장의 북서쪽 선착장 너머에 있다는 새 벼락 바위는 찾아보지 못했다. 새가 벼락을 맞아 바위로 변했다는 스토리텔링까지 갖고 있는 이 바위는 바다로 뻗어나간 거대한 바위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모양새라고 한다. 그 형상이 서산 황금산의 코끼리 바위를 빼다 닮았다는데 아쉬운 일이다. 하지만 물이 덜 빠진 탓에 바닷가로 내려설 수조차 없으니 어쩌겠는가.



오봉산 해변은 폭 150m에 길이가 2쯤 되는데 백사장을 따라 소나무 숲이 우거져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소나무 아래는 캠핑 장소로도 명성이 높다. 전기시설은 없지만 공중화장실은 항상 개방되고 있단다. 별도의 입장료와 이용료를 받지 않음은 물론이다. 또한 백사장 주변 갯벌에서는 바지락과 맛조개 등도 잡을 수 있단다. 가족단위 피서지로 제격이라 하겠다.



해식애로 인해 더 이상 진행을 못하게 된 우리 일행은 왼편으로 방향을 틀기로 했다. 그리곤 진말마을로 향한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성경 구절이 적힌 담벼락이 인상 깊었던 마을이다. 주인장의 신앙심이 꽤나 깊었던 모양이다.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 항아리가 보여 카메라에 담아봤다. 기존의 항아리로 사람 얼굴을 만들었는데 균형미에 해학까지 담아 보는 이들을 즐겁게 만들어 준다.



마을로 들어선 탐방로는 다시 오른편으로 방향을 꺾는다. 이어서 시멘트포장길을 따라 잠시 걷는가 싶더니 이내 작은 다랑논과 밭을 지나 나지막한 구릉(丘陵)을 넘는다. 그렇게 우린 사창(射倉) 마을에 이르렀다. ! 안산(案山)을 넘어 사창해수욕장으로 가는 방법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들머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이용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드물다는 얘기일 것이다. 참고로 안산은 풍수의 사신사(四神砂) 가운데 주산인 당산에 대응하는 산이다. 마을 안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당산의 서쪽에 자리한다. 원산도에서는 이곳 사창(射倉)과 진촌(鎭村, 짐말) 사이의 안산 외에도, 저두(猪頭, 도투머리)의 안산, 진고지(鎭串之, 진곶지) 안산 등이 있다.



사창해수욕장은 아까 만났던 오봉산해수욕장과는 확연히 다른 풍경이다. 샤워장이나 화장실 등의 편의시설이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해변도 순수한 모래사장이 아니고 자잘한 몽돌이 깔려있는 것이다. 가게나 식당 같은 상가도 없다. 대신 펜션은 두어 곳 보이니 차량을 가지고 들어와 숙소에서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자 하는 여행객들에게 어울리는 곳이라 하겠다. 오봉산해수욕장에서 이곳 사창해수욕장까지는 25분이 걸렸다.




사창해수욕장의 또 다른 특징은 해안의 중간쯤에 갯바위 지대가 있다는 점이다. 물이 빠졌을 때 바위에 붙어 있는 고둥이나 게 잡이를 체험해보기에 딱 좋은 곳이다. 우람하진 않지만 잠깐의 눈요깃감으로도 충분했다.



바위지대를 지나자 또 다른 백사장이 기다리고 있다. 아니 같은 해안인데 하도 몸집이 크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둘로 나뉘었나 보다. 그래선지 양쪽 모두 비슷한 느낌을 준다. 다만 조금 전보다는 훨씬 더 모래의 비중이 커졌다.



해안의 양 끝은 해식애(海蝕崖)로 이루어져 있다. 때문에 해수욕장과 해수욕장은 바닷길을 통해 이어갈 수 없다. 하지만 낚시꾼들에게는 잘 발달된 암초와 알맞은 수심 덕에 별천지로 예우를 받는단다. 그리고 낚싯대를 드리우기만 하면 놀래미와 우럭, 살감성돔 등을 손쉽게 잡아 올릴 수 있단다.



이제 남은 곳은 원산도 해수욕장저두 해수욕장만 남았다. 바닷길로 이어갔으면 좋겠는데 날카롭게 서있는 해식애가 가로막고 있으니 어쩌겠는가. 일단 도로가 있는 사창마을까지 되돌아 나가기로 했다. 그렇다고 산자락까지 기웃거리는 일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조금이라도 덜 걷고 싶은 게, 인지상정(人之常情)이 아니겠는가. 아쉽게도 원하는 바를 이룰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사방에 널린 공사 현장들 때문에 길이 없어져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옛길과 새로 생긴 길을 번갈아가며 걷다보니 트레킹을 시작했던 펜션이 나오고, 이어서 잠시 후에는 연장된 ’77번 국도에 이른다. 사거리인 이곳에서 우린 오른편 대천항 방향으로 진행했다. 곧장 직진하면 선촌항, 왼편은 안면도로 연결되니 참조한다.



국도변의 인도를 따라 걷기를 20, 공사현장이 길을 막는다. 77번 국도를 대천항으로 연결시키는 해저터널 공사인데 2021년 말 개통을 목표로 하고 있단다. 길이 6.9km의 이 터널이 완공될 경우 우리는 일본의 동경 아쿠아라인(9.5km)‘, 노르웨이의 봄나 피요르드(7.9km)‘, 에이커선더(7.8km), 오슬로 피요르드(7.2km)에 이어 세계 5위의 해저터널을 보유하게 된단다. 또 하나의 눈요깃거리를 갖게 되는 셈이다.



공사현장 입구에서 오른편으로 내려서서 조금 더 걸으면 원산도해수욕장이다. 화장실과 샤워장을 갖춘 널따란 주차장에는 서너 대의 푸드 트럭이 문을 열고 있었다. 아직 입춘 전인 점을 감안하면 이곳 원산도해수욕장은 철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찾아온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긴 매년 여름 휴가철에 약 10만 명의 피서객이 찾는다니 이를 말이겠는가. 참고로 이곳은 원산도에서 가장 넓은 해수욕장이다. 해변의 길이가 약 2km에 이른다. 해변 정중앙에 도로가 나있는데 주민들은 바다를 바라보고 오른편을 원산도해수욕장, 그리고 왼편은 원산도 옆 해변으로 구분한단다.



주차장을 지나자 눈이 부시도록 하얀 백사장이 눈앞에 펼쳐진다. 원산도해수욕장은 하얀 밀가루를 뿌려 놓은 듯한 고운 모래가 자랑이다. 서해안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남향의 해수욕장이라는 점도 눈길을 끈다. 거기다 조류의 영향이 적고 완만한 경사와 깨끗한 수질, 그리고 알맞은 수온을 갖고 있단다. 백사장 뒤쪽의 빽빽하게 들어찬 소나무 숲도 빼놓을 수 없다. 소나무에 해먹(hammock)이라도 걸어놓고 누우면 시원한 바람은 기본, 이때 눈앞에 펼쳐질 바다는 보너스(bonus) 일 것이다. 이런 게 바로 일상생활의 지루함을 금세 잊게 만드는 신비한 묘약이 아니겠는가. ! 끄트머리의 모퉁이를 돌면 저두해수욕장이 나온다고 했다. 해변 끝에서 끝까지의 거리가 200m도 되지 않는 작은 해수욕장이다. 그래서 나 홀로 여행객에게 어울리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근처에 파출소가 있어 안전에도 문제가 없단다.



반대편에도 모래사장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 물이 빠졌을 때는 저 갯벌에서 해루질체험이 가능하다고 했다. 해루질은 전통 고기잡이 법이다. 물이 대부분 빠져나가고 갯벌에서 찰랑거리는 밤 시간, 그 찰랑거리는 물을 향해 랜턴을 비추면 고기들이 몰려드는데, 그때 잽싸게 손으로 잡는 방법이란다.



원산도해수욕장의 또 다른 자랑거리는 학익진(鶴翼陣)처럼 양 옆으로 날개를 편 백사장의 중간에 우뚝 솟아 있는 바위산이다. 원산도에서 가장 거대한 해식애(海蝕崖)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아치(sea arch)''시 스택(sea stack)'은 눈에 띄지 않았지만 두어 개의 해식동굴(海蝕洞窟, sea cave)‘이 들어서있어 여행객들에 훌륭한 눈요깃거리가 되어 주고 있었다.




대난지도(大蘭芝島)

 

여행일 : ‘19. 12. 14()

소재지 : 충남 당진시 석문면 난지도리

산행코스 : 선착장방조제은개해변국수봉일월봉망치봉전망대난지섬해수욕장난지정바드레산선녀바위선착장(소요시간 : 4시간 10)

 

함께한 산악회 : 좋은사람들

 

특징 : 석문반도와 대산반도 사이의 당진만 입구에 들어앉은 당진에서 가장 큰 섬이자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는 섬이기도 하다. 이 섬의 주민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한단다. 바다라는 품에 안겨있는 섬치고는 의외라 하겠다. 그만큼 경사가 완만한 지형을 보유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경작에는 물도 필수이다. 그러니 섬이 품고 있는 산들도 흙산일 게 분명하다. 탐방로의 대부분이 산길임에도 불구하고 눈요깃거리가 전무하다시피 하는 이유일 것이다. ‘난지섬해수욕장선녀바위를 제외하면 바닷가도 역시 특별한 볼거리가 없다. 그러나 이 두 가지만 갖고도 관광객들을 끌어 모으기에 충분할 것 같다. 넓은 백사장과 맑은 물을 품고 있는 난지섬해수욕장은 전국의 어느 유명 해수욕장에도 뒤질 게 없으며, 특히 선녀바위의 자태는 내가 보아온 그 어느 바위보다도 그 자태가 뛰어났기 때문이다.


 

찾아오는 방법 : 대난지도로 들어가려면 일단 당진군에 있는 도비도까지 와야만 한다. 섬으로 들어가는 배가 이곳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서해대교를 지나 송악 IC로 나간다. ‘왜목리이정표를 보고 38번 국도를 달리면 633번 지방도로를 만나고 여기서 석문 방조제 방향으로 우회전해서 삼봉사거리까지 간다. 우회전해서 왜목리를 지나 대호방조제를 지나면 대난지도로 들어가는 배가 있는 도비도에 도착한다. 도비도는 원래 섬이었으나 대호방조제를 축조하면서 육지로 변한 곳이다.




대난지도까지는 차도선(車渡船)이 운행된다. 배는 2개 회사에서 운영하기 때문에 반드시 나오는 배 시간을 확인해 두어야 한다. 타고 들어갔던 회사의 배를 다시 타고나와야만 하기 때문이다. 우리 일행은 유람선(관광호 : 정원 96)을 이용했다. 하루 3차례(오전 750, 오후 1, 오후 5) 운항하는 차도선의 시간을 맞추기가 만만찮다는 운영진의 결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1인당 5천원의 요금을 추가로 지불했다.



배를 탄지 10분 남짓 지났을 뿐인데 벌써 배에서 내리란다. 느려터진 차도선을 이용할 경우 30분이나 걸리지만 우리가 빌린 유람선은 그보다 훨씬 속도가 빠르기 때문이다. 거기다 차도선의 중간 경유지인 소난지도까지 빼먹었으니 얼마나 빨리 도착했겠는가. 참고로 난지도는 큰섬(난지도)말고도 작은 섬(난지도)이 하나 더 있다.



포구는 우리가 내린 방파제의 오른편에 만들어져 있었다. 그런데 선착장이 부교(浮橋)로 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선착장과 물양장을 잇는 다리는 물높이에 따라 움직이도록 놓여있다. 조수간만(潮水干滿)의 차이가 엄청나게 크다는 증거일 것이다.



대난지도 표지석은 선착장 입구에 들어선 조그마한 마을의 전신주 옆에 세워져 있다. 2000년에 모 단체에서 기증한 것이란다. 그런데 주변이 조금 어수선하다. 쓰레기와 공사자재들이 널브러져 있는 것이다. ‘인생 샷을 찍을만한 장소가 못 된다는 얘기이다. ‘블랙야크 100대 섬&에서 이곳 대난지도의 인증 장소를 망치봉으로 정한 이유일 수도 있겠다. 참고로 난지(蘭芝)’라는 이곳 지명은 섬에 난초와 지초가 많다는데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풍도와 난지도 사이의 물살이 몹시 거세서 배가 다니기 어렵기 때문에 난지(難知)’라 했다가 한자만 난지도(蘭芝)로 바뀌었다는 설도 있다. 나에겐 후자가 더 타당성이 있게 들린다.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승선 대기소를 두 곳이나 만들어 놓았다. 그중 대난지도 나루터가 눈길을 끈다. 숲과 바다가 어우러진다는 섬의 특징만으로도 모자라 사랑한다는 건 서로의 마음을 향해 끊임없이 걸어가는 거라더라..’는 글귀로 관광객들의 감성까지 자극하기 때문이다. 이윤학 시인의 저서인 '샘 괴롭히기 프로젝트'에 나오는 글귀인데 당시에 받았던 감명이 10년 가까이나 지났는데도 새록새록 솟아오른다. 그만큼 가슴에 와 닿았던 책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 그 오른편에는 관광안내도도 세워놓았으니 한번쯤 꼭 살펴보고 길을 나서자.



민박집들이 늘어선 마을 앞 도로를 따라 트레킹을 시작한다. 왼쪽은 아예 뻘이다. 그 뻘밭 너머에서 이곳 대난지도의 명물인 선녀바위가 살포시 고개를 내밀고 있다. 오랜만에 보는 아름다운 풍경이다. 아름다움이 곧 행복의 원천일지니 오늘 트레킹도 행복할 것이 분명하다. ! 트레킹을 시작하기 전에 하나만 짚고 가자. ‘난지도라는 이름만 들어도 사람들은 이제는 생태공원이 된 서울의 쓰레기 매립지를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오늘 찾은 난지도는 서해의 섬이다. 서해의 가장 맑은 바다로 꼽히는 가로림만에 떠있다. 그런 천혜의 요건에다 불과 4.3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도비도가 육지로 변하면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숫자도 부척 늘었다고 한다.



5분쯤 걸었을까 방조제가 나타난다. 그 오른편 산자락에 이정표(망치봉3.5/ 난지섬 해수욕장2.6/ 선착장0.4)와 함께 진행해야 할 방향을 화살표로 표시해놓은 난지섬 둘레길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이런 안내도는 트레킹을 하는 도중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이때는 망설일 필요 없이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진행하면 된다. ! 안내도에는 국내 10대 명품 섬이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맞다 이곳 대난지도는 2010년 행정안전부에서 추천하는 열 곳의 명품 섬 가운데 하나로 뽑힌바 있다. 그걸 자랑이라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한편 2019년에는 해양수산부의 썸타고 싶은 섬에도 선정된바 있다. 연인과 함께라면 더 좋다는 얘기일지니 우리 부부는 오늘 제대로 찾아온 셈이다. 아무튼 화살표가 지시하는 산자락으로 들어선다. 난지섬 트레킹이 등산으로부터 시작되는 셈이다. 산길은 많이 가파르다. 그렇다고 버거울 정도는 아니니 미리부터 겁먹을 필요까지는 없다. 그래도 힘들다면 중간 중간에 놓아둔 벤치에서 잠시 쉬었다 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마침 서산반도 쪽으로 조망까지 트이니 눈요기까지 하는 호화 휴식도 가능하다.



급하게 오름짓을 해대던 산길이 언제부턴가 그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그리고는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간다. 그렇게 10분쯤 남짓 진행했을까 삼거리(이정표 : 망치봉2.9/ 등산로/ 선착장0.9)가 나온다. 이정표는 왼편으로 내려가라고 지시하지만 등산로라고 적힌 방향이 궁금해서 10m쯤 들어가 보니 맨 꼭대기에 벤치가 놓여 있었다. 정상표지석이나 이정표 등 이곳의 지명을 알 수 있는 시설물은 눈에 띄지 않는다. 주민들이 도독개미산이라 부르는 산이 이 부근에 있다고 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탐방로는 이제 은개해안을 향해 내려간다. 가파른 내리막길이지만 극한의 노약자만 아니라면 무리 없이 내려설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내려서면 해변에 이른다. 해변으로 들어서기 전에 예쁘게 지어진 전원주택을 만나게 되지만, 진행해야 할 방향을 알려주는 이정표(망치봉2.2/ 선착장1.65)둘레길 안내도는 해변과 만나는 지점에 세워져 있다. 둘레길은 이제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가없이 펼쳐지는 모래사장을 어깨에 기대고 걷는 이 길은 해송 숲을 헤집고 나있어 걷기에 딱 좋다. 소나무 아래에는 몇 개의 쉼터도 조성해 놓았다. 거기에서 취사도 할 수 있도록 해 두었다. 민박집에서 운영하는 시설인 모양이다.



길을 걷다보면 방사림(防沙林)으로 조성해 놓은 소나무 사이로 은개해변이 내다보인다. 좌우가 곶으로 둘러쳐져 있어 시야가 넓지는 않지만 눈에 들어오는 풍경만큼은 광활하다. 북쪽으로 몇 개의 섬이 바라보이는데 왼쪽부터 풍도를 비롯해 육도와 중육도, 미육도 등일 것이다.



서쪽 방향으로 난 해안을 따르다가 바닷가로 내려서 보았다. 그런데 위에서 보면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온전한 모래밭이 아닌 것이다. 아니 잘게 부서진 조개껍질들이 더 많아 보인다. 백사장 너머로 펼쳐지는 갯벌에서 서식하는 조개들이 그만큼 많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그렇게 10분쯤 더 걸었을까 탐방로는 해안을 떠나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그러나 앞서가는 일행 몇은 계속해서 해안을 따르고 있다. 이정표(망치봉 1.6/ 선착장 2.1)는 산자락으로 들어설 것을 지시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그들의 선택이 옳았다. 해안을 따르다 보면 국수봉으로 오르는 길이 나오는데, 이 경우 같은 길을 왕복해야 하는 거북스런 산행을 안 해도 되기 때문이다.



임도처럼 널찍한, 거기다 경사까지 완만한 탐방로를 따라 14분쯤 오르자 안부삼거리(이정표 : 망치봉0.85/ 국수봉0.5/ 선착장3.0)가 나온다. 망치봉은 왼편이지만 국수봉이 궁금할 경우에는 오른편으로 진행해야 한다. 단 이곳으로 다시 돌아와야만 하는 전제조건을 달고서이다. 우리 부부는 거추장스러운 배낭을 벤치에 맡겨두고 국수봉을 다녀오기로 했다.



그다지 가파르지 않는 오르내림을 두어 번 반복하면서 8분 만에 국사봉(121.7m)에 올랐다. 국수봉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작은 봉우리였다. 정상표지석을 세워놓지 않은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이정표(수련원 2.07/ 등산로)에서도 이곳의 지명을 알아낼 수는 없었다. 그저 수북이 쌓인 돌무더기가 옛날 이곳이 봉수대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만들고, 누군가가 세워놓은 뾰쪽한 돌맹이가 이곳이 국사봉임을 짐작해 해줄 따름이다. 그 돌맹이에 국사봉이라고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조망도 물론 트이지 않았다. ! 해안가를 따랐던 사람들과는 이곳에서 마주쳤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한다는 내 불평에 반대편도 가파르기만 할뿐 구경거리는 없더라는 위로의 말을 건네 온다. 그래도 같은 길을 왕복해야 하는 코스보다는 더 나았을 게 분명하다.



안부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망치봉으로 향한다.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되는 능선인데 특별히 눈에 담을 만한 구경거리는 내놓지 못한다. ! 짚고 넘어가야할 게 하나 있다. ‘난지섬 둘레길은 능선의 곳곳에서 내려가는 길을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선착장을 기점으로 삼는 주 탐방로 외에도 해안으로 연결되는 길(‘등산로로 표기하고 있었다), 삼봉초등학교 난지분교에서 올라오는 길도 있었다. 섬사람들이 오가던 길을 그대로 활용하다보니 샛길이 많이 생겼을 것이다.



그렇게 5분쯤 진행하자 일월봉이 나온다. 일월봉의 정상도 역시 정상석은 세워져 있지 않았다. 이정표도 보이지 않는다. 앞서간 이들이 매달아 놓은 표지기가 이곳이 일월봉의 정상임을 알려줄 따름이다. 대구의 뫼들산악회는 친절하게도 높이(105m)까지 적어놓았다. ! 국사봉 정상과 다른 점도 있다. 우리 집사람처럼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잠시 쉬었다가기 좋게끔 근처 굵은 나뭇가지에 그네를 매어 놓았다.



다시 능선을 따라 망치봉으로 향한다. 골만 조금 깊어졌을 뿐 이 구간 역시 눈요깃거리는 없다. 그러다가 벤치 두 개가 놓인 봉우리를 만났다. 망치봉으로 오는 도중에 수살리봉을 만난다고 했는데 이곳에는 리본까지 매달려 있지 않아 진위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3분쯤 더 걷자 드디어 망치봉(118.6m)’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이정표(난지정 1.5/ 난지분교 0.9/ 국수봉 1.3)에 매달린 정상표지판을 처음으로 만났다. 표지판에 &이 표기되어 있는 걸로 보아 블랙야크에서 인증용으로 설치한 것이겠지만 말이다. 아무러면 어쩌겠는가. 우리 부부같이 블랙야크의 이벤트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도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으니 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가.



이젠 난지섬해수욕장으로 내려갈 차례이다. 가파르게 떨어지는 길을 5분 조금 못되게 내려서니 전망 좋은 곳에 정자가 지어져 있다. 잘 가꾸어진 잔디밭에는 식탁과 평상에다 벤치까지 놓아 쉼터의 역할까지 겸하도록 했다. 모처럼 전망 좋은 곳을 만났으니 여유를 갖고 즐겨보라는 배려일 것이다.



벤치에 앉자 남북으로 곧게 뻗은 난지섬해수욕장의 시원한 풍경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섬 속의 해수욕장으로 맑은 바닷물과 금빛 백사장을 갖춘 명품 피서지다. 해수욕장 오른편 멀리의 육지에는 대산공단의 공장들이 줄지어 서 있다. 대산공단은 1998년 가로림만 일대를 매립해 국내 굴지의 석유화학 회사들이 들어선 곳이다.



이정표(난지정 1.3/ 망치봉 0.2)는 난지정으로 가라하지만 우린 이정표에도 표시되어 있지 않은 방향으로 진행한다. 난지섬해수욕장의 또 다른 명물인 전망대를 둘러보기 위해서이다. 난지섬해수욕장은 물론이고 간조 때면 육지로 변하는 작은 섬 등 볼거리가 무척 많다는데 어찌 들러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해외여행을 코앞에 두고도 떠나온 여행을 축복이라도 해주려는 듯 날씨가 참 맑다. 맑고 쾌청한 날씨는 섬을 찾는 이의 기분마저 들뜨게 한다. 물감을 풀어 놓은 듯한 파란 하늘과 하얀 뭉게구름, 푸른 바다에 점점이 박힌 섬들과 물살을 헤치고 조업에 나서는 배들. 바다는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아 나도 모르게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게 된다. ! 좋다! 행복하다! 맞잡고 있는 집사람의 손이 한층 더 따스하게 느껴지는 걸 보면 그녀의 마음 또한 나와 같은 모양이다.



가는 도중에는 군인들의 유격훈련장에서나 볼법한 시설들도 눈에 띈다. 이곳에 들어선 청소년수련원에서 만들어놓은 극기훈련장이란다.



10분쯤 걷자 유료캠핑장이 나오고, 이어서 선박모양으로 지어진 전망대가 반긴다. 전망대는 산뜻한 외모만큼이나 내부구조도 잘 되어 있었다. 나선형으로 설계된 계단은 무척 고왔고, 전망데크와 건물 내부를 유리문으로 차단해 악천후를 대비하는 지혜까지 동원했다.



전망데크로 나가자 최고의 조망이 펼쳐진다. 발아래로 펼쳐지는 바다에는 '소여'라는 암초가 하나 심어져 있고 그 뒤로 작은 섬이 있다. 물이 들어오면 나무만 보일 것 같은 그런 섬이다. 물이 빠져 있을 때도 저렇게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내는데 만일 물이라도 차오른다면 그 얼마나 화려해질까?



전망대를 내려와 바닷가에 만들어놓은 또 다른 전망대를 찾았다. 그러나 눈앞에 펼쳐지는 조망은 별로이다. 일부러 내려가 볼 필요는 없겠다는 얘기이다.



조망을 즐긴 다음 난지섬 해수욕장으로 내려왔다. 그리곤 길고 긴 모래사장을 직접 걸어보기로 했다. 모래 위에는 앞서 간 사람들의 발자국이 점점이 찍혀 있었다. 그 위를 내가 걷자 새로운 발자국이 찍히면서 이전의 발자국은 자연스레 지워진다. 얼마나 많은 발자국이 이 위에 찍혔다 사라졌을까.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의 발자국뿐만 아니라 강아지와 새 발자국도 있었을 것이다. 그 위에 발자국 하나 더 얹혔다 사라진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만, 때로는 그것에 목숨을 걸고 싶음은 왜일까.



겨울바다는 그리움이다. 두 손으로 시린 귀를 감싸고 겨울바다를 서성대다 보면 세상 시름이 잠시 잊혀진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와 '끼룩끼룩' 울어대는 갈매기 떼는 시인이 되게 하고, 쟁여둔 가슴속 상처를 꺼내게 한다. 가슴이 아림을 느낀다. 거친 숨을 뱉어내듯 끝없이 출렁이는 파도에 홀린 가슴에는 알 수 없는 그리움이 솟구친다.



모래사장은 가도 가도 끝이 나오지 않는다. 하긴 길이가 700m나 된다니 이를 말이겠는가. 폭이 50m인 백사장에는 질 좋은 모래가 깔려 있으며, 수심이 얕고 수온이 섭씨 2023도 정도로 비교적 따뜻하단다. 거기다 물까지 맑다보니 사람들은 이곳을 서해의 동해라고까지 칭송한단다. 그보다 더 뛰어난 것도 있단다. 낙조라는데 우린 돌아오는 뱃시간에 맞추느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네를 타는 집사람이 망중한을 즐기는 사이 난 해당화(海棠花)를 찾아보기로 했다. 이곳 난지섬해수욕장일대가 '대난지도해당화'라는 등식이 성립할 정도로 해당화가 흔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괜히 헛고생만 했다. 녹화사업이 한창이던 1970년대 이후 자취를 감췄다는 얘기가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아니 최근에 시작된 해당화 복원사업이 아직 가시화 되지 못했다는 얘기도 되겠다.



해수욕장 근처에는 관리사무소와 샤워장, 화장실 등 필수 편의시설 외에도 카페와 슈퍼, 음식점 등이 여럿 들어서 있었다. 하지만 편의시설들이 대부분 이곳에 몰려있어 나처럼 끼니를 굶을 수밖에 없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 선착장까지는 능선을 하나 더 타야 하는데 배불리 먹고 난 다음에 산을 넘을 수야 없지 않겠는가.



해수욕장의 끄트머리에 이르면서 다소 헷갈리는 상황과 맞닥뜨렸다. 진행방향의 능선에 올라앉은 난지정으로 올라가는 길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오른편은 선착장, 왼편은 식당을 겸한 해변연가펜션으로 연결되니 산자락으로 파고드는 계단 하나쯤은 응당 놓여있을 거라고 짐작했는데도 말이다. 이때는 삼거리에 세워놓은 둘레길 안내도를 살펴볼 일이다. 난지정으로 가는 길을 화살표까지 그려가면서 알기 쉽게 표시해 놓았다.



안내도가 알려주는 대로 왼편으로 진행한다. 복날이 지났다고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짖어대는 개새끼를 피해 펜션을 지나자 곧이어 삼거리가 나온다. 이정표(난지정)가 일러주는 오른편 방향으로 100m쯤 걷자 또 다른 삼거리가 나온다. 이정표(전망대500m/ 대난지도 선착장3.5/ 망치봉1.2)둘레길 안내도가 세워져 있지만 헷갈리기 딱 좋은 지점이다. 안내도의 방향표시는 선착장으로 가라며 왼쪽으로 향하고 있고, 이정표도 난지정이 아니라 전망대로 표기해 놓았다. 그렇다면 난지정은 어디서 찾으란 말인가.



안내도를 살펴보고 난 뒤에야 오른편으로 향한다. 차량이 다녀도 좋을 정도로 널찍하게 닦아놓은 임도를 따라 10분 남짓 걷자 기다란 돌기둥 위에 걸터앉은 팔각정이 나타난다. 조금 전 이정표에 전망대로 표기되어 있던 난지정(蘭芝亭)’이다. 하지만 비경도와 분도로 여겨지는 무인도 두엇이 소나무 숲의 빈틈을 통해 내다보일 뿐 조망은 꽉 막혀있었다. 이정표에 적혀있던 전망대라는 지명표시가 잘못되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삼거리로 되돌아와 산행을 이어간다. 그리고 그다지 가파르지 않는 봉우리 하나를 넘자 안부삼거리(이정표 : 대난지도 선착장2.7/ 삼봉초등학교 난지분교400m/ 망치산2.1)가 나온다. 난지정에서 20분쯤 되는 지점인데 첨부된 둘레길 안내도는 이곳에서 왼편으로 진행하도록 지시하고 있으니 참조한다.



우리 부부는 직진하기로 했다. 덕분에 우린 섬의 중심 마을인 양짓말을 둘러보지는 못했다. 산기슭에 자리 잡은 마을이지만 이정표에 표기된 난지분교는 물론이고 교회까지 있다는데 말이다. 그나저나 코에서 흙냄새가 난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엄청나게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그래서 둘레길을 난지분교 방향으로 돌려놓았던 모양이다.



그렇게 15분 조금 못되게 오르자 드디어 바드레산(117.6m)’ 정상이다. 도톰하게 솟아오른 모양의 정상에는 삼각점(난지 22)이 설치되어 있었다.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는다. 그 흔한 이정표도 세워놓지 않았다. 그저 대구의 뫼들산악회에서 매달아 놓은 리본이 이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대신 조망은 괜찮은 편이다. 난지정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가운데에 두고 오른편에서는 난지섬 해수욕장이 살짝 고개를 내밀고, 왼편에는 비경도와 소조도, 분도가 널따랗게 바다 위에 펼쳐진다.




조금 더 걷자 동그랗게 쌓아올린 돌무더기가 보인다. 얼핏 봉수대(烽燧臺)의 흔적처럼 보이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내 짐작이 옳다면 이곳은 연변봉수(沿邊烽燧)가 분명하다. 셋으로 구분되는 조선의 봉수 가운데 해륙(海陸)의 변경 최전선에 위치한 것이 연변봉수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둘은 서울 목멱산의 경봉수(京烽燧)와 경봉수와 연변봉수를 이어주는 내지봉수(內地烽燧)이다.



이젠 산을 내려갈 차례이다. ‘항아리만한 바위들이 사방에 널려있는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조심스레 10분쯤 내려섰을까 작은 임도가 나타나고 5분쯤 더 걸으면 안부삼거리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서는 임도를 따라 왼편으로 내려왔다. 맞은편 능선으로도 오솔길이 나있긴 했지만 소난지도를 잇는 연도교(連島橋) 공사 때문에 길이 끊겨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부에서 보이기 시작한 돌 조형물들이 마치 가로수 노릇이라도 하려는 듯이 임도를 따라 줄줄이 늘어서 있다. 누가 언제 무슨 목적으로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하나같이 석등(石燈)이나 사리탑(舍利塔)을 닮은 것을 보면 불교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다.



잠시 후 소난지도를 잇는 연도교(連島橋) 공사현장을 지난다. 아까 능선으로 진행했을 경우 저 현장에서 길이 끊기게 된다. ! 그러고 보니 아침에 도비도항에서 내려 유람선을 기다리던 도중 소난지도에 대한 안내판을 만났었다. 등록문화제(692)로 지정되어있다는 의병총에 대한 내용이었다.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이 소중한 역사는 70년대 지역 교사와 학생들에 의해 고증되어 기릴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공사현장을 벗어나자 임도가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내가 가려는 바닷가가 오른편에 보이는데도 말이다. 길을 찾아본답시고 웃자란 잡초와 갓 심은 과목들 사이를 헤쳐 나갔더니 아까 그 임도로 다시 내려선다. 헛고생만 한 셈이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해안에 다다랐다. 안부삼거리에서 내려선지 10분 만이다. 이후부턴 오른쪽 어깨를 해안절벽에 기댄 해안선을 따른다. 바닥이 너덜이라 걷는 게 조금 불편하지만 차량이 만들어놓은 바퀴자국을 따르면 큰 어려움 없이 진행할 수 있다.



그렇게 5분 남짓 걸었을까 특이하게 생긴 바위 하나가 길손을 맞는다. 이곳 대난지도의 얼굴마담이라 할 수 있는 선녀바위이다.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형상인 이 바위는 애틋한 전설을 갖고 있다. 오랜 옛날 고기 잡으러 나간 낭군이 돌아오지 않자 아낙이 섬에서 기도를 드리다가 바위가 됐다는 것이다. ! 밀물 때는 그냥 평범한 바위인데 물이 빠지면 저렇게 가느다란 모가지를 드러낸다고 해서 굴뚝모가지바위선바위라고 부르는 주민들도 있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그나저나 대만의 야류지질공원(野柳地質公園)에서 보았던 여왕머리 바위(女王頭)’를 쏙 빼다 닮았다. 고대 이집트의 네페르티티(Nefertiti, BC1370-1330) 여왕을 닮았다는 그 바위 말이다. 지각이 융기하는 과정에서 해수의 침식 작용으로 점차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어 왔다는데, 이 바위 또한 그런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하지만 사진이라도 함께 찍어보려고 언제 줄어들지도 모르는 줄을 부지하세월로 서야했던 그녀에 비해 이곳 난지도의 선녀바위 곁에는 우리 부부 밖에 없었다. 스토리텔링의 과정이 완성되지 않아서 일 것이다.



그밖에도 선녀바위 근처에는 숨겨진 비경들이 여럿 있었다. 그 첫 번째는 주변 해안이 온통 해식애(海蝕崖)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해식작용에 의해 만들어졌으니 곳곳에 구멍이 뚫려있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누군가 이 근처에 용난굴이 있다고 했는데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두어 개의 돌기둥도 보였다. 그렇다면 이곳은 해식지형의 변화과정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가 될 수도 있겠다. 해식절벽(sea cliff)에서 해식동굴(sea cave)을 거쳐 씨 아치(sea arch, 독립문처럼 암석 기저부가 뚫린 다리모양의 파식지형)’로 변하고, ‘씨 아치가 세월이 흐르면 시스텍(sea stack, 암석이 파도의 침식을 차별적으로 받아 만들어진 굴뚝 형태의 지형)’이 되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바위절벽들 사이에는 결이 고운 작은 모래사장도 숨겨져 있었다.



물 빠진 갯벌에는 굴양식장이 널따랗게 펼쳐지고 있었다. 지금은 옛 이야기가 되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난지도 앞바다에는 저런 시설들이 널려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인근에 대호방조제가 막히면서 어장이 황폐화되었고 대산에 공단이 들어서면서 주민들의 주 소득원이었던 양식 산업은 급격히 약화되었단다. 산업화라는 화려함 뒤에 숨어있는 가슴 아픈 일면이라 하겠다. 아픈 상처이지만 그 양식장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까지 묻힐 수는 없었다. 양식장 뒤를 하얀 수중기가 꽃무늬를 그려내는 서산(대산)산업단지가 받쳐주면서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잘 그린 그림이다.



날머리는 대난지도선착장(원점회귀)

뭍으로 돌아와 작은 방조제를 건넌다. 제방이 생긴 것은 일제강점기 때라고 한다. 대난지도 주민들의 생활은 제방이 들어서면서 변한다. 농사지을 간척지가 생기면서 주민들은 쌀을 생산해 식량으로 삼았고, 굴과 바지락 채취가 짭짤한 부소득원이 되어주었다. 제방의 왼편은 태양광 전지판이 가득한 발전소다. 옛날에는 저곳에 염전(鹽田)이 있었단다. 그러다가 대하 양식장으로 사용했었고 지금은 저렇게 발전소로 변해 마을에서 사용하는 전기를 생산하고 있단다. 방조제를 건너자마자 아까 산으로 올랐던 들머리가 나오고 이어서 잠시 후에는 선착장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끝을 맺는다. 오늘 트레킹은 총 4시간 40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 쉬었던 시간을 감안하면 4시간 10분을 걸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