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도(長島)

 

여행일 : ‘17. 10. 7()

소재지 :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면 장도리

트리킹 코스 : 선착장습지홍보관마을길능선짝지기미 삼거리습지 보호구역팔각정나무계단마을길선착장(거리 : 3km)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신안군 서부 해상에 있는 작은 섬으로 행정구역상 흑산면에 속한다. 목포시에서 서남쪽으로 약 94떨어져 있으며, 동쪽으로 약 2지점에 대흑산도가 있다. 소장도와 대장도가 전체적으로 북동-남서 방향으로 길게 뻗어 있다고 하여 장도라고 한다. 하지만 두 섬의 중앙에 사주(砂洲, sandbar)가 발달하여 간조(干潮)시에는 하나의 섬이 된다. 대장도 북동쪽 해안과 소장도 남동쪽 해안 일대에 101명의 주민(2016년 기준)이 취락을 이루고 있으며, 주민들 대부분은 어업에 종사한다. 연근해에서는 장어·우럭 등이 잡히며, 인근 해역에서는 전복 양식과 함께 김·톳 등이 채취된다. 이 섬의 특징은 흑산도와 함께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속해있으며 자연경관이 빼어나다는 점이다. 하지만 장도라는 이름을 세상에 알린 것은 대장도의 산에 있는 습지(濕地)이다. 20053월 국내에서 세 번째로 람사르 등록습지(Ramsar wetlands)’로 지정되었다.


 

찾아오는 방법

장도로 가기 위해서는 일단 흑산도까지 와야만 한다. 장도로 들어가는 배를 이곳 흑산도의 예리항에서만 탈 수 있기 때문이다. 장도 선착장에서 흑산도 예리항까지 11~2회 왕복 운항하는데, 미리 전화를 해놓을 경우 약속된 시간에 배를 대어 준다.




장도로 들어가는 뱃전에 서면 흑산도 연안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신안군에서 가장 먼 바다에 자리한 흑산도는 홍어 등의 풍부한 해산물은 물론이고 수려한 자연경관을 보유하고 있는 자연공원이다. 바닷가 곳곳에 해식애(海蝕崖)가 발달되어 있어 해안선을 따르는 내내 눈이 호사를 누리게 된다.



배가 출발한지 20분쯤 되었을까 진행방향 저만큼에 장도(長島)가 나타난다. 본섬을 왼편에 두고 작은 섬들이 오른편으로 길게 도열해 있는 형상이다. 그래서 섬의 이름에 길 장()‘자를 썼나보다 했더니 배를 몰던 마을 이장님이 그게 아니란다. 본섬의 길이가 동서로 칼 같이 길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참고로 장도에는 그 흔한 가게나 식당도 없다. 있는 것보다 없는 게 더 많은 오지의 섬이다. 섬이 작다보니 농사를 지을 땅도 없다. 쌀이나 배추를 사려면 배를 타고 흑산도나 목포까지 나가야만 한단다.



선착장에 가까워지자 기이하게 생긴 바위 하나가 시선을 끈다. 본섬과 부속섬 사이에 거북이를 쏙 빼다 닮은 바위섬 하나가 들어앉아 있는 것이다. ()의 문양까지도 닮은 것이 영락없는 거북이다. 그것도 금방 물속에서 빠져나온 놈으로 말이다. 아무튼 그동안 보아온 수많은 거북이들 중에서 가장 흡사하지 않을까 싶다.





배에서 내리면 달팽이 모양으로 생긴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마을 공동창고인데 장도습지 생태탐방로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주변 경관을 개선하기 위해 새로 지은 것이란다. 누군가는 저 건물을 보고 장도습지 모형을 형상화한 외관장식이 특징이라고 했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런 특징에 대한 감이 전해지지 않는다. 하긴 예술에 문외한인 내게서 그런 심미안(審美眼)을 어찌 기대할 수 있겠는가.



마을로 들어서면 습지 홍보관이 길손을 맞는다. 2013년 습지 생태탐방로를 조성하면서 함께 만든 산지습지 보전 이용시설중 하나란다. 국비(환경부)와 지방비(군비)를 반반씩 합쳐 지상2층 건물(170)로 지었는데, 1층은 대합실로 만들의 주민들이 활용할 수 있게끔 했고, ’습지홍보관은 이층에다 꾸며놓았다. 홍보관에 장도 산지습지의 생성원인 및 습지에서 살고 있는 생물종들을 전시해 놓았으니 먼저 들러보고 탐방을 나서는 게 옳은 순서가 아닐까 싶다.





홍보관을 둘러봤다면 이젠 습지 탐방에 나설 차례이다. 마을 안길로 들어서니 장도습지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해안가를 따라 돌아서 습지에 이르는 길과 마을을 가로질러 곧장 산 위로 오르는 길이다. 이곳에서는 해안가를 따를 것을 조심스럽게 권해본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야만 하는 후자보다는 훨씬 더 쉽게 습지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큰 장점은 습지를 둘러보고 마을로 내려오는 길에 소장도와 흑산도의 절경을 마음껏 구경할 수 있다는 점이다. 반대방향으로 진행한다고 해서 그런 절경을 못 본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그 절경을 앞에다 놓고 보느냐, 아니면 뒤에다 놓고 보느냐만 다를 뿐이다.



장도습지 안내도도 한번쯤은 꼭 살펴보고 길을 나서자. 어디로 가야할지를 선택하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하지만 장도에 대한 전체적인 윤곽은 머리에 심어 넣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해안가로 난 탐방로를 따른다. 마을 안길을 따라 한참을 걷다보면 어른의 키를 훌쩍 넘기는 조릿대 숲이 나타나고, 울창한 숲을 뚫고 나가자 이정표(짝지기미 1094m/ 습지 540m/ 마을입구 200m)가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도 습지로 곧장 올라가는 길이 있는 모양이지만 별 생각 없이 짝지기미로 향한다. ‘습지 해설사역할을 하는 마을 주민이 앞장을 서고 있으니 사서 고민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장도 산지습지에 대한 설명과 함께 방문객들이 협조해야 할 사항을 적은 안내판과 습지에서 서식하고 있는 검은이마 직박구리의 특징을 적어놓은 안내판도 세워놓았다. 이런 안내판들은 탐방 막바지 코스인 팔각정 근처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길은 어느덧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이후부터 탐방로는 산의 사면(斜面)을 옆으로 헤집으면서 조금씩 고도(高度)를 높여간다. 조금도 힘이 들지 않다는 얘기이다.



그렇게 얼마간 진행하면 어느덧 능선에 올라서게 된다. 장도에서 두 번째로 높은 233.7m봉을 우회(迂回)해서 6~7부쯤 되는 능선에 올라선 셈이다. 보다 수월하게 능선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이유일 테고 말이다.



능선에 오르면 장도에서 가장 높다는 큰산(267m)이 맞은편에 나타난다. 정상은 이따가 만나게 되는 팔각정에서 능선으로 연결된다. 하지만 지금은 길을 막아놓았다고 한다. ‘습지 보존구역으로 지정된 곳이어서 출입금지구역으로 묶어져 있단다. 그러니 눈요기라도 실컷 하고 가자.



오른편에는 보이는 233.7m봉은 이곳에서 능선으로 연결된다. 제법 높아 보이는 것이 우리가 얼마만큼 수월하게 올라왔는지를 미루어 짐작케 해준다. 아무튼 요 아래, 즉 이 능선과 맞은편에 보이는 큰산의 사이에 장도 습지가 들어앉아 있는 것은 분명하다.



아래 사진은 장도 전체를 입체적으로 담은 사진이다. 항공(航空)으로 촬영한 모양인데, 산지습지의 전체적인 감을 잡아보기엔 이만한 것이 없을 것 같아 신안군에서 빌려왔다. 대장도의 산지습지가 마치 화산(火山)의 분화구(噴火口)처럼 보인다.



바다 쪽으로도 시야(視野)가 막힘이 없다. 바다 건너에 있는 흑산도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울퉁불퉁한 근육질로 이루어진 암봉들은 물론이고, 순환도로가 만들어내는 허리띠까지도 시야에 잡힌다.



이젠 능선을 따라 아래로 향한다. 물론 짝지기미 방향이다. 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고도(高度)를 낮추어간다. 바닥이 작은 바위들이 널린 너덜길이어서 내려서는 게 쉽지만은 않은 구간이다. 그저 조심조심 내려가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루하다거나 짜증나지는 않는다. 곳곳에서 터지는 조망을 즐기다보면 까짓 불편하다는 느낌 정도야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져버리니까 말이다. 한없이 푸른 바다에 갑자기 고운 무늬가 만들어진다. 그 범인은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달려 나가는 보트. 그 솜씨가 어느 유명한 화가에 못지않다는 생각이 든다.




아래 사진의 움푹 파진 곳이 짝지기미이다. 최근 저수지를 만들어 마을의 식수를 공급하고 있다고 한다.



조망을 즐기며 내려서다 보면 이정표(짝지기미 340m/ 마을입구 900m) 하나가 나타난다. 혹시 짝지기미 가는 길이 나뉘는가 싶어 찾아보지만 갈림길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저 얼마쯤 남았는가를 알려주는 게 세워진 목적의 전부인 모양이다.



조금 더 내려서면 이번에는 개울이 나온다. 요 위에 있는 습지에서 흘러내린 물은 이곳을 지나 요 아래에 있는 짝지기미에서 저수지를 이룬다. 그리고 그 물은 파이프를 통해 장도리 주민들의 식수로 공급된다.






개울을 지나면서 탐방로는 다시 오름짓을 시작된다. 걷기에 딱 좋을 만큼의 경사로 이루어진 것이 산책로나 다름없다. 탐방로는 후박나무의 상록수림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인적이라곤 우리 일행뿐인 한적한 숲길이다.



울창한 숲이 끝나는가 싶더니 주변이 갑자기 조릿대 숲으로 바뀐다. 엄청나게 웃자란 조릿대들이 아예 원시의 숲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러한 조릿대들은 이따가 습지를 벗어날 때 다시 만나게 된다. 이로보아 습지를 빙 둘러싸고 있는 모양새가 아닐까 싶다.



조릿대 숲을 벗어나자 물을 모으는 집수정(集水井)으로 보이는 시설이 눈에 들어온다. 옛날 마을주민들의 식수(食水)를 공급하기 위해 만든 시설이었으나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요 아래 짝지기미에 저수지를 새로 만들고, 그곳에서 물을 공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갑자기 눈이 훤해지는가 싶더니 습지(濕地)가 나타난다. 산봉우리 두 개 사이에 분지형태로 들어앉아 있는 모양새인데, 나무들로 채워진 다른 지형과 다르게 습지의 중심부에는 키 작은 풀들이 자리 잡고 있다. 장도 습지는 2005람사르 등록습지(Ramsar wetlands)’로 지정되었다. 국내에서는 대암산용늪, 우포늪에 이어 세 번째이고 세계적으로는 1423번째이었다. ‘람사르 협약(Ramsar Convention)’에 의한 습지등록은 물새 서식지로서의 중요성을 가진 습지를 대상으로 엄격한 심사를 거쳐 지정된다. 그런 과정을 통과했으니 이곳 장도습지의 중요성을 인정받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참고로 람사르협약은 습지의 보호와 지속가능한 이용에 관한 국제 조약이다. 공식 명칭은 물새 서식처로서 국제적으로 중요한 습지에 관한 협약( Convention on Wetlands of International Importance, especially as Waterfowl Habitat)’. 197122일에 이란의 람사르(Ramsar)에서 체결되었기 때문에 람사르협약이라 부른다. 일명 습지협약’(Convention on Wetlands)‘이라고도 한다.



() 모양으로 물길을 막아놓은 나무판자들이 가끔 눈에 띈다. 토사(土砂)의 유입을 막아보려는 목적으로 만들어놓은 게 아닐까 싶다. 습지를 보호하기 위한 노력은 이뿐만이 아니다. ‘장도 습지는 일제강점기부터 1980년대까지 농경지로 이용되었으며, 1980년부터 1990년까지는 소와 염소의 방목지로 활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습지에서 흘러내린 물이 마을의 간이상수원으로 이용되면서 방목과 논 경작은 중단되었다고 한다. 자신들의 생명수이자 뭇 생명들의 보금자리를 지키기 위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탐방로는 습지의 가장자리를 따라 나있다. 가끔은 습지(濕地)를 가로지르기도 하는데, 깊이 들어갈수록 발이 푹푹 빠지는 늪으로 이루어져 있다. 땅 밑 수십 센티까지 물기를 머금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물은 썩지 않고 흘러 저수지를 이루는데 이는 습지의 흙이 이탄층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가능한 일이란다. 이탄층이란 썩지 않은 식물의 유해가 진흙과 함께 습지에 퇴적한 지층이다. 수질정화 기능이 뛰어나기 때문에 이곳에서 나는 물은 장도 주민들의 식수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생명수와 같은 습지를 보존하고자 섬 주민들은 오랜 세월 습지의 보존에 노력해 왔다. 20년 전부터는 가축의 방목도 금지했단다. 수질오염이 되면 마을 또한 유지할 수 없음이리라.




육지가 아닌 섬 가운데, 그것도 해발이 273m나 되는 높은 산자락에 어떻게 이런 너른(9만여) 습지(濕地)가 형성되었고, 또 어떻게 지금까지 이어올 수 있었을까? 인터넷 서핑을 해가면서 찾아낸 전문가들의 의견을 옮겨본다. 전문가들은 이곳의 독특한 지형과 자연환경이 습지를 키웠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장도에 고산습지가 형성될 수 있었던 이유는 우선 이곳이 스푼 모양의 형태라 물을 담아 둘 수 있기 때문이란다. 또한 장도는 다도해의 다른 섬들과 달리 변성퇴적암으로 이루어진 지질구조라 물이 잘 빠지지 않는다고 한다. 게다가 30cm의 이탄층이 발달해 항상 물을 머금고 있다는 것이다. 이탄층은 기온이 낮고, 물이 많은 곳에서 식물이 죽어도 썩지 않고 그대로 쌓여 있는 형태를 말한다. 이탄층은 마치 스펀지처럼 물을 저장하고 수질 정화 기능을 한다. 또 다른 이유는 바로 해무다. 장도의 지형상 바람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부는데, 이때 산 정상에서 수분이 많은 바다 구름이 머물게 된다. 해무는 장도 산지습지에 수분을 공급할 뿐만 아니라, 수분의 증발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단다.



이렇게 물을 머금은 습지는 사람들에게 귀중한 보물이 되었다. 장도의 강수량은 연간 1100로 소우(小雨) 지역에 해당되지만, 이곳 사람들은 습지에서 내려온 물로 365일 식수는 물론이고 생활용수까지 충족할 수 있단다. 20여 년 전에는 인근의 홍도에서 물을 구하러 장도까지 오기도 했다니 어느 정도인지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습지는 사람 이외의 생명들에게도 귀중한 터전이 되어 주었다. 장도에는 천연기념물 매(323-7), 흑비둘기(215) 등과 함께 205종의 야생동물과 보춘화(춘란) 등 습지식물 294종 등이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습지가 있어 다양한 동식물이 함께 살 수 있는 것이다. 동물 중에는 천연기념물(330) 수달도 포함되어 있다. 민물에서 사는 놈이 어떻게 바다 한가운데 섬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믿어지진 않지만 사실이란다. 수년 전, EBS에서 환경프로그램인 하나뿐인 지구을 취재하던 중 해안가 바위 부근에서 수달의 배설물을 발견했다고 한다. 자신의 영역 표시를 위해 배설을 하는 게 수달의 특성이니 사실일 것이다.



억새밭 초원의 습지대를 지나자 조릿대 숲이 나타난다. 어른의 키로 두어 길이 넘을 정도로 웃자란 조릿대들이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휘이잉~ 휘위잉~ 울어댄다. 그 소리가 마치 고기잡이 나간 낭군을 기다리는 섬 아낙네들의 한숨소리 같이 들리기도 한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예쁘게 지어진 팔각의 정자(亭子) 하나가 나타난다. 정자에 오르면 습지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큰산의 정상 아래에 분지(盆地) 형태로 들어앉은 모양새이다. 널디 너른 평원에는 온통 억새들로 가득 차있다. 참고로 아래 사진에서 정자의 뒤편을 따를 경우 큰산의 정상에 이를 수 있다. 하지만 습지 보존지역으로 지정되어 출입이 금지되고 있으니 섣부른 탐방은 삼갈 일이다.




바다풍경이라고 빠질 리가 없다. 짝지기미 방향에는 망망대해가 끝도 없이 펼쳐진다. 하지만 반대편 바다는 이와는 완전히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을 갈아 물에 풀어 놓은 듯 푸른빛이 반짝이는 바다에는 작은 섬들이 떠다니고 있다. 마치 파도에 몸을 실은 돛단배라도 되는 양 작은 물결에도 반항하지 않고 몸을 맡겨버리는 모양새이다. 내망덕도와 외망덕도, 호장도 등일 것이다. 그 뒤에 옆으로 길게 늘어진 섬들은 승섬과 다물도, 대둔도 등일 것이고 말이다.




하산을 시작한다. 내려오는 길, 바람이 거세다. 이 섬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201610, 이곳 장도는 KBS-2TV에서 소개된바 있다. ’다큐멘터리(documentary) 3이란 프로그램에서 바람과 함께 살아가다라는 제목으로 장도 섬사람들의 일상이 소개되었다. 당시 작가는 바다의 주소라는 문구를 만들어냈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고 있는 주소를 속세의 주소로 부르면서, 이와 대비되는 뭔가를 아련한 아픔에 담아 만들어낸 어휘로 보인다. 그러면서 그는 이곳 장도의 주소를 바람의 길목이라고 했다. 농사지을 땅이 없는 이곳 주민들에겐 고기잡이나 가두리양식이 삶의 전부라고 한다. 그런데 외해(外海) 중 외해에 위치하다 보니 일 년 내내 바람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고기 한 마리를 건저 올리려 해도 종잡을 수 없는 바람과 씨름을 해야만 하고, 태풍 한 번 몰아치면 땀 흘려 키운 양식장이 송두리째 날아가 버리기도 한단다. 그가 굳이 바다의 주소라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내면서까지 강조하고 싶었던 이곳의 현실은 바로 바람의 길목이었던 것이다.



잠시 후 진행방향이 시원스럽게 열리며 환상적인 풍광이 펼쳐진다. 내망덕도와 외망덕도, 호장도 등 작은 섬들이 줄을 지어 서있는 것이 가히 환상적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에서 바라보는 풍광을 장도 탐방의 백미(白眉)로 꼽는다. 아무튼 맨 앞의 섬은 무인도인 소장도이다. 언뜻 배를 타고 나가야만 닿을 수 있는 독립적인 섬으로 보이나, 하루 두 번, 간조 때가 되면 바닷물이 빠지면서 소장도까지 길이 열린다. ’모세의 기적이 이곳에서도 열리는 것이다. 비바람이 불어 바다로 나갈 수 없는 날이면 섬마을 어머니들은 뭍이 드러난 소장도 길에서 고동이나 따개비를 따면서 소일 한단다.





한참을 옆으로 돌던 탐방로가 아래로 향한다. 이어서 데크계단으로 변한다. 마치 뱀이 똬리를 틀듯이 요리조리 몸통을 흔들어가며 한없이 아래로 향하는 모양새이다. 덕분에 계단 자체만 갖고도 훌륭한 눈요깃거리가 된다. 계단 아래는 장도리 마을이다. 섬사람들이 겪어온 굴곡의 세월만큼이나 비탈진 골목골목 위로 빨간 지붕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온통 붉은색 지붕 일색인 것이 흡사 유럽의 옛 도시에라도 온 것 같은 느낌이다. 그만큼 이색적이란 얘기이다.



마을 앞바다에는 가두리양식장이 종()과 횡()으로 반듯하게 열을 이루고 있다. 행여나 바람이라도 거세질세라 주민들의 가슴을 졸이게 하는 근심의 근원이기도 한 시설이다. 섬사람들에게 바람은 곧 풍파다. 어떤 삶에 풍파가 없으랴. 그래서 이곳 주민들은 바람에 맞서 싸우기보단 바람과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터득했다고 한다. 그 결과는 풍요를 가져오게 되었고 말이다. 여기서 아재개그하나. 이곳 주민들은 기르고 있는 해산물의 몸값에 따라 양식장의 호칭을 구분해서 부른다고 한다. 가격이 비교적 싼 다시마와 미역은 '오피스텔''원룸'이라 하고, 비싼 전복과 우럭은 '맨션' 또는 '아파트'라고 한단다. 양식장 외에 봄부터 가을까지 행해지는 멸치잡이도 주민들의 주요 소득원이라니 참조한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더 아름다운 풍광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러더니 소장도와 대장도를 잇는 작은 바위섬들까지도 한눈에 쏙 들어온다. 한마디로 눈이 호사를 누리는 뛰어난 풍광이 아닐 수 없다.



흑산도(昇鳳島 )

 

여행일 : ‘17. 10. 7()-8(일)

소재지 :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면 본도 투어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우리나라 서남단(西南端) 해역의 끝자락에 위치한 섬으로 목포에서 92.7km 떨어져 있다. 19.7의 면적에 해안선 길이는 41.8km에 달하고, ‘tv-N’에서 인기리에 방영된바 있는 삼시세끼-어촌편에 등장했던 '만재도'와 같은 11(대흑산도, 장도, 영산도, 대둔도, 다물도, 영산도, 홍도, 상태도, 하태도, 중태도, 가거도, 만재도)의 유인도와 89개의 무인도로 이뤄진 제법 큰 섬이다. 통일신라시대인 828년 장보고가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한 이후에 이곳에 성을 쌓으면서 마을이 형성됐고, 조선 숙종 때에는 흑산진을 설치해 서남해안의 국방기지로 삼았었다.


 

찾아오는 방법

흑산도로 가기 위해서는 우선 목포 연안여객선 터미널까지 와야만 한다. 흑산도로 들어가는 배가 이곳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흑산도까지 두 시간이 걸리는 쾌속선으로 하루에 네 번(7:50, 8:10, 13:00, 16:00) 운행되며 요금은 34300원이다.




배의 출항까지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서 목포의 명물이라는 갓바위(천연기념물 제500)’를 찾았다. 해수(海水)와 담수(淡水)가 만나는 영산강 하구에 위치한 목포의 갓바위는 풍화작용과 해식작용의 결과로 형성된 풍화혈(風化穴; tafoni)로서 삿갓을 쓴 사람의 특이한 형상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은 풍화혈은 노출암괴에서 수분이 암석내부로 쉽게 스며드는 부위(균열 등)에 발달하며, 스며든 수분의 부피변화로 야기되는 물리적 압력에 의해 암석을 구성하는 물질이 보다 쉽게 입상(粒狀)으로 떨어져 나오는데, 일단 풍화혈이 생성되기 시작하면 이곳은 햇빛에 가려져 더욱 많은 습기가 모여 빠른 속도로 풍화되면서 풍화혈은 암석 내부로 확대된다.(문화재청)



갓바위는 예부터 목포가 자랑하는 명승지였다. 하지만 바위가 해안 절벽에 기대어 서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제대로 감상할 수가 없었다. 그런 불편을 감안해 목포시는 바다 위에 갓바위 주위를 한 바퀴 도는 해상 다리를 놓았다.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갓바위는 8m6m짜리 바위 두 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큰 바위가 아버지 바위, 그리고 작은 바위는 아들 바위라 불린다. 어쩌면 전설(傳說)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주 먼 옛날 병든 아버지를 모시고 소금을 팔며 살아가는 젊은이가 있었는데 살림살이는 궁핍하였지만, 아버지를 위해서는 어떠한 일도 마다하지 않는 착한 청년이었다. 아버지의 병환을 치료하기 위해 부잣집에 머슴살이로 들어가 열심히 일했으나 주인이 품삯을 주지 않았고 한 달 만에 집에 돌아와 보니 아버지의 손과 발은 이미 식어있었다. 젊은이는 한 달 동안이나 병간호를 못 한 어리석음을 한탄하며, 저승에서나마 편히 쉴 수 있도록 양지바른 곳에 모시려다 실수로 그만 관()을 바다 속으로 빠뜨리고 말았다고 한다. 이에 젊은이는 불효를 통회하며 하늘을 바라볼 수 없다고 갓을 쓰고 자리를 지키다가 죽었는데, 훗날 이곳에 두 개의 바위가 솟아올라 사람들은 큰 바위를 아버지 바위라 하고 작은 바위를 아들 바위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이와는 별도로 부처님과 아라한(阿羅漢 : 번뇌를 끊고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성자)이 영산강을 건너 이곳을 지날 때 잠시 쉬던 자리에 쓰고 있던 삿갓을 놓고 간 것이 바위가 되었다고 해서 이를 중바위(스님바위)’라 부른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바닷가 도시들은 대개 화려한 야경(夜景)을 자랑거리로 내세운다. 하지만 그게 아침까지 이어지는 건 아닌 모양이다. 바다건너 부둣가 가로등만이 외로운 걸 보면 말이다. 하지만 아침이어서 좋은 점도 있다. 바닷바람이 실어다 준 바다 향기가 더없이 강하게 코끝을 간질이기 때문이다. 낯선 이방인의 마음을 들뜨게 만들기에 충분한 향기이다. 아침이라서 그 바람이 조금 쌀쌀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먼 바다로 나가려는 여행객의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기에는 멀어도 한참을 멀었다.




목포에서 흑산도의 관문인 예리항()’까지는 2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100Km가까이 되는 바닷길임을 감안할 때 엄청나게 빠른 속도라고 볼 수 있다. 하긴 34300원이나 되는 뱃삯을 내고 탄 쾌속선이니 그 정도는 되어야하지 않을까 싶다. 예리항에 닿는 순간 사람들은 두 번 놀란다고 한다. 거대한 섬의 덩치에 한번 놀라고 예리항의 북적거리는 분주함에 또 다시 놀란다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흑산도는 이웃 섬인 홍도를 가는 길목의 징검다리 역할만 수행했을 따름이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흑산도를 둘러싸고 있는 새끼 섬들의 비경(祕境)이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홍도에 버금가는 관광명소로 자리를 잡았다. 더군다나 톡 쏘는 듯한 맛이 별미인 흑산 홍어가 대표적인 특산물로 널리 알려지면서 구경도 하고 홍어 맛도 보는남해안 최고의 섬 여행지로 인정받고 있다. 참고로 흑산도는 고려시대 이후로 끊임없이 강요되던 공도(空島) 정책으로 인해 주민들이 지금의 영산포로 강제 이주 당했던 적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흑산도는 옛날에는 흑산현이라 불리었다. 흑산폐현은 나주의 남쪽 10리 지점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흑산도 사람들이 육지로 나와 남포에 옮겨 살았으므로 영산현이라 하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정확한 천읍(遷邑)의 이유와 시기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상황으로 보아 다른 신안군의 섬들과 운명의 궤를 같이 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왜구들의 잦은 침략에 대한 거점지역을 없애기 위한 일환이었지만 생활의 터전을 빼앗기고 육지로 쫓겨나야 했던 섬 사람들에겐 혹독한 시련이었을 것이다. 흑산도는 고려시대에 나주목에 편입되어 흑산도라 칭하였으며 조선시대인 1888(고종25)에는 흑산진을 설치하여 만호(萬戶)를 두었다가 1896년에 이르러 지도군에 편입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배에서 내리면 엄청나게 큰 표지석이 관광객들을 맞는다. 흑산도가 기암괴석과 숲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섬이라며 한껏 기세(氣勢)를 돋우고 있다. 맞는 말일 것이다. ‘흑산도가 본디 섬 전역에 울창한 산림이 발달해 있어 멀리서 보면 섬 전체가 검게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니까 말이다. 바닷가에는 이곳이 다도해해상국립공원임을 알리는 표지판도 세워 놓았다.




흑산도의 지도 위에다 주요 관광지들을 표기해놓은 커다란 흑산도항안내판도 보인다. 흑산도의 중심 항구(港口)는 예리항이다. 그러나 처음에 항구가 들어선 곳은 진리였다고 한다. ‘진리라는 이름은 수군(水軍)의 진()이 설치되어 있었다는데서 연유한다. 그만큼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반증한다 할 수 있겠다. 진리는 흑산진영이 있었으므로 진말, 진촌, 대진이라 부르다가 이후 진리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또한 '예리'는 산줄기가 바다 속으로 끌고 들어온 목이 된다하여 끌미, 예미, 예촌이라 부르다가 이후 '예리'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흑산도는 새()의 모양으로 생겼으며 '예리'는 새의 입에 속하는 마을로 모든 것을 끌어들이는 형세라고 한다.



선착장 앞에는 꽤 많은 숫자의 투어버스(tour bus)‘들이 대기하고 있다. 관광객들을 태우고 흑산도를 한 바퀴 돌게 될 버스이다. 버스 전면 상단에 적혀있는 대박 가이드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그 가이드가 운전기사인 것을 알고 떨떠름해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럴 필요는 없다. 여느 유명여행사 가이드들에 비해 조금도 뒤지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구수한 음담패설(淫談悖說)‘까지 섞어가는 것을 보면 오히려 한 수 위가 아닐까 싶다. 참고로 흑산도에는 섬 전체를 한 바퀴 돌 수 있는 일주도로가 개설되어 있어 육로를 통해 흑산도의 명소를 탐방할 수 있다. 25.4에 달하는 이 일주도로는 1984년 착공해 27년만인 지난 2010년 완공되었다. 중간에는 열두 구비고갯길도 있고, 하늘 위에 떠있는 듯한 하늘도로도 있어 일주도로 자체만으로도 멋진 볼거리가 되고 있다.



흑산도 여행은 크게 육로와 해상으로 나누어진다. 그중 백미(白眉)는 육로인 해안 일주도로를 따라 여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그마한 배가 올망졸망 매어 있는 그림 같은 섬마을 포구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은 우리 같은 여행객들은 투어버스를 이용해서 섬을 돌기 마련이다. 그 버스가 첫 번째로 멈춰선 곳은 진리에 있는 '지석묘(支石墓, dolmen)'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차에서 내릴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차창 밖으로 눈요기나 하라는 모양이다. 아무튼 이곳에는 6기의 지석묘가 모여 있는데 타원형의 남방식으로 규모는 그리 크지 않으나 줄무늬와 빗살무늬토기, 돌창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흑산도의 지석묘는 육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청동기시대의 지석묘로써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아 1994년 문화재 자료 제194호로 지정되어 있다. 참고로 흑산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역사는 대체로 장보고의 활동시기로 본다. 하지만 이 고인돌들을 보면 그보다도 훨씬 더 오래전 선사시대부터 이곳에 사람이 살았던 모양이다. 그 증거는 이뿐만이 아니다. 1968년 서울대 한상복 교수팀에 의해 큰 규모(가로 25m에 세로 30m)의 신석기 시대의 패총(貝塚)도 발견됐다. 이 패총은 고고학계의 귀중한 자료로 활용가치가 있다고 해서 지방기념물 제130호로 지정된 바 있다.



다음에 멈춘 곳은 진리당이다. 매년 정초에 무사항해와 풍어를 기원하는 당제(堂祭)를 지내오는 곳이다. 하지만 이곳 역시 잠깐 멈추어줄 뿐 내릴 수는 없다. 아쉬운 마음을 당()에 대한 전설로 대신해 본다. 마을을 보호하는 신()들은 여신이 대부분인데, 이곳 진리당 역시 처녀신을 모시고 있다. 먼 옛날 열흘에 한 번씩 흑산도를 오가며 옹기를 팔러 다니던 배가 있었다고 한다. 선원들이 옹기를 팔러 떠나고 배를 지키던 소년이 무료함을 달래려고 피리를 불었는데 이게 보통 솜씨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진리당을 지키던 처녀신이 반해버렸으니 말이다. 그 결과 처녀신은 배가 출항할 수 없도록 풍랑을 일으켜버렸고, 여차여차 해서 선원들은 그 소년을 섬에 남겨 놓고 떠나게 되었단다. 소년이 혼자 남겨진 외로움에 지쳐 죽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에 섬사람들은 소년을 그가 숨진 자리에 묻어주고 당()에는 화상을 모신 후 매년 정초에 제사를 지내오고 있단다.



무심사지와 석탑들을 지났다 싶으면 가이드의 멘트는 맞은편 산자락에 쌓아져 있다는 상라산성(上羅山城)’ 얘기로 옮겨간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는 고갯마루 위에 올라선다. 전망데크에 서면 람사르 습지로 유명한 장도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첨부된 사진은 상라산으로 올라가면서 찍은 것으로 대체했다.)





전망데크의 맞은편에는 '흑산도아가씨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열이면 열, 흑산도를 찾는 여행자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사진을 찍는 명소이다. '흑산도아가씨'1969년에 개봉한 동명 영화의 주제가인데 노래 가사가 한편의 애절한 시()이다. <남몰래 서러운 세월은 가고/ 물결은 천번 만번 밀려오는데/ 못 견디게 그리운 아득한 저 육지를/ 바라보다 검게 타버린, 검게 타버린 흑산도 아가씨> 애달프기 짝이 없는 이 가사의 모티브(motive)는 아이러니(irony)하게도 이 섬에 있는 심리초등학교라는 작은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로부터 얻었다고 한다. 작곡가인 고() 박춘석선생과 작사가 정두수가 영화 주제가로 고민하던 때에 고 육영수 여사가 해군 군함을 주선해 흑산도의 심리초등학교 어린이들을 청와대에 초청했다는 기사를 봤다고 한다. 그리고 흑산도의 '검은 뫼 섬'이라는 이미지와 그리움을 가진 섬 여인들의 한을 결합시켜 노랫말을 지었다는 것이다. ! 이미자가 부른 노래는 1천 원 권 지폐를 내야 나온다고 들었는데 직접 시험해보지는 못했다. 상라산에 다녀오느라 그럴만한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쉽지만 노랫가락을 되뇌어 보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한다. 이 노랫말에는 흑산도 사람들의 마음이 들어있는 듯하다. 섬이라는 갇힌 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더욱이 여자의 몸이었다면 평생에 한번 이 섬을 떠나 육지로 나가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외로운 섬을 떠나 더 큰 세계가 기다릴 것 같은 육지를 향해 그렇게 흑산도아가씨들의 마음 또한 어쩔 수 없는 갈망을 안고 있었을 게 분명하다.



흑산도 아가씨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파시(波市). 어업전진기지였던 흑산도에서는 계절마다 조기, 고래, 고등어 파시가 열리곤 했다. 항아리처럼 생긴 흑산항에 배가 모여들면 한창 때는 2000대 가까이 들어와 배 위에서 직접 장사를 했다. 빼곡히 모여든 배들이 불을 밝히니 바다 위에 도시 하나가 생긴 듯도 하고 선착장이 있는 예리항에서 진리까지 배를 밟고 갈 수 있을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만선(滿船)이 되고 한때는 파시가 열려 돈이 모이면 흥청 되던 항구, 뱃사람들의 너털거리는 웃음과 함께 바닷바람에 젖은 그들의 피로감을 풀기 위한 행선지였던 술집, 그곳에는 육지에서 이곳 섬까지 흘러온 아가씨들의 애환이 숨어 있었을 것이다. 흑산도에서 나고 자란 처녀들 또한 흥청거리는 항구를 바라보며 막연히 육지를 동경했을지도 모른다. 자유롭게 들고 나는 물결은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밀려오는데 그저 먼 곳만 바라보다 검게 타버렸을 여인의 마음, 그 애타고 답답한 마음이 노래에 담겼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흑산도아가씨 노래비'는 바다가 멀리 보이는 상라산 근처의 고갯마루에 세워져 있다. 1997년에 세워졌고 2012년에는 가수 이미자씨가 흑산항에서 콘서트를 하면서 핸드 프린팅(hand printing)’을 남겼다.



고갯마루에는 해안누리길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그 아래에 진리해안길이라고 적혀있는데 산도 바다도 처녀가슴도, 검게 타버린 흑산도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뒤적거렸던 ‘1300리 해안누리길이라는 책에서 보았던 것 같기도 하다. 해양수산부와 한국해양재단이 선정한 전국의 걷기 좋은 해안길 53곳을 엮은 책인데 더 많은 사람들이 흥미를 가지고 해안누리길을 찾을 수 있도록 길에 숨겨진 역사와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풀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 안내판은 상라산 정상에서의 조망과 상라산성에 대해서만 설명을 해놓았다. 진리해안길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까지 덧붙여져 있었더라면 금상첨화였을 텐데 말이다.



또 다른 안내판에는 소설가 김훈의 약력과 그가 지은 흑산(黑山)’이라는 소설에 대해 적어 놓았다. 그러고 보니 김훈은 칼의 노래현의 노래’. 그리고 최근 영화로까지 만들어졌던 남한산성만 지었던 것은 아니었다. 정약전(정약용의 형)과 천주교 박해사건을 다룬 역사소설인 흑산또한 많은 이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소설은 마제(남양주)의 정씨 가문 4형제와 매제인 황사영이 중심에 서있다. 역사공부에 취미가 없었던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정약용을 제외한 나머지 형제들의 존재는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흑산은 정약전이 유배지인 흑산도로 향하는 시점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조선시대의 궁핍하고 힘들었던 삶과 더불어 시대의 벽을 뛰어넘어 또 다른 삶을 꿈꾸던 조선 최고의 지성(知性) 정약전과 그 주변의 인물들의 이야기, 즉 암흑 같은 시대상황 속에서 한줄기 빛인 천주교라는 종교를 통해 거듭 나고자했던 사람들의 가슴시린 이야기이다. 그러니 정약용이 아닌 정약전과 황사영에 포커스(focus)를 맞추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 내용을 모두 시시콜콜 늘어놓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김훈이 피력한 정약전의 마음까지도 잊지는 말자. 그는 155종의 어류에 관한 책을 엮으면서 <'흐리고 어둡고 무섭다는 이미지의 흑산(黑山)‘이 아닌 '희미하지만 빛이 있고 이제 여기서'라는 의미에서 '자산(玆山)’>이란 이름을 붙였다.



상라산성(新安 黑山島 上羅山城 : 전라남도의 기념물 제239)의 안내판도 보인다. 반달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반월성이라고도 불리는 산성이다. 안내판에는 고대~고려시대 국제 해양도시 역할을 했던 흑산도 읍동마을을 수호하기 위해 축조한 관방시설로 추정된다고 적어놓았다. 인근(읍동마을 뒤편의 계곡 초입부)에 사신단 및 무역 상인들이 머물던 관사(館舍) ’, 그리고 관사의 맞은편 골짜기에서는 무심사지(无心寺址)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또한 산성 서쪽의 상라산 정상에는 봉화를 피우던 봉수대(烽燧臺)도 있었단다. 이는 장보고의 해상활동이 활발했던 통일신라시대는 물론이고 고려시대까지 한국과 중국 간 교역활동에서 흑산도가 차지하고 있던 중요한 위치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참고로 상라산성은 산의 정상 부근이나 중간부분을 거의 동일한 레벨로 둘러싼 전형적인 테뫼식과는 달리 산복식(山腹式)에 가까운 테뫼식 산성이다. 전체길이 280m의 소형산성으로 남사면(南斜面)만을 반월형으로 둘러싸고 있는데 순수 석축부분의 길이는 220m이다. 해안에 면한 북쪽 능선의 경우는 별도로 성벽을 쌓지 않고 100m에 가까운 깎아지른 해안 절벽을 그대로 성벽으로 활용하고 있다.



고갯마루에 멈춰 선 투어버스가 무려 20분이나 자유 시간을 준다. 볼 것도 별로 없는 곳에서 말이다. 아무래도 상라산 정상에 다녀오라는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모두들 산자락으로 들어붙고 본다. 지난 여름에 파열되었던 인대가 조금은 걱정 되었지만 나 역시 그들을 따르기로 한다. 오르막길의 경사가 조금 가팔랐지만 별 어려움 없이 정상(해발 230m)에 올라설 수 있었다. 안전시설이 잘 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거리까지 짧았기 때문이다. ! 깜빡 잊을 뻔 했다. 올라가는 길에 상라산성의 흔적으로 보이는 옛 성터가 보인다는 것을 말이다.




정상은 일망무제(一望無題)의 조망을 보여준다. 아까 고갯마루에서 보았던 장도는 물론이고 이번에는 저 멀리 구름사이로 떠있는 홍도와 주변의 섬들 그리고 예리항까지 그림처럼 펼쳐진다.






발아래에 조금 전에 올라왔던 도로가 내려다보인다. 일주도로를 만들면서 새로 낸 길이라는데 상라산성을 끼고 구불구불 아흔아홉 구비를 돌 듯 고갯마루까지 올라온다. 올 여름에 노르웨이에 갔을 때 세계 10대 위험한 길중의 하나라는 요정의 길(trollstigen)’을 지났었는데, 그곳만큼 오금이 저리지는 않지만 천 년 묵은 구렁이가 지나가기라도 한 듯이 구불거리고 있는 모양만큼은 더 아름다워 보인다.




다시 길을 나선다. 얼마 후 이곳 흑산도의 대표적인 바위명승인 '지도바위'를 만나게 된다. 말 천 마리가 모인 형상인 천마산의 정기를 받은 곳이라 하여 모듸미라고 불리던 마리마을과 흑산진이 있던 진리마을의 산 너머에 있다 하여 전듸미라고 불리던 비리마을사이의 해안가에 떠있는 바위이다. 바위의 중앙에 뚫린 구멍의 생김새가 한반도의 모양과 닮았다 하여 '지도바위'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지도바위는 위치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고 한다. 파도와 바람이 만들어낸 자연이 그저 경이롭기만 하다.



잠시 후 하늘도로라는 안내멘트가 들려온다. 깎아지른 절벽에다 억지로 길은 내다보니 교각(橋脚)이 없는 테라스(terrace)형의 도로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절벽에 삐죽 선반을 달아 놓은 것 같다고 해서 선반도로라고도 불린단다. 중국을 여행할 때면 흔하게 만나게 되는 잔도(棧道), 즉 절벽에 붙어 허공에 떠있는 형상이라고 보면 되겠다. 그렇다면 하늘도로라는 이름을 붙인다고 해서 이를 나무랄 이는 없겠다. 하지만 아쉽게도 사진촬영은 불가능했다. 달리는 버스의 차창을 통해서는 사진촬영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장도로 가는 뱃속에서 찍은 사진을 첨부한 이유이다. 아무튼 48m 가량 이어지는 도로 벽에는 흑산도와 신안의 명물들을 그려 넣어 알록달록 리듬감 있는 볼거리를 제공했다. ! 깜빡 잊을 뻔 했다. 오는 도중에 샘골해안과 간첩동굴에 대한 멘트가 있었지만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었다. 19697, 북한 무장간첩 3명이 침투한 해안이 흑산도 비리에 있는 샘골해안이고 그들이 은신했던 곳이 간첩동굴이다. 3명의 간첩은 모두 사살됐다고 한다.




버스는 어느덧 사리마을앞을 지난다. 그런데 아재개그로 너스레를 떨던 기사아저씨가 마을을 그냥 지나쳐버리는 게 아닌가. 흑산도에 온 이상 한번쯤은 꼭 들러봐야만 하는 유배문화공원이 이곳 사리마을에 조성되어 있는데도 말이다. 육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흑산도는 그 입지조건으로 인해 유배된 선비들이 유난히도 많았다. 고려 때 정수개라는 선비부터 조선 말 면암 최익현까지 무려 130여 명이나 된다. 다산 정약용의 둘째 형인 손암(巽庵) 정약전(丁若銓, 1758-1816)’ 선생도 그 가운데 한명이다.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유배된 그는 이곳 사리마을에 15년 동안을 머물면서 근해에 있는 물고기와 해산물 등 155종을 채집하여 명칭, 형태, 분포, 실태 등을 기록한 우리역사상 최초의 어류 백과사전인 자산어보(玆山魚譜)’를 남겼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사촌서당(沙村書堂, 또는 復性齋)’이라는 서당을 열어 후학을 가르쳤다고 한다. 이 사촌서당(1998년 신안군에서 복원했다)’을 유배문화체험장(유배인 안치 가옥)과 손암정(巽庵亭), 전통주막 등을 함께 묶어 유배문화공원으로 조성했다. 공원에는 대표적인 인물의 사진과 죄명, 생애를 적은 비석을 세우고, 유배의 형태에 대한 설명을 붙여놓았다. 또한 손암이 자산어보에서 언급한 물고기의 이름과 형태를 돌에 새겨 전시하고 있다.(이번 투어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을 놓칠 수가 없어 다른 분의 사진을 빌려다 썼다)



손암과 면암(勉菴, 최익현)은 흑산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이웃 사람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중죄인으로 유배 생활을 했지만 그들의 학식과 정신을 존중한 지역 유생들과 토호들이 돌봐준 것이란다. 정약전은 천주교를 믿었다는 이유로, 그리고 동생 정약용을 보호하려다 멀고먼 흑산도까지 귀양을 온 조선의 선비이다. 그는 이곳에서 장덕순과 마을사람들의 도움을 받고, 어부들을 스승으로 삼아 자산어보(玆山魚譜)’를 저술했다. 겸손과 애민이 낳은 실용학문이 마침내 선생을 겨레의 스승으로 우뚝 서게 했다고 보면 되겠다.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하나도 다를 게 없다. 간신배들은 언제나 높은 자리에 있고, 훌륭한 사람들은 변함없이 그들의 핍박 속에서 살아간다. 촛불혁명 덕분에 새로 들어선 대통령이 그런 모순들을 모두 털어내겠다고 했으니 이젠 더 나은 세상을 기대해도 되겠지?



이곳 사리마을은 돌담으로도 유명하다. 그 역사가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사리마을의 옛 담장은 섬의 원형을 잘 보여준다고 해서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제282로 지정(2006)되어 있다.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차창 밖으로 사리마을 앞의 포구가 눈에 들어온다. 버스가 멈춰서더니 일렬로 늘어선 섬의 개수를 알아 맞춰보라는 안내멘트가 흘러나온다. ‘일곱 개라는 정답은 이라는 의식을 서너 번이나 치른 후에야 만날 수 있었다. 아무튼 7개의 바위섬들이 파도를 막고 있는 작은 내항에는 작은 고깃배들이 정박해 있다. 그리고 잔잔하기 짝이 없는 해수면은 반짝이는 은물결로 인해 눈길이 닿는 곳마다 눈이 부시다. 그래서 이곳이 한국의 소렌토라는 애칭을 얻게 되었나보다. 해안가의 풍경이 가장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고 해서 말이다. 이왕에 말이 나왔으니 칠형제바위에 대한 전설도 옮겨볼까 한다. 옛날 사리마을에 홀어머니와 아들 7형제가 바다에서 물질을 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해 큰 태풍이 불어와 몇 날 며칠을 어머니가 바다에 나가 물질을 하지 못하게 되자 아들 7형제가 바다에 들어가 두 팔을 벌려 파도를 막았는데 그대로 7개의 작은 섬들로 굳어져 버렸단다. 이후 사람들이 일곱 개의 섬에다 칠형제바위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얼마쯤 더 달렸을까 또 다시 버스가 멈춰 선다. 그러자 차창 밖으로 괴상하게 생긴 섬 하나가 나타난다. ‘구문여란다. 숲이 울창하여 사시사철 푸르다 하여 청재미라 불리던 청촌리와 산이 높고 마을이 길게 뻗어 있다 하여 여티미라고도 불렸던 천촌리 사이에 있는 작은 바위섬으로 섬의 한가운데가 뻥 뚫려 있는 형태이다. 구문여의 진면목은 태풍이 오거나 바람이 세게 부는 날에 볼 수 있다고 한다. 거센 파도가 구문여 바위를 삼킬 듯이 달려들 적에 중앙 공간 사이로 물줄기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장관을 연출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아재 gag’ 하나, 왜 하필이면 구문여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바위(: 바닷가에서 물속에 숨거나 나타나기를 반복하는 바위)에 뚫린 구멍이 여자의 거시기를 쏙 빼다 닮았기 때문이란다.



흑산도는 바닷물이 푸르다 못해 검게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그만큼 인근해역이 깊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그러다보니 파도가 셀 것은 어쩌면 자명(自明)한 일일 것이다. 그 파도가 곳곳에 비경을 만들어 놓았다. 바닷가를 따라 기암괴석과 해안동굴이 널려 있어 섬 전체가 온통 절묘한 비경을 만들어 내고 있다.






몇 년 전에 이미 올라본 기억이 있는 산이기에 직접 올라가보는 것은 생략했지만 흑산도까지 와서 진산이나 마찬가지인 칠락산을 거론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래서 당시의 사진과 기억을 되살려 몇 자 적어본다. 예리항에서 출발해서 정상을 찍고 한 바퀴 돌아오는 산행코스는 천천히 걸어도 3시간이면 충분하다. 산행을 시작한지 30분쯤 지나면 시야가 툭 트이는 능선에 올라서게 되고, 이어서 서남방으로 흐르는 능선을 타고 조금 더 걸으면 칠락산은 어머니의 산이라고 적혀있는 표석이 세워져 있는 봉우리에 올라선다. 예리항을 굽어볼 수 있는 최고의 전망대다. 이곳에서는 어선(漁船)과 여객선(旅客船)들이 쉴 사이 없이 들락거리는 분주한 모습의 항구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전망대를 지나면서 산길은 전형적인 흙산으로 변한다. 이어서 작은 봉우리들 몇 개를 오르내리면 흑산면사무소로 내려가는 길이 오른편으로 나뉘는 삼거리가 나타나는데, 칠락산은 왼편에 보이는 바위벼랑 아래로 진행하면 된다. 잠시 후 나무테크로 만든 계단이 보이고, 계단을 밟고 능선에 올라서면 진행방향에 시원스런 암릉이 펼쳐진다. 위험구간이라는 '용요릉' 길이다. 각진 바윗길이 마치 용의 거친 허리에 오른 듯 무척이나 조심스럽다. 이 구간이 칠락산 산행의 백미(白眉)이다. 칠락산의 암릉은 월출산처럼 화려(華麗)하지도, 그렇다고 설악산처럼 웅장하지도 않다. 그러나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면서도, 그렇다고 어디가 부족한지를 꼭 집어낼 수 없는 아기자기한 암릉미(巖稜美)를 보여준다.




면암 최익현 선생 적거유허비가 있다는 천촌리를 지나니 청촌리가 나온다. 오늘 저녁을 나게 될 숙소, ‘다모아 리조트가 있는 마을이다. 리조트는 규모가 크기 때문에 인원에 맞춰 방을 배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야외 풀장까지 갖추고 있어 휴식공간으로는 이만한 데가 없을 것 같다. 실내 또한 청결을 유지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다만 식사가 포함되지 않는 게 조금은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하룻밤 쉬어가는 걸로 만족해볼 일이다.




청촌리 마을 앞은 작은 포구(浦口)로 이루어져 있다. 호리병처럼 안으로 움푹 파여 있는 데다 깊지가 않아서 여름철에는 물놀이까지 가능하겠다. 관광객으로 보이는 여자 두엇이 선착장 아래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것을 보면 뭔가 잡을 거리도 있는 모양이다.




예리항 주변은 음식점과 함께 주점, 다방, 클럽, 여관 등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어 웬만한 도시의 유흥가를 방불케 한다. 외딴 섬이지만 없는 것이 없어 섬이라는 느낌조차 들지 않는다. 단지 이곳이 섬이라는 공간일 뿐 생활에 불편함이 없이 다 갖추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붉은 색 기와를 머리에 인 버스정류장이 눈길을 끈다. 여태까지 이렇게 멋지게 지어진 정류장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작년엔가 아라비아반도에 있는 두바이에 갔을 때 에어컨까지 갖춘 버스정류장을 보고 깜짝 놀란 일이 있었는데, 그만큼은 아니더라도 내 호기심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할 정도였다. 최고의 관광지로 발돋움하려는 지자체의 열정이 만들어낸 작품이 아닐까 싶다.



에필로그(epilogue), 흑산도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맨 먼저 홍어를 떠올릴 것이다. 전라도의 상가집과 잔칫상에 홍어가 빠지면 그것은 상차림이 아니다. 수요가 많아지고 잘 잡히지 않아 한때 홍어잡이 배가 끊길 뻔했다는 이 홍어가 요즘에는 그런 대로 잘 잡히는 모양이다. 거리 곳곳에서 홍어라는 문구를 적어 넣은 간판들이 자주 눈에 띄는 것을 보면 말이다. 전라도적이라 할 수 있는 이 홍어의 맛은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 조금 오해의 소지를 만들기도 한다. 한번은 이 홍어를 사간 사람이 상한 고기를 주었다고 항의를 하였다는 것이다. 고기 중에서 유일하게 삭혀서(썩혀서)먹는 것이 홍어이고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홍어라고 하면 뭐니 뭐니 해도 홍탁이 아닐까 싶다. 막걸리 한 사발을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이 들이마신 후에 안주로 곁들이는 홍어 한 점이 기막히게 궁합이 잘 맞기 때문이다. ‘삼합도 빼놓을 수 없다. 삶은 돼지고기를 얇게 썰어 배추김치와 함께 먹는 것을 삼합이라 하는데 먹어본 사람만이 그 맛을 알 수 있다. 홍어를 즐겨 먹는 사람들은 생것을 옹기그릇에 담아 놓았다가 며칠 후에 꺼내면 화끈한 냄새가 나도록 상하게 되는데 이것을 썰어 먹으면 입안에 매운맛이 확 퍼진다. 이런 짜릿한 미각에 자극되어 많은 사람들이 홍어를 찾게 된다. 흑산 홍어가 우수한 것은 군산이나 인천근해에서 잡는 것 보다 그 맛이 좋고 육포자체에 착 달라붙는 찰진기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장고도(長古島)

 

여행일 : ‘17. 12. 3()

소재지 : 충남 보령시 오천면 삽시도리(장고도리)

트레킹코스 : 대머리선착장소나무 숲길명장섬해수욕장당너머해수욕장데크전망대장고도리등대선착장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오천면(보령시) 해안에서 서쪽으로 17.4떨어진 태안반도 남쪽에 위치한 섬으로 주위에는 안면도를 비롯하여 고대도와 삽시도, 원산도 등이 있다. 섬의 모양이 장구와 같다 하여 장구섬 또는 장고섬·외장고도 등으로 불리다가, 1910년부터 장고도로 표기하기 시작했다. 섬은 일부에 구릉지(丘陵地)가 있을 뿐 대부분이 평지로 이루어졌다. 해안선은 비교적 단조로우며 간석지(干潟地)가 발달해있을 뿐이고, 관광객들의 눈요깃거리인 해식애(海蝕崖)는 일부 해안에서만 보인다. 명장섬과 몇 개의 여(暗礁, 물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 바위)를 제외하고는 크게 내세울만한 볼거리들이 없다는 얘기이다. 대신 이 섬에는 등바루와 진대서낭제, 용왕제, 등불써기 등과 같은 다양한 민속놀이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중 처녀들이 조개를 채취하며 땀을 흘린 뒤 휴식과 오락을 즐기는 놀이인 등바루는 선착장 앞에 안내판까지 세워놓았을 정도로 이 섬의 대표적인 민속놀이다.

 

찾아오는 방법

장고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일단 대천여객선터미널까지 와야만 한다. 섬으로 들어가는 여객선이 이곳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매일 3(7:40, 12:00, 15:00)씩 운항하는데 시간은 대략 1시간20분 정도가 걸린다. 이 배는 장구도에 이르기 전, 삽시도에 먼저 들르니 안내방송을 잘 들어야만 한다. 되돌아 나올 때는 고대도를 찍고 대천항으로 나간다. 이들 고대도, 장고도, 삽시도 세 섬은 편의상 장고도권역으로 묶인다. 이 장고도권역은 지난 2010년 행정안전부에 의해 대한민국 명품섬 베스트 10’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장고도까지 가는 승선권(10,100)을 사서 선착장으로 들어가니 가자 섬으로라는 꽤나 낭만적인 이름을 가진 페리호가 기다리고 있다. 세상이 변하다보니 이젠 배의 이름까지 젊은이들의 입맛에 맞추어 가는가 보다. 그나저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한고속페리호가 다닌 것으로 알고 있었기에 의외라는 생각이 든다. 혹시 배를 잘못 타는 게 아닐까 하고 승무원에게 물어보니 최근에 새로 투입되었단다. 새 배이니 그만큼 안전성의 높아졌다고 보면 되겠다. 아니 울부짖다시피 하고 있는 엔진 등의 소음을 보면 별로 그런 것 같지도 않지만 말이다.



선실 안에서 1시간 이상이나 뭉그적거리는 것이 지루하다고 생각될 때에는 갑판으로 나오면 된다. 이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매점에 들러 새우깡 한 봉지를 사가지고 나오라는 얘기이다. 거기다 캔맥주까지 챙긴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일 것이다. 밖으로 나오면 갈매기들이 시끄럽게 울어댄다. 사람들이 주는 과자에 길들여진 갈매기들은 힘차게 날개를 저어가며 장고도까지 동행을 해준다. 갈매기들과 장난이 시들해질 수도 있다. 이때는 챙겨 나온 맥주 한 잔 들이키며 뱃길 주변의 풍광에 푹 빠져볼 일이다.



삽시도에 이어 장고도의 대머리선착장에 도착한다. 대천항을 출발한지 정확히 1시간20분만이다. 선착장에는 어촌체험마을 방문객센터를 지어놓았다. 탐방객들을 위한 편의시설이라고 보면 되겠다. 배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대합실(待合室)도 만들었다. 매점 등의 편의시설은 보이지 않지만 널찍하면서도 여간 깔끔한 게 아니다. 그만큼 잘 관리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현대식으로 잘 지어진 화장실도 보인다. 장고도에서 유일하게 만난 화장실다운 화장실이었으니 참조한다. ! 조금 못미처에 안내판 하나가 세워져 있다. 그 뒤에는 안내판의 설명을 보완이라도 해주려는 듯 돌담까지 둥그렇게 쌓아놓았다. 전국적으로 유명한 전승 민속놀이인 등바루놀이에 대한 유래와 놀이의 순서를 적어놓은 안내판과 돌담이다. 등바루라는 어원(語源)등불을 밝힌다’, ‘등불을 켜 들고 마중 나온다에서 파생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음력 정월 대보름이나 4월 초파일을 전후로 해당화 만발한 시점에 초경을 지낸 규수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등불을 밝히고 노래를 부르며 굴 캐기 경연을 벌인다. 7년쯤 전엔가 보도된바 있는 등바루놀이재연(再演) 행사에 관한 기사를 옮겨본다. <‘등바루놀이는 장고도에서 옛날부터 내려오는 처녀들의 집단놀이로 원래는 마을처녀들이 하루 전날 바닷가에 둥근 돌담(등바루)을 쌓는데, 돌담 안으로 드나들 수 있도록 바다 쪽을 향해 넓이 1m 정도를 터놓는다. 놀이 날이 되면 처녀들이 두 편으로 나뉘어 조개 등 어물잡기 경합을 벌이고 점심때가 되면 이긴 편과 진 편을 가린 후 돌담 안에서 한복을 차려입고 동그란 원을 만들어 앉아 점심식사를 하고 노래와 춤을 추면서 놀이를 하는 일종의 성년식(成年式) 성격을 보이는 놀이다.>



화장실의 오른편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서 투어가 시작된다. 예쁘장하게 생긴 장고도 표지판옆에 세워진 해안탐방로 1구간이정표(해안탐방산책로 0.15Km/ 방파제선착장(마을) 2.6Km)가 가리키는 해안탐방산책로 방향이다.



산책로 끄터머리에 가면 또 다른 이정표(명장섬 해수욕장1.25Km/ 대머리선착장1.25Km)가 기다린다. 이곳에서 탐방로는 왼편으로 크게 방향을 튼다. 그리고 50m쯤 전진하다 이내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경사가 조금 가파르나 통나무계단을 놓아 오르는데 별 어려움은 없다. 2013년 여름엔가 장고도의 생태탐방로가 조성되었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다. 당시 기사는 대머리선착장에서 명장해수욕장까지 1정도 되는 구간을 해안길을 따라 산책할 수 있도록 소나무숲길을 만들면서 자연자원의 훼손을 최소화했다는 자랑을 하고 있었다. 4년이 지났는데도 주변이 깔끔하게 정비가 되어 있는 것이 그동안 관리를 잘 해온 모양이다.



탐방로는 한마디로 정비가 잘 되어 있다. 널따랗게 만든 것도 모자라 조금만 경사가 심하다싶으면 어김없이 계단을 만들었다. 쉴만한 곳에 벤치를 놓아두는 건 기본, 심지어 어떤 곳에는 평상까지 깔아놓았다. 거기다 비탈 쪽에는 밧줄로 난간을 만들어 안전성까지 확보해 두었다. 탐방로를 가꾸는데 심혈을 기울인 지자체의 노력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현재의 위치를 알려주는 표시가 일절 없다는 것이다. 이정표의 숫자를 조금 더 늘리면서 그 이정표에다 현재의 지명을 적어 넣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나 싶다.




좌우로 소나무숲이 울창한 길을 따라 얼마쯤 진행했을까 첫 번째 조망처를 만난다. 어른의 키를 훌쩍 넘길 정도로 웃자란 조릿대 숲으로 둘러싸인 공터인데, 바다방향으로 조그만 틈새를 터놓고 있는 것이다. 그 사이로 널디 너른 바다가 내다보인다. 그리고 그 바다에는 명장섬이 두둥실 떠있다.




명장섬해수욕장 가기 직전에 멋진 전망대 하나가 나타난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해식애(海蝕崖)가 잘 발달되어 있는 곳이다. 해식애의 위 구릉지(丘陵地)에다 데크전망대를 만들어놓았다.





갯바위에서 바다낚시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도 보인다. 이곳 장고도가 바다낚시의 명소라고 하더니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전망대에 서면 널따란 서해바다가 눈앞에 펼쳐진다. 바다건너에는 육지(陸地)로 보일 정도로 거대한 섬 하나가 길게 누워있다. 안면도일 것이다. 그 왼편에 보이는 자그만 섬은 외도일 게고 말이다.



전망대에서 명장섬해수욕장까지는 해안선을 따라 길을 내놓았다. 차량이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널따란 산책로이다. 이 길을 따라 조금만 더 걸으면 해수욕장의 너른 백사장이 눈앞에 펼쳐진다. 썰물 때면 그 넓이가 2km나 될 정도로 드넓은 해수욕장이다. 파도가 세지 않고, 수심이 깊지 않으며, 물이 따뜻하고, 동해를 방불케 할 정도로 깨끗해서 해수욕하기에는 안성맞춤이라고 한다. 또한 조개나 맛살 등을 잡아볼 수 있는 자연체험장으로도 적당하다니 가족여행지로 괜찮을 듯 싶다.



백사장 가에는 오래 묵은 해송(海松)들이 줄을 지어 늘어서 있다. 그 아래에는 돌의자와 간이식탁, 그리고 평상 등을 놓아두었다. 휴가철에 찾아온 피서객들에게 넉넉한 해가림막이 되어 주기에 충분할 것 같다.



중간에 해수욕장을 벗어날 것을 지시하고 있는 이정표(소나무숲길0.67Km/ 해안탐방산책로0.25Km)가 나오나, 이를 무시하고 집단시설지구 방향으로 향한다. 해수욕장에는 민박집들이 들어서 있다. 펜션 등이 주류를 이루는 다른 해수욕장들보다 훨씬 더 정겨운 느낌이 드는 풍경이다. 아무래도 우리네 어린 시절의 바닷가 추억을 되살려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건물 벽에는 이생진 작가의 장고도라는 시()가 적혀있다. 서산 출신인 그는 섬 시인이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로 평생 섬을 찾아다니며 섬에 대한 시집을 많이 펴냈다. 30여권의 시집 중에서 10여권이 섬을 주제로 한 시집이란다.



명장섬은 장고도 최고의 명물이다. 해안에서 약 200m 떨어진 곳에 떠 있다. 마치 태안반도 꽃지해수욕장의 할미·할아비바위처럼 두 개의 커다란 바위가 우뚝 솟아 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두 바위 사이에 초의 심지처럼 작고 가는 또 하나의 바위가 있다는 것이다. 이 명장섬이 특별한 것은 물이 빠지면 걸어서 갈 수 있다는 데 있다. 모세의 기적처럼 썰물이면 바다가 갈라지면서 자연적으로 생성된 자갈길이 열린다. 물때만 잘 맞추면 조개와 고동, 낙지 등 여러 해산물들을 직접 채취해 볼 수 있는 색다른 경험도 할 수 있다니 참조할 일이다.



명장섬해수욕장 일대는 저물녘이 되면 멋진 풍경을 선보이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명장섬 뒤로 해가 뉘엿뉘엿 지면서 하늘과 바다를 붉게 물들인다는 것이다. 이 때면 모든 사람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해안을 따라 일렬종대로 늘어선 소나무 아래에 앉아 그 풍경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는다고 한다.



명장섬해수욕장을 지나면서 탐방로는 바다와 맞닿아있는 산자락 아래로 나있다. 자칫 방심해서 내려딛기라도 할 경우 바닷물에 풍덩 빠져버릴 정도로 바다와 가깝다. 그 바다의 파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문득 아까 해수욕장에서 보았던 이생진 시인의 시가 생각난다. <평평한 수평을 잡아당긴 섬과 바다, 평행을 유지하기 위해 찢어지도록 긴장해 있다.> 그의 눈에 비쳤던 긴장감이 극에 달했나보다. 인간의 접근을 거부하고 있다.



바닷가를 따라 난 길을 따르는 진행이 더 이상은 불가능해졌다. 마지막 모퉁이를 마저 돌지를 못하고 산자락으로 올라선다. 어른의 키로 한 길을 훌쩍 넘기는 벼랑을 혼자서 오르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서로 만난 지 얼마 되지 않는 연인들에게 딱 좋은 구간이 아닐까 싶다. 아래서 밀어주고 위에서 끌어주다 보면 사랑은 이미 무르익었을 테니까 말이다. 아무튼 일행들끼리 서로 돕지 않고는 결코 올라설 수 없는 험난한 구간이다.



벼랑(깎아지른 듯 높이 서 있는 가파른 지형)을 올라섰다고 해서 길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애초부터 길은 없었으니까 말이다. 잡목은 물론이고 명감나무 등 가시넝쿨까지 우거진 능선을 직접 길을 만들면서 진행할 수밖에 없다. 이때 주의할 게 있다. 능선을 따르지 말고 고개를 넘듯이 그냥 넘어가라는 얘기이다. 조금만 고생하면 당너머해수욕장으로 연결되는 제대로 된 길을 만날 수 있다. 능선을 고집할 경우엔 고생만 죽도록 하다가 중간에서 되돌아 나와야만 하는 불상사를 겪게 될 것이다.




잠시 후 당너머해수욕장에 이른다. 해수욕장의 뒷산 이름이 당산인 걸로 보아, 당산 너머에 있는 해수욕장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해수욕장의 크기는 명장섬해수욕장의 절반인 1km 정도가 되는데 모래가 약간 검은색을 띤다는 게 특징이란다. 아니 또 다른 특징도 있다. 숙박시설과 편의시설, 해송숲 등 깔끔하게 정비가 되어있는 명장섬해수욕장과는 달리 이곳은 텅 비어있는 느낌이다. 해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민박집 몇이 보일뿐 다른 편의시설은 일절 눈에 띄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그저 무늬만 해수욕장인 셈이다.



이곳 당너머해수욕장에는 용굴이라는 기암괴석(奇巖怪石)이 있었다고 한다. ‘코끼리바위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렸는데 아쉽게도 지금은 볼 수 없은 풍경이 되고 말았다. 태풍으로 이 바위가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란다. 그 흔적이라도 찾아볼까 했지만 궂은 날씨는 이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밀물 때인데다 파도까지 높아 해안으로의 접근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해안을 따라 난 탐방로를 걷을 수 있는 것만도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거센 파도가 일고 있었다.



당너머해수욕장을 지나면서 탐방로는 해안가를 따라 나있다. 자연적인 길이 아니라 해안가를 다듬어서 만든 인위적(人爲的)인 길이다. 하지만 이 길은 파도가 높을 경우 이용을 삼가야할 것 같다. 정비를 하지 않은 탓에 곳곳이 붕괴되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곳은 어른의 키를 훌쩍 넘겨버릴 정도로 깊게 무너져 내린 곳도 있다. 여성분들이라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할 수밖에 없는 난감한 구간이다. 거기다 그런 곳은 파도가 조금이라도 높을 경우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바닷가에 맞닿아있다.





잠시 후 길은 다시 해안가로 내려선다. 작은 몽돌이 깔려있는 멋진 곳이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경관은 조금 전에 지나왔던 당너머해수욕장보다 오히려 한 수 위가 아닐까 싶다.



자갈밭의 끄트머리쯤에 이르면 왼편 언덕으로 나무계단이 놓여있다. 더 이상은 해안을 따라 길을 내는 게 불가능 했던 모양이다.



계단을 올라서면 임도로 연결된다. 아니 경작지 사이로 길이 나있으니 농로(農路)라고 하는 게 더 옳은 표현이겠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삼거리에 이른다. 왼편은 청룡초등학교 장고분교장을 거쳐 장고도리로 연결되고, 탐방로는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이 부근에 장고도 해안탐방로 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니 한번쯤 살펴보고 출발하는 지혜를 발휘해보자. 이정표가 세워져 있지 않은 탐방로이니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방향을 틀자마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나무계단이 보인다. 이제부터 탐방로는 산길을 따른다. 잠깐! 발길을 너무 재촉하지는 말자. 해안으로도 나무계단을 만들어 놓았으니 한번쯤 내려가 보자는 얘기이다. 조금 엉성하기는 해도 바닷가의 특징이랄 수 있는 해식애(海蝕崖)를 구경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반대편에는 돛단여도 보이나 잠시 후 전망대에서 다시 만나게 되므로 사진은 생략한다.




통나무계단과 데크계단이 번갈아 나오는 탐방로를 잠시 걷자 데크로 만든 전망대가 나타난다. 벤치까지 놓아 쉼터까지 겸하도록 했으면 금상첨화이겠지만 이 정도로도 감지덕지라 할 수 있겠다. 시야(視野)가 툭 터지는 곳에 전망대를 설치해놓은 것은 물론 바다 풍경을 담은 사진틀을 세워 보는 이들의 조망까지 돕도록 했기 때문이다. 왼쪽부터 삽시도, 용내기, 대서화도, 녹도, 호도, ·대길산도, 오도, 외연도 등 꽤나 많은 섬들이 표기되어 있다.



전망대에 서면 녹도와 호도, 외연도 등이 수평선 저 끝에 아스라하다. 그 앞에는 돛단여가 두둥실 떠있다. 이름 그대로 배에 돛대를 높이 세우고 항해를 하고 있는 형상이다. 그게 맑은 물빛과 어우러지며 아름다운 경관을 만들어낸다. 장고도의 뷰포인트(viewpoint)라고 알려진다.




잘 닦인 탐방로를 따라 얼마간 더 걷자 바닷가로 연결되는 데크계단이 만들어져 있다. 급하다고 그냥 지나치지 말고 한번쯤 내려가 보면 어떨까 싶다. 오랫동안 기억될만한 멋진 경관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바닷가 바위 위에 걸터앉은 소나무 한 그루가 눈길을 끈다. 척박하기 짝이 없는 저런 곳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소나무가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조그만 불편에도 못견뎌하며 불평불만을 일삼는 것에 익숙해져버린 우리네 삶과 너무 대비되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논어(論語) 위정(爲政) 편에 나오는 글귀 하나가 떠오른다. <子曰,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 ‘열다섯 살에 학문(學問)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 확고하게 섰고, 마흔 살에 사물의 이치(事理)에 의혹(疑惑) 갖지 않게 되고, 쉰 살에 천명(天命)을 알았고, 예순 살에 귀로 들으면 그대로 이해되었고, 일흔 살에는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라도 법도(法度)를 넘지 않았다.’는 공자님의 이야기이다. 내 나이 이미 예순 하고도 다섯이다. 그렇다면 내 삶은 과연 귀에 들은 대로 이해를 하고 있을까? 아니 남의 말을 듣기보다는 내 주장이 먼저인 나는 그런 경지에 이르려면 멀어도 한참이나 멀었다.



물결 위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바위들이 몇 보인다. 썰물 때나 그 모습을 드러내는 이다 장고도에는 라고 불리는 암초(暗礁)들이 많이 발달되어 있다. 섬사람들은 개개의 암초마다 마녀, 진녀, 버여, 갯녀, 비파녀 등의 이름들을 지어줬다. 해안선을 따라 걸으면서 암초의 생김새와 이름을 대비시켜 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일 것 같다. 하지만 오늘은 예외이다. 밀물에다 파도까지 높아 거의 모든 가 물속에 잠겨버렸기 때문이다.



탐방로는 한마디로 잘 닦여 있다. 조금만 경사가 심하다 싶으면 데크계단과 통나무계단을 깔았고, 심지어는 바닥에 반석을 깔아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게 하는 곳도 있다. 이정표까지 있었더라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였을 텐데 아쉽다. 6~7년쯤 전인가 이곳 장고도에 대한 개발계획을 기사로 접했던 것 같은데 당시에 만들어 놓은 시설들이지 싶다. 당시 기사는 장고도권역(장고도, 삽시도, 고대도)이 행안부의 명품섬 베스트 10’에 선정돼 전설과 자연이 공존하는 신비의 섬이란 모토로 클러스터(cluster)형 도서로 개발된다고 했었다. 그중에서 장고도는 전설이 있는 테마코스 조성이었으니 이런 탐방로를 조성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니었겠는가.



그렇게 잠시 걸으면 또 다른 데크전망대가 나타난다. 바다를 향해 불쑥 튀어나간 부분에 걸터앉듯이 만들어진 전망대이다. 전망대에 오르면 바다건너에 있던 고대도가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와 있다. 그 뒤에서 살포시 고개를 내밀고 있는 건 원산도이다. 그리고 두 섬의 오른편에는 삽시도가 내가 큰형이라고 우기기라도 하려는 듯 커다란 덩치를 불쑥 내밀고 있다.




전망대를 빠져나오면서 오늘의 투어가 대충 종료되었다고 보면 된다. 잠시 후 탐방로가 산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날머리인 달바위이다. 장고리 입구의 지명인데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장고도를 모두 둘러보고 싶다면 동쪽 해안선을 조금 더 타야만 한다. 하지만 우린 이쯤에서 끝내기로 한다. 뭍으로 나가는 배편이 이곳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다 둘러보지 못한 게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시간이 허락하지 않는 것을. 세상만사가 다 저와 같을지니 너무 욕심 부리지 말 일이다. ‘행복의 조건은 만족이라는 말도 있으니, 너무 아등바등 쫒기지 말고 조금은 여유로운 마음으로 관조(觀照)를 하며 살아보자. 그게 바로 행복이 아니겠는가.



잠시 후 장고리 마을에 이른다. 장고도 주민의 대부분이 모여 사는 마을인데, 보건진료소와 해경초소가 하나씩 있다. 저 마을에는 절강 편씨(浙江 片氏)’ ()을 쓰는 주민들이 유난히 많다고 한다. 외연도를 비롯한 보령의 여러 섬들이 갖고 있는 특징 중의 하나이다. 중국에서 건너왔다는 그들의 선조가 조금이라도 더 고향에 가까운 곳을 찾았던 게 원인은 아니었을까? 임진왜란 때 제독중군(提督中軍)으로 조선에 출병했다가 간신의 무고로 귀국하지 못하고 조선에 눌러 살았다는 편갈송(片碣頌)이 그들의 선조이기 때문이다.



마을 입구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왼편은 마을로 들어가는 길이니 배가 출출하다면 마을에 있는 식당이라도 찾아볼 일이다. 대신 대천으로 나가는 배를 타려면 오른편에 보이는 방파제를 따라 한참을 더 걸어야 한다. 방파제의 끄트머리에 있는 등대가 여객선의 선착장 노릇을 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 등대선착장에서 대머리선착장까지의 약 1.5쯤 되는 바다는 갯벌지대로 섬 주민들의 주머니를 두둑이 만들어주는 보물창고이다. 장고도는 해삼의 섬이라고도 불린다. 그만큼 많이 잡힌다는 얘기이다. 여름이면 제주에서 해녀들을 초빙해와 해삼을 채취하는데, 절반은 해녀들 몫이고 나머지 절반은 주민들에게 분배된다고 한다. 작년에는 해삼에서 나온 소득만 가구당 1천만 원 남짓 됐다니 얼마나 많이 잡히는지 대충 짐작이 갈 것이다. 해삼 양식장뿐만 아니라 바지락 양식장의 수확도 다른 섬들보다 크다. 게다가 섬에서는 홍합이나 소라도 많이 잡힌단다. SBS-TV의 시사교양 프로그램인 '생방송 투데이식도락코너에서 소개될 정도였으니 그 명성이 어느 정도인지 대충 짐작이 갈 것이다. 당시 방송에서는 해삼을 위시해서 바지락과 키조개, 낙지 등이 들추기만 하면 쏙쏙 나오는 광경이 방영되었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논에서는 자급할 정도의 쌀도 생산된다고 한다. 자연이나 인간이 모두 복 받은 땅이라 할 수 있겠다. 수익이 많으니 자연히 고향을 떠났던 젊은이들이 다시 돌아왔을 게 불을 보듯 뻔하다. 그 덕분에 두세 명까지 줄어 폐교(廢校) 지경까지 갔던 초등학교 분교가 지금은 학생이 20여명으로 늘어났을 정도란다.



방파제 끝에는 항로유도등이 만들어져 있다. 등대보다는 작지만 제법 우람하게 서 있는 하얀 구조물이다. 이 부근은 밤낚시를 즐기는 강태공들이 즐겨 찾는 곳이라고 한다. 낚시뿐만 아니라 해오름 뷰포인트(viewpoint)이기도 하단다. 등대 뒤편에는 버여라고 하는 바위섬이 머리를 내밀고 있다. 썰물 때라면 온전히 드러나 장고도의 풍광을 한층 돋보이게 만들 텐데 지금은 밀물 때라 아쉽다. 그래서 별도의 사진 첨부는 생략했다.



에필로그(epilogue), 이왕에 장고도에 왔으니 이곳에 얽힌 아픈 이야기를 하나 거론해보고 반면교사(反面敎師)의 예로 삼아보고자 한다. 옛 자료들을 한참이나 뒤적거려야만 발견할 수 있는 장고도사건(長古島事件)’으로 1900년 일본정부가 홍주(洪州, 지금의 홍성) 장고도(長古島, 杖鼓島)에 난파한 일본 배를 조선인이 파손하였다며 조선정부에 손해배상을 청구한 사건이다. 1900년 일본의 풍범선(風帆船) 히노데마루(日出丸)가 장고도에 좌초·난파했는데, 이때 섬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이 부서져 흩어진 선판 몇 조각을 습득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는 당시 조선인들이 배를 파손하였다고 주장하며 조선정부에 손해배상을 청구하였다. 이에 조선정부는 섬주민 10명을 서울로 압송하여 재판에 회부하였으나, 선주와 대질 결과 일본공사의 주장이 사실무근임이 드러나 이들을 무죄로 방면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026월 일본공사는 이 문제를 재론하며 3,000원의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억지를 부렸다. 이를 조선정부가 거절하자 일본공사는 그들이 매년 납부하는 마산조계지 세금에서 손해배상금을 공제하겠다고 하였으며, 고종을 알현하고도 같은 주장을 되풀이하였다. 결국 고종은 이들의 요구를 수락하고 탁지부에 지시, 3,000원을 일본정부에 지불하였다. 이 사건은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성을 나타내주는 사건의 하나이다. 또한 힘없는 나라가 겪을 수밖에 없는 아픔이었다. 그리고 더 이상은 그런 아픔이 생기지 않을 만큼 강한 나라를 만들어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겠다.

청산도(靑山島)여행 #2 : ‘슬로길걷기

 

산행일 : ‘17. 4. 22()

소재지 : 전남 완도군 청산면

걷기코스 : 범바위말탄바위권덕리낭길구장리고인돌길서편재길(당리)도청항

 

함께한 산악회 : 가보기산악회

 

특징 : 청산도는 더딘 풍경으로 삶의 쉼표가 되는 섬이다. 푸른 바다와 푸른 산, 구들장논, 돌담장, 해녀 등 느림의 풍경과 섬 고유의 전통문화가 어우러진 청산도는 이제 우리나라를 넘어 세계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1981년에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2007121일에는 아시아 최초 슬로시티로 선정되었다. 청산도 마을을 잇는 길 이름도 슬로길이다. 국제슬로시티연맹은 2011년 청산도 슬로길을 세계 슬로길 1호로 공식 인증했다. 걷기 여행자에게 필수 방문지가 된 섬은 미역 줄기처럼 이어지는 슬로길 11개 코스를 갖췄다. 영화 서편제촬영 무대로 유명한 당리 언덕길, 구불구불한 옛 돌담으로 채워진 상서마을 등은 대표적인 슬로길 코스다. 신흥마을 풀등해변, 해송 숲이 어우러진 지리해변 역시 슬로길이 지나는 청산의 아름다운 해변이다. 또한 전통 어로(漁撈)인 휘리체험, 슬로푸드 체험 등 느림이 곁들여진 다양한 경험은 슬로시티 청산도 여행을 더욱 풍요롭게 만든다. 오늘은 슬로길’ 5코스의 일부구간과 4코스 전구간, 그리고 1,2,3코스의 일부구간을 걸어보기로 한다.


 

슬로길 걷기의 시작은 범바위(완도군 청산면 읍리)

범바위에서부터는 슬로길을 따른다. 걷기 여행자에게 필수 방문지가 된 청산도는 슬로길 11개 코스를 갖췄다. 길마다 걸맞은 풍경이 어우러지고 사연이 차곡차곡 쌓여있는 길이다. 42km에 이르는 슬로길 전체를 걸으려면 최소한 이틀은 잡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3시간이다. 꼭 둘러보고 싶은 곳만 추려서 들러봐야 하는 이유이다. 참고로 청산도는 2007년 신안 증도, 담양 창평 등과 함께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슬로시티로 지정됐다. 돌멩이로 투박하게 쌓아 올린 담장, 바다와 어우러진 다랭이논, 얕은 바다에 그물을 친 뒤 줄다리기라도 하듯 전통 방식으로 고기를 잡는 휘리, 제주에서 건너와 정착한 해녀의 미소 등은 청산도의 자연과 사람이 모두 슬로시티로 지정된 배경이다. 섬이 지향하는 슬로건 역시 삶의 쉼표가 되는 섬이다. 느림의 종, 쉼표 조형물 등 느림을 형상화한 조각물이 곳곳에 있다. 뭍에서 청산도를 오가는 여객선 이름도 아시아 슬로시티호’ ‘슬로시티 청산호.




내려가다 보면 오른편으로 권덕리가 내려다보인다. 마을 앞 바다에는 양식시설들이 질서 있게 도열해 있다. 파도가 높은 망망대해를 맨몸으로 맞고 있으니 전복 양식은 아닐 것이다. 미역양식 시설쯤 되지 않을까 싶다.



잠시 후 안부에 내려서면 길이 세 갈래(이정표 : 말탄바위150m/ 권덕리700m/ 장기미해변1.5Km/ 범바위400m)로 나뉜다. ‘슬로길2코스인 범바위길과 또 다른 둘레길인 명품길이 자로 교차하기 때문이다. ‘명품길은 권덕리 말탄바위에서 청계리 장기미해변까지의 2.5구간에 작년(2016)에 새롭게 조성됐다. 기존의 슬로길(42.195)이 마을과 마을,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인문학적인 길인데 반해, 명품길은 태고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간직한 자연이 만들어낸 길이라고 한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멀리 여서도와 제주도까지 볼 수 있으며, 해안 절벽에 소금처럼 부서지는 파도와 기암괴석, 그리고 탁 트인 바다가 마치 한 폭의 그림을 연상시킨단다.




맞은편 능선으로 오르면 바윗길이 나타난다. 왼편은 수십 길의 해벽(海壁)으로 이루어져 있다. 조금 전 안부에서 만났던 이정표로 미루어보아 이쯤이 말탄바위인 모양인데 왜 그런 이름이 붙여졌는지는 모르겠다.



이제부터는 아름다운 해안가의 비경(祕境)을 보면서 슬로길을 걷게 된다. 말탄바위의 바윗길을 타고 내려오는 이 길은 서슬 시퍼런 해벽이 바다와 어우러지면서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풍광을 선사한다. 바닷바람이 만들어 놓은 비경이다. 청산도의 푸른 하늘과 바다, 그리고 산이 조화를 이룬 절경이 눈의 호사(豪奢)를 시킨다.



앞바다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작은 섬 상도가 떠있다. 범바위 부근 해역(海域)은 자기장(磁氣場)이 세다고 소문나있다. 근처를 지나는 배들은 조심을 해야겠다. 하긴 범바위 부근을 지나는 어부들은 아예 나침반을 쳐다보지도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안개라도 짙게 끼일라치면 어부들은 이 지역의 진입을 삼가고 먼 바다로 돌아갈 정도란다. 해도(海圖)에도 이 지역에다 '자기장 이상 지역'으로 표시하고 있다니 두말하면 뭐하겠는가. 참고로 청산도에서 1.3Km 떨어진 저곳 상도와 권덕리 마을 끝, 그리고 범바위에 삼각선을 그은 안쪽 지점은 한국판 버뮤다 삼각지대로 통한다. 이 지역 해도(海圖)에도 자기장 이상 지역으로 표시되어 있다고 한다. 배에 달고 다니는 나침반이 그 안에서는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곳을 지나는 배들은 GPS, 나침반이고 간에 계기에 의지하지 않는단다. 시계비행(VFR)처럼 그저 눈만 믿고, 눈으로 바닷길을 헤쳐 나간단다.




깎아지른 해안 절벽 아래를 오가는 파도는 잔잔하다. 한껏 자세를 낮추었다. 내 마음도 절로 파도처럼 잔잔해지고 있다. 그렇게 찾아온 여유는 자신도 모르게 슬로길의 느림에 맞춰져 있다.



바윗길이 끝나면 슬로길은 시멘트포장 농로(農路)를 따른다. 가는 길에는 흐드러지게 핀 유채꽃밭을 심심찮게 만난다. 한마디로 꽃과 함께하는 아름다운 길이다. 참고로 슬로길은 옛 사람들이 마을 간을 오갈 때 이용하던 이동로(移動路). 이 길을 걷다보면 아름다운 풍경에 취해 저절로 발걸음이 늦어진다고 해서 슬로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렇게 잠시 진행하면 진행방향 저만큼에 권덕리마을이 나타난다. 청산도의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는 이 마을은 1740(영조 16) 무렵에 읍리에서 살던 제주 양씨가 이곳으로 이주해오면서 생겨났다. 범바위의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서 호암동으로 불리다가 고종 37년에 권덕포(권득게)로 이름이 바뀌었다. 탁 트인 바다를 끼고 있어 일출과 일몰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마을 안으로 들어선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살처럼, 어릴적 술래잡기의 추억이 떠오르는 섬마을의 풍경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마을 안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이곳 삼거리에서는 왼편으로 진행해야 한다. 오른편이 더 널찍하다고 들어설 경우에는 읍리를 거쳐 도청항으로 이어지니 주의한다. 하긴 슬로길의 이정표들이 잘 정비되어 있어 조금만 주의한다면 길을 잘 못 들어설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곳에서 슬로길4코스로 바뀐다. 그리고 이 길은 낭길이라는 이름으로 구장리까지 이어진다.



어떤 길이든 길은 길과 연결된다. 그러니 어떤 길로 가야할지를 놓고 고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주요 포인트마다 이정표를 세워 두었기 때문이다. 이정표의 종류도 다양하다. 방향과 거리표시를 위주로 한 이정표들이 대부분이지만 지도(地圖) 위에다 현재의 위치를 표시해 놓은 것도 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지 길바닥에다 방향표시를 그려놓기도 했다. ‘트레킹 마니아(trekking mania)’들의 로망(roman)산티아고 순례길( Camino de santiago)’의 화살표를 벤치마킹(bench marking)한 모양으로 색깔도 역시 같은 노란색이다.




왼편으로 방향을 틀었다싶으면 바닷가에 이르게 되고, 길은 맞은편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길가에 바다정원이라는 주막(酒幕)이 있음을 알려주는 팻말이 세워져 있다. 막걸리 한 병에 해초전을 끼워서 만 원짜리 한 장에 모시겠단다. 시원하다는 홍보문구에 이끌려 들어가 보려다가 이내 마음을 바꾸고 만다. 주어진 시간이 넉넉하지 못한 탓이다. 아니 그보다는 조금 전 범바위에서 쉬면서 집에서 준비해온 얼음막걸리로 목을 축였기 때문이라고 해야 더 솔직한 표현이 되겠다.



잠시 후 산자락으로 놓인 나무계단이 나타난다. 청산도의 남쪽 해안은 10m에서 20m쯤 되는 높이의 해식애(海蝕崖) 즉 해안 절벽이 발달해 있다. 4코스는 이 해안의 낭떠러지 위로 나있다. '낭길'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이유가 아닐까 싶다. ‘슬로길안내판에 표기해 놓은 낭떠러지 길로 하늘에 떠있는 듯, 바다에 떠있는 듯, 모호한 경계선이라는 문구를 보면 말이다.



이곳을 지나면 슬로길의 진수를 느낄 수 있는 숲과 바다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길을 걷게 된다. 해안가 절벽 위로 오솔길처럼 고운 길, 바닷바람에 실려 오는 바다 향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걷는 길이 나타난다. 그 향기가 코끝을 스치는 탓에 가는 길을 멈추고 바다로 눈길을 한번 씩 주어야만 걸을 수 있는 그런 길이다.



바다 속에서부터 솟아 오른 가파른 절벽 옆으로 난 낭떠러지 길을 지나갈 땐 아찔한 고도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바다 방향에 튼튼한 동아줄을 난간 삼아 매어놓았기 때문이다. 그저 아슬아슬하고 아찔한 스릴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 만일 그것으로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 때에는 발아래로부터 들려오는 철썩철썩 파도소리에 귀 기울여 볼 일이다.




슬로길을 걷다보면 가벼운 배낭을 맨 여행객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그런데 맞은편에서 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1코스에서 시작해서 코스의 순서대로 걸어오고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싶다. 그렇다면 그들은 꽤나 먼 거리를 걸었을 게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없다. 하나 같이 모두 여유롭고 행복한 표정들이다. 피로를 느끼지도 못할 만큼 아름다운 길이었다는 증거이리라.



슬로길은 느림의 길이면서 또한 호젓한 사유(思惟)의 길이다. 수시로 변화를 주는 주변 풍경들을 눈여겨 살펴볼 수 있는 여유를 준다. 그 덕분인지 길을 걷는 도중에 어여쁜 꽃들이 많이 눈에 띈다. 특히 절벽 길에서 자주 마주칠 수 있었던 홍자색 꽃 '자란'은 그 중에서도 최고로 예뻤다. 남도지방의 양지쪽에서 자라는 난초과의 '자란'은 수줍은 듯 발그레한 꽃잎의 얼굴도 고왔지만, 경쾌하고 날렵하게 피어난 꽃잎의 자태도 일품이었다.



건너편에 바다를 향해 길게 누워있는 해식애(海蝕崖)가 펼쳐진다. 저 벼랑위로도 슬로길이 나있다고 한다. 1코스의 한 구간인 사랑길이다. 젊은이들이 데이트 삼아 걷기에 딱 좋은 길이란다.



1시간 남짓을 걸어 산자락을 빠져나오면 구장리이다. 길고 넓은 농토가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구장리라고 불리는데, 1914년 읍리에서 살던 제주 양씨가 이곳으로 이주해오면서 생겨난 마을이란다. 바닷가로 내려서면 잘 지어진 정자가 여행객들을 맞는다. 낭떠러지 위를 걸으면서 긴장했던 마음을 잠시 진정시켜보라는 배려인 모양이다. 이곳에는 정자 말고도 슬로길 안내도와 슬로길에 대한 설명판이 세워져 있다. 4코스인 낭길과 3코스인 고인돌길이 서로 맞교대 하는 지점이어서 일 것이다. 참고로 이곳 구장리는 2009년엔가 청산도의 전통 장례(葬禮)인 초분(草墳)이 치러졌던 곳으로 유명하다. 초분이란 일종의 풀 무덤으로, 시신 또는 관을 땅 위에 올려놓은 뒤 짚이나 풀 등으로 엮은 이엉을 덮어 두었다가 2~3년 후 남은 뼈를 씻어 땅에 묻는 것을 말한다. 고기잡이 나간 상주가 임종을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였기에 부모가 돌아가시면 일단 초분을 만들어 시신을 안치한 뒤 상주가 돌아오면 장례를 치루는 것도 자연에 순응하는 방법이었으리라.



구장리를 지나면서 슬로길은 도로를 따른다. 옛날부터 나있던 길이다. 주민들이 오가던 이동로가 지금의 '청산도 슬로길'이 되었다고 보면 되겠다. 이 구간은 시멘트포장 도로와 겹친다. 하지만 자동차 한 대 보이지 않는다. 슬로길을 걷는 여행객들을 제외하면 인적까지 끊긴 한적한 길이다. 시간이 더디게 가기에 마음껏 게으름을 피워도 탓하지 않을 것만 같은 섬. 느리게 사는 것이 진정 행복한 삶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섬. 그런 청산도에 딱 어울리는 길이 아닐까 싶다. 이런 길을 걷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소중한 쉼표의 해답을 만나게 될 것 같다.



건너편 해안이 다시 한 번 눈에 들어온다. 당리에서 구장리를 잇는 해안절벽길이다. ‘슬로길2코스인데 숲의 고즈넉함과 해안의 절경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길이란다. 주민들은 이 길을 '연애바탕길'이라고 부른다던데 공식 이름은 사랑길로 되어 있다.



도로를 따라 얼마간 걷다보면 왼쪽 저 멀리에 언덕이 나타난다. 그 위에는 예쁜 집 한 채가 지어져 있다. 눈치 빠른 사람들은 이미 내 의도를 눈치 챘을 것이다. 이쯤에서 읍리로 나가는 도로를 버리고 왼편에 보이는 조금 좁아진 길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당리마을로 연결되는 곡선(曲線) 길이다. 슬로길은 어느 곳 하나 직선(直線)이 없다. 그래서 직선보다는 곡선, 인공보다는 자연이 청산도의 자랑거리다. 유채꽃과 보리밭을 구경하며 구부러진 길을 따라 천천히 걷는다. 논두렁과 밭두렁에 지천으로 피어있는 꽃들을 바라보며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다.'는 말의 의미를 되돌아보는 여유를 가져본다.



아침에 보적산으로 가는 길에 보았던 청산진성이 또다시 나타난다. 반대편인 모양이다. 청산도는 옛날부터 우리나라 서남해안 바닷길의 요충지였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이 일대가 전란에 휩싸여 거주하는 사람이 없다가 효종 때 다시 입도(入島)했다. 이 지역은 제주도와 연결되는 해로(海路)상에 위치하고 있어 끊임없이 왜구의 침입을 받아 왔다. 고려 말과 조선 태종(1409) 때부터 왜구들은 민간인을 납치해 도주하는가 하면 약탈도 많이 했다. 이러한 왜구들의 잦은 출몰과 임진왜란으로 청산도를 비롯한 주변 도서 지역 주민이 흩어지게 되었고, 청산도 역시 공도(空島)가 되었다. 이후 해상 교통이 발달하면서 청산도는 서남해안을 방어하는 군사적 요충지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그리고 1866(고종 3)에는 당리 마을 언덕배기에 청산진성을 축조하기에 이른다. 세월이 흐르면서 흔적만 남아있던 것을 2010년에 다시 복원했다.



당리마을의 언덕으로 오른다. ‘서편제봄의 왈츠를 촬영했던 언덕이다. 이 언덕 근처는 청산도를 대표하는 슬로길 1코스로 봄이면 청보리와 유채꽃으로 단장된다. 참고로 청산도는 임권택 감독의 한국적인 풍경으로 유명한 영화 '서편제'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관광객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런 입소문에 기름을 붓은 것이 KBS 드라마 '봄의 왈츠'SBS 드라마 '여인의 향기'였다. 이 드라마들이 인기를 타면서 청산도는 침체기를 완전히 벗어났다고 보면 된다.



사방이 온통 유채꽃 천지다. 간간히 푸른 마늘밭도 석여있다. 그 사이로 돌담이 경계석 노릇을 하는 길이 나있다. 노란 유채 사이로 구불구불 이어지는 돌담을 보니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된다. 그래 바로 이곳에서 아름다운 풍경과 구성진 창으로 유명한 서편제를 촬영했었다.



청산도의 산하(山河)는 봄볕이 완연하다. 유채꽃이 만발한 영화촬영지 주변은 사방이 노란색이다.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노란 유채꽃과 청보리 사이를 걷다보면 자연과 동화되어가는 자신을 느낄 수 있다. 물론 모든 근심과 걱정을 털어버린 후에야 가능하겠지만 말이다.



저만큼 유채꽃밭 사이로 난 길이 보인다. 길 양쪽이 무릎 높이의 돌담이 쳐져 있는 이 길은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로 유명해졌다. 아니 청산도의 전체 이미지를 높이는데 이 영화 한 편이 큰 몫을 했다고 보면 되겠다. 아무튼 서편제의 주인공들이 진도아리랑을 부르며 내려오는 장면은 느리게 흘러가는 청산도의 시간을 반영했다.



언덕에 올라서면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오른편은 당리를 거쳐 도청항으로 연결된다. ‘봄의 왈츠촬영 세트장을 들러보고 싶어 왼편 화랑포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황톳길을 따라 잠시 이동하니 돌담 너머로 하얀 집이 나온다. ‘봄의 왈츠촬영지란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지어진 그림 같은 집이다. 그 앞으로 앙증맞은 돌담의 멋진 길이 길게 이어지는 그런 집이다.



슬로길의 하이라이트는 유채꽃밭 사이로 난 황톳길이다. 하지만 드라마 봄의 왈츠세트장인 왈츠하우스도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명소이다. 구불구불 길 따라가다 보면 만나는 하얀색의 예쁜 펜션이다. 입구에는 빨간 우체통이 바다를 향해 서있고, 드라마 주인공들을 그려 넣은 보드(board)판도 세웠다. 기념사진이라도 찍어보라는 모양이다. KBS-TV에서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인기드라마의 촬영 세트장이었음을 알리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음은 물론이다. 옆에는 SBS-TV의 인기드라마였던 여인의 향기가 촬영됐던 곳임을 알려주는 안내판이 따로 세워져 있다. 그만큼 이 부근이 아름답다는 증거일 것이다. 참고로 건물 내부는 드라마 때 사용했던 아름다운 소품과 가구들이 그대로 남아있다고 한다. 평상시엔 문을 닫지만 예약을 하면 숙박도 가능하다니 시간이 날 경우에는 하룻밤 머물러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봄이면 유채꽃과 청보리가 그리고 가을에는 코스모스가 어우러진 그림 같은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니 말이다.



건물 앞에서는 작은 음악회가 열리고 있다. 슬로길 축제를 맞아 열리는 이벤트인 모양이다.



세트장 옆 공터의 담벼락에 서면 도락마을 앞바다가 여행객들을 동화 속으로 이끈다. 전편(보적산 산행)에서 설명했듯이 ‘SBS-TV’에서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피노키오의 배경지가 되었을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다. 다른 한편으로 저곳은 어촌체험마을을 운영하는 곳으로 입소문을 타고 있다. 그중에서도 전통적 고기잡이 방식 중의 하나인 독살체험은 어린이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고 있단다. 독살이란 해안에 쌓아올린 돌담장을 이용해서 고기를 잡는 어로(漁撈)의 한 형식이다. 바닷물과 함께 들어온 고기가 썰물이 되어도 못 빠져나가게 만드는 것이다. 돌담 안에 남아있는 고기를 그냥 줍기만 하면 되니 어린이들이 좋아할 만도 하겠다. 참고로 독살은 돌로 담을 쌓기 때문에 한자어로 석방렴(石防簾)이라고 부르고 서해안 지역에서는 독살 외에 독장’, ‘쑤기담이라고도 부른다. 제주도에서는 원담이다. 근래에는 물고기가 잘 잡히지 않는데다 보수 관리에 많은 어려움이 있어 대부분 폐쇄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곳에서 체험코스로 운영하고 있는 모양이다.




조금 떨어져 있는 도청항이 아득하게 펼쳐진다. 심심찮게 배들이 들락거리고 있다. 요즘이 축제기간이어서가 아닐까 싶다. 이런 풍경들은 잘 그린 그림엽서처럼 한눈에 쏙쏙 담겨간다.



왈츠하우스 너머는 화랑포로 넘어가는 산책로이다. 그러나 주어진 시간이 부족한 탓에 그곳까지 둘러볼 여유는 없다. 반대편에 있는 서편제 촬영장으로 발길을 돌려야 하는 이유이다. 이 일대는 한국영화 사상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의 하나로 꼽히는 서편제촬영지이다. 가장 한국적인 소재인 판소리로 한국인의 한과 정서를 빼어나게 표현한 서편제는 이곳 청산도의 아름다움과 절묘하게 조화되어 빛을 내었다. 돌담 사이 황톳길을 따라 유봉, 송화, 동호 세 주인공이 구성진 진도아리랑의 가락에 맞추어 한바탕 신명나는 소리판을 덩실덩실 벌이며 내려오던 장면이 바로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노랫가락에 맞춰 덩실덩실 춤을 추던 장면이 지금까지도 눈에 선하다. 애달플 정도로 예뻤던 송화(오정해)가 단단히 한 몫을 했음은 물론이다.



유채꽃밭에서 추억을 남기며 환하게 웃는 사람들이 아름답다. 그 사이로 길이 나있다. 직선보다는 곡선, 인공보다는 자연이 청산도의 자랑거리다. 유채꽃을 구경하며 구부러진 길을 따라 천천히 걷는다. 세트장과 유채꽃 물결, S자형 오름길과 바닷가의 갯마을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파도가 치면 치는 대로 자연에 순응하면서 순리대로 사는 섬사람들의 생활이 이해된다



촬영지 옆 언덕은 작은 공원으로 꾸며 놓았다. 정자와 벤치 몇 개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그런데 정자 옆에 세워진 동상(銅像)이 무척 낯설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완도군수이다. 옆에는 그의 약력을 적었다. 그의 업적을 기리고자 세운 모양인데 내 눈에는 뜬금없어 보인다. 얼마나 큰 업적을 이룩했는지는 몰라도 살아있는 사람의 동상을 세우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 모르겠다. 북한도 아니고 말이다.




정자에서 서성이는 사람들이 몇 보인다. 서편제의 삼총사, 즉 유봉과 송화, 그리고 동호로 분장한 사람들이다. 잠시 후 이들의 창()을 들을 수 있었던 걸로 보아, 이번 행사를 위해 섭외된 판소리 가수들이 아닐까 싶다.



공원의 뒤에는 주막(酒幕)을 배치했다. ‘서편제 쉼터라는데 메뉴판에는 느림보의 미학 슬로장터라고 적고 있다. 이곳에서는 해초비빔밥과 오징어무침 등의 식사는 물론이고 술과 안주도 판다. 삼계탕과 오리구이 물회 등 계절음식도 준비되어 있다. 마침 경관까지 좋으니 주안상 차려놓고 망중한이라도 즐겨볼 일이다.



주막에서는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를 둘러싸고 있는 도락마을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가파른 언덕을 깎아 만든 다랑논에는 노란 유채꽃이 만발해 있고, 바다에는 전복 양식장들이 연병장의 군인들처럼 질서정연하게 도열해 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배경화면으로 깔기에 충분한 아름다운 경관이라 하겠다.



주막을 나서니 사진판들이 늘어서 있다. 청산도의 일상을 촬영한 작품들인데, 이번 축제의 일환으로 기획된 행사인 모양이다. 그 뒤는 솔숲이다. 한눈에 봐도 예사롭지 않은 숲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 안에는 높은 돌담에 둘러싸인 당집(신을 모셔 놓고 받들어 위하는 집)이 있다. 원래부터 있던 당집이 허물어지자 최근에 새로 고쳐 지은 것이란다. 당리라는 마을 이름도 이 당집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매년 정월에 이곳에서 제()를 지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당리를 모두 둘러봤으면 이젠 돌아갈 차례이다. 당집에서 몇 걸음 걷지 않아 아까 아침에 보적산으로 가는 길에 헤어졌던 삼거리를 만난다. 이어서 아침에 올라왔던 길로 되돌아 나가면 도청항에 이르게 되면서 오늘 트레킹이 끝을 맺는다. 도청항에 이르니 거리가 온통 사람들로 넘치고 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보다 훨씬 더 많아졌다. 그래 이 섬은 봄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사월 한 달 동안은 축제의 장으로 변한다. 이 기간에만 섬 주민의 30배가 넘는 7만여 명이 다녀간다고 한다.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흘러가는 느림의 미학이 청산도의 기적을 만들어 가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도청항으로 돌아오는 길에 ‘2017 완도국제해조류박람회의 성공개최를 기원한다는 현수막이 걸려있는 게 보인다. 2014년엔가 김, 미역, 다시마, 톳 등 해조류를 주제로 '해조류 테마 국제박람회(Seaweeds Expo)'가 열렸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두 번째라니 매 3년마다 열리는 모양이다. 이 또한 세계 최초라니 완도는 세계 최초가 많은 섬인가 보다. ‘슬로길도 세계 최초였으니 말이다. 세계 최초는 다른 부분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미국 CNN이 선정한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33선에 포함되었으며,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국내 관광지 99선에도 이름이 올랐다. 이 모든 게 슬로길덕분이다. 이 모든 것의 전제조건이랄 수 있는 슬로시티치타슬로(cittaslow) 국제연맹의 철저한 실사를 통해서 지정된다. 이를 위해서는 인구가 5만 명 이하여야 하고, 전통적인 수공업과 조리법이 보존되어 있어야한다. 고유의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한편, 자연친화적인 농법이 사용되고 속도가 중심이 아닌 인간이 중심이 되는 도시가 슬로시티라고 보면 되겠다.


청산도(靑山島) 여행 #1 : 보적산(寶積山, 330m) 산행

 

산행일 : ‘17. 4. 22()

소재지 : 전남 완도군 청산면

산행코스 : 도청항당리읍리 큰재보적산(331m)범바위(238m)

 

함께한 산악회 : 가보기산악회

 

특징 : , 바다, 하늘이 모두 푸르러 청산(靑山)이라 이름 붙여진 작은 섬! 청산도는 전남 완도에서 19.2km 떨어진 다도해 최남단 섬으로 완도항에서 뱃길로 50분 거리에 자리 잡고 있다. 자연경관이 유난히 아름다워 예로부터 청산여수(靑山麗水) 또는 신선들이 노닐 정도로 아름답다 하여 선산(仙山), 선원(仙源)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청산도는 1993년 영화 '서편제'로 널리 알려진 섬이다. 하지만 2006'봄의 왈츠'라는 드라마의 아름다운 화면으로 접하기 전까지는 낚시꾼들이나 찾는 외진 섬이었다. 드라마 촬영 이후 한국관광공사에서 대대적인 팸투어(Familiarization Tour : 사전답사 여행)를 시작했고, 각종 매체를 통해 청산도의 유채꽃 사진이 널리 퍼지면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기 시작했다. 이 섬은 아시아 최초(2007)의 슬로시티(Slow City)로 지정된바 있다. 이를 계기로 2009년 부터는 '느림은 행복이다.'는 슬로건을 내걸며 세계 슬로우 걷기 축제를 개최해 오고 있다. 빠른 변화가 오히려 느림이 행복인 세상을 만든 셈이다. 섬에는 남쪽 최고봉인 매봉산(鷹峰山, 385m)과 보적산(寶積山, 321m), 북쪽에는 대봉산(大鳳山, 334m)이 솟아 있다. 이 셋에다 오산(烏山, 333.5m)과 대성산(大成山, 343m), 대선산(大仙山, 311m) 등을 포함해 청산기맥(靑山岐脈)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왕에 여기까지 왔으니 ’C’자 형으로 생긴 기맥 전체를 종주해 보는 게 옳겠지만 오늘은 읍리큰재에서 산행을 시작해 본다. 주어진 시간이 적은 관계로 그중 경관이 가장 뛰어나다는 보적산과 범바위 일대만 한정해서이다.


 

오는 길 : 청산도로 들어가려면 먼저 한반도(韓半島)의 남쪽 끄트머리에 있는 완도까지 와야만 한다. 청산도로 들어가는 배가 완도항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남해(영암-순천)고속도로 강진무위사 I.C에서 내려와 13번 국도를 이용해서 완도까지 오면 된다. 청산도로 들어가는 배편은 완도항에서 아침 630분부터 오후 6시까지 주중 하루 8, 주말엔 하루 12회 왕복 운항한다. 배시간은 대략 50분 정도 걸리는데,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4월을 제외하고는 운항횟수가 줄어든다고 하니 참고할 것이다.

 

트레킹의 시작은 도청항(완도군 청산면 도청리)

완도에서 청산도는 남쪽으로 19, 완도항을 출발한 배는 50분이 지나면 청산도의 관문인 도청항에 도착한다. 청산면의 소재지로 면사무소는 물론 파출소와 우체국, 금융기관 등 모든 편의시설이 이곳에 다 모여 있다고 보면 된다. 뱃길로는 50여분 거리다.




배에서 내리면 예쁘게 생긴 조형물 하나가 여행객들을 맞는다. 달팽이를 형상화한 조형물을 가운데에 두고 느림보의 섬청산도라고 적은 두 개의 기둥을 양편에 세웠다. 이곳 청산도가 아시아에서 최초로 선정된 '슬로시티(Slow City)'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슬로시티는 치타슬로(Cittaslow)‘, 즉 유유자적한 도시, 풍요로운 마을이라는 이탈리아어이다. 출발은 느리게, 먹는 것도 느리게, 모든 것을 '느리게 살기' 운동이다. 빠르게 살아가는 우리 도시의 삶에 반대되는 운동이이라고 보면 되겠다.



청산도를 찾는 관광객들은 차량을 가지고 오지 않아도 된다. 섬내 주요 관광지들을 편안히 둘러볼 수 있는 순환버스가 운행되기 때문이다. 당일 승차권(1일권)을 한 번 구입하면 자신이 원하는 관광지와 슬로길을 걷고 체험하면서 버스시간표에 맞추어 몇 번이고 탈 수 있다. 순환버스의 이용요금은 1일권으로 성인 5,000, 학생과 할인 대상자는 3,000원이며, 45인승 대형버스 2대가 110(주말 12) 30분 간격으로 주요 관광지를 순환 운행한다. 이때 문화관광해설사가 함께 탑승하여 청산도의 자연경관과 문화를 자세히 안내한다.



길가에 시간으로 보는 청산도라는 거대한 안내판을 세워 놓았다.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지정(1981)‘, ’아시아최초 슬로시티 선정(2007)‘, ’구들장논 세계중요농업유산 등재(2014) 등 기원전(청동기시대)을 시작으로 2016년까지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시간대별로 적어 내려간 다음, 맨 아래에다 올해의 행사인 청산도 슬로걷기 축제(4.1~4.30)‘로 대미를 장식했다. 그러고 보니 지금이 축제기간이었던 모양이다. ’느림은 행복이란 주제로 노란 유채와 청보리 물결이 한 폭의 그림이 되는 매년 4월마다 열린다는 그 축제 말이다. ’세계 슬로우 걷기 축제라는 이름으로 2009년부터 열었다고 하니 벌써 9회 째가 되었나 보다.



화장실마저도 달팽이 모양으로 만들었다. 그래 이 섬은 모든 개념을 '슬로시티(Slow City)'에서 찾아보려는 모양이다. 이 운동의 목적은 사회의 진정한 발전과 전통문화의 보호, 사람이 사는 사회,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모처럼 찾아온 청산도, 그들이 내걸고 있는 목적을 가슴에 새기고 청산도판 둘레길인 슬로길을 걸어보자.



느림의 종도 보인다. 여행객들에게 슬로길 걷기의 시작을 알리고 느림의 의미를 일깨워 주기 위해 설치하였다는 종이다. 센스(sense)가 넘치는 집사람이 이를 놓칠 리가 없다. 슬로걷기를 시작하겠다면서 종을 울리고 있다. ’느림보의 미학을 추구라도 하려는 양 최대한 여리게, 동작 또한 최대한으로 늦추어보려는 낌새가 역력하다. 저런 여유와 낭만‘, 내가 그녀를 선택했던 이유이다.



슬로길 안내판을 따라 도청항에서부터 걷기 시작한다. 임권택감독의 영화 서편제(1993년 작)‘에의 촬영지로 유명한 당리마을 방향이다. 축제기간이어선지 여행객들의 숫자가 여느 유명관광지에 못지않게 많다. 그런데 그들의 발걸음은 결코 느리지 않은 것 같다. 아시아 최초로 '슬로시티(Slow City)'로 선정된 청산도에서, 그것도 슬로걷기 축제에 기간에 슬로길을 걸으면서도 말이다. 한꺼번에 청산도의 모든 것을 다 보려고 '패스트(fast), 패스트'로 나서는 거나 아닌지 모르겠다.



슬로길의 첫 번째 구간은 미항길과 동구정길, 그리고 서편제길, 화랑포길로 나뉜다. 하지만 당리로 들어가는 길목은 갤러리길이라는 또 다른 이름도 갖고 있다. 도로가에다 청산도의 아름다운 풍경을 촬영한 사진들을 게시해 놓은 것이 그런 이름을 얻게 된 계기가 아닐까 싶다.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리자 바닷가에 옹기종기 자리 잡은 도락마을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U’자 모양 만()의 형상을 하고 있는 바닷가 소나무 숲이 아름다운 마을이다. 마을 앞바다에는 전복양식장이 가득한데 그림 속의 또 다른 비경으로 나타난다. 하긴 SBS-TV에서 피노키오(2014.11.12.~2015.01.15.)’의 촬영지로 삼았을 정도이니 오죽하겠는가. 당시 드라마에서 이곳은 향리도로 등장하는데 성장과정의 두 주인공 달포(이종석)와 인하(박신혜)가 풋풋한 사랑을 만들어가는 곳으로 그려졌다.



슬로길 주변은 한마디로 잘 가꾸어져 있다. 조그만 틈이라도 날라치면 작은 공원(公園)으로 꾸며놓았다. 야자수 등의 열대성 식물들을 심어 남국의 풍취(風趣)를 한껏 느낄 수 있게 했을 뿐만 아니라, 곳곳에 벤치와 전망대를 배치하고 가끔은 정자(亭子)도 들어앉혔다.



그뿐만이 아니다. 데크길에는 시판(詩板)들을 부착해 여행객들의 감성을 자극해준다. 아름다운 주변 풍광에 푹 빠져들면서 서정적인 시들을 익는 맛이 제법 쏠쏠하다. 그러니 걸음에 속도를 낼 수 없음은 물론이다. ’슬로길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꾸밈이 아닐까 싶다.



20분쯤 걸었을까 당리마을 앞에서 길은 두 갈래 나뉜다. 오른편은 서편제촬영지와 봄의 왈츠촬영지를 거쳐 화랑포로 연결된다. 이따가 둘레길 답사 때 들를 예정이므로 이번에는 왼편으로 향한다.



잠시 후 골목 안에 서편제세트장이 있음을 알려주는 안내판이 눈에 띈다. 골목 안으로 들어서니 초가집 한 채가 나타난다. 안에는 유봉과 송화가 마루에서 창 연습을 하는 장면을 재현해 놓았다. 동호는 토방(방에 들어가는 문 앞에다 약간 높고 편평하게 다져 놓은 흙바닥을 이르는 전라도 사투리)에서 뭔가를 만들고 있다. 서편제는 판소리라는 한국 전통 예술의 놀라운 정서적 감화력과 한국 민중의 뿌리 뽑힌 삶, 그리고 고립되어가는 한 예술가의 광기가 아름다운 자연 풍광에 녹아든 슬프고도 잔혹한 작품이다.




다시 길을 나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어른의 키로 한 길쯤 되게 쌓아 놓은 담벼락을 만난다. 최근에 복원된 청산진성(靑山鎭城)이라는데 성벽치고는 너무 낮은 것 같다. 청산도에는 조선 숙종 때에 수군만호진이 설치되었다. 그 후 1866년에 청산진이 설치되어 강진, 해남, 완도 일대를 관장하였다고 한다. 당시 이곳에는 관망대와 봉화대를 설치하고 외곽에 성을 쌓아 각각 동문, 서문, 남문을 두었다고 한다. 1895년에 진이 없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의 성곽은 2010년에 다시 복원한 것이다.



계속해서 도로를 따른다. 잠시 후 읍리마을 입구에 이르니 버스정류장이 눈길을 끈다. 정면 벽면에는 '태고의 신비 읍리마을'이라고 적혀 있다. 고인돌로 대표되는 읍리마을의 오랜 숨결을 한 마디로 표현한 문구가 아닐까 싶다. 벽화(壁畫)도 그려져 있다. 2010년에 김상일 화백과 청산회원들이 그렸다고 한다. 벽화에는 이 마을을 대표하여 모델이 된 주민 양문수 할아버지도 그려져 있다. 벽화를 그렸던 2010년 당시에 90세의 양문수 할아버지보다 더 연세 드신 분이 있었으나 건강이 좋지 않아 할아버지가 모델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청산중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는 김상일 화백은 청산도의 이곳저곳을 틈틈이 다니며 그림을 그린다고 한다. 물론 하나 같이 청산도의 아름다움에 대한 그의 짙은 애정을 엿볼 수 있는 그림들이다.





몇 걸음 더 걸으면 이번에는 고인돌(支石墓)과 하마비(下馬碑)가 여행객들을 맞는다. 둘을 함께 묶어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16호로 지정한 소중한 문화재이다. 하마비는 민간 신앙과 불교가 결합한 것으로 자연석에 부처를 새겼는데 아무리 지체 높은 사람이라도 이 앞을 지날 때는 반드시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했다고 전해진다. 인간으로서 겸허함을 생활로 삼았던 섬사람들이 빚어낸 소중한 보물이라고 보면 되겠다. 하마비의 뒷면에는 마애불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는데 이는 민속 신앙과 불교가 하나로 어우러진 형태라고 한다. 혹자는 이 하마비를 선사 시대 때부터 신앙의 대상이 되었던 '선돌'로 보기도 한다니 참조한다. 참고로 하마비는 종묘 및 대궐 문 앞에 세워 놓은 비로, 누구든 그 앞을 지날 때에는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표시다. 왕릉을 비롯한 사찰, 향교 등에 하마비가 있었다.




고인돌은 인고의 세월을 묵묵히 괴고 있는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이다. 고인돌은 밑에 기둥이 있는 북방식 고인돌과 기둥이 없는 남방식 지석묘로 나뉜다. 읍리 고인돌은 남방식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이 고인돌은 '독배기'라 부르는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선사시대의 석기(石器) 유적이다. 그만큼 오래 전부터 청산도에 사람이 살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원래는 16기가 있었지만 20여 년 전 도로공사 때 흐트러져 지금은 3기만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도로는 읍리마을 앞을 지나면서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이어서 구불구불 이어지는가 싶더니 잠시 후에는 고갯마루에다 올려놓는다. ’읍리큰재(이정표 : 보적산 1.9Km, 범바위 3.0Km, 말탄바위 3.7Km, 권덕리마을 4.8Km)이다. 큰재는 청산도의 동부와 서부를 연결하는 고갯마루이다.



산속으로 들어선다. 널따란 길은 걷기에 딱 좋을 만큼 가파르다. 이런 길에서는 구태여 속도를 낼 필요가 없다. 마침 주어진 시간까지도 느긋하다. 모처럼 느림의 미학을 쫒아볼 요량으로 산행을 시작한다. ‘힐링느림이란 단어가 가장 한 유행어가 되는 시대가 됐다. 언젠가부터 새로운 유행의 물결 속에 사람들은 자동차를 타고 빠르게 달리는 대신 숲이 우거진 오솔길을 거니는 것으로 방향을 바꿨다. 느리다는 것은 속도로부터 소외된 것이 아니다. 그저 남들보다 많은 것들을 만날 수 있다는 여유이다. 바쁜 도심에서 벗어나 느림의 미학을 찾는 여행자들이 가장 즐겨 찾는 곳 중의 하나가 바로 이곳 청산도이다. 언제부턴가 나는 그 여행자들 중의 한명이 되어있다.




널찍하고 부드러운 능선을 따르면 풀내음과 바다내음이 코끝을 간지럽힌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얼굴뿐만 아니라 몸과 마음까지도 깨끗하게 씻어주는 듯하다. 이래서 청산도를 일컬어 하늘과 땅, 바다가 푸른 섬이라 하는가 보다. 그렇게 작은 봉우리 두어 개를 넘으면 20분 후 청계구장마을 분기점’(이정표 : 보적산0.8Km/ 구장리 보적산장1.6Km/ 청계리 장기미2.7Km)을 만난다. 청계리와 구장리가 경계를 이루는 고갯마루이다.



고갯마루 근처는 편백나무 숲을 조성했다. 그다지 굵지는 않지만 숲을 거쳐 오는 바람결에는 편백향이 가득 담겨있다.



편백나무 숲을 지나면서 산길은 가팔라진다. 하지만 버겁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길이 너른데다 계단을 놓아 속도만 내지 않는다면 별 어려움 없이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전위봉이라 할 수 있는 바위봉우리에 올라선다. 청산기맥의 힘찬 줄기와 청산도의 동서부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광들을 눈에 담을 수 있는 곳이다. 고성산에서 대선산과 대성산을 거쳐 대봉산으로 이어지며 섬의 등뼈를 이루는 산줄기가 섬 북쪽을 가로막은 채 기운차게 솟아올라 있고, 동쪽으로는 청산도의 최고봉인 매봉산이 암팡진 형상으로 솟아 있다. 그보다 더 마음에 와 닿는 것은 역시 바다가 아닐까 싶다. 바다 건너에 육지가 보이는가 하면 남쪽으로는 망망대해(茫茫大海)가 끝없이 펼쳐진다.




조망을 즐기다가 정상으로 향한다. 몇 걸음 걷지 않아 보적산(寶積山) 정상에 올라선다. 읍리큰재에서 50분 정도 결렸다. 물론 느림보 걸음으로 걸어서이다. 보적산은 온전한 흙산은 아니다. 그렇다고 바위산이라고 볼 수도 없다. 바위와 흙이 어정쩡하게 섞여있다고 보면 되겠다. 정상에는 각진 오석(烏石)으로 만든 정상표지석 말고도 서툴게 쌓아올린 케언(cairn)이 하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쌓인 돌들마다 누군가의 간절한 염원들이 알알이 영글어 있을 것이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한마디로 끝내준다. 시야를 가로막는 것이 없기 때문에 섬 전체가 한눈에 쏙 들어오는 것이다. 잠시 후에 들르게 될 범봉과 전망대의 모습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오고, 눈을 돌리는 곳마다 섬과 바다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풍광들을 볼 수가 있다. 둥글둥글한 산은 부드럽게 구릉(丘陵)으로 내려오고, 포근한 그곳에는 어김없이 마을들이 자리 잡고 있다. 청산도란 이름처럼 하늘과 바다, 심지어는 들판까지도 온통 푸른빛이다. 참으로 고요하면서도 평화롭고, 그리고 아름답다. 그래서 보적산(寶積山)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나 보다. 청산도가 빚어놓은 보물창고라는 의미로 말이다.




바위에 걸터앉아 쉬고 있는 한 쌍의 남녀가 눈에 들어온다. 망중한(忙中閑)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 슬로시티가 추구하고 있는 모토(motto)에 딱 어울리는 풍경이다. 그들의 한가함에 동화라도 된 듯, 우리부부도 다른 편에 있는 바위에 자리를 잡는다. 준비해 온 막걸리로 목을 축이면서 시간을 죽여 볼 요량이다. 그러다 취기(醉氣)라도 돌라치면 창()이라도 한 곡조 구성지게 뽑아볼지 누가 알겠는가.



망중한을 즐기다가 다시 길을 나선다. 이정표는 없지만 범바위 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된다.



쉬엄쉬엄 10여분 줄달음쳐 내려가면 범바위 삼거리 길이다. 차량 통행이 가능한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 잠시 후 전망대 주차장’(이정표 : 범바위 입구 300m, 전망대 입구 300m)에 이른다. 이곳도 달팽이화장실이 지어져 있다. 아시아 최초의 슬로시티에서 슬로길로 걷고 있으니 최대한 늦게 걸어보라는 의도인 모양이다. 본디 달팽이라는 게 느림보의 상징물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 앞에 서있는 버스가 왠지 눈에 거슬린다. 버스란 게 본래 빠름의 상징일지니 느림보 달팽이와는 안 어울려도 너무 안 어울리는 조합이 아니겠는가.



주차장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널찍한 오른편 우회로(迂廻路)는 전망대와 범바위로 이어진다. 그러나 작은범바위를 둘러보고 싶다면 능선을 치고 올라야 한다. 생각할 필요도 없이 작은범바위로 향한다. 올라가다보면 시야가 훤하게 트이는 전망바위를 만난다. 산비탈을 비집고 들어선 다랑논들이 조망되는 곳이다.



다랑논들을 당겨보았다. 이곳 청산도에서만 발견된다는 400년 역사의 구들장논일 것 같아서이다. 다랑논이 비탈진 산골짜기에 계단식으로 층층이 만든 좁고 긴 논이라는 점에서는 구들장논역시 같다. 하지만 조금만 더 들어가 보면 일반적인 다랑논들과는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의 전통적인 온돌 문화를 활용해서 논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구들은 아궁이에 불을 때어 불기운이 방바닥 밑으로 퍼지도록 하는 난방장치로, 구들장은 불길과 연기가 통해 나가는 길인 방고래 위에 덮어 바닥을 만드는 얇고 널찍한 돌을 말한다. 구들장논은 앞에서 말한 온돌방의 구들장처럼 돌로 구들을 만들고 그 위에 흙을 쌓아 논을 만든다. 그렇게 하면 구들장 위의 흙으로 인해 논의 물이 잘 빠지지 않으며, 필요 이상의 물은 아래쪽 논과 돌 틈으로 흘러내린다. 돌이 많아 물이 잘 고이지 않는 섬의 특성을 보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구들장논은 청산도에서만 발견되는 우리네 조상의 애환과 지혜가 담긴 독특한 농법이다. 그런 점을 인정받아 2013년에는 국가중요농업유산 1호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20144월에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유네스코(UNESCO, United Nations Educational, Scientific and Cultural Organization) 세계농업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집단지로 부흥리, 양지리, 상서리 등 3개 마을에 약 5ha가 현존하고 있으며, 구들장 논에서는 주로 친환경농법으로 농사를 짓고 있어 그 어느 곳보다도 생태계가 잘 보존되고 있단다.



조금 더 오르니 커다란 바위가 하나 나타난다. 범의 형상을 닮았다는 작은범바위이다. 일정한 거리에 멈춰선 채로 요리조리 살펴본다. 그리곤 한 바퀴를 빙 돌아 다시 제자리에 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갸웃거리는 내 머리는 멈추어지지를 않는다. 호랑이의 형상이 그려지지를 않는 것이다. 조선 개국초기의 승려인 무학대사는 시안견유시 불안견유불(豕眼見唯豕, 佛眼見唯佛)’이라는 말을 남겼다.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뜻이다. 이로보아 삶에 대한 내 깨우침은 아직도 멀었나 보다. 많은 사람들이 수월하게 찾아낸다는 호랑이의 모양새까지도 그려내지 못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작은범바위근처에서의 조망도 뛰어나다. 태평양으로 연결되는 너른 바다가 끝도 없이 펼쳐지는가 하면 조금 전에 올랐던 보적산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아까 만났던 바위들은 다 어디가고 순수한 육산(肉山)의 행색을 하고 있다. 산의 생김새 또한 두루뭉술하다. 하지만 반대편 아랫마을에서 올려다 볼 때에는 뾰쪽하게 나타난단다. 그래서 뾰쪽산이라고 불리기도 했다니 참조한다. 아무튼 누군가는 보적산(寶積山) 정상에서의 조망을 일러 청산제일경(靑山第一景)’이라 했다. 하지만 이곳의 조망 또한 그에 뒤지지 않을 것 같다.



남쪽에는 의자를 배치했다. 둘이 앉게끔 했으니 연인들에게 안성맞춤이겠다. 의자에 앉으면 발아래 바다에 떠있는 작은 바위섬이 눈에 들어온다. 청산도에 속해있는 부속 섬인 상도일 것이다. 그 너머에는 망망대해가 끝도 없이 펼쳐진다.



작은범바위를 둘러봤으면 이젠 제대로 된 범바위를 만나볼 차례이다. 하지만 그 전에 들러봐야 할 곳이 하나 있다. 중간 지점에 만들어 놓은 전망대이다. 섬 전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니 어찌 안 올라볼 수 있겠는가.



슬로시티의 상징인 달팽이 모양으로 지어진 전망대는 이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래층은 차와 간단한 먹거리가 준비되어 있다. 맥주나 아이스크림도 파는 것은 물론이다. 달팽이의 껍질을 타듯이 빙글빙글 돌아 위로 오르면 전망대가 나온다. 전망대의 안쪽에는 유리로 룸(room)을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그 안에 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소망나무라고 한다. 그렇다면 빽빽하게 매달려 있는 저 종이들은 소망엽서일 것이다.



전망대에 오르면 범바위가 한눈에 잘 들어온다. 호랑이처럼 생겼다는 바위이다. 마치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듯한 형상이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바람이 세차게 불 때에는 바위틈을 지나면서 호랑이가 울부짖는 소리를 낸단다. ‘범바위라는 이름을 얻게 된 이유이다. 또 다른 설()도 있다. 바위를 향해 포효한 호랑이가 울림으로 돌아오는 소리가 자신의 소리보다 더 크자 다른 힘센 호랑이가 살고 있나보다 하고 섬 밖으로 도망쳐버렸다는 데서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반대편에는 작은범바위가 있다. 그러고 보니 이 전망대를 가운데에 놓고 크고 작은 두 마리의 호랑이가 서로 자기 것이라며 다투고 있는 모양새이다.



전망대 앞 데크에는 우체통을 만들어 놓았다. 청산도에서는 편지까지도 느려 훗날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만든다고 한다. 우체통에 편지를 써서 넣으면 1년 뒤에 배달된다고 하니 느림보 우체통인 셈이다. 우체통 너머로는 망망대해가 끝없이 펼쳐진다.



전망대에서 내려와 범바위로 다가간다. 범바위는 바위가 뿜어내는 강한 자기장이 휴대전화나 나침반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리는 신비의 바위로 알려져 있다. 광장에는 이와 관련된 시설물들이 설치되어 있다. 한복판에 원형의 탁자를 배치하고, 양쪽 옆에는 삼각(三角)으로 된 의자를 놓았다. 그리고 맨 앞에는 이것들에 대한 안내판을 세웠다. ‘생기의 삼각의자움직이는 나침반이란다. 이곳 범바위 주변이 버뮤다 삼각지대처럼 기()가 흐르는 곳이라서 삼각의자에 앉을 경우 생기를 받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 증거가 가운데에 있는 회전판인데 조심스럽게 돌려보면 강한 자기장의 영향으로 나침반이 좌우로 흔들리는 모습을 직접 확인할 수가 있단다. 예로부터 범바위 부근 해역(海域)은 선박들의 사고가 빈번했던 곳이라고 한다. 선박의 나침반이 빙글빙글 돌며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 것이 그 원인이란다. 그런 범바위의 센 기()’를 받아가라며 삼각의자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범바위 앞 광장은 또 다른 전망대이다. 남쪽으로 외롭게 솟은 여서도 너머로 망망대해가 펼쳐지는데, 맑은 날에는 구문도와 제주도까지 선명하게 보인다고 한다. 하늘도 바다도 치우침 없이 서로 조화롭고 고르게 공간을 나누어 가지고 있다. 말 그대로 어디까지가 하늘이고 어디까지가 바다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하늘은 바다를 닮고, 바다는 하늘을 닮았다. 아련하고 아스라한 것은 엷게 낀 해무(海霧) 덕분이 아닐까 싶다.



반대편에는 권덕리 마을이 내려다보인다. 청산도 내에서도 오지(奧地)로 분류되는 마을이다.


승봉도(昇鳳島 )

 

여행일 : ‘17. 5. 30()

소재지 : 인천광역시 옹진군 자월면 승봉리

산행코스 : 선착장이일래해수욕장장골해수욕장능선너머 반대편 해안목섬촛대바위주랑죽공원선착장코끼리바위 왕복

 

함께한 사람들 : 갤러리산악회


특징 : 인천 연안부두에서 서남방으로 약 5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면적 6.39, 해안선 길이 9.5) 섬이다. 370여 년 전에 신씨(申氏)와 황씨(黃氏)라는 두 어부가 고기잡이를 하다가 풍랑을 만나 이곳에 정착하면서 이들의 성을 따서 처음에는 신황도(申黃島)라고 하였는데, 그 후 섬의 지형이 마치 하늘을 비상하는 봉황을 닮았다고 해서 지금의 명칭(昇鳳島)으로 변경하였다고 한다. 전체적으로는 작은 단애(斷崖)와 사빈(沙濱)이 주를 이루고 있으나 일부 구간에서는 서슬 시퍼런 해식애(海蝕崖)를 보여주기도 한다. 목섬과 촛대바위, 코끼리바위 그리고 부채바위 근처인데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진 해안절벽이 절경을 이루고 있다. 이왕에 승봉도에 왔다면 꼭 들러봐야 할 곳이다. 아무튼 작고 아름다운 승봉도는 한적한 시골 풍경과 탁 트인 시원한 바다 그리고 고즈넉한 사색까지 즐길 수 있는 일석삼조의 공간이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느낌’, ‘마지막 승부등을 비롯해 영화 패밀리’, ‘묘도야화TV드라마와 영화 배경의 단골 무대가 되기도 했다.

 

찾아오는 방법

승봉도로 가기 위해서는 우선 방아머리선착장까지 와야 한다. 승봉도로 들어가는 배가 이곳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승봉도까지는 차도선(車渡船 : 대부고속페리 7)11(9:30)운항하는데 성수기에 한해 12(8:0012:00, 일요일은 14:00) 운행된다. ! 인천항 연안여객터미널을 이용할 수도 있다. 성수기에는 매일 56회 정도 쾌속선(우리고속페리)이 운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천~승봉도(첫배 오전 8, 마지막배 오후 3), 승봉도~인천(첫배 오전 940, 마지막배 오후 440)로 운항하니 참조한다.



방아머리선착장에서 승봉도까지는 1시간20분이 걸린다. 비록 먼 거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가깝다고도 할 수 없다. 지루해질 수도 있다는 얘기이다. 그러나 이 항로(航路)에는 지루함을 해소시켜 줄만한 또렷한 볼거리가 없다. 대신 즐길 거리는 있다. 갈매기가 떼로 몰려다니기 때문이다. 매점에 들러 새우깡 한 봉지만 산다면 까짓 한 시간 정도야 금방 흘러가버릴 것이다. 갈매기들을 희롱하다보면 말이다.



그렇게 갈매기들과 놀다보면 유난히도 큰 건물이 들어앉은 섬 하나가 나타난다. 봉황이 날아가는 형세라는 승봉도이다. 건물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승봉도의 랜드마크(landmark)였던 동양콘도이다. 150실이나 갖춘 이 대형콘도는 여름철이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었다. 서해안에서는 드물게 쪽빛 바다를 내다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잡초만 무성하고 시설도 망가진 채로 을씨년스러울 따름이란다. 2010년 모회사가 부도나면서 다른 이에게 넘어갔지만 회원분양권과 시설보증금 등의 문제가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배에서 내리면 승봉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쓰인 대형 아치(arch)가 여행객들을 맞는다. 그 뒤에서 개그맨 이용식씨가 활짝 웃고 있다. 산과 바다가 하나가 되는 섬에 오신 걸 환영한다면서 말이다. 옹진군의 섬에서 만나게 되는 익숙한 풍경들이다. ! 그 옆에 세워진 승봉도선착장 안내도를 깜빡 잊을 뻔 했다. 그 안내판에 적혀있는 치유의 섬이라는 문구는 뭘 의미하는 것일까. 어쩌면 이 섬이 온통 소나무 숲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나타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특히 남쪽 백사장 뒤편에서 북동쪽으로 밀식되어 있는 수령 2030년의 곰솔은 이 섬의 자랑거리이다. 아무튼 소나무는 피톤치드(phytoncide)가 가장 많이 배출되는 나무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그 피톤치드는 몸으로 스며드는 각종 병균의 살균기능을 갖고 있다. 안내도에 치유의 섬이라는 문구를 쓴 이유가 아닐까 싶다.



길가에 승봉도 관광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한번쯤 살펴보고 트레킹을 나서볼 일이다. 아니 꼭 숙지하고 출발하라고 권하고 싶다. 승봉도의 가장 큰 단점은 꼭 필요한 곳에 이정표가 세워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섬에서 자랑하는 명소(名所)들까지도 들머리를 찾을 수 없었다면 이해가 갈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트레킹을 나서기 전에 지도(地圖)부터 숙지하는 것은 선택사항이 될 수가 없다. 필수사항인 것이다.



바닷가로 난 도로를 따라 들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여객선승객 대합실과 특산물판매장을 지나면 캠핑장으로 들어가는 길이 왼편으로 나뉜다. 420m 지점에 위치한다는데, 계속해서 진행할 경우 연꽃단지(1000m)도 만날 수 있단다.



잠시 후 바닷가가 끝나는 곳에 이르자 나의 고향 승봉도라고 쓰인 표지석 하나가 세워져 있다. 주변을 꽃밭으로 가꾸어 놓은 것이 정성들여 가꾼 흔적이 역력하다. 자신들의 고향에 대한 사랑이 그만큼 크다는 증거일 것이다.



표지석을 지났다싶으면 왼편으로 모내기가 한창인 들녘이 펼쳐진다. 자그만 섬치고는 제법 너른 들녘이다. 그리고 이런 들녘들은 섬의 곳곳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농사를 지을 만한 경작지가 그만큼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렇다. 최고지점의 높이가 93m에 불과한 승봉도의 대부분은 높이 40~60m 정도의 구릉지(丘陵地)로 이루어져 있고, 그 사이사이 드나듦이 심한 만()의 안은 간석지(干潟地)가 널따랗게 펼쳐진다. 그 간석지가 현재는 농경지로 바뀌어져 있다. 그래서 주민들 대부분은 어업보다는 농업에 종사한다. 농산물로는 쌀과 보리, , 마늘, 고추 등이 생산되는데, 특히 쌀은 자급을 넘어 수매까지 이루어 질 정도라고 한다.



선착장에서 10분 남짓 걸었을까 70호 정도 되는 마을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빨갛고 노란 지붕을 가진 집들은 띄엄띄엄 있지 않고 오랫동안 그랬던 것처럼 이마를 맞댄 채 옹기종기 모여 있다. 승봉마을로 섬에서 유일한 마을이라고 보면 되겠다. 다른 곳에서도 여행자들을 위한 민박집 한두 채씩 보이긴 하지만 마을의 여건을 이루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마을은 제법 번화하다. 마을회관은 물론이고 보건진료소와 치안센터, 초등학교, 발전소 등의 공공기관이 들어서 있다. 성당과 교회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특히 이곳은 시설 좋은 민박이 여럿 운영되고 있다.



마을을 통과해 언덕에 오르면 도깨비마트가 나타나고, 곧이어 오른편으로 길이 하나 나뉜다. ’이일레해수욕장으로 내려가는 길인데 이정표(이일레해수욕장0.3Km/ 촛대바위2.3Km)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일레해수욕장은 섬의 남쪽 해안에 위치하는 해수욕장으로 길이 1.3Km에 폭이 40m쯤 되는 백사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래사장 뒤로는 울창한 숲이 펼쳐져 있어 시원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서해안 해수욕장들의 대부분이 갯벌로 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이곳 이일레해수욕장은 썰물 때라도 갯벌이 나타나지 않는다. 해수욕을 즐기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라는 얘기다. 백사장의 경사도 완만한데다 수심까지 낮아 어린아이나 노인이 있는 가족이라도 안심하고 찾을 수 있다고 한다. 바다 건너편에서 대이작도와 사승봉도가 고개를 내민다. 그 왼편에 보이는 섬은 상하공경도일 것이다.



이일레해수욕장은 물이 빠질 경우 바로 옆에 있는 또 다른 해수욕장과 연결된다. 한적하기로 소문난 장골해수욕장이다. 두 해수욕장의 경계선은 크고 작은 갯바위들로 구분된다. 걷는 게 쉽지만은 않은 구간이다. 하지만 좋은 점도 있다. 갯바위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자연산 굴을 따먹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기 때문이다. 그런 장점을 그냥 지나칠 집사람이 아니다. 냉큼 쭈그려 앉더니 호미부터 꺼내들고 본다. 평소부터 챙겨 다니던 호미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집사람이 건네주는 굴을 안주삼아 막걸리를 꺼내든다. 하지만 딱 한 잔이다. 기념이라고 보면 되겠다. 지금은 굴을 먹는 시기가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자칫 장염비브리오균(Vibrio parahaemolyticus)에라도 감염된다면 낭패가 아니겠는가. 참고로 굴은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10월말부터 다음해 4월초까지가 제철이다.



장골해수욕장으로 향한다. 해안선 산책코스로 제격이라니 그냥 지나칠 수야 없지 않겠는가. 모래밭을 따라 한참을 걸으니 저만큼에 어선(漁船) 두 척이 매어져 있는 작은 선착장(船着場)이 나타난다. 선착장 조금 못미처의 왼편 산자락에는 낡은 폐가(廢家)가 한 채 보인다. 이쯤에서 바닷가를 빠져나갔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 목섬으로 넘어가는 일주도로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린 끝까지 가보기로 했다. 첫 번째 실수가 아닐까 싶다.



바닷가 끝자락에 만들어진 선착장에 이르면서 해변을 따르는 진행은 불가능해진다. 마침 산자락에 오솔길이 나있다. 밧줄까지 매어 놓은 것이 동네주민들이 배를 대기 위해 오갈 때 이용하는 길인 모양이다. 잠시 후에 올라선 능선에서 길은 둘로 나뉜다. 왼편 능선을 따라 길이 나있는가 하면 반대편 바닷가를 향해서도 밧줄이 매어져 있다. 우린 반대편으로 넘어가기로 한다. 두 번째로 저지른 실수였지만 말이다.



해안은 조금 전까지와는 사뭇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모래사장 일변도였던 조금 전까지와는 달리 바위투성이로 변해있는 것이다. 크고 작은 갯바위들로 이루어진 해변은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괜찮은 풍경을 보여준다.



갯바위는 갈수록 사나워진다. 그리고 저만큼에 목섬이 보이는가 싶으면 결단이 요구된다.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갯바위를 타느냐를 갖고 말이다. 우리 일행은 그만두기로 했다육십을 넘긴 여성들이 오르내리기에는 갯바위들이 너무 험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부근의 바위들에는 줄무늬가 나있다. 퇴적암이 변성된 변성암이 아닐까 싶다. 중간에 마그마가 관입한 흔적이 선명하게 나타나는 걸로 보아 오래 전에 강한 화산작용이 있었던 모양이다.



다시 돌아가는 것보다는 아무 곳이나 선택해서 위로 치고 오르기로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 결정은 현명했다. 잠시만 고생하면 능선에 올라설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후가 문제였다. 능선을 따라 난 길을 만나면 오른편으로 진행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린 왼편으로 진행해버린 것이다. 아까 고개를 넘어 다른 편의 바닷가로 내려왔다는 사실을 기억해내지 하지 못했던 게 그 원인이었다. 우리가 저지른 세 번째 잘못이었다.



결국에는 아까 지나왔던 선착장으로 내려서고야 말았다. 가시덤불이 가득한 길을 헤쳐 나오느라 엄청나게 고생했음은 물론이다. 그렇게 장골해수욕장에 내려선 다음 이번에는 앞에서 거론했던 폐가 방향의 산자락을 치고 오른다. 울창한 소나무 숲 사이로 희미하게나마 길이 나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잠시 후 목섬으로 연결되는 일주도로가 나타난다. 이제야 제대로 된 길을 걷는 셈이다. 이어서 고갯마루에서 오른편으로 갈려나가는 능선 하나를 만난다. 아까 우리가 길을 잃었던 능선이다. 또렷하게 길이 나있는 것이 아까의 실수가 더욱 안타까워진다. 길만 헷갈리지 않았더라면 수월하게 이곳까지 왔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개를 넘어 내려서니 삼거리(이정표 : 목섬0.5Km/ 촛대바위0.7Km)가 나온다. 오른쪽은 목섬 해안탐방로, 왼쪽은 촛대바위로 가는 길이다. 먼저 섬 동쪽의 목섬으로 방향을 잡았다. 잠시 후 오른편으로 너른 백사장이 펼쳐진다. 이곳 주민들은 이 일대를 일러 부두치또는 부디치라고 부른다. 파도가 많이 부딪친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바다로 내려가는 들머리에 해양생태계보전지역이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이곳 승봉도 주변은 모래갯벌과 바위해안 등 뛰어난 자연경관과 하벌천퇴(下伐川退, 모래섬)의 특이한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넙치와 가자미 등 수산생물과 기타 기저생물들의 주요서식처란다. 그래서 학술적 연구와 자연경관의 유지를 위하여 보전지역으로 지정했다며 이곳에서 금지해야 할 행위를 나열해 놓았다. 아무튼 바다에는 김 양식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이곳 승봉도가 먼 바다가 아니라 앞바다라는 증거일 것이다.



잠시 후 목섬으로 연결되는 목조데크 탐방로가 나타난다. ‘승봉도산책로라는 의젓한 이름까지 갖고 있는 길이다. 그런데 시설물을 보수한다며 입구를 막아버렸다. 공사 책임자로 보이는 사람의 말로는 탐방로의 이용이 불가능하단다. 그럼 이곳 승봉도의 3대 볼거리 중 하나라는 목섬을 포기하란 말인가. 절대 그럴 수는 없다.



데크 아래로 내려선다. 길이 없음은 물론이다. 때문에 걷는 게 여간 사납지가 않다. 집사람과 친구들을 떼어놓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촛대바위에서 만나기로 하고 나 혼자서 목섬으로 향한다. 하지만 오래 이어갈 수는 없었다. 진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바윗길이 사나워져 버렸기 때문이다. 별 수 없이 데크로드로 올라선다. 공사하는 분에게 양해를 구하고 목섬으로 향한다. 묵인을 해주는 것으로 보아 어쩔 수 없는 상황이란 걸 그도 알고 있었음이리라.



1.2Km 정도 되는 데크로드의 끝에는 정자(亭子)가 지어져 있다. 바로 앞의 목섬이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곳이다. 바닷가로 내려서니 삼각형 모양의 목섬이 바로 코앞이다. 뒤에 보이는 섬은 금섬(金島)’이다. 마침 물이 빠져나가는 썰물 때인지라 섬까지 모래밭으로 연결되어 있다. 섬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얘기이다. 밀물 때는 섬이지만 지금과 같이 썰물 때는 육지로 변하는 특이한 섬이라고 보면 되겠다. 혹자는 목섬으로 들어가는 길을 일러 모세의 기적이라고도 한다. 조금 옹색하기는 하지만 옳은 표현일 수도 있겠다.



목섬을 둘러보고 난 뒤에는 승봉도의 또 다른 명물인 촛대바위로 향한다. 아기자기한 해벽(海壁)으로 이루어진 바닷가를 따라 최근에 목제데크 탐방로를 만들어 놓았다. 아기자기한 해벽과 함께 모래와 자갈, 조개껍데기가 한데 어우러져 형성된 아름다운 해변이다.




데크로드가 끝나면 길은 왼편 산자락으로 이어진다. 그 길을 따라 능선에 오르면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오른편 능선을 따른다. 최근에 지어진 정자(亭子)가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소리개산으로 오르는 길이다.



정자에 오르면 일망무제의 조망(眺望)이 펼쳐진다. 조금 전에 지나온 목섬 방향의 해안선은 물론이고 이따가 걷게 될 동북방향의 해안선까지도 한눈에 잘 들어온다. 그뿐만이 아니다. 바다에는 부도와 풍도, 난지도, 육도군도 등 크고 작은 섬들이 파도에 떠밀려 다닌다. 그 너머로 보이는 뭍은 당진 땅일 것이다.





정자에서 내려와 이번에는 오른편 길을 따른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밀가루처럼 고운 흙먼지가 풀썩풀썩 올라온다. 그만큼 가물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잠시 후 길이 두 갈레로 나뉜다. 두말할 것 없이 바닷가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그렇게 잠시 내려서면 부두치해안의 끄트머리에 이른다. 소리개산의 밑이라고 해도 되겠다. 규암 성분의 암석들이 널린 이곳에는 촛대를 쏙 빼다 닮은 촛대바위가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크고 작은 바위들로 이루어진 해변은 잠깐의 놀이터로 충분하다. 그중에도 성인의 키로 세 길쯤 되어 보이는 바위가 가장 뛰어나다. 마침 밧줄까지 매어져 있으니 올라가는 것을 사양할 필요는 없다. 주변 풍광에 어울리는 갖가지 포즈를 취하다보면 사람과 바위, 그리고 바다가 언제부턴가 하나로 되어있다.




놀이터를 벗어나 촛대바위로 향한다. 설치한지 얼마 되지 않은 목제데크 탐방로를 따른다. 거대한 바위벼랑 아래로 지나가는 탐방로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잠시 후 탐방로가 끝나는 곳에서 촛대처럼 뾰쪽하게 솟아오른 바위 하나를 만난다. 어찌 보면 엄지손가락을 치켜든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촛대바위라는 이름을 붙였다. 촛대에 더 가깝게 보인다는 증거일 것이다. 참고로 촛대바위는 시스텍(sea stack, 암석이 파도의 침식을 차별적으로 받아 만들어진 굴뚝 형태의 지형)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씨 아치가 파도에 의한 침식과정을 한 번 더 거치면서 생겨난 바위라는 얘기이다.



촛대바위를 뒤로 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이번에는 바닷가를 걷는다. 아기자기한 바위들이 모여 있는 코너를 지나자 또 다른 해안이 나타난다. 승봉어촌계 소유의 면허어장이니 사전허가 없이는 출입을 금한다는 경고판까지 걸어 놓았다. 그렇다면 우린 처벌대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쯤에서 해안을 벗어나기로 한다. 그리고 일주도로로 올라선다.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따라 잠시 걸으면 길이 두 갈래(이정표 : 주랑죽공원/ 산책로입구/ 촛대바위)로 나뉜다. 주랑죽공원으로 내려서자 오른편에 또 다른 해안선이 펼쳐진다. 널따랗게 펼쳐진 바닷가에는 커다란 바위들을 깔아 놓았다. ‘해양생태계보호구역이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 걸로 보아 생태계 보호를 위한 조치가 아닐까 싶다.



잠시 후 주랑죽공원에 이른다. 수목(주목 외 9, 해당화 외 7)과 자생화(섬 기린초 외 18)들을 심어놓은 녹지공간에는 정자(亭子)와 피크닉 테이블, 급수대, 화장실 등 편의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다리품을 쉬어가며 준비해온 간식으로 요기하기에 딱 좋은 공간이 아닐까 싶다. 운동기구들까지 몇 개 설치해 놓은 것을 보면 이곳 주민들의 쉼터로도 이용되고 있는 모양이다.



공원은 온통 해당화 천지다. 울타리는 물론이고 조그만 틈이라도 날라치면 해당화들이 비집고 들어섰다. 아름다운 꽃망울을 활짝 연 해당화가 정자 등 주변 풍물과 어우러지면서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내고 있다. ! 이 정자 옆에서 바닷가로 내려서야 코끼리바위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깜빡 잊을 뻔했다. 물론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그냥 지나쳐버리는 이유이다. 우리 역시 그냥 지나쳐버리는 우()를 범하고야 말았다.



꽃의 지름이 평균 5cm를 넘는 해당화는 바닷가 모래땅에서 잘 자라며 오뉴월에 꽃이 핀다. 꽃잎은 분홍색, 진분홍색, 검붉은색 등 빛깔이 다양하고 때론 흰색도 있다. 다섯 장의 꽃잎 가운데에는 노란 꽃술이 튀어나와 벌과 나비를 꼬드긴다. 장미과 식물답게 줄기에는 가시가 무성하다. 향기가 좋아서 화장품 원료로도 쓰인다고 한다.



공원을 지나 고개 하나를 더 넘자 또 다른 해안이 나타난다. 길가에 화장실을 갖춘 헬기장까지 만들어진 해안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봐서는 안 될 풍경을 만나고 만다. 오른편 해안에 눈에 익은 바위 하나가 우뚝 서있는 것이다. 승봉도가 자랑하는 명물 중 하나인 부채바위이다. 그렇다면 우린 코끼리바위를 그냥 지나쳐버린 셈이 된다. 아까 주랑죽공원에서 바닷가로 내려서야 했는데 그냥 지나쳐버린 것이다. 이 모든 게 다 이정표가 세워져 있지 않은 탓으로 봐야 할 것이다. 되돌아갈까 고민하다가 그냥 선착장으로 향해버린다. 주문해놓은 점심에 때를 맞추려면 시간이 빠듯했기 때문이다.



이정표 하나 제대로 세워놓지 않은 행정당국을 향해 육두문자(肉頭文字)를 쏟아내며 승봉리로 향한다. 안말 해변에서 긴 오르막을 통과하면 승봉도 마을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고갯마루에 선다. 야트막한 산으로 둘러싸인 섬 속의 분지(盆地)에 수많은 민가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이 섬은 물이 풍부해서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아왔다. 그 때문인지 이곳 승봉도의 역사는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섬에서 발견된 청동기시대의 유물 패총(貝塚)이 이를 증명한다. 서쪽 해안가에 위치한 구릉에서는 2줄의 평행심선문(平行深線文)이 그어진 토기편이 채집되었고, 또 다른 곳에서는 파손부의 보수공(補修孔)으로 보이는 작은 구멍이 있는 빗살무늬토기 아가리부분 1점이 수습되었다고 한다.



선착장 근처에 있는 승봉선창이라는 음식점에 자리를 잡는다. 산악회에서 점심을 예약해 놓았기 때문이다. 준비된 메뉴는 생선회 비빔밥’, 자그마한 섬에 있는 식당치고는 맛이 뛰어났다. 생선회 또한 넉넉하게 넣어 별도의 안주를 주문하지 않고도 소주 한 병을 너끈하게 비울 수가 있었다. 이 식당의 또 다른 장점은 노래방기계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타고 나갈 배가 들어올 때까지 어깨춤을 추며 놀다가기에 딱 좋다.



식사를 마치자마자 다시 길을 나선다. 출항시간(16:20)까지 남아도는 1시간 정도의 자투리시간을 이용해서 아까 놓쳤던 코끼리바위를 둘러보기 위해서이다. 재빠른 걸음으로 20분이면 만나게 되는 주랑죽공원에서 바닷가로 내려선다. 몽돌과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운치 있는 풍광을 그려내는 해안이다.



바닷가로 들어서자 해식절벽(海蝕絶壁)이 나타난다. 절벽의 곳곳에는 구멍이 숭숭 뚫려있다. 파도가 만들어낸 해식동굴들이다. 잠시 후에 만나게 되는 코끼리바위와 아까 눈요기를 즐겼던 촛대바위와 함께 해식지형의 변화과정을 살펴보는 중요한 자료가 아닐까 싶다. 해식절벽에서 해식동굴을 거쳐 씨 아치(sea arch, 독립문처럼 암석 기저부가 뚫린 다리모양의 파식지형)’로 변하고, ‘씨 아치가 세월이 흐르면 시스텍(sea stack, 암석이 파도의 침식을 차별적으로 받아 만들어진 굴뚝 형태의 지형)’이 되기 때문이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승봉도 제일의 절경으로 꼽히는 코끼리바위가 그 자태를 드러낸다. 바닷가 기암괴석들 모두가 다 그렇듯 이 바위도 긴 세월 동안 파도에 깎이고 비바람에 씻긴 끝에 만들어졌다. 이 바위가 그중에서도 유명한 이유는 썰물 때만 그 모습을 나타내고 각도에 따라 문()의 형상, 또는 코끼리의 형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독립문바위라고 부르지만 난 코끼리바위라는 이름에 한 표를 던지고 싶다. 내 눈에는 코끼리가 코를 대고 물을 마시는 형상을 쏙 빼다 닮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바위는 연인들이 찾는 필수코스로 알려져 있다. 이 바위 아래를 지나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속설(俗說)이 전해지는데 어느 연인인들 이를 놓칠 리가 있겠는가. 시간이 맞지 않을 경우 썰물 때까지 기다리는 한이 있더라도 꼭 통과해 볼 일이다.



코끼리바위해변에서 물 빠진 바닷가를 따라 조금만 더 걸으면 승봉도의 또 다른 명물인 부채바위가 나타난다. 그 생김새가 부채와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이 바위에는 유배생활의 지겨움을 달래기 위해 이곳에서 시를 쓰던 선조들이 유배가 풀린 후 시험장에서 그 글을 쓰니 장원이 됐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에필로그(epilogue), 승봉도는 여행객들이 많이 찾는 섬 중의 하나이다. 모래사장의 경사가 완만한데다 썰물 때도 갯벌이 드러나지 않는 뛰어난 해수욕장들이 널려있는가 하면 목섬이나 촛대바위, 코끼리바위, 부채바위 등의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해안선을 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다 관할 지자체의 노력만 조금 더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여행객들이 몰려들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고 지자체의 노력이 없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곳곳에 공원과 쉼터, 화장실, 테크탐방로 등의 편의시설들을 만들어 놓은 것이 그 증거라 할 것이다. 그런 노력은 현재도 진행 중이었다. 목섬에서 부채바위로 이어지는 해안선에 새로운 탐방로를 개설하면서 목제로 데크로드를 만들고 소리개산에는 정자를 짓는 등 부단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흔적들이 역력했다. 하지만 이 모든 노력들이 모두 공허하게 보이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여행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 하나가 빠져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여행자들이 가고 싶은 곳을 찾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지도를 찾을 것이다. 어떤 때에는 나침반이 필요할 수도 있겠다. 이때까지의 준비는 물론 여행자의 몫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지도의 기점(基點)으로 삼을 만한 그 무엇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그 무엇을 이정표로 삼는다. 그런데 이곳 승봉도는 꼭 필요한 곳에서 이정표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덕분에 지도를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고 싶은 곳을 찾아갈 수가 없었다. 이런 중요한 부분까지 놓쳐가면서 어떻게 여행객들 유치하겠단 말인가. 불편한 심기를 추스르며 관할 지자체인 옹진군에 고언(苦言)을 드려본다.


연도(鳶島)

 

여행일 : ‘17. 5. 22()

소재지 :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 연도리

산행코스 : 역포마을덕포마을소리도 등대소룡단정자둘레길남부마을역포마을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여수 남쪽 돌산도의 13지점에 위치한 섬으로, 인접한 금오도(金鰲島), 대부도(大釜島), 안도(安島) 등과 함께 금오열도(金鰲列島)를 이룬다. 면적이 6.8(해안선 길이는 35.6)에 불과한 자그만 섬이지만 해식애(海蝕崖)와 바다동굴 등으로 이루어진 해안 경관이 아름답다고 해서 다도해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지형(地形)은 남쪽에 위치한 증봉(甑峰, 231m)을 중심으로 기복이 비교적 큰 산지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남쪽 해안을 제외하면 경사가 급하지 않으며, 특히 중앙부의 완경사지대는 농경지로 이용된다. 만안(灣岸) 일대는 사빈해안(沙濱海岸)을 이루고 있으나 나머지 해안 대부분은 암석해안이다. 중앙에 위치한 동쪽의 가량포(加良浦)와 서쪽 병포만(並浦灣)의 만입(灣入)으로 지협부(地峽部)를 이루어 남북으로 나누어진다. 북쪽 해안에 역포만이 있고, 그곳에 역포마을이 있다. 참고로 이 섬의 원래 이름은 소리도(所里島)이다. 섬의 모양이 솔개와 같이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1396(태조 5) 순천부(順天府)에 예속되면서 솔개 연()를 써서 연도(鳶島)로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역 주민들은 아직도 소리도라고 부른단다.

찾아오는 방법

연도로 가기 위해서는 우선 여수연안여객터미널까지 와야 한다. 연도로 들어가는 정기여객선이 이곳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연도까지는 금호고속페리호가 운항하는데 12(6:2014:00) 운행된다. 오가는 도중에 여천, 유송, 우학, 안도, 소고지 등 기착지(寄着地) 몇 곳을 들르게 되니 참조한다.





2시간 가까운 뱃길은 자칫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는 거리이다. 하지만 즐기기에 따라서는 다르게 느껴질 수도 있다. 여객선이 들르는 금호열도의 섬들이 모두 아름답기로 소문난 한려수도(閑麗水道) 해상국립공원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뱃전에 나가 감탄사라도 연발하다보면 까짓 2시간의 뱃길 정도는 금방 끝나버린다는 얘기이다. 참고로 위에서 말한 금오열도(金鰲列島)는 여수시에서 남쪽으로 약 25떨어진 금오도를 중심으로 안도와 연도, 수항도 등의 유인도와 대부도, 검둥섬, 알마도, 형제도, 오동도, 초삼도, 외삼도 등의 작은 무인도들을 아우르는 이름이다.




여수항을 출발한 배는 1시간 40분여 분만에 연도의 역포항에 도착한다. 중간 기착지인 여천항(금호도)과 안도항(안도) 그리고 서고지(연도)에 들렀음은 물론이다. 참고로 연도에는 섬의 중앙부근에 위치한 연도항과 북쪽 해안에 자리 잡은 역포항이 있다. 여객선 선착장은 이중 역포항에 있다. 항로가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이왕에 섬에 들어왔으니 내력부터 알아보자. 언제부터 연도에 사람이 살게 되었는지는 그 역사가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신석기 시대의 마제석기(磨製石器)가 발견되었다고 하니 최소한 그 이전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음은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연도항 선착장 맞은편 바닷가에서 발견된 조개더미가 바로 그것이다. 조개더미란 수렵·어로·채집으로 생계를 유지해온 선사시대의 인류가 식료로 채집한 조개를 먹은 뒤 버린 껍질이 쌓여 이루어진 퇴적층 유적으로 패총(貝塚)이라고도 한다. 조개더미 안에는 조개껍질 외에도 당시의 인류가 잡아먹은 동물이나 물고기의 뼈, 실생활에 사용되다가 버려진 토기·석기·골각기들, 일상생활에서 남겨진 재 등도 버려져 있어 쓰레기장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런데 이곳의 조개더미에서 압인문토기(押引文土器)와 침선문토기(沈線文土器) 등의 토기류와 석기류가 출토되었다는 것이다. 연도의 조개더미는 신석기시대의 유물이 다량으로 확인된 남해안 지역의 대표적인 조개더미 유적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보다는 민간에 전해오는 설화(說話)가 더 재미있다. 삼국시대에 유배지에서 탈출한 사람이 띠배를 타고 섬 가까이 이르게 되었단다. 망망대해를 떠돌던 사람이 큰 섬을 발견하였으나 사방이 절벽이라 상륙할 수가 없었는데 지금의 연도 목에 숲이 우거진 사이로 만조에는 바닷물이 들어갔다가 간조에 빠지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바가지를 바다에 띄우고 그 바가지를 따라 들어오니 지금의 연도만에 사람이 살만한 집터가 눈에 띄었다는 것이다.



선착장에서 내리면 소리도 역포마을이라고 적힌 표지석이 여행객들을 맞는다. 그러고 보면 이곳 주민들은 연도라는 공식 이름 대신에 옛 이름인 소리도를 고집하고 있는 모양이다. 문득 이미 고인이 되신 박동진 명창님의 구성진 창()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냥 귓가로 흘려보내고 말았던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라는 구절이 의미를 갖고 내게 달려온다. 그 옆에는 여기가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표지석도 세워져 있다. 참고로 역포라는 마을 이름은 죄인을 제주도로 귀양 보낼 때 쉬어가던 곳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연도 탐방로 안내판도 나도 있다며 여행객들을 부른다. 왼편에다 연도의 지도를 그려 넣고 오른편에는 일주코스를 적었다. 등대입구를 출발해서 소리도등대와 소룡단, 그리고 안뜰재를 거쳐서 남부마을에 이르게 되는데, 총 길이는 4.3Km이며 걷는 데는 2시간 정도가 걸린단다.



등대입구가 있는 덕포마을까지는 미니버스를 이용한다. 역포마을과 덕포마을 사이를 여객선이 들어오는 시간에 맞춰 운행하는 마을버스이다. 버스에서 내린 다음 시멘트포장길을 따라 조금만 더 걸으면 덕포마을이 나온다. 버스에서 내리는데 운전하시는 분께서 넌지시 귀띔을 해주신다. 이따가 돌아나갈 때에도 실어다 주겠다는 것이다. 그것도 미리 연락을 주면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으시겠단다.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역포마을까지 되돌아나가는 30분 정도의 거리를 오뉴월 뙤약볕과 한판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마을 안길을 통과한 시멘트포장길은 덕포마을 아래 해안에서 멈춘다. 연도는 암석지형이라서 대개는 가파른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때문에 편평(扁平)한 해안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 귀한 해안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곳이 바로 이곳 덕포마을의 몽돌해안이다. 해안은 감싸 안은 바다와 하나가 되어 아름다운 풍광을 선사한다.



해안의 오른편은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그 경관이 자못 빼어나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론 결코 잊어서는 아니 될 아픔의 현장이다. 1995년 유조선 시프린스호가 좌초되어 최악의 해양오염(海洋汚染) 사고가 났던 곳이기 때문이다. 5t이 넘는 기름이 바다로 유출되었던 당시의 사고는 3826의 양식장에 피해가 발생하는 등 한 동안 어민들이 힘든 시기를 보낼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많은 시간이 흐른 탓인지 몽돌해안은 깨끗해 보인다. 하지만 그 아래에 쌓였던 기름덩어리까지 깨끗이 사라졌는지는 모를 일이다. 바위벼랑에 걸터앉은 순비기나무와 인동초넝쿨 그리고 억새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위로의 말을 전해주는 것 같다.



덕포마을에서 등대까지는 잘 닦여진 산책로를 따라 이어진다. 승용차 한 대가 겨우 지나다닐 정도의 비포장 길은 넓적한 반석(盤石)들을 가지런히 깔고 그 사이사이에는 보드라운 잔디를 심었다. 깔끔한 것이 외국의 유명 관광지에 못지않다. 도보여행의 묘미를 더해 주는 멋진 길이다.



길가의 울창한 숲은 식생(植生)이 뛰어나다. 아니나 다를까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으로 지정된 곳이라면서 만일 임산물을 채취할 경우에는 관련법에 의거 처벌을 받게 된다는 서슬 시퍼런 경고판까지 세워놓았다. 곰솔과 후박나무, 굴피나무, 애기등, 우묵사스레피, 다정큼나무 등이 자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첨언하면서 말이다. 특히 열매와 꽃을 동시에 달고 있는 늘푸른 나무들이 많이 보인다. 육지보다 훨씬 따뜻한 기후 탓일 것이다.



그 덕분인지 예쁜 꽃들이 자주 눈에 띈다. 인동초와 천리향에 찔레꽃까지 꽤 여러 가지의 꽃들이 번갈아가며 나타난다.




그렇게 얼마간을 걷자 저만큼에 연도등대가 나타난다. 등대의 정식 명칭은 여수지방해양수산청 소리도항로표지관리소로 전국에서 21번째로 불을 밝힌 등대이다. 이 등대에는 재미있는 얘기가 하나 전해져 온다. 6.25전쟁 당시 소리도 등대를 점령하고 있던 인민군이 등대 앞을 지나가던 해군함대에 발포하자 해군함대에서도 등대를 향해 사격을 개시했다고 한다. 하지만 등대는 국제적인 유산이기 때문에 직접 맞추지는 못하고 주위만 포격했다는 것이다. 그때 등대의 등롱파리판을 맞힌 유탄의 흔적이 1979년만 해도 남아있었단다. ! 등대로 들어가기 전에 이정표(소룡단/ 등대) 하나가 눈에 띄니 유념해 두자. 다음 행선지인 소룡단으로 가는 길이 이곳에서 나뉘기 때문이다.



등대에 가까워지자 아까 지나왔던 덕포마을 해안이 한 폭의 그림으로 나타난다. 산책로를 따라 걷는 중에도 보이기는 했었다. 다만 길가 나무들로 인해 찢기고 헐거워진 풍경화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온전한 볼거리에 감질나 했던 여행객들을 위로라도 하려는 양 이번 것은 아름답기 짝이 없다. 어느 유명화가가 과연 저런 그림을 그려낼 수 있을까. 아무튼 맨 오른편에 보이는 바위는 애달픈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대바위일 것이다. 오랜 옛날 어느 여인의 딸이 나무하러 가다 대바위사이로 빠져서 죽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그 여인은 죽은 딸이 그리워 날마다 울고 지냈는데 어느 날 대바위 밑에 검정색 가오리가 나타나 우는 어머니를 위로하듯 빙글 빙글 돌았다고 한다. 그 후 날씨가 좋지 않을 것 같을 때마다 가오리가 나타나 미리 알려주며 위로해주었단다. 한 날은 여인이 대바위 밑이 얼마나 깊은가 명주실을 내려 보았는데 아무리 내려도 그 끝이 닿지 않았다고 한다.



안으로 들자 딱 트인 바다와 하늘을 배경 삼은 등대가 마치 한 폭의 풍경화라도 되는 양 멋지게 그려지고 있다. 하얀 등대를 한가운데에 놓고 둘레를 초록의 잔디밭이 감싸고 있다. 동그란 꽃밭까지 만들어 두었다. 등대 너머에는 푸른 바다가 끝도 없이 펼쳐진다. 저런 멋진 경관이 있기에 많은 여행객들이 찾아들 것이다. 머나먼 뱃길을 아까워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남해 바다의 길잡이인 소리도 등대1910104일에 처음으로 불을 밝혔다. 여수, 광양 인근으로 출입하는 선박이나, 서해안에서 부산 쪽으로 운항하는 선박들에게 주요 길잡이 역할을 하기 위해서이다. 등탑은 백색 육각형 철근콘크리트 구조물로 등대 내부는 나선형의 철제 계단이 설치되어 있는데 지금까지도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고 한다. 등탑 높이는 9.2m에 불과하지만 평균 해수면으로부터 82m의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인근 해역을 지나가는 선박들이 멀리서도 등대의 불빛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여러 가지 요인의 가치를 인정받아 2006년 등대문화유산 제22호로 지정된바 있다. 참고로 등대의 불빛은 흰색으로 매 12초마다 한 바퀴를 돌며 광달거리(光達距離)48Km이다. 날씨가 안 좋거나 안개가 낄 때 쓰는 전기혼은 매 54초마다 1회를 울리는데 음달거리는 5.5Km라고 한다.



왼편에는 전망데크를 배치했다. 소룡단(小龍端)을 조망(眺望)해보라는 배려인 모양이다. 하지만 막상 눈에 들어오는 풍경화는 아쉽게도 많이 잘려나간 채로이다. 데크 앞에 있는 나무들이 시야(視野)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왕에 나무들까지 제거해 주었더라면 좋았지 않았을까 싶다.



표지관리소(등대)’의 구내에는 사무실과 직원숙소, 그리고 전망대를 갖추고 있는데 숙소의 일부는 일반인에게도 개방되고 있단다. 숙소 앞에는 조각상이 하나 세워져 있다. 한쪽 손을 들어 올리고 있는 여자의 나신(裸身)을 조각했는데 꽤나 투박한 편이다. 단순하고 소박한 모양새를 하고 있는 등대에 어울리는 수준이 아닐까 싶다.



속속들이 등대를 살펴봤다면 이제는 소룡단으로 향할 차례이다. 아까 등대로 들어오면서 보았던 갈림길로 되돌아가 트레킹을 이어가면 되겠다. 등대를 오른편에 끼고 돌자마자 삼거리(이정표 : 소룡단0.5Km/ 필봉산증봉1.5Km/ 연도출장소2.8Km)를 만난다. 왼편은 팔봉산과 증봉을 거쳐 연도마을로 연결되는 또 다른 길이다.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숲이 무성한 이 길을 이용해도 좋을 것이다. 잠시 후 만나게 되는 테크계단을 내려서면 또 다른 삼거리(이정표 : 소룡단0.2Km/ 남부마을 탐방로3.0Km/ 등대0.3Km)가 나온다. 왼편은 남부마을로 연결되는 산책로로 최근에 새로 조성되었단다. 이따가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도 하다. 그 전에 소룡단을 둘러보는 게 먼저겠지만 말이다.



계단을 내려서자 잠시 후 오른편 숲이 빼꼼히 열린다. 안으로 들어서니 바위벼랑에 걸터앉은 데크전망대가 나타난다. 건너편에 있는 대룡단(大龍端)을 조망해 보라는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전망대에 서니 소리도 등대를 이고 있는 대룡단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실로 멋진 풍광이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이 전망대는 바다를 향해 곤두박질치듯 깎아지른 절벽 아래에 숨어있는 쌍둥이처럼 꼭 닮은 크기로 쏙 들어간 두 개의 굴을 조망할 수 있도록 만들어 졌다. ’속평굴또는 솔팽이굴로 불리는 해식동굴이란다. 이 동굴에는 재미있는 얘기 하나가 전해져 내려온다. 네덜란드 상선이 연도 근해를 지나가던 중 동굴 쪽으로 난파를 당했는데, 이때 한 사람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고 나머지는 모두 죽었다고 한다. 살아남은 선원은 배에 싣고 가던 보물을 동굴 안에다 숨겨놓고 본국으로 돌아갔단다. 오랜 세월이 지나 살아 돌아갔던 선원의 후손이 네덜란드계 미군으로 한국에서 근무하면서 보물지도를 펴놓고 난파 당시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이곳 연도출신 군인(카투사)이 우연히 듣게 되었던 모양이다. 네덜란드인 3세가 말하는 장소가 연도임을 확신한 그가 연도로 돌아와 동굴탐사를 시작했음은 물론이다. 결과는 동굴이 막혀있는 것으로 끝나버렸지만 말이다. 싱겁기 짝이 없는 얘기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신비롭고 즐거운 상상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 풍부해지고 있다니 이 또한 흥미롭지 않는가. 하긴 임자 없는 보물을 동경하기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래서 이곳 주민들은 보물이야기를 아직까지도 털어내 버리지 못하고 있을 게다. 그 동굴이 중간에서 막혔을 리가 없다면서 말이다. 굴속에 들어가면 연도리의 동부마을 부엌에서 누룽지 긁는 소리까지 들린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는 이유이다.



소룡단으로 내려가다 보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둘 모두 소룡단으로 연결되기는 마찬가지인데, 하나는 바위벼랑 위에 걸쳐놓은 데크로드를 통해 연결시키고, 다른 하나는 능선을 따르게 만든다. 데크로드를 따르기로 한다. 비경(祕境)으로 알려진 소룡단과 대룡단을 조금이라도 먼저 조망해보기 위해서이다. 아무튼 잘 만들어진 데크로드는 아찔한 절벽의 등짝을 타고 이어진다.



돌아올 때는 능선을 따랐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팔각의 정자(亭子)를 만났다. 조망이 트이지 않는 것이 그저 쉼터용으로 지어놓은 모양이다.



데크로드가 끝나가는 지점에 이르자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진 소룡단이 눈에 들어온다. 등대를 머리에 이고 있는 대룡단(大龍端)이 용의 머리라면 소룡단은 용의 꼬리이다. 양 옆에 바다를 끼고 한발 한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몸에 부딪쳐 파열하는 바람이 거세다. 그 바람은 말할 수 없이 청량하다. 머나먼 태평양으로부터 불어온 바람이니 오죽하겠는가.



데크로드가 끝나는 곳에 다다르니 소룡단(小龍端) 전체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엄청나게 큰 바윗덩어리이다. 중간부분까지는 해국과 천문동 등 키 작은 지표식물들이 자라고 그 아래 부분은 바다까지 온통 벌거숭이이다.



섬의 동쪽 해안도 눈에 들어온다. 울창한 숲을 머리에 인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바위 벼랑들이 장중하면서도 아기자기한 자연미를 마음껏 드러내 준다.



소룡단에 올라선다. 첨부된 지도에는 이곳을 소룡여로 표기하고 있다. ‘란 본디 물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 바위를 이르는 말이다. 그러나 파도가 높을 때 물속에 들어가는 바위까지 포함된다니 단어에 너무 집착할 필요는 없다. 이곳에서는 소리도 등대를 중심으로 용의 모습을 한 대룡단은 물론이고 실제로 용이 꿈틀거리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는 소룡단까지 한꺼번에 눈에 담을 수 있다. 용의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대룡단은 바다를 향해 있고 꼬리 부분인 소룡단은 바다에 꼬리를 담근 모습이다. 몸통 부분은 소리도 등대가 있는 곳으로 중심을 이룬다.



용의 꼬리는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다. 등허리를 밟으며 끄트머리까지 나아가 본다. 탁 트인 바다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가슴속까지 후련해진다. 그 바람에 가슴 속에 응어리졌던 짐 한 덩어리 실어 보내고 싶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새로운 씨앗을 심고 싶다.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씨앗을 말이다.



소룡단에 내려서면 마치 용의 비늘을 연상케 하거나 용의 꼬리 모양과 같은 희귀한 바위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특히 등허리를 따라 나있는 독특한 문양(紋樣)이 눈길을 끈다. 바위 위에 뭔가가 스치고 지나간 자국이 또렷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오래전에도 이런 형상을 본 일이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하나 같이 용()이 지나가면서 남긴 자국이라고들 우겼었다. 그 흔적을 이곳 소룡단(小龍端)에서 다시 보게 된 것이다. 아무튼 소룡단이라는 지명에 딱 어울리는 자국이 아닐까 싶다. 새끼용이 어미용의 등허리를 지나가면서 남긴 흔적 말이다.



아까의 삼거리로 되돌아와 트레킹을 다시 이어간다. 이번에는 남부마을로 연결되는 탐방로를 따른다. 필봉산의 남쪽 해안을 따라 새로 열어놓은 총 길이 3Km의 산책길이다. 비탈진 사면을 헤집으며 난 이 길은 한마디로 멋지다. 햇빛 한 점 스며들지 못할 정도로 숲이 울창한가 하면 또 어떤 곳에서는 서슬 시퍼런 바위벼랑을 지나기도 한다. 언젠가 가까운 곳에 위치한 금오도 비렁길의 이름을 빌려 '비렁길 7코스'로 이름 붙이는 방안을 구상하고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어찌됐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연도의 바다와 다양한 모양의 바위를 조망하며 걷는 산책길은 또 하나의 명품 둘레길이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럴 경우 연간 2만여 명에 달한다는 금오도 비렁길방문객 중 상당수가 연도를 찾지 않을까 싶다.




탐방로를 걷다보면 심심찮게 시야(視野)가 열린다. 소룡단(小龍端)의 동쪽 벼랑이 보이는가 하면 왼편으로는 소룡단과 마주보고 있는 바위벼랑이 또렷하게 나타난다. 기암절벽과 해식굴로 이루어진 해안은 한마디로 절경이다. 바람과 파도가 만들어 놓은 빼어난 조각품들이다. 하긴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의 명성이 어디로 가겠는가.




탐방로로 들어선지 30분쯤 되었을까 길이 오른편으로 크게 방향을 트는 지점(이정표 : 남부탐방로 1.5Km/ 등대 1.8Km)에서 군사제한구역임을 알리는 경고판 하나가 나타난다. 업무상 관계가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출입을 금()한다는 내용이다. 그러고 보니 왼편으로 길이 하나 나있다. 증봉으로 연결되는 길로 보이지만 그냥 지나치기로 한다. 뚜렷한 볼거리가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상석이 세워져 있지 않음은 물론이다. 거기다 또 다른 산봉우리인 필봉산은 아예 올라갈 수조차 없다.



오른편 저 멀리 작은 섬 하나가 신기루처럼 나타난다. 섬의 모양새가 까치처럼 생겼다는 까치섬, 즉 작도(鵲島)일 것이다. 섬 근처에서 조업 중인 선박이 보인다. 연도 인근의 해역은 겨울에도 난류가 흐르기 때문에 다양한 어종이 머무는 황금어장이라고 한다. 시프린스호의 사고로 한때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요즘은 많이 회복되었단다.



왼편에 뾰쪽하게 솟아오른 봉우리 하나가 나타난다. 옛날 봉화대가 있었다는 연도의 최고봉 필봉산(또는 시루봉, 230.5m)’이나 현재는 군부대의 레이더기지가 들어서 있어 출입은 불가능한 상태이다. 하지만 저 봉우리는 여러 개의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그 첫 번째는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의 시종인 서불(徐巿)에 관한 이야기다. 진시황이 장생불사를 꿈꾸며 서불에게 동방의 삼신산(三神山)을 찾아 불로초를 구해 오라는 어명을 내린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서불은 여수에서 연도(鳶島)와 월호도(月湖島) 두 곳을 다녀갔다고 한다. 그들은 이곳 필봉산을 샅샅이 뒤졌으나 불로초는 찾지 못하고, 도리어 두 명의 장수를 잃고 말았다. 일행은 두 장수의 장례를 치른 다음 까랑포 해안 절벽 바위에 붉은 색깔로 서불과차(徐市過此)’라 새겨 놓고 떠났고, 주민들은 장군이 죽어 묻힌 묘를 '장군묘'라고 불러오고 있단다. 또 다른 하나는 장서린이란 해적에 관한 이야기다. 1592년께 장서린이란 해적 두목과 부하 수백 명이 이곳 필봉산 중턱에 청기와 망루까지 지어놓고 해적질을 했었다고 한다. 관군에게 체포되면서 장서린의 해적 생활은 끝이 났지만 소리도 주민들은 아직까지도 이곳을 서린이 큰 도둑놈 집터라 부른단다.



방향을 튼 이후부터는 내리막길이 계속된다. 가끔은 가파른 구간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런 곳에는 어김없이 나무계단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얼마간을 진행하면 바위난간에 걸터앉은 전망데크를 만난다. 바다를 향해 움푹 파인 협곡(峽谷)을 구경하라고 만들어 놓은 모양이다. 데크에 서면 협곡의 양쪽 면을 장식하고 있는 깎아지른 수십 길의 단애(斷崖) 사이로 망망대해가 펼쳐진다. 텅 비어 있는 것이 흡사 빈 캔버스처럼 느껴진다. 여백이 너무 많기 때문일 것이다.



협곡의 끄트머리 바닷가에서 뭔가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렇다면 이곳은 아까 소룡단에서 만난 낚시꾼이 말하던 해녀(海女)들의 작업장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보물이야기들이 많은 섬이지만 소리도의 진짜 보물은 바닷속에 있다고 했다. 품질 좋은 해산물들로 넘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보물을 캐는 광부는 해녀랄 수도 있겠다. 언젠가 소리도의 해녀들이 차려내는 해녀밥상은 화려하기 이를 데 없다고 적은 글을 본 적이 있다. 그 밥상에는 소리도의 바다가 다 들어가 있다는 말도 덧붙였었다. 전복, 문어는 기본이고 과거 결혼식 잔치 음식으로 빠지지 않던 거북손, 군부(군봇), 배말(삿갓조개) 무침에 해산물 탕국, 합자(조선홍합)까지 전부 소리도 바다에서 해녀가 건져 올린 것들이라는 것이다.



조망을 즐기다가 길을 나선다. 이제는 동구(洞口) 밖으로 난 길처럼 편안한 산길이 이어진다. 누군가는 이 섬을 일러 '장중하면서도 아기자기한 자연미의 섬'이라고 주장했었다. '바위 박물관'이라 불릴 정도로 기이한 바위들만 있는 게 아니라 이렇게 호젓한 숲길도 있었기에 그런 표현을 썼었을 게다.



잠시 후 진행방향 저만큼에 바닷가에 웅크리고 있는 자그만 마을이 나타난다. ‘남부마을인데 또 다른 이름으로는 가랑포라 불린단다. 이 마을의 해안선은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파도가 매우 높아지는 곳으로 소문나 있다. 하지만 그 바람이 만들어내는 자갈소리는 아름답기 짝이 없단다. 동풍(東風)이 불 때면 파도에 밀리는 자갈 부딪치는 소리에 갓 시집온 새색시가 잠을 이룰 수 없어서 한번 울고, 해가 거듭할수록 이 자갈 소리에 익숙해지다가 막상 마을을 떠날 때는 자갈 구르는 아름다운 소리를 잊을 수 없어 다시 한 번 운다는 것이다.



남부마을은 몽돌이 깔린 아름다운 해안을 끼고 있다.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을 못 견뎌 소리를 지른다는 그 자갈들이다. 아기자기한 바위들로 이루어진 양 옆의 해식애(海蝕崖) 또한 한눈에 담기에 딱 좋다. 바위벼랑이 너무 거대할 경우 오히려 거북할 수도 있는데 그렇지 않다는 얘기이다. 중용지도(中庸之道)의 묘()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다. 아무튼 해안은 있는 그대로 그냥 놔두고 있다. 방파제나 배의 접안시설 등이 일절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런 아름다운 경관을 해치기 싫었을 지도 모르겠다.




마을 주변은 제법 너른 경작지가 들어서있다. 뒤편에 보이는 구릉(丘陵)도 경작지로 활용하고 있는 듯하다. 연도 주민의 반 이상이 농업에 종사한다고 하더니 그 말이 맞는가 보다. 그는 이곳에서 생산되는 주요 농산물로 고구마와 보리, 마늘, 콩 등을 들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닌 모양이다. 주변 밭들마다 온통 방풍나물들이 점령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풍을 예방한다고 해서 도시 사람들에게 각광을 받는다고 하더니 그 여파가 이곳까지 미쳤나보다. 하긴 짭짤한 현금 수입원을 어느 누가 마다겠는가. 아무튼 이곳 연도는 농사를 짓는 주민들이 많아 보이는 섬이다. 경사진 땅을 일구어 밭을 만들고 이때 나온 돌들은 담벼락을 쌓았다. 생존을 위한 각별한 노고와 지혜가 돋보이는 삶의 현장이다. 그리고 그런 삶들은 세월과 함께 섬의 곳곳에 전설처럼 녹아들었다.



역포마을로 되돌아와 민박집에서 점심상을 받는다. 8천 원 하는 백반은 가격에 비해 질이 좋은 편이다. 생선과 비말, 거북손 등 직접 잡았다는 해산물로 구이와 찌개, 무침 등 다양하게 요리를 만들어냈다. 밑반찬만 가지고도 소주 한 병을 너끈하게 비웠을 정도라면 대충 이해가 갈 것이다. 아무튼 점심을 먹고 난 뒤에는 역포항의 뒤편에 있는 취북산(162.3m)에 올라가볼 요량이었다. 아래 사진에 보이는 산이다. 하지만 이를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민박집 주인부부가 극구 말렸기 때문이다. 길이 나있지 않다는 것이다. 전에도 산을 오르겠다며 길을 나선 사람들이 몇 있었지만 하나같이 실패했었단다. 우리 일행들 중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몇 있었다. 하지만 이들도 역시 중간에서 그만두고 돌아오고 말았다. 그것도 고생만 죽어라고 했다며 툴툴거리면서 말이다. 덕분에 난 시도조차 해 볼 필요가 없어졌다. 점심 때 반주로 시작한 술자리가 끝나기도 전에 정상답사에 실패한 사람들이 되돌아왔기 때문이다. 취북산이 그만큼 나지막하다는 증거이리라.



부지하세월(不知何歲月)‘이란 말이 있다. ’일이 늦어져서 언제 이루어질지 그 기한을 알 수 없을 때를 두고 하는 말로 지금 우리들의 처지와 딱 맞아 떨어지는 것 같다. 점심 때 반주까지 곁들여가며 늦장을 부렸어도 너무나 시간이 많이 남는 것이다. 세 시간 가까이나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고민하는데 민박집 주인장께서 아이디어를 내신다. 마침 썰물 때니 조개를 캐보면 어떻겠느냐는 것이다. 남자들은 투망(投網)을 던지면 될 것이고 말이다. 숭어가 제법 많이 잡힐 것이란다.



부지런한 집사람이 이런 제안을 그냥 지나칠 리가 없다. 배낭에서 호미를 꺼내들더니 냉큼 갯가로 내려간다. 참고로 집사람을 평소부터 호미를 챙겨 다닌다. 아무튼 그 결과는 제법 쏠쏠했다. 굵은 바지락을 한 소쿠리나 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바지락은 우리부부의 밥상을 나흘 동안이나 풍요롭게 해주었다. 민박집 주인부부에게 글로써나마 감사를 드려본다. 만일 그들의 인정 넘치는 배려가 없었더라면 우리 일행들은 남아도는 시간을 소모하느라 죽을 맛이었을 게다.


에필로그(epilogue), 연도는 경관이 빼어난 섬이다. 등대가 위치한 소룡단이나 대룡단 뿐만이 아니다. 해안선의 대부분이 해식애(海蝕崖)로 이루어진 탓에 어디를 가더라도 경관이 빼어나다. 여수시에서 큰 고민을 하지 않아도 관광객들이 몰려들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나는 그 원인을 두 가지 관점에서 짚어보고 싶다. 첫째는 여객선의 운항시간이다. 오전 620분에 여수항을 출발하는 첫 배의 도착시간은 85분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들어온 배가 이곳 연도를 나가는 시간은 오후 435분이다. 이는 8시간30분 동안은 이 섬에서 갇혀있어야만 된다는 얘기가 된다. 이렇게 기나긴 시간을 소모시킬 수 있는 아이템( item)을 찾아야 하는 게 우선이지 않을까 싶다. 두 번째는 트레킹 코스에 관한 문제이다. 역포항에 세워놓은 탐방로 안내판에는 이곳 연도의 일주코스를 등대입구를 출발해서 남부마을 입구에 이르는 4.3Km 구간으로 소개하고 있다. 걸어서 2시간이면 충분하다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는 너무 짧다. 남녘땅의 끝자락인 여수까지 온 것으로도 부족해서 뱃길로 2시간 가까이를 더 왔는데 걸을 수 있는 시간이 겨우 두 시간이라면 어느 누가 이곳을 찾아오겠는가. 이런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남부마을에서 역포마을까지를 둘레길로 연결시키는 게 가장 우선이지 않나 싶다. 이때 지도에 나와 있는 앞산과 취북산의 등산로를 함께 개설해야 함은 물론이다. 섬을 찾는 사람들 중에는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는 많기 때문이다.


어청도(於靑島)

 

여행일 : ‘17. 5. 7()

소재지 : 전라북도 군산시 옥도면 어청도길 95-7

산행코스 : 선착장당산목넘고개 팔각정등대 왕복공치산목넘쉼터안산검산봉돗대봉선착장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군산으로부터 북서쪽으로 약 72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섬(1.80의 면적에 해안선 길이가 고작 10.8에 불과) 어청도(於靑島)1914년 일제하의 행정개편으로 옥구군에 편입된 섬이다. 중국의 산둥반도와는 300Km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개 짖는 소리와 닭 우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라고 한다. 육지와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기상악화 때에는 배들의 피항(避港)으로 유명하며 조선시대에는 귀향지로 이용되었다. 특히 어청도는 등대가 유명하다. ’어청도 등대(등록문화재 제378)‘는 청일전쟁 후 중국 항로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일제(日帝)에 의해 축조된 시설물로, 상부로 갈수록 좁아 드는 단면 등이 주변의 바다 풍광과 잘 어우러진다. 특히 불을 밝히는 등명기(燈明機)를 수은 위에 뜨게 하여 회전시키는 중추식 등명기(목제의 덕트 시스템)’의 흔적 등 초기(初期) 등대의 구성 요소가 잘 남아 있다. 바닷가 풍경 또한 빼놓을 수 없다. 동쪽해안의 해식애는 그 어느 유명섬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공치산 근처에서 바라볼 때 나타나는 한반도의 모형은 그야말로 절경이다. 아무튼 눈이 시릴 만큼 푸른 바다로 둘러싸인 어청도는 섬 전역이 볼거리일 만큼 빼어난 매력 덩어리다. 참고로 어청도의 은 맑을 청(), 아닌 푸른 청()자를 쓴다. ‘서해의 고도인 만큼 물 맑기가 거울과 같다고 해서 불린 이름이란다. 다른 한편으론 이 섬을 처음 발견한 전횡장군이 ! 푸르다,’라고 감탄하면서 섬의 이름으로 감탄사 ''()와 푸를 ''()을 쓰게 되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도 전해져온다. 자세한 이야기는 뒤에 치동묘를 설명할 때 거론하겠다.


 

찾아오는 방법

어청도로 가기 위해서는 우선 군산항 연안여객터미널까지 와야 한다. 어청도로 들어가는 배가 이곳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어청도까지는 고속선이 운항하는데 성수기에 한해 12(8:0014:00) 운행된다. ! 이 배에는 차량을 실을 수 없으니 참조한다.



배의 출항시간까지의 자투리 시간을 이용 겸암동의 철길마을을 둘러보기로 했다. 경암동 철길은 페이퍼 코리아 공장과 군산역을 연결하는 총 연장 2.5의 철도 주변에 형성된 마을을 가리키는 말이다. 1944년 일제 강점기에 개설된 이 철도의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동네를 이루었고 197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경암동 철길마을이란 이름은 이 마을이 위치한 행정구역의 명칭에서 유래되었다. 주택 사이로 아슬아슬하게 기차가 다니던 이곳은 지난 2008년 기차운행이 중단된 것을 계기로 폐() 철로를 활용한 탐방로(探訪路)로 조성되면서 전국적인 관광명소로 다시 태어났다. TV.와 신문을 통해 외부에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탐방객들의 대부분은 인터넷 신문이나 포털 사이트를 통해 알고 개인적으로 찾아온 사람들이다. 참고로 경암동 철길은 일제 강점기인 1944년에 신문 용지 재료를 실어 나르기 위해 최초로 개설되었다. 1950년대 중반까지 북선제지 철도로 불린 이래 고려제지 철도세대 제지선’, ‘세풍 철도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후 세풍그룹이 부도나면서 새로 인수한 업체 이름을 따서 현재는 페이퍼 코리아선으로 불린다.



경암동 철길마을진포 사거리에서 연안 사거리까지의 철길 약 400m 구간을 말한다. 철길 한쪽에는 70년대에 건축한 낡은 2층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고 다른 한쪽에는 부속 건물인 듯한 작은 창고들이 연결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의 철길과 침목도 그 모습 그대로 있다. 지금은 기차 운행이 중단됐지만 2008년까지는 마을을 관통하는 기차가 하루 두 번 운행됐다고 한다. 건물과 건물 사이를 기차가 아슬아슬하게 지나가는 이색적인 풍경 때문에 한때 사진가들의 단골 출사 지역으로 명성을 누렸다. 기차 운행 중단 이후로 잠시 먹거리촌으로 북적거렸으나 무허가 음식점, 포장마차들을 모두 정리하고 추억의 거리로 재탄생했다. 철길 변 벽 곳곳에는 화물차의 풍경, 꽃그림 등 옛 생각이 절로 나는 벽화들이 그려져 있다. 데이트 명소답게 아기자기한 가게들도 눈길을 끈다. ‘의상대여 숍에서는 교련복과 한복, 각설이복 등과 소품을 빌려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폴라로이드 사진촬영을 해 주는 곳도 있어 연인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추억의 불량식품, 쥐포 등 먹는 재미도 빠질 수 없다.



군산항을 빠져나온 배는 2시간 10분을 넘기고 나서야 어청도항에 도착한다. 그것도 중간 기착지(寄着地)인 연도(煙島)를 들르지 않아서 조금 단축된 것이란다. 그렇지 않았다면 2시간30분을 훌쩍 넘겨야 한단다. 아무튼 배에서 내리는 승객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축 늘어진 모습들이다. 오는 내내 너울성 파도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배가 껑충껑충 뜀뛰기를 하다시피 하는데, 만일 그런 상황에서도 멀미를 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면 그게 더 이상했을 것이다.




산자락으로 난 긴 나무계단을 오르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계단의 들머리는 여객선의 매표소를 겸하고 있는 신흥상회(게스트하우스)의 오른편에서 찾으면 된다.



계단의 끝에는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어청도항은 물론이고 어청도 마을이 한눈에 잘 들어오는 곳이다. 전망대에는 사각의 정자(亭子)까지 지어놓았다. 느긋하게 조망을 즐기면서 쉬어가라는 배려인 모양이다. 하지만 늦게 온 여행객에게는 그럴만한 공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비박(野營, Bivouac)을 하는 사람들이 이미 점령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아까 선착장 근처에서 비박을 금지한다는 안내판이 붙어있는 것 같았는데 이들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던 모양이다.



계단을 올라가는 길에 바라본 어청도 마을(於靑島里)’, 어청도에서 유일한 취락마을이나 언제부터 이곳에 사람들이 정착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고대중국의 초나라 초패왕 항우가 한의 고조에게 패하자 항우의 부장 전횡이 종신 500인과 어청도에 망명하여 이곳에서 입절 자살하였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아무튼 이 섬은 조선 후기까지는 충청남도 보령군 오천면에 속하였으나,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으로 전라북도 옥구군으로 이관되었다. 1995년에 군산시와 옥구군이 통합되면서 군산시 옥도면(沃島面) 어청도리가 되었다.



전망대에 서면 어청도항이 한눈에 들어온다. 남쪽 방향으로 문을 연 자형의 널따란 만()을 만들고 있다. 그 안의 수심(水深)20m 내외라니 어항으로서 좋은 조건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그 덕분에 1971년에는 국가어항으로 지정되었으며 태풍이 불 때는 원거리 조업을 나온 어선들의 대피항으로 이용되고 있다.



전망대를 지났다싶으면 울창한 산죽군락지가 나오고, 이어서 널따란 헬기장이 길손을 맞는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6분만이다. 헬기장에서 길은 반대편 왼쪽에서 열린다. 이어서 산길은 서서히 오름짓을 시작한다.



그렇게 6분쯤 진행하면 벤치가 놓인 능선 고갯마루(이정표 : 당산쉼터0.7Km/ 밀밭금 쉼터0.7Km/ 심목여 종점0.7Km)에 올라선다. 좌측은 심목여종점이고 직진으로 넘어가면 밀밭금쉼터가 나온다. 당산은 물론 오른편 능선방향이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이동통신사(KT)의 중계탑이 길손을 맞는다.



왼편 바닷가에 너른 바위지대가 내려다보인다. ‘불탄여란다. ‘란 본디 물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 바위를 이르는 말이다. 그러나 파도가 높을 때 물속에 들어가는 바위까지 포함된다니 단어에 너무 집착하지는 말자. 아무튼 저 갯바위는 낚시꾼들의 놀이터로 안성맞춤일 것 같다. 섬에는 쉼이 있는가 하면 맛이 있고, 거기에 더해 놀이도 있다. 그 놀이 중의 하나는 물론 낚시이다. 가끔 세상을 등지고 절해고도(絶海孤島)에서 낚싯대를 던지며 세월이라도 낚아보고 싶은 사람들이 찾기에 딱 좋겠다는 얘기이다.



계속해서 능선을 탄다. 이 능선은 걸음을 멈추면 멈추는 곳마다 전망대가 된다. 고개만 들면 어김없이 바다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장쾌하기 짝이 없는 바다이다. 저 바다에 섬이라도 한두 개 떠있었더라면 싶다. 화룡점정처럼 말이다.



14분쯤 지나자 봉수대(烽燧臺 : 군산시향토문화유산 제9)’가 나온다. ‘조선보물 고적자료(朝鮮寶物古蹟資料)’청도리 봉수대로 기록되어 있는 봉수대이다. 그런데 이 봉수대가 낯설게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원래의 봉수대가 어청도의 주봉(主峯)인 당산의 정상부에 위치했던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정상을 군부대에서 차지하고 있는 탓에 이곳에다 복원해 놓았나 보다. 원추형의 2층 석축으로 높이 2.1m에 지름이 3.6m인 이 봉수대는 고려 의종 3(1148)에 서해로부터 오는 외적의 감시 및 경계를 목적으로 세워져 조선 숙종 3(1677)에 운영상의 문제로 폐지(增補文獻備考에 기록)될 때까지 맡은바 임무를 수행했다. 당시의 봉수(烽燧)가 대개 남쪽으로부터 침입하는 왜구(倭寇)에 대비한 시설이었음을 감안할 때 색다른 특징이라 할 수도 있겠다. 이런 봉수대는 인근 도서인 외연도에도 있었다. 두 봉수는 녹도와 원산도를 경유하여 연안의 보령으로 이어지는 체계를 이루었을 것이다.



봉수대에서 몇 걸음만 더 걸으면 당산쉼터에 이른다. 사각의 정자를 지었는데 정자의 위는 서까래만 놓고 지붕은 덮지 않은 채로 그냥 놓아두었다. 그렇다고 미완성으로 놓아둔 것 같아보이지는 않는다. 언젠가는 넝쿨식물들이 위를 둘러쌀 것을 대비한 것으로 보인다는 얘기이다.



조금 더 걸으니 철조망에 둘러싸인 시설물이 나타난다. 당산의 정상을 점령하고 있는 해군의 레이더기지로. 서해를 지키는 해군부대의 필수 시설물일 것이다. 산길은 이 시설물을 둘러싸고 있는 철조망을 오른편에 끼고 이어진다. 그리고 철조망이 끝나면 산길은 급하게 아래로 떨어진다. 곧이어 오름길이 다시 시작되지만 말이다.



그렇게 10여분을 진행하면 목넘고개에 내려서게 된다. 고갯마루에는 팔각정이 지어져 있다.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어청도 포구와 주변 외연도의 풍경을 느긋이 즐겨보라는 모양이다. 팔각정 공터에는 어청도 안내판과 함께 주요 포인트별 거리표시판도 세워져 있다. 아무튼 이곳에서 직진하면 목넘쉼터를 거쳐 돗대쉼터로 이어진다. 이따가 우리가 걸어야 할 코스이다. 어청도 등대를 둘러보고 난 후에는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 나와야 한다는 얘기이다.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이정표(어청도 등대 0.7Km)가 가야할 방향을 알려주고 있으니 길 찾기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후부터는 시멘트포장 도로를 따른다. 특별한 볼거리는 없지만 가끔은 뼈만 앙상하게 남은 고사목(枯死木)들과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루어진 침식해안이 눈에 들어오기도 한다.



15분 조금 못되게 걸어 산굽이를 돌자 저만큼에 어청도 등대(於靑島燈臺)’가 그 자태를 드러낸다. 등대는 등탑과 등롱(燈籠)으로 이루어진 탑 모양의 건축물이다. 등탑 주위의 모든 구조물을 아울러서 등대라고 부른다. 아무튼 이 등대는 일제강점기인 19123월에 지어졌다. 서해의 외딴 섬 어청도에 인천 팔미도등대에 이어 두 번째로 등대가 들어선 이유는 무엇일까. 일본 제국주의의 대륙진출 야망 때문이란다. 중국 만주 진출을 위해 오사카와 다롄을 연결하는 정기항로를 개설하면서 어청도를 중간 기착지로 이용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현재는 서해안과 군산항을 오가는 선박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길잡이가 되고 있다. 어청도등대는 그 자태가 극히 아름답다고 소문나 있다. 상부 홍색의 등롱과 하얀 페인트를 칠한 등탑, 그리고 돌담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어 그 모습이 바다와 너무 잘 어우러진다는 것이다. 특히 해질녘 등대 주변의 해송과 어우러진 그림 같은 풍경은 직접 본 사람도 제대로 표현해 내지 못할 정도로 환상적이란다. 참고로 이 등대는 근대기에 조성된 대표적인 등대인데다 최초 건립 당시의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다고 해서 2008년 국가등록문화재(378)로 지정되었다.



본관(어청도 항로 표지관리소) 앞은 작은 공원을 만들어 놓았다. 벤치 몇 개와 정자(亭子) 말고도 어청도 등대라는 제목의 조형물을 배치했다. ‘풍랑의 피난처, 중국 산동반도 닭소리가 들리는 곳이라는 부제(副題)를 달았는데 좌대(座臺)의 위에는 돌고래 형상을 조각해 놓았다. 등대주변이 고래어장이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싶었던 모양이다. 어청도는 한때 포경선이 가득한 섬이었다. 동해에서 사는 고래가 봄에 새끼를 낳기 위해 어청도 근해로 오면 포경선도 따라 이동해 왔다고 한다. 1960~1970년대에는 포경선이 정박하여 고래의 해체 작업이 이루어지기도 하였으나, 포경 사업의 금지로 어획량이 감소하면서 현재는 폐쇄되었다고 한다.



해발 고도 61m의 위치에 세워진 이 등대는 15.7m 높이의 백색 원형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로 37거리에서도 등대의 불빛을 볼 수 있다. 주 출입구는 박공지붕(pediment) 형태로 처리하고, 전망대 부분에는 난간을 설치하고 하부를 조형적으로 처리하였으며, 상부의 등롱은 붉은 색으로 도색하였다. 등탑 내부 가운데에는 수직으로 중추식 등명기를 회전시키기 위한 중추 통로인 목재 트렁크가 설치되어 있고 주물로 만들어진 사다리는 2단 나선형으로 아름다운 곡선을 이루고 있다. 참고로 해풍에 부식(腐蝕)된 초기의 철제 등롱은 렌즈를 수은 위에 띄워 중추를 이용 회전시키는 프랑스에서 제작한 잔스식 등명기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19778월에 610m/m등명기로 교체하였으나 등명기의 성능이 좋지 않아 198312월 철거 보관하고 있던 중추식 등명기(목제의 덕트 시스템)’를 보수하여 다시 사용해오고 있다는 것이다.



등대에 서면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해식애가 한눈에 잘 들어온다.



건너편 벼랑 위에는 구유정(鳩遊亭)이 아슬아슬하게 올라앉아 있다. 꼭 가봐야 할 곳이니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하자. 들머리는 어청도 항로 표지관리소본관의 앞에서 열린다. 정자까지의 거리는 500m, 비탈진 오름길까지 끼어있어 다녀오는 길이 결코 수월하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구유정에 이르면 그 정도의 고생은 눈 녹듯이 사라져 버린다. 그만큼 뛰어난 눈요깃거리를 제공한다는 얘기이다.



산 허릿길을 잠시 돌아 목제데크길을 내려가면 정자에 이른다. 정자에 오르면 좌측으로는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진 어청도 해안이 내려다보이고 우측에는 등대가 그림 같은 자태를 보여준다. 누군가 이 정자에 앉아있으면 시가 저절로 나온다고 하더니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만큼 눈앞에 펼쳐지는 전경이 아름답다는 얘기이다.



구유정에 이르면 또 다른 모습으로 등대가 나타난다. 이번에는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모양새이다. 그렇다고 바다의 풍경이 사라져버린 건 아니다. 오히려 서슬 시퍼런 해식애(海蝕崖)가 하나 더 추가되었다고 보면 되겠다. 바다와 해식애, 거기다 푸른 하늘을 배경삼은 등대가 함께 어우러지며 그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고 있다. 과연 국내 10대 아름다운 등대 중 하나로 꼽힐만하다.



왼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서슬 시퍼런 바위벼랑이 끝도 없이 펼쳐진다. 북서풍의 바닷바람이 만들어낸 해식애이다. 저 멀리 벼랑의 아래에 뭔가가 보인다. ‘영해 직선기점(어청도) 영구시설로 대한민국의 영해(領海)가 시작되는 위치를 알려주기 위해서 설치된 시설물이란다. 영구시설은 첨성대를 형상화했다는데 아무래도 저 시설물이 수행하는 일이 옛날 첨성대에서 했던 것과 비슷함을 나타내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다. 아무튼 저 시설은 바닷물의 높이와 정밀위치, 기상 등 각종 관측을 수행한다. 다른 한편으론 이곳으로부터 12해리(22Km)까지의 외측해역이 우리나라의 영해란다.(안내판의 글을 참조해서 씀)



팔각정으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왼편 능선을 탄다. 입구에 진행해야할 능선(목넘쉼터(1.2Km)-샘넘쉼터(1.9Km)-돗대쉼터(2.7Km)-둘레길종점)의 코스별 거리(종점까지는 2.9Km)를 적어 놓았다. 이로보아 어청도에도 둘레길이 조성되어 있는 모양이다. 맞는 말이다. 아까 당산을 거쳐 이곳까지 걸어왔던 능선은 다른 여느 둘레길보다도 훨씬 더 잘 가꾸어져 있었다. 지금 걷고 있는 이 길 역시 마찬가지이다. 여러 가지 색상의 철쭉들을 심어 산상화원(山上花園)으로 만들어놓았다.



13분 후 이름표가 없는 산봉우리에 올라선다. 공치산(118m) 정상일 것이다. 정상에는 벤치 두 개를 놓아두었다. ‘해막넘쉼터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는 이유일 것이다. 망원경도 보인다. 그만큼 조망(眺望)이 뛰어나다는 얘기일 것이다.



망원경이 아니어도 시야는 넓기만 하다. 어청도항이 다시 한 번 눈앞에 펼쳐진다. ‘자 모양으로 나타나던 아까와는 달리 이번에는 ‘U’자 모양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끄트머리 양쪽으로 방파제를 쌓으니 그 안에 갇힌 너비 0.5에 길이가 1인 넓은 만()은 천혜의 항구로 바뀌어 있다.



공치산을 넘자 기이한 그림 하나가 그려진다. 그런데 그 그림이 무척 눈에 익은 게 아닌가. 한반도(韓半島)를 쏙 빼다 닮은 것이다. 누군가 어청도에 가면 바다에서 바라보는 한반도의 모형 중에서 가장 잘 생긴 놈을 만나게 된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말은 틀렸다. 내가 보기에는 육지에서도 이만큼 잘 생긴 놈을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동고서저(東高西低)인 본래의 한반도가 아니라 그 반대의 모양새를 보여준다는 게 아쉽다면 아쉬운 점이라 할 수 있겠다.



왼편은 서슬 시퍼런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졌다. 중국에서 건너온 전횡이 이곳 어청도에다 터를 잡고 해적노릇을 했다더니 능히 그럴만한 지형이라 하겠다. 전횡은 어청도, 외연도 일대를 거점 삼아 어부들의 수호신이 되었다고 한다. 서방산 정상에 올라 쇠부채로 바람을 일으켜 지나가는 배를 어청도로 유인해 선박을 탈취했다고 한다. 해적의 삶을 이어간 셈이다. 이따가 들르게 될 치동묘에는 전횡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으며 고래잡이와 풍어를 위한 제사를 지내고 있다.



좌우로 바다가 펼쳐진다. 바다는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푸른색이다. 명상(冥想)하는 사람들의 투명한 마음자리가 바로 저런 색깔이지 않을까 싶다. 오른쪽 바다에는 두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농배섬이 떠있다. 바위로 이루어진 섬은 주변 바다와 어우러지며 한 폭의 그림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것도 잘 그린 산수화이다.



섬의 바깥쪽 해안은 해식애(海蝕崖)로 이루어져 있다. 병풍처럼 둘러쳐진 절벽이 바닷바람에 오랜 세월 풍화되어 예인의 손길로 그려진 한 폭의 그림 같다. 둘레길은 그 위로 나있다. 빼어난 주변 풍광에 빠져 넋을 잃고 걷기에 충분한 길이다. 그렇게 잠시 걷다보면 목넘쉼터’(이정표 : 샘넘쉼터 0.8Km/ 팔각정)가 나온다.



목넘쉼터에 이르면 화산 분화구(噴火口) 같은 거대한 협곡을 만난다. 항아리 같은 이 협곡은 웅덩이가 아니라 바닷물이 들어오는 거대한 해벽이다. 보기에도 아찔할 정도의 절벽 끝에서 바닷물이 들어오는 장면을 내려다본다. 앗뿔싸! 한가운데에 폐어구(廢漁具)가 수북이 쌓여있는 게 아닌가. 하늘이 내려주신 선경(仙境)을 덜 깨인 인간들이 망쳐버렸다.



쉼터에 이르자 다시 한 번 농배섬이 나타난다. 아까 보았던 풍경화가 호()의 숫자를 키우면서 더욱 선명해졌다. 그리고 한층 더 아름다워졌다.



둘레길은 시간이 지날수록 고와진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침식해안, 짙푸른 바다가 계속해서 이어진다. 그런 풍경들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그 모양새가 갈수록 더 기이해지는 것이다. 초여름의 잡풀들이 웃자랐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절경을 바라보는 데는 아무런 지장도 주지 못한다.



15분 후 해돋이전망대로 알려진 안산(129m)에 올라선다. 능선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오는 곳으로 조망(眺望)이 환상적이다. 저절로 감탄사가 나올 수밖에 없다. 또한 이곳에서는 날씨가 좋을 경우 멀리 외연도는 물론이고 황도까지도 보인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은 해무(海霧)로 인해 어렴풋하게 나타날 뿐이다.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외연도 바다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아들인다. 그러자 산행으로 지친 피로와 함께 땀으로 흠뻑 젖은 몸이 편안함을 찾는다.



계속해서 능선을 탄다.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는 어청마을을 감상하며 5분쯤 진행하면 정자가 지어진 샘넘쉼터’(이정표 : 돗대쉼터 0.8Km/ 백사장 0.4Km/ 샘넘길 0.2Km)에 이른다. 능선안부인 샘넘쉼터에 이르면 길이 둘로 갈라진다. 오른편은 데크탐방로를 거쳐 어청도마을로 연결되므로 검산봉과 돗대봉으로 가려면 계속해서 능선을 타야 한다. 그리고 두 봉우리를 답사한 뒤에는 이곳으로 되돌아 나와야만 한다. 이곳이 마을로 내려가는 마지막 길이기 때문이다.



돗대봉으로 향한다.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돗대쉼터방향이다. 이 구간은 지금까지 걸어왔던 풍경과는 또 다른 멋을 보여준다. 원시의 숲이 나타나는 것이다. 언제 우리가 침식해안의 서슬 시퍼런 바위벼랑 위를 걸어왔던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이다. 이 구간에서는 고사목들이 널려있다시피 한다. 이국적인 느낌을 주는 소나무 고사목들이다. 그중에 어떤 것들은 송악(Hedera rhombea)에게 둘러싸여 신비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기도 했다.



이색적인 풍경에 취해 걷다보면 15분 후에는 삼거리를 만난다.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지만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내려가면 동방파제로 연결된다. 돗대봉은 능선을 따라 조금 더 진행해야 한다. ! 깜빡 잊을 뻔 했다. 중간에 있는 검산봉(106m)을 놓쳐버린 것을 말이다. 오는 길에 벤치 두 개를 놓아둔 곳이 있었는데 그곳이 아닐까 싶다. 지도를 보면 돗대쉼터일 것도 같고 말이다.



삼거리를 지나면서 산길은 무척 사나워진다. 산길은 그 흔적이 희미하다. 거기다 쓰러져 있는 나무기둥 아래를 기어갈 수밖에 없는가 하면 바윗길을 통과하기도 한다. 진행하는 게 쉽지 않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그 보상은 훌륭하다. 10분쯤 후에 이르게 되는 돗대봉(93m)에 올라서면 멋진 경관이 눈앞에 펼쳐지기 때문이다.



능선에는 죽은 소나무들이 즐비하다. ‘솔껍질깍지벌레의 피해를 입은 탓이란다. 빽빽하던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저런 모습으로 고사(枯死)하면서 철새들의 낙원이라는 명성 또한 과거형이 되어버렸다. 섬은 배뿐이 아니라 새들도 쉬어가는 곳이다. 남북으로 이동하는 철새들의 정거장과 휴게소 역할을 하는 것이다. 새들은 지친 날개를 오므리고 이 푸른 바다에 발을 담그고 한가로이 노닐다 다시 먼 길을 떠난다. 새들이 이동하는 경로 상에 위치한 어청도는 한때 국내의 대표적 철새 정거장으로, 철새 110종을 비롯해 전체 330종이 관찰됐다. 그래서 새를 탐조하려는 국내외 조류 전문가들이 매년 수백 명도 넘게 찾았고 조류탐방 방문자지원센터까지도 생겼다. 하지만 소나무가 죽은 후부터는 철새들의 개체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고 한다.



아까의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왼편으로 향한다. 어청도항의 동방파제로 이어지는 길이다. 내려가는 길은 엄청나게 가파르다. 데크로 계단을 만들면서도 부지런히 갈지()자를 써야만 아래로 내려설 수 있을 정도이다. 그만큼 힘들다는 얘기이다. 이는 구태여 내려갈 필요가 없다는 얘기도 된다. 그 고생을 해가며 내려가 봐야 눈에 담을 만한 풍경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고작 방파제 위에 세워진 등대와 어청도마을이 조망될 따름이다. 그런 정도야 산위에서도 실컷 바라봤으니 여기까지 내려올 필요가 없겠기에 거론해 봤다.



바닷가로 내려가는 계단은 동백나무 숲을 뚫고 나있다. 산행을 해오는 동안 동백나무가 보이지 않아 이상하다 여겼는데 그 아쉬움을 달래라도 주려는 모양이다. 늦부지런을 떨며 이제야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는 나무들도 보인다. 바닥에 떨어진 꽃들은 그중에서는 조금 서두른 놈들일 게고 말이다. 동백꽃은 양면성을 갖고 있는 꽃이다. 그중 하나는 새색시처럼 수줍은 꽃이라는 이미자와 다른 하나는 선홍빛 피의 애처로움이다. 옛날 선비들은 후자가 주는 이미지 더 강했던 모양이다. 귀양을 간 곳에 동백나무라도 있을 경우에는 가차 없이 잘라버렸다고 한다. 땅바닥에 떨어진 동백꽃을 보고 자신의 목이 댕강 떨어지는 것을 연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떨어진 꽃송이 몇 개를 모아보았다.



샘넘쉼터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백사장 방향으로 내려선다. 잠시 완만하게 이어지던 산길은 상어이빨처럼 험악하게 생긴 바위해벽을 만나면서 데크계단으로 바뀐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데크산책로를 만난다.



계단을 내려서면 해안 데크길이 나온다. 어청도항의 북쪽 해안을 따라 놓은 탐방로인데, 포구 전경을 조망하면서 해변을 산책할 수 있도록 꾸며졌다. 산책로는 아기자기하고 아름답다. 길이도 꽤 길다. 중간에는 정자쉼터도 만들어져 있고 오른편에는 능선으로 오르는 사잇길도 보인다. 이 부근은 물이 빠지면 해수욕장으로 바뀌니 수영을 즐길 수도 있고, 고니 서식지로 유명한 농배섬까지는 갯벌이 드러난다. 이때는 바지락이나 게 등을 잡을 수도 있단다. 데크 아래로는 거울처럼 맑고 투명한 물이 나타난다. 탁한 서해바다 답지 않은 바다이다.



산책로는 농배섬 옆으로 나있다. 사이좋게 서 있는 두 섬 농배섬은 고니의 서식처다. 희귀조류가 많아 조류학자 닐 무어스 등 유럽 철새탐조 여행객들에게 더 유명한 섬이기도 하다. 참고로 어청도는 붉은배새매와 새매, 소쩍새, 솔부엉이, 멸종위기종인 매, 비둘기조롱이, 희귀종인 흰날개해오라기, 검은바람까마귀, 흰배뜸부기, 흰털발제비, 흰꼬리딱새 등 야생조류가 서식하는 새들의 천국이다. 지난 2006523일에는 우리나라 조류도감에는 기록되지 않은 희귀조인 붉은부리찌르레기가 발견되어 촬영에 성공했다고 학계에 보고되었다. 군산철새생태관리과에서 발표한 이 새는 주로 중국 남부와 필리핀, 일본 일부지역에만 서식하는 새이다. 그래서 어청도에는 영국과 일본에서 조류연구가들이 자주 찾아오기도 한다.



마을에 돌아와 치동묘(淄東廟 : 군산시 향토문화유산 제14)를 찾아본다. 입도 시조로 여기는 전횡(田橫)장군의 사당(祠堂)이다. 자연석 담장에 둘러싸인 사당은 정면 3칸에 측면 1칸의 팔작지붕으로 9개의 사각기둥이 떠받치고 있다. 사당 안으로 들어서니 썰렁하다는 느낌부터 든다. 마당에는 잡풀이 어른 키를 넘었고, 여닫이문을 열고 내다본 사당의 내부는 신()의 흔적도 사람의 흔적도 느낄 수 없었다. 대신 누가 버리고 간 것인지 쓰레기만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전횡장군의 영정이 초라하게 보이는 건 그 이유 때문이 아닐까? 아니면 머나먼 중국 땅에서 쫓겨 이곳까지 온 처량한 신세 탓일 것이고 말이다. 그렇다면 전횡은 누구일까? 그는 중국 초패왕(楚覇王) 항우(項羽)의 부하 장수였다. BC 202년경 중국의 한고조(漢高祖)가 초()를 물리치고 천하를 통일한 후 패왕 항우가 자결하자 군사 500명을 거느리고 망명길에 올랐다. 전횡의 죽음에 대한 두 가지 설() 중에서 등주의 해도(海島)로 도망갔다는 설을 빌려온 모양이다. 아무튼 그는 돛단배를 타고 서해를 목적지 없이 떠다니던 중 중국을 떠난 지 3개월 만에 이 섬을 발견하였다는 것이다. 그날은 쾌청한 날씨였으나 바다 위에 안개가 끼어 있었는데 갑자기 푸른 산 하나가 우뚝 나타났다고 한다. 전횡은 이곳에 배를 멈추도록 명령하고 푸른 청()자를 따서 어청도(於靑島)라 이름 지었단다. 참고로 치동묘는 백제 시대에 어청도에서 같은 이름의 사당을 짓고 마을의 안위와 풍어를 비는 제사를 지낸데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어청도 치동묘 제사는 1970년대 이후 중단되었다.



식사를 마치고나서는 오른쪽 해안선을 둘러보기로 한다. 끄트머리에 괜찮은 볼거리가 있다는 귀띔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에 담을만한 것이라곤 바위벽에 올라앉은 폐그물이 전부였다. 아니 방파제의 아래에서 낚시를 하는 사람들도 눈에 띄기는 했다. 섬 전체가 바다낚시 포인트인 어청도에서도 이 근처가 서해안 참돔의 메카라고 하더니 이를 노린 강태공들인 모양이다. 아무튼 실망을 하면서 돌아오는데 오른편에 전망대 비슷한 건물이 지어져 있는 게 아닌가. 다가가보니 안전을 위해 올라가지 말라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그러나 내 호기심을 누르기에는 그 문구가 약했던가 보다. 조심하면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올라가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설의 위로 오르면 어청도항의 모든 것이 시야에 들어온다. ()나라 출신 전횡장군이 터를 잡았다는 어청도마을은 물론이고 형의 널따란 만()을 천혜의 항구로 만들어 주고 있는 동서 두 개의 방파제도 한눈에 쏙 들어온다. 지근거리에는 해군의 선박도 두 척이나 정박되어 있다. 보안에 문제가 있을 것 같아 사진 게재는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에필로그(epilogue), 어청도에는 생각보다 많은 식당이 있다. 민박(民泊)을 겸하고 있는 게 대부분이다. 주요 메뉴는 백반인데 인근 바다에서 잡힌 자연산 해산물이 한상에 가득히 올라온다고 한다. 횟감이라고 없을 리가 없다. 우럭과 숭어, 갑오징어, 붕장어 등 자연산 해산물에 입이 호사를 즐긴다. 하지만 먼저 알아두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사전예약이 필수라는 점을 말이다. 그걸 몰랐던 우리 일행은 해산물로 가득한 백반이 아니라 김치찌개로 점심을 때울 수밖에 없었다. 문을 열지 않은 식당들은 차지하고라도 문을 연 식당들까지 밥이 떨어졌다며 손사래를 쳤기 때문이다. 오후 3시가 다 되어서야 산에서 내려왔는데 그때까지 놓아둘 밥이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다. 횟감도 역시 똑 같다. 회를 뜰 사람이 밖에 나갔다니 어쩌겠는가.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어버린 김치찌개마저도 늦게 도착한 사람들은 먹지를 못했다. 그리고 그들은 420분에 출발하는 배에서 2시간 30분 동안을 시달린 후에야 군산에 도착해 요기를 할 수 있었다. 즐거워야할 섬 여행이 짜증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여행지 : 베트남(Viet Nam)

 

여행일 : ‘16. 1. 25() - 29()

여행지 : 하노이, 하롱베이

 

여행 셋째 날 : 하노이(Hanoi) 시내 투어

 

특징 : 하노이(Hanoi, 河內, 베트남어: Hà Nội)는 베트남의 수도이자 역대 왕조가 왕도(王都)로 정했던 도시로, 홍 강 삼각주, 송코이 강 오른쪽 편에 위치한다. 베트남 최대의 도시인 호찌민 시에서는 북쪽으로 1,760km 떨어져 있다. 춘하추동의 사계절이 뚜렷하고 비옥한 평야가 많은 하노이는 기원전 3천 년경부터 사람들이 터를 잡고 살았다. 그리고 리 왕조(1009~1225) 때 수도로 지정된 이래 응우옌 왕조(1802~1945) 시대를 제외하고는 베트남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지켜왔다. 1945년부터는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수도가 되었고, 남북 분단 시에는 잠시 북베트남의 수도로 남았다가, 1976년 통일 후에는 다시 베트남의 수도가 되었다. 때문에 도시 곳곳에서 장구한 역사에 걸맞은 베트남의 전통과 문화를 찾아볼 수 있다. 참고로 하노이 시의 원래 이름은 탕롱(昇龍). 즉 용이 승천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승천한 용이 하강하는 곳이 바로 할롱(下龍)베이다. 탕롱을 처음 수도로 정한 사람은 리 왕조의 시조 리타이또(李太祖). 지난 2010년은 그가 탕롱을 수도로 한 지 1000년이 되는 해였다. 리 왕조 시절인 1075년 송나라의 침입을 물리치면서 병사들이 불렀다는 '남국강산 남제거(南國江山 南帝居 : 남국 강산에도 중국과 대등한 황제가 살고 있다)'라는 노래가 베트남 역사상 최초의 독립선언이다.


 

옌뜨국립공원 관광이 끝나면 쇼핑이 시작된다. 패키지여행 상품과 쇼핑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쇼핑이 포함되지 않은 패키지 상품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다만 쇼핑 횟수가 적거가 많은 것만 다를 뿐이다. 이번에 따라나선 베트남 여행의 패키지상품에는 네 번의 쇼핑이 포함되어 있다. 그중 하나인 커피는 어제 들렀었고, 오늘의 첫 번째 방문지는 이베쎄(ABC)휴게소이다. 커피, 노니가루, 연꽃차 등 베트남의 특산물들과 꽤 고급스러워 보이는 잡화 등을 파는 곳이다.







두 번째로 들른 곳은 노니(Noni)’ 판매장이다. 노니는 열대 아시아에 자생하는 약용(藥用)식물이다. , 줄기, , 열매, 씨 등이 민간요법에서 치료제로 사용되어 오고 있다. 특히 열매에는 안트라퀴논, 세로토닌 등의 성분이 있어서 성기능 강장제로 효과가 있고 요도 관련 질병, 발열, 통증을 치료하는 데 유용하다고 세계의 식용식물에서 소개하고 있다. 보르네오에서는 노니 주스를 당뇨병이나 위염 치료제로 사용하며, 일본에서는 이 열매를 술로 만들어 먹으면 근육통에 효과가 있다고 해서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다고 한다. 한편 지역에 따라 인도뽕나무, 바지티안, 치즈과일, 노노, 해파극, 파극천 등으로도 불리니 참조한다.






판매점 주변은 공원처럼 잘 가꾸어져 있다. 봉긋하게 솟아오른 작은 언덕 위에는 정자까지 지어 놓았다. 그리고 마당에는 아까 옌뜨산에서 인상 깊게 보았던 나무도 보인다. 수염을 늘어뜨리고 있던 나무 말이다.




점심은 판매점과 같은 마당을 쓰고 있는 식당에서 때우기로 한다. 메뉴는 분짜이다. 분짜는 분이라는 쌀국수를 새콤달콤한 국물에 담갔다가 꺼내 먹는 국수로 우리나라의 메밀국수와 비슷하다. 국물은 느억 맘(Nouc Mam)’이다. 국수 이외에 숯불에 구워낸 고기완자와 야채를 고명으로 추가하여 색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 , 야채 속의 향채는 조심해야 한다. 점심 후에도 쇼핑은 계속된다. 라텍스(latex)와 히노끼(ヒノキ, 일본에서 욕조 소재로 쓰이는 편백나무) 매장을 들르게 되지만 너무 식상한 것 같아 사진은 생략하기로 한다. 아무튼 여행에서 가장 피하고 싶은 것 중의 하나가 쇼핑이 아닐까 싶다. 쇼핑에 맞춘 일정에 따르느라 정작 둘러봐야 할 곳을 거르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쇼핑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고역도 그런 고역이 있을 수 없다.



버스는 우리를 커다란 호숫가에다 내려놓는다. 하노이의 심장인 호안끼엠 호수(Hoan Kiem Lake)’로 크고 작은 호수가 많다고 해서 '호수의 도시'라 불리는 하노이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호수다.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호수 주위로 싱그러운 녹음이 어우러져 더위를 피하기에 좋다고 알려져 있다. 하노이 시민들의 휴식공간을 사랑을 듬뿍 받는 이유일 것이다. 호안끼엠은 환검(還劍), 검을 돌려준 호수라는 뜻이다. 15세기 레왕조의 태조인 레로이가 이 호수에서 발견한 명검으로 명()나라 군사를 물리쳤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후 호수에 들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칼을 거북이에게 다시 돌려주었다고 해서 호안키엠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베트남인들은 나라에 큰일이 일어날 때마다 거대 거북이가 모습을 드러낸다고 해서 거북이를 성스러운 동물로 여긴단다.



시내투어는 전동차를 타면서 시작된다. 호수의 북쪽에 있는 딘 티엔 호앙(Dien Tien Hoang)거리로 가면 엄청나게 많은 숫자의 전동차들이 늘어서 있다. 티켓을 먼저 끊은 후에 맘에 드는 차에 올라타기만 하면 된다. 우리 같은 패키지여행자들이야 가이드가 일러주는 대로만 하면 될 일이고 말이다. 2010717일부터 운행하기 시작했다는 이 전동차들은 8인승으로 시내를 한 바퀴 도는 데는 45분 정도가 걸린다. 28상업거리와 구시가지의 거리들 그리고 호수주변과 동쑤언시장(Dong Xuan Market)을 다녀오는 코스이다.



전동차는 커다란 호안끼엠 호수(Hoan Kiem Lake)’를 옆에 끼고 달린다. 호수 주변은 하노이 최고의 번화가로 꼽힌다. 하노이의 다른 어느 곳보다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호안끼엠호수를 찾아 모여드는 사람들로 인해 생겨난 결과가 아닐까 싶다.



호수를 끼고 길게 뻗은 도로는 오토바이나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사람들로 활기가 넘친다. 호수 북쪽에는 베트남을 대표하는 전통 공예인 수상 인형극을 공연하는 전문 극장과 구시가지가 있고 호수 주변에 자리한 박물관, 대성당 등 주요 명소와 가까워 관광객들도 즐겨 찾는다. 호수 남쪽에는 저렴한 숙소와 유명 레스토랑, 기념품 가게가 즐비한 여행자 거리가 형성되어 있다.





차와 함께 도로를 누비는 오토바이를 부지기수로 목격할 수 있다. 특히 로터리 같은 곳에서는 차와 오토바이에 자전거까지 함께 뒤엉키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사고가 나는 일은 거의 없단다. 그들이 만들어가는 무언의 규칙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배낭여행자와 일반여행자들이 뒤섞인 여행자들의 거리를 지나 온갖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는 ‘36거리에 접어든다. 36개의 상공인 조직이 36개의 거리에서 각자 정해진 상품을 판매한 것으로부터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옛말이 되어 버렸다. 비단, 골동품, 그림, 모조품 등 온갖 종류의 물품들이 거래되는 만물상으로 변한 것이다. 하지만 정부가 지정한 문화거리이니 참조한다.



다음에는 씨클로(cyclo)’을 이용해 한 바퀴를 더 돈다. 하노이에는 자동차와 오토바이만 있는 게 아니다. 자전거도 함께 공존하며 그들만의 룰에 따라 살아가고 있다. 그 자전거들 중의 하나가 바로 자전거 택시라 할 수 있는 세 발 자전거씨클로이다. 아무튼 씨클로를 타고 둘러보는 거리 풍경도 아까 전동차를 이용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 거의 같은 코스를 달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위잉~ 위잉~’ 운전자가 밟는 페달에 맞춰 씨클로는 잘도 달린다. 하노이 시가지의 풍경은 차양이 드리워진 좌석에서 구경하면 된다. 아주 편안한 자세로 말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런 자세가 나오지 않는다. 아니 그런 자세를 만들어낼 수조차 없다. 씨클로가 달리는 속도에 비례해서 더욱 강하게 날려 들어오는 빗방울들을 막아내는 게 먼저였기 때문이다.




번화가를 지난 씨클로가 좁은 골목으로 들어선다. 거리의 풍경이 확 바뀐다. 좁고 오래된 도로가 운치는 있지만 아슬아슬하다. ‘올드 타운(old town)’ 즉 구시가지란다. 고급 원피스를 벗고 다시 마오자이로 갈아입은 하노이 본래의 풍경이 씨클로의 속도에 맞춰 느릿하게 스쳐 지나간다.



다시 호안끼엠 호숫가로 돌아오면서 씨클로 투어도 끝이 난다. 호숫가는 젊은 연인들의 데이트장소로 유명하다. 분위기 있는 조명(照明)으로 바뀌는 호숫가의 야경(夜景)이 아름답기로 소문나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만은 예외인 모양이다. 연인들은커녕 일반인들조차 눈에 띄지 않는다. 하긴 이런 빗줄기 속에서 데이트를 즐긴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맨 마지막은 걸어서이다. 구미가 당기는 음식도 맛보고, 기념품도 사면서 현지의 실정을 느껴보는 시간이다. 시내투어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가 못하다. 갈수록 거세지는 빗줄기 때문이다. 빗속을 걷기도 불편할뿐더러 비 때문에 눈요깃거리도 현저하게 줄어들어있기 때문이다. 문을 닫아버린 상점들이 숫하게 많고, 거기다 외국인 여행자들도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비를 맞아가며 한산한 풍경의 시내를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차라리 호텔에 들어가 푹 쉬고 싶다는 표정들이 얼굴에 역력하다.



길가에는 식당들이 많이 보인다. 그리고 식당들마다 사람들로 넘친다. 그중에는 커플들이 많이 눈에 띈다. 다정하게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들에서 로맨틱(romantic)한 분위기 넘쳐난다. 너무너무 보기 좋다. 검을 돌려받은 거북이가 그 답례로 사랑의 묘약(妙藥)’이라도 선물했나 보다.




비는 그칠 줄을 모른다. 그리고 그 덕분에 우린 올드타운의 랜드마크라는 성 요셉성당을 구경할 수가 없었다. 프랑스 식민시대에 지어졌다는 고딕양식의 예술품을 말이다. 검게 빛바랜 외관이 녹록치 않은 연륜을 자랑한다고 했는데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무튼 더 이상 돌아다니는 게 무의미하다고 생각되어 호텔로 돌아가기로 한다.


여행지 : 베트남(Viet Nam)

 

여행일 : ‘16. 1. 25() - 29()

여행지 : 하노이, 하롱베이

 

여행 셋째 날 : 옌뜨 국립공원(Yen Tu National Park)

 

특징 : 하롱베이와 하노이의 중간쯤에 위치한 국립공원으로 한국인들도 많이 찾는다. 특히 패키지여행 상품에는 빠지지 않은 코스이다. ‘백년 불공을 드려도 옌뜨에 가보지 못하면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는 베트남 속담이 있을 정도로 베트남 사람들에게 유명한 산이다. 외세의 침략에 맞선 3명의 왕이 부처가 되어 산을 지킨다는 전설도 함께한다. 특히 산에는 10여 개의 사찰과 수백 개의 사리탑이 남아 있어 매년 정월 초하루가 되면 수많은 인파가 소원을 빌러 찾아간다고 한다. 한편 케이블카를 갈아타면 정상까지 오늘 수 있는데, 이때 중간 지점에서 천년고찰 '화안사(Chua Hoa Yen)'를 만나게 된다. 베트남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 중의 하나이다. 화안사에 오르기 위해서는 가파른 계단을 걸어야 하므로 무릎이 안 좋을 경우 관람이 힘들 수도 있다.


 

하노이로 돌아가는 길, 그런데 그제 하롱베이로 갈 때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가는 길에는 평야지대만 보였는데, 이번에 펼쳐지는 풍경은 완전한 산악지역인 것이다. 길 또한 산비탈을 헤집으며 나았다. 당연히 구불구불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곡예를 하며 달리던 버스는 산 중턱 쯤 되는 곳에다 우릴 내려놓는다. 옌뜨산(Yen Tu mountain), 그러니까 옌뜨국립공원(Yen Tu National Park)’이란다.




옌뜨산(Yen Tu mountain)은 하노이에서 110 Km, 그리고 하롱베이에서는 50 K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10 여개의 사찰, 수백 개의 사리탑, 그리고 700년 된 나무 등이 있는 베트남 북부 최대의 불교 성지(聖地)라고 한다. 그래선지 이 일대를 국립공원(National Park)’으로 묶어 놓았다.



'화안사(Chua Hoa Yen)'로 올라가는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서는 10분 정도를 걸어야 한다. 걷는 게 부담스러운 사람들이라면 주차장 한켠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전동차를 이용해도 될 일이다.



도로 주변은 깔끔하게 잘 정비되어 있다. 하긴 명색이 국립공원인데 이 정도를 갖고 감탄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얼마쯤 걸었을까 사원 입구가 나온다. 이곳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하지만 이정표를 보면 양쪽 다 최종 목적지가 같게 표기되어 있다. 올라가는 방법만 다를 뿐이라는 얘기이다. 이곳에서 '화안사(Chua Hoa Yen)'까지는 2,135m, 걷기에는 만만찮은 거리다. 거기다 가파른 오르막길이라면 상황은 더욱 나빠진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런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케이블카를 설치해 놓은 모양이다.




사원의 입구에서 거대한 노거수(老巨樹)를 만난다. 베트남 여행 중에 가끔 눈에 띄었지만 이 나무는 유난히도 더 굵다. 아래로 늘어뜨리고 있는 수많은 나무줄기들이 흡사 인간의 수염을 닮았다. 그래서 나이가 더 들어 보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뭔가 신비로우면서도 신성하게 보이는 이유일 테고 말이다.




잠시 후 사원 하나가 나타난다. 수행자들의 사원이라 불리는 옌뜨사원이라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전해지는 얘기로는 옛날 베트남의 왕이 그의 아들에게 왕권을 물려주고 이곳에 와 불교에 귀의하였단다. 권력분쟁의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 후로 수많은 수행자들이 진리를 얻기 위해 이곳을 찾게 되면서 베트남의 대표적인 수행처가 되었단다.



사진에 들어가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 대신에 이번 여행에 안내를 해주신 가이드 선생(맨 왼쪽)을 넣어봤다. 베트남에서 직접 여행사를 운영하고 계신 분이라는데 여행 내내 빈틈없이 꼼꼼하게 안내를 해주셨다. 친절하였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아쉽게도 보수공사가 한창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베트남 승려들의 수행현장은 구경할 수가 없었다.



케이블카의 탑승장으로 가려면 사찰 옆의 회랑(回廊)을 따라 들어가야 한다.




케이블카는 약 6명 정도가 탈 수 있다. 마침 우리 일행이 6명이니 맞춤형 서비스가 제공되는 셈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삼삼오오 맘에 맞는 사람들끼리 올라타고 있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아 자리에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케이블카는 벽면이 유리로 되어 있기 때문에 주변 풍광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하지만 오늘은 예외이다. 비가 그쳤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도 구름이 낮게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시계(視界)는 제로에 가깝다. 그저 보이는 것이라곤 앞서거나 뒤따라오는 다른 케이블카가 전부이다.



상부 케이블카 탑승장 벽면(壁面)에는 옌뜨산(Yen Tu mountain)이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그 아래에 베트남어로 뭔가를 적어 놓았다. 누군가 옌뜨사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하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케이블카에 내리면 작은 매점이 기다린다. 음료수는 물론이고 간식거리도 판다. 화안사까지 올라가는 게 어려운 사람들은 이곳에서 일행을 기다리면 된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려면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야 되기 때문이다.



밖으로 나오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둘 모두 최종 목적지는 '화안사(Chua Hoa Yen)'이다. 다만 길의 난이도가 약간 다를 뿐이다. 왼편은 조금 완만한 경사의 오르막길이고, 오른편으로 갈 경우에는 가파른 경사의 계단이 기다린다.



조금은 편하다는 왼편으로 향한다. 이곳도 역시 계단의 연속이다. 하지만 오른편으로 진행했을 때 만나게 되는 계단보다는 훨씬 더 편하단다. 경사(傾斜)가 더 완만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도진 개진일 것 같다. 어디로 가더라도 화안사로 오르는 게 쉽지 않다는 얘기이다.



10분 쯤 올랐을까 검소하고 정갈한 사찰이 여행객들을 맞는다. ‘화안사(Chua Hoa Yen)’인데 화려하지 않음에 오히려 더 정감이 가는 절이다. 시간이 이른 탓인지 법당(法堂)의 문은 아직까지 닫혀있는 채로이다. 살며시 열어볼까 하다가 그만두기로 한다. 자칫 잘못하다간 수행자들의 청정(淸淨)을 깨뜨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막상 올라본 '화안사'는 규모가 상당히 작은 사원이다. 외관도 화려한 것과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 한국이라면 그저 그렇고 그런 산사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하지만 베트남 사람들에게 화안사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 곳이란다. 베트남에는 '백년 불공을 드려도 옌뜨(Yen Tu)에 한번 가 보지 못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얘기가 전해져 내려온다고 한다. 여기에서 옌뜨라 함은 불교의 성지로 추앙받는 '화안사(Chua Hoa Yen)'를 이르는 말이란다. 그래서 베트남 사람들은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하는 곳으로 화안사를 꼽는단다.



사찰의 한쪽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노거수(老巨樹)가 보인다. 수령(樹齡)700년이나 된단다. 우리나라 같으면 보호수로 지정되었음직한 나무이다. 아니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무들도 자리를 잘 잡아야 대접을 받게 되는가 보다.



화안사는 기대했던 것보다는 훨씬 더 수수하다. 명산대찰(名山大刹)이라는 얘기가 있다. 국립공원, 그리고 그 안에 있는 고찰이라기에 명산대찰일 것이라는 막연한 상상을 하면서 올랐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그냥 상상으로 끝나버렸다. 기대했던 수준에 훨씬 못 미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트남 사람에게 옌뜨산은 죽기 전에 한번은 꼭 가야되는 명산 중의 명산이란다. 물론 불교의 성지라는 화안사를 찾기 위함일 것이다. 아무튼 이는 서로의 인식차이가 아닐까 싶다. 불교의 신심이 깊은 그네들에게는 화려한 외관(外觀)보다는 그 안에 있는 내용이 더 중요할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산중에 웬 소각장(燒却場)? 산 중턱에 위치한 탓에 옮기기 어려운 생활쓰레기라도 태우려고 지은 시설물인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란다. 시체를 태우는 시설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비장(茶毘場)이라고 보면 되겠다.



화안사를 모두 둘러봤으면 이젠 내려가야 할 차례이다. 하산은 아까 올라왔던 길과는 다른 길을 이용하기로 한다. 사찰의 정면에 놓인 가파른 계단이다. 참고로 사찰의 근처에서 정상으로 올라가는 케이블카가 하나 더 있다고 한다. 하지만 요즘에는 운행을 하지 않는단다. 걸어서 올라갈 수는 있다고 하나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다. 무모한 도전보다는 안전한 여행을 택하기로 한다. 그냥 내려가겠다는 얘기이다.



100여개 쯤 되는 계단을 내려서면 수많은 탑()들이 나타난다. 아예 탑의 숲이라고 부르는 게 옳을 정도이다. 옌뜨산은 뾰쪽 탑의 숲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고 한다. 이런 풍경이 있었기에 그런 이름이 붙여졌지 않을까 싶다.





불국사의 석가탑처럼 생긴 사리탑(舍利塔)도 보인다. 1309년에 건립된 탑으로 쩐 낭 통(Tran Nhan Tong) 왕불의 사리가 보관되어 있단다.





탑들 하나하나가 옌뜨산에 귀의한 왕들과 수도승들을 기리고 있단다. 과연 베트남 불교의 성지라 할만하다. 그러다보니 외지의 관광객들이 자주 찾는 대표적인 여행지가 되었을 것이고 말이다.





탑들이 모여 있는 지역에서 다시 한 번 가파른 계단을 내려서면 케이블카 탑승장이 나온다. 옌뜨산 투어는 이것으로 끝난다고 보면 된다. 이제부터는 아까 올라왔던 코스를 반대로 내려가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옌뜨산은 말이 국립공원이지 딱히 볼만한 구경거리는 없었다. 산세(山勢)도 평범하기 짝이 없고, 그 안에 있는 사찰(寺刹) 또한 기대한 만큼 인상적이지는 못하다는 느낌이었다. 시간까지 내어 둘러볼만한 곳은 아니라는 얘기이다. 그런데도 패키지여행에서는 빠지지 않는 코스중 하나이다. 어쩌면 하롱베이와 하노이를 이동하는 중에 조금 남는 자투리 시간을 소모시키기 위해서 끼워 넣는 코스가 아닐까 싶다.




이동 중에 들른 식당, ‘다문화가정에서 차린 식당이란다. 베트남 색시를 얻어 한국에서 살다가 여의치가 않자 부부가 함께 베트남으로 돌아왔단다. 그리고 식당을 열었다는 것이다. 이거야 말로 한·베트남의 진정한 수교(修交)관계가 아닐까 싶다. 우리나라와 베트남과의 관계는 역사적으로 난민(難民)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고려 때인 1253(고종 40)에 안남왕자 이용상(李龍祥)과 그 친족 군필(君苾)이 송나라로 망명하던 도중에 표류하다가 당시의 옹진현(甕津縣) 창린도(猖麟島)에 도착하였다. 이용상은 오늘날 옹진군 마산면(馬山面) 화산리(花山里)에 살았으며 그 뒤 고려를 침공한 몽골군을 항복시킨 공으로 화산군(花山君)에 봉해져, 화산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참고로 옹진 본영(本營) 동문(東門) 근처에는 그의 공적을 기린 기적비(紀績碑)가 있으며, 두문동(杜門洞) 이을봉(离乙峰) 아래에는 그와 아들·손자에 이르는 3대의 무덤이 있다. 그리고 지금의 화산 이씨(花山 李氏)들은 그의 후손이다. 그럼 이번에는 최근으로 옮겨보자. 돈독하게 유지되던 양국관계는 월남정권의 패망 후 사회주의 경제체제로 전환되면서 교류가 중단되었다. 그러다 구엔 반린(Nguyen Van Linh)’서기장이 도이모이(Doi Moi)’ 정책을 추진하면서 양국의 교역 규모는 확대되고 있다. 199244일 연락대표부 설치에 합의하였으며, 1222일에는 양국 외교 관계가 수립된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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