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옹도

 

여행일 : ‘14. 6. 7()

 

소 재 지 : 충남 태안군 근흥면 옹도(가의도리)

 

함께한 산악회 : 좋은 사람들

 

특징 : 옹도는 그 모양이 마치 옹기와 같이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넓이 0.17의 아담한 섬에는 등대가 있어 주변을 지나다니는 배들의 안전을 지켜주고 있다. 옹도는 등대섬이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 태안 앞바다를 통항하는 선박의 안전운항을 위해 세워진 충남유일의 유인등대라는 것이 그 이유이겠지만, 섬 자체가 등대를 빼 놓고는 내세울만한 풍경이 거의 없다는 것도 또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이유일 것이다. 이 등대는 19071월에 세워져 바닷길을 안내해 왔지만 일반인들에게는 출입이 금지되어 왔다. 그러다가 최근(20136)에야 일반인들에게 개방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등대에 불을 밝힌 지 106년 만에 그 비밀의 문을 열고 사람들을 받아들인 것이다.

  

옹도 가는 길

옹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선 태안군 근흥면에 있는 신진도 안흥항으로 와야만 한다. 이곳에서 옹도를 들어가는 관광유람선이 출항하기 때문이다. 배는 하루에 한 차례씩(성수기에는 12) 운항되고 있다. 신진도항에서 약 12정도 떨어진 거리에 위치한 옹도는 관광유람선을 타고가면 40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자그마한 섬이다.  

 

 

 

 

관광객을 태운 유람선(遊覽船)이 긴 경적을 울리면서 신진도항을 떠난다. 미지(未知)의 섬에서 새로운 풍경을 맞이한다는 설레는 마음을 갈매기들이 가장 먼저 알아주는 것 같다. 물결을 헤치며 힘차게 나아가는 유람선의 주위를 온통 갈매기들이 둘러싸며 끼룩거리는 것을 보면 말이다.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유람선을 가득 채운 관광객들은 하나 같이 행복에 겨운 표정들, 이런 표정들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다들 부지런히 카메라 셔터를 눌러댄다. 카메라 앞에 선 사람이나 카메라를 든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모두 화사한 웃음을 한시도 떨쳐내지 못하는 모습이다. 하긴 이런 여행에 우거지상을 지을 사람들은 아마 없을 것이다.

 

 

 

 

가마우지와 물개들의 낙원이라는 정족도와 가의도, 단도가 슬며시 다가온다 싶더니 저만큼으로 멀어져 버린다. 그리고 드디어 저만큼에서 옹도가 슬그머니 그 모습을 드러낸다. 손으로 움켜쥐면 손바닥 안에 쏙 들어가 버릴 것 같은 앙증스러운 모양으로 말이다. 그러나 맨 위의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등대는 자그마한 섬에 비해 과하다 싶을 정도로 거대하다. 어쩌면 늠름하고 위풍당당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다. 그래서 저 섬을 등대섬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옹도의 선착장(船着場)에 내려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위를 향해 길게 놓인 나무계단이다. 사면(斜面)의 경사(傾斜)가 가파르다보니 이를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려보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탐방(探訪)을 나서기 전에 신발 끈부터 조이고 본다. 나무계단으로 된 탐방로의 길이기 만만찮게 길어보였기 때문이다. 또 하나 유념해야할 것이 있다. 탐방을 나서기 전에 일단 화장실부터 들르라는 것이다. 옹도에서 화장실은 선착장의 것이 유일하다. 때문에 만일 탐방을 하다가 볼일이라도 생길 경우에는 낭패를 당할 염려가 있다. 그러니 출발하기 전에 미리 볼일을 보고나서 탐방을 나서라는 얘기이다.

 

 

 

나무계단을 따라 위로 오르며 본격적인 투어(tour)에 들어간다. 계단을 밟으며 50m쯤 올라가면 오른편에 데크로 만든 전망대(展望臺) 하나가 나타난다. 일단 올라가고 본다. 가의도를 위시해서 목개도, 정족도, 단도 등이 보이나 조금 후에 두 번째 전망대(일명 옹기 photo-zone)에서 보게 될 풍경과 별반 다를 게 없으니 그냥 지나쳐도 무방할 듯 싶다.

 

 

전망대에서 빠져나와 다시 50m쯤 더 올라가면 또 다시 전망대하나가 나타난다. ‘옹기 포토죤(photo-zone)’이라는 의젓한 이름을 달고 있는 전망대이다. 이곳에서는 전망데크 외에도 조형물(造形物)들이 설치되어 있다. 그중 하나는 옹기를 둘로 반듯하게 쪼개 놓았고, 다른 하나는 나무를 형상화한 모양인데 무슨 나무인지는 모르겠다. 이 조형물들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라는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조형물 앞은 포즈(pose)를 취하고 있는 사람들로 붐벼 발을 비집고 들어설 틈도 없다. 붐비는 사람들을 피해 전망데크 쪽으로 나가본다. 아까 지나왔던 전망대에서 보았던 풍경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곳에서 놓치지 말아야할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선착장과 선착장에서 올라오는 계단을 카메라에 담는 일이다. 꽤나 괜찮은 풍광을 자아내니 놓칠 경우에는 두고두고 후회할 수도 있다.

 

 

 

 

 

옹기 포토죤옆에는 동백잎 쉼터가 만들어져 있다. 선착장에서 이곳까지 올라온 정도를 갖고 힘들다고 해서 쉴 정도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배 출항시간까지 기다리면서 쉴 때나, 아니면 옆에 있는 포토죤(photo-zone)의 손님들이 빠지기를 기다리며 잠시 쉬라는 의미로 만들어 놓은 모양이다.

 

 

포토죤에서 사진 몇 컷(cut) 촬영했다면 다시 투어를 시작해보자. ‘옹기 포토죤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몇 발짝 옮기면 울창한 동백나무 터널로 들어서게 된다. 오랫동안 일반인에게 출입을 허용하지 않은 덕분인지 길을 따라 울창한 동백나무 숲이 거의 밀림에 가까울 정도 우거져 있다. 이곳도 역시 사진을 찍기 좋은 장소, 여기저기서 포즈(pose)를 취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 호젓한 풍경사진은 애초부터 촬영이 불가능하다.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그냥 등대로 올라가기로 한다. 여행을 좋아하는 내 경험으로는 이보다 나은 동백 숲들이 전국에 널려있기 때문이다.

 

 

동백터널을 통과하고 나면 등대의 중앙광장에 올라서게 된다. 광장에 올라서면 조형물(造形物) 하나가 반갑게 길손을 맞는다. ‘옹도 등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 옆에 영어(Welcome to ong-Do Lighthouse)로까지 표기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아마 외국인들의 방문까지 예상했나 보다. 아니나 다를까 가볍게 차려입은 외국들의 모습도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중앙광장에는 어른 키로 두세 배가 넘을 정도로 커다란 옹기를 빚어 놓았고, 그 곁에서는 잘생긴 돌고래 두 마리가 노닐고 있다. 이곳도 역시 분주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옹기를 감싸 안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돌고래를 올라타느라 정신이 없다. 물론 그들의 앞은 연인들이 지키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내는 포즈를 단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결의를 다지면서 말이다.

 

 

 

 

 

 

중앙광장의 정면에는 하늘전망대홍보관을 갖춘 등대가 있다. 이곳은 맨 마지막에 들러보기로 하고 등대 옆에 있는 등대 16을 둘러본다. 이곳에는 모두 4개의 사각기둥을 세워 놓고, 각 면마다 풍경사진을 하나씩 입혀놓았다. 물론 국토해양부가 선정했다는 한국의 아름다운 등대 16을 말이다. ‘등대 16은 간절곶(울주군), 독도, 마라도, 소매물도, 소청도, 속초, 어청도, 영도, 오동도, 오륙도, 우도(제주도), 울기(울산시 울기공원), 팔미도, 호미곶(포항시), 홍도, 그리고 이곳 옹도이다.

 

 

 

등대 16을 모두 봤다면 이번에는 등대의 뒤로 돌아가 보자. 바다를 향해 길게 놓인 나무계단이 보일 것이다. 일단 나무계단을 따라 내려가 본다. 바닷가가 가까워지자 갖가지 기암괴석(奇巖怪石)들이 나타나면서 멋진 풍경을 연출해 낸다. 그 기암괴석들이 주변의 초원(草原)과 어우러지며 목가적(牧歌的)인 풍경까지 만들어낸다. 아마 옹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일 것이다. 하나 더, 녹음이 짙은 초원을 자세히 살펴보면 장난을 치며 놀고 있는 물개들이 보일 것이다. 물론 조형물(造形物)이다. 그러나 얼핏 보면 물개들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개를 둘러싸고 있는 웃자란 풀들이 바람에 휘날리자 마치 물개가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바닷가까지 내려갔다 되돌아오는 길에 본 등대는 또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바닷가까지 내려갔다 왔으면 이번에는 등대 안으로 들어가 볼 차례이다. 먼저 2층에 있는 홍보관으로 들어간다. 홍보관은 등대의 역사를 한눈에 보여준다. 세계최초의 파로스 등대, 라 코우나 등대, 코르디안 등대, 팔미도 등대 등, 연대별로 대표등대를 선정하여 등대의 변천사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옛 옹도등대 사진 등과 옹도섬 조감도, 무종(霧鐘)모형물이 전시되어있다.

 

 

파로스 등대(Pharos Lighthouse)BC 280~250년 무렵 그리스 파로스 섬에 세워진 세계 최초의 등대이다. 프톨레 마이오스 2세의 지시로 소스트라투스가 건설하였다고 한다. 고대 알렉산드리아는 파로스섬과 헵타스타디온이라는 제방(길이약1)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맨 밑단은 4각모양, 가운데 단은 8각모양, 맨 윗단은 원통모양이었다. 등대 안쪽으로는 나선 모양의 통로가 꼭대기 옥탑까지 나있었고 옥탑 위에는 거대한 여신상이 솟아 있었다. 옥탑부분에는 불을 태우는 설비가 있었다고 하며, 불빛을 비추기 위해 반사렌즈나 거울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코르디안 등대(Cordouan Lighthouse), 등대높이68석조등대로 1355년에 코르드안섬 최초등대의 옛터에 세워졌다. 프랑스의 가장 유명한 중세 등대는 프랑스의 와인무역을 위한 코르디안(Cordouan)섬에서 9세기에 세워진 등대를 대체한 것이다. 이 등대의 목적은 선원들에게 암초로부터 벗어나 안전한 항로로 항구에 안전하게 도달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비록 사진에는 없지만 라 코루나 등대(Lacoruna Lighthouse)도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등대가 바로 AD 2세기에 세워져 원래의 기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스페인의 라 코루나(Lacoruna) 등대이다. 스페인 가리시안(Calician) 해안의 라 코루나 북부 언덕 위에 서 있는 이 등대는 로마 신화 속에도 등장하고 있다. 로마사람들에게 이 등대는 헤라클레스 타워로 여겨졌다. 라 코루나 등대는 제국의 흥망을 보여주고 있다

 

 

팔미도 등대 (Palmido Lighthouse), 190361일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등대 불빛을 밝힌 팔미도 등대는 지난 100년간의 임무를 수행하고 지금은 인천시 지방문화재(40)로 지정되어 그 자리를 지키며 보존되고 있다.

 

 

홍보관에 전시하고 있는 옹도등대(Ongdo Lighthouse) 조감도, 옹도등대는 19071월 태안앞바다를 통항하는 선박의 안전운항을 위해 세워진 충남유일의 유인등대로서, 그 불빛은 43마일(77)까지 비추어진다고 한다.

 

 

 

옛 무종(霧鐘)의 모형, 무종은 안개나 연무로 시계가 불량할 때 종을 쳐서 등대의 위치를 알리는데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등대에 대한 상식 하나, 유인등대나 무인등대들은 모두 외모만 백색인 게 아니라 불빛 또한 백색이다. 항해자가 멀리서도 식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란다. 또한 항해자가 어느 등대의 불빛인지 알 수 있도록 등대마다 불빛의 색과 깜빡이는 주기가 다르다.

 

 

 

홍보관을 다 둘러봤으면 마지막으로 하늘전망대에 올라가볼 차례이다. 전망대에 오르면 망원경이 설치되어있으니 한번쯤 들여다보자. 섬 동쪽으로 단도, 가의도, 목개도, 정족도가 보이고 서쪽으로는 괭이갈매기 서식지인 난도, 궁시도, 병풍도, 격렬비열도가 수평선 위로 장관을 이룰 것이다.

 

 

 

옹도 투어를 끝났다면 올라갔던 길을 그대로 다시 되돌아 내려와야 한다. 한번 봤던 길을 또 다시 걷게 되니 지루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천만의 말씀이다. 올라갈 때와는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만큼 옹도는 보는 각도에 따라서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난다는 얘기이다.

 

 

 

옹도를 다 둘러봤다면 이번에는 유람선 투어를 할 차례이다. 동쪽으로 방향을 잡은 유람선이 단도를 지나면 가의도가 나타난다. 옛날 가의라는 중국 사람이 이곳으로 피신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게 되었단다. 한편으로는 신진도에서 볼 때 가의도가 서쪽의 가장자리에 있다고 해서 가의섬이라고 불렀다는 설도 있으니 참고할 일이다. 유람선이 가의도 근처에 들어서자 선장님의 유창한 해설이 시작된다. 섬의 역사는 물론이고 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풍습이나 특산품이라는 태안6쪽 마늘등 쏟아져 나오는 설명은 끝도 없이 이어진다.

 

 

태안 앞바다는 아름다운 해안에 기암괴석이 많아 오래 전부터 해상관광지로 유명하다. 그 대표적인 바위가 가의도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코끼리바위이다. 바위의 모양새가 코끼리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또 다른 방향에서 보면 독립문의 모양이 나온다고 해서 독립문바위라는 다른 이름도 갖고 있다. 그 외에도 사자바위나 코바위, 거북바위 등 기암괴석들이 곳곳에 널려있어 구경하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사자바위, 멀리 중국땅을 바라보며 태안반도를 지켜준다는 전설의 바위이다.

 

 

코바위, 물살 빠른 관장수도에 위치하고 있으며 부부바위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비금도(飛禽島) 선왕산(仙王山, 255m)-그림산(226m)

 

산행일 : ‘14. 5. 6()

소재지 : 전남 신안군 비금면

산행코스 : 상암마을 주차장99.9그림산죽치우실전망대선왕산갈림길왼편능선하누넘해수욕장(산행시간 : 3시간20)

함께한 산악회 : 정산악회

 

특징 : 비금도의 서쪽에 커다란 산줄기를 형성하고 있는 선왕산과 그림산은 암봉이 수려(秀麗)한 산이다. 거기다 다도해(多島海)의 조망(眺望)까지 뛰어나서 섬 산행의 참 맛을 느낄 수 있다. 두 산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다니지 않아 가시덤불만 무성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을 신안군에서 위험한 곳에 밧줄과 철봉, 그리고 계단 등을 설치한 후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지금은 주말마다 수많은 내륙(內陸)사람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고 한다. 아무튼 울퉁불퉁한 근육질로 이루어진 산은 유명세(有名稅)를 타고 있는 내륙의 바위산들에 비해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산행들머리는 그림산 입구(상암마을) 주차장

선왕산을 오르기 위해서는 먼저 비금도에 와야만 한다. 그 방법은 목포에서 여객선을 타고 들어오는 방법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도초선착장에서 내려 택시를 이용해서 상암마을까지 왔다. 어제 저녁을 묵었던 우이도에서 탄 여객선이 도초선착장에다 우리들을 내려놓은 것이 그 이유이고, 또한 도초도와 비금도가 이미 서남문대교(大橋)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해진 일이다. 참고로 도초항에서 산행이 시작되는 상암마을까지는 택시로 5분이 채 되지 않은 거리이다. 상암마을로 가는 길가에 막 비상하려는 매의 조형물(造形物)이 세워져 있는 것이 보인다. 택시기사분의 말이 이곳 비금도를 표현하는 조형물이란다. ‘비금도(飛禽島)’라는 지명이 섬 형상이 마치 날아가는 새를 닮았다 해서 붙여졌다는 것이다. 참고로 섬에는 금이 세 개가 있다고 한다. 바로 소금의 금, 그리고 시금치의 금과 비금도의 금이란다. 그러나 비금도를 대표하는 그 금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염전(鹽田)일과 시금치농사 등 사철 내내 쉴 틈이 없이 일을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들머리인 그림산 입구(상암마을) 주차장에는 널따란 주차장 외에도 쉼터와 간이화장실까지 갖추고 있다. 그만큼 이 지역 행정관청이 이 산에다 정성을 들이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주차장 뒤편의 산자락으로 올라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들머리에 등산로 입구(入口)’라고 쓰인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니 별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산으로 오르는 길가에는 벤치(bench)가 놓여있다. 위에서 주차장을 설명할 때 얘기했던 대로 이 산에 쏟아 붓고 있는 정성들을 다시 한 번 떠올리게 만드는 정경이다. 벤치에서 몇 걸음만 더 걸으면 첫 번째 봉우리인 99봉에 올라서게 된다. 99봉에서 처음으로 시야가 열리면서 그림산의 전경(全景)이 눈에 들어온다. 마치 영암의 월출산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설레는 풍경이다.

 

 

 

 

99봉에서 완만(緩慢)한 능선을 따라 잠시 걸으면 아찔한 바위 절벽(絶壁)이 앞을 가로막는다. 도무지 올라갈 수 없을 것 같은 바위절벽에도 길은 나있다. 비록 그게 자연적으로 난 길이 아니라 인위적(人爲的)으로 만든 길이지만 말이다. 바위벼랑에 철계단을 설치해 위로 오를 수 있도록 해 놓은 것이다. 길게 놓인 철계단을 밟고 올라가면 그에 따라 고도감(高度感)이 쭉쭉 올라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계단의 경사(傾斜)가 그만큼 가파르다는 의미일 것이다.

 

 

 

계단이 끝나면 바위벼랑 위이다. 이곳이 첫 번째로 만나게 되는 전망대로 뛰어난 조망(眺望)을 자랑하는 곳이다.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보면 발아래에 맑은 코발트빛의 저수지가 예쁘장하게 빛나고 그 뒤에는 널따란 들녘이 끝없이 펼쳐지고 있다. 저 논밭들이 현재 비금도가 고소득을 올리는데 효자노릇을 단단히 하고 있다고 한다. 비금도(飛禽島)는 큰 새가 날아가는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한때는 비금도(飛金島)라고 불리기도 했다. 염전(鹽田)이 호황을 누리던 시절에 돈이 날아다닐 정도로 돈이 흔했던 탓이다. 그러나 지금은 소금 대신에 시금치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고 한다. 해풍(海風)을 맞고 자란 이곳의 시금치는 섬초라는 별도의 이름을 갖고 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그 덕분에 주민소득을 올리는데 일익을 담당할 수 있었고, 그 효자노릇을 가상하게 여긴 이 지방 사람들이 시금치를 금초(金草)라 부르기도 한단다.

 

 

 

일단 바위 위로 오르면 널찍한 바위지대가 나타나면서 어려운 길은 끝난다. 그렇다고 해서 바윗길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바윗길이지만 굳이 안전시설(安全施設)의 도움 없이도 오를 수 있을 만큼 경사(傾斜)가 가파르지 않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저 좌우(左右)로 펼쳐지는 비경(秘境)들을 감상하며 아기자기한 바윗길을 느긋이 걷기만 하면 된다. 능선을 오르다 고개라도 잠깐 돌리면 비금도의 간척지(干拓地)들이 끝없이 펼쳐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늘날의 비금도는 총 25차례의 간척사업으로 만들어진 섬이다. 때문에 비금도에는 또는 ()’로 끝나는 지명이 수없이 많다고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간척지는 대부분 염전(鹽田)이나 밭으로 탈바꿈했다. 그리고 그 염전과 밭에서 나는 작물이 이곳 비금도의 특산품(特産品)이 되었다. 천일염(天日鹽)과 시금치가 바로 그것이다. 비금도는 호남지역에서 가장 먼저 천일염을 시작한 곳으로, ‘우리나라 천일염의 메카(Mecca)’라 부를 만큼 천일염 생산 역사가 길다. 광복 직후인 1948년 비금도에 사는 450여 가구가 대동염전조합을 결성하여 100ha가 넘는 광활한 염전을 조성했다고 한다. 당시 보리개떡과 나물죽으로 연명하면서 염전 조성작업을 했다는 얘기는 후일담(後日譚)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또 하나의 특산물인 시금치는 섬초라는 별도의 이름을 만들어 낼 정도로 유명하다. 비금도 시금치인 섬초는 재래종이라서 다른 곳에서 재배되는 시금치보다 한참 작다. 그리고 한겨울 추위 속에서 바닷바람과 눈서리를 견디느라 땅바닥에 붙어서 자라느라 잎이 옆으로 퍼져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성장 환경 때문에 잎이 두꺼워져 삶아도 씹는 맛이 좋고, 또한 게르마늄(Germanium) 성분이 함유(含有)된 개펄에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자란 탓에 신선도(神仙圖)가 오래 유지되고 당도(糖度)가 높다. 그래서 누군가 비금도에 들어갈 때에는 승용차를 가지고 가는 것이 좋다고 했다. 특산품들을 가득 싣고 오려면 자동차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림산의 표고(標高 : 226m)만 보면 누구나 만만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오산이었음을 알아차리는 데는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가파른 철계단이 계속 나타나는가 하면 아득한 우회(迂廻) 암릉도 나온다. 그리고 닭 벼슬처럼 갈기를 세운 침봉들도 주눅을 들게 만드는데 한몫을 하고 있다. 비록 표고는 낮지만 험난한 것이 결코 쉬운 산이 아닌 것이다.

 

 

 

바윗길을 걷다보면 본체(本體)에서 떨어져 나온 것 같은 바위 하나가 누워 있는 것이 보인다. 그런데 그 모양이 한반도(韓半島)를 닮았다. 아니나 다를까 바위 옆에 우리나라 지도라는 이름표를 세워놓았다. 그 작명(作名)이 약간은 인위적(人爲的)으로 보이지만 어떠랴, 이렇게 아름다운 산하(山河)에서 그 정도의 너스레 정도야 얼마든지 받아줄 수 있지 않겠는가.

 

 

 

한반도를 닮은 바위에서 조금 더 진행하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이정표에 흙길과 계단길로 구분을 해 놓았다. 절벽(絶壁)의 왼쪽 사면(斜面)으로 놓인 계단이 부담스러운 사람들은 이곳에서 오른편(흙길)로 우회(迂廻)해서 정상으로 오르면 된다. 그러나 구태여 흙길을 이용해서 올라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계단이 견고(堅固)하게 설치되어 있는 탓에 위험하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기 때문이다. 나 역시 왼편 계단길 방향의 능선으로 향했음은 물론이다.

 

 

갈림길에서 몇 걸음 더 올라가면 또 다시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왼편은 계단길, 오른편으로 가면 해산굴을 통과하여 정상으로 오르게 된다. 앞서가던 집사람이 뒤를 한번 돌아보더니만 내 의사를 물어보지도 않고 냉큼 해산굴 방향으로 들어서버린다. 새로운 도전이 그녀의 마음을 설레게 했나보다. 그러나 그 도전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냥 돌아갈까 봐앞에서 오르고 있던 아주머니 한분이 거의 울상이다. 막상 해산굴(解産窟) 앞에 서니 통과하기가 난감했던 모양이다. 해산굴의 입구는 꽤나 넓다. 그러나 빠져나갈 구명은 좁다. 거기다 굴()은 거의 수직(垂直)으로 뚫려있기까지 해서 보통의 여자들도 통과하기가 쉽지 않을 정도이다. 후덕한 몸매의 아줌마들이 통과하기에는 결코 쉽지 않은 코스인 것이다. 굴을 통과하는데 그런 고통이 따르기에 해산굴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나 보다.

 

 

 

해산굴에서 산고(産苦)의 고통을 겪고 나면 곧이어 그림산 정상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만에 정상에 도착했다. 그림산 정상은 바위봉우리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 조망(眺望)이 일품인 반면에 그 조망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은 그다지 풍족하지 못한 것이다. 하긴 다른 바위산들의 정상에 비해서는 넓은 편이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다. 정상의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바위가 차지하고 있고, 그 바위 앞에 놓인 통나무 위에 정상표지판이 다소곳이 앉아 있다. 그리고 그 곁에는 망원경(望遠鏡)이 하나. 만일 비금도의 전경(全景)을 보고 싶다면 차례를 기다렸다가 눈을 가져다 대면 될 일이다.

 

 

정상에 서면 기막힌 조망(眺望)이 펼쳐진다. 우선 북동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간척지의 넓은 들판과 바둑판같은 염전(鹽田)이 펼쳐진다. 그리고 조금 더 멀리 시선(視線)을 가져가면 무수한 섬들이 산이 되어 끝없이 늘어섰다. 거기다 구불구불 물 흐르는 데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갯고랑, 그 풍경은 화가인 어머님 친구분께서 그렸다는 어머님 댁 거실에 걸려있는 유화(油畵)를 쏙 빼다 박았다. 물론 그림에는 없는 풍경(風景)도 담겨있다. 풍력발전기가 거대한 바람개비 모양으로 돌고 있는 풍경 말이다. 눈을 돌려 지나온 능선을 돌아본다. 내 뒤를 따라온 길이 이미 추억 속의 옛길로 변해있다. 그리고 앞으로 가야할 선왕산 방향에는 넘어야 할 암봉들이 12폭 병풍처럼 화려하게 펼쳐진다. 한마디로 보는 것마다 그림이다. 왜 그림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는지 실감이 나는 순간이다. ‘한 폭의 그림을 펼쳐 놓은 듯.’하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그림산의 이름말이다.

 

 

그림산 정상에서 선왕산 방향으로 바윗길을 잠깐 내려서면 안부에서 아까 헤어졌던 흙길과 다시 만나게 되고, 이어서 산길은 진행방향에 보이는 바위봉우리로 향한다. 그런데 이 봉우리가 보는 것만으로도 주눅이 들 정도로 아찔하게 서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대체로 길이 잘 나있고 맨 위의 바위봉우리는 아예 오른쪽으로 우회(迂廻)를 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조금이라도 위험한 곳에는 철계단과 철난간 등 안전시설을 만들어 놓았음은 물론이다.

 

 

 

 

바위봉우리로 올라서서 한숨을 돌릴라치면 진행방향에 또 다른 바위봉우리가 시야(視野)에 들어온다. 오르내리는 바윗길이 만만치 않게 보인다. 그러나 친절하게도 바윗길 중간 중간에 고정로프나 철계단을 만들어 놓아 거대한 바위들이 널린 바윗길을 오르내리는데도 험하다는 인상을 받을 겨를이 없다. 대신 주변 풍광(風光)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이런 길에서는 걸음을 재촉하기보다는 눈의 호사(豪奢)를 누려보는 게 좋을 것이다. 마음이 이보다 더 경쾌할 수 없다. 섬 산행의 진수를 맛보는 듯하다.

 

 

두 번째 바위봉우리를 지나면 산길은 길고 깊게 고도(高度)를 낮춘다. 그리고 가파른데다 험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막상 들어서고 보면 생각보다는 수월하다. 조금만 험하다싶으면 어김없이 계단이나 난간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봉우리에서 내려서면 다음에 나타나는 바위봉은 차라리 귀여울 정도이다. 아마 그동안 지나온 암봉들에 비해 왜소(矮小)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마지막 바위봉을 내려서면 푸른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는 작은 안부에 내려서게 된다. 이어서 나무가 없는 민둥산에 올라서게 된다. 아마 지도(地圖)에 전망대(展望臺)로 표기된 곳이 아닐까 싶다. 능선을 걷다보면 어느 곳 하나 전망대가 아닌 곳이 없겠지만 시야(視野)가 사방으로 터지는 이곳에서의 조망(眺望)은 가히 일품이기 때문이다. 마침 벤치(bench)까지 갖추고 있으니 잠시 쉬면서 조망을 즐겨보는 게 좋지 않을까 싶다. 지나온 그림산과 가야할 선왕산의 우람한 암릉들을 바라보는 기쁨을 한껏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조망을 즐기면서 만둥산을 내려서면 비금도 주민들이 옆 동네를 오갈 때 넘나들었다는 죽치우실에 닿는다. 왼편 대나무 숲 사이로 죽치마을로 내려가는 하산길이 보인다. 선왕산 정상에서 40분 조금 못되는 지점이다. 우실이란 다도해(多島海)의 생활문화가 담긴 석성(石城) 같은 돌담을 일컫는다. 즉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해풍(海風)으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 산등성이에 쌓은 돌담이다. 돌아오는 길에 안내를 맡았던 택시기사분의 말로는 바람이 셀 때 서쪽바다로부터 날려 오는 바닷물을 막기 위해 쌓았다고 했다. 아무튼 바람이나 바닷물로부터 농작물(農作物)을 보호해주는 역할을 수행한 것은 분명하다. 또한 풍수적(風水的)으로는 마을의 약한 부분을 보호해 주기도 하고, 마을의 안과 밖을 구분해주는 경계선 노릇도 하고 있단다.

 

 

 

죽치마을 갈림길에서 오른편으로 돌아 조금만 더 걸으면 또 하나의 우실(돌담)을 만나게 되고, 이어서 나타나는 완만한 오름길을 10분 남짓 오르면 조망 좋은 바위지대로 올라서게 된다. 이제 주능선의 절경이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당찬 산세(山勢)와 넉넉한 조망(眺望)이 육지의 명산들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다. 뒤를 돌아보면 지나온 그림산의 전경이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지고, 시선을 앞으로 돌리면 비금도 서쪽 해안의 비경(秘境)들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섬 산행의 풍경이 다 비슷하지 않을까 싶지만 결코 그렇지가 않다. 바라보는 각도(角度)를 달리할 때마다 새로운 구도로 잡히는 풍경들이 지루해 할 틈을 주지 않는 것이다.

 

 

 

능선을 걷다보면 바위로 이루어진 오른편 능선에 유난히도 뽈록하게 솟아오른 선돌(立石) 두 개가 보인다. ‘어머니가 아기를 안고 있는 모양같지요?’ 둘 중에 위에 있는 바위를 두고 함께 산행을 하던 일행이 하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부부는 세종대왕이 책을 읽고 있는 형상으로 결론을 내린지 이미 오래다. 역시 사물(事物)은 바라보는 이의 마음자세에 따라 그에 맞는 형상(形象)으로 나타나는가 보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안내를 맡았던 택시기사분의 말에 의하면 이 고장에서는 두 개의 바위 모두 남근바위라고 부른다고 했다. 능선아래 서산사가 위치한 계곡이 음기(淫氣)가 가득한 여근곡(女根谷)이란다. 때문에 부족한 양기(陽氣)를 채우려고 솟아오른 남근(男根)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 바위까지는 반들반들하게 길이 나있을 것이다. 아들을 낳고 싶어 하는 부녀자들이 뻔질나게 찾았을 테니까 말이다.

 

 

선왕산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바위절벽은 더 아찔해진다. 그리고 길가에는 기암괴석(奇巖怪石)들이 선을 뵈기 시작한다. 그리고 등대섬 칠발도를 비롯해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비금도 서쪽 해안이 점점 더 또렷해진다. 산행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벌어진 입을 다물 줄을 모른다. 그저 들리는 소리라곤 그들이 내뱉는 감탄사뿐이다. 하긴 계속해서 나타나는 비경(秘境)을 보고도 그런 행태를 보이지 않는다면 차라리 그것이 더 이상할 것이다. 갑자기 막혔던 가슴이 한순간에 확 터진다.

 

 

 

죽치우실에서 50, 그림산 정상을 출발한지 1시간30분 정도가 지나면 무인산불감시탑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선왕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선왕산 정상은 한마디로 말의 안장처럼 길쭉하게 생겼다. 때문에 정상은 그다지 넓지 못한 편이다. 이를 보완하려는 듯 정상표지석 뒤에다 나무데크로 전망대(展望臺)를 만들어 놓았는데 이게 좀 문제다. 정상표지석을 넣은 인증사진을 찍으려고 하는데 전망대가 자꾸 훼방을 놓는 것이다. ‘신안군청 사람들은 말귀를 못 알아들어요.’ 신안군청에다 이에 대한 시정요구를 몇 번이나 했지만 마이동풍(馬耳東風)이었다는 일행의 말마따나. 가능하면 전망데크를 다른 곳으로 조금 이동시켜 주었으면 좋겠다. 참고로 선왕산은 아래 마을에서 보면 산의 선이 왕관처럼 삐쭉삐쭉하게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선왕산 정상은 사방이 탁 터져 있어서 어느 것 하나 거칠 것 없는 일망무제(一望無題)의 조망(眺望)을 보여준다. 그림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물론이고, 좌우로 바닷가 풍경이 시원스럽게 펼쳐지는데 도초도와 우이도, 자은도, 흑산도 등 둥글둥글한 섬들은 차라리 보너스이다. 혹시라도 이러한 풍경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정상석 옆에 있는 망원경(望遠鏡)에 눈을 들이대면 된다. 간척지(干拓地)에서 못자리를 돌보다가 논두렁에 오줌을 갈기고 있는 농부의 뒷모습까지 보일 것이다.

 

 

 

정상에서 100m 더 가면 삼각점(三角點, triangulation point)이 있는 바위 봉우리다. 눈대중으로만 볼 때에는 이곳이 정상석이 있는 봉우리보다 더 높은 것 같다. 그렇다면 왜 엉뚱한 곳에다 정상석을 세워 놓았을까? 그 이유는 삼각점봉에 이르면 금방 수긍이 간다. 터가 좁아 정상의 역할을 수행하기가 어려울 것 같기 때문이다.

 

 

삼각점봉에서 근처에서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오른쪽은 서산저수지로 가는 코스이고, 왼편은 하누넘해수욕장으로 곧장 내려가는 코스이다. 물론 오른쪽으로 가더라도 중간에 하누넘해수욕장으로 내려가는 탈출로가 있으니 만일 바윗길을 조금 더 타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오른편으로 진행하면 된다. 그러나 그 암릉을 눈으로 즐기고 싶을 경우에는 왼편 길이 더 좋다. 내려가다 보면 오른편에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암릉이 마치 성벽(城壁)처럼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발걸음을 재촉할 필요는 없다. 갈림길 근처가 뛰어난 조망처이기 때문이다. 하누넘해수욕장을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닐까 싶다. 하누넘해수욕장은 하트해수욕장이라는 또 하나의 이름을 갖고 있다. 가만히 보니 하트()모양을 닮기는 닮았다. 그런데 그 닮은 모양을 발견한 것은 이곳 주민들도 아니고, 그렇다고 먼 곳에서 찾아온 등산객들은 더더욱 아니었다. TV 드라마 봄의 왈츠에서 하트 모양의 해변으로 등장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는 것이다. 드라마가 전파를 타면서 인기를 끌자 현지에서 상업적으로 이용한 것이 거의 고유명사로 고착(固着)이 되어버린 것이다. 여기서 상업적이라 함은 관광객들의 호기심을 끌기 위해 봄의 왈츠촬영지라는 것을 부각시켰다는 의미이다. 하긴 그런 활용은 이곳뿐만이 아닐 것이다. 전국 어디를 가나 드라마나 영화의 촬영지라는 홍보판을 흔하게 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왼편으로 난 길은 능선을 따라 하누넘해수욕장으로 연결된다. 너덜길로 시작되는 내리막 코스는 가파르지만 위험하다거나 내려서기 힘들 정도까지는 아니다. 당연히 주변 풍광을 즐기면서 내려가도 된다는 얘기이다. 마침 이 능선은 어느 지점에서 보더라도 모두 다 하누넘해수욕장이 한눈에 잘 들어오는 뛰어난 전망대이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서산저수지 쪽으로 이어지는 성벽 같은 암릉이 길게 펼쳐지고 있다.

 

 

 

능선을 따라 얼마간 내려오면 길가에 또 다시 돌담이 나타난다. 그런데 이번 것은 길게 쌓은 것이 아니라 마치 뭔가를 숨기기라도 하려는 듯 둥그렇게 쌓아 놓았다. 아마 아까 갈림길에 세워진 안내판에 적혀있던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의 군사시설(軍事施設)’인 모양이다. 일제(日帝)는 러일전쟁 후에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려는 배들을 감시하기 위해 서남해안의 여러 섬들에 포진지(砲陣地)와 참호(塹壕) 등을 설치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까 선왕산의 정상 근처에서 보았던 돌담도 이와 같은 목적으로 쌓았던 모양이다.

 

 

 

 

 

산행날머리는 하누넘해수욕장

참호(塹壕)터를 지나면 산길은 소나무 숲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이 소나무들이 좀 이상하다. 어른의 허리에도 못 미칠 정도로 키가 작은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심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소나무도 아니다. 꽤나 나이를 먹은 것 같은데도 그렇게 왜소(矮小)한 것이다. 아마 바닷바람의 영향이지 않을까 싶다. 아까 지나왔던 죽치우실에서 보았듯이 해풍(海風)과 바람에 실려 온 바닷물에 시달리다보면 아무리 생명력이 강한 소나무일지라도 제대로 자라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소나무 숲을 빠져나오면 해안도로에 내려서게 되고, 도로를 따라 오른편으로 조금만 더 가면 산행이 종료되는 하누넘해수욕장의 입구가 나온다. 갈림길에서 35분 정도가 걸렸다. 해수욕장에 도착하면 이제는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선착장까지는 택시를 이용해서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마침 해수욕장의 방갈로(bungalow) 앞에 쉼터가 조성되어 있으니 쉬면서 차량이 오기를 기다리면 된다. 그리고 방갈로 옆에 수도가 있으니 산행 중 흘린 땀을 씻어도 좋고, 고운 모래가 널따랗게 깔려있는 해변(海邊)을 걸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몸을 맡기고 벤치에 누어서 한 숨 자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참고로 하누넘해수욕장의 하누넘이란 북서쪽에서 하늬바람이 넘어오는 곳이란 뜻이라고 한다. 길이 1km에 폭이 50m(간조 시)인 자그마한 해수욕장이나 천연기념물인 칠발도와 어우러지는 낙조(落照)는 장관(壯觀)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산행을 마친 뒤에는 섬을 한 바퀴 돌아보는 기회를 가졌다. 물론 가이드는 택시기사분이다. ‘우리나라 천일염의 메카로 불릴 정도로 역사가 오래된 비금도의 염전(鹽田)섬초라는 고유명사를 새로 만들어낸 비금도의 시금치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으며 돌아보는 비금도는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 특산품들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지난(至難)했던 역사를 듣고 어찌 숙연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의 설명은 그 두 가지에 그치지 않았다. 하긴 어떻게 이 고장이 낳은 세계적인 기사(棋士) 이세돌을 빼놓을 수 있겠는가. 그는 요즘 한창 진행 중은 이세돌 VS 구리10번기를 쭉 꿰고 있을 정도로 이세돌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했다. 어찌 그만의 자부심(自負心)이겠는가 마는.. 아무튼 기사분의 안내에 취하다보면 택시는 어느새 끝이 안보일 정도로 널따란 해수욕장에 도착해 있다. 이웃 원평해수욕장의 모래밭 1.2와 합쳐서 꼭 10리 길이라는 명사십리해수욕장이다. 풍력발전기(風力發電機)라는 또 하나의 볼거리를 갖고 있는 해수욕장의 백사장(白沙場)은 택시가 질주해도 바퀴자국이 잘 나지 않을 정도로 모래가 곱고 단단했다. 때문에 경비행기 활주로로도 활용된다고 한다. 마구 밟아도 잔물결 무늬를 고스란히 간직한 명사십리 모래밭은 마치 넓은 사막을 연상시킬 정도였다. 해변에서 그물에 걸린 고기를 건져 올리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썰물 때 그물을 쳐 두었다가 밀물이 지나간 뒤에 그물에 걸린 고기를 건지는 중이라는 택시기사분의 설명이다. 그리고 지금 고기를 잡고 있는 사람들은 이곳 주민들은 아니란다. 이곳에 놀러온 사람들이 가끔 저렇게 고기를 잡곤 한단다. 물론 그물은 이곳 주민들에게서 빌렸을 것이다. 비록 생선회를 좋아하지 않는 나이지만 저들 속에 섞이고 싶어진다. 옛날 방식으로 고기를 잡고 있는 풍경이 동심(童心)을 자극했던 모양이다.

 

                                                 

 

여행지 : 우이도 상산봉(358.6m)

 

산 행 일 : ‘14. 5. 5()

소 재 지 : 전남 신안군 도초면(우이도)과 비금면

산행코스 : 진리항선창구미 갈림길기암(奇巖)비탈길바위능선상산봉진리고개(몰랑)대초리 폐허(廢墟)대초리고개돈목해수욕장(소요시간 : 2시간50)

 

함께한 산악회 : 정산악회

 

특징 : 우이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우리나라에 가장 빼어난 모래언덕이라는 풍성사구(風成砂丘)’이다. 그러나 또 하나 빼 놓아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상산봉 산행이다. 우이도는 비록 자그마한 섬에 불과하지만 섬 전체가 산악지대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산세(山勢)는 자못 옹골차다고 할 수 있다. 거기다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바위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오르내릴 때 짜릿한 손맛을 즐길 수도 있고, 또한 암릉에서의 다도해(多島海) 조망(眺望)은 자못 빼어나다. 이 모든 것을 감안할 때 누구나 한번쯤은 꼭 올라볼 것을 권하고 싶다. 그리고 그 코스는 오늘 우리가 걸었던 코스를 권한다. 스릴(thrill)과 조망이 가장 뛰어난 코스이기 때문이다.

 

  

산행들머리는 진리선착장(船着場)

선착장에서 진리마을을 향해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진리 삼거리’(이정표 : 상산봉 2.6Km, 돈목2구 모래언덕 3.5Km, 손암 정약전 적거지 600m/ 우이도출장소 170m, 문순득 생가 155m/ 진리선착장 480m)에서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상산봉 방향이 아닌 마을방향, 그러니까 도초면사무소 우이출장소방향으로 들어선다. 이정표의 지시에 따르지 않는 이유는, 오늘 걷게 될 코스가 진리고개를 경유하여 정상으로 오르는 코스보다 더 험하기는 하지만 암릉에서의 멋진 조망(眺望)과 짜릿한 스릴(thrill)을 훨씬 더 즐길 수 있는 코스이기 때문이다.

 

 

 

 

옛날 정취를 물씬 풍기는 마을 안길을 통과한 후, 밭두렁을 밟으며 마을 뒤편 산자락에 붙는다. 개척 산행을 예상했었는데 의외로 길은 또렷하다. 그게 마음이 놓였는지 방금 지나온 진리마을을 뒤돌아보는 여유까지 생긴다. 의외로 큰 마을이다. 우이도로 들어오는 뱃속에서 만났던 아주머니 말에 의하면 진리마을에만 60호 정도가 모여살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초등학교도 있었다고 했다. 비록 그녀의 아이들이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면서 폐교(廢校)가 되었지만 말이다.

 

 

 

 

 

 

선착장을 출발한지 22분쯤, 산자락으로 들어붙고 나서는 10분쯤 후에는 능선 안부에 올라서게 된다. 선창구미에서 올라오는 길과 합쳐지는 지점이다. 일반적으로 안부에 오르기까지가 힘이 드는 것이 보통인데, 땀방울을 흘리기도 전에 안부에 올라섰으니 오늘 산행은 별로 힘들지 않은 산행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러나 이 짐작이 섣부른 오산이었음을 알아차리는 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주능선까지 올라서려면 다시 한 번 산비탈과의 힘겨운 싸움을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안부삼거리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능선을 타고 산행을 이어간다. 산길은 흙길에다가 경사(傾斜)까지 완만(緩慢)하기 때문에 오르는데 조금도 힘들이 들지 않는다. 능선을 따라 13분쯤 걸으면 난데없이 바위지대가 나타나고, 그 위에는 흔들바위를 닮은 예쁜 바위 하나가 위태롭게 걸터앉아 있다. 성질 급한 집사람이 냉큼 바위로 달려가더니 일단 밀어붙이고 본다. 아마도 움직여질지가 궁금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금방 굴러갈 것 같은 생김새와는 달리 서너 명이 한꺼번에 밀어도 바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바위 위로 올라서면 시야(視野)가 열리면서 다도해(多島海)의 올망졸망한 섬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보고 있는 지대가 낮아서인지 섬들은 그저 옆모습만 보일 따름이다.

 

 

 

흔들바위를 지나서 조금만 더 나아가면 산길이 임도(林道) 수준으로 넓어지면서 능선을 벗어나 산자락의 사면(山斜面)을 째며 왼편으로 휜다. 사진을 찍으며 가느라 일행에서 약간 뒤처져있는데, 앞에서 일행들이 웅성거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일부는 오른편 산비탈을 따라 오르고, 또 일부는 갑자기 좁아진 임도를 따라 곧장 나아가고 있다. 흔들바위에서 6분쯤 되는 지점으로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이곳에서 곧장 임도를 따를 경우에는 지금은 인적이 끊겨버린 예리마을로 내려가게 되기 때문이다. 당연히 상산봉으로 가려면 오른편 산비탈로 올라붙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들머리에 아무런 표시가 없다는 것이다. 그 흔한 산악회의 시그널(signal) 하나 붙어있지 않다. 그저 눈치껏 찾아야 하는데, 넓던 임도가 갑자기 좁아지는 지점이라면 도움의 될지도 모르겠다.

 

 

능선으로 오르는 길은 한마디로 고난(苦難)의 행군(行軍)’이다. 길은 가파르기 짝이 없는데, 거기다가 길의 흔적까지 찾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길을 만들어 가는 개척(開拓) 산행은 결코 아니다. 길이 너무 가파르다 싶은 곳에는 어김없이 안전로프가 매어져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원래 길이 있었으나 하도 사람들이 다니지 않다보니 길의 흔적이 없어져버린 것이다. 매년 2회 이상 이곳을 찾는다는 정산악회가 아니고는 쉽게 이용할 수 없는 코스이다. 사실 산행 후에 인터넷을 검색해본 결과 아까 들머리에서 길을 찾지 못에 예리마을로 잘못 가버린 산악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그 험한 오르막길이 오래지 않아 끝을 맺는다는 것이다. 거친 오르막길을 13분 정도 치고 오르면 드디어 주능선에 올라서게 된다. 능선에 올라서면 산길은 일단 순해진다. 바윗돌이 듬성듬성 박혀있는 능선은 일단 경사(傾斜)부터 누그러뜨린다. 언제 그런 험한 길이 있었냐는 듯 한없이 너그러워진 것이다. 거기다 주능선이 주는 선물은 하나 더 있다. 바로 탁 트인 조망(眺望)이다. 능선이 초원으로 이루어져 있다시피 해서 사방으로 시야(視野)가 트이는 것이다. 오른쪽에는 아까 지나온 진리마을이 그림처럼 조용하고, 왼편에는 다도해(多島海)의 올망졸망한 섬들이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널따랗게 펼쳐지고 있다.

 

 

 

 

상산봉으로 가는 길은 그야말로 눈이 호사(豪奢)를 누리는 멋진 길이다. 그다지 가파르지 않은 산길은 오르는데 조금도 부담이 없고, 그것도 모자라 심심찮게 바윗길이 나타나면서 무료함까지 달래준다.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산이 주는 선물이 아닐까 싶다. 함께 산을 오르고 있는 일행들 중에 발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은 한사람도 눈에 띄지 않는다. 대신 사방으로 카메라의 포커스(focus)를 맞추느라 정신들이 없다. 하긴 이런 곳에서 갈 길을 서두르는 바보가 어디 있겠는가.

 

 

 

능선에 올라선지 15분쯤 되면 250봉에 올라서게 된다. 250봉에서의 풍경은 봉우리를 올라올 때와 별반 다른 게 없다. 초원(草原) 비슷한 분위기나 사방으로 열리는 조망 등 주능선을 올라오면서 즐겼던 풍경과 별반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구태여 꼭 하나를 꼽아보라면 정상인 상산봉이 더욱 선명하게 가까워졌다는 것이고, 다도해의 섬들이 마치 하늘 위에서 바라보는 것처럼 더욱 또렷해졌다는 점이다. 사람이 살고 있다는 동소우이도와 서소우이도는 물론이고, 그 옆에 있는 화도와 송도 그리고 백도 등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그리고 그 뒤로는 도초도와 비금도, 대야도, 하이도, 신도 등 비교적 큰 섬들이 겹겹이 늘어서 있다.

 

 

 

250봉을 지나서도 주변 풍경은 달라지지 않는다. 능선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고 또한 흙길과 바윗길이 번갈아 나타난다. 흙길은 순하기만 하고 바윗길 또한 험한 곳이 없으니 그저 눈요기를 즐기기만 하면 된다. 넘실대는 파도에 몸을 맡기고 있는 다도해의 올망졸망한 섬들이 마치 돛단배인양 동동 떠다니고 있다. 언젠가 찾았던 인사동의 화랑에서 오랫동안 내 시선을 잡았던 산수화(山水畵) 한 폭이 문득 머리에 떠오른다. 그만큼 주변 풍광이 빼어나다는 얘기이다.

 

 

 

능선에 오르면 시원스레 트이는 조망(眺望) 외에도 또 하나 특이한 게 눈에 띈다. 마치 환약(丸藥) 같이 생긴 염소 똥이다. 일 년 내내 방목(放牧)을 하는 우이도의 염소는 약()염소로 알려져 있다. 온통 산악(山嶽)으로 이루어진 우이도를 마음껏 돌아다니며 온갖 약초(藥草)를 다 먹고 자란 탓이다.

 

 

 

250봉에서 한참을 떨어지던 산길은 안부에서 다시 가파른 오르막길을 만들어 낸다. 그 가파름에 바윗길이 여러 번 끼어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바윗길 구간에는 어김없이 안전로프가 매여져 있기 때문이다.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능선은 바윗길의 비중을 높여간다. 그러나 위험하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는다. 왼편은 바위벼랑이지만 오른편이 흙으로 되어 있고, 산길은 흙으로 된 부분으로 나있기 때문이다. ‘방목된 염소의 통행을 막으려고 친 모양이네요산길 오른편에 쳐진 비닐(vinyl) ()을 보고 내리는 누군가의 최종 결론이다. 아까 주능선으로 올라오면서부터 보이던 이 망을 보고 다들 의견이 분분했다. 어떤 이는 뱀을 잡기 위한 망이라고 했고, 또 어떤 이는 동물들의 통행 차단막이라고 했다. 그러다가 뱀을 잡으려는 망은 그물코가 이렇게 크지 않을 것이라며 최종 결론을 내린 것이다.

 

 

 

 

진리선착장을 출발한지 1시간50분쯤 되면 상산봉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정상은 바위로 이루어져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암봉으로 부르기에는 어색할 정도로 한쪽이 흙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좁은 정상에는 누군가가 서툴게 돌탑을 쌓아 놓았고, 그 돌탑 위에 이정표 모양으로 생긴 정상표지판이 꽂혀있다. 정상이 바위봉우리치고는 어설프지만, 이를 만회라도 하려는 양 바위봉의 특징을 여실히 보여준다. 비좁은 대신에 뛰어난 조망(眺望)을 자랑하는 것이다. 가장 먼저 사방으로 누워있는 능선들이 눈에 들어온다. 자그마한 섬이라고만 생각했던 우이도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지는 순간이다. 비록 산악지대이지만 꽤나 큰 섬인 것이다. 그리고 정상에 올라서면 처음으로 돈목마을 방향이 눈에 잡힌다. 좌우로 도리산과 소래산을 거느린 해안선이 꼭 호리병을 닮았다. 그 뒤에 아스라이 보이는 것은 혹시 흑산도가 아닐까 싶다. 우이도에는 바둑에 얽힌 구전설화(口傳說話)가 있다. 1200년 전 신라(新羅)와 당()을 오가며 활약한 고운 최치원(崔致遠.857~?) 선생이 당나라로 유학을 가던 중 우이도의 최고봉인 상산봉 바위 위에 올라 신선(神仙)과 바둑을 두었다는 얘기다. 그런 인연 때문인지는 몰라도 세계적 바둑왕인 이세돌이 이 부근에서 태어났다. 지금도 세계 바둑계를 호령하고 있는 이세돌이 이웃에 있는 비금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상산봉 정상부근에 있다는 바둑바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정상에서 돈목마을 방향으로의 하산은 짙은 숲속으로 난 길로 들어서면서 시작된다. 아까 정상으로 올 때의 어른 키를 넘지 못하던 나무들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주변의 나무는 대부분 소사나무, 동백나무와 후박나무도 간간히 보인다.

 

 

숲속 터널을 뚫고 얼마간 내려왔을까 이번에는 바윗길이 나타난다. 이 바윗길도 아까와 마찬가지로 왼편만 바위벼랑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일부러 벼랑 끝으로 나가지 않은 이상은 위험한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거기다 조금 험하다고 생각되는 곳에는 친절하게도 안전로프까지 매어 놓았다. 그냥 또 다시 열리는 조망(眺望)만 즐기면 된다.

 

 

 

 

바윗길이 끝나면 또다시 숲길이 이어지고, 후박나무가 울창한 숲속 길을 지나면 진리고개(몰랑)이다. 정상에서 25분 조금 못되는 지점이다. 진리고개에서 길은 두 갈래(이정표 : 대초리우물 890m, 2구 돈목·성촌(모래언덕) 2Km/ 띠밭너머 해수욕장 1.3Km, 1구 진리삼거리 1.4Km/ 상산봉 1.3Km)로 나뉜다. 진리고개에 내려서면 제법 널따란 길을 만나게 되는데 이 길이 진리마을과 돈목마을을 연결시켜주는 하나뿐인 육로(陸路)이며, 이 길에서 가장 높은 고갯마루가 진리고개이다. 우이도는 산악지대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돈목이나 성촌마을에서 진리마을로 가기 위해서는 이 고개를 넘거나 아니면 배를 타고 가는 수밖에 없다. 삼거리에 이정표 외에 의자까지 놓여 있는 것을 보면 상산봉을 찾는 사람들 대부분이 이곳 진리고개에서 상산봉을 올랐다가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나온다는 의미일 것이다.

 

 

 

 

진리고개에서 돈목마을로 향하는 길은 비교적 넓은 편이다. 만일 지금처럼 방치만 되지 않았더라면 오프로드(off-road) 차량들은 통행이 가능했을 것 같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에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왼편에 바위로 이루어진 상산봉 정상이 눈에 들어온다. 억새지대와 산죽(山竹)이 우거진 길을 따라 13분 정도 걸으면 대초리마을이다. 상산봉이 만들어 놓은 계곡이 가장 넓어진 부분에 위치한 대초리는 우이도에서 가장 넓은 분지(盆地)이다. 어느 기록에 의하면 이곳에서 논농사까지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으로부터 450년 전 최초로 우이도로 찾아 든 사람들이 이곳에다 둥지를 틀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옛이야기로만 남았을 뿐이다. 마을은 사람들의 흔적과 지명(地名)만 남아 있을 뿐이고, 썩어 무너진 가옥(家屋)과 무너진 돌담만이 텅 빈 마을을 지키고 있을 따름이다.

 

 

 

 

 

 

 

무너진 돌담길을 따라 조금 더 걸으면 샘터가 하나 나온다. 대초리우물이다. 인적이 끊긴 오래된 마을의 샘 또한 흐르는 세월은 어쩔 수가 없나보다. 인간의 손길에서 벗어난 채로 위가 나무뚜껑으로 굳게 닫혀있다. 그저 이정표(2구 돈목·성촌 1.2Km/ 상산봉 2.0Km, 1구 진리삼거리 2.4Km)와 안내판(案內板)만이 세월의 무상함을 달래고 있다.

 

 

 

대초리우물에서 제법 가파른 오르막길을 7분 정도 치고 오르면 대초리 고개이다. ‘대초리고개이정표(1구 돈목·성촌 1.0Km/ 대초리우물 200m, 상산봉 2.2Km, 1구 진리삼거리 2.6Km)에도 아까 진리고개에서와 마찬가지로 대초리고개옆에 ( )를 만들고 그 안에 몰랑이라는 낱말을 써 놓았다. '몰랑'이란 산마루란 뜻의 사투리라고 한다. 풀자면 기와집 형태의 산마루란 뜻이다. 능선에서 보면 그저 해안절벽(海岸絶壁)이지만, 바다에서는 장대한 기와집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단다. 그렇다면 진리고개나 대초리고개도 바다에서 볼 때에는 기와집 형태로 나타나는 모양이다.

 

 

산행날머리는 돈목해수욕장

대초리고개에서 날머리인 돈목해수욕장까지는 그저 내려가기만 하면 된다. 원시림(原始林)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숲길은 넓고 또한 경사(傾斜)가 완만(緩慢)해서 내려서는데 조금도 부담이 없다. 고개를 넘어서자마자 돈목해수욕장이 내려다보이고 잘 닦인 산길을 따라 10분 정도를 내려서면 어른의 키를 훌쩍 넘기는 시누대 숲을 만나게 된다. 이어서 목제다리를 건너면 돈목해수욕장에 이르게 되면서 산행이 종료된다. 진리선착장에서 쉬지 않고 걸어서 2시간 50분이 걸렸다. 참고로 산에서 내려서는 지점은 돈목해수욕장의 정중앙에서 성촌마을 방향으로 약간 치우친 지점이다. 만일 우이도의 명물인 모래언덕 풍성사구(風成砂丘)’를 둘러볼 요량이라면 날머리에서 오른편으로 진행하는 것이 좋다. 돈목마을에 들렀다가 다시 사구를 다녀오려면 한참을 더 다리품을 팔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여행지 : 우이도 및 비금도

 

여행일 : ‘14. 5. 5() - 6()

 

전체 여행 일정

5. 5() : 우이도 진리항, 상산봉, 사구(모래언덕)

5. 6() : 우이도 도리산, 비금도 그림산과 선왕산

 

소 재 지 : 전남 신안군 도초면(우이도)과 비금면

 

함께한 산악회 : 정산악회

 

특징 : 51일부터 시작되는 6일간의 황금연휴, 연휴의 마지막인 5일과 6일 이틀 동안 서남해(西南海)의 끄트머리에 있는 우이도와 도초도, 그리고 비금도에 섬 여행을 다녀왔다. 그러나 도초도는 비금도로 들어가는 길에 잠시 들렀을 뿐이고, 비금도도 그림산과 선왕산의 산행 외에는 특별한 나들이가 없었다. 당연히 섬에 대한 추억은 우이도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섬 전체가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속하는 우이도(牛耳島)'소구섬'이라고도 불린다. 돈목해수욕장을 사이에 두고 돌출된 도리산과 소래산의 형상이 마치 소귀를 닮았기 때문이다. 우이도는 전체면적이 10.7, 인구 약 200, 해안선길이 21, 최고점은 상산봉 359m이다. 27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우이군도의 주도(主島)이며, 부속도서로는 동소우이도(東小牛耳島), 서소우이도(西小牛耳島), 화도(花島), 항도(項島), 승도(僧島), 송도(松島), 가도(駕島), 어락도(漁洛島) 등이 있다. 우이도 특징은 유별나게 모래가 많다는 것이다. 여북하면 우이도 처녀는 모래 서 말을 먹어야 시집간다.’라는 말까지 생겨났을까. 갯흙이 거의 섞이지 않은 고운 모래 해변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상산봉이다. 내륙(內陸)의 심산(深山)에서나 볼 수 있는 옹골찬 암릉이 펼쳐지는데, 암릉을 타며 바라보는 다도해(多島海)의 조망(眺望)은 전국 어디에다 내놓아도 뒤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이도 가는 길

우이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목포로 와야 한다. 우도로 들어가는 배가 목포에서 출항하기 때문이다. 우이도로 향하는 배는 목포에서 도초도를 거쳐 우이도로 들어가는데, 하루 1회 오전 1140분에 목포를 출발한다. 운임은 13,300원이다.

 

 

 

 

목포를 떠난 배는 3시간을 넘기고서야 우이도에 도착한다. 도초도에 먼저 들렀다 왔음은 물론이다. 참고로 목포에서 우이도까지 거리는 64km. 도초도에서는 17km가 떨어져 있다. 팔금도와 안좌도를 지나고 도초도-비금도 해협을 지나가는 먼 뱃길은 한마디로 숨겨진 천혜의 비경(秘景)이다. 그렇다고 뱃길을 온통 눈요깃거리를 즐기는데 쓸 수만은 없다.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 길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배를 타자마자 간단히 소주로 목을 축인 뒤에 선실에서 잠깐 눈을 붙이면 된다. 술이 깰 즈음이면 배가 도초도에 도착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도초도에서 우이도로 들어가는 뱃길 주변의 풍광이 가장 빼어나기 때문에 나머지 구간의 풍경을 못 본 것에 대해 억울해할 필요는 없다. 진리선착장이 규모면에서는 돈목선착장보다 크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목선착장에서 내린다. 호수 모양의 둥근 항구인 돈목선착장의 해안선이 보다 더 아름답고 넓으며, 특히 돈목해수욕장 끝에 우이도를 세상에 알리게 만든 '풍성사구(風成砂丘)'라고 하는 모래언덕이 돈목선착장 부근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선착장에서 배를 내린다. 상산봉 상행을 종주산행으로 꾸며보기 위해서이다. 산행을 돈목선착장에서부터 시작할 수도 있겠지만 숙박시설과 주변의 관광지 등을 고려해볼 때 불리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선착장에 내리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조형물(造形物)이 하나 있다. 바로 홍어장수 문순득동상이다. 동상의 주인공인 문순득(文順得:1777-1847)은 표해시말(漂海始末)이라는 표류기의 주인공이다. 홍어장사인 문순득과 그의 일행이 탔던 배가 표류(漂流)되어 유구국(流球國 : 오끼나와)과 여송(呂宋 : 현 필리핀), 광저우(廣州), 마카오, 그리고 베이징(北京)을 거쳐 32개월 만에 고향에 돌아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겪은 이야기들을 당시 흑산도에 유배 와 있던 정약전(1758-1816)선생이 이를 받아 적은 것이 표해시말(漂海始末)이다. 이 기록은 다산 정약용선생의 제자였던 이강희가 2(1918~1919)동안 우이도에 머물면서 저술한 유암총서(柳菴叢書)에 실리면서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포구에서 진리마을로 들어가는 길에 왼편에 자그만 배 몇 척이 매어져 있는 것이 보인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선창 중 가장 오래되었다는 진리 옛 선창이다. 조선 숙종 때에 쌓았다는 방파제로 둘러싸인 옛 선창은 전남도에서 기념물(243)로 지정하였을 정도로 역사적 가치가 있다고 한다. 배를 대는 포구시설과 방파제, 그리고 배를 수리하는 선소의 기능을 수행했다고 하는데, 방파제의 길이는 63.3m에 폭이 1.6m에 그리고 높이는 2~3m정도 된다고 한다. 선창 안 중앙에는 계주석(벼리목)을 세워 배를 묶어 둘 수 있도록 하였다.

 

 

 

진리마을로 들어가다 보면 마을 입구의 진리 삼거리’(이정표 : 상산봉 2.6Km, 돈목2구 모래언덕 3.5Km, 손암 정약전 적거지 600m/ 우이도출장소 170m, 문순득 생가 155m/ 진리선착장 480m) 오른쪽 바위언덕 위에 '상원김씨 열녀각'이라고 쓰여 있는 자그마한 비각(碑閣) 하나가 보인다. 이 비각 안에 세워진 비석(碑石)의 주인은 밀양 박씨이다. 혼약하기로 한 남자가 바다에 나가 숨지자 영혼결혼식을 하고 시부모를 봉양한 박씨 부인을 기리기 위해 상원김씨문중(門中)에서 세웠다고 하는데, 건립 시기를 1907년경으로 보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비석을 가만히 쳐다보면 이상한 점이 눈에 들어온다. 전통적인 비석의 형태가 아니라 동상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다가 그 형상이 자칫 동정녀 마리아를 닮았다고 해서 최근 세간의 관심을 끈 일이 있다. 그렇다면 건립 당시에 누군가 천주교(天主敎)를 믿고 있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우이도는 '천주교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조선후기 실학자 정약전이 16년간 유배돼 살다가 생을 마감한 곳이다. 그리고 표해시말(漂海始末)의 주인공 문순득이 필리핀에 표류돼서 천주교를 경험하고 돌아와 살았던 곳이다. 그로 인해 이 비석의 건립당시에도 이 섬에 천주교 신자들이 있었지 않았을까 싶다.

 

 

 

본격적인 산행으로 들어가기 전에 우선 마을 안으로 들어서고 본다. 행여 신비의 섬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라도 엿볼 수 있을까 해서이다. 마을 안길로 들어서면 가장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높게 쌓아올린 돌담들이다. 겨우 지붕 끄트머리만 살짝 보일 정도로 높게 쌓아올린 돌담들은 생김새부터가 견고(堅固)하다. 아마 돌이 많고 바람이 많은 외딴 섬의 특징을 그들의 삶에 맞춰 쌓은 탓이리라. 그 돌담을 온통 담쟁이들이 둘러싸고 있다. 참으로 오랜만에 만나는 고즈넉한 풍경에 도취되어 가만히 눈을 감아본다. 갑자기 어릴 적에 뛰어 놀던 고향동네 골목길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렇다. 산촌(山村)이었던 내 고향에도 돌이 많았었고, 그 돌들을 활용해서 쌓아올린 돌담들은 견고하면서도 멋졌었다.

 

 

 

 

 

상산봉 산행을 마치고도 시간이 남았다면 숙소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풍성사구((風成砂丘:모래언덕)에 들러보는 것이 좋다. 사구(砂丘)돈목 해수욕장의 북쪽 끄트머리에 있는데, 하산지점이 바로 근처이기 때문이다. 만일 숙소에 먼저 들를 경우에는 길이가 1,5km나 되는 돈목해수욕장을 오가는데 다리품을 한참 더 팔아야만 한다. 모래언덕은 그 높이가 80m에 불과하지만 우이도가 자랑하는 명소 중 하나이다. 전국 제일이라는 이 모래언덕으로 인해 우이도가 세상에 알려졌기 때문이다. 사실 충남 태안에 있는 신두리사구(길이 3.4km, 너비 500m-1.3km)가 전체적인 규모(規模)면에서는 이보다 훨씬 더 크다. 그러나 개발로 인해 사구가 많이 훼손되어버렸고, 사구의 대부분이 풀밭으로 변하기도 해서 사구로서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곳 풍성사구를 국내 제일로 친 것이다. 숨어있던 섬 우이도를 세상에 알리는데 큰 몫을 한 풍성사구(風成砂丘)는 돈목마을에서 돈목해수욕장을 지나 성촌마을 쪽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섬 속의 사막'이라고도 일컬어지는 모래언덕(沙丘)은 말만 들어도 신비스럽고 아름다운 느낌으로 가득해진다. 이 모래언덕이 우이도를 신비의 섬이라는 표현으로 세상에 알린 것이다.

 

 

 

풍성사구의 위로 올라가려면 우측 산비탈을 이용해야만 한다. 밀물 때는 바닷물 때문에 사구(砂丘)까지 갈 수가 없지만, 물이 빠져있어 곧바로 갈 수 있는데도 구태여 오른쪽으로 들어설 수밖에 없는 이유는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등산로를 지정(위반시 과태료 부과)해 놓은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길은 발목까지 푹푹 빠져드는 모래밭으로 나있다. 그러나 길의 양쪽 가장자리를 따라 대나무로 경계 표시를 해 놓았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모래언덕의 위로 오를 수가 있다. '사구(砂丘:모래언덕)'란 해수면이 빠르게 상승하면서 바다 북쪽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모래를 밀어 올리면서 만들어내는 모래언덕이다. 우이도의 모래언덕은 그 높이가 한 때는 80m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사람들이 오르내리면서 현재는 50m로 낮아졌단다.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금()줄을 쳐놓고 사구로 못 들어가게 하는 이유일 것이다.

 

 

 

산이란 일단 올라봐야 제 맛을 알 수 있는 법이다. 이곳 풍성사구도 마찬가지이다. 아까 해변에서 바라보았을 때 느껴지던 왜소(矮小)함과는 딴판으로 정상이 보여주는 풍광(風光)에 놀라 그저 !’하는 탄성밖에 나오질 않는다. 눈앞에 돈목해수욕장과 주변 섬들의 풍광이 시원스럽게 펼쳐지며, 부드럽게 선을 그으며 물결치는 모래언덕이 마치 엄마의 가슴처럼 포근하기 그지없다. 또 어떻게 보면 마치 사막의 한가운데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게도 한다. 우이도 풍성사구는 2006년 개봉된 김대승 감동의 영화 '가을로'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이 영화는 1995629일에 일어났던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를 배경으로 스토리가 전개된다. 삼풍 사고로 죽은 여주인공(민주)신혼여행다이어리를 전해 받은 주인공 현우가 다이어리의 지도를 따라 가을로여행을 떠나는데 그가 찾아온 곳이 바로 이곳인 것이다.

 

 

 

 

 

언덕에서 내려와 사구 아래에 만들어진 전망데크에서 위를 올려다본다. 그리고 뭔가를 열심히 찾아본다. 전설(傳說)로 인해 만들어진 형상(形象)을 찾아서이다. 그러나 아무리 눈을 크게 떠 봐도 여자의 아랫도리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참고로 풍성사구에는 애절한 사랑이야기 하나가 전해져 내려온다. 옛날 성촌마을에 사는 처녀와 돈목마을에 사는 총각이 사랑을 했는데, 그들이 사랑을 속삭이던 곳이 바로 이 모래언덕이었다고 한다. 그 사랑은 안타깝게도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갔던 총각이 풍랑(風浪)으로 인해 목숨을 잃으면서 끝나고 만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처녀가 그리움과 아픈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서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지고 만다. 그 후 총각은 바람이 되고, 처녀는 모래가 되어 매일 밤 모래언덕에서 만난단다. 그런 사랑의 힘이 모래언덕을 여자의 아랫도리 모양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풍성사구를 둘러본 다음에는 돈목해수욕장(海水浴場)을 지나 돈목마을로 간다. 길이가 약 1,5km인 돈목해수욕장은 우이도에서 가장 큰 해수욕장이다. 규사(硅沙), 내가 알기로는 해수욕장의 모래는 규사이다. 규사의 특징대로 광활한 해수욕장의 모래사장이 마치 유리를 깔아놓은 듯이 반짝이고 있다. 그 모래는 두 가지의 서로 다른 특징을 보여준다. 아까 모래언덕에 오르기 위해 걸었던 곳 같이 물기가 없는 곳은 모래가 마치 밀가루 같이 고우면서도 가는 반면, 물기가 조금이라도 있는 곳은 단단하고 깨끗해서 모래해변을 비행기 활주로로 사용해도 충분할 정도인 것이다. 모래사장의 아름다운 풍경에 폭삭 빠져버린 집사람은 벌써부터 동심(童心)으로 돌아가 있다. 뛰고 달리고, 깔깔거리는 그녀를 보며 나 또한 자연(自然) 속으로 녹아든다. 그것도 60~70년대의 흑백사진으로 도배된...

 

 

 

 

다모아민박의 옆집에 여장(旅裝)을 푼다. 집사람과 나, 그리고 친우 형우군이 한 방을 같이 쓰기로 했다. 우이도처럼 작은 섬에서의 저녁은 삭막하다 할 정도로 할 일이 없다. 구경거리가 없으면 즐길 거리라도 있었으면 좋으려면 그럴 리가 없다. 그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방에 들어앉아 가져온 술이나 마시는 게 전부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안주가 문제다. 이곳까지 와서 마른안주로 술을 마실 수야 없지 않겠는가. 부지런한 형우군이 안주를 찾아보겠다며 방을 나선다. 그리고 얼마 후에 그가 들고 온 쟁반에는 싱싱한 갑오징어와 조개전골이 올라와 있었다. 아까 자연산 회를 사먹었던 민박(民泊)집에서 구입했다고 한다. 가격도 25천원이니 적당한 것 같았다.

 

 

이튿날 이른 아침 530분쯤 민박을 나선다. 도리산에서 일출을 맞이하기 위해서이다. 도초도로 나가는 여객선의 출항시간에 맞추기 위해 이미 새벽밥을 먹었음은 물론이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마을의 공동우물과 교회 옆을 빠져나가면 밭두렁으로 길이 이어지고, 이어서 차량이 다닐 수 있도록 잘 닦아 놓은 임도(林道)에 올라서게 된다.

 

 

 

해안가를 따라 난 임도는 구불구불 곡선을 그리며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간다. 아직 여명(黎明)이 걷히지 않은 길을 따라 걷는 발걸음은 가볍기 짝이 없다. 차량 운행이 없으니 소음이나 매연이 있을 리가 없다. 거기다 뱃시간까지는 아직도 2시간이 남았으니 급할 것도 없다. 당연히 여유롭고 한가롭게 발걸음을 옮겨본다. 철썩이는 파도소리와 벌써부터 잠이 깬 새들의 조잘대는 소리가 박자를 맞추어 주니 이보다 더 행복할 수가 없다. 사실 나보다 더 이런 분위기를 즐기는 사람은 집사람이다. 길가에 보이는 산나물을 뜯는 재미에 흠뻑 빠진 것이다.

 

 

 

 

그러나 도리산에 이르기도 전에 동녘하늘이 붉어져오기 시작한다. 해가 떠오르는 것이다. 너무 여유를 부렸나? 그러나 애초부터 도리산 정상에서의 해맞이는 물 건너 간 뒤였다. 540분 무렵인 일출(日出)시간에 맞추기 위해서는 최소 515분 전에는 민박을 나섰어야만 했는데도, 우린 530분에야 출발했기 때문이다. 임도에서 맞는 일출은 실망스럽기까지 했다. 해가 봉우리에 올라오기 전부터 이미 햇살이 퍼져버렸기 때문이다.

 

 

 

돈목마을을 나선지 25분 남짓 되면 통신탑의 관리건물이 나타나면서 임도가 끝난다. 도리산 정상은 관리사(管理舍)의 입구에서 왼편 산자락으로 올라서야 한다. 동백나무와 후박나무가 어우러진 산길로 들어서면 중간에 통신탑을 거친 후, 도리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널따란 헬기장으로 이루어진 도리산 정상은 서툴게 쌓아올린 돌탑 위에 비스듬하게 세워진 정상표지판이 정상표지석을 대신하고 있다. 그 표지판 너머로 망망대해(茫茫大海)가 끝없이 펼쳐진다. 통신탑 너머로는 돈목해수욕장 끝머리의 사구언덕과 상촌마을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하나 더, 상산봉이 한눈에 들어오는 것도 물론이다.

 

 

둘째 날 일정인 비금도의 선왕산과 그림산을 가기 위해서는 먼저 도초도로 나와야 한다. 우이도에서 도초도로 나가는 여객선(旅客船)이 있고(비금도로 나가는 배편은 없다), 그리고 가려고 하는 비금도는 도초도에서 서남문대교(大橋)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이도에서 도초도로 나가는 배는 돈목선착장에서 07:4013:20분에 있다. 소요시간은 1시간 30분 정도가 걸린다.

 

 

돈목선착장에서 도초도로 나오는 길, 어제 들어올 때보다 훨씬 더 파도가 높아져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날씨가 어제보다 더 나빠진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유는 단 하나. 어제 도초도에서 진리항까지는 내해(內海)인데 반해, 지금 나가고 있는 바다는 외해(外海)이기 때문이다. 파도를 막아주는 섬이 없는 외해는 평소에도 파도가 거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파도가 거칠다고 해서 선실 안에만 있을 수는 없다. 모두들 밖으로 나와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대느라 정신이 없다. 하긴 관광유람선(觀光遊覽船)을 타지 않고도 해안선(海岸線)에 펼쳐지는 절경을 구경할 수 있는데, 어느 바보가 그런 기회를 그냥 흘려버릴 수 있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선실 안에 있는 사람들보다 뱃전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숫자가 더 많다.

 

 

 

선착장을 벗어난 배는 도리산의 해안 절벽을 끼고 돈다. 시야(視野)에 들어오는 검은 절벽(絶壁)은 어지럼을 느낄 정도로 높다. 그리고 오랜 세월에 걸친 해식(海蝕) 작용으로 인해 온갖 기이한 형상을 하고 있다.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가 하면, 또 어떤 줄기는 공룡의 등줄기를 닮았다. 연이어 나타나는 기암괴석(奇巖怪石)에 사람들은 그저 탄성(歎聲)만 연발할 뿐이다. 그런 다음에는 손놀림이 바빠진다.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대느라 정신들이 없는 것이다. 사진에서나 보아온 절경(絶景)들이 해안선을 따라 끊임없이 펼쳐진다. 기암절벽(奇巖絶壁)과 수천 년 동안 바닷물에 씻기면서 만들어낸 온갖 기이한 형상들, 그리고 그 위에는 울창한 수림(樹林)이 의젓하게 앉아있다. 다들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모르고 있다. 물론 탄성도 빠뜨리지 않으면서 말이다.

 

 

 

 

 

돈목선착장을 출발한지 20분 남짓 되면 사람들이 살고 있는 작은 섬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본섬에서 떨어진 동서이도, 동소이도를 차례로 거친다. 배가 멈추면 한두 명씩 타고 내린다. ‘마치 군내(郡內)버스 같네요.’ 집사람의 말마따나 언젠가 오지(奧地)산행을 하기 위해 타야했던 군내버스를 연상시키는 풍경이다. 당시에 그 군내버스도 산골에 있는 마을마다 다 들른 후에야 우리를 가고자 하는 목적지 아래에 내려놓았었다. 배는 어제 우리가 내렸던 진리항을 마지막으로 거친 후 도초항()으로 향한다. 그리고 한시간 남짓이 지나면 도초도에 있는 도초항에 도착한다.

 

 

에필로그(epilogue)

신비의 섬’, ‘은둔의 섬우도는 많이 변해있었다. ‘신비의 섬이라는 표현은 아직까지도 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은둔의 섬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좀 난감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변해 있었다. 잠자리를 찾아 들어선 돈목마을의 풍경 때문이다. 15가구쯤 되는 돈목마을은 거의 모든 집이 민박(民泊)집을 겸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부부 단둘이 머물 방 한 칸을 빼낼 수가 없을 정도로 마을은 붐비고 있었다. 아직 여름철 성수기가 아닌데도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음은 그만큼 널리 알려졌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은둔의 섬이라는 표현은 버려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또 하나, ‘우이도에는 차량(車輛)이 단 한 대도 없답니다.’ 우이도로 들어오기 전에 누군가의 코멘트(comment)가 있었다. 차량이 움직일 만한 도로가 아예 없다는 것이다. 그는 우이도는 섬 전체가 산악지대(山岳地帶)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 흔한 섬 일주도로도 만들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저 걷고 또 걸으면서 섬을 구경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돈목마을에 도착해보니 의외로 자동차가 보였다. 그리고 돈목마을에서 성촌마을까는 차량이 다닐 수 있게 중간에 시멘트로 포장까지 되어 있었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이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는 표현을 썼었나 보다.

 

내도(內島)

 

여 행 일 : ‘13. 12. 25()

소 재 지 : 경남 거제시 일운면 내도

투어코스 : 선착장세심전망대신선전망대희망전망대동산(130m)왕복선착장(소요시간 : 2시간30)

함께한 산악회 : 기분좋은 산행

 

특징 : 내도는 거제도 남서쪽에 위치한 면적 0.25의 작은 섬이다, 그러나 국토해양부가 명품(名品)마을로 지정했을 정도로 일상에 지친 도시인(都市人)들이 잠시 머리를 식힐 수 있는 뭔가가 있는 섬이다. 내도의 바깥쪽에는 외도(外島)라는 또 하나의 섬이 있다. 둘은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는데, 섬의 생김새와 암벽(巖壁)의 높이에 따라 내도를 여자섬으로, 외도를 남자섬이라고 한다. 옛 이야기에 내도와 외도가 흐르는 바닷물에 몸을 맡기고 사랑놀이를 하고 있는데, 아침에 물 길러 나온 여인이 이 모습을 보고 섬이 떠내려 온다고 고함을 치게 된다. 이 바람에 섬은 지금의 자리에 멈추게 되었다고 한다. 남자 섬인 외도는 넓게 펼쳐져 강한 바람과 파도를 막아주고 있고, 거북 모양을 하고 있는 여자 섬인 내도는 파도를 이겨내면서 쉼 없이 외도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형상이다. 참고로 내도는 상록수림(常綠樹林)과 해안 바위가 조화를 이룬 섬으로 서이말 등대에서 바라보면 거북이가 외도를 향해 떠가는 형상을 하고 있어 '거북섬'이라고도 한다. 어족(魚族)이 풍부하여 낚시터로도 유명하며, 원시림 상태의 동백나무와 후박나무가 우거졌다

 

내도(內島)로 가는 길

내도를 운항하는 배는 거제도의 남단(일운면)에 위치한 구조라 선착장(舊助羅 船着場)에서 출발한다. 배에 오르면서 내려다보는 바다는 비취색 물빛을 하고 있다. 제주도에서 보던 그런 색깔인 것이다. 배가 출발하자마자 마이크를 잡은 선장님이 갑자기 선생님으로 변한다. 이것저것 해서는 안 되는 것을 늘어놓는 것이다. 물론 건너편에 보이는 거제8중의 하나인 공곶이해안(海岸)서울시청 앞 광장의 6배쯤 되는 제법 큰 섬이라는 내도(內島)에 대한 설명은 빼먹지는 않은 채로다. ‘관매도를 아능교?’그의 말에 의하면 우리가 찾아가는 내도가 관매도(觀梅島)에 이어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선정한 명품마을 제2호라는 것이다. 이렇게 귀한 섬이니 절대 쓰레기를 버리지 말고, 여행을 하면서 생기는 쓰레기는 되가져오라는 것이다. 그러나 필요 없는 걱정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알기로는 산행에 이골이 난 사람들이라면 결코 아무 곳에나 쓰레기를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참고로 구조라에서 출발하는 배편은 하루에 5편이 있다. 09, 11, 13, 15, 17시 등 5편이 있다. 그리고 거제도로 나오는 배도 다섯 편인데 0930, 1130, 1330, 1530, 1730분이다. 운임(運賃)은 기껏 해봐야 왕복 20분밖에 안 걸리는 거리에 1만원을 받으니 제법 비싼 편이다.

 

 

구조라선착장에서 유람선(遊覽船)에 오르면 10분이 채 못 되어 내도 선착장(船着場)에 도착하게 된다. 멀미에 약한 사람들이 걱정을 시작하기도 전에 도착했다는 게 딱 맞는 표현일 것이다. 내도는 해안선의 길이가 약 3.24Km에 불과한 작은 섬이다. 주민(住民)들이라곤 기껏 해봐야 20명이 채 안 되는 작은 섬이지만 내도 선착장에는 안내센터도 설치되어 있고, 멋들어지게 지어진 펜션들이 늘어서 있다. 그만큼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났다는 증거이리라. 숨어있는 섬이라는 얘기도 이제는 옛이야기가 되어버린 지 오래인 것이다. 하긴 하루에 유람선이 다섯 번을 왕복할 정도인 섬이 어떻게 숨어있는 섬이 되겠는가. 참고로 내도는 패총(貝塚)이 발견된 곳이어서 향토사적(鄕土史的)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는 곳이다. 패총은 가로 65미터 세로 30미터로 여러 층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이 유적에서는 무문토기 조각, 홍도 조각 및 승석문토기(繩蓆文) 등이 발견되어 청동기시대부터 철기시대까지의 인류 문화를 알 수 있는 유적지이다.

 

 

 

숨겨진 섬이라는 내도도 최근 변화를 맞았다. 선착장에 내리자마자 눈에 띄는 자연을 품은 섬, 내도라고 적힌 멋진 시설물이 그 증거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선착장 근처의 집들은 하나같이 3년 전 세미나 참석을 위해 들렀던 지중해 연안의 마르세유(Marseille)에서 보았던 멋진 집들을 쏙 빼다 닮았다. 하나 같이 이국적(異國的)인 멋을 풍기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내도가 행정안전부(行政安全部)가 추진하는 명품섬 BEST 10’, 그리고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추진하는 명품마을에 선정되면서 일어난 작은 변화라고 한다. 행안부에서는 누구나 가고 싶고 찾고 싶은 명품섬 BEST 10’을 선정한바 있다. 이들 섬들에 대해 도서지역(島嶼地域)의 특성과 고유자원을 활용해 관광활성화(觀光活性化)를 통한 소득증대, 일자리창출 등 지역경제활성화 등의 성과를 거둘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국립공원관리공단(國立公園管理工團)이 추진하는 명품마을은 자연생태계와 문화적 다양성을 연계하고, 국립공원 브랜드(brand)를 바탕으로 마을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추진하는 사업이다. 두 사업 모두 사업의 성공적인 추진을 위해서 많은 예산을 지원하고 있다. 이곳 내도도 역시 각각 25억 원, 5억 원의 예산을 지원받았다고 한다. 그 돈이 혹시라도 난개발을 하는데 사용되지 않았기를 바래본다. 있는 것을 그대로 살리면서 그저 외지(外地) 사람들이 섬에 들어왔을 때 불편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만 개발되었으면 하는 바람인 것이다. 내도가 상혼(商魂)에 오염됨이 없이 동백나무와 더불어 언제까지고 소박하고 평화로운 섬으로 남아 있기를 바래본다. 그 정도만 개발한다고 해도 이미 숨은 섬이란 의미는 퇴색해버리겠지만 말이다.

 

 

 

펜션(pension)들이 몰려있는 마을 앞의 해안선(海岸線)을 따라 난 길을 따라가다 보면 커다란 거북이 조형물(造形物) 하나를 만나게 된다. 아마 이 섬이 거북이를 닮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모양이다. 바다 건너에는 공곶이가 바로 코앞이다. ‘거제8중의 하나일 정도로 소문난 곳인데도, 건너편에서 바라본 탓인지는 몰라도 특별한 경관(景觀)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거북이 조형물을 지나면 곧이어 아치형으로 만들어진 문() 하나가 나온다. 문의 위쪽에 자연의 품은 섬, 내도 명품길이라고 적힌 이름표를 달고 있다. 내도 둘레길 탐방이 시작되는 것이다(이정표 : 세심전망대 0.6Km, 연인길삼거리 1.0Km, 신선전망대 1.3Km). 내도는 선착장 부근만 포장도로가 나있다. 나머지는 해안절벽(海岸絶壁)으로 이루어진 탓에 도로(道路)를 만들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들어진 길이 둘레길이다. 해안절벽 위로 난 둘레길은 동백나무 숲속으로 난 길을 따라 섬을 한 바퀴 돈 후에 다시 선착장으로 되돌아 올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둘레길의 초입은 비교적 작은 잡목(雜木)들이 무성하다. 그러나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 더 깊이 들어갈수록 숲은 울창해진다. 아름드리 동백나무와 편백나무가 원시림(原始林) 상태로 보존되고 있는 것이다. 허나 아쉽게도 동백은 꽃망울을 열지 않고 있다. 아직은 제철이 아닌 모양이다. 아까 들머리에서 꽃망울을 활짝 연 동백꽃을 보았기에 내심으로는 많은 기대를 했는데 아쉽기 그지없다. 내도에는 여러 가지의 나무들이 많지만 동백나무가 가장 많다. 올 봄에 다녀왔던 지심도가 떠오를 정도로 동백의 숲은 짙다. 아니 사실은 지심도에 한참 뒤떨어진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차라리 지심도보다 낫다. 지심도의 숲길은 이미 사람의 때로 물들어버린 탓이다. ‘12로 공중파를 탄 여파일 것이다. 그러나 이곳 내도의 숲길은 아직까지는 숲길 본연의 모습을 잃지 않고 있다. 돌맹이와 낙엽들이 수북한 숲길을 걷다보면 마치 옛날 우리네 뒷동산의 숲길을 걷던 느낌이 오롯이 되살아난다.  

 

 

 

얼마쯤 올랐을까 평상과 장의자를 갖춘 쉼터가 나타난다. 소나무 가지 사이로 남해바다가 열리면서 공곶이 해안이 내다보이는 벼랑위이다. 벼랑의 난간을 겸한 목책(木柵) 앞에 세워진 김명규시인이 쓴 내도(助羅島)’라는 시()가 적힌 안내판이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내도에서 만나게 되는 색다른 안내판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둘레길 들머리에서 만났던 안내도에는 탐방로를 둘러보는 동안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안내판들의 위치까지 세밀하게 표시해 놓았다. 심지어는 안내지도(案內地圖)OR코드까지 입혀놓은 안내판도 있다. 안내센터 옆에 세워 놓은 내도 종합 안내도가 바로 그것이다. 스마트폰을 이용할 경우 트레킹(trekking)하는 곳곳에서 공곶이, 서이말등대, 외도, 해금강, 바람의 언덕 등의 안내를 검색할 수 있도록 해놓은 것이다.

 

 

 

쉼터에서 조금 더 걸으면 동백 포토존이라고 쓰인 안내판이 나타난다. 내용은 동백나무의 특성에 대해 적어 놓았지만 동백나무가 무성한 숲이니 꽃이 만개할 때에는 사진 촬영하기에 딱 좋은 곳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주위는 동백나무 천지이다. 얼마나 울창하던지 어두컴컴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그리고 이 부근은 또 하나의 특색이 있다. 울창한 대나무 숲이 펼쳐진다는 것이다. 오른쪽은 동백나무 숲, 그리고 왼편은 대나무 숲, 이질적인 만남인데도 묘한 어울림을 연출하고 있다.

 

 

 

어두컴컴한 숲길을 지나면 갑자기 시야(視野)가 툭 터진다. 억새가 우거진 너른 평원(平原)이 나타난 것이다. 원시(原始)의 숲으로 둘러싸인 섬에서 만나게 되는 평원은 한마디로 이색적이다. 지금은 비록 맨몸만 남은 억새들이 바람에 몸을 내맡기고 있지만, 초가을에 억새꽃이라도 필라치면 하얗게 빛나는 억새꽃들이 장관(壯觀)을 연출하고도 남을 것이다.

 

 

 

억새의 평원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 얼마 지나지 않아 눈앞이 열리면서 바다가 펼쳐진다. 일출을 보기에 이만한 곳이 없다고 알려진 세심전망대(이정표 : 연인길삼거리 0.4Km, 신선전망대 0.7Km/ 내도안내센터 0.6Km)이다. 나무데크로 단정하게 지어진 전망대에 올라서면 왼편에는 서이말등대가 보이고, 오른편에는 내도의 모퉁이에 가려있는 외도가 빠끔히 머리를 내밀고 있다. 전망대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툭 터진 바다 너머에 대마도를 그려 놓았지만 눈에 잡히지는 않는다.

 

 

 

 

세심전망대를 지나면 또 다시 짙은 동백나무 숲속 터널을 통과해야 한다. 왼편 가까이에 있는 바다가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숲은 짙다. 얼마나 걸었을까? 아마 10분 조금 못되었을 것이다. 동백나무 숲이 갑자기 소나무 숲으로 바뀌면서 갈림길이 나타난다. 바로 연인길삼거리(이정표 : 신선전망대 0.3Km/ 희망전망대 0.7Km, 내도안내센터 1.0Km/ 세심전망대 0.4Km, 내도안내센터 1.0Km)이다. 이곳에서는 먼저 신선전망대를 둘러본 후에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 나와야만 한다. 마지막 전망대인 희망전망대로 가려면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진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앞서가던 집사람이 멈춰 서서 손짓을 하고 있다. ‘연리목(連理木)’이니 사진을 찍으라는 것이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녀의 말마따나 연리목을 닮기는 닮았다. 그러나 연리목은 아니다. 각기 다른 나무가 위에서 하나로 합쳐진 것을 연리목이라고 하는데, 이 나무는 아래에서부터 합쳐져서 올라온 것이다. 하긴 이 동백나무가 만일 연리목이었다면 이곳 지자체(地方自治團體)에서 그냥 놔두었을 리가 없다. 관광(觀光) 상품으로 연리목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연인길 삼거리를 지나면 동백나무와 소나무는 사이좋게 균형을 이룬다. 오른편은 소나무, 그리고 왼편은 울창한 동백나무 숲이 펼쳐지는 것이다. 그러나 길은 소나무 아래로 나있다. 잠깐 걸음을 멈추고 심호흡을 해본다. 소나무 특유의 피톤치드가 온몸에 퍼진다. 세속에 찌들어 있는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정화시켜준다.

 

 

 

연인길 삼거리에서 6~7분쯤 걸었을까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나고, 그 끄트머리에 나무데크로 만들어진 전망대(展望臺)가 보인다. 새로운 마음으로 거듭난다는 뜻에서 모티브(motive)를 땄다는 신선전망대이다. 전망대에 서면 일망무제(一望無題)로 조망(眺望)이 터진다. 왼편에는 서이말등대가 하얀 절벽 위에 오롯이 서있고, 오른편에 보이는 해안선은 해금강이다. 그리고 가운데에 보이는 것은 물론 외도이다. 그러나 그 뒤에 보이는 섬이 홍도라는 것에는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서해의 끄트머리에 위치한 홍도가 언제 이곳으로 옮겨졌단 말인가. 이곳의 안내도에도 대마도가 그려져 있으나 보이지 않는 것은 매 한가지이다.

 

 

 

 

 

 

연인길삼거리로 되돌아 나와 이번에는 희망전망대 방향으로 트레킹을 이어간다. 희망전망대로 연결되는 해안(海岸)길은 경사진 사면(斜面)의 허리를 뚫으며 나있다. 현재도 위험할 정도는 아니지만 해안 쪽에 목책(木柵)이라도 설치했으면 어떨까 싶다. 만일의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서 말이다. 가는 길에는 곳곳에서 조망(眺望)이 트인다. 그 수준은 공식적인 전망대에 결코 뒤지지 않을 정도이다.

 

 

 

희망전망대로 가는 길에 드디어 목말랐던 정경(情景)을 만나게 된다. 그렇게나 고대하던 동백꽃이 활짝 피어있는 것이다. 그것도 한두 그루가 아니다. 수십 그루가 무리를 지어 꽃망울을 활짝 열고 있다. 아까 보았던 안내판에서 동백꽃이 12월부터 핀다고 하더니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동백꽃은 양면성을 갖고 있는 꽃이다. 그중 하나는 새색시처럼 수줍은 꽃이라는 이미자와 다른 하나는 선홍빛 피의 애처로움이다. 옛날 선비들은 후자가 주는 이미지 더 강했던 모양이다. 귀양을 간 곳에 동백나무라도 있을 경우에는 가차 없이 잘라버렸다고 한다. 땅바닥에 떨어진 동백꽃을 보고 자신의 목이 댕강 떨어지는 것을 연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동백나무 숲이 짙어질수록 발자국 소리가 크게 들린다. 파도소리고 들릴 만 하지만 발자국 소리에 묻혀버린다. 그만큼 호젓한 산길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이런 길에서는 느림보의 미학을 즐겨보는 것도 하나의 호사(豪奢)일 것이다. 동백꽃과 눈을 맞추다보면 느닷없는 풍경이 길손을 맞는다. 그 많던 동백나무들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온통 억새뿐인 사면(斜面)길이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곧 이어서 희망전망대(이정표 : 내도안내센터 0.4Km/ 신선전망대 1.0Km)에 이르게 된다. 전망대에 서면 바다 건너에 있는 거제지맥의 라인이 곱다. 그리고 그 끄트머리에는 해금강이 앉아있다.

 

 

 

희망전망대에서 안내센터 방향으로 조금만 더 걸으면 다시 갈림길(이정표 : 내도안내센터 0.2Km/ 마을안길 0.14Km/ 신선전망대 1.18Km)이 나타난다. 만일 내도에서 제일 높다는 동산을 올라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곳을 그냥 지나치면 안 된다. 동산으로 올라가는 갈림길이기 때문이다. 내도는 외도의 바로 이웃에 위치하고 있지만 풍경은 사뭇 다르다. 외도가 잘 꾸며진 화려한 화원(花園)이라면 내도는 꼭꼭 숨어 있는 비밀의 숲처럼 은밀하다. 울창한 동백나무 군락지와 덩굴이 우거진 밀림 같은 숲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숲을 나와 부딪치는 파도 소리를 벗 삼아 바닷길을 걸어가는 기분은 마치 시간을 거슬러가는 듯하다.

 

 

 

 

 

궤도가 깔려있는 마을 안길을 따라 오르다보면 반가운 팻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동산으로 올라가는 방향을 알려주는 이정표 옆에 무궁화나무가 있는 곳이라고 적힌 팻말이 바로 그것이다. 언젠가 뉴스에서 봤던 그 무궁화나무일 것이다. 그다지 오래되지 않은 때 뉴스에 내도와 관련된 기사(記事)가 하나 올라온 일이 있었다. 내도에서 국내 최고령(最高齡)의 무궁화나무가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아랫부분의 둘레가 93이고 나무줄기 윗부분(수관)의 폭은 4~5정도인 이 나무는 한 폐가(廢家)의 앞마당에서 발견 되었는데, 조사결과 수령(樹齡)100년 정도 되었다고 한다. 무궁화나무가 있는 곳까지 다녀오려다가 그만 포기하고 만다. 거제도로 나가는 배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집사람의 채근 때문이다. 고집을 부린다면 다녀올 수도 있겠지만, 삼식(三食)이 소리를 듣고 있는 요즘의 난 집사람에게 고분고분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동산을 향해 걸음을 옮기면 먼저 사람이 다니기 힘들 정도로 우거진 산죽(山竹) 숲이 마중 나온다. 초입에 치유명상로(治癒冥想路)라고 적힌 자그마한 팻말이 세워져 있다. 아마 이곳 주민들이 만들어 놓은 모양이다. 이런 팻말은 이곳 말고도 정상 근처에서도 만날 수 있다. 나뭇가지 위에 걸려있는 명품내도신선경(名品內島神仙景)이라고 적힌 푯말도 눈에 띄는 것이다.

 

 

 

어설픈 바윗길을 지나서 조금만 더 오르면 드디어 동산의 정상이다. 그러나 정상은 밋밋한 구릉(丘陵)일 따름이어서 어디가 정상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저 제일 높은 지점이 정상이려니 할 따름이다. 그리고 정상은 아무런 특징이 없다. 구태여 하나 들라고 한다면 울창한 동백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것이다. 내도의 숲길은 동백나무로 시작해 동백나무로 끝을 맺는다고 할 수 있다동백나무 사이사이 감탕나무, 육박나무 등 상록활엽수도 보이지만 숲을 이루고 있는 나무들은 대부분 동백나무인 것이다. 쉽게 말해 동백나무 천지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이곳에 살고 있다는 동박새도 동백나무에서 울 것이고, 비록 오늘은 보지 못했지만 세상 넓은 줄 모르고 뛰어다니는 염소 때도 동백나무 사이를 헤치며 뛰어다닐 것이다. 한마디로 동백나무의 심연(深淵)이다. 울창하게 우거진 동백나무는 하늘도, 세상도 시야(視野)에서 차단해버린다.

 

 

 

정상을 둘러본 다음에는 다시 아까 지나왔던 삼거리로 되돌아 나와 선착장(船着場)으로 향한다. 선착장으로 내려오는 길에는 사람들의 고단한 삶이 묻어나는 풍경들이 눈에 띈다. 절반쯤 허물어져가는 빈집들이 보이는가 하면, 조그만 공터만 보여도 어김없이 계단식 밭들이 만들어져 있다. 손바닥만한 섬에서 그나마 살아가려면 저만한 공터를 그냥 버려둘 수는 없었을 것이다. 가난한 민초(民草)들이 살아온 삶의 흔적을 음미하며 경사진 계단길을 내려서면 선착장에 이르게 되면서 내도 트레킹이 끝을 맺는다.

 

 

선착장에 도착하니 배가 출발하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아있다. 서서히 여객선으로 걸어 나가는데 방파제(防波堤)가 온통 시커멓다. 검은 성게로 뒤덮여 있는 것이다. 여객선에서 뜰채를 빌려온 일행과 함께 성게사냥에 나섰다. 그러나 먹어보지는 못했다. 점심을 먹던 구조라의 음식점에다 요리를 부탁했는데 식사를 마치고 자리를 털며 일어날 때까지 가져오지를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나도 성게를 요리해달라고 부탁했던 것을 잊어버린 지 옛날이었다. 식사를 마칠 즈음에는 이미 술에 만취해 있었기 때문이다. 330분이 되자 배는 어김없이 선착장을 출발했다. 110분경에 섬에 도착했으니 2시간20분 동안을 내도에서 머문 것이다.

 

거제도 구조라(舊助羅) ‘샛바람 소리길과 수정봉(148m)

 

여 행 일 : ‘13. 12. 25()

소 재 지 : 경남 거제시 일운면 구조라리(舊助羅里)

투어코스 : 구조라보건소삼정마을 골목벽화길샛바람 소리길구조라성수정봉서낭당삼정마을(소요시간 : 1시간)

함께한 산악회 : 기분좋은 산행

 

특징 : 거제 동남쪽 끄트머리 은빛 모래밭을 배경으로 펼쳐져 있는 구조라마을. 넘실대는 푸른 바다에 기대어 살아가던 한적(閑寂)했던 이 마을이 변화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고 한다. 2003년에 정보화마을로 지정되면서부터라는 것이다. ‘정보화마을이란 정보화(情報化)에 소외된 지역에 초고속 인터넷을 이용 환경 조성과 전자상거래 등 정보 콘텐츠를 구축함으로써 지역주민의 정보 생활화를 유도하고 실질적인 수익을 창출함으로써 지역경제 활성화를 통해 주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자 행정자치부(. 행정안전부)에서 추진하는 사업이다. 구조라마을은 이 사업에서 더 나아가 거제, 아니 전국에서 제일가는 관광지(觀光地)를 꿈꾸었다고 한다. 신비스런 자연과 쪽빛바다를 자원(資源)으로 삼아서이다. 그로부터 1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어촌(漁村)과 관광(觀光)을 접목시킨 사업 아이템(item)은 성공을 거두었다. 거제에는 제1의 관광지라 할 수 있는 '천국의 섬 외도''대한민국 명승 2호 해금강'이 있다. 거기에다 하나 더 든다면 오늘 다녀온 은둔의 섬 내도가 있다. 이 곳에 가는 여행객들의 유치에 착안한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여행객들의 불편을 최소화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여행객들이 유람선을 타기 위해 기다려야 하는 틈새시간에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마을 골목길 담장에는 자원봉사자의 지원으로 벽화(壁畵)를 그려 동화 속 세상을 만들었고, 동네 뒤편 야트막한 시릿대 밭은 '샛바람 소릿길' 이란 골목길을 조성하여 여행자들에게 알렸다. 거기다 한려해상 국립공원과 논의해서 만든 약 2.5km의 탐방로도 큰 인기를 얻고 있다. 그 결과 이곳 구조라선착장을 이용하는 여행객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구조라 선착장까지 오는 길

이번 여행의 최종목적지는 내도(內島)이다. 내도에 가기 위해서는 먼저 거제도에 있는 구조라리(舊助羅里 : 일운면)까지 와야만 한다. 내도를 왕복하는 유람선(遊覽船)이 이곳 구조라선착장(船着場)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구조라까지 오려면 우선 대전-통영간고속도로를 이용해서 통영까지 와야 한다. 그런 다음에 14번 국도를 이용하여 거제도로 들어서서 장승포시가지를 지나 와현고개를 넘으면 망망대해(茫茫大海)을 바라볼 수 있는 구조라리에 이르게 된다. 구조라에는 규모를 갖춘 구조라해수욕장이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네비게이션(navigation)이 있다면 거제시 일운면 구조라리 44번지를 입력하여 구조라해수욕장 내도도선매표소에 닿는다.

 

 

 

구조라 선착장(船着場)은 너른 주차장시설을 갖추고 있다. 내도(內島)를 왕래하는 정기여객선 외에도 외도와 해금강을 왕래하는 유람선(遊覽船)들이 이곳에서 출발하고, 이를 이용하려는 여행객들이 그만큼 많이 몰려들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선착장은 다른 지역에서 보아오던 선착장의 풍경들과 다른 게 없다. 그러나 선착장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 범선(帆船) 모양의 외형(外形)을 한 공중화장실이 눈길을 끈다. 방문객들에게 조금이라도 이색적인 느낌을 주려했던 주민들의 고민이 느껴지는 장면이다. 

 

 

 

내도(內島)에 들어가기 전에 구조라마을 투어(Tour)와 수정봉을 다녀오기로 한다. 11시를 넘겨서 선착장에 도착한 탓에 다음 배가 출발하는 13시까지 1시간30분 정도의 여유시간이 남아돌기 때문이다. 위 구조라 마을의 특징에서 언급했던 자투리시간 활용이라는 주민들의 아이디어가 들어 먹힌다는 증거일 것이다. 샛바람길 탐방은 내도선착장 바로 앞에 있는 구조라 보건진료소앞에서 시작된다. 진료소에서 마을방향으로 조금 걸어가면 첫 번째로 마주치게 되는 게 구조라마을 횟집거리이다. 내도에서 돌아오는 길에 늦은 점심을 이곳에서 할 계획이기 때문에 관심을 갖고 횟집들을 기웃거리며 진행한다. ‘비싸요’ ‘관광지답게 제값 다 받네요.’ ‘차라리 통영으로 나가서 먹으면 어떨까요.’ 기웃거린 결과는 한결같이 비싸다는 얘기뿐이다. 그러나 부지런한 총무님이 발품을 판 덕분에 1인당 15천원에 회와 매운탕을 곁들인 풍성한 점심식사를 할 수가 있었다.

 

 

 

 

횟집거리를 둘러보다보면 샛바람 소리길을 가리키는 푯말과 함께 다양한 지도(地圖)와 안내판들이 눈에 띈다. 안내판의 인도에 따라 샛바람 소리길로 향하다보면 마을 골목길을 통과하게 된다. 그다지 길지 않은 골목의 담벼락마다 빼곡하게 벽화(壁畵)가 그려져 있다. 요즘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삼정마을(주조라리) 벽화이다. 이 벽화는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의 월 아트 봉사단이 그렸다고 한다. 그들의 선행에 박수를 보낸다. 좋은 일을 하는 이들이 있기에 우리 같은 사람들이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벽화(壁畵)가 그려진 골목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으나, 요즘에는 농촌마을에서까지도 흔해진 풍경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 풍경은 결코 싫거나 지루하지가 않다. 아름다운 그림을 보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애니메이션 캐릭터(animation character)들이 눈길을 끈다. 빨간 머리 앤이 창문에 두 손으로 턱을 괴고 저만치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고, 자전거를 타고 가는 파페의 모습은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갑다. 그러나 바닷가에 위치한 이 마을의 특성을 살린 탓인지 바다를 주제로 한 그림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요즘 유명세를 타고 있는 통영의 동피랑마을 벽화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발품을 판 대가로는 충분했다.

 

 

 

파페포포의 벽화를 지나면 샛바람 소리길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조약돌로 정성스레 가꾼 돌계단을 올라서면 샛바람 소리길임을 알리는 안내판(案內板)이 세워져 있다. 그런데 안내판의 위편에 적힌 보이소라는 문구가 눈길을 끈다. 옛날에는 이 숲이 너무 어두컴컴해서 대낮에도 어린이들은 들어가지 못했다고 한다. ‘우짜든가 둘이 드가서 댕기보이소라는 문구가 더욱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 혼자서 걸으면 무서우니 둘이서 함께 걸어야 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없다. 지금 내 옆에는 집사람이 함께 걷고 있으니까 말이다.

 

 

 

샛바람 소리길은 이곳 댕박동에서 언덕바꿈으로 올라가는 시릿대 오솔길을 말한다. 시릿대는 해안가에 자생하는 대나무과의 식물로서, 옛날에는 곰방대나 활시위를 만드는데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 시릿대 숲은 원래 밭둑의 경계선 역할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샛바람을 막아주는 방풍림(防風林) 목적으로 조성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여행객들에게 눈요깃거리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울창한 대나무 숲은 강렬한 햇살을 막아주어 한여름에도 항상 선선한 바람이 들락거린다고 한다. 그래서 이름까지도 샛바람 소리길이라고 붙여진 모양이다. 울창한 시릿대 숲을 사이에 두고 난 길은 혼자 걷기에 딱 좋다. 어두컴컴한 가운데서 길바닥만이 훤하다. 오로지 길만 훤하게 열려있는 것이다. 그런데 또 하나의 길이 살포시 나타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시릿대가 만들어내는 동굴의 천정에 눈부신 햇살이 또 하나의 길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하늘길이 샛바람에 흔들리며 춤을 추고 있다.

 

 

 

시릿대 오솔길은 낭만 그 자체이다. 돌담길과 어우러지며 멋스런 풍경(風景)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어두컴컴할 정도로 짙게 우거진 시릿대 숲길을 얼마간 걸으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왼편은 언덕바꿈 공원으로 올라가는 길이고, 오른편은 둘레길이다. 어느 방향으로 진행해야할 지는 배의 출항시간에 맞추어 결정하면 된다. 배시간이 얼마 남지 않을 경우에 이용하는 30분 코스부터 모두 둘러볼 수 있는 코스까지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전체를 다 둘러본다고 해도 한 시간 남짓이면 충분하니까 코스선택에 골머리를 썩일 이유는 없다. 어디 코스로 갈까?’ 가볍게 생각한 것이 언덕바꿈 공원구경을 빼먹는 우()를 범해버리고 말았다. 오른편 둘레길로 진행해서 구조라성과 수정봉 정상을 들른 후, 서낭당으로 내려오다 보니 공원을 빼먹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음에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둘레길 보다는 공원 쪽 코스를 선택하라고 권하고 싶다. 만일 둘레길로 진행했을 경우에는 구조라성벽(城壁)으로 가기 전에 왼편에 있는 공원까지 잠시 다녀와야 나 같은 우를 범하지 않게 된다.

 

 

 

 

둘레길로 방향을 잡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시릿대 숲이 끝나고 갑자기 시야(視野)가 뻥 뚫린다. 오른편에 바다가 나타나면서 구조라해수욕장이 펼쳐지고 있다. 이어서 조금 더 걸으면 다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오른편은 둘레길(약물바위 방향), 구조라성으로 가려면 왼편에 보이는 시멘트포장길로 올라가야 한다. 왼편으로 방향을 잡아 100m쯤 걸으면 능선 위의 삼거리(이정표 : 수정산 전망대 0.66Km/ 댕박동 0.3Km, 샛바람소리길 0.2Km/ 약물바위 0.36Km)에 올라서게 된다.

 

 

 

 

삼거리에서 작은 산봉우리 하나를 오른편으로 우회(迂廻)해서 뒤편 구릉(丘陵) 위로 오르면 구조라성()이다. 구조라성은 조선시대에 왜구(倭寇)의 침략을 막기 위해 쌓은 포곡식 산성(包谷式 山城 : 산기슭에서부터 능선을 따라 정상부까지 계곡을 하나 또는 여러 번 감싸고 축성하는 방식으로 비교적 그 규모가 크다)이라고 한다. 산성의 성벽(城壁) 위로 올라서면 주변 조망(眺望)이 시원스럽다. 수정봉과 본섬이 육지로 연결되어 있는데, 가운데가 홀쭉한 것이 흡사 장구(杖鼓)의 허리를 닮았다. 장구의 오른편은 선착장 왼편은 구조라해수욕장이다. 양 옆으로 펼쳐지는 바다는 에메랄드 색깔로 빛나고 있다. ‘쪽빛 바다란 어휘를 썼던 어느 시인의 마음이 가슴에 와 닿는 순간이다. 참고로 백사장의 길이가 700m쯤 되는 구조라 해수욕장은 수심(水深)이 얕고 물이 맑기로 소문이 나있는데, 거제도포로수용소의 미군들이 처음 개발하여 사용하였다고 한다. ‘바다로 세계로행사가 해마다 열리고 있다 

 

 

 

 

 

구조라성(舊助羅城 : 경상남도기념물 제204), 구조라는 수정봉이 넓게 펼쳐져 바람과 파도를 막아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예전부터 천연항구로서 사용되었다. 그래서 조선 성종 원년(1470)에 거제칠진의 하나로서 만호병정(萬戶兵政)을 둔 조라진()을 설치하였다. 임진왜란 이후인 선조 37(1604)에 옥포진 옆 조라에 옮겼다가 효종 2(1651)에 다시 지금의 위치로 돌아왔기에 구조라진(舊助羅鎭)이 되었다. 조라진이 주둔하던 곳에 만들어진 산성이 구조라성으로 둘레 860미터, 높이 4미터이다. 구조라성은 섬처럼 독립된 수정산의 북쪽 경사진 계곡에 자리 잡아 해안에서는 식별하기 어려운 지형을 이용하여 성을 쌓았다. 조선 성종 21(1490)에 축조하였는데, 조선시대 평지읍성 구조와 큰 차이가 없다.

 

 

 

산성 위에서 조망까지 즐겼다면 이제는 수정봉으로 올라갈 차례이다. 산성에서 수정봉으로 가는 길은 제법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그러나 그 길은 결코 힘들게 느껴지지 않는다. 거리가 짧은 탓도 있겠지만 길가를 가득매운 해송(海松)들의 영향이 더 클 것이다. 아무리 호흡이 거칠어져도 들어오는 공기가 워낙 청량하다보니 피로감이 느껴질 여유조차 없는 것이다. 피톤치드(phytoncide) 가득한 솔향이 코끝을 스치는 호사(豪奢)를 누리며 산행을 이어가다보면 10분 후에는 수정봉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수정봉으로 가는 길에 보면 허물어져가는 벙커(bunker) 하나가 보인다. 지금은 사용하고 있지 않지만 군인(軍人)들이 사용했을 것이다. 요 아래에 있는 구조라성은 왜구를 막기 위해 설치되었다는데, 이 벙커는 누구를 막기 위해 설치했었을까? 아직까지도 세간(世間)을 시끄럽게 만들고 있는 그놈들이 조금만 조용했다면 이걸 만드느라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수정봉 정상은 하나의 전망대(展望臺)이다. 조망(眺望)을 위한 데크는 두 개로 하나는 바다를 향해 있고, 또 다른 하나는 내륙을 향해 설치되어 있다. 바다 쪽의 데크에 올라서면 남해의 망망대해(茫茫大海)가 눈앞에 펼쳐진다. 전면에는 내도와 외도가 남해의 잔잔한 파도에 두둥실 떠 있고, 오른편에는 거제의 해금강이 아스라하지만 제법 또렷하게 나타난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심지어 대마도까지 보인다고 한다. 물론 뒤쪽의 데크에서는 구조라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쪽빛 바다와 어우러지는 구조라마을이 멋지지만 아까 성곽(城郭)에서 보았던 풍경보다는 조금 뒤떨어진다는 게 흠()이라면 흠이다.

 

 

 

 

 

 

 

 

 

 

하산은 올라왔던 반대방향(정상의 이정표 : 구조라성 0.32Km/ 군초소체험관 0.32Km/ 숲체험길 0.59Km)에서 시작한다.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구조라성 방향으로 진행하려는 것이다. 다른 목적은 없다. 올라왔던 길(숲 체험길)로 다시 내려가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싫고, 그렇다고 군 초소 체험관으로 내려가는 것도 마음에 내키지 않아서이다. 구조라성으로 내려가는 길은 무척 가파르다. 거기다 미끄럽기까지 해서 무척 조심스럽다. 아니나 다를까 일행 중에 엉덩방아를 찧는 사람들이 몇 있었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조심스럽게 내려서면 잠시 후에 삼거리(이정표 : 수정·삼정마을 0.44Km/ 자갈해변 0.21Km, 군초소체험관 0.31Km/ 수정산전망대 0.23Km)가 나온다. 오른편은 군초소체험관에서 오는 길이니 왼편으로 진행하면 된다. 이어서 밋밋한 언덕길을 잠시 걸으면 구조라성이다. 그러나 아까 지나왔던 성곽은 아니다, 깔끔하게 복원되어있던 아까와는 달리 이곳은 많이 허물어진 채로 방치되고 있다.

 

 

성벽(城壁)을 따라 조금 더 걸으면 성벽 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 서낭당이 나온다. 진흙과 돌로 정성들여 지은 것이 역력한 서낭당은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고즈넉이 앉아 있다. 서낭당은 산신당, 할미당, 천황당, 성황당, 국사당으로도 불린다. 그렇다면 구조라마을의 서낭당은 산신당(山神堂)이라고 부르는 게 맞겠다. 마을 시조인 감씨, 장씨를 기리는 별신제(別神祭), 수신제(水神祭)를 마을 안에 있는 당산목(堂山木)에서 지낸 후에 이 서낭당에 올라와 산신제를 지낸다고 하니 말이다.

 

 

 

서낭당에서는 곧바로 언덕바꿈 공원으로 올라갈 수가 있다. 그러나 공원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그냥 포구로 내려선다. 차속에 보관해 놓은 막걸리를 한시바삐 마시고 싶은 충동이 강해서이지만 공원으로 올라가는 길이 그다지 또렷하지 못한 것도 한몫을 한 것이 사실이다. 서낭당에서 내려오면 커다란 당산나무가 보인다. 나무를 가운데에 두고 빙 둘러 목책(木柵)을 쳐 놓은 것을 보면 아마 마을 보호수(保護樹)로 관리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느티나무가 서있는 위치가 영 헷갈린다. 당산나무는 원래 마을 입구에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다면 이곳이 마을 입구였다는 얘기인데, 이곳은 마을에서 볼 때 내륙(內陸) 쪽이 아니고 바다 방향이기 때문이다. 섬에 있는 어촌(漁村)마을이라 사람들의 통행이 주로 포구(浦口)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얘기일까 

 

 

 

여행지 : 대이작도 풀등

 

부아산을 둘러보고 난 후에는 어제 저녁에 잡은 바지락으로 미역국을 끓였다. 덕분에 어제 저녁 폭음으로 시달리던 내 뱃속이 화끈하게 풀렸다. 덕분에 낮에는 또 다시 술을 마시게 만들기는 했지만 말이다. 늦은 아침을 들고 난 후부터 바빠진다. 11시에 풀등으로 들어가는 보트가 뜨니 서둘러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다. 풀등으로 운항하는 보트는 매 10분마다 손님들을 실어 나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풀등에 가기 위해서는 먼저 작은풀안 해수욕장으로 가야만 한다. 풀등까지 데려다주는 보트가 작은풀안해수욕장에서 큰풀안해수욕장으로 넘어가는 산책길에 있는 정자(亭子)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해수욕장에 도착하면 먼저 승선권(乘船券)부터 구입해야만 한다. 승선권은 해수욕장입구에 있는 음식점에서 구입하면 된다. 운임은 어른 1만원, 초등학생 이하는 7천원이다. 이때 대이작도의 펜션에서 숙박했다고 하면 30%를 할인해 주니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표를 구입했다면 왼편의 나무테크 산책로를 따라 정자(亭子)까지 가야한다. 정자의 아래에서 보트가 출발하기 때문이다. 이때 정자를 그냥 통과하지 말고 잠깐 짬을 내어 정자에 설치된 망원경(望遠鏡)으로 풀등을 한번쯤 본 후에 승선장으로 내려가는 것을 잊지 말자. 직접 풀등으로 가서 보는 광경과는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정자 아래 승선장에서 풀등은 500m도 채 안 된다. 그러나 보트는 5분 정도 후에나 풀등에다 사람들을 내려놓는다. 너무나 가까운 것이 미안했던지 선장이 배를 좌우(左右)로 왔다갔다 해가면서 풀등으로 나아가는 탓이다. 뱃머리(船首)에 부딪치며 튀어 오르는 바닷물을 뒤집어 쓴 승객들이 비명을 지른다. 그러지 않아도 좌우로 흔들리는 배가 뒤집힐 것 같아 무서운데, 차가운 바닷물까지 뒤집어쓰다보니 비명을 지르지 않고는 못 매겨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 비명은 애달픔으로 들리지 않는다. 차라리 흥에 겨운 소리로 들리는 것은 나만의 착각은 아닐 것이다.

 

 

 

대이작도의 명물(名物)풀등TV방송 프로그램인 ‘12로 전파를 타면서 갑자기 유명해졌다. 때문에 요즘은 대이작도 자체의 관광(觀光)을 위해 찾는 사람들보다 풀등을 보러오는 길에 대이작도의 다른 곳까지 둘러보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고 한다. ‘풀등은 넓이 30만평, 길이 2km이며, 조수간만(潮水干滿)의 차이로 오전에 나타났다가 오후에는 바다 속으로 잠기는 환상의 섬이다. 하루에 두 번씩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광활한 모래섬인 것이다. 

 

 

 

 

풀등은 하루에 썰물 때에 맞춰서 6시간 동안만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봉긋하게 솟아오른 모래언덕에서는 자연의 신비를 경험할 수 있는 신비(神秘)의 섬이다. 동서 2.5km, 남북 1km의 규모로 드러나는 이 모래사막에서는 조개를 캘 수도 있다. 특히 여름철에는 수영까지도 즐길 수가 있다고 한다. 풀등에서 즐길 수 있는 시간은 고작 2시간에 불과하다. 이후 에는 물이 들어와 다시 배를 타고 작은풀안해수욕장으로 넘어와야 한다.

 

 

 

배를 타고 도착한 섬은 거대한 모래벌판으로 아득히 지평선이 보일 정도였다. 바다의 한가운데에서 만난 지평선(地平線)은 차라리 경이(驚異)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이다. 지평선과 수평선이 함께 있는 곳이라니 대이작도는 여전히 놀라운 곳이었다. 하루 두 번 물에 잠기는 덕에 지표면은 깔끔했고, 물도 맑았다. 보트에서 내린 사람들은 삼삼오오 짝을 이루어 마음에 드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사방이 모래사막이니 특별히 방향을 정할 필요는 없다. 그저 한가롭게 거닐면 그뿐인 것이다.

 

 

 

 

 

 

 

 

풀등에서 반지를 교환하면서 언약을 맺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속설(俗說)이 요즘 퍼지고 있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최근 사랑을 맺으려는 연인(戀人)들이 부척 늘고 있는 모양이다. 저 멀리 범위를 넓혀가고 있는 풀등의 해안선을 따라 걷고 있는 남녀 한 쌍이 보인다. 어쩌면 사랑을 약속하며 걷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장엄한 경관에 놀란 마음을 달래려 숨을 한 번 몰아쉬어본다. 비릿한 바닷내음이 코끝을 간질인다. 모래사장은 바다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터라 단단하면서도 촉촉한 기운을 머금고 있다. 가족끼리, 연인끼리 풀등을 찾은 관광객들은 천천히 해안가를 걸으며 여유를 즐기고 있다. 조개를 캐고 있는 사람들도 눈에 띈다. 천혜의 자연 환경을 간직한 풀등은 삶에 지친 사람들을 자기만의 방식대로 그렇게 위로하고 있었다.

 

 

 

 

 

 

여행지 : 대이작도 부아산

산행코스 : 장골마을삼신할머니약수공원 갈림길고갯마루 소공원구름다리부아산 정상역순으로 원점회귀

 

 

아침을 먹기 전에 부아산을 올라보기로 했다. 물론 집사람과 단 둘이다. 다른 일행들은 그다지 등산을 즐기지도 않을뿐더러, 어제 저녁 늦게 잠자리에 들었던 탓에 아직까지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산행은 펜션 옆의 사거리에서 선착장으로 연결되는 도로를 따라 고갯마루로 올라가면서 시작된다. 고갯마루를 향해 오르다보면 얼마 안가 마을 보호수인 소나무가 나타나고, 이어서 찻길 옆 의자에 할머니가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삼신할미약수터 입구에 만들어 둔 조형물(造形物)이다.

 

 

 

 

 

 

 

 

 

 

약수터로 가는 계단을 따라 내려서면 숲 속에 숨어 있는 샘터가 눈에 들어온다. 약수(藥水)를 내뿜고 있는 용머리를 정자(亭子)가 품고 있는 것하며, 주변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것을 보면 관리가 잘 되고 있는 듯하다. 시원한 약수를 한 사발 들이키고, 빈 페트병(PET)까지 가득 채우고 난 다음에 다시 삼신할머니 조형물로 되돌아 나온다.

 

 

 

 

 

고갯마루를 향해 다시 발걸음을 옮기면 잠시 후에는 산을 오르는 포장도로와 나뉘는 갈림길(이정표 : 부아산 정상 0.9Km/ 작은풀안해변 0.5Km, 큰풀안해변 1.2Km)이 나타난다. 오른편에 보이는 길이 부아산 정상의 공원지대로 올라가는 길이다. 올라가는 도로변은 특이하게도 가로수로 배롱나무를 심어 놓았다. 경사(傾斜)가 완만(緩慢)한 오르막길인데다가 길가에 배롱나무까지 꽃을 활짝 피웠으니 이건 산행이 아니라 산책을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것도 느림보의 미학을 추구하면서 걷는 여유로운 산책을 말이다. 배롱나무가 끝나면 코스모스 꽃길이 나타나면서 가을이 무르익어 가고 있음을 알려준다.

 

 

  

 

 

갈림길을 출발한지 10분 남짓이면 고갯마루에 올라서게 된다. 고갯마루에 이정표(구름다리 120m, 팔각정(부아정) 200m/ 전망데크 80m/ 장골마을 500m)와 부아산탐방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니 살펴보고 코스를 정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부아산 정상은 이곳에서 왼편으로 올라서야 하지만, 잠시 짬을 내여 오른편에 보이는 언덕 위에 올라가 보는 것도 좋다. 꼭대기에는 2개의 정자와, 운동시설, 화장실 등이 설치된 전망 좋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정자에 오르면 승봉도 등 인근 섬들과 부아산 정상, 그리고 송이산이 잘 조망(眺望)된다. 특히 공원의 화단에서 활짝 핀 해당화를 볼 수가 있는 것이 이채롭다. 대이작도의 트레이드마크인 섬마을 선생님이 자연스럽게 머리에 떠오르며 자신도 모르게 고개는 송이산 너머로 향한다. 그러나 송이산으로 향하는 것은 사양을 한다. 송이산으로 향하는 산길(이정표 : 송이산 1.0Km)이 잡초(雜草)가 무성한 탓에 걷기가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다시 고갯마루로 되돌아 나와 이번에는 부아산 정상으로 향한다. 들머리는 쇠파이프로 아치(arch)를 만들어 놓았다. 아치를 통과하고 나면 이어서 87개의 침목(枕木)으로 만들어진 계단의 나온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계단이 폭신폭신하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나무로 된 침목이 아니고 화학재료를 사용하여 침목모형으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침목계단을 지나면 금방 구름다리가 나온다. 길이 68미터에 높이가 7미터인 구름다리는 비록 규모는 작지만 꽤 스릴이 있고, 또한 주변 경관(景觀)을 한눈에 볼 수 있어서 좋다. 때문에 대이작도를 찾는 사람들로부터 포토 존(photo zone)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구름다리를 지나면 오른편 언덕(이정표 : 정상 전망데크 0.1Km, 여객선 부두 2Km/ 송이산 1.5Km) 위에 팔각정 하나가 보인다. 정자에 올라서면 승봉도와 자월도가 가깝게 다가온다. 팔각정의 옆에는 봉수대가 복원(復原)되어 있다. 이 봉수대는 연변용수(해안가 및 도서지역에 설치)로서, 이곳이 한반도 최고의 요충지(要衝地)라 여겼기 때문에 5(다섯 개의 봉수)를 설치하였다고 한다. 이 봉수는 남양부(현재의 화성시)를 경유 한양의 목면산(현재의 남산) 봉수대에 집결되도록 하였다.

 

 

 

 

 

 

 

 

봉수대(烽燧臺)에서 정상의 전망데크까지는 100m에 불과하다. 부아산은 대이작도에 대표적인 산으로 정상의 높이는 159m로 낮은 산이지만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뛰어나다. 정상에 설치된 전망데크에 올라서면 승봉도와 소이작도, 사승봉도, 덕적도, 소야도, 굴업도 등이 한눈에 들어와 가슴까지 시원해진다. 시야(視野)가 시원스럽게 트이는 날에는 송도의 높은 건물들까지 보인다고 하지만 아쉽게도 오늘은 보이지 않았다. 정상을 둘러보고 난 후에는 아까 올라왔던 길을 따라 역순(逆順)으로 내려오면 된다. 장골마을에서 부아산 정상까지 갔다가 다시 되돌아오는 데는 1시간20분이면 충분하다.

 

 

 

 

 

여행지 : 대이작도(大伊作島)

 

소재지 : 인천광역시 옹진군 자월면 이작리

여행일 : ’13. 9. 21~22

함께한 사람들 : 처갓집 식구들과 가족여행

 

특징 : 인천에서 남서쪽으로 약 44떨어진 섬으로서, 임진왜란 이후 해적들이 살았다고 하여 이적도(伊賊島)라 부르다가 이작(伊作)으로 변화되었다고 전한다. 전체적으로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길게 뻗어있는데 면적이 큰 섬을 대이작도, 서쪽에 있는 작은 섬을 소이작도라고 부른다. 우리가 찾은 대이작도는 면적 2.57, 해안선길이 18에 불과한 작은 섬이지만, 맑은 물과 깨끗한 백사장, 울창한 해송(海松) 숲 등의 비경(秘境)을 간직하고 있다. 특히 썰물 때에만 드러나는 모래사막인 풀등에서도 노닐 수 있다는 점이 TV(12)를 통해 세상에 널리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들어가는 방법 : 대이작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인천의 연안부두안산의 대부도로 와야만 한다. 이 두 곳에서 대이작도로 들어가는 여객선이 출항(出航)하기 때문이다. 먼저 인천여객선터미널에서는 자월도와 대이작도, 승봉도 등을 거치는 대부해운(032-887-6669)의 대부고속훼리5(08:00)와 우리고속훼리(032-887-2891)의 쾌속선 레인보우호(09:00)가 비수기 기준 평일 1회씩 운행하고 있다. 대이작도에서 인천으로 돌아오는 시각은 오후 3(쾌속선)와 오후 330(대부해운의 차도선)이다. 주말과 휴일에는 12회로 증편 운항(運航)한다. 운임은 성인(成人)기준으로 1인당 41,700(쾌속선 왕복)25,200(차도선 왕복)이다. 그리고 대부도 방아머리선착장에서는 승봉도와 대·소이작도 등을 경유하는 대부해운(032-886-7813)의 대부고속훼리7호가 비수기 기준으로 평일에 11(09:30) 출항한다. 승봉도에서 돌아오는 배는 오후 350분에 떠난다. 물론 이곳도 주말과 휴일에는 12회 증편(增便) 운항된다. 운임(運賃)은 성인기준으로 1인당 왕복이 19,600원이니 인천항보다 약간 저렴한 편이다. 참고로 우리는 대부도 방아머리선착장을 이용했는데 추석연휴기간 이어선지 보통 때보다 왕복 2,000원씩을 더 받고 있었다.

 

대이작도에 들어가기 위해서 어느 여객선터미널을 출항지로 삼아야 할지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소요시간, 주차장 문제 등 많은 주의가 필요하다. 특히 주차문제를 소홀히 할 경우에는 즐거워야할 여행을 시작도 하기 전부터 망쳐버릴 염려가 있다. 대부도의 방아머리선착장은 주차장이 협소(狹小)한 탓에 주말에는 주차(駐車)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수준이기 때문이다. 만일 주차를 못할 경우에는 별수 없이 차량을 배에다 싣고 섬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이런 상황이 발생이라도 할 경우에는 차량 운임(편도 기준 : 중형 4만원, 대형 45천원, 외제 5만원)을 추가로 부담해야함은 물론, 돌아올 때에 차량을 배에다 실어야하는 걱정까지도 짊어져야 한다. 돌아오는 배에 실을 수 있는 차량의 숫자가 20대에 불과한 탓에, 자칫 잘못하면 하룻밤을 더 섬에서 묵어야만 하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우리 일행은 차량을 싣고 돌아오기 위해 출발 전날 저녁부터 선착장에다 차를 옮겨 놓고 대기하느라 운전자는 일부 일정을 포기해야만 했다.

 

 

배를 탄 사람들의 모습은 천태만상(千態萬象)이다. 휴게실에서 늘어지게 잠을 즐기는 사람, 삼삼오오 둘러앉아 술을 마시는 사람,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새우깡을 들고 갈매기들을 유혹하고 있다. 각자 나름대로 2시간의 운항시간을 채우고 나면 목적지인 대이작도에 이르게 된다. 40Km 남짓한 거리를 2시간 가까이 걸렸으니 고속훼리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느리게 달려온 샘이다. 차량까지 함께 싣는 도선(渡船)이다 보니 어쩔 수 없었을 게다. 그렇다고 해서 인천항에서 쾌속선을 탈 필요는 없을 것이다. 2배에 가까운 운임을 지불하면서까지 시간을 단축하느니보다는 모처럼의 여행을 바다를 벗 삼아 느긋하게 즐겨보는 것도 하나의 낭만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매점(賣店)에서 파는 새우깡을 하나 사서 갈매기 들을 희롱해보는 것도 여행의 즐거움이 되기에 충분하다.

 

 

 

 

 

 

선착장(船着場)에 내려서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커다란 아치(arch)형 문()이다. 상단(上端)에 적힌 영화의 고향 섬마을 선생님’ ‘대이작도 방문을 환영합니다.’라는 글귀가 왠지 살갑게 다가온다. 깔끔한 화장실을 갖춘 선착장에는 매표소와 탐방안내소, 그리고 음식점과 매점 등의 편의시설들을 두루 갖추고 있다. 선착장의 광장(廣場)에는 수많은 차량들이 늘어서 있는데, 배에 실으려는 차량들 외에도 여러 대의 차량들이 눈에 띈다. 차량들마다 펜션의 이름표를 달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 펜션을 찾은 손님들을 태우기 위해서 나온 모양이다. 참고로 대이작도에는 섬 내를 운행하는 대중교통편이 없다. 대신 방을 예약하면 펜션에서 오고가는 차편을 제공한다. 펜션에서 내보내준 차량을 타고 장골마을로 향한다. 장골마을은 섬의 한 중간에 있는 마을로서 곁에 작은풀안 해수욕장을 끼고 있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펜션을 잡을 경우에는 이곳 장골마을이 가장 낫지 않을까 싶다. 섬의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섬의 곳곳을 둘러보는데 소요되는 이동거리가 가장 짧기 때문이다. 물론 대이작도의 명물인 풀등으로 들어가는 보트도 장골마을 옆에 있는 작은풀등 해수욕장에서 출발한다.

 

 

 

 

 

 

 

우리가 묵을 금모래은모래 펜션은 장골마을에서도 가장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섬을 관통하는 중심도로 두 개가 교차(交叉)하는 사거리의 한쪽 코너(corner), 그러니까 장승공원(公園)의 맞은편 코너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굳이 이 펜션을 선택한 이유는 중심에 위치해서가 아니다. ‘이작 아일랜드 펜션풀등펜션등 이름난 펜션, 특히 ‘12촬영팀의 베이스캠프였던 풀등펜션을 제켜두고 고작 세 팀(team) 밖에 수용할 수 없는 작은 펜션을 선택한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우리 일행같이 여러 세대가 한꺼번에 묵을 잠자리를 잡을 때에는 가능하면 방의 숫자가 많은 곳이 유리하다. 아무리 친족(親族)들 일지언정 세대들마다 지키고 싶은 나름대로의 비밀들이 있는 법이고, 그런 때에는 세대들만의 공간이 따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의 여행객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곳이 바로 금모래은모래펜션이다. 대이작도의 펜션들은 대부분 원룸(one-room)형인데 비해, 금모래은모래펜션은 투룸(one-room)이기 때문이다. 세대마다 침실과 거실, 그리고 샤워장을 겸한 화장실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거기다 호실마다 정자(亭子)를 따로 갖추고 있기 때문에 실외(室外)에서도 다른 팀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껏 즐길 수가 있다는 장점이 있다. 자세한 정보는 홈페이지에 들어가 확인해 보기 바란다. 또 하나의 장점은 마음씨 좋은 사장님이다. 한마디로 한량을 닮은 멋쟁이 사장님에게 말만 잘하더라도 펜션의 명물인 전기자동차까지 얻어 탈 수 있는 행운이 주어진다. 물론 선착장까지 이다.

 

 

 

 

펜션에 짐을 풀자마자 정자(亭子)에 둘러앉는다. 방아머리선착장에서 사온 생선회를 싱싱함이 가시기 전에 먹어치우기 위해서이다. 자연산이라는 광어회와 갓 삶은 소라는 싱싱하면서도 맛이 있었다. 비싼 값을 하는 모양이다. 생선회를 안주 삼아 마신 소주가 얼큰하다면 이번에는 해수욕장으로 나가볼 차례이다. 펜션에서 100m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풀안 해수욕장이다. 대이작도는 비록 작은 섬이지만 작은풀안 해수욕장과 큰 풀안 해수욕장을 비롯해서 목장불 해수욕장, 장골 해수욕장, 띄넘어 해수욕장 등 다섯 개의 해수욕장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 경사(傾斜)가 완만(緩慢)하고 고운 모래가 깔려 있어 아이들도 안전하게 물놀이를 즐길 수 있다. 이번 여행에는 펜션에서 가장 가까운 작은풀안 해수욕장만 둘러볼 계획이다. 대이작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해수욕장이기 때문이다. 비록 해변(海邊)의 규모는 작지만 주변에 민박집과 펜션 등 편의시설이 많고 풍광(風光)이 아름다운 것이 그 이유일 것이다.

 

 

 

해수욕장에 들어서면 가장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널따란 백사장과 그 너머로 펼쳐지는 수평선이다. 백사장의 뒤에는 해송(海松)이 해변을 둘러싸고 있는데, 조림(造林)을 한지 얼마 되지 않는 듯 햇빛을 피하기 어려울 정도로 덜 자라있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해송 숲 앞에 예술적 감각이 펄펄 넘치는 구조물을 만들어 놓아 햇빛을 피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철이 지난 백사장은 사람들이라고는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 한가롭다. 지난여름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저 백사장에서 뛰어 놀았을까? 이런 것을 보고 격세지감(隔世之感)이라고 하지 않나 싶다.

 

 

 

 

작은풀안 해수욕장의 왼편에는 해안을 따라 데크길이 개설되어 있다. ‘큰풀안 해수욕장까지 연결된 해변 산책로(散策路)이다. 이 산책로를 따라가 보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암석(巖石)을 볼 수 있다. 무려 251,000만년이나 됐다고 한다. 이 암석은 땅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열에 의해 암석의 일부가 녹을 때 만들어지는 혼성암(混成岩 , Migmatite)이란다. 나이가 25억년이면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보고된 다른 기반암(基盤岩, bed rock)들의 나이인 약 19억년보다 훨씬 오래된 암석이 분명하다. 데크길의 끝에는 커다란 정자가 하나 세워져 있는데, 이곳에서 보는 큰풀안 해변과 사승봉도, 풀등 등 주변 풍광이 근사하다.

 

 

 

 

 

 

해수욕장을 둘러본 후에 시간이 남는다고 해서 조개를 줍는다고 모래사장을 뒤지는 우()를 범하지 않는 것이 좋다. ‘작은풀등 해수욕장의 모래사장에는 조개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긴 어느 해수욕장이라도 해도 갯벌이 아닌 모래사장에서 조개를 잡을 수는 없을 것이다.

 

 

작은풀안 해수욕장을 둘러보고 난 후에는 문화탐방으로 일정을 잡는다. 섬의 끝머리에 있는 섬마을 선생님촬영지를 둘러보려는 것이다. 섬마을 선생님 촬영장소로 유명한 계남분교는 대이작도 맨 끝에 위치한 계남마을에 세워졌던 자월초등학교의 분교(分校)이다. 계남마을은 장골마을에서 쉬지 않고 걸어갈 경우 20분이면 충분한 거리이다. 물론 아스팔트 차도(車道)가 닦여있으니 차량을 이용해도 된다. 대이작도의 동남쪽 끄트머리에 있는 계남마을은 자그마한 포구(浦口)이다. 비록 해수욕장을 끼고 있지는 않으나 거북바위 등 주변경관이 빼어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덕분에 이곳에도 민박집과 펜션들이 많이 보인다.

 

 

 

 

 

 

 

▼ 50~60대 중,장년들이라면 누구나 섬마을 선생님이라는 영화(映畵)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1967년 김기덕감독이 만든 이 영화는 농촌계몽(農村啓蒙) 등의 대립과 갈등의 요소를 통해 당시 시대상(時代相)을 반영했던 영화이다. 특히 이미자가 부른 동명의 주제가(主題歌)는 대 히트(hit)를 기록했었다. ‘해당화 피고 지는 섬 마을에 철새 따라 찾아온 총각 선생님’, ‘열아홉 살 섬 색시가 순정을 바쳐 사랑한 그 이름은 총각선생님

 

 

 

 

당시 섬마을 선생님의 배경은 남해안의 조그만 섬이었다. 그러나 영화의 촬영지(撮影地)는 대이작도에 있는 자월초등학교 계남분교였다. 이곳은 아직까지도 영화를 기억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촬영지를 찾아 온 후에는 한숨부터 쉬게 된다. 폐교(廢校)가 된 채 방치되어 있는 학교는 현재 쓰러지기 일보 직전, 철거하다가 남은 빈 건물처럼 허물어지고 망가진 채 덩그러니 형태만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운동장에 덩그러니 남아있는 촬영장소 기념비(紀念碑)만 아니라면 이곳이 촬영지, 아니 옛날 초등학교가 있었던 자리인지도 모를 지경이다. 이왕에 관광객들을 유치하고 있고, 관광안내도에 섬마을 선생님촬영지까지 소개하고 있는 바에는 관리에 신경을 써주면 어떨까 싶다.

 

 

 

 

 

저녁이라고 그냥 잠만 잘 필요는 없다. 썰물 시간에 맞춰 바닷가로 나가면 즐거운 소일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갯벌에 들어가면 잡는다는 것보다 차라리 줍는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만큼 조개가 지천으로 널려있다. 바지락과 조개, 고동이 즐비하다. 거기다가 자그만 게까지 잡을 수 있으니 이보다 재미있을 수가 없다. 미처 예상치 못한 일정이라서 손전등을 준비 못했다고 해서 발을 동동거릴 필요는 없다. 핸드폰 불빛이면 한 시간 정도는 충분히 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조개를 보다 많이 주우려면 해수욕장보다는 선착장(船着場) 근처의 갯벌로 나가는 것이 좋다. 모래사장이 없이 온통 갯벌로 이루어진 탓에 조개 줍는 재미가 훨씬 더 쏠쏠하기 때문이다.

 

 

 

 

여행지 : 지심도(只心島)

 

소재지 : 경상남도 거제시 일운면 옥림리

여행일 : ’13. 8. 4()

함께한 사람들 : 영진투어(소나무산악회)

 

특징 : 오늘은 제주 여행의 넷째 날로 여행이 끝을 맺는 날이다. 삼천포에 이른 새벽에 도착하여 서울로 올라가기 전에 거제도의 명품(名品) 관광지 중의 하나인 지심도에 들렀다. 지심도는 지세포에서 동쪽으로 6떨어진 해상에 있으며, 면적은 0.356, 해안선길이는 3.7, 최고점(最高點)97m이다. 조선시대 현종 때 주민 15세대가 이주하여 살기 시작하였으며 일제강점기에는 군()의 요새(要塞)로서 일본군 1개 중대가 광복 직전까지 주둔하였다. 현재는 약 10여 가구, 2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지심도는 자그마한 섬이기 때문에 한 바퀴 돌아보는데 어른 걸음이면 한 시간도 채 안 걸린다. 그러나 섬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자꾸만 잡아챈다. 가는 곳마다 끊임없이 멋진 풍경을 내보이는 것이다. 그러니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산책(散策)하듯 섬을 둘러보는 것이 좋다. 관람 순서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만 선착장에서 해안절벽, 포진지, 일주도로, 동백터널, 해안전망대 순이 바람직하다. 동선(動線)에 맞게 섬을 편안히 둘러볼 수 있는 코스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일제 때는 멀리서 보면 작은 보리알이 바다에 떠 있는 것 같다고 하여 보리섬, 일인들은 무기시마라고 불렀다고 한다. 지심도(只心島)란 이름은 섬 모양이 마음 심()자를 닮았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지심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장승포항()으로 와야 한다. 지심도로 들어가는 배가 장승포항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1시간에 1대꼴(휴일 기준)로 다니는 유람선(遊覽船)은 장승포 선착장(船着場)을 떠난 지 불과 20여분이면 지심도 선착장에 도착하게 된다. 장승포선착장에서는 보이지도 않던 지심도였는데, 지심도선착장에 내려 바라본 거제도는 손에 잡힐 듯 가깝다. 그만큼 거제도가 크다는 의미일 것이다.

 

 

 

 

지심도 트레킹은 섬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선착장을 벗어나 제법 가파른 길을 오른다. 선착장과 마을을 이어주는 유일한 길로서, 지심도에서는 유일하게 콘크리트로 포장된 길이다. 지그재그로 이어지는 길을 오르다보면 첫 번째 방향을 꺾는 지점에 전망대(展望臺) 하나가 보인다. 그러나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다. 바다 건너에 있는 거제도 외에는 별다른 볼거리가 없기 때문이다.

 

 

 

 

산비탈을 길게 가로지르듯 하며 난 콘크리트 포장도로를 따라 오르면 곧 울창한 동백숲속으로 들어서게 된다. 팔뚝만한 굵기의 것부터 허벅지만한 것까지 수많은 동백나무가 바다와 하늘을 가리고 있다. 여러 번 눈을 슴벅이며 어둠에 적응한 뒤에야 그 숲 그늘 안의 풍경이 눈에 들 정도다. 그 풍경 속에 동백과 어우러진 민가(民家)가 나타난다. 민가라고 해도 우리가 흔히 보아오던 그런 민가는 아니다. 이곳 지심도의 주민들은 대부분 민박(民泊)집을 겸하고 있기 때문에 일반 여염집이라기보다는 음식점 분위기에 가까운 것이다. 이곳이 해안절벽과 일주도로(포진지)의 갈림길(이정표 : 마끝(해안절벽) 0.2Km/ 포진지 0.45Km/ 선착장 0.35Km)이다. 이곳에서는 오른편에 있는 해안절벽으로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래야 동선(動線)이 겹치지 않기 때문이다.

 

 

 

 

갈림길에서 오른편 150m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지심도 자가발전소(이정표 : 해안절벽 0.2Km)에서 시멘트 길은 끝이 난다.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서 오솔길로 접어드는 것이다. 해안절벽(海岸絶壁)을 관광코스로 개발한지는 그리 오래되지는 않은 모양이다. 바닥에 깔아 놓은 야자수로 만든 망()이 아직까지도 새것인 보면 말이다. 100m 조금 넘게 내려서면 시야(視野)가 트이면서 바다가 내다보인다. 해안절벽에 이른 것이다.

 

 

 

 

 

해안절벽은 말 그대로 절벽(絶壁)이다. 가파른 절벽에 투박하게 솟은 바위와 그 사이로 부딪히는 파도가 나름대로 돋보이지만, 며칠 전에 들렀던 상족암 등 다른 이름난 관광지의 해안(海岸)보다는 한참이나 격이 뒤떨어진다. 그러나 동백나무 일색인 동백섬에서 만나게 되는 소나무들은 의외로 신선하다. 오랜 세월 해풍(海風)과 맞서 온 늙은 소나무군락이 먹먹한 감동을 주는 것이다. 섬의 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이곳은 '마끝'이라고도 불리며 KBS 주말 예능프로그램인 '12'에 방영된 곳으로도 유명하다.

 

 

 

 

 

해안절벽에서 아까 지나왔던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포진지(砲陣地)로 향한다. 이곳 삼거리 부근이 지심도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인 모양이다. 제법 많은 수의 민가가 보이는 것을 보면 말이다. 민가의 가옥(家屋)들은 하나 같이 처마가 낮은 목조건물(木造建物)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낯선 풍경에 화들짝 놀라게 된다. 지심도에는 차량(車輛)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길가에 차가 세워져 있는 것이다. 비록 바퀴 세 개에 차량 번호판까지 없는 귀염둥이 차였지만 버젓한 차()였다. 이 조그만 섬에서 무엇 때문에 차량이 필요했는지는 끝내 풀지 못한 의문이었다.

 

 

 

 

 

마을을 지나고 나면 국방과학연구소앞에서 사거리(이정표 : 포진지 0.15Km/ 해안선전망대 1.3Km/ 선착장 0.75Km)를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 오른편은 국방과학연구소, 왼편은 해안선전망대로 가는 길이다. 포진지로 가려면 맞은편에 보이는 흙길로 들어서야 한다. 그런데 이 조그마한 섬에 무슨 이유로 포진지가 구축되었을까? 사거리에서 포진지는 금방이다. 지심도는 아름다운 풍광(風光)만큼이나 아픈 역사(歷史)를 품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일제(日帝) 강점기 말(强占期 末), 태평양전쟁에 혈안이 된 일본군이 해안방어(海岸防禦)를 위해 섬 곳곳에 군사시설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덩그렁 남아 있던 탄약저장고는 현재 지심도 역사교육관(歷史敎育館)’으로 쓰고 있다. 어두컴컴한 탄약고에 들어가자 저절로 불이 켜진다. 벽면에는 지심도의 역사에서부터 생활상과 포진지가 언제 설치되었는지 등에 대해 자세히 적혀 있다. 지심도의 아픈 역사를 기록으로 남겨놓은 것이다. 그래서 다시는 다른 나라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일이 없도록 찾는 이들에게 경각심(警覺心)을 불어넣어주고 있다.

 

 

 

 

 

 

 

국방과학연구소 앞 사거리로 되돌아와 해안선전망대로 향한다. 300조금 못되게 걸으면 하늘이 활짝 열리면서 넓은 초지(草地)가 모습을 드러낸다. ‘활주로(滑走路)’라 불리는 곳이다(이정표 : 망루 1.2Km/ 포진지 0.4Km). 일본군이 군수물자 수송을 위해 만든 간이비행장(簡易飛行場)인 것이다. 일본군이 이곳 지심도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가가 실감나는 순간이다. 이곳은 지심도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덕분에 이곳에서는 남해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마을 주민들은 이곳에다 흔들의자와 망원경을 갖춘 예쁜 전망대(展望臺)를 조성해 놓았다.

 

 

 

 

활주로 구간을 지나자 동백나무가 만들어 놓은 숲의 터널로 들어선다. 이 구간이 지심도 트레킹의 백미(白眉)이다. 동백터널로 들어서면 더 이상 하늘은 보이지 않는다. 물론 바다도 보이지 않는다. 빽빽하게 들어선 동백나무는 햇빛 한 점 스며드는 것조차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어렵게 나뭇잎 사이를 뚫고 스며든 빛의 조각들이 동백잎들과 함께 어우러지며 장관을 연출한다. 또 하나 이 구간이 좋은 점이 있다. 여태 걸어왔던 길들 모두가 '터널'을 이루고 있는 동백길이었지만, 대부분 포장이 되어 있어 걷는 맛이 덜했다. 그러나 동백터널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 길은 비포장 흙길. 터덜터덜 걸을 때마다 먼지가 날린다. 설렁설렁 걸으며 지심도의 매력을 오롯이 가져갈 수 있는 길인 것이다

. 지심도는 예로부터 동백나무가 많아 동백섬이라 불렸다. 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울창한 동백나무 숲이다. 섬 전역(全域)에 동백나무와 후박나무, 소나무 등 37종에 이르는 수목(樹木)과 식물들이 자란다고 하지만, 눈에 띄는 것은 동백나무와 후박나무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過言)이 아닐 것이다. 하긴 지심도는 동백나무 숲이 전체 면적의 6070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동백섬이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릴 정도로 동백나무 천지인 것이다. 동백나무는 12월 초순부터 4월 하순까지 꽃을 피운다. 3월쯤에 찾아온다면 흐드러지게 핀 동백꽃을 구경할 수가 있을 것이다. 거기다가 3월쯤이면 바닥에 시체처럼 누워있는 낙화(落花)들을 보는 재미도 한몫을 한다. 동백꽃은 나무에 매달려 있을 때도 곱지만, 바닥에 떨어진 후에도 처연한 아름다움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동백숲을 벗어나면 갈림길(이정표 : 해안선전망대 0.3Km/ 선착장 1.75Km/ 선착장(우회길) 1.15Km, 육박나무군락지 0.6Km)이 나온다. 왼편으로 난 길이 선착장으로 가는 우회로이기 때문에 해안선전망대를 둘러보고 난 후, 선착장으로 돌아나갈 때에는 이 길을 이용하는 게 바람직할 것이다. 갈림길에서 조금만 더 걸으면 오른편 산비탈을 파서 만든 콘크리트 구조물(構造物) 하나가 보인다. 일제 때 서치라이트(search-light)보관소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콘크리트 구조물과 산비탈 사이에는 어두운 통로가 나있다. 들어가 보라는 듯 화살표 표시가 되어 있지만 아무나 들어갈 수는 없다. 조금만 뚱뚱해도 결코 통과할 수 없을 정도로 비좁기 때문이다. 날씬한 아가씨들 몇 명이 들어갔다 나오면서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마치 자랑이라도 하려는 것 같이 경쾌하다.

 

 

 

갈림길에서 300m쯤 더 가면 오른편에 나무로 만들어진 데크(난간)가 나타난다. 바로 해안선전망대이다. 이곳에서 바라본 지심도 남쪽 절벽(絶壁)이 절경이다. 활처럼 휘어져 바다로 튀어나온 해벽(海璧)은 투구마냥 빼곡한 해송(海松)을 머리 위에 뒤집어쓰고 있다. 해안전망대에서는 지심도의 해식애(海蝕崖 : 해식과 풍화작용에 의해 해안에 생긴 낭떠러지)를 뚜렷이 관찰할 수 있다. 파도와 조류에 의해 깎인 절벽이 위태롭다. 곳곳에 해식(海蝕)동굴을 만들기도 했다.

 

 

 

망루로 가는 길에는 깃대 하나를 볼 수 있다. 일본군이 일장기(日章旗)를 게양했던 받침대라고 한다. 또 하나의 아픔의 현장이다.

 

 

 

해안선전망대에서 조금만 더 나아가면 나무계단이 나오고, 짧은 나무계단을 밟고 내려서면 망루에 이르게 된다. 아마 한자음으로는 望樓(망루)’라고 쓸 것 같은데, 누각(樓閣)은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전망(展望) 좋은 누각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지 않았나 싶다. 망루는 까마득한 절벽 위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조망(眺望)은 일품이다. 망루에 서면 망망대해(茫茫大海)가 일망무제(一望無題)로 펼쳐진다. 넘실거리는 파도에 몸을 내맡기고 있는 어선(漁船)들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심도의 민가(民家)들 모두가 능선의 서쪽에 자리 잡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동쪽이 큰 바다인데다 섬이 워낙 작다 보니, 능선의 동쪽은 태풍(颱風)이라도 불 경우에는 배겨날 수가 없을 것이 불을 보듯이 뻔하기 때문이다. 망루에서 길은 끝이 난다. 길의 끝에서 만난 바다는 광활하기만 하다. 과연 그 바다는 여행자의 아쉬움을 아는지 모르겠다. 여전히 시리도록 푸르기만 할 따름이다.

 

 

 

 

 

해안전망대를 돌아보고 선착장으로 돌아갈 때에는 이미 지나온 동백숲을 거치지 말고 갈림길에서 선착장 쪽으로 방향을 잡는 게 낫다. 이 길에서는 아름다운 동백숲은 물론 멋스러운 대숲과 이제는 아담한 카페로 단장한 일본군 전등소장의 사택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곳도 역시 동백이 터널을 이루고 있다. 숲을 빠져나오자 시야(視野)가 확 트인다. 전망 좋은 장소에는 집 한 채가 조용히 앉아있다. 그런데 그 집의 외양(外樣)이 어쩐지 낯설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에는 보기 힘든 건물형태인 것이다. 옛날 초등학교에 다닐 때 보았던 학교의 관사(官舍)를 닮은 것을 보면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에 지어진 건물이 아닐까 싶다. 아니나 다를까 일본군 전등소 소장 사택이었던 건물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지은 지 70년이 훨씬 더 넘었을 텐데, 어떻게 저리 관리를 잘 하였을까. 건물 마당에 파라솔(parasol)를 펴 놓고 커피와 음료를 팔고 있기에 잠깐 쉬었다가기로 한다. 그런데 이곳에서 건물의 외양만큼이나 낯선 친절을 보았다. 마침 식수(食水)가 떨어졌기에 500페트병(PET)에 물을 채워줄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추호도 망설임 없이 병을 받아 간다. 그리고 그녀는 채워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던지 얼음이 동동 떠다니는 물을 가득 채워왔다. 그녀가 가지고 온 망고 스무디(smoothie)’도 무척 시원하면서도 감미로웠다. ‘먹는 행복이라는 말이 떠오를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그녀의 고운 마음이 가득 담겨있었기 때문이리라. 참고로 전등소는 일본군 기지에 전력(電力)을 공급하고, 적함(敵艦)을 찾는 탐조등을 관리하던 부서였다고 한다.

 

 

 

 

전등소장 사택을 나서면 동백나무 숲과 왕대밭이 번갈아가며 나온다. 왕대밭은 비록 면적은 넓지 않지만 대나무들은 제법 굵고 실하다. 해풍(海風)이 쉴 새 없이 불어대며 댓잎을 때리자, 서로 부대끼며 노래를 한다. 그리고 이곳의 동백나무 숲 역시 울창하다. 동백나무는 50년을 묵어도 그 굵기가 손목 두 개 합친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의 동백나무는 사람 몸통만 한 것들까지도 보인다. 그렇다면 수백 년은 묵었지 않을까 싶다. 길을 가다보면 몽돌해수욕장 내려가는 길 외에도 해안(海岸) 쪽으로 내려가는 길 하나가 더 보인다. 그러나 개의치 않고 선착장으로 향한다. 입구에 낚시꾼들 외에는 들어오지 말라는 안내판이 보이기 때문이다. 반반한 돌로 바닥을 깐 길을 따라 얼마간 더 걸으면 트레킹을 시작할 때 만났던 삼거리에 이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