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이 흐드러진 바다 위의 자연공원, 장사도(長蛇島)

 

여행일 : ‘15. 2. 27()

소재지 : 경남 통영시 한산면 매죽리

산행코스 : 선착장분교동백터널승리전망대허브가든야외공연장교회선착장(소요시간 : 2시간)

함께한 산악회 : 좋은사람들

 

특징 : 통영 항에서 남쪽으로 약 21.5km 떨어진 한려수도 해상국립공원에 위치한 동서로 200m 안팎, 남북으로는 1.9km 정도 되는 길다란 섬인 장사도(長蛇島)의 원래 이름은 섬 모양이 누에처럼 길다고 하여 잠사도(蠶沙島)였다. 그러던 것이 일제강점기 때 섬을 지적공부에 올리던 공무원들이 누에고치 ()가 너무 어렵다며 뱀처럼 길다는 뜻의 장사도(長蛇島)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민들은 아직까지도 누에의 경상도사투리인 늬비섬이라고 부른단다. 이 섬은 통영시가 다도해의 섬들을 관광지로 개발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태어나게 된 섬이다. 20여 년 전 이 섬은 주민들이 모두 떠나버린 무인도(無人島)가 되었던 때가 있었다고 한다. 버려진 섬은 한 투자가의 노력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의 노력으로 2011년에 카멜리아(camellia) 문화해상공원이란 관광지로 문을 열어 사람들을 다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카멜리아란 동백(冬栢)의 영어단어이다. 그만큼 장사도에 동백나무가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찾아오는 방법

장사도로 들어가려면 일단은 거제도에 있는 대포항까지 와야만 한다. 이곳에서 장사도로 들어가는 유람선이 출발하기 때문이다. 대전-통영간고속도로의 종착지인 통영 I.C에서 내려와 14번 국도를 타면 거제도의 남쪽 끄트머리에 위치한 저구항(거제시 남부면소재지)에 이르게 된다. 이곳 저구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1018번 지방도를 따라 조금만 더 들어가면 대포항(남부면 저구리)이다. 이곳 대포항 외에도 통영의 도남동선착장(미륵산 올라가는 케이블카승강장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이나 거제도의 가배항 또는 저구항에서도 유람선이 출발하니 참고할 일이다. 다만 섬에서 21Km나 떨어진 통영보다는 불과 3Km 밖에 떨어지지 않은 거제도의 선착장들을 이용하는 게 일반적이다. 또 하나 참조할 점은 일반 여객선의 선착장들을 기웃거리지 말라는 것이다. 모든 출발지의 포구에서 유람선 선착장을 별도로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뱃삯은 성인기준 왕복 15천원, 섬의 입장료 85백원은 따로 내야만 한다. 물론 돌아올 때에는 타고 들어갔던 배를 다시 타고 돌아 나와야만 한다. 그것도 정확하게 2시간 후이다.

 

 

 

하얀 파도를 일으키며 대포항을 떠난 배는 10분이 채 안된 것 같은데도 장사도 앞에 이르러 있다. 아니 어쩌면 갈매기들과 장난을 치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는지도 모르겠다. 섬에 도착하면 동백을 상징하는 큼지막한 카멜리아(camellia) 로고(logo)와 함께 이곳이 드라마 촬영지였음을 알리는 플래카드가 관광객들을 맞는다. 탤런트들의 얼굴을 새긴 것이 조금은 속물스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어쩌겠는가. 저것도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하나의 방법일 테니까 말이다.

 

 

 

선착장에서 경사(傾斜)가 제법 가파른 오르막길을 따라 들어가면서 투어(tour)가 시작된다. 투어에 들어가기 전에 리플렛(leaflet)을 챙기는 것을 잊지 말자. 아무리 이정표가 잘 되어 있다고 해도 말이다. 그만큼 섬 안에는 크고 작은 수많은 길들이 나있다. 그러나 어디로 가야할지로 걱정할 필요는 없다. 투어는 오직 하나의 방향으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안내판을 따라서 걸을 때에 해당되는 것이니 참조할 일이다. 가끔은 자기 마음대로 이동하는 사람들도 눈에 띄기에 하는 말이다. 어쩌면 통제를 받은 다는 느낌이 싫은 사람들일 것이다. 그러나 이럴 경우 자칫 잘못하다가 한두 곳쯤 빼먹은 채로 투어를 마칠 수도 있으니 염두에 두어야 한다. 진행은 1번 입구선착장에서부터 18출구선착장까지 순번대로 이루어지며, 이와는 별도로 섬그늘 쉼터동백터널길‘, ’수생식물원등 들러볼만한 곳들을 알파벳순으로 A에서 I까지 순서대로 배치해 놓았다.

 

 

 

안내대로 따를 경우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곳은 섬그늘 쉼터이다. 중앙광장에 이르기 조금 전에 위치한 쉼터로 동백나무 아래에다 벤치 몇 개를 놓아두었다. 비탈길을 올라오느라 고생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인 모양이다. 장사도에는 수만 그루의 동백을 비롯하여 후박나무, 구실잣밤나무, 풍란, 석란 등이 자생하고 있지만, 동백이 전체 수목의 80%나 되는 동백섬이라고 볼 수 있다. 때문에 붉은 동백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떨어지는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가 장사도의 절경이라고 한다. 최근에는 세간의 화제를 모았던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SBS-TV 수목드라마, 2013.12~2014.2)'의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중국 등 외국인 관광객들까지 줄을 지어 찾아들고 있다고 한다.

 

 

 

다음은 중앙광장, 조각가 정희욱씨의 바다, , 여인이라는 작품이 주인노릇을 하고 있는 광장은 전망대를 겸하고 있다. 난간에 서면 소지도와 좌사리군도, 연화도, 욕지도, 비진도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코발트 빛 융단을 깔아 놓은 바다에 크고 작은 수많은 섬들이 올망졸망 늘어서 있다. ‘과연 한려수도구나란 말이 절로 터져 나온다. 그 외에도 중앙광장에는 안내소가 설치되어 있으니 참고할 일이다.

 

 

중앙광장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 뜨락에 분재(盆栽)가 가득한 조그만 건물 하나가 나타난다. 초등학교건물이다. 앞서가던 아주머니가 화들짝 놀란다. 건물 옆에 매달린 종을 흔들어 깨우다가 생각지 못한 고음(高音)에 깜짝 놀란 모양이다. 1900년대 초부터 어민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장사도는 1980년대 말에는 13세대 83명까지 늘어났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건물이 바로 당시의 학교건물이다. 지금은 비록 폐교(廢校)가 되어버린 지 오래이지만, 당시만 해도 올망졸망한 어린이들이 23명이나 되는 반듯한 학교(죽도초등하교 장사분교)였다고 한다. 당시 이 학교에서 재직하고 있던 선생님의 이야기는 낙도의 메아리라는 영화로 만들어지기까지 했다.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1972년 죽도초등학교 장사분교에 부임한 31살의 청년교사 옥미조(玉米造)씨가 학생들과 함께 선착장(船着場)을 만들고, 농토를 개간하고 가축을 길러 소득을 향상시킨다는 성공스토리이다. 그런 내력을 잊지 않으려고 건물을 옛 모습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교실 안을 들여다볼 때 왠지 부자연스럽다는 느낌이 드는 이유는 뭘까? 아마 진열되어 있는 의자들이 너무 커서가 아닐까 싶다. 관광지로 개발하면서 새로 만든 모양인데, 어린이용이 아니라 성인용 크기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것도 덩치가 황소만한 어른들이 앉아도 넉넉할 정도로 말이다.

 

 

 

학교를 나와 오른쪽으로 돌면 멋진 아치(arch)형 구름다리 하나가 길손을 맞는다. 계곡으로 내려서지 않고도 곧장 건너편에 닿을 수 있도록 설계된 무지개다리로서 장사도에서 하나 밖에 없는 귀하신 몸이다. 무지개다리는 장사도를 찾는 사람들의 기념사진에서 한 번도 빠져본 적이 없는 명소일 것이다. 섬의 한가운데에 자리한 덕분에 주변의 바다는 물론이고 장사도의 능선까지도 한 장의 사진에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무지개다리를 건너면 달팽이전망대승리전망대가 연거푸 나온다. 장사도의 전경을 한눈에 넣을 수 있는 달팽이전망대에 서면 경계가 없는 하늘과 바다의 푸른색을 배경으로 녹음이 우거진 장사도가 환상적으로 펼쳐진다. 그리고 이순신장군의 옥포해전안내판이 세워진 승리전망대에서는 비진도와 오곡도, 용초도, 그리고 죽도 등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이어서 동백 숲길을 따라 잠깐 내려가면 다도전망대이다. 이곳도 역시 주변의 섬들이 잘 조망되는 곳이다.

 

 

 

 

 

 

다도전망대를 지나면 탐방로는 무지개다리 아래로 나있다. 섬의 풍경사진을 게시해 놓은 다리 아래를 지나는 길에 또 다시 동백나무 무리들을 만나게 된다. 활짝 핀 꽃송이가 통째로 떨어진 동백들이 가득이다. 여전히 고운 색이 처량하다. 그런데 그 떨어진 꽃들이 나뭇가지에 매달려있는 꽃들에 못지않게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누군가 3월의 동백은 바닥에 시체처럼 누워있는 낙화(落花)들을 보는 재미라고 했는데 그 말이 맞는 모양이다. 동백꽃은 나무에 매달려 있을 때도 곱지만, 바닥에 떨어진 후에도 처연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떨어진 동백은 또 떨어진 대로 제 몫을 다하고 있는 셈이다.

 

 

 

동백꽃에 취해 걷다보면 잠시 후에는 온실에 이르게 된다. 온실 안은 선인장 등 열대식물들과 양치식물(羊齒植物, Pteridophyta)들이 한껏 푸름을 자랑하고 있다. 겨울을 잊은 채 봄을 품고 있나 보다. 거기다 곳곳에 새장을 매달아 볼거리와 들을 거리를 함께 배치시킨 것이 돋보인다. 그러나 사진 촬영을 하려면 온실 안보다는 밖으로 나가 커다랗게 자란 선인장들을 배경으로 찍는 것이 더 나으니 참고할 일이다.

 

 

 

 

온상 위의 옥상은 또 다른 전망대이다.

 

 

장사도는 가슴이 따뜻한 사람과 함께하면 더 좋은 곳이다. 오늘 같이 겨울의 끝자락이라면 두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딱 들어붙어 걷다보면 시선은 어차피 하나로 동화(同化) 될 것이고, 혼자보다는 둘이서 보는 세상이 훨씬 더 넓고도 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온실을 빠져나오면 이번에는 섬아기집이 기다린다. ‘엄마가 섬그늘에~, 굴따러 가면~’이라는 동요(童謠)가 흘러나오기만 할 뿐 안내판이 없어 왜 그런 이름이 붙여졌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실제 장사도 섬 주민들이 살던 집이라는데 어떻게 사람이 살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그마한 집이다. 어쩌면 그 작음으로 인해서 그런 독특한 이름이 붙여진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섬아기집을 지나면 하얀 양옥으로 지어진 현대식건물이 나타난다. 갤러리(gallery)로 활용되는 공간이다. 그러나 막상 안으로 들면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초라하기 짝이 없다. 실내장식도 도심(都心)에서 보았던 갤러리들에 비해 보잘 것이 없고, 전시된 그림 또한 숫자나 장르(genre)가 단조롭기 짝이 없는 것이다. 그림의 대부분이 선홍빛으로 물든 동백 숲인 것으로 보아 어쩌면 동백꽃이 지고 난 계절에 찾아온 관람객들을 위한 공간이 아닐까 싶다.

 

 

 

갤러리를 둘러보고 나서 건물 뒤편의 계단을 오르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이곳에서 옳은 방향은 오른편이다. 그러나 곧장 오른편으로 가기보다는 잠깐 왼편으로 갔다고 다시 되돌아올 것을 권하고 싶다. ‘동백터널길이라는 어엿한 이름까지 갖고 있는 이곳이 장사도에서 가장 인상적이라는 평을 받는 길이기 때문이다. 식물원에서 야외공연장에 이르는 이 구간은 동백나무가 무성하게 우거진 숲인데, 동백들이 아예 작은 터널(tunnel)을 이루고 있을 정도이다. 나지막한 돌담길을 따라 천정이고 바닥이고 할 것 없이 붉게 핀 동백꽃이 한창이다. 가장 화려하게 핀 순간 뚝뚝 떨어져버린다는 동백꽃들과 기름칠한 듯 반짝이는 동백나무 잎들이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우리를 반긴다. ‘당신이 오기만을 기다렸어요.’라면서 말이다.

 

 

지심도만 못하죠?’ 선홍빛으로 물든 동백꽃에 취해있던 집사람이 넌지시 말을 건네 온다. 아무래도 2년 전에 다녀온 지심도의 동백나무들과 비교가 되는 모양이다. 하긴 크고 오래 묵은 동백나무들이 터널을 만들고 있던 지심도와 이곳 장사도의 동백나무는 비교 자체가 안 된다. 그만큼 이곳은 작고도 낮게 퍼져 있다. 오랫동안 주민들이 땔감으로 베어다 쓴 탓이란다. 그러나 동백나무의 크기가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꽃들이 이렇게 아름다운데 말이다. 예로부터 동백꽃은 다른 꽃들처럼 하나 둘 떨어지지 않고 꽃이 시들기 전에 송이채 뚝 떨어진다고 해서 여인의 절개(節槪)와 지조(志操)를 상징해 왔다. 그 꽃그늘 아래에 선 집사람의 절개와 지조도 이에 못지않을 것이다. 거기다 집사람은 내조(內助)까지 일품이니 동백보다 한 수 위가 아니겠는가.

 

 

 

동백터널을 빠져나오면 멋들어진 야외공연장(野外公演場)이 바다를 향해 펼쳐진다. 아무리 봐도 멋진 풍광이다. 망망대해 작은 섬 위에서 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공연이라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렌다. 가파른 경사지(傾斜地)를 이용해서 만든 공연장은 한마디로 크다. 이렇게 좁은 섬에다 1000석의 규모를 갖춘 공연장을 짓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공연장은 그 생김새보다는 관람석 뒤편에 아치형으로 만들어 세운 12개의 큼지막한 청동 얼굴 조각상들이 더 인상적이다. 얼굴상들을 각각 다른 모습으로 만든 작가의 재치가 돋보인다. 그보다 이곳에서 펼쳐질 공연을 떠올려본다면 또 다른 느낌이 찾아올 것이다. 망망대해의 작은 섬 위에서 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공연이라니 환상 그 자체가 아니겠는가.

 

 

 

 

야외공연장 뒤편 전망 좋은 곳에다 우체통이 하나를 만들어 놓았다. 그 이름은 메일로드(mail Road), 이 우체통에 넣어진 엽서들은 매주 월요일에 일괄적으로 발송이 된단다. 물론 엽서는 섬 안에 있는 모든 매점에서 구입할 수가 있다.

 

 

야외공연장 뒤편은 부엉이전망대이다. 나무데크로 만들어진 전망대는 오늘 만난 전망대 중에서 가장 널따랗다. 그러나 그 외에는 별다른 특징은 없다. 그저 거제도 본섬이 시원스럽게 조망(眺望)될 따름이다. 장사도 부근의 바다는 다도해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름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이 주변 바다에는 수많은 섬들이 떠있다. 거기다 리아스식 해안(rias coast )으로 이루어지다보니 바다라기보다는 차라리 호수(湖水)라고 부르는 게 더 어울릴 것 같다. 그만큼 잔잔하고, 거기다 물빛까지 가슴시리는 쪽빛으로 빛난다는 얘기이다. 바라만 보고 있어도 행복한 풍경인 것이다.

 

 

부엉이전망대의 한쪽 귀퉁이에 자리 잡은 김수현의 그림으로 다가간 집사람의 얼굴이 활짝 펴진다. 마음만은 이팔청춘(二八靑春)인 모양이다. 하긴 젊고 잘생긴 남자를 싫어할 여자가 어디 있겠는가? 나이를 불문하고 말이다.

 

 

부엉이전망대에서 조금 더 걸으면 수생식물원(水生植物園)’이 나온다. 그러나 오늘처럼 겨울철에 찾아왔다면 구태여 가볼 필요는 없다. 말라비틀어진 수초(水草)들만 사방에 널려있을 테니까 말이다.

 

 

야외공연장 한쪽 편에는 자그마한 집 하나가 자리 잡고 있다. ‘별에서 온 그대를 촬영했던 곳이라는데 안내판에는 예술가의 집이라고 적혀있다이곳은 드라마에서 키스를 하다가 실신을 한 도민준이를 천송이가 부축하여 들여간 숙소로 나왔던 곳이다. 보통 때는 공연설비를 보관하는 장소로 활용되며, 야외공연장에서 공연이 있는 날에는 예술가들이 공연을 준비하며 대기하는 곳으로 이용된다. 오래 묵은 나무 한그루가 마당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옛날에는 어느 주민이 살던 가옥(家屋)이었나 보다. 세월의 풍파를 고스란히 안은 듯한 이 고목(古木)은 시간의 무게를 다 내려놓은 듯 평화로워만 보인다.

 

 

야외공연장으로 다시 되돌아와 이번에는 반대방향으로 투어를 이어간다. 공연장에서 야외갤러리 방향으로 조금 더 가면 왼편에 작은 교회가 나타난다. 옛날 장사분교에서 근무했던 31살의 청년교사 옥미조(玉米造)씨가 학생들과 함께 지었다는 교회이다. 당시 교인이 얼마나 되었는지는 몰라도 작아도 너무 작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의문점은 과연 어떤 목사님이 이럴게 작은 교회까지 찾아왔을까 이다.

 

 

교회를 지나면 길은 네 갈래로 나뉜다. 왼편은 출구선착장으로 내려가는 길이니 야외갤러리로 가려면 계속해서 능선을 타야만 한다. 그런데 능선으로 난 길 또한 두 갈래이다. 이때는 오른편으로 진행하면 된다. 오른쪽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왼편에 보이는 카페테리아 앞으로 난 길로 나오면 되기 때문이다.

 

 

오른편 길로 접어들면 늬비하우스가 나온다. ‘늬비는 누에의 경상도 사투리라고 한다. 바다 풍경을 바라보며 음료수와 간단한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지만 과연 누가 그런 여유를 즐길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다. 예정된 2시간의 출항시간에 쫓기다보면 자리에 앉아볼 시간조차 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늬비하우스를 지나 야외갤러리로 향한다. 수생식물원으로 갈 때에 집사람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는데 이젠 시선까지 따가워져 있다. 뱃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늑장을 부린다는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야외갤러리를 그냥 지나칠 수야 없지 않겠는가. 발걸음의 속도만 약간 재촉해본다. 그러나 미인도전망대는 처삼촌 벌초하듯이 대충 지나칠 수밖에 없다. 전망대에서는 소덕도와 대덕도를 필두로 소매물도와 매물도, 가약도, 국도, 소지도 등이 잘 조망된다. 참고로 미인도는 소지도의 다른 이름. 섬의 모양이 여인의 누운 모습과 닮았다고 미인도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미인전망대다음은 야외 갤러리이다. 갤러리(gallery)란 이름 그대로 많은 조각품들이 늘어서 있는 공간이다. 그 중에서 압권은 동백나무 아래에 펼쳐놓은 섬마을 풍경이다. 나머지 작품들이야 작가들의 심오한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내 눈에는 그저 그렇고 그런 작품일 수밖에 없다.

 

 

 

야외 갤러리(gallery)’를 둘러봤다면 이젠 돌아갈 일만 남았다. 카페테리아 앞을 거쳐 내려가는 길은 가파른 돌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 거리 또한 가깝다고 할 수 없다. 내려가는 길은 두 가지이니, 무릎 관절이 안 좋은 사람들이라면 돌계단보다는 부드러운 길로 내려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출구선착장에 내려서면 우선 어떤 배를 타고 왔는지를 떠올려보자. 타고 들어왔던 배를 다시 타고 나가야만 하니 말이다. 드라마에서 도민준과 천송이는 순간이동으로 섬을 빠져나갔지만, 평범한 우리네야 배를 타지 않고서는 결코 섬을 벗어나지 못할 테니까 말이다. 만일 배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을 경우에는 치매(癡呆)’라도 걸린 양 수선을 떨지 말고 승선(乘船)할 때 나누어 받았던 이름표를 꺼내보면 될 일이다.

 

 

 

출구 선착장에 내려서면서 장사도 투어는 끝을 맺는다. 장사도는 김수현이 초능력을 이용해 전지현을 데려갔던 곳이다. 그리고 TV 속 그곳은 전지현이 사랑해. 당신이 이 별에서 산다고 하면 나도 이 별에서 살고 싶을 만큼 사랑해라고 했을 정도로 아름답게 그려졌었다. 그렇다면 투어를 마친 내 가슴속에는 과연 얼마만큼 아름다운 풍경으로 각인(刻印)되어 있을까? 한마디로 괜찮은 섬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뛰어난 섬이라고까지 꼽기에는 무언가 부족하지 않나 싶다. 자연 그대로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이 가꾸어져 있었고, 그렇다고 해서 잘 가꾸어진 외도 보타니아의 풍경에도 미치지 못하는 약간은 어정쩡한 풍경들이었건 것 같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한번쯤은 꼭 찾아봐야할 섬으로 꼽고 싶다.

 

 

귀경 길에 잠깐 들른 홍포전망대

거제시의 사등면에서 장목면을 잇는 지방도 1018호선을 따라 동쪽으로 가면 홍포해변과 여차해변이 나오는데, 지형적으로 기암절벽(奇巖絶壁)을 이루는 곳이 많다. 특히 홍포해변은 거제의 해안(海岸) 중 가장 경관이 수려한 구간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 만들어진 전망대(展望臺)가 바로 홍포전망대이다. 전망대에 오르면 거제도의 1 비경이라 하는 대소병대도(大小竝坮島)와 가왕도, 그리고 다포도, 대매물도, 소매물도 등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다도해(多島海)의 크고 작은 수많은 섬들이 그림처럼 펼쳐지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이 그대로 멈춘, 교동도(喬桐島)

 

여행일 : ‘15. 2. 16()

소재지 : 인천시 강화군 교동면

산행코스 : 상룡리교동향교화개사화개산대룡시장(12일촬영지)남산포교동읍성월선포(소요시간 : 5시간)

함께한 산악회 : 좋은사람들

 

특징 : 교동도는 민통선(民統線) 지역에 고립되어 있는 섬이다. 지도(地圖)를 보면 섬의 동쪽은 강화도, 그리고 북쪽과 서쪽은 북한의 황해도이다. 교동도와 북한의 거리는 불과 4~5. DMZ의 남북 거리가 4이니 말 그대로 북한이 코앞이다. 섬의 중앙에 솟은 화개산에서 바라보면 바다 건너 빤히 북한의 연백평야가 눈에 들어올 정도이다. 그 때문인지 북한 땅에서 이곳으로 헤엄쳐와 귀순을 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단다. 그런 연유로 인해 교동도는 우리나라에서 12번째로 큰 섬임에도 불구하고 은둔(隱遁)의 섬으로 남아있었다. 숨어있었던 덕분에 교동도에 가면 아직까지도 70년대의 풍경들을 만날 수 있다. 마치 시간의 흐름이 그대로 멈추어버린 채로 남아 있는 어딘지 낯익은 풍경들을 말이다. 그런 풍경들을 찾아 카메라를 둘러메고 섬으로 들어서는 사람들이 요즘 부쩍 늘었다고 한다. 물론 작년(2014)에 개통된 사장교(斜張橋)가 크게 한몫을 했음은 물론이다.

 

찾아오는 방법

교동도는 작년(2014)까지만 해도 배를 이용해야만 들어올 수 있는 섬 속의 섬이었다. 강화도에서만 들어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작년 6월 강화도와의 사이에 연륙교가 놓이면서 차량의 통행이 가능해졌다. 비록 군인들로부터 신분증 검사를 받아야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민통선 지역에 위치한 특수성 때문이라니 어쩌겠는가. 하여간 강화읍에서 48번 국도를 타고 들어오면 양사면 이화리에 이르게 되고, 이곳에서 길이 3.44km(13.85m·왕복 2차로) 규모의 사장교(斜張橋)를 건너면 교동도이다. 섬에 들어와 교동동로교동남로를 번갈아 타고 달리다보면 둘레길 투어의 들머리인 상룡리(교동남로 423번길)에 이르게 된다. 참고로 교동도에 들어간 사람들은 일몰(日沒) 전에 섬을 빠져나와야 한다고 한다. 섬에 들어갈 때 군인(軍人)들이 시간을 일러준다고 했는데, 검문이 없었는지 아니면 내가 잠을 자느라 못 들었는지는 몰라도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아무튼 해가 지고나면 다음날 해가 뜰 때까지 여행자들은 강화도로 나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거기다 밤에는 통행이 제한됨은 물론이다. 다만 주민들은 예외란다. ‘특혜가 주어진단다.

 

투어의 들머리는 상룡리(上龍里) 앞 도로

도로에서 들녘 가운데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서 둘레길 투어(tour)’가 시작된다. 들머리에 위치를 알리는 장승 한 쌍이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도 아니라면 **)‘강화 나들길’ 9코스의 푯말을 찾으면 된다.

(**) ‘강화 나들길은 강화도 출신의 선비인 화남(華南) 고재형 선생(高在亨 : 1846~1916)이 쓴 기행문 심도기행(沁都紀行)’을 토대로 만들어진 도보 답사 여행길이다. 심도기행은 화남(華南)선생이 1906년 환갑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픈 몸을 이끌고 집안 대대로 살아온 고향의 유풍을 두 발로 찾아다니면서 쓴 기행문인데, 강화군은 잊히거나 끊어진 심도기행 속 길을 찾아 연결했다. 나들길은 총 19개 코스 310Km로 만들어져 있는데 교동도에는 2개 코스 33.2Km가 개설되어 있다.

 

 

 

강화판 둘레길인 **)‘다을새길은 동네 골목은 물론, 차도와 임도, 그리고 오솔길 등 다양한 길을 연결하며 이어진다. 당연히 길 찾기에 애를 먹을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염려쯤은 붙들어 매어두어도 될 일이다. 강화군에서 길을 찾는데 도움이 되는 시설들을 다양하게 만들어 두었기 때문이다. ‘나들길 푯말과 이정표, 그리고 리본 등을 살펴보면서 걷는다면 여행 초심자(初心者)들도 어렵지 않게 투어를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 강화 나들길 9코스인 '다을새길'섬 속의 섬인 교동도에 개설된 강화판 둘레길이다. 임진강 물과 예성강물이 합쳐지는 물길 어귀에 위치한 교동도는 드넓은 간척지로 이루어져 있어 풍년이 들면 교동도 주민이 10년은 족히 먹을 수 있다는 풍요(豊饒)의 섬이다. 이런 점을 인정받아 삼국시대 이래 서해안 해상교통의 요지(要地)이며, 고려, 조선 왕족들의 유배지(流配地) 그리고 경기, 황해, 충청 삼도수군을 담당하는 삼도수군(三道水軍)의 통어영(統禦營)이 설치됐었다. 그러나 6.25전쟁이 끝난 후 교동도는 민통선 안에 들게 되었다. ‘섬 속의 섬이라는 지리적여건과 더불어 외부와 차단되었던 주요 원인이다. 그 덕분에 교동도의 들판 위로는 철새 떼가 몰려다니고 마을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곳으로 아직까지 남아있다. 이런 여건들을 살려 강화군에서는 이곳에다 둘레길을 만들었다. 이미 있던 길에 이정표와 표지기만 설치한 길이다. 월선포선착장~교동향교~화개산~석천당~대룡시장~남산포~교동읍성~동진포~월선포선착장로 이어지는 이 코스는 총 16. 한 바퀴 둘러보는데 6시간 정도가 걸린다. 참고로 둘레길의 이름인 다을새는 교동의 옛 지명 가운데 하나인 달을신에서 따왔다고 한다.

 

 

 

 

상룡리 골목을 지난 둘레길은 잠시 밭두렁을 따라 이어지다가, 다시 아스팔트 도로로 내려선다. 그러나 도로를 길게 타지는 않는다. 잠시 후에는 또 다시 산길을 이용해서 향교(鄕校)로 향하기 때문이다. 물론 도로를 계속 따르더라도 향교에 이를 수 있음은 물론이다. 하긴 향교 앞에 세워진 하마비(下馬碑)라도 보고 싶다면 도로를 이용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누구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리라(대소인원개하마 : 大小人員皆下馬)고 적혀있는 다른 대부분의 향교들과는 달리 수령변장하마비(守令邊將下馬碑)’라고 적혀 있다는 이곳 교동향교의 하마비를 말이다. 보통 하마비는 지위여하를 불문하고 공자님을 모신 곳이니 말에서 내리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곳 교동도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 수령과 변장이다 보니 그렇게 꼭 집어서 적었던 모양이다.

 

 

교동향교로 향하는 오솔길은 한적하다. 아마 오늘이 월요일이어서인 모양이다. 느낌 때문일까 주변 풍경 또한 한적하기 그지없다. 철지난 억새는 있는 그대로 아름답고, 고목(古木) 아래 만들어 놓은 쉼터는 고즈넉해서 좋다.

 

 

투어를 시작한지 40분쯤 지나면 교동향교(喬桐鄕校)에 도착한다. 우리나라의 23개 향교 중 가장 오래되었다는 교동향교는 고려 인종 5(1127)에 세워졌다고 한다. 충렬왕 12(1286)에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도입한 안향(安珦 : 초기 이름은 유)선생이 원나라에서 공자와 10(十哲)의 초상을 들여와 모신 유서 깊은 곳이다. 창건 당시에는 화개산(華蓋山) 북쪽에 있었으나 조선 중기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으며, 현재 남아있는 건물로는 교육공간인 명륜당(明倫堂)과 동재(東齋서재(西齋)가 있고, 제사공간을 형성하는 대성전(大成殿)과 동무(東廡서무(東廡)가 있다. 이외에도 제기고(祭器庫)과 주방(廚房) 등이 있다. 향교란 성현(聖賢)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제사(祭祀)를 지내며, 지방 백성의 교육을 담당하기 위해서 국가에서 세운 옛 교육기관(敎育機關)이다. 그려나 갑오개혁(1894) 이후 교육의 기능은 없어지고 현재는 제사의 기능만 남아있다.

 

 

 

 

향교에서 나오면 또 다시 아스팔트도로를 따르게 된다. 그리고 10분이 한참 못되어 오른편 산자락에 가만히 웅크리고 있는 사찰(寺刹) 하나를 만나게 된다.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화개사(華蓋寺)이다. 이 절은 고려 때 창건되었으며, 한때 고려의 삼은(三隱) 중 한 명인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이 이 절에 머물면서 독서를 즐겼다고 하나, 조선 후기까지의 연혁은 전하는 바가 없다. 1690년대에 이형상(李衡祥)이 지은 강도지(江都志)’에 절 이름이 나오고, 신경준(申景濬:17121781)이 지은 가람고(伽藍考)’에 화정사(火鼎寺)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정도이다. 그 후에도 붕괴(崩壞) 또는 소실(燒失) 등의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1968년에 중수(重修)를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고색창연(古色蒼然)한 사찰이라기보다는 여염집에 가까운 외형을 보여주고 있다. 그저 절간 마당의 나이가 200살도 넘었다는 늙은 소나무(강화군 보호수 4-9-73)가 이 절의 오랜 역사를 말해주고 있을 따름이다.

 

 

 

 

화개산를 둘러봤다면 다음은 교동도의 주산(主山)인 화개산에 오를 차례이다. 화개산으로 오르는 길은 널따란 임도(林道)를 따라 이어진다. 임도의 특징대로 경사(傾斜)가 거의 없음은 물론이다. 중간에 이 지역 출신이 인재들이 문관(文官)과 무관(武官)으로 등용되는 추세를 읽을 수 있었다는 문무정(文武井) 터를 지나면 잠시 후에는 오른편에 잘 써진 묘() 하나가 나온다. ‘창원 황씨부부를 합장한 묘인데, 임도는 이곳에서 끝을 맺고, 이후부터는 오솔길을 따라 걷게 된다.

 

 

산길이 오솔길로 변하면서 오르막의 경사도 가팔라지기 시작한다. 산길은 윤이 날 정도로 반질반질하다. 그만큼 찾는 사람들이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어쩌면 강화 나들길을 개설한 영향이 아닐까 싶다. 화개사를 출발한지 30분쯤 되면 봉수대(烽燧臺)가 나타난다. 낮은 석단(石壇)만이 남아있는 화개산 봉수대는 가로 4.6m, 세로 7.2m이고 잔존높이는 1.2m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남쪽으로 본도의 덕산봉수에서 연락을 받아 동쪽으로 하음 봉천산 봉수로 응한다고 되어 있다.

 

 

봉수대를 지나면 정상은 금방이다. 널따란 헬기장을 겸하고 있는 정상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사각의 정상표지목 외에도 잠깐 쉬어가라는 듯 예쁘장한 정자(亭子)까지 지어놓았다. 그리고 또 한편에는 조망도(眺望圖)를 설치해 교동도의 너른 들녘과 강화도의 조망을 돕고 있다. 거기다 정자 뒤에는 산불감시망루(望樓)까지 세워져 있지만 산행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무의미하므로 거론하지 않겠다.

 

 

 

 

화개산의 높이는 259.6m에 불과하다. 하지만 주변에 높은 산이 없기 때문에 사통팔달로 시야(視野)가 열린다. 가히 군사적 요충지(要衝地)라 할만하다. 오늘은 비록 비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다른 날에는 북한의 연백평야가 한눈에 들어오고 황해남도 연안군과 배천군이 지척이라고 한다. 하지만 길은 여기까지다. 저곳도 우리 땅이지만 물길이 모두 끊어져 있으니 사람은 있되 길은 없다. 그저 이 길과 저 길이 하루빨리 만나길 빌어볼 따름이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북녘 땅을 바라보다가 하산을 서두른다. 하산은 능선을 따른다. 정상에서 곧장 효자묘자리(0.15Km)와 약수터(0.2Km)로 내려갈 수도 있지만 능선을 조금 더 타보려는 욕심에서다. 거기다 유적지 두 곳을 더 둘러볼 수 있으니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 두 곳이란 청동기시대의 유물이라는 성혈(星穴)바위와 지금은 흔적만 남아있는 화개산성의 북벽망루(北壁望樓) 터이다. 참고로 성혈(星穴)이란 바위에다 구멍을 뚫어 그린 그림을 말하며, 하늘의 별자리, 풍요(豊饒)와 다산(多産), 자연숭배 등 민간신앙의 흔적으로서 일종의 주술적(呪術的) 행위로 볼 수 있다.

 

 

 

나들길은 북벽망루 앞에서 왼편으로 급하게 방향을 틀어 아래로 향한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화개산성(華蓋山城) 터에 내려서게 된다. 화개산성은 총 길이 2160m에 이르는 포곡식산성(包谷式山城 : 계곡을 내부에 두고 능선을 따라 쌓는 방식)으로 내외성의 골격을 갖춘 산성이다. 남쪽은 자연의 절벽을 성벽으로 이용했고 북쪽에만 성벽을 쌓았다. 이 산성은 언제 누가 쌓았는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명종 10(1555) 최세윤이 증축한 이래, 철거와 개축에 관한 기록만이 전해질 따름이다. 허술한 사료만큼이나 관리도 허술했음일까, 아니면 내가 덜 둘러봤는지는 몰라도 성문이나 성벽은 눈에 띄지 않았다. 대신 내성의 우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우물을 만났다. 그리고 그 물맛은 괜찮은 편이었다.

 

 

 

약수터를 지나면서 산길은 고와진다. 부드러운 황토흙길에다 경사가 거의 없는 평탄한 길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거기다 주변은 온통 소나무들 천지, 콧등을 스쳐가는 바람결에는 솔향이 짙다. 콧노래가 절로 나올법한 싱그러운 산행이 이어진다. 이런 길에서는 발걸음을 재촉할 이유가 없다. 마침 주어진 시간까지 넉넉하니 느긋하게 걸어볼 일이다. 행복에 겨워 걷다보면 어느덧 천년문(千年門)을 지나 한증막에 이르게 된다.

 

 

천년문을 지나 조금 더 내려오니 왼편의 개울가에 지어진, 마치 '에스키모(Eskimo)'인들의 이글루(igloo)를 닮은 구조물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조선후기부터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한증막(汗蒸幕)'이다. 인근 주민들이 70년대까지 사용해왔다는 이 한증막은 현대인 들이 즐겨 찾는 숯가마와 같은 원리이다. 솔가지로 안에다 불을 지핀 후, 재를 꺼낸 자리에 생솔가지를 깔고 그 위에 앉아 땀을 흘리는 원리 말이다. 가끔 밖으로 나와 냇가에서 땀을 씻은 후에 다시 안으로 들어갔음은 물론이다 

 

 

 

한증막을 둘러보고 나오면 입구에 세워진 이정표(면사무소 0.6Km/ 연산군유배지 150m/ 화개산등산로 0.9Km/ 고구리)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이정표는 이 부근에 연산군 유배지가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것도 150m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말이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들어가니 철문이 굳게 닫혀있다. 그렇다고 다시 돌아갈 수도 없어 문을 옆으로 우회(迂廻)해서 안으로 들어가 본다. 길이 반질반질한 것을 보면 나 같은 심정으로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이 꽤나 많은 모양이다.

 

 

그러나 막상 유배지(流配地)에 이르고 보면 의외로 보잘 것이 없다. 널따란 공터에 연산군유배지라고 적힌 커다란 비석 하나만이 외롭게 서 있을 따름인 것이다. 작은 글씨로 위리안치(圍籬安置)라고 적어 놓은 것을 보면 쫓겨난 임금의 처지는 보통사람들만도 못했었나 보다.

 

 

다시 한증막 앞 사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고구리 방향으로 향한다. 비록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있지만 시골의 풍취가 그대로 느껴지는 길이다. 요즘 여행을 하다보면 하다못해 심심산골까지도 이국적(異國的)인 외양(外樣)을 갖은 건물들이 비일비재하게 보이는데 아직도 여긴 70년대의 건물들이 대부분인 것이다. 눈요기 삼아서 서서히 걷다보면 대문에다 시판(詩板)을 덕지덕지 매달고 있는 시설이 하나 왼편에 보인다. 석천당(石泉堂)이라는 당호까지 매달고 있기에 안으로 들어가 보니 널따란 터에 정자까지 반듯하게 갖추고 있다. 대문에 걸려있는 글들로 보아 김흥기라는 시인(詩人)이 살고 있는 모양이고, 그의 호()가 석천이 아닐까 싶다 

 

 

석천당에서 조금 더 내려오면 고구리이다. 화개산 정상을 출발한지 40분이 지났다. 마을에 이르니 동네 앞에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버티고 있다. 동네 사람들 말로는 해나무란다. 엄청나게 오래 묵어 보이지만 아직까지 보호수로 지정되지는 않은 것 같다. 해나무 뒤로 자그마한 교회가 하나가 살짝 보인다. 별도로 만들어진 옛스런 종탑이 돋보이는 교회이다.

 

 

동네 앞에서 만난 허수아비에 눈길을 빼앗기다가 발길을 돌린다. 너무나 오랜만에 만난 풍경에 잠깐 넋을 잃었었나 보다. 고구리마을에서 면소재지까지는 일반 도로로 연결된다. 이 구간은 도보용 길을 따로 두고 있지 않다. 그런데도 자동차가 빈번하게 다니기 때문에 사고의 위험이 염려되는 구간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거리가 그다지 길지 않다는 것이다. 오가는 자동차에 눈길을 주며 걷다보면 잠시 후에는 면소재인 대룡리에 이르게 된다.

 

 

시가지로 들어가자 교동초등학교가 보인다. 중심에 들어왔다는 증거이리라. 그렇다면 이젠 식당을 찾아볼 차례이다. 마침 점심시간이 다 되었기 때문이다. 시골 동네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음식들을 위시해서 식당들이 내건 음식은 다양했다. 고민 끝에 찾아든 음식점은 삼호정(TEL : 032-932-5272)’, 주문한 음식은 물론 강화도만의 맛을 자랑한다는 젓국갈비이다. 강화도의 젓국갈비는 고려 중종 때부터 내려온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돼지갈비를 푹 끓인 전골에 새우젓으로 간을 한 시원한 국물맛이 일품으로 멀리서도 소문을 듣고 찾아올 정도라고 한다. 삼호정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국물은 고소하면서도 시원했고, 밑반찬이나 주인장의 서비스 또한 뛰어났다. 거기가 식당 안은 청결까지 유지하고 있으니 조그만 면소재지에 어떻게 이런 식당이 존재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주린 배를 채웠다면 이번에는 대룡시장을 둘러볼 차례이다. KBS의 인기 버라이어티 쇼 ‘12에 소개되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곳이다. 교동도의 나들길을 걸어본 사람들은 대부분 다을새길의 백미(白眉)는 뭐니 뭐니 해도 대룡시장이라고 꼽는다. 골목길을 걷다보면 마치 시간여행을 하고 있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면서 말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론 실망부터 하는 사람들도 많다. 골목을 다 합쳐도 그 길이가 채 200m도 될 것 같지 않은 왜소함 때문이다. 그런 양면성을 지닌 대룡시장은 6.25 전쟁 중에 황해도 주민들이 피난 나와 임시로 정착하면서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시장이라고 한다. 한때는 이곳도 번창했을 테지만 침체(沈滯)된 지금은 옛 정취가 물씬 풍겨나는 전통시장으로만 남아 있다. 그런 침체가 또 다시 많은 사람들을 불러오고 있다. 과거 시간대에 멎어버린 사물들을 찾아오는 여행자들로 말이다. 하긴 세상은 모두 LTE급 속도로 변해 가는데, 여기는 70년대의 풍경으로 낡고 헐어있으니 사람들이 찾아들 만도 하겠다. 도시에서는 뭉개 없애버린 지 이미 오래인 과거에다 카메라의 포커스(focus)를 맞추면서 말이다.

 

 

골목길에서 가장 유명한 집은 60년 이상 되었다는 이발소다. 대룡시장에 들른 사람들의 사진 속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그 증거이리라. 문이 닫혀있어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지만 이곳 주인장 또한 한국전쟁 통에 내려왔다가 주저앉은 실향민이란다. 그 외에도 골목에는 검은 고무줄이 매달려있는 잡화점雜貨店)이나 어린이 고무신을 판다는 신발가게, 거기다 요즘 보기 드문 벽시계가 덕지덕지 벽에 걸려있는 시계방 등 다양한 상점(商店)들이 늘어서 있다. 그러나 어디에서건 요즘의 풍경은 찾아볼 수 없다. 흑백영화에서나 보던 1970년대 시골장터의 모습 그대로이다. 고스란히 쌓여 있는 세월의 더께가 중장년층의 향수를 자극했나보다. 그런 이색적인 풍경을 찾는 도시인의 발길이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이젠 제법 알려진 여행지로 변했다.

 

 

교동시장을 둘러봤으면 이번에는 삼도수군 통제영이 있었다는 남산포로 가볼 차례이다. 남산포로 가는 길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너른 들녘을 가로지르며 나있다. 서울 촌놈들이 섬에 오면 섬사람들은 다들 물고기만 잡고 사는 줄 안다. 그래서 옛사람들이 서울 안 가본 놈이 가본 놈을 이긴다.’라는 말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 그만큼 고정관념(固定觀念)이란 게 중요하다는 이야기이다. 그런 속담(俗談)을 떠올리게 만드는 곳이 바로 교동도가 아닐까 싶다. 그만큼 교동도는 크다. 그리고 무지막지하게 넓다. 그것도 평야(平野)로만 말이다. 당연히 사람들은 농사를 지어먹고 살아간다. 바닷가 사람들도 고기를 잡는 사람들보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얘기이다. 하긴 사방을 둘러봐도 보이는 것이라곤 온통 끝없이 펼쳐지는 들녘뿐이니, 구태여 바닷가로 나갈 필요조차 없었을 것이다.

 

 

 

이곳 남산포는 옛날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禦營)이 있던 곳이다. 여기서 말하는 삼도란 황해도와 경기도 그리고 충청도를 일컫는 말일지니 이는 곧 이 섬이 수군의 중심지였다는 얘기이다. 하필이면 교통이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이런 오지(奧地)에다 삼도수군의 통제영(統禦營)을 두었을까 의문인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반도 전체 지도(地圖)를 펴놓고 보면 그런 고정관념은 단번에 사라져 버릴 것이다. 남북분단으로 인해 지금은 비록 민통선 안에 들어있는 오지로 남았지만 수도권 해안의 모든 수로(水路)들을 통제(統制)하기에 충분한 위치인 것이다. 대룡시장에서 남산포까지는 대략 40분 정도가 걸렸다.

 

 

삼도수군 통제영이 있던 남산포도 옛 영화는 사라지고 이젠 아쉬운 흔적들만 남아있다. 그런데 그런 흔적들까지도 옛것들이 아니다. 남아있는 집들은 물론이고, 이미 무너져 가고 있는 빈집들이나 폐 창고들까지도 모두 20세기에 들어서서야 지어진 집들인 것이다. 통제영의 건물이나 옛날 가옥들은 아예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번성했던 옛 영화는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고, 그 너른 터에는 차 없는 주차장만이 외롭게 남겨져 있다.

 

 

길가에 세워진 사신당지(使臣堂址)’ 안내판을 보고 포구의 뒷동산에 오르니 허름한 건물 한 동이 나타난다. 안내판에 적혀있는 사신당(使臣堂)이라는 당집인 모양이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 때 송()나라 사신이 해로(海路)를 이용하여 양국을 왕래할 때에 교동도 앞바다를 지나면서 무사태평하기를 기원하며 제사를 지내던 곳이라고 한다. 6.25때 건물이 없어졌던 것을 1069년에 다시 지었다는데 너무하다 할 정도로 볼품이 없다.

 

 

남산포에서 수로 옆으로 난 길을 따라 20분 남짓 들어가면 교동읍성(喬桐邑城)이 나온다. 읍성(邑城)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하는 성을 말한다. 교동도는 지금은 비록 강화군에 속한 일개 면()에 불과하지만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독립된 군현(郡縣)인 교동현(喬桐縣), 교동부(喬桐府)였다. 그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성인 교동읍성인 것이다. 그래서 성()이라고 하면 튼튼한 방패, 즉 철벽(鐵壁)을 연상시킨다. 쉽게 말해 철옹성(鐵甕城)을 떠올린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이곳 읍성에서는 그런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성이 뭐 이래?’ 누군가의 말마따나 초라하고도 옹색했다. 세 개의 문 중 남문만 남았다. 그나마 누각(樓閣)도 없었고 성벽도 일부만 남고 무너져 내린 상태다. 온전히 남아있는 부분의 높이로 보아, 옛날에도 방어(防禦) 역할을 수행하기에는 어딘가 어설퍼보였다. 교동읍성(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3)은 조선 선조 7(1629)에 돌로 쌓은 읍성(邑城)이다. 둘레 430m에 높이 6m 규모로 세 개의 문을 두었으나 지금은 남문(南門)만 남아있다.

 

 

 

 

성 안 마을에도 성한 집들이 드물었다. 흙벽이 허물어진 집과 지붕이 내려앉은 폐가들, 거기다 주민들까지도 눈에 띄지 않는다. 흡사 재개발을 앞두고 주민들이 떠난 빈 도심(都心)의 재개발지역을 연상시키는 풍경들이다. 마을 앞을 지나면 언덕 아래에서 또 다른 연산군의 유배지(流配地)’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이곳도 화개산 아래와 마찬가지로 텅 빈 공터로 남아있다. 당연히 볼거리는 없다. 유배지보다는 차라리 그 옆에 보이는 우물이 더 눈길을 끈다. 얼마나 오래 묵었는지 우물 안에서 자란 나무까지도 고사목(枯死木)이 되어버린 지 이미 오래이다.

 

 

 

 

유배지를 빠져나오면 또 다시 바닷가가 나온다. 동진포(東津浦)라는 곳이다. 조선시대에 읍성(邑城)이 축조(築造)되면서 함께 만들어진 포구(浦口)로서 서울, 인천, 해주로 통하는 관문이었다고 한다. 중국으로 가는 하정사신(賀正使臣)이 교동으로 와 해로의 일기를 살핀 후에 서해로 나갔으며, 사신들의 숙소인 동진원(東津院)이라는 객사가 있었다고 한다. 옛날 교동팔경 중의 하나로 동진송객(東津送客)을 꼽으며 이곳에서 손님을 맞거나 떠나보내는 광경이 볼만했다고 하니 당시에는 호황을 이루던 곳이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영화는 간곳이 없고 빈 갯벌에는 배 한척만이 버려진 듯 누워있을 따름이다.

 

 

동진포에서 이번 투어의 마지막인 월선표로 가는 길은 바닷가로 난 길을 따라 40분 남짓 걷게 된다. 때문에 길은 직선(直線)이 아닌 곡선으로 나있고, 그 곡선(曲線)이 만들어내는 풍광이 한결 더 돋보이는 구간이다. 오늘 걸어 온 다을새길에서 가장 뛰어난 곳이 아닐까 싶다. 둘레길을 따라 양옆으로 길게 매어놓은 로프 뒤에는 웃자란 갈대들이 무성하고, 바닷가로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널따랗게 펼쳐지는 갯벌들이 아름다운 선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갯벌과 바닷물이 경계를 이루는 선도 아름답지만, 그보다 더 뛰어난 건 물길이 만들어내는 곡선이 백미(白眉)라 할 수 있다. 어느 이름난 화가가 저런 풍경들을 온전하게 화폭(畵幅)에다 옮겨놓을 수 있을까?

 

 

 

다을새길투어의 마지막은 월선포선착장

해안 가로 난 길을 걸으며 눈요기를 즐기다보면 어느덧 월선포에 이르게 되면서 강화나들길 9코스다을새길투어는 끝을 맺는다. 월선포구는 다리가 놓이기 전까지만 해도 교동도의 대문역할을 톡톡히 했던 곳이다. 건너편 강화도의 창후리선착장에서 출발한 배들이 이곳 월선포 선착장에다 사람들을 내려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한적하기 그지없다. ‘선착장 대합실건물은 아직까지 남아있지만 인적은 느낄 수가 없다. 하긴 자동차로도 들어올 수 있는데 구태여 배를 타고 꾸역꾸역 들어오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다을새길은 원래 월선포에서 시작해서 월선포로 돌아오는 순환형 코스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상룡리에서 출발을 했다. 들녘을 통과하는 무료함도 줄이면서 투어시간도 조금이나마 단축해보기 위해서이다. 덕분에 오늘 투어에는 총 5시간이 걸렸다. 느긋하게 즐겼던 50분 정도의 점심시간까지 포함되었음은 물론이다.

서해의 숨겨진 진주, 국화도(菊花島)

 

여행일 : ‘15. 2. 2()

소재지 :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국화리

산행코스 : 선착장국화마을해수욕장체험장매박섬국화섬 둘레길도지섬선착장(소요시간 : 1시간30분이면 충분)

함께한 산악회 : 좋은사람들

 

특징 : 국화도는 60여명이 거주하는 면적 0.39의 작은 섬이다. 무론 한 바퀴 둘러보는데 며 1시간 반이면 충분하다. 국화도의 원래 이름은 구화도(九化島)였지만 조선시대에 유배지였던 만화리에 속하면서 만화도로 불리다가, 일제 강점기에 국화리로 다시 바뀌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실제로 섬 전체에 들국화가 지천으로 피지만,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서 많이 나는 조개의 조가비가 국화꽃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주장한다. ‘경기도의 5대 보물섬중 하나로 불리는 국화도는 경기관광공사와 화성시가 공동으로 추천할 정도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요소들을 갖고 있다. ‘모세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바닷길과 장엄한 일출 및 일몰은 물론이고, 풍광이 빼어난 매박섬 일대의 경관(景觀), 깨끗한 바닷가에 널린 조개, 소라 등 해산물(海産物)이 바로 그것이다. 때문에 매년 2~3만명의 여행객들이 찾아오고 있단다.

 

찾아오는 방법

국화도에 오려면 우선 충남 당진군(석문면)에 있는 장고항으로 와야만 한다. 국화도로 들어가는 배가 장고항에서 2시간 간격으로 있기 때문이다. 소속 행정구역인 화성시 궁평항에서도 들어올 수도 있지만 우린 장고항에서 들어가기로 했다. 눈앞에 훤히 보일 정도로 국화도가 가깝기 때문이다. 장고항으로 오려면 우선 서해안고속도로를 이용하는 것이 편하다. 송악 I.C에서 내려와 38번 국도를 따라 달리면 석문방조제와 석문국가산업단지를 지나 구억교차로(석문면 장고항리)가 나온다. 교차로를 빠져나와 오른편 방향으로 들어가면 잠시 후에 장고항에 이르게 된다.

 

 

장고항 주차장에서 선착장(船着場)으로 가다보면 왼편에 멋지게 생긴 바위무리가 나타난다. 바로 노적봉과 촛대바위이다. 가운데 붓을 거꾸로 꽂아놓은 것처럼 보이는 바위가 바로 촛대바위이고 그 오른편에 우뚝 솟은 바위봉우리가 노적봉이란다. 당진팔경 중에서도 으뜸으로 친다는 이곳은 일출(日出)의 명소로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일출을 본다는 것은 아니다. 바위의 뒤편에 보이는 왜목마을에서 바라볼 때 이 바위들 사이로 떠오르는 해가 장관(壯觀)이라는 얘기이다. 장고항이 왜목마을에서 볼 때에는 바다건너 해가 뜨는 곳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내판을 보면 매년 2월과 10월이면 아침 해가 촛대바위 걸리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이 바위의 뒤편으로 돌면 해식(海蝕)동굴이 나타나는데 이 또한 뛰어난 볼거리라고 한다. 그러나 난 뒤로 들어가 보는 것을 빼먹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배의 입항시간에 맞추다보니 어쩔 수 없었던 게 주된 이유였지만, 여행을 떠나오기 전에 예습을 부실하게 했던 것도 사실일 것이다. 참고로 위에서 말한 촛대바위는 남근바위라고도 불린다. 아마 남아(男兒) 선호사상의 발로(發露)가 아닐까 싶다.

 

 

바다로 돌출된 생김새가 흡사 장고를 닮았다는 장고항의 선착장에 이르면 바다 건너편에 있는 국화도가 또렷하게 나타난다. 국화도는 세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로로 길쭉한 국화도를 가운데에 두고 바로 북쪽에는 매박섬이, 그리고 남쪽에는 도지섬이 자리 잡고 있다. 이들 세 섬은 보통 때는 나뉘어져 있다가 바닷물이 빠져나가는 썰물(ebb tide) 때에는 하나의 섬으로 연결된다. 다시 말해 모세의 기적이 일어나는 셈이다. 그것도 하루에 두 번씩이나 말이다. 참고로 화성팔경 중 제6경인 입파홍암(立波紅巖)을 품은 입파도(立波島) 또한 국화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물론 행정구역상으로도 국화리에 포함된다.

 

 

 

국화페리호를 타고 섬으로 들어간다. 우리 일행이 70명 가까이나 되기 때문에 아예 배를 대절해 버렸단다. 그러니 출항시간과 다시 되돌아 나오는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아도 된단다. 노적봉 뒤편의 해식동굴을 못보고 그냥 지나쳐버린 게 다시 한 번 후회가 되는 순간이다.

 

 

장고항을 출발한지 20분이 조금 넘으면 국화도 선착장에 도착한다. 배에서 내리면 맞은편 언덕 위에 지어진 팔각정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바로 해맞이 전망대이다. 저곳에서의 일출은 독특하다고 알려져 있다. 동해의 일출은 붉은 기운을 품어내지만 국화도의 일출은 오렌지 빛을 내뿜는다는 것이다. 장관일 것이 분명하다.

 

 

 

 

국화도 선착장을 지나자 작은 건물이 눈에 띈다. 건물 벽에 물고기 그림들이 예쁘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안은 마치 빈집처럼 버려져 있다. 해수욕장과 섬에 국화가 많이 피는 곳을 표시해 놓았다는 입체 지도를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말이다. 관광객들이 찾지 않는 겨울철이라서 그냥 내버려둔 모양이다. 여름이 오면 다시 정비를 하겠지만 처음으로 만들 당시의 상황이 재현될지는 모르겠다. 참고로 이 지도는 지난해 '경기 문화 보물섬 프로젝트'에서 방치됐던 공용 건물을 대학생들이 재구성해 만든 것이란다. 섬을 찾는 사람들이 국화도의 문화 보물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말이다.

 

 

 

건물 옆에는 각기 다른 색으로 꾸며진 공동 우체통이 있다. 만든 지 오래되어 보기 흉할 정도로 낡았지만 이곳 국화도 주민에게는 반가운 소식을 전해주는 보물 같은 존재일 것이다.

 

 

'경기 문화 보물섬 프로젝트'의 흔적으로 보이는 시설들은 섬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붉은 노을과 음악이 있는 섬, 국화도라고 적힌 공연무대가 보이는가 하면 철망으로 울타리를 두른 멋진 족구장까지 만들어 놓은 것이다. 도심(都心) 근교의 공원에서 보던 운동기구들이 마을 앞에 설치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구경거리가 많다는 매박섬으로 가려면 마을을 들어앉은 언덕을 통과해야 한다. 마을은 온통 펜션들 천지, 섬 주민들 전체가 펜션이나 민박집을 운영하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마을은 조망(眺望)하나는 끝내준다. 어느 곳에 서더라도 눈앞에는 시원스런 바다풍경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마을 안길을 통해 언덕을 넘으면 활처럼 동그랗게 펼쳐진 바다가 나타난다. 이곳이 국화도에서 유일한 해수욕장이다. 자갈과 모래, 그리고 조개껍질이 적당히 어우러진 해수욕장은 경사(傾斜)가 심하지 않다. 거기에다 서해(西海)답지 않게 물까지 맑으니 어린아이들도 안심하고 물놀이를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누군가 말했다. 국화도는 외지인들에게 3가지의 선물을 준다고 말이다. 그중 첫째는 장엄한 일출과 일몰’, 그리고 갈라지는 2개의 바닷길아담한 해수욕장이 뒤를 잇는다. 이중 하나를 지금 우리가 걷고 있으며, 다른 하나인 갈라지는 바닷길은 조금 후에 만나게 된다. 아쉽게도 일출과 일몰은 시간이 맞지 않아 일견(一見)하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매박섬으로 향한다. 매박섬으로 가는 길은 그 자체가 모세의 기적이다. 본섬인 국화도에서 1Km쯤 떨어진 곳에 있는 매박섬은 항상 물에 잠겨 있지만 썰물 때면 비록 잠깐 동안이지만 두 섬이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곳뿐만이 아니다. 국화도에서 왼편으로 500m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도지섬도 상황은 이와 같다. 두 섬의 사이에는 폭이 거의 50m 이상 되는 갯벌이 드러나 있다. 이 길이 바로 모세의 기적갈라지는 바닷길이다. 바닷길은 갯벌이라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질퍽질퍽한 갯벌은 아니다. 조금 전에 지나왔던 해수욕장과 같이 모래와 자갈 등이 적절하게 섞여있어서 걷는데 조금도 지장을 주지 않는 것이다.

 

 

 

국화도는 고동과 조개류가 지천으로 깔려 있어 누구나 쉽게 망태를 채울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매박섬으로 들어가는 바닷길, 즉 하루 두 번 얼굴을 보여 주는 갯벌은 지역 주민들이 체험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본섬인 국화도와 매박섬 사이의 바닷길이 열릴 때 조개를 잡는 체험을 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밤에는 횃불을 들고 낙지도 잡을 수 있다는데 글쎄다. 낙지잡기가 그리 쉽지 않은 일인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체험장은 동네 어촌계에서 운영하고 있으니 조개를 잡기 전에 수속을 먼저 하고 도전해 볼 일이다.

 

 

매박섬을 가다보면 하얀색으로 빛나는 해변(海邊)이 보인다. 그러나 막상 도착해보면 의외의 상황을 만나게 된다. 모래사장으로 생각했는데 막상 다가가 보면 모래는 보이지 않고 대신에 굴 껍데기만 가득한 것이다. 역사책에서 읽어본 옛사람들의 조개 무덤(貝塚)’들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하얀 조개 무덤은 숫제 수북하게 쌓인 눈으로 보일 정도이다. 겨울의 막바지인데도 여기는 마치 한겨울인 셈이다. 집에 돌아온 집사람이 배낭에서 굴 껍데기뭉치를 하나 꺼내 놓는다. 일행으로부터 건네받았는데 너무 예뻐서 들고 왔단다. 섬사람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어쩌겠는가. 순백의 굴 껍데기가 너무 예쁘니 말이다.

 

 

 

오랜 세월동안 파도에 휩쓸리고 부딪치면서 하얗게 바랜 조개와 소라 껍데기들이 파도 따라 한쪽으로 밀려와 하얗게 밭을 이루고 있다. 눈부실 정도로 유난히 흰 것이 여름속의 눈밭이다. ‘팔월의 크리스마스라는 이해가 가지 않는 영화제목도 있는데 이 정도의 표현 갖고는 결코 지나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조개 무덤을 둘러봤다면 이젠 섬을 한 바퀴 둘러볼 차례이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할 일이 있다. ‘준비된 여행객인 집사람의 성의를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집사람이 준비해간 호미를 꺼내 굴을 채취하기 시작한다. 난 그저 챙겨간 소주를 꺼내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그녀가 건네주는 굴을 안주삼아 술잔만 기울이면 되는 것이다. 바위에 붙어있는 자연산 굴들이 무궁무진하니 안주가 떨어질 염려는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런 여유로움은 오래가지 못했다. 주어진 시간이 그다지 넉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매박섬의 풍경은 무인도(無人島)인데 비해 썩 뛰어나지는 않다. 해안선이 보통의 무인도들과 마찬가지로 바위벼랑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크기는 귀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왜소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그 흔한 해식동굴(海蝕洞窟) 하나도 없다. 당연히 걸음은 빨라진다. 덕분에 섬의 끄트머리에 있는 무인등대(無人燈臺)’를 지나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별다른 구경거리가 없다보니 한눈 팔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리라.

 

 

 

 

 

섬을 한 바퀴 돌면 다시 모래 무덤로 나오게 된다. 조개껍질로 하얀 눈이 내린 곳이다. 이번에는 아예 모래무덤을 타고 넘는다. 언덕을 가득 매운 하얀색의 조개껍질이 한 걸음 두 걸음, 발을 내 딛을 때마다 '사르륵 사르륵' 소리를 낸다. 너무 좋다. 그러나 무작정 황홀경에 빠져 있을 수만은 없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 채 또 다시 본섬인 국화도로 되돌아 나간다. 아까 매박섬으로 들어올 때보다는 물이 많이 차있다.

 

 

되돌아 나오는 길에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어김없이 매박섬이 나타난다. 아까 들어갈 때보다 훨씬 더 선명하다. 그리고 그 모습은 가까이 가서 보던 것과는 달리 아름답기 그지없다. 국화도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는 매박섬은 가까이서 보는 것보다 멀리서 보는 게 훨씬 더 좋은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매박섬까지 들어가지를 않고 이곳에서 조망(眺望)만을 즐긴 후 되돌아간다고 한다.

 

 

 

경관이 가장 빼어나다는 매박섬을 둘러봤다는 여유 때문인지 주변을 돌아보는 여유까지 생긴다. 오른편에 당진의 뭍들이 길게 펼쳐지고, 그 중간쯤에서는 당진화력이 하얀 연기를 내뿜고 있다. 그리고 왼편, 그러니까 북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바다 건너편에 있는 무인도인 입화도와 풍도 사람들의 바지락 채취지인 도리도가 빤히 건너다보인다.

 

 

갯벌체험장에서 둘레길은 바다와 헤어져 오른편 언덕 위로 향한다. 상당히 가파른 오르막길이나 다행이도 그 길이는 짧다. 거기다 누군가가 안전로프까지 매달아 놓아 그다지 어렵지 않게 올라설 수 있다. 산등성이를 따라 난 둘레길은 평지처럼 평탄하고 잘 다듬어져 있다.

 

 

둘레길을 걷다보면 낙조전망대의 방향을 나타내는 이정표(일출팔각정 1.2Km/ 낙조전망대 100m)가 눈에 띈다. 그러고 보니 이곳 국화도의 가장 큰 특징이 일출(日出)과 낙조(落照)를 모두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중 하나인 낙조전망대가 이 부근에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뚜렷한 시설물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널따란 분지(盆地) 비슷한 곳에서 서쪽으로 시야(視野)가 열려있을 따름이다. 조금 전에 둘러봤던 매박섬이 또렷하고 그 왼편으로 서해바다가 널따랗게 펼쳐진다. 저 망망대해(茫茫大海)에 붉은 해가 빠져든다고 생각해보자. 그야말로 황홀경이 아니겠는가. 지난해부터는 12월 마지막 날에 해넘이 행사를 실시했다는데 어쩌면 여기서 하지 않았을까 싶다.

 

 

 

낙조전망대에서 조금 더 걸으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왼편은 국화마을로 내려가는 길, 곧바로 진행하면 일출전망대이다. 이곳에서는 당연히 일출전망대로 향한다. 전망대를 둘러보고 섬의 끄트머리까지 가서 도지섬을 조망한 뒤에 바닷길을 따라 국화마을로 돌아오는 코스가 제격이기 때문이다.

 

 

갈림길에서 조금만 더 가면 정자(亭子) 하나가 보인다. 이정표에 표시되어 있던 일출팔각정인 모양이다. 그러나 선착장에 세워진 안내지도에는 그냥 정자라고만 표시되어 있으니 참고할 일이다. 선착장 언덕 위에 지어진 또 다른 팔각정과 구분하기 위해서인 모양이나, 그러려면 이정표까지도 동일하게 표기했으면 좋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나저나 전망대 앞에 서면 시야(視野)가 뻥 뚫린다. 눈앞에는 아산만의 너른 바다가 끝도 없이 펼쳐진다. 이만하면 일출을 즐기기에 충분하다 할 것이다.

 

 

 

정자에서 조금 더 걸으면 다시 바닷가로 내려가는 길이 나타난다. 엄청나게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그러나 아까 섬으로 오를 때와 마찬가지로 그 거리가 짧고 안전로프가 매어져 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내려설 수 있다.

 

 

 

바닷가에 내려서면 도지섬이 코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아까 매박섬과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바닷길이 열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도지섬은 멀리서 조망(眺望)만 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냥 발길을 돌린다. 멀리서보아도 볼거리가 없을 것이 뻔해보였기 때문이다.

 

 

국화섬의 끄트머리에서 마을까지는 시멘트로 만든 길을 따르게 된다. 물론 밀물 때에는 바닷속으로 가라앉아버리는 길이다. 돌아오는 길에 또 다시 끝없이 펼쳐지는 아산만을 볼 수 있다. 그 수평선 위에는 수많은 막대들이 누군가 일부러 꽂아놓은 것처럼 일렬로 도열해 있는 것이 보인다. 아마 당진국가산업단지의 건물들일 것이다.

 

 

부지런한 집사람이 다시 한 번 갯벌에 쭈그리고 앉는다. 조개라도 하나 주워볼 요량인 모양이다. 그러나 그녀의 바람은 희망사항에 그치고 말았다. 아까 매박섬으로 들어갈 때 만났던 갯벌과는 달리 이곳에서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점심은 국화도 선착장 근처에 있는 국화식당에서 했다. 메뉴는 회정식, 물론 일반 정식도 제공되고 있었다. 난 생선회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그러나 섬에까지 와서 뭍에서 먹는 일반정식을 먹을 수야 없지 않겠는가. 술안주 삼아 회를 먹었는데 13,000원이라는 가격에 비해 괜찮은 편이었다. 물론 밑반찬도 좋았다. 다만 곁들여 나온 매운탕은 진한 맛이 조금 약한 게 흠이었지만 말이다.

 

 

돌아오는 길에 잠깐 왜목마을에 들렀다. 왜목마을은 일출(日出)과 일몰(日沒), 거기다 월출(月出)까지 모두 한 장소에서 볼 수 있는 전국 유일의 장소로 유명하다. 해안이 동쪽을 향해 돌출되어 있고, 인근의 남양만(南陽灣)과 아산만이 내륙으로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형상이 마치 누워있는() 사람의 목()처럼 생겼다고 해서 와목(臥木)’이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이것이 세월을 거치면서 왜목으로 변했다고 한다. 독특한 지형구조(地形構造) 때문에 바다 너머 경기도 화성시까지는 서로 육지가 멀리 떨어져 있고, 수평선(水平線)이 동해안과 같은 방향이어서 일출·일몰·월출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참고로 이곳의 일출은 화려하고 장엄한 동해의 일출과는 달리, 한순간 바다를 가로지르는 짙은 황톳빛의 물기둥이 만들어지면서 소박하면서도 서정적인 분위기를 조성한다. 일몰은 대난지도(大蘭芝島)와 소난지도 사이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데, 활활 타오르던 태양이 서서히 빛을 감추며 바다와 하늘을 동시에 검붉게 물들이면서 바닷속 깊이 잠겨버리는 장관을 연출한다.

 

 

왜목마을은 일출과 일몰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곳이라는 유명세(有名稅)를 타게 되면서 크게 달라졌다. 당진이나 서산으로 여행 갈 때 눈여겨보지 않았던 조그만 어촌마을이 이제는 그 지역을 대표하는 관광지(觀光地)가 되어 버렸다. 상권(商圈)도 달라졌다. 주변에 음식점이 활기를 찾았고, 수많은 모텔과 펜션들이 그득하게 들어섰다. 7~8년 전쯤 찾아왔을 때의 한적했던 시골마을을 떠올리면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이 딱 어울릴 정도로 변해버렸다.

 

 

이곳 왜목마을은 한적할 때가 제격이라고 한다.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들려오는 돌 구르는 소리, 그리고 포구 앞에 떠 있는 수십 척의 배들이 자아내는 독특한 풍경은 한적할 때에 제대로 음미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렇다면 우린 제대로 때를 맞춰 찾아왔다고 할 수 있다. 수많은 배들이 떠있는 작은 바다는 너무나 잔잔해서 호수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아마 마을과 이웃 섬 사이에 파묻혀있기 때문일 것이다. 길가에 만들어진 다리모양의 조형물에라도 올라서면 그야말로 하늘과 바다. 그리고 내가 서 있는 육지까지 삼박자가 잘 맞아떨어진다. 이런 곳에 서면 나 자신도 몰래 내 안의 숨어 있는 보물들을 끄집어 내 함께 하고 싶어진다.

바다를 따라 걷는 명품길, 저도(猪島) 비치로드(beach road)

 

여행일 : ‘14. 11. 25()

소재지 :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 구복리

산행코스 : 연륙교하포전망대(1~2)140m바다구경 길(1~3)용두산(202.7m)170m봉 방향 바닷가 왕복큰개연륙교(소요시간 : 3시간30)

함께한 산악회 : 좋은사람들

 

특징 : 마산시가지에서 남쪽으로 길게 뻗어나간 구산반도(龜山半島 : 해발 100m 내외의 낮은 산세가 바다에 들어가는 거북이를 닮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의 끝자락에 앉아 있는 자그마한 섬(21470)으로서 섬의 생김새가 마치 돼지가 누워 있는 형국과 같아 돝 저()’자를 써서 저도(猪島)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최근 지도(地圖)에는 돗섬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돗섬은 돝섬의 오기(誤記)일 것으로 보이지만, 마산만(馬山灣)에 있는 돝섬(猪島)’과 구별하기 위한 배려라고 볼 수도 있다. 이 섬을 세상에 알린 것은 육지와 섬을 잇는 다리()로부터 시작되었다. 태국(泰國)을 배경으로 한 영화 콰이강의 다리와 비슷하게 생겼다고 하여 일명 한국의 콰이강의 다리라고 불리는 이 다리는 박신양, 이미연 주연의 영화 인디언 섬머(2001)’의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이 영화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이신영(이미연 분)은 항소심에서 무죄선고를 받은 후, 그녀를 변호하기 위해 모든 걸 바치는 변호사 서준화(박신양 분)와 이곳에서 이틀간을 보낸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끼리 손을 잡고 끝까지 건너면 사랑이 이루어지고, 다리 위에서 빨간 장미 100송이를 주면서 프로포즈(propose)를 하면 사랑이 맺어진다는 이야기가 마산의 젊은이들 사이에 전해지면서 다리 난간에는 연인들의 사랑 확인용 자물쇠들이 잔뜩 매달려 있기도 하다. 최근에는 창원시에서 섬의 해안을 끼고 도는 둘레길인 비치로드길(beach road : 9.5km)을 개설하여 더욱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찾아오는 방법

저도로 들어가는 방법은 특별하지가 않다. 이미 연륙교(連陸橋)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배를 이용하지 않더라고 섬 안으로 곧장 들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중부내륙고속도로 내서 I.C에서 내려와 마산 방면으로 좌회전하면 조금 후에 만나게 되는 5번 국도를 따라 마산방면으로 달리다가 현동교차로(마산합포구 예곡동)에서 군도(郡道)1002번 지방도를 연달아 타고 구남중학교까지 온다. 그리고 구남중학교 앞 반동삼거리(마산합포구 구산면 반동리)에서 오른쪽 길로 들어서면 얼마 지나지 않아 저도연륙교가 나온다. 연륙교를 건너기 직전에 주차장이 있다. 연륙교를 건너 섬 안으로 들어가도 주차장이 있으나 저도의 명물인 연륙교를 밟아보려는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모두 이곳에다 주차를 시킨다.

 

 

 

주차장에서 내리면 섬으로 들어가는 두 개의 다리가 길손을 맞는다. 저도는 본래 천혜의 자연환경을 지녔으나 배를 타고 드나들어야 했던 탓에 주민들의 불편은 물론 관광객들의 접근도 쉽지 않았다. 이런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1987년에 놓인 다리가 오른편에 보이는 붉은 색의 다리(길이 170m, 3m1차선)이다. 이 다리는 영화 콰이강의 다리에 나오는 다리 모양과 비슷하다고 하여 콰이강의 다리라는 애칭(愛稱)으로 불리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원래 소형차의 통행이 가능했었으나 옆에 새로운 연륙교가 완성되면서 현재는 사람들만을 위한 다리로 남겨두었다.

 

 

콰이강의 다리를 건너다보면 다리 난간(欄干)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자물쇠들이 눈에 띈다. 중국이나 유럽 등 해외여행 때 심심찮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비록 외국에서 보아오던 것들에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왜소하지만, 개개의 열쇠가 품고 있을 사연들이 중요한 것이지 매달린 숫자의 많고 적음이 무슨 대수겠는가. 연인(戀人)들이 다리의 난간에다 자물쇠를 채울 경우에 그들의 사랑이 지켜진다고 했으니 자물쇠와 한 몸이던 열쇠들은 하나같이 다리 아래의 바다물속에 잠겨있을 것이다. 영원히 열쇠를 찾을 수 없어야 다시는 자물쇠를 열 수 없을 테고, 그래야만 사랑이 끝까지 유지될 테니까 말이다. 그런가하면 자물쇠들의 사연도 제각각이다. 마치 평생을 도망 못가도록 꽁꽁 묶어 놓은 것이 있는가 하면, 사랑의 크기를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대형 자물쇠도 보인다. 그리고 또 어떤 것은 사랑을 맺은 순간을 기억이라도 하려는 모양으로 자물쇠에다 시간을 적어 놓기도 했다.

 

 

콰이강의 다리옆에 보이는 하얀색 다리가 새로운 연륙교(連陸橋)이다. 콰이강의 다리가 입소문을 타게 되자 수없이 많은 관광객(觀光客)들이 모여들었고, 거기다 기존의 다리가 낡아 위험성까지 제기되자 200412월 왕복 2차선의 연륙교(길이 182m, 13m, 높이 13.5m)를 새로 놓은 것이다. 새로운 다리는 마산을 대표하는 특색 있는 랜드 마크(land mark)로 건설되었다. 마산의 시조(市鳥)인 괭이갈매기를 형상화해 마산을 상징화(象徵化)하면서 바다와 산 등 구산면 일대의 수려한 자연지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한 것이다. 특히 아치(arch)의 곡선미를 강조하기 위해 괭이갈매기 형상을 중심으로 광케이블 조명(照明)을 설치해 시간별, 계절별로 여러 가지 색의 야경(夜景)을 연출하기도 한다.

 

 

다리를 건너면 음식점 골목인데, 간판들 대부분이 회와 조개구이를 주요 메뉴(menu)로 내걸고 있다. 그만큼 싱싱한 횟감이 인근 바다에서 많이 잡히고, 잔잔한 물결의 부근 바다는 굴 등의 양식에 최적의 요건을 갖추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저도 주민들의 주요 소득원은 음식점인 모양이다. 새로 놓은 연륙교를 건너자마자 만나게 되는 저도 비치로드 종합안내도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지도(地圖)에다 비치로드를 펼쳐놓고 그 위에다 횟집들의 위치를 꼼꼼하게 표기해 놓은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화장실까지 갖춘 버스정류장을 지나면 오른편에 나무데크로 만든 길이 나타나지만 이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도로를 따른다. 데크 길로 들어설 경우 192m봉을 거쳐 곧장 용두산으로 올라가게 되기 때문이다.

 

 

비치로드(beach road)’의 들머리로 가는 도로는 왼편에 해안선(海岸線)을 끼고 나있다. 주름 하나 잡히지 않은 바다는 속살까지도 훤히 보여준다. 이렇게 섬들로 둘러싸인 바다라면 만일 너울이 인다고 해도 물결은 그냥 살랑거리는 수준일 게 분명하다. 잔잔한 물결 너머로 구산반도가 조용히 앉아있고, 바다 위에는 쇠섬, 자라섬, 안목섬 등 자그마한 섬들이 두둥실 떠다닌다. 그래서일까 회를 먹을 수 있는 공간을 바다 가운데에다 만들어 놓았다.

 

 

 

 

비치로드(beach road)’의 들머리(이정표 : 1전망대 1.5Km/ 연륙교 1.2Km)는 하포마을을 거친 후에야 이르게 된다. 주차장에서 20분 정도가 소요된다. 길가에 주차장과 화장실 등을 잘 만들어 놓았으니 만일 승용차를 가지고 온 사람들이라면 구태여 다리 밖에다 주차를 시킬 필요는 없겠다. 나무계단을 올라서면서 트레킹(trekking)이 시작된다. 오늘 걷게 되는 길의 이름은 비치 로드(beach road)’, 해안선(海岸線)과 능선을 잇는 저도(猪島)만의 둘레길이다. 예로부터 아름답기로 소문 난 저도(猪島)의 풍광을 맘껏 즐길 수 있는 명품 둘레길인 것이다. 참고로 전국에는 저도(猪島)’라는 이름의 섬들이 많다.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10여 개가 나온다. 경남 사천의 실안해안도로에서 바다 너머로 보이는 섬도, 거제의 대통령 별장이 있는 섬도 저도이고, 통영과 전남 진도, 충남 서산에도 저도가 있다. 창원에도 저도라는 지명이 두 곳이나 있다. 이 중 창원 마산합포구에 위치한 저도가 오늘 찾은 섬이다. 남북 길이 1750m, 동서 너비 1500m의 그다지 넓지 않은 섬으로 한쪽에는 해발 202m의 용두산이 솟아 있고, 사방은 가파른 비탈과 해식애(海蝕崖)를 이루고 있다.

 

 

나무계단을 오르자 흙길이 나타나고 이내 왼쪽으로 시원스런 바다 풍경이 시야(視野)에 들어온다. 둘레길은 바닷가를 끼고 나있다. 하긴 그래서 비치로드(beach road)라는 이름이 붙었겠지만 말이다. 창원시에서 만들어 놓은 트레킹 코스는 단거리 코스(3.7)와 완주 코스(6.6)로 두 개가 마련돼 있다. 그러나 코스가 서로 다르지 않고 단거리 코스에서 더 가면 완주 코스로 이어진다는 것이 특징이다.

 

 

길을 걷다보면 가끔 왼쪽으로 오솔길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럴 경우에는 망설이지 말고 내려가 볼 것을 권하고 싶다. 얼마 후에 다시 본 길과 만나게 되기도 하고, 또 어떤 때에는 내려왔던 길로 다시 올라오게도 되지만 길은 어김없이 바닷가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바닷가로 내려가면 잔물결 하나 없는 고요한 바다가 거침없이 눈앞으로 다가온다. 그 풍경에 동화된 나는 가만히 바닷물에 손을 담가본다. 차다. 그러나 상큼하다.

 

 

 

둘레길에 들어서서 15분 정도를 걸으면 제1전망대(이정표 : 2전망대 0.8Km/ 주차장 1.5Km)에 이르게 된다. 섬에 조성된 둘레길이라 바다를 바로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는 것 또한 저도비치로드의 매력이다. 전망대에 내려서면 데크의 한가운데에 세워진 조망도(眺望圖)가 눈에 들어온다. 잔잔하게 일렁이고 있는 바다의 건너편엔 나타나는 건 거제도란다. 그 오른편에 보이는 곳은 고성반도이고, 거제도의 왼편에 보이는 뭍은 원전이라고 적혀있다. 아무래도 창원시에 있는 원전마을을 일컫는 모양이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갯바위에 서서 낚싯대를 휘두르고 있는 사람이 눈에 띈다. 입질이 괜찮은 포인트 (point)인 모양이다.

 

 

 

 

1전망대에서 다시 15분 남짓 더 걸으면 제2전망대(이정표 : 1전망대 0.8Km)이다. 바다를 내려다보면서 걸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이 구간은 제법 볼거리가 쏠쏠하다. 푸름을 한껏 자랑하고 있는 바다가 심심찮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2전망대는 마치 바다 속으로 내려가는 기분이 들 정도로 풍경 좋은 전망대이다. 산길에서 나무계단을 밟으며 바다를 향해 한참을 내려가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서 바다를 볼 수 있도록 배려를 한 모양이다. 이곳 제2전망대로 제1전망대와 비슷한 조망(眺望)을 보여준다. 푸른 바다 너머의 고성, 거제 등 주변 지역과 섬들이 건너다보인다. 그리고 바닷가까지 내려간 덕택에 저도의 수려한 단애(斷崖)까지도 가까이서 감상할 수 있다. 풍화작용으로 구멍이 숭숭 뚫린 모습이 기괴(奇怪)하기 짝이 없다.

 

 

 

 

 

 

2전망대를 지나면 길은 제법 가팔라진다. 그리고 20분 정도로 제법 길게 이어지면서 해발 140m의 높이까지 올라서게 만든다. 용두산의 높이가 202m이니 거의 7~8부 높이까지 올라서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다지 힘들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가팔랐다 평탄해지기를 반복하면서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가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다 가는 길에 시야(視野)가 툭 터지는 뛰어난 조망처까지 지나게 되니 힘이 든다는 생각이 찾아들 여지조차 없었을 것이다.

 

 

 

코스분기점인 140m봉에 올라서면 길이 두 갈래(이정표 : 1바다구경길 0.6Km/ 등산로 0.2Km)로 나뉜다. 만일 체력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곳에서 단거리코스를 선택하면 된다. 오른쪽에 보이는 길로서 진행할 경우 코스합류점을 지나 하포마을 내려가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왼편으로 연결되는 완주코스로 들어서고 볼 일이다.

 

 

길가는 온통 소나무들 천지이다. 양편으로 늘어선 소나무들이 매우 기운차게 느껴진다. 그리고 소나무 껍질이 내륙(內陸)의 소나무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두껍고 거칠다. 오랫동안 거친 해풍(海風)을 온몸으로 견디며 자라오는 과정에서 그렇게 변했나 보다.

 

 

왼편 완주코스로 들어서면 10분 간격으로 바닷가로 내려가는 길이 나뉜다. 바닷물에 손이라도 담가본 후에는 다시 갈림길로 다시 되돌아 올라와야 함은 물론이다. 그 첫 번째 갈림길(이정표 : 2바다구경길 0.5Km/ 코스분기점 0.6Km)은 제1바다구경길이다. 갈림길에서 100m쯤 가파르게 내려서면 바닷가에 이르게 되는데, 저도의 해안선을 만들어내고 있는 해식애(海蝕崖, sea cliff)를 가까이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조망(眺望)은 아까 전망대에서 바라보던 풍경과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

 

 

 

 

1바다구경길에서 다시 10분 정도를 더 걸으면 제2바다구경길(이정표 : 3바다구경길 0.4Km/ 1바다구경길 0.5Km)이 나뉜다. 2바다구경길도 역시 100m가까이 가파르게 내려가야 만날 수 있다. 이곳도 역시 아까 내려섰던 바닷가의 풍경과 별반 다르지가 않다. 눈앞에 펼쳐지는 바다풍경은 아까와 같다고 보면 되고,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이번의 바닷가는 암반(巖盤)으로 이루어진 아까와는 달리 조금만 자갈들로 이루어졌다는 게 조금 다를 뿐이다.

 

 

 

맨 마지막에 있는 제3바다구경길(이정표 : 정상 등산로 0.35Km/ 2바다구경길 0.4Km)은 제2바다구경길에서 10분 조금 못되게 걸으면 만날 수 있다. 이곳도 역시 다른 두 곳의 바다구경길과 거의 유사한 풍경을 보여준다. 굳이 다른 점을 들라면 오늘 만났던 바닷가 중에서 유일하게 모래사장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일 것이다. 백사장에 서면 푸르디푸른 바다 건너에는 거제도, 그리고 그 오른편에는 고성반도의 산야(山野)가 마치 병풍(屛風)처럼 둘러서 있다. 그래서일까. 바다는 마치 엄마 품처럼 포근하다. 가덕도와 거제도 그리고 고성반도가 태평양에서 밀려오는 파도를 막아주는 방파제(防波堤) 역할을 하면서 저도 앞바다는 큰 호수(湖水)로 착각될 정도로 잔잔하다.

 

 

 

용두산 정상으로 가는 길은 제3바다구경길에서 오른편으로 열린다. 비록 이정표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이곳에서 해안선(海岸線)을 따라 빙 둘러서 정상에 이를 수도 있으니 상황을 봐서 선택할 일이다. 정상 아래의 종합안내판이 있는 안부사거리(이정표 : 정상 0.3Km/ 등산로갈림길 0.54Km/ 큰개길 1.0Km/ 3바다구경길 0.35Km)까지는 무척 가파른 오르막길로 연결된다. 어느 정도로 가파른가 하면 왔다 가기를 반복하며 갈지()자를 만들고서야 겨우 고도(高度)를 높일 정도이다. 올라가는 길에 뒤라도 돌아볼라치면 낯익은 풍경이 나타난다. 작년에 중국의 장가계에 있는 천문산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던 도로와 많이 닮은 것이다. 차량이 다니고 안다니는 것만 다를 뿐 구불구불한 길의 생김새는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일까 400m도 채 안 되는 거리를 올라오는데 15분이 더 걸렸다.

 

 

 

 

사거리에서 용두산 정상은 금방이다. 능선으로 연결되는 길은 그다지 가파르지도 않고 바닥이 흙길이어서 부담 없이 오를 수 있다. 10분이 채 안되어 올라선 정상은 너른 분지(盆地)의 한가운데에 정상표지석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북동쪽방향, 그러니까 구산반도 방향으로만 열린다. 그 열림은 비록 좁지만 펼쳐지는 풍경만은 놀라울 정도로 빼어나다. 구산반도와 저도를 연결하는 연륙교들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데, 멋지게 생긴 다리들이 하얀 물결을 일으키며 교각(橋脚) 아래를 오가는 배들과 어우러지며 마치 한 폭의 잘 그린 동양화를 연상시키고 있다. 아까부터 들려오든 감탄사들은 바로 이런 풍경에 놀란 관광객들이 내지르는 소리였나 보다.

 

 

 

정상에서 하산 하는 길은 두 갈래이다. 아까 올라왔던 사거리까지 다시 내려가서 연륙교로 방향으로 하산하는 것이 그중 하나이고, 나머지 하나는 북쪽 방향의 능선을 타고 전망바위를 거쳐 연륙교로 향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것이 하나 있다. 북쪽 능선으로 난 길보다, 서쪽 능선 그러니까 170m봉으로 연결되는 능선길이 훨씬 더 또렷하다는 것이다. 그 덕분에 우리 부부는 서쪽방향의 능선길을 타게 되었고, 170m봉을 지나고 나서야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을 알았지만 내친김에 해안(海岸)까지 내려서게 되었다. 계속해서 길이 또렷했기 때문에 해안선을 따라 연륙교까지 길이 나있을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우리부부만 한 것이 아닌 모양이다. 다섯 명이나 더 우리와 함께 걷고 있었으니 말이다.

 

 

능선의 끝, 그러니까 섬의 서쪽 끄트머리에 이르면 바다 건너편에 고성반도(固城半島=통영반도)가 나타난다. 그리고 그 앞바다에는 궁도와 양도, 송도 등 크고 작은 섬들이 오롯이 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끄트머리에서 길이 끊어져 버린다는 것이다. 해안선(海岸線)을 따라 연륙교까지 길이 나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내려간 우리부부가 허탈해져 버리는 순간이다. 이곳까지 내려오는데 20분을 훌쩍 넘겼으니 다시 정상까지 돌아가려면 그보다는 훨씬 더 걸릴 것이다. 돌아가는 길은 오르막길이기 때문이다.

 

 

정상으로 돌아와 이번에는 북쪽 능선으로 내려선다. 비록 아까 내려갔던 서쪽 능선만은 못하지만 길은 또렷하게 나타난다. 산길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많이 가파르다. 조심스럽게 내려서는데 왼편의 숲 사이로 바다가 내다보인다. 그 바다 위에 떠있는 큰닭섬과 작은닭섬 그리고 곰섬, 나비섬 등 크고 작은 섬들이 만들어내는 풍경들이 제법 볼만하다. 겨울철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풍경일 것이다. 만일 나뭇잎이 무성해지면 저런 틈새가 없어져버릴 테니까 말이다.

 

 

가파른 능선을 따라 잠시 내려서면 사격장이라서 출입을 제한한다는 군부대의 경고판을 만나게 되고, 산길은 이곳에서 능선을 벗어나 오른편의 지능선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 잠시 후, 그러니까 정상에서 10분 정도의 거리에서 시야(視野)가 거릴 것 없이 탁 트이는 전망바위에 올라서게 된다. 바위에 서면 저도의 명물인 콰이강의 다리와 새로운 연륙교가 한눈에 잘 들어온다. 콰이강의 다리와 저도연륙교 주변의 풍경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산행날머리는 연륙교 주차장(원점회귀)

전망바위를 지나서도 조망(眺望)은 계속해서 좋은 편이다. 비록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지만 명품 다리들을 눈에 넣으면서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전망바위에서 10분 조금 못되게 더 진행하면 도로(큰개길)에 내려서게 되고, 이어서 조금 후에는 연륙교 건너에 있는 주차장에 이르게 되면서 오늘의 섬 투어가 끝을 맺는다. 투어에는 총3시간30분이 걸렸다. 정상에서 해안까지 내려갔다 온 시간을 감안하면 2시간30분 정도면 충분할 것 같다. 시간이 조금 남았기에 다시 섬으로 되돌아와 식당을 찾아본다. 집집마다 내걸고 있는 주 메뉴는 싱싱한 회와 조개구이, 그러나 남은 시간이 넉넉하지 못한 탓에 길가 편의점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간편식인 파전과 오뎅으로 허기를 채워본다. 참이슬 한 병이 상위에 올라왔음은 물론이다.

 

 

섬내 투어(tour)를 마치고 귀경(歸京)길에 인근(저도와 같은 인 구산면)에 있는 해양드라마세트장에 잠깐 들렀다. 이 세트장은 드라마 촬영 및 해양 교류사 홍보 교육을 위한 목적으로 지난 2010년에 조성되었다고 한다. 9,947의 부지에 세트장 7동과 선박 3척을 만들어 놓았는데, MBC 특별 기획 드라마 `김수로`를 이곳에서 촬영한데 이어 KBS `근초고왕`, MBC `짝패`, SBS `무사 백동수`, MBC `계백` 20여 편의 텔레비전 드라마와 영화를 이곳에서 촬영했고, 얼마 전에는 MBC 월화 특별 기획 드라마 `기황후`를 이곳에서 촬영했다고 한다.

보길도(甫吉島) #2 : 격자봉(格紫峰, 433m) 산행

 

여행일 : ‘14. 11. 22()

소재지 : 전남 완도군 노화읍

산행코스 : 보옥리뽀래기재누룩바위격자봉수리봉큰길재곡수당 (소요시간 : 2시간40)

함께한 산악회 : 좋은사람들

 

특징 : 보길도는 섬 전체가 주변 바다와 함께 다도해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돼 있다. ‘보길도 12이 있고 섬 안에 있는 윤선도 선생의 유적지인 부용동에만 부용동 8이 있을 정도로 작은 섬 안에 무수한 절경을 안고 있는 곳이다. 또 천연기념물만 해도 5(예송리의 상록수림, 예송리 앞섬 예작도의 감탕나무 군락, 여항리의 후박나무, 정자리의 황칠나무, 선창리의 상록수림)이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보너스로 산행까지 즐길 수 있게끔 괜찮은 산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보길도의 최고봉인 격자봉(格子峰·)은 섬 중앙에 자리 잡은 부용동의 남쪽에 솟아 있다. 멀리서 바라보면 황소가 드러누운 듯 산세(山勢)가 완만하지만 주능선에 올라서면 암봉이 줄지어 나타나며 시원한 조망(眺望)을 즐길 수 있어 산행하는 재미가 남다르다. 북쪽으로 윤선도 유적지가 남아 있는 부용리 일원과 쪽빛 바다, 바다 건너 해남 땅끝과 달마산이 한데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또한 격자봉은 산 전체가 온통 상록수인 동백나무로 우거져 있다. 동백꽃으로 붉게 물드는 봄철에 찾아보는 것이 가장 제격일 것이다.

 

보옥리로 가는 길에 만난 망끝전망대는 벼랑 끝의 바람 삽상(颯爽 : 바람이 시원한)한 곳이다. 전망대에 서면 한눈에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바다가 아늑하게 멀다. 이곳에서는 가슴 시린 해넘이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산행들머리는 보옥리

원래는 망끝전망대에서 시작하려 했지만 뽀래기재까지의 등산로가 희미한데다 거칠기 때문에 들머리를 변경했다. 보옥리에 있는 보길도식품의 왼편 옆길로 들어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마을 안길을 따라 5분쯤 걸으면 작은 나무다리가 나타난다. 다리 옆에 이정표(뽀래기재 1.6Km, 예송리 6.0Km)와 산행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리를 건너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산의 초입은 소나무가 대세(大勢), 남해(南海)의 바닷가 산치고는 의외다. 남녘 바다의 섬에 있는 산들은 대부분 동백나무가 주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길가에 우거진 양치식물(羊齒植物, Pteridophyta)이 이곳이 남해안이라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겨울의 초입인데도 아직까지 녹음(綠陰)이 짙은 것이다. 보길도는 섬 자체가 하나의 자연공원(自然公園)으로 일 년 내내 활엽상록수림이 산 전체를 덮고 있다. 아열대성(亞熱帶性) 식물이 무성하게 자라 투명한 바다와 신비스런 조화를 이룬다.

 

 

 

 

경사(傾斜)가 거의 없는 산길을 10분쯤 걸으면 갈림길 하나가 나타난다. 이정표(뽀래기재 1.0Km/ 백련사지 0.5Km/ 보옥리 0.6Km)가 오른편에 백련사지(寺址)가 있음을 알려주나 큰 의미가 없을 것 같아 다녀오는 것을 포기하고 그냥 뽀래기재로 향한다. 산길은 서서히 가팔라져 간다. 그러나 내륙(內陸)의 산들에서 만나는 가파름에 비하면 가파르다는 표현을 쓰기가 민망할 정도로 그 정도는 약하다. 그저 지금 산길을 걷고 있구나 하고 느낄 정도의 가파름이니 별로 힘들지 않는 산행이 계속된다. 길가의 나무들은 산이 깊어질수록 동백나무의 밀도가 높아지더니 언제부턴가 완전히 동백나무들 천지로 변해버렸다. 그것도 햇빛 한 점 스며들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격자봉에는 동백나무 외에도 황칠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으며 황칠나무를 비롯해 붉가시나무, 구실잣밤나무, 후박나무, 가막살나무 등 난대성 수종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계속 되는 어두컴컴한 동백 숲을 지나면 20(들머리에서는 35) 후에는 주능선 안부에 올라서게 된다. 뽀래기재이다. 뽀래기재는 해안도로가 없던 시절 보옥리 사람들이 부용동마을로 넘나들던 고갯마루이다. 생활로(生活路)였던 셈이다. 키 큰 붉가시나무의 군락지(群落地)인 이곳에는 벤치(bench) 두 개와 탐방로 안내판, ‘전남대학교 학술림 안내판그리고 이정표(격자봉 1.6Km/ 보옥리 1.6Km)가 세워져 있는 뽀래기재는 사거리이다. 비록 이정표에 나와있지는 않지만 이곳에서 왼편으로 가면 망월봉을 넘어 망끝전망대로 연결되고, 곧장 직진하면 모중골을 따라 보길도수원지로 내려서게 된다. 격자봉으로 가려면 이정표가 지시하는 데로 오른편에 보이는 능선으로 올라서면 된다.

 

 

주능선에 올라서도 산길은 거의 변함이 없다. 경사(傾斜)가 거의 없는 산길이 어두컴컴할 정도로 울창하게 우거진 동백나무 숲을 뚫고 이어지는 것이다. 능선을 따라 5분쯤 걸으면 오른편에 바위 하나가 나타난다. 전망이 좋은 곳이니 그냥 지나치지 말고 들어서보자. 푸른 남해바다를 배경삼아 뾰족산과 그 오른편에 망월봉으로 보이는 바위봉우리가 선명하게 나타난다.

 

 

 

조망(眺望)을 즐기다가 다시 산행을 이어가면 5분쯤 후에 등산로 왼편에 뾰쪽하게 솟아오른 바위가 하나 나타난다. 바위 위로 오르기가 다소 부담스럽지만 꼭 올라가보자. 조금 전에 보았던 전망바위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조망이 좋다. 조금 전에 보았던 뾰족산이 이번에는 산자락 아래에 자리 잡은 보옥리까지 합쳐있고, 그 왼편에는 망망대해(茫茫大海)에 떠 있는 자그만 섬들, 그리고 반대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면 부용동 너머로 해남 땅이 그림처럼 나타난다. 그 그림에 그려진 산은 아마 달마산과 두륜산일 것이다.

 

 

 

 

 

능선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계속된다. 등산로 주변이 동백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다소 지루할 수도 있겠지만 가끔 나타나는 괴상한 바위들을 보며 걷는 재미가 제법 쏠쏠한 구간이다. 그렇게 20분 쯤 걸으면 부용동으로 내려가는 갈림길(이정표 : 격자봉 0.6Km/ 부용동 1.2Km/ 뽀래기재 1.0Km)이 나오고, 이어서 나타나는 거대한 바위를 왼편으로 우회하여 통과하면 곧이어 거대한 암봉이 앞을 가로막는다. 누룩바위이다.

 

 

 

 

 

 

 

덩치 큰 바위 몇 개가 마치 누룩을 쌓아놓은 모양이라는 누룩바위에는 나무데크로 전망대(展望臺)를 만들어 놓았다. 전망대에 오르면 바로 아래로 큰기미의 파도소리가 아련하게 들리고. 당사도와 복생도가 나타난다. 조금 부담스럽지만 난간을 넘어 바위 위라도 오를라치면 이번에는 서쪽의 넙도군도와 북쪽의 노화도와 횡간도, 그리고 땅끝과 완도의 상황봉까지 모두를 볼 수 있다. 가히 격자봉 최고의 전망대이다.

 

 

 

 

 

전망대에서 내려와 다시 산행을 이어가면 10여분 후에는 격자봉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격자봉 정상은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고 격자봉 433m'라는 이름표를 단 이정표(수리봉 0.9Km, 예송리 2.8Km/ 뽀래기재 1.6Km)가 정상석을 대신하고 있다. 능선의 봉우리들의 높이가 고만고만하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정상인줄도 모르고 지나치기 십상일 듯 싶다. 참고로 격자봉(格紫峰)은 고산이 물외(物外 : 구체적인 현실 밖의 세계)의 가경(佳境)이요 기경(奇境)’이라고 예찬했을 정도로 빼어난 산이다. 1753년 고산의 5대손 윤위가 답사하고 쓴 기행문 보길도지에는 격자봉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1917년 일본인에 의하여 제작된 1/5만 지도에는 적자봉(赤紫峰)으로 적혀있다. 현재의 공식지명은 격자봉이다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오로지 남쪽으로만 트여있다. 그래선지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벤치를 만들어 놓았다. 의자에 앉아 잠깐 조망을 즐겨본다. 오늘은 그야말로 행운(幸運)이다. 바다 건너에 있는 제주도의 한라산이 아련하게나마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오른편에는 추자군도가 물안개에 잠겨 있는 것이 보인다. 코앞에 있는 당사도와 복생도가 또렷하게 나타남은 물론이다.

 

 

 

 

격자봉을 지나면서 능선은 심심찮게 오른편으로 시야(視野)를 연다. 간간히 나타나는 바위들과 어우러지는 능선의 경치에다 남해의 짙푸른 바다가 발아래 조화를 더하니, 그 아름다움이 한결 돋보인다. 그래서 고산이 이렇게 말했나보다. ‘선계(仙界)인가 불계(佛界)인가 인간이 아니로다.’라고 말이다. 참고로 보길도는 망월봉과 조금 전에 지나온 격자봉, 그리고 저 앞에 보이는 수리봉과 광대봉(310m)이 능선을 이루며 고산 윤선도가 자리를 잡았던 부용동마을을 감싸 분지(盆地)를 이루고 있는 형상이다.

 

 

 

수리봉으로 가는 길에 좀 묘하게 생긴 시설 하나를 만날 수 있다. 양쪽의 나무에다 두 개의 가는 통나무를 매달고 두 통나무 사이에는 그물망을 엮어 놓았다. 생김새로 보아 의자라기보다는 침대에 가까운 형상이다. 여름철에 산행을 하다가 잠깐 드러누워 피서 겸 오수(午睡)를 즐기기에 제격이겠다.

 

 

 

 

격자봉을 떠난 지 20분쯤 되면 돌탑이 외롭게 지키고 있는 수리봉에 올라서게 된다. 격자봉에서 이곳 수리봉까지의 능선도 큰 굴곡이 없이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졌다. 수리봉에도 정상표지석이 없기는 격자봉과 마찬가지다. ‘수리봉 406m'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이정표(예송리 1.9Km/ 격자봉 0.9Km)가 정상석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격자봉에서 보았던 벤치는 이곳에서는 눈에 띄지 않는다. 바닥이 바위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구태여 앉을 자리를 따로 만들 필요가 없었던 모양이다. 비록 이정표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이곳에서 예송리로 내려가는 길이 나뉜다. 오른편에 산악회의 시그널(signal)들이 매달려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수리봉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뛰어나다. 사방으로 시야(視野)가 트이기 때문이다. 남쪽의 푸른 바다 위에는 당사도와 복생도, 소안도 등 다도해(多島海)의 수많은 섬들이 마치 돛단배라도 되는 양 넘실대는 파도 위에서 떠다니고, 그 섬들이 만들어낸 고요한 바닷가 안쪽에는 예송리마을이 오롯이 앉아 있다. 그리고 마을 앞바다엔 전복양식장이 끝도 없이 펼쳐지는데, 그 사이를 배들이 수면(水面) 위로 반짝이는 주름을 만들며 오간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반대편을 살펴보자. 윤선도 유적지가 남아 있는 부용리 일원과 쪽빛 바다, 바다 건너 해남 땅끝과 달마산이 한데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수리봉을 지나면서 시야(視野)는 더 자주 열린다. 발아래 예송리 마을이 조용히 웅크리고 있고 그 뒤에는 예작도와 소안도, 당사도 등 다도해(多島海)의 섬들이 무수히 널려있다. 그 모습이 흡사 수반(水盤) 위의 수석(壽石)을 빼다 닮았다. 한 폭의 잘 그린 그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시선을 오른쪽으로 조금 돌린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보이던 제주도와 추자도가 언제부턴가 사라져 버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해무(海霧)가 짙어졌던 모양이다.

 

 

 

섬 주변은 온통 이 고장 특산물인 전복 양식장으로 빙 둘러 있고 전복 먹이로 사용되는 다시마와 미역 양식 그물이 기하학적으로 바다를 드리우고 있어 이색적인 풍경으로 다가온다.

 

 

 

조망을 즐기며 걷다보면 능선은 갑자기 바윗길로 변하면서 고도(高度)를 뚝 떨어뜨린다. 그냥 서서 내려가기가 부담스러울 정도인데 다행히도 길가에 로프로 난간(欄干)을 만들어 놓았다. 로프구간이 끝나서도 산길은 조금 더 급경사(急傾斜) 내리막길을 만들다가 능선안부에 있는 큰길재 이르게 만든다. 펑퍼짐한 분지(盆地)로 되어있는 큰길재는 사거리로서 오른편으로 가면 예송리해안, 그리고 곧장 능선을 탈 경우에는 광대봉을 거쳐 청별선착장이나 통리해안에 내려서게 된다. 곡수당으로 가고 싶다면 물론 왼편으로 내려서면 된다. 수리봉에서 이곳 큰길재까지는 24분이 걸렸다.

 

 

 

산행날머리는 곡수당

큰길재에서 내려가는 산길은 아까보다 또렷해졌지만 어두컴컴하기는 매한가지이다.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울창한 동백림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이다. 답답할 정도로 빽빽한 숲 속으로 이어지는 산길을 따라 20분 조금 못되게 내려오면 곡수당에 이르게 되면서 산행이 종료된다. 버스가 주차되어 있는 동천석실 앞 도로는 이곳에서도 한참을 더 걸어야하지만 이후의 코스는 관광코스에서 소개하기로 하고 산행기는 여기서 끝을 맺는다. 오늘 산행은 총 2시간40분이 걸렸다. 중간에 잠깐 간식을 먹기도 하였지만 잠깐이었기 때문에 오롯이 걷는데 걸린 시간이라고 보면 된다.

보길도(下花島) #1 : 섬내 투어

 

여행일 : ‘14. 11. 22()

소재지 : 전남 완도군 보길면

여행코스 : 곡수당낙서재동천석실세연정예송리 해수욕장송시열 글쓴바위

함께한 산악회 : 좋은사람들

 

특징 : 보길도에 가면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 1587~1671)의 이상향(理想鄕)을 만날 수 있다. '자연과 세상을 깨끗하게 씻는다.'는 세연정(洗然亭)을 중심으로 들어선 원림(園林)이 바로 그것이다. 조선시대 시조문학의 황금기를 주도한 윤선도는 조선 인조 15(1637)에 세상을 등지기 위해 제주로 향하다 우연히 들른 보길도에 정착했다. 당시 고산의 나이가 51세였다. 고산은 자신의 정착지를 부용동(芙蓉洞)이라 칭하고, 모두 25채의 건물과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호남을 대표하는 대부호였던 해남 윤씨의 대종(大宗)으로, 재산이 넉넉했기에 가능했었을 것이다. 이 가운데 격자봉 기슭에 살림집인 낙서재(樂書齋), 낙서재 건너편 산중턱에는 동천석실이라는 휴식공간을 지었다. 이와는 별도로 부용동의 초입에 세연정을 지었다. 오늘 둘러보려고 하는 주요 유적지(遺跡地)들이다. 참고로 고산은 부용동 원림을 경영한 1647년부터 1671년까지 34년 동안 두 차례의 귀양과 서울 벼슬길, 해남 금쇄동 등 다른 은거지에서 지내기도 하면서, 보길도는 일곱 차례를 드나들며 통틀어 13년을 생활했다.

 

찾아오는 방법

보길도로 들어가는 방법은 완도의 화흥포항과 땅끝마을에서 카페리(car ferry)호를 타야만 한다. 완도로 가든 아니면 땅끝마을로 가든 해남 땅을 가로지르기는 매한가지이다. 우리는 완도의 화흥포항에서 운항(運航)하는 카페리호를 이용했다. 화흥포항으로 오는 방법은 영암-순천간고속도로 강진무위사 I.C에서 내려와 18번 국도를 타고 해남쪽으로 달리다 55번 지방도로 갈아타고 완도대교(大橋)까지 온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우회전하여 해안도로를 들어오면 화흥포항에 이르게 된다. 화흥포항에서는 1시간에 1대꼴로 카페리호를 운항하고 있으니 출항(出港)시간에 맞추어 승선하면 될 일이다.

 

 

 

보길도로 들어가는 뱃머리에서 본 노화도, 거대한 바위산이 눈길을 끈다. 그리고 손이 근질거려온다. 한번쯤 올라보고 싶을 정도로 탐스런 암벽(巖壁)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다 위는 온통 양식장의 부표(浮標)들이 점령하고 있다. 왜 이곳을 부자들의 고장이라고 부르는지 알겠다. 원래부터 완도는 김과 다시마의 집산지, 거기다 최근에는 전복까지 추가되었다. 그중에서도 보길도와 노화도 연안은 다시마와 전복 양식으로 특화되어있다. 거기서 나오는 수산물(水産物)이 이 지역을 살찌우고 있는 것이다.

 

 

 

화흥포를 떠난 배는 30분 정도를 달린 후에 노화도에 있는 동천항에다 승객과 차량들을 내려놓는다. 윤선도 유적지(遺跡地)가 있는 보길도는 이곳에서 보길대교를 건너면 된다. 그런데 그 거리가 제법 되기 때문에 여행객들은 배에다 차량을 싣고 건너는 게 일반적이다. 배삯은 한 사람에 6500원이고 승용차 한 대 싣는 값은 운전자 한 사람 포함해서 16천원이라고 한다. 보길도에도 청별선착장이 있으나 보길대교가 놓인 뒤로는 육지에서 좀 더 가까운 노화도까지만 운항한다고 한다. 참고로 청별항은 여기서 윤선도가 찾아온 손님을 떠나보냈다고 해서 맑은() 이별()’이란 제법 서정적인 이름을 얻었다.

 

 

 

윤선도선생의 흔적을 찾아보는 여행의 시작은 곡수당(曲水堂)에서부터 시작된다. 격자봉 산행을 끝내면 내려서게 되는 곳이 바로 곡수당이기 때문이다. 곡수당 구역은 작은 개울을 중심으로 초당, 석정, 석가산, 평대, 연지, 다리, 화계 등이 좌우로 조성되어 있었던 곳이다. 검소하게 지어진 한 칸짜리 건물인 곡수당은 고산의 아들인 학관이 공부하고 휴식하기 위한 공간이라고 한다.

 

 

 

곡수당의 오른편에 보이는 건물은 책을 보관하는 서고(書庫)쯤 되려니 했는데, 막상 건물 앞의 안내판에는 사당(祠堂)이라고 적혀있다. 고산선생이 낙서재에서 돌아가신 뒤, 이곳에서 얼마간 초장(草葬)을 지냈다는 것이다.

 

 

곡수당을 빠져나가면 다리를 건너야 한다. 격자봉에서 흘러내린 물이 월하탄을 거쳐 이곳으로 흘러오는데, 그 개울을 가로지르는 다리는 모두 세 개, 사당 앞에 놓인 일삼교와 곡수당으로 들어오는 유의교, 홍예교가 바로 그것이다. 이중 아치형으로 만든 홍예교기 눈길을 끈다. 홍예교를 건너면 하연지이다. 하연지의 형태는 정방형에 가깝고, 한변의 길이는 대략 13m, 호안 축대의 높이는 약 1m 정도이다. 하연지의 연못 옆에 석정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참고로 곡수당 앞으로 흐르는 계천은 물 흐르는 소리가 옥이 구르는 듯하다고 해서 낭음계라고 불렀는데, 이로 인해 낙서재와 무민당, 곡수당 등이 있는 주변을 통틀어 낭음계정이라 부르기도 한다. 낭음계 주변은 소나무와 삼나무가 울창하고 깨끗한 암벽들이 있어서 윤선도가 때때로 죽장을 짚고 소요했다고 한다. 그리고 술잔을 물 위에 띄워 놓고 시를 지으며 노는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벌일 만한 곳과 목욕을 하기 알맞은 목욕반(沐浴盤)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보길수원지에 들어가 자취를 찾아보기 어렵다.

 

 

곡수당의 위편에는 상연지()라는 연못이 있다. 높이가 한 길(보통 사람의 키) 정도 되는 방대 위에 가산(假山)을 만들고 허리부분에 구멍하나를 뚫어 돌로 된 통을 끼워 뒤에서 끓어온 물이 구멍을 통해서 못으로 쏟아지게 하고, 비래폭포(瀑布)라고 불렀단다. 그러나 상연지의 정경이 어쩐지 엉성하게 보여 연못 대신에 물을 끓어오는 시설을 사진에 담아 보았다.

 

 

곡수당을 빠져나와 맞은편 언덕으로 올라가면 낙서재이다. 부용동은 크게 세 구역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중 첫 번째는 고산이 거처했던 살림집인 낙서재(樂書齋)와 그 주변에 있는 자식들의 생활생활 공간이었던 곡수당(曲水堂), 낙서재 맞은편 산 중턱에 위치한 휴식공간인 동천석실(洞天石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용동 입구에 있는 놀이공간이었던 세연정(洗然亭)이다. 보길도 안에서 가장 좋은 양택지에 자리잡은 낙서재(樂書齋)는 강학하고 독서하면서 즐거움을 얻고 은둔하고자 하는 선비의 생활공간이었다.

 

 

 

낙서재 앞에 보면 동와(東窩 : 동쪽에 있는 잠깐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자그만 움집)라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작은 초가집(草屋)이 한 채 보인다. 그 뒤에는 무민당(無憫堂 : 조상의 위패를 모시며 찾아오는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한 집)이 복원(復原)되어 있다. 그러나 동와 옆에 있던 서와(西窩)와 윤선도의 자제들과 문인들이 거처하던 동쪽 언덕의 정성암은 아직까지 복원되지 않았다. 또한 지금은 비록 땅속에 묻혔지만 예전에는 낙서재 앞에 거북바위가 있어서 저녁이면 윤선도가 거기에 앉아 달을 즐겼다고 전해진다.

 

 

 

낙서재 뒤편에는 소은병(小隱屛)이라 불리는 커다란 바위가 있다. 소은병이란 원래 주자가 경영한 중국 복건성 숭안현 무이산의 대은봉(大隱峯) 건너편에 있는 봉우리 이름으로, 윤선도는 산속에 은거하며 학문에 몰두한 주자의 행적을 따른다는 뜻에서 자기 거처 뒤의 바위에 이 같은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소은병 바위 위에는 홈이 크게 파여 있어서 빗물이 고이면 바위벽을 타고 흘러내리게 되어 있다. 윤선도는 숲이 빽빽한 이 부근에 나와 사색에 잠기곤 했다고 한다.

 

낙서재에서 바라본 부용동

 

 

낙서재를 빠져나오면 부용동 마을이다. 통천석실로 가려면 이 마을의 한가운데를 통과해야만 한다. 마을 안길을 걷다보면 자칫 무료해질 수도 있다. 이런 때는 뭔가 다른 생각을 떠올려보는 것이 무료함을 잊는 한 가지 방법일 수도 있다. 보길도는 섬 내에 명당자리가 있다는 뜻(十用十一口[甫吉])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그렇다면 마을 주변의 산들을 둘러보면서 명당자리를 찾아보자. 그러나 아마추어(amateur)의 눈에 들어올 리 만무하다.

 

 

 

마을을 통과한 후, 자동차도로를 건너 맞은편 동천석실로 향한다. 석실로 오르는 길은 제법 가파르다. 하긴 석실이 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으니 별 수 없었을 것이다. 이곳의 나무들도 역시 동백나무들, 햇빛이 스며들지 못할 정도로 울창하게 우거져 있다.

 

 

 

도로에서 15분 조금 못되게 오르면 아슬아슬한 절벽 위에 세운 누각(樓閣)형태의 한 칸짜리 정자 동천석실(洞天石室)에 이르게 된다. 동천이란 의미는 하늘로 통하는 곳, 산천경개가 빼어난 곳 또는 신선이 사는 곳이라는 뜻이 있다. 석실은 돌로 만든 방이라는 뜻이다. 서책(書冊)을 즐기며 신선처럼 소요하는 은자(隱子)의 처소라는 의미를 갖고도 있는데, 고산은 이곳을 부용동의 으뜸 절승(絶勝)으로 꼽았다. 동천석실에는 석실 외에도 석실로 접근하는 석문(石門), 석제(石梯), 석천(石泉), 석폭(石瀑), 석대(石臺) 및 희황교(복희씨) 등의 유적이 있다. 동천석실의 용도는 공부방이다. 고산은 이곳에서 석간수를 모아 연못을 조성하고 집을 지어 책을 읽었다고 한다. 그리고 배라도 고플라치면 바위에 매달린 도르래를 이용해서 아래에서 음식을 받아먹었다고 한다. 참으로 신선 같은 삶이 아닐 수 없다.

 

 

 

고산은 정자 외에도 다도(茶道)를 즐기던 오목하게 파인 차바위, 바위사이에서 솟아나는 석간수(石間水)를 받는 석지(石池), 연지(蓮池), 암벽 사이에서 자생하는 석란(石蘭), 한 사람만이 거닐 수 있는 희황교와 돌계단, 석문(石門) 등 자연 그대로의 모양에 따랄 여러 바위에 상징적인 이름을 붙였다. 고산은 부용동 제일의 절승이라는 이곳에서 부용동 전경을 바라보며 시가를 읊었다고 한다. 커다란 바위들에 둘러싸인 손바닥만 한 터에 앉은 한 칸짜리 작은 정자(亭子) 앞에 서면 낙서재와 적자봉을 비롯한 부용동 일대가 거침없이 시야(視野)에 들어온다. 참으로 호방하고 시원스러운 조망(眺望)이다. 만일 발아래 부용동 골짜기에 비구름이나 안개가 낮게 깔리기라도 하면 선계(仙界)에 들어선 듯한 착각마저 든다고 한다.

 

 

동천석실에서 바위벼랑을 따라 20m정도 아래로 내려가면 또 한 채의 정자(亭子)가 나온다. 안내판에 침실이라고 적혀있다. 날씨가 추울 때면 고산이 이곳에서 잠시 쉬었다는 것이다. 난방(煖房)을 위해 불을 지폈는데 아궁이가 석축(石築) 아래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이 건물의 특징이란다.

 

 

통천석실에서 세연정까지는 거리가 꽤 되므로 차량을 이용한다. 차량에서 내리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보길 윤선도 원림(園林)’이라고 쓰인 간판 옆에 있는 매표소이다. 관람료는 성인 기준 1천원, 물론 어린이나 학생, 군인은 할인이 되며, 65세 이상은 관람료가 면제된다.

 

 

매표소에서 세연정까지는 200~300m 정도, 급하게 발걸음을 서두르는 것보다. 매표소 건물에 만들어진 전시관(展示館)에 먼저 들러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요즘 시대에 맞게 디지털로 꾸며진 전시관에서 고산의 고난했던 생애(生涯)와 그가 지녔던 철학, 그리고 그의 작품들을 먼저 알아보는 것이 유적지 답사에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전시관에서 나와 원림에 들어서면 가장먼저 연못이 나타난다. 과연 '조선최고의 별서조원(別墅造園)'이라는 평가를 듣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세연지의 집채 만한 바위들이 방문객을 맞고, 무희들이 춤췄던 동대와 서대의 주변에서는 동백나무가 하늘거린다. 보길도는 한 개인의 낙원이고 유토피아(Utopia)였다. 그는 이곳(현재는 보길초등학교 담너머)에다 그의 꿈을 집약시킨 부용동 원림(園林)’이라는 정원을 만들었다. 논에 물을 대듯 개울물을 막아 세연지(洗然池)라는 연못을 만들고, 그 한가운데에다 섬을 만들었다. 세연지는 커다란 바위들을 스치고 자연 계곡처럼 흐르는 못이고, 그 물길을 이어서 장방형으로 만든 인공(人工) 못이 회수담이다. 후박나무, 동백나무, 감탕나무, 가마귀쪽나무 등이 늘 푸른 활엽수 숲을 이루는 이곳은 낙원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뛰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고산은 자연못과 인공못 사이에 팔작지붕을 얹은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의 우아한 세연정 건물을 들어 앉혔다. 그리고 속세(俗世)의 티끌을 씻어낸다는 뜻으로 세연정(洗然亭)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마음 심()자 모양으로 된 3개의 연못과 세연정이 어울리는 풍경은 한마디로 절경(絶景),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5년에 걸쳐 조성했다는 이 정원은 한 개인의 낙원(樂園)이라는 수준을 벗어나 버렸다. 그 결과 명승 제34호이자 사적 제368호로 지정되어 있다. 창경궁 후원 그리고 담양의 소쇄원과 함께 '국내 3대 아름다운 정원'으로 꼽힐 정도이니 명승으로 지정됨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3,000여 평에 이르는 세연정은 계곡 물을 담은 계담(洗然池), 계담의 물을 끌어들인 인공연못인 회수담(回水潭), 그 사이에 있는 인공섬에 정자인 세연정을 짓고 비홍교를 만들어 건너다녔다. 연못바닥은 깨끗한 암반(巖盤)으로 되어 있고 수초가 무성한 연못에는 사투암, 혹약암 등 7개의 큼직한 바위(칠암)이 놓여 있고 연못 주변에는 야외 무대격인 동·서대(·西臺)와 입석과 판석에 구멍을 뚫어 꿰어서 만든 판석보(板石洑 : 일명 굴뚝다리) 등이 있다. 특히 판석보는 우리나라 정원유적(庭園遺跡) 중에서 유일한 석조보(石造洑)로 세연지의 저수(貯水)를 위해 만들었다. 평소에는 돌다리가 되고 우기(雨期)에는 폭포가 되어 수면(水面)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고산은 이곳으로 친지를 불러 자주 연회(宴會)를 열었다고 한다. 풍악이 울려 퍼지면 동대와 서대에선 곱게 차려입은 기생이 덩실덩실 춤을 추었을 것이다. 그리고 세연지에는 배를 띄웠다고 하니 그야말로 별천지(別天地), '그만의 왕국'이었던 셈이다. 그런 연유로 세연정은 휴식공간인 동천석실, 그리고 거주공간인 낙석재와 대비되는 놀이공간으로 분류된다.

 

 

 

 

 

보길도는 전체적으로 볼 때 동백섬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곳곳이 동백나무들로 가득 차 있다. 당연히 꽃 따라 걸으며 고산의 생애(生涯)라도 떠올리면 좋으련만 아직은 철이 이르다. 꽃이 피려면 몇 달은 더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끔은 계절을 잊고 먼저 핀 꽃들도 있다. 세연정에도 그런 나무들이 몇 그루 있었나보다. 누군가가 길가의 등() 위에다 떨어진 꽃잎들을 수북이 쌓아놓았다. 고산의 곧은 절의에 깃든 섬세한 시심(詩心)이 빨간 꽃송이 위로 흐르는 것 같다.

 

 

청별항의 반대편 해안(海岸)에 위치한 예송리해변의 조약돌은 한국 해변 자갈밭 가운데 자갈의 크기가 가장 고르고 아름다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여름철에는 해수욕을 즐기기에 좋고, 겨울철 해돋이를 감상할 수 있는 명소로도 이름 나 있다. 특히 겨울철 해돋이는 완도팔경 가운데 하나로 손꼽힐 정도이다. 그래서 사시사철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고 한다. 주민들이 관광객을 상대로 민박집이나 음식점을 운영해 벌어들이는 수입이 짭짤하다니 효자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는 셈이다.

 

 

조약돌이 펼쳐져 있는 해변은 길이 1.5km에 폭이 20m~30m에 이를 정도이니 규모까지 꽤 큰 편이다. 조약돌들은 검정색이나 쑥색에 어른 주먹 크기의 타원형으로 파도에 바들바들 씻겨 있어 매우 깨끗하다. 늦가을 기온이 제법 쌀쌀한데도 불구하고 햇볕에 달구어진 조약돌들은 따뜻하다. 그 따뜻한 감촉이 마음에 들었던지 집사람이 조약돌밭에 벌러덩 누워버린다. 마침 파도소리까지 잔잔하게 들려오니 그녀에게 이 조약돌 밭은 자연 찜질방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아름다운 상록수림(천연기념물 제40)이 바닷가를 길게 감싸고 있고, 해변(海邊)을 가득 채운 작고 새까만 몽돌(깻돌)들은 앉아 있으면 차르르 차르르 소리를 지르며 말을 건넨다. 그리고 바다에 떠 있는 배들은 갯돌의 화음에 맞춰 살짝살짝 몸을 흔든다. 해수욕장 앞 바다엔 예작도, 당사도, 소안도, 기도(소섬) 등의 여러 섬과 여(물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 바위)들이 점점이 떠 있어 먼 바다에서 밀려드는 파도의 기세를 누그러뜨린다. 그 덕에 예송리 앞바다는 호수처럼 아늑하고 잔잔하다. 이런 천혜의 조건 덕에 주민들은 미역이나 톳을 양식하여 많은 소득을 올린다고 한다. 참고로 예송리 상록수림은 약 300년 전에 태풍을 막기 위해 이곳 주민들이 만든 숲으로 길이가 약 740m, 폭이 30m쯤 되는 반달모양의 매우 아름다운 숲이다. 숲을 이루고 있는 식물은 후박나무, 메밀잣밤나무, 구실잣밤나무, 참가시나무, 붉가시나무, 동백나무, 팽나무, 작살나무, 구지뽕나무, 졸참나무 등이다. 상록활엽수림이라고 하지만 상당수의 곰솔이 자라고 있고 굵은 나무가 있다.

 

 

예송리 몽돌해수욕장에서 통리와 중리해수욕장을 지나 보길도의 동쪽 끝까지 가면, 우암 송시열이 제주도로 귀양 가던 길에 잠시 쉬면서 시() 한 수를 지어 새겼다는 송시열 글씐바위앞에 다다른다. 보길도의 유적(遺跡) 중에 고산 말고는 우암(尤庵)의 유적이 유일할 것이다. 말년에 떠나야 하는 귀양길의 설움이 묻어나는 시(), 그 시가 새겨진 바위 앞에서 바라보는 바다도 퍽 인상적이다.

 

 

 

보길도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산(孤山)을 떠올린다. 그만큼 그가 남진 유적들이 섬의 곳곳에 널려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희귀하지만 다른 사람의 유적도 남아있다. 그런데 그 유명인사가 아이러니하게도 고산의 정적(政敵)이었던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 1607~1689)이다. 윤선도는 빼어난 시인이기도 하지만 당쟁의 와중에서는 남인(南人)의 투사(鬪士)로서 앞장서 싸운 정치가이기도 했다. 그런 고산의 정적이자 대척점에 섰던 서인(西人)의 영수(領袖)가 바로 우암인데, 그가 보길도와 인연을 맺었던 것이다. 송시열은 1689년 장희빈 아들(훗날 경종)의 세자 책봉문제로 제주도로 유배 가다가 풍랑을 만나 보길도에 잠시 피신하게 된다. 그때 자신의 심경을 토로한 한시를 바위에 새겨 놓았는데 이것이 바로 송시열 글씐바위(완도군 향토유적 12)’라고 일컫는 탄시암이다. 보길도 동쪽 끝 선백도 해변 500m 남짓한 거리에 있는 바위에 새겨져있다.

 

 

 

에필로그(epilogue)

윤선도(尹善道)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해옹(海翁)이다. 호남 제일의 남인(南人) 명문가로 자리 잡은 해남 윤씨의 종손이었던 고산은 반대파인 서인(西人)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게 된다. 때문에 의금부도사 등 조정의 관직에 여러 번 임명되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나라를 개혁하고 시무(時務)를 혁신할 큰 뜻을 품고 있었던 고산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은 자리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42세가 되는 1628(인조 6)에 훗날 효종(孝宗)이 되는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師父)가 되면서 중심에 서게 된다. 이후 윤선도는 공조좌랑, 호조좌랑, 형조좌랑, 예조정랑 등에 제수되면서 인조(仁祖)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그러나 그 호시절(好時節)은 서인의 견제에 걸려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고산(孤山)이라는 호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그의 삶은 외롭고 고단했다. 그의 제자였던 효종과 다음 임금인 현종 때 부름을 받기도 했지만 서인들의 방해로 인해 벼슬길에 나아기지는 못했다. 양주 고산(孤山 : 그의 호와 같은 지명이다)의 별장으로 물러가 임금의 명을 기다려야 하는 간난신고를 치러야 했던 것이다. 대신 그의 삶은 은거(隱居)와 유배(流配)로 점철된 인생이었다. ‘삼수갑산(三水甲山)을 가더라도 먹고나 보자.’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멀고 험하고 춥고 혹독한 곳으로 유명한 함경도 삼수(三水)에 위리안치(圍籬安置)까지 된 유배생활을 여기서 거론할 필요는 없고, 나머지 은거생활을 했던 곳이 바로 이곳 보길도인 것이다.

 

사림의 전성시대였던 16세기, 영남사림이 도학(道學:성리학) 연구에 힘을 쏟았던 반면 호남사림은 문학 방면에서 큰 재능을 발휘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면앙정(俛仰亭) 송순(宋純)과 송강(松江) 정철(鄭澈)이다. 그런데 17세기에 들어와 또 한 명의 걸출한 스타 시인을 배출하였으니 그가 바로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이다. 고산은 한문(漢文)보편문자였던 시대에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빛낸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극찬(고미숙의 윤선도 평전’)을 받기도 한다. 고미숙씨는 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그의 작품은 언어와 리듬이 지극히 부드럽고 서정적이라면서 자연미의 시인으로 분류하기도 했다. 특히 고산은 사대부의 주류 문화였던 한시(漢詩)에 비해 홀대당하고 있던 시조에 우리말의 감성과 서정성의 숨결을 불어넣어 미학(美學)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유일무이한 시인이었다.

 

시인으로서의 윤선도는 최고였지만, 그의 삶은 고산(孤山)이라는 호처럼 외롭고 고독했다. 평생 유배와 은거로 생을 보내야했기 때문이다. 길고 길었던 유배생활을 끝내고 보길도의 부용동으로 다시 돌아온 때는 그의 나이 81, 그리고 4년 뒤에 부용동의 낙서재에서 눈을 감고 만다. 이때가 그의 나이 85세였다. 고산은 보통의 사람보다 곱절 가까운 세월을 더 살았지만 30세에 이이첨을 탄핵한 일로 유배형에 처해진 후에도. 죽을 때까지 장장 50여 년 동안을 외롭고 고난한 삶을 살아야 했다. ‘외롭게 홀로 서 있는 산이라는 그의 호와 같은 삶이었다. 젊은 시절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로 큰 권세를 휘두른 이이첨을 탄핵했던 패기와 강직하고 올곧은 성격은 나이가 들어서도 끊임없이 불의에 대한 상소(上疏)를 올렸고, 이러한 패기와 성격 때문에 평생 외롭고 고단한 삶을 살아야 했지만 타고난 천성이었을까 고산은 가시밭길을 걸을망정 불의(不義)한 권력과 타협하려 하지 않았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땅 끝 해남에 머무르던 고산은 청나라 군대가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들고 지방 사족(士族)들과 가복(家僕)들로 의병(義兵)을 구성해 배를 이끌고 강화도로 갔으나 이미 강화도가 함락되었기에 다시 남해로 뱃길을 돌려야 했다. 그러다가 임금이 청나라에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제주도로 들어가 세상을 등지고 살기로 마음을 굳힌다. 이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제주도로 가던 도중 풍랑(風浪)을 만나 잠시 보길도의 황원포로 피항(避港)했다. 보길도의 아름다운 산수에 매료된 고산은 천석(泉石)이 절승하니 참으로 물외(物外)의 가경(佳境)이요 선경(仙境)’이라고 감탄하면서 아예 눌러 살기로 작정했다고 한다. 고산은 이곳에 터를 잡아 부용동(芙蓉洞)이란 이름을 붙이고 낙서재(樂書齋)를 지어 은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는 이곳에 얼마 머무르지 못했다. 청나라 군대가 물러가자 조정의 서인 세력은 윤선도가 강화도까지 와서 한양을 지척에 두고서도 임금을 알현하지 않았다는 이른바 불분문(不奔問: 달려와서 문안하지 않았다)’의 죄를 물어 경상도 영덕으로 유배형을 내렸던 것이다. 1년 가까이 유배 생활을 마친 고산은 이곳으로 돌아와 자신에게 학문을 배운 효종이 즉위한 후 3년이 되던 해까지 13년을 해남의 금쇄동(金鎖洞)과 보길도의 부용동(芙蓉洞)을 오가며 시인 묵객의 삶을 살았다. 이 기간 동안 윤선도는 산중신곡(山中新曲)’ 속의 오우가(五友歌)’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등 우리 시조 문화의 최고 걸작들을 연이어 지었다. 정치에 끈을 끊자, ‘언어의 연금술사이자 자연미의 시인윤선도가 비로소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참고로 고산은 51(1637)에 보길도에 처음 들어와서 85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일곱 차례를 보길도에 왔다 갔다 하면서 13년 동안을 머물렀다. 몇 차례 벼슬길에 오르고 당파 싸움에 휘말려 귀양을 가는 등 3차례의 유배기간이 20년이었는데, 유배가 풀려 해남과 보길도를 오가며 산 세월이 19, 그러니까 대부분의 은둔(隱遁)을 보길도에서 보냈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고산은 85세를 일기로 낙서재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 세연정, 곡수당, 무민당, 정성암 등 모두 25채의 건물과 정자(亭子)를 지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세연정(洗然亭)’을 꾸미는 일에 대단한 정성과 공을 들였다고 한다. 그러나 고산이 세상을 뜬 뒤로 부용동 정원은 한동안 폐허로 방치됐다. 그러다가 1993년 부용동 정원의 중심인 세연정의 복원(復原)을 시작으로, 최근까지 산중턱 바위에 올라앉은 동천석실, 그리고 고산이 강학하던 낙서재와 고산의 아들 학관이 휴식할 공간으로 조성했다는 곡수당이 순차적으로 옛 모습을 되찾았다. 참고로 현재 보길도의 부용동 정원은 명승 제34호이자 사적 제368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산에 대한 비판도 있다. 타고난 천재성과 심미안, 대를 이어온 엄청난 부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이상향을 실현하는 데는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던 이웃들에 대한 배려가 아쉬웠다는 점이다. 허나 자신의 부()를 사회에 환원한 흔적은 남아있다. 진도군 임회면 굴포리 및 보길도 북쪽 노화도 구석리와 석중리에 사재(私財)를 털어 간척지(干拓地)를 개간해 주민들에게 무상(無償)으로 나누어 준 것이다.

하화도(下花島)

 

여행일 : ‘14. 11. 10()

소재지 : 전남 여수시 화정면

여행코스 : 선착장애림야생화공원큰굴삼거리막산전망대깻넘전망대큰산전망대구절초공원선착장(소요시간 : 2시간40, 5.7Km)

함께한 산악회 : 좋은사람들

 

특징 : 하화도(下花島)는 행정구역상 여수시 화정면에 소속된 부속도서(附屬島嶼)로 여수에서 약 21km 정도 떨어진 구두처럼 생긴 섬이다. 동백꽃과 섬모초, 진달래꽃이 섬 전체에 만발하다고 해서 꽃섬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꽃섬은 두 개로 나뉘어 있는데, 위에 위치한 섬을 상화도 그리고 아래쪽 섬을 하화도라 부른다. 여수 앞바다에 보석처럼 흩뿌려진 365개 섬 중 하나로 공룡발자국 화석이 있는 사도를 비롯해 낭도, 개도, 백야도 등 하화도를 둘러싼 섬들의 유명세 때문에 비교적 덜 알려진 작은 섬이다. 그러던 것이 201310SBS-TV '생방송 투데이'식도락-정이 피어나는 꽃섬 하화도 편에 소개되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고, 특히 섬 둘레를 일주하는 5.7꽃섬길이 만들어지면서 섬 트레킹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새롭게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2008년부터 조성하기 시작한 꽃섬길은 절벽과 절벽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이어주며 하화도의 진면목을 외부에 알리는데 크게 일조를 했다.

 

찾아가는 방법

하화도로 가려면 여수여객선터미널(061-662-5454)에서 12회 운행하는 배편이나, 여수에서 30분 남짓 걸리는 거리에 위치한 백아도 선착장(061-686-6655)에서 출발하는 배편을 이용해야 한다. 우리는 백아도에서 개도~하화도~상화도~사도~낭도를 오가는 태평양해운의 대형카페리3호를 이용(1인당 6천원)했는데 하화도까지는 약 40분이 소요되었다. 이 배는 백아도에서 8, 1130, 1450, 그리고 낭도에서는 940, 1310, 1630분 각각 3회씩 운항(運航)한다.

 

 

여수에서 22번 지방도와 77번 국도를 번갈아 타고 30분 남짓 달려오면 이순신장군이 난중일기(亂中日記)에서 극찬했던 백아도(白也島)가 나온다. 섬으로 들어오는 길에 2005년 준공된 325m 길이의 백아대교(白也大橋)를 건넜음은 물론이다. 하화도로 들어가는 배가 이곳 백아항(白也港 : 여수시 화정면 백아리)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출항까지 시간에 여유가 있어 백아등대에 잠깐 들러본다. 이순신이 감상에 젖었을 법한 산자락에 가막만()의 입구를 밝혀주는 백아등대(白也燈臺)가 홀로 서있다. 아니 등대의 뒤편에 남해지방해양경찰청의 여수연안해상교통관제센터가 있으니 홀로라는 표현은 옳지 않겠다. 백아등대에 서면 제도와 돌산도를 비롯해 크고 작은 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여명(黎明)의 시간, 어둠에 덮인 사위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참고로 백아등대의 정식 명칭은 백아도항로표지관리소이다. 19281210일 최초로 점등되었으며, 19596월 유인등대로 전환되었다. 19602월 등명기를 개량하고, 197012월 음파표지 시설을 설치하였다. 198311월 높이 8.8m의 등탑으로 개량하였고, 200611월 높이 24m의 백색 원형 철근콘크리트 구조물로 등탑을 다시 개량하였는데 지리적 광달(光達)거리는 31km에 이른다.

 

 

백아항()은 화정면의 소재지(所在地)를 겸하고 있다. 섬에 있는 면소재지가 대개 그렇듯이 백아항 역시 시골마을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제법 큰 규모이다. 당연히 식당은 물론 번듯한 카페까지 편의시설들을 두루 갖추고 있다. 그러나 주의해야할 것은 아침 식사가 안 된다는 점이다. 새벽에 내려와 8시 배를 탈 계획이라면 아침식사를 미리 준비해 와야 하는 센스(sense)가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참고로 백아항에서는 하화도 외에도 금호도로 들어가는 배편이 운행되고 있다.

 

 

 

 

8시에 백아항을 떠난 배는 중간에 개도(蓋島)에 잠깐 들렀다가 하화도로 향한다. 개도는 여수시내에서 남쪽으로 약 21.5km 떨어져 있는 섬이다. 주위에는 남쪽의 금오열도를 비롯하여 월호도·자봉도·제리도·하화도·백야도 등 크고 작은 많은 섬들이 산재해 있다. 개도라는 이름도 주위의 작은 섬들을 거느리고 있다는 뜻에서 덮을 개()를 썼다고 한다. 섬에는 봉화산(338m)과 천제봉(320m)을 비롯한 200m 내외의 산이 많이 있어 비록 뜸하기는 하지만 내륙의 산꾼들이 찾기도 한다.

 

 

개도에서 10분 남짓이면 하화도(下花島)에 이르게 된다. 하화도는 0.71의 면적에 가장 높은 지점이 118m에 불과한 자그마한 섬이다. 취락은 북서쪽 해안가의 하화마을이 유일하다. 당연히 섬 여행의 출발은 이곳에서 시작된다. ‘참으로 깔끔하고 아담하다섬에 내리면서 느낀 첫 인상이다. 그만큼 관광지로 가꾸려고 섬에 쏟아 부은 정성이 지극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바닷가의 담벼락은 몇 해 전 봉사활동을 나온 대학생들이 그렸다는 예쁜 벽화(壁畵)들로 가득 채워져 있고, 길바닥은 지난달에 다녀온 동유럽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예쁜 돌길로 꾸며져 있다. 영화 꽃섬에서 슬픔과 불행을 잊기 위해 하화도를 찾은 세 여자들이 걸었던 길이 바로 이 길이 아니었을까? 영화 생각을 하다 보니 내 가슴도 마치 꿈과 희망으로 차오르는 듯한 느낌이다.

 

 

 

 

아담한 마을 풍경이 정겹다. 하화도는 작은 섬이지만 보건진료소와 교회, 그리고 내연발전소까지 반듯하게 갖추고 있다. 그러니 당연히 식당이 없을 리가 만무하다. 점심 식사 걱정을 했던 시절은 이젠 옛이야기가 되어버린 지 오래인 것이다. 오래전부터 식사를 제공해오던 이장집 외에도 몇 집이 더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이장집의 시골밥상이 싫은 사람들은 다른 집에서 싱싱한 자연산 회를 사먹을 수 있음은 물론이다. 참고로 하화도라는 섬의 이름은 임진왜란 당시 인동장씨(仁同張氏)가 난을 피하기 위하여 이곳을 지나다가 동백꽃과 섬모초꽃이 만발한 것을 보고 꽃섬이라 부른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들이 이곳 하화도의 입도시조(入島始祖)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전선(戰船)을 타고 항해하던 이순신 장군이 꽃이 활짝 핀 아름다운 섬이라 해서 화도로 명명했다는 설()도 있으니 참고할 일이다.

 

 

 

 

하화마을에서 오른편 해안가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서 투어(tour)가 시작된다. 코스는 세 갈래로 나뉘지만, 하화도 꽃섬 길의 비경인 큰굴과 막산 전망대 등 조망이 뛰어난 전망대를 서둘러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가는 길에 오른쪽 건너편에 보이는 섬은 상화도(上花島), 면적이 0.76이고 가장 높은 곳이 148m이니 이곳 하화도보다 약간 크나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차이는 미미하다. 그러나 섬 중간에 상당히 많은 가옥(家屋)들이 보이는 것을 보면 이곳 하화마을보다는 훨씬 더 많은 주민들이 살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참고로 상화도는 300년 전 배()씨가 처음으로 들어오면서부터 사람들이 살게 되었으며, 꽃섬이라는 이름에 못지않게 봄이면 진달래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난다고 한다. 투어를 시작하자마자 길가에 이국적(異國的)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건물이 하나 나타난다. 바로 화장실인데 지난주에 다녀온 독일에서 보았던 건물들과 흡사한 외형을 갖고 있다. 화장실 하나에까지 신경을 쓴 것을 보면 이들이 이곳을 관광지로 가꾸기 위해 얼마나 많은 정성을 쏟아 부었는지 실감이 난다.

 

 

 

화장실에서 몇 걸음 더 걸으면 애림민 야생화공원이다. 공원에는 가을 들꽃들이 나름대로 무리를 이루며 피어있다. 다들 우리네 어릴 적에 흔하게 보아왔던 꽃들이다. 다도해(多島海)의 풍광을 배경으로 소박하게 핀 들꽃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것이 참으로 자연스럽다. 여수시에서 이곳을 개발하면서 인위적(人爲的)인 아름다움을 최대한 배제하고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보존하기 위해서 공을 들인 결과란다. 그래서일까? 하화도는 나를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로 되돌려놓았고, 거꾸로 흐르는 시간에도 불구하고 나는 스스럼없이 푹 빠질 수 있었다. 공원에서 순넘밭넘 구절초공원으로 가는 길(이정표 : 큰굴 590m/ 순넘밭넘 구절초공원 350m/ 선착장 630m)이 나뉘지만 개의치 않고 큰굴방향으로 진행한다.

 

 

 

 

애림민 야생화공원을 지나면서 길은 서서히 오르막으로 변한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큰굴삼거리(이정표 : 막산전망대 400m/ 순넘밭넘 구절초공원 830m/ 애림민 야생화공원 590m)이다. 이곳에서는 우선 오른편으로 진행해야 한다. 막산전망대가 있는 오른편 봉우리를 한 바퀴 돈 후에 왼편 순넘밭넘 구절초공원으로 향해야 하기 때문이다. 삼거리 근처에서 왼편 바위벼랑 사이로 바다가 열린다. 깎아지른 절벽(絶壁)과 절벽 사이로 파도가 들락거리고 절벽 아래에는 커다란 동굴이 검은 입을 벌리고 있다. 예전에 밀수꾼들이 밀수품(密輸品)을 숨겨놓았다는 큰굴은 절벽을 타고 내려갈 수도 없고 배를 타고 접근하려 해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라고 한다. 밀수품을 숨겨놓은 이유였을 것이다.

 

 

 

큰굴삼거리에서 오른편 산길을 오르면 이름표가 붙어있지 않은 전망대(展望臺)가 나온다. 전망대에 서면 맞은편 깻넘전망대 방향이 잘 조망(眺望)되고, 그 왼편으로는 상화도가 나타난다. 좌우로 바다가 넓게 펼쳐지는 것은 물론이다.

 

 

 

 

 

이름 없는 전망대에서 산꼭대기를 넘으면 하화도에서 최고의 조망(眺望)을 자랑한다는 막산전망대이다. ‘막산은 섬 끝부분에 자리한 마지막 산이라는 뜻이란다. 전망대에 서면 바로 앞 장구도와 오른편의 상화도, 그리고 그 뒤편의 사도가 한눈에 들어오는 시원한 풍경이 펼쳐진다. 어쩌면 오늘 투어에서 가장 빼어난 경관(景觀)일 것이다. 참고로 장구도는 세뿔석위, 바위손, 다정큼나무 등 군락지가 분포하고 있고, 식생(植生) 및 자연성(自然性)이 우수하여 독도 등 도서지역의 생태계보전에 관한 특별법에 의거 특정도서(特定島嶼)로 지정(145)되어 관리되고 있다. 특정도서란 사람이 거주하지 아니하거나 극히 제한된 지역에만 거주하는 섬으로서 자연생태계·지형·지질·자연환경이 우수한 섬을 환경부장관이 지정하여 고시한 도서(島嶼)이다.

 

 

 

 

 

막산을 한바퀴 돈 다음 큰골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왼편의 깻넘전망대로 향한다. 철썩거리며 드나드는 파도들로 분주한 큰골과 맞은편 막산이 바다와 어우러지는 풍경을 감상하면서 데크계단을 오르면 깻넘전망대이다. 깻넘은 깨를 심은 밭으로 가기 위해 넘어야 했던 고개라는 뜻이란다. 그러나 깻넘전망대는 전망대라는 이름표까지 붙은데 비해 조망(眺望)은 썩 뛰어나지 못하다.

 

 

 

 

 

 

 

깻넘전망대에서 또 다시 나타나는 계단을 가파르게 치고 오르면 큰산전망대이다. ‘큰산은 하화도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당연히 시야(視野)가 뻥 뚫린다. 전망대뿐만이 아니다. 울퉁불퉁한 바닷가 벼랑 위를 아슬아슬하게 지나가는 깻넘전망대와 큰산전망대를 잇는 나무데크 길에서도 조망은 뛰어나다. 개도와 금오도, 연도가 늘어선 하화도의 동남쪽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벼랑길과 전망대 등 곳곳에서 이런 짜릿한 풍광(風光)을 만날 수 있다.

 

 

 

 

 

큰산전망대에서 조금 더 걸으면 순넘밭넘 구절초공원이다. ‘순넘밭넘은 예전에 이라는 사람의 밭이 있던 고개라는 뜻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공원 언덕의 어느 곳에서도 구절초(九節草)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름대로라면 지금쯤 음력 99일에 꺾는 풀이라는 구절초가 한창 꽃을 피우고 있을 텐데도 말이다. 아쉬운 마음이라도 달래주려는 듯이 조망(眺望)은 뛰어나다. 길가에 놓인 벤치(bench) 뒤로 상화도 방향의 다도해(多島海) 풍광이 아름답게 펼쳐지는 것이다. ‘순넘밭넘 구절초공원에서 길이 두 갈래(이정표 : 평바우 830m/ 애림민 야생화공원 350m/ 큰산전망대 400m)로 나뉜다. 두말 할 것도 없이 평바우 방향으로 진행하면 된다. 구태여 코스를 단축할 이유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구절초공원을 지나 조금 더 걸으면 왼편으로 하화마을이 내려보인다. 화사한 붉은 색깔의 지붕들이 이국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마치 동유럽에 와있는 착각이 들게 할 정도이다. 그것도 붉은 색 지붕으로 유명한 크로아티아의 옛 성곽도시(城郭都市)인 두브르브니크(Dubrovnik) 말이다. 수년 전 여수시에서 보수해 준 결과란다. 참 잘한 처사가 아닐까 싶다. 기세등등한 양옥 대신에 아름다운 소형주택들이 나지막하게 어깨를 맞대고 있는 광경이 너무나 보기 좋기에 하는 말이다.

 

 

 

하화마을을 구경하면서 걷다보면 쉼터를 겸한 정자(亭子)가 나오고, 이어서 조금 후에는 삼거리를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 왼편에 보이는 곳이 하화마을이니 행여 배의 출항시간에 쫒기는 사람들이라면 이곳에서 왼편으로 내려서면 될 일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구태여 코스를 단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완만한 구릉(丘陵)으로 이루어진 나머지 코스에서 또 다른 섬의 참모습을 구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감싸 안을 것 같은 부드럽고 풍요로운 모습을 말이다.

 

 

섬 둘레를 일주하는 꽃섬길을 걷다보면 어느새 그 풍경에 매료되어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하늘과 바다와 섬의 멋스러운 조화(調和)에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기게 되는 것이다. 번거로운 일상에서 벗어나 조용하게 자연과 함께 벗을 삼고 싶을 때에 찾아볼만한 곳임에 틀림없다.

 

 

 

부드러운 흙길을 느긋하게 걷다보면 오른편에 하화도의 해안선(海岸線)이 나타난다. 바위벼랑으로 이루어진 그 모습에 이끌려 오솔길을 따라 해안가로 내려가 본다. 그러나 해안선을 만들고 있는 벼랑들은 위에서 생각했던 것 보다는 한참을 못하다. 그러나 대신 귀한 볼거리를 만났으니 이곳 또한 새옹지마(塞翁之馬)가 아닐까 싶다. 접하기가 쉽지 않다는 해국(海菊)을 바위틈 곳곳에서 만났으니 어찌 행운이라 아니할 수 있겠는가.

 

 

 

 

바닷가에서 빠져나와 다시 투어를 이어간다. 누런 소들 서너 마리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구릉(丘陵)을 지나 나지막한 고개를 하나 더 넘으면 곧이어 하화마을을 다시 만나게 되면서 오늘 투어는 끝을 맺는다. 마을을 다시 만나는 지점에 국내에서 최초로 지어졌다는 태양광발전소가 있으니 눈여겨 볼만하다. 그리고 건너편에는 상화도(上花島)가 바다를 사이에 두고 다정한 연인처럼 하화도와 마주보고 있다. 두 섬, 그리고 파란 하늘과 바다가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빚어낸다. 이런 풍경 때문에 내가 섬을 찾는지도 모르겠다.

 

에필로그(epilogue)

갓 낳은 아기를 화장실 변기(便器)에 버린 여자(혜나), 어린 딸에게 피아노를 사주기 위해 몸을 판 여자(옥남), 그리고 그녀들이 구한 뮤지컬(musical)배우(유진)는 삶을 비관해 눈 속에서 죽어가는 중이었다. 이렇듯 현실에서 버려진 세 여자들이 향하는 곳이 바로 꽃섬’, 슬픔과 상처를 잊게 해준다는 섬이다. 이들은 꽃섬으로 찾아가는 과정에서 죽음, 용서 등의 형태로 치유(治癒)를 받는다. 마음속의 상처는 인간이 피해갈 수 없는 운명에서 온다. 영화 꽃섬(2001년 개봉)’은 존재론적(存在論的)인 영혼의 상처가 어떻게 치유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꽃섬이라는 치유의 공간을 잘 표현했다고 해서 2002년 대한민국영화대상에서 신인감독상(송일곤)과 신인여우상(서주희)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영화에 나오는 꽃섬, 즉 세 여자가 그들만의 파라다이스를 꿈꾸며 도착한 꽃섬이 바로 이곳 하화도이다. 그러니 구태여 발걸음을 서두를 이유가 없다. 영화가 표현하고자 했던 치유의 섬을 조금이라도 느껴보려면 주변 경관에 느긋하게 빠져보는 게 우선이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섬은 보이는 곳마다 완만했고 또한 포근했다. 송일곤 감독이 영화의 모티브(motive)를 따오기에 충분하다는 얘기이다.

추자도 여행 : 추자군도 유람선 투어

 

유람선 투어는 추자항에서 시작된다. 7시면 이른 아침이건만 일행들은 모두들 싱그러운 표정들이다. 조금 후에 마주하게 될 새로운 풍경들에 대한 설렘 때문이 아닐까 싶다. ‘만일 안 보여도 타실래요?’ 집사람이 넌지시 물어온다. 만일 구명조끼가 준비되어 있지 않을 경우에도 배를 타겠느냐는 말이다. 어제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에 우리부부는 유람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혹시 구명조끼 하나 갖추지 않은 허름한 낚싯배가 아닐까 걱정을 했었다. 물론 목숨을 건 투어는 하지 않기로 결론을 내렸었다. 그러나 그런 우려는 할 필요조차 없었다. 실내 에어컨까지 갖춘 배는 생각보다 멋졌고, 배에 오르자마자 선장이 구명조끼를 나누어주며 착용을 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항구를 빠져나간 배는 추자대교 아래를 지난다. 다리를 지나자마자 눈앞에 펼쳐지는 추자도는 온통 시커먼 바위절벽들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크게 뛰어난 풍경(風景)들은 아니다 저 정도의 풍경은 남해(南海)의 어떤 섬에 가더라도 흔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풍경에 눈길을 빼앗길 일이 없으니 시선은 자연스레 타고 있는 유람선으로 돌아간다. 실내에어컨과 조리시설, 그리고 침실까지 갖춘 유람선은 우리가 사진에서 봐왔던 바로 그 요트(yacht)이다. 선장의 말에 의하면 가격은 6억 원, 일본에서 직접 사왔단다. 그의 말에 의하면 국내에서는 아직 이런 배를 만들어내지 못한단다. 아니 제조(製造)하는 회사들이 작은 기업들이라서 오래 버티지를 못하고 흥망성쇠(興亡盛衰)를 거듭하기 때문에 이런 고급스런 배에 대한 노하우(knowhow)가 축적(蓄積)될 여지가 없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중소기업들의 슬픈 현실을 또 다시 접하게 되는 순간이다.

 

 

배는 상추자도를 반 바퀴 돈 후에 거대한 바위절벽 아래에 이른다. 그리고 배를 멈춘다. 실컷 구경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곳이 바로 추자도에서 가장 뛰어난 절경을 자랑하는 나바론 절벽이다. 사실 오늘 유람선을 탄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곳을 보기 위해서이다. 어제 올레길 트레킹때 본 절벽의 풍경이 하도 아름다워서 조금이라도 더 가깝게 보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절벽 앞에 서보니 절벽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어제만 못했다. 그저 웅장하다는 느낌만 들뿐 어제 같이 아름답다는 감흥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나바론 절벽을 벗어나면 오른편에 어제 보았던 참다랑어양식장이 나온다. 그리고 그 다음에 보이는 섬은 다무래미이다. 다무래미는 썰물 때는 도보로 건널 수 있지만 밀물 때는 상추자도와 분리되는 섬이다.

 

 

 

 

 

 

 

 

 

 

 

 

 

 

 

 

 

 

 

 

 

 

 

섬에서 제법 떨어진 곳으로 나간 배가 잠시 속도(速度)를 늦추더니 바다에다 낚싯줄을 드리우기 시작한다. 참치낚시가 시작되는 것이다. 낚시방법은 의외로 단순했다. 배에다 인조(人造)미끼를 매단 낚시를 바다에 드리운 채로 서서히 달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과연 저걸 덜컥 무는 멍청한 참치들이 있을까? 그런 내 우려는 불행하게도 딱 들어맞고야 말았다. 10분 정도를 이리저리 움직였으나 낚시는 입질 한 번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주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유람선의 선장으로부터 배에 대한 이야기와 이 지역에서 잡히는 어종(魚種), 그리고 주변 풍광에 대해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참치를 못 잡은 서운함을 뒤로 하고 나머지 무인도(無人島)들을 돌기 시작하는데 산행대장이 내게로 온다. 근처 낚싯배에서 고기를 좀 사다가 먹으면 어떻겠냐는 것이다. 유람선 선장이 직접 고깃배까지 데려다 준단다. 물론 나야 오케이다. 얼마 후에 고깃배에 이를 수 있었고, 우리는 마리당 3만원씩 9만원에 커다란 삼치를 세 마리나 살 수 있었다.

 

 

 

 

 

 

 

추자도 본섬에서 멀리 떨어지면 섬들의 풍경은 아까와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 첫 번째는 섬의 크기가 작아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섬마다 하얀 눈꽃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눈꽃은 아니다. 유람선 선장의 말로는 소금이란다. 소금이 바위에 하얗게 말라붙어 마치 눈꽃처럼 보이는 것이란다.

 

 

 

 

 

 

투어가 끝나면 중앙식당(064-742-3735)에서 아침식사를 하게 된다. 물론 아침상에는 아까 배에서 샀던 삼치회가 올라오게 되어있다. 오늘 아침 메뉴(menu)는 굴비정식이다. 추자도 특산품은 단연 참조기다. 국내에서 나는 참조기의 30%가 추자도산()일 정도이다. 초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추자도는 참조기로 들썩거린단다. 그 조기로 만들어낸 음식이 바로 굴비정식인 것이다. 추자도에 들를 경우 꼭 먹어봐야하는 메뉴인데 두 가지가 합쳐질 경우 혹시라도 어떤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배가 불러서 전체적으로 음식 맛을 느끼지 못한다든지 등의 문제 말이다. 그러나 육지에서는 결코 접할 수 없는 기회를 배가 좀 부른다고 해서 놓칠 수는 없는 일이다. 삼치는 포획되자마자 죽어버릴 정도로 성질이 급하기 때문에 육지에서는 회로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는 필요 없는 고민이었다. 사람 수가 많아서인지 삼치 회는 보기보다 많지 않았고, 덕분에 국내 최대어장인 추자도 앞바다에서 잡힌 참조기로 만든 굴비백반을 원래의 맛 그대로 생생하게 맛볼 수 있었다.

 

 

 

유람선 투어(tour)를 끝내고 나서 9시가 되어서야 겨우 아침을 먹을 수가 있었다. 이곳 추자항에는 새벽에 식사를 해주는 식당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침식사가 끝나면 이제는 육지로 나갈 일만 남는다. 출항시간까지 1시간 정도의 자투리 시간이 남았으니 어제 못 둘러본 명소를 찾아보면 될 일이다. 다만 알아두어야 할 것은 하나 있다. 출항시간(11)보다 20분 먼저 여객선 대합실로 나와야 한다는 점이다. 이곳 추자항에서 육지로 나가는 배는 쾌속선인 핑크돌핀호로서 진도의 벽파진항을 거쳐 목포항까지 매일 1회 운행한다. 쾌속선이라 벽파진까지 가는데 걸리는 사간이 1시간10분 정도로 단축되는 대신, 요금은 30,650원으로 더 비싸진다.

추자도 여행 : 상추자도 올레길 트레킹

 

코스 : 추자대교한국전력발전소62m바랑케 쉼터추자등대나바론절벽 정상처사각순효각용듬벙나바론절벽 전망대낙조전망대동굴레산최영장군 사당추자항

 

상추자도 올레길은 다리를 건너자마자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서 이어진다. 오른편으로 갈 경우에는 추자항으로 곧장 가게 되니 주의할 일이다. 그러나 들머리에 이정표(등대전망대/ 하추자올레길)가 세워져 있으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등산로의 들머리는 추자도의 불을 밝혀주는 미니 화력발전소를 지나서 오른쪽으로 열린다. 이 길은 65m봉을 넘어 추자등대로 연결된다. 65m봉으로 오르는 길은 산의 높이에 비해 제법 가파르다. 단번에 위로 향하지 못하고 갈지()자를 만들면서 위로 향하는 것도 모자라 침목(枕木)으로 계단을 만들어야 할 정도로 힘겹게 위로 향하고 있다.

 

 

그러나 다행이도 오르막길이 길지는 않다. 10분 정도 오르면 산길이 완만(緩慢)해지면서 또 다시 눈터지는 조망(眺望)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좌우로 바다와 섬들을 내려다보면서 능선을 타면 마치 구름 위를 걷는 신선(神仙)이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이다. 거기다 길이 완만하기 때문에 걷는데 조금도 부담이 없다. 그저 눈요기만 즐기면 되는 것이다. 발아래에는 수직의 바위절벽이 도열해 있고, 그 너머에는 보석처럼 수줍게 앉아있는 섬들, 이런 빼어난 경관(景觀)을 자주 접할 수 있는 기회는 그리 흔하지 않다.

 

 

 

전망바위가 있는 봉우리를 넘으면 산길은 능선안부에 있는 바랑케 쉼터(亭子)’까지 내려섰다가 다시 반대편 능선을 따라 위로 향한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산정(山頂)에 우뚝 솟아있는 추자등대에 이르게 된다. 이곳 전망대는 등대로서의 역할 뿐 아니라 추자군도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대(展望臺)로서도 최고이다. 추자대교 건너에 있는 하추자도를 위시한 추자군도(楸子群島)의 크고 작은 섬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광경을 볼 수 있는 최적의 조망(眺望) 포인트(point)인 것이다. 그 조망 포인트는 그림 같은 추자등대의 4층 옥상에다 만들어 놓았다. 옥상전망대는 한라산과 다도해(多島海)를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오늘은 아쉽게도 연무(煙舞)에 가려 한라산의 자태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추자도등대에서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하다. 세계최초의 등대인 파로스 등대의 조형물이 세워진 방향으로 진행할 경우 곧장 추자항으로 내려가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올레길은 등대를 왼쪽에 끼고 90()쯤 돈 후 북서쪽 능선을 타야 한다. 능선의 왼편은 깎아지른 천애절벽(天涯絶壁)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랜 세월에 걸쳐 거센 바람과 거친 파도가 빚어 놓은 걸작(傑作)이다. 이 절벽이 추자도에서 가장 뛰어난 경관으로 알려진 나바론절벽이다.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이 점령했던 에게해(Aegean Sea)의 케로스섬에 있었던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要塞)였던 나바론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절벽아래를 내려다보기가 무서워 멀찌감치 안쪽으로 서서 200m쯤 걸으면 능선의 안부에서 이정표 하나가 길손을 맞는다. 그런데 이정표를 보는 사람들은 누구나 고개를 갸웃거릴 것이다. 현 위치를 나바론절벽 정상이라고 표기하고 있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절벽의 정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절벽의 정상은 군()의 레이더기지가 있어서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된다. 철책(鐵柵)으로 둘러싸여있는 탓에 출입이 불가능한 것이다.

 

 

이정표가 있는 안부에서 능선을 벗어나 오른편으로 난 올레길을 따른다. 이어서 침목(枕木)으로 만든 계단을 따라 내려서면 조금 후에 처사각(處士閣)에 이르게 된다. 처사각은 처사 박인택을 추모하기 위해 그의 후손들이 건립한 사당(祠堂)이다. 박인택은 추자도에 사는 태인 박씨의 입도(入島) 선조로 조선 중기 추자도에 유배(流配)와서 주민들의 병을 치료해 주고 불교교리를 가르치면서 살았다고 한다. 처사각의 정확한 건립연도는 알 수 없으나 애초 마을 내에 소규모 주택가에 초가집으로 건립되어 제()를 지내오다가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처사각에서 빠져나와 영흥리에 들어서면 제주 올레길의 참맛을 느낄 수 있다. 원래 올레란 마을의 골목길을 이르는 제주의 방언(方言), 곧 사투리이다. 그러니까 제주 올레길트레킹이라 함은 곧 제주 마을의 골목과 골목을 잇는 길을 걷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지금 영흥리의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걷고 있으니 진정한 올레길 트레킹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순효각(純孝閣)은 마을 골목길을 통과하는 중에 만나게 된다. 순효각은 지극한 효성을 실천한 박명래(朴明來)의 행실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祠堂)이다. ‘밀양 박씨인 박명래는 효성이 지극했다. 병든 아버지가 먹고 싶어 하는 꿩고기를 구할 수가 없자 이를 슬퍼하며 하늘에 빌자 하늘이 이를 어여삐 여겨 꿩고기를 내려주었고, 또 어머니가 병에 들었을 때에는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먹여 생명을 연장하기도 하였단다. 목사가 이를 알고 그를 포상한 후 속수삼강록(續修三綱錄)에 기록했다고 한다. 이밖에도 추자도에는 최영장군의 사당과 처녀당이 있다. 최영장군이야 다들 알고 있을 테니 설명은 생략하고, 처녀당의 유래는 대략 이렇다. 옛날 제주의 해녀(海女)들이 추자도로 물질을 나올 때는 아기를 돌봐줄 처녀를 같이 데리고 왔는데, 이 처녀가 불의의 사고로 죽자 처녀의 원혼을 달래주기 위해 지은 사당이란다. 이렇듯 추자도에서는 한이 맺혀 죽은 사람, 벼슬아치, 장군 등 수많은 신()들이 모셔지고 있다.

 

 

순효각을 둘러본 후 마을을 빠져나오면 또 다시 바닷가를 만나게 된다. 화장실과 탈의실, 그리고 정자(亭子)쉼터까지 갖춘 자그마한 해수욕장이다. 이곳에서 길이 두 갈래로 나뉘는데, 추자도의 명물이라는 나바론의 절벽을 구경하기 위해서는 왼편으로 진행해야 한다. 갈림길에 세워진 이정표(용듬벙/ 봉골레산/ 순효각)의 용듬벙 방향이다. 용듬벙에 나바론 절벽을 보기 위해 만든 전망대가 있기 때문이다.

 

 

용듬벙으로 가다보면 호박터널을 지나가게 된다. 쇠파이프로 비닐하우스 모양의 긴 터널을 만들고, 양옆에다 관상용 호박을 심어 놓았다. 터널의 입구에 팻말 하나가 걸려 있기에 살펴봤더니 호박을 따가지 마라는 경고판이다. 설마 누가 저런 짓을 할까 생각이 들었지만 그동안 따가는 사람들이 숫하게 있었기 때문에 저런 경고판까지 붙여놓았지 않았나 싶어 눈살이 찌푸려진다.

 

 

나바론 절벽으로 가는 길에 보면 오른편에 양식장(養殖場)이 보인다. ‘! 추자도에는 양식(養殖)이 없고 모두 자연산(自然産)이라고 했는데 웬일이지?’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탄식이 히스테릭(hysterical)하게 느껴질 정도로 날카롭다. 추자도에서는 물고기 양식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저녁식사로 회 정식을 주문해 놓았는데 양식장이 보이니 속이 상할 만도 할 것이다. 그러나 다음날 투어 때 만난 유람선 선장의 말로는 일반 양식장이 아니라 참 다랑어양식장이란다. 그렇다면 저곳에서 자란 물고기는 우리들이 밥상에 올라올 일이 없다. 엄청나게 비싼 참다랑어를 16천 원짜리 밥상에 올려놓을 주인장은 세상 어느 곳에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호박터널을 지나면 맞은편에 바위로 이루어진 산 하나가 나타난다. 산 위를 향해 놓은 긴 계단이 바위산과 어우러지며 제법 그럴듯한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그 바위산으로 가기 위해서는 쇠로 만든 다리를 한번 건너야 한다. 근처에 물웅덩이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용듬벙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웅덩이이다. 용듬벙은 바위가 바닷물을 막아 물이 고인 곳인데 모양이 제법 아담하다. 못의 이름을 미루어 보건데 저 웅덩이에서 용이 머물렀던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용듬벙을 건너려는데 산행대장이 왼편 바위벼랑 위에서 손짓을 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맞은편의 용듬벙 전망대보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나바론 절벽이 더 뛰어나다는 것이다. 조심스럽게 올라 벼랑에 서니 그의 말대로 나바론의 전모(全貌)가 한눈에 잘 들어온다.

 

 

 

 

첫 번째 조망처에서 내려와 맞은편 용듬벙 전망대로 향한다. 긴 나무계단을 밟고 올라서면 나바론 절벽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바위벼랑 위이다. 벼랑 위에는 나무데크로 전망대(展望臺)를 만들어 놓았다. 전망대에 서면 나바론 절벽이 웅장한 모습으로 눈앞에 펼쳐진다. 과연 절경이다. ‘나바론의 절벽1961년 영국출신의 J.리 톰슨(John Lee Thompson) 감독의 나바론 요새라는 영화(映畵)에서 나오는 바위절벽이다. 당시 이 영화에는 그레고리 팩과 안소니 퀸, 그리고 데이빗 니븐, 안소니 퀘일 등 쟁쟁한 세계적 스타들이 출연했었고, 나 역시 완성도 높은 이 영화를 관람했던 기억이 있다. 영화는 케로스 섬에 갇힌 영국군 2천명을 구하기 위해 벌이는 전쟁영화이다. 구하러 가는 길목에 나바론이라는 섬이 있었고, 이 섬에는 독일군의 거대한 대포가 두 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영화는 길목을 막고 있는 이 대포들을 폭파하려는 연합군과 이를 막으려는 독일군의 대결을 그린 영화였다. 연합군 특공대가 목숨을 걸고 오르던 절벽(絶壁)이 바로 나바론 절벽인 것이다. 지금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절벽은 영화에서 보았던 절벽 만큼이다 서슬이 시퍼렇다. 그래서 나바론의 절벽이라는 이름을 서슴없이 붙였나 보다.

 

 

 

 

 

 

 

 

나바론의 절벽을 구경한 후 다시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봉골레산으로 향한다. 여유가 있는 풍경에는 농기계(農機械)까지도 멋진 소품이 되는 모양이다. 돌탑이 있는 쉼터에 방치되듯 놓여 진 경운기(耕耘機)까지도 멋진 풍광으로 승화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공원묘지를 지나면 다무래미 갈림길(이정표 : 봉골레산/ 다무래미)을 만나게 되고, 이어서 사각(四角)의 정자(亭子)가 지어진 봉골레산 입구에 이르게 된다. 봉골레산을 둘러본 후에는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 나와야 한다. 그래야 다음 행선지인 최영장군 사당으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봉골레산 입구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잡아 조금 오르다가 오른편에 보이는 오솔길로 들어선다. 오른쪽 언덕 위가 낙조전망대(落照展望臺)이기 때문이다. 쉼터를 겸한 전망대에 서면 아까 올랐던 나바론의 절벽 전망대가 한눈에 들어오고, 그 뒤에는 망망대해(茫茫大海)가 펼쳐진다. 저렇게 거칠 것 없이 너른 바다라면 티 하나 없는 낙조를 보여줄 것이 틀림없다. 한번쯤 낙조를 보고도 싶지만 아직은 이른 시간인지라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다.

 

 

 

 

낙조전망대에서 조금 더 걸으면 봉골레산이다. 봉골레산은 산의 정상이라기보다는 공원이라고 보는 게 더 옳을 것 같다. 분지(盆地)로 이루어진 너른 정상에 정자(亭子)와 체육시설은 물론 간이화장실까지 갖춘 쉼터를 조성해 놓았기 때문이다. 정상에 서면 추자항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이고 좌측으로는 수령섬, 악생이여, 염섬, 이섬, 추포도, 횡간도, 검은가리섬 등 추자군도의 대부분의 섬들이 모두 시야(視野)에 들어온다.

 

 

 

동굴레산에서 다시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최영장군 사당(祠堂)’으로 향한다. 이 길은 해안선을 따라 나있기 때문에 왼편으로 트이는 조망(眺望)이 시원스럽다. 그리고 그 조망은 최영장군 사당 뒤 소나무 숲 해안에 이르게 되면서 극에 달하게 된다. 해안의 절벽에 올라서면 시야가 완전히 트이면서 추자도 앞 섬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연무(煙霧)로 인해 비록 희미하게 나타나는 정도이지만 추자도가 제주의 다도해(多島海)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그렇다. 추자군도에는 상추자, 하추자, 추포, 횡간도 등 4개의 유인도와 38개의 무인도 등 총 42개의 섬들이 모여 있는 것이다.

 

 

 

전망대에서 내려오면 사당(祠堂) 하나가 나타난다. 최영장군을 모시는 사당(제주도 기념물 제11)이란다. 육지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외진 섬이 최영장군과 어떻게 인연을 맺었을까? 고려의 공민왕이 명나라와 우호를 맺기 위해 제주의 말을 징발했는데, 제주에 주둔하고 있던 몽골인 목호(牧胡) 석질리(石迭里) 등이 1374년에 난()을 일으켰다고 한다. 이때 최영장군이 등장한다. 목호를 진압하기 위해 뱃길에 올랐던 최영장군이 심한 풍랑을 만나 추자도(점산곶 : 點山串)에 잠시 머물게 되었고, 추자도에 머무르는 동안 어민들에게 어망 손질법(어망편법 : 漁網編法)을 가르쳐주어 추자도 사람들의 생활을 도왔다는 것이다. 그 뒤 이곳 주민들은 장군의 위덕을 잊지 못하여 사당을 짓고 매년 봄가을에 봉향(奉享)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위에서 말한 목호에 대해서 잠시 짚고 넘어가보기로 하자. 고려시대 무신정권의 사병(私兵)으로 꾸려졌던 삼별초(三別抄)용사들로 조직된 선발군이라는 그 이름에 걸맞게 항몽전(抗蒙戰)의 선두에 선다. 하지만 1273(원종14), 원은 탐라에서 항쟁하던 삼별초를 평정하고 일본 원정에 대비해 탐라총관부를 설치한다. 이어 제주도에 목마장(牧馬場)을 설치했는데, 이때 소나 말을 기르기 위해 파견하였던 몽골인들이 곧 목호(몽골의 목자, 목동)이다.

 

 

최영장군 사당을 둘러보고 추자초등학교 담벼락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잠깐 내려오면 추자항에 이르게 되면서 추자도 올레길 트레킹이 끝을 맺는다. 트레킹이 끝나면 미리 예약된 숙소(여정여관 : 064-742-8111)에 들러 짐부터 푼다. 독립된 잠자리를 원하는 우리부부에게 주어진 방은 3, 칫솔과 샴푸(shampoo) 그리고 타월(towel) 등 세면도구는 물론 화장품과 헤어드라이에다 에어컨까지 갖춘 생각보다 뛰어난 시설과 서비스가 제공되었다. 물론 이 방을 따로 얻느라 3만원을 추가로 부담해야 했지만 말이다. 트레킹에서 흘렸던 땀을 깨끗하게 씻어낸 후에는 제일식당(064-742-9333)으로 자리를 옮긴다. 여관 주인의 호의로 미리 예약이 되어있으니 그냥 먹기만 하면 된다. 오늘의 메뉴(menu)회 정식(가격 : 16,000)’, 싱싱한 자연산 회는 맛이 있었고, 그 양도 충분했다. 그리고 나중에 나오는 지리탕도 담백한 것이 일품이었다. 추자도 음식이 맛있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추자도 주민의 대부분은 전라도 출신들이란다. 그래서인지 주민들의 생활권은 본섬인 제주도 보다는 육지인 전라도에 더 가깝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아이들을 목포로 유학(遊學)을 보냈을 정도였다니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 연유로 남도의 손맛이 그대로 추자도에 전해졌고, 그 덕분에 우린 지금 맛깔스런 남도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여행지 : 추자도(楸子島)

 

여행일 : ‘14. 8. 23() - 24()

 

전체 여행 일정

8. 23() : 추자도올레길(제주 올레길 18-1구간) 트레킹

8. 24() : 유람선 투어

 

소 재 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추자면

함께한 산악회 : 온라인산악회

 

특징 : 행정구역상 본섬(母島)인 제주도(濟州道)가 섬()이니 추자도는 섬 속의 섬이라 부른다고 해도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추자도라는 이름은 섬의 모습이 흡사 바다 한가운데에 가래나무(추자) 열매를 흩뿌려 놓은 것 같다는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하추자도와 추포도, 횡간도 등 4개의 유인도(有人島)와 무인도(無人島) 38개 등 수많은 섬으로 이루어져 있어 추자군도(楸子群島)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완도와 제주도의 딱 중간쯤에 위치한 추자도는 행정구역은 제주도에 속해있지만 말투부터 생활문화까지 제주 본섬과는 사뭇 다르다. 오히려 전라도에 더 가까운 것이다. 섬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들려오는 귀에 익은 전라도 사투리가 이를 증명한다. 아마 오랫동안 전라도 땅으로 지내왔기 때문일 것이다. 참고로 추자도는 후풍도(候風島)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전남 해남이나 강진에서 사흘 뱃길이던 시절, 바람을 피해 잠시 머물며 순풍을 기다린다 하여 후풍도라 했다고 한다. 실제로 1271년 삼별초의 난이 났을 때 고려와 몽골 연합군이 폭풍우를 피해 추자도에 들어왔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추자도 가는 길

추자도로 가기 위해서는 전남 목포나 완도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거나, 제주에서 추자행 쾌속선을 타는 방법이 있는데 온라인산악회에서는 완도항을 이용해서 추자도에 들어갔다가 나올 때는 진도의 벽파진으로 나오는 배편을 이용했다. 완도항에서 추자도(하추자도 신양항)로 들어가는 배편은 한일카페리 3가 매일 오전 8시에 1회씩 운행한다. 참고로 이 배는 제주도에 들렀다가 다시 완도항으로 돌아가는데 하추자도에서 오후 440분에 출발한다. 운임(運賃)은 편도 3등실 기준으로 17,300원이다.

 

 

 

추자도 여행 : 하추자도 올레길 트레킹

 

코스 : 신양항모진이 몽돌해안황경한의 묘신대산전망대예초리석장승돈대산 정상묵리교차로정수장추자대교

 

선착장을 빠져나와 신양리의 마을 안길로 들어서면서 올레길 트레킹(trekking)이 시작된다. 제주 올레길 18-1코스인 추자도 구간을 걷게 되는 것이다. 추자 올레는 제주 올레 21개 코스 가운데 가장 어려운 코스라고 한다. 해발 고도는 100m대로 야트막하지만, 산봉우리와 산봉우리로 이어지는 길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산책이라기보다는 등산에 가깝기 때문이다.

 

 

 

마을 안길로 들어서 얼마간 걷다가 오른편 샛길로 빠져나가면 모진이 몽돌해안이 나온다. ‘추자십경(楸子10)’의 여섯 번째 비경인 장작평사(長作平沙)’가 바로 이곳이다. 작고 둥그런 자갈로 이루어진 해안(海岸)은 해수욕장을 겸하고 있다. 이런 곳에서는 몽돌에 바닷물이 부딪히는 소리에 집중해 보고 싶다. 그러나 하늘빛을 닮은 바다를 한 번 더 바라보는 것으로 위안을 삼고 길을 나서고 만다. 이제 겨우 투어를 시작했을 따름이니 아직도 갈 길이 먼 것이다.

 

 

 

모진이 몽돌해안에서 다음 행선지인 황경한의 묘까지는 시멘트포장 도로로 연결된다. 만일 포장도로가 싫은 사람들이라면 도로의 왼쪽 언덕 위로 올라가면 된다. 도로와 멀어지지 않게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산길이 나있기 때문이다. 산길을 따라 걷다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황경한의 묘()’가 나온다. 황경한은 19세기에 추자도에 살던 한 어부(漁夫)의 이름이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깔끔하게 단장을 하고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는 것일까? 위업(偉業)은커녕 선행(善行)도 딱히 전하는 게 없는데도 말이다. 그의 무덤은 성지처럼 꾸민 것은 천주교 제주교구라고 한다. 교구차원에서 묘비를 세우고 묘역을 조성한 것이다. 묘비(墓碑)에는 순교자 황사영 신앙의 증인 정난주의 아들 황경한의 묘라고 적혀 있다. 이 무덤의 주인이 황사영 백서 사건의 당사자 황사영(17751801)의 아들이란다. 그렇다면 황사영의 아들이 어쩌다 이런 절해고도(絶海孤島)에 묻혔을까. 남편 황사영이 서울에서 처형된 후 그의 아내 정난주는 두 살 아들 경한을 안고 제주로 유배를 갔다. 정난주는 배가 추자도를 지날 때 섬 동쪽 갯바위에 아기를 내려놓고 떠났다. 아들만큼은 죄인으로 키우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정난주는 제주 대정에서 관노로 38년을 더 살다가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기는 어미의 바램대로 예초리 어부 오씨가 거둬 제 자식처럼 키웠다. 경한이 성년이 되자 오씨는 꼭꼭 숨겨뒀던 내력을 들려줬다고 한다. 그렇지만 모자(母子)는 평생 재회(再會)하지 못했단다. 뒤늦게라도 화를 입을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묘역(墓域)의 옆에는 샘터가 하나 있다. ‘황경한의 눈물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이 우물은 어미를 그리워하는 아들의 애끓는 소망에 하늘이 탄복하여 내린 선물이란다. 그 때문인지 사시사철 마르는 날이 없다고 한다.

 

 

황경한의 묘역을 빠져나와 신대산 전망대로 향한다. 이 길도 역시 시멘트포장도로로 연결된다. 그러나 이 구간은 별도의 산길이 없으므로 따분하지만 도로를 따라 걸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해안선(海岸線)을 이루고 있는 바위절벽들을 구경하다보면 따분함은 금방 사라져버릴 것이다. 푸른 하늘과 짙푸른 바다 그리고 해안절벽이 비현실적인 색감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거기다 길가에 흐드러지게 핀 인동초(忍冬草)는 차라리 보너스이다. 그저 찬찬히 걸으며 추자군도가 드러내는 표정들 하나하나를 담아가며 발걸음을 옮긴다.

 

 

신대산 전망대로 가고 있는데 산행대장이 부른다. 함께 가고 있던 집사람은 옆에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오른편 끝자락에 보이는 바위가 뭘 닮았느냐고 물어온다. 대답을 기다릴 여유가 없었던지 그는 정답부터 알려주고 본다. 남근석(男根石)이란다. ‘물건만 실하면 됐지 생김세가 무에 그리 중요합니까.‘ 참으로 못생겼다는 내 말에 대한 집사람의 반박이다. 맞는 말이다.

 

 

 

신대산 전망대는 도로에서 우측으로 약간 비켜나 있다. 웬만한 운동장 크기의 전망대에 서면 다도해(多島海)의 풍광이 한눈에 펼쳐진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은 연무(煙舞)가 이런 풍광의 발목을 잡고 있다. 때문에 추포도와 횡간도 등 제법 덩치가 있는 섬들만 시야(視野)에 들어올 따름이다. 그렇지만 날씨가 좋은 날에는 염섬과 수령섬, 악생이 검등여는 물론 저 멀리 전라도의 보길도까지 눈에 들어온다고 한다.

 

 

 

 

신대산전망대에서 다음 행선지인 예초리까지는 도로가 아닌 해안선(海岸線)을 따라 걷게 된다. 아마 오늘 산행에서 가장 멋진 길이 아닐까 싶다. 그만큼 숲이 울창하고 심심찮게 열리는 다도해(多島海) 풍광이 빼어나다는 얘기이다. 이런 곳에서는 구태여 발길을 재촉할 필요가 없다. 서서히 걸으면서 시시각각으로 변화를 주고 있는 주변 풍광을 하나도 빠짐없이 가슴에 담아볼 일이다. 그런 우리의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앞서가던 산행대장이 바닷가에서 발걸음을 멈춘다. 맑디맑은 바닷물에 손이라도 담가보라면서 말이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집사람의 손놀림이 바빠진다. 저녁 술안주 감을 잡겠다는 것이다. 그녀의 말대로 꽤 많은 바다고동을 잡았지만 다음날 아침에 방생(放生)할 수밖에 없었다. 숙소에 취사시설이 없었기 때문이다.

 

 

 

 

올레길을 걷다보면 심심찮게 낚시꾼들을 만나게 된다. 낚시꾼들 사이에 '바다낚시 천국'으로 소문이 났다는 얘기가 실감이 나는 순간이다. 추자도는 앉는 곳마다 뛰어난 낚시터가 된다는 이야기가 있다. 섬을 둘러싼 모든 갯바위, 어선을 타고 나가 발붙일 수 있는 무인도가 모두 낚시 포인트(point)라는 것이다. 참고로 추자도에는 봄과 가을에는 참돔과 돌돔, 여름이면 농어와 돌돔, 겨울에는 감성돔과 같은 고급 어종이 넘쳐난다고 한다.

 

 

 

 

제법 큰 포구인 예초리를 지나 얼마간 더 걸으면 왼편에 거대한 바위 하나가 나타난다. 계단을 밟고 올라서니 벼랑 아래에 돌을 깎아 만든 장승이 하나 세워져 있다. 그래서 이름도 ()장승이란다. 그러나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장승은 돌로 만들어진 게 아니고 나무로 만들어졌었다. 그래서 장승의 이름도 목()장승이었다. 아주 오랜 옛날 이곳 엄바위(눈앞에 보이는 거대한 바위의 이름이 엄바위인 모양이다)에 억발장사가 살았다고 한다. 그는 엄바위 아래의 바닷가에 있는 다섯 개의 장사 공돌을 가지고 공기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앞바다에 있는 횡간도로 건너뛰다가 미끄러져 넘어지면서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예초리와 횡간도 사람들은 서로 결혼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를 어길 경우 청춘과부가 된다는 속설(俗說)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 누군가가 억발장사를 상징하는 목장승을 깎아 세웠고, 이곳 예초리 사람들은 해마다 걸궁(제주도에서 음력 정월부터 2월까지 마을 사람들의 안녕을 위하여 행하는 풍물 굿)을 할 때에는 이곳 엄바위 앞에서 한마당을 놀면서 소원을 비는 풍속(風俗)이 생겼다고 한다.

 

 

 

 

 

석장승에서 조금만 더 걸으면 왼편으로 오솔길 하나가 열린다. 추억이 담긴 학교 가는 샛길이란다. 이 길은 예초리에 사는 아이들이 신양리에 있는 학교에 다닐 때 이용하던 지름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해안을 따라 난 길을 따를 경우 너무 멀기 돌아야하기 때문에 산등성이를 넘어가는 지름길을 새로 내었던 모양이다. 지름길이어선지 시멘트로 만든 계단을 밟고 산등성이까지 올랐다가 떨어지면 금방 고갯마루에 내려서게 된다.

 

 

 

고갯마루에서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고갯마루를 곧장 넘어가면 신양리, 돈대산으로 오르려면 오른편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포장임도로 들어서야 한다. 입구가 간이 쉼터를 겸한 정류장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찾는데 별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임도는 큰 오르내림이 없이 완만(緩慢)하게 이어진다. 그 때문에 얼마 동안은 다도해 풍광을 즐길 수 없다. 그렇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길가에 흐드러지게 핀 들꽃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제법 쏠쏠하기 때문이다. 특히 하얗고 노랗게 꽃을 피운 인동초가 인상적이다.

 

 

 

돈대산 정상으로 가는 길에는 중간 중간 갈림길이 나타난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파랑과 주황색 리본을 단 올레 시그널(signal)을 따라 정상방향으로 올라가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들머리에서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통신사(通信社)의 중계소를 지나면 포장 임도는 끝을 맺는다. 자갈 깔린 흙길에 이어 인조목(人造木)으로 만든 가파른 계단을 잠시 오르면 드디어 돈대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널따란 분지(盆地)로 이루어진 정상에는 정상표지석 외에도 팔각정과 망원경(望遠鏡)을 갖춘 전망대 등 다양한 시설들을 설치해 놓았다. 정상을 아예 공원(公園)으로 바꾸어버린 모양새이다.

 

 

 

 

 

정상에 서면 남쪽으로 신양항과 고즈넉한 해안(海岸) 마을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그 뒤에 웅크리고 있는 섬은 아마 사자섬(수덕도)일 것이다. 그 옆으로 옛날 유배길에 오른 관원들이 관복을 벗고 평민으로 돌아가는 의식을 치렀다는 관탈섬과 청도, 절명여, 밖미역섬 등 크고 작은 섬들이 펼쳐진다. 그리고 북쪽에도 수많은 섬들이 널브러져 있다. 하나 아쉬운 것은 한라산이 시야(視野)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느 글에선가 바다 건너 한라산까지도 보인다고 했지만 오늘은 연무(煙舞) 뒤로 숨어버렸다. 아무튼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해안 풍경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짙푸른 바다와 점점이 떠 있는 섬들이 보는 이의 가슴을 탁 트이게 만든다.

 

 

 

산길은 정상을 지나서도 끊임없이 눈요깃감을 제공한다. 능선에서의 조망(眺望)이 뛰어나다는 얘기이다. 산 아래 펼쳐진 바다 위에 점점이 떠 있는 올망졸망한 섬들, 그리고 깎아지른 기암절벽들이 끊임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조망을 즐기다가 제3담수장이 내려다보일 즈음이면 능선은 울창한 숲으로 변한다. 숲만 울창한 게 아니다. 조금이라도 나무가 듬성듬성 하기라도 할양이면 어김없이 어른의 키를 훌쩍 넘기게 웃자란 풀들이 길손을 맞는다. 덕분에 길가에는 모시풀이나 망초 등 야생화(野生花)들이 그득하다.

 

 

울창한 숲길이 잠깐 열리는가 싶더니 주요 갈림길 중의 하나인 '묵리 고갯마루'에 내려선다.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내려가면 담수장, 곧장 진행할 경우에는 능선을 타고 담수장의 상부를 지나 추자대교로 가게 된다. 좌우의 갈림길을 무시하고 곧장 능선길을 따르면 조금 후에 펜스(fence)에 둘러싸인 시설 하나가 보인다. 지도에 정수장(淨水場)으로 표기된 지점이다. 어디선가 끌어올린 물을 이곳에 저장했다가 주민들에게 공급하는 모양이다. 과거 추자도는 물이 부족해 식수의 일부분을 빗물에 의존해야 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2012년에 담수(淡水) 정수화시설을 갖추고 난 뒤 1인당 급수량(給水量)을 하루 100리터에서 240리터로 늘릴 수 있게 됐다. 추자도 주민들로 봐서는 엄청나게 고마운 시설인 셈이다.

 

 

 

 

추자교로 내려가다 보면 낯익은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의 생김새가 제주도에서 보던 것들과 비슷한 것이다. 이곳에는 말()이나 소()가 없는데 왜 묘의 주변에 돌담을 쌓았을까.

 

 

담수장을 지나면서 산길은 다시 포장도로로 올라서게 된다. 그러나 그 거리는 짧다. 50m도 채 되지 않아서 또 다시 도로와 헤어져 오른편 샛길로 내려서기 때문이다. 이어서 제법 경사(傾斜)가 가파른 내리막길을 따라 15분 정도 더 진행하면 상추자도와 하추자도를 잇는 추자대교(大橋)에 이르게 된다. 추자대교는 기존의 다리가 붕괴(崩壞)되면서 1995년에 새로 확장 개통한 다리이다.

 

 

 

 

추자대교의 양쪽 끝은 깔끔한 공원(公園)을 만들어 놓아 추자도 올레길을 찾는 관광객들이 잠시 쉬어갈 수 있도록 했다. 특히 하추자도 방향의 공원에는 참조기 조형물(造形物)을 설치해 관광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 사진촬영을 하기에 딱 좋게끔 만들어 놓은 것이다.